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왜곡 각성 (2)
강후의 호기심 가득한 눈빛을 읽었는지, 김신령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신기하지?"
"직접 제작하신 겁니까?"
"맞아. 호신용으로 제작 중인데 화력 조절이 잘 안되네. 물론 권총에는 문제가 없고, 화력이 너무 세서 문제기는 하지만?"
"멋지네요."
강후가 헌터의 다양한 관련 분야 중에 가장 어렵고 대단하다고 느끼는 분야가 바로 세공과 제작이었다.
단순히 관련 지식이 있다고 해서 해결되는 분야가 아니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타고난 감각도 필요하고, 직관도 상당히 중요했다.
정해진 공식 같은 것이 있지 않으므로, 그때그때에 맞는 임기응변도 꽤 중요했다.
강후가 마탄 권총에 시선을 좀처럼 떼지 못하고 있는 동안.
그의 얼굴을 계속 살피던 김신령이 묘한 미소를 흘리며 말했다.
"참 잘생겼단 말이야. 혹시 여자친구는 있어?"
"아뇨, 없습니다. 앞으로 사귈 생각도 없습니다."
"그 잘생긴 얼굴을 혼자 쓰려고?"
"저 혼자도 위험한 세상을 함께 위험해지도록 만들고 싶지는 않아서요."
"생각이 많이 담긴 대답이네."
"네. 고민이 꽤 담겨 있죠."
어쩌다 보니, 진지한 대답이 되기는 했지만 오랜 시간 해 온 생각이기도 했다.
"내가 25년만 젊었어도! 먼저 고백했을 텐데 세월이 아쉽다! 아쉬워...."
"제가 25년 일찍 김신령 님을 만났더라면 고백했을지도요."
"멘트 좋은데?"
"진심입니다."
강후의 능청스러운 대답에 김신령의 입에 웃음꽃이 만개했다.
지금의 그녀가 강후에게 이성으로서의 호감을 느껴서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잘생긴 남자에 대한 반응이야 늙고 젊음을 가릴 이유가 없기에 솔직히 말했을 뿐이다.
김신령의 성격이기도 했다.
그녀는 돌려서 말하는 법이 없었다. 속마음도 포장해서 말하기보다는 날 것 그대로 말했다.
이성적으로 보자면.
강후가 보기에는 지금의 김신령도 충분히 매력적인 외모였다.
젊었을 적에 무조건 미인 소리를 들었을 외모다.
몸으로만 보면, 지금 30대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탄력적인 몸매를 가졌다.
아마 부단히 노력한 흔적일 것이다. 자기관리가 없으면 절대 저런 몸을 가질 수 없다.
어쨌든 서로 기분 좋은 덕담이 오가고 난 뒤.
그녀의 저택 안으로 들어가서 계속 대화가 이어졌다.
통유리로 된 창문을 통해 보이는 훈련장에는 이미 김신령이 소환해 놓은 소환수가 있었다.
강후는 그녀가 내어온 커피를 마시며, 소환수의 움직임을 면밀하게 관찰했다.
생각보다 길어지는 적막이 어색했는지, 김신령이 화제를 돌렸다.
"내가 말 거는 게 관찰에 방해가 되는 건 아니지?"
"상관없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네. 그거 알아? 중국에는 소환수만 부리는 부대를 따로 두고 있다는 거."
"신투 길드나 신수 길드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응. 모체, 그러니까 소환사를 극한까지 훈련시켜서 엄청난 수의 소환수를 부리게 만들지."
"그래서 소환사 헌터의 수명이 길지 못하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단명한다더군요."
"반쯤 기계라고 봐도 되지. 상대하게 되면 지옥이야. 헤어나올 수가 없어."
"어느 정도입니까?"
"지금 네가 보고 있는 저런 녀석들을 한 번에 열 마리도 넘게 부려. 무리하면 스무 마리까지?"
"...."
지금 강후가 보고 있는 것은 소환된 늑대였다.
움직임이 매우 날쌔고 공격성이 높았다.
수준으로 따지면, 레벨 300 정도는 된다. 물론 내구성이나 체력은 꽤 떨어지지만 말이다.
그런 녀석을 한 번에 한두 마리도 아니고 수십 마리를 부린다면, 무척 까다로울 듯했다.
바꿔 말하면, 컨트롤해야 하는 소환사가 정신적으로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야만 했다.
그래서 오래 살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게 1년을 살면, 남들의 10년, 20년만큼의 정신력을 소모하고 늙어버릴 테니까.
"중국에 대한 정보는 늘 유심히 챙겨보도록 해. 남의 나라 같아도 우리나라에 상당히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고...."
"끼칠 예정이기도 하죠. 영향권 안에서 자유로울 수도 없고요."
"응. 아무튼 소환수 얘기를 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네. 흑랑이는 어때? 네가 보기에?"
흑랑. 검은 늑대다.
김신령이 자신의 소환수에 붙여 준 이름이었는데, 그 말이 딱 어울리게 생긴 외모이기도 했다.
"지금 녀석이 목각을 상대로 보이는 공격 패턴이 너무 단조롭습니다. 이유는 알 것 같아요."
"왜지?"
"뻔한 얘기인데. 흑랑이 학습할 대상자로 생각한 헌터가 전력을 다하지 않았네요."
"선생이 별로였다?"
"정확히는 틀에 박힌 교과서적인 움직임만 보여줬네요. 그래서 학습도 그만큼만 됐습니다."
"예리하네."
"보이는 그대로 말했을 뿐입니다. 더하고 덜한 것도 없고요."
강후의 말대로였다.
김신령은 아무런 정보를 주지 않았음에도 그간의 과정을 읽어낸 강후의 안목에 감탄했다.
왜냐면 다른 헌터에게도 흑랑의 모습을 보여 준 적이 있었지만, 전혀 다른 대답을 들려줬기 때문이다.
흑랑은 매우 날쌔고, 화려한 움직임을 보이면서, 파괴적인 힘을 뽐내는 쪽이었다.
퍼포먼스 자체는 오히려 정신을 쏙 빼놓을 정도로 역동적이고 활동적인 축에 속했다.
하지만 강후는 그 안에 숨겨진 공허함을 본 것이다. 어설픈 콜드 리딩이 아니었다.
"도움을 좀 줄 수 있겠어? 내 소환수들이 반쪽짜리로 성장하는 걸 원하진 않아."
"요구사항이 하나 있습니다."
"뭔데?"
"녀석도 전력으로 저와 싸웠으면 합니다. 보니까 가장 중요한 순간에 공격을 머뭇거립니다."
"그래?"
"이건 주인의 통제가 자주 있었다는 뜻입니다. 녀석에게 최종 결정권이 없었던 거죠."
그 순간, 김신령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강후가 언급하지 않은 속사정을 짚어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랬다.
그녀는 소환수를 부리는 소환사로서, 전략적 움직임을 소환수에게 맡기는 편은 아니었다.
자신의 존재 가치가 소환수를 능숙하게 다루는 점에 있다고 생각했고, 전투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생각대로 조종하는 쪽에 가까웠다. 흑랑이 그것에 호흡을 잘 맞춰주기도 했고 말이다.
어느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는 것이지만, 강후는 이미 다 파악이 끝난 듯했다.
"그렇게 가면 계속 반쪽짜리가 될 겁니다. 자동화 기계를 만들어 놓고, 기계가 못 미더워서 자기가 손으로 돌리는 꼴이죠."
비유가 찰떡같이 들렸다.
놀란 만큼, 강후의 안목과 실력에 대한 신뢰는 저절로 올라갔다.
"알았어. 어떤 형태로든 간섭하지 않도록 해 볼게."
"그러면 됐습니다. 그렇게만 해 주시면 저도 녀석에게 배워갈 것이 생길 것 같네요."
강후가 몸을 풀었다.
흑랑이 전력을 다해서 싸워준다면, 자신도 학습할 수 있을 것들이 많을 듯했다.
이왕이면 서로에게 좋은 그림이길 바랐는데, 딱 그런 상황이 만들어졌다.
자신은 눈에 보이는 대로 짚어 주었던 것이지만, 김신령은 꽤 놀란 듯했다.
이상할 건 없다.
세공과 제작에 많은 시간을 할애해 온 그녀에게 소환수를 다루는 것이 오히려 어색했을 수 있다.
필요한 연구나 고민들도 세공과 제작 쪽에 더 쏠려 있었겠지.
"방음. 시야 차단. 전부 다 해 놓을 테니까, 외부 시선 걱정은 하지 말고 싸워 줘."
"그러죠."
김신령이 버튼 몇 개를 누르자, 훈련장을 둘러싼 외부 결계의 색깔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처음에는 단순 방음 정도만 되는 줄 알았는데, 선팅을 한 것처럼 시야 차단도 됐다.
상당한 고급 기술이다.
별장이든 저택이든 관계없이, 그녀와 관련된 시설은 무엇을 생각하든 그 이상이다.
'긴장 좀 해야겠군.'
질끈, 입술을 깨물었다.
소환수는 주인의 레벨을 따라서 성장하는 만큼 보통 힘든 상대가 아닐 것이다.
강후는 백일참, 흑월참을 포함해 전략적으로 배제하기로 한 스킬을 다시 한번 짚고는.
바로 흑랑과의 전투 준비에 들어갔다. 전투에 진심을 다할 생각이었다.
* * *
그 이후.
김신령은 강후와 흑랑의 전투를 보면서 정말 많은 것을 느꼈다.
일단 생각했던 수준보다 흑랑이 훨씬 더 고전했다.
강후에게 공격 경로를 간파당한 듯, 공격 시도가 계속 무위로 돌아가며 역공을 허용했던 것이다.
'한 번도 똑같은 패턴으로 가는 법이 없어.'
김신령은 지금 이 상황에 진심인 강후를 보며 놀랐다.
적당히 열심히 싸워주는 '척'만 할 수도 있었다. 화려해 보이도록 포장'만' 할 수도 있었다.
한데 그러지 않았다. 다양한 변수를 창출시켜, 흑랑의 폭넓은 학습을 도왔다.
그러자 이를 체득한 흑랑의 공격이 날카로워졌고, 그때는 오히려 강후가 학습하는 입장이 됐다.
선순환이었다.
'상당히 잘 다듬어져 있어. 효율적이야.'
강후를 면밀히 지켜본 김신령의 총평이었다.
암살자에게 있어 움직임의 효율은 매우 중요하다.
낭비가 있으면 그 즉시, 상대에게 약점을 잡히기 가장 좋은 직업군이기 때문이다.
괜히 고레벨 대에서 암살자 수가 적은 것이 아니다. 그만큼 위험 노출 빈도가 높아서다.
'도대체 뭘 했기에 스킬이 저렇게 많은 거지? 내 눈으로 확인한 것만 해도 20개는 넘어가는데.'
김신령은 그게 의문이었다.
물론 개인적인 호기심이다.
강후의 실력에 감탄했기에 생긴 자연스러운 궁금증이기도 하고.
지금 강후의 실력이 이 정도라면, 레벨이 제대로 올랐을 때는 시쳇말로 '미친놈'이 될 것 같았다.
공격 레퍼토리가 너무나도 다양하다. 적당히 많다의 수준이 아니라, 가늠이 안 될 정도다.
눈썰미 좋은 그녀가 10분 넘게 이어진 강후와 흑랑의 전투에서 '중복'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일까.
눈에 띄게 발전한 흑랑의 모습이 보였다.
녀석도 마치 제대로 된 맞수를 만난 것처럼, 신나서 열심히 날뛰고 있었다.
그때마다 통제하고 싶은 마음도 살짝 올라왔지만, 욕심을 내려놓고 흑랑에게 모든 것을 맡겼다.
'왜 K가 저 녀석에게 마음을 쓰고 있는지 알겠어. 한 번 보면 절대 놓을 수 없을 그럴 실력이네.'
김신령이 웃었다.
칭찬에 인색한 그녀가 이 정도로 호평을 한 헌터는 실로 오랜만이었기 때문이다.
하다못해 K가 항상 자랑스러워 하는 문형서의 창술 실력에 대해서도 평이 박한 그녀였다.
하지만 강후는 아니었다.
흠잡을 곳이 없었다.
마치... 암살자를 하기 위해서 태어난, 그런 존재 같았다.
* * *
15분의 짧고도 임팩트 있던 훈련이 끝난 뒤.
결국은 체력에서 버텨내지 못한 흑랑이 강후의 대참수 일격을 맞고, 그대로 소멸됐다.
마지막이 인상적이었다.
흑랑이 강후를 기습적으로 노리기 위해 공간 이동 기술을 쓰려다가 실패해서다.
김신령은 그것이 흑랑의 실수가 아니라, 강후의 능력에 의한 것임을 바로 간파할 수 있었다.
공간 이동을 억제하는 능력이라니! 어지간해서는 안 놀라는 그녀가 자신도 모르게 입을 떡 벌리고 있었다.
이쯤이면 됐다고 생각했다.
흑랑에게도 좋은 경험이 되었을 테고, 강후에게도 마찬가지의 자극이 되었을 것이라고 봤다.
그런데.
"혹시 다른 콘셉트의 소환수는 없습니까? 아직 몸이 좀 덜 풀린 것 같은데요."
"...응?"
강후가 예상치 못한 제안을 건넸다.
끝날 줄로만 알았던 훈련. 하지만 강후에게는 이제부터가 시작인 모양이었다.
166화 왜곡 각성 (3)
* * *
김신령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늦은 시점에 강후와 소환수의 훈련이 끝이 났다.
긴 시간이 지났지만, 김신령은 단 한순간도 지루하지 않았다.
강후의 움직임을 쫓고, 소환수와의 전투를 흥미롭게 살피느라 눈 돌릴 틈이 없었기 때문이다.
중간에 마른 침을 삼키다가 목이 너무 따가워서 깜짝 놀랐을 정도였다.
그만큼 넋을 잃고, 입을 벌리고 지켜봤다는 것이니까. 그랬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확실히 운은 아니야.'
김신령은 예리한 안목으로, 강후가 보인 실력이 절대 우연과 운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님을 파악했다.
우연으로 큰 힘을 얻은 헌터도 짧은 전투에서 파괴적인 힘을 능숙히 보여 주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장기전은 이야기가 다르다. 연륜이 필요한 장기전은 반드시 숙련된 경험이 필요했다.
강후는 철저하게 후자였다.
오히려 소환수의 움직임을 하나의 재료로 삼아, 자신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는 교재로 썼다.
김신령 본인이 강후가 필요해서 불렀던 것인데, 오히려 반대가 된 느낌이었다.
그의 성장에 거꾸로 도움을 준 느낌이랄까? 그래서 묘한 감정이 계속 교차했다.
"참나."
김신령이 소환수의 상태창을 보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전부 다 '회복 중'이라는 표시만 적혀 있다. 소환수 모두가 강후와 싸우다가 쓰러졌단 뜻이다.
실전만큼 전력으로 소환수를 다뤘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쯤이면 강후가 자신을 상대로 '버티기'쯤은 할 수 있다는 계산이 섰다.
레벨의 차이를 생각하면, 버틸 수 있다는 자체로도 대단한 셈.
김신령이 구슬땀을 흘리고 있는 강후를 향해 박수를 치며, 힘주어 말했다.
"좋아. 너무 좋아. 눈이 호강한 시간이었어. 필요 이상으로 고생을 한 건 아닌가 싶은데?"
진심이었다.
조금도 여유를 부리지 않고, 전력으로 훈련에 임해 준 강후가 너무 고마웠다.
물론 그만한 대가가 약속되었으니 하는 것이겠지만, 그럼에도 김신령은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
"서로 윈-윈이니까 전력을 다했을 뿐입니다. 소환수가 전부 수준급이네요. 놀랍습니다."
강후는 김신령의 소환수들이 상상 이상으로 강력한 것을 느끼고는 몇 번이나 놀랐다.
관리에 소홀했다고 하기에는 각 소환수의 성장 상태가 너무 좋았던 것이다.
학습도 일부분의 문제가 있었던 점을 제외하면, 기본적인 전투 감각은 좋았다.
동료로서 탐날 정도였다. 물론 그런 일은 없겠지만, 같이 던전에서 호흡을 맞춰 보고 싶었다.
"정말 흥미로워. 스승이 누군지 내게 말해 달라고 하면, 그건 큰 실례겠지?"
"솔직하게 말씀드릴까요?"
"그럼 나야 고맙지."
"없습니다."
"거짓말."
"정말입니다."
강후의 답을 듣자마자 바로 거짓말이라는 소리가 나올 만큼, 김신령은 믿기지 않았다.
이런 수준급 암살 실력이 스승도 없이 올라온 경지면, 좋은 스승이 하나만 붙어도 어떻게 될까?
모르긴 몰라도, 지금보다 더 파괴적인 힘을 가진 암살자가 될 것이다.
"내 소환수들은 전부 레벨 250에서 300급의 헌터는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이야."
"그렇더군요."
"그런 소환수를 상대로 멋지게 장기전을 치러냈어. 이게 독학이라니. 믿어야 되는 거야?"
"믿으시고 안 믿으시고는 자유지만, 제 대답은 언제나 똑같습니다. 스승은 없습니다."
김신령의 놀라는 반응이 강후는 참 재밌었다. 한편으로는 인정받는 것 같아 기분도 좋아졌다.
"어쨌든 고마워. 이제 약속을 지킬 시간이네. 준비는 됐지?"
"물론입니다."
"잠깐 기다려. 보안용 창고에서 챙겨와야 할 것 같거든."
"네. 기다리겠습니다."
"안으로 들어와 있어. 벽난로 앞에서 몸을 좀 녹이고 있어도 좋고."
"사양 않죠."
강후가 김신령을 따라, 저택 안으로 들어가 따뜻한 벽난로 앞에 자리를 잡았다.
그 사이, 김신령이 지하로 한참을 내려가서는 올라오지 않았다.
가까운 지하를 말하는 줄 알았는데, 지하에서도 훨씬 더 깊은 곳으로 가는 모양이다.
그녀가 하는 일을 생각하면 이상할 것은 없는 구조였다.
보안을 1순위로 생각하고 신경 쓰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과한 것이 부족한 것보다 백배 낫다.
'3등급이나 4등급쯤.'
강후는 그쯤을 예상했다.
김신령이 파괴된 무기를 공짜로 가져온 것도 아닐 테고.
분명 어느 정도 값을 쳐서 가져왔을 텐데. 그렇다면 강후에게 아주 비싼 아이템을 주기는 어렵다.
현실적으로는 4등급의 가능성이 높다고 봤다. 3등급도 이제 두 번 본 사이에서는 사치다.
어차피 강후가 이곳에 온 이유는 김신령과의 인맥을 만들기 위함이었다.
미래를 위한 투자인 것이다.
파괴된 무기를 얻겠다는 목적은 작은 핑계에 가까웠다. 틀어져도 아쉬울 것 없는 무게랄까?
이미 목적은 달성했다.
김신령은 소환수를 상대로 전력을 다해 싸워 준 자신에게 꽤 만족하는 눈치였다.
감정을 숨길 수 없는 그녀의 눈빛과 말이 증명하고 있었다. 신뢰와 호감이 묻어나는 것이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땀이 식으면서 살짝 으슬거리던 몸이 벽난로에 잔뜩 데워져, 오히려 더위를 느끼기 시작할 즈음.
김신령이 단검 하나를 들고 와서는 강후를 향해 무심하게 휙 던졌다.
검집에 담겨 있는 단검이라 아무렇게 받아도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그녀가 말했다.
"봐. 파괴된 무기라서 실전에서는 못 써. 하지만 네 무기에 먹이는 데는 문제가 없을 거야."
"감사합니다. 잠시."
강후가 검집을 벗기고 아이템을 손에 쥐는 순간.
"...?"
상태창에 표시된 아이템의 등급을 보고 깜짝 놀랐다. 4, 3등급도 아닌... 2등급이었던 것이다!
무려 1,000억 원에 해당하는 아이템을 준 것이다.
물론 파괴된 무기라서 매입가는 훨씬 낮았겠지만, 어쨌든 초기 가치는 무조건 천억 원이었을 터다.
"어때 보여?"
"2등급 아이템 아닙니까?"
"응, 맞아."
김신령은 그게 뭐 그리 대단한 것이냐는 표정을 지었다.
저급하게 돈 자랑을 하는 느낌이 아니었다.
그럼 자기가 이 정도도 못 쓸 것 같았냐는 그런 느낌이었다. 가진 자의 여유 같은 느낌이랄까?
"값을 정말 많이 쳐주셨네요."
"매입가는 얼마 안 해. 파괴된 무기라는 사실을 잊지 마. 민망할 정도로 고마워하진 말고."
김신령이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돌려서는 충분히 물이 우러나온 차를 들이켰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강후가 어떤 반응인지, 표정은 어떻게 하고 있는지 지켜보기라도 하련만.
그녀는 별생각 없는 듯했다.
"그럼 바로 먹이겠습니다."
"어. 그렇게 해."
[왜곡 각성 – 동일 계열의 무기를 타락한 신념을 활용해, 스탯 일부를 흡수할 수 있습니다.
총 5회의 흡수가 가능하며, 해당 무기의 총 스탯량이 높을수록 흡수량이 증가합니다.
흡수하려는 무기에 타락한 신념을 가져다 대면, 왜곡 각성이 활성화됩니다.]
강후가 마지막으로 툴팁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는 바로 왜곡 각성을 진행했다.
설명대로 파괴된 무기에 단검인 타락한 신념을 가져다 대자, 왜곡 각성이 즉시 활성화됐다.
망설일 것 없는 진행.
결과가 바로 나왔다.
기존에 근력 300, 민첩 300 스탯이었던 파괴된 무기를 타락한 신념에 먹인 이후.
타락한 신념의 스탯 상승치가 근력 350에서 440으로, 민첩은 0이었지만 90으로 올랐다.
도합 180 스탯이 오른 것이다.
애초에 무기로서는 아무 가치가 없는 재료를 써서 올린 것이라는 점을 고려해 보면 매우 큰 이득이었다. 심지어 강후는 이 과정에서 한 푼의 투자도 하지 않은 상황이다.
"어때? 한 30% 오르지?"
"정확합니다. 근력 90, 민첩 90이 올랐네요."
"잘됐네. 매입가는 궁금해도 물어보지 마. 죽어도 안 말해 줄 거니까."
"말씀 안 해 주셔도 됩니다. 일부러 좋은 쪽으로 부풀려서 상상을 많이 해 드릴 거니까요."
"은근히 당돌한 말이네. 선심이라도 써 주겠다는 거야?"
"감사함을 잊지 않겠다는 겁니다."
"하여간 말은 청산유수야. 능청스럽게 대답을 왜 이리 잘해?"
"자주 대화를 해 보면 생각이 좀 달라지실 겁니다."
강후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가까운 박동재와 정유리가 항상 강후의 '재미없는' 대화를 지적한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김신령은 아직 자신에 대해 몰라도 많이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부만 봐서 그럴 것이다.
"앞으로도 소환수 훈련에 종종 도움을 줬으면 해. 다른 방식으로도 만날 일이 있었으면 하고?"
"다른 이슈가 있습니까?"
"뭐... 내가 세공하거나 개조한 단검을 테스트해 볼 기회를 갖는 다거나?"
"테스터?"
"그런 셈이지. 그때마다 합당한 대가는 지불할 테니까, 그쪽으로는 걱정하지 말아."
"좋습니다. 연락하시면 일정 조율해서 만나죠."
"응. 고생했어."
"단검 감사히 잘 썼습니다. 요긴하게 쓰겠습니다."
"자주 보자구."
"네."
그렇게 김신령과의 만남은 끝이 났다.
지금까지의 수많은 경험 중, 가장 손쉽게 스탯을 올린 경험이 됐다.
무기를 먹이고, 즉각 스탯 변화가 일어났으니 말이다. 성장이 이렇게 쉽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쨌든 그녀의 저택을 나온 강후는 바람도 쐴 겸, 저택 앞의 잘 닦인 길을 따라 걸었다.
한데 바로 그때.
타락한 신념에 관련된 상태창의 하단에서 서서히 모습이 드러나는 글자가 보였다.
아까 무기를 먹인 직후에는 없었는데, 뒤늦게 색이 입혀지며 글자가 보이고 있었다.
[특수 조건을 달성하여, 새로운 옵션이 활성화되고 있습니다. 정해진 대기 시간이 지난 후에 활성화됩니다.]
"이건 처음 보는데."
원작에서는 경험해 본 적 없는 이슈였다.
주인공 장시환에게는 타락한 신념처럼 다른 무기를 먹이는 형태의 아이템은 없었기 때문이다.
소설 내용에서 주인공 외의 다른 인물의 아이템 설명을 다룰 일은 많지 않았기에.
이런 일이 서술로 언급된 적은 없었다.
한 번쯤 구상하면서 생각을 해 본 적은 있지만, 구체화된 내용으로 서술한 적은 없었다.
'이것도.'
무의식의 영역일 것이다.
완전히 베일에 가려진 구조다.
특수 조건이 무엇인지 알려 주지 않았고, 정해진 대기 시간이 얼마인지도 알 수 없다.
철저히 시스템의 페이스대로 흘러가는 내용이다.
'앞으로 아이템을 먹이는 분야에 대해서도 연구가 좀 필요할 것 같네. 여긴 미지에 가깝다.'
공부할 부분이 늘었다.
이 거대한 세계관을 조형한 것은 분명 원작자였던 자신이 맞다.
하지만 모든 그림을 그려놓지는 않았다. 일부는 여백으로 남기고, 생각할 여지를 남겨뒀었다.
그 여백이 지금 '새로운 옵션'처럼 빈자리를 채우면서 나타나고 있다.
소설 속 세계는 다뤄지지 않은 세계에 대해서 굳이 설명할 필요도 만들 필요도 없지만.
빙의한 이 세계는 모든 빈칸이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그 빈칸에 대한 대답은 무의식 속에서 찾아야 한다.
아는 것도 아니고, 모르는 것도 아닌 애매하고도 모호한 경계면에서 말이다.
그때.
[히든 스킬 '광기의 흡혈'을 획득한 헌터가 등장했습니다.]
히든 스킬의 소유자에게만 공유되는 히든 스킬 알림이 떴다.
지금 이 순간.
지구의 어딘가에서 흡혈에 관련된 히든 스킬 하나가 등장한 모양이었다.
167화 투사의 긍지 (1)
* * *
그 시각.
"뭐야, 이거?"
빈센트가 히든 스킬 알림을 보고는 멈췄다.
그는 방금까지 심판의 지옥 공략에 참여한 암살자 목록을 보고, 그중 하나를 쫓고 있었다.
제법 가까운 곳까지 그를 찾아왔지만, 스킬 알림을 보고 미련 없이 멈춰 선 것이다.
택시를 타고서 멀어지는 헌터를 보면서도 별다른 감흥 없이 그를 보내 주었다.
광기의 흡혈.
어떤 형태로 생각해 봐도 흡혈에 관련된 방향에 특화된 헌터가 얻었을 게 분명했다.
전 세계적으로 흡혈을 주 능력으로 삼는 헌터는 백 명이 채 되지 않았다.
히든 스킬을 얻을 정도면 그쪽이 주력이어야 하는데.
그중에서도 실력자를 골라내면, 열 손가락이 충분히 남는 수준이 되는 것이다.
"누군지는 확실히 알겠는데."
빈센트의 입에 미소가 걸렸다.
백일참/흑월참 스킬보다 타깃을 좁히기가 훨씬 더 좋은 히든 스킬의 소유자가 나타났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하던 조사를 계속하고 싶기는 했다.
하지만 기약이 없었다.
생각보다 암살자 목록의 인원도 많았고, 무엇보다 하나하나 찾기가 너무 어려웠다.
차라리 용병 없이 공략한 던전이었다면 정화 길드 안에서 잡아내면 그만일 텐데.
그게 아니다 보니, 외부 인원까지 전부 조사해야 해서 마침 힘이 빠지던 차였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운 좋은 줄 알아라. 내가 흡혈에 더 관심이 많은 걸 감사히 여기라고."
빈센트가 연초를 물고 불을 붙였다. 흩날리는 연기 속에 방금까지의 미련도 같이 날렸다.
자신의 능력을 생각하면 흡혈이 더 시너지가 좋을 것 같았다.
아울러 이번 흡혈 히든 스킬의 소유자는 특정이 쉬워서 서두르지 않으면 경쟁자가 늘어날 듯했다.
그건 질색이다. 한시라도 빨리 가서, 녀석을 죽이고 히든 스킬을 빼앗아야 한다.
다시 말해, 지금 한국에 있을 암살계 히든 스킬의 소유자는 나중에 다시 찾으러 와도 된다.
빈센트 자신이 못 찾았을 정도면, 이후 장시환이나 채관형도 쉽게 찾을 순 없을 테니까.
빈센트가 바로 엘리자베스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연결되자마자 일방적인 용건을 남겼다.
"엘. 루마니아로 놀러 가자."
* * *
강후는 정유리를 만나기 위해서 부산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선약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방금 연락이 닿았던 것이다.
정유리의 연락이었는데, 할머니를 보러 마침 부산에 와 있었다고 했다.
할머니가 누군지는 여전히 알려 주지 않았지만, 부산 여행을 며칠 할 것이라고 했다.
더 나아가 VIP 마켓의 VVIP 자격도 있으니, 같이 구경도 하자는 참기 힘든 유혹도 함께였다.
마침 괜찮은 아이템 매물을 찾으려던 강후 입장에선 거절할 수 없는 유혹이기도 했다.
부산으로 향하는 KTX를 타고 자리에 앉기 무섭게 박동재에게서 전화가 왔다.
강후는 보안을 위해 차단 부스로 들어가고 나서야 전화를 받았다.
"어, 동재야."
- 형. 명가 길드 쪽으로부터 공식 확인받았어. 미스테리 던전 공략에 같이 참여하자고 하네.
"다른 조건은?"
- 딱히 없어. 오히려 형에게 공식적으로 '옵저버' 자격을 주겠다는 약속을 해 주셨지.
"기본적인 지원은 다 해 주신다는 얘기네."
- 그렇지. 형은 몸만 오면 된다는 뜻이기도 하고!
"날짜는?"
- 곧? 지금 초기화 대기 중인 던전 하나가 있는데, 알다시피 딱 정해진 시간에 초기화가 되지는 않잖아?
"준비되면 바로 얘기해 줘. 6시간 안으로 커버할 수 있으니까."
- 알겠어, 형! 준비되는 대로 바로 연락할게!
"고생했다."
- 고생은 무슨. 열심히 형 팔아먹고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마!
"...."
마지막 말의 어감이 조금 이상하긴 했지만, 어쨌든 기분은 좋게 전화를 끊었다.
사실 던전 공략이라고 하면 이현석 쪽으로도 얼마든지 추진할 수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강후는 손에 쥔 기회보다는 쉽게 닿기 힘든 기회부터 먼저 누리고 싶었다.
이현석의 던전은 언제든지 그의 배려로 갈 수 있지만, 미스테리 던전은 아니기 때문이다.
기회는 왔을 때 잡아야만 한다. 잡은 기회는 놓아주지 않는 것이 당연히 맞고.
강후는 막간을 이용해 전세혁과도 짧게 전화 통화를 마치고는 정유리와의 만남을 준비했다.
뭐랄까.
의미 있는 데이트를 하는 것도 아닌데, 그녀를 만나는 것은 왠지 마음이 설렜다.
자신과 정반대의 성향에 있는, 세상 밝은 사람을 만나는 자리라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그녀와 함께 있으면, 적어도 하얀색으로 물드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 * *
"오빠, 여기!"
"먼저 와 있었네."
"당연하지! 오라고 한 사람이 기다려야지, 찾아온 사람이 기다리고 있어야겠어?"
부산역에 도착한 강후는 내리는 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정유리를 만났다.
가까워지기도 전에 그녀에게서 기분 좋은 향기가 났다. 향수 초이스가 꽤 좋았다.
'늘었군. 벌써 두 개나.'
강후는 전에 없던 성좌 정보 두 개가 정유리에게 늘어난 것을 보고는 감탄했다.
박동재도 그렇고 성장의 속도가 상당히 좋다. 미래가 바뀐 혜택을 톡톡히 보는 중이다.
물론 본인들은 미래가 바뀌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전부 아울러 볼 수 있는 강후의 입장에서는 신기하고 놀라울 수밖에 없었다.
"바람부터 쐴래, 아니면 마켓부터 갈래?"
"바람부터 쐬자. 머리가 좀 아팠던 참이기도 하고."
강후가 살짝 지끈거리는 이마를 어루만졌다.
아까는 별 느낌이 없었는데, 살짝 시간차를 두고 후폭풍이 오는 느낌이다.
김신령의 소환수들과 싸운 시간 내내 전력을 다했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게다가 솔라키움이나 각신환에 아예 손도 대지 않았으니, 고스란히 몸에 피로가 누적됐을 터.
"그럼 맛집부터 갈래? 돼지국밥집, 내가 잘 아는 데 있는데!"
"좋지."
"가자, 오빠! 오늘은 내가 전부 쏜다!"
덥석 손을 잡고서는 신나게 걷기 시작하는 정유리.
그녀의 손을 강후가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연인의 떨리는 손잡기라기보다는 기분이 좋아진 어린아이의 흥에 겨운 손잡기 같은 느낌.
당사자는 아무 생각이 없을 수도 있는데, 강후가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다 말았다를 반복했다.
누군가와 연애를 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고 해서, 호감이라는 감정도 말살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 것일 터다. 그저 이성에게 느끼는 설레는 감정. 남자라면 충분히 느낄 법한 그럼 감정이겠지.
어쨌든 그렇게 정유리를 따라서 부산 시내 투어를 시작했다.
해영 길드가 욕을 바가지로 먹기는 해도, 부산의 패권을 꽉 쥐고 있는 덕분에 치안은 좋았다.
짧지만 재밌는 시간이었다.
번화가에 붐비는 사람들 틈새에서 느끼는 체온도 나름의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어지간해서는 일반인과 접점을 만들 일이 없던 그동안의 행보를 생각하면 더 그랬다.
그렇게 한나절의 데이트를 마치고 마켓으로 향하는 길.
충분히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였기에 정유리와 함께 가로수길을 따라 걸으며, 얘기를 나눴다.
"오랜만에 쉬네, 진짜."
"그동안 던전만 다녔나?"
"응, 맞아! 쉬지 않고 달렸어. 오빠도 그랬지?"
"나도 항상 바쁜 편에 속하지. 그나저나 솔플? 아니면 팀플?"
"그건 비밀! 근데 아무 생각 없이 머릿수만 늘려서 가는 건 질색이라, 웬만하면 최적화는 해!"
말을 듣고 보니, 정유리도 자신과 비슷한 성향이구나 싶었다.
그리고 저게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기도 하다. 성장 속도를 극대화하려면 더더욱.
"그나저나 이쪽에 거래가 많았나? VVIP가 되려면 조건이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닐 텐데."
마켓의 VVIP가 되는 것은 백화점과 형태가 유사하다.
씀씀이가 커야 하는 것이 기본 전제다.
하지만 정유리는 현실로 복귀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마스터 K의 지원을 많이 받은 걸까?
그런데 그녀의 대답은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치고 나왔다.
"궁금해?"
"궁금하지."
"우리 외할머니가 마켓 주인이니까?"
"...."
그 말에 모든 의문이 풀렸다.
베일에 가려져 있던 존재의 정체가 풀리는 순간이었다.
강복화. 그녀가 정유리의 외할머니였던 것이다. 동시에 마스터 K의 부인이기도 하고.
할아버지는 그라운드 제로 일대를 꽉 잡고 있는 큰손. 할머니는 경상권의 상계를 잡은 큰손.
양쪽 모두 스케일이 장난이 아니다. 그리고 정유리는 그런 두 사람의 손녀다.
"나도 이번에 살 아이템이 있어서 왔어! 오빠도 괜찮은 거 있나 골라 봐. 할머니가 안목이 좋으셔."
"이건 정말 의외군."
"오빠니까 말해 주는 거야. 어지간해서는 말 안 해. 어차피 오빠 입이 무거운 건 내가 잘 아니까."
"믿어 주니 고맙네."
"고마우니 믿는 거지. 호호."
어느덧 도착한 마켓 앞은 방문한 헌터들로 붐비고 있었다.
몇 가지 절차를 거쳐야 입장할 수 있는 곳이 강복화의 VIP 마켓이었지만.
강후는 정유리 덕분에 절차 없이 하이패스로 들어갈 수 있었다.
입장하는 길도 공개된 일반 루트가 아닌, VVIP 전용 라운지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보안 요원과 몇 번 마주쳤지만, 역시 별다른 제지 없이 금방 지나갈 수 있었다.
심지어 VVIP 라운지에서도 별도로 만들어진 시크릿 룸으로 직행하게 됐다.
이곳은 마켓의 총 관리자인 강복화가 허락한 사람이 아니면, 절대 이동할 수 없는 루트였다.
그렇게 시크릿 룸의 앞에 도착하자 두 남녀가 정유리를 보고는 공손하게 인사를 올렸다.
하지만 그녀의 뒤에 있는 강후에게는 날카로운 눈길을 보냈다. 당연한 반응이다.
둘의 구성은 마치 마스터 K의 곁을 지키는 문형서, 황보혜를 보는 느낌이었다.
저게 맞다. 강복화 정도의 인물이라면 누군가에게 노려질 확률도 매우 높아지니까.
강후가 먼저 말했다.
"필요한 절차가 있으면 말해 주십시오. 괜한 의심을 받고 싶지는 않아서요."
호위 특성상, 검증되지 않은 외부인에게 적대적인 것은 너무 당연한 일.
강후의 말에 왼쪽에 있던 남자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들어가시죠. 전부 저희가 통제할 수 있는 범위 내에 있는 것 같군요."
자신만만한 남자의 반응에 성좌 정보를 훑어보니, 충분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성좌 중 하나가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딱 한 번의 기회밖에 주어지지 않지만, 그것으로도 배짱의 이유는 충분했다.
남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한 번의 기회를 강복화를 위해 얼마든지 쓸 수 있는 충성심을 가진 듯했다.
덕분에 별도로 무기를 내려놓을 필요도 없이, 시크릿 룸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강후는 그간 어떤 존재인지 궁금해했던 VIP 마켓의 총 관리자를 만날 수 있었다.
"할머니이...!"
"아이고, 우리 유리. 그새 얼굴이 왜 이렇게 탔어? 누가 보면 다른 사람이 됐는지 알겠네!"
"많이 까매졌죠?"
"더 건강해 보이긴 하는데, 이러다가 다음에는 아예 다른 사람이 될 것 같아 걱정이네."
"어차피 또 원래대로 돌아올 거예요! 아시잖아요, 저 피부 엄청 하얀 거!"
"알지! 그래도 과도하게 누적되면 아예 살색과 살성이 다 변하니까 꼼꼼하게 체크하고."
"알았어요, 할머니!"
강복화를 꼭 끌어안은 정유리의 모습은 할머니를 좋아하는 손녀의 사랑스러움, 그 정석이었다.
정유리를 대하는 강복화의 반응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누구보다도 깊은 사랑이 묻어났다.
바로 그때.
손녀와의 포옹을 마치고 자연스럽게 강후를 쳐다본 강복화가 웃으며 말문을 열었다.
"전에 우리 마켓에 온 적 있죠? 기억이 나네요."
"...?"
언제부터 지켜보고 있었던 걸까? 의외의 얘기가 또 나왔다.
168화 투사의 긍지 (2)
* * *
이야기를 좀 더 나누면서, 강후는 강복화의 기억력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좋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사실 그녀가 계약한 성좌 능력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어쨌든 뜨끔했던 강후였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녀의 표적이 되어 뒷조사라도 당하고 있던 것이 아닌가 싶었으니까.
만약 그랬다면, 그간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는 뜻이 되니 자신의 감각을 재조정해야 된다.
강복화는 마스터 K처럼, 손녀에게 변화의 계기를 준 강후에게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오고 가는 차 한 잔 속에서 피어오른 이야기꽃에 호기심이 잔뜩 담긴 상태였다.
"이클립스에 대한 소식을 들었어요. 아마 다들 그 소식에 대해서 놀란 점이 많았을 거예요."
"말씀 중에 잠깐 방향이 바뀌어서 죄송합니다만. 편하게 말 놓으셔도 됩니다."
처음부터 공손한 자세로 대화에 임하는 강복화의 모습에 무게감을 살짝 덜어내려 했지만.
강후의 제안을 강복화는 자애로운 미소와 더불어 아주 정중하게 거절했다.
"괜찮아요. 제 철칙이에요. 모든 손님에게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예의를 지키려고 해요."
"할머니! 그렇게 되면 할아버지가 뭐가 되는...."
"유리야. 쉿?"
강복화의 이글거리는 눈빛이 곧바로 정유리에 꽂혔다. 이내 조용해지는 정유리.
이 집의 서열은 아무래도 강복화, 정유리, 마스터 K의 순서로 이루어져 있는 듯하다.
물론 좋은 의미로의 얘기다. 각자의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며, 함께 사랑하고 있다는 얘기겠지.
강후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녀의 말에 대한 답을 이어갔다.
"알겠습니다. 말씀을 끊어 죄송합니다. 이클립스 소식이 꽤 많이 알려진 것 같더군요."
"워낙 전방위적으로 미움을 많이 산 조직이잖아요? 정의구현 소식은 다들 열광하죠."
강복화의 반응은 작금의 이클립스를 대하는 일반인 혹은 헌터들의 반응이기도 했다.
이름값이 생기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한 상황이다.
강복화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정작 당사자인 강후는 살짝 귀찮아하는 눈치였다.
당연한 일을 가지고 너무 부산스럽게 군다는 딱 그런 눈치? 그런데 그 모습이 전혀 오만해 보이지 않았다.
"알아봐 주시니 영광입니다."
"주제넘은 말이 될 수도 있지만 오해는 하지 않고 들었으면 해요."
"말씀하세요."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신강후 님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죠?"
"누구까지라고 제가 특정할 수는 없지만, 제법 많은 관심을 받는 것은 압니다."
"가장 강후 님에게 관심 없다고 생각하는 곳을 조심하세요. 가질 법한데 조용한 건, 그만큼 많은 뒷조사를 하고 있다는 거니까요."
무심한 듯, 툭 뱉은 그녀의 말이 강후의 머릿속에 꽤 깊은 울림을 주었다.
대놓고 자신에게 관심을 드러낸 곳은 많다. 안 좋은 쪽으로는 이클립스나 까쉬마르 같은 길드다.
좋은 쪽으로는 이예린의 청안, 김수경의 용병단, 이현석의 심연 등이 있을 터.
그중에 정화 길드는 없었다.
국내 소식에는 누구보다 민감한 정화 길드는 아직까지도 강후에게 어떤 관심을 보인 바가 없다.
물론 차고 넘치는 정화 길드의 인재풀에서 강후가 썩 대단치 않은 헌터처럼 보일 수는 있다.
하지만 강복화의 생각은 좀 다른 모양이었다. 충분히 해 볼 법한 생각이기도 했다.
"말씀 감사합니다."
"늙어서 그런지, 주제넘은 걱정이 참 많아요. 이해해 주면 고맙겠어요, 강후 님이."
"아닙니다. 오히려 좋은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다시 생각을 다듬는 계기가 됐습니다."
"그럼 일단 아이템에 대한 얘기부터 할까요? 유리도 할머니랑 얘기했던 아이템 좀 볼까?"
"그렇게 하시죠."
"좋아요, 할머니! 근데 그거 들어왔어요?"
"어렵게 구했다, 이 할미가. 쿠바까지 가서 구해 왔어. 이 정도면 할아버지보다 훨씬 낫지?"
"고마워요, 할머니! 할아버지보다 훨씬 좋아요!"
"그래놓고 너, 할아버지 앞에 가서는 이 말 그대로 뒤집어서 말한다며?"
"헉, 그건 어떻게 아셨어요?"
"그냥 떠본 건데 거짓말을 못 하는구나, 우리 유리...."
손녀와 할머니 사이에 오가는 즐거운 만담 속에 강후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정유리는 시크릿 룸 내부의 구조를 잘 아는 듯, 강복화보다 성큼성큼 더 앞장서 나갔고.
강복화는 강후의 옆에서 보폭을 맞춰 걸으며, 잠깐 정유리에게 쏠렸던 대화의 방향을 바꿨다.
"유리를 챙겨 주셔서 감사해요. 바깥양반이나 저나, 바쁠 때는 너무 바쁘다 보니...."
"막 크게 챙긴 것은 없습니다만...."
정유리가 자신에 대해서 포장을 잘해 준 걸까. 챙겨 줬다고 하기엔 가진 관심이 많진 않았다.
그녀가 그라운드 제로에서 나왔을 때, 몇 번 걱정하는 메시지를 보낸 적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 이후로는 그녀의 의지를 믿고, 오는 연락만 받아 줬었다.
"할머니로서가 아니라, 같은 헌터로서 정말 재능이 높은 아이예요. 강후 님과도 호흡이 잘 맞을 겁니다."
"저도 그건 동의합니다."
전에 정유리와 합을 맞춰 본 기억이 있는 강후였다. 확실히 그녀도 기본 실력이 좋다.
박동재와는 다른 매력이 있는 것이다.
그녀는 공간 이동에 제약이 거의 없어, 자신만큼이나 치고빠지는 전투에 능하다.
즉, 기동전과 게릴라전을 염두에 둔다면 정유리와의 팀플레이도 꽤 괜찮았다.
"해외에서 생각보다 많은 길드가 강후 님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있어요. 들어 본 적 없죠?"
"국내 소식도 사실 다 챙겨 듣지 못하는 편이라."
"일본 쪽에 갈 일이 있으면 조심하세요. 좋은 의미나 나쁜 의미 모두 포함해서 꽤 관심이 커요."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곧 안영호가 있는 일본으로 갈 예정인 강후에게는 살짝, 생각이 깊어지게 만드는 말이었다.
그녀가 되도 않는 허풍을 칠 리는 없고, 신뢰 있는 정보를 어딘가에서 얻었을 것이다.
해외에 다양한 판매 루트가 있으니, 정보 역시 비슷한 루트가 있는 게 이상할 것도 없다.
그렇게 강복화를 따라서 들어간 시크릿 룸 안의 또 다른 시크릿 룸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아이템이 보관되어 있었다.
습도와 온도까지 세밀하게 체크되며 관리되는 것이 일반적인 보관법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리고 각각의 아이템마다 출처가 적혀 있었다. 대여 중인 물품에는 대여라고도 적혀 있었다.
대여 같은 경우는 일단 강복화가 일부의 보증금을 주고 아이템을 가지고 온 뒤.
팔리면 잔액을 원주인에게 지불하고, 자신의 이득분만큼 차액을 갖는 식이다.
보증금이 보통은 아이템 단가의 20% 수준으로 책정이 된다.
즉, 대여해 줄 중개자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아예 시작조차 할 수 없는 판매구조인 것이다.
그만큼 강복화가 상계(商界)에서 얼마만큼의 신임을 받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안으로 들어온 강후는 흉갑 위주로 아이템을 살폈다.
현재 착용 중인 아수라의 혜안은 5등급 아이템으로 체력 50만 올려 주는 무난한 아이템이었다.
2등급으로 갈아치울 돈은 충분히 있는 만큼, 쓸만한 녀석을 찾고 싶었다.
"쓸만한 특수 효과가 있는 아이템을 찾는다면, 이쪽 로즈골드 라인이 좋아요."
강복화가 진열대를 따라서 앞면에 쭉 코팅되어 있는 로즈골드 색깔의 테를 가리켰다.
그녀의 안내대로 라인에 있는 흉갑 아이템을 살피니, 과연 쓸만한 옵션을 가진 녀석들이 많았다.
"잠시 혼자 집중해서 봐도?"
"물론이죠. 그동안 유리와 거래를 좀 진행해야겠어요."
"네."
손녀여도 거래는 확실하게 하는 듯했다. 정유리 역시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듯했고.
잠시 강복화가 자리를 비운 사이, 강후가 흉갑을 쭉 훑었다.
어떤 아이템이 별로인지 찾기보다, 어떤 것이 덜 매력적인지 생각해야 할 기분 좋은 고민이었다.
'유청화가 운영하던 마켓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리고 VIP 마켓에서도 마찬가지고.'
두 마켓을 합쳐놓은 것보다 시크릿 룸에서 본 아이템의 가치가 훨씬 높은 듯했다.
물론 고가의 아이템을 모아놨으니 그렇게 느껴지는 것일 수도 있다.
달리 생각하면, 지금 이 방에 있는 아이템의 가치 총합이 얼마나 될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5조? 10조?
아니, 그 이상일 수도 있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강후가 흉갑을 통해서 채워지기를 바랐던 부분은 스탯보다는 '안정성'이었다.
암살자라는 직업의 특성상, 위험에 노출되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그런 상황에 대비한 일종의 보험이 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한데 마침 그런 아이템이 여기 있었던 것이다. 다른 마켓이었으면 보지도 못했을 옵션이었다.
* * *
거래는 바로 진행됐다.
가격은 에누리 없이 1,000억 원.
등급에 맞춰 형성된 가장 보편적인 정가이기도 했다.
정유리도 강후도, 그리고 강복화도 흥정에 대한 얘기는 전혀 꺼내지 않았다.
흥정이라는 행위 자체가 서로의 가치 평가를 떨어뜨린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그러다 보니, 마치 쿨한 거래처럼 구매를 결정하고, 바로 대금을 치르는 모양이 됐다.
일반적인 마켓의 풍경을 생각하면, 전혀 일반적이지 않은 흐름의 거래였다.
"바로 착용해 보시겠어요? 피팅룸은 저쪽에. 촉감도 꼼꼼하게 체크해 보시고요."
돈을 입금받은 강복화가 피팅룸을 안내했다.
촉감 얘기를 해달라는 것은 아이템의 촉감이 별로일 경우, 추가로 신경을 써 주겠다는 뜻이다.
아이템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선에서 안감을 바꾸는 것 정도는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물론 숙련공의 손길이 필요해지는데, 그런 인력쯤은 내부적으로 충분히 갖고 있는 듯했다.
안으로 들어온 강후가 바로 아수라의 흉갑을 벗고, 새로운 흉갑 아이템을 착용했다.
[투사의 긍지 - 흉갑]
[등급 : 2등급]
[민첩 +350]
[항마 +50]
[맷집 +50]
[수호 – 즉사로 직결될 수 있는 치명상을 1회 방어한 후, 해당 능력은 소멸됩니다.]
'수호 때문에 사는 거라고 봐도 무방하지.'
강후는 처음부터 이 옵션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즉사로 직결될 수 있는 치명상이라는 것은 보통 심장을 관통당하는 일격을 말한다.
물론 세부적으로 따지면 조건이야 많겠지만, 직관적인 의미로 가면 한 단어로 축약이 가능했다.
원 코인.
게임에서 목숨 하나를 상징하는 단어다.
강후는 수호의 무게를 그쯤으로 보고 있었다.
1천억 원에 목숨 하나를 살 수 있다면 무조건 남는 장사다.
허무하게 기회를 날린다면 얘기가 다르겠지만, 강후에게는 보험이 여러 개 있었다.
이를테면 순간이동 능력도 일종의 생명보험인 셈이다. 유사시에 도망치는 것이 가능하니까.
'촉감은 좋네. 가슴에 착 감기는 느낌이 잘 맞는 속옷을 입은 느낌이군.'
그렇게 만족스럽게 착용을 마치고 피팅룸 밖으로 나오려는 순간.
빠드드득!
시크릿 룸 밖의, 정확히는 다른 방으로 생각되는 위치에서 뭔가가 튀겨지는(?) 소리가 났다.
영문을 알지 못하는 강후가 강복화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그녀가 웃으며 답했다.
"호호. 나쁜 마음을 먹은 손님이 VIP 룸에서 아이템을 훔치려다가 실패한 모양이네요. 공간 이동 스킬을 완전히 차단하는 결계가 있거든요."
"...."
타고난 장사꾼 아니랄까 봐, 그녀의 대비는 치밀했다. 질이 나쁜 좀도둑 하나가 그렇게 죽었다.
169화 투사의 긍지 (3)
공간 이동 스킬을 모두 차단하는 결계는 면적만큼 기하급수적으로 설계 비용이 올라간다.
방금 좀도둑을 한 번 잡은 것으로도 결계가 잡아먹은 마석의 가치는 상상을 초월할 터.
몇십억 원은 우습게 깨졌겠지만, 이 안에 있는 아이템을 생각하면 사실 큰 투자는 아니었다.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세상인 만큼, 강복화의 투자는 충분히 의미 있는 투자였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강복화가 강후의 생각에 보탬이 되는 말을 덧붙여 주었다.
"좀도둑이어도 기본적인 아이템 세팅은 하고 있을 테니까요. 뺏은 것으로 충당하면 됩니다."
"그렇겠네요."
"마켓을 우습게 봐도 정도가 있지. 호호호."
아무렇지 않게 웃는 그녀의 모습에서 한두 번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 엿보였다.
누군가가 죽었음을 기뻐하기보다는 안전하게 물건을 지켰음에 안도하는 듯했다.
그 이후로 강후는 남은 돈으로 아이템을 하나 더 바꿀까 하는 생각에 아이템들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흉갑으로 구매한 투사의 긍지 외에는 딱 마음이 끌리는 아이템이 없었다.
옵션이 별로인 것이 아니라, 강후의 깐깐한 기준을 충족하는 녀석이 없었던 것이다.
물론 투사의 긍지를 착용한 것만으로도 변화는 충분했다.
항마와 맷집도 각각 50씩 올라서 마법과 물리 공격에 대한 안정성을 더했고.
강후가 후순위로 육성에 임했던 민첩 스탯도 대폭으로 올랐다. 무려 350이나 올랐기 때문이다.
이 정도면 당분간 민첩 스탯에 관심을 두지는 않아도 될 듯했다. 평소 움직임도 매우 날래졌다.
더 이상 살필 것이 없는 강후가 슬슬 거래를 정리하기 위해 화제를 돌리려고 할 즈음.
강복화가 흥미로운 얘기를 하나 꺼냈다.
"혹시 인페르누스라는 아이템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있으신가요?"
인페르누스.
라틴어로는 지옥을 뜻하는 말이다. 단어를 기억하긴 하지만, 아이템에 대해서는 몰랐다.
강후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처음입니다."
"할머니, 또 그 얘기! 웬만하면 하지 말아요! 그거 좋은 이야기도 아니잖아요!"
그녀가 운을 떼기 무섭게, 옆에 있던 정유리가 손사래를 치며 말렸다.
격한 반응으로 봐선 유쾌하지는 않은 얘기인 모양. 정유리의 표정은 어둡기 그지없었다.
다만 강복화의 표정은 달랐다.
"할머니도 얘기할 만한 사람인 것 같으니까 하는 거야."
"VIP마다 그 얘기를 해서, 벌써 거기에 휘말려 바보가 된 헌터만 다섯이 넘어가잖아요?"
"그만큼 1등급 아이템을 싸게 얻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해."
"들어 보고 싶네요."
강후가 정유리와 강복화 사이에 오가는 언성이 높아지기 전에 먼저 분위기를 끊었다.
이유는 알 것 같았다.
정유리는 강후에게 위험한 아이템을 할머니가 추천해 주고 있기에 그것을 걱정하고 있는 것이고.
강복화는 충분히 매력적인 정보라고 생각해서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말해 주고 있는 것일 터.
1등급 아이템은 최저가가 5천억 원이다. 최고가에는 한계가 없다. 무제한인 셈이다.
그래서 정말 비싼 1등급 아이템의 경우에는 5조, 6조 원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누가 그런 아이템을 사고팔겠나 싶겠지만, 비현실이 현실이 되는 것이 헌터의 세계다.
"인페르누스라는 아이템이 있어요. 부적 아이템이고, 등급은 1등급. 죽은 헌터의 유품이에요."
"계속 말씀해 주세요."
그녀의 말에 집중했다.
일단 원작에서는 언급된 사실이 없는 얘기다.
무의식의 영역에서 이야기가 형성되었다면, 장시환의 관심이 닿기 전에 누군가 차지한 거겠지.
그리고 그 이후, 장시환의 눈에 띌 일이 없었기에 이야기로 다뤄질 수도 없었던 것일 터.
"유족이 이 아이템을 팔고 있어요. 생전에 착용자의 유언도 있었죠. 새 주인을 찾으면 주라고."
"무료 봉사는 아닐 듯한데요."
"맞아요. 유족의 생각인지, 이것을 착용했었던 헌터의 유언인지는 모르겠지만. 한 번 착용에 490억 원을 받아요."
"정확하게 말하자면 착용 시도에 490억 원이라는 얘기겠죠?"
"맞아요. 이 부적 아이템이 착용자를 주인으로 인식하면 소유자가 바뀌어요. '귀속'의 진행이죠."
"아니면?"
"부적이 착용자를 백치로 만들어요. 아니면 그에 준하는 정신적인 타격을 입히거나."
"귀속이라.... 그 말은 주인이 된 이후로는 팔 수도, 다른 사람이 빼앗아 착용할 수도 없다는?"
강복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귀속 개념이 생소하진 않았다.
2등급까지는 귀속이 흔한 이슈가 아니지만, 1등급 아이템부터는 종종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네. 그 아이템이 주인으로 인식한 헌터에게만 귀속되는 거죠."
"490억 원으로 손해를 보고 바보가 되거나. 아니면 10배 이상의 이득을 보는 주인이 되거나."
"맞습니다."
강후의 눈빛이 깊어졌다.
인페르누스에 대한 직접적인 정보는 없다. 하지만 이런 식의 '검증'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많다.
원작에서 제법 나온 설정이라서다. 보통 저런 형태의 아이템들은 잠재력이 높은 헌터를 알아본다.
백치가 될 수 있다고 하니, 악독한 흑마법이나 정신 조종과 연관된 것은 아닌가 하겠지만.
실제 대응법은 간단했다. 있는 그대로, 자신이 살아온 삶을 아이템에 투영해 주면 됐다.
필요 이상의 저항이나 거짓으로 포장된 기억이 아닌, 솔직함 자체가 열쇠인 것이다.
하지만 아이템이라고 하더라도, 자신의 부끄럽고도 어두운 일면을 보여 주기 싫은 헌터들은....
위선과 가식으로 아이템을 대하다가 앞서 말한 경우처럼 백치가 되어 버렸을 터다.
"저도 기회를 얻고 싶네요. 돈이야 있고, 1등급 아이템을 얻을 수 있으면 최고의 기회죠."
"오빠! 그건 너무 위험해! 아까 얘기 못 들었어? 바보가 된다니까? 돈만 날아가는 게 아냐!"
"절대 착용하지 못하는 아이템도 아니고. 예전 주인은 착용한 적 있는 거잖아?"
"그래도! 오빠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바보가 되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안 그러면 되지."
"그게 말이 쉽지, 말이 되는 건 아니잖아! 할머니, 오빠 좀 말려봐요! 이게 문제라니까!"
정유리가 목소리를 높였다.
강후에 대한 걱정이 짙게 묻어나는 외침이었다.
강복화 역시 손녀의 마음을 안다는 듯, 이내 화제를 돌렸다.
"어쨌든 그런 아이템이 있다는 것을 알려 주고 싶었어요. 흥미로운 이슈이기는 하니까."
"아뇨. 아는 수준에서 끝날 게 아니라, 정식으로 기회를 잡고 싶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죠?"
"오빠!"
"생각이 있어. 믿어 봐. 아무 생각 없이 무리하겠다는 게 아냐, 유리야."
강후가 그새 눈물까지 글썽이려는 정유리의 어깨를 툭툭 쳤다.
걱정하는 정유리나, 알려 준 강복화나 각자의 의도가 모두 이해가 돼서 혼란스럽지도 않았다.
강복화가 답했다.
"유족들이 한국에 입국하자마자 우리 마켓부터 들를 예정이에요."
"아하."
"정식으로 의사 접수만 하면 돼요. 나중에 마음이 변하면 포기해도 상관없어요. 다시 기회를 얻지는 못하겠지만."
"하겠습니다. 혹시 앞선 순번이 있나요?"
"없어요. 유리가 걱정하는 대로 몇 번 그런 이슈가 생긴 이후로는 지원이 없어졌죠."
"그러면 바로 넣어 주세요. 제가 준비해 보겠습니다."
일사천리로 얘기가 끝났다.
1등급 부적 아이템 인페르누스.
과연 그 뒤에 숨겨진 사연은 무엇일까. 그리고 녀석이 제공할 수 있는 스탯과 효과는 또 무엇일까?
기대가 됐다.
2등급도 아니고 1등급의 아이템이라면, 하찮다 평가받은 효과여도 상상을 초월할 테니까.
강복화와 거래를 마치고 나오는 길. 정유리는 강후에게 속사포처럼 걱정을 쏟아냈다.
"오빠, 진짜 괜찮겠어? 나도 호기심이 있어 도전해 볼까 했지만, 못 했어. 너무 두렵잖아, 바보가 된다는 거."
"괜찮아. 그리고 잘못되어 봤자 죽기밖에 더할까."
대수롭지 않게 죽음을 운운하는 강후의 모습을 보면서, 정유리가 기가 찬 표정을 지었다.
강후를 한심하게 보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 아무렇지 않을 만큼 초탈한 것 같아서다.
그녀로서는 도저히 가늠조차 할 수 없는 속마음이었다.
"말려도 할 거지?"
"어."
"그럼 오빠가 행운의 주인공이 되기를 기도하는 수밖에 없겠네. 그것밖에 없잖아."
"그냥 네 할 일 해. 기도한다고 죽을 게 살고, 살게 죽고 그런 거 없어."
강후가 덤덤하게 말했다.
원작자로서도, 그리고 신강후로서도 무신론자였기에 신에 대해서는 별 감흥이 없었다.
정유리도 과도한 걱정이 강후에게 부담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화제를 확 틀었다.
"나는 할머니와 여기서 며칠 지낼 거야! 오빠는?"
"던전에 가려고. 흉갑도 산 마당에 성능 테스트는 해 봐야지."
"오빠, 짧지만 잠깐이라도 봐서 즐거웠어. 매번 부산에 오면 혼자였거든. 이번에는 아니었네."
"동선이 맞으면 이번처럼 잠깐잠깐 보자고. 그리고 할머니와의 거래 루트를 뚫어줘서 고맙고."
"할머니가 진짜 취급하는 아이템이 많으셔. 자주 와봐. 오빠도 깜짝 놀랄 거야."
"안 그래도 이미 놀랐다."
정유리 덕분에 강복화와의 거래는 VVIP 자격으로 진행할 수 있게 됐다.
실제로 그 정도의 자격을 얻으려면, 구매가가 최소 5천억 원은 이상이어야 한다고 한다.
그것도 사고팔고의 개념이 아니라, 순수 구매 금액으로만.
하지만 손녀의 애교 공세와 개인적인 호기심 덕분인지, 그 허들이 많이 낮춰졌다.
물론 조건부로 대외비를 유지해 줄 것을 요청받았고, 강후 역시도 입을 놀릴 생각은 없었다.
* * *
그렇게 정유리와의 데이트는 끝났다.
데이트가 주였는지, 아이템 구매가 주였는지 살짝 헷갈릴 정도.
어쨌든 정유리와의 인연이 강복화라는 새로운 인물과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계기가 됐고.
1등급 아이템을 값싸게 얻을 수 있는 기회로까지 이어졌다. 좀처럼 오지 않을 기회다.
강복화에게 안내받은 시기를 정리해 보면, 일본에 다녀온 후에 얼추 시기가 맞을 듯했다.
강후는 바로 전세혁을 만났다.
박동재를 만나기에 앞서서 시간 여유가 있었던 덕분이다.
정유리를 만나기 전에 마침 전세혁과 연락이 닿아, 잠깐 만날 약속을 잡아 둔 것도 있었고.
그를 만난 곳은 역 근처도, 그의 아지트도 아닌 새로운 장소였다.
처음 주소를 안내받고는 여기에도 건물이 있나 싶어 왔는데, 사람 없는 갈대밭이었다.
몇 명 죽여서 버려 두어도 냄새가 안 나면 전혀 모를 것 같은 그런 곳이었다.
강후를 만난 전세혁이 먼저 악수를 청하며 운을 뗐다.
"장소가 좀 특이하죠?"
"아뇨. 오히려 저는 편합니다. 적어도 주변 시선으로부터는 자유롭잖아요?"
"저와 같은 생각을 하셨네요."
"만족합니다."
"아까 잠깐 전화로 나눴던 이야기를 좀 더 구체적으로 이어갔으면 해서 말입니다."
전세혁이 말하는 '이야기'는 바로 이클립스에 관련된 건이었다.
박동재에게 전해 들은 대로, 전세혁은 이클립스를 괴롭힐 준비를 하고 있었다.
괜히 이클립스에서 전세혁을 무서워하는 것이 아니다. 집요하리만치 괴롭히기 때문이다.
최근에 강후와 어울리느라 잠시 본분(?)에 소홀했을 뿐, 원래 그가 진심이었던 일은 다른 곳에 있었다. 바로 이클립스의 악당들을 심판하는 일.
여기에 강후도 함께 섞여, 칼춤을 시원하게 출 요량이었다.
목적은 확실했다.
대외적으로 걸어줄 수 있는 명분은 당연하게도 정의구현.
조금 깊이 들어가면, 전세혁과의 친분을 강화하는 숨은 목적이 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순흑의 구도자'의 시험을 통과하기 위한 과정이었다.
이래저래 한 번은 각 잡고, 제대로 하고 가야 할 푸닥거리였다.
170화 미스테리 던전 (1)
* * *
그 시각.
타카시는 리코우 길드로부터 온 전화를 받고 있었다.
음성 변조기를 써서 전화를 받고 있는 탓에 그의 목소리는 꽤 우스꽝스러웠다.
시사 보도 프로그램에서 얼굴을 가리고 나온 제보자가 낼 만한, 딱 그런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의 변조된 목소리, 그리고 쾌활하기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분신의 모습과는 다르게.
전화에 집중하고 있는 타카시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도 진지했다.
짙게 가라앉은 다크 서클이 그의 음침을 한 층 더 부각시켰다.
그는 도대체 몇 잔이 쌓인 건지도 알 수 없는 거대한 커피 종이컵의 탑을 한 번 쓱 보고는.
줄곧 듣기만 했던 통화에 대한 대답을 꺼내기 시작했다.
"신강후라는 헌터가 나를 만나 보고 싶어 한다는 거죠."
- 맞습니다. 전부터 꼭 만나 보고 싶었던 헌터인데, 이번에 기회를 얻고 싶다고 하셔서요.
"저는 누군지 전혀 모르는 헌터인데."
- 그러셔서 조심스럽게 여쭤보는 겁니다.
타카시가 떡진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리고 바로 옆에 두었었던 노트북을 열었다.
타닥. 탁. 탁.
빠르게 손가락이 움직이면서 이내 강후의 이름이 입력되고, 정보를 찾는다.
포털 사이트에서 검색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타카시가 별도로 구축한 프로그램을 쓰는 것이다.
순식간에 강후에 관련된 자료들이 출력됐고, 몇 가지 흥미로운 뉴스가 확인됐다.
"흐음."
- 어떠신가요? 만남에 관련된 페이는 저희가 지급할 예정입니다.
"신강후 헌터가 요청한 만남에 대한 대가를 리코우 길드가 치른다... 좀 흥미롭네요?"
- 꽤 중요한 손님이라서요.
"돈은 됐고요. 일단 만나보죠.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거야, 항상 재밌는 일이니까."
- 알겠습니다. 관련해서 일정은 다시 여쭙고, 그때 확정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래요. 수고하세요."
통화가 끝났다.
타카시는 강후에 대한 정보들을 유심히 살폈다.
특이한 사건 몇 개에 얽혀있기는 하지만, 그리 대단치는 않아 보이는 헌터였다.
이슈가 될 만한 사건 사고에 휘말려있는 정도랄까? 리코우 길드가 저자세로 임할 헌터는 아니었다.
저 정도라면 아마 길드의 간부와 가까운 사이거나, 관련된 사람이 목숨의 빚이라도 졌거나....
"후자군."
얼추 짐작이 됐다.
어쨌든 리코우 길드에서 특혜를 아무에게나 베푼 적은 없는 만큼, 특별한 사람이겠지 싶었다.
다만.
"나랑 뭘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네."
타카시는 그게 궁금했다.
가뜩이나 대외적으로 이미지도 나쁜 자신과 하고 싶은 게 뭐가 있는 걸까.
그것도 바다를 건너서 일본으로 직접 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할 만큼 말이다.
사소한 궁금증들은 헌터 그램의 보안 메시지나 개인 메일로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데 말이다.
"뭐, 내가 먼저 몸 달을 필요는 없지. 목마른 놈이 먼저 우물을 파야지? 하, 근데 물이...."
목마름을 운운하고 있는데 컵에 물이 없었다. 냉장고를 열어 보니, 아까 먹은 생수가 마지막이었다.
"하아...."
타카시가 한숨을 내쉬었다.
분신은 아직 한국에 있다.
생수를 사려면 외출을 해야 하는데....
사람과 직접 부대끼는 것은 바퀴벌레를 보는 것만큼이나 두려워하는 타카시였다.
그런데 이곳은 번화가나 도심과도 거리가 멀어 택배나 배달이 불가능하다.
"수돗물...."
일단 급한 대로 다른 방법으로 갈증을 해결해야겠지 싶었다.
분신이 없으니 이리 불편할 수가 없다.
* * *
밤늦은 시간, 강후는 예정대로 박동재를 만났다.
전세혁과의 얘기도 잘 마무리하고 온 후였다. 조만간 그와 협업할 일이 생길 듯했다.
타깃은 이클립스.
전세혁은 대담하게 이클립스의 아지트 중 하나를 노릴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중에는 강후가 노리는 대상이기도 한 '고경호'와 연결된 장소도 있었다.
"형! 왜 이리 바빠?"
"뭐가 바빠? 약속 시간보다 훨씬 일찍 왔는데."
"아니, 아까 메시지 하니까 세혁이 형 만나고 있다고 해서 말이야. 그 직전에는 부산이라고 하지 않았어?"
"시간을 쪼개서 잘 쓴 거지."
"형 보면, 시간을 분초 단위로 나눠서 칼 같이 쓰는 것처럼 느껴져. 가끔 무섭다니까?"
"가끔이라 다행이네."
강후가 피식 웃었다.
가급적이면 낭비할 시간을 만들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맞았다.
아직 해야 할 것도 많고, 쫓아가야 할 목표도 많은 시점이니까.
"차소혁. 그 사람은 아직 대전에 있어. 형 위치를 제대로 특정을 못 하는 것 같아."
"내가 청안 용병단이랑 접점이 있으니, 아예 그쪽에 돗자리를 펴려는 것 같군."
일전에 자신의 손에 죽었던 거너 쌍둥이 형제가 떠올랐다.
녀석들도 비슷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전국을 폭넓게 쓰는, 소속 없는 자신을 특정 지역으로 좁혀서 찾을 수는 없었겠지.
그렇다면 그나마 자주 만들어지는 접점이 용병단 청안이다. 즉, 대전으로 범위를 축소하게 된다.
그러니 저렇게 대전에 진을 치고 있는 것이다.
차소희는 이클립스 길드 차원에서 전방위적인 지원과 함께, 타 조직의 정보 공유도 받았었다.
하지만 차소혁은 그것까지는 기대할 수 없을 테니, 당분간 불철주야 계속 고생할 가능성이 크다.
"녀석이 민감도가 낮아서 정보 수집은 어렵지 않으니까. 마킹은 내게 맡겨 줘, 형."
"눈을 붙였어?"
"음. 싸게 구했어. 걱정하지 마. 형이 부담할 필요 없어."
"이래저래 고맙네."
"목숨값 갚으려면 한참 남았어. 열심히 좀 갚아 보자고!"
공치사와 거리가 먼, 박동재의 겸손함이 강후는 마음에 들었다.
아마 내가 형을 위해 이렇게까지 하고 있다느니 하는 말을 해댔으면, 생각이 달랐을 것이다.
사람의 진가란 아주 사소한 부분에서 나온다. 그런 의미에서 박동재는 아주 괜찮은 놈이었다.
"던전은?"
"확보 끝났어. 이동만 하면 돼. 가기 전에 테스트만 잠깐 하고?"
"던전 근처에 그럴 만한 공간이 있던가?"
"응. 다 마련해 뒀지. 형, 부담 갖고 있거나 그런 건 아니지? 살짝 표정이 굳은 것 같아서."
"부담은 없고, 어떤 사람들일까 하는 궁금함은 있다."
명가 길드 소속의 헌터들.
소수 정예만 모은 것으로 유명한 이 길드는 생각보다 힘이 강력한 길드였다.
앞뒤 못 재고 달려든다는 이클립스의 헌터들도 명가 길드원은 절대 건드리지 않는다.
길드원 하나만 건드려도, 모든 길드원이 지옥까지 쫓아가서 복수한다는 제1 원칙!
그것이 익히 알려져 있는 탓에 누구도 명가 길드원에게 해코지할 생각을 못 하는 것이다.
이를 악용해서 명가 길드원이라고 사칭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 경우에는 명가 길드를 건드리는 것보다 더 처절한 복수를 감당해야 했다.
일단 기본 구성이 '실종'이었다.
명가 길드를 사칭한 이후로 세상에 모습을 다시 드러낸 헌터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바로 가자, 형. 다들 기다리고 계셔."
"동재야, 고생 많았다. 덕분에 이렇게 미스테리 던전을 가네."
"갈 자격이 있으니까 당연히 가는 거지. 자, 갑시다! 주인공을 다들 기다려요!"
* * *
미스테리 던전의 위치는 강후가 생각한 것보다는 훨씬 더 은밀한 곳에 숨겨져 있었다.
준공 도중 건설사가 부도가 나는 바람에 버려진, 오래된 아파트의 지하였던 것이다.
그것도 시공 도중 중단된 탓에 지하에서도 허물어진 벽틈으로 엉금엉금 들어가야만 보였다.
가는 과정보다는 도대체 이곳에 던전 입구가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가 더 궁금할 정도.
그리고 박동재의 말대로 아파트 근처에 스킬 시연에 적합한 정도의 공터가 있었다.
현장에는 이미 명가 길드의 세 헌터가 도착해 있었다. 오늘 함께할 일행이다.
강후를 마주한 세 사람이 각자 통성명을 하며 말을 걸어왔다.
"안녕하세요. 길드 마스터 장선영 님의 남동생이자 기공수인 장태진이라고 합니다."
"신강후입니다."
기공수.
일전에 증선락과 상대해 본 적이 있는 직업군이다.
기공수의 뿌리는 시작이 중국이다. 그렇다면 장태진은 중국에 유학을 다녀온 케이스일 수 있다.
성좌 정보를 살피니, 기공수 특징에 맞게 기감 활용에 도움이 되는 계약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최호수라고 합니다. 미리 힘을 끌어올리고 있던 터라, 모양새가 좀 빠지네요."
"신강후입니다. 멋지시네요."
이어서 인사를 나눈 사람은 최호수였다. 직업군을 소개하진 않았지만, 보는 것으로도 충분했다.
그는 늑대인간이었다.
아마 이번 팀 구성에서 탱커 역할을 맞게 될 듯했다. 거구의 몸이 이미 그렇게 암시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안녕하세요? 연수아라고 해요. 주술사예요."
"신강후입니다. 주술사 클래스는 처음 보네요."
"호호. 흔하진... 않죠?"
연수아라는 이름의 여성은 주술사였다.
기공수, 늑대인간, 주술사.
전부 다 좀처럼 보기 힘든 클래스다. 원작에서도 깊게 다뤄진 적 없었다.
그런 클래스가 있다더라... 하는 설명 정도로 스쳐나갔을 뿐. 디테일하게 다뤄지진 않았다.
구성은 좋았다.
저 인원 셋이 박동재만 더해지면 근거리, 원거리 공격에 아무 문제가 없어진다.
주술사는 버퍼, 디버퍼의 역할을 하면서 동시에 다양한 주술로 원거리 공격을 담당한다.
여기에 기공수가 강력한 한 방으로 부족한 폭딜 포지션을 채워 주고.
늑대인간이 탱킹을 담당하며 근거리 전투를 치르면, 빈틈은 완전히 사라지는 셈이다.
'동재가 날 열심히 팔았나 보네.'
강후가 뿌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박동재를 바라보았다.
녀석은 벌써부터 들떠 있는지, 던전 주변을 둘러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상황을 보니, 강후가 꼭 필요해서 초청을 했다기보다는.
박동재가 열심히 강후의 매력에 대해 언급을 한 덕분에 호기심이 생겨 부른 듯했다.
어쨌든 실력 있는 암살자도 구하기 힘든 것이 현실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거기에 출혈 딜러로서의 쓰임새도 있으니, 이래저래 괜찮은 추가 옵션이라고 생각한 거겠지.
다들 반응은 호의적이었다.
이어진 세 사람의 말은 역시나 강후를 알게 된 사람들이 가장 먼저 접하게 되는 소식에 대한 얘기였다.
확실히 이클립스와의 사건이 좋은 의미로는 자기 어필이 확실하게 되는 듯했다.
조만간 전세혁과 한 번 시원하게 칼춤을 추고 나면, 그런 쪽으로는 이름이 더 올라갈 것이다.
워낙 귀에 못이 박히게 들은 칭찬을 반복해서 하는 터라, 강후가 적당히 흘려들었다.
그들의 칭찬을 하찮게 여겨서가 아니라, 내용 레퍼토리가 너무 똑같아서였다.
그렇게 기분 좋은 인정의 시간이 끝나고 난 뒤.
공터 한가운데 자리를 잡은 강후가 단검을 움켜쥐고는 스킬 시연에 들어갈 자세를 취했다.
박동재가 말했다.
"형! 시연은 어떻게 할 거야? 도와줄까?"
"괜찮아. 있는 그대로 보여 주는 게 맞아. 버프는 항상 달고 있는 건 아니잖아."
강후가 고개를 저었다.
스킬에 대해서 상대도 정확하게 평가하려면, 다른 추가 조건이 붙지 않아야 한다.
강후는 자신이 가진 실력 그대로 그들에게 평가받고 싶었다.
이어 말을 덧붙였다.
"한 번에 제가 쓸 스킬을 전부 연결해서 쭉 가겠습니다. 집중해서 봐주세요."
장태진, 최호수, 연수아, 그리고 박동재의 시선이 전부 강후에게로 집중됐다.
박동재의 표현에 따르면, '혼자 다 해 먹는다'는 암살자.
과연 그 포장이 거품인지, 제대로 된 포장인지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하는 그들이었다.
레벨 400을 훌쩍 넘기는 그들은 산전수전 다 겪어본 역전의 헌터들이기도 했다.
누군가를 냉정하게 판단하고 평가할 근거는 충분했다. 그리고 당연히 강후도 예외일 수 없었다.
171화 미스테리 던전 (2)
* * *
시연은 금방 끝났다.
강후는 히든 스킬인 '흑월참/백일참'과 몇 가지 핵심 스킬을 제외한 스킬을 모두 보여 주었다.
어차피 던전에 들어가면 사용할 수밖에 없는 스킬이기에 공개에 대한 부담도 딱히 없었다.
강후의 스킬을 꼼꼼히 살핀 세 사람이 내린 결론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박동재가 자신만만하게 추천할 만한 이유가 있었다는 것.
그간 자신들이 생각해 왔던 암살자의 이미지와 강후는 결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말이다.
세 사람 모두 강후의 스킬이 가진 다양성에 가장 높은 점수를 줬다.
스킬빨이라는 것이 헌터에게 있어, 절대 무시 못 할 요소이기 때문이다.
야구로 따지면 투수에게 다양한 변화구 옵션이 있는 셈이었다.
그래서 상대하는 입장 – 타자 – 에서는 어떤 변화구 – 스킬 – 가 올지를 고민할 수밖에 없다.
한데 강후는 노림수를 갖기 힘들게 만들 정도로 많은 스킬을 갖고 있었다.
강후에게 확인한 스킬이 열다섯 개 이상을 넘어갈 무렵에는 하나하나 기억하기를 포기할 정도.
"제가 말씀드렸죠? 강후 형에게는 우리가 무엇을 생각하든 그 이상이 있다고요."
"동재야, 적당히 해라. 낯 간지럽다."
자신의 매력을 대신 어필해 주고 있는 박동재에게 강후가 눈짓을 보냈다.
백번 천번 고마운 일이긴 하지만, 각 잡고 이렇게 띄워 주는 것이 영 어색해서 견딜 수 없었다.
물론 기분은 좋았다.
세 사람의 반응이 훨씬 더 호의적으로 변한 것을 보니, 더욱 뿌듯하기도 하고.
"시연 잘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좋은 구경 했네요. 전 동재의 자신감이 이해가 갑니다."
먼저 직접적인 반응을 보인 것은 장태진이었다.
명가 길드의 마스터인 장선영의 남동생이기에 입김이 상당히 큰 인물 중에 하나.
그런 그가 먼저 강후에 대한 인정의 물꼬를 트니, 나머지 두 사람의 반응도 결이 같았다.
"기대가 됩니다."
"적으로 마주하지 않은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씀드린다면... 너무 호들갑일까요?"
최호수와 연수아도 반응을 보탰다. 확실히 호의적이었으며, 영혼 없는 멘트도 아니었다.
'재밌겠어.'
강후 역시 이들과 함께하게 될 미스테리 던전 공략이 기대가 됐다.
분명 예측하기가 어렵고 위험할 가능성이 높은 던전이지만, 그래서 더 설렜다.
특히 미스테리 던전의 가장 큰 특징점은 레벨이 낮은 헌터에게는 '보정 경험치'를 제공한다는 것.
이들 중에서 가장 레벨이 낮은 강후로서는 경험치에 대한 기댓값이 훨씬 큰 셈이었다.
게다가 미들 보스와 메인 보스도 틀에 박힌 형태나 개수로 나오는 것이 아닌 만큼.
이득을 보려면 악착같이 뜯어낼 만한 요소가 많았다.
죽지만 않는다면! 얻을 수 있는 보상은 일반 던전보다 훨씬 더 많고 다양했다.
강후는 던전으로 들어오면서 그동안 확인을 미뤄 뒀던 아이템 하나를 살폈다.
일전에 정문 제1 연구소와 관련된 의뢰에서 한 판 붙었던 헌터, 증선락에게 얻은 반지였다.
그의 손가락을 절단하고 탈취한 반지는 총 2개.
그중에 하나는 마나에만 특화된 반지라서 판매할 계획을 세운 상태였다.
앞서 강복화를 만났을 때 팔 수도 있었는데, 아무 생각 없이 보관만 하고 있어 타이밍을 놓쳤다.
그리고 남은 반지 하나는 일찌감치 착용은 하고 있었지만, 옵션 확인을 이제야 했다.
사실 아주 특별한 이슈까지 있는 것은 아니어서, 확인을 서두르지 않았던 것이기도 하다.
[경쾌 - 반지]
[등급 : 3등급]
[민첩 +200]
[항마 +15]
[맷집 +15]
민첩 스탯에 특화된 반지였다.
기공수인 증선락에게 다소 부족한 기동력을 채워 주는 용도의 반지였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강후에게는 결이 잘 맞는 반지였다.
스탯은 다다익선이고, 특히 민첩 스탯은 스킬이 없을 때의 기본적인 기동력을 높여 주니까.
강후는 그간 선천성 마나 과민증이라는 특수한 몸 상태 때문에 체력 육성에 집중했을 뿐.
민첩 스탯이 중요하지 않았었던 것은 아니었다. 생존을 위해 체력이 0순위가 되었을 뿐이다.
그래서 이렇게 민첩에 특화된 반지는 쌍수 들고 환영일 수밖에 없었다.
'정신 바짝 차려야겠군. 할 게 많다 해서, 정신을 놓아 버리면 그건 더 큰 문제지.'
느슨해졌다기보다는 정신없는 일정 속에서 흐트러진 집중력을 되찾아야 함을 자각했다.
쓸모없는 아이템을 갖고 있는 것은 그 자체로도 손해다.
빨리 현금화를 해서 쓸만한 아이템으로 바꾸거나, 아니면 상위 아이템 구매에 쓰는 게 맞다.
* * *
던전 공략이 시작됐다.
일본에 가기 전의 마지막이 될 가능성이 높은 일정.
던전에 입장하자마자 강후 일행을 반긴 것은 던전 특유의 공기나 배경이 아니었다.
입장과 동시에 쏟아지는 화살비였다. 고지를 선점하고, 매복하고 있던 궁수들이 있었던 것이다.
인간형 궁수 몬스터로, 언뜻 보면 판타지 영화 속의 엘프 궁수를 쏙 빼닮은 적들이었다.
강후가 상황을 인지하고 즉각적인 대응에 들어갔을 때, 다른 동료들 역시 이미 대응하고 있었다.
팍! 파팍!
먼저 최호수는 일행 전면에 서서는 몸을 최대한 부풀려, 날아드는 화살을 맨몸으로 받아냈다.
'저게 되나.'
목적을 갖고 일행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강후가 화살비를 받아내는 최호수를 보며 경악했다.
자신이 갖고 있는 스킬 '석화'를 믿는다고 해도, 저렇게 깡다구 있게 버티진 못할 것 같았다.
최호수는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자신의 두꺼운 피부로 공격을 받아내고 있었다.
게다가 급소가 될 만한 부위, 그리고 눈처럼 연약한 부위는 별도로 특수 외피가 활성화됐다.
탱킹 특화라는 말이 전혀 아깝지 않을 세팅이었다.
티잉! 티잉! 티잉!
이어 장태진이 여기저기에 만든 기공강벽은 여러 갈래로 날아드는 화살의 위협적인 경로를 차단했고.
위이이잉....
연수아가 부적을 태우며 만들어낸 주술 역장은 화살 속도를 현저하게 늦춰 버렸다.
그 역장 안에서는 마치 시간조차 느려진 것처럼 화살이 아주 느리게 지나갔다.
연수아가 그 안에서 손을 휘저어가며, 화살을 하나하나 회수할 수 있을 정도였다.
박동재는 화살비의 대부분을 받아내고 있는 최호수에게 방어 버프를 쏟아붓는 중이었다.
'다들 좋네.'
한 명도 당황하지 않고, 능숙하고 차분하게 대응하는 모습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프로페셔널함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달까. 스스로에게 갖는 자부심의 근거를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한데 바로 그때.
'대장인가?'
강후는 궁수 무리 중에서 유독 손끝에 맺히는 마나의 기운이 강렬한 존재를 확인했다.
다른 궁수들과 달리, 화살 한 대에 담아내는 마나의 양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았다.
더 무서운 점은 고출력의 마나를 한 점에 담아내는 시간이 너무 짧았다는 것이다.
가속과 도약을 반복하며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강후가 궁수를 향해 손을 뻗었다.
납치 스킬의 사전 동작.
실로 오랜만에 쓰는 납치 스킬이지만, 지금은 쓰임새가 매우 충분해 보였다.
"억!"
이내 궁수 대장이 신음을 토해내며, 강후의 납치에 이끌려 날아왔다.
피잉!
그 사이에 활시위를 떠난 화살 한 대가 일행이 있는 방향을 향해 날아갔다.
그리고.
쉬이이익... 퍼석!
연수아가 펼쳐둔 역장의 방해를 전혀 받지 않고 통과해서는 뒤에 있던 나무에 꽂혔다.
강후가 납치로 변수를 주지 않았더라면, 누군가 크게 부상을 당했을 한 방이었다.
"아."
짧은 탄식이 터져 나왔다.
간담이 서늘해질 정도의 위력이 궁수 대장에게 있었던 것이다. 천만다행으로 위기를 넘겼다.
세 사람의 시선은 일제히 강후에게로 향했다. 그 덕분에 위험을 모면할 수 있었기에.
한편 강후는 납치한 궁수 대장의 뒤에서 그의 목을 감싸고는 그대로 단검을 꽂아 넣었다.
작정하고 한 방에 전력을 담은 대참수였다.
그리고 동시에.
파앙!
강후에게서 출발한 그림자 다섯 개가 궁수 무리를 향해, 어지러이 파고들었다.
푹! 푹! 푹!
강후가 대참수 한 번으로는 부족하다고 여겼는지, 궁수 대장의 목에 단검을 몇 번 더 찔러 넣었다.
이어서 혈화를 곧바로 발동시킨 뒤, 더 잴 것도 없이 그림자 하나를 선택해 위치를 옮겼다.
그러자 궁수 대장과 멀리 떨어진, 궁수 무리들 한가운데에 자리하게 됐다.
퍼펑!
궁수 대장의 핏빛 폭발은 영화 속의 한 장면과도 같았다.
방금까지 호기롭게 화살을 날리던 대장이 어느 새 목 없는 귀신이 되어 쓰러지고 있었다.
파팟! 팟! 팟!
여기에 호흡을 맞춰, 강후가 연속 네 번으로 위치를 바꾸며 궁수 넷을 추가로 유린했다.
그림자가 '실체'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궁수들은 속수무책으로 단검에 찔려 죽어갔다.
미리 선점하고 있던 고지.
하지만 이 안에서 불청객 하나가 날뛰기 시작하자, 근접전에 약한 궁수들로서는 답이 없었다.
어설프게 활을 휘둘러서 강후를 타격하려는 시도는 처음부터 아예 무위로 돌아갔고.
푸욱!
"커억!"
되려 강후에게 화살을 빼앗기고는 화살째로 눈이나 목 옆을 찔려 비명횡사할 뿐이었다.
게다가 상처를 입은 궁수 모두에게 공평하게 한 번은 찾아오는 혈화는 저승사자와도 같았다.
"이게 암살자의 힘인가?"
"우리가 늘 바랐던 그림이기도 했죠. 주도적으로, 능동적으로 먼저 판을 짜 주는 암살자."
"즉, 적극적인 암살자지."
그 시각, 강후의 원맨쇼를 지켜본 세 사람이 저마다 감탄이 섞인 멘트를 하고 있었다.
세 사람은 스스로가 변수에 매우 능숙하게 대처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일단 방어하고 난 뒤, 반격의 물꼬를 트면 상황은 무난하게 정리될 것이라고도 판단했다.
하지만 강후는 그것보다 한 걸음을 앞서 나가서, 아예 적의 매복지를 뒤집어 놓았다.
게다가 궁수 대장의 차별화된 특성을 인지하고는 그를 핀셋처럼 납치로 소환해 죽였다.
그 덕분에 박동재를 포함한 넷은 부상을 피할 수 있었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박동재가 감탄하고 있는 세 사람을 향해서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때요? 진짜 대단한 형이죠? 판단도, 실행도 전부 빨라요. 페이스 맞추기가 정말 어렵죠."
"한 번으로 속단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첫 대응은 우리보다 훨씬 빠르고 예리했어."
장태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암살자니까 당연한 건 없다. 기동이 빠를 순 있어도, 저렇게 순식간에 여럿을 제압하긴 어렵다.
"정직하게 화살이 그대로 왔으면 호수가 다쳤을 거예요. 피했으면 제가 다쳤을 거고요."
연수아도 의견을 보탰다.
강후가 궁수 대장의 일격을 무위로 돌아가게 만든 것이 정말 컸다.
화살의 위력이 다를 수는 있다고 생각했지만, 감속 왜곡을 무시하고 들어올 줄이야.
복기할수록 가슴을 쓸어내리게 되는 상황이었다. 절로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그때.
"잠깐!"
강후가 다급하게 외치며, 앞으로 전진하려던 일행을 멈춰 세웠다.
궁수들이 제압된 마당에 더 신경 쓸 것이 있나 싶었지만....
어느새 앞으로 다가온 강후가 장태진의 발끝에서 50cm도 떨어지지 않은 지점에서.
사각. 서걱. 사가각.
바닥에 묻혀 있던 대인용 트랩 하나를 단검 끝으로 들어 올렸다.
일정 체중 이상에만 반응하는, 마력 폭발형의 트랩이었다.
누구 하나 느끼지도, 예상하지도 못했던 함정. 그것이 강후에게는 보였던 모양이다.
"...."
일순간 적막이 감돌았다.
박동재가 절대 실망할 일 없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하던 이유를 다시금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172화 미스테리 던전 (3)
* * *
마나 트랩.
엄밀하게 따지면 던전에서 보기 흔한 함정은 아니다.
헌터들이 머무는 자택이나 길드 시설에 보안을 목적으로 설치되는 경우는 많았다.
사람의 손길이 닿은 트랩은 이상할 것도 없었으며, 오히려 당연했다.
하지만 던전에서 보게 되는 일은 적었다. 이 트랩을 설치할 만한 지성체가 있어야 해서다.
그래서 강후를 제외한 어느 누구도 마나 트랩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온갖 변수가 존재하는 미스테리 던전이라고 하더라도, 트랩만큼은 아닐 것이라고 본 것이다.
오산이었다.
일행은 강후가 이동 경로에 있는 트랩을 하나하나 해체하는 것을 보면서 놀라고 또 놀랐다.
그들 중에서 가장 마나의 흐름을 잘 잡아내는 연수아가 시도해 봤지만, 트랩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감지용 장비가 있었다면 단숨에 찾아냈겠지만, 던전 안은 기계 장비가 통하지 않는 곳이다.
결국 감각에 의존해서 찾아야만 하는데, 연수아는 연신 고개만 갸웃거릴 뿐이었다.
강후가 이동 경로에서 제거한 트랩의 수만 해도 총 열다섯 개.
화력은 최소 발목까지는 중상을 입힐 수 있을 만큼의 위력을 가진 녀석들이었다.
아무리 약하게 잡더라도 발가락 몇 개는 제물로 충분히 바칠 수준이었고.
"뭔가... 많이 부끄러운 현장이 되고 있는 것 같은데."
장태진의 얼굴이 붉어졌다.
미스테리 던전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박동재에게 깐깐한 외부인 합류 기준에 대해 말했던 그다.
변수 대응에 능해야 하고, 팀에 짐이 되지 않아야 하고, 위험 요소를 꼼꼼하게 체크해야 하고... 등등.
다양한 이유를 붙여가며, 팀의 구성원이 되기 위해 필요한 자격을 말했었는데.
상황만 놓고 보면 지금 자신들이 통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가장 위험한 것을 놓친 마당이라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것이다.
전부 강후의 덕을 보며, 안전하게 전진하고 있었다. 강후가 없었다면 누군가는 무조건 다쳤을 터다.
강후는 장태진의 반응에 일일이 반응하지 않고, 묵묵히 할 일을 해 나갔다.
여기에 가볍게 입을 놀려, 쓸데없이 말을 보태는 것 보다.
가만히 있는 것이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가치를 더 높게 보기에 적합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랬다. 전략적인 침묵이었다.
명가 길드의 사람들은 앞으로도 이용 가치가 상당히 큰 사람들이다.
그들이 갖고 있는 인맥이나 던전에 대한 연결 고리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넓고 깊다.
눈도장을 제대로 찍어 두면, 두고두고 쓸만한 일이 많을 터였다.
앞서 강후가 제주도에 다녀오면서 그루 길드의 환심을 샀듯이 말이다. 지금도 같은 형태다.
'재밌군. 재밌어.'
강후가 어쩔 줄 몰라 하는 동료들을 뒤에 둔 채, 계속 전진해 나갔다.
누가 더 중요한 사람이지?
그들에게 이런 화두를 던져 주고 싶었다. 이미 생각에 푹 빠져 있겠지만 말이다.
* * *
그 무렵.
김신령은 자신의 저택에서 계속 소환수들을 부리며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다.
간만에 어둡고 눅눅한 세공실에서 나와 탁 트인 훈련장에 있으니 느낌이 새로웠다.
그간 소환수들에게 소홀했다는 생각도 들고 해서, 훈련 시간을 대폭 늘리고 있는 중이었다.
사실 강후 덕분에 각각 능력이 급상승한 소환수들의 움직임을 보는 재미가 있어서이기도 했다.
"확실히 물건이란 말이야. 아무 생각 없이 내 소환수들에게 스킬을 쏟아붓기만 한 게 아니었어."
대만족이었다.
소환수의 움직임에 '생각'이라는 것이 추가되었다는 것이 여실히 느껴질 만큼, 변화는 컸다.
복기해 보면, 강후가 소환수와의 훈련 과정에서 끊임없이 녀석들의 빈틈을 공략한 것이 컸다.
스킬 뽐내기에 몰입한 것이 아니라, 소환수의 빈틈을 집요하게 노리는 것에 집중했던 것이다.
그 덕분에 이를 방어하고 대응하는 과정에서 학습을 거듭한 소환수의 수준이 확 높아졌다.
이건 단순히 훈련을 잘했다로 내릴 결론이 아니었다.
훈련을 누가 시켰는가, 그가 어떻게 스승의 역할을 했는가, 얼마나 가치가 높았는가!
그런 관점에서 접근해 볼 문제였다.
김신령은 자꾸 강후 생각이 났다.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니, 더 생각이 났다.
그렇다고 생각의 흐름에 맡겨 두자니 더 생각이 났다. 매력에 푹 빠진 느낌이랄까.
"그런 녀석이면 세공 아이템을 채워 주고 테스트하는 맛도 쏠쏠할 것 같은데...."
그녀의 취미 아닌 취미도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것이었다.
바로 테스터.
게임으로 따진다면 출시 이전에 먼저 경험할 수 있게 해 주는 베타 테스터의 포지션이다.
다양한 세공, 개조 아이템의 제작에 능한 김신령은 특이한 옵션의 아이템을 종종 만들곤 했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당연히 현재진행형.
그런 그녀가 과거에, 제작한 아이템을 착용시켜 보고, 평가를 들으면서 멋진 조언을 해 주던 사람이 있었다.
지금은 다시는 보지 않을 최악의 악당이 되어 버렸지만, 그땐 정말 아끼는 아이 중 한 명이었다.
"빈센트 마이어...."
애써 지워 버렸던 이름이 떠오른다.
정말 제대로 밀어 주고 키워 주고 싶어서 마음을 많이 썼던 녀석이다. 그만큼 녀석이 많이 따르기도 했고.
그러나 전부 가식이었다.
자신에게 보여 줬던 모든 일면은 가짜였고, 그의 본색은 바로 살인마가 되어 버린 지금이었다.
그래서 김신령은 빈센트 마이어의 악명에 대해 늘 죄책감을 갖고 있었다.
그로 인해 희생된 헌터들에게도 같은 감정이었다. 자신 때문에 괴물이 성장한 듯해서다.
다시 상처받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자꾸 강후에게 마음을 빼앗기는 건.
외면하려고 해도 보이는 강후의 실력 때문이었다. 보면 볼수록 매력이 느껴지는 것이다.
보석을 아무리 외면하려고 해도 보석 자체가 반짝이는 것을 숨길 수는 없듯이.
지금의 강후가 딱 그랬다.
계속 지켜보고 싶고, 접점을 만들고 싶었다.
한 번 호되게 당한 아픔이 있음에도, 다시 바보처럼 이끌려보고 싶은 인연이기도 했다.
그것이 이성적인 호감은 아니지만, 헌터 대 헌터로서 느끼는 강한 이끌림인 것은 맞았다.
"아무래도 오늘은 양주를 좀 마셔야겠어."
강후로 시작해서 강후로 끝나는 생각에 완전히 푹 빠져버린 지금이다.
김신령이 체념한 듯, 고개를 휘휘 저으며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독한 술이 간절하다.
* * *
중간 휴식의 시간이 왔다.
그새 레벨은 1이 올라서 171이 되어 있었다. 이 정도면 경험치 벌이는 정말 짭짤한 수준.
보통 넷도 아닌 다섯이 왔다면, 사실 미들 보스 정도까지는 가야 레벨업을 기대해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보정된 경험치가 추가로 들어오는 덕분에 남은 네 사람에 비해 상대적인 이득을 더 봤다.
강후는 박동재와 함께 전방 정찰 및 경계를 목적으로 일행에게서 떨어져 나온 상태였다.
지금은 두 사람이 정찰 담당이고, 나머지 셋이 휴식을 하는 시간이다.
다음번 휴식은 정반대의 포지션으로 진행이 될 예정이었다. 계획된 로테이션이다.
강후와 박동재가 충분히 먼 거리까지 이동한 것을 확인한 세 사람.
그들은 그제야 일상적인 대화에서 '강후'로 화제를 바꿨다.
포문을 먼저 연 사람은 가장 꼼꼼하게 강후를 지켜본 장태진이었다.
"출혈 유지는 아예 걱정할 필요도 없고. 어떻게 본다면 호수보다 훨씬 변수 창출에 능해."
장태진과 최호수는 동갑, 연수아는 동생이기에 두 사람은 서로 편하게 말하는 사이였다.
연수아만이 두 '오빠'들에게 존대를 하고, 깍듯하게 예를 갖추는 식이다.
최호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들어오는 공격을 묵묵하게 받아내며 시간을 벌어 주는 쪽에 가깝지. 신강후 님은 스스로 판을 짜는 쪽이고."
연수아도 의견을 보탰다.
"제가 점수를 높게 주고 싶은 부분은 강후님이 암살자라는 거죠. 원래 일반적으로 암살자는 저렇게 안 하잖아요?"
"리스크가 크니까."
"맞아요. 태진 오빠 말처럼 가뜩이나 종잇장인 물몸 암살자인데 저러다가 죽으면 본인만 손해고."
"기본 스탯에서는 좀 아쉬운 움직임이 보이는데, 스킬로 커버되니까 전혀 문제가 없어 보여."
"네. 기본 움직임은 생각보다는 좀 느려요. 근데 스킬로 봤을 때는 속도가 정말 빨라요. 저도 살피다가 몇 번 놓쳤을 정도로."
"도대체 스킬이 몇 개지?"
"모르겠어요. 스킬 안에서도 변주를 주니까, 그림자 관련된 스킬 같은 경우는 갈피도 못 잡겠어요. 그림자를 각각 별개로 봐야 하는지, 도대체 어떤 식으로 굴러가는 건지."
이야기꽃이 핀다.
결과적으로 세 사람은 전부 강후의 실력에 감탄하고 있었다.
'스킬빨'이라는 말로 강후의 능력을 낮게 평가하기에는 활용 능력이 정말 뛰어났다.
아무리 좋은 재료라고 한들, 셰프의 손길이 엉망이면 맛없는 요리가 되기 쉽다.
하지만 셋의 기준으로 봤을 때, 강후는 최고의 셰프였다.
적재적소에 자신이 가진 스킬을 사용할 줄 알았고, 효과를 최대로 보는 방법을 알았다.
그것은 냉철한 판단력과 다양한 경험이 없다면 절대 보여 줄 수 없는 모습이기도 했다.
그때.
"하, 뭐 하고 있는 거냐, 우리?"
장태진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순간 자괴감이 확 든 탓이었다.
보통 미스테리 던전에 오면, 핵심이 되는 주제는 앞선 전투에 대한 복기였다.
각자 자신의 아쉬웠던 점을 얘기하고 반성하거나, 혹은 만족하는 점을 자랑하는 자리였다.
그런데 던전에 들어온 이후, 지금까지 계속 대화의 중심에는 강후가 있었다.
심지어 강후는 지금 정찰을 나가 있어 자리에도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후의 실력에 대해 감탄하는 이야기를 자꾸 하게 되는 것이었다.
사실 그것이 명가 길드원들의 '전매특허'이기도 했다.
실력 있는 헌터에게 항상 관심을 갖고 동경하며, 배우고 가까이할 점을 찾는다는 것.
그것이 지금의 소수 정예를 만든 원동력이기도 했다.
그런 명가 길드원 세 사람에게 강후는 절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실력자였다.
아쉬운 건 레벨? 아니었다.
오히려 레벨이 낮기에 더 기대가 됐다. 그만큼 성장의 가능성이 훨씬 더 많다는 뜻이니까.
같은 시각.
박동재와 함께 정찰 중인 강후는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미들 보스 구역을 확인할 수 있었다.
미들 보스 몬스터의 이름은 팔크스. 거대한 낫을 들고 있고, 인간형의 외형을 하고 있다.
미스테리 던전 공략에서 최종 목적지이기도 했다. 메인 보스 몬스터는 너무 강력했기 때문이다.
강후도 관련된 브리핑을 듣고는 욕심낼 이유가 전혀 없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강한 녀석이었다.
강후가 말했다.
"던전이 매력 있네. 몬스터들이 멍청하지 않아. 생각하는 비선공형의 몬스터들로 구성되어 있고."
"맞아. 미스테리 던전에 있는 몬스터들은 유독 똑똑하지. 유인해도 쫓아오다가 말잖아?"
"그게 좀 놀라웠어."
앞선 전투에서 강후가 몇몇 대장격 몬스터를 유인해서 처치하려고 한 적이 있었다.
보통 던전에서 자주 쓰는 방법으로 무리에서 이탈시켜, 손쉽게 제거하는 방법 중 하나였다.
하지만 미스테리 던전의 몬스터들은 생각하고 판단할 줄 알았다.
어느 정도 쫓다가, 낌새가 수상한 것을 인지하고는 원래 자리로 돌아갔던 것이다.
게다가 매복을 진득하게, 끝까지 하는 경우도 있었다.
기척이 좀 느껴졌다고 해서 바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정말 가까이 접근할 때까지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궁수의 매복은 한 번만 있었던 게 아니었다. 그리고 갈수록 놈들의 치밀함도 더해져 갔다.
"기대 반 걱정 반이군."
그래서 강후는 머지않아 마주하게 될 미들 보스 몬스터, 팔크스를 보며 긴장하고 있었다.
센 놈이 머리까지 똑똑하면 정말 까다롭기 때문이다. 적으로서는 가장 상대하기 싫은 타입이다.
물론 그만큼 녀석으로부터 강탈할 스킬에 대한 기대치는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그로부터 한나절 후.
강후가 이동 경로에 있는 몬스터를 남김없이 척살하며, 착실하게 레벨을 끌어올리고.
어느덧 레벨 172를 지나, 173, 그리고 174가 막 되었을 즈음.
강후와 일행은 팔크스를 100m 앞에 둔 위치까지 도착해 있었다.
그리고.
"...진짜 크네."
모두가 팔크스가 들고 있는 길이 4m 이상의 대형 낫을 보고는 혀를 내둘렀다.
자기 몸보다 훨씬 긴 낫을 양손으로 움켜쥔 팔크스는 벌써 잔뜩 몸이 달아올라 있었다.
"쉽지 않겠군."
강후의 눈빛도 깊어졌다.
녀석에게 유의미한 공격을 시도하려면 4m를 단숨에 좁힐 수 있는 기동은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어설프게 거리를 벌리거나 좁혔다가는 저 낫에 어디든 날아가기 딱 좋은 상황.
꽤 어려운 녀석이 될 듯했다.
이것이 미스테리 던전의 매력이기도 하지만, 그래서 한 방에 훅 갈 수 있는 위험이기도 했다.
저승과 천국은 단 한 끗 차이의 경계를 두고 곁에 머물고 있었다.
173화 미스테리 던전 (4)
* * *
전투는 바로 시작됐다.
애초에 미스테리 던전은 입장할 때마다 내부 구성이 바뀌는 만큼, 공략법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탐색전을 치르면서 데이터를 쌓는 수밖에 없었고, 그것이 공략의 시작이기도 했다.
샤아앙!
팔크스는 시작하자마자 낫을 크게 휘둘러, 강후 일행을 향해 거대한 검풍을 발생시켰다.
낫의 모양을 쏙 빼닮은 검풍이 공간을 가르자, 그 자체로 공간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단순히 낫의 모양만 생겨난 것이 아니라, 그 모양을 따라 비틀린 공간이 생겨난 것이다.
장태진과 연수아가 각각 방어를 위한 스킬을 사용하면서 정석적인 대응을 시작했다.
팔크스가 어떤 녀석인지 파악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턱대고 공세를 퍼부을 수는 없었다.
쿠웅! 쿠우웅!
날아든 검풍이 장태진의 기공강벽을 바로 박살 내고, 연수아의 방어 역장까지 덮쳤다.
어지간해서는 몸으로 먼저 부딪쳐보는 최호수도 이번만큼은 몸을 사렸다.
위력이 정확하게 측정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몸으로 때우려다가 비명횡사를 할 수도 있기에.
하지만 강후의 대응은 달랐다.
시작과 동시에 검풍을 일으킨 팔크스가 정체불명의 장치 방향으로 이동하자.
[영혼 추적자]
[대상 '팔크스'를 추적합니다.]
[반경 1km 내에서 완전 추적이 가능합니다. 절대 은신 상태에서도 가능합니다.]
일전에 최진호, 최진수 형제에게서 강탈한 영혼 추적자 성좌를 활용했다.
대상 하나에 한 번밖에 쓸 수 없는 성좌 능력이나, 몬스터를 상대로 두 번 쓸 능력도 아니었다.
타앗!
팔크스가 손끝으로 버튼을 누르며 장치를 가동시켰다.
그러자 순식간에 사방으로 연녹색 빛깔의 기운이 퍼져나가더니, 이내 변화가 일어났다.
방금까지만 하더라도 그저 지형을 장식하는 바위 형태의 구조물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살아서 움직이는 돌 골렘으로 변한 것이다. 그랬다. 골렘들은 팔크스의 하수인이었다.
동시에 팔크스는 모두의 시야에서 자연스럽게 종적을 감췄다. 은신이 틀림없었다.
"일단 물러섭시다!"
장태진이 소리쳤다.
하수인들이 움직이기 시작하는데, 정작 그 주인인 팔크스는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장태진이 전력으로 기감을 펼치며 주변을 탐색했지만, 팔크스의 종적은 묘연했다.
그것은 바람의 흐름 속에서 적의 냄새를 맡는 최호수도, 영기의 흐름으로 기척을 쫓아가는 연수아도 마찬가지였다.
세 사람 모두 전력으로 팔크스의 행방을 쫓았지만, 녀석은 감쪽같이 모습을 감췄다.
"난 이럴 때는 진짜 무쓸모네."
자책하듯 말을 내뱉고 있는 박동재도 마찬가지. 버퍼인 그가 은신을 탐지할 능력은 없었다.
하지만 그 무렵에 이미 강후는 어딘가를 향해서 전력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팔크스 만큼이나 소리소문없이 사라져서, 강후의 위치를 계속 살피던 박동재도 놓쳤을 정도였다.
거의 동시였다.
팔크스가 협곡 지형의 어딘가로 사라짐과 동시에 강후 역시, 흔적도 없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강후 형?"
박동재가 버프의 흐름을 따라서 강후의 예상 위치를 짚어 봤지만, 그곳은 텅 빈 공간일 뿐.
도대체 어디에 있나 싶은 상황에서, 동력이 공급된 골렘들이 하나둘 주변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포위하려는 상황 자체가 위험한 것은 아니었다.
이미 상황에 맞춰 나머지 일행은 뒤로 물러서면서, 포위망의 형성을 막았기 때문이다.
모든 과정은 신속했고 정석적이었으며, 위험을 최소화하는 아주 바람직한 방향이었다.
박동재는 늘 이런 분위기 속에서 명가 길드의 사람들과 손발을 맞춰왔다.
그래서 이득은 최대한으로 누리되, 손해는 최소한으로 보면서 안정적인 던전 공략을 해 왔다.
다만 이 자리에 강후는 없었다.
박동재는 던전에 오기 전부터 예상하고 있던 부분이기는 했다.
강후는 특별한 상황을 안정적으로 대응하기보다는, 의도적으로 비틀어 대응하는 타입이니까.
그는 자신에게 위험이 될 요소를 되레 뒤집어서는 상대에게 더 큰 위험으로 만드는 케이스였다.
공격을 방어하기보다는.
상대의 공격을 훨씬 더 적극적인 공격으로 방어하는 방식이다. 결이 확실히 달랐다.
아니나 다를까.
쿠웅!
박동재를 포함한 다른 일행들이 전혀 생각하지 못한 곳에서 충돌음이 들려왔다.
그것은 협곡의 중턱 어딘가로, 현재의 전장과는 살짝 거리가 먼 곳이었다.
불과 몇 초 만에 이동했다고 하기에는 거리가 제법 되는 위치.
하지만 충돌 사고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강후와 팔크스였다.
"카아아아...!"
인간형 몬스터지만, 인간의 말을 하진 못하는 팔크스가 가래 끓는 소리의 비명을 내질렀다.
녀석은 허공에서 양팔을 허우적거리며, 날개 없는 추락을 경험하고 있었다.
가장 중요한 낫을 이미 손에서 놓친 상태라, 무장도 완벽하게 해제된 상태였다.
물론 상황이 팔크스에게 불리하게만 돌아가지는 않았다.
팔크스를 추락시키기 위해 충돌한 과정에서 당연히 강후도 상황에 휘말리지 않을 수 없었고.
그 역시 공중에서 팔크스와 약간의 높이 차이는 있었어도, 같이 떨어지는 중이었다.
쉬익! 쉬이익!
그런 와중에 전광비도로 연달아 팔크스를 타격하면서, 밀쳐내기의 효과를 본 것은 덤.
그때.
파아앗! 팟!
강후가 그림자 걸음 스킬을 활용해, 위치를 조정하며 직접 추락을 막았다.
공중에서 사방으로 흩어진 그림자 중 하나가 협곡 암벽 사이에 있는 돌부리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강후는 이를 활용해, 중간 제동의 개념으로 돌부리 위로 이동하며 잠시 숨을 돌렸고.
쿠우웅!
날개 없는 추락과 함께 지면으로 떨어진 팔크스의 몸은 둔탁한 소리와 더불어.
와드득!
"크워어어!"
몇 군데가 부러졌다.
가장 심각하게 골절이 일어난 부위는 무릎이었다.
왼쪽의 무릎은 아예 밖으로 접혀 버렸다. 보는 눈을 의심하게 할 만큼 깔끔하게 접힌 상태.
팔크스를 몰아붙이기에는 가장 좋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계속 수가 불어나는 골렘들로 인해 강후를 제외한 일행들은 발이 묶인 상태였다.
'내가 너무 적극적이었군.'
강후가 현재 동료들이 처한 상황을 보며 생각했다.
그들은 자신을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럴 것이다.
기감이나 영기의 흐름으로도 추적할 수 없었던 팔크스를 어떻게 바로 찾아냈나 싶었겠지.
녀석의 은신은 매우 깔끔했다.
어떤 형태의 방법을 이용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추적이 매우 어려운 은신이었다.
그러나 강후는 영혼 추적자 덕분에 특수한 필터를 덧씌운 것처럼 쉽게 놈을 찾을 수 있었다.
아마 마나의 흐름만으로 쫓으려고 했다면, 지금보다 훨씬 늦게 반응했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협곡이 만든 그늘진 곳, 어딘가에 자리를 잡은 녀석이 날려 보낸 검풍에 당했을 터.
'신속하게.'
강후가 고통에 신음하는 팔크스를 향해 빠르게 접근했다.
녀석의 낫과 검풍은 여전히 위협적이고, 골렘의 수는 계속 불어나고 있다.
기교의 장막과 무영 스킬을 연달아 쓴 강후가 팔크스의 후방으로 접근했다.
미들 보스 몬스터답게, 녀석은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빠르게 냉정을 되찾고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 떨어진 낫을 향해 손을 뻗으려는 모습도 보였다.
그때.
파앗!
완벽히 기척을 숨기고 있던 강후가 팔크스의 뒤에서 힘껏 도약하며 녀석을 덮쳤다.
그리고 깊게 생각할 것 없이, 가장 약하다고 할 수 있을 팔크스의 뒷목에 단검을 꽂았다.
푸욱!
"크허어!"
바람 빠지는 소리가 팔크스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팔크스는 전방에서 자신의 골렘들과 전투를 벌이고 있는 일행을 살피느라 강후의 움직임을 놓쳤고, 결국 빈틈을 보이고 말았다.
'한 번'의 부주의함이었지만, 그래서 더 치명적인 실수였다.
물론 팔크스도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낫을 쥘 수는 없었어도, 두꺼우면서도 길쭉한 팔을 이용해 후려칠 만한 힘은 충분했다.
후웅!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반원을 그린 팔크스의 주먹이 강후의 얼굴을 향해 날아들었다.
순간, 신속 회피를 위시한 다른 스킬로 시간을 벌까 생각했던 강후가 곧바로 방향을 틀었다.
지금의 팔크스에게는 숨돌릴 틈을 주는 것보다, 더 거칠게 몰아붙이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기에.
그래서.
강후가 꺼낸 선택지는 석화 스킬이었다.
꾸드드득.
눈 깜짝할 사이에 단단한 돌의 형태로 변한 강후의 전면부에 팔크스의 주먹이 닿았다.
터엉!
그러자 둔탁한 소리가 나며, 강후의 몸이 살짝 뒤로 밀리는 수준에서 방어가 끝났다.
석화로 만들어낸 돌의 형태에는 바로 균열이 일어났지만, 강후의 몸에는 영향이 없었다.
바로 반격 기회를 잡은 강후는 품속에서 다른 단검을 꺼내, 팔크스에게 전광비도를 날렸다.
팔크스가 양팔을 교차시키며 제법 멋지게 공격을 막는 데에는 성공했다.
타앙!
"크헉!"
다만 그다음이 문제였다.
밀쳐내기 효과에 노출된 팔크스의 몸이 뒤로 밀리며, 몸의 무게 중심이 확 무너졌다.
앞서 무릎 골절로 한쪽 다리가 성치 않았던 팔크스였기에 생긴 빈틈이었다.
그 순간, 팔크스는 볼 수 있었다. 이미 강후가 자신의 하단부로 파고들고 있는 것을.
동시에 불타는 듯한 고통이 무릎, 오금, 허벅지 안쪽, 사타구니를 가릴 것 없이 모든 곳에서 느껴졌다.
손쓸 틈도 없이 하체의 핵심 부위들을 모조리 내주고 만 것이다.
상황을 인지했을 때는 이미 상황이 '끝나버린' 후였다. 당연한 얘기지만 여기에서 공격이 끝났다는 생각은 전적으로 팔크스의 착각이었다.
아직 비장의 한 발이 더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혈화였다.
퍼퍼퍼펑!
피의 폭발이 일어났다.
보통 혈화의 양상이 상처가 누적된 상체를 기준점으로 폭죽처럼 피를 위로 흩뿌리는 형태가 되는 것과 다르게.
하체에 깊은 상처를 입은 팔크스는 수많은 핏물을 위가 아닌 아래로 쏟아냈다.
흡사 하혈(下血)을 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기괴하면서도 섬뜩한 광경이었다.
강후는 팔크스가 충격과 고통의 향연으로 정신이 없는 틈을 타 한 개의 옵션을 더했다.
뇌격진.
혈화로 인해서 상처가 깊어지고 더 나아가 생살이 노출된 팔크스에게는 최악의 선택지였다.
피로 흠뻑 젖은 하체에 전기 고문을 하는 것과 다를 게 없었으니까. 지옥이 눈앞이었다.
빠지지직!
"카아아아아아악!"
그것으로 끝이었다.
하체 전반에 감당할 수 없는 전류의 충격이 전해진 팔크스는 거품을 물고 나자빠졌다.
죽을 정도까진 아니어도, 쇼크로 인해 정신을 놓기에는 충분하고도 남는 한 방이었다.
정석을 따르는 전투로는 얼마나 시간과 공을 들여야 할지 쉽게 계산조차 되지 않는 녀석.
하지만 강후는 적극적인 맞대응으로 만들어낸 변수를 끝까지 놓아주지 않았다.
그리고 결과는 극명하게 갈려 버렸다. 죽음과 삶, 더 나아가 상실과 보상으로.
이윽고 팔크스로부터 강탈할 수 있는 스킬이 활성화됐다.
다른 선택지가 몇 개 더 있었지만, 강후로서는 고민할 필요 없는 선택지 하나만이 보였다.
[초감각 – 무기]
[모든 무기류에 대해서 기본적인 사용법과 활용법에 대한 지식 전반이 주입됩니다.]
[지식의 근거는 대성전의 성좌들과 계약한 계약자들이 다루는 무기에 대한 기본적인 상식을 기준으로 합니다. 패시브 스킬.]
'이참에 낫도 한 번 써 봐?'
주인을 잃은 채로 떨어져 있는 팔크스의 낫. 그것을 흘깃 살피는 강후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174화 일본으로 (1)
* * *
전리품 자체는 생각보다는 부실하게 나왔다. 노란색 마석 10개로 다 합치면 100억 원의 감정가.
팀원 총합이 5명이니, 1인당으로 분배하면 20억 원 정도의 분배금이 되는 셈이었다.
이것도 절대로 적은 금액은 아니다.
하지만 다루는 경제적인 규모가 커지다 보니, 상대적으로 적게 보이는 것이다.
레벨은 무려 4가 올라, 단숨에 178이 되었다.
이유는 너무 간단했는데, 팔크스를 강후 혼자서 처치했기 때문이다.
박동재의 버프 지원도 이번에는 다른 팀원을 지원하느라 없었기에 진정한 의미의 솔플이었다.
'그래도 아직까진 일대일로 승부를 볼 수 있는 몬스터가 많아서 이득이긴 하네.'
강후가 내린 총평이었다.
이번에 팔크스를 상대했을 때처럼, 아직까지는 급소나 핵심 부위를 노리는 변수 창출이 가능했다.
맷집 좋고 체력 좋은 몬스터라고 하더라도, 급소에 대한 노림수에는 약점이 있다는 얘기다.
일격에 죽을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하지만 레벨이 높아지고, 진입하는 던전의 수준이 지금보다 훨씬 높아지게 되면.
그때부터는 '기계형' 몬스터가 나오기 시작한다.
이런 녀석들은 급소라고 할 만한 부위가 없어서, 정말 죽을 때까지 '발악'하다가 죽는다.
설령 급소로 특정할 만한 회로가 있다 하더라도, 대체 시스템이 있어서 의미가 없었다.
원작에서 몬스터들에 대한 공략 난이도 상향을 연출하기 위해 고심했던 설정인데....
결과적으로 지금은 강후가 언젠가 마주해야 하는 빡빡한 미래가 되어 버렸다.
물론 걱정보다는 기대감이 훨씬 더 컸다. 어려운 만큼 보상은 확실한 녀석들이다.
'다양한 무기를 다뤄서 나쁠 건 없어. 가끔은 팔이 긴 전투가 필요할 때도 있고.'
강후는 팔크스에게서 강탈한 스킬의 가치를 매우 높게 보고 있었다.
암살자 특성에 있어서는 단검이 가장 잘 어울리는 무기인 것은 맞다.
오히려 다른 무기는 특색을 죽여 버리는 악조건이 된다. 시너지도 거의 없고.
하지만 언제까지 단검에만 의존할 수는 없다. 상대해야 할 적의 수준도 점점 올라가기 때문이다.
그중에는 뛰어난 실력을 바탕으로 초근접 거리의 전투를 허용하지 않는 헌터들도 있을 터다.
어떻게든 상대와 거리를 두려는 적에게 단검은 가장 쓸모없는 무기가 된다.
일단 붙으면 되는 것 아닌가?로 접근할 문제가 아니다. 그런 헌터들은 접근하지 못하는 방법을 필사적으로 연구한 케이스니까.
결국 가위바위보의 싸움이 되기 마련인데, 무기 하나로는 낼 수 있는 패가 하나뿐.
그래서 강후는 단검뿐만 아니라 장검, 대검, 단창, 장창, 도끼, 채찍 등등....
다양한 무기를 활용할 가능성을 만들어 두고 싶었다.
쓸 줄은 아는 것과 쓸 줄도 모르는 것은 하늘과 땅만큼의 큰 차이를 갖는다.
예전에 허정태에게 얻은 강격의 장창을 아직까지 한 번도 못 쓴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창을 어떻게 다루는지는 모르기 때문이다. 막연하게 휘두르면 되지 않을까 하고 있는 정도다.
'시간을 더 쪼개서 훈련에 써야겠다. 이제 장창 정도는 서브 무기로 다룰 수 있겠어.'
생각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장창에 대한 활용법이 떠오른다. 초감각 – 무기 스킬 덕분이다.
강후가 확 오른 체온을 식히며, 나름의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즈음.
팔크스의 죽음과 함께 자동으로 소멸해 버린 골렘을 지나온 나머지 일행이 강후를 찾았다.
준비했던 공략은 여기까지인 만큼, 이제 방향을 돌려 나갈 시간이었다.
강후로서는 필요한 것을 다 얻은 만큼 딱히 미련은 없었다.
팔크스의 수준을 봤을 때, 여기서 더 깊게 들어가면 고전할 가능성이 컸다.
"어지간해서는 이런 말을 먼저 드리지는 않습니다만. 다음 공략을 꼭 기약하고 싶네요."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장태진이었다. 그가 어떤 평을 해 줄지 궁금했는데, 내용이 아주 좋았다.
"사실 세 분과 동재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제가 앞에서 뛰놀 수 있었다고 봅니다."
"형은 정말! 겸손이 패시브야."
강후의 대답에 박동재가 옆구리를 푹 찌르며 말했다.
박동재가 보기에 강후는 진짜로 모르는 것 같았다.
저런 겸손이 상대를 두 번 죽이는 멘트가 된다는 것을.
뒤집어 해석하면, 내가 앞에 있는 동안 너희는 뒤에서 뭐했냐?는 내용이 될 수도 있다.
물론 여기 있는 세 사람이 그렇게 속 좁은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겸손이 거만함으로 바뀌는 건 한 끗 차이인 것이다. 애석하게도 듣는 사람의 수준에 따라 해석이 갈리게 된다.
연수아가 말했다.
"사실 저희는 전반적으로 모든 움직임을 보수적으로 가져가는 편이에요. 안전 지향적이죠."
"그 성향도 존중합니다. 다름의 문제지, 틀림의 문제는 절대 아니니까요."
강후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답했다. 진심이었다. 무조건 공격적으로 움직이는 것만이 답은 아니다.
"하지만 이번에 느꼈어요. 상황을 극적으로 뒤집을 그림이 보이면, 승부수를 던져야 한다고요."
연수아의 말에 옆에 있던 최호수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세 일행 중에서 극단적이라고 할 정도로 방어적인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유는 그녀가 접근전과 난타전에 가장 취약한 주술사 포지션이기 때문일 터.
하지만 그런 그녀도 강후의 적극적인 대응을 보면서 느낀 점이 많았던 모양이었다.
"찾아만 주시면, 날카로운 창이 되어 빈틈을 노리는 사냥개의 역할은 제가 하겠습니다."
강후가 담백하게 답했다.
그들은 계속 지금처럼 든든하게 방패가 되어 줘도 상관없다. 그러면 뒤는 걱정할 게 없어지니까.
"꼭 다시 뵙죠. 멋졌습니다."
최호수가 짧고도 확실한 멘트로 강후와의 팀플레이를 평가했다. 그 말이면 충분했다.
"보세요. 제가 진또배기 암살자로 소개해 드린다고 했죠? 강후 형 더 바빠지기 전에 많이 찾아 주세요! 번호표 뽑으셔야 될 겁니다!"
옆에서 본인보다 몇 배는 더 신나서 호들갑을 떠는 박동재의 환장(?)의 하모니까지.
강후는 그렇게, 첫 미스테리 던전 공략을 만족스럽게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예비로 둘 수 있는 공략법이 전혀 없다 보니, 체감 난이도가 상당히 클 수밖에 없는 던전.
앞으로도 미스테리 던전에 올 때는 긴장을 바짝 하고 와야 할 듯했다. 방심은 금물이다.
* * *
공략을 마무리하고 밖으로 나온 강후는 박동재와 짧게 대화를 나눈 뒤, 바로 헤어졌다.
특별한 얘기는 없었다.
다만 이클립스에 대해서 정보를 좀 더 철저하게, 면밀하게 찾아 주겠다는 박동재의 약속이 있었다.
특히 차소혁을 중점적으로 추적하겠다는 얘기도 덧붙였다.
예전에 압박감을 제법 느꼈었던 차소희의 추적과 달리, 차소혁은 부담이 조금 덜했다.
애초에 강후가 활동 무대를 전국적으로 쓰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고.
더 나아가 차소혁이 소속된 조직인 '태양'은 이클립스에 비해서는 규모가 작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차소희에게 쫓기던 시절과 지금의 자신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는 것도 컸다.
"뭐하려나, 지금은?"
강후가 문득 떠오른 한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요즘 새삼 느끼고 있는 것이 바로 '인연'에 대한 무게였다.
인연은 돈 주고도 살 수 없고, 내가 갖고 싶다고 해서 마음대로 얻어지지도 않는다.
아이템은 돈이 있으면 사면 그만이지만, 인연은 그만한 노력과 수고를 필요로 한다.
그래서인지 곁에 가까이 맺고서 지내는 인연들을 허투루 넘기고 싶지 않았다.
바로 통화가 연결됐다.
- 오빠? 무슨 일이에요? 오늘 복권이라도 긁어 봐야 하나? 먼저 전화를 이렇게 받을 줄이야!
"잘 지냈어?"
- 무소식이 희소식이죠, 오빠! 오빠는 어때요? 하긴 뭐, 항상 바쁘죠?
"나야 늘 그렇지."
- 저 지금 던전 앞이에요. 요즘 자는 시간 빼고는 무한대로 던전 뺑이치고 있어요.
"팀이야?"
- 네. 합도 잘 맞고, 던전도 연줄이 제법 많아서. 각잡고 성장에 올인하기 좋네요.
"좋네. 늘 던전이 골치인데."
- 그러니까요. 나중에 오빠랑도 던전 하나 제대로 가 보려면, 저도 실력을 더 키워야 하지 않겠어요?
"지금도 충분해."
- 됐어요, 립서비스는. 아무튼 저는 잘 지내고 있어요. 오빠, 항상 조심해요. 쫓는 눈이 많잖아.
"뭐... 부정하진 못하겠군."
- 들어가 봐야겠어요! 그러면 또 연락해요! 뿅!
"다음에 연...."
강후가 뒷말을 마무리 짓기도 전에 통화가 끝났다.
미소가 지어졌다. 뭐랄까. 주변의 사람들도 같이 성장하고 있다는 느낌에 기분이 좋달까?
강후는 박동재나 정유리처럼, 자신의 곁에 있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자극이 되어 줬으면 했다.
그래야 아래나 옆이 아닌, 위를 보고 힘차게 달려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명가 길드의 헌터에게도 인정을 받는 위치까지 올라오기는 했지만.
그래 봤자 열세 개의 별의 구성원들을 생각하면, 아직도, 여전히 하찮은 실력이었다.
지금 당장 일대일 승부로 끝장낼 수 있는 열세 개의 별이 과연 있을까...?
죽지는 않을 수 있어도, 비기거나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는 적수는 없었다.
갈 길은 여전히 멀다.
* * *
그날 이후.
강후는 단 한 번의 외출로 아이템을 판매한 일을 제외하고 내리 이틀을 쉬었다.
판매한 물품은 총 여덟 개였다.
예전에 증선락에게서 빼앗은 반지 중에 팔려고 한 반지, 그리고 이번에 분배받은 마석.
여기에 혹시나 싶어 갖고 있었지만 예비로도 필요 없을 듯한 흉갑과 아수라의 혜안을 더했고.
예비로 있던 광기의 전주곡 장갑, 마법사 사냥꾼 발찌, 추적의 신발, 순풍의 목걸이, 상승의 기력 팔찌까지 전부 판매했다.
이렇게 여덟 개를 묶어 인근의 마켓에서 팔았고, 넉넉하게 350억 원의 돈을 챙길 수 있었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전부 현금화하니, 그 액수가 제법 컸다. 예상외였다.
이틀 동안 안전 호텔에서 강후는 온종일 방에 틀어박혀 푹 쉬면서 지냈다.
다음 일정이 확정돼서다.
바로 일본행.
안영호로부터 연락이 왔다.
리코우 길드에서 강후와 조율한 던전들이 전부 '안전'하게 준비되었다는 것이다.
아마도 토우시 길드와의 전면전에서 영향권에 들지 않는 범위가 된 모양.
게다가 타카시에게 만남에 대해서 긍정적인 답변을 받았다는 소식도 함께 들었다.
'타카시의 마음을 어떻게 얻느냐가 문제군. 평소의 나와 다르게 텐션을 좀 올려야겠지.'
타카시에 대한 접근법은 나름대로 머리에 그려 둔 상태였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 달리, 꽤 냉소적인 구석이 많은 녀석이기에 접근에 신중해야 한다.
틀에 박힌 모습을 보여 주면 그의 흥미를 전혀 끌 수 없을 터.
그러면 어떻게든 타카시와의 접점을 만들겠다는 계획이 시작부터 어그러지게 된다.
"드디어 일본을 가네."
침대에 눕힌 몸이 점점 더 아래로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그간 누적된 피로가 있는 듯했다. 이것도 일본에 가기 전에 전부 털어낼 참이다.
강후는 안영호를 제외한 누구에게도 일본에 간다는 사실은 알리지 않았다.
최근 부쩍 가깝게 지내는 박동재도 마찬가지. 굳이 신변 노출을 할 필요는 없다.
그렇게 침대에 누워있다 보니, 문득 전에 울릉도에서 있었던 일이 생각이 났다.
그때, 울릉도에서 강후는 분명히 원작자 시절의 자신의 모습과 쏙 빼닮은 남자의 뒷모습을 봤다.
환각이나 환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뚜렷해서, 좀처럼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 뒷모습이었다.
누굴까.
원작자인 자신은 이렇게 신강후가 되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데.
만약 그 '원작자'가 살아있다면, 그 안에 있는 것은 도대체 누구일까? 또 다른 나일까?
그때, 답을 얻었으면 좋았을 텐데 안타깝게도 손 한 번 잡아보지 못하고 그를 보내 주고 말았다.
"울릉도를 한 번 더 가 보긴 해야겠어. 거기에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미련이 남는다.
차라리 잘못 본 것이라면, 그렇다는 확신이라도 얻어야 묘한 기분이 들지 않을 듯했다.
그로부터 이틀 후.
강후는 오사카 공항에서 안영호와 그의 외삼촌인 스즈키 후미야를 만났다.
오래전, 안영호를 구했던 날부터 약속하고 고대해 왔던 첫 일본행이었다.
활동 배경이 국내에만 한정되어 있던 강후가 처음으로 국외에 첫걸음을 내딛는 순간이기도 했다.
175화 일본으로 (2)
* * *
"형! 어서 오세요!"
입국 수속을 마치자마자 안영호가 강후를 격하게 반겼다.
로우톤의 박동재와 다른 하이톤의 목소리라는 점을 제외하면, 박동재 2호기를 보는 느낌이었다.
안영호가 자신을 보는 눈빛에서는 존경과 감사의 꿀이 열심히 떨어지고 있었다.
"오랜만이네, 영호."
"진짜 일본으로 모시기 어렵네요! 죄송합니다. 제가 더 백방으로 뛰었어야 했는데."
"뒤에 외삼촌이 듣고 계시는데, 너무 위험한 발언 아닌가?"
"아! 아아! 그런가요?"
강후가 안영호와 반갑게 악수를 하는 동안, 스즈키 후미야가 자연스럽게 옆에 자리를 잡았다.
일본 관서권에서 Top 1의 자리를 공고히 한 리코우 길드.
그런 길드의 부 길드 마스터다. 상당한 거물이 나온 것이다.
안영호의 외삼촌이 아니었다면, 사실 이 자리에 나오지 않았을 가능성이 훨씬 높은 헌터다.
후미야의 성좌 정보를 살피니, 레벨 600은 훌쩍 넘길 것 같았다.
장시환이나 채관형에 비할 바는 못되지만, 강동현 정도는 쉽게 뛰어넘을 실력을 가진 듯했다.
이어 안영호가 살짝 뒤로 물러서고, 후미야가 강후에게 악수를 먼저 청했다.
"방갑스무...."
"일본어로 편하게 하셔도 됩니다. 제법 쓸만하게는 할 줄 알고, 잘 들을 줄 압니다."
한국어로 인사를 하려는 후미야에게 강후가 환한 미소와 함께 일본어로 말했다.
언어에 있어서는 불편함이 없기에 이런 부분에서는 참 편리한 점이 많았다.
"반갑습니다. 리코우 길드의 부 길드 마스터이자, 영호의 외삼촌 되는 스즈키 후미야입니다. 편하게 후미야라고 불러 주십시오."
"신강후입니다."
"처음 해외로 나오신 것이라고 들었는데요. 어떠십니까? 일본도 크게 다르지 않지요?"
"공항만 봐서는 속단할 수 없지만, 전반적인 느낌은 국내와 크게 다르진 않네요."
후미야의 질문에 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미리 알아보고 온 바도 그랬다.
일본 역시 한국과 암묵적인 룰이 비슷해서 공항, 철도에 대해서는 잘 건들지 않는다고 한다.
물론 일본 헌터 치안청의 대다수 전력이 이런 교통 시설에 집중되어 있는 것도 클 것이다.
어쨌든 그 덕분인지 공항 주변이 어수선하다던가, 조심할 만한 일이 벌어진 것 같진 않았다.
다만 전광판에서 계속 흘러나오는 지명 수배에 관한 공고는 위협적이기는 했다.
그중에는 극단적인 성향을 가진 몇몇 헌터에 대한 전광판 알림도 있었다.
[이시하라 유우지]
[1급 지명 수배 대상]
[한국, 중국에서 입국한 헌터를 대상으로 무차별 살인을 거듭하고 있는 요주의 헌터입니다.]
'그래, 저 새끼가 있었지.'
원작에서는 일본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가 메인 스토리로서 진행된 적은 없었다.
주인공 장시환의 경우는 해외에서 주로 활동했던 무대가 미국과 독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본 이야기가 아주 없지는 않았다.
타카시로 인해 파생된 정보들이 있었고, 그중에는 이시하라 유우지에 대한 내용도 있었다.
혐한, 혐중 성향을 가진 유우지는 일본 헌터들도 경멸할 정도의 미치광이 살인마였다.
진짜 그런 성향이 있다기보다, 살인의 정당화를 위해 억지로 이유를 붙였다고 할 정도.
다만 전광판 공고대로, 이유 불문 한국과 중국의 헌터를 노리는 것은 맞았다.
레벨도 현재 알려진 수준에서만 판단해도 500은 넘는다.
게다가 광전사, 암살자 특성이 혼합된 형태라서 상당히 까다로운 헌터이기도 했다.
그래서 1급 수배 대상인 데다가, 한중일 3국의 치안청이 공조하고 있음에도 여전히 수배 중이었다.
리코우 길드의 밀착 보호를 받기는 하겠지만, 긴장의 끈은 늦추지 않기로 했다.
타카시를 만난다거나, 외부 활동을 따로 하게 되면 결국 자기의 몸은 자기가 지켜야 한다.
리코우 길드가 호의적이고 배려해 준다고 해서, 일거수일투족을 다 챙겨 주는 것은 아니니까.
후미야가 미리 공항 앞에서 대기 중인 안전 리무진 쪽으로 강후를 안내했다.
일전에 정유리 덕분에 탔던 안전 리무진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특수한 리무진이었다.
언뜻 보기에도 한 번 운행에 억 단위는 쉽게 깨질 듯한, 호화로운 차량이었다.
안영호를 구한 것이 이 정도의 가치를 하는 걸까?
과한 대우가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사랑하는 조카를 잃을 뻔한 위기에서 구해 준 보답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렇게 리무진을 타고, 리코우 길드의 건물이 있는 곳으로 이동하는 동안.
차 안에서 좀 더 긴밀한 대화가 이어졌다.
옆에서 열심히 재잘거릴 줄 알았던 안영호는 후미야와 약속된 게 있는지 최대한 침묵을 지켰다.
"처음 강후님과 연락이 닿았을 때와 지금의 위상이 정말 많이 달라지셨습니다. 아십니까?"
"어쩌다 보니 이래저래 악명과 명성을 같이 쌓은 듯합니다. 길드에서 국내 동향을 살피시나요?"
"물론입니다. 길드의 외연을 넓히기 위해서 한국 길드와의 협력을 고려하고 있기도 하고요."
"진척은?"
"자세한 사항은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만 경쟁자가 있어서 쉽지는 않군요. 하하."
쓴웃음을 짓는 후미야의 말에는 토우시 길드에 대한 이야기가 깔려 있었다.
한국에서 활동하려면 정화 길드의 협력은 필수적이다.
쉽게 말해 정화 길드의 허락 없이는 국내 활동이 어렵다고 봐도 된다.
실제로 원작에서도 장시환은 협력 건을 두고, 일본의 여러 길드에 의도적으로 경쟁을 붙였다.
협력해 주는 대신, 그에 따른 대가를 극대화해서 얻어내기 위해서였다.
그때는 주인공으로서 참 영리하게 머리를 쓴다고 자평했었는데.
리코우 길드와 가까운 입장에서 다시 생각하니, 참 영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군요."
"어쨌든 원래부터 중요한 손님이셨지만, 지금은 더 중요한 손님이 되셨습니다."
"여러모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저희도 나름의 투자를 하는 것일 뿐. 다만 모든 투자에 진심이 있다는 것만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물론입니다."
리코우 길드는 국외 헌터를 가장 적극적으로 영입하는 길드다.
원래는 관서권에서 Top 3 밖에 있던 리코우 길드가 1인자의 자리에 오르게 된 배경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런 행보가 낯설지 않았다.
그들은 미리 강후의 상품 가치를 판단하고, 투자를 진행하고 있는 것일 터.
혹자들은 이를 두고 '호구짓'이라고 하지만, 그게 틀리지 않았음은 지금의 위상이 증명하고 있다.
"이건 요청하신 던전 목록입니다. 다시 한번 최종적으로 확인해 주시면 됩니다."
후미야에게 서류를 넘겨받은 강후가 내용을 훑었다.
앞서 확인했던 바와 같았다.
암흑기 파밍을 노리기 위해, 강후가 의도적으로 언데드 계열 던전으로 리스트업 해 뒀다.
전부 언제든지 공략이 가능하도록, 대기 상태로 있었다. 안에 들어간 헌터가 없다는 뜻이다.
"확인했습니다. 신경을 많이 써 주셨군요."
"솔직히 말하면 길드원이 좀 꺼리는 던전이기도 합니다. 언데드는 계산이 빗나갈 때가 많아서."
후미야의 말이 맞다.
그것은 언데드 특유의 무감각과 무식함에 가까운 인내, 거세된 공포와 두려움에 기인한다.
그러니 이왕이면 예상대로 흘러가는 던전에 가는 것을 선호할 수밖에 없다.
바로 그때.
옆에 있던 안영호가 양해를 구하고 전화를 받더니, 이내 강후와 후미야의 얼굴을 흘깃 봤다.
개인적인 연락이었다면 굳이 눈치를 볼 필요까지는 없었을 텐데, 관련된 용무가 있는 모양.
안영호가 잠시 통화 상태를 보류로 바꾸자, 바로 후미야가 물었다.
"무슨 연락이야?"
"타카시님에게 연락이 왔어요."
강후의 눈빛이 번뜩였다.
이미 타카시와 사전 조율은 끝났다고 했다. 그것에 관련해서 더 나눌 이야기가 있는 건 아닐 텐데.
혹시 만남을 취소하려는 걸까? 그러면 타카시와 접점을 만들려던 계획이 복잡해진다.
내색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떤 내용의 통화인지는 너무 궁금했다.
곧 안영호와 후미야의 대화가 오갔다.
"어떤 연락이냐?"
"지금 훈련장에 나와 계시다는데. 볼 수 있으면 지금 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하시는데요?"
"지금?"
"네, 삼촌. 강후 형님이 입국한 것은 이미 알고 있다면서요."
"공항 CCTV라도 해킹해서 본 건가? 대외적으로 알린 바가 없는데 말이야."
"삼촌, 어떻게 답을 할까요?"
"이건 나한테 물어볼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 강후님, 어떻게 진행하시겠습니까?"
후미야가 강후에게 의사를 물었다.
어지간해선 만남의 주도권을 늘 자신이 가져가는 강후지만 이번만큼은 예외였다.
목마른 놈이 우물을 파는 것이 맞다. 그리고 타카시는 그럴 만한 가치가 충분했다.
강후가 바로 답했다.
"괜찮다면 곧바로 만날 수 있는 장소로 이동해 주시죠. 귀한 분을 뵐 기회를 놓칠 수는 없죠."
강후의 대답에 후미야와 안영호는 살짝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강후가 원하니 만남을 주선하고 자리를 잡기는 했다.
하지만 타카시에 대한 일본 내의 인식은 정말 나빴다. 기피 대상으로 분류해도 될 정도.
그런 타카시를 강후는 왜 꼭 만나고 싶어 하는 걸까. 아무도 속내를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심지어 강후에 대해서 모든 것을 신뢰하고 감사해하는 안영호도 마찬가지였다.
* * *
타카시가 강후를 불러낸 장소는 훈련장이었다.
도착하기 전까지만 해도 강후는 김신령처럼 개인 저택이나 별장에 구축된 훈련장을 생각했었다.
보통은 그런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타카시의 훈련장은 폐공장이었다.
예전에 전종두의 오쇼 용병단을 공격할 때 타깃이 됐던, 딱 그런 폐공장을 보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밖에서 전혀 안을 들여다볼 수 없도록, 창문은 전부 막혀 있었다.
안쪽 창문에 특수한 철판을 덧대어 놓았는지, 아예 그냥 하나의 벽이 되어 있는 상태였다.
"일정에 차질이 되시는 건 아닌가요?"
"아닙니다. 저나 영호나 오늘은 아예 프리하게 비워 둔 날이라. 신경 안 쓰셔도."
졸지에 타카시를 만나는 자리까지 동행한 두 사람을 보며 강후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타카시가 관계자 외에는 접근도 하지 말아 달라고 경고를 해 둔 만큼, 두 사람은 여기서 멈춰야 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강후가 성큼성큼 타카시의 훈련장을 향해 이동하기 시작했다.
사람 키만큼 높이 자란 폐공장 주변의 잡초와 상태가 엉망인 도로에서 을씨년스러움이 묻어났다.
애초에 타카시의 본체가 아니라 분신이 움직이고 있으니, 더 무심해질 수밖에 없을 터다.
물론 타카시 본인 – 본체 – 도 딱히 깔끔한 스타일은 아니라서, 집안은 엉망일 것이다.
원작에서 언급된 내용으로 미루어 보건대, 물 한 통 사러 나가는 것도 귀찮아서 참고 있을 것이다.
급한 대로 수돗물을 마시겠지. 그리고 몸에 맞지 않는 수돗물 때문에 배앓이도 하고 있을 것이다.
훈련장의 정문으로 보이는 철문 앞 10m 지점에 도착하는 순간.
척.
강후가 멈춰 섰다.
어떤 경고 팻말이나 특별한 표식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강후는 더 움직이지 않았다.
"...."
그리고 멈춰선 채로, 폐공장 주변을 하나의 시야로 크게 담아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자 어느 곳 하나 그냥 지나갈 수가 없도록, 촘촘하게 설계된 많은 감지 결계가 느껴졌다.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마나의 흐름을 예민하게 감지할 수 있는 강후에게는 흐름이 시각화된 것처럼 느껴졌다.
'이 망할 히키코모리가 첫 만남부터 장난질이네.'
강후의 미간에 '내 천(川)'자가 선명하게 찍혔다.
176화 아키야마 타카시 (1)
* * *
타카시는 원작에서도 항상 패턴 숙지를 강조하고, '생각하는 플레이'를 1순위로 추구했었다.
어떻게 보면 매사에, 그리고 공략에 진심이었다. 치열하게 고민하고 도전하는 것을 즐겼다.
반면에 열세 개의 별은 접근법이 달랐다.
그들도 초심자의 위치에 있었을 때는 시련과 고난을 즐기고, 어려움과 부딪히는 것을 선호했지만.
레벨과 실력이 본 궤도에 올라온 이후로는 쉬운 방법으로 쉽게 공략하는 것을 원했다.
굳이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무리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가치가 떨어질 수 있는 부상이나 실패에 대해서 극도로 회피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어차피 시행착오는 별도의 탐색대를 보내서 경험하면 됐다.
그들을 통해 알짜 정보를 얻고, 나중에 정답지에 가까운 공략법을 들고 움직이면 끝이었다.
원작의 타카시는 그것을 늘 못마땅해했다.
열세 개의 별 때문에 다양한 던전에 갈 수 있는 것은 즐거웠지만, 그것이 다였다.
그래서 원작 막바지에 이르러선 열세 개의 별과 떨어져 개별 행동을 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때, 그가 남겼던 말은 강후가 직접 쓴 대사인 만큼 여전히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 고생의 가치를 모르고서 먹는 과일은 달콤해. 하지만 말야. 가치를 알고 먹는 과일은 평생을 잊지 못할 만큼 짜릿한 마약과도 같아.
당연히 동료들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특히 그에게 적대적인 채관형은 헛소리도 길게 하면 개소리라며, 꼬우면 열세 개의 별을 탈퇴하라는 말도 했었다.
'쉽게 마음을 열지 않지만. 일단 한 번 마음을 열면 모든 것을 주는 타입.'
강후는 그렇게 타카시를 정의하고 있었다.
모험과 도전을 좋아하는 만큼, 그 부분에 중점을 두고 접근해야 한다. 그는 열정적인 헌터다.
대외적으로 알려진 괴짜 모습의 일부는 위장이다. 어설픈 인연을 솎아내기 위한 장치인 것이다.
"...."
강후가 제자리에 멈춰선 채로, 주변의 마나 흐름에 모든 정신을 집중했다.
눈으로 보면 하나도 보이는 것이 없는, 수많은 마나 트랩의 향연이다.
독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것 같을 정도로 여기저기에 함정을 떡칠해 놨다.
설계했을 타카시 본인도 제대로 인지하고 있지 못하면, 십중팔구 건드릴 수밖에 없는 함정이다.
집중하면 할수록.
보이고, 느껴졌다.
직접 두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어도, 감각의 흐름을 따라서 지도를 그려볼 수는 있었다.
'체중 관리를 그간 잘한 점은 칭찬을 해 줘야겠네. 비만이었으면 가지도 못했겠군.'
헛웃음이 나왔다.
마나 트랩이 촘촘한 구간은 지금의 체형이 아니면 아예 지나치지도 못했을 것이다.
스윽. 스스슥.
계산이 끝난 강후가 망설임 없이 이동하기 시작했다.
시각적으로는 전혀 의지하지 않았다. 어차피 눈으로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몸의 느낌, 그러니까 감각을 믿었다. 감각이 안전하다고 믿는 그 루트를 따라 이동했다.
필요에 따라서는 몸을 높이 띄우거나, 아예 장애물을 뛰어넘어야 하는 구간도 있는 만큼.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약간의 퍼포먼스도 곁들이게 됐다. 아마 타카시가 다 지켜보고 있겠지.
슬쩍 뒤쪽을 돌아보니 안영호와 후미야가 걱정 어린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아무것도 안 보이는 허공에서 폴짝 뛰었다가, 몸을 바짝 낮췄다 하고 있으니 이상하기도 할 터다.
아무래도 좋았다.
지금은 뒤의 두 사람보다 타카시가 자신을 어떻게 보고 있을지가 중요하다.
* * *
같은 시각, 강후의 예상대로 타카시는 CCTV를 통해 모든 움직임을 살피고 있었다.
자기 훈련장인 만큼, CCTV 설치에는 진심이었다. 과하다 싶을 정도로 CCTV는 많았다.
덕분에 다양한 각도에서 강후의 움직임을 볼 수 있었는데, 갈수록 타카시의 눈빛이 깊어졌다.
"제법인데?"
처음 몇 개의 트랩이 깔린 라인을 피했을 때는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다.
왜냐면 발끝이나 몸이 닿을 것 같을 정도로 아슬아슬했던 구간이 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타카시는 운으로 치부했던 자신의 판단에 문제가 있음을 느꼈다.
강후는 마치 트랩을 깐 라인에 대한 지도를 머릿속에 전부 입력해 놓은 것처럼 피하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아슬아슬할 일도 없이, 넉넉하게 거리를 두고서 이동하는 모습도 보였다.
"이놈 봐라...."
타카시가 설탕을 듬뿍 탄 커피를 홀짝이며, 강후의 영상에 더욱 몸을 기울였다.
가뜩이나 거북목 때문에 고생하는 목이 오늘은 유독, 더 앞으로 튀어나온 상태였다.
대뜸 자신을 보고 싶다고 하던 배짱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자기 실력에 믿을 만한 구석이 있었던 모양이다. 허풍이 아닌 진실로 증명할 수 있을 만큼.
타카시가 감탄하고 또 감탄하는 사이, 어느새 강후는 상당히 깊숙한 곳까지 들어와 있었다.
지금껏 호기심에, 혹은 이번 만남처럼 시험 삼아 함정 통과를 하려던 헌터는 수도 없이 많았다.
하지만 타카시가 G라고 표시해 둔 구간까지 들어온 사람은 강후가 처음이었다.
입구인 A 구간부터 시작해서, 폐공장 안으로 최대한 들어오려면 H 구간까지 돌파해야 했다.
강후는 그중, 마지막 구간을 앞두고 있었던 것이다. 첫 진입 기록이었다.
바로 그때.
파팟! 팟! 팟!
마치 강후가 곡예를 하듯,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뛰었다가 몸을 낮췄다가 하기를 반복하더니.
파아아앗!
이내 길게 도약하며, 단숨에 H 구간의 트랩 라인 사이를 한 번에 파고들었다.
대각선상으로 들어왔을 때 '유일'하게 존재하는 안전한 틈새를 강후가 정확히 캐치하고 들어온 것이다.
이 정도면 누가 머릿속에 설계도를 심어 놨다고 해도 될 정도로 완벽한 진입이었다.
"푸핫!"
타카시가 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괴짜 짓으로 손님을 시험하려는 자신도 우습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괴짜가 짠 게 분명한 공간에서 진지하게 임하고 있는 강후도 웃겼기 때문이다.
남들은 이해할 수 없는 웃음 코드지만, 타카시는 그 자체로 충분한 즐거움과 재미를 느꼈다.
"재밌네, 재밌어. 아차.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군."
영상에 집중하고 있던 타카시가 부지런히 패드를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분신에게 달린 마이크를 쓸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강후와 대화를 나눠야 할 듯했다.
"아흐. 아흑. 흠흠. 큼큼."
한참 입을 다물고 있어 가라앉을 대로 가라앉은 목소리를 다듬었다.
이대로 잘못 말했다가는 첫 만남부터 음 이탈이 작렬하는 대화가 될 수 있기에.
타카시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어떤 녀석인지는 대화를 나눠 봐야 알겠지만, 무척 흥미가 생기는 녀석이었다.
빨리 얘기를 해 보고 싶었다.
* * *
'이놈의 무사 심취는 언제 끝내려나. 볼 때마다 웃기군. 의도적으로 웃음을 유발하는 건가?'
한편 최종 구간에 들어온 강후가 현장에 자리하고 있는 타카시의 분신을 보고는 웃었다.
이 무렵이면 한국에 분신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었는데, 돌아온 모양이었다.
어차피 한국에서 일본으로 오는 것이야 몇 시간 남짓으로 금방 가능한 일인 만큼.
오전에 한국에 있었어도, 오후에 일본에 있는 것이 이상하진 않았다.
타카시의 분신은 전신을 치장하는 붉은 갑주에 악마 가면, 거기에 정체불명의 한문이 적힌 부적을 잔뜩 몸에 붙이고 있었다.
일본풍이라고 하기에는 중국 색깔이 있고, 그렇다고 중국풍이라고 하기엔 기본이 일본색이었다.
총평하자면 끔찍한 혼종이었다.
이래야 타카시답지, 라는 생각이 들지만, 꼭 이래야만 하나 싶은 의문도 같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때.
휘리리릭! 처억!
타카시의 분신이 현란한 움직임을 보이며, 강후의 코앞으로 날이 바짝 선 일본도를 내밀었다.
손가락 반 마디 만큼만 앞으로 더 왔어도 코 어딘가가 예리하게 베였을 그런 거리였다.
하지만 강후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정면으로 보이는 분신의 두 눈을 응시했다.
타카시의 분신이지만, 결국 본신이기도 한 녀석에게 보내는 시선이기도 했다.
분신과 본신의 연결고리는 단순히 기계적인 연결이 아니다.
그랬다면 던전에서 막혔을 것이다. 인간 문명이 만든 전자기기의 활용은 던전에서 불가능하니까.
하지만 분신은 언제 어디서든 타카시와 감각을 공유할 수 있었다. 이것은 영적인 결합이었다.
- 저를 보고 싶다고 했다던데. 이유가 뭐지요, 신강후 씨?
바로 앞에서 거는 말이지만, 마이크 때문에 상당히 거리감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주 잠깐, 강후는 이것이 자신과 타카시 사이의 운명이 갖는 거리감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일종의 잡생각이다. 긴장을 견뎌내기 위해 역설적으로 떠올리는 체계 없는 생각들.
그 안에서 평정심을 찾은 강후가 당당하게 입을 열 준비를 마쳤다.
강후의 콘셉트는 간단했다.
원작에서 에밀리아가 타카시와 가까워진 방법을 벤치마킹할 생각이었다.
그 방법은 '들이대기'다.
우스꽝스럽게도 난 당신이 마음에 들고, 당신도 내가 마음에 들 거라는 자신감을 내비치는 거다.
타카시에게 정석적인 접근은 그의 어긋난 불신을 강하게 자극할 뿐이기에 무의미했다.
이를테면 당신의 실력을 흠모했다거나, 멋지다거나, 혹은 오래전부터 만남을 고대했다거나.
이런 립 서비스 식 멘트는 오히려 타카시에게 독이 되는 것이다.
본래의 성격을 생각하면 쉽사리 운을 떼기 힘든 말이지만.
강후는 지금만큼은 타카시가 원하는 사람이 되었다 생각하고, 그에 맞는 연기를 하기로 했다.
"우리 친구 합시다."
- 뭐라고요?
다짜고짜 내지르는 강후의 반응에 타카시의 분신이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면전에서 이게 무슨 개소리인가 싶은, 딱 그런 반응의 고갯짓이었다.
"서로 영혼 없이 어르고 달래주는 그런 쇼윈도 프렌즈 말고. 땀 흘리며 맞부딪히고 경쟁하며, 성장하는 그런 친구 말입니다."
- 제가 왜?
짧은 반문, 하지만 아주 미세하게 떨리는 그의 목소리에서 당황스러움이 묻어난다.
긍정적인 신호다.
처음부터 속내를 보이기 싫어하는 타카시의 당연한 방어 기제니까.
떨림은 그것까진 완벽하게 컨트롤하지 못해 생긴 타카시의 인간적인 빈틈인 셈이다.
"우리 같은 사람은 원래 늘 외롭잖아요. 안 그래요?"
톤을 좀 더 높였다.
평소의 로우-미들 톤의 목소리에는 맞지 않는 하이톤이지만, 그래서 말에 좀 더 힘이 넘쳤다.
- 당신은 날 몰라요. 뭘 안다고 우리 같은 사람이라고 뭉뚱그려서 말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모르는 건 알아가면 될 문제고. 남이었어도 한 번 얼굴 봤으면 이제는 우리인 거죠."
- 진지하게 개소리를 하네요?
"개소리도 진지하게 하면, 그럴듯한 말이 돼요."
능구렁이처럼 받아치는 강후의 반응에 타카시도 뭐라 반박을 하려다가 이내 입을 닫았다.
그 정도 말로는 작은 내상도 입지 않는다는 듯, 태연하게 말하는 강후의 모습이 신기했다.
한편으로는 이 녀석이 뭘 믿고 이렇게 자신 있게 구는 건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이런 생각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호기심이었다.
타카시 스스로도 모르게 강후의 적극적인 태도에 말려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직선적인 접근을 경험해 본 적이 드문 타카시의 입장에서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열세 개의 별을 제외하면 그는 항상 누군가에게 두려움과 존경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당돌'하게 들이대는 헌터를 본 적이 없었다. 모두가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피어오르는 흥미.
그래서인지 마나 트랩을 통과했을 때부터 달라 보이기 시작했던 강후가 특별해 보이기 시작했다.
갑자기 사람이 달라 보였다고 하면, 혹자는 소설 쓰는 거냐고 손가락질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마음이 그랬다.
필터가 덧씌워진 것처럼, 신강후라는 사람에 대한 호기심이 무한대로 증식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순식간이었고, 타카시의 탐구 의식을 자극하기에는 충분한 울림이었다.
177화 아키야마 타카시 (2)
* * *
- 실력 좀 보죠.
"그럴까요?"
- 아무나 친구로 받아들일 만큼 그렇게 외로운 처지는 아니라서!
힘주어 말하는 타카시의 목소리에서 강후는 역설적으로 그의 외로움을 느꼈다.
원작에서 조형된 타카시의 모습을 알고 있기에,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반응이기도 했다.
타카시가 사람에게 반응하고 매력을 느끼는 감정선은 조금 비틀어서 봐야 한다.
그게 타카시의 매력이자, 동시에 단점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쉽게 다가올 수 없게 만든다.
휙!
타카시의 분신이 바닥에 떨어져 있던 연습용 나무 단검을 던졌다. 그리고 자신 역시 나무로 만든 장검을 들었다.
타카시는 당돌하면서도 자신의 앞에서 주눅 들지 않고, 할 말을 하는 강후가 신기했다.
검색으로 살펴본 바에 따르면, 능력도 제법 있어 보였다. 적어도 지금의 레벨이 어울리진 않는다.
허풍에 입만 터는 놈이면 손절하면 그만이다. 특별하게 엮인 사이가 아니니까.
그래서 부담이 없었다.
강후가 검증을 통과했을 땐 친해지면 그만이고, 아니면 다시 볼 일 없는 것일 뿐이다.
강후 역시, 좋은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단지 말 몇 마디로 타카시의 시험을 통과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이 최적의 시기야.'
확신했다.
여기서 시간이 더 흘러가면, 그때는 열세 개의 별이 다시 타카시에게 가까워지기 시작한다.
몇 개월 안으로 다수의 까다로운 던전 공략에 나서기 때문이다.
그때, 타카시가 공략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 앵무새처럼 재잘대던 '만물패턴론'이 통하는 것이다.
그 이후로는 필요에 따라 열세 개의 별이 타카시를 찾는 일이 많아진다. 스킨십이 많아지는 것.
그래서 그때가 되면, 아무리 강후가 들이대도 타카시가 마음을 돌리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 카운팅은 전방, 후방에 있는 대형 모니터에서 알아서 할 테니까 걱정할 것 없고요. 열 세죠.
타카시의 말이 끝나자마자, 대형 전광판에 붉은색으로 10의 숫자가 새겨지더니.
이내 카운트다운이 시작됐다.
타카시의 뒤로 너무 숫자가 크게 보여서, 쓸데없이 시선을 빼앗기기까지 할 정도였다.
바로 그때.
우웅. 우우웅. 우웅.
훈련장 여기저기에 널브러져 있던 타카시의 분신들이 하나씩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타카시가 직접 운전하는 디테일한 분신과 달리, 조악하게 분신을 닮게 만들어진 분신들이었다.
사령술의 느낌도 나지만, 그렇다고 해서 또 정확하게 사령술로 구분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특히 타카시가 직접 다루는 분신과 본신의 관계는 일종의 운명 공동체와 같았다.
쉽게 생각한다면, 직접 다루는 분신이 본체고 나머지가 단어적 개념의 분신이라고 볼 수 있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쓸 만한 패가 내 손에 있군. 언제 쓸 일이 있을까 싶었는데.'
강후가 첫 시작과 동시에 공격적으로 사용할 패 하나를 머릿속으로 만지작거렸다.
여러 갈래의 공략을 생각했지만 역시 이것만큼 괜찮은 방법은 없을 듯했다.
어느새 1이 되어버린 숫자.
처억. 스윽.
타카시(나 다름없는 분신)와 강후가 각각 공격 자세를 잡았다.
둘은 서로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곁눈질로 전광판의 시간을 살피고 있었다.
그리고 0이 되는 순간.
파앗! 파팟!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탐색을 위한 전략적 후퇴나 지켜보기 따위는 진즉에 내던져 버린 적극적인 시작이었다.
그때.
[셋째, '영혼 파동'을 사용해서 정신적으로 연결된 적 혹은 소환체의 연결 고리를 끊습니다.
마나 250을 소모하면서 정신의 혹사를 유발하지만, 완벽히 적의 상태를 초기화시킬 수 있습니다.]
강후가 먼저 노림수를 꺼내 들었다. 영혼 파동이었다.
황야의 전략가에게서 얻은 세 번째 성좌 특전으로, 이번이 첫 사용이었다.
"...윽!"
시간차로 고통이 찾아들었다.
아이템으로 제법 두른 고통 경감 효과를 가뿐하게 무시할 정도의 극심한 두통이 느껴졌다.
이 정도면 고통 경감이 없는 상태였으면 얼마나 끔찍한 통증이었을 지는 상상도 하기 싫을 정도.
십중팔구 바로 사방이 핑 돌아서 쓰러졌을 것이라 확신했다. 그만큼 두통의 강도가 강했다.
프스스슷.
동시에 타카시의 '하찮은' 분신들이 바람에 휘말린 볏짚처럼, 힘없이 바닥에 얼굴을 처박았다.
영혼 파동에 걸려든 것은 타카시의 제1 분신도 마찬가지였다.
이 녀석 역시도 타카시와 정신적으로 연결된 구성체인 만큼,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 ...와!
마이크 너머에서 당황의 감정이 잔뜩 섞인 탄성이 터져 나왔다.
타카시는 정신의 연결고리를 끊는 공격에 당황한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누가 봐도 자신은 그런 공격이 딱 약점으로 작용할 특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1 분신과의 링크가 끊기기 무섭게 바로 연결했고, 공백은 아주 짧았다.
바짝 달라붙으려던 강후가 즉각 대응하는 타카시의 반응을 보고는 바로 멈췄을 정도니까.
다만 타카시가 놀란 것은 암살자로 알려진 강후가 이런 스킬을 썼다는 사실이었다.
정신적 연결 고리를 끊는 것은 당연히 정신계 스킬이다. 보통 마법 쪽으로 특화된 헌터가 쓴다.
암살자에게서 나올 스킬의 성질이 아니었다. 교집합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 제법....
타카시가 강후의 시도에 나름의 감탄을 하며 멘트를 이어가려 할 즈음.
강후가 한 번 더 영혼 파동을 썼다. 이번에는 동시에 전광비도까지 연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가까이 접근하는 것은 리스크가 있지만, 멀리서 견제하는 것은 일방적이니까.
그리고 앞서 탐색으로 영혼 파동이 아주 잠깐이지만, 분명한 블랙 아웃을 만든다는 것도 알았다.
"크윽!"
강후가 신음을 토했다.
두 번까진 어찌저찌 쓰겠는데, 세 번은 못 쓸 스킬이다.
마나는 두 번째 문제고, 고통의 강도가 차원이 달랐다.
스킬을 활용하다가 자신이 오히려 고통에 블랙 아웃을 경험할 것 같을 정도였다.
잠깐이지만 아찔하면서 시야가 흩어지는 경험을 한 것이다. 좋은 조짐이 아니다.
2차 영혼 파동에 휘말린 타카시가 비틀거린 사이, 전광비도로 날아든 단검이 타카시를 타격했다.
아슬아슬하게 검을 사선으로 비틀어 막긴 했지만, 정말 막기만 한 수준이었다.
그래서 전광비도에 강후가 실어 보낸 '밀쳐내기'에 휘말리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 억!
타카시의 몸이 포물선을 그리며 쭉 날아갔다. 전혀 대비하지 못한 밀쳐내기가 만든 파괴력이었다.
더 잴 것도 없이, 강후가 연달아 도약과 가속을 시전하며 타카시에게 붙었다.
이런 실력자에게는 똑같은 기회가 두 번 오는 일은 절대 없다. 한 번 온 것도 많은 거다.
그렇기에 지금이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고, 상황은 상당히 좋아 보였다.
그때.
스치이잉!
몸이 날아가는 와중에도 장검을 꽉 움켜쥐고 있던 타카시가 지면 위로 장검을 그었다.
마치 의도적으로 불꽃을 일으키려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츠츳!
이윽고 만들어진 불꽃에 뒤섞인 검붉은 빛의 무언가가 강후를 향해 매섭게 덮쳐들었다.
'젠장.'
역시 레벨과 실력은 허투루 쌓은 것이 아니다.
제대로 한 방을 먹은 와중에도 타카시는 바로 반격 페이즈에 들어가 있었다.
모든 경우의 수를 생각하고 전투에 임하는 자신과 놀라울 정도로 비슷한 성향이었다.
순식간에 빛에 휘말렸다.
애초에 타카시를 쫓겠다고 몸이 완전히 앞에 쏠려 있었던 상황이라 피할 수 없었다.
그래서 뒤집어썼다.
그 순간, 강후는 실명을 유발하는 스킬임을 체감했다. 앞이 안 보였기 때문이다.
[공명의 시야]
대응은 바로 이뤄졌다.
초당 0.5의 마나를 실명 상태일 경우에만 자동으로 소모하는 공명의 시야 스킬.
앞서 썼던 영혼 파동처럼 언제 쓸 일이 생기나 싶었는데, 타카시 덕분에 스타트를 끊게 됐다.
'잘 보이네.'
실명 상태가 유지되는 동안에는 흑백으로 세상을 본다는 점이 아쉽기는 하지만.
실명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다는 점에서 스킬의 가치는 매우 컸다.
새삼 스킬 강탈에 공헌해 준 글로리아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 정도다.
강후가 실명에 걸린 듯한 손짓을 하며 비틀거리는 모습을 보였다. 기만이었다.
파앗!
그러자 이때다 싶었는지 타카시가 장검으로 만들어낸 검기를 강후에게 쏘아 보냈다.
연습용 목검 기반이기에 날카롭지는 않지만, 둔하게 후려치기에는 충분한 검기였다.
그러나 공명의 시야 덕분에 경로를 훤히 볼 수 있는 강후에게는 의미 없는 공격이었다.
타탓.
강후는 가볍고 경쾌한 움직임으로 검기의 경로를 피해냈다.
타카시는 눈을 의심했다.
아직 강후에게 걸린 실명 상태가 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디버프에 유지되고 있었다.
그런데 강후는 경로를 훤히 들여다본 것처럼 너무 쉽게 공격을 피했다.
예측이라고 하기에는 딱 필요한 만큼으로만 여유롭게 움직인 깔끔한 회피였다.
- 허허.
타카시가 허탈함이 묻어나는 웃음을 지었다. 잠깐 사이에 강후에게 두 번이나 놀랐다.
첫째는 분신과의 링크를 강제로 끊어내는 스킬이 있음에 놀랐고.
둘째는 실명 상태를 가뿐히 극복할 수 있다는 대응수가 있음에 놀랐다.
극단적인 공격에 치중하는 탓에 자신에게 걸리는 디버프나 방해에는 약할 수밖에 없는 암살자.
그런 암살자의 특성이자 일종의 '고질병'이 강후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었다.
그리고.
- 슬슬 열 받네요?
강후가 원했던 반응이 타카시에게서 나왔다. 약이 오르는 모양이다.
- 잠깐만. 연초 하나만 물고 다시.
이어서 기대했던 두 번째 반응도 나왔다.
연초라는 표현을 쓰지만,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담배는 아니다.
타카시는 정체불명의 뭔가를 태우는데, 정신 집중이 꼭 필요할 때 쓰는 일종의 필살기였다.
원작에선 마약과 연관된 것이라는 썰만 있을 뿐, 입증된 바는 없다.
어쨌든 그것을 입에 물었다는 것은 지금 상황에 어느 때보다 진심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됐다.
들고 있는 연습 무기는 위협적이지 않지만, 서로를 대하는 자세는 어느 때보다도 위협적인.
아주 치열한 난전이었다.
* * *
교전이 계속될수록, 강후는 점점 타카시가 힘든 상대임을 실감하게 됐다.
상대하는 대상이 본체가 아닌 분신이라는 탓에 성좌 스캔이 전혀 안 된다는 점이 답답했다.
그래서 녀석이 특화된 분야라던가 목적성을 한 번에 꿰뚫어 보기가 힘들었다.
원작에서도 디테일하게 성좌 설정을 설명하지 않았기에, 짐작해 볼 요소도 부족했다.
물론 애초에 서로의 레벨 차이가 상당하므로, 무너지지 않고 잘 버티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점을 줘도 되는 상황이기는 했다.
갈수록 교전이 힘들어지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패턴을 분석당하고 있어.'
타카시가 점점 자신의 움직임을 '학습'하고 '연구'하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상대의 패턴을 읽는 노림수 플레이는 강후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타카시도 할 줄 알았다.
오히려 더 집요했다.
전투에 변수를 주기 위해 강후가 분신술, 환영술과 연계하면서 그림자 걸음을 적극적으로 썼다.
하지만 어디서 읽혔는지, 계속 본신의 위치가 탄로 났다. 눈속임이 전혀 안 통했다.
'습관이 있는 건가?'
스스로에게 질문해 봤지만, 강후는 인지한 바가 없었다.
스스로 인지할 수 없다면 정말 미세한 습관이라는 얘기다. 겉으로는 거의 티도 나지 않는 습관.
그것이 타카시에게는 보이는 모양이었다.
그때.
- 하아앗!
타카시의 일갈과 함께 그가 힘껏 쳐올린 목검이 후방에서 접근하던 강후의 얼굴 앞을 갈랐다.
찰나의 순간.
사아아악...!
목검이 만들어낸 최대치의 검기에 휘말린 강후의 앞쪽 머리카락이 시원하게 잘려 나갔다.
실전이었으면, 그리고 몸이 조금만 더 앞으로 쏠렸으면 얼굴 앞면이 사라졌을 일격이었다.
"망할."
오늘 열심히 일하는 강후의 미간에 또 한 번 주름이 잡혔다.
역시 타카시는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178화 아키야마 타카시 (3)
- 이쯤이면 됐어요, 그만하죠.
"예?"
- 지금 서로 눈높이가 맞는 상태에서 싸우는 게 아니잖아요. 실력은 충분히 봤단 얘기에요.
타카시가 무덤덤한 목소리로 그만하자는 의사를 밝혔다.
강후의 입장에서는 이제 막 열기가 고조되려는 찰나인데, 타카시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었다.
말뜻은 충분히 이해했다.
지금까지 결과가 나오지 않은 것만으로 판단은 끝난 거겠지.
아무리 낮게 잡아도 지금 타카시의 레벨은 최소 550은 넘는다. 그 이하일 리는 없다.
한데 초반에 영혼 파동을 이용해 공세로 몰아붙이며, 위험한 상황을 연출하기도 했던 강후다.
그것으로 나름대로의 계산이 끝난 것일 터다. 꼭 끝장을 봐야 판단이 되는 것은 아니다.
- 근데 그거 알아요?
"어떤 것 말입니까?"
- 그림자 관련 스킬 쓸 때 말이에요. 쿠세가 있어요. 그거 안 고치면 힘들 거예요.
"역시...."
쿠세.
습관을 말하는 것이다.
계속 그림자 걸음 스킬의 활용에서 본체의 위치를 간파당했었던 강후였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다.
스스로는 절대 알지 못하는 습관이 어딘가에서 묻어나는 모양이다.
강후가 슬쩍 물었다.
"알려 줄 수 있습니까?"
- 날로 먹겠다는 건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니라는 점을 확실히 강조해 두죠.
타카시의 반응은 단칼이었다.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타카시다운 반응이 나왔다.
그는 불로소득, 무임승차 같은 단어를 정말 싫어한다. 그런 인간 군상을 혐오하기도 하고.
강후도 타카시에게 대답을 들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건넨 말은 아니었다. 찔러나 본 것이다.
다만 완벽주의의 성격을 가졌다 보니, 자꾸 신경이 쓰였다. 도대체 어떤 부분에서 읽힌 걸까?
'재수 없으면 내가 말리겠는데.'
강후가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타카시가 자꾸 자신을 생각하게 만들어 보려고 했는데, 이래서는 피차 똑같아질 판이었다.
일부러 미해결 과제를 만듦으로써, 강후가 타카시에 대한 생각을 가볍게 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물론 강후도 그만큼 타카시에게 생각의 울림을 준 것은 사실이었다.
타카시가 별다른 반응 없이 연습 전투를 종료한 것도 강후의 실력을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미심쩍은 구석이나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었으면, 테스트는 지금보다 훨씬 더 길어졌을 것이다.
- 아직도 왜 나와 가깝게 지내고 싶은 건지는 의문이지만. 가벼운 연락 정도는 괜찮겠네요.
타카시가 무심한 말투로 말을 쓱 내뱉고는 분신의 몸에서 꺼낸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꼬깃한 상태의 종이라서 웬 쓰레기인가 했는데, 타카시의 헌터그램 보안 계정명이 적혀 있었다.
대외적으로 활동하는 계정 외에 개인 DM용의 계정이 별도로 있는 듯했다.
타카시가 말을 이었다.
- DM해요. 괜히 중간 다리 끼지 말자고요. 피차 보는 눈이 많으면 피곤하니까.
"좋은 생각입니다."
종이를 넘겨받은 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리코우 길드의 시선이 싫은 것은 아니다. 사적인 만남에 길드를 낄 필요가 없을 뿐.
- 나가 봐요. 이제 훈련할 시간이니까.
"짧았지만 즐거웠습니다."
- 다음에 날 만날 때는 쿠세에 대한 해답을 조금은 찾았길 바라죠. 쉽지 않겠지만?
"그때도 괜찮으면 한 수 가르쳐 주시죠. 저도 전력으로 타카시 님을 분쇄해 보겠습니다."
- 불가능한 목표는 함부로 입에 담는 거 아니에요. 현실적으로 사는 게 중요하지 않겠어요?
"훗."
강후는 듣기에 따라서 공격적으로 들릴 수도 있을 타카시의 말을 뒤로한 채, 폐공장을 나섰다.
타카시의 말은 있는 그대로, 문장 그대로 해석하면 피곤해진다.
그가 자신과 말을 나눴는가, 아닌가만 판단하면 된다. 전자면 관심 있다는 거고, 후자면 아니다.
그래서 주절주절 말을 계속 덧붙이는 타카시의 반응은 강후의 기준에서는 100점이었다.
안면은 확실히 텄다.
아마 다음 만남을 기약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괜히 속만 긁지 않는다면.
그렇게 열세 개의 별의 구성원 중, 한 남자의 마음에 첫 번째 파장을 일으켰다.
강후에게는 어느 때보다도 가장 중요한 첫걸음이었다. 균열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 * *
"삼촌, 왜 강후 형님이 타카시에게 관심을 가진 걸까요? 평판 좋은 네임드는 더 많잖아요?"
"아무 이유 없이 만나고 싶어 했을 것 같지는 않다. 다만 네 말대로 타카시의 평판이 좋진 않지."
"그렇다고 길드에 소속된 것도 아니잖아요? 개인 소유의 던전이 많기는 하지만...."
그 무렵, 안영호는 강후를 기다리며 외삼촌 스즈키 후미야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주제는 역시 강후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강후가 적극적으로 타카시를 만나고자 했던 것이 이해가 잘되지 않는 모양.
어지간해선 속내를 잘 읽는 후미야도 이번만큼은 강후의 생각을 짐작할 수 없었다.
물론 타카시가 대외적인 이미지가 안 좋아서 그렇지, 능력이 없는 헌터는 아니다.
실제로 그가 다루는 분신의 능력은 때때로 인체의 한계를 아득히 초월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분신이라는 존재 자체가 인체의 역학을 무시하는 결괏값을 낼 때가 종종 있기 때문에.
상대하는 입장에서는 계산이 어그러질 일이 많이 생기는 것이다. 즉, 변수가 많았다.
"됐고. 그 부분은 더 이상 생각하지 말고, 강후 님을 최대한 깍듯하게 모시도록 해."
"알겠어요, 삼촌."
후미야가 계속 꼬리를 무는 대화 주제를 잘라냈다. 3자가 얘기해 봤자 알 수 없을 속내다.
어차피 타카시는 리코우 길드의 옵저버일 뿐, 길드의 소속 구성원은 아니다.
타카시와 강후의 관계에 호기심을 가질 순 있어도, 그 이상으로 발전시킬 필요는 없었다.
"한국의 정화 길드는 간부 중심의 구조라 외부 유망주 유입이 더딘 편이지. 빈틈이 많아."
"삼촌은 강후 형님도 리코우 길드에 영입할 수 있다고 보시는 거죠?"
"얼마든지. 더군다나 우리는 해외에서 데려온 길드원이 많잖아? 확장성에서 좋은 평가를 받지."
"제 역량을 총동원해서, 강후 형님의 모든 것을 서포트할게요."
"그렇다고 격을 잃지는 말고."
"명심하겠습니다!"
그러는 사이, 폐공장 밖으로 나온 강후가 두 사람 사이로 합류했다.
후미야와 안영호는 별다른 질문 없이, 바로 강후를 리무진으로 안내했다.
타카시와 있었던 은밀한 만남에 대해 이것저것 묻는 것은 분명 예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강후도 그런 두 사람의 배려를 읽을 수 있었고, 그 덕분에 편하게 리무진에 탈 수 있었다.
리코우 길드의 핵심 거점인 리코우 타워로 향하는 동안.
강후는 독립성이 보장된 자신의 자리에서 생각에 잠겨 있었다.
미뤄 두려고 할수록, 더 집요하게 떠오르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림자 걸음이 내 공격 레퍼토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엄청나게 크지. 근데 그것을 읽혔어.'
이 세계에 빙의한 이후, 처음으로 깊게 느껴보는 자신의 불완전성에 대한 고찰이었다.
타고난 암살자적 재능.
최고의 능력을 가진 성좌.
그 하모니 속에서 지금까지 자신은 완벽하게, 그리고 아주 멋지게 성장해 왔다.
한데 완전무결한 하나의 그림과 같다고 생각했던 자신의 모습에 작은 균열이 생겼다.
그것이 이번에 타카시가 말해 준 습관이었다.
그와의 첫 만남이 '모의 전투'였기에 오늘 일이 해프닝으로 넘어간 것일 뿐.
만약 타카시를 전장에서 만났다면? 오늘이 병풍 뒤에서 향냄새를 맡는 날이었을 것이다.
아쉬우면서 한편으로는 기대되는 아이러니한 감정이 교차했다.
불완전함은 아쉽지만.
채워 넣고 성장할 부분이 있다는 사실에서는 잔뜩 기대하게 되는 것이다.
이래저래 타카시 생각이 자꾸만 났다. 그도 같은 생각이었으면 좋겠는데 과연 그럴지는 모를 일.
타카시와의 만남이 그에게나 강후에게나, 모두 의미 있는 전환점이 되고 있었다.
* * *
이후 리코우 타워에 도착한 강후는 후미야의 안내를 따라, 최종적으로 던전 공략 점검을 끝냈다.
모든 던전은 강후가 요청한 대로 언데드 몬스터 타입의 던전이었고, 수준도 딱 맞았다.
강후는 리코우 길드에서 지원해 주려고 했던 팀은 거절했다. 어지간해선 솔플을 하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다.
다만 자신이 외부인이고, 현재 리코우 길드가 토우시 길드와 전면전 중인 상태이니만큼.
자신에게 배정할 역량 전체를 던전 보안에 집중해 달라고 요청했다.
아무리 좋은 던전을 공략한다고 한들, 뒤치기를 당하면 죽기 딱 좋은 그림이 될 테니까.
그리고 힐러가 필수인 던전 딱 한 곳만 안영호와 함께 가기로 했다.
안영호의 실력을 한번 보고 싶기도 했고, 후미야의 부탁도 있었기 때문이다. 겸사겸사였다.
던전 공략은 내일부터 강후 혼자서 진행할 예정이었다.
얼마나 암흑기 파밍이 가능할지 기대가 됐다.
던전 하나마다 암흑기 15 정도만 끌어올릴 수 있어도 차고 넘치게 남는 장사다.
그 이후.
후미야는 조카이지만 길드 내의 핵심적인 비즈니스에 관여할 자격이 없는 안영호를 밖으로 물렸다.
그리고 강후에게 별도의 티타임을 요청했다. 긴밀히 나누고 싶은 말이 있다는 시그널이었다.
짐작 가는 바는 있었지만, 어떤 대답을 할지와 무관하게 후미야와 대화를 나눠 보고 싶긴 했다.
리코우 길드는 관서권을 꽉 쥐고 있는 길드로 앞으로도 계속 그 위치를 공고히 유지할 길드다.
물론 그들이 일본 전체의 패권을 움켜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알짜배기가 많은 관서권 1위 길드라는 것만으로도, 그들이 갖는 매력과 미래 가치는 컸다.
쪼르르르.
찻잔에 고소한 차가 채워지고.
한결 포근해진 분위기에서 대화가 오갔다. 첫 만남에 어색했었던 느낌도 제법 많이 걷혀있었다.
후미야가 먼저 운을 뗐다.
"이번에 일본에 큰 발걸음 하셨습니다. 영호가 그날의 일을 몇 번이나 얘기했는지 모릅니다."
"저로서는 당연히 도와야 한다고 생각해서 도왔을 뿐인데. 영호가 많이 생각을 해 주더군요."
"제 조카의 은인이십니다. 더 나아가 저와 제 누나의 은인이기도 하지요."
"저로서도 그게 인연이 되어서 이렇게 일본에 오게 됐으니, 감회가 새롭네요."
진심이었다.
인연이 가지는 나비효과를 새삼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만약 안영호와의 연결고리가 없었다면, 일본에 왔어도 행보가 전혀 달라졌을 것이다.
궂은 용병 의뢰 쪽으로 기웃거렸을 테고, 어떤 험한 일에 내몰렸을지 모른다.
일본도 한국과 크게 다를 것이 없어서, 치안 부재인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큐슈 쪽은 신(新) 전국시대라는 말이 돌 정도로 수많은 길드가 각축전을 벌이고 있었다.
거대한 지옥도라고 표현해도 무방했다. 워낙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곳이라 용병 수요가 많았다.
하지만 그런 쪽으로 일본에 인연을 만든 것이 아니라, 안정화된 길드의 귀한 손님으로 온 상황.
그러니 인연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 느낄 수밖에 없었다.
정유리나 박동재를 생각해도 똑같이 느끼는 부분이다. 그들 덕분에 바뀐 것이 정말 많았다.
그때.
직전보다 꽤 많은 양의 차를 한 모금에 들이킨 후미야가 슬쩍 강후의 눈빛을 살폈다.
중요한 말을 하려는 듯한 눈빛. 강후가 지그시 그를 바라보자, 후미야가 바로 본론을 꺼냈다.
"혹시 해외 활동 한정으로 소속 길드를 둘 생각은 없으십니까?"
179화 신의 바람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