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우득! 우드득!
악신의 피를 마신 모스트의 몸이 진화하며 변화하기 시작했다.
모스토는 전율했다.
'엄청난 힘이다! 이 정도의 힘이라면 내가 황제를 넘어 제국을, 아니 어쩌면 신좌에 오르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그 고혹적인 신녀 아라크네가 자신의 것이 되리라!
휘이이잉!
단꿈에 젖어 있을 때 태풍 같은 바람이 불어왔다.
"?"
놀란 모스토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 순간, 그는 보았다.
하늘을 뒤덮을 정도로 거대한 악신의 손바닥이 그를 향해 운석처럼 낙하하는 것을!
"으아아악!"
찰싹!
뿌직!
***
"앗, 따가!"
찰싹!
반사적으로 이마를 때린 손에 벌레 파편과 내 피가 묻었다.
나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렸다.
"어휴, 이제 곧 겨울인데 웬 모기람. 게다가 왜 하필이면 이마를 물어?"
하여튼 이놈의 한국, 점점 동남아 화되어 가고 있다더니 이젠 모기가 늦가을에도 보이는구나.
내일은 다이써에 가서 모기향을 사야겠다.
"으, 그런데 이거 더럽게 간지럽네. 물파스라도 발라야 하나?"
난 모기가 문 이마를 북북 긁으며 원고 작업을 계속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으악! 이게 뭐야!"
거울을 본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내 이마에 아기 주먹만 한 크기의 검은 해골 문신이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비누로 빡빡 씻어보았지만, 도무지 지워질 기미도 없다.
대체 언제 생긴 거야 이거?
"큭큭, 어둠의 힘이 들끓어 오르는군."
같은 중2병 대사에 어울릴 것 같은 해골 문신이다.
띠링!
내 눈이 그것을 감정했다.
['추악한 역병의 기수'의 낙인이다.
오한의 저주가 발동한다.]
'어? 뭐야 이건?'
순간 갑자기 온몸에 한기가 들기 시작하더니.
"에, 에취이!"
***
그 시각.
한 남자가 가방에서 준비한 물건을 꺼냈다.
언뜻 해골 모형처럼 보였지만, 그것은 폭탄이었다.
그것도 보통의 폭탄이 아니었다.
A급 몬스터인 폭탄벌레에서 나온 부산물을 이용해 만든 생체 폭탄으로, 금속 탐지기로도 잡히지 않는 물건이었다.
블랙마켓에서도 항상 판매 상위권에 랭크된 기물.
수억 원을 호가하는 물건이지만 구하기는 쉬웠다.
바로 그것을 공급하는 블랙마켓의 후원을 받았으니까.
치익! 치이익!
박스테이프를 찢어 자신의 몸에 해골 폭탄을 두르고 있는 남자의 이름은 김테범.
그는 교단에서 선별된 용사였다.
비록 아직 이름조차 없는 신흥종교였지만, 세계에 무수히 존재하는 종교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진짜 실존하는 신을 믿고 있었으니까.
김테범은 신에 대한 조금의 미혹도 없었다.
그는 직접 봤다.
신의 대리자로서 지상에 강림한 사도 요한이 일으킨 경이로운 기적을.
겨우 G급 각성자에 불과했던 자신이 요한의 세례를 받아 C급까지 성장하지 않았던가.
-사랑하는 신도 여러분. 보셨습니까? 하늘에 빛나고 있는 저 영롱한 세컨문을!
하지만 그것은 전조에 불과합니다. 이제 곧 우리의 신께서 강림하시어 세계를 정화할 종언의 때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께서 이 썩어빠진 세계에 강림하기 위해서는 무수히 많은 제물이 필요합니다!
신의 전사 김테범. 죽음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당신이 많은 사람을 죽여 제물로 바칠수록 천국에서 갖은 보화와 미녀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사도 요한의 말을 떠올리며 김테범이 광기 어린 웃음을 지었다.
"맡겨만 주십시오. 모든 것은 신과 사도 요한님의 뜻대로 될 것입니다!"
***
띠링! 띠링!
[발열의 저주가 발동합니다.]
[근육통의 저주가 발동합니다.]
[빈혈의 저주가 발동합니다.]
.....
.....
..
"아이고, 나 죽는다."
처음에는 아스피린으로 버텨볼까 했는데 점점 증상이 심해져만 갔다.
이러다가 죽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결국 병원에 갔다.
물론 호환마마보다 무서운 병원비를 생각해서 처음에는 갓메이커의 '신의 상점'을 이용하려 했다.
[청낭경의 비의로 만든 부원화의 단약(하급신)]
카테고리 : 선신 전용 아이템
구매금액 : 50,000 Gcoin
신의 상점 목록 중에서 단연 눈에 들어온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부원화라 하면 낯선 이름이지만, 그것은 삼국지에도 등장하는 신의 화타의 진짜 이름이다. 화타는 일종의 존칭 같은 것이 와전된 것이니까.
아무튼, 작가치고 삼국지의 팬이 아닌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난 두 번 고민하지 않고 바로 구매를 했다.
띠링!
[퀘스트가 발생했습니다!]
또 이 패턴인가 생각하며 퀘스트를 보는데.
[퀘스트 : '살고 싶으면 남을 살려라.']
-자신의 생명만큼 남의 생명 또한 소중하다.
병든 자여, 살고 싶다면 그 간절함으로 백 명의 인간을 구하라.
그러하면 그대의 병마는 내가 치료해주마.
-퀘스트 완료까지 구해야 할 인간 : 0/100]
-기간 : 무제한
저절로 욕이 튀어나오는 퀘스트였다.
백 명을 구하라니?
시바, 대체 어떻게?
이것이 내가 가벼운 지갑임에도 불구하고 병원에 온 이유다.
"유일신 환자분 들어오세요."
동네 병원이 아니라 시내에 있는 대학병원에 왔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니고 이 병원이 각성자한테는 할인 혜택을 주는 병원이기 때문이다.
비록 G급에 불과한 각성자지만, 건강보험료가 밀려서 혜택이 끊긴 내게는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곳이다.
"네."
후들거리는 몸을 이끌고 진료실 안으로 들어가려던 때였다.
띠링!
[복통의 저주가 발동합니다.]
"컥!"
꾸르륵!
갑자기 아랫배가 활화산의 용암처럼 들끓기 시작했다.
유일신, 인생의 위기를 느꼈다.
난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간호사에게 힘겹게 물었다.
"허억! 가, 간호사님. 화장실이 어디······. 윽!"
빠삐코처럼 배배 다리를 꼬는 내 모습에 간호사 또한 위기감을 느꼈는지 서둘러 복도를 가리켰다.
"저기 복도에서 우측으로 가시면 돼요!"
사람은 위기가 닥치면 초인적인 힘을 발휘한다고 한다.
'으윽! 새, 샐 것 같다!'
나는 아픈 몸임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스피드로 화장실에 도착했다.
"자, 잠깐만요!"
그리고 막 좌변기 칸으로 들어가려는 남자를 제치고 그곳으로 들어갔다.
뿌드드드득!
뿌드득!
마치 전쟁터에서 기관총을 난사하는 것 같은 대격전을 치른 후.
"하아."
간신히 인간의 존엄과 팬티는 사수할 수 있었다.
간사스럽게도 복통이 가라앉자 잠시 잊고 있던 몸의 고통이 다시 날 덮쳤다.
"아이고, 죽겠다."
곡소리를 내며 후들거리는 다리로 다시 밖으로 나갔는데.
문 앞에서 방금 내가 새치기 한 사람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꿀꺽!
아까는 자세히 볼 경황이 없었지만, 지금 보니 나보다 머리 하나는 크고 현직 조폭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마스크의 소유자셨다.
그것만으로도 위압감이 느껴지는데 빡빡 밀어버린 스킨헤드에 해골 문신까지 더해지니 더욱더 살벌했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급해서······. 지금이라도 들어가실래요?"
슬그머니 좌변기 칸에서 비켜주었다.
하지만 남자는 안으로 들어갈 기미도 없었다.
하긴 냄새가 지독하긴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어젯밤에 야식으로 고구마를 먹지 말 것을!
"당신."
울상 짓는 날 남자가 송곳처럼 꿰뚫을 것 같은 눈으로 노려보더니 갑자기 번쩍 손을 들었다.
헉! 맞는다!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고 손으로 얼굴을 가렸는데.
덥썩!
들려오는 소리가 좀 달랐다.
"?"
슬그머니 눈을 떠보니 방금까지의 더러운 인상과는 다르게 해바라기처럼 화사하게 웃는 남자의 미소가 보였다.
"이렇게 귀하신 분을 여기서 뵙다니!"
그가 내 손을 떡 주무르듯 움켜잡으며 허리를 깊게 숙였다.
저기, 저 손 안 씻었는데······.
그런 내 수줍은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가 내 이마를 뚫어지라 보며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
"이 바라만 봐도 오한이 드는 불길한 힘! 필시 요한 사도님의 심복이 분명하시군요! 감격했습니다! 제 활약을 보시기 위해 직접 와주시다니!"
"네?"
"요한 사도님께 잘 전해주십시오. 당신의 어린 양이 오늘 최고의 제물들을 바치겠노라고!"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영문을 모르겠다.
스킨헤드는 그렇게 한참 떠들다 화장실을 나갔다.
어리둥절해서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보는데 내 눈이 남자를 감정했다.
띠링!
<--->
-수컷 인간이다. 사용한 지 31년 되었다.
특이사항 : 파괴신 '???' 의 떨거지다.
파괴신 ???의 떨거지라니 이건 또 무슨 소리야?
꾸르르륵!
그때 다시 내 아랫배에서 엄청난 신호가 오기 시작했다.
크윽, 한 번으로 끝난 게 아니었던가!
"으아아!"
덜컹!
쾅!
뿌드드득!
뿌드득!
"으으······. 엉덩이가 헐 것 같아······."
다시 2차, 3차 대전쟁을 치르고 기어 나오듯 화장실을 나왔을 때.
"꺄아아악!"
개난장판이 벌어져 있었다.
아까 화장실에서 본 스킨헤드가 온몸에 폭탄으로 보이는 걸 칭칭 감고 있었다.
한 손에는 기폭장치로 보이는 버튼을, 그리고 다른 손으로는 방금 보았던 간호사를 인질로 잡고 있었다.
"사, 살려주세요!"
영화에서나 볼 것 같은 장면을 현실에서 보니 머리가 띵했다.
요즘 내 인생에 마가 끼었나?
"모두 꼼짝 말고 엎드려! 도망치면 다 좃되는거야!"
그러면서 위협하듯 기폭장치를 든 손을 높게 쳐들었다.
"히이익!"
사방에서 비명이 터지며 사람들이 겁에 질린 얼굴로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그때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돼서 멀뚱히 서 있던 나와 스킨헤드의 눈이 마주쳤다.
스킨헤드가 날 향해 찡긋 윙크 했다.
야, 그렇게 친한 척하지 마라.
그러자 엎드려 있던 사람들이 마치 공범을 바라보는 듯한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난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닙니다. 오해십니다!
여러분! 전 저런 빡빡이 몰라요!
고슴도치처럼 따가운 시선을 피하며 조심스레 나도 저들처럼 바닥에 엎드리려고 할 때였다.
번쩍!
쿠콰콰쾅!
순간 뇌광이 번뜩이더니 출입구를 박살 내며 누군가가 그 자리에 나타났다.
번개가 그려진 검은 헬멧과 몸에 딱 달라붙는 절연 소재의 타이즈를 입은 뇌쇄적인 몸매의 여인.
파직! 파지직!
여인이 전신에 두른 사나운 뇌전은 사람들에게는 희망을, 그리고 빡빡이에게는 공포를 주었다.
"뇌, 뇌제?!"
빡빡이가 기겁하며 외쳤다.
그렇다. 바로 내 사랑스런 짜릿짜릿 소녀가 나타난 것이다.
미리씨! 어서 저 빡빡이를 날려버리고 우리를 구해주세요!
"우, 움직이지 마! 특히 뇌제! 조금이라도 허튼수작 부리면 이 폭탄을 터트리겠다!"
"꺄아악! 살려주세요!"
곧장 빡빡이에게 돌진하려던 기세였던 뇌제는 그가 몸에 두르고 있는 해골 모양의 폭탄과 인질을 보더니 움찔 멈췄다.
"치잇, 비겁하게!"
그때 빡빡이가 갑자기 내게 시선을 획 돌리더니 간절히 소리쳤다.
"도와주십시오! 형제님! 제 힘으로는 뇌제를 감당하지 못합니다!"
"뭐야? 한패가 있었······ 앗! 선생님? 여기서 뭐 하세요?"
빡빡이와 뇌제의 시선이 동시에 내게 꽂혔다.
"선생님? 무슨 소리냐! 저분은 우리 교단에서 왕림하신 요한 사도님의 심복이시다!"
"무슨 소리예요! 우리 선생님이거든요?!"
"헛소리! 저분의 사악하고 불길한 힘이 느껴지지 않느냐!"
"우리 유일신 선생님한테 사악하고 불길해? 너 죽을래요?"
두 사람의 말다툼을 시작으로, 병원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내게 집중됐다.
식은땀이 비처럼 쏟아졌다.
시바, 혼자 있고 싶어.
띠링!
[괴사의 저주가 발동합니다!]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되나 고민하고 있을 때, 다시 예의 그 메시지가 보였다.
그런데 괴사라니?
세포조직이 붕괴하거나 기능이 정지되는 그거?
동시에 내 이마에 새겨져 있는 해골의 입이 쩍 벌어지더니.
-킬킬킬!
마치 사신의 것처럼 섬뜩한 웃음소리를 토했다.
"커헉! 우에웩!"
후드득! 철퍽!
동시에 내 입에서 죽은 피가 폭포처럼 쏟아졌다.
흐릿해져 가는 시야 속에서 내 이마에 박혀있는 해골이 음산하게 선언했다.
-어린 신아, 마침내 네 죽음의 때가 왔도다!
이상한 빡빡이가 자꾸 친한척 굴어서 곤란하다 끝
ⓒ 크래커™
=======================================
세상에 날 노리는 변태가 너무 많다.
36.
-마침내 죽음의 때가 왔도다!
해골의 선언을 경계로 내 몸의 기능이 다 타버린 촛불처럼 힘없이 꺼져갔다.
내가 토한 피가 뺨에 닿는 감촉이 소름 끼치도록 차가웠다.
하지만, 그 차가움마저 곧 느껴지지 않게 되었다.
이것이 죽음인가?
싫어. 무서워.
제발 살려줘!
"유일신 선생님!"
희미해져 가는 내 눈에 비명을 지르며 달려오는 미리씨.
그리고 그 틈을 타 폭탄 버튼을 누르려는 빡빡이가 영화 속 슬로우 모션처럼 느리게 흘러갔다.
'요한 사도께서는 가급적 제물들이 공포를 느끼게 해서 죽여야 효과가 있다고 말씀하셨지만, 상황이 이러니 어쩔 수 없지! 그래도 뇌제 정도 되는 인물을 제물로 바친다면 용서해 주실 것이다!'
순간 빡빡이의 속마음이 내 눈동자에 '보였다'.
제물로 바치겠다고?
벌레 같은 놈이 감히 누구를!
스윽.
난 마지막 힘을 쥐어짜 빡빡이에게 피로 젖은 검지를 겨눴다.
"[짓뭉개는······ 신의 검지]."
그러자 마치 내가 거인이 되어 하찮은 벌레를 짓뭉개는 것 같은 감각이 손끝에서 느껴졌다.
"허억!"
내 손끝이 겨눈 빡빡이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의 민머리에서는 식은땀이 비처럼 쏟아졌고, 바지 또한 꼴사납게 흠뻑 젖었다.
빡빡이가 공포에 질린 눈으로 날 보더니 덜덜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다, 당신은 대체 누구십니까? 호, 혹시······. 당신께서 파괴신·····?"
헛소리를 지껄이는 빡빡 이를 노려보며 날 향해 다가오는 미리씨에게 힘겹게 소리쳤다.
"미리씨······. 해치워요!"
그러자 미리씨가 정신이 들었는지 빡빡이를 향해 쇄도했다.
번쩍!
"흐억!"
섬광이 번뜩이는 것을 본 빡빡이가 황급히 폭탄 버튼을 눌렀지만.
달칵! 달칵!
"큭! 왜 안 터져!"
그가 몸에 두르고 있는 해골 폭탄은 아무 반응도 없었다.
당연하다.
바로 내 '짓뭉개는 신의 검지' 권능으로 이미 그것의 기능을 off 해버렸기 때문에.
"꺼져!"
당황하는 빡빡이의 얼굴에 뇌전을 두른 미리씨의 주먹이 내리꽂혔다.
"으아악!"
콰콰쾅!
성난 뇌광과 함께 빡빡이가 병원 바닥에 깊숙이 박혔다.
게거품을 물며 기절한 빡빡이의 몸에서 경비원들이 황급히 폭탄을 떼어냈다.
"사, 살았다!"
"뇌제님! 감사합니다!"
"꺄악 언니!"
목숨을 구원받은 사람들이 환호하며 미리씨를 에워쌌다.
"자, 잠깐만 비켜주세요! 선생님! 괜찮으세요!"
미리씨가 울먹이며 쓰러져 있는 날 향해 애타게 소리쳤다.
내 꼴은 가관이었다.
피 웅덩이에 핏기 하나 없는 얼굴을 쳐박은 채 눈은 새하얗게 뒤집혀 있고, 혀를 길게 내밀고 있는 모습은 그야말로 훌륭한 시체 지망생이었다.
"으아앙! 선생님! 죽으면 안 돼요!"
벌떡!
그 순간, 시체지망생 유일신이 일어섰다.
'휴, 진짜 죽는 줄 알았네.'
하마터면 진짜 요단강 건널 뻔했다.
내가 죽음 직전에서 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퀘스트가 완료됐기 때문이었다.
[퀘스트 : '살고 싶으면 남을 살려라']
-자신의 생명만큼 남의 생명 또한 소중하다. 병든 자여, 그 간절함으로 백 명의 인간을 구하라. 그러하면 그대의 병마는 내가 치료해주마.
-퀘스트 완료까지 구해야 할 인간 : 1,238/100]
-기간 : 무제한
[축하합니다! '살고 싶으면 남을 살려라.' 퀘스트를 초과 달성하셨습니다!]
['부원화의 단약'이 지급되었습니다.
'청낭경의 주인'께서 당신의 선업에 무척 흐뭇해하십니다.
추가 보상으로 그분의 신력 일부가 당신에게 스며듭니다.]
입안에 마치 은단처럼 화한 느낌의 단약이 생겼다.
스스스스.
그것이 순식간에 녹아버리며 내 안으로 흡수되었다.
그러자 다 죽어가는 몸에 활력이 돌기 시작하며 지금처럼 부활한 것이다.
자세한 내막은 모르겠지만, 저 빡빡이가 자폭하려던 걸 막은 게 사람을 살린 거로 쳐준 모양이다.
"저 사람, 뭐지?"
"다 죽어가는 거 같았는데 연기한 건가?"
몇몇이 의아한 눈으로 날 보며 수군거렸다.
가뜩이나 저 빡빡이와 한패로 보는 것 같은데 이 자리에서 빨리 떠나는 게 좋겠다.
난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미리씨에게 걱정하지 말라는 손짓을 하며 핸드폰을 흔들었다.
'나중에 연락해요.'
입 모양으로 조심스럽게 말하고는 잽싸게 그 현장을 벗어났다.
후후, 뭐 좀 위험하긴 했어도 병원비도 굳고 개이득인 부분이다!
하지만 이땐 몰랐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날 노리는 변태들이 생기게 된다는 것을.
***
헌터 광휘 길드.
길드장의 집무실.
곱슬거리는 장발을 길게 늘어뜨린 남자가 화면을 뚫어져라 주시하고 있었다.
남자가 보는 것은 얼마 전 뇌제가 폭탄 테러를 막아낸 병원의 CCTV 영상이었다.
그 활약으로 뇌제는 매스컴의 조명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세컨문 사태로 뒤숭숭한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서 헌터협회에서도 뇌제의 홍보에 한참 열을 올리는 중이었으니.
화면은 한참 뇌제가 테러범을 제압하는 장면으로 넘어갔다.
테러범은 자폭하려는 듯 기폭 버튼을 눌렀지만, 폭탄은 터지지 않았다.
그것은 보는 광휘 길드장의 입술이 바짝바짝 말라갔다.
왜냐하면 저 폭탄을 준비한 것이 바로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광휘 길드장이 쿵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요, 요한 사도님! 폭탄은 몇 번이나 검수를 거쳤습니다! 분명 테범이 놈이 뭔가 실수를 한 것이 분명!"
"쉿."
요한이 검지를 입술에 대며 광휘 길드장의 입을 막았다.
그리고 CCTV 영상을 다시 앞으로 되돌렸다.
그렇게 몇 번을 영상을 확인하던 요한이 비릿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요한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이었지만, 길드장은 감히 그것에 트집을 잡을 용기가 없었다.
애초에 저 놈은 미친놈이었으니까.
그래서 더 무서웠다.
그는 반년 전에 기도 중에 재채기했다는 이유만으로 A급 헌터이자 전길드장의 상체를 날려버린 적이 있었으니까.
그래서 자신이 길드장이 될 수 있었지만,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피처럼 붉은 요한의 입술이 열렸다.
"길드장님."
"네, 넵!"
"한 번의 실수는 할 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실수를 통해서 한 단계 더 도약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하죠."
길드장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감사합니다! 다음번에는 절대로 사도님을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물론 그러셔야 합니다. 당신에게 두 번의 기회는 없을 테니까요."
요한이 부드럽게 웃었다.
"사흘 드리죠. 길드장님."
"네? 무슨 말씀이신지······."
요한의 가늘고 긴 손가락이 화면안의 인물들을 가리켰다.
처음에는 뇌제, 그리고 다음에는 화면 구석에서 피를 흘리고 죽어가고 있었던 남자 유일신.
"계집은 죽이고 남자는 제게 데려오세요."
뇌제를 죽이라는 명령은 나름 납득이 되는 것이었다.
그녀는 감히 그들의 행사를 막았으니까.
희귀한 전격 능력자인데다 최근에 A급으로 승급한 뇌제였지만, 죽이는 것은 가능하다.
하지만 후자의 명령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요한 사도님. 저 남자는 왜 데려오라는 건지."
요한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하아, 이래서 신의 총애를 받지 못한 벌레들이란. 정녕 이 남자의 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건가요? 이렇게 하찮은 벌레들 사이에서 눈 부신 태양처럼 빛나고 있는데."
요한이 CCTV 화면을 향해 바짝 얼굴을 들이밀었다.
화면 속으로 파고 들 것 같은 그의 눈동자가 구석에서 엉거주춤 피 웅덩이에서 일어나고 있는 유일신을 담았다.
"아아, 전 보입니다. 당신이 그 몸에 두른 신의 총애가."
할짝!
요한의 혀가 화면의 유일신을 핥았다.
"우후후후. 당신과 만날 순간이 벌써부터 기대되는군요."
벌거벗은 요한의 중요 부위가 불끈 곤두섰다.
길드장은 더욱 큰 공포를 느꼈다.
***
"으, 추워."
갑자기 스멀스멀 밀려오는 오한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분명 다 나았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아니었나?
화타의 명성만 생각하고 50,000 Gcoin에 퀘스트까지 했는데 약효가 심히 의심스럽다.
게다가.
"이건 왜 아직도 안 지워지지?"
거울 속 내 이마에는 여전히 해골 문신이 남아있었다.
처음보다는 많이 흐릿해졌지만, 그래도 찝찝했다.
생각해봐라.
'킬킬킬, 마침내 죽음의 때가 왔다!' 하고 외치는 해골이 이마에 박혀 있다는 게 얼마나 더러운 기분인지.
"신의 상점에 문신 지우는 약은 없으려나?"
갓메이커의 상점 메뉴를 활성화해서 쓸 만한 물건이 없을까 이것저것 찾아보고 있을 때였다.
띠링!
[가야미족의 신도 '일호'가 당신을 애타게 찾습니다.]
알림 메시지가 떴다.
일호라면 그 훈련장에서 근육근육하며 운동하던 그 녀석 말인가?
갓메이커를 실행시키자 훈련장 바닥에 넙죽 엎드려 있는 일호가 보였다.
'오?'
짧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비리비리하던 일호의 몸에는 제법 잔 근육이 붙어 있었다.
전에는 마치 아프리카 난민처럼 삐적 말라 있었는데, 역시 운동은 중요한가 보다.
"그래 나를 찾았느냐?"
신답게 목소리를 진중하게 깔려고 노력하며 일호에게 물었다.
일호는 몸을 덜덜 떨더니 차마 고개도 들지 못하며 외쳤다.
"유일신이시여! 신께서 주신 비약은 잘 받았사옵니다! 과연 위대하신 신께서 하사해 주신 만큼 그 효과는 굉장하였습니다! 비약을 아픈 자에게 먹이자 건강을 되찾고, 노인은 활기를 얻었습니다!"
응? 내게 이 녀석한테 뭘 줬었나?
아, 기억났다.
밤늦게 운동하는 모습이 짠해서 성장신의 가호를 줬었지.
나한테는 그냥 박카스인데 얘들한테는 만병통치약 같은 느낌인가?
일호가 기어가는 목소리로 내게 애원했다.
"소, 송구하오나 신이시여. 전에 제게 하사해주셨던 비약을 조금만 더 주실 수 없겠사옵니까?"
"어, 그래."
뭐 그게 어려운 부탁이라고.
['성장신의 가호'를 100 개 구매하셨습니다.
100,000 Gcoin이 차감되었습니다.]
띠링! 띠링!
[영겁의 구도자(求道者)가 호구를 보며 매우 흐뭇해합니다. 호구의 호응에 힘입어 조만간 다른 아이템도 입고 예정이니 많이 애용해달라고 하십니다.]
호구란 말이 좀 거슬렸지만, 결제한 성장신의 가호 백병을 갓메이커 세계로 전송했다.
쿵!
쿵쿵쿵!
일호가 엎드려 있는 훈련장에 내가 하사한 박카스들이 채워졌다.
자신의 몸보다 훨씬 거대한 박카스 병들이 가득 늘어서 있는 모습에 일호가 감격과 경악이 뒤섞인 표정으로 나를 아연히 응시했다.
"아아, 시, 신이시여······."
"그래, 더 필요한 건 없고?"
뭐 지금의 내게 10만 갓코인이야 아무것도 아니니까.
후후, 이것이 돈지랄의 맛인가.
현실 통장의 잔고는 텅텅이지만 갓코인은 만수르 부럽지 않은 나이다.
"흑흑! 은총에 감사드립니다! 유일신님! 저 일호! 반드시 유일신님의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
어이쿠, 개미만한 녀석이 목청도 좋다. 난 귀가 얼얼한 기분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래. 너무 무리하진 말고."
사람의 모습으로 변하긴 했지만, 여전히 개미만한 크기에 게임속의 인물에 불과한 얘들이 내게 해줄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건성으로 대답해주고는 갓메이커를 껐다.
"으. 내일은 몸보신이나 좀 해야겠다."
그리고 아직 으슬거리는 몸을 이불에 눕히며 나는 잠을 청했다.
드르렁, 쿠울.
그렇게 내가 깊은 잠에 빠졌을 때.
조금 이상한 꿈을 꾸었다.
다그닥, 다그닥.
흑마에 타고 있는 기수가 짙은 안개를 헤치며 내게 다가왔다.
그런데 그 흑마에 타고 있는 사람이 범상치 않았다.
하하, 해골이네?
내가 아무리 판타지 작가라고 해도 이런 꿈을 꾸다니, 직업병인 건가?
그런데 기분 탓인지 저 해골 어딘가 낯이 익다.
스윽.
해골이 붉은 안광을 번뜩이며 날 향해 노호했다.
[감히 나 '추악한 역병의 기수' 님을 직접 강림케 하다니! 아직 죽음의 때는 끝나지 않았다! 어린 신아!]
세상에 날 노리는 변태가 너무 많다. 끝
ⓒ 크래커™
=======================================
용사의 탑 1층 바위의 시련
37.
갓메이커의 세계 앤트라니아.
흰개미로 보이는 것이 새하얀 실에 고치처럼 칭칭 감긴 채 천장에 매달려 있었다.
뚝. 뚝뚝!
그 아래 놓인 보석으로 장식된 황금 잔이 한 방울씩 떨어지는 흰개미의 체액을 받고 있었다.
어느 정도 잔이 채워지자 호랑이 무늬 날개를 가진 미남자가 조심스럽게 잔을 들었다.
토굴처럼 어둡고 음습한 복도를 지난 남자가 거미 문양이 새겨진 문을 두드렸다.
"귀비님. 식사를 가져왔습니다."
"나바인가? 들어오너라."
옥구슬이 구르는 듯한 청아한 목소리가 울리자 나바가 공손히 문을 열었다.
안에는 비단실로 엮은 그물침대에 나른한 표정으로 엎드려 있는 아라크네가 있었다.
나바가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방울꽃 같은 청초함에 양귀비 같은 퇴폐함이 공존한다.
과연 그 잔인무도한 반신(半神)인 황제의 총애를 받을만한 아름다움이다.
하지만 나바는 안다.
그녀의 매력은 단지 저 아름다운 외모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아라크네는 타고난 포식자였다.
그 아름다움에 홀린 수많은 사내가 아라크네에게 먹혀 그녀의 일부가 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바는 자신도 그녀에게 먹히고 싶다는 욕망을 억누르기 힘들었다.
"뭐하느냐?"
"귀비께서 너무나 아름다우셔서 저도 모르게 그만······."
아라크네가 깔깔 웃었다.
"내가 아름답다고 하지만 너의 날개만 하겠느냐?"
"아닙니다. 귀비님에 비하면 제 날개 따위 헝겊만도 못한 것이옵니다."
"호호, 제법 듣기 좋은 소리를 하는구나. 이리 오너라, 나바."
나바가 고개를 조아리며 아라크네에게 다가갔다.
아라크네가 열에 들뜬 네 쌍의 눈으로 나바의 호랑 무늬 날개를 응시했다.
"언제 봐도 탐스러운 날개로구나. 하지만 이 아름다움에는 족히 수천만 명을 죽이고도 남을 치명적인 독분을 머금고 있지."
"제 독날개는 오직 귀비님의 것이옵니다. 지금이라도 명령만 내리신다면 제 독분으로 악신의 숨통을 끊어 놓겠습니다."
화려한 외모에 가려졌지만, 나바 또한 제국 최강이라 불리는 십검 중 일인이었다.
"네가 나설 일은 없을 것이다. 나바."
"하지만 만약에 그 악신에게 역병신의 저주도 통하지 않는다면······. 황제께서 크게 노하실 것입니다."
아라크네가 아름다운 나바의 날개를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후훗, 아무 걱정할 필요 없단다. '추악한 역병의 기수'께서는 아주 집요하고 탐욕스러운 신. 그분께서 한번 잡은 먹이를 놓아줄 일은 없으니."
***
추악한 역병의 기수.
해골이 검은 아지랑이처럼 꿈틀거리는 혓바닥을 내밀며 이빨을 핥았다.
[흐흐, 네 놈이 그깟 잔재주로 내 손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으냐. 너는 내 것이다. 네가 가진 하찮은 신력 한 올까지도 모두 나의 것······. 이놈 지금 무얼 하는 것이냐?]
보면 모르나?
아, 저 해골 눈은 없지.
나는 바닥에 이불을 깔고 있었다.
꿈이라서 그런지 이불을 상상하자 이불이 생겼다.
이 정도쯤이야 소싯적에 루시드 드림을 마스터한 내게는 식은 죽 먹기다.
사람마다 개인차가 있긴 하겠지만, 내가 꿈에서 탈출하는 방법은 바로 꿈속에서 자는 것이었다.
[이, 이놈 지금 뭐하는 것이냐! 감히 위대한 제7계의 악신! 나 역병의 기수가 말하고 있는데! 갓 태어난 신 주제에 무엄하다!]
아, 저 해골 되게 시끄럽네.
"해골아, 잠 좀 자게 좀 닥쳐줄래."
해골이 부서질듯 전신의 뼈를 달그락거렸다.
[크흐흐, 이런 모욕은 천년만이로구나. 각오해라. 내 너를 병마를 양식하는 고치로 쓸 것이다! 너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병고에 시달리며 제발 내게 죽여 달라고 썩은 눈물을 흘리리라. 하지만 소용없다. 네 놈은 영겁 동안 산채로 억겁의 고통을 느끼게 될 것이다!]
네, 네 그러시던가요.
하여간 더럽게 말 많은 해골이다. 난 해골에게 등을 돌리며 어서 이 개꿈에서 깨어나려고 노력했다.
부드득!
해골이 이를 갈더니 짐승처럼 으르렁거렸다.
[죽음의 낫이여, 저 건방진 어린 신 놈의 목을 베어, 헉?! 네년은 악몽? 네년이 여긴 왜!]
휘리릭!
덥석!
갑자기 당황하는 해골의 목소리가 들렸다.
['밤에 피는 장미'의 넝쿨이 '추악한 역병의 기수'의 해골을 휘감습니다.]
['소리없이 기어오는 악몽' 이 유일신은 자기 거라고 강하게 어필합니다.]
우드득! 두득!
['밤에 피는 장미' 의 넝쿨이 '추악한 역병의 기수'의 해골을 목에서 뜯어냅니다.]
-자, 잠깐 기다려! 난 이놈이 네가 눈독 들인 놈인지 몰랐······ 크아아악!
콰지직!
['추악한 역병의 기수'의 해골이 '밤에 피는 장미'의 아가리에 빨려 들어갑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모든 것을 베는 천검'이 아쉽다는 듯, 몸만 남은 '추악한 역병의 기수'를 바라봅니다.]
콰드득 콰득!
"음냐음냐, 더는 못 먹어요."
뼈를 씹는 것 같은 잡음을 무시하며 난 악몽의 요람에서 평화롭게 잠들었다.
***
"으으, 잘 잤다!"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난 나는 기분이 좋았다.
푹 잔 탓인지 컨디션도 좋았고, 무엇보다도 이마 한가운데 박혀 있던 해골 문신도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애초에 원인도 알 수 없었지만, 사라지기도 갑자기 사라졌다.
"대충 이 망겜 갓메이커 때문이겠지. 뭐."
이제 만성이 됐는지 웬만한 일로는 크게 놀랍지도 않다.
그런데 내가 원래 이런 성격이었나?
몇번이나 죽을뻔 하기도 했는데 그에 비하면 심하게 만사에 좀 무감해진 거 같은······.
띠링!
[일호가 유일신님께 간절히 구원을 요청합니다.]
"일··· 호?"
그런 찰나 일호의 구원 메시지가 들려왔다.
나는 황급히 갓메이커를 실행했다.
하지만, 평소 훈련장에서 땀을 흘리던 그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내가 만든 도시를 이리저리 살피다 중앙에 있는 흉물스러운 탑이 눈에 들어왔다.
용사의 탑.
지랄 같은 난이도에 분명 내가 입구를 막아놓았건만, 지금은 그것들이 엉망으로 흩어져 있었다.
"설마?"
그러자 내 시야가 변하더니.
띠링!
[일호가 유일신님께 간절히 구원을 요청합니다.]
탑 안에서 몸의 반신이 뭉개진 채 죽어가고 있는 일호가 보였다.
***
"근육! 근육!"
일호는 훈련장에서 뻘뻘 땀을 흘리며 훈련에 매진했다.
땀에서는 붉은 피까지 배여 있었다.
자지도 쉬지도 않고, 광기마저 엿보이는 무모한 훈련.
아무리 가야미족이 체력이 강한 종족이라고 해도, 당연히 한계가 찾아왔다.
뿌드득!
전신의 근육이 파열했다.
털썩!
"으으으······."
쓰러진 일호가 애벌레처럼 엉금엉금 훈련장 가운데에 꽂혀 있는 거대한 크리스털 기둥을 향해 기어갔다.
뿅!
간신히 그곳에 도착한 일호가 고 뚜껑을 열고 안에 든 샛노란 액체를 벌컥벌컥 마셨다.
그러자 놀랍게도.
[성장신의 가호의 축복이 일호에게 스며들었다.]
['영겁의 구도자'께서 근육 파열이야말로 헬창의 기본이라며 뿌듯해합니다.]
일호가 바닥에서 벌떡 일어섰다.
놀랍게도 갈가리 찢겼던 전신의 근육이 치유된 건 물론, 전보다 더 강하고 질기게 변해 있었다.
"오오, 위대한 유일신님이시여!"
일호가 감격하며 다시 한번 신을 찬양했다.
유일신께서 내려주신 이 신의 음료를 마시면, 몸의 피로가 말끔하게 풀리고 잠조차 자지 않아도 될 정도였다.
"근육! 근육!"
일호가 다시 자신의 몸보다 몇 배는 큰 바위를 짊어지고 훈련장을 달렸다.
그렇게 쉬지 않고 훈련을 하고 있을 때.
훈련장에 세워진 유일신의 석상이 입을 쩍 벌렸다.
[일호의 훈련 경험치가 직업 획득 조건을 만족했다.]
[병사]로 전직했다.
[보상으로 모든 무력 관련 스탯에 +2가 붙는다.]
"?"
의미를 알 수 없는 말과 함께 일호에게 변화가 일어났다.
츠츠츠!
철컥! 철컥!
일호의 전신에 힘이 넘쳐흐르며 동시에 번쩍거리는 금속 갑옷이 입혀졌다.
"오오, 유일신님이시여. 감사합니다."
일호는 자신이 전보다 훨씬 강해졌음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그 잔안무도한 황제와 대륙을 뒤덮을 정도의 제국의 군세를 생각한다면 아직 가야 할 길이 멀었다.
그들에게 동포들이 산채로 잡아먹혔던 악몽이 아직도 잊히지 않았다.
일호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도시 한가운데 불끈 솟아있는 용사의 탑을 보았다.
지금이라면 입구를 봉인하고 있는 바위를 치우고 시련에 도전할 수 있을 것이다.
몇 시간의 작업 후.
일호는 용사의 탑에 발을 디뎠다.
저벅!
탑 안의 모습은 일호가 생각하던 것과 조금 달랐다.
수백 평 남짓한 거대한 공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통로?'
주변을 살피던 일호는 위로 향하는 통로를 발견했다.
사람 열명 정도가 동시에 지나갈 수 있을 크기의 사선형의 통로.
일호가 무심코 통로에 발을 딛자.
[도전자 '일호' 용사의 시련에 도전합니다.]
[용사의 탑 1층 바위의 시련]
[클리어 조건 : 통로를 올라 2층에 도달하라.]
[시련을 시작한다.]
무미건조하고 음산한 음성이 울려퍼졌다.
구르르르!
통로에서 어른 몸통만 한 바위가 굴러 내려왔다.
"헉!"
일호가 본능적으로 몸을 옆으로 피했다.
쾅!
그를 스쳐 지나간 바위가 아래층에 박혔다.
구르르르!
바위는 그게 끝이 아니었다.
일호가 통로로 올라갈 때마다 바위들이 계속 굴러 내려왔다.
"이쯤이야!"
하지만, 병사로 진급해 스탯이 오른 일호는 그것들을 별 어려움 없이 피해냈다.
'이 정도 시련이라면 할 만하다!'
하지만 일호는 머지않아 그것이 오산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드드드드드!
드드드드!
"오, 신이여······"
한 치의 피할 틈도 없이 통로 전체를 가득 메우며 굴러 내려오는 집채만 한 바위를 보며 일호는 절망했다.
쾅!
뿌직!
***
"······아으으으."
거대한 바위가 덮쳐 지나간 일호의 모습은 처참했다.
온몸의 뼈가 박살 나고 살은 짓뭉개졌다.
만약 유일신께서 하사해주신 병사의 갑옷이 아니었다면, 즉사했을 것이다.
하지만 즉사만 하지 않았을 뿐이지 일호의 생명은 꺼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죽음의 문턱에서 일호는 깨달았다.
유일신께서 왜 이곳을 막아두었는지.
일호는 절망의 눈물을 쏟았다.
자신은 왜 이렇게 나약한 것인가.
자신은 왜 이렇게 어리석은 것인가.
겨우 쥐똥만한 힘을 얻었다고 이리 무모한 짓을 하다니.
"헉헉, 사, 살려주세······ 유일······."
일호가 반쯤 짓뭉개진 몸으로 신을 부르려다 멈췄다.
자신이 무슨 자격으로 대체 신께 구원을 바란단 말인가.
드드드드드!
통로 저편에서 다시 바위가 굴러왔다.
방금 일호를 덮쳤던 바위보다 더 크고 무거운 바위가 일호의 숨통을 끊으려고 무서운 기세로 굴러 내려왔다.
일호가 눈을 질끈 감았다.
이대로 죽는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마지막으로 한번 유일신님과 아름답고 고귀한 성녀님을 뵙고 싶었다.
'신이시여. 부디 저 대신 성녀님과 부족을 지켜주소서!'
드드드드!
섬뜩한 광음을 뿌리며 바위가 일호를 짓뭉개려는 순간.
치직! 치지직!
일호 앞의 공간이 갈라지며 거대한 신의 검지가 튀어나왔다.
쾅!
엄청난 광음에 일호가 힘겹게 눈을 떴다.
그 거대한 바위가 일호의 바로 앞에서 멈춘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눈물로 젖은 일호의 눈이 그 검지의 주인을 응시했다.
"아아, 신이시여······."
집채만 한 크기의 바위를 겨우 한 손가락으로 막아낸 기적을 펼치신 유일신께서 한없이 자비롭고 연민에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용사의 탑 1층 바위의 시련 끝
ⓒ 크래커™
=======================================
치유하는 신의 약지 (추가)
38.
나는 복잡한 눈으로 일호를 내려다보았다.
바위에 깔려 몸이 반쯤 뭉개진 채 죽어가는 일호의 모습은 내가 처음 갓메이커를 플레이했을 때, 만났던 No.1 개미를 떠올리게 했다.
그때는 메시지가 보이지 않았지만, 이제는 안다.
그 개미 또한 아마 지금의 일호처럼 내게 구원을 요청 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검지로 짓눌러 죽였다.
비록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게다가 그 후로는 갓코인이 생성되는 재미에 빠져 아무 죄책감 없이 수백 마리의 개미를 죽였다.
뒤늦게 죄책감이 밀려왔다.
그때의 개미들과 지금의 일호는 뭐가 달랐을까.
도트로 이루어진 개미와 어설프지만, 인간의 형상을 한 것의 차이?
아니면 길고양이와 내가 키우는 반려 고양이의 차이?
['일호'의 생명활동 정지까지 앞으로 10초]
[9초, 8초, 7초, 6초······.]
내 눈이 친절하게 죽어가는 일호의 생명을 카운트까지 해서 감정했다.
마치 예전 오락실에서 하던 격투게임에서 패배했을 때 뜨던 경고같이.
살리고 싶다.
살리고 싶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하지?
화타의 단약이라면 일호를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퀘스트를 하지 않으면 쓸 수 없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갓메이커에서 뭔가를 찾기에는 늦었다.
'그래!'
혹시나 하는 마음에 황급히 찬장에서 설탕 봉지를 꺼내 뿌려 보았지만, 사람의 모습으로 진화했기 때문일까? 개미때와는 달리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
일호가 더듬이를 힘없이 축 늘어뜨리며 내게 힘겹게 말했다.
"위대하신 유일신님······. 부디 저 대신 성녀님과 부족원들을 보살펴 주소서······."
"포기하지 마라! 일호!"
절명의 순간, 나는 병원에서 피를 토하며 죽어가던 때 들었던 메시지를 떠올렸다.
[축하합니다! '살고 싶으면 남을 살려라.' 퀘스트를 초과 달성하셨습니다!]
['부원화의 단약'이 지급되었습니다.
'청낭경의 주인'께서 당신의 선업에 무척 흐뭇해하십니다.
추가 보상으로 그분의 신력 일부가 당신에게 스며듭니다.]
여태까지의 갓메이커의 패턴을 본다면 실낱같을 가능성이 있었다.
나는 내 다섯 개의 손가락 중 고유권능이 발현되지 않은 손가락을 노려보았다.
그중에서 네 번째 손가락.
옛날 약물을 물에 달일 때 사용한 것에서 유래했다는 이름의 약지(藥指).
[청낭경의 주인의 신력이 유일신의 의지에 따라 발현합니다.]
스스스.
내 오른손의 손가락 중 약지가 희미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동시에 갓메이커 또한 반응했다.
띠링!
신의 상점에 [획득 가능]한 고유 권능이 있습니다.
'치유하는 신의 약지' (성장형)
-유일신이 천 명이 넘는 인명을 살리고 획득한 의술(醫術)의 신의 권능이다.
카테고리 : 고유권능
구매금액 : 100 Gcoin]
정신이 번뜩 들었다.
난 황급히 고유권능을 획득했다.
스스스!
백색의 100 Gcoin이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내 약지가 눈부신 백광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고유권능 '치유하는 신의 약지'가 활성화됩니다.
"감히 누구 앞에서 죽겠다는 것이냐! 당장 일어서라! 나는 네 죽음을 허락지 않았다!" ]
머릿속에서 울려 퍼지는 중2스런 멘트를 무시하며, 난 빛나는 약지를 죽어가는 일호에게 겨눴다.
그 와중에도 죽음의 카운트는 이어지고 있었다.
[3초, 2초, 1초······.]
제발 되라!
"[치유하는 신의 약지]!"
번쩍!
새하얀 빛이 엉망으로 짓뭉개진 일호의 전신을 감쌌다.
[치유 대상 '일호'의 인과율을 계산합니다······.
<최하급신 유일신의 신도이자, 제 10위계 하급 종족으로 신과 세계의 규율에 영향을 끼칠 수 없는 미약한 존재이다.>
띠링!
1 Gcoin이 치유의 대가로 소모됩니다.]
우득! 우드득!
그리고 빛이 사라졌을 때.
짓뭉개지고 부서진 일호의 처참한 육신은 거짓말처럼 원래대로 돌아가 있었다.
일호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자신의 몸을 살폈다.
"이, 이럴 수가······."
휴우, 확신은 없었지만 잘돼서 다행이다.
자기위안에 불과하지만, 처음에 멋모르고 죽여 버린 No.1 개미에 대한 죄책감을 조금은 덜어낸 기분이었다.
"흐어엉! 신이시여! ㅠㅠ"
갑자기 일호가 바닥에 머리를 쿵쿵 박으며 눈물 콧물을 질질 흘리며 울기 시작했다.
"야, 왜 울고 그래? 아직 어디 아프냐? 치유 한 번 더 써줄까?"
"흐어엉! 저처럼 나약하고 어리석은 놈을 위해 친히 강림해져서 귀한 신력을 사용하시다니요! 소인, 이 하해같은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모르겠나이다. ㅠㅠ"
희한하다.
분명 석상 와이파이 이후 애들의 목소리가 직접 들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왜 저건 이모티콘으로 보이는 거지?
왜? 왜지? 왜냐고!
이놈의 망겜, 이제 조금 알거 같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나 보다.
"흐어어엉! 흐어엉! ㅠㅠ"
네모난 얼굴에 근육이 살짝 붙은 이등신 일호의 모습을 보다 보니 뭔가 많이 친숙한 느낌이 들었다.
분명 어디서 많이 봤는데.
'아, 레고 닮았네.'
어릴 때 참 많이 가지고 놀았는데.
아무튼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나는 헛기침을 하고 살짝 목소리를 깔았다.
"흠흠, 나의 신도 일호여. 그만 울고 일어나거라. 그보다 이곳은 아직 너에게 너무 위험한 곳이니라. 훗날 지금보다 강해지고 난 후에 도전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오늘은 좋은 경험을 했다 생각하고, 이만 너를 기다리고 있을 가야미족들에게 돌아가거라."
물론 뻥이지만.
1억분의 1이란 이런 지랄 같은 난이도에 내가 우리 개미 애들을 들여보낼 거 같으냐.
아무도 못 들어오게 방벽을 몇 겹으로 쌓아버릴 테다.
"소인 일호, 유일신님의 뜻에 따르겠나이다. ㅠㅠ"
눈물 콧물을 팔뚝으로 훔친 일호가 짧은 다리를 토토토 움직이며 출입구를 향해 달려갔다.
그 모습을 보며 난 한시름 놨다.
아니, 놓으려고 했는데.
일호가 당황한 얼굴로 날 올려다보았다.
"시, 신이시여."
"응? 왜 그러느냐."
"무, 문이 열리지 않사옵니다."
일호가 끙끙거리며 입구에 있는 철문을 열려고 했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다.
"후우, 저리 비켜보아라. 내가 열어 줄 테니."
나는 손가락으로 일호가 낑낑거리는 철문을 밀어보았다.
'어? 왜 안 열려?'
문은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때 내 눈이 그것을 감정했다.
[용사의 탑의 입구]
-'영겁의 구도자' 의 레플리카다. 사용한 지 39,131,321 년 되었다.
-특이사항 : '들어올 땐 몰라도 나갈 때는 마음대로 안 된단다.'
최소 50층 이상 클리어하기 전에는 나갈 수 없다.
사용한 지 3900만 년이라는 말에 놀라고, 특이사항에 두 번 놀랬다.
일정 스테이지를 클리어하기 전에는 나갈 수 없다고?
'시발!'
"신이시여? ㅠㅠ"
일호가 네모난 얼굴로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 나를 올려다보았다.
아니, 겨우 1층에서도 쥐포가 되는 애가 어떻게 이 썩을 탑의 50층까지 오를 수 있단 말인가.
띠링!
[위대한 중립신, 최고위 신위를 위해 지금도 수행 중이신 '영겁의 구도자'께서 유일신님을 가만히 응시합니다.]
그때 이상한 메시지가 갓메이커에 떴다.
영겁의 구도자라면 내가 종종 구매하는 박카스 만드는 신이 아닌가?
게다가 이 썩을 용사의 탑에도 관계된것 같고 말이다.
['영겁의 구도자'께서 호구, 아니 신도를 걱정하는 유일신님께 스테이지 클리어에 좋은 물건들을 새로 입고했으니 한번 써보지 않겠느냐고 넌지시 권합니다.]
뭔가 좀 강매당하는 분위기인데.
그래도 상황이 이러니 일단 물건이나 봅시다.
신의 상점을 실행했다.
그러자 상단에 새로운 품목이 떠 있었다.
New![성장신의 대단한 가호 Ver.2 (하급신)]
카테고리 : 공용 소모 아이템
구매금액 : 3,000 Gcoin
New![성장신의 특별한 가호 Ver.3 (하급신)]
카테고리 : 공용 소모 아이템
구매금액 : 5,000 Gcoin
기존의 성장신의 가호, 일명 박카스는 최하급신 랭크였는데, 새로 입고된 가호들은 하급신으로 등급이 올라 있었다.
거기에 가격도 창렬했다.
내가 찝찝한 눈으로 그 품목들을 보자 메시지가 다시 울렸다.
['영겁의 구도자'께서 자신이 심혈을 기울인 물건들이니 일단 한번 써보시라고 권합니다.
탑 오르는 건 자신이 전문가라고 자부하시며 우람한 가슴을 주먹으로 탕탕 두드리십니다.]
그래. 일단 한번 하나씩만 사보자.
구매 버튼을 누르자 8,000Gcoin이 먼지처럼 바스러지며 동시에 핸드폰에서 두 개의 병이 튀어나왔다.
기존의 박카스 빛깔과는 다르게 Ver.2는 하얀색, Ver.3은 붉은색이었다.
나는 그것들을 '눈 먼 신의 눈'으로 감정해보았다.
<성장신의 대단한 가호ver.2>
등급 : 하급신
설명 : 최고위 신격에 도달하기 위해 '영겁의 구도자(求道者)' 가 수행 중에 흘린 자신의 체액을 담은 것이다.
특이사항 : 남자는 힘! 이것을 마신 필멸자는 근육을 모두 발휘하리라. 많이 마실수록 더 좋으리라.
그놈의 찝찝한 체액 타령은 여전했다.
<성장신의 특별한 가호 Ver.3>
등급 : 하급신
설명 : 최고위 신격에 도달하기 위해 '영겁의 구도자(求道者)' 가 수행 중에 흘린 자신의 피땀을 담은 것이다.
특이사항 : 피땀 눈물이다! 사나이가 흘리는 피땀은 반드시 그 대가를 받으리라! 역시 많이 마실수록 더 좋으리라.
단, 이것은 '영겁의 구도자'의 신력이 연결된 용사의 탑에서만 진정한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이제는 심지어 피땀이란다.
수상해. 아주 수상해.
이걸 과연 일호의 생존과 스테이지 클리어에 도움이 되는 물건일까?
"에라!"
뭘 고민하고 있냐. 일단 한번 마셔보면 되지.
나는 성장신의 가호 ver2의 뚜껑을 뿅 타서 단숨에 들이켰다.
하얀 체액이라고 하니 심히 찝찝했지만, 일호를 위해 참았다.
꿀꺽! 꿀꺽!
"어?"
낯익은 맛이었다.
예전에 잠깐 운동 좀 해보겠다고 미친 마음을 먹고 일주일 정도 다녔던 헬스장에서 트레이너 놈에게서 얻어 먹어본 걸쭉하고 텁텁한 이 맛은.
프로틴이었다.
뿅!
자칭 피땀인 붉은 액체, Ver 3도 마셔보았다.
꿀꺽! 꿀꺽!
약간 톡 쏘는 맛에 타우린이 한층 더 농후하게 섞인 이 맛은 분명, 마감을 코앞에 둔 작가들이 최후의 보루로 찾는 각성제.
"시발! 이건 레드불이잖아!"
대체 이 아저씨 몸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 거지?
내게는 별 효과가 없어 보이지만, 몸에 해로울 거 같진 않았다.
나는 그것들을 몇 병 더 사서 일호에게 하사했다.
일호는 그것들을 보며 다시 'ㅠㅠ' 거리며 질질 짜기 시작했다.
"성은이 망극하나이다 신이시여! 흐어엉!"
벌컥! 엉엉! 벌컥! 엉엉!
저기, 울든지 마시든가 둘 중 하나만 해라.
성장신의 수상한 가호를 마시는 일호의 모습을 내려다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어때? 몸에 무슨 변화가 있느냐?"
일호가 네모난 눈을 반짝였다.
"오오, 신이시여! 확실히 제 근육에 엄청난 기운이 전달되는게 느껴집니다! 이 상태에서 훈련하면 좀 더 강해질 것 같습니다!"
"오? 그래? 그럼 빨리하거라."
"옙!"
일호가 눈을 번뜩이더니 주변에 구르고 있는 커다란 바위를 양손에 쥐고 아령처럼 들었다.
"근육! 근육!"
찝찝한 색깔과 맛에도 불구하고 이번에 산 성장신의 가호 ver2, ver3 프로틴과 레드불의 효과는 굉장했다.
처음에는 자기 몸만한 바위를 들던 일호가 점점 중량을 늘려가더니.
마침내 자신을 짓뭉갰던 집채만 한 바위를 밀어붙이며 통로를 오르기에 이르렀다.
"낑낑! 낑낑!"
드륵, 드륵.
개미가 기는 것처럼 느릿느릿한 속도였지만, 겨우 다섯 시간 만에 일어난 일이란 걸 생각하면 기적 같은 일이었다.
나는 밥 먹는 것도 잊고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얼마나 긴장했는지 내 손도 땀으로 촉촉이 젖어갔다.
도와줄 수는 없었다.
처음에 내가 검지로 바위를 밀어주는 꽁수를 쓰자.
경고!
[엄숙한 용사의 시련은 오직 도전자만이 행해야 한다!]
[도전자 대기실로 이동한다!]
무효 판정과 함께 다시 일호가 일층의 대기실로 이동해버렸으니까.
이 스테이지는 오직 일호만의 힘으로 클리어 해야했다.
"으아아아! 근유욱!"
덜컹!
쿵!
개미 기어가듯 느릿느릿 움직이던 집채만 한 바위가 마침내 정상에 이르렀다.
무려 열 시간이 흐른 후의 위업이었다.
츠츠츠!
2층에 도착한 바위가 녹아들 듯 사라지며 일호의 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 이건?"
[축하한다. 용사의 탑 1층 '바위의 시련'을 클리어했다.]
[보상으로 도전자에게 '영겁의 구도자'의 '바위의 축복'이 내린다.]
['바위의 축복' : 도전자여, 그대는 바위처럼 단단한 근육을 가지리라!]
일호의 근육이 바위 빛으로 물들었다.
"성공이다!"
온몸이 땀으로 젖은 일호와 내 눈이 마주쳤다.
"유일신이여! 기뻐해 주소서! 제가 드디어 해냈습니다! ㅠㅠ"
"장하다! 일호!"
내가 코치가 되어 키운 선수가 대회에 나가 금메달을 따면 이런 기분일까.
고양감과 성취감이 벅차오른다.
"일호야!"
"흐어엉! 신이시여! ㅠㅠ"
감격에 찬 일호의 손과 내 손가락이 하이파이브를 하려는 순간.
띠링!
[용사의 탑 2층 : '바람의 시련'
클리어 조건 : 바람의 시련으로부터 살아남아 3층에 도달하라.
시련을 시작한다.]
쐐애액!
뭔가 날카로운 것이 공기를 가르더니.
푹!
일호의 이마에 화살이 박혔다.
찍!
털썩!
쓰러진 일호를 보며 난 비명을 질렀다.
"일호야아아아!!"
치유하는 신의 약지 (추가) 끝
ⓒ 크래커™
=======================================
유일신과 가야미족의 평화로운 일상
39.
결론을 말하자면 일호는 죽지 않았다.
바위의 시련 보상 덕분에 육체의 강도가 바위처럼 단단해졌기 때문이다.
비록 머리에 화살촉이 반쯤 박히긴 했지만 말이다.
처음에는 진짜 죽은 줄 알고 뜨악했다.
2층 '바람의 시련'은 날아오는 화살을 피해 3층으로 오르는 시련이었다.
우리는 그 후, 심기일전하며 다시 시련에 도전했으나 결과는 처참했다.
"흐으윽! 신께 누를 끼치다니 송구스럽습니다!"
"야, 가만히 있어. 뒤통수에 아직 화살 하나 남았다."
고슴도치처럼 온몸에 화살이 박힌 일호의 몸에서 화살을 뽑아내고, '치유하는 신의 약지'로 부상을 치유해주었다.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문제는 일호가 너무 느려 터져서 화살을 전혀 피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꼼수를 한번 써봤다.
1층에 굴러다니는 바위를 방패 삼아 화살을 막고 전진하게 했는데.
[신성한 용사의 시련에 허튼 수는 통하지 않는다!
도전자는 오직 자신의 육체만을 사용해서 시련을 돌파해야 한다!]
탑을 뒤흔들 것 같은 노성이 울려 퍼졌다.
슈슈슉! 슈슈슈슉!
동시에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기세로 화살비가 쏟아지며, 일호가 들고 있던 바위가 순식간에 박살났다.
"흐악!"
그럼에도 기세를 죽이지 않은 화살들이 일호를 덮치려고 하자, 나도 모르게 손으로 그것을 막았다.
퓩! 퓩퓩! 퓩퓩퓩!
"으갸갸갹!"
일호가 기겁하며 외쳤다.
"시, 신이시여! 괜찮으십니까?"
한의원에서 침을 한 번에 수백 번 손바닥에 맞은 것 같은 통증에 눈물이 찔끔 나왔지만, 애써 침착하게 말했다.
"물론이다.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으니라."
"하, 하지만 피, 피가 흐르시온데."
"어허, 기분 탓이다!"
쏟아지는 화살비를 피해 일단 일호와 1층의 대기실로 돌아갔다.
하아, 이게 무슨 개고생이람.
대충 열 시간이 넘게 이러고 있었는데, 담당이 알면 분명 날 죽이려고 할 거다.
일단 좀 쉬어야겠다.
"난 잠깐 눈 좀 붙여야겠다. 일호, 너도 오늘 힘들었을 테니 무리하지 말고 쉬거라."
"넵, 유일신이시여. 편히 쉬소서."
넙죽 엎드리며 절하는 일호를 뒤로하고 나는 이부자리에 누웠다
일단 좀 쉬고 일호를 어떻게 저 망할 탑에서 꺼낼지 방법을 고민해봐야겠다.
***
유일신이 사라지고 홀로 탑 안에 남은 일호는 짧은 팔로 팔짱을 낀 채 고심하고 있었다.
"신께서는 쉬라고 말씀하셨지만, 내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쏟아지던 화살비를 대신 막아주시며 피를 철철 흘리시던 유일신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잊히지 않았다.
신께서 다치신 것은 다 자신이 그분의 말씀을 듣지 않고 무모한 도전을 했기 때문이다.
그런 자신이 어찌 가만히 쉴 수 있겠는가!
일호는 2층 '바람의 시련' 에 대해 생각했다.
자신의 짧은 다리로는 무서운 기세로 쏟아지는 화살을 피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니 발상을 바꿔서 화살을 맞아도 끄떡없을 정도로 단단한 근육을 단련하면 되지 않을까?
꿀꺽! 꿀꺽!
일호가 성장신의 가호들을 순식간에 비우더니, 일층에 산처럼 쌓여있는 바위들을 원수처럼 노려보았다.
"흐아압! 근육!"
기존에는 바위들을 역기나 아령처럼 사용했던 일호였지만, 지금은 그 사용법이 전혀 달랐다.
성난 황소처럼 바위를 향해 맨몸으로 돌진했다.
쾅! 쾅! 쾅!
수 백, 수 천 번의 돌진.
돌먼지가 안개처럼 피어오르며 바위의 산들이 자갈밭으로 변했다.
쾅! 쾅!
쩌적! 쩌저적!
심지어 처음 일호를 짓뭉갰던 거대한 바위마저 점점 균열이 일기 시작했다.
"근유욱!!"
콰콰쾅!
띠링!
['영겁의 구도자'께서 사나이의 길을 걷는 도전자 '일호'를 내려다보며 흐뭇해하십니다.]
성장신의 가호는 섭취한 필멸자의 잠재력을 끌어올린다.
성장신의 대단한 가호 ver.2는 섭취한 필멸자의 육체 능력을 훈련하기에 최적화시킨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유일신이 레드불로 취급하는 '성장신의 특별한 가호 Ver.3'.
용사의 탑에 배여 있는 수많은 도전자의 피땀과 경험을 재료로 삼은 그것은 '시간' 의 가호였다.
일호가 바위를 몸으로 박살 내는 수련을 시작한 것은 무려 일주일.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겨우 1시간도 흐르지 않았다.
그것이 '영겁의 구도자' 가 최고의 걸작이라 자부하는 작품 '성장신의 특별한 가호 Ver 3.' 의 진정한 효능.
쿵!
정확히 두 시간 후.
온몸에 고슴도치처럼 화살이 꽂혔음에도 불구하고, 건재한 일호가 2층 통로를 지나 3층에 도달했다.
화살은 극한으로 단련한 일호의 근육 갑옷을 뚫고 그에게 치명상을 입히지 못했다.
[축하한다. '용사의 탑' 2층 '바람의 시련'을 클리어했다.]
[보상으로 도전자에게 '영겁의 구도자'의 '바람의 축복'이 내린다.]
[도전자 '일호'가 3층 '강철의 시련에 도전한다.]
띠링!
[축하한다! '용사의 탑' 3층 '강철의 시련'을 클리어했다.]
[보상으로 도전자에게 '영겁의 구도자'의 '강철의 축복'이 내린다.]
[도전자 '일호' 가 4층 '불의 시련'에 도전······.]
***
꾸르륵! 꾸르르륵!
자고 일어났더니 지독한 허기와 함께 현기증이 밀려왔다.
으으, 앓고 난 후 얼마 되지도 않아서 철야하듯 일호와 시달렸으니 당연한 일인가.
"아무래도 안 되겠다. 몸보신 좀 해야지."
나는 냉장고에 사놓았던 '그것'을 꺼냈다.
그것의 양은 보잘것없다.
하지만 내게는 갓메이커를 플레이하고 손에 넣은 권능이 있었다.
두근, 두근!
"후, 떨리는군."
어쩌면 내가 이 힘을 얻은 것은 바로 이날을 위해서일지 모른다.
나는 내 눈앞에 있는 '그것'을 매우 진지하게 응시했다.
'한다! 반드시 해내고야 만다!'
마치 필생의 적을 마주한 듯한 결의.
나는 엄숙한 의지와 간절함을 담아 엄지를 뻗었다.
"[증식하는 신의 엄지]!"
바로 내가 개미들과 함께 바퀴벌레 놈들을 박멸하고 얻은 권능.
효과는.
띠링!
[목표인 '한우 100g'의 증식에 성공했습니다.]
번쩍!
눈 부신 빛과 함께 접시에 놓인 한우가 정확히 두 배로 늘어났다.
나는 양 주먹을 불끈 치켜들며 환호했다.
"야호! 해냈다!"
시발, 내 권능 짱이다.
이제부터 매끼 한우를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사실 처음 이 권능을 쓴 건 술김에 개미한테 쓴 거여서 내심 효능을 반신반의했다.
이것이 과연 현실에서도 통하는 권능일까?
하지만 결과는 대박.
정육점에서도 겨우 100g만 산다고 아줌마한테 눈치를 먹었지만, 그것을 참고 산 보람이 있었다.
"그런데 접시는 안 늘어나네."
증식한 건 접시에 놓인 한우뿐이었다.
아무래도 내 권능은 유기물 한정 권능인거 같았다.
만약 그게 아니었다면 금 같은 걸 증식시켜서 순식간에 벼락부자가 됐겠지만.
뭐 이 정도도 충분히 만족스럽다.
한우는 위대하니까.
"[증식하는 신의 엄지]! [증식하는 신의 엄지]!"
번쩍! 번쩍!
흐흐, 늘어난다. 늘어나.
마구 증식하는 한우에 군침을 흘리며 희희낙락하고 있을 때.
갓메이커가 울렸다.
띠링띠링!
혹시 탑에 남겨둔 일호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지 싶어 황급히 핸드폰을 들었다.
하지만 나를 부른 건 일호가 아니었다.
"오오, 위대한 우리의 유일신님이시여! 강림하셨나이까!"
게임이 실행되자 내가 백호라 이름 붙여준 녀석이 넙죽 절을 했다.
백호는 사각사각한 일호와는 달리 얼굴도 몸도 오이처럼 길쭉했다.
"그래. 왜 불렀지?"
내 물음에 백호가 엄숙한 얼굴로 말했다.
"소인 백호, 위대하신 유일신님의 행적을 찬양하는 노래를 지어보았습니다."
"노래?"
"네, 부디 들어주소서!"
"그, 그래. 해봐라."
백호가 목소리를 흠흠 가다듬더니 덩실덩실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는데.
"우효오! 우리의 유일신님! 적을 무찌른다. 적을 불태운다! 우효오! 유일신님이 나타났다! 제국 놈들아, 오줌을 지려라! 유일신님이 포효하신다! 우효오! 마물들아 도망쳐라! 유일신께서 엄지를 치켜드신다! 우효오! 황제 놈아 각오해라! 유일신께서 강림하신다!"
큭, 귀가 괴롭다.
개미만한 애가 무슨 목청이 이리도 좋단 말인가.
"그만······."
하지만, 백호의 목소리에 반응했는지 다른 가야미족 애들도 몰려들기 시작했다.
"유일신님! 강림하셨나이까!"
"삼호! 인사 오지게 올립니다!"
"오오, 유일신님! 저 칠십이호가 숲에서 따온 열매를 공물로 바치옵니다!"
"어허, 어디 겨우 열매 따위를 유일신님께! 유일신님! 이것을 제물로 받아주소서! 저 이호가 창으로 도시 주변을 돌아다니던 이 사나운 맹수의 머리를 한방에 꿰뚫어 잡았사옵니다! 칭찬해주소서!"
"그래, 사나워 보이는 공벌레네······."
"유일신님께 겨우 그런 공물을 바치다니! 신이여! 저 구호가 낚시로 잡은 이 물고기를 봐주소서! 제 일평생 처음 낚는 대어이옵니다!"
"그래. 큰 송사리구나······."
"유일신님! 그보다 구십호인 제 공물을!"
내가 하사했던 '성장신의 가호', 일명 박카스 백병을 나눠 마셨던 가야미족 애들이 변했다.
뭔가 하나하나마다 개성이 생겼달까.
확실히 좋은 일이긴 한데 쉬지도 않고 떠드는 걸 듣자니 심히 피곤했다. 마치 유치원에서 아이들에게 둘러쌓인 마스코트 인형이 된 기분이랄까.
그런 내게 구원자가 나타났다.
"바쁘신 유일신님을 겨우 이런 일로 강신하게 하시다니! 이게 무슨 무례입니까! 빨리 작업이나 하세요!"
"······네, 성녀님."
성녀 앤티가 잔소리를 쏟아붓자, 나타나자 가야미족들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물러났다.
영차, 영차!
곧이어 그들이 삼삼오오 짝을 맞춰서 공사를 재개했다.
그들이 짓고 있는 것은 바로 내 석상이었다.
그것은 여태까지의 규모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거대한 석상.
얼핏 봐도 평소보다 열배는 거대해 보이는데 저런 게 내 방에 들어온다고 생각하니 오싹했다.
"앤티야."
"네. 하명하소서. 위대한 유일신님이여."
"저거, 꼭 만들어야겠니?"
앤티가 사색이 된 얼굴로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아아, 죄송합니다! 저희에게 내려주신 하해 같은 유일신님의 은총에 비하면 역시 너무 작고 볼품없는 신상이었군요! 제가 당장 동포들을 닦달해서 저것보다 훨씬 커다랗고 우람한 신상을 건설하도록 하겠나이다!"
아니, 그러지마. 제발.
난 앤티를 한참 설득한 후에 간신히 그냥 짓고 있는 석상을 완성하되, 나한테 바치지 말고 도시 한가운데에 놓으라고 합의를 보았다.
앤티는 고민하다 백성들에게 내 위엄을 직접 보여줄 수 있다는 게 나쁘지 않다 여겼는지 동의해주었다.
다행이다. 내 좁은 방의 공간을 사수할 수 있어서.
"그런데 앤티야. 너도 박카스, 아니 성장신의 가호를 마신거니?"
"넵. 위대하신 신께서 내려주신 성수인데 당연히 마셨사옵니다."
"흐음."
"신이시여, 소녀를 왜 그렇게 보시옵니까?"
"아니. 많이 예뻐졌다 싶어서."
그랬다. 갓 진화한 이등신 때의 모습이 약간 우스꽝스러운 귀여움이었다면, 지금은 그냥 귀여웠다.
몸의 비율도 이제는 삼등신은 되보이는게 어릴 때 누나가 가지고 놀던 인형보다 예쁘게 변했다.
"어, 어멋."
앤티의 새하얀 뺨이 홍당무처럼 달아올랐다.
"소녀처럼 미천한 것 따위에게 위대하신 유일신님께서 예쁘다고 칭찬해주시다니. 헤헤헤."
헤실거리며 웃는 게 기분이 나쁘진 않아 보였다.
"그럼 수고해라. 난 밥 먹으러 간다."
앤티가 자그마한 주먹을 불끈 쥐며 외쳤다.
"넵! 기대해주소서! 다음에 강림하시기 전까지 반드시 유일신님의 신상을 완성하겠나이다!"
아니, 안 그래도 돼.
"너, 너무 무리하진 말고 쉬엄쉬엄해."
"네! 유일신님의 말씀을 헤아려서 하루에 22시간만 일을 시키겠습니다!"
하루에 22시간이라니 그건 어느 나라의 노예냐?
뭐 원래 개미였던 애들이니 그럴 수도 있으려나 하고 긍정적인 사고변환을 해보았다.
갓메이커를 끄고 난 머리를 긁적였다.
사람처럼 변한 내 개미, 아니 가야미족.
겉모습뿐만 아니라 이제 대화까지 통하는 애들을 이제 전처럼 가볍게 대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아, 한우라도 나눠줄까?"
한우는 진리니 애들도 당연히 좋아할 것이다.
잔뜩 구워서 가야미족 애들이랑 탑에서 고생하고 있을 일호한테 나눠줘야지 생각하고 접시를 봤는데.
"······어?"
적어도 20인분은 될 정도로 증식시켰던 내 한우가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남은 건 처음 접시 위에 있었던 한우 100g뿐.
"내 한우 어디 갔어!"
그러자 친절하게도 내 눈이 현 상황을 감정해 주었다.
['증식하는 신의 엄지' 권능의 효과가 떨어졌습니다.
유일신님이 속한 '지구 지부'에서 증식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더 높은 랭크의 신력이 필요합니다.]
"이, 이럴 수가."
털썩!
난 바닥에 주저앉은 채 좌절했다.
매끼 한우는 정녕 찰나의 단꿈에 불과했던가.
"아니 잠깐? 그럼 없어지기 전에 먹어버리면 되잖아?"
대충 갓메이커를 한 시간이 2~3분 정도였으니까, 그 전에 증식시킨 한우를 먹어버리자. 만약 그보다 짧다면 그냥 육회 먹는다는 기분으로 먹어버리면 된다.
후후, 역시 난 천재야.
그렇게 한우에 대한 욕망에 불타며 다시 권능을 쓰려 했다.
"[증식하는 신의······.]"
딩동딩동!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아씨, 대체 왜 자꾸 내 한우 타임을 방해하는 거냐!
그런데 이 시간에 올 사람이 없는데 누구지? 혹시 미리씨인가?
하지만, 현관문을 열자 전혀 의외의 인물이 있었다.
"누구세요?"
척 봐도 앨리트스러운 정장 차림의 남자가 내게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유 선생님. 만나뵈서 영광입니다. 저는 헌터 길드 광휘의 스카우트 전담 김태민 실장이라고 합니다."
유일신과 가야미족의 평화로운 일상 끝
ⓒ 크래커™
=======================================
신이시여! 제 근육을 당신께 바치나이다!
40.
척 봐도 비싸 보이는 양복과 가죽 구두, 그리고 무엇보다도 팔목에서 번쩍거리는 롤렉스는 부의 상징이 뭔가를 보여주고 있었다.
"헌터 스카우터께서 저한테는 무슨 일로? 잘못 찾아오신 거 아닌가요?"
"유일신 헌터님 맞으시죠?"
"제가 유일신은 맞지만 헌터는 아닌데요."
"곧 되실 겁니다."
김 실장이 사람 좋은 미소를 함박 지으며 웃었다.
"잠깐 이야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
갑작스레 찾아온 손님을 맞기 위해 대충 쓰레기를 치우고 앉을 공간을 확보했다.
그리고 밥상에 차를 준비해 가져갔다.
"잔이 이래서 죄송합니다. 저번에 불이 나는 바람에 컵이 다 박살 나버려서요."
밥상 위에 놓인 밥그릇에 찰랑거리는 인스턴트커피가 있었다.
"하하, 감사합니다."
하지만 김 실장은 말과는 다르게 손도 대지 않았다.
보기엔 이래도 맛있는데.
후루룩.
음, 역시 커피는 막심이지.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 광휘 길드에 유 선생님을 꼭 영입하고 싶습니다."
"컥!"
순간 너무 놀라서 마시던 커피를 뿜을 뻔 했다.
"콜록쿨록! 저, 저를요?"
은테 안경 너머의 김 실장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저희도 아무런 조사도 없이 유 선생님을 찾아온 게 아닙니다. 최근에 몇몇 굵직한 사건들에서 선생님의 모습이 목격되었죠."
나도 모르게 움찔했다.
하기는 최근에 별의별 일을 다 겪긴 했었지. 노숙자라거나, 병원에서 만난 빡빡이라던가.
"보통이라면 그냥 무시하고 넘어갔겠지만, 저희 길드의 스카우트 팀에서는 유 선생님의 범상치 않은 점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거기에 뇌제님과도 친분이 있으시더군요."
"사람 뒷조사도 하시는 건가요?"
미리씨를 언급하자 기분이 확 상했다. 그러자 김 실장이 당황한 표정으로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본래는 그런 짓은 하지 않지만, 워낙 길드장님께서 관심을 가지시는 인재시라."
"광휘 길드장님이 저한테요?"
"네. 길드장님께서는 선생님의 잠재력을 무척 높이 평가하고 계십니다. 저한테도 돈은 얼마든지 들어도 좋으니 반드시 모셔오라고 신신당부를 하셨지요."
길드장도 내게 관심이 있다는 건 의외였다.
"대체 최하 G급 각성자인 절 뭘 보고 그러시는지."
"필시 유 선생님에게서 범상치 않은 잠재력을 느낀 것이겠지요. 게다가."
김 실장이 날카롭게 눈을 빛내더니 은밀하게 말했다.
"대외적으로는 비밀이지만 저희 길드에서는 헌터의 능력을 성장시킬 수 있습니다. 유 선생님은 겨우 G급이라 자신을 과소평가하시지만, 우리 광휘 길드의 비전을 쓰면 최소 C급 이상, 자질에 따라서는 A급까지도 성장이 가능합니다."
그 말에 나는 매우 놀랐다.
각성자는 한번 랭크가 정해지면 그 한계를 넘어서기 매우 어렵다.
미리씨의 경우는 B급에서 최근 A급까지 올랐지만, 그것은 본래 S급의 자질을 가진 데다 능력이 봉인됐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정말 제 랭크가 오를 수 있다고요?"
"물론입니다. 자세한 것은 유 선생님께서 같은 식구가 되면 말씀드리도록 하죠."
확신에 가득 찬 김 실장의 눈동자는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럼 계약 조건에 대해서 이야기해볼까요?"
그러면서 계약조건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데.
"······정확한 액수는 추후에 협의해야겠지만, 일단 제 권한으로도 연봉 3억 정도까지는 확실히 보장해드릴 수 있습니다. 물론 거기에 몬스터 사냥으로 얻는 부산물과 현상금은 7:3으로 배분해드리겠습니다. 어떤가요? 비록 광휘길드의 인지도가 높지는 않지만, 대우는 업계 최고라고 자부합니다."
"여, 연봉 3억!"
터무니없는 금액에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였다.
헌터 업계가 돈을 많이 버는 건 알고 있었지만, G급인 내가 그런 돈을 받을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물론 최근에 각성한 갓메이커의 권능과 신의 상점의 아이템들은 꽤 쓸 만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저 광휘 길드의 사람들은 그런 내 비밀을 알지 못할 테니까.
"어떠십니까? 조건이 마음에 드신다면 지금이라도 저와 함께 길드로 가서 계약을 진행하면 어떨까요? 사실 이미 차를 대기시켜두었습니다. 길드장님께서도 유 선생님을 꼭 만나 뵙고 싶어 하시고요."
3억이라면 겨우 입에 풀칠하고 사는 삼류작가인 나로서는 쌍수 들고 환영할 조건이었다.
하지만.
"제가 지금 급한 일이 있어서 지금 결정하기는 좀 힘들겠는데요. 죄송하지만 나중에 연락드리면 안 될까요?"
그러자 김 실장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혹시 조건이 마음에 안 드시나요? 어디를 가도 이런 대우는 받으실 수 없을 겁니다만."
"아, 아뇨. 제가 좀 급하게 마감할 원고가 있어서······."
"이런 말씀을 드리는 건 실례입니다만, 작가로 받는 인세는 헌터가 되셔서 버는 수익의 백 분의 일도 되지 않을 겁니다."
"제가 꼭 돈 때문에 작가 일을 하는 건 아니거든요."
조금 울컥해서 말했더니 김 실장이 허리를 깊게 숙였다.
"실례했습니다. 당장 저희와 계약하라고는 강요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길드장님께서 유 선생님을 모셔오라고 신신당부하셔서. 제 체면을 봐서라도 잠깐만 시간을 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내 이마에 나도 모르게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면 할 수 없죠. 저기, 그런데 잠깐 화장실 좀 다녀와도 될까요? 갑자기 배가 아파서."
"네, 다녀오시죠. 기다리겠습니다."
웃으며 말하는 김 실장을 남겨두고 난 1평 남짓한 좁은 화장실로 들어갔다.
'시발, 어쩌지?'
실로 파격적인 대우였지만, 나는 기쁨보다는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왜냐하면, 나도 모르게 감정한 저 김 실장이란 남자의 감정창 때문이었다.
<--->
-수컷 인간이다. 사용한 지 34년 되었다.
특이사항 : 파괴신 '???' 의 떨거지다.
특이사항에 있는 파괴신의 떨거지.
분명 병원 폭탄 테러 때 마주했던 빡빡이의 것과 똑같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것이 우연이라고 보기 힘들었다.
혹시 테러 실패의 앙갚음을 하러 날 쫓아온 게 아닐까?
난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들었다.
어디에 연락해야 하지?
경찰? 아니면 헌터 협회?
덜컥덜컥!
그때 내가 잠근 화장실 문손잡이가 움직이더니.
콰드드득!
종이 찢겨나가듯 문짝이 떨어져 나갔다.
유약해 보이기까지 한 김 실장이 한 손으로 뜯어낸 문짝을 휙 집어 던졌다.
쿵!
그리고 죽일 듯한 눈으로 나와 내 손에 쥐어진 핸드폰을 노려보았다.
"유 선생님. 지금 어디에 전화하시려고 하신 거죠?"
등줄기에 오한이 일었다.
"하하, 출판사에 급하게 연락할 게 있어서요."
"까고 있네. 새끼."
순간 김 실장의 분위기가 일변했다.
"시발, 이 새끼 비위 맞추기 더럽게 힘드네. 그냥 따라오면 되지 일을 왜 이리 복잡하게 만들지?"
김 실장의 손이 내 멱살을 순식간에 움켜쥐더니 나를 화장실 밖으로 휙 던져버렸다.
"으아악!"
70킬로는 나가는 내 몸이 마치 빈 캔처럼 가볍게 날아가며 맞은편 벽에 처박혔다.
으드득!
등뼈가 으스러지는 것 같은 엄청난 고통이 전신을 휩쓸었다.
"!"
너무 아프면 비명도 못 지른다는 말이 사실인가보다.
죽을 거 같았지만 신음조차 낼 수 없었다.
김 실장이 목에 차고 있던 넥타이를 거칠게 잡아 뜯었다.
그러자 셔츠의 단추가 몇 개 떨어지며 목덜미 안쪽에 새겨져 있는 검은 해골문신이 비쳤다.
그 폭탄테러를 한 빡빡이와 같은 문신이다.
"으으······."
"아파? 그러게 말로 할 때 들어 처먹어야지."
김 실장, 아니 개새끼가 내 목을 한손으로 움켜쥐고 위로 들어 올렸다.
도저히 평범한 인간이 낼 수 있는 괴력이 아니다.
개새끼가 새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히죽였다.
"어이, 작가 양반. 가만히 있어. 그러면 별문제 없이 의식만 날려 줄 테니까. 내가 이런 쪽은 아주 전문가거든."
내 목을 움켜쥐고 있는 개새끼의 손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켁! 케헥!"
나는 저항하듯 그의 팔을 후려치고 손톱으로 할퀴기까지 했지만, 강철같이 단단한 그의 팔에는 생채기도 나지 않았다.
"내가 가만히 있으랬지? 나는 육체 능력 특화인 강화계 헌터야. 랭크는 무려 B급이다. 너 같은 G급 쓰레기들이 아무리 발악해봐야 소용없다고."
"케엑!"
경동맥을 강하게 압박하면 10초 이내에 의식을 잃는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다.
의지와는 별개로 점점 내 의식이 멀어져갔다.
띠링!
[긴급 퀘스트가 발생했습니다!]
[신도 구원 퀘스트]
그때 희미해지는 의식 사이로 저 메시지가 보였다.
'신도 구원 퀘스트······?'
내가 의문을 가지자 설명문이 늘어났다.
[신도 구원 퀘스트]
: 신도들이 보내는 신앙이야말로 신의 존재 의의이며 신력의 원천입니다.
감히 당신의 신도를 위협하는 장애물을 제거하고, 유일신을 향한 신실한 신앙을 확보하십시오.
현재 생성된 신도 구원 퀘스트의 대상은 다음과 같습니다.
<지구지부 최초의 신도 '성미리'를 죽음의 위기에서 구원하라.
퀘스트 보상 : '성미리'의 신앙 +100>
나는 순간 눈을 의심했다.
죽음의 위기? A급 헌터인 그 미리씨가?
나는 미리씨에게 몇 번이나 목숨을 빚졌다.
심지어 내 가족의 목숨까지도.
만약 지금 메시지대로 정말 그녀가 위험하다면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호, 제법 오래 버티네? 보통은 기절했을 시간인데."
'힘. 힘이 필요해.'
그때 내 머릿속으로 누군가의 음성이 울려 퍼졌다.
[위대한 유일신이시여!]
귀에 익은 걸쭉한 톤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일···호?'
띠링!
['눈먼 신의 눈' 의 권능이 발동합니다.]
순간, 내 눈에 용사의 탑에 있는 일호의 모습이 비쳤다.
일호는 홀로 탑을 오르고 있었다.
폭우처럼 쏟아지는 2층의 화살비를 뚫고 바람의 축복을 받고, 강철로 된 철구가 벌레처럼 도전자를 짓이기는 3층을 돌파하여 강철의 축복을 받았다.
그리고 이제는 온 세상이 화염으로 들끓는, 불지옥 같은 4층의 '불의 시련'을 견디고 있었다.
열기에 머리는 물론 몸의 털이란 털은 모두 다 타버렸지만, 일호의 전진은 멈추지 않았다.
마치 강철이 거칠게 두드리고 불에 달굴수록 단단해지는 것처럼, 일호의 육체는 처음 탑을 오르기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졌다.
띠링!
[축하한다! '용사의 탑' 4층 '불의 시련'을 클리어했다.]
[보상으로 도전자에게 '영겁의 구도자'의 '불의 축복'이 내린다.]
츠츠츠!
일호를 그토록 괴롭히던 불꽃이 주위에 맴돌더니 그의 몸 안으로 스며들었다. 동시에 5층으로 향하는 계단이 나타났다.
하지만, 일호는 5층으로 향하지 않았다.
일호가 경건히 무릎을 꿇었다.
"위대한 유일신이시여!"
그가 양 주먹을 불끈 위로 치켜들며 피를 토하듯 외쳤다.
"제 근육을 당신께 바치나이다! 그러니 부디 승리하소서!"
띠링!
[스킬 공유]에 가야미족 '일호'의 스킬이 추가되었습니다.
[스킬 공유]
-유일신을 믿는 신도의 스킬을 공유할 수 있다.
현재 스킬 공유 가능 대상
: '성미리', '일호'
산소가 부족해 들끓는 의식 속에서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스킬 공유······ 일호]"
번쩍!
구석에 쌓여있던 내 신상들이 찬란하게 빛났다.
치이익!
동시에 날 들어 올리고 있던 개새끼의 팔이 부들거리더니 새하얀 연기가 치솟기 시작했다.
"뭐, 뭐야?"
띠링!
[유일신이 가야미족 '일호'의 스킬 '강체(剛體)'를 공유합니다.]
[강체(鋼體:강철의 육체)]
: Class A
-본래 개미에서 기원한 가야미족은 자신 무게의 열 배에 달하는 힘을 낼 수 있을 정도로 강인한 육체의 소유자들이다.
신도 '일호'는 '용사의 탑'에서 그런 자신의 특성을 더욱더 발전 시켜 불굴의 육체를 손에 넣었다.
바위, 바람, 강철, 불의 축복이 함께 한다.
찌이익! 차자자작!
폭발하듯 부풀어 오르는 내 근육에 입고 있던 티셔츠가 갈가리 찢겨나갔다.
"뭐, 뭐?!"
내 입이 나도 모르게 열렸다.
그리고 당황하는 개새끼를 향해 마치 일호처럼 웅혼한 고함을 내질렀다.
"근유우욱!!"
신이시여! 제 근육을 당신께 바치나이다! 끝
ⓒ 크래커™
=======================================
검귀(劍鬼), 네가 감히 누구에게 도전하느냐!
41.
"큭, 너 무슨 짓을!"
내 고함에 비틀거리는 개새끼의 팔을 양손으로 덥석 움켜쥐었다.
개새끼가 얼굴을 사납게 일그러뜨렸다.
"하! 이 새끼가 진짜 뒈질!"
뿌득뿌득!
하지만 내가 움켜쥔 놈의 팔에 힘을 주자, 그의 얼굴이 점점 새파랗게 질려갔다.
"자, 잠깐 기다······!"
"싫어."
콰드드득!
"으아아악!"
자지러지는 비명과 함께 개새끼의 팔이 으스러졌다.
"끄아아악! 아아아악!"
개새끼의 비명에 놀라 나도 모르게 팔을 놓았다.
후드득! 철퍽!
마치 걸레를 쥐어짠 것처럼 찌부러진 놈의 팔에서 쏟아진 피가 바닥에 웅덩이처럼 고였다.
하지만 스스로 B급 헌터라고 밝힌 게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런 부상에도 불구하고 놈은 전의를 잃지 않았다.
"이 시발 새끼가!"
핏발이 서다 못해 시뻘게진 눈으로 놈이 멀쩡한 주먹을 휘둘렀다.
부우웅!
얼마나 빠른지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도저히 중상을 입은 인간의 주먹질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소음이었다.
"헉!"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팔을 올리며 거북이처럼 몸을 웅크렸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격투기의 달인처럼 개새끼의 주먹이 궤도를 바꾸더니, 팔의 틈을 파고들며 내 얼굴에 송곳처럼 꽂혔다.
찰나, 그의 얼굴에 회심의 미소가 어렸지만.
콰드드득!
내 얼굴을 때린 놈의 주먹 뼈가 박살났다.
"아아악! 내 손!"
맞은 건 난데 왜 상대의 주먹이 부서지는지 미스터리였지만, 지금이 기회다!
"근유우욱!!"
왜 이 상황에서 이런 고함을 지르는지는 묻지 마라. 나도 모르겠으니까.
부우웅!
솥뚜껑만 한 내 손바닥이 공기를 사납게 가르며 냅다 놈의 얼굴을 후려갈겼다.
짜아악!
그러자 마치 가죽 북이 찢어지는 것 같은 찰진 소리가 울리더니, 개새끼의 몸이 휙 사라졌다.
'어? 어디 갔지?'
어디로 사라졌나 싶어 찾아봤더니 현관에서 10m는 떨어진 길거리에 뻗어있는 모습이 보였다.
바닥에는 그의 것으로 보이는 강냉이들이 후두득 널려 있었다.
얼추 스무 개는 되는 것 같다.
"헐, 무슨 놈의 힘이."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싶어 거울을 보았다.
누구세요?
그 안에는 비리비리한 작가 대신, 2m는 될 것 같은 장신에 달군 쇠처럼 시뻘건 피부의 근육질 남자가 있었다.
태평양처럼 넓은 대흉근 아래로 빨래판처럼 쩍쩍 갈라진 복근이 자리 잡고 있었고, 터질 듯한 허벅지 근육에 넝마가 된 바지는 힘겹게 국부를 가리고 있었다.
이게 진짜 내 몸이라고?
그때 내 눈이 지금의 내 모습을 감정했다.
[유일신]
-앤트리니아 행성의 최하급 신이다. 본래 이름 없는 신이었지만, 세계수를 관리하는 검은 부족의 섬김으로 신위를 얻었다.
특이 사항 : 신도 '일호'의 '강체' 스킬을 공유 중이다.
남은 시간 : 4:32 초
특이사항의 숫자가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다.
"아!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미리씨!"
놀라는 건 나중에 해도 된다.
지금은 갑자기 뜬 그녀의 구원 퀘스트가 진짜인지 확인하는 게 급했다.
[고객님께서 전화를 받을 수 없어서 소리샘으로 연결······.]
하지만 통화가 되지 않았다.
큭, 어쩌지?
'갓메이커!'
황급히 갓메이커를 실행했다.
띠리링!
['유일신'의 신도 관리 시스템을 실행합니다.]
[현재 '유일신'의 신도 수는 총 102명입니다.
지구 지부 1명
: '성미리'
앤트리니아 지부 101명
: '성녀와 100마리의 가야미족.']
지구 지부의 성미리를 터치해보았다.
[신의 구원이 절실한 신도입니다.
위기에 빠진 신도를 탐색하시겠습니까? (YES/NO)
지구 지부의 신도 탐색 시 1,000 Gcoin이 소모됩니다.]
어차피 코인은 넘친다. 황급히 탐색을 실행했다.
츠츠츠!
그러자 내 시야가 뒤틀리며 전혀 다른 곳의 풍경이 비추기 시작했다.
***
"흥~ 흐흥~."
교복 차림의 미리씨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길을 걷고 있었다.
"헤헤, 선생님이 좋아하시겠지?
그녀의 손에는 병원 테러 사건을 막은 공로로 받은 표창장 패와 한우세트가 들려 있었다.
"역시 우리 선생님은 대단해!"
[네? 제가요? 뭐가요?]
미리씨는 병원 테러 사건을 떠올리며 부르르 몸을 떨었다.
경찰은 테러범이 가지고 있던 폭탄은 몬스터의 부산물로 만들어진 특수폭탄으로, 그 살상력을 생각하면 단지 병원 하나의 피해로 끝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하마터면 수천의 인명이 희생될뻔한 것이다.
성미리는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테러범이 폭탄을 터트리기 직전, 그에게 검지를 겨눈 채 스킬을 쓴 유일신.
-미리씨······. 해치워요!
원리는 모르지만, 그때 그가 폭탄을 해제한 게 분명하다.
그렇게 홀로 테러를 막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지만, 유일신은 모든 공로를 자신에게 떠넘기고 사라졌다.
그래서 더욱더 존경심을 가지게 된 성미리였다.
돈과 명예 따위는 쳐다보지도 않는 우리 유일신 선생님!
그야말로 능력자의 귀감이시다!
띠링!
[신앙이 1 오릅니다.]
"응? 또 들리네?"
언제부터일까.
유일신에 대한 존경과 믿음이 강해질수록 이렇게 희미하게 영문을 알 수 없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에이, 뭐 그래도 선생님을 생각할 때 이런 현상이 나는 건 좋은 거겠지?"
이미 콩깍지가 깊게 씌어 깊게 생각하지 않는 성미리였다.
"앞으로도 선생님이 편하게 사시도록 내가 지켜드려야지."
유일신이 일부러 능력을 숨기고 살아가는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미리씨는 그것을 자신의 사명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니 그건 오해신데요······.]
현재 미리씨의 일거수일투족, 심지어는 속마음까지 마치 전지적 작가 시점의 글처럼 생생히 느껴졌다.
하지만, 갓메이커의 경고와는 달리 그녀가 위험해 보이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혹시 구원 퀘스트가 잘못된 게 아닐까 생각하고 있을 때.
오싹!
미리씨가 갑자기 움찔 몸을 떨더니 황급히 몸을 날렸다.
서걱!
동시에 그녀의 등이 날카로운 뭔가에 베인 듯 쩍 갈라지며 붉은 핏물이 후드득 쏟아졌다.
"아아악!"
"고통 없이 죽여주려 했는데 반응이 좋군. 분명 내 은신은 완벽했을 텐데."
장발을 길게 늘어뜨린 검은 코트의 사내가 피로 젖은 검을 들고 서 있었다.
헉, 저 새끼 뭐야?!
분명 아무것도 없던 공간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정체불명의 괴한이 있었다.
내 눈이 갑자기 나타난 그 남자를 감정했다.
<검귀(劍鬼)>
-수컷 인간이다. 사용한 지 29년 되었다.
특이사항 : 검에 미친 놈이다.
내가 감정한 다른 이들과는 다르게 이름이 있었다.
그런데 검귀라고?
"최근에 A급으로 승격했다는 소문이 진짜였나? 간만에 즐거운 사냥이 되겠어."
남자가 검에 묻은 피를 혀로 핥으며 킥킥거렸다.
"누, 누구?"
상처의 공포와 고통으로 얼룩진 얼굴로 미리씨가 물었다.
"나는 검귀. 널 죽이려고 왔다."
"대, 대체 왜?"
"딱히 너에게 악감정은 없다. 그저 일이기에 하는 것뿐."
검귀가 검 끝을 다시 미리씨에게 겨눴다.
"살고 싶다면 발악해봐라. 날 위해."
"이이익!"
미리씨가 이를 악물며 검귀를 향해 양손을 뻗었다.
"스킬 [뇌폭(雷爆)]!"
콰르릉!
번쩍!
여태껏 보았던 미리씨의 뇌전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마치 해일처럼 쏟아지는 뇌기의 폭풍이 검귀를 집어삼켰다.
"훌륭해. 이 정도면 웬만한 A급도 상대가 되지 않겠군. 하지만 내게는 소용없다."
"어, 어떻게?"
뇌폭을 정면으로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검귀의 몸에는 상처 하나 없었다.
입고 있던 트렌치코트가 사라지고 대신, 전신을 뒤덮고 있는 검은 가죽 갑옷이 모습을 드러냈다.
"뇌속성 면역인 S급 몬스터 뇌룡의 가죽으로 만든 장비다. 겨우 A급 헌터의 뇌전으로는 뚫을 수 없어."
방금의 공격으로 힘을 거의 다 써버렸는지, 미리씨가 힘없이 주저앉았다. 그녀의 상처에서 흐른 피로 주변의 땅이 시뻘겋게 젖어갔다.
"발악은 끝났나?"
저벅저벅.
자신에게 다가오는 검귀를 바라보는 미리씨의 눈에 깊은 절망이 어렸다.
"사, 살려주세요. 전 반드시 해야 할 일이······. 부모님의 원수를 갚기 전에는 죽을 수 없어요. 제발······."
"아까도 말했듯이 너에게 악감정은 없다."
검귀가 검을 위로 치켜들었다.
"걱정 마라, 고통은 없을테니. 단칼에 목을 쳐주지."
마치 그것이 자신이 해줄 수 있는 자비의 전부라는 듯, 검귀가 담담하게 말했다.
눈물이 고인 미리씨의 눈과 그녀를 바라보는 내 눈이 마주쳤다.
"일신 선생님······."
치지직!
"윽!"
갓메이커에 잡음이 일며 그녀의 모습이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주르륵!
동시에 내 눈에서 시뻘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띠링!
갓메이커의 메시지가 울려 퍼졌다.
['소리 없이 기어오는 악몽'이 선물한 <????> 권능으로 당신은 자신의 권속의 처참한 운명을 보았습니다.
이것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지만, 동시에 곧 일어날 운명이기도 합니다.]
이 현상은 한 번 겪어본 적이 있었다.
바로 붉은 개미들의 습격을 받았을 때, 사마귀가 휘두른 검기에 미리씨가 죽음을 맞이하던 순간.
아직 일어나지 않았지만, 곧 미리씨에게 일어날 죽음의 미래.
'분명 익숙한 길이었어. 이 근처야!'
들끓는 감정과는 다르게 머릿속은 차갑게 가라앉았다.
미리씨를 습격한 검귀란 남자.
암습했다고는 하지만, A급 헌터로 승격한 뇌제를 가볍게 제압한 실력자다. 전격 계열의 능력자는 등급보다 한단계 위로 평가해주는 헌터계에서 말이다.
상대는 적어도 S급의 실력자.
그런 그에게서 내가 미리씨를 구할 수 있을 것인가?
일호에게서 공유한 강체화 스킬로 스스로 B급이라 떠벌린 김 실장을 가볍게 제압한 나였지만, 그런데도 확신할 수 없었다.
찰나 동안 나는 상상력을 쥐어짰다.
상상력이야말로 작가의 힘.
나는 그동안 갓메이커를 플레이하면서 소소하지만, 신기한 권능을 얻었다.
생각해! 생각해내라!
검귀라는 저 살인귀에게서 미리씨를 구할 방법이 분명 있을······.
잠깐, 검귀?
검(劍)?
그때 내 눈에 봉인하듯 박스테이프를 덕지덕지 붙여놓은 선반이 들어왔다.
[유일신이시여, 신의 권능으로 필멸자의 운명을 개변하겠습니까? (YES/NO)]
그리고 이어지는 메시지.
나는 선반에 손을 뻗으며 소리쳤다.
"Yes!"
띠링!
[운명개변의 대가로 100,000 Gcoin을 소모합니다.
선신 타이틀 <자애로운 구원자(C)>와 유일신이 창조한 '세컨문' 의 효과가 맞물려 '대단한 기적'이 발동합니다.]
번쩍!
눈부신 백광이 날 감싸며 내 몸이 사라졌다.
***
"일신 선생님. 살려줘요······."
"소용없."
우뚝.
막 미리씨의 목을 베려던 검귀의 검이 멈췄다.
물론 그녀에게 동정심을 느껴서는 아니었다.
"······뭐냐, 너는? 언제부터 내 뒤에 있었지?"
검귀가 놀란 눈으로 고개를 돌렸다.
바로 그의 등 뒤에 서 있는 날 향해.
"설마 내가 눈치채지 못할 정도의 은신 스킬이라고?"
"······."
"너도 광휘 길드가 보낸 암살자냐?"
"······"
"말해라, 침묵하면 적으로 간주하고 베겠다."
"······크크큭."
내 입술 사이로 뒤틀린 웃음이 새어 나왔다.
검귀의 얼굴이 짐승처럼 일그러졌다.
"웃어? 감히 나한테? 내가 누군지 알고 있는 거냐?"
"크크큭!"
난 다시 웃었다.
도저히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쯧, 그냥 미친놈이었나."
쐐애액!
더 말을 섞을 가치도 없다는 듯, 검귀의 검이 사납게 내 목을 향해 날아왔다.
그대로 내 목을 베어버리겠다는 듯.
까가강!
하지만 그의 검은 그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마, 막았다고?"
검귀의 음성이 잘게 떨렸다.
"어, 어떻게 그런 식칼 나부랭이로 내 귀도를?"
검귀의 검을 막은 내 손에는 중국집 식재료 토막 사건 이후 봉인했던 식칼이 들려 있었다.
난 환희하며 검귀를 향해 광소했다.
"크큭, 베고 싶다······."
검귀(劍鬼), 네가 감히 누구에게 도전하느냐! 끝
ⓒ 크래커™
=======================================
나는 검신(劍神) 유일신이다.
42.
사실 검귀는 이번 의뢰를 별로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상대가 A급 헌터라 해도 이미 뇌제에 대한 공략은 완벽하게 준비했다.
아무리 랭크가 높은 헌터라도 주로 사용하는 능력만 무력하게 만든다면, 죽이는 건 쉽다.
대외적으로 알려지진 않았지만, 검귀는 심지어 S급 헌터조차 죽여본 적이 있었으니까.
대상에 대한 완벽한 공략, 그리고 귀신같은 칼솜씨.
그것이 겨우 A급 각성자임에도 불구하고, 검귀가 암살 업계에서 세계 수준으로 평가되는 이유였다.
하지만 갑자기 나타나 자신의 검을 겨우 식칼로 막아낸 남자.
"크큭, 베고 싶다······."
오싹!
유일신의 광기 어린 웃음을 보는 순간, 검귀는 불에 댄 것처럼 놀라며 황급히 그에게서 뒷걸음쳤다.
'뭐지?'
검을 쥔 검귀의 손끝이 덜덜 떨렸다.
'설마 내가 공포를 느꼈다고?'
유일신이 들고 있는 것은 겨우 식칼이었지만, 그것에서 뿜어져 나오는 예기에 온몸의 피부가 저릿거렸다.
'엄청난 고수! 누구냐 이자는?!'
"선생님, 도망치세요!"
그때 부상당한 채 주저앉은 뇌제가 눈물 젖은 눈으로 유일신에게 외쳤다.
자신을 구하러 와준 것은 꿈을 꾸는 것처럼 감격스러웠지만, 이 무시무시한 살인귀에 맞서 겨우 식칼 하나 들고 있는 유일신의 모습이 너무나 위태로워 보였기 때문이다.
검귀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선생님이라고?'
검귀는 그제야 유일신의 강함이 납득이 갔다.
"과연. 너 뇌제의 스승이었나?"
A급인 뇌제의 스승이라면 최소 S급의 실력자일 것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S급 중에 저런 자는 없었다.
짐작 가는 것은 있다.
그동안 소문만 무성했던, 정부나 헌터협회에서 비밀리에 보유하고 있다는 비공식 S급 헌터 언노운들.
'당한건가?'
이 자가 나타나는 타이밍이 너무나 빨랐다.
검귀는 어쩌면 자신이 함정에 빠진 것인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프리랜서로 세력에 소속되지 않고 고독한 늑대처럼 활동하는 그는 많은 단체의 표적이 되어 왔으니.
하지만, 오히려 검귀는 환희했다.
"차라리 잘됐군."
사실 그가 제일 선호하는 것은 뇌제와 같은 이능력자가 아니라, 육체의 극한을 본 강화계열의 헌터들과의 대결이었다.
그들이야말로 자신의 검기를 갈고 닦을 수 있는 최고의 소재였으니.
붉은 기가 도는 근육으로 가득한 유일신의 몸은 단련의 끝을 본 최상의 육체였다.
"킥, 너 정도라면 내 상대로 부족함이 없겠어!"
검귀가 늑대처럼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오늘에야말로 답습 상태였던 자신의 경지를 한 단계 높일 절호의 기회였다.
"어디 내 일참을 한번 받아봐라! 뇌제의 스승!"
쾅!
웅크린 자세로 있던 검귀가 발로 대지를 바술 듯 박차며 유일신에게 돌진했다.
"스킬 [반암참(半巖斬)]!"
그 이름처럼 바위조차 두부처럼 갈라버리는 검격이 유일신을 육체를 사선으로 갈라버릴 기세로 움직였다.
까가강!
검귀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뭐?!"
이번에는 스킬까지 썼지만, 유일신의 식칼에 너무나 쉽게 가로막혔던 것이다.
"이럴 리 없다!"
당혹과 공포를 동시에 느끼며 검귀가 검을 폭풍처럼 휘둘렀다.
보통 사람이라면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
챙! 까가강!
하지만 무수히 날린 검은 일격은커녕, 유일신의 몸을 스치지도 못했다.
심지어 A급 명도인 자신의 귀도를 막고 있는 저 식칼이 날 하나 나가지 않았다는 것이 검귀를 더욱 더 공포에 떨게 했다.
그때 유일신과 검귀의 눈이 마주쳤다.
마치 고양잇과 맹수가 먹이를 가지고 놀 듯, 조소하는 유일신의 눈.
이게 겨우 네 전부냐?
아니잖아, 더 할 수 있잖아?
좀 더 나를 즐겁게 해봐라. 벌레야.
순간 분노가 공포를 집어삼켰다.
"날 얕보지 마라!"
아무리 뇌제의 스승이며, 비공식 S급 헌터라 해도 자신을 향해 저런 눈을 할 수는 없었다.
유일신에게서 물러선 검귀가 품에서 포션병을 꺼냈다.
그곳에는 일반적인 포션과는 다르게 마치 오수처럼 검은빛을 띤 액체가 담겨 있었다.
꿈틀꿈틀!
살아있듯 포션병의 벽을 긁는 검은 액체의 모습은 실로 기괴했다.
빠드득!
하지만 검귀는 개의치 않고 이빨로 포션병 입구를 부수더니.
꿀꺽꿀꺽!
단숨에 그 액체를 삼켜버렸다.
그것이야말로 그가 이 의뢰를 맡게 된 이유기도 한, 블랙마켓에서만 공급하는 '신의 비약' 이었다.
치이익!
그러자 스팀처럼 검귀의 몸에 검은 아지랑이가 사납게 피어오르더니, 동시에 뺨에 검은 해골 문신이 생겼다.
유일신의 눈이 그런 그를 감정했다.
<검귀>
-수컷 인간이다. 사용한 지 29년 되었다.
특이사항 : 파괴신 '???' 의 힘을 빌려 전투력이 두 배 상승했다.
검귀가 자신의 애병 귀도를 양손으로 움켜쥐었다.
비록 편법을 사용한 도핑이었지만, 지금의 자신은 감히 S급이라 해도 막을 수 없을 정도였다.
"하아아아!"
쿠구구궁!
검귀가 뿜는 힘의 기파에 지진이라도 난 듯 대지가 사납게 요동쳤다.
하지만 그것은 검귀의 손에 들린 귀도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파직! 파직!
기공 계열의 전투 헌터만 쓸 수 있는, 강철마저 가볍게 베어버리는 극상의 스킬.
2미터 이상의 검기를 뿜을 수만 있어도, A급으로 인정받는 그 검기가 귀도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무려 5미터에 이르는 길이로.
포션의 부작용 탓인지 실핏줄이 모두 터진 검귀의 붉은 눈동자가 귀기마저 서린 채 유일신을 노려보았다.
"하하하! 어떠냐! 뇌제의 스승! 이 정도의 검기를 본 적이 있나? 중국 최강이라 불리는 린샤오밍도 이 정도 검기를 낼 수는 없을 거다!"
유일신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식칼을 움켜쥔 손을 아래로 축 늘어뜨린 구부정한 자세로, 검귀와 그의 귀도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기를 바라볼 뿐.
대꾸조차 하지 않는 유일신의 태도에 검귀는 더 모욕감을 느꼈다.
여전히 자신이 몇 단계 위의 경지에 있다 믿으며 상대를 깔보는 듯한 눈빛이지 않은가.
검귀가 이를 부득 갈았다.
그렇다면 더는 정공법으로 상대하지 않겠다.
"죽여주지! 뇌제의 스승! 스킬 [그림자 밟기]!"
스스슥.
검귀의 신형이 지워지듯 사라졌다.
극한의 은신으로 몸을 감춘 검귀는 은밀히 유일신의 사각을 향해 이동했다.
그리고 여전히 방심한 자세로 몸을 축 늘어뜨린 유일신의 목을 향해 비약으로 증폭되어 산조차 베어버릴 수 있는 검기를 내리쳤다.
쐐애액!
그 순간.
우드득!
유일신의 목이 절대로 움직일 수 없는 각도로 꺾였다.
마치 공포영화 엑소시스트의 주인공 소녀가 180도로 목이 돌아가는 것처럼.
"크큭!"
"흐억!"
유일신과 검귀의 눈이 마주쳤다.
검귀의 등에 소름이 우수수 돋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유일신의 눈.
그곳에 끝없는 심연이 있었다.
감히 범인으로서는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을 광기가 그 심연에서 일렁였다.
유일신이 말했다.
"크크큭, 벴다."
"무, 무슨?"
검귀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유일신의 목을 노린 그의 귀도가 허무하게 허공을 가르기 전까지.
"이, 이럴 수가."
모든 것을 베어버리는 검기를 두른 귀도가, 그가 양손으로 움켜쥐고 있는 손잡이만 남은 채 사라졌다.
차자작!
쩌저적!
동시에 검귀가 서 있는 등 뒤의 벽에 마치 거대한 짐승이 할퀸 듯한 검흔이 무수히 박혀 있었다.
"헉!"
검귀는 그 검흔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자신에겐 생채기도 남기지 않고 저런 검흔을 남기다니.
차라리 자신을 갈가리 찢긴 육편으로 만드는 것이 수천 배는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자신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지고의 경지.
"너, 너는 대체 누구냐?"
차라락!
산산이 부서진 귀도의 파편이 식칼을 휘두른 자세로 서 있는 유일신 주위로 별빛처럼 쏟아졌다.
그것은 그를 인간을 아득히 초월한 듯한 경외감을 불러일으켰다.
유일신이 식칼을 까닥거리며 말했다.
"크큭, 나 검신."
순간 검귀는 머릿속에 벼락이 치는 기분이었다.
검신(劍神). 검의 신이라고?
이 무슨 광오한 말이란 말인가?
하지만, 이 남자는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었다.
검귀의 눈에 공포와 경외의 감정이 차올랐다.
그가 평생을 고련해도 절대 따라잡지 못한 거인이 눈앞에 있었다.
쿵!
검귀가 무릎을 꿇고 유일신의 발치에 머리를 박았다.
"져··· 졌다. 아니 제가 졌습니다. 검신님."
***
띠링!
[유일신이 '모든 것을 베는 천검'의 권능 <검의 극의> 를 사용한 애검 '검신' 이 검귀의 '귀도(A)'를 포식했습니다.
유일신의 애검 '검신'의 진화가 가능해졌습니다.]
꺼어억!
내가 쥔 식칼에서 마치 트림 같은 소리가 나더니, 머릿속으로 나른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배부르다······. 나 잔다······.
"핫!"
그러자 모든 것을 베고 싶은 욕망과 광기가 사라지고, 대신 평범한 소시민 유일신의 자아가 돌아왔다.
스륵, 스르륵.
그와 동시에 일호와 공유한 스킬 '강체'조차 시간이 끝났는지 장신의 근육질이던 몸도 다시 원래의 멸치로 돌아왔다.
위기감을 느낀 난 잠든 식칼을 손으로 탁탁 때렸다.
"야, 인마! 일어나! 지금 상황에서 자면 어쩌라고!"
하지만 놈은 마치 평범한 식칼처럼 아무 반응이 없었다.
검귀라 칭한 남자는 내 발아래 엎드리고 있었지만, 언제 마음이 바뀌어서 다시 덤벼들지 모를 일이다.
"이 썩을 식칼아! 일어나라고!
나도 모르게 무심코 소리쳤다.
그러자 엎드려 있던 검귀가 파르르 몸을 떨며 중얼거렸다.
"자신의 검과 대화를 하신다니. 저것이야말로 진정한 지고의 경지인가."
이 아저씨가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야?
"아아, 역시 우리 선생님. 최고······."
털썩!
나와 검귀의 전투를 지켜보던 미리 씨가 순간 긴장이 풀렸는지 미소를 지으며 힘없이 무너졌다.
"미리씨!"
난 황급히 쓰러진 그녀를 부축했다.
내 품에 안긴 그녀의 안색이 백지장처럼 창백했다.
베인 등의 상처에서 고장난 펌프처럼 피가 쏟아지고 있었다.
"하아, 하아!"
젠장, 우선 지혈부터!
"잠시만 실례하겠습니다, 검신님."
헐, 깜짝이야!
음울한 음성과 함께 검귀가 불쑥 내 앞에 나타났다.
설마 또 덤비는 건 아닐지 불안하고 있을 때.
검귀가 품에서 유리병을 꺼내더니 그 안에 담긴 황금빛 액체를 상처에 부었다.
내 눈이 그것을 감정했다.
띠링!
<하이포션>
-검귀가 여벌의 목숨으로 들고 다니던 최고급 포션이다.
특이사항 : 죽지만 않으면 살릴 수 있다.
치이익!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마치 용접하듯 그녀의 상처가 원래대로 들러붙기 시작하더니, 흉터조차 남지 않았다.
검귀가 남은 것을 미리씨의 입에 흘려 넣었다.
그러자 창백하던 미리씨의 얼굴에 혈색이 돌아왔다.
우와, 하이포션이 개사기라는 말을 듣긴 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놀라워하는 내 시선과 검귀의 눈이 마주쳤다.
"주제넘게 나서서 죄송합니다!"
그러자 검귀가 황급히 땅에 머리를 박았다.
"감히 검신님의 제자에게 손을 대다니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하지만 자비를 베풀어 주신다면 저 검귀, 견마지로(犬馬之勞)의 심정으로 검신님을 평생 따르겠습니다!"
평생 따르겠다니? 이 아저씨가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걸까.
"제발 방금 저에게 펼치셨던 검신님의 경이롭고 아름다운 검기를 한번만 더 견식할 기회를 주십시오! 그럴수만 있다면 검신님께 제 목숨이라도 바치겠습니다!"
그때 갓메이커가 울렸다.
띠링!
[축하합니다. 신의 압도적인 위엄과 공포를 보여 광적인 신앙 생성에 성공했습니다.
'검귀'가 지구 지부의 두 번째 신도가 되었습니다.
'검귀(劍鬼)'
분류 : 광신도
특이사항 : 시험 삼아 죽으라고 말해보자. 아마 기뻐하며 죽을 것이다.]
······엥?
광신도라고?
나는 검신(劍神) 유일신이다. 끝
ⓒ 크래커™
=======================================
좋은 말씀 전해드리러 왔습니다. (수정)
43.
띠링!
-'신도 구원 퀘스트'를 무사히 완수했습니다.
-성미리의 신앙이 +100 증가했습니다.
-현재 성미리의 신앙은 139입니다.
-신도의 신앙이 200 이상이면 전직이 가능합니다.
-갓코인(화이트) 10,000을 얻었습니다.
띠링!
-'검귀'를 신도(광신도)로 얻었습니다.
-유일신의 애검 '검신' 의 진화가 가능합니다.
위이이잉!
사이렌과 함께 경찰과 구급차가 출동했다.
비록 외진 동네이긴 하지만, 뇌제를 포함한 상위급 능력자들이 충돌했고 내가 패버린 김 실장도 쓰러져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난 기절한 미리 씨를 구급대에 맡겼다.
"그러면 잘 부탁드립니다."
"아, 잠깐만요. 그쪽은 잠시 저희와 이야기 좀··· 엇? 어디 갔지?"
뒤늦게 경찰들이 날 찾았지만 난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
인적이 드문 공원.
스륵.
나와 검귀가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몸을 드러냈다.
[검귀의 '은신' 스킬이 해제되었습니다.]
검귀가 가진 은신 스킬의 효과다.
정말 암살에 특화된 스킬이다.
검귀가 날 향해 공손히 무릎을 꿇었다.
"분부대로 했습니다. 검신님."
아무렇게나 긴 산발 머리에 낡은 코트를 걸친 남자, 등에 메고 있는 검을 빼면 부랑자처럼 보일 정도다.
그러나 칼날 같은 그의 눈동자는 밤의 어둠 속에서도 형형하게 빛났다.
마치 굶주린 맹수 같다.
아마 본질 또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감정 창에 이름 대신 보이는 검귀라는 명칭이 누구보다도 어울리는 남자다.
하지만, 그런 사람이 지금 내 앞에 얌전히 무릎을 꿇고 있다.
<유일신의 광신도 '검귀'
수컷 인간이다. 사용한 지 29년 되었다.
특이 사항 : 시험 삼아 죽으라고 말해보자. 아마 기뻐하며 죽을 것이다.
그것도 머리에 저런 광신도란 명칭을 달고서 말이다.
검귀에게서 정황은 들었다.
광휘 길드란 곳으로부터 미리 씨의 살인 의뢰를 받았다고.
사정은 낮에 나를 찾아왔던 그 김 실장이란 불청객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들은 왜 나와 미리 씨를 노렸을까?
짐작 가는 것은 하나 있다.
바로 우리가 막았던 병원 테러범의 배후가 바로 광휘 놈들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를 습격한 것은 그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서이고.
사실 경찰에 알릴까도 고민했지만, A급 헌터인 미리 씨까지 노릴 정도로 미친놈들이다.
그리고 지금 내 앞에는 그런 미친놈들이 보낸 남자가 있다.
내 명령이라면 죽는 것도 서슴지 않을 광신도가 된 검귀가.
망할 놈들. 너희들도 한 번 엿 먹어봐라.
"검귀씨."
"말씀 편히 하소서 검신님."
"전 이게 편해요."
괜히 친숙하게 말을 놓고 싶지 않다.
"검귀씨 당신은 얼마나 강하죠?"
"미천한 제가 감히 검신님께 비할 바 있겠습니까마는."
검귀의 눈빛이 스산하게 빛나며 살갗이 저릴 정도의 살기가 뿜어졌다.
"제가 제대로 준비할 시간만 있다면, 이 나라에서 죽이지 못할 자는 열을 넘지 않을 겁니다."
마음에 드는 말이다.
하지만 혹시 모르니 확인해본다.
"당신, 내 명령은 뭐든지 듣겠죠?"
"물론입니다. 뭐든 하명만 하십시오!"
"그럼 미리 씨와 날 죽이라고 명령한 그 광휘 길드란 곳을 처리해주세요."
검귀가 당황한 듯 잠시 움찔했다.
난 스산한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왜? 못하겠나요?"
난감해하던 검귀가 잠시 후,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깊숙이 조아렸다.
"검신님의 명령이시라면 기꺼이."
그가 검을 부서질듯 움켜쥐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스스슥.
죽음을 각오한 남자의 눈빛을 한 그가 곧 지워지듯 사라졌다.
아무리 강하다 해도 혼자서 헌터들이 득실거리는 길드를 상대하기엔 택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어차피 미리 씨를 죽이려고 한 쓰레기 킬러니 어찌 되든 상관없다.
"하."
난 얼굴을 감싸 쥐며 머리를 위로 쓸어올렸다.
"이거 오래간만에 좀 빡치네."
여태껏 살면서 이렇게 화가 난적이 없는 것 같다.
차라리 나만 건드렸으면 모를까 내 주위 사람까지 건드린 게 더 나를 화나게 했다.
이런 놈들이면 분명 언젠가는 내 가족들에게도 손을 뻗을 것이다.
내가 만약 갓메이커를 손에 넣지 않았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웃기지 마."
[악신 타이틀 '잔혹한 학살자(D)'가 유일신의 분노에 호응하며 활성화됩니다.]
강해지고 싶다. 나와 내 사람들을 지킬 수 있는 확실한 힘이 필요했다.
'신의 상점을 쓴다면?'
하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여태까지의 선례를 보아 그런 것들이 내게는 별 쓸모없는 것일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다.
'최소 상급신 이상의 권능이나 아이템이 아니면 그저 코인 낭비일 확률이 높아.'
그러나 상급신이 붙은 품목은 천문학적인 수준이다.
최소 10억 갓코인 이상.
2억 정도의 지금 내 잔고로는 택도 없었다.
['소리 없이 다가오는 악몽'이 왜 그런 벌레들이 설치는 걸 놔두냐고 의아해합니다.]
['모든 것을 베는 천검' 께서 악몽의 말에 동감합니다. 벌레들에게는 종종 신의 위엄을 보여줘야 기어오르지 않는다고 합니다.]
['한없이 베푸는 풍요' 께서 우물쭈물하시며 이럴 때일수록 자애로운 마음으로 피조물을 보살펴야 한다고 조언합니다.]
그때 스토커들이 말을 걸어왔다.
그런데 하나가 더 늘었네?
마침 잘됐다.
"여러분, 내가 단기간에 강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소리 없이 다가오는 악몽' 이 가장 쉽게 강해지는 것은 당연히 악업을 펼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대학살을 벌이면 겁에 질린 벌레들이 공포와 신앙을 바칠 것이라고 합니다.]
['모든 것을 베는 천검'이 동의합니다. 그리고 이왕 대학살을 벌일 거면 자기 검을 쓰면 편하고 좋을 거라고 넌지시 권합니다.]
['한없이 베푸는 풍요'께서 기겁하며 고개를 세차게 저으십니다. 학살로는 단기간에 힘을 키우기에는 좋을지 모르나, 그렇게 하면 훗날 아무도 당신을 섬길 자가 남지 않을 거라 말씀합니다.
지금 가야미족들에게 하는 것처럼 장기적인 관점으로 선업을 베풀며 강한 신도를 육성하는 것을 권합니다.]
결론은 대학살을 벌이면, 힘을 키우기엔 좋다는 거로군.
그리고 풍요의 말도 일리가 있어 보였다.
일호의 도움으로 위기를 벗어난 적도 있으니까 말이다.
좋아, 결정했다.
"둘 다 하지 뭐."
선신의 길도, 악신의 길도 모두 걷겠다.
난 갓메이커를 실행했다.
띠링!
-갓메이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당신의 성향과 플레이에 따라 선신도, 악신도 될 수 있습니다.
갓메이커의 세계 앤트라니아.
그곳의 최하급 신인 나는 내 신도인 앤티와 일호, 가야미족들을 향해 말했다.
"애들아, 너희들이 날 좀 도와줘야겠다."
-근육! 신의 말씀이라면 뭐든지 따르겠나이다!
-하명만 하소서! 위대하고 자비로운 유일신님이시여! 저와 가야미족들은 유일신님의 유용한 도구가 되겠나이다!
사실 그동안은 너무 수동적이었다.
그 제국이라는 붉은 개미와 벌레들에게 죽을 뻔한 게 한두 번이 아니기도 했는데 말이다.
그러니 이제는 차라리 당하기 전에 내가 쳐야겠다.
내 악업을 위해서라도.
"일단 그 빌어먹을 개미 제국부터 박멸시킨다."
그리고 그 다음은 광휘 길드 놈들이다.
['소리 없이 다가오는 악몽'과 '모든 것을 베는 천검'께서 흥미진진한 눈으로 당신을 바라봅니다.]
['한없이 베푸는 풍요'께서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당신을 바라봅니다.]
***
로키미디어 편집부.
편집부의 실세이자 기둥인 이 팀장이 갑자기 날아든 메일을 보며 분개했다.
"크악! 이 망할 작가 놈이 또 잠수 탔어!"
<유일신 OnlyGod@never.com>
: 본의 아니게 잠시 급한 일 좀 처리하고 오겠습니다. 정말정말 급한 일이어서 도저히 미룰 수 없었습니다. ㅠㅠ
원고는 이번 일만 처리하고 반드시 마감하도록 하겠습니다.
언제나 위대하신 담당님을 존경하고 깊게 따르는, 당신의 사랑하는 자까 유일신으로부터.
뚜! 뚜!
"이 망할 작가 놈아! 제발 전화 좀 받으라고!"
분개한 이 팀장은 수화기가 불이 나게 전화를 했지만, 당연하게도 놈은 받지 않았다.
옆 테이블에 있던 윤 대리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했다.
"전 팀장님이 왜 유작가에게 집착하는지 모르겠어요. 그 사람 계약 유지 시키려고 사장님하고 대판 싸우기까지 하셨죠? 아무리 첫작을 같이 하셨다고 해도 그게 벌써 10년 전인데. 후우, 우리 팀장님은 정이 너무 많으셔서 탈이라니까요."
"유일신 작가는 천재야."
"에? 오히려 반대 아니에요? 사람이 좀 모자라 보이던데. 처녀작이 대박 치긴 했지만 사실 그 이후로 변변한 히트작 하나 없잖아요?"
"넌 몰라 인마."
이 팀장은 10년 전, 초고가 담긴 연습장 뭉치를 품에 한 아름 안고 출판사를 찾아온 13살짜리 소년을 떠올렸다.
그때 그 소년의 눈동자는 지금과는 다르게, 마치 심연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 광기가 느껴졌다.
"그 사람이 만약 마음만 먹으면 정말 대단한 작품을 쓸 거다."
"저, 정말요?"
"아님 말고."
"네?"
갑작스러운 태세변환에 멍한 표정의 윤 대리를 보며 이 팀장이 금연 껌을 씹었다.
"사실 이 바닥 어떻게 흘러갈지 내가 알면 이렇게 살겠냐? 뭐든 뚜껑을 열어봐야 아는 거지. 그래서 이 바닥이 재밌는 거 아니겠나."
***
[갓메이커를 실행합니다.]
갓메이커의 세계 앤트라니아.
십만은 될 것 같은 무리들이 북쪽을 향해 이동하고 있었다.
여러 민족이 섞이긴 했지만, 그들 중 대부분은 최근에 제국에게 멸망한 흰개미 왕국의 백성들이었다.
"으으."
"아으으······."
무리는 하나 같이 행색이 남루하고 얼굴에는 병색이 완연했다.
하지만 그런데도 그들은 행군을 멈출 수 없었다.
도망친 그들을 포획하기 위해 분노한 제국의 군대가 추격하고 있었으니까.
학정을 견디다 못해 도주의 길을 택한 그들에게 자비는 없을 것이다.
굶주린 제국군에게 산채로 잡아먹히는 끔찍한 최후만이 있을 뿐.
"거의 다 왔습니다 여러분! 조금만 더 힘냅시다!"
흰개미 왕국의 장로가 유랑민들을 독려했다.
유랑민들이 향하는 곳은 마경의 숲 아우렐리아.
태고의 악신이 잠들어있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불길한 장소였지만, 지금 그들에게 희망은 그곳뿐이었다.
유일하게 저 잔악한 제국군이 정복하지 못한 곳이 바로 그곳이었으니까.
악신이 부활해서 수백만의 제국군을 몰살시켰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드드드!
그때 저 멀리서 사납게 피어오르는 먼지구름에 유랑자들의 무리가 경계심을 품으며 멈췄다.
혹시 제국군인가 긴장했지만, 뭔가 달랐다.
드드드드!
마치 신화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신의 전사들처럼 아름답고 우람한 체구를 가진 사내들이 곡물이 가득 실린 거대한 수레들을 끌고 오고 있었다.
머리에 달린 더듬이와 곤충의 꽁무니는 분명 동포의 표식이었지만, 같은 종족이라 보기에는 너무나도 달랐다.
"이럴 수가!"
"저, 저렇게 커다랗고 탐스러운 곡식이!"
유랑민들은 수레에 실린 곡식들로부터 눈을 뗄 수 없었다.
제국의 폭정으로 땅은 메마르고, 청년들은 먹이로 잡아먹혀 변변한 노동력조차 남지 않은 유랑민들에게 저렇게 탐스럽고 거대한 곡식을 보는 것은 꿈만 같은 일이었다.
드드드!
일련의 무리, 가야미족들이 유랑민 앞에 멈췄다.
"여, 여신이신가?"
"너무나 아름다우시다."
유랑민들은 넋을 잃고 가야미족의 선두에 있는 수레에 탄 여인을 올려다보았다.
새하얀 천으로 온몸을 감싼 삼등신의 여인은 백합처럼 아름다웠고, 전신에는 성스러운 휘광까지 돌고 있었다.
"헤헤, 안녕하세요! 여러분!"
여인이 양손을 흔들며 곡식이 산처럼 쌓인 짐수레에서 뛰어내렸다.
폴짝!
그 모습은 마치 천사가 지상으로 하강하는 듯한 모습과 같았······.
철푸덕!
"흐억! 성녀님!"
"아이고, 몸도 둔한 분이 왜 무리하고 그러십니까!"
가야미족들이 기겁하며 땅바닥에 대자로 쓰러진 앤티에게 우르르 몰려들었다.
하지만, 앤티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벌떡 일어나더니 검뎅이 묻은 얼굴로 환하게 외쳤다.
"저 유일신님의 신실한 종 앤티, 여러분들에게 좋은 말씀 전해드리러 왔습니다!"
좋은 말씀 전해드리러 왔습니다. (수정) 끝
ⓒ 크래커™
=======================================
구원과 재앙의 유일신
44.
"으아앙! 아파! 아파요!"
유랑민 아이가 처참하게 울부짖었다.
유랑민들은 차마 그 모습을 보지 못하고 시선을 피했다.
아이의 몰골은 끔찍했다.
양다리는 제국병에게 먹혀 사라지고 없었고, 피는 얼마나 빨렸는지 백색의 갑각이 유리처럼 투명했다.
그 모습은 차라리 죽여주는 게 오히려 자비로워 보일 지경이었다.
"아아, 가엾게도."
그때 앤티가 신음하는 유랑민 아이에게 손을 뻗었다.
"아이야, 너에게 유일신님의 가호가 함께 할 것이다. [치유하는 유일신님의 약지!]"
츠츠츠!
앤티의 손에서 눈부신 백광이 뿜어지더니 아이의 전신을 휘감았다.
그러자 고통에 울부짖던 아이의 비명이 멎었다.
"어?"
아이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더는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 자신의 하체를 내려다보았다.
그곳에는 제국병들에게 먹히고 사라졌던 다리가 새로 돋아나 있었다.
"이럴 수가!"
"기, 기적이다!"
유랑민들이 대경실색하며 기적을 일으킨 성녀를 보았다.
척!
앤티가 양팔을 허리에 올리고는 얼굴을 한껏 하늘로 치켜들었다.
"훗, 모두 보셨나요? 이것이 바로 위대하고 자비로우신 우리 유일신님의 권능이랍니다."
"오오!"
"하지만 방금 제가 쓴 힘은 그분에 비하면 티끌만한 권능에 불과하답니다! 유일신님께서는 불을 뿜으셔 수십 만의 제국군을 잿더미로 만드시고, 겨우 100명의 병사로 수억의 마물들을 제압하게 만드는 권능도 펼치셨습니다!"
"오오오!"
"여러분, 유일신님을 믿습니까?"
"미, 믿습니다."
"소리가 작습니다! 여러분! 그래서야 유일신님께 목소리가 닿겠습니까?"
"믿습니다! 믿겠습니다!"
"오오오! 유일신님! 성녀님 만세!"
유랑민들의 함성을 들으며 앤티는 뿌듯함을 느꼈다.
'매일 열심히 유일신님께 기도했던 효과가 있어서 다행이옵니다.'
유일신이 도시에 가야미족들에게 지어준 [신전].
하루 전, 그날도 신전에서 열심히 예배를 올리던 앤티는 이상한 메시지를 들었다.
[성녀 '앤티'의 신앙 경험치가 직업 획득 조건을 만족했다.]
[신관]으로 전직했다.
[보상으로 모든 신력 관련 스탯에 +2가 붙는다]
[유일신의 성녀이자 최초의 신관인 '앤티'는 유일신이 가진 치유의 권능 일부를 스킬로 쓸 수 있다.]
[사용 가능한 권능 스킬 : '치유하는 신의 약지']
샤라락~!
앤티의 전신에 눈부신 백광이 일더니, 순백의 신관복이 입혀졌다.
"앗?"
난데없는 변화에 당황하던 앤티.
츠츠츠!
동시에 그녀의 시야가 변하더니, 그녀가 그토록 오매불망 보고 싶었던 유일신의 모습이 비쳤다.
앤티의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아아, 이럴 수가! 소녀, 유일신님의 늠름한 자태가 보이옵니다!'
신계에서 유일신은 아끼는 검을 들고 무슨 의식을 치르고 계시는 듯 보였다.
-이 망할 식칼······ 아니 '검신' 진화 실행!
띠링!
[유일신님의 애검 '검신'이 당신의 능력과 성향에 맞게 진화합니다.
진화에 44,444 Gcoin이 소모됩니다.]
슈슈슉!
그러자 갓코인들이 검에 빨려 들어가며 식칼 형태였던 '검신'의 모습이 변화하기 시작했는데.
툭!
결정적인 순간, 앤티의 시야가 원래의 현실로 돌아왔다.
접신의 순간은 짧았지만, 그때의 감격을 떠올리며 앤티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유일신님과 한결 더 가까워진 듯한 일체감.
게다가 자신이 위대한 그분의 권능까지 쓸 수 있게 되다니.
'앞으로도 더 열심히 기도를 올려야지! 그럼 더 유일신님과 가까워질 수 있을거야!'
굳게 다짐하는 앤티였다.
그때 유랑민들의 대표, 흰개미 장로가 그런 앤티를 보며 눈물을 글썽였다.
"정녕 성녀님께서 5882825 공주님의 후손이시란 말입니까?"
"네. 제가 그분의 후손이옵니다."
5882825는 흰개미 왕국의 공주로 100년 전, 세상을 유랑하던 검은 부족장과 사랑에 빠져 야반도주를 했다.
공주의 피는 격세 유전을 통해 후손인 앤티에게 전해졌다.
그탓에 앤티는 다른 가야미족과는 달리 순백의 피부와 머리칼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장로가 꺼이꺼이 울음을 터트렸다.
"흐으윽! 이렇게 감격스러울 데가! 우리 왕가의 피가 아직 끊기지 않았군요!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흰개미 왕족들은 제국병들에게 저항하다 처참히 살해당하거나, 제국의 귀족들에게 고급 먹이로 바치기 위해 수도로 끌려갔다.
구심점을 잃고 오직 생존만을 위해 유랑하는 그들에게, 흰개미 왕가의 피를 이은 앤티는 어둠 속에서 타오르는 한줄기 등불과도 같았다.
더군다나 굶주린 그들을 모두 먹이고도 남을 식량을 가져오시고, 중상자를 한 번에 치유하는 기적의 능력까지 가진 분이 아닌가.
"성녀, 아니 공주님!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지금도 성난 제국군이 우리를 추적하고 있을 겁니다! 한시라도 빨리 안전한 곳으로 도망쳐야 합니다!"
장로의 외침을 들은 유랑민들의 표정도 공포로 물들었다.
그렇다. 식량과 성녀의 기적에 잊고 있었지만, 그들은 쫓기는 신세였다.
하지만 그 말을 듣고도 앤티의 표정은 한 점의 변화도 없었다.
"아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츠츠츠.
"지금쯤 간악무도한 제국군에게는 위대하신 유일신님의 신벌이 내리고 있을 테니. 크크큭!"
스스슥.
앤티의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시뻘겋게 변했다.
"헉! 또, 또 시작이시다!"
가야미족들이 주춤주춤 뒷걸음쳤다.
앤티가 광신 어린 목소리로 외쳤다.
"사악한 제국군 놈들에게 광기! 혼돈! 파멸의 신벌이 내리리라!"
고오오!
앤티의 몸에 눈부신 광휘 대신 검은 오러가 피어올랐다.
가야미족들이 이마에 달린 더듬이를 파르르 떨었다.
최근 너무 무리해서 기도를 올리신 탓일까?
성녀님께서 조금 이상해지셨다.
***
'잰 또 왜 저러나?'
나는 고민 어린 눈으로 앤티를 내려다보았다.
'눈먼 신의 눈'으로 감정한 앤티의 머리 위에는 조금 전 보았던 [성녀이자 빛의 신관] 표시 대신 다른 게 있었다.
[타락한 성녀이자 어둠의 신관 '앤티']
타락한 성녀에 어둠의 신관이란다.
'애가 점점 맛이 가고 있는 거 같은데. 설마 나 때문인가?'
내가 요즘 악업을 올리고 있어서 앤티한테도 영향이 가고 있는 건가?
에휴, 아무래도 이번 일만 끝내면 착한 일 좀 해서 선신 타이틀 랭크나 좀 올려놔야겠다.
-유일신님! 제국군을 발견했사옵니다!
"오, 찾았냐."
백호의 외침에 난 재빨리 화면을 전환했다.
본래 초기에는 던전 밖으로는 이동할 수 없었지만, 내 신도인 가야미족들과 함께라면 가능했다.
사전에 가야미족 애들을 몇 명 풀어서 사방에 정찰을 보냈었다.
그 중 백호가 있는 쪽으로 놈들이 나타난 모양이다.
-전군 돌격! 노예 놈들이 근처에 있을 것이다!
-킬킬킬, 먼저 먹는 놈이 임자다!
우르르르르!
과연 백호의 말대로 저 멀리 대지를 시뻘겋게 물들이며 전진하고 있는 제국의 붉은 군단이 보였다.
대부분은 개미였지만 다른 곤충들도 일부 섞여 있었다.
난 손을 으득으득 풀었다.
"좋아, 여긴 내가 맡을 테니 넌 물러나 있어라. 백호."
그러자 백호가 길쭉한 얼굴을 마구 저었다.
"아닙니다! 소인 백호! 이곳에 남아 유일신님의 위대하고 장엄한 전투를 이 두 눈에 새겨 노래로 만들 의무가 있사옵니다! 오오, 저는 벌써 느껴집니다! 제 하트에서 꿈틀거리는 장엄한 파멸의 멜로디가! 분명 이번 노래는 대박일 것입니다! 기대해주소서!"
두렵다.
그 돼지 멱따는 노래를 또 들어야 한단 말인가.
지금이라도 악신답게 확 짓뭉개서 백호의 입을 틀어막고 싶은 욕망을 느꼈지만, 그래도 내 신도라 참았다.
어쩌다 가야미족한테 이런 이상한 놈이 나왔을까 생각하며 나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그래. 대신 멀리 떨어져 있어라. 괜히 휩쓸리지 말고."
"넵! 저는 걱정하지 마시고 유일신님의 위대하신 신력을 만방에 펼치소서!"
반짝반짝 부담스럽게 눈을 빛내는 백호 놈을 뒤로하고 미리 준비해놓았던 것을 꺼냈다.
['소리 없이 기어오는 악몽' 께서 흥미진진한 얼굴로 팝콘을 뜯습니다.]
['모든 것을 베는 천검' 께서 자기 검은 언제 쓸 거냐며 투덜거립니다.]
['한없이 베푸는 풍요' 께서 차마 못 보겠다고 양손으로 얼굴을 가립니다.]
"그럼 벌레 박멸을 시작해 볼까."
제국을 공포로 진동시킬 재앙의 서막이 시작됐다.
***
제국 수뇌부가 발칵 뒤집혔다.
"흰개미 왕국의 잔당을 쫓던 극락조 부대가 전멸했다고?"
"그뿐이 아닙니다. 마경의 숲 주변에 파견했던 부대들도 일제히 소식이 끊겼습니다!"
"마도 부대로부터의 급보입니다! 국경을 수비하던 노송나무 부대도 악신에 습격받아 전멸했다 합니다!"
"진디 왕국에 주둔한 철벽 부대 또한 습격을!"
사방에서 밀려오는 암울한 급보에 상석에 앉아있는 아라크네의 낯빛도 창백하게 변해갔다.
피해 추산은 대략 셈해도 이천만 이상!
물론 제국의 총 전력에 비하면 이 정도 피해는 대수롭지 않을 수도 있다.
만약 이것이 겨우 반나절도 되지 않은 시간에 몰살한 숫자가 아니었다면 말이다.
"히야시스 부대가 악신의 습격을 받고 있습니다! 서둘러 증원을! 헉! 무당벌레 부대 전멸!"
게다가 이 학살은 지금도 실시간으로 진행 중이었다.
우득우득!
아라크네가 앞발을 피가 날 듯 씹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설마 변방의 악신 따위가 [추악한 역병의 기수]의 저주에서 살아남았단 말인가?'
설마 천 년 이상 신위를 유지한 역병신인 그가 갓 태어난 악신 따위에게 당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무리 기도를 올려도 '추악한 역병의 기수'와 접신이 되지 않고 있었다.
'내가 그 악신의 저력을 잘못 계산했나?'
그때 회의실에 병사들이 들것에 실린 부상자를 데리고 들어왔다.
"여기 악신의 습격으로부터 살아남은 생존자가 있습니다!"
아라크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소속은?"
"극락조 부대의 보급관 땅개비입니다."
땅개비는 우람한 체구와 강력한 전투력을 가진 전사였지만, 지금은 그런 모습을 찾아보려야 찾을 수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죠? 악신이 사용한 능력은 뭐였습니까?"
아라크네가 다급하게 물었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
악신의 능력이 뭔지만 안다면 능히 대비할 수 있을 것이다.
땅개비가 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오싹!
"헉!"
아라크네와 수뇌부들은 땅개비의 얼굴을 본 순간 경악했다.
눈에는 눈동자 대신 텅 빈 어둠만이 존재하고 있었다.
땅개비가 사막처럼 비쩍 마른 주둥이를 힘겹게 열었다.
"쿨럭쿨럭! 우리는 도주한 흰개미 왕국의 노예들을 추격하고 있었습니다. 욕망으로 가득한 우리 병사들은 질세라 서로 앞 다투어 그들을 쫓았습니다. 사로잡은 노예의 고기는 자신의 소유였으니 굶주린 부대원들의 탐욕을 자극하기에는 충분하였죠.
본관은 보급부대였기에 최후미에서 식량을 싣고 부대를 느긋하게 쫓아갔습니다. 군량은 하루분뿐이었지만 걱정은 없었습니다. 어차피 곧 십만 마리의 흰개미 노예들의 고기로 충당할 생각이었으니······. 하지만 그때였습니다. 그 악신이 나타난 것이!"
타다다닥!
탈색되어 새하얗게 변한 땅개비의 갑각이 요란하게 떨렸다.
"그, 그것은 난생처음 보는 흉측한 몰골의 괴물이었습니다. 게다가 마치 거대한 산이 움직이는 것 같은 그 압도적인 크기란! 병사들에게 거인이라 불리는 나조차 겨우 그 악신의 손톱만도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우리 병사들은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곧 위대한 황제 폐하의 군대답게 용맹하게 악신에게 돌격했습니다. 무려 30만에 이르는 우리 군대의 돌격은 세상을 집어삼키는 붉은 해일처럼 장엄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하지만 악신은 그런 우리를 가소롭다는 듯 내리깔며 코웃음치더니 목에 건 기이하게 생긴 '신기'를 우리를 향해 치켜들었습니다. 그, 그러자······."
아라크네와 수뇌부들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 그러자?"
땅개비가 새하얗게 탈색된 얼굴로 늪에 빠진 것처럼 허공에 다리를 허우적거렸다.
"흐어억! 지, 지옥 밑바닥에서나 울려 퍼질 것 같은, 듣는 사람을 미쳐버리게 만드는 저주받은 광란의 선율이······!"
구원과 재앙의 유일신 끝
ⓒ 크래커™
=======================================
광신도도 신의 사랑이 필요합니다.
땅개비는 그 공포스러운 순간을 떠올렸다.
악신이 '신기'를 움켜쥔 손을 치켜들자, 난생처음 듣는 끔찍하고 기이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삐이이이이이이!
아니. 그게 진짜 단순한 소리였을까?
소리면서 소리가 아닌, 소리의 영역을 아득히 초월한 지옥의 초음(超音)!
"귀를 거치지 않고 뇌속을 직접 바늘로 긁는 듯한 그 끔찍한 소리가 울려퍼지자 용맹이 돌진하던 병사들이 갑자기 발광하며 주위에 있는 동료들을 물어뜯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재앙의 서막에 불과했습니다.
이어서 악신이 검지를 까닥이자 땅에서 짙은 독안개가 사나운 기세로 피어오르며 순식간에 군대를 집어삼켰습니다.
아아, 독안개 속에서 발광하며 죽어가는 병사들의 비명은 지옥도를 세상에 펼쳐 놓은 것 같았습니다······."
땅개비가 가슴을 쥐어뜯으며 탄식했다.
"후방에 있었던 나와 부대원들은 황급히 숨을 틀어막았지만, 그 악신이 뿜은 독무는 피부에 닿는 것만으로도 하나하나 내 동료들을 죽음의 늪으로 끌어당겼습니다.
난 온몸이 타들어 가는 고통을 느끼면서도 어떻게든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독안개와 초음에 발광하며 죽어가는 병사들을 버리고 도망쳤습니다.
그때였습니다. 그런 나를 비웃듯 끔찍한 흉소와 함께 악신의 손이 눈부시게 빛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땅굴을 파며 살았던 조상의 피가 이끄는대로 본능적으로 땅속으로 몸을 숨겼습니다.
그와 동시에 하늘이 갈라진 것처럼 천둥이 울려 퍼지며 엄청난 규모의 번개가 온 세상을 집어삼켰습니다.
내가 몇 시간 후, 간신히 땅위로 기어 나왔을 때는 30만의 규모를 자랑하던 우리 극락조 부대는 새까만 잿더미가 되어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땅개비가 텅 빈 눈두덩으로 허공을 보며 마치 늪에 빠진 것처럼 양발을 허우적거렸다.
"여러분. 절대로 그 악신과 맞서서는 안 됩니다. 도망치시오······. 날개와 다리의 기력이 다할 때까지 도망치고 또 도망쳐야 합니다······. 그것이 조금이라도 목숨을 연명하는 유일한 길······ 커헉! 우웨에엑!"
마지막 유언을 힘겹게 외친 땅개비가 온몸의 구멍에서 검은 피를 폭포처럼 토하더니 곧 절명했다.
"컥!"
"으아악!"
그뿐 아니라, 땅개비를 데려온 병사들도 갑자기 온몸을 뒤틀더니 시커먼 피를 토하기 시작했다.
아라크네가 황급히 입을 틀어막으며 그들에게서 뒷걸음쳤다.
"무, 물러나! 악신의 저주다!"
"히이익!"
모두가 공포에 질린 눈으로 황급히 그들에게서 물러섰다.
한참을 발작하던 병사들도 곧 절명했다.
하지만, 더 경악스러운 일은 그들이 죽고 난 후에 일어났다.
파스스!
땅개비와 죽은 병사의 육신이 모래처럼 바스러지더니, 불길한 기운을 뿜는 검은 원형의 금속 덩어리로 변했다.
금속 덩어리에는 실로 불길한 검은 해골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3 Gcoin(다크)을 추가 회수합니다.]
슈슈슉!
알아듣기 힘든 기이한 소리와 함께 시체 대신 남긴 금속 덩어리가 사라져버렸다.
"이, 이게 무슨?!"
"맙소사. 그 악신에게 죽으면 시체도 남기지 못한다는 건가!"
산전수전 다 겪은 수뇌부들조차 방금 일어난 기현상에 공포를 느꼈다.
심지어 아라크네조차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오한을 느꼈다.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도무지 갓 태어난 악신의 힘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사람을 광란케 하는 음파를 토하고, 극독의 안개를 뿜으며 심지어 천신(天神)들만이 사용한다는 번개까지 사용하다니.
게다가 방금 본 그 끔찍한 최후는 뭐란 말인가!
'더 강해지기 전에 처리해야 한다. 반드시!'
그 악신이 만약 신앙을 얻어 신위를 높인다면, 황제가 500년이나 걸쳐 만든 이 철혈제국의 존위를 위협할지도 몰랐다.
아라크네가 굳은 얼굴로 명령했다.
"당장 대륙 전역에 흩어져 있는 십검들과 대장군들을 모두 소집하세요!"
"네? 하, 하지만 신녀님. 국경에는 아직 호시탐탐 제국을 노리는 해저의 마물들이 남아있사온데."
"그런 사소한 일에 연연할 때가 아닙니다!"
아라크네가 분노하며 탁자를 후려쳤다.
"평생의 비원이신 신좌에 오르시기 위해 폐관 수행 중이신 황제 폐하께서 돌아오시기 전까지 반드시 저 악신의 목을 바쳐야 합니다! 분노한 황제 폐하께 불타 죽기 싫으면 당장 시키는 대로 하세요!"
"네, 넵! 신녀님!"
부산히 움직이는 수뇌부들을 보며 아라크네가 이를 갈았다.
아무리 악신이 강하다 해도 압도적인 숫자의 힘에는 어쩔 수 없을 것이다.
덜덜덜.
하지만 아라크네는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치밀어 오르는 두려움을 억누르지 못하고 애처롭게 몸을 떨었다.
한편.
회의에 참석하지 않고 창밖에서 아라크네를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아름다운 미남자, 제국의 십검 중 일인 독검(毒劍) 나바가 피가 날 듯 입술을 깨물었다.
"더러운 악신과 무뢰배 따위가 감히 나의 아름다운 신녀님의 심기를 저리도 어지럽히는가. 너희들은 용서할 수 없는 대죄를 저질렀다."
나바가 아라크네를 향해 정중히 몸을 숙였다.
"인사도 드리지 못하고 떠나는 것을 용서해주소서. 저를 너무 아끼시는 신녀께서는 제 출전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기에 이번 한 번만 무례를 저지르겠나이다. 아무 걱정 말고 제 승전보를 기다리소서. 저 독검 나바가 반드시 악신과 그 무리를 몰살시킬 테니!"
방금 악신의 경악스러운 힘을 목격했지만, 그럼에도 나바의 눈에는 두려움 한점 보이지 않았다.
악신이 아무리 기이한 권능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상관없다.
그의 공격이 닿지 않는 곳에서 친다면 그만이니.
"악신아, 먼저 네 더럽고 하찮은 신도들부터 청소해주마."
신과 신도는 불가분의 관계.
신도를 전멸시키면 악신의 힘도 크게 약해질 터였다.
이글거리는 눈으로 나바가 아름다운 호피 날개를 펼치더니, 북쪽에 있는 악신의 숲을 향해 비상했다.
***
[갓코인(다크) 3을 추가로 회수했습니다.]
[흰개미 왕국 유랑민 300,123을 영지에 받아들였습니다.
진디 왕국의 포로 131,302를 받아들였습니다.
유랑민과 포로를 '유일신교'로 포교 중입니다.
현재 진행률 69%······.]
[성녀이자 최초의 신관인 '앤티'의 포교 활동으로 인해 신앙 경험치가 한계까지 올랐습니다.]
['앤티'가 신관에서 주교로 전직합니다. '주교' 전용 스킬 [강림] 스킬을 얻었습니다.]
['일호'가 용사의 탑 9층 '어둠의 시련'을 돌파했습니다.]
['일호'의 경험치가 한계까지 올랐습니다.]
['일호'가 '용사지망생'에서 '초보(근육) 용사'로 전직합니다.]
['일호'가 용사의 탑 10층 '고독(蠱毒)의 시련' 에 도전합니다.]
['이호'의 경험치가 한계까지 올랐습니다. 병사에서 창병으로 전직합니다.]
['삼호'의 경험치가 한계까지 올랐습니다. 병사에서 궁병으로 전직합니다.]
....
....
(중략)
['백호'의 경험치가 한계까지 올랐습니다. 병사에서 군악병(軍樂兵)으로 전직합니다.]
"휴."
뿅!
난 갓메이커의 메시지를 확인하며 성장신의 가호, 박카스 버전을 따서 마셨다.
"초음파 퇴치기가 꽤 쓸 만하네."
목에 건 기기를 책상에 내려놓았다.
벌레 퇴치 기술도 많이 발전한 모양이다.
이제는 이렇게 초음파로 벌레를 퇴치하는 기계까지 나오고 말이다.
벌레만이 들을 수 있는 가청 주파수를 조작하는 원리라는데 자세한 것은 모르겠지만, 벌레 박멸에 매우 유용했다.
"미리 씨의 스킬 공유는 대략 3회 정도 사용할 수 있나."
제국 벌레들을 박멸하면서 시험 삼아 미리 씨와 스킬 공유도 해보았다.
스킬 공유는 내 신도로 등록된 자가 가진 스킬을 내가 사용할 수 있는 스킬로 현재 등록된 이는 미리 씨와 일호 둘이다.
일호의 강체가 시간제한이 있다면, 미리 씨의 뇌전 스킬은 사용 횟수 제한이 있었다.
한 번은 별 부담 없었지만, 전격을 두 번 이상 사용하면 온몸에 탈력감이 들며 현기증이 났다.
시험 삼아서 일호와 미리 씨의 스킬 공유를 한꺼번에 할 수 있는가도 시험해보았는데.
[경고! 신력이 부족합니다!]
[최하급 신의 신위로 자기보다 강한 신도들과 '스킬 공유'를 무리하게 중복 사용하다가는 자칫 육신이 붕괴될 수도 있습니다!]
갓메이커가 살벌한 경고를 보냈기에 황급히 스킬 공유를 취소했다.
육신이 붕괴한다니······.
아직은 스킬 공유는 한 명씩 사용하는 게 좋을 거 같다.
그런데 좀 걸리는 게 있다.
"미리 씨는 그렇다 쳐도 일호가 나보다 세다고?"
물론 내 아낌없는 후원, 즉 갓코인 지랄로 성장신의 가호 시리즈를 물처럼 퍼마신 일호는 탑에 처음 올랐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해졌다.
하지만, 그래도 일호는 원래는 개미잖아?
게다가 나도 요즘 열심히 훈련하고 있는데 그런 내가 일호보다 약하다는 건 뭔가 인간이자, 신으로써 자존심이 좀.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 오류가 틀림없어.'
문득 일호 녀석 생각이 났다.
'그러고 보니 10층에 도전하고 있댔지? 9층은 혼자서 잘 통과했나 보네?'
용사의 탑 9층은 '어둠의 시련'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10층의 통로까지 무사히 도달하는 시련이었다.
말로는 쉬워 보이지만, 그사이에 엄청난 장애물이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균열이 말이다.
9층의 시작점에서 10층의 통로까지 대략 일호를 성인 남성 기준으로 환산할 때, 1km는 될 균열이 펼쳐져 있었다.
뭐 사이에 다리 비슷한 게 있긴 했다.
겨우 일호의 머리만한 폭의 작은 봉우리들이 듬성듬성 솟아 있었는데, 그것들의 간격도 얼추 30m (가야미족 기준으로)는 되었다.
아마 저걸 징검다리처럼 삼아서 여기를 건너라는 것 같은데, 칠흑같은 어둠속에서 그것을 성공하기에는 난이도가 너무 헬스러웠다.
당연히 일호는 추락했다.
-으아아아악! 신이시여! 저 먼저갑니다아아아!
"안 돼! 일호야아!!"
-······근유우우우욱!
이상한 유언을 남기며 끝이 보이지 않는 균열 아래로 추락하는 일호를 보았을 때 얼마나 심장이 철렁했는지 모른다.
스스슥!
그런데 잠시 후, 추락한 일호가 온몸이 아작나서 다 죽어가는 몰골로 9층의 시작점으로 돌아왔다.
아무래도 추락해서 숨이 붙어 있으면 원래의 장소로 다시 돌아오는 시스템 같았다.
"[치유하는 신의 약지]!"
띠링!
[1 Gcoin이 치유의 대가로 소모됩니다.]
나는 황급히 치유 권능으로 숨이 꼴딱꼴딱 넘어가는 일호를 되살렸다.
-감사하옵니다 유일신이시여!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성공하겠나이다!!
녀석은 몸이 낫자마자 다시 도전했지만, 당연히 실패해 추락했다.
이등신의 그 짧은 다리로 넘기에는 징검다리의 폭이 너무나 넓었다.
게다가 뭐가 보이기라도 해야 통과하지.
혹시나 도움이 될까 해서 손전등을 비춰보았지만, 바로 탑의 경고와 함께 꺼져버렸다.
[용사의 탑의 신성한 도전은 도전자의 힘만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할 수 없이 일호의 추락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10번을 넘어 100번쯤 되었을 때.
일호가 기이한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징검다리를 건너려고 시도 하기는커녕, 그냥 균열로 몸을 던지는 게 아닌가?
"야, 너 왜 그래! 미쳤냐?"
그랬더니 녀석이 진지하게 이렇게 말했다.
"신기하게 몸이 박살 나고 다시 치유될 때마다 제 근육과 뼈가 한층 단단해지는 기분이 듭니다! 이것이야말로 근육 단련의 신기원이 아니겠사옵니까! 신이시여!"
그렇게 말하며 일호가 씩 웃는데, 만약 광기에 찬 레고가 있다면 이럴까 싶은 무시무시한 모습이었다.
"아······. 그렇구나······. 음, 난 잠깐 급한 일이 생겨서 잠시 자리 좀 비울 테니 얌전히 있어라. 괜히 혼자 뛰어내리지 말고. 알았지?"
"넵! 이제 감을 잡았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옵니다!"
그렇게 잠깐 자리를 비워뒀는데 어떻게 혼자서 잘 통과한 모양이다.
"10층이 고독의 시련이라고 했지?"
고독한 미식가처럼 혼자인 고독이 아니라, 다른 고독이다.
온갖 독충들을 한 항아리에 몰아넣어 배틀로열을 벌이게 해서 단 한 마리 최강의 독물을 가진 독충을 만드는 고대 저주의 일종.
"일호 녀석, 무사하겠지?"
흉흉한 이름의 시련이라 좀 걱정이 된다.
나는 만약에 대비해서 바로 치유를 해주려는 생각에 약지를 치켜들고는 갓메이커를 실행했다.
띠링!
[용사의 탑 10층 '고독의 시련']
그러자 화면이 전환되며 마치 아마존의 밀림 같은 장소가 펼쳐졌다.
그리고.
-끼에에에엑!!
"근유우우욱! 얌전히 있거라! 이놈!"
우드드득!
자기보다 수십 배는 거대한 지네의 목을 뽑으며 광소하는 일호가 보였다.
"하하하! 위대하신 유일신님께 바칠 공물이 쌓여가는구나! 필시 기뻐하시겠지!"
일호 주위에 그렇게 머리통 없는 곤충 시체가 언덕을 이루고 있었다.
예전에 주워온 길냥이가 은혜를 갚으려고 했는지 나한테 쥐나 벌레 시체들을 종종 물어오곤 했었다.
일호 너도 그런 과였냐!
'좋아, 안본걸로 하자.'
조심스레 갓메이커를 끄고는 성장신의 가호 ver2 인 흰색 액체를 꿀꺽꿀꺽 마셨다.
"그럼 나도 이제 하던 훈련을 마저 해 볼까."
으득으득 몸을 풀고 있을때였다.
갓메이커가 울렸다.
혹시 일호가 공물을 바치는건가 싶어서 살짝 놀랐는데 그게 아니었다.
띠링!
[신도 구원 퀘스트가 발생했습니다.
<대상 '검귀(광신도)'>
유일신이여, 당신의 광신도인 '검귀'를 죽음의 위기에서 구원하시겠습니까? (Yes/No)]
광신도도 신의 사랑이 필요합니다. 끝
ⓒ 크래커™
=======================================
일은 철두철미하게
46.
[광휘 길드 의문의 테러 발생. 사상자 부지기수! 테러범은 장검을 사용하는 20대 후반의 남성으로······.]
[테러범으로 의심되는 인물은 한때 헌터 아카데미의 촉망받던 수재?]
[아카데미 동기인 S급 헌터 신유가 밝히는 테러 용의자, 일명 검귀 강검은······.]
[광휘 길드의 충격적인 정체! 각성 마약을 유통하는 블랙 마켓의 배후였다!]
이것이 현재 대한민국을 들썩이게 만드는 기사들이었다.
단 한 명이 헌터들이 득실거리는 길드를 상대로 벌이는 무차별 테러.
그 와중에 사실 광휘 길드가 악명 높은 블랙마켓의 배후라는 실체까지 밝혀졌다.
거기에 얽힌 재계의 주요 인사들도 상당해서 TV만 틀면 연신 그 이야기들로 한창이었다.
나는 뭐 생각보다 검귀가 일을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신경을 끊었었다.
그래서 지금 고민하고 있었다.
[신도 구원 퀘스트가 발생했습니다.
<대상 '검귀(광신도)'>
유일신이여, 당신의 광신도인 '검귀'를 죽음의 위기에서 구원하시겠습니까? (Yes/No)]
갓메이커에서 깜박이고 있는 이 문구.
여태까지의 패턴을 보면 지금 검귀가 목숨이 경각에 달린 위기 상황인 건 분명했다.
하지만, 내가 굳이 이 사람을 구해야 하나?
그는 미리 씨를 죽이려 한 킬러였다.
게다가 광신도라는 이상한 카테고리에 속한 그는 다른 신도들과는 다르게 내게 갓코인을 주거나 심지어 스킬 공유조차도 되지 않았다.
뭐 죽으라면 기쁜 마음으로 죽을 것이다란 괴랄한 문구는 있었지만.
거기에 미리 씨는 퀘스트 보상으로 신앙이 +100 늘기라도 했지만, 검귀의 퀘스트 보상란은.
[퀘스트 보상 : 없음]
그래, 역시 무시하자.
"회원님 운동 중에 다른 생각 하십니까?"
비만 호랑이가 내 앞에 얼굴을 불쑥 들이밀었다.
정확히는 관장이 입고 있는 호랑이 티셔츠다. 똥배가 얼마나 나왔는지 호랑이 얼굴이 한껏 옆으로 퍼져 있었다.
"자자, 힘냅시다! 회원님도 열심히 하시면 저처럼 훌륭한 몸을 가질 수 있습니다! 파이팅!"
관장이 근육이 울퉁불퉁한 팔뚝을 자랑하며 나를 독려했다.
하지만, 별 감흥이 일지 않았다.
일호 때문인가? 내 안의 근육 기준이 상당히 올라간 기분이 든다.
뿅!
목이 타서 성장신의 가호 ver3 붉은 액체를 마셨다.
"회원님, 혹시라도 이상한 약 드시면 안 됩니다. 요즘 우리 업계가 그것 때문에 말이 많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그냥 음료수에요. 레드불 아시죠?"
그래도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관장이 빈 병 냄새를 킁킁 맡았다.
나는 그런 관장을 뒤로하고 추를 얹었다.
좋아, 이번에는 벤치프레스 40킬로에 도전해보자.
"흐아압! 근육!"
['영겁의 구도자'께서 당신도 이제야 근육의 매력을 알았는가보다 흐뭇해하십니다.]
"푸훗, 겨우 40킬로 치면서 생지랄을 하네?"
"어휴 쪽팔려. 내가 저 무게 치려면 벤치프레스 잡지도 않는다."
근육질인 언더아머들이 수군거렸다.
다 들립니다, 이 사람들아.
누구는 처음부터 몸짱이었냐!
이상하다. 일호는 성장신의 가호 좀 마시고 운동하더니 지금은 불끈불끈한 근육 병기가 돼 버렸는데, 난 왜 효과가 없지?
['영겁의 구도자'께서 3대 1000도 일단 아령부터라고 조급해하지 말라고 합니다.]
['모든 것을 베는 천검'께서 검으로 베어버리면 끝인데 근육 따위는 왜 단련하냐고 투덜거립니다.]
['소리 없이 기어오는 악몽'께서 열심히 운동해서 식스팩을 보여 달라며 당신을 열렬히 응원합니다.]
['한없이 베푸는 풍요'께서 진짜 신도를 구하러 가지 않을 거냐고 울먹거립니다.]
이 스토커들, 시끄러워 죽겠다.
하아, 조용히 혼자 운동하고 싶다.
지이잉!
순간 귀에 이명이 일며 모든 것이 느려지기 시작했다.
오, 약 기운이 도는 것 같다.
성장신의 가호 시리즈 중에 Ver 3. 일명 레드불은 시간에 관련된 가호였다.
이것을 사용하면 내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본래 용사의 탑 안에서만 사용 효과를 볼 수 있다는 문구가 있었지만, 나는 탑 안에 있는 일호와 심령이 연결되어 있어서인지 효과를 볼 수 있었다.
최단 시간의 수행으로 최고의 효과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눈먼 신의 눈' 고유 권능이 발동합니다.]
'뭐지?'
그때 아무런 예고 없이 갑자기 내 고유 권능이 발동했다.
그리고, 난 '검귀'를 보았다.
***
피투성이인 처참한 몰골의 검귀가 사슬에 묶인 채 천장에 매달려 있었다.
그의 오른팔은 텅 비어 있었는데, 잘린지 얼마 안됐는지 핏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흐음~. 정말 끈질기네. 검귀 오빠."
중국 전통의상인 붉은 차파오를 입은 여자가 검귀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내 눈이 그녀를 감정했다.
<철미>
-암컷 인간이다. 사용한 지 26년 되었다.
특이사항 : 파괴신 '???'의 축복을 받았다. 꽤 쓸만한 화염을 쓴다.
"우리 같은 청부업자가 무슨 의리를 그렇게 지킨다고 그래? 솔직히 말해봐. 누가 시킨 거야? 머리가 어떻게 되지 않고서는 요한 그 사이코가 버티고 있는 광휘를 치진 않았을 텐데. 안달 나게 하지 말고 이만 불어. 응?"
철미가 매혹적인 교음을 흘리며 붉은 혀로 검귀의 귀를 핥았다.
"배후만 밝히면 죽이기 전에 내가 화끈하게 천국으로 보내줄게. 어때?"
그러자 검귀가 메마른 입술을 힘겹게 열었다.
철미가 반색하며 귀를 가까이 댔다.
"응? 뭐라고 했어? 다시 말해 봐."
"······냄새나는 더러운 아가리 치우라고 했다."
"하?"
순간 철미의 눈동자가 뱀처럼 샛노랗게 변했다.
"이 새끼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네?"
분노한 철미가 손에 쥔 가시 채찍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검귀의 몸이 채찍에 찢기며 핏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죽여라······. 내게 배후 따위는 없다······."
"하아! 하아! 하, 곧 죽어도 검귀라 이거지? 오냐! 누가 이기나 한번 해보자!"
철미가 이를 악물며 다시 채찍을 들려 할 때, 커다란 손이 그녀를 막았다.
"오빠?"
손의 주인은 2m 50cm는 될 것 같은 거인이었다.
단순히 키만 큰 것이 아니라, 온몸에 갑옷 같은 근육을 두르고 있었다.
그래, 곰 같다는 표현이 제일 적절해 보이는 남자다.
특이한 것은 동공 없이 흰자만 번뜩이는 눈이었는데, 칼자국 같은 오래된 흉터가 남아 있었다.
"사실 나는 네 배후 따위는 관심 없다. 너에게 바라는 건 단 하나. 3년 전, 네 검에 잃은 내 눈의 빚을 받아내는 것뿐!"
남자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크크크, 그러자 손등에 새겨진 해골 문신이 음울하게 웃으며 그의 팔이 비대하게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띠링!
<철두>
-수컷 인간이다. 사용한 지 31년 되었다.
특이사항 : 파괴신 '???' 의 축복을 받았다. 꽤 쓸만한 근육이다.
철미가 다급히 말했다.
"에? 진짜 죽일 거야? 요한이 제물로 삼겠다고 가급적 살려오라고 당부했잖아. 돈도 10억이나 제시했는데."
"방해하면 너도 죽인다."
철두가 보이지 않는 눈으로 철미를 담으며 음산하게 으르렁거렸다.
"누, 누가 막겠다고 그랬나 뭐. 그냥 좀 아까워서 그랬지. 우리 철두 오빠가 죽여야 마음이 풀린다면 죽여야지! 검귀를 죽이면 우리가 이 바닥에서 명실상부한 최고가 되겠네! 호호호!"
어색하게 뒷걸음치는 철미를 무시하며 철두가 주먹을 휘둘렀다.
"죽어라, 검귀."
부우웅!
공기를 찢어발기며 뻗어오는 거대한 주먹을 보면서도 검귀의 표정은 그저 담담했다.
신과 광신도의 관계로 검귀와 심령이 연결된 나는 그의 마음을 보았다.
죽음의 순간, 검귀가 떠올린 것은 요한에게 잘린 검객의 생명인 오른팔도 그를 버렸던 어머니도 아니었다.
검신(劍神).
바로 나였다.
동시에 검귀의 과거 일부가 보였다.
검귀는 네 살때 창부였던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암흑가에 팔려가, 암살자로 키워졌다.
각성한 능력이 기공계열이라 있어 주로 검을 사용했지만, 그에게 검이란 은밀하고 효율적으로 대상을 처리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
그 생각은 암살 임무를 위해 아카데미에 잠입했을 때도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내가 검신을 사용해서 검귀를 제압할 때 펼쳤던, 광기와 기교의 극점에 달한 검술.
검귀는 마치 어둠 속에서 비춘 한 줄기 광명을 보는 환희를 느꼈다.
여태까지 자신이 휘두른 검은 그에 비하면 그저 도축장의 칼질에 불과했다.
검귀는 열망했다.
자신도 저렇게 검을 휘두르고 싶다.
그저 죽이기 위한 살검이 아니라, 보는 이를 매혹시키고 심지어 가치관마저 변화시키는 검신님의 검을 티끌만큼이라도 닮고 싶었다.
하지만, 그 꿈은 이룰 수 없게 되었다.
'검신님, 부디 옥체보존하소서.'
검귀는 죽음의 순간에도 나를 걱정했다.
나에 대해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기이한 사술로 자신의 팔을 베어버린 사도 '요한'이란 남자는 나조차도 위험할지 모른다고 우려하고 있었다.
'검신님의 방패가 되지 못하다니 원통하구나.'
그걸 보는 나는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미리 씨를 죽이려 한 살인마 주제에······.
철두의 주먹이 검귀의 머리를 바수려던 찰나.
"[짓뭉개는 신의 검지]"
부우웅!
철두의 주먹이 공허하게 허공을 갈랐다.
텅 빈 동공이 아래로 향했다.
"······누구냐? 넌. 어디서 갑자기 튀어나왔지?"
사슬이 풀리며 바닥에 널브러진 검귀가 어안이 벙벙한 눈으로 날 올려다보았다.
"거, 검신님?"
뒤늦게 갓메이커의 메시지가 들렸다.
띠링!
[운명개변의 대가로 100,000 Gcoin을 소모합니다.
선신 타이틀 <자애로운 구원자(C)>와 유일신이 창조한 '세컨문' 의 효과가 맞물려 '대단한 기적'이 발동합니다.]
['한없이 베푸는 풍요'께서 흐뭇한 얼굴로 당신을 칭찬합니다. 아무리 악당이라 해도 신도가 된 이상, 사랑을 베풀어 개심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합니다.]
"하아."
나는 머리를 북북 긁으며 손에 든 아령을 집어 던졌다.
그리고 혼란스러운 눈으로 날 바라보는 검귀에게 물었다.
"검귀 씨. 이제부터 착하게 살 수 있겠어요? 사람도 함부로 안 죽이고요."
"네······?"
"대답해요."
"검신님께서 원하신다면 따르겠습니다. 제 검과 목숨을 걸고······ 맹세합니다."
"좋아요."
그래, 풍요 아줌마 말대로 한 번 기회를 줘보자. 이 아줌마한테는 미안한 일도 있고 하니 한 번쯤은 말을 따라주는 것도 좋겠지.
"누구냐고 물었다!"
한편, 무시당했다고 생각했는지 철두가 금방이라도 천둥 같은 고함을 질렀다.
불과 며칠 전이라면 그의 위세에 눌려서 오줌이라도 지릴지 몰랐지만, 지금은 신기하게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나는 귀를 파며 심드렁하게 검귀를 가리켰다.
"이 사람, 주인인데요."
뭐 냉정하게 말하면 사이비 교주와 광신도의 관계쯤이겠지만.
아, 교주가 아니라 신인가.
"크흐윽! 검신님!"
그러자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 칼처럼 날카로운 사내가 울음을 터트렸다.
이 말 어디에 감동 포인트가 있는 거지?
"하!"
철두가 동공 없는 눈을 번뜩이더니 순식간에 내 머리를 움켜쥐었다.
얼마나 손이 큰지 내 머리가 다 가려질 정도였다.
"웃기지 마라! 제법 잔재주는 있는 모양이다만, 아무 힘도 느껴지지 않는 너 따위 피라미가 감히 검귀의 주인이라고?"
왜 이렇게 과민반응이지? 검귀한테 열등감이라도 있나?
철두가 손에 힘을 주기 시작했다.
으득! 으드득!
"이대로 머리를 터트려주마!"
철두가 손에 힘을 주기 시작하자 엄청난 압력과 함께 머리가 박살 날 것 같은 끔찍한 고통이 밀려왔다.
아, 원래대로라면 그렇게 됐겠지.
"이, 이게!"
철두가 당황하며 내 머리에 다른 손마저 얹고 힘을 주기 시작했다.
얼마나 힘을 쓰는지 그의 안색이 달군 쇠처럼 시뻘겋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끄으윽!"
"오빠? 뭐하는 거야? 바위도 맨손으로 으스러뜨리는 사람이."
"닥쳐! 네 눈엔 내가 장난하는 것처럼 보이냐!"
내 스토커들이 단기간에 강해지려면 악업을 올리라고 조언했었다.
그때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몰랐다.
사실 개미 한 마리를 죽여 봐야 갓코인(다크)은 겨우 1 밖에 얻을 수 없다.
반면에 신앙을 얻으면 그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갓코인(화이트)을 얻는다.
그렇다면 악신의 방식은 참으로 비효율적이지 않은가?
아니었다.
이천만이 넘는 제국군을 학살하자 악신 타이틀인 <잔혹한 학살자>의 랭크가 C로 올랐다.
그리고 그것의 진정한 기능이 깨어났다.
[대학살로 <잔혹한 학살자>가 D랭크에서 C랭크로 업그레이드되었습니다.
대악신 [살육과 광기의 전쟁]께서 당신에게 '학살의 가호'를 내립니다.
'학살의 가호'
-파괴하라, 죽이고 또 죽여라! 그렇게 쌓은 악업이 그대의 힘이 되리라!]
"악신 타이틀 '잔혹한 학살자(C)' 장착."
츠츠츠!
그러자 내 눈동자가 마치 앤티처럼 붉게 물들더니, 마치 세상이 발아래 있는 것 같은 오만함과 함께 전신에서 힘이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벌레야, 아직도 내가 피라미로 보이나?"
"뭐, 뭐냐! 이, 이 힘은?"
철두가 식은땀을 비처럼 흘리며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너, 넌 대체 누구냐!"
잔인하게 웃으며 주먹을 쥐었다.
"악신 유일신."
쾅!
경악하는 철두의 명치에 내 주먹이 포환처럼 박혔다.
일은 철두철미하게 끝
ⓒ 크래커™
신도 가끔은 직접 영업 뜁니다
"커헉! 컥!"
내 일격을 정통으로 맞은 철두가 비틀거리며 몇 걸음이나 뒷걸음쳤다.
"허억! 허억!"
거친 숨을 헐떡이는 철두의 입가에서 붉은 피 한 줄기가 주륵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런데도 그는 쓰러지지 않았다.
"어, 왜 안 쓰러져?"
악신이라고 실컷 분위기 잡았는데 무안하게.
제국군을 2천만 마리 넘게 잡았는데도 아직 악업이 모자란가?
"유일신?"
철미가 뭔가 곰곰이 생각하는 얼굴을 하더니 반색하며 소리쳤다.
"앗! 바로 너구나! 요한이 현상금을 무려 100억이나 걸고 잡아 오라던 인간이!"
그러더니 철미가 날 황금 돼지 보듯 반짝거리는 눈으로 보며 뱀 같은 혀로 입술을 사악 핥았다.
"오호호, 제 발로 복이 굴러들어 왔네! 넌 내 거야!"
-'소리 없이 기어 오는 악몽'이 당신은 내 거라며 씩씩거리십니다.
저기 악몽 스토커 씨, 우리 낄끼빠빠 합시다.
검귀가 가쁜 숨을 헐떡이며 내게 말했다.
"하아하아! 검신님, 방심하지 마십시오. 놈들은 암살 업계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강자들.... 게다가 요한의 마약으로 전보다 훨씬 더 강해졌을 터. 지금이라도 검을 쓰셔야...."
그런 검귀의 말을 들었는지....
들썩들썩!
내가 등에 맨 백팩이 요란하게 움직였다.
난 얼굴을 찌푸렸다.
야, 네가 아무리 그래도 내가 널 쓸 것 같아?
자칭 '검신' 님께서는 식칼일 때도 지랄 같았지만, 진화시키고 나니 그 지랄이 한층 더 업그레이드되었다.
절대 안 쓴다.
"크아악!"
철두가 짐승처럼 포효했다.
"이놈! 감히! 검귀도 아닌 너 따위가 감히 날!"
"철두 오빠?"
우우웅!
철두의 주먹에 눈부신 백색의 기운이 맺혔다.
"크아아! 죽인다! 죽여 버리겠어!"
"잠깐, 오빠! 죽이면 안 돼!"
철미가 황급히 철두를 말리려고 했지만, 그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띠링!
-철두 스킬 '파석(破石)' 사용한다.
내 눈이 반사적으로 철두가 지금 쓰려는 기술을 감정했다.
파석이라니 돌을 깨뜨리는 스킬인가?
'거참, 광산에서 일하기 좋은 스킬이네.' 하고 생각할 때, 철두의 주먹이 내 머리를 후려 쳤다.
콰드드드득!
뼈가 박살 나고 으스러지는 소리가 끔찍하게 울려 퍼졌다.
물론 내 머리에서 난 소리는 아니었다.
혹시나 해서 미리 스킬 공유를 해 두었기 때문이다.
띠링!
-가야미족 용사 지망생 '일호'의 스킬 '강체(鋼體)'를 공유합니다.
일호 이 돌대가리, 아니 강철 대가리 녀석. 어떻게 때리는 주먹이 부서질 수가 있지?
"으아악! 내 손! 내 손!"
바스러진 주먹을 움켜쥐며 비명을 지르는 철두를 보자니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한참 올려다봐야 하는 높이에서, 일호의 강체 스킬로 근육질로 변신하자 이제는 적당한 높이 차가 되었다.
시험 삼아 아까처럼 철두의 명치를 주먹으로 적당히 쳐 보았다.
퍼버벅!
"꾸에에엑!"
그러자 철두의 몸이 폴더처럼 기역 자로 획 접히더니, 전기에 감전된 듯 온몸을 파르르 떨며 축 늘어졌다.
설마, 진짜 일호가 나보다 센 건가?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을 때, 성난 철미의 고성이 울려 퍼졌다.
"너! 네가 감히 철두 오빠를! 용서 못 해!"
찌지직!
철미가 갑자기 치파오 하단을 북 찢었다.
그러자 눈처럼 새하얀 피부에 계곡처럼 시원한 각선미가 드러났다.
남자의 슬픈 본능 탓에 나도 모르게 그것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는데....
스스스스!
허벅지에 새겨져 있던 해골 문신이 스산한 검은 빛을 뿜기 시작하더니, 뱀 같은 비늘이 철미의 몸을 시커멓게 뒤덮었다.
화르르륵!
마치 뱀이 자기의 몸보다 커다란 먹이를 삼킬 때처럼, 흉하게 찢어진 철미의 아가리에서 시뻘건 불꽃이 맺혔다.
내 눈이 그것을 감정했다.
-철미 스킬 '이무기의 숨결' 사용한다.
"꺄아아아아아!"
단말마의 비명 같은 괴성을 지르며 철미가 불꽃 폭풍을 토했다.
내 시야가 온통 붉게 물들었다.
철미의 특이 사항 평가는 꽤 쓸 만한 불꽃으로, 시니컬한 내 감정치고는 무척 고평가였다.
그래도 최종 근육 병기 같은 일호의 스킬을 공유한 내 몸뚱이는 저것도 왠지 견딜 수 있을 거라 생각되지만.
"쿨럭! 쿨럭!"
뒤에서 피를 토하며 다 죽어 가는 검귀는 아니겠지.
슥.
'이무기의 숨결'을 향해 나는 중지를 들었다.
퍽큐는 아니니 오해는 하지 마라.
"단죄하는 신의 중지."
푱!
그러자 내 중지에서 라이터만 한 검은 불꽃이 맺혔다.
물론 나도 안다.
이것으로 저걸 막는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 상황에서 하기엔 뜬금없는 이야기지만, 나는 내 작가로서의 장점이 발상의 기발함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검은 불꽃이 맺힌 중지를 엄지에 얹었다.
그리고.
"증식하는 신의 엄지!"
따악!
철미의 '이무기의 숨결'을 향해 튕겼다.
처음 현실에서 '증식하는 신의 엄지'를 쓴 것은 한우였다.
그때는 유기물 한정으로 증식이 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문득 내 중지의 권능에는 어떨까 실험해 보았다.
결과는 지금 보는 바와 같다.
푱! 푱! 푱! 푱! 푱! 푱! 푱! 푱!
리드미컬한 소리와 라이터 불꽃만 한 내 흑염이 엄청난 기세로 증식해 갔다.
그리고 굶주린 피라냐 떼가 피 흘리는 짐승을 뜯어먹듯 불꽃 폭풍을 순식간에 먹어 치웠다.
"뭐, 뭣?"
철미의 뱀 같은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그녀의 불꽃을 삼킨 내 흑염은 그 기세를 몰아 철미까지 게걸스레 불태우려 했다.
"꺄아악! 살려 줘!"
철미가 비명을 지르며 양팔로 얼굴을 가렸다.
따악!
순간, 나는 중지와 엄지를 튕겼다.
그러자 막 철미를 집어삼키려던 흑염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어, 어?"
쾅!
그리고 난 어리둥절해하는 철미에게 쇄도해서 철두와 마찬가지로 그녀의 명치에 주먹을 꽂아 주었다.
악신의 주먹에 성차별은 없다.
퍼억!
"꺅!"
철미의 몸도 폴더처럼 접히더니, 곧 축 늘어져 버렸다.
"영차."
게거품을 물며 기절한 철두철미 남매를 바닥에 눕히고는 일호의 스킬 공유를 해제했다.
스스스슥.
내 몸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원래대로 돌아왔다.
자, 그럼 일단 이 사람들을 좀 묶어 놔야겠는데.
마침 신의 상점을 둘러보다 눈여겨보았던 게 하나 있었다.
[세계를 휘감은 뱀의 로프 세트(중급 신)]
카테고리 : 공용 소모 아이템
구매 금액 : 100,000Gcoin
구매를 누르자 갓메이커에 적립된 10만 코인이 사라짐과 동시에 뱀 비늘로 엮어 만든 듯한 로프가 튀어나왔다.
[세계를 휘감은 뱀의 로프]
멸망의 뱀의 신력이 응축된 비늘로 만든 로프로 속박한 자의 힘과 마력을 봉인한다.
특이 사항 : 끝내주게 질기다.
확실히 엄청 가볍게 질겨 보였다.
그걸로 철두철미 남매를 꽁꽁 묶어 놓았다.
뭐, 내가 살인귀도 아니고 이렇게 묶어 놓고 경찰한테 신고하면 알아서 처리해 주겠지.
"여, 역시 검신님...!"
어디서 부담스러운 시선이 느껴진다 했더니, 검귀가 경탄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설마 맨손으로도 이렇게 강하시다니! 인간을 아득히 초월한 인외의 육체!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피를 철철 흘리는 전직 킬러의 광신 어린 눈빛은 심히 부담스러웠다.
검귀의 마음을 읽은 나는 그가 검에 대해 어떤 경의를 품게 되었는지 너무나 잘 알았다.
단신으로 암흑가의 거대 조직―뭐 그땐 그런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을 치라고 한 건 나다.
그 와중에 검객의 생명인 오른팔을 잃었음에도, 여전히 주인을 바라보는 도베르만 같은 눈으로 날 보고 있다.
양심이 조금 찔린다.
"하아, 가만히 있어 봐요."
"네?"
나는 약지를 검귀를 향해 겨눴다.
현실의 사람에게 써 보는 건 처음이지만, 잘되려나?
"치유하는 신의 약지."
그러자 눈부신 백광이 검귀를 감쌌다.
-치유 대상 '검귀'의 인과율을 계산합니다....
-최하급 신 유일신의 신도이자, 제8위계 하급 종족으로 신과 세계의 규율에 영향을 끼칠 수 없는 미약한 존재이다.
띠링!
1Gcoin이 치유의 대가로 소모됩니다.
스륵, 스르륵!
그러자 검귀의 상처가 눈에 보이는 속도로 치유되기 시작했다.
피를 너무 흘려 파리하던 검귀의 얼굴에도 혈색이 돌았다.
비록 잘린 오른팔이 재생되진 않았지만, 상급 포션을 먹기라도 한 것처럼 눈에 보이는 상처는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검귀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자신의 몸을 살피더니, 눈물을 글썽거리며 바닥에 머리를 쿵쿵 박았다.
"크흑! 검신님! 저 따위를 위해 이런 기적을 베푸시다니!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아무래도 이 사람, 보기와는 다르게 사극 마니아인 것 같다.
'이것 참, 묘한 기분이네.'
현실의 사람도 겨우 1코인으로 치유된다니.
뭐, 싸게 치료할 수 있으면 좋은 거긴 하지만 마음 한구석이 찝찝했다.
그나저나 이렇게 효과가 좋을 줄 알았으면 미리 씨한테도 진작 써 줄 것을.
아무래도 이번 일만 정리되면 미리 씨가 입원해 있는 병원에 가 봐야겠다.
난 검귀에게 말했다.
"몸 괜찮으면 가죠."
"네? 어디를 말씀이십니까?"
난 꽁꽁 결박된 철두와 철미를 가리켰다.
"저 사람들을 보낸 놈이 있는 곳으로."
사실 검귀를 구하러 온 이유 중에는 광휘 길드의 본거지로 바로 쳐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계산도 있었다.
실제로는 이상한 이름의 남매 철두철미만이 있었을 뿐이지만.
"거, 검신님의 힘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너무 위험합니다! 숫자도 숫자거니와 그놈들의 수장 요한은 정체 모를 이상한 능력을 씁니다!"
"검귀 씨, 그냥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죠?"
내 얼굴을 본 검귀의 안색이 창백해지더니, 고개를 조아리며 몸을 덜덜 떨었다.
"제, 제가 감히 주제넘었습니다! 검신님! 제발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거참, 내가 뭘 어쨌다고 이러나 싶어 창가의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슬쩍 보았다.
거참, 훌륭한 악신의 얼굴이네.
사실 좀 빡치기도 했다.
나한테 100억이나 현상금을 걸었다니. 행여나 이런 놈들이 돈을 노리고 내 가족이나 미리 씨에게 찾아간다고 생각하면 치가 떨린다.
그러니까 내가 직접 간다.
오늘 안에 끝을 보겠다.
***
"이곳입니다, 검신님."
검귀의 안내를 따라 도착한 곳은 우원시였다.
한때 각광받던 신도시로, 수도 이전 이야기도 나왔던 곳이다.
하지만 10여 년 전쯤인가 재앙급 균열이 열리며 지금처럼 유령도시가 되었다.
인기척 없는 폐건물들이 무덤처럼 늘어져 있었다.
"잠시만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 얼굴은 가려야지. 난 준비한 빵 봉투를 머리에 썼다.
아, 물론 눈구멍은 뚫었다.
그런데 그런 나를 검귀가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왜요? 검귀 씨도 얼굴을 가릴 게 필요해요?"
"오오, 영광입니다! 검신님!"
그러면서 넙죽 허리를 굽히며 빵 봉투를 받았다.
뭐가 영광인지 모르겠다.
아무튼, 빵 봉투를 쓴 수상한 두 남자가 폐건물 중 하나에 은밀하게 숨겨진 지하 입구에 도착했다.
낡은 폐건물과는 다르게 입구는 일체 녹슬지 않은 두꺼운 철문이었다.
쾅쾅!
문을 두드렸다.
노크는 기본 에티켓이니까.
끼기긱!
그러자 문 위에 붙어 있던 CCTV의 렌즈가 우리를 향했다.
-누구냐? 요한 사도님의 신도라면 증표를 보여라!
스피커 기능도 달려 있나 보다.
나는 최대한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려 노력했다.
뭐, 빵 봉투를 쓰고 있어서 의미는 없지만.
"안녕하세요. 유일신교에서 쓰레기분들에게 좋은 말씀 전해 드리러 왔습니다."
무한 경쟁 사회인 현대에서는 신도 직접 발로 뛰어야 하는 시대 아니겠는가.
파괴신의 사도 요한과 독검 나바
-야! 이 미친놈이! 너 누구야? 여기가 어딘 줄 알아?
내 상냥한 요청에도 여전히 굳게 닫힌 철문을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조카님이 즐겨 보던 <얼음왕국>의 OST가 떠올랐다.
애절한 마음으로 목청을 가다듬어 보자.
"Do you wanna build a snowman~?(나랑 같이 눈사람 만들지 않을래~?)"
-이 미친 ×새끼가 진짜 뒤지려고! 야! ×××! ××××!
그러자 ×로 도배된 온갖 쌍욕의 하모니가 튀어나왔다.
난 고개를 끄덕이며 주먹을 뒤로 젖혔다.
오케이, 굿바이.
콰콰콰쾅!
마치 수류탄이라도 맞은 것처럼 강철 문이 움푹 찌그러지며 날아가 버렸다.
-으아악! 저 새끼 뭐야!
쿵!
나는 부서진 철문을 발로 밟으며 검귀에게 말했다.
"갑시다."
검귀는 그런 나를 감격한 눈으로 보더니 남아 있는 한 손으로 검을 뽑았다.
"검신님!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뭐, 그러면 나야 편하지.
지하로 이어진 통로는 마치 탄광의 갱도처럼 깊고 음습한 기운을 풍겼다.
쿵, 쿵.
우리들이 아래로 성큼성큼 내려가기 시작하자....
"저 새끼 막아!"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좋은 말씀을 듣고 싶어 하는 쓰레기들이 우르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비켜라! 어딜 감히 검신님의 행차를 막는 거냐!"
검귀가 희번덕 눈을 빛내며 쏜살같이 앞으로 나섰다.
"으아악!"
"젠장! 뭐 이리 빨라!"
"사, 살려 줘!"
살 써는 소리와 함께 사람들의 비명이 아비규환처럼 울려 퍼졌다.
검귀에게 되도록 죽이지 말라고 미리 말해 놓은 것도 있지만, 상대가 테러나 벌이는 악질 사이비들이다 보니 동정심이 들진 않았다.
그렇게 쓰레기들을 하나하나 치우면서 아래로 내려가고 있을 때였다.
'윽! 이게 무슨 냄새지?'
갑자기 코를 찌르는 강렬한 악취가 밀려오기 시작했다.
마치 냉장고에 넣고 까먹은 돼지고기를 몇 달 만에 발견했을 때 맡았던 냄새와 비슷하다.
나는 곧 그 냄새의 근원지를 발견했다.
피로 그린 듯한 붉은 육망성이 그려진 문.
그것도 갓 그린 것처럼 채 마르지 않은 핏방울이 눈물처럼 흘렀다.
[제물의 방]
신에게 공물을 바치는 곳이다.
특이 사항 : 마기(魔氣)가 흐른다.
내 눈이 그것을 감정했다.
제물의 방이라니. 이름부터가 기분 나쁜 곳이다.
얼굴을 찌푸리며 문을 열어 보려고 했지만 굳게 잠겨 있었다.
"검신님, 제가 열겠습니다."
검귀가 문을 향해 검을 겨눴다.
번쩍! 쿵!
섬광이 한 번 번쩍이더니 강철로 된 문이 사선으로 베였다.
그러자 그 안에 감춰진 추악한 속살이 드러났다.
"윽."
나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바닥에 그려진 커다란 핏빛 원에 도살장의 고기처럼 엉망으로 해체된 살점들이 널려 있었다.
그것은 분명 사람의 것이었다.
게다가 그 숫자도 한둘이 아니다.
적게 작아도 백은 넘을 것 같다.
그런데 심지어 그중에는 어린아이의 것으로 보이는 작은 손도 있었다.
바드득!
나도 모르게 부서질 듯 이를 악물었다.
"귀한 손님이 찾아오셨군요."
이 지옥 같은 장소에 어울리지 않는 청량한 음성이 어둠 속에서 들려왔다.
저벅저벅.
어둠을 헤치며 한 남자가 내게 다가왔다.
허리까지 늘어뜨린 긴 머리카락과 백옥 같은 피부와 섬세한 이목구비는 여태껏 내가 살면서 본 그 어떤 인간보다도 아름다웠다.
거기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고 있지 않은 조각 같은 육체까지.
만약 그 아래에 묵직하게 덜렁거리는 살덩어리를 보지 않았다면 여자라고 착각했을 수도 있겠다.
시바, 눈이 썩는 것 같다.
변태다. 야생의 변태가 나타났다.
"조심하십시오, 검신님."
검귀의 목소리에 숨길 수 없는 긴장감이 묻어났다.
"제 팔을 자른 게 바로 저자입니다."
남자가 텅 비어 있는 검귀의 소매를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그래요, 검귀를 살려 두면 귀인께서 직접 방문하실 거라고 신께서 예지해 주셨기에 목숨은 부지해 두었죠. 아아, 과연 신께선 위대하십니다."
남자가 짧게 기도를 올리고는 곧 내게 시선을 돌렸다.
그 눈빛이 용광로처럼 이글거렸다.
"직접 뵙게 되니 확신이 듭니다. 당신 또한 저처럼 위대한 신의 세례를 받은 사도라는 것을."
띠링!
순간 내 눈이 의지와 상관없이 그를 감정했다.
['???'의 사도 요한]
수컷 인간이다. 사용한 지 29년 되었다.
특이 사항 : 파괴신 '???'의 제물 담당이다.
파괴신의 제물 담당?
그런데 '???'가 뭐야?
눈에 힘을 줘 봐도 그것의 글자가 읽히지 않았다.
"아아, 온몸이 떨릴 정도로 감격스럽습니다. 설마 동지를 만날 수 있을 줄이야."
눈물까지 글썽이며 남자가 내게 손을 뻗었다.
채앵!
순간 백광을 뿜는 검이 내게 다가오려는 남자를 막았다.
"검신님께 더 이상 접근하지 마라!"
"쯧."
부드럽던 미남자의 얼굴이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졌다.
그가 귀찮은 듯 손을 휙 저었다.
얼쩡거리는 하루살이를 쫓는 듯한 그 손짓에....
콰콰쾅!
끔찍한 폭음이 울려 퍼졌다.
"하찮은 벌레 따위가 감히 주제도 모르고 끼어들다니."
"끄으으."
검귀가 피투성이가 된 채로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아무리 오른팔이 없더라도 검귀는 미리 씨를 제압한 실력자인데 이렇게 쉽게?
난 직감했다.
이 자식, 단순한 변태가 아니다.
졸라 센 변태다.
변태가 열에 들떠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내게 들이밀었다.
"당신께서는 어떤 신을 모시고 계시는가요? 혹시, 저와 같은 분을 모시고 계시는 건? 아아, 만약 그렇다면 얼마나 기쁠까요! 자, 어서 말씀해 주십시오! 형제님!"
난 답했다.
"유일신."
"네?"
"날 믿는다고, 이 사이비 변태 새끼야!"
그리고 스킬을 공유했다.
"스킬 공유, 일호 '강체'."
콰득! 콰드득!
내 전신이 일호가 용사의 탑에서 근학고련 한 강인한 근육으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거인으로 변해 가는 날 보며 경악하는 변태의 얼굴을 향해 손바닥을 치켜들었다.
짜아아악!
콰콰쾅!
벼락 치는 소리와 함께 변태의 몸이 종이 인형처럼 날아가며 벽에 꽂혔다.
바닥에는 변태의 입에서 튀어나온 피에 젖은 이빨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나는 피떡이 된 채 벽에 박혀 있는 변태를 노려보며 핸드폰을 들었다.
경찰에 신고할 생각이었지만 신호가 가지 않았다.
"그러면 안 되죠."
귓가에 은밀히 속삭이는 느끼한 목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뒷걸음쳤다.
피떡이 돼서 벽에 처박혀 있던 변태 놈이 어느새 내 앞에 서 있었다.
엉망이던 몸은 물론 날아간 이빨마저 멀쩡했다.
변태가 말했다.
"신의 축복을 받은 사도들끼리의 영광스러운 대면의 순간에 하찮은 벌레 따위를 부르실 참입니까? 한 번의 무례는 용서해 드리겠습니다. 자, 신의 축복을 받은 위대한 자여. 그 얼굴을 가린 우스꽝스러운 봉투를 벗고 저와 진솔한 대화를 나누어 봅시다."
그러면서 내게 다가오는데....
난 엄청난 공포를 느꼈다.
벌거벗은 놈의 아랫도리가 점점 커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혀로 입술을 왜 핥고 있는 거냐!
"으악! 저리 꺼져!"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지척까지 다가온 변태의 뺨을 힘껏 후려갈겼다.
부우우웅!
퍼어억!
그리고 대기가 비명을 지르며 변태의 머리가 수박처럼 터져 나갔다.
푸슈욱!
비틀비틀.
머리를 잃은 변태의 몸이 몇 걸음 걷다가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쿵!
'헐! 좆 됐다!'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내가 사람을 죽이다니! 힘 조절을 했어야 했는데!
"크크, 역시 검신님. 손 속에 일말의 자비도 없으신 분! 존경합니다!"
그런 내 마음도 모르고 검귀가 피투성이인 얼굴로 엄지를 척 치켜들었다.
이씨, 저 인간. 불난 집에 기름 퍼붓고 있네.
그렇게 어쩔 줄 몰라 하며 당황하고 있을 때, 머리통이 사라진 변태의 몸이 강시처럼 벌떡 일어섰다.
"도무지 대화가 통하지 않는 분이군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분명 떨어뜨린 수박처럼 박살 난 변태의 머리가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일단 제압하고 난 후에 진솔한 이야기를 나눠 볼까요?"
변태가 흰 이빨을 드러내며 늑대처럼 웃었다.
"위대한 신이시여, 당신의 미천한 종에게 힘을 빌려주소서."
스스슥.
스스스슥.
그러자 붉은 마법진이 빛나며 그 위에 놓여 있던 사체들이 늪에 가라앉듯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순간 갓메이커가 반응했다.
-파괴신 '???'가 인간 129마리를 제물로 받았습니다.
쿠쿠쿠쿵!
지진이라도 난 듯 땅이 요동치며 마법진 안에서 악의로 가득한 짐승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크르르르!
띠링!
-파괴신 '???'가 사도 요한에게 제물의 대가를 지급합니다.
"오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변태가 환희하듯 부르르 몸을 떨며 양손을 옆으로 펼쳤다.
번쩍!
콰콰콰!
동시에 마법진에서 붉은 빛줄기가 솟구치더니 그의 몸을 휘감았다.
그리고 잠시 후.
철컹철컹!
쿵! 쿵!
육중한 쇳소리를 흘리며 빛 속에서 변태가 걸어 나왔다.
놈은 아까와는 달리 몸에 가시 같은 돌기가 튀어나온 붉은 갑주를 걸치고 있었는데, 그 덩치가 일호의 강체 스킬로 변한 내 몸 못지않았다.
-크르릉!
가슴에는 입을 벌린 드래곤 문양이 새겨져 있었는데 마치 살아 있듯 그것에서 짐승의 포효가 새어 나왔다.
내 눈이 그것을 감정했다.
[파괴신의 마갑 세트(미완)]
인신 공양의 대가로 파괴신 '???'가 사도에게 하사한 공물이다.
특이 사항 : 파괴신 '???'의 권능을 일부 담은 SSS급 무구지만, 제물이 부족해 미완이다.
세계에서 단 세 점만이 존재한다는 SSS급 무구라니.
하지만 내게는 그보다 더 충격적인 게 있었으니, 미완의 마갑 세트답게 녀석의 갑주에는 없는 부분이 있었다.
투구와 그리고 그곳.
나는 이를 악물며 변태의 하반신에서 시선을 돌렸다.
"형제여, 각오하십시오!"
혈광을 뿜는 갑주를 입은 변태가 아랫도리를 덜렁거리며 내게 돌진했다.
"시바!"
아무나 저 새끼 아랫도리 좀 가려 줘! 제발!
***
한편 갓메이커의 세계 앤트리니아.
신관, 아니 이제 주교로 전직한 앤티는 유일신께서 엄지를 불끈 치켜든 문양이 새겨진 새하얀 모자를 쓰고 있었다.
주교로 전직한 앤티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한결 더 유일신 님과 가까워진 일체감도 그렇지만, 새로운 스킬이 생성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강림'.
[강림]
신실한 고위 사제만이 사용할 수 있는 스킬로, 신을 세상에 강림시킬 수 있다.
강림 유지 시간 : 60분.
앤티는 당장 스킬을 써 보려다가 행여나 유일신 님께 누가 될까 참고 또 참았다.
하지만, 유일신 님을 실제로 영접하고자 하는 욕망을 이기지 못하고 마침내 '강림' 스킬을 써 버렸다.
번쩍!
눈부신 빛과 함께 공간이 갈라지며 그가 강림했다.
그런데.
강림한 것은 유일신 님이 아니라, 행방불명되었던 일호였다.
[유일신의 임시 사도 '일호']
"왜, 왜 유일신 님이 아니라 당신이?"
"근육! 신께서는 소름 끼치도록 두려운 악신과 결전을 벌이고 계십니다!"
일호가 포징을 취하며 힘차게 외쳤다.
그는 온몸에 보기 싫은 근육이 덕지덕지 붙어 있고, 흑암처럼 시커먼 몸에는 이글거리는 불꽃마저 감돌고 있었다.
거기에 악취는 또 얼마나 심한지.
물론 동포가 살아 있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었지만, 그래도 유일신 님을 직접 뵐 수 없는 실망감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때 소환된 일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어디 가세요?"
"용사의 탑으로 돌아갑니다!"
"어차피 1시간 후면 역소환되실 텐데 굳이요?"
그러자 일호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절대 안 됩니다!"
"왜, 왜요?"
백전연마의 용사 같은 일호의 얼굴에 한순간 공포가 서렸다.
"이곳에 더 있다가는 근손실이 올까 너무나 두렵습니다!"
"네...?"
그러더니 쿵쿵거리며 신전 밖으로 뛰쳐나가는 게 아닌가.
"자, 잠깐만요! 일호님!"
앤티가 짧은 다리로 도도도 일호의 뒤를 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