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novel

11

서로의 힘을 공유한다는 말에 나는 층을 공략하는 데 쓸만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이내 서로를 믿으면 믿을수록 힘이 강해진다는 조건에 곧 혀를 찼다.

이런 유의 아이템들은 언제나 골칫거리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게 사람의 감정이라는 게 마음대로 될 리가 없으니까.

믿음이나 감정 같은 것에 따라 성능이 달라지는 아이템들은 늘 극과 극의 결과를 내놓았다.

'나가면 결혼한다는 녀석들이 이거랑 비슷한 아이템을 쓰다가, 결국 불신이 가득해져서 아이템 성능이 망가진 걸 본 적 있는데.'

서로의 믿음이라는 게 말이야 좋지. 제 성능이 나오다가 안 나오기 시작하면 오히려 반목할 계기가 되어 버릴 게 뻔했기에 나는 혀를 차며 아이템을 넣어 두었다.

어차피 참가자 사이에 쓸 일은 없을 거고, 층의 주민 중에 날 잘 믿는 녀석에게 쥐어 주면 될 것 같았다.

문제는 나도 그놈을 믿어야 사용할 수 있겠지만.

'그러고 보니 내가 힘을 얻고 나서 생각하는 건데....'

나는 최근 지급되는 아이템들을 쭉 훑어보고 살며시 인상을 찌푸렸다.

왜냐하면 이전 회차에서 황제 같은 녀석들이 받는 괴랄한 성능을 가진 무기 아이템들에 비해 내가 받는 것들은 재료나 장신구, 이상한 사용 아이템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설마 하며 나는 하늘 쪽을 노려보았다.

그야 물론 스텟을 거의 최고치까지 찍은 나에게 그와 관련된 아이템들은 그다지 쓸모가 없다.

나도 알고 있는 거긴 하지만.

"이 자식들 지금까지 아이템은 빨리 클리어하면 좋은 보상을 랜덤으로 주는 줄 알았더니 너희들 사용자 맞춤으로 주는 거였냐?"

당연한 거지만 돌아온 대답은 없었다.

괴랄한 성능을 가진 아이템을 줘 봤자, 나에게는 쓸모없으니 이 녀석들은 주구장창 저런 류의 아이템들만 퍼 주는 것이었다.

하긴, 애초에 아이템을 지급하는 녀석이 층의 성좌일 텐데 미처 생각 못 한 내 잘못이다.

기다랗게 한숨을 내쉰 나는 그냥 그러려니 하기로 했다.

어차피 나는 아이템에 의존하고 있지 않긴 했고.

'그다음은.'

나는 이번에는 상태 창을 켜 똥개 놈이 준 권능을 살펴보았다.

[세상 저편의 울음소리]

당신이 본 적 있는 자에게 외친 목소리가 같은 층에 한정하여 어디에 있든 닿습니다.

역시 또 애매한 성능을 가진 게 나왔다.

가능하면 저번과 같이 가톨릭 칠죄종이 나왔으면 했지만, 권능은 늘 덤 정도의 성능이었으니 그러려니 하기로 했다.

"됐다. 됐어. 내가 뭘 바라냐."

이쯤 되면 크라운 로드에게 미움 받고 있는 게 분명하다고 생각한 나는 버터 오징어를 마저 입에다 털어 넣곤 층을 오르는 계단으로 향했다.

['36층의 주인' '기억 속 영원'이 당신에게 살포시 인사를 합니다.]

['36층의 주인' '기억 속 영원' 이 당신에게 36층의 클리어 조건을 제시합니다.]

['모든 걸 잊지 못한 그대에게' 반갑습니다. 참가자, 저는 당신이 잊지 못할 과거를 되새기고 바꿔보고 싶습니다. 당신은 자신이 살아온 삶 중 하나를 떼어 보게 되고 그 기억이 끝나는 시점에 층은 완료될 것입니다.]

성좌가 내게 말을 걸어온 듯한 설명에 고개를 기울이고 있자 곧바로 주변 경치가 바뀌기 시작했다.

바뀐 경치 속에서 나는 어느 도심 불빛이 닿지 않는 골목길에 누워 있었다.

비에 젖은 아스팔트에서 피어오르는 습기 찬 냄새가 콧잔등을 간질이고, 입가에는 비릿한 핏물의 맛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얼굴을 한 대 얻어맞기라도 한 듯하였지만, 나는 그런 것보다 다른 이유로 눈살을 찌푸렸다.

이곳은 분명 기억 속에 있는 장소였기 때문이었다.

'설마.'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층과 관련된 불안한 느낌은 늘 적중한다.

"일어났어?"

과거를 되새긴다는 말에서부터 눈치챘어야 했다.

들려온 곱디고운 목소리에 시선이 옆으로 향하고, 곧 쓰러진 내 곁에 앉아 있던 여성과 눈이 마주쳤다.

우중충한 도심과는 어울리지 않는 새하얀 우산과 백금색의 머리카락, 곱게 다문 입가에 띤 잔잔한 웃음.

그 여자를 마주한 나는 저번 회차에서 억눌러 놓았던 기억이 다시금 떠올랐다.

"하아, X발."

한숨과 함께 다짜고짜 욕설부터 내뱉은 나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동그랗게 뜬 저 눈이 짜증스러웠다.

내가 최전선에 설 수 있도록 도와준 여자이자, 내가 층을 공략하는데 누구와도 함께 하지 않고 혼자 하게 된 원인 또한 제공한 여자.

'아래층 관리자 이자벨라.'

이 여자는 이전 회차부터 랭커로 최전선에서 활약했던 여자다.

그러나 참가자들의 발걸음이 멈추기 시작하는 아래층에서 사건 사고가 너무 자주 생기는 것을 알고, 이 상태로는 크라운 로드를 클리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렇기에 이 여자는 회귀 이후, 아래층에 남아 치안을 관리하고 후위를 육성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황제가 나타났을 당시 역대 급으로 많은 참가자들이 그와 함께 최전선에 설 수 있었던 이유가 이 여자의 후위 육성 덕분이었으니까.

심지어 나 또한 이 여자의 육성 덕분에 최전선에 오를 수 있었다.

짜증 나지만 이자벨라는 나를 확실히 성장시켜 주었다.

하지만 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나는 4회차에서 내 손으로 직접 이 여자를 죽였으니까.

왜냐하면 그녀는.

'야신 소속이니까.'

이 여자는 4회차, 야신의 배신과 함께 층의 클리어를 막았던 이들 중 한 명인 것이다.

내 욕설에 놀란 듯한 이자벨라를 잠시 바라보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과거일 뿐이야.'

한순간 감정 동요가 일어났지만 나는 곧바로 털어 내었다.

4회차 때 이자벨라와 관련된 모든 감정은 그때 전부 내려놓았다.

그 감정은 전부 야신을 향한 원한으로 뒤바뀌었으니까.

그렇기에 이제 와서 이자벨라를 향해 맹목적인 비난 같은 건 더 이상 할 생각이 없었다.

'이딴 층, 클리어나 하자.'

생각을 정리한 나는 곧바로 주변을 살펴보았다.

지금 내가 누워 있던 곳은 과거 크라운 로드 10.5층으로, 내 기억이 맞는다면 지금의 시간대는 2회차였다.

성좌가 의도한 건지는 몰라도 오랜만에 보는 풍경에 예전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이곳에서 이자벨라를 처음으로 만났다는 것 또한.

'과거를 되새기고 바꿔보고 싶단 말이지.'

참, 말은 편하게 한다.

2회차 당시 10.5층은 중하위권 참가자들이 가장 많이 머물던 층으로, 일종에 중간 거점으로 사용한 층이었다.

2회차에서 내가 가장 높게 올랐던 층은 58층.

즉, 지금은 2회차에 들어선 지 그리 많은 시간이 흐르지 않은 때였다.

"구해 준 은인에게 보이는 태도치곤 너무하네."

그러고 보니 이 여자와 내가 처음 만났을 때 나는 길거리에서 참가자 패거리들에게 얻어맞고 있었다.

그걸 구해준 게 때마침 순찰을 위해 이곳을 지나가던 이자벨라였고.

이 당시 나는 정말 말도 안 될 정도로 약하고 섣불렀으며 아무것도 몰랐었으니까.

나는 이자벨라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예쁘장한 얼굴이 내 기분을 잡쳤지만, 층의 설명에서 과거를 되새기라는 문장을 떠올리며 감정을 억눌렀다.

열 받지만 내 과거는 이자벨라의 영향이 크다.

그렇담 결국 이 층을 공략하려면 이 여자와 한동안 함께해야 한다는 소리와도 같았다.

"아까까지 맞고 있던 사람 같은 분위기가 아니네."

그러면서 이자벨라는 나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축축한 빗물 냄새 사이로 이 여자가 자주 사용하던 라벤더 향이 은은하게 코끝을 간질였다.

내가 그녀와 눈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하자 이자벨라는 빙그레 웃음을 띠었다.

"이상하네. 처음 보는 사람인데 왜일까, 당신은 나를 아는 거 같아."

"너 같은 여자 몰라."

"정말? 이 층에 남은 사람이 나를 모른다는 게 더 신기한데."

이곳은 현재 10.5층, 이자벨라가 육성과 관리를 하고 있는 층으로 가장 많은 참가자들이 머무는 층이었다.

대부분의 참가자들이 이 층에서 더 이상 나아가는 것을 포기한다.

10층을 오르는 동안 겪어 볼 것은 다 겪어 보니, 평범한 사람이라면 층을 클리어할 의지를 자연스레 잃게 되는 것이다.

'다 똑같겠지. 어차피 내가 아니어도 다른 사람이 클리어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며 대부분의 참가자들이 그렇게 살아가니까.'

황제가 있던 3, 4회차가 특이 케이스였을 뿐.

'이제는 상관없다.'

하위권 따위 신경 쓰지 않기로 하고 나는 이자벨라를 두고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러자 그런 내 모습을 보던 이자벨라가 옆으로 다가와 따라 걷기 시작했다.

"왜 따라와?"

"또 누군가한테 얻어맞을까 싶어서."

지금 그녀에게 비추는 내 모습은 10.5층의 불량배에게도 얻어맞는 등신이라 이건가.

내가 짜증스레 그녀를 보고 있자 이자벨라는 우산 너머에서 웃음소리를 내었다.

"앞에 말한 것도 거짓말은 아니지만. 당신에게 흥미는 확실히 있어."

예전 나를 처음 만났을 때 내게 했던 그녀의 말이 저 입에서 똑같이 흘러나왔다.

마치 데자뷔를 보는 듯한 감각에 괜스레 기분 나쁜 감각이 몸을 감싸왔다.

119화

"아까 전부터 지켜보고 있었거든."

"그래서 뭐."

"불량배들이 마약에 중독시키려고 등불에 중독되지 않은 참가자들에게 강요하던 걸 막아줬잖아."

"봤으면 네가 도와줬으면 되지 않았나?"

"내가 나서려고 하기 전에 당신이 먼저 나서 버려서 말이야. 그렇게 약할 줄 알았다면 말릴 걸 그랬다고 후회하긴 했어."

성격 나쁜 여자 같으니.

"당신도 알지? 여기까지 왔으니. 10.5층이 어떤 곳인지 말이야."

오래전 기억이지만 알기 싫어도 기억할 수밖에 없다.

10.5층, 방금 말했듯이 가장 많은 참가자들이 머무는 층이자, 가장 많은 참가자들이 재활용 불가능한 쓰레기가 되어 버리는 곳이다.

그렇게 되는 원인 중 가장 큰 이유는 10층과 관련되어 있다.

마치 지구에 오래전에 있었던 아편 전쟁과 같이 10층의 이야기 속에서 전쟁의 시발점이 된 것은 등불이라는 마약이었다.

그런 10층에서 등불에 손을 댄 참가자들은 그것에 순식간에 중독되었고, 그 결과 층을 클리어했음에도 불구하고 등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결국 그들은 등불을 손에 넣고자 10.5층에 머물렀고, 그런 그들에게 10층에서 등불을 반입하여 파는 등불 상인들까지 나타나기 시작해 10.5층은 층을 오르기를 포기한 참가자들의 무덤이 되어 버린 것이었다.

'참가자들은 지구인, 우리나라야 상대적으로 마약 유통이 적은 편에 속하지만 다른 나라는 정말 손쉽게 마약을 구할 수 있었으니.'

5만 명이나 되는 참가자들 중에 이전부터 마약 중독자가 없을 리가 없다.

그런 녀석들은 기필코 등불에 손을 대고, 다시금 마약 중독자가 되어 버린다.

"알면 어쩌자고."

"등불의 유혹은 강해. 떨어진 거리에서 달콤한 향을 맡는 것만으로도 자연스레 기분이 좋아지니까. 마치 술에 취한 것처럼 말이야. 그래서 나는 그 유혹을 떨쳐 낼 수 있는 사람들을 모으고 있어. 크라운 로드를 오를 수 있는 자들을."

역시 내가 어떤 태도를 보이건 이자벨라의 대화는 이전과 똑같았다.

"내가 당신을 키워 줄게. 크라운 로드에 오를 수 있도록."

"그 말은 누구에게나 다 똑같이 하는 말이냐?"

"아니, 가능성이 있는 사람에게만 하고 있어. 내가 추측 하나 해 볼까? 당신은 후에 랭커들도 가볍게 이길 수 있을 정도로 강해질 거 같아. 그리고 누구보다도 먼저 크라운 로드를 클리어할 거야."

이런 말을 한 주제에 이 여자는 결국 야신의 편에 서서 그 앞을 막았다.

자신이 직접 육성한 자들조차도 자신의 편에 서지 않을 시 제 손으로 직접 죽였고, 결국 그 칼은 나에게까지 들이 밀어졌었다.

어떤 유혹에 그녀가 넘어갔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여기 있는 이 여자는 내 기억을 토대로 다시 만들어진 층의 환상일 뿐이니까.

가증스러운 이자벨라를 바라보며 다시금 욕설이 끌어 올랐지만, 나는 억지로 억눌렀다.

층은 과거를 되새기라고 했었다.

바꿔 보라는 것이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과거를 되새기라는 건 적어도 원래의 기억을 그대로 따라가라는 소리일 것이다.

그렇담 여기서 이자벨라의 제안을 거절하는 건 층의 공략과 멀어진다는 것.

"넌 정말로 크라운 로드를 클리어하고 싶은 거냐?"

하지만 이것만큼은 묻고 싶었다.

지금 시점에서 처음 만난 나에게 어떤 대답을 할지 모르겠지만.

정말로 클리어하고 싶냐고.

내 물음을 듣고 이자벨라는 다시금 떨어지기 시작하는 빗물 사이로 가벼운 웃음을 지었다.

"응, 난 언제나 그랬어."

언제나.

내 입에서 조소가 흘러나오려 했으나, 나는 애써 억누르며 그녀가 원할 대답을 해 주었다.

"안내해."

"좋은 대답이야."

내가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이자 환한 웃음을 지은 이자벨라는 나보다 앞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의 뒤를 따르자 어느새 골목길 밖으로 나왔고, 그 어귀에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건장한 체격에 이자벨라와 같은 제복을 입은 그는 뒷짐 진 자세로 우리 쪽을 보더니 이자벨라에게 인사를 하였다.

"순찰 끝나셨습니까."

"응, 수고했어. 리네, 그만 들어가서 쉬어도 돼."

"본부까지는 같이 가겠습니다."

리네오르만, 크라운로드에서 호검이라는 지명을 부여받은 그는 이자벨라의 수족이었다.

내가 그를 바라보고 있자 이내 리네오르만의 시선과 마주쳤고, 그는 감정 없이 나를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이자벨라가 후위 육성을 위해 누군가를 데려오는 일은 번번이 있었던 만큼 그에게도 익숙한 듯싶었다.

이후 이자벨라와 함께 그녀가 현재 10.5층에서 지내고 있는 거점에 도착하였다.

영어로 대놓고 경찰서라 적어 놓은 건물을 올려다보고 있자, 이자벨라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넌 나를 따라오도록."

그 뒤를 따라 내부로 들어가자 이자벨라 대신 리네오르만이 내 안내 역할을 맡았다.

괜한 시비를 걸 생각은 없었기에 순순히 녀석을 따르기로 했다.

리네오르만은 경찰서 지부 안에 있는 다른 건물로 안내해 주었다.

"어라, 신입인가요?"

그 앞에 다다른 순간 마침 건물 옆을 지나고 있던 한 남성이 나를 보곤 반응했다.

본 적 없는 내 얼굴과 옷차림을 보고 신입이라 판단한 거겠지.

"맞다. 순찰 도중 이자벨라님께서 직접 데려오셨다."

"참, 늘 바쁘게 사시네요."

"안내역을 네게 맡겨도 되겠나. 나는 오늘 순찰 보고를 하러 가야 하니."

"네, 맡겨 주세요."

그의 말에 씨익 웃으며 남성이 대답했고, 리네오르만은 감사를 표한 뒤 떠나갔다.

그 뒷모습을 잠깐 바라보고 있자, 내 앞으로 다가온 남성이 내게 인사를 해왔다.

"반가워. 나는 글렌다. 이자벨라님의 육성소에 온 걸 환영해."

검은색 머리카락에 까무잡잡한 피부, 참 변함없이 여전한 얼굴이다.

이전에 내가 그의 검술을 한 번 사용한 적 있듯이 녀석과는 꽤 오랜 시간 동안 크라운 로드를 함께 올랐었다.

결국 죽은 사람이지만, 조금 그리움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하천성이다."

내가 인사를 받아주자 한 차례 웃어 준 글렌다는 나에게 이것저것 이야기하며 육성소 안으로 데리고 왔다.

육성소는 내 기억을 토대로 만들어진 만큼 다른 게 하나도 없었다.

여기저기 동고동락했던 얼굴들이 지나가고, 육성소 관리인인 니아 누나 또한 여전했다.

글렌다 녀석이 니아 누나한테 고백하겠다며 난리 치던 것이 아직도 새록새록 떠오른다.

그러나 감상에 젖기도 전에 현실이 먼저 다가왔다.

'결국.'

여기 있는 녀석 중 살아남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으니까.

"여기가 네 방이야. 오늘은 시간이 늦었으니 쉬고, 내일 아침에 다시 데리러 올게. 배가 고프면 아까 봤던 니아 누나한테 말하면 돼."

나와는 한 달 차이로 먼저 들어온 글렌다는 열심히 선배 행세를 하며 말했다.

그 말에 내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글렌다가 자리를 떴고, 나는 곧 방 안 구석에 놓인 침대에 털썩 앉았다.

방은 내가 당시 2달간 머물렀던 곳과 똑같은 방이었다.

내부를 잠시 바라보던 나는 곧 인상을 찌푸리기 시작했다.

"뭘 원하는 거냐."

대체 뭘 원하기에 이따위 층을 운영하냐고 물었지만, 성좌에게서 대답은 없었다.

좋을 것도 없는 기억을 구태여서 보여 주는 의도가 무엇일까.

성좌들이 보통 원하는 건 자신의 층에 도전한 참가자가 이야기에 매료되어 발이 묶이는 상황일 텐데. 지금의 이건 오히려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을 지경이다.

'추억 팔이를 하려면 좋은 추억을 가져올 것이지.'

이딴 기억을 가져온 영문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육성소에서의 첫날밤이 어땠더라.'

베개를 보고 털썩 누운 나는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기억이 애매하긴 하지만, 분명... 됐다. 그건 아무래도 좋아.'

나는 눈을 감고 잠시 쉬기로 했다.

이자벨라 녀석을 보고 나니 속이 매스꺼워서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옅은 잠에 든지 3시간정도 시간이 흘렀을까, 나는 주변에서 느껴진 기척에 살짝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창문가에서는 푸른색의 빛이 흘러들어 오고 있었다.

밤보다 새벽에 가까울 정도로 늦은 시간.

벌레들도 잠들었을 시간이었다.

희미하게 들리는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고, 그들은 곧 자는 척하는 내 주위를 둘러쌌다.

"잔다. 자."

"육성소의 첫날밤이 얼마나 고된지도 모르고, 신입답네."

"이렇게 들어오는 것도 못 알아차리면 얘는 글렀겠다."

소근소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야기를 나누던 그들은 한 차례 웃음소리를 내더니 곧 내게로 손을 뻗어왔다.

이들이 하려는 건 신입이 육성소에 들어오는 첫날 밤에 하는 일종의 신고식 같은 거다.

자고 있는 신입의 방에 몰래 들어와 수면 마법으로 다음날까지 완전히 잠재워 버린 후 아침 점호를 하는 운동장 중심에 던져 놓고 놀리는 일종에 뻘짓거리다.

나도 이때 이거에 당하고 꽤 열 받았었지.

처음 들어온 신입이 어색해할 분위기를 없앤다는 명분으로 계속 행해지긴 한 모양이지만.

'아는데 당해 줄 수는 없지.'

나는 내게로 뻗은 손을 그대로 잡아 주었다.

나에게 붙잡힌 손의 주인인 듯한 녀석이 흠칫하고 몸을 떨던 찰나, 나는 그 즉시 손을 당겨 놈의 머리를 벽에 박아 버렸다.

"아악!"

"이 녀석 깨어 있어!"

이를 보고 소리친 다른 사람이 나를 제압하려고 달려들었지만 어림도 없었다.

오러를 쓸 것도 없이 녀석의 복부를 걷어차 준 나는 고통에 끙끙 앓고 있는 두 사람을 두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아, 아, 그, 우, 우리는 그냥 장난으로...."

나머지 한 명이 당황한 표정을 지은 채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자, 나는 뒤에 둘을 가리키며 말했다.

"둘 다 재워."

"어, 어?"

"네가 마법사잖아. 재워."

내 말에 당황한 표정을 지었던 여자아이는 나와 둘을 번갈아 보다가 눈을 질끈 감더니 두 사람에게 수면 마법을 걸었다.

잠들기 직전 자신들이 무슨 일을 당할지 눈치챈 둘이 당황하여 소리치려 했지만, 금세 수면 마법에 의해 잠들어 버렸다.

"운동장에 옮겨 놔라. 안 옮겨 놓으면 다음 날 너도 똑같이 재워서 셋이 사이좋게 같이 누워 있을 거니까."

새파랗게 질린 여자아이는 급히 둘을 낑낑 끌고 방 밖으로 나갔다.

그런 셋을 보던 나는 침대에 털썩 누워 다시 잠을 청했다.

그리고 그렇게 다음 날.

일찍 일어난 내가 한동안 창가에 서서 바깥을 보고 있었을까, 똑똑하고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당했나."

내가 잠시 대답 없이 있자 밖에서 한숨 섞인 글렌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반응에 실소를 내뱉은 나는 방문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고, 그 앞에 서 있던 글렌다가 흠칫하고 나를 바라봤다.

"당했다니, 뭐가?"

"어, 어라? 혹시 어젯밤에 트리오가 안 왔어?"

"왔었지."

그리 말한 나는 아무렇지 않게 그를 지나쳐 운동장 쪽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내 말을 들은 글렌다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내 뒤를 따라 내려왔고, 곧 운동장에서 웅성거리는 사람들을 보고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이야, 이번 신입 대단하네."

"언젠가는 역으로 한 번 깨질 거로 생각했는데. 걸작이네."

키득거리는 사람들의 중심에는 어제 내 방에 들어온 두 녀석이 있었다.

세상모르고 운동장에서 자고 있는 둘을 본 글렌다는 내 어깨를 툭 두드렸다.

"누가 말해줬어?"

"신입한테 저런 걸 굳이 말해 줄 녀석은 없을 텐데."

"그렇지?"

내가 스스로 제압한 것을 눈치챈 글렌다는 고개를 끄덕였다.

"첫날부터 눈에 띄는 짓을 해 줬네."

그러던 순간 나는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팍 인상을 찌푸렸다.

고개를 돌리자 거기에는 이자벨라가 서 있었고, 오늘도 여전히 제복 차림인 그녀는 얼굴에 빙그레 웃음을 띠었다.

"아, 이자벨라 님!"

글렌다가 반갑게 이자벨라를 마주하는 동안 나는 그녀를 힐끔 보았다가 고개를 돌렸다.

괜히 아침부터 눈만 버렸다.

120화

"그럼 아침 점호 시작할게."

이자벨라는 아직도 바닥에서 자고 있는 두 사람을 깨우는 대신, 간단한 해독 마법으로 수면 마법을 풀어 주기만 한 뒤 아침 점호를 시작했다.

군대와는 달리 그저 인원 체크와 아픈 사람이 있는지만 확인하는 것이기에 빠르게 끝났고, 이후, 우리는 아침 식사를 하러 갔다.

"네가 하천성이지? 오늘 아침에 한 거 잘 봤다."

그렇게 식당으로 글렌다와 함께 걸어가고 있을 때쯤, 오늘 아침에 벌어진 일 덕분인지 지나가던 녀석들이 한두 마디씩 말을 걸어왔다.

예전에 같이 지낸 기억이 있는 만큼 내가 아는 녀석들도 꽤 많았지만, 나는 굳이 아는 척하지는 않았다.

"오늘 일정은?"

"우리는 간단히 체력 단련 이후 11층 공략을 하러 들어가. 하지만 천성이 넌 들어 온 지 하루밖에 안 되었으니까 아마 개인적으로 다른 게 있을 거야."

그건 똑같군.

층을 공략하기 앞서서 강해져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것만으로 층을 클리어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이렇듯 차분히 위에 층을 베테랑과 같이 공략해 나가며 층의 이야기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를 보여 주고, 이를 터득하게 만드는 식으로 육성해 나가는 것이다.

이러한 육성 방법은 확실히 후위가 전선으로 올라올 수 있는 데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자네가 하천성이지?"

그렇게 생각하며 식사를 마쳤을까,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거기에는 제복 차림의 한 남성이 서 있었다.

아무래도 글렌다가 말했던 다른 걸 하려고 날 데리러 온 거겠지.

잘 갔다 오라는 양 손을 흔드는 글렌다를 두고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남성의 뒤를 따라 걸었다.

'그러고 보니 그때 나를 찾아왔던 건 어떤 여자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아무리 내 기억 속이라 한들 내가 하는 일이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치는 모양인지 그때와는 다른 방향으로 상황이 흘러가고 있었다.

남성을 따라 얼마간 걸었을까, 나는 어느 응접실 앞에 도착하였다.

그 응접실은 나도 기억하는 곳이었고, 익숙하게 문을 열고 들어서자 아니나 다를까 이자벨라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

집무를 보고 있던 그녀는 나를 보더니 쓰고 있던 안경을 벗으며 웃어 보였고, 나는 남성을 지나쳐 태연하게 소파에 털썩 앉았다.

"아침은 맛있었어?"

"그럭저럭."

"다행이네. 우리 조리사 지구에서도 유명한 셰프였거든. 내가 고용하느라 고생 좀 했지."

그리 말한 이자벨라는 서 있던 남성에게 나가 보라는 양 손짓하였다.

그런 이자벨라를 보고 고개 숙여 인사한 남성이 나가고, 그녀는 집무를 보던 의자에서 일어나 내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아침에는 꽤 놀랐어. 우리 애들이 신입이 오면 장난을 치는 건 알고 있었지만, 역으로 당한 건 처음이었거든."

"멍청하게 다 걸리는 애들만 들어 왔으니까 그렇지."

"그래? 난 아닐 거라 보는데."

새하얗고 기다란 손가락으로 찻잔에 찻물을 따른 이자벨라는 내게 그걸 건네주었다.

그러곤 제복 상의를 벗어 곱게 갠 뒤, 자신의 무릎 위에 올리며 미소 지었다.

"그 아이들 그래 보여도 꽤 오랫동안 그런 걸 해 왔으니까, 그쪽 방면으론 나름 베테랑이야. 내 기억 속 하천성은 분명 약을 파는 불량배들한테 당하던 약한 사람일 텐데 이상하지 않아? 우리는 애들을 약 파는 불량배 따위는 손쉽게 쓰러트릴 수 있을 정도로 키워 놨는데 말이야."

그 말을 들으며 나는 찻잔 손잡이를 집고 들어 올렸다.

찻잔 바닥에 보이는 주홍빛 찻물을 보며 나는 아무렇지 않게 한 모금을 마시곤 도리어 그녀에게 물었다.

"그래서 내가 등불을 파는 등불지기 녀석들이 심어 놓은 첩자라도 될 거로 생각했나."

찻잔을 내려 둔 나는 그리 말하곤 가볍게 웃음 지었다.

"네가 아니면 해독 불가능한 독까지 타두고 말이야."

방금 마신 찻물에 이자벨라가 탄 독은 눈으로 확인할 수 없고, 향도 나지 않는 그녀가 가진 A급 클래스 무형독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 무형독은 이자벨라의 의사에 따라 조종이 가능하여 그녀가 상대에게 얻어낼 정보가 있을 때 주로 사용하였다.

나도 옆에서 몇 번이고 봐 온 그녀의 클래스였기에 잘 알고 있었다.

내 이야기를 들은 이자벨라는 당황하지 않고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런 말을 하면 내가 더 의심할 거란 생각을 안 해?"

"아니, 넌 내가 어떤 말을 하더라도 의심하겠지. 애초에 네가 남을 온전히 믿은 적이 있기나 해?"

내 비웃음 섞인 말에 이자벨라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곤 곧 자신의 턱을 양손으로 감싸며 눈가를 휘어 진한 웃음을 지었다.

"이상하네. 최전선에서 나랑 같이 있던 랭커들도 나에 대해서 이만큼은 알지 못하는데 어째서일까, 당신은 나에 대해서 너무 잘 알고 있는 거 같아. 마치 오래전에 만나기라도 했던 사람인 것처럼."

"내가 사람의 과거를 꿰뚫어 보는 S급 클래스를 가지고 있어서 말이야."

"거짓말은 참 못하지만 말이야."

망할 여자.

"당신이 나를 볼 때 느껴지는 감정은 뭐랄까, 여러 가지가 섞여 있는 거 같네. 분노라든가 차가움 같은 나쁜 감정부터 그리움, 후회 등등... 이렇게까지 여러 감정을 나한테 보이는 사람은 크라운 로드에서 만난 적이 없어."

그리움과 후회라는 말에 나는 코웃음 쳤다.

내가 이 여자한테 그런 감정을 느낄 리가 있나.

"이런 감정을 보였던 건 지구에서 마주친 전 남자친구밖에는 없었던 거 같은데."

하나 이어진 말에 나는 입을 꽉 다물었다.

내 반응을 잠깐 보던 이자벨라는 볼을 감싼 채 고개를 기울이곤 내게 물어왔다.

"혹시 우리 예전에 사귀기라도 했어?"

"닥쳐. 너 같은 거랑 사귈 거 같냐."

"그 반응을 보니 뭔가 더 의심스러운데."

그리 말한 이자벨라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 곁에 앉았다.

그러곤 옆에 바짝 붙어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기 시작했고, 그러자 그녀의 몸에서 라벤더 향이 진하게 풍겨 나와 내 코끝을 간질였다.

내 옆에 다소곳이 앉은 그녀는 곧 기다란 검지로 내 볼을 만지려 했고, 짜증이 난 나는 그녀의 손을 피해 자리에서 일어나 버렸다.

"허튼 짓거리 하지 마라. 내가 여기 온 건 어디까지나 필요한 일이라고 판단해서야. 엿 같은 등불지기 같은 녀석들이랑 팀 먹은 게 아니라."

"그건 하천성, 당신 태도를 보고 어느 정도 납득했어. 무형독은 사과할게. 내일 아침이 지나면 자연스레 몸에서 빠져나갈 거야."

자신을 피한 나를 보고 잔망스러운 웃음을 흘린 이자벨라는 자리에서 일어나 제복 상의를 들곤 집무실 의자로 갔다.

"연기한 건지, 아니면 갑자기 세계가 선택해서 용사라도 된 건지 모르겠지만 당신 꽤 강하지."

"그래서?"

"하천성, 당신 말대로 나는 의심이 많아. 말은 이렇게 했지만, 혹시나 당신이 등불지기 녀석들이 숨겨 둔 비장의 카드라든가 하는 의심이 들어. 그러니 등불지기 중 한 명을 당신이 잡아 와 줬으면 해."

"본 지 이틀된 나한테 그런 부탁을 하냐."

"신뢰 관계를 쌓는 방법은 다양하게 있는 법이잖아? 본인 입으로 여기에 온 건 필요한 일이라고 판단했다고 했으니, 이 정도면 내가 당신을 여기에 머물게 해 주는 조건으로 합당한 거래가 아닐까 싶은데."

저 싱글벙글 웃는 얼굴을 한 대 쥐어박아 주고 싶었지만, 나는 됐다는 양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이 여자 성격이야 질리도록 겪어 봤기에 일이 이렇게 흘러갈 것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나도 그걸 알고 한 거기도 하고. 결국, 이런 식이 아니면 이 여자의 신뢰를 얻을 방법이 없다.

그녀는 뼛속까지 인간 불신 주의자니까.

'불신하고 또 불신하고, 사람을 끝까지 절대로 믿지 않는 개 같은 여자.'

내 눈에 분노가 옅게 일렁였지만 나는 억지로 그걸 잠재웠다.

괜히 과거가 또 한 차례 머릿속을 스치자 기분이 언짢아졌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어차피 죽은 여자에 분노하는 건 의미 없다고 생각한 나는 감정을 억누른 뒤,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등불지기를 잡을 때 우리들이 시켰다고 말하지는 말아줘. 우리 쪽을 신뢰하지 않고 등불지기의 편에 있는 사람들이 아직 10.5층에 많이 있어서 말이야."

"약에 손댄 녀석들을 같은 편으로 만들어 봤자 독이다."

"이번 회차에서는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다음 회차에서 그들은 등불을 하지 않은 상태로 돌아갈 거니까.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곤 하긴 하는데, 내 생각은 다르거든. 바뀌어 사람은. 특히 이 크라운 로드에서만큼은 말이야."

그 말대로 크라운 로드에서 사람은 바뀐다.

지금 여기 있는 이자벨라가 후에 나를 배신하고 야신의 편에 섰듯이.

어제까지만 해도 곧 크라운 로드를 완전히 클리어할 수 있을 거라 웃던 녀석이 돌변하여 내 얼굴에 검을 들이밀던 모습은 아직도 생생하다.

인간 불신.

아이러니하지만 이자벨라가 가졌던 그 인간 불신 주의는 그녀를 죽인 내게로 이어진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도 등불지기들이 주로 움직이는 위치 정도는 파악해 두고 있는데. 어때, 줄까?"

"필요 없어. 그런 걸 제공하면서 너희 쪽 입김대로 날 움직이게 할 속셈이잖아."

내 말에 그녀는 대답 없이 웃을 뿐이었다.

"잘 다녀와. 하천성."

대신 인사를 건네준 이자벨라를 두고 밖으로 나온 나는 문 앞에서 아까 전 나를 안내해 주었던 남성과 마주했다.

그는 이자벨라와 안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사이 제복 차림에서 평상복 차림으로 바뀌어 있었고, 나는 그걸 보자마자 그의 역할을 알아차렸다.

"너, 이자벨라가 맡긴 감시 역이냐?"

"그렇다."

내 물음에 남성은 부정 없이 곧바로 대답했다.

등불지기를 죽여서 데려오면 그 과정이 어떨지 모르는 일이니, 감시 역을 붙인 것이다.

그런 그를 보고 나는 그러려니 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애당초 내 과거 토대로 만들어진 층이기에 등불지기 녀석들이 어디에 있는지는 전부 알고 있다.

애초에 등불지기 녀석들은 얼마 안 가 결국 이자벨라의 손에 전부 소탕될 예정이다.

나도 당시에 육성소 녀석들과 함께 그들을 쳤기에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었다.

"너 이름은."

"에단."

예전 기억에 몇 번 지나가면서 본 적 있긴 했지만, 그와 통성명을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나는 육성소 녀석들과 주로 어울렸지 경찰 쪽에서 일하는 자들과는 그리 친밀한 관계는 아니었으니까.

"그래, 에단. 미리 말해 둘게."

경찰서 뒷문 밖으로 걸어 나온 나는 별천도를 뽑았다.

그리고 휘두른 내 검이 에단의 검 앞에 채앵 하고 막혔고, 그는 나를 놀란 눈으로 보았다.

"왜 이자벨라 녀석이 널 등불지기를 치러 가는 내 옆에 붙여 둔 거라 생각하냐?"

내 웃음을 보자마자 에단은 눈살을 확 찌푸리더니, 그 즉시 내게 맞서 검을 휘둘러 왔다.

그러나 나는 아무렇지 않게 그의 검을 모조리 맞받아쳤고, 에단은 이내 힘으로 나를 제압하기 힘들다고 판단한 건지 오러를 일으켰다.

"크학?!"

"정신 차려야지. 훤한 대낮에 경찰 제복을 입은 녀석이 이러면 사람들 눈에 띄잖아."

하지만 그가 오러를 일으킨 그 순간 날아든 내 주먹이 그의 옆구리에 정확히 꽂혔다.

고꾸라지자마자 뱃속에 있는 것을 게워 내는 그의 앞에 자세를 낮춰 앉은 나는 별천도를 어깨 위로 짊어진 채 물었다.

"그럼 우리 즐겁게 등불지기가 어디 있는지 한번 대화를 해 볼까. 첩자 씨."

내 말을 듣고 에단의 두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

이자벨라 녀석은 처음부터 에단이 등불지기의 첩자라는 것을 알고 내 옆에 붙여 보낸 것이다.

내가 알아차린다면 알아서 에단을 제압하고 그를 이용해 등불지기를 찾아갈 거라 생각 한 것일 것이고.

만약 못 알아차린다면 에단의 뒤통수를 맞아 등불지기에게 당해 버리는 그것밖에 안 되는 사람으로 취급하고 나를 잊었을 것이다.

하여튼 하는 짓부터 모든 게 기분 나쁜 여자다.

121화

등불지기.

10층에서 판매하는 등불을 구해오기 위해 매일 같이 10층을 드나드는 자들.

판매를 도맡는 등불상인들과 협약한 그들은 등불 중독자들로 인하여 상당히 큰 세력을 구축하고 있다.

그 세력이 어느 정도냐면 그들은 상위 랭커들 몇 명과 연이 닿아 있을 정도이며, 10.5층의 절반이 그들에게 등불을 해 본 적이 있다고 할 정도이니 말 다 하였다.

그런 그들에게는 최근 큰 골칫거리가 생겼다.

그건 바로 본격적으로 10.5층에서 자리 잡기 시작한 이자벨라 때문이었다.

이전 회차에서 랭커로 활약하던 그녀가 갑자기 어째서 이런 하위층에 머물기 시작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본인들을 경찰이라고 칭하며 치안을 관리하려 드는 것이 여간 눈꼴 시린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무턱대고 이자벨라를 적으로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혹여나 그녀가 연이 있는 랭커들을 부른다면 아무리 10.5층에서 호령하고 있는 등불지기라고 할지라도 그대로 쓸려 나가 버릴 테니까.

'하지만 그런 짓을 했다간 오히려 더 큰 문제가 되지.'

등불지기 중 한 명인 리우 옌은 오늘도 장부에 적힌 돈을 세며 히죽히죽했다.

이자벨라가 만든 경찰이 그들을 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등불 때문이다.

등불 중독자들은 10.5층의 절반이나 된다.

그 수는 갈수록 늘어가는 추세고 등불의 강력한 중독성 탓에 수가 절대로 줄지 않는다.

오죽하면 회귀하여 중독되지 않은 몸이 되어도 다시 손을 대는 게 등불이라 할 정도니까.

그렇기에 등불은 아무리 공급해도 그 물량이 매번 수요를 따라가지 못했다.

왜냐하면 등불의 유통은 오로지 등불지기들만이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10층에서 등불을 효율적으로 구하는 방법을 오래전부터 만들어 두었다.

그 결과 10층은 사실상 등불지기들의 놀이터나 다름없는 곳이 되었다. 혹여나 등불의 중독된 자들이 간혹 10층으로 직접 들어갈시, 곧바로 강제로 클리어시켜 버리고 10층에 들어 온 녀석에게는 절대로 등불을 팔지 않았다.

이런 영악한 짓을 하다 보니 개인으로는 등불지기가 아니면 도저히 등불을 구할 방법이 없었고, 등불 중독자들은 더더욱 등불지기들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렇기에 경찰들이라 한들 등불지기에게 함부로 손을 댈 수가 없다.

만약 자신들이 없어진다면 그 즉시 등불 중독자 녀석들이 들고 일어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지금보다 더한 아비규환 사태가 발생할 테니까.

'그리고 이자벨라, 그 여자는 멍청하지.'

경찰이라고 한들 등불의 유혹을 피할 수 있을 것 같나.

이자벨라가 고르고 골랐다는 경찰 안에도 벌써 몇 명이나 등불 중독자가 생겨나고 있다.

그들은 등불을 얻기 위해 자신들에게 꾸준히 경찰과 관련된 정보를 바치고 있기에 이자벨라는 그들의 손에 사실상 놀아나고 있는 실정이었다.

"하핫, 이자벨라 그년도 등불 한번 해 보면 정신 못 차릴 텐데 말이야. 그렇게만 돼 봐라. 바로 그 반반한 얼굴이 엉망진창이 될 정도로 괴롭혀 주지."

게걸스러운 웃음을 흘린 리우 옌은 장부를 두고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등불을 팔아 치워 세워 놓은 자신의 저택 창문에 서서 하등한 것들을 내려다보는 것은 언제나 최고의 기분이었다.

"오늘은 이자벨라와 비슷한 녀석을 찾아봐야겠군."

그렇게 더러운 욕망에 찬 웃음을 짓고 있던 그 순간.

그의 이마가 바닥에 내리 찍혔다.

"아아악?!"

곧 이마가 찢어지고 핏물이 바닥을 적셨다.

그러나 그는 밀려오는 고통 속에서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자신의 정수리를 잡은 손에서 느껴지는 압박감이 도저히 자신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누구냐! 내가 누군 줄 알고 감히!"

"닥쳐."

왜 화가 난 것일까. 정체 모를 사내가 자신을 향해 분노를 담은 일갈을 내지르자, 등불지기는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남성에게서 흘러나오는 기운은 범상치 않았다.

이래 보여도 리우 옌은 회귀를 두 번이나 겪었다.

과거에는 나름대로 층을 올라 봤기에 더더욱 잘 알고 있다.

자신은 아무리 노력해도 크라운 로드를 클리어할 수 없다고.

자신의 한계점을 확실하게 깨달았기에 지금 이렇게 등불지기를 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확신했다.

여기 있는 이 남자에게서 풍겨 오는 기운은 최소한 자신으로는 어찌 할 도리가 없는 괴물의 것이란 걸.

"등불지기, 리우 옌. 네 목 좀 가져가야겠다."

"기, 기다려! 기다려 봐! 네 녀석 누가 보낸 거냐! 누가 너에게 이런 걸 시켰지? 나를 죽이는데 얼마를 줬어! 내가 그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줄 테니까!"

발악하듯 등불지기가 외쳤지만. 남성, 하천성의 표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저 허리춤에 차고 있던 별천도를 뽑을 뿐 그는 이미 등불지기를 죽이기를 마음먹은 것 같았다.

"기다려라! 나는 저주사다! 내 몸에는 저주가 가득해서 나를 죽이는 즉시 네놈도 성치 못할 거다!"

하지만 그 외침에도 하천성은 멈출 줄을 몰랐다.

저주 따위 얼마든지 걸라는 양 그의 눈에 일말의 감정도 비치지 않자 정말로 죽음이 눈앞에 닥치게 된 등불지기는 속으로 비명을 내지르며 아는 사람의 이름을 전부 내뱉었다.

그러곤 그 끝에.

"이자벨라! 설마 이자벨라 그년이냐! 그 멍청한 년...."

내뱉어서는 안 될 이름을 토해 낸 순간 등불지기의 머리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 순간 리우 옌에게서 꾸역꾸역 토해져 나오는 저주가 하천성의 손을 휘감았다.

하지만 그 저주는 하천성의 손에 닿자마자 아이의 비명을 내지르며 모조리 지워져 버렸다.

고작해야 10.5층에서 살아가는 등불지기의 저주 따위 자신에게는 아무런 영향이 없었기에, 하천성은 챙겨 온 가방에 머리를 던져 넣었다.

아무리 이자벨라가 엿 같아도 남의 입에서 그 여자가 멋대로 거론되는 건 기분 나빴다.

하지만 그걸 기분 나빠 하는 자신의 모습 또한 짜증 나기 그지없었다.

'아직도 묶여 있는 거냐.'

떨쳐 냈다고 생각했는데 그저 묻어 두었을 뿐이었던 걸까.

기다랗게 한숨을 내쉰 자신을 한심하게 여기며 그는 그렇게 장소를 떴다.

* * *

리우 옌의 머리가 든 가방을 든 채 한참을 유유히 길거리를 거닐었을까. 나는 어느새 내 옆을 따라 걷고 있는 사람을 보곤 녀석에게 가방을 내던졌다.

"네가 원한 거다."

"그러네. 이렇게 빨리 끝내고 올 줄은 몰랐어."

내게 가방을 받은 것은 이자벨라였고, 그녀는 나를 보고 만족스러운 투로 웃음 지었다.

그러곤 아무렇지 않게 가방을 마법으로 지워 버리곤 뒷짐 진 자세로 내 옆에 따라붙었다.

평소에 입던 제복 대신 가벼운 일상복과 안경을 쓴 그녀는 늘 보던 모습과는 전혀 달라 언뜻 보면 이자벨라라고 눈치 못 챌 정도였다.

"생각 이상이네. 등불지기 위치를 이렇게 빨리 파악한 것도 그렇고, 마치 전부 미리 알고 있었다는 양 움직이고 있잖아."

"그래, 그렇게 평생 의심해라. 나는 사실 미래에서 온 회귀자거든."

"어디까지가 거짓말일까."

그녀를 눈꼴사납다는 듯 쳐다보자 이자벨라는 나와 눈을 마주치며 웃어 보일 뿐이었다.

"웃지 마. 열 받게."

"내 웃음, 그래도 주변에서 예쁘다고 많이 칭찬받았는데 말이야."

"걔들 눈이 이상한 거겠지."

"그런 걸까."

자기 볼을 감싸며 고개를 기울이는 이자벨라를 두고 나는 앞서 걸어갔다.

그러자 그녀는 종종걸음으로 내 옆을 따라붙어 오더니 물었다.

"당신은 날 왜 그렇게 싫어하는 거야?"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다 싫어서."

"그래? 하지만 그런 것 치곤 내가 부탁한 거 전부 들어주고 있잖아."

"네 입으로 거래라고 말했던 걸 잊었냐."

"거래라는 건 자신이 가치 있는 것을 상대가 가지고 있을 때 이야기야. 등불지기들은 그렇게 보여도 꽤 크라운 로드에서 오래 썩었어. 크라운 로드에서 지내는 시간이 길면 길수록 참가자들은 자신의 생존에 집착하게 되지. 계속해서 참가자들이 바뀌는 걸 보고 언제나 죽음의 압박감을 느끼니까. 그래서 크라운 로드는 오래 있으면 오래 있을수록 사람을 망가트려. 그리고 그건 아이러니하게도 사람을 또 강하게 만들지."

그리 말한 이자벨라는 이제는 내 앞을 막아섰다.

그리고 나보다 작은 키의 그녀는 나에게 한 발짝 다가서서 빤히 올려다보았다.

"등불지기들은 악하지만 약하지는 않아. 그런 녀석들을 이렇게나 손쉽게 잡을 수 있는 당신이 어째서 육성소에 남으려는 걸까. 당신이라면 충분히 크라운 로드를 혼자 오를 수 있을 텐데 말이야."

등불지기를 잡아 오라는 건 이자벨라의 시험이었나.

어떻게든 파고들려는 이자벨라를 보고 나는 도리어 물었다.

"너야말로 등불을 해독할 수 있는데, 굳이 기다리고 있는 이유가 뭐냐?"

"뭐든 시기가 있는 법이니까."

해독 클래스를 지녔다는 건 그녀의 측근에게 마저 비밀로 하고 있다.

그걸 내가 알고 있음에도 그녀의 표정에는 조금의 놀라움도 일지 않았다.

이자벨라가 후에 등불지기를 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그녀가 등불의 중독을 해독할 수 있는 클래스를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해독 클래스를 얻은 것은 한참 전 일.

그러나 굳이 그녀는 등불지기를 치지 않고 잠자코 그들이 활개 치도록 기다렸다.

언젠가 등불지기로 인하여 등불 중독자가 10.5층의 가득 찼을 때.

10층을 강제 폐쇄하고 등불 중독자들을 자신의 손으로 해독시켜 주며 그들의 구원자가 되고자.

"똑같아. 나도 뭐든 시기가 있는 법이다. 육성소에 남아 있어야 하는 것도, 크라운 로드를 다시 오르는 것도 전부 그 시기를 위해서다."

본인이 했던 말을 내가 그대로 인용하자 그녀는 또다시 웃음소리를 내었다.

"그렇네. 당신이 나를 왜 싫어하는지 조금은 알 거 같아."

그러곤 마치 무언가 눈치챘다는 듯 그녀의 눈가가 휘었다.

"당신은 나랑 닮았네. 겉으로는 사람을 믿는 척하지만, 깊이 파 보면 전혀 그렇지 않아."

이자벨라의 양손이 조심스레 내 목을 감쌌다.

마치 금방이라도 내 품에 안길 듯 다가선 그녀의 시선을 나는 피하지 않은 채 가만히 내려다보았고, 그녀는 즐거운 양 미소 지었다.

"하지만 천성이 원래 이렇지는 않은 것 같은데, 뭐가 당신을 이렇게 만들어 버린 걸까? 그리고 그 이상함 때문에 자꾸 당신에게 관심이 가는 이유는 또 뭐고. 버려진 강아지를 못 지나치는 감정이 나한테 남아 있을 거라곤 생각 안 하는데 말이야."

"사람한테 버려진 강아지 취급하지 마라."

"나도 이상해서 그래. 살아오면서 여러 사람을 봐 왔지만 이런 건 처음이니까. 당신에게 관심이 가는 건 호기심일까, 혹은 다른 걸까?"

나는 내 목을 감쌌던 이자벨라의 손을 잡아 내렸다.

그러곤 그녀를 옆으로 밀친 뒤 다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런 나를 보고 이자벨라는 고혹적인 웃음을 짓더니, 더 이상 장난치지 않고 내 뒤를 따라 걸어올 뿐이었다.

이후 그녀와 헤어져 육성소로 돌아온 나는 방으로 돌아와선 침대에 털썩 앉았다.

짜증스러운 감각이 몸에 가득 차 머리를 천천히 쓸어 올린 나는 침대 벽에 기댄 채 기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이자벨라가 하는 행동을 곧바로 뿌려 치지 못하는 것을 보고, 얼마나 내가 지금 이 층에서 흔들리고 있는지 눈치챘기 때문이다.

"...빨리 끝내라. 안 그러면 층을 부숴 버릴 거야."

혼잣말을 중얼거려 보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지금까지 중에서 이 층이 가장 힘든 층일지도 모르겠다고.

122화

다음 날, 아침 점호를 마친 나는 어제 육성소 인원의 상당수가 11층에 갔는지라 한적한 아침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애초에 내가 이제 와서 수련한들 달라질 건 없었기에 체력 단련을 건성으로 치르며 오전을 끝낸 뒤, 쉴 수 있는 벤치에 앉아 가만히 운동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층의 클리어 목적은 결국 뭐지.'

어젯밤부터 줄곧 고민하고 있던 것을 떠올리며 나는 생각에 잠겼다.

층의 클리어는 항상 이야기를 어떤 식으로 마무리 짓는가가 가장 핵심이었다.

그러나 지금 진행되고 있는 것은 과거를 다시 겪는 상황뿐이니, 층을 클리어할 열쇠를 전혀 찾을 수 없었다.

'이야기의 마무리, 이 시점에서 이야기의 마무리라고 할 만한 게 있나?'

그나마 큰 건이라면 등불지기를 전부 해치우는 것 정도일까.

혹은 내가 눈뜬 시점에서 제일 먼저 만난 이자벨라와 관련된 일을 해결한다거나.

'그 녀석과 관련된 일이라고 해 봤자....'

이 당시의 나는 이자벨라와는 그리 친하지는 않았기에 그녀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자벨라와 내 관계의 접점은 육성소라는 것밖에 없었으니까.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해?"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 달까.

어느새 내 옆자리에 앉은 이자벨라는 들고 온 샌드위치를 오물거리며 물었다.

그런 이자벨라를 잠시 바라보던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가 곧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이 층을 어떻게든 빨리 클리어해야 하니 언제까지 이 녀석에게 짜증만 부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만약 정말로 이자벨라가 이야기의 중심이라면 어찌 되었든 이 녀석을 위주로 이야기를 진행해야만 하겠지.

"...너 요새 신경 쓰이는 거 있냐?"

"그런 걸 당신이 물을 줄은 몰랐는데."

의외라는 듯 이자벨라가 반응하자, 나는 짜증 내려다가 삭이곤 다시 물었다.

"그냥 말해."

"신경 쓰이는 사람은 있는데."

"나 말고."

"눈치 빠르네."

그래도 나름 내 물음에 진지하게 생각해 주는 듯 이자벨라는 샌드위치를 든 채로 가만히 생각하는 시늉을 했다.

"그래도 역시 없지는 않지. 등불지기 건이라든가, 랭커들과의 일이라든가 여러 가지 있거든. 10.5층은 문제가 많은 층이기도 하고."

"랭커들과의 일이라고?"

"들어 볼래? 남들한테는 안 해 준 이야기인데."

"그걸 만난 지 며칠도 안 된 나한테 해 주겠다고."

"당신이라면 왠지 괜찮을 것 같거든."

나라면 괜찮다고?

인간 불신 말기인 그녀가 그리 말하자 오히려 더 의심이 갔다.

"내가 네 고민을 해결해 주기를 바라고 일부러 던져 보는 거냐? 난 네 고민 해결사가 아니야."

내 말을 듣고 이자벨라는 웃음을 흘렸다.

"맞아. 가능하면 해결해 줬으면 해. 나, 현 랭커들이랑 사이가 그다지 좋지 못하거든."

이건 또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내가 그녀를 빤히 바라보고 있자 백금색 머리카락을 매만지던 이자벨라는 하늘 쪽을 응시하였다.

"최전선을 달려야 하는 사람끼리는 믿음이 중요하다고 하잖아. 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사람을 잘 믿지 못하거든. 그래서인지 나한테는 다들 등을 못 맡기겠다고 하더라고. 그것 때문에 자연히 서로의 사이가 소홀해지고 멀어지니 어쩌겠어. 내 힘으로는 크라운 로드를 혼자 오를 수 없으니, 결국 내 쪽에서 먼저 포기했지."

그런 말을 하면서 이자벨라는 자신이 누군가를 못 믿는다는 것에 대해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다는 반응이었다.

오히려 덤덤하게 늘 있었던 일이라는 양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다시 샌드위치를 들어 오물거렸으니까.

이자벨라는 상처 입지 않는다.

그 누구도 처음부터 믿지 않았으니까 상처받을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후위로 내려와 층을 클리어할 사람들을 새롭게 육성해 보고 있지. 겉으로는 내가 크라운 로드를 클리어할 사명을 가지고 육성소를 차린 것처럼 굴고 있지만, 실상은 이래. 어때? 이거라면 당신도 모르는 이야기였을까?"

내가 자신에 대해 많은 걸 아는 듯 굴었기 때문일까, 그러면서 이자벨라는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손을 들어 이자벨라의 입가에 묻은 샌드위치 소스를 닦아 주다가 멈칫하였다.

제멋대로 손이 먼저 움직여 버리다니.

내 행동에 놀란 건지 동그랗게 눈을 뜨던 이자벨라는 곧 웃음을 지었다.

"친절하네. 고마워."

"시끄러워."

소스를 닦은 손가락을 감싸 쥔 나는 혀를 차곤 시선을 돌렸다.

이 여자가 일부러 고독하게 살아가는 걸 자초하는 것은 이미 옆에서 질리도록 봐 왔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왜 이 여자가 인간 불신 주의가 되었는지도 나는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걸 알고 있기에 더더욱 그녀와 비슷한 상황을 겪었던 나라면....

입술이 꽉 깨물어졌다.

괜한 생각이 또다시 머리를 비집고 들어왔다.

내 손으로 죽인 이 여자한테 왜 또 이딴 감정을 느껴야 하는지를 모르겠다.

"그래서 결론은 랭커들을 내가 다 죽여 주면 되는 거냐? 널 못 믿는 녀석들이 앞에 있으면 불안하니까?"

"나쁘지는 않네. 나도 내팽개쳐졌다는 것에 복수심은 있으니까."

거짓말이다.

이 여자에게 그런 복수심 따위 조금도 없었으니까.

꺄륵 웃고 있는 지금 내게 보이는 저 미소마저 전부 거짓이라는 것에 또 멋대로 가슴이 술렁거렸다.

"그래도 딱 한 명 랭커 중에서도 아직 나랑 친한 사람이 있긴 해."

그게 누군지 짜증 나게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 사람이 이번 일을 도와주기로 했었는데, 아무래도 하천성 당신이 나타났으니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아."

묻고 싶었다.

그 녀석이 대체 너에게 무슨 짓을 했길래 네가 그딴 선택을 한 거냐고.

그러나 나는 억지로 그 말을 집어삼키곤 다른 말을 내뱉었다.

"이자벨라, 넌 정말 크라운 로드를 클리어하고 싶은 거냐?"

내 물음을 듣고 이자벨라는 나를 돌아보았다.

마치 그 물음의 의미가 무엇이냐는 듯.

뜸 들이듯 잠깐 침묵을 고수하던 그녀는 얼마간의 정적 후 대답해 주었다.

"하고 싶다고 생각해. 영원히 지속되는 굴레는 사람을 조금씩 피폐하게 만들거든. 크라운 로드에서 10회차를 넘긴 사람이 거의 없는 이유도 그런 거고. 나도 언젠가는 그렇게 망가질 거로 생각하니, 그전에 최대한 빨리 클리어하고픈 마음이긴 하네."

"나라면 클리어할 수 있다."

나는 확신에 찬 말을 내뱉었다.

이자벨라가 처음 내게 그런 말을 내뱉었듯이 나는 크라운 로드를 클리어할 것이다.

5년 안에 100층을 모두 오르고 천상이란 녀석에게 한 대 쥐어박아 줄 것이다.

그 대답을 듣고 이자벨라는 나를 바라보다가 옅게 웃음 지었다.

"그러네. 당신이라면 가능할지도 몰라."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건 내 힘 때문이냐?"

수없이 많은 랭커들을 봐 온 이자벨라는 내 비이상적인 힘 정도야 진작 눈치챘을 것이다.

그러나 내 말을 듣고 그녀는 고개를 좌우로 천천히 저었다.

"힘이라면 지금까지 있던 랭커들도 가지고 있었어. 수많은 클래스와 성좌들의 지목, 뛰어난 스텟, 랭커들이라면 다들 하나씩 가지고 있는 덕목이었지. 하천성 당신 말대로 그건 크라운 로드를 클리어하기 위한 필수 조건이 맞긴 하지만 그건 결국 밑바탕일 뿐이야."

"넌 날 처음 봤을 때도 나라면 크라운 로드를 제일 먼저 클리어할 수 있다고 말했었지."

과거 이자벨라와 내가 정말로 처음 만났을 때도 그녀는 내게 똑같이 말했다.

나라면 크라운 로드를 제일 먼저 클리어할 수 있을 거라고.

그때의 나는 그걸 육성소로 끌어들이기 위한 형식적인 말로 치부했지만, 다시금 그 말을 듣고 나니 다른 의미로 해석되었다.

"넌 나에게서 대체 무엇을 본 거냐?"

"아무것도."

그녀는 태연하게 말을 내뱉었다.

"딱히 아무것도 본 게 없어. 나도 내가 그런 말을 내뱉을 거라곤 생각 못 했거든. 그냥 당신을 보자마자 든 생각일 뿐이야. 왠지 그렇게 될 거 같다는 느낌이라면, 느낌이었겠지."

"네가 느낌만으로 그런 말을 했다고?"

"왜? 성좌의 간섭이라도 있었을 거 같아?"

그 물음에 나는 침묵했다.

차라리 그랬다면 좋았겠지.

모든 게 성좌의 의도라고, 탓이라도 할 수 있었을 테니까.

"됐다. 쓸데없는 물음이었어."

더 이상 이야기할 가치를 못 느낀 나는 이건 이쯤에서 대화를 끝내기로 했다.

"아, 참고로 어제 일 이후로 등불지기 쪽이 난리가 났어. 등불지기 사이에서 죽은 사람이 나온 건 처음이었으니까. 범인을 찾겠다며 길길이 날뛰더라고."

등불지기 녀석들이 이자벨라에게 첩자를 심어 놓았듯 이자벨라 쪽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그녀는 등불지기의 모든 정보를 파악하고 있었다.

"그렇담 등불지기 쪽에 내 가짜 정보를 만들어 흘려. 그 녀석들이 나를 노리도록."

"미끼 역할을 해 주게?"

"어차피 너도 빌미가 필요하잖아. 적당히 내가 등불지기 녀석들을 죽여 놓을 테니, 넌 경찰로서 살인을 막기 위해 등불지기들을 지키고자 나를 잡으러 온 거로 꾸며 내면 녀석들의 본부에 들어갈 명분은 충분할 거고. 그 뒤는 알아서 해."

"기왕 도와주는 거 파격 서비스라, 이거야?"

"내가 의심스러우면 다 정리할 때까지 기다려도 상관없다. 나도 등불지기 녀석들을 쳐야 할 이유가 있으니까."

혹시나 그게 층의 클리어 조건이라면 필요한 일이었다.

내 대답을 듣고 이자벨라는 자기 입장에서 전혀 나쁠 것 없는 이야기였기에 좋다는 양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한 대로 가짜 정보를 준비해 줄게. 하루 정도면 충분할 거야. 그렇게 되면 당신이 육성소에 남아 있을 시간도 하루밖에 없겠네. 기껏 데려왔더니, 이렇게 빨리 품을 떠날 거라곤 생각도 못 했어."

"네 품에 들어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니 헛소리 마."

"내 품은 꽤 부드러울 거라 생각하는데."

더 이상 헛소리를 들어 줄 생각이 없었던 나는 이자벨라를 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나를 이자벨라는 재미난 듯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녀의 시선을 무시한 채 걸음을 뗐다.

그리고 이내 나는 근처에서 느껴진 인기척에 입을 열었다.

"호검, 언제까지 지켜보고 있을 생각이냐."

자기 나름대로 인기척을 지우고 있었건만 내가 손쉽게 알아차리자 그가 혀를 차며 모습을 드러내었다.

호검, 리네오르만.

첫날 보았던 이자벨라의 직속인 그는, 내가 그녀와 처음 만난 이후 줄곧 나를 감시하고 있었다.

"내 스토커라도 되냐?"

"난 이자벨라 님의 수족이다. 네가 이자벨라 님께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는 이상 지켜봐야 할 의무가 있다."

"그래서 내가 무슨 짓을 저질렀냐?"

"수상한 짓은 잔뜩 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내가 별다른 부정을 하지 않고 있자 리네오르만의 눈빛이 날카로워지기 시작했다.

"무슨 목적으로 이자벨라 님 곁에 접근한 거냐?"

"내가 먼저 접근한 거로 보여? 접근한 건 그 여자였어."

나와 이자벨라의 첫 만남을 모르는 그이기에 내가 진실을 말해 주었으나, 리네오르만은 전혀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이 자식도 이자벨라 만큼이나 남을 잘 믿는 성격이 아니니, 그 주인에 그 수족이었다.

"네가 등불지기를 습격할 때의 과정도 지켜보았다. 내 눈에 넌 육성소에 들어 올 이유가 전혀 없다. 심지어 이자벨라 님 곁에 남을 이유조차 없었고."

나야 층의 클리어를 위해서였지만, 내가 이만한 힘을 가지고도 이자벨라에게 접근한 것은 그러한 사실을 모르는 리네오르만에게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인 듯하였다.

"마음대로 생각해. 내가 무엇을 말하든 넌 믿지도 않을 테니까. 이자벨라 녀석이랑은 그냥 악연일 뿐이야. 그리고 난 그런 이자벨라 녀석이랑 거래했을 뿐이다."

내가 굳이 리네오르만을 설득할 이유도 없었기에 나는 손을 흔들며 지나가려 했다.

"거래? 웃기지 마라. 이자벨라 님은 너 따위 절대로 믿지 않는다. 그리고 너 또한 이자벨라 님을 전혀 신용하고 있지 않을 텐데 그게 어떻게 거래냐."

그 말을 듣고 나는 멈춰 섰다.

"알아."

123화

그러곤 리네오르만을 돌아본 순간 그는 반사적으로 검을 뽑아 내게 겨누었다.

"안다고."

나를 마주 본 그가 식은땀을 흘리는 것을 보고 나는 순간적으로 뿜어져 나온 오러를 거두어들였다.

내 오러를 느낌과 동시에 주저앉지 않고 검을 뽑은 건 칭찬할 만했다.

"다음부터 내 앞에서 검 뽑지 마라. 뽑는 즉시 죽일 거다."

그러나 지금의 내 입장에서는 오히려 짜증을 불러일으키는 행동이었기에, 조언을 해 준 나는 다시금 걸음을 옮겼다.

* * *

다음 날, 정보를 준비한 이자벨라가 내가 육성소를 떠나 있을 장소를 마련해 주었다.

정보의 내용은 간단했다.

10.5층을 거의 장악한 등불지기이긴 하지만, 워낙 원한 살 일이 많았기에 그들을 죽이고 싶어 하는 자들이 상당수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그런 원한을 가진 자들에게 고용되어 등불지기를 전부 죽이려 한다는 내용의 정보였다.

듣기에는 허술하기 그지없는 정보였지만, 등불지기 한 명이 이미 죽임을 당했다.

그것도 정면으로 뚫고 들어와서 완전히 개 박살을 낸 것이다.

그렇기에 등불지기들은 그 정보들 듣자마자 자신들의 목숨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발등의 불 떨어진 양 움직였다.

"첫날부터 난리네."

이자벨라가 마련해준 여관방 안에 들어서자마자 검 한 자루가 목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러나 나는 피하지 않고 오러를 일으켜 목을 보호했고, 그 순간 내 목에 날아든 검은 오히려 뽀각 하고 부서져 버렸다.

당황한 암살자와 눈이 맞은 나는 씨익 하니 웃었고, 그는 기겁하며 내게서 물러서고자 했지만 이미 늦었다.

머리를 쥐어 잡아 여관 바닥의 내리꽂은 나는 기절한 녀석을 창문 밖에 내던진 뒤, 손을 털곤 낡은 침대에 털썩 앉았다.

오늘 여관에 오는 길에만 암살을 당할 뻔한 것이 벌써 3번째.

등불지기는 총 5명이니, 죽은 한 명을 제하면 이 녀석이 등불지기가 보낸 마지막 암살자일 것이다.

'아주 나에 대한 걸 적극적으로 퍼트려 놨구만.'

내가 시키긴 했지만, 기분 나쁠 정도로 내 정보를 확실히 팔아 준 이자벨라를 떠올리며 혀를 찼다.

나야 바라던 바다.

등불지기를 쓰러트리는 것이 층의 클리어 조건이 맞는 건지 확신은 할 수 없지만, 이렇게라도 움직여야 조금씩 단서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내 기억을 토대로 짜인 층에서 단서 찾기라니 나 원.'

물론 완벽히 내 기억은 아닌 것 같았다.

당시 육성소 안에서만 생활할 정도로 약했던 나인만큼 등불지기의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진 않았다.

내가 알고 있는 등불지기는 미카벨라의 지시 아래 경찰들과 함께 공격을 감행했던 리우 옌, 한 명 뿐.

나머지 4명은 이름조차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나는 곧 등불지기를 만나러 가게 될 터.

그렇담 내 기억에도 없는 등불지기가 그곳에 있게 된다는 소리다.

'내 기억을 토대로 성좌 녀석이 재구성했거나 혹은 과거를 그대로 가져 왔을 수도 있겠네.'

성좌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들은 인간의 범주로 생각하면 안 되며, 얼마든지 과거에 있었던 일을 그대로 재현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여기는 성좌 녀석이 만들어낸 층이란 말이지.'

그리 생각하니 한결 마음이 편해지기 시작했다.

이자벨라 녀석의 얼굴을 보지 않아도 된다는 게 이토록 마음 편한 일이었을 줄이야.

휘파람을 불며 여관 창문에 기댄 순간 나는 창문 아래쪽 골목길에 서 있는 한 남성과 눈이 마주쳤다.

녀석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흠칫하며 몸을 돌려 골목길로 사라졌고, 그런 그를 보고 있던 나는 천천히 고개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어라, 잠깐만.'

이 시점에 그 녀석이 10.5층에 있었나?

'그 녀석 분명 이번 회차에 들어온 게 맞긴 한데.'

내 기억을 토대로 만들어진 층이 아니라, 그걸 제멋대로 해석해서 만든 건가?

여러 의문을 느끼면서도 나는 이미 난간에 발을 걸치고 있었다.

그 즉시 난간을 박찬 나는 주변 건물 옥상에 착지했고, 곧바로 나와 눈이 마주쳤던 남성을 쫓기 시작했다.

오러를 전방위에 펼치며 본격적으로 쫓자 나는 금세 남성을 발견했고, 한발 앞서 뛰어간 뒤 남성이 골목길에서 빠져나가기 직전 그 앞에 뛰어내렸다.

"으악!?"

내가 갑작스레 나타나자 비명을 지른 남성이 엉덩방아를 내려찍었다.

그에 따라 곱슬한 붉은색 머리카락이 한 차례 흩날리고, 머리카락 아래로 얼굴이 드러났다.

크라운 로드 역사상 최초로 90층 이상에 도달한 자.

모든 랭커들과 참가자들을 휘어잡고, 크라운 로드를 클리어해 주리라는 믿음을 주었던 자.

황제가 이곳에 있었다.

황제는 언제나 대담했고 강했으며 자신감 넘치던 인물이었다.

어떤 역경이 오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맞서는 것이야말로 그의 모습이었으니까.

하지만 내 기억 속의 황제와 달리 그는 나를 보고 짐짓 두려운 듯 몸을 떨고 있었다.

'분명히 황제가 맞는데.'

나도 최전선을 달렸기에 안다.

이 얼굴과 목소리는 확실하게 황제가 맞다.

'내 기억을 재해석한 건지 과거를 그대로 가져온 건지 확신할 수가 없으니, 나 원.'

머리를 긁적인 나는 도망치려는 듯 몸을 뒤로 빼는 황제의 목을 틀어잡았다.

"으아아! 기, 기다려 주세요! 전 그냥 당신의 뒤를 밟으면 돈을 준다고 해서 그랬을 뿐이에요! 해치거나 그럴 마음은 전혀 없어요!"

꼴사납게 비명을 내지르는 황제를 보고 나는 볼을 긁적였다.

황제 녀석이 남한테 돈을 받고 뒤쫓는 짓을 할 녀석인가.

물론 최전선을 달렸던 나라고 해서 과거의 그를 완전히 아는 건 아니긴 했으니.

'검왕 녀석이었으면 알았으려나.'

황제 친위대 소속이었던 검왕이니, 황제에 대해 가장 잘 알지도 몰랐다.

내가 홀로 크라운 로드를 계속 오르는 이상 앞으로 만날 기회가 있을 것 같지 않지만, 기회가 있다면 나중에 물어보고 싶었다.

"어이."

"예, 예!"

내가 부르자 황제는 차렷 자세로 내게 외쳤다.

여전히 목덜미가 잡힌 그는 아까 전 내가 암살자를 해치워 창문 밖으로 던지는 걸 보곤 내게 상당히 겁먹은 모양이었다.

"너 이름은."

"데, 데이미언 앤드류입니다."

"지명은."

"아직 50레벨이 아니라서...."

이름은 황제가 맞지만, 지명도 받기 전이라 이건가.

확실히 2회차 당시 황제의 이름은 어디에서도 거론되지 않았었다.

그가 본격적으로 황제로서 이름을 떨치기 시작한 것은 3회차 때였으니까.

'몇 년 만에 이 모습에서 거기까지 성장했단 건가?'

다음 회차에서 이전과 다르게 완전히 모습이 바뀌는 경우는 딱 한 가지 방법이 있다.

그건 바로 S급 클래스 얻는 방법을 알게 되는 것.

실제로 참가자들 중에 갑자기 랭커로 부상하는 녀석들 대부분이 S급 클래스를 얻고 나서 강해진 것이다.

모든 랭커들을 누르고 1위가 되었던 황제가 S급 클래스를 가진 것은 당연지사.

그러나 지금까지도 그가 무슨 S급 클래스를 가지고 있던 건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혹시 이게 정말로 과거를 그대로 가져온 거라면.'

나는 황제를 빤히 바라보았다.

황제는 결국 야신의 손에 죽임을 당했다.

하지만 그것은 먼 훗날의 이야기.

이 층에서만큼은 황제는 살아 있고, 아직 지명도 받지 않은 생초보다.

그렇담 이 녀석을 쭉 따라간다면 황제가 가졌던 S급 클래스를 얻을 방법도 알아낼 수 있지 않을까?

내 눈이 한순간 번뜩였지만, 이내 뒷머리를 긁적였다.

크라운 로드의 기간은 날이 가면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이 층은 크라운 로드와 똑같이 시간이 흐르고 있으니 황제가 언제 S급 클래스를 얻는지도 모르는 마당에 언제까지고 이곳에서 머물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기회라는 생각은 들지만.'

기약 없는 일을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다.

"너 따라와."

"죄, 죄송합니다! 목숨만은 살려 주세요!"

"안 죽여. 안 죽일 테니까. 따라와라. 오히려 안 따라오면 죽인다."

그래도 혹시나 모르니까 나는 이 층에 머물고 있을 때만큼은 황제를 곁에 두기로 하였다.

그런 걸 알 리 없는 황제가 울상을 지은 채 내 뒤를 따라왔다.

그렇게 여관방으로 돌아온 나는 그에게 몇 가지 물어보기로 하였다.

"너 클래스는 뭘 가지고 있냐?"

"아, 그게 C급 하나랑... 나머지는 E급, F급인데요."

역시 이 당시 황제는 별 볼 일 없나.

그걸 떠나 클래스는 본래 남에게 말하지 않는 게 원칙인데 쉽게 대답하는 걸 보니, 정말로 별 볼 일 없는 클래스뿐인 모양이다.

"클래스 이름은 뭔데?"

"C급은 재생 강화, E급은 언제든지 시간 확인, F급은 신체 강화인데요."

재생 강화는 공격을 당해도 웬만한 상처는 회복할 수 있으니, 유용하긴 하지만 나머지는 정말 말 그대로 있으나 마나 한 클래스였다.

"등불지기 녀석들한테 돈은 얼마나 받았냐?"

"등불지기요? 전 그냥 평소에 지내던 하숙집 사장님이 싸게 벌 수 있는 일이 있다고 해서 온 건데... 설마 등불지기와 관련 있으신 거예요?"

자신에게 누가 일을 시킨 지도 모르는 말단 중에 말단이라 이건가.

완전히 버리는 카드인 그를 보고 나는 기다랗게 한숨을 내쉬었다.

"됐다. 넌 그냥 저기 가서 앉아 있어."

"아, 네에."

풀이 죽은 듯 대답한 황제는 내가 가리킨 의자에 얌전히 앉았다.

아까보다 덜 당황하는 걸 보니 내가 자신을 죽이지는 않을 거란 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그렇게 나는 황제에게 가끔씩 시답지 않은 걸 물으며 시간을 보내었다.

어느새 밖이 새빨갛게 노을로 물들어 가고 황제 녀석도 어느새 나에게 익숙해졌는지 이것저것 물어봤지만, 나는 전부 건성으로 대답할 뿐이었다.

'암살자를 계속 보낼 거로 생각했는데 의외로 조용히 있는군.'

가로등의 불이 하나둘씩 켜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순간 느껴진 기척에 황제를 두고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문을 덜컥 열었고, 그러자 그 앞에 자그마한 키의 남성이 한 명 서 있는 게 보였다.

"안녕하십니까."

"등불지기 녀석들이 보냈냐?"

"맞습니다. 그분들께서 당신과 거래를 하고자 합니다. 직접 만나 뵙고 싶다고 하시니 따라오시겠습니까?"

암살자를 보냈지만 일이 해결되기는커녕, 된통 당해 돌아왔다.

그러니 그다음 할 행동은 뻔한 것이었다.

나와 직접 마주하고 거래를 제안하거나 혹은 나를 데리고 가 함정에 빠트릴 속셈이겠지.

"그래, 가자고."

하나 내 입장에서는 뭐가 되든 상관없었기에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그러면서 내 방에 있던 황제 녀석을 가리켰다.

"따라올 녀석이 한 명 더 있는데 괜찮나."

"어, 하, 하천성님 전 따라가고 싶지 않은데요."

"상관없습니다."

"제 의사는 대체 어디에 있는 건가요?"

허망한 표정을 짓는 황제.

이내 나는 녀석과 함께 곧바로 남성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황제는 '난 끝이야'라고 계속해서 중얼거렸고, 듣기 짜증 났던 나는 참다 못해 녀석의 머리를 한 대 내려쳤다.

"멍청아. 여기에 혼자 있으면 오히려 죽는 건 너야. 등불지기 녀석들이 네가 나랑 같은 방에 쭉 있는 걸 봤는데, 나에 대해서 알아내고 싶어서라도 널 납치하려 할 게 뻔하잖아. 차라리 내 곁에 있는 게 더 안전해."

"어서 가시죠."

내가 데려가는 이유를 가르쳐 주자마자 황제는 나보다 앞장서서 남성을 열심히 뒤따라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니 랭커의 소질은 얼굴에 철판을 잘 까는 사람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124화

그렇게 얼마 동안 남성의 뒤를 쭉 따라갔을까, 그는 골목 몇 번을 오가곤 한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이후, 조금 더 걸으니 단단한 철문 앞에 도착했다.

그가 잠긴 문을 열고자 몇 개의 자물쇠를 열었고, 사내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서자 그곳에는 테이블 하나와 의자가 놓여 있었다.

테이블에는 한 노신사가 앉아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고, 나는 유일하게 전등이 켜져 있는 그곳으로 가서 의자를 빼 착석했다.

황제도 나를 따라 슬쩍 동석하자, 노신사는 내게 인자한 미소를 짓곤 자신을 소개했다.

"반갑네. 나는 등불지기 중 한 명 곤살레스 아라냐라고 하네."

"하천성이다."

"이름은 들었네. 우리 때문에 곤란한 사람에게 암살 의뢰를 받았다지."

가짜 정보의 내용은 그런 설정이었기에 적당히 그렇다는 투로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안타까운 미소를 머금었다.

"미안하네. 우리는 늘 여러 사람에게 폐를 끼치고 있지. 그들 모두한테 일일이 사과하지 못하겠지만, 그 사람에게만은 사죄하고 싶네. 소개를 해 줄 수 있겠나?"

"가해자를 피해자한테 소개해 주는 머저리가 어디 있냐? 그리고 폐를 끼치는 줄 알면 등불 판매를 그만두던가."

"그건 힘드네. 10.5층에는 등불을 원하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아. 수요가 있는 이상, 우리가 손을 뗀다 한들 결국에는 다른 사람이 손을 댈걸세. 게다가 중독자 중에는 실력자들도 꽤 있네. 우리가 공급을 중단했을 때, 이를 이유로 죽이려 들 텐데 어찌 멈추겠는가."

"같잖은 핑계는 그만해라. 한 층을 쥐락펴락하고 있으니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지? 너희는 그냥 욕심부리고 있을 뿐이야."

그 말을 하며 나는 도발적으로 탁자 위를 툭툭 두드리기 시작했다.

"내가 아는 녀석 중에 해독 스킬을 가지고 있는 녀석이 등불 중독을 치료할 수 있어. 수요는 내가 없애 줄 테니, 공급을 그만둘 거냐?"

"해독이라. 하핫, 그것참 의미 없는 소리군. 등불은 독이 아닐세. 어느 누가 미쳤다고 독이 좋아서 하겠나."

박장대소를 터트린 아라냐는 탁자 위에 마치 불타 버린 잿더미와 같은 등불 한 봉투를 내려놓았다.

"이건 마약이야. 나는 멕시코에 있을 때도 마약을 판매하던 조직에 있었네. 중독이 아니야. 그들은 자신들이 좋아서 못 끊는걸세. 아무래도 자네는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을 잘 모르는 모양이군. 마약은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최고의 쾌락이야. 쾌락에 한없이 약한 인간이 중독을 치료한다고 해서 다시는 안 할 거 같나?"

"그래, 맞아. 그 말대로야."

나는 부정하지 않았다.

10.5층에 발이 묶여 버린 녀석들은 전부 앞으로 나아가기를 포기한 녀석들이다.

누구보다 순간의 쾌락에 집중하는 녀석들은 고쳐 써 봤자 의미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짜증 나게도 이자벨라 그 여자는 절대 그렇게 생각 안 한다는 점이다.

녀석은 제 손으로 수없이 많은 사람을 고쳐 최전선으로 보냈다.

정작 자기 자신이 망가지고 있단 것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런데 그게 어쨌다고. 사실 난 등불을 해서 중독당하고 어쩌고 하는 놈들은 다 신경 쓰지 않아. 그냥 내가 마음에 안 드니까, 너희를 다 쳐 죽일 뿐이야."

"다 죽여서 뭐 하겠는가. 그거야말로 의미 없지 않나?"

"나는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 뭔지 모르는 사람이라고, 네가 말했지."

내 몸에서 오러가 스멀스멀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가까이 있던 황제가 제일 먼저 예민하게 반응하며 의자를 뒤로 뺐고, 나는 눈앞에 아라냐에게 비릿한 미소를 지어 주었다.

"크라운 로드만큼 세상을 다 가진 느낌을 느낄 수 있는 곳이 어디 있다고 생각하느냐."

"처음부터 우리와 거래 할 마음이 없었군."

"그래, 너도 나랑 그럴 마음이 없었잖아?"

그 순간 주위 불이 모두 켜졌다.

그러자 정장 차림을 한 천 명 가까이 되는 자들이 2층 건물을 꽉 채우고 있는 게 보였고, 그들은 이내 각자 무기를 꺼내 들었다.

"으, 아, 하천성님."

흉악한 분위기가 흐르자 황제가 오들오들 떨며 나를 불렀다.

"암살자를 상대로는 손쉽게 해낸 모양이다만, 이 인원을 상대로도 가능하겠나?"

불이 켜지고 나서 내가 침묵을 고수하고 있자, 아라냐는 내가 겁먹은 것이라 판단한 건지 회심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런 그를 보고 나는 머리를 잠깐 긁적였다가, 용천성의 호포를 꺼내 들었다.

내가 움직이자마자 주위 인원들이 반응하며 칼을 빼 들었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옆에 있던 황제에게 용천성의 용포를 던져 둔 뒤 아라냐에게 말했다.

"내가 조용히 있었던 건 이것들 때문이 아니야. 등신아."

쿠웅, 바닥을 박찬 소리와 함께 내 몸이 포탄처럼 쏘아졌다.

그러자 나와 바로 앞에 마주한 녀석이 팔을 교차해 내 주먹을 막았고, 그와 동시에 튕겨 날아가 벽을 부수고 처박혔다.

자욱한 연기가 피어났다.

내 움직임을 전혀 보지 못한 나머지 녀석들이 흠칫하며 뒤늦게 칼을 휘둘렀지만, 나는 별천도를 들어 칼째로 그 녀석들을 베었다.

핏물과 함께 나뒹구는 시체 사이로 연기가 거치기 시작했다.

연기 속에서 뼈가 부러진 듯 너덜거리는 두 팔을 원래대로 되돌린 남성을 보고 나는 어이없이 웃었다.

"야신, 이 쓰레기 새끼 너도 이때 여기 있었단 말이지."

전신에 한 나무 모양의 문신, 기다란 흑발과, 감긴 눈꺼풀에 가려 보이지 않는 눈.

황제가 크라운 로드를 클리어할 수 있을 때, 모든 걸 망친 녀석이 과거에 여기에 있었다니.

황제에 이어 야신까지.

무슨 정모하는 것도 아니고 기가 찰 노릇이다.

"뭣 하냐! 전부 공격해!"

나를 보고 아랴냐가 소리치자, 잠시 멈칫했던 떨거지들이 다시금 몰려오기 시작했다.

"가만히 있어라."

그러나 내가 전 방위로 오러를 풀자 그 압박을 견디지 못한 녀석들이 목을 부여잡고 바닥을 나뒹굴었다.

나에게 다가오던 자들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뒷걸음질 치자, 나는 녀석들을 두고 연기를 해치며 야신의 앞으로 다가왔다.

다른 이들과 같이 정장 차림인 그는 나를 보곤 손을 들어 제지했다.

"기다려라. 난 네 적이 아니다."

"그래, 네놈은 이자벨라의 부탁으로 왔겠지."

이자벨라 그 여자가 랭커 중 유일하게 아직도 친분을 유지하고 있는 녀석이 바로 이 녀석이었으니까.

아는 랭커에게 이번 일을 도와달라고 말해 놨다고 했었으니, 그 부탁을 들어주려 최전선에 있던 녀석이 10.5층에 내려온 것이다.

"그걸 안다면 왜 나를 공격하지? 그리고 네 힘은 비정상적이군. 웬만한 랭커들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한 대 얻어맞아 보니 내 힘이 이상할 정도로 강하다는 걸 깨달은 야신은 의심스럽게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녀석이 의문을 제기하는 동안에도 나는 별천도를 들어 올릴 뿐이었다.

"여긴 결국 층일 뿐이니까 내가 사라지면 전부 의미 없게 되겠지만."

별천도로 서서히 전속성의 오러가 모여들기 시작하고, 그에 위험함을 느낀 야신이 반사적으로 어둠 속성의 오러를 끌어 올렸다.

그러나 나에 비하면 한없이 미약한 그 오러로 이 공격을 막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이때의 야신은 모든 공격을 그대로 통과시키는 해괴한 클래스를 가지지 않은 모양이니까.

"널 죽이면 이 층에서나마 위안 삼을 수 있을 것 같네."

콰앙!

내 검에 오러가 다 모인 순간 아래쪽에서 대문이 거칠게 열렸다.

거기에는 경찰과 함께 들이닥친 이자벨라가 서 있었고, 그녀는 아라냐를 향해 무어라 말하려던 순간 이쪽을 바라보았다.

"하천성?"

원래의 계획대로 들어왔던 이자벨라는 야신과 대치 중인 나를 보고 의아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곧 내 검에 담긴 오러가 심상치 않았음을 눈치챘는지 그녀는 빠르게 내 쪽으로 올라왔다.

"기다려. 그 사람은...."

"알아. 이 녀석이 네가 유일하게 아직 친분이 남았다는 그 랭커 놈이잖아."

"알고 있는데 어째서...."

지금 이러고 있냐고 이자벨라가 묻자, 나는 검을 그대로 내려쳤다.

쏟아지는 번개가 주변을 휘감고, 곧 야신의 뒤에 있는 건물의 벽 전체가 무너져 내렸다.

내 검격에 반응조차 못 한 야신이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동안 이자벨라에게 물었다.

"이자벨라, 넌 저 녀석을 믿냐."

"내가 사람을 믿지 않는 건 당신도 잘 알잖아."

잘 안다.

잘 알아서 짜증 나는 거다.

이 여자는 끝까지 누구도 믿지 않았다는 걸, 내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렇담 왜."

그렇다면 끝까지 누구도 믿지를 말던가.

'나는 당신을 믿어.'

죽기 직전 이자벨라가 내뱉던 말이 떠오르자 나는 눈살을 팍 찌푸렸다.

이제 와서 잊었던 일을 다시금 되새기고픈 마음이 없었기에 나는 화를 억지로 삼켰다.

그러곤 야신을 내버려 둔 채 나는 별천도를 허리춤으로 되돌렸다.

"됐다. 소탕이나 마저 해. 저놈을 심문하면 결국 어련히 알아서 털어놓을 테니, 난 그만 빠지겠다."

그 말을 하고 밑으로 내려온 나는 밖으로 걸어 나왔다.

또다시 추적추적 비가 내리기 시작하고 내가 골목길 사이로 걸어가자 용천성의 용포를 뒤집어쓴 황제 녀석은 조심히 내 뒤를 따라왔다.

"아까 그 사람, 이자벨라였죠."

10.5층에 사는 주민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그녀였기에 황제가 조심히 물어왔다.

"굳이 더 안 따라와도 돼."

"그러고 싶어도 아까 하천성님이 직접 말씀하셨잖아요. 일에 연루되어서 제가 표적이 될 수 있으니 하천성님 곁이 가장 안전할 거라고."

확실히 내가 내뱉은 말이긴 했다만.

"이자벨라 녀석 곁에 있으면 안전해."

"그럴 분위기가 아니던데요."

"그럼 내 분위기도 그렇지 않다는 걸 알 텐데?"

내가 황제 녀석을 노려보자, 나와 눈이 마주친 그는 한 차례 볼을 긁적였다.

"그러게요. 묘한 분위기긴 하네요. 그래도 이쪽이 더 안전할 거 같다는 생각은 변함없어요."

그리 말한 황제는 능청스레 내 곁에 다가오더니, 쏟아지는 빗속에서 말했다.

"이대로 비 맞고 계실 건가요? 어때요, 기왕 이렇게 된 거 술이라도 한잔하실래요?"

"싫어."

"겨우 하루 정도 알고 지냈는데, 참 까다로운 사람이네요."

하루 만에 나를 파악했다고 구는 황제를 같잖게 본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계속해서 내리는 비에 하늘을 올려다본 나는 별천도를 뽑았다.

"뭐 하시려고요?"

느닷없이 별천도를 뽑는 나를 황제가 의아하게 볼 동안 나는 오러를 강제로 끌어 올렸다.

내 검을 타고 몰아치는 오러에 흠칫한 황제가 내게서 급히 멀어진 순간 새까맣게 물든 하늘을 꿰뚫고 빛 하나가 내려쳤다.

구식(九式)

낙뢰(落雷)

내려친 낙뢰가 나에게 떨어진 순간 일대가 빛 속에 잠겼다.

그리고 그 빛이 서서히 걷히자 하늘에 보인 것은 먹구름 대신 빼곡히 수놓은 별자리들과 어둠이었다.

이윽고 주위에서 파직하고 스파크가 튀며 공간 일부가 일그러졌다.

상당히 힘을 쏟은 탓에 층의 일부분이 무너져 내린 듯 성좌 쪽에서 급히 복구하는 움직임이 느껴졌다.

조금은 기분이 개운해진 나는 별천도를 넣곤 고개를 뒤로 돌렸다.

그러자 거기에는 넋 나간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는 황제가 있었고, 나는 그런 녀석에게 손짓했다.

"따라와. 술 마실 거니까."

"...사시는 거죠?"

역시 이런 면만큼은 황제인가.

이 정도의 힘을 눈앞에서 보고도 저런 말을 내뱉는 황제를 어이없다는 듯이 본 나는 금 주머니 속에서 금 하나를 꺼냈다.

"이거면 충분하겠지."

"모시겠습니다."

앞장서는 황제를 잠깐 바라보던 나는 녀석의 뒤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는 그냥 아무래도 좋다는 기분으로.

125화

"하하하. 저, 세상이 돌아요."

"그래, 알았으니 그만 쳐 자."

이후 황제 녀석을 데리고 몇 시간이나 술을 마셨을까, 어느새 잔뜩 취한 황제는 내가 빌린 여관방 침대에 누워 헛소리를 내뱉고 있었다.

나도 얼굴이 살짝 붉게 물들어 있긴 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내가 알코올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어서이지 조금만 오러를 일으키면 날아가 버릴 정도로 별것 아닌 취기였다.

'강철민 녀석 몸일 때는 어느 정도 취했었는데.'

사람이 찔리는 즉시 죽을 수 있는 독조차도 통하지 않는 몸이 되어 버린 만큼 술로는 나를 완전히 취하게 할 수 없었다.

살짝 알딸딸한 기분이 들긴 하지만, 그저 기분일 뿐 정말 술에 취해 드러눕는 감각을 나는 더 이상 느낄 수 없겠지.

'아니, 이러나저러나 내가 크라운 로드를 클리어 못 하는 이상 앞으로 몇 년 뒤면 또 초기화다.'

그때가 되면 술이 없어도 드러누울 수 있을 것 같다.

벌써 1년이란 시간이 다 되어가는 지금, 조금은 초조함을 느끼며 나는 기다랗게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한숨을 그렇게 크게 쉬어."

그러던 순간 어느새 내가 팔을 걸치고 있던 창가에 앉은 이자벨라를 볼 수 있었다.

그녀가 접근하는 기척은 진작에 느끼고 있었기에 별로 놀라지도 않은 나는 녀석에게 물었다.

"등불지기는."

"다 잡아들였어. 내일 공표할 건데, 아마 난리가 날 거야. 당분간 등불의 가격이 미친 듯이 치솟겠지."

"그때 팔아 치우면 한몫하겠군."

"아무리 나라도 그런 짓은 안 해. 그래도 등불을 팔겠다고 데리고 와서 그것 대신 해독을 시켜 버리는 건 괜찮을 것 같네."

등불을 사려 했더니, 해독을 당했다 이건가.

이 여자라면 진짜로 하고도 남을 것 같기에 내가 말없이 밖을 보고 있자, 이자벨라가 창문틀을 넘어 안으로 들어왔다.

"술 마셨어?"

"그래."

"당신 정도 되면 안 취하지?"

한때 랭커들과 함께 살아왔던 이자벨라다.

어느 정도 수준에 다다르면 술에 완전히 취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그녀이기에 나는 부정하지 않았다.

"그래도 일부러 취기를 어떻게든 남겨 둔 모양이네."

그리 말한 이자벨라는 내 옆에 다가와 섰다.

또다시 라벤더 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야신은 당신을 모르던 눈치던데. 당신은 그에게 원한이 있어 보였어."

"그 자식은 세상에서 가장 나쁜 놈이거든."

"왜? 사랑하는 사람이 그 사람 손에 죽기라도 했어?"

이자벨라는 고혹적인 미소를 그렸다.

그 미소를 보고 나는 아무런 생각 없이 녀석의 볼에 손을 올렸다.

백금색의 머리카락이 사락 하고 내 손을 타고 흘러내렸다.

달빛을 머금은 이자벨라는 여전히 지독하게 아름다웠고, 이건 참 짜증 나는 일이었다.

"더했나 보네. 사랑하는 사람을 자기 손으로 죽이게 만들기라도 하지 않고선 그런 표정은 못 짓지."

"제멋대로 해석하지 마라."

"그럼 얼굴에 그렇게 읽기 쉽게 생각을 보이지 말아줬으면 해."

취해서 그렇다는 변명조차 못 하는 것에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자 이자벨라는 자신의 손으로 자기 볼에 닿아 있는 내 손을 감쌌다.

따스한 손길에서 느껴지는 체온은 그녀의 메마른 심상에 비해 상당히 따뜻했다.

"당신은 어디서 온 거야? 그리고 왜 이곳에 왔어?"

그녀가 솔직한 물음을 던지자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전히 성좌는 어떠한 개입도 하지 않을 것처럼 계속 방관만 하고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내가 무슨 대답을 하든 신경 쓰지 않겠다는 건가.

"나는 36층을 클리어하기 위해 크라운 로드에서 왔다."

내가 솔직한 대답을 털어놓았으나, 주위에는 어떠한 변화도 없었다.

그저 변화가 생긴 것은 이자벨라의 표정뿐.

나를 한참을 올려다보던 그녀는 곧 작게 조소를 내뱉었다.

"그렇구나. 나는 층의 주민이구나."

내 기억 속에서 그대로 가져온 이자벨라답게 그녀는 내 말 하나로 모든 상황을 유추했다.

그러곤 뭔가 즐겁기라도 한 양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곤 내게 물었다.

"그럼 난 당신의 기억 속에 있을 정도로 가까운 사람인 거네?"

"그랬었다."

"아쉽네. 과거형이라는 건 현재의 난... 그쪽 세상에는 없는 모양이니까."

그리 말하면서도 이자벨라의 눈동자에는 슬픔이라고는 없었다.

그저 어떤 상황이 왔더라도 덤덤히 받아들일 뿐 그녀는 자신의 존재 자체가 부정당했음에도 조금의 동요 따위 하지 않는 여자였다.

"어때? 그 세계는."

"시궁창."

"정말? 참 변함없구나. 역시 내가 한 일은 별로 의미가 없었던 걸까."

아쉬운 듯 웃는 이자벨라를 보고 나는 녀석의 볼에 올렸던 손을 내렸다.

"이전 회차에서 99층까지 올랐어. 저기 자고 있는 녀석과."

"저 애가? 그건 놀랍네."

"하지만 100층에 도전하기 직전, 야신이 배신했다."

"그렇구나. 그 사람답다면, 그 사람 답네."

내가 자신이 모르는 미래 이야기를 해 주고 있음에도 이자벨라는 의심 한 점 없이 가볍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걸 통해 자기가 한 일이 쓸모없는 짓은 아니었다는 것에 조금의 보람을 느끼는 듯하였다.

"당신도 내가 키운 사람이야?"

"그래."

"그리고 난 당신의 손에 죽었고. 맞지?"

정황상으로 눈치챈 이자벨라는 침묵하는 나를 보고 픽 하고 웃음소리를 내었다.

"그렇담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은 나였어?"

"...그래."

장난을 치듯 묻는 그녀의 말에 나는 이제는 됐다는 양 대답했다.

그러자 이자벨라는 고백 같은 말에도 조금의 부끄러움조차 느끼지 않고 내 곁에 한 걸음 더 다가왔다.

"지금은 어때?"

"죽은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긴 하냐."

그 말을 내뱉고 나니 문득 나락 녀석이 떠올랐지만, 이내 나는 끔찍한 녀석을 떠올렸다는 양 급히 잊었다.

"당신의 세계에서는 죽었을지 몰라도 지금의 나는 여기 있는데."

"층을 클리어하면 너도 다 사라질 뿐이야. 신기루를 좇는 것만큼 무의미한 건 없어."

"매정하네. 사랑했다는 사람한테 어떻게 그렇게 말해?"

실망이라는 투로 이자벨라가 말하자, 나는 녀석의 손목을 붙잡곤 벽으로 밀어붙였다.

그러자 이자벨라는 말똥히 뜬 눈으로 올려다보았고, 나는 그런 녀석을 잠깐 내려다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손을 떼었다.

"이제 알겠지. 나도 사람이니 감정의 동요가 없는 건 아니지만, 그 이상은 없어. 이곳이 크라운 로드인 이상 그건 변함없다."

"그런 모양이네."

만약 내가 이곳을 현실로 인식했다면, 이자벨라에게 이다음 무슨 행동을 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 이상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그런 짓을 해 봤자 얼마나 무의미한 행동인지 몸이 잘 깨닫고 있기 때문이었다.

층에서 일어난 일은 그 층에서 마무리 지어야 한다.

그것이 지난 회차 동안 크라운 로드를 오르며 마음속에 확실히 새겨 둔 것이다.

"아쉽게 됐네. 나 당신이랑 크라운 로드를 같이 올라 보고 싶었는데. 그랬다면 아마 나도 당신을 좋아하게 됐겠지."

"대충 나한테 맞춰 주려고 막말하지 마라."

"막말이 아니야."

그리고 순간, 이자벨라는 내 볼을 양손으로 감쌌다.

곧이어 까치발로 서더니, 갑자기 내 입가에 자신의 입술을 맞부딪치곤 새침하게 미소를 지었다.

"난 당신을 처음 봤을 때부터 호감이 있었거든."

내게서 입술을 뗀 이자벨라는 키스는 오랜만이라며 혼자 중얼거렸다.

['오만의 아틀리에'가 배신을 당한 기분이라며 울상을 짓습니다.]

시끄럽게 울고 있는 성좌는 제쳐 두고 나는 이자벨라를 한동안 내려다보았다.

이자벨라가 이런 짓을 하는 이유는, 그녀가 내게 호감이 있어서라기보다는 그저 내 반응이 어떻게 나올지 궁금해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입술에 남은 촉감이 가시기도 전에 내 얼굴은 씁쓸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한때는 정말 미치도록 좋아했던 여자였지만.

죽음이란 건 남겨진 이가 그 사람을 추억하게 만들기에, 눈앞에 마주한 그녀를 더더욱 멀게 느껴지도록 하는 걸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크라운 로드를 오르며 수없이 많은 죽음을 보아왔고 겪어온 나이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왜 그런 행동인지 잘 알고 있기에 더더욱.

'모르는 사이에 나는 이 여자를 거의 다 잊어 가고 있었구나.'

이 층에서 그녀를 마주하자 동요했던 감정은, 잊혀 가는 기억 속 이자벨라의 마지막 발버둥이었을까.

키스로 이런 걸 깨닫다니 나도 참 무드 없는 남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앞에서 하나하나 예민하게 반응했던 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이자벨라."

"응."

"미래의 넌 왜 야신 편을 든 거냐."

그제야 모든 감정을 내려놓고 나는 덤덤하게 그녀에게 질문을 던졌다.

줄곧 묻고 싶었지만, 묻지 못했다.

어떤 대답이 돌아오던 나는 그 대답을 받아들일 자신이 없었으니까.

애초에 이걸 물을 틈도 없이 내 손으로 그녀를 죽여야만 했기도 했다.

이자벨라는 그때 진심으로 나를 죽이려고 했기에, 나 또한 그녀를 최선을 다해 싸웠다.

그리고 결국 살아남은 것은 나였다.

그녀는 죽었다.

나를 믿고 있다는 의미 모를 말만 남겨 둔 채로.

이자벨라는 내 질문을 듣고 창가 틀에 기댄 채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미래의 자신은 어떤 사람일까 하는 것부터 여러 가지 생각을 해보는 듯하였으나, 그녀가 끝끝내 내린 결론은 자신도 해답을 내리지 못하고 나온 애매한 대답이었다.

"원래 나는 자기애가 약하니까, 미래의 나라도 나를 위해서 그 사람의 편을 들지는 않았을 거로 생각해. 당신 손에 죽었다면, 아마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결론은 너도 잘 모르겠다. 이 소리냐."

"10년 전의 당신과 지금의 당신이 같은 사람이 아니듯. 이 이야기도 같은 것 아니겠어?"

괜한 물음이었다.

애초에 제대로 된 답을 바라고 물었던 것은 아니기도 했다.

그저 내가 이 질문을 던질 수 있을 만큼 그녀에게서 벗어났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었으니까.

성좌가 나를 이때로 보낸 이유는 무엇일까.

이 기억은 분명 내가 다시 추억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긴 했지만, 이자벨라를 죽여야만 했을 때가 더더욱 끔찍한 기억이었을 텐데.

'내가 어떤 해답을 듣는다고 해도 받아들이지 못할 걸 알고 있어서인가.'

이야기의 해답은 없다.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 것은 참가자의 뜻일 뿐, 성좌는 정확한 대답대신 언제나 모호한 결말들을 던져 놓고 참가자를 기다린다.

그리고 이번 층도 결국 그것과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해답이 정해진 결말을 가장 싫어하는 것이 성좌라는 것들이었으니까.

"내가 이대로 너와 쭉 함께한다면, 널 바꿀 수 있을 것 같냐?"

"나랑 함께 있고 싶어?"

그렇담 자신은 얼마든지 받아 줄 마음이 있다는 양 양팔을 펼치는 이자벨라를 보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전혀."

"다행이네. 좋은 대답이야. 당신은 앞으로도 계속 층을 오를 거지?"

"그래."

"그것도 혼자서."

자신에게 묶여 크라운 로드를 혼자 오르게 된 나를 보고 그녀는 미안한 듯 웃었다.

"너 때문만은 아니다. 세상 전부가 네 중심으로 돌아갈 거란 착각은 그만해."

"그래도 당신에게 한때는 내가 세상의 전부였던 것 같은데."

"과대망상이지."

그런 말을 내뱉고 나는 이자벨라의 손목을 잡아당겨 그녀를 창가 틀에서 떨어트렸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의 등 뒤에는 성좌가 준비한 다음 층으로 오를 수 있는 계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층의 클리어 조건은 무엇이었을까,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러나 적어도 성좌는 내게 무언가 바라던 것을 보았기에 계단을 내려 준 것일 것이다.

126화

"썩을 층이었지만, 덕분에 한 가지는 말할 수 있겠네."

"어떤 거야?"

"내가 앞으로 이용할 수 있는 건 싹 다 이용해야겠다고."

"자존심 강하기는. 그냥 나 때문에 이 층에 묶였던 게 자존심 상해서 그러는 거지?"

그 말을 들으며 나는 이자벨라의 손목을 놓았다.

"그래, 적어도 앞으로 네 핑계는 대지 않을 거다. 네 말대로 난 자존심이 강하거든."

나는 앞으로도 크라운 로드를 오르며 누군가를 믿기 힘들 것이다.

이자벨라의 영향은 여전히 나에게 남아 있고, 지금까지 겪어 온 일들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하지만 그것은 지금까지 내가 쌓아온 경험.

나는 더 이상 스스로 내 경험을 부정하지 않기로 하였다.

"기분이 좀 편해진 표정이네."

"세상살이 엿 같다는 걸 절실히 깨달아서 달관한 거겠지."

그리 말하고 나는 계단을 올랐다.

이자벨라는 나를 붙잡지 않았다.

그저 내가 오르는 것을 조금 부러운 양 바라볼 뿐, 그마저도 내가 계단을 절반쯤 올랐을 때 사라지고 없었다.

마지막으로 자신이 무슨 말을 하든 나는 앞으로도 꿋꿋이 크라운 로드를 오를 것임을 알기에 그녀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잘 가. 하천성."

그저 짧게 작별 인사를 내뱉을 뿐.

그렇기에 나 또한 그녀를 돌아보지 않고 마지막 계단을 올랐다.

[축하합니다. 4번째로 36층을 클리어하셨습니다.]

['36층의 주인' '기억 속 영원'이 조그맣게 미소 지으며 당신의 클리어를 축하합니다.]

층의 마지막을 알리는 알림이 뜨고, 나는 곧 4번째라는 말에 헛웃음을 흘렸다.

이번 층에서 그리 많은 시간을 묶이지 않았는데, 또 한 명에게 따라 잡혔다 이건가.

'나 원.'

이놈의 크라운 로드는 1등으로 클리어하는 것 한 번 참 힘들다고 생각하며, 나는 또다시 다음 층으로 향했다.

* * *

36.5층, 37층을 앞두고 그곳에 올라선 나는 전역으로 오러 감지를 뻗었다.

그 순간 넓게 펼쳐진 감각에 한 명 포착되었고, 저쪽도 나를 인식한 듯 반응하였다.

익숙한 반응에 나는 뚜벅뚜벅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네가 이렇게나 빨리 오를 줄은 몰랐는데."

"당신이야말로 너무 느린 거 아니야?"

그렇게 마주하자마자 장난스레 핀잔을 준 사람은 바로 검왕이었다.

여전히 고운 얼굴 위로 반가운 듯 환한 미소를 그린 그녀는 나를 잠시 살피더니 무언가 눈치챈 듯 물었다.

"지명이 생긴 모양이네. 어떤 이름을 받았어?"

"천왕."

숨길 것도 없었기에 대답하자 그녀는 대답을 듣고 실소를 내뱉었다.

"그것참 당신이랑 잘 어울리는 지명이네."

나락이나 이 녀석이나 똑같은 소리군.

"그런데 이제는 하천성이라 부르는 게 더 익숙해졌는데, 계속 그렇게 불러도 돼?"

"마음대로 해라."

"응, 고마워. 당신도 나를 이름으로 불러도 괜찮아. 동료들끼리 있을 때는 서로서로 이름으로 부르거든."

"싫은데."

슬쩍 동료로 끼워 넣으려 하는 검왕에게 선을 긋자 그녀는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그러곤 곧 뭔가 이상함을 느낀 것인지 검왕은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웬일로 짜증을 안 내네. 이런 말 하면 당신 매번 화내거나 짜증 냈잖아."

"내가 뭔 악귀나찰이라도 되어 보이냐?"

"평소에는? 애초에 탑을 혼자 오르고 있잖아. 그래서 당신이 예민한 건 당연한 거로 생각했어. 워낙 많이 봤으니까. 혼자서 탑을 오르다가 점차 견디지 못하고 망가진 사람들을."

이전에도 검왕은 비슷한 말을 한 적 있었기에 나는 대강 둘러댔다.

"그냥 잠깐 일이 있었을 뿐이야."

그러던 순간 나는 그녀가 혼자임을 눈치챘다.

"그 자랑하던 동료들은 다 어디로 간 거냐?"

"마술사는 대협을 치료하려고 조금 있다가 오르기로 해서 아래층, 같이 들어온 구천옥녀는 아직 36층을 클리어하지 못했어."

구천옥녀와 둘이서 층을 클리어하고 있었나.

둘 다 최전선에 뛰던 랭커들답게 층 클리어를 매우 빠른 속도로 하고 있다.

하지만 36층은 개인의 기억으로 들어가는 층인 만큼 결국 두 사람 다 따로따로 층을 공략하게 된 거겠지.

"36층, 당신은 어땠어."

그녀도 자신의 기억 속 과거를 봤을 것이다.

문득 검왕이 황제의 이전 모습을 알고 있을까 하는 의문이 떠올랐다.

"황제를 만났어. 내 기준 2회차 시점에."

"황제가? 당신 그 사람이랑 그때 만난 적이 있었어?"

36층이 어떤 층인지 겪어 봐서 아는 검왕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과거에 위용을 뽐내며 참가자들을 진두지휘하던 황제를 떠올렸는지 그녀는 그를 추억하듯 쓰게 웃었다.

황제의 친위대까지 했던 검왕이니 그는 그녀에게 특별한 사람이었을 테니까.

"아니, 나는 이자벨라 때문이었다. 황제는 우연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