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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수없이 실전을 거듭한 (1)

"덤벼!"

벤젠스 소대장이 외치며 검을 내리쳤다. 콧수염은 땅과 수평으로 검을 들고 중단을 벴다.

벤젠스 소대장의 검과 콧수염의 검이 만났다.

까-앙!

검이 부딪친 순간, 콧수염은 발을 앞으로 내딛고는 무게를 실어 상대를 밀어냈다.

벤젠스는 검을 휘두르는 데만 집중했다가 속절없이 뒤로 튕겨 나갔다.

"억!"

균형을 잃은 탓에, 밀린 걸 넘어 아예 뒤로 데굴데굴 굴렀다. 그가 구른 자리로 흙먼지가 일었다.

다리 사이에 머리를 넣은 자세로 벤젠스의 몸이 엔크리드 바로 옆에서 멈췄다.

벤젠스 소대장과 엔크리드의 눈이 마주쳤다.

짧은 침묵이 둘 사이에 감돌았다.

휘잉 하고 어디선가 찬바람이 불어왔다.

벤젠스는 얼굴이 시뻘게졌다.

엔크리드는 신중하게 단어를 골라 말했다.

"...구하러 왔다면서요."

벤젠스의 동공이 심하게 떨렸다.

"저 새끼, 왜 저렇게 세냐?"

엔크리드는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아니, 구하러 왔다면서, 왜 한 방에 나가떨어지냐고.

몸을 한 번 더 굴려 일어난 벤젠스 소대장이 바닥에 떨어진 검을 쥐고 다시 자세를 잡았다.

"씹, 이 새끼."

그는 상대를 노려보다가 외쳤다.

"쏴!"

벤젠스의 소대는 궁병이 반이었다.

"마구 쏴!"

그의 명령에 화살이 날아들었다.

"막아라!"

"방패를 들어!"

콧수염 뒤를 바짝 쫓아오던 적병 몇이 튀어나오더니, 방패를 들이댔다.

퍼버벅!

화살이 방패에 막혔다.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다.

방패 위로 고개를 내민 콧수염이 무서운 눈으로 엔크리드를 노려봤다.

그러곤 부하의 방패 하나를 빼앗았다.

이런 미친.

엔크리드는 어금니를 꽉 깨물고 벌떡 일어났다. 쿼렐이 꽂힌 다리와 등판에서 불에 덴 듯한 통증이 찾아왔다.

신음을 흘린 틈도 없었다.

크릉.

옆에서 표범이 송곳니를 드러냈다.

그 사이 콧수염이 든 방패가 훌쩍 가까워졌다.

"미친 새끼가!"

벤젠스가 놀라 외쳤다. 엔크리드는 통증을 견디며 벤젠스의 허리춤에 꽂힌 숏소드를 뽑았다.

챙.

그 사이 콧수염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뒤로 뛸 엄두는 나지 않았다.

훙.

벤젠스가 상대의 검과 사선을 만들며 검을 후려쳤다. 힘으로 돌진을 막을 심산이었다.

콧수염을 검을 부딪치는 척하더니, 손목을 젖혀 검을 뒤로 빼, 벤젠스의 검을 흘려보냈다.

붕.

벤젠스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그 뒤로 표범이 팍 하고 땅을 찼다. 콧수염은 일반 병사와 달랐다.

방패를 비스듬히 밑으로 내리더니, 달려들던 표범의 진로를 막고 밖으로 쳐 냈다.

"캉!"

울음을 토해 낸 표범이 옆으로 날아갔다. 이 모든 동작이 달려든 뒤 고작 몇 초 이내 일어난 일이었다.

숏소드를 쥔 엔크리드는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곧 심상에서 상대와 나만 남겼다.

한 점의 집중이다.

부상과 안도, 감정의 변화가 고도의 집중력을 이끌어냈다.

순간적으로 시간이 늘어진 듯한 착각이 들었다.

엔크리드의 눈에 콧수염의 핏발 선 눈이 보였다. 그와 동시에 상대의 손도 보였다.

콧수염은 그립의 끝, 폼멜 바로 위를 잡았다. 리치를 길게 해서 단숨에 베어 낼 심산이었다.

그는 그 상태 그대로 검으로 호를 그렸다. 위에서 밑으로.

언제 검을 들었는지도 모르겠는데, 검이 내려온다. 칼날이 들이친다. 그게 마치 단두대의 칼날 같았다.

콧수염의 칼날이 이제 됐다고 오늘을 다시 반복하라고 하는 것 같았다.

엔크리드는 그게 싫었다.

호흡을 삼킨다. 숨을 내쉴 틈은 없다. 아프다고 징징거릴 틈은 더 없다.

익힌 건 중검술, 하지만 지금은 라그나에게 배운 기본기로 헤쳐나갈 수 없다.

그렇다면.

배우고, 익히고, 보고, 따라 한 수십 개의 검술 중 지금 쓸 수 있는 건 무엇인가.

수없이 당하며 연구하고 또 연구했기에.

언제나 보고 배우는 자세를 견지했기에.

그의 몸이 본능에 따라 검을 들었다. 숏소드는 충격에 약하다. 힘으로 막으면 검째로 부서질 터였다.

콧수염은 승리를 확신했다.

눈앞의 얄미운 놈의 목숨을 가져갈 수 있으리라.

훙. 티잉, 치이이이잉. 팍!

결론만 말하자면 콧수염의 일격은 실패했다.

엔크리드의 어깨만 벴을 뿐이었다.

깊게 베여 피가 울컥 솟아났지만, 죽진 않았다. 죽이지 못했다.

"너."

콧수염은 재차 공격하는 대신 놀란 토끼 눈을 떴다.

그의 눈에 불신감이 가득 찼다.

"어디서 배운 거냐!"

콧수염이 외쳤다. 엔크리드는 솔직하게 답했다.

"싸우다가 배웠다."

미치 휴리어는 엔크리드 앞에 수없이 유검, 흘리는 기술을 보여 줬다.

그의 흘리는 기술은 그야말로 일품이었다.

그게 위험한 순간에 부지불식 튀어나왔다.

콧수염의 검이 내려치는 순간, 숏소드로 받아 내며 옆으로 흘려 흩어 낸 거다.

칼날 중간을 들이밀어 힘을 받아 내고 그립을 느슨하게 풀며 흘린다.

힘의 배분, 타이밍, 어느 하나 잘못됐다면 이렇게 될 수 없었을 터였다. 고작 어깨만 베이고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대답한 엔크리드도 내심 놀랐다.

'이게 되네.'

수없이 보고 당하고 연구했지만, 실제로 쓴 건 처음이다.

아니, 고된 훈련 없이 처음 쓴 기술이 성공했다.

그건 참 신기한 일이었다.

지독할 정도로 재능이 없는 엔크리드에게는 말도 안 되는 일이기도 했다.

처음 겪는 일에 엔크리드는 심장이 뛰었다. 상대의 검을 흘리는 유검식의 기술은 어지간한 단련으로는 흉내도 못 내는 기술이었음에.

"이 새끼가!"

콧수염의 뒤에서 허공에 검을 휘둘렀던 벤젠스가 반전해 외치며 달려들었다.

콧수염은 몸을 돌려 벤젠스의 검을 쳐 내고 방패로 다시 전면을 가렸다.

퍽!

화살 하나가 방패에 꽂혔다.

솜씨 좋은 궁병 하나가 그를 노리고 쐈는데 그걸 막은 거다.

챙! 챙!

콧수염은 제자리에서 벤젠스와 검을 두어 번 더 나눴다.

그는 불길이 이는 눈으로 엔크리드를 노려봤다.

엔크리드는 자신의 손에 들린 숏소드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미 다시 돌격해서 죽이긴 글렀다.

오히려 여기서 발이 묶였다간 다 죽게 생겼기에, 콧수염은 몸을 돌렸다.

"퇴각한다!"

그가 외치고 물러났다. 물러나며 끝내 엔크리드를 향해 말했다.

"너, 잊지 않겠다."

엔크리드는 진심을 담아 답해 줬다.

"잊어도 되는데."

진짜였다. 굳이 자신을 기억해서 뭐 하겠다고.

벤젠스의 소대는 더 깊이 쫓지 않았다. 선봉에 섰다고 해도 지금은 아군보다 훌쩍 앞선 채였다.

여기서 더 들어가면 역공으로 벤젠스의 소대가 전멸될 수도 있었다.

"야, 너 어깨!"

벤젠스는 콧수염이 물러날 때까지 노려보다가 돌아와선 엔크리드를 살폈다.

어깨에서 피가 죽죽 흘러내리는 중이었다.

막고 흘렸으나, 완벽할 순 없었다.

그래도 엔크리드는 웃었다.

'이게 되네.'

속으로 아까 처음 기술이 성공했을 때와 같은 말을 내뱉었다.

어떻게 상대의 검을 흘렸는지 되새기는데, 제대로 기억도 나지 않는다. 몸이 멋대로 움직였다.

희열이 차올랐다. 이런 적이 처음이었으므로.

"야이, 미친놈아, 웃을 때냐?"

벤젠스가 다가와 어깨를 천으로 칭칭 감았다.

"붕대 없어! 당장 뒤로 빠진다. 3소대 뒤로!"

벤젠스는 자신의 소대를 뒤로 물렸다. 이미 이긴 싸움이었다. 중대장은 적의 후미를 쫓되, 너무 깊게는 가지 말라고 했다.

주술에 한번 크게 데여서, 이쪽도 정비가 필요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다."

벤젠스가 부축하며 말했다. 엔크리드는 자신을 붙든 벤젠스를 보며 입을 열었다.

"표범도 데려가야 합니다."

서로 목숨을 구했다. 이제 와서 버리고 갈 순 없는 거다.

"미친 자식아, 네 몸 걱정이나 해라."

그리 말하면서도 벤젠스는 나가떨어진 표범까지 챙겼다.

어딜 다쳤나 싶어 보는데, 표범의 잇새로 피가 흐르는 게 보였다.

'등 뒤에 축축하게 흐르는 게 뭔가 했더니.'

잇몸에서 피를 흘리면서도 자신을 놓치지 않은 거다. 엔크리드는 표범을 품에 안았다.

무겁진 않았다. 이런 몸으로 어떻게 그런 힘을 냈을까.

낑.

표범이 품에서 신음을 흘렸다.

"가자!"

그 뒤 벤젠스가 엔크리드를 부축해 전장을 이탈했다.

중간부터 엔크리드는 비몽사몽이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린 탓이었다.

검은 강의 뱃사공이 허공에 나타나 물었다.

"야,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냐?"

과다 출혈로 헛것이 보였다.

대답할 힘이 없어 빤히 보니, 그가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다시 시작하면 그만이잖아."

"반복되잖아. 수없이, 계속."

"왜 그렇게까지 하는데?"

"어차피 다시 시작될 오늘, 대충 살면 어때서."

"안주해, 멈춰, 갈고닦아서 다시 오늘을 맞이해. 죽으면 더 완벽한 오늘을 시작할 수 있잖아."

"아, 죽음의 공포 때문에 그래? 아니, 그거 하다 보면 익숙해진다. 정신을 반쯤 놓으면 어때, 누가 본다고, 누가 안다고. 그 오늘은 오롯이 너만을 위한 오늘인데."

엔크리드는 입을 열 기운이 없었다. 이제는 제대로 걷지도 못해서 반쯤은 끌려가는 중이었다.

그래서 그는 속으로 답했다.

왜 안주해야 하는가.

반복된다고, 다시 기회가 있다고 어째서 오늘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 건가.

그럼 수없이 반복한다고 해도 계속 제자리인 자신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 살면 오늘에 갇힐 것이다.

그럼 내일이 없다.

내일이 없다면 꿈도 없다. 꿈이 없다면 아무 의미도 없는 거다.

'난 멈추기 싫어.'

힘겹게 내딛는 걸음이 다른 이에 비해 반의반밖에 안 된다 하여도.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 그렇게 살고 싶었다.

기사가 될 수 없다고 해도, 기사가 되기 위해 발악하고 싶었다.

툭.

걸을 힘이 없어 늘어졌더니, 발이 돌부리에 걸렸다.

"죽지 마라."

귀 바로 옆에서 벤젠스가 중얼거렸다. 시야가 흐릿했다.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어느샌가 검은 강의 뱃사공은 사라졌다.

엔크리드는 새삼 이게 어떤 저주인지 알 것 같았다

"다시 시작하면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오늘을 반복하다 보면 이런 생각이 들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엔크리드는 아니었다.

언제나 내일을 향해 걷고자 했다.

실패한 내일이, 완벽한 오늘보다 낫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다.

'안주하면 끝나.'

이게 축복이 아니라 저주인 이유다. 수없이 오늘을 반복하다 보면 다음 날을 맞이할 수 없다.

생각의 끝에 엔크리드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래서 이게 최선이었나?'

모른다. 완벽한 오늘이 어떤 오늘인지는 신만이 알 것이다.

엔크리드가 보낸 '오늘'은 반은 운이 따라 주기도 한 오늘이었다.

그 운이 다시 시작하는 오늘에서 찾아오리란 법은 없었다.

그렇다면 언제나 그러하듯 내일을 향해 걸어가면 그만이다.

품 안에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흐려진 눈으로 밑을 보니 흑표범이 자신을 바라봤다.

호수 같은 푸른 눈이 보인다.

그리고 엔크리드는 정신을 잃었다.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럼 다시 오늘을 반복하겠지.

내일로 가지 못했다고 해서 낙담하진 않을 것이다.

다시 반복해, 또다시 아등바등 살아갈 것이므로.

어둠이 찾아와 엔크리드를 감싼다. 그는 어둠의 세계에 초대된 방랑자가 되어 정신을 잃었다.

* * *

"내가 잘못 골랐을까?"

검은 강의 뱃사공이 보였다.

엔크리드는 그의 혼잣말을 들었다.

그가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아무것도 없는 반들반들한 검은 거울 같은 낯이 보였다.

"두고 보자고."

그의 한마디에 정신이 들었다. 눈을 뜨니, 막사 천장이 보였다.

"어우, 살았수? 이번에는 정말 뒈지는 줄 알았수다."

렘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깨, 등, 다리, 옆구리 안 아픈 곳이 없었다.

머리도 어질어질했다.

"마지막 어깨를 베인 게 컸수다. 어떤 놈이 했는지 모르지만, 야무지게 베었수."

렘이 계속 떠들었다. 정신이 반쯤 나갔다가 돌아온 엔크리드는 몇 번 눈을 깜빡였다.

그러다 곧 옆구리에서 온기가 느껴진다는 걸 깨닫곤 손을 내렸다.

어깨 어림에서 아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손에 부들부들한 털이 만져졌다.

"크르릉."

손길이 기분 좋은지 흑표범이 기분 좋은 소리를 냈다.

'오늘을 넘겼구나.'

"기절하는 거 버릇 들겠수다."

"누군 졸도하고 싶어서 졸도하냐? 목말라."

"그랬수?"

엔크리드의 눈에 렘이 팔짱을 낀 채 앉아 있는 게 보였다.

그 뒤에 선 왕눈이도.

왕눈이가 물을 가져다줬다. 몇 모금 마시니 마른 대지에 물을 주듯, 목구멍이 금세 촉촉해졌다.

"이야, 우리 분대장 명 질기다니까요. 봐요, 살았네."

물을 마시는 걸 보고 왕눈이가 말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습니다."

작센이 대수롭지 않게 말하고.

저 뒤쪽으로 종교에 심취한 분대원이 기도를 올린다.

"주여, 기도를 들어주심에 감사 기도를 올리나이다."

라그나는 조용히 자신을 지켜보다가 말했다.

"괜찮습니까?"

"죽을 정도는 아니야."

살았으니까,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오늘을 지나 내일을 맞이했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엔크리드는 수수하게 웃다가 다시 누웠다.

46. 수없이 실전을 거듭한 (2)

전신 곳곳에 자상과 관통상을 입어서 치료사가 다녀갔다고 들었다.

"다행히 영구적인 장애는 없을 거라네요. 운도 좋지요. 우리 분대장."

왕눈이가 웃으며 말했다.

"꼭 내가 다쳤으면 하는 말투 같다."

"아니, 걱정하는 겁니다. 걱정. 영광인 줄 아세요. 제가 남자 걱정하는 건 분대장이 처음이니까."

"오냐."

곧 철수하리라 생각했는데, 아군은 아직도 아즈펜 공국과 대치 중이었다.

전투가 더 있으려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엔크리드와는 상관없는 이야기일 것이다.

이런 몸으로 전장에 다시 서는 건 무리였다.

구경만 하는 거라면 모를까.

왕눈이가 사과를 놓고 가서 그걸 으적으적 씹어 먹고 있자니, 곧 렘이 들어왔다.

분대 전원이 자리를 비워서 막사에 사람이 없었다.

렘은 엔크리드 옆에 앉더니, 무릎 위에 팔꿈치를 얹고 손등 위에 턱을 얹었다.

그렇게 입술을 반듯하게 다문 채로 렘이 엔크리드를 빤히 바라봤다.

"고백할 생각이라면 거절을 먼저 하지."

"나 여자 좋아하는 거 모르슈? 난 분대장과 생판 처음 보는 여자가 물에 빠지면 여자를 구할 거요. 물론 그 여자가 예쁘다는 전제하에."

"괜찮아. 나 헤엄 잘 쳐. 안 구해 줘도 알아서 잘 살아."

"그럼 나중에 나 구해 주슈. 생각해 보니, 내가 헤엄을 잘 못 치네."

그럼 이 새끼 무슨 생각으로 물에 빠지는 여자를 구한다고 한 걸까.

엔크리드는 참 렘답다고 생각했다.

"응. 돌을 던져 주마."

평소와 같은 농담 따먹기였다. 그러다 렘이 입을 멈추고 빤히 엔크리드를 바라봤다.

회색 눈동자가 떨림 없이 엔크리드를 직시했다. 그 눈에서 전에 없는 진지함이 느껴졌다.

"할 말 있냐?"

"주술인 거 어떻게 알았수?"

음? 엔크리드는 이 질문을 여기서 받으리라 생각하지 못했다.

"정찰 임무 중에 봤으니까."

"그거만 보고 주술이란 걸 짐작했단 거유? 깃대가 목표인 걸 알고 달리는 것 같던데?"

맞다. 그게 목표였다. 다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반복한 오늘을 통해서 알았다고 할 순 없었다.

적절한 핑계가 필요했다.

그래서 이런저런 거짓과 변명으로 둘러대려고 하는데, 빤히 자신을 보는 회색 눈동자가 마음에 틱틱 걸렸다.

솔직히 말한다고 해도 믿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걸 무조건 거짓으로 넘겨야 할까.

어설픈 거짓말은 금세 알아챌 것이다. 그런 직감이 왔다. 엔크리드는 렘을 그렇게 대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사실을 섞어서 말했다.

"예전에 개척민 출신과 같이 지낸 적이 있다."

진실이었다. 렘이 개척민 출신이었으니까.

"그 친구한테 이것저것 들은 게 있어."

이 또한 진실이었다. 렘이 주술에 관해 말해 줬으니까.

"그래서 궁리하고 추측했지."

이건 꼭 진실이라 할 수 없지만, 어떻게 보면 진실에 가깝다고 할 수 있었다.

궁리하고 추측하는 대신 오늘을 반복하고 몸으로 굴러 알아냈으니까.

머리로 생각하는 대신 몸으로 생각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엔크리드는 그렇게 믿고 말했다.

"깃대가 주술의 매개인 것 같더라고. 안개가 끼기 전에 적 대형이 이상한 걸 봤고 뭐, 그다음에는 돌격했지."

"흐음."

거짓에 진실을 섞으면 왜 사람들은 잘 속는가.

그건 말하는 사람이 진심으로 말하기 때문이었다. 진심이기에 감이 좋은 사람이라 해도 상대의 말에서 거짓의 표식을 찾아내기 어렵다.

엔크리드는 말할 수 없는 것 빼고는 전부 진심을 담아 말했다.

렘은 그 말을 믿었다.

완전히 믿지 않았다고 해도 따질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그런 거였수? 보자마자 알아낸 게 신기했수다."

"주술이면 뭐?"

"그런 거 함부로 쓰는 거 아니라고 알려 줄라고 그랬수다."

"그래?"

렘은 고개를 끄덕였다. 엔크리드는 전투가 있던 날 렘이 자리를 비웠다는 걸 떠올렸다.

분명 돌격을 같이 했으니, 자신이 있는 곳으로 올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그 뒤로 쭉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부대로 복귀했다.

"전장에서 어디 갔었는지 물어보고 싶은데."

"별거 아니유. 그 깃대를 세운 놈이 누군지 통 궁금해서 잠깐 보고 왔수다."

"...보고 왔다고?"

"도끼로 얘기도 나누고 왔수다."

렘이 씨익 웃으며 막사 밖으로 나갔다.

엔크리드는 깃대를 쓰러뜨렸던 때를 떠올렸다.

주술사 놈이 딸랑딸랑 방울 따위를 흔들다가 금세 보이지 않았었다.

그때는 깃발을 망가뜨리기 바빠서 신경도 쓰지 못했는데.

그 뒤 홀로 뒤로 내빼다가 렘의 도끼에 걸린 듯했다.

엔크리드는 별일 아니라 생각하고 넘어갔다.

렘이 돌발 행동을 하는 게 한두 번도 아니고.

이전 전투에서는 매의 발톱인가 하는 놈을 잡겠다고 적진에 뛰어들기도 했었다.

그걸 아는 소대장은 깔끔하게 사고뭉치 분대를 전력에서 제외했다.

남은 분대만 소대 전력으로 친 거다.

그건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평소와 다른 점은 있었다.

이번에는 엔크리드가 먼저 진형을 이탈했다는 거다.

그게 특이한 일이었다.

"여, 괜찮냐?"

그 소대장이 막사를 찾았다.

"병문안 온 겁니까? 우리 복귀 안 합니까?"

엔크리드가 대뜸 물었다. 소대장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위에서 아직 명령 안 떨어졌다. 전원 대기야."

곧 겨울이다. 전투가 이어지기 힘든 계절이다. 그렇다고 이쪽 진지를 완전히 비워 놓지는 않겠지만, 이번 전장에서 이쪽 대대가 크게 힘을 썼으니, 교대는 해 줄 것이다.

그러니 아직 복귀 명령이 안 떨어진 게 이상한 일이다.

소대장은 엔크리드를 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너."

"네."

엔크리드의 이탈, 소대장은 그때 당시에는 이게 큰일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드디어 엔크리드가 미쳤나 하는 생각만 했을 뿐.

이후 엎드리란 외침과 방패를 들란 외침에 간신히 살아남고.

안개 속에서 이제 죽었나 싶은 순간에 갑자기 안개가 걷히고.

반전해 적군과 싸웠다.

나중에 들어 보니, 안개가 주술이었고 주술은 매개가 있는데, 그 매개가 망가지거나 주술사가 죽지 않으면 주술이 풀리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 전부 중대장의 입을 통해서 들은 거다.

"누가 그랬을까?"

중대장이 녹색 눈으로 자신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었다.

소대장은 그때 엔크리드의 이름이 떠올랐다.

적어도 그 분대가 무슨 짓을 했다고 판단했다.

왜, 그, 안개가 끼기 전에 엔크리드가 뛰쳐나가지 않았나.

그리고 그 외침도 엔크리드의 목소리 같았으니까.

소대장이 생각을 정리하며 입을 열었다.

"주술이라고 하더라고, 그 안개가."

"아, 네, 그렇죠. 제가 보고했습니다."

맞다. 정찰 임무로 파견 나온 엔크리드가 보고한 내용이다.

"음. 그랬지."

소대장은 잠시 엔크리드를 보다가 몸조리 잘하라는 말을 건네고 일어섰다.

'말도 안 되지.'

그는 엔크리드의 실력을 안다. 최하급은 아니다. 잘 쳐 줘야 어디 마을 자경단장이나 할까.

휘하 분대원 중에는 무서운 놈들이 많지만, 엔크리드는 아니다.

주술의 매개는 적군이 바보 천치에다가 머저리가 아니고서야 적진 안쪽 깊숙한 곳에 있었을 것이다.

그럼 누군가 거기까지 잠입했어야 한다는 건데.

'그 자욱한 안개를 뚫고?'

쿼렐과 화살 비를 맞으며?

사고뭉치 분대장이?

어림도 없지.

혹시나 해서 렘이 했나 물어보니 아니란다.

라그나는 말할 것도 없었다. 안개가 걷히고 나니, 어느새 곁에서 싸우고 있었다.

그럼 나머지 분대원인가 싶지만, 그들도 뒤쪽 소대 진형의 일부로 싸웠다.

'혹시 본대에서 지원이 나왔나?'

소대장은 그리 생각하며 막사 밖으로 나섰다. 어느새 훅 떨어진 기온 탓에 추위가 찾아왔다.

"진짜 회군 안 하나."

그도 도시의 공기가 그리웠다. 집과 아내, 딸아이가 보고 싶었다.

화롯불에 감자를 구워 먹고, 푹 자고 싶었다.

* * *

이틀을 누워 있자 엔크리드는 일어나 움직일 만했다.

"무리하지 마시죠?"

왕눈이가 걱정했으나, 생각보다 몸 상태가 괜찮았다.

"그 맹수는 갔죠?"

왕눈이가 물었다. 침대에 비스듬히 앉아 있던 엔크리드가 고개를 끄덕이며 주변을 살폈다.

"그러게. 안 보이네."

"분대장 잘 따르는 것 같던데."

"넌 무서워하지 않았냐?"

"전 무섭죠. 맹수잖아요. 맹수."

"아직 새끼 같던데?"

"엔리라고 정찰 같이 다닌 사냥꾼 알죠? 분대장이랑 같이 나갔다고 하던데."

대뜸 왕눈이가 물었다. 엔크리드가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왕눈이 놈, 발 참 넓다고.

어떻게 엔리까지 아는 걸까.

"그 친구가 평원 사냥꾼 출신이란 말입니다."

그건 엔크리드가 더 잘 안다. 직접 배운 것도 많고.

"엔리가 말하길, 그린 펄 초원에 맹수가 많이 사는데 그중에서 으뜸가는 놈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게 뭔지 아십니까?"

"뭔데?"

"푸른 눈의 흑표범, 청안표랍니다. 레이크 팬서라고도 부른다고 하고요."

왕눈이가 호들갑을 떨었다. 이 이야기가 못내 흥미를 돋운 듯했다.

"눈이 마치 호수와 같아서 레이크 팬서라고 하기도 하는데, 하여간 얘들이 가젤이나 누를 잡아먹기도 하지만, 보통 땅에 있는 무슨 기운을 삼키고 산다고 하더라고요. 영물이랍니다. 그 발톱 하나만 해도 만 크로나가 넘는다고 하던데."

크로나는 제국이 만든 화폐 단위다.

동화 한 닢을 1크로나로 치는데.

동화 백 닢이 은화 한 닢이고, 다시 은화 백 닢이 금화 한 닢이니.

만 크로나면 금화 한 닢의 가치였다.

발톱 하나에 금화 한 닢이라.

엔크리드의 봉급보다 높았다.

"그 발톱이 사람 멱을 따던데, 뽑을 수 있겠냐?"

"...아우, 전 욕심 없어요."

왕눈이가 손사래를 쳤다. 적당히 몸을 움직이고 있으니, 이마에 땀이 났다. 아릿하게 통증이 올라오기도 했다. 그래도 이 정도면.

하도 죽다 보니 통증의 정도로 상처의 상태를 어림짐작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무리하면 덧납니다."

작센이 그걸 지켜보다 말했다. 다들 어디 갔는지, 왕눈이와 작센만 남아 있었다.

"조절하는 중이다."

대강 답하고 다시 몸을 움직이다 보니, 콧수염의 일격을 흘렸던 게 떠올랐다.

그게 어떻게 가능했을까?

다시 하라고 하면 할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안 될까?

아니, 또 몇 번 해 보면 될 것 같기도 했다.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자니, 렘과 라그나가 돌아왔다.

"좀 떨어져서 걸어라. 게으름 옮는다."

렘이 툭툭 시비를 걸고.

"넌 왜 매일 죽고 싶어 안달인 거냐?"

라그나는 그 시비를 두 배로 받아쳤다. 싸움이 격화되기 전에 엔크리드가 먼저 입을 열었다.

"궁금한 게 있는데. 검술 쪽으로."

둘의 시선이 돌아갔다.

"말하슈."

"검술이라면 제가 답해 드려야죠."

둘이 다시 서로를 노려보기에 엔크리드가 급히 설명을 이어 갔다.

어려운 얘기는 없었다. 적이 하는 걸 몇 번 봤는데 그게 몸에 배서 부지불식간에 나오더라.

그런 얘기였다. 느낀 바를 최대한 덤덤히 말하니.

"그런 거야 뭐, 하다 보면 되는 거 아니유?"

렘이 먼저 답하고.

"재밌는 경험이군요. 전 어릴 때부터 그래서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분대장 같은 경우에는 음, 그렇죠. 신께서 축복을 내려준 겁니다. 행운의 여신이 발을 헛디뎌 금화를 쏟은 거죠."

라그나가 이어 말했다.

둘 다 딱히 도움이 되는 말은 아니었다.

그러다가 둘이 또 엔크리드를 사이에 두고 투덕거리더니, 자세한 설명이 튀어나왔다.

"싸우다 보면 시야가 트일 때도 있습니다. 보통은 수없이, 정말 수없이 실전을 거듭해야 그런 일이 한 번쯤 일어난다고 하죠. 한 점의 집중을 갖췄다면 그럴 확률은 더 높을 테고요."

"야수의 심장이 좀 몸에 붙었잖수? 눈을 감지 않고 상대를 빤히 볼 수 있는 능력이 생긴 거유. 그런 기회가, 그러니까 눈앞에서 빤히 상대가 검을 쓰는 걸 볼 수 있었다면, 검을 쓰는 방식이나 힘의 배분이 보일 때도 있었을 거유. 그럼 몸이 알아서 반응할 때도 있는 거고, 그런데 그건 어디까지나 기본기가 갖춰졌을 때 얘긴데."

"기본기도 기본기지만, 거친 실전을 수백 번은 거쳐야 할 텐데."

둘의 말을 들은 엔크리드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아.'

누군가에게는 그저 하루뿐인 오늘이.

엔크리드에게는 더없이 치열한 수백 번 넘는 오늘이었다.

그것도 그저 그렇게 포기하며 보낸 오늘이 아닌.

매 순간 발악하고 최선을 다해 보낸 오늘이다.

견디고 즐기며 보낸 숱한 시간이 그에게 행운을 준 것이다.

기실 행운이랄 것도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베이고 찔리고 긁히고 죽으면서까지 이겨 내려고 연구한 대가지.

그 기반에는 당연하게도 대담함을 준 야수의 심장과 한 점의 집중이 있었다.

'새삼 고맙네.'

고로 이 둘 덕분이었다. 하물며 라그나는 자신 검술의 기초를 다 뜯어고쳐 주지 않았나.

미치 휴리어와의 전투, 콧수염의 추적, 전장에서의 오늘.

복합적인 생각이 머릿속을 채워 한 가지 욕망을 불러일으켰다.

다시 검을 쥐고 싶다. 휘둘러 보고 싶다. 마지막 흘리기 기술이 얼마나 몸에 붙었는지 시현해 보고 싶다.

"대련하고 싶다."

엔크리드가 중얼거리자, 렘과 라그나 둘 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중 렘은 말도 덧붙였다.

"내가 어릴 때부터 넌 참 정상이 아니다, 미쳤냐는 소리를 많이 듣고 살았는데, 내가 볼 때 분대장은 나보다 더 미친 놈이우."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정말 렘에게는 듣고 싶지 않은 말이었다.

툭하면 주변 병사를 괴롭히질 않나.

상관 머리통을 날려 버리려고 하질 않나.

이런 미친놈이랑 동급, 아니 그보다 더 미친놈이라니.

"오늘은 그 말에 동의를 표할 수밖에 없겠군요. 그 몸으로 무슨 대련입니까?"

아니, 대련 좀 하고 싶다고 사람을 이렇게 몰아가는 건가.

엔크리드는 무척 억울했다.

"그 몸으로 대련은 무리다. 분대장."

펄럭.

천막의 문 역할을 하는 덮개를 밀리며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 보니, 요정 중대장이었다.

엔크리드가 몸을 일으키려 하자, 중대장이 성큼 다가왔다.

"너였나."

군례를 표하기도 전에 중대장이 대뜸 물었다.

엔크리드는 예술가가 만든 조각같이 차갑고 날이 선 아름다운 요정을 보며 입을 열려다 바짝 마른 입술에 침부터 묻혔다.

사실 렘이 아니라 이쪽에서 물어 오리라 예상했다.

어떻게 주술을 파훼했는가.

그건 지휘부 쪽에서 물을 질문이니까.

47. 스콰이어 또는 견습 기사

요정 중대장은 전투 이후 주술의 매개가 깃발임을 알았다.

그럼 이 깃발은 부순 건 누구인가?

그렇게 전장의 상황을 역추적하니, 답이 나왔다.

'사고뭉치 분대장.'

그게 그녀가 이곳에 있는 이유다.

대대장은 신경도 쓰지 못한 일이었다. 주술의 매개를 누가 부쉈는지 관심도 없어 보였다.

그는 멍청한 주술사가 실패했다고 생각했다.

기실 대륙의 많은 주술사 중에는 사이비가 많기에 그 말이 합당하게 들리긴 했다.

그게 아니더라도 지금 대대장은 정신을 차리기 힘들 터였다.

무려 직속상관 이상의 위인이 부대에 왔으니까.

"뭐가 말입니까?"

너였냐는 질문에 답이 돌아왔다.

"주술, 깃대, 매개."

짧은 단어 세 개로 그녀는 하고 싶은 말을 다 했다.

엔크리드는 누가 묻지 않아서 그렇지, 꼭 자신이 한 일을 부인할 생각은 없었다.

"네. 제가 했습니다."

"어떻게?"

짧은 질문이 되돌아왔다.

"이렇게 창을 들어서 훅 던졌습니다."

"미끼가 다섯이었다."

깃대는 총 여섯 개, 진짜는 하나였다.

"찍었습니다."

"깃대가 매개인 건?"

"정찰 나가서 본 게 있었고, 주술에 관해 사전에 아는 것도 좀 있었습니다."

대답에 막힘이 없다. 요정의 날카로운 직감은 상대가 거짓을 말한다고 판단하지 않았다.

다만, 모든 걸 솔직하게 말할 생각이 없다는 건 꼭 요정의 직감이 아니더라도 알 수 있었다.

뭐랄까.

자신이 했지만, 그걸 자세히 말하기는 꺼리는 것 같았다.

요정 중대장은 엔크리드의 파란 눈을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그거 물어보러 오신 겁니까?"

"그렇다. 얼굴도 볼 김에."

그러곤 잠깐 말을 삼킨 중대장이 잠시 숨을 고르더니 말했다.

"우린 인연인 것 같군."

중대장이 이 말을 남기고 돌아섰다. 오해의 소지가 많은 말이었다. 황당해서 굳은 엔크리드의 옆구리를 렘이 찔렀다.

"비법이 뭐요?"

"뭐?"

"요정을 꼬신 비법 말해 보슈. 내 경청하겠수."

"대단하군요."

라그나도 한마디 보탰다.

"그런 거 아닌 것 같은데."

엔크리드의 외모는 왕눈이가 인정하는 바이다. 따로 가꾸지 않아도 도시에 있다 보면 여자가 꼬일 때도 있었다.

숫총각이 아닌 건 당연한 거고.

엔크리드는 남녀 간의 오가는 시그널을 착각할 정도로 어리숙하지도, 맹하지도 않았다.

그러니 지금 오간 대화는 절대 아니었다. 시그널 따윈 없었다.

오히려 뒤가 찝찝한 기분만 남았을 뿐이지.

하물며 직속상관의 상관이다.

"따로 만날 시간도 없었을 텐데, 아, 알았수다. 그때 맞수? 의무 막사에 있을 때? 그때밖에 없는데!"

"아니라고, 이 미친놈아."

렘은 그 후로 네 시간을 같은 소재로 떠들었고.

라그나는 중간에 낮잠을 자러 갔다.

나중에 들어온 작센은 의미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엔크리드의 기분이 그나마 나아지게 했고.

나중에 들어온 왕눈이는 뭐라고 떠들려다가 렘이 한 말에 엔크리드 곁에 바짝 붙어 말했다.

"그러니까 전쟁터에서 구르지 말고 저랑 귀부인 살롱이나 하자니까요."

"안 해. 미친놈아."

왕눈이는 크로나를 잔뜩 모아서 제 가게를 차리는 게 꿈이란다.

귀부인 살롱, 그러니까 곱상한 남자들이 귀부인과 노닥거리는 것이 목적인 가게를 차리는 게 꿈이란다.

가게를 차려 술도 팔고 안주도 판다는데.

목적이 분명하니, 술과 안주를 몇 배 값을 받고 팔아도 사람들이 알아서 올 거라고, 같이 하자고 했었다.

렘에게도 같은 말을 했다가 얻어터질 뻔한 뒤로는 잘 꺼내지 않던 제안이 오랜만에 나왔다.

"나한테는 말하지 마라. 도끼로 쪼갠다. 네 머리."

렘이 뒤에서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아, 안 해요."

왕눈이가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럴 때만 야만인인 척하네."

왕눈이가 조용히 툴툴거렸다. 크게 말할 용기는 없어 보였다.

아니, 이 정도면 용기가 출중한 거다. 지금 중얼거린 말을 렘이 못 들었을 리 없으니.

렘이 눈을 부라리려 하자, 왕눈이가 손뼉을 짝 쳤다.

"아, 맞다! 이 얘기하려고 부리나케 온 건데, 분대장 얘기에 깜빡할 뻔했잖아요."

깜빡하긴.

렘이 뭐라고 대거리하기 전에 후다닥 말한 거지.

엔크리드는 알면서 속아 줬다.

중대장과 자신의 러브 스토리만 아니면 그 어떤 얘기도 지금보다는 가치가 있을 테니까.

"온대요."

"누가?"

"아, 왔대요."

왕눈이가 소곤거리며 말했다. 그 표정이 너무 진지해서 엔크리드도 절로 고개가 그쪽으로 기울어졌다.

"기사단 스콰이어가요."

"...붉은 망토 기사단?"

엔크리드가 되물었다.

"네."

현재 엔크리드와 이들이 몸담은 사단의 이름이 사이프러스다.

그건 곧 붉은 망토 기사단에 소속된 한 기사의 이름이기도 했다.

보통 군대 이름에 기사의 이름을 붙이고, 그 기사는 기사단에 속한다.

물론 기사라 불릴 만한 이들이 많지는 않다.

기사는 대륙에서도 흔하지 않은 재능의 소유자들이니까.

그래서 왕국의 기사단에는 기사만 있는 게 아니었다.

후일 기사가 될 가능성이 있는 자들.

기사를 따라다니는 종자이자, 제자인 스콰이어, 또는 견습 기사.

견습 기간이 끝난 뒤 기사에게 인정받으면, 그들은 곧 준기사가 된다. 그렇게 기사단에 종군하게 되는 구조였다.

보통 스콰이어는 기사와 별개로 전장에 참여하지 않는다. 그런 이가 지금 전장에 왔다는 건.

'곧 준기사가 될 몸.'

기사란 무엇인가.

한 음유시인이 말하길.

"기사란 사람을 일반 사람과 동일하게 보는 건 아주 많이 잘못된 생각이죠. 네, 맞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한계를, 어떤 범주를 벗어난 이들이죠. 그게 아니라면 프록과 같은 이들과 어떻게 맞붙겠습니까?"

기사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존재라 한다.

그럼 준기사란 무엇인가.

기사가 되기 전, 기사가 될 가능성이 있는 이들을 말한다.

준기사는 전투와 싸움의 전문가다. 기사가 인간의 한계를 극복한 이들이라면, 준기사란 인간의 한계에 맞닿아 있는 이들이다.

곧 준기사가 되어 기사단에 종군하게 될 스콰이어.

보고 싶었다. 그들의 실력이 궁금했다. 자신이 되고자 하는 기사는 명예만 갖춘 직위를 말하는 게 아니다.

이 시대의 기사는 무력의 상징이었다. 그 상징의 일부가 이곳에 왔다.

"보고 싶어 죽겠다는 얼굴인데."

렘이 엔크리드를 보고 말했다.

"왜 아니겠어."

"벌써 출진 준비 끝났다고 하던데요."

왕눈이가 말했다.

"혼자 왔다고 하디?"

렘이 팔짱을 끼며 물었다. 왕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혼자면 충분하다고 했대요."

엔크리드는 그 말에 아군이 왜 회군을 하지 않았는지 알았다.

'아즈펜이 주술을 준비했다면.'

이쪽은 무력을 비장의 카드로 삼았다.

나우릴리아도 아즈펜도.

매년 지루한 국지전을 반복하는 곳에 변수를 둔 거다.

'이거로 평야 일부를 집어삼키겠다는 의도일까.'

만약 주술이 제대로 먹혔다면 준기사든 뭐든 와 봤자 할 일이 없었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주술은 막혔고, 역으로 아군이 승리를 거머쥐었다.

하루나 이틀만 빨리 스콰이어가 왔다면 그대로 몰아칠 작정이었을 거다.

'좀 늦긴 했지.'

이 정도면 적군도 정비가 끝났다.

"출진 준비를 해라! 당장 전군 움직인다!"

엔크리드는 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이어지던 상념을 접었다.

소대장의 목소리였다.

그러다 불쑥 천막 안으로 소대장이 얼굴만 들이밀었다.

"야, 들었냐, 어, 들었겠네."

소대장이 묻다가 크라이스를 보고 혼자 답했다.

"전부 출진이다. 이번 기회에 그린 펄 평야의 진지를 저 앞까지 당겨 버린단다."

"작전을 그렇게 대놓고 떠드는 겁니까?"

엔크리드가 소대장을 보고 물었다.

"숨길 것도 없는 거지. 이제 곧바로 나간다니까? 너도 가게?"

"구경은 하고 싶네요."

엔크리드가 아픈 몸을 일으켰다. 아직 부상이 다 나은 건 아니다. 본래라면 전장에 나가는 건 삼가야 하지만.

"제가 옆에 있겠습니다."

크라이스가 손을 들고 말했다. 언제나 후방에서 제 목숨 잘 챙기는 놈이다.

엔크리드가 그 곁에 있으면 될 것이다.

소대장은 엔크리드를 가족처럼 아끼진 않는다. 나이도 꽤 많아서 부담스러울 때도 많다.

하물며 사고뭉치 분대를 통솔하는 분대장이다 보니, 부딪칠 때도 많았다.

그래도 엔크리드가 죽는 건 마음에 걸렸다. 매일 검을 휘두르고 그 어떤 순간도 쉬이 흘려보내지 않아, 주변의 빈축을 사기도 하는 노력가.

그런 사람이 시체가 되는 걸 보는 게 영 마음이 편치 않다.

"알아서 몸 잘 사려."

소대장이 말하고 나섰다.

"구경 가고 싶으면 가야지."

렘이 고개를 끄덕였다. 라그나가 주섬주섬 출전 준비를 시작했다.

작센은 검을 차고 쓰로잉 나이프를 몇 자루 챙겼다. 평소에는 잘 챙기지도 않던 장비다.

"옆에 있겠습니다."

작센이 말했다.

"내 옆에?"

렘이 농을 걸었다. 작센은 고개를 저었다.

"넌 노린내가 나서 같은 막사를 쓰는 것도 힘들다."

상대를 살살 긁는 건 렘이 잘하지만, 한 방에 불쾌감을 치솟게 하는 건 작센도 잘했다.

"분대장, 난 아즈펜보다 저 새끼 머리를 먼저 쪼개고 싶은 것 같수. 어떻게 생각하슈?"

"참아. 구경이나 가자. 스콰이어가 얼마나 잘 싸울지 궁금하지도 않냐?"

"겁나게 잘 싸우겠지, 뭐."

렘이 답하고 제 도끼를 챙겼다.

엔크리드가 절뚝거리며 출진하려고 대열을 맞추자, 벤젠스가 다가왔다.

"죽고 싶어 환장한 거냐?"

전투가 끝난 뒤, 고맙다고 말을 전했더니 툴툴대며 막사까지 찾아왔었다.

그러더니 빚은 갚았다고, 이제 됐다고, 속 편하다고, 혼자 신나게 떠들었다.

무슨 빚이냐고 물으니.

"그때 의무 막사 화재, 벌써 잊었냐?"

"그럴 리가. 잊었겠습니까?"

잊었었다. 하도 오늘을 반복하다 보니 생긴 부작용이다.

그래도 완전히 잊을 순 없는 일이었다.

크랑, 암살자, 그리고 불.

불은 엔크리드가 지른 거였다. 벤젠스는 불에 타 죽을 뻔한 걸 구한 거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암살자의 손에서 구한 거였다.

'구한 건 구한 거니까.'

빚은 빚이었다. 상대가 그렇게 생각하는 게 편하다니까.

그 덕분에 자신을 보고 냅다 달려와서 구하지 않았나.

여긴 왜 왔냐고 전장에서 눈을 부라리는 벤젠스를 보며 엔크리드가 입을 열었다.

"죽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근데 여길 왜 나와?"

"구경하고 싶어서요."

"뭘?"

"스콰이어가 왔다면서요."

"아, 야, 너무 나서지 마라. 두 번은 안 구해."

벤젠스는 그렇게 말하고 본인의 대형으로 돌아갔다.

"저 새끼는 왜 갑자기 친한 척이유? 전에 툭하면 시비 걸던 놈 아니었수?"

옆에서 렘이 물었다.

그랬던 적도 있었다. 벤젠스는 엔크리드를 참 싫어했었다. 그게 언제 일인지.

"저 새끼 아니고 소대장이야. 가까이 지내다 보니 사람 괜찮더라."

"너무 무르게 사람 대하지 마슈. 나중에 뒤통수 맞고 아프다고 꺽꺽대면 늦은 거유."

"너나 잘해."

부대 정렬과 이동이 순식간에 끝났다. 도열이 깔끔하게 이뤄지지 않았다. 대형도 넓게 펴진 방사형인 채로 행군이 시작됐다.

행군의 선두에 누군가 덩그러니 나선 게 보였다.

붉은 망토가 바람에 휘날린다.

선두에 선 이가 망토를 두른 채로 터벅터벅 걷는 게 보였다.

겉만 봐서는 스콰이어, 준기사의 대단함이 엿보이지 않았다.

"흠, 걸음을 보니까 좀 치겠수다."

렘이 옆에서 팔짱을 낀 채로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좀이 아니다. 자세가 잡혀 있어. 상대 쪽에 그, 프록이라도 있지 않은 이상, 재미없는 싸움이 되겠다."

라그나도 말하고.

작센도 시선을 앞으로 던졌다. 그의 눈이 붉은 망토의 뒤를 훑는 것처럼 보였다.

엔크리드 옆에 있던 왕눈이는 다른 말을 꺼냈다.

"이제 후방으로 빠지죠. 이제 빠져야 해요. 아니면 휩쓸립니다."

왕눈이는 빠져야 할 타이밍을 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붉은 망토가 파라락 휘날렸다. 망토가 바람을 타고 뒤로 펄럭인다. 망토의 주인이 앞으로 내달렸다.

엔크리드는 눈을 깜박이며 자신이 보는 게 맞는지 확인해야 했다.

앞에서 달리는 사람의 뒤로 잔상이 남았다.

사람이 얼마나 빨리 달리면 저렇게 되는 걸까?

"다리에 의지를 담았나 본데."

라그나가 그걸 보고 중얼거렸다.

엔크리드는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지 못했으나, 지금은 묻고 싶지도 않았다.

귀를 닫고 집중할 시간이었다.

망토의 주인이 달리는 걸 보고 놀란 적군이 화살을 쐈다.

이전처럼 쇠뇌병을 따로 배치하진 않았는지, 머리 위로 화살이 뭉쳐 날아왔다.

최소 백 명 이상의 궁수가 시위를 당겼다가 놓은 듯했다.

망토 기사의 위로 화살 비가 쏟아졌고.

스콰이어는 검을 들어 휘두르는 대신, 가속했다.

뻥!

땅이, 흙이 분수처럼 치솟고 망토의 주인은 어느새 적군의 지척까지 다가갔다.

화살의 피격 범위를 달리는 것만으로 벗어난 거였다.

확실히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움직임이었다.

48. 끝이 보인다면, 기어서라도 넘을 수 있었다.

소규모 국지전에 이 정도 수준의 무력이 투입된 건 처음이었다.

상대가 주술을 준비했듯이.

이쪽에서 준비한 패는 스콰이어였다.

그 스콰이어가 전장에 미친 여파는 끔찍한 수준이었다.

전진하는 것으로 화살 비를 피한 준기사가 검을 뽑아 그었다.

휭.

허공에 은빛 선이 그어진 순간 전면을 막은 병사 셋의 목이 덜렁 잘렸다.

스콰이어는 휘두른 검을 당겨서 회수하곤 위에서 밑으로 끊어쳤다.

검은 벼락처럼 떨어졌다가 곧바로 위로 솟았다.

보병용 단창을 들고 있던 병사의 머리통이 그 궤도에 걸렸다.

빡!

베는 게 아니라 부쉈다. 검을 끊어친 충격으로 병사의 머리통을 빠갠 검이 이번에는 나비처럼 날았다.

날아든 나비의 날갯짓은 곧바로 공포를 머금은 장송곡이 되었다.

곳곳 빈틈에 찌르기가 된 검의 날갯짓이 적군의 숨통을 앗아 갔다.

그러자 병사 둘이 크고 두툼한 나무 방패를 들고 진로를 막았다.

전신을 가리고 막아서자, 나비의 날갯짓이 방패에 막혔다.

검이 퍽퍽하고 방패를 때리자, 방패 겉면에 움푹 파인 자국이 남았다.

"조여!"

적군 병사가 외쳤다.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그는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최선을 다했다 한들 사신의 손길에서 자유로운 건 아니었다.

붉은 망토의 주인은 자신의 검을 두 손으로 잡고 가로로 휘둘렀다.

꽝! 카가각!

검이 방패를 후린다. 쇠테 부분은 잘리지 않고 휘어져 방패의 역할을 해냈으나, 그걸 쥔 병사의 손은 그 충격을 견디지 못했다.

"끄아악!"

방패를 쥔 손목이 비틀려 부러졌다. 손목뼈가 피부를 뚫고 나왔다.

방패가 바닥에 힘없이 떨어지자, 검이 횡으로 병사의 몸통을 갈랐다.

상체가 잘려 내장이 바닥에 후두둑 떨어졌다. 피가 사방에 흩뿌려졌다.

주변 병사의 눈에 공포가 스며들었다.

"이런 시발."

아즈펜 공국 병사 중 하나가 울먹이며 욕설을 뱉었다. 망토의 주인이 그걸 들었는지 코를 씰룩이더니 곧바로 땅을 박찼다.

검을 휘두르는 것도 무섭지만, 이 작자의 가장 무서운 점은 발이었다.

땅을 박찼다 싶으면 여기 번쩍, 저기 번쩍 나타나 병사의 목을 자르고 몸에 구멍을 냈다.

그 앞을 막으려고 방패를 들이밀어도, 갑옷을 지니고 막아서도, 전부 무의미해 보였다.

"쏴 버려!"

지휘관 중 하나가 외쳤다.

과감한 판단이었다. 한쪽에 대기하고 있던 서른 명의 쇠뇌병이 쿼렐을 쐈다.

근거리 사격을 전부 피할 순 없다. 지휘관은 확신했고.

망토의 주인은 그 확신을 깨부쉈다.

꽝!

그는 쿼렐이 자신에게 닿기 전 땅을 박차고 하늘로 날아 버렸다. 쿼렐이 허무하게 허공을 갈랐다.

위로 뜬 건 떨어지기 마련이다. 곡선을 그리며 날아간 망토의 주인은 아즈펜 공국 지휘관의 열 걸음 앞으로 떨어졌다.

적진의 심장부였다.

"...막아!"

아즈펜 공국 최고 지휘관의 외침이 애처로웠다.

그레이 독 부대가 남아 있다면 모를까.

그들은 패전의 책임과 미치 휴리어의 부상, 여러 가지 복합적인 상황 때문에 이미 물러난 뒤였다.

"후우우."

긴 숨을 내뱉은 망토의 주인이 검을 다시 휘둘렀다. 위에서 밑으로, 아래에서 위로.

쌔액!

칼날이 휘어지며 채찍처럼 지휘관의 호위병을 휘갈겼다.

뻑! 빠가가각!

몸에 두른 두꺼운 가죽 갑옷이 통째로 잘렸다. 철제 투구를 쓴 호위병은 검면에 머리통을 맞고 나가떨어졌다.

뻥!

한 대 맞고 옆으로 구른 호위의 코에서 피가 줄줄 흘렀다. 겉으로 보면 무사하나, 두개골 안쪽이 충격으로 부서져 죽은 거였다.

호위를 해치운 스콰이어는 그대로 지휘관의 목에 구멍을 냈다.

푹.

스콰이어는 그대로 적진 한복판에서 홀로 적군의 지휘관을 죽이고, 돌아서 복귀했다.

복귀하는 장면도 인상적이다.

뻥 하고 적군을 발로 걷어차더니, 그대로 땅을 몇 번 박차고 내달렸다.

멀리서 보면 붉은 줄이 전장 한복판에 선을 긋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엔크리드와 일행은 싸움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봤다.

렘은 망토의 주인, 스콰이어를 보며 좀 친다고 생각했다.

'놀 줄 아네.'

적진 한복판을 휘저을 줄 아는 놈이다. 손에 사정을 두지 않고 힘의 우위를 명확히 보여 줌으로써 공포심을 심었다.

그걸 통해 적진을 마음대로 유린했다.

특히 상대가 준비한 쇠뇌병의 기습을 피한 게 인상적이었다.

'나였으면 쇠뇌병 무리로 먼저 뛰어들 텐데.'

상대는 확실히 배운 태가 났다. 전투와 전쟁의 전문가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었다.

그는 쇠뇌병을 먼저 처리하는 대신 놔뒀고.

그들이 자신을 노렸을 때, 아껴 둔 다릿심을 보였다. 땅을 박차고 허공을 넘어 적 지휘관을 덮쳤다.

한 마리 비호와 같았다. 날개 달린 호랑이를 보는 듯했다.

라그나는 상대 수준을 가늠하고 자신과 비교했다.

자신이 걸어야 할 길을 먼저 간 상대다.

'저 정도면.'

얼마 안 있어서 당도할 수 있다. 굳이 지름길로 가지 않아도 뼈를 깎는 수련을 하지 않아도.

렘이 상대의 전략을 봤다면, 라그나는 상대가 지닌 능력의 수준을 가늠했다.

'검술이 날카롭군.'

쾌검을 기반으로 한 중검이다. 얼핏 보면 정검을 쓰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전부 눈속임이었다.

쾌검과 중검.

두 개를 섞어 쓴다. 훌륭한 검술 선생이 있는 게 분명했다.

보통 두 개의 검식을 섞어 배우면 기본기가 어설프기 마련인데.

붉은 망토의 스콰이어에게는 그런 어설픔 따위가 보이지 않았다.

'하긴, 스콰이어라니까.'

수준을 가늠한 라그나는 의욕이 사라지는 걸 느꼈다. 이미 길이 보이고 목적지가 빤히 보인다. 먼저 간 사람을 본다고 해서 호승심이 끓어오를 일은 없다.

그저 길을 걸어가야 한다는 일만 남았을 뿐.

그저 훈련이, 단련이 지루하기에 괴로울 뿐이다. 감정이 메마른 상태로 검을 단련하는 일만 남기에 그렇다. 재능이 너무도 출중해서 생기는 문제였다.

작센은 상대의 실력을 가늠했고, 빈틈을 찾았다.

'적어도, 다섯 번.'

적군은 망토의 주인을 해할 수 있었다.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전략의 문제였다.

지휘관이 멍청한 탓도 있었고.

예상치 못한 일격이란 점에서 당황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작센 자신이었다면 저런 상황이 되기 전에 끝냈을 것이다.

종교쟁이 분대원은 상대의 움직임을 눈에 담고 고개를 끄덕였다.

"신의 곁으로 사자를 인도하는 일에 능숙한 형제님이시군요."

참으로 잘 싸운다는 말이었다.

"뒤로 안 빠져도 되겠네요."

왕눈이는 혀를 내둘렀다. 고작 한 명이 전장의 흐름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있다. 싸우기도 전에 승리가 약속된 것 같았다.

그리고 엔크리드는.

'이게 기사.'

격동했다.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쳐 전신이 떨릴 지경이었다. 피부 솜털이 곤두섰고 오한이 들었다.

동시에 아랫배에서부터 뜨거운 온기가 느껴졌다.

그의 눈은 스콰이어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현 대륙에서 스콰이어, 준기사는 기사단의 주 전력이다.

홀로 전쟁의 판도를 바꾸는 기사의 바로 전 단계다.

살육 기계가 지금 전장의 판도를 휘저었다. 적군의 지휘관을 죽였다. 그리고 유유히 돌아왔다.

'어떻게 저럴 수 있지?'

망토의 주인은 수인도 아니고 프록도 아니다.

그런데 어떻게 저런 힘을 보일 수 있는 걸까.

홀로 천을 벨 수 있는 무력의 상징, 그게 기사다.

어떤 게 그걸 가능케 하는가.

무엇이 저자를 인간의 한계에 도달하게 했는가.

엔크리드는 몰랐다. 몰랐기에 상대의 움직임에 더 감탄했는지도 몰랐다.

동시에 그의 머릿속에서 뭔가 팡 하고 터지는 걸 느꼈다.

"때로는 보면서도 배울 수 있다."

대도시의 검술 교관이 한 말이 머릿속을 스쳐 간다. 흥분이 가라앉고,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한 점의 집중이 절로 발동했다.

초인적인 집중력이 발휘되자, 상대가 내딛는 발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휘두른 검의 의도가 보였다.

'중검식.'

힘의 중검.

근력을 길러 검을 휘두를 수 있다는 건, 곧 빠르게 검을 휘두를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상대는 중검의 묘리를 쾌검에 섞었다. 엔크리드의 눈에도 그게 보였다.

'발을 뺐어.'

뒤로 슬쩍 발을 빼 제 공격선의 범위를 정하는 것처럼 보이는 동작이다.

'아니야. 정하는 게 아니라 이미 정했다.'

라그나에게 배운 북방식 중검은 공격선을 중심으로 기초를 쌓았다.

스콰이어의 방식은 조금 달랐다.

그는 자신을 중심으로 원을 그렸다.

중앙 대륙식 기본기에 입각한 검술이었다. 그는 자신의 몸을 기점으로 원을 그렸고, 그 원 안의 상대를 도륙했다.

걸리면 베고, 다가오면 찌른다.

얼핏 보면 발을 써서 상대를 유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달랐다.

'범위를 지키고.'

발은 필요할 때만 끊어서 쓴다. 몇 번의 검격이 인상적이어서 그렇지, 대부분 공격은 찌르기가 많았다.

보고 또 본다. 눈에 들어오는 정보를 취합해 머릿속에서 정리한다.

'중검식이라고 해서 꼭 힘으로 내리찍어야 할까?'

미치 휴리어가 보인 비장의 한 수는 정검과 유검이 아닌 중검식의 한 수와 같았다.

뭐가 막든 베어 버리는 차륜 베기.

그는 왜 그걸 비기로 삼았을까.

상대를 속이기 위해서?

아니다. 검의 방식을 다섯 개로 나눴다고 해서 전부 다른 검술이라 할 수는 없었다.

다섯 개의 검술 방식에는 전부 교집합이 있다.

중검식이라고 해서 무조건 내리치고 힘으로 끊어 내는 게 정답은 아니다.

눈알이 구른다. 뇌가 회전한다. 움찔거리며 엔크리드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보니까 좋수? 음?"

렘이 아무 생각 없이 말을 걸려다 멈췄다.

라그나는 스콰이어의 움직임에 더 흥미가 생기지 않았기에, 그 소리에 뒤를 돌아봤다.

"건들지 마."

라그나가 속삭였다. 그는 한눈에 분대장의 상태를 알아봤다.

전장이든, 술집이든 또는 뒷골목이든, 연인의 품 안이든.

깨달음은 행운의 여신이 치는 장난처럼 찾아온다.

불현듯, 돌연히, 느닷없이, 갑자기, 그렇게 소리 없이 찾아와 뜬금없이 뇌를 흔드는 법이었다.

"옆을 지키지."

작센이 먼저 나서서 말했다. 라그나가 우측에, 렘이 좌측에 섰다.

종교쟁이 분대원은 묵묵히 움직여 엔크리드의 뒤로 돌아갔다.

왕눈이는 이게 무슨 일이냐고 속삭이며 물었다.

그 물음에 렘이 답했다.

"분대장이 제 껍데기를 깨려나 보지. 이럴 때가 되긴 했지. 그동안 혼자 밤낮으로 검을 휘두르더니만."

렘은 분대장의 노력을 인정했다. 그는 이런 행운을 누릴 만했다.

물론, 이건 행운 따위가 아니었다.

수없이 실전을 거듭하고 구르고 검술의 기초를 다시 닦았기에 찾아온 당연한 과정이었다.

라그나는 스콰이어보다 지금 엔크리드의 모습을 보니, 의욕이 생겼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무엇이 분대장을 이렇게 만드는 걸까.

끝이 분명한, 한계가 명확함을 알면서도 어떻게 검을 놓지 않을 수 있을까.

그게 라그나게에는 신기한 일이었다. 언제나 그렇듯, 지금 전장에 나서서 적지를 혼자 휘저은 상대보다 분대장이 그의 흥미를 더 자극했다.

기사단의 일원이 돌아온 직후, 아군 지휘관의 외침이 대기를 울렸다.

"돌겨어어억!"

곧 아군이 우르르 몰려나갔다. 기합과 외침이 뒤섞이고 보병대가 달리자, 땅이 두두두두 하고 울렸음에도.

엔크리드는 멍한 시선으로 허공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는 아직 몰아의 상태였다.

사고뭉치 분대는 이전 전투의 활약으로 방관자의 입장이 될 수 있었기에.

멈춰 있는 그들을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다.

사실 뭐라고 하고 싶어도 왕눈이를 제외한 넷이 뿜어내는 기세가 하도 살벌해 다가올 수조차 없었다.

저 앞에 스콰이어가 날뛰는 걸 봤음에도 가까이에서 사고뭉치 분대를 본 아군은 이들이 더 섬뜩하다고 느꼈다.

그렇게 그들을 놔두고 전쟁이 끝을 향해 달려갔다.

아마도 올해 겨울과 내년 봄은 많이 바쁠 것이다. 비축한 자원으로 겨울을 보내며 진지 구축도 다시 해야 할 테니.

나우릴리아와 아즈펜의 경계선이 새로 그어질 것이다.

아군이 돌진하는 사이, 엔크리드는 자신이 배운 기본기를 되새기는 중이었다.

교집합, 검술, 발렌 식 용병검, 북방식 중검.

모든 것이 자신이 배운 무기였다.

그 무기를 기본기란 틀에 가둘 필요는 없었다.

중검으로 받아넘기고 흘려도 된다.

바인드, 검을 붙이는 기술이 받아넘기기의 기초였다.

배울 때는 눈치도 못 챘다.

몰아의 상태, 때아니게 찾아온 깨달음이 엔크리드의 실력을 단숨에 올려 주진 않았다.

아니, 어느 정도 안목은 올려 줬으나, 그가 가진 재능은 보잘것없기에 그걸 단숨에 몸으로 체득할 수 없었다.

다만, 엔크리드는 자신이 가진 한계점을 명확히 알았다.

그건 곧 시간만 있다면 한계까지 단련하고 그 한계를 넘어설 수 있다는 말이었다.

아득히 높고 끝이 보이지 않던 절벽의 끝.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던 절벽의 가장 위쪽이 보이기 시작했다.

앞으로 가로막은 벽이 너무 높고 넓어 그 끝이 보이지 않으면 넘을 수 없는 법이다.

하지만 끝이 보인다면, 아무리 멀고 높고 넓더라도.

걷지 못한다면 기어서라도 넘을 수 있었다.

엔크리드는 그걸 깨달았다.

"아아."

그는 침을 흘릴 정도로 기뻤다. 실제로 그는 몰아의 상태에서 침을 흘리며 깨어났다.

"아니, 무슨 침까지 흘리슈?"

렘이 옆에서 핀잔을 줬다.

엔크리드는 눈을 뜨고 주변을 살폈다. 어느새 주변에 아군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다 돌진했수. 피곤하면 막사에서 쉴 거이지, 서서 졸고 그러슈?"

"아."

"아는 무슨, 돌아갑시다. 전투는 뭐, 손댈 것도 없겠구만."

그 말 그대로였다.

망토의 기사는 본진으로 되돌아왔고.

전투는 끝났다. 적군은 퇴각을 넘어서 본국까지 도망갈 기세였다.

이제는 회군할 때였다. 도시로 돌아갈 때였다.

엔크리드는 저물어 가는 해를 보며 몸을 돌렸다.

스콰이어의 무력을 본 그의 가슴에 다시금 불이 지펴졌다.

엔크리드의 목적지이자, 이상향이 눈앞에 있기에.

다시금 오래된 꿈이 고개를 든다.

'기사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단순히 무력만 키워서는 어림도 없었다. 일단은 자신의 실력을 증명해야 할 것이다.

최하급 병사로 머물 시간은 끝났다.

엔크리드는 속으로 그리 읊조렸다.

49. 광기와 열기, 욕심과 욕망

"이겼다."

"이 씹, 이겼다아!"

"개 같은 아즈펜 새끼들아아!"

승리는 환호를.

환호는 열기를.

열기는 광기를.

맞물리며 불러온 뜨거운 기운이 전장 전체를 후렸다.

전장에서 가장 큰 성과를 올릴 때는 언제인가.

도망간 적의 뒤꽁무니를 쫓을 때다. 나우릴리아는 아즈펜의 꼬리를 세차게 깨물어 뜯었다.

"우어어어!"

죽은 이들을 기리는 것보다 승리의 기쁨이 먼저 아군을 휩쓸었다.

광기가 엿보이는 것도 당연했다.

고작 며칠 전에 전멸할 뻔했다. 아직 안개가 가져다준 죽음의 공포가 가슴 속 깊게 새겨져 있었다.

이후, 공포를 안고 선 전장에서 아군은 압도적인 승리를 했음에.

"붉은 망토 기사단 만세!"

"나우릴리아 만세!"

스콰이어는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이름 모를 스콰이어 대신 기사단의 이름이 드높아졌다.

"붉은 망토 기사단 만세!"

그 환호, 그 열기, 그 광기.

전장의 선두에서 이 모든 환호를 받는 자가 그 중심에 있었다.

파라락.

상징과도 같은 붉은 망토를 휘날린 스콰이어가 한 손을 들어 환호에 답했다.

"우어어!"

승리의 열기에 취한 병사 중에서는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이들도 있었다.

다들 환호를 내지른다. 광기에 취한다. 그걸 본 엔크리드가 조용히 읊조렸다.

"나도."

아무도 듣지 못한 말이지만, 그 안에는 그의 오랜 꿈이 들어 있었다.

광기와 열기가 전염되어 엔크리드의 심장도 뛰게 했다.

전투의 끝, 전장의 마지막 날 밤.

죽은 사람 숫자도 꽤 됐지만, 엔크리드는 고양감을 느꼈다.

손가락 세 개가 없는 대도시의 검술 교관이 한 말이 떠올랐다.

"재능도 없는데 칼밥 먹는 놈? 둘 중 하나지. 전장을 즐기는 놈이거나 살인을 즐기는 놈이지. 아, 셋 중 하나겠다. 아무 생각 없이 사는 놈도 있지."

'난 전장을 즐기는 쪽인 것 같은데.'

환호가 부럽다. 그 앞에 서고 싶은 욕심도 있다. 단순히 검을 휘두르는 걸 넘어, 전장을 헤집고 싶었다.

무예를 갈고닦은 이유가 오롯이 검에 취해서만은 아니었다.

엔크리드는 이번 전투에서 자신이 한 건 무엇인지 생각했다.

살아남기 위해 발악한 게 전부였다.

결론적으로 깃발을 찢어 주술 매개를 깨는 것으로 공적을 쌓긴 했으나.

'그 또한 살아남기 위한 발악이었으니.'

불쑥 치솟은 고양감은 엔크리드가 꿈으로 가리고, 재능이 없기에 잊었던 욕심과 욕망을 함께 불렀다.

'기사.'

되겠다. 되고야 말겠다.

다시 한번 다짐하는 순간이다.

"더럽게 시끄럽네."

아무 생각 없이 전장을 떠도는 렘이 귀를 후비며 말했다.

전장도 살인도 즐기는 것처럼 보이진 않는다. 고양감 따윈 없어 보였다.

그 옆에선 라그나가 하품을 했다.

"흐아, 이제 끝난 거 아닌가? 오늘 밤에 회군하면 안 되나."

잘도 오늘 밤에 하겠다. 이 새끼도 생각 없는 쪽이겠지.

작센은 검날을 가죽으로 닦고 있었다. 벌써 검을 손질하고 있다.

말하거나 겉으로 티를 내진 않지만, 작센도 뭘 즐기는 쪽일까?

모르겠다. 워낙 자신을 잘 숨기는 쪽 아닌가.

"와 씨, 전투가 그냥 뚝딱 끝나 버렸네. 이거 이야기나 노래로 만들면 팔리려나?"

"노래도 만들 줄 압니까? 형제님?"

"아니요. 다른 음유시인 시켜야죠."

"직접 본 것도 아닌데 노래를 만들면 사기입니다."

"사기라니, 큰일 날 소리를 하네요. 그런 거 아니거든요. 아우딘."

전장조차 팔아먹을 수 있지 않나 하는 왕눈이와 속을 알 수 없는 신실한 분대원의 대화였다.

엔크리드가 주술의 매개를 찢던 날, 신실한 분대원의 전신은 피로 목욕이라도 한 것처럼 빨갛게 젖었다고 들었다.

무지막지하게 싸웠다는 소리다.

그도 조용하고 고요해 보이지만, 무지막지한 무력을 갖췄다.

전장에 서는 이유는 모르겠다.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져, 엔크리드는 자신의 자리에 제 분대원을 넣었다.

'렘이었다면.'

깃발을 뚫고 찢는 거로 끝내지 않았을 거다.

라그나였어도 작센이었어도 신실한 분대원이었어도.

전부 자신보다는 더 잘 싸웠으리라.

'다음에는 더.'

전장의 고양감이 심장을 옥죄니, 그 반작용으로 엔크리드의 가슴에는 욕망이 피어오를 뿐이었다.

전투가 끝난 밤, 지휘부에서 술과 음식을 풀었다.

염장한 토끼고기와 사슴고기 따위가 나왔고 커다란 참나무통에 담긴 독주가 나왔다.

"술이다, 술!"

렘과 라그나는 술이라면 환장했다.

"전 포도주만 마십니다."

신실한 분대원은 독주를 거부했고, 작센은 애초에 술을 입에도 대지 않았다.

"술보다는 여자가 낫습니다."

서슴없이 이렇게 말하고 다니는 놈이다. 이따위로 말하는데 여자가 꼬이는 이유는 뭘까.

'역시 얼굴이 답인가.'

그러는 엔크리드도 아무 노력 없이 여자가 꼬이는 편이었다. 얼굴 덕택이었다.

거기에 단련된, 쫙쫙 갈라진 근육질 몸은 그야말로 여심을 후리는 흉기였다.

"싸구려 술이네요. 안 먹어요."

왕눈이는 입이 고급이었다.

밤이 깊어지고 대대장이 막사에 들어왔다.

"444 분대장?"

엔크리드는 자신을 찾는 소리에 몸을 일으켰다.

이제 슬슬 열기도 한 김 식어 다들 자려고 준비하는 중이었다.

엔크리드는 부상 때문에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덕분에 대대장 얼굴을 못 알아보는 불상사는 없었다.

"부상자가 술을? 부상자 나부랭이가 술을? 다친 주제에 술?"

렘이 구박했고.

"삼가는 게 좋습니다. 몸부터 회복해야죠."

작센도 말렸다.

라그나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고.

왕눈이는 그런 엔크리드를 보고 낄낄 웃었다.

제대로 미친 분대원들이다.

대대장의 부름에 밖으로 나가니, 경례는 됐다며 술 냄새를 풍기는 대대장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깃발이 주술의 매개였다고? 그리고 그걸 찢은 게 너고."

이 전장의 절대적 공헌을 한, 주술 파훼자를 찾았다는 소리로 들렸다.

타닥타닥.

피워 둔 모닥불에 불똥이 남아 허공에 불티를 날렸다.

"네."

엔크리드가 담담히 답했다.

"돌아가면 포상이 있을 거다. 잘했다."

대대장이 엔크리드의 어깨를 두드렸다. 꽤 대단한 일이었다.

분대장이 된 이후로 대대장과 말을 나눠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으니까.

그만큼 엔크리드가 한 일이 대단했다.

전장의 판도를 바꿔 버렸으니.

다만, 그걸 아는 사람은 손에 꼽을 뿐이었다.

정확히는 지휘부만 알았다.

아마도 이 전투에서 주술을 이겨 낸 공은 지휘부가 채 갈 것이다.

그게 서운하진 않다.

대신 포상이 두둑할 것이니.

'아쉽진 않아.'

본래라면 자신이 한 일이기에 그 공을 취해야 하나.

'발악이었다.'

기사, 아니 고작 스콰이어를 보고 나니 생각이 많이 변했다.

이따위 작은 공적보다 얻은 게 더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물이 좋구만."

대대장이 어깨를 두드리고 돌아간 후, 엔크리드가 다시 막사로 들어가려는데, 톡톡 하고 바닥을 밟는 소리가 났다.

"뭡니까?"

소리의 근원지로 시선을 돌리자, 에메랄드를 닮은 눈이 보였다. 밤 중에 보니 유령처럼 섬뜩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인외의 미모.

요정 중대장이었다.

"깃발 찢은 포상을 어설프게 하진 않을 거다."

할 말은 그게 전부였는지, 중대장은 그 말만 하고 돌아섰다. 그대로 돌아가나 싶더니, 뒤로 고개만 돌린 중대장이 입을 연다.

"경례는 안 하나?"

엔크리드가 뒤늦게 왼손으로 무기를 누르는 시늉을 하자, 요정 중대장이 됐다고 손을 휘저었다.

"됐다. 간다."

저건 뭐 하는 요정인가.

중대장이 가고 막사 안으로 들어가자, 렘이 옆으로 누워 머리에 팔을 괴고 있었다.

"분대장 인기 생겼다고 나 버리면 안 되우."

"취했냐?"

"안 취했는데."

농담 짓거리였다. 밤이 깊었다. 엔크리드는 두 눈을 감았고 머릿속으로 스콰이어를 보고 느낀 걸 되새겼다.

몸이 나으면 할 일이 아주 많았다.

* * *

자고 일어난 나우릴리아 보병 대대는 보더 가드로 향했다.

나흘의 행군 끝에 그들은 요새 도시 보더 가드의 성벽을 마주할 수 있었다.

다른 지대보다 높은 분지에 길게 지어진 성벽과 세 개의 커다란 망루가 드높게 세워진 도시였다.

이곳이 바로 아즈펜 공국을 막아 내는 최후의 보루.

변방의 성곽, 보더 가드였다.

* * *

붉은 망토 기사단 스콰이어의 출현은 전장의 판도를 변하게 할 수 있었다.

이제까지 그린 펄 평야의 국지전이 소규모로 유지된 이유는, 여기에는 기사단 전력을 투입하지 않기로 한 불문율 때문이었으니까.

이런 상황에서 나우릴리아 왕국이 비장의 카드로 스콰이어를 출전시켰다.

나우릴리아가 불문율을 깼다.

전장에 나선 이가 아무리 스콰이어에서 준기사로 넘어가는 과정에 있다고 해도 선을 넘은 건 넘은 거였다.

"이런 개새끼들이?"

아즈펜 공왕은 버럭 화를 냈다. 눈이 뻘게지고 이마에 핏대가 섰다.

"우리도 내보내!"

보내란다고 바로 보낼 순 없었다.

겨울이었다.

겨울에 전쟁을 일으키며 두 국가 모두 국력 쇠퇴가 극심해질 것이다.

국지전 규모가 아니라 전면전이 예상된다면 국가 단위로 힘을 모을 필요도 있었다.

무엇보다 아즈펜의 주 전력이 지금 모종의 일로 자리를 비웠다.

제대로 싸우려면 아즈펜도 시간이 필요했다.

전쟁의 끝자락, 상대방이 화가 나서 머리 뚜껑이 열려 화산이 폭발한다고 해도 겨울이 다가온다면 참아야 했다.

나우릴리아도 이런 걸 예상했기에 전쟁 막바지에 전력을 투입했을 터였다.

반대로 아즈펜도 겨울을 오는 타이밍을 읽고 주술사를 투입한 거였고.

다만, 이쪽이 준비한 칼은 막혔는데, 저쪽이 준비한 비수는 팔뚝에 깊숙이 박혔다. 아팠다. 잘못하면 팔 한쪽을 못 쓸 정도로.

"외교 압박이라도 넣어. 기사단원을 전장에 내보낸 건 문제 맞잖아."

무투파로 유명한 공왕이 이대로는 못 넘어간다고 코에서 불을 뿜었다. 큰 소리를 내진 않았지만, 자글자글 끓는 물처럼 목소리에 화가 잔뜩 묻어난 게 느껴졌다.

아즈펜 공국은 세 개의 가문이 주축이 된 나라였다.

공왕 아즈펜.

무력의 휴리어.

그리고 행정과 정무의 엑킨스.

외교는 엑킨스 가문 담당이었다.

엑킨스 대신은 난감했다.

나우릴리아에서 보낸 서신 때문이었다.

붉은 망토 기사 단원이 투입된 시기와 비슷하게 서신이 날아왔다는 건, 나우릴리아가 변명거리도 완벽하게 준비했다는 방증이다.

서신에는 아즈펜 소속의 프록 장군이 적진에 모습을 드러내, 거기에 대응하기 위해 단원을 보냈다고 그렇게 쓰여 있었다.

이유가 그럴듯했다. 너무도 적절했다.

하필 왜, 프록 장군 새끼가 거기에 가서는.

프록이야, 본래 제멋대로 사는 종이다. 그들에게 군인의 옷을 입혔을 때부터 이런 문제는 야기될 수 있었다.

'장군이 아니었어도 다른 변명을 댔겠지.'

엑킨스는 바보가 아니었다.

나우릴리아가 충동적으로 기사 단원을 보내진 않았을 거다.

프록 장군이 핑곗거리가 됐지만, 그가 아니었어도 나우릴리아는 적절한 변명으로 둘러댔을 것이다.

결론만 말하자면 아즈펜은 당하고 끝났다.

이 모든 일의 시작은 주술이 망가진 것 때문이었다.

몰살의 안개가 성공했다면, 진짜 기사가 오지 않는 이상 긴 시간 지지부진 끌어온, 그린 펄 평원의 국지전은 아즈펜의 대승이었을 테니.

엑킨스는 적병 하나가 주술을 망쳤다는 보고가 떠올랐다.

'이 새끼들이 경계에 실패해 놓고 적병 하나가 망쳤다는 핑계를 대?'

그게 말이 되나.

이 일에 관련된 놈들은 전부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주술사는 퇴각 후 내빼다가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지나가던 산적이 그랬는지, 호위를 포함해서 주술사까지 전부 반으로 쪼개 놨다.

'되는 일이 없어. 되는 일이.'

"야, 이거 그냥 넘어갈 거냐고!"

왕이 체통을 잊고 외쳤다.

올해 가을, 엑킨스의 강력한 주장으로 시작된 비장의 한 수가 역풍을 맞았다.

지지부진한 국지전의 전장이 아즈펜의 패배로 점철되고 끝났다.

* * *

열흘, 엔크리드는 자기 몸이 전부 회복됐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일어나자마자 엔크리드는 곧바로 렘을 찾았다.

"렘."

"무슨 일이슈?"

경계 근무를 끝내고 돌아온 렘이 엔크리드 앞에 섰다.

"한판 하자."

"뭘?"

"대련."

"...이제 막 몸이 나은 거 아니유?"

그게 무슨 상관이지?

지금 몸이 근질거려 죽겠는데?

엔크리드가 표정으로 말했다. 이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었다.

눈썹과 입꼬리만으로 제 심중에 품은 뜻을 표현하는 것이니.

"합시다. 하고 싶으면 해야지. 또 쥐어 터져 봐야지."

"덤벼라. 건방진 이민족."

"어이쿠, 이번에는 다리가 부러지고 싶은 거요?"

엔크리드의 도발을 렘이 웃으며 받았다. 둘은 곧 숙소 밖으로 나갔다.

그걸 지켜보던 라그나는 렘이 한 말 중 다른 건 몰라도 하나는 동의했다.

자신이 본 미친놈 중에 분대장이 최고였다.

재능은 보잘것없으면서 어떻게 저렇게 일어나자마자 싸우자고 덤비는지.

그로부터 삼십 분도 되지 않아 엔크리드가 숙소 문을 다시 열었다.

"라그나, 나와. 너의 게으름을 씻어 주마."

신난 분대장이었다. 머리통 한쪽에서 피를 흘렸는지 피딱지가 관자놀이 부근에 남았는데도, 표정은 밝았다.

"네네, 합시다."

라그나도 괜히 말씨름으로 심력을 낭비하지 않았다. 몇 번 겨뤄 주면 될 일이었다.

이게 이들의 일상이었다.

50. '설마'는 사람을 잡는다 (1)

전투가 끝난 이후, 엔크리드는 보더 가드의 상비군으로서 의무도 다했다.

경계 근무도 섰고 도시 내부 순찰도 했다.

그 외 나머지 시간에는 매일 검에만 몰두했고.

이런 엔크리드를 처음 봤다면 질릴 만큼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주변 모든 이들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만큼 평온한 일상이기도 했다.

사실 누가 눈여겨봤다고 해도 신경도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안으로 침잠해 고민을 거듭했다.

'어떻게 하면 이길 수 있을까?'

또는 어떻게 하면 검을 더 잘 휘두를 수 있는가.

가진 것을 점검하고 되새기는 시간이었다. 기사의 실력을 보고 있으니, 그보다 더 나아지고 싶다는 욕구가 미친 듯이 끓어올랐다.

그렇다고 조바심이 나진 않았다.

천천히 하나씩.

느려도 반드시 앞으로 나아간다. 엔크리드의 특기였다.

'야수의 심장, 칼날의 감각, 한 점의 집중.'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렘, 작센, 라그나에게 배운 모든 걸 동원해서 대련에 임했다.

처음에는 주로 렘과 어울렸고 이후에는 라그나도 합류했다.

그러자 작센도 가끔 끼어들었다.

"뇌까지 근육이 되기 전에 제가 환기해 드리죠."

"응? 그건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냐?"

괜한 말 한마디로 렘과 작센 사이에 불똥이 튀었지만, 엔크리드가 보기에는 평온한 일상이었다.

렘과의 대련은 거칠었다. 순간적인 임기응변, 판단력이 요구되는 대련이다.

대담함을 필두로 집중해야 했다. 생각보다 몸이 먼저 움직여야 하는 시간이다.

라그나는 조금 달랐다.

검술 그 자체에 집중하는 싸움이다. 공세로 시작해도 방심하면 금세 수세에 몰린다.

대련 내내 싸움 전체 흐름에 신경 써야 했다.

작센은 이 둘과 또 달랐다.

작센은 속임수를 많이 섞어 썼다. 소리로도 속였고 발짓과 손짓, 어깨를 슬쩍 빼는 거로도 속였다.

모든 동작에 신경 써야 했다. 반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는 싸움이 된다.

"잡생각을 지우세요. 현재에 집중."

작센의 말이었다.

엔크리드의 머릿속에 기사는 어느새 지워졌다.

그는 매일 할 수 있는 걸 반복했다.

보더 가드로 돌아오고 보름이 지난 오후, 논공행상이 있었다.

"간악한 아즈펜을 상대로 승리에 기여한 이들이다!"

대대장이 포상금을 나눠 줬다. 그중 엔크리드의 포상금이 가장 많았다.

"주술의 존재를 알리고 파훼한 공을 따라 포상을 내린다!"

부관이 큰 소리로 엔크리드의 공을 말했다.

'이걸 다 말해 주네?'

지휘부 쪽에서 냉큼 자신의 공이라고 빼 먹을 줄 알았더니, 유유히 공을 인정해 줬다.

대대장 옆으로 줄지어 선 중대장 여럿 중 에메랄드 눈의 요정이 단연코 눈에 띄었다.

중대장이 뭘 한 걸까? 알 수 없다. 물어본다고 대답해 줄 것 같지도 않고.

"우리의 승리다!"

대대장은 다시 한번 승리를 부르짖었다. 하지만 전장의 마지막 밤처럼 광기에 휩싸이는 사람은 없었다.

소대장을 필두로 앞쪽에 선 병사가 손뼉을 쳤다.

엔크리드가 제자리로 돌아오자, 몇몇 병사가 뒤쪽에서 그걸 보고는 힐끔거리며 씹었다.

"주술? 그 깃발을 혼자 부쉈다고?"

"제 분대원 중 누가 했겠지."

"설마 혼자 했겠어."

"안개가 주술이었고, 그걸 없앴다는 거잖아? 설마 싶다. 저 분대장이?"

평소의 엔크리드를 안다면 할 수 있는 말이다. 엔크리드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렘은 아니었다.

"요즘 애들이 내 도끼 맛이 그리운가 보네."

그는 무표정하게 말했고, 그 말에 담긴 의미는 무시무시했다.

평소에도 주변 병사 머리통 때리는 걸 취미로 삼는 놈인데.

"이런 건 왜 하는 겁니까? 이럴 시간에 잠이나 한 번 더 자지."

라그나가 뒤를 힐끔 보고는 투덜거렸다. 대대장의 훈시가 지독하게 지루한 것 같았다.

엔크리드가 분대장으로서 그를 달랬다.

대대장이 한참 제 얘기를 떠드는 중이었다.

전장에서 자신의 역할이 어쨌고 사실 정찰대를 보낸 건 제 생각이었으며, 깃발을 보자마자 주술임을 알았다는 개소리의 향연이었다.

지루했는지 뒤에서 엔크리드를 까는 소리가 점점 늘었다.

"사고뭉치 분대장 저거, 몰래 대대장 숙소도 들어가는 거 아니야?"

"야, 남창 새끼도 아니고 무슨 헛소리냐."

남창 새끼라는 단어를 꺼낸 놈이 제가 뱉은 말에 더 크게 웃었다.

이것도 평소에 듣던 소리다. 분대원의 비위를 맞춰 살아남은 분대장.

예전 실력이 형편없을 때도 신경 쓰지 않던 말이다.

지금에서야 아예 귓등으로 흘리는 걸 넘어 들려도 듣지 않는 수준이 됐다. 엔크리드는 또 무시하고 넘어갔다.

그런데 그의 분대원은 아니었다.

"재밌나 보네?"

작센이었다. 어느새 움직인 적갈색 머리칼의 분대원이 입을 턴 병사들 가운데서 양쪽으로 어깨동무를 했다.

엔크리드는 작센이 언제 움직였는지도 몰랐다.

병사 둘이 흠칫 놀라는 게 보였다.

작센이 둘 사이로 고개를 푹 숙이더니, 뭐라 뭐라 속삭였다. 고개를 숙인 채로 말하는 바람에 입술도 읽을 수 없었는데, 그 말을 끝으로 병사 둘이 입을 다물었다.

안색이 창백해진 건 덤이었다.

작센은 유유히 본래 자리로 돌아왔다.

"뭐라고 했냐?"

렘이 궁금한지 물었다. 라그나도 귀를 세우고, 왕눈이와 신실한 분대원도 은근히 몸을 작센 쪽으로 기울였다.

저들이 뭐라 떠들든 신경 쓰진 않지만, 엔크리드도 작센이 한 말은 궁금했다.

"그냥 조언,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 필요한 조언."

"웃기시네."

렘이 그를 비웃었다.

엔크리드는 보지 못했지만, 아니 왕눈이까지 둘은 보지 못했지만, 나머지 셋은 봤다.

어깨를 두른 작센의 양손에는 짧은 나이프가 들려 있었다.

그 끝이 정확히 목을 찌르고 있는데, 어느 누가 간담이 서늘하지 않겠나.

"너도 조언이 필요한 거냐?"

작센이 렘을 향해 물었다. 여상한 태도였다. 렘이 그걸 듣더니, 웃었다. 이마에 핏대가 선 채로.

"조용. 대대장 훈시 중이다."

엔크리드가 적기에 끼어들어 말렸다.

작센의 무력시위에도 불구하고 엔크리드를 향한 불만은 여전했다.

질투와 질시가 물씬 섞인 비난이었다.

본래는 별 볼 일 없는 사람.

본래는 뒤에 처진 채로 바닥에서 바둥거리던 존재.

본래는 분대원 덕으로 간신히 목숨을 건지는 분대장.

그게 엔크리드의 위치였다.

최하급 병사인 것도 한몫했고.

그런데 그런 병사가 주술을 파훼했단다.

대대장이 직접 공을 치하하고 왕국에서 포상금까지 내려왔다.

순수하게 기뻐하는 사람보다 뱀의 마음으로 질시하는 사람이 더 많았다.

예부터 나우릴리아에서 뱀은 간악하고 질투가 많으며, 남 잘되는 꼴을 못 보는 흉한 생물로 표현되곤 했다.

그래서 이런 경우를 보고는 '뱀심'을 부린다고 말하기도 했다.

지금 병사들의 행태가 딱 그랬다.

자신보다 형편없어야 할 사람이 세운 공이 아니꼬운 거다.

주술을 파훼함으로 자신들을 구했음에도 쉬이 인정하지 못하는 병사가 많았다.

"설마, 저 분대장이?"

불만이 아니더라도 내뱉은 지금과 같은 한마디가 이 모든 상황을 대변하는 말이었다.

설마, 저 분대장이 뭘 했겠느냐고.

거기에는 무시와 질시, 질투가 섞여 있었다.

"흠, 다들 말이 많긴 하네요."

평소라면 그냥저냥 넘어갈 왕눈이가 한마디 할 정도였다.

대대장의 훈시가 끝났다.

받은 가죽 주머니는 두둑했다. 동화가 아니라면 꽤 큰 금액이었다.

엔크리드는 두둑한 주머니로 검이나 한 자루 사기로 마음먹었다.

"전부 흩어져! 근무 교대 시간이다."

대대 부관이 지루한 시간의 끝을 알렸다.

"바로 한판 할까? 근무 있어?"

모두 흩어지려는 가운데 엔크리드가 렘에게 물었다. 렘은 이 사람이 정말 참으로 너무도 신기했다.

"나 말고 저 입 턴 애들하고 노는 건 생각 안 해 봤수?"

"쟤들? 굳이? 도움이 될까?"

분대장은 또 검만 바라본다. 그걸 본 렘은 가슴이 푸근해졌다.

어찌 이렇게 사람이 한결같을까.

건방지게 입을 턴 새끼들을 처리하는 건 나중이었다.

"합시다. 대련."

렘은 새삼 보더 가드에서 처음 엔크리드를 봤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는 형편없는 수준을 넘어서 꼼수만 쓰는 머저리였는데.

지금은 어떤가.

전투가 끝나고 도시에서 다시금 겨뤘을 때가 번뜩 머릿속을 스쳤다.

'어디서 이런 기본기를?'

중검식, 그것도 탄탄한 명가의 지도를 받은 듯한 검술이 보인다. 같은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많이 늘었수다."

한마디 하고 곧바로 렘도 기어를 높였다. 그래야 했다. 이제 예전처럼 장난치듯 하는 대련으로는 부족하니까.

렘은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으나, 라그나는 엔크리드와 대련한 직후 꽤 놀랐다.

'내가 가르쳐도 이보다 잘할 순 없겠다.'

그만큼 분대장의 실력이 부쩍 늘었다. 기본기도 그렇고 한 점의 집중은 슬쩍 가르쳐 준 것 같은데 그것도 곧잘 했다.

그렇다고 이게 어색한 일은 아니었다.

한 점의 집중은 일종의 트랜스 상태로 자신을 몰아가는 것이다.

재능만 있다면 하루 만에 될 수도 있었다.

자신도 그랬으니까.

분대장이 그렇게 된 건 신기하긴 하지만.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다.'

자신이 되니까 상대방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천재의 사고방식이었다.

라그나는 그렇게 엔크리드의 현재 상태를 이해했다.

작센은 부쩍 실력이 늘어 버린 분대장을 상대하며 즐거움을 느꼈다.

'이게 즐거워?'

칼이란 무엇인가, 창이란 무엇인가, 비수를 포함한 무기란 무엇인가.

누군가를 죽이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이제까지 평생 무기를 도구로 대했을 뿐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분대장과 겨루고 나면 속이 시원했다.

작센 자신이 정한 목표를 잠깐 잊어버릴 정도로.

그게 못내 신기한 일이었다.

그래서 더 분대장을 챙기고 싶었다.

한쪽에 선 신실한 분대원, 아우딘 픔레이는 분대장을 빤히 쳐다봤다.

그의 안목은 남다른 바가 있었다.

'하루 만에 실력이 부쩍 늘었는데.'

분대장이 이 정도로 몸 쓰는 데 재능이 있었나?

그렇다면 이후에도 실력이 향상하는 게 보여야 하는데.

지금은 다시 정체다.

배우고 몸에 익히는 모든 것에는 정체기가 있을 수 있다.

아우딘도 그걸 알지만, 분대장을 볼 때면 언제나 어색함이 느껴졌다.

'뭔가 묘하게 이상한데.'

그래도 크게 신경 쓸 건 아니리라.

또는 신의 축복이 있었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했다.

엔크리드는 하루가 짧다고 느껴질 정도로 혹사하며 훈련에 임하던 사람이다.

저런 이에게 축복이 내리지 않는다면 어떤 이가 축복을 받아야 한단 말인가.

아우딘은 분대장으로부터 시작된 화두를 끌어안았다.

신과 사람, 축복과 저주.

그는 떠오르는 모든 것을 화두로 삼아, 깊은 생각에 잠겼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