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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격 외 혈통 천재 ⓒ소울풍

1. 고백

내가 막 스물이 됐을 때, 아버지는 비밀을 고백하셨다.

"놀라지 말고 들어라."

"네?"

"사실 넌 불멸자다."

"...네?"

"내가 불멸자니, 그 피가 너한테도 이어졌을 거다."

이게 무슨 개소리야?

라고 할 순 없었다.

동방예의지국에서 이십 년 동안 받은 교육이 내 주둥이를 잡았다.

"네?"

"너 안 죽는다고, 어지간해서는."

무슨 그런 말을 파를 사면서 해.

대파를 고르던 아버지가 슬쩍 주위를 둘러본다.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라."

아버지, 이미 여긴 마트 한복판입니다.

내가 주변을 둘러보자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조용히 말했으니 걱정하지 마라."

아, 이거 어쩐다.

"네 엄마도 모르는 사실이니, 알지?"

엄마한테 비밀, 남자만의 약속.

그럴 때 쓰는 말이다.

세상에는 인간 말고도 세 가지 종류의 특별한 종의 인간이 더 산다.

백인, 흑인, 동양인 상관없이 태어나는 이레귤러다.

비밀도 아니었다.

실제로 그런 사람은 정부 또는 각 부처에서 훈련받고, 특별한 일에 종사한다고 알려져 있다.

그렇다고 그걸 쉬이 밝힐 수 있는 건 아니다.

사이비 종교, 미친 과학집단 등등.

불멸자를 노리는 이들은 참 많다.

실제로 정부에서 관리하는 이들의 명단은 기밀 중의 기밀이라고 한다.

숨어 사는 이들도 있고 그게 아니라면 군인, 공무원 등 다양한 직종에 종사하기도 했다.

그리고 내 아버지는 공무원이다.

그것도 5급 행정 사무관이시다.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연봉이 높고 복지도 좋다.

그건 알지.

지금 사는 집도 정부에서 내준 아파트니까.

하여간 그런 이레귤러 중 첫째가 불멸자다.

죽지 않는 자들이다. 그 특징은 하얀 피부와 곱상한 얼굴인데.

"제가요?"

"이 아비를 많이 닮지 않아서 그런 거냐?"

솔직히, 네.

그래서 꿈에도 몰랐다.

"그래도 맞다. 넌 불멸자다."

아버지가 확인 사살을 끝마쳤다.

불멸자라니.

아무리 봐도 난 곱상한 외모와는 거리가 멀다.

그렇다고 못난 얼굴은 아니지만....

누가 봐도 '아, 잘생겼네'라고 말하는 딱 거기까지다.

적당히 잘생긴 얼굴.

그렇다고 연예인급은 아니다.

"스무 살 생일에 피를 각성할 거다. 네가 태어난 시간이니까 오늘 밤 열한 시쯤?"

너무 태연하게 말씀하셔서, 정말 별일 아닌 것 같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가 계속 말씀하셨다.

"아, 마늘도 사 오랬지?"

"네, 간 거 말고요. 직접 갈아서 쓰신다고."

"깐마늘 사 갈까?"

"아뇨, 껍질까지 있는 거요."

"이거 내가 까야겠지."

"확실히요."

"깐마늘 사고 싶다."

아버지는 그리 말하면서도 껍질이 있는 마늘을 고르셨다.

"엄마한테는 말하지 마라. 네 엄마, 아빠 그런 사람인 거 모른다."

마트 계산대 앞에서 그리 말하니, 계산대 앞에 직원분이 힐끔 쳐다봤다.

"절대로, 알게 되면 이혼당할지도 몰라."

몹시도 우울한 얼굴로 말씀하시니, 직원 아주머니분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아니, 그런 거 아닙니다.

바람 피운 걸 아들한테 걸린 거 아니에요.

"일단 가죠."

준비한 장바구니에 물건을 담고 들었다. 음료수랑 맥주, 소고기와 채소, 꽤 무겁지만, 나한테는 거뜬했다.

들고 나서자,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아들 힘 좋네."

흰 피부와 곱상한 얼굴 외, 불멸자는 타고난 완력이 약하다고 한다.

대신 각성 후 시력, 청력 등의 감각이 무척 뛰어나고.

각성 전에도 완력이 약하다는 특징은 고스란히 갖기 마련인데, 난 아니다.

난 힘이 좋다.

그건 나한테 두 번째 비밀이 있기 때문이다.

물건을 번쩍 드는 걸 보고 아버지가 물었다.

"요즘 운동 열심히 했니?"

아니요.

적당히 해도 이럽니다.

두 번째 비밀은, 아니, 사실 이게 먼저다. 아버지 덕분에 비밀이 두 개가 됐다.

그리고 그 비밀은 어머니와 연관이 있었다.

삑삑삑.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고 승강기를 타고 올라가면서도 아버지는 비밀임을 당부하셨다.

아, 어머니도 이러셨지.

그때는 열여덟 살 생일이었는데.

"왔어."

"왔어요?"

어머니가 앞치마를 두르고 부자를 맞아주셨다.

한눈에 미인이라는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로 아름다운 분이시다.

다만, 미인 앞에 '건강'이란 두 글자가 붙어야 더없이 잘 어울리겠다.

어머니는 강건하신 분이다.

취미는 웨이트 트레이닝, 마라톤, 수영 등이고.

지금 당장 철인 3종 경기를 나가면 씹어먹지 않을까 그리 생각한다.

아버지와는 완전 반대의 이미지다.

아버지는 평생 햇볕 한 번 안 본 것 같은 희멀건 한 스타일이시니.

팔뚝도 어머니가 더 두껍다.

"마늘 잘 사 왔지?"

"물론이지."

금슬이 너무 좋은 두 분이다.

마트 잠깐 다녀왔으면서 포옹에 쪽.

아들이 보고 있습니다. 두 분.

"정리해."

어머니가 눈웃음을 보이며 말씀하셨다.

난 주섬주섬 장바구니를 들고 정리했다.

고기와 채소를 한쪽으로 옮기며 고민했다.

난 아버지에게 오늘 비밀을 들었다.

내가 불멸자라고.

그리고 열여덟 생일 때는 어머니에게 비슷한 얘기를 들었다.

"광익아, 엄마가 오늘 너한테 할 말이 있어."

아직도 그날이 눈에 선하다.

홈트레이닝으로 케틀벨을 내려놓으시며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미리 약속해야 할 게 있는데 절대로, 지금 하는 말을 아버지한테는 말하면 안 된다."

열여덟 살 생일 선물로 게임기 PL4를 받은 나는 어머니의 어떤 비밀도 지켜 줄 자신이 있었다.

"얼마든지요."

아버지는 출장 중이셨다. 하나뿐인 아들의 생일에 자리를 비운 걸 몹시 슬퍼하셨고.

"엄마가 사실, 음, 그러니까."

어머니는 평소답지 않게 말을 고르셨다.

난 어서 듣고 싶었었다. PL4가 날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엄마가 사실은 특수종이야."

"아, 그랬군요."

영혼 없는 대답을 하고 내 사랑 PL4를 향해 돌아선 뒤에야 어머니가 한 말이 머리에 들어왔다.

몸을 그대로 둔 채, 고개만 뒤로 꺾어 내가 입을 열었다.

"특수종?"

그때까지만 해도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특수종, 그 첫째가 '불멸자'.

첫째가 있다면 그다음도 있다.

둘째는 '변신족'이다.

불멸자가 죽지 않는다면, 이들은 변한다.

"엄마는 변신할 수 있어."

엄마의 커밍아웃에 그때 나는 뇌가 3초간 멈췄었다.

"세일러문으로?"

나이는 있지만, 아직 미모는 뛰어나시니, 그리 흉한 외모는 아닐 거다.

"원한다면 천사 소년 네티도 할 수 있지."

어머니는 위트가 있으셨다.

세일러문을 네티로 받으시니.

그 이후, 어머니는 고백하셨다.

불멸자는 대부분 죽지 않는다는 특징으로 통일되어 있다.

그래서 단일종이라고 하기도 한다.

변신족은 조금 다르다.

이쪽은 늑대나 곰, 쥐 등의 특징을 몸에 담아 변한다.

쉬이 말하자면 늑대인간, 그래, 그거다.

옛날 이 특수종이란 인종이 알려지지 않았을 때, 밤에 사람들이 보고 상상해 만들어 낸 게 늑대인간이고 뱀파이어였다.

뭐, 이미 퍼진 소문을 묻을 수 없어서 이런저런 그럴듯한 전승까지 만들었다고 했다.

하여간 그 변신족이다.

어머니의 고백이었다.

"우리 아들 선물은 뭐 필요하냐?"

아버지의 목소리에 회상에서 빠져나왔다.

"아, 뭐."

딱히 생각나는 건 없다.

부유한 집이다. 어지간한 건 다 사 주셨고, 외동이라고 아낌없이 내주셨다.

가끔 얼굴도 못 본 외할아버지가 용돈이라고 백만 원 단위로 돈을 보낼 때도 있으시니.

"됐어요."

선물보다 두 분 입장 정리가 시급하다.

한쪽은 불멸자, 한쪽은 변신족.

아니, 그럼 난 뭐가 되는 거야.

변신족은 열여덟에 각성.

불멸자는 스물에 각성이다.

그래서 난 열여덟 살에.

아버지가 출장을 나가신 그 해에.

피똥 쌌다.

몸에 근육이란 근육이 다 끊어지는 것 같은 고통과 피를 몇 사발은 토했고, 손톱도 다 빠지고 머리카락도 다 빠졌다.

그리고 금세 다시 자라긴 했다.

열여덟에 민머리가 될 뻔한 경험만으로도 충분히 지옥 같은 고통이었다.

전보다 풍성해진 머리칼과 더불어 탄탄해진 근육, 턱걸이 두 개도 간신히 하던 몸뚱이가 열다섯 개를 해도 숨이 그리 차지 않았다.

아, 그제야 어머니가 하신 말이 가슴에 와닿았다.

난 특수종이구나.

그것도 변신족.

"진짜 필요한 거 없어?"

어머니가 물으셨다.

"낳아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하죠."

"아빠 닮아서 말을 참 예쁘게 해."

"아니지, 당신 닮아서 인성이 좋은 거야."

"둘 다 닮았다고 하죠."

하지 마요. 아들은 스물이 될 때까지 여자 손목 한 번 잡아 본 게 전부인데.

그 앞에서 꼭 이래야 합니까?

그나저나, 생각해 보니 급히 물어볼 게 있지 않나.

"저기. 아버지."

"응?"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내 부름에 어머니가 눈을 반짝였다.

"너 여자 생겼니?"

"아니요."

"그래, 나가서 얘기할까? 여보, 잠깐 나갔다 올게."

"그래요. 광익아, 임신은 안 돼. 알지? 피임은 철저히."

"아, 좀, 저 여친 없어요."

"그 얼굴에 왜 여친을 안 만드니?"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아버지는 허허 웃으시고는 앞장서 나가셨다.

밖으로 나가자마자 아버지가 눈으로 물었다.

"아니, 음, 내려가서 말하죠."

여기서 나누는 대화가 안 들리려나?

각성 이후 전보다 청각이 조금 예민해졌다.

아파트 방화문은 방음벽이 아니니, 일단은 지킬 건 지켜야지. 그러니까 아버지의 비밀을 지키고 보자.

띵.

승강기가 오고 내려갔다.

1층에 나오니, 후덥지근한 여름밤 날씨가 아버지와 날 반겼다.

덥긴 무지막지하게 덥네.

이번에는 장마가 무슨 한 달 보름은 가더라.

그 습한 공기가 아직도 곳곳에 남아 있는 것 같다.

"아들?"

"아버지, 각성할 때 아파요?"

솔직히 말하겠다.

두 번 다시는 그 고통 겪고 싶지 않다.

이게 안 당해 본 사람은 모르겠지만, 아프다. 진짜 더럽게 아프다.

어머니가 말씀하시길 산고의 고통보다 더하다고 했었다.

오히려 애 낳는 게 더 쉬웠다고 하시니.

"응?"

"아파요?"

이미 변신족으로 각성했으니, 불멸자로는 각성 안 할지도 모른다.

나야 모르지.

그래도 혹시나 마음의 준비는 해야 할 거 아닌가.

"아빠는 그냥 그랬어. 갑자기 피가 뜨거워진다는 기분이 들었고, 그다음은 오히려 차갑게 식어 버리는 것 같았지. 조금 춥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오감이 전에 없이 예민해졌지."

불멸자는 예민한 오감.

변신족은 타고난 완력.

상반되는 특징이다.

물론 변신족도 보통의 인간보다는 감각이 예민하다. 하지만 불멸자는 그보다 더하다고 한다.

애초에 오감을 넘어선 육감과 직감의 영역까지 나아가는 수준이라니까.

"아프진 않네요?"

"응, 그렇지."

그럼, 그럼 정말 다행이다.

"그, 그러니까 엄마는 그냥 인간이잖아요. 꼭 각성할까요?"

사실은 변신족과 불멸자의 혼혈이 가능한지 묻고 싶었다.

"한다."

아버지는 확고하게 말씀하셨다.

왜요? 눈으로 묻자, 아버지가 입을 여신다.

"불멸의 피가 더 진하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간단히 설명을 덧붙였다.

불멸의 혈통은 보통 인간의 피보다 더 강하고 진하게 흐르기 때문에 그렇단다.

유전학은 모르지만, 아버지는 당연히 그리되리라 믿고 있으셨다.

그럼 안 될지도 모르겠네.

어머니가 말씀하시길, 이쪽 변신족 피가 아주 살벌한 직계를 두고 있다고 하셨으니까.

"그리고 아버지는, 음, 아니다. 이건 상관없겠다."

말하다 말면 똥 싸다 끊은 것만큼 불쾌합니다. 아버지.

그런데 얼굴을 보니 차마 묻지 못하겠다.

스무 해 정도 살다 보니 다른 사람 표정을 살필 줄도 알게 되는 법 아니겠나.

아버지의 표정이 그랬다.

이제 브론즈에 올라온 게이머에게 마스터 급의 센스를 바랄 수 없는 그런 표정.

그러니까 아직 어리기만 한 나에게 무거운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은 거다.

거기에 오늘은 내 생일이고.

난 속 깊은 아들이었다.

"올라가요."

아프지만 않으면 됐다.

뭐, 거기에 각성 안 할지도 모르고.

오히려 각성 안 하면 더 문제겠는데.

아버지한테 뭐라고 핑계를 대지.

생일은 조촐했다.

다만, 차린 건 조촐하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과정이 조촐한 거지.

미역국, 한우 살치살 구이 9kg, 밥 세 공기.

갖은 밑반찬은 패스다.

이리 차려야 배가 든든하다.

난 엄청나게 잘 먹으니까.

이것도 변신족 특징이란다.

애초에 근섬유의 밀집도 변화로 신체 자체가 변해, 몸이 원하는 에너지가 더 커진다는 것이다.

나만 그런 것도 아니다.

아버지도 드시긴 참 많이 드셨다.

어머니는 말할 것도 없다.

우리 셋은 전부 대식가다.

이래 놓고 서로 이상하다고 의심조차 안 한다고? 그럴 수도 있지. 뭐.

잘 먹는다고 바로 '너 특수종이냐?' 이러는 건 억측이다.

그리 먹고 케이크에 촛불 붙이고 노래 부르고.

"잘자, 아들. 생일 축하해."

두 분의 축하를 받고 침대에 누웠다.

각성하려나?

나도 궁금한 참이다.

피곤하진 않지만, 난 머리만 대면 자는 타입인지라, 금세 잠들었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난 몸 안의 모든 피가 확 뜨거워졌다가 차갑게 식는 기분이 들었다.

"끄으으."

이게 안 아프다고?

온몸을 휘도는 피가 뜨거워졌다가 차가워지는데 안 아파?

차마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이 전신을 휘감았다.

개미가 전신을 물어뜯는 것 같았다.

끔찍했다.

신음은 흘러나오지 않았다.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버티고 버티다 보니, 몸이 그대로 얼음 속에 갇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거 뭐 문제가 있는 거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 때쯤.

몸의 자유가 돌아오고 고통이 가셨다.

아프지 않았다.

대신 어두운 방의 정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

절로 탄성이 나왔다.

처음 느낀 건, 시력의 변화다.

불멸자의 시각이다.

나이트 비전 수준의 밤눈이구나.

올빼미 저리 가라네.

그게 끝이 아니다.

청각도 예민해졌다. 밖에서 우는 매미 소리가 귀에 쨍하니 울렸다.

"윽."

반사적으로 귀를 부여잡고 고개를 숙였다.

다행히도 난 변신족으로서 몸을 컨트롤해 본 적이 있었다.

불멸자의 오감 컨트롤도 비슷했다.

의식적으로 귀를 멀리하듯이 두면 된다.

그럼 소리도 같이 멀어진다.

시각과 청각도 비슷하다.

익숙해지면 단 몇 초 만에 모든 걸 바꿀 수 있다.

아, 이제 좀 괜찮네.

미각, 촉각, 후각.

모든 게 달라졌다.

아니, 후각은 그대로 같은데.

다른 감각은 몰라도 후각만큼은 변신족도 탁월하게 뛰어난 듯싶다.

각성했네.

아버지의 이론대로라면 변신족의 피가 진하면 안 될 줄 알았는데.

그런데 혼혈이 나뿐일까?

그렇진 않을 것 같다.

불멸자나 변신족 중 서로 눈맞은 사람이 어찌 나의 부모뿐일까.

근데 왜 두 분은 서로 그거 숨기시는 걸까.

이 궁금증을 풀려면 비밀을 밝혀야 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왜 비밀이냐고 물으면 답을 회피하시니.

생각해서 뭐하겠나.

급격하게 피로도가 몰려왔다.

눈꺼풀이 무겁고 몸이 축 늘어진다.

땀 흘리고 시트 젖었는데.

모르겠다. 일단 자자.

그렇게 눈을 감았다.

2. 과외

다음 날 아침, 식탁 앞에 앉았을 때다.

"공무원 시험 준비해라."

아버지가 말했다.

"...공무원이요?"

어머니도 놀라신 걸 보니 상의하고 한 말은 아니신 것 같다.

갑자기 공무원?

"갑자기요?"

어머니도 물으셨다.

"이번에 좋은 기회가 와서 그래."

"뭔데요?"

어머니는 당황하셨다. 그럴 만도 하시지.

불멸자가 정부 소속이 대부분이라면, 변신은 조금 다르다.

이쪽은 전 세계에서 손꼽히는 기업 쪽이랑 연관이 있으니까.

어머니는 나에게 멀쩡한 대학만 가면 취업은 그쪽으로 하는 게 좋겠다고 했다.

아예 대학을 다니며 인턴 형식으로 꽂아 넣을 생각이신 듯했다.

외할아버지 쪽 인맥인 것 같은데, 자세하게 말씀은 안 하셨으니 뭐, 나야 알 도리가 없고.

어머니가 말씀하시길, 살다 보면 변신족의 본능에 휘둘릴 텐데, 보통 사람 사이에 끼어 사는 게 쉬운 일은 아니란 거다.

최소한 그곳에서 기본 훈련은 받았으면 하는 마음이실 거다.

그러니.

"이제 스물이에요. 대학도 가야죠."

이리 말씀하실 법했다.

"아니, 대학이 중요한가, 사람이 가진 바 능력이 중요하지. 공무원 좋잖아."

"아니, 공무원이 나쁘다는 게 아니라 광익이가 벌써 고시원에 들어가 사는 걸 보고 싶지가 않아서 그래요."

"고시원까지 갈 필요도 없어. 광익이 머리도 좋잖아."

음음, 이 말은 부인할 순 없지.

난 전교 1등은 아니지만, 그래도 고등학교 내내 전교 30등 밖으로 나가 본 적은 없다.

공부도 체력이 받쳐 줘야 한다는 말이 있다.

난 그 말에 동의한다.

열여덟 살, 늦여름 각성 이후 난 체력왕이 됐고.

책상에 앉아 버티는 힘이 늘었으며 집중력도 덩달아 늘었다.

어머니가 걱정하는 피의 본능으로 인한 참을 수 없는 욕구도 딱히 없어서 적당히 공부했다.

나머지는 놀았지.

피시방은 제2의 고향과도 같았으니.

그나저나 각성한 건 하나도 안 물어보시고 대뜸 진로 상담이라니.

"월급 따박따박 나오고 복지 좋고."

"광익이가 하고 싶은 일이 뭔지도 물어봐야죠."

아버지와 어머니는 싸우시는 일이 없다.

실제로 싸운다고 해도 아버지가 쥐어 터지는 꼴이 나올까 무섭긴 하다.

어머니의 육체는 그 자체로 무기다.

아름답지만, 강인한 어머니시다.

더욱이 어머니는 변신족이다. 일반 사람보다 완력이 세 배에서 네 배 이상 강한 변신족.

불멸자는 죽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맞아서 안 아픈 건 아니다.

아침에 화장실에서 세수하며 이미 실험해 봤다.

볼을 꼬집었는데 아프더라.

평소보다 더 아픈 것 같기도 하고.

"그럼 광익이한테 물어보지."

"그래, 광익아, 너 공무원 하고 싶니?"

"음. 저요?"

사실 이날까지, 난 두 분께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말한 적이 없다.

그런데 열여덟 살, 어머니를 통해 내가 변신족인 걸 알게 된 이전부터 소망한 꿈이 있었다.

두 분의 눈을 보며 난 입을 열었다.

"저 UDT 가고 싶은데요."

Underwater Demolition Team.

해군 특수부대의 줄임말이다.

스트리밍 방송 보다가 흥미를 느꼈지만, 얼마나 멋진가.

몸을 극한까지 단련한 군인 집단.

멋있다.

난 적당히 국가도 존경하고 공부도 잘하는 편이며, 육체는 말할 것도 없다.

일반 사람 사이에 변신족 육체로 비비면 그냥 콜드 게임이지.

"양심."

어머니가 중얼거렸다.

일반 군대에 들어가서 그러고 싶니? 라고 물으시는 겁니까?

아니, 그럼 편한 길 놔두고 왜 어렵게 가야 합니까, 어머니.

전 어머니가 말씀하신 기초 훈련받은 다음 곧장 장교로 입대할 겁니다.

그래서 훈련받고, 하고 싶은 거 다 한 다음에 돌아와서 어깨 딱 펴고 다닐 거라 이겁니다.

말뚝 박을 생각은 없지만, 지금 당장 하고 싶은 건 이거다.

"군인?"

아버지가 눈썹을 씰룩이셨다.

저건 곤란할 때 짓는 표정이다.

"깊게 생각해서 하는 말이 아니에요."

어머니가 옆에서 날 흘겨보고는 말했다.

"어머니, 소자도 벌써 스물입니다. 머리가 굵어질 만큼 굵어졌지요."

"굵다 못해 부은 것 같구나. 아들아."

어머니가 미소와 함께 말했는데 살기가 느껴진다.

예민해진 오감과 더불어 태어난 육감이 경고했다.

개기지 마!

아, 이거 씨알도 안 먹히겠다.

어머니가 반대하시면 이거, 음, 안 될 텐데.

난 어머니를 이길 수 없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했나? 여기 있다.

우리 어머니는 날 언제나 이기신다.

힘으로도, 말로도.

그런 어머니를 꺾을 유일한 사람은 단 한 명뿐.

"아니, 군인도 나쁘지 않은데."

아버지가 턱을 쓰다듬으며 내 손을 들어주셨다.

"겉멋 들어서 군인 하고 싶은 건 아니지?"

"음, 뭐, 그것도 조금."

이럴 땐 솔직한 게 낫다. 아버지는 거짓말을 싫어하시니.

"그것도 좋지. 스물 먹은 놈이 벌써 나라를 위해 싸우고 싶어 환장했다면 그게 더 이상해."

정답.

"그래도 군대는 좀."

어머니는 왜 저렇게 군을 싫어하시나.

"괜찮아. 군대 간다고 전부 소말리아 파병 가서 해적이랑 싸우고 그러는 거 아니야. 훈련받고 자대 배치받아서 군 생활 잘하면 되는 거지. 어차피 가는 군대, 장교로 가면 나중에도 좋을 거고."

조곤조곤 말씀하시는 아버지가 존경스러웠다.

"...네, 뭐, 당신이 그러자면."

어머니가 물러나셨다. 물러나시며 날 향해 강렬한 눈빛을 보내셨지만, 이미 끝난 일.

"소자, 그럼 뜻대로 해도 됩니까?"

"되는데, 지금 당장은 안 되지."

"네, 알아요. 일단 대학부터 가야...."

"아니, 공무원 시험."

아버지 어디서 에듀빌 뒷광고라도 받으셨나.

왜 이리 시험을 강조하시나.

"이 시험 합격하면 보직 유예하고 군대 가면 돼. 그게 싫으면 그냥 회사에 방위산업체 같은 거로 퉁쳐도 되고. 장교로 가면 가산점도 있을걸?"

"그게 그렇게 돼요?"

나보다 어머니가 먼저 물었다.

그래, 상식적으로는 안 되지.

"돼."

하지만 아버지가 된다고 하시면 될 거다.

정부에서 일하는 분 아닌가.

다 수단이 있으신 거다.

"그럼 치죠. 시험."

"어렵다고 할 순 없지만, 놀면서 준비할 정도는 아닐 거다."

"문제없어요."

공부 따위야.

"과외로 속성 수업해 줄 사람이 있다. 일주일에 이틀이면 될 거야."

"이틀이요?"

갑자기 뭔 소리인가 싶어 물으니.

"주말 이틀만 비워, 경기도 화성에 아빠 아는 사람 있으니까 거기서 공부해."

"공부를 무슨 거기까지 가서 해요?"

어머니가 물으시고.

"그럴 만한 사람이야. 또 거기가 공기도 맑고 좋아. 논밭 일구며 사는데, 그 친구가 영 도시는 안 오려고 해서."

어머니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시고.

난 아침을 위해 준비된 삼겹살을 흡입하기 시작했다.

먹고 보자. 어제 먹은 건 벌써 소화 끝나고 아침에 화장실에서 대장을 통해 세상으로 내보냈다.

새로이 먹을 걸 채울 때다.

먹고 쉬고 자고.

좋았다.

난 타고난 몸과 운동 신경이 다르다.

학교 다닐 때는 오히려 이런 걸 숨겨야 했다.

"난 아들이 평범하게 살았으면 해."

어머니는 각성하는 날 그리 말씀하셨다.

변신족은 보통 어떤 단체에 소속된다.

그리고 대부분 전투 요원으로 빠지는데, 그 요원은 흉흉한 세상의 전면에 나선 투사나 다름없었다.

어머니는 내가 거기로 내몰리는 게 싫은 눈치였다.

사실 지금 내가 사는 세상은 그리 평화롭다고 할 수 없었다.

환경 오염이나 전염병을 말하는 게 아니다.

우리는 실질적인 위협을 눈앞에 두고 있다.

일명 '어스 블랙홀'이란 거다.

대략 이십 년 전에 나타난 검은 구멍을 말함이다.

그 구멍은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이 맞다고 생각하게 했다.

허공에 뻥 하니 뚫린 구멍.

그건 바다 위, 하늘 위, 땅 위.

어느 곳에나 나타났다.

그리고 그 안에서는 인간과는 다른 생명체가 나오기 시작했고.

오, 끔찍해라.

역사 선생님은 그 게이트가 나온 해를, 테러블 이어라고 불렀다.

끔찍한 한 해.

말 그대로다. 괴물은 나와서 닥치는 대로 사람을 죽였고.

경찰은 권총을 빵빵 쏴댔다.

군대가 도시 내부로 진입하는 데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탱크가 도심을 가로질렀다.

"그때 참 끔찍했습니다. 여러분은 그 시절을 안 살아봐서 모르겠죠?"

역사 선생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모르지, 그래도 그 시대 사료는 많이 남아 있다.

역사서에 따르면, 빌딩 숲 사이에 놓인 블랙홀은 박격포로 포격도 어려웠다는 것 같은 거 말이다.

포탄이 지나갈 자리를 건물이 막으니.

어려움이 많았다고 한다.

"그때 첫 번째 특수종이 모습을 드러냈지요."

불현듯 역사 수업 일부가 떠올랐다.

내 처지에서야 불멸자와 변신족을 먼저 말했지만.

이쪽이 역사적인 첫 번째 형태의 특수종이다.

에스퍼, 초능을 지닌 사람이다.

일명 초능력자다.

고작 스푼을 구부리는 그런 종류의 사람이 아니었다.

염력, 발화, 결빙, 전격.

다양한 힘을 쓰는 초능력자가 나서서 블랙홀의 적과 싸웠다.

그 뒤에는 팔이 잘리고 내장이 터져도 죽지 않는 불멸자가 나섰다고 한다.

다음은 변신족이다.

곰과 늑대 따위로 변한 이들이 몰아치니, 적을 때려잡기도 좋았을 거다.

초능, 불멸, 변신, 그리고 마지막 마법.

특수종 셋에 특수한 기술 하나다.

그 시대에 마법이라면 마술, 트릭에 영역에 가까운 거였을 터.

근데 이거는 진짜였다.

초능과는 또 다른 힘이다.

오롯이 재능이 있는 자들만이 부릴 수 있는 그 신비가 적을 내리쳤다.

여기까지라면 그냥 판타지 소설의 한 장면과 다름없었을 텐데.

아버지는 왜 주위 사람들에게 불멸을 숨기고.

어머니는 왜 내가 평범하게 살길 바랄까.

그 이유가 뭐겠냐.

어찌어찌 블랙홀을 때려 막고 숨 좀 돌리겠다 싶으니, 내분이 일어났다.

불멸의 비밀을 캐자.

마법을 가르쳐라.

초능은 어떻게 각성하느냐.

"정말 슬픈 일이었습니다. 겨우 외침을 막자마자, 어제의 전우가 적이 된 거니까."

역사 선생님은 그리 말했지.

사람들, 참 욕심도 많아.

그 뒤는 핍박의 시간이 이어졌다.

사람과 사람이 사냥감과 사냥꾼으로 나뉘어 싸운다.

그 시간이 지난 뒤, 불멸은 정부에 귀속했고.

변신은 세계적인 기업과 결탁했으며.

초능은 스스로 단체를 설립했다.

그리고 마법은 숨었다.

그 타이밍에 두 번째 홀이 생겼다.

이번에 생긴 건 '어스 화이트홀'.

블랙홀이 나오는 구멍이라면, 화이트홀은 들어가는 구멍이었다.

반대로 우리도 적의 세계를 침략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세계는 이 땅에는 없는 새로운 자원이 있었다.

'이터널티테라라이트' 따위의 이름도 복잡한 것들이다.

홀로 빛을 내는 발광석도 있고.

마법사들이 처음 보는 마나를 품은 돌도 있었다.

새로운 금속, 새로운 식물, 새로운 동물.

모든 게 새로운 자원이다.

그 자원이 준 효과는 무엇일까.

인간의 영원한 숙제 몇 개가 풀리는 순간이었다.

탈모와 조루.

우습지만, 세상에 처음 공개된 건 탈모약이었다.

누구라도 머리에 바르기만 하면 탈모 증상을 완화할 수 있는 신약.

금액? 부르는 게 값이었다.

없어서 못 샀다.

사서 되파는 놈이 몇 배는 수익을 남겨 먹을 정도였다.

이걸 처음 판 건, 전 세계 정부 연합기구, 올드포스였다.

초강대국 미국과 유럽, 러시아, 중국, 일본, 한국 등이 중심이 된 기구였다.

그 이후 누구나 한 달만 복용하면 조루 증상을 깨끗하게 없애 주는 약이 나왔다.

그 약은 전 세계에서 가장 큰 기업, 엑스큐라시에서 만들었다.

그 이후 암세포 억제제, 노화 억제제, 간 이식 후 거부 반응을 없애는 약 등.

믿을 수 없는 신약과 새로운 것이 세상을 강타했다.

그래서 세상이 더 살기 좋아졌냐고?

꼭 그렇진 않다. 일상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모른다. 난 테러블 이어에 태어난 테러블 베이비였으니까.

내가 본 세상은 이미 변화가 시작된 이후였다.

그러니 내 눈에는 그냥 이게 일상이다.

정부 연합 올드포스랑 세계적 기업 엑스큐라시는 사이가 더럽게 안 좋고.

초능 단체, 사이오닉은 애매한 위치라는 거고.

이 모든 것과 상관없이, 사람들은 여전히 일상을 살고 있다는 거다.

어스 블랙홀의 침범이야, 이제 옛날얘기, 그러니까 역사 수업에나 들을 얘기니까.

아직도 그 전선에서 누군가 싸우고는 있다.

예전에는 생존을 위해서라면 지금은 자원을 위해서.

더 많은 걸 얻기 위해서.

그런 면에서 변신족은 유리했다.

타고난 완력과 운동 능력은 그들을 무지막지한 전투 인재로 만드니까.

그리고 드물게 자기 자신이 변신족인 걸 모른 채 각성하는 이들이 있는데, 이들은 그대로 정부에 끌려갔다.

그러니까 지금은 엑스큐라시에도 불멸자가 취직하고, 정부 기관에도 변신족이 들어가는 세상이다.

어떻게 사람이 딱 정해진 대로 나눠 살겠나.

어머니는 내가 어디서든 그리 싸우는 걸 바라시지 않았다.

그래서다.

적당히 어머니의 취향도 맞추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의 욕구도 채우는 중간 지점.

그게 군인이다.

본래라면, 군인 따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보다 더 나은 일을 하고 싶었지.

* * *

일주일에 이틀, 아버지의 말을 따라서 도착한 곳은 산속이었다.

"너 불멸 맞아? 왜 이렇게 튼튼하게 생겼냐?"

'자연인이다'에 나올 것 같은 아저씨가 날 위아래로 훑으며 물었다.

낡은 반바지만 입었는데, 얼굴은 또 말끔하다.

솔직히 말해서 미중년이다.

대충 정보를 종합하면 불멸자라는 판단이다.

"네, 뭐 혼혈이라 그런가 봐요."

"혼혈? 불멸의 피는 진해. 하물며 네 아버지가 누군데, 인간의 피가 그사이에 섞여?"

핍박의 시절, 역사 수업에서 말하길, 특수종 전쟁은 혈통 우월주의자를 만들기도 했다.

과외 선생이 그런 냄새를 풍겼다.

물론 난 아니다.

난 그런 거 없다.

사람은 다 사람이다.

"어머니 피도 진하시거든요."

솔직히 말해 주고 싶지만, 비밀이라 차마 말을 못 해 준다.

"특이한 놈이네. 가자."

"어딜요?"

"뭐야, 연호 선배한테 아무것도 못 들었어?"

유연호, 아버지 성함이시다.

"과외받고 오라고...."

"그래, 그 과외."

뭐지, 뭔가 이상하다.

번듯한 건물은 아닐지라도, 대충 책상하고 펜은 있어야 하지 않나?

근데 산속으로 가?

아, 절에서 공부하나?

아니었다.

"여기다."

공부는 무슨.

아버지, 대체 아들에게 뭘 가르치려는 겁니까.

난 속으로 그리 물을 수밖에 없었다.

3. 칼날 구보

"공부는 안 합니까?"

"이게 공부지."

자연인 아저씨는 단호했다.

난 눈살을 찌푸렸다.

그걸 보고 자연인 아저씨가 물었다.

"너 각성했지?"

"네."

"실험은 해 봤냐?"

자연인 과외 선생이 말하는 실험이 뭐겠나.

불멸에 관한 시험이다.

그래, 솔직히 해 봤지.

커터칼로 팔뚝 좀 그어 봤다.

상처가 생기는 것보다 빨리 낫진 않았지만, 금세 낫긴 했다.

커터칼로 그은 상처가 몇 분도 되지 않아 사라졌으니.

"우리 몸에 상처가 생기면 낫는 원리 알아?"

모른다.

각성도 엊그제 했고 내가 불멸자란 것도 아버지의 커밍아웃 덕에 나흘 전에 알았다.

과외 선생이 흙바닥 위에 나뭇가지로 뭘 쓱쓱 그었다.

그림이다. 다친 상처와 회복하는 장면을 그린 것 같은데.

이걸 알아보라고 그린 건가.

4살 먹은 애가 와서 그려도 이것보다는 나을 듯싶다.

그림은 무시하는 게 옳았다.

"상처를 회복하는 건 치유력이지. 그 치유력의 기초가 되는 건 첫째가 체력이다."

"네, 체력."

난 반사적으로 우등생의 면모를 보였다.

복명복창과 반짝이는 눈빛으로 가르치는 사람의 욕구를 자극한 거다.

나 되게 관심 많다!

말하면 철석같이 알아들을 것이다!

복명복창과 눈빛으로 이걸 표현하자, 과외 선생이 침 튀기며 말을 잇는다.

"두 번째는 감각을 단련하는 거지."

과외 선생이 간단히 체력과 예민한 감각을 통해 상처가 치유되는 원리를 설명했다.

단순했다.

기초 체력이 높으면 더 빨리 낫는다.

감각이 예민하면 고통을 크게 느끼지만, 대신 뼈가 잘못 맞물리거나 하는 경우 금세 알아챌 수 있다는 거다.

네, 다 알아들었습니다.

근데 그게 지금 이 상황과 무슨 상관이 있는 걸까요?

자연스레 우등생의 면모를 보였지만, 이게 뭔가 싶다.

"다 알아들었으면 달려."

"어딜요?"

"여기."

아버지, 유연호 씨, 당신 아들 제대로 보낸 거 맞지?

난 과외 선생이 말한 곳으로 눈을 돌렸다.

이곳이 평지였다면 그냥 구보 정도의 체력 단련으로 생각하면 그만인데.

그 구보를 해야 할 땅 위에 날카로운 쇠붙이가 가득 붙어 있으면 얘기가 달라진다.

"발바닥 지압치고는 과한데요."

"네 발바닥은 강철이냐? 저게 지압이 돼?"

아, 혹시나 했다.

다 알면서 달리라고 하는 거 맞구나.

혹시나 이 작자가 미친 작자면 얼굴에 원투 꽂고 튈까 고민했다.

"제가 여길 왜 달려야 할까요?"

이거 궁서체다.

난 진지했다.

"시험 본다며."

그러니까 그 시험이 뭔지, 어떤 설명도 듣지 못했다 이거다.

"연호 선배가 말 안 했구나."

네, 안 했습니다.

이런 불성실한 아버지 같으니라고.

"너 불멸 특수 기업 지원하잖아."

변신과 불멸을 각성하지 않았다면 난 지금 분명 딸꾹질을 했을 거다.

하지만 놀랍도록 강건한 내 육체와 정신은 상대의 말을 의연히 받아들이게 했다.

"왜요?"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

아니, 무슨 특수 기업? 그건 뭔데?

"불멸특수대 몰라?"

모른다. 몰라. 처음 들어 보는 소속이다.

얼굴에 의문을 보이자.

"군인 비슷한 거야."

저리 부연 설명을 한다.

그건 말 안 해도 알겠습니다.

UDT에 가고 싶다고 했는데 왜?

공무원 시험이라며?

"할 거야? 말 거야? 안 할 거면 가."

난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근데 여길 달리는 이유가 뭡니까?"

궁금한 것도 더럽게 많네, 과외 선생은 얼굴 근육으로 그리 말했다.

이것도 재주라면 재주다.

그는 그러면서도 설명을 아끼지 않았다.

"체력 단련 겸, 불멸의 육체를 다루는 법을 배우는 거다."

"아, 네."

난 피할 수 없는 선택이라 생각했다.

일단 이 시험을 통과해야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다.

변한 건 없었다. 그저 내가 생각한 시험과 아버지가 말한 시험이 종류가 좀 다를 뿐.

"달려. 기다리다 목 빠지겠다."

네, 그럼 갑니다.

불멸 육체 훈련 전통, 칼날 구보.

바닥에 칼날을 박아 넣고 그 위를 달리는 거다.

"윽."

아프다. 송곳에 푹 찔려 발바닥이 반쯤 뚫렸다.

조금만 더 힘주면 발등 위로 솟은 어여쁜 송곳의 끝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쉬지 마!"

뒤에서 과외 선생이 혓바닥 채찍을 휘둘렀다.

"뒤에서 적이 쫓아오는데 아프다고 멈출래? 응? 그래? 그냥 죽여 달라고 빌지 그러니?"

아니, 무슨 적이 쫓아온다고.

그리 말하면서도 난 달렸다.

찔리고 베이고 달린다.

겨우 50m 달리는 데 지옥 순례길을 걷는 기분이다.

변신족의 육체 덕분에 반사적으로 큰 상처를 피해서 그렇지.

진짜 음경 될 뻔했다.

그렇게 한 번 구보를 끝내자, 선생이 다가와 찢기고 베인 내 정강이, 종아리와 발을 빤히 본다.

"치유력 끝내주네."

아물어가는 살이 보인다.

그리고 그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피하지 말고, 더 밟아, 상처를 더 크게 만들어."

아니, 이런 미친놈이.

안 그래도 아파 죽겠는데, 무슨 개소리야.

"많이 다쳐 보고 회복할수록 재생력은 빨라진다."

선생이 말했다.

아니, 그래도, 이건 좀 아니지 않나. 더럽게 아픈데.

"엄살 부리지 말고."

선생이 말했다.

엄살 아닌데, 이거 궁서체인데. 진지하다. 진짜 더럽게 아프다.

하지만 과외 선생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강요했다.

"뛰어."

운동 신경을 이용해 일부러 다리에 깊은 자상을 만드는 과정은 자해나 다름없었다.

"다른 놈들은 피하지도 못하는 걸 용케 피하더라니, 너 운동 신경 좋구나. 타고났네. 그렇지, 일부러 밟아, 다리를 절단 내."

아니, 염병, 저 새끼가.

과외 선생이 어디서 평상을 가져와 그 위에 앉은 채로 말했다.

참 편해 보인다. 누구는 죽을 고생 중인데.

"야, 너 불멸자야. 그런 거로 안 죽어. 심장이 터져도 살아날 것 같은 놈이."

그걸 말이라고 하나.

"이거 언제까지 합니까?"

"원래는 쇼크 몇 번 오고, 쇼크를 이겨 내야 끝나는데...."

선생이 말끝을 흐리다가 묻는다.

"근데 넌 왜 쇼크가 안 오니?"

* * *

불멸자의 육체는 재생력이 끝내주고 오감이 예민하지만, 튼튼하다고 할 순 없다.

그래서 선대의 불멸자는 훈련에 심혈을 기울였다.

"쇼크를 경험해 보는 것."

한 번 경험함으로써 고통의 역치를 높이는 훈련이다.

그래서 생긴 첫 번째가 칼날 구보.

칼날 위를 달리며 눈깔이 뒤집히고 기절하는 걸 경험하는 거다.

그 훈련을 통해 전장에서 기절하거나 고통으로 패닉을 일으키지 않는 건데, 그런 건데.

"너, 왜, 음. 안 아프냐?"

아프다니까.

진짜 심각하게 말하는데 더럽게 아프다. 말만 그런 게 아니라. 침을 질질 흘릴 정도로 아프다.

"아픈데요."

"근데 왜 쇼크가 안 와?"

아, 난 선생에게 훈련 취지와 목표를 듣고 깨달았다.

변신족의 육체는 강건하다.

열여덟 각성 이후, 가벼운 빈혈조차 느껴 본 적이 없다.

변신족은 감기도 안 걸린다. 어지간한 독에 중독돼도 기침 몇 번 하면 해독하는 몸뚱이다.

세계 제일의 튼튼한 몸뚱이라는 거다.

그런데 쇼크?

충격과 고통으로 인한 쇼크?

피를 한 사발 흘려도 배고프다고 치킨집에 달려갈 변신족한테 쇼크는 무리다.

"그거 말고 이거 통과하는 기준 같은 거 없어요?"

"너 50m 몇 초 달리냐?"

진심으로 달려 본 적이 없다.

학교에서는 적당히 조절해서 6초 초반이다.

물론, 이것만으로 우리 학교 체육 선생님은 날 한 달이나 쫓아다녔다.

"넌 육상을 위해 태어났다. 달려라. 광익아, 그게 네 삶의 이유다! 나랑 같이 세계를 제패하자!"

안 해요. 달리기로 세계 제패 안 해!

겨우 뿌리쳤었지.

"6초쯤이요."

진짜로 달리면 글쎄 5초대는 나오지 않으려나.

세계 신기록이 5초 중반이다.

학교에서 기록을 잴 때, 혹시 저 기록을 깰까 봐 미리 검색까지 하고 가야 했다.

인터넷 세상에는 없는 게 없지.

50m 세계 신기록도 있다고.

드노반 메일리의 5.56, 그게 세계 신기록이다.

"칼날 구보 쇼크 외 통과 조건, 전속력으로 칼날 구간 통과다."

아, 그럼 쉽지.

난 칼날에 옷과 신발이 상할까 봐 벗고 과외 선생이 준 너덜너덜한 반바지만 입은 채였다.

그 반바지를 걷어서 접었다.

튼실한 허벅지 근육이 불끈불끈 솟았다.

"그럼 쉽죠."

아프긴 아프지만, 그렇다고 죽을 정도는 아니라는 거다.

"얍."

작은 기합과 함께 난 칼날 위를 달렸다.

퍽! 발이 베이고 찢기다 못해, 칼날이 뼈에 닿는 기분은 끔찍했다.

실시간으로 재생돼서 다리가 간지럽기도 했다.

난 모든 감각을 차단하고 냅다 달려 칼날의 범위를 벗어났다.

"와."

고통의 경감되길 기다리며 무릎을 바닥에 대고 뒤를 돌아봤다.

과외 선생이 눈을 깜빡이다 물었다.

"...너 뭐냐?"

불멸자의 육체는 단련하지 않으면 일반 사람 기준으로도 약하다.

그런데 난 아니다.

지금 과외 선생의 얼굴에 떠오른 황당함은 그거 때문이겠지.

"유광익이요."

이름을 묻는 건 아니겠지만, 달리 할 말도 없잖아.

그렇다고 내가 여기서 사실 내 어머니는 변신족이고 아버지는 불멸자인데.

두 분이 금단의 사랑, 아니, 금단까지는 아닌 것 같은데.

하여간 두 분의 사랑이 만든 기적입니다. 라고 말할 순 없지 않나.

상처가 회복된다.

발바닥 살이 재생되며 그 사이로 파고든 흙을 뱉어 낸다.

자리에서 일어나자, 어안이 벙벙한 선생이 말했다.

"한 번 더."

"뭘요?"

"한 번 더 뛰어 봐."

"방금 통과했잖아요."

쇼크로 고통을 견디는 역치를 늘릴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왜 또 뛰어?

아니, 신기하다고 그걸 보여 달라는 거냐?

이건 아니지.

한마디 따지려는데, 선생이 스마트폰을 꺼내며 입을 연다.

"시간 안 쟀어."

아 씨. 맞네. 안 쟀다.

통과 조건이 쉽기에 그냥 냅다 달려 버렸다.

"아, 네, 한 번 더."

나 사실 머리가 안 좋은 걸까.

잡생각을 하며 난 칼날 구보를 한 번 더 해야 했다.

물론 가볍게 통과다.

"두 번째 훈련은 숨 참기다."

좀 멀쩡한 훈련인가 싶었다.

잠수 훈련이라도 하나 싶었는데.

"이건 교수대 아닙니까?"

칼날 구보를 한 곳 뒤쪽 숲으로 향하니, 목매달기 좋은 튼튼한 가지가 보였다.

물론 그 가지에 머리가 쏙 들어갈 올가미 형태의 로프가 걸려 있었다.

"숨 참기 훈련 교보재다."

선생이 말했다.

이 새끼가 미친 걸까, 불멸자의 육체 단련이 미친 걸까.

후자가 맞겠지.

그러니 이 작자를 원망하진 말자.

"통과 조건은요?"

"이제까지 최고 기록은 8분 48초였다."

불멸자는 잠깐 산소가 끊어지는 거로 죽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훈련은 자살 훈련이 아니다.

그런데도 내 눈에는 자살 훈련으로 보였다.

아니, 아까 칼날 구보도 그렇고 전체적으로 자살 잘하는 법 따위를 배우는 기분인데.

"로프는 튼튼해서 안 끊어지니 걱정하지 말고."

과외 선생의 눈이 이상한 기대감으로 빛났다.

이건 딱히 피할 길이 없지 않냐 이거다.

목이 졸리는 압박감을 견디며 목 근육으로 버티는 게 훈련의 핵심이었다.

"자, 이거로 목 근육을 단련하고 여기에 목을 매달면 된다."

과외 선생이 친절하게 자살법을 설명해 준다.

목에 줄을 매달아 무거운 쇠공을 들었다가 내려놓는 훈련을 통해 목빗근을 단련하는 거다.

"목이 졸려 기절하면 끝이다. 그걸 견디기 위한 훈련이지."

개무식하네. 솔직한 감상이다.

그래. 불멸자는 팔 하나 다리 하나 자르는 거로 제압할 수 없다.

그럼 제압하는 방법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쇼크를 일으켜 기절시키고, 기도 압박을 통해 기절시키고.

"특수종 전쟁은 인간이 우리를 상대하는 법을 익히게 하는 계기가 됐지만, 그 반대 효과도 생기는 건 당연한 거 아니겠냐?"

과외 선생이 그리 취지를 설명했다.

그러니 이건 기절 대비 훈련이란 거다.

그래, 다 이해는 하는데.

더럽게 하기는 싫었다.

"바로 가죠."

빗근 강화 훈련을 준비하던 선생의 눈이 반짝였다.

"그래, 기절 한 번 해 보고 시작하는 것도 좋지."

운동 신경이 좋은 것과 근육 강화는 별개.

이것만은 너도 어쩔 수 없지.

라고 선생의 눈이 말했다.

난 그 선생의 기대를 무참히 부수고 싶진 않지만, 시간 낭비는 싫었다.

"통과 조건은요?"

"없다. 버티다 기절하는 건데 최소 5분은 넘게 버텨야지."

5분이라니.

내 잠수 최고 기록은 비공식으로 19분 20초다.

변신족의 폐활량은 불멸자의 상상을 뛰어넘는 법이었다.

"시작하죠."

난 의자에 올라가 목에 올가미를 걸었다.

훈련임을 아는데도 기분은 더러웠다.

아무리 봐도 자살하는 기분이잖아.

"준비됐지?"

선생이 묻기에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내 발밑에 놓인 의자를 걷어찼다.

4. 자살 훈련

덜컥.

줄 하나가 내 무게를 온전히 견뎠다. 팽팽하게 당겨진 줄의 장력이 느껴지며 내 목에 몸무게가 실렸다.

잘못하면 목뼈 부러진다.

난 그걸 힘으로 버텼다.

빗장 근육이 몸무게가 주는 부하를 버틴 이후에야, 편안해졌다.

목을 조이는 힘과 버티는 힘이 평행을 이룬다.

변신족의 육체를 가진 나에게는 이건 자살이 아니라 진짜 훈련이 될 수 있었다.

물론 불멸자에게는 아니다.

미친 훈련 같으니라고.

그래도 버텼다.

체감하기로 5분이 넘어가자 슬슬 한계가 다가오기 시작했다.

아까 신기록이 몇 분이라고 했더라?

8분? 그럼 이제 풀어 줄 때가 된 거 같은데?

이게 가만히 물에 들어가서 잠수하는 거랑은 달랐다. 목 근육을 조이는 올가미가 무척 신경 쓰였다.

호흡을 할 수 없다. 움직일 수도 없다. 손을 들어 목을 죄는 줄을 당기려 하자, 과외 선생이 어디서 가져온 회초리로 탁하고 손등을 내리쳤다.

"어딜."

그러면서 눈빛이 반짝반짝 빛나는데 정말 신기한 물건을 찾은 눈빛이다.

이런 눈빛 본 적 있다.

마트에 장난감 코너에 자리 잡은 아이의 눈빛이다.

염병, 근데 진짜 안 풀어 줘?

"아직 버틸 만하구나."

과외 선생이 말했다.

그래, 솔직히 버티긴 하겠는데.

시간이 얼마나 지났지?

처음부터 쟀다면 알았겠지만,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도 최소 5분은 진즉에 넘었다.

숨이 턱턱 막히기 시작했다. 목을 죄는 올가미가 피부를 파고들기 시작했다.

애초에 이런 무식한 훈련을 하겠다고 한 내가 미친놈이지.

버둥거리기 시작하자, 선생이 말한다.

"버둥거리면 더 힘들어, 그냥 깔끔하게 기절 한 번 해."

저 말을 들으니까 더 오기가 생긴다.

버티고 또 버텼다.

경동맥의 압박으로 뇌에 공급하는 산소가 부족해지기 시작했다.

하늘이 노랗게 변하고 빙글빙글하고 세상이 돌고 돈다.

변신족의 육체가 무적은 아니다.

의식이 끊기는 느낌이 든 순간, 훅하고 중력에 영향을 받은 몸이 바닥에 쿵 하고 떨어졌다.

"쿨럭! 쿨럭!"

거친 기침과 숨을 거듭 들이켜며 바닥에 무릎과 손을 대고 몸이 안정되길 기다렸다.

3초도 걸리지 않았다. 튼튼한 육체는 금세 본래의 컨디션으로 돌아왔다.

"와, 죽을 뻔했다."

"안 죽어."

내 말에 과외 선생이 답하는 걸 보는데, 솔직히 한 대 때리고 싶었다.

불멸자는 죽지 않는다.

그거 말하는 거겠지만, 진심으로 얄미운걸.

"기록 12분...."

스톱워치의 기록을 확인하던 선생이 날 빤히 본다.

그래, 언제까지 비밀을 숨길 순 없겠지.

한계에 다가갈수록 변신족의 육체 특징이 보일 테니.

이런저런 핑계를 생각할 때다.

"오늘은 쉬자. 뭐 좀 먹고."

과외 선생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래도 밥은 주는군요."

"굶으면서 하는 건 비효율적이다. 체력도 붙여야 하니까."

그 눈빛은 어떻게 안 됩니까?

아까부터 분해하고 싶은 조립 로봇을 발견한 여덟 살 아이의 눈빛을 하고 계십니다. 선생님.

그 뒤도 평범했다고 말하긴 어려웠다.

에 나온 생선 대가리 넣은 카레 수준은 아니지만, 선생님은 산에서 얻은 풀이나 버섯으로 전골을 끓였다.

맛은 어땠냐고?

솔직히 말하자면, 이때 난 제일 살의가 끓어올랐다.

대충 무쇠솥에 지은 밥에선 탄내가 진동했고, 정체 모를 고기는 노린내가 물씬 풍겼다.

자연에 살려면 일단 요리부터 배워야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니, 돌아가면 어머니한테 요리를 좀 배워 보자.

그 전에 아버지한테 이 일에 관해 묻고.

먹고 개울가에서 씻고 옷을 팡팡 털고 돌아오니 무척 피곤했다.

어설피 지은 오두막에 들어가니 조명 기구가 없었다. 덕분에 해가 떨어지기 시작하자 금세 컴컴해졌다.

"전등은 안 달아요?"

"불빛 생기면 벌레 들어와, 크게 불편하지도 않잖아."

왱.

귓가로 모기가 지나갔다.

쓱, 손을 뻗어 한 손으로 쥐어 터트려 죽이고 선생을 보자, 적당히 자리를 잡고 몸을 눕힌 게 보였다.

나도 눅진한 이불에 몸을 맡겼다.

편하다고는 때려 죽어도 말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못 버틸 정도는 아니었다.

"촉각 죽이기 훈련이다. 예민한 촉각은 다른 사람보다 몇 배는 불쾌한 감각을 느끼게 하지."

이것도 훈련의 일종이라 이겁니까?

뭐, 난 감각 죽이기는 이미 통달한 상태다.

촉각을 죽이고 피로를 느끼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잠들었다.

모기와 각종 벌레가 괴롭혔지만, 괜히 불멸자의 육체가 아니다.

벌레에 물린 작은 상처쯤은 생기자마자 없어지는 법이었다.

그래도 모기 새끼가 좋다는 건 아니었다.

밤새 왱왱거리며 연신 무는 놈이 반가운 사람이 있을 리가 없잖아.

가능하다면 지구에서 모기란 놈을 없애고 싶은 건 나도 마찬가지다.

결론적으로 괴로웠지만, 죽을 정도는 아니라는 거다.

애초에 몸뚱이가 다른 일반 사람과 비교하면 월등히 뛰어난 덕분이었다.

"아침 먹어라."

이게 제일 괴롭다. 요리, 요리를 배우자.

혹시나 다음에 오게 되면 그때 국자는 내가 잡자.

각오와 함께 나갔다.

아침은 정체 모를 노린내 나는 고기구이였다.

그 옆에 비린내 나는 생선구이도 함께다.

"잘 드시네요."

"불멸자는 소모하는 에너지가 크다."

선생은 이론적인 부분도 곧잘 말하긴 했다.

식사 시간이나 중간에 쉬는 시간이 되면 입을 열었고, 뭘 물어봐도 막힘없이 답했다.

"팔다리는 방패다. 일격에 행동 불능을 노리는 상대에겐 팔을 줘."

불멸자의 훈련이란 이런 건가 싶었다.

머리를 노리면 팔을 내주고 다리를 노려도 팔을 내준다.

불멸자로 훈련받다 보니 왜 그런지 이제는 이해할 수 있었다.

불멸자를 잡는 방법은 총 셋이다.

큰 상처로 쇼크를 주거나.

경동맥 압박 등으로 기절시키거나.

다리를 잘라 기동력을 봉인하는 거다.

"그래서 총보다는 칼을 조심해야 하고, 크레모아나 지뢰 같은 것도 유의해야 하지."

저격보다는 산탄총이 더 위험하다는 거다.

물론 저격으로 머리 터지면 어떤 불멸자라도 정신을 잃고 쓰러지겠지만.

요리 솜씨가 형편없는 과외 선생과 얘기하다 보면 먼 옛날 6·25 전쟁의 한복판에 서 있는 기분이 들었다.

"아, 네. 그렇군요."

"유의해라."

선생이 재차 말했다.

네, 물론이죠.

강남역 앞에 매설된 지뢰나 어두운 밤 골목길을 지나며 갑자기 터질 크레모아는 유의해야 합죠.

아니, 지금 시대가 어떤 시댄데 이런 폭발물을 걱정하나.

최근 인류의 전쟁은 심플하다.

정부의 '올드포스'.

세계적 기업에 '엑스큐라시'.

초능단체 '사이오닉'.

이상 세 단체와 아더사이드와의 전투다.

아더사이드가 뭐겠나, 홀 너머의 적을 말함이다.

방송에서는 연신 그 적을 우리가 압도한다고 하고.

실제로 아더사이드의 침략자, 흔히 말하길 인베이더의 모습도 몇 번 나왔다.

방송에 적의 모습을 보이는 수준이니 이기는 건 맞겠지, 뭐.

그러니까 이 과외 선생의 과외는 조금 구시대적인 발상이 섞인 듯하다.

인베이더 상대도 아니고 이건 재래 무기 상대하는 법이잖아.

그래도 지금 배우는 처지에서 일일이 따질 건 아니니.

"다음은 절벽 다이빙이다."

그 뒤로도 자살 훈련은 계속됐다.

겨우 이틀이지만, 총 세 가지 훈련으로 불멸자의 육체 방어법을 빠르게 익힌 셈이다.

칼날 구보에 쇼크를 일으키지 않고 통각을 조절하는 법.

교수형 훈련을 통해 기절로부터 버티는 법.

절벽 다이빙 훈련에서 공중에서 숨 참기, 다가올 충격에 감각 조절하기 등.

이틀은 쏜살같이 지나갔다.

"가라."

심플한 인사에 나도 대강 인사하고 몸을 돌렸다.

그대로 산을 타고 내려와 집으로 향했다.

하루에 버스가 달랑 두 대만 오는 곳이다.

시골도 이런 시골이 없다.

그런데 정작 서울까지는 2시간이면 도착이었다.

그렇게 집으로 향하며 꺼놨던 스마트폰 전원을 켜며 아버지에게 전화했다.

"오, 아들."

버스 안이라 크게 외칠 순 없었다.

"아빠, 나 제대로 온 거 맞아?"

"왜? 무슨 일 있었어?"

훈련에 대해 일일이 다 말할 순 없어, 간단하게 표현해야 했다.

"산속에서 다이빙을 시킨다고."

물론 불만을 섞었다.

"괜찮아. 아들, 넌 불멸자야."

대답치고는 이상하기에 무슨 소리냐고 묻자.

"넌 쉽게 안 죽으니까, 몸 좀 험하게 굴려도 돼. 그래야 제 몸의 한계를 알지."

아니요, 아버지.

험하게 굴려서 제 몸이 얼마나 튼튼한지 알았을 뿐입니다.

불멸과 변신의 콜라보레이션은 그 어떤 칵테일보다 환상적인 맛을 품었어요. 아버지.

제 몸 더럽게 튼튼합니다.

"집에 가서 쉬어라."

"제가 보는 시험은 뭔데요?"

"그건 나중에 얘기하자."

전화기 너머로 '선배, 좀 도와줘요'라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전화는 끝이다.

만나자마자 전화를 못 쓰게 한 선생 덕분에 이제야 아버지와 통화했지만, 예상한 대답이다.

애초에 이게 불합리하고 못 할 것 같으면 진즉에 도주했다.

불멸자의 교육 방식은 좀 특이할 뿐이다.

죽지 않으니 아들 몸 상하는 거 걱정하지 않고 막 굴리겠다는 거잖아.

내가 불멸의 피를 이어받지 않았다면 당신 친아버지 맞냐고 수없이 되물을 훈련이었지만, 우습게도 이게 도움은 됐다.

극한, 아니 극한은 아니지.

그래도 평소에 경험해 보지 못한 육체의 내구도 테스트다.

덕분에 난 내 몸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조금 더 깨달았다.

불멸자의 전투법을 조금 익혔다고 해도 좋았다.

"삼겹살 먹고 싶다."

잘 구운 삼겹살에 김치 한 점 올려서 먹고 싶었다.

아버지와 통화하면 꼭 할 말을 빼먹었다.

염병, 요리는 왜 저렇게 못 하는데.

버스의 덜컹거림과 진동, 머리 위에서 쏟아지는 에어컨의 찬바람과 밖에서 내리쬐는 햇볕까지.

모든 게 잠들기 좋은 환경이었다.

난 졸면서 집으로 향했다.

집에 가면 일단 씻고 PL4를 한 뒤에, 어머니가 차려 주시는 맛난 저녁을 먹고, 모기 한 마리 없는 내 방에서 12시간쯤 잠을 잘 예정이었다.

완벽한 휴식 계획이다.

그렇게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에 들어섰을 때다.

"...아들, 공부하고 온다고 하지 않았니?"

생각해 보니 씻기는 씻었지만, 꽤 험난한 이틀을 보냈다.

깔끔하다고 보기는 어려운 행색이었다.

옷은 갈아입어서 그나마 낫지만, 피부는 푸석푸석, 아니 푸석푸석하진 않다.

불멸자의 육체는 언제 어느 때든 피부를 지성도 건성도 아닌 중성으로 유지한다.

그러니까, 꿀피부다.

고로 나도 그렇고.

그냥 전체적인 행색이 그럴 뿐이다.

어머니는 야수의 감각으로 그걸 캐치하신 듯하고.

"풀냄새도 나고, 산에서 뒹굴다 왔니?"

정답.

하지만 또 순순히 말할 순 없는 거 아니겠나.

아버지가 비밀이라 그리 당부하셨는데 '불멸의 피를 이어서 발목 잘리는 훈련 하다가 왔어요'라고 말할 순 없잖아.

불멸자의 육체 덕분에 몸에 멍 자국 하나 없어서 다행이다.

그게 아니었다면 1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어머니와 아버지의 말다툼을 보게 되겠지.

"공부를 산속에서 하더라고요."

난 양심에 비추어 거짓을 말하지 않는 대신, 진실도 말하지 않았다.

공부나 훈련이나.

나한테는 거기서 거기 아닌가.

이건 내 육체의 신비를 찾는 훈련이기도 했다.

근데 이렇게 말하니까 나 자신을 너무 사랑하는 나르시시스트 같다.

"그래, 뭐든 배워 두면 쓸 만하지."

네, 그런 듯합니다. 어머니.

그러니 전 좀 일단 씻고 놀고 먹고 싸고의 콤보를 발휘하고 싶은데.

어머니가 움직이지 않으신다.

"엄마?"

"씻게?"

"그럼요?"

나도 내 몸에서 그리 좋은 냄새가 나지 않는다는 걸 아는데.

"저녁에 씻어."

아직 해가 중천이다.

무슨 저녁에 씻나.

"네?"

그래서 되물을 수밖에 없는데.

"엄마랑 어디 좀 가자."

"씻고 가면 안 될까요?"

진짜다. 좀 찝찝하다. 일단 뭘 해도 씻고 생각하고 싶다.

"아니,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아서."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어머니는 그 뒤 말도 없이 여행용 가방을 끌고 오시더니 말했다.

"아빠한테는 말해 놨어. 그래도 대학 공부는 해야 하지 않냐고."

"공부는 제가 알아서...."

"그래서 엄마가 선생님 한 분을 모셨는데 멀지 않아. 바로 옆 동네야."

뭐지? 이 불길한 예감은?

"이틀씩 숙식하면서 공부하기로 했으니까, 그렇게 알아."

공부가 공부로 안 들린다.

어머니의 압박에 움직였다.

씻지도 못하고 나가서 차에 실린 채 간 곳은 8층짜리 오피스텔 건물이다.

지하 주차장이 없는지, 외부에 차를 세운 채로 내렸다.

내려서 건물을 보는데 벽이 참 두껍다고 생각했다.

뭔가 두툼해 보이는 건물이다.

"사람이 머리만 좋으면 뭐 하나, 몸이 튼튼해야지."

들어가며 어머니가 말했다.

난 그 말에 속으로 답했다.

아니요, 어머니, 저 사실 몸뚱이만 굴리다 왔는데요.

"그럼 이틀 뒤에 데리러 올게."

승강기에 몸을 싣는데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소개도 안 해 주세요?"

과외 선생님 만나는 거 아닌가요?

"괜찮아."

네? 뭐가요?

뭐지? 하는 순간 승강기 문이 닫히고 버튼을 누르지도 않았는데 승강기가 알아서 밑으로 내려갔다.

5. 이틀 곱하기 이틀

띵.

도착을 알리는 신호음과 함께 승강기 문이 열렸다.

그리고 넓은 공간이 보였다.

주차장이 왜 없나 했더니, 지하를 개조해서 그랬구나 싶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밝게 비추는 LED 등 사이로 쇳덩이 친구들이 보였다.

바벨, 덤벨, 케틀볼 등.

육체 단련하는 형태의 기구다.

러닝머신, 사이클과 더불어 처음 보는 기구도 보였다.

"너구나."

그리고 그 앞에 선 사람도.

아버지가 소개해 준 과외 선생이 얇은 막대기 같았다면 이쪽은 통나무다.

두툼한 통나무, 그것도 여성형 통나무다. 통나무가 물었다.

"슬혜 아들 맞지?"

강슬혜, 어머니 성함이다.

"네, 제가 어머니 아들임은 맞는데 어머니가 여기로 보낸 이유를 모르겠네요."

당장 PL4와 풍족한 음식과 휴식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그런데 눈 떠보니 여기에 끌려와 있다. 뭔가 잘못됐다.

난 지금 쉴 타이밍이다.

"이틀 동안 공부만 했다며? 샌님처럼 머리만 굴리기에는 그 몸이 아깝다."

아닌데요. 샌님처럼 머리만 굴리다니요.

그쪽이 상상도 못 할 험난한 훈련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말하고 싶다. 그런데 할 수 없다.

여기서 말하면 어머니는 아버지의 정체를 알겠지.

반대로 아버지도 어머니의 정체를 알겠고.

하하하하하, 망할 집구석.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데, 훈련할 겁니까?"

"테스트부터 보고."

테스트? 무슨 테스트?

내 얼굴에 떠오른 의문을 보고 통나무 선생이 말했다.

"일단 뛰어 봐."

테스트라고 해서 무작정 쇳덩이를 들어 보라고 할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 과학적이다.

몸에 몇 개의 밴드 타입의 측정기구를 붙이더니 러닝머신을 툭 친다.

"뛰라고."

"아, 네."

한눈에 알아봤다. 반항해도 들어줄 사람이 아니다.

하물며 여긴 어머니가 보낸 곳.

어릴 때부터 봐 온 어머니의 양육 철학을 고려해 봤을 때, 반항하면 저 솥뚜껑 같은 손이 날아오지 않을 거란 보장이 없다.

말 안 들으면 적당한 폭력도 필요하다.

자신이 친 사고는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

이와 같은 가치관으로 이십 년 넘게 살아오다 보면, 자연스레 나도 비슷한 가치관이 생기기 마련이다.

엄마한테 개기면 뒈지게 맞는다.

따위의 가치관 말이다.

뛰었다.

통나무 여자는 자신의 폰을 들어 화면을 빤히 보더니 날 힐끔 본다.

"평소에 훈련한 적 없다더니."

불멸자 훈련에서 이 육체는 양심 없는 어드벤티지였다.

하지만 여기서는 아니다.

"쓰레기네."

가차 없다.

"심박수는 합격점이야. 곧 하드웨어는 좋다는 건데, 이 정도 하드웨어로 출력을 그것밖에 못 뽑아?"

난 왜 비난을 받아야 할까.

"게으르다. 게을러. 요새 세상이 너무 살 만하니까 그런 거지?"

통나무 선생은 세상을 한탄했다.

나랑 나이 차이가 그리 많이 나 보이지도 않는데.

하긴 겉으로 보이는 거로는 판단할 수 없다.

특수종이 인간보다 월등히 뛰어난 수명을 가진 건 아니다.

불멸을 죽이는 가장 빠른 방법은 시간이라는 농담이 있을 정도니까.

그래도 다른 점은 있다.

특수종, 그중에서 불멸과 변신은 늦게 늙는다. 동안이 많다는 소리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시 태어나게 해 주마."

"전 어머니를 두 분이나 모시고 싶진 않은데요."

나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다.

다시 태어나면 이쪽이 내 두 번째 어머니가 아닌가.

아버지의 잘못이 아니라 아들의 잘못으로 가정 파탄을 일으키고 싶지 않다는 간절함을 담아 말한 거다.

"슬혜를 닮아서 그런가? 농담을 좋아하네."

통나무 선생이 웃었지만.

난 전혀 웃기지 않았다.

적당히 기른 까만 머리를 뒤로 질끈 묶은 채로 목을 좌우로 꺾는데.

우두둑, 우두둑.

그 소리가 섬뜩하게 들렸다.

"네, 다 어머니 탓입니다."

"그래, 지금 입 많이 털어라."

아닌데, 이건 진짜 아닌데.

나, 이틀 동안 진짜 생고생하다가 왔는데.

여기서 또 뭐 하라고 하면 이거 정말 언페어 아닌가?

"유산소부터다. 가진 몸뚱이 업그레이드는 차차 하자고."

그래,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 했다.

불멸 훈련받을 때는 뭐 좋아서 했나.

즐기자. 즐기는 수밖에 없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