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1 그래, 조금만 더 고생하라고
* * *
"그래, 다음부터는 철저하게 준비하라고."
가온의 타박에 노인은 앓는 소리를 내었다.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는 게 이러할까.
못 말리겠다는 듯 노인이 어깨를 으쓱이자 가온이 입을 열었다.
"역시 이사벨라 공립 대학에 가야 할까?"
인류 석학들이 모이는 연구 시설에 양자 컴퓨터 하나 없을 리 없었다.
때마침 노아도 같은 생각을 했으나, 고개를 저었다.
"기록이 남을 거예요. 깨끗하게 지운다고 해도 우리가 왔다 간 사실만큼은 숨길 수 없어요. 전자 마약의 내부 구조를 규명하기 위해 사용했다는 걸 들키면...."
"소란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거지."
"그리고 거기에서 조사한다고 해도 결과는 변하지 않을 것 같아요."
특이한 패턴을 발견한 노아가 해당 구조를 분석했다. 다각적으로 해석했지만, 도출되는 결론은 하나뿐이었다.
"프레스턴 교수님이 이스터 에그를 남겼다면 그건 내부가 아니라 외부일 가능성이 높아요."
"외부라면?"
"어쩌면 직접 사용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거죠. 두뇌는 효율적인 해석 도구이기도 하니까요."
뇌신경학에 정통한 프레스턴이라면 떠올릴 법한 발상이었다.
"본인의 전공을 십분 활용했다는 건가."
"아마 심층 의식의 저편에 부상하도록 준비해 놓았을 거예요."
확실히 몰래 코드 몇 줄 삽입한다고 들키지 않을 리 없었다. 노아도 말했지 않던가. 에덴은 프레스턴 외에도 여러 사람의 손길을 거쳐 갔다고.
"문제가 있다면 너무 위험하다는 거예요. 유해한 성분이 없다고 해도 이거 마약이잖아요?"
"괜찮아."
노인을 쳐다본 가온이 답했다.
"여기 유능한 조력자가 있으니까."
* * *
유니트 체어에 앉은 가온은 전자전 대비용 프로그램을 종료했다. 그에게 다가간 노인이 입을 연 건 그때.
"에덴의 지속 시간을 임의로 늘렸네. 대신 억지로 명령어를 추가한 거라 안전은 보장하지 못해."
"대신, 뇌파로 구분할 거예요, 쾌락을 느끼는 건지 고통을 느끼는 건지. 만약 허용 수치를 넘을 경우 어느 쪽이든 강제 중지할 거예요."
짐짓 엄하게 선언하는 노아.
그녀의 눈빛에는 걱정하는 기색이 가득했다.
"걱정하지 마, 그 전에 돌아올 테니."
단언한 가온이 디바이스에 패키지를 삽입했다.
달칵.
순간, 시야가 반전한다. 생전 처음 겪는 쾌감이 전신을 뒤덮은 건 덤.
하지만 가온은 그 허상에 매혹되지 않고 정신을 집중했다.
잊지 않았다.
그가 본능에 따르는 짐승이 아니라는 것도, 그리고 이스터 에그를 찾기 위해 에덴을 받아들였다는 것도.
현실을 자각하기 무섭게 자극이 멎었다.
가온의 눈에 한가득 들어온 건 별빛이 만연한 밤하늘.
환상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 아득한 개방감엔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고개를 돌린 가온은 저 멀리 빛이 명멸하는 곳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신발 굽에 닿을 듯 말 듯, 얕게 찰랑거리는 수면을 헤치며.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돌연 코끝을 찌르는 혈향에 가온은 발걸음을 멈추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끈적하고 선명한 빛깔.
어느샌가 맑은 개울물은 짙은 핏물로 변해 있었다.
그 끝에는 각기 다른 모습으로 죽은 청년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자상, 창상, 열상, 내상,
화상, 교상, 동상, 좌상,
관통상, 타박상, 파열상, 절단상.
온갖 방법으로 훼손되었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그건 바로 얼굴. 모두 동일 인물이었다.
'나?'
그래, 일찍이 경험했던 죽음이 산을 이루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눈에 띄는 건 시체를 왕좌 삼아 앉아 있는 검은 짐승이었다.
근육의 결이 고스란히 드러날 정도로 발달한 신체. 그 위를 아우르는 건 전신 갑주처럼 딱딱하고 매끄러운 갑각이었다.
특히나 놈의 관자놀이에 돌출된 두 개의 뿔은 칼날처럼 날카로워 보였다.
정상에서 허리를 곧게 편 괴물이 오연하게 입을 연 건 그때였다.
"어서 와라, 폐품."
인간과 발성 기관 자체가 달라서 그런지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귀에 눌어붙었다.
블랙마켓에서 오웬이 했던 말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건 그 순간.
'더구나 그 쾌락이 어찌나 강렬한지 새로운 자신을 마주할 수 있게 된다더군.'
떠올릴 수 있는 단어는 하나였다.
바로 이중인격.
흥미롭지만 놀라울 건 없는 소재였다. 더구나 이곳은 심층 의식이지 않던가. 다른 사람보다 배는 되는 삶을 살아온 만큼 자각하지 못한 부분이 있을지도 몰랐다.
가온은 동요도 하지 않은 채 되물었다.
"왜 내가 폐품이라는 거지?"
"문명의 끝을 보는 게 허락되었지만 정작 본인은 새로운 생명을 잉태시킬 수 없지. 그야말로 불완전한 폐품이 아닌가."
공격적이면서도 직설적인 화법.
그래, 기나긴 세월을 살아온 가온이지만 그에게는 자손이라 부를 만한 존재가 없었다. 하지만 거기에 대해 부끄럽거나 실망스러운 감상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차라리 잘되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만약 혈육이 불로불사라면?
그만큼 골치 아픈 것도 없었다.
"내 심층 의식께서는 골이 많이 나셨네."
"있는 그대로를 말했을 뿐이다. 네 존재 의의부터 삶의 방식까지 모두 하찮으니까. 지금도 그렇다. 대체 여기에서 뭘 하고 있는 거지?"
"조사?"
"약자들이나 구하면서 자기만족에 빠지겠다는 건가. 그렇게 살아서 네가 이룰 수 있는 건 뭐지?"
염세적이고 독선적이기 그지없는 성격.
어딘가 모르게 익숙한 모습이었다.
그래, 마치 삼백 년 전의 자신을 보는 듯했다.
검은 짐승의 주장은 설익다 못해 풋내가 날 정도. 어떤 면에서는 그리워질 지경이었다.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 과거가 떠오르는 듯했으니.
"왜 일방적인 희생이라 해석하는 거지? 세상일은 모두 마음먹기 나름이잖아."
인간이 괴롭고, 분하다 여기는 건 태어난 후에 주입된 편견 때문이었다. 무엇이든지 나라는 개체를 우선시해야 생존에 유리하니까.
만약 맨 처음 희생과 선의에 대해 배웠다면 멀리 돌아갈 것도 없이, 득도했을 터.
검은 짐승이라고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본능을 거스르면서까지 남을 우선시해야 할 필요도 없지. 사람들은 그걸 위선이라고 부른다."
"인생이라고도 부르지."
잊어서는 안 되는 게 토마스의 선의로 신분을 얻었고, 노승의 호의로 고류 무술을 익혔다.
더 먼 시점, 그러니까 3차 세계 대전 당시엔 함께 작전에 투입된 특수 부대 요원들에게 생존하는 비법을 전수받았다.
그중 하나라도 없었다면 이 자리에 가온이라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았을 거다.
먹는 것, 입은 것, 자는 것 모두 다른 누군가에게 빚을 지며 살아간다. 삶이라는 게 그러했다.
그런데도 양보하기 싫다는 건 강박이요, 죄악이었다.
받은 만큼은 베푼다.
그게 중도.
가온이 추구하는 가치였다.
"아, 고작 심층 의식에게는 어려운 이야기였나?"
제 특질을 이해했을 때부터 정신 수양에 매진했다. 오랜 시간 살아간다는 건 자아 성찰의 연속이었으니.
자멸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중심을 잡아야 하는 건 필연이었다.
그렇기에, 가온에게는 검은 짐승의 질타가 아프게 들리지 않았다.
"언젠가 너는 홀로 남게 될 운명이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종의 굴레에서 벗어났다는 건 그런 뜻이니까."
예언과도 같은 선포에 가온은 침묵을 고수했다.
흔들린 게 아니었다.
눈앞의 상대가 에덴이 불러온 망상에 불과한 건지 아니면 불로불사의 근간이 되는 자아인 건지 모호해서였다.
전자라면 의심암귀에 빠졌다 자평할 수 있을 테고, 후자라고 한다면―
'루카스가 할드를 끌어들인 이유를 설명할 수 있지.'
히로가 보다 완벽한 전자 마약의 완성을 위해 프레스턴을 끌어들였듯이 루카스 또한 따로 무언가를 이루고 싶었던 게 틀림없었다.
그게 메타 휴먼과 긴밀한 연관이 있을 거라는 건 두말할 것도 없었다.
가온이 겪고 있는 상황이 그걸 방증했다.
"재미있네."
당연하지만 그럴듯한 건 후자였다. 진실에 근접한 것이 어느 쪽인지 물을 것도 없었다.
제 추측이 확실한 건지 검은 짐승을 계속 붙잡아 두고 설전을 벌이고 싶었으나 시간이 없었다.
"사라져."
"고작 그런 말로 내가...."
곧이곧대로 퇴장하리라고는 기대도 하지 않았다.
시체의 산을 징검다리 삼아 도약한 가온은 그대로 회전했다. 거듭되는 가속에 스트로보 현상이 격화되었다.
목격자가 볼까, 흔적이 남을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여기는 그의 의식 속.
화성에 오고 나서 처음으로 전력을 다할 여건이 형성되었다.
거물인 척 으스대봤자 본래 주인에게 대항할 리 만무.
검은 짐승이 무어라 말하는 듯했으나 가온은 듣지도 않고 극한까지 치달은 원심력을 발끝에 모아 걷어차는 것으로 답변을 대신했다.
쾅!
검은 짐승의 머리가 터지는 것과 동시에 황량한 공간이 사라지고, 익숙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저번에 한 번 방문했던 곳.
바로 프레스턴의 사무실이었다.
'어디 보자.'
이스터 에그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화이트보드에 글귀가 적혀 있었으니.
[이것의 이름은 내가 지었다, 평생 죄인으로 살자는 마음가짐으로]
아마도 이것이란 건 에덴을 칭하는 것일 터.
설마하니 프레스턴이 작명까지 한 줄은 몰랐지만, 무언가 의미가 있을 터였다.
* * *
[에덴이 그런 의미라고요? 그러고 보면 아버지가 어머니께 프러포즈했던 장소가 에덴파크라고 들은 것 같기도 하군요. 이런 정보가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요]
이스터 에그의 존재를 알린 레이이니만큼 무언가 알고 있을 확률이 높아 언질을 주었더니, 즉시 해답이 나왔다.
'에덴파크.'
확실히, 그곳이라면 에덴이 몰래 생산되어도 눈치챌 수 없을 거다. 사각지대라고 해야 하나. 놀이동산을 무대로 순찰하는 드론 또한 극히 드물거다.
"시간 내줘서 고마워."
[개의치 마세요. 이제부터는 조력자이기도 하니까요]
통화를 끝마치고 나니, 열심히 에덴을 파헤치고 있는 노아의 모습이 비쳤다. 방금 전, 접속 기록을 살펴보는 듯했다.
"이상해요. 아저씨가 에덴을 사용한 순간, 디바이스 내에 알 수 없는 신호가 감지됐어요."
"그게 무슨 소리야?"
"아무래도 내부 정보가 유출된 것 같아요."
"개인 정보 같은 건 아니겠지?"
중요한 포인트였다. 제2의 엑스가 되어야 할 수도 있으니까.
"그건 아니에요. 조금 더 근본적인 데이터였어요. BCI 계열은 아니고, 디바이스 전용 기계어 체계인 것 같은데. 대체 어떻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심각한 상황인 것 같았다.
"그래, 조금만 더 고생하라고."
해 줄 수 있는 말은 그게 전부.
"아저씨는요?"
"마무리하러 가야지."
* * *
고즈넉한 저녁.
대여한 차량으로 도로를 내달린다.
한시라도 빨리 도착하기 위해 하이퍼루프도 이용한 뒤. 서두른 보람이 있는지 얼마 가지 않아 저 멀리 에덴파크가 자랑하는 전망대, 엄브렐라 타워가 보이기 시작했다.
프로브가 울린 건 그때였다.
[조사가 끝났어]
"알아낸 거야?"
[그래, 16년 전에도 조작된 사건이 하나 있었어. 솔직히 이건 나도 놀랐어]
"뭔데, 그래."
[검은 소나기. 내 또래에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 사건이야]
그때 당시엔 No.3 돔에 정착한 뒤 적응하느라 바쁜 시기였다. 화성에서 사건이 터졌다고 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는 소리.
가온의 반응을 보고 그러한 사실을 짐작한 도비가 물었다.
[설마 몰라?]
"들은 적 있냐고 물어본다면 있긴 해. 단지, 명확하게 모를 뿐이지."
[콜로니 하나가 증발한 사건이야. 우주정거장에 도킹되어 있던 셔틀이 여럿 추락하면서 그 파편이 지상을 덮쳤거든]
072 흥미롭네
* * *
디바이스로 들어온 정보를 확인한 가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화성에 존재하는 자치구는 셀 수 없이 많았다. 누구의 것도 아닌 땅에 첫발을 내디딘 거다.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이는 없었다. 그게 설령 시정부나 이사회라고 해도 마찬가지.
일확천금을 노리고 황무지에 정착한 기업이 있는가 하면, 아예 문명과 동떨어진 생활을 구가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때문에, 시드 콜로니처럼 도시 국가라 불릴 만한 곳에서부터 마을이나 촌락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영세한 곳까지, 콜로니 개발은 규모와 용도에 따라 천차만별이었다.
검은 소나기의 무대가 된 곳은 그중에서도 탄탄한 세력을 자랑하던 중소 콜로니로, 이제 막 도시로 발돋움하려던 장소였다.
"수상한데."
여러 대의 셔틀이 대기권에서 산화한 건 물론이고, 그 파편이 탄착군을 이루었다.
원점 타격이 이루어졌다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는 상황.
[조사하기로는 전쟁이 일어난 것 같아, 그것도 콜로니가 날아갈 정도로 거대한 전쟁이]
"그래서 셔틀이 추락했다고 선동한 건가."
[당시에는 시드 콜로니 이사회가 수습에 나설 정도였어. 지금도 교과서에 실려 있을걸?]
"그 콜로니 이사회는 뭘 했길래 다른 콜로니가 간섭하는 걸 지켜만 본 거야?"
[모조리 죽었어. 말했잖아, 전쟁이라고]
"설마...."
[맞아. 콜로니 자체를 집어삼키고자 하는 세력이 전쟁을 일으킨 거야]
동시에, 도비가 그 목록을 띄워 주었다.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건지 테러범들의 이름은 수도 없이 이어졌다.
그중에서 가온은 익숙한 얼굴을 찾아낼 수 있었다.
"지네스?"
이명, 광신도.
이온 드라이브를 탈취하려고 했던 무리의 수장, 그러니까 우주여객선에서 만났던 놈이었다.
[아는 사람이야? 보니까 목이 잘렸다고 나왔는데]
아무래도 사이보그가 된 건 엑스에게 죽은 직후인 듯싶었다. 아마도 광신도로서 탄생하게 된 계기가 검은 소나기일 테지.
'화성방위군이 화들짝 놀라 사건을 덮은 이유가 있었네.'
한번 처리했던 과거의 망령이 나타났으니, 불편한 장군님들이 한둘이 아니었을 터.
[신기한 게 모두 RYQ컴퍼니라는 회사 소속이었어]
순간, RYS컴퍼니가 떠올랐다.
그래, 진짜 백가온에게서 디바이스를 적출한 것으로 짐작되는 집단 말이다. 이런 식으로 이름을 짓는 걸 보니 아마도 한 갈래에서 나온 단체일 터.
"보나 마나 유령 회사겠고. 다른 건?"
[28년 전에도, 39년 전에도 정체불명의 액터가 나타나서 사건을 정리한 정황이 밝혀졌어]
도비의 설명에 가온은 공통분모가 보이는 듯했다. 사실, 멀리 갈 것도 없었다. 하나같이 화성의 명운이 걸린 사안이었으니.
초동 조치를 취했기에 별다른 뉴스가 안 된 거지 불거졌으면 큰일이었을 터.
가온은 알고 있었다.
이렇게 활동하는 조직을.
"화성방위군인가."
이제야 진건이 맥을 짚지 못하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는지 알 것 같았다. 그 정도 체급은 되어야 시정부 소속 사냥개를 방해할 수 있을 테니.
막시무스가 꺼린 것도 이러한 연유에서이리라.
당연하지만, 이 시점에서 의문이 생겨날 수밖에 없었다.
왜 그들은 고작 전자 마약이 유통되는 것에 이리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인가.
불법 약물 취급이 심각한 범죄인 건 맞지만 화성방위군이 나설 정도로 위중한 건 아니었던 거다.
노아에게서 연락이 온 건 그때였다.
[알아냈어요]
"뭘?"
[에덴이 본래 어떠한 물건인지]
조잘거리는 노아를 따라 가온 또한 사건을 되짚어 보았다. 그녀의 주장은 빈약했으나, 맹점을 정확하게 짚는 데가 있었다.
"흥미롭네."
그거라면 화성방위군이 날뛸 수밖에 없었다.
* * *
26구역에 위치한 에덴파크에는 본디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설 예정이었다.
하지만 부지 조사 도중, 지반 침하 현상이 발견되면서 용도가 변경되었다. 보수 공사를 치르기에는 소모되는 비용이 만만찮았던 거다.
결국, 에덴파크가 들어서면서 그 자리는 동굴 탐험이라는 어트랙션으로 대체되었다. 위기를 기회로 바꾼 수익 모델이라고 해야 할까.
물론 활용하는 곳은 지하 중에서도 상층부였고, 하층부는 방치되었다. 필요 이상의 개발은 무의미할 뿐이었으니.
어차피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라 모두의 기억 속에서 잊혀졌다.
하지만 세상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장소는 없었다.
에덴파크는 26구역 내 최대 유동 인구를 자랑하는 랜드마크. 주말이나 특정 휴일이 되면 시민들로 붐비는 핫플레이스였다.
하루에 오가는 물류의 양만 해도 수천, 수만 톤.
더구나, 낮과 다르게 밤만 되면 인적이 뚝 끊겼다. 인구 밀집 지역이 아니어서 범죄가 성행하지도 않았다.
안전사고에 대비해, 비상 발전기까지 있으니 무언가를 생산하기에는 최적의 장소. 그러니 아무도 오지 않는 구석에 곰팡이가 피지 않을 리 없었다.
어트랙션 동굴 탐험 아래, 개발이 멈춘 공동(空洞).
그곳에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둥지를 틀었다.
굵은 전선과 길쭉한 파이프 그리고 그 위에 늘어선 전자 기기. 그건 지난 3년간의 결실이었다. 발칙하게도 불순한 무리는 에덴파크로 들어오는 짐에 하나둘씩 제가 원하는 부품을 끼워넣었던 거다.
다만 은밀하게 발주를 넣어야 했던 만큼 외적인 장식은 모두 배제해야 했다.
연구실 못지않은 시설을 갖췄는데도 내벽 처리가 미흡한 건 그 때문.
종유석에서 굴러떨어진 물방울이 정수리에 떨어졌지만, 남자 크로프트 쉔은 반응도 하지 않고 각지에서 날아오는 정보를 취합하는 데 집중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디바이스로 들어온 메시지에 크로프트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건 동료의 부고 소식.
안타까움보다 귀찮은 마음이 앞섰다. 그가 자금책이라는 게 생각나서였다.
"또 일이 터졌나 봐? 크로프트 박사."
경박한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온 건 그때.
목덜미에 베인 흉터가 가득한 사내, 제이콥이 송곳니가 드러날 정도로 웃었다. 안면에 새겨지는 주름을 따라 콧잔등에 걸린 선글라스가 들썩인 건 덤.
"네에, 관련자가 죽었다고 하는군요오. 역시 화성방위군에게 덜미를 잡혔나 봅니다아. 완벽했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죠오."
한없이 말끝이 늘어지니, 절로 힘이 빠지는 듯했다.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저를 놀리는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그건 오해.
그게 크로프트의 습관이라는 걸 파악한 이후에는 반쯤 포기한 상태였다.
애당초 그런 걸 지적할 사이도 아니었다.
두 사람이 맺은 건 전략적 동맹으로, 그 사이에 친분 같은 건 눈곱만큼도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프레스턴 교수를 포섭했을 때부터 결정된 일일지도 모르지. 그러니까 우리처럼 음지에서 사람을 고르라고 했을 텐데?"
"하지만 그 결정 덕분에 에덴이 예상보다 빠르게 완성되었을 텐데요오. 아무튼 여기가 발견되는 건 시간 문제겠군요오."
"아, 그렇다더군."
마치 남일처럼 말하는 듯한 제이콥의 태도에 크로프트는 디바이스에 결착된 마그네틱 케이블을 해제했다.
"그러고 보니 이곳에는 어떻게 오셨습니까아?"
크로프트조차 바깥에서 일어난 사건을 방금 들었다. 그런데 제이콥은 한발 앞서 도착한 것도 모자라 먼저 거론하기까지 했다.
이게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크로프트가 위화감을 느낀 것과 제이콥이 소매를 걷어붙인 건 거의 동시였다.
창상이 가득한 팔뚝에 컴뱃 나이프를 들이댄 제이콥이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상부에서는 이번 불놀이가 위험하다고 느꼈나 보더라고."
"여기에서 의견이 갈릴 줄은 몰랐는데 말이죠오."
"아쉽지만 어쩌겠어. 소꿉놀이는 끝이야."
"이게 얼마나 가치 있는지 저번에 설명해 드리지 않았나요오?"
에덴은 전자 마약이되, 전자 마약이 아니었다.
그 실체는 디바이스를 구성하는 독자적인 기계어 체계 해석하기 위해 세간에 흩뿌린 악성 코드였다.
다시 말해, 에덴을 남용하는 사람이 늘어나면 디바이스의 구조를 이해할 수 있는 표본 또한 증가한다는 소리.
악성 코드가 정보를 읽는 과정에서 쾌락이 발생한 건 뜻하지 않는 오류였지만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었다. 전자 마약으로서 유통할 수 있었으니까.
덕분에 예상보다 빠른 속도로 디바이스를 해석할 수 있었다. 구태여 수상한 프로그램을 설치하라고 종용하지 않아도 수많은 사람이 번호표 뽑고 구렁텅이에 빠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는, 무척이나 고무적인 성과였다.
디바이스의 근간을 파헤칠 수 있다면 그와 연결된 클라우드 컴퓨팅 플랫폼을 엿볼 수 있다는 거고, 그렇다는 건 시드 콜로니가 자랑하는 초대형 데이터 센터에도 도달할 수 있다는 뜻이 될 테니.
그래, 1구역에 존재하는 '그' 초대형 데이터 센터 말이다.
대업만 완수된다면 사회 체제 전반을 주무를 수 있었다.
"그런데도 포기하겠다는 겁니까아?"
"녀석들에게 우리의 존재를 들키지 않는 게 더 중요하니까."
루카스가 죽으면서 메가콥 마스톱과의 연결 고리도 사라졌다. 언론과 여론을 통제할 수 있는 수단을 하나 잃은 지금, 도박수를 던지는 건 옳지 않았다.
설령, 1구역에 진입할 수 있다 해도 전부 죽으면 의미 없는 짓이지 않던가.
제이콥은 메타 휴먼의 이익을 대변하는 자.
"차라리 이 자리에서 모든 게 사라진다면 놈들도 우리를 쫓을 흔적을 찾지 못하겠지."
"제이콥 씨, 진짜 미쳤습니까아?"
"어차피 절반도 완성하지 못했을 텐데."
"절반이나 완성한 겁니다아."
대치한 두 사람은 한 걸음도 물러나지 않았다.
일촉즉발의 상황.
돌연, 밖에서 탄환이 날아왔다.
크로프트의 미간이 꿰뚫린 건 한순간. 벽 뒤로 몸을 숨긴 제이콥은 즉시 고개를 올려 천장을 바라보았다.
지반 침하로 형성된 공동에는 어디로 통하는지 모를 굴이 산적해 있었다.
아마 습격한 자도 그중 하나를 타고 침입한 것일 터.
아니나 다를까, 저 멀리서 무언가 꿈틀거리는 그림자가 보였다. 하지만 제이콥은 다가가지 못했다.
총성을 들은 크로프트의 부하들이 급히 난입해서였다.
"너, 크로프트 님을?"
"아니라고 해도 믿지 않겠지."
변명도 할 수 없는 상황.
어차피 늦나 빠르나 처리해야 할 녀석들이었다.
제이콥은 컴뱃 나이프를 들어 제 팔뚝을 내리그었다.
* * *
에덴파크에 도착한 가온은 즉시 동굴 탐험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필요 이상의 물자가 소비된 것 같다는 도비의 해석이 있어서였다. 가온도 내심 점찍은 장소였다. 달리 진지를 세울 곳이 없었던 거다.
진건에게서 연락이 온 건 그때.
[방금 또 피해자가 나왔습니다]
"누구지?"
[템퍼 파커. 황금영화회, 그러니까 회계 법인의 주인입니다. 주로 륭영의 자금을 담당하는 회계사 중 한 명이기도 하고요]
"륭영이라 이거지."
4대 암부 중 하나.
루케시아 패밀리가 마피아라면 륭영은 삼합회. 그것도 꽤나 진보적인 사상에 취한 무리였다. 때문에, 기발하고 해괴한 기술을 많이 도입한다고.
직접 만나 본 적은 없지만 그들도 용의 선상에 오른 상태였다. 아니, 진건의 말로 판단하건대 지금 이 자리에서 판명된 거나 다름없었다.
073 마무리가 어설프더라고
* * *
[케이스가 모이니 알겠더군요. 엑스가 노리는 건 모두....]
"에덴과 연관된 사람들이겠지."
[역시 유능하시군요. 벌써 거기까지 눈치채신 겁니까]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오웬의 의뢰는 가만히 있어도 달성할 수 있었다. 몸소 나서지 않더라도 엑스가 관련자를 모두 도륙할 테니까.
가온은 그걸 보고 출처를 유추하면 될 뿐이었다.
하지만 그러면 놈에게 양후, 라는 누명을 뒤집어씌울 기회는 영영 얻지 못한다.
마침 진건도 함부로 조사할 수 없는 화성방위군 소속이라는 게 밝혀진 마당.
다시 없을 기회였다. 아마 이후로도 이만큼 완벽한 조건은 갖춰지지 않을 터.
거리낄 건 없었다.
저 멀리 엄브렐라 타워의 정상에서 펄럭이는 코트 자락이 보인 건 한순간.
수백 미터나 되는 거리였지만 가온의 눈은 그 궤적을 놓치지 않았다.
'역시.'
엑스도 냄새를 맡은 게 틀림없었다.
현장에 가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몸은 한 개. 놈을 쫓기 위해 전망대로 향하면 지하로는 내려갈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그곳은 진건에게 양보하기로 했다.
"에덴을 생산하는 곳은 에덴파크야. 어트랙션 동굴 탐험 위주로 둘러보면 얻는 게 있겠지."
[아니, 그걸 어떻게....]
"엑스가 먼저 습격할 수도 있으니 늦지 않게 오라고."
무심하게 통화를 종료한 가온은 등을 돌렸다. 떡밥을 던졌으니, 보채지 않아도 서둘러 올 터였다.
* * *
아말 캄의 인생은 투쟁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남들보다 작은 체구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잔병을 달고 살았다.
유전자 조작이 일상화된 시대에 그러한 체질은 이질적이었다. 간편한 시술 한 번으로 떨쳐 낼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아말 캄은 그럴 수 없었다. 돌봐줄 부모는 얼굴도 비추지 않은 채 그를 보육원에 버렸으니까.
기본 소득제의 혜택을 보았다면 그마저도 추억이 될 수 있었겠으나, 그가 태어난 건 2157년 경.
그러니까 디바이스가 적용되기 전이었다.
빙하기란 대재앙에서 홀로서기 시작한 인류에게 자애란 가상의 개념.
따라서, 아말 캄 또한 골목길에서 홀로 자생하는 수밖에 없었다. 무시당하고, 멸시당하더라도.
말라깽이처럼 비틀어진 신체와 거친 피부.
거기에 볼품없는 이목구비는 젊은 시절 그의 고민거리였다.
그래도 희망만큼은 잃지 않았다.
미래를 약속한 여인이 다른 남자를 만나 떠났을 때도, 부당한 사유로 회사에서 해고되었을 때도, 벼랑 끝에 몰려 길바닥에 나앉게 되었을 때도.
언젠가 제 재능을 펼칠 수 있는 시기가 오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래, 아말 캄은 특별해지고 싶었다.
돔 밖에서 문화재나 골동품을 찾아오는 탐사대에 합류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동상에 걸려 발가락을 세 개나 절단하고, 폐부의 일부가 손상되었지만 멈추지 않았다.
맹목적인 고행, 그 끝에서 해답을 갈구했다.
다행히도 그 노력은 얼마 가지 않아 보답받았다. 깊은 빙하 아래에서 운명을 발견할 수 있었던 거다.
상형 문자로 쓰인 고서.
일찍이 인류가 외면했던 가능성이 그곳에 있었다.
당대에 이르러서는 원본이 무엇인지 확인조차 할 수 없는 고류 무술.
그걸 통해 무예의 세계를 접한 아말 캄은 비로소 제 본성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는 남을 해치는 데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
억압된 굴레에서 벗어난 건 한순간.
강해진다는 게 어떠한 기분인지, 보다 나은 자신이 된다는 게 어떠한 의미인지 알게 된 아말 캄은 과거를 버리고 오로지 수련에만 몰두했다.
하지만 아무리 경지가 높아져도 갈증은 채워지지 않았다. 어찌 보면 당연했다. 비루한 출신이라는 과거는 어떻게 해도 지워지지 않았으니까.
연인에게 버림받았다는 이력도, 실패한 직장인이라는 꼬리표도.
그래서 아말 캄은 온전한 자신에 집착했다. 번민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화성이 개척되었을 당시, 바로 넘어간 것 또한 그러한 연유에서였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무대만 바뀌었을 뿐,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그곳에서도 아말 캄은 이방인이요, 외지인이었다.
자신을 갈고 닦으면서 얻은 건 파계승이라는 이명뿐.
화성방위군에 협조하는 건 정의 구현, 그런 게 아니었다.
아말 캄이 원하는 건 근원으로의 회귀.
다시 말해, 완전한 득도였다.
비록 비천한 출신으로 태어났으나 마지막은 그 누구보다 빛나길 바랐다.
때문에, 아말 캄은 제 행동 하나하나를 기억해 두었다. 언제 어디에서 깨달음을 얻을지 모르는 일이니.
속세로 나와 상대했던 이들 또한 마찬가지.
그래서 전망대, 엄브렐라 타워로 들이닥친 상대를 보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분명 몇 솔 전에 처리한 청년이었다.
어중간하게 자비를 베푼 것도 아니고, 철저하게 토막 냈다. 더 이상 어떻게 베어야 할지 모를 정도로.
그런데―
"어떻게 살아있는 건가?"
당혹스러운 감정을 감추지 못한 아말 캄, 아니 엑스의 말에 가온은 보란 듯이 두 팔을 벌렸다.
"마무리가 어설프더라고. 그래서 살아 돌아왔어. 저 지옥 밑바닥에서."
* * *
휘트니가 에덴파크를 주시한 건 당연한 귀결이었다. 마피아가 주기적으로 방문할 만한 장소는 아니었던 거다. 하물며 히로가 관심을 가진 때와 에덴이 유통된 시기가 서로 엇비슷했다.
결과는 보이는 대로였다.
가온보다 먼저 도착해, 한 명을 사살했다.
'내분.'
특출나게 밝은 귀로 들은 두 사람의 대화로 추측하건대, 의견 차이가 벌어진 게 틀림없었다. 그것도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방아쇠를 당기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단독으로 처리하면 오웬도 달리 볼 테니, 일거양득.
제이콥이라 불린 사내가 행동에 나선 건 그때였다.
어딘가 나사 하나 풀린 것처럼 웃은 그는 크로프트의 부하들에게 둘러싸인 즉시 제 팔뚝을 그었다.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행한 자해인 줄로만 알았다.
상처 사이로 솟구친 혈액이 사방에 흩뿌려졌으니까.
일반적인 상식을 아득히 넘어선 반응에 모두가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애석하게도 그건 오판이었다.
온갖 곳에 자리 잡은 혈액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순간, 전황은 반전되었으니.
"으아아악!"
"뭐야, 이건!"
"모두 흩어져!"
이변을 눈치챈 이들이 뒤로 물러났지만, 상당수가 제물이 된 뒤였다.
양으로 환산하자면 고작 몇 방울에 불과했으나, 효과는 지대했다. 염산이나 황산을 들이부은 것처럼 끝없이 사물을 녹였던 거다.
심지어 닦아내는 손까지 녹을 지경.
일련의 과정을 지켜본 휘트니는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제이콥의 신체 곳곳에 존재하는 흉터의 의의를.
저건 당한 게 아니었다, 당하게 한 거였다.
몸소 그은 횟수만큼 난관을 타파했을 터.
정예라 불리어도 모자람이 없는 무리가 눈 깜빡할 사이에 쓰러진 건 한순간이었다. MUG 인증을 받은 보호 장비로 무장해도 변하는 건 없었다.
혈액은 닿는 모든 걸 녹였다.
홀로 선 제이콥과 시선이 마주친 휘트니는 반사적으로 반격했다.
그에 대응하듯이 제이콥이 팔을 채찍처럼 휘두르자, 방벽처럼 펼쳐진 혈액이 탄환을 녹였다.
"내려오지 그래, 형씨. 아니면 내가 갈까?"
응수해야 하나, 아니면 도망쳐야 하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상대에게 엄청난 패가 있다는 걸 목도한 참이었다. 정면 승부는 무리. 등을 돌린 휘트니는 뒤도 보지 않고 내달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저 뒤에서 쫓아오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소싯적 휘트니의 이명은 래빗.
극미한 소음도 그의 귓가에는 천둥소리처럼 들려왔다.
규칙적인 발소리 사이로 이질적인 잡소리가 끼어든 건 한순간.
온다.
그리 직감하며 몸을 숙이는 것과 동시에 머리 위로 핏방울이 스쳐 지나갔다. 어두컴컴한 굴 속이라 명확하게 목격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추측만으로도 충분했다.
결과는 외면할 수 없을 정도로 파괴적이었으니.
쿠궁.
핏물에 젖은 천장의 일부가 녹아내린 것도 모자라 무너져 내렸다. 바윗덩어리에 길목이 막힌 순간, 휘트니는 벽을 밟고 도약해 뒤따라오는 제이콥에게로 총구를 돌렸다.
그리고 발작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거세게 방아쇠를 당겼다.
사격에 조예가 깊은 그였다.
두 발은 핏물에 녹아내렸지만 그래도 한 발은 적중했다. 하나, 마냥 웃을 수 없었다.
애당초 산성 혈액이 생성되는 건 제이콥의 몸으로, 그런 곳에 납탄이 들어박힐 리 없었던 거다.
그 증거로 제이콥의 어깨에는 긁힌 상처만 있을 뿐이었다.
"반항은 그걸로 끝?"
"그럴 리가."
다시 한번 겨냥한 휘트니는 탄창 하나를 전부 쏟아부었다. 산성 혈액이 탄환을 녹인다면, 그럴 수 없는 곳을 노리면 그만이었다.
예를 들면 그래, 눈구멍 같은데 말이다.
하지만 냉정한 판단에도 불구하고, 제이콥에게는 총격이 닿지 않았다.
길고 좁은 외길밖에 없어, 피할 공간은 협소하기 짝이 없는데도 말이다.
예상했다는 듯이 상반신을 위아래로 흔드는 모습에 휘트니는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지나니, 그 마법 같은 회피 운동의 비밀이 어디에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선글라스?"
자세히 보니 렌즈 위로 집적된 회로가 슬쩍 나타났다 사라졌다. 그 정체는 Head Mounted Display, 즉 HMD였다. 여러 관측 정보를 사용자에게 보여 주는 디스플레이 장치.
요즘에는 슬롯으로 대체하는 추세라 간과한 면이 없잖아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제이콥이 제 피를 표적에 맞추는 솜씨가 범상치 않았다. 아마 기이하리만치 높은 명중률 또한 선글라스에서 기인한 것일 터.
"그걸로 엿보고 있었나."
"아, 이거 말이지. 설마 멋내기 용이라고 생각한 거야?"
선글라스를 슬쩍 들어 올렸다 내린 제이콥이 거리를 좁히며 입을 열었다.
"내가 말이야, 이렇게 보여도 아픈 건 싫어하거든. 그런데 애석하게도 아파야만 능력을 쓸 수가 있네?"
낮게 웃은 제이콥이 제 팔뚝 위로 맺힌 핏방울을 아무렇게나 털어냈다.
"그래서 그런지 필요 이상으로 다치는 게 싫더라고, 끔찍이도 말이야."
덜컥, 멱살이 잡힌 휘트니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제이콥의 손바닥에서 떨어져 내린 핏방울이 허벅지에 닿은 순간 형언할 수 없는 격통이 전신을 내달린 거다.
치이익.
에덴을 제작하고 유통한 녀석에게 설마하니 이런 괴이한 능력이 있을 줄이야.
이건 실수였다.
알량한 경험으로 세상을 바라본.
공로를 독점할 판을 짜느라 시간을 허비할 게 아니라 만약의 사태에 대비했어야 했다. 그게 옳았다. 하지만 반성하기엔 이미 늦었다.
제 마지막을 직감한 휘트니가 두 눈을 질끈 감은 순간―
"이건 또 유별난 조합이군요.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동굴에서 남자 둘이서 땀내 나게 서로 부둥켜안고 있다라."
제삼자의 목소리가 동굴을 강타했다.
휘트니와 제이콥은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상상하지도 못한 사람이 나타난 거다.
주름 하나 없는 정장과 깔끔하게 넘긴 앞머리. 그리고 가늘게 뜬 실눈.
머리부터 발끝까지 현장직보다 사무직에 더 어울리는 인상이었다.
"보아하니 같은 편은 아닌 것 같군요."
가온의 말대로 에덴파크가 자랑하는 어트랙션, 동굴 탐험 아래에서 묘한 열원을 포착한 진건은 곧장 지하로 내려왔다.
그리고 처음으로 목격한 게 바로 이 광경이었다.
인과 관계를 파악할 수 없지만, 둘 다 일반인이 아니라는 건 자명해 보였다.
074 이건 내 죽음에 대한 복수야
* * *
"혹시 에덴과 관련된 분은 누구십니까? 자백하면 절충해 드리겠습니다."
여유로운 걸음걸이 그리고 느긋한 태도.
이 세상에서 이러한 부류는 많지 않았다.
진건의 정체를 짐작한 제이콥의 입가가 뒤틀렸다.
"너, 짭새구나."
"그런 별명은 좋아하지 않습니다만."
이미 휘트니는 관심 밖이었다. 공찰까지 직접 왔다는 건 에덴에 대해서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게 되었다는 뜻일 테니.
휘트니를 내던진 제이콥은 즉시 컴뱃 나이프로 전완부를 베었다.
깊고, 길게.
이건 일종의 퍼포먼스였다. 대부분의 사람은 행위에 집중하지, 그 뒤에 다가올 미래는 생각하지 않았던 거다.
하지만 이게 웬걸.
팔을 휘저어 핏방울을 흩뿌리기도 전에 상대는 저 멀리 물러난 상태였다.
"뭣."
뒤늦게나마 날아간 피는 애꿎은 벽면만 녹일 뿐.
"애시드 블러드, 산성 혈액입니까."
처음 접하는 타입의 이능이었지만, 진건에게는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았다. 경지에 도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직감은 그에게 다가오는 위험을 사전에 경고했으니까.
더구나 가온이 한 소년을 잡으면서 감염자가 뒷세계에서 암약하고 있다는 정황까지 포착한 상황.
이번에도 그러지 말란 법은 없기에 긴장을 늦추지 않았고, 철저한 준비는 곧 결과로 나타났다.
물론 제이콥이라고 멍청하게 관망하지 않았다. 신체에 빼곡한 흉터가 말해 주듯 그 또한 수많은 사선을 넘나든 전사.
진건이 범상치 않은 상대라는 걸 파악한 즉시 반대편 팔에도 상처를 내었다. 산성 혈액을 토해내는 통로가 하나에서 둘로 늘어난 건 한순간.
양팔을 X자로 교차한 제이콥은 전방을 향해 응축한 힘을 풀어헤쳤다.
동시에 촤악 하고 수많은 핏방울이 튀어 올라 자그마한 굴을 뒤덮었다.
개방된 공간이라면 모르나, 협소한 장소에서는 지극히 효율적인 수.
저마다 불규칙적인 궤도를 그리는 핏방울은 탄도처럼 계산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감지 센서의 힘을 빌린다고 해도, 보호 장비를 갖춘다고 해도 마찬가지.
하지만―
"2단계 감염자입니까, 하긴 한창 즐거울 시기죠."
진건은 위축되지 않고 앞으로 걸어갔다. 당당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으나, 휘트니에게는 자살 행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눈을 감고 외면했건만, 이게 웬걸.
시간이 지나도 비명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다시 보니 오히려 거리가 좁혀진 상태.
"너...."
평범한 공찰이 아니라는 걸 눈치챈 제이콥이 나지막이 으르렁거렸다.
어렸을 때부터 질리도록 들은 무리였다. 메타 휴먼만 잡아들이도록 편성된 시정부 직속 특수 부대, 비상 재해 대책반.
"특별해진 기분이 들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은 죽어도 못 쓰는 이능을 발휘할 수 있으니까요. 그것도 마음먹는 것만으로. 어쩌면 세상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고 있다 생각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모두 착각입니다. 당신들은 인간이 아닌 짐승입니다. 제게 주어진 힘에 취한."
"설교라도 하려는 거냐."
"그럴 리가요. 저는 사실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은 날 때부터 인간과 양립할 수 없는 부류입니다."
단정 짓는 어투에 제이콥의 고개를 삐딱하게 꺾였다.
그러고 보니 비상 재해 대책반과 맞부딪친 메타 휴먼들은 하나같이 적개심을 드러냈다. 논리나 이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게.
그때는 이레귤러를 처리하기 위해 공권력을 동원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기득권층에 대한 반발인 줄로만 알았지만, 직접 보니 알겠다.
메타 휴먼을 죽이겠다는 시정부의 의지는 맹신을 넘어 광신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증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누구 마음대로 단정 짓는 거지? 너희에게는 우리가 인간으로도 보이지 않는다는 거냐?"
"여러분은 격리, 아니 처분되어야 합니다. 안타깝게도 그게 답입니다."
"개소리 집어치워."
"진실을 아는 것도 썩 즐겁지 않군요. 제가 밝히지 않더라도 이 정도는 스스로 깨달아야 할 텐데요."
"닥쳐어!"
광분한 제이콥이 핏물을 흩뿌렸으나, 진건에게는 한 방울도 닿지 않았다. 마치 어디로 튈지 알고 있다는 듯 제이콥이 두 팔을 휘두르기도 전에 자리를 옮겼던 거다.
그것도 두 박자 먼저.
제삼자가 본다면 상대를 위해 광대 노릇이라도 자청하는 거냐며 질타를 들을 테지.
제이콥으로서도 미칠 지경이었다.
원인이 생기기도 전에, 결과가 정해지는 거다.
불합리하기 짝이 없는 상황.
진건이 권총을 집어 든 건 그때였다.
그가 애용하는 총기는 펀더멘탈 락의 듀드.
화약 추진에 자기 가속까지 겸한 제품으로 휴대하기 편하면서도 화력까지 챙긴 명품이었다. 그래서 생긴 별칭 또한 버디였다.
여타 권총과 다른 점은 바이너리 트리거를 채용해, 방아쇠를 당길때와 놓을 때 모두 격발된다는 것.
때문에, 어떠한 상황에서도 더블 탭 하기 수월했다.
바로 이처럼.
탕, 탕!
하지만 두 발의 탄환은 제이콥의 몸을 뚫지 못하고 그대로 증발했다.
"피가 통하지 않는 곳을 노려!"
먼저 당한 휘트니가 소리치자 진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렇군요. 충고 감사합니다."
진건이 곧바로 목표를 수정한 것과 제이콥의 안쪽 허벅지 살이 찢어진 건 거의 동시.
탄환이 아슬아슬하게 피부만 긁고 지나간 결과였다.
당연하게도 이는 우연의 일치가 아니었다.
진건은 출혈을 유발하기로 작정한 참이었다. 제아무리 강력한 위력을 지녔다 해도 정량이 정해진 이상, 한번 소진하면 채우기 어려울 거라는 건 자명한 바였으니.
아니나 다를까, 탄창이 밑바닥을 드러내기 무섭게 제이콥이 무릎을 꿇었다.
만신창이가 된 그의 피부는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핏물을 연신 흘려보냈다.
"더 보여 줄 건 없습니까?"
"퉤!"
진건과의 거리를 가늠한 제이콥은 혓바닥을 씹어, 흥건하게 고인 피를 내뱉었다.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인내하고 내지른 회심의 한 수.
순간, 진건이 반사적으로 손바닥을 내밀었다.
'됐다!'
방심을 유도한 게 주효한 듯싶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진건의 손이 녹아내리길 기다린 제이콥이었으나, 현실은 그의 기대를 배반했다. 진득한 혈액은 매끈한 피부를 타고 조용히 흘러내릴 뿐이었다.
"어째서?"
"이거, 우리 둘 사이에 오해가 있었던 것 같군요. 제가 여태 피한 건 두려워서도, 무서워서도 아닙니다. 그저 더러워지는 게 싫어서였습니다."
"고작 그런 이유로...."
전의를 잃은 제이콥의 앞에 선 진건은 무심하게 탄창을 교체한 뒤, 미간에 총구를 겨냥했다.
돌연 고개를 들어 올려 진건과 시선을 마주친 제이콥은 전신이 굳는 듯했다.
눈꺼풀 사이로 슬며시 비춰 보이는 눈동자.
그 속에서 제이콥이 발견한 건―
"의안?"
만화경처럼 펼쳐진 눈동자였다. 동공 안에 동공이, 그 동공 안에 또 다른 동공이 연속되었다. 과연 눈이라고 불러도 되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괴이한 모양새.
정말이지, 소름이 끼치도록 정교한 유닛이었다. 아마 어디에서도 출시한 적 없는 제품일 터.
그제야 제이콥은 자신이 패배할 수밖에 없었는지 깨달았다.
"아아."
"잘 가십시오."
탕!
* * *
엄브렐라 타워의 높이는 267미터. 건설 기술이 발달한 현대에는 평범하다 못해 평이한 수준이지만, 한 놀이동산을 대표하기에는 충분했다.
사전 답사에 나선 엑스가 이곳을 무대로 삼은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한눈에 에덴파크의 정경이 들어왔던 거다.
물론 지금에 와서는 실수라 할 수 있었다.
어디든 볼 수 있다는 건, 바꿔 말해 어디에서도 보인다는 뜻이기도 하니.
가온에게서 등을 돌린 엑스가 입을 열었다.
"미안하지만 해야 할 일이 있어서 말이네."
"사람들을 도륙하는 거 말이지."
원색적인 단어 선정에 돌연 엑스가 멈춰 섰다.
"사람은 탐욕에 사로잡히면 거기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한다네. 더 많은 잘못을 저지를 뿐이지. 나는 스스로 의혹을 잘라내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몸소 내 손을 더럽힌 거라네."
"업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헤매는 중생들을 구제했다는 거지."
웃기지도 않은 변명이었다. 수백 년 동안 수많은 사람을 만난 가온이었지만 엑스는 그중에서도 특출난 정신병자였다.
"이 또한 선업. 올바른 희생이 선행되어야만 비로소 진정한 선각자가 될 수 있는 법이지. 그 때문에 내 몸을 피로 씻어야 한다면 기꺼이 그럴 거라네."
"희생정신이 아주 투철하네."
"자네가 하나 착각하고 있는데 내가 벌하는 이들은 모두...."
"알고 있어, 당장 죽어도 이상할 게 없는 중범죄자인 거. 나도 에덴에 대해서 꽤나 자세히 파헤쳤거든."
유쾌하게 웃은 가온이 두 팔을 펼쳤다.
"근데 나를 죽인 시점에서 그런 개소리는 통하지 않아."
"...."
단 두 마디만에 논파 당한 엑스는 말을 아꼈다.
"대의를 위한다는 명목하에 거슬리는 녀석은 전부 죽이는데 네 말이 진실될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아마 나 말고도 무고하게 죽어간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겠지."
"그래서 그들을 대표해서 나를 징치하겠다는 건가?"
"이건 내 죽음에 대한 복수야. 거기에 대의나 정의 같은 건 필요 없어."
충돌은 피할 수 없다는 걸 직감한 엑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보다시피 이런 몸이라서 말이네, 의미가 있나?"
그는 액터. 여기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전신 의체로, 부서진다고 해도 죽는 건 아니었다.
"많이. 의미를 부여하는 건 쓰러진 자가 아니라 남겨진 자거든."
엑스와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긴가민가한 가온이었다. 실력이 출중한데도 이렇다 할 정보가 없었던 거다.
혹시나 시정부에서 직접 육성한 진건처럼 화성방위군이 애지중지하는 군인이면 어쩌나 싶었지만, 대화를 나눠 보니 그건 아닌 듯싶었다.
발상 자체가 일반인과 동떨어졌으니까.
"하나 물어보고 싶은데 너는 지금 어디에 있지?"
"물어본다고 가르쳐 줄 것 같나?"
"세상과 단절된 곳인가?"
"...."
침묵을 고수하는 엑스였지만 그것만으로도 대답이 되었다.
놈은 강제로 징집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근거는 많았다.
일단, 놈이 활동했던 시기부터가 인상적이었다.
39년 전, 28년 전, 16년 전, 그리고 지금. 신변에 이상이 있지 않은 한 나올 수 없는 패턴이었다.
하물며, 그 수단 또한 범상치 않았다.
'액터라니.'
통신이 끊기면 고물이 되는 깡통을 끌고 다녀야 하는 건 단점이면 단점이지 결코 이점이 되지 못했다.
아무리 화성방위군이 신비주의를 표방한다지만 이는 병적인 수준이었다.
흔적을 남기고 싶지 않다는 것보다 엑스에게 자유를 주지 않고 싶다는 의지가 더 절실하게 느껴진다고 할까.
액터로 활동할 수밖에 없으면서도, 경계해야 하는 신분은?
물을 것도 없었다.
'죄수거나 환자거나.'
어쩌면 상상하지도 못할 제3의 상태일 수도 있지만 가온은 그 가정을 제외했다.
어느 쪽이든 엑스가 진건과 접촉할 수 없을뿐더러, 화성방위군이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거라는 건 확실했으니까.
그야말로 최고의 상대.
마치 하늘이 점지해 준 것만 같았다.
쿠웅.
오늘따라 유난히 강하게 부는 바람을 따라 엑스의 레인코트가 나부꼈다. 순간, 후드가 뒤로 젖혀지면서 홀로그램 헬멧의 전면이 드러났다.
"참으로 궁금한 게 많은 듯하군, 자네는."
"나를 죽인 상대니까. 궁금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그러니까, 한 번 죽은 거론 만족하지 못한다는 거군."
075 후우
* * *
흉흉한 기세를 내보인 엑스가 태도 두 자루를 들었다. 가온 또한 그에 대응하듯이 초소형 레일건, 궁기를 꺼냈다.
하늘에서는 눈송이가 하나둘씩 내리기 시작했다.
"어떻게 해서 이 자리에 섰는지 모르겠지만, 행운이 언제까지나 자네의 곁에 있어 줄 거라 믿는다면 큰 오산이네. 나는 그조차 벨 테니."
"그러면 확인해 보자고. 네 검이 나은지, 내 행운이 나은지."
엑스의 발밑에 청색 전류가 튀어 오른 건 그 순간. 몸을 앞으로 수그린 듯싶더니, 어느새 가온의 코앞까지 치달아 그 목에 태도를 밀어 넣었다.
자기 부상을 이용한 초고속 질주.
소리마저 저 멀리 두고 온 일격을 피한 가온은 엑스의 겨드랑이 사이로 방아쇠를 당겼다.
허공에 선명한 궤적이 덧칠해진 것과 엑스의 허리가 꺾일 듯이 뒤로 젖혀진 건 거의 동시.
아무리 그가 단분자 블레이드를 소지하고 있어 대부분의 물질을 자를 수 있다지만 번개, 즉 전하는 어려웠다.
다만, 역이용하는 건 가능했다.
허공에 새겨진 빛줄기를 디딤발 삼아 이동 경로를 변경한 건 그 일례.
생각하지도 못한 방식의 입체 기동에 가온은 두 눈을 부릅떴다.
자기 부상 또한 전자기력의 반발을 이용하는 기술인 만큼 레일건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었다. 그래서 총격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전류를 타고 방향을 전환한다는 발상도 가능했다.
하지만, 그걸 활용하는 건 별개의 이야기였다.
천부적인 센스와 압도적인 경험이 없다면 시도조차 할 수 없는 묘기였으나, 엑스는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처럼 궁기가 그리는 궤적을 레일로 삼았다.
거리가 좁혀지는 건 한순간.
일전에도 가온을 상대한 적 있는 엑스였다.
그렇기에 방심하는 건 언어도단. 일합에 양단할 기세로 회전했다. 지면에 짙은 스키드 마크가 새겨지면서 태도의 궤적이 뚝뚝 끊겼다.
극한까지 발현된 스트로보 현상.
그 끝에 두 줄기 섬광이 가온의 가슴을 노리고 내질러졌다.
찰나의 순간, 횡 이동한 가온은 주먹으로 검면을 후려쳤다.
지난 전투를 복기할 수 있는 건 엑스뿐만이 아니었다. 가온 또한 그때 이후로 계속 고심했다.
이건 그에 대한 해답.
가온이 동그란 공을 하나 꺼내 떨어뜨린 순간, 반구형 정전기가 일대를 훑고 지나갔다.
일렉투스.
그건 국소적인 지역에 전자기 펄스를 발생시키는 장치였다.
쉽게 말해 EMP 폭탄.
영향을 받은 디바이스가 가동을 중지하는 건 물론이고, 궁기에 내장된 코일 또한 열기를 잃고 멈췄다.
순식간에 무장이 해제되었지만 감내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
엑스 또한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으니까.
만약 그가 사이보그였다면 빈틈을 노리기 어려웠을 거다. 대부분이 기계일지라도, 연산 장치를 관장하는 두뇌만큼은 생체이니.
하지만 엑스는 액터.
중요 장치 또한 통신에 의지해야 하는 몸이었다.
물론 화성방위군이 그에 대한 대비를 하지 않았을 리 없었다.
벌써부터 충격에서 벗어나 꿈틀거리는 게 그 증거. 내부를 전자기 차폐 도료로 코팅한 게 틀림없었다.
남은 시간은 밀리초 미만.
승부를 내기엔 촉박한 시간이지만 원하는 바를 취하기엔 차다 못해 넘쳐흘렀다.
손날을 세운 가온은 엑스의 손목을 부러트릴 기세로 내리쳤다.
위에서 아래로 그어지는 실선을 따라 폭풍이 휘몰아친 건 그 순간.
밟고 선 지면이 움푹 가라앉을 정도로 강한 일격에는 회전의 묘리가 담겨 있었다.
콰직 하는 소리와 함께 엑스의 손목이 뒤틀리는 건 당연지사.
엑스가 놓친 단분자 블레이드를 발등으로 걷어찬 가온은 어깨높이까지 올라오자마자 그 손잡이를 낚아챘다.
가온이 태도를 높이 들어 상단세를 취하자 엑스는 헛웃음을 흘렸다.
"내게 검술로 도전하겠다고?"
여태껏 그런 사람이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야쿠자 내에서 검호라 불리는 자도, 해결사 중에 검성이라는 자도 최후는 똑같았다.
제아무리 불세출의 천재라고 해도 시간이라는 벽을 뛰어넘을 수는 없는 법.
엑스가 검술을 수련한 기간만 해도 100년 이상이었다. 현 인류 중 그와 대적할 자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유쾌하군, 이런 감정을 느껴본 게 언제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두 손으로 태도를 고쳐 잡은 엑스가 중단세를 취했다.
내려치기 위해 칼끝을 하늘 높이 치켜든 가온과 어떤 상황에서도 반응할 수 있게 검날을 앞으로 내민 엑스.
점차 거세지는 눈발이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았다.
한 차례 들이닥친 강풍이 눈의 장막을 거둬들인 순간, 가온은 눈밭에 스키드 마크를 새기며 질주했다.
수십 미터의 거리가 좁혀지는 건 찰나.
동작과 동작 사이의 간극이 뚝뚝 끊어지는 모습에, 엑스는 아연할 수밖에 없었다. 그 광경이 무엇을 뜻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거다.
쾅!
아니나 다를까, 격돌한 순간 손끝에서 상상을 초월한 괴력이 느껴졌다.
기기긱.
검날이 대패로 간 것처럼 얇게 갈리며 비명 소리를 토해냈다. 단분자 블레이드끼리 맞부딪치며 생기는 특유의 공명 현상.
흘리려고 해도, 소용없었다. 마치 아교라도 발라놓은 것처럼 마주한 검날은 떨어지지 않았으니.
"이게 대체?"
경지에 오르고 나서 수 싸움에서 밀린 건 처음인지라, 곤혹스러울 따름이었다.
일단 거리를 벌리고 전열을 가다듬으려고 한 엑스지만, 그걸 가만히 두고 볼 가온이 아니었다.
프로펠러처럼 맹렬하게 회전한 그는 후퇴하는 엑스를 추격했다.
섬광이 번쩍일 때마다 기압 차를 견디지 못하고 생겨난 급변풍이 내리는 눈을 양단하고 지나갔다.
황급히 태도를 거꾸로 쥔 엑스는 가로로 그어지는 검격을 막았다.
쾅!
날붙이 둘이 충돌했다고 볼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폭음이 장내를 강타했다.
충격을 상쇄하기 위해 내디딘 지면이 움푹 패이자, 엑스는 분쇄기처럼 화려하게 돌면서 대응했다.
그가 사용하는 전신 의체는 특제.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공산품이 아니었다. 부품 하나, 회로 하나 모두 별도로 제작한 일품이었다.
그리하여 얻게 된 운동 능력은 현세대 최강이요, 차세대 표준이었다.
쓰러트리려면 일개 중대가 화력을 집중해야 할 정도.
더불어 MUG―2 이상의 장비가 없으면 접근하는 것조차 어려웠다.
하나, 가온은 순수한 신체 능력만으로 그에 육박했다.
수백 년에 걸쳐 수련한 결과.
톤 단위의 운동 에너지까지 감당하는 그 근력에 엑스가 경악하는 동안, 가온도 얼굴에 떠오른 감탄을 감추지 않았다.
당연하지만 기술의 완성도는 그가 상회하는 중이었다. 100번 부딪치면 99번 이길 정도.
그런데 조금씩 벌어지고 있었다. 꼭 패배하는 1번의 경합에서 격차가 벌어졌던 거다.
겉으로 보기에는 완전히 똑같은 품새.
대체 무엇이 부족한 것인가 가늠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가온은 굴하지 않고 엑스를 압박했다.
엑스 또한 그 공세를 걷어내며, 두 사람의 싸움은 격해져만 갔다.
쿠궁, 쿠궁.
그들이 회전을 거듭할 때마다 전망대에 가해지는 하중은 급격하게 증가했다.
엄브렐라 타워를 떠받치는 콘크리트가 너나 할 것 없이 거미줄 모양으로 갈라진 건 한순간.
하나 두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 중심에서 미친듯이 검을 휘둘렀다.
난무에 난무.
가속하는 검무는 이내 종국에 치달았다.
기기긱.
허공에서 태도와 태도가 교차한다.
가온의 검끝이 홀로그램 헬멧을 도려내는 것과 동시에 엑스의 칼끝이 여린 목덜미를 긁고 지나갔다.
서로의 급소를 정확하게 가른 크로스 카운터.
하지만 운명은 엑스에게 미소 지었다.
그는 전면부 바이저가 날아가는 데 반해, 가온은 어깨 위가 날아갔던 거다.
분리된 머리통은 저 멀리 날아가 널브러졌고, 주인을 잃은 반신은 털썩 주저앉았다.
기나긴 혈전에 종지부가 찍히는 순간.
"소망대로 두 번 죽여 줬네. 부디 내세에서는 이보다 더 오래 살길 빌어 주지."
엑스는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지체된 시간만큼 서둘러 에덴과 관련된 무리를 소탕해야 했던 거다.
하지만 그는 몇 걸음 가지 못하고 멈춰 서야 했다.
머리를 잃은 몸이 덜컥 일어나더니, 머리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으니까.
B급 호러에도 나오지 않을 광경인지라 엑스는 망연하게 바라보았다.
"뭣...."
그 뒤에 이어지는 행동도 가관이었다.
잘린 머리를 축구공 삼아 리프팅하더니 저 높이 차올리는 게 아닌가.
중력을 따라 텅 빈 목 위에 안착한 머리는 굴러떨어지지 않고 중심을 잡았다. 상처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뒤.
새로이 재생된 접합 부위가 뻐근한 건지 목을 좌우로 움직이는 가온을 보고 나서야 엑스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가 어떻게 생환했는지.
요령을 부린 게 아니었다.
순수한 능력.
"무량수불. 그런가, 자네는 메타 휴먼이었나. 그것도 죽지 않는."
"어떻게 그 명칭을 알고 있는 거지?"
"글쎄, 남에게서 얻은 진실 따위에 가치가 있겠는가. 자기 스스로 깨달아야 의미가 있는 거지."
"그래, 여기까지 와서 그런 걸 물어본다고 대답해 줄 리도 없겠지."
가온은 잘게 저며진 코트를 버리고 피에 절은 앞머리를 뒤로 쓸어 넘겼다.
"워밍업으로는 딱 적당한 죽음이었어."
"마지막 가는 길을 찾지 못하고 헤매는 망령답군."
"너처럼 말이지."
방금 전보다 더 빠르게 쇄도한 가온이 태도를 내리찍었다. 엑스가 어떠한 식으로 반응하는지 전부 기억한 상태였다. 물 흐르듯이 우위를 선점하는 건 당연지사.
하지만 엑스라고 마냥 당하고만 있진 않았다. 그 또한 가온의 검술을 타산지석으로 삼았으니까.
공방을 나눈 횟수가 많아질수록 수위 또한 높아졌다.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칼날을 맞댄 두 사람은 서로를 찍어누르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기기긱.
부서진 홀로그램 헬멧 사이로 엑스의 얼굴이 공개되었지만, 가온은 무심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전신 의체라는 걸 말해 주듯이 개성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무미건조한 인상이었던 거다.
다만, 귓가에 들려오는 숨소리가 신경 쓰였다.
그래, 숨소리.
전신 의체여서 생체 활동을 억제할 수 있을 텐데도, 들숨과 날숨에 역할이라도 부여하듯 엑스는 부단히도 호흡을 이어 갔다.
홀로그램 헬멧을 가르지 않았더라면 결코 몰랐을 사실.
순간, 가온의 뇌리에 영감이 벼락같이 왔다 지나갔다.
고집이 아니라 습관이라면?
그리할 수밖에 없다면?
어쩌면 이게 두 사람의 수준을 가르는 결정적인 차이일지도 몰랐다.
가온은 엑스에게 들러붙어 호흡의 흐름을 파악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노승에게서 배운 고류 무술을 완성하기 위해 수많은 무예를 섭렵한 그였다.
인도에서 건너온 달마대사가 소림에 전한 무술. 역근경과 세수경 그리고 십팔나한수.
그 원류가 되는 칼라리 파야트(Kalari Payattu)에 심취한 건 물론이고, 그걸 이해하기 위해 읽지 않은 문헌이 없었다.
중국을 비롯해 동남아시아, 유럽을 넘어 아프리카, 일본, 그리고 고향인 한국에 이르기까지.
막바지에 이르러선 고타마 싯다르타의 생전 행적을 훑어보기까지 했다.
수백 년에 걸쳐 이어져 온 방황.
이제 끝내도 될 것 같았다.
엑스의 호흡이 처음으로 되돌아온 순간, 더 익힐 게 없다는 걸 직감한 가온은 제자리에 멈춰서서 중단세를 취했다.
갑작스러운 가온의 태세 전환에 제게 무게추가 기울었다고 판단한 엑스는 거침없이 태도를 휘둘렀다.
"지친 건가? 하긴 그럴 수밖에 없지. 결국 자네는 인간의 몸이니까."
그 말을 대변해주듯이 가온은 이렇다 할 반격도 하지 못하고 뒤로 밀려날 뿐이었다. 켜켜이 쌓이는 상처에 탄력을 받은 엑스가 종횡무진 공세를 이어 갈 즈음―
"후우."
이변이 일어났다.
076 하, 자네가 내 마라였나
* * *
깨달음을 갈무리한 가온이 호흡을 정돈한 순간, 치아 사이로 증기가 새어 나왔다. 열차의 그것처럼 거칠고 난폭한 소리.
내리치는 폭설은 어깨에 닿기도 전에 증발했다.
노승이 미처 전하지 못한 가르침을 깨우친 순간, 답보 상태였던 고류 무술이 한 단계 진일보한다.
태도를 앞으로 겨누었을 뿐이건만, 몸이 부풀어 오른 것만 같은 환상이 좌중에 퍼졌다.
그에 엑스는 허허롭게 웃었다.
아지랑이가 생길 정도로 굳건한 기위(氣位).
그 경지는 이미 물리 법칙에서 벗어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무언가 번쩍이는가 싶더니 목 끝에 검날이 들이밀어졌다.
인간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빠른 속도.
청색 전류를 흘리며 뒷걸음질 치는 엑스였으나, 가온은 그마저도 놓치지 않고 뒤따라갔다.
이제 엄브렐라 타워조차 두 사람의 격전을 담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절단이라는 개념을 체현한 거다. 그 앞에서 베어지지 않는 건 없었다.
쿵.
전망대의 일부가 사선으로 그어지면서 저 아래로 추락한다.
뒤늦게 쿠쾅, 하는 소리가 에덴파크 전역에 울려 퍼졌다. 예기치 못한 충격에 외장재가 떨어져 나가는 건 물론이고, 장장 267미터에 이르는 콘크리트 더미가 뒤흔들리는 건 덤이었다.
가온이 빈틈을 찌르는 대(對)의 선을 추구한다면 엑스가 추구하는 건 후(後)의 선. 다시 말해 후발선지(後發先至)의 극의였다.
물고 물리는 상성 관계처럼 두 개의 태도도 뱀처럼 서로를 옭아맸다.
시계 방향으로 돌아가는 가온과 반시계 방향으로 돌아가는 엑스.
회전과 역회전.
서로 다른 돌풍이 부딪치면서 또다시 엄브렐라 타워가 비틀렸다.
거울로 비춘 것 같이 동등한 공방이 무한히 이어지면서 매초 천일수를 기록하자, 가온은 더욱 더 가열하게 제 몸을 채찍질했다.
금방에라도 쓰러질 것 같지만, 그 속에서 그는 해방감을 느낄 수 있었다.
과연 마음껏 검을 내지른 게 언제였을까.
처음 포탄을 검면으로 흘렸을 때? 빌딩을 베어 갈랐을 때?
아무리 고민해 보아도 지금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여기까지 와서 성장하는 건가. 과연, 집념 하나는 대단하군."
이제, 둘 사이의 고하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지만 엑스는 태연하게 반응했다.
평행선을 이루는 저울에 올려놓을 저울추가 아직 존재했으니까.
촤악.
레인코트가 벌어진 순간, 그 사이로 네 개의 팔이 모습을 드러냈다.
각기 다른 형태의 태도를 잡은 채로.
초고열 블레이드 한 쌍과 초진동 블레이드 한 쌍.
현대 공학의 정수로 탄생한 전신 의체에 불가능이란 없었다. 본디 인간은 가질 수 없는 신체 부위를 탈착하는 것도 그중 하나.
가온은 활짝 펼쳐진 여섯 개의 팔을 보고 한 단어가 떠올랐다.
"아수라."
"역시 자네도 그걸 연상하나?"
조금씩이나마 우위를 점했던 가온이지만, 태도 넷이 추가되면서 상황은 반전되었다. 다섯 방향에서 찌르고 들어오니, 막는 것도 버거웠던 거다.
가온을 오연하게 내려다본 엑스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여태까지의 기세는 어디로 간 거지?"
휘몰아치는 검격의 폭우 속.
끝없는 압박에 가온은 극약 처방을 내렸다. 목을 내어주기로 결심한 거다. 그것도 잘려서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만.
그러한 판단을 내렸다는 것 자체만으로 자살 행위지만, 가온에게는 남들과 다른 특징이 있었다.
"그래, 그래. 자네는 죽지 않지! 그래, 그거네!"
미친 듯이 난도질하는 엑스였지만 마지막 한 걸음, 그 한 걸음이 닿지 않았다.
아슬아슬하게 억지를 부리며, 제 영역을 넓힌 가온은 새롭게 튀어나온 태도를 노렸다. 아무리 가공할 무기라 해도 단분자 블레이드 앞에서는 수수깡이나 다름없었으니.
하나, 사전에 그 낌새를 파악하지 못할 엑스가 아니었다. 가온이 빈틈을 노릴 때마다 똑같은 단분자 블레이드로 응수하며 빌미조차 주지 않았다.
첨예하게 이어지는 공방에 목이 잘리며 몇 번이나 의식이 끊겼지만, 가온의 투지는 결코 꺾이지 않았다.
쿵.
끊임없는 줄다리기에 옥상이 무너져 내린 건 그때.
무게 중심이 한쪽으로 쏠리면서 전망대를 떠받치는 층계 또한 도미노처럼 넘어갔다.
그리하여, 시작되는 연쇄 붕괴.
먼지구름을 뚫고 도약한 둘은 전망대의 외벽을 지면으로 삼아 미끄러지면서도 서로를 향한 살의를 거두지 않았다.
다만, 두 사람 모두 스트로보 현상에서 벗어난 상태였다.
지면과 수직을 이루어야만 본래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고류 무술의 특성상, 통유리로 구성된 벽면은 발판으로 삼기엔 무리였던 거다.
"이걸로 자네는 힘을 잃었을 테지."
"너, 설마...."
"맞아, 전망대의 축을 부순 게 바로 나라네."
똑같은 무술을 공유하고 있다는 걸 파악하고 약점을 공략하기 위해 현 상황을 유도한 거였다. 회전의 묘리를 살릴 수 없다면 유효타가 많은 쪽이 유리.
가온을 구석에 몰아넣은 엑스는 추락하면서 생기는 위치 에너지까지 모두 끌어당겨 마지막 기술을 시전했다.
그것은 여섯 개의 팔로 구현하는 궁극의 무도.
[선무도 최종 비기 흑련화]
바깥에서부터 안쪽으로 말려들어 가면서 상대를 도륙하는 여섯 갈래의 궤적이 연꽃과 닮아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었다.
당연하게도 그 연원에 걸맞게 사각지대란 전무.
마주한 가온 또한 절실히 통감했다.
한 손으로 열 손은 못 막는다고, 최적의 루트를 그리며 받아친다고 해도 비는 부분이 생겼다.
그리고 공백을 허용한다는 건 처참하게 토막 난다는 뜻.
의식이 끊겨, 혹여라도 살아나는 모습을 진건에게 들킨다면 화성에 와서 기껏 쌓은 인연이 잿더미가 될 터였다.
도망자 신세가 되는 건 덤.
사방에서 밀고 들어오는 칼날과의 거리가 좁혀질수록 위기의식 또한 선명해졌다.
한없이 확장되는 사고 속에서 가온은 깨달았다.
완전할 것 같은 흑련화에도 허점이 있다는 걸.
가온은 초전에 검 하나를 빼앗았다.
본디 여섯이었을 검격은 다섯으로 줄어든 뒤. 균형이 무너진 기술이 완전할 리 없었다.
피할 수 있다 확신한 가온은 난립하는 폭풍 속으로 칼날을 욱여넣었다.
얽히고설킨 다섯 개의 선이 한 점에 수렴하며 정지한 건 그 순간.
방향성은 맞았으나―
'밀린다.'
걷어 내야 할 칼날의 수만 해도 다섯. 단순하게 계산해도 5배에 달하는 힘이 있어야 했다. 이 난점을 타파하지 못한다면 단분자 블레이드와 함께 전신이 조각날 터.
기기긱.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기억 속에서 돌연 기념비적인 그날이 떠오른다.
노승이 바위를 베었던 그 날이.
미숙했던 시절에는 알지 못했으나, 이제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 또한 회전을 이용했다는 걸.
혹여 제가 구한 답이 틀렸을까 망설일 필요는 없었다. 엑스의 존재가 그 방증이었던 거다.
푸쉬익.
호르몬 조절기에서 드러그 칵테일이 쏟아져 나와 전신을 내달린다.
한계를 모르고 고조되는 정신.
무아지경에 빠진 가온은 여태껏 자신이 지나온 길을 해체하고 조립했다.
원심력이란 어디까지나 관념적인 말로, 인류가 애용했던 개념이자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관성의 연장선이었다.
그리고 관성이란 작용과 반작용에서 오는 현상.
발을 디딜 곳이 없어 축을 구성할 수 없다면―
'이전한다.'
단지 그뿐.
발상을 전환한 순간, 저 자신을 규정한 한계가 한 꺼풀 벗겨진다.
지난 300여 년간의 여정은 헛되지 않았다. 끊임없이 수련한 끝에 가상의 주축을 구성하는 데 이르렀던 거다.
[나한 제1식 가회축(假回軸)]
어깨를 축으로 삼아 발현된 회전이 팔뚝으로 전가된다. 단분자 블레이드가 잘게 떨리며 다섯 개의 태도를 뿌리친 건 한순간.
흑련화를 파훼당한 엑스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뭣...."
디딤발 하나 없는 허공이었지만 이제 가온에게 그러한 제약은 의미가 없었다.
가회축의 장점은 축의 이동이 자유롭다는 것.
어떤 자세로든 전과 같이 회전의 묘리를 운용할 수 있었다.
그로 인해 생기는 무수한 갈림길은 가온에게 무한한 가능성을 선사했다.
으드득.
그만큼 반발도 강해져, 근골이 박살 났지만 가온은 개의치 않았다. 한순간에 회복되었으니까. 오히려 그조차 페이스를 올리는 수단으로 삼았다.
"자."
지상이 머지않았으니 축포를 터트릴 차례였다.
발목과 종아리, 무릎, 허벅지와 골반, 허리, 어깨 그리고 팔.
임의로 지정된 축들이 공명하면서 회전이 중첩되었다.
다시 한번 흑련화를 펼치는 엑스였으나, 응축된 힘 앞에선 무의미한 저항이었다.
콰직.
눈 깜빡할 사이에 그가 자랑하는 태도는 산산이 조각나 떨어지는 콘크리트 더미 사이로 흩어졌다.
자신은 닿지 못한 곳에 도달한 가온을 보고 엑스는 허탈하게 웃었다.
"하, 자네가 내 마라였나."
"잘 가라."
낙하하는 가온이 검을 휘두른 순간, 세상이 양단되며 비명을 토해냈다.
* * *
엄브렐라 타워는 뼈대만 드러낸 채로 아직까지도 콘크리트 더미를 토해냈다. 아마, 제 몸이 스러질 때까지 멈추지 않을 터.
낙하물을 단칼에 베어내며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가온은 멀지 않은 곳에서 엑스를 발견할 수 있었다.
여섯이었던 팔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처참히 망가졌지만, 어쨌든 가동 중이었다.
"내게 볼일이 남았나. 말했지만 나는 어디까지나 에덴을 뿌리 뽑기 위해서...."
"그런 건 됐어. 내가 듣고 싶은 건 그런 게 아니니까."
"그러면 뭐지?"
"그 검술, 누구에게 배운 거지?"
뜻밖의 질문을 들어서일까. 엑스는 패배했는데도 유쾌하게 웃을 수 있었다.
"하하핫, 자네는 끝까지 당돌하군."
"대답이나 해."
"원류를 되짚어 볼 생각이라면 아쉽게 되었군. 나도 독학으로 배운 거라서 말이네."
"그래."
여기까지 와서 거짓을 고할 것 같지는 않았기에 가온은 순순히 수긍했다.
"이제 와서 정체가 뭐냐고 물어봐도 대답해 주지 않겠지."
"아말 캄. 나는 아말 캄이라고 하네."
"너...."
예상치 못한 반응에 가온의 표정이 굳었다.
"그런 눈빛으로 보지 말게. 이래야 공평하다고 판단했을 뿐이니."
아말 캄, 언젠가 들어본 적 있는 이름이었다.
"죽었다고 들었는데."
"자네가 아는 게 세상의 전부는 아니라네. 진실은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아무도 모르게 사라지는 법이니. 자네의 존재가 그러하지 않나."
"혓바닥 하나는 인정하지."
후후, 하고 나지막하게 미소 지은 아말이 덧붙였다.
"자네가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현생을 헤매고 있는 한, 언제고 다시 만나게 될 걸세. 업보를 청산하지 못하는 중생을 구제하는 게 내 업이니."
"미친 소리 하지 마."
머리를 짓밟으며 불평을 터트렸지만, 전신 의체의 불빛은 꺼진 뒤였다. 끝까지 불쾌한 녀석이었다. 그래도 얻은 바가 적지 않았다.
아말 캄이라는 신원까지 특정할 수 있었으니.
거리낌 없이 양후라고 뒤집어씌울 수 있을 것 같았다.
한결 홀가분한 기분으로 등을 돌린 가온은 다가온 인물의 얼굴을 보고는 표정을 굳혔다.
"미스터 건."
혹시라도 대화를 들었을까 싶어 경계했지만 그건 아닌 듯했다. 구태여 확인해 볼 것도 없었다.
"설명해 주시죠, 어떻게 그 검술을 사용한 건지."
그보다 더한 폭탄이 던져졌으니까.
"가온 씨, 아니 검귀 양후."
077 이건 빚으로 달아놓을 거야
* * *
그리 단정 지은 진건이 권총을 꺼내 들었다.
들키는 게 시간문제일 거라는 건 알았다. 아무리 완벽하게 덮는다고 해도 결국 진실은 하나였으니.
설마 오늘일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이럴 때일수록 평정을 가장해야 했다.
놀라지 않고, 천연덕스럽게.
서슴없이 총구를 들이대는 진건 앞에서 두 팔을 들어 올린 가온이 피식 웃은 건, 그러한 계산이 끝나서였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숨기시지 않아도 됩니다. 당신이 검을 휘두르는 건 저 멀리서 충분히 보았으니까요."
"그것만으로 단정 지었다고?"
"검귀라면 백번 경계해도 모자람이 없습니다."
낚여서 양후가 누구인지 모르는 것처럼 행동하는 건 하책이었다. 의심만 살 뿐이었던 거다.
자기 자랑 같지만, 과거에 가온이 해결했던 사건은 전 인류가 떠들 정도로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그러니 어설프게 잡아떼는 것보다 아예 치고 나가는 게 상책이었다.
"검귀라고 하면 그 사람이지? 밀레니엄 코드 게이트를 터트린 해결사. 영광인걸. 내가 그 양후라니."
"공교롭게도 당신이 익힌 것과 똑같은 검술을 사용하죠. 그리고 아실지 모르겠지만 양후의 행적과 당신의 흔적이 대다수 일치합니다."
최악은 아니었다.
재생하는 과정을 직접 본 건 아니었으니까.
진건이 양후라는 인물을 특정할 수 있는 단서는 상식을 벗어난 생명력.
검술에 능하다는 건 쫓는 과정에서 얻은 부차적인 정보에 불과했다.
이 시대에 검사란 직종은 흔하지 않지만 없지도 않았다.
그래, 아말 캄처럼.
벗어날 방법은 있다.
두 눈을 감았다 뜬 가온이 입을 열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가 했더니 그 얘기였나, 그러니까 내가 쓰는 검술이 문제라는 거지?"
"정확하게 들으셨습니다."
"그러면 의심받을 이유가 없는걸."
"의심받을 이유가 없다?"
"나는 이 녀석에게 배웠을 뿐이니까."
깡통이 된 전신 의체를 걷어찬 가온이 그리 답하자, 진건은 눈살을 찌푸렸다.
"배웠다? 변명치고는 조악하군요. 천하의 양후도 당황하니까 인간적인 면모가 부각되는 겁니까."
진건으로서는 어처구니가 없을 따름이었다.
디바이스를 이식받은 인류의 활동 범위는 말도 못 하게 넓어졌다. 그 어느 때보다 방대한 학습이 가능해졌으니까. 그건 무술 또한 마찬가지.
물론 습득 과정이 그렇다는 거고, 숙달하려면 긴 시간을 할애해야 했다.
가온의 주장대로 단번에 익힐 수 있는 분야가 아니었다.
"이야기를 정리하지. 그러니까 너는 내가 이 녀석의 검술을 모방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검귀 양후로 착각했다, 이거잖아?"
"착각한 게 아니라 확신한 겁니다."
"내가 저지르지도 않은 일 때문에 용의자로 몰리는 건 질색인데."
급박하다기보다 진심으로 귀찮은 듯한 어조.
상황이 이렇게 되니 진건으로서도 긴가민가할 수밖에 없었다. 가온이 진정 양후라면 총을 겨눈 순간 반격했어야 할 테니까.
따지고 보면 제일 수상한 건 엑스였다. 그 또한 양후와 비슷한 검술을 이용하는 것도 모자라 비상 재해 대책반조차 뒤쫓을 수 없는 세력의 지원을 받고 있으니.
그래, 가온이 양후라고 치자.
그러면 엑스는?
그의 존재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혼란스러운 진건의 속내를 읽은 가온이 노림수를 던졌다.
"그러면 이렇게 하자고. 네가 알고 있는 무술을 시연해 봐. 똑같이 따라 할 테니."
"자기가 한 말을 증명하겠다는 겁니까."
그렇다고 해서 당장 권총을 내리고 자세를 잡는 것도 우스운 일.
진건은 가타부타 설명하지 않고 숨을 들이마셨다 내쉬었다.
이 호흡법은 비상 재해 대책반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기술 중 하나. 필히 익혀야만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었다.
때문에, 한 번 본다고 따라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수십 시간에 걸쳐 관련 이론을 이수해야만 겨우 신체 내부에서 일어나는 상승 작용을 이해할 수 있었던 거다.
괜히 1년짜리 커리큘럼이 아니었다.
"재미있네."
하나, 가온에게는 무용지물.
수백 년간 수련한 경력이 어디로 갈 리 없었다. 눈대중으로 원리를 파악할 것도 없었다. 고류 무술, 나한과 흡사한 점이 많았으니.
공들이지 않고도 진건이 사용하는 기술을 재현할 수 있었다.
가온의 입에서 특유의 숨소리가 들려오자 진건은 한 걸음 물러났다.
"정말 따라 하시는군요."
"그러니까 순순히 인정하라고, 세상에는 이러한 종류의 천재도 있다는걸."
당당한 걸 넘어서 뻔뻔하기까지 한 가온의 태도에 진건은 골치가 아플 따름이었다.
엑스와 사투를 벌이면서 검술을 따라 하게 된 건지, 아니면 양후이기에 검술을 사용할 수 있었던 건지 확인할 방법이 사라진 거다.
이이제이를 노렸을 때부터 가정했어야 할 변수.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는 순환 논리의 오류에 빠진 진건은 한숨을 내뱉었다.
정황 증거로만 보자면 가온은 양후가 아니었다.
진정 눈여겨봐야 하는 건 수상쩍은 검객 쪽이었다.
"일단 엑스의 잔해는 저희가 회수하겠습니다."
"마음대로 해. 어차피 그게 의뢰이기도 했잖아?"
가온은 엑스가 양후인 것 같다거나, 그가 화성방위군 소속이 아닌지 조사해 보라는 오지랖은 부리지 않았다.
기회가 생겼다 해서 무작정 유도하는 건 속이 훤히 보이는 악수였다.
스스로 깨닫게끔 시간을 주어야 했다. 오로지 자신이 판단했다고 착각할 수 있도록.
하지만 가만히 넘어가서도 안 되었다.
끝까지 무고한 피해자로 남아 있어야 했다. 무언가 켕기는 게 있는 것처럼 설득이 끝났다고 해서 조용히 넘어가는 건 어불성설.
그래, 여기에 있는 건 검귀 양후가 아니라 햇병아리 해결사 가온.
이럴 때 적절한 대응은―
"이건 빚으로 달아 놓을 거야."
단호하게 선을 긋는 것.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트집 잡아서 토사구팽하려던 걸 잊지 않겠다는 소리지."
"아니, 그건...."
무언가 항변하려던 진건은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제삼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건 권력에 의한 위압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었던 거다.
더구나 가온이 정말 양후가 아니라면 오늘 일은 커다란 실수였다.
어쩌면 먼 미래에 거물이 될지도 모르는 해결사와 협력 관계는 되지 못할지언정, 적대 관계가 된다는 건 여러모로 우둔한 선택이었으니까.
그래서, 서슴없이 고개를 숙였다.
"오해가 있었던 건 같군요. 면목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양후와 관련된 건은 저희 쪽에서도 심도 있게 다루고 있는 사건인지라."
"이번에는 조금 서운할 뻔했어. 그러니 처신 잘하라고."
진건의 어깨를 두드린 가온은 현장을 나섰다.
* * *
1980년, 한 남자가 두통을 참지 못하고 검진을 받았다. 머릿속이 크게 잘못되었다 여긴 탓이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의 두개골 안에는 뇌라고 부를 만한 게 없었다.
머리의 무게 또한 일반인의 5분의 1.
있는 거라고는 뇌척수액뿐이었지만, 그런데도 일상생활이 가능했다.
신기하게 여긴 의사들이 연구를 진행한 건 당연지사.
오랜 탐구 끝에 전신에 퍼진 신경 세포가 두뇌 활동을 대행할 수 있다는 게 밝혀졌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머리가 없어도 살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래, 설령 납탄이 박힌다고 해도―
"허업."
영안실에서 깨어난 크로프트는 머리가 깨질듯한 고통에 관자놀이를 짚었다. 순간, 이마에서 핏물이 질질 흘러내렸다.
한 박자 늦게 자신이 스트레처 카트 위에 누워 있다는 걸 깨달은 크로프트는 한숨을 터트렸다.
이미 몇 번이고 겪은 일.
다급해 할 것도, 황망해 할 것도 없었다.
4대 암부 중 한 곳인 륭영은 과거의 잔재를 현대의 지식으로 해석하려는 고루한 집단이었다. 때문에, 전력 증강이라는 미명하에 오래전부터 기이한 실험을 이어 왔다.
메가콥도 가지지 못한 정보와 지식을 보유할 수 있었던 건 그러한 연유에서.
크로프트 또한 수혜자 중 한 명이었다.
유전자 조작, 뇌역 소실로 두뇌의 비중을 확연하게 줄인 그는 내장에 장기 기억을 저장할 수 있게 되었다.
신경계의 기질 자체를 바뀐 만큼, 일종의 강화 인간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다만, 두뇌의 역할을 신경 세포에 전가하는 만큼 휘발되기 쉬운 단기 기억까지 보존하는 건 무리였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
"어째서 죽었더라아."
떠올릴 수 있는 게 없다는 소리였다.
CCTV라도 확인해 보면 나으련만, 장소가 장소였다. 애당초 병원에 들어왔다는 건 지하에 숨겨진 시설이 들켰다는 소리.
구태여 아득바득 에덴파크까지 가서 용의선상에 오를 이유는 없는지라, 크로프트는 휘파람을 불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떻게 보면 차라리 죽은 게 다행이었다.
탈출하기 위해서 이리 뛰고 저리 뛰는 건 취향이 아니었으니까.
그에게 어울리는 건 블루칼라가 아니라 화이트칼라였다.
의자에 걸린 흰 가운을 제 것인 양 걸쳐 입은 크로프트는 밝게 웃었다.
조직으로 돌아가면 사정은 대강 파악할 수 있을 터.
"다음 연구로 넘어갑시다아."
그렇게, 머리에 구멍이 뚫린 남자는 그림자 사이로 사라졌다.
* * *
바, 콜롬버스의 접견실.
시가를 입에 문 오웬이 후, 하고 연기를 내뱉었다.
"화려하게 저질렀더군."
"그래?"
태연하게 답한 가온이지만, 그도 난리가 났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다. 전망대, 엄브렐라 타워가 무너진 것도 모자라 지하에서는 마약 공장이 발견된 거다.
온 가족의 동산이 전 인류의 화산으로 변모한 지는 오래.
책임자, 관리자, 소유주.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동등하게 조사받는 중이었다.
어찌나 엄중하게 진행하는 건지 사건을 해결한 가온조차 공찰에 몇 번 방문해야 했다.
"그래서 출처는 알아낸 거겠지."
"륭영이 유력해. 자세한 건 황금영화회의 주인, 템퍼 파커의 행적을 쫓다 보면 알 수 있을 테지."
디바이스로 들어온 정보를 확인한 오웬이 재차 연기를 토해냈다. 따로 물어볼 것도 없을 정도로 완벽한 보고서였다.
"문서 작업에도 재능이 있었나."
"그만큼 열심히 했다는 걸로 봐주면 고맙겠는데."
"열심히 했다라."
묘하게 뒷말을 길게 늘어뜨린 오웬이 시가를 질겅 씹었다. 그러잖아도 가온이 의뢰를 수행하는 중에 기묘한 일이 하나 터졌던 거다.
"그러잖아도 그것 때문에 묻고 싶은 게 있었다."
"뭔데?"
"노드테크에서 압박이 들어왔는데 출처가 이상하더군. 내부에서 정보가 새어나간 정황이 발견되었거든."
은근하게 묻는 오웬의 눈빛에 살기가 맺혔다 사라졌다.
다 알고 왔으니, 자진 납세하라는 뜻일 터.
"아, 그거 말이지. 너네 간부가 디바이스 운영 체제를 구성하는 소스 코드를 유출했더라고. 그것도 모자라 에덴에 적용까지 시켰던걸."
능청스럽게 제 이마를 친 가온이 덧붙였다.
"정말이지 큰일이었다고. 내가 먼저 파악해서 협상에 나서지 않았더라면 네게도 화가 미쳤을 테지."
실상은 자리를 보존하고 싶어 하는 막시무스의 욕망을 부채질한 거지만, 미담으로 속이는 건 일도 아니었다.
어차피 마피아 간부인 오웬이 메가콥의 팀장과 접선해서 물을 일도 없지 않은가.
그것도 진위 여부를 파악하기 위해서.
이성적으로 깔끔하게 대화할 거였다면 해결사를 고용하지도 않았을 터.
슬그머니 송곳니를 드러낸 가온이 서늘하게 물었다.
"설마 이렇게나 노력한 내게 책임을 물으려던 건 아니지?"
078 내가 원하는 대답이 아닌데
* * *
감히 수지타산에 맞지 않는 의뢰를 맡기고, 중요 정보는 공개도 하지 않은 네가?
돌연 들리는 환청에 오웬은 침음을 흘렸다. 명명백백 밝히겠다고 으름장을 놓으면 파헤칠 수야 있을 거다.
하지만 손익이 맞지 않았다.
가온에게 맡겼던 의뢰처럼 말이다.
이건 한 방 먹었군.
씁쓸하게 미소 지은 오웬이 입을 열었다.
"그럴리가. 확인차 물어본 것뿐이었다."
"그러면 다행이네. 요즘 따라 서운한 일이 많아서 말이야. 너까지 이의를 제기했다면 회한에 잠겼을 거야."
가온 또한 한 걸음 물러났다. 구태여 오웬과 척을 질 필요는 없었으니까.
각자의 위치에 제 이득을 취하는 것.
어른의 거래란 그러했다.
마피아의 간부에게 해결사의 권리를 보장해 주라고 불평을 토로하는 것도 우습지 않던가.
"약속대로 물건을 넘겨주지."
오웬이 손가락을 튕기자 등 뒤에 기립해 있던 청년, 휘트니가 다가와 아타셰 케이스를 넘겼다.
손끝으로 전해지는 묵직한 감각에 가온은 감개무량한 표정을 지었다. 따지고 보면 이 인공지능을 얻기 위해 그리도 뛰어다닌 거였다.
하지만 그러한 감상도 잠시뿐이었다.
용건은 하나 더 있었으니.
"이번이 두 번째 만남인데 통성명도 하지 않았네. 나는 백가온이라고 하는데, 너는?"
가온과 시선이 마주친 휘트니는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심중을 꿰뚫어 보는 듯한 안광. 왜 이제야 알게 되었는지 의문일 정도로 강렬한 기세였다.
아니, 블랙마켓에서도 어렴풋이 깨달았을 터였다.
단지 자기보다 월등한 또래가 있다는 걸 인정하기 싫어 치기를 부렸을 뿐.
이제는 마음가짐 자체가 달라졌다.
에덴의 출처를 쫓으며 세상이 넓다는 걸 조금이나마 이해한 참이니.
"휘트니, 휘트니 쿠퍼다."
"그래, 깨물어주고 싶을 정도로 얄미운 이름이네."
의미심장한 어투. 무언가 알고 있는듯한 반응에 휘트니는 식은땀을 흘렸지만 가온이 그를 두 번 다시 부르는 일은 없었다.
그래, 거래가 일단락된 뒤 자리를 비울 때까지도.
* * *
덜컥.
휘트니가 접견실 밖으로 나가는 걸 확인한 가온은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그러고 보니 묘한 일이 있었어. 물어 물어 그랜트를 찾아갔더니 글쎄, 나를 알고 있더라니까. 마치 누군가 일러주고 간 것처럼."
"그래? 그거 희한하군."
"내가 원하는 대답이 아닌데."
"설마 나를 의심하는 건 아니겠지?"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이는 오웬이었으나 그의 장단에 맞춰줄 가온이 아니었다.
"입 아프게 네가 휘트니를 부추겼다는 사실까지 거론해야 들을 만한 대답이 나오는 거냐."
과장스럽게 휘파람을 분 오웬이 고개를 저었다.
"눈치 하나는 귀신같군."
"내가 너보다 늦게 진상을 파악하면 인공지능을 주지 않아도 될 테니까. 당연한 추론이야."
"오해의 소지가 있는 추론이기도 하군. 나는 어디까지나 페이스 메이커로써 휘트니를 등용한 것뿐이다. 사람은 경쟁 상대가 있어야 분발하고 성장하는 법이니."
"그래? 그러면 말이 나온 김에 너에게는 노드테크를 붙여줄까 하는데. 죽은 히로 대신에 네가 과오를 뒤집어쓰면 너도 성장하나?"
간과할 수 없는 말에 오웬의 눈썹이 들썩였다.
"방금 전에는 관련이 없다고 들었는데 말이야."
"이전에는 없었지. 이 이후에는 또 모르지만."
결국, 말장난이었다.
노드테크에게 찍히기 싫으면 조심하라는.
입가에 미소를 지운 오웬이 노려보았지만, 가온은 물러나지 않고 시선을 마주쳤다.
접견실 내부에 적막이 흘렀다.
일촉즉발의 상황.
참다 못한 오웬이 주먹을 쥐나 싶더니, 이내 제 잘못을 시인했다.
"그래, 졌다. 이거 신진들끼리 경쟁을 붙여 보려다 내가 먼저 나가떨어지게 생겼군."
"사과는 성의로 하는 거야. 들키지 않았으면 모르되 들켰다면 그에 응당한 대가를 지불해야지. 그게 뒷세계의 법칙일 텐데?"
"그래서 우리 잘나신 해결사께서 바라는 건 뭐지?"
"단분자 블레이드를 수배해 줬으면 하는데."
진건이라는 산을 넘었으니, 이제 거리낄 건 없었다. 하나 구비해 놓는다면 두고두고 사용할 터.
"감상용은 아니겠지?"
"당연한 소리를."
오웬이 턱을 긁적였다.
단분자 블레이드.
민간엔 풀리지 않은 군용 제품이었다. 그 말인즉슨 특별하게 관리된다는 거고 뒷골목에서 쉬이 구할 수 없다는 소리.
물론 루케시아 패밀리는 제외였다.
쉬운 건 아니지만 무리한 요구도 아닌 수준.
사과의 선물로는 딱 적당하다 할 수 있었다.
"어쩐지 걸고 넘어지더라니 속셈이 있었나. 알았다. 휘트니를 통해서 전달해 주지."
* * *
오웬이 접견실 밖으로 나오는 것과 동시에 휘트니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인인 페르난데스가 서비스로 맥주를 한 잔 건네줬지만, 마실 수 있을 리 없었다.
가온이 항의하는 순간, 상황이 엉키게 될 테니까. 어쩌면 그가 보는 앞에서 내기의 대가를 지불해야 할지도 몰랐다.
제발 무시해라.
몇 번이고 되뇌었지만 그러한 소원이 무색하게―
"여기 해결사 나으리가 용건이 있다고 하니 적당히 상대해 주다가 와라."
오웬의 선고는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었다.
"뭐 해? 들었으면 앉아."
휘트니를 제 옆자리에 끌어들인 가온이 보드카 마티니를 들었다.
"할 말이 뭐지?"
"한쪽 눈을 걸고 미스터 타이런트와 내기했다고? 그것도 내가 맡은 의뢰로."
"그건...."
"관심 없으니까 변명하려고 하지 마."
오웬이 휘트니를 부추긴 건 신입 교육의 일종.
자꾸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구니, 현실을 깨우쳐 주기 위해 충격 요법을 사용한 것으로 추측되었다.
조직을 운영하는 간부라면 당연히 해야 할 처방이기도 했다.
보아하니 의도대로 겸허라는 개념을 배운 듯 휘트니는 저번보다 정중한 자세를 고수했다.
물론 가온이 알 바는 아니었다.
"내가 묻는 질문에 성실하게 답해. 시원찮을 경우엔 내가 직접 네 눈을 가져가기로 했으니까."
오웬과 협의하지 않은 내용이었으나, 휘트니가 알 리 없었다.
"마, 말해라."
"듣기로는 너도 사건 현장에 방문했다고 하던데."
"그게 문제가 되나?"
"아니, 그저 알고 싶을 뿐이야. 거기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휘트니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그때 마주쳤던 진건이라는 보안관에게 경고를 들었던 거다. 함부로 정보를 유출했을 시엔 대가를 치르게 할 거라는.
제이콥을 처리하는 걸 보아서 그런지 허세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러한 휘트니의 속내를 엿본 가온이 헛웃음을 흘렸다.
"설마 그때 만난 보안관에게 겁먹은 건 아니겠지? 공찰의 경고에 입 다무는 마피아라니.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지? 이거 래빗이 아니라 치킨이었네. 안 그래, 미스터 치킨?"
"알았으니까 그 저주받은 혓바닥 좀 그만 놀려라."
한숨을 토한 휘트니가 미지근하게 변한 맥주잔을 들었다.
술기운을 빌려 기억을 정리한 그가 사건을 시간의 순서대로 배열한 건 잠시 후였다.
중구난방인 감이 없잖아 있었으나, 어쩌겠는가. 익숙한 상식선에서 설명할 수 있다면 이리 고민하지도 않았을 텐데.
실제로 눈앞에서 상황을 목격했지만, 휘트니는 절반도 이해하지 못했다.
반면, 가온에게는 유용한 양식이 되었다.
총책임자 크로프트, 그리고 제이콥.
두 사람의 관계를 통해 메타 휴먼과 함께하는 조직이 륭영이라는 걸 파악할 수 있었다. 디바이스 적출부터 에덴에 이르기까지 촘촘하게 얽힌 선이 보였던 거다.
무엇보다 고무적인 건 잠재적인 대적이라 할 수 있는 진건의 실력을 일부나마 알 수 있게 되었단 것.
"산성 혈액을 전부 피했다고?"
"가지고 놀았다는 표현이 더 옳을 테지."
그건 지금 가온도 못 하는 묘기였다.
아무리 감각을 곤두세운다고 해도 몇 방울은 필연적으로 맞을 수밖에 없을 터.
회전의 묘리를 활용해 기류를 일으킨다면 양상이 달라질 테지만, 그건 진건이 보여준 기예와 거리가 멀었다.
"평범한 사냥개가 아니라는 건가."
"뭐라고?"
"아무것도 아니야."
진건이 소속한 시정부가 메타 휴먼에 대해 배타적이라는 것도 퍽 유용했다. 그들의 목표가 생포일지, 사살일지 긴가민가하던 참에 확실해진 거다.
놈들은 메타 휴먼의 말살을 갈구했다.
거기에 협의나 양보의 여지는 없어 보였다.
* * *
똑, 똑.
"들어오세요."
달콤한 목소리에 이끌리듯, 문을 열고 들어간 남자 칼리반 로울러는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가 배알하는 존재는 동류 중에서도 특별한 여성이었다. 존경하고, 귀애해 마지않는.
비록 면사포로 얼굴을 뒤덮어 보이는 건 입술만이 전부였으나 그것만으로도 고혹적인 자태가 저절로 그려졌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그녀를 구성하는 모든 게 치명적이었다.
이상적인 굴곡이 드러나는 이브닝드레스와 오페라 글러브. 드러난 건 어깨와 쇄골뿐이었지만, 오히려 피부를 가리고 절제한 게 불순한 상상을 불러일으켰다.
모든 남성의 마음을 울리도록 운명이 정해진 팜 파탈.
그건 축복된 길이면서도 가시밭길이었다. 끌어모은 관심에는 선악의 구분이 없었던 거다. 그녀를 지키겠다 자청한 이들은 대부분 본분을 잊고 눈이 멀었다.
해마다 경호 인원이 바뀌는 것도 그 때문.
전임자의 최후를 기억하는 칼리반은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우려하던 사태가 일어나지 않았다.
천성적으로 무심한 성정도 한몫했을 터.
이 자리에 온 것도 그 연장선이었다.
사적인 용무가 아니라 공적인 보고 때문이었으니.
"제이콥의 사망이 확인되었습니다."
무거운 서두를 꺼냈으나 여성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모진 고초를 겪으며 미소를 잃은 그녀였다.
입 밖으로 나오는 소리 또한 무심하기 그지없었다.
"시신은 확보할 수 있었나요?"
평범한 공찰이 회수했다면 그랬을 수도 있었다. 동지들은 각지에서 활동했으니까. 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아무래도 사냥개들이 따라붙은 것 같습니다."
"화성방위군인가요?"
"지구에서 직접 온 것 같습니다."
지구. 그 의미를 모를 여성이 아니었다.
"돔에서 활동하기에도 바쁜 사람들이 여기까지 왔다는 건가요? 대체 왜?"
"확실한 건 아니지만 첩보에 의하면 양후를 쫓아왔다고 합니다."
"양후면, 그 양후를 말하는 건가요?"
밀레니엄 코드 게이트를 정리한 해결사.
이명은 검귀.
현재 활동하는 이들 중에서는 손에 꼽히는 강자였다.
"설마 그도 우리와 동류인가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여성이 답지 않게 소리를 높였다.
상기된 표정이라는 건 면사포를 올리지 않아도 익히 짐작할 수 있는바, 칼리반은 그녀의 바람에 동조하고 싶었으나 상황이 녹록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가정입니다. 그의 거취도 모를뿐더러, 섣불리 접근했다가 동류가 아니라는 게 밝혀지면 여러모로 곤란해질 뿐입니다."
"일단, 사냥개들의 흔적을 발견하는 게 관건이겠군요."
"네, 정말 쫓아왔다면 그들의 발자취를 더듬는 것만으로 의미 있는 결과를 얻을 수 있을 테니까요."
"양후에 대한 건 추가 인원을 배정해서 추적하도록 하세요. 접촉하는 시기는 제가 직접 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예상치 못한 정보를 들었지만 변한 건 없었다.
그 낙차에 흥분을 가라앉힌 여성은 화두를 돌렸다.
"에덴에 대한 건 어떻게 됐나요?"
079 기대되는군
* * *
"전부 공찰에서 회수했다고 합니다. 돌아가는 걸 보니 에덴의 원리도 눈치챈 거 같더군요."
세간에는 단순한 전자 마약으로 알려진 에덴이지만, 그 본래 목적은 클라우드 컴퓨팅 플랫폼을 분석하도록 설계된 악성 코드였다.
1구역에 존재하는 초대형 데이터 센터로 가기 위한 교두보라고 설명하면 쉬울까.
계획대로 양산되기만 했다면 능히 사회 체제를 뒤집었을 패였다.
물론 메타 휴먼 측의 입장에서 그건 소소한 이득에 불과했다. 그들이 진정으로 노리는 건 그 뒤에 따라오는 부가적인 효과.
륭영의 실험에 참가하면서 우연히 발견한 사실이지만, 메타 휴먼에게 에덴은 심층 의식을 드러내게 하는 촉발제가 되었다.
별도의 장치 없이 자신의 본질과 마주할 수 있다는 소리.
처음 소식을 접했을 때만 해도 여성은 하늘에서 계시가 내려온 줄로만 알았다.
지금까지 전문미답의 영역인 이능에 자의식을 부여할 수만 있다면 생각하지도 못한 결실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대화가 통하는 상태라면 고된 수련 없이도 여러 단계를 건너뛸 수 있지 않겠던가.
분쟁보다 타협이 더 효율적일 거라는 건 말할 것도 없는바, 모두 희망에 가득 차 에덴을 사용했다.
하지만, 그게 사달의 시작이었다.
이능의 각성은 그들조차 감히 추측할 수 없는 영역.
함부로 재단한 게 문제였다.
원리도, 근간도 알 수 없는 존재를 상대로 협상하려고 했으니 그 여파가 현실 세계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그래―
"실험에 참여한 분들은 아직도 혼수상태인가요?"
"아쉽게도 나아질 기미는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나지막이 탄성을 터트린 여성이 이마를 짚었다. 아무래도 과욕을 부린 대가를 혹독하게 치러야 할 것 같았다.
"유일하게 안드레이, 그분이 깨어났지만 당분간 요양이 필요한 수준이라더군요. 상당한 시간이 소비될 것으로 판단 중입니다."
안드레이 일리치 페트로프.
그는 4단계에 접어든 메타 휴먼으로, 조직의 중심인물 중 한 명이었다. 여태껏 외세와 균형을 유지해 온 비대칭 전력이라고 해야 할까.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분이 말씀하시기로는 숨기고 싶은 본성을 드러내 억지로 마주하게 한다는군요. 오로지 의지와 이성만으로 헤쳐 나가야 하기에 평범한 사람은 빠져나올 수 없을 거랍니다."
최강에 가까운 자가 내뱉은 충고였다. 아마 메타 휴먼 중에서는 감당할 수 있는 자가 없을 터.
"만약 단숨에 극복하는 이가 있다면 괴물 중의 괴물. 존재해서는 안 되는 생명체라는 우스갯소리도 하시더군요."
그야말로 난센스였다. 안드레이의 역량을 아득히 뛰어넘는다는 소리니까. 그가 얼마나 강한 인간인지 알고 있는 여성으로서는 당치도 않는 가정이었다.
그래도―
"한편으로는 보고 싶네요. 그런 절대적인 철인이 있다면 우리를 이끌어 주실 수 있을 테니까요."
* * *
32구역 외곽에 위치한 자택, 지하실.
컴퓨터 앞에 앉은 가온은 모니터에 떠오른 정보를 정독했다.
아말 캄, 2157년생.
이명, 파계승.
화성이 개척되었을 당시, 그러니까 시드 콜로니가 시드 콜로니이기 전에 나타난 검객으로 당시 화제의 중심이었다.
분쟁이 일어난 곳에 나타나 중생 구제라는 명목하에 폭력을 휘두르는 희대의 미치광이였던 거다.
확인된 사상자만 해도 700여 명.
지구였다면 나타난 즉시, 체포되었겠으나 인프라가 갖춰지지 않았던 당시의 화성에서는 요원한 일.
때문에, 아말이 폭거를 멈춘 건 그로부터 3년 후였다.
그를 잡기 위해 투입된 인원만 해도 3천여 명. 그중 태반이 안드로이드였지만, 그래도 이례적인 단위라는 건 변함 없었다.
얼마나 활개를 치고 다녔으면 아말 때문에 시드 콜로니의 완공이 한 달이나 지체되었다는 말이 나오겠는가.
하지만―
'그건 모두 조작된 정보.'
죽었다고 알려진 아말은 현재까지 생존해 있었다.
그의 나이는 올해로 164세. 유전자 조작을 받지 않은 인간이라고는 보기 힘들 정도로 장수한 타입이었다.
아마도 초월적인 수준에 도달한 무예 덕분일 터. 지나가는 세월마저도 붙잡아 두는 그의 내력에는 가온도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뭐 그런 아말이기에, 화성방위군이 요긴하게 써먹고 있는 듯했지만.
'자네가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현생을 헤매고 있는 한, 언제고 다시 만나게 될 걸세.'
불현듯 아말의 선고가 떠오른다. 대국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그의 예측은 틀리지 않았다. 하나, 언제까지나 웅크리고 있을 거라 생각한다면 오산이었다.
아타셰 케이스를 열어젖힌 가온은 메모리 폼에 감싸인 금속 장치를 내려다보았다.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집적 회로가 군집을 이룬 큐브.
오웬이 장담했던 대로 특상품이었다.
뒷세계에서 이보다 더 나은 인공지능은 구할 수 없을 터.
불로불사, 제 근원을 탐구하기 위한 기반이 마련되었다.
남은 건 그 밑바닥까지 샅샅이 훑어보는 것뿐.
* * *
푸쉬익.
커넥터에서 나온 아말은 애꿎은 허공을 잡으려 두 손을 휘적거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뭐든지 할 것 같은 전능감은 사라진 지 오래.
지금 그가 조종하는 건 특수 제작된 전신 의체가 아니라 노쇠할 대로 노쇠한 몸이었다.
그 격차가 자아내는 괴리에서 중심을 잡는 건 좀처럼 쉽지 않았다.
물론 소령, 파이퍼는 아말이 그러거나 말거나 그의 두 손에 수갑을 채웠다.
"일어나라, 죄수 번호 0001."
"자네는 보시(布施)하는 마음도 없는 건가? 아무리 내가 밉더라도 한 번만 참으면 공덕이 쌓일 텐데 말이네."
"이미 공찰 측에서 사건을 마무리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우리의 재산인 전신 의체를 아예 박살 냈다지?"
"어쩔 수 없지 않나. 그것이 순리인 것을."
"50년 감형은 없던 일로 하지."
"그렇게 하게."
어차피 아쉬울 때는 자기를 부를 수밖에 없다는 자신 때문일까.
서운한 기색도 없이 답하는 아말의 모습에 파이퍼는 묘한 위화감을 느껴야 했다.
그 예상대로 아말에게 제 형기는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걸 만회하고도 남을 경험을 쌓아서였다.
"밖에서 아주 재미있는 걸 보았네. 어쩌면 내가 오랫동안 찾아 헤맸던 인생의 의미라고 할 수도 있겠지."
"잡설은 거기까지. 그 이상 말하면 발포하겠다."
행여라도 아말이 돌발 행동을 일으킬세라 파이퍼는 사전에 논답을 차단했다.
"허허. 아쉽게 되었군."
아말이 거론하고자 한 건, 어쩌면 인류의 대적으로 성장할 수도 있는 자였다. 그런데 사사로운 감정에 휩싸여 외면하는 꼴이라니.
아말은 고개를 저으면서도 구태여 덧붙이지 않았다. 어차피 다른 사람에게 양보할 생각은 없었으니까.
쿵.
독방에 들어가자마자 사지가 결박되고, 억지로 눕혀졌지만 아말은 요람에 누운 아기처럼 곤히 눈을 감았다.
"수감해."
"다음에 또 보세나."
머리 위로 커넥터가 씌워진 순간, 아말의 의식은 가상 현실 속에서 내던져졌다.
그가 눈을 떴을 때 목도한 건 목가적인 분위기가 흐르는 집. 지난 수십 년 동안 계속해서 기거한 곳이기에 아말은 망설이지 않고 뒷마당에 세워진 비석으로 향했다.
여기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제한적이었다.
아니, 하나밖에 없었다.
그건 바로 비석에 새겨진 피해자 명단을 보고 잘못을 비는 것. 어찌 보면 세뇌나 다름없는 일과지만 아말에게는 의미 없는 강요일 뿐이었다.
익숙한 자세로 무릎을 꿇은 그는 두 눈을 감았다.
특별한 존재로 오롯이 서려면 누구보다 위대한 과업을 달성해야 했다.
그래, 속세를 떠도는 망령의 족쇄를 끊어 주는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던가.
그 한 번의 결단이 만 번의 설법보다도 은혜로운 자비이니―
"기대되는군."
아말은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염불을 외웠다.
가온이 보여 주었던 검격을 몇 번이고 회상하면서.
* * *
백석도, 그는 메가콥 백두를 일으킨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일생이 순탄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가문 대대로 중견 기업을 운영하고 있었을뿐더러, 보유한 부동산 또한 적지 않았던 거다.
하지만 위에는 또 위가 있다고 했던가.
상류층이라 부르기에는 넘치나, 그렇다고 재벌이라고 칭하기에는 부족한 제 처지에 백석도는 항상 갈증을 느꼈다.
신분 상승에 맹목적으로 매달린 것도 그 연장선.
하지만 굳어진 권력 구도 앞에서 백석도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무력하게 시간만 흘려보내던 와중, 외계에서 손님이 방문하면서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인류가 화성으로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된 거다.
일생일대의 기회가 코앞에 왔다는 걸 직감한 백석도는 지분을 정리하고 자금을 모아 미지의 대지에 진출할 계획을 세웠다.
그는 화성을 개척하는 데 있어 가장 큰 난관을 자원이나 자금이 아닌 인력으로 보았다. 그간 억압된 인류의 수는 제한적이었던 거다. 나올 수 있는 전력 또한 거기에서 거기.
결국 빈자리는 도구로 대체할 수밖에 없었다.
안드로이드 관련 특허와 기술을 긁어모은 건 그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만능 일꾼을 원하는 이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꾸준히 대비한 덕분에 백석도는 시류에 올라탈 수 있었다. 백가산업의 이름을 백두로 바꾼 것도 그즈음.
지금에 이르러서는 화성 사회를 지탱하는 거목이 되었다.
그 이력에서도 알 수 있듯이 주력 분야는 로봇 제조.
전신 의체를 비롯해 센서와 칩, 모듈, 배터리, 프레임에 이르기까지.
현대 사회에 없어서는 안 될 고부가 가치 사업이 메가콥 백두의 먹거리였다.
그 위세를 보여주듯 2구역의 외곽에는 백석도만을 위한 저택이 존재했다.
그곳에는 증강 현실을 구현한 홀로그램도, 그 흔한 안드로이드도 없었다.
하물며 필요 이상으로 높은 고층 빌딩은 세워지지도 못했다. 지평선 너머까지 탁 트인 정경이 그 증거였다.
이 일대는 전부 백석도가 추억하는 어린 시절을 그대로 구현한 모형 정원.
이는, 그가 누구보다 지고한 위치에 있다는 걸 알려주는 장치이자 시설이었다.
하지만 화무십일홍이라, 백석도가 부귀를 누릴 수 있는 기간은 정해져 있었다. 이는 자연의 섭리이기도 했다. 200세에 가까운 몸이 말썽을 부리기 시작했으니까.
끝을 모르고 발달한 의학은 천수도 넘게 만들었지만 죽음까지 농락할 정도는 아니었다.
제 명줄이 머지않아 꺼진다는 걸 눈치챈 백석도는 1년 전부터 칩거에 들어갔다. 남은 기간 동안 신변을 정리하고 유산을 분배하기 위함이었다.
흔들의자에 앉은 그가 여느 때처럼 사색에 잠긴 건 필연.
이제는 일종의 루틴이 된 일상을 영위하던 백석도는 침음을 흘렸다.
뒷정리하다 불쑥 떠오른 과거의 기억이 몇 솔 동안 그의 머릿속을 어지럽힌 탓이었다.
마음속 깊숙한 곳에 묻어 두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닌 듯했다.
그렇다면 해결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판단과 결심이 이루어진 건 거의 동시.
지팡이를 짚고 일어난 백석도는 즉시 친구이자 심복인 알프레도를 호출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회장님."
"아이들을 불러주게."
080 수단도 방법도 묻지 않겠다
* * *
* * *
백설의 하루는 이른 아침부터 시작되었다. 해가 뜨기도 전에 기상, 그리고 요가와 명상을 병행하며 지난 밤에 굳은 몸을 풀었다.
그녀의 이름처럼 새하얀 피부는 타고난 체질에 노력을 더해 완성된 자랑거리.
위에 서는 자란 무릇 자기 관리에 심혈을 기울여야 하는 법이었다.
표정, 식단, 지식, 인맥 그리고 감정에 이르기까지.
메가콥의 일원이라는 명패를 꺼내기 전에, 백설이라는 이름만으로 우상이 되어야 한다는 건 말할 것도 없었다.
"후."
절제된 한숨을 내뱉은 백설은 시간을 확인했다. 오전 6시 11분. 평소보다 1분 늦었다.
"임솔아, 차 좀 내와 줄래?"
평상시라면 부르기도 전에 달려올 텐데, 반문하는 소리조차 없었다.
"임솔?"
밖으로 나가니, 트롤리 위에 찻주전자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아무래도 그녀가 총애하는 비서는 준비하던 것도 놓고 갈 정도로 바쁜 용무가 생긴 듯했다.
"칠칠치 못하기는."
어쩌겠나.
주인인 그녀가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 주는 수밖에.
어차피 느긋하게 티타임을 즐길 시간도 없었다. 간소하게나마 찻잔에 따라 마시는 게 베스트일 터.
또르륵.
한 모금 음미한 백설은 한 박자 늦게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평소 마시던 찻잎이 아니었다. 아니, 차조차 아니었다.
그저 펄펄 끓는 물.
금방에라도 발을 동동 구르며 소리치고 싶었지만 백설은 인상도 찌푸리지 않고 품위를 유지했다.
"나쁘지 않네."
그게 그녀가 내놓을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이었다.
뒤늦게 나타난 임솔이 두 눈을 화등잔처럼 크게 떴다.
"아가씨, 그건 끓는 물입니다. 찻잎을 우리기 전에 준비해 놓은 건데...."
"그래서 나쁘지 않다는 거야. 오늘은 뜨거운 걸 먹고 싶은 기분이었으니까."
"그, 그렇습니까."
질렸다는 듯이 수긍하는 임솔이었으나, 그러한 반응을 눈치채지 못한 백설은 상급자로서의 위엄을 지킨 것 같아 퍽 만족스러웠다.
"그보다 무슨 일이야? 너답지 않게 말도 없이 자리를 비우고."
"비서실장님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알프레도에게서?"
"회장님께서 아가씨를 부르신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의외라면 의외였다.
아버지, 백석도가 두문불출한 지도 벌써 1년. 그는 바깥과의 교류를 거부했다. 그건 가족이라고 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백석도의 의중을 알 수 있었던 건, 알프레도의 입을 타고 내려오는 업무적인 지시가 전부.
그런 그가 이제 와서 친목을 다지자고 부른 건 아닐 터였다.
어차피 거부할 수도 없었다.
백두에서 회장, 백석도의 지시는 절대적이었으니.
하루 일정을 취소하고 곧장 저택으로 향한 백설은 그곳에서 마주치고 싶지 않은 인물과 조우했다.
그녀처럼 새하얀 피부와 커다란 체구.
흠결 하나 없이 조각된 이목구비는 불호의 영역을 넘어선 상태였다. 유전자 풀이 허락하는 선까지 조작된 인간의 선두 주자라고 해야 할까.
그는 여덟 살 터울 오빠인 백량이었다.
"오랜만이에요, 오라버니."
"너도 호출을 받았나."
동생에게 말하는 게 아니라 하급자에게 묻는 듯한 어투. 무시하는 게 명백한 태도인지라 백설의 미소에 금이 가려고 했으나, 그 전에 먼저 백량이 등을 돌렸다.
"무엇 때문에 아버지가 부른 건지 알고 있나?"
"글쎄요, 그건 저도 잘...."
"쓸모가 없군."
"피차일반이지 않을까요?"
참다못한 백설이 응수했지만 백량은 무심하게 앞장설 뿐이었다.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에 임솔은 슬그머니 뒤로 빠졌다. 어렸을 때부터 백설의 비서로 발탁된 그녀이기에 알 수 있었다.
백석도가 두 자식을 부를 땐, 항상 번거로운 사건이 생긴다는 걸.
* * *
백량과 백설.
두 자식을 앞에 둔 백석도는 먼 산을 바라보았다.
"23년 전이었나. 나는 한 콜로니에서 운명적인 사랑을 만났다."
개척력 기준으로는 11년 하고도 반이나 되는 시간.
백량과 백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백석도는 늘그막에 자식을 보았다. 백두가 메가콥의 반열에 오르지 않으면 아예 전문 경영인에게 위임할 생각까지 했던 그였다.
그 정도 각오가 없었다면 격동의 시대에서 살아남지 못했을 테니, 어찌 보면 당연한 처사였다.
하지만 웃기게도 그것이 미련의 단초가 되었다.
"첫눈에 반했다고도 할 수 있겠지. 하지만 나는 그녀에게 약속해 줄 수 있는 게 없었다. 그 당시에 나는 회사를 운영하는 데 정신이 팔려 있었으니까."
결국, 하룻밤의 꿈으로 남길 수밖에 없었다.
이는 둘 다 합의한 사안.
"그러던 중, 뒤늦게 그녀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찾아보려고 했지만 이미 내 시야에서 사라진 뒤더구나."
백량이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백석도였다. 연명 치료도 거부한 그이지 않던가.
그래서 서둘러 경영 승계 작업에 들어갈 줄 알았다. 하지만 이게 웬걸, 풍속 소설에도 나오지 않을 법한 비밀을 들을 줄이야.
화목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복잡한 족보가 없어 평화로웠던 백두였다.
그런데 난데없이 배다른 동생이라니.
"인정할 수 없다고 해도 듣지 않으시겠죠. 아버지가 원하는 게 뭡니까."
"나는 너를 이리 눈치 없는 아이로 키우지 않았는데 말이다."
그래, 노인이 구태여 제 치부를 드러낸 거다. 그 저의가 무엇인지 물을 것도 없었다.
데려와라.
백석도는 방금 전부터 그리 말하고 있었다.
"이복동생, 이름은 뭡니까?"
"모른다."
하긴, 알았다면 이미 데려왔을 터.
"출생지는 아십니까?"
"하이픈 콜로니로 예상하고 있다."
"거기는...."
검은 소나기가 벌어진 장소이지 않던가. 셔틀 무리가 떨어진 자리에는 아직도 깊은 크레이터가 남아 있을 정도였다. 하물며 그 사건을 계기로 그곳을 다스리는 이사회는 증발.
기존의 인프라가 모두 망가졌을 테니 조사 환경이 열악할 터였다.
그곳에 사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정상은 아닐 거다.
여러모로 산 넘어 산이었다.
최악의 경우엔 이미 사망했을 수도 있었다. 문제는 그 증거를 찾기 전까지는 조사가 끝나지 않으리란 거였다.
이래서 백석도도 섣불리 찾지 못하고 관망한 듯했다.
"심통 난 표정이군."
"그럴 리가요. 어떻게 수색할지 고민했을 뿐입니다."
백석도는 백량에게서 백설로 시선을 옮겼다.
"그에 반해 설이 너는 별말을 하지 않는구나."
"아버지가 지시하신 일이니까요."
"그래, 너는 항상 나를 지지해 주었지."
그것보다는 납작 엎드릴 수밖에 없는 처지라는 게 옳을 거다. 백량이 적대하는 지금, 백설에게 버팀목이 되어 줄 수 있는 건 백석도뿐이었으니.
지팡이를 짚고 일어난 백석도가 백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쩌면 너희와 나 사이에 인식 차이가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아무리 내가 과거를 사랑한다고 해도 그게 너희를 부정한다는 말은 아니다."
얼굴도 보지 못한 자식이 걱정되는 이유는 하나였다.
"단지 내 씨가 알지도 못하는 녀석들에게 모욕과 수치를 겪을 게 뻔히 보여 부아가 치미는 거지. 하긴 이건 내 사감일 뿐이고, 너희에게는 먼 나라의 이야기처럼 들리겠구나."
그러니―
"그 아이를 먼저 데려오는 쪽에게 백두 로보틱스의 지분 3퍼센트를 양도하겠다."
백두 로보틱스, 그곳은 지주회사였다. 땅으로 말하자면 메가콥 백두의 머리를 휘어잡을 수 있는 요충지라는 뜻.
순간, 계산을 끝낸 백량의 눈빛이 빛났다.
"그래. 량이 너는 최대주주로 올라갈 수 있을 테고, 설이는 새로이 경쟁에 임할 수 있는 기회가 되겠구나."
허허롭게 웃은 백석도가 자리에 앉았다.
경쟁이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성장 구도.
그의 일생 전체를 관통하는 깨달음이기도 했다.
"수단도 방법도 묻지 않겠다. 하루라도 빨리 그 아이가 보고 싶구나."
* * *
밖으로 나온 백량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입을 열었다.
"미리 경고하는데 찾지 마라."
"오라버니만 총애를 받겠다는 건가요?"
하, 하고 짧은 조소한 백량이 덧붙였다.
"돌아가는 상황을 모르겠나? 녀석이 남자이기라도 할 경우에는 어떻게 할 거지? 단숨에 적법한 승계 후보가 한 명 더 생기는 거다."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얼굴을 들이민 백량이 으르렁거렸다.
"네 손에 돌아가야 할 유산까지 뺏긴다는 거지."
"글쎄요, 백두 로보틱스의 지분 3퍼센트라면 갈음하고도 남을 것 같은데요. 그리고 곤란해지는 건 저뿐만이 아니잖아요. 오라버니는요?"
"나는...."
거기까지 말한 백량은 입을 다물었다.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물어봐서 저도 모르게 반응할 뻔했던 거다.
"많이 자랐군, 백설."
"네? 이 나이 먹고도 성장이 끝나지 않는다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잖아요?"
"아니, 그걸 말한 게 아니다만."
김이 팍 샌 백량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러고 보면 제 동생은 항상 이러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완벽하지만, 한 번씩 나사가 하나 빠진 듯한 언동을 보였다.
"아무튼 내 말대로만 해라. 그러면 녀석이 우리 앞에 나오는 일은 없을 테니."
찾기도 전에 그 후를 고려하는 백량이었다.
"설마, 무고한 사람을 처리하겠다는 건 아니죠?"
"내 동생은 무서운 상상을 하는군. 나는 어디까지나 이미 죽었을 가능성에 대해 말하고 있는 거다."
"그 말이 그 말이잖아요."
"그러면 믿고 싶은 대로 믿도록."
더 할 말은 없다는 듯 백량은 애매모호한 태도를 고수한 채로 사라졌다. 물론 그 속내를 모를 백설이 아니었다.
단번에 백두 로보틱스의 최대주주로 승격할 기회였다. 그런데 잠재적인 경쟁자를 곁에 두기 싫어서 제거한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백량은 어떻게 해서든 이복동생을 찾아내 백석도 앞에 대령할 거다.
그러면 백설에게 다음 기회는 없었다.
다른 기업에 팔려 가듯이 시집갈 수도 있고, 어쩌면 용도가 다했다고 판단한 백량의 손에 폐기 처분될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유쾌한 미래는 아니었다.
메가콥 백두의 지원을 받아 대대적인 조사에 나서는 게 최선이지만, 백량의 귀에 들어갈 거다. 사내에 그의 수족 아닌 자가 없었으니.
이럴 때 이용해야 할 상대는 정해져 있었다.
"임솔."
"네, 아가씨."
"해결사를 찾아봐. 이름은 알려지지 않지만, 실력은 좋은."
터무니없는 요구에 임솔의 눈이 가늘어졌다.
"경력 있는 신입 같은 건가요, 아가씨."
"그런 말이 있어? 역시 내가 맥을 정확히 짚었나 보네."
"아니, 그걸 말한 게 아닌데요."
임솔은 아무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 * *
몇 주 전, 한 캡슐 호텔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
좁디좁은 방과 방음이 미흡한 벽. 잦은 도난과 다툼. 거기에서 촉발된 스트레스는 악순환의 고리를 그렸고, 참다못한 패러사이트 중 한 명이 기어코 총기를 난사하면서 참극이 발생했다.
캡슐 호텔의 주인인 케빈이 늦지 않게 신고했지만, 출동한 공찰은 범인이 잔탄을 소진할 때까지 진입하지 않았다.
때문에, 10명에 달하는 사상자가 나온 건 말할 것도 없었다.
불행히도 거기에는 케빈의 동생도 섞여 있었다.
그는 분개할 수밖에 없었다. 제 안위만 챙긴 공찰의 미흡한 대처에 애꿎은 피해자가 생긴 거다.
법적인 조치를 취하려고 했지만 기소조차 되지 않았다.
공찰 내부에서도 묵묵부답.
당시 출동했던 두 조사관은 징계위원회에 회부되지도 않았다.
정직은커녕, 감봉도 없었다.
케빈은 불합리한 현실에 치가 떨리는 듯했다. 하지만 일개 시민인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전무. 벽보를 붙이고 시위를 해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결국, 케빈은 썩은 동아줄이라도 잡는 심정으로 해결사를 고용했다.
결과는 보이는 대로.
하늘은 아직 그를 버리지 않은 건지 만날 때마다 이죽거리던 조사관은 땅바닥에 널브러진 채, 신음을 토하고 있었다.
"쿨럭, 쿨럭."
081 저는 이런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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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빈의 요청에 응한 해결사, 가온은 그 앞에 서서 나지막이 읊조렸다.
"내가 말했던 것 같은데. 아픈 척할 때마다 한 대씩 추가된다고."
무리한 요청이었지만 벌써 세 번째 반복되는 대화인지라 조사관, 하룽가는 애써 고통을 감내했다. 하지만 불만을 담은 눈빛까지 거둔 건 아니었다.
"내가 잘못한 게 뭐가 있지?"
"이거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네."
"그러면 내가 총이라도 맞았어야 됐다는 거냐."
후안무치의 끝을 보여 주는 보신주의.
하룽가의 성향을 질타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사람의 천성이라는 건 여간해서는 바뀌지 않았으니까. 진정 가온이 비판하고 싶은 건―
"그렇지 않을 거면 왜 공찰이 된 거지?"
공익을 저해하고, 자기 위신만 챙기고.
지금 하룽가는 민중을 지키는 지팡이가 아니라 사회를 좀먹는 기생충에 가까웠다.
권리만 누리는 그에게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질리도록 들은 지적인지라 하룽가는 귓등으로 흘릴 뿐이었지만 말이다.
"어쩔 거지? 신고라도 할 건가? 고작해야 폭력으로 되갚는 게 고작이지 않나."
잘난 듯이 열변을 토하고 있지만, 공찰도 되지 못하고 도태된 반푼이에 불과했던 거다.
하물며 해결사라는 직종이 촉망받는 건 어디까지나 서민의 지지를 받아 사회 체제의 일각으로서 효용을 보였기 때문.
당연하게도 기존 권력에 대항한다면 무너질 뿐이었다.
"싸그리 묶어서 넣어 주마. 그래, 이 녀석을 고용한 너부터."
케빈과 시선을 맞춘 하룽가가 악을 토해냈다.
"동생에게 주어질 유산을 독차지하고 싶어서 패러사이트에게 사주했다고 하면 되겠군."
"뭣."
놀란 케빈이 멈칫했지만, 하룽가는 보지도 않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해결사 너는 그 사실을 덮기 위해 고용된 걸로 처리해 주지."
"그러니까 거짓으로 조서를 작성하겠다는 거지?"
"왜? 못 할 거 같나?"
조사관이라지만 어엿한 공찰의 일원이었다. 내부에서야 잡일꾼으로 통하지만, 오히려 아랫사람이기에 할 수 있는 업무도 존재했다.
"그렇다는데? 미스터 건."
"이것 참, 곤란한 의뢰만 받으시는군요."
방금 전부터 가온의 뒤에 서서 상황을 관망하던 사내, 진건이 앞으로 나왔다.
"안녕하십니까? 하룽가 씨."
"넌 또 뭐지?"
"보아하니 직무를 유기한 건 이번뿐만이 아니더군요. 비품 절도, 허위 야근 신고, 상납금 갈취."
"동료인 것 같은데 아직도 돌아가는 상황을 모르겠나? 이렇게나 눈치를 줬으면 알아서 꺼지지 그래?"
"그리고 상관 모욕."
"뭐?"
"저는 이런 사람입니다."
진건이 품 안에서 공찰 수첩을 꺼내 펼쳤다.
인식 태그를 확인한 하룽가는 침음을 흘렸다.
[2구역 광역수사대]
[보안관 진건]
공찰청 본부가 있는 2구역.
그곳의 광역수사대라면 시드 콜로니 내에서 벌어지는 모든 범죄에 관여할 수 있었다.
말하자면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는 자리.
특무관으로 가는 직행 코스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제야 제 실수를 깨달은 하룽가의 얼굴이 흙빛으로 바뀌었다.
"개인의 사상과 생각은 자유입니다. 시민을 얕볼 수도, 상관을 헐뜯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을 때의 이야기."
하룽가에게 얼굴을 들이민 진건이 유쾌하게 웃었다.
"설령 공찰이라고 해도 절대 해서는 안 되는 게 있는 법입니다. 아무래도 하룽가 씨는 가장 기본적인 덕목이 부족하신 것 같군요."
"아니, 나는…."
하룽가는 서둘러 항변하려고 했지만 진건은 여지조차 주지 않았다. 그가 등을 돌리자마자 조사관이 여럿 튀어나와 하룽가를 구속했다.
일선을 넘고도 반성하지 않는 자의 최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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