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식 구원자 전형 - ⓒ 외투
여느 때와 같았던 월요일 오전 8시.
전 세계의 인간에게, '지구'가 말을 걸었다.
「주민 여러분, 나쁜 소식을 전하게 되어 유감입니다. 우주에 의해 제 수명이 다 되었다는 판정이 내려졌습니다.
... 지금까지 지구였습니다. 죄송합니다.」
게이트를 통해 등장하는 끔찍한 존재들과
구원자라는 이름으로 선택받은 자들.
인간의 존엄이 짓밟히는 파멸 속에서
전직 게임사 말단 대리, 현직 구원자 박정우-
세상을 구하려는 그의 일대기가 시작된다.
=======================================
프를로그-지구가 죄송하다고 했다
그 일은 갑작스럽게. 아무도 예상치 못한 순간에 벌어졌다.
하지만 누군가 예상했다고 해서. 감히 대비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일이 아니 었다.
월요일 오전 8시.
모두가 놀라서 동작을 멈추고 말았다.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인간이 어느 한 사건에 일제히 집중하는 건 인류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누구는 출근 준비를 위해 막 일어나던 참이었고, 또 누구는 아침 생방송을 위해 카메라 앞에 선 채였다.
더러는 아직 단잠을 자고 있기도 했지만, 너무나 중요한 순간을 맞이하던 사람도 있었다.
이를테면 6년째 잡지 못하고 있던 범인을 우연히 출근 버스에서 만난 형사.
임종 직전의 어느 여자와 그녀의 자식들.
하지만 그 일은... 아니 그 '문구'는 너희의 사정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는 듯이 모두의 눈앞에 나타났다.
그 어떤 것으로도 문구를 가리거나 지울 수 없었다.
마치 컴퓨터에서 특정 프로그램에만 '항상 위로' 설정을 해 둔 것과 같았다.
눈앞의 문구를 손으로 헤치면, 문구가 가려지는 게 아니라 손등과 팔뚝이 그 안으로 스며들듯 사라졌다.
눈을 다른 곳으로 돌리면 문구가 그대로 시선을 따라 쫓아왔다.
이 문구는 허공에 홀로 떠 있었고, 질감은 물론 질량도 없는 것 같았으며. 빛조차 통과시키지 않았다.
물리법칙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은 이 사실을 깨닫자마자 본능적인 공포에 사로잡혔다.
이 문구는 모든 질서의 위에 서 있었다. 그런데 누가 봐도 인간의 언어를 적어내는 중이었다.
「주민 여러분, 나쁜 소식을 전하게 되어 유감입니다. 우주에 의해 제 수명이 다 되었다는 판정이 내려졌습니다. 지금부터 42일에 걸쳐 행성 폐쇄 절차가 진행될 예정이며. 이것은 제 의사와 상관없이 결정됐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실지 모 르겠지만, 저는 더 살고 싶습니다. 앞으로 이어질 안내를 잘 따라 주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지구였습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무엇이 죄송하다는 이야기였을까.
몇몇 인간이 의문을 품었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 일은 바로 시작됐다.
1화. 설문조사 (1)
월요일 오전 8시.
지구가 우주의 결정에 불복하겠다는 뜻을 천명한 시점.
눈앞에 갑자기 나타난 '성명문' 때문에 도로에선 연쇄 추돌 사고가 일어났고, 지하철로 출근 중이 던 사람들도 혼란에 빠졌다.
그러나 우습게도 몇몇 곳에선 사태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서울시 금천구 가산동에 소재한 중소 게임 개발사 'Watcher'.
사무실이 워낙 작은 탓에, 평소에도 사업부에서 부하 직원 갈구는 소리가 개발 부까지 들리던 차다.
이번에도 여지없이 누군가의 목소리가 모든 직원의 귀에 스며들었다.
"이. 이게 무슨 개소리야...?"
당황한 기색이 가득한 음성.
사업본부장 최주열 이사였다.
본부장이라고 해 봐야 밑으로 팀장 하나와 평사원 세 명이 있을 뿐이지만, 그래도 서열상으론 대표이사 바로 밑이다.
작은 회사이다 보니 사업부의 입김이 상당히 셌고, 최주열의 성격도 상당히 까탈스러운 편이라 직원들 사이에서 악명이 자자했다.
뭐만 하면 사업부 팀장을 세워 둔 채 공개적으로 망신을 줬고, 심지어 개발부 인원까지 그의 앞에 불려 가는 일이 허다했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여느 때처럼 '발광 모드'에 들어설 기미를 보이자 다른 직원들은 숨을 죽이는 수밖에 없었다.
우두머리 침팬지가 성을 내면 나머지가 눈을 내리깔고 자세를 낮추듯, 자신의
생존을 위한 본능적인 선택이었다.
물경 '지구'가 말을 걸어오고 있는 상황이었는데도 말이다.
「주민 여러분, 나쁜 소식을 전하게 되어 유감입니다. 우주에 의해 제 수명이 다 되었다는 판정이 내려졌습니다. 지금부터 42일에 걸쳐 행성 폐쇄 절차가 진행될 예정이며. 이것은 제 의사와 상관없이 결정됐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더 살고 싶습니다. 앞으로 이어질 안내를 잘 따라주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지구였습니다. 죄송합니다.」
물론 이 상황이 워낙 현실성 없어서 사태의 심각성이 와닿지 않았다는 점도 컸다.
지구와 직장 상사 중 누가 우위에 있는 존재겠는가?
우주의 질서를 아는 자라면 당연히 지구를 꼽겠지만, 지금 이 자리에 모인 삼십여 명의 인간은 '습관적'으로 직장 상사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그러면서도 걱정되는 마음에 저마다 불안한 표정으로 눈동자를 굴렸다.
그러나 시야의 7할 이상을 차지한 성명문이 시선을 따라 함께 움직이는 탓에 주변 사람들의 표정을 살필 수가 없었다.
지금 이 순간, 다른 인간과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은 목소리뿐인 것 같았다.
"대체 이게 무슨... 대리님도 보고 계신 것 맞죠?"
속삭이는 듯한 음성에 기획부의 박정우 대리가 고개를 살짝 돌렸다.
소리의 발원지는 바로 옆자리, 입사한 지 이제 4개월이 지난 신입이었다.
신입의 이름은 김재형. 나이는 스물아홉이라고 했던가. 신입답게 싹싹했지만, 눈에 띄는 특징까진 없는 평범한 녀석이었다.
"..."
정우는 성명문 사이로 언뜻 보이는 신입의 몸을 훑었다.
자리에 얌전히 앉은 채인 자신과 달리, 녀석은 의자를 뒤로 빼고서 제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아마도 눈앞에 문구가 나타난 순간, 깜짝 놀라서 벌떡 일어났을 터.
"침착하게, 자리에 앉아서 기다려요. 넘어졌다간 다칠지도 모르니까."
이렇게 말한 정우는 자신의 목소리가 너무 차분한 것에 놀랐다.
평소 호들갑 떠는 걸 싫어하긴 했지만. 이유가 단순히 그것만은 아니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위협을 느껴야 할 상황인 건 알겠는데, 솔직히 겁이 나진 않네. 꿈은 아닌 것 같고...'
이 회사 'Watcher'가 만들어 온 게임의 배경은 주로 포스트 아포칼립스였다.
이 때문에 오프닝에서 인류 열망 직전의 장면을 다룬 적이 많았는데. 그래서인지 이런 상황이 너무 익숙하게 느껴졌다.
찍소리하지 않고 있는 다른 직원들의 형편도 비슷한 것 같았다.
아무리 본부장이 무섭다곤 해도 진짜 두려운 상황 앞에서 상사 따윈 문제가 아닐 터.
즉, 다들 겁은 좀 났지만, 이성을 잃을 정도는 아닌 거다. 본부장의 눈치를 볼 수 있을 정도로.
게다가 인간들에겐 지구가 준비한 이 상황보다 필씬 자극적이고 참신한 시나리오가 많이 있었다.
소설, 만화, 영화, 게임 등등....
따라서 지금 이건 인간의 상상 범주 안에 있는 상황. 그래서 이게 '현실'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다들 이상하리만큼 침착한 걸지도 모른다.
'그래도 무려 지구가 세상의 종말을 암시하고 있다는데... 너무하군.'
그는 신입이 의자를 되찾기 위해 허공을 휘젓는 기척을 느끼면서. 시야를 가득
채운 성명문을 다시 읽었다.
이번으로 벌써 다섯 번째 읽는 건데, 무슨 이유에선지 문자열이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뭔가 때를 기다리고 있는 걸까?
"혹시 이거 몰카 아니야?"
"그렇다고 보기엔 너무...
"너무 실감 난다고? 이상한 신기술을 시험해 보는 걸 수도 있잖아."
"우리 같은 듣보잡 개발사 상대로요...?"
"야,야...듣보잡이라니.쯥."
정면 칸막이 너머의 개발부 자리에서부터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정말로 이걸 '몰래 카메라'로 생각하는 건지, 아니면 긴장감을 좀 덜고자 해보는 소리인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대다수의 직원이 '성명문'의 정독을 마친 것 같았다.
그럼 슬슬 다음 사건이 벌어질 때가 아닐까?
정우는 눈앞의 문구를 손으로 다시 휘저어 보면서 침착하게 기다렸다.
여느 엑스트라처럼 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그를 단단히 붙들고 있었다.
흔히 보아 오지 않았던가. 멸망류 게임이나 영화에서 소리만 빽빽 지르다가 어이없게 죽어 버리는 인물들.
이게 만약 게임에서나 보던 일이 정말로 벌어진 거라면, 작중 '클리셰'가 현실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을 거란 생각이었다.
쉽게 당황하고, 괜히 비명부터 지르고, 어설픈 치기를 부렸다간 빠르게 죽을 가능성이 높다.
반면 주인공은 대체적으로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고 행동하기 전에 생각부터 한다.
베스트는 기연이 따라 주는 것이겠지만....
'후... 한심하기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정우가 헛웃음을 짓는다.
'Watcher'는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서 게임 시나리오 제작도 기획부에게 일임하고 있었다.
덕분에 그간 출시한 제품의 시나리오 중 30%는 정우의 작업물이었다.
그러다 보니 '진짜 멸망'을 앞둔 와중에도 현실과 게임 시나리오를 비교하고 있었던 거다.
아무리 그래도 인류가 열망하는 과정이 한낱 인간의 상상물인 게임과 똑같겠는가.
'더군다나 이건 주체가 지구잖아.... 일단 자기부터가 살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고.'
정우는 거의 해탈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의자에 앉은 채로 고개를 들었다. 그때, 드디어 다음 사건이 진행됐다.
그런데 정중해 보이던 '성명문'과는 전혀 다른 성질이었다.
모두의 머릿속에 정수리가 찌릿할 정도의 신호음이 높게 울렸으니까.
삐이...!
아주 공격적이고, 위압적인 느낌을 주는 소리였다.
정우는 이때 처음으로 제대로 된 '현실감'을 맛봤다.
인간에게 일방적으로 다뤄지던 실험용 쥐들이 이런 기분이었올까.
모종의 의도가 담긴 압도적인 실력 행사.
다음엔 눈앞의 문구가 바뀌었다.
「모두 집중해 주십시오. 지금부터 진행할 설문은 당신의 생명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가급적 진지하게 응해 주시기 바랍니다. 답변의 결과에 대한 책임은 본인에게 있습니다.」
"뭐라고...?"
"어?"
"...정신 나간 장난은 그만하자. 누가 됐든 이쯤 해."
몰카 운운하던 때로부터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그새 개발부 쪽의 음성이 위축되어 있었다. 슬슬 겁이 난 것이다.
그리고 그건 조금 전까지 진노하던 본부장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미친 새...!"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욕지거리를 내뱉던 본부장의 음성이 갑자기 사라졌 다.
문자 그대로 사라졌다. 마치 누가 음소거 버튼을 누른 것처럼.
"...!"
이 소릴 가만히 듣고 있던 모두가 지독할 정도의 위화감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하지만 거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곧 모든 직원의 목이 긴장감으로 뻣뻣해졌다.
본부장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목소리까지 소거됐음을 깨달았으니까.
읍읍, 하면서 신음을 내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인간의 소리가 통째로 들어내진 것 같은 상황.
"..."
소름 끼치는 고요 속에서, 눈앞의 문구가 다시 바뀌었다.
이에 침묵 행렬의 어딘가에 끼어 있던 정우가 머릿속으로 침음했다.
'이건 예상에서 좀 벗어나는데...'
-질문 1. 중형견 두 마리와 인간 한 명 중 한쪽과 죽을 때까지 맨손으로 싸워야 한다면 어느 쪽을 택하시겠습니까?
-20초 안에 답하십시오.
제한 시간 20초. 이 질문의 의도를 추론해 보기엔 너무 촉박한 시간이었다. 정우는 '중형견'의 정확한 정의가 뭔지를 스스로에게 물었다.
'대형견이면 대충 감이 오겠는데, 중형견이면 크기가 얼마나 되는 거지?'
그러자 질문자가 이를 알아들었다는 듯이 대번에 어떤 짐승의 모습을 보여 줬다.
정우의 머릿속에 주입된 중형견의 예시는 아메리칸 불도그였다.
몸길이가 1미터는 족히 돼 보이고, 잘 발달한 근육 때문에 땅을 짚은 다리가 전부 울룩불룩했다.
'저런 놈 두 마리와 싸운다고...?'
코카 스파니엘 같은 걸 떠올리고 있던 정우로선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사이 남은 시간이 15초까지 줄었다.
'그럼 인간은? 인간은 예시가 없나?'
만약 준비된 '인간 예시'가 평범해 보이는 누군가라면, 그는 앞뒤 가리지 않고 인간과의 결투를 선택할 생각이었다.
그의 머릿속엔 목덜미와 허벅지를 동시에 뜯기는 자신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5초를 가만히 흘려보내는 동안 아무런 예시가 나타나지 않았다.
'알아서 상상하라는 의미인가. 아니면 진짜무작위 배정이거나.'
이제 남은 시간은 10초.
'...제길.'
근육질과는 거리가 먼 정우가 떠올린 결투 상대는 신장이 190을 넘고, 몸이 우락부락한 사내였다.
최대한 약해 보이는 사람을 떠올리고 싶었지만, 그게 마음처럼 잘 안 됐다.
이쪽에 비해 '피지컬'이 압도적인 상대를 상상하고 나자 전투 과정이 자연스럽게 예상됐다.
시물레이션의 기반 데이터는 학창 시절 두어 번 치러 봤던 '개싸움'과 인터넷 에서 종종 보던 일반인 길거리 싸움 영상이었다.
특히 고등학생 때 체대 입시를 준비하던 녀석과 싸웠다가 처참히 패배한 경험이 있는 정우는 잘 알았다.
완력의 차이가 싸움의 승패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지 말이다.
'미친, 4초밖에 안 남았어...!'
정우가 입술올 꽉 깨물며 문항 밑에 표시된 제한 시간을 노려본다.
인간과 단독 대결을 할 게 아니라면 부담스러운 덩치의 개 두 마리와 싸워야 하는 셈이다.
이게 단순히 성향 테스트인지, 진짜 앞으로 벌어질 일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생명과 직결되는 설문이라고 했으니 함부로 결정해선 안 된다.
'중형견 한 마리라면 어떻게든 해 볼 텐데.'
남은 시간 2초.
정우는 이마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끼며. 눈을 꼭 감았다.
그러고는 양쪽 턱 근육에 힘을 꽉 줬다.
머리통이 가늘게 떨리면서 이마에 고여 있던 땀방울이 주룩 떨어진다.
'제 선택은, 중형견. 중형견 두 마리입니다.'
1초를 남기고 간신히 답변을 마친 정우.
곧 상품 바코드 찍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띡.
그러더니 문항이 바뀌었다.
-질문 2. 신체의 일부를 1킬로그램 이상 잘라 내야 한다면, 어딜 원하십니까?
-한 부위만 선택해야 합니다. 20초 안에 답하십시오.
2화. 설문 조사 (2)
두 번째 문항을 확인한 정우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쩍 벌렸다.
이게 정말 '지구'가 진행하는 설문이라고?
대체 왜?
하지만 더는 불평할 여유가 없었다.
어느새 남은 시간이 16초로 줄어 있었으니까.
-질문 2. 신체의 일부를 1킬로그램 이상 잘라 내야 한다면, 어딜 원하십니까?
-한 부위만 선택해야 합니다. 16초 안에 답하십시오.
'한 부위만 고를 수 있다는 건, 그냥 신체 일부를 포기하라는 소리네. 한쪽 손 가락을 다 잘라 봐야 몇백 그램 안 나올 것 같고. 자르려면 아예 큼직한 부위를...'
고기 한 근이 600그램이다.
1킬로그램올 덜어 내려면 대체 어딜 잘라야 할까.
더군다나 지방은 동일한 부피의 근육에 비해 무게가 70% 수준.
단순히 고기를 기준으로 가늠했다간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할지도 모른다.
가장 쉬운 방법은 뼈를 함께 잘라 내는 것이겠으나....
'미치겠군.'
의학을 공부했더라면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을는지도 모르겠지만. 정우에게 의학 지식까진 없었다.
상식선에서 최대한 좋은 선택을 해 보려고 애쓸 뿐이었다.
'일단 발은 안 돼.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에선 기동력이 가장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허벅지 살을 자른다는 선택지도 사라졌다.
한쪽 허벅지 살을 두 근 가까이 덜어 내고도 달릴 수 있을 리 없으니까.
또한 허벅지 쪽에 큰 동맥이 있어서, 깊은 상처를 입을 경우 출혈이 엄청나다는 이야길 들은 적이 있었다.
따라서 그나마 만만한 곳은 팔.... 그게 아니면 내장이 상처 입지 않길 바라며 복부 지방을 도려내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수술로 최대 3킬로그램의 복부 지방을 덜어 낼 수 있다고는 하지만, 그건 전문의가 의료 장비를 가지고 집도했을 경우다.
문항에 명시되어 있진 않았으나 앞서 본 질문의 성격상 제대로 된 수술을 전제로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결국, 답은 왼쪽 팔이다.
'팔? 아니면 손까지만...? 손가락과 손바닥 그리고 그 안의 뼈를 다 합치면 1킬로그램 정도는 나와 줄까?'
정우가 시야를 가로지른 문항 아래로 자신의 팔을 들어 올렸다.
고기 두 근과 비슷한 수준의 무게를 만들어야 한다.
살면서 이런 결정을 내릴 일이 없었기에, 손을 구성한 뼈의 무게가 얼마나 될 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1킬로그램이라는 무게가 이렇게 버겁게 느껴질 줄은....
손 하나로 될까? 팔꿈치 밑까진 잘라야 하지 않을까? 아니다, 팔꿈치 밑이면 족히 3킬로그램은 나올 터.
남은 시간은 7초.
"..."
마지막 고민을 하던 정우의 신경에 자그마한 기척이 감지됐다.
고개를 슬쩍 돌려 보니 신입 사원 김재형이 자신의 손을 바라보며 벌벌 떨고 있었다.
게다가 녀석이 검토 중인 건 오른손.
'왼손잡이인가? 어찌됐든 나는...'
이윽고 마음을 정한 정우가 숨을 크게 쉬었다.
'제 선택은, 왼쪽 손끝부터 손목 밑 5센티미터까지입니다.'
이렇게 구체적으로 조건을 달아도 답변으로 쳐주는지 모르겠으나 그는 일단 기다렸다.
아직 4초 정도는 여유가 있었으니까.
곧 예의 그 확인음과 함께 문항이 넘어갔다.
띡.
-질문 3. '투표'가 인류의 미래를 결정하는 방식으로 적합하다고 생각합니까?
-20초 안에 답하십시오.
아까와는 전혀 다른 성질의 질문이다.
도대체가 의도를 알 수 없는 설문으로 인해 정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신체의 어딜 잘라 내야 할지 고민할 때보다는 마음이 덜 불편하긴 했지만, 시간이 여전히 촉박한 상황.
'인류의 미래를 투표로 결정한다라...'
평소라면 이견 없이 '예'라고 대답했겠지만, 지금은 지구의 폐쇄를 앞둔 상황이다.
아까 본 성명문의 내용이 전부 사실이라면 말이다.
여태 출시된 아포칼립스 배경의 게임 세계관을 봤을 때, 원가 큰일이 벌어진 후에도 투표라는 시스템이 제 기능을 할 수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또한 이성을 잃은 사람들이 제대로 된 방향을 설정할는지도 미지수이고 말이다.
그렇다면 투표를 대체할 수 있는 방법엔 무엇이 있는가?
'...'
20초 안에 답을 도출하기엔 너무 어려운 문제.
다행히 3번 질문은 대안을 제시하라는 게 아니고. 가부만을 묻는 단순 문항이 었다.
'아니요.'
띡.
또다시 확인음이 출력되면서 다음 문항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걸 풀면 쉴 시간도 안 주고, 바로 다음 문항이 등장했다.
4번 질문부터는 또 다른 유형이었고, 6번에선 스케일이 상당히 큰 전제를 잡더니, 다시 7번에선 현재 시점 기준의 선택을 요구했다.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기 위한 문항 배치가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질문 4. 당신이 사는 지역에 갑자기 홍수가 난다면, 즉시 대피할 방법을 알고 있습니까?
-질문 5. 당신이 사는 지역과 거주민들을 평가해 주십시오.
-질문 6. 세계가 '초기화'된다면, 적어도 몇 명의 인간과 새 삶을 시작하고 싶 습니까?
-질문 7. 곧 위험한 상황이 벌어질 예정입니다. 당장 동료로 삼고 싶은 사람을
15초 안에 4명 떠올리십시오.
-질문 8. 만약 당신이 24시간 후에 반드시 죽을 운명이라면, 남은 시간 동안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문항당 제한 시간 20초, 총 8개의 질문.
질문 하나하나가 목에 날이 선 칼을 들이미는 듯했다.
그리고 그가 마지막 문항에 대한 답을 한 직후.
-이제부터 감응력 시험을 하겠습니다. 지금 느껴지는 것을 머릿속으로 떠올려 보십시오.
오랜만에 질문이 아닌 문장이 나타났다.
'감응력? 무엇에 대한...?'
정우는 되묻는 게 의미가 없을 거란 걸 알면서도 물었다.
이에 대한 답은 오감을 통해 내려졌다.
화악!
'헉!'
발끝에서부터 시작된 싸늘함.
마치 냉수로 가득 찬 거대한 수조 속에 천천히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이 냉기는 순식간에 그의 정강이까지 차오르더니. 곧바로 무릎을 삼키고, 허벅지를 잠식하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하반신의 감각이 죽었다. 그의 의식 속에서 말이다.
'미친... 뭘 하는 거야?'
당황한 정우가 몸부림을 쳤지만. 그의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감응력 시험'이라는 게 시작된 직후 몸에 대한 제어권이 사라진 것 같았다. 그래도 의식만큼은 멀쩡했다.
어느새 그 냉기가 가슴팍까지 올라왔다는 걸 인지하고 있었으니까.
'이러다가 머리까지 다 잠기면 어떻게 되는 거지?'
이젠 목 언저리까지 싸늘하게 말라붙기 시작했다.
숨이 막히거나 하진 않았지만, 본능적으로 여기에 반항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 었다.
'제길...!'
이미 턱까지 치고 올라온 정체불명의 기운.
공포감보다는 불쾌함이 먼저 찾아왔다.
'그,그만둬!'
순간적으로 화가 난 정우가 몸을 휘감은 냉기에게 강한 반감을 표출하자 아주 잠깐이었지만, 그의 의식 속에 흰 빛줄기가 나타났다.
눈으로 봤다고 할 순 없었다. 머릿속올 스쳐 지나간 잔상에 가까운 개념이었으니까.
대신 정우는 깨달았다.
방금 그 빛줄기가 나타난 순간, 몸을 잠식하던 냉기가 주춤했다는 걸.
'이게 감응력이란 걸 시험하는 방식인가?'
영악한 인간의 뇌가, 지구의 시험을 간파하려 든다.
싸아....
기세를 되찾은 냉기가 코를 뒤덮기 시작했고, 정우는 관자놀이가 싸늘해지는 느낌올 받으며 정신을 집중했다.
'...멈춰라!'
아까보다 한층 강렬한 의지였지만, 이번엔 냉기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삽시간에 눈을 집어삼키더니. 이마마저 차갑게 덮어 버렸다. 예상과 다른 전개에 정우가 당황한다.
'어어?'
스스..
결국 정수리를 포위하기 시작한 정체불명의 기운.
'...!'
의식 속에서조차 '자신'에 대한 통제권을 거의 다 빼앗겨 버린 정우는, 여태 굳건히 붙들고 있던 무언가를 놔 버렸다.
의연함. 침착함, 신중함 그리고 이게 어쩌면 전부 꿈일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희망까지.
그러자 그것들이 있던 자리를 어마어마한 밀도의 공포가 채웠다.
비로소 자신의 의식이 존재하던 공간이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는 게 느껴졌다. 이대로, 이대로 사라진다면....
'아아...사, 살려줘...!'
존재가 서서히 지워지는 느낌에 그는 완전히 굴복해 버렸다.
이성을 잃고서 소리 없이 울부짖는다.
입에 재갈이 물린 채 생매장당하는 사람이, 점점 좁아지는 시야에 미쳐 가는 것처럼.
'제, 제발! 제발!'
정우는 필사적으로 구걸했다.
그의 마지막 조각인 정수리가 빠르게 식어 가고 있었다.
찰나였지만, 살고 싶다는 욕망 외의 모든 잡념이 사라졌고....
그리고 이런 원초적인 의지가. 다시금 한 줄기 빛을 불러냈다.
파앗...!
이걸'시야'라고 할 수 있을까?
머릿속을 가득 채운 시커먼 어둠 속에서, 아주 얇디얇은 빛줄기가 공간을 가르둣이 솟아오른 게 보였다.
그건 새하얀 선에 가까웠다.
하지만 너무 멀리 있었다. 까마득할 정도로 멀리.
그럼에도 정우는 알았다.
저것이 곧 달려들 거란 사실을.
'...!'
그에게 남은 한 올의 의식이 본능적으로 움츠러든다.
이어서 '빛'이 다가왔다.
시야가... 아니 의식이 소름 돋을 정도로 빠르게 하얘졌다.
모든 게 사그라지고 있었다. 심지어 정우 자신까지도.
파아앗.
"헉!"
뭉툭한 날숨.
의자에 앉아 있던 정우는 자신도 모르게 앞으로 엎어졌다.
끼리릭.
의자 바퀴가 마찰음을 내며 뒤로 밀려났고, 덕분에 그의 이마가 책상 위에 들이박혔다.
쿵!
"억...!"
두 번째 신음.
정우는 그제야 자신의 입에서 소리가 나오고 있음을 깨달았다.
지구의 '음성 통제'가 풀린 것이다.
'끄, 끝났나...?'
한동안 잊고 있던 그간의 일들이 영화를 되감기 하듯 하나씩 떠올랐다.
감응력 시험. 8개의 문항. 지구의 '성명문'.
아, 그리고 신입.
자신의 오른손을 잘라야 할지 고민 중이던.
휙.
정우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녀석이 의자를 찾아서 앉았을지 걱정됐고, 나머지 문항과 감응력 시험을 잘 통과했을지도 궁금했다.
그런데.
"으으음, 으음....."
이미 신입의 목에서도 소리가 나고 있었다.
다만, 제정신으로 내는 소리가 아니었다. 간질 환자가 발작할 때 내는 신음과 비슷했으니까.
게다가.
"으음..으으....."
"으으으음, 으음, 음...."
신음을 내고 있는 건 신입뿐만이 아니었다.
사무실 내 모든 사람이 각자 자리에 앉거나 선 채로 몸을 부르르 떨며 이상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것도 눈을 까뒤집은 상태로 말이다.
"...!"
마치 종교 집단의 최면 의식 현장에 와 있는 것 같은 기분.
정우는 온몸에 돋은 소름을 양손으로 쓰다듬으며, 자신의 책상 위에서 무기로 쓸 만한 것을 찾아 눈을 굴렸다.
가장 먼저 발견한 건 철제 만년필.
1년 전쯤이었나. 대리로 진급했을 때, 아버지가 기념 선물로 준 물건이다.
그는 지체 없이 만년필을 오른손에 쥐고서, 바로 옆자리의 신입을 노려봤다.
"으음..."
녀석은 여전히 기이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아직 다들 '감응력 시험' 중인 상태라서 이런 걸까?
어쩌면 그 시험에서 탈락한 결과로 이런 가수면 상태가 된 걸지도 모른다.
정말 어쩌면 그 '탈락자'들이 이 상태에서 근처의 사람을 해칠지도 모르고.
"..."
정우는 지난 세월 숱하게 써 왔던 인류 멸망 시나리오들을 곱씹으며, 앞으로 벌어질 수 있는 최악의 상황에 대비했다.
사무실 안에서의 혈투, 인간의 좀비화, 이계와 연결된 게이트 등장. 싱크홀에 서부터 기어 올라온 끔찍한 생물들....
꽈악.
손바닥이 축축해진 탓에 만년필을 더욱 그러쥔다.
그리고 그때.
쿵!
칸막이 건너편 개발부 쪽에서 둔탁한 소리가 났다.
그러더니 이어서.
퉁! 드륵!
갖가지 충격음과 함께 의자가 뒤로 밀리거나 넘어지는 소리가 연달아 발생했다.
"억!"
"어쿠..."
이건 정우가 냈던 것과 비슷한 앓는 소리.
사람들이 하나씩 깨어나고 있었다.
바로 옆자리의 신입도 말이다.
홰액!
엉거주춤한 자세로 앉아 있던 신입이 앞으로 고꾸라지려 하기에, 정우가 황급히 그를 붙들었다.
"힉!"
마침내 의식을 되찾은 신입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부림친다.
이에 정우가 녀석의 이름을 또렷한 발음으로 부르며 양팔에 힘을 줬다.
"김재형 씨! 진정해요. 다 잘 끝났으니까."
솔직히 '다 잘 끝났다'라는 말엔 확신이 없었지만, 적어도 지금이 '감응력 시험'에 들어 있던 때보다는 나았다.
정우가 신입의 상체를 일으켜 세우며 걱정스럽다는 듯이 바라보자 녀석이 입술을 가늘게 떨었다.
"보, 보셨죠? 그거...그거요...."
"예, 저도 봤어요. 일단 자리에 좀 앉죠. 또 넘어지겠어요."
사실 정우로선 자신이 본 것과 신입이 본 게 같은 것일지는 알 수 없었다. 설문과 시험의 결과가 어떠했든 지구가 모두를 풀어 줬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을 뿐이다.
신입을 자리에 앉히자 사방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는 흐느끼는 중이었고, 연신 욕지거리를 하며 긴장을 해소하려는 사람도 있었다.
드디어 인간의 의연함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럼에도 지구의 고압적인 조치는 계속됐다.
모두의 눈앞에 새로운 문구가 나타났다.
-설문 결과에 따라. 일정량의 '정수'가 지급됐습니다. 이것은 현 시점 여러분이 사용할 수 있는 최고의 무기이자 방어구입니다. 만약 죽음에 이를 경우, 그 자리에 본인의 정수가 떨어집니다. 이는 동료가 주워서 바로 사용할 수 있으므로, 최후의 순간까지 명민함을 잃지 마십시오. 당신의 죽음은 기억되고, 활용될 것입니다.
"뭣..?"
"이게 무슨 개..."
다들 험악한 표정을 지었지만, 눈은 겁에 질려 있었다.
이 와중에 정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마지막 문장이 어디에서 많이 본 것이었기 때문이다.
게임? 영화에서 봤던가?
그러나 다음 문구 때문에 그의 생각이 끊어졌다.
-가급적 '정수'를 지구 소속이 아닌 존재에게 빼앗기지 마십시오. 싸울 자신이 없다면, 동료 근처에서 자살하십시오. 정수는 단련할 수 있으며. 모일수록 강해집니다. 만약 이 사태를 완전히 해결하고 싶다면, 구원자를 찾아 도우십시오. 건투를 빕니다.
'지구 소속이 아닌 존재... 라고? 구원자를 찾으란 건 또 무슨 소리야?'
정우는 여전히 오른손에 잡혀 있는 만년필의 촉감을 느끼며, 주변을 둘러봤다.
끔찍하다고 표현할 수 있을 만한 지구의 공지에 모두 패닉에 빠진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런 미친 새끼! 어떻게 사용하는지는 알려 줘야 할 것 아니야?"
사내에 딱 한 명 있는 원화가 임수영이 뭔가를 바닥에 던지며 소리쳤다.
정수 사용법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적어도 그녀만큼은 이 상황올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정작 사람들의 시선이 쏠린 곳은 그쪽이 아니었다.
"허..."
"어떻게 된 거예요?"
"팀장님...?"
각자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칸막이 밖으로 나오더니, 사업부 쪽으로 다가갔다.
'뭐지?'
정우는 제자리에서 사업부 방향올 쳐다봤다.
그러자 우두커니 서 있는 사업부 팀장 조선웅의 모습이 보였다.
단, 사람들이 주목하고 있는 건 조 팀장이 아니라 그의 머리 위에 붙은 세 음절의 단어였다.
...포식자.
이 글자는 마치 게임 캐릭터의 닉네임인 양 조 팀장의 움직임을 따라 함께 이동했다.
딱. 따닥.
조 팀장의 구두가 소리를 낸다.
그는 지금 사업본부장 최주열 이사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고 있었다.
"어..."
이 장면을 지켜보던 몇 사람이 침음을 흘렸다.
어느 날 갑자기 모종의 힘을 얻게 된 평범한 직장인과 그를 매일 못살게 굴던 직장상사.
멸망류 시나리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캐릭터 구성이었기 때문이다.
클리셰에 따르면, 이런 경우엔 힘을 얻은 쪽이 대번에 자신의 정의를 구현한다.
즉. 지금 눈앞의 상황에선....
'설마.'
정우가 마른침을 삼켰다.
조 팀장은 이미 최 이사 앞에 서서 상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특별한 안내가 없었지만, 장내의 대부분이 눈치챘다.
저 '포식자'라는 호칭은 일종의 기연이라는 걸.
설문이나 감응력 시험의 결과를 보고서, 지구가 뭔가 특혜를 내려 준 게 틀림 없다.
최 이사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떨떠름한 표정으로 조 팀장을 올 려다보는 중이었다.
"무, 무슨 일인가...?"
간신히 입을 열어 대사를 발음한 최주열 이사.
이에 조 팀장이 한동안 굳은 표정으로 자신의 상사를 빤히 바라봤다.
그러더니 갑자기 상체를 홱 숙였다.
"억!"
순간, 최 이사가 기겁하며 의자에 앉은 채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조 팀장이 취한 행동은 공격 같은 게 아니었다.
"..."
그건 깍듯한 인사였다.
허리를 90도 가까이 숙이고 있던 그는 곧 상체를 일으켜 세우더니 짤막하게 말했다.
"건강하십시오. 그동안 많이 배웠습니다."
"무슨..."
휙.
조 팀장은 그렇게 상사를 내버려 둔 채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장내를 훑었다.
회사 사람들올 살펴보고 있는 거였다.
'누군가를 찾고 있는 것 같은데.'
정우는 조 팀장이 그저 마지막으로 직장 동료들을 눈에 담는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것치고는 시선이 사람들의 얼굴이 아닌 그 위를 향하고 있었으니까. 자신처럼 머리 위에 호칭이 붙은 사람올 찾고 있는 거다.
'월 더 알고 있는 거지?'
조바심이 난 정우가 눈썹올 꿈틀거릴 때쯤 그의 눈앞에 또 다른 문구가 나타났다.
-인간 박정우 님에 대한 평가가 끝났습니다.
-당신에게 배정된 역할은 '구원자'입니다. 당신의 능력이 주어진 역할과 맞지 않거나 부족하다고 판단될 경우 역할이 바뀌거나 사라질 수 있습니다.
3화. 선택과 집중 (1)
'구원자...?'
정우가 황급히 주변을 둘러본다.
이 문구가 자신에게만 나타난 건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역시 주변 사람들에겐 별 기색이 없었고, 마침 이쪽을 보고 있던 조 팀장만이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인간 박정우 님에 대한 평가가 끝났습니다.
-당신에게 배정된 역할은 '구원자'입니다. 당신의 능력이 주어진 역할과 맞지 않거나 부족하다고 판단될 경우 역할이 바뀌거나 사라질 수 있습니다.
정우는 안내 문구를 몇 번이고 계속 읽었다.
곧 사라질 내용이라 최대한 머릿속에 담아 두기 위해서였다.
'역할이 바뀌거나 사라질 수 있다니... 적자생존이라 이건가.'
그는 지구가 무엇을 원하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녀석이 원하는 건 '주인공'.
기가 막힐 정도로 빠르게 새 환경에 적응하고. 주어진 기연을 효율적으로 활용 할 인재를 찾고 있는 거다.
성명문에서 밝혔듯이, 지구 자신이 살기 위해서 말이다.
문제는 지구가 인재를 찾는 방식이 다소 불친절하고, 여러 경우의 수를 고려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었다.
조 팀장이 '포식자'인 반면, 정우 자신이 부여받은 역할은 '구원자'다.
또 다른 역할이 없으리란 보장이 있는가?
게다가 이 자리에 모인 인간은 삼십 명이 좀 넘는다. 그런데 벌써 '역할'을 부여받은 사람이 적어도 두 명.
서울시에만 구백팔십만 명이 살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엄밀히 말하면, 이건 기연이라기보다는... 최소한의 자격인 셈이네. 전국, 아니 어쩌면 전 세계인을 상대로 하는 선발전의...'
정우는 이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위화감이 들었다.
자신도 조 팀장처럼 역할올 배정받았는데, 아무도 이쪽을 주목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일부 직원은 정우를 옆에 두고도 구원자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 수군거리고 있었다.
"아까 구원자를 찾으라는 내용이 있지 않았어? 이렇게 가만히 있어도 되는 건가."
"그럼 조선웅 팀장님은 뭐죠? 포식자라고 적혀 있잖아요..."
"구원자라는 게 은유적인 표현 아니었을까."
"그럴 수도 있죠.... 사람들을 구할 수 있다면 그게 구원자잖아요."
정우는 이 대화를 들으며 슬그머니 뒤로 빠졌다.
회사 정수기 옆에 걸린 거울을 보기 위해서였다.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사람들이 왜 알아보지 못할까.
바로 옆에 구원자가 있는데도.
그리고 그 이유는 거울올 보자마자 알게 됐다.
정우의 머리 위엔 아무런 문구도 없었다.
'오류? 아니야, 그럴 리는 없다.'
어쩌면 이 문구 자체가 특수해서. 거울에 비치지 않는 걸지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사람들이 알아채지 못하는 건 설명되지 않는다.
그냥, 정말로 문구가 없는 거다.
그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종이컵에 물을 따르고 있자 신입 사원 김재형이 다가왔다.
"대리님. 괜찮으세요?"
"예. 괜찮아요. 그냥 좀 속이 안 좋아서..."
희미한 웃음을 지으며 물을 들이켜던 정우가 동작을 멈췄다.
재형의 뒤로 조 팀장이 걸어오고 있었다.
"정우 씨. 조금 불편해 보이시는데.... 혹시 제게 하실 말씀이라도 있습니까?"
머리 위의 '포식자'라는 문구만으로도 조 팀장의 존재감은 엄청났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본부장에게 매일 구박을 받는 안쓰러운 사람이란 이미지 뿐이었지만, 지금은 우리 밖으로 나온 맹수 같은 느낌이었다.
스윽.
조 팀장이 다가오자 겁에 질린 재형이 뒤로 물러선다.
방금 조 팀장의 대사는, 모르는 사람이 듣기엔 '내가 좀 불편합니까?'라는 의미로 해석될 여지가 있었다.
그러나 정우는 상대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아들었다.
너도 혹시 역할을 가지고 있는 것 아니냐?라는 의미였던 거다.
더 나아가서는, '그런데 넌 왜 역할명이 붙지 않았지?'란 물음이었을 수도 있다.
'설마 이쪽이 구원자란 걸 알아챈 건 아니겠지.'
정우는 종이컵에서 입을 떼지 않은 채로 조 팀장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표면적으로만 보면. 정체를 숨길 이유가 없었다.
상대가 적의를 보이지 않은 데다 이쪽은 '사태를 완전히 해결'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찾아내야 하는 구원자였으니까.
'그렇지만... 이상하잖아. 역할명이 노출되지 않고 있어. 이건 지구가 설정한 기본 세팅이다. 분명히 이유가 있는 거야.'
더군다나 뭔가를 아는 눈치인 조 팀장과 달리, 정우에겐 구원자라는 역할이 주어졌다는 것 외엔 아무런 정보가 제공되지 않았다.
즉. 사람들이 어떤 '해답'을 요구한다 해도 지금 그가 해 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거다.
만일 그렇게 되면 이들은 어떤 생각을 할 것인가.
모종의 이유로, 구원자란 놈이 중요한 정보를 숨기고 있다고 오해할지도 모른다.
일이 꼬이고 또 꼬이면 이 자리에서 죽을 수도 있는 거라고, 그는 판단했다.
마녀 사냥... 머릿속에 끔찍한 장면이 떠오른다.
'정수... 설문 결과에 따라 일정량의 정수를 줬다고 하지 않았나? 나한텐 얼마나 들어온 거지?'
지구의 주장에 따르면, 현 시점 인간이 사용할 수 있는 최고의 무기라는 정수.
하지만 지구가 사용법을 알려 주지 않았다.
원시인에게 총을 하나씩 보급하고도 장전하고 쏘는 법을 알려 주지 않은 거나 마찬가지다.
왜일까.
이게 정말 '무기'라면 자신이 위험할 때 언제든 사용할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음...'
불과 4미터 앞엔 조 팀장이 서 있고, 그 뒤로는 직원들이 병풍처럼 늘어진 상황.
불안감을 느낀 정우가 본능적으로 경계심을 갖자 어떤 변화가 일어났다.
그의 머릿속에 푸른색으로 '5'라는 숫자가 그려진 것이다.
그저 숫자일 뿐이었지만, 정우는 이게 자신이 보유 중인 정수의 개수라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오...'
눈앞의 모든 사람에게도 숫자가 하나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위치는 머리맡.
대개는 1에서 3 사이였지만, 종종 4나 5라는 숫자를 붙이고 있는 사람도 보였다.
'이게 지구가 나눠 줬다는 정수의 양이구나.'
분위기를 보아하니, 남들의 정수를 볼 수 있는 건 이쪽뿐인 듯.
정말로 오류가 아니었다. 나는 구원자로 선택됐고. 어떤 이유에서인지 정체가 감춰져 있다.
뒷덜미가 짜릿해지는 느낌에 정우는 종이컵에서 입을 떼고 말았다.
그러다 미간이 좁아지기 시작한 조 팀장과 눈이 마주쳤고.
"쿨럭..!"
깜짝 놀란 정우가 기 침을 크게 했다.
조 팀장이 보유한 정수는 무려 10개였다.
"죄송합니다... 아까부터 속이 좋지 않아서요."
정우가 급히 표정올 수습했지만, 조 팀장이 뭔가를 감지한 뒤였다.
'정체가 뭐지?'
포식자 조선웅이, 눈앞의 남자 박정우 대리를 유심히 살핀다.
심증만 있고 물증이 없다.
수상한 기색이 있다는 걸 빼면 박 대리는 여느 직원과 다를 게 없어 보였다. 조선웅은 자신의 시야 구석에 자리 잡은 자그마한 문구를 다시 읽었다.
-구원자를 찾아 그를 돕거나 역할을 빼앗아 직접 구원의 길을 걸으십시오.
이건 마치 게임의 퀘스트 알림처럼 사라지지도 않고 시야에 계속 걸려 있었다.
구원자를 돕거나 역할올 빼앗아라....
역할을 빼앗으라는 게 무슨 의미인지는 충분히 짐작됐다.
죽이라는 의미일 터.
문제는 박 대리를 포함해, 그 누구도 죽이고 싶지 않다는 점이었다.
설문을 할 때만 해도 그는 살의에 가득 차 있었다.
여느 때처럼 본부장이 성질을 부리기 시작한 상황이었으니까.
이 때문인지 당시 그는 설문의 마지막 문항에서 끔찍한 답변을 내놓고 말았다.
-질문 8. 만약 당신이 24시간 후에 반드시 죽을 운명이라면. 남은 시간 동안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사업본부장 최주열을 죽이고 싶습니다.'
이 답변은 진심이었지만, 설문이 끝나고 '포식자'라는 역할을 받은 뒤엔 생각이 달라졌다.
막상 본부장 앞에 서게 되니 살의가 눈 녹듯 사라져 버린 것이다.
여전히 상대가 밉긴 했지만. 직접 죽이고 싶을 정도는 아니었다.
따라서 그는 자연스레 예상할 수 있었다.
어떤 이유에서든 박정우 대리 역시 죽이지 못할 거라고.
자신은 무자비한 살인자와는 거리가 멀었다.
'혹시 이 사람이 구원자입니까?'
설문에 답을 하던 때처럼 조 팀장이 의식 속에서 물었다.
그러나 어떤 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한편. 정우는 조 팀장 뒤편에 줄지어 늘어선 직원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쪽의 분위기가 급격히 술렁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처음엔 몇몇이 핸드폰올 들여다볼 뿐이었는데, 곧 사방에서 진동이 울려 퍼졌다.
전학나 메시지 등이 한꺼번에 날아들고 있는 것이었다.
"전화받았습니다. 김종태입니다."
"여보, 무슨 일이야?"
"아버지...?"
저마다 불안한 얼굴로 핸드폰을 얼굴에 가져다 댄 순간.
쾅!
바깥에서부터 큰 굉음이 났다.
교통사고라도 난 걸까?
소리의 크기나 울림으로 봤을 때,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하지만 통화 중이던 직원 일부는 그런 것에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핸드폰 너머에서 들려온 소리가 더 두려웠으니까.
배우자나 부모, 자녀, 친구의 겁에 질린 목소리.
이 와중에 누구는 전화를 걸어온 사람의 음성을 확인하지도 못했다. 이들이 손에 쥔 '통화 중'인 핸드폰에서는 무언가 으깨지거나 유리가 조각나는 현장음만이 들려왔다.
"지금 어디야? 집인 거야?"
"여보! 무슨 일이야? 잘 안들려!"
"이, 이... 씨발! 거기 누구야!"
공포는 빠르게 전염된다.
'급한 전화'를 받은 직장 동료들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뛰어나가자 나머지 사람들도 불길한 예감에 젖어 들었다.
"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야...?"
"지금 회사에 있을 때가 아닌 것 같은데요."
아직 자신의 전화가 울리지 않았다고 해서 안심할 수는 없었다.
상대가 이미 전화를 걸 수 없는 상태가 돼 버려 그런 걸 수도 있으니까.
"..."
아주 잠깐의 정적이 찾아오더니,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각자 자리로 달려가 짐올 챙기면서, 소중한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제기랄! 왜 안 받는 거야!"
"여보, 거기 별일 없어? 애들은? 애들은 지금 어디야?"
벌써 몇 명은 통곡을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두 손으론 충실하게 짐을 챙겼다.
행동이 잽싼 사람들은 그새 회사 비품까지 몇 개 집어 들고서 문을 나섰다.
이 북새통에서 전화를 받지도 걸지도 않고 있는 건 조선웅 팀장과 박정우 대리 뿐이었다.
두 사람 근처에 서 있던 기획부 신입 김재형도 어딘가로 전화를 거는 중이었지만...
"...아."
전화가 연결되지 않았다.
재형의 깊은 탄식에 정우가 그를 안타깝다는 듯이 쳐다봤다.
그러자 조 팀장이 정우에게 묻는다.
"대리님은 가족에게 안 가 보십니까?"
직위 불문하고 무조건 존대하는 건 조 팀장의 특징.
그리고 그건 정우도 마찬가지였다.
본래 남에게 말올 잘 놓지 않는 성격이었기 때문인데, 그래서인지 자신과 비숫 한 면모를 보이는 조 팀장에게 모종의 동질감을 느꼈다.
"가야죠. 집에 아버지가 계시거든요."
정우의 대답에 조 팀장이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집에 아버지가 계신다면서 왜 전화를 해 보지 않는 걸까?
어쨌든 세계가 박살 나고 있는 것 같은 지금, 조 팀장의 관심사는 유일한 지령인 '구원자 찾기'와 자신의 생존이었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여태 쭉 혼자 살아온 그에겐 안부를 물을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으니까.
참 쓸쓸하고 답답한 인생이었다고, 그는 자조했다.
"괜찮으시면 댁까지 제가 태워 드리겠습니다. 이 상황에 버스나 지하철을 타는 건 어려울 겁니다."
사실 조 팀장이 미리 알고서 건넨 말은 아니었다.
정우에게 차가 없다는 사실 말이다.
그렇지만 이 작은 회사에서 대리급 직원에게 봉급을 줘 봐야 얼마나 주겠는가.
평소 직원들의 퇴근 풍경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자기 차를 굴리는 사람이 몇이나 되는지.
"음..."
정우가 예상치 못한 제안에 머뭇거린다.
이전부터 꼬박꼬박 존대해 주던 조 팀장에게 호감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지금은 이야기가 좀 달랐다.
'포식자라는 게 대체 어떤 의미지? 피해야 할 대상인지 아닌지만 알아도 좋을 텐데.'
사람은 마음에 들지만, 그가 부여받은 역할이 두려운 상황.
조 팀장은 여전히 얼굴에 그 어떤 기색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의도로 이러는 걸까?
정말 이쪽이 구원자라고 생각해서? 아니면 단순히 이상한 낌새를 보인 것에 호기심을 느낀 걸까?
정우는 마치 게임 시나리오의 분기점 앞에 선 느낌을 받았다.
물론 정수를 열 개나 가진 조 팀장이 먼저 손을 내밀어 온 건 감사한 일이었다. 하지만 제어할 수 없는 변수를 계속 늘려 가는 건 위험한 짓이다.
굳이 조 팀장과 '포식자'라는 불길한 역할이 아니더라도 그에겐 반드시 마주 해야 할 큰 변수가 하나 있었다.
그건 바로 아버지.
'설문에 어떻게 대답했을까. 아버지라면...'
패악스럽다라는 표현이 절로 나올 정도였던 문항들.
정우는 아버지가 설문의 결과로 어떤 역할을 받았을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다른 건 몰라도 결코 구원자는 아닐 것이다.
쿠웅!
또다시 건물 바깥에서부터 굉음이 났다.
처음 들렸던 것보다 거리감이 한층 가까웠다.
이미 대부분의 직원은 짐을 챙겨 떠나고 없었다.
이제 사무실에 남은 건 멍한 표정의 신입 사원 김재형과 여전히 통화를 시도 중인 몇 사람 뿐이었다.
"..."
정우가 출구 쪽올 바라보자 조 팀장이 그를 따라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갑시다, 정우 씨. 시간을 더 지체했다간 차가 남아 있지 않을 수도 있어요."
조 팀장은 그저 자신이 우려하는 바를 이야기했을 뿐이지만, 이 대사가 정우의 마음을 움직이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맞는 말이야. 어물쩍거리면 여기에 발이 묶일 확률이 높아질 뿐이다. 이왕이면 지리를 잘 아는 지역으로 가야 해. 세상의 종말을 회사에서 맞이하고 싶지도 않고.'
정우는 조 팀장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면서 지구가 일러 준 정보들을 되새겼다.
하나, 42일에 걸쳐 지구가 폐쇄될 것이다.
둘. 지구 소속이 아닌 존재들이 정수를 빼앗을 것이다.
셋, 정수는 무기이자 방어구다. 사망하면 바닥에 떨어지며. 다른 사람이 주워 갈 수 있다.
넷, 이 사태를 완전히 해결하고 싶다면 구원자를 찾아서 도와야 한다.
다섯, 내가 바로 그 구원자다.
4화. 선택과 집중 (2)
'Watcher' 사무실 밖, 건물 복도.
조 팀장을 따라가던 정우가 걸음을 멈췄다.
여느 날과 다름없는 퇴근 경로였지만. 오늘은 '여느 날'이 아니었다.
"엘리베이터는 안 타는 게 좋겠습니다."
지구가 종말을 예고한 것치고는 건물에 전기가 잘 들어오고 있었다.
그러나 여긴 8층이다.
평소처럼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자니 꺼림칙했다.
"제가 생각이 짧았네요."
조 팀장이 깜빡했다는 듯이 말하며, 뒤를 살짝 돌아본다.
이때 정우는 느꼈다.
저 사내도 내심 긴장한 상태라는 걸.
그도 그럴 것이, 대뜸 지구가 '전 살고 싶습니다.'라고 밝혀 온 날이 아니던가. 대체 이게 다 무슨 일인지 아직도 감이 잡히지 않고 있을 거다.
그러나 지구가 위협을 느낄 정도의 일이라면, 마땅히 인간도 경계심을 가져야 한다.
엄밀히 말해, 이 세계의 모든 존재는 지구의 일부인 셈이니까.
지구 속 인간을 굳이 세밀하게 분류한다면, 병균 정도에 해당할까?
그간 생태계를 망치고 자연을 훼손해 왔다. 그러면서도 오만했다.
이런 이유로 소설이나 게임엔 자연이 인간올 벌하는 이야기가 많았다.
'너회는 더 이상 존재할 가치가 없다.'라면서.
그럼에도 위기에 빠진 지구가 인간을 이용해 무언가를 해 보려 한다는 사실에 정우는 안도감과 경외감을 동시에 느꼈다.
'좀 걸리는 점이라면. 우리에게 죄송하다는 이야기를 해 왔다는 거지.'
정우는 다른 건 몰라도 지구가 인간에게 보여 줬던 '성명문'의 마지막 문구만큼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여러분은 어떠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더 살고 싶습니다. 앞으로 이어질 안내를 잘 따라 주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지구였습니다. 죄송합니다.」
너무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지구가 이런 식으로 접촉해 왔다는 사실이... 그리고 죄송하다며 사과를 해 왔다는 점이.
"대리님...?"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정우가 눈을 부릅떴다.
정신을 차려 보니, 저 멀찍이 비상구 쪽에서부터 김재형이 불안한 얼굴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스물아홉의 기획부 신입 사원 김재형.
정우의 부사수이자 조 팀장과 긴급히 결성한 '조기 퇴근 파티'의 특별 게스트다.
정우가 조 팀장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그와 함께하기로 결정했을 때, 곁에서 이 대화를 듣고 있던 재형이 자신도 데려가 달라고 애원해 왔다.
울산에 계신 부모님과 연락이 되지 않고 있어서 당장 갈 곳이 홀로 사는 자취방 뿐이라는 게 이유였다.
울먹이는 재형의 얼굴을 본 순간, 정우는 직감했다.
이 녀석은 단역이구나....
그럼에도 놈을 모질게 내치지 못한 건 순전히 잔정 때문이었다.
여태 바로 옆자리를 써 오던 부사수이지 않은가.
"아. 미안합니다. 저도 정신이 없네요."
정우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동료들에게 다가가자 조 팀장이 괜찮다고 말하며 비상구 문올 열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둔탁한 소리가 비상계단 아래쪽에서부터 터져 나왔다.
퉁! 퉁! 투퉁!
사람들의 발소리였다.
아마도 다른 사무실의 직원들일 것이다.
"우리도 서둘러야겠군요."
조 팀장이 층계 위아래를 살피며 초조하게 말하자 정우가 그에게 물었다.
"차는 몇 층에 있죠?"
이에 차주의 얼굴이 살짝 어두워졌다.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던 재형의 얼굴도 덩달아 굳는다.
이어진 조 팀장의 답변.
"...지하 3층에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