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화
(7)
영의는 헬멧을 벗고 일단 나름의 설명을 시작했다.
자신은 이곳에 그저 음식을 전해 주기 위해 온 것이라는 것, 그리고 독고휘도 그런 식으로 만나 뇌기...와 이런저런 것을 전수받았다는 것.
그리고 절대! 자신은 제자가 아니라는 것.
"그런데 왜 네놈은 녀석의 무공을 사용하지? 무공을 배웠으면 충분히 제자가 아닌가? 본좌를 농락하는 게냐?"
혁련무강은 이제 독고휘를 앞에 두는 게 아니게 되자 말투가 윗사람의 것으로 돌아갔다.
영의는 한숨을 내쉬며 추가적인 설명을 시작했다.
"하아... 그게 아니라...."
"본좌 앞에서 한숨이라니! 네놈이 죽고 싶은 거로구나!"
혁련무강이 영의의 목으로 칼을 더 들이밀었다.
"설명! 설명! 설명 좀 합시다! 예?! 그렇게 성격이 급해 가지고 제명에 다 못 살고 죽겠네! 독고 영감님은 말까진 들어 줬어요!"
물론 독고휘도 첫 만남 때 칼로 겨누고 집어 던지는 등, 말보다는 행동이 앞서긴 했지만 사람의 말을 막진 않았다.
"계속 이야기해 보아라. 그러나 만약 본좌의 심기를 한 번만 더 거스른다면...."
"아, 알겠어요. 그러니까... 제가 뇌전지체니 뭐니 하면서 제 몸으로 실험 삼아 무공을 더 개량해 보고 비급도 만들어 본다고 하면서...."
독고휘를 언급하자 얌전하게 영의의 말을 들으려 하는 혁련무강.
영의는 독고휘와 비교하는 게 효과가 좋겠다고 생각하며 나머지 설명을 했다.
지금 내가 독고휘의 기술을 배운 건 뇌전지체를 만들고, 그런 뇌전지체에게 어떻게 무공을 가르쳐야 하나 고민한 흔적일 뿐이라고.
그래서 배운 게 뇌창이랑 이동 계열밖에 없었다고.
'사실은 덜 배운 거지만, 이 정도만 말해도 속지 않을까...?'
영의는 그렇게 도박을 시도했다.
"흐음... 단전도 느껴지지 않고, 근골은 훌륭하지만 걷는 방식이나 전투법이 무인이라기엔 엉성하군. 그래, 네 말을 믿어 주지."
무인이라기엔 엉성하다는 말에 영의는 약간 짜증이 나려고 했지만 그래도 참았다.
눈앞의 인간은 마교의 정점인 천마니까!
진짜 사람 목을 따 버릴 수도 있는 존재니까 참았다.
그리고, 혼자 몸으로 잘 훈련된 군사 수십, 수백 명을 도륙하는 무림인이 넘쳐 나는 세상에서 정점에 선 인물이 눈앞의 천마다.
현대에서 나름 무인처럼 사는 영의였지만, 걷고 숨 쉬고 때론 먹는 것까지 수련이 묻어 나오는 무림인들에 비하면 일반인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아무튼, 전 진짜 음식만 전해 주고 갈 거니까 이젠 그 칼 좀 치워 주세요."
"흠, 마지막으로 하나만 묻지. 독고휘는 어디에서 뭘 하고 있나?"
눈앞의 청년이 독고휘의 전인은 아닌 듯했지만 나름 인연은 있는 듯했으니 최근의 소식인 태극검과 권왕, 검황의 회담에 대해선 알 것 같았기에 그렇게 물었다.
"음... 얼마 전에 다른 영감님들 둘이랑 놀던데, 아마 지금쯤은 또 혼자 동굴에 계시지 않을까 싶은데요."
"...놀아? 다른 영감 둘이랑? 설마, 그중에 하나는 덩치가 크고, 또 하나는 도관에 도복 입진 않았겠지?"
혁련무강은 설마 진짜 그 셋이 모여서 차나 한잔하며 옛날이야기나 하던 것인가 싶어 물었으나, 영의는 진실을 답해 주었다.
"네, 셋이 술 먹고 잘 노시던데. 그 덩치 큰 영감님은 팽소운이고, 도복 입은 분은 운광이라던데요. 그보다, 이제 진짜 칼 치워 주시면 안 됩니까? 어르신?"
혁련무강이 계속 칼을 자신에게 겨누고 있자 영의는 어르신이라고까지 부르며 혁련무강에게 부탁했고, 혁련무강은 칼을 떨구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마뇌... 이번엔 그대가 틀렸소. 내 독고휘와의 결전을 얼마나 기대했건만....'
혁련무강은 그렇게 힘없이 성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고, 영의는 혁련무강을 따라가려다 멈칫했다.
'내 바이크!'
번개로 터트려 먹은 지 얼마 안 됐기에 또 잃을 수는 없었다.
물론, 경매에 맡겨 놓은 금화로 사면 될 일이었지만 아직 판매가 됐다고 연락이 오지 않았기에 지금은 조심해야 했다.
그렇게 다급히 뇌전보로 바이크가 떨어진 곳을 향해 간 영의.
바이크는 다행히 크게 고장 나진 않은 듯 바닥에 나름 그럴듯하게 떠 있었다.
그리고 바이크에 다가가자 시야에 들어오는 알림 창.
[Alrim이 알립니다. 탑승자의 부재를 감지해 일시적으로 시동이 켜진 반운행 상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다시 운행하시겠습니까?]
"...그래."
상당히 이 알림 창... 아니, 알림이가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며 영의는 바이크를 타고 혁련무강의 뒤를 따라갔다.
"...자네인가. 가는 듯했는데, 안 갔군?"
"음식 전해 주러 왔다니까요."
혁련무강은 지금 눈앞의 청년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해가 안 됐다.
음식 하나 전해 주려고 공중을 날아다닌다고? 그 능력을 겨우 그런 곳에?
그보다, 어떤 정신 나간 놈한테 주려고 하는 거지?
"음식? 누구한테?"
"...어르신요."
그 정신 나간 놈이 나였구나....
혁련무강은 어이가 없었다. 만마의 주인이자 명교... 천마신교의 최고봉인 자신이다.
이런 자신에게는 매일같이 서역을 오가는 장사꾼들과 신교의 교인들이 수없이 재물을 갖다 바친다.
그런 그에게 겨우 음식을 주러 와?
영의는 혁련무강이 별로 음식을 반기는 기색이 아닌 듯하자 은근슬쩍 자극해 보기로 했다.
"독고휘 영감님도 제가 갖다 준 음식 되게 좋아하셨는데."
"...본좌가 직접 먹어 보도록 하지. 따라오너라. 내 너를 친히 초대하마."
효과는 직빵이었다.
"어차피 너도 공중을 활보할 수 있으니 편하게 가겠다."
그렇게 혁련무강이 앞서서 하늘로 떠올라 신교로 돌아갔고, 영의는 바이크를 몰아 그 뒤를 따랐다.
그리고 혁련무강은 아까 천장을 부수며 나왔던 대전으로 다시 옆의 다른 천장을 부수며 돌아왔다.
"지존이시여!!"
돌아오자 그 자리에서 기다리던 다른 부하들이 그에게 엎드렸다.
"지존이시여! 방금 전 하늘에서 보여 주신 무위는 저희 모두가 목도하였나이다! 과연 만마의 주인다운...!"
마뇌가 그렇게 소리치며 혁련무강을 칭송하기 시작했지만, 혁련무강은 마뇌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만."
"...아아, 역시 천하제일인은 하찮은 정파의 독고휘가 아닌 이 신교의 진정한 지배자인...."
"그만하라고 하지 않았나! 마뇌!"
혁련무강이 소리치자 마뇌는 말하는 것을 멈추었다.
그리고 동시에 서로 눈치를 보기 시작하는 권마와 검마.
'...독고휘는 온 것 같은데, 권왕은?'
'...왔으면 형님이 나한테 말을 해 주시지 않았을까.'
그렇게 무언의 의사소통을 하는 권마와 검마. 혁련무강은 마뇌에게 말을 걸었다.
"...마뇌."
"예, 지존이시여!"
"...예측이 틀렸더군?"
"예?!"
"그게.... 아, 마침 왔군. 어서 오게, 나의 신교에."
혁련무강이 부수고 내려온 구멍으로 천천히 내려오는 영의.
혁련무강이 두 번이나 부숴 먹었기 때문에 별로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하지만 마교의 다른 인물들이 어떻게 나올지 몰라 최대한 조심스럽게 내려왔다.
"어... 반갑습니다?"
영의를 보자마자 바로 경계를 시작하는 검마와 권마.
둘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서서 영의에게 달려들기 위해 내력을 끌어 올렸다.
"놈! 누구냐!"
"감히 성스러운 대전에 발을 들이다니!"
마뇌는 분위기상 혁련무강의 손님으로 온 걸 아는 듯 가만히 있었지만, 검마와 권마는 서로 의사소통을 하느라 그 말을 못 들었었다.
"...본좌가 우습나 보군."
쿠웅!
혁련무강이 가볍게 앞으로 발을 한번 내딛자, 대전의 안에 엄청난 압박감이 몰아쳤다.
"으윽!"
"큭, 지... 지존...이시여!"
바닥에 곧바로 엎어지는 권마와 검마.
둘은 한순간 저항하려 했으나, 자신들의 주군의 뜻이었기에 순순히 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내가 초대한 손님이다. 예를 갖추도록."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내 방금 전의 압박감은 사실 거짓이었다는 듯, 아무렇지도 않아진 대전의 내부.
영의는 방금 혁련무강이 한 것을 보며 감탄했다.
"오오, 그게 그 천마군림보...!"
"그래, 이게 역대 모든 천마들의 상징이자 자랑, 천마군림보다. 그래... 어디까지 했지? 아, 마뇌의 예측이 틀렸다고 했지."
그렇게 잠깐 자랑을 한 혁련무강은 방금 전 하던 이야기를 이어서 하기로 했다.
"제... 제 예측이 말입니까?"
"그래. 권왕과 태극검, 그리고 검황의 회합... 말이지."
마뇌는 믿을 수 없다는 듯 혁련무강을 바라보았다.
모든 정보를 취합하고 모든 검증을 마친 뒤, 가장 가능성이 높은 사안이었거늘... 이 내가 틀렸단 말인가??
"지존이시여! 권왕 놈은? 팽소운은 어찌 된 겁니까?"
"...."
검마는 이번엔 입을 다무는 게 낫겠다 싶어 침묵했지만, 권마는 눈치 없이 물었다.
그런 권마를 못마땅하게 바라보고는 시선을 돌리는 혁련무강.
"그 셋은... 모여서 우리에게 복수하러 오는 게 아니라, 술 마시고 놀았다는군. 옛날이야기나 꽃피우면서 평화롭게."
"그, 그럴 리가! 어찌...!"
마뇌는 혁련무강의 말이 믿기지 않았다.
왜 그 셋이 모여서 옛날이야기로 담소나 나눈단 말인가?!
그 셋이 쳐들어오면 마교의 수뇌부가 나서지 않는 이상 마교는 박살 날 텐데!
그 전력으로 셋이 술 마시면서 하하 호호 담소나 나눴다고?
"그래, 이 청년.... 자네 이름이 뭔가?"
생각해 보니 이름도 안 물었던 것이 기억나 이름을 묻는 혁련무강.
영의는 그 물음에 순순히 답했다.
혁련무강보다 더 정신 나간 것 같은 노인들이 셋이나 늘어 있었기 때문에.
"어, 영의입니다. 최영의요."
"그래, 이 녀석이 그 자리에 있었다."
"네.... 제가 거기 음식하고 술을 갖다 줬죠? 그리고... 셋이 잘 노시더라고요. 특히 도사님 쪽이."
술에 취해 벗겠습니다라고 소리치던 운광의 모습을 아직 잊지 못한 영의였다.
그리고 영의의 말에 당황하는 세 노인들.
"이럴 수가... 나의, 예측이...."
'...태극검 그놈이 잘 논다고? 도사가? 술을?'
'...태극검 운광... 역시 도사답지 못하군.... 한편 평생을 마교에 충성하고 교리에 충실한 내 승리다.'
마음속으로 작게 1승을 적립하는 검마.
그리고 혁련무강은 손을 내저었다.
"그럼 이제 다 나가라. 권왕도 없고, 태극검도 없다. 그리고... 마뇌는... 당분간 근신하도록."
"명, 받들겠나이다!"
고개를 숙이고는 곧바로 나가는 마뇌와 검마.
그러나 권마는 그 자리에 있었다.
"...왜 안 나가지, 권마? 뭔가 불만이라도 있나?"
"이 정체 모를 녀석을 곁에 두실 겁니까?"
상당히 상식적으로 접근하는 권마.
그도 그럴 것이 정체 모를 청년을 교의 주인인 천마와 단둘이 놔두는 것이다.
"왜, 자네는 내가 이 녀석에게 죽을 것 같나? 그렇게 내가 못 미더웠나?"
"아닙니다, 지존이시여. 다만.... 흠. 물러가겠습니다."
이내 인사를 올리고는 대전에서 나가는 권마.
그리고 단둘이 남게 된 혁련무강과 영의.
"자, 그러면... 내 개인실로 가지. 가서 그 음식이란 것도 먹어 보고, 평을 내려 주도록 하지. 만약 맛이 좋다면... 내 상을 내릴 것이고. 만족스럽지 못하다면... 넌 여기서 죽는다."
혁련무강은 그렇게 말하며 대전의 뒤에 있는 자신의 개인실로 향했고, 영의는 표정 변화 하나 없이 그 뒤를 따랐다.
아니, 오히려 자신감 넘치는 발걸음이었다.
'호오...? 죽일 마음까진 없었다만. 전혀 위축되지 않는군. 마음에 들어. 배짱 하나는 있군그래. 아니면... 음식에 대한 자신감인가?'
혁련무강은 영의에게 약간의 위압을 주기 위해 그렇게 말했지만, 영의는 전혀 쫄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도 그럴 것이, 그의 무기인 음식은... 최강을 자랑하는 치킨이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양념치킨!
제33화
(8)
혁련무강의 개인실은 넓고 화려했던 대전과는 달리 조금 소박했다.
물론 모든 물품은 최고급이었지만, 장식이 가득하다거나 색감이 화려하지는 않았다.
마치 물품 본연의 기능만 하면 충분하다는 듯 별다른 특징이 없는 가구들.
그리고 그런 가구 중 하나인 탁자 위에 영의는 보온 박스를 얹고, 치킨을 꺼냈다.
"...흠, 향은 좋군."
보온 박스의 보온 기능 덕분인지, 사막 지역의 열기 덕분인지 아직도 따끈따끈한 치킨.
은박지에 싸인 그 붉고 찬란한 자태에 혁련무강은 내심 감탄했다.
"허어, 음식을 은으로 감쌌다? 환단을 금박으로 감싸는 것은 몇 번 보았지만, 음식의 포장에 저만큼 은을 쓰다니. 먹는 이의 품격을 손상시키지 않겠다는 건가. 본좌에게 대접할 정도의 격은 되는군."
물론 그런 이유는 아니었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해 주는 것 같아 영의는 침묵했다.
지익- 탁.
치킨 무도 꺼내어 포장을 뜯고 내려놓는 영의. 혁련무강은 치킨 무에 대해선 잠잠했다.
그리고 기본 제공인 작은 콜라 캔을 하나 따고 내려준 뒤 영의는 뒤로 물러섰다.
"...드시죠?"
"크흠, 그럼...."
사실 공복이라 나름 배가 고파 영의가 소면을 줘도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던 혁련무강이었다.
하지만 천마라는 지위가 있지 않은가.
마침 다행히도 알루미늄이지만 색깔은 은이었으니... 은으로 포장된 고급진 음식이었고, 또 향과 겉모습도 좋아 보였기에 혁련무강은 근엄하게 젓가락을 들었다.
'...잠깐. 그래도 천마인데, 그냥 배고프다고 막 집어 먹으면.... 품위를 보여야겠군.'
사실 독고휘도 정신없이 먹긴 했지만 혁련무강이 알 리 없었다.
이내 젓가락을 내려 두고 허공섭물로 닭 다리를 들어 올려 입에 갖다 대는 혁련무강.
'어떠냐, 허공섭물이다. 본좌는 식사도 허공섭물로 하는 존재란 말이다. 우러러볼 만하지 않나?'
사실 애초에 사막에서 검강 날리면서 눈 감고 싸운 그 순간부터 영의는 혁련무강에게 우러러보는 눈빛이고 자시고 없었다.
그리고, 영의는 각성자가 넘치는 현대인이었기에 손 안 대고 물건 옮기는 행위는 익숙했다.
당장 그도 전격계 능력으로 자석처럼 금속 물품은 잡아당길 수 있지 않은가.
이내 한 입 베어 무는 혁련무강. 그리고 그는 우주를 느꼈다.
'이 맛은....'
겉 부분은 양념으로 인해 달큰한 맛이 시작된다.
그리고 이빨이 파고드는 순간 내부의 바삭한 튀김옷이 입안을 자극하는 감촉을 준다.
튀김옷을 지나고, 이빨에 느껴지는 따스함.
갓 튀겨 낸 듯한 따뜻함이 고기에 돌고 있다.
고기는 또 어떤가. 부드럽고 잡내가 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묘한 향신료 맛도 나는 듯하다.
그리고 한 입을 베어 물고 씹기 시작하자 이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루다가 역순으로 천천히 사라져 목으로 넘어가고, 입안에는 여운만이 남는다.
"...."
한 입 베어 물고 삼키고 나서 움직임이 없는 혁련무강.
영의는 설마 치킨 먹다가 죽었나 싶어 그를 바라보았지만, 수염이 조금씩 흔들리는 거로 봐서 숨은 쉬는 듯싶었다.
'참으로 대단하구나...!'
혁련무강은 순간적으로 양손을 이용해 집어 들고 뜯어 먹고 싶은 충동을 참았다.
그는 한 단체를 이끄는 수장. 늘 앞일을 예상해서 행동해야 했다.
"...거기 누구 있는가!"
혁련무강의 외침에 영의는 깜짝 놀랐다.
'뭐지?! 치킨이 안 먹혔나? 이 영감, 괴식자야? 막 피 같은 걸 먹는 건가?'
영의는 놀라서 한두 발 물러섰으나, 이내 개인실 밖에서 들려오는 나지막한 목소리.
"지존이시여, 하명하십시오!"
"연화를 데려오라. 그리고, 최고숙수도 데려오도록 해라!"
"존명!"
이내 멀어져 가는 문밖의 발소리.
영의는 치킨이 실패했는지 놀라서 돌아보았으나, 혁련무강의 모습을 보고 안심했다.
쩝쩝쩝.
닭다리를 손으로 집어 들고 뜯고 있는 혁련무강.
영의는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옆의 의자에 앉았다.
"참으로 훌륭한 요리로구나. 격을 갖춘 고급짐과, 그를 뛰어넘는 맛까지. 그래, 이 요리를 만든 숙수는 누구더냐?"
영의에게 약간 친근해진 혁련무강. 영의는 성공했구나 싶어 안도했다.
"음, 모르는데요."
치킨집 사장님들이라고 다 닭을 튀기는 분들은 아니지 않은가.
물론, 대부분일지는 몰라도 다는 아닐 것이다.
"몰라? 허어, 참 안타깝구나. 본좌가 직접 신교로 초대하여 전속 숙수로 삼으려 했거늘...."
혁련무강은 참으로 안타깝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치킨을 내려다보았다.
아직 조각은 제법 남아 있었으나 계산을 해봐야 했다.
물론, 그 와중에도 손과 입은 계속 치킨을 먹기 위해 움직였다.
'숙수에게 연구를 시켜 봐야 한다. 계속 만들어 낼 수 있다면 서역을 오가는 중원 상단에 팔아먹어도 되고, 또 내가 먹을 수도 있다.'
아마 목적은 본인이 먹고 싶은 마음이 대부분일 것이다.
'그리고, 연화에게 둘... 아니, 하나...? 그래도 딸인데 둘... 아니, 하나만 주자.'
막내딸, 혁련연화에게도 맛보여 주고 싶었던 참아버지 혁련무강. 그러나 나눠 주는 개수엔 자비가 없었다.
"이것들도 드셔 보시죠. 너무 닭만 드시는 거 같은데."
그때 영의가 치킨 무와 콜라를 내밀면서 권했다.
혁련무강은 네가 뭔데 내 식사를 방해하느냐라는 마음과 저걸 먹으면 이 맛이 변하는 게 아닐까...? 라는 마음이 동시에 들었으나, 이내 한번 해 보기로 했다.
아삭, 아삭-
치킨 무 특유의 신맛과 아삭함이 입안에 돌며, 슬슬 치킨이 물리기 시작했던 혁련무강의 입안에 침이 배어 나오며 식욕이 다시 돋기 시작했다.
꿀꺽-
혁련무강은 두 번째 우주를 보았다.
'달다! 달구나! 그리고... 시원하구나! 이 황량한 지역에서 이런 시원함을 맛보다니...!'
물론 마교에도 음한 계열의 무공이 있긴 했지만, 북해의 것처럼 차가움을 만든다는 개념이 아닌 따뜻함을 빼앗는다는 개념이어서 얼음은 꿈도 못 꿨다.
그런 그에게 조금 미지근해지긴 했어도 바깥 날씨에 비하면 냉장고에서 막 꺼내 온 듯한 시원함을 주는 콜라는 새로운 체험이었다.
그리고 그 특유의 톡 쏘는 맛과 마시고 난 뒤의 묘한 피부의 얼얼함.
그 시원한 느낌에 혁련무강은 치킨을 다시 바라보았다.
'마치 먹기 전의 상태... 아니, 더 먹기 좋게 하기 위한 상태가 된 것 같구나. 하루 종일도 먹을 수 있어.'
그렇게 캡틴... 아니, 천마 혁련무강은 딸이고 숙수고 그냥 다 먹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치킨에 손을 댔으나....
"지존이시여! 하명하신 임무를 완수했나이다!"
문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혁련무강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러면 나눠 줘야 하잖아.... 나 공복이다! 공복이라고!!
"...스그흤드."
이를 악물며 대답하는 혁련무강.
"황공하나이다!"
이윽고 문이 열리며 혁련무강처럼 검은 바탕에 금색 꽃을 수놓은 옷을 입은 한 여인과, 손에 상처가 많은 민머리의 노인이 들어왔다.
"지존을 배알하나이다!"
들어오자마자 땅바닥에 엎드리는 민머리 노인과 그저 서 있는 여인.
혁련무강은 마음을 다스리며 입을 열었다.
"...나에게 새로이 올라온 음식이다. 맛이 매우 마음에 드니, 먹어 보고 만들 수 있을지 얘기해 보도록."
혁련무강은 나지막하게 말했고, 민머리의 노인은 크게 소리쳤다.
"성은에 몸 둘 바를 모르겠나이다, 지존이시여!"
그리고 일어나서 혁련무강의 앞으로 다가오는 노인. 여인은 그 뒤를 따라 걸어왔다.
"...아버님, 옆의 사내는?"
영의의 모습을 보고 호기심이 생긴 듯한 여인.
"...이 음식을 가져온 친구지. 독고휘의 소식을 전해 준 사람이기도 하고."
"아하...."
혁련무강은 이내 치킨을 가리키며 말했다.
"자, 먹어 보라. 그리고 얘기해 보도록 하라."
"존명!"
민머리의 노인은 치킨을 집어 들고 우선 겉모습을 관찰하고, 냄새도 맡아 보는 등 분석하기 시작했으나 여인은 그대로 바로 집어 들고 귀퉁이를 베어 물었다.
"...!!"
"맛이 어떠냐, 연화야."
방금 전 혁련무강처럼 잠시 굳어 있다가 이내 차분한 태도로 조심스럽게 입을 여는 혁련연화.
그녀는 중원에서 사화로 꼽히는 아름다운 여인 중 한 명이었고, 또 요리에 재능과 취미가 동시에 있었다.
"...참으로 대단합니다."
그리고 뒤에서 마찬가지로 분석을 끝내고 한 입 먹어 본 민머리 숙수가 입에서 분석을 내뱉었다.
"먹자마자 느껴지는 단맛과 걸쭉함은 아마 꿀로 추측되오나 꿀 특유의 꽃 향이 없사옵니다. 아마 비슷한 다른 무언가로 사료됩니다. 그리고 겉 부분의 바삭함은 튀김의 형식 같사오나 일반적 튀김과는 다른 형태입니다. 아마 두 번의 반죽 또는 두 번의 튀김을 한 듯 보이며...."
상당히 전문적이고 그럴듯한 추측을 해내는 노인.
마교 최고의 숙수라더니, 능력이 제법인 모양이었다. 그리고 옆에서 추가적인 설명을 하는 연화.
"이 고기는 상당히 연했습니다. 이건 손질을 해도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분이죠. 아마 크게 자라지 않은 닭이나 영물의 고기를 쓴 듯합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잡내의 제거입니다. 물에 담가 두거나 향신료만 사용해서는 안 되는 수준입니다. 상당한 시행착오가 필요하겠네요."
그 둘의 설명을 들으며 혁련무강은 한쪽 눈으로 치킨을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식지 않아야 하는데....
"...그래서, 가능하겠나?"
"하오나 이 소인이 미천하여 두 가지는 불가능하옵니다!"
"...두 가지?"
"첫째로, 단맛 사이에 섞인 매운맛을 구할 수 없사옵니다! 다른 매운 향신료와는 달리, 이것은 소인도 평생 맛본 적이 없사옵니다!"
혁련무강은 조금 안타까웠으나 그래도 매운맛 정도야... 싶어서 넘겼다.
정 안 되면 조금 타협해야겠지...라고 생각하면서.
"...둘째는?"
"둘째는 튀김옷의 재료겠네요. 쌀가루나 다른 곡식 가루와는 다른... 그런 맛입니다."
두 번째는 연화가 대답했고, 민머리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마교는 대부분 쌀을 먹으며, 밀가루로 빵을 먹는 문화를 전파받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대충 반죽해서 구워 먹는 용도였지, 밀가루로 튀김을 하진 않았다.
"...끄응...."
튀김의 바삭한 식감만큼은 매우 만족한 혁련무강이었기에, 그 부분의 이야기가 나오자 앓는 소리를 내뱉었다.
돈은 있다. 닭 따위 얼마든지 사들일 수 있다.
향신료나 기름도, 서역에서 얼마든지 구해 올 수 있다.
하지만 저 나이 먹도록 온갖 식재는 다 먹어 본 숙수도 못 먹어 본 걸 어떻게 구하지...?
"하아... 알겠다. 일단 그 두 개는 나중에 얘기하도록 하지."
"예, 지존이시여!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지금부터 연구에 착수하여도 되겠는지요!"
민머리 노인은 말년에 열정을 발견한 것처럼 눈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죽기 전에 자신의 인생을 걸고 만들 목표가 눈앞에 나타나지 않았나.
저 음식을 만들어서 재현한다면 자신은 신교 숙수들의... 아니, 중원 전체 숙수들의 전설로 남으리라.
"...허한다. 그리고, 연구 중 문제가 생기면 나의 명으로 진행 중이라 하도록."
"존명!!"
민머리 노인은 혁련무강에게 인사를 올리고 곧바로 밖으로 나가 주방에 뛰어갔다.
그리고 그의 제자들과 다른 숙수들을 닦달하며 한참은 걸릴 기본 연구에 들어갔다.
그렇게 방 안에 셋만 남게 된 상황. 영의는 이쯤 되면 슬슬 보상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야 하지 않나 싶어 입을 열려 했지만....
"...혹시, 나머지 재료에 대해서 아시는 바가 있나요...? 소협?"
연화가 영의에게 그렇게 물어보았고, 영의는 당황했다.
'왜 안 나가고 여기 있는 거야...? 당신도 요리하는 거 아니었어?'
그러자 혁련무강도 내심 원하는지 나지막하게 말했다.
"흠, 흠. 혹시 아는 바가 있다면 말해 보게. 나는 상과 벌이 확실한 사람이니."
"어, 매운맛...은...."
영의는 여기에 고추장이 있나... 싶은 생각이 들었고, 만약 고추장이 있고 그게 동쪽의 땅에 있다고 하면 조선인지 고려인지 몰라도 멸망하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어? 그러고 보니, 고추장은... 임진왜란 이후 아닌가?'
영의는 국사 시간 때 들은 한 줄의 이야기를 기억해 냈다.
지금 한국인이 잘 먹는 고추나 감자, 고구마들은 다 왜란 이후 들어온 거라고.
그리고 지금이 조선 후기일 리는 없다고 생각한 영의는 모른다고 말하기로 했다.
"...모르겠는데요. 저도 그냥 전달만 받아서."
영의의 말에 침음을 내뱉는 혁련무강.
'혹시나 하는 기대를 품어 봤지만 역시나였던가....'
"으음...."
"그럼, 혹시 두 번째는...."
"아, 그건 밀가루요."
두 번째는 너무 흔쾌히 답해 주는 영의.
밀가루 정도야 뭐 세계 어딜 가도 하나쯤 있을 거라 생각하고 내뱉은 말이었다.
"...??"
"...?!"
혁련무강과 혁련연화. 두 부녀는 영의가 너무 서슴없이 내뱉은 말에 놀랐다.
'밀가루?! 그... 돈 없는 이들이나 사 가지고 먹는 그거?'
'밀가루면... 빵을 구워서 바로 안 먹으면... 돌보다 단단해지는 그... 가루?'
그 맛있는 음식에 그런 저급한 재료가 들어간단 말인가.
아니, 그 저급한 재료가 제일 핵심이었단 말인가.
혁련연화와 혁련무강은 놀라서 영의를 뻔히 쳐다보았다.
"응? 왜요?"
영의는 어리둥절해졌다.
아니, 왜 날 빤히 쳐다보는 거지? 설마, 여기 밀가루 없는 거야?
제34화
(9)
한편, 주방에선 민머리 노인, 장화관의 외침이 이어지고 있었다.
"닭은 최대한 어리고 부드러운 것으로!"
"예, 최고숙수!"
장화관은 아까 먹었던 치킨의 맛을 떠올리며 한번 황홀감에 젖었고, 이내 황홀했던 시간에서 빠져나오며 다시 소리쳤다.
"아니지, 잡내부터 없애야 한다! 지금부터 태어나는 병아리들에게 전부 최고급 모이와 깨끗한 쌀을 먹이면서 키워라! 지존께서 드실 최고의 닭이어야 한다!"
"예, 최고숙수!"
그렇게 마교에선 병아리들이 일반 교인들도 못 먹는 최고급 쌀을 먹으면서 키워졌으나 그건 다른 이야기였다.
다시 혁련무강의 개인실.
"...상을, 주셔야겠네요. 그것도 아주 많이."
"...그래야겠군. 비고로 가도록 하지."
연화와 혁련무강은 눈앞의 영의에게 상을 내려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혁련무강은 처음부터 상을 줄 마음이 있었다. 치킨에 만족했으니까.
하지만 한 번으로 끝나고 말 음식을 계속 먹을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해 주지 않았나.
"그럼, 비고로... 가기 전에. 먹던 건 먹어야겠군."
혁련무강은 더 빠르게 치킨을 먹기 시작했다.
옆에서 자신의 것을 다 먹었으나 혁련무강의 앞에 남은 치킨 조각들을 보며 아련한 표정을 짓는 혁련연화.
그러나 혁련무강은 치킨 앞에서 자식을 무시할 수 있는 단호한 아버지였다.
"...잘 먹었네."
'...진짜 끝까지 안 주시네...?'
손에 묻은 양념을 빨아 먹으며 일어나는 혁련무강.
그는 체통이고 뭐고 이미 잊은 상태였다. 그리고 그런 그를 노려보는 연화.
그러나 이내 연화는 생각을 바꿨다.
닭은 다 사라졌지만, 저 양념은 남아 있지 않은가.
저것만 잘 얘기해서 받아 보면....
"아, 저 남은 건 나중에 따로 아껴 먹어야겠군."
이라고 말하며 혁련무강은 은박지를 꺼내어 자신의 방 서랍장 안에 고이 모셔 두고는, 그 서랍장을 잠가 버렸다.
그리고 한층 더 날카로운 눈매로 아버지, 혁련무강을 노려보는 연화.
"...설마 거기에 밥이라도 비벼 드시게요?"
"좋은 생각이군!"
연화는 이내 영의도 노려보기 시작했다.
'그냥 꿀 드시듯 숟가락으로 먹으면 얻어먹어라도 보겠는데, 밥에 비벼 먹으라니...!'
한순간에 은인을 보는 눈에서 갑자기 적을 바라보는 눈으로 자신을 보는 연화에게 당황하는 영의.
'뭐야, 쟤는...? 갑자기 노려보고.... 역시 마교인가...? 멀쩡한 인물이 없네....'
이내 혁련무강이 깔끔히 빨아 먹은 손을 닦고는 개인실의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그의 최측근들.
"...다들 여기 모여 있었군."
"예, 지존이시여!"
혁련무강은 그들을 지나쳐 그냥 가려고 했으나 권마가 가로막았다.
"지존이시여, 지금 어디로 가시는지 여쭈어도 되겠나이까!"
"...비고로 간다. 비켜라."
"비고라 함은...."
"천마비고다."
천마비고, 마교의 모든 귀중품이 든 거대한 금고와도 같은 곳이다.
역대 유명한 마인들의 무공과 심득이 담긴 비급에서부터, 중원에서 몰래 들여온 영약이나 주변 지역에서 발견한 영초들이 있는 곳이었다.
물론, 그 외에 보검이나 몇몇 귀한 신물들이 있긴 했다.
하지만 보검의 경우에는 거의 다 고위 마인들이 대대로 물려주면서 쓴다고 가져가 버려 몇몇 신물들이나 조금씩 굴러다니는 실정이었다.
그러나 천마비고란 이름이 가지는 가치 때문에 어지간해선 개방하지 않았다.
그것도 외부인에게는!
"지존이시여, 설마 저 외부의 청년에게 비고의 보물을 넘기실 작정이십니까!"
"맞습니다! 그냥 저 외부인을 금과 은으로 목욕시켜 버리십시오! 위대하신 옛 선인들의 무공을 넘길 수는 없습니다!"
"아닙니다, 차라리 제가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는 영단을 바치겠나이다! 비고를 여는 것을 재고해 주십시오, 지존이시여!"
차례대로 권마와 검마, 마뇌의 의견이었다.
포상은 하되, 그냥 재물로 줘 버리라고 하는 검마와 그냥 자기 돈으로 해결하겠다는 마뇌.
그보다 그 이전에 그들은 영의가 상을 받는 이유도 몰랐다.
"...잠깐. 근데 뭣 때문에 비고를 여시려고 하는 겁니까?"
권마의 말에 잠시 고민하기 시작하는 혁련무강.
이걸 말을 해야 돼?
'...내가 왜 포상한다고 하지? 아, 그래.'
"독고휘의 행방과, 근황을 말해 주지 않았나. 그것만으로도 중원에 보내 둔 저 쓸모없는 정보원 놈보다 훨씬 낫다."
혁련무강의 말에 검마와 권마는 수긍했고, 마뇌는 약간 기분이 상했다.
'우리 애들도 무능하고 싶어서 무능한 게 아닙니다, 지존이시여....'
"그럼 저희도 하나 물어도 되겠습...."
"안 된다."
권마의 물음도 혁련무강에 의해서 막혔다.
그리고 눈치 빠른 검마는 그냥 입을 다물기로 했다.
마침 옆에 연화도 있으니 나중에 따로 물어보면 될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리고 이내 부하들의 만류를 물리치고(?) 비고로 향하는 혁련무강.
감히 천마의 비고를 건드는 이는 없을 거라는 듯, 비고 앞을 지키는 인원은 없었다.
"...경비나 수문장이 없네요?"
"있어도 없어도 의미가 없다. 세상 어느 누가 감히 천마의 비고를 털겠나? 그리고...."
혁련무강은 비고의 문에 손을 대고 진기를 주입했다.
그의 몸 안에 가득한 천마신공의 기운이 문에 흘러 들어가자, 육중한 소리를 울리며 좌우로 열리는 비고의 문.
"...천마가 아니면 그 누구도 열 수 없다."
"오오...!"
물론 자동문이나 인식 장치 따위 얼마든지 보고 자란 영의였지만, 사람의 기운을 주입해서 인식하는 것은 처음 보았기에 놀랐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며 약간 뿌듯해진 혁련무강.
'선조님께서 왜 이딴 장치를 하셨나 했는데, 이런 기분을 느끼기 위해서였나 보군.'
물론 보안 용도가 주된 목적이었겠지만, 크게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리고 비고 안에 들어가는 혁련무강. 영의와 연화는 그 뒤를 따랐다.
"와아...!"
연화는 천마비고를 처음 들어와 보았다.
그녀의 오빠들은 소교주 자리를 경합하기 위해 성인이 될 때 혁련무강과 함께 비고에 출입을 했었다.
단 한 번, 선대들의 무공비급이나 자신의 내력을 증진시키기 위한 영약을 내려 받을 때만 허용해 주었다.
그러나 그녀는 소교주의 자리에 관심도 없었고, 또 비고 안의 것이 아니어도 어지간한 영약은 구할 수 있었기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하지만 비고에 직접 들어와 보는 경우는 또 다르지 않은가. 그녀는 비고 안의 광경에 감탄했다.
한쪽에는 안쪽까지 쭉 늘어선 비급으로 추정되는 서적의 선반들이.
다른 쪽에는 각자 다른 기운을 안에 품은 것으로 추정되는 수많은 목갑과 보관함들이.
그리고 중앙에 있는 몇몇 선반들에는 신교가 지금껏 모아 온 신물들이 존재했다.
"음? 하하, 연화야. 지금껏 관심이 없는 듯했는데. 막상 비고 안에 와 보니 좋아하는구나."
"예, 아버님.... 비고의 내용물을 필요로 하진 않아도... 정작 들어와 보니 대단합니다...."
그렇게 기뻐하는 연화와 내심 뿌듯한 혁련무강과 달리 영의는 조금 심드렁했다.
무공비급이야 별 필요가 없었고, 사실 있어도 쓰기 싫었다.
'저거 다 마공 아냐? 막 사람 피 보고 싶어 하고 미치는....'
사실 마공이라 불리는 것들 중 정말로 피나 광기를 불러일으키는 괴상한 것들도 많았으나, 그런 것들이었으면 비고 안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영의는 마교에 대한 선입견이 있어 비급을 무시했다. 그에게는 뇌격공(미완)이 있었으니까.
그리고 비급에는 관심 없다는 듯 바로 고개를 돌리는 영의를 보며 혁련무강은 감탄했다.
'저 중에 하나만 들고 가도 바로 절세고수가 되거나 팔아서 부자가 될 수 있건만, 비급에 관심이 없다니. 그만큼 독고휘의 무공에 자신이 있는 거거나... 아니면, 영약을 노리는 건가?'
"영약들은 어떤가. 정파에게서 가져온 것들도 있고, 자연의 것들과 영물의 내단까지. 얼마든지 있지!"
실제로 혁련무강은 천마비고를 비급보다는 영약에 더 치중해서 생각했다.
당장 자신의 아들들만 봐도 세력을 이끌어 부하들을 키워 내고 싶어 하는 첫째를 제외하고는 전부 영약을 골랐고, 아직도 은근히 영약을 더 원하는 눈치가 아니던가.
그리고 무공비급에 대해서 잘 모르는 백성들도 영약만큼은 비싸고 중요하단 걸 알기에 욕심을 낼 거라 생각했다.
"음...."
사실 영약도 딱히 필요가 없었다. 이전이었으면 모를까, 일라이저와의 거래에서 마력 주입기를 받아 왔던 영의였다.
앞으로 일라이저와 꾸준히 관계만 유지하면 체내의 뇌기를 얼마든지 늘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이것들은 다 뭐죠?"
영약에서도 고개를 돌려 신물들이 모인 곳을 바라보는 영의.
그는 몇몇 물건들이 신경 쓰였다.
"...허어, 영약도 신경을 안쓴다라.... 혹시, 뇌령(雷領)조의 내단에는 관심 없나? 뇌기가 가득한 영단인데!"
영업을 하듯 한 목갑을 들어 내미는 혁련무강.
영의는 그 목갑을 보고는 약간 감탄했다.
'와, 뇌기가 가득해.... 그리고 저건... 어째선지 먹으면 다 내 힘이 될 것 같은 기분이....'
그렇게 뇌령조의 내단에 묘하게 홀려서 몸에서 무의식적으로 뇌기를 뿜고 만 영의.
그의 몸에서 살짝 빠져나온 뇌기가 공중으로 흐르려다 어디론가 향했다.
"...응?"
뇌기가 흩어지지 않고 갑자기 어디론가 이동하자 의문이 든 영의.
그는 이내 뇌기가 이동한 곳을 살펴보다가 신물들이 올려진 선반 위의 한 물체를 바라보았다.
"이건... 알?"
약간 달걀보다는 확실히 큰 사이즈의 알을 발견한 영의.
뭔가 사람의 손 위에 올려두면 딱 맞을 것 같은 마우스 정도의 크기였다.
"...뇌령조의 알이네요. 아마 저 내단이랑 같이 들어온 것 같은데...."
연화는 그 알을 살펴보며 말했다.
그리고 그걸 바라보며 혁련무강은 살짝 아까워졌다.
'...독고휘에게 선물로 주려고 했던 건데.... 녀석이 뇌령조의 내단을 찾아다니는 걸 알고 교도들을 동원해 찾아온 것이거늘....'
뇌전지체를 만들기 위해 뇌령조의 내단을 탐낸 적이 있던 독고휘.
혁련무강은 그걸 알았기에 폭풍우 치는 날 낙뢰에 세 명의 교도들을 희생시켜 가며 뇌령조와 그 알을 포획해 내단과 알을 여기에 보관한 것이다.
"...근데, 이건 왜 여기 둔 거예요? 부화 못하지 않나?"
영의의 물음에 연화가 답해 주었다.
"뇌령조는 새끼를 부화시키기 위해 폭풍과 번개가 몰아치는 날, 번개 구름 속으로 알을 가지고 달려들어요. 그리고 그 번개의 뇌기로 알을 부화시키는 거죠. 그 전까지 알은 깨어나지 않는다고 들었어요."
뇌령조는 이름부터 번개를 거느린다는 이름이었다.
뇌기를 품고 엄청난 속도를 자랑하며 뇌기가 가득한 먹구름을 쫓아다니는 영물이었는데, 그 속도 탓에 보이는 일이 거의 없었다.
다만 유일하게 관측하거나 포획할 수 있을 때가 새끼를 부화시킬 때였다.
그때만큼은 뇌기를 알에 주입시키며 번개가 가득한 폭풍우 속을 날기 때문에 때론 어미 새가 먼저 죽는다 하였다.
그렇게 되면 알이 부화 못할 때가 있기 때문에 언젠가는 부화하도록 알 상태에서도 뇌기를 받아들이는 성질이 있는 것.
충분한 뇌기를 받아들인다면 그때 알이 깨어날 거라고 설명했다.
"...흠, 그럼 이걸로 할게요."
"...?"
"정말요?"
영의는 갑작스러운 충동으로 정한 게 아니었다.
솔직히, 영약이고 영단이고 잘못 먹으면 어떻게 될지도 두려웠고, 신물이나 보검들은... 아무리 신기해 봤자 현대 문물만큼 신기하겠나?
그리고, 영의는 칼은 쓰지 않았기에 지금 여기서 그나마 흥미가 가고 신기했던 게 이 알이었다.
"...그래, 알겠네. 그럼 이 뇌령조의 알을 가져가게."
혁련무강은 조금 아깝다는 생각을 했지만 뇌령조의 내단은 아직 있으니까 나중에 독고휘하고 마주해서 술이라도 한잔하게 된다면 그때 말을 꺼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내 비고의 문이 닫히고, 연화와 영의의 손에는 각자 뭔가 하나씩 들려 있었다.
영의는 뇌령조의 알을, 연화는 백청옥을 들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아버님."
"뭘 그러느냐. 네 오빠들에겐 다 하나씩 주었는데, 너만 안 주었지. 그보다, 정말 그거면 된 거냐?"
"예, 아버님."
백청옥은 북해의 빙정처럼 한기를 뿜어내는 물건이었는데, 빙정만큼의 냉기를 뿜진 않았다.
그러나 빙정보다 안전하고, 또 안정적인 냉기를 뿜어냈기에 연화는 그걸 자신의 방에 두기로 했다.
그렇게 보상을 대충 받은 듯했으니 이제 슬슬 가야겠다고 생각할 때, 영의는 문득 생각이 들었다.
'...이쯤 되면 알림이 떠야 하지 않나?'
뇌령조의 알을 손에 넣었고, 또 비고에서 나와 혁련무강의 개인실로 향하고 있음에도 알림이 뜨지 않았다.
'설마....'
[배달이 완료되었습니다. 보상을 수령하세요.]
보상 수령은 끝난 게 아니었다.
제35화
(10)
영의는 눈앞의 알림 창에 당황했다.
'지금 분위기는 받을 거 다 받고 이제 집에 가면 되는 분위기인데... 아직 보상 수령이 덜 끝났다고...?'
지금은 혁련무강의 개인실로 향하는 길이었고, 조금 더 가면 대전이 코앞이었다.
옆에서 백청옥을 껴안고 있는 연화를 잠깐 보고는 혹시나 싶은 가능성을 떠올린 영의.
'...설마.'
그래도 정말 모르는 일이니 영의는 알림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알림아, 추천 보상... 있니?'
[Alrim이 보상을 추천합니다.]
[수령 가능 보상 : 재화, 무공, 여자(확정되지 않았습니다.), 영약(품질이 낮습니다.)]
[추천 보상 : 재화, 무공]
'아, 다행이다.'
영의는 알림의 목록 표시를 보며 안도했다.
뭔가 문제가 생긴 게 아니라 원래 더 비싼 걸 받을 수 있었는데 뇌령조의 알이 그만큼의 가치는 안 된 거였구나....
"음, 천마님? 어르신? 뭐라 불러야 하나...."
영의는 괜히 재화를 얘기했다가 금이나 은을 받게 될 것 같아 두려워졌다.
지난번의 금화야 그냥 예술품 같은 느낌으로 팔 수 있을지 몰라도, 이곳이면 금을 궤짝으로 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혁련무강은 영의가 자신에게 먼저 말을 걸어오자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자신을 꺼려 하는 느낌은 조금 있는 것 같아도, 일단 가까워지려고는 하는 거 아닌가.
"크흠, 본좌를 그렇게 함부로 부르는 건 허가할 수 없지만... 자네는 별 상관 없겠지. 편한 대로 부르게."
"아, 네. 그럼 천마님으로 하겠습니다."
혁련무강의 말에 연화는 깜짝 놀랐다.
막내딸인 데다 혁련무강이 친히 아끼는 연화였다.
그런 연화도 혁련무강과 가족처럼 가까운 몇몇 인물들을 제외하면 아버님 소리를 꺼내지 못했다.
그런데 외부인에게 저렇게 편한 호칭을 허락한다고?
"...그래서, 나한테 말은 왜 걸었나?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으니 물어본 것이겠지?"
"네, 그게...."
영의는 그때 잠깐 고민했다.
'무공을 가르쳐 달라고 해? 근데, 그러면 아까 비고에서 왜 비급을 안 골랐냐고 물을 거 아냐? 아니, 그 이전에. 천마라고 해도 결국은... 마공 같은 거 아닌가?'
물론 천마신공은 패도적이고 흉악한 위력을 자랑하지만 정신에 문제가 생기게 하는 마공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쪽의 지식이 얕았던 영의는 그냥 금으로 받아 버릴까 생각하다가 문득 팽소운과 독고휘가 하던 말이 떠올랐다.
'뇌룡보는 천마군림보를 흉내 내기 위해 만든 거야. 그럼, 직접 전수받는다면? 그럼 더 완전해지지 않을까?'
"그, 천마군림보 그거 가르쳐 주실 수 있어요? 비슷하게 만든 건 쓸 줄 아는데, 아무래도 원조가 더 나을 것 같아서...."
영의의 파격적 요청. 연화는 이제 영의를 미친 사람 보듯이 하고 있었다.
"당신 제정신입니까?! 하늘 아래 둘도 없는 천마신공을, 게다가 가장 대표적인 천마군림보를 가르쳐 달라니!"
연화가 영의에게 소리치며 슬쩍 혁련무강의 눈치를 보았다.
'어...?'
딱히 감정의 변화 같은 게 보이지 않는 듯한 혁련무강.
오히려 그는 은은한 미소를 품고 있었다.
"허허... 천마군림보를? 그래, 그러고 보니 아까 처음 만났을 때 조금 특이한 보법으로 공중을 날아다녔지. 그건... 독고휘가 만든 건가?"
"어어, 네. 그 제운종에, 맹호... 뭐시기랑...."
영의가 과거를 떠올려 보며 설명을 하려 할 때 연화가 놀라며 추임새를 넣었다.
"맹호파산보! 권왕의 독문 보법을...!"
신교에 천마군림보가 있다면, 정파에는 맹호파산보가 있다는 말이 있다.
넓은 전장을 그대로 찍어 누르는 천마군림보와 다르게 일대일에서 적에게 엄청난 중압감을 주는 권왕의 성명절기 중 하나 아닌가!
"...그리고 그 뇌전보라는 거 합쳐서 천마군림보랑 비슷하게 만들어 본다고 했던 게 그거였거든요. 근데, 땅에서 쓰는 것보단 공중에서 쓰는 게 더 쓸 만한 것 같아서 그렇게 쓰는데... 원조가 어떤가 궁금해서요."
영의는 딱히 큰 관심은 없었다.
애초에 하늘을 직접 뛰어다니는 시점부터 그는 뇌룡보가 너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의의 설명을 듣던 혁련무강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자부심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보이느냐, 독고휘?! 내가, 이 천마 혁련무강에게! 네놈과 네놈 친구들이 힘을 합쳐 만든 보법을 배운 녀석이! 천마군림보를 배워 보고 싶다고 하지 않느냐!'
연화는 놀라면서도 아버지가 영의에게 나름 호감이 있어서 화를 안 내지, 적당히 거절하거나 다른 보법을 가르쳐 줄 거라 생각했다.
천마신공은 소교주의 직위를 차지하고도 교주의 명이 있을 때나 전수받을 수 있는 희대의 절기였다. 외인에게 그 절기의 한 자락을 전수할 리가....
"좋다! 본좌가 직접 친히 가르쳐 주마! 맹호파산보니, 제운종이니, 다 필요 없다! 천마군림보 하나면 부드러움이니 속도니 모든 걸 무시할 수 있다!"
혁련무강은 그렇게 외쳤고, 연화는 그때부터 생각이라는 걸 포기하기 시작했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그렇게 혁련무강이 친히 가르쳐 주겠다는 말을 꺼내자, 영의의 시야에 알림이 떠올랐다.
[보상 수령 완료! 이제 복귀하셔도 된다고 Alrim이 알립니다!]
"허어... 해가 지기 시작하는구나."
그때 혁련무강이 대전의 뚫린 구멍으로 하늘을 잠깐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어느새 하늘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음, 그러고 보니 내일은 성화제로군. 본좌가 지금 가르쳐 줄 순 없겠네. 다음에 다시 오면, 그때 천천히 가르치도록 하지."
'...어? 뭐야, 안 배워?'
영의는 잠깐 당황했으나 이내 생각을 정리했다.
이름부터 천마가 들어가는 엄청난 무공 아닌가.
평소라면 그거 하나로도 보상은 차고도 남았겠지만, 이번엔 다른 보상을 먼저 받고, 남는 부분을 받는 거였다.
그러니까... 분할 지급, 뭐 그런 건가?
"...네, 뭐. 그럼 저도 돌아가 볼게요. 천마님."
"그래, 그리고... 혹시, 다음에는 다른 요리.... 아, 아니네. 그대로 가져와도 된다네."
혁련무강은 혹시 더 맛있는 게 있지 않을까 싶어 그렇게 물어봤지만, 만약 맛이 더 떨어지는 걸 가져오면 만족하지 못할 것 같아 손을 내저었다.
"네, 알겠습니다. 더 맛있는 거로 갖다 드릴게요. 혹시, 순살은 좋아하세요...?"
"...순살?"
혁련무강은 영의의 말에 의문을 느꼈다. 순살? 그건 뭐지?
"네, 뼈 없는 거요. 젓가락만으로 집어 드시게. 아, 뭐 손 안 대고 드실 수 있긴 한데...."
혁련무강은 영의의 말에 감탄했다.
젓가락만으로 먹을 수 있다니, 그럼 손에 안 묻히고 먹어도 된다는 말 아닌가!
'품위를 지킬 수 있겠군!'
"그럼 더 좋지. 기대하고 있겠네."
영의는 그렇게 말하며 바이크에 올라탔고, 바이크는 겉이 부서지긴 했어도 나름 멀쩡한지 일단은 떠올랐다.
"그럼, 다음에 뵐게요 천마님!"
"그래, 잘 가도록 하게!"
영의는 손을 흔들며 하늘로 날아올랐고, 혁련무강과 연화는 천장에 뚫린 구멍을 보며 작게 손을 흔들었다.
"...아버님, 혹시 아까 먹다 남은...."
"안 된다."
"...네."
그리고 약간의 아쉬움을 뒤로한 채, 연화는 자신의 처소로 돌아갔다.
'주방을 갈 기분이 아니야....'
평상시였다면 그녀는 주방에서 치킨의 재현을 구경하거나, 직접 시도해 봤겠지만 남은 양념을 먹는 것을 거부당했기에 그녀는 의욕이 나지 않았다.
"하아... 다시 한번, 가볼까...."
그리고 혁련무강은 그의 개인실에서 내적 갈등에 휩싸였다.
'지금 먹는 게 좋은가? 아니다, 나중에 식사 때 먹어야 한다! 하지만... 조금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안 돼, 참아야 하느니라...!'
차라리 없었다면 이런 갈등도 없었을 것을, 혁련무강은 왜 저게 남아 있어서 이런 고뇌를 겪는 건가...! 라고 생각하다가 문득 무언가를 깨달았다.
'그래, 있으니까 문제가 생기는 거다. 내공도, 재물도, 심지어는 가족도! 재물도 가족도 없는 거지는 밥 한 덩이에 모든 만족과 행복을 느낀다. 하지만 난 어떤가? 가족과 재물, 내공마저 넘쳐 나지만 나는 행복했었나?'
물론 치킨 먹을 때는 행복했지만 평소의 그는 행복하다고 느끼지 않았다.
그리고 가부좌를 튼 채 계속 깨달음을 이어 나가는 혁련무강.
'그래, 버리는 거다. 가족은 버리는 의미가 없다. 내가 죽을 때 바로 함께 죽진 않으니. 재산도 의미가 없는 것이다. 나의 모든 재산은 전대로부터 받은 것. 후대로 물려질 것이다. 그러니... 내공을 버린다. 단전을 버린다. 모든 것을... 버리고 비운다....'
혁련무강은 깨달음을 얻어 점점 의식이 사라지기 시작하고 깨달음만 뇌리에 남았다.
그리고 그때 그의 개인실에 찾아오는 연화.
똑똑.
"...아버님...? 주무십니까?"
내일이 성화제였기에 조금 일찍 주무시나 싶어 문을 빼꼼 연 연화.
그녀는 자고 있다면 그냥 나가기로 하고 자는 모습만 확인하기 위해 문틈으로 안을 바라보았다.
안에서 가부좌를 틀고 눈을 감고 있는 혁련무강.
그의 몸에서 엄청난 기운이 빠져나오고 있었으나 기세가 거칠지 않았고, 오히려 부드러웠다.
그리고 동시에 그의 머리가 조금씩 검게 변하고 주름이 줄어들기 시작하는 것을 본 연화.
'바... 반로환동!'
연화는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를 뻔했으나 이내 입을 스스로 틀어막았다.
전설상의 반로환동을 지금, 눈앞에서 아버지가 하고 있다니!
그녀가 무공에 모든 걸 건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름의 입지가 있으니 무공을 제법 익히고 지식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눈앞의 것은 젊을 때의 육체로 돌아간다는 반로환동!
물론 무공을 사용하기에 최적의 육체로 바뀌는 환골탈태에 비하면 약간 손색이 있었으나, 나이를 먹는 게 당연한 무림인들에겐 반로환동이 더욱 좋았다.
"...지금이다!"
그러나 감동하거나 호법을 서기보다는 지금이 기회라고 판단한 혁련연화.
그녀는 지금 아버지가 무아지경의 상태일 때 빠르게 양념을 탈취하기로 했다.
'조금만, 먹고 연구해 볼 조금의 양만 있으면...!'
조금의 양이라고 하면서 품에서 꺼낸 병은 주먹만 했으나 연화에겐 그게 조금이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혁련무강이 잠가 둔 서랍장을 따기 시작하는 그녀.
'다행이야, 아버님이 이런 쪽에 큰 관심이 없으셔서.... 그냥 약간만 좀 쑤셔 주면....'
잠금 기능만 있지, 확실한 보안 기능까진 없었던 서랍장이었기에 그녀가 가지고 다니던 작은 침을 조금 쑤셔 주자 잠금장치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짤깍, 짤깍-
혁련무강은 무아지경에 빠져 있었고, 주변의 소리와 기척을 감지하지 못했기에 아직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본래 늙음을 억제하고 있었기에 독고휘와 달리 느린 속도로 사라지고 있는 주름과 흰머리.
탁!
스르륵-
서랍장이 열리고, 그 안에서 영롱하게 빛을 반사하는 은박지를 본 연화.
그녀는 마음속으로 환호성을 내질렀다.
이내 은박지를 들어 올려 조심스럽게 병으로 기울이던 그때!
바스락-
은박지 특유의 구겨지는 소리가 났고, 연화는 마음을 졸였다.
"...."
다행히 혁련무강은 가만히 있었다.
내뿜어지는 기운은 조금 줄어든 것 같았지만, 반로환동 과정 중의 변화겠지 싶어 넘겼다.
"후우...."
물론 무아지경이라 못 들으시는 건 알지만, 언제 아버지가 일어날지 모르니 일단 빠르게....
"...뭐 하는 거냐."
"...꺄악!!"
지금껏 살아오며 적응된 수많은 소리가 있다.
어느 누구에겐 물소리, 어느 누구에겐 바람 소리.... 하지만 사람은 익숙지 않은 소리가 들리면 거기에 신경이 쏠리기 마련이다.
그리고 은박지처럼 얇은 금속이 구겨지는 소리를 들은 혁련무강은 무아지경에서 깨어났고, 그의 기감에 연화가 느껴졌다.
'...연화? 왜 내 앞에 있는 거지? 아, 호법인가?'
그렇게 일차적으로는 웃어넘기거나 나중에 상을 줘야겠다고 생각했으나, 방금 전 들은 소리가 신경 쓰였다.
'그보다 내가 뭣 때문에 무아지경에서 벗어난 거지? 음? 그러고 보니, 아까 그 요리를 먹을 때 포장해 둔 은이....'
그리고 혁련무강의 머릿속에서 모든 것이 퍼즐처럼 맞춰지기 시작했다.
무아지경의 상태, 절대 다른 곳에서 찾아볼 수 없을... 아니, 일단 자신의 방 안에서 나는 금속이 구겨지는 소리.
그리고 호법을 방 밖이 아닌 굳이 자신 앞에서 서고 있는 연화.
마지막으로... 서랍에 보관해 둔 양념!!
혁련무강은 그 사실에 가부좌를 풀고 눈을 떴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은박지를 손에 들고, 다른 손에 병을 들고 있는 연화.
사실 혁련무강도 그냥 찍어 먹고 있는 모습을 봤으면 크게 화를 안 냈을 거다.
양념의 양은 제법 됐고, 자신도 딸에게 한 조각 줬으니 그리 못 줄 건 없었다.
하지만... 그 손에 들린 손바닥만 한 크기의 병은 양심이 조금 없지 않느냐, 딸아?
그거면 다 담아 가고도 남겠구나.
혁련무강은 곧바로 입을 열었고, 그의 말소리에 연화는 깜짝 놀라 바닥에 주저앉았다.
"...뭐 하는 거냐."
"꺄악!"
그렇게 혁련연화는 오늘 받았던 백청옥을 빼앗기고, 당분간 근신하라는 징계를 받아 쫓겨났다.
그리고 혁련무강은 반로환동을 반쯤 포기하고 양념을 지켜 냈다!
한편, 독고휘의 동굴.
독고휘는 동굴 안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그때 반로환동을 어떻게 했던 거지...."
깨달음의 때를 놓쳐 버린 독고휘는 반로환동을 다시 해 보려 애쓰고 있었다.
제36화
(11)
혁련무강에게 다녀오고 나서 늘 그렇듯 배달을 하러 간 영의.
혁련무강에게 다녀오기 전까지만 해도 조금 피곤했으나 그래도 지금 퇴근하고 자러 가기엔 애매했다.
그렇게 그는 늘 모이던 그 장소에 도착하고 아래에 병찬과 병민, 병병 브라더스가 있는 걸 보고 내려갔다.
"오, 행님 왔어예?"
반갑게 그를 맞이하는 병찬과는 달리 병민은 약간 서운한 듯이 말을 꺼냈다.
"...영의 형, 근데 특별 주문 들어오면 우리 부른댔잖아.... 왜 안 불러?"
지난번에 영의가 혹시 모를 보험으로 말해 둔 이야기를 꺼내는 병민.
영의는 병민에게 뭐라 설명해야 할까 잠시 고민했다.
'음... 내가 그사이에 다 다녀올 수 있으니까...는 좀 아니고, 그냥 없었다 해야겠다.'
"딱히 겹치는 일이 없어서...? 그때 말한 것도 혹시, 호옥시 모르니까 말해 둔 거고. 어지간하면... 내가 다 처리하지. 내가 자리를 못 비울 때 연락받는 경우라고 했었잖아."
"아...."
"마, 행님 능력 모르나? 우리 중에 제일 빠른 기 행님 아이가! 엥간하면 행님이 다 처리한다. 우덜한테 말한 기는 그 뭐냐 그그... 그 사자성어 뭐고?"
뭔가 말을 하려고는 하는데 떠오르지 않는 듯 물어보는 병찬.
"...유비무환?"
그리고 병민은 충분히 많이 겪어봐서 익숙한 듯 금방 대답을 해주었다.
"아, 그래. 그기다. 아무튼, 우리는 우리 할 일에나 집중하면 되는 기다. 그보다 행님, 요즘 뭐 으데를 그래 다니시길래 자꾸 자리를 비우심꺼? 아니, 이유는 지난번에 말씀해 주셔가 내 모르지는 않는데... 그, 정도란 게 있지 않심까."
물론 다른 차원으로 배달을 다녀오면 거기서 얼마나 있든 간에 떠났던 시간대로 돌아오긴 한다.
하지만 여기서 음식을 준비하고, 또 건너가기 전에 걸리는 약간의 이동 시간이 있었으니 영의는 자리를 비울 수밖에 없었다.
"...그냥, 좀 그럴 때가 있긴 해...."
대충 얼버무리는 영의.
그러나 그 말을 다르게 받아들인 듯한 병찬은 능글맞은 미소를 지었다.
이내 병찬은 영의에게 다가와 작게 속삭이기 시작했다.
"행님, 지는 다 압니더. 뭘 그리 숨기고 그랍니까? 우리 사이에. 지도 똑같심더, 행님이랑."
"뭐?! 너...?"
설마, 이 녀석도 자신처럼 차원을 넘나들면서 배달을 하는 건가?! 아니, 그러면 너는 어떻게 한....
"거... 남들 보여 주기 좀 그런 거 있지 않습니꺼. 그 이쁘장한 가시나들 나오는 만화라든가... 게임... 그런 거. 뭔가 부끄럽진 않은데 떳떳하기도 그런 거 하러 다녀오시는 거지예?"
...병찬이 녀석이 조금 바보라 다행이었다. 그보다, 이 형은 네 취향을 존중해 줄게....
"에이, 행님. 빼지 마시고. 사실 병민이 저노마도 다 합니더. 지는 게임 쪽으로, 저노마는 그... 만화 쪽으로다가. 지난번에 점마 저거 그 이상한 복장 하고 영화관 가는 것도 봤심더."
...그만해, 병찬아... 더 존중해 주기 힘들어....
"뭔데, 무슨 얘기 하는데?"
자신에 대한 얘기인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자기도 끼워달라며 불쑥 끼어드는 병민.
"아, 행님이 가끔 자리 비우는 거 사실 니랑 내처럼...."
그러다 갑자기 자신들만의 이야기를 시작하는 병민과 병찬.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 새로 나온 게...."
그리고 영의는 그런 둘을 바라보며 작게 미소 지었다.
'형은 너희가 멍청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그리고, 취향은 존중해 줄게...어느정도는..'
"그러니까 행님, 저희랑 같이하시지예. 그리고... 가능하면 추천 코드에 제 닉네임 좀.... 아, 제 닉네임은 '핑키공주 핑짱이'입니더."
"아, 저는 게임은 안 하고... 그, 만화 쪽인데... 형, 나중에 저랑 일본 같이 가실래요...?"
"맞다, 맞다. 행님, 지금 신규 유저 이벤트도 막 하고 있는데. 지랑 가챠나 하실랍니까? 핑키공주 핑짱...."
알겠어, 핑키공주 핑짱... 아니, 병찬아. 그만해, 화내기 전에.
그렇게 핑키공주 핑짱... 아니, 병찬과 병민... 두 동생들의 은밀한 취미를 알게 된 영의.
그는 혁련무강을 만나고 나름 괜찮아졌던 정신적 피로가 다시 몰려오기 시작했다.
"...갑자기 피곤해졌어.... 자러 가야겠다."
"에엥? 행님? 추천인은 해 주셔야...!"
"핑... 아니, 병찬아. 나중에... 나중에 해 줄게.... 아니면 병민이한테 해 달라 그래...."
영의는 병민을 가리키며 그렇게 말했으나 병민은 고개를 저었다.
"저는 이미 해 줬는데요. 그 게임 지금 끊긴 했는데...."
"복귀 유저 이벤트도 한다 아이가! '골디골디 미니' 계정 복귀해라!"
설득의 대상을 영의에서 병민으로 바꾸는 병찬. 그는 병민을 열심히 설득하려 했다.
"아, 가챠 망겜 안 한다고...."
...설마 그 골디가 황씨라서 골디고, 미니는 병민이의 민은 아니지?
영의는 더 피곤해졌다. 그냥 얼버무리지 말고 그럴듯한 거짓말이나 할걸....
"...나 간다. 찾지 마...."
곧바로 바이크를 몰고 떠나는 영의.
배달이고 자시고, 그는 그냥 집에서 자고 싶었다.
"아, 행님 갔다...."
"...네가 너무 과하게 설득해서 그래. 아니, 얘기 나오자마자 갑자기 급발진하면서 바로 스카우트하면 어떡해! 그리고 추천인부터 얘기가 나오냐!"
"아, 우짜라고 그러믄! 다짜고짜 가시나들 나오는 만화 영화 보러 가자꼬 영화관에 손잡고 끌고 가는 거보다는 게임 재밌는 거 있는데, 해 보실래예-? 라고 묻는 게 더 그럴듯하지 않나!"
"...그건 일리가 있다."
별로 일리가 없지만 병찬의 논리에 병민은 나름 설득되기 시작했다.
이래서 둘이 친구인 듯했다.
"그렇제? 내 보니까는 행님도 별로 큰 거부감은 없는 거 같드라. 지금 사람 많아가가 부끄럼 타서 그런 거 같은데, 난중에 내가 다시 한번 권해 보께."
"그래, 잘되면 내 쪽으로도...."
병민의 나지막한 말에 병찬은 표정을 굳히며 냉정하게 말했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그거는 행님이 정하는 기지,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이다. 그건 니가 노력해 봐야지."
"...그래. 근데, 영의 형 바이크에 기스 난 거 봤냐?"
혁련무강에 의해서 파손된 부분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하는 둘.
그들도 바이크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이었기에 나름 관심을 가지는 부분이었다.
"어, 쪼매 크게 파였드만. 뭐 날아댕기다가 새에 치있나?"
"...새 정도는 박살 내고 날아가지 않을까?"
"그라믄 뭐겠는데? 뭐 밑에서 어떤 미친놈이 총으로 쏴 갖고 맞힌 기가? 그랬는데 터지거나 행님 다치는 거 없이 그냥 기스만 났다고? 차라리 행님이 공중을 걸어서 배달을 할 수 있다 카지?"
"아니, 뭐 말이 그런 거지.... 비행기들도 새랑 부딪치면 사고 나잖아...."
거짓말처럼 대부분을 맞혀 버린 병찬의 말이었지만, 병민은 그 기세에 주눅이 들었다.
한편, 두 동생들의 숨겨진(?) 취미를 알고 싶지 않았지만 알게 된 영의는 피곤함을 크게 느끼며 집에 들어왔다.
그리고 늘 입던 라이더 재킷을 벗고 그 안의 주머니에서 알을 꺼내는 영의.
바깥 주머니에 넣기에는 너무 불룩하고, 또 눈에 띄었기 때문에 그는 안주머니에 알을 넣었었다.
"...근데, 이거 부화하긴 하는 거지...?"
간간이 뇌기를 알에 주입하며 옷을 갈아입고, 또 씻는 영의.
그는 지금까지 뭘 제대로 키워 본 적이 없었기에 조금 어색했다.
'...초등학교 때 사 온 병아리는... 강하게 키운다며 날렸다가 그대로 떨어져 죽었고. 금붕어는... 아, 그건 그냥 잘 키워 보려고 해도 죽는 거구나. 수조가 없었지.'
지금껏 살아오며 뭔가를 성공적으로 키워 본 기억이 없는 영의.
그나마 뭔가를 잘 키워 냈다 싶은 건 그의 여동생 수연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이... 뇌령조였나? 그 병아리를 때리면서 훈련시킬 수 있는 노릇도 아니고...."
강하게 키우는 집안이었기에, 무려 여덟 살 차이가 나는 오빠인 영의도 막내 여동생 수연을 대련으로 강하게 키웠다.
용케 엇나가지 않은 게 이상했지만, 첫째인 영웅과 둘째인 영환은 영의보다 더 정신 나간 인물들이었기에 그나마 영의를 좋아하는 것이리라.
그렇게 침대에 걸터앉아 휴대폰으로는 병아리 부화시키는 법을 검색하며 다른 손으로 알에 뇌기를 주입하는 영의.
"...따뜻한 곳이라."
영의는 이 집에서 그나마 따뜻한 곳이라면 침대뿐일 거라 생각했다.
따뜻하게 하겠답시고 난로 같은 걸 썼다가는 그냥 맥반석 계란이 될 것 같았고, 또 뜨거운 물을 받아 두고 거기에 두면 뭔가 삶은 계란이 될 것 같았다.
"...초보 아빠라 미안하다."
그리고 자는 동안은 뇌기 주입이 힘들기에 일라이저에게서 받아 왔던 마력 주입기에 뇌 속성 마정석을 세팅하고, 알에 맞게 조금 조정해서 매어 둔 영의.
실제로 마력 탈진에 걸린 사람을 위한 도구였기에, 몸에 축적시키기보다는 당장의 몸에 마력을 순환시키는 용도였다.
그래서 체내 뇌기의 증진은 몰라도 당장의 뇌기 충전에는 쓸 만했으니 알에다 연결해 둔 것.
영의는 그렇게 세팅을 마쳐 주고, 핫 팩을 하나 뜯었다.
지금은 겨울철에다, 운행을 안 하고 대기할 때는 제법 추우니 핫 팩을 충분히 구비해 두었기 때문이다.
물론 독고휘를 만나 뇌기를 전수받고 난 이후에는 별로 필요로 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따뜻함과 뇌기, 둘 다 충족시킨 채 알은 영의와 함께 밤을 보냈다.
다음 날 아침. 영의는 곧바로 일어나서 옆의 알을 확인했다.
"음... 뇌기는 다 주입된 거 같은데."
마력 주입기도 뇌 속성 마정석이 없어져 있었고, 핫 팩도 어느 정도 온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알은 깨어나지 않고 있었다.
"...내가 주입해 봐?"
그렇게 알을 마력 주입기에서 빼고 손에 들어 뇌기를 주입하는 영의.
그러나 알은 뇌기를 받아들이지 않고 옆으로 흘려 냈다.
"...어라?"
받아들이지도 않고, 일반적으로 물체에 뇌기를 쏘았을 때 튕겨 나오듯 하지도 않고... 흘려 낸다고?
"뭔가 되긴 한 거 같은데...."
영의는 알을 지켜보며 뭔가 고민을 해 보려 했지만, 그때 그의 시야로 알림이 새로 떠올랐다.
[Alrim이 알려 드립니다. 새로운 주문인에게서 새로운 주문이 있습니다.]
"어...? 새로운 주문?"
영의는 곧바로 옷을 챙겨 입기 시작했다.
알이야 잠깐 놔두면 될 거고, 지금은 주문이 더 중요했다.
'이번엔 뭐 어떤 인물이려나? 무협 한 번, 판타지 한 번, 무협 한.... 아니지, 지연이가 있었으니까.... 아, 뭐 어때. 언젠 규칙적이었나.'
빠르게 옷을 갈아입고 세수만 대충 한 뒤 바깥으로 나가려던 영의.
그는 일단 뇌기는 충분한 듯하니 알을 따뜻하게 유지하기 위해 새로운 핫 팩을 뜯어 알 위에 올려 두었다.
그리고 낡은 핫 팩은 쓰레기통에 던지고 영의는 바로 바깥으로 나갔다.
부들부들....
그가 나가고 대략 3분 뒤, 뇌령조의 알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제37화
(12)
바깥으로 나와 바이크에 올라타는 영의.
지금은 아침 9시 30분. 어지간한 가게들은 거의 다 문을 닫고 있을 시간이었다.
"...뭐, 그래도 확인은 해 봐야지."
영의는 공중을 날아가며 알림을 확인했다.
"알림, 띄워 줘."
[Alrim이 알립니다. 새로운 주문!]
뭐 언제는 파격적이지 않았냐마는, 이번 주문은 조금 특이했다.
[주문인 : 마공학자 '더 크레이지' 베키입니다.]
우선 이름부터가 심상치 않은데...?
[주소지 : 베키의 연구실입니다.]
뭐, 이거야 자동 운행으로 가면 되겠고.
[배달 물품 : 대략적인 한 끼. 그리고 피로를 쫓아줄 무언가. 입니다.]
...뭐야, 나랑 퀴즈나 하자는 거냐? 왜 이렇게 대충 해 놨어?
[예상되는 보상 목록 : 베키의 재량과 상황에 따라 달라집니다. 입니다.]
...그래, 뭐... 상황 따라 다를 수도 있지.
영의는 약간 짜증이 날 뻔했으나 이내 참아 냈다.
그래, 지금까지가 되게 편하고 좋았던 거다.
당장 주문한 사람 이름부터가 크레이지라고 하지 않나. 그리고 설명이 나름 쉬웠다.
"한 끼...는 뭐, 샌드위치나... 햄버거나... 토스트? 정도면 되지 않을까...?"
한 끼에 대해서는 영의도 잘 이해가 안 갔다.
누군가에게 한 끼는 뜨끈한 국에 밥과 반찬이 있어야 하고, 누군가에게 한 끼는 프로틴 바 두 개면 되는 것이니.
하지만 뒷부분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건 커피구만? 보자, 커피가 되면서 음식도 되는 곳이...."
영의는 머릿속으로 일단 커피라도 나름 집중해서 구해 보자는 생각을 하다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아...!"
영의는 빠르게 날아올랐다.
그의 바이크에서 미묘한 스파크가 튀는 것을 모른 채....
오늘 호찬은 기분이 몹시 좋았다. 어제 단체 주문이 들어왔었기 때문이다.
"흐흠~ 흐음~ 역시, 학생들 단체 주문은 햄버거지! 치킨은 싸우고, 피자는 분배 문제가 있지만~ 햄버거는 한 사람에 한 개!"
호찬은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주방을 돌아다녔다.
주문은 점심까지 해 주면 되지만, 좋은 일을 앞두면 괜히 들뜨는 게 사람 심리 아닌가.
호찬은 일단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커피를 한 잔 내려 먹으러 커피 머신 앞으로 갔....
콰앙!
"호찬 아저씨!"
"엄마야!"
깜짝 놀라 머그잔을 무심코 던져 버리고 만 호찬.
그리고 문을 다급히 열며 나타난 건 영의였다.
"컵 던지지 마세요, 아저씨. 맨날 놀라면 뭐 던지더라."
"놀라게 하지를 말라고!"
호찬이 던진 컵을 받아 들고 카운터로 다가오는 영의.
물론 가게는 9시부터 열지만 누가 아침에 햄버거 가게가 문을 열자마자 와서 시켜 먹겠나? 밤을 새운 사람이 아니고서야....
호찬도 비슷한 생각이었다.
영의가 아침부터 햄버거를 먹자고 온 건 아니겠고... 얘기나 하러 온 건가? 싶은 생각을 하던 그때.
"아저씨, 햄버거 아무거나 하나 포장요. 그리고 커피도 제대로 내려서 한 잔 테이크아웃."
먹으러 온 거 맞구나?
"아니, 뭐... 내 햄버거 맛이야 너도 잘 알지만... 아침부터 햄버거라니? 그리고 너, 커피는 잘 안 먹지 않았어?"
일단은 주문이 들어왔으니 계산하고 커피 머신부터 준비시키는 호찬.
과연 그 부분에 대해선 프로다웠다.
"...아침부터 시켜 먹는 빌런이 있더라고요. 대체 뭐 하는 인간인지는 몰라도...."
"아, 배달이구나...."
그래서 이렇게 다급하게 쳐들어오고, 또 아무거나라고 했구나....
"뭐... 그래, 맛있게 만들어 줄게."
호찬은 주방 안으로 들어서며 불판에 불을 올리고, 적당히 유지해 뒀던 튀김 기름의 온도도 올렸다.
본래 10시부터 본격적인 준비를 하고 알바생들도 출근했지만, 오늘 이런 주문이 올 줄은 몰랐다.
"그래도 다행이야. 오늘 오후에 단체 주문이 있어서 재료 준비는 미리 다 해 놨거든. 금방 나간다!"
불판에 패티와 빵을 올리고 기름에도 감자튀김을 집어넣었다.
오늘의 첫 햄버거이니만큼 맛은 제대로 나오리라.
그리고 익기를 기다리는 잠깐의 시간 동안 그는 커피 머신 앞에서 상태를 체크했다.
"...아직이군."
그리고 다시 돌아가서 빠르게 햄버거 패티를 뒤집은 호찬.
그는 튀김의 상태를 확인하다가 감자가 떠오르기 시작하자 잠깐 뜸을 들이고는 빠르게 건져 내 걸쳐 두었다.
그렇게 호찬은 혼자서 모든 조리 과정을 빠르게 진행했다.
그럼에도 패티가 타거나, 뭔가 하나 어긋나는 것이 없는 것이 그의 실력을 증명했다.
'...역시 베테랑이야....'
영의도 그의 전문성을 보고는 나름 감탄했다.
역시 어떤 분야든 그 분야의 고수는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구나... 하면서.
"자, 완성이다! 감자는 두 번 튀겼고, 패티는 완벽하게 구웠지! 감히 햄버거를 시키면서 아무거나라니! 내가 용납 못 한다!"
호찬이 그렇게 열심히 조리한 이유가 밝혀졌다.
차마 햄버거를 아무렇게나 취급하는 손님의 태도에 열받았던 것.
그의 장인 정신 가득한 햄버거 세트가 봉투에 담겼다.
"...커피는요?"
"거의 다 됐어."
이내 커피도 전부 내려져 테이크아웃 용기에 담겨 봉투에 들어갔고, 영의가 그것들을 보온 박스에 넣자 호찬이 소리쳤다.
"가서 감상 한번 듣고 와! 물론 뭐 배달하고 바로 오겠지만."
"...네, 감상 듣고 와 볼게요."
호찬은 그저 영의가 맞장구로 한 소리인 줄 알고 미소 지었지만, 영의는 정말로 감상을 들을 수 있는 입장이었기에 꼭 들려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늘 하듯이 바이크를 타고 날아올라 자동 주행으로 가는 영의.
그는 이번엔 또 어떤 신비한 광경이 자신을 반길까 기대를 가득 안고 밑을 내려다보았지만....
"...뭐지?"
넓고 황량한 평야. 곳곳에는 땅이 파인 자국이나 어딘가 그슬린 자국이 가득했다. 그리고 그 평야의 한 중간, 제법 큰 집이 덩그러니 서 있었다.
"이것도, 나름 개성 넘치네...."
그 집으로 다가가는 영의.
그러나 그때 바이크가 느닷없이 바닥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영의가 당황하여 다급히 작동시키려 했으나 반응이 없는 바이크.
그는 혁련무강의 검강으로 파손됐었던 바이크가 멀쩡한 줄로만 알았는데 사실은 문제가 있었구나... 싶었다.
'...이런!'
다급히 몸에 순환하는 뇌기를 가속시켜 뇌룡보를 시전하는 영의.
파직, 파직, 파앗-
그는 바이크를 짊어지고 공중을 밟으며 땅으로 내려섰다.
그리고 집의 외관을 둘러보는 영의.
"...겉은, 생각보다 깔끔한데?"
주변 평야는 뭔가 그슬리거나 땅이 파인 자국이 많았지만, 집은 관리를 하는 듯 제법 멀끔한 외관을 자랑했다.
물론 집주인이 게으른 듯 정원은 손질이 안 되어 있었고, 우물도 낡은 채 방치되어 있었지만....
이내 집의 문을 두드리는 영의.
똑똑.
"계세요-."
그러나 응답이 없었다. 두어 번 정도 더 두드려 봤으나 응답이 없는 집. 영의는 고개를 갸웃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람이 안 사는 곳은 아닌데...?'
그리고 풀숲의 한구석, 무언가 반짝거리며 영의를 향해 바라보고 있었다.
"흐음, 다른 주소인가...?"
영의는 여기가 아닌가 싶어 알림을 불렀다.
'알림, 지도 좀 띄워 봐.'
[Alrim이 현재 위치를 표시합니다.]
하지만 지도에 나온 주소는 여기가 맞았다.
여기 부근은 죄다 황량했으니, 만약 주문인이 유령이 아니고서야 이 집밖에 없지 않은가.
"...없나?"
설마 지금 주문시켜 놓고 자리를 비웠다거나 하는 그런 경우는 아니겠지 싶어서 다시 한번 문을 두드리려는 찰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넌 뭐야? 꺼져! 환불, 교환, 수리 다 안 돼! 사 갈 때 얘기는 들었을 텐데!
조금 성깔이 있는 듯한 날카로운 여자의 목소리.
베키라는 이름에서부터 짐작했지만, 마공학자 베키는 여자였다.
'...그럼 대체 얼마나 미친년인 거야...?'
도대체 무슨 인물이길래 별호가 더 크레이지인가.
일단 영의는 음식 배달을 왔다고 말하려 했다.
"저, 일단...."
-일단이고 자시고 없어! 협회 놈이면 꺼져! 내 기술은 죽기 전에 절대 못 넘겨! 그리고 손님이어도 꺼져! 당분간은 장사 안 해!
"...네?"
그럼 뭐 누가 들어온단 말인가.
아니, 진짜 손님이었으면 어쩌려고 쫓아내? 돈 많이 벌었나?
-지금 당장 안 나가면 네 몸을 써서 자동으로 움직이는 마도 인형을 만들 거야! 썩 꺼져!
갑자기 정원과 집의 벽에서 튀어나오는 총구들.
영의는 진짜 총인가 싶었지만, 아니라고 단정할 수 없었기에 순순히 물러나기로 했다.
"네, 갑니다. 간다고요!"
배달도 정도가 있지, 미친 인간한테 배달할 마음은 들지 않아서 영의가 곧바로 돌아가려던 그때, 또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깐, 너 그거 뭐야?
"...뭐요?"
영의는 퉁명스레 말했다
차라리 배달 안 해 먹고 말지, 이젠 또 뭐야?
-네 뒤에 있는 흰색 그거, 그거.... 아.
-털썩.
갑자기 뭔가 쓰러지는 소리와 함께 끊긴 베키의 음성.
영의는 미친 인간이 또 다른 미친 짓을 하나 싶어 다급히 떠나려 했으나, 그때 눈앞에 알림이 떠올랐다.
[배달 제한 시간 : 01:00:00]
"...알림아, 좀 아니지 않니? 저건 미친년이야! 피하는 게 보통이라고!"
[Alrim이 알립니다. 제한 시간 내에 배달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무적이고 딱딱하게 대답하는 알림이. 영의는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돌렸다.
"그래, 뭐 얼마나 미쳤는지 얼굴이나 보자.... 자동 안내 해 줘 봐. 지도 키우고."
[지도와 경로를 표시합니다.]
이내 영의의 시야 한구석에 미니 맵처럼 표시되는 지도.
그것을 확대해 보자, 집 안의 구조는 생각보다 복잡... 아니, 아예 괴랄했다.
어딘가는 막혀 있고, 어딘가는 또 갑자기 계단이 나오고....
"가지가지 하네. 문 앞에 두고 가세요- 하면 얼마나 좋냐고!"
영의는 지금까지의 진상은 그나마 양반이었다고 생각하며 보온 박스를 챙기고는 문을 발로 걷어차 열었다.
"좋아, 진상 고객 놈아. 보상을 제대로 뜯어내 주마."
영의는 그렇게 말하며 손에서 뇌전을 튀기기 시작했다.
* * *
한편, 독고휘 일행은....
"...형님, 다음은 누구 할지 생각하셨수?"
동굴로 걸어 들어오는 팽소운.
운광은 무당파로 돌아갔지만, 팽소운은 지겹지도 않다는 듯 매일 독고휘의 동굴로 찾아왔다.
"...모르겠는데?"
"아, 맞다. 오늘 아침에 객잔에서 소문을 들었는데 무림맹에서 뭔가 준비한다던데?"
"준비? 뭘?"
"그 왜, 얼마 전에 우리가 모였지 않수."
"...그거는 그냥 운광 녀석이 말 조금 해 주면 조용하지 않을까?"
독고휘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거 아무리 최고 어른들이라고 해도 그렇지, 우린 옛날 얘기 하면서 술도 마시면 안 되나?
"근데 무림맹에서 그... 마교에 심어 둔 세작이, 한창 바깥으로 보내 둔 첩자들이 다 돌아왔다고 했고. 어, 그리고... 마교의 상공에서, 천마와 누군가의 격돌을 봤답니다. 그리고 거기선 뇌기가 막 보였다고...."
"...설마."
이 중원에 뇌기를 쓰는 무공은 많다.
근데... 그걸 하늘에서 쓸 수 있고, 천마 혁련무강이랑 맞상대가 가능한 건... 나밖에 없는데?
"...그 설마가 맞는 것 같수."
"내가 마교에서 혁련무강이랑 싸웠고, 그래서 무림맹이 뭔가 준비를 한다고?"
"...그런 것 같수. 그 이후로 세작들이 싹 돌아갔으니 천마가 죽진 않아도 패배한 거로 본 것 같은데?"
혁련무강은 독고휘와 그 일행이 싸우러 오는 게 아니란 걸 알게 되자 신교로 오는 길에 깔아 둔 부하들을 철수시켰다.
오면 맞이하라고 보낸 거였는데, 안 온다니 둘 필요가 있나? 하지만 그걸 본 무림맹은 다르게 판단한 듯했다.
팽소운의 말에 독고휘는 한숨을 쉬었다.
'그게 됐으면 진작 했겠지, 그리고 난 걔랑 크게 싸우고 싶진 않다고.... 절대자의 고독이란 걸 알긴 하는 거냐?!'
팽소운의 말은 이어졌다.
그도 상당히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진짜 독고휘가 가서 싸웠으면 말이라도 하기 편하지, 그게 아닌 걸 알고 있지 않은가.
"아마 마교를 싹 밀자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은데.... 사도련 놈들도 정파를 좋아하진 않아도 마교보다는 덜 미워하잖수."
자신은 계속 여기 있었으니, 아마 영의이리라.
'혁련무강 녀석에게도 요리를 갖다 줬단 말인가...! 그보다, 뭔 짓을 했길래 싸울 때 말곤 침착한 그놈이랑 부딪친 거지?'
"하아... 내가 하산을 해야 하나...."
"그래야 하지, 않겠수...? 그, 옛날처럼 한바탕해야...."
"하아아아...."
독고휘는 영의 때문에 은거를 풀게 생겼다.
자신이 하지도 않은 천마와의 생사결에 대해 해명을 하러....
제38화
(13)
마공학자, 베키.
그녀의 어린 시절에 대해선 알려진 바가 없으나 평소의 언행이나 행동 양식을 보았을 때 상당히 거칠게 자라 온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도대체 어떤 정신 나간 인물이 그녀를 키워 낸 건지 몰라도 17세에 상당한 지식과 경험을 가지고 마법계에 나타나 주목받는 신인이 되었다.
그리고 불과 1년뒤인 18세에 마법 협회의 정회원이 되며 놀라운 연구 성과를 보여 줬다.
그러나!
-고리타분하고, 재미없어.... 나 안 해.
그녀는 정통파 연구에 대해 재미없다며 거부감을 보였고, 자신만의 길을 가겠다고 하며 돌연 마공학을 하겠다고 선언.
마법은 보조적인 역할을 하고, 기계 자체의 힘이 주가 되어 움직이도록 하는 시스템을 만들겠다고 선포했다.
-난 이미 연을 다 끊었어! 나중에 손대려고 하는 놈은 손목을 쇳덩이로 바꿔 주마!
당시 학계는 신기하긴 하지만 별로 쓸모가 없어 보이는 것만 만드는 그녀를 무시하듯 방치했으나, 이내 결과물이 나아지는게 눈에 보이기 시작하자 금지령을 내렸다.
-뭐? 금지? 다 엿이나 까 잡숴! 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거야! 영감들이 내 부모야?
...라는 말과 함께 도시에서 뛰쳐나가 황야에 거처를 만들고 틀어박혀 연구를 시작했다.
그렇게 그녀가 만든 몇몇 장치는 비싼 값에 팔려 나가 그녀의 자금이 되어 주었고, 하필 그게 또 법적으로 어긋나는 부분은 없었다.
'개인적으로 연구한 마법의 산물은 모두 연구자의 소유가 되며, 그것을 어떻게 처분할지는 연구자의 몫이다.'
라는 영세 마법사들을 지원하기 위한 법이 있었기 때문에 그녀를 막을 명분이 없었다.
그렇게 혼자서 마음껏 연구를 하던 베키. 그리고 그녀는 지금....
'...아, 힘 빠져.... 밥을 굶어서 그런가....'
연구실에 쓰러져 있었다.
그것도 영양실조 및 탈진등의 상당히 독특한 원인으로.
'지난 며칠... 아니, 몇 주인가? 아무튼, 물은 제때 마셨는데... 식사는 안 했네.... 하.'
베키는 책상에 엎어져 기운 없는 숨을 내쉬며 후회했다.
진작 뭐라도 먹으면서 할걸....
'사람 몸은 몇 주 정도 굶어도 안 죽는 건 알았지만... 뭔가 먹을 힘이 없는 건 몰랐는데....'
몸에 힘이 안 들어가는 베키.
그녀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다.
너무 연구에 미쳐 살다 보니 이렇게 된 게 아닐까...? 라는 후회도 하고.
만약 자기 몸에서 힘이 솟아난다면 당장 연구실 구석에 있는 오래된 빵부터 먹고, 사람 사는 곳에서 제대로 된 식사도 하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좀 힘들 것 같았다. 몸에 힘이 하나도 안 들어갔다.
하필 쓰러지기 전에 집의 방범 장치를 작동시켜 버려 누군가 들어오려면 한세월은 걸릴 것이었기 때문이다.
'천재 마공학자 베키 님의 마지막이 겨우 이런 건가....'
베키는 자신의 마지막이 너무 초라하다고 생각하며, 조금이나마 편하게 있기 위해 눈을 감았다.
쾅!
'...?'
몸에 힘은 없어도 청력은 살아있었기에, 그녀는 확실히 작게나마 뭔가 부서지는 소리를 들었다.
베키는 그 소리에 눈을 떴다가 문득 아까의 남자가 생각났다.
'바깥에 있던 녀석이 방범 장치를 건드렸나...? 미안, 괜히 고생하게 만들었네....'
다시 눈을 감으려던 순간, 또 소리가 울렸다.
쾅! 쾅!
부서지는 소리는 멈추지 않고, 점점 더 크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부서지는 소리가 점점 더 커졌고, 이내 문 앞에서 소리가 멈췄다.
터엉!
문이 박살 나며 누군가 들어왔다.
"...뭐야? 시체?"
그리고 그때 방금 전에 들은 듯한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응? 저걸... 다 지나서 왔다고...?'
이게 죽기 직전이라 헛것을 보나...?
쓰러지기 직전에 봤던 녀석이 눈앞에 있는 것 같네.... 저걸 뚫을 사람은 없을 줄 알았는데....
그리고 머리에 은색의 뭔가를 뒤집어쓴 남자는 베키에게 크게 소리쳤다.
"야, 이 미친년아! 집에 뭘 붙이고 사는 거야! 그리고, 사람 빡치게 주문시켜 놓고 거절하지 말라고!"
영의는 화가 잔뜩 난 목소리로 그렇게 외쳤다.
물론 주문한 줄 모르는 베키였지만, 영의에겐 사소한 문제였다.
'주문하고 잠수 타는 거? 좋다, 이거야. 거절? 그건 좀 빡쳤는데....'
"집 안을 이따위로 만들어 놓고 거기에 사람이 들어오게 하다니, 그건 좀 너무한 것 같지 않아? 응??"
영의는 베키의 방범 장치를 떠올리니 다시 화가 치밀어 올랐다.
갑작스럽게 밑으로 꺼지는 바닥이나 걸려 넘어지라는 듯 벽에서 반대 벽으로 튀어나오는 철봉은 애교였다.
최루가스, 아프진 않지만 짜증 나는 부드러운 공, 그리고 가끔 사람 놀라게 하려는 용도로 만든 것만 같은 인형이 튀어나오는 장치까지....
아, 물론 무기가 나오는 것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다 몸에 닿기 전에 때려 부쉈지만, 저렇게 사람 놀리려는 듯한 장치는 피하기 애매하게 나와서 계속 걸렸던 영의.
"...하아, 내가 지금 반시체 앞에 두고 뭐 하는 거냐."
잠깐 분노와 스트레스로 인해 그렇게 말했지만 이내 베키의 상태가 영 좋지 못하자 영의는 화낼 마음이 사라졌다.
'무슨 후원단체 광고에나 나올법한 제 3세계 애들도 아니고....'
얼마나 밥을 굶은 건지 깡마른 팔에, 씻지도 정리하지도 않은 듯 떡 지고 지저분한 머리까지.
"너 공학자 맞아...? 거지 아니지?"
"...꺼, 어어...."
영의의 말에 베키는 갈라지는 목소리로 뭔가 말하려 했다.
하지만 몸에 힘이 안 들어가서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상태의 그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에휴, 그래... 뭐라도 먹고 해야지. 씹을 순... 있겠지?"
영의는 반신반의하면서도 보온 박스를 열어 안에 든 햄버거 봉투를 꺼내었다.
음식 냄새가 퍼지자, 베키도 거기에 반응한 건지 움찔거렸다.
"어어...억...!"
움찔거리며 일어나려는 베키.
하지만 몸에 힘이 없어 일어나지 못했고, 영의는 베키의 상태를 보고 그녀를 일으켜 준 뒤 주변에 칼로 쓸 만한 걸 찾기 시작했다.
'입도 못 벌리겠구만. 병원에서 오늘내일하는 환자도 저것보단 생기가 넘치겠어.'
이내 다른 탁자 위에 있는 좀 오래된 듯한 식기구를 발견한 영의.
"먼지가...."
낡기보다는 먼지가 엄청 앉은 식기에 눈살을 찌푸렸으나, 탁자 위에 물이 받아진 양동이도 있는 걸 보고는 안심했다.
"좀 씻어서 쓰면...."
하지만 물도 상태가 영 좋지 않았다.
주변에 녹조가 조금씩 끼어 있었고, 그리 맑아 보이지도 않았다.
"...씻을 때 쓰는 물인가 보네...."
'설마 저걸 마시진... 않겠지?'
절대 저 물이 마시는 용도는 아닐 거라고 생각하고 싶었던 영의는 애써 양동이 옆에 있는 컵을 무시하고는 식기를 적당히 씻었다.
'식중독...에 걸리더라도, 원망하진 마라. 화장실에서 고통받는 게 죽어서 고통이 없는 거보단 낫잖아?'
그렇게 물에 씻어 내자 나름의 광채를 뿜어내는 은제 나이프와 포크를 가지고 베키에게 돌아간 영의.
그녀는 눈으로 영의의 움직임을 계속 좇고 있었기에 그가 딱히 해를 끼칠 생각이 없다는 걸 알았다.
"...자, 한 입 해라."
햄버거를 썰어 그녀의 입에 넣어 주는 영의.
그러나 베키는 영 힘이 나지 않았다.
사실 영의가 도착했을 때까지만 해도 나름 버틸 만했는데, 어느 순간 몸에 힘이 탁 풀린 것.
"으어...어...."
"...하아."
파직-
영의는 한숨을 내쉬며 몸에 뇌기를 일으켜 베키의 턱을 자극했다.
그러자 입을 바로 꽉 다물더니 반쯤 씹힌 햄버거를 바로 꿀꺽 삼켜 버린 베키.
"...?!"
베키는 깜짝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영의를 바라보았다.
이 남자가 방금 대체 뭘 한 거지?!
영의로서는 간단하게 인간의 본능을 자극한 것이었다.
사람은 고통스러워할 때 이와 눈을 꽉 물게 되니까.
게다가 상당히 굶은 사람에게 음식만 입에 넣어 주면 몸이 알아서 살기 위해 먹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추측은 성공적으로 맞아들어간 듯했다.
"자, 다시 입 벌려."
"...으어어."
물론 거절할 생각도 없었고, 지금의 몸 상태로는 거절도 못 했겠지만 베키는 눈을 빛내며 영의를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방금 그건 마법도 아닌데, 어떻게 내 몸을 움직이게 한 거지? 굉장해!'
지금껏 마공학에만 관심이 있었지, 다른 부분에 대해선 영 젬병이었기에 새로운 것을 발견하자 눈을 반짝이기 시작했다.
'더, 더 많은 표본이 필요해!'
이내 실험을 하는 마음으로 영의의 햄버거를 받아먹는 베키.
마치 모이를 주는 어미 새의 마음을 가지자는 생각으로 햄버거를 입에 친절히 넣어 주는 영의였다.
'...그래, 조만간 집에 병아리도 한 마리 키울 건데. 그냥 예행연습한다 치자.'
햄버거를 반쯤 먹어 치웠을 때, 베키는 몸에 기운이 어느 정도 돌아왔다.
이제 영양분이 들어온다는 걸 확인한 몸이 생존용 에너지 절약 상태에서 다시 활동 상태로 통제권을 돌려준 것.
하지만 베키는 계속 가만히 받아먹었다. 계속 신기했기 때문이다.
파직-
냠냠.
파직-
냠냠냠.
영의는 이 작업을 계속 기계적으로 반복했다.
그러던 중, 그는 시야 한구석을 바라보았다.
[배달 제한 시간 : 00:46:37]
'...그래, 진짜 다 먹이라 이거구나...? 어쩐지 한 시간을 주더라. 나 참....'
죽을 사람 구하기 위한 마음 반, 그리고 배달을 위한 마음 반으로 베키에게 모이를... 아니, 밥을 먹이는 영의.
이내 베키가 햄버거를 다 먹어 치우자 영의는 손을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아, 이제 움직일 수 있는 거 다 알아. 나머진 알아서 먹어."
영의가 다 알고 있다는 눈빛으로 베키를 보자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던 베키는 혀를 차며 손을 들어 올렸다.
"...쯧."
이내 감자튀김에 손을 뻗어 하나씩 집어 먹는 베키.
햄버거도 상당히 맛있었지만, 그녀는 맛보다는 생존에 중점을 두고 먹었다.
사실 입에 닿을 시간도 없이 목구멍으로 넘겼던 거지만, 이 작고 노란 조각들은 직접 맛보면서 먹기로 했다.
"다리는 못 움직이겠는데, 혹시 물 갖다 줄 수 있어?"
베키의 정중한 부탁(그녀 기준에선 매우 정중한 거다)에 영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뭐라도 마시면서 해라. 진짜 시체 같네....'
"...그 정도야 뭐."
영의가 승낙하자 베키는 그 뒤쪽, 식기가 놓여 있던 탁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방금 전에 봤지? 아, 그러고 보니 식기도 씻었구나. 그거 갖다 줘. 그게 내 물이야."
"...뭐?"
영의는 지금 잘못 들었나 싶었다. 녹조가 있고, 맑지도 않고, 냄새까지 나는 물이 네 물이라고?
"...저걸, 마신다고...?"
"응, 수분이란 건 적당할 때 몸에 보충만 하면 되는 거잖아? 배탈 나면... 약이나 먹으면 되는 거고! 빨리 갖다 줘. 나 목도 마르다고."
'역시 사람은 어디 한군데가 망가져야 다른 곳이 발달하는 건가...?'
영의는 그때 다시 한번 깨달았다. 베키, 그녀의 이름 앞에 '더 크레이지'가 괜히 붙은 게 아니라고.
제39화
(14)
영의는 생각보다 심각한 상황에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베키는 공학은... 뭐, 나름 잘하는 걸지 몰라도... 나머지는 사람이 사는 꼴이 아니었다.
-잠은?
"그냥 안 자면 돼! 진짜 피곤하면 몸이 알아서 자거든!"
이라고 답했다.
-밥은?
"그딴 거 필요 없어! 가끔 당분만 머리에 채워 주면 쓰러지진 않아!"
라고 했고,
-설마 물은 저 녹조가 떠 있는 걸 마시는 건 아니지?
"먹고 나서 약 안 먹으면 배탈 나지만, 먹고 약도 챙겨 먹으니까 괜찮아!"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씻는 건?
"사람은 안 씻어도 안 죽어!"
영의도 나름 남자라서 귀찮음을 제법 타고 무인처럼 살았기에 자취방 청소도 대충 하고, 수련 후 땀에 절었을 때 씻는 걸 조금 나중으로 미룬 적이 종종 있었다.
하지만 눈앞의 베키란 여자는... 그냥 야생인 아닌가. 아니, 야생인도 먹고 자는 문제는 챙긴다.
"넌 올바른 생활 습관이란 게 필요해. 그것도 아주 많이."
영의의 말에 베키는 감자튀김을 오물거리며 대답했다.
"하지만 필요하지 않은 일에 시간을 낭비하긴 싫은걸...? 아, 이건 맛있으니까 챙겨 먹을지도."
감자튀김이 마음에 든 듯 계속해서 집어 먹는 베키.
영의는 그런 그녀에게 커피까지 내밀었다.
"자, 이것도 마시면서."
'그냥 빨리 줄 거 주고 받을 거 받고 손절을 해야겠어....'
"오, 고마워. 근데 넌 어떻게 들어온 거야? 우리 집 방범 장치, 내가 설계해서 어지간하면 안 뚫리는데."
베키는 커피를 받아 들고는 그렇게 말했고, 영의는 그 말에 다시 한번 깊은 빡침이 솟아올랐다.
"그... 거지같이 사람 넘어지게 하고, 짜증 나게 하는 함정이... 계산이었냐...?"
"응! 그래도 다치는 용도는 별로 없어! 다치면 배상해야 하니까!"
영의가 다시 내면의 분노를 다스릴 때, 베키는 커피를 한 모금 빨아 먹고는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써...! 브에에...."
혀를 내밀며 표정을 찡그리는 베키.
그러나 이내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한 모금을 더 마셨다.
"근데... 묘하게 중독되네...."
늘 피로감과 영양부족으로 혹사당한 베키의 몸은 커피에 든 카페인, 그 각성 효과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쭈우우욱.
쭈우우우욱.
빠르게 커피를 흡입하기 시작하는 베키.
그녀의 미각은 커피를 조금 꺼려 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뇌는 미각의 의견을 무시하고 커피를 받아들였다.
쪼르르르륵.
어느새 다 빨아 먹어 버린 건지 빨대가 달라진 소리로 빈 잔에 대한 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그 소리에 의식을 다시 베키 쪽으로 돌린 영의.
"저기, 이거 더 없어? 먹으니까 뭔가 쌩쌩해지는데!"
[배달 완료. 보상을 수령할 수 있습니다.]
"없어. 그보다, 이제 난 간다?"
영의는 보상을 포기하기로 했다.
아니, 뭘 주든 간에 받기 싫었다.
받으면 이 정신 나간 여자랑 더 있어야 한다는 뜻이니까.
그렇게 영의가 밖으로 나가려던 순간, 베키가 책상에서 일어서서 영의를 잡았다.
"잠깐, 떠나기 전에 몇 개만 말해 주고 가라! 응?"
"...또 뭔데?"
물론 베키는 맛있는 식사라는 것과는 동떨어진 삶을 살고 있었기에 살이란 게 거의 없었고, 가벼워서 한 팔로도 뿌리칠 수 있었지만 영의는 그러진 않았다.
육체 단련이란 걸 해 본 적도 없는 사람에게 함부로 힘을 쓸 순 없었기 때문이다.
"저기, 아까 전에 내 턱을 막 건드려서 음식 씹게 한 거랑, 또... 그, 저거 뭐야? 그 누런 음식이랑! 또...."
이것저것 빠르게 말을 내뱉는 베키. 그녀는 그렇게 빠르게 말을 하다가 갑자기 떠오른 듯 손뼉을 짝 하고 쳤다.
"그래, 차라도 내올게! 차 한잔하면서 이야기하자!"
"아니, 난...."
"조금만 기다려, 금방 준비돼!"
영의가 뭐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베키는 곧바로 방 안의 어딘가로 뛰어갔고, 영의는 말할 타이밍을 놓쳤다.
'진짜 처음부터 끝까지 마이페이스네....'
그리고 이내 차가 든 것 같은 작은 양철통을 들고 나타난 베키.
그녀는 먼지가 뽀얗게 앉은 양철통을 영의에게 보여 주었다.
"아리안델 직수입 고급 차야! 뭐... 오랫동안 안 열긴 했지만. 한번 볼래?"
베키는 그렇게 말하며 양철통의 뚜껑을 열었고, 안에 있는 향기롭고 또 고급스러운 찻잎은....
"...썩어 있는데?"
관리를 어떻게 한 건진 몰라도 이미 안에서 좋게 말하면 발효, 나쁘게 말하면 썩어서 반쯤 부엽토가 된 찻잎들이 보였다.
차는 적당히 보관해도 잘 변질하지 않는다는 걸 생각해 보면 이게 그만큼 오래됐거나 진짜 이상하게 보관했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그리고 안에 물 같은 게 있는 걸 보면... 명백히 후자일 것이다.
"아하하, 아하...하... 혹시 물 좋아해?"
베키는 이미 찐하게 우러난 찻물... 아니, 썩은 물에 적셔진 찻잎이 든 통을 옆으로 치우면서 컵을 들어 올렸고, 아까 그 물을 보았던 영의였기에 고개를 저었다.
"...물은 좋아하는데, 그 물은 아니야. 그게 어떻게 물이야?"
"아, 왜! 마실 수 있으면 물이야! 봐!"
그렇게 말하며 대수롭지 않게 컵으로 물을 떠서 입으로 들이켜는 베키.
"멀쩡하지? 마실 수 있어!"
"...그렇다기엔 얼굴이 조금 아닌데, 표정 관리라도 하고 그런 소리를 해라."
물은 거칠 것 없이 당당하게 쭉 들이켰으나 그걸 먹은 그녀의 표정은 당당하지 못했다.
뭔가 구토감을 참는 듯 힘이 잔뜩 들어간 입 주변과 묘하게 눈물이 글썽이는 눈.
아무리 봐도 멀쩡하지 않은 듯했다.
"괜찮아, 약 먹으면 돼...."
베키는 그렇게 말하며 책상으로 다가갔고, 서랍을 열어 뭔가를 찾기 시작했다.
"...어?"
서랍을 더 다급히 뒤지기 시작하는 베키.
"...어어어??"
"이번엔 또 뭔데?"
영의는 뭔가 짐작이 가면서도 설마... 싶어서 물었다.
배탈은 약으로 막으면 되니까 걱정 없어! 라고 소리치는 여자가 설마 그 약이 떨어지게 놔둘 리가....
"...약이, 없어...! 사 놓는 걸 까먹었나 봐.... 히잉...."
"가지가지 한다, 진짜...."
영의는 마른세수를 하며 진짜 여러 가지로 사람 피곤하게 하는 진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뭘 어쩌겠는가. 그의 시야에는 이런 문구가 떠 있었으니.
[Alrim이 알립니다. 한 지역의 배달을 완료하기 전까지 다른 배달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이중 계약을 막기 위한 하나의 방법입니다.]
'...알림아, 너 나 싫어하냐? 이런 애랑 날 붙여 놓게...?'
[Alrim이 알립니다. 보상을 수령해 주세요.]
'...싫어하는구나? 알겠다.'
그렇게 알림과의 약간의 다툼을 끝내고 베키를 바라보자 베키는 약간 울상을 짓고 있었다.
"...괜찮아. 나중에... 화장실에 좀 오래 있으면 되겠지...! 아무튼, 이야기 좀... 해 줄래?"
영의는 이쯤 되면 베키가 오히려 불쌍해졌다.
대체 뭘 어떻게 살았길래 챙겨 주는 이 없이 이렇게 산단 말인가.
아니, 그중의 대부분은 본인이 선택한 거겠지만....
"어휴... 그래. 일단은 말이지...."
베키의 턱을 강제로 다물게 해 음식을 씹게 한 것과 감자튀김에 대해 설명해 주는 영의.
베키는 그 모든 걸 눈을 빛내며 받아 적기 시작했다.
"좋아, 좋아... 사람을 아프게 해서 입을 다물게 했다는 거지...? 근데, 단순 고통과는 달랐어.... 몸에 자연스럽게 명령을 내리는 듯한.... 너, 혹시 주술사야?"
"...아니야."
"음, 아니야? 근데 어떻게 몸을 움직이게 한 거지...?"
베키는 빠르게 뭔가를 궁리하는 듯했고, 영의는 조금이라도 이 시간을 줄이기 위해 대답해 주었다.
"사람 몸이 반사적으로 움직이는 걸 이용한 거지. 그보다, 왜 질문이 자꾸 늘어나는 건데?"
"아, 미안미안. 음... 반사적이라... 나중에 연구 소재로 삼아 봐야겠다! 아무튼, 음식은 대충 알았어! 감자를 기름에 튀기란 거지? 나중에 해 볼게!"
'...제발 집은 태워 먹지 마라....'
이젠 베키의 미래까지 걱정되기 시작한 영의.
둘이 만난 지는 불과 한 시간도 안 됐지만, 베키가 뭔가를 하려고 하면 일단 말리고 생각해야 한다는 건 알 것 같았다.
"아, 진짜 궁금한 게 있는데! 너 여기 올 때 방범 장치 다 부순 거야?"
"어어, 으음...."
물론 다 부수면서 오긴 했다.
그땐 베키에 대한 짜증과 그걸 굳이 배달을 해야 한단 분노가 합쳐진 빡침이 이중이었으니까.
근데 여기서 자기가 다 부쉈다고 하면 아마... 배상을 해야 하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던 그때, 베키가 웃었다.
"끼히햐핫! 내 방범 장치 다 부숴 먹었구나? 괜찮아! 더 발전시키면 되는 거지! 정답을 미리 알면 재미없으니까 내가 보고 한번 개선해 볼게! 다음에도 부탁해!"
뭔가 불길한 소리를 한 것 같았지만 어쨌든 방범 장치와 집 안 일부를 조금 부순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것 같아 영의는 안도했다.
"그리고 너 처음 봤을 때 생각한 건데, 바깥에 있는 흰색 저거! 저거 마도구야? 막 마력이 감지되는데?"
베키는 영의에게 그렇게 말하며 한쪽 벽을 가리켰고, 그 벽에는 나무판자의 위에 바깥 풍경이 비쳐 재생되고 있었다.
"...감시카메라?"
"멋지지! 내가 만든 보안 체계야! 이름은 멀리 보는 눈! 영상 기록 마법 수식을 길게 늘여서 밧줄에 감고, 그걸 여기 벽에 있는 판자에 연결한 거야!"
다소 원시적이고, 마법적이지만... 분명 감시카메라였다.
그리고 거기에 나오는 영상 하나에 비치는 베키의 집 앞 모습.
거기엔 은은히 빛나는 영의의 바이크가 놓여 있었다.
"원래 마법 기반이라 마력이 있는 건 빛이 조금 나거든? 근데 저건 빛이 제법 잘 나잖아! 내가 저걸 너한테 물어보려다가 힘 빠져서 쓰러진 거야!"
한편 계속 설명하기 시작하는 베키.
자신의 발명품을 소개하게 되자 신이 난 듯 마구 재잘거렸다.
"그리고, 내가 만든 게 좀 많은데...!"
베키가 뭔가를 더 설명하려 하자 영의는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비록 거지꼴로 살고, 살림도 안 하고, 그 이전에 자기 몸도 안 돌보는 베키.
그러나 거기에 쓸 열정과 시간과 에너지를 뭔가에 쓰고 있고, 그게 그녀의 직업대로 마공학이란 걸 알게 되자 영의는 뭔가 하나 가능할 것 같았다.
"잠깐. 그럼 혹시... 내 물건 좀 봐줄 수 있어?"
"뭔데? 설마 저거야?!"
베키는 흥분한 기색으로 바깥 풍경에 보이는 영의의 마정석 바이크를 가리켰다.
"...저거야."
"야호! 새로운 분해다! 조립이다!"
"분해하지 마!"
베키는 신이 나서 환호했고, 영의는 소리를 질렀다.
* * *
한편, 마교에서는....
"...최고숙수님?"
"이게 아니다, 이게 아니야!!"
바닥에 닭을 내팽개치며 머리를 쥐어뜯.... 그러나 쥐어뜯을 머리가 없었던 민머리 노인, 장화관. 그는 주먹을 꽉 쥐며 비통해했다.
"하아... 대체 이걸 어떻게 재현을 해야 할지...."
성화제의 날, 모든 교인들은 그날의 일을 멈추고 축제를 벌이며 성화와 천마를 찬양하며 즐기고 논다.
본래엔 무인들만 살판나는 날이었으나, 혁련무강이 천마 위에 오르며 내린 명이 있었기에 모든 이들이 즐기게 된 것이었다.
-평생 쇠만 두드려 온 70세의 장인이 있다. 그런 장인을 무공 배운 지 2년 차인 수련생이 이겼다고 하자. 그럼 장인이 수련생을 떠받들어야 하나?
라고 말하며, 혁련무강은 강자존의 법칙을 조금 바꾸었다.
-강자존도 좋다, 하지만! 각자에겐 각자의 분야가 있는 법! 숙수는 요리로, 대장장이는 무기로! 무인은 당연히 힘으로 각자의 강함을 증명해라! 어디 가서 숙수를 때려눕혔다고 대접받을 멍청한 생각은 하지도 말고!
그렇게 교인들은 각자의 분야에 대해 나름의 존중을 해 주었고, 덕분에 성화제에서 일반 교인들도 눈치를 안 보고 즐기게 된 것이다.
그리고 성화제의 저녁때, 첫 재현 시도로 만들어 낸 양념치킨을 먹어 본 혁련무강.
그는 닭 다리를 들고 기쁘게 한 입 베어 물고는, 딱딱한 표정으로 닭 다리를 모두 먹어 치웠다.
-...그래... 뭐, 잘...했네. 노력은 잘했어.
혁련무강의 그런 모습을 본 장화관은 절망했다. 잘 만들진 못했다.
하루 만에 어떻게 재현을 하겠나?
그러나... 차라리 못 만들었다고 화를 내시든가, 아니면 그냥 침묵하시지.
애써서 칭찬하려고 하시는 모습을 보니 더 절망스러웠다.
그렇게 대외적 근신을 명받아 주방에 가끔 찾아오는 연화와 주방에서 오늘도 닭을 쪼개고 밀가루를 묻혀 튀겨 보며 답을 찾아보려 하는 장화관.
그들은 과연 황금의 치킨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인가!
제40화
(15)
바이크를 끌고 베키의 연구실로 들어온 영의.
물론 방범 장치는 나가는 길에 베키가 꺼 주었다.
대부분 박살이 나긴 했지만, 그래도 넘어지게끔 하는 트랩이나 최루가스는 여전했기 때문.
"...자. 어때 보여?"
영의는 그래도 나름 프로겠지 싶어서 바이크를 베키에게 내밀었고, 베키는 빠르게 바이크에 다가가...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스으읍-- 하아... 어디 보자, 예쁜아... 이 언니한테 한번 몸을 맡겨 보지 않을래...?"
"...."
바이크의 냄새를 맡으며 간간이 이곳저곳을 더듬기도 하고, 또 살짝 맛보기까지 하는 베키.
영의는 그 모습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뭐라고 하려고 했으나 베키가 갑자기 벌떡 일어섰다.
"이거, 하늘 나는 용도구나? 그것도 자체적 비행이 아니라 주변에 역장을 생성해서 역장째로 움직이게 하는 거."
"...어떻게 안 거야? 그... 향 맡고, 더듬고... 하는 그런 짓으로."
영의는 대체 뭐 어떻게 하면 저런 변태스러운 행동으로 바이크에 대한 분석을 끝낼 수 있나 싶어 말했지만, 베키는 그 말에 화를 냈다.
"그런 짓이라니! 우리 애기와 나 사이의 교감이야! 애기가 나한테 말해 줬다고!"
"...뭐라고 말하디?"
이쯤 되면 미친 소리도 재능이구나 싶어 흥미로웠던 영의는 조금 더 들어 보자 싶어 물었고, 베키는 바이크를 계속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얘가 말이지... '언니, 저는 하늘을 날고 싶어요.... 하지만 허리가 아파서 못 날겠어요....'라고 하는 거야!"
"...그래, 좀 더 해 봐. 어디까지 가나 보자."
"그래서 보니까? 짜잔! 이 기계... 음, 이름이?"
베키는 조금 더 설명을 하려다가 문득 바이크에 대해 듣지 못해 영의에게 물었다.
"바이크. 왜, 그건 말 안 해 주디?"
"성은?"
"...그런 게 필요해?"
영의의 말에 베키는 바이크를 갑자기 껴안으며 말했다.
"미안해, 바이크... 네 아빠는 널 버리려나 봐. 자신의 이름을 물려주기 싫대.... 이 언니랑 살지 않을래?"
영의는 그 모습을 보며 진짜 '더 크레이지'라는 말이 왜 붙었는지를 다시금 실감했다.
천마는 마 중의 마, 제일 높으니 하늘의 마라서 천마고, 검황은 검을 감탄이 나오게 잘 써서 검황이고.
그리고... 저건 미친년 중의 미친년이라 더 크레이지인가....
그렇게 바이크를 껴안던 베키는 껴안던 걸 멈추고는, 책상 서랍을 다시 뒤지기 시작했다.
"...아, 찾았다!"
그리고 뭔가... 공구 벨트 같은 것을 꺼내더니 허리에 감는 베키.
차르륵-
"아차, 살 빠졌지.... 아하하."
물론 여성들이 들으면 적대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할 것 같은 말이었다.
하지만 밥이란 걸 안 먹고 물도 반쯤 썩은 걸 먹으면서 기절하기 직전까지 과로하다가 쓰러져 잠드는 생활을 하는 베키였다.
저런 생활을 하면서 살이 찐다면 그건 병을 한번 의심해 봐야 할 것이다.
이내 벨트를 어깨에 걸치는 베키. 그녀는 벨트에서 넓적한 칼과 망치를 꺼냈다.
"설마 그걸...."
"죽어라!!"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바이크를 자식처럼 아끼더니, 이제는 눈이 뒤집힌 것처럼 칼을 바이크에 박아 넣는 베키.
그럼에도 칼은 바이크의 연결부에 정확히 박힌 것을 보니 프로는 프로였다.
"...미친년...."
베키는 싱글벙글 웃으면서 바이크를 뜯고 그 안의 구조를 살피기 시작했다.
모터로 이루어진 것보다는 덜 복잡했지만, 공학이나 기계에 대해서는 영 무지한 영의가 보기엔 그게 그거였다.
"흐흠~ 으흠흠~ 우와! 전마석이네! 이 정도를 두 개나! 너 어어어엄청 부자구나!"
이젠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면서 내부를 완전히 뜯어낸 베키.
그녀는 내부의 마정석을 보고는 감탄했다.
"저기, 부자님! 이거 보여?"
"...?"
베키는 바이크 내부에 든 두 개의 마정석 사이의 한 공간을 가리켰다.
혁련무강의 검강에 의해 파손된 부분 근처였다.
"...여기가 뭔데?"
"음, 그러니까 허리 같은 부분이야! 이 바이크란 아이는 두 개의 전마석을 동시에 이용해서 움직이는 구조거든? 그래서 규격이 거의 똑같은 두 개를 동시에 써야 한단 말이야. 두 개를 동일하게 써먹는 구조니까!"
"...모르겠는데."
"아우~~! 이래서 부자 놈들은!"
영의가 설명을 못 알아듣자 베키는 머리를 마구 긁었다.
비듬이 흩날렸으나, 베키는 개의치 않는 듯했다.
"그러니까! 둘 다 동시에 쓴다고! 그래서 중요한 게 이 두 개를 연결해 주는 허리 부분이야! 여기가 고장이 났다고!!"
성질을 마구 내며 손에 든 망치를 휘두르며 소리치는 베키.
물론 진짜 휘둘러도 맞아 줄 영의가 아니었지만 일반인이 옆에 있었으면 위협을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고칠 수 있겠어?"
"하, 고칠 수 있냐고? 이 베키 님을 뭘로 보고! 더 끝내주는 애로 탄생시켜 줄게!"
베키는 그렇게 말하며 영의를 바깥으로 쫓아냈다.
"꺼져! 여자아이는 섬세한 법이야! 수술 중엔 아빠라도 못 들어와!"
"...진짜 미친년인가."
그렇게 문을 닫자, 영의는 베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흐흐흐... 우리 귀여운 바이크... 언니랑 단둘이네? 조금 더 예뻐져 볼까요? 히히히히...."
영의는 못 들은 거로 하기로 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최대한 기도했다.
'제발 저 돌아가면 옥션에 팔려고 맡겨 둔 금화 팔렸다고 해 주세요.... 저거 말고 새 바이크 뽑게....'
* * *
그렇게 영의가 기도를 하고 있을 때, 무림에서는....
무림맹. 대회의실.
구파일방을 대표해서 온 인물들과 오대세가의 가주들, 그리고 몇몇 영향력 큰 무인들이 모여 있었다.
"크흠... 본 맹주가 우선 먼저 말을 꺼내도 되겠소?"
무림맹의 맹주, 남궁선이 헛기침을 하며 먼저 안건을 꺼내려 했지만....
"응, 안 돼. 일단 더 중요한 일부터 해야지."
그를 가로막는 한 남자가 있었다.
이 자리에서 유일하게... 아니, 유이하게 그에게 막 대해도 되는 남자.
사도련주 패왕 갈성천이었다.
"...허허, 갈 시주. 어찌 그리 성격이 급하신지요."
맹주의 권위를 무시할 수 있는 또 다른 사람인 소림의 방장, 신승 혜윤대사가 웃으면서 말했다.
"...땡중, 넌 몰랐냐? 말코 놈이랑... 덩치 놈이랑 너 따돌리고 지들끼리 노는 거?"
갈성천의 말에 눈에 보이게 동요하진 않았지만 분위기가 어수선해지는 내부.
대체 누가 소림의 방장에게 저런 식으로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혜윤대사는 인자하게 웃었다.
"허허... 소승은 속세의 일에 대해선 모르는지라.... 아무튼, 우리가 모인 이유에 대해서 이야기를 좀...."
혜윤대사가 일단 분위기를 진정시키고 회의의 목적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려고 했으나, 갈성천이 더는 못 참겠다는 듯 일어나서 외쳤다.
"아, 다 집어치우고! 검황, 권왕, 태극검! 그 셋이 모였었고, 그 와중에 마교 놈들 본거지에선 뇌전이 막 튀어 올랐고! 그리고 마교의 쥐새끼들이 자기네들 집으로 돌아갔다! 이거만 보고도 답이 안 나오냐!"
갈성천의 외침에 남궁선은 탁자 밑으로 작게 소리 없는 박수를 쳤다.
'내가 할 설명 대신 다 해 줬네....'
"...허, 허, 허... 그건 얘기를 못 들었소만...?"
조금 전처럼 인자하게 웃고 있었으나 목소리는 웃고 있지 않은 혜윤대사.
그는 정말로 바깥소식을 몰랐으나 방금 갈성천의 말로 나름의 상황이 정리되었다.
'나만 빼고 셋이 모여서 마교에 갔다고...? 그 와중에 재미는 독고 시주 혼자서 다 보고...?'
염주를 손에서 굴리며 내면의 번뇌를 다스리기 시작한 혜윤대사.
그리고 그의 모습에 주변인들이 긴장했다.
"...아무튼, 이제 어찌하면 좋겠소? 도우들, 한번 말해 보시오."
무당파 장문인, 운성은 그리 말하며 속으로는 사형을 욕하고 있었다.
'운광 사형, 그런 일이 있었으면 와서 말을 좀 해 주지.... 저한테도 굳이 거짓말을 하셔야 했습니까....'
운광은 무당파로 돌아가서 사실대로 말했다.
진짜로 옛날이야기나 하면서 고기 좀... 먹고 마셨다고.
사실, 술을 마셨다고 말하면 안 되지만 운광과 독대해서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운성은 넘어갔다.
그래, 마시면 안 되는 술을 마셨고, 또 고기를 먹어서 화식도 했으니까 나름 진정성 있다고 생각해 눈감아 주었다.
사실, 그도 젊은 시절 운광을 따라 강호행을 할 때 한두 개씩 얻어먹고는 했다.
'하지만 사형, 마교에 가서 생사결을 내고 왔다고는 한 적 없지 않습니까.... 차라리 원시천존께 제사를 올릴 때 고기를 구워서 올리십시오.... 그게 차라리 덜 문제입니다....'
그런 내색을 하나도 하지 않고 회의를 진행하는 운성.
수많은 의견들이 오갔고, 갈성혁은 뭔 의견을 내든 간에 다 무시하고 자신도 마교로 가려고 했다.
그리고 회의장 내부의 의견도 마교 토벌 쪽으로 집중되는 듯했다.
"...좋소, 정파와 사파. 둘 모두가 힘을 합쳐 마교를 토벌한다. 동원 인원의 수는 사파가 더 많지만 고수의 수는 정파가 많으니 협업을 합시다."
"...협업?"
"그렇소. 어차피 전장에서 사파는 사파의 방식대로, 정파는 정파의 방식대로 싸울 것 아니오? 하지만 그 전장에 마교의 고수나 원로들이 난입한다면 혼란이 벌어질 것이니, 고수들 따로. 전장에 서는 무인 따로 나눕시다."
남궁선의 말에 갈성천은 이제야 뭔가 이해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각자 검강 뽑는 녀석들 뽑아다가, 마교 고수를 조지고 다니는 토벌대를 만들자... 이건가?"
"...비슷하오. 사파 측에서는 병력을 주로 맡고, 정파 측에서는 고수들을 맡겠소. 아무래도 정파의 무공은 소수 대 소수의 싸움이 유리하니."
조금 치사하고 더럽다는 소리를 듣는 사파의 무공들이지만, 혼란하고 어지러운 전장 속에서는 그게 더 생존에 도움이 될 것이었다.
그리고 정파의 무공은 일대일 싸움에 최적화되어 있으니 고수들을 찾아다가 대결을 벌이는 데 도움이 될 거고.
"...분배는?"
"전리품에 대해선... 개별적으로 챙길 건 챙기시오. 하지만 사안이 제법 큰 것 같으면... 전공자 우선으로 하고, 나머진 양측의 협의로 챙겨 갑시다."
갈성천은 머릿속으로 나름 계산을 해 보기 시작했다.
고수들을 척살하는 정파들은 마교 고수들이 갖고 있는 비급이나 영약을 챙겨 갈 것이다.
하지만 대외적인 모습을 신경 써야 하니 나름 점잖은 척 분배도 공평하게 한다고 하겠지.
사파는? 부하들이 많으니까 재물이나 자잘한 물품들을 많이 챙길 수 있겠지.
그리고, 자신들은 영약도 원하는 놈 주면 되니까 수량도 딱히 많이 확보할 필요는 없다.
"좋아, 계산 끝났다. 마교 잡고, 나오는 건 절반씩. 그럼 사도련도 하도록 하...."
그렇게 계산을 끝낸 갈성천이 나중에 자신의 제자가 전장에서 살아남는다면 영약 하나쯤 챙겨 주고 후계자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그때 회의장의 문이 벌컥 열렸다.
"누가 감히 회의 중에 기별도 없.... 어...."
남궁선이 이제 갈성천이 하겠다는 말이 끝나기를 기다리다 문이 벌컥 열리자 짜증이 솟구쳐 소리를 치려 했으나 문이 열리고 나타난 사내를 보자 할 말을 잃었다.
"아니, 뭘 봤.... 어...."
갈성천도 남궁선이 굳어 있자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은거하기 전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아니, 더 젊어진 것 같은 독고휘가 서 있었다.
"계속해 봐, 재미있네. 마교가 뭐?"
제4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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