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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화. 아카데미로 (6)

얼굴은 몰라도 저 어설프기 그지없는 눈빛은 또렷이 기억했다.

서로가 서로에게 느끼는 낯설지 않은 기운.

그 또한 이미 들켰다는 것을 자각한 듯, 이 상황을 부정하려 들진 않았다.

"자, 자리를 옮겨도 되겠습니까?"

보아하니 딸아이로 보이는 소녀의 눈치를 보는 듯했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니, 남성이 소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샐리. 아빠가 지금 여기 있는 분이랑 얘기를 나눠야 할 것 같아, 그러니 안에서 좀 기다려 주겠니?"

"응 알겠어!"

소녀는 환한 미소를 보이며 안으로 들어갔다.

딸아이를 보낸 남성은 경직된 얼굴로 나를 안내했다.

"이, 이쪽으로 오시죠...."

그가 안내한 곳은 집 뒤쪽, 용도를 알 수 없는 폐목들이 놓인 공터였다.

나를 보고 있진 않지만, 저 근심 어린 뒤통수에선, 아직 가시지 않은 살기가 아른거리고 있었다.

"영주의 사람이십니까...?"

몸을 돌아선 남성이 불안에 찬 시선으로 물었다.

"그랬다면 내가 어젯밤 널 진즉에 잡아 처넣었겠지."

나는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조금 전 아이는 딸? 아니면 손녀?"

"딸입니다...."

"몸이 좀 불편해 보이던데, 원래부터 그랬던 거야?"

"...."

남성은 대답 대신 위협적인 살기를 풍기며 말했다.

"그, 그냥 어제처럼 못 본 척 지나가 주실 순 없는 겁니까?"

실로 같잖은 모습에 피식하고 웃음이 나왔다.

"착각하지 마. 지금 주도권을 진 건 나야. 널 산 채로 잡아다 넘길 수 있고, 귀찮으면 그냥 목만 베어갈 수도 있어."

그의 눈은 여전히 경계심으로 가득했다.

"내 말이 말 같지 않은가 보네? 할 수 있으면 한 번 해봐. 허리춤에 몽둥이는 똥 닦을 때 쓰려고 꽂아둔 거야?"

"...!"

겉만 감췄다고 해서 다가 아니거늘, 흉기를 숨기고 있었다는 건 이미 처음 봤을 때부터 알고 있었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남성은, 곧 숨겨두었던 몽둥이를 꺼내 바닥으로 던졌다.

자신에게 선택권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무엇을 원하십니까?"

"일단 그놈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

남성의 시선이 이내 한 방향으로 향했다.

시선 끝, 공터 안쪽에는 지어진 지 얼마 안 된 것으로 보이는 작은 오두막이 자리하고 있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겼다.

-끼익

1평은 겨우 될 법한 뒷간 정도의 크기였지만, 바닥엔 어울리지 않을 만큼 깔끔한 카펫이 깔려 있었다.

자연스럽게 카펫을 치우니, 밑으로 내려갈 수 있는 계단이 등장하였다.

누가 보면 비밀기지라도 있는 줄 알겠군.

좁디좁은 계단을 따라 내려가니, 깜깜한 어둠의 공간이 반겨주었다. 이에 손 위에 마나를 모아 점화 마법을 시전했다.

-화악!

순식간에 밝아진 주위.

들어왔을 때랑 별반 다를 것 없는 협소한 지하 공간이었다.

"...!"

눈앞에 대뜸 나타난 육중한 몸뚱이에 하마터면 불로 지질 뻔했다.

"누, 누구야!"

몸뚱이의 주인 또한 인기척에 놀란 듯 괴성을 질렀다.

인상을 절로 찌푸리게 만드는 걸걸한 목소리가 아닐 수 없었다.

머리부터 아래로 찬찬히 훑어보다가, 머리카락 없는 두상을 보고선 바로 알 수 있었다.

실종되었다던 파콰론 영주였다.

"이 녀석! 감히 내가 누군 줄 알고 이런 험한 꼴을 당하게 해? 나 사페른의 영주 파콰론이야! 제국의 대가 네펠리스 가문의 일원인 파콰론 네펠리스라고! 여기서 나가기만 하면 네놈의 생살을 하나하나 바른 뒤, 뼈를 갈아 사육장 가축들에게...!"

사슬로 구속된 손과 발.

앞을 볼 수 없게 안대로 가려진 시야.

뭔가 고문을 당해 빌고 있어도 시원찮을 판에, 귀 열고 못 들어 줄 심각한 욕설들을 내뱉고 있었다.

침이 튈 염려가 있어 일단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툭

그러자 모퉁이에 있던, 작은 탁상과 부딪히게 되었다.

탁상 위엔 꽤나 낯익은 검은 가면이 자리하고 있었다.

"뭔가 했더니 나무로 깎아 만든 가면이었네? 꽤 그럴싸하게 만들었어."

남성은 묵묵부답이었다.

가면 옆으론 적갈색의 주먹만 한 돌이 놓여 있었다.

주위엔 미세한 마나의 기운이 아른거리고 있었다.

"점화석이구나? 딴 건 몰라도 검은 연기는 어떻게 구현했을까 싶었는데, 기사 놈들은 이런 어설픈 속임수에 넘어간 건가?"

소형 아티팩트 점화석.

마법을 사용하지 않고도 불을 생성해낼 수 있는 일종의 마나 부싯돌이었다.

장거리 상인들의 애용품일 정도로 쉽게 구할 수 있는 아티팩트지만, 설마하니 이런 저급한 물건으로 미스트를 흉내 냈을 줄은 몰랐다.

"그, 그냥 운이 좋았던 거라 생각합니다...."

남성은 고개를 돌리며 답했다.

"맞아, 운이 좋았던 거야. 벨리아스나 황성 근처 다른 도시였으면 꿈도 못 꿔. 이런 저급한 도시니까 가능했던 거지."

좀 더 조사를 해봐야 알겠지만, 이런 등신 같은 기사들이 지키고 있는 도시가 제대로 돌아갈 리는 만무했다.

"이런 세상에 존재해선 안 될 해충 같은 놈들! 검은 안개의 추종자들이라 해서 내가 무서워할 것 같냐! 내가 마음만 먹으면 네놈들 일망타진하는 거 일도 아니야!"

하물며 저런 한심한 영주까지 있는데 어련하실까?

머리카락만 없는 게 아니라 사고력 또한 없는 것 같았다.

"정작 일만 저질렀지 길들이진 못했네? 여태 뭐한 거야?"

"예?"

"묶어놓고 감상이나 하려고 납치한 건 아니잖아? 고문하려 했던 거 아니야?"

"고, 고문?!"

고문이란 말에 파콰론은 더욱더 발광했다.

애써 무시하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마, 맞습니다! 하지만 아직 마음의 준비를 하지 못한 터라... 게다가 밖엔 기사들도 돌아다니고 있고...."

되지도 않는 나약한 망설임에 이제는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나는 머릿속으로 짐작했던 가정을 그대로 입 밖으로 내뱉어 보았다.

"네 딸의 다리... 이놈이랑 관련 있는 거지?"

남성은 부정하지 않았다.

"어, 어찌 아셨습니까?"

"그냥 그래 보였어."

나는 내색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소중한 자식이 이런 머리 없는 돼지 때문에 그리됐는데 눈 안 돌아갈 부모가 있을까? 그래서 독하게 마음먹고, 철저하게 계획 세워 영주를 납치하는 데 까진 성공했는데, 막상 다음 단계로 넘어가려니까 망설여진 거지?"

남성은 억울하다는 듯이 소리쳤다.

"그런다고 해서 제 딸의 다리가 돌아오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이런 행위도 사실 아무런 의미가 없는데...."

남성은 눈물을 머금으며 속에 담아두었던 이야기를 시작했다.

"전 이곳 사페른의 전 영주를 보필했었던 시종이었습니다. 그분의 곁에 직접 붙어 다니며, 도시 운영과 관련된 사무 업무를 담당했었죠."

설마하니 그 1년 전 병사했다던 전 영주의 사람이었을 줄은 몰랐다.

"전 영주님은 굉장히 욕심 없는 분이셨습니다. 개인의 사리사욕을 채우고자 하는 마음 없이, 오로지 도시의 번영만을 생각하실 정도로요. 허나 그분은 안타깝게도 고질적인 지병으로 인해 일찍 세상을 떠나고 마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자식도, 형제도 없으셨고 영주 직을 물려줄 만한 다른 후계자를 따로 지목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이에 황성에서 새로운 후계자를 보냈는데, 그게 바로 이 파콰론 영주였습니다."

딱 봐도 현 황후 세력인 네펠리스 가의 입김이 작용했음을 알 수 있었다.

"허나 이 자는 제가 모셨던 주인과는 정말 반대되는 놈이었습니다. 도시의 안위는커녕, 자기 배만 불리기에 바빴고, 더군다나 가문에 자금을 보낸다는 명목으로 영지민들에게 막대한 세를 부과한 데다, 그마저도 일부 빼돌리기까지 했습니다."

더 볼 것도 없이 그냥 부패 영주란 소리였다.

사실 저 정도만 돼도 진짜 미스트들이 움직일 여지는 충분했다.

"전 그런 탐욕적인 모습에 괴리감을 느꼈고, 그 즉시 일을 그만두고 나왔습니다. 어차피 그런 부정부패를 제가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냥 안 보는 게 편하다고 생각했죠."

"왜? 네가 바꿔볼 생각은 없었어?"

"전 힘없는 소시민에 불과합니다. 게다가 저 부패 영주의 뒤엔 네펠리스 가문이란 엄청난 세력가가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어설프게 나서봤자 제 명만 재촉할 뿐이겠죠."

그에겐 사실상 나름 분수에 맞는 최선의 대처였다.

"한데 불행은 정말 난데없는 곳에서 터지고 말았습니다. 신도 정말 무심하시지! 그 어린 것이 무슨 죄가 있다고! 아직 다 자라지도 않은 순수한 아이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고작 자기 앞길을 막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남성의 얼굴에서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순방 중이던 자신의 마차를 막았다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제 아이는 그저 길거리에서 놀다가 불행하게 말려들었을 뿐인데, 이 자식은 고작 이런 이유로 아이의 한쪽 다리를 부러트렸습니다! 평생 거리를 돌아다니지 말라는 의미로요!!"

심장이 찔리는 것보다 더 쓰라린 고통이 바로 자식의 아픔이라 했다.

자식이 있던 적은 없어, 그다지 공감할 순 없었지만 그래도 영주를 납치한 경위에 대해선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 자를 납치한 겁니다! 다른 건 몰라도 제 딸이 겪었을 아픔을 고스란히 되돌려 주기 위해! 하지만 그랬다간... 저도 이 인간 같지도 않은 말종과 같은 놈이 되지 않습니까!"

안쓰럽다고 생각하는가?

내가 볼 땐 나약하기 그지없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되갚아주는 것이 세상의 이치거늘, 고작 인간의 존엄성 따위를 지킨답시고, 복수를 망설이고 있다.

애초에 인간이란 종족은 그렇게 존엄성을 운운할 만큼 선한 존재도 아닌데 말이다.

모든 사정을 들은 나는 그에게 나직이 말했다.

"다를 거 없어."

"예?"

"시작이라는 선을 넘는 게 어려울 뿐이야. 그런다고 해서 네가 인간이 아니게 되진 않아."

나란 놈도 인간으로 당당히 세상에 존재하고 있으니까.

"게다가 이놈은 애초에 인간 취급도 못 받을 놈이잖아?"

세금을 빼돌리는 부패 영주에, 어린아이의 다리를 부러트리는 파탄 난 인성이라....

진짜 미스트가 움직여도 이상하지 않을 일이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그를 뒤로 한 채, 나는 구석에 놓여있던 묵직한 나무 막대기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머지않아 지하 전체에 끔찍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퍽

"끄아아악!"

화들짝 놀란 남성이 다급히 소리쳤다.

"뭐, 뭐 하시는 겁니까?"

"네가 못 했던 걸 대신 해주는 것뿐이야."

한 번, 두 번, 몽둥이가 휘둘러질 때마다 밀실 전체가 크게 울렸다.

특히 녀석의 왼쪽 발목을 집중적으로 가격했다.

줄곧 욕설만을 내뱉던 파콰론의 입에선 이제는 고통의 비명만이 반복되고 있었다.

"사, 살려주세요! 뭐, 뭐든 시키는 대로 다 하겠습니다! 제발 살려만 주시면...!"

얼마 때리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한다.

이게 인간의 추악한 본성이지.

아픔을 겪고 나서야 자신의 주제를 파악하고 만다.

근데 이 정도로 끝낼 거였으면 시작도 안 했어!

-퍽!

"아아악!"

나의 매질은 10분 정도 더 지속한 후에야 멈추게 되었다.

징벌을 받은 파콰론 영주는 이미 기절했는지, 눈동자가 안 보였다.

"대체 왜 이런 짓을...?"

주저앉은 남성의 앞으로 몽둥이를 던지며 말했다.

"잔인하다고 생각해? 네 딸이 겪은 고통에 비하면 이 정돈 축에도 못 낄 텐데?"

"하, 하지만...."

"어설프게 끝낼 거였으면, 시작조차 하지 말았어야지. 미련하게 굴어봐야 결국 너한테 도움 되는 건 아무것도 없어."

남성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우두커니 앉은 그를 놔둔 채 계단을 올랐다.

사람들은 말한다.

선을 넘는다는 건 돌아 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것과 같다고.

허나 반대로 나는 묻고 싶다.

굳이 돌아올 필요가 있는가?

처음 시작이 어려울 뿐, 시작과 함께 선을 넘는다면 어디로 이어져 있는지 모를 끝없이 평원이 펼쳐져 있다.

내가 걸어온 길이 용인될 수 없고, 이해받을 수 없다는 걸 안다.

애초에 그런 걸 이해받았다 해서 뭐가 달라지겠는가?

그저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위해 살 뿐인데.

그렇게 볼일을 마치고, 지상으로 올라가려는 순간,

황급히 따라 올라온 남성이 나를 붙잡으며 또 한 번 물었다.

"당신은 대체 누구십니까...?"

3초 정도를 고민하다가 답을 내었다.

"그냥 경험 좀 많은 사람...."

현재의 내 외관과는 참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나는 그 길로 사페른을 벗어나, 다시 루웬으로 가는 여정에 올랐다.

(다음 편에서 계속)

제33화. 로열 아카데미 (1)

사페른을 떠난 지도 벌써 열흘.

간간이 들은 소식에 의하면 사페른의 영주는 내가 도시를 떠났던 그다음 날, 저잣거리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물론 온전한 상태로 발견된 것은 아니었다.

온몸의 뼈가 수십 개는 부러져 있는 데다, 한쪽 다리는 아예 회생이 불가능할 정도로 뭉개져 있었다나.

어찌 된 것인지 입이 닳도록 물어도 그저 미친 사람마냥 살려달라는 말만 반복했고, 급기야 악마가 쫓아올 거라 발광하며, 도망치듯 사페른을 벗어났다는데....

죽는 것보다 더 잔혹한 죽기 직전의 고통을 만끽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도 미련하게 풀어주는 짓은 안 했나 보군.

뭐 이제부터는 그 부녀가 알아서 할 일이겠지.

나는 청승맞은 하품을 하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평화롭네.

앞선 열흘의 여정 중 가장 평화로운 순간이 아닌가 싶다.

가는 도시마다 호위병 필요 없냐며 들러붙는 조무래기들, 조금 으슥한 곳을 지난다 싶으면 여지없이 튀어나오는 도적들, 야영 좀 할까 하고 마차를 멈추면 냄새를 맡고 달려오는 짐승들까지.

어쩜 그렇게 귀신같이 내 여정을 방해하려 드는지 모르겠다.

대부분 이 세상에서 살기를 싫어하는 것 같아, 손수 저세상으로 보내주었다.

"도련님, 루웬이 보입니다!"

흩날리는 풀잎들 너머, 이어진 길목 끝자락에 위치한 백색의 도시가 모습을 드러냈다.

내 여정의 최종 목적지이자, 그 이름도 찬란한 화합의 도시 루웬이었다.

보통 국가와 국가가 인접한 경계지역은 언제 분쟁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위험지역이지만, 이곳은 다르다.

우시프 제국, 가람 왕국, 스파니아 왕국 총 3개의 나라가 국경을 접하고 있는 곳.

과거 로열 아카데미가 세워지기 전까지만 해도, 이곳은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황무지에 불과했다.

아마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황무지에 아카데미가 들어설 거라곤.

로열 아카데미는 마법과 인간의 무궁한 발전을 추구한다는 이념 하에 세워진 국립 기관이다.

국립이라는 단어에서 알 수 있듯, 어지간한 사람이 세울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이다.

대현자 테라마일 이슈파.

인간사를 통틀어 가히 최고의 마법사라 칭해졌던 그가 이 아카데미를 세운 장본인이었다.

대현자의 이념을 따르고자 하는 후계자들을 시작으로, 점차 성장하고 발전한 것이 오늘날 다국적 도시 루웬을 만든 것이다.

사방을 넓게 둘러싸고 있는 순백의 성벽.

루웬은 도시 전체가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오직 수속을 밟고 허가된 사람들만이 도시에 출입할 수 있었다.

성문에 다다른 순간, 여타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경비병들이 앞을 가로막았다.

난 늘 그랬듯 직접 마차에서 내려, 베르트 가의 문장을 보여주었다.

"베르트 공작가의 자제님을 뵙습니다! 화합의 도시 루웬으로 오신 걸 환영합니다!"

경비병들은 우렁찬 선창과 함께 검례를 올렸다.

마차를 몰던 브라이언이 이제는 당연하다는 듯 물었다.

"어디로 가면 되겠습니까?"

"일단, 좀만 더 가면 금색으로 치장한 도로가 나올 거야. 그 길만 쭉 따라가."

"알겠습니다."

브라이언은 지시에 따라 이어진 도로 위를 천천히 나아갔다.

나 또한 창문 너머로 시선을 돌려보니, 수많은 마차의 행렬을 비롯해 대륙에서 온 내로라하는 귀족들이 거리를 누비고 있었다.

이거 참, 본의 아니게 아련해지네....

그다지 좋은 기억이라고 할 순 없어도, 이렇게 과거의 공간으로 되돌아올 때마다 마치 추억의 시간여행을 하는 것 같았다.

당시엔 이렇게 창밖으로 사람들 구경하는 것도 어려워했었는데,

그러고 보면 이 아카데미란 장소가 나에게 참 많은 변화를 줬었네.

이곳에 오지 않았더라면, 결국 그 악마의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을 테니까.

누차 말하지만, 난 이곳에서 더 이상 배울 게 없으며 그로 인해 바뀔 것도 없다.

귀족 간의 친목질은 더더욱 할 생각이 없으며, 아카데미는 그저 학생이라는 현재의 내 신분을 보호해주기 위한 울타리에 불과하다.

뭐 내 마음이 바뀐다면 또 모르겠지.

이번엔 내가 직접 이 썩히고 고인 장소를 바꿔나갈지도....

여러모로 교차하는 생각들과 함께, 마차는 점차 로열 아카데미와 가까워지고 있었다.

* * *

본관 행정실에 도착하니, 나처럼 수속을 위해 찾아온 학생들을 비롯해 교관, 관리인 등 다양한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주고받느라, 딱히 내 쪽을 신경 쓰지는 않는 것 같았다.

나는 수속을 담당하는 안내원에게 다가가 원서를 제출했다.

원서를 읽던 여직원이 안경을 추어올리며 말했다.

"신분을 증명할 만한 문장을 보여주시겠습니까?"

나는 품에서 가문의 문장을 꺼내 책상 위로 올렸다.

문장을 본 안내원은 살짝 동요했다.

"혹시 성함이 어떻게 되시는지?"

"시안 베르트."

"...!"

호명 한 번에 모두의 시선이 내 쪽으로 쏠렸다.

"시안 베르트라면... 그 베르트 공작가의 무능아...?"

"무려 1년 동안 상급 기사들이랑 전선을 누볐다던 그 공자 아니야?"

"에이, 듣기론 그냥 후방에서 죽치고 있었다는데 뭐. 베르트 공작이 하나 달아주겠답시고 만든 꼬리표겠지."

"크란츠 공자랑은 하나도 안 닮았네."

가끔은 청력이 너무 좋아도 문제다.

이런 잡설들이야 대부분 한 귀로 듣고 흘린다곤 하나, 알다시피 난 성인군자가 아니기에,

부디 내 기분이 언짢을 땐 저런 말들이 안 들려오길 바란다.

안 그러면 그 나불거리는 주둥이들을 찢어버릴지도 모르니....

뭐 첫날부터 그럴 수야 없지.

오늘은 산뜻한 마음으로 넘어가고자 한다.

"수속은 모두 끝났습니다. 나머지는 준비된 기숙사에서 기다리시면 되고, 이틀 후에 열리는 입학식에 참석하시면 됩니다."

여직원은 도장이 찍힌 입학원서와 함께 숙소의 열쇠를 건넸다.

"...?"

반짝반짝 빛나는 열쇠엔 왕관 그림이 새겨진 금색의 고리가 걸려있었다.

뭔가 문제가 있음을 판단한 나는 바로 여직원에게 되물었다.

"이거 제대로 주신 거 맞습니까?"

"맞습니다. 시안 공자님은 로열관으로 배정되셨어요. 정식 절차를 밟아서 선정된 것이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로열관이란 말에 주변이 또 한 번 웅성거렸다.

아니, 정식 절차를 밟았다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되지 않나?

전생의 내가 배정받았던 기숙사는 노블관.

대부분의 귀족 자제들이 생활하는 보통의 기숙사였다.

그보다 더 아래 등급의 기숙사도 있긴 하나, 대개 남작 이상의 지위를 가진 집안이라면, 지위를 막론하고 똑같은 노블관을 배정받는다.

허나 지금 내가 받은 이 로열관은 그런 일반적인 기숙사가 아니다.

로열. 말 그대로 왕족을 뜻하는 단어.

귀족의 신분이 아닌, 각 국가의 몇 없는 왕과 황제의 자손들만이 이용할 수 있는 최상위 클래스.

물론 황실 직계만이 아닌, 황후 측과 같은 황실과 밀접한 유력가문 중에서도 종종 로열관을 배정받는 경우가 있다지만, 난 그런 경우도 아니었다.

이건 필시 누군가의 입김이 작용한 것이다.

설마 아버지의 사주인가?

뭐 위치도 위치고, 직접 황제에게 부탁했다면 안 될 것도 없긴 하지만, 솔직히 그렇게까지 할 이유는 없는데?

엘리스 누나도 그렇고, 심지어 그 개자식도 로열관을 배정받진 않았다.

크란츠 놈이야 말할 것도 없겠지.

조용히 지내도 모자랄 마당에 첫날부터 격한 관심을 받고 있군.

아마 내일쯤이면 황가도 아닌 귀족의 자제가 로열관을 배정받았다며, 여러 놈들 입에서 내 얘기가 오르내릴 거 같은데....

부디 내 귀에 안 들리기를 바랄 뿐이다.

일단 짐부터 풀고자, 마차를 이끌고 해당 기숙사로 찾아가 보았다.

6년의 아카데미 생활을 했던 전생에서도 한 번도 들른 적이 없던 곳이다.

끽해야 노블관보다 조금 더 호화스러운 정도일거라 생각했지만....

"이, 이건 대체...."

기숙사의 전경을 바라본 브라이언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건 뭐 호화스러운 걸 넘어, 아카데미 안에 성을 하나 지어놨네.

심지어 건물 앞엔 정갈한 호수를 비롯해 정원까지 지어져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나라에서 따로 지은 별궁인줄 알 것이다.

멍 때리는 브라이언을 한 대 때려 정신을 차리게 한 뒤, 정문으로 들어섰다.

내 방이 위치한 곳은 건물 2층 왼쪽 복도 끝자락.

호화스러운 건물치고, 정작 방문은 생각 보다 평범했다.

조금은 의아스러운 마음과 함께 자물쇠를 풀고 안으로 들어선 순간....

-후두둑

별거 아니다.

양손 가득 들어 올린 나의 짐을 브라이언이 떨어트린 소리였다.

오죽 놀랐으면, 바로 주워 올릴 생각도 없이 눈앞에 펼쳐진 장관을 넋 놓은 채로 구경하고 있었다.

어쩐지 복도 넓이에 비해, 문들이 심하게 떨어져 있더라니.

내가 생활했었던 노블관의 3배 정도는 될법한 크기였다.

"죄, 죄송합니다, 도련님! 바로 나머지 짐도 옮기도록 하겠습니다!"

이내 정신을 차린 브라이언은 허겁지겁 밖으로 나가 마차에 있던 짐까지 모두 옮기기에 이르렀다.

나는 그동안 여유롭게 방안을 돌아다니며 무엇이 있는지 살펴보았다.

이윽고 짐 정리를 마친 브라이언은 내 앞으로 다가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가, 가져오신 짐! 모두 정리했습니다. 도련님!"

그의 얼굴에선 땀이 비 오듯 흐르고 있었다.

"수고했어. 이제 가도 돼."

"예 알겠... 예?"

브라이언은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

"이제 가도 된다고. 아카데미까지 왔고, 짐도 풀었으니까, 네 할 일은 이제 끝이야."

나는 품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내 그에게 던졌다.

어차피 아카데미 내에선 돈 쓸 일도 없기에, 가지고 있던 금화를 모두 넣어 주었다.

주머니를 연 녀석의 표정이 아주 볼만했다.

"어찌하여 제게 이런 것을...?"

"일을 했으면 한만큼 받아 가야지. 어딜 가서 뭘 하든, 새 출발 할 자금으론 충분할 거야. 그래도 가급적이면 벨리아스는 피해라. 뭐 굳이 간다면 안 말리겠지만...."

브라이언은 아무런 말 없이, 금화가 든 주머니만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조금 과한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들 수 있지만, 난 토사구팽 짓이나 하는 양아치가 아니다.

안정된 운행과 좋은 승차감으로 내게 만족감을 주었으니, 그에 따른 보상을 주는 것이다.

이후에 뭘 하고 살지는 이제 알아서 해야겠지.

-턱!

"...?"

생각을 정했나 싶더니, 그가 대뜸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신 벨리아스의 정식기사 브라이언 켄드릭! 감히 말씀드리건대, 존귀하신 시안 도련님을 모시고 싶습니다!"

얘가 금화를 보더니, 정신이 나갔나?

"제 아버지가 말씀하시길, 평생을 믿고 따를 수 있는 주군을 만나게 된다면, 망설이지 말고 그 밑으로 들어가 모든 것을 바치라 했습니다! 전 오늘 고작 금화 몇 닢이 아닌, 시안 도련님을 제 인생의 새로운 시작으로 선택하고 싶습니다! 부디 받아주시옵소서!"

거참 아버지가 누구신진 몰라도 말 한번 맛깔나게 가르치셨네.

그냥 금화 몇 닢 주면 그냥 감사합니다 하고 떠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배포가 큰 놈이었다.

종자라고 해야 하나?

에밀리 같은 시종이랑은 또 다른 느낌이다.

"평생을 믿고 따를 주군이라 했냐?"

"그렇습니다! 전 시안 도련님을 제 주군으로 모시고 싶습니다!"

"그거 굉장히 미련한 짓이다."

"예?"

바닥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브라이언이 그제 서야 고개를 들었다.

"넌 지금 나에게 무한한 신뢰를 주고 있을지언정, 난 지금 너에게 어떠한 믿음이나 감정도 없어. 그 말은 즉 내가 널 언제 버려도 이상하지 않다는 거야."

"괜찮습니다! 설사 버림받는다 해도, 제 존재 자체가 도련님께 작은 도움이라도 되었다면 그걸로 만족할 수 있습니다!"

녀석은 철옹성이었다.

"그러니까 그게 얼마나 멍청한 짓인데! 너 속된 말로 나중에 나한테 칼 맞고 뒤지면 어쩌려고?"

"그래도 상관 없... 예?"

순간 방안에 긴 정적이 흘렀다.

나도 모르게 흥분하다 보니 별 얘길 다 하네.

전생의 그 자식도 날 보면서 이런 기분이 들었을까?

날 위해 뭐든 다 해줄 것 같은 종자라....

생각해보면 그 개자식을 위해 죽어라 뛰었던 전생에도 정작 내 밑으로 누군가를 둔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그나마 날 모시겠다고 처음으로 나선 놈이 마부인 것도 참 웃기네.

뭐 나쁠 건 없지 않겠는가?

인연이라면 인연일 터, 날 위해 목숨까지 바칠 각오가 돼 있다면, 나 역시 내 사람에 대한 안위는 확실하게 책임져 줄 것이다.

애초에 난 그놈이랑 다르거든.

나는 걸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중에 통수 치지 마라...."

(다음 편에서 계속)

제34화. 로열 아카데미 (2)

대강당에는 대략 300명 정도의 신입생들이 모여 있을 거다.

이미 서로 간의 아는 귀족들도 있을 것이고, 얼굴은 몰라도 이름 정도는 들어본 이들도 있겠지.

아마 입학식 첫날부터 친목을 다지겠다고 양옆, 앞뒤로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을 것이다.

점점 분위기가 어수선해지고, 장내가 소란스러워지겠지.

그때쯤 연단 위로 총장이 나타날 것이다.

그는 마나를 써서 자신의 목소리를 증폭시킨 뒤, 시작부터 이런 말을 하겠지.

"여러분은 의무를 지고 태어난 존재입니다. 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말이죠."

그럼 학생들은 무슨 개소리냐며 시큰둥한 반응을 보일 것이다.

그럼 또 총장은 말하겠지.

"귀족이라는 명패는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가진 권세는 신께서 부여해주신 능력과도 같죠. 그렇기에 이에 따른 책임과 의무를 수반해야 하며, 상류층이라는 사회적 위치에 걸맞은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몇몇 순진무구한 학생들은 그 말에 혹해 감동을 먹을지도 모른다.

귀족과 상류층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책임과 의무를 져야 한다.

이 얼마나 멋있는 말인가?

너무 멋있어서 오히려 말이 안 될 노릇이지.

그런 겉만 번지르르한 말을 굳이 시간 내서 들을 바에야, 차라리 방에 틀어박혀 운동이나 하는 것이 더 가치 있다고 본다.

철봉을 잡고 턱걸이를 하던 내게, 이젠 마부에서 종자으로 승격된 브라이언이 다가왔다.

"저, 도련님. 입학식엔 정말 안 가셔도 되겠습니까?"

나는 역으로 물었다.

"왜 가야 한다고 생각하냐?"

"도련님의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는데 앞서 중요한 초석이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다른 학생 분들과 친목을 쌓으실 수도 있는데다, 총장이나 교수님들로부터 좋은 말씀을 들으실지도...."

좋은 말씀이란 말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좋은 말씀? 좋지. 오죽하면 너무 좋아서 아직도 기억하고 있을 정도니까."

"예?"

"너 로열 아카데미의 규범이 뭔 줄 아냐?"

"잘 모르겠습니다만...."

"솔선수범. 여기서 배우고 익힌 걸 잘 다듬어서 나중에 나라와 국민을 위해 베풀라는 거야."

"...좋은 규범 아닙니까?"

그는 뭐가 문제인질 모르겠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땅에서 그걸 지키는 귀족이 몇 명이나 있을 것 같니?"

"...."

"참고로 너를 처음 사주했던 공작부인도 여기 아카데미 출신이야."

"아...."

브라이언은 이해의 탄식과 함께 고개를 끄덕거렸다.

귀족이라는 놈들이 탐욕이나 오만함 없이, 정말 국가와 국민들을 위해 솔선수범한다면, 우리가 사는 이 땅이 얼마나 화목해지겠는가?

하다못해 미스트가 활개 칠 일도 없을 것이다.

뭐 그런 모범적인 귀족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라지만, 애초에 귀족은 기본적으로 생계수단을 추구하는 하찮은 신분이 아닌, 권력과 부를 가진 고귀한 신분이다.

내일 당장 어떻게 먹고 살아야 하는지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는 태생부터 선택받은 자들.

그러면서도 하염없이 욕망만 추구하는 놈들에게 나눔과 베풂이라....

이미 고일 대로 고여 버린 귀족 세계에서 그런 건 허울 좋은 이야기에 불과하지.

하물며 그런 이야기나 해댈 입학식에 갈 이유는 더더욱 없다.

애초에 안 갔다 해서 쫓겨나는 것도 아닌데 뭐.

"푸아!"

목표 횟수를 완료하자마자, 쉴 틈 없이 바로 다음 운동으로 넘어갔다.

방안엔 철봉뿐만이 아닌, 훈련장을 연상케 할 만한 다양한 운동기구들을 비롯해 근력 촉진에 도움이 되는 포션들 까지 갖춰져 있었다.

마수의 피를 먹어왔던 나로선 저런 포션들이 별 효과는 없겠다만,

뭐든 없는 것보단 낫다고, 황족의 공간이 주는 편리함과 안락함에 점차 적응되어 가고 있었다.

-똑똑똑

입학식이 한창일 시간에 노크 소리라...

어떤 놈인진 몰라도 내가 이 안에 있다는 걸 모르고 온 거겠지.

일단은 브라이언을 내보내 누군지 확인시켰다.

브라이언은 금세 돌아와, 나에게 종이 하나를 건넸다.

"뭐야 이건?"

"행정실에서 보낸 안내문이랍니다. 금일 16시 마법 수련장에서 속성 검사를 할 예정이니, 그때까지 가급적 마나를 쓰지 않은 상태로 모여 달라고...."

난 또 뭐라고.

하기야 학생들은 강당에 있지만, 수호 기사로 위장한 시중들은 기숙사 안에 있을 테니, 미리 배포한 거로군.

"귀찮은데...."

"예?"

브라이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 아무리 그래도 속성 검사는 중요하지 않습니까? 자신의 마법 능력을 어느 방향으로 갈고 닦아야 할지 알게 해주는...."

"맞아. 무지무지 중요한 거지."

근데 난, 내 마법 속성이 뭔지 이미 알고 있거든.

회귀하면서 속성이 바뀌었을 리도 없고, 어차피 의미 없는 검사에 불과할 텐데, 그냥 대충 종이에 써서 보내면 안 되려나?

당연히 안 되겠지.

나도 참 귀찮은 마음에 별생각을 다 한다.

* * *

공간 중앙에 위치한 오색 빛의 커다란 마법진.

준비를 마친 한 학생이 긴장된 얼굴로 마법진 위에 올라섰다.

-우우웅

이에 발아래로 작은 서클이 생겨났고, 대상자의 발끝부터 머리까지 천천히 상승하며, 몸 전신을 훑기 시작했다.

이후 검사가 끝나니, 마법진 앞에 놓인 푸른 양피지 위로 붉은 글자가 새겨졌다.

<아인 크리거>

『마법등급: 1성

신체등급: C

속성: 불 31%』

검사를 끝낸 학생은 양피지와 함께 방을 나갔고, 곧바로 다음 학생이 들어왔다. 검사 과정은 동일했으며, 전과 마찬가지로 양피지에 글자가 새겨졌다.

<세레나 에인리스>

『마법등급: 2성

신체등급: D

속성: 물 37%』

바로바로 확인되는 자신의 등급에 일부 학생들은 환호를, 일부 학생들은 실망을 표하기도 했다.

반면 예상치 못한 속성수치에 어리둥절한 이들도 종종 보였다.

"이번 신입생들은 전반적으로 수치가 높게 나오네요?"

검사 결과를 확인하던 로딘 교관이 말했다.

"근데 속성들이 무난한 것 같아 아쉽네요. 대부분 불, 물, 바람, 등에 한정돼 있어요."

곁에 있던 시리카 교관은 다소 아쉬워하는 눈치였다.

"어쩔 수 없죠. 저희가 바란다고 특별한 속성이 나오는 것도 아니니까요. 올해는 신의 선택을 받은 학생이 없을지도 모르겠네요."

모든 사람은 신체에 마나와 더불어 마법 속성이라는 것을 가지고 태어난다.

마나가 마법을 사용하기 위해 필요한 에너지라면, 속성은 어떤 마법을 구사할 수 있는지 천부적으로 부여받는 고유한 성질이었다.

불 31%, 물 37%, 바람 42%.

이처럼 본 수련장에 있는 마법진은 대상자가 가진 가장 높은 속성의 수치를 확인하고, 이를 마력이 담긴 양피지에 전승하여 결과를 보여준다.

물론 양피지에 새겨진 수치는 대상자의 속성수치 중 가장 높은 것만 보여줬을 뿐임으로, 속성이 밝혀졌다 해서 다른 마법을 못 쓰는 건 아니다.

만약 가장 높은 수치가 불 31%라면, 그 외 나머지 69%는 물, 전기, 바람, 땅, 빛, 어둠 등 다양한 속성들이 응집돼 있는 것이기에, 다른 마법들 또한 얼마든지 구사할 수 있다.

다만 수치가 높은 속성일수록 해당 속성을 발전시킬 수 있는 범위가 넓어지기에.

대부분 본 검사를 통해 확인된 속성을 바탕으로 자신의 마법 능력을 증강시키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다음 학생 들어오세요."

시리카 교관이 다음 검사자를 부르니, 은발의 아담한 소녀가 들어왔다.

두 교관은 그녀가 누군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아린 황녀네요?"

"네. 일단 검사부터 진행하죠."

시리카는 쭈뼛쭈뼛 서 있는 아린에게 다가가 주의 사항을 알려주었다.

"신발 벗고 올라서시고, 검사가 끝날 때까지 내려오시면 안 돼요. 가만히 계시면 알아서 다 해줄 거예요!"

"네...."

아린은 시리카의 말대로 마법진 위에 올라섰고, 곧 검사가 시작되었다.

-우우웅

검사는 다른 학생들과 다르게 1분 정도 더 소요되었다.

이내 양피지 위로 조금은 특별해 보이는 하얀 글씨가 새겨졌다.

<아린 세벨러스>

『마법등급: 2성

신체등급: B

속성: 빛 52%』

"비, 빛 속성?"

전혀 예상치 못한 속성에 아린은 입을 틀어막았다.

놀란 건 두 교관도 마찬가지였다.

"세상에, 설마하니 아린 황녀가 빛 속성이 나올 줄은...."

"게다가 수치도 50% 이상이에요. 이 정도면 신의 선택을 받았다고 봐야겠는 걸요?"

신의 선택.

속성검사를 진행하다 보면 가끔 수치가 50%를 넘는 학생들이 나타난다.

앞서 말했듯 속성 수치가 높을수록 마법 등급을 상승시킬 수 있는 여지가 넓어지는데, 가령 그 수치가 50%를 넘을 경우, 그때부턴 완전히 다른 범주에 들어서게 된다.

경지에 따라선 신의 힘에 필적한다는 해당 속성의 초월급 마법까지 구사할 수 있다.

그래서 일각에선 이를 두고 신이 직접 자신의 힘을 내렸다고 하여, 신의 선택을 받았다고 불렀다.

"디오네 황제 폐하도 빛 속성이셨죠?"

"네. 아버지의 속성을 딸이 그대로 물려받았다고 봐야겠네요. 게다가 신체 등급도 굉장히 준수해요."

신입생 중 처음으로 나타난 빛 속성에 교관들은 그녀의 정보를 꼼꼼하게 기록하였다.

아린 황녀는 사뭇 기쁜 얼굴로 교관들에게 고개를 숙인 뒤 밖으로 나갔다.

검사는 계속해서 진행되었다.

"다음 학생 들어오세요."

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진 거구의 남성이 커튼을 거치고 나타났다.

나이에 어울리진 않는 우락부락한 덩치에 교관들의 어깨가 다소 움츠러들었다.

"시, 신발 벗고 올라서서 기다리면 돼요. 검사가 끝날 때까지 내려오시면 안 됩니다."

마법진은 여타 학생들과 다를 것 없이 검사를 진행했다.

<세트 샤하르칸>

『마법등급: 3성

신체등급: A

속성: 모래 71%』

"모, 모래 71%?!"

결과를 확인한 두 교관이 이구동성으로 소리쳤다.

놀랄 건 수치만이 아니었다.

"이, 이거 잘못된 거 아니죠? 마법 등급 3성에 신체 등급 A? 정말 올해 입학한 신입생 맞아요?"

시리카는 급기야 신입생에게 대놓고 다가가 물었다.

허나 세트라는 이름의 남학생은 말없이 자신의 정보가 새겨진 양피지를 들고선 방을 나갔다.

"세상에, 인성등급은 F네요."

뒷모습을 째려보던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비아냥거렸다.

"저런 학생들이 한둘인가요 뭐.... 그보다 저 학생, 이제 보니까 세트 샤하르칸이었네요."

"그 스파니아의 1왕자를 말씀하시는 거죠? 모래의 왕자라고 불리는...."

"네, 신체등급도 상위 수준에, 속성도 비교적 희귀한 모래 속성이 나왔어요. 아마 이번 신입생 중 가장 높은 수치를 가진 학생이지 않을까 싶네요."

교관들은 아린과 마찬가지로 그의 정보를 꼼꼼하게 기록하였다.

"다음 학생 들어오세요!"

시간이 흘러 어느덧 마지막 학생이 들어왔다.

흑발의 소년은 들어오자마자 신발을 벗고 마법진 위로 올라섰다.

아직 주의사항을 얘기하지도 않았건만,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행동에 시리카는 순간 말문이 막혀버렸다.

"어, 그, 그러니까 시작할게요!"

그녀는 후다닥 커튼 너머로 달려 나갔고, 바로 검사가 시작되었다.

"마지막 학생은 베르트 공작가의 막내아들이네요."

"아! 그 1년 동안 전선에서 생활했다던 공자가 바로 저 학생이었군요! 어쩐지 눈매가 날카로운 게, 마치 마족을 보는 것만 같았어요!" "본래는 가문의 무능아로 불렸다고 하는데, 과연 어떤 속성이 나올지 궁금하네요."

-우우웅

마법진은 이전과 달리, 좀처럼 검사를 빨리 끝내지 못했다.

두 교관은 갈수록 초조해지는 마음과 함께 빈 양피지에 글자가 새겨지기만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검사가 끝나자, 양피지에 글자가 새겨지기 시작했다.

<시안 베르트>

『마법등급: 1성

신체등급: S

속성: 어둠 92%』

"???"

양피지를 확인한 두 교관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제35화. 로열 아카데미 (3)

92%.

살면서 본 적도 없고, 들어본 적도 없는 말도 안 되는 수치였다.

이 정도면 신의 선택이 아니라, 신계의 존재가 직접 인간의 몸으로 들어간 것은 아닐까?

감히 자부하건데 속성 검사가 시작된 이후, 이렇게 높은 수치를 가진 인간은 이 학생이 처음일 것이다.

"이 마법진, 고장 난 거 아니죠?"

"그럴 리가요, 조금 전까지 잘 작동됐는데...."

두 교관은 양피지에 쓰인 글씨를 몇 번이고 다시 확인하였다.

그만큼 천 번 만 번을 확인해도 못 믿을 일이었다.

"끝났죠?"

시안은 덤덤하게 마법진에서 내려와 자신의 양피지를 확인했다.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 무신경한 눈빛.

그는 92%라는 수치에 아무런 반응 없이, 그대로 방을 나갔다.

남겨진 두 교관은 아직도 어안이 벙벙할 뿐이었다.

"속성 수치 92%에 신체 등급 S라니.... 그나마 양심은 있는지 마법 등급은 1성이네요."

허나 별로 의미는 없어 보였다.

어차피 마법 등급은 해가 지날수록 단계적으로 상승하는 대기만성적인 요소에 불과하다.

"분명 전례가 없을 정도의 역대급 수치이긴 하지만...."

로딘 교관은 다소 아쉬워하고 있었다.

"왜 하필 어둠 속성인지... 반대로 보면 참 안타깝네요."

어둠 속성.

속성자체로 봤을 땐 희귀 속성이긴 하나, 이 땅에서 그다지 환영받는 속성은 아니었다.

보유자 자체가 별로 없는 것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우시프 제국은 빛을 숭배하는 국가였다.

빛을 선호하는 나라에서 빛과 반대되는 성질인 어둠을 달갑게 볼 리는 없을 터.

이는 인접해 있는 국가들을 비롯해 다른 지역들도 마찬가지며, 이로 인해 어둠 속성을 기반으로 한 마법 연구는 대륙에서 거의 진행되지 않았다.

한마디로 빛 좋은 개살구.

실속이 전혀 없는 허울뿐인 속성에 불과했다.

"그러게요. 최대수치 92%라면 그걸 제외한 나머지 수치가 8%라는 건데, 아무래도 마법으로 크게 성장하진 못할 것 같네요."

"혹시 모르죠. 저 정도 적합성에 천재성만 가미된다면, 새로운 마법은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으니까요."

"어둠 속성 대마법이라... 전 솔직히 감이 안 잡혀요. 끽해야 은신이나 환영 정도의 마법이 고작일 텐데.... 저런 냉대받는 속성을 어떻게 발전시킬 수 있을까요?"

시리카는 말하면서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반면 로딘은 의미심장한 얼굴로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 보였다.

"로딘 님은 뭔가 떠오르시는 게 있나 봐요?"

"아뇨. 별 건 아니고, 왠지 저 시안이라는 학생을 환영할 만한 조직이 한 군데 있을 것 같아서요."

"어딘데요?"

잠시 우물쭈물하던 로딘은 이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미스트요...."

"...."

"아니, 은신이나 환영 정도의 마법이라 하시길래... 그런 계열을 즐겨 쓰는 암살자들에겐 좋지 않을까 해서...."

그녀는 진심으로 경멸감을 느낀 듯한 얼굴로 로딘을 바라보고 있었다.

* * *

92%라.

원래 전생에선 80%대였던 것 같은데, 그새 수치가 늘었나 보군.

하긴 그동안 마수들 사냥한다고 써댄 마나들이 얼만데 안 올라간 게 이상하지.

당연한 말이겠지만, 지금 확인된 속성 수치들이 평생 변함없이 지속되는 건 아니다.

본래 힘이란 것도 쓰면 늘고, 안 쓰면 무뎌지는 것처럼,

속성 역시 마나를 어떻게 쓰고 활용했냐에 따라 늘 수도 있고 줄 수도 있다.

사람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대개 10% 안쪽의 변화율을 보인다고 한다.

물론 그 이상의 사례도 존재한다.

뭐 전생에서도 이 말도 안 되는 수치 때문에 꽤 주목은 받았었지.

가문의 무능아라 그런지 속성도 무능력한 거냐는 조롱이 대부분이었지만....

아, 이거 또 옛날 생각 하려니 기분 잡치려 하네?

전생에선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지만, 이번에 못 그럴 듯싶다.

아마 본보기로 한 명 잡아다가 어둠의 구렁텅이로 빠트려서 절망과 고통을 선사하지 않을까 싶은데....

뭐 그랬다간 조용하고 평화로운 내 아카데미 생활은 끝이겠지.

나는 기숙사에서 가져온 근력 촉진 포션을 마시며 찝찝한 마음을 정리하고자 했다.

흠, 이거 생각보다 꽤 먹을 만한데?

달콤 쌉싸름한 것이 꼭 트롤의 피를 연상케 하는 맛이다.

뭐 효능은 비할 가치가 없겠지만, 나름 옛 맛을 상기하는 정도로는....

"...!"

모퉁이를 돌아선 순간, 낯익은 얼굴과 마주쳤다.

"시, 시...."

급성 학질이라도 걸린 것 마냥 벌벌 떠는 눈과 입.

마치 있어선 안 될 죽은 자라도 본 것 같은 반응.

크란츠였다.

너 이 새끼, 잘 만났다.

"아는 애야 크란츠?"

옆에는 살이 찌다 못해 목은 없고, 머리가 가슴 위에 바로 얹힌 것 같은 금발의 꼬맹이가 자리하고 있었다.

아 너도 기억나네.

가람 왕국 페네론 후작가의 아들 포퍼 페네론.

크란츠와 더불어 나의 초창기 아카데미 생활을 아주 더럽게 만든 놈들 중 하나였지.

"어, 그, 그러니까 그게...."

돼지 놈의 물음에도 크란츠는 등신마냥 계속해서 어버버 거렸다. 얼씨구, 왜 말을 못 하실까?

그새 친애해 마지않는 동생의 이름도 까먹으신 건가?

그럴 리야 없겠지.

얼굴도 보기 싫어서, 아예 이 세상에서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엄마한테 꼰지르신 우리 크란츠 형님이 이 동생을 잊을 리야 없지!

"내, 내 동생이야! 시안 베르트라고 올해에 나랑 같이 아카데미로 왔어! 무, 무사히 도착했구나, 시안?!"

이 뻔뻔한 자식 봐라?

그래도 꼴에 친구 있다고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시네?

일단 어디까지 버틸지 궁금해 잠자코 있어 보기로 했다.

"아, 네가 저택에 사는 동안 노예처럼 부려먹었다던 그 동생이구나?"

"...!"

그나마 정신을 되찾았던 크란츠의 얼굴이 다시 하얗게 질려버렸다.

차마 내 얼굴을 볼 수 없었는지 놈의 눈동자가 심히 방황하고 있었다.

아 그래, 뭐 사실이지.

검술 대련 전까지만 해도 이놈이 날 노예처럼 부렸던 건 사실이니까.

난 자비로운 사람이기에 그 정도 혀 놀림은 너그럽게 이해해줄 수 있다.

"게다가 어미가 누군지도 모르는 사생아라 했었지? 이야! 네 말대로 되게 근본 없게 생겼다!"

-쿵

무언가 묵직한 것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예상컨대 아마도 크란츠의 심장이 내려앉는 소리일 것이다.

"아, 아니 저 그러니까 내 말은...!"

-턱

변명을 들을 것도 없이 바로 녀석의 뒤통수를 잡아 움켜쥐었다.

땀을 얼마나 흘려댄 건지 잡은 머리카락이 매우 흥건했지만, 그렇다고 놔줄 내가 아니다.

역시 짐승은 때려야 말을 듣는다고, 아무래도 녀석에게 다시금 교육의 시간이 필요할 듯하다.

잠시 고개를 숙이고 있던 나는 이내 밝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잠깐 얘기 좀 할까, 크란츠?"

* * *

"속성수치 92%?"

보고서를 읽고 있던 백발의 노인이 턱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네. 하지만 정작 중요한 속성 자체가 어둠이다 보니...."

"실속은 없을 거란 얘기군."

노인은 정제된 시선으로 계속해서 시안 베르트의 보고서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확실히 역대급 수치라는 건 사실이군. 그 신의 아이라 불렸던 엘리스 베르트도 81%인가 그랬지 아마?"

"네. 졸업할 당시엔 물 속성 88%까지 상승해 있었습니다."

"재미있군. 그 역대급 재능이라 칭송했던 아이도 이뤄내지 못했던 수치가, 신입생에게 나타났을 줄이야."

총장의 얼굴엔 좀처럼 보기 드문 은은한 미소가 서려 있었다.

그걸 본 시리카는 지금 상황이 매우 낯설게 느껴졌다.

그녀가 있는 곳은 아카데미 본관 최상층에 자리한 총장실.

금일 진행한 속성검사의 보고를 위해 이곳에 온 만큼, 그 보고서를 읽고 있는 노인은 당연히 이 방의 주인일 수밖에 없었다.

로열 아카데미의 총장 '쿤델 퀴젤'.

우시프 제국의 유력가문인 퀴젤가의 가주이며, 황제의 첫 번째 황후였던 디아나 퀴젤의 아버지, 즉 황제의 전 장인.

더불어 현재 아카데미의 구성원 중 유일하게 9성급 경지에 도달한 위인이기도 했다.

"자네, 이 시안이라는 아이가 로열관을 배정받았다는 거 알고 있나?"

"네. 다른 교관들로부터 전해 들었습니다."

"황가의 일원도 아닌 그가 어떻게 배정받았다고 생각하나?"

때아닌 퀴즈쇼에 시리카의 몸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사실 답은 이미 어느 정도 나와 있었다.

황가의 일원도 아닌 일반 귀족이 로열관을 배정받았다?

이건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그냥 누군가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얘기였다.

문제는 그걸 수용할 사람이 못해도 총장 이상의 권력을 가진 자여야 한다는 것.

이에 해당되는 사람은 단연 쿤델 총장밖에 없었다.

즉 쿤델 총장이 누군가로부터 사주를 받고 이를 수용했기에, 시안 베르트가 로열관에 배정된 것으로 정리할 수 있었다.

"...혹 베르트 공작이 사주한 것입니까?"

"허허, 그건 아닐세. 베르트 공작이 얼마나 강직한 사람인데? 자식의 편의나 봐주자고 그런 걸 부탁할 남자는 아니지."

"그럼 대체 누가...?"

"황제 폐하일세...."

시리카는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디, 디오네 황제 폐하 말씀이십니까?"

쿤델은 말없이 눈썹을 치켜 올리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대체 황제 폐하는 무엇 때문에 그 아이를?"

"자네 현재 마법 등급이 어떻게 되지?"

쿤델은 난데없이 그녀의 마법 등급을 물었다.

"7성입니다...."

특별할 것 없이 아카데미 소속 교관들의 평균 등급이었다.

"7성이면 살상 마법 한 번으로 웬만한 마을 하나는 거뜬히 날려버릴 수 있는 경지지. 그런 자네 앞에 지금 드래곤이 나타났다면 어찌하겠는가?"

"드, 드래곤 말입니까?"

신의 피를 이어받은 계승체가 눈앞에 나타나면 어떻게 하겠냐고?

뭐 때문에 그런 질문을 하는진 모르겠지만, 시리카는 일단 솔직하게 말해보기로 했다.

"전력을 다해 싸워... 아니 도망쳐 보긴 하겠지만, 머지않아 신께 살려달라고 빌 것 같습니다."

"솔직하구먼. 그래 7성급인 자네도 그런 말을 하는데 다른 이들은 말할 것도 없겠지. 아마 대부분은 죽음을 자각하고 삶을 포기할지도 모를 걸세. 한데...."

총장의 눈빛이 순간 날카롭게 변했다.

"그 아이는 살아 돌아왔다더군. 무려 드래곤에게서 말이야...."

"...?"

시리카는 귀를 의심하는 걸 넘어, 자신이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닌지, 현실이 의심되기 시작했다.

"안 믿기지? 놀랍게도 이건 황제 폐하가 나한테 직접 한 말일세. 무려 데빌 드래곤에게 납치되었다가, 강에 떨어져서 실종된 뒤, 이틀 만에 발견되었다고 하더군. 생명엔 아무런 지장 없이 말이야...."

"저, 전선에서 생활했단 얘기는 들었지만, 설마 그런 일이 있었을 줄은...."

쿤델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아마도 황제 폐하께선, 그때 당시 순방에 동행했던 아린 황녀를 마수들로부터 무사히 대피시킨 것에 큰 감명을 받으신 모양이야. 거기에 뭐 드래곤으로부터 살아 돌아온 걸 두 눈으로 보셨다 하니, 더 이상은 말할 것도 없겠지. 이거 뭐 몇 년 뒤엔 둘의 혼사 얘기가 나올지도 모르겠군."

우스갯소리로 얘기하긴 했지만, 황제가 직접 관여했을 정도면 실제로도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였다.

모든 경위를 알게 된 시리카는 복잡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정말 그 아이는 신의 선택을 받기라도 한 것일까요?"

쿤델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어렵게 생각할 것 없네. 우리가 할 일은 그냥 지켜보는 것뿐이야. 비록 아무짝이 쓸모없는 속성을 가졌다 해도, 모르지 않겠는가? 그 누구도 다다를 수 없는 유일한 경지에 이를지...."

쿤델은 꽃이 피기를 기다리는 화분을 보는 것 마냥, 시안의 보고서를 흡족한 미소로 바라보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제36화. 로열 아카데미 (4)

총장과 면담을 마친 시리카는 본관을 나와, 별관에 있는 자신의 연구실로 향했다.

"아 맞다! 확인하는 걸 잊었네?"

뭔가 두고 온 게 불현듯 생각났는지, 다시 걸음을 돌려 본관 안으로 진입한 그녀는 교직원들만이 출입할 수 있는 연구 자료실로 향했다.

"여기 있었던 것 같은데...."

꼭 찾으려 하면 안 보인다고, 오늘따라 위치도 가물가물했다.

책을 더듬으며 위치를 가늠해보던 그녀는 이내 한 지점에 멈춰 섰다.

"...?"

빼곡히 자리한 책장 속 유일하게 비어 있는 공간.

분명 있어야 할 무언가는 보이지 않고, 자욱한 먼지만 휘날리고 있었다.

"이거 찾으세요?"

느닷없이 등 뒤에서 들린 낯선 목소리.

시리카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어, 그, 그러니까... 시안 학생 맞죠?"

목소리의 주인은 조금 전 총장과 함께 긴 이야기를 나누고 왔던 시안 베르트였다.

그의 손에는 빨간 양장본 도서가 들려있었다.

"여긴 학생들 출입제한 구역인데 어떻게 들어왔어요? 여기 있는 것들은 다 중요한 연구 자료들이라 함부로 손대면 안 되는데...."

시안은 말없이 묘한 미소만 짓고 있었다.

"그거... 돌려줄래요? 오늘 있을 연구 작업에 꼭 필요한 자료라서...."

"아 네, 그럼요. 당연히 돌려드려야죠."

시안은 아무런 거부감 없이 그녀에게 도서를 내밀었다.

"고마워요 시안 학...."

손끝에서 느껴진 얇은 촉감에 시리카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그녀가 잡은 것은 붉은색의 두꺼운 양장본이 아닌, 검은색의 얇은 종이였다.

"이거 찾으셨던 거 아니었나요, 시리카 선생님? 아니... 시리카 당주?"

"...."

폭풍 전 바다마냥 휘몰아치는 고요한 정적.

이내 살가웠던 그녀의 눈빛은 온데 간데 사라지고, 붉은 혈기와 살기를 머금은 눈빛이 세상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너 뭐니?"

* * *

시리카 니그리티.

로열 아카데미의 학술 교관.

밝은 성격과 뛰어난 강의력을 바탕으로 아카데미 내에서 학생, 교관 상관없이 고루 인정을 받고 있는 교육자 중 한 명이었다.

허나 그것은 위장된 신분에 불과하지.

학생도, 교관도, 심지어 총장조차도 모르는 그녀의 진짜 신분이 만약 세간에 알려진다면?

로열 아카데미는 아마 그다음 날 폐쇄를 당해버릴지도 모른다.

그 누가 예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대륙의 내로라하는 귀족들이 모인 아카데미에서, 귀족을 사냥하는 암살조직의 당주가 교관으로 있을 거라고....

푼수데기 같던 이전 모습은 어느 샌가 사라져 버린 그녀.

지금 내 앞엔 한 명의 암살자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밀서를 봤다고 하기엔, 근거가 너무 부족한데? 어디까지 알고 온 거니?"

양장본 속에 있던 검은 종이는 조직 내에서 비밀리에 정보를 주고받는 일종의 밀지였다.

아카데미 내에 존재하는 다른 대원들이 각 영역에서 조사한 내용을 모아다가 이곳에 숨겨놓으면, 당주인 그녀가 그것을 가져가는 방식이었다.

물론 암어로 쓰여 있는 만큼, 다른 이들이 봤다 해서 문제가 되진 않는다.

하지만 설사 밀서의 내용을 알았다 해도 결코 알 수가 없는 사실을, 난 방금 내 입으로 말해버렸다.

시리카 '선생'도, 시리카 '대원'도 아닌 시리카 '당주'라고....

"구질구질하게 이야기하진 않겠습니다. 보고서 판단해주시죠."

백문이 불여일견. 나는 그녀의 물음에 답하고자 봉인해두었던 안개의 기운을 해제시켰다.

"...!"

옷깃 사이로 빠져나온 검은 안개가 주변을 잠식하였고, 서서히 자료실 전체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본 시리카의 낯빛이 변한 것도 잠시,

그녀가 재빠른 손놀림으로 내 옷깃을 부여잡았다.

퍼져나간 안개는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거기까지. 이 이상 퍼져나가는 건 곤란해. 여기 아카데미엔 꽤 민감한 사람들이 많거든?"

손수 단추까지 잠가주던 그녀는 이내 싱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리를 좀 옮기도록 할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