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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좁은 상자 안을 정신없이 튀어 다니는 고무공처럼, 그는 장소의 이점을 최대로 활용하며 수사노오를 서서히 무너뜨리고 있었다.

'이, 이노옴!'

수사노오는 미칠 것 같았다.

이게 과연 기절했다 막 깨어난 사람의 움직임이란 말인가.

'이 녀석에게 나와의 간격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눈앞에 나타난 녀석을 향해 칼을 쑤셔 넣고 회오리를 일으켰더니 어느새 녀석은 그의 등을 그어오고 있다. 급히 몸을 피하고 보니 녀석은 이미 그 자리에서 사라지고 업다. 어느새 발아래를 갈라오는 시퍼런 기운.

마치 허깨비와 싸우는 것 같다.

아니 인간일 리 없다.

인간의 몸뚱이로 어찌 이런 움직임을 보일 수 있단 말인가. 혹시 순간이동을 하는 능력자는 아닐까?

병규가 달려들 때마다 몸서리치는 소름이 오싹오싹 돋는다.

손바닥을 펼쳐보았다.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다. 그의 등은 땀으로 젖은 지 오래다.

'긴장을 느껴본 것이 대체 얼마 만인지.'

짜릿한 녀석이다.

그리고 뜨겁다.

감염이라도 된 듯 자신마저 뜨거워진다.

이런 녀석이 있었는데도 여태 모르고 있었다니. 차라리 엄청난 능력으로 그를 곤란케 하는 것이라면 이렇게 흥분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녀석은 약하다.

날카로운 요기? 점프력? 빠른 움직임?

하나하나를 놓고 보자면 보잘것없는 능력들이다. 그런데 그런 하찮은 능력들을 융합해 놓은 녀석은 입안이 바싹 마를 정도로 대단한 위력을 보인다.

"하하하, 좋아. 널 인정하마. 넌 충분히 나와 싸울 자격이 있다."

껄걸 대소를 터트린 수사노오는 돌연 두 팔을 확 펼쳐냈다.

고오오오오오오!

자욱하게 밀려드는 회색의 회오리.

대기가 울부짖는다.

바람에 휩쓸린 잡동사니들이 미친 듯이 춤을 춘다.

쿠르르르르르르!

발밑에서 일어난 검은 먹구름이 바람을 타고 그의전신을 휘감는다.

건물 전체가 우르르 흔들린다.

벽이 무너지고 천정과 바닥이 쩍쩍 갈라진다.

장엄하기까지 폭풍의 기운.

용솟음치는 폭풍 속에서 병규를 향해 수사노오가 손을 까딱였다.

"오라!"

"좋아, 가지!" 병규는 무섭게 솟구치는 폭풍 앞에서 오히려 투지를 불태웠다.

"사내자식이 좀스럽게 폭풍 속에 몸을 감춰? 나보고 오라고? 오냐 가주마. 허약한 네 녀석에게 사내의 주먹질이 무엇인지 꼭 한 번 보여주고 말 테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병규의 신형이 한 줄기 빛처럼 쏘아졌다.

촤아아아악.

비단이 갈라지듯 폭풍의 한 자락이 거침없이 쪼개진다.

"으랴아아! 우선 한 방이다!"

호쾌한 음성이 해일처럼 쏟아지는 폭풍 속을 아련히 진동했다.

'역시 저놈은!'

한가롭게 부채를 부치고 있던 오로치. 아니, 오로치의 몸을 사용하고 있는 발칸은 치솟는 분노를 간신히 억제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처음 병규의 모습을 보았을 때, 그는 분노가 치솟아 자칫 이성을 잃을 뻔했다. 요수의 발톱으로 자심의 배를 갈라오던 놈의 얼굴이 떠올라 두 손이 바르르 떨려오던 게 몇 번이던가.

'역시 놈은 요수의 발톱을 사용할 수 있다.'

병규의 움직임을 차분히 살펴보고 얻은 결론이다. 아니 단순히 사용하는 정도가 아니라 자신의 것인 양 마음대로 부린다.

'어떻게 내 기술을 저 녀석이 훔쳐간 거지?'

그러고 보니 놈의 빠른 움직임도 묘하게 자신과 닮아 있다. 마치 능력을 빼앗긴 것 같은 기분이다.

생각해볼 수 있는 가능성은 한 가지. 놈이 타인의 능력을 복제하는 능력자라는 것.

'터무니없는 녀석이군.'

발칸은 치를 떨었다. 설마 이런 해괴망측한 능력자가 존재할 줄이야. 그러나 한 가지 이상한 것은 오로치의 노를 아무리 검색해 봐도 능력을 복제하는 수호신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이다.

수호신이 없는 능력자란 있을 수 없다.

적어도 오로치가 알고 있는 선에선 그랬다. 물론 풍가닌자들처럼 수사노오 급의 뛰어난 능력자가 자신의 힘 일부를 불어넣어 만든 대용품이 없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런 것들은 아무래도 정상적인 능력자와는 차이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하긴 녀석이 어떤 능력자이건 상관할 바 아니지. 여기서 죽을 게 뻔한데.'

수사노오는 강력하다.

질투가 날 정도로.

이 세계에서 오로치가 만난 인간들 중 가장 강했던 존재가 바로 수사노오였다. 처음 수사노오를 보았을 때 그에게서 느껴지는 압도적인 힘에 얼마나 놀랐던가.

애송이는 절대로 수사노오의 상대가 될 수 없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수사노오에게 병규가 죽는 것은 바라지 않았다. 그저 걸레처럼 뭉개놓기를. 그래서 그가 직접 잔인한 미소를 지으며 마무리를 지을 수 있게 되길 간절히 바랐다.

그런데 일이 조금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수사노오가 평정을 잃었다.'

애송이 녀석이 사용하고 있는 능력은 그에게서 복제해간 어중간한 기술들. 한데 최고라 칭송받는 수사노오가 그런 녀석에게 흔들리고 있었다.

녀석의 보잘 것 없는 재주에 휘말리면서 식은땀을 흘리고, 천한 녀석의 발악에 잠재능력까지 폭발시킨다.

여간해서는 웃지도 않는 수사노오다. 오로치의기억을 모두 뒤져봐도 크게 웃었던 적이 한 손에 꼽을 정도다. 그런데 지금 그 목석 같은 남자가 몸이나 풀어보려고 끼어든 싸움에 껄걸 대소를 터트리고, 경악성을 질러대고 있다.

'좋지 않다.'

오로치의 가늘고 긴 눈썹이 지그시 휘어진다.

한가롭게 팔랑이고 있던 부채는 어느새 그의 손에 차분히 모아졌다.

'대체 녀석의 무엇이 군주를 흥분하게 만드는가.'

오로치의 가는 두 눈이 병규의 자취를 좇기 시작했다.

고오오오오오!

무서운 폭풍. 사방의 집기들이 날아다니고, 유리창들이 펑펑 터져 나간다.

"꺄악!"

실신한 이한영을 꼭 끌어안은 경애는 찢어질 듯한 날카로운 비명을 토했다.

거친 바람에 몸이 질질 밀려난다.

벽이 없었다면 아마 밖으로 날려갔을 것이다.

'숨이 막혀.'

막강한 풍압. 눈앞이 컴컴해지고, 물에라도 빠진 듯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손으로 입을 꼭 막아도 숨쉬기가 힘들다. 그녀는 낑낑거리며 이한영을 벽에 기대 앉히고, 그녀 자신도 벽을 향해 돌아앉았다. 조금이라도 폭풍의 영향을 덜 받기 위해서다.

'참, 그 잘생긴 남자는?'

경애는 주위를 살폈다.

부옇게 날리는 먼지들, 송곳 같은 바람. 눈을 뜨는 것조차 힘들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이운석은 근처에 있었다. 정신을 차렸던지 벽을 짚어가며 경애쪽으로 힘겹게 걸음을 옮겨오고 있었다.

"괜찮습니까?"

이운석은 그녀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애써 웃음 짓는 모습이란. 경애는 곧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군요."

따뜻한 음성으로 대꾸한 이운석은 그녀와 이한영을 감싸듯 안았다.

"저, 저기 굳이 이러실 필요는....."

당황한 듯 경애가 말을 꺼내자 이운석은 씩하고 웃어 보인다.

"괜찮아요. 전 회복능력이 남다르니까 조금 다쳐도 금방 낫습니다. 게다가 이런 일은 원래 남자가 하는 겁니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멋있게 보이지 않겠습니까."

믿음직스러운 목소리. 경애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뭘까. 이 불안감은. 아직 한 사람이 저 사나운 폭풍 속에 있다고 생각하니 도무지 안정이 되질 않는다.

"잘 해낼 겁니다."

이운석이 말했다. 그는 편안한 표정으로 쉬고 있는 이한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누나가 이 정도로 의지할 만큼의 실력을 갖춘 남자라면. 틀림없이 잘 해낼 겁니다."

조용히 말ㅇ르 이어가는 그의 목소리엔 강한 확신이 실려 있었다.

하지만 뭐랄까.

그의 표정에서 분한 느낌이 읽혀졌다. 인정은 하지만, 남자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못하는 것일까. 그도 아니면 자신의 부족한 능력에 자괴감이 든 것일까.

경애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복잡한 표정으로 폭풍의 중심을 응시했다.

귀를 막고 싶을 정도로 무서운 괴음이 계속해서 들려오는 중심. 그곳에 병규가 있다.

경애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힘주어 쥐었다.

'힘내! 오빠.'

촤악.

요수의 발톱을 휘두르자 무섭게 휘몰아치던 폭풍이 양 갈래로 쫙 갈라진다.

바람의 장벽 사이로 뚫린 길.

병규는 십계의 한 장면처럼 양쪽으로 나눠진 폭풍의 한가운데를 무서운 속도로 내달렸다.

발이 보이지 않을 만큼 놀라운 스피드.

그러나 갈라진 폭풍은 베어진 물이 원래대로 돌아가는 것처럼 하나로 모이며 그의 뒤를 맹렬하게 쫓아왔다.

병규는 아예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보면 두려움만 생길 뿐이다.

야수의 괴성과 같은 폭풍의 중심.

수사노오의 경악에 찬 표정이 보인다.

'얼마 안 남았다!'

병규는 폭주하는 육체를 더욱 더 채찍질했다.

"카아악."

그를 보고 놀라던 수사노오가 돌연 고함을 지른다.

키오오오오!

폭풍이 더욱 거세어진다. 살갗이 따가워 미칠 지경이다. 옷을 거리지 않은 상체는 화상이라도 입은 듯 벌겋게 달아올랐다.

칙칙.

급기야 피부가 갈라진다. 녀석의 바람은 형체 없는 톱처럼 사정없이 피부를 뜯어간다.

조금씩 찢어지는 피부.

그 고통이란 칼에 베인 것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러나 병규는 온몸이 마비된 것처럼 아무런 통증도 느끼지 못했다. 오로지 폭풍 속의 수사노오만이 보일 뿐이다.

"으아아아아!"

맹수의 표호와도 같은 거친 외침.

요수의 발톱이 한계까지 뻗어 나오며 사납게 날뛰는 폭풍을 단번에 쪼개버린다. 병규는 흩어지는 폭풍 너머의 수사노오를 향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우선 한 방이다!"

병규의 신형이 빙글 회전하며 수사노오를 휩쓸어간다.

"감히!"

수사노오가 분노에 찬 한 마디를 내뱉는다. 성난 폭풍이 한 순간에 사그라지고 대신 회색빛 회오리가 저돌적으로 달려드는 병규에게 집중되었다.

그것은 대륙을 거침없이 질주하는 막대한 에너지.

집을 날리고 거대한 화물차를 뒤집어 놓는 허리케인, 그 엄청난 힘이 한 사람에게 소나기처럼 퍼부어진 것이다.

'크윽.'

병규는 터져 나오는 비명을 억지로 참아 냈다. 온몸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만 같다. 아니 실제로 그의 몸은 비명을 지르며 피부 바깥쪽부터 찢어져 날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오로지 한 방!

녀석의 그 잘난 낯짝에 한 방을 선물할 수 있다면 피부에 생기는 생채기 정도는 멋진 훈장으로 치부해 줄 수도 있다.

그러나 허리케인에 휘말린 그는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따. 움찔이라도 하면 그대로 허공으로 날아가고 말 것 같았다.

'어떻게 하면!'

허공을 올려다보던 그의눈에 문득 섬광이 번뜩인다. 빙글빙글 나선을 그리며 솟구치는허리케인의 움직임.

생각이 떠오르자마자 병규의 몸은 즉각적인 반응을 보였따.

평소엔 머리보다 몸이 앞서는 성격 탓에 잦은 실수가 많은 편이지만, 지금처럼 숨 쉴 틈 없는 격전에서는 그의 직선적인 성격이 그 어떤 잔재주보다 탁월한 효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병규는 더 이상 허리케인에 저항하지 않았다. 전신의 힘을 풀고 바람이 이끄는 대로.

휘리리리리릭!

허리케인에 말린 그의 몸이 맹렬히 회전히기 시작했다.

"저, 저럴 수가!"

오로치의 몸뚱이를 뒤집어쓴 발칸의 입에서 끝내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병규를 응시하던 그의 두 눈은 찍어질 듯이 흡 떠져 있었다.

애송이가 요수의 발톱을 휘두르며 수사노오의 폭풍을 가를 때만 해도 그는 '제법'이라고 생각했다. 훔쳐 배운 능력으로 꽤 그럴싸한 저항을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반항은 어디까지나 반항일 뿐이다. 수사노오가 힘을 조금만 더 배가시키면 저 처절한 저항도 순식간에 끝날 것이라 믿었다.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문다지만 녀석은 고양이가 아니라 성난 사자에게 대들고 있는 것이다. 노력은 가상하지만 힘의 차이는 너무도 명백했다.

그러한 그의 예측은 곧 현실로 나타났다.

군주가 사방으로 방사하던 능력을 녀석에게 집중하자 마침내 피를 뒤집어쓴 처량한 쥐새끼 꼴의 녀석의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끝났군." 발칸은 확신했다.

갈기갈기 찢겨져서 날리는 녀석의 살점. 물보라처럼 치솟아 오르는 피. 사람의 신체가 외부에서부터 천천히 분해되는 듯한 처참한 광경을 보며 그는 짜릿한 쾌감까지 느꼈다. 다만 자신의 손으로 그 쾌감을 얻지 못한 것이 아쉬울 뿐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한 그때.

애송이가 어설픈 반항을 시작했다. 몸을 축 늘어뜨리더니 그대로 허리케인에 휩쓰려 올라간다.

'마침내 포기한 것인가?'

그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짙어졌다. 그러나 다음 순간!

허리케인에 말린 병규가, 천장에 처박히며 묵사발이 되었어야 할 그가 오히려 회전하는 그 힘을 이용해 시퍼런 요수의 발톱으로 건물의 지붕을 뚫고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툭!

발칸의 손에서 부채가 떨어졌다.

그의 미끈한 얼굴이 일그러지며 눈 밑으로 가는 경련이 일었다. 궁지에 몰린 상황에서 어떻게 저런 기발한 생각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이놈은. 이 쥐새끼는. 살기 위해서 사자의 입 속으로 스스로 뛰어들었다.

"이럴 수가."

놀란 경악성. 그러나 놀라운 사건은 이제 막 시작된 것에 불과했다.

쩌걱.

번개가 내려치는 듯한 거대한 소음.

시끄러운 소음을 좇아 천장으로 고개를 돌린 발칸의 눈동자가 크게 출렁인다.

"천장이....!" 천장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수사노오가 서 있는 바로 위쪽의 천장이 예리한 무언가로 둥글게 잘린 채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우연한 일로 보기엔 절단된 면이 너무 날카롭다. 틀림없이 놈이 요수의 발톱을 써서 잘라낸 것이다.

"놀랍군."

발칸의입에서 끝내 탄성이 터져 나왔다. 설마 저럼 일을 저지를 줄이야.

정말 뛰어난 격투센스가 아닐 수 없었다.

'아니지, 본능리라고 해야겠군.'

발칸의 두 눈이 가늘게 오므려졌다.

"헉!"

무너져 내리는 천장을 본 수사노오는 경악성을 질렀다. 대경한 그는 급히 폭풍을 일으켜 무너지는 시멘트 철근을 날려버리려 했다. 하지만 막상 천장이 낮다는 사실이 그에게 상당히 불리하게 작용했다.

채 돌풍을 일으키기도 전에 시멘트 덩어리가 머리를 눌러왔던 것이다. 이대로 버티다간 꼼짝없이 압사당할 판.

결국 수사노오는 꼴사나운 모습으로 바닥을 굴러야 했다.

쿠웅.

충격과 함께 먼지구름이 확 피어오른다. 간신히 빠져나올 수 있었던 수사노오는 몸을 채 일으키기도 전에 성난 쥐새끼 병규의 방문을 받아야 했다.

퍽!

병규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는 수사노오의 얼굴을 발로 지그시 밟아주었다.

"큭!"

듣는 것만으로도 통쾌한 신음성!

병규는 짧게 외쳤다.

"한 방이다."

"이 자식이!"

수사노오의 입에서 거친 말이 터져 나온다. 말과 함께 뇌전 같은 섬뜩한 기운이 병규의 상체를 쓸어온다. 병규는 춤을 추듯 허리를 뒤로 젖혀 공격을 피하고 이어 거꾸로 물구나무를 서며 발로 수사노오의 턱을 올려쳤다.

화려한 백 핸드스프링 킥!

딱!

이가 부딪히는 듣기 괴로운 소음.

수사노오의 입에서 핏물이 튄다. 그러나 그 역시 결코 만만한 인물은 아니었다. 턱에서 시작된 통증이 찡 하게 머릿속을 저며 오는데도 팔을 휘저으며 질풍을 뿌렸다.

꾸웅.

병규의 배가 파도처럼 출렁인다. 그는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뒹굴었다.

벌려진 입에서 한 바가지의 피가 쏟아진다. 내장에 심각한 타격을 받은 것이다.

"이제 끝이다!"

번쩍 치켜든 수사노오의 두 팔이 병규를 내리친다.

우르릉하며 울리는 뇌성.

무지막지한 기운이 병규를 눌러왔다.

"아직..."

병규의 두 눈에 독기가 서린다.

"부족해!"

병규의 두 발이 지면을 찼다.

탕!

경쾌한 소음.

병규는 하체에서 비롯된 탄력으로 신형을 돌개바람처럼 회전시키며 수사노오에게 달려들었다. 같이 죽자는 식으로 몸을 부딪히는 막무가내식 공격.

"소용없다."

수사노오는 뒤로 훌쩍 물러섰다.

그러나 병규는 집요했다. 무서울 정도로.

쾅하고 지면에 떨어지자마자 이번엔 팔랑개비처럼 한 바퀴 휘돌며 수사노오의 하체를 공격해 들어간다.

"이 녀석이." 독기가 오른 수사노오는 살을 주고 뼈를 깎는다는 심정으로 전력을 기울여 병규를 내리쳤다.

그러나 다음 순간!

병규의 발그림자가 쉭~ 하는 날카로운 파공성과 함께, 하늘로 승천하는 용권풍처럼 수사노오의 가슴과 얼굴을 타고 올라오는 것이 아닌가.

파파파팡!

폭죽이 터지는 듯한 폭음. 수사노오의 몸이 뒤로 쿵쿵 튕기며 밀린다.

'이건!'

두 사람의 치열한 생사혈투를 응시하던 발칸은 다시 한 번 경악했다.

'이것은 수사노오의 회오리바람이 아닌가.'

몰론 그의 능력을 복제했던 것처럼, 수사노오의 바람을 그대로 복제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한순간 회전하며 승천하는 병규의 몸놀림이 회오리를 연산시켰을 뿐이다. 하지만....

'설마 그 짧은 시간 동안. 나선움직임의 효율을 깨달았단 말인가.'

그러고 보니 좀 전부터 녀석의모든 움직임이 나선을 그리고 있었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힘의 효율과 파괴력을 삽시간에 깨닫고 곧바로 실전에 응용한 것이다.

"말도 안 돼!"

비명과 같은 경악이 터져 나온다.

저 놀라운 적응능력. 생명력을 일시에 폭발시키는 것 같은 터프함. 그리고 무엇보다 바퀴벌레와 같은 억센 생명력!

발칸은 전율했다.

처음으로 녀석에게 두려움을 느끼게 된 순간이었다.

"지긋지긋한 자식! 제발 쓰러져라."

수사노오는 악에 받쳐 소리질렀다.

이젠 뜨겁지 않다.

더 이상 터질 듯한 심장의 고동이 즐겁지 않다.

힘들다. 아니 괴롭다. 미칠 만큼 괴롭다.

"싫어."

입에서 피를 쿨럭쿨럭 토해 내며 병규가 대꾸한다.

"아직 부족해."

그의 입술이 부드러운 미소를 그린다.

"......"

불같이 화를 내던 수사노오는 병규의 웃음에 복잡한 표정이 되었다.

화가 나야 하는데, 왜 저 녀석의 옹고집에 가슴이 무거워지는 것일까.

"3회전이야."

병규가 천천히 걸어온다. 병규의 꼴은 말이 아니었다. 온몸이 성한 데가 없었다.

전신의 살갗은 거의 다 벗겨져 있었고, 상처에서 흘러내리는 피는 걸음을 옮길 때마다 붉은 핏자국을 남겼다.

보통사람이 저 정도 상태였더라면 고통 때문에라도 죽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병규는 통증을 전혀 못 느끼는 듯했다. 몽롱한 그의 두 눈은 말없이 상대를 바라볼 뿐이었다.

수사노오는 고요한 눈길로 그를 응시했다. 굳어있던 표정이 서서히 풀어진다. 그리고 잠시 후, 그의 입에서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말이 흘러나왔다.

"그만 하자." 병규의 발걸음이 멈춰졌다.

"....뭐?" "그만 하자고 말했다." 고개를 설레설레 흔든 수사노오는 병규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을 무시하며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놀란 얼굴의 발칸이 급히 고개를 숙여 보인다.

"주군."

"가자." "하, 하지만 저하."

발칸은 당황했다. 수사노오가 갑자기 왜 이러는 것일까.

오로치의 몸을 얻고 난 후부터, 남의 속을 제 손바닥 보듯 읽어 낼 수 있게 되었지만, 지금 수사노오의 생각만은 도저히 읽을 수 없었다.

"우리가 잘못되었다." 수사노오의 묵직한 한 마디. 발칸의 몸이 벼락이라도 맞은 듯 떨려온다.

'이 녀석. 애송이에게 반했군.'

가끔 그런 경우가 있다. 남자가 남자에게 반하는 경우. 저속한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상대에게 매료되고, 인정하게 되는 것.

수사노오는 마음속으로 애송이를 인정한 것이다.

'아깝게 되었군.'

발칸은 입맛을 다셨다.

원수가 눈앞에 있는데 처리할 수 없다니. 마음 같아서는 당장 애송이 녀석을 때려죽이고 싶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다. 힘을 모을 때까지 당분간 오로치 행세를 해야 하기 때문에 수사노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알겠습니다. 허면 잠시만 시간을 주십시오."

허리를 숙인 채 총총히 물러난 발칸은 H 빔 위의 퀴니를 올려다봤다. 비록 버러지 같은 녀석 때문에 일이 틀어지긴 했지만 퀴니만을 꼭 되찾아 와야 한다.

그의 장대한 계획을 위해서.

그러나 그는 우뚝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병규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오로치의 눈가가 실룩인다.

"주군을 조금 곤란케 했다고 기고만장해진 모양이군요."

차가운 오로치의 말.

병규는 대답이 없었다. 독기서린 눈으로 그를 노려볼 뿐이다. 그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가 바닥을 흥건히 적시고 있었다. 피를 뒤집어 쓴 것 같은 몰골. 그러나 여전히 그의 두 눈은 시퍼렇게 살아 있었다.

"건방진!"

발칸은 하얗고 긴 손을 들어 부채처럼 펼쳐보였다.

최면.

단순한 녀석일수록 걸려들기 쉽다. 차라리 잘되었다. 이대로 녀석을 백치로 만들어 버리면.

그때 수사노오의 묵지한 음성이 날아들었다.

"그만해 둬라."

발칸은 찔끔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수사노오는 등을 보이고 서 있었다.

넓은 등.

그러나 어딘가 모르게 쓸쓸해 보인다.

"날 더 이상 비참하게 만들지 마라."

"허나 주군. 저 아이는 꼭."

수사노오가 비스듬히 뒤를 돌아본다. 그 스산한 눈동자란. 발칸은 순간 얼어버렸다.

"부족한 것이 있다면 내 스스로 해결해 보이겠다."

병규.

하급의 능력자 주제에 감히 수사노오와 맞선 자. 죽음을 면하기 힘든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끝내 한 방을 보여주었던 사내. 불가능한 일에 목숨 아까운지 모르고 불나방처럼 달려들던 멍청한 녀석.

그러나 왜일까. 그의 무모함이 부러운 이유는.

수사노오의 굳은 음성. 발칸은 그의 결정이 걸코 번복되지 않을 것이란 걸 느낄 수 있었다.

"...알겠습니다."

결국 발칸은 뜻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굳은 표정으로 수사노오의 곁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때였다.

발칸의 등을 누군가 잡아챘다.

"헛." 피투성이가 된 병규의 얼굴이 바짝 들이밀어진 것이 아닌가.

놀란 발칸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병규의 그 시퍼렇게 발화하는 눈빛이란. 차가운 심장의 소유자인 그도 공포를 느낄 정도였다.

"넌 못 가."

묽게 풀린 눈으로 병규가 말했다.

"뭐?"

"놈 맞아야 하거든." "?" 발칸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이 녀석이 감히 주제도 모르고. 수사노오가 말리지만 않았다면 내 손에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처참한 꼴이 되었을 녀석이....'

그는 분노했다. 그러나 그의 분노는 오래가지 못했다. 곧 그의 얼굴은 경악으로 dflrmfjwu야 했기 때문이다.

코가 맞닿을 정도로 가까이 붙어 있던 병규의 얼굴이 휙 하는 바람소리와 함께 갑자기 시야에서 사라진 것이다.

"이게 무슨....."

경악성을 토하던 발칸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쿠쿵.

강한 진동과 함께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시작된 목직한 통증.

"크윽." 이를 빠득빠득 갈며 비명을 참아 보려 했지만 끝내 진득한 신음이 입술을 비집고 새어나왔다.

발칸은 배를 움켜잡으며 털썩 주저앉았다.

"이건 퀴니를 납치한 벌이댜.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생기면 약속하건데 영혼을 팔아서라도 널 죽여버리겠어." 그를 차갑게 내려다보며 병규가 중얼거린다. 뒤통수를 훑으며 쏟아지는 살벌한 병규의 목소리. 원인을 알 수 없는 오한으로 발칸은 몸을 덜덜 떨었다.

"그만 됐다." 어느새 가가온 수사노오가 바닥에 엎어져 꿈틀대고 있는 발칸을 부축했다. 그에게 부축된 발칸의 두 눈에서 순간 살기가 흘러나왔지만, 그런 사실을 병규는 물론 수사노오도 눈치채지 못했다.

"기회가 되면 또 보지." 수사노오는 비스듬히 선 채. 병규를 향해 조용한 한마디를 날렸다. 묵직한 음성.

깨어진 찬 틈으로 불어온 바람이 그의 머리칼을 길게 흩날린다. 어딘지 모르게 사내다운 멋이 물씬 풍기는 모습니다.

잠시 병규의 얼굴을 응시하던 그는 미련을 거두는 듯 빙글 돌아서며 깨어진 창을 뛰어 넘어갔다. 폭풍의 군주에겐 고층빌딩의 높이도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

수사노오가 사라진 후, 끈적거리는 피를 뚝뚝 흘리고 서 있던 병규의 입에서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때는... 꼭 이길 거야."

병규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그려진다. 그리고 다음 순간, 가뭄철 논바닥이 갈라진 것처럼 쩍쩍 갈라짐 피부에서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털퍼덕.

"오빠!"

"병규."

귓가로 희미하게 들려오는 사람들의 목소리. 하지만 병규는 꿈속의 일인 양. 전신이 무기력하기만 했다.

'정말... 피곤한 하루야.'

아악! 귀가! 귀가아아아아!!

짜릿한 느낌과 함께 병규는 무거운 눈꺼풀을 들었다.

흐릿한 시야에 하얀 천장이 보인다. 그리고 침상 옆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링거.

병원인 모양이다.

시간이 얼마나 지난 것일까.

알 수 없다.

머릿속이 멍한 걸 보니 꽤 오래 잤던 모양이다.

"엇. 깨어났니?"

긴 머리카락을 찰랑이는 여자의 모습이 잡혔다.

갸름한 미인의 얼굴.

이한영이었다. 그녀는 건강해 보였다.

병규는 저도 모르게 씩 미소를 지었다.

험한 일을 함께 겪어서일까. 깨어나자마자 그녀를 보니 반가움이 더 크게 느껴졌다.

'누님. 무사해서 정말 다행입니다.'

병규는 눈으로 그렇게 인사했다.

"녀석. 웃기는. 남은 네 걱정에 잠 한숨 못 잤는데."

이한영이 그의 머리를 콩 하고 쥐어박았다. 그녀의 눈에 수정 같은 눈물이 맺혀 있었다. 병규는 그녀의 그런 모습이 무척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한영은 부끄러웠던 모양이다. 소매로 눈가를 쓱 훔치며 병실 밖으로 나가버린다.

"잠깐만.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고 올게."

그 후로 한동안 병규의 병술은 몰려드는 사람들로 떠들썩했다.

이운석을 시작으로 조준엽. 김한식 등등 친숙한 사람들부터, 영웅의 얼굴 한 번 보겠다며 몰려든 생소한 얼굴의 요원들까지.

모두들 그의 어깨를 두드리고 대소를 터트리며 잔치를 벌이듯 왁자지껄 소란스럽게 떠들어댔다.

보다 못한 자영이 교통정리를 하지 않았다면 쏟아지는 질문에 그는 다시금 기절했을지도 모른다.

"궁금한 게 많겠죠?"

사람들을 몰아낸 자영이 나긋나긋한 음성으로 물어왔다.

병규는 눈을 감은 채 고개만 끄덕였다.

물먹은 솜처럼 몸이 무겁다. 모든 게 귀찮게만 느껴진다.

자장가처럼 조용하게 이어지는 자영의 목소리.

병규는 편안한 마음으로 그녀의 설명을 들었다.

수사노오가 떠난 얼마 후, 뒤늦게 자영과 특재대의 요원들이 최상층에 도착했다.

그녀가 그렇게 늦었던 이유는 오로치가 건물 곳곳에 설치한 고성능 폭탄을 하나씩 모두 제거하느라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기 때문이다.

오로치는 치밀한 자였다.

그는 이 기회를 빌려 특재대에 심각한 타격을 입힐 생각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자영은 꼼꼼한 사람이라 급박한 상황 중에도 혹시나 있을지 모를 사태에 대비했고, 결과적으로 그녀의 판장은 옳았다. 만약 그녀에게 그런 꼼꼼함이 없었다면 특재대는 그날 그곳에서 끝장이 났을 것이다.

당시 병규와 함께 적진 깊숙이 침투하던 이한영은, 적들이 구태여 관문을 설치하며 시간을 끄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했는데, 거기엔 이런 이유가 숨어 있었던 것이다.

병규는 새삼 두 영인의 재능에 감탄하였다.

그가 퀴니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무작정 돌격했을 때, 자영은 끝까지 냉철한 판단을 잃지 않았다. 그런 치밀함이 요원들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한영은 위험한 걸 뻔히 알면서도 그를 믿고 따라주었다. 특히 이한영의 깊은 신뢰에 병규는 가슴뭉클한 감동을 받았다.

자영과 대원들이 위험한 장애를 모두 제거하고 뒤늦게 도착했을 때 병규 일행은 지쳐 쓰러져 잠이 든 상태였고, 유감스럽게도 수사노오와 오로치는 임 종적을 감추고 없었다.

부상당한 병규와 이운석을 병원으로 옮기며, 자영은 이를 박박 갈았다.

특히 오로치에 대한 분노가 대단했다. 심지어 그녀는 요원들이 듣는 앞에서 다음에 만나면 뼈를 아작아작 씹어주겠다며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기까지 했다.

얌전한 그녀가 이를 빠득빠득 갈며 고함을 질렀다니.

병규는 자영의 얘기를 듣고 큭큭거리며 웃음을 참느라 곤혹을 치러야 했다. 직접 두 눈으로 못 본 것이 억울할 정도였다.

대충 상황이 정리된 후 집계된 요원들의 피해상황은 생각보다 경미했다.

일본의 능력자들과의 싸움으로 몇몇 요원이 부상을 입긴 했지만, 굳이 보고서를 작성할 필요도 없는 경상이었다. 요원들이 대거 투입된 것에도 원인이 었었지만, 애초에 실력에 큰 차이가 있었다.

사실 수사노오가 신임하고 있던 상급의 능력자들은 죄다 병규와 이운석이 치워주었으니, 요원들은 나머지 떨거지들만 정리한 셈이었다.

다른 요원들의 피해상황은 예상보다 가벼웠지만 반면, 전혀 생각지도 못한 부상자들이 최상층에서 발견돼 자영의 가슴을 덜컥 무너지게 만들었다. 물론 그 부상자들은 수사노오와 격전을 벌인 병규 일행이었다.

일행 중 이운석은 왼쪽 어깨뼈가 탈골되었고, 두 다리의 찰과상 또한 심각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행동하는 데는 큰 불편이 없었고, 심각해 보이던 외상마저 며칠 요양하면서 대부분 치유되었다.

그리고 격전 중 혼절하는 바람에 병규를 많이 걱정시켰던 이한영은 의외로 멀쩡했다.

장시간 수사노오의 직격을 받아낸 그녀지만 특유의 강인한 체력 덕분에 별 다른 부상이 없었다.

피부 허물이 조금 벗겨지긴 했지만, 다음날이 되자 말끔해졌다.

세상모르고 골아 떨어졌던 그녀는 다음 날 아침,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말끔한 표정으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계속 병규의 병실을 지키고 있었다.

누구보다 상태가 심각한 것은 병규였다.

병규는 갈비뼈가 세 개나 부러지고, 내장에 큰 충격을 받았으며, 전신의 피부가 찢겨져 흉물스런 모습이 되었다. 특히 허벅지와 팔의 경우엔 근육이 보일 정도로 심각하게 살점이 찢겨져 있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능력자의 치유력은 일반인의 그것과 매우 달라 한 달 정도만 고생하면 약간의 흉터만 남고, 다른 상처들은 괜찮아질 것이라는 반가운 소식도 함께 들을 수 있었다.

물류센터는 예상대로 오로치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물류센터의 사장과 운영진은 정상적인 한국인 기업가의 이름으로 등록되어 있었지만, 실제 회사의 대주주는 일본인이었다.

그들 대주주는 회사의 운영권마저 좌지우지할 수 있을 정도의 실세였다. 수사노오가 물류센터의 창고들과 건물의 일부분을 개인용도로 사용할 수 있었던 것도 다 그런 이유에서였다.

퀴니가 납치될 당시, 왜 인근 주민들이 그 사실을 알지 못했는지에 대한 의문도 풀렸다.

오로치의 최면이 원인이었다. 그는 유선방송과 라디오, 그리고 전봇대에 설치된 긴급연락용 스피커를 통한 최면술로, 사건이 벌어진 시간 동안 인근 주민들의 기억을 조작했다.

능력자들은 정신계 조작에 대한 기본적인 저항능력을 갖고 있었지만, 일반인들은 그렇지 못했다. 때문에 오로치의 광범위한 최면이 펼쳐지자, 보안설비가 없는 서버에 바이러스가 침투하듯, 그렇게 쉽사리 최면에 사람들이 걸려든 것이다.

자영에게 전해들은 여러 뒷이야기들 중에 한 가지 유감스러운 소식은, 이운석이 잡아놓은 화차와 쓰치노코가 감쪽같이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왕자(?)의 q or성들에게 휩쓸려간 오가마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주변 일대를 707 부대가 그물처럼 촘촘히 포위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그렇군요."

자영의 자세한 설명에 고개를 끄덕인 병규는 조용히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퀴니와 호랭이가 그의 양 무릎을 한 쪽씩 베고 고롱고롱 잠을 자고 있었다.

엉뚱하게도 퀴니와 호랭이는 그 난리 통에도 자명종과 노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병규는 작게 뒤척이는 퀴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없이 웃었다.

대체 기상태그매치가 뭐기에, 그 강력한 오로치의 최면마저 한순간에 깨뜨린 걸까.

"참, 저 아이에게도 뭐라고 한마디 해 줘요."

자영이 가리킨 곳은 건너편 침상 아래였다. 음영이 드리운 으슥한 곳을 지그시 응시하니 동그란 눈을 깜빡이고 있는 바퀴벌레 왕자의 모습이 보였다.

아마도 이번 사건을 통틀어 가장 큰 활약을 한 것이 바로 녀석이 아닐까?

바퀴벌레 왕자는 병규의 명령을 지키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 폭풍 속에서 미친 듯이 자명종을 후려치고 있는 두 사람을 붙들고 있는 일은 보통일이 아니었다. 삐끗 잘못해도 바람에 휭 하니 날려갈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평소엔 다소 껄끄러운 녀석이긴 했지만, 이번 일로 그런 불쾌하던 마음이 많이 가셨다.

병규가 따뜻한 시선을 보내자 숨어서 말똥말똥 기척을 살피던 바퀴벌레 왕자가 쪼르르 달려와 반갑게 인사를 했다.

"주인님. 너무 멋졌어요. 샤바. 그런데 왜 그 허접한 녀석을 살살 봐주면서 노신 거예요? 샤바샤바." 바퀴벌레 왕자 눈에는 병규가 살살 논 것으로 보였다.

그 피 터지는 혈투가 고작 놀이 정도로 보였다니. 어쩌면 이 녀석이 진정한 최강일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이 병규의 머릿속을 스쳤다.

바퀴벌레 왕자를 조용히 바라보던 병규는 문득 한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경애.

경애가 보이지 않았다.

"혹시 찾는 분이 저쪽에서 몸부림치며 주무시는 분인가요?"

자영이 웃으며 옆 침상을 손짓해 보였다.

그것에 경애가 있었다.

아기 곰이 그려진 잠옷을 입고, 모자까지 뒤집어쓴 채, 베개를 품에 안고 침대 위를 뒹굴거리고 있었다.

아, 뒤척거리다 침대에서 철퍼덕 떨어졌다.

"아야야."

잠이 덜 깬 얼굴로 엉덩이를 문지르더니 스멀스멀 침대 위로 기어올라가서 다시 쿨쿨거린다.

"우움. 집세 인상 절대 반대~. 500원만 주세요."

"하하."

경애의 잠꼬대에 병규는 맑은 웃음을 터트렸다. 남의 병실에서 저렇게 편하게 잠이 들다니. 사람을 편하게 하는 게 그녀의 천성인 듯 싶었다.

퀴니를 찾아 무작정 뚜쳐나간 그녀는 사방팔방을 헤매다 얼떨결에 물류센터까지 가게 되었다. 보통 사람들 중에도 감이 유달리 뛰어난 사람이 있는데, 그녀가 바로 그런 부류가 아니었을까?

"어쩌면....."

조용히 말을 꺼내던 자영은 이내 고개를 흔들어 보였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경애에게 능력자로서의 소질이 있는 건지도 모른다고 말하려 했지만, 확실한 게 아니어서 그냥 얼버무리고 말았다. 만약 그녀가 능력자라면 벌써 각성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녀에게선 아무런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저...." 병규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네?" "퀴니가 가스펠의 총수가 된 이유에 대해 더 밝혀진 것은 없나요?"

병규는 정말 궁금했다.

정말로 가스펠이 로리 공화국이라서 그럴 이는 없다. 분명 뭔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사실 그것에 대해 조금 조사해 봤어요. 그래서 미심쩍은 정보를 하나 얻었는데, 아무래도 퀴니 님은 유럽에서 발생한 3차 소울 임팩트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 같아요."

"소울임팩트와 관련이 있더라."

소수의 특별한 자들을 각성시키는 신비스러운 현상, 소울임팩트.

그 현상과 퀴니가 연관되어 있다는 말이다. 병규는 퀴니의 금빛 머리를 쓰다듬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하앙~"

호랭이가 길게 하품을 하며 깨어났다.

"어? 일어났네?"

가만 병규를 올려다보며 킁킁거리던 호랭이가 갑자기 코를 부여잡고 뒹굴며 뒤로 넘어간다.

"아이고, 냄새야. 코가 썩는 것 같네. 망할 녀석. 정신 차렸으면 멍청하게 있지 말고 냉큼 가서 좀 씻어라."

"예에."

병규는 어색한 표정으로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망할 연초마니아.

죽다 살아난 사람을 쳐다보고 한다는 소리가 좀 씻으라고?

기절한 상태로 며칠 못 씻었으니 몸에서 냄새가 좀 나는 건 당연한 일인데, 굳이 살살 애기해도 될 것을 본부장이 보는 앞에서 이렇듯 망신을 주다니.

병규는 꿍얼꿍얼거리며 귀엽게 고롱고롱 코를 고는 퀴니를 한쪽으로 조심스레 눕힌 뒤,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자영이 부축하려 들었지만 병규는 손을 내저었다.

"냄새난답니다. 때 빼고 광 낼 때까지 접근하지 마세요."

"호호. 네."

병규의 심술에 자영은 곱게 웃어 주었다.

"젠장. 좀 어지럽네."

"사내자식이 며칠 드러 누었다고 엄살은. 퍼뜩 갔다 와."

"네네. 알겠습니다."

병규는 툴툴거리며 휘청휘청 병실을 나섰다.

"녀석. 몸 하나는 정말 기가막히게 튼튼하단 말이야."

병규가 사라진 병실 문을 보며 호랭이는 감탄 섞인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일주일이나 기절해 있던 사람이 깨어나자마자 멀쩡한 사람처럼 휘적휘적 걸어 다니다니. 믿기 힘든 회복력이다.

"정말 그러네요."

자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호랭이의 말에 동의했다.

"그런데 조사해 본 것은 어떻게 됐냐?"

갑자기 호랭이가 굳은 표정으로 질문을 했다. 눈치 빠른 자영은 호랭이가 묻는 것이 무엇인지 곧장 눈치 챘다.

"혈액 검사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정밀 조사결과 아무런 이상도 발견되지 않았어요."

"으흠."

자영의 대답에 호랭이는 석연치 않은 표정을 지었다.

"거참 이상하네. 분명 뭔가 좀 이상한 게 있을 것 같았는데."

병규가 혼수상태였을 때, 호랭이는 따로 자영에게 그의 혈액을 채취하여 정밀검사해 보라는 지시를 내렸다. 혹시나 몬스터의 능력을 흡수하는 이유를 알 수 있을까 하는 기대에서였다. 그러나 결과는 호랭이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역시 수호신의 능력인 걸까?"

"아마도 그런 것 같아요. 일반적으로 능력자들은 수호신의 힘을 빌려 쓰는 것이기 때문에 신체검사를 해봐도 일반인과 별 다른 것이 검출되지 않아요. 혈액검사에 아무런 이상이 없는데도 능력을 발휘한다는 것은, 역시 그가 수호신에게서 힘을 빌려오는 것이라고밖에 해석할 수 없어요."

그건, 그렇긴 한데.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단 말이야. 대체 몬스터의 능력을 흡수하는 수호신이 뭐냐고. 내 평생 그런 수호신에 대해선 들어본 적도 없단 말이다."

"그건 그렇죠."

자영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선호인 그녀조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능력이다.

"정말 모를 일이야."

고개를 이리저리 귀엽게 갸웃거리던 호랭이. 문득 떠오른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참 그러고 보니 녀석. 가라스텐구의 피를 먹은 건 어떻게 된 거지?"

".....?" 자영은 호랭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 괜스레 눈만 깜빡였다.

그때였다.

특재대 병실 전용 샤워실에서 한 줄기 처절한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악. 귀가! 내 귀가아아아아아아!"

"파하하하."

비명소리를 듣고 황급히 달려온 호랭이는 병규를 보자마자 자지러졌다. 배를 움켜잡고 뒤로 발라당 넘어지더니 이젠 아예 데굴데굴 굴렀다.

"하하. 니가 무슨 아기 코끼리 점보냐? 파하하하하하."

그렇다.

호랭이가 이렇게 미친 듯이 웃어 재끼는 것은 병규의 귀 때문이다. 놀랍게도 그의 귀가 날개처럼 팔락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차라리 그의 귀가 부채만큼 크거나 하다못해 길기라도 했다면 좀 모양이 나을 뻔했는데, 그의 귀는 지극히 평범하게 보통의 크기였다. 그렇게 작은 귀가 팔랑팔랑 앞뒤로 정신없이 왔다 갔다하고있는 것이다.

"큭!"

귀를 본 자영은 얼굴을 붉히더니 입을 막도 밖으로 후다닥 뛰어갔다. 잠시 후 복도 저 건너편에서 호호호 하는 웃음소리가 메아리로 울려왔다.

이럴 수가! 믿었던 분부장까지.

병규는 두 주먹을 지그시 움켜쥐며 한 방울으 가련한 눈물을 떨구었다.

"푸하하하. 귀를 움직일 수 있는 인간은 여럿 봤지만 너처럼 팔락거리는 녀석은 처음이다. 파하하하하하."

남의 불행을 보고 깔깔거리는 호랭이의 모습에 병규는 묘한 살인충동을 느꼈다.

토닥토닥.

다른 병실에서 동생인 이운석과 수다를 떨다가 뒤늦게 달려온 이한영이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를 하고 나섰다.

"괜찮아."

"휴. 말만이라고 고맙습니다. 누님."

팔락팔락.

"풋. 그, 그래."

"누님. 얼굴 표정이 왜?"

팔락팔락.

"큭. 제, 제발 마. 말은 하지마."

"말요?" 팔락.

"푸푸풋."

어깨를 들썩이며 철인의 인내심으로 간신히 웃음을 참고 있던 이한영. 그러나 그녀 역시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결국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손가락으로 벽을 벅벅 긁더니, 결국 자영을 따라 복도로 달려 나간다.

"....?" 병규는 그녀의 반응을 이해할 수 없었다.

"푸하하. 녀석아 네가 말을 할 때마다 그 귀가 팔락거리잖냐."

호랭이의 말에 병규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거울 앞으로 달려갔다. 과연 정말로 말을 할 때마다 이놈의 귀가 나비가 날갯짓을 하듯 팔락이는 것이 아닌가.

"아니,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야!"

팔락팔락팔락.

"큭."

호랭이는 다시금 뒤집어졌다.

"파하하하하."

"휴."

팔락.

병규는 손으로 벽을 짚은 채 나직한 한숨을 쉬었다. 대체 이놈의 인생은 왜 이리 꼬이는지.

"아무래도 가라스텐구의 피를 먹은 것 때문인 것 같아요." 사태가 어느 정도 진정되자 자영이 말했다. 이한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그런데 가라스텐구라면 날개가 돋아야 할 것 같은데, 왜 하필 귀지?" 이한영의 물음에 호랭이는 고개를 갸웃한다.

"글세. 아마도 사람의 신체 중에서 날개와 가장 유사한 곳이 귀라 그런 것이 아닐까? 아무래도 몬스터의 능력을 복제해 낼 때 신체의 특정 부위가 변이를 일으키는 것 같다."

물론 호랭이의 말은 이한영이 들을 수 없었다. 그래서 자영이 그녀를 위해 통역을 해주어야 했다.

병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지의 결과를 보면 대충 그런 것 같다.

"흠. 그럼. 이번의 귀도 무슨 특별한 능력 같은 게 있을까요? 예전의 혀도 그렇고."

자영의 눈이 요란스레 반짝인다. 몬스터의 능력을 복제해 내는 병규의 능력이 무척이나 끌리는 모양이다.

"어떠냐? 뭐 특별히 달라진 건 없냐?" 호랭이의 물음에 병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귀가 펄럭이는 것 말고는 특별히 변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 참 이상하군. 날지는 못하더라도, 회오리바람 정도는 일으킬 줄 알았더니."

아쉬운 듯 호랭이는 입맛을 쩝쩝 다셨다.

"아직 모르는 일이에요. 적응되면 뭔가 기발한 능력이 또 생길지도 모르죠. 가령 이번에 알게 된 재생능력 같은 것처럼 말이죠."

자영이 호호 웃으며 말을 꺼냈다.

"그래. 맞아. 설마 그 험한 상처가 샤워 한 번에 깨끗해질 줄 누가 상상이나 했어?"

병규의 얼굴을 새삼 확인하며 이한영이 고개를 크게 끄덕인다.

"헤에. 넘넘 신기해요."

경애는 병규의 주위를 팔짝팔짝 뛰어다니며 기뻐했다.

팔락팔락 귀 사건의 충격이 워낙 컸던지라 뒤늦게 알게 된 일이지만, 병규는 재생력이라는 새로운 능력을 알게 되었다. 스크래그에게서 흡수한 것으로 생각되는 능력으로, 전신의 피부를 한 꺼풀 벗겨낸 것 같은 험한 상처들도 물이 닿자마자 단숨에 아무는, 가공할 만한 능력을 보여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런데 병규씨의 재생능력은 과연 어느 정도일까요?" 자영이 눈을 게슴츠레 뜨며 묻는다.

"흠, 나도 갑자기 그게 궁금해지네." "저도요. 저도요." "푸흐흐."

이번엔 이한영과 경애, 호랭이가 차례로 야리꼬리한 시선을 그에게 던진다.

병규는 흠칫 놀라며 한 발 크게 물러섰다. 세 사람에게서 불쾌한 오로라가 풍겨왔던 것이다. 특히 세 여인의 입술에서 새어나오는 그 썩은 미소란.

무의식중에 생명의 위협을 느낀 병규는 돌연 창가의 화분을 집어 들어 위협했다.

"저리가! 오지 마. 쉭!"

팔락! 팔락! 팔라~~ 악 팔락!

물론 호랭이와 세 여인은 병규에게 다다갈 수 없었다. 그의 어설픈 협박이 무서워서가 아니다. 말을 할 때마다 팔락이는 귀 때문에 도저히 웃겨서 접근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파하하하하하. 그, 그만."

"쿠쿡. 아이고. 미치겠다. 크후후후후."

"호호호. 비겁하게 정신공격을... 호호호."

나란히 병실바닥을 구르는 세 사람을 보며 병규는 세상 다 산 노인네처럼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에효. 정신공격이라니."

팔락팔락.

'이 귀가 과연 무슨 쓸모가 있을까.'

사람들이 모두 돌아간 후. 병규는 침대에 풀썩 누우며 생각했다. 말을 할 때마다 펄럭이는 귀. 다행히 연습을 좀 하면 의지대로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침대에 누운 채 가만 눈을 감았다.

머릿속이 맑아진다. 그리고 주위의 갖가지 소리들이 귓가에 소곤대는 것처럼 또렷하게 들려왔다.

무작정 크게 들리는 것과는 달랐다. 그가 집중하는 곳의 소음이 그의 머릿속에 영상으로 그려진다고나 할까.

'신기한 걸?'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생소한 경험.

병규는 더욱 더 정신을 집중했다. 귀가 레이더처럼 팔락이고 있었지만 그는 느끼지 못했다.

그 때, 아주 먼 곳에서 들려오는 또각또각 발소리.

차분하면서도 균형 감각이 뛰어나다. 그리고 놀라울 정도로 가볍다. 하이힐을 신었는데도 발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는 걸음걸이.

'본부장님일까?'

병규는 어쩐지 그 발소리의 주인공이 자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핸드백을 잊고 갔네요."

잠시 후, 병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과연 자영이었다.

멍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던 병규의 입술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랬군."

그렇다.

팔락이는 귀.

가라스텐구에게서 얻은 능력이 무엇인지 그는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네?"

의미심장한 눈빛을 띠고 웃는 병규를 보고 자영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핸드백을 찾으러 들어온 사람에게 갑자기 '그랬군.'이라니? 밑도 끝도 없는 소리가 아닌가.

"본부장님은 참 차분한 성격인 것 같네요."

어리둥절해하는 자영을 향해 병규는 여전히 조용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평범한 얼굴.

그러나 묘하게도 매력이 넘치는 웃음이었다.

총수님, 몇 척이 필요하십니까

"에잉?"

병규의 얼굴이 살짝 맛이 간다.

"집이 어디 간 거야?"

며칠 동안의 특훈으로 귀를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게 된 후, 즐거운 마음으로 랄라라~ 특재대 본부를 나설 때까지는 좋았다. 아니 그 이후로도 쭉 좋았다.

탁한 도시를 벗어나 정든 골목길로 접어들고 가파른 언덕을 오를 때엔. 눈물마저 핑 돌 정도였다.

하지만 그 즐거웠던 기분은 골목을 지나 노랭이 언덕에 오른 후 엉망진창이 돼 버렸다.

그게 그러니까, 뭔가 좀 썰렁해졌다.

아니, 다른 것은 다 그대로인데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이 눈에 보이지 않았다.

"잘못 왔나?"

혹시나 싶어 눈을 크게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익숙한 골목길. 익숙한 전봇대. 익숙한 풍경 속에서 그의 집만 온데간데 없었다.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평평하게 땅을 닦아 그 위에 세운 휘황찬란한 20층짜리 건물의 조감도.

"헛.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병규는 머리를 부여잡고 비명을 질렀다. 열흘 정도 외출한 사이 집이 싹 사라진 것이다. 좀도둑에게 집이 털렸다는 소리는 들어봤어도 집이 통째로 사라졌다는 얘기는 듣도 보도 못한 그였다.

그가 한참 절규하고 있는데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앗, 오빠. 드디어 찾았다!"

고개를 돌려보니 경애였다. 쪼르르 달려온 그녀는 대뜸 병규의 소매를 붙들고 대성통곡을 했다.

"오빠. 이럴 수 있는 거야? 이럴 수 있는 거냐고. 엉엉엉."

"무, 무슨 소리야. 경애야 울지 말고 똑바로 애길 해봐."

병규가 당황한 얼굴로 자초지종을 묻는데, 그녀는 신발을 벗어 들고 땅을 두드리며 꺼이꺼이 통곡만 했다.

"무슨 얘길 해. 이렇게 해 놓고. 집세가 마음에 안 들었으면 그냥 말로 나가라고 할 것이지. 야박하게 이게 뭐야. 난 그래도 오빠가 좋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사람 가슴에 대못을 박을 줄이야. 아이고, 억울해. 아이고오."

"엥? 야, 야박?"

그녀의 말을 듣고 있자니 자초지종을 알게 되기는커녕 머리만 더 복잡해졌다.

"야박하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설마, 집을 싹 밀어버린 게 나란 말야?" "흑흑, 오빠가 흑. 오빠가 안 그러면 누가 그래?"

병규는 답답한 마음에 가슴팍을 퍽퍽 쳤다.

"바보야. 어떤 미친 녀석이 달랑 집세 500원 때문에 집을 밀어버리겠니? 내가 그런 게 아니야."

"흑흑. 정말?" "당연히 정말이지. 집이 없어지면 당장 오늘 잘 곳도 없어지잖아." "흑. 맞아. 오빠도 잘 곳이 없구나." 그제야 이해가 된 경애.

소매로 눈가를 쓱쓱 닦더니 그를 향해 고개를 갸웃거려 보였다.

"그럼 누가 집을 밀어 버린 거예요?"

"지금부터 알아봐야지. 나쁜 자식들." 이를 으드득 갈아대는 병규는 조감도에 씌어 있는 전화번호로 연락을 넣었다.

"Hello~"

수화기에서 흘러나온 활달한 목소리에 순간 열이 확 뻗친 병규는 다짜고짜 고함부터 질러댔다.

"헬로는 무슨 놈의 헬로야? 나 노랭이언덕의 이층집 주인인데. 내 집 밀어 버린 게 당신이야?" ".... 혹시 대변기 씨?"

"뭐, 뭣? 대변기? 그래. 내가 바로 대변기다. 응가통이라고! 그러는 넌 누구야. 누군데 남의 집을 밀어 버린 거야!"

"Please calm down. 진정하세요. 곧 가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전화를 끊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검은색 리무진 한 대가 노랭이언덕 쪽으로 다가왔다.

"아아~" 리무진을 본 경애의 눈이 몽롱해진다.

"돈 냄새가 풀풀 나." 그녀의 말대로 이놈의 리무진은 비싼 티를 내는 건지 겁나게 번쩍거렸다. 그런데 더욱 약이 오른 것은 그렇게 휘황찬란한 차에서 내린 사람이 배불뚝이 중년 아저씨가 아니라, 훤칠한 키에, 금발머리의 미청년이었던 것이다.

순간 병규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이. 거기 계신 양반. 이거 불공평해도 너무 불공평한 거 아뇨?" 뚜벅뚜벅 걸어온 청년은 병규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대변기 씨?"

신경질적으로 그의 손을 툭 쳐낸 병규는 버럭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 내가 바로 대변기다. 그러는 넌 누구냐? 수세식 좌변기라도 되냐?"

"하하. 이거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군요."

기분이 나빠질 만도 하건만 청년은 과장되게 손을 흔들며 가볍게 웃어 보였다.

"우선 제 소개부터 하겠습니다. 제 이름은 체이드. 카트리얼 체이드입니다. 그냥 편하게 채드라고 부르십시오."

청년은 노랑머리에 코쟁이인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유창한 발음으로 한국어를 구사했다. 병규의 기분은 더 엉망이 돼 갔다.

'이 자식. 우리나라 말을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날 대변기라고 불러?'

집도 없어지고 이름까지 해괴하게 불려진 병규는 이래저래 짜증이 일 수 밖에 없었다.

"그래. 만나서 반갑소. 카드캡터 채리 씨! 그런데 당신. 왜 남의 집을 허락 없이 밀어 버린 거요?"

"하하. 역시 그것 때문이었군요. 기분이 안 좋으셨던 이유가."

원래 천성이 그런 듯. 시비조의 말에도 채드는 비실비실 웃음을 흘렸다.

"미리 설명을 드렸어야 했는데, 일이 급하다 보니 이렇게 되었군요. 많이 당황하셨을 것으로 압니다. 그 점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지금부터 천천히 사정을 설명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면.... 엇?" 막 설명을 시작하려던 청년의 입에서 돌연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무엇을 보고 놀란 것일까. 찢어질 듯 커진 눈동자에서 갑자기 눈물이 주르르 흘러나온다.

'이게 미쳤나. 왜 갑자기 이러는 거야?'

병규는 불안한 표정으로 청년의 끈적끈적한 시선이 향하는 곳을 살폈다. 그의 등 뒤, 퀴니가 고개를 빠꼼히 내민 채 채드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총수니임!"

갑자기 채드가 퀴니를 향해 몸을 날렸다.

바다로 뛰어드는 물개처럼 퀴니 앞에 넙죽 엎드린 그는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그녀의 손등에 정신없이 키스를 퍼부었다.

"마이 마스터. 너무 보고 싶었습니다."

이 청년.

조금 전까지는 젠틀한 이미지를 팍팍 풍기더니, 퀴니를 본 후론 하는 짓이 완전 유치원생 수준이 되어버렸다.

"퀴, 퀴니야. 아는 사람이니?"

황당한 표정으로 병규가 묻자 퀴니는 고개를 딸랑딸랑 끄덕여 보였다.

"얘, 퀴니 쫄병. "

"쫄병? 부하란 소리야?"

"응."

병규는 청년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사신을 청년이 퀴니를 총수라고 부를 때부터 대략 눈치를 챘다.

퀴니를 총수라고 부르는 곳.

청년은 유럽의 능력자 연합. 가스펠에서 온 능력자인 것이다.

청년의 정체에 대해 알게 된 병규, 불현듯 그는 청년이 자신을 대변기라는 시금털털한 이름으로 부르게 된 이유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끙, 퀴니였군.'

원흉은 퀴니였다.

그를 대변기라는 흉악한 이름으로 부르는 사람은 퀴니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이 양반은 대체 언제쯤 정신을 차리려나.'

채드는 10분이 넘도록 퀴니의 손바닥과 손등에 번갈아 가며 키스를 퍼붓고 있었다. 주위의 따가운 시선은 아예 아랑곳하지 않고 하긴 신경도 쓰지 않는 듯했다.

"우응. 마스터. 마스터. 마이 마스터."

"이게 뭐죠?"

"매매계약서입니다."

"매매계약서?"

채드라는 사내가 내민 서류를 받아든 병규는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왜 허락도 없이 남의 집을 밀어 버렸냐는 질문에 그는 대뜸 매매계약서를 내민 것이다.

고개를 갸웃하며 매매계약서를 훑어본 병규의 입이 차츰차츰 벌어진다.

매매계약서는 병규의 집 주변 일대의 토지와 가옥에 대한 소유권 이전을 내용으로 하고 있었으며 소유권 이전의 대상으로 태병규라는 이름이 기재되어 있었다.

쉽게 말해 새로 건축되는 20층 빌딩과 이 주변 일대의 땅이 병규의 소유가 된다는 소리였다.

"이, 이거 사실인가요?"

"물론입니다."

"저, 정말로 이 빌딩을 제게 주시는 건가요?"

"하하하, 당연하지요."

"하지만 전 가스펠에게 이런 선물을 받을 만한 이유가 전혀 없는데....."

"하하. 그런 말씀 마십시오. 이유가 없다니요. 저희의 총수님을 돌봐주셨지 않습니까. 게다가 이번에 납치된 총수님을 구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활약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분께 이 정도 보상쯤이야. 아무 것도 아니지요."

"오오."

병규는 탄성을 질렀다.

그저 가족을 지킨다는 생각으로 뛰어다닌 것뿐인데, 이런 엄청난 보상이 뒤따를 줄이야.

이미 이층집이 없어진 불쾌감은 은하계 저 멀리로 날아가 버린 지 오래다. 허름한 이층집을 날린 대신 삐까번쩍한(?) 빌딩을 얻게 되었으니, 이득도 이런 이득이 없지 않은가.

병규는 갑자기 퀴니가 엄청 사랑스러워졌다.

"그런데 20층이라니. 개인소유로는 너무 크지 않을까요?" "허어. 크다니요. 그나마 이것도 최소로 잡은 겁니다. 총수님의 품위를 생각한다면 200층짜리 초고층 빌딩으로도 부족합니다. 공사기간을 감안하지 않았다면 절대로 이렇게 소박한 건물 따위를 짓지는 않았을 겁니다." "소, 소박요?" 병규는 김빠지는 소릴 냈다. 20층 건물이 소박하다니.

"그럼 계약에 동의하십니까?"

"무, 물론입니다." 병규는 혹시나 말이 바뀔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얼른 대답했다.

그는 채드가 내미는 계약서에 후다닥 서둘러 서명을 했다. 서명을 하고 계약서를 한 장씩 나눠 갖자 그렇게 행복할 수 없었다. 당장 복권에 당첨된다 해도 이렇게 뿌듯할 것 같지 않을 듯 했다.

"저, 오빠."

계약서를 품에 안고 헤벌쭉 웃고 있는데, 경애가 그의 소매를 살짝 당기며 묻는다.

"저, 기존의 세입자 내쫓지 않을 거죠? 방세도 올리지 않을 거죠?"

그녀는 그의 소매를 살며시 붙든 채 비 맞은 강아지 같은 눈길로 끼잉끼잉 운다. 만약 꼬리가 있었다면 정신없이 흔들었을 것 같다. 병규는 금세 거만해져서는 대소를 터트렸다.

"푸하핫. 물론이지. 20층이나 되는데 그깟 500원 정도야. 푸하하하."

"와아. 대한독립 만세~! 만세~!"

경애는 두 손을 쳐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대체 이 사건과 대한독립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인지.

'그런데 20층 건물을 뭐로 채우나.'

그가 어떻게 빌딩을 굴릴까 고민하는데 계약서를 받아 챙긴 채드가 은근한 목소리로 말을 건다.

"참. 그런데 건물의 설계상, 몇 가지 특이점이 있는 걸 깜빡 잊고 알려 드리지 않았군요."

"트, 특이점요?" 병규는 왠지 불안해졌다.

"뭐 별것은 아니고, 총수님께서 함께 계시는 만큼 그에 걸맞은 시설과 보안장비가 필수라 생각돼서 말입니다. 설계 당시부터 신경을 쓴 부분이 있습니다. 일단 지하 1층에서부터 5층까지는 주차장으로 사용되며, 3층은 손님접대를 위한 라운지로, 그리고 최상층인 20층은 다목적 무도장으로 꾸밀 예정입니다. 또한 건물의 옥상에는 헬기 착륙장을 마련할 생각입니다."

병규는 오오 하는 환성을 질렀다.

괜한 걱정이었다.

채드의 말대로라면 그의 빌딩은 웬만한 호텔 뺨칠 정도로 편하고 화려한 것이 아닌가. 하지만 행복한 순간은 딱 여기까지였다.

채드의 말이 이어질수록 병규의 얼굴은 점점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에또.... 그리고 보안을 강화하기 위해, 1층에 금속 탐지기 같은 최첨단 검색장비 몇 개를 설치할 생각입니다. 그리고 이런 보안강화의 일환으로 각층의 복도를 이중으로 구성할 예정입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비밀 복도엔 수백 명의 요원들이 상시 대기, 빌딩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을 24시간 세밀히게 감시하게 될 것입니다.

아! 물론 특수한 훈련을 받은 요원들이라 절대로 눈에 띄지 않을 테니 변기 씨는 전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그리고 이건 조금 사소한 사항이긴 하지만, 각층마다 100여 대의 고성능 CC TV가 설치될 겁니다. 아! 물론 CC TV 또한 저희가 직접 관리한 생각이니 변기 씨는 전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금속 탐지기? 비밀복도? 24시간 감시? 특수한 훈련을 받아서 절대로 눈치 채지 못할 거라고? 그게 오히려 더 신경 쓰이지 않을까? 과연 화장실에서 마음 놓고 '청산~ 벽계~ 퐁당'을 할 수는 있을까?

그리고 각 층마다 100여 대의 CC TV가 설치된다는 것은 또 웬말이란 말인가. 아예 천장을 CC TV로 도배를 하겠다는 말이지 않은가.

병규의 입이 쩍 벌어졌다.

이건 나사(NASA) 나 펜타곤(미국국방부의 본부청사)은 비교도 안 될 정도의 보안이다. 아니 이 정도면 아예 대놓고 스토킹을 하겠다는 소리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채드의 충격적인 설계방침은 이제 겨우 시작이었다.

"그리고 이건 사소한 문제입니다만, 역시 보안강화의 일환으로 방문마다 전자식 도어를 설치하여 개인 카드가 없으면 화장실도 출입할 수 없도록 할 예정입니다.

또한 헬기 착륙장 바로 아래에 대공 미사일과 더불어 신형 패트리어트 미사일 발사장치, AHED(자기감응유도 방식의 신형탄약 시스템)를 장착하여 상공에서의 공격에 대비할 예정이며, 이와 같은 맥락으로 건물의 최하층인 지하 6층엔 장갑차 5대와 군용 지프 8대. 귀빈 수송용 방탄차량 10여 대 및 각종 화기들을 비치할 생각입니다."

"무, 무슨!"

병규는 질겁했다.

'화장실 갈 때도 보안카드가 필요하다?'

카드가 없으면 볼일도 못 본단 얘기가 아닌가. 심각할 정도로 불편할 것 같다.

'대공 미사일 발사장치와 장갑차? AHED는 또 뭐야.'

이건 무슨 만화에나 등장하는 지구방위대 사령부라도 만들 모양이다. 만약 대공요격장비들에 이상이 생겨서 지나가는 여객선이라도 추락시켜 버린다면 그야말로 전쟁발발이 아닌가.

병규는 떨리는 목소리로 채드에게 물었다.

"저, 저기. 방금 말씀하신 장비들. 꼭 설치해야 하나요?"

"네. 반드시." "....."

채드의 대답은 단호했다. 병규는 식은땀을 흘렸다.

이건 빌딩만 병규의 소유로 해놓고 실질적인 관리 감독은 가스펠에서 모두 맡겠다는 협박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두 사람의 대화를 가만 듣고 있던 퀴니가 앞으로 쑥 나서며 하는 말이 또 걸작이다.

"나 항공모함 좋아. 항공모함 줘."

"컥."

탱크에 미사일 발사장치까지 갖춘 20층짜리 건물로 부족해서 이젠 항공모함을?

'여기서 바다까지는 100킬로미터도 넘는다고!'

병규는 속으로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사내의 행동이 또 황당하기 이를 데 없었다. 곧장 어딘가로 전화를 때리더니.

"총수님께서 항공모함이 갖고 싶다고 하시는데요. 즉시 수배 좀 해주십시오."

'마, 말도 안 돼.'

병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 양반도 정신 상태가 썩 좋지 않은 모양이다. 그런데 사내의 다음 말에 병규는 입을 쩍 벌려야 했다.

"저, 총수님. 몇 척이나 필요하시냐고 묻는데요?" "헉!"

숨넘어가는 병규.

충격의 여파로 그는 잠시 굳어버려야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곧 득달같이 채드에게 따지고 들었다.

"말도 안 돼. 절대로 그럴 수 없어요. 항공모함은 둘째치고, 그 큰 것을 집 앞까지 어떻게 가져올 겁니까."

병규는 절대로 안 된다며 결사적으로 반대의 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채드는 훗 하는 웃음과 함께 손을 가볍게 흔들어 보이는 것이 아닌가.

"하하. 그거야 집 앞까지 수로를 뚫으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아니 하는 김에 아예 운하를 건설하죠."

국토를 양분하는 엄청난 작업을 무슨 애들 소꿉장난처럼 얘기한다. 돈은 둘째 치고, 한국 정부로부터 어떻게 허락을 얻을 생각인 건지.

"안 돼. 안 돼. 항공모함? 운하? 절대 안 돼."

병규는 정신없이 고개를 흔들어댔다. 그리고 빌당에 설치될 예정인 보안시설도 모두 제거해 달라고 요구했다. 내가 실험실의 생쥐냐며 눈물로 호소했다.

그러나 채드는 계약서를 흔들며 단호하게 거부했다.

그는 병규의 눈물보다 퀴니의 안전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급기야 병규는 감히 치사해서 동원하지 않으려고 했던 비장의 수법을 사용하게 되었다.

"나, 빌딩에서 안 살아."

"하지만 분명 방금 계약서에 서명을 하지 않습니까?"

채드는 당당한 표정으로 다시 한 번 계약서를 흔들었다. 그러나 의외로 이번엔 병규가 허허 하고 웃어 보였다.

"누가 빌딩을 안 가진다고 했나요?"

"....."

"빌딩은 가지겠지만, 그곳에서는 안 살겠다는 말이지요."

"!"

채드의 얼굴이 일순간 굳어졌다. 그러나 병규의 소매를 붙들고 있는 퀴니를 내려다보더니 곧 입가에 차분한 미소를 그린다.

"갈 테면 가십시오. 그러나 총수님은 이곳에 남으실 겁니다."

차라리 잘되었다는 투다.

"호, 과연 그럴까?"

병규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퀴니를 응시했다. 퀴니는 병규와 채드를 번갈아 보더니 채드를 향해 뭐라 입을 열었다.

"난 변...." 그 순간 채드가 두 손으로 입을 감싸 쥐며 소곤거렸다.

"항공모함입니다. 총수님. 군함 100척은 보너스로 얹어 드리겠습니다."

"오옷!"

퀴니가 솔깃한 반응을 보인다.

"후후후."

채드는 손가락으로 황금빛 머리칼을 휙 쓸며 득의의 미소를 날렸다.

이미 승부는 끝났다는 식의 여유로운 웃음.

그러나 병규는 픽 하고 가볍게 비웃어 주었다. 감히 항공모함 정도(?)로 퀴니를 꼬시려 들다니. 아직 한참 연구가 필요한 녀석이 아닌가.

그는 망설이고 있는 퀴니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그녀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긴 더듬이. 반질반질 등껍질." 퀴니의 어깨가 흠칫 떨린다.

반응이 온다. 역시 이 아이의 취향은 일반적인 상상을 초월한다. 병규는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유혹을 계속했다.

"차다다다. 샤바샤바!" 추르르르.

퀴니의 뽀얀 뺨이 발그레하게 붉어지더니 입가에 침이 흥건하게 고인다.

반대로 채드의 얼굴은 하얗게 질리고 있었다.

"무, 무슨!"

"후후후."

병규는 창백한 그의 얼굴을 향해 사악한 미소를 한 번 지어 보이더니, 마침내 최후의 한 마디를 내뱉었다.

"둥글넓적한 바퀴벌레 왕자~"

"후오오옷. 나 변기할래." 대뜸 병규의 허리춤에 매달리는 퀴니.

"크윽."

결국 채드는 무릎을 꿇었다.

"이럴 수가. 총수님이."

그는 두 손으로 땅을 짚은 채 좌절했다.

"쿠후후후후. 음화화화화화홧."

거만한 자세의 병규는 썩은 미소를 채드에게 날려주었다. 애초부터 상대가 안 되는 게임이었다.

"대, 대체, 총수님을 무엇으로 유혹한 것인가!"

채드는 피를 토하는 목소리로 병규를 향해 물었다. 그를 흘끔 내려다본 병규는 동정하듯 한마디를 툭 던졌다.

"바퀴벌레."

"무엇이?!" 쿠쿵.

채드는 벼락이라도 맞은 듯 놀랐다. 이어 실성한 듯 흘러나오는 절망 어린 음성.

"하, 항공모함이 바퀴벌레에게 침몰되다니."

그렇게 일련의 사건은 병규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항공모함을 원하는 퀴니에겐 프라모델로 만든 항공모함으로 대충 합의를 보았다.

퀴니는 항공모함에서 비행기가 안 날아간다며 투덜거렸지만, 병규가 접착제로 붙여서 그런 것이라고, 대신 그 항공모함은 통째로 하늘을 나는 놈이라고 얘기해줬다.

퀴니는 '후오오~'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병규가 선물한 항공모함은 그녀의 손에 붙들린 채 부웅~ 하며 하늘을 날고 있다. 어디서 들었는지 '우주전함 야마토'란 소리가 가끔씩 들려왔다.

병규에게 패해 한동안 의욕상실 증세를 보이던 채드는 곧 원래의 쾌활한 모습을 되찾았다.

그는 아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지만, 병규가 원하는 모든 사항에 합의해 주었다. 그렇게 빌딩 공사가 시작되었다.

"너무 빠르다."

병규의 입이 쩍 벌어졌다.

20층짜리 빌딩이다.

아무리 수수하다고 해도 무려 20층이나 되는 빌딩이다.

'일 주일 전에 계약서에 서명했는데.'

그때만 해도 허허벌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20층 빌딩이 거의 완성되어 있다. 남은 것이라곤 페인트칠과 자질한 뒷손질 정도.

어떤 마술을 부린 거냐고 채드에게 물으니 새로운 공법을 도입했단다.

예전처럼 H빔으로 뼈대를 만들고 한 층 한 층 살을 붙이는 방식 대신, 장난감 블록처럼 다른 장소에서 이미 만들어진 큐브 형태의 방 하나하나를 탄탄하게 닦인 베이스 위에 차곡차곡 쌓아올리는 식으로 건물을 완성해 간다는 것이다.

물론 아무리 새로운 공법이라곤 해도 일 주일이라는 터무니없이 짧은 시간 동안 완공이 가능했던 것은, 역시나 단단한 자금력과 무자비할 정도의 인력투입 덕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무슨 놈의 건물을 일 주일 만에.'

병규는 혹시나 건물이 무너지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그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빌딩은 차츰 제법 제 모습을 갖춰갔다. 내부 역시 내장재와 더불어 퀴니를 보호하기 위한 첨단장비들이 설치되기 시작했다. 병규가 우려했던 CC TV와 이중복도에서의 감시문제는 대충 합의점을 찾았다. 그러나 패트리어트 미사일 발사대와 같은 가공할 만한 병기들은 끝내 건물 이곳저곳에 장비되고 말았다.

정원 아래에 장착되는 최첨단 자동병기들을 보며, 병구는 혹시 빌딩 뒤쪽의 작은 연못 아래에 로봇이 숨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했을 정도다.

"만약 그렇다면 조종사는 틀림없이 퀴니겠지?"

후오오라고 외치며 로봇을 조종하는 귀여운 얼굴의 퀴니를 떠올리니 쿡 하고 웃음이 터져 나온다.

하여간 그렇게 빌딩의 완공일이 다음 날로 잡혔을 때다.

학교에서 터덜터덜 돌아와 보니 한 무리의 사람들이 빌딩 주위를 서성이고 있었다.

짧은 머리에 검은 양복. 조폭들이었다.

'조폭들이 이곳에 무슨 볼일일까.'

만약 뜯어먹겠다는 생각으로 온 것이라면, 정말 잘못 생각한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어설픈 협박도 끝내기 전에 정원에 설치된 수많은 자동화기들의 환영을 받아야 할 테니 말이다.

"여, 사장!"

조폭들 사이에서 하얀 원피스를 입은 아리따운 여자 한 명이 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엇! 누님?" 그녀는 이한영이었다. 병규는 반갑게 그녀를 맞았다.

"이곳엔 어쩐 일이세요?"

"아, 그게 특재대에 들어가게 됐거든." "특재대요?"

별일이다.

그녀는 영원히 암흑가에 남을 줄 알았더니.

병규의 의문을 눈치 챈 이한영이 씩 웃으며 말을 덧붙인다.

"본부장이란 여자가 동생들과 굳이 헤어질 필요가 없다고 해서 말이야. 돈세탁도해 준다고 했다." '역시 구미호 본부장.'

병규는 새삼 또 한 번 감탄했다.

자영은 사람을 살살 녹이는 데도 정말 천부적인 재주가 있었다.

병규 때는 병역문제를 들먹이더니, 이한영은 동생들(그녀를 따르는 조폭들)과 돈세탁이라는 절대로 생각지도 못한 방법을 들이민 것이다.

마치 상대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훤히 꿰뚫고 있는 것 같은 그녀만의 영업능력이 아닐 수 없다. 만약 그녀가 보험설계사 쪽 일을 하게 된다면 업계 최초의 백억 대 연봉자도 꿈은 아닐 것이다.

"이제는 특재대에서도 볼 수 있게 되는 거예요? 잘됐네요."

이한영의 두 손을 잡으며 병규는 웃음을 보였지만 한편으론 조금 아쉽기도 했다.

'아아, 이제 누님의 빵 만드는 그 화려한 춤은 못 보게 되는 것인가.'

마침 호랭이도 그런 생각을 했었던가 보다.

"쩝. 결국 작두는 안 타는 거야?" 입맛을 다시는 걸 보니 은근히 기대했던 모양이다. 호랭이의 괜한 투정에 씩 웃던 병규는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여기 온 거랑 특재대에 가입한 것이 대체 무슨 상관이란 거지?'

"음? 설마 본부장에게서 아무런 연락도 못 받은 거야?"

병규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이한영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묻는다.

"네, 별 다른....."

"어허. 이런. 일처리가 좀 늦네."

이한영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이래서 공무원은 안 된다는 둥, 일처리가 굼벵이라는 등, 월급도둑이라는 등의 말이 나온다.

"저, 혹시 본부장님이 이곳으로 가 보라고 한 겁니까?"

"그래. 마침 새로운 사무실을 구하고 있었거든. 전의 빵집은 여학생들이 너무 몰려들어서 영업하는 데 여러모로 불편한 점이 많았어. 마침 본보장이 이곳에 사무실로 쓸 만한 방이 많을 거라고 소개해 주더라고.

그래서 어제 긴가민가하며 전화를 해 봤지. 그런데 하필 넌 없고 세입자란 분이 받더라. 그래서 그 분께 물었지 방은 어느 정도 크기며, 또 집세는 대충 얼마나 줘야 하느냐고. 그랬더니 그분이 방은 현관문을 열면 맞은편의 베란다가 안 보일 저도고, 방세는 한 달에 딱 오백 원이면 충분하다고 하던 걸?"

"큭!" 병규의 입에서 신음에 가까운 경악성이 터졌다. 그리고 호랭이와 그의 입에서 동시에 한 사람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경애군."

"역애닷!"

다른 사람일 리 없다.

세입자. 500원.

이 두 가지만 봐도 확실하다. 병규는 문득 그녀가 생각보다 엄청난 인물일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또 한 번 들었다.

설마 집세 500원을 정말로 믿고 있었을 줄이야. 어쩐지 매월 1일 날만 되면 500원짜리 하나를 주면서 바득바득 영수증을 요구한다 했더니.

"저런 무슨 사정이 있는 모양이네. 하여간 이렇게 한 집에 살fp 돼서 정말 잘됐어. 앞으로 잘 부탁해."

이한영이 불쑥 손을 내밀었다. 그 하얗게 웃는 미소에 병규는 머릿속에 홀랑 타버릴 것 같았다.

"저, 저도 잘 부탁드릴 게요."

땀으로 흥건한 손을 바지에 쓱쓱 물지러 닦고 마주 손을 내미는데, 그의 손을 잡은 이한영이 갑자기 그를 덥석 껴안더니 등을 팡팡 두들기는 게 아닌가.

"좋아, 앞으로 잘해보자. 동생."

다소 거친 내용과 달리 그녀의 말투는 귀가 간지러울 정도로 부드러웠다.

"오오."

병규의 얼굴이 42.195% 만큼 행복 충전.

반대로 이한영을 호위하고 있던 형님들의 얼굴은 42.195% 만큼 흉악함 충전.

'누님이, 숨백의 천사가 저런 허접한 녀석을 껴안다니.'

이한영을 따라온 일면 동생들의 경악은 곧 분노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들의 소매에서 주르르 흘러나오는 각종 연장들. 듬직하던 형님들의 얼굴은 순간 사탄의 모습과 흡사해 보였다.

"...!"

뽀샤시하던 병규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그러나 그런 일련의 사태를 짐작도 못한 이한영은 병규의 어깨를 토닥이며 연신 방긋거렸다.

"녀석. 순진하구나. 이 정도로 부끄러워하긴. 하여간 빌딩 완공식 때 보자. 그럼." 검은 양복들의 형님들에게 둘러싸인 채 멀어져 가는 하얀 원피스의 그녀. 문득 사탄의 부하들에게 납치되는 순백의천사 같은 이미지가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어이구. 좋아 죽는구나! 아주 죽어라." 황홀한 표정의 병규를 보고 호랭이가 빈정거렸다.

"헤헤헤."

병규는 뒷버리를 긁적이며 마냥 헤헤거리며 웃었다.

핸드폰이 울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받아보니 가물치였다.

"아, 가물치 형. 네, 네....? 그, 그런. 아, 알겠습니다."

심각한 표정으로 전화를 끊은 병규.

"뭐래냐?"

호랭이가 묻자 병규는 좀 전의 모습과 달리 암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목 깨끗하게 씻고 기다리라는데요."

"....!"

넌 사람이야, 그리고 내 먹이지

병규가 빌딩과 관련한 일들로 복잡한 하루를 보내고 있던 그때, 특재대의 추적을 피해 은밀한 은신처에 숨어든 신풍에선 감히 상상도 못할 일대 사건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신풍의 군주, 수사노오의 말끔한 얼굴이 충격과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앞으로의 일을 논의하고자 오로치의 방을 찾은 수사노오는 적지 않은 충격에 빠졌다.

파리한 형광등 불빛 아래 드러난 작은 방안의 모습은 참혹한 그 자체였다.

수십 구의 시체들. 그런데 죽어 있는 모습이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처참했다. 시신들은 모두 가슴이 조개처럼 좌우로 벌려진 채 내부를 휜히 드러낸 상태였다. 하지만 이상하게 파리가 득실득실 꼬인 내장들 중에는 심장이 보이지 않았다.

없어진 심장.

수사노오는 어렵지 않게 한 살인마의 이름을 떠올릴 수 있었다.

발칸.

심장 강탈자.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사람의 심장을 뜯어먹는 잔인한 살인마.

최근 한국을 공포에 몸서리치게 만든 발칸은 사실 일본에서 먼저 악명을 떨친 바 있다. 한때 그도 놈을 잡기 위해 신풍의조직원들과 함께 대단위 추적 작업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미 발칸은 일본을 뜨고 없었다.

발칸의 그런 점이 여느 살인자들과 다른 점이다. 놈은 영악하게도 일본 내의 관심이 지나치게 높아지자 곧장 반도로 숨어들었다. 그리고 또다시 엽기적인 살인행각을 자행했다. 이것은 놈이 국적에 얽매이는 존재가 아님을 시사한다.

하지만 발칸이 악명을 떨치던 것도 옛날일.

최근 소식에 따르면 복수심에 불타는 한국의 야쿠자들에 의해 처리되었다고 들었다.

그런데 이런 속에서 놈의 흔적이 발견될 줄이야. 그것도 하필 최측근인 오로치의 방에서.

혹시 이 일이 최근에 오로치에게서 느껴지던 이질감과 어떤 관련이 있는 게 아닐까?

수사노오의 얼굴이 한층 무거워졌다.

최근 들어 그는 오리치에게 좋지 않은 느낌을 여러 번 받았다. 뭐라고 딱히 말할 수 없는 불길함. 깨고 나면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 몽혼한 악몽과 같은 그런 칙칙한 느낌.

그때 가느다란 음성이 들려왔다.

"어인 일이십니까." 오로치였다.

"왔는가?" 수사노오는 묵직한 음성으로 그를 맞았다.

멀쩡히 살아 있는 오로치. 게다가 코를 찌르는 피비린내에도 무덤덤한 표정. 만약 그가 방안의 참상과 관련이 없다면 이처럼 덤덤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런저런 정황으로 보아 수사노오는 오로치가 발칸과 관련이 있다는 데 확신이 섰다.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수사노오는 자리를 비켜 오로치가 시신들을 볼 수 있게 했다.

비위 약한 사람이라면 당장이라도 토악질을 할 만큼 참혹한 시신들. 그러나 오로치는 입가에 서늘한 미소 한 조각을 베어 물뿐이다.

'역시 다르다.'

수사노오의 굵은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한다.

그가 아는 오로치는 심성이 독란하기는 해도 지나칠 만큼 깔끔한 사람. 피비린내 같은 불쾌한 냄새가 나면 손수건으로 입부터 가리곤 했다.

'그런데 이 녀석은.'

손으로 입을 가리기는커녕 오히려 피비린내를 즐기는 듯 하다.

"후후후."

오로치가 웃는다. 뱀을 연상케 하는 차가운 웃음.

"넌 누구냐." 수사노오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눈앞에서 비릿한 웃음을 풍기는 이놈.

절대로 오로치일 리 없다고 확신했다.

"글쎄, 누굴까?" 오로치는 의뭉스런 대답을 하며 문을 닫았다.

수사노오는 그의 말과 행동에서 두 가지 사실을 알아챌 수 있었다.

'놈은 오로치가 확실히 아니다. 그리고 지금 나를 죽이려하고 있다.'

문을 닫았다는 것은 수사노오를 죽여서 입을 봉하겠다는 의미인 것이다.

"내가 누군지 잘 모르는 모양이군." 수사노오의 전신에서 폭풍 같은 기운이 솟구친다. 과연 엄청난 힘이다. 그러나 오로치의 표정은 여전히 매끄러웠다.

수사노오를 처음 보았을 때, 그는 감히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그만큼 그와 수사노오 간의 격차는 컸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

그동안 그는 수많은 인간의 심장을 먹었고, 지금은 이드라센에서 활약할 때의 힘을 거의 회복한 상태다. 아니, 오히려 지금이 전성기인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힘이 넘쳤다.

지금까지는 수사노오의 힘에 눌려 몸을 사리며 지냈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녀석에게 자신의 비밀을 들켜버린 것이 어쩌면 더 잘된 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미 물밑작업은 거의 끝났다. 수사노오는 물론이요, 신풍이라는 조직조차 더 이상 쓸모가 없다.

"내가 널 모르는 것 같다고? 천만에 너무도 잘 알지." 오로치가 말했다.

"넌 사람이야. 그리고..... 내 먹이지." 오로치의 빨간 혀가 입술을 천천히 핥는다.

"놈."

수사노오는 분노했다. 감히 자신을 먹이 취급하다니.

"내 너를 잡아 진짜 오로치의 행방을 찾아내리라."

"큭큭. 불가능해. 오로치는 이미 내게 완전히 먹혀버렸거든. 이미 한참 전에 말이야."

"그렇다면 내가 그의 복수를 대신 하겠다." 콰우우우.

성난 분노가 거센 폭풍이 되어 사방을 휘몰아쳤다.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듯한 엄청난 능력.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에게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펼칠 만한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

푸욱 하는 끔찍한 소리와 함께 오로치의 손이 그의 복부를 파고 들었기 때문이다.

수사노오의 눈이 경악으로 물든다. 자신이 당했다는 사실보다 오로치의 움직임이 눈에 익다는 데 더한 충격을 받고 있었다.

"큭. 네, 네놈의 움직임... 그것은...."

그의 뱃속에 손을 깊숙이 쑤셔 박은 오로치가 서늘하게 웃었다.

"그래. 그 애송이의 움직임과 비슷하지. 아니 똑같아. 사실 나도 놀랐어. 녀석이 내 능력을 복제해 낼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거든." 찌걱. 쩍.

말을 계속하면서 오로치는 수사노오의 뱃속에 박은 손을 잔인하게 휘저었다.

수사노오는 다시 한 모금의 피를 토했다.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 그러나 그는 내장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고통 중에도 결코 무릎을 꿇으려 하지 않았다.

"기억해? 애송이의 손에서 솟구치던 푸른 섬광. 사실...." 오로치의 웃음이 짙어졌다. 그 순간.

추아아악.

예리한 칼이 고기를 파고드는 섬뜩한 소음이 들려왔다. 수사노오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푸르스름한 빛 줄기가 그의 등을 사정없이 찢어발기며 툭 튀어 나왔다. 요수의 발톱이다.

"사실 요수의 발톱도 원래 내 기술이었어. 그 애송이 녀석이 마음대로 카피해 간 거지."

오로치가 수사노오의 귓가에 대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턱!

마침내 수사노오가 무너졌다. 부대자루처럼 허물어지는 그를 내려다보며 오로치가 중얼거렸다.

"너의 심장. 과연 어떤 맛일까."

수사노오의 눈동자가 붉게 충혈 되었다.

'이런 놈에게. 고작 이런 놈에게.'

죽는 것은 억울하지 않다. 그러나 이따위 녀석에게 당한 것이 너무 억울했다. 차라리 그때 애송이의 손에 죽었다면. 그랬다면 이렇게 괴롭지는 않았을 텐데.

곧이어 미칠 듯한 고통이 가슴을 파고 들어왔다.

그 순간!

콰콰쾅.

돌연 묵직한 폭음과 함께 잠겨있던 문이 벽째 무너져 내렸다.

"웃!"

수사노오의 심장을 꺼내려 했던 오로치는 별안간 벌어진 일에 당황하며 주춤 물러섰다. 그때 작은 그림자 하나가 날듯이 달려와 수사노오를 끌어안고 도망쳤다. 고양이를 닮은 듯한 재빠른 움직임.

"감히!"

오로치가 호통을 치며 쫓으려 하자 이번에 거대한 그림자 하나가 그의 앞을 가렸다. 먼지가 너무도 자욱해서 얼굴을 판별할 수 없었지만 오로치는 곧 그자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갑자기 팔 다리에서 기운이 쭉 빠져나간 것이다. 인간의 정기를 갈취하는 두꺼비.

"오가마!" "흡. 추악한..... 놈. 감히 군주를..... 흡!"

오가마는 얼굴 가득 분노를 담고서 오로치에게 달려들었다. 쿵쿵 무거운 발소리. 게다가 오가마의 능력 때문에 힘을 제대로 쓸 수 없는 상황.

그러나 오로치는 여전히 입가에 간악한 미소를 그렸다.

"흡! 죽어라!"

오가마가 기둥과 같은 주먹을 오로치를 향해 내뻗었다.

"흐흐. 이것이 너의 능력인가? 가소롭군."

오로치의입술 밖으로 흘러나온 스산한 웃음소리. 곧 오가마는 엄청난 광경을 봐야 했다. 그의 능력에 얽혀 잇는 줄만 알았던 오로치가 휙 하고 눈앞에서 사라져 버린 것이다.

채 놀람이 가시기도 전. 왼쪽 등을 찔러오는 엄청난 고통.

"크윽!"

"오~ 놀랍군. 네 녀석이 흡 하는 소리를 안 지껄일 수도 있다니 말이야."

오가마의 등 뒤에 바짝 붙은 오로치가 간드러지게 지껄인다.

"내가 그동안 네 녀석의 그 흡 하는 소리에 얼마나 짜증이 났는 줄 알아? 흡! 흡! 하는 쇳소리를 들을 때마다 네 녀석의 목을 날려 버리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 흐흐흐흐."

투드드득.

"!"

차가운 오로치의 말에 오가마는 뭐라 대답할 수 없었다. 아니 비명조차 지를 수 없었다. 등을 파고든 오로치의 손이 그의 심장을 어루만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로치가 그의 귓가에 바짝 대고 속삭였다.

"걱정 마. 네 녀석의 심장을 먼저 먹고, 그 다음 깔끔하게 목을 쳐 줄 테니까."

쯔거걱.

살점이 강제로 뜯겨져 나가는 잔혹한 소음!

"큭큭!"

부릅떠진 눈. 입 밖으로 울컥 쏟아져 나오는 검붉은 피. 미칠 듯한 경련이 오가마를 휩쓸었다. 그리고 잠시 후 심장이 뜯겨 나간 오가마는 모래성처럼 허물어져 내렸다.

"역시. 능력자의 심장이라고 해서 특별히 더 많은 마나가 들어 있는 건 아니군."

입가에 피칠을 하며 오가마의 심장을 찌걱찌걱 씹어 삼킨 오로치는 맛없는 음식을 먹은 것처럼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오가마의 심장을 뜯어먹고 난 뒤. 오로치의 탈을 벗어버린 발칸의 표정은 더 이상 겁날게 없다는 듯했다.

가공할 만한 능력을 발휘하는 능력자. 그들의 심장엔 당연히 일반인보다 훨씬 많은 마나가 담겨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역시 능력을 빌려 쓰기 때문인가."

능력자들은 수호신이라 불리는 존재로부터 힘을 빌려 쓴다.

이 말은 즉 능력자의 몸뚱이 자체는 일반인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소리다. 그들의 몸은 단지 수호신으로부터 능력을 끌어낼 수 있는 매개체와 같은 역할을 수행할 뿐이다. 곧 능력자의 심장을 먹어도 더 큰 힘을 얻을 수는 없다.

"그나저나 이제 어쩐다?" 수사노오의 시신을 훔쳐 달아난 자의 움직임은 무척 빨랐다. 그런 스피드를 낼 수 있는 자라면 그가 아는 한 세 명에 불과하다. 하나는 애송이 녀석. 그리고 기린을 수호신으로 둔 이운석.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은...

"화차. 그녀로군."

화차라면 조금 귀찮아진다.

그녀의 스피드는 성가실 정도로 빨라서 지금 뒤쫓는다 해도 따라잡기 힘들 것이다. 게다가 발칸은 단거리엔 강해도 장거린엔 약했다.

"쫓아가야 할까?" 그러나 발칸은 귀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 순간, 그가 확인한 바에 의하면 수사노오의 심장은 확실히 멎었다.

오가마가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발악한 그들의 탈출극은 결국 실패로 돌아간 것이다.

"고생고생 메고 간 군주가 이미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화차가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까. 크흐흐."

턱을 쓰다듬으며 발칸은 음침한 미소를 지었다. 생각해보니 굳이 그녀를 쫓아갈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가만 내버려두는 편이 깊은 절망감을 맛보게 될 것이다.

"그나저나 수사노오를 죽여 버렸으니 어쩐다?"

수사노오를 뺀 신풍은 오합지졸에 불과하다.

화차나 오가마는 꽤나 탐이 나는 능력자이긴 하지만 그들은 수사노오에게만 충성을 다하는 존재. 결코 자신의 발아래 둘 수 있는 인물들이 아니다.

사실 오로치의 몸을 차지한 이후로, 그는 한참 동안 신풍을 손아귀에 넣기 위해 고민했다. 그러나 몇 개월이 지난 지금. 그는 신풍을 과감하게 포기하게 되었다. 신풍은 수사노오에 대한 결집력이 무척 강한 집단이다. 지나칠 정도로.

"차라리 잘됐어. 이 기회에 깨끗이 치워버리는 게 좋겠군."

기괴한 미소를 지은 발칸은 얼마 전부터 생각해오던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로 마음먹었다.

"총사. 무슨 일입니까." 뒤늦게 폭음소리를 들은 풍가닌자들이 달려왔다. 발칸은 태연스런 표정으로 핑계를 댔다.

"별일 아니다. 실험을 하다 약간의 소란이 있었던 것뿐이다. 다들 제자리로 돌아가라."

"네." 오로치로 변장한 발칸의 삼엄한 명에 풍가닌자들은 일제히 허리를 숙이며 돌아갔다.

몇몇은 피 냄새를 맡고 사상하게 생각하는 듯했지만, 발칸의 최면에 말려들어 머릿속이 텅 비어 버렸다.

내부의 소요를 가라앉힌 발칸은 곧 어딘가로 전화를 했다. 그리고 30분쯤 지났다.

종이에 먹물이 스며들 듯 발칸의 앞에 십여 명의 사내들이 기척도 없이 나타났다.

그들은 하나같이 세 말이의 용이 그려진 중국식 무도복 차림을 하고 있었다.

비틀어진 살기를 솔솔 풍기는 그들.

그들 중 유난히 팔이 길고 원숭이 같은 관상의 사내가 키득거리며 앞으로 나섰다.

"우리에게 이곳을 정리하라고 하더니, 당신도 한바탕 한 것 같군." 그의 시선이 힐끗 실내로 향한다. 그 안에서 피비린내가 풍겨왔기 때문이다.

발칸의 눈꼬리가 꿈틀거렸다. 사내의 말투가 귀에 거슬렸다.

"흠. 백원신. 말이 좀 짧은 것 같군. 삼룡회에서 내게 협조하라고 했을 때엔 분명 내 말에 복종하라는 지시가 있었을 텐데." "흐흐. 실수했군. 용서하시오."

백원신은 음침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여보였다. 그러나 능글맞은 그 태도는 오히려 사람 속을 부글부글 끓게 만들었다.

'이 녀석들도 믿지 못할 놈들이군.'

백원신을 쳐다보던 발칸의 두 눈에 스산한 살기가 어렸다가 사라졌다.

이들 복면인들은 발칸이 중국의 암흑 능력자 연함인 삼룡회와 모종의 계약을 맺고, 그 증거로 지원받은 능력자들이다.

삼룡회는 중국의 마피아와 같은 조직으로 동남아시아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거대 조직이다. 워낙 그 규모가 방대하고 야심이 크다보니, 세계적인 능력자 연맹인 데몬게이트와 심심찮게 분쟁이 일기도 했는데, 그것 때문에 능력자라면 능력의 고하에 상관없이 무작위로 받아들였다.

이러한 사정을 훤히 꿰뚫은 발칸은 자신의 야망을 위해 과감히 신풍을 버리고 삼룡회와 손을 잡았다.

오로치의 뛰어난 지략을 흡수한 발칸이 가장 먼저 깨달은 것은 세력 확장의 중요성이었다.

이드라센을 무너뜨린 마계를 물리치기 위해선 무엇보다 힘이 필요하다. 지금까지는 혼자의 힘만을 생각했지만, 지금은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이 세상의 발전된 과학문명을 마음껏 이용할 수 있다면, 무적을 자랑하는 마계와도 한바탕 자웅을 겨룰 수 있을 것이다.

더더구나 마왕이 이 세상에 왔다는 소식은 그의 이런 생각을 더욱 부채질했다.

힘을 키워 이곳에 스며든 마왕을 처리할 수 있게 된다면, 마계를 토벌하는 것도 꿈에 그치지 않을 것이리라.

야망을 품은 발칸은 삼룡회에 손을 내밀었다.

처음 삼룡회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발칸은 갓파와 가라스텐구라는 카드를 내밀었다. 키메라 제조법으로 흥정을 한 것이다.

마침내 삼룡회가 움직였다.

데몬게이트와의 보이지 않는 암투 속에서 대단한 무기를 찾고 있던 삼룡회의 입장에선 발칸이 내민 키메라 제조법은 구미가 당기는 만찬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해서 일차적인 자료를 넘기고 협조를 받은 것이 바로 눈앞에 있는 자들인 것이다.

물론 이 수가 전부는 아니다.

삼룡회에서 보내온 인원은 총 삼백여 명. 모두들 지하 깊숙한 곳에 은신한 채 그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다.

"그나저나 부탁한 일은 어떻게 처리했지?" "큭. 일본의 능력자들을 처리하라던 명령 말인가? 크크. 그들은 너무 약하더군." 백원신은 두 팔을 축 늘어뜨린 채 킥킥거렸다. 새카맣게 굳은 피가 덕지덕지 묻은 그의 손가락이 유독 눈길을 끌었다.

발칸이 그들에게 명령한 것은 단 하나, 신풍의 정리였다.

일전에 있었던 특재대와의 전면전으로, 상당수의 능력자가 포로로 잡혔지만 아직 비밀아지트 내에는 백여 명의 조직원이 남아 있었다.

물론 그들 대부분은 풍가닌자라 불리는, 만들어진 능력자들이었다. 수준은 고작해야 하급의 능력자 정도. 하지만 그들을 가만 내버려두었다간 자칫 귀찮은 일이 생길 수도 있는 일.

그래서 삼룡회에 협조 받은 인원들의 실력도 알아볼 겸 청소명령을 내렸다. 그런데 이게 웬일. 이들의 실력은 생각보다 훨씬 대단한 게 아닌가.

무려 백여 명에 이르는 풍가닌자들을 십여 명의 인원이 소리도 없이 제거해 버린 것이다.

'삼룡회에서 꽤 쓸만한 녀석들을 보냈군.'

발칸은 속으로 득의의 미소를 지었다. 태도는 마음에 안 들지만 어차피 서로 이용해 먹는 관계니 그런 것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발칸은 삼룡회에서 지원해준 사람들을 유심히 살폈다. 십여 명 중 유난히 눈에 띄는 사람은 셋.

첫 번째는 지금 그의 앞에서 거들먹거리고 있는 백원신이라는 녀석이고, 두 번째는 한쪽 벽에 기댄 채 이따금씩 어깨를 비틀고 있는 사자머리의 마복이라는 녀석이다. 녀석은 유난히 큰손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무리와 따로 떨어진 채 서 있는 태극 문양 도포를 입은 사내. 그는 백택이라는 이름으로, 듣기로는 무당파의 직전제자라 하였다.

이들 세 명은 각기 독특한 느낌을 풍겼다. 특히 무당파 제자인 백택은 어떤 힘을 감추고 있는지 짐작조차 못할 정도다.

'좋아. 이 녀석들이라면 충분히 특재대를 흔들어 놓을 수 있겠어.'

그의 계획은 먼저 한국의 능력자들을 제압하여 세력을 불린 다음. 일본까지 삼키는 것이다. 그렇게만 되면 충분히 이계를 정벌할 수 있을 테지.

문득 그는 계획의 실행에 앞서 한 가지 거추장스러운 녀석을 제거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능력을 복제하던 해괴망측한 녀석!

사사건건 그의 일을 방해하는 고얀 녀석.

'그래. 이번엔 눈에 거슬리는 그 애송이 녀석을 먼저 치워버려야겠어. 하는 김에 퀴니라는 그 앙큼한 계집아이도 다시 빼앗아 올 수 있다면, 이거야말로 일거양득이 아닌가. 크흐흐흐.'

삼룡회에서 지원받은 중국인 능력자들을 훑어보며 발칸은 입가에 잔혹한 미소를 지었다.

"냐. 역시 군주님의 염려대로였어."

수사노오의 몸을 안고 부리나케 달리고 있는 화차는 군주에게 들었던 명령을 떠올렸다.

언제부터인가 수사노오는 오로치에서 풍기는 기운이 이상하다고 말해왔다. 그리고 얼마 전. 급기야 그녀와 오가마에게 오로치를 은밀히 감시하라는 비밀지령을 내렸다.

일전에 특재대와의 싸움에 수사노오가 굳이 그들 두 사람을 버리는 것처럼 행동했던것도 사실 이러한 움직임을 숨기기 위한 방편이었다. 그런데 그런 조치에도 불구하고 끝내 이런 일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

"냐, 군주님 죄송해요. 저희의 대처가 늦어서."

화차의 큰 눈에 눈물이 고였다.

품에 안은 수사노오에게서 아무런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는다. 처참하게 찢겨진 뱃속에서 피와 함께 내장이 흘러나왔다.

화차는 소매를 찢어 군주의 상처 부위를 대충 칭칭 감았다.

지금은 치료를 할 여유가 없다. 언제 오로치의 추적이 시작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오가마."

정신없이 달리던 화차는 문득 뒤를 돌아다보았다.

오가마는 아마 살아남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후회는 없을 것이다. 그는 원래 그런 사내다. 군주를 위해 한 목숨 바치려 했던 사내니 후회 없이 죽음을 맞았을 것이다. 그러나 동료의 희생을 밟고 달려야하는 화차의 마음은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냐. 빨리 몸을 피해야 해."

일본으로 향하는 항만과 공한은 놈이 미리 수작을 부려놓았을 가능성이 크다. 일단은 세상의 눈을 피해 잠적해야 한다. 그것도 아주 오래.

경계가 느슨해 졌을때, 그때야 비로소 그녀는 부상당한 군주를 데리고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

'냐. 어딜까. 발칸이 생각할 수 없는 곳이.'

그녀는 오로치가 얼마나 치밀한 자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오로치가 당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군주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오로치가 바뀌었다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했다.

단순한 살인마인 줄로만 알았던 발칸. 그자가 실은 엄청나게 치밀한 작자였다는 것이 증명된 셈이다. 그런 발칸의 마수에서 벗어나려니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게다가 이곳은 타국.

일본인인 그녀는 아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혹 있다 해도 이미 발칸이 손을 써 두었을 것이다.

'냐. 어디로 가지? 어디로 가지?'

도무지 몸을 숨길만한 곳이 떠오르지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그녀는 초조해졌다. 그러다 문득 한 곳이 머릿속에 번뜩 떠올랐다.

결코 친하지 않은 사람. 아니 적이라고 할 수 있는 관계지만 임무차 찾아갔기에 대충이나마 집을 알고 있었다. 마침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이다.

게다가 적이라는 관계. 발칸의 허점을 교묘하게 찌를 수있을 것으로 보였다.

"냐. 좋아. 가자."

방향을 잡은 화차는 눈부신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더 이상 고민할 여유가 없었다.

"냐. 이게 뭐야?"

목적지에 당도한 화차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당황했다.

분명 제대로 찾아온 것 같은데 주위 풍경이 예전과 전혀 달랐다. 오밀조밀하게 모여 있던 집들은 싿 다 사라지고 웬 20층짜리 빌딩 한 채만 덩그러니 서 있는 게 아닌가.

"냐. 잘못 왔나?" 화차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무리 둘러봐도 제대로 온 것이 맞다. 그녀가 이운석 등과 한바탕 했던 골목은 여전히 새카맣게 그을려 있었다.

"냐. 어떻게 된 거야. 이게." 화차는 길을 잃은 초등생처럼 두 손을 축 늘어뜨린 채 훌쩍거렸다. 그때였다.

언덕 아래에서 가방을 멘 병규가 터덜터덜 걸어오는 모습이 눈에 띈 것은.

화차는 반가운 마음에 왈칵 눈물이 맺혔다. 적이었던 사이지만 이 순간만큼은 포옹이라도 해주고 싶을 정도로 반가웠다. 하지만 갑자기 그의 앞에 나타나는 것은 자칫 상대의 경계심만 높이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었다.

주위를 살핀 화차는 조심조심 그에게 다가갔다.

방학식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규는 발걸음도 가볍게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멀리서도 보이는 20층 빌딩의 웅장한 모습에 그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저렇게 삐까번쩍한 걸물이 자신의 것이 되다니, 웃음이 절로 나오고 좋아서 미칠 지경이다.

물론 가스펠의 간섭 때문에 완전히 자신의 것이라 말하기도 좀 뭐하고, 실재로 수입이 생기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저 자신의 소유라는 것 하나만으로도 가슴이 벅차고 뿌듯했다.

게다가 일이 잘 풀리려는지 갑자기 좋은 소식만 들려왔다.

오늘부터 여름방학이 시작되어 자유의 몸이 되었다는 것과 곧 이한영이 이사를 온다는 소식.

그야말로 해피 해피한 일의 연속이 아닌가.

가물치 형을 위시한 조폭 형님들의 압박이 심상치 않지만 그쯤이야. 필요하다면 전쟁이라도 불사할 작정이다. 이한영은 충분히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니까.

'좋아. 기왕이면 특수면허라도 따 둘까? 누님과 드라이브라도 할 수 있게 말이야.'

특재대의 요원에겐 국가에서 발행하는 특수면허라는 것이 있는데, 이 면허 하나로 모든 종류의 차량을 자유롭게 운전할 수 있었다. 이운석이 미성년자이면서도 스포츠카를 몰고 다닐 수 있는 것도 이 면허 덕분이다.

그렇게 병규가 방학과 함께 시작될 분홍빛 미래를 상큼하게 설계하고 있을 때.

"병규야. 이상한 기척이 느껴진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언덕을 오르던 병규는 호랭이의 경고에 걸음을 멈추었다. 마침 그도 수상한 기척을 느끼던 차였다.

팔락팔락.

소리에 의식을 집중하자 레이더처럼 귀가 팔락인다.

귀를 자유롭게 움직이게 된 이후로 뜻하지 않게 그는 소리를 매우 잘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전혀 생각도 못한 새로운 능력이 생긴 것이다.

단순히 소리만이 아니다. 감각이라고 할까. 주위의 기척을 무서울 정도로 예민하게 감지할 수 있게 되었는데, 그것은 마치 박쥐의 초음파만큼이나 민감하면서도 놀라운 재주였다.

지금도 화차의 미세한 발걸음소리를 귀신같이 잡아내고 있었다.

'조금 놀려줄까?'

짓궂은 생각이 든 병규는 호랭이에게 꽉 잡으라는 눈신호를 보낸 후 몸을 움직였다.

'헉!'

살금살금 병규의 뒤를 쫓던 화차는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조용히 걷고 있던 병규의 모습이 돌연 휙 하고 시야에서 사라져 버린 것이다. 식은땀을 흘리며 허둥지둥 주위를 둘러보는데, 등 뒤에서 병규의 음성이 들려온다.

"어? 누군가 했더니 고양이 아가씨네."

"냐? 냐!" 화차는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펄쩍 뛰어올랐다. 그녀 역시 스피드 면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뛰어난 능력자.

과거 이운석과 대등하게 싸울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방금 병규의 움직임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빨랐다. 오죽하면 두 눈 멀쩡히 뜨고도 그의 종적을 놓쳤으랴.

"흐음. 그때 운석이에게 잡혔다가 운 좋게 도망갔다고 들었는데 멀리 안 가고 여길 돌아다니고 있었네. 뭐, 하여간 그건 그렇다 치고 무슨 볼일이야?"

병규의 물음에 화차는 어깨를 움츠리며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원래 그녀의 계획은 몰래 살금살금 다가가 병규를 깜짝 놀라게 만든 후에, 협박 반 부탁 반으로 협조를 요청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된 것이 지금은 완전히 반대 상황이 되어 버렸다.

병규의 음성이 갑자기 등 뒤에서 들리던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벌렁거린다.

"어, 너 그 소매에 묻은 거 뭐야?"

화차의 소매에 묻은 피를 본 병규의 표정이 변했다. 그러고 보니 그녀에게서 피비린내가 물씬 풍겨온다.

"너 사람 죽였냐?" 병규의 분위기가 거칠어졌다. 화차는 급히 두 손을 흔들며 극구 부인했다.

"냐. 난 싸우러 온 게 아니야. 그리고 사람을 해치지도 않았어. 사실 그 반대야."

"반대?"

병규가 묻자 화차는 큰 두 눈에 눈물을 가득 채우며 울먹였다.

"냐. 도와줘. 제발 군주님을 살려줘."

"?" 병규는 그녀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에게 군주라고 불리는 사람이라면 폭풍의 군주, 수사노오를 말하는 것일 텐데, 그가 아는 그는 절대로 살려 달라는 말을 들을 만큼 허약한 인간이 아니었다.

"무슨 사연이 있는 모양이다. 일단 들어보자."

호랭이가 차분하게 말했다. 고개를 끄덕인 병규는 우선 그녀는 안정시키는 데 주력했다.

눈물을 줄줄 흘리던 화차는피로 물든 소매로 눈가를 닦더니 이곳까지 오게 된 사연을 두서없이 설명하기 시작했다.

"냐. 숨을 곳이 필요했어. 오로치를 피해서 숨어야 해. 그런데 갈 곳이 없어. 그래서 여기로 왔어."

"무슨 소리야. 오로치를 피해야 하다니. 너 오로치와 싸우기라도 한 거야?"

"냐. 아니야. 오로치 전혀 다른 사람이야. 오로치는 발칸이었어. 그가, 그가 군주님을 해쳤어." 쿵!

병규는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무너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발칸.

이 두 글자 이름이 주는 충격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다.

"그, 그 녀석은 죽었잖아."

병규는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그렇다. 발칸은 죽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그가 해치웠다. 요수의 발톱으로 몸뚱이를 양단해 버렸다. 그런데 그런 그가 살아있다고? 그리고 오로치가 되었다고?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일단... 가보자."

그는 굳은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이럴 수가."

화차가 안내한 으슥한 곳의 수풀 속에서 수사노오를 발견한 병규는 신음성을 흘렸다. 천하무적이라 생각하던 폭풍의 군주가 으슥한 수풀 속에 볼품없이 널브러져 있었다.

"이 녀석. 고작 이런 꼴로....."

지금도 눈을 감으면 그때의 위엄 가득한 모습이 떠오르는 폭풍의 군주!

상상도 못할 폭풍을 과시하며 그를 몰아붙였다. 온몸이 산산조각 나는 것 같은 고통. 죽을 것 같은 통증을 참아내며 어거지로 덤벼들었다. 한 방만.딱 한 방만 때리자며 악을 쓰지 않았던가.

그리고 피를 온몸에 뒤집어쓴 채 간신히 한 방 먹였을 때, 녀석은 이제 그만 두자며 몸을 돌렸다. 그때 그 모습이 얼마나 멋져 보였던가.

질투가 날 지경이었다.

그래서 의식을 잃는 그 순간까지 다음에 만나면 기필코 이기겠노라고 투지를 불태울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녀석이 지금 그의 발아래 죽은 듯 쓰러져 있는 것이다.

붉은 피에 범벅이 되어 흥건히 고인 핏물에, 온몸을 축 늘어뜨린 채.

병규는 수사노오의 배를 칭칭 동여맨 헝겊을 천천히 풀어냈다. 안에서 밖으로 터져나간 석처럼 벌어진 살점. 그 안으로 보이는 뭉개진 내장들.

욱신.

갑자기 아랫배로 진한 통증이 느껴졌다. 전에 발칸에게 당했던 자리다. 수사노오의 상처를 보자 갑자기 예전의 그 미칠 것 같았던 통증이 떠올랐다.

"정말이로군."

수사노오의 상흔을 확인한 호랭이가 신음성을 흘린다.

"이런 짓을 할 수잇는 녀석은 내가 알기로 발칸. 그 녀석뿐이다."

병규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죽였다고 생각하던 녀석이 버젓이 살아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몸이 반 토막이 났는데도 살 수 있는 거지?" 부검실로 수송 중이던 발칸의 시신이 중간에 사라졌다는 소식을 뉴스에서 들어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단순한 사고로만 받아들였다. 몸이 반 토막 난 인간이 어떻게 다시 살아날 수있겠느냐는 단순한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놈이 버젓이 살아있다.

"애초에 녀서을 인간으로 생각한 것이 잘못이었어."

병규는 넋이 나간 듯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그런 그를 호랭이가 다독였다.

"놀라는 건 나중에 해도 돼. 우선 녀석의 상태를 확인해 보자."

"네."

병규는 즉시 수사노오의 가슴에 귀를 대 보았다. 심장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이어 그는 수사노오의 코와 입에 손을 가져갔다.

"숨도.... 수지 않아."

"냐. 아니야. 아니야. 그럴 리 없어."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던 화차는 곧 눈물을 뿌렸다. 수사노오의 몸 위에 엎드린 채 흐느꼈다.

그렇게 고생하면서 구출해 왔는데, 오가마의 목숨을 희생해 가면서 구해 냈는데, 그런데 이렇게 허무하게 죽어버리다니.

그녀의 울음은 어느새 통곡으로 바뀌었다.

그때였다.

조용히 수사노오의 손을 잡고 있던 병규의 입이 열린 것은.

"아직은.... 살릴 수 있을 지도 몰라."

"냐?"

화차가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들어 그를 쳐다봤다.

"그의 심장은 이미 오래전에 멈춘 것 같아. 그리고 피도 너무 많이 흘렸지. 숨도 쉬지 않아."

"냐. 싫어 싫어."

화차는 두 손으로 귀를 감싸며 도리질을 했다. 듣고 싶지 않은 것이다.

잠시 그녀를 바라보던 병규가 손을 뻗어 그녀의 손목을 잡아 내렸다. 힘으로 그녀의 귀를 열고는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반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는 죽은 게 맞아. 하지만 이상해. 그는 열기가 있어. 체온이 있단 말이야."

"냐?" 화차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그녀는 화급히 수사노오의 가슴에 얼굴을 가져다 댔다. 약간이긴 했지만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군주님. 군주님."

화차는 수사노오의 손을 붙든 채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군주님은 몸이 죽어버린 상황에서도 아직 포기하지 않은 것이다. 화차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녀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병규는 조용한 목소리로 호랭이에게 물었다.

"살릴 수 있나요?"

예전에 그 역시 이런 상태였다. 그리고 그런 그를 살려낸 것이 호랭이였다. 그러나 호랭이는 고개를 가로저어 보였다.

"불가능해."

"왜요?" "전에 말했다시피 널 살리기 위해 난 수백 년의 도력을 소모해 버렸다. 그래서 이런 꼴이 되었지 지금 내게 이 녀석을 살릴 만한 도력은 남아있지 않아."

그리고 결정적인 차이점이 하나 더 있다. 호랭이가 도력을 사용할 때의 병규는 아직 숨이 완전히 끊어지기 전이었다. 그렇지만 수사노오는 누가 봐도 죽은 사람이 아닌가. 호랭이가 아무리 대단한 도력을 지녔다 해도 명계로 넘어간 혼령을 어찌할 능력은 없었다.

"냐. 제발."

화차는 간절한 표정으로 병규를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왜 병규가 강아지를 보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는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 의지할 사람은 그 하나뿐이라는 것만은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잠시 그녀를 내려다보던 병규는 씩 하고 웃음을 보였다.

"걱정 마. 최선을 다할 테니까." 그러나 화통한 대답과 달리 병규는 속이 타 들어가는 것 같았다.

대체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 할지 난감하기만 했다. 아무리 능력자의 회복능력이 일반인의 상상을 초월한다고는 하지만, 심장이 맘춘 상태에서도 과연 되살릴 수 있을까?

'상처도 좀 꿰매고 피도 수혈해줘야 할 것 같고. 아니지. 심장이 멎었으니 전기 충격을 줘야 할까? 3분만 피가 안 통해도 뇌세포가 죽는다고 하던데, 이거 고생해서 살려놨더니 혹시 치매환자가 되어버리는 거 아냐?

아무리 생각해도 전문의의 진단과 치료가 필요했다. 그러나 화차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냐. 절대로 안 돼요. 병원 같은 곳에 갔다간 발칸이 금방 눈치를 챌 거예요." "흠. 병원이 안 된다면." 당장 떠오르는 것은 특재대 본부의 의료센터. 하지만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특재대의 지원을 바라기엔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그런 그에게 전혀 다른 대안이 떠올랐다.

'그래. 가스펠이라면.'

퀴니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가스펠은 이 주변에 다수의 특수요원과 시설들을 배치해 놓았다. 그리고 그런 시설 중엔 최첨단의 의료장비들과 의료진도 포함되어 있었다.

병규는 수사노오의 몸을 들쳐 업고 무작정 빌딩을 행해 뛰었다. 뛰면서 그는 바퀴벌레 왕자를 호출했다.

"바퀴" "부르셨어요? 샤바?" 부르자마자 화차의 그림자 속에서 바퀴벌레 왕자가 파다다다 날아왔다.

"꺅!" 화차는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지만 병규는 아예 무시했다.

이미 바퀴벌레 왕자의 치 떨리는 은신술(?)을 여러 번 경험했기 때문이다.

가라스텐구의 피를 먹은 후, 10미터 후방의 낙엽 떨어지는 소리조차 잡아낼 수 있게 된 그의 감각으로도, 아직 바퀴의 은신술(?)만은 도무지 파악이 안 되었다.

"마퀴. 채드가 어디 있는지 알 수있어?"

"물론이죠. 샤바."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한 바퀴벌레 왕자는 더듬이를 번개 모양으로 구부리며 잠시 수상한 전파를 송수신했다.

"채드는 지금 퀴니와 놀고 있어요. 샤바. 15층 22호실이에요. 샤바."

"잘했어."

바퀴벌레 왕자를 칭찬한 병규는 발걸음을 빨리했다.

휘이잉.

그의 움직임이 무서울 정도로 빨라졌다. 화차는 아예 쫓아오지도 못할 정도였다.

저 멀리 보이던 번쩍거리는 빌딩이 어느새 손에 잡힐 듯이 가까워졌다.

1층엔 금속 탐지기를 비롯한 복잡한 보안절차가 있었다. 그런 보안절차들을 정상적으로 통과하려면 상당한 시간을필요로 한다. 그러나 병규는 잠시도 지체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아예 문이 없는 벽으로 달려가 빌딩의 외벽을 평지처럼 타고 오르며 15층의 복도 창을 깨고 들어갔다.

"냐. 냐?"

숨을 헐떡이며 뒤쫓아오던 화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수직으로 선 건물 벽을 평지처럼 달려?

"냐. 거짓말!"

화차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경악했다. 믿기 어려운 일이 눈앞에서 펼쳐진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그녀를 당황케 한 것은.

"냐아! 난 어쩌란 말야!"

유감스럽게도 그녀는 스파이더맨이 아니었다.

"채드!"

22호실의 문을 뻥 걷어차며 병규는 곧장 채드를 불렀다.

"아. 병규 씨."

퀴니와 소꿉장난을 하고 있던 채드가 방긋 웃으며 그를 반겼다. 병규는 수사노오를 침대에 조심스럽게 눕히며 그에게 부탁했다.

"당신의 도움이 필요해요. 채드." "네?" 멀뚱한 표정의 채드는 병규와 침대에 누운 수사노오를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학교에 갈 때만 해도 이제 여름방학이 시작된다며 '해방이다.'

'자유다.' '하렘이다.' 한껏 들떠있던 그가 지금 갑자기 피투성이가 된 사내 하나를 들쳐 메고 왔다.

패싸움이라도 한 것일까?

공연한 의심을 하며 침대에 쓰러진 수사노오에게 눈길을 주던 채드. 돌연 그의 얼굴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엇! 이 자는!"

눈에 익은 얼굴이다.

"푹풍의 군주."

채드는 단번에 수사노오의 정체를 파악했다.

감히 총수인 퀴니를 납치한 무례배. 채드가 그를 본 곳은 가스펠에서 발행된 척결명령서에서였다.

사실 가스펠에서는 신풍을 징계하기 위해 음으로 양으로 많은 힘을 쏟았다. 그러나 신풍의 자취가 너무도 신비하여 지금까지는 별 성과를 보지 못했다. 그런데 갑자기 병규가 홀아비가 과부보쌈 하듯 신풍의 군주를 들쳐 메고 온 것이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채드의 얼굴 위로 살얼음 같은 냉기가 내려앉았다.

"잠시만. 이제부터 설명할 게요."

가쁜 숨을 몰아쉰 병규는 화차를 만나게 된 이야기부터 차근차근 설명하기 시작했다.

"불가능합니다."

병규의 얘기를 들은 채드는 고개를 저었다.

심장이 멎어버린 사람을 다시 살려보겠다니. 터무니없는 소리다.

"정말로 안 될까요?"

병규는 음울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심장이 멎은 지 한참이나 지난 사람입니다. 체온이 유지되고 있는 것이 이상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다시 살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정말로?"

"안 됩니다. 안 돼요.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에요."

거듭되는 병규의 부탁에도 채드는 점잖게 거부했다.

"휴." 깊은 한숨을 내쉰 병규. 별 수 없이 그는 최후의 수단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퀴니야."

"헛!"

병규가 무표정한 얼굴로 퀴니를 부르자 냉정하던 채드의 얼굴이 참담하게 일그러진다.

"서, 설마 비겁하게 총수님을 이용하려는 것은 아니겠지요?"

병규는 그를 보며 씩 하고 웃어 주었다.

"앞으로 비겁을 생활신조로 여길 생각입니다."

"!"

결국 채드는 병규의 사주를 받은 퀴니의 한마디에 무너지고 말았다.

처음엔 완강하게 저항했던 그였지만 일단 퀴니의 명령이 떨어지자 놀라울 정도로 신속하게 일을 처리했다.

곧바로 대기 중인 의료반에 연락을 놓고,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특수장비들을 공수해오기 시작했다.

"살다 살다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 엉뚱한 일을 하게 될 줄이야."

채드의 가시 돋친 말에 병규는 조금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어디까지나 조금이지만.

"그런데 왜 그렇게 수사노오를 살리려는 거죠? 그는 적이잖아요?"

채드가 물었다.

"한 방 먹여 줄 생각이거든요."

"네?"

채드는 병규의 말이 이해되지 않는 듯 고개를 갸웃해 보였다.

병규는 그를 향해 짙은 미소를 보였다.

"전에 싸움에서 졌을 때. 다음에 만나면 꼭 이겨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도저히 이해 못할 사람이군요."

채드는 머리를 저었다. 다음에 싸워서 이기기 위해 다 죽은 원수를 다시 살려낸다고? 상식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다.

"맞아."

호랭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채드의 말에 동감을 표했다.

"참 이상한 놈이야. 하지만 그것이 녀석의 매력인지도 모르지."

폭주 날라리 신선님의 입가에 영문을 알 수 없는 미소가 번졌다.

넌 물만 있으면 되지?

수사노오를 채드에게 넘긴 병규는 곧바로 특재대에 연락을 넣었다. 본부장인 자영은 막 샤워를 마친 듯한 촉촉한 음성으로 전화를 받았다.

"본부장님? 병규입니다. 네. 다름이 아니라 신풍의 은신처를 알아냈습니다." 병규는 화차에게서 들은 신풍의 비밀아지트와 발칸의 소식을 자영에게 아려주었다.

자영은 물론 이 사건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사실 병규와 마찬가지로 그녀 역시 발칸과 전혀 무관한 사이가 아니었다. 예전에 발칸이 전국을 피로 물들이고 다닐 때, 경찰의 대대적인 수색에도 용의자가 검거되지 않자 끝내 특재대에 사건 의뢰가 접수된 적이 있었다.

당시 자영은 몇 명의 요원들을 현장에 파견했는데, 유감스럽게도 요원을 파견한 다음 날 성난 조폭들에 의해 사건이 종결되고 말았다. 물론, 실제로 발칸을 잡은 것은 병규였으나 당시 사정상 언론의 초점은 무차별한 살인에 대한 조폭들의 응징 쪽으로 맞춰져 있었다.

하여간 그렇게 어정쩡하게 종결된 사건이다 보니 자연 꼼꼼한 자영의 성격상 계속 신경이 쓰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