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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저게 무슨 소리지?'

도무지 대화의 흐름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젊다고는 하지만 어떻게 봐도 로이스보다 나이가 많아 보이는 여인들과 나이가 들어 보이는 드워프가 어째서 로이스를 어려워하는 건지.

'빅터? 뭔가… 익숙한 이름인데?'

시바가 그리 고개를 갸우뚱거릴 때, 연구회실의 문이 열렸다.

똑똑-.

"로이스 군, 있습니까?"

노크와 함께 들어온 이는 다름 아닌 시에라였다.

그녀의 손에는 작은 봉투가 들려 있었다.

시에라의 등장에 로이스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았다.

"무슨 일이야?"

"아, 이번 성적 장학금 증명서가 나와서… 전해 주려고 왔는데...."

시에라는 방 안을 차지한 면면을 살피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누구지? 학생은 아닌데. 학관 관계자?'

그런 이들이 여기서 왜 차를 마시고 있지?

그녀 역시도 조금 전 시바가 품었던 의문을 똑같이 되풀이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또 다른 이가 들이닥쳤으니.

"어? 선생님 오셨어요?"

"로이스 오빠! 어디 갔다 왔어요!"

문을 벌컥 열고 들이닥친 불꽃 남매.

오기 무섭게 치근덕 달라붙는 타니아의 얼굴을 꾹꾹 밀어내며 로이스가 말했다.

"인사해, 내 제자들."

로이스의 말에 셋이 놀라 소리쳤다.

"제, 제자들 말입니까? 탑주님의?"

"네? 제자요?"

"로이스 님의 제자라고요?"

그도 그럴 것이 로이스의 제자라면 탑의 다음 대 탑주라는 소리이기도 했다.

물론, 로이스가 언제 죽을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죽기는 할런지....

그들의 놀람에 로이스가 가볍게 손을 휘휘 내저으며 말했다.

"무슨 생각인지는 알겠지만, 얘들은 탑과는 관련 없는 애들이다. 기술이 아니고 그냥 쌈박질 좀 가르치고 있으니까."

"아하! 그렇군요...."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

이를 보고 타니아가 물었다.

"이분들은 누구신데요?"

그리고 그녀의 궁금증은 곧이어 들어온 이들이 풀어줬다.

"로이, 우리 왔다!"

"너, 어제 어디 갔다 온 거야? 한참 기다렸는데! 방학했는데 놀러 가자!"

또다시 문을 벌컥 열고 들이닥친 이들을 보고 로이스가 다시 차를 호로록 입에 머금으며 말했다.

"이것들이 올 거면 한꺼번에 올 것이지… 아무튼, 쟤들은 알지?"

그 말에 처음으로 반응한 것은 플로리아였다.

"아, 그분들이시군요! 탑주님의 친구분들이셨던!"

"허허, 로이스 님도 그렇지만, 저분들도 몰라보게 자라셨습니다."

"저분들이 그분들이라고?!"

과거, 전기 지짐의 공포가 떠오른 것인지 에리카가 쌍둥이를 보고 흠칫 어깨를 떨었다.

그때 카니와 칸이 셋을 보고 알은체를 해 왔다.

"어? 쟤, 걔잖아? 더… 더… 더… 뭐였더라?"

갑자기 생각이 안 떠오르는지 머리를 부여잡은 칸을 보며 카니가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더글라스, 멍청아."

"아 맞아! 그럼 네가 에리카고, 이쪽이 플로리아였나?"

"맞습니다. 오랜만에 뵙네요. 칸 님, 카니 님."

"응, 오랜만."

카니가 플로리아를 향해 손을 짤랑짤랑 흔들어 주었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턱- 턱-.

한쪽에서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나 시선을 돌리니 시바와 시에라의 손에 들려 있던 성적 우수 상장과 장학 증명서가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자신들에게 쏟아지는 시선에 둘이 다급히 떨어진 물건을 주워 들었다.

시바가 뒤통수를 긁적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조금 놀라서. 그 시, 실례되지 않는다면… 더, 더글라스 님, 플로리아 님, 에리카 님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런데?"

"응."

"맞아요."

"하하, 신기하네요. 그랜드 마이스터님들의 성함을 쓰는 분들이 이리 한자리에 모이다니. 재밌는 우연이네요."

시바의 이야기에 더글라스가 킁- 하고 콧방귀를 꼈다.

"우연은 무슨. 우리가 우리 이름을 쓴다는 게 무슨 문제라도 있나?"

그때 에리카가 일어나 시바와 시에라의 어깨에 팔을 얹었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건 비밀인데 말야… 우리가 그랜드 마이스터야."

그 이야기에 시바와 시에라의 표정이 잠깐이나마 굳어졌다.

하지만 여전히 믿는 눈치는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랜드 마이스터들이.

탑의 정점이자 수십 년간 모습을 드러낸 적 없는 그들이 초월학관의 한낱 잡스러운 연구회실에 모여 차나 홀짝이고 있다고?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시바의 표정에서 속내를 읽은 에리카가 버럭 소리쳤다.

"진짜라니까?"

"아, 예...."

그의 시큰둥한 답변에 더글라스와 에리카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거짓말 아니래도?"

"허허, 아해야, 믿기지는 않겠지만, 사실이란다."

하지만 아무리 말을 해도 시바의 얼굴은 딱히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더 의심의 눈초리를 할 뿐.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로이스가 낄낄거렸다.

"쿡쿡, 면전에서 사기꾼 소리 듣는 기분이 얼마나 더러운지 이제 알겠지?"

사기꾼 취급을 받으며 탑의 입구에서 쫓겨난 일을 비꼬는 말이었다.

이에 플로리아가 살짝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저희는 진실을 이야기했어요."

"에이, 거짓말이죠?"

"저희가 당신...."

"쟤 이름은 시바야."

"아, 감사합니다, 탑주님. 그래요, 저희가 시바 군께 거짓말을 할 이유가 있나요?"

그녀의 말이 옳았다.

저들이 굳이 그랜드 마이스터임을 사칭해 가며 자신에게 취할 이득 따위는 없었다.

시바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해다.

"네, 좋아요. 알겠습니다. 그런데 말이에요… 그… 세 분이 그랜드 마이스터라고 쳐도...."

"쳐도가 아니고 진짜라니까!"

에리카의 발끈에 시바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네네, 그랜드 마이스터시라면...."

시바의 시선이 로이스에게 향했다.

"왜 로이스 님께 탑주님이라고 하는 겁니까?"

자신이 들은 대화.

그 속에 나온 '탑주'라는 칭호는 분명 로이스를 향해 있었다.

시바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자 로이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왜긴, 당연히 내가 탑주니까."

"…로이스 님이 뭐라고요?"

"염원의 탑주."

"뭐요?"

"염원의 탑, 그곳의 주인."

"...."

잠시 연구회실에 침묵이 감돌았다.

그사이 시바의 시선이 로이스에게서 차례대로 플로리아, 더글라스, 에리카에게로 향했다.

셋에게 옮겨진 시바의 시선은 아주 짜게 식어 있었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나직한 중얼거림.

"…역시 거짓말이었잖아?"

뭐, 이 새꺄?

로이스의 이마에 혈관이 불거졌다.

240화. 장난질 (2)

이걸 과연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라고 말해야 할 것인가.

초월학관의 학생조차 알아보지 못하는 허울뿐인 그랜드 마이스터의 명성?

아니면 일말의 신뢰조차 품지 못하게 만든 로이스에 대한 불신?

'에이, 로이스 님이 탑주? 어찌 저런 분이 탑주가 될 수 있습니까?'라는 속내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시바의 눈을 보며 로이스의 얼굴이 떨떠름하게 변했다.

딱-.

기괴한 소리와 함께 시바의 이마에서 불똥이 튀었다.

"당장 그 불손하기 짝이 없는 눈깔 안 깔면 종탑에 거꾸로 매달아 버릴 줄 알아."

"그, 그런 말씀은 왜 먼저 때리고 나서 하시는 겁니까!"

딱-.

"칵!"

항변하던 시바가 다시 이마를 부여잡고 널브러졌다.

그의 곁으로 쪼르르 다가간 켄드릭이 '내가 그 고통 잘 알지!'라며 등을 토닥여 주었다.

둘의 작태를 지켜보던 로이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저 자식… 어째 점점 뻔뻔해지는데?'

시바가 자신 때문에 저리 된 것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생각지 않는 로이스였다.

살짝 훌쩍이며 자리에서 일어난 시바.

그가 여전히 그랜드 마이스터의 존재를 믿지 않는 것 같았지만, 로이스는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해결될 일이었으니 말이다.

'그때 가서 저놈이 어떤 표정을 짓는지 구경하는 것도 재밌겠네.'

로이스는 속으로 낄낄거리며 차를 홀짝였다.

"어… 음… 나는 이만 가 볼게...."

눈치를 보던 시에라가 어색한 얼굴로 연구실을 떠나갔다.

그렇게 한 명이 빠졌지만, 해충 박멸 연구회는 여전히 시끌벅적했다.

안 그래도 좁은 연구회실에 비해 사람이 많았는데 세 그랜드 마이스터들이 합류하면서 더욱 비좁게 느껴졌다.

그 탓에 명색이 회장이지만, 가장 서열이 낮은 시바는 연구회실의 구석에 쭈그러질 수밖에 없었다.

대신 시바는 귀를 쫑긋 열고 로이스와 외부인 셋이 나누는 이야기를 들었다.

가장 먼저 붉은 머리의 여인, 에리카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탑주님, 여기 연구회 이름이 왜 해충 박멸이에요?"

"왜겠냐. 벌레 잡으려고 그런 거지."

"벌레요?"

"염원의 탑을 좀 먹는 해충들."

"오? 그러니까 여기가 비밀 수사기관 같은 거네요?"

"대충 그런 거지."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시바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연구회 이름이 그래서 해충 박멸 연구회였어?!'

연구회를 처음 만들 때 로이스가 이름을 그리 정해 주기에 대충 아무거나 지은 것이라 여겼건만, 그런 의미가 있었다니!

'아니, 근데 난 이걸 왜 이렇게 진지하게 듣고 있는 거냐?'

그랜드 마이스터라 주장하는 셋과 로이스의 대화는 묘하게 흥미를 자극했다.

시바가 다시금 귀를 쫑긋 세웠다.

이번에는 늙은 드워프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저희, 여기에 있어도 되는 겁니까?"

"원래 등잔 밑이 어두운 거야. 죽었다고 알려진 너희가 초월학관에 있을 거라고 누가 생각하겠냐?"

"그건 그렇지만… 혹여 누군가 알아볼 수도 있고...."

"누가?"

로이스가 콧방귀를 꼈다.

"아까 나간 여자애나, 그리고 저기서 엿듣고 있는 저 쭈구리나...."

자신을 지목하는 목소리에 시바가 살짝 어깨를 움찔거렸다.

이를 본 로이스가 피식했다.

"니들이 대놓고 '내가 그랜드 마이스터요!' 했는데도 안 믿는데, 다른 놈들이 '여기에 그랜드 마이스터가 있어요'라고 하면 잘도 믿겠다."

"커흠...."

너무도 옳은 말이지만, 그게 또 뼈아파서 더글라스가 헛기침을 흘렸다.

'아, 예전에는 밖에 돌아다니기만 해도 알아보고 사람들이 너도 나도 달려들었었는데....'

사람들의 시달림에서 벗어나고자 오랜 시간 칩거를 했더니 아주 제대로 잊혀 버린 것이다.

더글라스가 민망함에 볼을 긁적이니 이번에는 플로리아가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부터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가요?"

"떡밥을 던졌으니 물고기들이 파닥파닥 모여드는 걸 좀 보긴 봐야 하는데...."

문제는 물고기가 모여드는 물속을 살필 방법이 현재로서는 마땅하지 않다는 점이었다.

로이스가 셋을 보며 물었다.

"믿을 만한 놈 없냐? 절대 배신하지 않고 탑 내부 상황을 전해줄 충성스러운 놈."

로이스의 물음에 세 그랜드 마이스터들이 고민에 잠겼다.

"믿을 만한 놈이라...."

"음...."

솔직히 예전이라면 자신 있게 추천했겠지만, 이제는 누구를 믿을 수 있겠다고 쉬이 답할 수가 없었다.

그들이 머뭇거리자 로이스가 혀를 찼다.

"쯧, 하여간 이 방구석 폐인 놈들이 맨날 집구석에 처박혀 있었으면서도 집안 단속 하나 제대로 못 하냐."

"바, 방구석 폐인이라뇨. 저희가 탑의 부흥을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데요!"

"맞습니다! 저희 탑 커진 것 좀 보십쇼! 그게 다 저희가 열심히 돌아다니면서 만들어 낸 성과입니다!"

"저희도 나름 열심히 했는데...."

셋의 변명에 로이스가 인상을 썼다.

"얼씨구? 누가 들으면 너희가 맨땅에서부터 시작한 줄 알겠다? 내가 기반 다 닦아주고 갔더니만, 이것도 못 했으면 나가 죽어야지. 안 그래?"

"...."

그랜드 마이스터들이 본전도 못 찾고 입을 다물었다.

물론 지난 세월 그들이 노력한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광휘의 탑과의 제휴 관계, 정신파 변환 물질, 탑의 기본 자금 등등.

애초에 로이스가 떠나기 전 철저하게 기반을 닦아 놓지 않았다면, 현재의 염원의 탑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랜드 마이스터들이 한 것이라고는 로이스가 뚫어 만든 길을 깨끗하게 정돈한 것에 불과했다.

그것을 알기에 그랜드 마이스터들도 할 말이 없는 것이었다.

로이스는 입을 다문 셋을 보며 혀를 찼다.

"쯧, 그래서 탑 내에 믿을 만한 놈 있어 없어?"

"…잘 모르겠어요."

"에라이. 하여간 이것들은 250년 전이나 지금이나 도움이 안 되는 건 똑같아."

로이스의 면박에 다시금 셋이 시무룩하게 변했다.

그런 셋을 보고 어느 누가 저들이 그 위대한 그랜드 마이스터들이라고 생각하겠는가.

로이스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지. 내가 이 짓거리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무슨 방법이라도 있으십니까?"

"방법? 있지."

자신을 향한 시선에 로이스가 씨익 미소를 지었다.

"너희 유령 놀이 한번 하자."

* * *

스승의 부고 소식을 듣고 자택으로 돌아온 해럴드는 홀로 울음을 터뜨렸다.

"스승님...."

어린 시절 길거리를 떠돌던 자신을 데려와 먹이고 재워주며 가르친 이가 다름 아닌 더글라스였다.

더글라스는 해럴드에게 스승이자 아버지였으며 하나뿐인 가족이나 다름없었다.

아무리 예상을 하고 있었다고는 해도 스승의 죽음이 슬프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다른 마이스터들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억눌렀던 슬픔이 자택에 홀로 남게 되며 터져 나오고 말았다.

"크흑… 스승님, 조금만… 조금만 더 있다 가시지 그러셨습니까."

존경하는 스승을 이제는 볼 수 없다는 슬픔에.

살아 계실 적, 왜 좀 더 잘해 드리지 못했을까 싶은 후회에.

해럴드는 평소에 잘 입에도 대지 않는 술을 마시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술기운과 슬픔이 쌓여, 해럴드는 의식하지 못한 새 곯아떨어지고 말았다.

그 후로 얼마나 흘렀을까.

"해럴드야...."

귓가에 울리는 목소리에 해럴드가 눈을 떴다.

'이건...?'

뿌연 안개가 자신의 침실을 감돌고 있었다.

"해럴드야."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는 바로 그 안개 속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또한, 그 음성은 해럴드에게 너무도 익숙한 것이었다.

벌떡 상체를 일으킨 해럴드가 안개를 향해 소리쳤다.

"스승님...? 스승님이십니까?!"

그의 외침이 끝나기 무섭게 안개 속에서 한 인영이 걸어 나왔다.

늙은 드워프의 형상.

"아아...."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스승의 모습에 해럴드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정녕… 정녕 돌아가셨단 말인가!'

그는 현재 상황이 죽은 스승의 영혼이 꿈을 통해 자신을 찾아온 것이라 여겼다.

해럴드가 오열하며 더글라스의 발치에 엎드렸다.

"흐허헝, 스승님! 어찌… 어찌 그리 허망하게 가셨단 말입니까!"

해럴드가 어찌나 비통하게 울음을 토해 내던지,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가슴이 울컥하게 만들 정도였다.

그런 그를 향해 더글라스가 입을 열었다.

"원통하구나… 너무도 원통해...."

"스, 스승님?"

"해럴드야, 해럴드야. 너무도 원통하구나."

"무,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놈이… 우릴 죽였어."

"예?"

"그놈이… 우릴 죽였어! 그놈이!"

새하얀 더글라스의 얼굴에는 사무치는 듯한 원한이 서려 있었다.

이에 해럴드는 직감했다.

스승님의 영혼이 자신을 찾아온 이유.

그것은 무언가를 전하기 위함이라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스승님?"

"해럴드야...."

"그놈이 누굽니까? 대체 누가 스승님을 죽인 겁니까?"

"해럴드야… 조심하거라...."

"말씀해 주십쇼, 스승님! 제가… 제가 스승님의 원한을 풀어 드리겠습니다! 반드시 그러겠습니다! 대체 누가 스승님을 해한 것입니까!"

해럴드는 눈물을 줄줄 흘렸다.

그의 표정은 너무도 진실했고, 더글라스의 이야기에 조금의 불신도 갖지 않은 듯싶었다.

'스승님의 죽음이 몬스터에 의한 습격이 아니었다니!'

해럴드는 다짐했다.

"제가 반드시 스승님의 죽음에 대한 비밀을 밝혀내고, 그 후레 잡놈을 잡아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 스승님의 무덤에 바치겠나이다! 그리하여 스승님의 영혼을 위로하겠습니다!"

해럴드의 외침이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오케이, 컷! 거기까지."

갑작스러운 외침과 함께 안개가 걷혔다.

동시에 해럴드의 침실에 빛이 들어오고, 천장에서 몇몇 인물이 뚝 떨어졌다.

"...?"

난데없는 상황에 놀란 해럴드.

"이, 이게 무슨?!"

갑자기 나타난 이들의 면면을 살핀 해럴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에리카 님? 플로리아 님?"

천장에서 떨어진 이는 다름 아닌 에리카와 플로리아였다.

'저분들이야… 그렇다 쳐도....'

전해지기로는 그들도 더글라스와 같이 죽었다고 하니까.

그렇다면 자신의 꿈에 다 같이 나올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셋의 곁에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이 함께 있다는 점이었다.

"오, 나이는 허투루 먹은 게 아니구나? 감정연기 좋았다, 더글라스."

"허허, 이게 다 연륜이지 않겠습니까?"

스승의 어깨를 토닥이는 이.

해럴드가 그를 몰라볼 리 없었다.

자신이 있는 초월학관의 학생이었으니 말이다.

그것도 자신이 눈여겨보던 학생.

해럴드가 넋 나간 얼굴로 그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로이스 군...?"

해럴드가 황망한 얼굴을 하고 있을 때 더글라스가 로이스를 조심스럽게 보며 물었다.

"그나저나… 어떻게 보셨습니까?"

더글라스의 물음에 로이스가 미소를 머금고 답했다.

"쟤는 아니야. 확실해. 저게 연기면 쟤는 초월기의 마이스터가 아니고 연기의 마이스터야."

"그렇지요. 껄껄."

해럴드는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자신의 꿈에 나타나 스승에게 반말을 지껄이는 초월학관의 학생이나.

이를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는 스승님이나.

그가 그렇게 멍하니 있으니 더글라스가 인자한 얼굴로 다가와 제자의 어깨를 토닥였다.

"클클, 나는 믿고 있었단다. 우리 해럴드라면 다를 거라고 생각했지! 암!"

"스, 스승님?"

어깨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감촉.

이제 해럴드는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였다.

그때 더글라스가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내 너에게 누누이 이야기했던 걸 기억하느냐?"

"어떤 걸… 말씀입니까?"

"언젠가, 탑주님께서 돌아오실 터이니 그분의 외형에 속아 의심치 말고 모든 걸 내어 드리라고."

"아! 기, 기억납니다."

그건 더글라스가 어린 자신에게 누누이 하던 이야기였다.

해럴드가 고개를 끄덕이니 더글라스가 미소를 머금고 로이스를 가리켰다.

"자, 인사드리거라. 저분이야말로 우리 염원의 탑의 진정한 주인이시니."

"예? …로이스 군이 말입니까?"

"어허! 로이스 군이라니! 탑주님이시다!"

"...?"

해럴드의 시선이 에리카와 플로리아에게 향했다.

더글라스의 말이 사실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

그리고 해럴드의 시선이 로이스에게 닿았다.

'저 녀석이… 탑주님?'

그런 생각과 함께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방황하던 해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꿈이구나."

해럴드는 그리 중얼거리고는 다시 침대로 돌아가 이불을 덮었다.

"뭔 이런 개꿈을...."

그러고는 다시금 조용히 눈을 감는 게 아닌가.

제자의 행동에 당황한 더글라스가 데룩데룩 눈을 굴리며 로이스의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 그는 볼 수 있었다.

탑주의 관자놀이에 불룩 튀어 오른 혈관을.

'이것들이....'

시바나, 해럴드나.

어쩜 이리들 반응이 똑같은지.

로이스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3초 준다. 저 새끼, 깨워."

"넵!"

더글라스의 행동은 신속했다.

241화. 장난질 (3)

늦은 밤.

평소라면 깊이 잠들어 있을 시각.

하지만 해럴드는 잠들지 못했다.

그저 양쪽 뺨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멍한 표정을 하고 앉아 있을 뿐.

그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다수의 사람이 시끌벅적하게 떠들고 있었으니.

"이거 맛있네?"

"나도 좀 줘 봐."

"저도! 저도요!"

"와, 이거 색깔이 예쁘네요. 향도 좋고."

해럴드의 진열장에서 거침없이 술병을 꺼내 술판을 벌이는 불꽃 남매와 쌍둥이들.

그들은 어디서 주워 온 것인지 모를 안주까지 깔고 아주 제대로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자신의 집을 헤집고 다니는 학생들의 태도에도 해럴드는 아무런 말도 못 하고 그저 지켜볼 뿐이었다.

저 망나니 같은 것들을 데려온 이가 바로 '그'였으니 말이다.

"허...."

해럴드의 입에서 짙은 한숨이 흘러나올 때, 그의 곁으로 한 그림자가 다가왔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게냐?"

스승인 더글라스의 물음에 해럴드가 힘 빠진 목소리로 답했다.

"…충분히 정신 들었습니다. 그렇게 맞았는데 당연히 정신 차려야지요."

"커흠."

뼈 있는 제자의 항변에 더글라스가 헛기침을 흘렸다.

그도 그럴 것이 해럴드의 양 뺨에 진하게 남은 손자국.

그것이 더글라스의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3초라는 소리에 달려가 냅다 제자의 뺨을 연타로 후려갈긴 스승.

퉁퉁 부어오른 제자의 얼굴을 보며 더글라스가 진지하게 말했다.

"그 정도로 끝난 걸 다행으로 여겨, 인석아!"

"나이 든 제자를 이렇게 때리셔야 했습니까?"

"어허, 인석이 고마운 줄도 모르고!"

"…예?"

해럴드가 어이없다는 듯 되묻자 더글라스가 살짝 어둑해진 낯빛으로 작게 속삭였다.

"내가 그리 안 했으면, 넌 지금쯤 관짝에 들어가 있을 게다."

"원, 스승님도 농담을...."

"내 말이 농담인지 아닌지는 탑주님을 겪다 보면 차차 알게 될 거다."

"...."

"나도 한 두어 번 들어갔다 왔거든."

"...."

더글라스가 너무 진지해서 해럴드는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대신 해럴드의 시선이 한쪽으로 돌아갔다.

그곳에는 불꽃 남매와 쌍둥이의 엉덩이를 한 번씩 걷어차며 구석으로 치우고 있는 로이스가 있었다.

그때 해럴드의 어깨로 묵직한 손이 올라왔다.

"따라오거라. 정식으로 탑주님께 인사드려야지."

"스승님, 저분이 정녕… 탑주님이십니까?"

"그럼 내가 노망이 들어서 헛소리라도 하고 있단 소리냐?"

"그, 그게 아니오라."

솔직히 쉽게 믿는 게 더 어려운 일이었다.

자신이 학관에서 가르치던 학생이 탑주라니.

그것도 250년 전의 바로 그 염원의 탑주라니.

이를 어찌 쉽게 믿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제자의 속내를 읽은 것인지 더글라스가 살짝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탑주님의 외적인 모습만 보고 넘겨짚지 말아라. 저 속내에는 일반적인 상식으로 재단할 수 없는 깊은 지식과 지혜가 감춰져 있으니."

"...."

"저분께서 토대를 닦아 두지 않았다면 지금 염원의 탑이 누리고 있는 성세 또한 없었을 게야."

"…알겠습니다."

스승인 더글라스는 물론, 에리카와 플로리아까지.

그들 모두가 한입으로 로이스가 탑주라 말하고 있었다.

이들이 단체로 미친 게 아닌 이상, 로이스가 탑주임은 확실했다.

자리에서 일어선 해럴드가 더글라스와 함께 로이스에게 다가갔다.

로이스의 앞에 선 해럴드.

"염원의 탑의 제자, 해럴드가 탑주님께 인사드립니다."

자신을 향해 깊게 고개 숙인 해럴드를 향해 로이스가 미소 지었다.

"뺨은 괜찮냐?"

곧장 튀어나오는 하대.

그것이 너무도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여겨져 해럴드는 잠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러다가 옆에서 쿡쿡 찌르는 더글라스의 손길에 정신을 차리고 답했다.

"네? 아… 네. 괘, 괜찮습니다."

한편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시바의 입이 떡 벌어졌다.

'마, 맙소사!'

영문도 모르고 끌려온 게 바로 조금 전이었다.

그사이 시바는 무려 세 번이나 놀라고 말았다.

첫 번째로 끌려온 장소가 마이스터 해럴드의 자택이란 것에 놀랐고.

두 번째는....

'진짜 그랜드 마이스터님들이었다니?!'

로이스에게 구박받는 늙은 드워프.

같이 구박받는 붉은 머리 여인.

그나마 덜 구박받는 눈을 감은 여인까지.

저 구박데기들이 진짜 그랜드 마이스터일 것이라고 감히 상상이나 했겠는가.

하지만 명성이 자자한 마이스터 해럴드가 더글라스를 스승이라 부르면서 그런 의혹은 말끔히 사라졌다.

마이스터 해럴드가 더글라스의 제자란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니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경악스러운 진실.

시바는 장담할 수 있었다.

소름이 끼치는 놀라움이 무엇인지 오늘에서야 알 수 있었다고.

세상이 두 쪽이 나도 절대 아닐 거라고 여겼건만, 정말로 세상이 두 쪽 나는 일이 벌어졌다.

'지, 지, 진짜 로이스 님이 탑주였다고?!'

아직 공식적으로 알려진 건 아니었지만, 무려 250여 년이나 비어 있던 자리의 주인이 나타났다.

그 주인의 정체가 누구인지 알고 있는 몇몇에 자신이 들어갔다는 사실은 어찌 보면 매우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다만 염원의 탑주가 매번 자신을 부려먹는 악독한 룸메이트라는 점만 뺀다면 말이다.

'가만? 만약 내가 염원의 탑에 들어가면… 저분을 탑주로 모셔야 하는 거잖아?'

오랫동안 품어 왔던 시바의 꿈, 염원의 탑에 입탑 하겠다는 꿈이 처음으로 흔들리는 순간이었다.

시바가 머리를 부여잡고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로이스는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해럴드가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정말 다행입니다. 세 분이 이리 멀쩡히 살아 계신 사실을 알게 되면 정말 다들 기뻐할 겁니다. 그리고 탑주님이 오셨다는 걸 알면...."

이에 로이스가 손을 내저었다.

"아니, 이 사실은 한동안 너만 알고 있어."

"예?"

"우리가 왜 이 밤중에 몰래 너를 찾아왔다고 생각하냐?"

"...?"

로이스가 턱짓으로 더글라스 외 2인을 가리켰다.

"저 녀석들은 대외적으로 죽은 거다."

"그게 무슨...."

어째서 멀쩡하게 살아 있는 이들을 죽었다고 해야 하는 건지.

전후 사정을 모르는 처지로서는 잘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당연했다.

이에 로이스가 더글라스에게 눈짓했다.

알아서 설명하라는 신호였다.

더글라스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심각한 얼굴로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실은 말이다...."

살짝 운을 뗀 더글라스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거기에 에리카와 플로리아가 중간중간 끼어들어 더글라스의 이야기에 살을 덧붙이니, 그간의 사정이 상세하게 전달됐다.

자신들이 납치된 것부터, 로이스가 구해 준 일.

검은 금 용병단이 받은 의뢰 내용과 로이스가 이를 역이용해 염원의 탑에 자신들의 죽음을 전했다는 것까지.

모든 이야기를 전부 전해 들은 해럴드는 분노했다.

"이, 이! 어떤 놈들이 감히!"

해럴드의 눈은 살벌했다.

만약 이 일의 주동자가 눈앞에 있었다면 당장이라도 찢어 죽일 것처럼 그는 살기등등했다.

그때 로이스가 끼어들었다.

"아, 그러고 보니까 나도 알려 줄 게 있는데."

"...?"

자신에게 이목이 쏠리자 로이스가 입을 열었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는 윌리엄과 사이론 영지에 관한 것이었다.

그간 로이스가 알아낸 모든 것.

이를 전해 들은 다른 이들의 안색이 굳어졌다.

또한, 감탄했다.

"허… 그걸 홀로 알아내셨단 말입니까?"

사이론에 온 지 얼마 되지도 않는 로이스가 그 같은 일을 알아냈다는 사실에 모두가 혀를 내둘렀다.

그때 해럴드가 혹시나 하는 눈빛으로 질문을 던졌다.

"설마… 초월학관에 들어오신 것도?"

"윌리엄 새끼가 뭔 꿍꿍이인지 알아보려고 그랬지."

"허...."

"아무튼, 일단 파악된 건 윌리엄뿐이지만, 이번 일은 그 녀석 혼자서 진행한 게 아닐 거다. 녀석이 말하는 걸 보면 분명 탑 내부에 다른 공모자가 있어."

"허… 그런."

"윌리엄, 이 자식이! 내가 얼마나 잘해 줬는데!"

"흠...."

여기저기서 불편한 신음이 들려왔다.

로이스가 해럴드를 보며 물었다.

"그랜드 마이스터들이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진 후 탑 내 상황은 어떻게 됐지?"

"하… 탑주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윌리엄이 어째서 그런 안건을 내놓았는지 이제야 알겠군요."

"놈이 뭐라고 했는데?"

"…탑의 새로운 주인을 뽑자고 했습니다."

그랜드 마이스터들의 얼굴이 다시 한번 굳어졌다.

하지만 로이스는 의외로 침착했다.

이미 어느 정도 예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역시였나.'

현재 탑의 주축이나 다름없는 그랜드 마이스터 셋을 한 번에 처리할 이유가 달리 뭐가 있겠는가.

'오래된 축을 뽑아내고 새로운 축을 세우기 위해서겠지.'

작게 고개를 끄덕인 로이스가 해럴드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안건은? 통과됐겠지?"

"예...."

해럴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 탄식했다.

'허… 어쩐지 일사천리로 안건이 통과된다 싶었더니만.'

새로운 탑주의 선발은 매우 중대한 사안이었다.

신중하고 또 신중하게 고민해 봐야 할 문제였지만, 해당 안건은 여러 마이스터들이 동조하며 너무도 자연스럽게 통과되었다.

당시에는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그럴 수도 있겠거니 하고 생각했지만, 이면에 숨겨진 진실을 알고 나니 비로소 이상한 점들이 눈에 보였다.

동시에 이번 그랜드 마이스터 납치의 진정한 목표를 깨달을 수 있었다.

플로리아가 신음을 흘리며 말했다.

"새로운 탑주.... 그게 놈들의 진짜 목적이었군요."

"그래."

지난 오랜 시간 비어 있던 탑주의 자리.

놈들이 노리는 것이 바로 그것이리라.

에리카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이제 어찌할 생각이세요?"

"기다려야지."

"예? 하지만...."

"에리카."

"네?"

"욕심 많은 놈이 가장 절망하는 순간이 언제인지 알아?"

"…글쎄요?"

"모든 것을 얻었다고 기뻐할 때, 손에 넣었다고 확신했던 것들이 모래알처럼 빠져나가는 순간."

"...."

"혹은 쥐었던 걸 빼앗기는 때지."

로이스가 입꼬리가 비틀렸다.

"탑주의 자리를 원한다고? 그럼 주자고."

"...."

"손에 쥔 사탕을 빼앗겼을 때. 놈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사뭇 기대되네."

로이스의 미소가 너무도 음흉하고 사악해 해럴드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또한, 어째서 스승님을 비롯한 다른 그랜드 마이스터님들이 탑주를 무서워하는지 알 것만도 같았다.

"해럴드."

"예?"

"네가 해 줄 일이 있다."

"제가… 무얼 하면 되는 겁니까?"

이후 이어진 로이스의 이야기에 해럴드의 눈이 휘둥그렇게 변했다.

* * *

3주의 시간은 유수와 같이 흘러갔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그사이 염원의 탑은 폭풍처럼 몰아친 한 사건으로 인해 어느 때보다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 폭풍의 중심에는 그랜드 마이스터들의 죽음이 있었다.

처음 마이스터 15인의 대회의가 있은 일로부터 2주가 흘렀을 무렵, 문제의 유품들이 전달됐다.

유품이 진짜임을 알아본 마이스터들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난 세월 염원의 탑을 이끌어 온 세 거인의 죽음을 말이다.

그들의 죽음은 빠르게 사이론 전역으로 퍼져 나갔고, 여기저기서 애도의 물결이 이어졌다.

이후 그랜드 마이스터들의 장례는 사이론 영주가 직접 주관하여 대대적으로 치러졌다.

그렇게 장례식이 끝나고 며칠이 흘러.

염원의 탑으로 15인의 마이스터가 모여들었다.

"흠...."

가장 처음 회의장에 도착해 회의장으로 들어오는 마이스터들을 한 명 한 명 바라보는 해럴드.

로나, 덤프, 파울라, 델피나, 라우라, 브리아나, 이네스, 안드레스, 레오넬, 발렌, 다미안, 아구스, 에일리오.

그리고 윌리엄까지.

자신을 포함해 염원의 탑이 자랑하는 15인의 마이스터.

이들 사이에 스승을 죽음으로 내몰려 했던 이가 섞여 있단 사실에 해럴드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그의 뇌리로 로이스가 했던 말이 스치고 지나갔다.

'아마 이번 일은 꽤 오래전부터 시작됐을 거다. 또한, 이미 마이스터 중 상당수가 포섭되었을 테니 탑주 선발은 놈들에게 유리한 투표의 방식으로 진행될 거다.'

해럴드가 로이스의 말을 상기하고 있을 때, 의장인 에일리오가 착석하며 회의가 시작됐다.

"다들 오늘 이 자리가 무엇 때문에 만들어진 것인지 알고 있을 겁니다. 새로운 탑주의 선발, 탑의 미래를 책임질 이를 뽑는 일이니만큼 다들 신중하게 생각하고 의견을 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이번 탑주의 선발을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고견이 있으신 분은 손을 들고 말씀해 주시지요."

에일리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잠깐의 침묵이 감돌았다.

그때 침묵을 깨고 아구스가 손을 들었다.

"말씀하시게, 아구스."

"탑의 주인이니만큼 가장 실력이 좋은 이가 그 자리에 앉음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그 의견을 윌리엄이 부정했다.

"말도 안 됩니다. 각자 전공하는 분야가 다른데 어찌 실력을 겨룬단 말입니까?"

이에 몇몇 마이스터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힘을 얻은 윌리엄이 의견을 이어 나갔다.

"여기 계신 마이스터분들은 그 누가 탑주가 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뛰어난 명성과 실력을 갖추신 분들입니다. 그러니 불필요한 과정을 생략하고 투표를 통해 탑주를 선발함이 어떠실지요?"

"다들 윌리엄의 생각을 어찌 생각하십니까?"

에일리오가 되묻자 여기저기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동의합니다."

"나쁘지 않은 생각 같군요."

회의장의 분위기가 그리 흘러갔고 결국 탑주 선발 방식은 투표로 결정됐다.

그 이야기에 해럴드의 눈이 빛났다.

'그분의 말씀대로구나.'

투표의 방식으로 진행될 거라던 로이스의 예상.

거기에 로이스는 덧붙여 말했었다.

'잘 지켜봐. 자진해서든, 누군가의 추천이든, 탑주 선발에 나오는 놈이 바로 이번 일의 주동자일 테니까.'

해럴드가 로이스의 말을 떠올리기 무섭게 한쪽에서 손이 올라왔다.

"말씀하시죠, 다미안."

"다수의 의견이 그러하니 따르기는 하지만, 굳이 투표까지 할 필요가 있나 의문이 듭니다."

그리 말하며 씨익 웃는 다미안.

"탑주라면 응당 지금껏 탑의 대소사를 살피며 희생하신 분이 그 자리에 앉음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솔직히 이분이 아니면 어떤 분이 탑주의 자리에 어울리겠습니까?"

"대체 누구를 추천하려고 그리 장황하게 칭찬을 늘어놓는 겐가?"

델피나의 핀잔에 다미안이 웃음을 지우고 신중한 어투로 답했다.

"누구긴 누구겠습니까? 당연히 에일리오 님이시지요. 저는 마이스터 에일리오 님을 다음 대 탑주로 천거하는 바입니다."

다미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해럴드의 눈에 놀라움이 스쳤다.

'에일리오… 설마 네놈이?!'

다미안의 말처럼 플로리아의 직계 제자인 에일리오는 지난 세월 탑의 대소사를 직접 주관해 왔었다.

해럴드와 비슷한 시기에 탑에 들어와 오랜 시간을 함께한 에일리오.

비록 에일리오의 나이가 해럴드보다 조금 더 많았지만, 그들은 나이를 떠나 친구로 지냈다.

평소 친구의 성격을 알고 있는 해럴드였기에 에일리오는 이번 일의 주동자가 아닐 거라고 무의식적으로 배제하고 있었다.

그가 뭐가 아쉬워 이런 일을 꾸민단 말인가.

만약 자신이 알고 있는 에일리오라면 다미안의 천거를 분명 거절하리라.

다미안의 천거 또한 계획된 것이 아닌 즉흥적인 의견일 것이라고, 해럴드는 그리 믿고자 했다.

'거절해라, 에일리오.'

해럴드는 속으로 그리 빌었다.

하지만.

"절 그리 좋게 봐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당연한 말을 했을 뿐입니다."

에일리오는 다미안의 천거를 사양하지 않았다.

그저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다미안을 바라볼 뿐.

마치 당연한 일이라는 듯 말이다.

수십 년을 봐 온 친우의 새로운 모습에 해럴드의 눈이 허망하게 물들었다.

242화. 장난질 (4)

탁자 아래에 놓인 해럴드의 손이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꽉 말려들었다.

'정녕… 네놈이었던 거냐?'

해럴드의 표정 또한 다른 이들과는 달리 잔뜩 굳어진 상태였다.

다행히 다수의 시선이 에일리오에게 쏠려 있었기에 해럴드의 표정을 본 이는 없었다.

그사이 에일리오가 좌중을 둘러보며 물었다.

"다른 뜻을 가지신 분이 계십니까?"

그리 말하며 좌중을 훑는 에일리오의 시선은 언뜻 평온해 보였다.

아무것도 몰랐다면 별생각 없이 넘어갔을 정도.

하지만 이미 에일리오의 이면을 깨달은 해럴드였기에 그 시선 속에서 작은 긴장을 잡아낼 수 있었다.

불안과 초조.

그리고 기대.

세 가지의 감정이 묘하게 혼재된 눈빛.

질문을 던지고도 한참 동안 아무도 말이 없자 에일리오의 눈에 안도가 스쳤다.

하지만 그것도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슥-.

옷이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살짝 올라오는 한 여인의 손.

이를 본 에일리오는 살짝 당황했다.

"…라우라?"

자신을 바라보는 에일리오를 향해 라우라가 살짝 미소 지으며 답했다.

"저도 한 명을 추천하고 싶은데요?"

"...."

"해도 되죠?"

"…당연하지요."

당연하다고 말하고 있었지만, 에일리오의 목소리는 이전보다 살짝 낮아져 있었다.

그의 반응을 무시한 라우라가 눈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새로운 탑주인 만큼 젊은 피를 가진 이가 낫지 않겠어요? 저는 마이스터 윌리엄을 천거합니다."

라우라가 윌리엄을 향해 찡긋 윙크하니 윌리엄이 미소를 머금고 살짝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둘의 모습에 에일리오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이를 본 해럴드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허… 탑주님의 혜안이 진정으로 놀랍구나.'

얼마 전 로이스는 말했었다.

'탑에는 변절자가 있어. 정확히는 변절자 무리겠지. 이번 일을 계획한 주동자와 그를 따르는 놈들의 목표는 비워진 탑주의 자리를 자신들의 세력으로 채워 넣는 걸 거다. 그리고 윌리엄은 그 무리에 속하는 자일 테고. 하지만 내 예상이 맞다면 윌리엄 그 새끼… 딴마음을 품었을 거야.'

여태껏 로이스가 수집한 정황이 이를 말해 주고 있었다.

빅터의 유산을 찾은 윌리엄.

그는 이를 밖으로 빼돌렸다.

그것도 탑이 아닌 외부 세력인 사이론으로 말이다.

만약 변절자들의 목표가 비워진 탑주의 자리를 자신들의 세력으로 채워 넣는 것이라면 굳이 외부 세력과 동조할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윌리엄 그 새끼의 목표는 자신의 동료가 탑주가 되는 게 아니라, 제 스스로가 탑주의 자리에 앉는 거다. 그 과정에서 사이론의 도움을 받았을 테고.'

처음에는 윌리엄도 에일리오를 지지했을 것이다.

하지만 욕심이 생겼겠지.

에일리오가 아닌 자신이 탑주의 자리에 오르고 싶다고.

그렇기에 윌리엄이 에일리오를 배신하고 사이론과 내통하며 거래를 했을 거란 게 로이스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상황은 로이스의 말처럼 흘러가고 있었다.

언뜻언뜻 비치는 불편해 보이는 에일리오의 심기.

보란 듯이 미소를 짓고 있는 윌리엄.

아마 지금 윌리엄의 배신은 에일리오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리라.

'만약 그날의 상황이 예상대로 돌아간다면… 넌 내가 던지는 돌이 될 거다, 해럴드.'

그렇게 로이스의 이야기를 상기해 낸 해럴드가 손을 번쩍 들었다.

자신을 향해 다수의 시선이 쏠리자, 해럴드가 로이스의 지시를 이행했다.

윌리엄과 에일리오.

둘 사이에 아주 큼지막한 돌덩이를 던지기 위해.

"말씀하시게, 해럴드."

"그 탑주의 자리… 본인도 도전해 볼까 하는데?"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에일리오와 윌리엄, 두 사람의 얼굴이 동시에 당황으로 물들었다.

마치 이건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말이다.

* * *

마이스터들의 대회의가 일단락되고, 탑주 선발 투표의 시일이 이틀 뒤로 정해졌다.

그사이 그날의 회의 내용이 탑 전체로 퍼져 나갔다.

"이번에 탑주님을 뽑을 거라는데?"

"뭐? 탑주? 아니, 그랜드 마이스터님들의 장례를 치른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탑주야?"

"그분들이 돌아가셨으니까 뽑는 거지. 세상에 탑주 없는 탑이 어디 있냐? 그간 탑주님 없이 운영된 우리 탑이 이상했던 거지."

"하긴.... 그래도 그랜드 마이스터님들이 돌아가시고 나서 바로 탑주를 뽑는다고 하니까 조금… 그렇기는 하네."

"애초에 그랜드 마이스터님들이 탑주직을 계승하셨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텐데 말야."

염원의 탑 도제들이 둘 이상 모이면 어김없이 탑주 선발에 관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이번 탑주 선발에 세 분이 나오셨다는데?"

"세분이나?"

"에일리오 님, 윌리엄 님, 해럴드 님. 이렇게 세 분이라던데?"

"에일리오 님과 윌리엄 님은 그렇다 쳐도… 해럴드 님은 정말 의외네."

"너도 그렇지? 그분이 탑주 자리에 욕심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평생 연구만 하실 분일 거라고 생각했거든."

"우리만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니고 다들 그렇게 생각했을걸?"

"너는 누가 탑주님이 될 거 같냐?"

"글쎄 연륜이나 정통성을 보면 에일리오 님과 해럴드 님이지. 그랜드 마이스터 님들의 제자잖아?"

"탑의 장기적인 미래를 봤을 때는 윌리엄 님도 괜찮지 않을까? 마이스터 님들 중에서 젊은 축에 속하잖아?"

"뭐, 우리가 이렇게 말해 봤자 뭐가 달라지겠냐. 어차피 마이스터 님들께서 알아서 정하시겠지. 그분들 중에 한 분이 탑주가 된다고 해도 이상할 게 전혀 없으니까."

탑주 선발에 모든 염원의 탑 일동의 관심이 쏠린 가운데.

평화로운 오후.

해럴드의 저택을 방문한 이가 있었다.

"오랜만이군, 에일리오. 자네가 내 집에 찾아온 건."

"그러게, 한 5년 만이던가?"

접객실에 탁자를 놓고 마주한 해럴드와 에일리오.

"그래, 무슨 할 말이 있어 귀한 발걸음을 하셨는가?"

해럴드의 낮은 음성에 에일리오가 탐색하는 눈으로 물었다.

"그대의 저의가 궁금해서 말이지."

"내 저의?"

"어째서 탑주가 되겠다고 하였나?"

"자네도 하고 윌리엄도 하겠다는데, 나인들 못 할까?"

"원래 그런 거에 관심 없지 않았는가?"

그 물음에 해럴드가 등받이에서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나야말로 묻고 싶군, 에일리오 자네야말로 탑주의 자리에 관심이 없지 않았나?"

"...."

그 물음에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그러다 에일리오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한때는 그랬었지… 하지만 사람 마음이란 게 늘 한결같을 수는 없더군."

수십 년을 알고 지낸 친우의 진정한 속내에 해럴드가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이 한밤중에 찾아온 이유가 있을 텐데? 얼른 말하고 가시게. 피곤해서 쉬어야겠으니."

"…도와주게."

"...."

"자네가 날 지지해 준다면 내가 탑주가 될 수 있을 걸세. 정통 계승자인 우리가 탑을 이끌어야지 외부에서 들어온 윌리엄에게 탑을 내줘서야 되겠는가?"

"허… 잊은겐가? 나 또한 탑주가 되겠다고 했네만?"

"알고 있지. 그러니까 이렇게 부탁하는 거 아닌가. 자넨 탑주 선발에서 빠지고 날 지지해 주게. 부탁일세."

해럴드는 말없이 에일리오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의 속은 너무도 복잡했다.

'뻔뻔하구나… 참으로 뻔뻔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면.

그랬다면 애초에 자신이 탑주 선발에 지원할 일도 없었겠거니와 어쩌면 탑주 선발에서 그를 뽑았을 것이다.

어차피 누가 탑주가 되든 자신은 연구만 하면 되며, 이왕이면 탑의 정통성을 이은 에일리오가 탑주가 되는 것이 좋을지 모르니 말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알고 나니 오랜 친우의 부탁이 뱀의 속삭임처럼 간사하게 들릴 뿐이었다.

배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역겨움을 참아 내며, 해럴드는 아무런 내색 없이 물었다.

"설령 내가 도와준다고 한들, 자네가 탑주가 되려면 다른 마이스터들의 표가 있어야 하는 걸세. 나 하나가 자넬 도와준다고 무슨 힘이 되겠는가."

"스스로의 가치를 너무 낮게 잡고 있군. 더글라스 님의 제자이자 뚜렷한 정통성을 지닌 후보가 바로 자네일세. 그런 해럴드가 지지해 준다면 그것만으로도 다른 마이스터들의 마음을 나에게 돌리기 충분할 거야."

"...."

이대로는 자신의 우글거리는 속내가 들킬까 싶어 해럴드는 눈을 감았다.

"내 생각해 보지.... 난 쉬려 하니 이만 돌아가 주게."

"…부디 현명한 선택을 해 주길 바라네."

그렇게 이야기를 마친 에일리오가 해럴드의 저택을 떠나갔다.

하지만 해럴드는 쉴 수 없었다.

연이어 찾아온 손님이 있었기 때문이다.

"…자네도 내 지지를 얻기 위해 온 건가?"

"이런, 에일리오 님이 먼저 다녀가셨던 모양이군요."

윌리엄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런 그를 향해 해럴드는 로이스가 미리 지시한 말을 넌지시 던져 보았다.

"쯧, 어쩌자고 무모한 싸움을 시작했는가?"

"무모한 싸움이라뇨?"

"에일리오에게 들었네. 자네… 원래는 에일리오를 지지해 주기로 했었다지?"

해럴드의 이야기에 윌리엄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에일리오 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까?"

"여기 와서 한 시간 동안 화를 내고 가더군. 원래 자신을 지지해 주기로 했던 자네가 배신했다고."

물론 에일리오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다만 로이스가 시키는 대로 한 말일 뿐이었다.

윌리엄과 에일리오의 관계를 떠보기 위해 말이다.

그런 사실을 모르는 윌리엄은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이 빌어먹을 영감탱이가 그딴 것까지 말하다니!'

원래 자신과 에일리오가 애초에 한통속이었다는 것은 몇몇만 알고 있는 비밀이었다.

그것을 해럴드가 알고 있다는 것은 윌리엄의 관점에서 에일리오가 발설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후우...."

작게 한숨을 내쉰 윌리엄이 잠깐 굳어졌던 표정을 정돈하며 입을 열었다.

"예,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한때나마 저와 에일리오 님은 한뜻을 가지고 있었지요."

해럴드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윌리엄의 인정.

그것으로 인해 이번 일의 주동자가 에일리오임이 다시금 확실해졌다.

"하지만 배신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저 저 또한 에일리오 님 못지않게 탑주의 자리에 어울리는 존재라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정통성은 에일리오에게 있네."

"알고 있습니다. 그것만이 에일리오 님이 가진 무기죠. 그러나 해럴드 님이 저희 편이 되어 주신다면 그 정통성 또한 해결되지 않겠습니까?"

"…저희?"

"아, 이런… 이걸 말씀드린다는 걸 깜빡했네요."

살살 눈웃음을 짓는 걸 보니 윌리엄이 일부러 '저희'란 단어를 언급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미 저와 뜻을 함께하고 있는 동지들이 있습니다. 이는 에일리오 님 측도 마찬가지고요."

"...."

"아마 해럴드 님이 이번 탑주 선거에 나오신다고 해도 표를 얻기는 쉽지 않으실 겁니다. 그러니 차라리 저희와 함께하시고 필요한 거를 얻어 가시는 게 어떠실지요?"

"필요한 거라...."

"혹여 에일리오 님께서 무얼 준다고 하셨습니까?"

"글쎄? 별다른 말은 없었네만?"

"이런 이런… 귀한 분을 섭외하면서 아무것도 안 걸었단 말입니까?"

"그 말은 자네는 나에게 무언가를 해 줄 수 있다는 거로 들리네만?"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무얼 줄 수 있지?"

"수용 가능한 것이라면 뭐든지 해드릴 수 있습니다. 전폭적인 연구 지원금에서부터 원하신다면 독립해서 해럴드 님만의 탑을 만들 수 있게 아낌없는 지원을 해 드리지요."

"...."

"지금 이 자리에서 답을 주시기 어렵다면 천천히 생각해 보고 알려 주시길.... 아직 이틀의 시간이 있으니 말입니다."

"…생각해 보겠네."

"그럼 전 이만."

말을 마친 윌리엄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고 방을 빠져나갔다.

그렇게 홀로 남겨진 해럴드가 작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보셨습니까?"

누군가를 향한 물음.

이에 허공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고생했다."

곧 허공에서 뚝 떨어지는 4개의 인영.

로이스와 더글라스, 플로리아와 에리카.

로이스의 뒤에 선 플로리아의 안색은 거무죽죽했다.

그녀가 슬픈 눈으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됐어. 네가 죄송할 게 뭐 있냐. 스승을 죽이려고 했던 놈이 짐승만도 못한 새끼인 거지."

그답지 않게 플로리아를 위로한 로이스.

에일리오의 변심을 확인하였기 때문인지 다른 이들의 낯빛도 무겁기는 마찬가지였다.

그 속에서 해럴드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 저는 어찌하면 되겠습니까?"

"더는 할 거 없어. 쉬어."

"네?"

"넌 할 일 다 했다고."

"제, 제가 말입니까?"

자신이 한 일이라고는 그저 로이스가 시키는 대로 탑주 선거에 나가겠다고 말한 거뿐이었다.

혹은 오늘 윌리엄과 에일리오를 만나 그들과 대화를 나눈 것뿐.

그런 해럴드의 속내를 읽은 것인지 로이스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네가 한 일은 잘 굴러가던 수레 앞에 큼지막한 돌멩이 하나를 던진 거야. 밟고 지나가면 그만인 돌멩이지만, 아마 수레는 제법 덜컹거리겠지."

"...."

윌리엄과 에일리오.

각각의 수레를 끌고 경쟁을 하는 두 사람.

그리고 그 수레 안에는 그들이 포섭한 이들이 타고 있을 것이다.

"수레가 크게 덜컹거리면 아무래도 그 안에 타고 있는 사람들이 놀라지 않겠어?"

비록 돌멩이는 큰 위협이 되지 않지만, 수레에 타고 있는 이들이 놀라 수레에서 뛰쳐 내리려고 할 수도 있었다.

혹은 이 수레가 안전한지에 대해 수레를 끌고 있는 이에게 항의하거나.

"에일리오든 윌리엄이든, 제 수레 안에 있는 녀석들을 다독이느라 꽁무니에 불난 놈들처럼 뛰어다니겠지."

그 단적인 예로 회의가 끝나기 무섭게 둘은 해럴드의 저택을 찾지 않았는가.

아마도 지금쯤 에일리오와 윌리엄은 피아를 구분하고 아군을 보듬기 위해 열심히 움직이고 있으리라.

그렇다면 그들 사이에 거래가 오가는 것은 당연했다.

로이스가 원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우리는 누가 누가 어떤 놈의 수레에 타고 있는지, 수레가 덜컹거릴 때 그놈들이 뭘 흘리는지 확인할 거다."

놈들이 거래하며 흘릴 부정의 찌꺼기.

로이스는 그것을 모을 생각이었다.

자백 성법을 쓰면 놈들의 죄를 밝혀내기는 쉽다.

하지만 문제는 아주 사소한 죄까지 밝혀내기는 어렵다는 거다.

원하는 모든 걸 물어보기 전에 성법에 당한 이는 백치가 되거나 피를 토하고 죽을 테니까.

성법에 당해 죽어 간 검은 금 용병단의 행동대장처럼.

하지만 로이스는 놈들이 저지른 부정의 아주 사소한 것 하나하나까지 원했다.

그리고 지금, 로이스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잠입과 추적, 도청의 달인인 핀이 열심히 그들의 뒤를 캐고 있었다.

이미 핀이 물어 오는 정보가 로이스의 살생부에 차곡차곡 적혀 가는 중이었다.

"어떤 놈이 선거에서 이기든 지든 상관없어. 어차피 싸그리 잡아 족칠 거는 똑같으니까."

미소 짓는 로이스의 눈이 시퍼렇게 빛났다.

"나는 그저 죽일 놈과 죽을 만큼 때릴 놈만 구분만 하면 돼."

스산한 살기에 해럴드는 마른침을 삼켰다.

'큰 피바람이 불겠구나....'

그리고 피바람이 불 날은 아마도 새로운 탑주를 뽑는 그날이 되리라.

243화. 장난질 (5)

그날 이후로도 윌리엄과 에일리오가 한 번 더 찾아왔었지만, 해럴드는 나중에 답을 주겠다며 그들을 돌려보냈다.

그렇게 이틀의 시간이 흘러, 탑주 선거 당일.

속속들이 마이스터들이 염원의 탑 정문에 나타났다.

이들을 보며 말단부터 1급 도제까지 술렁거렸다.

"어떤 분이 될 거 같냐?"

"글쎄? 난 누가 되든 상관은 없는데. 어떤 분이 탑주가 된다고 해도 우리 탑이 크게 달라질 거 같지도 않고."

무려 250여 년간 공석이었던 탑주의 자리가 채워지는 순간인 만큼 염원의 탑 도제들의 관심이 쏠리는 것은 당연지사.

그리고 또 한 가지.

탑주 선발에 관심을 가진 것은 염원의 탑만이 아니었다.

사이론의 중앙 광장.

비교적 이른 시간이었지만, 수많은 사람이 광장에 모여 있었다.

그 근처를 지나가던 행인이 하늘에 떠오른 직사각형 형태의 거대한 판을 보며 물었다.

"저게 뭡니까?"

"응? 얘기 못 들으셨우? 그제 아침에 염원의 탑에서 설치해 놓고 간 거지 않소? 뭐라더라… 영상 수신기? 뭐 그런 거라던데."

"영상 수신기? 염원의 탑에서 저걸 뭐 하러 설치했답니까?"

"오늘 탑의 최상층이 열리는 걸 공개한답디다."

"예? 탑의 최상층요? 그, 단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는 탑주의 방? 거길 말하는 겁니까?"

"그렇다는구려. 이번에 염원의 탑에서 탑주를 뽑는데, 250년 만에 탑주가 탄생하는 걸 기념해서 우리 같은 일반인들에게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탑주의 방이 열리는 걸 보여 준다는구려."

"허… 250년 만에 열리는 탑의 최상층이라니. 그 소문으로만 무성한 문이 열리긴 열리는군요. 저는 솔직히 그거, 사이론에 전해지는 괴담인 줄 알았습니다."

"누군들 안 그렇겠소."

"그럼, 여기 모인 사람들 모두가 그거 보려고 이러고 있는 거겠군요?"

"역사에 기록될 만한 일이니 다들 이 시간에 이러고 모여 있는 거지요."

그 말이 맞았다.

새로운 염원의 탑주를 본다는 사실은 후대에 길이길이 자랑할 만한 일이었다.

이에 행인도 결국 다른 이들처럼 중앙 광장에 자리를 펴고 앉았다.

무려 250년 만에 탄생하는 염원의 탑주를 보기 위해 말이다.

그렇게 염원의 탑은 물론 사이론의 모든 관심이 이번 탑주 선발에 모여들었다.

* * *

마이스터들이 모인 회의장.

알 수 없는 긴장감이 15인 사이에 감돌았다.

평소였다면 의장인 에일리오가 회의를 진행해 나갔겠지만, 그 역시 탑주 후보로 나온 인물.

그를 대신해 투표의 진행을 맡은 1급 도제는 마른침을 삼켰다.

'…미치겠네. 괜히 한다고 그랬나?'

오랜 공백을 깨고 탑주가 선발되는 영광스러운 자리.

공정한 일 처리를 위해 1급 도제 몇몇 역시 회의장에 들어올 수 있었다.

그중에서 투표의 진행을 맡은 1급 도제.

그는 막상 회의장에 들어서서 15명의 마이스터를 마주하고 나니 오금이 절로 저렸다.

'여기서 실수라도 했다가는....'

마이스터들에게 찍혀도 단단히 찍힐 것이다.

그렇다면 창창한 자신의 앞날에 먹구름이 끼겠지.

그가 속으로 '잘하자'를 되뇌고 있을 때 에일리오가 눈짓했다.

"흠… 시작하시게."

"네!"

투표의 방식은 간단했다.

그저 한 장의 종이에 후보의 이름을 적어서 제출할 것.

그리고 그것을 모두가 보는 앞에서 개표할 것.

대륙에서 가장 부유한 탑의 탑주를 선출하는 방식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간단했다.

하지만 이보다 간결하고 더 확실한 방법은 없었다.

그렇게 1급 도제가 막 종이를 나눠 주려는 찰나.

"본인은 이번 탑주 후보에서 물러나겠소."

난데없는 해럴드의 발언에 마이스터들의 얼굴에 놀람이 스쳤다.

윌리엄과 에일리오는 어느 정도 예상했다는 듯한 표정과 함께 안도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의아하기도 했다.

지난 이틀간 그 누구의 편도 들어주지 않고, 또한 그 어떤 행동도 보이지 않은 해럴드.

이렇게 쉽게 후보에서 물러날 거면 왜 탑주직에 오르겠다고 선언을 한 것인지 그들로서는 의문일 따름이었다.

어찌 되었거나 해럴드가 누군가의 편에 선다는 것은 에일리오나 윌리엄이나 서로 간에 부담스러웠기에 해럴드의 사퇴는 둘에게 좋은 일이었다.

그렇게 작은 해프닝이 있고 난 뒤, 투표용지가 15명의 앞으로 전달됐다.

슥- 슥-.

각자 지지하는 후보의 이름을 적은 후 그 투표지는 1급 도제가 든 작은 상자에 담겨 앞으로 옮겨졌다.

불과 채 5분도 안 되는 짧은 시간.

250년에 비하면 찰나나 다름없는 순간으로 비어 있던 탑주가 결정될 것이다.

"그럼… 개표하겠습니다."

마이스터는 물론이요, 개표를 맡은 1급 도제들까지 긴장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첫 번째 표가 펼쳐졌다.

곧 표의 주인이 개표자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첫 번째 표는 마이스터 에일리오 님이십니다."

곧이어 두 번째 표가 펼쳐졌다.

"두 번째는 마이스터 윌리엄 님이십니다."

그리고 세 번째.

"세 번째는 백지… 기권표입니다."

에일리오 1표, 윌리엄 1표, 기권표 1표.

공평하게 1표씩이 나온 상황.

탄력을 받은 개표가 쭉쭉 이어졌다.

약 10분여가 흘러.

총 14개의 표가 펼쳐진 결과는 이러했다.

기권 2, 에일리오 6, 윌리엄 6.

후보자를 포함한 마이스터 15명 전원이 투표하였으니 이제 남은 것은 단 한 표뿐.

만약 남은 표가 기권이라면 이번 투표는 무효가 되어 다시금 치러지게 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딱 한 표 차이로 탑의 주인이 정해질 것이다.

"마지막 표는...."

부스럭-.

개표자가 떨리는 손으로 종이를 펼침과 동시에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마지막 표는… 에일리오 님이십니다."

짧은 정적이 흘렀다.

동시에 몇몇 마이스터의 얼굴에 희비가 교차했다.

에일리오를 천거한 다미안이 일어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축하드립니다, 마이스터 에일리오. 아니, 이제는 탑주님이라고 불러야겠군요. 하하!"

다미안의 웃음소리에 라우라의 인상이 구겨졌다.

반면, 선거에서 진 윌리엄은 의외로 담담해 보였다.

아니, 입가에 은은한 미소까지 띤 채 에일리오에게 다가갔다.

"축하드립니다. 앞으로 저희를 잘 이끌어 주셨으면 합니다."

"기대에 부응하도록 노력하겠네."

에일리오와 윌리엄이 악수를 나눴다.

그때 에일리오의 지지자인 발렌이 다가와 말했다.

"이럴 게 아니라, 얼른 탑의 정상으로 가시지요. 사이론의 시민들과 탑의 제자들이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 그럽세."

발렌의 이야기에 마이스터들이 회의장을 빠져나와 탑을 오르기 시작했다.

앞서는 이들과 뒤에 따르는 이들.

그중 가장 뒤쪽에서 걸어가는 해럴드의 곁으로 델피나가 다가왔다.

"쯧, 내 너한테 한 표를 주려 했더니만, 해 보지도 않고 기권인가?"

"나 말고 기권표가 누군가 했더니 할망구였는가?"

"이놈이나 저놈이나, 편 가르기나 하면서 살살 꼬드기는 꼬락서니가 영 마음에 안 차서 말이지."

"클클."

"에이, 실없는 영감탱이 같으니라고. 탑주가 되겠다고 했으면 되든 안 되든 부딪혀라도 볼 것이지, 뭐가 무섭다고 쏙 빠져서는."

투덜거리는 델피나의 목소리에 해럴드는 환히 미소 지었다.

이에 델피나가 와락 인상을 구겼다.

"뭐가 좋아서 그리 실실 쪼개는가?"

"재밌는 게 생각나서 말이지."

"재밌는 거?"

"아니, 아니. 재밌어질 거라고 해야 하는 게 맞겠군. 허허."

"…뭔 소리를 하는 게야?"

"그런 게 있네. 한 가지 귀띔을 해 주자면… 기권표를 던진 할망구의 선택이 옳았다는 걸세."

"...?"

계속해서 킬킬거리는 해럴드를 향해 델피나가 의아한 눈빛을 보냈다.

그들이 그렇게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 모든 이들이 탑의 정상에 도달했다.

마이스터들이 주변을 둘러보며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허, 여기가 탑주의 방이군."

"이 탑에서 수십 년을 보냈지만, 이곳에 올라와 보는 거는 처음이구려."

바로 밑에 층인 그랜드 마이스터의 집무실까지는 마이스터들도 자주 올랐지만, 최상층은 그들도 처음이었다.

에일리오를 필두로 20여 명의 사람이 계단을 통과하자 너른 복도가 나타났다.

그리고 복도의 끝.

그곳에 화려한 장식의 문이 놓여 있었으니.

이를 본 이들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저게 말로만 듣던 열리지 않는 탑주의 방이구나!'

염원의 탑은 물론 사이론 전역에 괴담처럼 전해지는 방의 문이었다.

그리고 그 문 앞에는 다수의 영상 송출 기물이 염원의 탑과 사이론의 광장으로 영상을 송출하고 있었다.

그렇게 에일리오가 잠시 멈춰 문을 바라보고 있을 때, 다미안이 그의 뒤로 다가왔다.

"자, 가셔서 한 말씀 하시지요."

"그러지."

다미안의 재촉에 에일리오가 걸음을 옮겼다.

곧 문을 등지고 영상 송출기를 마주한 에일리오.

"흠흠...."

살짝 헛기침하며 긴장을 달랜 그의 입술이 열렸다.

"친애하는 염원의 탑 일동, 사이론 영지민 여러분...."

나직한 음성이 영상 송출기를 타고 퍼져 나갔다.

* * *

에일리오가 문 앞에 선 순간, 염원의 탑 하층과 사이론 광장과 설치한 영상 수신기에 불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 안에 떠오른 에일리오의 얼굴.

"친애하는 염원의 탑 일동, 사이론 영지민 여러분...."

에일리오의 목소리가 퍼져 나가며 이를 보고 있던 이들이 수군거렸다.

"마이스터 에일리오 님이 탑주가 되셨구나!"

"내 역시 이럴 줄 알았지! 에일리오 님이 아니면 누가 탑주가 되겠어!"

에일리오를 지지하던 염원의 탑의 도제들.

그리고 사이론 영지의 시민들.

그들 모두가 새로운 탑의 주인에게 축하를 보냈다.

그사이에도 에일리오의 탑주 취임사는 계속됐다.

잠시 뒤.

"…감사합니다."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취임사가 끝나고 에일리오가 문을 향해 뒤돌아섰다.

"어? 연다!"

"드디어 열리는구나!"

곧 사이론 전역에 숨 막히는 정적이 감돌며 모든 이목이 영상 속 탑주의 방문으로 쏠렸다.

* * *

염원의 탑.

그중에서도 최상층 탑주의 방문은 열리지 않는 방이라 불렸지만, 문자체가 특별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수백 년간 주인이 없기에 열리지 않는 방이라 불린 것일 뿐.

젊은 시절, 탑주의 방에 관심이 생긴 에일리오는 스승인 플로리아에게 물었었다.

'스승님, 탑주의 방에는 뭐가 있는 겁니까?'

그 물음에 플로리아는 미소를 머금고 '아무것도 없다'라 답했다.

처음에는 그게 중의적인 의미를 지닌 말이라고 생각했으나 나중에 가서는 정말로 탑주의 방이 텅텅 빈 공간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아무것도 없는 탑주의 방.

언젠가는 돌아올 탑주를 위해 그랜드 마이스터들이 비워 놓았고, 돌아온 탑주가 원하는 것들로 채워질 공간.

그렇기에 더욱 의미가 있는 장소가 아닐 수 없었다.

굳건하게 닫힌 방문에 손을 대며 에일리오는 감회에 젖어 들었다.

'앞으로 이곳이… 나의 공간이 된다.'

마이스터가 아닌 염원의 탑주라 불릴 자신만의 공간.

스윽-.

오래전에 만들었지만, 그랜드 마이스터들이 관리해 온 방문은 조금의 잡음도 없이 부드럽게 열렸다.

가장 먼저 에일리오의 시야에 들어 온 것은 한 층을 전부 사용하고 있는 만큼 널찍하고 쾌적한 공간이었다.

자체 정화 성법이 새겨지고 유지되어 온 만큼 쿰쿰한 냄새는 물론 먼지 한 톨 없이 깔끔한 탑주의 방.

거기에 사방에 뚫린 커다란 창을 통해 맑은 햇볕이 실내를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도 좌중의 시선을… 아니, 염원의 탑에서 보내는 영상을 보고 있는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탑주의 방 창가에 선 누군가의 뒷모습이었다.

'이게 어찐 된...?'

아무것도 없다던 플로리아의 말은 옳았다.

다만 물건이 아닌 사람이 있었을 뿐.

그렇게 에일리오가 놀라 굳어 있을 때.

창가에 서 있던 이가 문을 향해 돌아섰다.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은 하얀 머리의 미청년.

로이스가 놀라 토끼 눈이 된 이들을 향해 미소를 보냈다.

"어서 와라. 기다리다가 지루해 죽을 뻔했네."

은은한 웃음기가 담긴 목소리에 에일리오가 굳은 목소리로 물었다.

"…누구냐? 여긴 어떻게 들어온 거지?"

그의 물음에 로이스가 문을 향해 한 발짝 걸음을 내디뎠다.

"내가 누구냐고? 글쎄, 누구라고 설명해 줘야 할까?"

다시 이어진 한 걸음.

저벅-.

"일단, 250년 전에는 탑의 막내 제자였지. 하지만 지금은...."

그리고 또 한 걸음.

밝은 햇살 속에 느릿느릿 움직이는 로이스의 모습은 모두의 눈에 선명하게 담겼다.

저벅-.

"네가 밟고 있는 이 공간의 주인이자...."

그리고 마침내 로이스가 탑주의 방 중앙에 자리했을 때.

그의 입에서 나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염원하는 이들을 위해 지어진 이 성탑의 당대 탑주라고 할까?"

탑주의 방 안에 퍼진 목소리가 모두의 뇌리에 틀어박혔다.

15인의 마이스터는 물론, 염원의 탑의 제자들.

나아가 영상 송출기 앞에서 현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모든 이들의 머릿속에 말이다.

244화. 탑의 주인 (1)

쥐 죽은 듯한 적막이 감돌았다.

250여 년 만에 공개된 탑주의 방.

그 한가운데서 스스로를 탑주라고 칭하는 청년.

하필 새로운 탑주가 탄생한 이때, 그것도 탑 내의 상황이 생생하게 중계되는 순간 나타난 존재로 인해 모두가 당황으로 얼어붙었다.

또한, 스스로 탑주라 말한 로이스의 발언이 계속해서 뇌리에 맴돌았기에 좌중은 더욱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숨소리마저 들리는 짧은 적막이 이어지던 그때.

"저 아이는...?"

아구스의 작은 중얼거림을 들은 라우라가 물었다.

"아는 놈입니까?"

"이번… 초월학관 하급 기술반의 학생이네."

"초월학관의 학생?"

라우라의 되물음에 아구스가 설명을 덧붙였다.

"왜, 이번에 필기 전 과목 만점을 받은 학생이 있지 않았나? 그 녀석이네."

아구스의 설명은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들을 수 있었다.

"아아!"

이에 라우라와 윌리엄이 들어봤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다미안은 성난 얼굴로 버럭 소리쳤다.

"뭣들 하는 게야!"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

"언제까지 멍하니 있을 셈이냐! 당장 저 정신 나간 놈을 끌어내지 않고!"

"아… 네!"

"아, 알겠습니다!"

다미안의 명령에 1급 도제들이 움직였다.

그들이 다급히 로이스를 향해 다가가려는 찰나.

"다미안 필스."

나직하게 울린 로이스의 목소리에 1급 도제들의 움직임이 다시금 멈췄다.

다미안의 이름을 부른 로이스가 품에서 수첩을 꺼내 들었다.

바로 로이스가 만들어 낸 살생부였다.

로이스는 지난 이틀간 핀이 알아 온 정보를 읊기 시작했다.

"나이는 58세. 염원의 탑에 들어온 건 26년 전이며 마이스터에 오른 건 7년 전이군. 아직 결혼은 하지 않았고...."

다미안의 인적 사항을 읊어 가던 로이스의 눈이 싸늘하게 변했다.

"상습적으로 젊은 도제들을 성희롱해 왔군. 그것도… 남자만? 이건 뭐 하는 놈이야?"

로이스의 입가에 조소가 걸렸다.

"뭐, 개인적인 성향은 존중해야 한다만… 싫다는 이를 억지로 취하고 지위를 이용해 입막음한 건 상당히 역겹네."

로이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다수의 시선이 다미안에게 쏠렸다.

당황과 분노로 얼굴이 붉어진 다미안이 버럭- 소리쳤다.

"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게야!"

쩌렁쩌렁한 목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로이스는 수첩의 페이지를 넘겼다.

"다음은 라우라."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라우라가 움찔거렸다.

"올해 나이 51세. 귀족들에게 뒷돈을 받고 초월학관에 부정 입학을 주선함. 또한, 초월학관 내에 연구회를 가장한 사조직을 만들어 학생들의 진로를 미끼로 돈을 받아 처드셨군. 거기다… 얼씨구? 탑의 운영 공금을 주기적으로 횡령해서 제 주머니를 채웠네?"

"...?!"

"다른 곳에서 해 처먹었으면 나도 뭐라 하지는 않았을 텐데… 감히 내 탑에서 이딴 짓을 벌여?"

"...?!"

자신들이 벌인 짓이 로이스에 의해 낱낱이 까발려지자 다미안과 라우라가 광분할 수밖에 없었다.

"가,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그딴 날조를 하는 거냐!"

"뭣들 하고 있어! 당장 영상 송출기 꺼 버려!"

"우선 저 빌어먹을 놈부터 끌어내!"

"어서!"

이미 로이스의 목소리가 영상 송출기를 타고 생중계되었지만, 더 늦기 전에 지금에라도 막아야 했다.

하지만 1급 도제들은 로이스의 이야기에 너무 놀란 나머지 멍하니 다미안과 라우라만 바라볼 뿐이었다.

"이, 이것들이?!"

다급해진 라우라가 직접 송출기를 꺼 버리려 움직였다.

그 순간.

딱-.

로이스의 손가락이 튕겨지며 강한 압력이 라우라를 짓눌렀다.

"악!"

영상 송출기 근처에는 가 보지도 못한 채, 바닥에 무릎 꿇은 라우라.

"이, 이게 무슨 짓이냐!"

"당장 라우라를 풀어 줘라!"

갑작스러운 아연실색한 마이스터 중 몇몇이 소리쳤지만, 로이스는 이를 무시했다.

대신 그는 문 뒤쪽을 보며 입을 열었다.

"해럴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해럴드가 한 발짝 앞으로 나서며 고개를 숙였다.

"부르셨습니까, 탑주님."

"...?!"

공손한 해럴드의 태도, 그리고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탑주란 명칭에 모두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거기서 영상 송출기 잘 지키고 있어. 내 허락 없이 손대려고 하는 놈은 가차 없이 대갈통 날려 버려. 죽여도 상관없다."

"예, 그리하겠습니다."

"해, 해럴드?"

"해럴드, 미치셨소?!"

로이스의 명령에 고개를 끄덕이는 그를 보고 다른 마이스터들이 소리쳤지만, 해럴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해럴드는 자신의 아공간 주머니에서 초월기 수리용 해머를 꺼내 들어 바닥을 내리찍었다.

쿵-.

묵직한 타격음과 함께 해머의 머리가 바닥을 울리니 그 소리를 들은 이들이 어깨를 움찔 떨었다.

그리고 그 순간, 해럴드의 지척에 있던 델피나는 볼 수 있었다.

해럴드의 입가에 맺힌 연한 미소를 말이다.

'이 영감탱이… 재밌는 일이 있을 거라더니, 이걸 말하는 거였는가!'

그는 알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현재 상황도, 그리고 저 탑주를 자칭하는 청년의 존재도.

어이없어하는 델피나가 눈을 끔뻑이는 사이 로이스의 호명은 계속됐다.

"이네스."

한 차례 이름이 불린 다음, 어김없이 해당 마이스터가 저지른 죄목이 낱낱이 공개됐다.

이네스에 이어 발렌, 레오넬, 덤프.

그들이 저지른 죄도 가지각색이었다.

상습적인 폭행에 횡령, 심지어....

"마이스터란 놈이 절도? 그것도 취미로?"

황당할 정도의 죄목까지.

기록된 정보를 읊던 로이스가 혀를 내둘렀다.

"쯧. 이런 것들이 마이스터라고 불리고 있다니… 남부끄럽지도 않냐?"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그딴 망발을 늘어놓는 거냐!"

"해럴드, 당장 그 송출기 끄란 말이오!"

"이건 모함입니다!"

라우라, 다미안, 이네스, 발렌, 레오넬, 덤프.

윌리엄과 에일리오에게 붙은 마이스터들은 끝까지 자신들의 죄를 부정했다.

오히려 화를 내며 로이스를 노려보았고 영상 송출기를 끄기 위해 해럴드를 향해 달려들려 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해럴드가 해머를 휘두르며 두 눈을 시퍼렇게 떴기에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발렌이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

"아구스, 어떻게 좀 해 보시오!"

염원의 탑도 성탑이기는 하나 그들이 익히는 것은 기술 연구에 특화된 성법이었다.

때문에 그들은 이 자리에서 가장 무력이 높은 아구스를 바라보았다.

그가 해럴드를 제압하고 영상 송출기를 꺼 주기를 바라면서.

하지만.

"흠… 글쎄, 나는 좀 더 이야기를 듣고 싶네만?"

아구스는 작금의 상황을 흥미롭게 지켜볼 뿐이었다.

그때, 지금까지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에일리오가 입을 열었다.

"이야기는 잘 들었네."

"호오?"

"대체 이러는 저의가 뭔가?"

"저의?"

"증거도 없는 모함 따위로 우리 염원의 탑에 흠을 내려는 이유 말일세."

"증거라...."

로이스가 피식거렸다.

"증거가 필요한가?"

"…뭐라?"

"너희가 저지른 부정을 내가 알았다는 사실 자체가 증거이며, 너희를 벌할 근거다."

지독히 오만한 말이었다.

하지만 너무도 로이스에게 어울리는 발언이기도 했다.

애초에 그가 하는 일을 일일이 증거를 보이며 '내 말이 사실이니 너희는 벌을 받아야 한다!'라고 설득하는 일이 아니었다.

그에게 증거 따위는 필요 없었다.

로이스는 탑의 하나뿐인 탑주이며 심판을 내리는 자일 뿐.

염원의 탑에서는 그의 말이 법이자 진리였다.

"내가 죄를 확인했으니 너희는 그저 달게 벌을 받기만 하면 되는 거야."

로이스의 이야기에 에일리오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미쳐도 곱게 미쳤어야지. 다미안."

"예."

"내려가서 호위 법사들과 호위 무사들을 데려오게."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다미안이 곧장 등을 돌려 달려 나가려 했다.

딱-.

하지만 또다시 손가락이 튕겨지는 소리와 함께 다미안의 육신이 철퍼덕 바닥에 넘어졌다.

"큭! 컥!"

자신을 짓누르는 압력에 다미안이 퍼덕거렸다.

"가긴 어딜 가? 이제부터 시작인데."

로이스에게서 뿜어진 서늘한 기운으로 주변 온도가 확 내려갔다.

이제는 네 차례라는 듯 에일리오를 본 로이스가 입을 열었다.

"에일리오 도미닉. 올해 나이 67세."

지금껏 사람들의 죄를 밝혀낸 목소리가 다시금 들려오자 좌중의 이목이 로이스의 입에 집중됐다.

대체 저 입에서 이번에는 무슨 이야기가 나올지 관심이 쏠렸다.

그리고 이번에 나온 이야기는 좌중의 상상을 훌쩍 뛰어넘은 것이었다.

"너는 탑의 마이스터들을 선동해 분란을 일으켰으며, 검은 금 용병단에게 사주해 그랜드 마이스터들을 살해하려 했다."

"...?!"

로이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경악과 헛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그랜드 마이스터 살해라니!"

"맙소사!"

주변에 퍼져 나가는 술렁거림에 에일리오가 소리쳤다.

"조용!"

짧고 굵직한 목소리가 이목을 잡아끌었다.

그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로이스를 노려보았다.

"저런 얼토당토않은 헛소리에 왜 이리 소란을 떠는 건가!"

좌중을 사로잡는 에일리오의 존재감.

제법 침착한 그의 모습에 로이스가 미소를 지었다.

과연 저 침착함이 언제까지 유지될지.

그것이 사뭇 기대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