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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운을 향해 쏟아지는 파도와 같은 검기.

"어어…! 안 돼!"

강철우가 놀라 소리쳤다.

화경의 고수가 쏟아내는 검기를 막아내기에, 이로운은 너무도 무방비하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살기 가득한 절초가 이로운의 몸을 향해 짓쳐들어갔다.

'서거거거거걱!'

그런 소리가 들렸어야 했다.

카앙!

이런 단말마의 비명과 같은 소리가 아니라.

"...!"

강철우와 플레이어들이 두 눈을 부릅떴다.

"검막!"

이로운의 앞에 푸른 막이 파도와 같던 육사걸의 검기를 모조리 막아냈다.

암영 길드 길드장이라던 남자.

"감히!"

그가 검막을 만들었던 검을 비껴들며 소리쳤다.

"네 놈 같은 버러지가 누구의 존체를 노리는 것이냐!"

그의 일갈 속에서 느껴지는 내공.

그 거대한 기에 플레이어들이 두 귀를 막아내었다.

"무인이더냐?"

허나 육사걸은 사자후와 같은 목소리에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은 듯 잔해를 밟고 서서 정치수를 노려보고 있었다.

투둑, 툭.

잔해 속에서 다른 무인들도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아이템인가."

이로운이 그들을 보며 장단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처음 보았을 때부터 눈치채고 있었다.

'육사걸의 검.'

언뜻 보기에는 무인들이 쓰는 별 다를 바 없는 검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 서려 있는 기운이 다르다.

무인들의 전용 아이템.

'신병이기神兵利器.'

육사걸은 그 힘으로 무인들과 함께 살아남은 것이리라.

"정체를 숨기고 토벌대에 잠입하다니, 무슨 목적이냐."

육사걸의 살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 죽어가는 노인네가 힘도 좋네."

이로운이었다.

어느새 잔해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무인들의 수가 육사걸을 포함해 스물 가까이 됐다.

사십에 가까운 수가 폭발 속에서 명을 달리했다는 뜻.

모습을 드러낸 무인들도 그리 좋은 꼴은 아니었다.

온몸에 가득한 화상 자국들과, 폭발 속에서 몸을 지키기 위해 급격히 내기를 끌어올리며 내상을 입은 듯했다.

스윽.

이로운이 그들을 향해 손을 들어 올리려던 때였다.

"기회를 주실 수 있겠습니까?"

정치수의 목소리였다.

"감히 혀…."

"길드원."

이로운의 말에 정치수가 몸을 움찔 떨며 다시 말했다.

"길드원님의 존체를 노린 자입니다. 교… 같은 길드원으로 용납할 수 없는 일입니다."

정치수가 육사걸의 존재를 무시하듯 그를 등진 채 이로운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기회를 주셨으면 합니다."

혈마 도래의 날.

정치수는 진정한 혈마를 알아보지 못하고 감히 혈마신에게 검을 겨누었다.

무지하여 생긴 일이라 하지만 무지하다고 용서받을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위대한 혈마의 자비에 목숨을 부지했지만, 그 죄악의 날이 매일같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기회.'

조금이나마 죄를 씻을 수 있는, 혈마께 도움이 될 수 있는 기회.

"그렇게 해. 뭐…."

이로운이 뒤편에서 잠시나마 호흡을 가다듬고 있는 육사걸을 보며 말했다.

"나쁘지 않은 상대일 것 같으니까."

스윽.

다시금 정치수가 등을 돌렸다.

어느새 그의 양옆으로 암영 길드원들.

혈검 대원들이 서 검을 들고 있었다.

"혀… 길드원님의 적을 척살한다. 그게 무슨 뜻인지 알겠지. 창피한 모습 보이지 마라."

"충."

낮고도 진중한 울림.

"흥."

육사걸이 코웃음을 쳤다.

자신들도 폭발 속에서 입은 내상을 조금이나마 다스리기 위해 시간을 준 것일 뿐.

"주제를 모르고 나서는구나."

진즉 저들 모두를 쓸어버릴 힘이 자신들에게 있다 믿고 있었다.

파파파파팟!

잔해 속으로 암영 길드원들이 몸을 던졌다.

육사걸이 검을 들어 다시 초식을 펼치려던 때.

카앙!

"버러지, 네 죄는 네 피로 씻어야 할 것이야."

어느새 달려든 정치수의 검이 급히 든 육사걸의 검과 부딪혀 불꽃을 튀기고 있었다.

* * *

'좋은 기회네.'

이로운이 아예 자리를 잡고 앉아 싸움을 보고 있었다.

"고, 괜찮은 겁니까? 저희가 도와야…."

강철우가 플레이어들을 대변하며 그렇게 말했지만 이로운은 관심 없다는 듯 손을 휘저었다.

"괜찮아."

강철우가 대답 없이 전투가 치러지고 있는 통로 쪽을 바라봤다.

암영 길드가 지면 자신들도 죽는다.

"크윽!"

"컥!"

"이게 무슨 검법이냐!"

하지만 이로운을 제외하고 아홉 명밖에 되지 않는 암영 길드원들은 상처를 입은 무인들을 말 그대로 몰아붙이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압권인 것은 암영 길드장.

카카카카캉!

정치수였다.

그의 검이 기괴한 각도로 꺾여 나가며 육사걸을 농락하고 있었다.

캉!

제대로 된 반격조차 하지 못하며 물러서고 있는 육사걸.

'해남의 장로가….'

강철우는 이 상황이 그저 꿈같이 느껴졌다.

무인들이 누구인가.

사람을 상대하고 상처 입히는 것만을 평생토록 배워온 이들이다.

그중에서도 육사걸은 해남의 장로였다.

대한민국 삼대 길드 중 하나인 해남, 그들이 은의 수위권에 드는 세력 해남파의 것임을 안다.

본산 제자라 불리는 해남의 무인들은 말 그대로 압도적인 실력을 가지고 있는데, 육사걸은 그런 자들 사이에서도 괴물로 치부되는 장로였다.

'혼자 나머지 전부를 상대할 수 있는 실력.'

함께 온 무인들, 플레이어들까지도 상대할 수 있는 실력.

암영 길드장은 그런 육사걸과 동수를 이루고 있다.

'아니.'

그런 육사걸이.

"큭!"

밀려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강철우의 낯빛은 좋아질 줄 몰랐다.

"제법이구나."

육사걸의 입가,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 미소가 너무나도 마음에 걸린다.

"차라리 확실히…."

"확실히 끝낼 거면 내가 움직였지. 경험치 좀 쌓게 하는 거야."

"경험치?"

"이게 알게 되겠지."

이로운이 느긋한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현대의 무인들이 어떤 자들인지.'

혈왕성에 갇혀 세상과 동떨어진 채 산 혈교의 교도들.

강한철이 그간, 뒤바뀐 세상에 대해 혈교에 보고했음에도 그것이 제대로 이어지지 않았다.

강한철이 혈교주를 맡고, 강은하가 은하 길드를 맡아 변화를 꾀하고 있지만.

'생각이란 건 그리 쉽게 바뀌지 않아.'

혈교도들은 아직도 새로운 문물이나 발전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자신이 나서 한마디만 하면 그들은 받아들이겠지만, 그것만으론 안된다.

무엇이든 직접 느끼고 보는 게 빠르지 않나.

은하 길드는 지금껏 게이트 사냥에 최선을 다하고 있을 뿐 아직 전쟁을 벌인 적은 없었다.

즉, 현대의 무인들을 상대한 경험이 전무하다는 뜻.

"이런 사이한 검법이라니, 사파의 무리더냐?"

정치수와 혈검대는 이번에 느끼게 될 것이다.

"허나, 부족하구나. 아마 문이 열린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거나 했겠지."

거리를 벌린 육사걸이 웃고 있었다.

그가 기수식을 취하며 검을 양손으로 쥐었다.

"보여주마. 해남의 힘을."

무언가를 느낀 정치수가 망설임 없이 육사걸을 향해 뛰어들었다.

"거, 검강!"

검강이 서린 정치수의 검.

그 어떤 몬스터라도 일격에 잘라낼 수 있을 듯 날카로운 기세로 검과 하나가 된 정치수가 육사걸을 노려갔다.

'벤다.'

더 끌면 안 된다.

끝을 내야 한다.

그런 의식이 살기가 되어 동화한 정치수가 번뜩이는 눈으로 검을 찔러넣는 순간이었다.

카앙!

"...!"

분명 빈틈을 보고 찔러넣은 검이 너무 허무하게 막혀있었다.

"헤이스트."

육사걸의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

파앗!

육사걸의 신형이 마치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이형환위移形換位.

너무나 빨리 움직여 그 잔상이 남는다는 고절한 신법.

"스트랭스."

카아아아아앙!

내리쳐진 육사걸의 검이 부딪힌 정치수의 검을 밀어내고 있었다.

"내력 증폭."

육사걸의 검에 서려 있던 검강의 색이 더욱 짙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콰아앙!

폭발과 함께 정치수가 튕겨 나갔다.

고오오!

막대한 내력에 육사걸의 머리칼이 중력을 거스르며 나풀거리고 있었다.

"이것이."

"이게."

육사걸과 이로운 둘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신병이기의 힘이다."

"무인들의 아이템이야."

파스슷.

통로에 부딪혀 잔해를 떨구며 정치수가 걸어 나왔다.

비틀거리는 몸, 찢겨진 옷가지.

그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치욕.

"감히…."

혈검대장이 누구인가.

혈마를 지키는 혈마궁 친위대의 대장이다.

장로들에 비교해도 꿇리지 않으며, 장로를 넘어서야 하는 강함을 지녀야 한다고 생각했다.

"감히!"

그런 자신이 혈마의 앞에서 치욕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죽인다.'

자신에게 이런 치욕을 준 육사걸, 그를 죽일 것이다.

그리고 혈마께 죄를 고해 자신의 팔 한 짝을 자를 것이다.

"과연 제법이로다. 허나 그 꼴로 그런 말을 하기엔 너무 건방진 것 아닌가?"

육사걸이 미소를 지으며 정치수를 끝내기 위해 움직였다.

"멍청하긴."

이로운의 목소리.

"이제 알겠어? 너희가 뭘 하고 있었는지?"

육사걸은 들려오는 목소리를 무시한 채 나아가려 했다.

"...?"

하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저 늙은이가 대단해 보여? 아니, 해남에 저자보다 강한 자가 백을 넘을 거다. 세외에서 활동하는 장로 따위한테 뭘 기대하는 거야."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육사걸이 멍한 얼굴로 정치수를 바라봤다.

"그들이 저런 아이템을 둘둘 두르고 있다. 저것보다 더 대단한 것들로."

육사걸이 멍청한 눈으로 주변을 훑었다.

자신과 같은 무인들, 그들 또한 아이템의 힘으로 암영 길드를 몰아세웠지만 멈춰 서 있었다.

그들의 표정 또한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고이고 썩어버린 대가다. 이제 알겠나?"

"씻을 수 없는 죄. 혈마의 적을 치우고, 목숨으로 치르겠나이다."

"혀… 혈마?"

"저런 늙은이 하나 처치하지 못하는 자의 목숨은 필요도 없어. 거기다 내가 그런 거 하지 말랬지."

스윽.

앉아있던 이로운이 몸을 일으켰다.

"미, 미친…!"

그제야 육사걸은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딱딱히 굳어버린 몸.

'살기….'

그 크기를 헤아릴 수 없는 거대한 살기가, 모든 무인을 짓누르고 있는 것이었다.

"금제를 해제한다."

구웅.

"치워."

이로운이 볼 것을 다 봤다는 듯 돌아선 순간이었다.

구우우우우우!

암영 길드원들의 온몸에서 짙은 마기가 흘러나와 유형화되고 있었다.

육사걸이 지금껏 보았던 그 어떤 마기보다 짙은 핏빛의 마기가.

"존명."

푹! 푸푸푸푸푸푹!

움직이지 못한 채 사방에서 들려오는 파육음들.

눈앞에 정치수가 다가오고 있건만, 육사걸은 검을 들어 올리지조차 못했다.

아까 전 몸을 멈추었던 살기는 사라졌다.

지금 것은.

일렁.

눈앞의 남자, 암영 길드장이 내뿜는 살기의 힘이었다.

아까보다 두 배는 더 강해진 듯한 느낌.

신병이기의 힘이 작동하고 있는 지금도 감히 그의 상대가 되지 못할 것 같았다.

"고맙다. 버러지."

육사걸의 앞에 선 정치수가 검을 쥔 채 말했다.

"덕분에 우리가 얼마나 큰 죄를 저질렀는지 알게 됐다."

"아, 안 돼…."

서서히 올라가는 검을 보며 육사걸이 신음했다.

"그 대가로 한 번에 끝내주지. 감히 혈마의 앞길을 막은 죄, 피로 씻거라."

"안 돼!"

서걱!

* * *

"...."

강철우는 멍한 얼굴로 멍청히 서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꿀꺽.

다른 플레이어들도 방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살기로 무인들의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고?'

그런 게 가능한가?

'혈마…?'

그건 또 무엇인가.

하지만 하나는 알 수 있었다.

꿀꺽.

저 개 같은 해남의 무리보다 이 자들이 더 위험하다고.

-살길을 알려줄까?

악마의 속삭임이라 생각했던 그것은 악마보다 더한 것이었다고.

"사… 살려…."

그런 말밖에 할 수 없었다.

치기라 말하는 용기로 해남의 무리에게 대항한 것과는 달랐다.

아득한 공포 속, 할 수 있는 것은….

"살려 주…!"

그렇게 소리치던 강철우가 멈춰 섰다.

"뭐 해?"

지워진 마법진의 앞에 서 있던 이로운이 나른한 얼굴로 보고 있었다.

"가자."

어느새 이로운이 아르모의 본거지로 향하는 문 앞에 서 있었다.

삼왕의 제자

제2권 제6화

031

아르모의 본거지로 향하는 문이 열렸다.

또 다시 나타난 통로.

하지만 더 이상의 함정이나 마법진은 없었다.

'던전 코스트에도 한계가 있으니까.'

던전이란 곧 멸망하여 조각난 세계.

격리된 세계라는 뜻이었다.

혈왕성이 그러하듯, 조각난 세계는 유지를 위한 양분이 필요하다.

던전 코스트란 세계를 유지하기 위한 양분을 제외한 잉여자원을 말했다.

던전 속에 존재하던 마법진이나 함정, 몬스터 따위 등은 이 코스트를 통해 유지된다.

'제물 마법진 같이 커다란 게 있었으니까.'

아르모는 결코 큰 세계가 아니다.

세계의 크기와 던전 코스트는 거의 비례하는 법.

이제 더 이상 준비된 함정 따위는 없을 것이었다.

"혈마께 수치를 보인 죄, 제 목숨이 필요치 않으시다면 팔 한 짝으로…."

"제발 그 입 좀. 입!"

정치수의 말에 이로운이 소리치자 정치수가 급히 입을 다물었다.

"하."

혈교도란 자들.

오랜 세월 혈왕성에 갇혀 그들의 신이라는 혈마만을 기다려왔으니, 그들의 광신이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

뭐 그게 나쁘다고만 생각도 들진 않지만 적당히는 해야지.

"그리고 수치가 아니야."

이로운이 말했다.

"차이다."

"...."

"지구와 은이 뒤섞인 지 몇십 년이 지났어. 그동안 은의 무인들은 그들의 세계를 유지하기 위해, 혹은 더 높은 곳으로 향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신병이기.

본디 무인들은 아이템을 사용하지 못한다.

아이템이란 플레이어들의 전유물로 세계의 침범 초반에는 아이템을 통해 플레이어들이 무인들에게 대항한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무인들은 그들이 아이템을 사용할 방법을 찾아냈다.

물론 아무나 쓸 수 있을 정도로 값어치 없는 것들은 아니지만 보급화된 신병이기들도 있는만큼 지구에서 활동하는 무인들의 대부분은 신병이기를 착용한 상태라 말할 수 있었다.

그에 반해 혈왕성은?

-무인이 도구 따위에 먹혀선 안 된다며….

한숨이 절로 나온다.

장로들은 무인들이 혈교의 무인들이 강해지는 걸 바라지 않았겠지.

숨어 지내야 하며 혈마를 기다려야 하는 그들의 입장상, 무인들이 세외의 것에 관심을 두는 것을 바라지 않았을 터였다.

'힘이란 건 가지면 쓰고 싶어지니까.'

그 결과가 이것이다.

"육사걸은 네 상대가 안 돼. 알고 있을 텐데."

"예. 물론입니다."

정치수와 육사걸의 실력 차이는 극명했다.

애초에 신병이기를 쓰기 전 육사걸을 금제 당한 정치수가 몰아붙이지 않았던가.

"무학武學과 무리武理에서는 네가 이긴 거다. 깨달음에서도."

이로운이 말했다.

"다만, 능력치 차이가 큰 것뿐이야."

스트랭스, 헤이스트, 내공 증폭과 같은 버프 마법들.

그것만으로 무인은 눈에 띄게 강해진다.

'육사걸의 검이 폭발을 막아내느라 망가지지만 않았다면.'

정치수는 더 힘든 싸움을 해야 했을 것이다.

"금제를 풀고선 압도할 수 있었겠지."

혈마공의 금제가 풀린 혈검대는 신병이기의 힘을 빌려 쓰는 무인들을 압도했다.

"하지만 금제를 푼 너와 비슷한 강자가 신병이기를 사용한다면?"

"...."

정치수는 답할 수 없었다.

"그러니 강은하를 잘 따라. 신녀가 알아서 잘해줄 테니까."

"명심하겠습니다."

"신병이기들은 잘 챙겼지?"

"예."

이로운이 잘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신병이기는 일반 아이템과 비슷한 등급이라도 몇 배는 더 높은 가격에 거래된다.

애초에 거래가 안 되는 물품이기도 했다.

"지금 당장 사용은 못 할 거야. 챙겨서 가져다 놔."

그렇게 말한 이로운이 발걸음을 멈췄다.

동시에 옆에서 걷던 정치수도.

"...."

그 뒤를 따르던 플레이어들도.

나머지 혈검대들도 모두 멈춰 섰다.

저벅.

이로운이 다시금 발걸음을 떼 내딛었다.

일렁.

공간 전체가 흔들리듯 일렁거렸다.

흑시왕을 만났을 때처럼 갑작스레 바뀐 공간.

던전 속 커다란 공동에 이로운이 서 있었다.

우우우웅!

사방에 가득한 마법진이 이로운을 노려보고 있었다.

***

어느새 이로운과 함께 모든 이들이 공동으로 이동되어 있었다.

천장과 벽에 들러붙은 마력등이 은은한 불빛을 발하며 새벽과 같은 빛을 내고 있었다.

이로운이 고개를 돌리며 주변을 살폈다.

우우웅.

제각각의 마법진 수십 개가 이로운과 일행들을 노려보듯 떠올라 있었다.

"흡…!"

너무 놀란 플레이어들이 숨을 들이삼켰다.

"중첩 마법진…!"

다른 플레이어들도 마찬가지의 반응이었다.

던전 코스트 탓에 더 이상 함정으로 만들어진 마법은 없다.

즉, 지금 자신들을 노리고 있는 마법진은 누군가 시전한 마법진이라는 것.

일렁.

저 앞의 공간이 다시금 일렁였다.

그곳에 기다란 로브를 입은 마법사들 수십이 서 있었다.

"어, 어떻게…."

손을 뻗어 마법진을 유지한 채 경악한 얼굴의 마법사들.

"마법진의 발동을… 멈춘 거지?"

그들은 지금 상황이 이해가 안 간다는 듯했다.

스윽.

이로운이 허공에 떠 있는 마법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지직, 지지직.

노이즈를 일으키고 있는 마법진들.

마법진의 축 한 켠에 붉은 침이 틀어박혀 있었다.

"허튼짓 안 하는 게 좋아."

이로운의 나른한 목소리가 커다랗게 동공을 울렸다.

내력으로 증폭된 목소리였다.

"지금 마법진을 함부로 거뒀다간, 마법진이 폭주할 테니까."

마법진이 폭주한 결과는, 마법진을 발동한 마법사들의 마나 역류.

자칫 잘못했다간 그들이 삶을 바쳐 만들어낸 써클마저 깨져버릴 가능성이 있었다.

"말도 안 되는!"

백발의 노마법사가 소리쳤다.

"그 짧은 사이 마법진의 축을 찾고, 중심축에 노이즈를 발생시켰다고! 그것도 동시에 이 많은 마법진에…!"

"어려운 일이지."

이로운이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직접 느끼고 있잖아?"

움찔.

마법사들의 표정이 더욱 일그러졌다.

마법진을 발동시킨 것이 그들이기에, 마법진에서 느껴지는 이질감을 가장 크게 느끼고 있을 터였다.

"네가… 한 짓이냐?"

마법사들 사이, 어리지만 강인한 목소리가 들렸다.

"제물 마법진을 억지로 뒤틀고, 제물의 수를 바꾼 게?"

파앗!

마법진 하나가 제멋대로 사라져버렸다.

노이즈가 발생한 마법진의 마력 공급을 끊어버리고 소멸시킨 것.

말이야 쉽지 마나 역류를 감수해야 할 일이었으며, 다른 이가 변형시킨 마법진에 공급을 끊는다는 것은 완전히 새로운 마법진을 순식간에 이해한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맞아."

"...."

움직임이 자유로워진 그 마법사가 다른 마법사들의 품을 뚫고 나와 있었다.

작은 키, 짧게 깎은 머리.

고등학생을 연상시키는 앳된 얼굴의 남자였다.

"너 같은 자가 왜…."

무인들과 함께 있느냐는 말일 거다.

"그 멍청한 얼굴은 하나도 안 바뀌었네?"

"...?"

"마법사랑 전혀 안 어울리는 운동선수 같은 모습 말이야."

이로운이 발을 떼 나아갔다.

"크흡!"

몇몇 마법사가 자신들도 마력 공급을 끊고 마법진을 소멸시키려 했지만, 외려 마나 역류에 피를 머금고 있었다.

"날… 알아?"

"모를 리가."

이로운, 그가 어느새 작은 마법사 앞에 서 있었다.

반항 같은 것은 없었다.

아마도 머리가 핑핑 돌고 있겠지.

어떻게 제물 마법진을 뒤튼 것일까, 어떻게 이 마법진들에 노이즈를 발생시킨 걸까.

목숨이 경각에 달한 지금 이 순간에도 그는 마법진에 대한 것만이 머릿속에 가득할 거다.

"널 구하러 왔다."

"무슨…."

"본데노."

"...!"

광법사 본데노.

마법진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아인하트의 기관 중 하나인 아르모의 후계로 태어났던 그.

어린 나이부터 그 천재성을 인정받아 써클을 만들려 했지만, 써클이 폭주했고 결국 아르모의 후계임에도 세 개의 써클만을 만들어내는 데 그쳤다.

그 모든 불합리함과 나약함을 오롯이.

'마법진.'

그것 하나로 극복해낸 자.

"오랜만이야."

***

길드원들에게 배신당해 도망자 생활을 하던 때였다.

은의 무인들에게서 벗어난다는 것은 적어도 이 아시아 땅에서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

서쪽으로 넘어갈 방법을 찾아 도망치고 또 도망쳤다.

하지만 결국 궁지에 몰려 은의 무인들을 맞이했을 때였다.

-이쪽으로!

처음 듣는 낯선 목소리.

그를 따라가 겨우 몸을 숨길 수 있었다.

-어디로 간 거지?

무인들은 눈앞에 자신이 숨어있는데도 발견하지 못했다.

본데노가 만든 은신 마법진이 자신들을 숨겨준 것이었다.

-쉬잇.

결국 무인들을 따돌리는 데 성공했다.

-왜?

일면식도 없는 자.

왜 자신을 구해준 지 알 수도 없었다.

그때 그가 말했다.

-너와 나는 같으니까. 그래서다.

그 후로도 본데노는 한동안 자신이 숨는 것을 도와주었다.

서쪽으로 향할 길을 찾아 마침내 떠나려던 때까지.

그동안 이로운도 본데노에 대해 알 수 있었다.

-네가 그 광법사라고?

그가 그 유명한 광법사라는 것을.

그의 도움으로 대한민국을 벗어나려던 때.

-제길. 가!

놈이 찾아왔다.

-여기 쥐새끼와 함께 있었군.

매화검수.

그건 괴물이었다.

하이랭커에 근접했던 자신도, 광법사라 이름난 본데노도.

무엇 하나 할 수 없이 당해야만 했다.

-미안해.

그녀였다.

끝까지 자신과 함께 해줄 것이라 믿었던 자신의 여자친구가 배신해 위치를 알렸던 것.

그날 자신은 화산 길드의 노예가 되었다.

-안 돼…!

본데노는 그날 매화검수의 손에 죽었다.

그렇게 알고 있었다.

하세민이 녀석의 이름을 다시 입에 담기 전까지.

* * *

"나, 날 구하러 왔다고?"

본데노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말했다.

"난 널 몰라. 근데 왜…?"

모두가 본데노와 이로운을 보고 있었다.

"너와 나는."

이로운이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같으니까."

"...."

본데노의 눈에 파문이 일어났다.

"그래서다."

이로운의 말이 끝났을 때, 그는 두 눈을 부릅뜬 채 형언할 수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너… 너… 그럴 리가…."

"모두가 날 배신했다. 내가 사랑했던 그녀도."

너무나 담담히 말한다.

"하지만 일면식도 없던 넌, 나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왜 그랬지?"

그때는 묻지 못했다.

그저 그와 내가 같다는 말만 들었을 뿐이다.

만일 더 물어봤다가 그가 떠날까 봐 두려웠다.

혹여 그의 입에서 생각지 못한 말이 나올까 두려웠다.

그러면 나는 결국 잡힐 테니까.

"나는…."

"이해가 안 가서 말이야."

"나는…."

눈물이 그렁하게 맺힌 얼굴로 본데노가 말했다.

"단크가 좋았어."

"단크?"

플레이어들이, 마법사들이 웅성댔다.

"아르모를 떠나, 아르모를 구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내게 단크의 일화들은 동경의 대상이었으니까."

그랬던가.

배신으로 점칠되어 영락해버린 그것을 본데노는 좋아했었던가.

동료 살해범이라는 오명, 누구도 자신을 믿어주지 않고 인생의 반려라 생각했던 이마저 날 놓았지만 본데노는 믿어준 것이다.

단크의 리더였던 자신을.

"너 정말… 이… 이…."

"구해주지."

이로운이 손을 내뻗었다.

"네가 그날 나를 구해준 것처럼, 나도 널 구해주마."

쩌저저저저저정!

사방에 가득했던 마법진들이 순식간에 깨져나갔다.

하지만 마법사들 중 누구도 마나 역류를 당한 자는 없었다.

"날 도와야겠다. 본데노."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떨리는 본데노의 얼굴.

녀석이 그 작지만 단단한 손을 뻗어내며 말했다.

"영광이야. 나의 영웅."

검왕 스승님이 말했었다.

-그 티끌마저도 타버려 소멸하길 바라느냐?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스승님.

꽈악.

구했습니다.

그 티끌.

삼왕의 제자

제2권 제7화

032

화산 길드의 노예로 생활하며 다 타버렸던 재 속에 남아 있던 티끌과도 같은 불씨들.

그중 하나인 본데노.

"...."

녀석을 구했다.

본데노는 아직 이로운을 완전히 못 믿는 듯 고심하는 얼굴이었다.

'그렇겠지.'

완전히 변해버린 모습.

거기다 마법진을 무력화시키는 것을 보며 자신이 플레이어가 아님을 알고 있을 거다.

상식을 벗어나는 일에 쉽게 믿음을 가지기에는….

"각오했어. 이로…운."

마지막 이름은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을 작은 목소리였다.

"음?"

"왜?"

본데노가 말했다.

"아르모를 버려야 한다는 거 아니야? 지금 우리가 살아나갈 방법이."

본데노의 말에 앙다물었던 이로운의 입가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하, 하하하."

"왜 그래?"

본데노, 녀석은 자신의 정체를 의심하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을 구해준다는 말을 믿고 이미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고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멍청한 것도 똑같네."

기분이 나아졌다.

광법사, 마법진에 미친 천재.

천재란 것들은 으레 그랬다.

어딘가 하나에 단단히 미쳐 있어 또 다른 부분은 망가져버려 있는 자들.

그게 아니라면.

'육감이겠지.'

범인들은 볼 수 없는 그 어떤 것을 볼 수 있는 천재성.

본데노는 아마 전자와 후자 둘 다일 것이다.

그러니 과거에도 제 목숨을 희생해가며 일면식도 없는 자신을 구하러 와 준 것이겠지.

"아르모를 버린다. 괜찮아?"

"방법이 없잖아."

본데노가 말했다.

"네가 내가 모르는 힘을 가지고 있다지만 던전을 빠져나가긴 어려울 거야. 밖엔 이미 해남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육사걸의 토벌대는 척후대일 뿐.

이미 지금쯤이면 추가로 투입될 토벌대들이 척후대를 기다리며 대기하고 있을 것이다.

"더, 던전주主…."

그때 노마법사 중 하나가 조심스레 나오며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요? 아르모를 버려야 한다니."

"지킬, 어차피 우리가 살아서 여길 나갈 수 있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습니다."

본데노가 차분히 노마법사를 향해 말했다.

"바깥엔 이미 아르모를 파괴할 적들의 2진이 대기하고 있을 겁니다. 어찌 다른 방법이 있겠습니까."

"하, 하지만… 아르모를 버릴 순 없습니다!"

지킬이라는 마법사의 말에 동조하듯 다른 마법사들도 앞으로 나왔다.

"아르모는 우리의 모든 것이 남아 있습니다! 아르모의 역사와 함께한 마법진들이…."

"쯧."

이로운이 짧게 혀를 찼다.

'똑같군.'

아마 현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못한 것일 거다.

그 이유는 저들이 혈교의 장로들과 똑같은.

'바깥을 경험하지 못한 자들.'

그저 이 던전 속에서만 살아 확장되고 바뀐 세계에 적응하지 못한 자들.

"저들이 던전주에게 은혜를 입은 자들이라면 함께…!"

"조용히 하세요!"

본데노의 커다란 목소리가 공동을 울렸다.

의외였다.

'꽤 성깔이 있네.'

과거 오래는 아니어도 함께 시간을 보냈던 아르모는 천성 마법사라 말할 수 있었다.

적을 맞이했을 때 가차 없긴 해도 자신의 사람들에게는 한없이 유한, 달리 말하면 호구 같은 이라고 생각했다.

"어찌 이들에게 목숨을 걸라 말하십니까! 이들, 아니 이 자는 저희를 위해 위험을 감수하고 이곳까지 왔습니다! 더 무엇을 바라는 겁니까!"

"하지만…."

"지킬의 말대로 이들과 토벌대를 뚫고 나가면 무엇이 달라집니까? 던전의 위치가 발각됐습니다! 인정하세요."

흥분했던 본데노의 목소리가 점차 가라앉았다.

"우리는 아르모를 지킬 힘이 없습니다."

통한의 심정이 절절히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여기서 다 죽겠습니까?"

지킬이란 자가 입을 다물었다.

"아르모의 마법사가 전멸하는 것이야말로 아르모의 역사가 끝나는 것 아니겠습니까?"

"...."

"걱정 마세요. 지킬."

본데노가 작은 웃음을 비추었다.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희망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

"아르모의 역사는."

툭, 툭.

제 머리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는 본데노.

"저와 함께 있으니까요."

지킬이란 노마법사가 결국 고개를 떨구었다.

"하지만…!"

그러나 모두가 납득한 것은 아닌 듯 또 다른 마법사가 목소리를 높였다.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마법사들이란 집착하는 자들.

거기다 마법진이란 비주류 학문을 연구하는 이들의 집착은 가히 필설筆舌로 형언할 수 없는 것이었다.

쉽게 포기하지 못하고, 놓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

"착각하지마."

그런 마법사를 향해 이로운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안이 아니야."

"다, 당신."

"나는 본데노를 살릴 거다. 그것 말곤 내게 어찌 되어도 상관없다는 것이야."

마법사가 몸을 떨었다.

이로운에게서 쏘아진 살기를 감당하지 못한 것.

"가자."

본데노는 그런 마법사를 신경 쓰지조차 않는다는 듯 앞서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

본데노가 앞장섰고, 이로운과 정치수가 따라갔다.

"역시 던전을 소멸시킬 생각이시군요."

그 뒤를 따르던 강철우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왜, 너도 던전 소멸시키는 게 싫어?"

던전의 소멸.

그리고 그 결과는 토벌대의 전멸로 보고될 것이다.

그 말은 즉.

'이들 모두가 죽은 이로 처리된다는 것.'

만일 살아 돌아가는 이가 생기면 생존자들은 던전에서의 일을 추궁당할 것이다.

이들은 모두 죽은 자가 되어야 한다.

이들이 쌓아 올리고 살아온 삶이 모두 끝난다는 뜻.

"그럴 리가요."

강철우는 한 치의 거짓도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이게 저희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란 걸 압니다."

"그럴 리가."

이로운이 재밌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살아날 방법이 하나 더 있잖아?"

"...."

강철우는 이로운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깨닫고 얼굴을 굳혔다.

"해남에 달려가 던전 안에서의 일을 낱낱이 고하면 되지. 암영 길드의 이상한 새끼들, 혈마라고 불리는 자의 일행이 육사걸을 죽였다."

"...!"

"거기다 그를 본 아르모의 던전주가 단크라는 이름을 말했다."

"그, 그런…."

강철우의 낯빛이 거무죽죽 죽어갔다.

"아르모는 소멸했으나, 마법사들은 살았고 던전주는 혈마와 함께 도망쳤다. 그렇게 말하면 살 수 있잖아?"

강철우가 다급히 손사래를 쳤다.

"두려움에 떨며 살긴 싫습니다."

그래도 나름 길드장이라는 걸까.

"그런 짓을 했다간 언제가 대가를 치르겠죠."

"해남이 지켜주지 않을까?"

"해남이요?"

피식.

강철우가 웃었다.

"육사걸을 죽게 내버려 두었다고 저희마저 죽일 게 분명합니다."

"멍청하진 않아서 좋네."

이로운이 걸으며 다시 말했다.

"그래서 나한테 이런 말을 하는 건?"

우뚝.

걷던 강철우가 멈춰 섰다.

그리곤 낮게 몸을 웅크리며 바닥에 머리를 찧었다.

지구의 주민들인 플레이어들에겐 수치스러운 일이지만 은에서는 간절한 부탁을 할 때 이렇게 하는 법이다.

"살길을 알려 주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

"그렇다면 부탁드리겠습니다. 이대로면 어차피 저흰 다 죽습니다. 가족마저 죽겠죠."

던전 소멸로 그들이 사망자로 처리된다 해도 그들은 신분을 숨기고 살아갈 능력이 없다.

이 좁은 대한민국, 어디에서 숨어 살 것이며.

'은에 의해 국경을 넘는 것도 철저히 통제되어 있지.'

대한민국을 벗어나는 것도 불가능하다.

"혹시…."

강철우가 조심스레 고개를 들며 말했다.

"의병이십니까?"

의병이라.

"얼마 전에도 의병 몇을 구해준 적 있습니다. 저는 어차피 해남이 그 사실을 알면 끝장입니다. 그렇다면 저희에게도 은혜를 베풀어주십시오. 할 수 있는 건 뭐든지 하겠습니다."

본데노도, 정치수도 멈춰서 이로운과 함께 강철우를 봤다.

"알겠으니까. 일어나. 어차피 그대로 죽게 내버려 두는 건 나도 마뜩잖거든."

그렇게 말한 이로운이 관심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가, 감사합니다."

급히 일어나 따라나서는 강철우.

본데노는 작게 웃으며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다.

"안 변했구나."

"뭐가?"

이로운이 본데노의 말에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과거의 모습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자신.

도대체 뭐가 변하지 않았다는 걸까.

"그냥. 내 영웅이."

그렇게 말한 본데노가 마침내 멈춰 섰다.

던전의 중심부.

혈왕성으로 따지자면 만혈못과 같은 던전의 깊은 심처深處였다.

우우웅.

사방에서 마력이 공명하며 울어대고 있었다.

수십의 마법사가 동시에 만들어낸 듯한 중첩 마법진이 그곳에 자리 잡아 있었다.

그 속에 낡디 낡은 책 하나가 신물처럼 모셔져 있었다.

"저게 아르모의 핵이야."

던전의 핵이었다.

***

"잠깐, 마법진을 해제하는데 시간이 좀 걸려."

던전의 핵을 지키고 있는 것인만큼, 저 마법진들은 아르모의 마법진에 대한 연구의 정수라 할 수 있었다.

광법사라 불리며 마법진에 대한 이해만큼은 아인하트에서도 백 명 중 하나라 불리는 본데노라한들 꽤 시간이 걸려 해제해야 하는 마법진.

"비켜."

이로운은 그런 본데노를 지나쳐 나아갔다.

"뭘 하려고?"

본데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저건 제물 마법진이나, 아까 마법사들이 만들었던 중첩 마법진과는 다른 거야!"

어이가 없어 하는 목소리였다.

"은의 기준으로 천급이라고 하지만, 제대로 해제하지 않으면 용급에 가깝다고! 지금 제대로 듣고 있는 거야?"

이로운은 말없이 마법진의 시작부에 서서 눈을 반개했다.

"시끄러. 본데노."

"너…!"

본데노가 당황하며 이로운을 향해 다가가려던 순간.

촤아아아아아!

이로운의 발밑에서부터 핏줄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무, 뭐…."

핏줄기는 마치 거미줄처럼 퍼져나가며 형상을 갖춰나가기 시작했다.

마법진에서 발하는 빛이 핏줄기를 비추는 그 광경은 신비로우면서도 기괴한 그런 것이었다.

넋을 놓고 그 광경을 바라보는 이들.

"마, 말, 말도 안 돼!"

가장 먼저 깨달은 본데노가 기겁하며 소리쳤다.

"대항 마법진이라고?"

마법진을 해제하는데 가장 간단하면서도 궁극이라 불릴 정도로 어려운 것이 있었다.

바로 대항 마법진.

마법진과 대칭을 이루어 마법진과의 공멸을 유도하는 마법진.

말이 대칭이지, 하나의 마법진도 복잡한 술식과 축을 지니고 있고 눈에 보이지 않는 입체와 숨겨진 술식 또한 존재하기에 완벽한 대칭을 이루는 마법진을 만든다는 것은 오랜 분석과 공부가 필요한 일이었다.

더욱이….

"중첩 마법진이라고!"

저것은 중첩 마법진이다.

중첩이란 게 단순히 여러 개가 나열되어 있는게 아니다.

수없이 얽히고설켜 기존의 구조보다 몇 배는 더 복잡하게 이루어진 것.

근데 한순간에 대항마법진을 만들어냈다고?

"발동은 못 시키니까. 너가 해."

"대, 대체 이런 걸 어디서 배운 거야?"

배웠다, 라.

이건 좀 다르다.

"각인된 거지."

마도의 종주라 불리는 마왕에게.

"지, 진짜잖아."

본데노는 어느새 이로운의 말은 신경도 안 쓴 채 이로운이 만든 대항 마법진을 뜯어보고 있었다.

광법사라 불리는 그에게도 이렇게 빠른 시간 대항마법진을 만드는 건 불가능한 일이지만, 대항 마법진이 진짜인지 확신할 수 있는 눈은 가지고 있었다.

"나… 아르모의 희대의 천잰데…."

우는 얼굴을 한 본데노가 마법진의 시작점에 가 손을 뻗었다.

"나….노력도 열심히 했는데."

말뿐이 아니라 정말 눈물이 맺힌 본데노가 마법진에 마력을 부여하기 시작했다.

"시이발… 더러운 세상…."

화아아아아악!

마법진이 빛을 발하며 깨져나가기 시작했다.

쩌어어엉!

완전히 파훼 된 마법진 속, 던전의 핵을 향해 이로운이 나아갔다.

어색한 침묵과 본데노의 울음소리가 가득한 그곳에서 이로운이 던전의 핵에 손을 댄 순간이었다.

"...!"

이로운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아인하트의 파편, 아르모와 접촉하였습니다.]

[아르모의 주인으로 등록하실 수 있습니다.]

다시 볼 수 없을 것 같았던 그것.

시스템 메시지가 눈앞에 나타났다.

삼왕의 제자

제2권 제8화

033

[아인하트의 파편, 아르모와 접촉하였습니다.]

[아르모의 주인으로 등록하실 수 있습니다.]

눈 앞에 떠오른 푸른 창.

이건 두 말할 것도 없는 플레이어들의 권능.

"시스템 창…."

시스템 창이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자신은 분명 플레이어의 힘을 잃었다.

'마력 코어.'

플레이어들이 각성과 동시에 생성되는 마력 코어 혹은 시스템 코어라 불리는 것.

이로운은 매화검수에 의해 그것이 파괴당했다.

그렇기에 모든 힘을 잃고 화산 길드 몬스터 사체 처리장에 처박혀 노예와 같은 삶을 살지 않았던가.

그 이후 시스템 창을 본 적이 없다.

아니.

'있네.'

혼돈의 그릇으로 선택받았을 때 보았던 시스템 창.

그리고 혼돈의 차원에서도 분명 시스템 창을 보았다.

"...."

이로운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분명 내 몸에 시스템 코어는 없어.'

두 번의 환골탈태를 하며 자신의 몸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그였다.

혼돈의 차원에서 돌아온 후, 자신이 보낸 백 년의 시간이 전부 돌아간 듯 노예였던 몸 상태 그대로였다.

하지만 어떻게 시스템 창이 보이는 걸까.

짐작 가는 바는 있었다.

스윽.

가슴께를 쓸어내리는 이로운.

'혼돈.'

그때와 지금의 유일한 공통점이라면 혼돈의 여부 아니겠나.

그때는 혼돈의 그릇으로 선택받았고, 지금 자신의 안에는 혼돈이 있다.

'이건 고민해봐야겠어.'

지금 당장 알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이로운이 시스템 창을 바라봤다.

무엇보다 신경 쓰이는 것은 또 있었다.

[아인하트의 파편, 아르모와 접촉하였습니다.]

[아르모의 주인으로 등록하실 수 있습니다.]

이 메시지, 마치 던전주를 말하는 것 같았다.

던전주는 던전의 주인을 부르는 말, 그 던전의 왕이나 리더를 뜻하는 말이었다.

'이런 식은 아니지.'

그들이 시스템 창을 통해 던전주로 등록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 없었다.

던전의 핵에 접근해 일부의 힘을 사용한다는 것 정도만이 자신이 아는 정보.

"본데노."

"왜 그래?"

"던전의 핵에서 던전주로 등록한다는 메시지를 받아본 적 있어?"

"메시지?"

이로운의 말에 본데노가 무슨 말을 하느냐는 듯한 얼굴을 했다.

"시스템 창 말이다."

"그런 걸 내가 어떻게 봐. 잊었나 본데, 난 아인하트의 주민이야. 플레이어가 아니라고."

역시.

"그럼 던전주라는 게 될 때 어떤 의식이라도 치르나?"

"그렇긴 해."

본데노가 깨져버려 파괴된 마법진을 가리켰다.

"마법진에 내 피를 바쳐, 인식함으로써 던전의 힘을 일부 사용할 수 있어. 그래서…."

본데노가 꽉 막힌 얼굴로 말했다.

"모든 것을 잃었음에도 다시 한 번 힘을 쓸 수 있는 거야."

대충 이해할 수 있었다.

플레이어였기에 세계의 파편, 던전에 대해서 아는 것은 많지 않았다.

그건 자신의 스승님들이었던 삼왕 또한 마찬가지였다.

'던전의 주인으로 인정받는 것은 가계약.'

그로 인해 일부의 권리를 이용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이로운의 눈앞에 나타난 것은.

'정식 계약인가.'

왜 이런 것이 가능한지는 모른다.

과거 자신이 플레이어였기 때문인지, 아니면 정말로 혼돈 때문인지.

플레이어들 중 던전 핵에 접근했다는 자가 있다는 소문은 듣지 못해 확인하기 힘들겠지만 아마도 후자이리라.

"결국은 겪어 봐야 안다는 거네."

"무슨 소리를…."

본데노의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등록한다."

이로운의 말이 마치자마자 낡은 책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띵! 띵! 띠디디디딩!

이로운만이 들을 수 있는 소음과 함께 여러 개의 시스템 창이 나타났다.

[아르모의 주인으로 등록되셨습니다.]

[아르모가….]

[....]

[은의 파편, 혈왕성의 주인이 될 자격이 있습니다.]

[혈왕성의 주인이 되시겠습니까?]

아르모의 주인이 되어 할 수 있는 것들이 나열된 후, 뜬금없게 혈왕성에 대한 시스템 창이 나타났다.

'나는 이미 혈왕성의 핵에 접촉했었다.'

만혈못.

하지만 그때는 어떤 자격이 충족되지 못해 이 메시지가 나타나지 않은 듯했다.

"등록한다."

[혈왕성의 주인으로 등록되셨습니다.]

다시 한 번 머리를 울리는 시끄러운 소음과 함께 눈앞이 어지럽혀졌다.

하지만 이로운은 하나의 시스템 창을 바라보며 미소를 띠웠다.

"본데노."

"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아르모."

이로운이 본데노를 보며 말했다.

"버리지 않아도 되겠다."

이로운은 그렇게 말하며 다시금 메시지를 쳐다보았다.

[두 세계의 주인으로 등록되어 있습니다.]

[두 세계를 병합할 수 있습니다.]

[어느 세계를 주 세계로 설정하시겠습니까?]

말할 것도 없다.

"혈왕성."

화아아아아아아악!

낡은 책에서 뿜어나온 빛이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이로운-!"

"혈마님!"

본데노와 정치수가 그런 빛무리 속에서 이로운을 지키기 위해 달려들었다.

파앗!

세상이 꺼져버렸다.

***

"이로운!"

가까이에 있던 본데노가 급히 한 손으로 마법진을 구축하며 이로운을 향해 뛰었고.

"혈마님-!"

파앗!

온 신경을 이로운에게 집중하고 있던 정치수도 몸을 던졌다.

먼저 도착한 것은 멀리 있던 정치수였다.

금제 속에서도 강제로 뚫어내며 나오는 혈마기를 토대로 순식간에 움직여 이로운을 덮쳤다.

그다음은 본데노.

그가 한 손으로 보호 마법진을 펼치며 이로운과 정치수 사이에 뒤섞였다.

"뭐하냐."

싸늘한 목소리.

"음?"

"응?"

정치수와 본데노와 동시에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이로운의 허리를 잡고 숙이고 있는 정치수, 한쪽 종아리를 잡고 있는 본데노.

그들이 한껏 긴장하며 고개를 돌렸을 때.

"...."

모든 이가 자신들을 보고 있었다.

아르모의 마법사들, 놓고 온 플레이어들.

"크, 크흠."

암영 길드원들로 위장한 혈검대가 기침을 하며 조심스레 고개를 돌렸다.

"흡."

정치수가 급히 숨을 들이마시며 자세를 바로 했다.

이로운을 지키며 서듯 정치수가 검을 치켜들고 있었다.

"뭣들 하는 거냐! 당장 혈마님을 보호…, 으음?"

그렇게 말하던 정치수도 곧장 입을 다물었다.

"...."

그곳엔 너무도 낯익은 자들이 풀풀 기세를 풍기며 서 있었다.

"어떻게 이곳에 들어온 것이냐! 감히 이곳이 어딘지 알고!"

그곳에서도 누군가 커다란 고함을 치켜 주먹에 불꽃을 피워내고 있었다.

주먹의 불꽃.

"염왕권…?"

"음? 혈검대장?"

서로가 서로의 눈을 마주치며 멈춰섰다.

"교주님…."

"혀, 혈검대장이 갑자기 여기 왜? 그럼…."

세계가 뒤바뀌며 일어난 변화에 아마 무인의 기감마저 엉망이 되었던 것.

이제야 돌아온 기감 속에서 그들은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혈마님!"

이곳은 혈왕성이다.

그것도 혈왕성의 한복판.

소란을 눈치챈 혈교도들이 급히 이곳에 와 이들을 포위한 것이고.

순백으로 모든 것을 가로막고 있던 세계의 보호막이 사라지자 서로가 서로를 눈치챈 것이었다.

"자, 다들 인사는 끝난 거지?"

이로운이 정치수와 본데노를 밀어내며 나왔다.

"혈마님을 뵙습니다!"

쿵!

혈교주가 된 강한철을 필두로 포위하던 모든 자들이 동시에 무릎을 꿇었다.

"혈마천세! 혈…."

"닥쳣!"

짜증 나게 소리친 이로운이 강한철 앞에 서자 서 있는 모두가 이로운을 보고 있었다.

혈교도들이야 혈마의 존재만으로 모든 것을 받아들일 테지만.

"대체… 무슨…."

갑작스레 이곳으로 이동된 아르모의 마법사들이나 플레이어들은 당황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일단 다시 한 번 인사들 해."

이로운이 그들의 앞을 휘적휘적 걸어가며 말했다.

"오늘부터 새 식구들이다."

혈마궁으로 향하는 방향.

뒤늦게 정치수와 혈검대원들이 급히 뒤를 따랐다.

우뚝.

멈춰선 이로운이 아직도 어안이 벙벙한지 말조차 꺼내지 못하는 이들을 넘어 강한철을 보며 말했다.

"쟤네 금제부터 걸고."

"존명!"

그제야 몸을 일으키는 혈교도들.

덜덜덜.

마법사들과 플레이어들은 영문도 모른 채 몸을 떨어야만 했다.

***

혈마궁의 심처, 만혈못.

그곳에 이로운과 강한철이 서 있었다.

호법일 때의 강한철은 만혈못에 들어올 수 없으나, 혈교주가 되어 들어올 수 있게 되었다.

"혈왕성의 핵이 만혈못이 아니었나?"

"아, 그건."

강한철이 급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만혈못은 신물과 혈왕성을 잇는 통로입니다. 신물은 따로 있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이로운이 만혈못을 향해 나아갔다.

작은 세계인 아르모도 핵을 지키기 위한 방비가 철저했다.

더 큰 세계인 혈왕성이라고 다를 바는 없는 것이었다.

"통로를 여는 법은 신녀만이 알고 있습니다. 신녀께 연락을 취했으니…."

"그럴 필요 없어."

이로운이 만혈못을 향해 손을 내뻗었다.

우웅.

공명하는 만혈못.

'저 안에 있었군.'

자신의 눈조차 일순 속일 수 있는 진법이라니.

혈왕성에 제대로 남아있는 혈교의 유산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굳이 통로를 열어젖혀 신물에 다가갈 필요는 없었다.

통로인 만혈못.

여기서도 충분하다.

[주인 세계, 혈왕성에 접촉하셨습니다.]

다시금 나타나는 시스템 메시지.

[혈왕성과 아르모가 병합되었습니다.]

[아르모를 배치하겠습니까?]

이로운이 고개를 끄덕이자 눈앞에 푸른 빛무리가 일렁거렸다.

떠오른 것은 입체적으로 혈왕성을 그러낸 듯한 지도였다.

손도 움직이지 않은 채 이로운이 눈길을 주자 또 하나의 빛무리가 일렁거렸다.

[아르모]

눈 앞에 떠오른 그것은 분명 본데노가 있던 아르모의 모습이었다.

혈왕성의 백 분의 일 크기도 되지 않는 작은 세계.

이로운은 혈왕성의 변두리 쪽을 바라봤다.

[세계의 확장이 가능합니다.]

[확장하시겠습니까?]

세계의 확장이라니.

'은의 세계에 대한 정보도 흑시왕에게 더 알아보라 해야겠어.'

물론 그가 아직 몰라야 하는 정보들은 배제한 채.

"확장하겠다."

이로운의 말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쿠쿠쿠쿠쿠.

땅 밑이 흔들리는 느낌이 들었다.

[아르모가 자리 잡았습니다.]

아마 깨져버려 사라진 암흑지대가 확장되어 아르모의 입구가 나타났으리라.

과연 눈앞의 혈왕성의 지도도 바뀌었다.

'이런 식이군.'

암흑지대의 일부가 확장됐다.

평평한 평지, 그곳에 지하 던전인 아르모로 향하는 입구가 만들어져 있었다.

이로운은 다른 기능이 있는지 확인해보려 했으나 쓸데없는 것들뿐.

딱히 신경 써야 할 것은 없는 듯했다.

볼 일을 다 마쳤다는 듯 이로운이 뒤로 돌려던 때, 다시금 띵하는 메시지 음이 울렸다.

[던전 키퍼를 지정할 수 있습니다.]

던전 키퍼.

"던전주… 아니. 보스몬스터 같은 거겠군."

그 밑으로 이어진 설명.

그건 본데노가 했다던 의식과 같이 던전의 힘을 일부 끌어쓸 수 있는 것을 말하는 것 같았다.

[혈왕성의 던전 키퍼를 지정해주십시오.]

[아르모의 던전 키퍼를 지정해주십시오.]

두 던전의 키퍼.

'내가 갖는 것은?'

이로운이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세계의 주인은 키퍼가 될 수 없습니다.]

시스템이 이로운의 마음이라도 읽은 듯 메시지로 알려왔다.

'키퍼는 외부출입이 가능한가?'

그런 질문에 대한 답도 나타났다.

[키퍼가 던전 밖으로 나가려면 대가가 필요합니다.]

아마도 세계의 양분, 던전 코스트를 소모해야 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야 선택은 간단했다.

"혈왕성의 키퍼로 강한철을 지목한다."

그리고 또 한 명.

"운도 좋네, 그 늙은이."

아르모에서 본데노를 제외하고 이름을 아는 유일한 존재.

"지킬을 아르모의 키퍼로 지목한다."

변화는 즉각적이었다.

"혀, 혈마님!"

뒤에 떨어져 있던 강한철의 몸에서 핏빛과 같은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삼왕의 제자

제2권 제9화

034

그간 혈왕성은 많은 변화를 맞이했다.

말라 죽어가던 혈왕성, 강은하의 활약으로 세외에서 자원이 수급되기 시작되었고 교도들의 안색은 전과 다르게 밝아져 있었다.

다 무너져가던 혈왕성의 건물들을 보수하기 시작했으며, 아직 혈왕성의 변두리에는 판잣집이 가득했지만 혈마궁 근처부터는 제대로 된 주택들이 지어지고 있었다.

강은하의 활약에 흑시왕의 투자까지 받고 있으니 당연한 변화였다.

'강한철.'

더욱이 강한철도 혈교주로서의 역할을 생각보다 잘해주었다.

본래 혈교는 확실한 계급이 존재하는 세계였다.

혈마의 밑에 교주, 그 밑에 부교주, 상교도라 불리는 장로들과 교의 중진들.

그 중간에는 무인들이.

그 밑에는 일반 교도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하교도는 상교도의 말을 거스를 수 없고, 상교도는 원한다면 언제든 하교의 목숨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

강한철은 이것을 바꾸었다.

물론 계급은 여전했지만 하교가 더 높은 곳에 오르기 위해선 무인이 되는 수밖에 없던 것을, 다른 방식으로도 올라설 수 있게 해주었다.

'나쁘지 않아.'

계급주의 타파라느니, 만민평등이라느니를 외칠 바보 같은 생각은 없다.

자신이 피라미드의 밑이라면 모를까, 그 맨 꼭대기에서도 별첨이라면 굳이 바꿀 이유가 있나?

그래도 더 이상 상교도가 아무 이유 없이 하교를 괴롭히거나 목숨을 빼앗을 수는 없게 되었다는 것으로 만족해야지.

그렇게 변화하고 있는 혈왕성.

하지만 그 변화도 눈앞의 이 두 명의 변화보다는 작은 것이었다.

"허허허!"

호기롭게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에 강인한 힘이, 젊음이 서려 있었다.

"이 모든 것이 혈마님의 은혜이옵니다!"

혈교주, 강한철.

팔십이 넘어가는 나이, 무인이기에 노화의 티가 많이 나지 않는다고는 하나 그래도 백발이 성성했던 그였다.

하지만 지금 그는 건장한 체격에 새까맣게 자라난 머리칼을 자랑하고 있었다.

마흔 정도로 보이는 중년인.

"되찾은 젊음으로 하교 강한철, 혈마께 충성! 또 충성하겠나이다!"

강한철이 변화한 이유는 하나였다.

'던전 키퍼.'

던전 키퍼로 지정되며, 혈왕성의 힘을 가져다 쓸 수 있게 된 것.

그는 그것으로 바로 경지를 돌파해 탈마의 경지에 이르렀다.

"저, 저는 어찌 감사를 표해야 할지…."

그리고 또 한 명.

마찬가지로 금발을 자랑하는 중년인이 옆에 서 있었다.

"왜 제게 이런 은혜를 주셨는지…."

또 다른 던전 키퍼, 아르모의 키퍼가 된 지킬이었다.

그 또한 백발이 성성한 노 마법사로 아르모에서 나오지 않은 채 마법진만을 연구하던 자였다.

아르모에서의 지위는 본데노의 바로 다음.

그런 그가 본데노를 제치고 키퍼가 되어 젊음마저 되찾은 것이었다.

"이름을 아는 게 너밖에 없었다."

이로운의 말에 지킬이 입을 다물었다.

"본데노는 바깥과 왕래해야 해. 좋아할 일만은 아니야. 너희는 내 허락 없이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

"교를 위해 여생을 바치는 것, 하교의 큰 은혜입니다."

"목숨을 부지하게 해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그들은 젊음을 되찾고, 강인한 힘을 얻었다.

변화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래서 가능하다고?"

이로운의 말에 강한철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예. 보여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강한철이 이로운의 앞을 향해 양손을 내뻗었다.

우직.

돌더미 속에서 커다란 소음이 울려 퍼졌다.

그그그그그구!

그리고 곧 돌무더기 속에서 나무 한 자루가 커다랗게 자라 그늘을 만들었다.

'창생.'

새로운 것을 만드는 힘.

아니, 그런 것이 아니다.

'변환.'

대가를 지불하여 그 형태를 바꾸는 것일 뿐.

"자재의 조달이 힘들어 증축이나 건축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로써 해결될 듯싶습니다."

던전 키퍼의 힘을 빌려, 세계의 양분을 대가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힘이었다.

은의 세계든, 아인하트의 세계든 그 입구가 좁은 데다 보안을 유지하기 위해 외부인의 출입을 엄금한다.

그로 인해 식량이든 무엇이든 들고 들어오는 데 한계가 있는 법이었다.

"다른 세계도 이런 것이 가능한가?"

이로운의 말에 강한철이 고심하는 듯 말했다.

"저도 잘은 모르옵니다. 허나, 그들은 다른 방식으로 자재를 만들거나 변환한다 들었습니다."

비슷한 방식이 있다는 소리다.

'그렇다면 결국 던전주라는 특별한 힘을 사용하는 이도 있다는 건가?'

확실히 알아봐야 할 것 같았다.

"왜…."

그때 옆에서 흐느끼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희대의 천잰데… 아르모를 위해 모든 걸 다했는데…."

음울한 귀신의 목소리.

"나는 왜…."

본데노가 그곳에서 울상을 지은 채 쪼그려 앉아 있었다.

"던전주… 그것이… 제가 죄송합니다."

지킬이 그를 위로했다.

던전 키퍼로 지킬을 지목한 탓에 모든 이득은 지킬이 갖게 되었다.

거기다 원래 아르모의 힘을 빌려 쓰고 있던 본데노는 그 힘을 잃었고, 겨우 되찾은 힘마저 잃은 채 마법진을 그릴 수조차 없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하아… 시이발… 세상…."

이로운이 그런 본데노를 보며 웃었다.

"웃기냐…."

"왜? 불만이라도 있는 거야?"

이로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강한철을 비롯한 수많은 이들의 시선이 본데노를 향했다.

"그, 그런… 시이발…."

"걱정 마라."

이로운이 그를 향해 걸어 나가 말했다.

"널 그대로 내버려 둘 생각은 없으니까. 말했잖냐."

분명 이로운은 말했다.

"구해주겠다고."

* * *

혈마궁, 혈마를 위해 따로 만든 연공장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이로운은 폐관을 할 수 있는 곳을 찾아 본데노와 함께 들어섰다.

"정말이야?"

"내가 이로운이라는 사실은 한 번에 믿었으면서. 이건 못 ,믿는 거냐?"

"그건 다르지."

본데노가 말했다.

"너와 내가 같다는 말. 그 말은 너랑 그 여자밖에 모르는 얘기야. 거기다 모습이나 여러 가지는 변했어도 내 눈엔 보이거든."

"보여?"

"말로는 설명하지 못해. 하여튼, 정말 가능한 거야?"

본데노가 그렇게까지 믿지 못할 만했다.

지금 이로운이 그에게 얘기해준 것은 써클이 파괴된 것을 수복하겠다는 것이니까.

그건 코어를 파괴당한 플레이어를 살리는 것과 똑같은 일이었다.

'하지만 다르지.'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본데노의 힘이 되어줄 써클.

그에 대해 그 누구보다 잘 아는 이를 스승으로 두었으니까.

또 그것을 수천 년 동안 연구한 마도의 종주 또한 자신의 스승님이었다.

"일반적인 방법으론 불가능하겠지."

이로운의 말에 본데노의 눈이 흔들렸다.

"일반적이지 않으면 가능하단 소리다. 물론 실제로 해낼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없겠지만."

이로운은 그렇게 말하며 혈침을 던져 땅에 박아넣기 시작했다.

"나도 네 힘이 필요해."

"네가?"

본데노는 이해가 가질 않는다는 듯 말했다.

"난 마법진밖에는 모르는 반푼이 마법사야. 써클을 되찾는다고 해도 마찬가지고."

툭, 투툭.

본데노가 말을 하는 사이에도 혈침들은 이로운의 의지에 따라 박혀 들어갔다.

"마법진은… 나보다 네가 더 뛰어난 것 같던데."

"뭐 그렇겠지."

보지 않아도 본데노의 얼굴에 경련이 일어났음 정도는 알 수 있다.

"지금은 마법진을 발동시키지 못해."

"왜?"

"마나를 움직여선 안 되거든. 내공으로 마법진을 발동한다고 되는게 아니야. 그건 진법이지 마법진이 아니거든."

세계에 귀속된 기술들.

그것들은 세계에 걸맞은 대가가 필요하다.

같은 힘이라고 한들, 무인은 내공, 플레이어는 마력, 아인하트는 마나로 사용하듯.

"무엇보다."

마침내 모든 혈침이 제 자리를 찾아 박혔다.

"믿을 수 있다는 게 중요한 거지."

"...."

"준비는 끝났다."

스르르륵.

혈침들에서 뻗어 나온 피가 다른 혈침으로 옮겨가며 그림을 그려대기 시작했다.

복잡한 중첩 마법진은 아닌, 두 개의 마법진이 연결되어 있는 형태였다.

"이건…!"

과연 마법진에 미친 광법사라는 별명답게 본데노는 즉각 이 마법진이 무엇인지 알아차린 듯했다.

"계약 마법진… 맞아?"

계약 마법진.

게헨나의 마인들이 쓰는 특수한 마법진.

"이걸 어떻게 만든 거야?"

계약 마법진은 마인이 태어나며 그에게 각인된다.

즉, 마인이 아닌 이상 사용할 수 없을뿐더러 만든다고 만들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내가 만든 게 아니야. 만들어주신 거지."

그들의 왕이.

"이걸로 너와 내가 계약한다. 계약 마법진이 뭔진 알고 있겠지?"

"당연하지."

본데노의 얼굴에 희망이 깃들었다.

"이거라면… 정말 가능할지도…."

계약을 통해 그 힘을 전해 받는 것.

대가를 지불해 마인의 힘을 빌려 쓰는 것이 바로 이 계약 마법진이었다.

본데노도 보아서 안다.

이로운이 가진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그것이 계약 마법진을 통해 변환되어 마나로 환원돼 자신이 쓸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그럼 시작하지."

그런 계약 마법진에 가장 중요한 절차가 있었다.

"대가는 뭘 지불할 거지?"

"...."

대가.

계약 마법진에 새겨진 대가가 그가 빌려 쓸 수 있는 힘의 한계를 확립한다.

대가가 크면 클수록 빌려 쓸 수 있는 힘도 커지는 것.

"목숨."

본데노가 망설임 없이 말했다.

"필요하다면 영혼이라도."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르진 않을텐데."

이로운의 말에 본데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널 구하러 갔을 때 이미 목숨을 걸었어. 그리고 그날, 매화검수의 칼날에 한 번 죽은 게 나야."

"...."

"운이 좋아 살았고, 다시 너에게 구해졌다."

담백하기 그지없는 말투.

"그 새끼, 살려둘 건 아니지?"

누굴 말하는지 안다.

그날 본데노의 목숨을 앗아갈 뻔하고, 자신을 노예로 처박아버린 장본인.

매화검수.

끄덕.

이로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어. 더 이상 아르모도 내가 지키지 않아도 되고. 대가는…."

녀석이 손바닥을 베어 피를 냈다.

그것으로 마법진의 빈 공간에 글씨를 새겨나갔다.

아인하트어로.

'영혼.'

계약의 준비는 모두 끝났다.

"발동시킬게."

이로운이 마법진을 발동시킬 수 없기에, 녀석이 한 줌 남아있는 마력을 마법진에 부여하기 시작했다.

그것으로.

"계약은 완료됐다."

***

혈왕성과 아르모는 안정화되었다.

물론 그들이 뒤섞여 사는 것은 아니었다.

혈왕성의 변두리, 원래는 존재치 않았던 세상에 아르모가 자리 잡았고 혈교는 그들의 구역을 인정해주었다.

혈교로서는 사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이었다.

'아르모의 주인 또한 혈마시다.'

저들 또한 혈마를 숭배하진 않아도 따를 수밖에 없는 입장이란 것이었다.

각자의 자치권을 가지고, 던전 키퍼의 능력을 활용해 두 세계는 발전해나갔다.

플레이어들의 처우도 큰 문제는 아니었다.

약간의 금제.

'새로운 신분이 주어질 거다.'

그들은 흑시에서 건네주는 새로운 신분으로 새 출발을 할 것이다.

'남양주에 자리 잡지.'

은하길드의 영향권, 그들은 새로운 하나의 플레이어 길드가 되어 자리를 잡아 생활하기로 했다.

그 사이 이로운과 본데노는 함께 폐관에 들었다.

"미쳤어… 이건 진짜 미쳤어…."

본데노가 새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사방을 훑었다.

운동장 크기만 한 폐관수련장.

그 바닥과 벽 천장에 새빨간 마법진이 가득했다.

그 중앙에 이로운이 상의를 벗은 채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발동시켜라. 본데노."

혈마가 되어 혈교를 얻었다.

이제 천마가 될 시간이다.

삼왕의 제자

제2권 제10화

035

우웅!

폐관 수련장에 붉은 빛이 가득했다.

이로운이 가진 핏빛의 마법진을 본데노가 발동한 대가였다.

"아… 아…."

본데노의 눈이 뭔가에 홀린 듯 흐리멍덩해졌다.

마법진에 미친 광법사가 바로 그였다.

아르모는 그런 광법사들이 대대로 주인을 맡아온 세력이었다.

안 그래도 지식에 대한 집착이 남다른 마법사들인진대, 그들의 앞에 미쳤다는 수식언이 붙었다.

그 정도로 아르모의 마법사들은 마법진에 대해 집착하고, 공부하는 자들이었다.

"이건… 미쳤어…."

그렇기에 본데노는 이것이 무엇인지 어림짐작이나마 할 수 있었다.

마법진의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마법진은 아닌 것.

'진법?'

은의 진법이라는 것도 조금이나마 공부했기에 그것의 느낌도 있었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신성 마법진이라니."

신성 마법진.

아인하트의 삼교도들이 쓰는 특수한 마법진이었다.

마법진이란 것은 본래 어떤 목적으로 축을 만들고 수식을 새겨넣고 언어와 형태를 부여해 힘을 끌어내는 것을 말한다.

신성 마법진도 비슷한 형태다.

하지만 그들의 것은 오히려 게헨나의 마인들, 그들이 쓰는 계약 마법진과 비슷하다 할 수 있었다.

이해할 수 없고, 만들어낼 수 없는.

그저 가진 채 태어나야만 하는 각인.

또한, 삼교도들은 말한다.

'신의 은총이자 은혜.'

신언이라고.

그런데, 그런데.

"아…."

저 불길하기 짝이 없는 괴이한 마법진에서 신성 마법진의 모습이 보이는 건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플레이어인 이로운을 알기에 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아아아…!"

본데노의 눈에 초점이 사라져갔다.

이해할 수 없는 아득한 경지의 무언가를 어렴풋이나마 느낀 반향이었다.

공동안을 채운 마법진이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다.

흐려지는 것이 아닌, 압축되어 가는 것.

복잡하디 복잡한 마법진이 그 크기를 줄여나가 중심부를 향해 갔다.

사방에서 빛나던 핏빛 마법진은 어느새 가부좌를 틀고 있는 이로운을 감쌌다.

"하아…."

앉아있는 이로운의 입에서 새빨간 연기가 흘러나왔다.

줄어든 마법진은 그사이 더욱 작아져 이로운의 온몸을 뒤덮고 있었다.

까득.

그렇게 변화가 시작되었다.

* * *

혈마신공은 스승님들의 첫 번째 가르침이자, 혼돈의 그릇이 되기 위한 첫 번째 톱니였다.

내부의 관조.

육체로 이루어진 그 안의 것들을 새로이 정비하고 버텨낼 수 있게 만드는 것.

그러나 무왕 스승님이 새로이 만들어낸 혈마신공은 괴악하고 난해하기 그지없어 그 한계를 뚫어버렸다.

본디 내부라 불리려면 그 겉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새로운 혈마신공은 인간의 육체가 담아낼 수 없는 내부를 만드는 과정이었다.

작은 유리병에 용량의 한계를 넘어가는 물을 채워 넣을 수 없다.

그런 불가능과 불가해를 해낸 것이 혈마신공이다.

그렇기에 부작용이 존재한다.

'언제 깨질지 몰라 위태롭다는 것.'

무공을 사용하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다.

과도한 움직임마저 자제해야 했다.

한계를 넘어 축적된 내부가 육체라는 겉껍데기를 터트리면 안 되었으니까.

그 부작용을 지우기 위해 고안된 것이 새로운 천마신공이었다.

'육체 또한 그렇게 만들면 된다.'

유리병의 크기가 작다면 더 키울 수 있게.

아니, 그런 것이 아니다.

'아무리 과도한 용량이 들어온다 해도 깨어지지 않는 육체.'

그런 불가능을 위한 무공이다.

까드드득!

원래 이로운의 계획은 혈마신공의 완성 이후 곧장 천마신공을 연공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계획에 변동이 생겼다.

'천마기.'

천마신공은 조력자가 필요하다.

천마기, 천마교의 교도들이 가진 그 힘으로 마치 강철을 제련하듯 두드려야 하는 것.

그렇기에 이로운은 처음부터 마교를 찾았다.

혈교를 찾는다면 혈마신공에 복속될 것이고.

천마교라면 천마임을 밝히거나, 힘으로 금제해 돕게 할 생각이었다.

-천마교는….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그들과 교류한 지 너무 오래되었습니다. 아니 교류라할 것도 없죠. 적대나 다름없으니.

강한철의 말이었다.

-언제나 그들을 신경 쓰고 관심을 두고 있었기에 그렇게도 생각했습니다.

천마교는 멸망했다고.

가장 강대한 적이었던 천마교와의 분쟁을 두려워해 계속해서 그들을 경계했으나 마음 한 켠엔 그들이 멸망하여 사라졌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혈수백이 천마교의 건재를 증명했다.

-천마교는 저희 쪽도 찾을 수 없습니다. 적어도 정체를 드러낸 채 흑시와 거래하는 자는 없단 거죠.

흑시왕도 마찬가지.

-아니, 정체를 숨길 수도 없었을 테니 멸망했거나 적어도 활동을 하지 못하고 있음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본데노를 찾았다.

제2 안이 필요했으니까.

지금 만들어낼 수 없는 천마기를 만들어 몸을 두드릴 수 있는 방법.

화아아아악!

이 마법진이다.

"끄악… 끄아아아악!"

본디 정해진 방식이 아닌 이로운이 비틀어 만들어낸 방법.

"크아아아악!"

가지 않았던 길인만큼 그 효과를 확신할 수 없는 방법.

"커억, 커어억…. 컥!"

그 부작용이 생각한 것 이상이었다.

"머, 멈출게!"

본데노가 공급하던 마력을 멈추려 소리치던 참이었다.

"멈추지 마!"

이로운이 피눈물을 흘리며 소리쳤다.

"계속… 계속해."

"하지만…!"

"내가… 죽을 것 같아도 멈추지 마…!"

이미 육체의 붕괴가 시작됐다.

오히려 지금 마법진을 멈추면 육체는 완전히 붕괴한다.

피식.

그런 생각을 하니 고통 속에서도 웃음이 났다.

'생에 대한 집착이라.'

다시는 갖지 않을 감정이라 생각했는데.

아닌가.

'죽음을 바라는 건가.'

온몸을 갈가리 찢겨 짓이기는 고통 속에서 이로운의 머릿속엔 잡념이 들었다.

의식이 흐릿해져 간다.

'뭐, 언제든 포기해도 괜찮다고 생각했으니까.'

어차피 멸망을 바랐던 세상.

자신의 죽음으로 세상이 멸망한다면 본래 받아야 할 결과를 받는 것뿐일 테니까.

'혈교도, 무엇도 내겐 큰 의미 없어.'

어차피 스승님들을 위해….

"끅, 끄으으윽…."

스승님들.

자신에게 없던 부모님의 역할을 해주었던 사람들.

때로는 형제로, 자매로 존재해주었다.

배신의 상처가 아물지 않았을 때 그들은 믿으라 말하지 않고 품을 내주었다.

'죽이십시오.'

모든 것이 소용없다 여겼을 때.

'아니다.'

그들은 자신의 고통을 함께 떠안아 더 큰 고통에 몸을 내던졌다.

'밥 먹자.'

다시 한 번.

'잘 잤느냐?'

다시 한 번 그것을 느끼고 싶다."이로운-!"

마법진의 빛이 꺼졌다.

털썩.

그 중심에 있던 이로운이 쓰러졌다.

* * *

"혈검대장."

"예. 교주님."

강한철의 말에 정치수가 작게 답했다.

"아니, 치수야."

강한철의 이어진 말에 정치수의 눈이 흔들렸다.

둘은 혈마궁에 서서 혈왕성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좋구나."

정치수, 그는 본래 혈왕성 변두리에서 죽어가던 꼬마였다.

하지만 강한철이 그를 발견했고 무재武才가 있다는 것을 알곤 혈마궁으로 불렀다.

그때 강한철이 그를 구하지 않았다면 정치수는 죽었을 것이다.

"아직도 죄책감을 느끼는 게냐?"

강한철의 말에 정치수가 입술을 깨물었다.

"네가 했어야 할 일이다."

혈마 도래의 날.

정치수는 혈마를 수호하는 혈검대장으로서 강한철들에게 검을 겨눴다.

혈마를 지키는 것이 그의 임무였기에 당연하다 생각하면서도 마음 한 켠에는 죄책감이 서린 것이었다.

"괘념치 말아라. 네가 그럴 자이기에 혈검대장이 될 수 있던 것이다."

"저는…."

정치수가 마음을 다잡은 듯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또 그런 일이 생겨도 같을 겁니다."

"...."

"교주님이 혈마께 반기를 든다면 주저 없이 교주님의 목을 내칠 겁니다."

강한철이 정치수를 보았다.

"그러니 죄책감은 없습니다."

"...조금은 죄책감을 가져도 좋은데."

"예?"

"아니다."

강한철이 고개를 젓곤 작게 웃으며 말했다.

"그럴 일이 없으니 그렇게 말하는 거겠지."

그제야 정치수도 다시 혈왕성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혈마궁을 제외하면 언제나 죽어가듯 생기가 없던 혈왕성.

정치수는 그곳에서 나고 자랐기에 더욱더 깊게 느끼고 있었다.

'변화.'

이 짧은 사이에 일어난 변화가 모든 것을 바꾸었다.

"혈마께서 내려주신 은총이다. 어디 그분을 배신하겠느냐? 그분이 죽으라면 죽을 것이고, 살라면 살 것이다."

율법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가슴 깊숙한 곳에서 우러나오는 진심.

이것 또한 피의 종속의 탓일 수 있겠으나, 강한철은 아니라 말할 수 있었다.

망해가고 죽어가던 이들이 웃으며 지낸다.

은에서 혈교는 피도 눈물도 없는 마인의 집단으로 이야기하지만, 어찌 세상이 그렇겠는가.

사람이 사는 곳이다.

교란 것도 결국 하나의 집단.

사람이 모여 이룬 것이다.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정치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나는 이제 더 놀랄 일이 없을 것 같구나."

그토록 기다리던 혈마신이 도래했고, 망해가던 혈왕성이 영광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거기다 아르모라는 던전이 세계에 편입되지 않았나.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

그나마 세외에서 활동하던 강한철도 그에 대한 사실은 들어본 적조차 없었다.

마법사라니.

"허허. 이러다 마인도 함께 사는 것 아니겠는가."

그럴 가능성이야 없지만.

"그래도 놀라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정치수가 말했다.

"그런 것치곤 많이 놀라던데."

아르모가 이동하며 혈마를 지키기 위해 달려들었던 정치수의 표정을 떠올린 모양이었다.

"교주님도 많이 놀라셨습니다."

"그니까 이제 안 놀라겠다는 거 아니냐…."

이들이 이토록 한가로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이유.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만 했던 것과 달리 조금의 여유를 되찾았기 때문이리라.

그때였다.

콰아아아앙!

들려온 폭발음에 강한철과 정치수가 다급히 땅을 박찼다.

순식간이라 말해도 이상하지 않을 반응이었다.

"폐관 수련장이다!"

강한철이 소리쳤다.

"혈마께서 계신 곳입니다!"

혈마가 있는 곳.

눈에서 불길을 뿜어내는 둘은 빠르게 폐관 수련장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무슨 일이오!"

소란을 들은 혈마 도래의 날 살아남은 장로였던 도무성과 한도백도 금세 당도해 있었다.

멀리서 마법사들이 움직이는 기척도 느껴졌으나, 그들을 기다릴 틈은 없었다.

"왜…."

도무성이 일그러진 얼굴로 말했다.

폐관 수련장에서의 폭발이야 당연히 뛰어갔겠지만 이리 놀라지는 않았을 거다.

혈마의 수련이라면 아무리 강인하게 지은 수련장도 버티지 못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혈교의 인물들이 이렇게 빠르게 달려온 것은 다른 이유였다.

"왜 천마기가 느껴지냔 말이오!"

폐관 수련장에서 폭발해 나오는 기운이 혈교에선 느껴질 수 없는 천마기였기 때문이었다.

콰앙!

강한철이 망설임 없이 염왕권으로 부서진 폐관 수련장 입구의 잔해를 치워버렸다.

파스스.

피어오르는 먼지.

채채채챙!

입구가 치워지자 더욱 짙어진 천마기가 숨통을 옥죄는 듯했다.

"혈마님!"

뒤도 돌아보지 않고 들어선 정치수.

그 뒤를 따른 강한철과 도무성, 한도백.

그들이 온 기운을 끌어내며 무너진 폐관 수련장의 중앙을 봤다.

일렁.

순간 그들의 시야가 일렁였다.

새까만 어둠,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그 중앙에서.

터벅.

누군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보이는 것은 새빨간 적안에서 뿌려대는 안광뿐.

터벅.

그가 걸어 나오자 한도백은 자칫 뒤로 물러설 뻔했다.

"웬 놈이냐!"

하지만 겨우 마음을 가다듬고 걸어 나갔다.

"만일 혈마께 상처 하나라도 생겼다간…."

강한철이 앞장서 소리쳤다.

"뼈째로 갈아 마셔 주마."

낮지만 서늘한 경고.

그들은 긴장한 채 당장이라도 괴인에게 뛰어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혈마를 찾는 것이 우선이다.'

혈마의 안전 때문에 움직이지 못하는 것.

터벅.

한 발 더 나온 괴인.

그가 어느새 가까이 와 있건만 그의 형체이는 일렁이는 검은 귀신같았다.

천천히 그 형체가 드러난다.

형형히 빛나는 적안, 짙은 흑발.

"으음….?"

"뭐 그리 놀라서 다들 뛰어와?"

괴인이 손을 뻗어 쥐자, 파앗하는 소리와 함께 가득했던 천마기가 자취를 감추었다.

"혀, 혈마님?"

"어떻게…?"

"말 안 했었나?"

이로운, 그가 길게 자라난 흑단 같은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말했다.

"나 천마야. 혈마기도 하고."

삼왕의 제자

제2권 제11화

036

"나 천마야. 혈마이기도 하고."

그렇게 말한 이로운은 무엇이 문제냐며 팔을 빙빙 돌리거나 가볍게 뛰며 몸 상태를 체크했다.

"...."

"...."

그런 이로운을 보는 이들이 형언할 수 없는 얼굴로 입을 벌리고 서 있었다.

"더 놀랄 게 없다고 생각했건만…."

정치수와 방금 전 했던 대화를 떠올린 강한철이 말했다.

"안 놀랄 수가 없구나."

그런 강한철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이건 단순히 놀라는 것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다.

세계의 병합보다도 중요한 일이다.

"혈마시여."

강한철이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이로운이 하지 말라던 예까지 취한 것이었다.

"감히 하교 강한철이 혈마께 여쭙고자 합니다."

그 모습에 이로운도 돌리던 팔을 멈추고 그를 바라봤다.

"말해."

"진정 혈마께선, 천마이기도 하시는지요."

천마교와 혈마교.

그 둘은 오랜 세월 양립할 수 없는 싸움을 해왔다.

천마교는 언제나 혈마교를 원해왔고, 그들을 가질 수 없자 힘으로 혈마교를 핍박해왔다.

그 세월 속 서로에게 쌓인 앙금은 지우려야 지울 수 없는 것이었다.

강한철이 태어나기도 전부터 천마교와 혈마교는 끝없이 피를 흘렸다고 들었다.

"맞아. 얘기했었을 텐데."

이로운의 말에 강한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신녀인 강은하에게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천가냐, 혈가냐.

-천마교든 혈마교든 상관없어.

혈마 도래의 날, 혈수백에게도 말했다.

-너 천가냐?

-맞나 보네. 그럼 죽이진 않으마. 그쪽도 내가 찾아야 하거든.

그때는 그것이 이런 뜻인 줄 몰랐다.

단지 혈마로서 천마교를 처단하기 위하는 것이라고.

"불가능하다지만, 혈마께 그런 말은 통용되지 않는 것이겠지요."

천마교도가 그토록 혈마교를 원했던 이유가 무엇인가.

혈교도들이 사용하는 혈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천마교는 성공하지 못했다.

혈공을 연공하여 혈마기를 다루는 자는 천마교의 마공을 배워 천마기를 다룰 수 없다.

반대로 천마기를 가진 자는 혈공을 배워 혈마기를 다룰 수 없다.

그것은 결국.

'폭발.'

양립할 수 없는 두 기운이 몸 안에서 폭발하여 단전을 부수고, 무인의 목숨을 앗아가기 때문이었다.

어떤 연구도, 새로운 무학도 둘을 이어붙일 수 없었다.

천마교가 과거 무당에서 양의심공을 빼앗아 연구했음에도 불가능했던 일이다.

'혈수백도 마찬가지.'

그가 이로운의 덕으로 천마교의 인물이라는 것을 알았고, 천마기를 품었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그건 극히 미량일 뿐.

천마기를 담았던 흔적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혈마공으로 혈마가 될 수 있었어도 천마기와 혈마기를 동시에 다룰 순 없었다.

그것이 어찌 가능하냐, 이로운에게 묻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무엇이 먼저십니까."

그것이 묻고 싶었다.

"혈마께선."

강한철이 두 눈을 똑바로 뜬 채 이로운을 보며 말했다.

"천마이십니까, 혈마이십니까."

혈교도로서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

어떻게? 라는 의문보다 현실에 입각한 문제.

그에게 무엇이 더 중요한지, 무엇으로부터 시작되었는지를 묻고 싶은 것이었다.

"부질없는 질문이군."

그에 답하는 이로운의 말은 싸늘했다.

"무엇이 먼저냐 물어선 안 됐지."

"...하교 경청하겠습니다."

"어떻게? 냐고 물었어야지."

강한철이 의미 없다며 하지 않았던 질문, 이로운은 그것을 말하고 있었다.

"애시당초 둘은 다르지 않다."

"...?"

"혈마도, 천마도 처음엔 하나였단 소리다."

그저 필요 때문에 나누었을 뿐.

그 둘은 모두 하나.

혈교가 잊어버린 역사, 아니 은에서조차 잃어버렸을 것 같은 역사.

"신마."

"...!"

"모든 건 하나, 신마에서 비롯된 것일 뿐이야."

잊혀졌던, 그러나 일깨워야 할 역사 말이다.

"그러니 순서를 따지지 마. 의심도 하지 마."

달라질 것은 없으니까.

흔들리던 강한철의 눈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존명."

* * *

'운이 좋았다.'

본래 예정된 방법이 아닌 다른 방법.

급조했다고 말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안정성 검증은 끝났어.'

혈마신공을 완성하고 그동안 이로운은 계속해서 방법을 찾아 연구하고 실험했으니까.

그리고 어느 정도 확신이 섰을 때 마법사를 찾아 나선 것이었다.

천마기가 아닌 혈마기를 천마기로 변환시켜 때려 박았던 방법.

탓.

부작용으로 지독한 통증의 마지막 환골탈태를 겪어야 했다.

환골탈태란 본디 몸 안에 쌓인 독기를 배출하고 혈도를 넓혀 기의 순환이 원활하게 하며 근골을 성장시켜 무공에 더욱 적합한 몸을 만드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미 두 번의 환골탈태로 몸 안에 독기는 없었다.

근골도 용골지체란 희대의 근골을 얻어 비교할 것이 없었다.

"제기랄. 생각하기도 싫네."

그럼에도 마지막 환골탈태는 끔찍하기 그지없었다.

쇠를 두드려 검을 만든다.

자신은 그 쇠가 되었다.

사실상 환골탈태라 말할 수도 없는 것.

"그래도 용골지체 덕분에 덜했어."

그나마 용골지체로 인해 뼈가 버텨주어 고통이 덜한 게 그 정도였다.

그나마 이 고통을 겪은 보람이 있는 게 유일한 위안이랄까.

'두 번째 톱니.'

스승님들의 가르침은 여러 것이 하나로 묶여 완성되기 위한 하나의 부품들.

하나의 부품 위에 또 다른 부품이 얹어질 때 일시적으로 두 가지 부품이 부조화를 일으켜 약화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번에 새로운 방식으로 천마신공을 쌓은 결과.

팟!

다행히 약화를 겪을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두 개의 톱니가 완벽히 맞물렸다.

타탓!

연무장 위에서 몸을 움직여보고 있는 이로운.

확실히 어딘가 억눌린 듯 걷는 것밖에 하지 못했던 이로운의 움직임과는 많은 게 달라져 있었다.

팟!

뛰어보고, 주먹을 내뻗기도 해본다.

드디어 그 답답함 속에서 벗어났다.

'좀 더 해 볼까.'

이로운이 가만히 멈춰서 자세를 잡아봤다.

반개한 눈이 날카롭게 변하며 천천히 오른팔을 당겼다.

"...…!"

연무장을 지키던 혈검대원들 몇 명이 급히 고개를 돌려 이로운을 바라봤다.

일순, 공기의 흐름이 바뀐 듯했다.

솨아아.

무겁게 내려앉는 공기.

그 속에서 이로운이 당겨졌던 팔을 천천히 내뻗었다.

파아아앗!

경쾌하고 시원한 소리.

내뻗는 일격에 혈검대원들이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지르는 순간이었다.

"어?"

이로운의 입에서 터져 나온 단말마와 같은 목소리.

콰콰콰콰쾅!

곧이어 이로운이 주먹을 내뻗었던 공간이 뒤틀리며 폭발했다.

연무장이 부서져 비산하는 파편들과 주먹이 내뻗어진 곳의 끝.

혈마궁의 벽이….

쿠르르릉!

그대로 무너져버렸다.

차라리 그것뿐이라면 다행이었다.

화륵!

부서진 벽에서부터 피어나 타오르는 불꽃.

문제는 혈마궁의 벽이 나무가 아닌 돌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것이었다.

"...!"

돌을 녹여내는 화력.

강한철의 염왕권 정도나 되어야 벌어지는 일이었다.

쿠드드드득.

그 광경을 만들어낸 이로운의 오른팔에서 섬뜩한 소음이 울려퍼졌다.

"혀, 혈마시여!"

"망할."

이로운의 오른팔.

콰지지직!

그것이 마치 비틀리고 찢긴 듯 엉망이 되어 있었다.

"아직 무리네."

덜렁거리는 오른팔을 다른 팔로 부축한 채 이로운이 말했다.

* * *

네 단계로 나누어졌던 혈마신공과 달리 천마신공은 다섯 단계로 나누어져 있었다.

육체를 더 세밀하고, 더욱 정밀하게 조종하며 동시에 가속하는 무공.

근육과 피부는 끝없이 파괴와 재생을 반복해나가며 그 끝에 이를 때까지 열기를 피워낸다.

그 열기가 바로 천마신공의 경지를 나누는 단계였다.

'일 단계, 염화.'

붉은 불꽃을 피워내는 것으로 천마신공을 단련한 이가 무공을 쓸 때 화염이 치솟는다하여 붙여진 이름이었다.

'이 단계, 청화.'

지금 이로운이 이 경지였다.

부작용을 견뎌내며 천마신공을 완성한 탓에 염화의 단계를 건너뛰었다.

덕분에 이 단계, 청화에 이르렀지만 그렇다고 완벽한 것은 아니었다.

"이게 뭔 무공이야."

이로운이 짜증스럽게 말했다.

스승님들의 가르침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는 자신도 안다.

그러나 그렇기에 문제 시 되는 것도 있었다.

타앗.

이제 적당히 몸을 움직이는 건 괜찮지만.

콰득!

조금이라도 무공을 쓰려는 기미가 보이면 육체가 견디지 못하고 망가져버렸다.

"...."

장로였지만 혈교에 대한 충성심과 그 실력을 인정받은 탈마의 경지인 도무성.

그가 멍한 얼굴로 이로운을 본 채 입을 헤 벌리고 있었다.

"개, 개안하는 기분이옵니다."

지은 죄가 있어 이로운에게 죄를 청하고 폐관에 들어갔던 도무성.

아르모의 합병 사건으로 잠시 튀어나왔던 그는 아직 다시 폐관에 들지 않고 있었다.

"어찌 이런 무공이…, 아니 무리가…, 무학의 끝이 이것인 것 같습니다."

도무성은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실함을 담아 말했다.

'맞는 말이지.'

도무성의 평가는 정확하다 할 수 있었다.

이로운의 무공은 무공이라 말할 수 없는 어떤 움직임이었다.

팔을 내뻗어 주먹을 내지른다.

그런 평범한 움직임.

그러나 그 안에 담긴 무리와 무학은 결코 범인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스승님이 만든 것이니까.'

스승님의 모든 깨달음이 담긴 무공이다.

이름조차 지어지지 않은.

"무초식…의 경지인 것이옵니까."

초식이 없다.

즉, 형形이 없다는 것이다.

그 어떤 것도 치명적인 공격이 되며 동시에 절대적인 방어가 되는 것.

그렇기에 이름을 붙이는 것조차 할 수 없는 지금은 오직 이로운만이 쓸 수 있는 것이었다.

"하오나 육체가 견디지 못하는 듯합니다."

깨달음을 육체가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실정.

"차라리 하급의 무공을 사용해보시는 것이."

조심스레 말하는 도무성을 보며 이로운이 말했다.

"못 써."

"예?"

"탱크의 포신에 구미리 총알을 박아넣는다고 발사가 되나?"

도무성은 이해하지 못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대포에 쌀알 하나 넣고 불 지피면 발사가 되질 않을 것 아냐."

그런 문제다.

너무 큰 깨달음이 영혼에 각인되어, 어떤 무공도 치환해버린다.

'적어도 흑화, 아니 백화엔 이르러야 가능할 듯싶네.'

결국, 천마신공을 연공하는 데엔 성공했지만 아직 제대로 된 무공을 사용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모든 단계를 건너뛰고 스승님들의 정수만을 받아들인 결과였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고서야 세계의 왕인 그들의 가르침을 백여 년 만에 배우는 것은 무리였을 것이다.

'강해져야 해.'

누군가는 지금도 충분하다 말할 테지만, 이로운은 아니었다.

세계의 편린을 보았던 그였기에 지금의 수준으론 아직 무엇도 할 수 없음을 안다.

더욱이 그 재수 없는 흑시왕과 만일 생사를 겨루는 대결을 펼쳐야 한다면 그 승률이 백퍼센트가 아니었다.

'스승님들.'

무슨 짓거릴 해도 자신을 방해하지 못할 힘을 갖춰야 한다.

그때가 되어 스승님들을 찾아야 한다.

지금은 스승님들은커녕, 자신을 방해할 자들조차 막아내지 못할 테니까.

"잘 됐다."

이로운이 성큼성큼 도무성을 향해 다가가며 말했다.

"대련 좀 하지."

"여…."

도무성이 흔들리는 눈으로 깊게 읍하며 말했다.

"영광입니다."

천마신공의 완성을 앞당겨야 할 것 같다.

최대한 빠르게.

그러기 위해선.

'슬슬 밖을 돌아다녀야겠네.'

실전만큼 좋은 게 없었다.

삼왕의 제자

제2권 제12화

037

남양주의 한 게이트.

은하 길드가 예약한 게이트로, 은하 길드원들은 한껏 긴장한 눈빛으로 도열해 있었다.

게이트의 등급은 B등급.

그리 낮은 수준도 아니었지만, 지금껏 빠르게 게이트를 공략하며 세를 키워나가던 은하 길드가 긴장할 수준은 아니었다.

꿀꺽.

그럼에도 은하 길드원.

아니, 단련된 혈교도들은 침을 삼키며 작은 숨소리조차 조심하고 있었다.

그 맨 앞, 그들의 자랑스러운 길드장이자 혈교의 신녀 강은하가 똑같이 긴장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다들…."

그녀가 입을 열자 길드원들의 눈빛이 바뀌었다.

강은하 또한 긴장을 숨기지 못한 채 다시 한 번 호흡을 가다듬으며 길드원들을 바라봤다.

"전달받은 바대로…."

후우, 숨을 내뱉은 강은하가 똑바로 눈을 뜨며 말했다.

"오늘부터 새로운 길드원께서 합류하신다."

쿠웅!

돌덩이가 내려앉는 듯한 침묵.

"그분께서는 우리 은하 길드, 아니 혈교의…."

"미쳤냐."

들려오는 목소리에 강은하가 두 눈을 치켜뜨며 곧장 몸을 숙였다.

혈교도들 또한 마찬가지.

"혀어어얼-!"

강은하의 입에서 터져 나온 고함과 같은 소리.

"제발 그 입 좀 다물어. 입! 입!"

이로운이 강은하의 앞에 서 짜증스럽게 말했다.

"송구하… 죄송합니다."

"길드원께서어?"

"그것이…."

이로운이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강은하에게 미리 전달한 내용이 있었다.

-은하 길드에 합류해 게이트를 공략할 셈이다.

그렇기에 은하 길드에 마땅한 자리가 필요했다.

강은하는 당장에 길드장 자리를 비우겠다고 했으나.

-미쳤니. 정말.

이로운이 받아들일 리 없었다.

은하 길드는 갓 만들어진 신생 길드임에도 빠르게 세를 확장시키며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는 상태였다.

더욱이 은하 길드의 젊은 길드장 강은하에 대한 명성도 퍼져나가고 있는 상황.

-주변 시선 좀 생각해라.

그 상황에서 갑작스레 길드장 자리가 바뀐다면 그 관심은 의심의 눈초리로 변할 것이었다.

더욱이.

-정말 그 이름을 쓰실 겁니까?

흑시왕에게 제대로 된 신분을 받은 이로운.

그가 새로이 받은 무인의 신분이 가진 이름 또한 이로운이었다.

-내 이름이야.

혹여 스승님들이 봉인에서 풀렸을까, 그렇다면 자신을 찾지 않을까.

그런 생각에 어떤 이유로든 포기할 수 없는 자신의 이름이었다.

신생이지만 빠르게 세력을 확장시키는 은하 길드, 그 새로운 길드장이 이로운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무인이기에 큰 의심은 받지 않을 테지만 어떤 식으로든 몇몇 인물들은 은하 길드를 주시할 터였다.

부길드장이나 전면에 드러나는 직위는 안 된다.

그렇기에 받아든 직위가.

"다들! 길드원님께 예를…!"

길드원, 아니 길드원님.

"하아."

이로운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머리가 잘 돌아가는 데다 흐름을 잘 읽는 강은하였지만 혈마라는 존재가 엮이면 바보가 되어버린다.

강은하만 해도 저 꼴인데.

"길드원님을 뵙습니다! 길드원천세! 길드원앙복!"

그 밑에 있는 혈교도들이 저딴 미친 꼴이 되는 것도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피의 종속 탓에 저들의 충성심이 더욱 강해진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였다.

'대체 스승님은 무슨 생각으로 그러셨는지.'

스승님들의 예전 이야기는 단편적으로밖에나마 듣지 못했던 이로운이었기에 도대체 이런 광신집단을 왜 만들었는지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강은하."

"옙! 길드원님!"

"당장 저 짓거리부터 고쳐."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강은하가 급히 양손을 내저었다.

"세외에서의 처세는 확실히 숙지시켜두었습니다. 다만, 이곳은 혈… 길드원님과 저희만 있는바 길드원님께서 함께하신다는 영광에 흥분한 듯싶어요."

이해가 안 가는 바는 아니다.

혈마란 저들의 신, 그것도 전신이다.

그런 혈마가 강림한 것도 모자라 신도들의 옆에 서서 전장을 누빈다면.

"하."

그 어떤 신도가 흥분에 머리가 정상일 수 있을까.

"하여튼, 알아서 해라."

"명심할게요!"

그래도 강은하가 가장 빨리 머리를 식힌 듯했다.

이로운은 그들을 지나쳐 가 널따란 게이트를 봤다.

돌아와 강은하를 만났던 게이트를 제외하고는 처음 들어오는 게이트.

"...."

플레이어였을 때는 하루에 세 번도 들락거렸던 곳이기도 했다.

강해지겠다는 일념으로, 살아남는다는 이유로.

하지만 다시 게이트에 들어온 이로운에게 어떤 감상이나 감정은 들지 않았다.

그저 예전과 똑같은 곳일 뿐.

"가지."

이로운이 앞장서서 걸어 나가며 말했다.

***

"괴물이십니까?"

평온한 고저 없는 목소리였지만 그 속엔 확실한 경악이 숨어 있었다.

"뭘 보고?"

이로운의 말에 흑시왕, 하세민이 고개를 저었다.

"얼마나 지났다고, 더 읽기 힘들어지셨습니다."

이로운이 은하 길드의 길드원으로 게이트 공략에 나선 지도 벌써 수 일이 지났다.

안 그래도 빠르게 게이트를 공략하며 세를 키워나가던 은하 길드였는데, 게이트 공략의 베테랑이라 말할 수 있는 이로운이 합류하며 그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플레이어의 힘, 아직도 가지고 계신겁니까?"

하세민이 진심을 담아 말했다.

"뭔 레벨업 하는 것도 아니고, 게이트 몇 번 돌았다고 공략마다 기세가 더 읽기 힘들어집니까?"

무인은 그렇다.

하수일 때는 강해질수록 그 기세가 강맹해지지만, 고수일 때는 강해질수록 그 기세가 옅어진다.

"어떨 것 같은데?"

이로운이 졸린 눈을 뜬 채 입가만 슬쩍 올렸다.

"그럴 리는 없겠죠. 뭐 플레이어였던 자가 무인이 되었으니 불가능의 영역이 다르다는 건 인정하겠지만."

하세민이 답했다.

"시스템 코어는 느껴지지 않으니까요."

"그거야 모르지. 시스템 코어를 숨길 수도 있잖아?"

"제 눈에는 보입니다."

역시.

'괜히 흑시왕은 아니라는 건가.'

플레이어도 무인처럼, 하이 랭커급에 이르면 그 기세를 읽기 힘들다.

시스템 코어의 존재 유무를 숨긴 채 수준을 숨기고, 플레이어임을 숨길 수도 있다.

반대로 현경의 무인은 플레이어를 흉내 낼 수 있다.

시스템 코어가 가진 특별한 파장을 내공을 이용해 흉내 내어 속일 수 있으니까.

하지만 예전에도 그런 소문이 있었다.

'흑시왕의 눈은 속일 수 없다.'

흑시왕에겐 진실을 꿰뚫는 눈이 있다고.

"네 눈이 아닐 테지만."

"...이따금 얄미우실 때가 있습니다."

이로운의 말에 하세민이 질렸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해남 길드는 아르모의 일에 모종의 개입이 있었다고 판단한 모양입니다."

하세민의 이어진 말에 이로운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아무리 척후대라고 하지만, 장로가 포함되어 있던 전력이 전멸했으니 당연한 일이지요."

"광법사가 있는 것도 몰랐잖아?"

광법사, 본데노.

녀석의 악명은 과거 생각보다 높았다.

하지만 해남은 아르모 토벌을 준비하면서도 본데노의 세력이 아르모였던 것은 몰랐다고 했다.

'알았다면 척후대라 해도 겨우 그 수준으로 보내진 않았겠지.'

아르모에 있던 제물 마법진.

실상 그것 하나만으로 이로운이 없다 가정했을 때 척후대는 궤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을 테니까.

제물 마법진을 넘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아르모, 그리고 광법사가 만든 새로운 공격 마법진들을 중첩으로 쌓아놓고 기다리던 그들.

척후대가 아닌 본대라 해도 어쩌면 궤멸당했을 전력이었다.

'해남의 정예를 보내지 않는 이상 말이지.'

그렇기에 이상하다.

"알고 있었습니다."

하세민의 말에 이로운이 입을 다물었다.

"해남 상층부는 아르모가 광법사의 세력임을 알고 있었죠."

"네가 팔았구만."

이로운의 말에 하세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아니어도 흑시에서는 정보의 판매를 제한하지 않습니다.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야 말이죠."

그 특별함은 자신과 혈교를 말하는 것이리라.

그보다 해남의 상층부가 아르모가 본데노의 세력임을 알고 있었다?

광법사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겨우 그 정도 전력만 보냈다?

그건 애초에 그들이 전부 버리는 패라는 소리다.

그곳에서 다 죽으란 소리.

"명분으로 삼을 생각인 듯합니다."

명분.

은의 세계에서 수위에 달하는 세력이 속해있는 무림협회.

그들은 스스로를 정파라 말했다.

그런 정파들의 움직임에는 어떤 조건이 필요하다.

아인하트, 혹은 게헨나와 같은 외부 세력이나 플레이어들과의 분쟁이 아닌 같은 은의 세력끼리의 싸움에서 필요한 것.

그것이 명분이었다.

"개입 대상은…."

이로운이 기억을 떠올리며 말했다.

"철검련인가."

하세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답입니다."

철검연합, 철검련.

그들은 작게는 경기도를 지배하는 거대 세력이었고.

크게는 경기도와 강원도, 충청도를 지배하는 패자라 할 수 있었다.

"해남은 부산을 비롯한 대한민국 남부를 지배하는 세력입니다. 몇 해 전, 인천과 강화도를 세력권으로 편입시킨 이후로 호시탐탐 철검련의 세력권을 노리고 있었죠."

"애초부터 아르모 토벌은 철검련을 노리고 시작된 일일 수 있겠군."

정답이라는 듯 하세민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아르모가 있던 곳은 철검련의 세력과 부딪히는 곳이었습니다. 해남은 철검련이 아르모 토벌을 방해하고, 해남의 장로를 죽였다고 발표할 생각인 듯합니다."

일이 재밌게 돌아갔다.

결국.

'내가 아니었어도 다 죽었겠군.'

그날 아르모의 척후대로 선발되었던 이들.

그들은 이로운이 아니었어도 전부가 죽었을 터였다.

운 좋게 아르모를 토벌했다고 해도 해남의 무인들에게 죽었겠지.

육사걸이라는 장로의 운명은 그런 것이었다.

"전쟁이 시작될 것 같습니다."

전쟁이라.

현대에 괴리감이 느껴지는 단어였다.

세계 어느 곳에서는 끊임없이 전쟁이 벌어졌지만, 휴전국이었던 대한민국은 오히려 전쟁에 둔감한 시야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옛말이다.

은, 아인하트, 게헨나.

세계의 침범 이후 전쟁은 수시로 벌어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흑시왕이 재밌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그 철검련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

"은하 길드를 향해서 말입니다."

* * *

콰앙!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탁자가 주먹질에 산산조각이나 파편을 흩뿌렸다.

"해남 이 개새끼들이!"

탁자를 부순 것으로도 화가 풀리지 않는지 수염마저 부르르 떨고 있는 중년인.

그가 바로 대한민국을 삼분하는 세력이자, 대한민국 삼대 길드의 마지막 좌인 철검문의 문주이자 길드장 철종휘였다.

그가 이토록 분개하는 이유가 있었다.

그들과 세력권이 맞닿아 있는 또 다른 삼대 길드, 해남 길드가 철검련이 개입하여 장로가 죽었다 발표한 탓이었다.

단언컨대 그런 일은 없었다.

"결국… 이리 나온단 말인 게지."

해남이 어딘가.

철검련이 대한민국을 삼분하고 있다지만 그것은 말뿐인 일이었다.

구파 일방에 속하지는 못했지만, 그에 못지않다 여겨지는 해남이다.

전력상 큰 차이는 없다 해도, 그들의 뒤에는 무림협회가 있었다.

"회는?"

"침묵하고 있습니다."

다시금 철종휘의 수염이 떨렸다.

"그래. 어쩔 수 없는 싸움이라 이 말이군."

작은 숨과 함께 철종휘가 진정했다.

곧 그는 눈을 돌려 모여 있는 자들을 바라봤다.

다섯의 남녀.

그들이 철검련의 다섯 기둥이라 말할 수 있는 자들이었다.

"전쟁을 준비한다."

철종휘의 목소리가 커다란 돌덩이처럼 떨어져 내렸다.

"최대한 전력을 보충하고, 영역 내 위험 요소를 제거한다."

철검련의 세력권에 있으면서도 아직 그 무릎을 꿇지 않은 자들은 이제 결정해야 할 것이다.

철검련의 편에 서서 해남과 싸울지.

그것이 아니면….

"회는 끝까지 침묵할 것이다."

철검련의 손에 의해 파멸할지.

삼왕의 제자

제2권 제13화

038

이로운은 은하 길드와 함께 게이트를 공략하며 조금씩 몬스터를 처치해나가고 있었다.

경험치나 실전 경험 따위가 필요한 게 아니었다.

"제법 몸이 익숙해졌네."

천마신공.

몸을 움직이며 육체를 파괴시키고, 천마신공과 혈마신공의 공능으로 파괴된 육체를 회복시킨다.

그렇게 육체는 천마기와 파괴에 익숙해지며 점점 그 단계를 나아간다.

'다른 사람이라면 못 할 짓이겠지.'

과도한 힘으로 육체가 터져나갈 때의 고통은 상상을 초월한다.

그것을 몸을 움직일 때마다 느껴야 하는 일이다.

그래도 이로운은 고통에 익숙한 편이었다.

과거의 경험도 경험이었지만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매초 드는 환골탈태를 겪은 덕분이었다.

천마신공으로 인한 통증은 과격할 정도였지만, 환골탈태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잠도 좀 깨고.'

힘을 되찾아가며, 더욱 졸음이 쏟아진다.

혼돈을 몸에 담아 잠들 수 없는 몸.

혼돈이 쪼개어 나누어졌다고 하지만 감히 수면을 취해볼 순 없었다.

그 결과가 얼마나 끔찍할지는 이로운조차 예상하지 못하니까.

그래도 마왕 베르제나 스승님이 영혼에 새긴 각인으로 어느 정도 졸음은 참을 수 있을뿐더러, 잠에 취하지 않는 상태가 되었다.

"음."

그렇게 생각하던 이로운이 느껴지는 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은하 길드 하우스, 그곳에 새로운 기척이 느껴지고 있었다.

무언가를 떠올린 이로운은 이내 기척이 느껴지는 곳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길드원님을 뵙습니다."

저 미친 인사도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상황이다.

"누가 왔나?"

이로운의 질문을 받은 길드원은 감격한 얼굴로 급히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도천 길드에서 손님이 왔다고 합니다."

"도천 길드?"

이로운도 알고 있는 길드였다.

남양주, 그 안에서 말 그대로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는 곳이 바로 도천 길드였으니까.

삼도를 지배하는 패자, 철검련에서 경기도를 맡고 있는 두 개의 기둥 중 하나가 도천 길드였다.

"예. 도천 길드장의 아들이 직접 왔답니다."

"으음."

도천 길드장의 아들이면 그래도 경기도에선 꽤 거물이다.

언젠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경기도의 반절을 지배하게 될 테니까.

"그렇단 말이지."

이로운이 그렇게 말하고 강은하가 있는 길드장실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도천 길드라는 경기도의 지배 세력에서 손님이 와 길드장과 독대하고 있건만.

"길드장님을 뵙습니다."

그 누구 하나 이로운을 제지하거나, 방해하지 않았다.

마침내 이로운이 길드장실 앞에 도착할 때였다.

"그럼, 잘 생각해보시고 연락해주시길 바랍니다. 소저."

길드장실의 문이 열리며 사내 셋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내 그들은 길드장실 앞에 서 있는 이로운을 발견하곤 눈을 마주쳤다.

"음?"

맨 앞에 선 사내.

나이는 대략 스물 중반쯤으로 보이는 훤칠한 미남이었다.

하지만 그는 곧, 그 잘난 얼굴이 무색하게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은하 길드의 길드원인가?"

이로운을 향한 목소리.

"그런데?"

"…버릇이 없군."

녀석의 얼굴이 한층 더 일그러졌다.

"오늘 누가 온다고 했는지 듣지 못한 건가? 아니면 알면서도 그리 행동하는 겐가?"

어느새 녀석의 옆에 두 사내가 지키듯 섰다.

"길드장의 얼굴에 먹칠을 해도 유분수지. 난 도천 길드의 도상목이다."

일그러졌던 녀석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마치 이 뒤에 일어날 일을 예상하듯, 기대하는 표정이었다.

"그래서?"

하지만 이어진 이로운의 말에 도상목의 눈이 흔들렸다.

"어쩌라고. 비켜."

"무, 뭐?"

"네 놈!"

당황하여 굳어버린 도상목을 대신해서 호위를 하던 자들이 이로운을 향해 소리쳤다.

"당장 고개를 조아리고 예를 취해라! 도천 길드의 부길드장님이시다!"

호위의 고함 소리가 통로를 가득 울리고 있었다.

스윽.

이로운이 도상목을 향하던 시선을 호위에게 던진 순간이었다.

움찔.

무언가를 느낀 듯 호위가 입을 다물고 몸을 떨었다.

'뭐지?'

이해할 수 없었다.

별 것 없는 눈빛이다.

아니 재수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졸린 눈.

느껴지는 기척도 형편없고, 무인의 기세 또한 느껴지지 않았다.

"뭐라는 거야."

하지만 호위는 움직일 수도, 입을 뗄 수도 없었다.

"무슨 일이시죠?"

그때 소란을 느낀 강은하가 모습을 드러냈다.

도상목이 일그러졌던 얼굴을 잠시 풀며 강은하를 바라봤다.

"은하 길드의 길드원이, 저를 알아보지 못한 모양입니다. 소저."

"길드원?"

"아무래도 어린 소저인지라, 길드원의 교육이 부족한 모양입니다. 은하 소저의 얼굴을 보고 이번은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 다시 한 번 잘 생각해보시길."

그렇게 말한 도상목이 훽 돌아 호위들과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렇기에 그는 볼 수 없었다.

"감히…."

이로운을 발견하고 상황을 눈치챈 강은하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진 것을.

***

"송구하옵니다."

강은하가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말했다.

"감히 그 버러지 같은 놈의 아가리를 찢어놓지 못한 죄! 제 팔 한 짝을…!"

"혼날래?"

이로운의 말에 강은하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표정은 정말로 죄스러운 얼굴이었다.

"철검련인가?"

이로운의 질문에 강은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연합 제의를 해왔습니다."

"연합이라면?"

"철검련이 아닌, 도천 길드에 복속되는… 얘기였습니다."

강은하가 치욕이라도 당한 듯 입을 떨었다.

"단박에 거절했지만, 더 생각해보라고…."

강은하는 그렇게 말했지만 이로운은 알고 있었다.

'고민하고 있겠지.'

강은하에겐 혈교의 세외 세력에 대한 전권을 맡겼다.

그녀가 혈마인 자신에 대한 충성으로 가끔 바보가 된다고 하지만 결코 머리가 나쁘지는 않았다.

혈마에 대한 충성이 가장 우선시되지만, 은하 길드를 안정적으로 키우는 것 또한 혈마인 자신에 대한 충성이었다.

지금 그녀는 그저 자신을 달래기 위해 저리 말하는 것이었다.

"솔직히 어떻게 생각하는데?"

이로운의 말에 그제야 강은하의 표정이 풀렸다.

"고려해볼 만합니다."

흑시왕이 들러붙어 있는 은하 길드다.

물론 하세민이 주는 정보에서 상위 정보는 이로운에게만 주어지지만, 보편적인 것들은 강은하와도 공유하고 있다고 했다.

"해남과의 전쟁이 가시화되고 있습니다. 전쟁이란 건…."

"위기이기도, 기회이기도 하지."

강은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해남도 철검련 전부를 지울 수는 없을 겁니다. 적당히 세력권을 빼앗고 휴전을 맺을 터."

"철검련도 경기도만큼은 절대 빼앗기지 않을 테고, 하여 남양주는 안전하다?"

다시금 강은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 여하에 따라 경기도, 적어도 남양주의 지배 세력이 저희 은하 길드가 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강은하의 눈에 빛이 비치었다.

그건 단순한 말이나, 가능성을 재는 것이 아니었다.

씨익.

그렇게 만들겠다는 각오가 담긴 말과 비슷했다.

"혈왕성의 입구가 남양주에 있는 만큼, 남양주는 저희가 꼭 가져야 하는 지역입니다. 철검련 전체와 싸우는 것보다 그들과 손잡아 남양주를 지배하는 게 훗날을 대비하는 것에도 좋다는 판단입니다."

나쁘지 않은 판단이었다.

"혈마께선 어찌 생각하시는 여쭤봐도 될까요?"

하지만 그녀의 생각엔 치명적인 허점이 있었다.

'회에 대해 모르는군.'

무림협회.

그들이 얼마나 잔인하며, 졸렬한 집단인지.

그리고 그들이 이 아시아를 지배하고 있다는 게 무슨 뜻인지.

강은하는 세외에 관심을 두고 정보를 취합했다고 하지만, 직접 겪어본 경험은 적었다.

그녀뿐만이 아닌 혈교 전체가 마찬가지일 것이다.

"뭐, 알아서 해. 난 너한테 전권을 맡겼어. 그러니 판단도 선택도 네가 하는 거다."

이로운의 말에 강은하의 얼굴에 긴장이 서렸다.

"머리나 식힐 겸 커피나 마시러 가자."

* * *

북한강변 카페.

강이 훤히 보이는 자리에 이로운과 강은하가 앉아 있었다.

"쟤네도 제법 기세가 나아졌는데?"

이로운의 말에 강은하가 기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암혈대원들도 몬스터 사냥에 나서고 있습니다. 물론 혈마를 호위할 인원을 제외한 채 교대로 하고 있습니다."

강한철이 키워낸 살수 집단인 암혈대.

그들의 기세가 한층 더 깊어져 있었다.

혈마공의 영향도 영향이겠지만, 몬스터를 상대하며 혈마흡공으로 내기를 상승시키고 실전 경험을 쌓은 것이 주효할 것이었다.

'그래도 부족하지.'

암살집단이란 건 그런 훈련을 통해서 강해지는 게 아니다.

물론 저들도 제 역할을 할 수는 있겠지만 진정한 암살집단은 맡은 바 역할을 수행하며 경험을 쌓는 것.

하지만 지금껏 혈교가 암살해야 될 대상들이야 그저 그런 세력들뿐이었을 거다.

"나중에 써먹으려면 제대로 키워야 할 거야."

"명심할게요."

강은하의 목소리가 조금 더 편해졌다.

기막 속에서 대화를 나누는 둘.

"본데노, 그리고 아르모의 마법진은 수준급이야. 혈왕성의 입구 방비가 끝나면 그들 중 몇 명이 은하 길드에 합류할 거다. 알아서 챙겨줘."

"준비하고 있겠습니다."

그런 대화를 나누던 둘이었다.

경치 좋은 카페, 맛이 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나쁘지 않은 커피.

고요한 시간.

"...."

강은하에게도 마찬가지겠지만 이로운에게도 정말이지 오랜만에 느껴보는 평화였다.

마치.

"그게… 알겠습니다."

폭풍 전 고요처럼.

"저기…."

입구 쪽에서 소란이 일더니 직원들이 움직이고 있다.

"무슨 일이지?"

강은하의 목소리에 숨어 있던 암혈대원 몇 명이 강은하에게 전음을 보냈는지 곧 강은하의 얼굴이 굳어졌다.

"길드원님."

이로운을 부르는 호칭이 혈마에서 길드원으로 바뀌었다.

"아무래도 제가 잠시 다녀와야겠습니다."

강은하의 말에 이로운이 마시던 커피를 내려놓았다.

"도천 길드지?"

"예."

"가만히 있어. 어차피…."

이로운의 입가가 옅게 올라갔다.

"네가 안 가도 올 테니까."

어느새 몇 명 있던 손님들이 사라져있었다.

"이거…."

멀리서 들려오는 목소리, 기막을 치웠기에 작지만 또렷하게 전달되어오고 있었다.

"은하 소저를 여기서 또 뵙습니다."

도천 길드장의 아들, 도상목.

녀석이 아까보다 더 많은 호위와 함께 이로운과 강은하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척, 척, 척.

몇 명의 호위는 입구를 지키며 서듯 섰고.

착, 착, 착.

몇 명은 진을 갖추듯 알맞은 위치에 자리를 잡고 섰다.

아까 전, 은하 길드를 찾아왔던 두 명의 호위와 도상목만이 그 사이를 유유히 걸어와 강은하에게로 다가왔다.

"어쩐 일이신가요?"

강은하의 말에 도상목이 그게 무슨 소리냔 얼굴을 했다.

"모르시진 않을 텐데요. 이 남양주가 저희 도천 길드의 세력권입니다. 제가 어디 있든, 제 땅 아니겠습니까?"

자신의 땅이라.

실로 광오하기 그지없는 말이었다.

사람들의 소유권과 정부의 체계를 무시하는 말, 시대를 역행한 듯한 헛소리.

하지만 그것이 은이고, 현실이었다.

"그런데…."

도상목의 눈이 이로운을 향했다.

"또 보는군. 길드원."

싸늘한 눈빛.

살기조차 숨기지 않는 눈이었다.

"소저. 다시 말하지만…."

"도 부길드장님."

강은하가 나서려 했으나.

척.

두 명의 호위가 강은하의 앞을 검집을 든 채 가로막았다.

명백히 끼어들지 말라는 뜻.

"길드원 교육이 부족한 듯싶습니다. 해서…."

녀석의 입가에 맺힌 웃음.

잔인하고 진득한 웃음이었다.

"제가 길드원 교육을 대신에 해드릴까 합니다."

"도 부길드장님!"

"은하 소저께선."

강은하의 외침에 도상목은 그녀를 보지도 않은 채 말했다.

"저희 도천 길드와 척을 지는 것보다 이 길드원 하나를 지키는 게 낫다고 판단하시는 겁니까?"

후르륵.

"뭐래? 병신이."

남아있던 커피를 전부 마신 이로운이 도상목을 보며 웃고 있었다.

삼왕의 제자

제2권 제14화

039

사아아.

진득하게 피어오르는 살기에 순식간에 주변 온도가 내려앉았다.

"지금."

도상목이 겨우 참아내며 뒤틀린 목소리를 내뱉는다.

"나를 보고 한 소린가?"

이로운을 향해 오는 시선.

"그럴 리가."

이로운이 그 시선을 담대히 받아넘기며 답했다.

"말귀도 못 알아듣는 병신에게 병신이라고 할 정도로 나는 바보가 아니야."

채엥!

도상목이 녀석의 도를 꺼내 들었다.

"무기를 들어라."

싸늘한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내 동지가 될 것이라 생각한 은하 길드의 길드원이라 사정을 봐주려 했건만, 방종이 도를 지나치는구나."

우우웅!

도상목이 들고 있는 도에 도기가 서리기 시작했다.

'화경의 중입인가.'

화경의 중반, 플레이어로 치자면 백오십 레벨 수준.

"내 너를 교육하고 강호의 도리를 세우겠다."

스윽.

이로운이 도상목의 말을 듣는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디 한 번 세워봐."

고오오.

도상목의 몸에서 끓어 넘치는 내공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라 주변으로 뻗어갔다.

처억.

도상목을 호위하던 자들이 자리를 비키며 제 무기들을 꺼내 들었다.

강은하 또한 그녀의 애병, 혈왕도를 끄집어내려던 참이었다.

-가만히 있어.

그러나 들려오는 이로운의 전음에 강은하는 덜커덕 멈춰섰다.

"내 은하 소저께서 허락하신 것으로 아오리다."

도상목은 그것이 이로운을 핍박해도 되는 허락인 줄 안 모양이었다.

"그래도 내가 도천 길드의 부길드장이자, 도천방의 부방주다. 겨우 은하 길드의 길드원인 네게는 가혹할 테니 삼 초식을…."

그렇게 말을 꺼내려던 도상목이 멍청한 눈으로 천천히 제 배를 바라봤다.

뒤늦게.

퍼억!

가죽 터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고맙다."

어느새 이로운의 주먹이 뒤틀리며 도상목의 뱃가죽에 틀어박혀 있었다.

"커어억!"

형언할 수 없는 통증에 비명을 내지르는 도상목.

"아직 이 초가 남았다."

콰아앙!

이로운의 발뒤꿈치가 도상목의 관자놀이를 때리며 폭음이 울렸다.

순식간에 튕겨져 나가며 도상목의 몸이 벽에 부딪혀 먼지를 일으켰다.

"부방주를 지켜라-!"

그제야 상황을 인식한 호위들이 이로운에게 달려들려고 했지만, 이로운은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마지막 한 초 남았는데, 이거 맞으면 죽을걸."

이로운은 피투성이가 된 몸으로 도상목의 목을 붙잡은 채 호위들을 보고 있었다.

시뻘건 안광 속에 드러난 광기에 호위들이 몸을 떨었다.

마치,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도상목의 목을 비틀어버리겠다는 듯한 협박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네 놈! 정체가 뭐냐!"

도상목의 호위대장인 이천길이 울부짖듯 소리쳤다.

도상목의 성격에 문제가 있다고 하나 그는 화경의 중입에 이른 고수다.

비록 깨달음이 부족한 가짜 무인이라 할지라도 겨우 은하 길드의 길드원 따위에게 저리 당할 인사가 아니었다.

"그걸 물어볼 때가 아닐 텐데."

"뭐…?"

이천길이 무언가 불안함을 느끼며 소리치려던 순간이었다.

파앗!

그의 뒷목을 때려오는 감각에 이천길의 시야가 암전됐다.

털썩, 털썩.

하나둘 쓰러지는 호위들.

'무슨….'

이천길은 시야가 완전히 까맣게 변하기 전, 짙은 핏빛 무복을 입은 사내들을 봤다.

자신들이 기척조차 느끼지 못했던 살수들을.

'함정….'

더 이상 이천길의 생각은 이어지지 못했다.

"혈왕성으로 데려가라."

이로운의 말에 암혈대원들이 호위들을 하나씩 업으며 말했다.

"존명."

***

"끄윽, 끄으윽."

도상목이 억눌린 신음과 함께 정신을 차렸다.

"이… 노옴…."

정신이 들자마자 떠오르는 굴욕의 순간들.

그리고 그 굴욕을 안긴 이가 지금 눈앞에 앉아 여유로이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더럽게 늦게 깨네."

"네 놈이…, 무슨…, 크윽!"

말을 하려던 도상목이 복부에서 밀려오는 통증에 입을 다물었다.

"으, 은하 소저."

도상목은 호위들마저 사라진 것을 깨닫곤, 이로운의 옆에 있는 강은하를 보며 말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요…! 당장…."

"그 입 닥쳐라."

강은하가 살기로 번들거리는 눈을 한 채 도상목을 향해 말했다.

"네가 감히 건드려선 안 되는 분을 건드린 대가일 뿐이니."

"무, 무…."

"지금 네가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것은 길드원님께서 네 놈에게 할 일을 부여하기 위함일 뿐일지니, 길드원님께 감사하거라."

대체 길드원님이라는 헛소리가 또 무어란 말인가.

그제야 도상목은 현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어떻게 된 것인지 몰라도 저 길드원은 은하 길드장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거물이다.

그 실력 또한 자신이 보았지 않은가.

거기다 자신을 지켜야 할 호위들도 어딘가로 사라져 있었다.

"도상목."

"...."

"대답해."

"말… 해라."

서걱!

도상목의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제 왼팔을 바라봤다.

푸슈우우욱!

뿜어져나오는 피 분수.

"크, 크아아아악!"

어느새 강은하가 휘두른 검이 도상목의 왼팔을 잘라냈기 때문이었다.

"존경과 경애의 마음을 담아 답하거라. 버러지."

"미, 미친… 이 미친 것들이…!"

도상목, 경기도를 지배하는 두 기둥 중 하나인 도천 길드의 부길드장인 그였다.

태어나길 귀족으로 태어났고, 그 권리를 당연스레 누리며 살아온 자신이었다.

그런 그가 언제 이런 치욕을 당해보았을까.

스윽.

하지만 강은하의 검이 다시 움직이는 것을 보고 도상목은 생각을 바꾸었다.

"죄, 죄송합니다…!"

살아야 한다.

그래야 복수의 기회도 있는 것이다.

이곳에서 살아 돌아갈 수만 있다면 도천 길드에서, 아니 철검련에서 어떻게든 해줄 것이다.

스윽.

대답이 만족스러웠는지, 강은하가 검을 늘어뜨렸다.

"도상목."

"예, 옙!"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가?"

"...."

"하긴."

이로운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게 이해가 갔으면 네가 병신 소리 듣는 일은 없었을 테지."

도상목은 어떤 말도 함부로 할 수 없었다.

그저.

'죽인다. 죽일 테다.'

이곳에서 벗어나서 하게 될 복수만을 꿈꿀 뿐이었다.

"살기 하나 감추지 못하니, 병신 소리를 듣는 거다."

"그, 그것이…!"

그제야 제 잘못을 깨달은 도상목이었지만 늦었다.

푸우욱!

강은하의 검은 자비 없이 도상목의 뱃가죽을 뚫고 들어가 있었다.

"크억, 크어억…."

"몇 해 전, 천인문의 문주가 애지중지하는 금지옥엽이 시체로 발견되었지."

"...!"

"너무나 뜬금없는 죽음에 천인문주가 노해 범인을 색출하겠다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천인문, 천인 길드로 불리는 곳이었다.

또한, 도천 길드와 함께 경기도를 양분하는 철검련의 세력.

"결국, 범인은 평소 무인들에 앙심을 품은 플레이어 길드의 소행으로 밝혀졌고, 그 길드는 피의 대가로 몰살당했다. 그 가족마저도."

경기도는 물론 대한민국에서도 유명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소문에 불과한 루머라 여겨졌던 일.

"기억이 좀 나나?"

덜덜덜.

그러나 그건 사실이었다.

회의 압박을 받은 플레이어 협회가 나서 무마시켰던 사건.

"그 범인이 누군지 너는 알겠지?"

도상목은 복부의 고통을 느끼지도 못한 채 떨고 있었다.

"네 짓이니까."

이로운이 웃음 짓고 있었다.

"어찌 알았나 궁금하겠지. 그 사실을 아는 자들은 전부 죽였거나, 도천방에 가둬놓았으니까."

"아, 아니…."

"일라인 길드라는 플레이어 길드의 일도, 별내 길드의 일도."

플레이어 길드의 금지옥엽들이 무참히 살해당해 발견되었던 일들.

"전부 네 짓이지."

도상목은 부인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이로운의 저 졸린 눈이 마치 모든 것을 꿰뚫고 있는 듯했다.

만일 이 사실이 알려진다면 파국이다.

자신의 아비도 이 사건들의 몇 개만을 알고 있을 뿐이었다.

무엇보다 천인 길드와의 사건은 결코 알려져선 안 된다.

해남과의 전쟁을 앞둔 지금, 철검련은 내부의 분란을 어떻게든 무마하려 들 것이 분명하고.

"사, 살려…."

그 대가로 자신의 목숨을 가져갈 것이 분명했다.

더 이상 살아나간다고,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살 길을 알려줄까?"

"...!"

그건 마치 악마의 속삭임과 같은 목소리였다.

은근하고도 나른한.

그렇기에 거절할 수 없는.

채에엥.

강은하가 도상목의 배에 박혀 있던 검을 뽑아내 던졌다.

"뭔지 알아보겠나?"

"크윽."

복부의 통증에 신음하면서도 도상목은 던져진 검을 바라봤다.

"...!"

무엇인지 안다.

그리고 그가 말한 살길이 무엇인지도.

"해남의… 검."

그것도 장로의 문양이 그려져 있는 파랑검이었다.

신병이기기에 결코 문외로 발출이 어려운 진품.

"너는 해남의 무인에게 당한 거다. 은하 길드가 그 증인이 되어줄 거고. 무슨 말인지 알아듣겠나?"

끄덕! 끄덕!

도상목의 머리가 미친 듯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건 분명 살길이었다.

더욱이.

'어차피 해남과의 전쟁은 확실시되어가고 있다.'

해남과의 전쟁은 거스를 수 없는 흐름.

거기에 해남의 무인이 도천 길드의 부길드장을 암살하려던 것이 밝혀지면 빼앗겼던 명분마저 되찾을 수 있다.

증거도 있지 않은가.

은의 세력이 가지고 있는 신병이기는 해당 무공을 익히지 않은 자는 결코 사용할 수 없을뿐더러, 그 가치 탓에 문외로 가지고 나가는 것조차 제한이 많은 물건이다.

헌데 저건 분명 해남 장로를 상징하는 검이었다.

이것이라면….

"하, 하겠습니다!"

사는 것뿐 아니라 공을 세우는 것이 된다.

사라진 호위 따위는 이미 안중에도 없었다.

이로운이 누구인지 관심조차 없었다.

무슨 목적이 있든, 자신에게는 도움이 되는바.

'복수는… 그때 가서…!'

이로운이 도상목을 향해 차가운 웃음을 짓고 있었다.

"좋아. 살려주지."

* * *

이로운은 이미 흑시왕에게서 철검련에 대한 정보를 받아 가지고 있었다.

"흑시의 투자가 무슨 뜻인지 명확히 알도록 해."

"명심하겠습니다."

흑시의 투자는 단순히 금전이 아니다.

그 세력을 성장시킬 수 있는 정보 또한 제공한다.

이로운은 그 가치를 알았으나, 강은하는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

흑시의 투자가 무슨 가치인지, 그것을 어찌 이용해야 하는지.

강은하는 분명 똑똑했으나 경험이 부족했기에 생기는 문제였다.

도상목에 대한 정보, 아니 누군가가 가진 약점을 알 수 있다는 것의 이점.

"선택지가 생겼을 때, 꼭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할 이유는 없다."

이로운은 또한 말했다.

"그건 강자들이 편한 길을 선택하기 위한 것뿐이다."

약자였던 플레이어로 살아왔기에 그 누구보다 잘 안다.

주어진 선택지에 만족하며 나아가는 것은 안정적일지언정, 큰 변화를 꾀할 수는 없다.

외려 이용당할 뿐이다.

"선택지가 아닌 판을 흔들 수 있는 선택을 해. 네가 강자가 되기 전까진."

혈교의 세가 많이 늘어났다 하지만 아직은 약세.

철검련과 해남 길드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적은 것들뿐.

또한, 그 뒤에 남은 것도 적디적은 지푸라기뿐일 터다.

"도천 길드로 가라. 도상목의 증인이 되어주고, 도상목을 지지해라."

그 쓸모가 다할 때까지.

어차피 도상목은 이로운이 생각하는 바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미 그의 심령은 천마신공에 제압당해있으니까.

"때가 되면…."

이로운이 작게 웃으며 말했다.

"천인 길드에도 진실을 알려줄 필요가 있겠지."

그것이 강은하에게 해줄 말의 전부.

"존명."

전보다 더 깊어진 눈으로 강은하가 진심을 담아 답했다.

'곧 전쟁이 시작된다.'

그리고 그 전쟁의 끝에.

씨익.

은하 길드는 철검련을 대신할 강자가 되어 있을 것이다.

삼왕의 제자

제2권 제15화

040

"감히-!"

드드드.

분노로 가득한 일갈에 벽과 천장이 무너질 듯 흔들리며 돌가루를 떨구었다.

"해남 이 미친 것들이 기어코!"

그가 바로 삼도의 지배자인 철검련의 다섯 기둥, 그중에서도 경기도를 양분하고 있는 도천 길드의 길드장 도천후였다.

알려지기로 이미 현경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그.

'혈수백보다도 강한 기세야…. 현경의 중입…!'

강은하는 그 기세에 진심으로 놀라워하고 있었다.

현경이라 알려진 강자들, 당연히 강은하는 그들이 현경, 탈마의 초입에 불과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직접 대면해보니 알 수 있었다.

적어도 도천후, 그는 현경의 중입이라고.

'그렇다면….'

올올이 소름이 돋는다.

도천후는 분명한 강자다.

허나 그는 철검련에서도 겨우 세 번째 손가락이라 알려져 있었다.

도천후가 본 실력을 숨겼다면 다행이겠지만.

'정말 그가 세 번째라면….'

꿀꺽.

절로 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철검련만해도 이 모양인데, 철검문과 해남, 화산은 또 얼마나 강하단 말인가.

'또 다른 구파일방은?'

무림 협회는?

'나는 정말로 우물 안 개구리였구나.'

강은하가 눈을 질끈 감았다.

무인의 경지와 플레이어들의 레벨을 비교하는 자들이 많이 존재했다.

강하 그룹과 길드는 플레이어 길드를 표방했기에 어느새 자신들도 모르게 그들의 습관을 따라한 것이었다.

화경의 고수가 랭커의 수만큼 있다고, 현경의 고수가 하이랭커의 수만큼 있다고.

'아니야.'

그런 것이 아니다.

그보다 더하다.

플레이어들이 결코 무인에게 대항할 수 없는 절대적인 차이가.

"아, 아버지. 노여움을 거둬 주시길…!"

도상목이 몸을 떨며 말하자 그제야 도천후의 눈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우리 아가. 많이 놀랐구나."

급히 달려와 도상목을 부축하는 도천후.

벌써 스물 중반인 도상목을 아가라 부르는 도천후의 그릇된 부성애가 느껴졌다.

'육십이 넘어 겨우 얻은 아들이라던데.'

그렇기에 도상목의 말이라면 끔뻑 죽는다던데.

그 말이 전부 사실이었다.

헌데.

부르르르.

그런 아들이 왼팔을 잃고, 뱃가죽을 검에 꿰뚫린 채 돌아왔다.

"분명, 해남의 무인이더냐?"

도천후의 말에 도상목이 꿀꺽 침을 삼켰다.

잠시 눈을 감으며 생각에 빠졌던 그가 눈을 뜨고 강은하를 바라봤다.

혹여 그가 진실을 말한다면 강은하는 이 자리에서 죽을 것이다.

다시 도천후를 보는 도상목의 눈.

"아버지. 소자를 못 믿으시는 겁니까?"

"크흠."

"제 배를 꿰뚫었던 것이 해남의 검임을! 그것도 장로위를 상징하는 파랑검임을 아버지도 보시지 않으셨습니까!"

도상목은 그렇게 소리치며 탁자에 꽂혀있는 파랑검을 가리켰다.

-걱정 마.

강은하가 이로운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심령이 제압되어있으니까.

혈마도, 천마도.

은의 세계에서 그들은 마였다.

인간을 홀리고, 그릇된 길을 걷게 하는 마도의 종주.

허나 그 모든 것이 역사 속 전설처럼 여겨졌건만.

'진짜였어.'

이로운의 말에 의하면 아직은 완벽한 세뇌와 인간의 정신을 조종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저 억눌린 욕망을 자극시켜 극대화한 것뿐이라고.

"믿고 말고. 다만, 해남이 그리 움직일 것이라 예상하지 못했기에 물은 것뿐이란다. 아가."

"아버지! 소자가 왼팔을 잃었습니다!"

그러면서 도상목은 멀쩡해진 왼팔을 들어올렸다.

도천 길드에서 가지고 있던 엘릭서를 사용한 효과였다.

수천억을 호가한다는 엘릭서였건만, 망설임 없이 도상목에게 사용하던 도천후였다.

"죽을 뻔했단 말입니다!"

"알고 말고!"

"이대로 내버려 두실 겁니까!"

도상목이 목소리를 더욱 높였다.

"만일 아버지께서 이 화를 참으신다면…."

도상목이 무언가를 결심한 듯 재빨리 제품에서 단도를 끄집어내 목에 겨누었다.

"무슨 짓이냐!"

"이 치욕, 제 목숨을 끊어 증명하겠습니다!"

"안 된다! 안 돼!"

덜커덕!

찔러 들어가던 단도에 목에서 살짝 핏방울이 맺히기도 전, 도천후의 내기가 허공을 격해 도상목의 손을 멈춰버렸다.

"걱정 말거라."

도천후가 결심한 듯 말했다.

"듣거라."

도천후의 목소리에 방 밖에서 작은 떨림이 일었다.

"지금 당장 도천방의 삼 개 공격대를 소집하고, 길드원들을 소집하라!"

드드드!

"휘하의 길드에 소집령을 내리고 준비하라."

도천후에게서 풀풀 살기가 흘러나왔다.

"내 직접 움직여 동해 길드부터 지울 것이야."

분노로 일렁이는 도천후의 눈.

그렇기에 그는 볼 수 없었다.

씨익.

말려 올라가는 아들의 입꼬리를.

***

"축하해요."

강은하의 말에 도상목이 웃어 보이며 답했다.

"고맙소. 소저. 전부 소저 덕이요."

도상목은 진실로 웃고 있었다.

도천후가 아들 바보라지만, 그가 진짜로 바보일 리는 없었다.

그 또한 철검련의 한 기둥이자, 경기도를 지배하는 패자.

오랜 세월 한 세력을 이끌어온 연륜이 있는 자였다.

만일 아무런 증거 없이 도상목이 돌아와 해남과의 전쟁을 이야기했다면 도천후는 도상목을 달랠지언정 출정을 준비하진 않았을 것이다.

적어도 철검련에 보고하고 응당한 절차를 거쳐 움직였을 터였다.

하지만 증거가 뚜렷하다.

'파랑검.'

육사걸에게서 빼앗은 신병이기.

도상목이 당한 상처가 해남의 장로가 펼쳐낸 검법이라기엔 조악함이 있었다고 하나, 신병이기를 다룰 수 있는 것은 해남의 심법을 익힌 자여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혈마께서 신병이기의 공능을 제압해주신 덕분이야.'

이로운이 육사걸에게서 빼앗은 것을 본데노와 그의 능력으로 잠시 제압해둔 덕분.

그것으로 증거는 충분했다.

만일 검법마저 완벽했다면, 도천후는 아들에게 엘릭서를 주는 것이 아닌 응급처치만을 해 상처를 세상에 내보이며 더욱더 명분을 쌓았을 것이다.

그것이 아니기에 엘릭서로 상처를 봉합한 것일 뿐.

"도천의 공은 전부 부길드장의 것이 될 테지요."

"어찌 저 혼자의 공이겠습니까.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한…."

씨익.

"소저와 '그분'의 덕택이지요."

시간이 갈수록 그에게 뿌리내리는 마기가, 그의 이성을 장악한다.

"소저께서도 듣지 않으셨습니까? 아버지께서 은하 길드에 약속한 것을요."

"감사히 생각한답니다. 그분도 만족하실 거예요."

도상목의 웃음이 더욱 진해졌다.

"그거 기꺼운 일이군요."

"이번에 잘만 풀린다면 천인문을 몰아내고, 경기도 전체를 도천이 지배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어요."

"하하하! 그때가 되면 내 꼭 약속대로 남양주를 은하에 넘기리다."

빙빙 도는 듯한 대화를 하던 강은하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헌데."

낮고도 가느다란 목소리.

"서둘러야 하지 않겠습니까?"

"무엇을?"

"천인문 말입니다."

강은하의 말에 도상목이 흠칫 몸을 떨었다.

"저희가 그 정보를 알고 있다는 것은, 또 다른 누군가도 이 정보를 알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오래된 이야기요. 증거라도 있다면 모를까…."

"그 증거."

강은하가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있지 않습니까?"

분명, 이로운은 말했다.

-진실을 아는 자들을 도천방에 가둬놓았지.

진실을 아는 자들이 살아있다.

그리고 그들은 존재 자체만으로 증거다.

도천방은 도천 길드가 뿌리내린 은의 세계.

"도천방이 안전하다고 하나, 혹시 모를 일입니다. 후환은 남겨두지 않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 그렇구려."

도상목의 눈에 화광이 일렁였다.

"내 지금 당장 그것들을 지워야겠소. 이리 있을 때가 아니겠소. 다음에 또 보구려. 소저."

그리 말한 도상목이 재빨리 어딘가로 향하기 시작했다.

"멍청한 인간."

그리고 그의 움직임은 그가 결코 발설해선 안 될, 알려선 안 될 정보를 혈마께 전달할 것이다.

꽈악.

홀로 남은 강은하가 걸어 나가며 주먹을 꽉 쥐었다.

'아직 부족해.'

노력한다 했지만 결국 혈마께서 직접 움직이자 일이 훨씬 더 잘 풀렸다.

자신이 생각해서 가져야 할 것이라 여겼던 것보다 수 배, 수십 배 더 많은 것을 얻게 될 것이었다.

혈마는 자신들의 신.

신의 말을 이행하는 것이 신도의 역할이라 하지만, 신의 뜻을 짐작하여 신의 길을 닦는 것 또한 신도의 일이었다.

'더, 더… 도움이 되도록 노력하겠나이다.'

강은하의 눈 또한 화광이 일렁이고 있었다.

* * *

기습이었다.

이른 새벽 경기도에서 출발한 여섯 대의 버스가 동해에 도착한 것은 말 그대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애시당초 좁디좁은 대한민국 땅이었다.

대비하지 않는다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현실.

그날, 동해 길드의 텅 빈 길드 하우스는 도천 길드에 의해 장악당했고 게이트를 공략하고 돌아오던 자들은 기다리던 도천 길드에 의해 모조리 죽임당했다.

'전쟁.'

전쟁이었다.

그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일.

철검련이 먼저 해남을 친 것이었다.

뒤늦게 상황을 눈치 챈 해남이 움직였지만, 미리 모든 상황을 대비한 도천의 벽을 뚫을 순 없었다.

해남이 이 일을 철검련과 회에 항의했지만 돌아오는 답은 하나였다.

'해남의 장로가 도천의 부길드장을 습격했다.'

헛소리.

하지만 그들은 증거를 가지고 있었다.

명분이란 것은 은의 세계를 움직이는 힘.

이제 서로는 준비된 명분을 가진 채 전쟁에 돌입했다.

"철검련주, 철종휘는 도천의 행동에 당황했지만 어쩔 수 없는 흐름이라 생각한 것 같아요."

"그렇겠지."

"오히려 명분도 있으니 한 번 해볼만하다고 생각한 거겠죠. 동해는 해남의 큰 줄기 중 하나에요. 그게 하루 아침에 점령당한 것으로 모자라, 동해 길드의 대부분이 죽임당했으니…."

해남은 한동안 움직이기 힘들다.

"전선이 갖춰지고 있어요. 정예들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멈출 수 없는 흐름.

둑이 터져 흘러나오는 강줄기는 그 누구도 쉬이 막지 못한다.

"잘된 일이에요."

강은하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덕분에 경기도는 물론 충청도, 강원도에 게이트가 넘쳐나요."

게이트를 공략해야 할 무인과 플레이어들이 전선을 지키러 움직이고 있다.

그러니 당연히 게이트를 공략할 인원이 부족할 터.

그것은 철검련의 영향력 아래 있는 길드들이 막아야 할 일이었다.

그 대가로 게이트 공략을 하는 길드들은 철검련에 더 많은 상납을 해야겠지만.

"도천의 영향력 아래에, 저희는 상납을 하지 않아도 좋다는 약속을 받았어요. 또한, 도천의 공략 게이트 중 대다수를 저희에게 맡긴다고도요."

기회다.

더할 나위 없는 기회.

그보다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다.

"도천이 은하 길드의 길드원 수 제한을 한시적으로 해제해주었어요."

그것이 현대의 기득권과 그렇지 못한 세력을 나누는 기준이었다.

세력을 지배하는 거대 세력.

그들은 그들 안에서 불화의 씨앗이 발아하는 것을 지켜보지 못한다.

무림 협회가 플레이어 협회에게 그러하듯.

세력을 지키는 자들은 세력 안에 또 다른 세력이 나타나는 것을 견제한다.

그렇기에 은하 길드는 조금씩, 천천히 혈교도를 길드원으로 바꿔나가는 작업을 하던 것이었다.

헌데 그 제한이 풀렸다.

"이미 이백의 교도들을 길드원으로 만들었습니다."

은하 길드가 성장할 시간.

"말씀하셨던 대로…."

이로운과 강은하.

그가 혈왕성에 새로 만들어진 한 공터를 바라보며 말했다.

"낭인들 또한 대거 모집하였습니다."

세계를 잃거나, 세계에서 버림받은 자들.

그렇기에 떠도는 자들.

그들을 모아 혈왕성에 가두었다.

씨익.

은하 길드가 크듯, 혈교가 커야 할 시간이었다.

저벅.

이로운이 그들을 향해 움직였다.

삼왕의 제자

제2권 제16화

041

은의 세계는 멸망한 세계다.

멸망하여 닫힌 세계.

그런 그들은 어떻게 새로운 무인을 키워낼 수 있을까?

대개는 그 세계 속 태어난 아이들을 길러내는 방식으로 육성했지만, 문이 열린 지금은 또 다른 방법도 가능했다.

"대, 대체 이게 무슨 짓이오!"

세계를 파괴시키고 그 세계의 주민들을 흡수하는 것.

또 하나는.

"대체…."

세계를 잃어버린 방랑자들.

세계에서 버림받은 패배자들.

죄를 지어 파문당한 범법자들.

그들을 부르는 말, 낭인.

"여긴… 어디란 말이오."

그들을 받아들이는 방법이었다.

허나, 수많은 은의 세계에서 낭인을 받아들이는 일은 흔치 않았다.

그들은 닫힌 세계 속, 많게는 수백여 년을 살아온 이들이었다.

그들의 본거지를 보여주고 정체 모를 외인을 받아들이기는 절대 쉽지 않은 일일뿐더러.

'멸망한 세계 속 시간은 그들을 더욱 폐쇄적으로 만들었다.'

은의 세계를 이루는 문파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폐쇄적이다.

그들이 가진 무공은 제 식구라고 생각하는 이에게만 전수했고, 그중에서도 뛰어난 무공은 식구 중에서도 뛰어난 이에게만 전승된다.

그런 그들이 방랑자들을, 패배자들을, 범법자들을 받아들여 무학을 전수한다는 것은 사실 말이 되질 않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낭인들은 그저 떠돈다.

은의 주민이기에, 플레이어들을 얕잡아보면서도 그들과 어울리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이들이 바로 저들이다.

"쯧. 버러지들이."

이로운의 말에 낭인들의 얼굴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이 무슨 행패란 말이오! 우리가 비록 낭인일지언정, 하나의 무인이오!"

"무인?"

이로운의 입가가 재미있다는 듯 올라갔다.

이번에 은하 길드에서 흑시를 통해 모집한 이백에 가까운 낭인들.

"패배자들이?"

"그 입…!"

"닥쳐."

이로운의 싸늘한 일갈에 낭인들이 입을 다물었다.

은은하게 뿜어져 나오는 기세가 그들의 입을 절로 닫아버린 것이었다.

"세계를 잃고, 가족을 잃었지만 복수조차 못 하는 패배자들."

"크윽."

"버림받았음에도 바득바득 그 목숨을 부지하며 연명하는 자들."

"그, 그만…."

"죄를 짓고 파문당한 이들이? 무인?"

"그만하시오!"

틀린 말이 아니다.

무인들은 말한다.

스스로를 무에 모든 걸 바쳤다고 말하는 무인들.

허나 이 자들을 보라.

무가 아닌 살아남는 것에만 모든 것을 바친 이들은 영락零落한 자들이었다.

"겨우 이런 수모를 주기 위해, 우리를 이곳에 모은 것이오."

그중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곳은 분명, 당신들의 세계임이 분명하건만."

노인의 눈이 가라앉았다.

"이곳에 우리를 모았다는 것은 본디 다른 뜻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데."

저들은 은하 길드와 계약하여 모인 연회 속에서, 정신을 잃었고 눈을 뜨자 혈왕성에 도착한 것이었다.

저들의 허락도, 의지도 없다.

"그래. 그렇지."

이로운이 이제야 정답을 들었다는 듯 작게 웃으며 말했다.

"왜 너희가 세계를 잃었느냐?"

이로운은 질문했다.

"왜 너희가 버림받았느냐?"

질문이 계속될수록 낭인들의 눈이 가라앉았다.

"왜 너희가 짓지도 않은 죄를 저지른 것이 되었느냐?"

낭인들 중 대다수가 그렇다.

누명.

그들이 저지른 죄가 아님에도 그들이 죄를 뒤집어써 파문당한다.

더욱이 이들은 흑시왕을 통해 신원을 확인한 이들.

진실로 죄를 저지른 자들은 없다.

"대답해 보거라."

이로운은 다시 답을 기다리며 조용히 눈을 반개했다.

"...힘이 없어서."

노인이었다.

"무인임에도 그 이름을 쓸만한 힘이 없어서. 그래서 집을 잃었고, 그래서 버림을 받았으며, 그래서 짓지 않은 죄를 뒤집어써야만 했소."

짜악.

이로운이 작게 손뼉을 쳤다.

"정답이다."

낭인들을 바라보는 이로운의 눈.

낭인들은 입을 부르르 떨고 있는 자도, 입술을 짓씹어 피를 흘리는 자들도,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피가 흐르는 자들도 있었다.

"그 힘."

이로운은 웃으며 말했다.

"내가 주마."

***

"우리를… 받아들인단 말이오?"

노인이 말했다.

그는 낭인들 중에서도 오래 살아남은 노강호이었다.

비록 일신의 무공이 부족하다 하지만, 재치와 노련함으로 이 나이까지 살아남은 것이었다.

그는 지금도 주변을 보고 있었다.

'성.'

은의 세계 중에서도 성의 크기를 유지하고 있는 세력은 그다지 많지 않다.

그럼에도….

질끈.

노인은 눈을 감으며 생각했다.

'이곳이 어딘지, 저들이 누군지 모른다.'

은하의 이름이 무엇을 상징하는지.

그리고 이곳이 어딘지 모른다.

'암계暗界.'

감추어 드러나지 않은 세상이라는 뜻.

그리고 그런 이들은 필시 무림공적일 확률이 높았다.

스윽.

어느새 이백의 낭인들을 그보다 적은 수가 감싸고 있었다.

군인이라면 군홧발 소리로 겁을 주었겠지만, 무인이기에.

'아무런 기척조차 느끼지 못했다.'

소리 없이 그들을 둘러싸는 것이 더 두려운 일임을 알고 있었다.

"노, 노사…."

낭인들이 노인을 부르며 말했다.

늙은 스승이라는 뜻의 노사라 불리는 노인.

그는 오랜 세월 낭인들을 이끌고, 이들을 살려낸 장본인이자 낭인들의 정신적 지주였다.

"우리에게 선택권은 있소?"

다시 눈을 뜬 노사가 말했다.

"우리에게 질문할 기회라도 있소?"

이로운이 고개를 저었다.

"그것도 힘이 있는 자들이나 가능한 일이지."

정답이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제안을 받아들이거나, 죽는 것뿐이겠구려."

대답은 들려오지 않는다.

그렇기에 그것이 정답임을 알 수 있었다.

"허나, 그리 호락호락하지는 않다오."

노인은 입을 열었다.

"회에 친우가 있소."

비장의 한 수를 꺼내듯, 노인이 천천히 말했다.

"내 계약을 받을 때마다, 그 소식을 전달하는 친우라오."

"그 말은."

이로운이 노인의 말을 끊곤 말했다.

"네가 돌아가지 못하면, 회가 너와 계약한 은하 길드를 의심하여 우리가 발각될 것이라 협박하는 건가?"

"협박이라 말하니 과하오. 그저 보험 정도라 말하겠소."

과연.

낭인들은 살길을 찾았다는 듯, 노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런 준비 없이 무언가를 하기엔 세상이 흉흉하지 않소."

"그래. 그렇지."

하지만 노인은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웃고 있다.

"그렇다면 말하지."

주변을 훑는 이로운의 시선.

"이런 세상이 지금까지 유지되어 있다. 내가 너희들을 이곳, 혈왕성에 부르며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았을 것 같더냐?"

"혀, 혈왕성…!"

"맙소사…."

이제야 그들은 이곳이 어딘지 깨달은 모양이었다.

"선택은 하게 해주지. 그래도 무인이라 자부하는 자들이니만큼, 죽을지 받아들일지는 선택하도록 해주지."

그건 거스를 수 없는 선택이었다.

"크윽…."

노사 또한 더 이상 방법이 없음을 알고 있었다.

"왕여일."

"...!"

호명된 이름에 노인이 눈을 부릅떴다.

옛적에 버린 이름이다.

기억에서조차 희미한 이름.

"왕방문의 문주였으나, 해남과의 일방적인 전쟁에서 가족과 문도 대다수를 잃고 겨우 목숨을 부지한 채 떠도는 낭인."

"어, 어찌…."

"천소진."

또 다른 호명된 이가 눈을 부릅떴다.

"화산의 속가, 칠절문의 후예였으나 화산과의 마찰로 파문당해 죽었다고 알려졌다지?"

"그, 그런…!"

"유표상."

또 다른 이.

"죽인 적도 없는 자를 죽인 죄로 공적이 되어 떠도는 기분이 어떻지?"

이미 이들의 정보는 모두 이로운의 손안에 있었다.

아니, 애초에 그런 자들만을 모았다.

"나는 힘을 주겠다 말했다."

이로운은 더 이상 어떤 감흥도 없다는 듯 웃지도 않고 있었다.

"받아들일지, 말지. 너희들이 무인인지, 아닌지는 알아서 잘 판단하도록."

그렇게 말한 이로운이 망설임 없이 뒤돌아섰다.

웅성웅성.

낭인들은 주어진 시간 동안 그들이 무얼 해야 하는지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 중심에 노사라 불리는 왕여일이 있었다.

* * *

결국, 낭인들은 전부 혈교도가 되기를 선택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럴만한 자들만 이곳에 불러들인 것인 데다.

"고생했어."

"어찌 하교가 고생했다 하십니까. 혈마의 품에 안기는 은혜를 베푼 것뿐이옵니다."

왕여일.

노사라 불리던 그가 다소곳이 무릎을 꿇은 채 이로운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하교.

아직 그는 혈공을 익힌 혈교도도 아니건만, 스스로를 혈교도라 생각하여 자세를 낮추고 있었다.

아니.

"하교에게 기회를 주신 것, 결코 실망시키지 않도록 각골난망하겠나이다."

그는 혈공을 이미 익힌 혈교도였다.

결국 은의 세계가 성장할 수 있는 방법은 한계가 있다.

더욱이 드러나선 안 되는 혈교로서는 방법이 더욱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낭인들을 받아들이는 것은 이미 옛적에 결정된 일이었다.

그렇기에 이로운은 낭인들을 이끄는 자들에게 관심을 두었다.

'왕여일.'

이 자는 오랜 시간, 낭인 무리를 이끌고 살아온 자들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이 자는 버러지 같은 자들이 아닌, 썩 괜찮은 자들을 휘하에 두고 있다는 것.

그리고 명분을 쥐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이가 있어 노련한 만큼, 은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 자.

그렇기에 그가 모은 낭인들은 하나같이 사연이 있으며, 그 사연을 해결할 힘이 없는 자들뿐이었다.

이로운은 전에 따로 이자를 만났다.

-힘을 주마. 해남에 복수할 힘을.

왕여일은 기다렸다는 듯 그 제안을 받아들였고.

"앞으로도 낭인을 모아오도록 해. 그게 네 역할이다."

"명심, 또 명심하겠습니다."

혈교가 되어 이 촌극에 참여한 것이었다.

촌극이라 하지만 중요한 일이었다.

혈공을 배운 이들이 피의 종속을 통해 절대적인 충성심을 가진다고 하나, 다른 이들을 설득하는데 그 충성심은 광기에 불과하다.

합당한 이유와 과정이 필요하다.

오늘 혈교도가 되길 선택한 낭인들은 오늘의 일을 필요할 때 또 다른 낭인들에게 전달할 것이다.

그렇게 힘이 없는 자들은 힘을 갈구해 모일 터.

"혈교는 힘없고 사연 있는 자들의 집이 돼줄 거다."

허나, 그 사연은 다른 방식으로 쓰일 테지만.

인사하는 왕여일이 교도를 따라 움직였고, 다가온 정치수와 함께 이로운이 걸었다.

도착한 곳은 혈왕성 지하 감옥.

"...."

그곳에 잡아 온 도상목의 호위들이 있었다.

"꽤나 꼴들이 편해 보이는데?"

이로운의 말에 도천방의 무인들이 입매를 뒤틀었다.

이로운의 말은 단순한 농담이 아니었다.

그들이 잡혀 오고 그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뭇매를 맞기도, 고문을 당하지도 않았다.

"무엇을… 듣고 싶어 한들 들을 수 없을 것이오."

눈과 입을 닫아버리는 그들.

"왜, 내가 도천방의 입구가 어디 있느냐 물을 것 같나?"

"...."

"아니면 도상목이 저지른 죄악을 말하게 시킬 것 같아?"

그들은 답이 없었다.

"이미 다 안다."

"...!"

"도천방의 입구."

씨익.

"고양에 있더군."

"그…!"

무어라 말하려던 호위가 서둘러 제 입을 틀어막았다.

"도상목이 저지른 죄악이야 워낙 많으니 뭐 관계없지.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은 하나뿐이다."

가라앉는 이로운의 눈.

"도천은 지워진다. 그게 아니면, 우리랑 하나가 되거나."

영문 모를 말이다.

"어차피 하나가 될 거, 처음부터 그들을 받아들이는 데 도움을 주는 게 낫지 않겠나? 잘 생각해보도록."

삼왕의 제자

제2권 제17화

042

철검련과 해남의 대치가 본격화되었다.

본래 강원도가 철검련의 세력이라고 하나 그 영역은 강릉까지로 제한되어 있었다.

동해는 경상도를 지배하는 해남에게 빼앗겨 밀려났던 상황.

하지만 도천 길드가 명분을 쥐고 순식간에 움직여 동해를 탈환했다.

드디어 철검련이 강원도를 완벽히 지배한 순간이었다.

당연히 해남 또한 온 신경이 동해에 쏠려 있으며, 전선이 만들어졌다고 하나 동해에 가장 치열한 전력이 모여들고 있는 실정이었다.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 소규모 전투들.

"이주를 선택한 이들이 전원 혈왕성에 들어와 주거 구역을 배정받았습니다."

그 불씨를 지핀 혈왕성은 너무나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전부 혈공을 익힐 준비를 마친 상태로, 곧 혈공을 익힐 예정입니다."

강한철의 말에 이로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교도가 되기로 했던 낭인들.

그들이 지키던 소수의 은의 주민들이 혈왕성에 들어왔다.

갑작스러운 상황, 겨우 자리 잡은 터전마저 잃게 될 그들이었지만 반발은 심하지 않았다.

-이곳 또한 너희의 집이다. 이곳이 너희의 집이 되었을 때, 언제든 자유로이 움직여도 좋다.

그런 허락이 떨어진 탓이었다.

더욱이 그들은 본디 은의 주민들이었다.

지구에 뒤섞여 삶을 이어가는 은의 주민들이 적지 않다고 하나, 그들 대다수는 그래도 은의 향취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그들은 지구에 살면서도 언제나 그곳을 집이라 생각하지 못한 이들이다.

그런 그들이 살아가야 할 집을 갖게 되었다.

"차별 없이 대하도록."

"염려하실 것 없습니다."

강한철이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사실 혈마궁의 소속이 아닌 하교에게 그리 큰 간섭은 하지 않는 것이 혈교의 율법이었습니다. 그간 혈교의 사정이 워낙 좋지 않아 어쩔 수 없었던 것뿐이니…."

강한철은 뒤바뀌고 있는 혈왕성의 모습이 그저 꿈처럼 느껴지는 듯했다.

"혈교가 본디 가졌어야 할 모습으로 회귀하는 것뿐이옵니다."

회귀.

그토록 설레는 단어가 또 있던가.

지금이 그들에게 찬란한 때였다면 회귀가 빌어먹을 저주일지 모르지만, 지구에서 나고 자라 지구의 주민이던 이로운은 알지 않은가.

"좋네. 그 단어."

또 한 번의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만큼 설레는 것은 없다.

"회귀하면 미친 듯 빠르게 강해져서 다 때려 부숴야 하는 법이야."

이로운이 재밌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결코 져서도 안 되고, 실패를 본보기 삼아 성공의 길을 찾아가야 할 거다."

"명심, 또 명심하겠습니다."

혈왕성, 그리고 은하 길드는 전쟁이 시작되고 아직 제대로 결전이 벌어지지도 않았건만 그 몸집을 빠르게 불려 나가고 있었다.

세외, 바깥에서는 은하 길드가 비어버린 게이트들을 미친 듯한 속도로 공략하고 있다.

그 부는 다시 쌓여 혈왕성으로 수급되는 중이었다.

'이번에 확실히 키워야 해.'

전쟁으로 혼란한 시기가 지나면 문제가 생기기 시작할 것이다.

특히나 은하 길드의 확장이 걸린다.

철검련의 그늘이 드리워진 지금이야 문제 될 것이 없지만, 은하 길드가 지금 게이트를 공략하며 벌어들이고 있는 것은 무시할 수준을 넘어섰다.

그것이 다시 돌지 않고 어딘가로 사라진다?

그 돈이 물자가 되어 증발해버린다?

'의심.'

흑시가 도와주는 지금이야 괜찮지만 흑시에게만 의존할 수도, 흑시가 감당하지 못할 수준으로 커지는 것도 문제였다.

은하 길드는 성장해야 한다.

혈왕성으로 들어가는 물자가 은하 길드의 크기에 비해 너무 적어 티가 나지도 않을 만큼.

"율법을 개정하고, 법을 바로 세워라. 곧…."

이로운이 뒤돌아서며 말했다.

"식구가 늘어날 테니까."

"존명."

***

바란 길드.

하나의 주인이 있는 것이 아닌 여러 기업과 사람들이 투자하여 만든 대표적인 플레이어 길드의 모습을 띠고 있는 곳이라 할 수 있었다.

그래도 대표는 분명 존재했다.

'최유란.'

그녀가 바란 길드의 총 책임자로, 그녀 자체로서 백 레벨이 넘는 랭커였다.

"다들 모여주셔서 감사해요."

젊은 리더.

그리고 그런 그녀의 부름에 바란의 투자자들과 임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회의장에 가득한 이들의 얼굴색은 결코 좋지 못했다.

침통한 분위기는 당장이라도 바란 길드가 멸망의 위기에 처했거나, 큰 재액이 닥쳐온 모습이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최유란은 그들의 행색이 당연하다 생각했다.

바란 길드는 플레이어 길드다.

허나, 제대로 된 스폰서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뒤바뀐 세계, 아시아에서 길드가 힘을 가지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스폰을 해 줄 은의 세력이 필요했다.

물론 바란에도 그러한 은의 스폰서가 존재하지만, 그들의 존재는 비밀리에 감춰져 있었다.

결국 바란은 제대로 된 스폰서도 없는 플레이어 길드.

이도 저도 아닌, 제대로 된 활동을 허락조차 받지 못하는 반 푼짜리 길드란 셈이었다.

"크흠. 오늘 화합은 무슨 이유요?"

그렇다면 기업가나 투자자의 입장에서 바란은 언제든 해체하는 것이 옳은 길드였다.

허나 벌써 몇 년 동안 바란은 적자를 기록하면서도 유지되고 있었다.

그들의 의지가 아닌 타인의 의지로서.

"제가 부른 것이 아니에요."

"...!"

최유란의 말에 말을 꺼낸 중년인이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곧 그 눈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을 지닌 채 내리깔렸다.

"교에서 사람이 오는 모양이군."

"한동안 잠잠하더니…."

바란.

그들은 혈교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길드.

또한, 어쩔 수 없이 정식교도가 아닌 임시교도가 되어버린 이들이 주인인 곳.

말이 교도지 그건 강제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따르지 않는다면 죽는다.

비록 그들에 의해 중요한 이들이 살아났다고 해도, 그건 결코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다.

"또 얼마나 원하시려고…."

그간 혈교가 바란에 바란 것은 어떤 무력이 아닌 금전뿐이었다.

그것도 바란이 휘청거릴 만큼.

바란이라는 길드의 존재는 강제로 교도가 된 자들이 어쩔 수 없이 혈교에 상납을 위해 만든 단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오늘은 다들 말을 조심하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최유란의 말에 모두가 그녀의 얼굴을 봤다.

"오늘은…."

최유란 또한 긴장을 숨길 수 없었다.

자신은 이들과 다르다.

-넌 특별해.

그녀에게 선택받아 지구의 주민임에도 임시가 아닌 정식교도가 되었으니까.

"높으신 분이 오신답니다."

"노, 높으신 분이라면…?"

아무도 그 정체를 짐작할 수 없었다.

지금껏 그들이 만났던 교의 높은 이라고 해봐야 심부름꾼에 불과한 자들뿐이었다.

인간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냉혹한 얼굴에 그 무엇도 통하지 않는 기계 같은 인간들뿐.

"...!"

최유란은 말 대신 몸을 일으켰다.

"기립."

최유란의 말이 이어지자 의자 끌리는 소리와 함께 모인 이들이 몸을 일으켰다.

문이 열리고, 교에서 바란 길드에 파견한 무인들이 도열했다.

꿀꺽.

그제야 모여든 이들은 조금이나마 실감할 수 있었다.

지금껏 말을 전했던 대표들이 그저 한낱 길드원처럼 도열해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

그 사이로.

"유란. 오랜만이야."

스물 정도밖에 되어 보이지 않는 앳된 미녀가 정장을 입은 채 등장했다.

"신녀님을 뵙습니다."

바란의 길드장이라는 위를 지니고 있음에도 망설임없이 무릎을 꿇고 예를 취하는 그녀.

"시, 신녀를 뵙습니다!"

그래도 여기 모인 이들은 각자 재력을 모은 이유가 있다는 듯 눈치를 채곤 예를 취했다.

'신녀라니!'

그들 중 신녀를 제대로 본 적은 없었다.

그저 말처럼 전해져오는 교의 높은 분이라는 말뿐.

듣기론 교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권력자라 불리는 이가 직접 행차한 것이었다.

꿀꺽.

침 삼키는 소리가 이곳저곳에서 났다.

나이가 어리다고 무시해선 안 된다.

은의 속담에는 그런 것이 있다고 했다.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아이와 여자, 노인이다.

과거 젊디젊어 보이는 은의 무인에 의해 대한민국이 어떤 피해를 입었던가.

모인 자들은 더욱 몸을 낮추며 숨을 죽였다.

헌데, 더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스윽.

신녀라 불리는 교의 권력자.

"예를 취하세요."

그녀가 양 무릎을 꿇은 채, 마치 신을 배알하듯 몸을 숙이는 것이 아닌가.

쿠쿠쿵!

도열해 있던 교의 무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급히 모인 자들이 최유란을 보았지만 당황한 것은 그녀 또한 마찬가지인 듯했다.

쿵!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최유란이었다.

그녀가 몸을 낮춘 채 강은하만큼이나 낮은 자세로 숙였다.

다른 이들 또한 마찬가지.

저벅.

멀리서 작은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그들은 해선 안 되는 일인 것을 알면서도 조심스레 고개를 슬쩍 들었다.

저벅.

어느새 더욱더 가까워진 발소리.

저벅, 저벅.

그 소리에 그들은 심장이 움츠러드는 것과 같은 착각을 느끼고 있었다.

툭.

마침내 발이 멈추었다.

멈춘 발의 주인.

신녀라 불린 강은하가 다시 숙였던 고개를 땅에 처박으며 말했다.

"혈마를 배알합니다."

그것이 시작.

"혈마를-! 배알합니다! 혈마천세! 혈마앙복!"

"...!"

혈마!저들이 그토록 말하던 교의 신.

그가 직접 이곳에 왔단 말인가?

도대체 그가 누구이기에….

"야. 내가 이거 하지 말랬지. 쪽팔리게."

하지만 곧 들려온 파락호와 같은 목소리에 긴장했던 이들의 얼굴에 의문이 피어올랐다.

"하, 하오나 오늘은 임시 교도들을 만나는 것으로 혈마께서 그 위엄을…."

"닥치고 일어서."

"예, 옙!"

쿵!

강은하의 머리에서 듣기 좋은 북소리가 났다.

* * *

혈마.

그들이 임시 교도라는 신분이 되며 귀가 닳도록 들은 존재였다.

교의 신이며, 교가 무조건적으로 따라야 하는 존재.

그들의 맹목적인 신앙은 종교의 모습을 띠기도, 과거 북의 푸짐한 이를 말하는 것 같기도 했었다.

그 존재를 얼마나 상상했던가.

누군가는 정말 신성한 신의 모습을 떠올렸을지도 모르지만, 대부분은 악귀를 떠올렸다.

피를 뒤집어쓴 전귀.

헌데 그런 존재가 지금 눈 앞에 있다.

"먼저 뛰어가서 준비한다더니 이딴 짓이나 하고 있어?"

"그, 그것이… 혈마의 위엄을…."

"하아."

피로 물 들은 용이 그려져 있는 붉은 용포가 아닌 칠흑처럼 어두운 새까만 슈트.

흑빛의 머리는 지저분하게 자랐지만 또 묘하게 어울렸다.

세상 모든 것이 귀찮다는 반쯤 감긴 눈 사이로 드러난 짙은 혈광.

스물 초반인 듯 보이는 굵은 선의 미남자였다.

"소, 송구합니다."

"혈왕성에서야 교도들이 그걸 바라는 거니까 조금 놔줬더니."

"시, 시정하겠습니다."

또 최유란이 그토록 두려워하면서도 경애하던 신녀란 존재는 신출내기 대학생이 선배에게 잔소리를 듣는 모습으로 서 있다.

"...."

둘의 미모가 이 세상 것이 아니라는 것은 알겠지만 이건 그저 스물 초반의 대학생과 다를 바 없는 모습 아닌가.

물론 그 속에서도 결코 거스를 수 없는 짙은 카리스마가 있는 것은 느껴진다.

"진짜 다음에 또 이 지랄하면 뒈진다."

"며, 명심할게요…."

정말일까?

진짜 교에서 온 사람이 맞나?

모두가 그나마 교와 가장 가까운 최유란을 보았으나.

"...."

가장 넋이 나가있는 건 최유란인 듯했다.

그때였다.

화아악!

공간이 어딘가에 빨려 들어가는 듯, 적막이 찾아왔다.

이로운과 강은하를 향해서 했던 생각도, 어떤 의문도 사라져버렸다.

여유로이 상석에 앉아 모인 이들을 보는 두 눈.

그것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반갑다."

혈교의 신이 입을 연다.

"혈마다."

삼왕의 제자

제2권 제18화

043

"반갑다."

나지막한 목소리가 회장을 울린다.

"혈마다."

그 한 단어에 모두의 입이 굳게 다물렸다.

어떤 증명을 한 것도, 무인들이 풀풀 내뿜는 기세란 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말이 거짓이라곤 단 한 치의 의심조차 들지 않았다.

"...."

몇몇은 그저 침음했다.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른 것이다.

드물게 그런 인간이 태어나곤 한다.

어떤 면에선 천재라고도 부를 수 있는 이들.

'위엄을 타고난 자.'

저 모습이 은의 무인들이 한다는 반로환동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면, 아마도 저자는 그 위엄을 타고난 자일 것이다.

얼굴을 보는 것도 용기를 필요로 하며 그 목소리에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사람.

과거 그런 자들이 태어나면 세상이 뒤흔들렸다.

둘도 없는 제왕이 되거나, 그 왕좌를 차지하기 위해 검을 드는 역도가 되는 것이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마찬가지.

그런 이들은 꼭 어떤 자리에 올라 수많은 이들을 호령한다.

하지만 왕국이 사라진 현대에 제왕은 탄생할 수 없는 법.

'그러나 지금이라면….'

또다시 뒤바뀌어버린 세상.

세계의 침범.

본래의 주민들은 멸시당하며 그들의 권리와 자격을 박탈당한 세상이라면?

아니, 무력이라 불리는 유형의 힘이 근간이 되어버린 세상에서라면?

꿀꺽.

왕은 태어날 수도 있다.

'이미 태어났을 수도.'

믿기지 않았지만, 상석에 앉아 있는 저 젊은이가 그리 보인다.

"그래. 다들 혈교를 위해 충성을 보였다지?"

이로운의 말에 그제야 사람들의 안색이 조금 풀어졌다.

이로운이 그간 고생한 자신들을 치하하러 온 것이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개 같은 짓이지. 독에 중독되어, 세뇌당해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을 충성이라 하나?"

"크, 큼."

이로운의 말에 강은하가 헛기침을 했다.

"그건 노예지."

"...."

몇몇 이들은 자칫 긍정하며 고개를 끄덕일 뻔할 정도로 솔직하고 담백한 목소리였다.

"나는 노예는 필요 없다."

이로운의 말에 무인들이 움직였다.

탁, 탁, 탁.

탁자 위에 놓이는 것들.

"이것은…?"

"해약이다."

"...!"

이로운이 말을 이었다.

"너희들의 충성이 혈고로 인한 것임을 안다. 그 혈고를 죽이는 해약이다."

다시 사람들은 입을 다물었다.

'시험인가?'

아니면 다 필요 없어졌으니 죽이려는 것인가?

수많은 의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내가 원하는 건."

혈마라는 자의 입꼬리가 장난스럽게 올라갔다.

"비즈니스다."

"...!"

이로운이 장내의 사람들을 보았다.

이들은 말 그대로 노예나 다를 바 없는 신세다.

충성?

그건 은의 무인들이나 지니는 가치다.

각자의 세계에 충성하고, 애정을 느끼고 소속감에 목숨조차 초개처럼 버리는 이들.

허나 현대의 세상, 아니 지구의 주민은 다르다.

"원한다면 더 이상 교와 엮이지 않아도 좋다. 물론 교에 대한 기억은 지우거나 금제 당해야겠지만…."

씨익.

"죽는 것보다 낫잖아?"

지구의 주민들이 지니는 가치.

그것을 주는 것이 그들을 가장 잘 다룰 수 있는 법이다.

* * *

"비, 비즈니스라 하심은…?"

"말 그대로야."

충성이 아닌 사업.

"너희들의 투자가 상납이 아닌 진짜 투자가 되면 되는 거지."

그리고 그것이 진정 혈교를 위한 일이 될 터였다.

'독으로 인한 충성, 활용성이 떨어진다.'

혈고란 혈교에 전해지는 비장의 독으로, 약속된 시일 내에 끊임없이 열화된 해약을 먹지 않으면 죽어 없어지는 극독이었다.

가족을, 혹은 본인이 그 독에 당해 억지로 하는 충성.

과거 은에서는 이 혈고를 해독하지 못해 많은 고충을 겪었다, 했다.

'그러나 세월이 변했다.'

아직 혈고가 드러난 적은 없지만 그 해독이 아예 불가능할까?

물론 쉽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지구의 과학과 아인하트의 마법이 있어도 불가능할까?

그렇기에 혈교는 세외, 지구의 주민들을 상대로 마구잡이식 포교를 할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이들의 독은 누군가 해독할 수 있다.

'즉, 이들은 그저 상납이나 버림패의 용도로밖에 활용하지 못한다.'

혈고를 먹는 순간, 이들의 운명은 그렇게 결정되는 것이었다.

이로운이 바라는 건 그게 아니었다.

오히려 저들이 목숨을 걸고 바란과 혈교를 지킬 인사가 되는 것.

그것은 그들의 가치가 혈교에 있으면 되는 것이다.

혈공을 배운다면 쉽게 해결될 문제겠지만 저들은 은의 주민이 아닌바, 무공을 배울 수 없다.

'나중엔 다를 수 있겠지만.'

지금은 그렇다.

이로운이 생각하는 동안 저들의 머리는 당장이라도 터질 듯 회전하고 있었다.

"혈마께선… 생각했던 것과 다른 분이시군요."

중년인이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안종혁.'

전에 강은하를 만났던 게이트.

그곳에 있던 안민홍의 아비가 저 자였다.

객기로 잡지 말아야 할 손을 잡아 죽을 뻔했던 녀석의 아비.

"뭐 뿔 달린 괴물인 줄 알았어? 그런 괴물은 게이트 가면 있어."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안종혁은 긴장을 가라앉히며 말했다.

"하지만 혈마의 말씀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

이로운의 목소리가 떨어지기 무섭게 무인들과 강은하의 싸늘한 눈초리가 안종혁에게로 향했다.

"눈 깔아. 내가 얘기하는데."

"송구합니다."

"말해봐. 문제라."

안종혁이 서늘한 심장을 겨우 부여잡고 말했다.

"혈마는 저희가 더욱 왕성히 활동하길 바라시는 것입니까."

"맞아."

"제대로 된 길드로 키우실 생각이시군요."

이로운의 답이 없자 안종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

"혈마께서 그리는 그림을 조금이나마 이해했기에, 그것이 성립되면 자연적으로 수많은 관심을 받게 됩니다. 그것이…."

"바란의 뒤에 누가 있느냐? 하는 것이겠지."

안종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혈교는 제 얕은 지식으로 무림이라 불리는 은의 공적이라 들었습니다."

안종혁을 향한 시선이 따가워진다.

강은하나 무인들의 것이 아니었다.

'왜 그러는 것이오.'

안종혁과 같은 사람들.

그들은 혈마가 혹시 노해 이 자리의 모두를 죽일까 두려운 것이었다.

"투자란 단순히 득을 보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실 또한 생각하여 그 저울의 가치를 재는 것이죠."

안종혁은 굴하지 않은 채 말했다.

"은이, 회가 알면 결국 모두 죽습니다. 혈마께선 그들을 막을 방도가 있으십니까?"

터진 입은 거침 없었다.

"은의 세력권, 아니 적어도 화산을 넘어설 수 있겠습니까?"

싸늘한 분위기.

아직 안종혁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은. 혈교가 상대하실 수 있겠습니까?"

차라리 이것이 낫다.

혈교에게 등을 돌리면 그래도 살 수 있는 자들은 있을 것이다.

그들이 자신들을 완전히 버리면 회에 붙어 어떻게든 한두 명은 연명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 반대라면?

'은이 알면 모두가 죽는다.'

싸그리.

말 그대로 싸그리.

그러니 차라리 지금이 낫다.

재정에 압박이 있더라도 십시일반하여 상납금을 내는 편이 차라리 낫다.

"안종혁. 맞지?"

"이름을 알아주시니 영광일 뿐입니다."

"졸부답군."

"...!"

이로운은 웃고 있었다.

"그러니 푼돈이나 만지는 거다."

"얼마든지 저를 모욕하셔도 좋습니다. 하지만 저는 안전을 추구하는 것뿐입니다."

"세계에 안전이 있나?"

"그런…."

"대한민국 땅에 안전하단 말이 어울리나?"

은의 지배.

"어차피 너희가 무얼하든 저들이 마음먹으면 죽는 게 현실이야. 위험이라."

웃음이 사라졌다.

"무엇이 다르지?"

"...."

"혈교에 가담해 죽는 것이나, 저들의 마음이 돌변해 학살당하는 것이나. 무엇이 다르지? 오히려 이유 있는 죽음이 낫질 않나?"

이로운은 말했다.

"네 자식, 게이트 속에서 죽어 나자빠질 뻔한 걸 신녀가 살렸다. 어디 세상이 안전한가?"

답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우리의 보호 아래 있다, 생을 함께하는 게 더 억울하진 않을 거다."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

"큰돈을 벌고 싶다면 득만 봐라. 위험이 있다면 그 위험을 줄이는 것만 생각해야지. 쯧."

너무나 정론이기에 도저히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은이라…."

사라졌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거긴 원래 내 것이다. 내가 계승 받은 정당한 내 것."

안종혁이 너무 놀라 이로운의 얼굴을 쳐다봤다.

이로운의 눈.

'말도 안 돼….'

그곳에 광기가 서려 있어야 했다.

어린아이가 치부나, 광인의 외침처럼 느껴져야 했다.

"생각해보도록."

하지만 너무나 평온한 그 눈은, 마치 변하지 않는 진리를 말하는 듯했다.

잠시 후.

"함께 하겠습니다."

가장 먼저 안종혁이 답을 전했다.

* * *

-해약은 먹지 않겠습니다.

혈교라는 배를 타기로 한 안종혁이 전한 말이었다.

모두에게 해약을 철회해달라.

그리고 그것이 조건이라고.

피식.

배를 떠날 것이라면 모를까.

'위험을 줄이는 것만을 생각해야지.'

안종혁은 위험을 줄이는 방법을 제시한 것이었다.

그가 탄 배가 침몰하지 않게 모두가 배에서 내리지 못하게 해버렸다.

만일 그래도 해약을 원하는 자가 있다면 안종혁이 먼저 나서 몰아갔을 것이다.

이번에는 왕여일 때와 달리 미리 접촉하지도 않았다.

이런 흐름은 예상했으나.

'안종혁이라.'

이로운은 필요하면 바란은 버릴 생각이었다.

그리 맛있어 보이는 과실도 아니고, 위험을 떠안고 딸 이유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제법 괜찮은 과실이 보였다.

안종혁도, 최유란도.

"어때. 마음에 들어?"

이로운의 말에 강철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그들 또한 혈고로 제압된 몸.

그들의 새로운 집은 바란으로 결정되었다.

새로운 길드를 만드는 것보다 본디 있던 길드에 합류하는 게 나을 것이라는 판단.

"기대가 커."

"명심하겠습니다."

더욱이 강철우와 함께 합류했던 그들은 인천과 강화도 쪽에서 제법 크기가 큰 길드를 운용하던 이들이었다.

바란의 성장에 도움이 되면 되었지, 방해는 되지 않을 터.

"바란의 길드장은 누구나 될 수 있다."

그것이 무슨 뜻인지 모를 강철우가 아니었다.

준비는 끝났다.

먹이만 주어지면 미친 듯 처먹고 덩치를 불릴 아기새들이.

"그건 어떻게 됐지?"

이로운의 말에 그림자 속에서 인형이 모습을 드러냈다.

"말씀하신 대로 일주일 후 전달될 예정입니다."

흑시왕, 하세민.

그가 질렸다는 얼굴로 고개를 흔들고 있었다.

"판을 키워도, 너무 키우는 것 아닙니까?"

"흑시왕의 담이 너무 작은 것 아닐까?"

"흑시라면 감당할 수 있죠."

하세민이 말했다.

"혈교가 급격히 성장한다고 하나, 아직 이 모든 걸 감당할 것이라는 건 무리인 것 같습니다."

"네 위도 그렇게 생각하고?"

"큽."

하세민은 이제 부정조차 하지 않았다.

"괜히 떠보지 마. 너도 혈교가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잖아?"

하세민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감당하겠죠. 하지만 제가 말하는 건 그 후입니다."

그들이 있는 서울, 저 멀리 보이는 커다란 빌딩.

그 위에 선명한 한자가 자리매김해 있었다.

[화산華山]

그것을 보며 이로운이 말했다.

"못 들었어?"

담담하고도 나른한 목소리.

하세민은 분명 들었을 것이다.

"은은 내 것이라니까."

그때 하세민이 울리는 핸드폰을 보며 말했다.

"시작됐습니다."

동해에서 마침내 해남과 도천이 맞붙었다.

삼왕의 제자

제2권 제19화

044

동해에서 도천과 해남이 맞붙었다.

그 소식은 빠르게 퍼져나갔다.

멀쩡히 인터넷이 존재하는 세상이니, 시시각각 정보가 전달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동해뿐만이 아니었다.

전선을 유지하던 해남이 기다렸다는 듯 전선을 밀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일어나는 전투.

결과는 하루를 넘기기 전 결정났다.

"철검련이 이겼습니다."

철검련이 밀고 들어오는 해남의 전력을 밀어내는 데 성공한 것.

아무리 대한민국 삼대 세력이라는 철검과 해남이지만 사람들은 철검이 열세라 생각했다.

헌데, 철검이 승리했다?

"그게 전부가 아닐 텐데."

이로운의 말에 하세민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동해가 고립됐습니다."

몰아내는 데 성공했으나, 동해가 고립되었다.

"처음부터 동해를 노린 거겠지."

해남의 전선은 사실 위장이었다.

그들이 계속해서 노린 것은 동해.

사방에서 전투가 시작되고, 본대라 부를 수 있는 전력이 동해의 도천과 부딪힌 것.

도천은 도천후가 직접 가 있는 만큼 해남을 일시적으로 밀어냈으나 고립되어 버렸다.

"철검련은?"

"다른 쪽도 피해가 적은 건 아니어서, 당장 병력을 움직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당황하고 있을 터다.

'해남.'

철검련은 오랜 시간 속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사람들이 삼대 세력이라며 그들을 묶어 불러주고, 실제로 그들이 차지한 영토가 커다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구파일방, 해남은 그리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본대가 아님에도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생각지도 못하게 동해까지 고립당해버렸다.

이대로 해남이 동해를 치면 도천은 씻을 수 없는 피해를 입을 것이다.

"처음부터 동해를 노렸을 텐데."

영향력이라는 것 때문이다.

긴 시간 동해를 차지하던 해남은 동해를 빼앗긴 걸 두고 볼 수 없을 것이다.

만일 동해를 빼앗긴 채로 내버려 둔다면 해남이 가진 다른 세력권에서도 불만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해남이 힘을 보여주어야 할 차례.

그 시작점은 동해였을 것이다.

"그래서?"

이로운이 표정 없이 말했다.

"도천이 철검련에 원군을 요청했습니다."

***

"제기랄!"

도천후가 노성을 터트렸다.

"원군이 오지 못한다고?"

철검련에서 지금 당장 움직일 병력이 없으니 그저 버티라는 이야기였다.

좁디좁은 대한민국 땅.

차로 움직여도 오래 걸리지 않으며, 경공으로 뛰어도 올 수 있는 거리였다.

하지만 어디 거리가 중요한가.

"해남이 진법을 쳤습니다."

은의 진법.

"마법진까지… 동해가 봉쇄되었습니다."

마법 계열 플레이어들을 동원해 결계를 쳐버린 것이었다.

그러니 원군이 오지 못하는 것이다.

원군이 들어오려면 진을 모두 뚫고 들어와야 할 테고, 진을 뚫을 정도의 실력자는 지금 전선에서 빼내기 힘들 테니까.

"엉덩이 무거운 놈들이… 이렇게까지 할 줄이야."

해남의 본격적인 공세가 이런 식으로 빠르게 진행될 줄은 몰랐다.

은의 지배자들인 구파일방과 오대 세가.

그들이 이렇게 본격적으로 행동했던 적이 있던가?

철검련에 대해 칼날을 세웠다고 하지만 어느 정도 힘겨루기로 끝날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기에 빠르게 움직였건만.'

어차피 소모전에 불과할 싸움.

해남이 원하는 건 인천과 부천을 비롯한 경기 일부 지역.

그렇다면 해남도 동해 정도는 내어줄 것이라 생각했다.

어차피 전쟁의 양상이 그런 식으로 흘러갈 것이라면 명분을 쥔 채 빠르게 동해를 쳐 도천이 동해를 지배하는 것이 도천후가 그린 그림이었다.

이쯤 되면 해남에서 오히려 도천의 동해 지배권을 두고 철검련과 협상을 할 것이라 생각했건만.

"협상은 없다고?"

해남은 철검련의 제안 자체를 묵살해버렸다.

'뭔가 잘못됐다.'

이건 마치 정말로 철검련을 지워버리려는 것 같지 않은가.

"제기랄."

도천후의 목소리가 더욱 낮아졌다.

그렇다면 결국 자신은 실수를 한 것이었다.

기회라 생각했던 것이 결국 뱀의 아가리 속에 몸을 집어넣은 형국이었다.

"아니, 아니지."

도천후가 고개를 흔들었다.

"어차피 철검련을 지워버리려 한다면 틀리지 않았다."

삶아 죽기 전에 목덜미를 물기라도 해봐야 할 테니까.

"방법은?"

"버티면 됩니다."

봉쇄된 동해에서 해남의 공세를 버텨야 한다.

"지원을 오려던 도천과 천인의 병력을 부길드장께서 이끌고 강릉 쪽을 뚫고 있습니다. 그들이 올 때까지만 버티면 됩니다."

"기간은?"

"삼일… 삼일만 버티면 됩니다."

말이야 쉽다.

해남은 바보가 아니다.

그들도 그 삼 일 안에 어떤 식으로든 동해를 탈환하려 들 것이다.

"버틸 수 있을 거다."

도천후는 그리 말했다.

"내가 있으니."

초인이라 불리는 벽을 넘은 고수.

그것이 도천후였다.

현재의 세계에서 수백의 병력보다 하나의 초인이 더 큰 전력이다.

부술 수 없는 벽과 같은 존재.

그렇기에 은이 초기에 지구의 병력을 압도하며 그들의 수뇌를 점령하지 않았던가.

지금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그자.

"...."

전에 벌어졌던 전투에서 자신과 거의 동수를 이루던 존재.

해남의 장로가 문제였다.

세외를 떠도는 이름뿐인 장로가 아닌, 엉덩이가 무거운 진짜 장로.

더욱이 해남의 정예 검수들이라 할 수 있는 파랑대까지.

자신이 장로를 막는다 한들, 나머지는 버틸 수 없는 싸움.

'제기랄.'

동해의 전투에서 저들은 패배한 것이 아니다.

애초에 물러서 자신들을 완벽히 끝낼 준비를 한 것이지.

"길드장님!"

보고하는 목소리가 커다랬다.

"원군이 온답니다!"

"원군이?"

"은하 길드랍니다!"

도천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은하 길드는 이미 예전에 들어 알고 있었다.

신생 길드임에도 빠르게 세를 확장하는 게 도천후의 눈에 거슬렸으니까.

"미친 겐가?"

하지만 그들은 무릎 꿇는 것이 아닌 공을 세우며 도천에 은근한 존재감을 보여주었다.

그저 운이 좋은, 그런 자들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도천의 그늘 밑에서 기회를 노리는 승냥이 정도.

하지만 그런 은하 길드가 지원을 온다고?

'곰인가.'

둔해 빠진 곰.

그렇기에 이익을 잘못 생각하여 사지에 목을 내민다?

은하 길드의 세가 빠르게 커졌다 한들 그들은 신생이다.

아직 경험도, 자원도 부족한 신생.

그들 전부가 지원을 온다 해도 전황은 크게 뒤바뀌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강은하란 꼬맹이는 제법이었지.'

한두 명의 고수의 지원을 기대할 수 있을 뿐.

그때 도천후의 머릿속에 섬찟한 생각이 지나갔다.

'여우?'

곰이 아닌 여우라면?

그런 생각을 하던 도천후가 실소를 지었다.

"나도 몰렸나 보군. 쓸데없는 생각이나 하니."

도천후가 탁자에 기대어져 있던 커다란 대도를 들며 말했다.

"뭐, 그래도 지원을 온다는 것은 나쁘지 않군. 저들이 목숨을 미끼 삼아 해남의 한 축만 유인해주어도 강릉 쪽의 지원이 뚫기 쉬울 테니까."

더욱이 자신들을 향한 공세도 조금이나마 줄어들 테고.

그때였다.

쾅!

사납게 열리는 문과 함께 도천의 길드원이 소리쳤다.

"습격입니다!"

* * *

사십오 인승 버스에 검은 무복을 입은 무인들이 한가득 타 있었다.

"이리 쉽게 전멸해선 안 되지."

그 맨 앞자리에 팔짱을 낀 채 눈을 반개한 남자가 말했다.

"아직 쓸모가 있으니까."

이로운.

버스에 가득 찬 무인들의 정체는 은하 길드.

정확히는 혈교도들이었다.

동해로의 지원을 결정하고 곧장 움직인 그들이었다.

어두운 고속도로 위를 빠르게 내달리는 버스의 속도는 규정 속도를 한참이나 위반하고 있었다.

"혈마님."

옆에 있던 강은하가 조심스레 목소리를 내었다.

"굳이 지원 가야 하는 이유가 있나요?"

그녀의 질문에 이로운이 작게 웃었다.

장족의 발전이다.

강은하는 그간 거의 질문하지 않았다.

혈마가 결정하면 그저 따른다.

그것이 혈교도의 뇌리 깊숙이 뿌리 내린 생각이었으니까.

물론 지금도 의심하여 묻는 것이 아니었다.

"동해에서 도천의 병력이 전부 스러지면 혈마님의 계획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녀는 발전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로운의 생각을 알고, 이로운의 생각처럼 움직이기 위해.

이로운이 굳이 명령을 내리지 않아도 그녀 홀로 움직일 수 있기 위해 배우려는 것이다.

"내가 그리는 그림이 뭐라고 생각해?"

이로운의 말에 강은하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답했다.

"도천과 천인의 공멸 아닌가요?"

이로운은 도천의 세계로 향하는 입구를 알아냈고, 도천의 약점을 알아냈다.

그리고 그것은 경기도를 양분하는 철검련의 또 다른 세력 천인과 관련 있다.

때가 되면 정보를 흘려 도천과 천인을 맞부딪히게 할 것이다.

전쟁 중이라 하지만 천인문의 문주인 천수걸의 성격을 생각하면 철검련을 탈퇴하더라도 도천과 전쟁을 치를 것이 분명하니까.

공멸한 도천과 천인의 자리를 대신해 은하 길드가 대체품이 된다.

경기도의 지배.

그것이 이로운이 그리는 그림이라 생각했다.

"맞아. 하지만 그 둘로는 부족하지."

"그렇다면…?"

이로운은 답하지 않았다.

말로서 배울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는 법이다.

보고 듣고 경험하는 것이 그 어떤 말보다 빠른 것임을 이로운은 알고 있었다.

덜컹.

버스가 크게 흔들리며 어두운 터널 안으로 들어갔다.

버스 안은 계기판을 제외하곤 그 어떤 불빛도 없었다.

"이번 전쟁 중 금제를 푸는 것은 불허한다."

이로운의 목소리가 버스 안을 왕왕 울렸다.

"마기를 끄집어내지 말도록."

아직 이빨을 드러내기엔 이르다.

"하지만."

이로운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 버스 중앙 통로에 섰다.

그를 향해오는 형형한 눈빛들이 만족스럽다는 듯 이로운은 웃었다.

"압도적인 힘을 보여줘라."

은의 무인들은 세계가 뒤섞인 이후 엄청난 발전을 해왔다.

무공 하나만으로 초인의 영역에 이른 그들인데, 그것도 부족하다는 듯 그들은 성장을 탐해왔다.

이제 은의 지배 세력은 무인을 양산한다.

일류와 절정의 무인들을 찍어내고, 조금의 노력만 기울이면 화경의 고수마저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그들이었다.

또한, 적절한 무구를 통해 그들의 전력을 강화시켜 오기도 했다.

'그에 반해….'

혈왕성, 혈교는 퇴보를 거듭해왔다.

혈왕성 안에 갇혀 고이고 썩어버렸다.

일만의 교도가 있다고 하나, 그들 중 무인의 수는 겨우 오백을 넘겼을 뿐이었다.

그 중 탈마의 고수는 한 손에 꼽을 수 있었고, 극마의 고수도 양손을 넘기지 못했다.

평범한 은의 세계와 비교하자면 나쁘지 않은 전력이라 말할 수 있겠지만, 은의 지배 세력이라 불리는 자들에 비해서는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나쁘지 않지.'

혈교만의 장점은 존재했다.

만들어진 무인이 아닌 진짜 무인이라는 점.

그 갇힌 세계 속에서 틀어박혀 수련만을 해왔다는 점.

그리고 이제 알 속을 벗어나 경험을 쌓았다는 것.

"알겠나?"

이들은 절대 약하지 않다.

혈마흡공을 통해 더더욱 성장하기도 했다.

그동안 갇혀 있던 혈교는 세상의 무인들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눈에 담아야 하겠지만.

'그들 또한 마찬가지다.'

세상 또한 혈교의 무인들이 어떤 자들인지를 깨달아야 할 것이다.

뒤로 돈 이로운.

어느새 버스는 터널을 벗어나고 있었다.

천천히 내비치는 빛 속에서.

"존명."

단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콰아아아앙!

폭발음과 함께 버스가 뒤집히는 순간이었다.

"쪽팔리게 만들지 마."

뒤흔들려 전복되어가는 버스 속에서 어느새 균형 잡은 무인들이 살기를 내비치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삼왕의 제자

제2권 제2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