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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카탈리나 로웬은 애비게일과 연습생 시절부터 동고동락한 사이였다. 걸그룹, 시티즈를 결성했을 당시에도 서브 보컬로 한 자리 차지해 그 재능을 빛낸 적 있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가 은퇴를 선언하고 잠적한 건 1년 전. 갑작스러운 선언이었으나 아쉬워하는 이는 드물었다. 모두 올 것이 왔다고 저마다 수긍할 뿐.

연일 하향세를 걷던 시티즈였다. 만년 적자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지도 어언 3년째.

호사가들은 맏언니인 카탈리나가 동생들을 대신해 큰 결단을 내렸다 추측했다.

시티즈가 해체되는 수순을 밟았지만 팬들의 반발이 적었던 건 그러한 연유에서였다.

꾸역꾸역 다른 걸그룹으로 옮겨가 재데뷔에 성공한 건 애비게일이 처음이자 마지막.

시티즈 멤버들은 그대로 업계를 떠났다.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단호하게.

샴이 전해준 정보를 떠올린 가온은 맞은편에 앉은 여성을 지긋이 관찰했다.

후드를 뒤집어쓴 여성은 얼굴을 내보이기 싫다는 듯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이래서야 대화가 진행될 수 있는지 의문이 들 지경이었다.

어디서부터 풀어 가야 하나.

고심하던 가온은 서론을 건너뛰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에비게일이 실종되었을 당시 신고했다고 들었는데."

"제가 신고했다고요? 잘못 아신 것 같은데요. 저도 프로듀서님에게 듣고 나서야 알았는걸요."

그럴 리가.

입 밖으로 나오려는 말을 주어 삼킨 가온은 카틸리나를 쳐다보았다. 순간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둘러대는 줄 알았지만 정말 모르는 듯한 눈치였다.

그렇다는 건 정말로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건데―

'말이 되나?'

가슴 속에서 피어나는 묘한 위화감을 뒤로 한 채 가온은 다음 주제로 넘어갔다.

"그러면 애비게일이 실종되기 전, 그녀와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나눴지?"

"평소와 다르지 않았어요. 대부분 잡담이었으니까요. 아시잖아요? 친구들끼리 만나면 요즘 나오는 방송이나 유행하는 패션 같은, 윽."

거기까지 말한 카탈리나가 이마를 부여잡았다, 그것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았는지 몸을 둥글게 말기까지 했다.

그녀가 진정된 건 품 안에서 꺼낸 진통제를 쏟아붓듯이 먹고 나서였다.

"괜찮아?"

"자주 있는 일이에요."

"병원에는 가 본 거야?"

"갈 수 없어요. 이건 단순한 두통이 아니니까요. 흐윽...."

이어지는 간헐적인 발작에 후드가 벗겨진 순간, 시뻘겋게 달아오른 안구와 뒤틀린 안면 근육이 밖으로 드러났다.

생체에 이물을 삽입했기에 생길 수밖에 없는 문제.

사이버네틱스 수술을 받은 사람 중 몇몇은 이 질환을 달고 살았다.

"거부 반응이구나."

"네, 맞아요."

"설마 은퇴한 게?"

"이것 때문이죠."

처연하게 웃은 카탈리나가 후드를 다시 뒤집어썼다.

오르페우스 측도 인지했을 거다. 하지만 인기가 저조한 걸그룹 멤버에게 투자할 생각 따윈 없다는 거겠지.

라주도 말하지 않았던가.

아이돌이 되기 위해 무리한 이식을 받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몸에 맞지 않는 슬롯을 받아들였어도 은퇴한 몸이잖아. 보증 기간 안에 가면 해결할 수 있는 거 아냐?"

"그런 게 있을 리 없잖아요."

어딘가 모르게 체념한 듯한 어투.

"모두 제 사비로 이식한 거예요. 그것도 뒷골목에서."

가온은 저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내었다. 무허가 시술소를 운영하는 리퍼닥의 실력은 천차만별인지라 여러 사람을 통해 알아보고 가야 했다.

하지만 음지와 연이 없는 연습생이 무얼 알겠는가.

그저 가격만 보고 혹한 것이리라.

"그런 곳은 어떻게 가게 된 거지? 오르페우스 내부에서 알선해 주는 브로커라도 있었나?"

"아뇨, 애비게일이 말해 줬어요."

"그녀가?"

"네, 전부터 연습생들 사이에서 소문이 돌긴 했거든요. 사이버네틱스 수술을 싸게 할 수 있는 가게가 있다고."

"그러던 차에 절친이 제안했다 이거지."

"손님을 데리고 갈 때마다 무료로 시술해 주거든요, 처음 방문한 손님과 함께. 아마 애비게일도 그걸 노린 거겠죠."

좋지 않은 예감밖에 들지 않았다. 다단계가 그러한 식으로 시작되었던 거다.

"말하는 걸 보니 너도 몇 명 데리고 갔나 보네?"

"...면목 없지만요."

동시에, 축 늘어지는 어깨.

그러잖아도 자그마한 체구가 더욱더 줄어든 듯한 기분이 들었다.

가온은 카탈리나를 옹호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막연하게 비난하고 싶지도 않았다. 잘못된 방법을 추구한 건 틀림없지만, 그것 때문에 커다란 짐을 짊어지게 되었으니까.

"그 뒤로 변한 건 없었어? 리퍼닥이 갑자기 터무니없는 금액을 요구했다거나, 주변에 수상한 사람이 접근했다거나, 생각나는 거라면 아무거나 좋아."

"글쎄요, 소개해 준 친구들과 연락이 뜸해진 걸 빼면 이거다 싶은 건 없는데요."

"그렇다 이거지."

파면 팔수록 수상쩍기 그지없었다.

무언가 노리는 게 있으니 손해를 감수하고 호객행위를 하는 걸 텐데, 정작 겉으로 드러난 건 없다시피 했다. 도를 넘었다고 해도 결국 상술의 영역이었던 거다.

사회적인 문제로 불거질 것 같냐고 묻는다면 가온은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애비게일은 알아냈을 거다. 폭로하고자 마음먹은 것만으로 실종될 정도로 중대한 사안을.

아직 빠진 퍼즐 조각이 있다.

그리 직감한 가온은 애비게일의 행적을 되짚어 보기로 했다. 카탈리나가 애비게일의 추천을 받아 음지에 들어갔다면―

"애비게일도 처음에는 누군가에게 추천을 받았을 거야. 혹시 누구인지 알 수 있을까?"

순간, 머리를 짚은 카탈리나가 어깨를 잘게 떨었다. 전보다 더 격렬한 거부 반응.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은 그녀는 토해내듯이 답했다.

"확실, 확실한 건 아니지만, 헨델이라는 이름일 거예요."

"미스틱 헌드레드에 출현했던?"

"미스틱 헌드레드요?"

그게 뭐냐는 듯한 몸짓에 가온은 말을 줄였다. 느긋하게 설명할 상황이 아니었던 거다. 그보다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시술을 받은 곳이 어디인지는 알고 있지?"

"그야..., 윽. 으극."

돌연,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른 카탈리나가 쓰러졌다. 의식을 잃은 그녀의 안색이 점점 어두워졌지만, 구급차를 부를 수만도 없었다.

불법으로 슬롯을 이식한 게 밝혀진다면 처벌받을 게 뻔하니까.

그렇다면 남은 선택지는 하나.

'그곳으로 간다.'

* * *

39구역에 위치한 무허가 시술소.

그곳을 운영하는 노인의 솜씨가 범상치 않다는 걸 몸소 체험한 가온은 망설이지 않고 문을 두드렸다.

다만, 예고도 없이 귀찮은 짐덩이를 데리고 와서 그런지 노인의 입에서는 고운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여기는 개인 업소지, 와서 쉬고 가는 복덕방이 아니라네. 그리고 이렇게나 아픈 사람이 있으면 병원에 가야지, 이런 곳에 왜 데리고 오는 건가. 정말 한 명 죽어야 속이 시원하겠나."

벌써 세 번째 타박.

가온이라고 무턱대고 찾아온 건 아니었다. 노인은 가온에게 갚아야 할 빚이 있었던 거다.

"피어 갱이 사라져서 평화롭게 지내고 있잖아. 그걸로 갈음하자고, 미스터 샤룩 칸."

노인의 별명은 3차 세계 대전이 벌어지기 전, 인도를 대표하는 배우의 이름에서 따왔다. 실제로도 그와 비슷한 외견이니 이견은 없을 터.

당연하지만 노인은 그런 것보다 다른 걸 먼저 지적했다.

"뻔뻔하군. 누가 보면 내가 의뢰를 넣은 줄 알겠군."

짧게 혀를 찬 노인은 더 이상의 잔소리는 무용하다는 걸 깨닫고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 자네에게 신세를 진 건 사실이니 이번엔 넘어가겠네."

"납득이 빨라서 좋네. 그래서 그 아이는 어때?"

"카탈리나라고 했던가? 대체 몸에다 무슨 장난을 친 건지 내가 묻고 싶을 지경이네."

노인이 손짓하자, 한쪽 벽면을 차지한 스크린에 검사 영상이 떠올랐다.

"이식받은 슬롯 전부 개조한 흔적이 있더군, 그것도 회로 설계 단계부터. 두말할 것도 없이 전문가의 솜씨네. 아마 음지에서 이만한 작업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을 테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초일류라는 소리였다. 연습생을 상대로 장사하는 걸 보면 좀스럽지만 말이다.

"두통이나 발작은 그 때문에 생긴다고 봐야 하나?"

"맞다고도 할 수 있고, 아니라고도 할 수 있네. 과도한 전기 신호가 신경계를 압박하면서 통각에 이상이 생긴 거니."

"조금 더 풀어서."

"흠. 이건 내 사견이네만, 브레인 워싱을 할 때 생기는 패턴과 유사하네."

브레인 워싱, 즉 세뇌를 일컫는 말이었다.

외부에서 충격을 가해 두뇌의 기능 일부 제한하거나, 추가하거나 하는.

이 건에서 한해서는 슬롯이 그 기능을 대신한 듯했다.

"혹시 기억도 지울 수 있는 수준인가?"

"그것뿐이겠는가. 간단한 명령도 내릴 수 있을 정도라네, 본인도 모르게 말이야. 이렇게나 섬세하게 다루는 걸 보면 적지 않은 노하우를 쌓은 거겠지."

애비게일이 어떤 걸 폭로하려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아마도 그녀는 스스로 세뇌에서 벗어나 진실을 깨달은 것일 터.

"슬롯은 부작용 없이 없앨 수 있지?"

"나를 뭘로 보는 건가. 아무리 전문가가 손댔다고 해도 저런 건 눈 감고도 절개할 수 있네. 다만 본인의 동의를 얻어야겠지만. 그래도 일단 우려되는 전기 신호는 전부 차단했네. 호전된다면 잃어버렸던 기억도 점차 돌아오겠지."

"보기보다 친절하잖아."

"동종 업계에서 일하는 쓰레기가 저지른 일이지 않나. 선배 된 자로서 부채 의식을 느낄 수밖에 없네."

회한이 섞인 노인의 말에 가온은 어떠한 낌새를 감지할 수 있었다.

"혹시 알고 있는 녀석이야?"

"내 예상이 맞다면 시술한 녀석은 마피아 출신일걸세."

"마피아?"

"정확하게 말하자면 마피아와 전속 계약한 리퍼닥이라고 해야겠지."

생각하지도 못한 거물의 등장에 가온은 눈살을 찌푸렸다.

마피아.

범죄 조직 중에서는 그나마 대화가 통하는 상대였다. 저마다 규율이라는 규칙을 세우고 숭상했던 거다.

물론 어디까지나 최후의 일선을 넘지 말자는 의미에서 세운 기틀에 불과했다.

잔혹해지고자 한다면 스트리트 갱보다 더 잔혹해질 수 있는 게 바로 녀석들이었으니.

"무고한 시민은 건드리지 않는다. 그건 대부분의 마피아가 공유하는 규율일 텐데?"

047 속았다는 뜻이야

* * *

놈들이 도덕적으로 우월해서 그런 표어를 내거는 건 아니었다. 단지, 자체적으로 관리하는 사업과 인력이 워낙 크기에 저절로 성립된 관습에 가까웠다.

완벽한 기업형 조직을 지향하는 게 바로 마피아였던 거다.

괜한 분쟁은 삼가겠다는 의지의 표명에 더 가깝다고 해야 할까.

"따로 독립했을걸세, 이런 건 조직에서 허용하지 않을 테니까."

"마피아가 제 팔이 떨어져 나가는 걸 지켜만 보았다고?"

"아마 녀석들에 준하는 세력이 나선 거겠지."

"지랄 났네."

불쾌한 감정과는 별개로 점점 사건의 윤곽이 드러나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유능한 리퍼닥 하나가 탈선해 업장을 하나 차려, 연습생을 상대로 장사했다는 정황까지 도달한 거다.

거기에 정체불명의 세력이 끼어든 건 덤.

한 가지 의문점이 있다면 어째서 브레인 워싱을 시도했냐는 것이었다.

구구절절한 과정 사이에 목적만이 부재중이었다.

지금 당장 떠오르는 게 몇 개인가 있지만 리퍼닥을 지원한 세력과 대면하기 전까지 단언하는 건 금물이었다.

카탈리나에게 자세한 내용을 듣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그녀는 정신을 잃고 회복 중이었다.

"깨어날 때까지 기다릴 텐가?"

"언제 일어날 수 있는데."

"이 추세라면 내솔에나 깨어날걸세."

"그때가 되면 늦어."

이미 애비게일을 처분한 전적이 있는 놈들이었다. 아마 꼬리를 밟힌다고 생각되면 극단적인 선택도 마다하지 않을 터.

다행히 물어볼 사람이라면 한 사람 더 있었다.

헨델 바이슨.

미스틱 헌드레드에서 우승한 아이돌.

잃을 게 많은 그녀라면 친히 협조해 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 * *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고 했던가.

사쿠야에게 있어 요 몇 솔은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마지막 경선에서 불렀던 노래는 틀림없이 그녀가 쥐어 짜낼 수 있는 최고의 한 수였다. 여태껏 이런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완벽하게 소화했던 거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하기만 했다.

7위.

대중은 인간의 감정보다 기계의 감성을 신뢰했다. 자신만만하게 승리를 확신했던 과거의 자신이 우스울 지경.

애석하게도 시간은 사쿠야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미스틱 헌드레드가 끝나고 최종적으로 선발된 6인의 데뷔가 어느덧 코앞으로 다가온 거다.

그룹명은 아직 미정, 넷상에서 모집 중이었다.

그래서일까.

프로그램이 끝났지만 그 열기가 아직도 식지 않았다. 벌써부터 메가콥 마스톱의 관리를 받고 있다는 게 여실히 느껴질 정도였다.

이제 슬슬 인정해야 했다.

대중에게 제 노래를 선보이고 싶다는 갈망은 지나친 욕심이었다는 걸.

애초에 품으면 안 되는 몽상이었던 거다.

노력만이 능사가 아니었다.

결과가 말해 주지 않는가.

결국, 이렇게 될 운명이었던 거다.

아이돌이 되지 못한 건 그녀고, 된 건 헨델이었다.

어차피 사람들이 보는 건 결과지, 그 속에 담긴 여정이 아니었다.

어쩐지, 우직하게 내추럴만 고집했던 자신이 바보 같아졌다.

이럴 거라면 슬롯이라도 하나 이식받았으면 후회하지 않았을 텐데.

덜컥, 하고 방문이 열린 건 그때였다.

사쿠야는 얼른 우울한 표정을 덜어냈다. 안으로 들어온 상대에게만큼은 약한 모습을 보여 주기 싫어서였다.

"헨델."

"너한테 어울리는 최후네. 그러게, 처신 좀 잘하지 그랬어. 혹시 알아? 널 알아본 사람이 후원해 줬을지."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이대로 포기할 거야?"

설마하니 헨델에게 그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던 터라 사쿠야는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면?"

"미스틱 헌드레드에서는 탈락했지만 다른 곳에서도 그러리란 법은 없잖아."

그러잖아도 매니저와 대화를 나눈 후였다. 오디션 프로그램이 나온다면 거기에 참가하기로.

"하지만 변하지 않는다면 영원히 연습생으로 남겠지. 이제 너도 알잖아, 왜 탈락할 수밖에 없었는지. 자신에게 부족한 게 무엇인지."

그 또한 지적받은 내용 중 하나였다.

어쩐지 발가벗겨진 기분인지라 사쿠야는 뒷걸음질 쳤지만 두 사람의 거리는 멀어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좁혀졌다.

"사이버네틱스 수술받고 싶지 않아?"

귓가를 스친 열기에 사쿠야는 마른침을 삼켰다.

"내가 받고 싶다고 해서 받을 수 있는 게 아니잖아."

"맞아, 회사 입장에서 너는 이제 투자할 가치가 없는 중고 신인이지. 하지만 시선을 돌려 봐. 네가 도전하고 싶다면 내가 그 기회가 될 테니."

"왜 내게 이런 제안을 하는 건데?"

"못난이가 한 명이라도 많아야 내가 빛나니까. 하지만 네가 여기서 포기하면 집계조차 되지 않잖아."

헨델이 손을 내밀었다.

무언가에 홀린 듯 그 손을 마주 잡은 사쿠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순진무구한 모습에 헨델은 비릿하게 웃었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소문난 못난이였다. 모두가 너나 할 것 없이 외면하고, 무시하는 못난이.

그래서 누구나 우러러볼 수밖에 없는 우상이 되고 싶었다.

그리고 언젠가 진정한 자신을 보지 못하고 지나쳤던 이들에게 알려주는 게 꿈이었다.

나도 이만큼 할 수 있다고.

너는 이럴 수 없다고.

연습생들에게 무허가 시술소를 소개해 주고 악착같이 여러 슬롯을 교체한 건 그 때문이었다.

한시라도 빨리 과거의 자신을 버리기 위해서.

그 과정에서 만난 사쿠야에게 사사건건 시비를 건 건 열등감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내추럴인데도 유전자 조작을 받은 것처럼 아름다울뿐더러 별다른 슬롯 없이도 다른 연습생과 동등한 대결을 펼쳤던 거다.

헨델에게는 참을 수 없는 모욕이나 다름없었다.

그 빛나는 재능이,

그 피어난 외모가.

하지만 이제는 입장이 역전되었다.

절개를 지키는 것밖에 하지 못하는 반푼이가 못난이로 전락하는 건 한순간.

승리는 인내하고 기다리는 자의 것이었다.

* * *

카탈리나의 말로 판단하건대, 헨델은 오래전부터 불법 슬롯을 이식받았을 터. 접촉 횟수가 많은 만큼 가장 많은 위험에 노출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더구나 근래에 미스틱 헌드레드의 우승자까지 되었으니, 리퍼닥을 지원한 세력이 눈독을 들이지 않을 리 없었다.

어떻게든 사건의 중심에 있을 터.

설령 그녀가 기억하지 못할지라도.

일단 헨델만 확보하면 애비게일을 처리한 녀석들의 꼬리를 잡을 수 있다는 건 명약관화.

하지만 헨델의 행방은 묘연하기만 했다. 불과 몇 솔 전까지만 해도 여타 연습생과 다를 게 없었던 그녀지만, 인기 프로그램에 나가 신분이 상승했던 거다.

숙소에서 나와 독립한 건 물론이고, 오가는 모습 또한 철저하게 통제되었다.

외부인이 알아낼 수 있는 건 제한적.

'그래, 외부인이 말이지.'

달리 말하자면 내부 조력자가 있다면 한결 편해진다는 거 아니겠는가.

마침 헨델의 곁에 착 달라붙어 다니는 사람을 가온은 알고 있었다.

홀덤 브루스.

애비게일의 전 매니저이자 헨델의 현 매니저.

성실한 그라면 담당 아이돌의 일정을 꿰고 있을 거다.

홀덤의 행동반경을 예상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잠시 동안이지만, 그의 뒤를 따라다녔으니까.

이 시간이라면 한잔하고 있을 시간이었다. 그래, 다른 데로 새지 않았다면 자택에 있다는 뜻.

아니나 다를까, 커튼 사이로 불빛이 새어 나오는 게 보였다.

서슴없이 초인종을 누른 가온은 문을 두드렸다.

"공찰입니다, 지금 헨델 양이...."

기껏 생각해놓은 변명이 다 끝나기도 전에 홀덤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속았다는 뜻이야. 정말 일이 터졌다면 회사에 직접 연락하지, 왜 매니저를 찾아오겠어?"

"너...!"

두 눈을 부릅뜬 홀덤이 상황을 파악하고 주먹부터 내지르려고 했지만, 가온은 가뿐하게 뒤로 돌아 그의 팔을 꺾었다.

"윽."

"헨델 어딨어."

"그녀를 찾는 거라면 번지수 잘못 짚었어. 딱 기다려. 신고해서 아예 얼굴도 들고 다니지 못하게 해 줄 테니까."

헨델이 성공하면서 그녀를 찾는 사람이 부쩍 늘었다. 홍보가 필요한 대기업이나 정치인, 혹은 온갖 제작사에서 이르기까지.

물론 긍정적인 효과만 낳은 건 아니었다.

이처럼 갑작스럽게 들이닥치는 불청객도 존재했으니까.

"그러고 보니 소개가 늦었네. 나는 애비게일에게 일어난 불행한 사건을 파헤치기 위해 고용된 해결사야."

"애비게일이라고? 하, 웃기지도 않는군. 누가 누구를 고용해? 그녀에게 가족이 없다는 건 몰랐나 보지?"

아무래도 프로듀서, 라주는 애비게일과 약혼한 사실을 직장 동료들에게도 숨긴 듯했다.

가온으로서는 참담하기 그지없는 소식이지만 애초에 그는 설득하고자 온 게 아니었다.

"닥치고 말하기나 해. 네 방에 있는 컬렉션을 만천하에 드러내기 싫다면."

"뭘 말하고 싶은 건지 도통 모르겠군."

"정말? 이대로 공찰이 오면 나는 네 방부터 헤집어 놓을 거야."

홀덤은 매니저이기 전에 아이돌의 굿즈 수집에 열광하는 광적인 팬이었다.

그런 고양이 같은 녀석이 생선을 눈앞에 두고 지나칠 리 없지 않은가.

"헨델이 사용하거나 만진 소품을 수거하던데 말이야. 아마 애비게일의 것도 비슷하게 수집했을 테지, 안 그래?"

"그걸 어떻게?"

"아무리 숨기고 싶은 것도 결국엔 들통나게 되어 있어, 친구."

물론 곧바로 신고하지 않은 건 가온도 떳떳할 건 없어서였다. 모두 미행해서 얻은 정보인데, 어디에 하소연하겠는가.

그래도 이런 식으로라도 활용할 수 있으니, 지난날의 조사는 헛되지 않은 것 같았다.

반쯤 꺾인 홀덤의 고개가 그걸 증명했다.

"말이 실종이지, 애비게일이 유명을 달리했을 거라는 건 너도 내심 짐작하고 있을 거 아냐. 그녀의 원념을 달래주기 위해서라도 순순히 말하는 게 어때?"

"그러니까 그게 왜 헨델의 뒤를 캐는 거랑 이어지는 거지?"

"급박하게 돌아가서 느긋하게 설명해 줄 시간은 없어. 딱 한 번, 한 번이면 돼. 정 마음에 걸린다면 내솔 해가 뜨는 대로 회사에 보고해도 좋아. 그녀의 신변에 이상이 생긴다면 범인은 나일 테니까."

고민하는 듯한 기색이 역력했다.

직업적인 윤리와 개인적인 소망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걸까.

"헨델이라면 기분 전환하러 클럽에...."

"아이돌이 클럽에 갔다고? 회사에서 알면 난리가 나겠네."

섣불리 밝히지 못한 것에는 다른 이유가 있는 듯했다.

* * *

짙은 네온사인과 가슴을 때리는 비트 소리.

공동처럼 개방된 공간을 가득 채우는 건 단둘뿐이었다. 39구역에 위치한 클럽, 롤링 스타의 밤은 그만큼 원초적이었다.

얼굴을 도려내 그 안에 기계 장치를 삽입한 사내가 있는가 하면, 사지를 잘라 내고 강철로 대체한 여자도 있었다.

번화가에서도 간혹 가다 볼 수 있는 유형의 인간들이 이곳에서만큼은 차고 넘치도록 많았다.

여태 어디에서 지낸 건지 모를 정도.

좀처럼 익숙해질 수 없는 분위기인지라 사쿠야는 헨델의 소매를 부여잡았다.

"알아보는 사람이 있으면 어떻게 하려고 이런 곳에 온 거야."

"여기에서? 걱정하지 마. 총 들고 난사해도 모를 사람들밖에 없어."

그 말이 거짓은 아닌 듯, 방금 전 어깨를 부딪치며 사라진 남자는 사쿠야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시술소가 대체 어디에 있다는 거야?"

"따라와."

048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야

* * *

이전에도 왔던 건지 반지하로 내려가는 헨델의 발걸음에는 주저함이 없었다. 문을 몇 개 넘자, 방금 전까지만 해도 떠들썩했던 파티의 열기는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별세계처럼 격리된 공간. 그 괴리가 사쿠야의 심장을 옥죄었다. 어쩐지 잘못 왔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던 거다.

"정말 이 아래에 시술소가 있어?"

"왜? 이제 와서 겁나?"

"아니거든."

롤링 스타의 아래, 자리 잡은 기자재 창고.

타인의 침입을 불허하듯 철망으로 둘러싸인 장소에 자그마한 문이 하나 있었다.

"여기야."

그럴듯한 간판이나 표찰 하나 없는 가게.

"미리 말해 놓았어. 나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어서 들어가."

헨델을 뒤로 한 채 사쿠야는 문고리를 잡았다.

* * *

무허가 시술소 내부는 복잡하기만 했다. 뱀처럼 구불구불 기어 다니는 전선과 어디로 가는 건지 모를 파이프. 그리고 발광하는 유리통 안에 담긴 슬롯에 이르기까지.

질서를 잃은 구조에 절제란 없었다.

"내 슬롯을 이식받고 싶다고?"

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사쿠야는 어깨를 파르르 떨었다.

칠판을 긁는 것처럼 날카로운 소음.

어렸을 때부터 유달리 귀가 좋았던 사쿠야는 그게 인공 성대에서 비롯된 음성이라는 걸 눈치챘다.

일부러 그렇게 조정한 거다.

다른 사람이 움츠러들도록.

고개를 올리니 사내의 모습이 보다 확연해졌다.

나이는 30대 혹은 40대나 될까. 어쩌면 그보다 더 많을 수도 있었다.

세상의 모진 풍파를 한 몸에 받은 것만 같은 외견. 들개나 늑대 같은 짐승을 연상케 했다. 리퍼닥이라고 사전에 듣지 못했다면 갱이나 마피아로 착각할 정도.

이제 보니 피부도 골격도 모두 슬롯인 것 같았다.

문외한인 사쿠야가 단번에 파악한 연유는 의외로 간단했다. 메마른 논밭처럼 갈라진 남자의 손만큼은 침착된 흉터로 가득했던 거다.

'화상.'

과거에 어떠한 재난과 조우한 게 틀림없었다.

"내 말이 들리지 않는 건가?"

"아니요, 아니요. 잘 들려요."

"그러면 여기 앉아라."

사내가 가리킨 유니트 체어에 앉은 사쿠야는 차가운 감촉에 잠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첫 방문에 한해 시술은 무료다. 다만, 정식 슬롯이 아닌 만큼 이식받은 후 생기는, '예상치 못한 문제'는 본인이 감당해야 한다."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나한테 하소연해도 들어주지 않는다는 거다, 만나 주지도 않을 거고. 이해했나?"

"네."

말하는 것과 동시에 머리 위에서 쏘아지는 라이트의 강도가 한층 더 강해졌다. 눈을 감고 있는데도 시릴 정도.

"우선 인공 성대부터 시작하지. 대중들이 가장 선호하는 타입이면 되겠지?"

"네? 제 목소리는요?"

"흥미 없는데."

"그게 무슨...."

"여기까지 왔다는 건 그러한 의미 아니었나? 세밀하게 조정하는 건 귀찮으니 있는 걸로 참아라."

어떠한 감정도 담겨 있지 않은 선고.

그제야 사쿠야는 자기가 어디에 있는 건지 새삼스레 깨달을 수 있었다. 정신이 번쩍 드는 건 한순간. 품속에서 종잇조각이 느껴졌다.

그건 5만 피아 지폐.

버스킹 하다 만난 남자가 주고 간 응원의 메시지였다.

'열심히 해. 포기하지 않으면 꿈은 떠나지 않으니까.'

그래, 제가 추구했던 이상이 현실 앞에 무너져서 실망하고 좌절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리 쉽게 버릴 건 아니었다.

잠시 미친 거였다.

해서는 안 되는 선택을 한 거다. 애당초 와서는 안 되는 곳이었다. 미스틱 헌드레드에서 탈락한 거지 인생이 망한 건 아니지 않은가.

"뭐 하는 거지?"

사쿠야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사내가 눈살을 찌푸렸다.

"죄송하지만 역시 시술을 받는 건 아닌 것 같아요."

"그래서 이대로 가겠다고?"

"지금이라면 되돌릴 수 있잖아요."

"아니, 그걸 정하는 건 네가 아니다."

우악스럽게 사쿠야의 팔뚝을 잡은 사내가 그녀를 유니트 체어로 안내했다. 아차, 하는 사이 구속 장치가 사쿠야의 손목을 결박했다.

"싫어, 싫어엇!"

"저항해도 소용없다. 너만 다칠 뿐이니까."

반대편 손까지 제압당하면 그걸로 끝. 가만히 앉아서 바라지도 않는 사이버네틱스 수술을 받게 될 거다. 대체 왜 그러는지 알 수 없지만 사내의 행동은 어딘가 맹목적이었다.

일촉즉발의 상황.

극한까지 치달은 스트레스에 사쿠야는 솜털이란 솜털은 전부 곤두서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노래를 부를 때보다, 미스틱 헌드레드에 붙고 싶다고 갈망할 때보다 더.

"싫어, 「하지 마!」"

강렬한 의지는 소리가 되어 사쿠야의 입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일순 주위에 정적이 흘렀다. 방금 전까지의 교착 상태가 꿈인 것처럼.

하지만 상상이 아니었다.

사내가 바로 앞에서 송곳니를 드러내고 있었던 거다.

다만―

'움직이지 않아?'

어찌 된 건지 사내는 다가오지 않고 멀뚱히 서 있을 뿐이었다. 상황이 비약해서 그런지 이해할 수 없는 일투성이지만 가만히 생각하고 있을 틈은 없었다.

천재일우의 기회였던 거다.

황급히 구속 장치를 해제한 사쿠야는 출구를 향해 달려갔다.

사내가 반응한 건 그때.

"크크, 크크큭. 아, 그쪽이었나. 정말 우연치 않게 진귀한 상대를 만났군."

'그쪽?'

당최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기에 현혹될 여지 같은 건 없었다.

덜컥, 덜컥.

잠긴 문을 겨우 열고 밖으로 나온 사쿠야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달렸다.

"헨델! 헨델!"

동행했던 이의 이름을 목이 터져라 외치면서.

하지만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이게 의미하는 바는 명약관화.

버려진 거다.

하긴 이유도 없이 경연 내내 대립각을 세웠던 헨델이었다. 호의에서 비롯된 제안이 아니라는 걸 진즉에 파악했어야 했다.

그러나 망연자실하게 원망하고 있을 수도 없었다.

탁, 탁, 탁, 타닥.

자신을 쫓는 구둣발 소리가 점차 가까워졌으니까.

시술을 거부한 것뿐인데도 이리 악착같이 쫓아오다니.

결코 정상적인 부류가 아니었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연습생 생활이 길어서 체력에는 자신이 있다는 거였다.

폐부를 찌르는 공기는 송곳처럼 날카로웠지만 사쿠야는 멈추지 않았다.

도로 측면에 설치된 그레이팅 사이로 발목이 빠진 건 그때.

"큭."

넘어지려는 몸을 가까스로 붙잡은 사쿠야는 입술을 깨물었다. 발목이 부러진 건 아니지만 시큰거리는 건 피할 수 없었다.

더불어 소리가 워낙 크게 울린 탓에 피치 못하게 방향을 바꿔야만 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게 패착이었다.

얼마 가지 못하고 막다른 골목에 도달하게 된 거다.

다른 길로 돌아가는 건 불가능했다.

시간을 지체한 탓에 사내와 마주치게 되었으니까.

"더 다가오면 공찰, 부를 거예요."

"불러라. 구조받기 전에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면 말이지."

신랄한 경고였다.

가면을 벗은 사내는 더 이상 리퍼닥이 아니었다. 법을 잊은 야만인일 뿐.

"제 발로 온다면 고통은 없게 해 주지. 자, 어서 와라."

다가오는 사내와 대칭을 이루듯 사쿠야는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그러한 발악도 잠시뿐이었다. 하늘 높이 치솟은 철망이 그녀를 밀어냈던 거다. 도망치려면 뛰어넘는 수밖에 없었다.

당연하지만 사쿠야는 평범한 소녀였다. 그 정도로 뛰어난 운동 능력 따윈 없었다.

탁.

어느새 사내와의 거리는 3미터.

엎어지면 코가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안 된다.

반쯤 포기한 사쿠야가 고개를 아래로 내린 순간,

쾅!

굉음이 울려 퍼졌다.

화들짝 놀란 사쿠야의 눈에 들어온 건 저 멀리 튕겨 나가는 사내의 모습.

난데없이 나타나 두 사람을 갈라놓은 건 24구역에서 만났던 청년이었다.

퇴폐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이목구비. 하지만 그와 다르게 한껏 올라간 입꼬리.

'어른의 여유'라는 게 무엇인지 단적으로 보여 주는 인상이었다.

단 한 번뿐인 만남이었지만 잊을 리 없었다. 요전에도 응원해 주었던 사람이었던 거다.

"오빠."

"오빠?"

* * *

가온으로서는 예상외라고 할 수 있었다.

기껏 롤링 스타까지 헨델을 찾으러 왔건만 그녀는 보이지 않고 뜬금없는 인물이 떡하니 나타난 거다.

통성명은 나눈 적 없지만 눈에 익은 얼굴이었다.

허리까지 굽이치는 기다란 갈색 머리.

군살 하나 보이지 않는 체형과 쭉쭉 뻗은 사지. 그리고 사슴처럼 동그란 눈동자까지.

유키하나 사쿠야.

그녀는 미스틱 헌드레드에서 아쉽게 탈락한 연습생이었다.

"너는...."

분명 첫 만남이어야 할 테지만 묘한 기시감이 일었다. 착각은 아니었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기억이 선명해졌으니까.

분명, 그녀는 유행에 아랑곳하지 않고 옛날 노래만 주야장천 부르던―

"미스 레트로."

"제 이름은 사쿠야인데요."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야."

사쿠야가 대꾸했지만 가온은 일축했다. 마침 그녀가 헨델과 같은 소속사라는 걸 떠올린 거다. 지금까지의 단서를 조합해보면 도출되는 결론은 하나.

"혹시 헨델과 같이 왔어?"

"그렇다고 할 수 있죠?"

"그러면 내가 걷어찬 녀석은 리퍼닥이겠고."

의외로 일이 수월하게 풀릴 것 같았다. 어차피 리퍼닥이 쥐고 있는 정보가 알고 싶은 거지 헨델의 사생활이 궁금한 건 아니었던 거다.

널브러졌던 사내가 일어나 흉흉한 기세를 뿜어낸 건 그때.

"버러지가 한 마리 붙었군."

"미스터, 그러니까 울프."

사내의 특징을 한 번에 축약한 가온이 고갯짓했다.

"혹시 애비게일이라는 이름을 들은 적 있어?"

"내가 알아야 하는 이름인가?"

"흐음, 적어도 네가 사람이라면?"

"모르겠군."

"그래, 금수를 자청하겠다는 거지."

처음부터 회개하고 낱낱이 제 잘못을 고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이식한 슬롯에 쓸데없는 기능이 하나 붙어 있었을 텐데."

"...."

"애비게일이 눈치채자마자 사안이 커질 걸 걱정한 너희들은 그녀가 입을 열기 전에 없앴다. 그게 내 결론이야."

"무엇을 주장하고 싶은 건지 알 수 없지만, 불쾌하군. 죽이고 싶을 정도로."

둘 사이에 대화는 필요치 않았다. 구태여 설명하지 않아도 말로는 해결할 수 없는 지점에 도달했다는 걸 이해했던 거다.

스스로의 정의를 관철하는 건 폭력뿐.

사내가 비상한 것과 가온이 클락을 꺼낸 건 거의 동시였다.

달칵, 달칵, 달칵.

미간과 가슴 그리고 복부로 이어지는 트리플 탭.

탄환을 교체해 화력을 늘린 만큼 전보다 강렬한 불티가 사방에 흩어졌지만, 사내는 겁도 없이 거리를 좁혔다. 그럴 만도 했다. 벌겋게 멍이 들었을지언정, 꿰뚫린 건 아니었으니까.

'우블렉 탄성 피부.'

일찍이 가온이 우주여객선에서 한번 경험한 적 있는 유닛이었다.

충격을 받으면 받을수록 단단해지는 체외 장착 기기.

사내가 지닌 강점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입고 있는 장비는 금속 섬유로 제작된 컴뱃 재킷. 더불어 양손에 착용한 건 화기가 아닌 냉병기였다. 그것도 고루하기 짝이 없는 형태였다.

'칼날 손톱?'

마피아 소속이었다고 하더니, 단순한 전문직이 아닌 듯했다.

049 바퀴벌레 새끼신가

* * *

그러한 추측은 사내와 충돌하면서 더욱더 확실해졌다.

반응 속도를 올려주는 페이스 업.

근력 증강이 주가 되는 스트렝스 플러스.

오감이 증폭되는 파이브 멘탈.

확인된 슬롯만 해도 세 개였다.

본업이 리퍼닥이라는 걸 고려했을 때 모두 개조한 특제라는 건 말할 것도 없었다.

창졸간에 접근한 사내가 송곳처럼 손가락을 나란히 모아, 휘두른 건 한순간.

서걱, 서걱, 서걱.

맹공을 따돌리는 가온의 등 뒤로 깊은 상흔이 차례대로 새겨졌다.

거리는 난장판이었다.

긁힌 수준이 아니라 양단된 수준.

사내가 착용한 칼날 손톱은 평범한 장비가 아니었다. 그것은 초진동을 이용해 절삭력을 향상시키는 유닛.

바로 프로그레시브 네일이었다.

"정말 짐승이 따로 없네."

"남기고 싶은 말은 그게 전부인가?"

사내는 가온을 찢어발길 기세로 두 팔을 휘둘렀다. 칼날 손톱에 걸린 물체는 너나 할 것 없이 동강 났지만, 가온만큼은 예외였다. 정확하게 공격 범위에서 벗어나 반격을 가했던 거다.

콰직.

어깨에 바람구멍이 생겨난 건 그때.

계속해서 한 부위만 노리니 우블렉 탄성 피부라도 뚫리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큭."

물론 사내라고 당하고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반복되는 공방을 통해 가온의 패턴을 습득하기에 이르렀던 거다. 유리알처럼 빛나는 동공 안에 켜켜이 쌓인 렌즈가 다음 동작을 예측한 건 그리 놀라울 것도 없었다.

죽일 수 있다.

확신한 사내는 주저하지 않고 도약했다. 허공에 다섯 갈래의 궤적을 아로새기면서.

"오빠!"

제삼자가 보기에도 퍽 위협적인 수였던지라 사쿠야는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그도 그럴 게, 상대를 눈앞에 두고도 가온은 비어버린 약실을 감상하고 있었던 거다.

하지만 그녀의 우려는 우려에서 그쳤다.

사내의 손목을 클락으로 후려쳐, 내리꽂히는 칼날 손톱을 무위로 되돌린 가온은 그대로 그의 멱살을 잡고 메다꽂아 버렸으니까.

마치 귀찮은 날파리라도 걷어 내는 듯한 모양새.

쾅!

지면이 거미줄 모양으로 갈라진 건 순식간이었다.

"쿨럭."

갑작스러운 위치 전환에 폐부가 쪼그라들었으나 그것뿐이었다.

우블렉 탄성 피부 덕분에 대부분의 충격이 상쇄된바, 지체하지 않고 일어서려는 사내였으나 그걸 가만히 두고 볼 가온이 아니었다.

시도도 하지 말라는 듯 가온은 사내의 가슴을 짓밟았다.

콰직.

단 한 번뿐이었지만 사내의 전의를 꺾기에는 충분했다.

"뭣?"

누군가 한 스푼 떠올린 것처럼 움푹 패인 제 가슴을 내려다본 사내는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멍청한 소리를 내었다.

물론 가온에게는 아무래도 좋을 감상이었다.

"미스 레트로. 근처에 묶을 게 없나 찾아봐."

"그거라면 맡겨 주세요."

"잠깐."

사쿠야의 손을 빌려 사내를 속박하려고 한 가온이었으나 예상치 못한 기척에 다시 그녀를 붙잡아야 했다.

"네? 왜 그러세요?"

"내 뒤에 붙어. 얼른."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사쿠야는 가온이 지시하는 대로 그의 등 뒤로 돌아갔다.

그때 눅눅하게 눌어붙은 그림자 속에서 철컥하고 묵직한 쇳소리가 울리는 듯하더니 탄환이 쏟아졌다.

코트를 펼쳐 사쿠야를 그 안으로 초대한 가온은 몸을 웅크리고 호우가 사그라들길 기다렸다. 귓가를 두드리는 총성에 사쿠야는 입도 벙긋하지 못하고 가온의 소매를 잡고만 있을 뿐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폭풍이 지나가고, 가시지 않는 두려움을 억누른 채 사쿠야가 입을 열었다.

"괘, 괜찮은 거예요?"

"그래."

몇 발인가 명중했지만 죽지 않으니 남는 건 고통뿐이었다. 항상 그러했듯이 말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무고한 사쿠야가 다칠 뻔한 거다.

"어이, 장난은 그쯤 하고 나오는 게 어때? 아니면 내가 직접 갈까?"

"호오, 나름 빈틈을 잘 노렸다고 생각했는데 죽지 않았나. 천둥벌거숭이처럼 나댈 정도의 실력은 있었나 보지?"

가온의 호통에 호응하듯이 나타난 건 갱스터 무리였다. 자유분방한 옷차림에 가진 무기조차 달랐지만 뺨을 가로지르는 갈고리 모양의 문신만큼은 일치했다.

가온도 본 적 있는 양식이었다.

"피어 갱."

이들과는 예견된 만남이라 할 수 있었다.

페르난데스가 누누이 경고했지 않던가. 뒷골목에서 자신을 찾는 갱스터 무리가 있다고. 39구역에 들어왔으니 그들의 물망에 오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설마하니 이런 식으로 마주칠 줄은 몰랐지만.

하지만 기묘한 대치는 오래가지 못했다. 죽은 것처럼 누워 있던 사내가 벌떡 일어나더니 반대편으로 도망쳤던 거다.

놓칠세라, 길가에 설치된 그레이팅 하나를 들어 올린 가온은 있는 힘껏 내던졌다.

후웅.

프로펠러처럼 강렬하게 회전하면서 날아간 철판이 사내에게 꽂히기 직전, 이변이 일어났다.

사내가 급격하게 몸을 비틀었던 거다.

마치 누군가 어깨를 잡고 끌어당긴 것처럼 부자연스럽기 그지없는 동작.

덕분에 그레이팅은 등이 아닌 팔을 집어삼키는 것에 그쳤다.

'밸런스 볼도 이식했나.'

그건 무게 중심을 의도적으로 옮길 수 있게 해 주는 슬롯이었다. 익숙해지면 고층에서 떨어져도 상처 하나 없이 착지할 수 있을 정도.

팔 하나가 떨어졌는데도 달리는 속도가 떨어지지 않는 게 그 증거였다.

더 멀어지기 전에 가온은 폴딩 나이프를 쏘아 날렸다.

사내의 동선이 기묘하게 변할 수 있다는 건 파악한 후.

이번에는 아예 디바이스를 노렸다.

결과는 볼 것도 없이 명중.

콰직.

경추를 부수고 중추 신경계까지 영향을 미칠 정도로 칼날이 깊이 박혔지만 사내는 의연하게 거리를 벌렸다. 보아하니 신경계까지 갈아엎은 게 틀림없었다.

"바퀴벌레 새끼신가."

가온으로서도 실소를 금치 못했다. 그만큼 사내의 대비는 병적이었다. 교토삼굴이라는 말이 왜 나왔는지 알 정도.

뒤늦게나마 따라가려고 했지만 그걸 견제라도 하듯 총탄이 빗발쳤다. 몇몇은 애꿎은 사쿠야에게로 향하기까지 했다.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코트를 벗어 사쿠야에게 입힌 가온은 등을 돌렸다.

"나중에 질펀하게 놀아줄 테니까 오늘은 이쯤에서 물러나지?"

"저 의사 선생에게 신세를 진 적이 있어서 말이야. 그리고 우리 사이에는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을 텐데?"

갱스터들 사이에서도 부쩍이나 눈에 띄는 스킨 헤드가 미소 지었다. 동시에 입술 사이로 비춰 보이는 금니가 번쩍였다.

피어 갱의 우두머리.

페르난데스에게 듣기로―

"케이든이라고 했던가."

"그래. 내가 바로 네가 죽인 게스토의 형인 케이든이다."

"아아, 그래서 계속 쫓아온 거였냐."

귀찮다고 피할 게 아니라 진즉에 나서서 처리했어야 했다. 쓰레기는 사라지는 게 아니라 썩어 문드러질 뿐이니.

"그보다 뒤에 숨긴 사람은 누구지? 애인? 창녀?"

과장되게 어깨를 들썩거린 케이든은 멈칫했다. 두 눈에 비친 건 그로서도 예상치 못한 사람이었다.

"사쿠야?"

그 외침에 따라 갱들도 동요하는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메아리처럼 퍼지는 제 이름에 사쿠야는 몸을 움츠렸다.

"뒷골목을 돌아다니다 새로운 직업이라도 찾은 건가. 이거 널 쳐 죽여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겼군."

케이든이 피식거리자 녀석을 따르는 무리도 음흉하게 웃었다. 무엇을 상상하는 건지 훤히 보였다. 아마 성대하게 포식이라도 하고 싶은 걸 테지.

"예전부터 생각했던 건데 너희 같은 족속들은 항상 꼭 낄 데 안 낄 데를 구분하지 못하더라고."

"글쎄, 그건 네 주관적인 주장일 텐데? 어쩌면 이번에 확인해 볼 수도 있겠군. 정말로 구분하지 못하는 건 누구인지."

장비를 확인한 가온은 사쿠야를 향해 나지막이 읊조렸다.

"미스 레트로. 적당한 곳에 숨어 있어."

"네, 넷."

* * *

상황이 정리된 건 그로부터 1분 후였다.

"와우."

자신이 뒷골목에 있다는 것도 잊은 채 감탄성을 내뱉은 사쿠야는 두 눈을 깜빡였다.

스트리트 갱에게 먼저 접근한 건 가온이었다. 누가 보아도 수적 열세였으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니, 그럴 필요가 없었다는 게 더 정확하리라.

상대가 방아쇠를 당기기도 전에 총열을 분쇄하는가 하면, 보지도 않고 날아오는 탄환을 회피했다. 사방에서 옥죄이는데도 불구하고 유유히 그 사이를 노니는 건 덤.

케이든이라 불린 남자에 이르러서는 가히 압도적이라 부를 수 있었다. 손가락 사이로 대거(Dagger)를 낚아챈 것도 모자라 제 세 배는 될 법한 거구를 고꾸라트린 거다.

놀라운 건 그러면서도 상처 하나 입지 않았다는 것.

직접 보지 않고 전해 듣기만 했다면 거짓으로 치부했을 활약상이었다.

리퍼닥과 싸울 때도 그러했지만 정말이지 범상치 않은 사람이었다.

"혹시 화성방위군 출신이에요?"

"그렇다면 이 고생은 안 하지."

고생.

그 단어에 이끌리듯 사쿠야는 탄성을 내뱉었다.

"그러고 보니 헨델을 찾는다고 했죠. 무슨 일 때문에 그러는 거예요?"

당돌한 물음에 가온은 잠시 고심했다.

과연 사쿠야에게 알려줘도 될까. 마음속에서 들려오는 대답은 역시 '아니다.'였다.

리퍼닥에게 쫓기고 있을 때부터 내심 짐작했던 거다. 그녀가 어떠한 결정을 내렸는지.

상처를 헤집는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시간도 늦었으니 숙소까지 데려다줄게."

"자, 잠깐 그러지 말고 이름이라도 알려주세요. 은혜는 꼭 갚고 싶으니까요. 사람 일이라는 게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요? 혹시 알아요? 제가 오빠를 먹여 살리는 미래가 있을지?"

"내가 정신 차리고 살아 있는 한, 절대 안 와."

가온이 대놓고 따돌리려고 하자 사쿠야는 그의 팔을 잡고 늘어졌다. 하지만 그런다고 끌려갈 가온이 아니었다.

사쿠야를 액세서리 삼아 걷던 그는 돌연 멈춰 섰다.

떠오른 게 있어서였다.

"그래, 정 은혜를 갚고 싶다면 방문했던 시술소까지 안내해."

그게 가온이 제시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 * *

사내가 운영했던 무허가 시술소.

그곳에서 컴퓨터에 저장된 기록을 모두 훑어본 가온은 짧게 혀를 찼다. 기본적인 해킹 툴로는 입구조차 넘어갈 수 없었다. 아무래도 통째로 뜯어가서 전문가에게 맡겨야 할 것 같았다.

대충 정리하고 밖으로 나온 가온의 곁으로 사쿠야가 다가왔다.

"다 끝난 거예요?"

"덕분에."

"그래서 이름은 가르쳐주지 않을 거예요?"

"나랑 얽혀서 좋을 거 없어."

피어 갱이 훌륭한 예시였다. 하마터면 산송장 하나 치울 뻔했지 않던가.

그런데도 사쿠야는 무엇이 그리도 기쁜지 졸졸 따라올 뿐이었다.

한숨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저 멀리서 들려오던 환호 소리가 점차 잦아들었다. 기나긴 밤이 끝나간다는 신호. 푸르스름하게 물든 골목길 사이로 스산한 바람이 들이닥쳤다.

누군가 다가오고 있다.

그리 판단한 가온은 사쿠야를 끌어당겼다.

장소에 맞지 않게, 바퀴 굴러가는 소리가 들려온 건 한 박자 뒤.

'인라인?'

아니나 다를까, 저편에서 한 소년이 어그레시브 스케이트를 타고 나타났다.

자체적으로 발광하는 네온 코트가 펄럭이고, 허리춤에 걸린 체인이 치렁거렸다.

언뜻 유행에 민감한 요즘 세대처럼 보이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이는 드물 터였다.

기이하게도 소년은 방독면을 착용하고 있었으니까.

050 너보다는 멋져

* * *

그것도 일반적인 형태가 아니었다.

합금으로 보강해, 큼지막한 필터를 덧댄 형태. 지금 당장 우주에 떨어져도 생존할 수 있을 것 같은 모양새였다.

"혹시나 해서 와 봤는데 난장판도 이런 난장판이 없네. 업장을 지키는 개는 온데간데없고, 토끼는 누가 방생해서 돌아다니고 있고."

개와 토끼.

무엇을 지칭하는 단어인지는 명확했다.

하물며 이 타이밍에 보란 듯이 접근한 거다. 아침이 무서운 클러버(Clubber)는 아닐 게 분명했다.

은연중에 상하 관계를 암시하는 단어를 쏟아내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소년은 도망친 사내의 윗선인 게 분명했다.

그래, 여태껏 이 모든 판을 설계한 녀석들 말이다.

"미스터 울프와 아는 사이?"

"울프? 아아, 그 리퍼닥? 상관이 있다면 있고, 없다는 없는 사이인데..., 너는 뭔데 그걸 물어보는 거지?"

"해결사다, 너희들에게 희생된 피해자가 보낸."

"아, 그러셔."

소년은 어깨를 으쓱였다.

방금 전, 오가다 확인한 갱스터들의 사체가 뇌리를 스쳐 지나간 건 우연이 아닐 터. 여기에서 변수라고 할 수 있는 건 한 사람뿐이었던 거다.

"복병을 미리 만나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그래도 귀찮게 되었네. 뒤처리해 주던 녀석들은 전부 죽었는데 말이야."

"역시 피어 갱과도 결탁한 적이 있었나 보군."

"거기까지 알아냈어? 그러면 더더욱 살려 보내줄 수가 없겠는걸."

어그레시브 스케이트를 타고 빙글빙글 돌던 소년이 방독면에 설치된 밸브를 돌린 순간, 필터 사이로 숨결이 새어 나왔다.

후우욱.

소년이 뱉은 날숨은 대기 중의 수분을 응결시켜, 눈꽃을 피워냈다.

주위의 온도가 삽시간에 하강한 건 말할 것도 없었다. 피부로 냉기가 스며들자 사쿠야는 두 팔로 제 몸을 감쌌다. 겨울이라는 말로 대체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기상 현상이었다.

"오빠?"

"멀리 떨어져 있어, 내가 찾으러 갈 때까지."

저건 어떠한 유닛이 작용한 결과가 아니었다.

그저, 순수한 이능.

소년의 방독면은 이물의 침입을 막기 위한 장비가 아니었다. 능력을 화려하게 방출하기 위한 장치였을 뿐.

이로써 한 가지 명확해졌다.

소년의 정체는, 리퍼닥을 후원한 세력은―

'메타 휴먼인가.'

바라마지 않았던 동류의 등장이었다. 하지만 반갑다는 감정은 들지 않았다. 디바이스 적출에 동조한 것도, 죄 없는 연습생을 제물로 삼은 것도 모두 그들이 주체적으로 행한 일이었으니.

리퍼닥이 마피아를 털고 나온 이유도 알 것 같았다.

저러한 인간 병기가 소속된 단체인 거다. 어떠한 비전을 보았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다만, 가온이 원했던 청사진은 리퍼닥과 조금 달랐다. 아무리 시정부에게 쫓기고 있다 해도 마지막 희망만큼은 잃지 않고 제 모습을 간직해 주길 바랐던 거다.

소년을 앞에 두고 실망한 것도 어쩌면 그 때문일지도 몰랐다.

메타 휴먼이 어떤 식으로 몰락하고, 타락한 건지 이해할 것만 같아서.

하지만 그러한 가온의 반응을 소년은 다르게 받아들였다.

"얼빠진 거 보소."

조소한 소년이 손을 휘젓자, 안개처럼 흩어졌던 냉기가 휘몰아치면서 하나의 형상을 이루었다.

그것은 고드름.

송곳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매끄럽게 제련된 고드름이었다.

슉!

더불어, 쏘아지는 속도는 탄환에 비견될 정도였다.

그런 게 하나도 아니고, 수십 수백 개가 연달아 빗발치니 일대가 쑥대밭이 되는 건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소년은 홀로 피어 갱이 보유했던 화력을 가볍게 웃돌았다.

무엇보다 위협적인 건 흉기가 남지 않고 증발한다는 거였다. 형태가 명확하다고 해도 결국 본질은 물이었던 거다. 사건 현장에서 어떠한 흔적도 찾을 수 없을 터.

암살자로서의 자질이 충만할 거라는 건 두말할 것도 없었다.

거기에 하나 더.

투둑.

고드름 앞에서는 코트가 보호 장비의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화기에 특화된 설계인 만큼 한 점을 후벼 파는 날붙이에는 취약했던 거다.

섬유로 직조했기에 생길 수밖에 없는, 구조적인 결함이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그런데도 가온은 탄환을 욱여넣고자 했다. 메타 휴먼이라고 해도 결국 인간이었으니까.

머리에 바람구멍이 나고서도 괜찮을 리 없었다.

달칵.

하나, 납탄은 소년에게 닿기도 전에 운동 능력을 상실했다.

안개와 소년의 경계는 모호하기만 했다. 밸브를 얼마나 돌린 건지 알 수 없을 지경. 방독면은 증기기관이라도 된 것처럼 끝없이 냉기를 배출했다.

지면에 자욱하게 깔린 안개를 타고 고드름이 솟구친 건 그때.

여태 한 방향으로만 사출된 만큼 쉬이 예측하기 어려운 공격이었다.

턱끝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가는 고드름을 가까스로 피한 가온의 시야에 꼬치가 된 클락이 들어왔다.

"이걸 노린 거였나."

"소리가 나지 않는 권총만 빼면 너는 별거 아니니까."

"그래, 그렇단 말이지."

클락을 버린 가온이 자세를 낮추었지만, 소년은 무시로 일관했다. 발악해봤자 얼마나 할 수 있겠냐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그 안일한 판단을 꾸짖듯, 눈 깜빡할 사이에 수십 미터의 거리를 주파한 가온이 폴딩 나이프를 휘둘렀다.

"큭."

받아들이는 것조차 여의치 않은 급 전개.

어그레시브 스케이트에 내장된 모터가 돌아가면서 회피 운동을 하지 않았더라면 죽었을 수도 있는 공세였다.

"하, 그래. 숨겨 둔 재간은 있다 이거지."

분명 가온의 일격은 굉장했지만, 그게 승리를 보장해 주는 건 아니었다. 거리야 벌리면 그만이었던 거다.

풀쩍, 뛰어오른 소년은 벽면을 타고 질주했다. 중력을 거스르기에는 불합리한 구조였지만, 그 위에 빙판을 형성하면 그만이었다.

발판으로 삼을 수 있는 곳, 그곳이 바로 트랙이었다.

하지만 입체적으로 기동하는 건 소년만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쏘아지는 고드름을 징검다리 삼아 도약한 가온은 소년의 뒤를 쫓아 미끄러졌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서 있을 수조차 없는 환경이지만, 당연하다는 듯 중심을 잡고 추격하는 가온을 떨어뜨리고자 소년은 팔을 휘둘렀다.

두 사람이 지나간 빙판이 분해되면서 고드름으로 변모한 건 한순간.

소년이 선고를 내리기 전, 가온은 자신을 에워싼 장벽을 뚫고 뛰어올랐다. 체공할 수 있는 시간은 불과 몇 초.

하지만 반격하기에는 차고 넘쳤다.

찰나의 순간, 회전은 시작되었으니까.

기기긱.

가온이 휘두르는 폴딩 나이프를 따라, 안개가 흩어졌다. 지근거리에서 발생한 급변풍에 고드름은 저마다 방향을 잃고 애꿎은 도로를 가격했다.

용오름을 억제하려는 냉기조차 기압 차를 견뎌내지 못하고 폴딩 나이프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방패막이 사라졌지만 소년은 당황하지 않고, 방독면을 벗어 보였다. 간격이 좁혀졌으면 하고 바란 건 가온뿐만이 아니었던 거다.

"내게 다가온 건 실수야."

소년의 목소리는 들렸지만 얼굴까지 확인하는 건 불가능했다. 조금 전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냉기가 소용돌이쳤던 거다.

쩌저적.

불길한 파열음에 제 손을 바라본 가온은 두 눈을 부릅떴다. 혈색이 사라진 피부는 갈라져서 속살을 드러냈다. 충격적인 건 보여야 할 근육과 핏줄이 전부 얼음으로 대체되었다는 것.

급격한 수축을 견디지 못한 폴딩 나이프가 쪼개진 건 덤이었다.

'빙하기.'

지구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결코 잊을 수 없는 재해가 소년에게서 발현되었다.

* * *

예고도 없이 세상은 하얗게 물들었다.

멀리 떨어졌는데도 확실하게 느낄 수 있을 정도. 숨을 들이쉬는 것조차 고통스러워 사쿠야는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났다.

대체 저 중심에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청년이 걱정되어, 사쿠야는 좀처럼 발을 뗄 수 없었다. 기다리라는 소리를 듣긴 했지만, 그 말을 따르는 게 정말 옳은 건지 확신할 수 없었던 거다.

더구나 그녀에게는 도구가 있었다.

리퍼닥을 잠시나마 멈추게 했던, 그 알 수 없는 '힘'.

그거라면 승산이 있을지도 몰랐다.

약속을 어기고, 자신 있게 발을 내디딘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기껏 쥐어 짜낸 용기는 냉혹한 결과 앞에서 무너졌다.

차게 식어, 얼어붙은 청년의 얼굴이 보였다.

소생의 여지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어, 차라리 석고상이라는 단어가 어울릴 지경.

방독면을 착용하고, 밸브를 걸어 잠근 소년은 예상치 못한 초대 손님에 헛웃음을 터트렸다.

"뭐야, 제 발로 기어들어 온 거야? 왕자님이 이긴 줄 알고? 이것 참, 마음이 꽃밭에 가 있는 년은 곤란하다니까."

확보 대상에 사쿠야가 있으니, 이는 기꺼워해야 할 일이었다. 물론 기분이 나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내가 질 게 뻔하다고 생각했던 거네?"

각성하고 나서, 한 번도 패배한 적 없는 소년이기에 더욱더 모욕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마치 소중히 간직해왔던 성지가 밟힌 것 같았다.

"야, 내가 만만해? 만만하냐고. 내가 묻잖아."

"아니, 나는...."

사쿠야의 대답은 시원찮았다. 명료하지 않은 건 어투뿐만이 아니었다.

완전히 망가진 듯한 표정.

그녀를 괴롭혀 봤자 얻을 수 있는 건 없다시피 하다는 걸 깨달은 소년은 머리를 거칠게 긁적였다. 압도적으로 이겼는데도 뒷맛이 개운치 않았다.

사쿠야를 향한 분노가 가온에게로 향하는 건 당연지사.

"야, 다 너 때문이잖아. 뭔데, 뭔데, 뭔데! 나타나서 지랄이야, 지랄은."

그래서 보란 듯이 짓밟았다.

어그레시브 스케이트가 굴러갈 때마다 얼굴에 바퀴 자국이 선명하게 새겨졌다.

이미 인간이라고도 부를 수 없는 형상.

금이 가 있는 고깃덩이를 보며 만족스럽게 웃은 소년이 사쿠야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어이, 네 왕자님을 보라고? 어때?"

"...."

"이거라도 온전히 보존하고 싶으면 대답해."

"그래도...."

"그래도?"

"너보다는 멋져."

발갛게 달아오른 눈가를 닦은 사쿠야가 나지막이 항변했다. 끝까지 고개를 숙이지 않는 모습에 소년은 다리에 힘을 주었다.

콰직.

그나마 형체를 갖추고 있던 얼굴이 산산이 조각나면서 그 파편이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어이쿠, 나도 모르게 그만."

"아아, 아...."

털썩, 주저앉은 사쿠야는 절규했다.

* * *

불로불사는 그 단어대로 죽음에서 벗어났다는 걸 의미했다.

하지만 세상에는 차라리 죽는 게 더 나을 정도로 참혹한 사유도 존재했다.

저번에 한 번 겪을 뻔했던 우주 미아도 그중 하나였다.

죽지 않지만, 죽은 것과 다를 게 없는 상태.

이는, 지금 직면한 재앙과도 대동소이했다.

'동사.'

아니, 죽지 않았으니 동상에 더 가깝다고 해야 하나.

저체온증에서 비롯된 이 질병은 혈액의 순환을 멈춰 신체의 괴사를 유도했다. 종국에 이르러서는 심장이 굳어서 사망하게 되지만, 불로불사만큼은 예외였다.

행동에 제약이 생길 뿐이니까.

가온도 몇 번인가 경험한 적 있었다.

돔과 돔 사이를 오가는 경로가 명확하게 구분 지어지지 않았을 때는 오로지 직관만으로 횡단해야 했던 거다. 잘못된 선택을 한다면 아무것도 못 하고 눈밭에 파묻혀 있어야 했다.

'그때는 어떻게 빠져나왔더라.'

051 나는 진심이야

* * *

스스로 던진 물음에 파문이 일어난다.

그래, 처음에는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질했더랬지. 하지만 인간이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건 불가능했다. 의식을 잃고 불가피하게 동면을 취해야 했던 거다.

그때 당시에는 느긋하기만 했다. 가온에게 있어 시간이란 돌보다 못한 것이었으니까. 가만히 있기만 해도 손에 쥐어지니 조급해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 태만에 대한 대가는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무시하지 못할 만큼 시간이 흐른 뒤였으니까.

때때로 수십 년이란 세월을 허비하기도 했다.

존재의 부재라는 측면에서는 사망한 거나 다름없는 결과.

그 뒤로 가온은 한 가지 방법을 고안했다.

바로 지금 하는 것처럼.

콰지직.

가온이 배운 고류 무술에는 형태가 없었다.

본디 그러한 부류가 아니라, 끝까지 가르침을 받을 수 없었기에 벌어진 참사.

이른바 무지의 소치였지만 가온은 포기하지 않고 부족한 부분을 스스로 채워 넣었다.

그 과정에서 고안한 게 회전.

콰지직.

불수의근을 자극해, 빨래처럼 전신을 쥐어짠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혈관과 근골 전부.

고조되는 정신을 따라 체내가 요동치는 건 당연지사. 요체는 어떠한 자세에서도 멈추지 않는 거였다. 설령 과하게 회전한 대가로 전신이 부서진다고 해도.

콰직, 콰지직.

얼어붙은 관절이 깨지고, 뼈마디가 틀어진다. 일반적이라면 이 시점에서 재기불능. 혹 동상에서 벗어난다고 해도 치유할 수 없는 후유증을 얻을 테지만, 가온에게는 의미 없는 가정일 뿐이었다.

뼈와 살을 깎아, 조금씩 전진하는 중이었으니까.

해동하는 부위는 한 곳이면 되었다.

호르몬 조절기.

그곳에는 뉴클레이즈뿐만이 아니라 손수 배합한 드러그 칵테일도 있었다.

신경 말단까지 자극을 주어 영구적인 장애를 일으킬 정도로 강력한 녀석이지만, 우라늄이나 수은조차 섭식할 수 있는 가온에게는 일용할 양식에 불과했다.

투둑.

잔불이 일어나 체온이 상승한 순간, 재생은 완료되었다.

시야를 되찾은 가온의 눈에 들어온 건 소년의 발과 절규하는 사쿠야였다.

'짓밟히고 있는 건가?'

적당한 위치 선정이었다.

망설이지 않고 어그레시브 스케이트를 잡은 가온은 그대로 우그러뜨렸다.

콰득.

MUG―1에 해당하는 제품이 골판지 박스처럼 구겨지는 소리에 소년이 놀라는 건 당연지사.

해답을 구하는 듯한 기색이 얼굴 위로 드러났지만 가온은 대답조차 하지 않고 겨드랑이 사이에 소년의 다리를 끼웠다.

발목과 무릎 그리고 허벅지까지 제압하는 관절기, 힐훅.

소년에게 보내는 선물의 이름이었다.

"네 다리하고 작별 인사나 해."

콰직.

섬뜩한 파열음이 메마른 거리를 가득 채웠지만 소년은 비명도 지르지 않고 밸브를 열어젖혔다. 오로지 제가 지닌 이능만이 활로라는 걸 깨달은 거다.

사방에 분사되는 안개를 따라 하강하는 기온.

부러진 다리를 얼음으로 보강한 소년은 재빠르게 거리를 벌렸다.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반격을 꾀하는 소년이었지만, 한껏 달아오른 가온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쿠쾅!

창처럼 내질러진 관수가 냉기를 몰아낸 거다.

갑작스럽게 휘몰아친 후폭풍을 따라, 거리 곳곳에 가라앉은 서리 또한 지우개로 지운 것처럼 깨끗하게 지워졌다.

물론 소년의 이능이 제힘을 잃은 건 아니었다. 자연재해는 일개 인간이 거스를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그건 가온이라고 해도 변치 않았다.

하지만 얼어붙은 손이 떨어져 지면에 닿기 직전, 또 다른 손이 나와 그 자리를 대체했다.

도마뱀도 이보다 더 극적인 광경은 보여 주지 못할 터.

그제야 소년은 제 눈앞에 있는 게 누구인지 눈치챘다.

"너도...?"

"너만 특별하다고 확신한 시점에서 진 거야."

가까이 다가가, 손수 밸브를 걸어 잠근 가온은 그대로 손잡이를 부러뜨렸다. 소년이 마음대로 이능을 개방하지 못하도록.

제 끝을 짐작한 소년이 도망치려고 했지만 무용.

다리를 걸어 넘어뜨린 가온은 주먹을 내질렀다. 살인을 저지르는 것에도 개의치 않는 놈이었다. 자비는 필요하지 않을 터.

얼마 가지 않아 소년의 사지는 축 늘어졌다.

이제 그에게 온전한 건 입뿐이었다.

"내가 묻고 싶은 건 하나야. 왜? 왜 이런 짓을 저지른 거지? 대체 무엇을 노리고?"

"그, 걸 말할 것 같냐."

패배까지 한 마당에 사실대로 실토할 리 없었다. 끝까지 함구하는 게 최고의 복수라는 걸 알기에 소년은 미련 없이 두 눈을 감았다.

삶의 여한 따윈 없다는 듯.

하지만, 방금 전부터 일련의 과정을 지켜본 사쿠야가 입을 열면서 상황은 반전되었다.

"「말해」"

* * *

"오빠."

단 한 마디였지만 그 말에는 수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고."

살아난 경위를 묻고 싶은 건지, 아니면 소년이 남긴 정보가 충격적이었는지 가온으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지금은 거론할 때가 아니었다.

사쿠야가 난데없이 발휘한 이능에 대해 거론하지 않은 것도 그 연장선.

현황에 놀라기보다 냉정하게 사건을 수습하는 게 우선이었다.

가온의 시선은 숨이 끊어진 소년에게로 향했다.

어떻게 해야 가장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을까.

이대로 가져가 실험 재료로 삼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표본이 많으면 많을수록 불로불사에 대한 연구도 한결 더 편하게 진행될 테니까.

하지만 그건 하책이었다.

거하게 저지른 참인 거다. 공찰이 조사하지 않을 리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증거라고 할 만한 건 없었다.

부서진 머리는 증발,

회전한 발판도 증발,

검흔도 따라서 증발.

완전 범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격전을 거치고도 온전한 디바이스를 조작한 가온은 한 사람에게 연락했다.

마침 적당한 인력이 있었다.

* * *

신고를 받고 출동한 진건은 현장을 살펴보았다. 아무도 모르게 마른세수를 한 건 덤.

아무리 겨울이라지만 구름처럼 새햐앟게 물든 설경은 부자연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때, 누군가 곁으로 다가왔다.

"오랜만이네, 미스터 건."

"가온 씨입니까."

그러잖아도 유전자 검사 결과가 나온 직후였다. 본디 행동 방침을 정해야 마땅하나 그럴 수 없었다.

[대조 불가]

유전자 정보가 훼손됐기에 검증할 수 없다는 소식을 접했기에.

이는, 진건으로서도 예상 밖이었다.

가온이 관련 병증을 앓고 있거나, 인위적으로 손상시켰다는 소리니까.

우연의 일치인지 아니면 의도된 연출인지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접근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 와중에 가온의 연락은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변수를 창출하지 않고도 다가갈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니까.

하지만 그러한 기쁨도 잠시뿐, 도리어 판단이 어려워졌다.

마치 유전자 검사로는 제 정체를 알아내지 못할 거라는 걸 인지하고 있다는 듯 시의적절하게 호출한 거다.

정말 가온은 양후일까? 이쪽의 의중을 살펴보고 싶어 농락하는 걸까? 아니면 모든 건 자신의 망상? 애꿎은 시민을 상대로 위압 수사를 펼치는 걸까?

머릿속에 떠오르는 수많은 가정을 무시한 채 진건이 고갯짓했다.

"해당 공찰서에 신고하는 게 일반적일 텐데요. 콕 집어 저를 지목한 건 어떠한 의도가 있다고 봐도 무방할까요?"

"평소에 친하게 지내는 보안관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

"그러기 위해 새벽에 상대방을 호출하는 건 추천드리지 못할 것 같군요."

"그거 미안하게 됐군. 하지만 믿을 사람이 없어서 말이야."

진건의 불만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 가온은 비릿하게 올라가는 입꼬리를 가렸다.

시정부 소속 사냥개라는 건 자명했지만, 대외적으로 진건이 내밀고 있는 이름표는 광역수사대.

가온 또한 이러한 점을 본받기로 했다.

실력은 좋지만 경험은 일천한 새내기 해결사라는 콘셉트 뒤에 양후를 숨기기로 한 거다.

무턱대고 알고 있는 보안관에 신고하는 건 그에 부합하는 행동이었다.

핑계거리야 차고 넘쳤다.

소년에 대해 설명하는 것만으로 진건의 태도가 확연하게 달라졌으니까.

"그러니까 의뢰를 수행하는 중에 마주친 거수자가 특이한 능력을 사용했다는 겁니까."

"별일이지? 유닛이나 슬롯 같은 건 없었는데 말이야."

"그게 사실이라면 심상치 않은 일이군요. 왜 제게 연락했는지 알 것 같습니다."

대답과 다르게 진건의 의심은 커져만 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수상쩍은 변명이었다. 감염자를 미끼로 삼아 반응을 살펴보려는 기색이 역력했던 거다.

역시 가온은 양후일 확률이 높은 것 같다.

그리 확신하려는 순간―

"한 가지 더 있어. 저 녀석, 피어 갱과 연관이 있는 것 같더라고."

뜻밖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피어 갱 말입니까."

"그래, 디바이스 적출하고 다니는 놈들 말이야. 쫓는 거 아니었어?"

"그건 그렇습니다만."

진건은 말을 아꼈다. 매사에 당당한 그이지만 하마터면 일생일대의 오판을 저지를 뻔했다는 자각 정도는 있었다.

저번에 지하로 향한 것도, 다짜고짜 위협 사격을 해 강렬한 인상을 남긴 것도 모두 그였다.

자, 그러면 여기서 문제.

피어 갱의 흔적을 발견한 가온이 과연 외면할 수 있었을까?

정답은 당연하게도 '아니요.'였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놈들이 쓰러져 있을 거야."

"이번에도 우연히 발견한 것뿐입니까?"

"적어도 현상금이 걸리지 않은 녀석들은."

능청스럽게 답한 가온은 그러한 심경의 변화를 모두 감지했다.

직접 진건에게 연락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는 메타 휴먼만을 추격하는 요원이었다. 39구역에서 일시적으로 일어난 이상 기후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리 없었다.

따라서 소년이나 가온의 행적이 밝혀지는 건 시간 문제.

그런데도 위험을 감수하기 싫다고 괜히 도망친다면?

요주의 인물로 급부상해 집중 마크당할 뿐이었다. 일말의 여지조차 주지 않고 정면에서 돌파하는 게 상책이었다.

지금도 진건에게 혼란을 주었지 않던가.

그도 긴가민가할 거다.

진정 양후라면 공찰과 접촉하는 것 자체를 기피할 테니까.

메타 휴먼에 대해, 진건에 대해 몰랐더라면 가온도 그리했을 거다.

하지만 전후 사정을 파악한 이상, 수사망에서 벗어나는 건 일도 아니었다.

더불어 메타 휴먼이 범행을 저지르고 다닌다는 걸 은연중에 밝혔으니 진건으로서도 마냥 무시할 수 없을 터.

그가 열성적으로 임해도, 임하지 않아도 가온은 상관없었다. 가까이 붙어서 결실만 훔칠 생각이었으니.

"혹시라도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연락하라고. 나도 한 번 불렀으니 너도 한 번 부르는 게 공평하잖아?"

"친하게 지내고 싶다는 건 빈말이 아니었습니까?"

"나는 진심이야. 솔직히 궁금하기도 하거든. 우리가 어디까지 친해질 수 있는지."

이건 진건이 받을 수밖에 없는 제안이었다.

'내게 품은 모든 의혹을 털어내야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을 테니까.'

시험하듯이 의뢰를 맡길 거라는 건 불 보듯 뻔했다. 아마 위험한 것들로만 선별할 테지.

테마야 정해져 있지 않던가.

'메타 휴먼.'

왜 시정부가 그리도 열렬하게 그 뒤를 쫓는지 알아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운이 좋다면 그 과정에서 도비를 치료할 수 있는 메타 휴먼을 찾을 수도 있을 터.

진건은 자신이 주도권을 쥐고 있다 생각할 테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모든 건 가온이 원해서 설계된 관계였다.

052 다음에도 말이지

* * *

* * *

가온이 사쿠야와 함께 사라진 뒤, 그들이 눈길 위로 남기고 간 발자국을 잠시 동안 바라본 이라이가 진건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팀장님 말씀대로 종잡을 수 없는 인물이군요."

"어떻게 생각합니까?"

"양후일 확률이 3할 가까이 된다고 보았습니다만, 2할까지 낮춰도 무방할 것 같군요."

"이유를 들을 수 있을까요?"

"그간 양후의 행동으로 추론하건대 그는 감염자에 대한 정보를 몰랐을 확률이 높습니다."

"그렇겠죠."

화성과 다르게 지구는 시정부에 의해 완벽하게 통제되는 중이었다. 돔이라는 특수한 환경이 그걸 가능케 했다.

"정말 양후가 맞다면 우리를 부르지 않았을 겁니다. 그의 입장에서 보자면 뜻하지 않게 동류를 만난 셈이 되니까요."

"이렇게 알리는 게 아니라 따로 조사한다는 겁니까. 일리 있는 지적입니다. 하지만...."

여느 때처럼 두 눈을 가늘게 뜬 진건이 이라이를 응시했다.

"화성에 와서 깨달았을 경우도 빼놓을 수 없지 않겠습니까."

"팀장님이 우려하시는 부분도 공감합니다만, 거기까지 가면 기적의 영역입니다. 모든 상황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 건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어날 수 없는 일까지 가정하면 한도 끝도 없으니까요."

"하긴 괜한 걱정이군요."

불확실한 위험보다 중요시해야 할 게 눈앞에 있지 않던가.

소년의 방독면을 열어젖힌 진건은 가온의 증언을 떠올렸다.

"냉기를 뿜었다고 했죠. 크라이오키네시스와 프리조키네시스 둘 중 하나겠군요. 이라이 양이 보기에 몇 단계인 것 같습니까?"

"2단계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감염자라고 해도 모두 동등한 퍼포먼스를 보이는 건 아니었다. 감염이 진행된 정도에 따라 천차만별인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1단계가 제 이능을 파악하는 것도 급급하다면, 2단계는 일상생활에서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는 수준.

"3단계일 가능성도 있지 않겠습니까?"

"3단계입니까."

타고난 특성을 극한까지 연마해, 인간 병기로서 탈바꿈하는 구간이었다.

현장은 CCTV가 없는 사각지대인지라 정확한 영상을 얻기 어렵지만 그래도 한 가지는 분명했다.

"백가온이라는 청년은 아무런 장비 없이 처리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3단계 감염자일 리 없습니다."

소녀 또한 말했지 않던가.

소년의 이능은 위협적일지언정 상식을 넘어설 정도로 강력하지 않았다고.

"사쿠야라고 했던가요."

진건에게는 꺼림칙할 따름이었다. 먼저 나서서 가온이 정당방위라고 주장한 건 그녀였던 거다.

마음 같아서는 서까지 끌고 가 진실을 실토할 때까지 신문하고 싶었으나 그러면 불가피하게 소년의 존재가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애석하게도 감염자는 그 자체로 중요 기밀.

가온이 말하고 싶다고 해도 막아야 하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조용히 거래했다.

가온은 오늘 일을 잊고 진건은 그의 일탈을 무시하기로.

"어지럽군요."

결국, 돌고 돌아 제자리였다.

이럴 때는 강압적인 수단이 제격이었다. 불시 검문이나 임의 동행같이 미적지근한 제재를 말하는 게 아니었다.

폭력.

그것은 어떠한 문제도 해결할 수 있는 마법의 열쇠였다.

하지만 감염자를 처리한 솜씨만 보아도 가온이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건 자명한바, 괜히 나섰다가 일만 복잡해지는 수가 있었다.

안경을 착용한 사내, 휘랑이 다가와 조사한 결과를 보고한 건 그때였다.

"이 녀석의 시민 ID를 검색했지만 데이터베이스에서 나온 건 전혀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대충 쓰고 버리려고 했는지 기본적인 신상 정보조차 수정하지 않았더라고요."

"다른 사람의 디바이스를 이식했군요."

"디바이스에 내장된 기록을 살펴보니 피어 갱과 몇 번 만난 것 같던데요."

가온이 주장한 대로 소년은 디바이스 적출에 일조한 것 같았다.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거짓을 고한 게 아니라는 소리.

"곤란하게 됐군요."

감염자가 조직적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정황이 밝혀진 이상, 인력의 조달은 필수.

어쩌면 가온의 소망대로 의뢰를 맡겨야 할지도 몰랐다.

그가 감추고 있는 속내를 들춰내기 위해서라도.

* * *

카탈리나에 이어 또다시 짐덩어리를 데리고 들이닥친 가온에게 노인은 역정을 토해 냈다.

"말했을 텐데. 내 가게는 만남의 장소가 아니라고."

그러거나 말거나 가온은 리퍼닥에게서 얻은 팔을 내밀었다.

"이건?"

"오기 전에 한바탕했어. 아쉽게도 잡지 못했지만. 리퍼닥 주제에 꽤 강하더라고. 아니, 도망치는 게 능숙하다고 해야 하나."

"같은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 그런 차별적인 발언은 참을 수 없지만 자네보다 완성된 인격체로서 넘어가 주지. 그래서 말하고 싶은 게 뭔가?"

"도움이 필요해. 다행히 녀석이 떨어트린 건 의수더라고. 신호가 죽지 않았을 테니 역추적하면 장소 정도는 알아낼 수 있을 거야."

"아니, 당연하다는 듯이 요구하지 말게. 그게 금방 되는 일인 줄 아나?"

"어찌 됐든 할 수 있다는 거잖아. 해가 뜨기 전까지만 처리해 주면 돼."

디바이스를 부수었기에, 다른 세력과 접촉하는 건 당분간 어려울 거다. 소년과 엇갈린 게 대표적인 예.

예상에서 벗어나 배후 세력과 직접 접촉할 수도 있겠지만 망가질 대로 망가진 모습을 그들에게 보여서 좋을 게 없다는 건 리퍼닥도 인지하고 있을 거다.

놈이 다음 수를 내기 전에 먼저 처리해야 했다.

"저번에는 호의를 베풀었지만 이번에는 다르네. 돈도 되지 않는 일에 내가 왜...."

가온이 품속에서 자그마한 케이스를 꺼낸 것과 노인이 입을 다문 건 거의 동시.

"이건 그 녀석이 운영하는 무허가 시술소에서 가져온 드라이브야. 너라면 이 안에 담긴 가치를 알겠지?"

슬롯을 개조하는 것만으로 두뇌 활동 전반에 영향을 제어할 정도로 브레인 워싱에 일가견이 있는 사내였다.

천륜을 저버린 거지 재능을 버린 게 아니라는 뜻.

어떤 식으로 시술하고, 무슨 기술을 사용했는지 기록된 드라이브는 리퍼닥에게 보물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내용물을 얻으려면 복호화부터 해야겠지만 말이다.

가온의 성의를 받아 든 노인은 멋쩍은 듯 마른기침을 내뱉었다.

"이번만이네."

"다음에도 말이지."

* * *

무허가 시술소에 몇 없는 병실을 차지한 가온은 의자에 앉아 체력을 비축했다. 어차피 노인이 무언가 알아낼 때까지 꼼짝없이 대기해야 하는 상태였다.

똑똑, 하고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

"누구지?"

"저예요, 사쿠야."

베개를 들고 안으로 들어온 사쿠야는 어색하게 웃었다.

"잠이 오지 않아서요."

짧게 변명한 사쿠야는 허락도 구하지 않고 침대로 기어들어 갔다. 만난 지 두 번밖에 되지 않은 상대에게 보일 만한 어리광이 아니지만 가온은 이해했다.

"그 녀석이 말한 게 신경 쓰이나 보지?"

이불을 뒤집어썼는데도 정곡을 찔렸다는 듯 움찔하는 게 훤히 보였다.

"너는 배우 하면 안 되겠다."

"그래서 아이돌 하려고 한 건데요."

사쿠야가 힘들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제 입으로 루카스라 밝힌 소년에게 들은 사실은 퍽 충격적이었으니까.

놈이 리퍼닥과 꾸민 건 완벽하게 구성된 성매매 시스템이었다.

부분적으로나마 브레인 워싱이 되는 슬롯을 연습생들에게 이식해, 젊음을 원하는 고위층에게 팔아넘긴 거다.

부를 때는 암시를 주고, 내보낼 때는 기억을 지우니 겉으로 보아서는 그 누구도 눈치챌 수 없었다.

더구나 연습생들끼리 정보를 교환해 새로운 피가 주기적으로 들어오니 억지로 건드릴 필요가 없었다.

악순환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모두 브로커이자 스폰서면서,

전부 피해자이자 가해자였던 거다.

진보한 기술에 희롱당하는 건 무고한 소년, 소녀들뿐.

미몽에서 깨어난 애비게일이 폭로하려고 했던 건 이러한 실태였던 게 틀림없었다.

아무리 도덕과 윤리가 땅에 떨어졌다지만 인간의 근간을 유린하는 작태는 현대 사회에 작지 않은 파장을 불러올 테니.

하지만 지금에 이르러서도 풀리지 않은 의문이 있었다.

그건 바로 프로듀서 라주의 신고를 무시하고 애비게일을 사회적으로 묻어버린 게 누구냐는 것.

메타 휴먼의 무력은 분명 출중하지만 음지에서나 통용되었다.

가온이 열거한 건 엄연히 공적인 권력이 필요한 사안.

메타 휴먼과 별개로 양지에서 움직인 세력이 있다고 봐야 했다.

일련의 과정을 살펴보면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흑막일 터.

"죄송해요."

"갑자기 뭐가?"

"제가 이 힘을 잘 다룰 수 있었더라면 더 많은 걸 물어볼 수 있었을 테니까요."

그 말대로 사쿠야의 이능은 같은 대상에게 두 번 사용할 수 없는 종류였다. 루카스에게서 제한된 정보밖에 받지 못한 게 그 증거였다.

감정이 고양되지 않으면 사용할 수 없는 것도 단점이라면 단점. 물론 이렇게나 결함투성이지만 그 잠재력은 무궁무진했다.

개발 여부에 따라 엄청난 성과를 거둘 수도 있을 터.

물론 상황이 허락한다면 말이다.

"이 이후엔 호기심으로라도 사용하지 마. 절대로."

"왜요?"

"너는 모르겠지만 우리의 존재를 탐탁지 않아 하는 사람들이 많아."

"저 알아요. 일루미나티나 프리메이슨 같은 거죠?"

과연 미스 레트로.

나지막이 답한 가온은 쓰게 웃었다.

"오빠가 능력을 숨긴 것도 그 때문인가요?"

이 자리에서 수백 년의 삶을 읊어줄 수도 없는 노릇인지라 가온은 무언으로 수긍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오늘 질리도록 모험하기도 했으니, 사쿠야도 깨닫는 바가 많을 터.

하지만 그녀의 관심은 다른 곳에 있는 듯했다.

"오빠는 꿈이 뭐예요?"

"건강하게 오래 사는 거."

"그게 뭐예요."

생각하지도 못한 대답에 사쿠야는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세상 진지하게 살 것 같은 가온의 입에서 나왔다고 보기에는 너무나 명료했던 거다.

"나 같은 녀석보다는 네가 더 꿈 같은 꿈을 꾸고 있다는 거야."

가온의 손길이 제 머리칼을 쓸고 지나가자 사쿠야는 이불로 얼굴을 가렸다. 무언가 들켜서는 안 되는 표정을 짓고 말았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껴서였다.

연령에 맞지 않게 기이한 청년이었다.

그러고 보면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던 것 같았다.

"정말 포기하지 않으면 제 꿈을 이룰 수 있을까요?"

"적어도 멈추지는 않을 거야."

"저도 오빠의 소원이 이루어지도록 빌어드릴게요. 자요."

자신 있게 손을 내민 사쿠야가 덧붙였다.

"제 행운 받아 가세요."

"요 근래 네게 일어난 사건만 보면 받아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너인 것 같은데."

"크흠, 그래도 덕분에 오빠를 만났잖아요. 반등하는 일만 남았어요."

"어련하시려고."

가온이 손을 마주 잡은 순간 사쿠야가 힘을 주었다.

"그리고 죽었다 살아날 수 있다고 해도 아프지 않은 건 아니잖아요?"

핵심을 찌르고 들어오는 말에 가온은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사쿠야는 그 말이 하고 싶었던 거다.

"익숙해져서 그런 건 모르겠는걸. 그래도 고마워. 여전히 아프겠지만 그래도 조금은 따뜻해질 것 같아."

정말 아픈 건 사쿠야일 거다.

바라던 꿈이 꺾이고, 믿었던 동료에게 배신당하고, 알지도 못하는 녀석에게 죽을 뻔했으니. 그런데도 남을 걱정할 수 있는 이유는 아마 천성이 강해서겠지.

"하흠."

얼마 후, 사쿠야의 숨소리가 고르게 나는 걸 확인한 가온은 자리에서 일어나 곧장 병실을 나섰다. 노인에게서 기다리던 메시지가 온 거다.

053 남은 거라도 괜찮다면 가져가

* * *

* * *

"오래 걸리지 않아 다행이야."

아랫사람을 대하는 듯한 태도에 노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것 참, 상전이 따로 없군."

"드라이브까지 줬잖아. 엄밀히 말해서 내가 손해라고? 블랙마켓에 팔기만 했어도 목돈을 만질 수 있었을 테니까. 진짜 상전 대접을 받아도 시원찮아."

"알았으니 빨리 확인이나 해라."

망막 위로 투사된 정보를 훑어내린 가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멀지 않는 곳에 녀석이 있었다.

"바로 갈 건가?"

"그래."

"조심해라, 송곳니를 잃었다고 해도 늑대는 늑대니까."

"그러고 보니 아는 녀석이라고 했지."

"지금은 리퍼닥이지만 소싯적에는 해결사였던 놈이다. 이명으로 불릴 정도로 장래가 촉망받기도 했지."

* * *

코요테.

오래전에 잃어버린 이명을 떠올린 사내, 할드 웨이든은 입술을 깨물었다.

한 번 의뢰를 맡으면 끈질기게 추격하고, 기어코 상대를 찾아내 처리하는 잔혹한 해결사는 이 자리에 없었다.

믿었던 동료들의 배신으로 인해 추락한 리퍼닥만 있을 뿐.

오늘따라 기계로 대체한 몸이 그날의 고통을 잊지 못하고 욱신거리는 듯했다.

해결사로 활동하던 그가 마피아에 입단한 건 그들에게 복수할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중책에 앉는다면 경쟁자 제거라는 명목하에 사람 몇 명 묻는 건 일도 아니었으니까.

어렸을 때부터 슬롯이나 유닛에 관심이 많았던 그이기에 전속 리퍼닥이 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마피아는 할드의 개인적인 원한에 관심이 없었다. 잊으라고 독촉할 뿐이었다.

나날이 회한이 쌓여가던 와중, 자신을 루카스라 소개한 소년이 손을 내밀었다.

복수를 이뤄줄 테니, 함께 가자고.

솔직히 못 미더운 제안이었다.

그때 헤어졌던 동료들은 저마다 세력을 일궈 어엿한 우두머리가 되었으니까. 그래도 혹시 몰라 속는 셈 치고, 거래에 응했다.

놀랍게도, 수십 년에 걸쳐 준비했어도 성공하지 못한 복수는 몇 솔도 지나지 않아 이뤄졌다.

할드는 전율할 수밖에 없었다. 뒷세계에서도 강자는 넘쳐나지만 루카스는 그중에서도 궤를 달리하는 괴물이었던 거다.

인간의 소망과는 무관하게 갑작스레 들이닥친다는 점에서는 재해와 다를 게 없었다.

어찌 보면 조금 전 마주친 청년도 그러한 부류일지도 몰랐다.

"흡."

경추가 날아가고, 팔 한쪽이 잘려 나갔지만 할드는 태연하게 수술을 시작했다. 비밀리에 마련한 거점에는 여분의 의수는 물론이고 장비까지 완비되어 있었다.

거기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본인이 리퍼닥이었다.

위급 상황이라 판단이 느리다고 해도 그 능력이 어디로 갈 리 없었다.

하지만, 살아났다는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치료하는 것에 집중한 나머지, 불쾌한 손님이 오는 걸 인지하지 못한 거다.

"기어코 따라왔군."

"칠칠치 못하게 단서를 흘리고 다니니까."

39구역에 버려진 폐건물.

그곳에 둥지를 튼 사내, 할드를 쳐다본 가온이 비릿하게 웃었다.

"그리고 의뢰인의 의지가 워낙 강경해서 말이야."

"공찰 놀이라도 할 셈인가. 아니면, 반병신으로 만들었으니 손쉽게 처리할 수 있을 거라 여기는 건가."

"네 사정은 대강 알고 있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네가 한 짓이 용서받을 수 있는 건 아니잖아?"

"그 오만이 네 목을 조를 거다."

단숨에 거리를 좁힌 할드가 날카롭게 벼려진 칼날 손톱을 들이밀었다.

사고 과정을 생략하고, 오로지 본능에 입각한 공세.

고개를 뒤로 젖힌 가온은 헛웃음을 흘렸다. 할드를 품 안에 끌어들여 반격하려고 했건만, 그걸 예상이라도 한 듯 뒤로 물러난 거다.

더불어 감각적인 스텝과 위압적인 지르기는 몇 시간 사이에 배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 예측대로―

할드의 선전에는 트릭이 있었다. 프로그램에 몸을 맡기고 있었던 거다.

브레인 워싱의 연장선.

이른바, 자기 암시의 극의였다.

무아지경에 다다라 보다 높은 경지를 손에 얻은 건 당연지사.

살육만을 위해 모델링된 마리오네트처럼 할드는 철저하게 가온을 압박했다.

매번 최적의 경로를 산출해 동작하니, 상대가 어떤 식으로 방비한다고 해도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몇 번이나 응수해, 그러한 흐름을 읽은 가온은 탄성을 터트렸다.

"그게 본래 용도구나?"

전투에 적합하도록 정신을 재구성해, 대상의 적성에 관계없이 최고의 포텐셜을 부여하는 거다. 획기적이고 천재적인 방법이라 할 수 있을 터.

그래, 상대를 잘못 만나지만 않았더라면.

바닥에 스키드 마크를 새기며 질주한 가온이 팔을 휘두른 것과 장내에 정적이 감돈 건 거의 동시.

털썩, 주저앉은 할드는 한 박자 늦게 바닥을 나뒹구는 제 팔을 볼 수 있었다.

불현듯 가온을 쳐다본 그는 두 눈을 부릅떴다.

가온이 착용한 건 프로그레시브 네일.

"잠깐 빌렸어."

제 유닛이었다.

"하."

슬롯이 과열할 정도로 연산했건만, 이러한 결과는 예측도 하지 못했다. 허망할 따름이었다.

대체 몇 수 앞을 내다본 건지 할드로서는 짐작도 하기 어려웠다.

터무니없는 강자였다.

현대 기술로도 격차를 좁힐 수 없을 정도로.

어째서 이명(異名)도 없이 돌아다니는지 모르겠으나―

"내가 죽으면 사신이 널 찾아갈 거다. 그때가 되면 후회하겠지."

불합리한 괴물이라면 할드도 한 명 알고 있었다.

"루카스라는 애새끼를 말하는 거라면 늦었어. 이미 왔다 갔거든."

하지만 그의 마지막 발악은 가온 앞에서 무너져 내렸다. 더할 나위 없이 처참한 형태로.

"뭣...?"

순간, 자기가 무슨 말을 들은 건지 이해할 수 없었던 할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난솔, 루카스가 보여준 능력은 압도적이었다. 화성방위군이라고 해도 그를 저지할 수 있나 싶을 정도로.

그런데 죽었다고?

믿기지 않지만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비중 있는 악역처럼 의미심장한 대사 뱉지 말고 아는 거나 불어."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간 청년의 얼굴에 두려움이란 티끌만큼도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 * *

잘게 저며진 할드를 내려다본 가온이 방금 전 들었던 말을 정리했다.

"그래, 그래서 그랬다는 거지."

어째서 루카스나 할드가 태연하게 악행을 저질렀는지 알 것 같았다.

이번 사건에 연루된 녀석들은 총 셋.

메타 휴먼 측이 설계하고, 리퍼닥이 시행하고, 그리고―

"거기 애송이, 잠깐 멈춰 봐라."

남성스러움이 물씬 풍기는 저음이 귓가에 날아와 때려 박히자 가온은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췄다.

코끝을 산뜻한 체취가 훑고 지나간 건 그때.

레몬이 연상되는 상큼하고 달콤한 냄새였다.

등을 돌리니 아무렇게나 자른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긴 남자가 보였다.

치장에는 관심이 없는 부류인 듯싶었으나, 선이 굵어서 그런지 인상이 강렬했다.

더구나, 코트를 어깨에 걸친 탓인지 위험한 분위기가 흘러넘쳤다.

어쩌면 남자의 뒤를 따라 들어온 무리가 기립해 서 있어서 그런 걸지도 몰랐다.

군부대에 비견될 정도로 기강이 잡힌 모습이지만, 가온에게는 불편할 따름이었다.

난데없이 찾아온 불청객이 누구인지 알 것 같아서였다.

한 번에 분위기를 휘어잡은 남자는 당연하다는 듯 하대했다.

"해결사?"

"그래."

"네 뒤에 있는 할드는 살아 있는 거겠지?"

"불행 중 다행히도 숨은 붙어 있네."

최대한 고통을 주기 위해 느긋하게 고문한 것도 있지만, 할드의 내부는 대부분 생체가 아니라 기계로 구성되어서 명줄이 길었다.

"그런가, 그러면 넘겨라."

"그건 곤란한걸."

"곤란하다?"

"내가 먼저 잡았으니까. 그리고 갑자기 찾아와서 명령하는 녀석의 말을 곧이곧대로 들어줄 리 없잖아."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건가?"

"알아야 해?"

"이 거리를 누비면서 우리를 알지 못한다니 아이러니하군."

생소한 감정을 느끼면서도 남자는 제가 할 일을 잊지 않았다.

"너는 모르겠지만 녀석은 우리에게 빚이 있다. 어쩌면 목숨으로도 갚을 수 없겠지."

"그래서 꼭 데려가야겠다?"

"그게 벤데타(Vendetta)니까. 아무리 무지한 애송이라도 그 정도는 알고 있겠지?"

벤데타, 그건 복수의 규율을 뜻하는 용어였다. 반드시 갚아 줘야만 할 대상에 한해서만 선포되는 동원령.

상대 세력도 아니고 일개 리퍼닥에게는 과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한 가지 예외가 있다면 할드가 오메르타(Omerta), 즉 침묵의 규율을 어겼다는 건데―

'브레인 워싱.'

돌연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단어에 가온은 침음을 흘렸다. 아무래도 할드는 마피아에서 자체적으로 개발한 기술을 훔친 것 같았다.

거기에 더해, 알지도 못하는 녀석들과 손을 잡고 장사까지 했으니 일벌백계해도 모자랄 터.

남자가 무엇을 주장하고 싶은 건지 모르려야 모를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게 넘겨줄 이유는 되지 못했다. 마피아가 데려가면 그때는 수많은 연습생을 처리한 살인마가 아니라, 배신자로서 죽는 거다.

해결사인 가온에게는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차이였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답은 나와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콰직.

남자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할드의 머리를 터트린 가온은 고갯짓했다.

"남은 거라도 괜찮다면 가져가."

반은 도발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당연하게도 분개할 줄 알았건만 이게 웬걸, 남자는 배를 부여잡고 웃었다.

"크크크크, 크크큭. 백 점짜리 대처다. 우리 애들에게 보여 주고 싶을 정도군."

그리고 박수까지 쳐가며 호응했다.

"그래, 해결사를 자청한다면 그 정도 기개는 있어야지. 요즘에는 가짜들밖에 없어서 따분하던 참이었다."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는 남자였으나,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돌연 웃음을 멈추더니 눈살을 찌푸린 거다.

"하지만 내가 먼저 벤데타를 천명하지 않았나. 그런데도 너는 그 말을 무시했지. 면이 서지 않게 되었다는 거다."

쿵.

남자가 한 걸음 내디딘 순간, 지면이 거미줄 모양으로 갈라졌다.

"어쩔 수 없지. 자라나는 새싹을 밟는 건 취향이 아니지만, 본보기를 보여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니까."

그림자가 주욱 늘어지는가 싶더니, 저 멀리 있던 남자가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왔다. 신속이라 부르기에 모자람이 없는 움직임.

남자가 들이민 손바닥이 가슴에 닿고 나서야 가온은 일련의 과정을 인지할 수 있었다.

우웅.

전신을 타고 흐르는 울림에 단련된 육감이 꿈틀거렸다.

이건 위험하다.

그리 판단한 것과 허공을 부유한 건 거의 동시.

쾅!

벽면에 부딪힌 가온은 피거품을 쏟아냈다. 절륜하기 짝이 없는 위력. 반사적으로 고개를 내리니, 가루가 되어 흩날리는 언더 아머가 눈에 들어왔다.

"IVOD인가. 햇병아리답지 않게 좋은 장비를 사용하는군. 선물이라도 받은 건가?"

무심하게 추론한 남자가 자세를 바로잡았다.

"뭐, 그래봤자 고통받는 시간만 늘어나겠지만."

쫙 편 두 손바닥이 포보스─위성─의 빛을 받아 반짝거린다. 멀리서 보았을 때는 장갑을 착용하고 있는 줄 알았다. 에나멜 특유의 광택이 살아 있던 거다.

하지만 마주하고 나니 알 것 같았다.

저건, 유닛.

그것도 특제였다.

"더 보여 줄 게 없다면 여기서 죽어라."

054 교훈으로 삼으면 되겠네

* * *

다시 한 번 급가속하는 남자를 상대로 가온은 프로그레시브 네일을 들었다. 그가 노리는 건 남자가 아니었다.

옆에 있는 기둥.

그래, 설계 단계부터 부실하기 그지없는 건물이 서 있을 수 있게 지탱해주는 축 중 하나였다.

서걱!

무너져 내리는 천장, 그 사이로 쏟아지는 콘크리트 더미를 징검다리 삼아 질주한 가온은 프로그레시브 네일을 내질렀다.

순간 남자의 피부와 닿은 칼날 손톱이 비명을 내지르며 불씨를 토해냈다.

우블렉 탄성 피부와는 차원이 다른 유닛.

'MUG―2 아니 3인가?'

정확한 연원은 알 수 없지만 전쟁을 염두에 두고 고안된 특수 소재가 틀림없었다. 딱 잘라 말해 군용 사양.

위력이 부족한 걸 깨닫고 회전의 묘리를 더하려고 한 가온이었으나, 그걸 두고 볼 남자가 아니었다.

이미 두 사람의 거리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가까워진 상태.

남자는 주저하지 않고 돌려찼다.

쾅!

걷어차인 가온은 건물을 몇 개인가 들이박고 나서야 멈출 수 있었다.

그야말로 파멸적인 일격.

"솜털 정리할 때 쓸 만하겠군."

먼지구름이 걷히기도 전에 바로 코앞에서 튀어나온 남자가 손바닥을 내질렀다.

우웅.

방금 전처럼 기묘한 울림이 전신을 타고 흐르자, 가온은 위험을 감지하고 옆으로 굴렀다. 하지만 남자의 공세는 멈출 줄 몰랐다.

전투에 특화된 유전자 조작. 거기에 동반된 사이버네틱스 수술.

고밀도 인공 근육,

티타늄 합금 프레임,

전방위 감지 센서.

그리고 의수형 유닛까지.

남자를 구성하는 요소 하나하나가 압도적이었다. 화성에서 처음 만난 진짜배기 강자라 할 수 있을 터. 그의 손에 잡힌 물체는 너나 할 것 없이 먼지가 되어 스러졌다.

가로등, 차량, 그리고 건물에 이르기까지.

크기와 밀도를 가리지 않았다.

이미 그 위용은 인간의 영역에서 벗어난 지 오래.

쿠우웅.

갑작스러운 강제 철거에 거리는 금세 떠들썩해졌다.

"저항하는 것도 나름 의미 있는 일이다."

흥이 한껏 오른 남자는 올라간 입꼬리를 내릴 생각도 하지 않은 채 가온에게 쇄도했다. 마치 공간을 뛰어넘은 것처럼 폭발적인 도약.

"광대 역할에 흥미가 있다면 말이지!"

그 힘을 견디지 못한 지면은 한 박자 늦게 거미줄 모양으로 갈라져 가라앉았다.

그림자조차 따돌린 채 당도한 남자를 밀어내고자 칼날 손톱을 휘두른 가온이었으나, 아차 하는 사이에 가루가 되었다.

승부가 갈리는 건 한순간.

방점을 찍고자, 체공 중에 방향을 비튼 남자는 섬전과 다를 게 없는 속도로 손바닥을 내질렀다.

이걸로 끝이다.

가온의 머리가 잘게 부서져 바람에 흩날릴 거라 믿어 의심치 않은 남자였으나 애석하게도 그 기대는 상상에 그쳤다.

딱딱한 감촉이 그를 반겼던 거다.

프로그레시브 네일의 자리를 대신한 건―

"너클?"

"과연, 그런 거였나."

유닛의 성능이 절대적이라면 첫 일격을 허용했을 때 죽었어야 했다. 하지만 타격을 입은 건 언더 아머가 유일했다. 방금 전 프로그레시브 네일도 마찬가지.

그래서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남자가 자랑하는 유닛이 어떠한 원리인지.

세상 만물은 저마다 각기 다른 진동수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를 고유 진동수라 하여, 똑같은 횟수로 진동하는 외력과 맞부딪치면 그 진폭이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했다.

이게 세간에서 흔히 말하는 공진의 요체였다.

남자가 장착한 건 그러한 현상을 일으켜 사물의 붕괴를 유도하는 장치, 레조넌스였다.

하나, 고유 진동수를 맞춰 공진을 유도한다는 건 좀처럼 쉬운 작업이 아니었다.

한 번에 하나.

기껏해야 그 정도가 한계일 터.

갑작스레 튀어나온 너클 하나에 막힌 걸 보면 알 수 있었다. 방금 남자가 내민 레조넌스에 설정된 값은 생체였을 테니까.

실수를 모면하겠다는 듯이 반대편 손바닥이 사각지대에서 솟구친 건 한순간.

가온은 다가오는 위협을 맨주먹으로 뿌리쳤다. 너클을 부수기 위해 발해진 일권이었다. 공진 대상이 금속으로 변경되었을 테니 무서울 건 없었다.

이건 꼬리 잡기였다.

누가 먼저 앞서는가 하는.

남자라고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오히려 당사자이기에 더욱더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너...."

입가에 미소를 지운 남자가 맹공을 개시하는 건 당연지사.

두 손바닥을 채찍 삼아 짧게 끊어치자, 날카로운 소음이 장내를 뒤덮었다. 내려치고 올려치는 동작이 하나로 연결되자 마치 풍차가 돌아가는 듯했다.

그것은 장타 위주로 구성된 전통 무술―

'벽괘장?'

처음 상대하는 이는 신기막측(神奇莫測)한 궤적에 놀라기 마련이지만, 오랜 시간 동안 수많은 무술을 섭렵한 해결사에게는, 3차 세계 대전을 몸소 경험한 가온에게는 그리울 정도로 익숙한 동작이었다.

날아오는 타격을 모조리 걷어내는 건 필연.

너클을 노린다면 주먹을,

주먹을 노린다면 너클을,

고유 진동수가 다른 두 가지 소재 앞에서 레조넌스는 고철덩이가 되었다. 적중해야 의미가 있건만, 설정된 값과 반대되는 물체만 잡았던 거다.

어느새 뒤바뀐 판도에 남자는 실소를 머금었다.

레조넌스의 약점이 잦은 스위칭이라는 건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설정을 변경하는 건 찰나에 불과했다. 본인이 아니라면 짐작도 할 수 없을 정도.

설마하니 그러한 순간조차 꿰뚫어 보는 상대를 만날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이거 내가 사람을 잘못 봤군."

"교훈으로 삼으면 되겠네."

쿵!

가온과 사이좋게 한 방씩 주고받은 남자는 뒷걸음질 쳤다. 이대로는 영원히 평행선을 달릴 뿐이라는 걸 짐작한 거다. 저울추를 기울이기 위해서는 목숨을 걸어야 했다.

그런 것조차 깨닫지 못한 조직원들이 지원하겠답시고 화기를 꺼내 들려고 하자, 남자는 단호하게 제지했다.

"어이, 거기까지 해라."

이 이상, 서로 물어뜯는 건 손해였다.

"사과하지, 나와 다르게 이 녀석들은 멋이라는 걸 모르니까. 대신, 시신은 우리가 가져가겠다."

"마음대로 해."

서로 만족할 만한 협의가 오간 순간, 저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헤어질 시간이 다가왔다는 신호.

"인상 깊은 대처였다, 해결사. 기회가 된다면 다음에 보도록 하지."

미련 없이 등을 돌린 남자가 작별을 고했다.

* * *

서둘러 무허가 시술소로 향한 가온은 기다리던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카탈리나, 그 아이가 깨어났네."

곧장 병실로 들어간 가온의 눈에 어색하게 웃는 카탈리나가 비쳤다. 초췌한 건 변함없지만 그 눈동자에 망설임은 존재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기억이 돌아온 모양이네."

"네."

"미스터 샤룩 칸에게 사정은 대강 들었을 거라 생각하는데."

"제가 잠든 사이에 많은 일이 일어난 것 같더라고요."

카탈리나는 잠시 숨을 몰아쉬었다. 아무리 각오했다고 해도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녀가 입을 연 건 얼마 뒤.

"그날, 애비게일은 도와달라고 했어요.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어요. 하지만...."

"계속된 설득에 너도 기억이 났나 보네."

진실뿐만이 아니었다. 알고 싶지 않았던 자신 또한 알게 되었다. 제삼자에게 놀아나는 제 자신 말이다.

애비게일의 말이 지당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두려운 건 어쩔 수 없었다.

"무서웠어요. 저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일이 벌어졌다는 게."

그리고, 만난 사람들의 사회적 지위 또한 만만찮았다. 폭로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걸 어렴풋이 알게 된 카탈리나는 결국 용기가 나지 않아 애비게일을 외면하고 말았다.

"납치 신고는 어떻게 하게 된 거야?"

"헤어지는 길에 누군가 그녀를 데려가는 게 보였어요."

하물며, 그런 대화를 나눈 직후였다. 아무리 멍청하다 해도 인과 관계를 고려해 보지 않을 리 없었다.

"심상치 않다는 건 금방 눈치챘어요. 직접 대면한 적은 없지만, 그러한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들은 몇 번 봤거든요. 그래서 신고했지만...."

"기억이 사라진 거구나."

상대가 왜 카탈리나만 방치한 건지 물을 필요도 없었다. 그녀까지 처리하면 연결 고리가 너무나 강해지는 거다.

한 명이 실종되는 건 우연이지만 두 명부터는 필연.

프로듀서 라주도 더 적극적으로 움직일 거고 공찰도 외면할 수 없을 테니 적당한 조치를 취한 것일 터.

그래도 대담하다는 건 변치 않았다.

덜덜 떨리는 손을 부여잡은 카탈리나가 물었다.

"정말, 해결하실 수 있는 건가요?"

"네가 증언만 해 준다면 말이야."

"하지만...."

"뭘 우려하는 건지 알고 있어. 하지만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내가 전말을 알고도 이 자리에 있는 게 그 증거잖아?"

그러잖아도 리퍼닥 할드에게 들은 참이었다.

모든 일의 배후에 있는 건―

"메가콥 마스톱, 맞지?"

* * *

메타 휴먼 측에서 마스톱을 포섭한 건 언론을 통제하기 위함이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자신들의 행적을 감추기 위해서.

진건 같은 사냥개들의 눈을 흐리기 위해 방패막이를 하나 구한 거다.

마스톱의 입장에서도 나쁠 건 없었다. 그들이 제 손으로 상납한 사업이 창출하는 부가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이 특별했으니까.

고액의 후원을 하지 않고도 매체에 나오는 아이돌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을뿐더러, 그렇게 했다는 흔적 자체가 지울 수 있었던 거다.

메타 휴먼 측은 새로운 동맹을 구해서 좋고,

메가콥 마스톱은 제 영향력을 과시해고 좋고,

할드는 복수를 이루고 든든한 뒷배를 구해서 좋고,

서로 물고 빨고도 질리지 않는 트라이앵글의 완성이었다.

모럴 하인즈 연예부 기자, 샴 베리는 이마 위로 흐르는 땀을 연신 닦아냈다.

"정말입니까?"

"말했잖아, 특종은 네게 준다고."

메타 휴먼에 대한 건 빼고, 적당히 피어 갱을 집어넣었지만 그것도 버거운 듯싶었다.

"아니, 이런 걸 바란 게 아니었습니다만."

가온에게 사건의 경위를 들었을 때만 해도 샴은 평범한 스캔들인 줄로만 알았다. 유명인이 여러 연습생을 후원해서 생기는 치정극, 뭐 그런 거 말이다.

하지만 뚜껑을 열고 보니 상상 이상의 마경이었다.

연습생을 브로커로 활용해 불법 슬롯 이식을 다단계로 성행시키질 않나, 그걸로 대대적인 성매매 시스템을 수립하질 않나, 최후에는 브레인 워싱으로 증거를 없애다니, 교화 시설에 수감 중인 사형수에게도 쓰지 않을 법한 수법의 연속이었다.

중범죄 중 하나인 디바이스 적출이 중간에 껴있는데도 색이 바래질 정도.

기자로서 백전노장이라 할 수 있는 샴도 이만한 규모의 사건은 오랜만이었다.

하물며 상대가 상대였다.

메가콥 마스톱.

그들은 대중의 여론을 조작하고, 정보를 은폐하는 게 특기였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다행히 증인은 다시 구할 수 있었어."

죄책감인지, 아니면 소명감 때문인지 적극적으로 변한 카탈리나였다. 거부 반응이 일어난 그 얼굴은 극적인 상황을 연출하는 데 제격일 테지.

벌써부터 그날이 기대되는 가온이었으나, 샴으로서는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게 아니라 마스톱 말입니다. 저희가 아무리 발 벗고 뛰어다닌다고 해도 금세 묻힐 겁니다."

"착각하지 마. 메가콥을 상대하는 게 아니라 그 안에 있는 기생충 하나를 도려내는 것뿐이야."

사업적인 전략을 지키는 것도 아니고, 일탈한 사람을 보호하는 데 메가콥이 전력으로 나설 리 없었다.

"방관하는 게 이득이라고 여겨지게 하면 돼."

"우리 둘로 그게 된다면 정말 편하겠습니다만."

"기업 간의 역학 관계를 이용하면 오히려 쉬운 편에 속하지."

"그건 무슨 말씀입니까?"

"모르는 척하지 마. 너에게도 절호의 기회잖아."

가온이 무엇을 말하는지 깨달은 샴은 숨을 삼켰다.

"설마...."

"그렇게나 자랑하는 모기업의 힘 좀 보자고."

대형 언론사 모럴 하인즈.

그 모체는 메가콥 B&B였다.

마스톱의 영원한 숙적인 그들이라면 업계 1위 자리를 탈환하기 위해서라도 협조할 거다.

055 나야, 네 양심

* * *

* * *

메가콥 B&B의 역사는 짧은 편이었다. 화성이 개척될 당시에, 설립된 거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서로 다른 두 대기업이 전략적으로 합병하면서 급격하게 세를 불린 케이스였다.

B&B라는 법인명 또한 뱅과 브룩스라는 두 회사의 이름에서 기인했다. 태생부터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만큼 지분을 둘러싼 논쟁이 오갈 듯싶었으나, 한 가지 사풍이 중심을 잡으면서 빠르게 사그라졌다.

그건 바로 실력지상주의.

과거의 행적은 보지 않고, 오로지 실적과 업적으로만 대상을 평가하기로 결정한 거다. 철저하게 효율을 중시하는 방침. B&B가 전통 산업을 지향하는 회사였다면 어울릴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들이 추구하는 건 미디어 매체 관리.

패션, 방송, 영화, 드라마, 쇼핑, 연예 등등 엔터테인먼트라고 부를 수 있는 분야에 진출했던 터라 조직이 경직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러한 단점이 절정에 다다른 건 전대 회장 클로안 맥 때였다. 그의 절망적인 안목과 합쳐져 최악의 결과를 불러왔던 거다.

후발주자에 가까웠던 메가콥 마스톱에게 선두를 빼앗긴 것도 그 때문이요, 만년 2위 자리에 만족하지 못하게 된 것도 그러한 연유에서였다.

그래도, 지금은 하나둘씩 제 궤도를 찾아가는 중이었다.

마이너스의 손이라 불린 아버지 클로안 맥과 다르게 새롭게 회장직을 물려받은 장남 데미안 맥은 그 자리에 걸맞는 활약을 선보였으니.

선제적인 복지와 합리적인 보상을 내세운 급진적인 사내 제도 개혁이 대표적인 예시였다. 사람이 먼저라는 그 사상은 B&B에 커다란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현대 사회에서 직원을 착취하는 건 당연시되는 관행이었으니까.

이는, 시대를 역행했다고도 평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가온은 그 점을 높이 샀다.

충성이나 열정같이 무형적인 개념에서 나오는 부가 가치에 대해 알고 있는 제대로 된 사업가는 드물었던 거다.

물론 그게 자상하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인간의 감정마저 계산한 뒤에 이용하려는 수작의 발로였으니.

어쩌면 누구보다 냉혹하다 할 수 있을 터.

그런데도 접선하고자 한 건 그나마 대외적인 시선을 신경 쓰는 기득권이 그 말고 달리 없었던 탓이었다.

'적어도 당장 찾을 수 있는 범주 내에서는.'

B&B 본사 접견실.

푹신한 소파에 등을 맡긴 가온은 옆에서 방정맞게 다리를 떠는 샴을 바라보았다.

솔직히 여기까지 오는 데 그의 도움이 컸다.

샴이 기자 생활을 하는 동안 열심히 모은 연락처에는 B&B에서 근무하는 비서의 친구라 부를 만한 자가 있었던 거다.

어떻게 보면 6단계 법칙을 잘 사용한 사례라고 할 수도 있을 터. 얇지만 넓은, 간장 종지 같은 인맥도 얕보아서는 안 된다고 해야 할까.

달칵.

그때, 예고도 없이 문이 열리며 데운 우유처럼 고소하고 부드러운 냄새가 접견실을 가득 채웠다. 범상치 않은 인물이 등장했다는 걸 알리는 신호.

아니나 다를까, 한 청년이 들어왔다.

지적인 인상이 두드러지는 무테안경에 기름칠이라도 한 것처럼 매끄러운 투 버튼 슈트. 포마드로 정리한 머리에는 윤기가 흘러내렸다.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포커페이스.

전도유망한 사업가 그 자체였다.

탁.

자리에 앉은 청년, 데미안은 접견실에 비치된 모래시계를 한 바퀴 돌렸다.

"5분 드리겠습니다. 그동안 절 설득하지 못하면 여러분은 퇴실하게 될 겁니다."

편법을 사용해서 그런지 데미안은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그리고 그만한 페널티를 부여하겠습니다. 갑작스러운 일정 때문에 다른 회의들이 10분씩 밀렸거든요."

사적 제재도 서슴없이 가하겠다는 오만한 사고방식.

그런데도 그 눈빛에는 미안함 하나 서리지 않았다. 너무나도 당연해 구태여 거론할 것도 없다는 태도.

놀랍게도 이는 가온이 경험한 메가콥 관계자 중에서 가장 온화하고 정중한 태도였다.

정작 그걸 모르는 샴의 눈은 허공을 휘저었지만 말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가온은 현재 일어난 사건을 시간의 순서대로 나열했다. 직접 겪은 일이었다. 생생하게 전달하지 못할 리 없었다.

"정말 놀랍군요."

가온의 말을 끝까지 경청한 데미안이 일그러지는 미간을 가렸다.

"성상납? 성매매? 고작 그런 소리를 하려고 온 겁니까? 여기는 민원실이 아닙니다."

약속도 잡지 않은 손님이 둘이나 찾아왔지만 데미안은 결코 간과하지 않았다. 거인도 돌부리에 넘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보고 자랐던 거다.

어쩌면 중요한 정보를 들을 수 있을 거라 예상했건만 이게 웬걸, 쓸데없이 귀만 더럽힌 꼴이 되었다.

경쟁사의 치부를 듣게 된 건 유쾌하지만 그것뿐.

"퇴거하십시오. 나중에 따로 부를 테니."

"실망인데."

"뭐라고 했습니까."

"유능하다고 들었는데 말이야. 내가 한 말 듣긴 한 건가?"

"마스톱이 제 영향력을 높이고자 비밀리에 접대부를 따로 운용했다. 여기에서 더 알아야 할 게 있습니까?"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봐야지. 성 관련 스캔들은 어차피 넋두리야. 본질을 파헤치기 위한 입구에 불과하다고."

애당초 공찰에 가도 되는 사안이었다. 이만큼 증거가 명확하다면 안팎으로 시끄러워질 수밖에 없으니. 그런데도 B&B를 고른 건 라주의 의뢰를 완벽하게 수행하기 위해서였다.

"핵심은 불법 슬롯을 이용해 타인을 조종했다는 것."

"비윤리적이지만 특별할 건 없지 않습니까."

"만약 마스톱에서 향락에 빠진 자들에게도 불법 슬롯을 이식할 계획이었다면?"

당연하지만 접대부의 존재가 드러나지 않은 이상, 누구도 연결 고리를 찾지 못할 거다.

"아무도 모르게 마스톱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는 거라고. 과연, 이 소식을 듣고도 서비스를 이용한 자들이 가만히 있을까? 나는 노발대발하지 않을까 싶은데."

마스톱에서 그러한 자충수를 둘 리 없었다. 하지만 데미안은 가온이 말하고 싶은 걸 어렴풋이 눈치챘다.

중요한 건 진위 여부가 아니었다.

"그러니까, 사안을 키우자는 겁니까?"

"20년 전에 터진 경제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방송국을 매각했더군. 그것도 세 개나."

그리고 그 셋 모두 마스톱의 양분이 되었다. 미스틱 헌드레드를 송출한 LOTV도 그중 하나였다.

B&B의 입장에서는 죽 쒀서 개 준 꼴.

아직까지도 거론되는 실수였다.

"그런데 지금 와서 다시 세우려니 마스톱의 견제가 만만치 않지? 얄밉기도 하고 말이야. 마음 같아서는 물어뜯고 싶을 정도로."

의지도 있고, 자금도 있는데 실행만을 하지 못하니 여간 답답한 게 아닐 터.

가온은 그러한 데미안의 심정을 읽고 충동질했다.

"하지만 모두 여러분의 일방적인 주장이지 않습니까."

한결 누그러진 어투.

모래시계의 모래가 다 떨어졌는데도 데미안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이는 명백한 청신호였다.

가온은 샴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제 그가 나설 차례였다.

"미스터 톰캣."

"으응, 저 말입니까?"

이름이 샴이지 않던가. 고양이란 별명보다 더 잘 어울리는 건 없을 터. 본인은 인정하지 않겠지만, 가온은 막무가내로 몰아붙였다.

"그동안 취재해서 정리한 걸 전달해 드려."

"알겠습니다."

샴에게서 받은 정보를 검토한 데미안이 침음을 흘렸다. 다행스럽게도 마스톱에서 진두지휘한 건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반사 이익을 취하고 있을 뿐, 주동자는 따로 있었던 거다.

"B&B가 마음껏 주무를 수 있을 거야. 관계된 연습생만 해도 수십, 수백은 될 테니까. 정식으로 데뷔한 아이돌이나 배우까지 합치면 얼마나 될까?"

그 수를 살인 멸구 한다고 해도, 하지 않는다고 해도 문제였다.

"실적, 필요하잖아?"

부정할 수 없는 물음이었다. 데미안에게는 지상 대명제나 다름없는 말이었으니까.

하지만―

"제가 주도할 수 있다고 해도, 이건 한 사람이 사라져야 끝나는 사건입니다."

괜히 벌집을 건드렸다가 지지부진한 법정 공방으로 번지는 건 원치 않았다.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내가 바라는 건 여기에 들어오기 전이나 나간 후나 뒤처리 하나뿐이니까."

* * *

청년, 이스턴 린드버그는 여느 때처럼 소파에 앉아 야경을 내려다보았다.

비록 막내라는 위치 때문에 정상으로 가는 길을 포기해야 했지만 그가 모자라서 그런 건 아니었다. 다만, 형제들과 나이 차이가 너무 났다.

그들은 이스턴이 태어나기 전부터 실무에 뛰어들어 제 입지를 굳히고 있었던 거다.

자각하기도 전에 거세되었지만 이스턴은 만족했다.

마스톱이라는 명함을 가진 것만으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으니.

하지만 근래 들어서 삐걱거린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헨델이 침실에서 정신을 차린 것에서부터 어젯밤 무사히 배달되었어야 할 상품이 다른 곳으로 도망친 것에 이르기까지, 수월하게 풀리는 게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일까.

불현듯 불길한 예감이 들어 노인에게 조사를 명한 이스턴이었다.

그 결과를 보고받은 건 불과 몇 분 전.

"그러니까 저번에 처리하라고 지시한 여자 때문에 덜미를 잡혔다고?"

"실종 처리가 되었어도 그녀를 잊지 못한 이가 있는 것 같았습니다. 해결사까지 고용한 걸 보면."

"결국 브레인 워싱은 완벽한 대책이 아니었나."

인격을 지울 수 있는 기술이라고 해도 인연까지 없애는 건 무리였던 듯싶었다. 처음부터 예정된 일이었는지라 이스턴은 놀라지 않았다. 사실, 허둥지둥할 것도 없었다.

그간의 행적이 밝혀진다 해도 마스톱은 자신을 비호할 테니.

"리퍼닥은?"

"연락이 닿지 않습니다만, 공찰에서도 반응이 없는 걸로 보아서는 알아서 잘 숨은 것 같습니다."

"루카스는?"

"그 또한 행방이 묘연합니다. 다만 의도적으로 지운 것 같은 흔적이 역력합니다."

도출되는 결론은 하나뿐이었다.

"둘 다 그 해결사 때문에 잠시 몸을 숨긴 건가. 멍청하긴, 미리 언질을 주었다면 처리했을 텐데."

아니, 그건 이상하다.

할드와 루카스 모두 해결사 정도는 손가락 하나로 갈기갈기 찢을 수 있는 실력자였던 거다. 고작 하룻강아지가 무서워 피할 인사들이 아니었다.

분명 무언가 있다.

그리 말하려던 노인이었으나 갑작스럽게 울린 초인종 소리에 입을 다물어야 했다. 지극히 일상적인 소음이건만 저도 모르게 소름이 등골을 내달렸던 거다.

무리도 아니었다. 이스턴이 입주하고 나서 처음으로 울린 초인종이었으니.

이곳에 방문하는 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사전에 연락했다. 이스턴의 형제들도 그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런데 오늘 그 법칙이 깨졌다.

과연 한밤중에 찾아온 손님은 누구인가.

* * *

마스톱이 관장하는 분야는 B&B와 상동했다. 언론으로 여론을 선동하는 데 특화된 거다.

특별한 기술이 없어도 선점 효과를 누릴 수 있는 만큼 절대적인 힘을 가진 것 같지만, 기반 산업의 특징상 대중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었다.

가온이 B&B에 협조를 구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여론전에 돌입한다면 명분을 가진 자가 승리하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세상에는 논리와 정의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부분도 존재했다. 선과 악이 구분되었다고 해도 천벌 따윈 내려지지 않았으니까.

방점을 찍으려면 직접 불화의 불씨를 꺼트려야 했다.

스카이 빌리지에 발을 내디딘 것도 그 때문.

인터폰이 지지직거리는가 싶더니 노쇠한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십니까?]

"나야, 네 양심. 그동안 우리가 너무 소원했지?"

056 덕분에 개운해졌어

* * *

[아무래도 잘못 찾아오신 것 같군요]

의뭉스러운 대답이지만 그건 기만에 불과했다. 문 너머에서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던 거다. 방심을 유도해 반격하려는 의도일 터.

역시 늙은 생강이 맵다고 해야 할까.

오기 전, 샴에게 이스턴의 곁에 유능한 심복이 있다 들은 참이었다. 이름은―

'드마르쿠스 란드.'

그는 공찰에서 60년 동안 장기 복무한 엘리트 중의 엘리트였다. 퇴직한 후에는 경력을 살려 마스톱에 입사했다고 하던가.

딴에는 평온한 말년을 보내기 위해 막내인 이스턴을 선택했지만, 그도 몰랐으리라.

이렇게까지 상황이 악화될 줄은.

물론 동정의 여지는 없었다. 방관하고 협조한 이상, 드마르쿠스도 공범이었던 거다.

쾅!

가온이 문을 걷어차 날려 보낸 것과 어깨 위로 납탄이 스쳐 간 건 거의 동시.

기관단총을 패용한 드마르쿠스가 선제적으로 총격을 가한 증거였다. 공찰로 복무한 경험이 길어서 그런지 그는 당황한 기색조차 내비치지 않고 무릎을 굽혔다.

투두둥두둥.

한순간에, 연사 모드로 바뀐 기관단총이 불을 뿜었다.

벽면 따위는 갈가리 찢어버릴 정도로 위력적인 화력. 수백 발이나 쏟아부었는데도 형성된 탄착군은 정확하게 한 선을 그렸다.

과녁만 노리는 솜씨는 칭찬받아 마땅했으나 달리 말하자면 그 궤적만 예측할 수 있다면 접근하는 건 일도 아니라는 소리.

"경고도 없이 죽이려고 하다니, 이건 양심으로서 못 본 척할 수 없겠는걸."

단번에 드마르쿠스와의 거리를 좁힌 가온이 기관단총을 걷어찼다.

강렬한 충격이 손끝에서 전해졌지만 드마르쿠스는 인내했다.

추가적인 슬롯, 그립 세이퍼를 이식해 장비를 직접 놓지만 않는다면 손에서 떨어지지 않았던 거다.

말하자면 강력한 자성의 힘을 빌려, 물리적으로 결착된 상태.

콰직.

하지만 현실은 드마르쿠스의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기관단총과 함께 팔 전체가 뒤틀렸던 거다.

단숨에 드마르쿠스의 목덜미를 옥죄어 끝내려던 가온이었으나, 전신을 훑고 지나가는 격통에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 정신 방벽을 뚫고 들어오고 있었다.

아차 하는 사이, 코에서 핏물이 터져 흘러내린다. 신경계에 걸린 부하가 곧장 머리로 향할 때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몇 초.

"양심은 이미 오래전에 버렸다네. 그런데도 찾아왔다면 몸소 처리할 뿐."

드마르쿠스의 특기는 육탄전이 아니라 전자전이었다. 디바이스를 해킹해 자멸을 유도하는 것 정도는 눈 감고도 할 수 있을 정도.

무언가 탄 것처럼 매캐한 냄새가 코끝을 스쳐 지나가고 나서야 드마르쿠스는 만족스럽게 웃을 수 있었다.

"머릿속이 노릇노릇하게 익는 건 쉬이 체험할 수 없는 경험일 테지."

아무리 수련한다고 해도 강해질 수 있는 부위는 명확했으니까.

풀썩, 주저앉은 가온을 무심하게 내려다본 드마르쿠스가 홀스터에서 권총을 꺼냈다.

"전자전에 대한 대책도 없이 쳐들어오다니, 내가 자네를 너무 과대평가했나 보군."

"그러고 보니 전자전에도 대비해야 하나."

의식을 잃은 줄 알았건만 이게 웬걸, 두뇌가 반절이나 익어 버렸는데도 태연하게 답하는 가온을 보고 드마르쿠스는 경악했다.

"뭣...."

"덕분에 개운해졌어. 두피 마사지 말고 두뇌 마사지는 오랜만이거든."

어떠한 경위로 회복했는지 궁금해할 여유는 없었다. 죽인다는 목표를 이룰 뿐.

철컥.

당겨진 방아쇠를 따라 장전 손잡이가 뒤로 젖혀진 순간, 가온은 약실 사이로 손가락을 집어넣어 발포를 막았다.

상상 이상의 기예에 놀란 드마르쿠스가 대처하려고 했지만 그때는 이미 늦었다. 권총은 가온의 손에 들어간 뒤였으니까.

"잘 쓸게."

탕!

* * *

거실로 진입한 가온의 눈에 한 청년이 들어왔다. 조각처럼 아름다운 이목구비와 황금비를 이루는 신체.

외면만큼이나 내면도 완성되었다면 인류에게 다시 없을 축복이겠으나, 그런 남자가 아니라는 걸 가온은 익히 알고 있었다.

이스턴 린드버그.

이 모든 사달을 일으킨 장본인이었다.

"도망치지 않은 건 칭찬해 주지."

"도망친다고? 내가 왜 그래야 하지?"

"호오, 네가 저지른 잘못을 모른다는 건가."

"잘못?"

도저히 흘려들을 수 없는 말에 이스턴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그야말로 묻고 싶었다.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는 거지? 그저 슬롯이 필요하다는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었을 뿐이다."

"골때리는 녀석이네. 멋대로 남의 머리를 휘적거린 건 그새 잊었나 보지?"

"정말 아무런 대가도 없이 슬롯을 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한 놈은 한 명도 없었을 거다. 은연중에 알고 있었을 테지. 어떤 식으로든 대가를 치를 거라는걸. 그런데도 동의한 건 순전히 본인의 욕심 때문이 아닌가."

책임져야지.

이스턴은 어디까지나 당당했다.

"그게 불만이라면 뒤늦게 대금을 지불했다고 생각해라. 몸뚱이에 값이 나가 봤자 슬롯 정도는 아니니까."

도덕과 윤리를 배제한 오로지 정량적인 판단.

맞다.

이스턴의 주장대로 절대적인 가치만 놓고 보자면 누군가의 하룻밤보다 슬롯이 비싼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거기까지 허물을 벗겨 버리면 남는 게 없었다.

짐승으로서는 최고일지 모르나 인간으로서는 최악이었다.

"너, 제정신이 아니구나."

"제정신이 아닌 건 그 연놈들이고! 아니 그래서 어쩌라는 거지? 상처 하나 없이 다뤘을뿐더러, 기껏 싫은 기억도 지워 주었는데 왜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지?"

독선적이기 짝이 없는 고성이었다. 거기에 반성과 후회라고는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면 애비게일은?"

"...."

"여태껏 잘만 대답하다 왜 그녀에 대한 건 말하지 않지?"

"그야...."

돌연, 저 멀리서 들리는 사이렌 소리에 이스턴이 씨익 웃었다.

"그래야 할 이유가 없으니까. 정말이지 멍청하군. 왜 내가 네 장단에 맞춰 준 건지 모르겠나?"

비상시, 스카이 빌리지로 전담 경호 부대가 출동하도록 되어 있었다. 화성방위군에서 퇴역한 군인들로 채워진 드림팀이 오기까지 시간만 벌면 되었던 거다. 이스턴이 고분고분하게 협조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가온이 포섭한 B&B 또한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그러한 변수는 진즉에 차단한 상태.

애석하게도 이 자리에서 그걸 모르는 사람은 이스턴뿐이었다.

물론 아무리 무지하다 해도 시간이 흐르면 저절로 깨닫는 게 있는 법.

전담 경호 부대가 예정된 시각에도 오지 않자, 이스턴은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걸 직감했다.

"네 짓이군."

"그래, 마지막 해피 타임은 잘 보냈나? 아주 절절하게 느끼길래 도중에 말도 못 꺼내겠던데."

"하, 시발. 날 가지고 놀았다 이거군."

철컥, 하고 차가운 감촉이 미간에서 느껴졌지만 이스턴은 목숨을 구걸하지 않았다.

그래봤자 살아날 가망은 없었으니까.

진정해야 하는 건 호소가 아니라 협박이었다.

"만약 날 쏘고 싶다면 그래, 마음대로 해라. 근데 그건 알아야 할 거다. 내 심장이 멎는 즉시 불법 슬롯을 이식한 녀석들도 함께 죽는다는 걸."

혹시라도 이런 일이 일어날까 싶어 해당 명령을 사전에 입력해 놓은 상태였다.

"자, 어떻게 할 거지? 대의를 위해서 소수를 희생할 텐가?"

"아, 마지막 해피 타임이 이거였네."

한 박자 늦게 가온이 무엇을 말하는 건지 깨달은 이스턴은 두 눈을 부릅떴다.

"너...."

"미안해서 이거 어쩌지. 네 기대와 다르게 모두 자유의 몸이 된 지 오래야."

할드가 남긴 드라이브 안에 무슨 정보가 있는지 해석이 끝난 후였다. 불법 슬롯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

이스턴이 어떠한 수작을 부리든 그가 원하는 대로 일이 흘러갈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웠다.

어금니가 부러져라 입을 다문 이스턴이 독설을 내뱉은 건 그 순간.

"너같이 하찮은 것들은 폭력으로 되갚는 것밖에 하지 못하지. 대화와 타협이라는 게 없다고 해야 하나."

그러한 행동을 보인 건 이스턴이지만 가온은 구태여 지적하지 않았다.

모순을 깨닫지 못하고, 아니 인정하지 않고 남에게만 책임을 전가하는 건 오늘날 지배자의 모습과 그리 다르지 않았으니까.

만인의 모범이 되어야 할 이는 한 명도 존재치 않았다. 그건 3차 세계 대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도 마찬가지.

애꿎은 이들만 지옥에 끌려가 희생되었다.

전쟁을 선도했던 자들은 한 명도 죽지 않았다.

단 한 명도.

빙하기를 거치면서 쇠락할 만도 하건만 그들의 후손은 지금까지도 전성기를 누렸다.

시정부의 주축이 되어, 메가콥의 수장이 되어.

지난날의 과오는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다.

"나를 죽인다면 하루 종일 기분 좋을 테지. 하지만 순간의 쾌락을 위해 일생의 자유를 잃을 건가? 고작 돈 몇 푼 받고?"

가온을 노려본 이스턴은 발악하듯이 지껄였다.

"그래서 안 된다는 거다, 너 같은 것들은. 여태껏 그래왔던 것처럼 묵인하고 관망하란 말이다. 그러면 나도 건드리지 않는다. 이 간단한 걸 왜 모르는 거지?"

더 듣기 싫다는 듯 총구를 이스턴의 입에 쑤셔 넣은 가온은 그의 손에 권총을 들려 주었다.

제 끝이 어떻게 될지 예측한 이스턴이 발버둥질 쳤지만 맨손으로 철판도 구부리는 가온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 리 없었다.

"좆같이 굴면 좆같이 당한다, 이 간단한 걸 왜 모르는 거지?"

이스턴의 검지를 방아쇠에 건 가온은 가는 길 외롭지 않게 같이 당겨 주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