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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친구와 연인 사이'는 유소진이 대본을 쓰고 오윤서와 정예지, 곽민지가 출연했다.
그 드라마의 첫 번째 방송일이 되었다.
배우와 스태프 일부가 식당을 빌렸다. 그들은 첫 방송을 같이 보면서 회식을 하기로 했다.
정예지가 식당에서 방송을 기다리며 말했다.
"'황금빛 향기'는 이겨야 하는데."
'황금빛 향기'에는 정예지가 라이벌이라고 생각하는 조연 배우 강수민이 출연한다.
둘은 콘셉트도 겹치고 나잇대로 비슷한 데다가 연기력까지 누가 낫다고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곧잘 비교당했다.
그 드라마도 같은 시간대에 방송된다.
오윤서가 말했다.
"우리는 그냥 최선을 다하는 거야. 결과는 우리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잖아."
"그래도 수민이는 이기고 싶어요."
"걔도 너는 이기고 싶을걸?"
여자 신인 배우가 식당을 돌아다니면서 스태프와 배우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진소영입니다!"
정예지가 그녀를 보며 물었다.
"누구예요?"
"너랑은 촬영이 안 겹쳤겠다. 소희 역할로 나온 애야."
"아. 언니 동생을 좋아하는 여자애."
"드라마에서."
"네. 드라마에서 배역이요. 근데 언니 친동생은 저런 스타일 안 좋아해요?"
"걔? 쟤가 아깝지. 사실 걔 옆에는 누굴 세워놔도 다 아까워."
"네?"
"내 동생만 아니었으면 개폐인이라고 욕하고 다녔을 거야."
"이미 욕하고 있는 거 아녜요?"
"아. 차우진 씨 왔다."
정예지가 고개를 휙 돌렸다.
"어디요?"
진소영이 어제 나인세븐 엔터에 차용증을 빌미로 붙잡혔던 건, 이 드라마에서 조연을 맡았기 때문이다.
오윤서는 주연급이지만, 그녀의 동생 역할을 맡은 배우는 조연이다.
진소영은 그 조연을 좋아하는 역할이라 출연 비중은 더 낮았다.
대신에 드라마에 꾸준히는 나온다. 대사는 몇 줄 없을 때도 있지만, 매회 최소한 한 번은 화면에 얼굴이 나온다.
그녀는 겨우 잡은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어제 끌려가서 협박당하고 고생했는데도 불구하고 오늘 이 첫 방송 사수 모임에 나왔다.
그녀가 인사하러 다니다가, 정예지가 손을 흔드는 모습을 보았다. 처음에는 자신을 부르는 줄 알았다.
'앗! 날 부르시는 건가?'
착각이라는 건 곧바로 알았다. 정예지의 시선이 그녀를 살짝 벗어나 있었다.
진소영이 그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차우진이 식당에 들어오고 있었다.
차우진이 진소영을 두 번이나 구해줬지만, 그녀는 차우진의 얼굴은 모른다. 매번 마스크를 썼기 때문이다.
그녀의 눈에 드라마 작가인 유소진도 차우진을 보는 게 보였다. 주연 여배우인 오윤서도 차우진을 보고 있었다.
'중요한 분인가 보다.'
진소영이 식당에 들어온 차우진에게 다가가 고개를 꾸벅 숙이고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신인 배우 진소영입니다!"
차우진은 당황했다.
"네가 왜 여기서 나와?"
"네?"
"아니, 그러니까."
"혹시 저를 아세요?"
"모릅니다만? 오늘 처음 봤습니다만?"
"아닌데. 저는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차우진이 둘러댔다.
"저는 스태프도 아닌데 인사하시길래 당황해서요."
"네? 중요한 분 아니세요?"
"이 드라마의 세트장 전기 공사를 며칠 했습니다."
"하지만 배우님이나 작가님이 선생님을 보는데…."
"몇 명 안 보네요."
차우진이 진소영을 지나갔다.
그녀가 고개를 갸웃하다가 다른 곳으로 인사하러 갔다.
차우진이 작게 말했다.
"쟤는 다시는 안 볼 줄 알았는데 왜 여기서 마주치냐."
정예지가 손을 흔들었다.
"우진 오빠! 여기요. 여기."
그 테이블은 정예지의 옆자리가 비어 있었다.
차우진이 자리에 앉았다.
"자리가 비어 있네요."
오윤서가 말했다.
"예지가 자리 맡아놨어요."
"뭘 굳이."
정예지가 생색을 냈다.
"어머. 우진 오빠는 여기 아는 사람이 별로 없잖아요. 혼자 심심할까 봐 그랬죠."
"그래서 안 오려고 했습니다만?"
"에이. 맛있는 거 좋아하잖아요. 여기 오늘 한우 나와요. 투뿔. 술은 전통주 장인이 빚은 좋은 거."
"안 오려고 했는데 그래서 왔습니다."
TV에서 드라마가 시작됐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이미 촬영에도 참여하고 대본도 봤다. 모두 1화의 내용을 알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드라마에 집중하지 않았다. 이 자리는 1화 방송을 축하하며 잘 먹는 회식 자리였다.
드라마가 방송되는 도중에 작가인 유소진이 굳이 그 테이블로 자리를 옮겼다.
그녀가 말을 붙였다.
"저기, 차우진 씨."
97. 나인세븐 II
차우진은 유소진이 아니라 고기를 보며 말했다.
"이 집 고기 맛있네요."
유소진은 살짝 당황한 얼굴이 되었다가 방긋 웃었다.
"그렇죠. 맛있죠. 다음엔 제가 살까요?"
"뭘 그렇게까지."
"꼭 사고 싶어요."
차우진이 저쪽 자리에서 고기를 굽는 진소영을 힐끗 보았다.
'박재구한테도 잡히고 어제도 붙잡혔던 저 아가씨는 두 번이나 구해줬는데도 고기 한 번을 안 사네.'
그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이게 아니지. 두 번이나 나를 봤는데도 마스크 쓸 때만 알아보고 지금은 오히려 못 알아봤잖아.'
그가 유소진을 슬쩍 보았다. 그녀는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이 아가씨는 왜 이러지? 그때 눈이 부어 있어서 나를 제대로 보지도 못했는데? 왜 알아보기라도 한 것처럼….'
그가 유소진에게 물었다.
"혹시 나한테 관심 있습니까?"
"네?"
"하여간 이 마성의 매력은 어쩔 수 없다니까."
옆에서 정예지가 피식 웃었다.
"어머. 지금 그거 진심이에요?"
"당연히 농담이죠. 누가 이런 걸 진심으로 말합니까?"
"하긴. 거울을 볼 줄 알면 그럴 리가 없죠."
"뭐지? 예지 씨 묘하게 말에 가시가 있는데?"
"어머. 그럴 리가요."
진소영이 다른 테이블에서 고기를 굽다가 차우진 쪽을 슬쩍 돌아보았다.
"진짜로 어디서 본 거 같은데…."
"진 배우. 고기 탄다."
"네? 아! 잘 굽겠습니다! 제가 고깃집 알바를 해봐서 이런 건 진짜 잘…. 아!"
그녀가 차우진을 휙 돌아보았다. 왜 익숙한 느낌이 들었는지 깨달았다.
"아! 아!"
"왜 그래?"
"아니에요."
그녀가 방긋 웃으며 고기를 구웠다.
"완벽하게 구워드릴게요."
TV에서 드라마 1화가 끝났다.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
"피디님. 최고입니다!"
"작가님. 재미있어요!"
그러거나 말거나 고기에 집중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차우진이 대표적이었다.
"여기 소고기가 아주 살살 녹네요."
정예지도 잘 먹었다.
"나 이렇게 과식하면 안 되는데."
"그럼 그만 먹어요. 내가 먹을 것도 모자라겠네."
"너무 맛있게 굽잖아요. 무슨 고기 굽기 장인이신가? 비결이 뭐예요?"
"집중이죠. 단 한 점의 고기도 허투루 굽지 않겠다는 집중력."
그래서 맛있게는 굽는데, 속도가 느렸다.
차우진은 고기를 하나하나 정성을 다해 구웠다. 당연히 드라마가 방영되는 TV에는 관심도 없었다.
작가인 유소진까지 그럴 수는 없다.
그녀는 이 드라마가 첫 장편 드라마다. 단편 드라마나 독립영화 때는 좋은 반응도 얻고 상도 받았지만, 그게 장편의 성공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그래서 그녀는 1화 방송이 끝날 때까지는 이 테이블에 앉아서 고기만 조금 집어 먹으며 TV에 집중했다.
이제 1화가 끝났다.
그녀가 차우진의 집게를 잡으려고 손을 내밀었다.
"이제 제가 구울게요."
그녀의 손이 차우진의 손에 닿았다. 그런데 차우진이 집게를 놓지 않았다.
그녀가 고개를 갸웃하며 차우진을 보았다.
차우진이 그녀의 손을 밀어냈다.
"내 고기를 남에게 맡길 수는 없습니다."
"아니, 그래도 혼자 계속 구우셨으니까…."
정예지가 끼어들었다.
"그렇게 손 계속 잡고 있으면 스캔들 나요."
유소진이 손을 천천히 떼며 말했다.
"잡은 건 아니에요. 닿은 거지."
"소문내는 사람들에게는 진실은 안 중요해요. 루머를 만들 건수가 생겼다는 게 중요하지."
"하지만 나는 배우가 아니잖아요."
"어머. 그렇죠. 그럼 괜찮…지는 않죠. 이 바닥 소문 장난 아니에요. 손잡지 말아요."
"아, 네."
그들이 있는 곳으로 신인배우 진소영이 다가왔다. 오윤서는 이미 다른 자리로 가서 의자가 하나 남았다.
그녀가 그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앗. 제가 구울게요! 이리 주세요!"
이번에는 유소진이 진소영을 말렸다.
"배우는 그러면 스캔들 나요. 그러지 마요."
"네?"
"하지 마요."
"아, 네. 작가님."
정예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금방 배우시네요."
유소진이 말했다.
"내가 원래 적응이 빨라요."
차우진은 그들이 뭐라고 하든 상관하지 않고 고기를 구웠다.
정예지와 유소진은 차우진이 먹어도 된다고 알려준 것만 골라서 하나씩 집어먹었다.
진소영도 고기를 하나 먹어보고 호들갑을 떨었다.
"어머! 너무 맛있어요!"
그녀가 고기를 먹은 후에 차우진을 보며 방긋 웃었다.
"우리 어디서 만났는지 생각났어요."
정예지가 끼어들었다.
"뭐죠? 둘이 아는 사이에요?"
"아, 그게요."
차우진이 선을 긋는다.
"난 기억 안 납니다만?"
"네? 아니, 그럴 리가…. 아. 그렇죠. 아닌가 봐요."
유소진의 눈이 조금 가늘어졌다. 그녀는 진소영의 반응이 낯설지 않았다.
'정체를 눈치챘지만 남들 앞에서 말하면 안 되는 그런 느낌?'
유소진이 차우진을 보았다.
'혹시, 나만 구해준 게 아니라, 다른 사람도 구해준 건가?'
차우진은 진지하게 고기를 구웠다. 유소진이 그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역시 히어로였어.'
차우진이 말했다.
"뭐해요. 고기 먹어요."
"네에."
유소진 작가의 목소리에 자기도 모르게 살짝 콧소리가 섞였다.
정예지는 그 소리를 듣고 뭔지 모를 위기감을 느꼈다.
'뭐지? 고속도로에서 안전운전하다가 칼치기 양카한테 추월당하는 듯한 이 느낌은?'
***
드라마 '친구와 연인 사이' 첫 방송 기념 회식이 끝났다.
차우진은 일단 집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왔다.
집에 들어갈 때는 아파트 입구부터 현관, 엘리베이터 CCTV에 모두 찍혔다.
나올 때는 공간이동 스킬을 사용해 CCTV를 모두 피했다.
차유리는 며칠째 집을 비우고 출장 중이다.
차우진이 이번에는 나인세븐 엔터의 5층짜리 건물 옥상으로 이동했다.
그가 그곳에 서서 궁리했다.
"이놈들이 레드 크리스털을 어디서 구했을까?"
신인 배우 진소영을 협박하던 매니저가 신종 마약인 레드 크리스털을 가지고 있었다.
"건물 안에서 떠드는 소리를 도청이라도 하면 좋겠다만…. 음? 가만. 불가능한 건 아니지 않나?"
차우진이 생각해보았다.
"도청장치라…. 어차피 내가 계속 듣고 있을 건 아니니까 녹음기가 더 안전하겠네."
차우진이 맞은편 7층 건물 옥상으로 점프했다.
이미 밤이 깊어 나인세븐 엔터의 불은 꺼져있었다. 창문이 열린 곳도 있었다.
충분히 쉬었다가 공간이동 스킬을 사용하면 7층 옥상에서 맞은편 나인세븐 건물 5층 창문으로 침투할 수는 있다.
그런데 만약 복도에 CCTV가 있으면 일이 심각해진다. 아무도 없던 복도에 사람이 갑자기 나타나는 모습이 찍히게 할 수는 없다.
"일단 복도에 CCTV가 있는지부터 확인해야겠다."
***
김상훈은 나인세븐 엔터의 배우다. 그는 비중이 낮은 조연으로 영화나 드라마에 몇 번 출연했다.
그가 직접 운전한 차에서 내리며 욕을 했다.
"씨발새끼들. 그 여자가 도망친 게 내 잘못이야? 처맞은 건 자기들이면서 왜 나한테 약을 안 줘?"
어제 나인세븐의 매니저와 직원 둘이 진소영을 협박하다가 차우진에게 얻어맞고 기절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 사건을 경찰에 신고하지는 못했다. 납치 감금에 마약까지 쓰려던 놈들이 경찰에 신고할 수는 없다.
블러드 크리스털은 멸망급 마약이지만, 그 원료인 레드 크리스털은 금단증상이 약한 편이다. 그래서 김상훈은 약이 떨어져도 일상생활은 가능했다.
그렇지만 중독성은 다른 마약들처럼 강하다. 금단증상도 상대적으로 약할 뿐 없는 건 아니다.
김상훈은 지금 상당히 불안정한 상태였다.
"내가 그 새끼가 누구인지 아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찾으라고…. 어?"
김상훈이 입을 다물었다. 어둠 속에 사람이 서 있었다.
"누구…."
차우진이 나타났다.
"네가 방금 말한 그 새끼다."
"히익!"
"왜 놀라?"
"아, 아닙니다. 여긴 어떻게…."
"찾아냈느냐고? 너야 내 손바닥 안에 있으니까."
"왜, 왜 나를 찾…."
"너 약 끊고 싶다더니 왜 또 약 타령이냐?"
김상훈이 당황한 얼굴로 어색하게 웃었다.
"하, 하하. 그게 개인의 의지로 끊을 수 있는 게 아니라서요."
차우진이 이선정 박사에게 성분 분석을 부탁한 건 딱 한 알이다. 그가 하얀 약통을 보여주었다.
"원하냐?"
김상훈의 눈이 커졌다.
"어? 그건, 매니저가 가지고 있던 그거…."
"이거 아홉 개나 남았다?"
김상훈은 당장 달려들어 약을 빼앗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면 처맞기만 하고 약은 못 얻는다는 걸 안다.
김상훈이 급히 물었다.
"원합니다. 얼마입니까? 얼마면 되겠습니까?"
"이 새끼가 누굴 마약상으로 아나."
"예? 아니, 그럼 왜 그걸 보여주는 건데…."
차우진이 말했다.
"너 가서 너희 기획사 내부 사진 좀 찍어와라."
"네?"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서."
김상훈은 당황했다.
"아니, 거기는 저도 못 들어가는 곳이 많은데 그걸 어떻게…."
"해보지도 않고 안된다고 하는 거 보니까, 약이 필요 없나 보다?"
김상훈이 즉시 손을 흔들었다.
"아, 아닙니다. 필요합니다."
"약을 원하면 뭐라도 찍어와야 하지 않겠냐? 짜식이 성의가 없어."
차우진의 요구는 김상훈이 할 수 있는 수준이다. 그가 당장 고개를 끄덕였다.
"열심히 찍어보겠습니다!"
"이 약은 사진을 가져와야 준다."
"지금 당장 회사로 들어가서 사진을 찍어오겠습니다!"
***
김상훈은 나인세븐 엔터 건물로 들어가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었다.
이미 일반 직원들은 퇴근한 후라 그런 그를 보는 사람은 없었다. 대신에 사무실은 모두 문이 잠겨 있었다.
그 건물에는 낮에도 들어갈 수 없는 통제구역이 있다. 사장실도 그런 곳이다.
김상훈이 복도 사진만 부지런히 찍으며 말했다.
"이런 거로는 안 될 텐데."
그가 휴게실과 화장실 사진도 좀 찍었다. 연습실도 창문 밖에서 찍었다.
"에라. 모르겠다."
그는 어떻게 하면 약을 얻을지 생각했다.
"일단 이 사진들로 두세 알이라도 받아내자. 나머지는 낮에 찍어서 넘겨주고 받으면 되겠지."
***
김상훈은 사진을 찍은 후에 기획사를 나와 차우진을 찾아갔다.
그런데 만나기로 한 장소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가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이 새끼 어디 있는 거야?"
등 뒤에서 바람이 살짝 불었다. 차우진의 목소리가 같이 들렸다.
"또 새끼네?"
김상훈이 황급히 뒤로 돌아서며 인사했다.
"형님! 여기 계셨습니까?"
"내가 왜 네 형님이냐?"
"연륜이 있어 보이셔서요."
"그러면 나는 형님 새끼냐?"
"그럴 리가요! 제가 새끼죠. 제가."
차우진이 물었다.
"사진은?"
김상훈이 스마트폰을 들어 보였다.
"여기 찍어왔습니다. 번호 주시면 바로 전송하겠습니다. 그런데 그 전에, 계약금 느낌으로 알약 두 개만 주시면…."
차우진이 김상훈의 손에서 휴대폰을 탁 잡아챘다. 김상훈은 당황했다.
"어?"
차우진이 사진을 넘겨보며 말했다.
"많네?"
"네? 네? 아. 네. 많습니다. 그거 다 보시려면 너무 오래 걸리니까, 일단 약 좀…."
차우진이 하얀 약통을 휙 던져줬다. 김상훈이 두 손으로 약통을 얼른 받았다.
김상훈의 손이 덜덜 떨렸다. 약이 손에 들어오니까 마음이 급해졌다.
그가 약을 한 알 빼냈다. 손이 떨려서 약이 바닥에 떨어졌다.
"어이쿠. 이 귀한걸."
그가 알약을 얼른 손가락으로 집어서 입에 넣었다.
신맛이 확 올라왔다.
"그래. 이 맛은…. 셔. 너무 셔."
김상훈은 이 맛을 안다. 아주 익숙한 맛이다.
그가 소리를 질렀다.
"씨발! 이거 비타민 C잖아!"
그가 차우진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보이지 않았다.
그가 급히 다른 알약들도 확인했다.
모두 비타민 C였다.
"이 개새끼야!"
그가 약통을 다시 확인했다. 매니저가 가지고 있던 그 통이었다.
김상훈이 손을 떨며 다른 비타민 C 알약을 입에 넣었다.
"혹시 진짜가 섞여 있을…. 이것도 셔! 으아아!"
***
차우진이 나인세븐 엔터 건너편 건물 옥상에서 말했다.
"마약을 그렇게 먹었으면 비타민으로 건강도 좀 챙겨야지."
98. 나인세븐 III
차우진이 김상훈에게서 빼앗아온 휴대폰을 확인했다. 이미 유심칩은 빼놓았다. 와이파이도 꺼놓았다.
휴대폰에 들어 있는 사진을 확인했다.
"많이 찍기는 했는데, 주로 복도나 화장실, 휴게실이구나."
김상훈은 차우진을 잠깐이라도 속여보려고 사진을 많이 찍었다. 같은 곳만 찍으면 변명조차 할 수 없어서 공용 공간 위주로 찍었다.
"이러면 더 좋지."
차우진이 원한 건 사무실 사진이 아니다. 말로는 그런 걸 요구했지만, 실제로 필요한 건 5층 복도였다.
사장실은 5층에 있다. 5층 복도에는 창문이 열린 곳이 하나 있다. 창의 크기는 사람이 충분히 통과할 수 있을 정도였다.
문제는 복도 안쪽에 CCTV가 있느냐였다.
만약 복도로 공간이동을 했는데 그곳을 CCTV가 찍고 있으면, 증거를 없애기 위해 영상 저장 장치가 있는 곳에 불이라도 질러야 한다.
김상훈은 복도 사진을 특히 많이 찍었다. 차우진이 사진을 넘기다가 창문이 열려 있는 복도를 찾았다.
"여긴가?"
거긴 아니었다. 창문 밖 풍경의 높이가 달랐다.
차우진이 사진을 더 넘겼다. 열린 창문이 하나 더 나왔다.
"여기네."
그 사진에서도 창문 밖이 살짝 보였다. 풍경의 높이를 보면 몇 층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5층 복도 사진은 한 장 확보했으니까 이걸로 다시 찾으면…."
그가 그 사진에 나온 복도 모습과 일치하는 사진들을 골라냈다. 복도에 세워진 화분이나 문의 위치, 벽에 묻은 얼룩 등으로 5층 사진만 골라낼 수 있었다.
차우진이 그 사진들을 하나로 모은 후에 복도를 확인했다. 목적은 하나. CCTV가 있는지였다.
"없네?"
그가 다른 사진들을 보았다. 2층과 3층 복도에는 CCTV가 있었다. 그런데 사장실이 있는 5층에는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5층에는 숨겨야 할 게 있으니까 CCTV를 뺐겠지."
차우진이 내부 분석을 마친 후에 김상훈의 스마트폰을 부쉈다.
그가 길 건너편을 보았다. 나인세븐 엔터의 5층은 불이 꺼져있었다.
"퇴근할 때는 문단속을 잘했어야지."
차우진이 7층 건물 옥상에서 사라졌다. 거의 동시에 나인세븐 엔터 5층 복도에 나타났다.
공간을 이동한 거리가 근거리 전투 때보다 멀었다. 그만큼 더 피곤해졌다.
"스킬을 쓸 체력을 만들려면 역시 더 먹어야겠어."
그가 복도를 점검했다. 사진과 마찬가지로 CCTV는 없었다.
사장실도 확인했다. 문이 잠겨 있었다.
"이건 이럴 거 같더라."
문을 억지로 열 수는 있다. 그런데 그러면 상대도 침입자가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그는 사장실 문 앞에 있는 화분에 소형 디지털 녹음기를 숨겼다. 이 녹음기는 크기는 작지만 24시간 녹음 기능이 있다.
그가 복도를 걸었다. 끝쪽에 화장실이 있었다.
"여기도 하나 숨겨야…."
갑자기 인기척이 느껴졌다. 누군가 올라오는 소리였다.
"이런."
청소 담당 직원이 5층에 올라와 바닥을 청소했다. 청소기를 돌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누가 또 창문을 열어놓고 간 거야? 담배 피우려고 열었으면 다 피고 나서는 좀 닫아주지."
창문을 닫는 소리가 들렸다.
직원은 화장실에도 들어왔다. 변기도 확인하고 바닥도 닦았다. 세면대도 청소했다.
그 직원이 화장실을 나오다가 말했다.
"왜 어디서 자꾸 바람이 부는 느낌이지? 창문이 열린 곳이 있나?"
직원이 복도 창문을 다시 확인한 후에 아래로 내려갔다.
차우진은 직원이 화장실에 들어올 때는 단거리 공간이동 스킬을 써서 복도로 빠져나갔다. 직원이 복도로 나올 때는 다시 화장실로 들어갔다.
"스킬을 반복해서 쓰니까 지친다."
그가 세면대를 확인했다. 직원은 세면대의 위쪽만 청소했다. 세면대 아래 뒤쪽은 건드리지 않았다.
차우진이 그곳에 디지털 녹음기를 붙였다.
"화장실에 있을 때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보자."
***
차우진이 이튿날 밤에 다시 나인세븐 엔터 건물 5층으로 침입했다. 오늘도 창문은 열려 있었다.
"나와서 담배 피우는 놈이면 사장은 아닐 텐데, 매일 오는 놈인가?"
차우진은 화분과 화장실에서 녹음기를 회수했다. 오늘은 직원이 오기 전에 도로 빠져나왔다.
그는 7층 건물 옥상으로 돌아가 녹음파일을 확인했다.
24시간짜리 녹음기 두 개를 48시간 동안 확인할 필요는 없다. 고속으로 넘기다가 음성이 있는 부분만 정상 속도로 들으면 된다.
음성이 녹음된 부분은 많지 않아서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았다.
두 사람이 복도에서 대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진소영이었지? 이번에 선수로 만들려던 거."
"어. 맞아. 이상한 새끼가 작업장에 쳐들어왔을 때 도망쳤지."
"걔가 그 새끼에 대해 뭐 아는 게 있는 거 아닐까?"
"그때 분위기로는 모르는 것 같다고 하긴 했는데, 속이는 걸지도 모르지."
"다시 납치해서 확인해야 하는 거 아니야?"
"내가 볼 땐 지금은 때가 아니야. 위험해."
"왜?"
"드라마에 나와서 얼굴이 너무 알려졌잖아."
"그 드라마 잘 뽑혔더라. 걔 데려와서 접대 돌리면 효과 죽일 텐데."
"그러려면 약부터 중독시켜야 하잖아. 시청자한테 관심받고 있을 때 작업 치다가 탈 나면 감당 안 된다."
"그건 우리 생각이고, 형님은 가끔 그냥 지르시니까…."
그 이야기는 복도에 숨겨둔 디지털 녹음기에서 나왔다.
차우진이 말했다.
"진소영 씨는 내가 안 도와주면 큰일 나겠네. 이게 벌써 몇 번째야?"
그것 외에는 여자와 어떻게 놀았는지 자랑하는 이야기라서 건질 게 없었다.
차우진이 화장실에서 가져온 녹음기도 확인했다.
대소변 보는 소리만 가끔 녹음되어 있었다.
그러다 사람 목소리가 들렸다. 전화 통화 소리였다.
"오늘 밤에 만나기로 했으니까 너도 그리로 가라."
장소가 어디인지도 언급됐다. 서해안에 있는 창고 시설이었다.
"그래야 형님 체면이 살지."
통화는 거기서 끝났다.
차우진이 녹음기를 끄며 말했다.
"그래. 나도 현장이 편하다."
***
서해안 바닷가 한적한 곳에 창고가 있었다.
앞쪽에는 작은 어선 정도나 정박할 수 있는 허름한 선착장 시설도 있었다.
그 선착장에서 좀 떨어진 바위틈에서 도인선 기자가 검은색 옷을 입고 창고를 감시했다.
그녀는 야간 촬영 기능이 있는 카메라와 망원렌즈를 사용했다.
현장으로 검은색 승용차가 한 대 도착했다. 차에서 양복을 입은 남자가 내렸다.
도인선은 카메라로 그 남자를 보다가 눈에 힘을 주었다. 남자의 체형이 눈에 익었다.
"저 새끼는?"
얼굴은 확인되지 않았다.
지금은 한밤중이라서 망원렌즈를 써도 화질에 한계가 있었다. 게다가 상대는 마스크도 쓰고 있었다.
그래도 도인선은 상대가 누구인지 감이 왔다. 그녀가 주먹을 꽉 쥐었다.
"오케이. 최용구. 드디어 나타났구나. 이 기회를 오랫동안 기다렸다."
바다 쪽에서 배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카메라를 바다 쪽으로 돌렸다.
작은 배 한 척이 낡은 선착장으로 다가왔다. 미리 와 있던 사람이 선착장으로 마중을 나갔다.
콘크리트로 만든 좁은 선착장에 배가 정박했다. 배에서 선착장으로 발판이 걸쳐졌다.
배에서 네 사람이 내렸다. 그중에는 가방을 든 사람도 있었다.
도인선이 그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씩 촬영했다.
여기는 서해안이다. 바다를 건너면 중국이 나온다.
"역시 상대는 중국 조직인가? 최용구는 중국에서 뭘 사려는 거지?"
창고 쪽으로 차가 한 대 더 다가왔다. 이번에는 승합차였다.
배에서 내린 사람들이 경계하는 듯한 움직임을 보였다. 뭔가 떠드는 사람도 있었다.
상대편에서 손을 들어 진정시켰다.
도인선이 그 모습까지 확인한 후에 승합차 쪽으로 카메라를 돌렸다.
승합차에서는 남자 두 명과 여자 한 명이 내렸다.
그녀가 차에서 내린 여자를 확인했다.
그녀의 카메라는 야간 촬영이 가능하긴 하지만 이 거리에서 얼굴을 확인할 정도는 아니다.
그렇지만 지금 무슨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알 수 있었다. 여자는 손이 앞으로 묶인 채로 남자 두 명에게 끌려가고 있었다.
도인선은 당황했다.
"뭐, 뭐야? 납치야?"
이건 그녀의 예상과 달랐다.
"오늘 물건만 거래하는 거 아니었어?"
그녀가 갈등했다.
"이러면 안 되는데…."
그녀는 최용구의 중범죄 현장을 취재해 기사화하려고 오래전부터 노력했다. 그러다 오늘 거래 정보를 입수했다.
그녀가 지금까지 이 현장을 취재하기 위해 쏟아부은 시간은 엄청나게 길었다. 성과를 최대한으로 내려면 오늘 이후로도 취재가 계속되어야 한다.
"그래야 최용구를 확실히 잡을 수 있는데…."
그런데 방금 여자가 납치당하는 모습을 카메라로 보았다. 지금 신고하면 취재도 여기서 중단된다.
그녀가 갈등하다가 주머니 속 휴대폰을 손으로 잡았다. 112에 신고하기 위해서였다.
"그래. 사람은 살리고 보자. 다음에 기회가 또 있겠지. 그리고 지금까지 취재한 거로도 최용구에게 한 방 먹일 수 있…."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쥐새끼가 여기 있었네?"
그녀가 뒤를 휙 돌아보았다.
남자 세 명이 그녀가 있는 바위로 접근하고 있었다. 그중 한 명은 야시경을 얼굴에 걸치고 있었다.
'들켰다.'
잡히면 좋은 꼴은 못 본다.
그녀는 판단을 내리자마자 카메라만 들고 뛰었다. 휴대폰은 주머니에 있지만, 다른 짐은 그 자리에 버려두었다.
하지만 도망칠 수가 없었다. 그녀가 숨어 있던 바위 사이는 몸을 숨기고 촬영하기는 좋지만 탈출하기엔 좋지 않았다.
도망치는 그녀를 향해 테이저건이 날아왔다.
***
도인선은 정신을 차렸을 때 자신이 의자에 묶여 있다는 걸 깨달았다.
"당했다."
옆에서 진소영이 물었다.
"저기, 언니도 사채 썼어요?"
그녀가 옆을 보았다. 진소영도 묶여 있었다.
"네? 사채요?"
진소영이 말했다.
"난 아니에요. 친구가 내 이름으로 차용증을 쓰고 죽어버린 거지 내가 쓴 돈이 아니에요. 난 여기 있으면 안 된단 말이에요."
"그래서 잡혀 온 거예요?"
"나도 언니처럼 돈이라도 쓰고 잡혔으면 덜 억울할 거예요."
"나도 아니에요. 나는…."
창고 문이 열리면서 사람들이 들어왔다. 모두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도인선이 몸을 흔들며 그들을 향해 외쳤다.
"당장 이거 풀어!"
나인세븐 엔터의 사장 천중칠이 말했다.
"깨어났나?"
"당신 이러고도 무사할 거 같아? 나 기자야!"
"그러시군. 기자님이면 풀어드려야지."
"저, 정말이야?"
"구라다. 이년아. 크하하하."
천중칠이 손짓을 했다. 남자 두 명이 옆에 묶여 있던 진소영을 끌고 나갔다. 그녀가 소리를 질렀다.
"살려주세요! 사람 살려!"
"입 막아!"
"예!"
"읍! 읍!"
도인선이 창고에 들어온 놈들을 확인했다. 남아있는 셋과 진소영을 끌고 나간 두 놈 중에 최용구는 없었다.
천중칠이 물었다.
"너 지금 누구 찾냐?"
그녀는 이곳에 최용구가 왔다는 걸 안다. 야간에 카메라로 본 것이라 확실하진 않았지만 그렇게 판단했다.
그녀가 궁리했다.
'여기서 약하게 보이면? 날 죽일지도 몰라. 내가 패를 쥐고 있는 것처럼 행동해야 해.'
"넌 빠지고 최용구를 만나게 해줘."
천중칠의 표정이 굳었다.
"너 어디까지 알고 있지?"
"최용구와 천상칠의 커넥션. 오늘 여기서 중국 조직을 만난다는 거. 전부 다 알아."
천중칠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네년이 그걸…."
도인선은 확실한 정보를 아는 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한 마디 더했다.
"너희가 그 조직에서 그 물건을 산다는 것도 다 알아."
"뭐?"
"나를 풀어주지 않으면 모든 자료가 공개될 거야."
천중칠이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크하하하! 제대로 아는 건 없는 년이구나. 괜히 걱정했어."
"야! 내가 실종되면 그 자료가 전부 경찰에 넘어가고 기사로도 나간다고!"
"솔직히 말해봐. 그런 자료는 없잖아?"
도인선은 천중칠이 처음에는 긴장했다가 중간에 느긋해졌다는 걸 깨닫고 당황했다.
'처음에는 얼굴이 일그러졌는데 왜?'
그는 천중칠의 표정이 언제 풀렸는지 기억해냈다.
'물건을 산다고 했을 때?'
그녀는 뒤늦게 깨달았다.
"중국에서 사는 게 아니라, 파는 거였어?"
"역시 기자님은 다르네. 벌써 눈치챘단 말이지. 역시 살려두면 위험하겠어."
"도대체 중국 조직에 뭘 파는데…."
"그걸 가르쳐주겠냐? 궁금한 채로 그냥 죽어라. 크하하하."
창고 입구에서 차우진이 말했다.
"야. 수출의 역군. 나도 너희가 뭐 파는지 궁금한데, 그냥 말하지?"
창고에 있던 세 놈이 목소리를 듣고 뒤를 휙 돌아보았다.
천중칠이 인상을 구기며 물었다.
"넌 누구냐?"
"지나가던 낚시꾼."
"뭐?"
그의 눈이 차우진의 몸을 훑었다.
"낚싯대는 어디에 두고?"
"그걸 믿냐? 당연히 구라지."
"이 새끼가!"
99. 수출의 역군
나인세븐 엔터 사장 천중칠이 화를 벌컥 냈다.
"뭐해? 저 새끼 잡아! 반항하면 죽여!"
그가 데려온 두 놈이 움직였다. 한 놈은 삼단봉을 뽑아 펼쳤다. 다른 놈은 잭나이프를 뽑았다.
차우진이 창고 안으로 들어와 천중칠을 향해 걸어가며 말했다.
"창고에 여자를 묶어둔 걸 보면 좋은 놈들은 아닐 테고."
옆에서 삼단봉이 날아왔다. 차우진이 몸을 뒤로 젖히며 손을 뻗었다.
삼단봉이 허공을 갈랐다. 차우진의 주먹은 적의 목을 후려쳤다.
"켁!"
적이 비틀거렸다.
차우진이 적의 오른손에서 삼단봉을 가로챘다. 그런 후에 적의 머리를 삼단봉으로 내리쳤다.
"컥!"
적은 짧은 비명만 남기고 엎어졌다.
그러는 사이에 잭나이프를 든 놈이 달려들었다.
차우진이 달려드는 놈을 향해 삼단봉을 수평으로 휘둘렀다.
적이 한쪽 팔로 삼단봉을 막으며 다른 팔로는 칼을 내질렀다.
삼단봉이 왼팔을 때리는 속도가 적의 칼보다 빨랐다.
적의 팔이 뚝 부러졌다.
"끄악!"
팔이 부러졌는데도 적의 칼은 계속 들어왔다. 적이 고통을 참으며 차우진의 배를 향해 칼을 내질렀다.
칼날이 닿지 않았다. 차우진은 이미 그만큼 옆으로 움직인 후였다.
적은 허공을 향해 허우적댔다. 차우진이 갈 곳을 잃고 앞으로 내민 손에서 단검을 잡아챘다.
적은 당황했다.
"어?"
그가 빼앗은 단검을 적의 어깨에 푹 찔렀다.
"끄아악!"
그런 후에 비명을 지르는 놈의 턱을 삼단봉으로 올려쳤다.
적은 뒤로 나가떨어졌다.
대신에 삼단봉이 뚝 부러졌다.
차우진이 부러진 삼단봉을 던져버리며 혀를 찼다.
"장비 품질이 왜 이래? 너희 조직 중간에서 누가 돈을 빼돌리고 싸구려로 보급했나 보다?"
천중칠이 재킷을 크게 젖히며 권총을 뽑았다.
"이 새끼. 칼 좀 쓰는 것 같…."
차우진이 방금 빼앗은 칼을 휙 던졌다. 칼날이 화살처럼 날아가 천중칠의 가슴에 푹 꽂혔다.
"커, 컥…."
천중칠이 비틀거리며 방아쇠를 당겼다.
총알이 나가지 않았다. 권총을 뽑자마자 칼을 맞는 바람에 안전장치를 해제하지 못했다.
천중칠은 그걸 깨닫지 못하고 방아쇠를 몇 번 더 당겼다. 소용없었다.
차우진이 성큼 다가가 천중칠의 가슴에 꽂힌 칼을 뽑았다.
그 칼을 다시 천중칠의 어깨에 꽂았다.
"끄어억!"
천중칠이 무릎을 꿇었다. 어깨를 찔리는 순간 팔과 오른손까지 힘을 잃었다. 그 상태로는 방아쇠를 당길 수 없다.
천중칠이 무릎을 꿇은 채로 물었다.
"어, 어느 조직에서 왔…."
"네가 생각하는 거기서 보냈다."
천중칠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이 창고에 있던 세 놈은 모두 쓰러졌다.
차우진이 도인선을 돌아보았다.
"쯧. 사서 고생이시네."
그가 단검으로 도인선의 몸에 묶인 끈을 잘랐다.
"일단 여기서 나갑시다."
도인선이 급하게 말했다.
"납치된 사람이 또 있어요!"
"압니다."
차우진이 도인선을 데리고 창고 밖으로 나갔다. 다른 창고는 거리가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다.
"고마워요. 그…."
그녀는 자신을 구해준 사람이 차우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나를 아는 것처럼 말하는 것도 그렇고, 대단한 무술 실력도 그렇고, 키도 비슷하고….'
그런데 배의 형태가 달랐다.
'차우진 씨는 배가 나왔는데, 이 사람은 아니잖아.'
그래서 확신하지 못했다.
차우진이 도인선의 가방과 카메라를 챙겨주며 말했다.
"역시 도인선. 천천히 해도 되는데 이렇게 서두른다니까. 그러다 손해도 보고. 사람이 참 변하지를 않아."
도인선은 멸망한 세계에서도 행동력이 강했다. 방어 성향으로 바뀌긴 했지만 타고난 본성을 바꾸지는 못해 종종 적극적으로 대응하곤 했다.
그러다 총에 맞은 일도 있었다.
도인선이 물었다.
"저 아세요?"
"모릅니다."
"진짜요?"
"모른다니까요. 그나저나."
차우진이 잔소리를 했다.
"여긴 왜 혼자 온 겁니까?"
"정보가 들어와서요."
"그게 함정이란 생각은 못 합니까?"
도인선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런 거예요? 이게 다 함정이었어요?"
"모릅니다."
"네?"
"함정을 판다 하더라도 오늘 여기로 유인하진 않을 텐데, 저놈들이 정보를 흘리다가 뭔가 실수라도 했나 보군요."
"아니요. 이 장소는 제가 그동안 모은 정보와 새로 얻은 정보를 분석해서 알아낸 거예요. 새로 얻은 정보만 있었으면 바닷가가 아니라 산으로 갔겠죠. 그것도 내일쯤에."
"저놈들이 함정을 파긴 팠는데, 도 기자의 분석능력을 과소평가한 거네요."
"아마도요."
"그럼 저놈들이 무슨 거래를 하는지도 알아냈습니까?"
"이놈들이 중국에서 뭔가를 사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판대요."
"그리고?"
"아직까진 거기까지만…."
차우진이 잠시 생각하다가 물었다.
"레드 크리스털이라고 압니까?"
"들어는 봤어요. 신종 마약이잖아요."
"얼마나 압니까?"
"자세한 건 저도 몰라요. 최근에 나와서 몇 나라에 돌기 시작했다는 정도?"
"어쩌면, 그걸 국내에서 만들어서 수출하나 봅니다."
도인선의 눈이 동그래졌다.
"네? 그 마약이 국산이었어요?"
"최초에 개발된 곳이 어디인지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건 10년 후 미래에도 알려지지 않았다.
블러드 크리스털은 멸망급 재난을 일으킨 마약이다.
레드 크리스털은 그 멸망급 마약의 첫 번째 소재다.
멸망 초기에는 소재의 최초 생산자까지 추적할만한 여력이 없었다.
"개발자가 국내에 있을 수도 있고, 국내에서는 하청 생산만 하는 걸 수도 있는데, 어쨌든 뭔가 아는 놈이 국내에 있겠죠."
"그럼 중국에 레드 크리스털을 수출하려고…."
"그걸 팔고, 그 대금으로 뭔가 받겠지요. 마약을 만들 원자재도 받고, 무기도 받고. 돈이야 뭐 당연하고. 수출입을 동시에 하는 놈들이네."
"아. 그렇겠네요. 마약의 대가로 저 총 같은 걸…. 총?"
그녀가 긴장한 얼굴로 천중칠을 가리키며 물었다.
"총 저거 빼앗아둬야 하지 않나요?"
"저놈은 못 깨어납니다."
"주, 죽었나요?"
"아직은 안 죽었습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총만 챙기면…."
"경찰이 왔을 때 저 총을 쥐고 있는 상태로 발견되어야 하니까 그냥 놔둬요."
도인선은 당황했다.
"경찰이요? 신고하셨어요?"
"신고는 도 기자가 해야죠."
"제가요?"
"지금 말고 내가 떠난 후에."
도인선은 그가 떠난다는 말을 듣고 급히 말했다.
"저 말고도 납치된 사람이 또 있어요. 끌려갔어요."
"안다니까요."
"구해야 해요."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잘 숨어 있어요. 카메라로 내가 가는 방향은 찍지 말고."
"네?"
"기사에 낼 사진이 필요하면 여기만 찍어요."
"아…. 네. 취재원 보호, 아니, 저를 살려준 분인데 제가 곤란하게 해드릴 순 없죠. 그런데 그…."
"뭡니까?"
도인선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다 끝나고 난 후에는 저쪽 상황도 기사로 써도 되죠?"
"내가 떠난 후라면 기사를 쓰든 사진을 찍든 마음대로 해요. 물론 나에 대한 건 빼놓고."
"네!"
***
신인배우 진소영은 공포에 질려서 달달 떨었다.
"왜, 왜 이러세요? 저 배우예요. 이번에 드라마에도 나왔어요. 저한테 이러면 큰일 나요!"
KMTV 기자 최용구는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진소영을 죽일 게 아니라서 얼굴은 드러내지 않았다.
다른 놈들도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상칠파 두목 천상칠이 실실 웃으며 말했다.
"네가 방송에 나가서 네 가치가 더 높아졌지. 근데 너 차용증 썼잖아. 그럼 빚 갚아야지?"
진소영은 차용증이 지긋지긋했다. 몸은 겁이 나서 달달 떨리는데도 소리를 빽 질렀다.
"내가 쓴 것도 아닌데! 그리고 그거 태워버렸잖아!"
"그래도 빚은 누군가는 갚아야지?"
"돈은 내가 뜨면 갚아줄게요! 나 방송 나갔다니까요?"
"그러지 말고 손님 접대만 좀 해. 그럼 보내줄게."
"싫어!"
"다들 처음엔 그렇게 말하지. 일단 약부터 먹자."
천상칠이 알약을 꺼냈다. 붉은빛이 도는 알약이었다.
"이거 먹고 기분 좋아지면 다시 말하자고. 야. 술 가져와라. 약은 술이랑 같이 해야 효과가 더 좋지."
"형님. 소주 가져올까요?"
"이 새끼가. 중국 손님한테 좋은 향 풍겨야 할 거 아냐. 꼬냑으로…."
비명이 멀리서 들였다. 창고의 문이 닫혀 있어서 들리는 소리가 그리 크진 않았다.
천상칠의 표정이 싹 변했다.
"뭐지? 중국 손님들이 마음을 바꾸었나? 다들 장비 챙겨!"
그의 부하들이 무기를 꺼냈다.
천상칠이 부하 중 하나에게 손짓했다.
"나가서 3번 창고 확인해."
그의 부하가 창고 문을 살짝 열고 밖으로 고개만 조금 내밀었다가 들어왔다.
"형님. 3번 창고 쪽은 조용합니다."
"그럼 그 비명은 뭐야? 중국이 아니면 어디…. 잠깐. 1번 창고에 지금 누구 있어?"
"작은 사장님이 그 기자를 직접 다루겠다고…."
"혼자?"
"아닙니다. 두 녀석이 같이 있습니다."
천상칠이 욕을 했다.
"씨발. 손님들 가실 때까지는 조용히 다루랬더니, 그년을 죽인 거 아냐?"
지금 이곳에 개인 휴대폰을 켜놓은 상태로 가지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천상칠도 개인 휴대폰은 꺼놓았다.
대신에 대포폰이 몇 개 있었다. 그가 그중 하나를 집었다.
천상칠이 천중칠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는 가는데 상대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천상칠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뭐지? 야. 조금 전에 그 비명. 여자 목소리였냐?"
"소리가 작아서 모르겠습니다."
"씨발. 1번 창고에 문제가 생겼다. 나가자."
최용구가 옆에서 말했다.
"천 사장. 분위기가 이상한데 나는 잠시 비켜있는 게 낫겠지?"
천상칠의 얼굴이 더 구겨졌다.
"듣는 귀가 있을 때는 성을 부르지 말라고 했잖아!"
"어차피 저 여자는 천 사장이 시키는 대로 하게 될 텐데…."
"변수는 줄여야 할 거 아냐!"
"그리고 지금 1번으로 가면 중국 손님과의 협상은 어쩌게?"
"씨발. 진짜 말 많네. 일이 마무리되면 돌아올 테니까, 그냥 당신도 여기 있어!"
최용구도 욕을 뱉었다.
"씨발. 괜히 과민반응하는 거 같은데."
천상칠이 야시경을 가진 부하에게 손짓했다.
"네가 나가서 1번 창고 확인해!"
창고 문이 활짝 열렸다. 부하가 야시경을 얼굴에 쓰고 오른손에 칼을 쥔 채로 밖으로 나갔다.
몇 초 후에, 나갔던 놈이 도로 창고 안으로 날아와 바닥에 처박혔다.
"케엑!"
그놈의 가슴에는 칼이 박혀 있었다. 얼굴에 쓰고 있던 야시경도 사라졌다.
천상칠은 당황했다.
"뭐, 뭐야!"
차우진이 창고 안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상칠이가 누구냐?"
천상칠이 소리를 질렀다.
"너 이 새끼! 누구냐!"
"누가 보냈는지 생각나는 데가 없냐? 거기서 보냈는데."
"뭐?"
"생각 안 나면 말고."
천상칠이 부하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왜 구경만 하고 있어? 저 새끼 죽여!"
천상칠의 부하 넷이 차우진을 향해 달려갔다. 다들 칼 하나씩은 쥐고 있었다.
차우진이 조직원들을 향해 걸어갔다. 적이 네 방향에서 차우진을 포위했다.
천상칠은 그 모습을 보고 확신했다.
'멍청한 새끼. 완전히 포위됐다. 넌 이제 죽었다.'
천상칠이 소리를 질렀다.
"죽여!"
조직원 넷이 거의 동시에 차우진을 덮쳤다.
차우진이 시간 가속 스킬을 사용했다.
그 스킬은 유효 시간이 짧다.
차우진은 일부러 적에게 포위된 후에 스킬을 사용했다. 그래야 동시에 처리할 수 있는 놈이 많아진다.
적의 칼날이 눈앞에서 날아왔다. 느리게 보였다.
차우진이 몸을 슬쩍 젖히며 적의 칼을 피했다.
적의 허리에 칼이 하나 더 있었다. 차우진이 손을 내밀어 적의 허리에서 칼을 뽑았다.
그 칼을 뽑자마자 오른쪽으로 쭉 뻗었다.
오른쪽에서 칼을 높이 들고 달려들던 놈의 가슴에 그 칼이 꽂혔다.
"컥!"
차우진을 정면에서 공격한 놈은 허공을 베었다가 칼날을 가슴 앞에 세우며 다시 자세를 잡으려고 했다.
차우진이 발차기를 앞으로 날렸다. 발이 적의 손을 밀어 찼다.
적이 쥐고 있던 칼날이 적의 가슴에 깊게 박혔다.
"케엑!"
등 뒤에서도 칼이 다가오고 있었다. 차우진이 뒤로 돌아서며 상체를 젖혔다. 그의 가슴 바로 앞을 칼날이 지나갔다.
차우진이 뒤에서 공격한 놈의 다리를 걷어찼다. 적이 자빠지면서 손을 앞으로 뻗었다.
그 손에서 칼을 잡아챘다.
왼쪽에서 공격하는 놈도 있다.
차우진은 짧은 시간에 셋을 잡았다.
시간 가속이 끝났다.
상관없다. 어차피 남은 건 한 놈이다.
차우진이 옆으로 점프하며 칼을 던졌다. 작살처럼 날아간 칼이 왼쪽 놈의 가슴에 꽂혔다.
"으아악!"
적이 고꾸라졌다.
넷이 덤볐는데 셋이 칼을 맞고 하나는 넘어졌다. 거기까지 걸린 시간은 1초를 살짝 넘었다.
차우진이 마지막 남은 놈을 내려다보았다.
뒤로 넘어진 놈이 엉덩이를 끌며 다리로 바닥을 밀었다. 얼굴은 공포에 질려 있었다.
"으, 으아아!"
차우진이 천상칠을 돌아보며 물었다.
"야. 더 없…."
천상칠이 권총을 뽑자마자 방아쇠를 당겼다.
시간 가속은 방금 사용했다.
스킬 쿨타임에 걸렸다.
100. 장웬
시간 가속 스킬은 쿨타임에 걸렸다.
차우진이 일단 옆으로 뛰었다. 천상칠이 발사한 총탄이 차우진이 있던 곳을 지나갔다.
차우진이 이동한 쪽에는 칼을 맞고 고꾸라진 놈이 있었다.
차우진이 그놈이 떨어뜨린 칼을 재빨리 잡았다.
천상칠이 다시 방아쇠를 당겼다.
차우진은 칼을 잡자마자 바닥을 박차며 옆으로 한 바퀴 굴렀다.
날아온 총탄이 쓰러져 있던 조직원의 몸에 꽂혔다.
차우진이 자세를 회복하자마자 단검을 던졌다. 화살처럼 날아간 칼이 천상칠의 가슴을 때렸다.
천상칠이 뒤로 주춤 물러났다.
그런데 칼날이 가슴에 박히지 않았다.
차우진은 그 이유를 깨달았다.
'방검복을 비싼 거 입었구나.'
차우진도 차유리에게 옷 속에 입을 수 있는 방검복을 하나 사주었다. 그래서 저런 방검복의 성능을 안다.
천상칠이 계속 방아쇠를 당겼다. 그의 권총은 6연발이 아니라 탄창을 사용하는 반자동권총이다.
아직 탄창에 탄약이 많이 남아있었다.
차우진이 천상칠의 사격 방향을 확인하며 창고 문으로 뛰었다.
총탄이 계속 날아왔다. 그중 한 발은 엉덩이를 끌며 뒤로 물러나던 부하의 몸에 맞았다.
"으아악!"
차우진이 창고 밖으로 몸을 날렸다.
천상칠이 권총으로 창고 문을 겨눈 채로 숨을 몰아쉬었다.
"허억. 허억."
긴장했더니 숨이 가빴다.
"저 새끼 뭐, 뭐야! 어떻게 혼자서 넷을 순식간에 잡아!"
그는 차우진이 부하들과 싸울 때의 움직임을 떠올렸다.
그가 권총을 창고 입구에 겨눈 채로 말했다.
"씨발. 마네킹 넷을 세워놓고 싸워도 방금 그것보단 오래 걸려!"
최용구 기자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천 사장. 여기서 총을 쏘면 곤란하지 않아? 아무리 바닷가라지만 누가 총소리를 들으면 어떻게 하려고…."
"씨발. 안 쐈으면 우리도 다 뒈졌어!"
"그, 그럼 그 새끼는 잡았어?"
"당신 눈에는 잡은 거로 보여?"
"그래도 총알을 맞았으면…."
천상칠도 그건 확인하지 못했다.
"몰라. 맞았으면 좋겠는데. 나가서 확인해야…."
그걸 시킬 사람이 없었다.
천상칠이 최용구에게 말했다.
"당신이 나가야겠는데?"
최용구가 정색했다.
"천 사장. 그건 아니지. 내가 나갔다가 칼이라도 맞으면 뒷감당이 되겠어?"
"씨발."
진소영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차우진은 얼굴을 완전히 가리고 나타났다. 이번에는 고글을 써서 눈동자조차 노출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녀는 누가 나타난 건지 눈치챘다.
'차우진 씨?'
얼굴이나 체형을 보고 눈치챈 게 아니다. 이미 두 번이나 차우진이 구해줬기 때문에, 이번에도 차우진일 거라고 짐작하는 것뿐이다.
지난번에도 차우진이 구해줬다는 증거는 없다. 마스크 때문에 그때도 얼굴은 보지 못했다.
그래도 그녀는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또 나를 구하러 오셨어. 벌써 세 번째야.'
그녀가 그 이유를 추측했다.
'혹시 나한테 관심이 있어서? 나를 지켜주시나? 이건 운명인가?'
***
차우진이 창고 밖에서 작게 말했다.
"세 번이나 납치되니까 세 번이나 구하게 되네. 이 정도면 악연인데."
차우진은 방금 시간 가속을 사용했다. 아직 스킬 쿨타임이 끝나지 않았다.
천상칠은 지금 창고 입구를 반자동권총으로 겨누고 있다. 차우진이 들어가면 난사할 게 뻔하다.
단거리 공간이동 스킬을 쓰면 천상칠의 뒤를 잡을 수 있다. 그런데 그건 목격자가 있을 때는 써서는 안 된다.
게다가 기왕이면 천상칠을 살려서 레드 크리스털에 관한 정보를 알아내야 한다.
차우진이 옆을 보았다. 다른 창고에서 사람들이 뛰어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천상칠이 말한 중국 고객들이네. 저쪽에도 정보가 있으려나."
단거리 공간이동은 창고로 들어갈 때는 쓰면 안 되지만 저쪽은 이야기가 다르다.
지금은 어두운 밤이다. 여기는 가로등도 없다. 불빛은 창고 문에서 나오는 것밖에 없다.
차우진이 조금 전에 빼앗은 야시경을 얼굴에 썼다.
"창고에 있는 놈들은 못 나올 테니까, 외국 손님들부터 처리하자."
***
장웬은 중국인이지만 조선족이라 한국말을 할 줄 알았다. 그래서 그가 오늘 거래의 책임자로 부하들을 데리고 서해안에 도착했다.
그는 오늘 접대를 꽤 기대했다.
"드라마에 나온 배우를 붙여준다더니."
그래서 입맛을 다시며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총소리가 들렸다.
장웬이 권총을 뽑았다. 그와 함께 온 부하는 셋이다. 그중 한 놈은 권총이 있었다.
권총을 쥔 부하가 물었다.
"형님. 한국 경찰일까요?"
"그랬으면 이렇게 조용할 리가 없잖아."
"그럼…."
"다른 조직에서 약을 노리는 거겠지. 우리 돈도 겸사겸사 노리고."
그가 부하들을 데리고 창고 밖으로 나가며 말했다.
"끼어들어서 총이나 몇 발 쏴주고 물건값이나 깎자."
"깎은 돈은 어떻게…."
"너희들도 한 몫씩 떼어줄 테니까 나중에 입이나 다물어."
"감사합니다. 형님."
장웬이 부하들과 2번 창고로 걸어갔다.
갑자기 바람이 살짝 불었다. 제일 뒤에 있던 놈이 무슨 일인가 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뒤를 돌아보는 놈의 가슴에 칼이 푹 박혔다. 입을 틀어막혀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차우진이 그놈의 손에서 칼을 빼앗은 후에 다음 놈에게 접근했다.
두 번째 놈의 가슴에도 칼을 박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소리가 살짝 났다.
"컥."
장웬과 부하가 뒤로 휙 돌아섰다.
"어?"
"기습이다!"
장웬은 고민하지 않았다. 즉시 권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차우진의 앞에는 방금 칼에 찔린 놈이 있었다. 총탄이 중국 조직원의 몸에 퍽퍽 박혔다.
차우진은 그놈의 손에서 흘러나오는 칼을 잡았다.
중국 조직원을 방패로 쓰고 있지만 방어용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장웬의 사격부터 중단시켜야 한다.
차우진이 단검을 던졌다. 칼날이 빨랫줄처럼 날아가 장웬의 어깨에 푹 박혔다.
"으아악!"
그의 부하가 뒤늦게 권총을 들었다.
차우진이 시체가 된 조직원을 옆으로 밀어버리고 돌진했다.
부하가 차우진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차우진도 시간 가속 스킬을 사용했다. 적의 총구 방향이 선명하게 보였다.
차우진이 앞으로 달리면서 몸을 옆으로 젖혔다. 총탄이 그의 바로 옆을 스치듯이 지나갔다.
거리가 너무 가까워서 방아쇠를 두 번 당길 틈은 없었다.
차우진이 적의 손목을 후려쳤다. 적이 다시 방아쇠를 당겼을 때는 총구가 이미 옆으로 밀려난 상태였다.
총탄이 발사됐다. 바로 옆에는 장웬이 있었다.
총알이 장웬의 몸에 박혔다.
"크윽!"
장웬은 총을 맞았는데도 비틀거리기만 했다. 오히려 어깨에 칼에 맞았을 때 더 고통스러워했다.
차우진은 그 이유를 알았다.
'방탄조끼.'
낮은 레벨의 방탄조끼는 방어력이 약하다. 그런데 권총도 관통력이 높은 총기는 아니다. 비싼 방탄조끼라면 두께가 얇아도 권총탄 한두 발쯤은 막아줄 수도 있다.
차우진이 적의 손목을 꺾으며 권총을 빼앗았다.
적이 급히 칼을 뽑으려 했다.
차우진이 저항하는 적을 향해 방아쇠를 연달아 당겼다. 근거리에서 발사된 총탄 두 발이 적의 몸통에 명중했다.
"커컥!"
그놈은 뒤로 나자빠졌다.
'방탄조끼는 두목만 입고 있구나.'
장웬은 그 사이에 권총을 왼손으로 옮겨 쥐었다.
장웬이 차우진을 향해 총구를 돌리며 방아쇠를 당기려 했다.
차우진의 사격이 조금 더 빨랐다. 그가 발사한 총탄이 장웬의 몸통에 꽂혔다.
총탄은 방탄조끼에 막혔다. 대신에 충격이 들어갔다.
장웬의 상체가 총에 맞은 충격 때문에 옆으로 조금 돌아갔다. 총구도 그만큼 옆으로 움직였다. 뒤늦게 방아쇠를 당겼지만 총탄이 허공을 갈랐다.
차우진이 장웬의 몸통을 향해 계속 사격했다. 총탄이 방탄조끼에 퍽퍽 꽂혔다. 관통은 면했지만 강력한 충격이 몸에 계속 들어갔다.
장웬이 비명을 질렀다.
"으아악!"
방탄조끼로 한두 발은 버틴다 해도 이렇게 많이 맞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얇은 방탄조끼는 방어력에 한계가 있다.
차우진이 탄창이 빌 때까지 권총을 발사했다. 권총 슬라이드가 뒤로 젖혀진 채로 고정됐다.
장웬이 무릎을 꿇었다.
"커억."
장웬은 충격을 너무 많이 받았다. 총을 쏘기는커녕 팔을 위로 들지도 못했다. 갈비뼈는 이미 여러 대가 부러졌다.
차우진이 장웬의 손에서 권총을 빼앗았다.
"근데 너 뭐 사러 왔냐?"
"끄으으. 내 뒤에 누가 있는지…."
차우진이 그 권총으로 장웬의 다리에 한 발을 쏘았다.
"으아악!"
"대답."
"내가 너 죽…."
차우진이 한 발 더 사격했다. 장웬의 허벅지에 총알이 하나 더 박혔다.
"아아악!"
"대답."
"야, 약을 사러 왔다."
"약 이름."
"레, 레드 크리스털."
"대가는?"
"돈이다! 돈!"
차우진이 장웬의 다리에 또 총알을 박았다.
"으아아악!"
차우진이 권총을 장웬의 이마에 겨누었다.
"거짓말하면 다음 총알은 머리에 박힌다. 돈이 다가 아니잖아."
"워, 원료! 원료! 한국에서는 구하기 어려운 원료를 가져왔어!"
"레드 크리스털은 누가 만들었지?"
장웬은 공포에 질렸다. 총구는 이마를 겨누고 있는데 이번 질문은 답을 모른다.
"제, 제작자를 알면 납치해서 중국에 데려갔…."
"모르면 죽어야지."
"처, 천 사장은 알 거야! 누군지 아니까 우리한테 약을 파는 거겠지!"
"그래. 천 사장은 알…."
차우진이 옆으로 뛰었다. 그가 서 있던 곳으로 총탄이 날아왔다.
천상칠이 그쪽으로 총을 쏘며 소리를 질렀다.
"죽어어어!"
차우진도 천상칠을 향해 사격했다. 총탄이 천상칠의 몸에 꽂혔다.
"컥!"
천상칠은 총에 맞자마자 차를 향해 뛰었다. 그러면서 차우진 쪽으로 계속 방아쇠를 당겼다. 총탄이 몇 발 더 날아왔다.
최용구도 창고에서 빠져나와 자기 차로 도망쳤다. 차를 둔 위치가 달라서 그들이 도망치는 방향도 서로 달랐다.
천상칠은 허겁지겁 도망쳐 SUV의 문을 열고 운전석에 올라탔다. 그는 급히 시동을 걸고 가속페달을 밟았다.
차가 흙을 뒤로 뿌리며 튀어나갔다.
"씨, 씨발. 그 새끼 뭐야!"
그가 데려온 부하들은 전부 당했다. 1번 창고 쪽은 가보지 않아도 마찬가지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장웬도 당한 거야? 중국에서 데려온 놈들까지 싹 다? 씨발. 빨리 피해야 돼. 안전한 곳이 필요해."
KMTV의 부장급 기자 최용구도 도망쳤다.
"뭐야! 뭐가 어떻게 된 거야!"
그는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누가 습격한 거야! 천 사장 이 새끼! 다른 조직하고 싸울 거면 내가 없을 때 싸웠어야지!"
그는 서둘러 현장에서 멀어지고 싶었다.
"총격전이 벌어진 곳에 내가 있었다는 게 알려지면 끝장이야."
도인선 기자는 총격전이 시작될 때는 숨어 있었다. 그녀는 총소리가 멈추고 천상칠과 최용구가 도망친 후에 그곳을 나왔다.
"끝난 건가?"
그녀가 카메라를 꺼냈다. 야간 촬영 기능이 있는 카메라로 현장을 확인했다.
움직이는 사람은 없었다. 그녀를 구해준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그럼 이제 신고해도 되겠지?"
그녀는 신고하기 전에 현장 사진을 좀 남겨두고 싶었다. 그녀를 구해준 사람이 남아있는지도 확인하고 싶었다.
그녀가 카메라를 들고 2번 창고 쪽으로 걸어갔다. 그 방향에서 총격전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도인선이 창고 근처로 갔을 때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저기요! 누구 없어요? 죽은 건 아니죠? 괜찮으신 거죠?"
"아! 납치된 그 아가씨."
도인선이 창고로 뛰어갔다.
진소영이 의자에 묶여 있었다. 겁먹은 얼굴이었다.
그녀는 도인선을 보고 표정이 밝아졌다.
"앗! 사채 쓰다 잡혀 온 언니!"
"난 사채 때문에 잡힌 거 아니에요."
"저도 아니에요. 사채는 친구가 썼어요."
"난 취재하러 왔다가 잡혔어요."
"네?"
"소리언덕 도인선 기자예요."
"아! 저 소리언덕 알아요!"
"작은 인터넷 언론사인데?"
"거기 예능 기사를 자주 봤어요. 제가 시간이 많았거든요."
"그렇군요."
도인선이 그녀의 몸에 묶인 끈을 풀어주었다.
진소영이 물었다.
"저기, 근데, 싸움은 끝난 거예요?"
"네. 아주 화려하게요."
"누가 이겼어요?"
"저도 숨어 있어서 자세한 건 못 봤어요."
진소영이 걱정했다.
"혹시 도와주러 온 그분은… 괜찮아요? 총소리가 많이 들렸는데…."
"찾아봤는데 없더라고요. 이미 갔나 봐요."
"휴우."
도인선이 그녀의 반응을 보고 물었다.
"왜요? 누구인지 알아요?"
"아뇨. 몰라요. 오늘 처음 봐요."
"그런데 왜 안도의 한숨을 쉬어요?"
진소영이 둘러댔다.
"그래도 우리를 구해주러 온 분인데 괜찮으시면 좋잖아요."
101. 서해안 사건
도인선 기자가 112에 신고했다.
가까운 파출소의 경찰이 먼저 출동했다. 그들은 현장을 보고 기겁했다.
"헉! 이게 다 뭐야!"
전투 현장 한복판에 도인선이 서 있었다. 그들이 도인선에게 급히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도인선은 현장 사진을 찍으면서 통화도 하는 중이었다.
그녀가 휴대폰에 대고 말했다.
"선배. 빨리 장비 챙겨서 오기나 해요. 지금 연락되는 직원 다 데려와요. 이거 우리 회사 독점 특종이니까."
- 다 모이라고 이미 톡방에 올렸어.
"비밀 유지는?"
- 위치는 안 올렸어.
"잘했어요."
- 넌 괜찮지?
그녀가 경찰을 돌아보았다.
"경찰에서 오셨어요. 일단 끊어요."
- 나도 회사에 도착하기 직전이야. 먼저 모인 사람들부터 데려갈게.
그녀가 통화를 마친 후에 출동한 경찰에게 말했다.
"아뇨. 저는 안 괜찮아요. 저놈들은 더 안 괜찮지만."
경찰이 여기저기 널브러진 조직원들을 보았다. 총에 맞은 놈들도 있었다.
"방금 통화는 누구와 하신 겁니까?"
"제가 기자라서요. 이거 제 특종이에요. 어디 연락하고 그러시면 안 돼요."
구급차와 형사들도 도착했다.
구급대원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여기 칼 맞은 사람이 있다. 빨리 옮겨."
"여긴 총에 맞았습니다!"
"뭐? 거기부터 옮겨!"
"이 사람은 여러 발 맞은 것 같은데요?"
"이게 뭐야? 여기 전쟁터야?"
"구급차 더 불러!"
"이미 요청했습니다!"
"올 수 있는 구급차는 다 오라고 해!"
형사들이 도인선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었다.
그녀가 설명했다.
"이 서해안 창고에서 수상한 거래가 이뤄진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여기서 몰래서 취재하다가 납치됐어요. 여기 멍든 거 보이시죠? 납치될 때 맞은 거예요. 테이저건도 맞았어요."
"총은 누가 쏜 겁니까?"
"저를 납치한 놈들끼리 쐈겠죠."
"그럼 저기 총에 많이 맞은 사람은…."
"아. 저놈들은 배 타고 들어왔어요. 아마 중국에서 왔을 거예요."
"그러니까 누가 총을 쐈냐니까요?"
"저는 숨어 있어서 싸우는 건 못 봤어요. 자기들끼리 쐈을 거라니까요. 저를 죽이려던 놈도 권총을 가지고 있었거든요."
형사팀장은 장웬의 시체 앞에 있었다.
"이 사람은 총을 너무 많이 맞았네."
"방탄조끼를 입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많이 쐈나 봅니다."
"치명상은 머리에 맞은 거고."
"아마도요."
장웬은 죽었다.
천상칠이 도망치면서 난사한 총탄 중 한 발이 장웬의 머리에 명중했다. 그게 치명타였다.
팀장이 방탄조끼에 박힌 총탄들을 보며 말했다.
"그런데 이거, 총탄 하나가 좀 다르다?"
"여기 있는 권총 두 정은 같은 모델인데요?"
장웬의 시체 옆에서 권총 두 정이 발견됐다.
하나는 장웬의 부하가 쓰던 권총이다. 그건 탄창이 다 비워진 채로 현장에 있었다.
다른 하나는 장웬의 권총이다. 그것도 현장에서 발견되었다.
팀장이 장웬과 부하의 시체를 보며 말했다.
"이쪽 놈의 권총에서 발사된 총탄이 이놈의 방탄조끼에서 많이 발견됐는데, 머리에 맞은 건 다른 총에서 날아온 총탄일 수도 있단 말이야. 총을 쏜 놈이 또 있어."
"주변 도로의 CCTV를 찾아보겠습니다."
팀장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런 지역에 CCTV가 있다고?"
"거의 없죠.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요."
다른 형사가 다가왔다.
"팀장님. 여기 와보셔야겠는데요."
그들이 창고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발견된 가방에서 다량의 약이 나왔다.
"약이네?"
"양이 많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발견된 걸 보면…."
"각성제나 마약이겠지."
팀장이 물었다.
"여기 있었다는 피해자는?"
"저쪽에서 케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피해자 직업이…."
"왜? 수상한 거야?"
"배우입니다."
팀장은 당황했다.
"어? 배우가 왜 여기 있어?"
"납치됐답니다."
"환장하겠네. 기자에, 배우에, 마약에, 총격 사건까지…. 이거 원래 우리 팀 혼자 감당할 사이즈가 아니긴 한데, 일이 생각보다 더 커지겠는데?"
형사팀장이 진소영을 만났다. 그는 그녀를 알아보았다.
"아! 이번에 드라마에 나오신 분."
"어머. 저 보셨어요?"
"우리 와이프가 그 드라마를 좋아해서요."
"고맙습니다. 저까지 기억해주셔서."
"그런데 여기는 어떻게…."
진소영이 그녀가 납치된 이유를 설명했다.
"그 기획사는 저한테 배우만 하라는 게 아니에요. 시키는 건 뭐든 다 하라는 거라니까요?"
"나쁜 놈들이군요."
그녀가 하소연했다.
"이놈 저놈 다 그 차용증을 들고 와서 저를 협박해요. 저 진짜 너무 억울해요. 돈은 내가 빌린 거 아닌데! 난 구경도 못 해봤는데!"
팀장이 위로했다.
"앞으로는 그러는 놈이 없을 겁니다."
"진짜요?"
"이 사건이 워낙 크게 터졌으니까요. 어떤 놈이든 그런 차용증을 들이밀면 이 사건의 범인으로 의심받을 겁니다. 그렇게 되고 싶진 않겠지요."
"아…. 다행이다. 아니, 이런 일이 터져서 잘됐다는 게 아니라 그…."
"괜찮습니다. 못 들었습니다."
"어머. 고마워요. 형사님 친절하시다."
팀장이 물었다.
"그런데, 누가 이렇게 한 건지 아십니까?"
그녀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뇨. 얼굴을 완전히 가린 분이라서 아무것도 못 봤어요. 밖에서 싸울 때는 전 여기 묶여 있었고요. 아! 저를 협박하던 놈이 그분한테 총을 쏜 건 봤어요."
팀장이 밖에 죽어 있는 두 놈을 생각했다.
'총에 맞고 사망한 두 명은 중국에서 온 사람들. 여기에 있던 놈들은 다른 조직.'
"진소영 씨를 협박하던 사람이 새로 나타난 사람에게 총을 쐈습니까?"
"네. 먼저 칼 가진 부하들에게 죽이라고 했다가 실패하니까, 총을 꺼내서 막 쐈어요."
팀장이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 권총은 장웬이 가지고 있던 것이다.
"그 총이 혹시 이렇게 생긴 겁니까?"
"아뇨. 이건 은색이잖아요. 그놈이 쏜 건 검은색이었어요."
"그렇군요."
팀장이 형사들을 불렀다.
"이놈들 어디 놈들인지 확인했어?"
"이쪽 창고에서 발견된 놈들은 상칠파입니다. 저기서 발견된 건 중국 조직으로 보이고요."
"그럼 저쪽 창고는?"
"도인선 기자가 잡혀 있었다는 저쪽 창고에는 나인세븐 엔터 사장이 있던데요."
"엔터? 그런 회사 사장이 왜 여기 있어?"
"급히 알아봤는데요. 사장이 상칠파 두목 천상칠의 동생입니다."
"아. 피해자가 말한 기획사가 거기겠네."
"이러면 피해자 진술이 사실인가 본데요?"
"조사해봐야지."
팀장이 물었다.
"천상칠은?"
"사라졌습니다."
"저쪽에 총 맞고 사망한 사람 있잖아. 머리에 맞은 총알은 천상칠이 쐈을 수도 있다. 천상칠을 빨리 찾아."
***
천상칠은 현장에서 도망쳤다.
그는 차를 타고 이동하며 욕을 했다.
"씨발. 도대체 누구야? 어떤 새끼들이 나를 친 거야!"
그는 적이 많다.
"우연히 거래 현장에 들르진 않았을 거야. 작정하고 쳐들어왔어. 오늘 약 거래가 있는 걸 아는 놈 짓이야."
누가 그걸 원하는지 생각해보았다.
"내 약을 원하는 새끼가 한둘이 아닌데."
그가 외진 곳에 있는 집의 대문 앞에 차를 세웠다. 그런 후에 차에서 내려 담배를 입에 물고 대포폰을 켰다.
그 대포폰에는 기존에 연락한 전화번호가 하나밖에 없었다.
천상칠이 그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 무슨 일이지요?
"일이 틀어졌습니다.
- 얼마나?
"다 망쳤다고. 나 좀 피해 있어야겠는데."
- 그런 건 당신 전문이지 내가 하는 일이 아니야.
"씨발. 숨어 있으려면 당장 돈이 필요하다고. 돈. 말을 못 알아듣나."
- 현금으로?
"당연하지. 한국 돈 반, 달러 반. 각각 1억씩."
- 내일 밤까지 준비하지. 내일 만납시다.
"그럽시다. 장소는 내일 내가 알려주지."
천상칠이 전화를 끊었다.
그의 차에는 번호판 변경장치가 달려 있었다. 버튼만 누르면 번호판이 바뀌는 장치였다.
그래서 지금 그의 차에는 바닷가에 있을 때와는 다른 번호판이 붙어 있었다.
그가 차를 멈춘 곳은 시골 전원주택처럼 생긴 단독주택의 앞이다. 외진 곳이라서 주변에 다른 집은 없었다.
그 집은 천상칠이 숨어야 할 때 쓰려고 준비해둔 안전가옥이다. 이곳의 위치는 그의 부하들도 모른다.
천상칠이 담배를 던져버리고 집으로 걸어갔다.
"씨발. 술이나 빨아야겠다."
천상칠이 사라진 후에 차우진이 나타났다.
"내일 밤이라…."
천상칠의 차에 몰래 타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는 당황한 천상칠이 문을 열고 운전석에 탈 때 동시에 문을 열고 뒷좌석으로 들어갔다.
그것도 그냥 들어간 게 아니라 초단거리 공간이동을 써서 뒷좌석으로 이동한 후에 도로 문을 닫았다.
그러면 차에 탈 때 룸미러에 그의 모습이 노출되진 않는다.
차우진이 불평했다.
"천상칠이 방금 통화한 놈과 오늘 만나야 내가 편한데…. 나도 집에 갈까? 근데 여기는 어디야?"
***
천상칠은 집에 들어오자마자 방탄복을 벗었다. 그건 방탄성능은 낮은 대신에 방검복 기능이 같이 있는 제품이었다.
그가 옷을 벗고 거울 앞에 섰다. 방탄복이 권총탄을 막아내긴 했는데 총에 맞은 곳은 시퍼렇게 멍들어 있었다.
"씨발. 더럽게 아프네."
그가 위스키부터 찾아서 마셨다.
그는 술을 마시다 드러누웠다. 잠이 오지 않았다.
그가 다시 일어나 술을 또 마셨다. 그러면서 고민했다.
"그 새끼는 진짜 뭐지? 어디서 그런 지독한 킬러를 보낸 거야?"
누가 보냈는지는 모르지만 의심 가는 곳이 없는 건 아니다.
"레드 크리스털을 빼앗아서 자기가 팔고 싶은 새끼겠지."
천상칠의 중국 거래 라인이 오늘 같이 공격당했다. 그들 중에 최소한 두 명은 죽었다 천상칠은 장웬이 총에 맞는 걸 봤다.
"가만. 장웬을 죽이면 그쪽과는 거래가 안 될 텐데?"
그가 고개를 갸웃했다.
"모르고 그런 건가? 알면서 그런 건가? 알고 있었다면 중국에 다른 거래선이 있다는 건데."
천상칠이 결론을 냈다.
"중국 쪽과 이미 이야기가 다 된 후에 습격했구나! 어떤 놈들인지 몰라도 치밀하게 준비했어."
걱정도 들었다.
"그럼 내가 중국으로 밀항하는 게 맞는 건가? 차라리 일본으로…."
갑자기 집안의 전등이 모조리 나갔다. 실내가 어둠으로 바뀌었다.
"씨발. 이제 하다 하다 정전…."
하필 이 시점에 정전이 일어나는 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급히 대포폰의 플래시 기능을 켰다. 마음이 불안했지만 억지로 부정했다.
"아니야. 내가 여기 있는 건 아무도 몰라. 심지어 접선장소도 내일 내가 알려주기로…."
그가 들고 있는 대포폰을 보았다. 구형이긴 하지만 스마트폰이다. 이것으로 아까 국내 공급책과 통화했다.
스마트폰은 앱 하나만 깔면 위치추적이 가능해진다.
"설마 이걸로?"
그가 급히 권총을 찾았다.
탁자 위에 오늘 사용한 검은색 권총이 놓여 있었다. 총알은 아직 두 발이 남았다.
"씨발. 설마 나를…."
현관의 잠금장치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천상칠이 현관으로 다가가며 권총을 겨누었다. 누가 들어오든 일단 쏴버릴 생각이었다.
갑자기 옆쪽 유리창이 박살 났다. 파편이 내부로 튀었다.
"으헉!"
천상칠이 팔을 들어 유리 파편을 막았다가 권총을 창문 쪽으로 겨누려고 했다.
늦었다.
뾰족한 침이 달린 바늘 두 개가 전선을 매달고 날아왔다. 테이저건에서 발사된 바늘이 천상칠의 몸에 박혔다.
동시에 신경계를 교란하는 전기가 천상칠의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끄으으."
천상칠은 몸이 마비된 채로 옆으로 넘어갔다.
현관문이 벌컥 열렸다.
얼굴을 복면으로 가린 남자가 들어왔다.
그는 천상칠의 손에서 권총을 챙겼다. 그런 후에 약실과 탄창을 확인했다.
"두 발 남았군. 자살하는 데는 한 발이면 충분할 텐데, 한 발이 남아."
천상칠이 눈알을 굴리며 물었다.
"너, 너 이 새끼. 누구야. 누가 보냈어?"
창문을 부순 놈이 현관으로 들어왔다.
"권총 자살로 처리하기엔 집에 흔적이 너무 많이 남았어. 외국으로 밀항한 것으로 처리하는 게 낫다."
"세팅은?"
"이놈도 밀항할 생각이었을 테니까 준비해 놓은 게 있겠지. 그걸 좀 흘려놓자고."
천상칠이 제안했다.
"이, 이봐. 돈 때문에 이러는 거야? 내가 돈 줄게. 두 배, 아니, 세 배 줄게!"
"그렇게 의뢰할 때마다 배신하면 우리가 아직까지 살아있겠나? 그냥 가라. 고통은 없이 보내주마."
"씨, 씨발! 돈 아니면 뭐? 약? 약 필요해? 레드 크리스털이 있어! 그거 진짜 끝내주는 약이라고!"
"그건 우리도 있어서."
"어?"
천상칠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너 이 새끼들! 백 이사가 보냈냐? 백 이사가 보냈지? 백 이사 그 개년이 내 입을 막으려고!"
"그런 건 저승에 가서 물어봐라. 시끄러우니까 입 막아."
현관에서 차우진이 말했다.
"야. 계속 말하게 둬라. 나도 궁금한데."
두 놈이 현관을 향해 고개를 휙 돌렸다.
"누구냐!"
"자기소개는 너부터 해야지."
102. 킬러
천상칠을 죽이러 온 놈이 차우진을 향해 권총을 들었다.
차우진이 현관 밖에서 옆으로 사라지며 말했다.
"그 총을 지금 쏘면 소리가 멀리 퍼질 거다. 여기가 외진 곳이긴 하지만, 한밤중에 총소리가 안 들릴 정도는 아니야. 그거 쏘면 감당할 수 있겠냐?"
두 놈이 서로를 보았다.
테이저건을 가진 놈이 카트리지를 교환했다. 권총을 쥔 놈이 오른쪽을 가리킨 후에 손가락을 세 개 폈다. 그걸 하나씩 접었다.
마지막 손가락을 접자마자 두 놈이 현관 밖으로 동시에 뛰어나왔다. 둘 다 차우진이 이동한 방향인 현관 오른쪽으로 총과 테이저건을 겨누었다.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어?"
그들은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차우진이 오른쪽으로 가는 것도 봤고, 목소리도 그쪽에서 들렸다.
하지만 오른쪽에는 차우진이 없었다.
권총을 든 놈이 머리를 굴렸다.
'오른쪽으로 갔고, 오른쪽에서 목소리도 들렸지만, 오른쪽에 없으면? 왼쪽?'
방법은 모르지만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고개를 뒤로 휙 돌렸다.
차우진이 그의 뒤에 서 있었다.
"헉!"
지금은 킬러의 고개만 뒤로 향한 상태다. 킬러가 황급히 뒤로 돌아서 차우진을 쏘려고 했다.
늦었다.
킬러가 다 돌아서기도 전에 차우진이 적의 팔을 후려쳤다. 권총이 손에서 빠져나가 아래로 떨어졌다.
권총을 놓친 킬러가 욕을 하며 칼을 뽑았다.
"씨발!"
대응 방법이 틀렸다. 칼을 뽑을 게 아니라 차우진의 공격부터 막았어야 했다.
차우진이 칼을 뽑는 적의 목을 후려쳤다.
"커컥!"
칼을 뽑던 놈이 목을 잡고 비틀거렸다.
테이저건을 든 킬러는 그 뒤에서 기회만 보고 있었다.
그의 동료가 목을 붙잡고 왼쪽으로 비틀거렸다. 가려져 있던 차우진의 몸이 테이저건의 사선에 들어왔다.
'기회다!'
킬러가 테이저건의 방아쇠를 당겼다. 바늘 두 개가 가느다란 전선을 매달고 발사됐다.
적이 테이저건을 쏘는 순간 차우진이 비틀거리는 킬러의 다리를 툭 찼다.
킬러의 몸이 옆으로 휙 기울어졌다. 테이저건 바늘이 날아오는 위치였다.
바늘 두 개가 킬러의 몸에 꽂혔다.
킬러의 몸이 경직됐다. 그 뒤에서 테이저건을 쏜 놈은 당황했다.
"씨…."
차우진이 칼잡이 킬러를 걷어찼다. 킬러의 경직된 몸이 동료 쪽으로 돌아가면서 넘어졌다.
왼손에 쥐고 있던 단검이 테이저건 사수의 몸에 푹 꽂혔다.
"컥!"
그들은 동시에 뒤로 넘어갔다.
개조된 테이저건에서 신경계를 교란시키는 전기가 칼잡이의 몸속으로 계속 들어갔다.
"끄으으."
차우진이 두 놈을 버려두고 천상칠에게 다가갔다.
천상칠이 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몰아쉬었다.
"허억. 허억. 살려줘서 고맙다. 누군지 몰라도 내가 돈을 줄 테니까 저 새끼들을 치워…."
"너 살려주러 온 거 아니다."
천상칠이 눈동자가 흔들렸다.
"도, 돈 준다고! 살려줘!"
"돈은 됐고."
"그, 그럼 뭐? 약? 약이 필요해? 레드 크리스털 한 통이 여기 어디 있을 거야. 그거면 되지? 응?"
"난 백 이사 이야기가 흥미롭더라."
천상칠은 당황했다.
"어? 뭐?"
"내 타깃은 네가 아니야. 백 이사야. 그러니까 다 털어놓고 살던가, 아니면 그냥 죽던가."
"나, 난 아는 게…."
차우진이 킬러들을 가리켰다.
"저놈들 말이야. 한 놈은 테이저건을 배터리가 방전될 때까지 맞았고, 한 놈은 칼에 찔렸어. 그렇지만 아직 안 죽었지. 둘 중에 한 놈만 풀어놔도 네가 죽겠지."
천상칠이 허겁지겁 일어났다.
"저, 저 새끼들을 죽여버리면 되잖아!"
"저 둘을 처리해도 백 이사가 또 사람을 보내겠지. 네 입을 막아야 하니까. 실패할 때마다 더 확실한 킬러를 보내겠지. 실패한 것조차 덮어야 하니까."
"그럼 내가 먼저 백 이사를 치면…."
"승산이 있겠어?"
천상칠이 눈알을 굴렸다.
그의 조직은 박살 났다. 남은 놈들은 경찰의 눈을 피해 숨어야 한다.
현금도 별로 없다. 돈은 백 이사가 더 많다.
지금 청부업자와 접촉하면 오히려 천상필을 팔아넘길지도 모른다.
"씨발. 더럽게 걸렸네."
"그러니까 털어놔라. 혹시 아냐? 내가 백 이사를 치면 너한테 살아날 길이 생길지."
"뭘 털어놓으라는 거야?"
"백 이사와 레드 크리스털에 대해 아는 거 전부."
천상칠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 새끼가 백 이사에 대해 아는 게 있다면, 구라치다가 걸리면 손모가지가 아니라 진짜 모가지가 날아가겠지.'
어차피 그가 백 이사의 비밀을 지켜줄 이유는 없다. 저 킬러들을 백 이사가 보냈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그래. 이 새끼와 백 이사를 싸움 붙이면 나한테 살길이 생길 수도 있어.'
천상칠이 입을 열었다.
"백희선 이사. 라이프레인 제약의 이사다."
"라이프레인 제약이라…."
라이프레인 제약은 중견 제약사다. 차우진도 이름은 알 정도다.
그런데 차우진은 멸망 초기에는 그런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다.
천상칠이 설명했다.
"레드 크리스털은 혁명이다. 지금은 라이프레인이 중견기업이지만, 백 이사가 그걸 쥐고 있으니까 나중엔 대기업이 될 수 있다고!"
레드 크리스털은 멸망급 마약의 첫 번째 소재다. 그런 마약을 만들어 팔았으면 결과는 둘 중 하나여야 한다.
"대기업이 되거나, 망하거나. 마약을 만들어 팔다가 걸려서 망했나 본데?"
"그게 무슨 소리야? 그 회사가 왜 망해? 내가 주식도 샀는데!"
"마약 팔아먹는 조폭이 제약회사 주식을 사?"
"아, 아니, 그게…. 내 이름으로 산 건 아니고 차명으로…. 그거 주면 살려줄 거지?"
"망하는 회사의 주식을 어디에 쓰라고?"
"사, 살려줘."
"너는 네 목숨값을 아직 못 치렀다. 정보를 더 말해."
"레드 크리스털은 백 이사한테서 받은 거야. 그년이 구해온 거라고."
"어디서?"
"몰라."
"살고 싶다며? 그러면 모르면 안 되지."
"마, 만들었겠지. 그년이 직접 만들었든지, 연구원을 시켰든지!"
"음. 그럴듯해."
"그, 그렇지?"
차우진이 물었다.
"그런데 너한테 차명 주식이 있다고?"
"있어! 살려주면 줄게! 살려주면!"
"내놔."
***
천상칠이 벽에 걸려 있는 그림을 옆으로 치웠다. 그 안에 비밀 금고가 있었다.
그가 금고에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문을 열었다.
금고 안에는 몇 가지 물건이 있었다.
권총 소음기도 보였다.
천상칠은 그걸 보고 나서야 후회했다.
'저게 여기 있으면 안 되는데….'
차우진이 물었다.
"왜 보고만 있냐? 생각이 바뀌었냐?"
천상칠이 얼른 주식 차명계좌 정보가 들어 있는 봉투를 꺼내 넘겼다. 그런 후에 금고의 문을 닫았다.
그는 두려웠다.
'저 새끼가 소음기를 봤으면, 그걸 총에 끼고 나를 죽….'
멀어지는 발소리가 들렸다. 그가 뒤를 천천히 돌아보았다. 차우진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천상칠이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휴우. 살았다. 진짜로 살려줬어."
그가 숨을 고른 후에 내부를 확인했다. 문앞에 쓰러져 있는 킬러 두 놈이 보였다. 한 놈은 칼에 찔렸고 다른 놈은 테이저건을 맞았다.
천상칠이 바닥에 버려진 권총을 집었다. 그건 그의 권총이었다.
"이 개새끼들. 감히 날 죽이러 와?"
권총에는 탄약이 딱 두 발 남아있었다.
그가 금고를 다시 열고 소음기를 꺼내 권총에 결합했다.
그가 권총을 킬러 두 놈의 가슴에 겨누었다.
"원래 이 바닥은, 이긴 놈은 살고 진 놈은 죽는 거다."
천상칠이 방아쇠를 당겼다. 칼을 가진 킬러의 몸의 몸이 풀썩 흔들렸다.
천상칠이 테이저건을 쓰던 킬러의 가슴에도 권총을 겨누었다. 그 킬러의 몸에는 단검이 박혀 있었다.
"이 새끼는 그냥 놔둬도 죽을 것 같긴 하지만."
그가 방아쇠를 당겼다. 총탄이 그 킬러의 가슴을 뚫었다.
그가 뒤로 젖혀진 권총의 슬라이드를 앞으로 보내며 말했다.
"나를 죽이려고 한 새끼는 다 죽는 거야."
그의 뒤에서 차우진이 말했다.
"너도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천상칠이 뒤로 휙 돌아서며 비명을 질렀다.
"히익! 가, 간 줄 알았…."
천상칠은 놀라서 비명을 지르다가, 손에 권총을 쥐고 있다는 게 게 생각났다.
그가 차우진을 향해 권총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죽어!"
빈 총에서 총알이 나갈 리가 없다.
차우진이 말했다.
"한 발은 남겨놓지 그랬냐?"
"아, 아니, 이건, 그게 아니라…."
"네가 방금 그러더라. 나를 죽이려고 한 새끼는 다 죽는 거라며.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현대 사회에서는 좀 자제하게 되더라?"
"그, 그렇죠. 자제하셔야죠!"
"그런데 너한테는 자제 안 해도 되겠더라. 너도 그러니까."
천상칠이 욕했다.
"씨, 씨발. 나를 죽이러 돌아온 거냐!"
"어. 잘 아네. 처음부터 안 갔어."
천상칠이 왼손으로 단검을 뽑으려 했다. 차우진이 손을 휙 뻗었다.
단검이 날아가 천상칠의 가슴에 푹 꽂혔다.
"컥!"
그건 천상칠의 총에 맞은 킬러의 허리에 있던 칼이다.
"개…."
천상칠이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
시체는 이튿날 오후에 발견됐다.
단독주택 현관은 활짝 열려 있었다. 킬러 두 놈은 현관 밖에 쓰러져 있었다.
형사가 보고했다.
"여기가 원래 사람이 거의 안 다니는 곳이긴 합니다. 그래도 마당이 이런 상태이다 보니까 지나가던 사람이 바로 알아봤답니다."
팀장이 말했다.
"이 시체들까지 집 안에 있었으면 일주일이 지났어도 못 찾았겠는데?"
"그렇죠."
"그럼 이건 일부러 발견되라고 시체를 밖에 방치한 것이거나…."
"아니면 자기들끼리 쏘고 찌르다가 죽은 거겠죠."
"신원확인은 했어?"
"집안에서 오른손에 권총을 쥔 채로 죽은 사람은 천상칠입니다. 상칠파 두목입니다."
팀장은 그 이름이 익숙했다.
"상칠파? 어젯밤에 바닷가에서 중국 조직원들과 싸운 그놈들?"
"예."
"두목이 도망쳤다더니 우리 지역으로 왔구나."
팀장이 죽어 있는 킬러들을 가리켰다.
"그럼 저 둘은?"
"지문을 조회해봤는데 둘 다 폭행과 강도 전과가 있습니다. 차에서는 사람을 묻기 딱 좋은 장비들이 나왔고요. 트렁크에서 혈흔도 찾았습니다."
팀장이 인상을 썼다.
"청부업자?"
"장비만 보면 그럴 가능성이 있습니다. 누군가 천상칠을 죽이라고 청부한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상칠파 두목과 킬러들이 서로 싸우다 전부 죽었다?"
"그런 것 같습니다. 천상칠의 가슴에 꽂힌 칼과 똑같은 칼이 저 차에서 여러 개 나왔거든요."
"저 둘의 가슴에 있는 총상은 천상칠의 총에서 나간 거고?"
"소음기까지 장착한 권총인데, 확인해봐야 하지만 맞는 것 같습니다."
팀장이 다른 가능성을 물었다.
"그냥 다른 킬러가 와서 셋 다 죽이고 갔을 수도 있고?"
"그것도 가능은 합니다."
"이거 간단한 사건 아니다. 지금 이야기한 모든 경우를 다 조사해."
"알겠습니다."
***
천상칠이 넘겨준 주식은 차명계좌에 들어 있었다.
그렇지만 그걸 차우진이 그냥 먹을 수는 없다. 그 주식을 샀다는 걸 증명하지 못하면 의심받는다.
차우진이 라이프레인 제약의 백 이사가 누군지 검색해보았다.
인터넷에는 정보가 별로 없었다. 사진은 한 장이 있었다. 혼자 찍은 사진이 아니라 회사 행사에 나온 기념사진이었다.
차우진이 사진을 확대했다.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키웠더니 화질이 나빠졌다.
"음…. 사진만 봐서는 모르겠는데?"
일단 이런 얼굴은 기억에 없다.
"직접 만나보면 알지도 모르지."
딥어스테크 사장 장호철도 사진으로는 낯설었는데, 직접 보자마자 살모사 장이라는 걸 알아볼 수 있었다.
그가 이번에는 라이프레인 제약을 검색했다. 멸망 초기에 그런 회사가 있었다는 기억은 없다.
그런데 회사의 상표가 낯설지 않았다.
"아. 진통제 만들던 곳이구나."
멸망한 세계에서는 진통제가 귀했다. 항생제는 부르는 게 값이었다.
제약회사의 생산 공장은 파괴된 지 오래였지만, 폐허를 뒤지다 보면 멸망 이전에 만들어진 진통제를 가끔 구할 수 있었다.
항생제는 진통제보다 훨씬 더 귀했다.
***
멸망한 세계에서 박창수가 말했다.
"우진아. 진통제 남은 거 있냐?"
"하나밖에 없어. 참아."
"야. 나 총 맞았어."
"이 정도면 맞은 거 아니야. 스친 거야."
"스쳤는데 왜 구멍이 났냐?"
103. 특별조사팀
멸망한 세계에서도 일반 소독약은 알코올을 정제하면 만들 수 있다.
요오드 기반의 소독약도 재료와 손기술만 있으면 개인이 만들 수 있다.
그래서 멸망 전에 제약이나 화학 업종에 종사하던 사람이 소독약을 직접 만드는 경우는 종종 있었다.
차우진이 지금 박창수에게 사용하는 소독약도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박창수가 말했다.
"이럴 때 소염진통제 하나 먹어주면 좋은데."
"스킬로 버텨봐."
박창수의 스킬 중에는 회복력을 높이는 것도 있다.
"총에 맞은 구멍을 꿰매는 고통을 네가 알아?"
"나도 총 맞아봤어."
"아. 맞다. 잘 알겠네."
차우진은 바늘과 실로 박창수의 상처를 꿰맸다.
"됐다. 가자."
"어딜?"
"상태 나빠지기 전에 약이 있는 곳으로 가야지. 회복력 증가 스킬만 믿다가 훅 가는 수가 있으니까."
"기성품을 구할 곳이 있어?"
"아니."
"야. 소염진통제 한 알 남은 거 있다며. 그거 기성품이잖아. 나는 수제품이 아니라 현대 과학기술로 만든 약을 먹고 싶다."
"이 총상에 문제 생기면 약 한 알로는 어림도 없어. 약을 미리 확보해야 해. 문제 안 생기면 이 한 알도 아껴야 하고. 형 말대로 이 약은 기성품이잖아."
"어디로 가게?"
"서쪽으로 4km. 그 마을에 제약 기술자가 있어."
"아! 제약 명인 손하은! 뭐해? 빨리 가자."
차우진이 물었다.
"이 형이 왜 반가워하지? 또 차이고 싶냐?"
"난 차인 적 없다. 들이대기도 전에 눈빛으로 까였으니까."
차우진이 약이 딱 한 알 들어 있는 소형 케이스를 꺼내 박창수에게 던졌다. 그런 후에 말했다.
"약은 열이 나면 먹어라. 열 안 나는데 미리 먹지 말고."
박창수가 빈 케이스를 보여주었다.
"어? 받자마자 먹었는데?"
"와…. 이럴 때는 손이 눈보다 빠르네. 그걸 벌써 홀라당 삼켜?"
"먹으라고 준 줄 알았지!"
"총을 그렇게 빨리 쏴봐. 그럼 오늘은 총에 안 맞아도 됐잖아."
***
차우진은 그 한 알 남은 약의 포장지에 인쇄되어 있던 상표가 생각났다. 그 모양이 지금 모니터 속에 보이는 마크와 똑같지는 않았지만, 꽤 비슷했다.
"회사 이름은 낯선데 마크는 익숙해."
차우진이 화면을 보며 생각했다.
"회사가 망해서 다시 만들었나? 아니면 사장이 회사 분위기를 바꾸고 싶었나?"
지금은 확인할 방법이 없다.
차우진이 푸념했다.
"왜 내 꿈속 미래는 멸망 초기에 시작하냐. 이러면 돈 버는 데 써먹을 정보가…. 사덕리소스는 그 정보로 주식을 먹긴 했지."
그는 멸망 초기까지 망하지 않는 회사 이름을 많이 안다. 지금부터 그런 회사에 장기 투자하면 10년 후에는 수익을 확실히 낼 수 있다.
그렇다고 정말로 그런 회사에 투자해서 10년 동안 손가락 빨면서 기다리면, 세상이 멸망한다.
지구 멸망을 막으려면 지금 당장 쓸 예산이 필요하다. 장기 투자가 불가능하다.
"라이프레인 제약이 어떤 곳인지부터 알아낸 후에 접근해야겠다."
차우진이 기사를 검색했다.
"이번에 서해안에서 잡은 놈들은 체포됐을 텐데."
그가 직접 현장에 있던 상칠파와 중국 조직원들에게 총알도 박아넣고 칼도 꽂았다. 거기서 도망친 건 천상칠과 최용구 두 놈뿐이다. 나머지는 죽거나 체포됐다.
인터넷 기사에 그 사건에 관한 것이 나오긴 했다.
"도인선 기자 좋겠네. 단독 특종도 내고."
현장에서 구출된 도인선과 인터넷 언론사 소리언덕이 특종 보도를 쏟아냈다.
그 후에 다른 언론사들이 내보낸 기사들도 있었다.
하지만 기사에는 차우진이 아는 내용만 나왔다. 도인선이나 다른 기자들이 본 건 차우진도 이미 봤기 때문이다.
오히려 차우진이 아는 게 더 많았다.
"누나나 수연이가 아는 게 있으려나."
***
민수연은 경찰이다. 그녀가 차우진의 집에 와서 밥을 먹으며 말했다.
"야. 말도 마라. 서해안에서 터진 것 때문에 나까지 고생한다니까?"
"이번에는 네가 당첨이구나."
차우진이 사건을 해결하면 보통 차유리의 일이 늘어난다. 그런데 이번에는 민수연의 일이 늘어났다.
민수연은 무슨 말인지 몰라서 눈을 깜빡였다.
"응?"
"맛있냐고."
민수연이 엄지를 세웠다.
"응. 엄청. 너 진짜 식당 안 차릴래?"
"식당은 아무나 하나. 그리고 나는 자유로운 영혼이다. 일주일에 최소한 6일은 가게 문을 열어야 하는 직업은 가질 수가 없다."
"쳇. 매일 공짜로 먹을 수 있을 줄 알았더니."
"되겠냐?"
"혹시나 했지."
"내가 만들어주는 건 다 비싸고 좋은 재료를 써서 맛있는 거야. 식당 차리면 단가가 안 맞아."
"그럼 파인다이닝 같은 건? 거긴 비싸니까 비싼 재료 써도 되잖아."
"내가 요리를 야매로 배워서 안 돼."
멸망한 세계의 요리사들이 제일 중요하게 생각한 건 기존에는 못 먹던 걸 먹을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그 요리사들은 부실한 재료에서 어떻게든 맛을 끌어냈다.
멸망한 세계의 요리사들도 요리의 모양에 신경을 쓰긴 했지만, 그건 우선순위가 낮았다.
민수연이 먹던 그릇이 점점 바닥을 드러냈다.
"야. 이거 더 있지?"
"아줌마랑 아저씨 드리라고 싸줄 거다. 네가 다 먹지 마라."
"엄마 아빠는 많이 안 드셔."
"네가 다 먹으니까 못 드시는 거겠지."
TV 뉴스에서 서해안 마약 조직 총격전 사건이 나오고 있었다. 차우진이 일부러 채널을 그쪽으로 돌려놓았기 때문이다.
민수연이 그걸 보고 짜증 냈다.
"저놈들이 저기서 치고받고 싸우다 죽은 걸 가지고 왜 나까지 괴롭히냐고."
"너한테는 무슨 일 시키는데?
"현장이랑 상칠파의 거점에서 노트북을 몇 개 찾아냈나 봐. 그거 분석해서 나온 자료를 바탕으로 거래 대상이나 공급책을 추적하는 일. 누구랑 뭘 주고받았는지 같은 거."
차우진이 고개를 갸웃했다.
"응? 너 이제 그런 일 안 하잖아."
"그러게. 징계 먹여서 이리로 쫓아내더니 사람 부족하다고 도와달란다."
차우진이 한소리 했다.
"그래서 도와준다고? 이런 호구를 봤나!"
"거기서 쫓겨날 때 팀장님이 미안하다고 하면서 집에서 가까운 경찰서로 오는 거 도와주셨거든. 내가 또 야멸차게 거절을 못 하네?"
"너 그냥 위에서 까라니까 까는 거 아니고?"
"까라면 까긴 하는데, 그래도 대충 까는 거랑 열심히 까는 거랑 다르잖아. 그 팀장님이 따로 전화해서 부탁했어. 그쪽은 지금 사건 수사하느라 아주 난리가 났대."
차우진이 TV를 보며 말했다.
"저놈들 때문에 고생하는 경찰이 많다."
"그러게 말이야."
"그래서 뭐 나온 거 있냐?"
"상칠파가 중국 조직이랑 거래한 거는 좀 찾았어. 수출을 꽤 했더라?"
"국내 쪽은?"
"엉망진창이지. 현장에서 칼을 맞고 발견된 놈은 국내 연예 기획사 사장이고, 그 형은 조폭인데…."
민수연이 차우진을 휙 돌아보며 따지듯이 물었다.
"야! 너 이 새끼. 딥어스테크 알지."
"으응? 갑자기 그건 왜?"
"내가 네 말 듣고 적금 탄 거로 거기 주식에 몰빵했는데!"
"올랐잖아."
"앞으로는 떨어질지도 몰라. 이유는 말 못해."
차우진이 인상을 살짝 썼다. 짐작 가는 게 있었다.
"예전 사장이 횡령한 장비가 발견됐구나?"
"하여간 이 새끼. 눈치는 빨라."
민수연은 차우진이 딥어스테크 이사라는 걸 모른다.
그녀가 설명했다.
"죽은 사장이 횡령으로 빼돌린 장비 중에 일부는 성구파와 천수파가 싸우던 시골 농장 창고에서 찾았어."
"그건 뉴스에서 봤다."
"그때 장비를 다 찾은 건 아니거든. 그런데 이번에 사라진 장비 중 일부가 발견됐어."
"어떻게?"
"상칠파 두목이 몇 지역을 은밀히 조사하던 중이라는 걸 알아냈거든. 그놈이 거기서 뭘 찾고 있었는지 궁금하잖아? 그래서 그 지역들을 경찰이 직접 수색했어."
"수색 능력이 조폭 따위랑은 차원이 달랐겠구나."
"당연하지. 경찰은 전기 사용량부터 CCTV까지 여러 가지 정보를 이용할 수 있으니까. 그러다 그중 한 곳에서 사라진 장비가 발견됐어. 그 장비로 마약을 만들고 있었나 보더라."
차우진이 캐물었다.
"그러면 상칠파가 그 마약을 생산한 건 아니네?"
"어. 생산은 다른 놈들이 했더라고. 상칠파 놈들은 거기서 납품을 받아서 다시 중국 조직에 팔던 거고."
"누가 생산했는지는 알아냈고?"
민수연이 툴툴댔다.
"그걸 알면 벌써 체포했지. 서해안에서 사건이 터진 날 그 장비를 다루던 놈들은 다 튀었나 보더라. 공장 내부에 지문 하나 남지 않을 정도로 청소까지 완벽하게 하고 튀었어."
"장비는 그대로 남겨뒀고?"
"응. 그 장소를 안 들키면 돌아와서 다시 만들려고 했는지 고스란히 남겨놨더라고."
"그런데 경찰이 찾아냈구나. 그놈들 손해가 크겠어."
"지금 그놈들 손해가 문제냐? 내가 손해 보게 생겼는데?"
민수연이 투덜댔다.
"너 믿고 적금 탄 거 딥어스테크에 몰빵했단 말이야."
"이런 사건으로 주가가 폭락하지는 않을 거야."
"왜? 이미 사고를 많이 친 회사라서?"
"그것도 있지만, 이젠 딥어스테크도 적극적으로 대응할 테니까."
***
차우진이 홍성준 사장을 만났다.
홍성준이 말했다.
"차 이사님. 형사들이 찾아왔습니다. 사라진 우리 장비가 마약 조직의 생산 시설에서 발견됐다는 겁니다."
"그렇군요."
"우린 진짜 억울합니다. 그거 다 장호철이 빼돌린 장비인데!"
그 횡령 사건을 신고한 곽수혁 팀장도 회의에 참석했다. 그가 맞장구쳤다.
"우린 그런 장비는 구경도 못 해봤습니다. 장호철이 측근들을 시켜서 주문하고, 연구소에 들어오기도 전에 빼돌렸으니까요."
차우진이 말했다.
"그 장비들은 마약 제조용으로 사용됐다더군요."
"그래서 우리 연구소에서 주문할 이유가 없는 장비들도 있나 봅니다. 경찰에서 그러는데, 제가 눈치챈 것보다 더 많은 장비가 횡령됐다더군요."
장호철이 횡령한 장비 중에는 딥어스테크에는 필요 없는 것들이 꽤 있었다.
곽수혁 팀장이 말했다.
"장호철 사장은 다양한 장비를 회사 연구용이라면서 사서 빼돌렸습니다. 그 장비만 있으면 아마 무슨 마약이든 만들 수 있을 겁니다."
"전문 장비를 사용해서 만들면, 마약의 순도가 높겠군요."
"저는 그런 것까지는 잘 모르지만, 필요한 물질만 추출하거나 불순물이 섞이는 걸 막기는 좋을 겁니다."
차우진이 홍성준에게 제안했다.
"홍 사장님. 그 장비에 관해 공식 발표나 기사가 안 나가면 우리도 입을 다물죠."
"당연히 그럴 겁니다. 우리가 일부러 공개할 이유는 없으니까."
"그런데 만약 기사가 나가면 사실대로 발표하시죠. 죽은 장호철이 회사 이름만 이용했을 뿐, 그 장비들은 연구소에는 들어온 적도 없다고요."
홍성준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역시 그게 최선이군요."
"그리고 이 문제는 회사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조사하는 게 좋겠습니다. 기사화되면 우리도 대응해야 하니까요."
"아. 그러면 비서실이나 홍보팀에 지시를…."
"그 조사는 제가 직접 주도하고 싶은데요."
그래야 차우진이 원하는 정보를 수집하라고 지시할 수 있다.
홍성준의 눈이 조금 커졌다.
"차 이사님이요? 이런 일은 원래 안 하시는…."
"어렵겠습니까?"
"어렵기는요. 연구소를 책임지시는 차 이사님이 장비 유출 문제를 조사해 주신다는데, 저야 당연히 찬성입니다."
"조사하려면 사람이 좀 필요합니다."
"부서 상관없이 데려다 쓰십시오."
***
딥어스테크에 특별조사팀이 만들어졌다.
차우진은 관련 정보를 수집하거나 분석할 수 있는 부서에서 직원을 한 명씩 파견받았다.
회의실에 특별조사팀원들이 모였다. 이번 조사가 끝날 때까지 팀에 전담으로 참여하는 직원이 네 명, 기술자문을 맡은 연구원이 두 명이었다.
비서실에서는 차우진의 담당자인 송미소가 참여했다.
연구소에서는 개발 2팀의 곽수혁과 박효정이 특별조사팀에 기술자문으로 참가했다.
개발 2팀은 마그마 탐지기를 개발해야 한다. 그래서 두 사람은 연구실과 특별조사팀을 오가며 기술 지원만 하기로 했다.
외부 현장을 뛰는 건 다른 부서에서 온 직원 네 명이 맡았다.
박효정이 회의실에서 차우진을 보고 손을 살짝 들어 인사했다. 곽수혁이 즉시 그녀의 팔을 톡 쳐서 자제시켰다.
차우진이 말했다.
"회사 장비가 외부 조직에 넘어가 마약을 만드는 데 사용됐습니다."
팀원들이 웅성댔다.
이전에 발견된 일부 장비는 성구파와 천수파의 전투 현장에서 발견됐다.
"지난번 비슷한 사태 때는, 당시 부사장이던 사장님이 전임자들의 범죄라고 주장해 겨우 넘어갔습니다."
그런데 마약 생산 장비가 또 발견됐다.
"이번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면 회사 존립에 영향을 받을 수 있습니다."
특별조사팀 직원들은 긴장했다.
차우진이 말했다.
"여러분은 소속 부서의 지원을 받아 이번 문제를 조사해야 합니다. 시작합시다."
104. 특별조사팀 II
딥어스테크 특별조사팀의 팀원들은 각자 소속된 부서를 통해 정보를 수집했다. 그런 후에 서로 모아온 정보를 교차 분석했다.
그중에는 이번에 발견된 장비로 어떤 마약을 생산했는지에 관한 것도 있었다.
팀원이 보고했다.
"빼돌린 장비로 만든 건 레드 크리스털이라는 신종 마약입니다."
그 정도는 경찰에 연줄만 있어도 알아낼 수 있었다.
차우진이 말했다.
"저도 알아봤습니다. 그건 마약 조직이 쉽게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더군요."
"예. 횡령된 우리 장비 정도는 사용해야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장비가 버튼만 누른다고 결과물이 튀어나오는 종류는 아니잖습니까? 그러면 그 작업은 누가 한 걸까요?"
팀원들이 의견을 냈다.
"단순 마약 기술자가 아니라 화학 전문가 아닐까요?"
"저희 부서에서도 그렇게 판단했습니다. 현장에서 발견된 장비의 세팅 수준은 전문가의 솜씨였답니다."
차우진이 말했다.
"전문가 한 명이 아니라 제약회사나 바이오 회사에서 세팅했을 확률은요?"
팀원들이 웃었다.
"하하. 설마요."
"우리나라에서 회사 단위로 마약을 제조하면 비밀 유지가 어려울 텐데요."
차우진이 질문을 바꾸었다.
"그럼 그런 회사의 임직원 몇 명이 작당하고 한 거라면?"
팀원들이 대답했다.
"어…. 그건 가능할 수 있죠."
"돈 많이 주고 매수하면 뭐…. 회사 기밀도 빼돌려서 외국에 팔아먹는데 장비 세팅이라고 안 하겠습니까?"
"경찰 소식통에게 들었는데, 생산 현장에서 여러 명이 일한 것처럼 보인답니다."
차우진이 제안했다.
"그런 일이 가능한 회사를 찾아봅시다."
팀원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차 이사님. 정말로 이사님 말씀처럼 특정 회사 연구원들이 마약 제조에 개입한 것으로 밝혀지면, 대응은 어떻게…."
"그 회사가 모든 걸 책임지게 하고 우린 빠져나와야지요. 우리 회사는 횡령 피해자니까요."
팀원들의 반응은 좋았다.
"아! 그러면 되겠군요."
"이제 조사 방향이 좀 보입니다."
곽수혁 개발 2팀장이 손을 들었다.
"저는 제약 분야는 전공이 아니라서 잘 모르겠지만, 우리나라에 제약이나 바이오 회사가 한두 개가 아닌데, 그걸 찾아낼 수 있을까요?"
팀원들이 서로를 돌아보았다. 그들도 자신이 없었다.
차우진이 말했다.
"일단 자료를 최대한 많이 모아봐요. 분석해서 찾는 건 내가 할 테니까."
"네? 차 이사님이요?"
"나도 뭔가 해야죠."
일단 회의가 끝났다. 특별조사팀원들은 정보를 모으기 위해 각자 부서로 흩어졌다.
회의실에는 곽수혁과 박효정만 남았다.
차우진이 물었다.
"곽 팀장님. 탐지기 개발과 이 일을 같이 하려면 힘드시겠습니다."
"대신에 다른 개발들은 일정을 늦춘 상태라 저는 괜찮습니다만…."
"일정을 늦춘 것 중에 개발을 서둘러야 하는 건 다른 팀에 넘기시죠. 지금은 탐지기 개발이 제일 중요합니다."
"예. 스톤파인더와의 협업 스케줄도 있으니까 그래야지요."
이튿날 회의에서 대량의 자료가 차우진에게 넘어왔다.
팀원들이 말했다.
"각 부서에서 24시간 동안 수집한 자료입니다. 공식적으로 수집할 수 있는 자료만 모았습니다. 회사 내부 사정까지 조사하려면 인맥을 동원해야 해서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
차우진이 말했다.
"고생하셨습니다. 이건 제가 가져가서 보겠습니다. 오늘은 집에 가서 쉬시고 내일 뵙지요."
모든 자료는 종이가 아니라 디지털 파일로 되어 있다. 차우진이 노트북을 들고 회의실을 나갔다.
남은 팀원들이 기지개를 켜고 하품을 했다.
"으다다다. 야근했더니 피곤하다."
"우리 그럼 이대로 퇴근인가?"
"차 이사님이 집에 가라고 하셨잖아요. 그럼 가야지."
팀원 중 한 명이 박효정에게 물었다.
"효정 씨가 차 이사님하고 잘 아신다면서요?"
"차 이사님이 우리 2팀 탐지기 개발 프로젝트를 지휘하시니까요."
"소문으로는 효정 씨는 그전부터 아셨다던데."
"아아. 그거요? 그 이야기를 하려면 공사장 이야기부터 해야 하는데요. 방화 사건 이야기도 해야 하고요. 이야기가 길어요."
"우리 오늘 업무는 끝났는데, 점심 먹으면서 그 이야기나 들을까요?"
"그거 좋죠. 아. 점심 이야기하니까 생각난다. 차 이사님 요리 진짜 잘하시는데."
"어? 그걸 어떻게 아세요? 혹시…."
박효정이 손을 흔들었다.
"아뇨. 도시락요. 도시락. 직접 만든 도시락을 나눠주실 때가 있는데 진짜 끝내주거든요."
특별조사팀원 네 명 중에는 비서실에서 차우진을 담당하는 송미소 외에도 여자 직원이 한 명 더 있었다.
그 직원이 물었다.
"차 이사님 총각이라던데, 진짜예요?"
"그렇게 알고 있어요."
"그럼 어떤 스타일을 좋…."
"메이야?"
"네?"
"아, 아니에요. 나도 몰라요. 그냥, 이공계 좋아해요. 이공계. 개발이랑 친하시거든요."
다른 팀원이 말했다.
"우리가 드린 자료가 워낙 많으니까, 차 이사님이 그걸 다 분석하시려면 며칠은 여유가 있겠군요."
"그러게요. 한숨 돌리겠습니다."
***
차우진은 집에 가서 소파에 드러누웠다. 자료는 열어보지도 않았다.
"아니다. 보는 시늉은 해야지."
상칠파 두목 천상칠은 킬러들을 보낸 건 라이프레인 제약의 백희선 이사라고 말했다.
차우진이 자료 중에서 라이프레인 제약에 관한 게 있는지 확인했다.
"있네. 그럼 됐지."
차우진이 파일을 열어 라이프레인에 관한 것만 대충 훑어보았다.
"백희선에 관한 건…."
임원진에 관한 정보 중에 백희선에 관한 것도 있었다.
"외국에 있다가 들어온 임원이구나."
조사팀이 넘겨준 자료는 여러 제약회사의 공개된 정보를 수집한 것이다. 그래서 그중 한 회사의 이사인 백희선에 관한 건 많지 않았다.
현관문이 열리면서 차유리가 들어왔다.
"야. 일하냐?"
차우진이 노트북을 닫았다.
"아니. 다 했어."
"밥은?"
"배달시켜."
"일하는 거 아니라며. 그럼 요리 좀 해라."
"싫어."
"수연이 불러야겠다."
"그런다고 요리를 하겠냐? 치킨이나 시키자."
차유리가 조건을 제시했다.
"세 마리에 피자 추가?"
차우진이 물었다.
"왜 세 마리야?"
"수연이 부른다니까?"
"피자는?"
"사람이 어떻게 단백질만 먹냐? 탄수화물도 먹어야지."
"10년 후의 멸망급 세계 식량 위기는 누나와 수연이 때문에 시작된 건가?"
"헛소리 말고 얼른 시켜라."
"돈은?"
차유리는 당당했다.
"동생이 상장기업 대주주라서 좋은 건 배달 음식을 시킬 때 내가 돈을 안 내도 된다는 거지. 수연이가 당장 온다는데 아직도 안 시켰냐?"
"벌써 불렀냐?"
"이미 불렀다."
***
이튿날 오전에 차우진이 특별조사팀원들을 다시 소집했다.
차우진이 말했다.
"여러분이 모아준 자료를 모두 분석했습니다. 그 결과."
그가 보고서 중에서 라이프레인에 관한 걸 화면에 띄웠다.
"라이프레인 제약이 제일 의심스럽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팀원들은 당황했다.
"예? 차 이사님. 저희가 드린 자료가 정말 많은데 그걸 하룻밤 사이에…."
"다 보고 분석해서 내린 결론입니다."
다른 자료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라이프레인이 범인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는데 굳이 그럴 이유가 없었다.
그렇다고 특별조사팀이 필요 없는 건 아니다.
차우진은 그가 원하는 정보를 조사하고 분석해줄 사람들이 필요했다.
특별조사팀을 만든 명분은 횡령된 회사 장비가 마약 제조에 사용된 사태에 대응한다는 것이다. 그건 정말 써먹기 좋은 명분이다.
차우진이 특별조사팀원들에게 말했다.
"이제부터 라이프레인 제약을 집중적으로 팝시다."
팀원들은 어느 회사가 유력한 용의자인지는 어차피 모른다.
팀의 책임자인 실세 이사가 그중 하나를 찍어줬다. 그러면 거기부터 분석하는 게 속 편하게 일하는 방법이다.
그들은 어제 차우진이 개발 2팀의 연구를 어떻게 이끌고 있는지 들었다.
'실무자들조차 생각하지 못한 것까지 알려주면서 탐지기를 개발하게 했다던데.'
'제품이 완성되기도 전에 미국의 꽤 큰 회사와 협업시킬 정도로 업무 능력도 탁월하다던데.'
팀원이 물었다.
"그럼 어떤 방향으로 조사할까요? 연구원 위주로 파볼까요?"
"연구원도 알아봐야 하지만, 지휘한 사람이 더 중요합니다. 일단 임원진을 집중적으로 조사하시죠. 물론, 라이프레인에서는 우리가 조사한다는 건 모르게 조용히."
"알겠습니다."
차우진이 업무를 나눠주고 회의실을 나갔다. 이제부터는 팀원들이 처리해야 한다.
팀원이 말했다.
"차 이사님은 그 많은 자료를 어떻게 하룻밤 사이에 분석하셨지?"
"그러게. 그거 우리 부서에서 수집한 거 내가 정리만 해서 드린 건데."
"저도 마찬가지예요. 저는 다 읽어보지도 못했어요."
"난 지적인 남자가 좋더라."
"그렇다고 침 흘리지 말고."
***
특별조사팀원들이 라이프레인 제약을 조사했다.
인터넷에 나오는 자료만으로는 차우진을 만족시킬 수 없다. 그들은 인맥을 통해 정보를 수집했다.
송미소는 비서실을 통해 민간 정보업체도 이용했다.
예전 사장이나 전무는 불법적인 수단도 가리지 않았다.
그런데 그들은 결국 파멸했다. 그들이 이용한 청부업자나 마약 조직들도 줄줄이 박살 나고 체포됐다.
심지어 전임 사장 장호철은 광산을 폭파하러 갔다가 자기가 가져간 폭탄에 폭사했다.
신동욱 전무와 비서 몇 명도 체포됐다.
비서실도 대폭 물갈이됐다.
새 비서실은 이제는 그런 짓은 어지간하면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때 쌓인 노하우가 사라진 건 아니다.
비서실은 합법과 불법의 경계까지는 활용해 정보를 모았다.
이튿날 다시 회의가 열렸다.
수집된 자료가 무척 많았다.
팀원들은 자신만만했다.
"차 이사님. 24시간 동안 각종 정보를 수집했습니다. 다만, 자료 수집에 집중하느라 팩트 체크는 충분히 하지 못했습니다. 첩보 중에서 진짜 정보를 걸러내려면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
차우진이 자료를 받으며 말했다.
"제가 일단 좀 보겠습니다. 오후에 다시 이야기하시죠."
차우진은 자료를 가지고 그의 방으로 갔다. 출근을 자주 하진 않아도 그의 방은 따로 있었다.
점심때가 되어서 특별조사팀원들이 식당에 모였다.
개발 2팀에서 온 박효정이 물었다.
"차 이사님은요?"
비서실에서 차우진을 담당하는 송미소가 대답했다.
"제가 차 이사님께 여쭤봤는데, 도시락 드신다고 하셨어요."
"직접 싼 도시락이요?"
"아니요. 배달 도시락 넣어드렸어요."
박효정이 입맛을 다셨다.
"차 이사님이 만든 도시락이 더 맛있는데."
"제가 진짜 최고급으로 드렸는데요?"
"진짜 더 맛있다니까요? 요리 솜씨가 장난 아니시거든요. 도시락 몇 번 얻어먹어봐서 알아요."
여자 팀원이 말했다.
"난 요리 잘하는 남자가 좋던데."
옆에서 동료 팀원이 말했다.
"차 이사님한테 들이대다가 까이면 회사 다니기 참 편하겠다. 그치?"
"왜 시비예요?"
"회사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특별조사팀에 와서 연애할 생각만 하니까?"
"일은 내가 더 많이 한 거 같은데요? 라이프레인의 내부 상황을 인맥 통해서 알아온 게 누군데요!"
"난 임원진에 대해 조사 많이 했는데?"
송미소가 싸움을 말리며 말했다.
"자자. 밥부터 먹고 싸우든 해요. 차 이사님은 도시락을 드시면서 일하시는데 우리가 식당에서 편하게 밥 먹으면서 싸우는 건 좀 그러네요."
***
차우진은 그의 방에서 인터넷을 보며 낄낄댔다.
그는 팀원들이 가져온 수많은 자료 중에서 백희선 이사에 관한 것만 제대로 읽었다. 나머지는 대충 목차만 보고 넘겼다.
백희선에 관한 자료는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남아돌았다.
"이 호텔 도시락 맛있다. 미소 씨가 도시락 고르는 실력이 좋아."
자료는 오전에 다 봤는데도 회의를 바로 소집하지는 않았다. 분석 시간을 너무 짧게 잡으면 사람들이 납득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회의는 오후 세 시쯤 하면 되겠지."
차우진이 오후 세 시에 TF 회의를 다시 소집했다.
그가 팀원들 앞에서 말했다.
"여러분이 모아주신 자료를 검토하고 분석했습니다. 그 결과."
그가 화면에 사진을 띄웠다. 오늘 받은 자료에 들어 있던 사진이었다.
"백희선 이사. 이 사람이 제일 수상합니다."
송미소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차 이사님. 수집된 첩보가 많았는데 어떻게 벌써 분석하고 용의자까지 특정을…."
차우진은 이미 백희선이 범인이라는 걸 알고 있다.
"어렵지 않더군요."
105. 백희선
송미소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차 이사님. 자료 분석능력이 정말 대단하세요."
다른 팀원들도 놀라워했다.
"이러니까 벌써 이사가 되셨구나…."
차우진이 지시했다.
"지금부터는 백희선을 집중적으로 조사하시죠. 상대가 모르게, 필요하다면 전문 업체를 고용해서라도."
송미소가 물었다.
"어느 선까지 할까요? 법을 조금 어기면 알아낼 수 있는 게 많아지는데요."
"회사에서 불법적인 수단을 쓰다가 걸리면 우리 조사팀은 전임 사장이나 전무 꼴이 나겠지요?"
법을 넘나드는 건 차우진이 하면 된다. 회사 직원들까지 그럴 필요는 없다.
송미소는 차우진의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역시 차 이사님. 믿고 있었어요."
"나 믿지 말아요."
"예. 합법적인 선에서 조사할게요."
차우진이 백희선에 관한 조사를 특별조사팀에게 맡겼다.
하지만 모든 조사를 그 팀에 맡길 수는 없다. 선을 넘는 일은 차우진이 직접 해야 한다.
"나는 용구가 뭐 하는지 알아봐야겠다."
***
KMTV의 부장급 기자 최용구는 밥을 먹어도 모래를 씹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그날 서해안에 있었다는 거, 들키면 어떻게 하지?"
그는 서해안에서 천상칠과 중국 조직이 거래할 때 그 장소에 있었다.
"씨발. 큰 거래라서 따라갔다가 똥 밟았네."
그는 처음에는 해결방법을 고민하다 잠을 설쳤다.
그러다 천상칠이 사망했다는 뉴스가 나왔다.
"그날 거기에 있던 놈들 중에 내가 누구인지 아는 건 천상칠과 천중칠 뿐인데…."
상칠파 두목 천상칠은 죽었다.
"천중칠도 죽었어야 내가 두 다리 쭉 펴고 자는데 말이야."
나인세븐 엔터 사장 천중칠은 칼을 맞았지만 살아는 있다. 그래서 최용구는 더 초조했다.
"천중칠이 당장은 입을 다물겠지만, 언제까지 그럴지…."
천중칠의 입을 막으려면 경찰이나 검찰의 손에서 빼내거나 제거해야 한다.
빼내는 건 불가능했다. 현장에서 체포된 용의자를 빼내는 건 최용구의 힘으로는 무리다.
"입을 막을 방법을 찾아야 해."
천상칠의 동생인 천중칠은 연예 기획사 사장이라는 간판을 갖고 있다. 그래서 제약회사 임원과 자리를 만드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그중에 레드 크리스털의 제조 기술을 가진 사람이 있을 거야. 그게 아니면 천상칠이 어디서 그런 약을 구했겠어?"
그는 마약 공급자와 손을 잡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천중칠이 입을 열면 나만 엿 되는 게 아니니까."
문제는 공급자를 찾는 방법이다.
"분명히 접대를 받은 VIP 중에 있을 텐데."
나인세븐 엔터는 정상적인 연예 기획사가 아니다. 연예계에서 뭔가 해보려고 세운 회사도 아니다.
소속 배우들을 드라마나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시키기는 한다. 그런데 그건 그들의 몸값을 높여서 접대에 이용하기 위해서다.
나인세븐 엔터는 연예계 활동으로는 적자가 나지만 다른 쪽에서 흑자를 낸다. 그곳은 처음부터 사람을 그런 목적으로 쓰려고 만든 회사다.
그런데 나인세븐 엔터는 서해안 사태의 여파로 압수수색을 당했다. 사장인 천중칠이 사건 현장에서 권총을 쥐고 있는 상태로 발견됐기 때문이다.
당연히 최용구는 그 건물에 발도 들일 수 없다. 그곳에 들어간 모든 사람이 용의자가 될 수 있다.
"경찰도 모르는 일은 기자들도 알아낼 수 없으니까 그쪽으로는 안 되고…. 나인세븐의 내부 정보를 아는 놈을 찾아야겠는데…."
***
김상훈은 나인세븐 엔터의 배우다. 가끔 드라마나 영화에 조연으로 출연했다.
그는 나인세븐 엔터의 대표 선수다. 남자 VIP는 술을 마시면서 놀아주고, 여자 VIP와는 2차도 나가는 올라운드 플레이어였다.
김상훈은 회사가 날아간 것 때문에 걱정이 많았다.
"이제 약은 어디서 구하지?"
회사에 묶인 족쇄가 풀렸다는 건 기쁘지만, 약을 구할 방법이 없어진 게 문제였다.
나인세븐 엔터에 부탁해서 몇 개 얻었던 약은 오늘 마지막 한 알을 먹었다. 이대로면 금단증상이 올 게 뻔하다.
그런 그에게 기자의 연락이 왔다.
***
KMTV 부장급 기자 최용구가 김상훈을 만났다.
'나인세븐 엔터 선수 중에 김상훈만큼 VIP를 많이 아는 놈은 없어.'
그는 김상훈의 상태를 보자마자 눈치챘다.
'중독자인 건 최 사장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는데, 역시 약이 떨어졌나 보군.'
그는 다른 언론사 기자의 명함을 김상훈에게 내밀고 인터뷰하는 시늉을 한 후에 떡밥을 흘렸다.
"서해안 그 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마약 말입니다. 제약회사가 엮어 있다는 제보가 있습니다."
김상훈은 깜짝 놀랐다.
"네? 제약회사요? 아니, 무슨 마약을 제약회사에서 만듭니까?"
"회사에서 직접 생산하진 않았겠지요. 그런데 제약회사 임원 중에 누군가 장비를 따로 마련해서 외부에서 만들었을 수는 있잖습니까?"
김상훈이 멈칫했다.
"어? 아…."
최용구의 눈이 번뜩였다.
"생각나는 사람이 있나 봅니다?"
"아니, 그게…."
"누구입니까?"
김상훈이 당황한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아, 아니요! 저는 기자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하나도 모르겠습니다!"
최용구가 그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이 새끼가 알아.'
그가 손을 가방에 넣었다. 레드 크리스털이 들어 있는 약통이 손에 잡혔다.
"김상훈 씨. 우리 어디 조용한 곳에 가서 이야기 좀 합시다. 내가 마침 줄 게 있어서."
***
라이프레인 제약 백희선 이사가 뉴스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천중칠 사장이 안 죽네?'
그녀가 기사를 몇 개 더 검색해보았다.
상칠파 두목 천상칠은 죽었지만 나인세븐 엔터의 천중칠 사장은 중상을 입은 상태로 체포됐다.
"지금은 입을 다물고 있지만, 나중에는 입을 열 수도 있겠지."
그녀의 목소리는 서늘했다.
"그러면 내가 곤란해지네?"
***
이튿날 차유리가 집으로 돌아와 호통을 쳤다.
"야! 빨리 도시락 싸. 각종 요리로 첩첩이 쌓아라!"
차우진이 물었다.
"맡겨놨냐?"
"나 오늘 나가면 며칠 못 들어온다. 위문품이다 생각하고 싸라."
"무슨 일인데?"
"나인세븐 엔터 천중칠 사장이 죽었다."
"결국 죽었네."
차유리가 물었다.
"그 반응 뭐지? 아는 사람이야?"
"뉴스에서 봤어. 중상이라며. 칼을 안 좋은 곳에 맞았나?"
"아니. 수술이 잘 돼서 회복 중이었는데 갑자기 죽었어."
"음? 병원에서?"
"밖에서. 도망치다가 죽었어. 병원을 탈출했더라고."
차우진이 혀를 찼다.
"쯧. 그냥 거기 있었어야 오래 살았을 텐데. 생각이 없어서 죽었구나."
"그러게 말이다."
"그런데 누나는 왜 며칠 못 들어오는데?"
"병원을 어떻게 탈출했는지부터 어디로 이동했는지 다 조사해야 하잖아."
"그렇지?"
"예상 도주 경로 중에 우리 지역을 지나가는 것도 있다. 그럼 누군가는 그 경로를 확인해야겠지? 내가 당첨됐네?"
"고생해라."
"그래서 도시락은?"
차우진이 제안했다.
"재료 사서 넉넉히 준비하려면 오래 걸려. 나중에 내가 경찰서로 가져갈게. 그러면 되지?"
"오케이. 난 씻고 옷 챙겨서 나가야겠다."
"옷 많이 챙겨라. 생각보다 오래 걸릴 수도 있는데."
"저주하냐?"
***
차우진은 요리를 넉넉하게 만들었다.
차유리 혼자 먹는 게 아니라 그녀와 같이 일하는 팀원들도 먹을 수 있을 만큼 많이 만들었다.
차우진이 그걸 들고 차유리가 있는 형사과를 찾아갔다.
"누나 혼자 먹지 말고 다른 분들도 드시라고 넉넉히 준비했어."
같은 팀 형사들이 반가워했다.
"차 형사 동생 도시락은 전에도 먹어봤는데 정말 맛있더라고요."
"이 실력이면 식당을 하지. 그럼 매일 사 먹을 텐데."
팀장은 차우진이 두 회사의 대주주라는 걸 안다. 그가 회의실에서 야식을 먹으며 말했다.
"차 형사 동생은 다른 쪽에서 잘나가는 분이야. 식당을 차릴 리가 없으니까 지금 이거나 즐겨라."
차우진은 형사들이 야식을 먹는 사이에 끼어서 정보를 주워들었다.
대단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차우진은 경찰이 모르는 정보들을 안다.
그는 서해안에서 상칠파와 싸운 당사자이다. 천상칠이 죽기 전에 했던 이야기도 들었다.
여기서 수집한 자투리 정보를 모아서 그가 아는 정보에 더하면 전체적인 그림을 그리는 데 도움이 된다.
차우진이 경찰서를 나오다가 복도에서 민수연과 마주쳤다.
"뭐야. 네가 왜 여기서 나와? 사고 쳤어?"
"누나 도시락 배달."
민수현이 차우진의 손을 보았다. 빈손이었다.
"응? 내 거는?"
"내 주변 여자들은 왜 다 맡겨놓은 것처럼 굴지? 둘 다 선수 출신이라서 그러나?"
민수연이 맡겨놓은 거라도 있는 것처럼 손을 내밀었다.
"그게 선출하고 뭔 상관인데? 내 것도 내놓아라."
"너도 이 시간까지 여기 있는 줄은 몰랐다."
"배고파!"
"넌 항상 배고프잖아. 나가자. 컵라면이라도 사줄 테니까."
"고기 사라."
"삼겹살?"
"콜."
***
삼겹살을 먹는데 TV에서 라이프레인 제약의 광고가 나왔다.
민소연이 광고를 보고 인상을 썼다.
"아이. 씨. 고기 맛 떨어지게."
"그렇게 말하면서 너무 잘 먹는 거 아니냐?"
"더 맛있게 먹을 수 있었는데."
"저 광고가 왜 불만인데? 영양제 광고잖아."
그녀가 주변을 슬쩍 본 후에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내가 이번 서해안 사건 때문에 예전 팀의 노트북 분석을 도와주는 거 알지?"
"알지."
"거기서 나온 자료를 추적하다가 라이프레인에 관한 걸 찾았거든?"
차우진이 관심을 보였다.
"중요한 정보가 나왔어?"
"중요한 건 아닌데 확인은 해야 했어. 그래서 협조 요청하러 회사에 찾아갔지. 근데 아주 대놓고 박대하더라."
"보통은 경찰한테 그렇게까지는 안 하지 않나?"
"영장 받아간 건 아니었거든."
"응?"
"그래도 그렇지. 겉으로는 도와주는 척하면서 아주 도도하게 굴고, 실제로는 아무것도 안 도와줘. 앞에서 한 말과 뒤에서 한 말이 완전히 달라."
차우진이 물었다.
"누가 감히 너를 그렇게 박대했냐?"
민수연이 욕을 했다.
"백희선이라고 미친년이 있어. 그 회사 이사라더라."
차우진이 백희선이라는 말을 듣고 활짝 웃으며 물었다.
"고기 더 사줄까?"
"응? 진짜? 그럼 삼겹살 2인분에, 소주…. 아니다."
"왜? 그냥 시키지?"
"그냥 소주 말고 명품 소주."
"한 병에 이만오천 원짜리?"
"어."
"왜?"
민수연이 씩 웃었다.
"너 지금 흥미진진한 얼굴이잖아."
"역시 민수연. 기회를 잡았다 싶으면 신나서 뜯어먹지."
차우진이 고기와 술을 더 주문한 후에 물었다.
"그래서 그 미친년에 대해 더 이야기해봐."
"백희선 이사?"
"어. 그게 어떻게 미쳤는데?"
***
백희선은 차를 타러 가다가 걸음을 멈추고 인상을 찌푸렸다. 주차장에서 그녀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
"누구지?"
최용구가 마스크를 쓰고 다가왔다.
"기자입니다."
그녀는 최용구를 제대로 보지도 않고 다시 걸어가며 말했다.
"나와 인터뷰하고 싶으면 홍보팀을 통해서 스케줄을 잡아요."
"그러면 곤란하실 텐데."
"내가?"
최용구가 명함을 내밀었다.
"소개가 늦었군요. KMTV 기자 최용구입니다."
백희선이 표정이 살짝 굳었다. 그녀가 걸음을 다시 멈추고 상대의 얼굴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최용구?"
"아시지요?"
"몰라요."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혼자만 빠져나가겠다니."
백희선이 손짓을 했다. 회사 보안요원이 다가왔다.
최용구가 말했다.
"이러면 곤란하다니까. 내가 다 터트리면 어쩌려고요."
"터트려? 뭘?"
"나 KMTV 기자입니다. 아시잖습니까?"
백희선이 다시 손을 흔들었다. 보안요원이 다가오는 걸 멈추었다.
백희선이 말했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지만, 여기는 대화하기 좋은 곳은 아니군요."
그녀가 가방에서 명함을 꺼내 몇 자 적었다.
"인터뷰하고 싶으면 여기서 만나죠."
백희선이 명함을 넘겨준 후에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걸어갔다.
최용구가 명함을 보았다.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한강 생태공원이 적혀 있었다. 내일 새벽 2시라는 글자도 있었다.
"역시 백희선 이사. 이런 철저함은 나도 좀 배워야겠는데?"
***
조연 배우 김상훈이 나인세븐 엔터 천중칠 사장의 장례식장에 조문을 갔다.
그가 절을 하며 작게 말했다.
"사장님이 그렇게 가셨으니까, 난 이제 자유입니다. 이제 내 마음대로 살 거라고."
그는 육개장까지 먹은 후에 장례식장을 나왔다.
그가 장례식장 밖에서 담배를 입에 물며 말했다.
"이제 약은 어디서 구하나."
옆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게. 너 약 어디서 구하냐?"
김상훈이 옆을 돌아보며 말했다.
"아. 오해하셨군요. 내가 말한 약은 보약…. 히익!"
그의 옆에 차우진이 서 있었다. 마스크로 얼굴을 가렸어도 지난번과 같은 모습이라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다, 당신이 왜 여길…."
"장례식장에 왜 왔겠냐?"
"조문하러?"
"조문하는 너 만나러."
김상훈이 뒤로 주춤 물러났다.
"나, 나를 왜…."
"너 때깔이 좋아졌다? 저번에는 초조하더니 지금은 되게 여유가 있네?"
"그, 그거야…."
"너. 약이 생겼구나?"
106. 백희선 II
나인세븐 엔터 출신 배우 김상훈이 다급히 말했다.
"아, 아니다!"
"매를 버는구나."
김상훈이 반항했다.
"여, 여기서 내가 소리 지르면 너도 안 좋을 텐데!"
"그러면 네가 마약중독자라는 게 밝혀지겠지."
김상훈이 눈알을 데굴데굴 굴렸다. 아직 차우진에게 맞은 건 아니라서 소리를 질러봤자 해결되는 건 없다.
"아, 아니, 그 약은 가벼운 거라서…."
"레드 크리스털이 가벼워 보이긴 하지?"
"그렇지!"
"대마초보단 세잖아."
레드 크리스털은 아직은 일부만 아는 신종 마약이다.
몇 년만 지나면 그 약이 대마초 시장을 잠식한다. 프로포폴 같은 약품의 불법 투약 시장도 레드 크리스털이 장악한다.
그렇게 전 세계에 약이 퍼지고, 거기에 다른 마약 두 개와 중독자의 피에서 추출한 물질이 섞이면 블러드 크리스털이 된다.
"레드 크리스털로 시작한 놈은 결국은 끝까지 가. 그 끝에서 기다리는 건 파국이야. 마약이란 그런 거지."
"아니, 나는 이걸로 만족할 생각인데…."
"그게 네 마음대로 통제가 되면 의약품이지 마약이겠냐?"
김상훈은 반박할 말이 없었다.
차우진이 물었다.
"천중칠은 죽었고 나인세븐 엔터는 풍비박산이 났는데, 그 약은 어디서 났을까? 누가 줬냐?"
"모, 모른다."
"콩밥 좋아하냐?"
"진짜 몰라! 모르는 기자였어!"
"기자? 그러면 명함 받았겠네?"
"명함? 받긴 받았는데…."
김상훈이 명함을 꺼냈다.
"내가 이 기자를 인터넷에 검색해봤거든? 얼굴이 달라. 다른 사람이더라고."
차우진은 누가 약을 줬는지 짐작이 갔다.
'용구가 왔나 본데?'
"어떻게 생겼냐?"
"어…. 그게. 두꺼운 풀테 안경을 썼고, 키는 이만큼. 조금 마른 체형인데…."
"눈은?"
"뭐라고 표현해야 하지? 눈빛이 뱀처럼 차가웠는데…."
"누군지 알겠다."
김상훈의 목소리가 흥분으로 조금 커졌다.
"그, 그래? 누구야?"
"왜 알고 싶지? 약이 더 필요해서? 나한테 약이 있는 거 알지? 약을 원하면 그놈에게 무슨 정보를 줬는지부터 말해."
"약을 먼저…."
"말부터 하라고."
김상훈이 항의했다.
"넌 저번에도 사진만 받아가고 비타민 C를 줬잖아!"
"네 건강 생각해서 준 건데 이렇게 마음을 몰라준다."
"야 이 사기꾼 새…."
"비타민 C 한 통 다 씹어먹고 싶냐?"
"아, 아니요."
김상훈은 차우진이 싸우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그때 나인세븐 엔터의 건달 같은 직원 두 놈과 매니저가 순식간에 나가떨어졌다.
차우진이 말했다.
"너 그 기자에게 무슨 이야기를 했냐?"
김상훈은 최용구에게 지킬 의리가 없다. 최용구가 누구인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최용구에게 약을 더 얻을 수 있을까 하는 기대를 했었는데, 명함이 가짜라 연락할 방법도 없다.
"나한테 어떤 VIP들을 상대했냐고 묻더라. 그래서 알려줬지."
"몇 명이나?"
"당연히 여러 명. 아! 동시에는 아니고, 돌아가면서 접대를…."
"어디까지?"
"이게 좀 복잡한데, 남자는 술 마실 때 형님이라 부르면서 같이 놀아줬고, 여자는…. 그, 2차를…."
"한 번은 아닐 테고."
"연락 오면 그때마다…."
"그래서 그중에 누구에게 관심을 보였지?"
"여자 VIP…."
"누구냐?"
"여자 VIP의 신분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게 룰이라서…."
차우진의 눈썹이 조금 올라갔다.
"그래서 이름을 모른다?"
"이름은 진짜 몰라! 제약업계에서 일한다는 것만 안다고!"
"어떻게 생겼는지 설명해."
김상훈이 인상착의를 설명했다.
'역시 백희선이네.'
상칠파 두목 천상칠은 백희선이 킬러를 보냈다고 주장했다.
"그 기자가 네 설명을 듣고 나서 약을 줬다고?"
"그, 그래."
'그러면 용구는 레드 크리스털의 공급자가 누구인지는 몰랐다는 건데…. 이제 백희선이라는 걸 알아냈네?'
***
차우진이 딥어스테크에 출근했다.
특별조사팀은 그가 지시한 자료를 모아두었다.
비서실 송미소가 보고했다.
"라이프레인의 백희선 이사는 미국 쪽과도 일하지만, 러시아 쪽에도 인맥이 있습니다. 러시아 회사의 기술을 몇 가지 들여왔습니다."
"러시아라…."
차우진은 예전에 성구파 두목 박성구가 썼던 권총이 생각났다.
'그거 러시아에서 만든 권총이었는데.'
그건 그냥 작은 단서일 뿐이다. 권총은 러시아 선원을 통해서 샀을 수도 있다.
'딥어스테크에서 횡령으로 사라진 장비 일부는 박성구가 가지고 있었고, 나머지 장비는….'
이번에 마약 제조 시설에서 발견됐다. 그런데 그 장비를 이용해 마약을 만들던 사람들은 정체를 짐작할만한 단서를 모두 없애고 사라졌다.
'백희선이 장비와 사람을 제조 시설에 배치한 걸까? 아니면 레드 크리스털을 중개만 한 걸까?'
***
최용구가 한강 공원에서 백희선을 만났다.
뚝섬처럼 유명한 곳은 밤에도 사람이 있지만 외진 생태공원은 새벽 2시에는 아무도 없었다.
백희선이 말했다.
"최용구 기자님. 이름은 들은 적이 있어요."
"천상칠 사장한테서?"
"출처는 밝힐 수가 없죠. 그래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뭐죠?"
최용구가 물었다.
"원래는 천중칠 사장의 입을 막아달라고 하려던 건데, 이미 죽었더군요. 백 이사님 솜씨입니까?"
"난 최 기자님이 손을 쓴 줄 알았는데요? 그쪽으로 인맥이 있으시잖아요."
최용구의 얼굴이 꿈틀거렸다. 그쪽 인맥이던 천상칠은 죽었다. 상칠파도 무너졌다.
'다 알면서 하는 소리인가?'
"백 이사님은 나에 대해 많이 아시네."
"들어는 봤다니까요. 그 이야기를 하려고 보자는 건 아닐 테고, 진짜 용건이 뭐죠?"
최용구가 주변을 둘러본 후에 말했다.
"이 사업, 천 사장이 죽었다고 해서 그냥 접을 겁니까?"
백희선이 최용구를 빤히 쳐다보다가 가방에서 작은 검은색 상자를 꺼냈다. 상자 위에서 파란 LED가 빛을 뿌렸다.
"도청 탐지장치예요. 휴대폰은 완전히 끈 채로 차에 두고 오셨죠? 그런데도 여기 이 불이 빨갛게 변하면 녹음기를 가지고 있는 거로 알게요."
최용구가 손을 들었다.
"철저하시군요. 난 그런 거 없습니다."
백희선이 말했다.
"그럼 사업 이야기를 하죠. 알다시피 리스크가 큰 사업이에요."
최용구가 입술을 핥으며 말했다.
"대신에 조 단위의 수익을 볼 수 있는 초대형 사업이지요. 백 이사님에 대해 좀 알아봤습니다. 그 돈이면 라이프레인 제약을 손에 넣을 수 있을 텐데요."
"그렇다고 쳐요. 그 사업을 왜 최 기자님하고 해야 할까요?"
"언론의 적극적인 지원? 기자들 사이에 떠도는 정보 수집? 경찰 수사 정보? 뭐든지."
"어지간한 건 내 돈으로 해결되던데?"
"어지간하지 않은 건 돈과 인맥을 같이 써야 효과가 좋습니다만?"
"그런가요?"
최용구는 백희선이 필요하다.
그가 처한 상황을 수습하고 새로운 거래처도 뚫으려면 혼자 힘으로는 어렵다.
'우리나라에서는 사기를 쳐도 돈을 조 단위로 벌면 덮을 수 있어.'
최용구는 아직 그런 돈을 벌지는 못했다. 다른 비리로 번 돈은 흥청망청 썼다.
마약 장사에 한 발 걸치고 번 돈은 꽤 많았는데 그건 천상칠이 죽으면서 날아갔다.
그가 천상칠이 했던 마약상을 이어받는 건 혼자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러려면 약을 공급받을 수 있어야 하고, 문제가 생겼을 때 처리할 힘도 필요하다.
그중에서 최용구가 할 수 있는 건 언론을 움직여 적당히 띄우거나 덮는 것 정도다.
그래서 그는 백희선이 필요했다.
'백 이사는 레드 크리스털의 공급 루트와 힘을 가지고 있어.'
최용구의 언론계 영향력만으로는 백희선과 손을 잡기 어렵다. 그걸로는 균형이 맞지 않는다.
대신에 그는 백희선과 레드 크리스털이라는 비밀을 공유하고 있다.
그가 백희선에게 제안했다.
"백 이사님. 같이 삽시다. 혼자만 빠져나가지 말고."
백희선이 궁리했다.
'새로운 사람을 끌어들이는 건 그만큼 리스크가 있고, 어차피 나팔 불 놈은 필요하니까….'
그녀가 대답했다.
"그러죠."
최용구가 활짝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럼 잘해봅시다."
백희선은 그 손을 잡지 않았다.
"남이랑 피부가 닿는 거 싫어해서."
최용구가 어색하게 손을 집어넣었다.
"흐흐. 그러시군."
백희선이 단서를 달았다.
"비밀 철저히 지켜요. 최 기자님 입에서 우리 정보가 새어나가면."
그녀가 웃었다.
"기자님 죽어요."
입은 웃는데 눈은 웃지 않았다.
***
차우진이 인터넷 언론사 소리언덕의 도인선 기자를 만났다.
"도 기자님. 용구 잡고 싶지요?"
도인선이 국밥집에서 소주잔을 탁 소리가 나게 내려놓았다.
"말이라고 해요? 이번엔 잡을 수 있을 줄 알았어요."
"얼마 전에 서해안에 용구도 있었을 텐데, 그때는 그걸 안 터트리더군요."
"차 이사님이 그건 어떻게 알았을까요?"
"그게 아니면 도 기자님이 거기 있었을 리가 없으니까."
"아. 그렇죠."
도인선이 아쉬워했다.
"난 거기서 분명히 최용구 비슷한 놈을 봤거든요? 근데 증거가 없어요. 최용구를 증거 없이 치면 내가 도로 당해요."
"서해안 사건에서 살아남은 놈들이 최용구를 모르던가요?"
"부하들은 손님이 있었지만 누군지 모른다고 하네요? 천상칠이나 천중칠은 알 텐데 죽었죠. 이러면 어떻게 된다? 어설프게 덤벼봤자 최용구의 인맥이 덮어요."
"그래서 내가 도와주려고요."
"방법이 있어요?"
차우진이 물었다.
"미리 말하는데, 이 일에 끼어들면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상관없어요. 그게 무서웠으면 그날 서해안에 안 갔어요."
그녀가 소주 한 잔을 입에 털어 넣은 후에 말했다.
"우리 오빠는 1년 전에 실종됐어요. 저는 최용구가 범인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최용구에게 알려달라고 부탁해봤자 말할 리가 없어요."
"그건 맞습니다. 최용구는 부탁이 아니라 밟아놓고 물어봐야 말을 하는 놈이니까."
"나랑 의견이 딱 맞으시네. 맞아요. 최용구를 먼저 무너뜨려야 해요."
"나한테 용구를 잡을 방법이 있는데, 위험을 감수한다면 끼워줄게요."
도인선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내가 뭐 하면 돼요?"
"라이프레인 제약을 압니까?"
"영양제 파는 곳?"
"그 회사 임원 중에 백희선 이사가 있습니다. 누군지 압니까?"
"아뇨."
"정보가 느리시네."
"그래서 그 백희선 이사는 왜요?"
"이번에 발견된 마약 공장의 장비는 조폭이 다룰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그건 그렇죠. 화학이나 제약 전문가가 필요…."
도인선은 이게 무슨 이야기인지 깨달았다.
"그게 백희선인가요?"
"그렇게 짐작하고 있습니다."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천상칠이 자백하고 죽었다.
"용구가 백희선을 찾기 위해 움직였습니다. 지금쯤이면 접촉했을 겁니다."
최용구가 백희선과 접촉했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상관없다. 이미 접촉했거나 곧 한다는 걸 안다.
도인선의 눈이 반짝였다.
"계획은 있죠?"
"일단 백희선을 흔들어봅시다."
"어떻게요?"
"도 기자가 서해안 사건 현장에 있었다는 건 이미 알려졌습니다."
"당연하죠. 제가 직접 현장에서 특종 기사를 썼으니까요."
"그러니까 백희선은 도 기자가 인터뷰를 요청하면 의심할 겁니다."
"잠깐만요. 그러면 백희선이 나를 죽이는 거 아녜요? 다치는 건 각오했지만 살해당하는 건 마음의 준비가…."
"당연히 서해안 이야기는 빼고 평범한 인터뷰인 척해야죠. 살짝 흔들어만 봅시다."
"그럼 우진 씨는요?"
"나는 카메라 기자로 위장해서 따라가겠습니다."
"아! 사진 잘 찍어요?"
"아뇨."
"네?"
"카메라는 셔터를 누르면 찍힌다는 정도는 압니다."
"그럼 장비는…."
"도 기자님 걸 빌려줘야지요."
***
도인선이 라이프레인 제약에 백희선 이사 인터뷰를 요청했다.
그걸 홍보팀 혼자 결정할 수는 없다.
백희선은 홍보팀의 보고를 받고 고개를 갸웃했다.
"소리언덕 기자 도인선?"
"네. 이사님을 인터뷰하고 싶다는데, 어떻게 할까요?"
"뭐가 묻고 싶대?"
"여성 리더로서의 이사님을 취재하고 싶다고 합니다."
"흐음…. 알았으니까 나가 봐."
백희선이 인터넷으로 기사를 검색했다. 서해안 사건의 기사였다.
"현장에서 취재하다 납치됐던 도인선 기자…. 하필 나한테 인터뷰 요청을 해? 이게 우연인 걸까? 아니면 나한테서 뭔가 알아내려는 걸까?"
의심이 안 가는 건 아니다.
"괜히 거절하면 이상하게 생각할 테고."
그녀가 피식 웃었다.
"어차피 나한테서 나갈 정보는 없지. 내가 도인선이 뭘 아는지 알아낸다면 모를까."
그녀가 홍보실에 연락했다.
"인터뷰한다고 해. 스케줄 때문에 오늘 오후에 와야만 받아준다고 하고. 얼마나 급하게 오나 보게."
107. 독거미
도인선이 차우진과 함께 라이프레인 제약 연구소를 방문했다.
인터뷰 장소는 회의실이 아니라 연구소 앞에 꾸며놓은 정원이었다. 그곳은 사방이 탁 트여 있고 배경으로 연구소 건물이 보였다.
도인선이 인터뷰 장소로 가면서 말했다.
"차우진 씨. 보조 기자 연기에 자신이 없으면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그냥 가만히 서 있어요. 이게 연기력이 필요한 일이거든요."
"말할 생각은 원래 없습니다. 난 반응을 보러 온 거니까 도인선 씨나 자연스럽게 잘해요."
"어머. 나 잠입취재 많이 해봤어요. 이런 거 잘해요."
***
백희선이 여유로운 표정으로 인사했다.
"반가워요. 백희선이에요."
도인선은 백희선과 인터뷰하며 평범한 질문만 건넸다. 마약이나 레드 크리스털 같은 건 묻지도 않았다.
그런데 너무 평범한 것만 물어보면 상대를 흔들 수가 없다.
그래서 제약 기술에 관한 걸 질문했다.
"백 이사님께서는 러시아 기술도 도입하셨다고 들었는데, 그쪽에 인맥이 있으신 건가요?"
백희선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녀가 말을 돌렸다.
"그런데 옆에 서 계신 분은?"
차우진은 백희선의 사진을 찍고 연구소 사진도 찍는 중이다.
도인선이 설명했다.
"사진 멋있게 찍어드리려고 같이 왔어요."
"소리언덕은 작은 인터넷 언론사로 아는데, 인터뷰 하나에 기자가 두 명이나 올 여유가 있나요?"
"네? 그건…."
차우진이 밥을 한 숟가락 먹었다가 도로 뱉었다.
"먹지 마."
박창수는 이미 몇 숟가락 먹었다.
"왜?"
"독이 들어 있어."
박창수가 곧바로 손가락을 목에 넣고 토했다.
"우웨엑! 어떤 독이냐? 위험한 거야?"
"변종 스파이더의 독인가? 거기에 지연 성분을 합성했어. 반응을 지연시켰다가 훅 가게 하는 타입이야. 처음엔 괜찮았다가 한 시간쯤 지나면 위험해져."
박창수가 물로 입을 헹구었다.
"젠장. 우리가 가진 해독제가 통하는 독이야?"
"일단 3번 해독제를 먹어둬. 정확한 건 분석해봐야 알아."
박창수가 수제품 해독제를 입에 넣고 삼켰다.
그가 주변을 슬쩍 보며 말했다.
"이 사람들이 왜 우리를 속였지? 관계는 좋았는데 이상하네."
"이 사람들도 독을 당하는 중일 수 있어. 우리만 먹은 게 아니니까."
그들은 생존 커뮤니티에서 나온 거래팀과 접촉 중이다.
멸망한 세계에서 돈은 종잇조각 이상의 의미가 없다. 금속인 동전의 가치가 더 높다.
그래서 거래를 할 때는 식량이나 유용한 물건을 교환한다. 특히 탄약과 통조림, 소염진통제나 항생제는 언제나 환영받는 대체화폐다.
그런 거래물품을 가지고 커뮤니티를 나오는 팀은 당연히 무장을 단단히 한다.
차우진이 거래 상대방인 사람들에게 말했다.
"먹던 거 일단 뱉고, 확인 좀 합시다."
사람들이 씹던 동작을 멈췄다.
차우진이 그 팀 리더에게 물었다.
"우리 만나기 전에 거래한 곳 있습니까?"
"물론이죠. 마을 밖으로 멀리 나온 김에 세 건 정도 거래할 예정인데, 여기가 두 번째입니다."
"우리보다 먼저 한 거래에서 받은 물건 중에 식량도 있습니까?"
"그야 당연히…. 지금 우리가 먹는 이거…."
"그럼 확실하네. 여기에 독이 섞였습니다."
독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거래팀 사람들도 먹은 걸 토해냈다.
식량이 귀하긴 하지만 독 경고가 우선이다. 그 경고를 한 사람이 차우진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리더가 손가락을 목에 넣고 먹은 걸 토한 후에 물로 입을 씻고 나서 급히 말했다.
"전부터 거래하던 상대이고, 식량은 테스트했는데?"
"그럼 상대방 팀에 누가 침투했겠지요. 그리고 식량 테스트는 뭐로? 쥐?"
"우리도 독 감지 스킬 각성자가 있습니다."
"스킬 레벨은?"
"1레벨…."
"이건 중독 효과가 즉시 나오는 게 아니라서 1레벨로는 감지가 어렵습니다."
리더는 더는 의심하지 않았다. 그가 팀원들에게 물었다.
"우리 해독제 얼마나 있어?"
"확인해보겠습니다."
차우진이 끼어들었다.
"아마 변종 스파이더의 독을 가공했을 겁니다. 일반 해독제로는 안 되니까, 우리가 가진 걸 나눠드리죠."
"아! 고맙습니다!"
"물론 공짜는 아니고요."
"그러면…. 탄약?"
"탄종은?"
"우리 기술자가 직접 만든 9mm. 스무 발."
탄약이 대체화폐이긴 한데, 수제품은 멸망 전에 공장에서 만든 것보다는 가치가 떨어진다.
게다가 이런 비상 상황에서는 해독제의 가격을 더 높게 부를 수도 있다.
"콜."
어차피 식량은 독으로 오염됐다.
이 팀은 오래 거래한 사람들이다. 차우진과 박창수에게 방금 먹은 식량을 나눠주기도 했다.
그래서 그냥 스무 발만 받기로 했다.
거래팀의 독 감지 스킬 각성자는 그가 이미 먹은 음식에서 독을 감지하기 위해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러다 눈을 떴다.
리더가 물었다.
"맞아?"
"맞습니다. 죄송합니다. 감지가 어려운 타입의 독이라 알아채는 게 늦었습니다."
"지금은?"
"이미 먹은 독이 몸에서 아주 조금씩 반응하는 중입니다. 그래서 겨우 감지했습니다."
리더가 차우진에게 물었다.
"우리 해독제로는 안 된다고요?"
"뭐 쓰는지 아는데, 그걸로는 중독 지연효과 정도만 있을 겁니다."
차우진이 3번 해독제를 나눠주었다.
"이게 낫습니다."
그 팀 사람들은 3번 해독제를 나눠 먹었다.
독 감지 능력자가 제일 먼저 먹고, 그가 고개를 끄덕인 후에 나머지 인원 중에 반만 먼저 먹었다. 남은 인원은 차우진에게 받은 건 아껴두고 기존 해독제부터 사용했다.
팀 리더가 이를 갈았다.
"독을 쓴 새끼를 찾으면 죽여버릴 테다."
박창수가 말했다.
"내가 생각해봤는데, 누구 짓인지 알 거 같다."
차우진이 물었다.
"누구?"
"별명이 백독거미인 여자가 있어. 독을 섞은 식량을 제공하고, 그걸 먹은 사람들이 중독되면 약탈하는 여자야."
"1레벨이라도 명색이 독 감지 스킬인데 놓칠 정도면, 독 제조 기술이 꽤 뛰어나겠네."
반응이 느린 독을 쓴 이유는 뻔했다. 차우진이 말했다.
"반응이 너무 빠르면 순서대로 먹던 사람을 모두 중독시킬 수가 없으니까, 느린 독을 만들었겠지."
박창수가 말했다.
"우리가 맛이 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접근하려고 했을 텐데, 들켰으니까 안 오고 튈걸?"
"다음에 보면 쏴버려."
"당연하지."
***
차우진이 하얀 옷을 입고 대화하는 백희선을 보며 생각했다.
'백독거미. 그 여자네.'
도인선 기자는 오늘 인터뷰에서 러시아 기술 이야기를 물은 것 외에는 민감한 질문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질문 하나면 충분했다.
백희선이 시계를 보고 일어났다.
"오늘 인터뷰는 여기까지 하죠. 제가 스케줄이 있어서."
"시간 내주셔서 고맙습니다."
차우진이 옆에서 물었다.
"혹시 연구소 안내도 받을 수 있습니까? 백 이사님은 바쁘시니 다른 직원을 통해서라도요."
"홍보실에 연락해둘 테니까 그렇게 해요."
백희선이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걸어갔다.
도인선이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말했다.
"우진 씨. 평소에 나 쫓아다녔어요? 말을 하지."
"당연히 핑계지, 진짜겠습니까?"
"알아요. 나도 농담한 거예요. 그런데 오늘 인터뷰는 챙긴 게 없어요. 반응이 영 없잖아요."
"충분히 챙겼습니다."
백희선이 빌런 백독거미라는 걸 알아냈다. 러시아 기술 이야기를 대충 넘기려 하는 것도 보았다.
'레드 크리스털에 러시아 기술이 들어갔을까?'
가능성은 있다.
도인선이 물었다.
"그런데 연구소 안내는 왜요? 그건 오늘 계획에는 없었잖아요."
"원래는 필요 없었는데."
상대가 빌런 백독거미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제 필요해졌습니다."
홍보팀 직원이 찾아와서 그들을 안내했다.
외부인은 통제구역까지는 갈 수 없다.
대신에 일반적인 연구소 시설 정도는 구경할 수 있었다. 로비나 복도 정도는 사진촬영도 가능했다.
복도 맞은편에서 젊은 여자 연구원이 걸어왔다. 차우진이 그녀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녀는 그들을 보고도 딱히 반응하지 않았다. 차우진의 카메라를 한번 슬쩍 본 게 다였다.
차우진이 작게 말했다.
"찾았다."
도인선이 물었다.
"네?"
"나중에 말해줄게요. 저 사람이랑 인터뷰 좀 해봐요."
도인선이 앞을 보았다. 젊은 여자 연구원이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가 얼른 연구원에게 다가갔다.
"소리언덕 도인선 기자예요. 인터뷰 좀 요청할게요."
"네? 저요?"
홍보팀 직원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연구원과의 인터뷰는 따로 홍보팀을 통해 진행하시죠."
"홍보팀에서 나오셨다면서요. 지금 주선해주시면 되겠네요."
"제가 아니라, 홍보팀에 정식으로 절차를 밟아 요청해 주십시오. 회사 방침이 그렇습니다."
차우진이 끼어들었다.
"방침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요. 도 기자님. 취재 더 하실 겁니까?"
"아니요. 정식으로 절차 밟으라잖아요. 오늘은 그만할래요."
홍보팀 직원이 두 사람을 연구소 입구까지 배웅했다.
두 사람만 남은 후에 도인선이 물었다.
"왜 갑자기 인터뷰를 시킨 거예요? 그것도 계획에 없었잖아요."
"마지막에 복도에서 마주친 사람이 필요해서요."
"그 사람이 무슨 일을 하는데요?"
"이제부터 알아봐야죠."
"네?"
***
백희선이 홍보팀 직원에게 물었다.
"뭘 하고 갔어?"
"연구소 전경, 로비와 복도 사진을 좀 찍었습니다."
"연구실 쪽은?"
"복도까지만 허용했습니다."
"잘했네."
"그런데, 저…."
"왜? 특이사항이 있어?"
"기자가 복도에서 마주친 연구원에게 인터뷰 요청을 했습니다."
"인터뷰? 누구?"
"손하은 연구원입니다."
"알았어요. 가봐요."
홍보팀 직원이 나간 후에 백희선의 얼굴이 싸늘해졌다.
"연구소에서 뭔가 캐내려고 시도하는지 알아보려고 들여보내긴 했는데."
홍보팀 직원에게는 잘 감시하라고 말까지 해놓았다.
"하은이까지 알아낸 거야?"
확신은 없다. 있는 건 작은 의심뿐이다. 그런데도 그녀의 눈빛이 독해졌다.
"하은이는 이용가치가 더 있지만, 위험한 시기니까 어쩔 수 없네. 손절해야지."
***
라이프레인 제약 연구원 손하은이 집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피곤하다."
그녀의 입이 삐죽 나왔다.
"나만 일 많이 시켜. 일 더 한다고 월급 더 주는 것도 아니면서. 사람이라도 더 투입해 주던가. 왜 나 혼자 그걸 다 해야 하는데."
그녀가 투덜대며 걷다가 편의점에 들렀다.
"술 마시고 잘 거야. 두 캔 마실 거야."
그녀가 맥주 두 캔과 편의점용 닭강정을 사서 가방에 넣었다.
그런 후에 다시 집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골목 앞쪽에 남자가 서 있었다. 그녀가 남자의 얼굴을 확인했다. 마스크와 모자를 쓰고 있었다.
이 골목은 CCTV는 없지만 가로등이 밝았다. 근처에는 편의점도 있고 사람들도 종종 지나다녔다.
그녀는 상대를 무시하고 지나가려고 했다.
차우진이 그녀를 불렀다.
"손하은."
그녀는 깜짝 놀랐다.
"나, 나를 알아요?"
차우진이 마스크를 내렸다.
"압니다."
"난 모르는데…. 우리가 어디서 봤나요?"
"물론이죠."
***
박창수가 팔에 붕대를 감으며 말했다.
"손하은 씨가 만든 약이 없으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손하은은 멸망한 세계에서 수제 약품을 만든다. 그녀처럼 약을 만들 줄 아는 사람은 고급인력으로 인정받는다.
그녀가 약통을 챙기며 말했다.
"박창수 씨는 회복력 증가 스킬이 있잖아요. 우진 씨의 회복 스킬도 있고요. 그러니까 팔이 칼에 베인 정도는 알코올로 소독하고 실로 꿰매기만 해도 나을 텐데요."
"손하은 씨의 약을 쓰면 더 빨리 나을 수 있잖습니까?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해야 생존에 유리하지요. 하하하."
"공짜 아닌 거 아시죠?"
차우진이 텐트 앞에 고라니 한 마리를 내려놓았다.
"오다가 잡았습니다."
"어머. 맛있겠다."
"창수 형 팔에 바른 약만으로는 가격이 안 맞는데."
"약 더 드리려고 했어요."
박창수가 불평했다.
"와아. 하은 씨. 나랑 이야기할 때와는 표정부터가 다르네."
"이건 어쩔 수 없잖아요. 나는 우진 씨처럼 날씬한 몸을 가진 사람이 좋아요."
"아니, 요즘 세상에 살찐 사람이 어디 있다고. 나도 날씬합니다."
"박창수 씨는 날씬한데도 뭔가 두꺼운 느낌이 들잖아요. 멸망 전에는 곰이었을 거 같아요. 우진 씨는 원래 날씬했을 것 같고요."
"와. 억울하네. 우진아. 뭐라고 말 좀 해봐라."
"난 불만 없어. 이 평가에 매우 만족해."
"야 이 사기꾼 새끼…."
108. 손하은
박창수와 손하은, 차우진은 고라니 고기로 국을 끓여 나눠 먹었다.
손하은이 사는 생존 커뮤니티의 다른 사람들도 고기를 먹으며 즐거워했다.
차우진이 말했다.
"백독거미의 거점이 어디쯤 있는지 알아냈습니다. 곧 공격할 겁니다. 피해를 본 마을 몇 곳의 공동의뢰를 받았거든요."
손하은이 물었다.
"설마 두 분만 싸우러 가는 건 아니죠?"
"당연히 병력도 지원받기로 했습니다. 의뢰한 마을들의 무장팀에서 인원을 차출할 겁니다."
손하은이 진지하게 말했다.
"저도 참전할게요."
"후방 지원이라면 언제나 환영입니다."
"아니요. 전투에 참여하고 싶어요."
"왜 굳이…."
손하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멸망 이전에 백독거미와 같은 회사 연구소에 있었어요. 그리고, 엄마의 원수거든요."
박창수가 비명을 질렀다.
"으아악! 하은 씨! 지금 내 상처를 누르고 있습니다!"
"죄송하니까 참아요!"
***
차우진이 손하은에게 말했다.
"아까 연구소에서 인터뷰 요청을 했습니다."
"어머. 맞다! 아까 그 기자분이시…."
그녀는 당황했다.
"잠깐만요. 설마 여기까지 따라온 거예요?"
"아까 못 한 인터뷰를 하고 싶어서요."
"와. 기자들은 원래 이렇게까지 해요?"
"이번에는 그래야 해서."
손하은은 망설였다.
"아까 보니까 회사 허락 없이 인터뷰하면 안 되는 거 같던데요?"
차우진이 진지하게 물었다.
"손하은 씨. 왜 이 회사에 있습니까? 회사를 옮길 실력이 될 텐데."
멸망한 미래의 손하은은 식물이나 다양한 소재를 써서 약을 만드는 전문가다.
그녀는 기존에 있던 식물만이 아니라 멸망의 영향으로 이상 변이한 식물들까지 사용해 필수 치료제를 만들었다.
차우진은 지금 손하은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른다. 그렇지만 우수하리라는 건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다른 마을의 제약 기술자들보다 실력이 훨씬 좋았으니까.'
손하은은 차우진의 질문이 인터뷰가 아니라 그냥 물어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대답했다.
"그게 마음대로 되나요."
"능력이 충분히 될 텐데."
"어머. 저를 어떻게 아시고."
"기자의 감?"
"웃기시다."
차우진이 그녀의 가방을 보았다. 캔맥주가 슬쩍 보였다.
"같이 마실까요?"
"네? 어디서요?"
"방금 나온 편의점 앞 테이블?"
"웅…. 그래요."
두 사람은 편의점 앞 테이블에 앉았다. 손하은이 가방에서 맥주 두 캔과 닭강정을 꺼냈다.
"술은 제가 살게요."
차우진이 웃었다.
"좋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캔맥주 하나로는 부족해졌다. 차우진이 맥주를 두 캔 더 사서 하나씩 나눠 마셨다.
술이 들어가니까 손하은의 입이 열렸다.
"엄마 병원비 내려면 열심히 일해야 해요. 그리고 그 병원이랑 우리 회사랑 제휴 관계라서 병원비 할인도 많이 받아요."
"어지간한 병은 의료보험이 될 텐데?"
"회사에서 신경 써줘서 엄마가 보험 안 되는 좋은 병실을 저렴하게 이용하고 있거든요. 외국 신약을 이용한 비보험 치료도 받고 있고요."
차우진은 백희선이 손하은을 직접 관리한다는 걸 깨달았다.
'손하은이 미래에 백독거미를 그렇게 미워하는 건,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겠지.'
멸망한 세계의 손하은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엄마의 원수거든요.'
맥주 두 캔을 마시고 손하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가야겠다. 오늘은 두 캔을 마시기로 했는데 다 마셨거든요."
"내일은 주말이니까 출근 안 하잖습니까?"
"안 하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해야 할 것 같아요. 일이 많아요. 늦게라도 나가야죠."
차우진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중에 다시 뵙죠."
"다시? 웅…. 네. 그래요."
손하은이 웃으며 손을 흔들고 돌아섰다. 그녀가 집으로 걸어갔다. 아까보다는 힘이 나는 걸음이었다.
***
손하은은 다세대 건물 옥탑방에 살았다.
그녀는 회사에서 월급을 꽤 받지만 나가는 돈도 많았다. 병원비도 있고 학자금 대출도 있었다.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 적금도 하나 들었다.
그 돈을 다 마련하려면 아껴야 한다. 그녀는 주거비부터 줄였다.
그녀가 옥상에 올라가 옥탑방 문을 열었다.
"오늘은 그래도 기분이 좀 풀린다."
그녀가 벽에 있는 전등 스위치를 손으로 눌렀다. 불이 켜지지 않았다.
"응? 전구가 또 나갔나?"
그녀가 휴대폰을 꺼내 손전등 기능을 켜려고 했다.
갑자기 앞에서 검은색 그림자가 휙 다가왔다.
그녀는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늦었다.
옥탑방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까지는 성공했는데, 소리를 지르기도 전에 붙잡혀 입을 틀어막혔다.
"읍! 읍!"
그녀의 목에 칼이 닿았다. 남자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조용히 해. 떠들면 죽여버린다."
그녀의 눈이 커졌다. 눈동자는 흔들렸다.
집안에서 남자가 한 명 더 나와 그녀의 입에 테이프를 붙였다. 그놈은 그런 후에 옥상을 올라오는 외부 계단으로 이동해 망을 보았다.
그녀의 목에 칼을 댄 놈이 말했다.
"오래 기다렸다. 우리가 물어볼 게 있으니까, 안으로 들어가…."
차우진이 그놈의 팔을 덥석 잡아서 바깥쪽으로 당겼다. 칼날이 그녀의 목에서 떨어졌다.
적은 당황했다. 차우진이 언제 나타났는지도 몰랐다.
"어?"
그놈은 일단 차우진을 뿌리치려고 했다.
이번에는 그놈이 늦었다. 차우진이 적의 손목을 꺾으며 다리를 걷어찼다.
"컥!"
적이 옆으로 나자빠졌다.
"으악!"
쥐고 있던 칼은 손에서 빠져나가 옥상에 떨어졌다. 쇳소리가 났다.
차우진이 말했다.
"간만에 기분 좋게 퇴근한 사람한테 칼을 들이대다니. 예의가 없는 새끼들이네."
나자빠진 놈이 바닥을 기면서 뒤로 후다닥 물러났다. 옥상에서 망을 보던 놈도 다가오며 칼을 꺼냈다.
손하은은 아직도 겁을 먹은 상태였다.
그는 눈앞에 보이는 등이 넓은 사람이 누구인지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했다.
그래도 그녀를 도와주러 왔다는 건 알고 얼굴을 확인했다.
그녀가 입에서 테이프를 떼다가 차우진의 얼굴을 보고 놀란 소리를 냈다.
"어? 기자님?"
차우진은 마스크를 쓰고 있었지만 옷은 조금 전 그대로였다. 복대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손하은이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차우진이 물었다.
"괜찮아요? 다치진 않았어요?"
"네. 다친 건 아닌데, 여긴 어떻게…."
"집에 잘 가는지 보는데, 옥상에서 공격당하는 모습이 보여서."
"아!"
그녀가 적들을 보며 물었다.
"그럼 우리 이제 어떻게 해요? 저놈들이 계단을 막고 있…. 어떻게 올라오셨어요?"
적도 그게 의문이었다.
"너 이 새끼! 여길 어떻게 올라왔지? 계단은 내가 감시하고 있었는데?"
"옆집 옥상에서 점프해서."
옆집은 올라간 적도 없다. 지상에서 이 옥상까지 스킬을 써서 공간을 건너뛰었다.
한 놈은 차우진에게 손목이 꺾일 때 칼을 놓쳤다. 그놈이 허리에서 다른 칼을 뽑았다. 다친 손이 아니라 왼손이었다.
계단 앞에서 망을 보던 놈도 칼을 쥐고 있었다.
"이 새끼. 죽여버린다."
차우진이 잠시 갈등했다.
"이것들을 어쩐다…."
여기가 산속이고 이곳에 적만 있다면 해결법은 간단하다.
그런데 지금은 확실한 목격자 손하은이 있다.
손하은은 차우진의 옆에서 떨고 있었다. 그녀의 협조를 얻으려면 피를 보지 않고 해결해야 한다.
차우진이 숨을 크게 들이마신 후에 고함을 내질렀다.
"강도야아아!"
"어? 어?"
"강도가 나타났다! 동네 사람들! 강도다아아!"
칼잡이 두 놈은 당황했다. 차우진의 목소리가 너무 컸다. 여기저기서 창문이 열리는 게 보였다.
"씨, 씨발. 여기서 빠져나가!"
두 놈이 허겁지겁 계단을 뛰어 도망쳤다.
차우진은 그놈들이 도망치는 방향을 확인하며 손하은에게 말했다.
"이제 안전합니다."
손하은이 감탄한 얼굴로 말했다.
"진짜 간단히 쫓아내셨네요?"
"더 간단한 방법도 있었는데, 여기는 보는 사람이 많아서."
"목청도 진짜 좋으세요!"
"가수를 할 걸 그랬나요?"
차우진이 간단한 농담으로 그녀를 진정시킨 후에 말했다.
"무슨 일인지 구경하러 나온 사람이 많으니까 아래로 내려갑시다."
"네?"
"경찰이 올 때까지 동네 사람들 사이에 있으면 안전할 겁니다. 기왕이면 아는 얼굴들 옆에 있어요."
"아, 네!"
"경찰이 오면 내가 누구인지 모른다고 해요."
"네?"
"내가 복잡한 일에 얽히는 걸 싫어해서."
두 사람은 계단을 내려왔다.
손하은이 대문을 통과해 골목으로 나왔다.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같은 건물에서 나온 사람들도 있었다.
차우진은 그녀에게 그 사람들 사이에 있으라고 했다.
그녀가 뒤를 돌아보았다.
"여기 있으면 괜찮…. 어머."
차우진이 보이지 않았다.
"언제 가셨지?"
옆집에 사는 여자가 물었다.
"저기, 경찰에 신고해야 하는 상황이에요?"
손하은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네! 칼을 든 놈들이 둘이나 옥상에 있었어요. 그놈들은 도망쳤지만 지금 옥상에 칼이 떨어져 있어요."
"어머. 어떻게 해! 괜찮아요? 안 다쳤어요?"
"네. 괜찮…. 휴대폰 좀 빌려주세요. 제 건 옥상에 떨어뜨렸어요."
***
옥상에서 손하은을 노렸던 두 놈은 서둘러 도망쳤다. 그들은 CCTV가 없는 골목을 이용해 이동했다.
한적한 곳에 SUV가 한 대 서 있었다. 대포차였다.
그들이 차에 올라탔다. 운전석에 탄 놈이 물었다.
"쫓아오는 놈은?"
"없었어."
"씨발. 넌 망 잘 보라니까!"
"계단 앞을 지키고 있으라며!"
"옆쪽도 봤어야지! 옆집 옥상에서 뛰어넘어왔다잖아!"
"옆집은 멀잖아! 그 거리를 목숨 걸고 뛰는 놈이 있을 거라고 누가 생각하는데!"
운전석에 앉은 놈이 차를 출발시키려고 하면서 말했다.
"어쨌든 그 목청 큰 새끼 때문에 오늘 의뢰는 실패…. 씨발. 손목 아파. 운전은 네가 해. 이 새끼야!"
그들은 차에서 내려 다시 운전석과 조수석에 탔다. 그런 후에 그곳을 조용히 빠져나갔다.
운전할 때는 교통신호도 확실히 지키고 과속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이동한 후에 공터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승합차가 한 대 서 있었다.
그들이 차에서 내렸다. 승합차에서도 두 명이 내렸다. 그중 하나는 두목이었다.
"일은 잘 처리했지? 빨리 번호판 바꿔놓고 차를 옮겨 타."
손목을 다친 놈이 말했다.
"형님. 그게…. 현장에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일은 어디까지 했는데?"
"일단 빠져나와야 해서 아무것도…."
두목이 화를 벌컥 냈다.
"이 새끼들이! 여자 하나 처리하는 것도 제대로 못 하나!"
"여자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남자친구가 있었습니다."
"애인?"
"예. 그놈이 운동을 했는지 좀 치는 데다가, 강도라고 소리를 크게 지르는 바람에…."
"씨발. 남자친구도 없고 혼자 산다고 했는데. 의뢰인이 준 정보에 문제가 있었잖아!"
"맞습니다. 이건 다 의뢰인 잘못입니다. 당장 연락해서 따지시죠."
"연락처가 없어. 저쪽에서 연락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해."
갑자기 차우진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그러면 나는 기다릴 필요가 없겠네."
청부업자 넷이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휙 돌아섰다.
"누구냐!"
차우진이 말했다.
"어려운 일을 의뢰한 것도 아닌데 그걸 실패하다니. 너희들에게 실망했다."
부하가 두목에게 물었다.
"형님. 의뢰인이 직접 찾아온 거 아닐까요?"
"아니야. 의뢰인은 여자였어."
차우진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사님께서 그러시더라."
차우진은 상대가 여자라고 말한 걸 듣고 의뢰인이 누구인지 확신했다.
'백희선. 그럴 줄 알았다.'
그는 일부러 의뢰인을 '이사님'이라고 불렀다. 게다가 두목은 물론이고 부하들도 모두 들을 수 있게 또박또박 말했다.
"사냥이 끝났으면 사냥개를 삶으라고 하셨지."
"뭐?"
"전문용어로 토사구팽이라고 하지. 너희가 일을 마치면 입을 막으라는 뜻이다. 그런데, 음…."
차우진이 잠시 고민하는 척한 후에 말했다.
"일은 못 끝냈어도 들켰으니까 입은 막아야겠지?"
두목이 화를 냈다.
"이 새끼가 돌았나? 야! 저 새끼 끌고…. 아니다. 믿는 게 있으니까 혼자 왔겠지. 포위해!"
"눈이 삐꾸는 아니구나. 머리도 좀 돌아가고."
세 놈이 차우진을 포위하기 위해 슬금슬금 움직였다.
차우진은 기다리지 않았다. 옥상에서 손하은의 목에 칼을 댔던 놈을 먼저 덮쳤다.
"헉!"
그놈은 오른손을 다쳤다. 왼손으로 칼을 잡고는 있는데 움직임이 오른손만은 못했다.
적이 왼손으로 칼을 휘둘렀다. 위협적이지도 않았고 빠르지도 않았다.
차우진이 그 손을 잡아채 손목을 꺾고 다리를 걷어찼다. 옥상에서와 같은 기술이었다.
"으아악!"
적은 이제 두 손을 다 쓸 수 없게 됐다. 옥상과의 차이라면 손에서 놓친 칼을 차우진이 잡았다는 것뿐이다.
차우진은 이번에는 칼을 챙겼다.
옥상에서는 목격자가 있지만, 지금은 보는 사람이 없다. 이곳에 있는 건 모두 적이다.
두목이 옷 속에 숨겨두고 있던 권총을 뽑으며 외쳤다.
"실력이 제법이구나! 그래도 나한테는 안…."
두목은 그런 말을 할 게 아니라 권총을 뽑자마자 쐈어야 했다.
109. 청부업자
차우진은 두목이 떠들면서 권총을 뽑는 사이에 칼을 던졌다. 방금 빼앗은 칼이 화살처럼 날아갔다.
두목은 화들짝 놀랐다. 급히 그 칼을 피하려 했지만 늦었다.
칼날이 두목의 몸통에 꽂혔다.
"큭."
하지만 날이 깊게 들어가진 않았다. 두목은 방검복을 입고 있었다.
그 방검복은 옷 속에 입어도 표가 나지 않을 정도로 얇았다.
대신에 방검복이 칼날을 완벽하게 막아주진 못했다. 칼끝이 살을 조금 파고들었다.
그 정도 부상이면 권총은 쏠 수 있다.
두목이 잠깐 비틀거린 후에 총구를 차우진 쪽으로 겨누었다.
차우진은 이미 오른쪽 놈을 향해 뛰고 있었다.
오른쪽 놈이 칼을 크게 휘둘렀다.
차우진이 자세를 낮춰 그 공격을 피하며 파고들었다가, 적의 뒤로 돌아가 목에 팔을 걸었다.
"켁!"
적이 팔을 흔들며 허우적댔다. 차우진이 적의 오른팔을 잡아 꺾었다. 적의 손에서 칼이 빠져나왔다.
그 칼을 차우진이 잡았다.
두목은 차우진의 손에 칼이 들어가면 자기 목숨이 위험해진다고 판단했다.
'방검복이 있는 걸 알았으니 목이나 얼굴을 노리겠지. 아니면 다리라도.'
두목이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차우진을 노리고 쐈지만 빗나갔다. 조준은 정확했는데 차우진이 부하를 붙들고 움직였다.
총탄이 부하의 몸통에 박혔다.
"컥!"
차우진이 무너지는 부하를 밀어버리고 두목을 향해 돌진했다.
두목이 이번에는 차우진을 정확해 조준했다. 그는 확신했다.
'잡았다!'
두목이 방아쇠를 당겼다.
차우진이 시간 가속 스킬을 사용했다. 두목이 방아쇠를 당기는 모습이 슬로우 모션처럼 보였다. 총구의 방향도 정확히 보였다.
차우진이 바닥을 박차며 몸을 옆으로 기울였다.
총구에서 불꽃이 튀며 총탄이 발사됐다. 금속 총탄이 차우진의 바로 옆을 스치듯이 지나갔다.
두목은 깜짝 놀랐다. 빗나갈 리 없다고 생각한 총탄이 빗나갔다.
'빗나간 게 아니야. 피했어!'
두목은 권총 사격을 꽤 잘한다. 그는 놀란 와중에도 방아쇠를 한 번 더 당겼다.
시간 가속 스킬의 효과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차우진이 두 번째 총탄도 피했다.
두목이 황급히 방아쇠를 다시 당기려 했다.
늦었다.
그들의 거리는 그렇게 멀지 않았다.
방아쇠를 두 번 당기는 사이에 차우진이 가까이 접근했다. 총탄을 피하며 돌진했기 때문에 정면이 아니라 옆쪽으로 파고들었다.
이제 차우진을 조준하려면 두목은 팔을 크게 움직여야 한다.
두목이 권총을 쥔 손을 차우진 쪽으로 돌렸다.
또 늦었다.
이제 칼이 닿는 거리다.
차우진의 칼이 두목의 팔을 베고 지나갔다.
"으악!"
힘을 잃은 손에서 권총이 빠져나갔다. 팔을 옆으로 돌리던 도중에 칼을 맞는 바람에 권총이 옆으로 날아가 바닥에 떨어졌다.
차우진이 두목의 어깨와 옆구리에 칼을 연달아 박았다.
"끄아악!"
두목이 비명을 지르며 무릎을 털썩 꿇었다.
마지막 남은 놈은 겁을 집어먹고 주춤거렸다.
'저 새끼는 이런 단검으로는 못 이겨!'
두목이 칼에 맞을 때 놓친 권총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그 위치는 차우진보다 그놈 쪽에 더 가까웠다.
마지막 적이 권총을 향해 뛰었다. 권총을 잡아야 차우진을 상대로 싸울 수 있다고 판단했다.
차우진이 단검을 던졌다. 단검이 날아가 적의 옆구리에 깊게 박혔다.
"끄아악!"
적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차우진이 권총이 떨어진 곳으로 걸어가 발로 툭 찼다. 권총이 더 먼 곳으로 밀려났다.
차우진이 두목을 돌아보았다.
"괜히 힘 빼게 하고 있어."
두목은 칼을 세 방이나 맞고 바닥에 무릎을 꿇은 상태였다. 그가 공포에 질린 얼굴로 말했다.
"사, 살려줘."
"이사님 말씀을 그대로 전하지. 죽은 놈은 말이 없으니까, 다 죽여라."
"씨, 씨발. 왜 하필 이번에 우리를…."
차우진이 갑자기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받는 시늉을 했다.
"음? 사실이야? 교차 검증은? 알았어."
차우진이 전화를 주머니에 넣은 후에 청부업자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너희들 살겠다?"
두목의 눈이 커졌다. 그가 급히 말했다.
"고, 고맙다!"
"반말?"
"고맙습니다!"
차우진이 불평했다.
"오늘은 괜히 헛고생했네."
그는 그 말만 남기고 떠났다.
그가 사라진 후에 두목이 벌렁 드러누웠다.
"씨발. 진짜 뒈지는 줄 알았네."
다른 놈들도 칼에 찔리거나 총에 맞거나 손목이 부러져서 쓰러져 있었다.
부하들이 물었다.
"형님. 저 선생님은 누구시죠?"
"선생님? 새끼가 아니라?"
"어디 숨어서 듣고 있을지도 몰라서…."
"어…. 킬러겠지. 아주 대단한 킬러…."
"그럼 왜 우리를 살려준 걸까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전화하는 거 보니까 막판에 뭔가 틀어졌겠지."
부하들이 각자 생각을 말했다.
"의뢰인이 여자라면서요. 그년이 저 킬러도 배신한 거 아닐까요?"
"그년이 입금을 안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년이 마음을 바꿨을 수…."
두목이 말했다.
"우리를 거의 다 죽였는데 그년이 마음을 바꿔서 살려줘? 그건 아니지."
"그럼 역시 그년이 저 킬러도 배신을…."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두목은 당황했다.
"저 소리 점검 가까워지는 거 맞지?"
"혀, 형님. 빨리 도망쳐야 합니다."
"차 가져와! 일단 뜬다!"
"누, 누가…."
넷 다 부상이 심했다. 입은 열 수 있는데 일어나서 걸어갈 수 있는 놈은 하나도 없었다. 칼을 맞지 않은 놈도 두 손과 한쪽 발목이 나갔다.
"씨, 씨발! 기어서라도 차로 가!"
그들은 승합차를 향해 기어갔다.
너무 느렸다. 경찰이 먼저 현장에 도착했다.
두목은 경찰차가 도착하는 걸 보면서 급히 말했다.
"우린 일단 피해자라고 주장해! 피해자!"
"미, 믿을까요?"
"우리가 그렇게 주장하면 어쩔 거야? 일단 우겨!"
경찰은 총소리가 난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했다. 그들이 권총에 손을 댄 채로 차에서 내렸다.
"어? 부상자다!"
"빨리 구급차…."
"여기 칼이 떨어져 있습니다. 칼이 많습니다."
경찰이 권총을 뽑으며 외쳤다.
"여기 총도 떨어져 있다. 지원 요청한 거 빨리 좀 오라고 해!"
"이 사람들은 피해자일까요?"
"여기 있는 칼과 총의 지문을 확인하면 알겠지."
총에는 두목의 지문이 남아있고 칼에는 부하들의 지문이 남아있다. 차우진은 가죽장갑을 끼고 있어서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두목이 작게 말했다.
"씨발. 엿 됐다."
***
차우진은 청부업자들을 잡아놓고 현장을 떠났다.
총소리가 났기 때문에 경찰이 곧 오리란 건 알고 있었다.
조금 전에는 전화가 걸려온 게 아니다. 그런 척만 했다. 청부업자들을 산채로 경찰에 넘기려면 그놈들도 속여야 했다.
"배신당했다고 생각하면."
그래도 한두 놈은 범행을 부인할 수 있다. 의뢰인이 존재한다는 걸 알리면 그들의 죄를 자백하는 거나 마찬가지가 된다.
그런데 죽다 살아난 놈이 넷이다. 그런 놈들에게서 자백을 받아내는 건 경찰이 전문이다.
"한두 놈은 입을 열겠지."
차우진은 청부업자들이 모르던 정보도 조금 흘리고 왔다.
"내가 이사님이라고 불렀고, 여자가 의뢰했다는 걸 알 테니, 경찰은 여자 이사를 찾을 테고."
현장에 남겨둔 차도 있다.
"차량 이동 경로를 조사하면 오늘 손하은 씨에게 일어난 강도 사건과 연결지을 테고."
그러면 손하은의 주변에서 여자 임원을 찾을 게 뻔하다.
"그러면 이제."
라이프레인 제약에는 여자 임원이 두 명이다. 그중 한 명이 백희선이다.
"백희선이 당황하겠네."
이러면 백희선은 흔들 수 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백희선을 잡지 못한다.
설사 백희선만 잡힌다고 해도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다.
차우진의 목표는 백희선이 아니다. 신종 마약인 레드 크리스털을 만든 놈이다.
***
손하은은 경찰서에서 강도 사건에 관해 진술하고 나왔다.
형사가 제안했다.
"제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그럼…."
그녀의 휴대폰으로 문자가 들어왔다. 그녀가 문자를 확인하고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친구가 오기로 했어요. 같이 가면 돼요."
그녀가 경찰서 밖으로 나왔다. 차우진이 손을 들었다.
그녀가 차우진을 향해 뛰어가 물었다.
"괘, 괜찮아요?"
"그건 내가 물을 말인데요."
"아까는 정말…."
그녀가 고개를 숙이려고 했다. 차우진이 얼른 말했다.
"일단 이곳을 벗어납시다. 여기는 보는 눈이 많으니까."
"아, 네!"
차우진은 그녀를 데리고 조용한 카페로 이동했다.
"오늘 밤은 어쩌실 겁니까?"
그녀가 대답했다.
"오늘은 집에 안 들어가려고요."
"범행 현장은 경찰에서 조사해야 하니까 그게 맞겠죠."
"형사님도 그렇게 하라더라고요."
"그럼 어디로?"
"친구 집이요."
그녀가 커피를 한 모금 마신 후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왜 강도가 저를 노렸을까요?"
"손하은 씨. 돈 많습니까?"
"아니요. 돈이 많으면 옥탑방에서 살겠어요?"
"돈이 많은데도 그러는 사람이 있다고 들어서."
"예?"
"역시 돈 때문은 아니란 거군요."
"그럼 왜 저한테 강도가…."
"강도가 아닙니다."
차우진이 그녀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살해하려고 한 겁니다."
"네, 네?"
차우진이 백희선의 별명을 떠올렸다. 멸망한 세계에서 그녀의 별명은 백독거미다.
"검출되지 않는 독을 쓰고, 자살이나 돌연사로 위장하려 했을 겁니다."
오늘은 금요일 밤이다.
"주말 내내 발견되지 않다가 월요일에 출근하지 않아서 회사가 연락을 시도. 회사는 가족이 아니니까 하루 이틀쯤 더 시간이 지나고 화요일이나 수요일쯤에 발견."
손하은이 겁먹은 소리를 냈다.
"히익."
"그때쯤이면 독 성분은 사라지고 증거도 사라졌겠죠. 그런 시나리오를 그렸을 겁니다."
"그, 그, 그게 가능해요?"
"증거를 없앴는데도 시나리오와는 다른 방향으로 일이 진행될 수는 있습니다. 이를테면 사건이 언론에 보도된다든지. 하지만 그런 돌발상황은 약을 쳐서 막겠지요. 용구가 그런 거 잘할 테니까."
손하은이 겁먹은 얼굴로 물었다.
"왜? 왜요? 왜 그렇게까지 하는데요?"
"나도 벌써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습니다. 단지 인터뷰 요청만 한 건데."
손하은이 물었다.
"기자님 혹시 위험한 분이세요?"
"손하은 씨가 위험한 일을 하는 겁니다."
"네?"
"내 인터뷰 요청은 발작 버튼을 누른 것뿐이고, 폭탄은 손하은 씨가 가지고 있겠지요."
"저는 그냥 평범한 회사원인데요."
"제약회사 연구원."
"그렇죠. 제약회사의 평범한 연구원."
차우진이 손하은을 쳐다보았다.
그는 왜 백희선이 손하은을 제거하려 했는지 확실히 알지는 못한다.
그런데 오늘 백희선을 흔들었더니 손하은이 위험해졌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단순히 인터뷰 요청을 받았다는 것만으로 그런 일을 당할 리는 없다.
'돈도 쓰고 리스크도 감수하면서 제거하려는 이유? 레드 크리스털과 관계가 있겠지.'
손하은은 옥탑방에 산다. 마약으로 돈을 많이 벌었다면 더 좋은 곳에 살 수 있다.
그녀는 강도들을 만나 칼이 목에 닿은 상황에서도 레드 크리스털과 연관해 생각하진 못한 것처럼 행동했다.
'본인이 어떤 일에 말려들었는지 모르거나.'
알 수도 있다.
'그 모습조차 위장일 정도로 철저히 숨기거나.'
차우진은 멸망한 세계에서 만난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안다. 그녀가 만들어낸 약은 많은 사람을 살렸다.
그는 그녀가 잘못된 길을 알고 걷는 건 아니길 바란다.
그래서 질문했다.
"손하은 씨. 회사에서 하는 일 중에, 의심 가는 거 있습니까?"
"네?"
"향정신성 약물이라든가."
"아니, 그거야 제약회사니까 그런 부작용이 있는 약물을 당연히 다루죠."
"빨간약이라던가."
"약의 색은 다양…. 어?"
"뭔가 생각 난 게 있군요."
"회사가 개발한 약 중에 빨간색이라면 좀 있는데…."
"그중에서 빨간색 향정신성 약물은? 아니면 그 원료가 되는 물질은?"
"그게…. 회사 기밀이라….'
차우진이 생각했다.
'짚이는 게 있어도 회사를 의심하면 안 되는 사정이 있겠지.'
그는 아까 캔맥주를 마실 때 그 이야기를 들었다.
"손하은 씨 어머니가 라이프레인과 제휴 중인 병원에 입원해 계시다고 했지요? 거기서 특별한 치료를 받고 계시고?"
"네…."
'그것부터 깨야겠네.'
차우진은 아직 충분한 신뢰를 주지 못했다.
차우진이 손하은을 구해줬으니 고마워하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고마운 것과 신뢰하는 건 다른 문제다. 그들은 오늘 처음 만난 사이다.
'나를 신뢰하기 어렵다면, 진실이라고 믿고 있는 걸 부숴야지.'
차우진은 손하은이 멸망한 세계에서 했던 말을 기억한다.
'멸망 이전에 백독거미와 같은 회사 연구소에 있었어요. 그리고, 엄마의 원수거든요.'
차우진이 제안했다.
"손하은 씨 어머니께 문병을 가고 싶습니다만."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