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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화

Chapter 1. 협력은 초반만

"하, 드디어 끝났다."

한국에서 제일가는 재벌 집, 기업 자산만 수조 단위나 되는 곳에서 막내아들로 태어난 지 24년.

엄한 아버지 탓에 군대를 빼지도 못하고 다녀오게 된 나는 드디어 만기 전역까지 10일을 남겼다.

사람들한테 그다지 기대받을 일 없는 막내인 나는 줄어들지 않는 돈이나 펑펑 쓰면서 놀 일만 남은 것이다.

"하 병장님, 곧 사회로 돌아가시지 말입니다."

"그래, 인마. 나오게 되면 형한테 연락해라. 넌 특별히 인생이 뭔지 가르쳐 줄 테니까."

부대에서 가장 성실한 김 상병의 어깨를 툭툭 쳐 준 나는 휘파람을 불며 화장실로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지금은 아직 짧은 머리카락을 거울 앞에서 매만지며 히죽 웃었다.

곧 머리도 제대로 원상 복구할 수 있겠지.

나는 그런 시답지 않은 생각을 하며 베레모를 다시 썼다.

그러나 나는 곧 내 눈앞에 펼쳐진 상황을 보고 눈만 멍청히 끔뻑거릴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서 있던 공간이 다른 곳으로 뒤바뀌었기 때문이었다.

"어, 뭐야 이거."

멍하니 소리를 내뱉은 순간 내 앞에 갑자기 글자가 떠올랐다.

['크라운 로드의 창시자' '천상'이 전합니다.]

[넌 곧 죽을 운명이었다. 그러나 크라운 로드에서 승리한다면, 그 운명에서 벗어나 살 수 있을 것이다.]

"뭐, 뭔 개소리야!"

글자를 보며 입에서 소리를 내친 순간 갑자기 나열된 글자가 허공에서 바뀌었다.

[5년 안에 100층의 최종 보스 크라운을 잡아라. 5년 안에 잡지 못한다면 처음 시작한 이 날로 다시 돌아오게 될 것이다.]

이곳에 온 건 나 혼자만이 아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그중에는 익숙한 듯 저 멀리 보이는 문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마치 이곳을 이미 겪어 봤다는 양.

나는 서둘러 아무렇지 않게 걸어가는 사람 한 명의 어깨를 붙잡았다.

"잠깐, 잠깐만! 거기 너!"

내가 붙잡은 그가 고개를 돌린 순간 나는 흠칫하고 몸을 떨었다.

녀석이 보인 눈동자는 보통 사람과 동떨어져 있었다.

마치 수많은 전선을 건넌 것처럼 피폐해 보였다.

내 손을 뿌리치고 걸어가자, 그를 바라보던 내 얼굴이 확 찌푸려졌다.

어떻게 된 건지는 몰라도 일단 여기에서 빠져나가야 한다.

저 멀리 보이는 흰색 공간을 넘어가면 무언가 답이 나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때의 나는 알지 못했다.

만기 전역을 10일 남기고 재벌 집 막내아들답게 돈 쓸 일만 남았다고 믿은 내 인생이.

영원히 순환되는 지옥에 갇혔다는 것을.

* * *

『 1회차 』

한때 패닉에 빠졌던 나지만 인간은 적응의 생물이라던가.

1층 단위로 나눠진 크라운 로드는 탑과 같았다.

회귀자들은 그 탑을 오르고, 100층에 도달하여 보스인 크라운을 쓰러트리면 끝난다.

또한 0.5층마다 안전지대가 존재하였고, 그곳에서 아직 인간성을 유지하고 있는 자들이 마을을 형성해서 살아가고 있었다.

"클리어는 다른 머저리들이 알아서 해 주겠지."

5년이나 있다.

크라운 로드 참가자는 나 말고도 무려 5만 명이나 된다.

게다가 나는 경험이라고는 없는 후발 주자였다.

그에 반해 벌써 몇 번이나 회귀를 경험한 녀석들이 있으니 내가 도움이 될 리 만무하다.

무엇보다 이곳은 군대에 비하면 돈도 벌 만하다.

거기에 여자도 있다.

굳이 위험을 감수하며 오를 이유가 있을까.

그리 생각하며 나는 크라운 로드 1.5층에 적응해 유유자적 잘 살아갔다.

그리고 크라운 로드의 제한 시간을 잊어갈 때쯤.

5년이 지난 순간.

처음 그때처럼 군바리로 돌아와 있었다.

『 2회차 』

1.5층에서 만나 사귀던 체렌과 단란한 시간을 보내던 중 갑작스레 공간이 뒤바뀌자, 한동안 나는 바보처럼 눈만 끔뻑였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이곳이 내가 5년 전에 보았던 시작 장소와 똑같다는 것을 깨닫고 천천히 몸을 떨기 시작했다.

"썅."

입에서 제일 먼저 튀어나온 건 욕설이었다.

보자마자 깨달았다.

층을 공략하던 녀석들이 크라운 로드 클리어를 실패한 것이다.

집으로 금방 돌아갈 수 있겠거니 하면서 가장 안전한 1.5층에서 5년을 낭비한 내게 돌아온 것은 물거품 같은 허상뿐이었다.

젊어진 얼굴.

1년 6개월을 꼬박 입어 낡은 군복.

다시 짧아진 머리카락.

문득 기분 나쁜 감각이 들었다.

'이거 또 돌아가면.'

자그마치 10년이다.

['크라운 로드의 창시자' '천상'이 전합니다.]

[넌 곧 죽을 운명이었다. 그러나 크라운 로드에서 승리한다면, 그 운명에서 벗어나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1회차에 보았던 글자가 다시금 눈앞에 떠올랐다.

"대체 뭐 하는 거야. 이 머저리들은!"

말과 함께 베레모를 내던지며 이번에는 내가 직접 나섰다.

어차피 이곳에서의 5년은 아무리 노력해도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면, 처음으로 되돌아가니 모두 쓸모없는 것들이다.

그렇다면 빨리 클리어를 해 지구로 돌아가야만 한다.

내게는 빛나는 생활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1층의 주인' '조소하는 신데렐라'가 당신의 2회차를 환영합니다.]

환영은 얼어 죽을.

'머저리들이 클리어 못 하면 내 손으로 해 주마.'

그렇게 도전이 시작되었다.

초기에는 몇 번 죽을 위기도 있었지만, 악착같이 살아남아 목표를 향해 헤쳐 나갔다.

그 후 어느 정도 적응하고 나서는 다른 회귀자 녀석들을 뒤따라 정보를 모으고, 뛰어난 '클래스'를 선택하며 나는 폭풍 성장해 나갔다.

그러다가 나름 동료애 같은 것도 생겨서 다른 녀석들이랑 의기투합해 층을 돌파하기도 했다.

58층.

내가 도달한 최고층.

또 5년.

또 5년이 지나 버렸다.

나는 역시나 군바리로 돌아와 있었다.

『 3회차 』

100층에 존재하는 크라운은 보지도 못하고 또 이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씨바아아아아아아아알!"

열심히 쌓아 둔 클래스와 레벨, 스텟이 모조리 초기화된 순간 분통이 터졌다.

이 좆같은 모습으로 또 돌아왔다.

짧아진 머리부터 입고 있는 군복까지 미치도록 엿 같았다.

베레모를 바닥에 집어 던지고 쾅쾅 짓밟은 나는 눈을 부라렸다.

이번 회차에서 확실히 깨달았다.

이건 혼자서는 안 된다.

['1층의 주인' '조소하는 신데렐라'가 당신의 3회차를 응원합니다.]

2회차 때의 아는 놈들을 모으고, 전 회차에서 터득한 기억을 이용해 필사적으로 아이템을 얻으며 레벨을 올렸다.

그런 도중 나보다 앞서 몇 회차나 크라운 로드를 반복한 유명한 녀석이 우리 앞에 나섰다.

크라운 로드 지명자 '황제'의 인도하에 우리는 필사적으로 크라운 로드를 뚫었다.

크라운 로드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참가자들의 마음이 처음으로 한데 뭉쳤다.

이번에는 클리어한다.

기필코 클리어한다.

그리고 또 5년.

나는 군바리로 돌아와 있었다.

『 4회차 』

그러나 내 표정은 이전과 달랐다.

['1층의 주인' '조소하는 신데렐라'가 당신의 4회차를 기대합니다.]

3회차의 기한이 끝나 회귀한 순간, 전속력으로 크라운 로드를 돌파하고자 모두가 협력했다.

그 결과 우리는 역사상 최초로 90층에 도달했다.

전 회차의 우리는 또 실패하고 말았지만, 그만큼의 경험을 쌓았다.

그렇기에 이번에는 할 수 있다.

클리어가 가능하다.

'황제'와 함께라면 분명히 성공 가능하다.

그리고 그런 기대와 집념을 통해 사상 최초로 99층까지 도착했을 때.

일이 터졌다.

「우리는 돌아가지 않는다. 이 세계에서 영원히 군림할 것이다.」

지명자들이 만든 길드이자, 정예 중의 정예였던 '야신'이 배반하였다.

그들은 '황제'를 죽이고 참가자들 사이에 전쟁을 일으켰다.

그렇게 클리어하고자 하는 자들과 돌아가지 않으려는 자들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

이 전쟁으로 인해 99층을 돌파할 때보다 훨씬 많은 사망자가 발생했고 참가자들 중 절반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결국, 끝끝내 100층의 최종 보스 크라운에게 도전조차 하지 못하고 능력 있는 회귀자들만 잃은 채로 5년이 지나 버렸다.

그리고 나는 또다시 군바리로 돌아와 있었다.

['크라운 로드의 창시자' '천상'이 전합니다.]

[넌 곧 죽을 운명이었다. 그러나 크라운 로드에서 승리한다면, 그 운명에서 벗어나 살 수 있을 것이다.]

멍하니 나는 눈앞에 나타난 글자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100층의 크라운에게는 도전조차 해 보지 못하고 또 5년.

나는 얼굴을 쓸어 올리며 비명을 지르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았다.

황제가 존재하던 4회차가 유일한 기회였다.

경험과 능력을 지닌 회귀자들이 살아 있었던 그때가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능력 있는 회귀자들이 대부분 죽었다.

이제 그 자리를 채울 새로운 참가자들은 크라운 로드 따위는 경험해 본 적도 없는 뉴비들.

뻔하다.

모든 기회가 날아갔다.

"X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크라운 로드.

성좌들의 놀음판에 나는 또 놀아나고 있었다.

까득.

이가 부딪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주먹을 쥔 손에 핏방울이 맺힐 정도로 힘이 들어갔다.

됐다.

다 필요 없다.

"그냥 나 혼자서 한다."

24살 하천성.

크라운 로드에 체류한 기간 20년.

크라운 로드 5회차.

지구로 돌아가고자 독기를 품고 다시 한번 크라운 로드에 도전한다.

* * *

크라운 로드.

5년 안에 총 100층을 돌파하여 최종 보스인 크라운을 쓰러트릴 때까지 무한히 반복하는 로그 라이크 세계.

참가자 수는 총 5만 명.

50층 이후로는 지구와는 전혀 다른 9개의 세계의 참가자까지 합쳐져 50만 명이 도전하게 되는 세계.

그중에는 나와 같이 회차를 반복하는 자들도 있고, 이전 회차에 죽은 사람 수만큼 새로이 소환되는 자들도 있다.

그리고 전자에 속하는 사람. 지금 검은색의 공간 앞에 서게 된 나는 5회차였다.

"하, 씹."

이미 몇 번이 봐온 광경을 다시 마주하자 짜증 섞인 욕설부터 흘러나왔다.

시작지점에 소환된 몇몇 사람들은 허탈감에 주저앉아 있었고, 더러 정신이 나간 녀석들도 몇몇 있었다.

처음 온 자들은 영문을 몰라 오들오들 떨거나 당황하고 있었고, 이미 몇 번 경험한 녀석들은 익숙한 듯 검은색 일색인 공간 사이에 수놓아진 흰색 문으로 걸어 나가고 있었다.

'썩을, 야신들은?'

고개를 세차게 돌리며 내 눈이 야신들을 찾고자 빠르게 움직였다.

그러나 시작하자마자 움직인 걸까. 눈에 들어오는 야신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없어. 망할, 그놈들 얼굴을 드러내지 않은 녀석들이 더 많으니까. 찾아내고 싶어도 한계가 있어.'

황제가 이끈 수많은 회귀자들은 야신과의 전쟁에서 죽어 나갔고, 한참 하위 층에 있던 회귀자들은 야신이 배신했는지조차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게 내로라하는 회귀자들은 모조리 최전선에서 함께 뛰고 있었으니까.

'그 때문에 아는 얼굴이 거의 없어.'

저번 회차 때 배신과 암투, 세력 간에 전쟁 탓에 역대급으로 많은 참가자들이 죽어 나갔다.

몬스터에게 죽은 것보다 사람끼리 찔러 죽인 게 더 많았다.

게다가 그 죽은 녀석들이 전부 실력 있는 회귀자란 것도 뼈아팠다.

뉴비들을 데리고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크라운 로드는 쉽지 않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다른 놈들이고 뭐고 나 혼자 해내고 만다.'

결심했다.

협력이고 뭐고 그냥 나 혼자 하겠다고.

'필요 한 건 F클래스 두 개다.'

4회차 마지막에 인간끼리의 전쟁을 겪은 후, 이번에는 혼자 하겠다고 결심했을 때 나는 한 가지 방법을 떠올렸다.

계속해서 연구했던 클래스에서 찾아낸 돌파구 하나를.

크라운 로드를 클리어하기 위해 극단적으로 강해질 수 있는 꼼수를 발견한 것이었다.

"뭐, 뭐죠. 여긴 어디예요!?"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순간 옆에서 여자 목소리 하나가 들려 왔다.

검은색의 단발 머리카락과 입가에 점 하나가 있는 그녀는 양복 차림이었다.

보아하니 회사원인 듯한 그녀는 누가 보아도 뉴비였고, 나는 그녀에게서 눈을 떼고 걸어갔다.

"저, 저기요! 잠시만요! 군인 씨!"

군인이라는 말에 반사적으로 인상이 찌푸려진다.

이 썩을 군복을 대체 몇 번이나 보는 건지.

머리카락도 밀려 다시 자라나려면 몇 달이나 걸릴 거다.

하필 크라운 로드에 소환당한 게 만기 전역 10일 전이라니, 다시 생각해도 토악질이 흘러나왔다.

"뭔가 아시는 거죠? 왜 제가 이런 곳에 있는 거죠? 전 분명 일을 하고 있었는데! 여긴 어디인 거죠?!"

나는 내 뒤를 쫓으며 다급하게 말하는 그녀를 향해 한 번 돌아보았다.

내 눈과 마주친 그녀는 움찔거리며 멈춰 섰고, 나는 그런 그녀를 잠깐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꺼져. 다른 놈들한테 물어봐."

내 말을 듣고 그녀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금방이라도 한소리 치려는 기색인 그녀를 나는 무시하고 하얀색 문을 밟아 넘어섰다.

그 순간 내가 서 있는 공간이 바뀌었다.

['1층의 주인' '조소하는 신데렐라'가 당신의 5회차를 조소합니다.]

그건 성좌의 비웃음이었다.

"망할 년이. 언젠가 기필코 넌 죽인다."

['1층의 주인' '조소하는 신데렐라'가 당신에게 행운을 빕니다.]

['조소하는 신데렐라'가 당신에게 F클래스 선택권을 지급합니다.]

['조소하는 신데렐라'가 경고합니다. 클래스는 한번 선택하면 바꿀 수 없습니다.]

'클래스.'

크라운 로드에서 참가자가 이능력을 얻고 강해질 수 있는 돌파구.

이 클래스 덕에 평범한 인간 몸뚱이로도 능력자로서 싸울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특별한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최종 보스인 크라운을 보지도 못했다.

본론으로 돌아와 크라운 로드는 클래스끼리 어떻게 조합하는가에 따라 능력 효율이 달라진다.

게임과도 비슷한 이 세계는 클래스를 조합하고 레벨을 올린 뒤, 스텟을 강화시켜 성장하는 것이 주목적인 세계이니 클래스는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매 회차마다 이전 회차보다 뛰어난 클래스를 선택하며 필사적으로 강해졌음에도 불구하고 크라운을 쓰러트리기는커녕 만나지도 못했다.

그렇다면 이전에 했던 클래스들은 모조리 폐기 처분이다.

이번에는 달라야만 한다.

혼자서 크라운을 쓰러트릴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클래스를 얻어야만 했다.

각종 클래스가 적힌 글자들이 우르르 올라가고 있는 벽 앞에 선 나는 망설임 없이 손가락을 움직였다.

"클래스 선택, 타임 리셋."

[클래스 선택을 F클래스 [타임 리셋]으로 결정하겠습니까?]

그리고 거창한 이름의 클래스가 나타났다.

2화

여기서 대답을 하면 그 즉시 타임 리셋을 얻게 된다.

클래스 이름은 정말 거창해 보인다.

마치 시간을 자유자재로 리셋 시킬 수라도 있을 것처럼.

그러나 이 클래스는 그런 특별한 클래스가 아니다.

[타임 리셋(F클래스)]

타입 : 액티브(active)

무려 자신을 1레벨 전 과거로 되돌릴 수 있습니다.

축하합니다.

이 능력만 있으면 당신은 영원히 1레벨로 살 수 있습니다!

육체 또한 1레벨 전으로 돌아가서 영원한 젊음을 맛볼 수 있습니다.

물론 5년 뒤 어차피 초기화되겠지만요.

사용하면 자신을 과거로 되돌린다. 정확히는 1레벨 전으로.

일명 똥 쓰레기 클래스.

F클래스 중에서도 폐급 중의 폐급.

처음 크라운 로드에 들어왔을 때 내가 선택한 폐급 쓰레기 클래스이었다.

유일한 장점은 자신이 빈사 상태더라도 타임 리셋을 이용해 1레벨 전으로 돌아가면 몸이 원상 복구된다는 점이다.

그러나 1스텟 하나로 격차가 큰 크라운 로드에서 레벨 다운은 피해가 너무 컸다.

한 번 살아날 수 있더라도 약해지면 말짱 도루묵이다.

게다가 더 좋은 클래스가 잔뜩 널린 마당이니, 타임 리셋은 아무도 선택하지 않는 클래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타임 리셋을 선택했다.

내가 최초로 선택했던 클래스를.

"예."

[F클래스 [타임 리셋]으로 결정되었습니다. 잠시 후 0.5층 안전지대로 이동됩니다.]

눈앞에 글자가 나열된 순간 나는 바닥을 밟았다.

환한 빛에 잠시 감았던 눈을 뜨고 고개를 들어 올린 순간 눈앞에는 새로운 글자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크라운 로드 참가자 하천성]

[크라운 로드 5회차]

지명 성좌 : 무(無)

오러 속성 : 전(電)

나이 : 24세

LV.1

체력 5

마력 5

힘 5

지력 5

민첩 5

남은 스텟 : 0

―스킬창―

F클래스 [타임 리셋]

[클래스가 비어 있습니다.]

간단한 창.

그러나 이 창은 절대적인 수치다.

스텟의 숫자가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강해진다.

그런 간단한 이야기.

창을 손으로 지운 나는 익숙한 마을을 걷기 시작했다.

어딘가 판타지와 현대가 뒤섞인 듯한 느낌의 마을은 오래전 머물렀던 곳이었고 나는 이곳의 모든 걸 알고 있다.

'목표는 10층.'

타임 리셋은 '그 클래스'를 얻을 때까지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

그렇다면 다음 클래스를 얻을 수 있는 10층까지 어떻게든 돌파해야만 했다.

위력이 전혀 없는 클래스인 만큼 맨몸으로 10층까지 돌파는 무리다.

그래서 내가 생각한 것은.

"크라운 로드 처음 참가자분들! 제가 여러분들을 도와드리겠습니다!"

당차게 외치고 있는 오지랖 넓은 녀석을 따르면 된다.

참 이상한 이야기지만 꼭 한 명씩 저런 녀석들이 있었다.

이전 회차에서 살아남은 녀석들이 저런 식으로 나서서 뉴비들을 도와주는 것이다.

'뭐, 이유는 뻔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뉴비들을 이용해 먹을 생각이겠지.

크라운 로드는 초반이 매우 위험하다.

좋은 클래스를 선택하더라도 스텟이 낮으니 이기지 못할 확률이 높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저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뉴비들을 모아 그들을 방패 막으로 써서 초반 성장을 원활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내 입장에서는 오히려 뉴비를 이용해 먹는 녀석을 역 이용해 10층까지 돌파할 생각이지만 말이다.

'게다가 이런 뉴비들 사이라면 야신도 없겠지.'

놈들은 반드시 또 움직일 것이다.

크라운 로드를 클리어해야 하는 내 입장상 그놈들은 무조건 배제해야만 한다.

"저도 껴도 될까요?"

"네, 물론이죠."

일부러 내 얼굴을 모르는 녀석을 골라 말을 걸자 상대가 흔쾌히 받아 주었다.

이 녀석은 내가 몇 회차인지 알 수 없다. 겉으로나마 뉴비로 보이게 해야겠지.

"클래스는 뭘 선택하셨나요?"

"아, 타임 리셋이에요."

그의 물음에 순진한 듯 대답해 주었다.

본래라면 절대로 말하지 않겠지만 타임 리셋 따위 아무한테나 가르쳐 줘도 무방한 클래스다.

그러자 내 대답을 들은 그는 아 하며 아쉬운 탄식을 뱉었다.

회귀자답게 타임 리셋이 쓰레기 클래스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 녀석에게 뉴비의 클래스는 상관없다.

'게다가 이놈 내 얼굴을 모르는 녀석인 듯하고.'

5회차씩이나 크라운 로드를 해 온 데다가 최전선에도 섰던 나이기에 회귀자들 중 나를 아는 녀석들도 상당수 있다.

물론 저번 회차에서 잔뜩 죽은 탓에 이젠 얼마 남지도 않았겠지만.

회차를 수없이 반복하며 동료의 죽음에 무뎌진 탓일까, 나는 이제는 그러한 것에 큰 감흥을 느끼지 않았다.

"안 좋은 클래스인가요?"

나는 뉴비인 양 순진하게 되물었다.

그러자 그는 능글맞은 미소를 지었다.

"괜찮습니다. 10층을 돌파하면 다른 클래스를 획득하실 수 있을 테니까요. 게다가 군인이시지 않습니까. 그때까지 잘 견딜 수 있을 겁니다."

썩을 군복.

어쨌든 그가 자신의 무리에 끼워 주자 나는 몰려 있는 사람들 곁으로 갔다.

행색과 행동거지를 보아하니 정말로 모조리 뉴비였다.

이번 회차에는 뉴비들이 4만 명 이상 유입되었기에 뉴비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

'초반 아이템은 어쩔 수 없겠구만.'

크라운 로드는 각 구역을 클리어할 때마다 유용한 아이템이 수여된다.

당연히 최초 클리어를 하는 자들에게는 후발 주자들보다 좋은 아이템을 주기에, 회귀자들은 그 아이템을 얻고자 제일 먼저 층을 클리어하려고 다툰다.

평소에 사용하던 뇌뢰를 클래스로 선택했다면 나도 그 틈에 끼었을 테지만, 타임 리셋을 선택한 지금 나는 그런 경쟁에 끼일 수 없다.

그저 조용히 10층까지 남들 사이에 끼여 성장해 나갈 뿐이다.

"어."

웅성거리는 뉴비들 사이에 끼고자 무리로 다가가자 그 순간 한 여자가 날 알아봤다.

바로 1층에 들어오기 전 나한테 말을 걸었던 회사원 여자였다.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눈살을 찌푸렸다.

'뭘 찌푸려? 콱, 면상을 찢어 버릴까 보다.'

평소 성격대로라면 그대로 내뱉었겠지만, 지금은 베레모를 꽉 눌러 쓰며 그 여자의 시선을 피했다.

별 탈 없이 무리에 낀 지금 괜한 상황은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뜨거운 시선은 계속해서 느껴졌다.

"그럼 크라운 로드에 대해 자세히 알려 드리겠습니다."

내가 사람들 사이에 조용히 끼자 우리를 모은 녀석이 크라운 로드에 관한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일단 제 소개부터 하죠. 제 이름은 이고리. 러시아 사람입니다. 여러분들은 원래라면 죽을 운명이었으나 성좌의 선택을 받아, 운명을 피해 크라운 로드에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소개와 함께 설명을 시작한 이고리의 말을 나는 그저 가만히 듣고 있었다.

죽을 운명을 성좌가 선택하여 피할 수 있었다.

크라운 로드를 5회차나 했던 나로서는 전부 아는 이야기였다.

여기 있는 모두는 원래라면 죽을 운명이었다.

사고사든 병이든 뭐라도 걸려 갑작스레 죽을 운명.

지금 이야기하기에는 복잡하니 나중에 다시 생각하자.

나도 준성좌 '카탈민의 노예'를 붙잡고 나서 안 이야기였으니까.

'저놈은 내가 아는 것만큼은 모르는 모양이지만.'

팔짱을 낀 채 한참을 설명한 이고리는 설명이 끝난 뒤 가볍게 손을 올렸다.

"그럼 질문받겠습니다."

오호, 질문까지.

이고리의 발언에 몇몇이 손을 들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뉴비에게 이고리의 정보는 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층마다 성좌가 내는 퀘스트를 클리어하게 될 거라고 했는데 그게 무슨 소리인가요."

"말 그대로입니다. 여러분들은 층을 올라갈 때마다 성좌들의 퀘스트와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저희를 시험하고 저희가 다음 층에 올라가기에 적합한지 판단할 것입니다."

이고리의 발언에 또 다른 사람이 손을 들었다.

"그 퀘스트란 건 위험한가요."

"예, 죽을 수도 있습니다."

웅성웅성.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이고리의 발언에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퍼져 나갔다.

그런 뉴비들을 바라보며 이고리는 진정시키듯 손을 한 번 더 든 뒤 말했다.

"목숨을 잃는 게 두려운 사람들은 이곳에 남아 주십쇼. 물론 0.5층에서도 일만 한다면 충분히 먹고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희가 하지 않으면 5년 뒤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그때의 무력감은 이뤄 말할 수 없죠. 여러분에게는 클래스가 있습니다. 그리고 레벨이 있습니다. 기억하십쇼. 여러분은 상상 이상으로 강합니다."

이고리는 차분히 사람들을 설득했다.

강력한 클래스의 존재를 근거로 주장하며 설득하고 또 설득했다.

그래도 이고리의 말을 듣고 망설이는 사람들이 상당수 있었다.

무지에서 비롯된 두려움이란 것은 사람을 쉽사리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이었다.

"전 끝까지 가겠어요. 집으로 돌아갈 거니까요."

그 순간 아까 보았던 회사원이 손을 들며 발언했다.

회사원의 눈에는 투지가 엿보였다.

이고리는 그녀의 모습에 박수까지 치며 만족했다.

"좋습니다. 멋진 자세입니다. 여러분 걱정하지 마십쇼. 적어도 10층까지 여러분들을 확실히 지켜 드리겠습니다. 저를 믿고 10층까지만 가 보고 그 뒤에 결정하셔도 여러분에게 큰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그, 그럼."

"나도 참가할까."

회사원과 이고리의 콜라보로 하나둘 사람들이 참가를 희망했다.

이름 모를 회사원은 어느새 이고리와 친해져 잡담을 나누고 있었고, 그런 그들을 보며 나는 슬쩍 사람들 사이에 끼어 참가 희망 쪽에 들어갔다.

이고리가 도와주겠다는 말에 뉴비 중 대부분이 참가 의사를 보인 것이다.

"좋습니다. 많이 남아 주셨군요. 그럼 굳이 기다릴 것 없이 바로 1층으로 출발하겠습니다. 1층은 튜토리얼과 같은 곳. 여러분의 클래스를 마음껏 시험하실 수 있을 겁니다."

바로 돌파하려는 속셈인가.

하긴 이고리의 말대로 1층은 별 볼 일 없는 곳이다.

['1층의 주인' '조소하는 신데렐라'가 당신을 비난합니다.]

좆까.

별 볼 일 없는 건 팩트니까.

['1층의 주인' '조소하는 신데렐라'가 슬퍼합니다.]

1회차 때 1.5층에서 5년간 지냈던 탓일까, 조소하는 신데렐라는 나를 기억하고 내가 매번 1층에 올 때마다 이렇듯 말을 걸어왔다.

그러나 내 입장에서는 전혀 달갑지 않은 관심이다.

성좌의 지목으로 권능을 내려 주는 세례를 받을 수 있지만, 조소하는 신데렐라는 지목을 하지 않기로 유명한 성좌였다.

그렇기에 나는 조소하는 신데렐라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다.

이고리를 따라 한참을 걷자 우리는 올라가는 계단과 마주했다.

1층으로 이어지는 계단.

마치 유치원생처럼 이고리 '선생님'의 안내를 받으며 계단을 오르고 또 올라 마지막 계단을 오른 순간 눈앞이 번뜩였다.

뒤바뀐 시야.

수만 개의 별들이 박힌 밤하늘 위에 돌아가는 거대한 시계.

중심에 존재하는 유리로 지어진 탑과 끝없이 위로 이어진 계단.

이곳이 바로 1층.

조소하는 신데렐라가 관장하는 1층 '유리 구두'다.

['조소하는 신데렐라'가 관장하는 1층 Stage '유리 구두'에 입장하였습니다.]

* * *

시선을 돌리자 저 멀리 조그마한 유리 토끼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들은 각자 자신의 가슴팍에 시계를 가지고 있었고, 시계는 째깍째깍 소리를 내며 12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성좌 '조소하는 신데렐라'가 관장하는 1층 유리 구두는, 하늘의 시계가 12시가 되기 전까지 다음 층인 1.5층으로 나아가면 됩니다. 그렇기에 그전까지는 유리 토끼를 사냥하며 레벨업을 하는 튜토리얼 같은 곳이죠. 11시 30분까지 각자 흩어져서 사냥을 하고 다시 계단을 오를 테니 각자 한번 사냥해 보도록 합시다."

크라운 로드에 모든 층 중에서 가장 안전하기로 유명한 곳이 바로 이곳 1층 유리 구두.

이고리의 말에 사람들은 미심쩍어하면서도 나섰고, 눈치 빠른 자는 이 시간 동안 이고리에게 다가가 친분을 쌓고자 노력했다.

나는 그런 그들을 딱히 신경 쓰지 않으며 유리 토끼에게 다가갔다.

하늘에 있는 별을 비추고 있는 유리 토끼는 반짝거리며 빛났다.

나는 무신경하게 토끼를 손으로 잡아 올렸다.

'모든 몬스터 중 최약체 유리 토끼.'

쉽게 깨지며 한없이 약하지만, 경험치는 15층보다도 많이 주는 녀석이다.

그런 유리 토끼를 나는 즉시 바닥으로 내려찍었다.

쨍그랑.

유리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파편이 손에 박혔다.

그러나 나는 아랑곳 하지 않고 군화로 유리 토끼를 짓밟았고 그 순간 빛이 몸에 감돌았다.

3화

[축하합니다. 레벨 업 하셨습니다!]

[좀 더 많은 성좌들이 당신을 인식합니다.]

레벨 업을 하며 손의 상처가 사라지자, 나는 스텟을 민첩에 모두 투자했다.

이처럼 레벨 업은 망가진 몸을 복구시켜 준다.

그렇기에 아무리 다쳐도 상관없다.

"아, 너무 멀리 가지 마십쇼! 계단에서 너무 멀어지면 12시가 되기 전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중간중간 들리는 이고리의 충고를 흘려넘기며 나는 계속 스텟을 찍었다.

민첩을 올려서인지 몸이 조금 빨라졌음을 느꼈다.

시험 삼아 빠르게 바닥을 한 번씩 팍팍 밟은 나는, 마침 눈앞에 나타난 또 다른 유리 토끼를 발로 차 깨트렸다.

12시가 되기 전까지 유리 토끼의 반격은 없다.

그렇기에 나는 보는 족족 유리 토끼를 깨트리고 다니기 시작했고, 다른 뉴비들도 하나둘 유리 토끼에 자신의 클래스를 시험하기 시작했다.

'이고리는.'

고개를 돌리자 이고리는 얼음 같은 창을 휘두르며 유리 토끼를 사냥하고 있는 게 보였다.

F클래스 '추위에 얼어붙은 창' 인가.

익숙한 무기를 쥘 수 있는 건 큰 메리트긴 하지.

그렇게 한참을 유리 토끼를 깨트렸을까, 레벨 10에 도달한 순간 더 이상 레벨이 오르지 않았다.

유리 토끼의 경험치는 레벨 10까지만 제공되기에 레벨 업이 멈춘 것이었다.

"여러분,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다음 층으로 이동하죠!"

그 순간 이고리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람들은 이고리의 안내를 따라 또다시 다음 층으로 이동하기 위해 계단을 올랐고 나도 그 뒤를 따르며 중얼거렸다.

"또 보자고 조소하는 신데렐라."

['1층의 주인' '조소하는 신데렐라'가 궁금증을 표합니다.]

기대해라.

조만간 기겁하게 될 테니까.

[축하합니다. 10871번째로 1층을 클리어하셨습니다.]

['1층의 주인' '조소하는 신데렐라'가 당신의 클리어를 축하하며 보상을 지급합니다.]

조소하는 신데렐라의 보상과 함께 1.5층에 오른 순간 익숙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1회차 때 5년간 생활했던 내 공간.

이제는 5년 만에 되돌아온 이곳에서 나는 쓰디쓴 한숨을 내쉬었다.

이곳만큼은 다시 돌아오고 싶지 않았건만 또 돌아왔다.

"모두들 수고하셨습니다. 1층 클리어 보상이 들어 오셨을 테니 각자 확인하고, 또 층을 오르실 분들은 조금 쉬고 잠시 후 저 중심에 있는 계단 앞 광장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이고리의 말에 여기저기서 안도의 한숨이 들려 왔다.

그러나 몇은 눈을 번뜩이며 방금 막 친해진 사람들과 떠들었다.

"이 정도면 할 만한데."

"클래스 대박이다. 만화처럼 불이 손에서 나가."

"2층도 금방 깰 거 같아."

그리고 1층을 클리어했다는 것에 몇몇이 섣부른 판단과 함께 자신감에 차기 시작했다.

처음 써 보는 클래스의 위력에 감격한 자들도 몇 있는 듯싶었다.

그런 그들을 보며 나는 새삼 뉴비들의 위험성을 느꼈다.

집단이 되니 자신감이 끌어 오르는 건가.

'다음 층에 몇 죽겠군.'

누군가 죽어 나가면 그때 가서야 깨닫게 되겠지.

크라운 로드가 어떠한 곳인지.

사람은 원래 죽음이 다가올 때까지 자신은 죽지 않을 거라고 쉽게 판단하는 편이니까.

그걸 나도 뼈저리게 느꼈기에 알고 있다.

"이고리 님! 정말 대단했어요! 이고리 님만 있으면 크라운 로드도 클리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하하, 별거 아닙니다. 허나연 씨도 열심히 하지 않았습니까."

얼씨구.

그 순간 열심히 이고리에게 알랑방귀를 끼는 회사원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저 여자 아까부터 엄청 이고리를 따른다.

저 반짝거리는 눈, 배배 꼬는 몸동작.

은근슬쩍 계속되는 스킨십.

이고리도 싫지 않은 표정인 걸 보니 조만간 거사가 이루어질 듯싶었다.

"보상 아이템을 받겠다."

거사는 알아서들 치르라고 하고 나는 곧바로 발언을 내뱉었다.

그 순간 손에는 검 하나가 턱 하니 쥐어졌고 눈앞에는 문자가 나열되었다.

[1층 클리어 보상으로 롱 소드가 지급되었습니다.]

롱 소드를 쥔 나는 칼집에서 빼 검 날을 확인하곤 혀를 찼다.

기왕 줄 거라면 도를 줄 것이지.

검은 손에 잘 안 맞는데. 망할 성좌 같으니.

어찌 되었든 이왕 준 거 잘 써먹겠다고 생각하며 허리춤에 롱 소드를 찼다.

다른 사람들도 나처럼 보상으로 각종 무기를 받은 듯싶었다.

'마지막 스텟은 힘에 투자하고.'

롱 소드를 휘두를 수 있는 힘 정도는 확보하고자 힘에 스텟을 투자한 나는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내가 도달했던 최고 레벨은 561.

그 이상 올라가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생각했다.

그러나 우리를 이끌었던 황제의 레벨은 자그마치 999. 나보다 훨씬 높은 레벨을 가진 그는 압도적인 능력으로 우리를 99층까지 이끌었다.

비록 다구리에는 장사 없다고 야신에게 배신당해 죽음을 맞이했지만.

'그러고 보니 야신을 창립한 2위 녀석은 죽었던가?'

회귀자 랭킹 2위이자, 야신 길드 창립자, 야신.

회귀자 랭킹 1위 황제를 죽이고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인 그는 황제가 죽고 종적을 감추었다.

세간에는 그가 죽었다는 말이 나돌았지만, 그를 본 적 있는 나는 그가 그리 쉽사리 죽지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황제. 그래도 회귀자 중에서는 제일 괜찮은 인간이었는데.'

최전선에 같이 서 본 만큼, 몇 번 그와 대화를 나눠 본 적 있는 나는 황제를 추억했다.

회귀는 이게 문제다.

우리가 무슨 짓을 하건 전부 과거의 일이 되어버린다는 게.

'사람이 현재 진행형으로 살아야지.'

야신과 야신의 길드원들이 배신한 것은 그들이 지구에서는 난민이나 실패자, 병자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지구에 돌아가고 싶지 않은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저, 군인은... 빼... 게."

그 순간 군인이라는 말에 내 귀가 반응했다.

뉴비 중에 군복을 입고 있는 건 나 하나뿐이었고, 내 시선도 자연스레 그쪽으로 갔다.

대화를 하고 있는 건 허나연과 이고리, 그리고 사람 몇 명.

그중 여자는 허나연뿐인 걸 감안하면 분명 그녀의 목소리였다.

'아까 전 보복이라도 하겠단 건가.'

흐음, 이간질이라.

어차피 떠날 뉴비 집단이지만 재미있는 짓을 해 준다.

"자, 다시 출발해 볼까요."

얼마간 롱 소드의 그립을 만지작거리고 있었을까, 다시금 출발을 알리는 이고리의 말에 사람들이 하나둘 일어섰다.

분명 2층은 '숙명의 태만' 이 관리하는 '숙명의 정원'이다.

패턴은 1층과 비슷한 몬스터 사냥.

쉬운 난이도이니 별 탈 없이 진행 가능하리라.

...라고 믿었었다.

"꺄아아아악!"

"사, 사람이."

"총알이야 피해!"

2층에서 뉴비들이 집단으로 죽어 나가기 전까지는.

"어째서."

나는 황당함과 짜증에 뒤섞인 채 중얼거렸다.

덜컹거리는 기차 소리.

붉은색의 낡은 나무로 지어진 기차의 내면.

여기저기서 들리는 사람의 비명 사이로 들리는 총소리와 문 너머에 우리를 향해 총을 겨누고 있는 선인장.

그리고.

우리를 맹렬히 뒤쫓고 있는 기차보다도 커다란 사하라 웜.

5회차 동안 숙명의 태만이 관리했던 2층 숙명의 정원이.

['메마른 황야'가 관장하는 2층 Stage '사막 열차'에 입장하였습니다.]

'사막 열차'로 뒤바뀌어 있었다.

* * *

2층에 입장하기 전.

1층에서 호기롭게 유리 토끼를 사냥한 사람들은 너도나도 클래스에 취해 2층에서 일어날 일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 머릿속에는 일종의 안전장치가 있었다.

이미 과거에 2층을 클리어해 본 이고리의 존재와 지금껏 경험해 보지 못한 강력한 능력인 클래스.

그 두 가지가 어우러져 사기가 진작 되었던 것이다.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단순한 녀석들이야 자신의 클래스에 도취되어 있었지만 몇몇은 주의를 기울이며 바짝 긴장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저런 녀석들은 다음 회차까지 살아남을 확률이 높지.'

5회차나 겪었기 때문일까, 사람 보는 눈 하나는 확실히 올라간 나는 쓸 만해 보이는 녀석들을 확인했다.

그러나 곧 나는 머리를 저어 털어 내야만 했다.

'자꾸 과거 버릇이 나오네.'

동료를 만들고, 길드에 참가하고, 최전선에 서 봐서 알지 않는가.

황제 정도 되는 인간이 곁에 있더라도 크라운 로드는 클리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믿을 건 나뿐이다.'

이번 길은 나 혼자서 걷겠다.

그리 결심한 게 엊그제인데 잊어서야 쓰나.

스스로 다짐하며 계단을 마저 오른 순간 나는 또다시 흰색의 빛에 휩싸였다.

2층에 입장한 것이었다.

덜컹덜컹.

순간 익숙지 않은 소리가 귀에 일렁였다.

그 소리는 마치 기차가 철로를 달리며 부딪치는 소리와 비슷했기에 나는 의아함을 품었다.

숙명의 정원은 벌레 소리로 유명하다.

하나 들려 온 게 덜컹덜컹이라니?

빛이 사라지고 시야가 확보된 순간 나는 눈을 깜빡거렸다.

마치 사태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내 눈앞에 매세지가 떠오르기 전까지.

['메마른 황야'가 관장하는 2층 Stage '사막 열차'에 입장하였습니다.]

메마른 황야.

본적 없는 성좌의 이름에 내가 경악한 순간.

타앙!

총소리가 울려 퍼졌다.

"악, 아아아악."

섣불리 반대편 열차 문을 열었던 한 녀석이 문 너머에서 날아온 총알에 맞은 것이었다.

"총, 총?!"

"꺄아아아아아악!"

핏물을 흘리며 쓰러진 뉴비 탓에 순식간에 열차는 혼비백산으로 변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좌석 뒤편에 몸을 숨겼다.

그리고 바짝 좌석에 몸을 붙이고 열차 건너편을 살피자, 거기에는 선인장이 서 있었다.

카우보이 복장을 하고 손에는 권총을 쥔 녀석이 우리 쪽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뭐야, 이건."

확실하다.

2층을 관리하던 성좌가 바뀌었다.

4회차 동안 줄곧 같았던 2층이 새로운 스테이지로 완전히 뒤바뀐 것이었다.

['메마른 황야'가 당신을 환영합니다.]

['메마른 황야'가 2층 클리어 조건을 제시합니다.]

['빵야빵야!' 총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당신이 타고 있던 열차 롤로레스 호가 선인장 도적에게 습격당했습니다. 그런데 웬걸, 기차에 무슨 비밀이 있는 모양이군요. 뒤에서 거대한 사하라 웜이 당신이 타고 있는 기차를 금방이라도 삼킬 듯이 뒤쫓고 있습니다! 선인장 도적에게서 롤로레스 호를 구하고, 사하라 웜을 기차와 떨어트려 무사히 2.5층에 도착하십시오. 힌트는 기관실.]

그리고 눈앞에 글자가 떠오른 순간 내 인상이 팍 일그러졌다.

'사하라 웜?'

분명 이놈은 레벨 150에 달하는 녀석이라 20층 이후에 나오는 몬스터일 텐데.

쿠구구구구구궁!

메마른 황야가 내린 클리어 조건을 다 읽은 순간 대지가 흔들렸다.

창문 너머에서 기차보다 수백 배는 커 보일 사하라 웜이 사막을 휘저으며 기차로 다가오고 있었기에 그걸 발견한 사람들이 크게 당황했다.

"다들 우선 몸부터 피해요!"

그 순간 회사원 허나연이 다급히 외치자 사람들이 바삐 좌석으로 몸을 피했다.

복도에 멀뚱히 서 있으면 선인장 총에 벌집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표정은 여전히 좋지 못했다.

당장은 좌석에 몸을 피하더라도 곧 선인장이 이곳까지 도달할 거란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체 뭐야. 왜 2층이."

그리고 당황한 사람 중에는 이고리 또한 있었다.

갑자기 뒤바뀐 2층의 상황을 보고 그도 제대로 된 판단을 하지 못하고 있는 듯싶었다.

그야 그렇지.

나도 한순간 얼마나 당황했는데.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모르지만.'

클리어 조건이 뒤바뀐 이상 이 집단은 글렀다.

분명 뉴비들은 모조리 죽어 나갈 것이다.

"이고리 님!"

일단 혼자서라도 탈출을 하든 클리어를 하든 해 보자고 생각하며 몸을 일으키려던 찰나, 이고리의 반대편 좌석에 있던 허나연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빨리 뭔가 해결책을!"

그녀의 재촉에 이고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우선, 누군가 돌파를."

그리 말하며 이고리가 주위를 둘러보자, 객차 내의 모두가 침묵했다.

그야 그렇지.

여기 있는 모두가 뉴비.

총을 들고 있는 상대로 돌파할 수 있는 녀석이 있을 리가 없었다.

"이고리 님."

다시금 허나연이 재촉하자 이고리는 입술을 깨물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도 나름 책임감은 있었던 듯 그는 좌석을 넘어가며 선인장이 이쪽 칸으로 오기 전에 객차를 잇는 입구 벽에 바싹 달라붙었다.

뚜벅뚜벅.

선인장의 발소리가 천천히 울려 퍼진다.

긴장된 순간 이고리의 손에서 얼음의 창이 만들어졌다.

선인장이 입구 코앞까지 온 순간 이고리가 움직였다.

"어?"

그는 창이 아닌, 바로 옆에 있던 사람을 손으로 잡아 입구에 들어선 선인장 앞에 내던졌다.

4화

타앙!

갑작스레 튀어나온 사람을 보자마자 선인장은 총을 발사했고 사람들은 비명을 질렀다.

그 틈을 타 이고리는 선인장의 머리를 꿰뚫었다.

순식간에 사람들의 표정이 제각각 뒤바뀌었다.

"이고리 님?!"

그리고 그중에서 가장 크게 충격을 받은 건 허나연인 듯싶었다.

그녀는 예상치 못한 이고리의 행동에 입조차 다물지 못했고 이고리는 창을 빙글 돌려 뽑아 내곤 말없이 다음 칸으로 이동하려 했다.

"잠깐만요. 잠깐만, 이고리 님!"

이고리의 이동에 당황한 허나연이 그 뒤를 쫓아 복도를 달려갈 동안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롱 소드를 뽑았다.

뉴비 모임은 끝났다.

이고리도 그렇게 판단한 것이었다.

"오, 뇌제 아니심까."

그리고 이고리처럼 나도 다음 칸으로 이동하려는 순간, 나는 내 과거 지명을 언급한 목소리에 고개가 돌아갔다.

"...마도?"

5년 동안 줄기차게 쓰던 검은색 모자, 그와 같은 색의 진한 아이라인.

똑똑히 기억한다.

마도다.

"이거 오랜만입니다."

내가 반응을 보이자 3칸 정도 앞 좌석에 있던 마도가 반갑게 인사해 보였다.

마도, 그는 이전 회차 레벨 502까지 올렸던 회귀자 중 한 명이었다.

설마 그가 나와 같은 시간에 2층에 올랐을 거라곤 생각 못 했다.

"죽지 않고 살았군."

"뇌제도 말입니다."

"난 이제 뇌제가 아니야. 지명은 초기화됐다고."

"하핫, 저도 이제는 마도가 아닙니다. 스테일러 밤비입니다."

"하천성이다."

서로 짤막한 소개를 하자 밤비가 복도를 따라 다가왔다.

그리고 내 몸을 기분 나쁘게 훑으며 히죽 웃었다.

"그렇군요. 과거의 하천성 씨는 이렇게 생겼던 겁니까."

"기분 나쁘게 훑지 마. 그것보다 네가 들어오는 모습을 못 봤는데, 나보다 먼저 들어왔던 모양이지?"

"예, 제가 딱 입장할 때 이미 2층이 클리어된 모양이라 어쩌다 보니 스타트 라인에 서게 됐습니다."

밤비의 말에 나는 혀를 찼다.

크라운 로드는 한 가지 편법이 존재한다.

그건 다음 층으로 입장할 때 층이 클리어되기 바로 직전에 들어왔어도, 참가로 판정되어 스테이지 클리어가 된다는 점이었다.

밤비의 말대로라면 우리 바로 앞에 있던 녀석들이 타이밍에 안 맞게 2층을 클리어해 버렸다는 소리로, 마침 최악의 타이밍에 들어온 셈이었다.

'거기에 당분간 회귀자들의 입장은 거의 없을 거란 소리.'

우리 뒤에 들어오던 사람은 보이지 않았으니, 지금 이 멤버로 2층을 클리어해야 한다는 소리와 같다.

"밤비, 클래스는."

"저번 회차와 같이 염력입니다. 하천성 씨는요?"

"나? 안 가르쳐 줄 건데?"

"역시 대단한 인성이시군요."

내 대답을 듣고 밤비는 익숙한 듯 반응했다.

재미없는 녀석.

염력이라면 어차피 곧 밝혀질 테니 순순히 밝힌 것이다.

나는 밤비의 클래스를 듣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염력이라. 염력.

그 순간 나는 창문 밖을 힐끔 보았다.

덜컹덜컹 움직이고 있는 객차의 바깥.

"어이, 밤비."

"예, 말씀하십쇼."

"밖으로 나갈 수 있겠냐."

내가 창문을 가리키자 밤비는 핫 하고 웃고는 창문을 덜컥 열었다.

"쌉가능이죠."

훌륭한 대답이다.

그래, 기관실까지 굳이 객차 내를 일일이 직접 뚫을 필요는 없다.

그냥 밖으로 나가면 순식간이지 않은가.

"올려 줘. 너도 따라올 거면 따라오고."

"하핫, 클리어를 위해서 잠깐 동맹이군요."

특유의 웃음소리를 내뱉으며 밤비가 준비하듯 모자를 돌려쓰자 나는 창문 밖으로 몸을 뻗었다.

그 순간 밤비의 염력이 몸에 감싸졌고 즉시 지붕 위로 내던져졌다.

'마나.'

지붕 위로 내던져지는 순간 나는 손가락 끝에 마나를 모았다.

크라운 로드에서 인간을 초월자로 만들어 주는 또 다른 요소 마나.

신체를 인간의 몸보다 강하게 만들어 주는 능력이 손끝에 사용되었다.

그와 동시에 손가락이 바닥을 긁듯 지붕 위를 붙잡은 순간, 마찬가지로 발가락 끝에도 마나가 모이며 지붕 위에 섰다.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

그 속에서 몸 안을 감도는 마나를 느끼며 나는 기다랗게 숨을 내쉬었다.

"썅."

"올려 주자마자 욕이십니까."

"짜증 나잖아. 마나가 쥐꼬리밖에 없는 게."

게다가 심장을 두르는 마나의 길도 엉망진창이다.

단단한 벽이 세워져 있는 듯한 기분 나쁜 감각.

이게 정말 짜증 나는 감각이었다.

이 벽이란 게 강해지기 위해서는 무조건 뚫어야 하는 조건이고, 이 벽을 뚫고 싶으면 마력 스텟을 찍어야만 한다.

"좋지 않습니까? 이 강해질 수 있는 감각. 전 늘 새롭습니다."

"넌 고작 3회차니까 그딴 소리를 할 수 있는 거야."

이걸 다섯 번이나 반복하고 있으면 짜증만 잔뜩 날 뿐이다.

나도 3회차까지야 어떻게 하면 더 깔끔하고 빠르게 뚫을 수 있을까 싶었지만, 이제는 뚫기도 귀찮다.

차라리 회귀를 할 거면 소설에서처럼 엄청나게 뛰어난 몸뚱이를 주든가.

'그나마 남은 건 경험뿐이었는데.'

그것마저도 층이 바뀌어 쓸모없어져 버렸다.

문제는 2층만 이런 게 아닐 수도 있다는 점이다.

"밤비, 성좌가 바뀐 거에 대해 아는 거 없냐."

"아, 저 들은 거 있습니다."

혹시나 해서 물어보자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뭐야, 있었어? 진작 말해야지."

"2층을 클리어하고 나서 들어야 사기가 덜 떨어질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리고 서늘한 대답이 돌아왔다.

"설마."

"10회차 정도 반복하신 신선 한 분 기억하십니까."

"어, 그 노망났는데 뒤지게 끈질긴 할아범."

"예, 그분이 한 번 겪은 적 있으시답니다. 성좌 변동을."

"성좌 변동."

"예, 성좌 변동."

이름만 들어도 불안감이 엄습한다.

"그거. 혹시 다른 층도 성좌가 다 바뀐다거나...."

"정답입니다! 하천성 씨는 척이면 척이군요. 1층을 제외한 모든 성좌가 변경됩니다. 마치 50층과 같이 말합니다."

밝게 이야기하는 것과 달리 최악의 대답이 들려 왔다.

왠지 현기증이 나는 것 같은데 기분 탓인가.

"그럼 내가 다섯 번이나 회귀한 보람이...."

"예, 모조리 없어졌습니다."

썅.

욕을 안 하고 배길 수가 없는 상황에 부들거리고 있자 팔짱을 낀 밤비가 음음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회차는 50층까지도 뚫을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닥쳐. 내가 뚫을 거니까."

"하핫, 호기롭군요."

괜한 불안감 조성을 시키는 밤비에게 일침을 준 나는 성큼성큼 지붕을 이동했다.

다 필요 없다.

우선 눈앞에 있는 2층 클리어가 먼저다.

'열차 칸은 총 20개.'

우리는 현재 맨 끝칸에 있으니 19칸은 더 지붕으로 이동해야 하기에 나는 바삐 발을 놀렸다.

19칸.

18칸.

17칸.

16칸.

15칸.

다섯 칸을 이동한 순간 뒤에서 총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마 뉴비나 이고리가 선인장과 싸우는 소리겠지.

신경 쓰지 말자고 생각하며 앞을 걸어가려는 순간 나는 뻗으려던 발을 멈췄다.

"야, 야. 저거."

"터널이군요."

태평하게 지껄이는 밤비의 목소리에 나는 기겁하곤 롱 소드를 들었다.

마나가 손가락 끝을 타고 움직이며 롱 소드의 그립을 따라 검 날로 흘러 넘어갔다.

롱 소드에 오러를 씌워 날을 지붕에 박아 넣었고 내 주위로 원을 그리듯 빙글 돌렸다.

파삭.

나무 지붕이 오러가 담긴 롱 소드에 잘린 순간 나는 바닥 아래로 추락했다.

내가 터널을 피해 아래로 떨어지자마자 밤비도 곧바로 뒤따라 뛰어내렸고 열차는 터널에 들어섰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까닥했다가 터널의 부딪쳐 사막에 내동댕이쳐질 뻔했다.

"아직 안도할 때는 아닌 거 같은데 말이죠."

"알아."

밤비의 말에 적당히 대답하며 나는 시선을 돌렸다.

터널에 들어서자 번쩍하고 객차 내에 전등이 켜졌다.

그리고 주홍빛 전등 아래에 자리한 넓은 통로 사이에 수십 마리의 선인장이 보였다.

그들은 우리의 등장에 한순간 당황한 듯싶었지만, 곧 권총으로 우리를 겨누었다.

"마도!"

"밤비지만요!"

그 순간 일제히 선인장의 권총이 불을 뿜었다.

선인장의 수는 19마리.

권총도 19개.

총알도 겹치지 않고 19발.

19개의 총알이 우리를 덮쳐 온 순간 밤비가 양측으로 손을 뻗었다.

그 즉시 발동된 염력이 날아드는 총알을 뒤덮었다.

파직.

롱 소드의 겉에 흰색 스파크가 튀었다.

내 특성에 따라 오러의 효과가 바뀌었고, 내 발이 다음 자세를 위해 깊숙하게 앞으로 뻗어져 나갔다.

밤비의 염력에 의해 교묘하게 공중에서 굳어진 총알 사이로 롱 소드가 직선으로 뻗어 나가며 멈춘 총알 하나와 함께 선인장의 머리를 갈랐다.

일식(一式)

뇌전섬뢰(雷電閃雷)

그리고 이에 멈추지 않고 검로가 이어졌다.

이식(二式)

섬뢰적선(殲雷迪渲)

스파크가 튐과 동시에 선인장 다섯 마리의 머리가 순식간에 갈라졌다.

"역시 뇌제! 번개 같은 검이네요!"

"감탄하지 말고 너도 싸워! 난 벌써 한계라고!"

저릿한 통증이 손가락 끝을 타고 올라왔다.

몸이 마나에 익숙하지 않기에 오는 반동이었다.

이거 분명 내일 근육통으로 고생할 게 뻔했다.

"예, 그래야죠."

나머지 선인장이 다음 사격을 준비하고자 우리를 겨눈 순간 밤비가 염력을 발동시켰다.

내가 가른 총알을 제외한 18발의 총알은 어느새 밤비의 것이 되어 있었다.

녀석은 그 즉시 총알을 반대 방향으로 발사시켰다.

퍼버버벅!

선인장들의 머리가 순식간에 밤비의 총알에 터져 나갔다.

바닥의 널브러진 나머지 선인장들을 두고 밤비는 짧은 숨소리와 함께 미소 지었고 나는 혀를 찼다.

저 염력을 다루는 솜씨 하나는 인정해야 한다.

본래 F급 클래스 하위 염력은 기껏해야 돌멩이 하나를 들 수 있을 정도다.

그런데 녀석은 그 염력을 세분화시켜 사람을 들어 올리고, 손가락보다 자그마한 총알을 막았다.

"하천성 씨는 원래 운동을 하신 모양이네요. 아무리 회귀자라도 검술을 쉽게 쓰는 걸 보면요."

"군인이었으니까. 특급전사 안 따면 휴가가 적어서 죽어라 운동했었지."

덕분에 기초체력 쪽에서는 빛을 볼 수 있었다.

그래도 상당히 어설프기 그지없지만 말이다.

"이래서 회귀가 싫다는 거야. 뭘 해도 어정쩡하게밖에 못해."

"잘하셔 놓고 딴소리군요. 그것보다 정말 무슨 클래스를 선택하신 겁니까? 보아하니 패시브는 아니신 것 같습니다만."

밤비는 회귀자답게 내 상태를 보고 순식간에 유추했다.

그러나 나는 대답해 줄 생각은 없었기에 말없이 롱 소드를 허리춤에 차곤 밖을 보았다.

아직까지도 터널 안.

이 터널 생각보다 긴 것 같았다.

"썩을, 시간도 없는데."

설마 지붕으로 올라가는 걸 막기 위해서 만들어 둔 걸까.

지금도 뒤에서 사하라 웜이 미친 듯이 쫓아오고 있는 마당이다.

언제까지 기차가 터널에서 나갈까 기다릴 수는 없었다.

"이동한다."

"그래야겠네요."

객차 문 앞에 다가선 채 한 내 말에 밤비도 동의하자, 나는 문을 세차게 열었다.

그 즉시 밤비의 염력이 발동되어 날아온 총알이 막혔고 나는 그사이를 뚫으며 검술을 펼쳤다.

삐걱거리는 다리와 팔.

검의 무게를 아슬아슬하게 견딜 정도의 힘.

꺼질락 말락 하는 오러를 겨우겨우 유지하며 나는 필사적으로 선인장을 베었다.

14칸.

13칸.

12칸.

11칸.

10칸.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근육이 비명을 질러 대었다.

고작 10레벨로 뚫기에는 선인장의 수가 너무 많았고, 이제 내 체력도 한계에 부딪히기 시작했다.

그러나 멈출 수는 없었다.

멈추는 순간 오러가 꺼지고, 근육의 통증에 얼마간 움직일 수 없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음!"

"예!"

밤비와 호흡을 맞추며 계속해서 다음 칸, 다음 칸 하나씩 넘어갔다.

숨소리가 가빠진다.

눈앞이 흐릿해지는 기분이 들었지만, 이를 꽉 깨물며 악착같이 견딘 그 순간 나는 드디어 마지막 방문을 덜컥 열었다.

치이이이이이이익!

문이 열리자마자 밀려 들어오는 증기기관에 거센 열기와 연기.

마지막 칸 기관실 칸에 도착한 순간 내 몸 앞에 기다렸다는 듯이 총 하나가 겨누어져 있었다.

더블 배럴 샷건.

오래전 게임에서 본 기억이 있는 총을 선인장이 쥔 채 내게 겨누고 있었다.

"뇌제!"

이건 자신도 막을 수 없다는 뜻을 담은 밤비의 목소리가 울려 퍼질 때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나도 이미 발을 내뻗고 있었다.

오른발을 중심축으로 앞을 향해 중심을 실었다.

손에 쥐어진 검은 오롯이 선인장의 머리를 노리고 있었고, 샷건을 든 선인장의 기괴한 손가락은.

방아쇠를 당기고 있었다.

5화

타앙!

거친 폭발음과 함께 귓가에 총소리가 웅웅 울렸다.

과거 군대에서 수백 발을 쏴본 K2보다도 더욱 거세게 울린 총소리와 함께 산탄이 튀며 눈앞으로 뻗어 나왔고 일부는 밤비의 염력에 막혔다.

그러나 샷건의 산탄을 모두 막을 수 없었기에 나머지 총알은 내 몸을 강타했다.

나는 벌집이 되어 핏물이 튀는 와중에도 팔을 멈추지 않았다.

푸왁!

더블 배럴을 든 선인장의 머리를 내 검이 뚫은 순간 스파크가 튀며 선인장이 부들부들 한차례 떨었다.

그리고 쓰러져 가는 내 몸과 함께 바닥에 널브러진 선인장은 곧 죽음을 맞이했고, 산탄 총알에 벌집이 된 나는 핏물을 뚝뚝 흘리며 바닥에 무릎 꿇었다.

일부 총알을 밤비가 막아줬기에 이 정도지 자칫 했다간 샷건 한 발에 바로 저세상을 가 버릴 뻔했다.

"뇌■! 괜■■십■까!"

샷건 소리에 고막이 나간 걸까.

윙윙거리는 밤비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바닥에 얼굴을 부딪쳤다.

'이거, 가겠다.'

의식이 날아가기 직전 나는 클래스를 발동시켰다.

[타임 리셋]

한순간 눈앞에 빛이 점화했다.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내 몸은 순식간에 원래 상태로 돌아왔고 나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닥의 흥건한 핏물이 거짓말같이 보일 정도로 내 몸이 원상 복구되었다.

타임 리셋.

1레벨 전의 상태로 돌아감과 동시에 몸 상태도 온전하게 되돌려 주는 일종의 구사일생 클래스.

그러나 1레벨 다운이라는 최악의 조건 탓에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클래스지만, 그 덕에 나는 목숨을 부지했다.

"오호, 타임 리셋인가요."

눈치 빠른 밤비가 내 클래스를 바로 알아챘다.

그러나 지금 상황에서 사용하지 않을 수도 없었기에 나는 흥미로운 눈초리를 취하는 밤비를 무시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뒷 칸의 나머지 선인장은 이고리가 처리할 테고.'

선인장 도적은 내버려 두고 우선 사하라 웜이 우리를 쫓는 이유를 찾고자 기관실을 둘러보았다.

분명 클리어 조건에 적힌 힌트는 기관실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기관실을 뒤졌을까, 나는 어느 구석에 박힌 박스를 발견하곤 박스를 뜯어보았다.

"사하라 웜의 새끼군요."

"그런 모양이네."

박스 안 내용물은 다름 아닌 사하라 웜의 새끼였다.

그 괴수가 그토록 기차를 쫓던 이유가 새끼를 위해서였다는 걸 알아차린 나는 문을 덜컥 열어 새끼를 밖에 내던지려 했다.

"잠깐만요. 하천성 씨."

"너 호칭을 부를 거면 하나로 통일해라."

급할 때는 뇌제, 아니면 하천성으로. 지 꼴릴 대로 부르는 밤비에게 주의 주듯 말하자 녀석은 무슨 종이 하나를 들어 보였다.

내가 그게 뭐냐는 듯 종이를 바라보자 밤비는 종이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이 열차는 아무래도 사하라 웜 새끼를 원료로 달리는 모양입니다. 사하라 웜 새끼를 넣지 않으면 곧 열차가 멈출 겁니다."

"썩을."

다행히 사하라 웜 새끼를 던지기 전이었다.

"대신 다른 방법도 있군요."

객차의 창문 밖으로 사하라 웜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열차를 뒤쫓고 있는 걸 초조하게 보고 있자 밤비의 목소리가 들렸다.

뜸 들이는 모양새에 눈으로 그의 이야기를 재촉하자 밤비는 미소와 함께 말해 주었다.

"사람을 넣으면 됩니다."

"...연료통에 말이냐."

사이코 같은 성좌 새끼.

"예, 아까 뉴비들이 잔뜩 있었으니 그중 한 명만 넣어도 다음 층까지 충분히 갈 수 있겠죠."

히죽 웃으며 말하는 밤비의 말에 나는 침묵했다.

사람, 사람이라.

그리고 나는 사하라 웜 새끼를 내려다보았다.

크기는 내 팔뚝 정도.

이 한 마리밖에 없는 걸 보면 이 녀석 하나로 다음 층까지 갈 수 있겠지.

"그럼 한 명 잡아 오겠습니다."

"야, 너 오러 쓸 줄 아냐."

"예, 그야 쓸 줄 알죠. 전 마력에 스텟을 투자했으니 단순 오러양이라면 하천성 씨보다도 제가 더 많을 겁니다."

밤비가 가슴을 앞으로 피며 자랑스레 말했다.

밤비의 대답에 나는 사하라 웜 새끼를 우선 밖으로 내던졌다.

통통통 하고 굴러간 사하라 웜 새끼는 사막 바닥으로 파고들었고 잠시 후, 사하라 웜 어미도 우리를 쫓는 걸 멈췄다.

이걸로 한 시름 놓은 것이다.

'그럼 됐고 이제.'

나는 롱 소드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롱 소드를 밤비 녀석에게 건네려 하자, 내 손에 들린 검을 보고 밤비가 고개를 기울였다.

"이걸로 잡아 오라는 말씀입니까?"

"아까부터 뭔 개소리야. 잘라. 내 팔."

"예?"

당신이야말로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한 밤비의 표정에 나는 인상을 팍 찡그렸다.

"새끼 웜 크기가 사람 팔뚝 정도잖아. 그렇다면 내 팔 하나 정도만 있어도 충분할 거야."

"굳이 자기 팔을 말입니까."

"괜한 놈 죽을 필요는 없잖아. 난 타임 리셋으로 복구시키면 그만이야."

내 말을 듣고 밤비는 잠깐 동안 멍하니 있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입가를 가리고 웃기 시작했다.

한참을 웃는 녀석을 가만히 보고만 있자, 그제야 밤비는 웃는 걸 멈추고는 내게 롱 소드를 받았다.

"몰랐네요. 하천성 씨가 이런 사람 일 줄은."

"뭐가."

"5회차나 크라운 로드를 거듭하지 않으셨습니까. 사람의 마음은 진작 버렸을 거라 생각했죠."

"날 무슨 사이코패스로 보는지 모르겠지만 난 적어도 나한테 해코지도 안 한 놈을 죽이지는 않아. 뭐, 그렇다고 남 위험하다고 나서는 위인도 아니지만."

"네, 5회차나 되어서도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점을 전 대단하다고 여기고 있는 겁니다."

참 별 게 다 대단하다.

"전 정말로 자를 겁니다?"

"그래, 잘라."

혹시나 하고 묻는 밤비의 물음에 확답한 나는 팔을 앞으로 내뻗었다.

그런 내 팔을 보고 빙그레 웃은 밤비의 롱 소드에서 푸른색 오러가 빛났고, 그 즉시 검이 휘둘러졌다.

서걱!

눈앞에 핏물이 튀며 군복이 피로 얼룩져 갔다.

툭 하고 떨어진 팔은 바닥을 나뒹굴었고 나는 밀려오는 고통에 소리를 지르기 전에 타임 리셋을 먼저 발동시켰다.

그 순간 환한 빛이 내 몸을 감쌌고, 정신을 차렸을 때쯤에는 내 팔이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순간적인 고통이었지만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격통에 식은땀을 닦아 내곤 나는 내 팔을 들었다.

이 무게감. 기분 나쁘군.

"깨끗이 잘 잘라드렸습니다."

"그래, 고맙다."

감사하는 게 맞는지 모르겠다만. 일단 나는 잘린 내 팔을 연료통에 넣었다.

그 순간 화륵 하고 타오르는 불길과 함께 기관차가 하얀 증기를 내뿜었다.

어떤 원리인지는 몰라도 내 팔을 삼킨 기관차는 열심히 나아갔다.

덜컹.

밤비에게 건네받은 롱 소드를 허리에 다시 채울 때쯤, 그 순간 갑자기 기관실 문이 덜컥 열렸다.

거기에는 이고리가 서 있었고 그는 나를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곧 상황을 눈치챈 듯싶었다.

"회귀자였습니까."

"그래, 좀 속였다. 내가 얻은 건 없다만."

내가 회귀자라는 것을 알아차리자마자 그는 적의를 없앴다.

회귀자끼리 낮은 층에서 싸워봤자 얻을 게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회귀자."

그런 순간 이고리의 뒤에 선 허나연의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가 처리하지 않은 기차 칸이 꽤 있었던 관계로 선인장 도적들과 사투를 벌였는지 그녀의 모습은 엉망진창이었다.

그러나 이고리가 있었다 한들 여기까지 온 것을 보면 꽤나 강단 있는 여자인 듯싶었다.

"클리어는...."

"도착하면 어련히 알아서 될 거다."

이고리의 물음에 답해 주자 그는 고개를 끄덕이곤 한구석에 털썩 앉았다.

그런 이고리를 본 허나연도 그의 곁에 앉고는 해탈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이고리가 자신들 뉴비를 이용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그녀 입장으로서는 이고리한테 붙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는 사실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떤 의미론 가장 현명한 대처를 하고 있는 셈이었다.

'다른 뉴비들은 처음 칸에 있나.'

이고리가 그런 짓을 하고 난 뒤 뒤따라간 사람은 허나연밖에 없었으니.

뿌우우우우우!

그 순간 증기가 거세게 피어올랐다.

바깥으로 시선을 돌려보자 정거장이 눈에 들어왔고 그 정거장에는 하늘로 이어진 계단이 있었다.

[축하합니다. 4022번째로 2층을 클리어하셨습니다.]

['2층의 주인' '메마른 황야'가 당신에 클리어를 축하하며 보상을 지급합니다.]

4022번.

2층치고 상당히 적은 수다.

그만큼 이번 회차에 뉴비들이 많았고, 갑자기 변한 성좌에 당황한 회귀자들이 많았다는 소리겠지.

여러모로 험난한 회차가 될 것을 짐작한 나는 홀로 한숨을 내쉬었다.

* * *

정거장에 도착한 기차에서 내린 나는 팔을 쭈우욱 피며 기지개를 켰다.

타임 리셋 덕분에 엉망이었던 몸이 전부 회복되어 괜찮아졌다.

정말 레벨 다운만 아니라면 꽤나 쓸 만한 클래스인데.

'뭐, 난 그 레벨 다운이 중요한 거지만.'

어찌 되었든 아까운 클래스임은 사실이었다.

덕분에 1층 유리 구두에서 올렸던 레벨도 2나 다운 되었으니, 복구하려면 시간이 걸리리라.

"앞으로 어쩌실 겁니까?"

"뭘 어째. 계속 클리어할 건데?"

옆에 다가온 밤비에게 당연할 걸 묻느냐는 표정을 짓자 그는 미소를 지었다.

"그럼 저도 함께해도 되겠습니까?"

동료가 되겠다는 선언.

그 말을 듣고 잠깐 침묵한 나는 곧 인상을 찌푸렸다.

"싫은데."

"어라, 사람이 필요해서 뉴비 사이에 끼셨던 거 아님까?"

"그거야 성좌들이 그대로 있었을 때 이야기고 전부 바뀐 지금 뉴비 사이에 있는 건 자살 행위지."

"그럼 저랑 같이 가면 조금이라도 더 쉽게 클리어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싫어."

또 한 번 거절하자 담비는 이해할 수 없다는 눈초리를 취했다.

원래 혼자 하기로 했던 내 계획상 회귀자랑 어울리는 건 좋지 못한 판단이다.

내가 지금껏 하려는 짓은 어떠한 회귀자들도 하지 않았던 거니까.

그러나 알게 되면 모두가 할 수 있는 만큼 더 이상 비밀이 새나가는 건 사양이다.

"탑은 알아서 올라가. 나도 알아서 올라갈 테니."

"고집이 세시네요."

어쩌라고.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죠. 그럼 하천성 씨, 다음에 만날 때까지 무사하시기를."

내 고집에 못 이긴 듯 포기하며 그는 작별 인사와 함께 계단을 올랐다.

그 모습을 잠깐 본 나도 계단에 오르려 했는데, 그 순간 내 앞길을 막는 사람이 있었다.

그녀는 바로 회사원 허나연이었다.

"군인 씨, 아니, 회귀자님."

그녀는 내게 간청하듯 두 손을 모았다.

"저를 데리고 가 주실 수 없나요."

내 예상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은 말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싫어."

이고리의 실체를 알았기 때문일까, 이고리가 내리기 전에 한발 앞서 내렸던 그녀는 이제 버스를 갈아탈 모양인지 내 말을 듣고 털썩 무릎까지 꿇었다.

그리고 양손을 모아 싹싹 빌기 시작했다.

"제발, 제발 부탁이에요. 하라는 건 뭐든지 할게요. 절 데리고 가 주세요."

하라는 건 뭐든지 한다라.

그 말을 듣고 나는 고민하듯 턱을 잠깐 매만졌다.

곧 씨익하니 웃었고 그녀도 나를 따라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날 뭘로 보고. 싫어."

"아아아아아."

난 강단 있는 남자다.

싫은 건 싫다.

남 이간질하는 여자를 내가 뭐가 예쁘다고 데려가 준담.

게다가 누가 미쳤다고 크라운 로드에 뉴비를 데리고 가. 이고리도 아니고.

그녀를 내버려 둔 채 다시 계단을 오르려 하자 뒤에서 허나연의 째지는 목소리가 들려 왔다.

"당신 후회할 거야! 내가 당신 절대로 후회하게 할 거라고!"

그 정도 강단이라면 잘 살아남을 수 있겠지.

하나 내가 후회할 일은 없기에 나는 좆까라고 중지를 올려 주며 계단을 마저 올랐다.

2.5층에 오르자 사막으로 이루어진 도시가 눈에 띄었다.

중간중간 야자수를 바라보며 적당히 거닐던 나는, 다음 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앞에 서서 후우 하고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지.'

3층 공략 시작이다.

6화

Chapter 2. 최강의 1레벨

3층 모르시아의 식물.

4층 고난 섞인 자의 역경.

5층 참회하는 죄인.

6층 섬멸하는 자만.

7층 삐걱거리는 인형.

8층 꿈을 잃은 피터 팬.

9층 호각을 부는 바람.

10층 해맑은 비옷.

총 8개의 층을 공략하기까지 걸린 시간.

한 달.

나는 최전선에서 21층을 공략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으며 10.5층에서 커피를 홀짝이고 있었다.

성좌의 영향으로 언제나 비가 내리고 있는 10.5층에서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음미하다가 입을 열었다.

"개 쓰네."

가게에서 블랙커피밖에 안 판다길래 마셔봤더니 더럽게 맛없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상태창을 켰다.

[크라운 로드 참가자 하천성]

[크라운 로드 5회차]

지명 성좌 : 무(無)

오러 속성 : 전(電)

나이 : 24세

LV.31

체력 30

마력 50

힘 35

지력 5

민첩 50

남은 스텟 : 0

―스킬창―

F클래스 [타임 리셋]

[10층 클리어로 보상으로 클래스를 선택하실 수 있습니다.]

그동안에 클리어로 레벨 31까지 오른 나는 클래스 창을 내려다보았다.

아직 비어 있는 추가 클래스.

10층을 클리어하고 나서 드디어 추가 클래스를 선택할 기회를 얻었다.

아직까지 선택은 안 했다만, 이제 내가 저번 회차 때 그토록 연구했던 성과를 드디어 이룰 때가 온 것이었다.

"클래스 선택."

그 순간 내 앞에 글자들이 주르륵 나타났다.

선택은 E클래스부터 F클래스까지.

본래라면 당연히 E클래스를 선택했을 테지만, 나는 눈길도 주지 않고 F클래스까지 스크롤을 내렸다.

[얍! 네 말이 들린다(F클래스)]

타입 : 패시브(passive)

웬걸, 신기하게도 몬스터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이거 잘만하면 몬스터의 모든 작전을 알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단, 주의하세요. 목소리만 들릴 뿐 말은 안 통하니까요!

[바람처럼(F클래스)]

타입 : 패시브(passive)

당신의 몸이 바람에 날릴 정도로 가벼워집니다.

이걸 이용해 날 수도 있겠군요.

하지만 주의하세요.

폭풍이 불면 미아가 될지도 몰라요.

역시 쓰레기들이 넘쳐 나는 F클래스답다.

그렇게 한참을 스크롤을 더 내렸을까, 나는 마지막 장에 들어서서야 발견한 클래스에 손을 멈췄다.

"찾았다."

[그대로 멈춰라(F클래스)]

타입 : 패시브(passive)

당신의 스텟이 어떠한 상태가 되더라도 고정됩니다!

아이템으로 강해지지도 저주로 약해지지도 않는 완전무결!

물론 상태 이상 면역은 아니니 주의해주세요!

이것도 쓰레기 오브 쓰레기.

상위 클래스 중 상태 이상 면역 클래스가 있는 걸 감안하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F클래스를 바라보며 나는 히죽 웃었다.

이 클래스를 발견하게 된 것은 4회차에 들어가고서부터였다.

한 명, 그 당시 시점으로 뉴비였지만 나를 따라 층을 올랐던 녀석이 선택한 클래스.

'그 녀석은 63층에서 결국 죽었지만.'

한 가지 좋은 점은, 레벨 디버프가 있던 54층에서 유일하게 녀석만은 디버프를 당하지 않았었다.

'물론 그때 말고는 전혀 쓸모없던 클래스지만.'

크라운 로드는 클래스 조합으로 전투 방식이 완전히 바뀐다.

하나의 클래스가 매우 큰 역할을 하거나 간혹 레벨 차이가 나더라도 클래스 조합으로 승패가 뒤집히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지금.

나는 그 조합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깨달은바 있었다.

"클래스 선택, 그대로 멈춰라."

[클래스를 F클래스 [그대로 멈춰라]로 결정하겠습니까?]

그 순간 알림창이 떠올랐다.

그러나 내게 망설임은 없었다.

내 생각이 맞는다면.

'나는 크라운 로드를 혼자서 클리어할 수 있다.'

그리고 내 입이 열렸다.

"예."

[F클래스 [그대로 멈춰라]로 결정되었습니다.]

내 대답이 나오자마자 그 순간 클래스가 내 상태 창에 박혔다.

그 모습을 실시간으로 확인한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곤 천천히 입을 열었다.

"타임 리셋."

10층에 오기까지 몇 번이고 위기를 반복하며 이제는 내 최고의 구사일생 스킬이 되어버린 타임 리셋.

레벨이 1레벨 다운 된다는 최악의 단점을 가진 스킬을 발동한 순간 눈앞이 하얀빛으로 점화했다.

그리고 천천히 시야가 돌아온 순간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크라운 로드 참가자 하천성]

[크라운 로드 5회차]

지명 성좌 : 무(無)

오러 속성 : 전(電)

나이 : 24세

LV.30

체력 30

마력 50

힘 35

지력 5

민첩 50

남은 스텟 : 0

―스킬창―

F클래스 [타임 리셋]

F클래스 [그대로 멈춰라]

[클래스가 비어 있습니다.]

스텟이 고정되었다.

내 레벨이 다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스텟만은 그대로 고정되어 있었다.

입에서 소리가 새어 나오려고 했으나 겨우 참았다.

그 대신 악마 같은 미소가 서서히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아, 나 머리 존나 좋아.

"타임 리셋!"

또 한 번 리셋 했다.

당연히 레벨만 떨어지고 내 스텟은 유지되어 있었다.

"타임 리셋!!"

또다시 리셋 했다.

결과는 같았다.

"타임 리셋!!!"

그리고 나는 계속해서 타임 리셋을 외쳤다.

그리고 그 끝에.

[크라운 로드 참가자 하천성]

[크라운 로드 5회차]

지명 성좌 : 무(無)

오러 속성 : 전(電)

나이 : 24세

LV.1

체력 30

마력 50

힘 35

지력 5

민첩 50

남은 스텟 : 0

―스킬창―

F클래스 [타임 리셋]

F클래스 [그대로 멈춰라]

[클래스가 비어 있습니다.]

1레벨이 되었다.

완전히 줄어든 레벨을 바라보며 그 자리에 서 있던 나는 천천히 바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비를 맞는 내 눈은 오랜만에 열정으로 불타고 있었고, 입가에는 호기로운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되었다.

되었다.

되었다!

크라운 로드를 클리어할 수 있다!

"아래층으로 이동하시겠습니까?"

우뚝.

내 발이 멈춘 곳은 10.5층으로 올라오는 계단이었다.

크라운 로드는 클리어한 층이라면 언제든지 이동이 가능하다.

그렇기에 나는 층 앞에 서 있는 우산 쓴 여성에게 대답했다.

"이동, 1층."

"1층으로 하천성님을 전송합니다."

그 순간 내 몸이 아래부터 서서히 사라졌다.

아래층으로의 전송이 시작된 것이었다.

내 입가에는 여전히 진한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시야가 점점 흐릿해지다가 어느새 비 오는 하늘이 사라졌다.

대신 하늘 위에는 거대한 시계가 나타나 있었고, 눈앞에는 유리 토끼들이 깡총깡총 뛰어다니고 있었다.

['조소하는 신데렐라'가 관장하는 1층 Stage '유리 구두'에 입장하였습니다.]

['1층의 주인' '조소하는 신데렐라'가 당신에게 의문을 표합니다.]

"내가 다시 만날 거라 했지."

성좌의 말에 대답하며 나는 검을 뽑았다.

새하얀 도신이 하늘의 별을 받아 반짝거렸고, 나는 마치 개화하는 꽃처럼 활짝 웃었다.

지금 들고 있는 건 7층을 클리어하며 구매했던 도였다.

서걱!

순식간에 유리 토끼 한 마리가 잘려 나갔다.

[축하합니다. 레벨 업 하셨습니다!]

[좀 더 많은 성좌들이 당신을 인식합니다.]

레벨 업을 한순간 나는 상태 창을 켰다.

그러곤 힘에 스텟을 투자한 뒤 스텟 창을 껐고 그 즉시 외쳤다.

"타임 리셋!"

그 순간 내 레벨이 1로 초기화되었다.

초기화된 레벨에도 올린 스텟 만큼 강해진 힘이 유지되자 나는 천천히 웃기 시작했고, 곧 조용해진 그곳이 울릴 정도로 박장대소했다.

"하하, 하하하하하하하하하!"

['1층의 주인' '조소하는 신데렐라'가 눈을 크게 뜹니다.]

그 순간 조소하는 신데렐라가 반응했다.

내가 무슨 목적으로 이곳에 왔는지 알아챈 것이다.

"하하핫, 축하한다. 조소하는 신데렐라. 너는 특별히 특등 관람석에 앉은 거다."

그리 말하며 나는 도신을 하늘 높이 들어 올렸다.

그 순간 내 도신이 반짝거렸고 내 눈동자가 번뜩 이였다.

"크라운 로드를 클리어할 회귀자의 등장이다."

['1층의 주인' '조소하는 신데렐라'가 당신의 생각을 깨닫고 감탄합니다.]

"시작이다."

왕좌에 오를 시간이다.

* * *

"타임 리셋!"

강해져라.

"타임 리셋!"

더 강해져라.

"타임 리셋!"

더 더 더! 강해져라.

그 뒤로 나는 유리 토끼를 끝없이 사냥했다.

그때마다 나는 강해져 갔고, 오러 또한 보다 커져 갔다.

내가 유리 토끼를 사냥하는 속도는 더더욱 빨라져 갔지만, 내 검은 여전히 쉬지 않고 끝없이 휘둘러졌다.

희열감에 찬 내 검은 멈출 줄을 몰랐다.

째각.

['유리 구두' 의 시간이 12시가 되었습니다.]

그 순간 시간이 12시를 알렸다.

내 앞에 있던 유리 토끼의 몸에 달린 시계가 재빠르게 돌아가며 몸집이 거대해지기 시작했다.

가녀린 유리 몸이 순식간에 근육질의 유리로 변한 것이다.

이빨이 날카롭게 솟아나고, 유리 눈동자가 붉은색으로 물들자 변화한 유리 토끼는 비명 같은 소리를 내질렀다.

"끼에엑!"

그러나.

서걱! 쨍그랑!

일격에 변신한 유리 토끼를 박살 내었다.

나는 녀석이 시체처럼 남긴 유리 파편 사이로 천천히 거닐었다.

12시가 되는 순간 유리 토끼는 방금처럼 변신한다.

그 레벨은 200.

이전 회차의 내가 아니고서야 절대로 잡을 수 없는 괴물을 나는 일격에 쓰러트린 것이었다.

지금의 내 스텟은 이미 200레벨 따위는 압도하고 있었다.

"크롸롸롸롸롸롸!"

유리 토끼 한 마리를 쓰러트린 순간 다른 토끼들이 반응하며 소리를 내질렀다.

그들은 동료의 복수를 하고자 내게 달려들었고, 그들을 보는 내 얼굴에는 흉한 미소가 그려졌다.

"그래, 와라! 모조리 내 경험치가 되어라!"

검이 휘둘러지고 유리 토끼의 비명이 울려 퍼진다.

쨍그랑 쨍그랑 쨍그랑.

대지를 뒤덮을 정도의 유리 토끼들이 내 검에 끝없이 희생되어 간다.

도중부터는 검이 부러져 주먹을 쥐었다.

발로 토끼를 걷어차고, 주먹으로 깨부쉈다.

그때마다 토끼들은 죽어 나갔고, 내 레벨과 스텟은 올라갔다.

나는 미쳐 있었다.

끝없는 레벨 업에 취하여 미친 듯 주먹을 휘둘렀다.

그렇게 무아지경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날이 밝은 그곳에 유리 토끼는 한 마리도 남아 있지 않았다.

['1층의 주인' '조소하는 신데렐라'가 당신에게 감격합니다.]

['1층의 주인' '조소하는 신데렐라'가 당신을 지목합니다.]

['1층의 주인' '조소하는 신데렐라'가 당신에게 세례를 내립니다. ]

그 순간 조소하는 신데렐라가 나를 지목하였다.

역사상 어떤 자들도 해 본 적 없는 조소하는 신데렐라의 지목을 내가 받은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런 것에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몸의 힘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오러가 폭발할 듯 흘러넘치고 있었다.

정신이 극도로 고양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나는 떨리는 입을 열었다.

"...상태 창."

[크라운 로드 참가자 하천성]

[크라운 로드 5회차]

지명 성좌 : '조소하는 신데렐라'

오러 속성 : 전(電)

나이 : 24세

LV.1

체력 5000

마력 5000

힘 5000

지력 5000

민첩 5000

남은 스텟 : 0

―스킬창―

F클래스 [타임 리셋]

F클래스 [그대로 멈춰라]

[클래스가 비어 있습니다.]

나는 괴물이 되어 있었다.

7화

"하아."

저녁 해가 저물고 있는 도시 21.5층.

그곳에 의자에 앉은 여인은 고혹적인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옅은 보랏빛이 감도는 흑발.

어딘가 침울한 얼굴.

그리고 허리춤에 채워진 검.

검왕이라는 지명을 받고 현재 탑의 랭킹 10위 안팎을 달리고 있는 그녀는 창문 너머에 보이는 22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바라보았다.

21층까지 최전선에서 달려온 지 세 달.

성좌 변동 없이 그대로였다면 30층을 돌파하고도 남았을 시간이다.

'한 층, 한 층 공략이 너무 길어.'

그녀는 과거 황제의 친위대에 속할 정도로 실력 있는 회귀자였다.

비록 야신의 손에서 황제를 지키지 못했다지만, 4회차인 그녀에게 50층까지의 공략은 일사천리로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성좌 변동이 일어난 뒤 공략은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뎌지고 있었다.

위로 올라갈수록 성좌가 내는 클리어 조건은 흉악해지고 있었고 이에 회귀자들도 점점 지쳐 갔다.

아직 초반임에도 마치 50층 이후를 클리어하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좋을까.'

크라운 로드의 4회차.

4번이나 크라운 로드를 반복했던 그녀이기에 알고 있다.

이번 회차가 얼마나 힘든 회차인지.

전쟁으로 인해 역대급으로 많이 잃은 회귀자.

성좌 변동으로 인한 크라운 로드의 변화.

두 가지 악재가 겹치며 상황은 최악으로 치달았다.

전쟁을 겪었던 회귀자들의 정신은 피폐해져 있었고 성좌 변동까지 겹치며 그들은 더욱 힘들어하고 있었다.

'그 남자가 있었더라면.'

한때 따랐던 리더인 황제를 추억하며 그녀는 아쉬움을 보였다.

그 남자가 있었더라면 이런 상황도 돌파했을까.

아니, 애초에 저번 회차에서 크라운 로드를 클리어했을 것이다.

뿌득.

그 순간 그녀의 이가 갈리며 노기가 뿜어져 나왔다.

주변에 있던 창문에 금이 가고, 방 안은 지진이 난 양 옅은 진동이 울렸으며, 그녀의 몸에서 붉은색 오러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야신을 떠올리자마자 그녀가 분노 한 것이었다.

'진정하자 진정해.'

야신은 그 이후로 소식이 없다.

분명 황제의 손에 그 남자도 죽은 것이다.

하지만 야신의 잔당은 남아 있다.

전 층에 정보망을 뻗어 야신과 관련된 인물들을 수소문하고 있으니 언젠가 놈들도 꼬리가 밟힐 것이다.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지 몰라도 세 달 동안 감감무소식이니.'

나타나기만 한다면 모조리 죽여 버릴 텐데.

그런 서슬 퍼런 생각을 하던 검왕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지나간 일은 잊자. 현재에 집중해야 해.'

그녀는 22층 공략에 한 번 실패 했다.

최전선에 선 실력 있는 이들을 끌고 갔지만 22층을 공략하기에는 무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당장 그녀가 해야 할 일은 22층을 공략할 방법을 찾는 것이었다.

'22층 파르만의 피리가 관장하는 마녀 박물관.'

마녀의 원한을 풀어 줘야 하는 이 층은 상당히 골치 아프기 그지없었다.

마녀의 원한은 강했고 무엇보다 큰 문제가 있었다.

「마녀의 원한이 독기가 되어 대기에 퍼져 있습니다.」

바로 마녀의 독기 때문에 장시간 머무르는 게 힘들다는 점이었다.

상태 이상 면역 클래스도 뚫고 오는 이 독기는 오러마저도 먹히지 않았고 순수한 체력만으로 견뎌야만 했기에 층을 오르려는 자들이 곤혹을 치르며 실패했다.

이 층에 머무른 지만 벌써 한 달.

비록 이전 회차에 비해선 느리다곤 해도 두 달 안에 실패 없이 이곳까지 뚫었던 것을 감안하면, 한 층에서 너무 오랜 시간 동안 묶여 있었던 셈이다.

'골치야. 스텟을 체력만 찍은 사람이 있을 리도 없고.'

최단 시간 안에 클리어한다 해도 마녀의 독기를 견디려면 체력 스텟을 300 이상은 찍어야 한다.

지금 최전선을 달리는 회귀자들 평균 레벨대가 70인 것을 감안하면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다른 회귀자들은 이전 층에 가서 레벨 업을 하며 체력을 찍고 있긴 하지만.'

혹시 다른 방법이 있지 않을까 싶어 검왕은 이곳에 남아 고민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봐, 기다려. 22층은 당분간 통제야. 이 위는 위험하다고."

그 순간 검왕은 창문 너머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시선을 돌렸다.

거기에는 한 남성과 혹시나 누군가 22층에 멋모르고 들어갔다가 돌아오지 못할까 싶어 세워 둔 경비병이 그를 막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사실 야신을 검열하기 위해 세워 둔 것도 있었다.

"언제 크라운 로드가 위험하지 않았던 적이 있었나?"

그 말을 듣고 풋 하고 검왕이 웃었다.

호기로운 말이다.

하지만 이번 회차 때 본 적 없는 뒷모습이다.

그럼 같이 최전선을 섰던 회귀자는 아니라는 소리인데.

'어디서 본 것 같기는 한데.'

잘 기억이 나지는 않았다.

잠시 애매한 기억을 떠올리고 있는데, 남성이 경비병을 지나쳐 층에 오르려 했다.

하는 수 없이 경비병이 말리기 전에 검왕이 창문을 뛰어내렸다.

그가 야신의 잔당 중 한 명일 수도 있었다.

게다가 야신의 잔당이 아니라 한들 섣불리 22층에 오르는 것은 위험한 판단이었다.

"잠깐만."

검왕은 남성을 불러 세웠다.

검왕의 부름에 남성은 고개를 뒤로 돌렸고 로브를 눌러쓴 남성과 눈이 맞은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본 적 있는 얼굴인데. 누구였지?"

"검왕이냐."

남성이 입을 연 순간 검왕은 눈을 깜빡거렸다.

상대는 자신을 아는 듯싶었고, 어딘가 하대하는 듯한 저 투박한 말투를 검왕도 알고 있었다.

"아."

이윽고 검왕이 무언가 떠올렸다는 양 고개를 들었다.

남성은.

"뇌제."

이전 회차 때 뇌제라고 불렸던 자였다.

뜬금없는 뇌제의 등장에 검왕은 의문을 표했다.

비록 뇌제가 친위대급은 아니었지만, 함께 최전선에서 뛰었던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신, 어디에 있다가 이제야 나타난 거야."

이전 회차에서 벌어진 전쟁으로 회귀자가 수없이 죽어 나갔기에, 그녀는 이번 회차에서 능력 있는 회귀자들이 매우 귀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최전선에 설 수 있는 회귀자들을 어떻게든 끌어모아 만든 길드.

소낙.

이 길드를 만들고자 동분서주했던 검왕 입장에서 뜬금없는 뇌제의 등장은 다소 의문스러웠다.

그리고 그녀의 마음속에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미안하지만 뇌제가 아니야. 난 지명이 없으니까. 내 이름은 하천성이다."

"뭐?"

그런 순간 들려온 뇌제, 아니, 하천성의 말에 검왕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아직도 지명을 받지 못했다?

지명이란 50레벨이 넘어갈 때부터 자신의 존재를 성좌들에게 각인시키며 받는 것이다.

그런 지목 명을 못 받았다는 소리는 하천성이 아직 50레벨 미만이라는 소리와도 같았다.

"뇌, 아니, 하천성. 당신 지금 레벨 50도 안 되었으면서 22층에 들어가려는 거야?"

"그런데 왜?"

"미쳤어?! 회귀자라는 인간이 무슨 생각이야. 성좌 변동으로 층마다 성좌들이 바뀐 건 당신도 아는 사실이잖아. 지금 하는 건 자살 행위나 다름이 없다고!"

검왕의 외침에 하천성은 귓등으로도 안 듣는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을 보고 검왕의 인상이 팍 찡그려졌고 그녀의 몸에서 옅은 노기가 흘러나왔다.

"뭐야, 그 반응은?"

검왕의 노기에 경비병이 히익 하고 물러서는 동안에도 하천성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그는 여전히 검왕의 말을 시답지 않은 취급 하고 있었고, 검왕은 그런 하천성의 태도에 더욱 분노했다.

"난 지금 당신을 걱정해 주고 있는 거야. 당신이 22층에 들어가서 죽을까 봐. 그런데 그건 무슨 태도야?"

"검왕."

노한 검왕의 목소리에 하천성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귀찮게 하지 마. 오지랖이다."

그리고 그 말은 검왕을 더 노하게 만들 말이었다.

* * *

검왕, 과거 황제의 친위대이자 최전선에서 싸운 랭커로 728이라는 엄청난 수치의 레벨을 가졌던 그녀.

그녀의 검은 천지를 가르고, 그 검로 또한 아름다웠으니 가히 검의 왕이라는 호칭이 어울릴 자였다.

그러나 지금 5회차에 들어선 내 앞에 있는 검왕은 그저 한없이 약한 여인일 뿐이었다.

크라운 로드에 랭킹은 레벨로 정해진다.

검왕, 그녀의 랭킹은 9위.

현재 레벨 87.

다른 회귀자들의 평균 레벨이 70대인 것을 감안하면 압도적인 수치다.

그러나 그 레벨로도 내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내 현재 레벨은 10.

검왕에 비하면 한없이 낮은 수치였지만 내게는 압도적인 스텟이 있었다.

그리고 그 압도적인 스텟 앞에 검왕의 레벨은 무의미했다.

"아무래도 말로는 안 될 모양이네."

열이 받은 검왕이 스릉 하고 검을 뽑았다.

이 정도로 검을 뽑다니 정말 불같은 여자였다.

"죽이기라도 하려고?"

"레벨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 주려는 거야. 당신이랑 내 차이를 깨달으면 적어도 다음 층에 오르기에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닫겠지."

"누가 부족한 걸까 싶은데."

비웃음 섞인 내 말에 검왕의 얼굴이 팍 찡그려졌다.

그 순간 검왕의 모습이 사라졌다.

비영선보.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는 C클래스다.

고수이면 고수일수록 거리 조절이 중요한 것을 알기에 택한 클래스겠지.

하지만.

마나를 집중시킨 내 눈에는 한없이 느리기 그지없었다.

'검면으로 쳐서 기절시킬 속셈인가.'

목을 향해 날아드는 검면을 보며 나는 고개를 가볍게 뒤로 뺐다.

그러자 내 얼굴 앞에 검면이 스쳐 지나갔고 검왕의 눈에는 한순간 의문이 서렸다.

'피했어?'

검왕의 입 모양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미안한데 난 더 이상 시간을 허비하고픈 마음이 없어서."

그리고 내 주먹이 움직였다.

쩌엉!

"카학?!"

여자라고 봐주는 건 없다.

무엇보다 그녀는 과거 황제의 친위대가 될 정도의 실력자.

그런 그녀도 눈치채지 못할 속도로 복부에 주먹을 꽂자, 그에 의해 검왕의 몸이 부웅 떠올랐다가 잠시 후 바닥을 나뒹굴었다.

"커헉, 컥."

복부의 통증에 몸을 못 가누는 검왕을 뒤로하고 나는 돌아섰다.

내가 일격에 검왕을 제압한 탓에 경비병 또한 사태를 파악하지 못한 채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그를 지나쳐 계단을 올랐다.

"자, 잠깐, 기다, 려."

간신히 소리를 짜내 부르짖는 검왕의 목소리에도 나는 멈추지 않았다.

['파라만의 피리'가 관장하는 22층 Stage '마녀 박물관'에 입장하였습니다.]

['파라만의 피리'가 당신에게 흥미를 보입니다.]

계단을 오르자마자 환한 빛과 함께 시야가 탁 트였다.

그곳에는 물이 가득한 유리 상자가 놓여 있었다.

그 안에 한 여성이 있었고 숨을 쉬고 있는 듯 가끔씩 기포가 올라왔다.

[마녀의 원한이 독기가 되어 대기에 퍼져 있습니다.]

그 순간 독기가 몸을 덮쳐들었다.

원한이 서린 독기는 상당히 지독했다.

나는 왜 최전선을 뛰던 회귀자들이 이곳 22층을 못 뚫고 있었는지 이해했다.

확실히 이 정도 독기라면 체력 300 이상은 찍어야 견딜 수 있을 정도다.

지금 현재 전력으로는 힘들었겠지.

'나한테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현재의 나에게는 그저 조금 간지러움을 일으키는 정도였으니까.

내가 어지간히 강해지기는 했다고 생각하며 유리 상자 앞으로 다가가자 또다시 글자가 떠올랐다.

['파라만의 피리'가 22층 클리어 조건을 제시합니다.]

['원한이여 내게 오라.' 마녀라 불린 아르다 카르모아는 원래 고아원의 원장이었습니다. 그녀의 원한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그녀의 원한을 풀어 주세요. 단, 당신의 정체가 드러나면 실패합니다.]

클리어 조건 제시와 함께 그 순간 눈앞이 점화했다.

새하얀 빛이 차츰 옅어짐과 함께 내가 눈을 다시 떴을 때쯤에는, 초록빛의 들판과 그 중심에 학교처럼 생긴 3층짜리 건물이 하나 있었다.

들판에는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었고, 나는 문뜩 내 시선이 상당히 낮아졌음을 깨달았다.

'작아졌네.'

내 손을 내려다보자 아기자기한 손바닥이 눈에 들어왔다.

'고아원 아이 중 한 명에게 빙의라도 한 건가.'

8화

혹시나 하고 마나를 피워 보자 손가락 끝에 마나가 맺혔다.

다행히 마나는 별문제 없이 이용 가능했다.

'당연히 돼야지.'

스텟을 얻고 나서 두 달.

나는 내 몸에 마나의 길이 뚫리도록 두 달을 꼬박 투자했다.

달빛 아래서 가부좌를 튼 채 나는 압도적인 스텟을 이용해 끝없이 마나의 길을 개척해 나갔다.

그리고 그 끝에.

'환골탈태까지 했지.'

과거 회차에서는 단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환골탈태.

지금껏 '황제'만 겪어 보았던 환골탈태를 내가 해낸 것이다.

덕분에 얼굴도 10대 피부처럼 뽀송뽀송해졌다.

그렇기에 지금처럼 아이로 빙의했어도 마나를 다룰 수 있었다.

'마나를 쓸 수 있단 걸 알면 됐어.'

손아귀를 쥐었다 폈다 했던 나는 우선 아이들 곁으로 다가갔다.

클리어 조건은 정체를 들키지 않고 마녀의 원한을 풀어 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시점은 마녀가 원한을 가지기 전이라고 봐도 되겠지.

"얘들아."

"천성이다. 도망가!"

그 순간 나를 보자마자 아이들이 우르르 도망갔다.

영문을 몰라 가만히 있던 나는 곧 인상을 팍 찡그렸다.

내 이름을 말하는 것 그렇다 치고 날 보자마자 도망가는 건 상당히 기분 나쁜데.

"쯧, 애들은 싫은데."

물론 결코 날 보고 도망쳐서가 아니다.

투덜거리며 나는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아이의 시점에서 보기에 이곳은 상당히 큰 건물이었다.

나는 주위를 차근차근 둘러보며 복도를 거닐기 시작했다.

'분명 고아원 원장이랬나.'

우선 마녀를 찾는 게 먼저임을 자각한 나는 이곳저곳 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

그 순간 나는 창문 너머에 보이는 한 노신사의 모습에 발걸음을 멈췄다.

그는 아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고, 그걸 본 나는 조금 이상함을 느꼈다.

그의 눈동자는 아이들을 보는 자상함 대신 돈을 보는 눈길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저 눈 자주 봤었지.'

원래라면 나도 재벌 집 아들.

현실에 내 곁에 다가오는 자들 중에 저런 눈을 한 녀석들이 종종 있었다.

그리고 녀석들은 하나 같이 기분 나쁜 녀석들뿐이었다.

'누구였더라. 미국에서 마피아를 하고 있던 녀석의 눈이 딱 저런 느낌이었는데.'

과거를 잠깐 회상하며 추억하던 찰나, 노인이 아이들에게서 시선을 떼고 이동하려 하자 나도 따라나서려 했다.

"천성아 애들이랑 안 놀고 여기서 뭐 하니?"

발을 뻗으려는 순간 내 발은 허공을 휘저었다.

내 뒤에 나타난 사람이 날 들어 올렸기 때문이었다.

어린 애의 몸이기에 저항도 못 했다.

나는 고개를 뒤로 돌려 시선을 옮겼다.

'마녀.'

그 순간 유리 상자에 있던 똑같은 얼굴을 한 여성이 거기에 있었다.

후에 마녀라 불릴 여자 아르다 카르모아, 이 고아원의 원장이었다.

"원장 선생님."

"응, 왜 그러니?"

내 부름에 마녀는 해맑게 웃었다.

그 웃음에서 원한 따위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녀의 얼굴을 잠깐 보던 나는 고개를 돌렸다.

"아니요."

"천성이, 또 애들이랑 못 어울려서 그렇구나."

아이들이랑 못 어울린다는 말에 나는 순간 인상을 찌푸렸다.

아, 거참 내 이름 언급하면서 말하는 게 기분 나쁘네.

나 재벌가 막내아들 '하천성'이란 말이야.

"아닌데요."

"그래, 그래."

아니라고 해도 쥐뿔도 안 듣는 반응에 나는 그녀의 품에서 발버둥 쳤다.

그러자 날 끌어안던 것을 풀어 주었고, 바닥을 밟은 나는 그녀를 힐끔 보았다.

일단 이 여자의 원한을 푸는 게 주목적인데.

'곧 원한이 생길 만한 일이 발생 하는 건가.'

그렇다면 아까 전 그 노신사가 가장 의심스럽다.

역시 뒤쫓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마녀가 내게 계속 말을 걸었다.

"천성아, 곧 낮잠 시간이네. 선생님이랑 코 잘까."

"귀찮게 하네. 거참."

"응? 뭐라고...."

"아니요. 가요. 원장 선생님."

귀도 밝으시지.

어쨌든 나는 마녀에게 어울려 주기로 하고 그녀의 손을 잡고 낮잠실로 들어가.

진짜로 잠들었다.

* * *

하천성이 22층 스테이지에 돌입했을 무렵, 복부에 강하게 남은 통증에서 겨우 해방된 검왕은 자신을 부축하는 경비병과 함께 방에 들어왔다.

그리고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채 옷을 풀어 복부를 확인했는데, 시퍼런 멍 자국과 함께 주먹 자국이 선명하게 나타나 있었다.

"이게 대체."

기절할 것만 같은 하천성의 일격이 생생히 떠오르자 몸을 파르르 떤 검왕은 입가를 지그시 눌렀다.

하천성은 자신의 공격을 피하고 카운터까지 날렸다.

그 카운터는 자신을 단 일격이었으나, 아무것도 못 하게 만들 정도로 강했고 깔끔했다.

마치 자신보다 몇 차원이나 앞서 있는 것처럼.

'혹시 나보다 레벨이 훨씬 높다던가....'

하지만 랭킹 표에 하천성의 이름은 없었다.

본인의 입으로 지명이 없다고 했으니 분명 레벨 50 이하라는 소리일 텐데 그 공격은 낮은 레벨이 할 만한 일격이 아니었다.

'분명 힘 조절을 한 느낌이었지.'

강자를 수없이 봐 온 검왕이다.

그녀의 눈은 생각 이상으로 정확했고, 눈치도 빠른 사람이었다.

'이건.'

크라운 로드에 새로운 강자의 등장인가.

그가 무슨 짓을 했는지는 몰라도 확실한 강함을 손에 쥐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만약 야신이라면.

'아니, 굳이 나서서 야신이 22층을 클리어할 이유가 없어. 우리가 지난 한 달 동안 22층에 막혀 있는 건 야신들도 알고 있을 거야. 녀석들은 시간만 끌어도 크라운 로드를 실패한다는 걸 알아.'

22층은 클리어는 앞으로 몇 달이 더 걸릴지 모른다.

그러한 층을 야신들이 직접 나서서 클리어할 리가 없었다.

'즉, 그는 야신과 관련 없는 인물일 가능성이 높아.'

그리고 검왕의 기억 속 하천성은 언제나 야신을 증오하고 맞서 싸웠었다.

게다가 재벌 집 막내아들이라는 점도 그가 지구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것에 한층 더 힘을 실어 주었다.

'잠깐만, 하지만 그는 마녀의 원한에 대한 건 모를 텐데.'

그 순간 그녀는 머릿속에 스친 생각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천성은 강했다.

그렇지만 그 강함이 마녀의 원한에 통할지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초반에 스텟을 체력에 과할 정도로 투자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래서 자신들도 22층을 뚫지 못하고 막히지 않았던가.

'게다가 그는 과거에도 능력을 떠나, 자신감 하나는 높은 사람이었어.'

하천성이 뇌제였던 시절을 떠올린 검왕은 다급히 방문을 열고 나갔다.

하천성은 새로이 등장한 강자다.

자신을 일격에 쓰러트릴 정도에 강자가 22층에서 독기에 당해 버린다면 크라운 로드의 클리어가 그만큼 멀어진다.

'그를 구해야 해.'

그녀는 남들보다 걱정이 많은 여자였다.

그러나 그녀가 한 가지 잊은 점이 있었다.

바로 늘 세워 두던 경비병이 자신을 부축하느라 자리를 비웠다는 점이었다.

그사이 누군가 22층으로 들어간 것은 경비병도 검왕도 알지 못했다.

* * *

어린아이의 몸이 되었다곤 하나 정말로 잠들 거라곤 생각 못 했던 나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육체적으로 정말 어린아이가 되어 버리기라도 한 건가.'

그게 사실이라면 밤 시간이 되었을 때 급격히 졸려질 것이다.

'가뜩이나 클리어하기 바쁜데.'

한숨을 내쉬며 이부자리를 정리한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직 낮잠 시간이라서일까, 또래로 보이는 아이들이 너도나도 잠에 취해 잠들어 있었다.

'마녀는.'

우리를 재우던 원장과 선생들이 보이지 않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밖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고개를 살짝 문 사이로 내밀었다.

복도는 조용했기에 조심히 문을 밀고 나왔다.

'아까 원장실을 못 찾았었는데.'

다시 한 번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한 나는 복도를 거닐기 시작했다.

낮잠방으로 불리는 방의 위치는 2층.

이 건물은 4층까지 있는 모양이니 아직 못 둘러본 곳이 많았다.

어느덧 점심시간, 나는 발을 바삐 놀리며 2층을 돌고 3층을 돌았다.

그리고 끝내 4층까지 도착하고서야 원장실이라고 적힌 방을 찾을 수 있었다.

귀에 마나를 집중시켜 놓았던 나는 원장실 내에 아무도 없음을 알고 문을 열었다.

안쪽에는 책장과 어린애가 앉기에는 높은 의자와 책상이 있었다.

나는 단출한 방의 모습을 보며 안으로 들어갔다.

조용히 문을 닫은 뒤 책상으로 다가섰다.

서랍장이 달린 책상, 보통 문서 같은 걸 숨긴다면 이런 곳에 넣어 두겠지.

덜컹.

당연하게도 서랍장은 열리지 않았다.

혹시나 열쇠가 있을까 싶어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그건 마녀 본인이 가지고 있는 듯싶었다.

'굳이 잠가 놓은 이유는.'

뭔가 숨겨 놓을 만한 게 있다는 거겠지.

서랍장을 그냥 부숴 버릴까 하고 고민하던 도중 문뜩 내게 있는 한 가지 능력을 떠올렸다.

'쓸모없을 줄 알았는데 쓸데가 있군.'

내가 생각해 낸 것은 바로 조소하는 신데렐라의 세례.

성좌가 세례를 내리면 그걸 받은 사람에게 특별한 권능이 생긴다.

조소하는 신데렐라의 권능은 '유리 공작'.

유리로 일정한 형태의 무언가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이다.

'그렇다는 건.'

나는 서랍장 열쇠 구멍에 검지를 맞추곤 유리 공작을 발동시켰다.

발동된 유리 공작에 의해 유리가 열쇠 구멍 사이로 새어 들어갔고 잠시 후, 열쇠 모양에 맞춰 굳어졌다.

딸칵.

'나이스.'

열쇠를 돌리자 서랍장이 열렸고, 나는 서둘러 안의 내용물을 보았다.

무슨 용도인지 모르지만, 서랍장에는 서류들이 잔뜩 들어 있었다.

나는 그것들을 하나씩 살펴보기 시작했다.

'이거.'

그리고 서류를 전부 훑어본 순간 내 인상이 찌푸려졌다.

이 서류들은 전부 입양을 간 아이들의 서류였다.

분명 무언가 있을 거라 생각하고 열었건만 전부 입양 서류라니.

'응?'

그때 나는 입양 서류 사이에 있는 종이 한 장을 발견했다.

'잔고 증명서.'

고아원 통장이라도 있는 건가.

혹시나 싶어 잔고를 확인해 보니, 꾸준히 돈이 들어온 내역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라에서 받는 건지 아니면 기부라도 하는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돈은 계속해서 일정하게 들어오고 있었다.

그러나 최근과 가까워질수록 지원이 끝나기라도 한 건지 들어오는 돈이 상당히 줄어 있었다.

'기부가 멈추기라도 한 건가.'

잔고를 한참 들여다보던 나는 팔짱을 낀 채 고민에 빠졌다.

돈이 없어서 생긴 원한.

하지만 그게 그녀가 마녀가 된 실질적인 이유라면 어떨까 싶었다.

'연관은 있을 것 같지만 아직 확신은 못 하겠네.'

아직 정보가 모자람을 깨달은 나는 서류 사이에 잔고 증명서를 다시 끼워 넣었다.

이런 짓까지 했는데 소득이 하나도 없다니.

한숨을 쉬고 서랍장을 잠갔다.

이후, 혹시나 싶어 이번에는 책장을 둘러보았으나 끝내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마녀는 정말 그냥 고아원의 원장일 뿐인 건가.'

그렇다면 마녀의 원한은 내부가 아니라 바깥쪽에서 왔다는 소리다.

역시 아까 그 노인 신사가 수상하다고 생각한 나는 원장의 방을 나왔다.

그렇게 복도에 발을 내딛는 순간 반대편에서 들려온 발걸음 소리에 우뚝 자리에 멈췄다.

들리는 소리로 보아 거리가 좀 있긴 하지만, 얼마 안 가 마주칠 게 분명했기에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딱히 숨을 곳이 없다.

그렇다면.

나는 창문을 열고는 아래를 확인한 뒤 곧바로 뛰어내렸다.

약한 부유감과 함께 4층에서 뛰어내린 나는 가볍게 착지했고, 손을 가볍게 탁탁 털며 위를 힐끗 보았다.

"하천성?"

그 순간 나는 들려온 목소리에 흠칫하고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7살 정도로 보이는 여자애가 서 있었다.

그녀는 또랑또랑한 눈동자를 커다랗게 뜨며 나를 보고 있었다.

"드디어 찾았다!"

그리고 꼬마 여자애가 소리친 순간 나는 씁 하고 숨을 들이켰다.

설마 내가 뛰어내린 걸 본 건가.

큰일이다.

이대로라면 클리어는 불가능하다.

"내가 당신을 얼마나 찾은 줄 알아? 콜록."

그 순간 꼬마 여자애가 목을 쓸며 이해 못 할 말을 했다.

"무슨 소리야? 네가 날 왜 찾아."

"그야 하천성 당신이 혼자서 22층에 올라갔으니까!"

어라, 이 꼬마 애 설마.

"너 검왕이냐?"

"설마 몰랐던 거야?"

"그야 모르지. 내가 어떻게 알아."

어려진 모습이 된 검왕을 내가 알아볼 리가 없지 않는가.

내 말을 듣고 긴 보라색 머리카락을 옆으로 넘긴 검왕은 내 손목을 잡았다.

어머.

9화

검왕은 나를 멋대로 끌고 가며 외쳤다.

"말할 시간 없어. 일단 어서 나가자."

"나간다니 어디로?"

"그야 아래층으로지."

나는 그 순간 검왕의 말에 힘을 주어 멈췄다.

그러자 검왕은 나를 끌고 가려던 자세에서 도리어 끌려 넘어질 뻔한 모습으로 비틀거리며 날 돌아보았다.

"뭐 해. 어서 나가야 한다니까."

"그러니까 왜?"

"마녀의 원한에 대한 건 당신도 봤을 거 아니야. 아무리 당신이라도 오러를 뚫고 들어오는 마녀의 원한을 견딜 수 있을 리 없어!"

내 눈살이 찌푸려졌다.

이 여자.

"너 오지랖 한 번 엄청 넓구나."

"오, 지랖?"

"미안한데 난 마녀의 원한은 아무렇지도 않아. 오러를 쓰지 않고도 여기서 몇 년은 버틸 수 있다고."

그리고 내가 사실을 가르쳐 주자 검왕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로?"

"그래."

"그럼 내가 여기 온 건...."

"헛고생이야. 애초에 친하지도 않은 날 위해서 굳이 따라올 필요가 있긴 했어?"

황제의 친위대일 때는 꽤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이었건만 현실은 오지랖 넓은 아줌마였나.

"...당신 도대체 정체가 뭐야?"

"하천성이다."

"아니, 이름 말고 대체 어떻게 그렇게 됐냐고."

"내가 가르쳐 줄 이유가 없는데?"

내 말을 듣고 검왕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그건 맞아. 그렇지만 당신처럼 강해지는 방법을 알면 크라운 로드를 클리어하기 한층 더 쉬워질 거 아니야."

"내가 뭘 믿고 너한테 정보를 주지?"

"크라운 로드 클리어란 목표를 같이 하고 있다는 점에서."

진심이라는 양 검왕의 눈동자를 보곤 나는 실소를 내뱉었다.

"그렇게 믿은 결과가 이번 회차다."

그리고 내 말이 이어진 순간, 검왕의 눈동자가 서서히 커지기 시작했다.

내 말에 내포된 의미를 그녀도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검왕의 눈에 또다시 노기가 서리고, 그녀의 눈이 맹렬히 타올랐다.

"당신 지금 날 야신이랑 동급으로 취급하는 거야?"

"적어도 그만큼 믿지 않아. 그리고."

노기를 뿜어내는 검왕에게 나는 당당히 말해주었다.

"크라운 로드는 나 혼자서도 클리어할 수 있다."

호기롭게 포부를 말한 순간, 검왕은 눈동자를 깜빡이곤 곧 실소했다.

"대단한 자신감이네. 그런데 당신, 마녀의 원한이 왜 생긴 줄은 알아?"

그 말에 내 어깨가 멈칫했다.

실제로 나는 아직 마녀의 원한에 대해 거의 조사하지 못했다.

내 반응을 보고 검왕은 다시금 실소했다.

"혼자서 호기롭게 외친 것치곤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너희는 안다. 이거냐."

"그렇지. 비록 마녀의 원한의 독기가 너무 짙어서 번번이 실패했지만, 우리도 한 달 동안 놀기만 한 건 아니야."

나는 검왕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정보의 대가는."

"22층의 클리어."

그녀가 내뱉은 말은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이었다.

진심이 담긴 눈동자, 그 눈동자와 마주한 나는 그녀의 말에 담긴 뜻을 알았다.

그리고 그 순간 검왕이 픽 하고 쓰러졌다.

설마 갑자기 쓰러질 거라곤 생각 못 했기에 당황한 나는 검왕을 서둘러 살폈다.

새하얗게 질린 안색, 식은땀.

그녀의 상태를 알아차린 나는 곧 한숨을 내쉬었다.

"너 마녀의 원한을 견디지도 못하는 주제에 들어온 거냐."

"...크라운 로드를 클리어하기 위해서야. 회귀자를 더 잃을 수는 없으니까."

그리 말한 나는 쓰러진 검왕을 벽에 기대게 해 주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도 지구로 돌아가고 싶은 거냐."

"동생이 기다리고 있어."

가족인가.

가족이란 말에 내 입가에 잠시 쓴웃음이 지어졌다.

재벌 집 막내아들, 뛰어난 형들.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상황을 지구에서 겪었던 나는 중얼거렸다.

"...그래, 돌아가야지."

내 목소리를 듣고 검왕이 날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내게 조심스레 물었다.

"당신은 지구에 뭘 두고 왔는데?"

"돈이랑 전역."

"전역? 당신 군인이기라도 해?"

하하, 썩을 대한민국.

그래도 사실이다.

5년마다 그 망할 군복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으니까.

"정보나 줘."

"...알았어."

쓸데없는 소리는 그쯤 하라고 경고하듯 말하자 검왕은 순순히 물러났다.

그리고 그녀가 지금껏 모아왔던 22층의 정보를 내게 말해 주기 시작했다.

* * *

최근 들어 돈이 들어오지 않기 시작했다.

소식은 들었다.

나라에 가뭄이 들었다.

농사는 흉작이었고, 국고도 비어 가기 시작했다.

물가는 오르고, 농민들이 죽어 나가는 지금 고아원까지 국가가 신경 쓸 겨를이 없는 것이다.

거기에 아직 성년도 안 된 어린 왕자가 왕위에 오른 뒤, 귀족들이 기승부리기 시작했다.

이 틈을 타 자신의 위치와 부를 더 늘리고자 귀족들은 쓸데없는 자금 투자를 줄여 나가기 시작했다.

우리 고아원은 나라의 지원금과 귀족들의 기부금으로 운영되던 곳.

두 가지 지원이 동시에 끊겨 버리자 고아원의 재산은 급격하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대로 가다간 고아원이 문을 닫아.'

그렇게 된다면 고아원의 아이들은 길거리로 나앉게 될 것이다.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해야 할까.'

원장인 내가 혼자 나가서 돈을 번다고 한들 아이들을 전부 먹여 살릴 수는 없다.

그렇다고 이대로 가만히 있는다고 새로운 방법이 나타나 주지도 않았다.

그렇게 하루, 이틀, 나흘, 한 달.

고민하는 것만으로 세 달이 지났을 무렵.

잔고가 거의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앞으로 한 달."

얼굴에 초조함이 서리고 불안감이 뒤섞였다.

밤에는 매일 같이 고아원이 문 닫는 꿈만 꿨고, 낮에는 아이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렇게 하루, 또 하루 초조함 속에 뒤섞여 살아가던 도중 고아원에 한 사람이 찾아왔다.

단출한 복장, 흰 머리카락, 수염이 눈에 띄는 노신사는 고아원 아이들을 봐도 되겠냐고 하였다.

나는 그가 아이를 입양하고자 하는 사람인 줄 알고 아이들을 소개시켜 주었다.

그렇게 아이들을 둘러본 노신사는 다음에 다시 오겠다는 말을 하고 며칠 뒤, 나를 다시 찾아왔다.

"아이를 입양하고 싶습니다."

"아, 정말인가요? 그럼 우선 아이와 대화 후 입양 서류 작성을...."

"입양 서류 작성을 하지 않고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노인의 말에 내 눈에 의문과 경계심이 서렸다.

가끔씩 있다.

아이들에게 무언가를 노리고 나타나는 인간들이.

입양 서류와 절차는 이런 인간들을 솎아 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안 됩니다."

"고아원 운영이 최근 힘들지요."

그 순간 노신사의 말에 몸을 일으키려던 내 몸이 굳었다.

그는 사정을 전부 알고 있다는 듯 진한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전 돈이 많습니다. 고아원 하나 정도는 충분히 살릴 수 있을 정도로요."

"그렇다 한들 입양 서류 없이 아이를 입양할 순 없습니다."

"고아원이 사라지면 모든 아이들이 길거리에 나앉게 될 텐데 말입니까?"

마지막 말이 가슴 깊이 파고들었다.

나도 알고 있다.

이대로라면 고아원 아이들이 모두 길거리에 나앉게 될 것이라고.

그렇지만 아이들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이 사람에게 우리 아이들을 입양시킬 순 없었다.

"소수의 희생으로 모두를 살릴 수 있는 길을 저버리겠다... 그런 생각이시군요."

그리고 내 불안한 표정에서 생각을 읽은 듯 노인이 지그시 웃었다.

"괜찮습니다. 고아원을 운영할 정도의 위인이시니 당연한 반응입니다. 어차피 저에게 시간문제일 뿐인 일이니, 저도 급할 건 없습니다. 고아원이 망한 뒤 다시 찾아오면 그만이죠."

나지막이 말한 노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1년에 한 명이면 족했는데 말입니다. 그래도 고아원이 망하면 잔뜩 들어 올 테니, 그것도 나쁘지 않군요."

내 동공이 한차례 부르르 떨렸다.

그는 내게 고아원이 망하면 아이들을 전부 자신이 데려갈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이건 협박.

지금 자신의 말을 따라 1년에 한 번씩 한 명의 고아를 자신에게 보낼 것인지, 아니면 고아원이 망해 모든 아이들을 자신에게 빼앗길 것인지 결정하라는 협박이었다.

그리고 내게 주어진 시간은 그가 방문을 나서기 전까지이었다.

덜컥.

"기, 다려 주세요."

그리고 그가 문을 열기 직전 내 입이 끝내 열리고 말았다.

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눈가에 핏줄이 서고 눈물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지만 나는 꾹 참고 그가 바랄 말을 입으로 한자, 한자 내뱉었다.

"제안, 받아, 들이겠습니다."

내 목소리가 방 안을 메웠다.

노신사는 인자한 미소와 함께 다시 방문을 닫았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렇게 나는 노신사와 계약을 체결 했다.

이후, 나는 1년마다 노신사에게 고아원의 아이 중 한 명을 보내기로 하였다.

그는 매년마다 찾아와 아이 중 한 명을 고른 뒤 내게 말했다.

나는 그가 시키는 대로 아이의 입양을 준비시켰고, 노신사가 보낸 사람의 손에 아이를 들려 보냈다.

그렇게 고아원에는 풍족하게 운영할 수 있는 수준의 돈이 계속해서 들어왔다.

노신사는 약속을 지킨 것이었다.

카르민.

소피아.

에바.

오리시아.

4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어느새 나는 4명의 아이를 떠나보냈다.

「선생님 저 정말로 입양된 거예요?」

「새엄마, 아빠는 어떤 사람일까.」

「나 열심히 할 거야.」

「선생님, 왜 울어요? 저 좋은 데로 가는 건데. 아, 저랑 헤어질까 봐 그래요? 다시 꼭 찾아올게요. 걱정 마요.」

아이들 목소리 하나하나가 귓가에 아직도 생생했다.

그러나 4년 동안 그 아이들이 다시 고아원을 찾아오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또 1년.

노신사가 선택한 아이를 또 보낸 다음 날.

나라에서 기사들이 병사를 이끌고 우리 고아원을 찾아왔다.

"마녀, 마녀는 어디 있느냐!"

맨 앞에 앞장선 기사는 칼을 빼어 들고 외쳤다.

그 외침에 놀란 아이들이 건물로 들어가고 대표자인 내가 벌벌 떨며 기사의 앞으로 다가갔다.

"기, 기사님 마녀라뇨?"

"네년이 이 고아원의 책임자냐?"

"그, 그렇습니다만."

그 순간 기사의 검이 내 가슴팍을 꿰뚫었다.

문답무용으로 날아든 검에 가슴이 꿰뚫린 나는 피를 쏟으며 무너졌고, 내 눈은 의문으로 물들어갔다.

어째서.

어째서 갑자기.

"마녀의 아이들이다! 모두 죽여라! 악마에게 바쳐질 제물들이다!"

"안, 돼. 안 돼."

핏물을 쏟는 와중에도 기사의 목소리가 생생히 들렸다.

"꺄아아아악!"

"엄마, 선생님, 선생님."

"살려 주세요. 아저씨 제...."

그는 병사에게 지시해 아이들을 붙잡았고, 비명을 지르는 아이들의 목을 베었다.

고아원은 순식간에 쑥대밭이 되어 갔고 주위는 아이들의 비명으로 얼룩져 갔다.

"그만, 그만."

애원을 듣기는커녕 끝내 고아원에 불을 질렀고, 내 눈에는 피눈물이 흘렀다.

기사는 악마 소환 의식이라는 말을 했다.

그리고 그 말의 의미는 노신사가 지금껏 아이들을 악마를 소환하는 데 제물로 바쳤다는 소리였다.

5명의 아이들은 고통스럽게 그에게 죽은 것이다.

아니, 나 때문이다.

그 아이들은 내 손으로 키웠고, 내가 보내 죽었다.

고아원의 아이들도 유혹에 넘어간 나 때문에 모두 죽은 것이다.

"아, 아아아."

한없이 비통한 목소리가 하늘에 울려 퍼지고, 나는 그렇게 숨을 거두었다.

* * *

검왕이 설명을 끝마쳤다.

"오늘이 바로 기사들이 오기 하루 전날이야."

"클리어 조건은 그 기사를 막으면 되는 건가."

"아니, 클리어 조건은 그 이후야. 기사들을 막는 데까지는 우리도 해 봤어. 하지만 클리어는 되지 않았지. 그 이후는 마녀의 원한을 견디지 못하고 다들 포기할 수밖에 없었어."

거기까지 해 본 건가.

검왕의 설명을 듣고 나는 생각에 잠겼다.

'마녀의 원한의 대상은 노신사보다도 자신일 거야.'

아이들을 버려야만 했던 자신을 향한 원한.

그렇다면 이미 아이들을 보내 버린 지금 그녀의 원한은 이미 현재 진행 중이었다.

그저 무얼 계기로 터지느냐가 남았을 뿐.

'골치네.'

기사를 막아도 클리어가 안 된다면 노신사를 죽이기라도 해야 할까.

하지만 그를 죽인다 한들 마녀의 원한이 풀릴지도 의문이다.

'우선 더 진행해 보는 수밖에.'

길고 짧은 건 해 봐야 아는 거니까.

그리 생각한 난 검왕을 돌아보곤 말했다.

"알았어. 내가 해결해 볼게. 넌 그만 돌아가. 더 이상 버티지도 못할 거잖아."

"...알았어."

그리 말한 검왕은 손을 들어 올렸고 곧바로 선언했다.

"22층 공략을 포기하겠습니다."

그리고 검왕이 포기를 선언하자 그녀의 몸이 사라져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사라짐 속에서 검왕이 속삭이듯 말했다.

"당신이 정말로 22층을 클리어해 줬으면 좋겠어."

"22층뿐만 아니라 전부 나 혼자서 클리어할 거야. 너희는 닥치고 뒤에서 손가락이나 빨라고."

"정말 그러면 좋겠네."

10화

그리고 그 말을 끝으로 검왕이 사라졌다.

이후, 나는 곧바로 들판을 거닐어 건물로 돌아왔다.

기사들이 오는 건 내일.

그렇다면 그전까지 마녀의 원한을 풀 방법을 알아내는 것이 주요 포인트다.

'역시 노신사를 쫓아야 했어.'

하지만 기회는 있다.

입양할 아이를 데리러 올 사람을 뒤쫓으면 될 테니까.

그렇기에 나는 잠자코 아이들 사이에 섞여 기다렸다.

"자, 여러분 오늘 토니안이 새로운 부모님을 만나게 되었어요."

왔다.

기다리고 기다린 끝에 다섯 번째 아이가 떠날 때가 왔다.

마녀의 얼굴은 미소 짓고 있었지만 어딘가 서글픈 느낌이 들었다.

나는 아이들과 함께 토니안을 배웅했다.

토니안을 데리러 온 것은 30대 중반의 여성.

그녀는 미소와 함께 토니안의 손을 잡고 고아원을 떠나갔고, 나는 아이들 틈에서 빠져나와 그 뒤를 밟았다.

그렇게 한참을 걸었을까, 손에 꼬치를 쥐고 걸어가던 토니안과 여성은 한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여성은 토니안에게 자기 집이라고 소개하고 있었고, 토니안 또한 그 말에 별 의심 없이 따라나섰다.

'어디 보자.'

토니안이 안으로 들어간 순간 나는 그 건물의 창문을 확인해 보았다.

1층에는 창문이 없지만 2층에는 있었다.

마나를 집중시켜 사람이 없는 방을 확인한 나는, 사람들이 안 볼 때 도약하여 창문에 붙었고 곧 유리창을 깨고 안으로 들어갔다.

건물 안쪽은 평범했다.

나는 청각은 곤두세우며 안을 서성거렸고 곧 남들보다 자그마한 발소리를 찾을 수 있었다.

아이의 발걸음은 어른보다 가볍다.

이 건물에 아이는 토니안 한 명밖에 없었기에 더더욱 선명하게 들려 왔다.

'지하.'

분명 악마 소환 의식이라고 했나.

정말 전형적인 곳에 자리 잡았다고 생각하며 나는 지하로 내려가는 길을 찾았다.

그때 토니안의 발걸음 소리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분명 멋모르는 어린아이의 눈에도 점점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그 발소리를 쫓아 지하로 내려가는 길을 찾아낸 나는, 지하 입구 문 앞에서 노닥거리는 남자 두 명을 발견했다.

경비병인 듯싶으나 눈대중으로 봐도 별거 없는 자들이었기에 나는 길을 잃은 어린애처럼 두 사람 앞으로 다가갔다.

"어, 뭐야. 어린애가 왜 있어."

"응? 데카르트 님이 데려온 애 중에 한 명 아니야?"

"뭔 소리야. 아까 전에 한 명 들어갔잖아."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낀 두 사람이었지만, 곧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한 명이 내게 다가왔다.

"자, 얘야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여긴 함부로 올 곳이 아니란다."

그리고 남성이 다가온 순간 나는 그의 머리를 내려쳤다.

힘 조절을 했지만, 바닥에 머리가 꽂힌 그는 일격에 기절했다.

나는 주먹을 쥔 채 말했다.

"어디서 애 취급이야. 잡것이."

물론 내 몸은 영락없는 어린애였다.

"어, 어어."

그리고 곧이어 나와 눈이 맞은 다른 경비병 또한 같은 꼴로 기절했다.

경비병 둘을 가볍게 제압한 뒤 문을 열고 유유히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가만 생각해 보니 마녀에게 들킬 일 없는 이곳에서 내가 굳이 조심스레 숨어다닐 이유가 없었다.

마침 지하로 내려가는 길도 일직선.

나라면 길을 좀 더 복잡하게 만들었을 거라 생각하며 경비병들을 보이는 족족 하나같이 바닥에 꽂아 주었다.

"으아."

그 순간 나를 보고 한 남자가 주저앉았다.

주변 사람들을 모조리 벽에 꽂아 버리는 나를 보고 겁에 질린 듯싶었다.

그의 표정에서 전의를 상실한 게 엿보였다.

굳이 상대할 필요도 없겠지.

그리 생각하고 몸을 돌릴 때였다.

순간 내 가슴팍에 날아드는 검을 눈치챘다.

검날에는 오러가 묻어 있었다.

나를 향해 검을 내지른 자는 웃고 있었다.

나는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세계에서 가만히 그를 직시했다.

'이 녀석.'

누구더라.

"이거, 얼굴을 바꾸는 클래스인 거 같은데."

오러를 사용하는 것을 보면 회귀자는 확실하다.

그런데 이런 회귀자가 날 노릴 이유는....

"이놈."

내 눈초리가 날카롭게 올라갔다.

쩌엉!

그리고 회귀자의 검날이 내게 닿은 순간 상식과는 거리가 먼 소리가 울려 퍼졌다.

"뭣."

오러를 담은 검이 내 몸에 두른 오러를 뚫지 못하고 튕겨 나왔다.

즉, 이 녀석과 내 차이는 하늘과 땅 수준이었다.

그 순간 내 몸이 무언가에 휩싸였다.

'중력.'

D클래스의 중력장인가.

몸을 짓누르는 중압감 속에서 나는 태평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뭐 하냐? 너."

내 말 한마디에 회귀자의 눈동자가 커다랗게 떠졌다.

"X발."

회귀자가 욕설을 입에 담으며 중력장을 발동시킨 채로 도주를 하려는 순간, 나는 발가락에 마나를 집중시켰다.

콰앙!

"크학!"

곧이어 바닥에 이마부터 내리꽂힌 회귀자의 비명이 지하에 울려 퍼졌다.

녀석은 한 차례 몸을 부들부들 떨더니 중력장을 쓰고자 팔을 들었다.

"으허학?!"

그러나 중력장이 발동되기도 전에 이미 녀석의 팔이 내 손에 의해 부러져 있었다.

반대편으로 기괴하게 휘어 버린 팔에 녀석은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믿을 수 없다는 양 나를 바라보았다.

마치 내가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고 녀석은 눈으로 말하고 있었다.

"너 야신 녀석이지?"

낮게 깔린 내 목소리에 오러가 담겼다.

순식간에 내 목소리는 녀석을 옭아매었고, 회귀자는 숨이 막힌 양 새파랗게 얼굴이 질렸다.

나는 그 모습을 희번덕거리는 눈으로 보며 오러를 담은 손으로 녀석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그 순간, 마치 가면처럼 머리 피부가 뜯어져 나감과 함께 몸이 허물어졌다.

클래스가 내 오러를 견디지 못한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내 밑에 깔린 녀석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성좌의 영향으로 어린애가 됐지만, 얼굴은 그대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 야신 정예 중 한 명.

지명 이단아.

녀석이 이곳에 있었다.

"이단아, 오랜만이네."

"뇌, 제."

이를 빠득 간 이단아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과거 나와 면식이 있기 때문일까, 녀석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어떻게 그런 힘을."

"야신은 어디 있지?"

이단아의 말을 무시하며 나는 녀석의 머리를 더 짓눌렀다.

그러자 녀석은 몸을 버둥거리며 내게 외쳤다.

"가르쳐 줄 것 같나! 내가!"

"그렇지 않겠지."

이단아의 대답을 듣고 나는 머리를 누르던 손을 떼었다.

뜻밖의 행동 때문이었을까, 기회라고 생각한 이단아가 곧바로 내게서 탈출했고 나는 녀석을 보며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적당히 추론하면, 엄청난 속도로 층을 클리어하는 나를 보고 누군가 야신에게 보고해서 미리 죽여 놓으러 왔다. 이거겠지?"

"그걸 아는 녀석이 날 놓아 준 거냐."

"그야 네 역할이 있으니까."

내 고개가 옆으로 삐딱하게 기울여지며 표정에 담긴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전해. 야신한테."

그리고 나는 가슴팍 위에 손을 올렸다.

"내가 크라운 로드를 클리어할 거라고. 그러니 어서 날 막으라고. 대신 막게 되면."

내 손에서 오러가 피어올랐다.

파직하고 스파크가 튀기자 이단아가 움찔거렸다.

이 오러에 얼마나 고농축의 마나가 투자되었는지 이단아가 알아봤기 때문이었다.

"내 손에 죽을 거다. 넌 몸소 느꼈으니 잘 알겠지?"

이 말은 야신을 향한 선전 포고.

얼마든지 와라.

나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내 자만심을 보고 이단아의 눈동자에서 투기가 솟아올랐다.

"그 말 책임지게 만들어 주마."

그리고 한마디 말과 함께 이단아가 자취를 감췄다.

B클래스 텔레포트인가.

F에서 E클래스까지는 층을 공략해서 얻을 수 있지만, 그 위 클래스들은 층을 공략하는 것만으로 얻을 수 없다.

클래스마다 각자의 부합 되는 기준이 있고, 그 기준을 충족시켜야 비로소 클래스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부디 잘 전해달라고."

그러나 내게는 상관없었다.

황제만이 가졌다는 SSS클래스를 가져오든 그 이상의 것을 가져오든.

지금의 날 이기지는 못할 테니까.

고개를 돌린 나는 앞에 보이는 마지막 문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그 문을 연 순간, 거기에는 노신사가 하늘을 향해 손을 뻗고 중얼거리는 모습과 토니안이 피로 그려진 마법진 위에 누워 있는 것이 보였다.

"£€=£{÷`°£¶¶_¢×|=€<€=€{¢."

노신사는 내가 들어 온 것조차 눈치채지 못하고 사람이 내뱉을 수 없을 법한 소리를 계속해서 웅얼거렸다.

그리고 그 끝에 눈동자를 희번덕거리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오, 오오오오! 악마이시여, 제물을 삼키고 제1 왕자를 죽여 주시옵소서."

나는 그런 노신사를 뒤에서 발로 찼다.

"그럼 제물은 네가 해라."

"으겍?!"

내게 걷어차여 마법진 위에 철퍼덕 엎어진 노신사는 나를 보고 심히 당황한 듯싶었다.

하지만 내 발차기에 허리가 빠진 듯 그는 엎어진 채로 나에게 노성을 토해 냈다.

"네, 놈 무슨 짓이냐! 내가 누군 줄 알고 감히!"

노신사의 노성이 터져 나오는 동안, 나는 그를 지나쳐 토니안을 들고 마법진에서 빠져나왔다.

곧이어 마법진이 붉게 물들기 시작하자 노신사는 퍼뜩 고개를 들더니 바닥을 기어 마법진에서 빠져나오려 했다.

우뚝.

그러나 그 행동은 나에 의해 저지되었다.

토니안을 업고 노신사의 앞에 선 나는 히죽 웃었고, 그의 표정도 나를 따라 얼떨떨한 투의 미소가 지어졌다.

곧이어 내 손에 의해 자신의 팔이 마법진이 새겨진 땅에 박히자, 그는 참지 못하고 비명을 내질렀다.

"남을 제물로 바치려면 본인부터 바쳐 봐야 되지 않겠어?"

"이, 이이! 거기 누구 없느냐! 빨리 이놈을 잡아라! 어린애의 탈을 쓴 마귀를 잡으란 말이다!"

당연하게도 계단을 내려오는 사람은 없었다.

전원 벽에 얼굴을 파묻고 기절해 있었으니 말이다.

그 순간 마법진의 빛이 더욱 붉어졌다.

흉흉히 빛나는 마법진 위로 울긋불긋한 손이 솟아 노신사의 다리와 팔을 붙잡았다.

그는 곧 상황을 알아차리고 발버둥 쳤다.

"안 돼! 안 돼! 기다려! 기다려라! 난 제물이!"

그리고 순식간에 노신사는 단말마의 비명만을 남긴 채 바닥으로 흡수되었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본 나는 다른 기운을 느끼자, 곧 고개를 들었고 거기에는 반투명한 몸에 검붉은 색 망토를 쓴 남자가 서 있었다.

그의 머리 위에는 두 개의 뿔이 솟아 있었다.

이내 그는 감긴 눈을 서서히 뜨더니 말했다.

"인간, 소원을 말해라."

노신사를 제물로 바쳐 나온 악마는 소원을 물었다.

뜻밖의 소원 요구에 턱을 감싼 나는 혹시나 하고 내뱉어 보았다.

"크라운 로드 클리어."

"...그게 뭐지."

쯧.

"그럼 소원을 100개로 늘려 줘."

"그건 안 된다. 소원은 하나다."

쯧쯧.

"지구로 돌려보내 주라."

"지구가 뭐냐?"

"개 쓸모없네."

내가 솔직한 심정을 말하자 악마의 인상이 팍 찡그려졌다.

"날 더 이상 놀리면 네 목숨이 성치 못할 것이다."

"그래, 알았어. 그럼 아까 그 노친네 빼고, 이전에 제물로 바쳤던 4명 애들 돌려주라."

그럼 이건 어떠냐 하고 내가 그에게 말했다.

그러자 악마의 눈이 또다시 찌푸려졌다.

그는 자신의 턱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이상한 소원이군. 이전에 바친 제물을 돌려 달라는 소원은 나도 처음이다."

"돼, 안 돼. 그것만 말해."

"음, 영혼은 내가 쥐고 있으니 돌려주는 건 가능하다. 하지만 그만큼의 영혼을 교환 받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영혼이라는 말에 나는 오 하며 감탄사를 보였다.

뜻밖의 수확이다.

나는 계단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에 기절한 놈들 잔뜩 있는데 저놈들로 되냐."

"...음, 가능하다. 아이들의 영혼은 값비싸지만, 욕망에 타락한 영혼도 상당한 값어치가 있지. 교환해 주마."

"너 쓸모 있는 녀석이네."

악마치고 제법 말이 통하는 녀석이 아닌가.

곧이어 아이들이 하나둘 악마의 몸에서 내뱉어지기 시작했다.

아이는 처음 말했던 대로 4명, 이전에 제물로 바쳐진 아이들이었다.

"교환은 성립되었다."

"잠깐만, 기다려."

교환을 끝내고 곧바로 사라지려는 악마의 모습에 나는 손을 들어 멈춰 세웠다.

그러자 그는 내게 의문을 보였고 나는 그가 한 한 가지 실수를 말했다.

"너 노친네 분의 소원은 아직 들어주지 않았잖아."

"무슨 소리지. 네 소원이 아이들을 되살리는 것 아니었나?"

내게 의문을 보이는 악마의 말에 나는 뭘 모른다고 혀를 찼다.

"아니지. 이건 어디까지나 교환이었잖아. 너도 방금 교환이라고 말했고. 그렇다는 건 우리는 공정한 거래를 한 것뿐이지 선불로 제시한 노친네의 소원은 아무것도 이루어진 게 없잖아?"

"그건."

"설마 악마씩이나 되는 분이 그냥 떼먹으려는 것도 아닐 테고. 그치?"

히죽 웃은 내 말에 그의 눈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마치 이런 놈은 처음 본다는 양 그의 눈길이 내게 향하자 나는 손을 내뻗었다.

"그러니 제대로 소원 들어줘."

11화

Chapter 3. 하천성, 23층에서 막히다

"으음, 쯧, 알았다. 그렇게 하지. 노인의 소원을 말해라."

나이스.

"앞으로 매달 고아원에 적어도 한 달 동안 무리 없이 운영할 수 있는 정도의 돈을 넣어줘. 이름은 이 녀석들 이름으로. 돈도 이 녀석들이 가지고 있던 걸로 충분하겠지."

"그뿐인가."

"그뿐이야."

내 소원을 듣고 딱히 손해 볼 건 없다 여겼는지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악마가 보기에도 쉬운 소원이었기 때문이었겠지.

"알았다. 그리하지."

그리고 그 말을 끝으로 악마는 사라졌다.

"토니안, 일어나 봐."

"으, 으응."

악마가 사라진 뒤 나는 아이들을 한 명씩 깨우기 시작했다.

어린애의 몸으로 다섯을 들고 가는 건 무리가 있었기에 깨워서 직접 제 발로 걷게 할 계획이었다.

내 뒤흔듦에 하나둘 일어난 아이들은 날 볼 때마다 히익 하고 소리 질렀고, 나는 일일이 다 쥐어박으려다 참았다.

"집에 가자."

그렇게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고아원으로 돌아갔다.

그곳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가자 마침 마녀가 고아원 앞에 나와 있었다.

그녀는 누군가를 찾는 듯싶었다. 이내 나를 발견한 순간 안도하다가, 곧 내 옆에 선 다섯 아이들을 보고 천천히 다가왔다.

"카르민, 소피아, 에바, 오리시아, 토니안."

아이들의 이름을 하나씩 부르며 다가온 마녀는 믿을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마녀와 마주한 아이들은 천천히 울먹거리기 시작했고 곧 그녀에게 뛰어들 듯 안겨 울음을 터트렸다.

마녀도 곧 아이들이 되돌아 왔다는 것에 울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던 나는 입을 열었다.

"어때. 파라만의 피리. 내가 만든 결말이."

내 목소리가 내뱉어진 순간 대엥 하고 거리에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파라만의 피리'가 만족을 보입니다.]

그 순간 하늘에 글자가 커다랗게 떠올랐다.

[축하합니다. 1번째로 22층을 클리어하셨습니다.]

['22층의 주인' '파라만의 피리'가 당신의 클리어를 축하하며 보상을 지급합니다.]

나는 시선을 돌려 눈물 섞인 눈으로 웃고 있는 마녀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잠깐 눈을 깜빡인 순간, 그녀는 어느새 유리 상자 속에 갇힌 마녀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알립니다. 3달하고 하루만에. 22층이 클리어되었습니다.]

그리고 전 층에 알림 메시지가 나타났다.

지금쯤 다른 사람들도 22층이 클리어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겠지.

[마녀의 원한을 해소했습니다.]

[마녀의 원한이 사라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