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증거 (2)
로칸 7세가 살짝 고개를 돌렸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가?"
그의 동공이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를 본 로이스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아까 한 말 그대로입니다만?"
"...."
로이스의 별거 아닌 이야기에 로칸 7세의 표정이 한 번 더 변했다.
한참을 말없이 서 있던 그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알고 그리했던 건가."
"뭘요?"
"오늘 회의장에서 말일세."
이번에는 로이스 쪽에서 아무런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로칸 7세에게는 충분히 답이 되었다.
"후우… 하긴, 생각이 있다면 모를 리가 없겠지."
한숨을 내쉰 그가 완전히 몸을 틀었다.
"그래도 그 말을 들으니 안도가 되는군. 교단이 아직 우리를 믿어 주고 있다는 소리일 테니까."
"그런가요?"
선문답 같은 대화가 이어졌다.
이를 듣는 이들이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편, 선문답을 통해 어느 정도 감을 잡은 로칸 7세가 확신을 가지고 말했다.
"교단을 습격한 것은 우리가 아니네."
몇 시간 전, 로이스와 파브로가 떠나고, 회의는 어영부영 마무리됐다.
더불어 로칸 7세의 고민거리가 하나 더 늘어났다.
발견된 스노우 킹의 행적만으로도 머리가 아픈 와중에 새로운 일거리가 던져진 것이다.
때문에 그는 밤새 고민해야만 했다.
정말로 교단을 습격한 것이 왕국의 소행인지?
그렇다면 왕국의 일원 중, 누군가가 일을 꾸민 것일지.
생각을 하면 할수록 여러 가지 가능성이 발생했다.
머리가 터질 듯 고민한 끝에 로칸 7세는 결심했다.
"아까 왕국의 신하들을 믿냐고 물었는가."
"그랬죠."
"난 믿네."
왕국의 신하들을 믿자고.
오랜 세월 쌓아 온 그들과 신뢰를 믿어 보자고.
그리 결심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또 다른 경우의 수가 발생했다.
왕국에서 교단을 습격하지 않았다면, 누가 그랬을까?
이로 인해 누가 가장 이득을 보는 거지?
생각이 그쯤 이르니 오히려 머릿속이 맑아지며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교단과 왕국이 사이가 틀어지면 이득을 보는 이들.
그 답은 뻔했다.
"난 이번 일이 제국의 짓이라고 확신하네… 지금 상황에서 교단과 우리가 반목하길 원하는 곳은 제국과 그들에게 붙어먹은 왕국들뿐이지. 교주, 그대도 이걸 어느 정도 예상한 것 아닌가?"
"글쎄요."
로이스의 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죠."
"떠보는 건 그만하게. 그럼 대체, 무슨 대화를 하고자 나를 이곳으로 납치… 데려온 거지?"
"...."
"그리고 무엇을 알고자 나에게 신하들을 믿냐고 물은 건가? 그건 교주 그대도 이번 일의 배후가 제국이란 것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어서 아닌가? 아니, 그대는 이미 회의장에서부터 이번 일의 범인이 왕국의 사람이 아니라고 확신하고 있었네."
"...."
"또한, 회의장에 있을지 모를 세작을 염려해 우리 왕국과 갈라서는 듯한 자세를 취한 거겠지. 내 말이 틀렸는가?"
자신을 노려보는 부리부리한 시선에 로이스가 돌연 빙그레 눈웃음을 지었다.
"이거 생각보다 눈치가 빠르시네요. 음… 이 정도 생각도 못 하는 다른 놈들이 멍청한 건가?"
"후우...."
"뭐, 전하의 생각이 얼추 맞습니다. 저도 이번 일의 배후를 제국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왕국 입장에서는 교단과 척을 질 이유가 없으니까요."
"맞네."
"하지만 그 모든 게 심증뿐이죠. 결정적인 증거가 없잖아요."
"교주...."
"전하를 왜 납치해 왔냐고요?"
한쪽에서 '와, 납치인 거 인정했어'라는 누군가의 중얼거림이 들렸지만, 로이스는 이를 가뿐히 무시했다.
"증거를 찾기 위해서입니다. 제국의 짓이라 생각은 하지만, 결정적으로 놈들이 확실히 범인이라는 증거를 찾지 못했습니다. 그 일에 대해 왕국의 협조를 바란다고… 말하려고 했습니다."
로칸 7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는 저 교주의 생각이 궁금했다.
아니, 그것은 자신이 품은 최종 의문이기도 했다.
밤새 고민을 했지만, 내리지 못한 마지막 문제.
그가 로이스를 직시하며 물었다.
"증거를 찾아서 어쩌려는 건가? 설령 결정적인 증거를 찾았다 해도, 저들은… 그것을 부정할 걸세."
로이스에게 던진 질문은 로칸 7세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했다.
설령 증거를 찾았다 한들.
이번 일이 제국의 짓이 확실하다고 한들.
지금으로서는 왕국이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당장 눈앞에 닥친 스노우 킹의 문제만 해도 막기 급급했고, 설령 그것이 아니더라도 거대한 제국을 어찌하겠는가.
오히려 이 일로 제국에게 빌미를 주는 게 아닐까 걱정해야만 했다.
그런 로칸 7세의 고민과는 달리 로이스의 답변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아,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무슨 방법이 있는 건가?"
"아뇨."
"...?"
"제가 증거를 찾는 이유는 정당성 때문이에요. 저 자신을 위한 정당성이랄까?"
"그게… 무슨 말인가?"
"괜히 심증만 가지고 엄한 놈들 때릴 수는 없잖아요? 확실하게 증거를 잡아야 그놈들이 아니라고 발뺌해도 제가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팰 수 있으니까."
로이스가 말을 마치기 무섭게 한쪽에서 '그러니까 죽을 때까지 패려고 확실한 증거를 찾고 있다는 소리잖아요?'라는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딱-.
칵!
이마를 부여잡고 쓰러지는 켄드릭.
한쪽에서 그런 촌극이 벌어짐에도 로칸 7세는 웃을 수 없었다.
그가 굳은 얼굴로 물었다.
"그 소리는… 제국과 전쟁을 하겠다는 뜻인가?"
이에 로이스가 가볍게 손을 휘휘 내저었다.
"에이, 무슨 거창하게 전쟁씩이나."
웃고 있던 로이스의 눈이 거짓말처럼 싸늘해졌다.
"그냥 일방적인 폭행이라고 해 주시죠."
"…그 폭행의 상대가 제국이란 걸 잊은 거는 아니겠지?"
"갑자기 뭔 뚱딴지같은 소리예요? 지금까지 열심히 얘기해 놓고. 제가 그걸 왜 잊어요?"
"허...."
로칸 7세에게서 기가 찬다는 듯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는 로이스를 미친놈 보듯 바라보았다.
도미넌트 제국이 어디던가.
겨울 대륙의 동부를 대부분 장악한 거대 국가였다.
그런 제국을 상대로 동네 친구에게 싸움을 걸듯 말하는 저자가 과연 제정신일까?
그것도 국가가 아닌 일개 종교 집단이?
그런 로칸 7세의 시선을 알아차린 것일까.
로이스가 피식거렸다.
"왜요? 제가 정신 나간 놈으로 보입니까?"
"…아니라고는 못 하겠군."
"글쎄요. 전 제가 매우 정상적이라고 생각하는데?"
"정상적이라면 제국을 상대로 싸움을 걸 생각을 안 했겠지."
로이스의 조소가 짙어졌다.
"그럼 어떤 게 정상적인 사고방식입니까?"
"…뭐?"
"덩치 큰 제국이 칸부르크 같은 약소 왕국을 집어삼키려고 수작질한 걸 알면서도 그냥 당해 주는 게.... 그게 정상적인 사고방식입니까?"
"...?!"
"처맞아서 아프지만 때린 놈이 세다고 그냥 숨죽이고 참는 게 정상적인 사고방식이냔 말입니다."
로이스의 뼈 있는 말에 로칸 7세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이어진 로이스의 나직한 물음.
"제국이 칸부르크 왕국을 전부 집어삼키면, 그때 가서 후회하시렵니까?"
잔잔한 목소리가 로칸 7세의 심정을 사정없이 뒤흔들었다.
그라고 어찌 생각해 보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아니, 못 했다는 게 옳았다.
자신의 결정에, 그릇된 결정 한 번에 수많은 칸부르크 왕국민의 목숨이 사라질지 모르니 말이다.
누구보다 칸부르크 왕국을 아끼는 그였기에 로이스의 말처럼 단순하게 행동을 취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로칸 7세가 변명하듯 답했다.
"때로는… 참는 게 득이 될 수도 있는 법이네."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이야기였지만, 그렇다고 로이스가 동의하는 것은 아니었다.
로이스가 조소를 머금고 물었다.
"이 나라의 국민도 그리 생각할까요? 과연 이대로 칸부르크 왕국이 아닌 도미넌트 제국의 사람이 되길… 당신의 백성들이 원하겠습니까?"
"...?!"
로칸 7세는 무언가 충격을 받은 눈치였다.
이어지는 로이스의 한마디 한마디가 로칸 7세의 심장을 후벼 팠다.
"과감해지세요. 당신은 칸부르크를 이끄는 자이며 이 땅의 군주입니다. 당신은 자신의 백성들조차 믿지 못합니까?"
"...?!"
말이 끝나기 무섭게 벼락이라도 맞은 듯 몸을 부르르 떠는 로칸 7세를 보며 로이스는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조금은 가벼워진 건가?'
누군가가 그런 말을 했다.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디라고.
로칸 7세는 분명 현명하고 좋은 왕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쓴 왕관의 무게, 책임감의 무게에 짓눌려 있었다.
백성을 아끼기에 그들을 보호해야 한다고만 여겼다.
그러나 조금 전 로이스의 충고로 그는 깨달았을 것이다.
자신이 간과하고 있던 사실을.
"그래… 여긴 칸부르크였지. 그래, 그랬지...."
수시로 마해에서 넘어오는 마물들과 수백 년에 걸쳐 투쟁해 온 땅.
예리한 동풍에 굴하지 않는 겨울 대륙 최고의 전사들이 머무는 최전선.
혹한의 대지 칸부르크.
그리고 자신은 바로....
'내가 바로 칸부르크의 군주다.'
오랜 시간 마물과 투쟁을 이어 온 호전적인 자신의 백성들이 얌전히 고개를 숙이고 제국의 밑으로 들어간다?
설령 자신이 그렇게 하라 하여도 백성들이 반발할 것이다.
그리고 싸울 것이다.
제국에 맞서.
"허...."
로칸 7세는 그간 왕국의 정체성을 잊고 있었다는 사실을 자책했다.
그가 로이스를 보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고맙군."
"별말씀을."
로칸 7세의 목소리가 한결 가벼워져 있었다.
잠시 로이스에게 고마움을 표현한 로칸 7세의 눈빛이 돌연 변했다.
"하나, 고마움과는 별개로 우리는… 쉽게 움직일 수는 없네."
"그런가요?"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전쟁이라면, 이쪽에서 먼저 선공을 가하는 것도 나쁘지 않으나… 언제 스노우 킹이 들이닥칠지 모르는 상황에서 함부로 병력을 외부로 뺄 수는 없으니까."
그 이야기에 로이스는 웃었다.
"네네. 그렇죠. 알겠습니다. 하지만 뭔가 착각하신 게 있는 거 같네요."
"…착각?"
"제가 언제 왕국 보고 제국이랑 싸우는 거 도와 달랍니까?"
"아까는 분명...."
"아까 분명히 전 증거 찾는 거에 협조해 달라고 했죠."
"...."
"증거만 찾으면 나머지는 우리가 알아서 할 겁니다. 그러니 증거 찾는 거나 도와주세요."
"허...."
로칸 7세는 교주의 저 끝없는 자신감에 혀를 내둘렀다.
잠시 고민을 하던 로칸 7세가 입을 열었다.
"후… 안 그래도 내일 이야기하려고 했던 게 있네."
"뭘요?"
"그 초월기… 정말 우리 왕국 것이 맞는가? 내 알아본 바로 우리 왕국에서 외부로 유출된 초월기는 없었네."
"그렇습니까?"
되묻기는 했지만, 로이스도 대충 그럴 거 같았다는 얼굴이었다.
이를 마주한 로칸 7세가 덤덤히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외갑에 그려진 문장이야 얼마든지 꾸며 낼 수 있네. 하지만 고유 인식 문장은 다르지."
"고유 인식 문장? 그건 뭡니까?"
"각 국가에서 직접 제작한 초월기라면 모를까, 염원의 탑에서 판매하는 초월기의 동력구에는 각각의 국가별로 고유의 인식 문장이 들어가 있네. 염원의 탑으로부터 초월기를 사 간 국가의 문장이 말일세."
"그런 게 있었다니...."
처음 듣는다는 듯한 로이스의 중얼거림에 파브로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이스 님 모르셨습니까? 초월기에 각 국가의 고유 인식 문장이 들어간다는 거?"
"그 말은… 넌 알고 있었다는 소리?"
"알고야 있었죠. 전 로이스 님도 당연히 알고 계신 줄...."
파브로의 이야기에 로이스가 버럭 소리쳤다.
"인마!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250년 만에 세상에 다시 나와 인간이 만든 초월기를 처음 본 게 불과 얼마 전이다.
그런 상황에서 초월기의 동력구에 각국의 '고유 인식 문장' 같은 게 들어간다는 걸 자신이 어찌 알겠는가.
그들의 대화에 로칸 7세가 넌지시 말했다.
"그대가 증거를 찾고 싶거든, 그 초월기의 동력구부터 손에 넣게. 만약 교단을 습격한 초월기가 제국의 것이라면… 분명 거기서 단서를 찾을 수 있을 테니까."
로칸 7세의 이야기에 로이스가 이마를 부여잡았다.
'하… 그러니까 지금까지 멀쩡한 증거를 코앞에 두고 헛짓거리했다는 거네?'
로이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 모습을 본 로칸 7세가 미소 지었다.
"동력구를 구해 오면 말하게. 내 그걸 분해할 기술자들을 불러 둘 터이니."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로이스의 손이 허공으로 쑥 들어갔다.
곧 빠져나온 그의 손에 거대한 구체가 들려 있었다.
이를 본 로칸 7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허… 그건 정말 볼 때마다 기가 막히는군. 대체 어찌하는 거지?"
"신의 은총을 받으면 가능합니다."
"국교를 전신교로 삼아야 하나.... 하여튼, 그게 교단을 습격한 초월기의 동력구인가?"
로이스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본 로칸 7세가 웃으며 말했다.
"그럼 조금만 기다리게. 내 기술자들을 불러올 터이니."
그러나 로이스가 손을 내저으며 로칸 7세를 만류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설마 그걸… 직접 뜯어볼 참인가? 그런 생각이라면 관두게! 전문적으로 초월기를 연구한 법사들도 그걸 분해하는 데에만 닷새가...."
로칸 7세의 말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그의 눈앞에서 커다란 동력구가 삽시간에 빠른 속도로 척척- 분해되어 갔기 때문이다.
그것도 교주 로이스의 손에 의해서 말이다.
그렇게 약 5분 뒤.
로이스가 로칸 7세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닷새가 뭐요?"
"부, 분명… 다, 닷새가 걸리는 일이라고 했는데...."
로칸 7세의 눈에 당혹이 깃들었다.
"고작 이걸 분해하는 데 5일이나 걸린다고요?"
"…그리 들었다만."
"어떤 멍청한 놈이요? 당장 그런 무능한 놈 잘라 버리세요."
"...."
그 멍청하고 무능한 놈이 왕국 소속 법사장이네만?
하물며 그가 극비리에 진행 중인 자체 초월기 제작의 책임자라는 사실을 말할 수 없었던 로칸 7세는 입을 꽁하니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사이 로이스는 분해한 동력구를 살폈다.
찬란하게 빛나는 동력구의 술식의 정중앙.
분해해야지만 살필 수 있는 위치에 손바닥만 한 크기의 문장이 그려져 있었다.
목도리도마뱀처럼 꼿꼿이 깃을 세운 뱀 한 마리.
사납게 벌린 아가리와 두 개의 송곳니에서 시커먼 독액이 떨어지는 섬뜩한 문장이었다.
이를 본 로칸 7세에게서 낮은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독을 품은 서리뱀."
"어디 겁니까?"
로이스의 물음에 로칸 7세에게서 망설임 없는 답이 나왔다.
"도미넌트 제국일세."
그의 확답을 듣는 순간 로이스의 눈에 빛이 번뜩였다.
"찾았다."
정당하게 도둑놈을 두들겨 팰 증거를 확보한 순간, 로이스의 입술이 서늘한 호선을 그렸다.
181화. 판 뒤집기 (1)
도미넌트 제국 소속 특수 행동 지침 시행 부서, 통칭 검은 서리쥐.
오로지 황제의 명령에만 따르며 주인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해내는 조직.
그들에게 지상 과제가 떨어졌다.
[칸부르크를 내게 가져오라.]
황제의 절대적인 명령.
그들의 군주가 동방의 작은 나라를 원한다고 말했다.
그런 명령 이면에 자리한 내막은 로이스가 예상한 그대로였다.
도미넌트 제국.
이 거대한 국가는 겨울 대륙의 동부를 '대부분' 통일한 상태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대부분'이라는 수식어.
'대부분'이라는 단어는 제국의 역대 황제들이 가장 싫어하는 말이기도 했다.
겨울 대륙 동부에는 제국과 4개의 왕국이 있었고, 그중 칸부르크 왕국을 제외한 나머지 3개의 왕국은 제국의 속국이나 다름없었다.
사실상 칸부르크 왕국의 영토를 빼면 도미넌트 제국이 동부를 통일했다고 봐도 무방했다.
한데, '완벽'하게 동부를 통일하고 싶은 염원을 방해하고 있는 것이 칸부르크 왕국이었으니 도미넌트 제국이 이를 좋게 볼 리 있겠는가.
지난 세월 제국은 끊임없이 칸부르크 왕국에 압력을 넣었지만, 제국 영토의 10분의 1도 안 되는 이 작은 나라는 쉽게 굽힐 줄을 몰랐다.
천성적으로 호전적인 성향을 지닌 칸부르크 왕국의 사람들.
간이며 쓸개며 다 빼 줄 것처럼 행동하는 다른 속국과는 달리 홀로 고고한 칸부르크를 제국은 눈엣가시로 여겼다.
그럼에도 도미넌트 제국에서 칸부르크를 두고만 보았던 것은 그 지리적 특성 때문이었다.
마해에서 올라오는 마물들을 막아 주는, 겨울 대륙의 방패와도 같은 역할을 해내는 칸부르크 왕국.
만약 제국이 칸부르크 왕국을 집어삼킨다면, 그 역할을 제국에서 해야만 했다.
이는 제국의 귀족 중 누군가는 칸부르크 왕가를 대신해 최전선에서 썩어 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으며, 또한 제국의 많은 예산이 동부 전선에 투입된다는 소리였다.
때문에 지난 세월 누대의 황제들이 칸부르크 왕국의 정벌을 원했지만, 현실적인 문제로 꿈을 접어야 했다.
한데, 근래에 들어 희망적인 변수가 생겨났다.
그 첫 번째는 바로 캘룬 대방벽의 완공.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캘룬 대방벽의 완성이 코앞으로 다가온 것이다.
두고 보자니 아깝고, 먹자니 탈이 날 거 같던 칸부르크 왕국이 먹어도 말끔하게 소화할 수 있는 땅이 되었다.
안 그래도 칸부르크 왕국을 주시하고 있던 황제의 눈이 돌아가는 것은 당연지사.
이에 제국은 1년 전부터 칸부르크 왕국을 손에 넣기 위한 계획 수립에 들어갔다.
그러다 발생한 2번째 변수.
그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칸부르크 왕국에서 직접 알려왔다.
[스노우 킹으로 추정되는 존재 발견. 제국의 협조가 필요합니다.]
난데없이 들려온 스노우 킹의 소식은 제국에게는 호재나 다름없었다.
스노우 킹의 준동 소식을 접하고 검은 서리쥐의 전략분석조가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결과, 이번 일을 잘만 이용하면 손쉽게 칸부르크 왕국을 집어삼킬 수 있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들은 그동안 짜 둔 계획을 전면 취소하고 새로운 계획을 설립했다.
그 첫 단계가 바로 언제든지 왕국의 막강한 전력이 될지 모를 교단을 왕국에서 쳐 내는 것.
이를 위해 검은 서리쥐의 특급 요원 50명이 투입되어 교단의 신물을 탈취했고, 계획대로 교단 깊숙이 웅크리고 있던 파브로를 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이후 제국에 단 32대밖에 없는 2급 초월기까지 동원됐다.
그들의 목적은 파브로를 죽이고 단 한 명의 목격자만을 살려 보낸 뒤, 이 모든 일을 칸부르크 왕국의 소행인 것처럼 꾸미는 것.
설령 교단이 왕국과 반목하지 않는다고 해도 최소 파브로를 죽이는 것만으로도 성과가 있을 계획이었다.
물론 교단이 왕국과 반목하면 그보다도 더 좋은 결과는 없었다.
한데, 순조롭게 진행되던 계획에 제동이 걸린 것은 2급 초월기를 비롯해 습격에 투입됐던 초월기들이 증발하면서였다.
그로 인해 검은 서리쥐의 수장 사무엘 후작은 이날 이때까지 골머리를 싸매야 했다.
그랬던 그에게 희소식이 날아든 것은 캘룬 대회의가 열린 날로부터 이틀이 흐른 뒤였다.
사무엘 후작은 아침부터 급전으로 올라온 보고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 보고가 사실이더냐?"
"그렇습니다."
수하의 답변에 후작이 가만히 턱을 쓸었다.
"교단이 칸부르크 왕국을 의심하고 있다라.... 정확한 내용은?"
"교단에서 왕국 측에 불신을 품었다고 합니다."
"불신?"
"예, 이번에 자신들을 습격한 게 왕국이라고 의심하고 있는 듯합니다."
"허… 그 말은 결국 파브로가 습격을 받긴 받았다는 소리 아닌가? 그런데 파브로가 어째서 멀쩡히 살아 있는 거지? 습격에 동원된 초월기는 어디로 증발한 거고!"
"저는… 이를 통해 오히려 제3의 세력이 끼어들었다고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이유는?"
"저희가 동원한 초월기가 파브로를 습격한 게 맞다면 그가 그토록 멀쩡했을 리 없습니다. 당시 그 자리에서 분명 전투는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지만 파브로는 너무 멀쩡히 나타났고, 저희 측 초월기는 사라졌습니다. 이는 파브로를 도운 제3의 세력이 있지 않다면 절대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교단을 돕는 제3의 세력이 있다. 한데, 그 정체 모를 놈들이 제국의 초월기를 가지고 사라졌다?"
"그렇습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교단에서 왕국을 의심하는 것도 말이 됩니다."
"흠...."
"분명 그날 파브로는 습격을 받았고, 저희의 계획대로 은연중에 칸부르크 왕가의 문장을 그가 확인한 겁니다. 한데, 제3의 세력이 끼어들어 저희 측 초월기를 처리함으로써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래서 대체 그 제3의 세력이 어디란 말이냐!"
"그건 아직...."
"후우...."
사무엘 후작은 크게 한숨을 내쉬며 머릿속을 정리했다.
수하의 이야기가 영 말이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지금 상황에서 그보다 더 납득이 가는 추측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 가능성은 충분하다.'
깊게 생각을 한 사무엘 후작이 물었다.
"칸부르크 왕국과 교단의 사이가 틀어졌다는 정보… 얼마나 믿을 수 있지?"
"아시다시피 저희 측에서 캘룬 대회의 참석자를 만드는 데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흘러나온 정보만으로 정황을 파악했습니다만...."
"나도 알고 있는 이야기로 쓸데없이 시간 낭비 하지 말고 본론만 말해라."
"저희 분석대로라면 90% 이상 확실한 정보입니다."
"흠...."
사무엘 후작이 슬며시 눈을 감았다.
자신이 이끄는 검은 서리쥐의 정보력은 겨울 대륙 중 최강이라 자신했다.
그들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곳은 '대부분 없다'고 할 정도였다.
그 '대부분'에 광신도 집단인 교단과 기이하다 싶을 정도로 뚝심을 보이는 칸부르크 왕국이 들어갈 뿐.
때문에 90%라는 수치도 굉장히 높은 수치였다.
이를 떠올린 후작은 피식거렸다.
'언제나 칸부르크 놈들이 문제군.'
후작은 왜 황제가 '대부분' 겨울 대륙 동부를 통일했다는 말을 싫어하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잠시 뒤 눈을 뜬 그가 말했다.
"당분간 모든 계획을 전면 중단하고 칸부르크 왕국과 교단 놈들의 동향을 예의 주시해라. 올라오는 정보는 즉시 나한테 보고하고."
"알겠습니다."
"그리고 모든 자원을 동원해 그 제3의 세력인지 뭔지를 찾아와라. 네 추측이 옳다고 주장하고 싶거든 반드시 찾아야 할 것이다. 놈들이 가져간 2급 초월기에 너와 나의 목이 달렸다."
2급 초월기가 귀한 물건이기는 했지만, 그보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만약 누군가가 그것을 분해해 제국 소유의 것임을 밝히는 것이다.
'그러면 일이 조금… 귀찮아지는데.'
그 전에 어떻게 해서든 2급 초월기를 회수해야만 했다.
"명심하겠습니다."
깊게 고개 숙인 수하가 벽난로가 타오르는 방을 빠져나가려는 찰나.
"아, 잠시."
후작의 부름에 수하가 멈춰 섰다.
"신물에 대한 분석은 어찌 되어 가고 있지?"
후작의 눈에 살짝 기대감이 차올랐다.
전신의 교단에서 탈취해 온 신물.
처음 그것을 받았을 때, 얼마나 당황했던가.
하지만 교단이 신물을 찾기 위해 미쳐 날뛰는 것을 보고 그는 생각을 달리했다.
이 뼈다귀 같은 열매에 무언가 있는 게 확실하다고.
그렇지 않다면 그 미친 광신도들이 저렇게 목숨 걸고 신물을 찾으려 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후작은 교단에서 훔쳐 온 신물을 수하들에게 분석하라고 명했다.
그게 벌써 십수일 전.
이쯤이면 신물에 대한 분석이 어느 정도 나왔으리라.
후작의 기대감 가득한 물음에 수하가 난감한 얼굴로 답했다.
"그것이...."
"왜?"
"아직은 별다른 특색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법사들의 말에 의하면… 그로우 푸르트라 불리는 영약이라 하온데...."
"영약? 전신의 신물이?"
"그렇습니다."
"효과는?"
후작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전신의 신물이라 불리는 영약이다.
그 효과가 어떠할지 벌써 기대가 됐다.
'어쩌면 소문처럼 경지를 한 단계 이상 끌어올릴 수 있는 영약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런 후작의 기대는 들려온 수하의 답변에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그로우 푸르트는 수 속성의 영약으로 수 속성을 익힌 이에게 약간의 속성 증진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유명한 건… 성장 촉진입니다."
"…성장 촉진?"
후작이 눈을 끔뻑거렸다.
"예. 그로우 푸르트를 섭취하면 키가 자란다고 합니다."
"…그게 끝인가?"
후작의 믿지 못하겠다는 물음에 수하가 난감한 얼굴로 답했다.
"일단 밝혀진 것은 그 정도이나, 전신의 신물이라 불리는 물건이니 예사의 영약은 아니리라 판단됩니다. 만약 더 밝혀지는 것이 있으면 바로 보고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해라."
"예."
다시금 고개를 숙여 보인 수하가 방을 빠져나갔다.
그가 떠난 자리를 바라보던 후작의 눈에 약간의 탐욕이 떠올랐다.
"그래, 교단의 신물이라는 물건이 고작 그런 영약일 리가 없다."
아니, 절대로 평범해서는 안 된다.
그런 영약을 교단의 신물이라고 가져갔다가는 오히려 황제에게 자신의 목이 날아가리라.
섬뜩함에 몸을 부르르 떤 후작은 벽난로 속으로 장작을 집어 던졌다.
타탁-.
거세게 타오르는 불꽃이 마치 그의 앞날을 예고해 주는 듯싶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