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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14 이왕 묶을 거라면

혹시 모를 육장성의 돌발행동을 막기 위해 온 힘을 다해 꼼꼼히 매듭을 묶던 회귀자는, 내 참견에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넌 왜 또."

"굳이 앞으로 한 번 더 싸매는 매듭을 할 필요 있어요?"

나는 회귀자가 묶은 매듭을 가리켰다.

지금 천잠사는 뒤쪽으로 겹친 팔을 묶은 것도 모자라 앞쪽까지 둘러져 있다. 혹여나 탈출하지 못하도록, 완벽하게 구속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너무 세게 묶어서일까. 히스토리아가 조금 다른 의미로 불편해하고 있었으니.

"무슨 소리야. 내 매듭이 어때서?"

"아니, 제 입으로 말하긴 좀 그런데."

일부러 낯 뜨거운 듯 손부채질을 하며 회귀자를 힐끔거렸다. 회귀자가 엄청 대담하고 노골적인 사람인 것처럼.

그 불순한 시선에 회귀자가 인상을 찌푸릴 때, 나는 손가락을 다 벌린 채 내 눈을 가렸다.

"굳이 리아의 몸매를 강조하는 듯한 포박을 하니까, 이거. 대담함을 칭찬해야 할지 아니면 동기가 희롱당하는 모습에 우려를 표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하아? 쌍으로 무슨 헛소리를…."

내 손가락 방향을 따라 시선을 옮긴 회귀자는, 그제야 한결 객관적인 입장에서 히스토리아를 보았다.

히스토리아는 육장성이다. 어지간한 포박으로는 구속할 수 없다. 쇠사슬도 끊어버리며, 여차하면 제 팔까지 늘이거나 줄일 각오가 되어있다. 그런 의미에서 신중에 신중을 기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다만, 그래서일까. 회귀자는 그녀가 남자였다면 눈길이 갔을 부분을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몸을 조이는 데 집중한 결과 제복 위로 몸매가 한껏 돋보이는 꼴이 되고 말았다.

"아."

'아, 맞다. 나는 남자로 보이니까. 저 녀석이 보기엔 내가 꼭 변태처럼 보이겠….'

이제야 깨달은 회귀자는 짧게 탄식했다. 히스토리아는 고개만 돌려서 놀리듯이 대꾸했다.

"흐음. 별생각 없었구나. 아무런 생각 없이도 이럴 수 있다니, 생긴 것과는 달리 음흉한데."

"아니! 포로가 뭘 따지고 있어! 그리고! 애초에 나는 묶느라 네 뒤쪽에만 있어서 몰랐지!"

아무리 말해봐야 변명에 불과하다는 걸 깨달은 모양이다. 타자의 시선으로 자기 모습을 상상한 회귀자는 급히 손을 내밀며 부정했다.

"아무도 이상한 생각 하지 마!"

나도 이상한 생각은 안 한다. 그냥 내 동창이 처한 부끄러운 꼴을 즐겁게 감상하고 있을 뿐이다. 이 기회를 준 회귀자에게 감사를.

"본능이겠죠. 이해해요. 하지만 그래도 한때 절친했던 제 친구를 제 앞에서 희롱하는 건 좀, 저에 대한 무례가 아닌가."

"무례는 무슨 무례야!"

"제가 더 잘 묶을 수 있는데. 먼저 저에게 순번을 줬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네요."

"그나마 내가 한 게 다행이었네! 나는 너처럼 삿된 생각은 전혀 안 했으니까!"

"아, 맞다. 남자를 좋아하신다고 했."

"그건 그만 잊으라고!"

정신적 내구도가 한계치에 달한 회귀자가 빼액 소리를 질렀다.

"그럼 나보고 어떻게 하라고! 총사를 우리 한가운데 아예 풀어놓자고?!"

[셰이.]

그때였다. 컨테이너 안쪽에 가만히 누워있던 새까만 목관에서 어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군국의 공격이 멈춘 사이 잠시 쪽잠을 잔 티르가 드디어 깨어난 것이다.

아군의 등장에 회귀자가 잔뜩 기대했다.

"티르칸쟈카! 네가 한 마디 해줘!"

아직 해가 다 지지 않았기에 티르는 관에서 나오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어둠을 진동시켜 목소리만을 전했다.

[…남사스러워, 쉬이 볼 수가 없구나. 내 너의 행동에 불만을 표한 적 있어도 행실을 지적한 적은 없으나. 오늘부로 생각을 조금 달리해야겠구나….]

"아니라고!"

다만 전한 목소리도 회귀자의 편이 아니라는 게 문제였을 뿐.

이리저리 치인 회귀자는 반쯤 울먹이는 목소리로 항변했다.

"무슨 말인지 알아! 그래도 풀어둘 수는 없잖아…!"

'남장하니까 불필요한 오해를 사잖아! 저 자식이 합류하기 전에 한번 옷을 벗어봤어야 했어…! 아니, 차라리 지금 무리해서라도 가슴에 붕대 감은 걸 보여줄까?'

아, 그건 안 되지. 내가 여러모로 곤란해진다. 다 아는데도 억지로 놀란 척을 해야 하잖아.

그리고 남장한 상태가 여러모로 이겨 먹기 편하고. 아직 네가 성별을 밝히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지.

놀리는 건 여기까지 하자. 장난감은 아껴야 하는 법이다.

"적당히 풀어줘도 괜찮아요. 사실 셰이 씨 말마따나, 리아는 일부러 잡혔거든요."

"봐봐!"

내 말에 회귀자는 화색이 되어 히스토리아를 가리켰다가, 삐걱거리며 다시 손가락을 나에게로 돌렸다.

"뭐어? 이미 알고 있었어? 그런데 왜 말 안 했어!"

"알든 모르든. 어쨌건 붙잡은 건 제 성과인데 자꾸 깎아내리잖아요. 기분이 상해서."

"진짜 그것 때문이었던 거야?! 심지어 틀린 말도 아니었잖아!"

아지마냥 나를 향해 으르렁거린 회귀자는 한층 의기양양해진 채로 히스토리아를 가리켰다.

"그래! 나도 예상하고 있었어! 포로로 잡힌 척하며 잠입해있다가 정보를 캐낼 생각이었겠지! 하지만 그렇게 두진 않을…."

"아니요. 그건 아니에요. 리아는 저와 협상해서, 제가 정보를 건네는 조건으로 잡혀준 거예요."

티르도 일어났고, 해가 거의 다 졌다. 다음 작전을 위해서는 슬슬 이야기를 시작해야 한다.

내가 눈짓으로 히스토리아를 보채자, 알아들은 히스토리아는 다 탄 담배를 툭 떨어뜨렸다. 땅에 떨어진 담배를 군화로 짓밟으며 히스토리아는 웃음기를 지우고는 딱딱하게 말했다.

"지금부터 하는 말은, 모두 나 개인의 의지이며 개인적인 문제. 군국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고 맹세할게…. 믿을지 안 믿을지는 자유지만."

"…흥. 개인이라니. 군국답지 않은 말이네."

지금껏 놀림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회귀자가 불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히스토리아는 회귀자를 향해 귀엽다는 듯이 피식 비웃음을 한 번 날려주고는 대답했다.

"군국이 쫓는 이 남자의 이름은 휴이. 하멜른 중등군사학교의 학생이었어. 휴이는 나와 동창이었고 3년간 같은 수업을 들었지. 그리고…."

히스토리아는 거기까지만 말하고는 반 박자 쉬었다. 딱히 극적인 효과를 노린 건 아니고 자기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서였지만, 어쨌건 덕분에 회귀자와 티르가 더욱 집중하게 했다.

그렇게 시선을 모은 뒤, 히스토리아는 치밀어오른 감정을 삼키고는 말을 이었다.

"그리고… 3학년 말 실습, 휴이는 다른 161명의 동기를 죽이고 자살했어. 정확히는, 그렇게 알려졌지."

다른 사람이 들었다면 잠시 입가를 굳히고 어색하게 바라보았을 무거운 진실. 그러나 세계급으로 놀던 회귀자나 티르는 그리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았다.

특히 회귀자는 이죽거리기까지 했다.

"잘못 알려진 거겠네. 그는 여기 살아있고, 하멜른의 희생자들은 모두 강에 빠져서 자살했다고 하니까."

나름 나를 변호해주기 위한 말이었다.

이전 회차, 군국의 치부를 들추고 레지스탕스와 협력하여 군국을 멸망시켰던 회귀자는 각종 기밀 정보를 꿰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그렇게도 알려졌지."

여러 가지 의미가 축약된 대답에 회귀자는 묘한 분위기를 느끼고 입을 다물었다.

"나름 기밀인데 어디서 들었나 봐. 네 말이 맞아. 실제로 군국에, 정확히는 하멜른 군사학교에 반기를 들었던 내 동기들은… 최후의 순간, 제 발로 강을 향해 구보했으니. 누가 봐도 자살이었겠지."

그 말을 맺은 뒤, 히스토리아의 찌르는 듯한 시선이 나를 향했다. 나른한 눈 속에서, 뜨겁다기보다는 가시처럼 따가운 열망을 담아. 히스토리아 노골적으로 나를 가리키고 말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오직 그만 알아. 하지만 그도 사라졌지. 다들 하멜른 강 바닥에 빠져 죽었다고 했고, 그러기를 바랐어. 나만 빼고는."

휙, 고개를 돌린 히스토리아는 회귀자와 티르가 든 관을 향해 차례로 시선을 던졌다.

"나는 어떤 수를 써서라도 그 이야기를 듣겠어. 자진해서 포로가 된 것도, 군국의 적인 너희에게 기밀을 발설한 것도 다 그 때문. 너희가 듣고 있다면, 휴이도 쉽게 거짓말을 하진 않을 테니."

듣는 사람이 여럿일수록, 그들의 힘이나 위세가 강할수록 거짓말에 부담이 커진다. 히스토리아가 노리는 건 그것이었다.

다만.

[…참으로 하찮은 이유로구나.]

티르를 비롯하여 내 동료는, 네 예상보다 훨씬 더 많이 나를 믿어주고 있다는 게 문제지.

[휴가 너를 속이기 위해 거짓을 말한다고 해서, 내가 너 대신 휴를 추궁할 것 같으냐? 나름 머리를 쓴 모양이다만 틀렸다. 휴, 말할 것도 없다. 네가 하고픈 대로 하거라.]

히스토리아는 잠깐 당황한 게 틀림없었다. 설마 시조 티르칸쟈카라는 강대한 고대의 존재가 이토록 나를 비호할 줄은 몰랐을 테니까.

포로로 붙잡힌 이상 목숨까지 건 셈이다. 그런데도 아무것도 건지지 못할 수 있다는 사실에 히스토리아는 애써 평온한 척 말했다.

"시조마저도 꼬신 거야, 휴이? 대단해. 어쩌면, 너를 둘러싼 소문이 다 허구는 아니었나 봐?"

[…둘러싼, 소문?]

앗차. 티르의 흥미를 끌어버렸다. 한참 히스토리아를 압박해야 할 티르는 슬그머니 말을 멈추고 모르는 척했다.

[…한낮에 힘을 쓰니 피곤하구나. 너희끼리 결정을 내리거라. 나는 잠시 쉬고 있겠다.]

라고 말하면서 귀는 이쪽을 향해 연 게 괘씸하다.

회귀자는 태연히 대꾸했다.

"말해주기로 약속했다며. 그러면 말해야지."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거든! 네가 그러니까 꼭 나는 원래 약속을 어길 작정인 것처럼 느껴지잖아!

와중에도 정보 수집에 혈안이 된 회귀자는 이 기회에 히스토리아로부터 이것저것을 듣고자 했다.

"원래 적극적 교전회피가 붙은 우리에게 군국의 추격이 붙은 것도 그 때문이야?"

"나는 몰라. 그건 사령부의 판단이니까. 하지만 아예 관계가 없진 않겠지.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 그건 군국에서도 가장 덮고 싶었던 치부였을 테니."

"고작 백 명 가지고?"

시선이 회귀자에게 모였다. 그 시선을 느낀 회귀자는 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니, 백 명은 많지. 하지만 군국이잖아? 하루에도 백여 명씩 노역으로 죽어 나가는 군국이라면 이 정도 죽음은 아무 일 아니잖아. 자살이라는 점이 좀 꺼림칙하긴 하지만."

인간적으로는 모를까, 군국의 입장에선 타당한 질문이다. 히스토리아는 느릿하게 대답했다.

"…저주 때문이지."

"저주라고?"

"이 이상은 나도 잘 몰라. 그러니까, 들어야 해."

질문을 받아넘긴 히스토리아는 어둡고 탁한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대답해야 할 의무는 이제 나에게로 넘어왔다.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 그에게."

어차피 말하려고 했다. 군국이 우리를 쫓고 있는데, 나와 함께하는 동료들이 이유조차 모르고 있으면 곤란하니까. 단지, 그럴 기회가 없었을 뿐.

자아. 어디부터 말해야 하나.

그때 나를 위로하는 듯한 티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괜찮다, 휴. 백 명 언저리가 별거더냐. 갓 흡혈귀가 된 녀석이 아니라면, 흡혈귀 중에는 세자릿수 안 되는 이가 드물다.]

"저기, 티르. 그렇게 말하는 거 제 위로에도, 흡혈귀 포교에도 전혀 도움이 안 되거든요."

[…그러느냐?]

내가 헛기침하자, 티르도 말을 멈추고는 내 말을 경청할 준비를 했다. 회귀자도 마찬가지였다.

"…머엉."

어느새 다가온 아지까지, 왠지는 모르지만 귀를 쫑긋거리며 진정한 의미로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이게 뭐라고 개까지 듣는 이야기가 되었담.

그중에서도 히스토리아는 특히 형형한 눈빛으로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양팔이 묶여 있었지만 아마 풀려있어도 별반 차이가 없을 것이다. 날카로운 눈빛하며, 그 이야기를 꼭 알아야겠다는 열망이 나를 옭아매고 있었으니까.

무대는 준비되었고 관객은 자리에 앉았다. 남은 건 내가 이야기를 푸는 것뿐.

입술에 침을 바른 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EP.215 과거의 이야기,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 - 1

널따란 연병장에 앳된 얼굴들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서 있었다.

각을 맞추어 선 그들의 좁은 어깨에 두꺼운 통나무가 징검다리처럼 걸쳐져 있다. 허리와 다리를 타고 내려오는 통나무의 묵직한 무게를 악으로 깡으로 견디며, 시뻘게진 얼굴로 앞을 바라보고 있던 이들은, 선두가 호각을 부는 순간 일제히 발을 굴렀다.

-야트막한 동산의 배움의 전당. 오, 하멜른의 품이여.

모래가 흩날리는 땅바닥 위에 작고 깊은 발자국이 다닥다닥 쏟아진다, 자기보다 몇 배나 큰 통나무를 어깨에 걸친 아이들이 제복과 비슷한 교복을 입은 채 구보를 시작했다. 아이들은 주먹을 꼭 쥐고는, 고통 속에서 피어나는 묘한 유대감을 느끼며 소리 질렀다.

-피와 땀을 다 태워 적들을 무찌르고….

그것도 잠시. 몸의 고통은 그 모든 것을 잊게 만든다.

걸음과 함께 호각 소리도 흔들리고, 묵직한 통나무는 아이들을 더욱 찍어눌렀다. 살점이 짓이겨지는 듯한 압력을 더해, 아이들은 폐부를 쥐어 짜내어 더욱 악을 썼다.

-찬란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 진격한다….

구보가 끝나갔다. 악쓰던 목소리에서도 서서히 힘이 빠졌다. 거의 한계에 이른 아이들은, 저쪽에서 보이는 결승선을 향해 보조를 맞추어 다가갔다.

-앞으로, 앞으로.

노래 가사에 맞추어 나아가는 그들.

그리고 선두가 결승선을 밟는 것과 동시에 노래가 끝났다.

-군국의 미래로.

"아오! 숨차!"

나는 물고 있던 호각을 벗어던지며 가쁜 숨을 내쉬었다. 땀에 젖은 옷이 찐득하게 달라붙었다. 이게 피부인지 옷인지 구분하기 힘들었다.

중등군사학교의 훈련 커리큘럼 중 하나, 통나무 구보.

아직 군사로 무르익지 않은 학생들의 체력과 단합력을 기르기 위해… 라고, 이유야 갖다 붙였으나. 실상은 그냥 나라가 부리는 꼬장에 가깝다.

"단합력은 무슨. 정치질이나 늘겠지."

사람의 키는 제각각이다. 보폭도, 어깨높이도, 걸음걸이는 물론 숨을 쉬는 간격마저도 무엇하나 맞는 게 없다. 그런데 통나무가 억지로 학생을 누르니 어쩔 수 없이 가진바 모든 노력을 기울여서 호흡을 맞추어야 했다.

만일 호흡이 맞지 않는다면 통나무는 기울어지거나 굴러떨어지고, 누군가는 호된 벌을 받을 테니까.

"아이고, 어깨야. 끄응. 내가 키 안 자라거나 어깨 짝짝이가 되어봐. 다 이 빌어먹을 학교 탓이야…."

짧은 휴식시간 동안 풀썩 주저앉아 끙끙거리고 있을 때였다.

땅 위를 가볍게 저벅거리는 소리가 났다. 누구인지는 볼 필요도 없었다. 혹사나 다름없는 훈련에 모두가 땅에 쓰러져 신음하는 동안, 사뿐사뿐 걸어 다닐 수 있는 존재는 한 명밖에 없었으니까.

히스토리아가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채 내 곁으로 다가왔다. 지쳤다기보단 지루한 표정을 하며.

"리아. 잘 왔다. 와서 내 어깨 좀 주물러 봐아아아아악! 취소! 항복!"

엄청난 압력! 통나무보다도 묵직해!

고통에 휩싸인 내가 무릎을 굽히고 항복 선언을 하자 그제야 히스토리아가 손을 풀었다.

"휴이. 약속 기억하지?"

"무슨 약… 아아아! 기억나! 기억나니까 그만!"

내 어깨를 위협하던 손아귀가 사라졌다. 나는 어깨를 어루만지며 그 손아귀의 주인을 보았다.

흙먼지가 자욱이 일어난 하멜른의 연병장에서 히스토리아만은 이질적이었다. 혼자 숨소리 하나 거칠어지지 않았고, 허리춤에서 찰랑거리는 긴 머리카락에는 먼지 하나 묻지 않았다. 여기서 확인하지는 못하겠지만, 어깨를 걷어보면 더 확실하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새빨갛게 눌린 자국이 있어야 할 어깨는 티 하나 없이 말끔할 테니까.

누가 보면 마치 혼자 구보를 빼먹은 것 같은 모습.

"통나무 구보에 참가해 줘서 고마워. 오늘은 인원이 부족해서 살짝 위험했는데, 덕분에 오늘 낙오자가 없게 되었어!"

"입에 발린 말은 됐어. 그래서. 약속, 지킬 거지?"

"…어, 그게."

"내가 부족한 인원을 메워주면, 대신 네가 한 시간 동안 내 대련 상대가 된다. 그게 약속이었을 텐데?"

그러나 실은, 오늘의 구보는 그녀 혼자 통나무를 옮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군국 최강의 존재는 아닐지라도, 군국 최강의 학생인 히스토리아.

태어날 때부터 기공에 남다른 소질이 있던 그녀는 열여덟 나이에 이미 건곤을 이루고 감마저 잡았다. 힘은 벌써 영관급 장교를 넘어 장성과 비견되는 정도였다. 아직 빛이 없기에 별이 반짝이지 않을 뿐.

통나무를 앉은 자리에서 들어 올릴 수 있는 그녀가 굳이 하지 않아도 될 구보에 참가한 건 내가 내건 조건 때문이었다.

"아아. 또 뒤지게 얻어맞겠네."

"유난 부리지 마. 어차피 서로 기공 안 쓰는 조건이잖아."

"기공 안 쓴 채로 얻어맞는다는 점은 다를 바 없잖아. 차라리 기공 잘 쓰는 다른 사람이랑 하는 건 어때?"

"싫어. 다른 녀석들은 제힘에 휘둘리고. 교관들은 몸을 사리고. 그나마 나와 수를 나눌 수 있는 상대는 너뿐이야."

그건 수를 나누는 게 아니라, 독심술로 미리 읽고 피하는 거다. 그것도 얼마 지나지 않아 히스토리아가 흥을 내기 시작하면 사정없이 얻어맞는다.

하지만 어쩌랴. 약속은 약속인 것을.

"에휴. 알았어. 오늘은 좀 맞지 뭐. 그렇게 때리고 싶다면야."

"애초에, 네가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진심으로 기공을 익혔다면. 충분히 내 상대가 되었을 거 아니야."

"그건 아닐걸."

독심술이라는 사기적인 기술에, 저쪽이 기공을 쓰지 않는다는 조건으로도 일방적으로 얻어맞는 걸 보면 재능의 차이가 극심하다. 거기에 기공 조금 익힌다고 뭐가 달라질 것 같진 않다.

내 미적지근한 태도가 불만이었던 히스토리아는 말 나온 김에 가진 불평을 토해냈다.

"너도 이상해. 왜 통나무 구보 같은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낭비하는 거야?"

"쓸데없다니. 통나무 구보가 협동심 함양과 체력 단련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데."

"마음에도 없는 말 하지 말고, 잘 들어. 휴이, 다시 한번 말하는데."

가만히 앉은 나를 타이르듯, 히스토리아는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

"수석인 네가, 저들을 위해 희생할 필요 없어."

머리를 거칠게 넘긴 히스토리아는 모두를 둘러보았다. 나에게 향할 때와는 조금 다른, 길가에 있는 돌멩이를 바라볼 때의 무심한 눈길.

가장 잘 드러나는 감정은 거슬림이었다.

하멜른에 입학한 뒤, 한없이 나약하고 어린 다른 동기들은 히스토리아의 발목을 잡는 존재나 다름이 없었다. 그나마 대등한 친구는 나 정도.

그리고 내가 반장 역할을 충실히 하는 동안, 히스토리아는 내가 그들 때문에 제 뜻을 펼치지 못하고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일까. 히스토리아는 나를 향한 듯하면서도 모두에게 들리도록 말했다.

"토끼 무리를 이끌어봤자 우두머리 토끼가 될 뿐. 낙오자, 혹은 낙오 예정자와 어울려봐야 네 발목만 잡아. 제발, 부탁인데 시간을 아껴, 휴이."

아이들의 가슴을 후벼 파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누구도 히스토리아의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 감정은 온전히 자기 것이건만, 그들 중 누구도 히스토리아와 눈을 마주치지조차 못했다.

이만 악물고 고개를 돌릴 뿐.

히스토리아는 그들을 비웃지도 않고 흘려보냈기에, 다른 동기들이 갖는 열패감은 더욱 컸다.

"용기도, 기백도 없는 낙오 예정자보다는 네 시간이 훨씬 더 소중해. 제발 쓸데없는 것에 시선을 돌리지 마."

한 명의 강자가 천 명을 압도한다. 히스토리아는 그것을 증명하는 하나의 예시였다. 압도적인 강자.

말 그대로. 히스토리아는 합동 전투 훈련 때… 딱 한 사람을 제외한, 하멜른의 모든 학생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적 있기에.

…딱 한 사람을 제외하고.

구보에 참여도 하지 않은 채로 그늘에서 책을 읽던 소년이, 히스토리아의 목소리를 듣고는 인상을 팍 구기며 다가왔다.

"생각이란 걸 좀 하고 살아라."

새빨간 머리카락을 지닌, 학구적인 동시에 신경질적인 인상의 소년이 이쪽을 향해 걸어왔다. 그는 두꺼운 책을 팡 소리 나게 덮고는 자기 이마를 톡톡 두들겼다.

"아직도 모르겠냐? 세상은 다 때려 부순다고 능사가 아니거든. 수석이자, 반장이자, 모든 학생의 모범이 되는 휴이는 지금 군국에게 잘 보이기 위해 점수를 따고 있는 거라고."

그의 갑작스런 등장에 히스토리아는 올 게 왔다는 듯 하, 하고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너한테 안 물어봤어, 란카르트."

"이미지 관리에 열심이신 수석 님 대신 차석인 내가 대신 대답해주는 거 아니야. 새겨들어."

홱. 그의 손가락이 교관들을 향했다. 단상 위에서 통나무 구보를 명령했던 교관들은 히스토리아와 내 쪽을 보면서 무언가를 열심히 상의하고 있었다.

이쪽에게 들리지 않도록 소리 죽여 속삭이는 교관을 흘긋 본 란카르트는 이죽거리며 말했다.

"욕심쟁이 수석 님은 말이다. 양손잡이가 되실 생각이라고. 너나 나처럼 이질적인 왼손잡이는 물론이고, 저 평범한 오른손잡이 놈들마저 잘 다룰 수 있다는 사실을 교관에게 보이고자 한다, 이 말씀이야."

기공으로는 히스토리아가 있다면, 마법에는 란카르트가 있다. 정확히 히스토리아의 반대편 극단에 선 인물. 군국 유일의 신비.

란카르트 스펜드라이.

그는 고유마도를 각성한 마법사인 동시에 마학자이며, 소속만 하멜른일 뿐 벌써 마도장교를 이끌고 있는 불세출의 천재였다. 교관조차도 그를 대하기 어려워할 정도였으니.

물론 히스토리아에겐 해당 사항이 없는 이야기였다.

"오른손잡이니 왼손잡이니. 또 자기만 아는 말 만들어내서 쓰네. 란카르트, 그렇게 살면 불편하지 않니?"

"잡년이. 자기 무지를 인정 못 하고 논점을 흐리긴."

기공의 천재와 마법의 천재. 군국의 미래를 이끌어나가리라고 기대받는 쌍두마차…는, 서로만 보면 으르렁거렸다. 히스토리아는 마침 손에 쥐고 있던 수통을 우그러뜨리며 란카르트를 노려보았다.

"휴이가 너처럼 타산적인 성적주의자인 줄 알아?"

"아니. 나보다 훨씬 대단한 성적주의자지."

"뭐 눈엔 뭐만 보인다고 다 그런 줄 아네."

"콩깍지가 쓰인 너보다야 훨씬 객관적이지 않을까."

란카르트는 히스토리아의 날카로운 기세를 받고도 태연히 걸어왔다. 사정거리 안에 거리낌 없이 발을 들이민 그는 조롱의 의미로 한숨을 내쉬었다.

"군국에 기공사는 많아. 멧돼지, 네년이 아무리 강해봤자 오장성 자리 하나 꿰차는 게 한계겠지. 너는 아주 중요하겠지만, 그래봤자 중요한 부품일 뿐이야. 군국이라는 거대한 기계를 잘 돌아가게 만들겠지만, 네가 아니어도 성능의 차이만 있을 뿐 달라지는 건 없겠지."

세상을 비관적으로, 그리고 계산적으로 바라본다면 란카르트와 비슷한 관점을 갖게 될 것이다. 그에게 있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설명할 수 있는 현상에 불과하며, 이해하고 이용할 수 있는 대상이었으니.

마법사보다도 마법사다운 사고방식을 지닌 그는, 동류를 보는 듯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그에 비해 휴이는 독특한 위치에 올라섰지. 마법은 나보다 별로. 기공은 너보다 별로… 하지만 모든 분야에 두루 능통해. 인원을 적재적소에 배치할 수 있고. 아는 게 많아서 떨거지들한테도 인기 있고. 너나 나처럼 특이한 케이스와도 대화가 통하지. 이런 인재는 휴이가 유일해."

"…네 말은, 다 계산적인 행동이라 이거야?"

"그래. 휴이는 사령부, 그 자체가 될 셈이다."

추측이 아니라 확신이었다. 란카르트는 다 한 치의 의심도 없이 그렇게 말했다. 누가 보면 꼭 그가 독심술사인 줄 알겠네.

그에 맞서 히스토리아는 자기 귀를 후비적거리며 대꾸했다.

"우물 안 개구리 같은 말이네. 세상 사람들이 다 자기 같은 줄 알아서 그것만 보이나 보지. 네가 휴이와 직접 맞대봤으면 알 텐데."

"아아. 머리 굳은 년이 이해할 거라고 기대하지도 않았어."

"…근데 이 열등생은 오늘따라 왜 이렇게 시비를 걸지? 죽고 싶어?"

히스토리아는 구겨진 수통을 란카르트를 향해 냅다 던졌다. 파아앙, 파공성과 함께 수통이 포탄처럼 쏘아졌다. 사람이 맞는다면 그대로 즉사할 위력이다.

그러나 히스토리아는 물론 란카르트도 별다른 위협을 느끼지 않았다.

수통은 공중에서 누가 잡아챈 것처럼 휙 비틀어지더니, 근처 땅을 박살 내며 틀어박혔다.

공격이 닿지 않는다는 사실을 처음부터 알고 있던 듯, 란카르트는 조금의 동요도 없었다.

"야만적이긴. 이래서 멍청이들과는 대화도 나누기 싫어."

"…마법 없으면 죽도 밥도 아닌 주제에."

언제나처럼 으르렁거리는 둘. 하지만 진짜 싸움까지 이어진 적은 없다. 내가 언제나 둘 사이를 중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은 나도 피곤하고. 계속 있으면 히스토리아에게 잡혀서 얻어맞겠다 싶어서. 둘이 싸우도록 내버려 두고는 냉큼 자리에서 벗어났다. 저 둘은 내가 사라진 것도 모르고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연병장을 걷는다. 바스락거리는 모래 사이, 통나무 구보를 끝내고 힘겹게 몸을 추스르는 아이들 틈에서 다양한 감정이 느껴진다.

고통, 아픔, 질시, 후회, 두려움, 열등감, 그리고 절망.

그리고 나에 대한 원망.

빛나는 재능을 가진 둘과는 달리, 나의 재능은 애매한 편.

란카르트와 히스토리아는 각자 마법이나 기공이라는 분야에서 누구도 따라오지 못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아득히 높아 감히 쳐다볼 수조차 없으나, 나는 고작 계단 한두 걸음 앞서갈 뿐.

자연재해를 원망하는 이들은 없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존재에게는 인간적인 감정을 품지 못하기 마련이다.

내가 비록 수석일지라도, 코앞에서 아득바득 앞서나가는 내가 더욱 원망스럽겠지.

어두컴컴한 감정이 나를 향한다. 차마 증오할 수 없는 밤하늘의 별 대신, 감히 그들과 허물없이 어울리는 평범한 나를 원망한다.

나는 거무튀튀한 감정들이 소용돌이치는 땅을 지나, 나를 부르는 교관에게로 향했다.

EP.216 과거의 이야기,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 - 2

히스토리아는 나를 낙오자 하나조차 쉽게 버리지 못하는 착한 호구로 생각하고 있다.

란카르트는 내가 그마저도 계산하여 행동하고 있는 냉혈한이라 여겼다.

둘은 알까. 그들이 나에게서 보고 있는 건, 그들이 보고 싶은 세상이라는 것을. 어떻게 보면 나는 소망을 비추는 거울인 셈이다.

그래서 나는 무엇일까? 호구? 아니면 냉혈한?

글쎄. 굳이 따지자면 나는 둘 다라고 생각한다.

원래부터 나는 남의 부탁을 잘 거절하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내가 독심술사라서…가 아마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그게 목숨 바쳐 이루고자 하는 열망이라면 나도 모르게 응원하고 싶어진다.

그게 사탕을 자기만의 비밀장소에 숨겨놓고 모른 척하는 어린아이라면, 미소를 지으며 맞장구를 치고 싶어진다.

그게 과거의 자신을 투영하여 기대를 거는 행위라면, 그에 부응하고 싶어진다.

…상대가 나보다 어른일지라도.

"히스토리아가 통나무 구보에 참여했다, 라."

총교관 니콜라스의 앞에 불려간 나는, 팔을 뒤쪽으로 모은 채 공손하게 대답했다.

"예. 니콜라스 총교관님."

"잘했다, 휴이."

하멜른의 총교관, 니콜라스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히스토리아… 그 아이. 정말 축복받은 인재야. 이 하멜른의, 그리고 나아가 군국의 행운이다. 저 나이에 감 기공을 익히고 독자적인 무류를 만들어가는 재능은 저 제국에서도 손에 꼽을 터."

그의 상념이 자연스레 란카르트에게로 옮겨갔다. 입가에 뜬 미소에 더욱 큰 미소가 덧칠해졌다.

"란카르트. 그 녀석도 마찬가지. 고유마도가 사람마다 다르다지만, 그것이 품은 심의(心意)에 따라 규모가 달라진다. 란카르트의 고유마도는 최소 전략급. 혼자 전황을 바꿀 정도. 혹여나 계기만 있다면… 마도사가 되는 것도 꿈이 아니다."

총교관인 그보다 훨씬 위대해질 두 학생을 두고도 니콜라스의 마음속에는 오직 기쁨뿐이었다.

니콜라스 대령. 학생에게 엄격하면서도 다정하고, 군국에 충실하며 제 몸을 헌신하는 군인. 전설적인 군인은 아닐지언정 뛰어난 교육자의 자질을 가진 장교였다. 군국의 인선이 그다지 나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누구보다도 충성스러우며 나라를 사랑하는 군인은 군국의 찬란한 미래를 그리며 기뻐했다.

"나는 너를 믿는다, 휴이. 히스토리아나 란카르트. 둘과 대등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지시를 내릴 수 있는 사람은 너뿐이니."

"…저는 히스토리아에게 지시를 내릴 수 없습니다. 부탁만 할 뿐이에요."

"무슨 상관이겠나. 말대로 행동해주면 그게 지시고, 부탁이고, 명령이지."

다만, 그는 어디까지나 군인이었기에. 이미 긁어서 꽝이 나온 복권에게까지 마음을 쓰지는 않는다.

"반장 역할은 그만해도 된다. 어차피 네가 그들에게 배울 건 없으니까."

"말씀은 감사하지만, 이제 3학년이잖습니까. 이왕 맡은 김에 끝까지 하겠습니다."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비슷한 말을 들었지. 그때 너를 말리지 못한 게 내 천추의 한이다."

"하하."

애매하게 웃어넘기는 나를, 니콜라스는 안타까운 듯 바라보았다.

"내 생각에 너는 너무 많은 일을 떠맡으려고 한다. 기공, 마법, 탄도학, 전술, 신비 해체, 연금술, 의술, 제련…. 재능을 찾으려고 이것저것 건드려보았고, 나름의 분야에서 성과를 거뒀으나. 무엇도 대성하지는 못했지."

성과를 거둔 게 아니다. 그냥 독심술로 읽으면서 요지를 파악하고 대강 따라갔을 뿐. 그러니 대성하지 못한 것도 당연했다.

그러나 그걸 모르는 니콜라스는 내가 시간과 재능을 낭비했다고 여겼다.

"너는 너무 뛰어났다. 스스로 알아서 잘하겠지, 그리 여기고 잠시 관심을 끊었지. 그게 내 한이고, 후회다. 아직 네가 어리고, 자기 재능을 모른다는 사실을 알았어야 했어."

절절함과 안타까움이 느껴졌다.

여섯 개를 맞추어야 하는 복권이 자기 실수로 마지막 자리가 틀렸을 때, 그때 느낄 법한 참담하고 망가진 감정.

사실, 나란 인간이 원래부터 무언가를 대성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던 나지만, 그의 절실한 감정을 읽고도 냉소를 지을 수는 없었다.

"다들 그런 거죠. 그게 저 혼자에게 찾아온 일은 아닙니다. 다른 아이들도 비슷할 거예요."

"…아아. 그렇지. 다른 아이들."

니콜라스가 수긍한 건 그나마 그가 교육자이기 때문이었다. 다른 군인이었다면 논점을 흐리지 말라며 윽박질렀을 것이다.

아니, 1학년이 끝나기도 전. 억지로라도 나를 그들과 떨어뜨려 놨겠지.

'휴이는 다른 사람에게 관심과 시간을 많이 쏟는 성격이다. 히스토리아나 란카르트와 친해진 건 그 덕분이나, 부작용도 있어. 일반병이 될 이에게도 관심을 주지. 혹시 또다른 히스토리아나 란카르트가 나타날 가능성이 있을까 싶어 놔두었지만, 애초에 휴이를 그들과 같이 두면 안 되었어. 처음부터 떨어뜨려 놓았다면.'

버려진 복권조차도 군국의 자원이라 생각하고 아끼는 니콜라스는 그나마 교육자에 가장 가까웠다. 그래봤자 군국이라는 한계를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니콜라스는 참담한 심경을 숨기지 않고 말했다.

"…그래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 너에게는 고등사관학교가 남아있으니까. 거기서는 나보다 더 뛰어난 교관을 만날 것이다."

"총교관님보다 높은 계급을 가진 교관은 만나겠지만, 더 좋은 스승을 찾기는 어려울 거예요."

"인사치레는 필요 없다. 나는 이미 실패했으니까."

자조적으로 말했으나 내 아부에 조금이나마 기분이 좋아진 게 틀림없었다. 나는 경례를 올려붙이고는 뒤를 돌아서 나섰다.

내가 밖으로 나서며 문을 닫자, 안쪽 홀로 남은 니콜라스는 깊게 한숨을 내쉬며 자기 서류 무더기 속에 담겨있던 기밀문서를 꺼냈다. 한층 착잡한 얼굴로 문서를 읽던 그는 눈을 질끈 감고는 중얼거렸다.

"…어쩌면, 내 실수를 되돌릴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동기를 생각하는 마음이 저만큼 크다면…."

니콜라스는 내가 문밖에서 독심술로 읽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기밀문서의 글자를 읽어내려갔다.

하멜른은 과거 왕국이었던 시절의 아카데미를 기반으로 지어졌다. 그 시절의 자료도 그대로 남아있어, 신비 해체자나 군국 연구진이 자주 방문하곤 했다.

그중에서 누군가 건넨 자료에는 이런 게 있었다. 원래는 폐기해야 마땅하나, 니콜라스는 그를 만류하며 그 자료를 받아들였다.

-1종 금기, 탐식.

니콜라스의 눈이 점차 깊어갔다.

"아, 상쾌하다!"

"끄으으으으…."

히스토리아는 상쾌한 얼굴로 허리를 쭈욱 폈다. 그에 반해, 연신 두들겨 맞은 나는 거센 신음을 흘리며 땅에 엎드려 있었다. 팔과 다리를 수도 없이 얻어맞아서 아프다.

친구가 고통에 신음하고 있건만, 내 처참한 꼴에도 히스토리아는 여전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오랜만에 움직이니 얼마나 좋아. 안 그래, 휴이?"

"두들겨 맞는 쪽이 되면… 너도 별로 기분은 안 좋을걸…."

"네가 나를 때릴 만큼 강해진다면 얼마든지 맞아줄게."

"안 맞겠다는 말을 잘도 돌려서 하는구나…."

끄응. 작게 신음하고 몸을 돌렸다. 히스토리아는 흐른 땀을 닦으며 즐겁게 웃었다.

히스토리아가 기공을 쓰지 않은 대련이었다. 당연히 이 경우 보다 체격이 큰 내가 유리…할 거라는 생각은 버리는 게 좋다.

기공을 익힌 자는 강한 힘을 발휘한다. 처음엔 한껏 휘둘리던 육체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그 힘에 적응해간다. 결국은 일반인의 육신보다도 훨씬 강건한 몸이 완성된다.

그러니까, 지금 히스토리아는 내가 기공을 쓰더라도 이기지 못할 정도로 강해진 상태라는 거다!

"왜 나랑 대련하는 거야… 차석인 스프링필드나 전투부 교관도 있잖아…."

"재미가 없어."

히스토리아는 아직도 기운이 남았는지 긴 팔과 다리를 쭉쭉 뻗어 스트레칭하며 대답했다.

"기공을 쓰면 내가 이기잖아."

"거참 부럽네. 안 쓰면?"

"안 쓰고 하자니, 저쪽은 힘으로 찍어누르려고 하지. 수읽기나 허점 찌르기는 생각도 하지 않아. 하등의 도움이 안 돼."

"배부른 소리…. 내가 너만 한 힘이 있었으면 바로 찍어눌렀는데."

"얼마든지 찍어 눌러도 되니까, 어디서 기력 좀 길러와 봐."

"말처럼 됐으면 이미 길렀지."

한탄하며 품 안에서 종이갑을 꺼냈다. 달칵하고 위쪽을 젖히니, 동그랗게 말린 마력초가 딱 한 개비 남아있었다.

한 개비? 이제는 마력초마저도 나를 몰아붙이네.

마력초는 3레벨 사치 물품. 사관학생도 아니고 일개 군사학교 학생이 구할 수 없는 물건이다. 하지만 뭐 어떠랴. 마력초는 사람이나 때를 구분하지 않는다. 입에 물고 불꽃만 붙여주면 달콤한 연기는 상황과 때를 가리지 않고 속삭이며 나를 위로한다.

내가 종이 속 연기와 밀회를 나누고 있을 무렵, 히스토리아가 다가왔다.

"마력초? 너 그런 거 피우니?"

히스토리아가 잔소리하기 전에 나는 얼굴을 찡그리며 말을 걸었다.

"리아. 만일 나에게 기력이나 마력이 조금이라도 더 있었다면 어떨까?"

"그랬다면 더할 나위 없지."

기공 이야기가 나오자 히스토리아는 연기도 신경 쓰지 않고 나에게로 다가와 말했다.

"네 기공 운용은 정말 자연스러워. 가진 힘을 완벽히 다 소화해내고 있잖아. 기공에 대한 이해야 네 필기 점수를 보면 나오지."

"그거야 내 기력이 한 톨이니까 그렇지. 욕조를 움직이는 것보다 한 컵 다루는 게 쉬우니."

"거짓말. 내가 넘치는 기력을 제어하지 못하고 칼과 창을 부숴 먹고 있을 때, 총으로 밸런스나 잡아보라며 권했던 것도 너잖아. 네가 이래도 이해가 부족하다고?"

아니, 니콜라스 총교관이 생각은 떠올렸지만 총에 대한 안 좋은 인식 때문에 그만둔 걸, 독심술로 읽은 내가 가로채서 말했을 뿐인데.

그걸 사실대로 알려줄 수는 없었기에 나는 말을 흐렸다.

"…그 탓에 맨날 나한테만 대련하자고 오지. 내 일생일대의 실책이다."

"후후. 나에게는 일생일대의 행운이었고."

맑게 미소 짓는 그녀에게서는 오직 즐거움만이 느껴졌다. 이미 무언가를 이룩하고, 앞으로 나아갈 힘을 갖고, 찬란한 미래가 기다리는 그녀는 앞만 바라보면 되었기에.

히스토리아에게 부족한 건 너무 멀리 나아갔을 때 나란히 걸어줄 친구뿐이었으나, 란카르트나 내가 있는 지금은 그마저도 충족되었다.

그녀는 나아갈 일만 남았다.

히스토리아는.

"그런데 갑자기 왜 궁상을. 잠깐. 너, 설마?"

'아까 휴이는 니콜라스에게 불려갔었지? 왜? 설마?'

감도 좋아. 무언가를 깨달은 히스토리아는 다급히 몸을 이쪽으로 들이밀며 내 얼굴을 살폈다.

"혹시 니콜라스가, 혹은 군국 사령부에서 네 기력을 늘려주겠다고 하면, 앞뒤 재지 말고 수락해, 휴이!"

"기력을 어떻게 늘려."

"보약이나 영단 같은 거를 먹으면 되지!"

"말이 쉽지. 그걸 어디서 구해? 설사 구하더라도 일개 학생인 나를 줄까? 주더라도 기력이 는다는 보장이 없는데."

"아냐. 내 생각엔 가능성 있어! 군국에 눈이 달렸다면 너를 그냥 두고 볼 리 없잖아!"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군국이 그토록 특별취급할 거라면 나라 이름을 군국이라 짓지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눈을 반짝이는 히스토리아의 얼굴은 너무나도 희망차 보여서 차마 꺾을 수가 없었다.

미안. 히스토리아. 군국이 나를 위해 준비한 건 영단이나 보약 같은 게 아니야.

그보다 더욱 질이 나쁜 무언가지.

딱히 나 하나만을 위한 건 아니지만 말이야.

"에휴. 푸우우."

할 말이 없어서 담배 연기를 히스토리아 얼굴에다 대고 뿜었다. 연기를 들이켠 히스토리아는 코를 찌르는 향에 기겁하며 뒤로 물러났다.

"콜록. 거의 독 아니야? 도대체 이딴 건 왜 피는 거야?"

"후우. 너는 모른다. 이게, 인생을 살다 보면 가끔은 독이라도 입에 털어 넣고 싶은 날이 오는 법이야. 너는 이런 거 피우지 마라."

"나랑 동갑인 게 허세는."

쯧쯧. 겪어보지 못한 이만 이걸 허세라고 생각하지. 나는 마력초를 입에서 놓고는 휘적휘적 흔들었다. 그게 마치 결계라도 되는 것마냥, 히스토리아는 고개만 이리저리 돌려서 피했다.

"허세처럼 보여? 그러면 한 번 펴 보든가."

"내가 못 필 것 같아?"

탁. 히스토리아는 재빠르게 내 손에서 담배를 낚아챘다. 반쯤 타 들어간 담배를 보며 잠깐 고민하던 히스토리아는, 나와 내 입술을 번갈아 보다가 앙하고 크게 물었다. 입에 담배를 문 순간 히스토리아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누가 보면 훈연하는 줄 알겠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중얼거렸다.

"뺏어가란다고 진짜 뺏어가네."

"콜록. 네가, 하라, 콜록!"

"야, 다 탄다. 못 필 것 같으면 다시 돌려줘. 그거 사정사정해서 간신히 얻은 거란 말이야."

"흡, 콜록. 내가 줄, 콜록!"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으면서도 히스토리아는 계속 내 손을 피해 달아났다. 담배 한 개비가 다 타 들어갈 때까지.

저게 마지막이었는데.

EP.217 과거의 이야기,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 - 3

먼 옛날, 인간은 본디 짐승이었다.

도구를 쥘 수 있는 손과 언어를 빚어낼 수 있는 혀를 신이 내린 선물이라 칭송하지만, 사실 잘난 척 말한 것치곤 다른 짐승에 비해 크게 특출난 특징은 아니다. 평범한 다른 짐승들이 갖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쓸 만한 개성이었을 뿐.

인간은 그저 이 땅을 거니는 짐승 중 하나였다.

눈앞에 먹이가 있으면 먹고, 자기 씨를 흩뿌리기 위해 노력했다. 살기 위해, 생존을 위해. 말 그대로 필사적인 노력이라, 굳이 상대나 상황을 가리지 않았다.

그 노력에는 같은 인간을 사냥해 먹이로 만드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살인, 강간, 멸족, 강도. 그 모든 것들은 따로 이름 붙여지지 않은 채 야만 속에서 상식으로 존재했다.

그리고 그 누구도 그것을 탓하지 않았다.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다른 모든 짐승과 마찬가지로.

그러던 어느 순간. 인간은 존엄을 찾았다.

야만을 경멸하며 법과 도덕을 세웠다. 처음의 성녀가 이 땅에 떨어지고 인간의 왕이 자취를 감추었을 때, 인간은 진정으로 지상의 지배자가 되었다.

온갖 야만을 금기로 취급하고 역사 이전에 묻어버린 채, 그들은 세상 위에 서서 옳은 것과 그렇지 못한 것, 정의와 불의를 정했다. 그 속에서 인간은 번영과 질서를 발견해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사토 속에 묻혀있을 뿐. 금기는 여전히… 존재했다.

"말도, 말도 안 돼…. 니콜라스. 그런 짓을 저지르겠다고?"

뜻밖의 소식을 들은 란카르트는 눈을 크게 뜨고는 펼친 책으로 자기 입을 막았다. 그의 눈동자는 인간의 가죽을 뒤집어쓴 괴물을 보듯, 혐오와 두려움으로 떨리고 있었다.

"이해할 수가 없어. 어떻게, 어떻게 생각해도 이해가 안 돼. 수단 방법 가릴 처지가 아니라도… 이건, 이건! 너무하잖아!"

어찌나 공포에 질렸는지, 어지간해서는 겁먹지 않던 그조차도 격하게 몸을 떨었다. 제 팔을 애처롭게 붙잡고 흐느끼며, 란카르트는 거칠게 포효했다.

"어떻게, 어떻게 그토록 비효율적으로 먹일 생각을 하냐고! 재료가 있으면…! 그 재료의 목숨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완벽하게 포식시켜야지!"

란카르트는 마법사다. 마도장교는 그 특성상 온갖 고문서에 대한 열람권을 지닌다. 란카르트는 우연한 기회에…라고 하기에는 조금 노골적으로 금기를 찾아냈다.

그리고 금기에 대한 어떤 기밀정보를 접했을 때, 그는 환호해서는 즉각 니콜라스에게 찾아갔다. 친구를 위해 조사하다가 우연히 발견한 척 그의 앞에 내밀었다.

계획은 성공했으나, 어디까지나 일부 뿐이었다.

거세게 감정을 내뱉은 란카르트는 머릿속 지식을 입 밖으로 꺼내 정리했다.

"1종 금기. 탐식. 죽이고, 피와 살로 목을 축여, 그들의 힘을 얻는 금단의 의식. 가장 손쉽기에, 가장 끔찍한 금기."

금기, 라고 부르기도 힘들 것이다. '탐식' 자체는 일상에서 흔히 일어나고 있는 일이니.

오랜 시간 동안 공을 들인 농작물, 혹은 그것들을 먹고 자란 짐승의 고기. 인간은 그것을 취하고 강해진다. 이로 씹고 목구멍으로 넘겨 몸 안에 품으며, 자기 육신을 성장시키고 그 안에 스며들어있던 마력과 기력을 얻고 건강해진다.

아주 간단히 말해, 탐식은 곧 무언가를 먹는다는 행위의 총칭.

"하지만 기본적으로 몸 밖의 것은 몸 안의 것과 달라. 분해하여 자기 것으로 만드는 과정이 필요하지. 그렇기에 탐식은 아주, 아주 비효율적이야. 무언가를 변환하기 위해선 그만한 손실을 요구하는 법이니."

그렇기에 금기이다. 이 탐식으로 힘을 얻으려고 하였던 이들은, 고작 티끌만큼 강해지기 위해 수천 수만의 목숨을 먹어치웠으니까. 역사적으로 폭군, 재앙, 혹은 악마라 불렸던 이들은 흔히들 이러한 방식으로 힘을 얻곤 했으며, 대부분 토벌당했다. 1의 힘을 얻기 위해 100을 먹어치운다 한들, 그동안 쌓은 업보가 너무 커져 감당할 수 없게 되었으니까.

…단, 탐식을 꼭 그토록 커다란 규모로 해낼 필요는 없다. 효율을 중시하는 몇몇 인간들은 조금 더 효율적인 방법을 찾았다.

"3년간 동일한 기공을 익히고 비슷한 마력을 길렀으며,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생체 주기를 가졌어. 다른 사람, 이라고 하기엔 닮은 부분이 너무, 너무 많지. 참으로 완벽한 상황이야… 마치, 처음부터 이걸 염두에 둔 것처럼."

흔히 있는 일이었다. 규모가 조금 있다 하는 비밀 조직 중에서는 고아를 거둬 오랜 기간 같이 기르다가 하다, 한 명만 남기고 다 포식시키는 경우가 수두룩하여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을 정도였다.

탐식이 군국이 학교를 만든 이유 중 하나라는 건 분명했다. 다만, 그 금기가 지금까지 한 번도 행해지지 않았을 뿐.

준비해낸 것치고 놀라운 일이긴 했으나 란카르트는 그 사실을 확실하게 이해했다.

"하긴. 나나 그 멧돼지 여자에게는 전혀, 전혀 필요하지 않지. 고작 백, 이백 먹어 치운다고 달라질 것도 없어. 히스토리아 그년은 실제로 혼자 이백 명을 상대로 승리하기도 했고…."

세상은 합리성 위에 서 있다.

지금까지 군국이 백 명의 학생을 희생시켜 한 명에게 힘을 몰아주지 않은 것은, 그렇게 만들어낸 어정쩡한 인공 초인 한 명이 다른 백 명보다 가치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쭙잖은 정의나 도덕 문제가 아니라, 그게 비합리적이기 때문에.

그렇다면.

"다만. 휴이에겐 의미가 남달라. 그 녀석은… 힘의 크기만 부족할 뿐. 다루는 능력은 충분하니."

만일 힘을 탐식하는 편이 더욱 합리적인 경우가 나타난다면. 그때 군국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같잖은 정이 들었다고.

모두가 터부시하는 금기라고.

지금껏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다고.

오직 부정하기 위한 부정을 해가며, 합리성을 외면할 것인가.

"군국은 시험에 통과했어. 이 나라에서 일할 가치는 있겠어…."

니콜라스는 짧은 고민 끝에 휴이에게 학생들을 먹이기로 결정했다. 단, 그는 조금 비효율적인 방식을 택했다. 그들끼리 서로 죽이게끔 한 게 아니라, 죽음의 위기 속에 몰아넣고자 한 것이다.

란카르트와 히스토리아, 그리고 기타 타 직군 진학생 38명을 제외한 162명의 학생은, 실습을 위해 하멜른 강을 따라 올라가는 도중 조난할 예정이었다. 늑대와 멧돼지, 악어가 사는 숲에서 이틀 동안 생존해야 할 것이다.

…아마, 캠프에는 금기개진이 설치되어 있겠지. 누군가의 피가 양식이 될 수 있도록.

" 그 방법은 저열하기 짝이 없지만, 그거야 내가 손을 좀 대면 되니. 그런데 니콜라스, 왜 그런 애매한 방법을 썼을까… 설마?"

합리성을 찾던 도중, 가능성 하나를 떠올린 란카르트는 아연실색했다. 말도 안 되는 가설이었다. 제 생각에 어이가 없어진 그는 배꼽을 잡고 한껏 웃기 시작했다.

"혹시, 혹시 니콜라스. 휴이가 그 기회를 차버릴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하하! 하하하! 설마, 설마! 그럴 리가 없잖아! 그는 천재라고. 분하게도, 나보다 더한! 그런 괴물이, 고작 무언가에 얽매일 것 같아?!"

한참을 웃은 그는, 어느 시점을 기점으로 웃음을 딱 멈췄다. 갑작스레 찾아온 적막은 조금 전의 광소와 대비되어 더욱 섬뜩한 느낌을 풍겼다.

란카르트는 가설을 부정하듯, 혹은 부정하게끔 만들어버릴 듯이 미소를 지었다.

"이건 시험이야, 휴이. 나는, 나는 너를 믿어. 누구보다, 심지어 나보다도… 재능이 있는 너라면.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을 거야."

란카르트는 그 어느 때보다도 어둡게 중얼거렸다….

"믿어줘서 고마워, 란카르트. 하지만 네 기대에 부응할 수 있을까 모르겠네."

"엥? 그 새끼 이름이 여기서 왜 튀어나와?"

필기 시험이 끝나고 다들 힘이 쭉 빠진 채 걸어 나오는 동안, 히스토리아와 나는 여유롭게 시험장 바깥 그늘에 자리를 잡은 채 앉아있었다. 우리 둘은 시험과는 동떨어진 사람 같았다.

실제로도 동떨어져 있긴 했다.

히스토리아야 사관학교 입학도 전에 별을 달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연일 이야기가 오가는 이레귤러이고, 나야 1등인 게 상수인 걸어다니는 성적상한선이었으니까.

히스토리아의 질문에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아. 이번에도 예상대로 내가 1등할 것 같아서."

히스토리아는 오늘 지은 것 중 가장 큰 미소를 지었다.

"유감이네! 그 자식, 이번에야말로 이겨보겠다며 매일 책 끼고 다니던데."

"맞아. 열심히 하더라고."

덕분에 나도 덕을 좀 봤지 뭐야. 그 녀석 공부한 거 그대로 읽어서 써먹으면 되니까. 혹시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다른 사람 거 참고해도 되고.

나에게 있어서 시험이란 퍼즐 맞추기 비슷한 것. 적당히 주워다가 들어맞는지 확인해보고, 아니면 거르고 맞겠다 싶으면 톡 갖다 붙이면 된다. 그러면 빈 곳에 딱 맞물리는 정신적인 쾌감이 나를 자극했다.

이건 상당히 재미있는 일이었다.

나는 마음을 읽을 뿐이지 정답을 아는 게 아니다. 누군가 정답이 3번이라는 걸 확신했다고 냉큼 물었다간 둘 다 사이좋게 틀리는 경우가 있다.

시험이란, 정답을 맞추는 게 아니라 믿음과 현실의 괴리를 배우는 행사. 군국이 원하는 바는 아니었겠지만 독심술 훈련에 상당한 공헌을 했다.

"그런 내가 생각하기에, 이번 시험도 1등인 것 같네. 란카르트에게 전해. 1등은 내가 없는 곳에서나 하라고."

"낄낄. 그 말, 그대로 전해도 돼?"

"내가 감히 허락하지 않은 척해줘. 그 자식 내가 위선떠는 꼴을 더 싫"

"내 전문이지! 그 자식 분해하는 모습은 매년 봐도 질리질 않아!"

"…리아. 그런데 너, 실기 가산점 빼면 란카르트보다 점수가 낮."

히스토리아는 웃는 낯 그대로 내 어깨를 잡았다. 양철 수통조차 우그러뜨리는 악력이 내 뼈를 상대로 그 힘을 시험하려고 하고 있었다.

"으응? 휴이. 한마디만 더 하면, 대련 시험에 있었던 1번부터 7번 동작에 대해 다 까발린다?"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했어요."

"너도 나랑 동작 안 맞춰뒀으면 2등 될 수도 있었어. 앞으로는 조심해. 까불지 말고."

언제나처럼 장난을 치며 실없이 웃던 히스토리아는, 그대로 고개를 숙여 내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새까만 머리카락이 돋아난 정수리가 내 시야를 가득 메웠다.

히스토리아는 얼굴을 묻은 채로 작게 속삭였다.

"…졸업 실습, 조심하고."

홱. 언제 약한 모습을 보였냐는 듯, 그녀는 곧장 고개를 젖히며 싱긋 웃었다. 힘찬 움직임에 따라서 길게 땋은 머리카락이 그녀처럼 활발하게 움직였다.

"야! 이번에 끝나면, 네가 갈 곳을 정해야지! 어떤 사관학교를 가냐에 따라서 미래가 바뀌니까!"

"그래. 그것도 고민해봐야지."

"잘 생각해보는 게 좋아! 정 갈 데 없을 것 같으면, 내 부관으로 와! 나는 장성이 될 거니까, 네 자리 하나 정도는 만들어 줄 수 있어!"

불안한 마음을 억누른 채, 밝은 미래를 그리며 신나게 이야기하는 히스토리아. 왜 불안해하는 걸까. 생각을 읽은 결과 탐식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고 있던데. 본능적으로 무언가를 깨달은 걸까.

아니면 그냥 졸업과 이별 그 자체를 조금 두려워하고 있는 건가? 다른 아이들처럼.

잘 모르겠네. 인간의 감정은 워낙 복합적이라.

나 역시, 그녀의 바람에 따라 애써 밝은 척 대꾸했다.

"에이. 그래도 가오가 있지. 어떻게 3등의 부관으로 1등이 가냐."

"2등이라고!"

그래도 지금 밝은 모습은 탐식에 대해 모르기에 가능한 거겠지.

만일.

히스토리아가 탐식에 대해 알게 된다면 어떻게 변할까?

긍정할까, 아니면 부정할까?

잘 모르겠다. 내가 독심술사이지만 미래를 아는 건 아니니까. 단지 추측할 뿐.

"히스토리아. 만약 뭔가 문제가 생기면… 나 좀, 도와줄래?"

"…갑자기 뭔 소리야, 그게. 어디 죽으러 가?"

그러나 말할 수는 없다. 이건 니콜라스도, 란카르트도 꽁꽁 숨겼던 기밀 중의 기밀이다. 일개 학생 역할을 가진 내가 나를 둘러싼 음모를 알아차린다면 분명 그 출처를 추궁당할 터.

독심술을 가졌다는 사실을 들켜선 안 되며, 그럴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가져선 안 된다. 내 유일한 무기를 무용지물로 만들 수는 없으니.

모든 것을 공유하지만, 그렇기에 나는 홀로 고독하다. 왜 하필 나일까 싶어도 대답해주는 이 없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냥, 무서워서. 악명 높은 졸업실습이잖아. 죽는 사람도 왕왕 나온다며."

"겁쟁이처럼 굴긴."

말은 그렇게 했지만 히스토리아는 기쁜 얼굴이었다. 그녀는 풋풋한 미소를 지으며 크게 흔들었다.

"구해줄게. 대신, 내가 너를 구하면 내 부관이 되는 거다?"

"생각해보니 1등이 3등한테 부탁하는 게 아이러니다. 취소. 그냥 나 혼자 해낼게."

"야!"

히스토리아를 향해 크게 손을 흔들며 나는 집합소로 향했다.

가는 사람은 많지만 오는 사람은 몇 안 될, 일방통행의 실습이 시작될 곳으로.

EP.218 과거의 이야기,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 - 4

졸업 실습이란, 시험이나 대련으로는 짚어내기 어려운 재능을 발굴하는 실전 평가다.

달리 말해서, 사관학교에 진학할 수 없는 아이들을 위해 준비한 마지막 기회다.

절박한 아이들은 실전을 방불케 하는 위험한 실습에 자원했다.

실습은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졸업 실습은 종합평가로, 오직 학생끼리 힘을 모아 뗏목을 만들고 강을 따라 내려가, 하류 주둔지에서 교관에게 평가를 받고 보급 물자까지 수령하여 복귀하는 것이 목표였다.

연금술, 제작술, 완력, 체력, 독도법, 조직력, 교섭력 등. 다양한 능력을 평가하기 위해 준비된 실습이었다. 여러 가지 위기가 찾아왔지만 학생들은 적재적소에 제 재능을 발휘하여 극복해냈다.

"첸토. 너 탄도학 공부를 하면서 기상학도 좀 했었잖아? 조금 분야가 다르긴 하지만 어때. 돛을 다는 게 나을까?"

첸토라 불린 소년은 무언가에 찔린 듯 잇소리를 내며 고개를 돌렸다.

"…쳇. 몰라. 내가 어떻게 알아. 중간에 접었는데."

"그래도 여기서 너보다 잘 아는 사람은 없잖아."

"하. 지금 나를 놀리는 거야? 너 있잖아. 휴이. 전교 수석."

"나는 책상놀음일 뿐이야. 직접 무언가를 던져보고, 쏘아보고, 관찰한 너와는 경험치가 다르지."

"…흥. 어린애 장난질이었을 뿐이야. 그냥, 누구나 할 수 있는."

첸토는 투덜거리면서도 바람의 방향이나 돛대의 재질을 살피고는 무언가를 만지작거렸다. 바람이 불자 뗏목은 조금은 더 손쉽게 나아갔다. 미묘하나 확실하게.

"도움은 되네."

"…그닥."

첸토는 참담한 심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무언가를 이루어낸 사람이 보일 법한 태도는 아니었으나, 그의 사정을 이해한 나는 구태여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미 포기한 것을 빛난다고 추켜세워봐야 아쉬움만 커지니까.

뗏목 선단은 천천히 나아갔다. 남부로 뻗어가는 하멜른 강은 그리 크진 않지만 구불구불하고 유속이 느려, 온갖 부유물들이 떠다니고 그 위를 노리는 새나 짐승들도 많았다. 강을 따라가는 시커먼 그림자가 통나무 밑바닥을 긁을 때면 모두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그렇게 한참을 나아가는 도중이었다. 평가를 위해서 이쪽을 지켜보고 있던 교관 한 명이 다음 포인트를 향해 이동하려고 잠시 자리를 비웠을 때 긴급 상황이 일어났다.

수면에 가득한 표류물 때문에 강이 막혔다. 가뜩이나 느린 유속에 나무토막이나 이파리들이 강을 가득 메우고 있으니 뗏목 타고는 전혀 나아갈 수가 없었다.

난데없는 장애물에 아이들은 혼란에 빠졌다.

"유속이 느려지는 지점이라, 표류물이 쌓여서 강을 막았나 봐."

"어쩌지…? 이대로 가다간 밤이 찾아와! 오늘 안에는 하류에 도착해야 하는데."

그리고 자연스레 시선이 나에게로 몰린다. 어떤 방식으로든 해결해주기를 바라며 나에게 기대한다.

학년 초, 모든 아이들이 백지상태로 중등군사학교에 들어왔을 때. 아이들은 각자 꿈과 희망을 품고서 부푼 마음을 안았다.

아이들은 대부분 멋들어진 제복을 입은 자기 모습을 그리고 있었다. 3레벨. 평범한 군국민과는 다른, 진짜 무언가를 이룰 수 있는 특별한 위치.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가장 중요한 한 걸음.

그러나 특별함은 그 숫자의 구애를 받는다. 숫자가 적기에 특별하며, 특별하기에 모두가 바란다.

모두가 그것을 손에 넣을 수는 없다.

나는 한때 마도장교 지망생이었던 이를 불렀다.

"케러팔드. 마법으로 해결할 수는 없을까?"

"우리 마력량이라면, 제식 마법으로는 한 세월이 걸려도 무리일 거야. 란카르트였다면… 또 모르지만."

떨떠름한 대답이었으나 그것은 분명한 사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른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시아티. 저거 배 위에서 치우는 건 무리겠지?"

"…발판이 이래서야, 하루 종일 걸려. 치워서 둘 곳도 없고."

시아티가 발을 쾅쾅 구르자 근처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나름 촉망받는 무투파였으나 성장이 멈춰버린 시아티에겐 신체의 한계를 극복할 만큼의 재능이 없었다. 벼랑 끝에 몰린 그녀는 이 졸업실습에서 평가를 반전시키고자 했다.

발을 구르던 시아티는 고개를 홱 돌려 나에게 쏘아붙였다.

"그나저나, 네가 명령을 내려야 하는 거 아니야, 휴이?"

"나? 왜?"

"왜긴. 이 졸업실습, 사실 너를 위해 마련된 거잖아."

탐식에 대해 아는 건 아니었다. 만일 시아티가 그것을 알고 있었다면 고작 발구르기 하나로 끝나지는 않았을 테니.

시아티는 눈을 게슴츠레 뜨며 나를 떠보았다.

"총교관은 네 지휘능력을 평가하고 싶었던 거겠지. 그러니까, 학년 수석인 네가 굳이 실습에 참가하게 된 거고."

안타깝지만, 그건 표면적인 이유다. 니콜라스는 교관들과 일부 학생에게 그런 소문을 퍼뜨려, 내가 참가해야만 할 이유를 불어넣었다.

억지로 거부하기에는 힘들 정도로 타당한 이유라, 나는 거절하지 못하고 여기까지 와서 표착한 것이다.

아마, 나를 위해 준비되었을 표류물에.

"…지시를 내려 봐, 장군. 명령을 기다릴게."

시아티가 비꼬며 말했다.

동시에 어쩔 수 없다는 듯 쓸쓸함마저도 배어 나온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그녀 역시도 수긍하고 있었기에.

명령을 기다리는 그녀를 위해 명령을 내려주었다.

"배를 강변에 대고, 육지에서 표류물을 치우자. 땅에서 치우는 게 훨씬 안전할 거야."

"그러면 숲에 들어가게 되는데…."

"이 배는 땟목이잖아. 우리가 짐짝처럼 실려서 그렇지 벌써 과적이야. 일단 움직이자. 여차하면 되돌아오면 그만이니까."

결국, 우리는 근처에 배를 대고는 임시 캠프를 차렸다. 위험이 도사리는 숲 안쪽까지 들어가는 건 악수였기에 그다지 멀지 않은 공터에 모닥불을 피우고 옹기종기 모였다.

표류물을 치우는 건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물을 잔뜩 머금은 유목과 그물망처럼 얽히고설킨 나무덩굴, 각종 잔해까지 가득한 그것을 건져내는 건 혈기왕성한 아이들 백여 명이 있더라도 힘겨웠다.

조금 걷어냈나 싶었을 때. 하늘을 보던 아이들이 중얼거렸다.

"…이거, 위험한 거 아니야? 이대로면 밤이 되어버려."

"사실 밤은 이미 왔지. 몇 시간이 지나지 않으면 해가 질 거야."

"밤은 위험한데. 어쩌다 이렇게 됐지?"

그들은 이 상황이 누군가의 음모로 인해 생겨났을 가능성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숲을 조금 헤치자 공터가 나타났다. 누군가가 머물렀던 흔적이 보이는 공터라 훌륭한 캠프를 세울 수 있겠다며 아이들은 한층 기뻐했지만, 그 아래 있는 불길한 운명을 느낀 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밤이 찾아왔다. 짐승의 시간이다. 어둠 속에서 인간은 겁에 질린 채 조그만 모닥불로 자기를 위안했다.

애초에 이런 곳에서 묵을 계획은 없었다. 식수, 식량, 의복 모든 게 부족했다. 저편에 텐트나 모포, 장작 등이 남아있었기에 망정이지 없었으면 흔들리는 배 위에서 밤을 지새워야 했을지도 모른다.

"캠프가 있어서 다행이야. 하마터면 꼼짝없이…."

이 모든 게 시나리오 안에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아이들은 이 불행 중 다행인 상황에 기뻐했다.

군데군데 모닥불을 피운 채로 옹기종기 모였다. 시간이 남자 마음속에서 불안이 싹텄다. 말간 불이 서로의 홍안을 비추는 가운데 아이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어쩌지. 이제 포기해야 하는 거 아니야?"

"어떻게 안 되나? 불을 크게 피워서 교관님을 부르자. 이대로 밤을 지내는 건 위험…."

불을 크게 피우는 건 포기 선언이나 마찬가지다. 교관이 찾아오기야 하겠지만 부정적인 평가는 피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당장 안전해지기 위해선 어쩔 수 없다, 고 몇몇은 생각했다.

그때 첸토가 벌떡 일어서서 외쳤다.

"교관님을 불러선 안 돼!"

첸토의 말에 공감한다는 듯 아이들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시아티 역시 그에 동조했다.

"졸업실습은 아주 중요해! 이건 예상 외의 상황이지만, 이것을 잘 극복해내면 더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거야! 애초에, 우리가 왜 여기까지 왔는데! 3레벨이 되기 위해서잖아!"

"하지만."

"여기서 포기하면 평생 2레벨이야. 노역으로 하루 일하고 하루 풀칠해가면서 쳇바퀴처럼 똑같은 일상을 살 거라고! 그래도 괜찮아?"

2레벨을 할 바에야 0레벨로 산다, 이런 우스갯소리가 있다.

중등군사학교를 졸업한 2레벨 시민은 중등 교육 수준이 필요한 군사 시설에서 노역을 하게 된다. 말이 노역이지, 사실상 복무다.

당연히 타 노역에 비해 위험성이 크며 번거롭다. 일반 노역보다야 보수가 높지만, 어차피 물려줄 수 없는 재산.

"나는 3레벨이 되어야 해. 아니면 의미가 없어! 너희도 그렇잖아!"

더 높은 레벨이라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 저열한 우월감 하나. 심지어 그마저도 어디까지나 감정적인 부분에서 멈춘다. 2레벨이라고 1레벨, 혹은 0레벨을 향해 폭력을 휘두르거나 사적인 명령을 내렸다간 즉각 노역장에 끌려가기 마련이니.

다른 레벨을 차별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군국뿐. 2레벨이나 0레벨이나, 이 군국의 노예이기는 마찬가지.

달라지는 건 3레벨부터.

그 사실을 상기한 아이들은 또 다른 고양감에 휩싸였다.

"그래! 이건 오히려 기회야!"

"이 상황을 헤쳐나가면 더 좋은 평가를 받을 수도!"

"불침번 정해! 아, 암구호도!"

시아티의 연설 덕분일까. 아이들끼리 으쌰으쌰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들뜬 감정은 모닥불처럼 떠올라 춤추다가 사그라들었다.

그들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데, 캐러팔드가 작은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휴이. 이리 와봐."

독심술은 모든 것을 읽는다. 캐러팔드의 용건을 단숨에 읽어낸 나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때 마도장교를 꿈꿨던 그는 란카르트를 신처럼 떠받드는 추종자였다. 그런 그가 어제 란카르트의 부름을 받았다. 란카르트는 평소에 자기를 따르는 그를 불러서 은근히 말했다.

이번 시험에는, 함정이 하나 숨어있다고.

그래서, 그는 가장 먼저 이상한 점을 알아차리고는 나에게 다가온 것이었다.

"내가 발견한 건데."

캐러팔드는 이 밤중에 나를 강가로 데려갔다. 배가 매여 있는 곳 가까이 다가간 수면에 대고 제식 마법으로 빛을 뿜었다. 그가 빛나는 손가락으로 비춘 강 아래에는… 길고 튼튼한 밧줄이 수면 아래 묶여있었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광량이 부족해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달그림자에 비친 수면에는… 이 밧줄이 이어진 직선 위로, 표류물의 선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캐러팔드가 자랑스레 말했다.

"그물이야. 이 표류물들, 그물에 걸려서 멈춰있었어."

"그러게."

예상대로네.

이 지점이 유속이 느려지며 표류물이 쌓이는 지역이긴 하지만, 이토록 시기적절하게 쌓이려면… 역시, 이런 인위적인 조작을 했겠지.

"너도 대충 알고 있었나 보네. 크크. 그래. 애초에 이 미리 준비된 듯한 캠프의 존재부터 이상했어. 표면적인 시험은 하류로 내려가는 거지만 진짜 시험은… 위기 상황에 대처하는 것. 조난 상황에서 슬기롭게 대처하여 살아남는 것이야말로 이 시험의 진짜 목적이지. 안 그래?"

아니다. 슬기롭지 못하게 대처하여 다 죽는 게 이 시험의 진짜 목적이다. 이것이 함정이라는 사실도 알아채지 못하도록.

그런 의미에서 캐러팔드는 란카르트가 보낸 독촉장이었다.

무언가를 파내기 좋아하는 성격. 써먹는 것보다는 지식 그 자체를 알아내며 쾌감을 느끼는 인물. 앞으로도 계속 시험에 숨겨진 진의를 파악하려고 돌아다니겠지. 가만히 놔뒀다간 이 캠프에 숨겨진 비밀, 금기개진까지 파헤칠지 모른다. 아니, 파헤칠 것이다.

캐러팔드, 그는 란카르트로부터 넌지시 금기 비슷한 것까지 전해 들은… 그야말로 시한폭탄.

내가 아이들을 전부 집어삼키기 위해 죽음으로 가장 먼저 내몰아야 하는 존재이고. 그렇게 설계된 인물이나.

란카르트.

너는 지금 여기에 없어. 지금 나에게 들려오는 바람은 오직 캐러팔드의 것이야.

그렇기에 나는 네 뜻을 들어줄 수 없어. 아니, 이런 방식으로는 나를 바꾸지 못해.

나는 도리어 미소를 지었다.

"정답이야, 캐러팔드. 벌써 이것을 알아차리다니. 너 좀 하는구나?"

캐러팔드의 눈이 충족된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역시, 수석! 나도 네가 알고 있을 줄 알았어!"

'썩어도 수석…. 나는 란카르트가 힌트를 줘서 알았는데. 하지만, 그래도! 지금 이곳에서는 내가 2등이야!'

바람이 불어온다.

삶을 향한 열망. 자기가 익힌 지식으로 무언가를 이루어냈다는 기쁨. 동료애와 전우애. 혹은 찾아온 희망.

내가 한 줌의 마력이나 기력을 얻기 위해 그것을 짓밟을 수는 없지.

오히려.

"캐러팔드. 네 예상이 맞아. 이 캠프에는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게 분명해."

"어떤 비밀?"

"나도 다 알지는 못해. 이제부터 찾아야지. 그러니까 캐러팔드, 네가 해주지 않겠어?"

군국은 너희를 버렸다. 어쩌면 나 때문일지도 모른다. 내가 워낙 탐식 최적화 인재라서 니콜라스가 강행해버렸어.

그러나 그걸 내 책임이라고 할 수는 없지. 군국이, 혹은 니콜라스나 란카르트가 획책한 일이니까. 나는 너희를 죽이고 싶지 않아.

이런 말하기는 뭣하지만, 이미 충분히 내 마음의 양식이 되고 있다고.

니콜라스도, 란카르트도. 나를 바꾸고자 하지만 고작 그뿐이다. 그들의 감정은 잔잔하다. 아쉬움과 회한은 고요하게 가라앉는 수면처럼 바닥에 깔릴 뿐.

자기 아쉬울 것 없이 타인만 휘두르려는 차가운 감정에는 흥미가 없다.

오히려….

"나는 할 일이 많으니까, 네가 팀을 꾸려서 조사해줬으면 좋겠어."

"정말? 내가 한다? 나중에 똑바로 보고해줘야 해?"

"물론이지. 내가 뭐가 아쉬워서 네가 한 일을 누락시킬까."

계획이 들통났을 때, 이 문제가 그대로 되돌아와 너희를 덮칠 때 너희가 어떻게 반응할지. 어떤 감정을 보일지. 그게 더 궁금할 뿐이다.

너희도 목을 걸어야지. 그래야 공평하잖아?

"이 사실을 가장 먼저 눈치챈 너만이 그럴 자격이 있어. 캐러팔드. 일단 캠프의 지도를 그리는 것부터 먼저 해볼래?"

"알았어!"

지도를 그리다 보면 알게 될 거야. 이 캠프가 어떤 형태를 이루고 있는지. 아래 깔린 게 무엇인지.

만일 피가 흐른다면, 어떤 모양을 그릴지 말이야.

'봐봐! 나는 벌써 이 시험의 본질을 파악했어. 이걸로 다른 녀석들보다 몇 걸음은 앞서 나갈 거야!'

그 끝에서 얻어낸 진실은 절대 웃으며 받아들일 수는 없겠지만.

나도 가서 준비를 해야겠다. 아이들이 조금 더 분명한 진실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슬금슬금 정보를 풀고 떡밥을 뿌려야지.

아주 피상적인 지식만 있더라도 이것이 금기임을 알 수 있게끔.

EP.219 과거의 이야기,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 - 5

이러쿵저러쿵 일이 벌어진 끝에, 결론만 간단하게 말해서.

나는 나무 덩굴로 만든 밧줄로 꽁꽁 묶였다.

아이들의 얼굴에 떠오른 경악과 분노가 날카로운 창처럼 나를 찔렀다. 그들은 무기까지 치켜든 채로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서로를 위로하고 응원하며 힘을 합쳐 싸우고 있었는데. 그때의 우정과 신뢰는 다 어디 갔는지. 버는 건 힘들어도 탕진하긴 쉽구나.

뭐, 당연한 일이다.

"아이고, 들켜버렸네."

이 기지 한복판에 온갖 짐승을 불러들이는 초대형 페로몬 미끼가 숨겨져 있고, 그게 얼마 지나지 않아 터질 예정이었으며, 그랬다간 불청객 인간 무리를 경계하던 짐승들이 캠프를 쓸어버릴 예정이란 것도.

전부 들켜버렸으니까.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

시아티는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는 혼란에 빠진 그녀를 향해 묶인 채로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왜 그래. 다들 알잖아? 바보가 아닌 이상 모를 수 없는 처지인데?"

스스로 도달한 답은 그 무엇보다 확실해서, 굳이 설득하기 위해 노력할 필요도 없다.

그들이 찾아낸 단서와 엮은 논리, 그리고 서서히 쌓아온 의구심이 하나의 진실로 귀결되니까.

어제 나와 캐러팔드가 어디 갔는지 궁금해했던 첸토는 우리 흔적을 되짚다가 표류물을 잡아두던 밧줄을 발견했다. 아이들은 그 밧줄의 존재를 눈치채고는 이 상황 또한 시험이라 지레짐작하며 기뻐했다. 긴급상황이 아니라 시험의 일부라면, 통제에서 벗어난 일이 일어나지는 않을 테니까. 그렇게 제멋대로 안심하고는 한층 활발하게 움직였다.

그 와중 캐러팔드는 팀을 꾸려 캠프를 뒤졌다. 캠프의 지도를 그린 그는 이곳이 무언가 마법진의 형태와 비슷하다는 사실을 파악하고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것이 퍼즐, 혹은 시험 문제라고 생각한 아이들이 끙끙거리는 동안, 시아티는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 식량과 식수 등을 구해왔다.

캠프 아래에는 반석이 있었고, 얕게 난 홈을 따라 기이한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형태의 마법진에 다들 머리를 싸매며 고민할 무렵.

마침 캠프 텐트 중 하나에서 그 한복판에서 새까만 상자가 나타났다. 그게 단서라고 추측한 아이들이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짐승을 부르는 미끼였다는 사실도 모르고.

미끼에 가득 묻어있던 페로몬이 퍼졌다. 사냥꾼 부모를 둔 아이가 그것의 정체를 알아차리고는 급히 닫으라고 외쳤으나 이미 늦었다.

저 멀리에서 짐승이 날뛰는 소리가 들렸다.

군사 훈련을 받은 백오십여 명의 학생들은 나름 적절하게 대처를 했으나,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적절한 대처.

이것으로 짐승이 지금까지 인간 무리를 습격하지 않은 건, 지금껏 살아남은 짐승들의 타고난 조심성 때문이라는 게 증명되었다.

뿔 달린 사슴이 잔뜩 흥분해서는 침을 튀기며 캠프를 종으로 관통했다. 기병의 돌격에 비견되는 공격이었다. 집채만 한 사슴은 머리에 나무 두 그루를 매달고 휘젓는 거인 같았고, 올가미 하나를 당기는데 열 명이 붙어야 했다.

그 뒤를 따라서 조심스레 배회하던 늑대가 덮쳤다. 은밀한 사냥꾼의 습격을 알게 된 건 희생자가 생긴 뒤였다.

싸움의 기미를 발견한 까마귀와 독수리가 저 멀리에서 배회했다.

열일곱이 죽었다.

미리 함정을 만들어두지 않았다면 훨씬 더 많이 죽었을 것이다.

어쨌든 인간은 그들의 저력을 발휘했다. 하나 된 유대, 적절한 지시, 그리고 처절한 사투 끝에 짐승놈들을 몰아낼 수 있었다.

소중한 친구가 죽었으나 슬픔을 느낄 새도 없었다. 지친 아이들은 바닥에 앉은 채, 죽은 아이들에게서 흐르는 피가 흘러가는 모습을 경악한 채 지켜보았다.

피는 음각된 홈을 따라 주르륵 흘러… 거대한 마법진을 빛내고는 스며들었다.

땅 아래 숨어있었다면 보이지 않았겠지만, 마침 조사하느라 반석을 드러냈기에 보였던 비밀이었다.

모두가 까닭 모를 불길함을 느끼는 와중, 누군가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부상과 감염의 위험이 있으니, 옷을 벗어보는 것이 어떻겠냐며.

아이들은 수긍했고, 의복 패킷을 해제했다.

그리고 내 등에서 불길하게 빛나는 새빨간 자국을 발견했다. 의미하는 바가 너무 명확해서 차마 눈을 돌릴 수조차 없는 그 흔적을.

"마, 말도 안 돼…. 어떻게, 그딴…, 니콜라스가, 우리를 희생양으로…."

모두가 일련의 사태를 이해했다. 나라가 그들을 버리고, 믿었던 리더가 사실 양의 탈을 쓴 늑대이며, 어제까지 웃고 지내던 친구가 팔다리 기괴하게 비틀린 채 죽어있고, 그들도 머지않아 그렇게 되리라는 사실을.

그때, 누군가 그들의 죽음을 취해 힘을 얻으리라는 것을.

"죽여버려!"

누군가 외쳤다. 사슴을 막다가 팔이 부러져 붕대를 감은 아이였다. 그는 눈가가 붉게 충혈된 채 나를 향해 저주를 퍼부었다.

"어차피 여기는 우리를 막을 교관도 없어! 죽여서 어딘가에 묻어버려!"

"그, 그러면 뭐라고 설명해?"

"발을 헛디뎌 강물에 빠졌다고 말하면 그만이잖아!"

"그래! 이건 정당방위야!"

사납게 외치는 이들. 나는 최대한 담담하게 웃어보이며 말했다.

"당연한 판단이야. 이 와중에 내통자라고 예상되는 나를 살려두는 건 어리석은 행동이지. 안 그래?"

"포로면 포로답게 조용히 해, 휴이."

새로이 학생들의 대표가 된 시아티와 캐러팔드는 혼란에 빠진 아이들을 진정시켰다. 특히 나에게 분노한 시아티는 입술을 꾹 다물고는 나를 노려보았다.

"휴이. 나는 너를 좋아하진 않았지만, 최소한 네가 다른 둘보다는 인간적이라고 여겼어. 그런데… 아무래도 사람을 잘못 봤네."

"하필 비교해도 그 둘과 비교하냐. 그래, 시아티. 이 끔찍하고 비인간적인 나를 어떻게 할 생각이야?"

"마음 같아서는 당장 처죽이고 싶지만."

이제 그녀가 설득해야 할 대상은 내가 아닌 다른 아이들이었기에, 시아티는 고개를 돌려서 외쳤다.

"여기서 죽여봐야 아무것도 변하지 않아. 우리는 너를 묶어서 배에 실은 뒤 하멜른에 가서 따질 거야. 니콜라스가 애지중지 감싸고 도는 너라면 좋은 교섭 재료가 되겠지."

"교섭?"

"그래! 금기는 성황청이 눈에 불을 켜고 잡으려는 행위야. 비밀을 지키는 대가로 무언가를 요구할 수 있을…."

"푸하하하!"

나는 묶여있는 채로 크게 웃었다. 폭소가 이어지자 시아티를 비롯한 아이들의 시선이 한데 모였다. 충분히 시선을 끈 나는 웃음을 뚝 그치고는 말했다.

"시아티. 스스로도 믿지 못하는 말 그만둬. 니콜라스는 너희를 다 죽이고 금기를 일으키려고 했는데, 너희가 그 사실을 간파해서 돌아간다고 아하 미안하구나 상으로 3레벨을 주겠다, 이럴 것 같아?"

그럴 리가. 그게 되었으면 애초에 시작도 하지 않았겠지.

"아니, 다 죽이겠지. 금기와 함께 너희들까지 묻으려고, 조금 더 강경한 수단을 쓸 거야."

"그러면, 어쩌라고! 여기서 너에게 죽어줘?!"

"무엇을 할지는 너희 선택이지만, 이왕 할 거라면 최소한 너 자신이 믿는 바를 따라. 네 선택은 현실성은커녕 당장 현실조차 부정하는 망상에 불과해."

"잘난 듯이 말하긴…!"

시아티는 성큼성큼 다가와서 내 멱살을 잡았다. 묶인 채로 목이 이끌리니 아파서 켁켁거렸으나, 그녀는 나의 상태는 신경도 쓰지 않고 말했다.

"너를 죽여버릴 거야! 네가 잘났으면 다야?! 네가 아무리 잘났다고 해서, 우리 운명을 결정지을 수는 없어…! 나는, 우리는! 네 먹이가 되기 위해서 지금까지 노력해온 게 아니라고!"

말을 할수록 거센 외침은 점차 흐느낌으로 젖어 들었다. 멱살이 늘어날 듯 붙잡은 시아티는 투명한 눈물을 흘리며 나를 원망했다.

"왜? 어차피 너는, 이미 사관학교에 갈 수 있잖아! 그것만으로도 모자라? 우리가 그토록 바라는 3레벨에 이미 도달했으면서…! 더 큰 것을 원했어? 그보다 더 뛰어나지고 싶었어? 우리를 다 죽여서라도?"

한껏 원망을 토해낸 뒤 남은 건 시꺼멓게 눌어붙은 감정이었다. 마음을 죽인 듯한 어두컴컴한 눈이 나를 올려다본다.

"그러면 너도… 죽어. 그게 공평하잖아."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아, 이건 위험하다. 이대로 계속 있다간 진짜 휩쓸려버린다.

금기가 괜히 금기일까. 지금까지 쌓아왔던 인간에 대한 믿음 그 자체를 부정하기에 금기.

그 부정당한 쪽이 된 시아티는 이제 완전히 증오와 절망에 사로잡혀 주먹을 쥐었다.

…그래서, 히스토리아.

지금이 나를 구해줄 마지막 기회야. 만일 네가 구해주지 않으면.

나는.

졸업 실습을 떠난 교육생들이 조난당했단 사실은 순식간에 전해졌다. 그 사태에 깊은 책임을 통감한 니콜라스는 자기 측근만 데리고 먼저 하멜른 중등군사학교를 뛰쳐나갔다. 본대는 구조선에 물자를 싣고 니콜라스를 뒤따르기로 했다.

'도와달라고 하더니. 진짜 무슨 일이 있을 줄이야. 설마 이것까지 예견한 거야?'

히스토리아는 약속을 잊지 않았다. 그렇기에 졸업 실습에 문제가 생겼다는 사실을 안 순간, 총 한 자루를 등에 메고 하멜른 강까지 뛰어가 나룻배 하나를 빌렸다.

그녀가 노를 저으면 강에 양옆으로 갈라지는 이상한 파도가 쳤다. 물을 밀어내는 게 아니라, 수면을 힘으로 가라앉혀 경사를 만들고 그 위를 미끄러지는 듯한 노질이었다.

나룻배는 강 위를 말 그대로 미끄러지며 쑥쑥 나아갔다. 히스토리아는 순식간에 표류물이 가득한 강가에 도착하여, 몸을 숨기고 상황을 살폈다.

그녀가 목격한 광경은… 기묘했다.

'휴이? 왜 묶여있는 거야? 애들 꼴은 뭐고?'

사태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하나도 알 수가 없는 상황. 그 와중 소년은 교수대에 매달린 죄수처럼, 혹은 십자가에 꿰어 죽은 처음의 성녀처럼. 모두의 우러름 속에서 구속당해있었다.

그 주위를 둘러싼 아이들은 절망과 분노 속에서 무언가를 성토하는 듯했다.

뜻밖의 사태에 어찌 반응해야 할지는 몰랐지만, 히스토리아는 일단 총을 꺼내들었다.

목표는 나. 그리고 내 곁에 있는 시아티.

'시아티. 네가 왜 휴이를 붙잡은 건지는 몰라. 하지만, 그를 죽이려 든다면 반드시 막겠어.'

저쪽의 의도를 파악하기 전까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편이 좋다. 별거 아닌 일이라면 그냥 넘어가게 될 것이며, 위험한 상황이라면 히스토리아가 등장했을 때 더 위험해질 수도 있으니.

은신술이나 잠입술처럼 조용하고 은밀한 기술은 히스토리아의 요란한 기공에는 맞지 않는다. 대신, 히스토리아는 시야가 닿지 않는 사각에서 총을 겨누었다.

총의 가늠쇠로 시아티와 나를 본다. 나는 아직 무사하고, 심지어 묶여있으면서도 입가에는 해맑은 미소를 띠고 있다.

평소처럼 장난스러운 얼굴에 히스토리아는 긴장이 다 풀릴 뻔했지만, 다시 호흡을 가라앉히고 조준했다.

'소리는 잘 들리지 않네. 대충 예상하건대, 누가 죽어서 휴이를 원망하는 모양인데….'

아무리 내가 리더라고 한들, 그래도 고작 그거 가지고 사람을 저리 묶어놓을까?

같은 의문에 도달한 히스토리아는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시아티를 조준한 채로 그녀의 전신 근육을 팽팽하게 긴장시켰다.

단, 섣불리 나서거나 쏘지 않았다.

시아티 역시, 히스토리아의 동기다. 상대가 적이거나 짐승이었다면 바로 바람구멍을 내주었겠지만, 일단 구면이라서 손이 모질지 못했다.

물론 꼭 그런 이유만 있는 건 아니었다.

'휴이. 이제 알겠어? 여차할 때 믿을 건 자신의 힘이야. 너는 기공에 조금 더 관심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어.'

만일 내가 목숨의 위협을 느낀다면, 기공의 중요성을 깨닫고 그에 더 열중할 것이라고. 그런 생각에 잠시 나를 방치했다.

그 탓에 늦었다. 나는 군국을 향한 증오와 절망에 충분히 물들어버렸으니.

나와 시아티는 대화를 나누었다. 지루한 시간이 흘렀다. 심각한 분위기가 다 어디 갔는지, 대화는 유창했고 또 내가 짓는 표정이 다채로웠다.

히스토리아가 보기에, 나는 꼭 이 상황 자체를 즐기고 있는 듯 보였다.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뭐야. 내 도움이 필요한 거 맞아?'

도움이 필요했었어. 이제는 아니지만.

'그러니까, 처음부터 기공을 익혔다면. 고마움도 모르고 너를 배신할 아이들을 위해 쓸데없는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다면. 너는 묶여있지 않아도 됐잖아. 칫, 불안하게 하긴.'

몸은 묶여있지 않아. 이런 로프로는 나를 묶을 수 없으니까.

뒤로 묶여있던 손을 펼친다. 뻣뻣한 덩굴로 묶은 어설픈 매듭이다. 덩굴이 스르르 풀리며 양팔은 언제 묶여있었냐는 듯 어깨 위로 올라왔다. 당황한 아이들이 깜짝 놀랐으나, 나는 손을 내밀어 그들을 진정시켰다.

'심지어 묶여있지도 않아? 점점, 내가 바보가 되어가는 기분인데.'

히스토리아에겐 전부 동기에 구면이었다. 아무리 하찮게 본다고 한들 그 역시 동기의 범주에서다. 그들을 공격할만한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긴장을 푼 히스토리아가 잠깐 멈추었던 호흡을 다시 재개하던 때였다. 지근거리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멧돼지 여자."

철컥. 총구가 순식간에 돌아갔다. 그녀의 총구가 향한 곳에는 란카르트가 무표정하게 서 있었다.

그는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아리송한 얼굴로 히스토리아와 내쪽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히스토리아가 총구를 내리며 물었다.

"아, 씨. 깜짝이야. 너, 뭐야?"

"내가 할 말이다. 나야 니콜라스와 같이 출발한 선발대이니 여기 있지만. 너는? 너는 대체 뭐지?"

"나는 후발대."

"후발대가 어떻게 벌써?"

"너희가 느린 거지. 노를 젓고 온 나보다도 늦게 와서야 어쩌겠어?"

란카르트는 마침 강가에 있는 나룻배와 커다란 노를 발견하고는 중얼거렸다.

"미친, 또라이 멧돼지…."

그래도 히스토리아가 여기 온다는 것 자체는 예상 내였다. 란카르트가 니콜라스를 따라온 이유이기도 했다.

'이 멧돼지는 짐승마냥 기분파에다, 발정기인지 휴이 상대로는 더욱 노골적으로 관심을 쏟는다. 탐식이 일어나기 전에 떨어뜨려 놓아야 해.'

"니콜라스 총교관의 지시야. 휴이 문제는 교관 측이 해결할 테니, 너는 잠깐 빠져있어."

"해결? 무슨 해결?"

'탐식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는지 확인하고, 혹 남은 게 있다면 직접 처리하기 위해.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은 도대체….'

상념에 빠진 란카르트를 향해 히스토리아가 이죽거렸다.

"또, 또. 되도 않는 대가리 굴리지. 재능 없는 머리로 같잖은 수작 부리지 말고 똑바로 말 안해?"

"이건 너에게는 없는 개념인 생각이라는 거다, 잡년."

서로 사이 좋게 폭언을 내뱉은 뒤, 란카르트는 짜증스럽게 대답했다.

"이 상황을 정리해야 해. 그 이상은 말하지 않겠어. 말해도 네가 이해하지 못할 거고."

"왜, 갑자기. 숨기는 일이라도 있어?"

"그래."

란카르트가 흔쾌히 수긍하자, 히스토리아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지었다.

"…허. 당당하네. 그러면 더욱 빠지고 싶지 않아지는걸."

'쯧. 고집만 더럽게 세고 설득도 통하지 않으니 짜증나는군. 힘으로 배제하고 싶어도, 여기서 싸워보았자 결판도 나지를 않겠지. 그렇다면.'

"휴이를 위한 일이야."

"뭐? 휴이를 위한 일?"

"네가 알까 모르겠지만, 아니, 그냥 모르겠지. 이 평가는 사실 휴이를 위해 준비된 시험. 네가 지켜보고 있다면 그 시험의 의미가 퇴색돼."

"시험이라고?"

"그래. 이것, 바로 이것으로, 휴이는 한 단계 더 나아갈 거다."

와아. 틀린 말은 아니네. 나를 위한 장소이긴 했으니까.

나를 언급한 덕분에 히스토리아는 화를 누그러뜨렸다. 내쪽과 란카르트를 번갈아보던 그녀는 잠시 고민하고는, 이제 해방된 나를 보고는 작게 혀를 찼다.

'…란카르트 이 놈은 마음에 안 들지만, 그래도 일처리는 확실한 녀석이야. 휴이를 반쯤 떠받들고 있으니 해칠 리는 없어. 거기다 총교관이 왔다면 뭐. 사태는 다 끝났겠지.'

수긍한 히스토리아는 어깨에 장총을 걸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경고하는데, 나한테 명령하지 마. 내가 알아서 할 거니까."

"대꾸할 힘이 있으면 저 강변 따라 맴도는 짐승이나 잡아먹던가. 너에게 딱 어울리는 일인데."

일단 히스토리아를 떼어놓는다는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 란카르트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여전히 혼란스러운 얼굴로 내 쪽을 지켜보았다.

'탐식을 거부한 것도 아니야. 그렇다고 수락하지도 않았다. 도대체, 너는 무엇을 하려고 하는 거지, 휴이…?'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

둘이 사담을 마치는 동안, 스스로 밧줄을 풀고 나온 나는 아이들의 설득을 끝마친 상태였다.

시아티는 내 말을 부정하고 싶은 듯이 크게 외쳤으나.

"…아니야. 시아티…. 아니야."

내 이야기를 듣고 있던 다른 쪽 대표자, 캐러팔드는 눈을 꼭 감고는 고개를 저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휴이는 우리에게 힌트를 줬어. 그물의 존재를 알고도 모두에게 알렸고, 우리보고 캠프의 비밀을 파헤쳐보라고 했어. 가장 먼저 뛰어들어 페로몬 미끼가 든 상자를 닫고, 직접 들고 가서 강에 던져버린 사람도 휴이야. 또 휴이가 함정을 미리 설치해 두자고 시키지 않았다면 사람은 더 죽었을 거야. 만일, 그가 우리를 죽이고자 했다면…."

더.

혹은 다 죽었을 거라고. 캐러팔드는 설명을 마쳤다.

그리고 침묵하던 다수가 그의 뜻에 동조했다.

꼬박 하루를 같은 장소에서 지냈다. 언제나 지시를 내리고 불철주야 일했던 나에게 무언가를 꾸밀 시간이 없었다는 걸 알기에. 내 행실을 보았기에 설득이 통한 것이다.

시아티도 그것을 믿지 않을 만큼 멍청하진 않았다. 단지, 그 이상으로 화가 났을 뿐. 화낼 대상을 잃은 시아티는 두 손을 꽉 쥐며 외쳤다.

"그러면! 그러면, 뭐냐고! 도대체 뭔데…!"

"궁금하지? 나도 궁금해. 솔직히 말해서, 나도 여기 오기 전까지는 뭐가 기다리고 있는지 몰랐으니까."

이건 분명한 진실이다. 탐식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 표류물과 미끼용 캠프, 그리고 페로몬으로 탐식을 발동시키려고 했을 줄이야.

성공적, 이라고 하기엔 희생자가 있었지만. 어쨌든 극복해냈다. 다만 이건 어디까지나 첫 번째 고비.

모두를 죽이려고 했던 진짜 악의는 지금 다가오는 중이니.

"이 대답을 해줄 수 있는 건, 한 사람밖에 없어."

"누군데…?"

"니콜라스 총교관. 이 모든 것을 계획한, 하멜른 중등군사학교의 수장."

아이들의 머릿속에 훈훈하면서도 엄격한 인상의 제복 남성이 떠올랐다. 그는 교육에 열성적이었고, 아이들을 위해 시간과 노력을 쏟았으며, 매질하고 체벌을 가할지언정 절대 굶기거나 다치게 하지는 않았다. 비교적 인격자라고 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지금에 이르러선… 인간의 껍질을 뒤집어 쓴 괴물처럼 보일 뿐이었다.

"자, 그러니까 준비하자, 얘들아."

나는 니콜라스를 안다. 그는 좋은 교육자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군국 장교의 특성으로서 존재한다. 그의 교육관은 나라를 위한 것. 교육은 나라를 위한 인재를 만들어내기 위해 나라가 가꾼 밭.

어설픈 백 명보다 그 힘을 일부 취한 나 하나가 더 뛰어나리라 생각한 모양이지만.

단언컨대, 확실하게 틀렸다.

나는 백 명 속에 있을 때 더 뛰어난 사람이라서 말이지. 그들의 힘을 하나로 뭉쳤다고 한들, 그건 책을 찢어서 땔감으로 쓰는 일과 다를 바 없다.

지식의 수호자는 양서를 가득 담은 도서관이지, 그 앞을 지키는 사서가 아니다. 사서를 위해 책을 찢어 불을 땐다니 주객전도나 다름없다.

물론 책을 땔감으로 쓰는 만행을 저지른다면 누구보다도 사서가 가장 크게 화를 내겠지만 말이다.

"저 페로몬 미끼가 든 상자는 몇 시간 뒤에 저절로 열리는 구성이었어. 잘은 몰라도 그 시간이 아마 결행시각이겠지. 그런데, 니콜라스 총교관이 이런 일을 저지르고도 그냥 방치만 해둘까? 예상컨대, 니콜라스 총교관은 머지않아 찾아올 거야."

"초, 총교관님이…? 직접?"

"그래. 이 실습, 표류물을 묶어둔 그물, 금기가 숨겨진 캠프와 언젠간 터질 페로몬 상자… 이 무덤을 직접 준비한 그가 직접 찾아오지 않으면 금기라는 단어가 다 무색하지."

확신은 없었다. 조금 전 히스토리아와 란카르트의 생각을 읽지 앟았다면 단언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어쨌든, 이제 정보를 얻었으니 준비해야겠지.

"니콜라스 총교관이 찾아왔을 때, 무엇을 물어볼지. 어떻게 환영하고, 맞이하고, 질문하고 대답해야 할지. 우리는 미리 준비해야 해."

군국에 버림받고 초점 잃은 눈동자들을 둘러보며, 나는 목소리를 낮게 깔고 모두에게 전했다.

"이야기를 듣고 납득할 수 있도록."

나는 알지만, 너희는 모르니까.

모든 의구심과 절망, 탈력감을 뒤로 한 채. 아이들은 일단 일어섰다. 그들은 조금 전 친구의 시체를 묻은 손을 꼭 쥐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모두를 향해 힘차게 말했다.

"우선, 함정부터 만들까?"

대화수단으로 말이야.

EP.220 과거의 이야기,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 - 6

총교관 니콜라스는 그의 최측근 부관만 데리고서는 캠프를 찾았다. 이곳이 위험천만한 숲이라는 사실을 신경도 쓰지 않고 뛰어왔는지 그는 옷과 머리카락에 부러진 나뭇가지와 나뭇잎을 잔뜩 붙이고있었다. 겉모습만 보면 마치 학생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모범적인 교육자 같았다.

실상은 전혀 달랐지만.

'만신창이가 된 아이들. 몇 남지 않은 숫자. 저기 죽어있는 짐승의 사체. 성공인가…싶지만. 뭔가 이상하다.'

처참한 캠프의 모습을 본 니콜라스는 다급히 가장 멀쩡해 보이는 교육생에게 다가갔다. 본래라면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소녀의 정체는… 구 전투장교 지망생이었던 시아티였다.

"시아티 교육생. 무슨 일이 있었는지 간략하게 보고하도록."

내 말대로 니콜라스가 정말 찾아와서 놀랐던 모양이다. 멍하니 서있던 시아티는 니콜라스에게 형식적인 경례를 하고는, 시선을 땅으로 내리깔며 우물거렸다.

"…표류하는 바람에 이곳에서 캠프를 차렸습니다. 그런데, 이 캠프 아래에 페로몬 미끼가 숨겨져 있었습니다. 아마 사냥꾼들이 짐승을 잡기 위해 만든 덫이었겠죠. 그것이 열리자… 분노한 짐승들이 저희를 덮쳤습니다."

연기 더럽게 못 하네. 땅만 보고 우물거리라고 말해서 다행이다. 최소한 대답할 기운도 없는 척은 할 수 있으니까.

'미끼의 존재를 알고 있다니? 원래 이들은 이유도 모른 채 짐승에게 휩쓸렸어야 했는데. 아니, 그보다. 시간이 아직 안 되었는데 어째서 미끼가 벌써 작동한 거지? 그렇다면?'

니콜라스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핏자국이 가득한 캠프에는 죽음의 흔적만이 가득했다. 특히 나무에 뿌려진 핏자국과 무언가를 묻은 듯 대충 덮은 구덩이는 조금 전에 벌어진 참상을 다 알려주는 듯했다.

그의 계획대로 충분한 피가 뿌려졌지만… 정작 중요한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어째서 휴이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거지? 설마.'

이 모든 게 헛고생이 될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휩싸인 니콜라스는 곧장 시아티를 다그쳤다.

"휴이는. 휴이 교육생은 어디 있지?"

가타부터 말도 없이 나를 찾는 니콜라스의 태도. 이것만으로도 확실해졌다. 이 졸업실습이 누구를 위해 준비되었는지, 누가 준비하였는지를.

연기를 맡은 시아티가 평정을 잃었다. 분노로 머리가 새하얗게 표백된 그녀는 내 조언조차 잊은 채로 니콜라스를 노려보았다.

"…왜, 가장 먼저 그를 부르시는거예요? 지금 없어진 학생들이 몇 명인데, 몇몇이 이 밑이 묻혔는데! 왜 하필 휴이부터 부르시는 거죠?!"

예상치에서 벗어난 격한 대응이었다. 만일 니콜라스가 그 태도에서 위화감을 느끼면 조금 곤란해질 것이다.

그러나 니콜라스 역시도 혼신의 계획이 수포가 되었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심리적으로 몰린 상태였다.

"당연한 일 아닌가! 휴이는…!"

그래도 금기에 대한 내용을 언급하지 않을 만큼의 분별력은 있었기에, 니콜라스는 간신히 이성을 되찾고 말을 가렸다.

"학년 수석으로 사관학교 입학이 확실시된 인재이자, 졸업 실습의 리더다. 내가 원활한 보고를 위해 그를 찾는 게 무슨 문제가 있지?"

"하, 그래요. 우리가 몇 죽어도 상관없다는 거군요…!"

"시아티 교육생! 귀 교육생이 겪은 일에는 유감을 표하나, 귀 교육생은 현재 보고하라는 나의 명령에 불복하는 중이다. 내 인내심을 시험하지 마라."

니콜라스의 호통에 시아티는 자기 입술을 꾹 깨물고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는 미리 준비한 대사를 말하기 시작했다.

"휴이는… 저희를 위해 스스로 희생했습니다."

"…음?"

니콜라스는 설계자. 이 무대를 준비하고 각본을 써 내려가며, 제멋대로 배역을 정해 이야기의 결말을 그렸다.

그러나 아무리 치밀하게 계획했다고 한들, 막이 오른 순간부터 그는 한 명의 관객일 뿐이다. 니콜라스는 이 연극이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랄 터이나, 가끔 연극은 설계자의 예상을 배반하고 각본을 뛰어넘는 무언가를 보여주곤 한다.

시아티는 무대 안으로 뛰어올라온 그를 향해 미리 말을 맞추어둔 대사를 꺼냈다.

"저희들이 갑작스러운 짐승의 습격에 대응하는 동안, 휴이는 이 상황이 페로몬 미끼 때문에 일어났다는 사실을 한 발 먼저 깨달았습니다. 이 캠프를 조사하다가 어딘가에서 미끼를 발견한 그는, 그 상자를 끌어안고는 괴성을 외치며 강가를 향해 달렸습니다. 우리를 공격하던 짐승들은… 전부 휴이를 따라가고. 저희는 남아서 생존자를 추슬렀습니다."

"뭐…?! 휴이 자신이 미끼가 되었다고?"

"그렇습니다."

시아티는 참담한 표정을 숨기려는 듯 팔을 뒤로 모으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동안 니콜라스는 예상을 벗어난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연극은 그의 손에서 벗어났다. 현실은 그의 기대를 배반했다. 니콜라스는 커다란 기대를 품고 있었던 만큼 끔찍한 패배감을 느꼈다.

평범하게 찾아오는 실패를 맞이해 니콜라스가 택한 방법은.

부정하는 것이었다.

"말도 안 돼! 휴이는 그럴 녀석이 아니다. 휴이처럼 영악한 녀석이, 너희를 위해 희생할 리 없어!"

"…네?"

"히스토리아와 란카르트. 그 둘 사이에서 수석을 차지하려면 단순히 뛰어나서는 안 돼! 그 둘마저 제 편으로 만들어 이용할 생각마저 해야. 인망을 얻으면서 영악하게 굴어야만 도달할 수 있는 위치! 휴이는 그걸 해냈다. 그런 그가, 고작 너희 따위를 위해 희생할 리가 없어!"

니콜라스는 핏발 선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직까지 살아남은 아이들은 몸에 익은 공포감에 감히 시선을 마주치지 못했다. 총교관 니콜라스가 뿜어내는 기세가 그토록 무서웠기 때문이다.

총교관 니콜라스 대령. 하멜른은 그가 담당하는 곳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서남부 지역의 초중등학교를 총괄하는 총교관.

하멜른에 히스토리아와 란카르트가 동시에 들어온 건 우연이 아니다. 총교관 니콜라스가 초등시민학교에서부터 두각을 보였던 둘을 이곳에 뫘기에 이루어진 것.

상층부에서도 니콜라스 정도의 능력은 되어야 학생을 정확히 평가할 수 있다고 판단할 만큼, 출중한 능력이 있기에 총교관의 자리에 오른 걸물이다.

지위도, 능력도, 쌓아온 경험도 차원이 다르다. 여기 있는 아이들이 전부 고등사관학교에 진학한다고 하더라도 니콜라스의 발끝만큼도 도달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니콜라스의 사나운 기세에 아이들은 기가 죽어서 고개를 숙였다. 그 위로 니콜라스의 격노한 목소리가 내리깔렸다.

"차라리 너희가 희생했어야지! 이왕 누군가 죽을 거라면! 그 대신 너희가 죽었어야 했다! 어째서 너희가 살아남은 거냐!"

생명의 위기를 간신히 견디고 난 이후 찾아온 총교관이다. 몇몇 아이들은 이 모든 게 끔찍한 악몽이라고 믿고 싶어했다. 사실 군국이 그들을 버리지 않았기를, 무언가 오해가 있기를 차라리 희망했다.

그러나 니콜라스가 내뱉은 말은, 그 일말의 희망을 짓밟는 것이었다.

"그래서 저희를 다 죽이려고 했습니까! 휴이 그 녀석 하나를 위해?!"

반발심이 솟아난 시아티가 고개를 홱 들었으나, 그녀의 눈에 비친 건 니콜라스가 섬뜩한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이었다.

"…오호라. 그렇군. 너희는…이 시험에 대해서 알아차린 것이로군."

반쯤 광기에 잠긴 듯한 얼굴. 겁에 질린 시아티가 주춤거리며 물러나자, 니콜라스는 입술과 고개를 기이하게 뒤틀며 대충 묻어놓은 듯한 구덩이를 흘끔거렸다.

"어쩌다 알게 되었지? 죽은 이를 위한 무덤을 파다가 반석이라도 발견했나?"

"마, 말해줄 것 같아…?"

"'무엇'을 알고 있는지 아직 묻지 않았다, 시아티 교육생. 누군가를 속이려면 네가 아는 사실을 머릿속에서 지우고 있도록 하여라…."

그러면서 그는 뒤따르는 부관을 향해 손짓했다. 부관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는 니콜라스의 뒤를 따랐다.

"물론. 더는 그 가르침을 쓸 일이 없겠지만 말이다."

서늘한 살의가 시아티와 다른 아이들을 향했다. 아이들은 겁먹은 병아리처럼 시아티의 뒤로 옹기종기 모였다. 숫자가 서른이 넘지만 그들의 우세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세크릭."

"네. 총교관님."

"저들을 전부 묻겠다. 거들어라."

스릉. 세크릭이라는 이름의 부관이 군도를 꺼냈다. 아이들에게 지시를 내리기 위해 사용된 군도가 칼날의 방향을 바꾸어 아이들을 가리켰다.

칼날에서 풍기는 살의를 읽은 시아티가 외쳤다.

"이게 무슨…! 설마, 우리를 다 죽일 셈입니까, 총교관!"

"너희들은 어차피 죽을 운명이었다. 방법만 조금 번거로워졌을 뿐."

니콜라스도 기다란 장검을 뽑아 들며 서늘하게 대답했다. 칼 손자루에서부터 시작된 어두컴컴한 기공이 불꽃처럼 칼날을 감싸고는 솟아올랐다. 예정에 없는 생존자를 처단하기 위해.

아이들은 점차 물러났으나, 이 뒤쪽은 강이다. 저편으로 도망치려면 강에 뛰어들거나 니콜라스를 넘어서야 했다.

둘 다 불가능에 가까운 일.

"도망쳐봐라. 이 군국에 그럴 장소가 있다면 말이지만."

주춤주춤 물러나던 아이들을 따라 니콜라스와 그의 부관이 걸어왔다. 한 걸음 한 걸음이 확고한 살의로 가득 차 있었다. 그렇게 걸어가던 그는.

함정을 밟았다.

"서프라이즈입니다, 총교관!"

그 발에 무게가 실리기 직전, 내가 무너진 텐트를 박차고 일어섰다. 뜬금없는 등장에 놀란 니콜라스는 함정에 대응하지 못했다.

그 직후, 숨겨져 있던 올가미가 그의 발목을 낚아챘다. 큰뿔사슴조차 쓰러뜨릴 수 있게 만들었던 올가미 덫이 그를 붙잡았다….

다른 게 있다면, 그는 손에 무기를 든 인간이었다는 점이다.

"흡!"

기다란 장검은 그 길이에 맞지 않을 정도로 민첩하게 움직였다. 서걱, 하고 발목 높이에 있던 올가미가 순식간에 잘려나갔다. 여력이 남은 검격이 땅에 길게 새겨졌다.

하지만 함정은 하나로 끝나지 않는다.

"서프라이즈 투."

그 올가미는 다른 무언가와 연결된 것. 밧줄이 끊어짐과 동시에 제멋대로 걸쳐져 있던 기다란 통나무가 니콜라스의 뒤통수를 노리고 떨어졌다. 후웅, 묵직한 소리가 들렸다.

다만 기공을 익힌 그에게는 너무 느릿한 공격이었다.

"하찮은 수."

거합. 커다란 통나무가 일격에 잘렸다. 이것으로 함정의 연쇄고리가 끊겼다.

만일 옆이나 아래로 피했다면 서프라이즈 3, 4, 5까지 차례로 겪었을 텐데. 그냥 베어버릴 줄은. 썩어도 대령이라 이건가.

"뭐, 그래도. 한 건은 했으니까요."

픽, 휘리릭. 내가 단검을 뽑아 들었다. 세크릭이라고 불렸던 그의 부관이 옆구리에서 피를 뿜었다.

"커헉!"

"자자. 잠깐 누워 계세요."

니콜라스만큼 대응이 민첩하지 못했던 부관은 올가미에 이끌려 내 코앞까지 미끄러졌다. 본능적으로 몸을 보호했지만 나는 그의 방어를 비집고 옆구리에 단검을 박아넣었다.

미약한 기공이어도 기공은 기공. 칼날은 그의 빗장뼈 사이에 틀어박혔다. 단검을 타고 흐르는 피는 흙을 타고 스며들어… 어디론가로 향했다.

"너, 너, 휴이…!"

"쉬잇. 내 몸의 양식. 가만히 있어요. 죽어버리기라도 하면, 피가 잘 안 나온단 말이에요."

아직 죽진 않았으나 서서히 그에 다가가는 부관을 뒤로하고, 나는 단검을 곧추세우며 니콜라스를 향해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니콜라스 총교관님?"

"도대체. 어떻게. 아니."

휙, 휙. 그의 시선이 나와 시아티, 그리고 그의 발아래 있는 함정으로 향했다. 짧은 순간 내 미소에서 무언가를 파악한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자기 얼굴을 짚었다.

"…그런가, 휴이. 너는 전부, 알고 있었나. 그리고 어리석은 선택을 한 것인가…!"

"어리석은 선택이라뇨? 좀 이상한 말인데요."

"너는 가만히만 있으면 되었다! 금기는 내가 저질렀고, 너는 모른 척 실패자들의 죽음만 취하면 되었어! 내가 모든 것을 짊어지고 대신했는데…! 어떻게, 그것을 마다할 수가 있지?!"

어떻게 마다하기는. 이렇게.

내가 신호를 보내자, 강둑 아래쪽에서 몸을 숨기고 있던 아이들이 일제히 올라왔다. 그 숫자는 무려 백사십여 명. 각자 급조한 나뭇가지에 단검을 묶은 창을 들고는, 분노와 두려움으로 몸을 떨면서 이쪽에 가세했다.

"이런 방식으로 마다했죠."

순식간에 불어난 아이들. 이 대부분이 니콜라스에게 증오의 시선을 보내고 있다. 니콜라스는 멍청하게 중얼거렸다.

"거의 다… 살렸다니."

"거의 다 살렸다니요. 아까운 목숨이 열일곱이나 죽었어요. 제게 있어서도 큰 손실이라고요."

니콜라스는 나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눈치였다.

"열일곱! 한참 부족하다. 한참! 네 기력이 전혀 늘지 않았잖나!"

"칭찬해주세요. 기력은 얼마 늘지 않았음에도, 큰뿔사슴이랑 부관 한 명은 간단하게 담가버릴 정도니까."

나는 싱긋 웃으며 칼날을 빙글 돌렸다. 거기에 맺힌 피의 색은, 뿔과 발톱에 당한 아이들이 죽어가며 흘린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탐식의 영향일까? 직접 찌른 탓인지, 무언가가 내 몸으로 스며드는 것 같다. 어둡고 더럽혀진 탁한 기운이 생체 단말을 경유하여 혈관 틈으로 들이닥친다.

그 기운이야, 절대적인 총량으로 따지면 보잘것없지만… 애초에 털끝만큼의 기력과 마력을 가진 나에겐 확연히 느껴질 정도의 크기.

다만.

"퉤. 별로네. 고작 이런 걸 준비해뒀다고 으스대신 거예요? 차라리 마력초를 피우고 말지. 그건 맛이라도 있다."

니콜라스는 일련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어긋난 극본도, 그 아래서 빠져나온 나의 존재 자체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째서지, 휴이?"

"어째서일까요, 니콜라스?"

"너는 약하다. 그 기공으론, 그 마력으로는 절대 어느 단계 이상 올라가지 못해. 주어진 능력을 다루는 데에는 탁월하나, 선천적으로 적은 기력과 마력은 두고두고 너를 얽매는 족쇄가 될 것이다! 나는 네 족쇄를 풀어주려고 한 거야!"

놀랍게도, 내가 그의 신뢰를 배신하고 부관을 칼로 찌른 지금마저도… 그는 진심으로 나에게 호소하고 있었다. 나란 인재가 어리석은 선택을 한 게 아깝다는 듯이.

"누군가를 다루기 위해선 최소한의 자격이 필요하다. 그게 위엄이고, 힘이다. 아무리 뛰어나봤자 힘이 부족하면… 그 무엇도 이룰 수 없어. 너라면, 자기 한계를 누구보다도 통감했던 너라면 이해했을 터!"

"물론, 이해해요. 총교관님. 어떻게 모를까요."

니콜라스는 진심이었다. 아무리 총교관이라고 한들 금기를 그리 가벼운 마음으로 저지를 수는 없다. 3년 동안 내 능력을 관찰하며, 내가 부족한 부분이 무엇인지 파악한 그는 절실히 내가 더 위대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 나를 위해, 군국을 위해.

하지만, 그게…. 아무리 나라를 위한다고 한들. 본질적으로 타인을 향한 바람일 뿐이다. 자기를 다 쌓고 남은 것을 선심쓰듯 건네는 여윳돈이라고나 할까.

평범한 사람이라면 그런 여윳돈도 고맙겠지만, 나는 독심술사. 자투리 마음으로는 움직이지 않는다.

"그런데, 니콜라스. 당신이 마음을 막 포장해서 그런데… 사실, 당신의 진심은, 어디까지나 자기는 안전한 상태에서 등 따숩고 배부른 채 앉아 있어야만 나오는 거잖아요? 마음이 너무 가볍고 치사하지 않아요?"

어찌 보면 당연한 말이다.

나는 생각을 읽는다. 마음에는 그 크기를 계량할 단위가 없지만, 그래도 나는 독심술사인만큼 적당히 감정의 크기나 깊이를 비교하곤 했다.

그 결과, 당연하게도. 무대 바깥에 있던 니콜라스의 마음 따위 죽어나간 아이 한 명의 여운보다도 가벼웠다.

하지만 이건 뭐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쩝.

내 말의 절반도 이해하지 못한 니콜라스가 당당하게 외쳤다.

"이건 너를 위한 시험이기도 했다! 대국적인 승리를 위해서는 병사를 희생시켜야 하는 법! 나는 위험을 무릅쓰고 일을 벌였는데, 너는 사사로운 인정 때문에 판단을 그르쳤어!"

"그래요? 그러면 대국적인 승리 문제를 하나 낼게요. 꼭 총교관님만 문제 내라는 법 있나요?"

나는 천천히 걸었다. 덩굴과 나무뿌리가 밟히며 사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요 며칠 사람들이 자주 돌아다닌 탓에, 원래와는 너무나 달라진 지형. 부러진 나뭇가지, 밟힌 땅, 이곳저곳 파헤치고, 밧줄로 만든 함정이 가득한 곳.

승산은 충분하다.

"맛도 없는 아이들 대신 저를 위해 죽어주세요, 니콜라스. 저를 위해 피를 바쳐요.그러면 군국은 멸망시키지 않을 테니까…."

최소한 공평하게 무대 위로 올라오란 말이야. 그만한 마음으로 나를 움직이라고.

"당신 한 명 어치만큼 말이죠."

EP.221 과거의 이야기,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 - 7

백 명과 한 명 사이에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승패를 가늠하긴 어렵지 않다. 한 명 쪽이 유리하다.

베기에 특화된 니콜라스의 기다란 장검은 길이가 길고 커버하는 각도 넓다. 약한 다수를 상대할 때 특화된 무기, 그러한 종류의 기공이다. 학생을 가르치는 총교관 답다고나 할까.

그러나 이 숲에는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두꺼운 나무가 많다. 가끔 나무째 베어버리며 나아가곤 하지만 그의 힘은 착실히 소모되고 있다.

거기다.

삑!

"리! 럭스!"

"파스칼!"

나의 지시에 따라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아이들은 니콜라스의 생각보다 상대하기 까다로운 상대였다.

호각을 불면 제식마법이 일제히 니콜라스를 두들긴다. 빛과 바람. 군국이 자기 방식대로 재단해내어 더는 신비가 아니게 된 신비가 니콜라스에게 쏘아졌다.

"이것들이!"

니콜라스가 앞으로 한 걸음을 내디디며 거합을 내질렀다. 오랜 시간과 노고를 들여 뻗어난 복잡한 덩굴이 한순간에 끊어진다.

후두둑, 동시에 통나무를 들고 니콜라스를 가로막던 아이들이 비명을 지르며 일제히 나가떨어졌다.

그러나 니콜라스의 표정은 만족스럽지 않았다. 본래 방패삼아 든 통나무부터 일렬로 선 아이들까지 전부 일격에 갈라버렸어야 했는데, 칼날에 끈적한 무언가가 들러붙어 예기가 떨어졌기 때문이다.

"어때요? 아까 저희가 날린 통나무, 담쟁이덩굴을 끓인 송진에 담그고는 그걸로 칭칭 감싸놓았거든요. 송진은 생기에 더욱 들러붙는 성질이 있으니, 기공으로도 쉽게 벗겨내지 못할 거예요."

사소한 함정이다. 혹여나 통나무 째로 베어버릴 때를 대비해 준비한 것.

원래는 전신을 송진으로 뒤덮어서 약화시킬 생각이었는데 칼날에 그쳤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니콜라스가 쓰러진 나머지를 처리하려는 때 내가 끼어들었다. 단검이 그를 노리는 그 순간 송진이 엉겨붙인 장검이 빛을 발했다.

나를 향해.

"하하! 역시, 자기가 죽을 생각은 없죠? 그거야 당연한 일!"

그의 생각에서 궤적이 그려진다. 나의 허리를 동강 내려는 일격이다. 막을 수는 없지만, 처음부터 가까이 다가갈 생각도 없었다. 싱긋 웃으면서 들어가려는 척 내디딘 다리를 회수해서 멀찍이 멀어졌다.

칼끝이 아슬아슬하게 내 허리춤 앞을 스쳐 지나갔다. 닿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기에 두려움은 없다.

잠깐의 대치. 그동안 위기에 처했던 아이들이 재빨리 달아났다. 상황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왔다.

"…제법이구나, 휴이. 볼수록 아까워. 어째서 그런 어리석은 선택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공격을 피해내는 나를 보고 니콜라스는 혀를 내둘렀다. 그의 한탄에는 일부 진심이 섞여 있었다.

적절한 타이밍에 끊고 들어와서 니콜라스의 맥을 끊는 그 능력은, 니콜라스가 보기에 전투를 이해한 자만이 할 수 있는 기예였기에.

정작 나는 생각을 읽고는 빈틈을 계속 계속 노렸을 뿐인데 말이야.

뭐, 어쨌든. 저쪽이 나를 위협으로 생각해준다면야 좋지.

"아하하! 알잖아요! 나는 뭐든지 잘 배우지만, 그 이상을 나아가지는 못한다고! 달리 말하면, 저는 벌써 제 인생 최고점을 찍은 셈이네요!"

"그래! 네가 이 기회를 놓치면, 너는 영원히 그 단계에서 멈춘다! 나 처럼 장성이 되지 못한 대령에게도 도망쳐다녀야 하는 신세가 돼!"

별을 못 단 군인은 병에 걸린다고들 한다. 물론 자기 위치에 충실하게 일하는 사람도 많지만, 누구보다 빨리 재능의 한계를 체감한 니콜라스는 더욱 재능에 매달리게 되었다.

그가 보기에 나는 뛰어난 재능을 갖췄으면서도 기회를 저버리는 바보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지금이라도 받아들여라! 너만 수긍한다면 모든 게 해결돼! 우리 둘이 입을 다문다면, 이 금기도 없었던 일로 만들 수 있다!"

실제로도 그랬다. 여기 있는 백사십 명 중 가장 강한 사람은 나. 만일 내가 없다면, 지금도 아슬아슬 버티고 있는 이 아이들은 오합지졸처럼 부서지리라.

실제로 몇몇은 내가 배신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눈치고.

하지만.

"니콜라스. 이왕 할 거면 도전해봐요! 왜, 언제나 시험하는 쪽은 당신이죠? 고난을 발행하는 쪽이죠? 목숨을 걸고 불가능한 무언가를 이루어내는 건, 왜 언제나 이쪽의 몫이죠?"

장검은 길이가 길고 반경이 넓지만 그탓에 오히려 궤적이 한정된다. 예기를 아무리 두른다고 한들, 난폭한 짐승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 온 나무는 쉽게 자기 나이테를 보여주지 않는다. 나무에 걸리면 붙잡히기는 그의 장검도 마찬가지다.

장검이 날 노릴까 봐, 그가 가장 곤란해하는 위치로 피하며 큰소리로 외쳤다.

"저들처럼 대적할 수 없는 시련에 맞서 싸워요! 그게 진짜지, 목숨도 걸지 않고 난관을 극복하지도 않은 채 무언가 시키기만 하는 건! 그냥 꼰대질에 불과하잖아요?"

"끝까지 어리석어지다니!"

니콜라스가 나를 뿌리치고 다른 학생들이 가득한 쪽으로 달렸다. 미리 계획해둔 대로 몇몇이 재빨리 달아났지만, 반응이 늦은 두 명의 몸이 찢겨나갔다.

예리한 날에 베인 것도 아니다. 우악스러운 참격에 몸이 찢겼다. 칼날에 묻은 송진이 식물의 몸속에서 태어나 인간의 몸속을 보는 진귀한 경험을 했다.

곁에 있던 아이가 비명을 질렀다. 친구의 죽음을 그냥 넘기기에는 아직 어렸다.

니콜라스가 이어서 비명을 지르는 목을 베어버리려는 찰나. 내가 그의 등으로 달려들었다.

"내가 약속할게요, 니콜라스! 정녕 나에게 저들을 다 먹이고 싶다면! 내 방해를 뿌리치고, 나 말고 다른 모두를 죽여서, 그 피를 취하게 해요! 당신이 난관을 극복하고 그만한 위업을 성공시킨다면, 저도 조금 더 '합리적인' 판단을 할지도 모르겠네요!"

나를 더욱 대단한 인재를 만들기 위해, 그 모든 고난을 뛰어넘고 나에게 피를 먹인다면. 변함없는 의지를 가지고 나를 그렇게 만든다면야 뭐 그때부터는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까.

하지만 니콜라스는 기다렸다는 듯 냉큼 나를 향해서 칼을 뻗었다. 목을 노리는 칼날에는 분명한 살의가 담겨있었다.

의미하는 바는 하나.

"하하하! 그럼 그렇지! 정작 자기 자신은 난관을 극복하고 싶진 않다는 거죠!"

광소하면서 칼날을 쳐냈다. 묵직하다. 몸이 뒤로 주르륵 밀렸다.

니콜라스는 혀를 차며 대답했다.

"…반동분자와는 협상하지 않겠다."

"변명이 궁색하네요. 시도하기도 전에 못할 것 같으면 선을 긋는 주제에. 당신의 한계는 거기까진가요?"

무너질 뻔한 자세를 다잡은 나는, 머리카락을 이마 위로 쓸어올리며 중얼거렸다.

"아아. 이제 알았네요. 당신도 말로만 군국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바치겠다고 할 뿐. 결국, 자기가 무언가를 이뤄내려는 의지나 열정은 없었어요. 그냥 위에 앉아서 아랫사람들에게 기대에 부응하기만을 강요하죠."

칼을 맞대고 싸우며 그의 마음은 충분히 들었다.

기대가 크고, 포기가 빠르다. 효율적으로 코스트 관리를 시도한다. 군국이 바라는 교육자의 상이다. 누구 하나 희생시키는 것에 거리낌이 없다.

하지만 정작, 그는 목숨을 걸 용기가 없다. 스스로를 고난에 빠뜨릴 자신이 없다.

"아아, 재미없어라. 161명의 목숨을 쓸 각오는 있어도, 자기 목숨을 걸고 그것을 행할 각오는 없다니."

"…이 내가, 그런 도발에 넘어갈 것 같나."

"도발 아니라 객관적인 평가에요. 휴, 맞서 싸우길 잘했어. 재미없는 이야기에는 반전을 넣어줘야지, 암."

빠직, 재미없다는 말이 니콜라스의 역린을 건드렸다. 그의 혈관이 끊어질 듯이 불거졌다.

격노한 니콜라스는 장검을 머리 위로 치켜들고 나에게 달려왔다.

"너는, 내 뜻을 받아들여야 했다!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언제는 군국을 빛낼 인재라더니. 도발에 홀랑 넘어갔구만, 뭐."

나는 다시 호각을 입에 물고는 지시를 내렸다.

장검이 나를 노린다. 나무를 방패로 빙글 돈다. 창처럼 내질러진 장검이 나무껍질을 부수고 사각에서 튀어나왔으나, 미리 생각을 읽어 간단히 고개를 트는 것으로 피한다.

생각을 읽는 나는 잡기 어렵다. 니콜라스는 회심의 공격을 연달아 피하는 나에게 조바심을 느끼고 있었다.

나를 상대하는 니콜라스의 등 뒤로 마법이나 창, 돌과 올가미가 쏟아진다.

인간에게 용기를 주는 가장 큰 방법은 바로 안전을 보장하는 것이다. 철창살이 사이에 있다면 짐승에게 다가갈 용기를 얻고, 방패가 있으면 앞으로 나아갈 용기를 얻는다.

아이들도 마찬가지.

올가미, 마법, 로프, 통나무 그리고 창. 거리로 무장한 그들은 계속 닿지 않을 거리에서 니콜라스를 압박했다. 특히 한때 무투파였던 시아티나, 마도장교 지망생이었던 캐러팔드가 톡톡히 한 역할을 했다.

"이, 이것들이…!"

장검을 휘두르기엔 불편한 공간. 그러나 함부로 무기를 버릴 수는 없다. 아직 기공으로 전신을 완전히 둘러쌀 수 없는 이상, 그도 칼날에 찔리면 몸이 상한다. 다들 나름 중등군사학교에서 기공의 기초는 익힌 아이들이니까 달려들어 칼날로 내리찍으면 니콜라스라도 위험하다.

아차 하는 사이, 송진 가득 담긴 구덩이에 니콜라스의 발이 빠졌다. 균형을 잃은 그의 위로 올가미가 날아들었다. 니콜라스는 미친 듯이 날뛰었지만, 인간의 사냥은 점점 집요하고 끈질겨졌다.

그래, 마치 큰뿔사슴을 사냥할 때처럼.

"이것들이!"

결국, 그는 잡을 수 없는 나 대신 거슬리는 방해꾼들부터 처리하기로 마음을 바꾸고는, 나무를 발로 박차고 냅다 뛰려고 했다. 그 생각을 읽은 순간 단검 두 자루를 거꾸로 들어서 발목을 냅다 그었다. 살갗에 닿지 않았음에도 칼날이 아주 잠깐 검붉게 물들었다.

피가 튀었다. 바짓소매가 찢어지고 피가 흘러나왔다.

양이 안 되어서 오래 쓰진 못하지만 아주 잠깐이라면, 나도 기공 정도는 불어넣을 수 있으니.

"으으윽! 휴이, 네가…!"

여기서 자세를 뒤바꾸는 건 너무 큰 손해. 그는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가장 거슬리는 존재, 시아티가 이끄는 창병들에게 도약했다.

가장 건강하고 용감하며, 조금이나마 기공을 다룰 수 있어서 위협적인 아이들이었다. 나름의 훈련을 받은 이들이 그에 대응했다.

그러나 대령 앞에서는 하룻강아지다. 니콜라스가 다가오면 냅다 땅을 구르라는 지시를 잊은 한 소년이 급조한 나무 창대를 들어막으려고 했다. 거대한 참격이 창대 위로 떨어졌다.

"멍청아! 위험해!"

누구보다 빨리 몸을 피했던 시아티는 깜짝 놀라서 그를 냅다 밀쳤다.

그러나 늦었다. 아니, 늦기보다도 무의미한 데다 더욱 큰 손해를 몰고 왔다.

그의 몸과 함께, 시아티의 오른팔 역시 잘렸으니까.

장검의 궤적에 걸린 그녀의 오른팔이 부러져서 하늘로 솟아올랐다. 몸과 분리되는 팔 너머로, 어깻죽지부터 갈라진 소년의 눈동자가 천천히 빛을 잃었다.

"꺄아아아아아악!"

친구의 죽음 때문인지, 오른팔의 고통 때문인지 모를 비명이 울려 퍼졌다. 팔꿈치 아래 사라진 오른팔을 붙잡고 시아티는 무릎을 꿇었다.

당장 시아티를 끝장낼 수 있음에도 니콜라스는 칼을 휘두르는 대신, 언제든 뒤로 뻗을 수 있도록 준비했다. 학생 하나를 죽였으면서도 여전히 나만 경계하고 있던 것이다.

즉, 지금 이 상황은 나를 꾀어내기 위한 미끼.

일부러 소리 내어 천천히 다가갔다. 니콜라스가 미간을 움찔했다.

'…냉정하군. 역시, 다른 녀석들과는 차원이 달라. 그렇게 신중하게 다가온다면, 다른 녀석들을 노리는 게.'

"아, 그래요?"

이미 니콜라스에게 나를 살려둘 의지가 없는 건 확인했지. 이제 저 학생들과 나는 운명공동체인 셈이다. 다름 아닌 니콜라스가 그렇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그 기대대로 해주지. 나는 시아티의 이름을 부르며, 방금까지의 냉정함은 사실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뛰쳐나갔다.

"너도, 결국…. 어리구나."

니콜라스의 생각을 읽는다. 나에 대한 안타까움은 싸움을 거치며 점차 희석된 상태. 꽤 지치고 시달린 속에서 느껴지는 건 오직 피로와 짜증, 그리고 나를 향한 울분뿐.

자신의 말을 들었으면 너도 죽는 일은 없었을 거라고, 그리 생각하며. 니콜라스는 머릿속으로 궤적을 하나 그렸다.

그의 칼 손잡이에서 시작되는, 거무튀튀한 빛으로 그려진 참격.

궤적의 끝에는 내가 걸려있다. 등 뒤로 쏘아지는 기습적인 일격이다.

그런데, 이거. 나를 너무 우습게 본 거 아닌가. 이렇게 대놓고 휘두르겠다고?

"나, 나름 수석인데!"

한순간 전신의 기공을 끌어올린다. 탐식의 영향인지 평소보다 탁하지만 거친 빛이 단검에 맴돈다. 죽음으로 얻은 힘이기 때문일까, 미약하게 검붉은 빛이 나는 것 같다.

그렇지만 내 몸안에 들어온 이상 내 힘. 일단 뿜어냈다. 두 손에 들린 단검이 내 몸을 쪼개려고 드는 거대한 장검을 잡아챘다.

테애앵. 묵직한 소음.

팔이 후들거리고 단검 축이 비틀어진다. 전신의 뼈가 비명을 지르는 것 같다.

그래도 송진을 발라두길 잘했다. 덕분에 칼날이 미끄러지지 않아, 몸이 갈라지는 일은 피했으니까.

삐걱거리는 팔을 다잡으며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히스토리아도, 란카르트도 제 아래인데. 총교관님 걔네 둘한테 벽을 느꼈잖아요? 그런데, 저는 뭐 쉬운 줄 알았어요? 나름 저 필기도, 실습도 다 상위권이라고요."

"…그게, 무슨 의미가 있지?"

니콜라스는 허리에 힘을 잔뜩 준 채로 팔을 더욱 거세게 휘둘렀다.

"가장 중요한, 힘이 부족한데!"

느껴지는 것은 순수한 힘. 나의 방어를 부수기 위해 힘으로 찍어누를 셈이다. 풍차의 끄트머리가 나를 밀어젖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축이 어긋난 단검이 거센 비명을 지른다.

버티기엔 너무 강력한 힘이다. 이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나는 또다른 수단을 꺼냈다.

"세트, 리. 피렌하이트."

손톱으로 송진을 긁는다. 마른 풀로 뒤덮인 접착제를 타고 불꽃이 솟구쳤다. 장검이 불꽃에 휩싸였다. 커다랗고 기다란 횃불은 위협적이었으나, 실상 나보다는 니콜라스에게 불리한 상황.

불꽃이 그의 시야를 방해하고, 녹아내린 송진이 장검에 들러붙는다. 이제 예리함은 기대하기 힘들 것이다.

그 참에, 단검으로 불타는 송진을 긁어서 그대로 튕겼다. 니콜라스의 눈을 향해.

"잡기술!"

숙련된 군인답게 니콜라스는 눈을 감는 우를 범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불타는 송진이 자꾸 날아오는 건 그에게도 조금 부담스럽다.

피하는 김에 거리를 주지 않기 위해, 니콜라스는 장검을 회수하며 뒤로 물러났다.

내가 크게 외쳤다.

"놓치지 않아아아! 싸워라, 니콜라스으으으으!"

나는 그의 시야 한구석을 계속 차지하며 그를 따라붙는다. 소리를 지르며 그의 고막을 계속 두드린다. 축이 무너진 왼손의 단검은 내친김에 던져버린다. 대신 왼손으로 마력을 끌어올려 마법을 연달아 쏘아냈다.

내가 모든 것을 쥐어짜서 공격하자, 니콜라스는 기세에 밀렸다. 잠깐 물러난 한 걸음이 두 걸음이 되고, 두 걸음이 내친 김에 세 걸음이 된다.

단, 그 이상은 물러나지 않았다.

"하나하나, 잡기술이 아닌 게 없군…! 그게 네 한계다! 네가 장래에 무엇을 마주하더라도, 그 한계에 금방 봉착할 것이다…! 너에게, 이제 장래는 없겠지만!"

휘두르는 단검도, 쏘아지는 마법도 하찮기 그지없다. 기껏해야 짜낸 기공으로 단검을 찌르는 것 정도가 위험할 뿐.

집중해서 내 공격을 파악한 그는, 내가 쓰는 그 무엇도 위력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가 다시 자세를 다잡고는 순수하게 힘으로 밀어붙이려는 때였다.

그러나.

"뒤로 너무 물러났어요, 니콜라스."

푸욱.

세 자루의 창이 그의 등을, 오금을, 허리를 찔렀다. 이어 뗏목을 만들 때 썼던 밧줄이 그의 팔다리를 휘감았다. 순식간에 그를 구속하는 힘들.

그 사이로 끊어질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죽어…."

날카로운 단검이 니콜라스의 어깨에 꽂혔다. 시아티였다. 한 팔을 잃은 채로도, 광분에 휩싸여 단검을 들고는 달려든 것이다.

다들, 나름 군사 교육을 받은 아이들. 기회가 오면 냉큼 잡아챈다. 그럴 재능도, 기량도 있다.

"이, 패배자들이! 감히!!"

밧줄이 팔다리를 묶고 칼날이 몸을 헤집는 와중에도 니콜라스는 아득바득 버텨냈다. 한 손으로 밧줄을 붙잡고 기공으로 땅에 발을 붙이며, 그 모든 구속을 단번에 뿌리치려고 했다.

그러나, 꼼짝도 하지 않는다.

학생의 숫자는 백 명이 넘는다. 그러나 한 번에 싸울 수 있는 인원에는 한계가 있기에, 전투에 참가하지 않는 이들은 전부 멀찍이 떨어져 로프를 붙잡고 있었다. 그러다 함정이나 올가미 조가 니콜라스를 묶는 데 성공하면 스무 명 씩 모여서 온힘을 다해 잡아당겼다.

줄다리기는 결국 숫자와 무게의 싸움. 얹은 무게만큼 힘이 더해지는 정직한 대결. 건곤으로 땅을 잡아당기고 몸을 비튼다고 한들 이 차이를 극복할 수는 없다.

"크윽…!"

방법은 하나. 불에 그을려 녹은 송진이 엉겨 붙는, 날이 상한 장검으로 하나하나 잘라내야 했다.

와중에도 칼날은 시시각각 그의 몸을 파고드는데, 그것을 참고서.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사실상 불가능. 그 생각이 지나가자, 니콜라스의 마음이 다급해졌다.

'잠깐. 내가, 죽는다…고?'

드디어. 오래도 걸렸다. 니콜라스는 죽음을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생명의 위기에서 그는 쫓기듯 자기 처지를 상기해냈다.

이 절체절명의 상황. 닥치기 전에는 자기에겐 절대 오지 않으리라 믿었던 위기에 그의 마음이 다급해졌다.

그러나 너무 늦었다.

"안녕히 가세요, 니콜라스 총교관님. 배운 거 잘 써먹었습니다. 심지어 마지막에는 자처해서 교보재가 되실 줄은."

"휴, 휴이! 기다려라! 여기서 나를 죽이면!"

말하거나 말거나 신경도 쓰지 않고, 그의 앞에서 가만히 중얼거렸다.

"당신보다 뛰어난 사람은 우러러보면서, 부족한 사람은 경멸했죠. 그런 당신의 허영심을 채워줄 곳이 바로 하멜른. 자기보다 뛰어난 학생을 지도한다는 입장에 취해, 총교관의 자리를 너무나 사랑했던 니콜라스 당신에게. 당신이 경멸했던 버려진 재능이 한데 모여서 위업을 이뤄내는 광경은 어땠으려나요. 딱 당신에게 어울리는 최후일지도 모르겠네요."

"나를 죽이면 하극상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금기를 둘러싸고 입을 다물기는커녕, 도리어 나를 공격한 일은…! 군 당국이 묻으려고 할 거다! 너희는 나를 죽이면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거야!"

그 말은 강을 건너기 전에 했어야지. 너무 허무해서, 창으로 너를 찌른 아이들조차도 동요하고 있지 않잖아.

어쨌건.

"하지만, 당신의 바람은 이루어줄게요. 탐식, 하죠."

처음에 무슨 말인지 몰랐던 니콜라스는 내가 생체 단말을 들이밀자 크게 눈을 떴다.

아키 아바타는 몸을 따라가는 일종의 본. 몸 위에 무언가를 형상화할 수 있다. 보통 의복 패킷을 위해 쓰지만… 그가 나에게 건넸던 건, 패킷 타입의 문신이었지.

지금껏 벌어진 전투로 흐른 피가 그 문신과 감응했다. 땅 곳곳에서 시작된 핏물이 내 발을 타고 올라와서는, 내 생체 단말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참, 군국도 신기한 짓을 한다는 말이야.

"당신이 선물한 것으로. 당신의 기억을, 기력을, 경험을 전부 삼켜드리죠. 당신이 바라마지 않았던 대로."

"아, 안 돼! 나는 아직 할 일이…!"

"누구는 할 일이 먹히는 것밖에 없어서 먹힐까요. 그냥, 그렇게 되는 거지."

그래. 이건 결과일 뿐이다. 자기가 결과를 강요했다면, 나타나는 결과에 수긍할 정도는 되어야지.

"안…!"

추해지지 않도록, 나는 저항하지 못하는 그의 목에 마침표를 박아넣었다.

마지막 순간, 어차피 죽을 거라면 탐식당하고 싶지는 않다는… 그의 생각을 끊어내듯.

생각이 끊겼다. 목에 찍힌 칼자국은 그의 말도, 생각도, 생명도, 삶마저도 마무리를 짓는 마침표였다. 총교관 니콜라스는 이것으로 생을 마감했다.

반평생 교육에 종사했던 그가 남긴 것은.

증오에 찬 백여 명의 아이들과.

그리고 티끌만큼 더 늘어난 내 기력.

그게 전부였다.

EP.222 과거의 이야기,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 - 마무리

"총교관을… 장교를… 대령을 죽였어. 어떻게 해?"

"그 새끼는 죽어도 싸! 릭크도 칸타나도 죽었다고! 죽였으면, 죽는 게 당연하잖아!"

"하멜른에, 아니, 군국에겐 어떻게 말할 거야? 아니, 구조대가 오기는 할까? 우리 여기서 버려진 거야…?"

"잘 설명하면, 어떻게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그보다, 금기가 뭔데? 금기가, 도대체 뭔데 총교관이 우리를 죽이려던 건데?"

"멍청아, 그것도 모르고 싸웠냐! 아까 휴이가 설명했잖아. 뱀파이어릭 마법진이라고!"

짐승의 습격에서 열일곱이 죽고, 니콜라스와의 전투로 열다섯이 전사했다. 피해는 컸지만 솔직히 말해서 말도 안 되는 위업이었다.

숙련된 사냥꾼들도 광란하는 사슴과 배회하는 늑대를 상대로는 일단 물러난다.

거기다 대령이라면 장성 바로 아래. 강함은 천차만별이지만, 그래도 잔뼈가 굵은 군인이다. 재능을 인정받은 사관생도라면 모를까 평범한 군사학교 졸업생으로는 대적하기 힘든 상대인 것이다.

그러나 기뻐하기엔 그들이 잃은 게 너무 많았다.

"…다들, 닥쳐."

지혈을 끝마친 시아티는 천으로 감싼 절단면을 움켜쥐고는 고개를 들었다. 모두들 입을 다물었다. 살아있는 사람 중, 이 싸움에서 가장 큰 것을 잃어버린 사람이 비틀거리며 나를 향해 다가왔다.

"휴이. 나는 너를… 믿지 않아. 우리를 이 지경까지 만든 건, 너니까."

술렁거리는 소리가 들렸으나, 나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시아티는 창백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너의 지시는 틀리지 않았어. 너의 지시를 따른 덕분에 여기까지 왔어. 그러니까… 알려줘.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해?"

시아티가 음울하게 물었다. 텅 빈 눈동자에는 미래를 향한 한 점의 희망도 보이지 않았다.

지금 그녀에게 필요한 건, 어디까지나 그녀에게 방향을 가리킬 화살표였다.

그러나 나는 바람이 없으면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이다. 나는 텅 빈 그녀의 마음을 향해 물었다.

"내가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어?"

"어떻게든."

"그래도 네가 뭘 원하는지 알면 조금 더 판단하기 쉬울 거야.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도망칠까? 아니면 목숨을 걸어서라도 니콜라스의 부정을 폭로할까? 어떤 방식을 원해?"

내가 묻자 잠시 뒤, 시아티는 다시 초점을 되찾았다. 텅 비었던 눈동자에는 이글거리는 증오만이 가득했다.

"무엇을 원하는지 말하면, 그것을 들어줄 수 있어?"

"할 수 있는 만큼은."

"군국이, 망해버렸으면 좋겠어."

시아티가 즉답했다.

"한평생 하란 대로만 해왔어! 일하고, 배우고, 혼나고, 공부하고, 시험을 치고, 평가받고. 조금이라도 더 군국에 쓸모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도 참고, 아파도 견디고, 힘들어도 남 몰래 울면서도, 더 좋은 평가를 받아서, 뭔가를 하려고 했어! 그런데!"

감정에 치우쳐진 외침은 백 명이 넘는 아이에게, 그리고 그들을 통해 바람을 읽는 나 자신에게 여과없이 다가왔다. 시아티는 사라진 오른팔을 더욱 꾹 움켜잡으며 절규했다.

"이건, 아니잖아! 재료로 쓰는 건, 아니잖아…! 아무리 우리가 필요 없어도, 흔해 빠진 2레벨이어도…!"

군국에게 2레벨 이하는 언제든지 대체 가능한 이들. 있어도 없어도 그다지 아쉬울 것 없는 존재다.

그래서 버렸다.

사관학교 진급생들은 그대로 놔둔 채, 절실한 나머지만을 데리고 왔다. 재료로 쓰기 위해서였다.

그러니까, 이들은 진정으로 나라에 버려졌다. 너희 따위는 없어도 된다…고, 군국이 나서서 증명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아무리 울부짖는다고 해도. 이 나라에는 들리지 않을 거야. 보상은커녕 우리를 죽여 입을 막으려고 들겠지. 니콜라스 말대로, 우리는 군국에 있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존재니까."

시아티가 말을 마치자,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아이들도 푹 고개를 떨구었다. 그녀의 울분에 찬 외침 덕분에 애써 부정하던 현실을 되새기고야 말았다.

결국… 군국은 하멜른 사태를 묻어버릴 것이다. 그러니 모두 죽는다. 살아남지 못한다.

그런 간단하고 냉혹한 사실을.

"쓸모 있게 되고 싶어?"

그때. 아이들 틈에서 누군가가 나타났다. 아이들은 갑작스레 나타난 기척에 깜짝 놀랐다. 붉은 머리의 소년은 처음부터 그 속에 있던 것처럼 느긋하게 다가왔다.

몇몇 아이들이 그를 알아보았다.

"란…카르트?"

란카르트는 그 물음에 대답하지도, 고개를 돌려보지도 않았다. 그는 오직 내쪽을 향해 시선을 고정한 채로 일직선으로 걸어왔을 뿐이었다. 이 숲에서 발 아래도 확인하지 않고.

그뿐인데, 그의 반걸음 앞에 저절로 소용돌이가 일며 수풀을 헤치고 먼지를 날려버렸다. 마치 세상이 그를 위해 앞을 청소해두는 듯했다.

군국 최초의 신비. 전략 급 고유마도를 지닌 소년. 마도사의 재목.

란카르트 스펜드라이.

잔가지가 널린 숲속에서 혼자 말끔한 차림으로 선 란카르트는, 난데없이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대단해. 정말, 진실로 예상 밖의 사태였어. 혹시나 했는데 설마, 니콜라스를 죽이고 그를 먹어치울 줄은."

느닷없는 등장에 모두가 말문이 막힌 사이, 란카르트는 혼자 거세게 치고 있던 손뼉을 멈추고는 짐짓 인상을 썼다.

"하지만, 그렇지만 너도 알지, 휴이? 니콜라스는 너와 너무 다른 존재야. 그는 늙었고, 찌들었고, 기력 속성도, 기력량도 너와 달라. 극도로, 끔찍하게 비효율적이지. 탐식으로 그를 먹어도 네 기량에 극적인 변화는 없어."

"란카르트. 다 아는 이야기는 언제까지 할 거야?"

내가 짜증스러운 태도로 내뱉자 란카르트는 말을 하다 말고 움찔거렸다. 나는 팔짱을 끼며 그를 다그쳤다.

"네가 좋아하는 효율적인 대화를 해야지, 란카르트. 설마 네가 나의 지적 수준을 의심해서 처음부터 가르치는 건 아닐 테고."

"아, 어어, 음."

"용건만 말해. 나 피곤하니까."

"아, 알았어, 미안."

주눅이 들어 사과한 란카르트는 빠르게 용건을 꺼냈다. 단 한순간의 주저도 없이.

"남은 녀석들을 먹어."

몇 번의 비약을 거쳐서 나온 결론. 그러나 독심술을 가진 나는 란카르트의 말을 단숨에 이해했다.

어차피 죽을 처지다. 내가 죽이지 않더라도 군국이 죽일 것이다. 그러니까 의미 없게 죽일 바에야, 금기개진 위에서 죽여 내 힘으로 만드는 게 효율적이다.

거기다 이들은 나와 생체적으로 모든 것이 맞추어진 최상의 재료. 니콜라스와는 달리 '탐식'이 조금 더 매끄럽다. 지금 기회가 아니면 먹어봤자 의미가 없으니 지금 먹어라… 뭐, 그런 뜻이었다.

당연히, 방금 구사일생한 시아티는 격하게 반응했다.

"란카르트! 재수없는 자식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너도 니콜라스의 하수인이냐…!"

"아무것도 모르는 멍청이는 닥쳐. 내가 저딴 패배자의 하수인일 것 같아?"

불쾌해진 란카르트가 고개를 홱 돌렸다. 순간적으로 어마어마한 압력이 시아티를 짓눌렀다. 시아티의 표정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란카르트의 고유마도가 그녀가 선 곳까지 닿았기 때문이다.

비틀어진다.

란카르트로부터 가까운 곳은 빠르게, 먼 곳은 느리게. 공기를 포함한 세상 만물이 서로 다른 속도를 갖고 오른쪽으로 소용돌이친다. 거리에 따라 달라지는 흐름 속에서 시아티는 누군가 몸을 붙잡고 찢는 듯한 격통을 느꼈다.

"으학, 으끄아아악!"

시아티는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소리마저도 기이하게 멀리 들린다. 공간이 비틀어지는 고유마도 속에서는 소리마저도 길을 잃고 헤매기 때문이다.

손도 쓰지 않고 시아티를 제압한 란카르트는 다시 시선을 나에게로 향했다.

"만일 네가 손을 더럽히기 싫다면, 나, 이 내가 해주지."

"귀찮을 텐데."

"뭘. 친구를 위한 일인데. 이 정도, 요만큼의 귀찮음은 감수해주지."

물론 란카르트가 말한 '친구'라는 존재는 오직 나 하나만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아이들이 비명을 지르며 시아티를 구하려고 했으나, 그들은 다가오기는커녕 내뻗은 팔조차 찢어질 듯한 고통을 느꼈다.

찻잔 속에 생긴 폭풍우를 일직선으로 가로지를 수는 없다. 비스듬히 나아가야 한다. 그러나 누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소용돌이치는 공간의 미로를 단번에 꿰뚫어보고 극복해낼 수 있을까.

무리다. 누구도 그의 허락 없이는 다가가거나 물러날 수 없다. 심지어 나조차도.

오른손잡이의 세계.

그에게 있어서 세상이란 오른쪽으로 소용돌이치는 물과 같다. 세계의 이치. 그 흐름. 따르지 않으면 충돌하여 휘말린다. 수포를 일으키며 가라앉고 만다.

그 세상의 주인인 란카르트는 금방이라도 시아티를 잡아 비틀 듯이 힘을 주며 말했다.

"아. 참고로. 네 말마따나 네가 나를 방해하더라도, 나는 네 방해를 뿌리치고 이들만 다 죽일 수 있어. 난 니콜라스 따위랑은 달라. 휴이 너도 나름 숨겨둔 비장의 수가 있겠지만… 그래도 나에겐 못 닿으니까."

란카르트는 니콜라스처럼 설득하지는 못할 거라고 엄포를 놓았다. 그 눈은 흥미와 호기심으로 빛나고 있었다. 마치, 내가 어떤 대응을 할지 궁금한 사람처럼.

그렇지만.

"란카르트. 좀 재미없게 굴지 마."

짜증이 나서 툭 내뱉었다. 란카르트가 의아해한다.

내가 남의 바람을 잘 들어주긴 하지만, 그렇다고 자기를 재미있게 해달라는 어린애 떼쓰기를 하나하나 들어주진 않는다. 귀찮거든.

"방금 나는 너와 니콜라스의 시험을 보고 대답을 들려줬잖아? 똑같은 대답을 또 시킬 셈이야? 상수만 바꾼 똑같은 문제 낸다고 투덜거리던 란카르트 스펜드라이는 어디 갔어?"

"아니, 아니. 나는."

"일부러 힘을 조절해서, 아프지만 죽지는 않게끔 마법을 가한다…. 협박이잖아. 안 통하는 거 알면서 마력이나 낭비해? 짜증나게 하지 말고 마법 거둬."

란카르트는 일단 내 말에 따랐다. 바깥과 안쪽으로 몸을 쥐어뜯던 힘이 풀리고, 시아티의 몸이 풀썩 쓰러졌다. 땅과 맞닿은 얼굴 틈으로 고통 섞인 흐느낌이 새어나왔다.

"그럼 어쩌려고? 구조선이, 교관들이 올 거야. 여기 몇 명만 골라서 심문해봐도 이 사건의 전말을 금방 알아차리겠지. 일단 보고가 위로, 사령부로 올라가면 군국이 내릴 '합리적'인 판단은 분명…."

"서로 아는 이야기 하지 말자고 했지."

"아, 응."

정작 자기도 합리성을 믿지 못해서 이것저것 시험하려는 주제에. 그런 시험 자체가 비합리적이라는 것을 언제 알아차릴지.

란카르트의 입을 다물게 한 나는 이야기를 간단하게 정리했다.

"한마디로 이런 말이잖아. 이 난관을 타파할 다른 대응은 있을 수 없다. 아니, 있을지 모르지만 정확히 란카르트 너는 생각해내지 못했다. 그러니까 어떻게 타파하려는지 내 대응이 궁금하다. 맞지?"

"딱히 그건… 잠깐만. 너는 이 상황을, 난관을 타파할 수 있다고?"

"난관이니, 상황이니. 모르겠으면 닥치고 지켜나 봐. 왜 자꾸 끼어들어서 물을 흐려?"

한 번 더 구박해서 기를 죽여놓은 나는 냉큼 손을 휘저었다.

"가서 강 막고 있는 것만 치워 봐. 하류에서 할 게 있으니까."

"그래봤자. 강의 끝은 바다다. 원시의 공포, 해흉이 바다에 사는 이상 어차피 도망은 불가능…."

"또, 또 다 아는 이야기."

내가 짜증스러운 표정을 짓자, 란카르트는 입을 꾹 다물고는 황급히 강변으로 향했다.

내 요청은 억지나 다름없다. 들어주고 말고는 오직 란카르트의 의지에 달려있으며, 들어주지 않아도 하등 문제는 없다.

하지만 방해 말고 지켜보라는 말에 수긍한 이상, 그는 내 요청을 들어야 한다.

내가 어떻게 대처할지 궁금해졌기 때문에, 그 준비를 도와야만 하는 굴레에 빠졌다.

란카르트가 강변으로 향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거칠게 우지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댐처럼 강을 막고 있던 표류물들이 단숨에 부서진 것이다. 백여 명이 매달려도 어려웠던 일이 란카르트의 고유마도 앞에 저토록 손쉽게 끝났다.

마법. 세계의 규칙을 덧씌우는 신비. 그것을 자기 뜻대로 다루는 이에게, 고작 구조와 무게로 지탱하고 있는 표류물 따위 간단하게 허물어지기 마련이다.

"시아티!"

"…큭, 그래. 한 명이… 백 명보다 낫, 지."

시아티는 친구들의 부축을 받으며 간신히 일어섰다.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다 포기한 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길이…생겼네."

"란카르트…! 친구로 보진 않더라도, 최소한 동기인 줄 알았는데!"

한때 란카르트의 추종자였던, 그러나 더 소중한 정이 든 캐러팔드는 시아티의 부상에 격분한 반응을 보였다. 캐러팔드는 자기가 란카르트의 마법을 동경하고 두려워했다는 사실도 까맣게 잊은 채로 외쳤다.

"다들 나를 도와줘! 저 개자식에게 한 방 먹여주지 않으면 못 견뎌!"

"가만, 있어. 흐. 팔 잘린 거에 비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냐."

캐러팔드를 붙잡고 헐떡거리던 시아티는 끊어질 듯한 목소리로 되뇌었다.

"방금 내가 겪은 게, 우리 모두가 앞으로 겪을 신세야. 다들 익숙해지는 게, 큭, 좋아. 군국도, 그 누구도. 우리를… 돕기는커녕, 신경조차 쓰지 않을 테니."

아이들이 처량하게 고개를 숙였다.

란카르트 한 명조차 감당하지 못하는 그들이 앞으로 다가올 고난을 이겨낼 가능성은 없다.

조금 전 이겨냈던 대령조차 미리 준비한 함정과 열다섯 명의 용감한 희생 끝에 간신히 격퇴했지만… 군국이 제대로 힘을 쓴다면. 꽝 복권이나 다름없는 학생 백서른 명은 잡초처럼 뿌리 뽑히고 쓰레기처럼 버려지리라.

누군가 외쳤다.

"씨발…! 내가, 뭘 잘못했는데!"

고양감이 가라앉고 울분만이 남는다. 전투의 흥분 속에서 잊힌 고통과 슬픔이 다시 찾아오고, 잠시 반짝였던 불꽃이 꺼지며 어둠이 몰려왔다.

그들은 갈 곳을 잃었다. 시간을 허비하는 것조차 그들의 도피처가 될 수 없다. 구조선이라는 이름을 가진 또 다른 적군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으니까.

모두 길을 잃고, 나아갈 곳을 잃고, 희망과 의지마저 잃은 채. 그저 울분만 속으로 삼킨다. 그러는 와중에도 누군가 길을 밝혀주기만을 소망한다.

만일 이곳에 천신교의 위세가 펼쳐졌다면, 그들은 신에게 기도했겠지. 이 시련으로부터 자신을 구하고 천국으로 이끌어달라고.

그러나 세상에는 천국도, 지옥도 없다. 죽음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단순한 종말이다.

천국이니, 지옥이니. 먹기 좋게 가공된 믿음은 인공적인 것. 인공이라 하면 흉내 낸 거짓에 불과하다. 가장 좋은 것은 몸 안에 둔 채, 나쁜 것만 배설해낸 무언가에 지나지 않는다.

"지옥에나 떨어져…."

그래도 나는 그 소망에 응해야 한다.

희망마저도 잃고 아무도 길을 떠올리지 못하며, 간절한 소망만이 가슴에 자리 잡은 한가운데.

나는 차갑게 식은 호각을 입에 물었다.

구조선은 표류물이 잔뜩 쌓인 곳에서 시간을 허비하고 말았다.

분명 이곳에 머물렀던 흔적이 있는데, 아이들은 어딘지 보이지 않았다. 다만, 흔적으로부터 추측하건대 짐승의 습격을 받았고 격렬한 전투를 벌인 듯했다. 사방에 핏자국이 널려있고 무언가 묵직한 것을 강가로 끌고 간 자국이 남아있었다.

그 와중 나무에 새겨진 검흔을 알아본 누군가가 조심스레 지적했다. 니콜라스 총교관이 칼을 휘두른 흔적이 있다고. 상대는 조직된 다수의 일반병, 아마 학생들 같다고.

교관들은 혼란에 빠졌으나, 이윽고 분개하여 수색을 더욱 서둘렀다.

니콜라스가 굳이 이런 오지에서 아이들을 공격할 이유는 없지만 아이들은 니콜라스를 공격할 이유가 충분하다.

졸업실습에 참가한 교육생들은 경쟁에서 도태된, 2레벨이 확정된 실패작들이다. 그들이 수석인 휴이나 총교관 니콜라스에게 억하심정을 품고 협박 혹은 공격을 가한 게 틀림없다…고 교관들은 판단했다.

어쨌건, 수색을 서두를 필요성이 늘었다. 구조대는 캠프 탐색 팀과 강 하류 쪽 탐색 팀으로 나뉘었다. 쌓인 표류물 한 구석이 허물어져 있었기에 강 하류로 내려갔을 가능성도 고려했다.

그렇게 구조선이 강을 따라 내려갈 때였다. 하류 쪽 주둔지에 도착하자 목격 정보를 얻었다. 뗏목 여러 개에 나눠 탄 아이들이 주둔지를 지나쳐 하류 쪽 도시까지 내려갔다는 이야기였다.

왜 그들을 붙잡지 않았냐며 불평…할 수는 없었다. 니콜라스 총교관도 아니고, 중등학교의 교관은 주둔지 지휘관보다 계급이 낮았으니까. 또, 주둔지와는 별 관계 없는 하멜른 내부 일이기도 했다.

경례한 교관들이 하류 쪽으로 더 내려가려는 때였다.

"그런데, 또 무슨 이상한 명령이라도 했소? 그들은 노를 저으며 교가를 부르고 있던데…."

하멜른 강 하류 쪽에서 큰 소란이 일었다.

하멜른 강이 그리 큰 강은 아니나, 그렇기에 사람이 살기엔 좋은 지역이었다. 특히 좁은 강일수록 무서운 해흉이 물을 거슬러 올라오는 경우가 적어서 더욱 안전했다.

그런 강으로 일련의 무리가 떠내려왔다. 몇 개의 커다란 뗏목에 나눠 탄 아이들이었다.

-야트막한 동산의 배움의 전당. 오, 하멜른의 품이여.

호각 소리에 맞추어, 목이 쉰 아이들이 성대를 찢어가며 부르는 노래. 그건 그 어떤 처절한 비명보다도 끔찍한 절규였다. 시민들이 얼굴을 찡그리며 강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피와 땀을 다 태워, 적들을 무찌르고…

구경꾼들이 불쾌함과 호기심을 가지고 강가로 몰려들었다. 악취미를 가진 교관이 이상한 명령이라도 내렸나, 그들이 생각할 때였다.

삐—익.

가장 앞쪽 뗏목에 선 소년이 호각을 불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노를 젓던 아이들이 주섬주섬 일어났다. 그들은 서로를 한 번 마주 보더니, 서로의 손을 꼭 잡고는 뗏목의 가장자리로 향했다. 입으로는 여전히 노래를 부르면서.

-찬란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 진격한다….

크기가 크더라도 뗏목은 뗏목이다. 위에서 걷기는커녕 균형을 잡는 것도 어려워 보인다. 그런데도 아이들은 서로를 잡아주며, 흔들리는 뗏목 위에서 딱딱한 군화를 차분히 벗었다. 맨발이 거친 통나무 위에 내려앉았다.

누군가 신음을 흘렸다. 아이들은 아니었다. 그들은 여전히 노래를 부르고 있었으니까.

나쁜 상상력을 잔뜩 발휘한 구경꾼 중 누군가는, 설마 하는 심정으로 웃음을 흘렸다. 아무리 그래도 그 상상은 너무 현실성이 없었다.

어떻게 저토록 많은 인원이….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강은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흐린 시야 속에서 시원한 물소리가 흘러나온다. 얼굴에 부딪히는 바람이 서늘했다.

-앞으로…. 앞으로….

후렴을 부르며 아이들은 손을 잡고 앞으로 나아갔다. 뗏목의 가장자리. 한 걸음만 더 나아가면 딱딱한 통나무 대신 부드러운 수면이 밟힐 그 자리에까지.

그제야 무언가 불길함을 깨달은 관객들이 다급하게 뭔가를 외쳤다. 그러나 노래를 부르고 있는 아이들에게는 전해지지 않는다.

새벽녘, 안개에 걸러진 햇빛이 희끄무레 비치는 강물. 물살이 거칠게 흐르기에, 그들을 향하는 빛이 없기에, 수면에는 아이들의 얼굴이 비치지 않는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바로 옆, 고개를 돌리면 서로 닮은 얼굴이 있었으니.

그렇게, 아이들은 서로 마지막 구절을 부르며.

-군국의 미래로….

차갑고 깊은 강 아래로 가라앉았다.

그제야, 노래가 멎었다.

-사령부가 하멜른 중등군사학교에 전한다. 최대한 빨리 진상을 규명하여 보고하라. 생존자를 탐색하고 심문하여 의도를 밝혀내라.

긴급. 긴급. 최대한 빠르게 전말을 파악해라. 사령부에서도 독자적으로 조사를….

….

….

….

-정정한다.

현시점부터 5레벨 정보 관제를 가동한다.

하멜른을 통제하라.

반복한다. 하멜른을 통제하라.

EP.223 포로포로포로

독심술 이야기는 대부분 숨기고, 나머지는 적당히 각색했다.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거나, 나중에 따로 전해 들었다는 식으로 바꾸어 말했다.

물 흐르는 듯 이어진 이야기는 하멜른 강의 흐르는 물까지 언급하고서야 끝이 났다.

내 이야기를 누구보다도 객관적인 위치에서 듣고 있던 회귀자가 이야기를 정리했다.

"그러니까 군국이 금기를 쓰는 실험을 하려고 했고, 너는 그 실험 대상이었지만 저항했고, 학생들과 힘을 모아 장교를 처치했지만 뒤따른 추격을 피하기 위해서 하멜른 사태를 일으켰다는 거지."

음음, 하고 고개를 끄덕이던 회귀자는 주먹을 꽉 쥐며 냅다 외쳤다.

"저번에 했던 말, 다 거짓말이잖아! 아이들이 반란을 일으키고는 너를 제물로 삼아서 저주했다며!"

"비슷하지 않나요? 하나하나 뜯어보면 다 진실이긴 했는데."

"틀리지! 너는 네가 완전한 피해자인 것처럼 말했잖아! 듣고 보니, 다 네가 조장한 거네!"

"아니, 그러면 네가 범인이지, 라고 말 들었을 때 냉큼 고개를 끄덕이고 보는 바보가 어딨어요? 진상을 말한 것만으로도 저는 제 의무를 다했다고 봐요."

당당하게 대꾸했다. 놀랍게도 회귀자는 내 변명에 일단 수긍하는 기색이었다.

"하지만, 그거랑은 별개로… 뭐, 적절한 대처였어."

"오? 이걸 이해해줘? 웬일이에요?"

"웬일이냐니. 나는 처음부터 객관적인 입장이었거든."

가볍게 쏘아붙인 회귀자는 팔짱을 끼고는 내 행동을 냉정하게 평가했다.

"최선의 판단이었어. 신비에 취약한 군국은 그런 기괴하고 갑작스러운 사건이 일어나면 일단 보도관제를 걸지. 역으로 사건을 크게 일으키고 저쪽이 진상조사에 조심스러울 때가 가장 허점이 생기는 시간. 좋은 방법이야."

군국을 한 번 멸망시켜 본 이다운 발언이었다. 똑같은 존재를 싫어한다는 동질감 때문일까. 회귀자는 군국을 망가뜨리는 데 일조한 나를 향해 우호적인 시선을 보냈다.

"…그래도, 생각보다 괜찮은 이야기였어. 나는 처음에 네가 통신병이나 공안처럼 군국이 특수하게 키워낸 특무부 요원이라고 생각했지 뭐야. 알고 보니 꽤 괜찮은 녀석이었잖아."

"하하하. 지선의 팔까지 자른 대범죄자에게 그런 소리를 들으니까 어색하네요."

"끝까지 이죽거리긴."

하하하. 미소가 오고 가는 즐거운 대화. 이게 진짜 대화지.

지금까지 너무 날 서고 목적성 있는 대화만 해왔어. 누구를 가르치고, 알려주고, 화내고, 싸우고.

꼭 언어를 정보교환의 형태로 쓸 필요는 없잖아. 이렇게 친목을 도모하는 것이야말로 말의 순기능 중 하나.

'예전 회차. 레지스탕스와 협력했을 때에, 하멜른의 사건 덕분에 내부 지지자를 꽤 모을 수 있었어. 뭐, 그것만으로는 안 되고. 주로 내가 게릴라전을 벌이며 만물의 영장을 폭주시켜서 가능했던 거지만, 내부 민심도 무시할 순 없지… 뭐야. 우리, 동료였잖아?'

회귀자가 나에게 이토록 따뜻한 시선을 보내는 일이 또 있었을까. 화기애애. 그 말이 딱 어울릴 정도로 우리는 친근하게 미소 지었다.

"내가 너를 지금껏 크게 오해한 것 같아."

"지금이라도 알았으면 됐어요. 원래 인간은 배워가는 생물이잖아요?"

"말은. 어쨌든, 신세를 졌어."

'어디까지나 이전 회차 한정해서 말이지만. 이번 회차에서는 레지스탕스와 협력하지 않기로 했으니 별 쓸모는 없겠네…. 아니, 잠깐만. 하멜른, 진상. 자살…. 영향력.'

뭐지? 생각이 팽팽 돌아가고 있는데, 내용이 휙휙 건너뛰어서 잘 모르겠다.

그때였다. 팔이 꽁꽁 묶인 채 이야기만 듣고 있던 히스토리아가 담배를 더욱 악물었다. 짓누른 듯한 소리가 났다.

"…우리 귀염둥이. 생각보다 잔인한 사람이었네. 못났다곤 해도 나와 휴이의 동기들인데, 그들이 다 죽어 나간 일을 보고 괜찮다니."

"어?"

고개를 돌려보니, 히스토리아는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 무섭게 회귀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난데없는 적의와 마주한 회귀자는 얼떨떨한 얼굴이 되었다.

"왜? 신비인 척 관제 걸어놓고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하멜른 학생들을 빼낸 거 아니야?"

순진하게 되묻는 회귀자.

회귀자가 어떤 오해를 하고 있는지 깨달은 히스토리아는 코웃음을 치며 다시 등을 컨테이너 벽에 기대었다. 입에서 담배연기를 풀풀 뿜으며, 히스토리아가 순진한 아이를 보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아아.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거야? 아까 말 취소할게. 여전히, 사고방식이 귀엽네."

"또 왜 시비야? 적당히 눈속임하고 빼내면 되잖아?"

"중등군사학교 학생들이 그만한 사람들을, 그리고 뒤따라온 구조선에 탄 교관의 눈을 어떻게 속이니? 참, 순진하고 어려. 어쩌다 너 같은 아이가 휴이랑 같이 다니게 되었을까?"

"엥? 잠깐만. 네 말대로라면."

'확실히, 제식마법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평범한 사람이라면… 흐르는 물속에서 아무도 모르게 탈출하는 건 힘들겠네. 그러면, 정말 그들은 스스로….'

한순간 물에 젖은 것처럼 소름이 쫙 올라온다. 내 감정이 아니라 회귀자의 것이다.

잠깐 몸을 떤 회귀자는 흠칫거리며 내 쪽을 쳐다보았다.

'…정말, 다 죽였다고? 자기 동기들을…?'

"아, 어. 이게 설명하긴 좀 그런데. 꼭 제가 죽인 것처럼 들려서 저 자신을 변호하자면. 죽은 아이들끼리는 서로 합의를 봤어요."

"합의를 봤다고? 무슨 합의. 다 같이 죽자는 합의?"

설마, 그런 의미 없는 합의를 하려고.

"비슷하지만 달라요. 모두가 살아나갈 수는 없다는 합의요."

"뭐?"

"죽을 사람은 죽고, 살 사람은 살 테니까. 최소한 살아남을 이들을 위해서… 죽더라도 체념한 채로 조용히 죽도록."

시체가 발견되지 않는다면 생존한 게 아닐까 의심받는다. 그렇다면 그저 그런 도주극으로 남을 뿐이다. 목이 찢어지라고 노래를 부르면서 노를 저은 보람이 없어진다.

"방법은 모두에게 일러두었어요. 생체 단말에 바람 마법을 세트해두고, 강 밑을 걸어서 빠져나가는 거예요. 집중력을 잃지 않는다면, 제식 마법으로 물속에서도 3분 정도는 숨 쉴 수 있으니까. 물길에 휩쓸려 죽든, 숨이 차서 죽든. 물고기 밥이 되어 죽든. 전부 감수하고 강 밑바닥을 걸어서 나가자…. 전부 다 살지 못할 테니, 살고자 하는 이들은 살 수 있도록."

"잠깐. 그게 가능할 리가 없잖아. 물속에서 바람 마법을 쓰려면 어지간한 집중력으로는 불가능해. 설사 한다고 해도, 숨이 차면 본능적으로 발버둥 칠 거라고."

"그것을 참아냈는걸요. 하멜른의 졸업실습에 참가한 그 아이들 중, 살려달라며 허우적거린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어요. 묵묵히 걷다 죽거나, 아니면 간신히 살아서 강둑에 닿거나. 사람들의 뇌리에 새겨질 만큼 확실하게 했죠."

그렇기에 하멜른은 군국의 치부이며, 우연히 그 광경을 목격한 이들에게는 악몽과도 같은 경험이 되었다.

저주란 특별한 게 아니다. 강한 증오와 울분을 가진 사람이, 충분한 사색과 고민을 거듭하고는, 충격적이고 기발한 방법으로 표출하여 사람들의 마음에 새긴다면… 그것이 곧 저주가 된다.

그 저주에 당한 사람은 멀리서 찾을 필요 없다.

"직접 본 증인도 마침 여기 있네요."

히스토리아가 바로 그 증인이다. 가장 가까이 있었던 사람 중 하나로서, 우리가 어떤 결말을 맞이했는지 마지막으로 목격한 사람 중 한 명.

그 탓에 저런 꼴이 되었지.

"리아를 보세요. 육장성 총사. 군국의 딸이자, 패왕의 별 아래 태어난 최강의 무재. 안하무인의 천재가… 고작 동기한테 이야기를 듣고자 하는 이유로 일부러 묶여오는 진풍경이 펼쳐졌잖아요."

"끙…. 그러기는 한데."

'총사가 신왕국의 중책이 된 것도 그 때문인가…? 도대체 이 자식은 어디까지 뻗어있는 거야?'

사람을 암중의 존재처럼 취급하지 마. 나는 개인 중의 개인이다. 조직을 짠 적도, 암중에서 암약한 적도 없어. 언제나 최선을 다해 살아남았을 뿐.

회귀자를 내버려두고 히스토리아에게로 다가갔다.

마음에 새겨진 상흔은 그 자체로 저주다. 두고두고 남아서 괴롭히며, 그 상처에서 풍기는 짙은 어둠이 주변에 퍼지고 만다.

뭐, 상흔이 아니라 감명을 받은 바보 자식에게는 축복 비슷한 게 될 수 있지만. 최소한 히스토리아에겐 아니었다.

"어때, 리아. 알고 싶은 건 다 알았으려나?"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대충 알았어."

"아직 뭔가 욕구불만인 모양인데. 할 말 있어?"

호기심은 해결했지만 여전히 응어리가 맺힌 표정이다. 히스토리아는 마력초 연기 너머에서 고개를 들어,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나를 추궁했다.

"어째서. 너는. 아이들을 다 죽이는 방법은 떠올릴 수 있으면서… 그들을 살릴 방법을 떠올리지는 못한 거야? 너라면, 다른 방법을, 분명…."

그러나 의미 없는 한탄이라는 걸 히스토리아도 안다. 그때 나는 행동했고 히스토리아는 방관했다. 방관자인 그녀가, 더 기발한 수를 떠올리지 못했다고 나를 지탄할 자격은 없다.

말을 하다가 말고 히스토리아는 고개를 홱 돌렸다. 연기 섞인 한숨 소리만이 들려왔다. 나는 옅은 미소와 함께 이야기를 마무리지었다.

"자, 자. 어쨌든 조금 암울한 이야기였네요. 다들 지루하지 않으셨을지 모르겠어."

[지루하기는. 흥미진진한 이야기였다. 군국이라는 나라가 너를 죽일 듯이 쫓아다니는 이유가 이것이었나 보구나….]

이야기라면 뭐든지 좋아하는 티르칸쟈카에게는 오로지 흥미만 있을 뿐이었다. 하긴 백여 명 자살한 것 가지고는 티르칸쟈카에 별다른 충격을 주지 못하겠지.

[다만… 저기, 휴. 탐식은 금기라고 할 만한 권능까진 아니다. 먹잇감을 사냥하여 그 목을 축이는 건 세상 만물의 이치이니. 비록, 군국이 쓴 수단이 사이하여 거부감이 들지만, 탐식이라는 권능 자체를 꺼려하지는….]

인간을 탐식하는 흡혈귀는 필사적으로 자기 행위를 변명했다. 자신의 무해함을 증명하고 싶어하는 포식자 같은 태도였다.

뭐, 티르가 무차별살인마도 아니고. 입장은 충분히 이해하고 있어서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별로 꺼린 적은 없어요. 다만 굳이, 싶어서였죠. 티르도 지나가는 사람 푹푹 찌르고 피를 내서 먹지는 않듯, 저도 불필요한 일을 저지르지는 않아요."

[고맙구나.]

"뭘요. 저만 안 드시면 되죠."

나를 절대 잡아먹지 않는 포식자의 존재만큼 든든한 게 또 없다. 나만 안 공격하면 우리는 종족 출신을 뛰어넘어 아주 친한 친구가 될 수 있지, 암암.

"멍멍."

"…? 너는 갑자기 왜 짖냐."

"멍. 타이밍!"

"타이밍은 무슨 타이밍?"

어쨌건 할 말을 다 한 나는, 손뼉을 짝짝 치며 이야기를 끝냈다.

"자, 해가 졌어요. 이제 슬슬 움직이죠. 밤이어야 우리가 안전하게 움직일 수 있으니까. 그 전에…."

히스토리아는 나와 눈도 마주치고 싶어 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시선을 홱 돌려서 옆얼굴만 보여준 채 맛있게 담배연기만 뿜어내고 있다. 아무래도 전폭적으로 협력해줄 것 같지는 않다.

이대로 놔주자니 그것대로 걱정이고, 그렇다고 군국의 온갖 어그로를 끌면서 군국의 딸을 데리고 다니는 것도 좀 그렇고.

어차피 내가 취할 수 있는 선택지는 없다. 히스토리아는 저렇게 묶인 상태로도 나를 제압할 수 있으니, 결국 동행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의견을 구하자.

"어, 음. 셰이 씨, 히스토리아는 어떻게 하실래요?"

"으음. 잠깐만. 생각 좀 해보고."

'군국 육장성이고, 이 와중에도 아직 전성기가 오지 않았어. 놔두면 두고두고 방해돼. 특히, 세 발 쏘면 한 발이 무조건 맞는 필중의 이치 말고… 총검총의(銃劍總意)를 깨우치면 그때부턴 천앵의 카운터라서 상대하기 정말정말 껄끄러운데. 으음.'

엥? 뭐야. 여기서 더 강해진다고? 총검총의, 그냥 들어도 엄청나게 세 보이는 그 기술 이름은 또 뭐야?

허 참. 상대적 박탈감이 느껴지는구나. 멋대로 생각을 읽는 내가 한탄하는 사이 회귀자도 난색을 표하며 의견을 구했다.

"…굳이 죽이고 싶지는 않아. 일단 살려두는 쪽으로 가닥을 잡자."

엉? 뭐라는 거야, 갑자기.

"저기, 셰이 씨. 당신은 살육에 미친 악마인가요? 뭘 선심쓰듯이 죽이고 싶지 않다는 말이 나옵니까?"

"어? 왜? 별로 죽이고 싶지 않다고 말했는데?"

아직도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몰라? 입을 딱 벌리고 있는 사이, 어처구니가 없던 건 티르칸쟈카도 마찬가지였는지 근엄하게 훈계했다.

[셰이. 네가 군국에 억하심정이 있다 한들, 휴의 벗이 아니겠느냐. 그런데 어이하여 동료의 벗을 죽인다고 말하는 것이냐? 목마른 흡혈귀조차도 지인의 친지는 건드리지 않는 법이다.]

"어…? 잠깐만. 내가 나쁜 사람이야?"

"봐봐요. 흡혈귀 나무랄 일이 아니라니까요. 탐식만 안 하면 뭐해. 사람 오른팔을 깍둑썰기하지 않나, 친구인 거 다 빼놓고도 나름 순순히 투항한 포로인데 죽인다는 말이 왜 나와."

일제히 비난을 받은 회귀자는 정색하며 부정했다.

"나도 죽일 생각 안 했어! 그냥 의견을 말한 거잖아!"

"분위기가 깨지잖아요. 아무도 죽일 생각 없는데 혼자서 '그럼 죽이지 말자'니, 누가 들으면 마치 우리가 막 죽이고 다니는 사람인 줄 알겠습니다?"

[험한 세상에서 동료의 벗조차 참살한다면 누가 내 편에 서겠느냐. 실수로라도 언급하지 말거라.]

"나, 나도… 그런 생각은 안 했는데…."

티르와 나의 합동공격으로 인해 회귀자는 쭈그러들고야 말았다. 암암, 이거지. 기분 좋게 회귀자를 두드려 팬 나는, 문득 느끼는 위화감에 시선을 돌렸다.

어, 티르. 왠지 포로라 안 죽이는 게 아니라, 내 지인이라서 안 죽인다는 것처럼 들리는데…?

"저기, 티르. 만약 붙잡힌 게 리아가 아니라 창 쓰는 아저씨였으면 어땠어요? 죽여요?"

[…? 네 지인이 아니라면 구태여 살려둘 필요가 있겠느냐? 너희가 피를 취하기 위해 생자를 필요로 하는 것도 아닐 터인데.]

'구태여 네 벗을 참살하여 반감을 만들고 싶지는 않구나.'

사고방식 자체가 인연 혈연 우선이었네…. 사고방식 자체가 옛날 시절이라 그런가 보다.

어쨌건 히스토리아의 처우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왔다. 결국, 놔주거나 아니면 끌고 가거나 둘 중 하나인데. 풀어준다면 어떻게 풀어줄지, 끌고간다면 어떤 조치를 할지.

딱히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는 상황에서, 묘안이 떠오른 내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면 이렇게 하는 게 어떨까요?"

EP.224 작전타임은 불리한 쪽이 건다

메타컨베이어 벨트 위에 마련된 군국 임시 기지에서는 작전 회의가 한창이었다.

네모난 탁자를 앞에 두고 정돈된 혼란이 몰아쳤다. 장성들이 탁자 하나를 두고 수많은 대책을 강구했지만 이 상황을 타파할 뾰족한 방도가 나오지 않았다.

언급된 내용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들의 발언에 들어있는 공통된 기조는 불안함이었다.

"이쪽은 전력이 준 데 비해, 저쪽은 건재합니다. 더군다나 저쪽이 메타컨베이어 벨트에 간섭할 수 있음이 드러난 이상, 벨트 위에서의 추격이 무의미합니다."

참패였다. 군국 탄생 이후 이토록 처참하게 패배를 당한 경험이 또 있을까.

변명할 말은 많았다. 상대가 시조 티르칸쟈카라는 전설적인 존재였으며, 거기다 특정 개체의 편을 들지 않아야 할 짐승의 왕이 노골적으로 저쪽의 편을 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상대의 기량이, 특히 보이지 않는 검을 쓰는 소년 검사의 힘이 예측을 훨씬 웃돌았다.

파트락시온이 격분해서는 외쳤다.

"그 꼬마! 나랑 싸울 때는 힘을 숨겼어! 내가 만만해? 절대,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다!"

"…대장님. 어떻게 용서하지 않으실 생각이십니까? 거듭 말씀드립니다만 단독행동은 하시면 안 됩니다."

제자인 간드 대령이 조심스레 묻자, 파트락시온은 창대를 잡은 손에 힘을 꽉 쥐고는 격하게 대꾸했다.

"어떻게 하기는! 다음에 만나면 전력으로 때려 부순다. 나는 결투하는데 가진 걸 다 안 쓰는 녀석이 싫어!"

"이건 결투가 아닙니다! 작전이라고요!"

"모든 분쟁은 결투의 연속, 혹은 집합이야! 어찌 되었든, 다음에는 확실하게 꼬마의 전력을 끌어내겠어!"

"끌어내지 마시고 전력을 다해 격파해야 합니다! 그래야 히스토리아 소장님을 탈환할 것 아닙니까!"

간드 대령이 히스토리아를 언급하자 회의실 안에 불편한 침묵이 맴돌았다.

이 작전에 그 누구보다도 적극적이었던 히스토리아. 총사대를 데리고 앞질러가서 지연전을 펼치며 하루 종일 상대방을 붙잡아두었던 그녀다. 심지어 불리한 와중에도 총사대를 지키기 위해 단신으로 그들과 맞섰다.

아무리 이번 임무에 사적인 감정이 있다고 한들, 히스토리아는 최선을 다해 목숨을 걸어 싸웠다. 장성들은 히스토리아를 향해 기특함은 물론 약간의 부채감까지 느끼고 있었다.

파트락시온이 진지하게 되물었다.

"히스토리아 소장님? 너 방금 히스토리아 소장님이라고 했냐?"

"그렇습니다만.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모두가 파트락시온의 입만 바라보는 도중, 그는 한없이 가볍게 대답했다.

"야, 너 언제는 히스토리아 보고 나이도 어린 게 겉멋 들어서 총이나 쏜다며 건방지다고 했잖아? 그때 대련에서 쥐어 터진 이후에는 꼬박꼬박 존칭을 붙인다?"

"예의를 지키는 겁니다! 대장님께서도 좀 지키십시오! 이곳에는 대장님만 계신 게 아니잖습니까!"

"여기선 내가 제일 직책 높잖아. 지금은 마장 할매도 없고…."

"내가 없다고 태평하게 있을 땐가!"

문이 벌컥 열리고, 정찰과 벨트 보수를 마치고 들어온 마장이 옷깃을 여미며 안쪽으로 들어왔다. 한껏 태평한 자세로 있던 파트락시온은 투덜거리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쳇, 호랑이도 제말하면 오는 것 봐. 이젠 내가 대빵이 아니네."

"허튼소리 말고, 빨리 소장을 구할 생각을 해야 할 거 아닌가! 지금 소장이 적의 손에 붙잡혀 어떤 모진 고초를 겪고 있을지 모르는데!"

만사 제멋대로인 절창을 향해서 거리낌 없이 훈계를 내뱉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존재, 마장 프렐비요르.

왕국 시절, 수가 적고 신비한 능력을 지닌 마법사는 당연하게도 오직 귀족들만의 전유물이었다. 귀족들은 더 뛰어나고 강력한 마법사를 식객으로 두며 '신비해질' 필요가 있는 일에 마법사를 투입하고는 했다. 고유마도를 가진 마법사는 그 뜻에 따라 상상조차 못 할 방식으로 권력을 지탱했다.

그 와중, 공사부터 전쟁까지 온갖 더럽고 힘든 잡일을 도맡아 했던 프렐비요르는 군인으로부터, 시민으로부터 커다란 지지를 받았다. 정작 그녀는 자기 마법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서라며 영광을 마다하였지만.

왕국에서는 마법사 주제에 잡일이나 하는 그녀를 향해 반쯤 조롱의 의미로, 반쯤은 혀를 내두르며 그녀를 왕국의 일꾼이라 불렀다.

절창도 외골수인 그녀 앞에선 비교적 말을 가리는 편이었다.

"그러니까 비행 연습 좀 하고 다녀! 댁의 바람에 잘못 휘말렸다간 뼈도 못 추려서, 떨어져도 괜찮은 장성 아니면 날아갈 수가 없잖아! 언제까지 연처럼 매달려 날아다닐 건데?"

"시끄럽다!"

어디까지나 비교적으로.

성큼성큼 걸어들어온 프렐비요르는 군국 지도가 그려진 탁자 앞에 서서는, 그 위로 돌돌 말린 마력초를 던지며 말했다.

"짐승의 왕, 그에 대해서 해결책을 전해받았다."

"뭔데?"

"가능한 상대하지 않는다. 이쪽이 먼저 공격하지 않는다면 짐승의 왕도 구태여 공격의지를 보이지 않을 것이다. 하나, 만일 고양이의 왕이 또 적대한다면, 이 진정용 마력초를 피우라고 하더군."

마장이 탁자 위에 둔 건 상쾌한 향기가 나는 엽궐련이었다. 파트락시온이 마력초을 들어 냄새를 킁킁 맡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건 누가 준 거야?"

마장이 대답했다.

"과병, 막시밀리앵이다."

"그놈은 무기 말고 약도 만들고 다녀? 하긴, 연금술사들이 다 음습한 면이 있지. 그래서 비밀병기는 언제 온대?"

"과병은 대적하기 위한 무기를 제작하는 중이며, 끝나는 즉시 합류하기로 하였다."

"아직도 다 안 만들었대? 그때쯤이면 이미 공국으로 튀었겠다. 창도 고쳐야 하는데, 맨날 필요할 땐 없어."

"건방진 것이! 어른 말하는데 초치지 말고, 할 말 없으면 가만히 듣고 있어라!"

윽박지른 마장이 좌중을 둘러보며 소리쳤다.

"들어라. 작전이 입안되었다. 다음 전투 장소는 극동 기착지! 아마 저들은 극동 기착지에서 해안도로를 따라 공국으로 올라갈 것이다. 우리는 그곳에서 결전을 벌여, 그들이 해안도로로 향하는 것을 저지한다!"

극동 기착지는 군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기착지이며, 동시에 메타컨베이어 벨트의 보수와 유지를 위해 여러가지 제어 시설을 지닌 공간이기도 하다. 군국에서 메타 컨베이어 벨트가 가장 느리게 흐르는 길목이 다음 전투장소로 낙점되었다.

합리적인 작전에 다들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무렵 참모가 조심스레 물었다.

"하지만, 저희는 그들의 뒤쪽에 있지 않습니까? 어떤 방식으로 앞질러갑니까?"

"방금 목소리를 높인 네놈! 질문할 때는 손을 들고 질문해라!"

"시, 시정하겠습니다."

참모가 손을 들고는 다시 물었다. 그제야 프렐비요르는 손을 든 쪽을 향해 몸을 돌리고는 우렁차게 말했다.

"그래! 자기가 누구인지 밝혀야 그쪽을 보고 대답할 것 아닌가! 기억하도록. 신원을 밝히는 것! 이건 보고의 기본이다!"

"상기하겠습니다."

"시정이 빠르군. 좋은 자세다!"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인 프렐비요르는 다시금 설명했다.

"극동 기착지에는 다목적 기갑부대, 베르나르테른이 대기 중이다. 그들이 지연전을 펼칠 것이다."

프렐비요르의 입에서 나온 건 군국 최정예 군단의 이름이었다. 참모는 깜짝 놀라서 대답했다.

"베르나르테른? 사령부 직속, 오직 전쟁을 위해 준비하는 5레벨 정예부대가 아닙니까? 그들이 국가 간 전쟁도 아닌 이런 일에…?"

"시조 티르칸쟈카는 일인군단. 충분히 그럴 필요가 있는 적이지. 또한, 어둠을 불러내어 병력으로 삼는 그녀의 능력을 고려할 때 이쪽도 군단으로 부딪히는 편이 훨씬 낫다. 베르나르테른에게 시조와의 전투를 맡기고, 우리는 배후에서 공격한다."

이른바 망치와 모루였다. 베르나르테른이 저들을 저지하고 메타컨베이어 벨트가 지지부진 움직이는 동안, 마장과 절창을 비롯한 장성들이 습격하여 마무리한다…는 작전.

완벽한 계획이었다. 모든 계획이 그렇듯, 계획대로 된다면.

당연히 참모도 그 점을 지적했다.

"만일 저쪽이 극동 기착지에서의 싸움을 회피한다면 어떻게 합니까?"

"그들이 벨트 위에서 내려와 준다면 우리가 유리해진다. 평지에서는 군단의 힘이 더욱 제대로 발휘될 수 있으니. 기동전을 벌여 마무리하면 그만이다."

"그것도 그렇지만, 저들은 군단급 위력을 갖춘 개인입니다. 만일 어딘가에 숨어서 게릴라전을 펼치면 곤란해질 겁니다."

"통신병을 필두로 모든 인력이 동원되어 감시중이다. 이 나라를 빠져나갈 수도 없겠지만, 어딘가 숨을 수도 없을 거다."

"으음…."

잠시 고민하던 참모는 사방을 슬쩍 둘러보다, 총대를 메는 기분으로 마지막 가능성을 제시했다.

"만일… 저들이 히스토리아 소장을 인질로 잡는다면…?"

평소에도 강철과 같은 태도를 보였던 프렐비요르조차도 얼굴을 한층 더 굳혔다.

요술사 란카르트와 총사 히스토리아. 군국의 미래를 이끄리라 믿었던 두 인재 중, 온전하게 남은 건 히스토리아 하나.

히스토리아가 애교 있는 성격은 아니나, 누구에게나 깍듯하면서도 적당히 융통성 있는 태도에 나름 정을 붙이고 있던 프렐비요르였다. 분야가 다르긴 했지만 내심 란카르트보다 히스토리아 쪽을 대견하게 여겼다.

마음 같아서는 어떤 수를 쓰더라도 구하고 싶지만.

"…협상은 없다. 탈환을 노리되, 여차할 때는 포기하라."

군국에겐 협상이란 없다. 한 번 숙이면 두 번 숙이게 되며, 나아가 국가가 무너지게 하는 도미노이다.

개인을 위해 국가를 위기에 처하게 하지 마라. 군국이라는 나라의 정체성이자 대전제.

장성들이 참담하게 고개를 끄덕일 무렵, 절창은 혼자 의뭉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 악물고 무시하려고 했으나 너무 거슬리는 바람에 결국 마장은 그를 지적하고 말았다.

"파트락시온 대장. 할 말이 있으면 실실 쪼개지 말고 말로 하라!"

"크크. 이쪽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

악동 같은 미소를 짓던 파트락시온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대답했다.

"군국의 딸내미, 그 불량한 녀석. 일부러 잡혔어."

"…뭐라고 했나, 파트락시온?"

"히스토리아 말이야. 그 녀석 상황 불리해져서 도망가야 할 타이밍에도, 일부러 달려들었다고. 잠입한 거야."

뜻밖의 발언에 모두가 아연실색해졌다. 그 속에서 파트락시온은 홀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제법 열심히 싸우는 척했지만 내 눈은 못 속이지. 벨트 밖으로 굴러떨어지면 될걸, 고양이 왕이랑 기어코 일전을 겨룬 다음에 힘 빠진 척 했어."

"왜, 굳이 그런 위험한 수를?"

"글쎄? 위험한가? 저쪽 녀석들, 기지 몇 개 초토화시키고 수도사령부를 습격해서 난동을 피운 것 말고는 딱히 뭐 한 거 없잖아?"

"충분히 위험하잖습니까! 지선의 팔을 자르고 보급기지 다섯 곳을 불태웠습니다! 아무런 이유 없이요!"

"아무런 이유가 없지는 않을걸. 어쨌건, 사람을 마구잡이로 죽이지는 않는 것 같으니. 잡힌 척 숨어 들어간 게 분명해."

그러나 일부러 잡히는 건 위험하다. 특히 개인의 힘이 집단을 능가하는 경우에는 더욱 치명적이다. 포로로 잡히는 바람에 힘의 무게추가 기울기 때문이다.

돌발행동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과하다. 참모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말했다.

"혹시, 아예 전향했을 가능성은…?"

그 순간 장성들의 시선이 전부 그쪽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