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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유물관의 아저씨

웅성거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눈 앞으로 채워지는 캄캄한 천장.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지겨운 광경이다.

일어날 시간인가.

시계를 볼 필요는 없다.

귓가에 웅성거림이 들려오고 눈이 저절로 떠졌다면 어차피 똑같은 시간일 테니까.

더 늦으면 또 무슨 욕을 들어먹을지 모르니 일어나야겠다.

물론 내 몸을 생각해 천천히…

우두둑.

"으…."

천천히 신경을 써서 일어났는데도 이 모양이다.

이제는 조심해서 괜찮을 정도는 지난 듯했다.

틱.

익숙한 위치로 손을 가져가 스위치를 켰다. 

캄캄했던 방을 밝히는 빛.

더 암울하네.

차라리 빛이 없을 때가 더 좋았다.

빛이 없으면 내가 이런 2평 남짓한 골방에 있다는 현실을 잠시나마 망각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쏴아아.

방에 딸려있는 세면대로 가 물을 적셨다.

손으로 느껴지는 시원한… 아니지, 얼음장같이 차가운 물줄기.

일부러 차갑게 튼 건 아니었다.

나도 따듯한 물에 씻는 걸 좋아하지만 이 쓰레기 같은 방에 온수는 사치였다.

"후우."

하루를 시작하며 현실을 깨닫는 순간은 총 두 번이다.

불을 켜 내가 좁고 쾨쾨한 골방에 처박혀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리고,

세면대의 거울을 통해 주름이 자글자글한 내 얼굴을 봤을 때.

나이에 비해 고생을 많이 해서 그런지 보통의 40대보다도 훨씬 주름이 많았다.

그래도 젊었을 땐 나름 인기도 많고 인싸라는 소리까지 들었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매일 같이 지겹게 하는 자조 섞인 한탄.

한탄을 조금만 더 이어가면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 수 있겠지만, 나에겐 그런 시간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철컥.

나갈 시간이다.

정확히는, 인정할 수밖에 없는 잔인한 현실로 집어 삼켜질 때다.

* * *

골방을 나오니 밝은 빛이 날 반겼다.

내 방에서 얼마 남지 않은 수명으로 제 역할만을 간신히 하는 어두침침한 전구의 빛이 아니었다.

눈을 제대로 뜨기조차 버거운 밝디밝은 빛.

그 아래로는 빛만큼이나 밝은 표정의 사람들이 앞에 놓인 전시물들을 구경하며 거닐고 있었다.

세상 걱정 하나 없는 행복한 얼굴들.

"야! 백운!"

백운.

날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항상 이름을 부르기 전에 야부터 시작하는 놈.

목소리의 주인공은 외관상으로 나보다 10살은 어릴 듯한 이곳의 관리장, 김덕만이다.

"뭘 밍기적거려! 저기 앞에 아이스크림 떨어뜨리셨잖아, 당장 가서 치워!"

"알겠습니다."

반말을 한다고 기분 나빠할 필요는 없다.

저래 봬도 김덕만은 나보다 10살은 더 많으니까.

그런데 생김새가 왜 이러냐고?

그건 내가 무능력하기 때문이다.

원래는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고 하려는 노력조차 안 하는 사람을 무능력자라고 불렀지만, 지금은 좀 다르다.

능력의 개방.

오늘날, 인간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능력을 개방한 사람과, 개방하지 못한 사람.

이렇게 두 가지로 나누어 놓으니 50 대 50 아닌가 라고 착각할 수도 있겠지만, 아쉽게도 아니다.

비율로 따져봤을 때 개방에 성공한 사람과 못한 사람은 99.9:0.1 정도다.

그리고 내가 그 0.1에 속해 있었다.

개방하지 못한 인간, 그래서 아무 능력도 없는 인간, 열심히 살아보려는 의지와 노력이 있어도 제대로 살 수 없는 인간.

그게 지금의 무능력이 의미하는 바다.

개 같구만.

지나가는 젊은이들을 보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개방되는 능력에 따라 사회적 위치와 대우도 달라졌지만, 이건 나중의 이야기였다.

개방이 되냐 안 되냐에 따라 극명히 갈리는 게 있었다. 

수명.

오랫동안 사람들은 고민하고, 또 연구해왔다.

영생이란 목표를 위해서 말이다.

옛날 진나라의 진시황은 영생을 위해 안 다녀본 곳이 없을 정도였고, 수많은 권력과 돈을 가지게 된 이들도 엄청난 상금을 걸며 삶을 영원히 누릴 수 있는 방법을 찾았지만.

결과는 실패.

수명은 인간이 어떻게 할 수 있는 범주가 아니었으며 시간의 흐름은 거스를 수 없는 법칙이었다.

하지만.

어느 날 능력의 등장과 함께 발현된 개방이란 현상.

이것이 지금까지 거스를 수 없었던 법칙을 완전히 부숴버렸다.

개방이 된 시점부터 사람들은 나이를 먹지 않았으며 각각 개성 있는 능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것.

모든 게 한순간에 변해버린 세상. 

지금은 그런 세상이었다.

우두둑.

"크으…."

물론, 누군가 떨어뜨리고 간 아이스크림을 치우느라 허리 통증을 겪고 있는 날 제외하고 말이다.

난 어째서 개방하지 못했을까?

아니지, 왜 안 되는 걸까?

불혹의 나이가 된 지금도 의문이다.

사람마다 개방의 조건은 제각각이었다.

누군가는 가만히 있어도 개방이 됐으며, 누군가는 평생 안 먹던 오이를 먹는 순간 개방이 됐다.

그야말로 제각각.

그래서 개방과 능력이 등장했던 23살엔 여유로웠었다.

개방의 방식이 워낙 제각각이니 급하게 여기지 않아도 알아서 되겠지란 생각.

하지만, 착각이었다.

엄청나게 큰 착각.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고, 3년이 지나며 주변 사람들 모두가 개방했지만 난 아니었다.

난 왜 안 되는 걸까, 설마…. 평생 개방을 못 하는 건 아닐까?

그때부터 마음이 조급해졌었다.

운동, 칼질, 주먹 휘두르기, 달리기, 여행, 수영 등등등 안 해본 짓이 없었다.

가능한 모든 행동을 다 해봤다.

내 개방 조건이 얻어걸리길 기도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 포기하게 되었다.

포기라기보단 인정하게 되었다.

난 개방이 안 되는 무능력자라는 걸.

"어이! 이것도 좀 치워."

철퍽.

닦고 있던 아이스크림으로 던져지는 휴지 뭉치.

한국이란 유교 나라에 살아서 그런가 지금도 저런 새파랗게 젊은 얼굴이 반말을 하면 움찔거리곤 한다.

하지만 이젠 외관과 나이가 연결되지 않는 세상이니 그러려니 할 뿐이다.

우두둑.

"으."

지겨운 뼈 소리와 허리 통증.

굽히고 펼 때마다 한번도 빠짐없이 이러니 미칠 지경이다.

아무리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고통이다. 

"…."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허리를 괜히 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 혼자 세상에 속하지 못했다는 소외감.

남들은 당연한 듯이 누리는 것들을 누리지 못하는 상실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능감까지.

난 매일매일 이런 것들과 마주하며 살고 있었다. 

나도 개방만 됐다면.

수만 번, 아니지, 수천억 번은 생각한 것 같다.

개방이 됐다면 난 어떤 능력을 가졌을까?

영생을 가진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훨씬 행복하게 살았겠지?

아, 이건 아닐 수도 있겠다.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유물관이 위치한 장소는 서울의 외곽.

외곽 밖으론 하늘까지 솟은 장벽과 에너지 장막이 쳐져 있었다.

옛날 독일에 있던 베를린 장벽 수준이 아니라 서울 전역을 둘러싸고 있는 벽이다.

개방했으면 죽었을 수도 있겠네.

개방으로 인해 나이를 먹지 않음에도 지구가 식량 부족 같은 기근에 시달리지 않을 수 있는 이유, 

종말의 날.

사람들은 그 날을 이렇게 부른다.

세상이 변하며 생겨난 건 능력뿐 만이 아니었다.

어디서 온지 모르는 괴생명체들.

처음엔 몬스터, 괴물, 좀비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렸지만, 지금은 데몬이란 이름으로 통일되어 불리고 있었다.

- 시민 여러분, 빨리 가장 가까운 곳으로 대피해 주십시오!

어느 날이었다.

능력자들이 아르바이트를 하듯 드문드문 등장하는 데몬을 잡고 있던 시기.

갑자기 하늘과 땅, 바다에서 감당할 수 없는 수의 데몬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 중엔 웬만한 능력자 열댓명이 붙어도 이길 수 없는 강한 녀석들도 섞여 있었다.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데몬.

그 결과,

살아남은 소수의 사람들은 패배를 인정하고 서울로 모여들어 요새화를 시작했다.

고립을 선택하고 방어에 모든 걸 쏟아부어 데몬들이 접근할 수 없는 성역을 만든 것이다.

처음엔 다 끝났다며 자포자기했었다. 

이 좁은 곳에서 어떻게 평생을 사냐며 말이다.

하지만, 인간은 적응하는 동물이라고 했던가.

좁디좁은 서울 안에서 사람들은 터전을 꾸렸고, 어느 정도 살만해지자 서로 급을 나눠 시스템을 만들었다.

그리고 우연히 서울 쪽방에 거주하며 무능력자인 탓에 데몬과 전투를 하지 않았던 나는 시스템의 바닥에 속한 채 기생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래, 무능력자라 40살까지 살았다.

오늘도 쓸데없는 자기 위로를 하며 몸을 돌렸다.

"야! 백운!"

좀 쉬려고 하면 귀신같이 무언가를 시키는 김덕만.

"내일까지 창고 비워야 하니까 가서 청소해!"

이런 샹.

허리 때문에 미루고 미뤘던 창고 정리라니.

내일 아침엔 지옥 확정이다. 

* * *

끼이익.

"콜록!"

문을 열기 무섭게 묵은 먼지가 날아들었다.

사람의 발길이 얼마나 끊겼길래 이 정도로 먼지가 쌓인 걸까.

틱.

….

창고의 불을 켜니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내쉬어졌다.

먼지와 함께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물건들.

숫자가 많지는 않지만 부피가 있는 것들이 꽤 섞여 있다. 

툭툭.

발에 치이는 물건들을 밀며 앞으로 나아갔다.

유물관의 창고.

유물이라 여겨져 들여왔지만 확인해보니 가짜인 물건들이 버려지는 장소다.

"이걸 언제 다 치우나."

혀를 내두르며 창고의 끝으로 천천히 걸어나갔다.

손대기엔 막막하니 일단 견적이라도 내보자는 심산이었다.

저벅.

조심조심 한 발자국씩 내디디며 버려진 물건 사이를 거닐던 중,

창고의 가장 구석에 버려져 있는 물건이 눈에 들어왔다.

잔뜩 먼지를 먹어 기존의 색을 잃어버린 붉은 천에 감싸져 있는 물건.

한 번도 이 구석까지 온 적이 없어 보지 못 했던 물건이었다.

….

전시관에 놓인 다른 유물들과 다르게 창고의 가장 구석에 처박혀 썩어가고 있는 녀석.

왠지 모르게 나와 닮은 구석이 있었다.

큰 흐름에서 벗어나 있는 듯 없는 듯 살다가 바스러질 존재.

털썩.

무슨 바람이 불어서일까.

당장 쓰레기 자루에 버려도 모자란 판국에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슥.

천천히 감싸져 있는 천을 풀어냈다.

그나마 먼지가 덜 먹은 천의 안쪽은 과거의 선홍빛을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었다.

툭.

천을 다 풀어내자 나타난 것.

검…?

정확히는 부러진 검이었다.

천보다 훨씬 낡아 조금이라도 힘을 주면 바스러질 것 같은 모양새.

검의 옆에는 휘갈겨 써진 쪽지 한 장이 있었다.

[출처나 연혁을 확인할 수 없음. 가품 판정.]

검이 창고에 처박히게 된 이유였다.

"…."

다른 환경과 조건이었다면, 이 검도 다른 결말을 맞이하지 않았을까? 

창고의 구석이 아닌 멋진 주인의 손에서 전장을 누빌 수도 있지 않았을까?

스윽.

검을 향해 천천히 손을 뻗었다.

제일 낡은 놈부터 치워버리자는 생각은 아니었다.

그저, 왠지 모르게 동질감이 느껴지는 검을 들어보고 싶었다. 

툭.

손이 검의 손잡이에 닿은 순간.

우웅!

"!!"

엄청난 빛이 쏟아지고, 몸이 조금씩 검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한 단어가 본능적으로 머리에 떠올랐다.

개방(開放).

2화. 개방

천천히 눈을 떴다.

여느 날의 아침과 다를 바 없는 시작이었지만,

"으."

날 맞이한 건 어두컴컴한 골방의 천장이 아니었다.

눈을 뜨기 무섭게 쏟아져 들어오는 찬란한 빛.

군대에 있을 때 당한 눈뽕이 떠오를 정도로 빛은 강렬했다.

달…?

어떤 놈이 눈앞에 후레쉬를 비추고 있나 했는데, 인위적인 빛이 아니었다.

슈퍼문이란 단어로도 한참 부족해 보이는 거대한 달.

체감상 조금만 걸어가도 닿을 듯한 크기의 달이 공간 전체를 빛으로 밝히고 있었다.

밤이구나.

달빛 때문에 잠시 헷갈렸지만 주변은 밤이었다.

밤이라니.

하늘을 보고 있자니 어안이 벙벙했다.

진짜 밤.

서울에서 밤과 낮이란 개념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데몬을 막기 위해 하늘까지 뒤덮여 버린 장벽 때문이었다.

현재 서울에서 낮과 밤이란 개념이 존재할 수 있는 건 인공 태양과 인공 달 덕분인 것.

이렇게 진짜 밤과 달을 보는 건 몇십 년만인지 모르겠다.

"후웁."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와."

간단하지만 강렬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이렇게 상쾌한 공기라니.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게 아닌 자연 그대로의 공기였다.

대체 여기는 어디기에 이런 게 가능한 걸까?

천천히 주변을 둘러봤다.

끝이 보이지 않는 광활한 공간.

"…!"

공간에 있는 건 나 혼자가 아니었다.

아, 사람은 혼자지만.

주변엔 처음 보는, 처음 보지만 딱 봐도 엄청난 가치가 있을 듯한 물건들이 가득했다.

가득.

단어 그대로 주변을 가득 메우고 있는 물건들.

자세히 살펴보니 물건들은 모두 한 가지 계열이었다.

무기.

검과 도, 창, 도끼, 활, 단검 등 갖가지 무기들이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그 중엔 사용법을 알 수 없는 구슬과 지팡이도 보였지만, 어찌 됐든 무기로 사용이 될 것 같았다.

저벅.

가장 가까이에 꽂혀 있는 수리검으로 다가갔다.

영화나 애니메이션에서나 나오던 거대 수리검.

이런 건 실제로 던지려면 힘과 관련된 능력자거나 거인이어야 할 것 같았다.

반짝.

영롱하게 반짝이는 청록색의 수리검.

나도 모르게 빛에 이끌려 수리검으로 손을 내뻗었다.

손으로 수리검의 감촉이 느껴지기 직전,

"손대지 말거라."

"!!"

분명 아무도 없었던 공간으로 낮고 묵직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목소리에 색이 있는 건 아니지만, 만약에 있다면 묵직하면서도 기품 넘치는 찬란한 황금색일 것 같았다.

"나의 것이니라."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

분명 조금 전까진 없었는데?

찬란한 달의 아래.

거대한 황금색 왕좌가 솟아있었다.

왕좌… 맞겠지.

그리고 그 왕좌 위에서 턱을 괸 채 날 바라보고 있는 남자.

왕좌에 잘 어울리는 황금색 머리와 눈동자, 그리고 또렷한 이목구비까지.

지금까지 봐 오던 어떤 연예인보다도 눈부신 생김새였다.

그리고,

남자는 아직 자신에 대해 어떤 소개도 하지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어떤 왕인지는 모르겠지만 저 남자는 최소 왕이라는 것을.

"너 뭐냐?"

"네…?"

다짜고짜 뭐냐고 물어오는 남자에 말문이 막혔다.

"저… 전 백운이라고 합니다."

"이름 말고 뭐하는 놈이길래 나의 공간에 들어왔냐는 거다."

그건 나도 알고 싶은 부분이다.

내가 한 거라곤 그냥 묵혀두고 있던 창고에 들어와 처음 보는 검을 만졌을 뿐이니까.

"저도 모르겠습니다. 창고에 있던 검에 손을 뻗었더니 이곳으로 와졌거든요."

"창고에 검…? 아."

남자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신살도를 말하는 거군."

신살도…?

그런 거창한 이름이라고?

이름을 붙이는 거야 자기 마음이지만 내가 봤던 부러진 검에겐 과분한 이름이었다.

너무 녹슬고 낡아서 당근조차 베지 못할 것 같은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과분한 이름이라 생각하는가?"

"…! 아… 아닙니다."

독심술이라도 쓰는 건가.

"무리도 아니지. 그 모양이 되어버렸으니."

그나저나 이 남자는 창고에 처박혀 있는 검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걸까.

"신살도가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단지 베어야 할 것을 베지 못하고 방치된 탓이지."

창고에서 했던 생각이 옳은 듯했다.

지금은 녹슬고 낡아 반으로 부러져 버렸지만, 다른 상황이었다면 신살도란 이름에 걸맞은 모습이었을 수도 있었다.

"넌 그런데… 왜 그렇게 늙은 거지?"

"…."

참 사람 할 말 없게 만드는 왕이다.

유교 사상의 장유유서나 어른 공경 같은 건 모르는 건가.

아, 물론 저 왕이 생김새는 젊더라도 나보다 나이가 훨씬 많을 수도 있지만 말이다.

그리고, 

주름이 많고 세월을 정통으로 맞았다곤 하나, 40살은 늙은 나이가 아닌데.

새삼스레 억울함이 느껴졌다. 

"네 녀석이 온 곳에서 인간은 수명이란 한계를 넘어섰을 텐데?"

"…!"

창고의 검에 이어 능력과 개방까지.

세상 밖 물정은 하나도 모를 것 같았는데 의외였다.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는 나의 무기들. 그 보물들이 나의 눈이며 귀다. 그러니 어떻게 아는 건지 궁금해할 필요 없느니라."

"혹시… 독심술도 가능하신 건가요?"

"너의 표정이 너무 뻔하다는 생각은 안 해봤나?"

"…"

잊을 만하면 표정 똑바로 하고 다니라던 김덕만의 충고가 떠올랐다.

괜히 괴롭히고 싶어서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아닌 모양이다.

"흐음."

남자가 흥미롭다는 듯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너, 설마 이제 서야 개방을 한 게냐?"

잠시 잊고 있었다.

이곳으로 오면서 나도 모르게 떠올렸던 단어, 개방.

남자의 말에 비쳐 보건대 난 개방을 한 것 같았다.

"그… 그런 거 같은데요."

"풉… 하하하하하!!"

남자가 웃음을 터뜨렸다.

공간이 울릴 정도로 커다란 웃음소리.

뭐가 저렇게 웃긴 걸까.

"하하… 하…."

한참을 웃다 간신히 그친 남자가 고개를 내저었다.

"우매한 녀석이로다. 빨리 개방했으면 영원한 젊음을 누릴 수 있었을 텐데."

빠직.

남자와 나 사이엔 절대 편하게 대할 수 없는 보이지 않는 벽이 존재했지만, 예민한 부분을 건드려서일까,

나도 모르게 불만 섞인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저라고 안 하고 싶어서 안 했겠습니까. 조건을 몰랐으니까 못한 거지."

사실 내가 평소와 다르게 한 행동은 딱히 없었다.

처음 보는 검을 만졌던 것뿐이었다.

그다지 대단하다고 볼 수 없는 행동.

"나의 신살도를 만진 것. 그것이 네놈의 개방 조건이었구나."

"…"

말문이 제대로 막혔다.

남자가 몇 초에 걸리지 않아 말한 나의 개방 조건.

정말 간단한 행동이었다.

난 그런 간단한 걸 못해서….

자책하려다 고개를 내저었다.

결과론적인 생각이었다.

지금 듣고 나니 간단한 거지 내가 어디 가서 저 남자가 귀하다 말하는 물건을 만질 수 있었겠는가.

난 수십 년을 일한 유물관의 유물조차 한 번 만져보지 못한 바닥 인생인데 말이다.

그래도 억울하긴 하네.

차라리 마지막까지 안되는 게 나았을 텐데.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나있었다.

개방의 조건을 찾는 걸 포기한 지도 이미 오랜 시간이 지난 시점.

어느 순간부터 난 개방을 포기하고 있었고, 현재의 바닥 인생을 현실이라 생각하며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개방이라니.

허리는 조금만 움직여도 뼈 소리와 함께 고통이 밀려왔고, 팔과 다리 역시 시도 때도 없이 저려올 정도로 내 몸은 고장 나 있었다.

조금이라도 부피가 있는 물건은 힘이 딸려 들지도 못하는 최악의 몸.

이런 몸으로 이제 와서 영생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개방된 능력이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느냐?"

"… 잘 모르겠습니다, 이제 와서 궁금해 하는 게 의미가 있는 건지." 

남자가 묘한 미소를 지으며 날 응시했다.

모든 걸 꿰뚫어 볼 것 같은 황금색 눈동자.

"개방된 능력 덕분이구나. 나의 공간에 들어와 있는 건."

자세히 보니 알겠다는 듯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남의 공간에 침투하는 게 내 능력인 걸까?

"그리고 어찌 보면 나와 같기도 하구나."

"…?"

물음표를 띄는 내 표정에 남자가 묘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누군지 알겠느냐?"

알 리가.

"난 모든 무기의 왕."

남자의 엄격하고도 근엄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두근.

동시에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대체 누구길래 저런 근엄한 얼굴로 뜸을 들이는 걸까?

혹시나 신!?

제우스? 헤라클레스? 아니면 비슈누?

기대감이 천정부지로 치솟기 시작했다.

두근두근두근.

"카이안."

"?"

나도 모르게 미간이 찌푸려졌다.

뭐라고?

카이안?

"뭐지? 그 얼굴은."

카이안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어떤 표정을 지어야 되는 거지.

생전 처음 들어보는 이름에 헉! 또는 우와! 하며 놀라야 하는 걸까.

"모르는 이름이어서 그런가? 알 리가 있겠느냐. 모든 무기의 왕이었지만, 이곳으로 들어온 지는 꽤 됐으니. 지금 살아있는 인간들은 알지 못하는 게 당연하지."

"그… 그렇군요."

"…."

아무 대답이 없는 카이안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왕임을 밝혔으니 고개를 조아리거나 무릎이라도 꿇어야 하는 걸까.

지금 허리 상태로 고개를 조아렸다간 바로 요단강 행일 텐데 말이다.

무리해서라도 무릎을 꿇어야겠다 생각한 순간, 카이안이 미소를 머금었다.

"뭐 어쨌든. 네 녀석이 나의 공간에 들어온 첫 인간이다. 영광으로 알거라."

"가… 감사합니다."

"네 녀석의 능력은 뭔지 파악했느냐?"

개방이 되면 자연스럽게 자신의 능력을 깨닫는다고 했었다.

그리고 나 또한, 나도 모르는 사이 내 능력에 대해 깨달아 가고 있었다.

"공명."

싱긋.

나의 말에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의미가 있는 사연, 역사 혹은 신화가 담겨있는 물건을 건드렸을 때 그 공간으로 들어가는 것. 그것이 네 능력이다. 지금 나와 마주하고 있는 것도 그 능력 덕분이고."

기분이 이상했다.

드디어 그토록 원하던 개방을 했는데도 기쁘다기보단 묘한 기분.

능력이 마음에 안 들어서일까?

아니면 이미 늦어버려서일까.

아무 말 없는 날 잠시 바라보던 카이안.

"늦었다고 생각하느냐?" 

"…."

카이안이 이해한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개방된 능력이 몸의 시간을 되돌리는 게 아닌 이상, 그런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지."

아픈 부분을 골고루 잘 때리는 무기의 왕, 카이안.

정확했다.

공명이란 능력을 얻었다 한들 거동도 불편한 몸을 가지고 뭘 하겠는가.

내가 만질 수 있는 유물은 전시관의 것들이 다였고, 아마 룰을 어기고 만지는 순간 바닥 인생에서 지하로 내버려질 것이었다.

"만약."

"…?"

카이안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가볍게 말을 건네던 지금까지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다시 한번 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

잠시 구름에 가려졌던 달이 모습을 드러냈다.

동시에 공간의 중앙에 있는 왕좌로 찬란한 달빛이 쏟아져 내렸다.

"어떻게 하겠느냐?"

어떻게 할 거냐는 카이안의 질문.

예상외로 머리가 복잡해지거나 하진 않았다.

3화. 기회

"다시 살고 싶습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이 튀어나왔다.

이외에 어떤 대답을 할 수 있겠는가.

"대답은 시원해서 좋구나. 이유는?"

이유를 묻는 카이안에 수십 년간 쌓여 왔던 것들이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개방을 하지 못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바닥에서 무능력자로 살아온 인생.

어떻게든 강해져 위로 올라가고 싶었다.

그리고,

- 운아, 걱정하지 말고 기다려! 내가 다 무찌르고 올 테니까.

- 백운 님, 죄책감 가질 필요 없어요. 각자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되니까요. 싸우는 건 제 역할입니다.

- 내가 지켜줄게.

바닥 인생이기에, 무능력자이기에 어쩔 수 없다 여겨왔던 것들.

그저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들.

난 무능력자잖아, 뭘 할 수 있겠어.

싸움 같은 게 불가능하잖아, 숨어있을 수밖에 없어.

어쩔 수 없어.

어쩔 수 없었어.

어쩔 수….

꽈악.

어쩔 수 없다는 속 편한 말로 외면하고 잊으려 했던 모든 것들.

잊으려 했지만,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었다.

"후회되니까요."

세상을 종말의 날로부터 구하겠다거나 그런 거창한 걸 하겠다는 게 아니었다.

그저, 어쩔 수 없다는 이유로 외면했던 일들에 최선을 다 해보고 싶었다.

다시는 후회하지 않도록.

그리고 그걸 위해 강해지고 싶었다.

강해질 수 있는 끝까지 말이다.

"다시 살면 후회 안 할 자신은 있고?"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떻게 확신할 수 있겠는가.

일찍이 개방을 함으로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었고, 지금보다 더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삶이 기다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확신할 순 없지만, 아직 살아보지 않았다는 건 적어도 후회를 안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거니까요."

가능성이 있다는 것.

그것 하나만으로도 대답의 이유는 충분했다.

잠시 무언가 생각하는 것 같던 카이안이 입을 열었다.

"나는 어떨 거 같으냐?"

"네…?"

"억겁의 시간을 살아온 나는… 과연 지나온 삶을 후회할까, 아니면 만족하며 행복해할까?"

"이 정도의 무기들을 모으며 왕이 되셨으니 행복하실 것… 같지만."

"같지만?"

어딘지 모르게 쓸쓸해 보였다.

휘황찬란한 보물급 무기들에 둘러싸여 있었지만, 차가운 달빛과 무기 사이에 홀로 앉아있는 카이안에게선 짙은 고독과 외로움이 느껴지고 있었다.

대답을 망설이는 내 모습에 카이안이 웃음을 터뜨렸다.

"됐다. 대답하지 않아도 알 것 같군. 그래서, 다시 주어진 삶에선 어떻게 살 생각이지?"

"위로 올라갈 겁니다."

올라가고 올라가 손이 닿을 수 있는 극한까지 올라가서.

후회로 남아 있는 것들을 바꾸고 싶었다.

"단순해서 좋군. 그럼…."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카이안이 손을 들어 올렸다.

카이안의 손으로 날아드는 푸른 검 한 자루.

"아까도 말했다시피 난 뛰어난 무기를 모은다. 그리고, 내 손에 들어온 무기를 사용할 수 있지. 여기서 사용은…"

"!!"

카이안이 든 검으로 퍼져 있던 달빛이 모여들었다.

"단순히 휘두르는 것이 아닌, 각 무기가 가지고 있는 능력을 다룰 수 있는 것이다."

사악!

카이안이 하늘을 향해 검을 크게 휘둘러 보였다.

콰아아아!

저절로 입이 벌어졌다.

하늘에서 이따금씩 달과 별을 가리던 구름들.

그 구름들이 카이안이 휘두른 결대로 갈라져 버렸다.

"그리고 또 하나의 능력은 계승."

스윽.

왕좌에서 일어난 카이안이 느긋한 걸음걸이로 내게 다가왔다.

"나의 능력을 그대로 전해줄 수 있지. 물론, 계승이란 능력 자체는 제외하고 말이다."

다가온 카이안에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조용히 자신의 능력을 말해주고 있는 카이안.

지금 내게 계승을 해주겠다는 의미일까?

"넌 아직 모르겠지만, 네 녀석의 능력과 나의 능력은 좋은 합을 이룰 수 있겠지. 이미 세월이 지나 바스러져 내가 손에 넣지 못한 것들까지, 넌 손에 넣을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훤칠한 키로 내려다보고 있는 카이안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그려 보였다.

"어떠냐? 내 능력, 받아 볼 테냐?"

"!!"

왕의 엄청난 제안에 눈이 커져 갔다.

이렇게 눈이 커진 적이 있나 싶을 정도로 말이다.

"어째서 제게…?"

만난 지 이제 갓 한 시간 정도가 되었을 뿐이다.

정확히 카이안이 어느 정도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게 주겠다니.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하거라. 동의한다면, 아까 말했던 대로 기회도 주마."

이유를 말해줄 것 같지 않은 카이안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전 하늘을 가르던 힘과 다시 살 수 있는 기회. 

어떻게 거절할 수 있겠는가.

"좋다."

카이안이 다시 한번 손을 들어 올렸다.

잠시 후 카이안의 손으로 다가오는 황금색의 검.

푸욱.

너무 갑작스러웠다.

"!!"

고개를 내려 심장에 꽂혀진 검을 바라봤다.

신음조차 나오지 않은 건 너무 놀라서는 아니었다.

심장에서 느껴지는 건 뭔가 날붙이에 꿰뚫린 것이 아닌, 따듯하면서도 신비로운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어디 한 번 잘 살아 보거라."

사아아아….

심장에 검이 꽂힘과 동시에 공간 전체가 빛의 입자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카이안의 몸과 함께.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공간과 함께 카이안이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놀랄 필요 없다. 왕은 두 명 존재할 수 없는 법이니까."

"어… 어째서!"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이 사라지면서까지 처음 보는 나에게 왜?

"글쎄."

싱긋.

흩어져 가는 카이안에게 그려지는 미소.

아까의 미소와는 달랐다.

왠지 모르게 서글프면서도 지친 듯한 미소였다.

"그냥… 왕의 변덕이니라. 그리고, 이왕 올라갈 거라면 끝까지 가거라. 힘의 한계 때문에 무언가를 놓치지 않도록 말이다."

목 위를 제외하곤 대부분이 빛의 입자가 되어버린 카이안.

카이안의 마지막 목소리가 귓가로 스며들었다.

"왕이 되거라."

* * *

사방이 캄캄했다.

동시에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공기도, 소리도, 빛도.

어느 것 하나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었다.

조금 전까지는 분명 달빛으로 가득 채워졌던 공간에 있었는데.

설마 꿈은 아니겠지.

아니면 정신이 나가버렸던가.

그래선 안 된다며 열심히 부정을 하던 중.

사아아…!

점점 앞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

언제 그랬냐는 듯 사방이 밝아져 있었다.

살을 간지럽히는 따듯한 햇빛.

밖…?

손끝으로 느껴지는 까끌거림에 몸을 일으켜 세웠다.

아! 너무 급하게 일어나면 허리가

"…?"

멀쩡했다.

오랜 시간 날 괴롭혔던 허리의 통증.

그 통증이 깨끗하게 사라져 있었다.

- 다시 한번 살 수 있다면.

그제야 카이안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삶의 기회.

벌떡 일어나 주변을 살폈다.

조금 떨어진 곳에 깨져 있는 유리가 보였다.

덥석.

손이 베이든 말든 일단 집어 들어 얼굴을 비춰보았다.

"하…"

탄성을 내뱉는 거 말곤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유리 속에 비추어진 나의 모습은 더 이상 자글자글한 주름을 기본으로 삶의 의지마저 박탈되어버렸던 처참한 몰골이 아니었다.

말끔.

왁스를 발라 깔끔하게 넘겨진 머리와 주름은커녕 잡티 하나 존재하지 않는 깨끗한 피부까지.

하도 오래되어 기억에서조차 퇴색됐던 젊었을 적 나의 얼굴이었다.

"하하…."

유리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이게 가능하다니.

정말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마음 같아선 미친놈처럼 사방팔방 뛰어다니며 환호성을 지르고 싶었다.

"크르르."

"…?"

크르르?

그렇게 자아도취 상태로 유리를 바라보고 있던 중.

등 뒤로 불길한 소리가 들려왔다.

스윽.

천천히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허.

너무 놀라 육성으로 나올 뻔했지만, 눈앞에 있는 놈들을 자극할까 간신히 참아냈다.

날카로운 이빨과 거대한 몸체.

개의 형상으로 침을 줄줄 흘리고 있는 데몬들이 몇 발자국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저 녀석들이 있다는 건 한 가지를 의미했다.

서울이 아니구나.

그리고 서울이 아니라면, 아직 장벽이 쳐지기 전이라는 것.

하운드라는 이름을 가진 데몬들.

무리를 지어 다니며 발견한 사람이나 동물을 무차별적으로 뜯어 먹는 녀석이었다.

- 왕이 되어라.

꼭 카이안이 시켜서는 아니었다.

그저, 이왕 올라갈 거라면 힘의 부족으로 무언가를 잃지 않아도 되는 최고까지 가볼 생각이었기에, 나도 모르는 사이 왕이 되는 걸 목표로 삼고 있었다.

그런데 하운드라니.

아직 무기 하나 모으지도 못했는데 하운드라니.

설마 여기서 죽는다고?

돌아온 지 5분도 안 지났는데?

안될 말이었다.

"…."

하운드 무리와 나 사이로 찾아온 정적.

셋에 뛴다.

하나.

팟!

셋까지 세고 있을 여유 따윈 없었다.

"크르르! 컹컹! 컹!"

얌전한 척 하던 먹이가 튀어서인지 하운드 놈들은 잔뜩 화가 난 모양이었다.

지성이 있는 놈들인지는 모르겠지만 이해를 좀 해줬으면 좋겠다.

너네도 내 입장이면 억울해서라도 도망칠 테니까.

"컹! 컹! 컹!"

쫓아오며 무서운 소리를 뱉어내는 녀석들.

소리로 거리를 가늠하며 급하게 주변을 살폈다.

장벽이 쳐지기 전이라면 각 지역을 지키는 가드들이 있을 터였다.

훼엥.

말 그대로 거리가 휑했다.

설마 버려진 도시?

불길한 생각이 엄습해왔다.

장벽이 쳐지기 전에도 데몬이 너무 자주 출몰하거나 하는 장소는 전력의 부족으로 버려지기 일쑤였다.

여기가 그런 곳이라면 지금 날 구해 줄 사람은 없다고 보는 게 현실적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사람 찾기는 포기.

하지만 삶은 포기할 수 없다.

빠르게 고개를 돌려 무기가 될만한 걸 탐색했다.

우우웅.

눈을 바쁘게 움직이고 있을 때, 무너진 건물 사이로 은은한 황금빛이 새어 나왔다.

타닥!

저 빛이 날 죽음으로 이끌지도 모르지만, 일단 내달렸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크라아!"

조금 전보다 훨씬 가까워진 소리.

점점 따라잡히고 있었다.

눈썹 흩날리게 뛰던 중, 건물이 무너지며 떨어진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영국 런던 거리를 완벽히 재구성! 인천 속의 런던을 즐기세요.]

더럽게 긴 문구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조졌다.

그것도 완전히 조졌다.

빛이 새어 나오길래 뛰어왔더니 런던 거리라니.

사용할 수 있는 무기가 있을까 싶어 달려왔는데 거리 전시회라니!

삶이 아니라 죽음으로 이끄는 빛이었단 말인가.

"커어어어엉!"

귀 바로 뒤까지 들리는 소리에 안쪽으로 몸을 날렸다.

우당탕! 쿵!

"아으…."

데굴데굴 구르다 무언가에 머리를 부딪혔다.

쓰려오는 머리를 어루만지는 사이,

"크르르…!"

"크르르르릉!"

여러 마리의 하운드가 날 포위하며 다가왔다.

뒤에는 막다른 길.

독 안에 든 쥐라고 생각했는지 느긋한 걸음으로 다가오는 하운드들.

오반데.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이런 단어를 써본 게.

젊어진 몸에 반응한 건지 이맘때쯤 쓰던 단어가 튀어나왔다.

어쨌거나.

기가 찼다.

새로운 삶을 살며 예상하지 못한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다는 건 알았지만.

지금은 좀 아니지 않은가.

아직 아무것도 못 했단 말이다.

우웅.

!

시야의 끄트머리에서 빛을 뿜어내고 있는 무언가.

곁눈질을 해 빛을 살폈다.

면도칼…?

하마터면 욕지기가 튀어나올 뻔했다.

빛을 뿜어내고 있는 건 다름 아닌 면도칼.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조막만 한 건 아니었다.

나름 손잡이가 있고 사각형의 칼날이 과도 정도는 되는 크기.

그런데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난 과일 깎아 먹을 칼이 아니라 앞에 있는 괴물을 죽일 게 필요한데.

면도칼 옆에는 작은 푯말이 떨어져 있었다.

[런던 거리 어느 미용사가 사용했던 면도칼]

미용사가 거대한 대도로 머리를 잘랐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크르르르!!"

이제 먹을 때가 됐다 생각했는지 맨 앞에 있던 하운드가 내게 달려들었다.

이에 질세라 연달아서 도약하는 하운드 무리.

죽기 전에는 주마등이 보인다 했던가.

왠지 모르게 하운드가 느릿하게 다가오는 것 같았다.

잠시 느릿하게 다가오는 하운드를 보고 있던 중.

죽을 땐 죽더라도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맨손보단….

빛을 향해 몸을 기울였다.

낫겠지!!

떨어져 있는 면도칼을 향해 손을 뻗었다.

4화. 런던의 살인마

뭐지?

면도칼을 잡은 순간.

시간이 멈춘 듯 하운드의 움직임이 정지했다.

그리고, 

꿀렁.

!!

멈춰있는 하운드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무언가.

젊어졌으니 망정이지 몸 여기저기가 고장 나 있던 과거의 나였다면 심장마비 확정이었다.

털썩.

홀리….

분명 무교였음에도 나도 모르게 신을 찾을 뻔했다.

피칠갑을 한 채 바닥으로 떨어진 건 사람이었다.

사람 모양을 한 핏덩이인지, 사람이 피를 칠한 건지 헷갈리는 형상.

찰박.

부… 부처님.

떨어졌던 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군가를 찾지 않고선 버틸 수 없는 광경이었다.

"누구냐?"

소름 끼치는 목소리가 귓가로 들려왔다.

쇠를 갈아 넣는 듯한 목소리는 착 가라앉기까지 해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뒷머리를 쭈뼛 서게 만들었다.

"전 백운입니다."

인간인지 아닌지도 모를 것한테 이름을 말하는 게 의미가 있나 싶었지만, 일단 물었으니 대답해 준다.

"당신은 누구죠?"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질문을 건넸다.

나도 말했으니 너도 말해야 한다.

"그런 질문… 해도 괜찮겠어?"

"…?"

의미심장한 되물음에 머리를 갸웃거리자 핏덩이 남자가 미소를 머금었다.

"그걸 물은 사람은 다 죽었거든. 한 명도 빠짐없이."

"!"

"물론 내가 죽였다."

시발.

몇십 년 만에 욕이 터져 나왔다.

모든 걸 포기하고 살아 욕할 의욕조차 없었는데.

지금은 욕이 아니면 적절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어쨌든 찾아온 손님이니 대답은 해주지. 난 예술가다."

예술가라 소개하는 말을 들으니 강력한 확신이 섰다.

미친놈이다.

그것도 완전 개미친놈.

사람을 죽이는 행위를 예술이라 표현하는 미치광이는 영화에서나 나올 거라 생각했는데, 내 눈앞에 버젓이 존재하고 있었다.

"…."

각자를 소개한 후 잠시 찾아온 정적.

그 정적을 놓치지 않고 주어진 정보를 조합했다.

다 고장 난 몸을 이끌고 유물관에서 할 수 있는 취미 생활은 독서뿐이었다.

유물 및 역사, 여러 사건에 대한 지식만큼은 그 누구보다 많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런던 거리 전시회.

면도칼.

사람을 죽인 살인마.

더 떠올릴 필요도 없었다.

이 세 가지에 부합하는 인물은 딱 한 명이었으니 말이다.

"잭 더 리퍼."

"호오?"

내가 자신을 알고 있는 게 의외였는지 잭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날 알고 있는 건가?"

자신이 잭 더 리퍼임을 시인하는 남자.

대체 어떻게 해야 연쇄 살인마가 사용하던 면도칼을 주워올 수 있는 걸까.

슥.

고개를 돌려 옆에 떨어져 있는 푯말을 쳐다봤다.

런던의 어느 미용사가 사용하던 면도칼

뭐야 저게.

뜬금없는 미용사라니.

"뭐라고 적혀 있는 거지?"

내 시선을 따라온 건지 잭이 물어왔다.

"런던의 어느 미용사가 사용하던 면도칼이라고 써놨어요."

"내 가게에서 주워왔나 보군."

"가게… 요?"

뭘 되묻냐는 듯 잭이 어깨를 으쓱 올려 보였다.

"미용사였다. 런던 거리에 내 가게도 있었고."

들으면 들을수록 어안이 벙벙해지는 말이었다.

희대의 연쇄살인마 중 한 명이 미용사라니.

"그럼 살해당한 사람들은 설마?"

"날 찾아온 손님들이었다. 마음에 들어서 죽였지. 네가 들고 있는 면도칼로 말이야."

"…. 그럼 이걸로 사람도 죽이고, 사람 죽인 칼로 머리도 깎고…?"

뭘 당연한 걸 묻냐는 듯 잭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개또라이네.

어떻게 살인마의 면도칼을 주워온 건가 했더니.

수집가가 런던의 버려진 미용실을 뒤지다 우연히 잭의 가게에 얻어걸린 모양이었다.

"런던 이스트엔드에서 5명 이상을 살해한 연쇄살인마가 미용사라."

미용사였다는 말이 믿기지 않아 혼잣말을 중얼거리자.

"풉."

잭이 실소를 터뜨렸다.

역시 미친놈들은 종잡을 수가 없다.

"5명?"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은 잭이 다시 입을 열었다.

"혼란을 줄이려고 많이 줄여서 기록 했구만."

꿀꺽.

거짓말 같지 않은 말에 마른침이 삼켜졌다.

5명이 아니면 대체 몇 명을 죽인 걸까?

10명? 15명?

"내가 죽인 건 이 정도다."

사아아아.

"!!"

잭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발 아래로 피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차오른다?

여긴 무너진 건물이라 뭔가 차오르고 할 수 있는 곳이 아닌….

"허…."

언제부터였을까.

사방이 새빨간 피로 도배된 것은.

눈에 보이는 모든 곳이 붉은 피로 뒤덮여 있었다.

찌릿.

동시에 엄청난 피비린내가 코를 찔러댔다.

"이것이 내가 죽인 사람들의 피다."

이 정도 피의 양이라면 50명 이상 아니, 최소 100명이었다.

"모두 네가 들고 있는 면도칼로 죽였지."

"…!"

어느샌가 들고 있던 면도칼에도 피가 흥건히 물들어있었다.

여전히 면도칼을 놓지 않자 잭의 얼굴로 묘한 미소가 그려졌다.

"살기 위해서 그 칼을 잡은 거냐? 무고한 100명의 목숨을 빼앗아 간 그 면도칼을?"

"…."

잭의 말에 들고 있는 면도칼을 응시했다.

피가 흥건하다 못해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고 있는 면도칼.

밤에 본다면 지리고도 충분히 남을 모습이었다.

"그러면 안 되나요?"

잭이 하운드 입에서 튀어나오느라 상황을 못 살폈나 싶었다.

5초 후엔 저놈들한테 갈기갈기 찢겨 고깃덩이가 될 판인데 말이다.

"아니, 안될 건 없지. 단지, 보통은 안 쓰거든. 죄 없는 이들을 학살한 살인마의 도구는 말이야."

선택지가 있었다면 안 쓸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나에게 무기라고는 이것뿐이다.

이 면도칼이 내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1000명을 죽인 면도칼이라고 해도 전 썼을 겁니다. 여기서 죽을 생각은 전혀 없거든요."

암, 억울해서라도 못 죽지.

"키킥… 정의감에 못 쓰겠다고 징징거리지 않아서 좋군. 그래서, 써본 적은 있고?"

솔직히 말하면 없었다.

그 흔한 과도조차 잡아본 지가 수십 년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유를 알 수 없는 확신이 들었다.

모든 무기의 왕, 카이안.

카이안은 모든 무기의 진짜 힘을 다룰 수 있었고, 난 그런 카이안을 계승했다.

끄덕.

고개를 끄덕이자 잭이 어깨를 올려 보였다.

"좋아, 내 소중한 면도칼이지만 주도록 하지. 단, 조건이 있다."

"조건…?"

씨익.

미소를 지은 잭이 손을 들어 면도칼을 가리켰다.

"그 면도칼에 피가 부족하지 않도록, 흠뻑 적셔 주겠다 약속하면 주마."

뭐야.

어디 가서 살인이라도 하라 그럴 줄 알았는데, 몹시 쉬운 조건이었다.

"알겠습니다, 받아들이죠."

피를 적셔달라고?

5초만 기다려라.

달려들던 하운드 놈들 피로 목욕을 시켜줄 테니.

"좋다."

잭이 천천히 피가 흥건한 손을 들어 올렸다.

옛날에도 악수란 게 있었던 모양이다.

슥.

망설임 없이 잭의 손을 붙잡았다.

"어디 한 번 마음껏 날뛰어봐라."

* * *

주변에 있던 피가 걷히고, 

"크르르릉!"

두세 발자국 앞까지 다가온 하운드 무리가 눈에 들어왔다.

이상했다.

면도칼을 잡기 전까지만 해도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급했었는데.

어째서인지 지금은 마음이 평온했다.

그리고,

손끝에 느껴지는 면도칼의 촉감을 시작으로 몸에 변화가 찾아왔다.

간질간질하면서도 짜릿한 전기가 흐르는 묘한 느낌.

이제는 바로 앞까지 다가온 열댓 마리 정도의 하운드를 응시했다.

보인다.

내가 움직여야 하는 자리가.

보인다.

그었을 때 저놈들이 가장 많은 피를 뿌려댈 위치가.

"스으으으…"

[잭 더 리퍼]

한 차례 호흡을 뱉어낸 후,

"난도질."

저벅.

하운드들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 * *

"뭐야… 이거."

하운드 무리가 출몰했단 소식을 듣고 달려 나온 지 10분.

도착한 장소에 하운드는 존재하지 않았다.

존재하는 거라곤 하운드였던 것으로 보이는 살점들 뿐이었다.

"포상금은 물 건너갔네."

"그러게요."

변화는 항상 새로운 직업을 만들어 냈고, 데몬의 등장이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았다.

데몬에 의해 피해가 증가하자 정부는 극단적인 대안책을 내기에 이른다.

데몬 헌터의 공식화.

공식화 전까지는 개개인이 프리랜서 형식으로 데몬을 잡아왔지만, 이젠 아니었다.

국가에 헌터로 등록을 하게 되면 공무원과 같이 데몬 처치에 대한 보수를 받을 수 있게 된 것.

"선배, 이거 누가 그랬을까요?"

"그걸 알면 10분 동안 멍하니 서 있진 않았겠지."

"그렇긴 하죠."

헌터 서연의 팀은 3인 1조로 구성되어 있었다.

지금까지 꽤 많은 데몬을 잡아 오며 어느 정도 이름도 알려진 상태.

그런 세 명조차도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엔 멍하니 있을 수밖에 없었다.

"피가 다 빠져있어요."

무너진 건물 내부 현장.

현장은 말 그대로 피바다였다.

그리고 피의 주인인 열댓 마리의 하운드는 액체가 전부 빠진 상태로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스윽.

서연이 허리를 숙여 하운드의 시체를 살폈다.

얼핏 보면 아무렇게나 난도질당한 것처럼 보이지만, 아니었다.

자상 하나하나가 모두 피가 몰리는 혈관을 가르고 있었다.

물론 한 마리뿐만이 아닌, 열댓 마리 모두 다 말이다.

꿀꺽.

긴장한 탓일까.

마른침이 서연의 목을 통과하며 소리를 만들어 냈다.

"어떤 미친놈이야, 이거."

* * *

"에취!"

누가 내 욕하나.

재채기와 동시에 귀가 간질간질해졌다.

후비적후비적.

귀를 파며 열심히 발걸음을 옮겼다.

저 멀리서 보이는 밝은 불빛들.

뭐하는 곳인지는 모르겠지만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 같았다.

그나저나.

이 꼬라지로 가도 될지 모르겠다.

고개를 내려 피범벅이 된 옷을 바라봤다.

내가 옷을 입고 있는 건지 피를 칠하고 있는 건지 헷갈렸다.

그만큼 온몸의 옷이 새빨갛게 물들어있는 상태였다.

- 난도질.

하운드들을 마주한 채 나도 모르게 읊조린 단어.

본능에 몸을 맡기며 걸음을 내디뎠었다.

그다음은?

간단했다.

이미 움직여야 할 위치를 알고 있었고, 면도칼을 휘둘러 베어내야 하는 자리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냥 미친 듯이 휘둘렀다. 

본능이 시키는 대로 말이다.

1분이나 걸렸을까?

달려드는 무리를 통과하고 뒤를 돌아봤을 땐, 모든 하운드가 선홍빛 피를 분수처럼 뿜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엔 몸에 있던 감각들과 함께 손에 들려있던 면도칼이 황금색 입자가 되어 흩어져 버렸다.

물론,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다.

지금도 느껴지고 있었다.

나의 무기고 안에 들어 있는 면도칼의 감각이 말이다.

"흐음."

면도칼을 처음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잭 더 리퍼 뺨 때리는 움직임을 구사했다.

그야말로 엄청난 능력.

물론 주의할 게 있었다.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자연스럽게 풀려버린 잭 더 리퍼의 능력.

그 뒤엔 다시 사용하려고 해도 묵묵부답이었다.

마치 배터리를 한바탕 사용하고 다시 충전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사용 시간이 지난 뒤 쿨타임이 도는 면도칼.

정확한 표시가 되는 건 아니라 구체적인 시간은 알 수 없었다.

다만, 본능적으로 어느 정도겠구나 감이 올 뿐이었다.

빨리 무기들을 더 구해야겠어.

모든 무기가 같을지는 모르겠지만, 사용 횟수와 시간에 제한이 있는 이상 최대한 많은 무기를 쟁여놔야 했다.

괜히 카이안이 산더미처럼 무기를 쌓아 놓은 게 아니었던 것.

저벅.

싱긋.

걸음을 걷던 중,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남이 보면 미친놈이라고 하겠지만, 상관없었다.

꽈악.

힘을 줘 볼따구를 꼬집었다.

씨익.

역시 꿈이 아니다.

어젯밤까지만 해도 지겹다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지긋지긋했던 골방에서 잠이 들었는데.

지금은 십수 년 전으로 돌아와 길을 거닐고 있었다.

쌩쌩한 몸은 덤으로 말이다.

그리고, 무기 왕 카이안의 능력과 나의 개방 능력.

두 가지의 능력이 나에게 깃들어 있었다.

앞으로 날 강하게 만들어 줄 능력.

아무 무기나 되는 건 아니지만, 모으면 모을수록 난 강해진다.

아직 모은 건 잭 더 리퍼의 면도칼 하나였지만, 기분이 좋았다.

강해질 수 있다는 확신에 가까운 가능성.

전에는 한 줌조차 없었던 가능성이 지금 내게는 존재했다.

강해질 거다.

아니, 무조건 강해진다.

북받쳐 오르는 마음에 입을 크게 벌리고 소리를 내질렀다.

"아자아아!! 강해지자아아아!!!" 

우렁찬 목소리가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5화. 반짝이는 상자

"…."

나잇값을 못하고 소리를 질러 대서일까.

곤란한 상황에 처했다.

굳이 따지자면 곤란한 상황이라기 보단, 쪽팔린 상황.

너무 신이 났던 걸까.

바로 뒤까지 다가온 사람들을 인지하지 못해버렸다.

멍한 표정으로 두 명의 여자가 날 바라보고 있었다.

"뭐… 뭐하세요…?"

작은 키의 여자가 말을 더듬으며 물어왔다.

뭘 하고 있었다고 해야 할까.

신이 나서 소리를 질렀다고 해야 하나.

더 이상해 보일 거 같은데.

"소연아 이리 와. 가까이 가지마."

윽.

너무 했다.

바로 앞에 사람이 있는데 가까이 가지 말라니.

주름이 자글자글했던 시절, 많이 들은 얘기였지만 젊음으로 돌아온 후엔 처음 듣는 말이었다.

"희연 언니, 잠깐만. 이 오빠 어디 아픈 거 같아."

애야 난 아프지 않단다.

잠시 신이 났던 것뿐이란다.

하지만.

정말 오랜만에 들어보는 오빠란 호칭은 몹시 기분이 좋구….

짝!

마음속으로 뺨을 올려 쳐버렸다.

상대방의 나이와 현재 내 나이를 고려해봤을 땐 그다지 도리에 어긋난 생각은 아니었지만, 아직까지 내 양심은 불혹에 머물러 있는 듯했다.

"김소연!"

희연과 소연.

두 사람의 이름인 것 같다.

"전 괜찮아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동생을 부르는 걱정 가득한 목소리.

안 괜찮더라도 걱정하는 언니를 위해서 괜찮은 척을 해야 할 것 같다.

"거봐. 괜찮다고 하시잖아. 얼른 와."

저 수상한 사람 아니니까 그렇게 급하게 안 부르셔도 되는데…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방금 처음 본 사람 말을 믿을 리가 있겠는가.

그런 언니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왕눈이 같은 눈을 부릅뜨고 날 바라보고 있는 김소연.

애타는 언니를 떠나서라도, 착한 분인 것 같지만 빨리 가줬으면 했다.

혼자 소리 지르다 걸려서 그런지 이 창피를 홀로 삭힐 시간이 필요하다.

"정말은 괜찮은 거죠…? 도움이 필요하신 거 같은데…."

그 정도로 이상하게 보였던 걸까.

하긴, 캄캄한 밤에 왠 놈이 강해지자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대니 나 같아도 미친놈이라 여겼을 것 같다.

"하하… 아니에요. 얼른 가보세요."

괜찮다는 말에도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김소연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시선을 나에게 고정한 상태로.

"저엉말 괜찮은 거죠…?"

"그럼요, 정말 괜찮아요."

어두워서 잘 보이진 않겠지만, 괜찮다는 걸 어필하기 위해 해맑게 웃어 보였다.

씨이익.

그 순간.

하늘을 가리고 있던 구름이 걷히며 캄캄했던 길로 달빛이 스며들었다.

동시에 내 얼굴을 비추는 밝은 달빛.

"!!"

"!!"

두 사람의 동작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얼마나 놀란 건지 두 사람은 호흡까지 멈춰버린 것 같았다.

아.

큰일이다.

잠시 잊고 있었다.

지금 내 몰골이 어떤지를.

….

몇 초간의 정적이 흐른 후.

"저… 저기."

"오지 마세요."

"죄… 죄송합니다!

빠르게 뒷걸음질 치기 시작한 두 사람.

괜찮냐고 묻던 소연이란 분도 피가 떡칠된 얼굴은 감당 불가능인 듯했다.

"죄송합니다!"

다시 한번 죄송하다는 말을 남기고 등을 돌린 희연과 소연.

후다닥.

잠시 후 두 사람의 모습이 마을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 * *

불빛에서 약간 떨어진 버려진 건물.

쏴아아아.

사람의 발길이 끊겨 관리가 엉망이었지만, 다행히 수도는 끊기지 않은 듯했다.

촥! 촥! 촥!

"으…."

차갑다. 

더럽게 차갑다.

그런데, 상쾌하다.

얼굴이라도 좀 닦았어야 했는데 내 실수다.

- 죄송합니다!

내 몰골을 보자마자 오만상을 찌푸리며 도망가버린 두 사람.

도망칠 만했어.

그나마 둘은 담력이 강한 편이었다.

나 같았으면 한밤중에 이런 몰골을 마주쳤다?

바로 기절행이다.

- 호다닥.

그리고 마을로 도망가버리는 두 사람과 함께 나도 이곳으로 도망쳐 왔다.

죄지은 것도 아닌데 나까지 꼭 도망쳐야 하는가 의문이 들긴 했지만, 혹시나 오해를 해 총탄이 날아들까 일단 몸을 피한 것이었다. 

스윽.

고개를 들어 깨져 있는 거울을 바라봤다.

진작에 씻을걸.

얼굴이라도 씻으니 미치광이 살인마의 이미지에서는 많이 벗어난 생김새가 됐다.

그나저나 또 어두컴컴한 화장실과 차가운 물이라니.

거울에 비춘 모습이 아니었다면 다시 유물관으로 돌아왔다고 착각할 뻔했다.

아 따신 물로 씻고 싶다!

꼬로록.

그렇게 따듯한 물에 대한 욕구를 불태우고 있을 때, 이보다 더 큰 식욕이 내 배를 울렸다.

배고플 만하지.

유물관에서 시작된 아침부터 지금까지 단 한 끼도 먹지 못했으니 말이다.

거기다 그 개들한테 쫓겨서 미친 듯이 달리기까지.

당장 뭐라도 안 먹으면 무기왕은커녕 잭 더 리퍼의 면도칼과 함께 굶어 죽을 것 같았다.

뒤적.

하운드를 잡은 후 굴러다니는 천으로 만든 보따리.

보따리 안엔 하운드의 이빨이 가득 담겨있었다.

커다란 덩치에 맞게 일반 개들보다 몇 배는 더 큰 이빨.

하운드의 이빨은 악세사리나 장식품으로 많이 가공된다고 들었기에 돈이 될까 싶어 주워왔다.

진짜로 돈이 될지 안 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가보자! 

밥 먹으러!

* * *

와구와구!

앞에 차려진 상으로 폭격을 시작한 지 10분째.

후루룹!

단숨에 눈앞에 있던 국물까지 원샷 해버렸다.

아직 부족하다.

하나 더 시키기 위해 손을 번쩍 들었다.

"여…."

여기요! 라고 말하려는 순간.

나이 때문에 불가능했던 호칭이 떠올랐다.

"이모님!"

입에 착착 감기는 정겨운 호칭.

자리에 앉아 계시던 이모님이 환하게 웃으며 걸어왔다.

시간을 돌리기 전 내 나이와 비슷한 연배이실 듯했다.

"뭐 더 필요한 거 있어? 뭐 줄까? 밥을 고봉으로 줘야겠구만."

크으, 정겨운 호칭과 그에 따라오는 정겨운 대답.

이게 다 이모라는 호칭의 힘이 아니겠는가.

"여기 너비아니 정식 하나 더 주세요! 밥 가득요."

"그려 그려. 정말 잘 먹는구먼." 

이모님의 잘 먹는다는 말에 상으로 눈을 돌렸다.

폭격이 제대로 떨어졌는지 어느새 초토화되어 있는 너비아니 한 상.

너무 인간의 존엄성을 버리고 게걸스럽게 처먹었나 싶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런 제대로 된 음식을 맛보는 게 십수 년만이기 때문이다.

장벽이 생긴 후에도 관련된 능력자와 시스템의 개발로 식량이 부족하진 않았지만, 한정되어 있다는 불안감 때문이었을까.

상류층은 식량을 쉽게 풀지 않았다.

대신, 새로 개발한 영양바와 생산이 쉬운 콩고기를 풀었다.

얼마나 지겨웠던가.

뭐로 만들었는지 모르는 맛없는 영양바와 콩 비린내 나는 고기까지.

바닥에서도 진성 바닥의 신분이었기에 이거라도 주는 것에 감사하며 먹긴 했지만 말이다.

두근.

그러던 중 만난 너비아니.

이건 참을 수 없다.

아니, 참지 못하는 게 당연한 일이다.

입에 넣는 순간 팡! 하고 터지는 육즙과 혀에 착착 감기는 부드러움까지.

이렇게 미친 맛의 너비아니 정식이 8천원이라니.

백반집의 힘은 위대하다.

하나 더 먹지 않으면 스스로에게 죄를 짓는 것이다.

거기다,

묵직.

주머니도 두둑했다.

앞으로 너비아니 정식 100개는 더 먹을 수 있었다.

- 멀쩡한 건 개당 2만원! 부러진 건 개당 1만원!

식당으로 향하기 전 들린 물품 거래소.

거래소 주인은 잔뜩 짊어지고 온 하운드의 이빨에 가격을 매겨줬다.

- 다 팔겠습니다!

다른 곳에 가면 가격을 더 받을 수도 있었겠지만, 어차피 안 팔리면 다 버려야지 하던 것들이었다.

얼마를 주든 당장의 배고픔과 옷을 살 수 있다는 게 중요한 것!

- 자 여기 80만원.

그 길로 건네받은 80만원을 손에 쥐고 눈에 보이는 백반집으로 돌격했다.

"여기 너비아니 정식에 밥 가득."

어느새 주방을 다녀온 이모님이 한 상을 더 건넸다.

"감사합니다."

선택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이렇게 맛있는 밥이라니.

입에 너비아니를 하나 넣은 후 고개를 들어 올렸다.

너무 배고파 잘못 본 걸 수도 있기에 다시 한번 확인해야 했다.

2021년 7월.

음! 잘못 본 게 아니군.

걸려 있는 달력과 식당의 TV에서 나오는 날짜를 재확인한 뒤에야 마음이 놓였다.

아직 종말의 날까지는 많은 시간이 남아 있었다.

좋았어.

무기를 모아 강해질 수 있는 시간이 충분했다.

날짜를 봤는데 당장 내일이 종말의 날이었다면 몹시 곤란했을 텐데, 다행이다.

"총각도 헌터인감?"

내 먹방을 구경하던 이모님이 조심스럽게 질문을 건넸다.

얼굴과 몸은 대충 씻어냈지만 여전히 옷에는 하운드의 피가 묻어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고도 그다지 놀라지 않았던 이모님.

아마 데몬을 사냥하는 헌터가 낯선 직업이 아니고, 헌터들이 피를 묻히고 다니는 일도 흔해서인 듯했다.

"하하… 아직은 아니에요."

아직은.

아직 아니지만 내 계획에 포함되어 있었다.

가장 최우선은 무기 모으기지만, 그러기 위해선 일단 먹고 살 방법이 필요했다.

옷이라던가, 밥이라던가, 잘 곳이라던가.

그리고 교통비도 필요했다.

가까운 곳부터 가긴 하겠지만, 다양하고 많은 무기를 찾기 위해선 결국 다른 나라까지 가야 하니까.

"그래? 될 생각이 있다면 서울로 가야겠구만."

국가직 헌터에 지원할 수 있는 등록소는 서울에만 딱 하나 있었다.

그것도 가장 핫플레이스라는 강남.

아마 강남의 돈 많은 사람들이 유동 인구의 유입을 위해 하나만 지어놓은 게 아닐까 추측해본다.

어쨌든,

"내일 가볼 계획입니다, 하하."

"가서 잘 하길 바라네."

"고맙습니다."

호칭의 힘이 이리도 강했던가.

마지막 덕담까지 잊지 않은 이모님이 밝게 웃으며 몸을 돌렸다.

훈훈….

훈훈하다고 생각하려는 순간.

이모님을 보니 묘한 느낌이 들었다.

인구의 99.9%가 개방을 해 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종류는 무척 다양했다.

그리고, 능력의 대부분은 거창한 단어와 달리 몹시 평범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바느질을 빠르게 할 수 있다던가, 발음이 더 정확해진다던가.

이런 류의 능력을 갖게 된 사람들은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아야 했다.

개방과 동시에 멈춰버린 시간 속에서 말이다.

반성해야겠네.

유물관 창고에서 검을 만지며 개방을 했을 때도 난 절망했었다.

이제와서 개방이 되는 게 무슨 소용이야! 라고 하면서.

그랬었는데 밝게 웃으며 처음 보는 나한테 덕담까지 건네는 이모님을 보니 묘한 죄책감이 들었다.

다 먹고 더 먹어야지.

별로 도움은 안 되겠지만 최대한 많은 백반을 팔아드리리라 마음먹는다.

오늘 많이 못 먹으면 내일 떠나기 전에라도 와서 또 먹어야지.

그렇게 잠시 멈췄던 식사에 속도를 높이려는 찰나,

짤랑.

백반집의 문이 열리고 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들어왔다.

반사적으로 눈이 문으로 향하고, 들어 올리던 젓가락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제복이 멋있다거나 아는 사람이어서는 아니었다.

반짝.

제복을 입은 두 명의 남자.

두 남자가 들고 있는 상자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면도칼을 발견했을 때와 같은 황금색 물결이.

6화. 서울로

무슨 제복이었지?

가게로 들어온 사람들을 바라봤다.

작은 상자를 들고 들어온 두 명의 사람들.

군인이나 경찰은 아니었다.

분명 TV에서 본 적이 있는 제복인데.

뭐였지.

저 밑에 있는 기억을 끌어내기 위해 오만상을 찌푸렸다.

통상 찌푸려지는 인상과 기억력은 비례한다.

아!

기억났다.

대기업 대산에 속해 있는 용병단.

그 용병단에 속한 헌터들이 저런 제복을 입고 TV에 나오곤 했었다.

데몬 헌터지만 국가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

국가보다 훨씬 좋은 조건을 약속으로 대기업의 용병단에 소속된 이들이었다.

국가 헌터처럼 공식적인 신분은 아니지만, 대기업인 만큼 국가직보다 훨씬 좋은 대우를 받는 헌터들.

국가와 대기업의 긴밀한 협력은 기본이라 나라의 지원도 잘 받는다고 들었었다.

"여기는 이런 식당밖에 없는 거야?"

"하하. 외곽이라 어쩔 수 없네요. 죄송합니다, 대리님."

"쩝!"

상사와 부하로 보이는 이들이 한 켠에 자리를 잡았다.

이곳은 송도 부근의 작은 도시. 아니지, 마을이 더 잘 어울리는 작은 곳이었다.

"역시 돈 잘 버는 사람들은 입도 비싼 건가." 

대놓고 가게를 폄하하는 모습에 고개를 내저었다.

가게 주인인 이모님도 다 듣고 있는데 이런 식당이라니.

이 너비아니를 먹고도 그런 소리가 나오는지 봐야겠다.

그나저나.

저걸 어떻게 한다?

상자 안에 뭐가 든지는 모르겠지만 잭 더 리퍼의 면도칼 때와 같은 빛이었다.

뭐가 됐든 내가 사용할 수 있는 무기가 들어있을 터.

가서 잠깐만 보여달라고 하면 뺨 쳐맞겠지.

부하는 모르겠지만 안하무인 스타일인 저 대리란 놈은 뺨을 치고도 남을 놈이다.

백번 양보해서 보여준다 치더라도 문제였다.

내 무기고로 옮겨 오면서 실물이 사라졌던 면도칼.

만약 모든 경우가 같다면 난 대산이란 대기업에 도둑놈으로 낙인 찍히고 말 것이다.

지금은 딱히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깝네.

조금 아까웠다.

내가 조금만 더 셌다면 어두운 길에서 뒤통수를 갈기고 상자를 뺏어….

꼬집.

나도 모르게 드는 나쁜 생각에 허벅지를 꼬집었다.

흠.

허벅지를 꼬집어 나쁜 생각을 멈추긴 했지만, 눈을 뗄 수는 없었다.

저 사람들이 상자를 어디다 갖다 버리지 않는 이상 언젠가 내 손에 넣을 수야 있을 테지만.

난 지금 필요했다.

무기고에 면도칼 하나밖에 없는 상태.

다른 무기가 하나라도 더 필요하다.

일단은.

지켜본다.

* * *

식당을 나와 거리를 걸었다.

배가 너무 빵빵해 조금만 더 먹었다간 역류해버릴 것만 같았다.

아쉽네, 한 상 더 먹고 싶었는데.

이미 너댓명 분의 양을 먹었으면서도 아쉬웠다.

내일 출발하기 전에 더 먹어야지.

저벅.

식당에 있던 대산의 헌터들을 떠올렸다.

- 내일 날 밝으면 강남 본사로 가자고.

입으론 너비아니를 먹고 있지만 청각을 포함한 모든 신경은 그들에게 향해 있었다.

그 결과 서울로 가겠다는 상사의 말과,

- 혹시 모르니까 페어를 구해서 가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그런 상사에게 페어를 제안하는 부하의 말을 엿듣는데 성공했다.

페어, 말 그대로 동행이다.

통상 마을에 상주하는 군이나 경찰 가드들이 만들어 주는 동행.

인원이 많으면 많을수록 목적지까지의 이동이 안전해지기에 국가 차원에서 해주는 것이었다.

나도 많이 했었지.

개방 조건을 찾겠다며 여기저기 쏘다닐 때 이룬 적이 많았었다.

물론, 능력이 없다 보니 아무 도움도 안 되는 민폐 그 자체였지만.

으.

페어가 이뤄지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통상 같은 페어가 되면 능력을 물어보기 마련.

개방을 하지 못했다는 대답을 할 때마다 얼마나 눈치가 보였는지 모른다.

대답을 듣는 사람들의 표정 역시 좋지 않은 건 어쩔 수 없는 일.

- 그럼 저한테 딱 붙어있어요! 지켜줄 테니까.

물론 아닌 사람도 있었다.

아무런 대가 없이 날 지켜줬던 사람들.

싱긋.

나도 이제 1인분은 할 수 있다.

더 이상 페어를 만들 때마다 눈치를 볼 필요도 없었다.

그럼 이제….

고개를 돌려 적당한 공터를 찾았다.

- 방 없어요.

오랜만에 뜨신 물에 씻고 침대에서 자보나 했는데,

쉽지 않았다.

가는 모텔이나 여관마다 방이 가득 차버린 것.

아쉽지만 오늘은 노숙을 해야 했다.

뭐, 유물관 골방이나 공터나.

골방이 조오금 더 낫긴 했지만, 큰 차이는 없어 보였다.

부스럭.

모텔비 대신 사온 침낭을 꺼냈다.

아니지, 모텔비 대신이라고 하기엔 몹시 비싼 가격의 침낭.

헌터들이 늘어나며 밖에서 자야 하는 상황이 많이 생겨서인지 캠핑 관련된 용품이 더럽게 비쌌다.

쏘옥.

침낭으로 들어가 유사 번데기 형태가 되도록 지퍼를 끌어올렸다.

바닥이 딱딱하긴 해도 비싸서 그런가 꽤 포근한 침낭이다.

"하아…."

하늘을 바라봤다.

캄캄한 하늘을 밝히고 있는 달과 별.

그리고 노출되어 있는 얼굴로 불어오는 잔잔한 바람까지.

조용히 눈을 감고 뺨을 간지럽히는 바람을 즐겼다.

뭐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 첫날 밤이다.

* * *

"서울로 가시는 분들은 이쪽에 서주세요!"

해가 중천에 뜬 아침.

마을의 가드 역할을 하고 있는 경찰이 교통정리를 시작했다.

어제는 늦은 밤이라 몰랐었는데 마을엔 꽤 많은 사람들이 머무르고 있었다.

열심히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어제 식당에서 만났던 대산의 헌터들.

목적지가 같으니 가능하다면 그들과 페어로 가고 싶었다.

"!!"

"!!"

찾는 헌터들은 없고 다른 이들이 있었다.

"어… 안녕하세요."

"아… 안녕하세요."

어젯밤 날 보고 도망쳤던 소연과 희연.

어색한 인사를 건네는 둘의 눈을 보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이 갔다.

사람이었구나.

100%다.

"안… 안녕하세요."

나도 인사를 건네는 사이, 인원수와 구성원을 살피던 경찰이 우리 쪽을 바라봤다.

"거기 세 분!"

"네!"

정확히는 두 명과 한 명이었지만, 부르는 소리에 얼떨결에 대답해버렸다.

"여기 대산 분들과 함께 가시죠."

대산!?

아니나 다를까.

경찰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곳엔 어제 식당에서 봤던 두 명의 남자가 있었다.

나이스!

상자는 다른 곳에 둔 건지 빛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나저나,

쭈뼛쭈뼛.

동행이 아닌데도 동행처럼 걸어가자니 몹시 어색했다.

"어서오세요, 이대현입니다."

"대산의 대리, 전국현입니다."

어색함을 깨는 대산 헌터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김소연입니다!"

"김희연입니다."

"백운…."

"어서 오세요! 저희가 안전하게 서울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하하!"

저 쉨.

아니나 다를까.

어제 식당에서 안하무인처럼 굴었던 전국현.

전국현이 나 따위는 별로 궁금하지 않다는 듯 김소연과 김희연에게 다가갔다.

아직 내 소개는 끝나지도 않았건만.

뭐, 별로 안 궁금하겠지.

"안녕하세요, 백운 님."

서글서글한 표정의 이대현만이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역시.

사람이 꼭 죽으라는 법은 없는 듯했다.

저런 선배 밑에 이런 후배가 있다니.

"이쪽으로 오시죠, 하하! 대산에서 지원해 준 차량으로!"

"하하… 네."

전국현이 부담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김소연과 김희연을 안내했다.

일단 대기업에서 지원해 준 차량이라 하니, 서울까진 편하게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 * *

부르릉.

"세상 참 좋아졌어요, 그쵸? 내가 운전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오다니."

능력이 생기며 급속도로 발전한 기술들.

그 중엔 나온다 나온다 말만 많았던 자율주행이 가장 큰 찬사를 받고 있었다. 

물론 나야 회귀 전까지 더한 것들도 봐왔으니 그러려니 하지만 말이다.

"그래서 말입니다! 하하! 제가 또 그런 걸 그냥 못 넘기거든요! 아주 강하게 말을 했죠! 내가 맡겠다!"

전국현은 출발해서부터 쉬지 않고 자신의 무용담을 떠들고 있었다.

옆에서 그저 웃고 있는 이대현을 보니 50% 이상은 허구로 이루어진 듯했다.

그리고, 사실 상관없었다.

전국현의 말이 허구든 진짜든, 무용담을 떠들든 슬픈 이야기를 떠들든.

내 눈은 맨 뒤에 있는 상자에 꽂혀 있었다.

궁금하다!

미치도록 물어보고 싶었다.

안에 든 건 뭐냐고.

대충 던져 놓은 걸로 봐선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듯한데.

대체 뭘까?

사사삭.

은밀한 움직임으로 이대현에게 다가갔다.

"대현 님, 뒤에 있는 상자엔 뭐가 들었나요?"

뒤를 돌아본 이대현이 미소를 지었다.

"아아, 저거요. 송도 바다 쪽에서 발견된 유리병이에요. 쪽지가 든 유리병."

"!?"

무기가 아니라 유리병이라니.

빛을 뿜어내는 게 무조건 무기일 거라 생각한 건 아니었지만, 유리병이라니 의외였다.

"대산으로 제보가 들어와서요. 알 수 없는 문자로 적힌 유리병을 발견했다고요. 회사에선 혹시 모르니 가져오라고 저희를 보냈고요."

쪽지에 무언가 단서가 있는 건가.

카이안도 말했었다.

내 능력과 자신의 능력은 궁합이 좋다고.

바스러져 사라져버린 무기까지 손에 넣을 수 있을 거라고 말이다.

어찌됐든.

약간의 희망은 생겼다.

이대현은 저 상자를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고 있지 않았다. 

말로 꼬드기든, 아니면 상황을 만들어서라도 서울에 도착하기 전에 상자를 열어봐야 했다.

그렇게 머리를 열심히 굴리고 있던 중.

"배… 백운 님은 서울에 왜 가시는 거예요?"

한참을 불편하게 있던 김소연이 말을 걸어왔다.

"국가직 헌터에 등록하려고요."

"어! 저랑 언니도 헌터 등록하러 가는 길인데."

드디어 발견된 공통 관심사.

헌터 등록이란 주제의 등장과 함께 어색함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저랑 언니는 집이 인천이거든요. 그런데 등록소가 강남 밖에 없어서 가는 중이에요."

"정말 불편하죠? 헌터에 지원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 왜 강남에만 있는지 모르겠어요."

"맞아요!"

공감대까지 형성되자 무거웠던 차 안이 화기애애 해졌다.

침묵을 지키고 있던 김희연도 몇 마디씩 할 정도로 전환된 분위기.

"헌터가 되는 게 쉽게 생각할 일은 아닙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소외되어버린 탓일까.

잠자코 있던 전국현이 엄근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국가직 헌터는 10급이 시작이다 보니 보수도 너무 적고요. 다시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도 가능하다면 저처럼 대기업의 용병단에 들어오는 걸 추천드립니다. 보수가…."

끝도 없이 쏟아져 나오는 전국현의 자기 자랑과 훈시.

가능하다면 저 주댕이를 틀어 막….

앗.

나도 모르게 나쁜 생각을 하고 말았다.

안하무인이고, 눈치도 없고, 도움도 안 되는 훈시를 늘어놓는다 하더라도 말할 권리는 있는 것인데 말이다.

"하하… 대단하시네요, 국현 님."

만난 지 얼마 안 됐지만, 전국현의 말에 열심히 대답해주는 걸 보니 김소연이 어떤 캐릭터인지 알 것 같았다.

천사.

저런 듣기 싫은 소리도 커다란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여주다니.

엄청난 인내심과 포용력이다. 

"쯧…."

그에 반해 똥 씹은 얼굴로 먼 산을 바라보고 있는 김희연.

정상적인 반응이었다.

나만 해도 조금만 더 들으면 전국현의 입을 쳐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하하하하! 원하신다면 제가 대산에 추천을…."

끝도 없을 것 같은 전국현의 말이 화룡정점을 찍으려는 순간,

콰앙.

"!?"

"꺄악!"

굉음과 함께 차가 하늘로 솟구쳤다.

7화. 개미굴

교통사고?

차가 허공에 뜬 순간 떠오른 단어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순간이지만 땅에서 무언가 솟구쳐 차를 쳐낸 느낌.

"아오…."

욱씬거리는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젊음이 좋긴 좋다.

돌아오기 전의 고장 난 몸이었다면 몸을 일으키긴커녕 여기저기 부러져 있었을 테니.

"아아…."

"다들 괜찮아요?"

"네…."

"조금 욱씬거리지만 괜찮아요."

대기업이 지원해 준 차의 위엄일까.

허공에 체류한 시간이 꽤 길었는데도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에어백 덕인지 크게 다치지 않았다.

"뭐… 뭐야!?"

뒤늦게 일어난 전국현이 목소리를 높였다.

"쉿."

그 옆에서 조용하라고 신호를 보내는 이대현.

제일 먼저 일어난 듯한 이대현은 앞 좌석의 에어백을 찢고 밖을 살피고 있었다.

"뭔가 있어요."

서서히 어둠에 눈이 적응되기 시작하고,

허.

밖에서 무언가 꿈틀거리는 게 눈에 들어왔다.

개미…?

내가 아는 개미는 작고 귀여웠다.

저렇게 사람만 한 덩치로 징그러움을 뽐내는 게 아니었는데.

"개미 계열 데몬 같아요. 그리고 여기는… 개미굴인 거 같네요."

개미굴.

읽은 적이 있었다.

거대한 개미 형태를 한 데몬으로 한 마리 한 마리의 전투력은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다.

하지만, 지금 있는 장소가 개미굴이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여왕 개미를 중심으로 밀집 생활을 하는 개미 데몬.

개미굴의 크기에 따라 다르지만 통상 개미굴엔 수백 마리의 데몬이 살고 있었다.

아무리 위협적이지 않은 전투력이라도 수백 마리를 사방이 막힌 굴에서 만나는 건 최악의 상황.

"지… 지원 요청을 해. 멀지 않은 곳에 대산 인원들이 있을 거야."

"무전은 먹통이라 지원 신호만 보내놨어요. 잘 도착했을지는 모르겠지만요."

이대현의 침착한 설명을 들으며 뒷좌석으로 고개를 돌렸다.

망했네.

처음 봤을 때 안전벨트를 해줬어야 하는데.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깨져 있는 트렁크 창문과 사라져 있는 나의 상자.

정확히는 내거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상자가 없었다.

개미굴로 추락하며 어디론가 떨어진 모양이었다.

철컥.

조수석에서 화기를 챙겨 든 이대현과,

따각.

기다란 케이스를 열어 거대한 저격총을 꺼내는 김희연.

덩달아 옆에 있던 김소연이 팔뚝만 한 대바늘을 꺼냈다.

바… 바늘?

무슨 능력인지 상상도 안 가는 무기였다.

"저 혹시…."

저마다 준비를 하는 상황.

가만히 있을 순 없었다.

"단검 같은 거 있나요?"

"본인 무기도 안 챙겨 다닙니까? 뭐하는 사람이야?"

1초 만에 퉁명스럽게 대답하는 전국현.

얼굴에는 한심하다는 표정이 한가득했다.

저건 인정.

데몬이 나타나는 곳을 다니며 무기도 안 가지고 있다면 저럴 만하다.

"꺼낼 수는 있는데 막 사용할 수가 없어서요."

고개를 끄덕인 이대현이 서랍에서 작은 단검 하나를 건넸다.

꽈악.

오?

면도칼보다 크기는 컸지만, 그리 낯설지 않은 느낌이었다.

약간이긴 하지만 면도칼을 사용했을 때의 감각이 몸에 남아 있는 듯했다.

"…?"

퉁명스럽게 대답했던 전국현을 바라봤다.

어찌 됐든 모두가 준비를 마쳤는데 혼자서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전국현.

"전 비전투 인원입니다. 고장 난 기계들을 수리하는 능력이거든요."

뭐지, 이 새끼.

나도 오랜 시간 민폐 역할을 해왔다 보니 웬만하면 그러려니 하겠는데, 양심 없는 자식.

"개미들도 차를 주시하고 있을 거예요. 최대한 조용히 나가서 위로 향할 길을 찾아보죠."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일행이 이대현을 따라 밖으로 나섰다.

자박.

신발 아래로 느껴지는 모래의 감각.

피부로 느껴지는 습함이 현재 있는 장소가 지하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떨어질 때 느껴졌던 충격으로 봐선 직선으로 추락하진 않은 거 같아요."

똑똑한 친구였다.

직선으로 떨어졌다면 아무리 에어백이 있다 해도 충격이 컸을 터.

떨어지는 중 빙빙 돌았던 느낌은 어딘가를 굴러 내려왔다는 걸 의미했다.

적응된 눈을 움직이며 사방을 살폈다.

어둠에 적응되긴 했지만 완벽히 보이는 건 아니었다.

거뭇거뭇한 시야와 몸의 감각을 살려 나아가야 하는 상황.

"그런데 데몬들이 왜 공격하지 않는 거죠? 우리가 움직이고 있는 걸 알 텐데."

"지휘관이 아직 안 온 거죠."

김소연의 물음에 천천히 답변했다.

개미 계열 데몬의 공통적인 특성.

선천적으로 겁이 많고 주의가 깊어 누군가 지휘해 주는 게 아니라면 섣불리 움직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지금은 그 누군가가 도착하지 않아 우릴 지켜보고 있는 것.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놈이 오기 전에 빨리 빠져나가야 해요."

"와~ 백운 님 엄청 잘 아시네요."

다른 이들에게 보이진 않겠지만 묘한 미소가 지어졌다.

소연 님도 할 게 독서밖에 없으면 열심히 읽게 될 거예요.

"이쪽인 거 같아요."

이대현을 필두로 기차놀이를 시작하고 잠시 후.

이대현이 올라가는 길을 찾은 듯했다.

위로는 미세하지만 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는 길.

"빛 방향으로 빠져나가면 되겠어요."

키이이이이이----!

길을 발견함과 동시에 들려오는 불길한 울음소리.

소리가 울려 퍼지자 멈춰있던 개미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도착한 모양이다.

"달려요!!"

* * *

이대현의 외침을 신호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뒤에서 우글우글 몰려오는 개미들과 끊임없이 등장해 길을 막는 놈들까지.

탕! 탕! 탕!

이대현의 총구가 불을 뿜었다.

한 발 한 발이 치명상인지 픽픽 쓰러져가는 개미들.

역시 철갑탄이구만.

뛰기 전에 들었었다.

이대현의 능력은 일반 총알을 철갑탄으로 바꾸는 것.

일반 총알이라면 개미들에게 박히고 끝났겠지만, 철갑탄의 위력 덕에 더 치명적인 유효타를 입히고 있었다.

사사삭.

죽은 개미들의 시체에 바느질을 시작한 김소연.

김소연의 능력은 꿰매기였다.

바늘이 통과할 수 있는 모든 걸 특수한 실로 꿰매어 버리는 능력.

김소연은 개미들의 시체를 꿰매서 장애물을 만들고 있었다.

타아아앙!

그리고 그사이 총을 거치하고 한 발씩 쏘아내고 있는 김희연.

거대한 저격총에서 쏘아진 탄의 위력은 엄청났다.

웬만한 방탄유리도 그냥 찢어버릴 것 같은 위력.

발사될 때마다 따라 올라오던 개미들의 한 열이 우수수 쓸려나갔다.

서걱.

아직 숨이 붙어있는 개미에게 단검을 휘둘렀다.

개미굴을 따라 달리며 깨달은 게 있었다.

움직임이 훨씬 빨라졌다.

착각 같은 게 아니었다.

하운드에게 쫓겨 달아날 때와 지금의 몸 상태는 확연히 달랐다.

숨 차는 것 하나 없이 더 빠르게 움직여지는 몸.

추측이지만,

면도칼을 들고 있을 때 재연해냈던 잭의 비정상적으로 민첩한 움직임.

그때만큼 빠르고 유연하진 않지만, 그 움직임에 몸이 어느 정도 적응해버린 것 같았다.

역시 인간은 적응의 동물!

내 몸을 격하게 칭찬하며 고개를 들었다.

"으아아아악!"

아까 미리 말하지 않았다면 비명이 전국현의 능력인 줄 알았을 것이다.

그 정도로 전국현은 쉴 새 없이 비명을 질러 대고 있었다.

욕하지는 말자.

옛날 생각해야지.

어제 식당부터 해서 조금 전 내게 했던 퉁명스러운 대답까지.

마음 같아선 비명만 질러 대는 전국현에게 욕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올챙이 시절을 잊으면 되겠는가.

자제하기로 한다.

쉬시시시식---!

뒤에서 소름 끼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착각이면 좋겠지만,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헉… 헉…."

개미들과 다르게 사람들은 지쳐가고 있었다.

특히 티는 안 내고 있지만, 거대한 저격총을 들고 뛰어야 하는 김희연의 체력 소모는 더 빨랐다.

"푸헤엑… 푸헥…."

특히 저놈, 아니지. 전국현 님.

제일 저질이었다.

아니 저렇게 힘들어할 거면 소리라도 지르지 말던가.

"힘내요! 거의 다 왔어요!"

점점 따라잡히고 있는 걸 알아서일까.

이대현이 힘내라며 힘을 북돋았다.

사각 사각 사각

귀를 간지럽히는 개미들의 이동 소리.

저런 소리까지 들려오는 걸 보니 정말 가까이까지 좁혀진 모양이다.

고개를 들어 출구의 빛을 바라봤다.

따라잡힌다.

남은 거리와 개미들의 속도를 봤을 때, 출구를 나서기 전엔 무조건 따라잡힐 것 같았다.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해야 할까.

나 혼자 냅다 달리면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겠지만.

정말 방법이 없는 걸까.

반짝.

!!

맨 뒤에서 보조를 맞추며 달려가고 있던 중.

낯익은 황금빛이 눈에 들어왔다.

올라가는 길의 샛길 부근.

추락하던 차에서 흘러나온 상자가 저곳으로 굴러 들어간 듯했다.

마음 같아선 당장 주우러 가고 싶었지만, 이런 급박한 상황에 저곳으로 갈 여유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었다.

"허억… 헉…."

김소연과 김희연, 전국현에게 한계가 온 듯했다.

더 이상 달리지 못하고 걷는 수준까지 떨어진 속도.

고개를 돌린 이대현의 얼굴로 낭패감이 물들었다.

이젠 서로의 얼굴이 보일 정도로 빛에 가까이 온 시점.

이대로 계속 올라가는 건 무리라는 걸 깨달은 듯했다.

그리고 현재 상황과 별개로.

조금 전 봤던 금색 빛이 눈에 아른거렸다.

무기 욕심에 눈이 멀어서는 아니었다.

지금 느껴지는 건 이런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날 포기하지마.]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날 두고 가지마.]

정신이 나간 걸까.

이대현의 말대로 상자에 든 건 무기가 아니었다.

쪽지가 든 유리병일 뿐.

[난 이곳에 있고 싶지 않아.]

유물관 창고에 있던 신살도가 떠올랐다.

다른 상황이었다면 반으로 쪼개져 바스러지는 결말이 아닌, 자신의 힘을 뽐내며 빛날 수도 있었던 검.

으득.

정신차려라, 백운.

저거 가지러 가는 순간 죽음 확정이다.

알고 있었다.

알고 있는데….

머리의 생각과는 별개로 발걸음은 점점 느려지고 있었다.

다른 이들과 보조를 맞추느라 느려진 게 아니었다.

뒤에 두고 온 것 때문에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멈추지 마, 미친놈아.

움직여! 어쩔 수 없는 상황이야!

내 이성의 외침과는 별개로, 어느새 내 발은 멈춰있었다.

인정한다.

난 미친놈이다.

미안하다, 내 이성.

"배… 백운 님…?"

뒤따라오던 김소연과 김희연이 안 달리고 뭐하냐는 눈빛을 보냈다.

"먼저 올라가세요."

"!!"

"백운 님! 안돼요!"

표정과 반응으로 보건대 둘은 큰 착각을 하고 있었다.

"그… 그런 거 아니니까 빨리 가요."

"안돼요! 백운 님만 두고 안 갈 거예요!"

"아니 그런 거 아니라니깐. 다 죽을 거예요? 빨리 올라가요, 일단."

김희연에게 눈짓을 보냈다.

뭔가 죄책감 가득한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김희연.

김희연이 김소연을 붙잡고 위로 달리기 시작했다.

"백운 님!"

아니 그냥 올라가요, 좀.

생각하시는 그런 희생 아니라니깐.

"후웁."

숨을 들이마시며 몰려오는 개미들을 바라봤다.

미친 짓인 건 안다.

아는데.

두 번째 삶에서까지 어쩔 수 없다 라는 말로 쉽게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거기다 미친 짓이긴 해도 죽음이 확정인 건 아니다.

더 따라잡혔을 때 꺼내려고 했던 면도칼.

꺼내는 김에 상자 구출도 하는 것이다.

아직 해볼 수 있는 게 있으니, 작은 가능성이라도 있으니 해보는 것뿐.

사사삭!

형체가 보일 정도로 다가온 개미들.

개미들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잭 더 리퍼"

8화. 두 명의 해적

"스으으.."

황금빛 입자가 손으로 모여들었다.

꽈악.

손으로 느껴지는 면도칼의 감촉.

짜릿한 몸의 감각을 살리며 개미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길지 않은 지속 시간.

망설이고 있을 시간 따윈 없었다.

난 미친놈이다.

다시 한번 자아성찰한 후 개미떼에게 달려들었다.

서걱 서걱 서걱!

길을 통째로 막고 있을 만큼 엄청난 숫자의 개미들.

닥치는 대로 베기 시작했다.

숫자가 많은 만큼 더듬이로 보이는 날카로운 것들이 계속해서 얼굴로 날아들었지만, 

슥.

문제는 없었다.

잭 더 리퍼의 움직임은 개미들의 더듬이에 닿을 정도로 느리지 않았다.

대체 사람을 어떻게 죽였길래 이런 움직임이 가능한 걸까.

새삼스레 감탄하며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반짝.

서거걱!

앞에 있는 녀석들을 순식간에 도륙한 후.

옆길을 향해 몸을 날렸다.

텁.

몸을 날리기 무섭게 손에 잡히는 상자.

상자에선 쉼 없이 황금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자 구하러 왔다."

상자를 향해 말을 걸었다.

물론 대답을 바라고 한 건 아니었다.

아직 그 정도로 미치진 않았으니까.

사사사삭--!

샛길 밖에선 분주히 움직이고 있는 개미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면도칼은 시간을 다 하고 이미 사라져 버린 상태.

내 손에 있는 건 아까 이대현에게 건네받은 작은 단검뿐이었다.

"구하러 왔으니까."

손을 뻗어 상자를 열어젖혔다.

이곳에 도달한 결과가 단순히 유리병을 얻는 거라면?

나도 유리병 쪽지에 글을 적어야 했다.

- 유리병을 위해 개미 밥이 된 남자, 여기 잠들다. -

빛을 뿜고 있는 유리병이 눈에 들어왔다.

"부디 나 좀 구해줘라."

유리병을 향해 손을 뻗었다.

* * *

철썩. 철썩.

뺨 때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 뺨을 때리는 거지?

좀 먼 곳에서 느껴지는데.

누가 뺨을 때리고 있고 누가 맞고 있는 걸까.

"일어났어?"

눈을 뜨기 무섭게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드러운 것 같으면서도 왠지 모르게 힘이 담겨있는 매력적인 목소리였다.

목소리를 향해 몸을 일으켰다.

"안녕?"

"안녕하세요."

사방이 막혀 있는 좁은 방.

간신히 형태만 유지하고 있는 침대에서 한 여자가 인사를 건넸다.

허리까지 오는 붉은 곱슬머리에 호기심 가득한 눈동자를 가진 여자.

"저 백운이라고 합니다. 누구시고 여긴 어디죠?"

묻기 전에 먼저 이름을 밝혔다.

"난 보니. 여기는 감옥이야."

사람 살 곳이 못 된다.

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감옥이라니.

아주 작은 창문과 창살을 통과해 들어오는 달빛이 다인 좁은 장소.

"환영해, 여긴 죽어야 나갈 수 있는 감옥, 알트리지야."

"…."

죽어야 된다고 말하면서 환영한다니.

그나저나 보니라.

누군지 파악이 필요했다.

"혹시 무슨 잘못 하셨어요?"

"나? 그냥 배 타고 다니면서 남에 보물 좀 훔쳤지."

해적이시고.

해적과 보니.

앤 보니구나.

유명한 여성 해적을 논할 때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앤 보니.

유명세에 비하면 빨리 잡혀서 오랫동안 해적을 하진 못했지만, 짧은 시간 동안의 행보가 워낙 엄청난 이름을 떨친 해적이었다.

스르르.

창가로 스며든 달빛이 보니를 비추었다.

"!!"

몸 여기저기에 새겨져 있는 깊은 상처들.

상처를 입은 뒤 제대로 치료하지 않아서인지 곯아 터져 진물이 나고 있었다.

"징그럽지? 내가 너무 상대를 안 가리고 털어 버렸나봐. 잡히자마자 그냥은 안 죽일 기세더라고." 

고통이 엄청날 텐데도 해맑게 웃은 보니가 창가를 바라봤다.

"여기도 나름대로의 장점은 있어. 들리지?"

철썩. 철썩.

뺨 쳐올리는 소….

"파도 소리에 이 정도로 집중할 수 있는 장소는 없을 거야."

파도 소리구나.

알고 보니 참 파도 소리 같은데 정신 상태가 어떻게 된 걸까.

고민도 없이 뺨 때리는 소리라고 인식하다니.

"다시 한번 반가워. 나의 세계와 공명할 수 있는 사람아."

"…!"

날 알고 있었다.

정확히는 물건을 통해 세계로 들어올 수 있는 내 능력을 알고 있었다.

"몸이 썩어 죽는 순간까지도 혼자였는데, 이렇게 옆에 누가 있으니 좋네."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지만.

현실에서의 자신이 죽었다는 건 인지하고 있는 듯했다.

"그런데 넌 어떻게 여기로 온 거야? 매개체가 필요했을 텐데."

"유리병을 발견했어요. 읽어보진 못했지만 쪽지가 들어있던 유리병."

"!!"

눈을 크게 뜬 보니의 얼굴로 작은 경련이 일어났다.

"푸하하하!"

잠시 후 크게 웃음을 터뜨리는 보니.

"진짜 유리병이라고? 하하하!"

"네… 네. 바다에서 주웠다고 하던데요."

"우와, 정확히 어디 바다인지는 몰라도 먼 곳일텐데. 그게 거기까지 갔단 말이야?"

어떤 추억을 떠올린 건지 보니의 얼굴에 아련한 빛이 어렸다.

"쪽지에는 뭐가 쓰여져 있나요?"

내 물음에 보니가 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직접 봐봐."

"네…."

밖에 절 먹으려는 개미들이 우글거려서요.

살아나갈 수만 있다면 꼭 보겠습니다.

슥.

몸을 구부린 보니가 내 눈을 응시했다.

"자. 그럼 내 세계로 들어온 백운 씨. 들어온 김에 나 좀 도와줄래?"

이제 나가서 개미들을 죽여! 라며 무기를 던져 주는 날먹까진 바라지 않았었다.

심지어 어떤 무기일지도 모르는 상황.

면도칼을 손에 쥐고 시작했던 잭 더 리퍼 때와는 상황이 달랐다.

"도와드릴게요."

다른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좋았어! 그럴 줄 알았다니깐."

주먹을 움켜쥔 보니가 방을 막고 있는 정면의 쇠창살을 바라봤다.

"내 힘으론 여기서 나갈 수 없거든. 그런데, 넌 가능할 거야. 날 데리고 나가줘."

"탈옥 시켜드리면 되는 건가요?"

"풉."

작게 웃음을 터뜨린 보니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죽었는데 이제 와서 무슨 탈옥. 그건 아니고, 날 끝에 있는 방까지 데려다줘."

보니가 힘겹게 팔을 들어 왼쪽을 가리켰다.

"내 반쪽이 있는 곳까지 데려다줘."

반쪽…?

아.

잠시 잊고 있었다.

해적 보니는 홀로 유명해진 게 아니었다.

앤 보니 & 메리 리드.

악명 높았던 해적을 부를 땐 항상 두 명의 이름이 언급됐다.

보니와 그의 연인 리드.

둘은 죽는 순간까지도 함께 했다고 들었는데, 아닌 모양이다.

"저들은 우릴 괴롭게 만드는 방법을 알고 있었거든."

그래서 떨어뜨려 놓은 듯했다.

항상 둘이었던 보니와 리드가 각자 쓸쓸히 죽어가도록 말이다.

어쨌든.

어려운 부탁이 아니다.

같은 층의 끝까지만 데려다주면 되는 일.

"가시죠. 리드 님한테 데려다 드릴게요."

자리에서 일어난 보니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어떻게 리드의 이름을 알아?"

"두 분 유명하니까요."

저벅.

"후우!"

뭔가 단단해 보이는 쇠창살이지만.

왠지 모르게 지나갈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쇠창살을 향해 발을 뻗으려는 찰나,

덥썩.

"!!"

보니가 내 손을 붙잡았다.

손을 타고 올라오는 온기가 느껴졌다.

온기라니.

사람끼리 손을 잡았으니 따듯한 게 당연했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 보니를 허구의 사람이라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런 세계가 어떤 원리로 펼쳐질 수 있는지, 죽었던 사람이 어떻게 내 앞에서 말할 수 있는지는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었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눈앞에 있는 보니는 따듯한 온기를 가진, 진짜 살아있는 사람이라는 걸.

"가볼까?"

몸은 죽어가고 있지만 생글생글 웃고 있는 보니.

보니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갑니다요!"

쾅!

* * *

보니의 손을 잡고 열심히 내달렸다.

그리고, 앞을 가로막는 검은 연기 모양을 한 사람 형체들.

서걱.

잭의 면도칼을 휘둘러 형체들을 베어냈다.

모든 세계가 그런진 모르겠지만, 한 가지 특징이 있었다.

이곳에선 조금 전 사용했던 면도칼을 다시 꺼내 들 수 있으며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해제되지 않는단 것이다.

"저기 앞이야!"

복도 끝을 가리키는 보니에 속도를 올렸다.

무슨 달리기의 저주라도 받은 걸까.

돌아온 직후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달려야 하는 상황이 생겼다.

서걱! 서걱!

마지막 놈들을 베어내며 목표했던 방 앞에 도달했다.

도달하기 무섭게 쇠창살로 달라붙는 보니.

"리드!"

"보니!"

얼레?

남자일 거라 생각했던 리드는 여자였다.

그리고 둘의 모습.

보니와 리드는 연인 사이로 알려져 있었는데, 둘은 연인이라고 보기엔 너무… 닮아있었다.

아니, 닮은 걸 넘어 완전 똑같이 생겼다.

"보고 싶었어. 나의 반쪽."

"나도…!"

쇠창살을 사이에 두고 흐느끼는 보니와 리드.

보니 혼자서는 쇠창살을 통과할 수 없다.

내 세계도 아닌데 왜 난 통과되고 보니는 안되는 걸까?

작은 의문을 뒤로하고 보니의 등에 손을 가져갔다.

스르르.

그제야 쇠창살을 통과해 리드를 껴안은 보니.

리드의 몸도 보니와 마찬가지로 만신창이였다.

"언니, 괜찮아?"

보니를 부르는 리드의 호칭에 둘이 닮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쌍둥이 자매.

"난 괜찮아. 리드, 힘들었지?"

서로를 누구보다 끔찍이 아꼈지만, 한 번 헤어진 뒤엔 죽는 순간까지 만나지 못했던 자매.

많은 세월이 지난 뒤에야 자매는 서로의 상처를 어루만지며 눈물을 흘릴 수 있었다.

좋구먼.

둘을 보고 있자니 코가 찡해져 버렸다.

조금 있으면 개미한테 씹힐 수도 있는데 이러고 있어도 되는 건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슥.

누가 쌍둥이 아니랄까 봐 동시에 고개를 돌리는 보니와 리드.

"정말 고마워."

마치 한 명이 말한 듯 둘의 목소리가 겹쳐 들려왔다.

사아아!

둘의 모습과 함께 공간이 빛의 입자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백운, 네 덕분이야. 우리가 다시 함께할 수 있게 된 건."

서로의 두 손을 맞잡은 두 사람.

두 사람이 밝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우리의 이름은 앤 보니와 메리 리드. 이번엔 우리가…."

황금색 빛의 입자로 공간이 완전히 사라지고.

둘의 마지막 목소리만이 메아리처럼 울려 퍼지고 있었다.

"널 구해 줄게."

* * *

천천히 눈을 떠 앞에 있는 유리병을 챙겼다.

사사사삭--!

밖에서 내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녀석들.

조금 전 면도칼에 잔뜩 썰려서인지 녀석들은 쉽사리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후우…."

한 차례 심호흡을 한 뒤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스윽.

와우.

고개를 돌리니 탄성이 나왔다.

지휘자가 있어서인지 내가 올라가야 하는 길을 새까맣게 채우고 있는 개미들.

가장 뒤엔 다른 개미들에 비해 덩치가 큰, 여왕 개미로 보이는 녀석이 시시식 거리며 지휘를 하고 있었다.

몸을 돌려 개미 부대와 마주 섰다.

[앤 보니 & 메리 리드]

사아아아!

머릿속으로 둘의 이름을 떠올리자 양손으로 차가운 쇠의 감촉이 느껴졌다.

리볼버.

옛날에 사용했다고 하기엔 세련된, 자동 권총 같은 생김새의 리볼버였다.

보니의 붉은 색과 리드의 파란 색이 들어가 있는 두 자루의 권총.

권총을 들어 올려 정면의 개미들을 조준했다.

자, 보니와 리드 님.

양손 검지 끝으로 방아쇠의 무게가 느껴졌다.

부디, 절 구하소서.

[빛의 구원]

탕!!

9화. 포격

"안녕하세요! 시청자 여러분, 송유빈입니다. 현재 송도 도시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길목에 나와 있습니다."

마이크를 든 리포터, 송유빈이 손짓으로 개미굴을 가리켰다.

"현재 개미굴에 시민 한 명이 고립된 상태이며 이를 구하기 위해 대산의 헌터들이 파견되었습니다!"

차가 추락하기 전까지만 해도 한산했었던 개미굴.

개미굴 앞은 현재 사람이 들끓고 있었다.

송유빈이 속한 CBC 방송을 제외하고도 각 곳의 방송사가 촬영을 나온 상태.

"앗! 저쪽으로 대산의 헌터들이 보입니다!"

개미굴 근처에서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는 대산 소속 헌터들이 카메라에 잡혔다.

인터뷰를 위해 빠르게 달려간 송유빈이 그중 책임자로 보이는 남자에게 마이크를 내밀었다.

@ 김대석이다!

@ 대산의 용병대 중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힌다는 그 김대석? 

@ 시민 한 명 구하자고 저 김대석이 오다니, 엄청난데?

실시간으로 송출되고 있는 뉴스에선 빠르게 댓글이 올라오고 있었다.

대산의 용병대 중 한 개 팀을 맡고 있는 팀장, 김대석.

괴력의 소유자로 거대한 투핸드소드를 사용해 시원한 전투를 펼치는 인물이었다.

"안녕하세요! 김대석 팀장님. 현재 어떤 상황인가요?"

거대한 덩치와 깔끔하게 넘긴 올백 머리, 단정하게 차려입은 제복까지. 

팀장 김대석이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데몬이 파놓은 함정에 걸려 차가 개미굴로 추락했습니다. 그 안에 있던 시민 한 명이 아직 빠져나오지 못했고요."

@ 개미굴요? 개미 계열 데몬들 드글거리는 곳 아닌가요?

@ 거기에 떨어졌으면 이미 죽었다 봐야지.

@ 벌써 개미 밥 됐을 듯하네요.

"빠져나오지 못한 시민은 살아있을까요?"

송유빈 아나운서의 질문에 김대석이 엄격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살아 계실 거라 믿습니다! 지금 바로 제가 들어가서 구해내겠습니다. 반드시! 구해내겠습니다!"

굳은 다짐을 한 김대석이 개미굴로 향하고.

잠시 생긴 틈에 송유빈이 마이크 스위치를 내렸다.

"지랄하네."

"선배, 좀!"

여전히 돌아가고 있는 카메라에 마이크 소리만 송출되지 않는 상태.

카메라를 들고 있는 후배 진유석이 송유빈을 말렸다.

"재수 없는 새끼. 그렇게 구하고 싶으면 기자들 기다릴 게 아니라 들어갔어야지. 진유석, 그래 안 그래?"

"에휴… 그렇긴 하죠."

기자들은 기업 대산의 홍보실로부터 연락을 받고 개미굴로 온 것.

이유는 뻔했다.

개미굴로 떨어진 민간인 한 명을 위해 대기업인 대산은 이렇게 노력을 한다!

라는 이미지를 사람들에게 심어주기 위함이었다.

"쯧… 떨어진 사람이랑."

송유빈이 카메라 경로 밖에 있는 곳을 바라봤다.

"저 사람들만 불쌍하지."

송유빈이 바라보고 있는 곳.

"왜 아직도 안 들어가는 거예요! 저희라도 가게 비켜 주세요!"

그곳에선 김소연과 김희연이 자신을 막고 있는 대산 직원들에게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곧 들어갈 거니까 좀 가만히 계세요."

"곧이 대체 언젠데요! 저 사람들 도착한 지 30분은 더 지났잖아요!"

"아 글쎄 좀!"

그런 두 사람을 가로막고 있는 남자, 전국현.

미친 듯이 비명을 질러대던 전국현이었지만, 지금은 완전 딴사람이 되어있었다.

자신보다 높은 직급인 김대석에게 잘 보이기 위한 극한의 딸랑이.

"대현 님!"

"…."

김소연의 호소에 이대현이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이미지 개선하자고 기자들을 기다리고 있는 김대석이 마음에 안 들었지만, 이대현은 일개 사원일 뿐이었다.

기업에 소속되어 있기에 어쩔 도리가 없는 것.

"이런 쓰레기 새끼들…."

김희연이 나지막이 읊조렸다.

개미굴을 빠져나온 직후, 김희연은 백운을 지원하기 위해 가장 먼저 자리를 잡았었다.

그런 김희연을 강제로 끌어낸 건 다름 아닌 대산의 헌터와 홍보팀 직원들.

이유는 단순했다.

위험에 처한 시민을 구하는 영웅의 역할.

그 역할은 모두가 보는 앞에서 대산의 헌터들이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훼방을 놓은 뒤에도 김대산은 개미굴로 들어가지 않았다.

헌터 전원을 대기시키며 방송국들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린 것.

저벅.

악을 쓰고 있는 김소연과 김희연에게 김대석이 다가왔다.

그런 김대석을 노려보는 김희연.

"이러고도 아무 일 없을 줄 알아요? 각오하세요. 인터넷이랑 방송사에 다 알릴 테니까."

"풉."

비웃음을 터뜨린 김대석이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 상황 파악이 안 되나?"

김대석이 손을 휘둘러 도착해 있는 방송사들을 가리켰다.

"저 사람들이 당신 목소리를 못 들어서 안 찍는 줄 알아?"

"!"

"우리 찍으러 온 거야, 우리. 당신들이 아무리 고래고래 소리 질러도 아무도 관심 없다고."

인상을 찌푸린 김희연에 김대석이 어깨를 으쓱 올려 보였다.

"그리고 당신들 친구, 벌써 죽었어. 개미굴에 데몬이 몇 마리 있는지 알아? 헌터도 아닌 일반인이잖아. 벌써 천등분은 됐을걸."

"키킥. 팀장님, 천등분은 좀 너무 잔인하지 않습니까?"

"아! 그런가? 하하하!"

사람의 목숨을 두고 농담하며 비웃어대는 인간들.

역겨운 인간들의 모습에 충격을 받은 김소연과 김희연은 말을 잃고 말았다.

"자 인터뷰도 했고, 카메라들도 모였으니 슬슬 들어가 볼까."

"예!"

김대석이 여유로운 자세로 개미굴을 바라봤다.

숫자만 많을 뿐 전투력 자체는 낮은 녀석들.

대형을 갖추고 천천히 진압한다면 전혀 문제 될 것 없는 데몬이었다.

카메라를 의식한 건지 멋드러지는 대형을 갖춘 채 개미굴로 걸어가는 대산의 헌터들.

"선배, 김대석 들어가려나 봐요. 빨리 마이크 켜요."

"어휴 십새끼 저거."

마지막으로 욕을 휘갈긴 송유빈이 마이크를 들어 올렸다.

"여러분! 드디어 김대석 팀장이 개미굴로 향하고 있습니다!"

@ 드디어 김대석의 시원한 칼질을 볼 수 있는 건가?

@ 역시 대기업 대산. 정부보다 빠르게 움직이다니 대단하네요.

@ 그런데 안에 있는 사람은 벌써 죽었을 듯하네요.

사람들의 관심사는 개미굴에 있는 백운이 아니었다.

곧 개미굴로 가 데몬들을 시원하게 썰어버릴 김대석과 헌터들의 활약상이 주요 관심사였다.

"자 느긋하게 가보자고!"

바로 앞까지 다가간 김대석과 팀원들.

드드.

"…?"

그들의 발아래로 작은 진동이 느껴졌다.

"팀장님?"

김대석이 몸을 숙여 땅을 짚었다.

미세하지만 분명히 흔들리고 있었다.

드드드드.

저 아래서부터 점점 위로 올라오고 있는 진동.

아래에는 떨어진 백 뭐시기란 일반인을 제외하곤 아무도 없을 텐데.

어째서 이런 진동이 생기는 걸까.

드드드드드!

"어어…!"

"뭐야? 지진인가?"

처음보다 훨씬 강해진 진동에 당황하기 시작한 기자들.

드드드드드드!!!

"뭐야? 밑에서 뭐가 일어…"

당황한 김대석이 개미굴로 눈을 돌린 순간,

콰아아아아아!!

개미굴에 있었을 다량의 데몬들이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두두두두두두두두!!

그런 데몬들을 밀어내며 갈기갈기 찢어 놓고 있는 정체불명의 탄환.

일반적인 탄환의 빛이 아니었다.

붉은 색과 파란 색이 섞인 빛줄기.

수백, 수천의 빛줄기가 하늘을 향해 쏘아지며 경로에 있는 개미들을 분쇄하고 있었다.

"…."

갑작스럽게 일어난 엄청난 광경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물론,

@ ….

실시간으로 시청 중이던 대중들까지 말을 잃고 말았다.

두두두. 두.

타겟을 모두 섬멸해서일까.

하늘로 쏟아지던 빛줄기가 잦아들기 시작했다.

현장으로 무거운 침묵이 찾아왔다.

누구 하나 먼저 나서서 침묵을 깰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기엔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감조차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모두가 침묵에 쌓여 있는 상황.

저벅.

"어… 누군가 개미굴에서…."

기자의 더듬거리는 말에 김대석을 비추고 있던 카메라들의 앵글이 개미굴 입구로 쏠렸다.

수많은 사람이 지켜보고 있는 상황.

백운이 개미굴 입구로 모습을 드러냈다.

@ … 뭐임?

* * *

총을 쥐고 있던 손을 내려다봤다.

성능 확실하구만.

찰박. 찰박.

조금 전까지 개미들로 가득 차 있던 길을 올려다봤다.

깔끔 그 자체.

더 이상 길을 막고 있는 녀석은 존재하지 않았다.

겁나 시원한 무기네, 이거.

사실 처음 손에 들려진 두 자루의 권총을 봤을 땐, 뙇! 하고 확신이 서지 않았었다.

과연 저놈들을 다 녹여버릴 때까지 탄환이 받쳐 줄 것인가.

쏘는 중에 탄피가 걸리거나 기능 고장을 일으키진 않을 것인가.

등등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까지 잡다한 걱정이 들었었다.

하지만,

이런 걱정은 오래가지 않았다.

첫발이 쏘아지기 시작한 후, 벌어진 입은 포격이 끝날 때까지 다시 다물어지지 않았다.

포격.

그냥 총이 아니었다.

두 자루의 총에서 쏘아지는 빛줄기는 엄청난 속도로 개미들을 꿰뚫었고, 정신을 차렸을 땐 여왕 개미까지 녹여버리며 길을 깨끗하게 치워버린 상태였다.

예전에 미국의 수많은 항공모함에서 쏘아지는 포격을 봤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대현 님이랑 소연 님, 희연 님은 잘 도망갔으려나.

먼저 올라간 세 사람을 걱정하며 걸음을 옮겼다.

모습이 사라지는 순간까지 비명을 꽥꽥 질렀던 전국현은 조금도 걱정되지 않았다.

그런 류의 인간이 목숨줄 하나는 매우 질기기 때문이다.

하이고 다리야.

아픈 다리를 꾹꾹 누르며 얼마 남지 않은 출구를 바라봤다.

아 샤워하고 싶다.

온몸이 땀과 데몬의 피로 찐득찐득한 상태.

샤워가 몹시, 몹시 절실했다.

뭐, 원래 샤워를 좋아하거나 청결을 중요시하는 건 아니었다.

유물관에서 지날 땐 그다지 깔끔하진 않았었기 때문.

솔직히 말하자면 조금, 조금 많이 더러웠었다.

하지만,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

방에 하나 있는 세면대라곤 얼음장 같은 찬물만 뿜어냈으며, 유물관 안에 있는 직원 샤워실에도 가끔을 제외하곤 뜨신 물이 안 나왔기 때문이다.

난 여름에도 따듯한 물로 씻는 사람인데.

그런 나에게 찬물 샤워는 너무 가혹했다.

저벅.

"후우… 겁나 높네."

발에 걸리는 개미 조각을 툭툭 밀어내며 고개를 내밀었다.

스아아아.

얼굴을 비추는 따스한 햇살과 뺨을 간지럽히는 상쾌한 공기가 느껴졌다.

역시 사람은 잃어봐야 안다고 했던가.

개미굴에 처박힌지 얼마나 됐다고 밖의 공기에 감사함을 느끼고 있었다.

두두!

눈을 감은 채 햇살과 바람을 즐기고 있던 중.

옆으로 진동과 함께 소리가 들려왔다.

설마 또 데몬?

이제 그만 좀 했으면 좋겠다.

사람을 그렇게 괴롭히던 훈련소 교관님도 10분씩 쉬는 시간을 줬는데 말이다.

제발 아니길 바라며 소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응?"

비비적.

비현실적인 광경에 눈을 비빌 수밖에 없었다.

나를 향해 미친 듯이 달려오고 있는 것들.

아니지, 것들이라 하면 안 되지.

사람들.

두두두두두!!

마이크와 카메라를 든 사람들이 엄청난 얼굴로 달려오고 있었다.

10화. 개미굴의 남자

늦은 시각, 기업 대산의 본사 건물.

똑똑.

"들어와요."

어디서 찬바람이 불었나 생각이 들 정도로 냉랭한 목소리.

귀가 얼어붙는 목소리에 문을 두들긴 대산의 홍보팀장, 전수희가 눈을 질끈 감았다.

'난 죽었다.'

들어가야 하는데, 발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밖에서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무서운데 어떻게 이 문을 열 수 있단 말인가.

'도망치고 싶다.'

뒤에 있는 비상계단을 바라봤다.

조금만 걸어가면 닿을 수 있는 거리지만, 진짜로 갈 순 없었다.

갔다간 지금까지 인내하며 쌓아온 모든 게 무너진다.

'김대석 개새끼.'

낮에 홍보팀으로 연락했던 김대석이 원망스러웠다.

대산의 이미지를 높일 건수가 생겼다며 신이 나 전화했던 김대석.

그냥 끊어버렸어야 했다.

'이 연예인 병 걸린 놈 때문….'

벌컥!

"헙."

전수희의 눈동자에 지진이 일어났다.

문을 열고 눈앞에 나타난 여자.

길게 늘어뜨린 에메랄드색 머리와 머리색에 걸맞은 눈동자와 눈썹까지.

서구적인 이목구비를 가진 여자의 이름은 최리아, 대산 홍보실의 실장이다.

"뭐해요? 안 들어오고."

"네… 넵!"

키까지 우월한 최리아가 바짝 얼어있는 전수희를 내려다봤다.

목소리만큼이나 얼음장 같은 눈빛.

조금만 마주치고 있으면 심장까지 얼어붙을 것 같았다.

탁.

문이 닫히고.

또각. 또각.

자리로 되돌아간 최리아가 의자에 몸을 앉혔다.

"뭐해요? 안 앉고. 수희 님은 하나하나 말해줘야만 하는 건가요?"

"아… 아닙니다!"

깜짝 놀란 전수희가 호다닥 책상 앞 의자로 몸을 날렸다.

그런 전수희를 묘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최리아.

"항상 말하지만 수희 님은 너무 수동적이에요. 상사가 문도 열어줘야 하고, 앉으라고 말까지 해줘야 하고."

"죄송합니다!"

고개를 숙인 전수희의 안에서 작은 희망이 불타올랐다.

오늘따라 기분이 좋아 보이는 최리아.

어쩌면 혼나지 않고 넘어갈 수….

"참 수동적인데… 능동적이면 안되는 곳에서만 적극적이란 말이죠."

착각이었다.

"죄…."

"죄송합니다란 말 그만 해요, 맨날 하니까 진심으로 안 들리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고개를 숙이는 전수희.

"수희 님, 취미가 요리라고 했었나요?"

"네… 네!"

"수희 님은 요리 참 잘할 거 같아요."

"…?"

"어쩜 그렇게 죽을 잘 쒀서 떠 먹여버리지."

대답하느라 잠시 들었던 고개를 원위치 시켰다.

말투 자체는 나긋나긋 하지만 차가운 목소리를 앞세워 전수희를 압사시키고 있는 최리아.

'제발.'

전수희가 할 수 있는 건 기도뿐이었다.

부디 이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를.

이 또한 지나가기를!

"오늘 낮에 일로 홍보실 예산이 얼마나 날라갔는지 아세요?"

"그…."

"모르겠지. 모르는 거 고민한다고 생각나요? 시간 끌지 말고 모른다고 대답해요."

"모… 모릅니다."

한숨을 내쉰 최리아가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들겼다.

톡. 톡.

그 소리를 듣는 전수희는 죽을 맛이었다.

방송사와 헬기, 유명한 스트리머를 동원하느라 많은 비용을 소비해버렸다.

시원하게 돈을 쓸 때까지만 해도 대산의 이미지를 높인 공으로 칭찬 받는 꿈을 꿨었는데.

완전 망해버렸다.

- 두두두두두두!!

"허… 참나."

인터넷을 통해 전국으로 퍼져버린 개미굴 영상.

미간을 찌푸린 최리아가 최대 사운드로 영상을 틀었다.

'죽고 싶다.'

죽 쒀서 개 준다.

오늘 대산이 한 일이었다.

김대석을 포함한 헌터 팀을 통해 기업의 인지도를 올리려 했건만.

[개미굴의 남자]

[정체불명의 헌터]

[개미굴의 영웅]

어느 영상에도 대산의 디귿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흐음."

영상을 보던 최리아가 앓는 소리를 냈다.

이미 엎질러진 일은 엎질러진 일이고.

대체 이 인간은 누구란 말인가?

'어느 수준에 다다른 헌터라면 개미굴은 그리 위험한 곳이 아니야. 그런데….'

기자들을 발견하자마자 냅다 반대쪽으로 튀어버린 남자, 백운.

도망가버린 탓에 영상에는 제대로 찍히지 않았지만,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그런데 저런 화력을 쏟아내다니?

"쯧."

댓글창으로 눈을 돌린 최리아가 혀를 찼다.

@ 이펙트 미쳤네요.

@ 탄환 하늘까지 치솟는 거 보여요?

@ 그런데 아까 무슨 대산? 있지 않았나요?

@ 있었나? 잘 모르겠는데.

@ 들러리 아니었나?

달린 댓글들이 최리아의 속을 더 긁어내고 있었다.

이미지를 올리긴커녕 오히려 들러리 취급이라니.

마음 같아선 홍보팀으로 연락한 김대석을 찾아가 성이 풀릴 때까지 뺨을 갈기고 싶었다.

스윽.

고개를 들어 오돌오돌 떨고 있는 전수희를 바라봤다.

꽤 먼 학번 차이지만, 같은 학교 선후배이자 벌써 5년이 넘는 시간을 홍보실에서 함께 일해온 전수희.

"수희야."

"네… 넵!"

"하아아…."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내쉰 최리아가 입을 열었다.

"잘 좀 하자."

"네…."

끼익.

의자에 몸을 기댄 최리아가 이마를 짚었다.

'백운이라….'

대산에 제대로 엿을 먹인 남자, 백운.

'뭐하는 놈이지?'

* * *

- 아앗! 도망가고 있습니다! 어째서죠!

- 쫓아가! 놓치면 안돼!

"푸하하하!"

끼익.

샤워실에서 나온 김희연이 침대에서 굴러다니고 있는 김소연을 바라봤다.

"또 보는 거야?"

"응! 너무 재밌어."

가까이 다가간 김희연이 모니터로 다가갔다.

"풉."

웃기긴 웃겼다.

개미굴을 나오자마자 냅다 달리기 시작한 백운과 그런 백운을 기를 쓰며 쫓아가는 기자들.

경찰과 도둑 비슷한 이 추격전은 백운의 승리로 끝났다.

기자들을 모조리 따돌린 뒤 다시 김소연과 김희연이 있는 곳으로 돌아온 백운.

- 카메라 울렁증이라서요.

머리를 긁적이며 백운이 말한 도망친 이유였다.

"그나저나 백운 님 이렇게 잘 달릴 수 있었구나."

"그러게…."

카메라에서 점점 멀어지는 백운을 보며 김소연이 말끝을 흐렸다.

달리기가 좀 빠른 정도가 아니었다.

마이크나 카메라를 들고 있다 해도 기를 쓰고 쫓는 다수의 사람들을 가볍게 따돌려버리는 스피드.

이렇게 뛸 수 있는 백운이 목숨이 위험했던 개미굴에선 자신들과 맞춰 뛰어 준 것도 모자라 마지막엔 홀로 남기까지 해버렸다.

"조금 있다 야식 먹을 때 다시 한번 감사하다고 해야겠어."

김소연의 말에 김희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

김희연이 낮에 일을 떠올렸다.

가파른 오르막 때문에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 순간.

이대로라면 다 잡히겠단 생각에 걸음을 멈추고 뒤돌기 직전이었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김소연은 올려보내야 했기 때문에 내린 결정.

- 먼저 올라가세요.

하지만, 먼저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린 건 백운이었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남는 걸 선택한 백운.

'그때 같이 남아서 싸웠어야 했는데….'

김희연은 지금도 마음에 죄책감이 남아 있었다.

김소연을 위해 남겠다는 결정을 내린 후에도, 정작 행동으로 옮기진 못했었다.

'무서웠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무서웠다.

머리로는 결정했지만, 김희연의 몸은 살고자 하는 본능에 따라 계속해서 위를 향해 달리고 말았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다행이라 생각해버렸다.

김소연이 살았고, 자신도 무사하다는 사실에 말이다.

- 죄송합니다.

백운에게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건 김희연뿐만이 아니었다.

대산의 인원들과 기자들을 피해 조용히 서울까지 태워다 준 이대현.

이대현은 세 사람이 지낼 수 있도록 호텔까지 예약해 준 뒤 자리를 떠났었다.

죄송하다는 말을 남긴 채로.

"와…."

인터넷 여기저기를 서핑하던 김소연이 입을 벌렸다.

사방이 백운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었다.

모든 기사의 제목과 인기 검색어가 하나로 통일되어 있었다.

[개미굴의 남자]

인터넷에서 사람들이 백운을 부르는 호칭이었다.

대산에선 백운의 이름을 알고 있었지만 공개하지 않았고, 그 덕에 생겨난 호칭이 개미굴의 남자였다.

"아깝다, 백운 님 완전 슈퍼스타 될 수 있었는데."

카메라 울렁증이라며 튀지만 않았다면 얼굴까지 전국으로 알려질 수 있었는데 아쉬웠다.

띠링.

컴퓨터를 하던 김소연이 옆에 있는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각자 씻은 후 야식을 먹자고 했었는데.

삐--- 삐---

백운과의 연락이 두절 되어버렸다.

"아직도 안 받아?"

김소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잠 들었나봐."

김희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는 하운드에게 쫓기고 오늘은 개미들에게 쫓겼다.

거기다 마지막에 그런 엄청난 전투까지.

안 피곤하다면 거짓말일 터였다.

"흠."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김희연이 턱을 문질렀다.

"소연아."

"응?"

"백운 님 어제 하운드들한테 쫓겼다고 했잖아."

"응, 그랬지."

턱을 문지르던 김희연이 김소연과 눈을 마주쳤다.

"거짓말이겠지?"

"당연하지."

김소연이 당연한 소리를 한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강한데 쫓아갔으면 쫓아갔지, 쫓기다니. 말이 안 되지!"

꼬로록.

배에서 나는 소리에 김소연이 다시 한번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진짜 잠든 건가? 백운 님 뭐하고 있는 거야."

* * *

"후우우우!"

커다란 욕조에 몸을 담궜다.

미쳤다.

완전 미쳐버렸다.

미쳤다는 단어 말고는 이 느낌을 설명할 수 있는 단어가 없었다.

제일 먼저 닿은 발끝을 타고 머리끝까지 올라오는 물의 기분 좋은 뜨끈함.

치익!

냉장고에서 갓 꺼내온 캔맥주를 뜯었다.

귀를 간지럽히다 못해 착한 폭행을 해버리는 시원한 사운드.

벌컥! 벌컥! 벌컥!

탁!

목이 찢어질 것 같은 캔맥주를 원샷한 후.

"키아아아아아아아!!!"

단전에서부터 올라온 탄성이 터져 나왔다.

이게 대체 얼마 만에 먹어보는 맥주란 말인가.

십수 년간 체증이 확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극락이다."

천국은 먼 곳에 있지 않았다.

여기가 천국이다.

이것이 행복이다!

"하아… 행복이라."

정말이지 오랜만에 말해보는 단어였다.

말하는 걸 넘어 완전히 잊고 살았던 단어, 행복.

지금은 그 행복이란 단어가 뜨신 물의 힘으로 온몸에서 튀어나오고 있었다.

- 기다리세요! 도망가지 마세요! 기다리라고! 이름이라도 말해주고 가!!

피식.

뒤에서 쫓아오던 기자, 송유빈을 떠올렸다.

단정한 모습과는 달리 악을 쓰며 끝까지 쫓아왔던 송유빈.

송유빈의 이름은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인터넷에서 CBC의 미녀 리포터로 유명했기 때문이다.

너무 열심히 쫓아오던 송유빈에 멈춰줄까도 싶었지만, 안될 말이었다.

안되지, 안돼.

내가 해야 하는 일은 명확했다.

어느 정도 살아갈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한 후, 무기를 모으는 것.

분명 국가의 유물도 섞여 있을 것이기에 불법적인 일을 저지르게 될 수도 있었다.

얼굴이 팔리는 건 좋지 않지, 암! 그렇고말고.

옳은 선택이었다고 열심히 고개를 끄덕인 후,

"흠."

개미굴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겁대가리를 상실했던 걸까.

거기서 뛰는 걸 멈추고 뒤를 돌다니.

"풉."

물론, 말은 이렇게 하지만 그 순간을 자아성찰 하거나 반성하려는 건 아니었다.

그 반대였다.

나 자신을 너무 칭찬하고 싶었다.

왜냐고?

매우 옳은 선택이었으니까.

어쩔 수 없다란 이유로 보니와 리드를 포기해버렸다면, 아직까지 후회하고 있었을 터였다.

싱긋.

얼굴로 기분 좋은 미소가 지어졌다.

"잘했다."

턱 아래까지 욕조로 밀어 넣으며 따듯한 온기를 즐겼다.

"나 자신."

11화. 일단은 한국

"백운 님! 여기요!"

호텔의 조식 시간.

김소연이 여기라며 힘차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하하.

김소연에 부응하기 위해 나도 열심히 손을 흔들었다.

이렇게 서로 힘차게 손을 흔들며 반길만한 사인지는 살짝 의문이 들었지만, 어쩌겠는가.

상대방이 흔드는데 나도 흔들어야지.

"어제는 일찍 잠든 거 같아서 안 깨웠어요."

"정확하십니다. 씻자마자 뻗어버렸어요."

물론 피곤으로 인해 침대에서 뻗은 건 아니었다.

몇 시간 동안 뜨신 물에 몸을 담그며 냉장고에 있는 맥주를 털어먹은 어제.

취한 건 아니었지만, 김소연이 전화한 시간엔 나도 모르는 사이 맥주와 목욕물의 노곤함에 패배해 잠들어버리고 말았다.

"괜찮은 거죠? 눈이 엄청 퀭한데요."

오, 감동이다.

첫 만남 때부터 수상하게 보는 걸 넘어 바리게이트를 치고 경계했던 김희연.

그런 김희연이 날 걱정해주고 있었다.

"제가 눈이 원래 팬더상이서요. 다들 퀭해보인다고 하더라고요."

"아… 네. 원래 그런거면 다행이네요."

다행이라니.

원래 이랬으면 슬펐을 것이다.

그나저나, 난 잠이 부족하면 티가 많이 나는 스타일인가 보다.

어젯밤.

맥주 흡입에 달콤한 쪽잠까지.

욕조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긴 했지만, 아침 댓바람까지 그러고 있었던 건 아니다.

- 따각 따각 따각

호텔인데도 불구하고 최신 컴퓨터까지 갖추어져 있던 방.

컴퓨터를 보자마자 최대한 빨리해야지 했던 게 떠올랐다.

앞으로의 계획 정리.

좀 더 디테일하게는 회귀하기 전의 기억을 바탕으로 내 무기고에 넣을 수 있을 만한 유물들을 기록해나가는 것이었다.

생각보다 별로 없었지.

정리해보기 전까지는 많을거라 생각해 신이 났었는데, 막상 기록하고 보니 유물관엔 무기라고 할만한 게 몇 개 없었다.

물론, 꼭 무기가 아니더라도 찾을 가치는 있었다.

보니와 리드의 경우처럼 유리병이 무기에 직빵으로 연결될 수도 있고, 그게 아니더라도 다른 무기에 대한 정보가 담겨있을지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백운 님! 저기로 가서 앉아요."

아직 덜 끝난 기록과 정리.

호텔 체크아웃이 내일이니 오늘 저녁까진 어떻게든 정리를 마쳐봐야겠다. 

"옙! 갑니다!"

김소연이 음식과 가장 가까운 곳으로 자리를 잡았다.

세 명이 앉을 수 있게끔 준비되어있는 자리.

드륵.

의자를 빼고 자리에 앉았다.

"와! 맛있겠다. 그치? 언니."

"응, 또 저번처럼 너무 많이 먹진 말고."

"아이고 알겠어, 알겠어, 내가 애야?"

서로 티격태격 대는 두 사람을 보고 있자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누군가와 같이 먹는 밥이라니.

대체 얼마 만인지 감도 오지 않았다.

- 백운! 오늘은 배 터지게 먹어! 혹시라도 우리가 못 돌아오면 이게 너의 마지막 만찬이 될 테니까! 와하하!

- 딱 기다리고 있어, 돌아오는 날에 아주 제대로 사줄 테니까!

모두가 무능력자라고 내려다보는 날 친구로 대해줬던 사람들이 있었다.

하루가 멀다하고 찾아와 이야기 동무를 해주며 밥까지 사줬던 녀석들.

조금만 기다려라.

내가 다 바꿔줄 테니까.

"백운 님, 음식 가지러 가요."

"옙, 얼른 가요."

김소연을 따라 음식이 진열된 곳으로 걸어갔다.

벌써부터 코를 괴롭히는 향긋한 음식 냄새들.

콰로로록!

배에서 엄청난 소리가 들려왔다.

큰일이다.

이 정도의 배고픔이라면 필시 인간답지 못한 모습으로 처먹을 터.

첫 만남 때 봤던 김희연과 김소연의 눈초리를 다시 보게 될 것 같다.

"백운 님."

뒤에서 따라오던 김희연의 목소리.

고개를 돌리자 김희연이 묘한 표정으로 자리에 서 있었다.

"어제는 정말 감사했습니다. 백운 님이 아니었다면 저랑 소연이는 어떻게 됐을지…."

돌아보기 무섭게 김희연이 고개를 숙였다.

아까부터 뭔가 말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는데 이거였나 보다.

"아니에요. 누구라도 그렇게 했을 거예요."

얼굴에 한껏 정의감 불타는 표정을 그려줬다.

"그리고 저 역시 다시 돌아간다 하더라도 똑같은 선택을 할 거고요."

"…!!"

고개를 든 김희연의 얼굴에 놀라움이 번져나갔다.

만났을 때부터 왠지 모르게 무뚝뚝한 얼굴이었는데, 저런 표정도 가능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뜨끔.

물론 술술 터져 나오는 말과 별개로 양심은 조금 찔렸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조금 많이 찔렸다.

과연 보니와 리드의 유리병이 없었더라면?

그래서 올라가던 중 반짝이는 상자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흠.

"희연 님, 얼른 밥 먹으러 가요. 소연 님이 다 퍼가겠어요."

쓸데없는 가정은 넣어두기로 한다.

마음이야 어쨌든 난 올라가던 중 몸을 돌렸고, 그 결과로 모두가 살 수 있었다.

중요한 건 결과 아니겠는가?

암!

그렇고말고.

* * *

"휴우!"

만족스러운 한숨을 뱉으며 포크를 내려놨다.

"…"

"…"

그제서야 알았다.

나머지 두 명이 흔들리는 눈동자로 날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슥.

둘의 눈동자를 따라 테이블 위를 보니 좀 이해가 갈 것 같았다.

서빙하는 로봇이 주기적으로 다녀갔지만 그릇이 쌓이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고, 결국엔 테이블 가득 접시가 쌓이게 되었다.

"백운 님, 대단하시네요."

김희연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젓고 있었다.

진짜 노답이다 하며 젓는 건 아니었다.

그저 엄청나구나 하며 무의식중에 고개를 젓는 듯했다.

… 그래야 했다.

어떡하지.

포크를 내려놨다고 해서 오해를 하는 것 같다.

아직 디저트랑 과일 먹어야 되는데.

"백운 님, 실례가 안된다면…."

포크를 내려놓기 무섭게 김희연이 입을 열었다.

내가 도야지처럼 먹는 데 방해될까 봐 이제야 입을 연 듯했다.

"편하게 말씀하세요!"

"어떤 능력을 개방하신 건지 말해주실 수 있나요?"

개미굴을 걸으며 김희연과 김소연의 능력은 들었었다.

김희연은 거리가 멀면 멀수록 총의 위력을 배로 증가시키는 능력.

김소연은 바늘이 통과할 수 있는 모든 걸 꿰매어 버릴 수 있는 능력.

내 차례 때는 조금 얼버무렸었다.

그냥 간단하게 무기를 꺼낼 수 있는 것으로 말이다.

- 흑….

개미굴에서 나온 뒤, 한창 기자들을 따돌리고 돌아온 날 보며 김소연은 울음을 터뜨렸었다.

그렇게 방법 없이 같이 도망치다가 뒤를 돌아버렸으니.

아마 자기들을 살리기 위해 희생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100% 죽었을 거라는 생각은 덤으로.

그런데, 

죽었다고 생각한 인간이 비실거리며 기어나오긴커녕 개미굴에 있던 데몬들을 다 쓸어버리며 밖으로 나와버렸다.

그냥 보통의 모습으로 처치 했으면 그나마 나을 텐데, 하늘에 대고 화려한 축포를 쏘아 올리면서 등장해버렸으니 김희연이 궁금해하는 게 당연했다. 

"저는 무기를 저장하고, 다시 꺼낼 수 있어요. 물론 일단 무기가 생겨야 저장할 수 있는데, 이게 능력을 가지고 있는 저조차도 언제 생길지 알 수가 없거든요. 개미굴에서도 거의 죽기 직전에 생겨나서 간신히 살아난 거고요."

진실과 거짓을 양념 후라이드 반반 느낌으로 섞어서 말을 시작했다.

난 높은 확률로 미래의 유물 도둑이 될 수 있는 몸.

쫓길 일이 많을 수도 있는데 능력을 완전히 밝힐 수는 없었다.

"그런 능력이었군요. 눈앞에서 직접 봤는데 너무 엄청났었거든요. 하늘로 솟아오르는 데몬들과 그 데몬들을 분쇄하는 무수히 많은 총알들."

김소연이 어제 일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정도 대답이 만족스러웠는지 김희연 역시 고개를 끄덕이는 상황.

더 물을 것 같지는 않지만, 혹시 모르니 화제 전환을 시도해본다.

"두 분은 내일 바로 등록소로 가시나요?"

"네, 체크아웃하고 바로 가보려고요. 백운 님은요?"

"저는…."

처음엔 가는 김에 등록소까지 같이 갈까 했지만.

완전히 속인 건 아니나 능력에 대해 다 말하지 않은 부분이나, 앞으로의 활동하는데 있어 혼자가 더 마음이 편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만에 강남이나 좀 구경하다 천천히 가려고요."

내 대답에 김소연과 김희연이 아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쉽네요, 등록소까지 같이 갔으면 좋을 텐데."

"네 그러게요. 정확히 저도 언제 갈지를 모르겠어서 하하. 그런데 두 분은 왜 헌터에 지원하시는 거예요?"

자세히는 듣지 못했지만, 둘의 헌터 지원 동기는 나와 다른 것 같았다.

나와 달리 인천에 집도 있고 먹고 살만함에도 지원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김소연이 잠시 대답을 망설이는 사이, 김희연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찾고 있는 게 있어요."

나랑 비슷하군.

"어떤 데몬을 찾고 있는데… 그 데몬을 찾으려면 저희 둘만의 힘으론 부족하거든요. 발견하게 됐을 때도 둘만으론 역부족이고요. 그래서 조직에 소속되려고 헌터에 지원하는 거예요."

새삼 비장해지는 김희연의 표정과 왠지 모르게 서글퍼지는 김소연의 열굴.

가볍게 물어본 건데 질문을 잘못 선정한 것 같다.

무슨 데몬을 찾아요?

라는 궁금증은 삼킨 채 빈 그릇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런 분위기에선 달달한 게 필요하다.

"저는 디저트 가지러 갈 건데, 두 분도 같이 가시죠!"

* * *

호텔에서의 마지막 밤.

두 사람과 저녁까지 먹은 후 부지런히 방으로 돌아왔다.

따각 따각 따각.

컴퓨터가 필요하면 PC방으로 가도 되겠지만, 가능하다면 쾌적한 호텔방에서 끝내고 싶었다.

흠.

어느 정도 정리를 마친 화면을 바라봤다.

다 끝내고 나니 살짝 암담한 심정이 들었다.

역시 별로 없네.

유물관에서 지내며 알게 된 정보들은 대게 두 가지였다.

유물관으로 들어오는 유물들 정보와 다른 국가에서 발견된 유물들의 정보.

정보 자체 양은 꽤 많았지만, 어제와 마찬가지로 무기에 직결되는 게 마땅히 없었다.

대부분이 어떤 역사나 고대 민족의 생활, 혹은 이런 무기가 있었을 것이다 정도를 보여 주는 정보들 뿐.

그렇다고 직결되는 게 하나도 없는 건 아니었다.

몇 가지 정보는 무기와 직결되는 유물들 중 약 10년 후엔 발견되지만 아직은 발견되지 않은 것들이 있었다.

물론 여기서도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이런 정보의 대부분은 장소가 외국이라는 점.

아직은 헌터가 돼서 외국에 갈 기반이 마련되지도 않았고, 한국보다 더 다양하고 강한 데몬이 나타나는 외국에 가서 살아남을 만큼 강해지지도 못한 상태였다.

따각.

기억을 되살려 외국에서 발견된 것들 옆에 발견 날짜와 장소를 적어 넣었다.

시간이 완전 여유롭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당장 가야 할 만큼 촉박하지도 않은 상황.

공식적으로 발견되기 전에만 내가 가서 후려오면 되는 일이다.

그럼 우선은 한국이다.

페이지를 넘겨 직접 발견된 적은 없지만, 한국에서 주어진 정보들로 찾아갈 만한 무기들을 나열해놓았다. 

음… 쉽진 않겠네.

접근성 좋은 한국이라고 해서 쉬워 보이는 건 없었다.

무기라고 해서 전부 왕의 무기고에 넣을 수 있는 게 아니었기에 가능할 거라 여겨지는 몇 개만 추려 놓은 것들.

무기가 직접 발견된 건 없었기에 단서를 따라 찾아가야 했다.

"으어어어!"

기지개를 켜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괜히 정리를 했나, 오히려 막막한 심정이다.

아니지.

잭 더 리퍼의 면도칼과 앤 보니&메리 리드의 리볼버.

이 두 가지는 그 어떤 역사서나 기록에도 없던 무기인데 지금은 내가 가지고 있다.

"조급해하지 말자."

조급해할 필요 없다.

스스로 되뇌며 충혈된 눈을 감았다.

공명이 있는 이상 언제 어디서 무기를 발견할지 모르는 일.

기록한 것들을 목표로 나아가되, 그 여정에서도 무기를 발견할 수 있었다.

웃챠.

의자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음을 옮겼다.

언제 또 와볼지 모르는 호텔이니 창밖이나 한번 볼 생각이었다.

오우.

낮에는 복잡 그 자체지만 밤에 보면 형형색색 빛을 뿜어내는 아름다운 도시, 서울.

야경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마음을 가다듬었다.

내일부터, 시작이다.

12화. 10급 헌터

"이… 이게 머선 일이여."

대한민국에서 한 군데밖에 없는 헌터 등록소.

근처에 왔을 때부터 사람들이 우글거리길래 불안했었는데.

"대기번호 341번!"

등록소엔 사람이 말 그대로 미어터지고 있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대체 어디서 나온건가 궁금할 지경이었다.

- 저희는 먼저 가볼게요!

체크아웃 시간보다 일찍 일어나 빠르게 떠나버린 김소연과 김희연.

빨리 떠난 이유가 있었다.

너무 느긋하게 왔나.

일부러 느긋하게 온 건 아니었다.

언제 갈지 모른다며 같이 가고 싶어 하는 두 사람을 거절해버렸던 어제.

그렇게 거절해놓고 혹여나 등록소로 가는 버스라던가 길가에서 만날까 봐 시간을 늦춰 온 것이었다.

"헌터 지원하러 오신 거죠?"

깔끔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직원이 다가왔다.

줄이 하도 길어 돌아다니면서 대기 번호표를 나눠 주는 것 같았다.

"네 맞아요."

"몇 급 지원하러 오셨나요?"

질문을 건네며 기계의 특정 번호를 누르려 하는 직원.

아마 지원하려는 급수별로 대기 줄이 따로 있는 듯하다.

"10급 지원하려고 왔어요."

"…?"

무언가 잘못 말한 걸까.

10급이라 하자 잘못 들었다는 듯 직원이 고개를 들었다.

앞과 뒤에 서 있던 사람들도 마찬가지.

"10급이라고?"

"굳이 10급을 지원한다고?"

수군거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직원이 다시 한번 물어왔다.

"10급 확실하신가요?"

"네. 확실해요."

사방에서 저런 반응을 보이니 괜한 걱정이 들려고 한다.

이전에도 심심할 때마다 인터넷에 올라오는 헌터 영상을 가끔 봤을 뿐, 국가직 헌터의 시스템이나 구조에 대해선 잘 알지 못했다.

오히려 소설책이나 역사책, 유물에 대한 기록들을 더 즐겨 읽었던 과거.

"음…"

잠시 난처한 표정을 지은 직원이 입을 열었다.

"10급 헌터도 국가직에 속하긴 하지만 받을 수 있는 혜택이 가장 적어요. 제가 이런 말을 하긴 좀 뭐하지만 거의 소속만 국가에 되어있는 프리랜서라고 봐야 되거든요. 여기서 혜택에는 수준별 팀 배정이나 지역 선정 등도 포함되고요."

다른 사람들이 웅성거린 이유였다.

혜택이나 지원 수준이 다르다 보니 자신이 가능하다 생각하는 높은 급수부터 낮은 급수로 차례대로 지원하는 게 보통이었다.

처음부터 10급에 지원하는 건 아주 아주 드문 케이스인 것.

"10급도 데몬을 잡으면 국가에서 포상금 주는 건 맞죠?"

"네 당연하죠. 그건 모든 급수가 동일합니다."

하지만, 이 정도면 됐다.

오히려 좋다.

급수가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혜택이나 케어가 늘어나긴 하겠지만, 그만큼 어딘가에 긴밀히 소속되어야 한다는 단점이 있다.

난 어딘가에 깊이 소속되어 시간을 쏟거나 누군가와 함께하느라 신경을 쓰고 싶지 않았다.

최소한의 밥벌이.

이것이 내가 헌터에 원하는 전부였고, 이것만 가능하다면 국가에서 가장 관심을 덜 가지고 덜 챙겨 주는 10급이 좋았다.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래도 10급으로 할게요."

"알겠습니다, 여기 번호표입니다."

직원이 건넨 번호표, 10급의 대기표 600번.

현재 처리 중인 번호 100번.

뭐요?

욕이 튀어나올 뻔했다.

곧바로 탈주하고 싶게 만드는 대기자 수.

"10급 줄은 이쪽입니다."

"고… 고맙습니다."

직원의 안내를 받아 줄을 이동했다.

우글우글.

저건 대체 어느 급수의 줄인가 했었는데, 내가 서야 하는 줄이었다.

침착하자.

어쨌든 온 김에 해야 된다.

돈이 조금 남아 모텔이나 찜질방에서 자는 건 가능했지만, 내일이라고 줄이 적으란 법은 없었다.

이왕 온 거 끝을 보고 간다.

막상 와보니 아까 줄의 사람들이 갸웃거린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사람이 많은 이유도 말이다.

"허허 김씨 할머니도 왔는가."

"이잉. 내가 뜨개질 하나는 빨리 하지 않는가 껄껄! 저기 사랑방 박씨도 왔네 그려."

"박씨는 경운기를 빨리 모는 능력이 개방됐다지? 아주 마을의 그 레이싱 선수 머시기냐 박마허여 박마허." 

소일거리를 찾아 나오신 어르신들이 계셨고,

"엄마한테 말하고 왔음?"

"말했더니 바로 해보라 함. 되면 용돈 올려 준댔음."

소풍을 나온 듯한 어린이들도 있었다.

물론 개방이 시작되고 몇 년이 지났으니 이른 나이에 개방을 한 청소년일 가능성도 있지만,

"어제 뽀통령 지리지 않았음? 반박 시 뽀알못 인정임."

"오졌지, 별로라고 했으면 뽀알못 반박 불가임. 이거 끝나자마자 가서 볼거임."

어린이들이 맞는 것 같다.

….

아이들의 대화를 듣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잠시 흔들렸다.

스르르 10급 줄을 이탈해 9급으로 갈 뻔했다.

소정의 지원금.

아마도 이렇게 줄이 몰려 있는 이유일 것이다.

헌터에 대해서 잘은 모르지만 이 지원금 때문에 지원자가 꽤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되면 좋고 안돼도 그만인 10급 헌터.

등록만 된다면 주기적으로 활동에 대한 지원금이 나오기에 안될 것 같아도 일단 지원해보는 게 현명해 보이긴 했다.

처음 등록했던 계열에 따라 계속해서 활동하고 있다는 걸 증명해야 하는 게 좀 귀찮지만, 최소한의 검증이니 어쩔 수 없었다.

난 전투 계열이니까 데몬을 주기적으로 잡아야겠네.

아마 앞에 계신 어르신의 등록이 성공한다면, 뜨개질 한 걸로 다른 사람들을 돕던가 하는 활동을 증명해야 할 터였다. 

"하아…."

한숨 나오게 만드는 사람 수. 

시간이나 때울 겸 어제 잠들기 전을 떠올렸다.

- 잭 더 리퍼

무기를 꺼내 계속해서 사용하는 것.

잠자리에 들기 전 내가 항상 하는 일이었다.

물론 이미 어느 정도 적응해서인지 처음 사용했던 때처럼 몸이 확 좋아지는 느낌은 없었다.

처음엔 숫자로 치면 제로인 몸 상태였으니 체감상 크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겠지. 

어쨌든, 처음보다 체감은 덜 되더라도 면도칼을 꺼내어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몸 상태가 조금씩이나마 올라가는 게 느껴졌다. 

그래서였다.

몸이 피곤하더라도 빼먹지 않고 면도칼을 꺼내고 있는 것은.

멈춰있는 것.

나아가지 못하는 것.

회귀하고부터였던 것 같다.

이런 것들에 대한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생긴 것은.

조금씩이나마 계속 나아가야만 할 것 같았다.

그렇기에 호텔에 머무르면서도 계속해서 면도칼을 꺼내고 앞으로의 계획을 정리한 것이었다.

그리고,

면도칼을 꺼내며 알게 된 게 있었다.

지속시간의 증가와 쿨타임의 감소.

이건 보니와 리드의 리볼버 덕인 것 같았다.

무기고의 무기가 늘어날수록 다른 무기에도 영향을 끼친다.

정확히는 시너지가 생기는 것 같았다.

리볼버가 새로 추가되며 기존에 있던 면도칼에 생긴 변화들이 그 예였다.

또 하나.

잭 더 리퍼의 면도칼이 처음과 달랐다.

하운드를 썰어버리고 개미굴에서 다시 꺼냈을 때는 상황이 급박해 몰랐지만, 호텔에서 차분히 꺼내고 나니 차이를 알 수 있었다.

뭐라고 표현하긴 힘들지만 면도칼이 조금씩 발전? 하는 느낌이었다.

베어내고 뒤집어쓴 피에 따라 마치 경험치가 쌓이는 듯한 그런 느낌.

참 밀당 오지는 능력이란 말이야.

보통 사람들은 개방과 함께 자신의 능력을 자연스럽게 깨닫는다.

사용법이나 한계, 성장 방법 등등을 말이다.

하지만, 카이안이 계승해 준 무기왕의 능력은 달랐다.

내 능력임에도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많다고 할 수 있었다.

일단 공간.

카이안과 만났던 공간은 내 안에도 존재했다.

존재하는데, 들어갈 수가 없었다.

처음엔 나의 공간이 되기도 했고 공명도 있으니 들어갈 수 있겠지 했는데 아니었다.

아직 자격이 없다는 건가?

대충 짐작해볼 수 있는 이유였다.

그나마 공간 자체를 볼 수 없는 건 아니다 보니 어떤 무기들이 존재하는지는 알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리고 무기들.

무기들에 대해서도 얼추 사용법은 알지만 완벽하게 아는 건 아니고.

기존 무기의 지속시간이 늘어나며 쿨타임이 줄어든다는 걸 제외하고는 정확히 무기 추가에 따라 어떤 시너지가 발생하는지도 아직 몰랐고, 면도칼에 경험치가 쌓이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이게 다 쌓였을 때 어떤 일이 생기는지 역시 모르는 상태였다.

"10급 400번 창구로 와주세요."

생각보다 진행이 빠르다.

조금만 있으면 600번을 부를 기세다.

아, 모르는 것 투성이지만 그래도 깨달은 게 하나 더 있었다.

뭐…. 의문이나 깨달음이라기보단 새삼스러운 이해였다.

- 단순히 휘두르는 것이 아닌, 각 무기가 가지고 있는 능력을 다룰 수 있는 것이다.

무기가 가지고 있는 능력.

보니와 리드의 리볼버 같은 경우는 무기 자체적인 능력일 수도 있지만, 잭 더 리퍼의 경우는 확실히 달랐다. 

면도칼 자체는 평범한 면도칼.

특별한 건 그런 면도칼을 잭 더 리퍼라는, 보통 사람보다 월등한 움직임과 감각을 가진 살인마가 사용했다는 점이다.

즉, 무기에 담긴 능력은 두 가지로 볼 수 있었다.

무기가 가지고 있는 고유 능력과 주인이었던 사람들이 자신의 무기를 사용함으로써 발생시킬 수 있었던 능력까지.

어…?

여기까지 생각하고 나니 문득 떠오르는 게 있었다.

옛날에 읽었던 책의 한 소절.

[왕은 검과 함께 호수에 잠들었다]

전설로 전해지는 왕과 검의 이야기.

만약 왕과 검이 실존한다면, 그리고 내가 그 검을 찾을 수만 있다면?

오우야.

알 수 없는 전율이 몸을 관통했다.

엄청난데? 라고 생각하는 사이,

"10급 600번, 600번 창구로 와주세요."

드디어 번호가 불리었다.

* * *

"백운 님 10급 전투 계열 지원하셨고요, 능력은 저장해둔 무기를 꺼내는 거네요."

사무적인 목소리로 빠르게 지원서를 훑어 내려가는 접수관.

"10급이긴 하지만 전투 계열은 이곳에서 검증이 불가능해서요. 외부에 있는 국가 헌터 팀에서 간단한 테스트가 이루어질 거고요."

부스럭.

접수원이 옆에 있는 봉다리를 건넸다.

"액션 캠이에요. 실제로 자신이 데몬을 처치했다는 걸 증명하기 위한 카메라입니다. 캠은 데몬을 잡을 때마다 자동으로 데몬의 급수와 숫자를 카운트하고, 기록된 것에 따라 포상금을 지급합니다. 그리고 국가의 판단에 따라 홍보용 혹은 세금을 위해 인터넷에 올릴 수도 있습니다. 영상에는 후원금 제도가 존재하는데, 세금을 제하고는 모두 제공해주신 헌터에게 돌아갑니다."

후원금이라니.

조회수를 통해 발생하는 이익은 모두 국가로 돌아가는 듯했지만, 후원금 자체는 내게도 나쁜 시스템이 아니었다.

그나저나 이런 비싸 보이는 액션 캠을 공짜로 주다니.

"아, 감사합니다."

10급이라도 줄건 다 주는….

휙.

봉다리를 받으려 손을 뻗자 뭐하냐는 얼굴로 다시 거둬들이는 접수관.

"40만 원입니다."

뭐?

나도 모르게 육성으로 튀어나올 뻔했다.

40만 원이라니.

내 남은 돈의 50%를 넘어가는 금액이 아니던가.

"뭐, 영상만 보내 주시면 되는 거라서요. 비싼 거 같으면 여기서 안 사셔도…."

"아닙니다. 살게요."

하운드의 이빨을 팔고 받은 80만 원이 담긴 일회용 카드.

낮에 강남을 돌아다니며 이것저것 사먹느라 액수가 조금 줄어든 카드였지만 액션 캠 가격 정도는 남아 있었다.

"여기 카메라요."

"네… 넵. 감사합니다."

떨리는 손으로 액션 캠을 받아 들었다.

고장나기만 해봐라.

"테스트는 등록소 밖에 10급 전투 계열을 위한 차가 대기하고 있습니다. 그걸 타고 가세요. 테스트 장소에는 미리 연락을 해두겠습니다. 감사합니다. 601번!"

빨리 가라는 듯 다음 번호를 부르는 접수관.

이렇게 간단하다고?

물론 아직 어떤 테스트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생각보다 너무 간단해서 놀랐다.

뭐, 간단하면 좋은 거지.

좋은 게 좋은 거지란 생각으로 등록소 밖을 향해 걸어나갔다.

* * *

강남에서 멀지 않은 구룡산 정상.

"선배님, 10급 전투 계열 지원자 한 명 온답니다. 10급 전투 계열이라니… 있긴 있네요."

….

"선배님?"

아무 대답도 없는 선배에 9급 헌터인 배영태가 고개를 돌렸다.

"어…?"

배영태의 바로 뒤에 서 있는 무언가.

그건 더 이상 선배라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와작!

13화. 구룡산

"다… 니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누구지?

혹시 또 나도 모르는 사이 어떤 공간으로 들어오게 된.

"다 왔습니다!!"

벌떡!

명확히 들려오는 두 번째 목소리에 몸을 일으켰다.

츄릅.

입가로 흘러있는 침 한 줄기.

필시 병 말기였다.

예나 지금이나 차에만 타면 잠들어버리는 병.

호다닥 침을 닦는 모습에 앞에 있던 직원들이 으… 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필이면 두 명이나 타고 있어서 창피도 두 배였다.

"구룡산입니다."

"네."

구룡산이라 말해준 직원이 조수석을 돌아봤다.

"수빈아 아직도 전화 안 받어?"

"네. 이상하네요. 아무도 안 받다니."

"아까는 받았지?"

"그쵸. 받았으니까 저희가 출발한 거니까요."

조심스럽게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의 명찰을 살폈다.

임수빈와 김경찬.

임수빈은 구룡산에 도착하는 시점부터 계속 어딘가로 전화를 걸고 있었다.

"백운 님이라고 하셨죠? 원래는 구룡산 입구로 인수인계 받는 인원들이 내려와 있어야 하는데… 안 보이네요."

"아… 그렇군요."

"음, 연락을 좀 더 해보고 안 받으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돌아갔다가 나중에 다시 오실래요?"

어떻게 하겠냐는 질문에 고민이 시작됐다.

간단한 테스트라고는 했지만 어쨌든 통과해야 공식적인 10급 헌터가 되는 셈.

지금 돌아가면 아무것도 얻은 것 없이 하루종일 등록소와 차 안에서 기다린 게 된다.

차 안에서 퍼질러 자긴 했지만 어쨌든.

"혹시 조금만 더 기다려보거나, 아니면 제가 직접 그분들이 있는 곳으로 가면 안 될까요?"

서로를 바라보는 김경찬과 임수빈.

무언가 조용히 대화를 나누던 김경찬이 메고 있던 안전벨트를 풀었다.

"같이 올라가시죠. 퇴근 시간이긴 하지만."

살짝 감동할 뻔했다.

직장인이 되어 본 적은 없지만, 유물관에서 일할 때도 김덕만이 퇴근 시간 넘어서까지 일을 시키면 정말 화가 났었기 때문이다.

오늘 처음 본 한 명의 지원자를 위해 아무런 보상 없이 함께 산을 올라주다니.

대한민국의 미래는….

"선배님, 초과 근무 신청했어요."

"그래, 초과 근무 신청할 땐 몇 시까지 하라고?"

"무조건 10시요."

"그렇지."

조금은 어두울지도 모르겠다.

차에서 나와 조금 걸어가니 보이는 구룡산의 입구.

항상 가지고 다니는지 두 사람이 재빠르게 운동화로 갈아 신었다.

"…?"

어허.

임수빈과 김경찬은 똑같은 신발을 신고 있었다.

사내 연애와 동시에 비밀 연애.

직장에선 아닌 척 하다가 퇴근하면 커플 신발로 갈아 신는 모양이었다.

좋을 때네, 훈훈하구먼.

나도 모르게 사십 대 아저씨의 미소가 띠어졌다.

휙!

올라가다 말고 뒤를 돌아보는 임수빈.

"?"

"백운 님, 혹시 산 이름이 왜 구룡산인지 아시나요?"

음….

갑작스러운 질문에 미간을 찌푸리며 기억을 되살렸다.

되살렸지만, 애초에 모르던 걸 기억해내려 한다고 해서 기억이 날리는 없었다.

모르겠다.

전설이나 기록된 역사에는 관심이 많았지만, 고장난 몸 덕에 운동 같은 건 별로 안 좋아했었다.

그러다 보니 건강 운동의 끝판왕인 등산에 대한 관심도 역시 낮은 상태.

관심도가 낮으니 에베레스트나 설악산, 백두산 같은 유명한 산들을 제외하곤 무슨 산이 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어…."

"모르시는구나! 제가 알려드릴게요."

내가 모르는 표정을 짓자 재빠르게 알려주겠다 말하는 임수빈.

임수빈이 스마트폰으로 고개를 내렸다.

뭐시여.

방금 검색을 해본 모양이다.

뭐, 그래도 알려주려는 자세가 기특하니 넘어가 주기로 한다.

"산에서 열 마리의 용이 승천하려고 했다고 해요. 그러던 중에 임신한 여성이 그 장면을 보게 됐고 비명을 질렀는데, 그 비명을 듣고 놀란 용 한 마리가 떨어져 버리고 말았대요."

"아홉 마리만 승천해서 구룡산이군요."

"딩동댕! 그리고 용이 떨어져 죽은 자리에 물이 생기면서 양재천이 됐다고 해요!"

"우와!"

신나 하는 임수빈에 맞춰 박수까지 곁들여주었다.

아홉 마리의 용이 승천해서 구룡산이라.

어쩐지 산 치고는 이름이 멋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설화가 있을 줄은.

물론 내가 용이었으면 조금 킹 받았을 거 같긴 하지만 말이다.

개고생 해서 승천하고 있었을 텐데 비명 소리 때문에 떨어지다니.

"음?"

용의 입장에 빙의해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앞서가던 김경찬이 몸을 수그렸다.

"왜 그러세요, 선배?"

손으로 흙을 만져보는 김경찬.

평온하던 김경찬의 얼굴에 작은 주름이 그려졌다.

"이거… 피 같은데."

"피… 피요?"

구룡산 이야기로 신이 났던 임수빈도 깜짝 놀라는 모습.

고개를 빼꼼 내밀어 김경찬의 손을 내려다봤다.

피인지 아닌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건 바닥에 묻은 지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수빈아, 무기 꺼내."

"네… 네!"

철컥.

철컥.

두 사람이 메고 있던 가방에서 화기를 꺼내 들었다.

오면서 듣기로는 김경찬과 임수빈 모두 전투와는 상관없는 능력이라고 들었는데, 헌터들은 유사시에 대비한 기본적인 무장을 가지고 다니는 듯했다.

"천천히 올라가 보죠. 별다른 일은 없겠지만요."

두 사람을 따라 천천히 길을 올랐다.

데몬이 자주 출몰하는 장소 중 하나인 산.

그렇기에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모든 산에는 국가직 헌터가 팀을 이뤄 배치되어 있다고 들었다. 

"어디 깊은 곳은 몰라도, 대부분의 데몬은 기존에 있던 팀이 처리했을 테니까요."

대부분의 데몬이라.

수색 인원을 대규모로 투입하는 게 아닌 이상 산에 있는 데몬의 수는 파악하기 힘들어 보이는데.

"팀은 보통 몇 명으로 구성되나요?"

"책임지는 구역에 따라 다른데, 구룡산 같은 경우엔 30명 규모라고 들었어요."

30명이라니.

다른 산에 비하면 작다 하더라도 구룡산 전체를 30명이 커버한다는 건 불가능했다.

"인원수가 적죠? 그렇다 보니 전체를 책임지는 건 불가능하고 등산로 위주로…!!"

앞서가던 김경찬이 발걸음을 멈추었다.

"내려가는 게 좋을 거 같아요."

"왜 그래요? 선… 흡!!!"

김경찬 옆으로 섰던 임수빈이 입을 틀어막았다.

두 사람의 반응에 천천히 주변을 살피자 처참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풀 속.

붉은 피와 함께 신체 일부분이 흩어져 있었다.

어림잡아 봐도 두세 명 분을 훨씬 넘는 듯한 부위들.

"이게 대체…."

끔찍한 광경에 임수빈이 미간을 찌푸렸다.

"수빈아, 지원 요청해."

"알겠습니다."

"백운 님, 아래로 천천히…."

부스럭.

뒤를 돌아내려 가려던 찰나.

근처 수풀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사… 살려주… 세요."

"!!"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가자 팔 하나를 잃은 남자가 바위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유니폼을 입고 있는 걸 보아 구룡산을 지키던 팀원으로 보였다.

"괜찮아요?!"

남자의 옆으로 다가간 임수빈이 응급처치를 시작했다.

10급보다 높은 헌터들은 기본적인 응급처치법도 배우는 모양이었다.

"후우… 여긴… 위… 위험합니다."

대충 봐도 적지 않은 출혈량.

남자는 정신만을 간신히 붙잡고 있는 상태였다.

뭐에 당했길래 팔이 이렇게 된 거지.

얼핏 보긴 했지만 절단면이 고르지 않았었다.

무언가의 이빨에 뜯겨진 듯한 상처 부위.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다른 팀원들은요?"

"변종 미믹… 크럭커가 나타났습니다.."

"!! 산에서 왜 크럭커가…."

상자 모양을 한 데몬, 미믹.

대부분의 미믹은 이동 수단이 없기에 보물 상자인 척 함정을 파고 먹이를 기다리지만, 변종인 크럭커는 달랐다.

팔과 다리를 가지고 태어나 이동이 가능하며, 다른 미믹들보다도 더 단단한 몸체를 지닌 것.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나타났어요. 팀원들 대부분이 죽었습니다…. 몇 명은 도망치긴 했지만… 어떻게 됐을지…."

남자가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나도 도감에서만 봤을 뿐 실제로 만난 적은 없는 크럭커.

단단한 신체 강도를 가지고 있었기에 그걸 뚫을 만한 화력이 없으면 공략이 불가능한 녀석이었다.

음… 일단 작전상 후퇴를 하는 게 낫겠지.

보니와 리드의 화력이라면 뚫릴 것도 같았지만, 어디까지나 가정에 불과했다.

만약 크럭커의 피부가 더 단단해서 리볼버의 탄환이 먹히지 않는다면 위험할 수도 있었다.

면도칼로는 당연히 안 썰릴 거고.

잭 더 리퍼의 강점은 어디까지나 상대의 급소인 혈관을 끊어낼 수 있다는 것.

혈관이란 것 자체가 없는 크럭커를 상대로는 무용지물이었다.

"응급처치만 한 후 바로 내려가시죠. 지원 요청을 해놨으니 높은 급수의 헌터들이 도착할 겁니다."

"후욱… 알겠습… 니다."

찌익.

마지막으로 테이프로 붕대를 마무리한 임수빈.

임수빈이 김경찬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려가…."

쿵! 쿵! 쿵! 쾅!

"!?"

쓰러져 있는 남자를 부축해 내려가려는 때.

멀지 않은 곳에서 땅을 울리는 발소리와 무언가 폭발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일단 숙여요."

섣불리 움직였다간 크럭커를 만나게 되는 상황.

김경찬의 말대로 바닥에 몸을 바짝 엎드렸다.

군대 훈련소에서 배웠던 각개전투 포복을 여기서 사용하게 될 줄은.

크럭커 님, 부디 이쪽은 신경 쓰지 말고 위로 올라가 주세요.

아직 보이지도 않는 크럭커 님에게 기도를 올렸다.

쿠웅! 쿠웅!

하지만 종교를 믿지 않아서일까.

소리는 조금씩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쾅!

잠시 후, 무언가 터지는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휘릭! 쾅! 펑! 펑!

조금 지나자 달려 올라오는 큰 덩치의 크럭커와 함께 유탄기와 총을 쏘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유… 유한 팀장님!"

쓰러져 있던 남자의 팀장인 것 같았다.

아슬아슬하게 크럭커의 깨물기를 피하며 화력을 쏟아붓고 있는 팀장, 유한.

속도 자체는 크럭커를 앞서고 있었지만, 쏘고 있는 탄들이 전부 통하지 않고 있었다.

무언가 날아 올만 하면 바로 입을 다물어 공격을 몸으로 버텨내는 녀석.

얄밉구만.

상대의 화력이 자신에게 통하지 않는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얼마 못 버티겠는데.

멀리 떨어진 데다 해까지 지는 상황.

제대로 볼 순 없었지만, 얼핏 봐도 유한의 상태는 좋지 못했다.

어느 정도 떨어진 이곳까지 거친 숨소리가 들리는 걸 봐선 체력이 거의 바닥인 듯했다.

"팀… 팀장님을… 도와야…."

"잠시만요."

침통한 표정의 김경찬이 팔을 뻗어 일어나려는 남자를 말렸다.

"?"

남자가 얼굴에 의문을 띈 사이.

김경찬이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현실적이구만.

어떤 생각인지 알 것 같았다.

남자는 부상이 심한 상태였고, 김경찬과 임수빈이 가진 화기로는 크럭커를 잡을 수 없었다.

괜히 나서서 크럭커에게 인식 당했다간 모두가 죽을 수도 있는 상황.

잔인하긴 하지만 김경찬의 판단대로 몸을 숨기고 있는 게 옳았다.

남자도 그런 김경찬의 생각을 읽은 건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흠, 가서 리볼버라도 한 번 부어봐야 하나.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도의상으론 나가서 해볼 수 있는 건 다 해보는 게 옳았지만, 말 그대로 도박.

이성적인 판단은 아니었다.

잔인하지만 현실적인 선택을 한 시점.

앞에서 크럭커와 유한이 싸우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지만, 모두가 죄책감 섞인 얼굴로 그 소리를 못 들은 척하고 있었다. 

어떻게 하지.

그래도 나가서 해보는 게 옳지 않을….

번쩍.

내가 심각하게 갈등하는 걸 알아준 걸까.

갈등을 해결해주려는 빛이 보였다.

이전과 같은 황금빛은 아니지만, 마치 날 부르는 듯한 연보랏빛의 반짝임.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크럭커가 공격을 위해 입을 열 때마다, 그 안에서 말이다.

크럭커의 입안.

왜 하필….

와작! 와작!

저기냐.

14화. 선택지는 하나

하느님, 어째서 저놈 아가리 안에 빛이 있단 말입니까.

믿지도 않으면서 신을 찾아도 되는지는 의문이었지만, 그만큼 난감한 상황이었다.

스윽.

고개를 돌려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살폈다.

아무 반응도 없는 걸 보아 확실히 저 보랏빛은 나에게만 보이는 것 같았다.

그렇다는 건 카이안의 능력과 관련이 있다는 것.

차라리 지금까지와 같이 황금색 빛이었다면 무기구나 했을 텐데, 대체 저 빛은 뭐란 말인가.

아, 물론 색깔에 상관없이 집으러 가야 된다는 건 동일하지만 말이다.

저 보랏빛은 처음 보다 보니 집으러 가야 된다는 의무감에 더해 궁금증까지 솟아나고 있었다.

무기를 모으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만큼이나 중요한 건 내 무기왕 능력의 파악이었다.

특정한 조건이 갖춰질 때마다 하나씩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무기고의 시스템.

지금 저 보랏빛을 놓친다면 언제 나타날지 몰랐고, 그만큼 관련된 시스템을 언제 파악하게 될지 역시 기약이 없어지게 된다.

선택지는 없다.

무조건 집어야 된다.

"빨리 지원이 도착하기를…."

옆에서 임수빈의 간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까 임수빈이 긴급 연락을 했으니 열심히 달려오고 있을 지원팀.

조금 전까지는 나도 지원팀이 빨리 도착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변했다.

지원팀이 도착해 크럭커를 잡아버리는 순간.

크럭커의 입안에서 빛나고 있는 물건이 모두의 눈앞에 나타나게 될 것이다.

빛만 안 보인다뿐이지 물건 자체는 다른 사람들의 눈에도 보일 터.

그렇게 됐을 때 과연 헌터들이 그 물건을 내게 넘겨줄까?

절대 안 주지.

나 같아도 안 주겠다.

빛이 나는 걸 봤을 때는 보통 물건이 아닐 터.

바닷가에서 발견된 유리병도 대기업에서 사람을 보내 가져가는 판국에 크럭커가 뱉은 걸 내게 줄 확률은 제로에 가까웠다.

난 10급 헌터니까.

1급이었으면 감히 내 물건을 탐내는 녀석들의 뺨따기를 한 대씩 때리고 갈취했겠지만, 지금은 그랬다간 공무 집행 방해 같은 걸로 깜빵 행이다.

지금 밖에 없다.

지원팀이 도착하기 전에 내가 잡아야 한다.

생각해라, 백운.

머리를 최대치로 돌리기 위해 미간에 힘을 줬다.

조금 전까지는 과연 도박을 해가면서까지 유한이란 팀장을 구해야 하나를 고민했다면, 지금은 어떻게 아무도 없는 곳에서 저 보물 상자년을 처치하는가를 고민하고 있었다.

회귀 전 읽었던 크럭커에 대한 정보를 떠올렸다.

아니지, 떠올릴 필요도 없었다.

크럭커의 약점은 명확했다.

약점은 아가리…. 아니, 입속.

미믹의 특징은 상자처럼 생긴 외관과는 달리 안쪽은 생물과 같다는 것이다.

크럭커도 마찬가지.

다른 미믹보다 내구성이야 강하겠지만, 입안으로 화력을 때려 박으면 제아무리 크럭커라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문제는 크럭커 역시 자신의 약점을 알기에 관리가 철저하다는 점.

어떻게 화력을 때려 박는 동안 저 입을 벌리게 하고 있을지가 관건이었다.

스윽.

필요한 정도까지의 생각은 마쳤다.

일단은 움직인다.

"백운 님…?"

바짝 엎드려 있다가 슬금슬금 몸을 일으키니 옆에 있던 임수빈이 작은 목소리로 날 불렀다.

다 죽고 싶은 거 아니면 당장 몸뚱이를 낮추라는 무언의 말이 섞여 있었다.

"전 팀장님 구하러 갈게요."

"!?"

나머지 세 사람의 고개가 동시에 날 향했다.

이 사람이 미쳤나?

모두의 얼굴에서 보이는 의문이었다.

이해 가는 반응이었다.

자기들도 못 잡아서 침통한 심정으로 포기하고 있는 크럭커를 10급 헌터 지원자가 잡겠다니.

"백운 님 심정은 이해 가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맞아요. 백운 님 마음은 충분히 알겠으니까…."

뭘 알아, 이 사람들아.

지금 내 마음이 얼마나 급한데.

"아뇨, 전 저분이 죽는 걸 지켜볼 수만은 없어요. 아무리 말리셔도 전 갈 겁니다."

"!"

비장한 얼굴로 말하자 세 사람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자신들은 겁에 질려 숨어있는 걸 선택했는데 처음 보는 10급 지원자가 팀장을 구하러 나가겠다니.

"그럼… 저도 가겠습니다."

김경찬이 비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니야, 오지 마.

인원수가 많을수록 잡을 확률이 늘어난다면 데려갈 만하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어차피 김경찬의 화력은 크럭커한테 통하지 않는 상태.

"경찬 님이랑 수빈 님은 여기에 계세요. 저는 싸우러 가는 게 아니에요. 체력이 남으니 따돌려보려는 거죠. 둘 이상 나가면 괜한 위험만 더 증가시킬 뿐이에요."

"하지만…!"

김경찬이 무언가를 말하려는 순간.

김경찬이 옆구리에 끼고 있는 기다란 중화기가 눈에 들어왔다.

어허?

요것 봐라?

"경찬 님, 절 정말 돕고 싶으신가요?"

"당연하죠, 어떻게 백운 님 혼자 보내…."

슥.

손을 들어 김경찬의 중화기를 가리켰다.

"그럼 그거 좀 빌려주세요."

"이걸 왜…?"

쿵! 쿵! 퍼엉!

"빨리요, 시간 없어요. 저러다 팀장님 죽겠어요."

김경찬의 허락이 떨어지기 전.

다급한 척을 하며 중화기를 집어 들었다.

"그럼 잘 숨어 계세요! 저를 위해서라도 나오시면 안 돼요!"

다시 한번 강조를 한 후,

팟!

크럭커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 * * 

'크으….'

구룡산 팀을 이끌던 팀장, 유한.

유한이 입술을 깨문 채 위로 내달렸다.

쿵! 쿵! 쿵!

뒤에서 무섭게 쫓아오는 변종 미믹, 크럭커.

대체 저놈이 왜 여기에 있는 건지는 유한 역시 알지 못했다.

- 팀장님, 주말에 내려가면 뭐 사주실 겁니까?

몇 년째 구룡산에서 함께 생활해 온 팀원들을 떠올렸다.

교대 시간을 제외하곤 산에 처박혀 있어야 하는 근무.

그런 환경에서도 팀원들은 한 마디 불평 없이 잘 따라 와줬다. 

- 뭘 사줘, 임마. 오늘 저녁에 뭘 먹을지나 고민해봐.

- 하긴… 아직 주말 멀었죠. 오늘은 라면이나 끓일까요?

여느 날과 다름없는 하루였다.

평소처럼 시덥잖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시간이 되면 라면을 끓이거나 고기를 굽거나 하는 평범하고도 평화로운 하루.

그리고, 

이런 평화를 깬 위험은 소리소문없이 다가왔다.

처음부터 크럭커를 발견한 건 아니었다.

밥 시간이 되었음에도 돌아오지 않는 팀원이 걱정되어 마중 나갔을 뿐이었다.

- 으적. 으적.

팀원 몇 명과 함께 마중을 나간 장소.

그곳엔 기다리고 있던 팀원들이 있었다.

사지가 뜯기거나 상반신이 사라진 채로 말이다.

- 으아아!!!

동료를 잃었다는 분노.

몇 년을 함께 했던 동료가 저딴 데몬에게 씹어 먹히고 있었다.

그 분노에 눈이 돌아간 유한과 팀원들은 크럭커를 향해 가지고 있는 화력을 쏟아부었다.

하지만, 유한과 팀원들의 분노를 비웃듯 크럭커에겐 작은 상처 하나조차 남지 않았다.

전부 다 튕겨 나와버리는 말도 안 되는 몸의 강도.

- 으직!

공격이 전부 막힌 후엔 참극이 시작되었다.

크럭커의 일방적인 식사 시간.

- 으아아! 티… 팀자….

- 으득.

유한은 인정할 수 없었다.

현실성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지금 보고 있는 게 정녕 현실이란 말인가?

조금 전까지만 해도 같이 웃고 떠들던 팀원들이 지금은 데몬의 입속에서 처참하게 분해되고 있었다.

- 날 따라와라!!

이미 많은 팀원들이 죽었지만, 남은 인원이라도 살려야 했다.

다시 가지고 있는 화력을 쏟아부어 크럭커의 관심을 끌었다.

- 와작! 와작!

관심을 끄는데 성공했는지 크럭커가 흉측한 이빨을 보이며 따라오기 시작했다.

그때부터였다.

해가 저물어 산에 어둠이 찾아오는 지금까지 크럭커와 술래잡기를 하게 된 것은.

'젠장!'

여전히 바짝 쫓아오는 크럭커.

유한의 얼굴에 낭패감이 물들어갔다.

크럭커의 속도가 빠른 건 아니기에 지금까진 잘 도망치고 있지만, 문제는 체력이 바닥이라는 것.

"허억…."

이미 숨이 턱 밑까지 차올라 호흡 한번 한번이 고통스럽게 느껴지는 상태였다.

그에 반해 조금의 처짐도 없이 계속해서 따라오는 크럭커.

체력이란 한정된 자원이 존재하지 않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딱 한 번…!'

유한이 고개를 내려 들고 있는 화기를 바라봤다.

아직 마지막 한 방이 남아있었다.

유한의 능력은 미리 표식을 새겨둔 물체에서 가시를 돋게 하는 것.

그리고 들고 있는 화기 속의 탄환엔 표식이 새겨져 있었다.

'저 입속으로 한 발만 넣을 수 있다면!'

가능성은 있었다.

펑! 펑! 펑!

계속해서 화기의 유탄을 쏘아댔다.

통하지 않을 거란 건 알고 있다.

유탄의 용도는 크럭커의 화를 돋우기 위한 것.

빨리 잡아먹고 싶어 안달 나도록 도발해야 했다.

'속도를 조금씩 줄이자.'

크럭커가 의심하지 않도록 조금씩 속도를 줄여나갔다.

사실 일부러 줄이지 않더라도 이미 체력이 바닥이기에 어차피 오래가진 못했다.

흥분한 크럭커가 유한을 잡아먹기 위해 입을 벌리는 순간.

'입안으로 박아 넣어 주마!'

어느 정도 거리가 좁혀진 상태.

쩌억!

유한을 다 잡았다고 생각한 크럭커가 입을 벌렸다.

'지금이다!'

유한이 빠르게 몸을 돌렸다.

팀원들의 미래를 뺏어간 놈.

이놈을 죽인다고 해서 죽은 팀원들이 돌아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죽여서 최소한 원수라도 갚아야 했다.

"뒤져라 이 새끼야!!"

유한이 크럭커의 벌려진 입을 향해 화기를 조준하고,

타다라라라라라!

표식이 새겨진 수십 발의 총알이 크럭커의 입안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빠르게 쏘아졌기에 입을 다물 틈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발현!"

드드드드!

유한의 외침과 함께 크럭커의 입으로 들어간 탄환에서 무수한 가시가 솟아져 나왔다.

아무리 크럭커라도 입안은 생물과 동일할 터.

이제 저 가시와 탄환에 갈기갈기 찢겨….

"어?"

드드… 득.

크럭커가 입을 벌린 타이밍과 그 타이밍에 맞춰 총을 쏜 유한.

모든 게 유한이 계획한 대로 흘러갔다.

단 하나.

유한의 예상과 다른 게 있었다.

크럭커 입안의 강도.

일반 미믹보다는 강할 거라 생각했지만, 이건 예상 범위 밖이었다.

발사된 탄환과 유한의 능력으로 인해 발현된 가시는 크럭커의 내막을 뚫지 못하고 있었다.

카칵!

오히려 내막의 내구성에 밀려 부러져 버리는 가시.

쩌어어억!

입안에서 돋아나는 가시는 아랑곳하지 않는 크럭커.

크럭커의 벌어진 입이 유한의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이미 가속력을 잃었고, 체력도 바닥인 상황.

'죽는다….'

한계였다.

이제 남은 건 죽은 팀원들을 뒤따라가는 일뿐이었다.

가까워져 오는 흉측한 이빨을 보며 유한이 천천히 눈을….

덥석!

'!?'

죽음을 인정하고 포기하려는 순간, 누군가의 손이 유한의 뒷덜미를 낚아챘다.

휙!

그대로 뒤로 당겨져 옆으로 던져지는 유한.

죽었다고 생각한 찰나였는데 내던져지다니.

유한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처음 보는 남자가 서 있었다.

자신이 삶을 포기하고 앉아있던 자리보다 조금 더 떨어진 자리.

퍼엉!!

남자가 들고 있던 화기에서 탄을 발사됐다.

'저건 국가 헌터들에게 주어지는 화긴데?'

"누… 누구…?"

반사적인 물음에 크럭커와 대치하고 있는 남자, 백운이 입을 열었다.

"10급 헌터.."

쩌어어억!

백운이 자기소개를 하려는 찰나, 식사를 방해받은 크럭커가 돌진해 왔다.

후다닥!

곧바로 등을 돌려 도주를 시작한 백운.

그런 백운이 못 다한 소개를 마쳤다.

"지원자아아!!"

15화. 입 벌려

누군가에게 쫓기는 꿈.

다들 꾸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뭐가 쫓아오는지는 모르겠지만 엄청난 공포에 휩싸여 온몸이 벌벌 떨리는 꿈.

이런 꿈의 결말은 쫓기던 것에 잡히는 것이었고, 식은땀과 함께 잠에서 깨어나게 된다.

덜덜!!

지금의 내 상황이 그 꿈과 같았다.

문제가 있다면 꿈이 아닌 슈퍼 리얼이라는 것.

와작!

뒤에서 머리를 쭈뼛 서게 하는 입질 소리가 들려왔다.

당장 널 씹어버리겠다는 의지가 가득 담긴 입질.

후다다다다닥.

빠르게 달리며 드는 생각은 하나뿐이었다.

개무섭다.

진짜 미치도록 무서웠다.

뒤에서 내 몸을 씹어 먹기 위해 쫓아오는 데몬이라니.

여느 추격 꿈처럼 잡히면서 끝나는 엔딩은 절대 안 된다.

우지끈!

오랜 술래잡기 끝에 먹으려던 식사를 방해해서일까.

크럭커는 아까보다 더 화가 나 보였다.

와작! 와작! 와작! 와작!

미친놈이 입질을 몇 번 하는 거야?

그만큼 내가 화가 났다는 걸 보여주려는 듯했다.

그만했으면 좋겠다, 저 입질.

그냥 조용히 따라오면 얼마나 좋을까.

저 소리를 들을 때마다 오금이 저려왔다.

솔직히 말하면, 조금은 지린 것 같았다.

조금 전 유한을 낚아채느라 크럭커에게 가까이 다가간 순간.

예상보다 조금 더 다가가서인지 입을 벌리고 있는 크럭커를 정면으로 봐버렸다.

사람의 몇 배는 되어 보이는 입의 크기와 삐죽삐죽 흉측하게 솟아있는 이빨.

그리고 이빨에 묻어 있는 무언가의 붉은 잔여물까지. 

시발.

반사적으로 시발 소리가 절로 나오는 생김새였다.

순간이지만 내 판단이 옳은 것인지에 대한 의심이 들 정도.

와작!

녀석과 어느 정도 거리를 벌린 건지 궁금했다.

하지만 돌아보는 건 사치였다.

어느덧 어둠이 내려 깜깜해진 깊은 산 속.

산에는 걸려 넘어질 게 얼마든지 있었다.

해까지 사라져 바로 앞도 잘 보이지 않는 상황.

뒤를 돌아본다는 건 미친 짓이었다.

쿵!

앞이 잘 안 보이는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미믹보다야 낫겠지만 크럭커의 눈은 제대로 발달되지 못했다.

사방이 밝은 낮이야 어느 정도 보이겠지만, 지금 같이 밤이 깔린 상황에서 크럭커의 시야는 거의 없다 봐도 무방한 상태.

와자자아악!

계속 보이지 않는 지형에 부딪혀서인지 크럭커의 소리가 점점 흉폭해졌다.

운아 집중하자.

스스로의 이름을 부르며 눈에 모든 신경을 쏟아부었다.

지금은 기본 속도만으로도 크럭커에겐 잡히지 않는 상황.

하지만, 산속인 만큼 방심은 금물이었다.

조금이라도 돌뿌리에 걸리거나 하는 순간 면도칼을 꺼내 들어야 했다.

스윽.

달리는 속도만큼 빠르게 지나쳐 가는 나무와 바위들.

뒤까지는 못 보지만 달리는 내내 주변은 살피고 있었다.

적절한 장소.

내 행동에 변수가 없어지고 완벽히 크럭커의 입에 탄을 박아 넣을 수 있는 장소가 필요했다.

거기다 아래에 있는 네 명의 사람들.

개미굴에서의 화력을 봤을 때 아래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가는 사람들이 휘말릴 수도 있었다.

- 팀 구성은 30명이에요.

대부분 죽었다곤 하나 생존자가 있을지도 모르는 일.

어디에 있을지 모르는 사람들이 휘말리지 않을 장소를 찾고 있었다.

모두를 구해야 한다거나 하는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살 수 있는 죄 없는 사람까지 죽이는 건 다른 일 아니겠는가.

탓.

사람들이 있던 곳에서부터 얼마나 달려온 걸까.

정상으로 가까워지고 있는 건지 사방을 채우고 있던 나무가 많이 사라졌다.

자연스럽게 시야가 트이며 달빛에 의해 웬만한 지형이 보이기 시작했다.

정상 쪽은 바위인 산이구만.

쿵. 쿵. 쿵.

시야는 너만 트인 게 아니라는 듯 이젠 부딪히지 않고 잘 따라오는 크럭커.

저 짧은 팔다리로 이렇게 잘 쫓아오다니, 정말 대단한 놈이다.

크럭커의 사지.

커다란 상자 형태를 띄고 있는 몸체완 달리 크럭커는 사람과 비슷한 팔다리를 가지고 있었다.

사실 저 짜리몽땅한 팔다리만 보면 귀여운 녀석이다.

와작!!

저 주댕이를 벌리면 얘기는 달라지지만 말이다.

!?

열심히 달리던 중 눈에 들어오는 거대한 바위 하나.

내가 찾고 있던 생김새의 바위였다.

사람의 키보다 높게 뻗어 있으면서도 크럭커의 입질에 부서지지 않을 두께의 바위.

퉁! 

크럭커의 텐션을 올려주기 위해 유탄을 한 발 발사해줬다.

퍼엉!

정확히 크럭커의 안면에 직격하는 유탄.

내가 이래 봬도 군 시절 4번 분대원, K201 유탄 사수였다 이거야!

와자자자자자!!

예상대로 속도를 붙이는 크럭커.

놈을 바위의 위쪽으로 유인하며 머리속으로 되뇌였다.

[잭 더 리퍼]

오른손에 면도칼이 나타나며 몸이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안에서 끓어오르는 무언가.

계속 꺼내도 적응이 안 된단 말이지.

끓어오르는 건 특유의 갈증이었다.

당장 뭐라도 베지 않으면 몸이 간질간질한 그런 갈증.

잭 더 리퍼 이 자식….

희대의 네임드 살인마다운 놈이다.

척.

적당한 위치에 도착한 시점.

달리는 걸 멈추고 몸을 돌렸다.

짧은 다리를 구르며 열심히 달려오고 있는 크럭커.

저벅.

크럭커에게 파고들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 * *

구룡산의 입구.

백운이 크럭커를 데리고 올라간 덕에 네 사람은 무사히 산을 벗어날 수 있었다.

….

지원팀을 기다리는 네 사람 사이엔 무거운 정적이 깔려있었다.

살아남은 건 천만다행이었지만, 국가직 헌터라는 자리에 있으면서도 민간인의 희생으로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마음을 짓누르고 있었다.

끼이익!

그때 정적을 깨며 도착한 특수 차량 한 대.

멈춘 차 안에서 한 명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한… 한 명?"

"어째서 한 명만 온 겁니까! 위에 있는 건 크럭…!?"

자리에서 일어났던 김경찬이 말을 멈췄다.

만사가 귀찮다는 얼굴로 서 있는 중년의 남자.

모를 수 없는 얼굴이었다.

국가에서 몇 안 되는 1급 헌터 중 한 명, 기태랑.

긴급 구조 신호를 보냈다곤 하나 보기조차 힘들다는 1급 헌터가 오다니.

"기… 기태랑 님!"

저벅.

다가온 기태랑이 상황을 살폈다.

팔이 잘려있는 한 명과 팀장급 한 명, 그리고 비전투 인원으로 보이는 8급 헌터 두 명까지.

"괜찮나?"

"지… 지혈은 했지만 빨리 병원으로 옮겨야 할 것 같습니다."

"너네는 환자 데리고 병원으로 가."

다급해진 임수빈이 앞으로 나왔다.

"위에 민간인이 한 명 있습니다!"

"뭐?"

"10급 헌터 지원자인데… 그분이 크럭커를 몰고 위로 올라갔습니다."

믿기 힘든 말에 눈썹을 꿈틀거리는 기태랑.

기태랑이 발아래로 힘을 집중시켰다.

"어느 방향이야?"

* * *

쐐엑.

조금 전까지 도망치던 놈이 돌격이라니, 누군가 보면 미친놈이라 할 수 있겠지만.

면도칼을 꺼낸 시점부터 크럭커보다 월등한 속도를 가지게 된 상태.

놈에게 잡힐 일이 없기에 더 이상 맞서는 걸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스악!

갑자기 먹이가 돌진하자 놀랐는지 한 차례 입질을 하는 크럭커.

와작!

귓가로 크럭커의 입질 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굳이 따지면 50cm도 안 되는 거리였다.

갈아입어야겠다.

적셔졌을 무언가를 떠올리며 크럭커의 짧은 다리로 쇄도해 들어갔다.

몸처럼 단단하지 않지만 크럭커의 팔다리가 약점으로 분류되지 않는 이유는 하나였다.

너무 짧았다.

거기다 거대한 몸에 가려져 있기까지 하니 저 숏다리를 노리고 무언가를 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

하지만,

난 가능하다.

서걱.

크럭커가 다음 반응을 하기도 전.

빠르게 숏다리 하나를 베고 지나갔다.

사람의 형태라곤 해도 혈관 같은 게 존재할 리 없는 다리.

피를 다 뿜어내게 해서 죽일 생각은 당연히 아니었다.

와자아아악!!

기대에 부응하는 반응을 보여주는 크럭커.

크럭커가 이리저리 몸을 회전시키며 입질을 시작했다.

쐐엑!

그러든 말든.

계속해서 주위를 빙빙 돌며 크럭커의 숏다리를 베어 나갔다.

누군가를 팰 때도 팼던 곳만 패야 되듯, 지금도 같은 숏다리만을 베고 있었다.

쿠웅!

몇 번이나 면도칼을 휘둘렀을까.

숏다리가 끊어지며 크럭커의 몸이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스으으.

"!?"

크럭커에게 의사소통 능력은 없지만, 녀석의 당혹감이 내 발을 타고 올라왔다.

왜 내 발을 타고 올라오냐면, 난 지금 크럭커의 위에 올라와 있기 때문이다.

와… 와자… 악

착각인지 모르겠지만 녀석의 몸이 조금씩 떨려오는 것 같았다.

내가 무서워서는 아니겠지.

오히려 반대일 것이다.

몸을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분노.

한낱 먹이 주제 소중한 다리 하나를 끊어낸 것도 모자라 머리 위에 서 있다니.

빡칠만 하지.

여름밤, 피곤한 몸을 눕히고 달콤한 잠에 빠지기 직전.

위이이잉.

귓가에 들려오는 모기 소리를 떠올려보라.

다급하게 귀 옆으로 손을 휘둘러보지만 얍실한 모기 놈이 잡힐리는 만무.

일어나기 싫은 귀차니즘에 몇 번은 무시해보지만, 계속해서 들려오는 소리에 마음을 먹는다.

죽여버린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느끼며 불을 켠 뒤 졸린 눈을 비비며 한참을 찾아보지만.

날 괴롭히던 녀석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질 않는다.

그리고 불을 끈 뒤 다시 누우면?

위이이잉.

그때의 기분일 것이다.

와자아아아아아아아악!!!

예상대로 폭발해버린 크럭커.

크게 입을 벌리는 녀석에게서 벗어나 봐뒀던 바위로 위치를 바꿨다.

정확히는 바위 아래로 사사삭 기어들어 갔다.

등으로 느껴지는 바위의 편안함.

투우웅!!

오우야.

남은 숏다리 하나로도 저 정도 점프력이라니.

숏다리가 열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우우웅!

바위에 기댄 채 날아오는 크럭커를 바라봤다.

눈에 뵈는 게 없지?

크럭커는 생각보다 약삭빠른 데몬이었다.

공격이 올만 하면 입을 다물고, 가끔은 입을 벌리는 척 하면서 상대를 유인할 때도 있었다.

그런 크럭커를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필요한 것은 하나.

주변을 살필 겨를이 없을 정도로 눈이 돌아가게 만드는 것이다.

쩌어어어억!!

도발은 성공적이었다.

입이 저렇게 컸구나 싶을 정도로 주댕이를 쩌억 벌린 채 날아오는 크럭커.

김경찬에게 뺏어 빌려왔던 화기를 준비했다.

크럭커의 벌려진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할 2차 나무 막대기.

그 막대기의 역할을 화기가 해줘야 했다.

콰드득!!

날아든 크럭커의 이빨이 1차 막대기 역할인 바위에 파고들었다.

예상대로 단단히 버텨주는 바위.

바위가 버티지 못하고 부서지면 바로 쨀 생각으로 면도칼을 해제하지 않고 있었는데, 다행이었다. 

휙.

화기를 세로로 세워 크럭커의 입 안쪽으로 던져 넣었다.

쏙 들어가며 안쪽에서 지지대의 역할을 해주는 화기.

화기의 역할은 끝났다.

드드드드.

내가 바로 아래에 있다고 여겨서일까.

크럭커는 바위에서 이빨을 빼긴커녕 어떻게든 나와 함께 씹어버리겠다는 심산인 것 같았다.

번쩍!

그런 놈의 입안에서 흘러나오는 보라색 빛.

빛은 크럭커의 입속 깊숙한 곳에서부터 흘러나오고 있었다.

조금만 기다려라.

[앤 보니&메리 리드]

손에 있던 면도칼이 사라지며 리볼버 두 자루가 생겨났다.

스윽.

소중한 보라색 빛에 맞지 않도록 크럭커의 벌려진 입 중앙을 조준했다.

사람을 치면 목에 해당하는 위치.

와자아아아!

녀석의 부들부들거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오는 것 같았다.

후우.

조준을 마친 후, 나를 씹으려고 애 쓰고 있는 크럭커를 올려다봤다.

"야."

"?"

"아가리 벌려라."

철컥.

시원한 느낌의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쳤다.

씨익.

"탄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