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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45 맛만 좋으면 그만

이전 회차.

무저갱이 무너졌다.

군정 사상 최악의 사건이라는 탄탈로스 탈옥 사건. 그보다도 훨씬 치명적이고 끔찍한 일이었다. 탄탈로스를 탈옥한 범죄자들의 면면 역시도 흉악하기 그지없었으나…. 무저갱이 무너지고 그 아래에서 기어 나온 건, 세계를 멸망시킬 수 있을 정도의 끔찍한 것들.

그 거대한 위험성에 비해 당장 눈에 띄지 않아, 더욱 치명적이었던 재앙이었다.

무저갱에 종말의 조각이 있다는 건 회귀자도 몇 번의 회귀 끝에 간신히 도달한 진실이었다. 회귀자는 이전 회차에서 캐낸 단서를 모아 무너진 무저갱에 도착했고.

거기서 마주한 건, 수만 명의 살덩이로 빚은 끔찍한 괴물이었다.

"거, 나도 피해자니까 너무 그런 눈으로 보지 마시오. 낸들 어찌 알았겠소?"

늘어진 노을빛이 젖은 땅을 비춘다. 노을에 닿아 붉게 질척이는 빛깔은 무어라 형용할 수 없이 아름답고, 역겨우며, 끔찍하다.

대지를 적신 그 액체는, 전부 사람의 몸에서 나온 핏물이었으니까.

과거 제국으로 향했던 불사의 시체 골렘. 그 발원지조차 무저갱이었다. 회귀자는 만 하루 동안의 전투 끝에 가까스로 골렘을 처치하고는 그 핵이던 불사자를 끄집어냈다.

정작 그 핵이었던 불사자는, 그 처절했던 전투도 무색하게 태평하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쩝. 너무 오래 눈을 감고 있었어. 우리는 불사이나, 불멸은 아니오. 생명이 다하면 잠시 세상으로 돌아갔다가, 대지에서 생명을 부여받고는 다시 움직이지. 헌데, 어떤 빌어먹을 것이 나를 모독했소. 내 살점을 저주하고는 사방으로 뿌렸지. 하필 대지모신의 저주를 받은 땅이라, 나는 나를 지킬 수 없었소…."

살덩이 괴물은 총탄을 맞아도 재생하고 불에 그을려도 멀쩡했으며, 집어삼킨 시체를 곧장 무기 삼아 휘둘렀다. 가시 돋친 척추뼈가 사방에 난무하고, 고름 종기가 터져 땅에 흩뿌려졌다. 치익, 싯누런 고름이 땅 위로 떨어질 때면 독액이라도 맞은 듯 땅이 녹아 들어가기 시작했다.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 내장은 풍선보다는 폭탄에 가까웠고, 칼날처럼 날카로운 정강이 뼈가 장대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악취와 오물 속에서 회귀자는 검을 휘둘렀다.

해묵은 시체와 그 원념을 빨아들이고 무차별적으로 재생한 몸뚱아리. 다른 인간의 육신을 탐하는 그건 기어 다니는 역병이었으며, 그 자체로 인속(人屬)에 대한 끔찍한 모독이었다. 다음 고기를 찾아 땅 위를 헤매는 그것을 회귀자는 온 힘을 다해 저지했다.

그 결과.

"뭐! 죽은 사람에게는 조금 미안하군! 하지만 어쩌겠소! 내 의지로 한 일도 아닌데!"

불사자는 호쾌하게 외쳤다. 이 정도야 별일 아니라는 듯 가볍게 웃으면서.

그럴 리 없다. 회귀자는 악취를 막기 위해 두른 천으로 땀방울을 훔쳤다. 지친 한숨이 틈으로 새어나왔다.

"네가 부순 마을이 셋, 죽은 사람이 백아흔에 이르러."

"만일 아가씨가 막지 않았다면 그의 열 곱절은 더 죽어 나갔겠지! 잘했소! 아가씨야말로 영웅이구려!"

"…칭찬을 바라고 한 말이 아니야. 너는 처단당해야만 해. 이번에는, 어쩔 수 없어."

냉혹한 발언에도 불사자는 태연했다.

"나도 살기를 바라고 한 말은 아니오만! 거, 우리는 불사지 불로가 아니오. 나이를 먹으면 천천히 기력이 쇠하다가 어느 순간 흙으로 돌아가지. 물론, 나는 죽기엔 아직 젊은 편이오만."

불사자는 왼쪽 어깻죽지를 들었다. 녹아내린 핏물이 길게 늘어진 그의 몸은, 아무리 보아도 인간의 형상과는 몇백 년 떨어져 있었다. 구더기 수만 마리가 몇 년 동안 갉아먹고 토해내면 그런 모습일까. 육신의 윤곽이 테두리를 뭉갠 그림처럼 희미해서, 어디부터가 그의 몸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몸이 실시간으로 녹아 없어지는 와중에도 불사자는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 몸을 너무 험하게 썼단 말이지! 수명이 너무 빨리 닳아, 머지않아 죽을 것이오! 거, 최소한 무저갱 안에서 죽지는 않았으니 어머니 대지모의 품에 묻힐 수는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또, 그 무저갱이었다. 도대체 그 무저갱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다는 말인가.

허탕이다. 이번 회차의 회귀자는 늦고 말았다. 이 사건 자체가 회귀 초에 일어나는 바람에 시간이 너무 촉박했던 탓이다.

하지만 만일, 그 무저갱 속에 엄청난 해답이 있다면. 다음 회차야말로 희망을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짙은 피로감 속에서 약간의 기대가 반짝거렸다.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지? 누가 무엇을 했길래 당신 같은 괴물이 탄생한 거지?"

"사람을 괴물로 표현하면 좀 섭하오만. 부정할 수는 없겠군! 지금 내 꼴은 분명 괴물이니!"

"잡담할 시간 없어. 빨리."

"아, 그렇지. 내가 너무 이기적으로 굴었군! 바쁘신 몸일 텐데!"

죽음은 노을처럼 느릿하면서도 확실하게 찾아왔다. 불사자의 말투는 아까와 다를 게 없건만, 그의 얼굴에는 죽음의 기색이 파리하게 내려앉았다. 그늘진 얼굴에서 간신히 만든 말이 새어나왔다.

"혹, 그 무저갱에서 누군가 탈옥했다는 것을 아시오?"

"알아."

"그렇다면 이야기가 쉽겠구만! 탈옥하려던 놈 중 하나와 싸웠소. 거기가 지상이었다면 단숨에 재생하여 그 모가지를 찢었을 텐데, 안타깝게도 맥이 없는 무저갱에서는 재생이 안 되더구려! 영문 모를 마술에 사지가 찢기고, 생명력이 다해 잠들었지. 그런데…."

그는 흐릿한 기억을 짜내려는 사람처럼 인상을 찡그렸다.

"처음 눈을 떴을 때, 몇몇 사람이 있었소. 가장 먼저 교관이라는 자가 다가와, 자기가 나를 깨웠다고 말했지. 그는 나에게 무언가를 물어본 뒤, '관리'하기 귀찮으니 다시 잠들어 있으라고 했소. 그때는 생명력이 얼마 회복되지 않았기에 나도 다시 잠들었지."

이야기를 듣던 회귀자는 콱하고 인상을 썼다.

"…그게 끝이야? 다른 이야기는?"

"또 뭐라 했던 것 같은데. 기억 안 나오."

"조금만 더 열심히 떠올려 봐!"

"미안하오만, 나는 남자가 중얼거리는 말 하나하나 기억하는 취미 없소. 그게 요술쟁이의 허영뿐인 말이라면 더더욱."

"아무거나 단서가 될 만한 게 있을 거 아니야! 사람 숫자라든지, 거기 누가 있었는지!"

"단서라. 으음. 내가 보았을 때. 여자가 둘 있었다, 정도? 둘 다 매력적이었소."

"…그게 다야?"

"그게 얼마나 중요한 정보인데 그러시오? 사내놈 숫자보다 열 배는 중요하지 않소?"

죽음에 익숙한 것일까, 아니면 오히려 죽음이 너무 생소해서 미쳐버린 것일까. 회귀자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다잡으며 다시 캐물었다.

"다른 건?"

"그 다음에 눈을 떴을 때, 나는 잘 모르겠지만 난리가 난 상태였소. 건물이 불길하게 흔들리며 저 멀리서 짐승의 울부짖음이 들리고 있었지. 나를 깨운 사람들은, 교관이 자신들을 죽이려고 하고 있다며, 나보고 그와 맞서 싸워달라고 했소."

"그 사람들이 누군데? 뭐라고 했는데?"

"글쎄? 나도 모르오. 확실한 건, 여자는 아니었소."

"…."

정보가 너무 부족하다. 하지만 간헐적으로 눈을 뜨고 잠들었던 불사자에게 무언가를 더 기대할 수도 없다.

그럼에도 회귀자는 실망하지 않았다. 어차피, 회귀자는 다음 회차에는 꼭 그 무저갱 속으로 들어갈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건 그저 정보를 알아내기 위한 실마리에 지나지 않았다.

"싸웠고, 패배했지. 그곳이 지상이 아니었다면…. 아니, 내 손발만 멀쩡했다면 그리 허무하게 당할 리는 없었겠지만, 사실 그를 이겼어도 별 차이 없었을 것이오. 그는 짐승의 왕과 함께하고 있었거든."

"짐승의 왕이라고?"

"그렇소만. 뭐더라…. 인류의 위대한 비원인가 뭔가, 그분을 찾기 위해선 처절한 투쟁이 필요하다 했던가…. 거참, 너무 얼토당토않은 말이라, 남자놈의 지껄임도 기억해버렸지 뭐요. 큭큭…."

건조한 웃음소리가 땅에 떨어져 흐른다. 그릇이 깨져 그곳으로 목숨이 새어 나온다. 불사자라고 불리는 이들의 무한한 생명도, 결국 언젠가 끝날 수밖에 없는 찰나의 촛불일 테니.

"마지막으로 눈을 떴을 때는, 나는 내가 아니었지. 고통과 원념만이 남아, 해묵은 한을 갚기 위해 날뛰고 있었소. 몸에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허기가 졌고, 몸은 누군가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고통스러웠지. 굶주림에 이것저것… 먹어선 안 될 것을 먹은 것 같아."

"그래. 좀 징그러웠어."

"거. 마지막만 아니었다면, 괜찮을… 뻔한, 삶이었군. 큭. 할 수만 있다면, 내 삶의 마지막을, 도려내고 싶구려…."

그의 일생을 상징하는 듯한 짧은 실소와 함께, 그는 죽었다. 그것을 확인한 회귀자는 천천히 일어섰다.

"위로가 될지 모르겠지만, 안심해. 어차피 다음 회차에는 다시 살아날 테니까."

미안하게도, 그의 최후는 아직 오지 않았다. 그는 아마도 다시 살아날 것이다. 회귀자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세계가 되돌아가면, 그때는 지금과는 다른 결과가 나올 것이다.

회귀자는 담담히 몸을 일으켰다.

"…인류의 위대한 비원, 그분, 짐승의 왕…. 그놈들 계획은, 거기부터 시작되었던 거야? 참, 뿌리를 아무리 들추어도 끝나지를 않네."

어쨌건 중요한 단서가 무저갱 속에 잠들어있다는 건 확실하다. 이번 회차는 이미 늦었으니, 이 기억이 남아있을 때 당장 회귀를 할까, 아니면 조금 더 조사해볼까.

고민하던 회귀자는 천앵을 꺼내 들었다.

"이왕 회귀할 거면, 스스로 죽는 것보다는 못 다한 깽판을 치고 죽는 게 낫겠지. 좋아, 이번 회차는 버리자."

그때, 그 회차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회상이 끝났다.

회귀자는 바로 이전 회차의 기억을 되살리고는 불사자를 빤히 보았다.

'첫 번째 눈을 떴을 때. 분명 교관이 자신을 깨우고 이것저것 물어보았다고 했어. 그게 이 시점임을 확신하려면…. 분명, 여자가 둘이라고 했지. 매력적이라고도 했고.'

회귀자의 상념이 길어지자 불사자가 재촉했다.

"거, 할 말이라는 게 뭐기에 그리 짱구를 굴리고 있는 건가, 소년? 할 말이 있으면 빨리 하도록. 사내놈 말은 오래 기다리고 싶지 않으니."

"아, 알았어. 질문할게."

생각을 끝마친 회귀자는, 더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불사자를 향해 물었다.

"이곳에. 여자가 몇 명인 걸로 보여?"

아주 자연스러운 생각의 흐름이다. 회귀자는 이 시점이 그가 처음 눈을 뜬 시점이라는 것을 확신하기 위해, 과거의 증언과 현재의 증언을 비교해 볼 생각이었다. 만일 이번에도 여자가 둘이라고 말하면 과거 불사자가 말한 때가 바로 지금인 것이다….

'셰이? 그게 무슨 질문이냐? 도대체 어떠한 의도로 그런 의문을?'

아니. 잠깐만. 흡혈귀의 생각 덕분에 이성을 되찾았다.

이거, 독심술 없이는 뭔가 대화의 흐름이 이상하지 않냐?

기묘한 질문을 받은 불사자는 일단 묻는 대로 여자의 수를 셌다. 앞에 앉은 흡혈귀 하나, 그리고 저 뒤에 배를 깔고 앉아있는 아지까지 둘.

회귀자는 왜 안 세는 거지? 아, 남장 중이지. 셈을 끝마친 불사자는 손가락 두 개를 들어 보이며 대꾸했다.

"하나, 둘. 둘이지 않나? 바보가 아닌 이상 여자의 숫자는 딱 보면 당연히 알 터인데."

"두 여자가 다 매력적이야? 다른 사람은 아니고?"

"당연하지. 애초에, 세상에 매력적이지 않은 여자는 없소. 모두 각기 다른 자기만의 매력을 품고 있을 뿐. 남자야 뭐, 내 신경 쓸 일 아니고…. 그런데 그건 왜?"

불사자조차 그 질문의 저의를 의심했다.

당연한 의심이다. 대화의 흐름이 미묘하게, 아니, 대놓고 엇나가 있다. 그야 회귀자에게는 이전 회차에서 이어진 정보가 있어서 그리 말한 거지만, 가만히 보는 사람들은 대화의 간극을 잠시 따라가지 못한 채 그 안을 자기 상상력 안으로 채웠다.

특히 흡혈귀가 그랬다. 양손을 모아 입을 가린 채, 회귀자와 불사자를 보고는 탄식했다.

'어째서? 어째서 저놈에게 여자의 수나 매력을 묻는 것이냐? 도대체 무엇이 궁금하기에? 설마 저 토인의 취향이 궁금하더냐?'

대단하게도, 불사자는 이 묘한 분위기 속에서 무언가를 잡아챘다. 그는 혹시나 하는 얼굴로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잠깐. 선생. 혹 저 소년이 나에게 관심이 있다는 게…. 그런 관심이오?"

"와. 그건 또 기억하네요. 선택적 기억력 무엇?"

에라, 모르겠다.

나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을 긍정해주었다.

"맞습니다. 셰이 교육생은 어느 날 큰 목소리로 나는 남자가 좋다며 외친 경력이 있습니다."

"뭐? 그게 여기서 왜 나와?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거든?"

반사적으로 내 말에 반박하고 나서려던 회귀자는, 그제야 자신을 둘러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눈치챘다. 흡혈귀는 심장에 대한 일도 잠시 잊고 손으로 자기 입을 막고 있었으며, 나 역시도 흡혈귀의 생각에 공감하여 고개를 끄덕였고.

무엇보다, 불사자는 턱을 쓰다듬으며 진지하게 회귀자의 외모를 품평하고 있었다.

응? 야, 너는 왜 진지하게 품평하는 중이냐.

"흠! 본디 남자는 거들떠보지도 않는 이몸이나!"

-나? 어미가 이상한데. 그건 앞 주장과 상반된 의견이 나올 것을 내포하잖아?

설마, 내가 읽은 그 생각대로 아니지?

"저 정도로 곱상한 얼굴이라면 어찌저찌 가능할지도 모르겠소!"

미친놈인가.

"미친놈아!"

회귀자가 냅다 소리쳤다.

아. 마음이 통했다. 드디어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달은 회귀자가 씩씩거리며 소리쳤다.

"아니야! 전혀 아니야! 너 따위에게, 전혀 관심이 있지 않으니까!"

"앙칼진 건 웬만한 소녀 저리가라로군. 아무래도 성별을 잘못 태어난 듯 싶어."

"아니… 라고…. 했지…!"

앗. 큰일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회귀자가 폭발하겠다. 회귀자가 이성을 잃고 칼을 휘두르면 불사자는 몰라도 나는 분명 죽는다.

그리고 나 역시 불사자의 사고방식이 이해가 가지 않았고. 나도 불사자를 향해 호통쳤다.

"무슨 말이에요? 라쉬 교육생! 분명 셰이 교육생은 신경질적이고 비위를 맞추기도 힘들며 난폭한 데다 남자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당신도 그러면 안 되죠! 남자 따위는 관심이 없다면서요?"

"허허. 선생. 수놈이고 암놈이고 상관없이 맛만 좋으면 그만 아니겠소?"

"응? 뭐래."

"오히려 다행이지. 나는 불사자. 부족회의에서 허가를 받지 않고는 아이를 만들 수 없소. 혼혈을 만드는 건 더더욱 금기시되었지. 그 탓에 애석하게도, 나는 수많은 여자의 구애를 거절하며 독수공방으로 살아왔소. 차라리 남자가 나을지도 모르지…. 오, 이건 또 새로운 시각이로군! 나는 세기의 대발견을 한 게 틀림없소!"

안 되겠다. 벌써 회귀자가 검에 손을 올렸다. 그 전에 이 불사자를 어떻게 해야 한다.

나는 문득 손에 든 꼬챙이를 다시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다시 불사자를 보았다.

불사자의 가슴팍은 여전히 열려있었다.

흠.

"라쉬 교육생. 잠깐만요."

"음? 무슨 일이오, 선생?"

나는 손안에 꼬챙이를 숨긴 채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자 그는 곤란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허어. 남자에게 인기가 많아도 곤란하거늘."

뭐?

갑작스럽게 불쾌해졌다. 회귀자에게는 어떤 오해를 해도 알 바는 아니었지만, 나한테까지 그 지랄은 용서할 수 없지. 지랄은 거기까지다. 나는 그의 가슴 속으로 꼬챙이를 깊숙이 찔러넣었다.

불사자는 몸 안까지 쑥 들어온 꼬챙이를 보고는 의아해했다.

"응? 선생? 이건 뭐."

"볼트."

"크허어어억!"

그리고 전기충격. 심장에 다이렉트로 꽂아버린 전격이 전신으로 퍼졌다. 불사자의 전신이 파들파들 떨렸다.

"내가… 당하는… 입장이… 될 줄이야…."

거구가 경련하며 허물어진다. 불사자는 몸을 부들부들 떨다가, 씨익 웃어보이며 최후의 한 마디를 남겼다.

"이것도… 나름 독특한 맛이구려."

미친놈.

마지막까지 그는 강아지소리를 지껄이며 눈을 감았다. 곧 그의 의식이 완전히 끊기고, 오른팔이 툭하고 떨어졌다.

휴. 간신히 정리했다.

"자아. 잠시 소란이 있었어요."

씩씩거리던 회귀자는 반쯤 꺼냈던 천앵을 다시 돌려놓고는, 기절한 불사자를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그거, 절대 다시 깨우지 마. 별 괴상한 오해나 해대선. 으으. 이래선 내가 아가르타의 가면을 쓴 의미가…."

아니, 그런데 너무 책임을 불사자에게 미루는 거 아니야? 꼭 자기 문제는 없는 것처럼.

"그런데 솔직히 거의 다 셰이 교육생 업보인 거 알죠?"

"뭐가!"

"뭐긴. 자기가 오해할만한 언동을 다 하고 다녔잖아요. 잘 모르겠으면 티르칸쟈카 교육생을 좀 보세요."

회귀자가 흡혈귀를 쳐다 본 순간, 흡혈귀가 고개를 휙 돌리며 회귀자의 시선을 피했다. 땀도 안 나는 흡혈귀가 손부채질까지 하고 있었다.

무슨 오해를 하는지 본능적으로 깨달은 회귀자는 양손을 내밀며 어설픈 미소를 지었다.

"아니, 오해야. 티르칸쟈카."

"괜찮다. 나는 다 이해한단다…."

"전혀 이해한 얼굴이 아니잖아!"

"그, 그렇지만 나에게는 조금 이른 것 같구나. 세상은 정녕 나조차 따라갈 수 없을 만큼 빠르게 나아가고 있다는 말인가…. 그, 가능하면 내가 보지 않는 곳에서 해다오."

"그러니까 오해래도!"

둘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던 나도 한마디 거들었다.

"혹시 라쉬 교육생의 몸만 필요했던 거라면 말하세요. 원하는 부위를 빌려드릴 테니까. 그도 그리 싫어하지는 않을 겁니다…."

격분한 회귀자가 다시 천앵을 붙잡기 직전. 나는 다급히 손뼉을 치며 수업을 마무리했다.

"여러분. 군국이 어떻게 전기충격으로 심장 소생 현상을 발견했는지 아시겠죠? 다 전기 고문, 아니, 전기와 함께하는 사이좋은 심문 과정에서 충격을 받은 용의자의 심정지가 선행되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다시 전격을 가해줬더니 심장이 멈춘 겁니다! 그러니까 오늘의 교훈. 남한테 함부로 심장을 보이지 맙시다. 이상!"

그 말을 끝으로 나는 냉큼 문을 열고 도망쳤다.

EP.46 하트비트

낮과 밤을 구분하는 가장 큰 특징은 무엇일까.

당연히, 그것은 빛의 유무이다.

빛은 세상을 비추며, 험난한 이 세상에서 앞을 분간할 힘을 선물한다. 빛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코앞에 죽음이 닥쳐와도 세 살배기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얼굴을 들이밀지도 모른다.

미지는 용기가 아니라 공포다. 암흑 속을 한 발자국 나아갈 때, 보이지 않는 송곳니가 목을 후벼 파지 않는 것은 용기로 이루어낸 성과가 아니라 단지 운이 좋기 때문. 그것을 깨달은 평범한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어둠 속을 피하게 된다.

만용을 부리다 돌아오지 않은 자를 교훈 삼아서.

"일어나보거라."

그렇기에, 밤은 늘 경계의 대상이었다. 알 수 없음은 곧 공포이며 두려움이니.

인간이 집을 짓고 불을 피운 일 역시 어둠을 몰아내기 위해 마련한 자구책. 공포를 덜기 위해 낯익은 것으로 주변을 채우는 행위이니.

"일어나거라."

"하아아압!"

그래서 이 밤중 누군가 내 방에 침입했을 때. 나는 발작적으로 튀어 오르며 침대맡에 있는 램프를 켰다.

누가 아무런 기척도 없이 밤중에 숨어들어온다는 말인가. 그것도 내 방 안까지. 필시 나쁜 의도를 가지고 온 게 틀림없다….

그렇게 생각했으나, 눈에 비친 모습은 너무나 의외였다.

새하얀 인상의 아름다운 소녀였다. 흰색을 가졌다기보단 색소가 결핍된 듯한 느낌이다.

핏기 없는 얼굴, 채도 없는 은발, 온기 없는 표정에, 미동 없는 가슴.

생명을 이루는 몇 가지가 결여된 듯 병약한 인상.

귀족적이면서도 고전적인 우아함이 묻어나왔으나, 신비로운 분위기에 비해 어리게 보이는 외모였다. 그러나 그건 덜 자란 게 아니라, 마치 어느 순간부터 성장을 빼앗겨버린 것만 같은 덧없음이었다.

귀신인가? 머리카락도, 팔다리도 가늘기 그지없다. 손만 대면 부러질 것 같아 쉬이 다가가기 힘들다. 바닥에 떨어지기 직전의 백자를 보는 것 같은 아슬아슬한 위태로움이 느껴진다.

하지만 불안감은 그 자체로 매력이기도 하다. 언제 떨어질까, 어떻게 깨질까, 부서진 조각 사이사이로 흘러나오는 붉은 액체는 얼마나 아름다울까. 그러한 기대감이 아찔하고 배덕적인 충동을 들게 하기에.

전신의 피가 그쪽으로 이끌린다. 까마득하다. 떨어지는 것과 비슷한 아찔함이 감각이 느껴진다. 나는 나도 모르게 손을 뻗었고-.

"아."

상대를 읽었다.

흡혈귀잖아.

여기는 왜?

설마.

"드디어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러 온 겁니까?"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붉은 눈동자에 의아함이 가득 담겼다.

"자다가 웬 봉창 두드리는 소리냐?"

"배가 그렇게 고팠습니까? 하지만 잠시 생각해보십시오. 이건 대단히 어리석은 선택입니다. 제 전신에 흐르는 피는 약 5L 정도. 당신은 지금 저를 잡아봤자 딱 그 정도 피밖에 얻지 못합니다. 그러나 저는 매일매일 피를 만들어낼 수 있고, 극한으로 짜내면 일주일마다 약 300mL 정도의 혈액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17주, 약 120일이면 그때부터 저를 살리는 게 이득인 셈이죠. 기억하세요. 이자율의 괴물이 되십시오. 당신처럼 긴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무조건 복리가 이득입니다…."

세상이 멸망하지 않는 한 영원히 살아갈 흡혈귀에게 금단의 지식을 전해주는 나, 어쩌면 괴물을 만들어버린 것일지도….

아지소리를 지껄이던 나를, 흡혈귀는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말했다.

"잠은 다 깼느냐?"

"네. 좀 입 놀리니까 정신이 드네요."

"그래. 앉아도 되겠지?"

"아, 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흡혈귀는 허공에서 검은 의자를 만들어내더니 그 위에 걸터앉았다.

침대에 앉으며 손으로 얼굴을 몇 번 쓸었다. 상대방에게서 적의나 식욕이 느껴지지 않는다. 아무래도 오늘 죽을 운명은 아니었던 듯하다.

내가 겁먹은 것을 너무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았으면 한다. 밤중에 조용히 찾아온 흡혈귀라니. 호환과 마마에 이은 세계 3대 공포 장르잖아.

흡혈귀에게 나를 해칠 의도가 없어서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나는 땅에 떨어진 야자수처럼 쪽쪽 빨리는 꼴이 되었을 거다.

"이 밤중에 제 방에는 무슨 볼일이세요?"

생각을 읽을 겸 질문을 던졌지만, 굳이 독심술을 쓸 것도 없이 흡혈귀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래. 내 긴히 할 말이 있어 너를 찾아왔다. 조금 급했다 생각하나, 이 밤중 아니면 기회가 없을 것 같아…."

말을 하다 말고 잠시 주위를 둘러본 흡혈귀는, 양산으로 얼굴을 살짝 가리고는 고개를 숙였다.

"바깥에서 너를 불렀거늘, 잠에서 영 깨지를 않더구나. 어쩔 수 없이 너의 방에 발을 들였다…. 웬 잠이 그리도 깊다는 말이냐. 내가 직접 들어 와야 했잖느냐."

'아녀자가 밤중에 사내의 방에 몰래 찾아오다니 상상조차 못할 일이건만.'

저기, 아녀자고 뭐고 전에 자신이 흡혈귀라는 사실을 자각해주었으면 하는데. 엄청 무서웠다고. 지금 내 심장의 두근거림은 천적을 만났을 때나 느낄 공포의 박동이다.

당한 건 나인데 왜 자기가 손해 본 양….

에라. 나는 내친 김에 사악하게 웃으면서 혀를 내밀었다.

"크크크. 이 밤중에 몰래 찾아왔다는 건 각오가 되어있다는 거겠지…. 그렇게 내가 그리웠나? 오냐. 원하는 대로 다뤄주마…."

"장난치지 말거라. 나는 진지하다."

붉은 눈에 불쾌함이 어린다. 자기는 야간에 침입해놓고서 나는 장난도 못 치게 하네. 불공평해.

하지만 나와 흡혈귀 사이의 나이 차이는 그 이상으로 불공평하지. 꼬리를 말고는 냉큼 말을 돌렸다.

"자꾸 말을 끊으시니까 그렇죠. 평소엔 느긋하신 분이 몸이 달아 밤중에 여기까지 찾아왔으면서, 왜 말도 못 꺼내고 머리카락만 꼬고 계세요?"

"그것이…. 내, 이런 말하기는 조금 갑작스럽다만. 그게, 네게 긴히 할 부탁이."

"빨리요. 저는 한낱 인간이라 티르칸쟈카 교육생 속을 읽을 수 없거든요. 말로 하지 않으면 몰라요."

사실, 안다. 방금 읽었으니.

아니, 어쩌면 오늘 심장 소생술을 시도했을 때부터, 나는 이럴지도 모른다는 예감을 느꼈다. 멈춘 심장과 빼앗긴 삶에 대한 흡혈귀의 열망은 천 년이 지나도 여전히 응어리져있었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흡혈귀는 결심하고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붉은 눈동자에는 한 가닥 희망을 붙잡은 인간의 열망이 뜨겁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꼭 도박판에서 좋은 패를 움켜쥔 초보를 보는 것 같았다.

"심장, 말이다. 오늘 네가 했던 그것으로, 멈추었던 심장을 다시 뛰게 했지."

"네."

"나의 몸 안에도 멈추어있는 심장이 하나 있다. 오랫동안 지펴지지 않아 고장이 나 버린 화로가."

흡혈귀의 심장은 뛰지 않는다. 그들의 심장은 차갑게 얼어붙은 채 피만 흘려보낸다. 흡혈귀의 심장이란 그저 수많은 혈류가 한곳에 만나는 장소일 뿐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피는 어떻게 움직이느냐. 생명의 근원이기도 한 붉은 액체는 어떤 원리로 움직이느냐….

정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혈조술.

회귀자가 배우려고 했던, 피를 다루는 흡혈귀의 기술.

그것으로, 피 한 방울 한 줄기를 직접 조종하여 온몸으로 퍼뜨린다. 근육 틈으로, 살갗 속으로 하나하나 밀어넣는 것이다. 온전히 자신의 의지로 통제되는 피는 심박 없이도 몸을 움직인다.

그게 흡혈귀가 죽었으면서도 살아갈 수 있는 이유이다.

"그 화로를, 네 불꽃으로 되살려주겠느냐?"

그렇기에 흡혈귀의 심장은 뛰지 않는다. 그들의 심장은 멎은 채다. 피는 심장과는 상관없이 도도히 흐른다. 강물이 흘러가듯 자연스럽게.

쥐어짜는 듯한 격정적인 혈류는, 흡혈귀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다. 그들은 흥분하거나 슬퍼하지 않는다. 만일 그런 감정을 느꼈다고 하더라도 육체에 주는 영향은 단 하나도 없다.

"부탁이다. 제멋대로 뛰는 심장을 가지고…. 살아있는 채로 죽고 싶다."

얼굴이 붉어지지 않는다. 핏대가 올라오지 않는다. 시야가 좁아지지 않는다.

눈시울이 붉어지지 않는다. 눈물이 흐르지 않는다. 긴장하여 손발이 떨리지도, 슬픔이 전신을 옥죄지도 않는다.

흥분도, 슬픔도. 머릿속에서 반짝이는 생각으로 끝날 뿐. 호르몬 없는 감정에는 지속성이 없다.

지난 천여 년 동안, 몇몇 사람들은 흡혈귀를 동경해왔다. 그들이 가지지 못한 불로불사의 육체와 냉철한 평정심마저도 부러워했다. 흡혈귀가 가질 수 있는 감정이라고는 자신의 혈주를 향한 경애 뿐.

하나, 정작 그 시조인 티르칸쟈카는 한순간도 그것을 좋아해 본 적 없었다.

그래서, 흡혈귀는 나에게 찾아온 것이다. 천 년을 품어온 절절한 소망을, 그러나 가슴으로는 실감할 수 없는 공허한 아쉬움을 담아.

내가 말없이 바라만 보고 있자, 흡혈귀는 슬프게 미소를 지었다.

"…조금, 추하지? 이미 천 년을 넘게 살아왔건만, 뭐 그리 미련이 남았다고. 다른 이들의 몇 배는 살아왔는데 염치없이 더 삶을 바라니."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뭘요. 지금까지 살아왔다는 게 앞으로 살고자 하는 마음을 퇴색시킬 수 없지요."

의외로 다정한 나의 대답에 흡혈귀가 입을 작게 벌렸다.

"너라면 놀려댈 줄 알았건만. 의외로구나."

"제가 언제 티르칸쟈카 교육생을 놀렸다고 그러세요? 한결같은 태도로 얼마나 배려해드렸는데. 저처럼 노인공경 열심히 하는 사람 또 없습니다."

"…아닌가? 여전히 나는 놀림 받고 있는 것이냐?"

지금까지 나이를 건드릴 때마다 묘하게 신경을 쓰더라니. 더 살아가는 것에 염치없음을 느끼고 있었나.

흡혈귀는 시선을 아래로 내리며 중얼거렸다.

"죽음이 두렵지 않다. 이미 한 번 죽었으니. 고통 역시도 겁나지 않는다. 오랜 시간 동안 수많은 고통을 겪어보았으니. 하지만, 내 이 몸으로 느낀 경험이나 감정, 그리고 고통은… 다 한번 걸러진 것. 천천히 흐르는 피로 관조한 것이다. 내 지난 세월이 전부 가짜인 것 같아, 그게 너무 끔찍하여…."

흡혈귀가 느닷없이 내 팔을 잡았다. 차가운 손이 나를 최후의 동아줄마냥 붙들었다. 그 안에 담겨있는 힘은 얼마 되지 않지만, 나는 흡혈귀의 손을 떨쳐낼 수 없었다.

싸늘한 애환을 잔뜩 담아, 흡혈귀는 내게 애원했다.

"뭐든지 하겠다. 부탁이다. 내 심장을 되살려다오."

쓰읍. 이거 안 좋은데.

빛바랜 희망 속에서 스며나오는 희미한 기대. 저문 꿈. 잃어버린 동심.

이 모든 게 마술사를 미치게 만드는 요소다.

자기 자신도 믿지 않던 희망을 갈구하는 모습을 보면, 어떻게든 놀라게 하고 싶어지잖은가.

환상을 심어주는 것이야말로 마술사의 의무이니까.

나는 다시 한번 물었다.

"뭐든지 하시겠다고요?"

"그래. 천 년의 염원인데 무언들 못할까."

"그러면."

침대에서 일어났다. 흡혈귀의 시선이 나를 따라온다. 의자에 앉아있는 흡혈귀의 머리는 기껏해야 내 허리춤밖에 오지 않았다.

이부자리를 반듯하게 정리하고는, 딱딱한 매트리스를 팡팡 두드리며 명령했다.

"가슴 풀어헤치고 여기 누우세요."

그러자 흡혈귀의 눈동자가 흠칫 떨렸다. 설마 그런 반응이 나올 거라고는 전혀 예측하지 못한 사람처럼.

"가슴을, 풀어헤치고 말이냐? 그건."

"뭐든지 하시겠다면서요?"

이 태도, 이 눈빛.

절박함과, 거기서 찾은 희망. 익숙하다. 동시에, 맛있는 먹잇감을 본 것처럼 입가에 군침이 돈다. 뒷골목 카드쟁이로 살아온 나의 감이 외치고 있다.

이건 호구다.

마침 좋은 패가 손에 들어와, 내가 달리면 따라 내지를 각오가 되어있는. 아주 등골을, 피까지 쪽쪽 빨아먹을 수 있는 호구.

이런 호구를 그냥 보냈다간 도박사의 이름이 운다.

"일을 치르려면 누우셔야죠. 자, 어서요."

단호하게 명령했다. 흡혈귀는 쉽사리 발이 떨어지지 않는지 움찔거렸다. 새하얀 손이 괜히 허공을 움켜쥐었다가 놓는다. 그러다가 이윽고 결심한 듯, 작은 손으로 옷깃을 다잡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EP.47 비팅포유

"…미리 말하건대, 네가 무슨 파렴치한 짓을 하려거든 그건 심장을 되살린 이후이다. 섣불리 몸에 손을 댔다간…."

"뭔 소리야. 심장에다가 전기 마사지를 해야 하니까 가슴을, 그러니까 살을 잘라서 열라고요. 제가 꼬챙이로 가슴을 가르는 것보다는 티르칸쟈카 교육생이 스스로 풀어헤치는 편이 훨씬 편하잖아요. 흡혈귀니까."

내가 빤히 보며 반문하자, 흡혈귀는 뒤늦게 내 말뜻을 알아차리고는 민망해하며 가슴께를 쥐었다.

"가슴…. 아. 그렇…겠구나."

요즘 들어 사람들이 애먼 상상만 해서 곤란하다. 보여준다면야 냉큼 보겠지만, 그러면 나 죽일 거잖아.

미안한데 나는 다른 것보다 목숨이 두 배는 소중하다.

"…그, 그래. 그도 심장을 드러냈으니, 나 역시 그리해야겠지. 그래…."

고개를 끄덕이며 흡혈귀는 검지손가락으로 자기 가슴골을 따라 그었다. 새카만 드레스의 한가운데 한 줄기 혈선이 생기더니, 흰 가슴팍이 양옆으로 벌어지며 안에 있던 피륙이 드러났다.

몸을 감싼 새하얀 포장지는 쉬이 시선을 떼기 힘들 정도로 깨끗하고 매끄럽다. 그러나 그보다 고작 한 꺼풀 안쪽에는 아무리 비위 좋은 사람도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광경이 있다. 피거품이 들끓고 근막이 꿈틀거리며 새하얀 뼈가 묵직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몸 안쪽.

"…자. 잘 보이느냐?"

옷을 벗은 맨몸은 보이는 사람의 부끄러움이나, 그보다 더 안쪽으로 가면 꺼림칙함은 보는 사람에게로 넘어간다. 극단으로 치달으면 관계가 역전된다는 말이 허언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자기 가슴을 만지작거릴 때만 해도 꺼림칙해하던 흡혈귀가 피부 안쪽을 내보이자 이제는 내가 고개를 돌리고 싶어졌다.

자기 맨가슴 드러내는 건 부끄러워하면서 왜 그 안쪽을 드러내는 것에는 아무런 거부감이 없을까? 이 무슨 아이러니….

아니, 평범한가? 나라도 '피부를 벗고 심장 보여줄래, 옷을 벗고 맨몸 보여줄래?' 양자택일을 시키면 맨몸 보여준다. 안 죽는 흡혈귀라서 자기 가슴을 가른 채 수술대 위에 눕기까지 하는 거지.

"자아. 다 끝냈다."

흡혈귀가 자기 가슴을 들춰 보이며 말했다. 잘린 살 틈으로 새빨간 근육과 울렁거리는 핏물이 보인다.

아무래도 우리는 수치심 이전에 인간적인 무언가를 잃어버린 것 같다. 나는 새삼 눈앞의 소녀가 얼마나 비인간적인 존재인지 되새겼다.

"제가 오늘 분명 심장 드러내지 말라고 했는데."

"네, 네녀석이 시키지 않았느냐. 나도 이런 꼴을 원한 건 아니다."

"다시 강조하는데, 저 말고는 진짜 아무에게도 보이면 안 됩니다. 솔직히 저한테도 안 보여줬으면 하지만요. 우엑. 징그러."

"잡설은 되었다! 그래서? 되겠느냐?"

"한번 보고요. 어디."

캄캄해서 잘 보이지 않는다. 검지손가락을 좁은 균열 안으로 집어넣으며 마법을 사용했다.

"럭스."

손가락에서 한층 강렬한 빛이 번쩍인다. 나는 발광하는 손가락을 흡혈귀의 가슴 안쪽에 들이밀었다. 검붉은 어둠 속을 헤치며 빛나는 손가락이 흡혈귀의 몸 더욱 안쪽을 비추었다.

흡혈귀는 내 손길을 지그시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 어느 때보다도 신기하게도, 이런 꼴을 하고 있는데 그다지 부끄럽지 않구나….'

이게 부끄러우면 정신에 문제가 있는 거지. 그래도 걱정마시라. 댁의 부끄러움은 나의 메스꺼움으로 대체되었으니. 우웨엑.

"그, 저. 안에 있는 피 좀 치워주세요. 잘 안 보여요."

"아, 그러하구나."

그러자 빛이 닿는 범위에서 붉은 피가 벌레떼처럼 사방팔방 흩어진다. 스스로 가슴을 가르며 잘 보이게 피도 치워주는 환자라니 모범적이라고 해야 할지 무서워해야 할지.

우욱. 핏기도 사라지니까 모양이 더 잘 보여서…. 참자.

어쨌건, 환자의 적극적이고 의식적인 도움 덕분에 나는 금방 흡혈귀의 심장을 찾아낼 수 있었다. 바람 빠진 허파 뒤쪽으로 미동도 안 하는 심장이 보였다. 나는 그곳으로 손을 뻗었다. 톡, 하고 손가락에 심장이 닿았다.

"윽."

별의별 경험을 다 해보았으나 아무리 그래도 자기 심장까지 만져진 적은 없는 흡혈귀였다. 생소하면서도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촉감에 흡혈귀는 크게 반응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솔직히 심장을 직접 만지는 입장에서는 뭘 느끼고 싶지도 없다. 나는 계속 심장에 마력을 살짝살짝 흘려보내며 가능성을 재보았다.

으음. 이거.

심장을 툭툭 건들며 한참을 가늠하던 나는, 인상을 한껏 찌푸리다.

결국, 고개를 내저었다.

"안 되겠네요."

나의 담백한 선언에 흡혈귀의 붉은 눈동자가 급격하게 커졌다.

"안…돼? 안 된다고?"

"네."

"정녕, 가능성이 없다는 말이냐?"

"네. 안 돼요."

흡혈귀는 절망했다.

물론, 그렇다고 심장이 움직이는 일은 없다. 이토록 커다란 낙담조차도 심장을 움직이게 하지는 못했으니. 그렇기에, 흡혈귀는 비원이 수포로 돌아간 이 시점에도 냉철하게 나의 말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나는 심장에 손가락을 댄 채로 말했다.

"애초에 라쉬 교육생과 티르칸쟈카 교육생은 주어진 상황이 달라요. 라쉬 교육생은 가사 상태라 심장이 멈췄던 거였죠. 그는 불사자이고 몸을 구성하는 요소가 사람과 다르지만, 몸이 움직이는 원리는 똑같아요. 그에 반해."

톡. 흡혈귀의 심장을 두 손가락으로 살짝 꼬집는다. 흡혈귀는 소스라치게 놀라 움찔했으나, 정작 내 손가락에 닿은 심장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본래라면 닿지 않아도 움직여야 하건만, 이미 역할을 잃은 심장은 상징으로만 남았다.

"티르칸쟈카 교육생은, 혈조술로 피를 움직이고 있잖아요. 가슴을 풀어헤친 지금 이 순간조차도."

평범한 사람은 자기 가슴을 열지 못한다. 살을 들어내어 안쪽을 보여주면서도 피 한 방울도 흐르지 않도록 잡아채지 못한다. 제멋대로 뛰는 심장을 바란다고 한들, 피가 전부 자기 의지대로 움직이는데 무슨 의미가 있을까.

호흡조차 필요 없다. 피를 몸 밖으로 빼내어 공기 중에 흩뿌린 다음 다시 되돌릴 수 있는 게 시조 티르칸쟈카이니.

"아까 화로에 불을 지펴달라고 하셨죠? 아니에요. 비유하자면, 티르칸쟈카 교육생은 아궁이가 아니라 물레방아에요. 장작을 넣고 불을 당겨, 타오르는 삶을 사는 게 인(人)속. 그렇지만 흡혈귀는 혈조술로 강을 끌어와, 물레방아를 돌리는 방식으로 몸을 움직이죠."

손가락의 빛을 꺼뜨렸다. 심장을 비추는 불빛이 사라지고, 흡혈귀의 몸 안쪽에는 어둠이 다시 찾아왔다. 흡혈귀는 그녀의 가슴 안쪽만큼이나 어두운 낯빛으로 중얼거렸다.

"불가능하다는 거로구나."

"네. 이 전격은 불씨에 불과해요. 장작더미에 불꽃을 당기면 불이 붙지만, 흐르는 물에 해보았자 잠깐 따끔거리고 말 뿐이죠."

영민한 흡혈귀는 내 말을 이해했고, 낙담했다. 몇백 년 만에 희망을 찾고 들떴다가 추락했으니 그 낙차가 어마어마하리라.

그러나 그 감정 역시 반짝임으로 사라지고 만다. 흡혈귀의 감정이란 그러한 것이다. 담담하게 실패를 받아들인 흡혈귀는 마지막 남은 미련을 털었다.

"그렇다면, 딱, 딱 한 번만 해주겠느냐? 그게 무용하다고 하더라도 확인하고 싶구나."

"뭐,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죽어서도 움직이는 사람 소원이야."

"후후. 딱 이럴 때 쓰는 말이구나."

흡혈귀는 옅게 미소를 지었다.

나도 마주 미소를 지으며, 팔꿈치에서부터 마력을 끌어올렸다. 전격을 끌어내는 군국 제식마법.

"볼트."

짧게 끊어친 전격이 연달아 심장을 자극했다. 손가락 끝에서 심장이 경련하는 게 느껴진다. 움찔, 움찔거리며, 그 압력으로 핏물이 잠시간 왈칵 넘친다.

이건 뭐, 심장 소생보다는 기계적인 반응에 가깝다. 인간의 근육이란 전격에 닿으면 움찔하기 마련이고, 흡혈귀의 경우 그게 심장이었을 뿐이다.

나는 별다른 감흥 없이 손가락을 떼려고 했다.

그때였다. 흡혈귀가 다급히 내 손을 꽉 움켜잡고는 끌어당겼다. 미처 대응할 틈도 없이 내 손이 흡혈귀 가슴 속으로 쏙 들어갔다. 살아있는 고깃덩이의 물컹거리는 촉감이 느껴졌다.

내가 기겁하려는 무렵.

"뛰었다."

"네?"

흡혈귀는 경악한 얼굴로, 그러나 대단히 밝은 표정으로 외쳤다.

"느낌이 있었다. 분명, 잠깐이지만 가슴이 뛰었다."

"그야 전격이 튀었으니까…."

"그래. 잠깐이지만, 제멋대로 튀어 나갔다는 말이다! 이게…. 심장이…."

내 손이 희망이라도 되는 양, 꼭 품고는 놓아주지를 않았다. 도망이라도 갈까 걱정되어 아예 몸 안으로 품으려는 듯한 모양새였다.

"정말, 정말 안 되는 것이냐? 심장, 내 심장이…."

그러나 상대가 흡혈귀라고 하더라도 현실은 비정한 법.

마력의 잔재가 사라지고, 들뜬 심장도 안정을 되찾아 천천히 가라앉을 무렵. 덩달아 흡혈귀의 희망 역시도 저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흐르는 피 사이로 심장이 천천히 멎는다.

그에 따라 팔을 잡은 손에서 힘이 약해진다. 내가 슬쩍 팔을 빼자, 힘없는 손가락이 내 손목에 툭 걸린다. 나는 그 손을 살짝 쥐고는 말했다.

"어쩔 수 없지요."

"…그러하구나."

흡혈귀가 가슴을 여미며 몸을 일으켰다. 아쉬움과 슬픔, 그리고 만성적인 체념을 피부 한 장 안쪽에 숨겨놓은 채 잘린 살가죽을 손가락으로 스윽 밀었다. 상처가 순식간에 아물고, 뽀얀 피부는 언제 그랬냐는 듯 말끔해졌다.

'이번에는 되나 했건만. 희망은 여전히 나의 손아귀 틈으로 사라지는구나. 나의 손이 터무니없이 커진 것일까, 아니면 희망이 그토록 작고 고운 것일까. 지금도… 안 되는 것일까.'

그러나 마음마저도 질척거리지 않는다. 손에 쥐었다가 사라지는 반짝임마저도 차갑게 흐르는 피에 쓸려나간다.

흡혈귀는 깔끔하게 마음을 정리하고는, 도리어 나를 위로하려는 것처럼 말했다.

"괘념치 말거라. 실패는 익숙하니. 어쩔 수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네? 제가요? 저는 그저 선의로 도우려다가 안 된다는 걸 알고 포기했을 뿐인데 무슨 아쉬움이 있겠어요? 저는 봉사를 의무로 생각하는 멍청이가 아니네요. 티르칸쟈카 교육생이나 아쉽지, 저는 아무런 생각 없답니다?"

"여전히…. 말은 참으로 잘하는구나. 얄밉게도."

서글픈 미소를 지은 흡혈귀는 침대에서 내려왔다. 풀어헤쳤던 옷을 끌어올리며 몸가짐을 단정히 한 흡혈귀가 느릿하게 밖으로 향했다.

"오밤중에 실례했구나. 우리와는 달리 너희에게 밤은 잠에 들 시간일 텐데."

"어차피 무저갱인데요, 뭐. 괜찮다니까요. 필요한 일 있으면 얼마든지 말씀해주세요."

천여 년 동안 군림한 흡혈귀의 시조. 그 심장을 다시 뛸 수 있게 했다면 엄청난 대가를 얻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내 능력밖에 있는 일.

나에게 독심술이 있다고 한들, 내가 뒷골목 최고의 도박사라고 한들. 손패가 없는데 억지로 족보를 만들어 돈을 딸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당연한 일이고 아쉬워할 필요 없다.

중요한 건, 이 이후에 무엇을 얻어갈 거냐. 그것뿐.

"가끔은, 심장 마사지라도 해드릴 테니까요."

손가락을 슬쩍 들어 보였다. 이 손가락이 닿았던 것과, 그때 느꼈던 희망을 떠올리게 하기 위해.

"가끔이지만요."

"그래…."

조금 아쉬운 결과이나, 이 정도 인연이라도 얻어간다면야.

내 방을 나서는 흡혈귀를 바라보며,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EP.48 여태까지 너를 미행한 거야

흡혈귀의 은밀한 욕구를 알아차리고, 그녀의 비원을 들어주려다 실패한 게 며칠 전. 나는 흡혈귀에게 한 가닥의 끈이라도 걸쳐둔 것에 크게 만족하며, 이 탄탈로스에서의 인연 쌓기에 한 걸음 큰 진전을 이뤘다….

라고 생각하던 시기가 나에게도 있었다.

"잠시 시간을 좀 내주겠느냐?"

"또요?"

익숙함이 꼭 반가움으로 바뀌지는 않는다. 오히려 지겨움이나 짜증으로 바뀔 가능성이 크지. 최근 들어 흡혈귀는 틈이 날 때마다 내 방이나 식당에 방문하여 나를 찾고는 했고, 나는 골머리를 앓는 중이었다.

흡혈귀가 나에게 찾아오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나는 얼굴을 콱 구기며 대꾸했다.

"그거 중독이에요, 중독."

"별로 힘들지도 않잖느냐."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삼시세끼 밥 먹고 쉴 때마다 찾아오는 건 좀."

"너는 손가락을 집어넣거라. 나머지는 다 내가 알아서 할 터이니."

아무래도 말린다고 들어먹지도 않을 것 같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고, 흡혈귀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옷고름을 풀며 나에게로 다가왔다.

내막을 모른 채 먼 발치에서 바라만 본다면, 엄청 부러울 만한 광경이다. 만인이 돌아볼 만한 아름다운 여자가 나만 보면 화색이 되어 으슥한 곳으로 잡아끌고는, 나의 손을 잡아당겨 가슴에 묻는 일.

다만.

"자. 어서."

옷이 아니라 살가죽을 풀어헤치고.

비유가 아닌, 말 그대로 가슴 안에 묻어버린다는 점을 안다면, 좀 다르게 느껴질 수도 있다.

잘린 살 틈으로 손가락을 깊숙이 집어넣었다. 이제는 보지도 않고 심장까지 향하는 길을 찾을 수 있다. 그 달갑지 않은 변화를 스스로 느끼며, 안쪽을 능숙하게 헤집었다.

"볼트."

전격이 손가락을 타고 심장으로 흘러 들어간다. 아무리 약하다고 하나 심장에 직접 맞닿은 채 쓰는 마법. 심장이 멎을 수도 있을 충격이다.

하지만 상대는 이미 심장이 멎은 지 오래인 흡혈귀. 그녀에게 이 충격은 과거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반가운 자극이었다.

"흐읏. 하아…."

흡혈귀의 얼굴에 홍조가 돈다. 전격에 맞은 심장이 펄떡이며 피를 맹렬하게 뿜어낸 탓이다. 창백한 상아색이었던 얼굴에까지 과할 정도의 피가 들이닥치자 얼굴색이 바뀌고, 잠시 장르가 다른 쾌락이 들이닥친다.

흡혈귀는 달뜬 신음을 내뱉으며 내 팔을 꽉 붙잡았다. 전신이 매달린 것 같은데, 팔에 느껴지는 무게는 가볍기 그지없었다.

한참 여운을 즐긴 흡혈귀는 나에게 매달리듯 몸을 기댔다.

"흐으으…. 점점, 더… 능숙해지고 있구나."

"인간은 배움의 생물이니까요. 서로서로 익숙해지는 거죠."

"고맙다…. 다음에도 부탁하마."

"좀 띄엄띄엄 오세요. 제가 귀찮아요."

"언제는 노인공경이라더니, 이제는 가식조차 부리지 않는구나."

"이렇게 자주 찾아올 줄은 몰랐죠. 분명 심장 함부로 드러내지 말라고 했는데 이제는 지킬 생각도 없나 봐요?"

"이미 죽은 몸이다. 심장을 밖으로 내놓아도 아무런 지장이 없거늘, 어찌 드러내지 말라고 하느냐."

내친김에 직접 꺼내서 보여주려고 하는 흡혈귀. 나는 급히 손을 뻗어서 그걸 막았다. 흡혈귀는 피식 웃으며 내 손을 떼어내고 옷을 추스렸다.

"거기다, 오직 너에게만 보여주고 있지 않느냐. 자랑스럽게 여기거라."

"자랑스럽긴. 그것도 별로 반갑지 않거든요? 제가 하려는 건 노인공경이지, 노동이 아니에요. 추가노동은 동서고금 남녀노소 누구나 싫어하는 거라고요."

"그렇다면, 노동에 대가가 있다면 어떠하냐? 내가 따로 보관하고 있던 금을 주마."

"됐어요. 연금혁명 이전 시기 금은 믿을 게 못 되어요. 그것들 실제 가치는 땅에 굴러다니는 좀 예쁜 돌 수준이라고요."

"으, 으윽. 시대가 좀 많이 흘렀나 보구나…."

낙담한 흡혈귀는 턱에 손을 괴고 중얼거렸다.

"어쩌지…. 지금 나에게는 금과 조각상 정도밖에 남지 않았거늘. 이것이 대가가 될지 모르겠구나."

"네? 조각상이요?"

"그래. 그림이나 조각 같은 것들. 나에게 취미가 하나 있었다면, 그것은 미술품을 모으는 것이었다. 감흥은 한순간이나 예술은 그대로 남아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것도… 이 시대에는 얼마나 가치를 가지고 있을지."

"그래도 금보다는 낫겠죠. 한 번 보여주시겠어요?"

"그래. 내 들고 올 터이니 여기 있거라."

흡혈귀는 미술품을 가져오겠다며 자리를 비웠다. 나는 멀어지는 흡혈귀의 뒷모습을 보며 회심의 미소를 흘렸다.

이거 봐. 호구라니까. 내가 조금 만져주고 튕겨주니 제 손으로 재산을 갖다 바치려고 하잖아.

그것도 미술품이라니. 오래 묵힐수록 가치를 더해가는 몇 안 되는 물건이다. 관 속에서 흡혈귀와 함께 천여 년 간 보관되었던, 그것도 한때 세상을 지배했던 절대자의 미술품? 가치를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어지간한 금광 이상의 보물고인 것이다.

탄탈로스에서는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품 안에 보물 정도는 하나 쟁여놓아야지. 나는 장밋빛 미래를 그리며 몸을 돌렸다.

'저, 저, 저, 저. 저 녀석. 티르칸쟈카와 뭘 하고 있는 거야?!'

…일단, 모퉁이 너머에서 이쪽을 엿보던 관음증 환자부터 해결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척 복도를 걸었다. 그런 내 뒤를 회귀자가 은신술로 몸을 숨긴 채로 따라왔다.

'정체를 드러내? 말아? 현행범은 당장 붙잡아서 추궁하는 편이. 아니, 내가 미행했다고 생각하면 어쩌지?'

어쩌지라니? 너 미행한 거 맞잖아. 양심은 저번 회차에 두고 왔니?

입이 근질거리는 걸 필사적으로 틀어막고 있는 사이, 회귀자는 오만 생각 끝에 결론을 내렸다.

'아니야! 원래 목적에 집중해, 셰이! 나는 이곳 무저갱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아내고, 아지와 티르칸쟈카의 타락을 막기 위해 온 거야! 그러기 위해서는! 끼어들어도 돼!'

홱.

회귀자는 몸을 날려 내 앞에 내려앉았다. 그리고는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성큼성큼 걸어왔다.

드디어 나설 마음이 들었나. 오래 기다렸다. 나는 태연하게 회귀자를 맞이했다.

"안녕하세요, 셰이 교육…."

"티르칸쟈카에게 무슨 짓을 했어?"

곧바로 본론이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대꾸했다.

"여태까지 나를 미행한 겁니까?"

"물론… 이 아니라, 어쩌다가! 어쩌다가 네가 티르칸쟈카와 같이 어딘가를 향하는 걸 봤고, 네가 이상한 짓을 하는 장면을 목격했어!"

"이상한 짓이라니요? 저는 딱히 누군가에게 비난받을 짓을 한 적이 없는데요."

"발뺌할 셈이야?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다 봤는데! 심지어 둘이 나누는 이야기까지 들었어!"

뭐야, 그거. 그냥 스토커잖아.

"뭐야, 그거. 그냥 스토커잖아."

아차. 속마음이.

"아니라고!! 따지고 보면, 그래! 잠복형사 같은 거야!"

"셰이 교육생. 혹시 경관이세요?"

"어? 그, 그건 아닌데."

"뭐야. 그럼 그냥 스토커잖아."

"아니…!"

제멋대로 흥분해서 폴짝폴짝 뛴 회귀자가, 깊게 심호흡을 하고는 나를 노려보았다.

"말 돌리지 마. 이건 매우 중대한 문제니까!"

"저야말로 어이가 없는데요. 제가 티르칸쟈카 교육생에게 무슨 짓을 했다고? 최소한 양심에 반하는 짓은 하지 않았습니다만."

"이제는 발뺌하겠다 이거지?"

"발뺌은 미행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셰이 교육생이 하고 있는 게 발뺌이죠."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에휴, 그래요. 중요한 걸 들어나 봅시다. 뭔데요?"

조금 대답해주니 몰아넣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회귀자는 한층 의기양양해진 채 소리쳤다.

"너, 티르칸쟈카를 강제로 더듬었잖아!"

"네? 누구를, 강제로, 뭐요?"

"티르칸쟈카를, 강제로, 만지고…."

자기가 말하면서도 말이 안 된다는 것을 깨닫고는 목소리를 점차 줄여나가는 회귀자. 나는 미간을 좁히고 회귀자를 흘겨보았다.

당연하다. 역천의 괴물이자 어둠의 여왕, 흡혈귀의 시조 티르칸쟈카를 협박해서 강제로 더듬어?

그게 되면 왜 이러고 살아.

차게 식은 시선. 내 속뜻을 눈치챈 회귀자는 빽 소리쳤다.

"하, 하지만 녹안으로 나는 똑똑히 봤다는 말이야! 네, 네놈이, 티르칸쟈카 가슴팍에 손을 집어넣는 모습을!"

"네, 뭐. 심장까지 건드렸죠."

"그딴 소리를! 네가 뭐, 시적인 표현으로, 얼어붙은 심장을 녹이기라도 했다는 말이야?"

뭔 소리야. 문자 그대로의 의미인데. 진짜로, 이 손으로 물리적 접촉을 했다고.

"거기에, 점점 능숙해지고 있다고…!"

"별로 유쾌한 경험은 아니에요."

손이 자연스럽게 살을 헤집고 심장에 닿는 기분을 네가 아니? 아무리 흡혈귀가 자기 피를 마음대로 다루며 몸이 조각나도 재생한다지만, 그렇다고 그 안쪽에 손을 집어넣는 건 진짜 묘하다고. 미끈한 속살, 꿈틀대는 근육, 묘하게 따뜻하고 축축한 안. 꼭 고래 뱃속에 들어간 느낌이야.

피, 내장, 근육, 뼈. 인간은 몸 속을 채우는 모든 것을 메스껍게 여기도록 진화해왔다. 내장이 드러난다는 건 죽음의 예고 비슷한 거니까. 나도 마찬가지다. 요즘 실시간으로 이성 수치가 깎여나가고 있다.

"너, 너. 네가, 어쨌든. 도대체 티르칸쟈카와 어떤 짓을 하고 있는지는 솔직히 잘 모르지만."

머릿속으로는 잠정 결론까지 낸 주제에 무슨.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정말 몰라요?"

"모르지마안!!"

'이러다간 아지도, 티르칸쟈카도 이 남자의 영향을 너무 크게 받아! 이게 타락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훗날 그런 결과로 이어진다면, 이 남자의 탓일 가능성이 있어!'

내가 뭘 한다고 그래? 타락? 내가 저들을 왜 타락시켜. 자살할 일 있나.

애먼 상상을 하는 걸 보니 진짜 모르는구나. 하긴 심장을 직접 터치해서 전기마사지를 하고 있다고는 상상도 못하겠지.

"분명 남들 눈에 보일 수 없는 이상한 짓이겠지!"

이건 정답이네. 반박할 말이 없다.

"대꾸하지 못하는 걸 보니 맞나 보네! 오늘 그 짓거리를 끝내주겠…!"

"내 좋아서 하는 일이다. 누구 마음대로 끝내고 말고 한다는 말이냐."

나이스 타이밍이다. 마침 커다란 관을 끌고 온 흡혈귀가 짐짓 화난 표정을 지으며 다가왔다. 흡혈귀는 그대로 회귀자를 지나쳐 서서, 나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나름 스승처럼 자신을 대한 티르칸쟈카가 나의 편에 섰다는 것에, 회귀자는 큰 충격을 받았다.

"티르…칸쟈카?"

'티르칸쟈카가, 저 남자를 등지고 나와 맞서고 있어?'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아 떨리는 눈동자. 그러나 흡혈귀의 시선은 차갑고 냉랭했다.

"그만하거라. 왜 나의 일 하나하나까지 네 참견이냐? 스승의 행사에 제자가 어찌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냐."

"아니야. 나는 너를 위해 하는 거야!"

'저번 회차, 너는 누군가에게 배신당해서 큰 고통을 느끼고, 세계를 불사르는 대전에 참가한다는 말이야!'

애절한 목소리에는 진심이 담겼다. 분명 저 말은 진실이며, 언젠가 미래에 일어났던 일이다. 회귀자는 티르칸쟈카의 몰락을 막고, 그녀의 행복을 기원하는 게 분명하다.

그게 세계를 위해서든, 아니면 그녀 자신을 위해서든.

하지만 그건 나밖에 알지 못한다. 흡혈귀에게는 생각을 읽는 능력이 없으므로.

"나를 위해?"

그 마음이 무색하게 흡혈귀는 코웃음을 쳤다.

EP.49 너는 행복할 수 없어

"말 잘했다. 이 기회에 나도 한마디 하마. 너는 나에게 가르침을 청했지. 내 분위기에 휩쓸려 너를 제자로 받고 가르침을 주고 있다만."

차가운 불은 실존했다. 그렇지 않다면, 불처럼 새빨간 흡혈귀의 눈동자는 그토록 시릴 수가 없었다. 내 곁으로 한 걸음 붙은 흡혈귀가 회귀자를 꾸짖었다.

"너는 나에게 아무런 경의도 표하지 않는구나."

"경, 의?"

"혹은 존경, 상징, 징표, 뜻. 무엇이든 말이다."

새카만 양산이 어깨에 톡 걸쳐진다. 흡혈귀는 작게 한탄하며 회귀자를 흘겨보았다.

"조그마한 선물이라도 괜찮다. 고맙다는 말 한마디라도, 감사하게 여긴다는 그 말이라도 충분했다. 헌데, 셰이 너는 나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그건…."

"그에 반해."

이번에는 시선이 나를 향한다. 나는 냉큼 손을 들어 흔들었고, 흡혈귀는 미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회귀자에게 보여주기 위해 내 장단에 맞춰준 것이었다.

명확한 온도 차. 비록 보여주기 용으로 지은 표정이라도, 회귀자에게 충격을 주기에는 충분했다.

"이 녀석은 건방지더라도 말로는 나를 공경했지. 무례하지만 나에게 필요한 것을 주었다. 요구하면 나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바라면 나에게 지식을 알려주었지. 그런데 너는 나에게 무엇을 하였느냐?"

혈조술을 배웠다. 그뿐이다.

회귀자의 입장에서 흡혈귀는 종말의 전조였다. 세계가 멸망할 때 그 이유로 항상 흡혈귀가 거론되고는 했다.

그러나 이전 회차, 회귀자는 온갖 노력 끝에 흡혈귀를 굴레에서 빼내어 아군으로 삼는 데 성공했다. 둘은 어깨를 맞대고 싸우는 전우였으며 동시에 믿을 수 있는 동료이기도 했다. 둘 모두 흘러가는 시간 속의 조난자였기에, 공감대가 형성되어 금방 친해질 수 있었다.

그래서 회귀자는, 혈조술을 얻고 겸사겸사 티르칸쟈카를 '보호'하기 위해 이곳에 내려왔다. 그녀를 위해.

하지만.

"그, 대가라면…. 뭐, 보물이라도…."

"보물? 내 금이 무용지물이 되었다고, 지금 내가 보물을 요구하는 것처럼 보이더냐?"

지금 이 시점의 흡혈귀는 그녀가 아는 종말의 조각이 아니라, 정녕 시조 티르칸쟈카로서 존재하고 있으니.

"나 역시 한때 세상의 머리였다. 온갖 귀중한 것으로 머리를 꾸몄고, 아름다운 것을 몸에 걸쳤으며, 부드러운 것을 발밑에 깔았다. 나는 어둠의 존재였으나, 모든 반짝이는 것을 손에 넣었다. 태양을 제외하고 말이다. 그러한 내가 권력을 바라겠느냐? 재물을 탐하겠느냐? 그것도 아니라면, 하찮은 명예를 얻으려고 들겠느냐? 단지 조금의 마음이라면 충분했거늘."

사실, 흡혈귀도 회귀자를 그리 싫어하는 건 아니다. 그저 아쉬움이 담긴 투정일 뿐이다.

다만 인간관계를 회귀로만 쌓아온 회귀자는 이런 상황에 닥쳐 본 경험이 얼마 없는지 어쩔 줄 몰라 했다.

"티, 티르…."

"되었다. 어차피 나에게 얻어가려는 건 혈조술밖에 없었지. 원하는 것을 취했으면 그냥 가거라."

흡혈귀의 냉정한 선언에, 회귀자는 부들부들 떨다가 고개를 떨궜다. 흡혈귀는 양산을 어깨에 얹고는 몸을 빙글 돌렸다. 새카만 양산이 흡혈귀와 회귀자를 갈랐다.

쐐기를 박듯, 흡혈귀는 나를 보고는 상냥하게 말을 걸었다.

"가자꾸나."

"잠깐만요. 셰이 교육생에게 한마디만 하고요."

"짧게 하거라."

내 말에 회귀자가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회귀자의 시선에 의구심이 맴돌았다.

'또 무슨 말을 하려고?'

나는 작게 헛기침을 한 뒤, 그녀를 바라보며 비열하게 미소를 지었다. 다리를 벌리고 서서 턱을 치들며 삼류 악역처럼 헤프게 웃었다.

"뭐, 그렇게 되었습니다. 큭큭큭. 걱정하지 마세요, 셰이 교육생. 댁의 스승은 내가 극진히 모시겠습니다."

'…지금 나를 놀리는 거야?'

그걸 지금 알아채다니 눈치가 없어도 너무 없구나. 그러니까 흡혈귀처럼 다루기 쉬운 사람한테도 핀잔을 듣지.

아, 내친김에.

나는 호주머니에서 다이아몬드 1 카드를 꺼냈다. 마름모꼴 새빨간 문양에는, 말로 설명하기 힘든 기이한 빛이 번뜩이고 있었다.

회귀자는 그 색의 정체를 깨닫고 외쳤다.

"너, 그건…! 진혈!"

"캬하하하. 이제 아셨습니까? 한 방울만 달라고 하니까 냉큼 주시더군요. 이미 당신 스승은 나에게 심장이고 피고 다 빼서 준 몸! 당신은 이제 끝…!"

"요 녀석이."

새빨간 주먹이 느닷없이 내 뒤통수를 스치고 지나갔다. 고통에 신음하는 사이, 흡혈귀가 인상을 찡그리며 나를 나무랐다.

"너는 입을 좀 다물 필요성이 있다. 내 분노를 어찌 이리 무색하게 만든다는 말이냐."

"왜요? 저도 평소에 쌓인 게 많아 골려준 건데요."

"어른이 화를 낼 때는 잠자코 있거라. 아랫것이 이것저것을 덧붙여서야 본래 의미가 퇴색되는 법이다."

"어? 뭐야. 진지하게 나이 대우해주기를 바라세요? 해드릴까요?"

'지금까지는… 진지하지 않았다고? 이보다 더할 수 있다는 말이냐?'

내 말에 겁을 집어먹은 흡혈귀가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다. 무얼 하던 네 자유이거늘 어찌 탓할까. 네 멋대로 하거라."

흡혈귀를 단숨에 굴복시킨 나는 한쪽 입가로만 웃으면서 회귀자를 한껏 비웃어주었다. 나는 말 한마디로 흡혈귀를 물러나게 할 수 있다고. 너는 안 되지?

"보셨죠? 저는 이만 갑니다. 그리고 죄송한데, 다음부터는 '상관없는' '타인'의 일로 '번거롭게' 굴지 않았으면 해요. '질척'거리지 말고…. 큭킥칵캬캬캬캬!"

'저 자식…! 두고 보자! 반드시 저 가면을 벗겨서 추악한 낯을 낱낱이 파헤쳐주겠어!'

맹렬하게 불타오르는 회귀자를 뒤로 하고 나는 흡혈귀와 함께 걸어갔다. 조금만 더 자극해볼까 싶어 흡혈귀에게 어깨동무를 하려고 했으나, 손을 가져다 대려고 하자 흡혈귀의 양산이 뭉게뭉게 피어나더니 나를 꼭 붙잡고 밀어냈다. 그 손길은 정중했지만 강력해서 손을 댈 수가 없었다.

뭔데 양산이 나보다 강하지? 거기다 왜 스스로 움직일까? 나는 양산조차 이기지 못하는 몸이야?

그동안 흡혈귀는 깊이 생각에 잠긴 채로 느릿하게 걸었다.

'셰이. 능력이 출중한 아이이나, 무언가 손색이 있다. 힘이나 재능과는 관계없이, 자신을 이루는 무언가가 조금 결여되어 있어…. 헌데, 그것이 무엇인지. 도저히 무어라 짚을 수가 없구나.'

우리는 그것을 사회성이라고 부르기로 했습니다. 수틀리면 세상을 멸망시키고 다음 회차로 도망쳤던 회귀자는 흡혈귀에게 걱정받을 정도로 부족해 보인다.

세상에 지적받을 사람이 없어서…. 쯧쯧쯧. 피 빨아먹는 흡혈귀가 인성을 걱정하는 꼴이라니. 우스운 일이다.

'나는 저 아이를 어쩌다 제자로 받았을까. 누가 보지 않더라도 열심히 수련하는 모습은 기특하기 그지없으나, 그건 내가 스승으로서 지켜본 바에 의한 것. 태생이 그리 살갑지 않은 아이다. 본래 나라면 저런 아이를 쳐다보지도 않았을 터…. 왜였지?'

생각을 따라, 흡혈귀의 시선이 점차 나에게로 향했다. 붉은 눈에 새하얀 의문이 담긴다.

'그때도 이 녀석이렷다. 이 녀석이 나를 건드려, 셰이를 제자로 삼게끔 되었다. 그리고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꼭 물을 흐려놓으며 상황을 만들어가는 쪽은 이 녀석…. 혹시?'

적극적인 생각은 좋지만, 그보다는 정산이 먼저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는 하지만 식대 정산은 미리 해야지. 나는 흡혈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자, 그래서 미술품은요?"

내 물음에 흡혈귀는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그녀는 양산을 살짝 들어올리며 손짓했다.

"…아아. 맞다. 너에게 조각을 주기로 했지."

그러자 흡혈귀의 관이 내 앞에서 멈추더니 뚜껑이 덜컥 열렸다. 여전히 넘실거리는 어둠 속에서 조각상이 하나 둘 튀어나왔다. 새카만 기류가 조각상을 조심스레 붙잡고는 나의 앞에 늘어놓았다.

옥을 깎아 만든 토템, 대리석으로 만들었으나 옷주름까지 섬세하게 조각한 인물상, 앞발을 높이 든 말과 그 위에 타고 있는 전사의 동상.

하나하나 귀중한 가치를 가진 조각이었다.

"내가 가진 조각상이다. 무엇을 좋아할지 몰라 일단 대강 추려서 들고 와봤는데…."

흡혈귀는 조심스럽게 말했으나, 나름 아끼는 콜렉션인 듯 으스대는 마음도 한 톨 지니고 있었다. 추렸다는 게 허언은 아닌지, 재료부터가 귀중해 보이는 것들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조각 하나하나가 섬세하고 세밀하게 표현되어 있었다.

대박이다. 진실로 흡혈귀의 관짝 안은 보물상자, 아니, 보물창고 그 자체였다!

내로라하는 황제의 무덤도 트레져 헌터들에게 탈탈 털리는 시대다. 그러는 와중 흡혈귀와 함께 천 년이라는 세월을 건너뛴 이 조각에는 천문학적인 가치가 남아있었다.

고전적이나 낡지 않은 기법. 그러면서도 티끌만 한 흠집 하나 없었다. 아무래도 흡혈귀의 기운에 영향을 받은 듯 만들어졌을 때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역사적인 가치를 인정받기만 한다면, 그야말로 떼돈을 벌 수 있는 황금향.

"와…!"

다만.

여기서 고민이 필요하다.

호구를 상대할 때, 가져온 판돈을 냉큼 털어먹어서는 안 된다. 그랬다간 호구는 돈과 함께 불쾌한 기억만 남기고는 손을 털고 판에서 떠난다.

낚시의 기본은 시침질. 떡밥을 뿌리고, 살살 달랜 뒤, 슬쩍슬쩍 놓아주다가 미끼를 문 순간 한 번에 잡아채야 한다.

비록 한 방울이라지만, 진혈도 선물한 흡혈귀가 아끼는 예술품을 내게 준 건 나에게 부채의식이 있기 때문. 나는 흡혈귀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도 들려주었고 심장 마사지도 해주고 있다. 그에 반해, 저번에 줬던 왕관은 가짜 금이었으며, 가진 지식이나 물건도 시대에 한참 뒤쳐졌다는 열등감에 빠져있다.

이거, 사실대로 말하고 냉큼 받는 것도 방법이지만.

더 커다란 이득을 위해 여기서 살짝 놓아주는 게 진정한 도박사.

나는 안색을 흐리며 조각을 손에서 놓았다.

"이거 이단의 우상이잖아요…."

"무어라? 이단?"

"지역 신앙 같은 거…. 드루이즘이나 토테미즘, 짐승의 왕 숭배 등등. 그 시절의 잔재요. 이 모든 것들은 이단의 우상 취급을 받아서 보이는 즉시 파괴되기 일쑤인데."

아쉬운 듯이 말하자, 흡혈귀의 심기가 불편해졌다.

"뭣? 누가, 도대체 누가 멋대로 과거의 유물을 이단으로 취급하느냐?"

"이단 정하는 곳이 어디겠어요. 성황청이지."

"천신의 사자들…. 그 놈들인가! 도움이 되는 게 없구나!"

틀린 말은 아니다. 다만, 약간의 과장을 섞었을 뿐.

세상 모두가 천신의 사도는 아니니 팔려면 못 팔 것도 없다. 특히 군국은 신전에 세금을 매기는 유일한 나라. 내 독심술과 함께라면, 제 가격 받아내는 건 일도 아니다.

하지만.

어려운 척, 이 보물을 마다한다면?

"혹시나 해서 여쭙는데, 성경 삽화와 비슷한 느낌의 그림이나 신상(神像)은 없죠?"

흡혈귀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대답했다.

"…내 피로 물들인 거라면, 아직 남아있다만."

"아이고. 그건 세상에 드러난 순간 척살령이 떨어지겠네요."

나는 난감한 기색을 보였다. 가져온 대가가 나에게는 마땅치 않다는 기색. 그러면 지불능력을 상실한, 최소한 그렇게 믿는 흡혈귀는 나에게 미안한 감정을 느꼈다.

"또 별로 도움이 되지 못했구나."

"뭘요. 마음만이라도 고마운걸요."

아쉬움을 숨기고 사양하는 척, 받고는 싶지만, 상대가 지불한 대가가 마땅치 않은 척. 말을 조금씩 끌며 흡혈귀의 마음에 부담을 더해간다.

'결국, 내가 가진 것 중 무엇도 도움이 되지 못했구나.'

흡혈귀의 마음속에서 나지막이 전해지는 짧은 죄책감을 들으며, 나는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괜찮다니까요. 낙담하지 마시고. 애초에 보상을 바라고 한 일도 아니니까요. 뭐, 전기 마사지는 계속해드릴게요!"

내 위로에도 흡혈귀의 마음에 드리운 그늘은 가시지 않았다.

"내가 미안하여 그렇다. 재물에 뜻을 두었다 생각한 적은 없으나, 지나고 보니 세월이 무상하기만 하구나. 내가 여전하다고 한들, 내 가진 모든 것이 시간에 스러지니."

"이미 진혈도 받았잖아요. 충분히 받았으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허나."

"에이. 괜찮다니깐."

좋아. 충분히 부담을 주었으니 이제는 살짝 풀어줄 차례다.

나는 시원하게 웃으며 검지손가락을 들었다.

"자. 이제 우울한 이야기는 그만하고. 마사지나 해드릴게요. 가슴을 풀어 헤쳐주세요. 양손으로 붙잡고 벌려주시면 그러면 제 손가락을 안에 깊숙이 넣은 뒤, 제 마력을 가득 뿌려드릴게요."

바보도 알아들을 만큼 노골적인 농담. 나에 대한 미안함으로 한껏 우울해졌던 흡혈귀는, 언제 그랬냐는 듯 확 인상을 썼다.

"말 좀 가려서 하지 않겠느냐? 꼭 음행을 저지르는 것 같아 불편하구나."

"그러면 진지하게 묘사할까요? 자아, 어디 보자. 갈비뼈랑 근막이 심장부를 튼튼하게 감싸고 있네요…, 허파 뒤집어야 하는데 각도가 안 나오니 살짝만 치워주시, 우욱. 잠깐. 비위가. 우웩."

"…하, 말로는 도저히 이기지 못하겠구나. 되었다. 네 알아서 하거라."

분위기는 충분히 풀었다. 헛웃음을 지은 흡혈귀는 냉큼 가슴을 열어젖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얼굴이 붉어진 흡혈귀는 가슴께를 여미며 나에게서 멀어졌다. 다음에도 부탁한다는 말과 함께.

흡혈귀가 돌아가고,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전격을 쏘아낸 손가락이 가늘게 경련하고 있었다.

…손쉽게 흡혈귀의 호감도를 사는 심장 마사지…. 다 좋은데. 내 정신건강에 해롭다. 손가락에 아직 몰캉거리는 촉감이 남아있는 것 같아.

내가 아무리 사람 속을 들여다본다지만, 자연과학 내부를 들여다보고 싶지는 않았다고.

오늘은 고기요리를 했는데, 붉은 살점을 볼 때마다 속이 올라와 차마 먹지 못하고 아지에게 주었다. 아지는 영문도 모른 채 행복한 울음소리를 냈다.

EP.50 긴급상황

『긴급상황입니다. 속히 기상하십시오.』

그것은 기습처럼 찾아왔다.

야음을 틈타 다가온 그것은 어찌나 은밀했는지 발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호흡도, 체온도, 심지어 생명마저도 없는 그것은 눈치채고 보니 벌써 나의 곁에 도달해 있었다.

『긴급상황입니다. 속히 기상…. 3회 시도, 실패. 귀납적인 논리에 따라 이 이상 반복하는 것이 의미가 없을 거라고 판단합니다.』

잠든 나의 곁으로 무언가가 다가와 재잘거렸다. 작은 크기만큼 희미한 목소리. 잠들었을 때 몰래 왔다 간다는 요정일까.

하지만 이 요정은 하늘을 날지 못하는 모양이다. 고작 무릎 높이밖에 안 되는 침대에 올라오지 못하고, 아래쪽에서 깡충깡충 이쪽을 넘보는 것을 보면.

나는 희미하게 느껴지는 기척을 무시하며 다시 잠을 청했다. 이빨 요정이 아니라 산타 할아버지가 와도 나의 잠을 방해하지 못한다. 볼 일이 있다면 내가 자는 사이에 빨리 해결하고 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긴급 시 대처 매뉴얼에 의거, 강제 기상 프로토콜을 발동하겠습니다.』

흡, 하고 바람 빨아들이는 소리가 들리고.

『왜애애애애애애애앵!』

"끼이아아아아아아아악!"

귓가를 뒤흔드는 굉음에 나는 이불을 박차고 벌떡 일어났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시선을 아래로 내리자, 어슴푸레 반짝이는 수정구가 나를 올려다보는 모습이 보였다.

"골렘?"

『군국 통신병 에이비 대위입니다. 긴급한 상황이 있어 부득이….』

"감히 나의 잠을 깨우다니. 오늘 그 오래된 연식에 종지부를 지어주지. 폐기처리장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셰이 교육생! 여기 골렘이 탈출…!"

그러자 골렘이 온 힘을 다해 내 정강이를 깠다. 눈높이 한참 아래쪽에서 벌어진 공격. 골렘의 생각을 읽지 못했던 나는 피하지도, 저항하지도 못했다.

심지어 골렘의 재질은 강철. 강도는 내 몸뚱아리의 몇 배. 거기다 정강이와 다른 물체의 충돌 승부는 오직 강도와 경도로만 승패가 나뉘는 정직한 전투.

나는 격심한 고통에 눈을 부릅떴다.

"끄, 끄극."

입을 크게 벌리고는 정강이를 부여잡으며 침대 위에 주저앉았다. 눈물이 찔끔 흐른다. 분노와 원망, 그리고 고통으로 범벅된 눈으로 골렘을 노려보았다. 골렘도 삐걱이는 팔로 비틀린 다리 프레임을 끼워 맞추며 나를 보았다.

『시간이 없습니다. 경고합니다. 즉각 대응하십시오.』

"끄윽, 뭘요. 도대체 뭔데 이 밤중에 사람을 깨우고 난리입니까?"

『침입자입니다. 누군가 침입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뭐? 침입자?"

골렘의 말을 잠시 곱씹었다.

그러니까, 누군가가 지금 이 탄탈로스에 침입을 하고 있다 이거지? 그리고 골렘은 이걸 감지하고는 나보고 막으라는 거고.

거처에 쳐들어온 침입자. 평범한 상황이라면 긴장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나는 응당 찾아와야 할 긴장감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아픈 다리를 부여잡으며 나는 다시 침대 위에 누웠다.

"혹시 조난자랑 착각한 거 아니에요? 누가 발을 헛디뎌 떨어진 모양인데?"

탄탈로스에 침입? 그건 하늘에서 헤엄치거나 물속에서 고기를 구워 먹는 거랑 다를 바가 없다. 주어랑 서술어가 매칭되지 않는 조합인 것이다. 한 번 들어오면 빠져나갈 수 없는 이곳에, 뭐 훔쳐 갈 것도 없는 장소에 왜 침입한다는 말인가.

"뭐, 또 레지스탕스라거나 그런 건 아니죠? 또 레지스탕스가 쳐들어온 거면 군국이 무능한 거야. 진짜로."

물론 폭탄을 들고 있다면 예외다. 폭탄과 함께라면 인간이 하늘을 유영할 수도, 물속에서 고기가 익을 수도 있으니.

폭탄은 불가능하다 생각했던 것 대부분을 해결해준다. 그러니 무언가 막히는 일이 있을 때, 곁에 폭탄이 있으면 사용해보도록 하자.

『상대의 의도를 알 수는 없습니다. 그는 맨몸이니까요. 다만, 의도를 알 수 없는 만큼 더욱 한시가 시급합니다.』

"맨몸? 흠. 지금 야간등 켜진 걸 보면 바깥도 밤이겠고. 에이, 뭐야. 어떤 유명한 철학자의 고사처럼, 하늘의 별을 올려보다가 발밑을 살피지 못하고 빠진 모양이네요. 같이 명복이나 빌어주죠."

『…고작 떨어지는 것 가지고는 이곳에 침입할 수 없습니다. 그는 분명, 이곳에 들어올 의지를 가지고 무저갱 안으로 몸을 던진 겁니다.』

"아니, 글쎄. 그게 말이 안 된다니까. 도대체 누가 볼일이 있어서 여기 들어와? 거, 들어오면 밥이나 먹이고 있을 테니까 데리러 오던가요."

대수롭지 않다는 나의 태도에 골렘은 말을 멈추고는 찬찬히 나를 보기 시작했다. 나 역시 눈을 가늘게 뜨며 골렘을 캐물었다.

잠시간 이루어진 눈싸움. 승자는 나였다.

『…이러한 협상에 능하시군요. 해당하는 정보를 주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겠다는 뜻입니까.』

"응? 뭘요?"

『허가합니다. 귀하의 경계 레벨을 한 단계 올리는 것으로, 귀하의 정보 열람 권한을 일시 상승시키겠습니다.』

"아니, 그러니까 뭘."

뭘 멋대로 경계 레벨까지 상승시키고 있어? 도대체 무슨 말이야? 나는 그냥 일어나기 귀찮았을 뿐이라고.

『탄탈로스는 무저갱입니다. 지상과는 완전히 분리된 땅. 이곳은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절대 도달할 수 없습니다.』

"일반적인 방법?"

『낙하입니다. 평범한 낙하로는 무저갱의 미아가 될 뿐, 이 탄탈로스의 좌표를 특정할 수 없습니다.』

"낙하가 언제부터 일반적이고 평범한 이동수단이 된 겁니까? 역사적으로 추락은 쉽고 빠른 천국행 편도티켓이었는데요?"

내가 아는 상식과는 좀 다르구나. 역시 군국. 상식조차 악용하는 미친 나라.

어, 잠깐.

"하지만 나는 평범하게 구속된 채로 무저갱에 내던져졌는데…? 아아, 알겠다. '그게' 평범하지 않았던 거구나?"

『…이해하셨으면, 다음으로 넘어가겠습니다.』

다급하게 내 말을 끊은 골렘은 이어 보고했다.

『본디 탄탈로스는 군국의 허가를 받지 않은 사람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장소입니다. 그렇기에 레벨 5의 시설임에도 감옥 입구에도 별다른 보안장치를 해두지 않았습니다.』

"거, 군국이 잘못했구만. 주요 시설이라면서 그리 안일해서야. 쯧쯧."

『…어쨌건.』

방금 빠직거리는 소리가 들렸는데, 골렘 회로가 끊어진 게 아니면 좋겠다.

『본관은 탄탈로스 내외부를 감시하는 도중, 무저갱을 망라하는 환술이 깨졌다는 사실을 약 7분 전에 포착했습니다. 그 즉시 현 가용할 수 있는 유일한 인원인 귀하를 찾아온 겁니다. 침입자는 곧장 이곳으로 향하고 있으며, 약 3분 뒤에 도착할 거라 예상됩니다.』

"그래서. 내가 뭘 하면 되죠?"

『가능하다면, 배제를.』

"아니, 이 사람들 자꾸 막 왜 죽이려고 그래. 하루라도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좀이 쑤셔요?"

불사자도 그렇고 이번에 떨어지는 사람도 그렇고 뭐 일만 있으면 죽이라고 하네. 적극적인 부정의 뜻을 담아 손을 내저었다.

"저처럼 개 한 마리 못 잡는 선량한 시민이 누구를 죽여요. 말도 안 되는 소리 좀 하지 마세요."

『의문. 그렇다면, 레지스탕스는 어떻게 처리하신 겁니까?』

"칼날은 가만히 있었는데 자기들이 목을 들이밀더라고요. 셰이 교육생이랑 싸우려고 들고, 티르칸쟈카 교육생 앞에서 로자리오를 자랑하고. 한번 꼰 고품격 자살이죠? 뭐, 애초에 살아갈 생각이 있었다면 폭탄 들고 여기 떨어지지는 않았겠지만."

어쨌건, 누가 찾아왔다면 마중을 나가야 한다. 상대가 어떤 의도로 이곳을 찾아왔는지 미리 읽어놓고, 이용할 수 있을지 없을지 가늠해놔야 편하기 때문이다. 정 못 쓸 거 같으면 회귀자랑 흡혈귀 이용해서 죽여버려야 하고.

어차피 나갈 거, 그 와중에 골렘에게 한 줄 이야기 듣는 것도 소소한 이득. 나는 의복패킷을 착용하고는 나갈 채비를 했다.

"자자. 일단 가볼게요. 기다리고 있어봐요."

그러자 골렘이 다급히 내 바짓자락을 붙들었다.

『본 기체를 대동하여 주십시오. 본관은 탄탈로스의 이상사태를 관찰할 의무가 있습니다.』

"무거워서 싫은데."

『귀하는 탄탈로스에 배속된 노역자이며, 해당 소재지의 주무관인 본관의 지시에 따를 의무가 있습니다. 명령불이행으로 불이익을 받고 싶지 않다면 본관의 지시를 이행하여 주십시오.』

"그렇게 딱딱하게 말하면 제가 들어줄 거라고 생각했어요? 아아, 마음 아파서 골렘 들어 올릴 힘도 없다."

내가 연극 투로 엄살을 부리자, 골렘은 더 이상 협박이 듣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말했다.

『…무엇을 원하십니까? 미리 경고합니다만, 공무중인 군인에게 무언가 물질적인 대가를 요구하는 것은 중범죄입니다.』

"골렘에게 뭐 받아낼 생각은 없고. 거, 애교 좀 부려보세요. 귀엽게. 가능하면 아이처럼 유치하고 혀짧은 소리를 내줬으면 하는데."

『...시간이....』

"시간 없으니까 서둘러야 안 늦겠네. 자아, 어떻게 데려다 달라고요? 목말? 어부바?"

『….』

골렘에게서 으드득거리는 소리가 들리는데, 프레임 어디가 부서진 게 아닐까 걱정된다. 나는 여유롭게 휘파람을 불었다.

휘휘휘, 세 번 정도 불었을까. 골렘에게서 이를 악문 소리가 들려왔다.

『어, 어부바…를…. 부탁드립니다.』

"에이. 끝말도 조금 딱딱하다. 골렘 몸은 딱딱해도 마음은 부드러워야죠."

딱, 하고 마이크 너머에서 수수깡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무어라 형용하지 못할 잡음이 들린 뒤, 마이크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어부, 바… 해줘요…. 오빠….』

"오빠라고 부르는 건 시킨 적 없는데. 그래도 말을 부드럽게 하니까 한결 편하네요. 서로 화목하니 얼마나 좋아."

어쨌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여동생의 부탁이니 들어줘야지.

나는 골렘을 들어 목말을 태웠다. 어부바를 해달라고는 했지만, 그랬다간 시야가 가려질까 봐 걱정한 내 나름의 소소한 배려였다.

골렘의 양다리를 내 어깨에 늘인 채 복도를 내디뎠다.

"아, 참고로 군국의 지시는 이행한 겁니다? 내가 뇌물을 건넨 것도 아니고, 이거 가지고 불이익주면 당신이야말로 개인적인 감정을 평가에 반영한 거야. 설마 군국 통신병이 사적감정으로 위증하지는 않겠지?"

『---!!!』

"고장 났나? 뭔가 통신에 문제가 생긴 것 같은데요. 왜 사람 소리가 안 들리지."

휘적휘적. 나는 골렘에게 스릴을 알려주려고 일부러 상체를 크게 흔들며 걸었다. 그러자 골렘이 딱딱한 주먹으로 내 머리를 쥐어뜯었다. 모근에서 투둑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오케이. 약점을 잡혔구만. 이건 하지 말자.

EP.51 불청객

밤이 찾아온 무저갱은 한 치 앞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웠다.

아니, 이것이 본래 무저갱의 모습이리라. 한 톨의 빛도, 한 줌의 온기도, 한 발을 디딜 공간도 없는 버림받은 땅.

그곳에 자청하여 들어온 멍청이를 살피기 위해 램프를 들고 마당으로 내려왔다. 그러자 놀랍게도 나보다 먼저 나와 있는 시체가 있었다.

"티르칸쟈카 교육생? 여기는 웬일이에요?"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이 어두움에도 흡혈귀가 든 양산은 여전히 독보적으로 어둡다. 빛의 부재보다, 어둠이라는 개념이 뭉친 듯한 칠흑이 그녀를 가린다.

그 속에서 흡혈귀가 붉은 눈을 빛내며 나를 보았다.

"용케도 일어났구나. 밤잠이 많아 보이던 것을."

"에이. 영면에 드는 티르칸쟈카 교육생만 할까요. 300년 연속 수면에 비하면야 제 밤잠은 하룻밤 반짝이는 반딧불이죠."

"말은…."

흡혈귀는 부드럽게 웃으면서 나를, 정확히는 내 머리 위에 있는 골렘에게 시선을 주었다.

"귀여운 장난감이로구나. 골렘이냐?"

"군국 통신병 에이비 대위입니다. 낯을 많이 가리는 골렘이라 아는 체를 잘 안 할 거니까 미리 양해를 구할게요."

골렘이 대꾸했다.

『부정. 낯을 가리는 게 아니라, 감시자의 입장에서 교육생과의 직접적인 접촉은 권장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그러하니 말이 없더라도 양해를 바랍니다.』

"뭣? 골렘이, 조종자 없이 스스로 말을 해…?"

흡혈귀의 붉은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가, 손을 입가로 대고 말아쥐고는 중얼거렸다.

"흠흠. 분명 새로운 기술이겠지. 이제는 별로 놀랍지도 않구나."

거짓말이다. 흡혈귀는 실로 조종하는 골렘밖에 알지 못하니까. 마력통신이란 그녀에게 최신문물인 것이다.

"아. 네. 일단 그런 거로 해드릴게요. 그보다 정말 왜 나오셨어요?"

흡혈귀는 내 물음을 회피했다.

"내 너에게 이래저래 설명할 이유 없다."

"곧 내려올 사람 때문이에요?"

"…그러하다."

살포시 인상을 찡그린 흡혈귀가 투덜거렸다.

"이미 알고 있었구나. 하긴, 이곳은 군국의 땅이며 네가 관리한다고 했지? 영주나 다름없는 네가 모를 리 없겠구나."

"딱히 영주 같은 건 아니지만요. 그나저나 정말 곧 내려올 사람 맞이하러 나온 거예요?"

"그래. 네가 저번에 말하지 않았느냐. 다른 누군가가 온다면 이제부터는 나나 셰이가 처리하라고."

"어, 기대도 안하고 그냥 던진 말이었는데 진짜 해주시려고요?"

"그러하다. 비록 내 시간에 박리된 존재이나 이곳에 몸을 의탁하고 있으니, 네 정당한 요청을 들어주는 것이 마땅한 예의겠지."

흡혈귀는 그리 말하고는 양산을 어깨에 얹고 시선을 위로 향했다.

흐음. 물론 흡혈귀가 옛날 사람이다 보니 이런 예의에 민감하기는 하지. 손님이라면 마땅한 의무를 다하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그게 다일까?

나는 흡혈귀의 생각을 찬찬히 읽었고, 씨익 미소를 지었다.

"꼭 그런 이유만 있는 건 아니죠?"

"…내 말을 의심하는 것이냐?"

"의심이라니요? 분명, 그런 마음도 한구석 있겠죠. 그래서 기척을 느끼고 마중을 나온 거고. 다만."

나에게는 재능이 있다.

마음을 읽어서 알아낸 비밀스러운 이야기. 하지만 만일 내가 독심술을 할 줄 안다는 게 알려지면, 나는 만인으로부터 경계받기 마련이다. 자신의 치부를 커튼 거둬내듯 들추고 빤히 들여다보는 나를 반길 사람이 어디에도 없으니. 오히려 앞장서서 나를 죽이려 들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좀 다른 종류의 능력을 개화시켰다.

"아시다시피, 티르칸쟈카 교육생께서는 흡혈귀시죠? 피에 대한 감지 능력은 이 탄탈로스 전체를 망라하는 수준. 아니, 누구 몸속에 있지만 않으면 아예 지배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힘이죠. 하지만 달리 말하면, 피가 밖으로 흐르고 있지 않다면 그리 완벽하게 포착해낼 수 없어요. 예를 들어 저나 불사자 라쉬 교육생 같은."

바로, 독심술로 알아낸 것을 내가 추리해낸 것처럼 들려주는 내용.

그래서 한때는 탐정 노릇도 좀 하고 다녔지. 온갖 손님들이 나를 찾아왔다. 누군가의 치부를 드러내고 싶어 나를 고용했지.

가장 많이 받은 의뢰가 불륜 상대 처리였지만. 흠흠.

"그런 티르칸쟈카 교육생이 벌써 침입자의 존재를 알았다는 건, 아마 두 가지 경우. 떨어지는 침입자가 피를 흘리고 있거나, 아니면."

흡혈귀의 표정은 담담했다. 그러나 그건 곧 다가올 진실을 외면하는 것에 불과했다.

나는 여유롭게 어깨를 으쓱이며 그녀의 생각에서 읽어낸 사실을 그대로 들려주었다.

"-시조의 권능을 받아 몸을 움직이고 있는 흡혈귀던가."

지금 떨어지는 존재는, 다른 누구도 아닌 흡혈귀.

그런 흡혈귀가 이곳에 들어왔다? 햇빛을 피하기 위함은 아닐 것이다. 요즘 세상에는 햇빛을 피할 그늘이 많으니까.

이곳에 흡혈귀의 피가 이끌릴 일은 하나밖에 없다.

시조 티르칸쟈카. 그 강대한 피를 찾아 온 게 분명하다.

'어차피 들킬 일, 조금이나마 늦추어보려고 했건만.'

흡혈귀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부탁이 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도 흡혈귀에 대한 편견은 없거든요. 애초에 편견이 있었다면 티르칸쟈카 교육생한테 이리 스스럼없이 대했겠어요? 지금 내려오는 상대가 저를 죽이려 들지 않는 한 죽이지 않을게요."

"…내 마음에 들어갔다 나온 것 같구나."

청산유수 같은 나의 대답에 흡혈귀는 푸근하게 미소를 지었다.

"고맙다. 이해해주어서."

"무얼요. 알고 지내는 흡혈귀가 있는데, 의외로 같이 지낼 만하더라고요."

"녀석. 넉살은."

짧고 맑게 웃은 흡혈귀는 다시 고개를 위로 들어, 지금도 떨어지고 있을 흡혈귀를 기다렸다. 흡혈귀의 마음마저 만족시킨 훈훈한 엔딩.

다만 모든 아름다운 이야기가 그렇듯, 그 뒤에는 머리가 깨질 것 같은 고난과 고통이 자리하고 있었다.

『귀하는 무엇을 멋대로 정하는 겁니까!』

흡혈귀의 시야가 닿지 않는 곳에서 골렘이 내 귀밑머리를 쭉쭉 잡아당기고 있었다. 터져나오는 비명을 삼키며, 나는 팔을 뒤로 뻗어서 골렘의 팔을 잡아 뜯었다.

"그럼 내가 정합니까? 시조께서 정하는 거지."

『상대는 시조입니다. 모든 흡혈귀의 시작이자, 그들의 지배자이자, 적혈공의 공국(公國)을 비롯한 다섯 세력의 실질적인 주인입니다! 귀하는 저 만남을 성사하게 둘 겁니까?』

"아니. 어쩌라고요. 그러면 내가 막으라고요? 무슨 힘으로?"

『저 사이에 끼어들어 시조를 설득하십시오!』

"뭐라고?"

『할 수 없다면, 본관이 하는 말을 그대로 전달하십시오. 그것만으로도 시조는 침묵할 겁니다!』

나 참. 그토록 중요한 내용이었다면 지들이 할 것이지. 일개 노역자에게 무엇을 바라는 거야?

나는 투덜거리면서도 발걸음을 옮겼다.

"알았어요. 일단 옆에서 거들기는 해볼게요. 하지만 나에게 흡혈귀를 무찔러 달라 이런 말을 하기만 해 봐. 군국이고 뭐고 그냥 당신을 물속에 처박아버릴 거야."

『이 일을 잘 끝내는 게 우선일 겁니다. 당신과는 달리, 저는 실질적인 이곳의 책임자이니까요.』

골렘을 머리에 매달고 슬금슬금 걸어가서 흡혈귀 근처에 섰다. 그리고 흡혈귀와 똑같이 하늘을 보며 곧 떨어질 침입자를 기다렸다.

하염없이 시간이 흘렀다. 떨어지는 데 시간이 걸리는지, 아니면 어떤 절차가 필요한지, 곧 내려온다는 침입자는 한참이 지나도 소식이 없었다. 나와 흡혈귀는 별똥별을 기다리는 아이처럼 목만 빼고 가만히 하늘만 바라볼 뿐이었다.

침묵이 길어질 무렵, 양산 아래쪽에서 감상에 젖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까마득한 과거에는, 밤 중에 이리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는 게 낙이었다."

나도 적당히 대꾸했다.

"똑같네요. 요즘도 그걸 낙으로 삼는 사람들 많아요."

"그래. 과거든 지금이든, 하늘은 여전히 아름답겠지. 별빛이 반짝이는 밤하늘은 꼭 은하수가 흘러가는 것 같아, 나는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밤하늘만 하염없이 바라보곤 했단다. 오직 밤만이, 아무런 제약 없이 하늘을 볼 수 있는 시간이었기에. 그러다 영원할 것 같은 밤이 끝나고 저 멀리서 태양신이 대지모의 팔베개 너머로 고개를 내밀면, 푸르게 번져오는 햇빛을 피해 땅 아래로 몸을 숨겼지."

뭐야, 갑자기.

12세 소녀도 저리 가라 할 12세기 소녀의 감수성에 나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가만히 듣기만 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흡혈귀도 딱히 나의 대답을 바란 건 아니었다는 점이다.

감상에 젖어 내뱉는 말은 바람에 머물다 사라지길 바라고 하는 것이니.

"그저 살고자 하였을 뿐인데, 우리에겐 떳떳함이 없었다. 고개를 들고 당당히 빛을 맞이할 수가 없었다. 나와서 정당한 심판을 받으라고 요구하여도, 그것이 정오의 광장에서 행해지는 것이면 도망쳐야 했다. 결국 우리는 살아남았으나 당당해지지 못했다."

흡혈귀의 시작이자, 그림자의 여왕.

한때 죽어가는 이들이 안쓰러워 그들을 흡혈귀로 만들어 일으켜 세웠으나, 이제는 그리 태어난 흡혈귀를 동정해버린.

그리고 그런 감정은.

못난 부모가 자식에게 품곤 하는 죄책감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

왜 태어나게 했을까.

이 고통뿐인 세상에 너를 낳은 것이 잘한 일일까.

도망치고, 쫓기고, 숨어야 하는 생명을 선물한 건 축복일까, 저주일까.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다면 서로에게 더 낫지 않았을까.

선한 부모는 그러한 괴로움을 느꼈다는 사실 자체에 죄책감을 느끼고, 그 죄책감에 또다시 괴로워한다. 괴로울수록 죄책감은 더욱 부풀어오른다. 자기 자신을 집어삼키는 불처럼, 감정은 어둡고 탁하게 몸을 불려나간다. 그들은 끝없는 고통 속에서 정론과 현실 사이의 간극에 떨어지지 않기 위해 아우성친다.

시조 티르칸쟈카의 감정이 지금 그러했다.

흡혈귀라는 존재를 탄생시켰으나, 창조의 죄악에 젖어버린 작은 신은 새카만 양산을 손에 쥐고 괴로워했다.

"…하늘이 보이지 않으면 기분이 조금 나아질 것 같았건만. 그리하여 자청해서 이곳에 들어왔건만. 이곳에서 그리워하는 게 정작 하늘이라니."

그때, 별빛 하나 없는 무저갱에서 무언가 반짝인다. 주기적으로 반짝이는 지시등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별똥별, 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인공적이라 별로 와닿지 않는 그러한 빛이 이곳으로 다가왔다.

그건 꼭 무언가가 전락하는 모습처럼 보였다.

"처량하구나."

그리고 침입자가 땅으로 떨어졌다.

EP.52 혈주와 권속

아무래도 침입자는 낙하산을 제대로 착용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반짝이는 빛은 여전히 다가오고 있는데 그보다 먼저 쿵, 하고 묵직한 충돌음이 들렸다.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피 같은 게 튀어 내 발에 닿았다.

그러나 나도, 흡혈귀도 걱정하지 않았다. 상대가 만일 내가 생각하는 그것이라면, 이 정도 상처는 상처 축에도 들지 않았음으로.

상대는 흡혈귀. 쏟은 물은 주워담지 못해도 흘린 피는 그대로 되돌릴 수 있는 불사의 존재.

머리가 깨져 피가 흘러나온 것 정도야 금방 되돌리고는 일어날 것이다…. 나는 그가 일어나기를 기다렸으나.

"어? 왜 안 일어나지? 정신을 못차리는데요?"

"아아. 내 잠시 깜빡했구나."

흡혈귀가 손을 내저었다. 그러자 슬금슬금 흡혈귀로 다가오던 피가 다시 침입자를 향해 밀려 들어갔다.

피에 대한 지배력의 차이가 월등해서, 침입자의 생존본능보다도 흡혈귀가 피를 잡아당기는 인력이 강했던 것이다. 흡혈귀는 내친 김에 피를 안에 다 집어넣은 뒤 상처까지 막아주었다.

피를 되찾은 덕분에 침입자가 정신을 차렸고, 곧이어.

"이 피의 이끌림, 이건 분명!"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침입자가 고개를 든다. 어둠 너머에서 붉은, 하지만 흡혈귀의 것보다는 살짝 탁한 빛이 번뜩였다.

환희, 경애, 숭배, 희열.

격랄한 감정이 파도처럼 넘실거렸다. 침입자는 눈을 부릅뜨고는, 땅을 기듯 달려와 흡혈귀 앞에 부복했다.

"시조시여!"

낯선 이가 다가와 느닷없이 무릎을 꿇는 게 꽤 익숙한 일인지, 흡혈귀는 일말의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지그시 쳐다보는 동안 침입자가 읍소했다.

"시조시여! 당신을 뵙기 위해 불초 핀레이가 찾아뵈었나이다. 부디, 칩거 중인 당신을 방해한 저를 용서해주십시오!"

쿵, 하고 머리를 찧는 침입자. 찢긴 피부에서 흘러나온 피가 흡혈귀를 향하다, 흡혈귀가 살짝 시선을 던지자 화들짝 놀란 것처럼 제 주인을 찾아갔다.

흡혈귀는 차가운 눈으로 부복한 침입자를 향해 명령했다.

"핀레이. 너를 설명하거라."

더 높은 피.

더 강한 권능.

시조의 앞에서, 시조가 아닌 흡혈귀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니다. 그들이 사용하는 피에 대한 지배력은 전부 시조에게서 비롯된 것이니.

피를 움직이는 것, 목소리를 내는 것, 생을 구가하는 것, 그 모든 게 시조의 암묵적인 허락 아래 이뤄지는 일. 시조가 손짓 한 번만 하면 그 순간, 자기 피에 대한 지배력을 모두 상실하고 한 끼 간식거리가 될 것이다.

그렇기에, 시조는 흡혈귀에게 있어서 신을 초월한 무언가였다.

시조에게 있어서는 가볍게 내던지는 말이었으나, 받아들이는 침입자에게는 어명, 아니, 계시와도 같았다. 침입자는 곧바로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예. 저를 권속 삼으신 분은 에르테 백작이시며, 그분께선 적혈공 발다미르 전하의 직계이십니다. 공국의 명을 따라 정보를 수집하다, 누군가에게 소식을 듣고는 시조께 드릴 청이 있어 찾아왔나이다."

적혈공 발다미르.

안개 공국의 공왕이자, 정체와 소재가 동시에 밝혀진 유일한 흡혈귀. 성황청의 주적. 그리고 가장 고귀한 엘더.

그의 이름이 흡혈귀의 대명사로 쓰일 정도로 어마어마한 거물이었지만.

"발다미르. 그 아이. 오랜만에 듣는 울림이구나."

그런 존재를 어린아이 부르듯 되뇐 시조는 먼 곳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 그 아이는 잘 지내느냐? 여전히 왕 노릇에 심취해있느냐?"

누군가에게는 왕이며, 절대군주이며, 지배자.

하지만 한때 꿈 많은 청년이던 그를 지켜본 시조에겐, 여전히 그 순간 그대로 남아있었다.

침입자는 순간적으로 그 간극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버벅거렸다.

"저, 적혈공 전하를, 그 아이라고…."

'아니, 시조께서는 적혈공 전하를 친히 권속으로 삼으신 분. 나는 지금 전설과, 신화와 마주하고 있는 거야. 정신 차려, 핀레이! 이 영광스러운 자리에서 어리바리한 모습을 보여드릴 수 없어!'

자기를 채찍질한 침입자는 정신을 다잡고는 다시 머리를 숙였다.

"네! 그분은 평안하십니다. 공국의 명실상부한 왕인 적혈공께서는 그 어느 때와 비교해서 입지전적인 위치에 올라와 계십니다!"

"열심히 노력하였나 보구나. 성황청이 가만 보지 않았을 터인데."

이 세상에 오롯한 자신의 나라를 세우겠다 천명하고, 영웅적인 행보를 보인 끝에 그것을 이룩해낸 적혈공의 업적을 누가 단순히 '노력'이라 치부할 수 있을까. 평범한 사람이 그리 말했다면 불경하다고 핀잔을 들을 것이다.

그러나 오직 같은 전쟁을 겪고, 같은 세월을 지내며, 한때 같은 꿈을 꾸었던 시조는 그를 평가할 수 있으리라.

새삼스레 그것을 자각한 침입자가 마른 입술을 적셨다.

'그래. 이분은 절대자. 우리를 창조하였고, 우리의 비원을 이루었으며, 우리를 하나로 모아 영광으로 이끌어주실 분! 나는 지금 그런 분 앞에 선 거야! 그러니,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어!'

침을 삼키려는 듯, 침입자의 목울대가 꿀렁였다. 침이 나지 않음에도 인간일 적 습관이 남아있는 탓이다.

그만큼 침입자는 잔뜩 긴장하고, 또 기대한 채로 입을 열었다.

"시조시여! 요즈음 성황청의 기세가 예전만 못합니다."

드디어 본론이었다. 이 침입자가 온갖 고난을 감수하며 이곳에 떨어진 이유.

침입자가 땅을 바라보며 큰 소리로 외쳤다.

"신비는 그 베일을 벗고, 신성은 빛이 바랬습니다. 성황청은 독선에 휩싸여 사방에 적을 만들었으니, 그야말로 천신이 그들을 저버린 것입니다. 아니면, 처음부터 그딴 잡신은 존재하지 않던지."

미처 포장하지 못한 증오가 그 가시를 세웠다.

침입자는, 비록 증오의 대상이 다른 쪽이라지만, 시조 앞에서 너무 감정적이었다는 것을 자각하고는 재빨리 표정을 가다듬었다.

"어쨌건 그들은 사방에 너무 많은 일을 벌였고, 이제 그동안 쌓은 업보를 감당할 차례입니다. 당연히, 그 일축을 우리 밤의 귀족들이 담당하는 것이 순리일 겁니다. 다가올 그날을 위해 혈채를 받아낼 준비를, 혈전을 벌일 채비를 해야 합니다."

"전쟁이라."

짧게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슬픔, 내키지 않음, 꺼림칙함, 지긋지긋함.

들뜬 침입자와는 정반대의, 가라앉고 음울한 감정.

이 둘의 온도 차는, 겉으로만 보면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지만, 전쟁을 바라보는 전후세대와 전쟁세대의 온도 차를 보는 듯했다.

흡혈귀는 입술을 작게 달싹였다.

"그건, 모든 아이의 뜻이더냐? 다들 전쟁을 바라느냐?"

아주 짧은 순간, 침입자는 갈등했다. 거짓은 아니지만 조금이나마 사심을 담아 말할지, 아니면 있는 그대로를 말할지.

하지만 흡혈귀 사이의 위계는 왕과 군주의 것, 그 이상이다. 흡혈귀는 자기보다 높은 위계의 흡혈귀에게 저항하지 못한다. 생사여탈을 결정하는 그 간극은, 어쩌면 신도와 신의 관계보다도 더 벌어져 있었다.

신은 인간을 낳지도 않았으며, 인간을 조종할 수도 없다. 전원을 내리듯 한순간에 목숨을 빼앗아갈 수도 없다.

그러나 시조는 그 모든 게 가능하다. 흡혈귀를 만들었고, 그들을 움직일 수 있으며, 손짓 하나로 소멸시킬 수도 있으니.

결국 침입자는 머리를 조아리며 사실을 고했다.

"아니, 아닙니다. 적혈공을 비롯한 다른 엘더께서는, 시조께서 허락하지 않는 한 절대 전쟁을 벌일 수 없다는 뜻을 비치셨습니다."

그러나, 라고 작게 덧붙인 침입자는 기대감에 부푼 미소를 지었다.

"달리 말하면, 시조께서 한마디만 하여도 저희는 전쟁을 준비할 겁니다."

흡혈귀가 안색을 굳혔다.

그 말인즉슨, 전쟁을 위한 준비가 거의 다 끝났다는 의미이다.

무기도, 힘도, 병력도, 각오도.

심지어 전쟁을 벌일 상대조차 준비되어, 이제 시조의 허가만 떨어지면 당장이라도 뿔나팔을 불겠다는 뜻을 담은 말.

"그러한 시대입니다. 모두가 힘을 비축하는, 무기를 준비하고 정신을 다잡으며 서로를 향한 증오를 키워가는 그런 때. 모든 게 갖춰졌습니다. 시조시여, 당신께서 오신다면 말이지요. 하나의 구심점이 없는 저희에게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그 말을 끝으로, 침입자는 경건하게 머리를 조아렸다. 이어질 대답을 기다리며.

흡혈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무저갱에 다시금 침묵이 도래했다. 살아가기 위한 호흡도, 음식을 넘기기 위한 침도, 피를 순환시키기 위한 박동도 필요 없는 두 흡혈귀는 못 박힌 듯 멈춰있었다. 사진을 한 장 오려낸 모습이라고 해도 믿길 정도로.

어둠만큼이나 무겁게 내려앉은 고요함.

그곳에서 소리를 낸 건.

『적극적으로 저지하십시오.』

내 귓속에다 마이크를 들이밀며, 아주 작은 목소리로 지령을 전달하는 골렘뿐이었다.

『아직, 전쟁을 일으킬 때가 아닙니다. 시조는 아직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귀하에게 요청합니다. 적극적으로 저지하십시오.』

아직, 아직이라. 꽤 흥미로운 단어선택이다.

그보다, 흡혈귀 둘이 대화하는데 끼어들어야 한다니. 평범한 노역자에게 바라는 게 너무 많지 않아?

어지간하면 안 들어주려고 했지만, 왠지 지금은 흐름이 나쁘지 않아서.

"자아. 이제 그만."

나는 성큼 앞으로 나섰다.

EP.53 시조와 마사지사

골렘을 잠시 떨어뜨려놓은 나는 두 흡혈귀 사이에 끼어들었다. 누군가 해야 할 일인 것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어이, 불법침입자. 지랄은 거기까지다. 그만하고 일어나."

흡혈귀와 침입자의 시선이 동시에 나를 향한다. 흡혈귀는 고요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고, 침입자는 고개를 살짝 들며 눈을 부라렸다.

영접을 방해받은 침입자에게서 강렬한 생각이 들려왔다.

'감히! 지금 시조를 영접하는 신성한 자리에, 고작 인간 따위가 끼어들어? 죽고 싶나?'

이 말이 입 밖으로 새어 나오지 않은 건 흡혈귀의 어전이기 때문이었다. 만일 흡혈귀가 없었다면 바로 나에게 달려들었을 것이다.

'시조의 어전만 아니었어도 당장 네녀석의 몸을 찢어발기고 혈조술로 네놈의 피를 다 빼어냈을 것인데!'

맹렬한 적의가 나를 향했다. 그에게 있어서, 나는 고대하던 만남을 방해하러 온 훼방꾼으로 보이겠지. 실제로도 맞고.

하지만 내가 믿는 구석 없이 끼어든 게 아니다. 애초에 흡혈귀가 없었으면 내가 나서지 않았을 것이다.

처음부터 내가 말을 건 대상은, 침입자가 아니라 흡혈귀였으니까.

"티르칸쟈카 교육생."

침입자와 싸우면 내가 지겠지. 똑같이 베여서 상처가 나고 피가 흘러도, 저기는 동전 떨어뜨린 것처럼 피를 주워 담으면 그만이지만, 나는 꽁꽁 싸매고는 며칠 정양해야 하니까.

그렇다면, 안 싸우면 그만.

싸워서 이기는 건 하수이며,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진정한 고수다.

팔짱을 끼고, 고개를 든다. 평소에 한없이 가벼운 분위기를 풍겼던 건 바로 이 순간을 위해.

입가에 서린 미소를 지우고, 언짢은 듯 미간에 힘을 주고. 몸을 살짝 비틀어서 금방이라도 뛰쳐나갈 듯한 불안정한 자세를 만든다. 보는 이가 불안하도록.

나를 처음 보는 침입자에겐 그냥 흔하디흔한 양아치처럼 보이겠지만, 가볍고 해맑은 나에 익숙해진 흡혈귀에게는 조금 낯설 것이다.

낯섦은 곧 두려움. 아주 잠깐이지만, 흡혈귀는 나에게 두려움을 품었다.

…물론. 그건 내 힘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갑자기 정색할 때 순간적으로 느끼는 종류의 두려움이었지만.

둘은 의외로 같은 감정이다.

"저는 많이 참았습니다."

마술의 기본은 손기술도, 신기한 마술도구도 아니다.

청중의 심리를 가지고 노니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마술.

그런 의미에서, 나는 아직 마술사였다.

"밤중에 예고도 없이 남의 영지에 방문하여, 주인을 무시하고 멋대로 빈객을 찾고는, 정당한 요청에도 응하지 않았습니다. 저의 영지와, 저의 체면과, 저의 명예가 위협받은 셈입니다."

정당성을 설파하며, 분노한 기색을 은연중에 내비친다. 단서는 충분히 건넸다. 흡혈귀는 내 말의 결론을 스스로 유추해냈다.

나의 모든 것을 위협받았으니.

'설마. 죽이겠다고?'

뇌리속에 그 한마디가 번쩍이는 것. 그거면 충분하다.

"세 번째의 무례까지 인내하는 건 자비가 아니라 방종이라 했습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꽤 성실한 사람이라 이 무례를 그냥 보고 넘어갈 수가 없겠습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는, 팔짱 낀 손에서 손가락만 까닥였다. 마치, 이 손가락 하나만으로도 저 침입자를 배제할 수 있는 것처럼.

오만하게 보이도록 꾸미며, 나는 흡혈귀를 향해 물었다.

"다만 티르칸쟈카 교육생과의 정이 있으니, 마지막으로 여쭙겠습니다. 제가 이 침입자를 죽여도 되겠습니까?"

죽일 능력이야 쥐뿔만큼도 없지만, 그걸 모르는 흡혈귀는 진심으로 나에게 부탁했다.

"…그러지 말아라. 부탁하마."

흡혈귀 마음속에서 나는 회귀자와 비견되거나 그 이상의 강자. 터무니없는 오해이든 뭐든, 상대가 그렇게 믿는다면. 이용하지 못할 이유 없다.

흡혈귀는 강하다. 그와 별개로 남의 행사에 끼어들고자 하지 않는다. 지극히 방관자적인 입장에서 모든 것을 지켜만 볼 뿐.

군국이 오래된 교회를 무너뜨리다 그 아래에서 흡혈귀를 발견했을 때도, 그녀를 죽이려고 하다 실패하여 대신 무저갱에 넣고자 했을 때도. 흡혈귀는 알면서도 그것을 방치했다.

그런 무심한 그녀도, 동족의 행사에는 차마 눈을 돌리지 못한다. 저주받았다 지탄받던 그들을 안타깝게 여기기에. 그들을 만들어낸 책임감으로.

흡혈귀는 나를 향해 간곡히 부탁했다.

"나의 얼굴을 보아서라도, 부디."

좋아. 이 정도 간곡한 부탁이라면. 여기서 그만두어도 의심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야."

휴. 성공.

죽이든 살리든 네 마음대로 하라고 했으면 곤란할 뻔했다. 이 분위기에서 살리면 이상한데, 안타깝게도 나에게는 당장 저 침입자를 죽일 수단이 없거든.

하지만 능력의 부재가 의지의 부재인 척, 나는 몸을 휙 돌리며 침입자를 향해 말했다.

"티르칸쟈카 교육생의 얼굴이 예뻐서 살아남은 줄 알아라."

"으, 으음?!"

스위치를 누른 것처럼 한순간 가벼운 분위기를 만들었다. 뒤쪽에서 흡혈귀의 아연실색한 소리가 들리지만, 일단 그건 넘기고.

"저 얼굴이 못생겼다면 댁은 오늘 내가 친히 마늘장아찌에 담가버렸을 거야. 됐으니까 이제 물러가. 깜깜한 밤에 난리를 피우지 말고."

"마늘, 장아찌?"

침입자는 내 앞에서 무릎을 꿇고 싶지는 않은지 엉거주춤 일어난 상태였다. 그러나 내가 폭언을 내뱉어도 덤벼들거나 도망치지도 못하고는 애매하게 서서 눈만 뒤룩뒤룩 굴렸다.

'시조께서, 친히 부탁이라 말할 정도…? 혹시 이 인간, 그렇게 보이지는 않은데 엄청난 강자인가?'

그의 시야에 흡혈귀가 비쳤다. 경애해 마지않는 시조께서 이쪽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모습은, 장난이나 오해라 하기에는 너무 진지했다.

흡혈귀의 위계질서는 확고하다. 윗사람을 향한 의심은 피가 거꾸로 솟는 불경이며, 따라서 윗사람이 내린 판단조차 의심하지 못한다.

'그럴 수 있어. 이곳은 탄탈로스! 온갖 괴물들이 있던 곳이다. 이 인간도 상상 이상의 괴물일 가능성이!'

뒤늦게 예의를 주입 당한 침입자는 옷차림을 가다듬었다. 지금이라도 나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뒤늦게 헛기침을 하며 손을 내밀었다.

"인사가 늦었구려. 나는."

"됐고. 아직 밤이다. 너희들은 몰라도, 인간은 잠들고 경계할 시기지."

나는 손가락으로 무너진 관리실을 가리켰다.

"네 방은 저 무너진 관리실이다. 빈 캐비닛 있으니까 관 삼아서 알아서 잠들어. 그 이상의 대우는 바라지 말고."

"크윽."

'내가 어디 가서 이런 취급을 받은 적은 없었는데…! 하지만 이곳은 시조께서 기거하던 곳. 무저갱의 다른 주민들 역시, 시조만큼은 아니어도 강하고 신비할 것이다. 일단 수그려! 살아남는 게 우선이야!'

침입자는 흡혈귀에게만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나와 눈도 마주치지 않고 무너진 관리실로 향했다.

휴우. 다행이다. 안 덤벼들어서.

역시, 사기를 칠 거면 제대로 쳐야 해. 나름 밤의 귀족이라 거들먹거리던 녀석도 내 앞에서 알아서 숙여주잖아. 숱한 위기를 넘기며 강자를 연기한 보람이 있다.

내 행동은 틀리지 않았어. 내가 잠시 전율에 빠져있는 동안.

"고맙구나."

시야 근처에서 흔들리는 양산이 보였다. 흡혈귀가 나의 옆에 나란히 선 것이다. 나는 평온하게 대꾸했다.

"뭘요, 우리 사이에. 이 정도 부탁은 들어드릴 수 있죠."

"우리 사이?"

"심장을 만지작거리는 사이 아니겠어요? 그토록 깊은 관계를 맺었는데요, 뭘."

"풉. 그래. 그러하지."

흡혈귀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은근히 기대하는 얼굴로, 손을 자기 가슴골에 가져다댔다.

아, 잠깐만. 또?

살갗이 갈라진다. 피부가 갈라지며 보여선 안 될 것이 펼쳐진다. 은밀한 곳까지는 램프의 빛이 닿지 않아, 음영이 진 가슴골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지금의 나에겐 자신이 있었다. 오직 손의 감각만으로 저 안에 숨겨진 심장을 찾아갈 자신이.

"말이 나온 김에, 한 번 해주겠느냐?"

"지금? 이 와중에요?"

"지금이 어때서? 딱 괜찮은 때 아니더냐. 사방은 어둡고, 온 세상이 고요하며, 아무도 우리를 보고 있지 않으니."

붉은 눈이 기대감으로 반짝였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손가락을 들었다.

이어진 일은 딱히 떠올리고 싶지 않다.

몰캉거리는 촉감(심장), 안쪽을 더듬고 파헤치는 손가락(갈비뼈와 허파), 번쩍이는 감각(전격 마법)과 함께 느껴지는 달뜬 신음.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는 뜨끈한 액체(피).

일을 끝마친 뒤 정신건강을 위해 적당히 머릿속으로 보정하는 동안, 흡혈귀는 만족스럽게 피부와 옷을 다잡았다.

"후후. 고맙다. 나는 이만 들어가보마."

그 말을 끝으로 흡혈귀는 새카만 관 위에 올라앉았다. 그리고 관은 소리도, 기척도 없이 부드럽게 흡혈귀를 데리고 지하 무기고를 향해 움직였다. 붉은 빛 낙인이 찍힌 철문이 활짝 열려 흡혈귀를 맞이했다. 커다란 관과 반짝이는 은발이 사라지고 나서야 철문이 둔중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새카만 어둠과 고요가 찾아왔다. 나도 다시 내려놓았던 램프 곁으로 다가갔다.

그제야 골렘은 봇물이 터진 듯 말을 토해냈다.

『방금 그거. 도대체 무엇을 한 겁니까?』

"찌릿찌릿하고 기분 좋은 거요."

『찌릿찌릿?』

"설명하기 어려워요. 대충 마사지 비슷한 거라고 생각하세요."

이것만으로 이해할 수 있으면 그건 신 아니면 독심술사다. 둘 다 아니었던 골렘은 고개를 갸웃하면서 나름대로 결론을 내렸다.

『어쨌건, 귀하와 시조의 관계가 나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살아남기 위한 노력이죠."

골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훨씬 이야기가 쉬워질 수 있습니다. 타 흡혈귀의 방문은 상정 외의 상황. 현장인력의 적극적인 대처가 필요합니다.』

나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네. 열심히 하세요. 아, 저한테 보상 주는 건 잊지 마시고요."

『보상 말입니까?』

"설마 입 싹 닫을 생각하는 거 아니죠? 평범한 사람의 몸으로 흡혈귀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고요. 내가 방금 군국을 위해 이 한 목숨을 걸었는데 보상 정도는 있어야죠."

『군국민이 군국을 위해 봉사하는 건 의무입니다.』

말같지도 않은 말을. 나는 냅다 골렘을 치켜들었다. 목을 붙잡힌 채 허공에 떠오른 골렘은 팔다리를 바둥거리며 외쳤다.

『즉각 위협 행위를 멈추십시오. 부정 평가가 누적되면 귀하의 석방 여부 혹은 사후평가에 불이익이 있을 수 있습니다.』

"대위님 명령이 과도하게 누적되면 평가고 뭐고 받기 전에 뒤질 것 같습니다. 좀 말이 되는 요구를 하십시오. 이따위로 써먹을 거라면 나 말고 진짜 교관을 데려왔어야지."

『귀하는 지금도 살아남기 위해 교관을 사칭하고 있지 않습니까? 본디 군인 사칭은 최대 사형에 이르는 중죄. 본관이 그걸 좌시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유의미한 보상이라 생각.』

"앙? 소리가 나온다고 다 스피커가 아닙니다, 에이비 대위."

골렘의 스피커를 톡 떼어냈다. 입을 잃어버린 골렘은 다급히 팔다리를 버둥거리며 이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렇게 안 보여도 이쪽은 목숨 내놓고 일하고 있다고요, 에이비 대위. 앞으로는 말할 때 상대방 사정도 좀 고려합시다. 대답."

골렘이 머리를 급히 위아래로 움직였다. 충분히 그 모습을 즐긴 뒤, 나는 스피커를 손가락으로 톡 튕겨주었다.

날아오는 스피커를 잡기 위해 골렘이 급히 손을 뻗었으나 철로 된 프레임은 무언가를 붙잡기엔 너무 딱딱했다. 골렘은 불에 덴 사람처럼 허우적거리며 수정구 스피커를 간신히 품에 안았다. 혹여나 내가 훔쳐갈까 봐 소중히 안은 모습이 애처롭다.

어찌저찌 다시 스피커를 붙인 골렘이 지친 듯이 말했다.

『…본관의 권한으로 허용된 것이라면 하나 보상하겠습니다. 다만, 본 기체가 부서지는 일이 있더라도 월권은 불가합니다.』

역시, 골렘이고 인간이고 일신상의 위협을 느껴야 좀 고분고분해진다니까. 나는 다시 골렘을 내려놓았다.

"거, 별건 없고. 마력초 같은 거 좀 몇 개 보내주십쇼. 이거 요즘 매일 생활마법 쓰다가 마력 다 떨어져서 몸이 허합니다."

『마력초라면 3레벨 사치품입니다. 그건 귀하에게 허용되지 않은….』

내가 스피커를 톡톡 두들기자 골렘은 급히 말을 바꾸었다.

『하지만 보급 목적으로는 요청 가능한 품목입니다. 타당한 이유가 있으니, 며칠 안에 보급해드리겠습니다.』

"좋아요. 꼭 꽉꽉 담아주세요. 솔직히 말해서, 제가 지금 하는 일에 비하면 마력초 그거 아무것도 아닙니다."

한 번 으름장을 놓은 다음 몸을 돌렸다. 하암. 졸려. 빨리 들어가서 자야지.

충분한 수면이야말로 장생의 지름길. 나는 크게 하품을 하며 내 방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때 또 골렘이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다.

『잠깐 기다리십시오. 본 기체를 식당까지 이송해주시기 바랍니다.』

"네?"

『귀하의 협조가 없다면 장애가 많은 이 기체로 식당까지 되돌아가기 어렵습니다. 이 기체를 식당으로….』

"잘 안 들리는데요? 이상하다. 여기 올 때는 잘 들렸는데, 다시 말이 딱딱해져서 그런가?"

내가 귀를 후비는 시늉을 하자, 골렘이 말을 멈추었다. 아마 내가 무엇을 요구하는지 눈치 챈 모양이었다.

『귀하는 본관의 정당한 요청을 이행할 의무가….』

"다시 대답해보세요. 뭐라고요?"

잠깐의 고민 끝에, 골렘은 뚝뚝 끊어지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어부, 바를. 부탁드립니다. 오빠.』

나도 마주 대답했다.

"오냐."

EP.54 침묵 선언

다음 날.

어제 중간에 깨는 바람에 잠을 통 자지 못한 터라, 아지가 짜증을 낼 때까지 잠에서 못 깨어나고 말았다. 심기가 불편한 아지를 달래기 위해 아침부터 거나한 식사를 차려야 했다.

먼저 그릇을 비우고 느긋하게 내려가는 도중 갑자기 아래쪽에서 비명 비슷한 게 들려왔다. 뭔가 하고 고개를 내밀어 살피니 어제 침입한 핀레이가 회귀자와 대치하는 중이었다.

아니, 대치라는 표현은 너무 온건한 선택이었다.

이미 회귀자의 검 아래 핀레이의 오른팔이 떨어져 있었으므로.

"쯧쯧. 제 버릇 남 못 준다더니."

참나. 옛 버릇 못 버리고 또 팔을 잘랐구만. 나는 크게 하품을 하며 그들에게로 걸어갔다.

"하암. 셰이 교육생, 왜 또 남의 팔을 잘랐습니까?"

그러자 핀레이는 자기 어깻죽지를 부여잡으며 눈을 부릅떴다.

'또? 지금 이 소년은 평소에도 남의 팔을 자르고 다녔다는 말인가? 설마!'

놀랍게도, 현실은 상상을 뛰어넘기 마련이다. 비록 내 경우는 미수에 그쳤지만 말이야.

내 지적에 외팔이 양산자가 얼굴을 찌푸리며 변명했다.

"내 탓이 아니야. 처음 보는 얼굴이 느닷없이 찾아와서는, 나를 보고 손을 뻗어오잖아."

"악수라도 청했겠죠. 셰이 교육생은 뭐 악수를 청해오는 사람을 의수가 필요한 몸으로 만들겠다고 맹세하기라도 했습니까? 왜 그렇게 팔을 잘라대요? 팔 모으는 취미라도 있어요?"

"내가 악수를 청하는 것 가지고 손을 자를 리 없잖아. 누구를 정신병자로 보는 거야?"

"앗, 어떻게 알았지?"

회귀자의 시선이 따갑다. 눈에서 광선이 나온다면 내 팔을 잘랐을 것이다. 나는 팔을 등 뒤로 숨기며 급히 말을 덧붙였다.

"아니, 솔직히. 셰이 교육생은 제 팔도 자르려고 했잖습니까? 정상적인 사람은 만나면 손을 흔들어 인사하지, 칼을 휘둘러 팔을 자르지 않습니다."

"나도 아무 이유 없이 자른 건 아니라고. 저 흡혈귀는 뭐라고 했더라, 왜 인간 따위가 진혈을 갖고 있냐면서 내 가슴으로 손을 뻗었단 말이야."

"아하."

이제야 내막이 이해되었다.

핀레이는 그 고귀한 시조의 피의 기운을 느끼고 감옥 1층을 기웃거렸던 모양이다. 그러다 회귀자와 마주치고는, 어째서 인간 따위가 그걸 갖고 있냐며 화를 낸 것이다.

당연히 까칠한 회귀자 나리께서 손을 뻗는 핀레이를 가만히 보고 있을 리 없다. 검을 휘둘러서 냅다 팔을 잘라버리고, 겁을 집어먹은 불청객은 어깻죽지를 부여잡고는 저런 상태가 된 거지.

충분히 개연성 있는 이야기다. 상황을 이해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티르칸쟈카 교육생의 손님이에요."

"그 생각이 문득 들어서 목을 치려다가 말았어. 단순히 목을 자르는 것만으로는 죽지도 않을 테니 말이야."

사람이 참 못됐다니까. 죽이지 않은 이유가 그걸로는 안 죽어서라니. 뭐야?

친절한 모범시민인 나는 떨어진 팔을 주워들고는 불청객의 팔에다가 갖다주었다. 잘린 단면끼리 가까워지자, 핏물이 자석이라도 되는 양 주욱 늘어나더니 서로 달라붙었다. 팔을 되찾은 핀레이는 팔을 쓰다듬으며 주춤주춤 물러났다.

'뭐, 뭐지? 저런 괴물딱지와 평범하게 대화를 나누다니…!'

팔 한 번 베였다고 엄청 경계하네…. 별 것도 아닌 것 가지고.

아니, 경계하는 게 인간적으로 맞구나. 요즘 이상한 사람이 너무 많아서 잠시 헷갈렸다. 식당에 들릴 때마다 불사자 팔다리를 매일 마주치고, 맨날 찾아오는 흡혈귀의 심장을 만지작거리다 보니까 상식이 뒤틀리고 있어.

정신 차리자. 이러다간 전혀 평범하지 않게 되어버린다.

나는 마음을 다잡고는 이성적으로 말했다.

"그래도 앞으로는 조심해주십시오. 상대가 흡혈귀라 다행이지, 멀쩡한 인간이라면 다시 붙이지도 못합니다."

"나도 상대가 평범한 인간이면 안 이래."

"네? 잘 못 들었습니다? 그럼 저는 인간이 아니어서 팔을 자르려고 한 겁니까?"

"평범한, 이라고 했잖아. 보이지 않는 검을 손가락으로 튕겨내는 녀석을 어떻게 평범하다고 그래?"

그 말을 들은 핀레이가 경악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저 검격을 손가락으로 튕겨냈다고? 저토록 평범해보이는 사람이? 이럴 수가. 탄탈로스의 영주라고 했던 것도 허언이 아니었잖아!'

의도한 바는 아닌데, 실시간으로 착각이 쌓여가고 있다. 점점 나를 보는 핀레이의 눈에 공포가 어린다.

…왠지 조금 즐거운데? 밤의 귀족이랍시고 목에 힘주고 다니던 사람이 길거리 마술사에게 저런 태도라니. 내가 언제 이런 대접을 받아보겠어?

얼마나 재미있냐면, 길 가다가 제각각 모양을 가진 돌로 돌탑을 쌓아올릴 때와 비슷한 정도로 재밌다. 할 만 한데.

어디, 뭐 좀 더 쌓을 거 없나?

그때였다. 마침 아침을 배불리 먹고 설렁설렁 걸어오던 아지가, 앞에 있는 낮선 이를 보더니 입가에서 미소를 지우고는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핀레이는 뒤쪽에서 다가오는 난데없는 적의에 당황했다.

'뭐지? 이 불길한 느낌은?'

핀레이가 몸을 돌렸다. 그가 마주한 건, 드물게도 이빨을 드러낸 개의 왕 아지였다.

아지는 뭔가 불편한 듯 볼을 씰룩이면서, 그를 뚫어지게 노려보며 천천히 걸어왔다.

털이 곤두선다. 아지의 것도, 우리들의 것도. 짐승의 울부짖음에는 몸을 옭죄는 강렬한 기세가 있었다. 그것을 직접 받은 핀레이는 공포에 질렸다.

"으르르."

'수인? 어째서 수인이 나를 보고 이를 가는 거지? 그보다, 도대체 뭐야? 이, 더 근원적이고 피가 떨려오는 두려움은….'

핀레이의 몸이 덜덜 떨리고, 아지의 으르렁거림도 점점 날카로워질 무렵.

아지의 발이 움찔거리며 당장 튀어 오르기 직전 내가 소리쳤다.

"어허. 아지야! 그거 가만히 두고 이리 와!"

내 목소리를 들은 아지는 고개를 홱 돌려 나를 마주한 뒤, 핀레이를 향해 경계하는 시선을 던지면서, 옆걸음으로 내가 있는 곳까지 도달했다. 아지는 나의 곁에 착 붙으면서 고자질하듯 핀레이를 가리켰다.

"멍. 멍멍. 피 냄새. 쟤. 저거."

아무래도 시조 정도 되지 않는 흡혈귀는 은근히 피냄새를 풍기는 모양이다. 아지 입장에선 죽은 인간이 걸어다니는 것처럼 보이겠지.

후각이 몇 배나 되는 아지는 인간보다 피냄새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신경이 잔뜩 곤두서 노려보는 아지. 중재할 내가 없었다면 저 핀레이를 해체해버렸을지도 모른다.

나는 아지의 턱을 간질이며 말했다.

"알아. 나도 저거 사람 아닌 거. 그냥 놀러왔대."

"멍멍. 멍. 나, 쟤랑 안 놀아."

"쟤도 너랑 놀 생각 없을 테니까 참아."

마침 좋은 착각거리가 왔다. 핀레이에게 여기 서열 좀 알려줄 겸, 조금 강조해볼까.

나는 핀레이를 슬쩍 보며, 일부러 특정 단어를 강조해서 말했다.

"'개의 왕'이면 '개의 왕'답게 좀 품위 좀 지키고. 저런 잔챙이 하나하나에 반응하면 어쩌자는 거야."

'개의 왕!'

아지의 정체를 깨달은 핀레이가 입을 딱 벌렸다.

'진정으로 개의 왕인가? 예전, 인간의 편에 서 인외를 몰아내었다는, 인간과 가장 가까운 짐승의 왕? 그 개의 왕을 애완견처럼…! 역시 여간내기가 아니었어!'

뭘 잘 모르나 본데 개는 기본적으로 애완용이다. 심지어 난폭한 사냥개도 주인 앞에서는 애교를 부리고는 한단 말이다. 개의 왕도 개니까 애완용이지.

애완견이 아닌 개도 있다고? 그걸 우리는 늑대라고 부르기로 했다.

어쨌든 내 대수롭지 않은 태도 때문일까. 아지는 이내 핀레이에게 관심을 끊고는 나에게 매달렸다.

"멍. 오늘 뭐해? 밥? 공놀이? 다른 놀이?"

"아니. 오늘은 나도 안 놀아. 할 일 있어."

"멍!"

크크. 착각을 쌓을 만큼 쌓았다. 이제 핀레이는 완전히 주눅이 들어서 기도 못 펼 거다. 일합에 팔을 자른 검사에, 흡혈귀의 천적이었던 개의 왕. 거기다 그 둘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나까지.

앞으로는 내 말을 절대 무시하지 못하겠지? 내 손짓 하나하나에 겁을 집어먹고 내 말을 따를 거다.

안 그래도 일하기 귀찮은데, 마침 좋은 흡혈귀 노예 하나 구했구나. 피가 쏙 빠지도록 써먹어 주지.

그때였다.

"마침 모여있었구나."

어둑한 존재감이 문을 열고 들어온다. 넘실거리는 어둠이 새카만 관을 받쳐 들고, 그 관을 가마 삼아 올라탄 흡혈귀가 느릿하게 다가왔다.

또 심기가 불편해지려는 아지를 꼭 붙잡고 흡혈귀를 반겼다.

"아, 좋은 아침이에요. 오늘은 일찍 일어나셨네요?"

"그래. 마침 잘 되었구나. 이곳에 다 모여있으니 구태여 찾아다닐 필요 없겠어."

관 위에서 다들 한 번씩 굽어보던 흡혈귀는 턱을 꼿꼿이 쳐들며 양손을 모았다. 그러자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이 잠시 말을 멈추고는 흡혈귀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자그마한 손짓부터 모두에게 균등하게 한 조각씩 건네는 시선. 그에 마주한 사람은 잠시 자신을 잊고는 흡혈귀를 쳐다보게 된다. 그녀는 태생적으로 모두의 주목을 받는 법을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타고난 카리스마라고 할까. 계산해서 행동하지 않아도 존재감이 은은하게 드러난다.

향초가 타오르면 잠깐은 눈치채지 못하더라도 언젠가 그 향을 맡게 되는 것처럼.

음악이 깔리면 수다를 떨다가도 잠시 귀를 기울이게 되는 것처럼.

흡혈귀의 존재감은 옅으면서도 어느샌가 방을 가득 채우는 것이라, 눈치챘을 땐 이미 모든 사람이 흡혈귀의 입술과 손짓에 집중하고 있었다.

"멍멍? 안 놀아?"

늘 이야기하지만 아지는 사람이 아니다. 개다.

어쨌건 뭇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은 흡혈귀는 입술을 떼고 말했다.

"널리 전해야 할 말은 듣는 이가 많아야 하는 법. 핀레이, 듣거라. 네가 작일 읍소한 건에 대해 답을 내리겠다."

평소와 별 다를 바 없는 목소리에, 변함없는 어조. 하지만 지금 들리는 흡혈귀의 말은 꼭 어전의 왕명과 비슷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핀레이는 더없이 감동한 얼굴로 무릎을 꿇었다.

"예! 불초 핀레이, 시조의 명을 직접 듣는다니 황송하기 그지없습니다. 들려주십시오!"

나도, 회귀자도 숨을 죽이고 상황을 지켜보는 지금. 흡혈귀는 핀레이를 내려다보며 선언했다.

"작일, 너는 나에게 전쟁을 허락해달라 읍소하였지. 그에 대한 답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기꺼이 받들겠습니다!"

"나는 침묵하겠다."

핀레이는 실망도, 탄식도 내뱉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조아린 채 그것을 수용했을 뿐.

본인은 영광스러운 성전을 기대하고 이곳에 떨어졌을 것이다. 그가 그리는 최선의 미래는 시조와 함께 지상으로 올라가는 것이고, 최악의 미래는 무저갱의 미아가 되는 것. 핀레이는 최선의 경우를 위해 최악의 상황을 각오하고 무저갱에 떨어졌다.

그러나 그 희망이 산산조각이 났으면서도. 핀레이는 전혀 실망한 투가 아니었다.

오히려.

"받들겠습니다! 답을 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답을 들었다는 사실 자체에 감격했을 뿐이다.

아래 서열의 흡혈귀는 설득할 필요도, 배려할 필요도 없다. 아래에서 위로 거슬러 올라오는 강물은 없듯, 권속이 혈주에게 건넬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의견을 구하면 그제야 읍소할 수만 있을 뿐.

"여기까지 온 노고를 높이 사, 조금만 더 풀어 말해주겠다."

흡혈귀는 나와 회귀자 쪽을 흘긋 보며 약간의 설명을 덧붙였다. 나는 저 설명이 핀레이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 말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발다미르, 그 아이에게 전쟁을 금한 적 없다. 애초에 나는 아이들에게 내 뜻을 강요한 적이 없다. 전쟁은 오롯이 그들의 몫이자, 그들의 결정으로 이루어지리니. 나는 이미 역사에서 스러진 자. 그들이 나를 필요로 한다면 모를까, 내가 직접 나서서 상징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받듭니다."

"따라서, 설령 모든 것이 준비되었다 한들, 내가 먼저 나서 혈전을 주창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게 나의 뜻이다."

"받듭니다."

"그렇다면. 이만 지상으로 돌아가라. 이곳은 네가 올 곳이 아니니."

지엄한 명령.

그러나 계속 고개를 조아리며 수긍하던 핀레이는, 이번에만은 다른 태도를 보였다.

"송구하오나, 시조시여. 그 명은 받들지 못하나이다."

"어째서냐?"

흡혈귀가 시조의 명을 거부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 그렇기에, 만일 권속이 할 수 없다고 말한다면 그건 의지의 문제가 아니다. 능력의 문제이지.

그렇기에 흡혈귀도 핀레이를 책망하는 대신 그 이유를 물었다. 핀레이는 땅에 머리를 세게 찧으며 외쳤다.

"송구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저의 의지와 무관한 것. 저에게는 무저갱에서 나갈 수단이 없나이다! 그렇기에, 불민한 저는 시조께서 내린 명을 받들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죽여주십시오!"

"나갈 수단이 없다…? 준비하지 않은 것이냐?"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내려오는 것보다 올라가는 것이 더 수고스럽다는 거야 주지의 사실이건만, 그렇다고 지상으로 되돌아갈 준비조차 하지 않다니? 조금 궁금해지는구나. 도대체 밖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빠져나갈 기약이 없는 무저갱으로 나를 찾아온 것인지.'

흡혈귀의 고민은 길었으나, 그것만으로는 의문은 풀리지 않는다. 흡혈귀의 호기심이 치솟았다. 그러나 이미 결정을 내린 바, 더 물어보면 결심이 흔들릴까 흡혈귀는 구태여 캐묻지 않았다.

"가만있거라. 이곳은 군국의 영토이며, 관리하기 위해 내려보낸 이가 있다. 그라면 너를 내보낼 수 있음이니. 어디 보자."

대신 그녀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했다. 흡혈귀는 정확히 나를 지목하며 명령에 가깝게 말했다.

"교관. 핀레이는 이곳에 올 죄를 저지르지 않았을 터. 그가 이곳에 온 건 착오이자 사고이니. 그를 지상으로 돌려보내기를 희망하는 바이다."

어? 나?

잠깐만. 뭐? 저 침입자를 고이 돌려보내라고?

나보고?

"네? 저요?"

"여기 너 말고 누가 또 있다는 말이냐."

당연하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는 흡혈귀. 그 시선을 마주하자 내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아니, 교관이고 자시고.

사실 나도 잡힌 몸인데?

"군국이란 나라가 이곳의 주인이라면, 필시 나가는 방법도 알고 있을 터. 핀레이에게 그러해주기를 요청한다."

아니, 빠져나갈 방법을 알았다면 가장 내가 먼저 시도했지. 여기 계속 갇혀있었겠어?

"나는 시조 티르칸쟈카. 세계를 삼킬 괴물, 칸쟈카의 이름을 받은 재앙 중 유일하게 남은 업이다. 내로라하는 기사들이 내 앞에서 피를 흩뿌렸고, 수많은 영웅도 이 목을 노리다 스러졌다. 내 비록 영락하여 무저갱에 몸을 의탁했다 하나 내가 행했던 일들이 무색해지는 것은 아닐 터."

"영락하다니! 시조시여, 말도 안 됩니다! 지상의 모든 흡혈귀가 시조께 경애를 바치는데 그런 말씀은…!"

아니, 그걸 왜 나에게 요구하냐고. 점점 궁지에 몰린다.

그보다, 정말 빠져나갈 준비 하나도 안 하고 온 거야?

그러면 저 불청객을 살려둘 이유가 없었잖아?

"…대답이 없구나. 곤란한 것이냐? 꼭 그것이 안 된다면, 개인적인 인연으로 요구하마. 그를 지상으로 되돌려놓도록 해다오."

내가 대답하지 못한 건, 그 요청을 들어줄 능력이 없어서였다. 위기를 감지한 내가 머리를 핑핑 돌리고 있을 때였다.

흡혈귀는 나의 침묵을 거절의 뜻이라 지레짐작하고는 목소리를 깔며 선언했다.

"만일 거절한다면, 나는 핀레이를 직접 지상으로 되돌릴 생각이다. 무저갱이 무한하다 하나 나에게 있는 시간 역시 영원. 어둠은 나의 영역이니, 계속 올라간다면 지상에 닿겠지. 다만, 그때 핀레이를 되돌려놓는다면, 구태여 이곳으로 돌아오지는 않을 것 같구나."

핀레이가 고개를 퍼뜩 쳐들고, 회귀자도 경악해서 얼굴을 굳혔다. 저 말의 의미는 하나였다.

지상으로 갔다가 돌아오지 않겠다.

즉,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탈옥하겠다는 뜻이었다.

큰일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