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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2화 영주.

-살아 있는 인간에 대한 정보 말입니까...?

"그래."

-그런 건 왜... 아!

살아 있는 인간에 대해 알고 있냐는 내 질문에.

녀석은 처음에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으나.

-아아... 과연.

"...음?"

-기사님이 무얼 원하시는지... 알 것 같습니다요.

녀석은 무언가를 깨달은 듯 그리 말하더니.

-크흠. 사실 이건 다른 누구한테도 알리지 않은 비밀입니다만....

"...?"

-기사님, 잠시 이쪽으로....

그렇게.

나를 어디론가로 인도하기 시작했다.

'뭐지?'

내가 원한 것은.

어느 도시에는 살아 있는 인간들이 있다든가, 언제 목격한 적이 있다든가 하는 뭐 그런 정도의 대답이었는데.

갑자기 나를 어디론가로 데리고 가다니.

'...잠깐, 설마.'

이건 어쩌면.

'살아 있는 인간이 이 근처에 있다는 건가?'

그런 생각에.

나는 약간의 희망에 찬 채.

녀석의 뒤를 따라갔다.

...하지만.

-후후, 보이십니까? 기사님!

그곳에 있는 것은.

인간이 아니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인간은 맞지만....

"시체로군."

-예!

살아 있지는 않은 인간....

즉.

시체였다.

-시, 실은... 언젠가 이 땅에 귀족분이 오실 때에 대비해 아껴 둔 물건입니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꽁꽁 얼어붙어 있는 상태였다는 점이었다.

-비록 살아 있는 놈은 아니지만!

후욱 하고.

녀석이 그 시체 위에 숨을 불어넣자.

사르륵....

사체의 위에 하얀 냉기가 일었다.

-제가 직접 이 숨으로 얼린 놈이지요.

"...."

나는 녀석을 바라보았다.

새하얀 털을 가지고 있는 괴물.

지금은 [구울]로 종족이 바뀌었기에 알아보지 못했지만.

본래는 냉기를 다루는 괴물이라는 거다.

-즉....

방긋 웃으며.

나를 향해 자랑스럽게 말하는 녀석.

-완전히 살아 있는 인간의 것에 비하면 조금 모자랄지언정, 상당히 신선한 피를 얻으실 수 있을 거다, 이 말입니다!

그 말에.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내가 살아 있는 인간의 위치를 물은 게... 신선한 인간의 피를 구하고 싶다는 거로 받아들인 건가.'

이 녀석이 내 명령을 따르려고 한 것 자체는 알겠다.

그리고.

인간을 이 꼴로 만든 것 역시.

"...애초에 왜 이렇게 보관해 둔 거지?"

-헤, 헤헤... 제 열등종 시절의 본능 같은 겁니다. 운 좋게 약한 사냥감을 발견하면 일단 얼려 놓고 보관해 두는 편입죠.

이놈도 결국은 무언가를 먹어야만 하는 괴물.

생존을 위한 본능의 결과물인 셈이니.

뭐라 탓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했다.

-식량이 모자랄 때 먹으려 했는데, 아시다시피 그 후에 귀족분들이 이 땅을 찾아와... 저를 구울로 진화시켜 주셨지요.

"...."

-그렇게 열등종을 벗어난 뒤에는 말씀드린 대로, 귀족분들께 진상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이렇게 아껴 두었습니다요. 몇 번이고 저 피를 녹여서 마시고 싶다고 생각하긴 했습니다마는...! 이런 날을 위해 참고 또 참았지요!

자랑스럽다는 듯 팔을 벌리며 떠드는 녀석.

그래 봐야 나한테 실망스러운 결과라는 건 변하지 않는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대단하긴 하지만, 내가 원하는 건 이런 게 아니다."

-예?

"내 질문을 곡해하지 말고 그대로 받아들여라. 살아 있는 인간에 대해 아는 건 없나? 그러니까, 죽은 상태인 게 아니라. 정말 살아 있는 상태 말이야."

-살아 있는 인간... 말입니까?

그 말에.

고개를 갸우뚱하는 녀석.

-왜 그런 걸 찾으시는지는 모르겠으나... 기사님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알다니, 뭘?"

-이 근방 일대의 생명들은 이미... 귀족 여러분들께서 모두 구울로 바꿔 버리셨다는 것.

...아, 그런가.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저는 이 일대를 돌아다니며 많은 정보를 수집한 편입니다만... 살아 있는 인간은커녕 구울이 아닌 존재를 본 적은 없습니다.

이 땅에 살던 이에게서 직접 그 얘기를 듣자.

조금 머리가 아파 오기 시작했다.

-혹시 모르는 일이긴 하지요. 먼 곳 어딘가에는 살아 있는 인간들이 있을지도요. 하지만 적어도 이 일대는 아닙니다.

"...그런가. 혹시 이 정보를 알고 있을 만한 다른 괴물은 없나?"

-제가 아는 놈들 중에서 이 주변에 대해 저보다 잘 아는 놈은 없습니다요. 오히려....

녀석은.

나를 미심쩍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 걸 알고 있을 이가 있다면 귀족분들이 알고 계시지 않겠습니까?

"...."

-이 일대를 벗어나지 못하는 하찮은 짐승인 저와 달리, 귀족분들께서는 다른 땅에도 많이 가 보셨을 것이고요.

녀석의 눈동자에.

약간의 의문이 깃든다.

-그런 귀족님을 섬기는 기사님이라면 당연히 저보다 많은 걸 아셔야 정상일 텐데....

"...."

-왜 그런 걸 물으시는지...?

그리고.

그런 녀석의 말에 그 말에.

"...흠."

나는 말없이 앞으로 걸어 나간 뒤.

얼어붙은 인간의 시체를 바라보며 말했다.

"일단, 이 시체는 받도록 하지."

-아...!

그러자.

녀석은 그 몸 안을 맴돌고 있는 구울의 피의 영향일까.

-물론입니다. 제가 바치는 것이 귀족님의 도움이 될 수 있다면 큰 영광이지요!

기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거기서 끝이 아니라는 듯.

-그, 그런데 기사님.

"음?"

-그... 이 신선한 피를 바친 게 저라는 걸 영주님께도 알려 주셨으면....

"아아."

처음엔 좀 의아했지만.

이 녀석들의 몸 안에 있는 구울의 피가 귀족들에 대한 충성을 만들어 낸다고 한들.

딱히 충성만 생각하는 맹목적 존재로 만드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저는 힘이 약한 편이지만 이런 귀한 물건들이 어디 있는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요...!

"그러냐."

-예에! 저를 중용해 주신다면, 분명 영주님에게도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살고 싶다든가.

성공하고 싶다든가.

그런 욕구는 이들에게도 존재한다.

'혈주'의 아래에 있지 않은 상태의 이 녀석들은.

귀족들과 같은 약점을 지니고, 귀족에 대한 약간의 복종심을 지니고 있을 뿐.

기본적으로는 구울이 되기 전과 큰 차이가 없는 것이다.

'노예가 되었다는 점을 제외하면... 평범한 생명과 다를 바 없는 이들.'

그리고 지금.

그 녀석들을 노예로서 다루고 있는 건 다름 아닌 나였다.

그 사실이 묘하게 마음에 걸렸다.

"미안하지만."

그리고.

이 녀석에게는 안타깝게도.

"그건 좀 어려울 것 같다."

-예? 어째서....

"그야."

[강제급식]

[영웅급 요리사의 짙은 혼란의 전투식량]

"여기서 있었던 일을 기억하고 있으면 곤란하니까."

이 녀석의 그런 욕구는.

충족시켜 줄 수 없을 것 같았다.

* * *

-...응? 뭐야 여긴... 내 식량 창고잖아? 언제 여기에 왔더라....

내 요리를 먹은 뒤.

잠깐 멍하니 있던 녀석이 눈을 뜬다.

-뭐, 뭔가... 여기서 기사님을 만났던 것 같기도 한데….

-어? 잠깐. 뭐야! 기껏 보관해 둔 신선한 인간이...!

-어떤 놈이 훔쳐 간 거야, 제기랄!!!

이곳에서 나눈 대화는 기억나지 않는 듯.

사라진 인간의 시체를 보고 억울해하는 녀석.

"미안하게 됐다."

그리고.

나는 그런 녀석의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며 생각했다.

'아리엘라의 말대로다.'

딱히 저 녀석에게 뭔가 악감정이 있는 건 아니었다.

본래라면.

나는 이 시체를 거둔 뒤, 별다른 일 없이 저 녀석과 헤어졌겠지.

하지만.

'이 녀석은 나를 의심했다.'

귀족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생각은 있지만

구울로 만든 장본인이 대상이 아니라면, 그 복종에 강제력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아리엘라는 얕보이지 않고자 나라는 기사를 부려 권세를 자랑하려 했고.

지금 이렇게.

내가 던진 질문으로부터, 아리엘라가 제대로 된 귀족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의심을 품기도 하는 것이다.

'그 의심이 다른 구울들에게 퍼져선 안 된다.'

녀석에게는 미안하지만.

그 의심을 그대로 가지고 가게 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녀석과 나의 수준 차이는 상당했다.

내가 전력을 다해 만든 요리에 담긴 '혼란'의 감정.

그것은 녀석이 나와 나눈 대화나, 이곳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서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도록 만들고 있었다.

'구울들을 다루는 건... 어쩌면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일지도 모르겠어.'

내 입장에서는 마음에 드는 일은 아니었으나.

나를 기사로 다루고자 한 아리엘라의 선택이 옳았던 셈이다.

화륵.

나는 저 녀석이 얼려 두었던 사람의 사체에 불을 붙인 뒤.

그 앞에서 작게 합장했다.

제대로 된 장례 예절을 알지도 못하는 나지만.

그래도, 저렇게 꽁꽁 얼어붙어 있는 것보단 제대로 화장을 치러 주는 게 좋을 테니까.

그리고.

그렇게 합장한 채, 타오르는 불을 보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런 건 귀족분들이 잘 알고 있지 않겠느냐 라...."

그 말대로다.

이 땅에 살아 있는 인간들에 대한 정보.

그런 걸 잘 알고 있는 건, 귀족들에게 버림받은 저 구울들이 아니다.

얼마나 세력을 퍼트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넓은 땅의 모든 생명을 구울로 바꿔 버리고 떠났다는, 그 귀족이란 놈들이 알고 있겠지.

하지만.

"그 귀족들을 만나서 묻기는... 힘들겠지."

아리엘라와는 적대적인 혈족들이라고 했으니까.

이 도시의 모든 생명을 전멸시켰다는 부분으로만 봐도.

이 땅에 도사리고 있을 귀족들의 세력은 상당할 것이다.

아리엘라는 다른 귀족들이 어떤 제약도 없이 성장했다면 자신보다 강한 군세를 다루고 있을 가능성도 크다고 말했다.

최소한으로 추측해 봐도 군단이 통째로 넘어와야 상대가 될 수준.

'어딘가에 살아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지금 전력으로 도움을 주기는 힘들겠지.'

나는 몸을 돌려 도시를 향해 올라갔다.

그래.

당장 내가 가진 힘만으로 이 나라의 인간들에게 도움이 될 방법은 없다고 봐야 한다.

하지만.

'나중은 아니지.'

적어도 이 땅에 도사리고 있는 이들이 어떤 적들인지는 알아냈다.

그렇다면 그들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할 수도 있다.

최대한 빠르게 대한민국으로 복귀한 뒤.

한국의 점령전을 마치고, 북한을 건너 이 땅으로 온다면.

어쩌면 살아 있는 인간들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는 일.

'어딘가에 살아 있을 인간들이 그때까지 버텨 주길 바라는 수밖에.'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도시로 복귀했다.

저 구울들에게 명령을 내림으로써.

대한민국으로 복귀하는 시간을 최대한 빠르게 앞당기기 위해서.

* * *

다행히도.

그 후에 마력을 모으는 작업은 생각보다 빠르게 진행되었다.

{이, 이 물건만은 안 됩니다. 제 어미가 품고 있었던 내단이란 말입니다...!}

사실.

그 과정에서 문제가 없지는 않았다.

"...아, 그래?"

예를 들면 이 녀석처럼.

마력이 담긴 물건을 너무 애지중지해, 귀족의 명령에도 내놓지 않으려고 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게 그리 귀중한 물건이란 말이지...?"

{크륵...?}

대부분의 경우.

별 시답잖은 이유로 내놓지 못하겠다 뻐기는 녀석들에게서는 약간의 무력도 동원해 가면서 압수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아무래도 나도 사람이다 보니.

"그래. 어미의 유품이라."

저 괴물의 종족은 평생에 걸쳐 몸 안에 마석을 형성한 뒤.

죽을 때 그 마석을 자식에게 물려준다고 한다.

사실상 그 마석이 부모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것.

"흐으음...."

그런 물건을 내놓으라 하기엔.

아무래도 조금 마음이 흔들렸다.

{기, 기사님?}

"...."

{왜, 그런 눈빛으로 바라보시는....}

그렇게.

약간의 고민을 하며 녀석의 얼굴을 바라본 뒤.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그게 그리 귀한 물건이라면 내놓지 않아도 좋다."

{...아, 그. 감사....}

"감사는 무슨. 그렇게 귀한 물건을 강제로 빼앗을 수는 없지. 그나저나."

조금 아깝긴 하지만.

그래도 저런 사연이 있는 물건을 뺏을 수는 없다.

"어미의 유품이 그리 소중하단 말이지."

{예, 예에....}

"즉, 너는 가족이라는 개념이 존재하는 종족이라는 얘기로군."

그 개념 자체가 없는 괴물들도 많다 보니.

나는 약간의 궁금증을 담아 물었다.

"그러면. 혹시 자식은 있나?"

{...이, 있습니다만.... 그건 왜....}

"나한테도 가족은 꽤 소중한 것이라서 말이야."

안 그래도.

저번에 만난 '무리어미' 등.

괴물들이 가지고 있는 가족애 등에 대한 개념에 대해서도 궁금하던 참이었다.

"어미의 유품을 그토록 아끼는 너한테 가족이 얼마나 소중한 대상인지...."

{....}

"조금 알아보고 싶어지는군."

그 말에.

녀석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리더니.

{내놓겠습니다...!}

"응?"

{어머니의 유품, 기꺼이 바치겠습니다!}

어미의 분신 어쩌고 하던 마석을 넙죽 내밀었다.

"소중한 물건이라 하지 않았나? 그냥 가져가도 된다만?"

{아뇨! 생각해 보니 제가 어리석었던 것 같습니다! 어미라 해 봐야 이미 죽은 지 오래인 시체! 시체의 부산물 따위는 별로 중요하지도 않지요!}

"흠, 그래?"

{예! 이딴 마석 따위 얼마든지 바치겠습니다! 그러니, 그러니... 가족만큼은 제발....}

그 말과 함께.

마석을 내 앞에 놓고 후다닥 멀어지는 녀석.

"뭐야. 기껏 봐주려고 했더니."

{...몰랐는데. 군단장은 꽤나 독한 부분이 있으시군.}

"응?"

아무튼, 이런 식으로.

{죄송합니다, 기사님을 기만하려는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그륵... 제발, 그런 눈으로 바라보지 말아 주십시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뭐라 해야 할지.

뱀파이어로서의 마력을 뿜어내는 나는 아무래도 좀 살벌한 이미지인 듯했다.

'한때는 정말 큰일 나는 줄 알았는데 말이지.'

내가 나서서 구울들을 독촉해 가며 마력을 모은 결과.

예상보다 빠르게 목표치에 도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지간히 이변이 생기지 않는 이상.

며칠 내로는 필요한 마력을 모두 모으는 데 성공하여 한국으로 복귀할 수 있을 테지.

그래, 어디까지나.

어지간히 큰일이 생기지 않는 경우....

말이지만.

* * *

그리고.

신영준 병장이 한창 마력 수집에 몰두하고 있을 때.

-저곳입니다!

도시의 외곽에서부터.

일단의 무리가 도시의 안쪽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성대한 행렬.

행렬에 속한 모든 이들의 숫자는 거의 천에 육박할 정도였으며.

그중 호위를 담당하는 것으로 보이며 거대하고 강렬한 힘을 품은 괴물들의 숫자만 해도 수백에 달했다.

도시에서의 힘 싸움에 밀려나 도시 외곽으로 쫓겨난 구울들은 그 성대한 행렬에 두려움을 느끼고 멀리 도망쳐야만 했다.

쿠웅....

그리고.

그 성대한 행렬의 한가운데에는 거대한 가마가 있었다.

수십 마리의 건장한 괴물들이 어깨에 들쳐 메 옮겨야 할 정도로 거대하고 육중하며.

이 어두운 세상에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화려하게 치장된 가마.

"흐음, 그래...?"

그리고.

그 가마 위에 올라탄.

권태로운 표정을 한, 고풍스러운 인상의 사내가.

"저곳이."

조금 흥미롭다는 눈빛으로 도시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내 영지가 될 땅이다, 이 말이렷다."

493화 예상외.

태양조차 가려진 어두운 세상 속.

그 어둠 속에 있기에는 과하다 싶을 정도로 화려하게 치장된 행렬이 한 도시를 향해 다가간다.

'저곳인가.'

군세의 가장 앞쪽을 담당하고 있던 구울들은 그 도시를 바라보았다.

자신들이 섬기는 귀족.

그의 영지로 선정된 도시.

그리고.

그 도시를 바라본 구울들의 눈빛엔 약간의 놀라움이 담겼다.

'저건....'

구울들은 노예로서의 운명이 부과된 이들이다.

그들이 본래 가지고 있었을 대부분의 욕망은 노예가 된 시점부터 이룰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린다.

삶도, 욕구도 없어진 구울들.

그런 그들에게서 활력을 찾기 어려운 이유다.

그나마 원하는 것이 있다고 한다면 신선한 피 정도겠지만.

같은 구울들의 피는 맛도 좋지 않다 보니.

모든 종족이 구울로 대체된 도시는 대체로 조용하고 우울한 분위기를 띤다.

'도시의 분위기가... 활발해 보이는구나.'

하지만.

이곳은 아니었다.

분명 모든 생명이 구울로 대체된 상태일 텐데도 불구하고.

모든 구울들이 묘한 활력을 지닌 채 움직이는 모습.

"후후... 나쁘지 않구나."

구울들로만 가득 찬 도시가 저런 모습을 보이는 경우는....

그들이 알기로는 단 하나밖에 없었다.

"자신들의 주인 될 자... 영주의 방문을 알아채고, 저리 분주하게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는 모습이라니!"

대부분의 욕망을 거세당한 그들에게 활력을 줄 수 있는 존재.

그 피에 각인된 주인.

귀족의 휘하에 있을 때만큼은, 구울들의 활동성이 급격하게 늘어난다.

"과연 대공께서 내게 하사하신 땅의 노예들답구나. 명령을 내리기도 전에 스스로 판단하고 영주를 위해 행동할 줄이야. 도구로 쓰이기 위해 만들어진 녀석들치고 제대로 일하는 녀석을 보기가 드물었는데 말이지...."

거기까지 말한 젊은 사내는.

인상을 찡그리며, 자신의 주변에 있는 구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희들을 말하는 것이다. 쓸모없는 것들아. 시키는 것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네놈들과는 참으로 비교되는 모습이 아니더냐."

"예! 죄송합니다, 영주님!"

"사죄의 말을 듣고 싶어서 한 말이 아니거늘... 쯧. 뭐 됐다. 태어나길 열등하게 태어난 놈들에게 많은 걸 바라는 게 잘못이겠지. 너희 같은 쓰레기들마저 품어야 하는 내 어깨가 무겁구나."

"부족한 저희를 이끌어 주신 점, 깊이 감사드립니다!"

사내는 주변의 구울들을 한심하단 눈빛으로 노려보다가도.

활기를 띠는 도시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역시 대공께서 내게 점지해 주신 땅... 그 노예들마저 훌륭하단 얘기겠지.'

권태로워 보이던 그 얼굴에 기분 좋은 미소가 맺힌다.

'애초에 도구로 쓰이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들. 그렇다면... 내가 기꺼이 써 줘야겠지.'

그렇게.

행렬은 도시를 향해 점점 더 다가갔다.

그리고, 그들이 도시의 안에 진입하려 할 때쯤....

탁.

-윽....

도시 안에서 바쁘게 움직이던 구울과.

행렬의 선두에 있던 구울의 몸이 부딪혔다.

-안 그래도 바빠 죽겠는데, 이놈들은 또 뭐야?

행렬과 부딪히고는 불쾌하다는 표정을 짓는 한 무리의 구울.

그들을 향해, 행렬에 속해 있던 구울이 물었다.

-바쁘다니. 뭘 하느라 바쁘단 말인가.

-뭐긴 뭐야. 영주님을 위해 일하느라 바쁜 거지.

그 말에.

행렬의 중심에 있던 사내의 입가에 맺힌 미소가 더욱더 짙어진다.

"참으로 훌륭한 노예들이로구나."

-그런 것 같습니다, 영주님

"저 노예의 이름을 알아 두거라. 오늘의 나는 훌륭한 노예들을 많이 보아서 기분이 좋으니. 나중에 저 녀석이 무언가 실수를 저질렀을 때... 딱 한 번, 죽이지 않고 팔다리를 베는 정도로 넘어가 주도록 하마."

-예.

그 명령에

중앙에서 사내를 호위하던 거구의 괴물 몇 마리가 앞으로 다가갔다.

-너, 이름이 무엇이....

기사들이 그 훌륭한 노예의 이름을 물으려던....

바로 그 순간.

-그러니까 빨리 좀 꺼져, 이 자식들아!

-...?

그 입에서 나온 말에.

기사들의 발걸음이 주춤거린다.

-꺼지라니... 무례한!

-이 행렬의 주인이 어떤 분이신 줄 알고!

행렬의 외곽에 있는 것은 구울들이다.

그 구울들의 모습만 보고, 행렬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눈치채지 못했을 수도 있는 일.

-누군지는 몰라도!

선두에 있던 구울들은 그 주인의 정체를....

이 행렬의 주인이야말로, 너희들이 섬기는 영주라는 걸 알려 주고자 했으나.

-이 도시를 지배하시는 영주, 아리엘라 자작님의 명령을 막을 수는 없다!

-...?

그 입에서 나온 이름에.

구울과 기사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갔다.

그들의 머릿속에 든 생각은.

단 하나.

'...무슨 자작?'

저 구울들이 입에 담은 이름이.

그들에겐 처음 들어 보는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기껏 내가."

그리고.

그 얼굴이 차갑게 식은 것은 그들만이 아니었다.

"이 미개한 무지렁이들을 지배하러 와 주었거늘...."

행렬의 주인이자.

이 땅의 적법한 영주로서 선정된 존재.

"기사들이여."

-예.

"아무래도... 이 도시의 벌레들은 제 주인의 이름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놈들 같구나. 그러니...."

그가.

싸늘한 눈빛으로 도시를 바라보며 말했다.

"약간의 교육이 필요할 것 같아."

-영주님의 명대로.

그 말과 함께.

거구의 기사들이 각자의 무기를 꺼내 든다.

-영주님이라고?

-우리 영주님은 저 안에 계시는데 뭐라는 거....

구울들의 말이 이어지는 일은 없었다.

서걱-

한창 마력석을 옮기던 구울들.

그 목이 순식간에 날아가고.

-영주님의 명대로.

-지금부터 교육을 시작한다.

도시의 구울들을 상대로.

학살이 시작되었다.

* * *

처음 그 존재를 눈치챈 것은, 그것이 도시에 접근하기 직전이었다.

하던 대로 구울들에게 명령을 내리며 마력을 모으던 중.

방울....

"어?"

문득 내 눈앞에 나타난 커다란 물방울.

[방울이]

정수아가 다루는 물의 정령이었다.

'정수아는 지금 도시 바깥에 있을 텐데?'

아리엘라의 비호 아래에 있으면 어지간하면 큰 문제는 없을 테지만.

그래도 혹시 모를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정수아와 부대원들은 도시 바깥에 비교적 안전한 위치에 자리 잡고 있었다.

아리엘라의 권속들 일부가 그곳에 남아 있으니.

이 도시에 있는 수많은 구울들에게 둘러싸이는 것보단 안전할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런 정수아의 정령이 갑자기 이곳에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부글부글...!

"이건...!"

내 눈앞에 나타난 방울이는.

붉은색으로 변하며 끓어오르고 있었다.

그냥 끓는 물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 붉게 끓어오르는 모습에.

방울이가 전하고자 하는 바를 알아채는 건 어렵지 않았다.

'경고...!'

이 일대를 감시하던 정수아가.

내게 무언가를 경고한 것이다.

"뭔가 이상 현상이 생긴 거냐?"

부글.

"이상 현상의 위치는?"

부글부글....

방울이의 물방울로 이루어진 몸이 쭈욱 늘어나며.

어느 한 곳을 가리키는 모습.

"고맙다."

부글...!

나는 짧은 감사 인사와 함께.

허리춤에 걸려 있던 칼.

[독고구식]을 꺼내 쥐며, 방울이가 가리킨 방향을 향해 달려갔다.

'목표까지 얼마 안 남았는데...!'

이대로만 가면 며칠 내로 필요한 마력을 모두 모을 수 있을 상황.

갑작스러운 이상 현상에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다.

어떤 문제가 발생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가능한 한 빠르게 해결해야만 한다.

그런 생각에, 나는 도시의 외곽으로 빠르게 달려 나갔다.

그렇게 도착한 외곽에는, 엄청난 숫자의 무리가 몰려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내가 본 것은....

서걱.

콰직.

퍼어어엉....

도시 바깥에 있는 무리가.

안쪽에 있는 구울들을 공격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제기랄, 뭐 하는 놈들이야...!

-맞서 싸워라!

나름대로 도시 안쪽의 구울들 역시.

바깥에서의 공격에 대항하고는 있었으나.

콰아아아앙!

-끄륵...!

-사, 살려....

그 대항이 그다지 빛을 보지는 못한 채.

일방적인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누군가가 도시를 공격하고 있다.'

하지만.

이 일대에는 구울밖에 없다고 했다.

구울들끼리 내분을 일으켜 이 도시를 공격한 건가?

그런 생각에.

나는 외곽에서 공격해 들어오는 무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

외곽에서 들어오는 무리.

그 한가운데에 있는 거대한 가마.

그 위에 반쯤 누워 있는 사내를 발견했다.

'저 녀석은...?'

가마 위에 앉아, 지상을 내려다보고 있는 사내.

권태롭게 지상을 내려보는 그 모습은....

최근에 많이 본 듯한, 묘한 기시감이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식재료 감별(강화)]

그리고.

눈앞에 나타난 내용에, 나는 눈을 크게 뜨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뱀파이어 자작]

[라시르 드 멜키오른]

"귀족...!"

이 땅에서 절대로 만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던 존재가.

바로 저곳에 있었으니까.

* * *

"귀족이라니."

이상 현상이 발생했다는 사실에 무기를 빼 들고 달려들었던 나지만.

저기 있는 존재의 정체를 알고 난 뒤에는.

달려가던 그 몸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화려한 금발에 붉은 눈빛.

오만하기 그지없는 자세와 분위기.

그 이름을 보지 못했더라도 귀족이라는 것은 눈치챌 수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아리엘라와 비슷한 분위기의 남자.

'아니, 조금 다른가?'

풍기는 분위기는 무척이나 비슷했으나.

묘한 차이가 있기는 했다.

예를 들어, 그 복장이라든가.

아리엘라가 전형적인 중세 귀족다운 화려한 드레스 차림을 즐겨 입는다면.

저 사내의 복식은 그것보다는 좀 더 뭐랄까.

중세보다는 근대에 가까운 느낌이 있었다.

'다른 혈족이라서 그런건가?'

이 땅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아리엘라와 적대적인 혈족.

심지어 그 혈족의 수장마저 근처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을 가능성이 큰 상황이다.

아리엘라가 아무리 강해졌다고 한들.

전력의 상당 부분이 훼손된 지금은 절대 건드려서는 안 될 상대.

'이곳은 방치된 듯하니, 귀족이 올 일도 없을 거라 했을 텐데...!'

그런 아리엘라의 호언장담과 달리.

우리가 이곳에 자리 잡고 얼마 되지 않아 귀족이 나타난 것이다.

'아리엘라의 예상이 벗어났다.'

그녀의 예상이 벗어난 이유도 신경 쓰이기는 했지만.

아쉽게도.

당장 그 이유를 파고들 여유는 없었다.

'...도망쳐야 ...한다.'

이곳에 아리엘라가....

적대적인 혈족의 귀족이 있다는 사실을 들켜서는 안 된다.

당장 저 귀족과 싸워서 이길 수 있다고 한들.

다른 귀족들이 군세를 우르르 이끌고 온다면 답도 없는 상황이 펼쳐질 테니까.

'모아 놓은 마력이 담긴 물건들만 [그림자 장막]에 몰아 넣은 뒤, 이 도시를 떠난다.'

구울들의 인력을 활용하지 못하게 되는 것은 아쉽지만.

이미 필요한 마력 대부분을 모으는 데 성공한 상황.

조금 더 시간이 걸린다고 한들.

나머지 마력은 나와 부대원들, 아리엘라의 권속들을 이용해 모으면 된다.

"하아, 제기랄."

그런 생각에.

나는 한숨을 쉬면서 등을 돌린 뒤.

최대한 저 귀족의 눈에 띄지 않도록 전장에서 멀어지려고 했다.

...그런데.

{기사님...!}

"...?"

학살의 현장에서 등을 돌려 떠나려던 바로 그 순간.

나를 발견한 누군가가 외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살려, 살려 주십시오....}

"너는?"

그 누군가는 엄청난 속도로 내게 달려오더니.

내 다리를 붙잡으며 외쳤다.

{제발 도와주십시오... 기사님....}

"...그때 그 구울이로군."

얼마 전.

자기 어머니의 유품이라던 마력석을 내게 바쳤던 바로 그 괴물이었다.

{저기 밖에서 온 자들이 저희를 학살하고 있습니다...!}

"...."

{그, 그냥 구울들뿐이라면 저희도 싸우면 그만이지만, 저들 사이에는 '기사'들이 있었습니다!}

녀석은 내 다리를 붙잡더니.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막대한 힘을 지닌 귀족의 기사들...! 다른 영지의 귀족이 영주님과 이 땅을 노리고 기사들을 끌고 온 것이 분명합니다!}

아, 그런가.

녀석들 입장에서는 아리엘라야말로 이 땅의 적법한 주인이니.

저쪽은 그런 아리엘라를 노리고 쳐들어온 다른 귀족으로 보인다는 것.

{저희끼리 최대한 막아 보고자 했으나, 더는 무리입니다...!}

"...."

{저희는 기사들을 상대로 이길 수 없습니다. 하지만 기사님은 다르시지 않습니까!}

그 말에.

나는 학살이 이루어지고 있는 전장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저항하고 있는 구울들의 모습도 꽤나 대단하긴 했지만.

[기사]로 보이는 몇몇 거대한 괴물들을 이겨 내지 못하고 있는 모습.

{함께 싸워 주십시오.... 제발...!}

그 말에.

나는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미안하다."

{예?}

"나는 함께 싸워 줄 수 없어."

{어, 어째서... 이곳은 영주님의 땅 아닙니까.}

"이유는 말해 줄 수 없다. 그러니... 너희들도 지금이라도 도망쳐라."

저들이 왜 구울들을 학살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부터 도망친다면.

외곽에 있는 몇몇 구울들을 제외한 나머지는 어떻게든 이 도시를 떠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안 됩니다....}

"안 된다니, 왜지?"

{저기, 저곳에... 제 둥지가 있습니다.}

내 말에 답하는 녀석의 얼굴에는.

깊은 절망이 가득 차 있었다.

{아직 어린 제 아이들이... 그 둥지에 있습니다.}

"...."

{모든 아이들을 데리고 도망가는 건 불가능합니다. 그러니... 제발....}

494화 이쪽이 좀 더 편한걸.

청도의 한 도시.

강일은 그 도시에서 활동하던 불량배 중 하나였다.

일명 독사파....

라고 하면 꽤나 그럴싸해 보이지만.

사실 알고 보면 큰 폭력 조직의 하청 일이나 받아서 하는 작은 조직.

그래도 나름 불량배는 불량배라고, 이 일대에서는 목소리깨나 내고 다니던 강일이었다.

...물론.

그것도 어디까지나 멸망 전의 이야기.

"아, 아아...."

멸망이 찾아온 후.

그와 독사파 조직원들은 어떻게든 살아남았다.

...자신들이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악한 짓도 마다하지 않았다.

같은 인간을 공격하거나.

심지어 동료를 배신하는 일마저도.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인간보다는 쓰레기에 더 가까운 부류.

그러다가 구울이 되었을 때는 솔직히 천벌을 받았다는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이, 이렇게...."

그런 쓰레기 같은 그라도.

"이렇게 죽고 싶지는 않아...!"

삶에 대한 욕구는 남아 있었다.

슈욱!

그 욕구에 종말을 선언하는 거대한 칼날이.

그를 향해 쇄도한다.

귀족의 피를 나눠 받은 강대한 힘을 지닌 거구의 괴물들.

'기사'들이 휘두르는 무기에, 구울들은 무차별적으로 휩쓸려 나가고 있었다.

생전에 그럭저럭 강한 각성자였던 강일조차 저들의 공격에는 제대로 저항하지 못하겠지.

'아.'

그 공격에.

비루한 삶이 끝나고 만다는 생각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데....

카앙!

"...?"

예상외로.

그의 사고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기...."

슬쩍 눈을 뜨고 앞을 바라보자.

그곳에 있는 것은....

"기사님...."

이 도시의 구울들을 공포로 다스리고 있던 존재.

그들을 다스리던... 붉은 눈의 기사였다.

* * *

{아직 어린 제 아이들이... 그 둥지에 있습니다.}

"...."

{모든 아이들을 데리고 도망가는 건 불가능합니다. 그러니... 제발....}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무시해야 한다.'

여기서 저들에게 나와 아리엘라의 존재가 들킨다면.

엄청난 위험에 놓일 게 뻔한 일이다.

애초에.

이 구울들은 아리엘라의 권속도 아닌 다른 누군가가 만든 존재.

나는 이들을 잠시 이용하려 했을 뿐이다.

이들의 부탁을 들어줄 이유 따위 어디에도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들을 버리고 도망치는 쪽이 옳은 선택이다.

하지만.

-영주님... 영주님은 어디 계시는가...!

-사, 살려 줘...!

"...."

[정신 언어]는 목소리가 아닌 정신으로 소통하는 언어.

그 특성상.

저 먼 곳에서 울려 퍼지는 목소리마저 내게 들려왔다.

-영주님, 기사님...!

"...."

이 땅의 구울들은 어디까지나 잠깐 이용하려 한 존재들.

냉정하게 따지면 나와 아무런 관계도 없었다.

하지만.

-영주님은 저희를 인도하시는 분....

"...."

-당신은 그분의 기사님이지 않습니까....

내가 저들을 이용하려 했건 말건.

저들은 나와 아리엘라를 자신들의 주인으로 여기고 있었다.

...비록 노예로서의 삶을 부여받은 이들이라 한들.

그들은 나를 섬기고 있다는 거다.

그리고, 지금.

[신력이 주변의 바람을 인식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주인이 자신들을 구원해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아."

그리고.

...그렇다면.

"이러면 안 되는데, 제기랄."

[신력이 주변의 바람에 부응합니다!]

나는 그 기대에 부응해야만 한다.

그 생각이 제대로 들기도 전에.

내 몸이 먼저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카앙!

"...호?"

일방적으로 이루어지는 학살... 아니, 교육.

그 현장을 무심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던 귀족.

라시르의 눈에 흥미로운 빛이 돌았다.

"...이곳은 귀족의 영지."

지루하게만 보였던 그 전장에.

"지금이라도 물러난다면, 목숨만은 살려 주지."

흥미로운 존재가 난입했으니까.

"...기, 기사님?"

"가라."

구울들을 베던 기사의 손을 잘라 낸 그는.

자신의 뒤에 있는 구울을 향해 무심하게 말했다.

"감사... 감사합니다...!"

그 말에.

구울은 눈물을 흘려 가면서 급하게 전장을 떠났다.

그리고.

멀리서부터 그 모습을 바라보던 귀족.

라시르의 눈빛에 흥미로운 기색이 서렸다.

'뭐지, 저건?'

저 뒤에 도망가는 구울 따위에게는 관심도 없지만.

눈앞의 사내는 아니었다.

갈색빛이 도는 흑발.

붉은 눈동자의 사내.

날카로운 인상이 묘하게 위험한 느낌이 드는 인물.

하지만

그의 흥미를 끈 건 그 외형이 아니었다.

'기묘한 향이 난다.'

귀족의 향이 나면서도.

묘하게 이질적인 향이 섞여 있다.

귀족이라기에도 애매하고.

기사라 하기도 애매한....

그 정체를 가늠하기 힘든 존재.

"...물러나라고?"

그는 수많은 기사와 구울로 이루어진 군세 앞에서 덤덤한 태도로 서 있었다.

그리고.

"너도 섬겨야 할 주인이 누구인지 모르는 모양이니...."

귀족을 따르는 기사들.

그들은.

주인의 가는 길을 가로막은 이를 그냥 보내 줄 생각이 없었다.

"교육해 주마."

본래도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었을 몬스터들.

그런 그들이 귀족의 피를 받아 다시 태어나면서 더 강한 힘을 얻은 것이 '기사'다.

그런 그들의 무기가 눈앞의 적을 향해 쇄도한다.

한 명도 아니고, 여러 기사가 동시에 휘두른 일격.

그 광경을 본 모두가 그의 죽음을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서걱-

그 후에 보인 것은.

그런 그들의 예상을 완전히 벗어난 것이었다.

"...어?"

가장 먼저 공격을 날린 기사.

칼을 쥔 그의 손이... 허공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 * *

루카의 말에 의하면.

얼마 전까지의 내 몸 상태는 최악에 가까웠다.

40레벨대의 각성자라는 압도적인 능력치가 있음에도.

너무나도 최악인 몸 상태로 인해, 그걸 제대로 활용하지도 못하고 있던 상태.

하지만.

'지금은 아니지.'

루카의 모든 치료가 끝난 뒤.

드디어 내 몸 상태는 정상....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의 컨디션으로 돌아왔다.

아직도 [진기]가 채워지지 못한 만큼 완벽하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 전의 상태와는 비교조차 하기 힘들 정도로 호전된 상태다.

'...전투는 내 전공이 아니지만.'

내 직업은 취사병이다.

즉.

요리사이면서도... 동시에 병사.

'부전공쯤은 되지.'

내 능력은 같은 요리사인 하워드와 비교해도 전투에 좀 더 치중되어 있었다.

그 하워드에게서 얻어 온 특성, [식재료 관리]의 버프 대상에는 나도 포함되어 있다.

진기가 회복되지 않은 만큼, 부작용을 의식해 여러 요리를 적용할 수는 없겠지만.

전력을 다해 만든 요리 하나 정도는 섭취해도 몸에 큰 문제는 없다.

그리고 그 요리는....

'영웅급 요리사의 전력이 들어간 요리.'

30레벨대의 내가 만든 요리 3개와 비교해도 크게 꿀리지 않는 효과.

그리고.

그 효과가 어느 정도인지는, 방금 괴물의 무기를 튕겨 내면서 이미 깨달은 바 있었다.

아무리 내 주전공이 전투가 아니라지만.

왜.

게임을 보면 그런 거 있지 않나.

아무리 근접 공격이 약한 마법사라고 한들....

100레벨 마법사쯤 되면, 50레벨쯤 되는 전사는 근접 공격으로도 이길 수 있다든가.

뭐 그런 거.

서걱-

"...!"

하필이면 몸을 치료하고 난 직후에 싸운 게 워낙 미친 괴물이어서 그렇지.

40레벨대에 달하는 레벨은 압도적이었으며.

스탯은 아예 규격을 벗어나 있다고 하는 게 옳다.

"형제들이여 주의해라! 이자는...."

그 스탯을 제대로 활용할 수 있게 된 지금.

"강하다!"

나는 어쩌면.

상당히 강한 편일지도 모른다.

* * *

"쿠워어어억!!!"

수 마리의 기사와.

수십 마리의 구울들이 동시에 덤벼들었다.

"감히 형제의 팔을...!"

처음 공격한 기사의 팔이 베인 것을 본 뒤.

라시르의 기사들은 적이 평범한 구울은 아니라고 깨달았다.

망치를 쥔 기사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그리고.

꽈아아아아악....

그 근육이.

갑옷을 뚫고 나오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부풀어 오른다.

멜키오른 혈족은 시조에게서 그 '힘'을 물려받은 이들.

그 피의 일부나마 이어받은 이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거력을 발휘한다.

파앙!

그 무게를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속도로 휘둘러지는 기사의 망치.

어지간한 대형 몬스터들조차 일격에 분쇄할 수 있는 강력한 일격이었으나.

그 모습을 바라보며.

스윽.

사내는 무심하게 손을 뻗더니.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원소 요리.'

그리고.

그걸로 충분했다.

물컹...!

사내의 손을 무자비하게 분쇄했어야 할 망치는 적을 분쇄하기는커녕.

사내의 손에 닿는 부위가 그대로 사라지고 있었다.

"...무슨!?"

그리고, 단 한 명.

그 망치를 휘두른 기사는 볼 수 있었다.

'내 무기가... 물처럼 녹았...?'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생각이 길게 이어질 수는 없었다.

파앙!

사내의 손에 의해 절반으로 갈라진 망치는 그 기세 그대로 날아갔다.

거력을 담아 무기를 휘두른 기사는 그 반동으로 몸이 앞으로 쏠리고 말았으며.

...사내는 그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슉.

거대한 기사의 품 안으로 파고들더니.

손에 쥔 단도를 기사의 허리춤에 찔러 넣는 남자.

하지만.

그 모습을 본 다른 기사들은 생각했다.

'심장은 피했다!'

기사들은 귀족의 힘을 나누어 받아 초월적인 생명력을 자랑한다.

태양에 노출되기라도 하지 않는 이상, 심장이 뽑히거나 뇌를 적출당하는 등의 치명상을 제외하면 그들을 죽이기란 극히 힘든 일.

게다가, 저 사내가 찌른 단도는 무척이나 작아 보였다.

기사가 몸 크기가 3m가 넘는 거대한 괴물임을 감안한다면, 저 정도 상처는 별것도 아닐....

"커...."

것이라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모두가 생각했으나.

"헉...."

"...형제여!?"

쿠우우우웅!

그 거대한 기사의 몸이.

무력하게 바닥으로 쓰러지는 모습.

다른 기사들은 그제서야 볼 수 있었다.

기사의 허리춤에 난 작은 상처.

그 상처는 분명 그리 크지는 않았으나.

파아아아악!!!

그 작은 구멍으로부터 기괴할 정도로 많은 피가 튀어나오고.

기사는 죽지는 않았으나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었다.

뱀파이어들의 생명력을 감안한다면 말이 되지 않는 일이다.

그래, 어디까지나.

[요리사의 눈]

그곳이.

뱀파이어가 되기 전부터 가지고 있었던 치명적인 약점이 아닐 경우에 한해서.

"감히 형제를...!"

그 모습을 보고 분노한 다른 기사들이 기세를 끌어 올렸다.

그 몸엔 멜키오른 혈족에게 허락된 거력이 깃든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펄럭....

그 등 뒤로.

검은색 피막으로 이루어진 날개가 자리 잡는다.

카르슈타인 혈족이 그림자에 특화되어 있으면서도 안개의 힘 또한 다룰 수 있는 것처럼.

멜키오른 혈족은 힘에 특화되어 있으면서도.

동시에 짐승으로서의 힘도 다룰 수 있었다.

"크뤄어어어어어억!!!"

그 거대한 날개를 통해 하늘로 날아오른 기사들.

그들은 그 가공할 힘으로 날개를 움직여, 엄청난 속도로 지상을 향해 쇄도했다.

하늘에서부터 이루어지는 공격.

위력과 속도, 공격이 이루어지는 각도까지.

무엇하나 까다롭지 않은 점이 없는 공격이었으나....

서걱-

큰 의미는 없었다.

"크뤄어어억!?"

사내는 한 손에 쥔 단도를 휘두르더니.

빠르게 쇄도해 오는 기사의 목을 부드럽게 베어 넘겼다.

갑옷을 두른 기사의 목이 마치 부드러운 젤리처럼 잘려 나간다.

카앙!

그리고, 다른 쪽의 손을 뻗더니.

다른 방향에서 쇄도하던 기사의 무기를 가볍게 건드렸다.

엄청난 기세로 이루어지던 공격.

그 무기를 가볍게 두들겨 봐야 큰 의미는 없는 것이 정상이겠지만....

휘청....

"!?"

그 가벼운 두들김에 어떤 묘리가 들어 있었던 것일까.

가벼운 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사의 공격 방향이 크게 틀어진다.

그리고.

콰직!

사내는 그 기세를 이용해.

기사의 심장 언저리에 자신의 단도를 가져다 대었다.

자신이 무기를 휘두르던 기세 그대로, 심장을 찔려 절명하는 기사.

"...."

"...."

그 비현실적인 광경을 목도한 모든 이들이.

행동을 멈춘 채, 사내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저 움직임은 대체...?'

사내가 보여 준 힘과 속도도 분명 대단한 것이었으나.

멜키오른 혈족의 피를 이은 기사들인 그들만큼 강하지는 않았다.

애초에.

방금 보여 준 것은 그저 조금 힘이 강하다고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기예에 가까운 움직임....'

[무예 - 식食]

[Lv. 6]

기예에 가까운 움직임.

단순한 몬스터에서 기사가 되었을 뿐인 그들로서는.

저 움직임에 담긴 깊이의 일부조차 제대로 헤아릴 수 없었다.

"힘이 강하고, 날개를 가진 대신... 안개화도 그림자에 숨는 것도 불가능한 건가."

"...."

"일격 일격의 위력은 확실히 위협적이지만... 그만큼 단순하다."

그리고.

그 믿기지 않는 광경을 연출한 당사자는 덤덤하게 중얼거렸다.

"상대하기엔 이쪽이 좀 더 편한걸."

495화 귀족들.

"상대하기엔 이쪽이 좀 더 편한걸."

덤덤하게 중얼거리는 사내.

그 말에.

'편하다니....'

'뭐에 비해서?'

라는 의문을.

몇몇 기사들이 품었으나....

"빈틈!"

...그 질문을 던지는 이는 없었다.

순식간에 셋이나 되는 기사를 도륙 낸 남자.

분명 강한 것은 물론.

그 기묘한 움직임에는 그들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하는 깊은 무언가가 담겨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형제들의 희생이 만들어 낸 빈틈...!'

동시에 일어난 두 기사의 공격.

그 공격에 대응하느라, 사내의 몸에는 빈틈이 생긴 상태였다.

삼 인의 기사들이.

그 빈틈을 노리고 몸을 내던진다.

아무리 강하고, 신묘한 움직임을 지녔다고 한들.

애초에 물리적으로 대응하는 게 불가능한 타이밍에 이루어진 공격.

수많은 전투를 겪어 온 귀족의 기사다운 판단.

이보다 더 나을 수는 없다고 확신할 수 있는.

최선의 순간에 이루어진 필사의 일격이었으나....

카앙!!!

"이게, 무슨...!?"

아쉽게도.

그 공격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기사들의 판단이 틀려서라거나.

적이 물리 법칙마저 무시하고 대응에 성공했다거나....

그런 이유는 아니었다.

[보조 셰프]

"무기가...."

"하늘을 날고 있다고?"

허공을 날아다니는 수없이 많은 칼들이.

그 기사들의 공격을 막아 냈다.

카앙, 카앙!

"귀찮게...!"

기사들은 무기를 휘둘러, 허공을 날아들며 그를 향해 쇄도하는 단도들을 쳐냈다.

무기들이 마치 스스로 의지를 가진 듯 움직이는 모습이 기괴하기는 했으나.

하나하나의 힘이 그리 강한 편은 아니었다.

기사들은 대부분의 공격을 요격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푸슉!

단 한 번.

그 칼에 몸을 베이고 말았다.

'그래 봐야 가벼운 상처!'

애초에 허공을 날아다니는 칼들은 그렇게 크지 않았다.

어지간한 상처는 순식간에 회복하는 기사들에게 있어서 저런 단도에 베인 상처쯤은 상처로도 여겨지지 않는다.

기사는 압도적인 회복력을 지닌 이들.

그런 기사로서의 전투에 익숙해진 이들은 오히려 가벼운 상처는 내어 주는 경우가 많았다.

그 회복력을 믿고 어지간한 부상은 내어 줌으로써, 반격을 통해 적의 치명상을 노리는 것이다.

"죽어라!!!"

이번 공격 역시.

그런 판단에 작은 공격쯤은 내어 주고, 적의 본체.

저 사내를 노리고자 한 것이었다.

무기를 쥔 기사의 손이 사내를 향해 휘둘러졌으나....

카앙.

"...어?"

그 기사가 본 것은.

자신의 검에 베이는 사내의 모습이 아니었다.

데구르르....

그의 손에 쥐어져 있던 칼이.

바닥에 떨어져 구르는 모습.

그리고.

기사는 그 모습을 보고 나서야 깨달았다.

촤아아아악....

"아, 안 돼. 안 돼...!"

그가 낸 작은 상처는 팔뚝에 난 것이었다.

칼날에 베인 그 상처는 분명 얕았으나.

"내, 내 손이...!"

그 상처로부터 퍼지기 시작한 독기가 그 팔을 녹이고 있었다.

팔뚝이 통째로 녹아 버린 결과.

무기를 쥐고 있던 기사의 손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밤의 귀족 피를 이어받은 기사들.

그들의 회복력은 목이 베여도 금방 가져다 붙이면 다시 붙을 정도로 강력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강대한 생명력에도 불구하고.

사아아아악....

[영혼을 녹이는 독 - 네펜데스]

단도에 살짝 베였을 뿐인 상처.

그 작은 상처로부터 시작된 부패는 그 강대한 회복력조차 압도하고 있었다.

"...형제들이여!"

그 모습을 본 기사 중 누군가가 결단을 내린 듯한 표정으로 외쳤다.

"내가 희생해 저자를 붙잡을 테니 부디 그대들이 마무리를!!!"

기사들 중에서도 유독 질겨 보이는 가죽에.

터무니없이 두터워 보이는 갑옷을 두른 거구의 전사.

그가 자신의 죽음조차 각오한 채 몸을 내던졌다.

"우리의 위대한 주인, 라시르 경께 영광 있으라!!!"

아무리 강력한 적이라고 한들.

안 그래도 강한 방어력에 기사로서의 회복력까지 지닌 기사다.

그가 공격을 맞을 것을 감안하고 적의 움직임을 봉쇄한다면.

제아무리 강해 보이는 저자라고 한들, 다른 동료들의 공격을 이겨 내지 못하리란 판단이었으나....

"흠."

그 모습을 본 사내는 허리춤에 손을 집어넣더니.

그전까지 다루던 칼이 아닌, 다른 칼을 꺼내 들었다.

[검정중식]

칼이라기보다는 도끼에 좀 더 가까운 형태.

그 육중한 도가 사내의 손에서 휘둘러지자.

콰직!!!

"끄륵...!"

두꺼운 갑옷과 질긴 가죽을 모조리 박살 내며, 괴물의 몸을 반으로 갈라 버렸다.

몸이 반으로 갈라진 기사는 가까스로 목숨만을 건진 채 바닥을 기었다.

"...개개인으로 싸워서는 답이 없는 적이로군."

그 광경을 목격하자.

저 사내를 경시하는 기사는 단 한 명도 없게 되었다.

귀족의 행렬을 호위하던 기사들.

그들은 저 사내가 자신보다 강자임을 인정했다.

"산개해서 포위하라!"

"동시에 간다!"

기사들은 사방으로 퍼진 뒤.

사내를 중심으로 원형의 진을 펼친 뒤, 동시에 무기를 휘둘렀다.

그러자.

그 모습을 본 사내는 품속에 손을 집어넣더니,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그 손안에 쥐어져 있던 것은.

갈색의 작은 막대기 같은 물건.

[원소요리 - 수水]

그 막대기가 갑자기 액체로 변화하고.

사내는 그 손을 휘둘러 한 방향의 기사들에게 흩뿌렸다.

"무슨...!?"

무기를 휘두르려던 기사들은 그 액체를 피하지 못했다.

그 액체가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것을 바라보며, 기사들은 각오를 다졌다.

만약 그것이 아까 동료들의 몸을 녹이던 정체불명의 독 같은 것이라면.

설령 자신들의 몸이 녹아드는 한이 있더라도.

무기를 휘두르는 손에 담긴 힘을 놓지는 않으리라....

고통과 죽음이 찾아온다고 한들 인내해 내고자 하는 강인한 의지가 그들의 머리를 뒤덮었으나.

[강제급식]

[영웅급 요리사의 정성이 담긴 짙은 패배감의 전투식량]

그 의지가 오래 이어지지는 못했다.

기사들의 몸에 닿은 액체가 그 갑옷을 뚫고 몸 안에 침투하는 순간.

털썩....

"아, 아아...."

"우린... 이길 수 없어...."

깊은 절망감을 느끼기라도 한 듯.

갑작스럽게 기세를 잃는 기사들.

파악!

사내는 그렇게 기세를 잃은 기사들의 어깨를 밟고 원형의 포위망을 벗어났다.

그러자.

콰직!

쩌저적...!

가운데 있던 사내를 향해 휘둘러졌던 공격.

기사들은 그 공격을 제때 회수하지 못했다.

"...형제들이여!"

"맙소사, 이게 대체 무슨...!"

그들이 휘두른 공격은 사내가 있던 자리에 쓰러지던 이들....

...패배감으로 쓰러져 가던 기사들의 몸을 찢어발겼다.

그리고.

큰 공격으로 인해 생겨난 빈틈.

형제들을 자신들의 손으로 공격했다는 사실로 인한 충격.

그로 인한 빈틈을.

[보조셰프]

허공을 날아다니는 무기들과.

사내가 두 손에 쥔 두 자루의 칼날이 종횡무진으로 휩쓴다.

그리고....

"...강하다."

멀리서부터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이들은.

멍한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 * *

"우리가 느끼는 게 착각이 아니라면... 저들도 분명 귀족의 기사들일 텐데."

"우리 기사님은... 저렇게까지 강했던 건가?"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저 기사들에게 학살당하고 있었던 도시의 구울들.

그들은 자신들에게 명령을 내리던 기사가 보여 준 비현실적인 무력.

자신들을 아무렇지 않게 학살하던 기사들을 상대로 단신으로 활약하는 그 모습에 압도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때.

비록 그 숫자는 적을지언정.

"...이놈들아!"

그 모습에 압도되기는 했으나.

그저 압도되는 데 그치지 않은 이도 있었다.

"기사님이 우리를 위해 싸워 주시는데, 이렇게 보고만 있을 거냐!"

불과 몇 분 전.

저기서 싸우고 있는 귀족의 기사에게 그 목숨을 잃을 뻔한 구울.

독사파 행동대장, 강일.

그는 죽음의 공포 앞에서 흘렸던 눈물을 닦아 냈다.

그럼에도 그 눈에는 여전히 물기가 가득했다.

공포로 인한 것은 아니었다.

'한낱 구울들이 죽을 위기에 처했을 뿐인데... 저 숫자의 기사들을 상대로 덤벼들다니.'

구울들의 피에는 노예의 습성이 각인되어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감정이 없는 이들은 아니었다.

'게다가... 다른 기사들 수십조차 압도하는 힘.'

그들은 도구로써 다시 태어난 이들이기에.

자신들을 다스려 줄 주인을 간절히 바란다.

'저분이 우리를 다스리는 기사.'

그리고.

그 주인이 위대하면 위대할수록.

'우리의 주인...!'

그들은 쓰임에 기쁨을 느끼고....

주인의 위대함에 큰 감명을 받는다.

"우리도 가세한다!"

그 주인이 자신의 혈주가 아니더라도.

그 충성심이 깊어지고.

"우리 영혼의 주인... 아리엘라 자작님을 위하여!!!"

때로는.

스스로의 목숨을 바치는 선택마저 스스럼없이 선택하는 것이다.

콰앙!

"...!?"

"벌레 같은 것들이...!"

단 한 명의 사내와 다수의 기사들 간의 전투에.

도시의 구울들이 가세했다.

"크윽...!"

본래라면 기사들에게 있어서 별것 아닌 적들인 구울들이었으나.

대부분의 기사들이 저 정체불명의 사내를 상대하느라 집중하고 있던 상황.

그 틈을 노리고 구울들이 가세하자.

"커억...!"

"형제여!"

라시르의 기사들이 열세에 몰리고 말았다.

행렬의 외곽에 있었던 구울들은 이미 전멸한 지 오래.

학살을 자행하던 기사들마저 허무하게 전멸해 버리나 싶던....

바로 그 순간.

짝!

"조금 흥미로운 녀석이다 싶어 지켜보고 있었다만."

작게 울려 퍼진 박수 소리에.

치열하게 이루어지고 있던 전투가 멈춘다.

전장의 모든 이들이 박수 소리가 울려 퍼진 곳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시선이 향한 곳에 있는 것은.

여유로운 웃음을 짓고 있는 금발의 남자.

"거기까지만 하는 게 좋겠구나."

그 남자의 몸에서는.

붉은빛의 마력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 마력에 담긴 향기를 느낀 구울들이 기사를 향한 공격을 멈추었다.

'귀족...!'

저 마력이야말로.

노예로서 탄생한 그들을 지배할 권위가 있는 존재.

귀족이라는 명명백백한 증거였으니까.

'아, 안 돼.'

그리고.

독사파 행동대장, 강일은 떨리는 눈빛으로 옆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기사님이 강하다고 해도...!'

저 기사들 전원을 상대로 이길 수 있으리란 보장은 없었다.

그렇기에, 죽음의 위기조차 무릅쓰고 다른 구울들과 함께 전투에 참여한 것이니까.

아니, 어쩌면.

그들을 학살하던 기사들 전원을 혼자서 쓰러트리는 것까지는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기....'

생전에 그럭저럭 강한 각성자였던 강일이다.

비록 지금은 구울이 되어 버렸다고 한들.

각성자로서 가지고 있었던 감각마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는 행렬의 중심을 바라보았다.

많은 기사들이 이번 전투에 나섰지만.

귀족의 곁에 선 채, 전투에는 가담하지 않은 이들이 있었다.

여유로운 웃음을 지은 채 박수를 친 귀족.

그 곁에 굳건한 자세로 선 채, 덤덤히 이곳을 바라보고 있는 자들.

구울이 피에 각인된 정보가 본능적으로 저들의 정체를 알려 주고 있었다.

'정예.'

귀족들이 다스리는 기사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이들.

애초부터 뛰어났기에, 귀족의 총애를 받아 강력한 힘을 부여받은....

귀족의 진정한 전력이라 할 수 있는 존재.

고위 귀족의 정예 기사들은 그 업적에 따라 준남작의 작위를 받는 경우도 있다던가.

사실상 귀족과 기사의 경계에 자리 잡고 있는 강자들.

'저들이 가세한다면... 아무리 기사님이라 해도.'

그런 생각에.

강일은 어떻게든 굳어 버린 몸을 움직이고자 했다.

'제기랄...!'

하지만.

머리로는 움직이라고 아무리 명령해 보아도, 도무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 몸.

그런 자신의 무력함에 강일이 이를 갈고 있을 때.

"그만하는 게 좋겠다니."

한 목소리와 함께.

굳어 버린 그의 몸이 갑자기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그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누구 마음대로?"

그들을 지배할 권위를 지닌 존재.

귀족은 저 남자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 * *

"그만하는 게 좋겠다니. 누구 마음대로?"

한 차례 소강된 전장.

그곳에 나타난 것은 아름다운 금발을 휘날리는 여인이었다.

방금 박수를 쳐 전투를 멈추게 한 귀족.

라시르와 같은... 붉은 마력을 내뿜는 존재.

"내 영지에 갑자기 쳐들어와 놓고서는 피해가 커질 것 같으니 그만하겠다? 이 얼마나 뻔뻔한 짓인지."

아리엘라.

그녀는 이 공간을 지배하고 있는 두 사람 중 한 명답게 당당한 태도로 눈앞의 귀족을 향해 외쳤다.

'아.'

...물론.

'대체 왜 이런 곳에 귀족이... 구울들을 저렇게 방치해 놨으면서!'

당당해 보이는 태도와는 달리.

당장 그녀의 속은 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다른 귀족이 도시에 접근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녀는 곧바로 은밀하게 도시를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도시에 있는 구울들은 어디까지나 도구에 불과할 뿐.

그들이 학살당하건 말건, 그녀에게 있어서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으니까.

'왜 여기서 끼어드셔선...!'

...그녀의 주인이 그 학살을 막으러 나서기 전까지는.

'주인님이라고 해서 상황을 모를 리는 없을 텐데.'

저 귀족 한 명이 적의 전부라면 상관없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는 게 문제였다.

눈앞에 보이는 저 귀족은 '멜키오른' 혈족의 귀족.

그 혈족과 적대적인 '카르슈타인'의 귀족이 이곳에 있다는 것이 들키는 순간.

주변에 있을 저 귀족과 같은 혈족의 귀족들이 군세를 이끌고 우르르 몰려올 것이다.

'절대 못 이겨.'

아무리 아리엘라가 지닌 군세가 대단하다고 한들.

그 귀족들을 상대로 이길 만한 자신은 없었다.

'왜 갑자기 끼어드신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된 이상....'

그녀는 어떻게 이곳에서 탈출할지.

탈출이 불가능하다면, 최소한 주인의 목숨이라도 살릴 방법이 없을지 최대한 머리를 쥐어 짜냈다.

"그대는... 귀족이로군."

"흥, 보면 모르겠느냐."

일단 그녀의 모습을 들키고 말았으니.

눈앞의 귀족을 최대한 빠르게 처리한 뒤.

저자의 사망 소식이 주변에 퍼지기 전에, 최대한 멀리 도망친 뒤 몸을 숨긴다.

그 후에는... 자기 자신을 제물로 삼아서라도 저 전이문을 발동시킨 뒤, 주인님만이라도 탈출시켜야....

"이름이 무엇이오."

한다고.

다급하게 생각하고 있었을 때.

"...음?"

"이름이 무엇이냐 물었소, 레이디."

눈앞의 귀족이 그녀에게 말을 걸어 왔다.

그리고.

그 목소리를 들은 아리엘라는 인상을 찡그릴 수밖에 없었다.

"아, 이거 참 실례했소. 남의 이름을 물으면서 내 이름도 먼저 밝히지 않다니.... 나는 라시르라 하오."

어떻게 저자를 죽여야 할지를 고심하고 있었던 아리엘라와는 달리.

저 귀족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내 이름을 밝혔으니, 그대의 이름을 물어도 될지?"

"...."

너무나도 부드럽기 그지없었으니까.

496화 동경과 충성.

"내 이름을 밝혔으니, 그대의 이름을 물어도 될지?"

"...."

부드럽기 그지없는 말투로 말을 건네는 금발의 사내.

직전까지 구울들의 학살을 심드렁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던 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온화한 태도였다.

그리고.

'...역겹기는.'

그 온화한 태도에.

아리엘라는 소름이 끼치는 듯한 기분을 받았다.

귀족이 또 다른 귀족을 대하는 것이라 생각한다면, 그렇게 이상하지는 않은 일이겠지만.

저런 태도는....

이 땅에 떨어지기 전.

귀족들의 고향에서도 받아 본 적 없는 그녀였으니까.

하지만.

"...아리엘라라 합니다. 작위는 그대와 같은 자작이지요."

"아... 아리엘라 경! 이름도 아름다우시구려."

자칫하면 여기서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상황이다.

그녀 혼자만이라면 모를까.

권속의 맹약으로 인해, 그녀는 어떤 일이 있어도 주인의 안전을 우선시해야만 한다.

저자가 보이는 태도가 마음에 들건, 들지 않건.

일단 저쪽이 적의를 거두어들인 이상.

거기에 응해 주는 것이 지금은 가장 안전한 선택이었다.

'그나저나... 뭔가 이상하구나.'

그러면서도.

아리엘라는 저 사내와의 대화에서 묘한 어색함을 느꼈다.

거기에 대해 깊이 생각하기도 전에.

자신을 라시르라 밝힌 귀족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우선은 사과드리겠소. 아리엘라 경."

"사과라 함은?"

"나는 이곳의 구울들이 주인의 명령 없이 독자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줄 알았소. 아무래도 급조한 구울들이다 보니 불량품들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 하지만... 그건 내 착각이었던 것 같군."

"...."

"저들은 경을 섬기고 있었던 것이야."

그런 말을 하며.

아리엘라의 모습을 슬쩍 훑는 남자.

"전적으로 내 잘못임을 인정하겠소. 설마 저들이 이토록 고풍스럽고 우아한 귀족을 섬기고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지 뭐요."

"...."

"아까 저기서 내 기사들과 싸웠던 자... 그 기묘한 냄새를 풍기는 이 역시, 그대의 수하였던 것이겠지? 조금 기묘한 부분도 있기는 하지만 꽤나 훌륭한 기사인 듯하더군. 하인의 모습을 보면 그 주인의 품격도 예상할 수 있는 법. 그대가 얼마나 훌륭한 귀족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겠더구려."

나름대로 자신의 무례를 사과하면서도.

상대를 치켜세워 주려는 모습.

아리엘라는 그 의도를 알지 못해 인상만 찡그리고 있을 뿐이었다.

"으음... 아무래도 내가 저지른 무례에 마음에 많이 상하신 모양이구려."

"...본인이 무례했다는 것 정도는 이해하고 계신 듯하니. 그나마 다행이군요."

"하하, 이거 참. 더 이야기해 봐야 화만 돋울 뿐일 듯하니, 본론부터 말씀드리도록 하겠소."

라시르는 그런 그녀의 태도에 상처 받았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더니.

이내, 조금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나는 가주님의 명령으로 이곳을 내 영지로 삼기 위해 왔었소."

"...!"

"하지만, 이미 이곳에는 그대가 자리 잡고 있었지."

그 말에.

아리엘라의 몸이 조금 움찔거렸다.

"이게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아마 그대도 이미 눈치채셨겠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사내였으나.

그 말을 듣는 아리엘라의 기분은 결코 편안하지 못했다.

"...그야."

저자는 혈족의 수장에게서 명령을 받고, 이 땅을 지배하기 위해 찾아왔다.

하지만.

그 땅에 이미 자리 잡고 있는 다른 영주가 존재한다.

그게 의미하는 바는 아리엘라가 알기로는 하나밖에 없었다.

'가주의 명을 따르지 않는 자는... 다른 혈족의 귀족밖에 없지.'

아리엘라는 눈을 반쯤 뜬 채, 상대의 모습을 예리하게 바라보았다.

스르륵....

그녀의 손톱이 길어지고.

붉은 눈의 안광이 더욱더 짙어진다.

"당연히 처음부터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적대적인 혈족 간의 만남.

그렇다면, 남은 것은 싸움뿐.

그녀는 저 사내와의 전투를 준비했으나....

"처음부터라!"

"...응?"

"역시. 그대는 나와 달리 애초부터 이 상황을 눈치채고 있었던 것이구려. 하긴... 그러니 이렇게 빠르게 이 땅에 도착해 있었던 것이겠지."

전의를 다지고 있었던 그녀와 달리.

라시르는 오히려 그녀에게 감탄했다는 듯 입을 열었다.

"생각해 보면 내가 참 어리석었다는 생각이 드는구려. 그야, 그 가주님이 하시는 일이지 않소. 우리 가주님께서... 이렇게 간단히 영지를 내려 주실 거라 생각해선 안 됐는데."

그는 무언가 깨달음을 얻었다는 듯.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한 영지에 배정된 두 명의 영주. 본래라면 말도 안 되는 상황이지만... 우리 가주님의 성정을 생각하면, 무슨 상황인지 이해하는 건 어렵지 않지."

"...?"

"하하. 아무래도 우리는 가주님의 시험에 놓인 것 같구려."

아리엘라는 저자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으나.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의 가언... 멜키오른의 피는 그 힘으로 쟁취한다."

그는 자신의 주먹을 꽉 쥐더니.

아리엘라를 뚜렷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그대와 나! 둘 중에 더 강한 힘을 증명한 자가... 이 땅의 주인이 될 자격을 쟁취한다. 그런 뜻이겠지."

거기까지 말한 그는.

시원한 태도로 뒤돌아서며 말했다.

그가 두른 화려한 망토가 어둠 속에 흩날렸다.

"하필이면 그대와 같은 아름다운 여인과 겨루게 된 것이 아쉬울 따름이오."

"...?"

"하지만 이 또한 운명이겠지.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 힘으로 쟁취하는 것이 우리의 방식이니...."

그가 이끌고 온 화려한 행렬이.

도시를 벗어나기 시작하고.

"이틀 후에 다시 찾아오겠소, 자작. 나와 그대, 둘이 가진 모든 것을 걸고 결투를 벌이도록 하지."

그렇게 떠나간 귀족의 행렬은.

이내 도시에서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리 떠나가 버렸다.

그리고....

"...?"

아리엘라는.

멍하니 입을 벌려 그런 뒷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 * *

갑자기 나타나 이 도시의 구울들을 학살하고.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이더니, 이내 혼자 만족하고 뒤돌아서 떠나가는 귀족.

"무슨 상황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그가 그렇게 떠나가자.

아리엘라는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는 상황에, 머릿속으로 수많은 물음표를 띄우고 있었으나.

"...그나마 다행이구나."

그래도.

당장은 큰 문제 없이 상황을 넘길 수 있었다는 데에서 오는 안도감이 더 컸다.

아리엘라의 전력은 전에 비해 크게 손상된 상태.

그 전력이 회복되기도 전에 다른 귀족과의 전투를 벌이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했다.

어떻게든 이기는 데 성공한다고 한들, 피해가 막심할 것은 당연한 일.

"주인... 아니. 나의 기사여!"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잠시 안도의 한숨을 내쉰 아리엘라는 이내 고개를 돌리며 인상을 찡그린 채 외쳤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이냐!"

"...."

"운 좋게 넘어가서 다행이지, 자칫하면...."

그런데.

그런 그녀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기사여?"

"아."

그녀의 주인.

신영준 병장은.

"미안... 아니, 죄송합니다."

멍하니.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 * *

"...무슨 일이 있는 것이냐?"

"...조금."

직전까지 화를 내던 모습과 달리.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아리엘라.

하지만 아쉽게도.

나는 그런 그녀의 말이 제대로 귀에 들어오지 않는 상황이었다.

나는 인상을 찡그린 채 멍하니 내 손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방금은... 뭐였던 거지?'

내가 이상하게 느낀 것은 다른 게 아니었다.

방금 전.

나도 모르게 참전하고 말았던 전투.

그 전투는 냉정하게 생각했을 때.

'하면 안 되는 전투였다.'

다른 귀족과의 전투라니.

위험은 가득하면서도, 이겨 봤자 득 될 것은 없는.

하이 리스크 로우 리턴의 표본과도 같은 상황.

저 구울들이 내게 살려 달라고 빌기는 했지만.

자칫하면 내 생존과도 직결될 수 있는 일이다.

어떤 부탁을 듣는다 하더라도, 거기서 싸움에 참여하는 일은 있어선 안 됐다.

그런데.

'저들의 바람을 인식하는 순간....'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나도 모르게, 그 바람에 응해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더니.

그 순간.

'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생각이 든 것이 먼저였는지.

몸이 움직인 게 먼저였는지.

그것조차 제대로 구분이 가지 않았다.

애초에, 내 의지가 아닌 다른 무언가가 내 몸을 움직인 것 같은 기분.

'이건... 좋지 않다.'

인상을 찡그릴 수밖에 없는 일이다.

사소한 실수로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세상.

군단에 있을 때라면 모를까, 지금은 군단의 보호조차 받지 못하는 상황이다.

하필이면 이런 상황에 내 의지와 상관없이 몸이 움직이는 일이 발생하다니.

지금은 운이 좋아 저자가 그냥 돌아갔다지만.

자칫 잘못하면 큰일로 이어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원인을 파악하지 못한 채, 같은 일이 또 벌어진다면.'

...솔직히 말하자면.

내 몸에 일어나고 있는 알 수 없는 현상에.

나는 약간의 공포마저 느끼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일단은 도시 안으로 돌아가자꾸나."

그런 나를 바라보던 아리엘라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안쪽에서 나누는 것이 좋겠지. 저자가 다시 돌아올 수도 있는 일이니."

"아."

확실히 그녀의 말대로.

당장 저 귀족이 떠나가기는 했지만, 갑자기 마음이 바뀌어서 돌아올 수도 있는 일.

여기서 이런 생각에 빠져 있는 건 좋지 않았다.

"아, 그리고 밖에 있는 다른 인간들도 도시 안으로 들어오라 전하거라."

"...?"

그런데.

이어진 그녀의 말에 나는 의아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다른 인간들.

즉, 부대원들을 도시 안으로 들이라니.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다른 귀족이 이 근처에 있다는 걸 알게 된 이상, 도시 밖에 있는 편이 더 위험할 것이야. 근처를 돌아다니던 귀족에게 눈에 띄기라도 하면 보호해 줄 방법이 없으니... 차라리 이 도시 안에서 보호하는 게 낫겠지."

"하지만."

부대원들을 도시 밖으로 내보낸 것은.

이 도시에 가득 차 있는 이들....

'구울들을 믿을 수 없기 때문이었지.'

당장은 아리엘라와 내 명령을 듣기는 하지만.

아리엘라가 직접 만들어 낸 구울이 아닌 이상 그 충성을 맹신할 수는 없는 일.

나와 아리엘라가 부재하고 있는 사이, 신선한 피에 이끌린 그들이 부대원들을 습격할 수도 있다는 판단이었으나.

"그 걱정은 이제 하지 않아도 될 것이야."

"...?"

"저들을 보아라."

아리엘라는 그런 말을 하며 주변을 바라보았다.

나 역시 그녀의 시선이 향하는 곳으로 눈을 돌렸다.

"갑자기 나선 것은 분명 위험한 판단이었다. 나로서는 질책할 수밖에 없는 일이나...."

그러자.

눈앞에 나타난 것은.

"저들에게는 조금 다른 듯하구나."

이 도시에 들어차 있던 수없이 많은 구울들.

그런 그들이.

"아아... 기사님이 우리를 보고 계신다."

"우리 같은 하등한 것들을 지켜보고... 보호해 주고 계셔."

우리를....

아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말했지 않았느냐. 너라면 기사로서의 일도 잘 수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그런 모습을 바라보며.

아리엘라는 기분 좋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도 그럴 게.

"이제는 저들도 자신들이 누구를 섬겨야 할지 스스로 이해하고 있는 듯하구나."

그 수많은 구울들에게서는.

깊은 동경과 충성의 맛이 느껴지고 있었으니까.

497화 시조님.

저 싸움은 내가 원해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으나.

어쨌든 구울들을 지키기 위해 내가 다른 귀족과 맞선 일이었다 보니.

그 사실이 구울들에게는 꽤나 감명 깊은 일이었던 듯하다.

얘기를 들어 보면 구울들은 이 밤의 어쩌고 사회에서는 최하층에 속하는 이들.

그런 그들을 지키기 위해 기사가 자신의 위험을 무릅쓰고 나선 것이니.

"이제는 저들도 자신들이 섬겨야 할 대상이 누구인지 제대로 이해하게 되었다.... 그런 거겠죠."

노블리스 오블리주... 뭐 그런 느낌이랄까.

혈주가 아닌 자를 향한 충성심은 조금 느슨한 면이 있다고 했으나.

나는 구울들의 피에 각인된 노예로서의 습성 외적으로도 저들의 충성심을 얻어 내는 데 성공했다는 뜻.

"그래서 저희를 도시로 다시 불러들이신 거군요."

덕분에.

나와 아리엘라의 보호하에 있는 부대원들을 향한 습격은 어지간하면 없을 거라는 소식에.

도시 밖에 있던 부대원들도 다시 안쪽으로 들일 수 있게 됐다는 얘기다.

"그나저나, 섬겨야 할 대상을 이해하게 되었다 라."

"후후... 괴물들치고는 조금 보는 눈이 있는 놈들인가 봅니다."

"...?"

이곳에서 있었던 얘기를 듣고는.

묘하게 뿌듯해하는 표정의 부대원들.

자기 일도 아닌데 왜 저러나 조금 의아하기는 했으나.

"...그래서?"

아무튼.

당장 중요한 것은 그 부분이 아니었다.

"저 녀석, 뭐 하는 놈이었던 거야?"

"으음."

"갑자기 싸움에 끼어들었던 내가 할 말은 아니긴 하지만, 네 말대로라면 이 근처에 귀족이 있을 가능성은 적다고 하지 않았나?"

혈주의 이름조차 가르치지 않았다는 건, 아리엘라의 경우처럼 적대적인 혈족에게 구울이 이용당할 수도 있다는 뜻.

그렇게 최소한의 교육조차 하지 않은 구울들이라면 아예 거둘 생각조차 안 하고 방치된 것일 확률이 높다고 아리엘라는 말했으나.

"저 녀석은 뭔데."

막상 나타난 귀족은 자신이 이 땅의 영주가 되기 위해 왔다고 말했다.

질책하듯 하는 내 말에.

그녀는 면목이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

"의문인 점은 저도 한두 가지가 아니에요."

인상 찡그리는 아리엘라.

"사실... 그자가 갑자기 나타난 부분이라면 처음에는 방치하려 했던 땅이었으나, 나중 가서야 다른 이유가 생겨서 영주를 파견했다든가...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설명이 되긴 합니다만...."

"...의아한 점은 그게 전부가 아니란 건가?"

"네. 예를 들면."

그녀는 잠깐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기더니.

아 하고 입을 벌리며 말했다.

"그 가언이요."

"가언?"

"가언은 혈족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애초에 가언 자체가 없는 가문도 있지만, 가문의 결속력을 위해 가언을 만드는 경우도 있죠. 멜키오른 혈족이 그 대표적인 예고요."

그 귀족 녀석이 말한 것을 떠올려 보았다.

"분명, 멜키오른의 피는 힘으로 쟁취한다고 했나...? 그게 뭐가 이상한 건가?"

"그 자체는 이상하지 않죠. 하지만."

그런데.

"제가 기억하는 대로라면 멜키오른의 가언은 그런 게 아니었어요."

"뭐?"

"멜키오른의 피는 그 힘으로써 증명한다... 였던 거로 기억해요."

증명과 쟁취.

"...음. 큰 차이는 아니긴 한데."

단어 하나의 차이에 불과한 만큼.

나는 이게 아리엘라의 착각에 불과한 게 아닌가 싶었으나.

"큰 차이가 아니라고요? 맙소사!"

"응?"

"가언은 그 혈족을 상징하는 말이라고 말씀드렸잖아요? 한 번 정해지면 수천 년이 지나도 변하는 일이 없는 게 정상이에요. 단순한 어조만 바뀌는 것도 엄청나게 큰 차이인데, 단어가 바뀌다니...!"

아리엘라의 입장에서는.

그게 꽤나 큰 차이처럼 여겨지는 모양이었다.

"그다음으로 신경 쓰인 건... 이름을 밝힐 때였어요."

"이름?"

그게 왜?

"자기 이름을 밝힐 때... 그자는 자기 성을 얘기하지 않더군요."

"아."

그러고 보니 그러기는 했다.

가언 얘기를 한 것을 보면, 멜키오른 혈족 소속이라는 것은 맞는 듯한데.

"그자가 자기 이름만 밝혀 준 덕분에 저도 제 이름만 말하고 넘어갈 수 있었으니 다행이긴 하지만요."

"...아. 그러면 설마 저 녀석이 네게 우호적이었던 건."

"아마 그 생각이 맞을 거예요."

아리엘라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가언을 중얼거린 걸 보면... 아마 높은 확률로 저를 같은 혈족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거겠죠".

그제서야 놈이 보인 태도가 이해가 갔다.

같은 가문 소속의 귀족이라 생각했기에, 그녀에게 우호적이었던 것.

"하지만 이상한 일이기는 해요."

"?"

"귀족들이 서로를 소개할 때는 보통 성.... 그러니까 가문의 이름까지 밝히는 게 일반적이에요."

"큰 차이인 건가?"

"...글쎄요. 이건 너무 당연한 거라, 저로서는 의문도 품어 본 적이 없는 부분이라고 해야 할지...."

그 외에도.

"그러고 보면, 그자의 차림도 묘하게 이질적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행렬의 치장도 묘하게 낯선 양식인 게...."

의문스러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는 듯.

계속해서 뭐라 뭐라 중얼거리는 아리엘라.

"당장 알 수 없는 문제에 시간을 투자하기에는 저희가 여유가 있는 편은 아니지 않나요?"

그때.

그런 그녀에게 말을 거는 이가 있었다.

"그보다 중요한 건, 그자가 어째서 물러났냐는 점이죠."

정수아.

그녀는 아리엘라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도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지만, 그자의 병력은 은인의 힘 앞에 서서히 제거되고 있었죠. 거기에 여왕님까지 참전했으니... 어쩌면, 그자는 자신이 불리하다고 판단해 후퇴를 선택한 것일지도 몰라요."

"음?"

"그렇다면 다른 동료들을 통해 지원 병력을 데려올 가능성도 크겠죠. 여왕님은 그자를 보내 줘서는 안 됐던 거 아닌가요? 어떻게든 붙잡아서 처리했어야 하는 게."

"아아, 무슨 소리를 하나 했더니."

그 말에.

아리엘라는 모르면 말을 하지 말라는 듯한 태도로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그 부분이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그자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으니."

"알고 있다니요?"

"애초에 정말로 다른 귀족을 불러올 것 같았다면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았겠지. 그렇지 않은 이유는 하나뿐이다."

아리엘라는 팔짱을 낀 채 말했다.

"그자는 피의 결투를 바라고 있었음이야."

...결투?

"귀족의 힘은 그 권세가 얼마나 크냐에 달려 있다. 피의 결투란... 서로가 가진 모든 권속을 부딪쳐 가며 싸우는 귀족들의 오래된 전통이지."

"잘은 모르겠지만, 그게 동료를 부를 수도 있다는 얘기에 대한 답이 되지는 않는 것 같은데요?"

"답이 된단다. 피의 결투에는 결투를 벌이기로 한 두 귀족의 명예가 걸려 있으니까."

아리엘라는 경외심이 담긴 눈빛으로 말했다.

"피의 결투란 위대하신 시조님께서 만들어 낸 혈족의 문화. 다른 귀족이 이 신성한 대결에 엮이는 것은 결코 허용되지 않으며, 당사자들도 다른 귀족에게 그 결투에 대해 알리는 것을 크나큰 불명예로 여기지."

"불명예로 여길 뿐, 발언하면 안 된다는 법 같은 건 없다는 뜻 아닌가요? 그런 걸 믿어도 될지...."

"믿어도 될 것이야. 저자의 언행에는 조금 의문스러운 점이 많기는 했다마는, 귀족으로서의 명예는 중시하는 듯 보이더구나. 시조님에 대한 존중이 있는 귀족이라면 결코 이 문화를 경시하지 못할 테지."

...시조님이라.

몇 번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그건 이 녀석들의 먼 선조이자, 창조주 비슷한 것인 듯했다.

'저번에 아리엘라가 했던 말로는... 뱀파이어는 마족에게서 파생됐다 했지.'

아마 그 시조님이란 녀석이 마족이라는 종족이었던 것이겠지.

그리고, 이 뱀파이어들은 그 시조님을 일종의 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모양이었다.

시조님이란 녀석에 대한 신앙이 남아 있는 한.

그 시조님이 직접 만들어 낸 문화에 대해서는 종교적인 의미로라도 존중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뜻.

"서로가 가진 모든 권속을 부딪쳐 가며 싸운다 했지."

그래.

저 귀족이 아리엘라와 피의 결투라는 걸 하고 싶다는 점.

그 피의 결투를 벌이기로 한 이상, 우리에 대한 걸 동족에게 알리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도 알겠다.

하지만 궁금한 것은....

"그렇게 부딪혀서 싸우는 이유는 뭔데?"

"간단하지요."

왜 동족끼리 모든 권속을 부딪쳐 가며 싸우려 하며.

이 녀석들의 시조란 놈은 그딴 문화를 만들었는가.

"피의 결투란 서로의 모든 것을 걸고 벌이는 승부랍니다. 그리고... 그 결투에서 승리한 자는 패자의 모든 것을 빼앗고. 패자는 자신의 모든 것을 승자에게 바쳐야 하지요."

그리고.

그에 대한 답은 꽤나 단순한 것이었다.

"재산도, 군세도... 영지와 자기 자신. 그 영혼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 그 피마저."

그렇게 결투가 끝나고 난 뒤에는.

하나의 귀족은 사라지고 말겠지만.

"다른 귀족의 피를 먹음으로써, 더욱더 고귀해진 위대한 귀족이 탄생한답니다."

"...."

"정정당당하게 서로의 모든 것을 두고 싸운 끝에, 승자는 한 단계 위로 도약한다.... 명예롭고 긍지 높은 귀족들의 문화이지요."

그리고.

그 말을 들은 나는 생각했다.

'피의 결투 끝은 승리한 귀족이 패배한 귀족을 먹고 더 강해지는 것.'

즉.

이 녀석들의 창조주.

이 문화를 만든 시조님이란 녀석은....

'자신의 자손들이 서로를 잡아먹고 강해지길 원했다는 뜻인가?'

아무래도.

영 제정신은 아닌 놈 같다고.

* * *

중국, 산둥성.

그 중심에는 산둥성의 성도인 지난시가 있다.

한 성의 수도로 여겨지는 만큼 꽤나 큰 규모의 도시.

그리고 지금.

크뤄어억....

그 도시 안은.

수없이 많은 구울로 가득 차 있었다.

엄청난 숫자의 구울과.

그들을 지배하는 기사들이 도시 이곳저곳을 거닐고 있을 때.

그 도시 안으로....

"귀족님의 행렬이 입장하신다!"

한 무리의 귀족이.

그 안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모두 예의를 갖추고 길을 비켜라!!!"

어둠 속에서 바쁘게 일하던 구울들이.

그 모습을 보고는 경의를 담아 고개를 숙인다.

"...쯧. 여전히 쓸모없이 많은 놈들이구나."

하지만.

그들이 경의를 보내거나 말거나.

"이 좁은 땅에 뭐 이리 많은 벌레들이 모여 있는 것인지."

그 행렬의 한가운데 앉아 있던 귀족은.

너무나도 많은 숫자의 구울들이 자신의 행렬의 앞길을 막고 있는 것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나름대로 귀족의 앞을 막지 않고자 이리저리 피하고는 있지만.

애초에 너무 많은 숫자 탓에, 제대로 길을 트기 힘든 상황.

"기사들이여."

그 모습에.

"시간이 아까우니 적당히 길을 트도록."

"예."

촤아아아아악!!!

기사들이 무기를 꺼내 들고.

길을 막는 구울들을 치워 버리기 시작했다.

"아, 아아...! 귀족께서 노하셨다!"

"다들 비켜라!"

그렇게.

길을 막는 구울들을 학살하고, 그 시체를 쌓아 가며 도시 안쪽으로 다가가고 있을 때.

"아! 누구신가 했더니!"

그 행렬에 다가가는 이가 있었다.

귀족의 기사는 하던 대로 길을 트기 위해 그 무기를 들었으나.

"이렇게 금방 다시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라시르 자작."

움찔하고.

그 사내의 모습을 본 순간.

무기를 치켜든 기사의 손이 멈춰 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화려한 행렬의 주인....

라시르는 그 사내를 바라보며 인상을 찡그린 채 입을 열었다.

"친한 척 말 걸지 말라고 했을 텐데. 잡종."

"하하. 확실히 그런 말을 하시긴 했죠."

능글맞은 눈웃음을 짓고 있는 검은 머리의 사내.

기사의 무기가 자신의 머리 위에 올라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소를 잃지 않은 사내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하지만 너무 뭐라 하지 말아 주시겠습니까. 저도 마음 같아선 굳이 경에게 이렇게 말을 걸고 싶지는 않습니다마는...."

거기까지 말한 검은 머리의 사내는.

주변에 수북이 쌓인 시체들을 턱짓하며 말했다.

"경께서 제 영지의 도로에 시체를 쌓아 두고 계시니. 이거 참, 그냥 넘어갈 수도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쯧."

"이 도시는 안 그래도 교통이 좋지 않아서 곤란하거든요."

그러자.

라시르는 그 싱글거리는 얼굴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하등한 잡종 따위가... 뻔뻔하게도 말을 걸어 대는군.'

멜키오른 혈족의 자작.

라시르는 저 사내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자신에게 말을 건 순간 곧바로 그 목을 베어 버리고 싶을 정도.

하지만.

"흥. 도로라면 지나갈 수 있도록 깨끗하게 관리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렇지요?"

"마침 도로 위에 쓰레기가 가득 차 있기에 청소해 줬을 뿐이다."

그 말에.

사내는 주변에 쌓인 구울들의 시체를 흘겨보았다.

온갖 괴물은 물론, 한때 인간이었던 이들도 군데군데 보이는 참상.

"아아...."

그 싱글거리던 눈가의 곡선이.

"쓰레기, 말이지요?"

아주 약간.

역으로 휘어졌다.

498화 잡종.

"자네가 해야 할 일을 대신 해 준 셈이니. 오히려 감사 인사를 들어도 모자랄 상황이지."

"하핫. 그거참 감사...."

"물론. 나는 고귀한 귀족의 일원이니 자네의 감사 인사를 받을 생각은 없네. 잡종의 영지를 청소해 준 것은 귀족의 의무를 다한 것뿐, 굳이 감사를 받을 일은 아니니까 말이야."

"...."

"그러니 빨리 비켜 주겠나? 갈 길이 바쁜 몸이거든."

거만하기 그지없는 태도의 라시르였으나.

검은 머리의 사내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웃음을 지었다.

"물론 비켜 드려야지요. 그런데... 바쁘시다고 하셨습니까?"

사내는 조금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그런 바쁘신 분이 이곳에는 왜 다시 찾아오신 겁니까? 자작님께서는 저 칭다오의 영주로써 임명되어 떠나신 거로 압니다만."

"...."

"가주님의 명령을 이행하려면 여기서 이렇게 제 영지민들이나 가지고 놀며 허비할 시간은 없으실 텐데요. 설마...."

눈웃음을 짓고 있던 사내는.

몸을 라시르 쪽으로 기울이며, 혹시나 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가주님의 명령을 제대로 이행할 생각이 없으시다거나... 그런 건 아니시겠죠?"

"무, 무슨!"

그 말에.

사내를 노골적으로 무시하고 있었던 귀족.

라시르는 당황한 듯 손사래 치며 말했다.

"그 무슨 불경한 말이더냐! 나만큼 우리 혈족과 가주님을 위해 헌신하는 자가 없다는 것 정도는 너 같은 잡종이라도 알고 있을 텐데!"

"아, 알지요. 잘 알고 있지요. 경의 충심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저는 그냥, 그렇게 충성심 빼면 시체라 할 만한 경께서 왜 아직까지 이런 곳에 계시는지가 궁금했을 뿐입니다."

능글능글하게 웃음 짓는 사내.

그 모습에 라시르는 이를 까득 악물었다.

'감히 잡종 따위가, 가주님의 위세를 믿고 끝까지 건방지게 굴다니....'

하지만 그 분노를 표출할 수는 없었다.

그는 속으로 분노를 삭이며 해명의 말을 꺼냈다.

"...별건 아니다. 마음이 조금 바뀌어서 말이지. 이곳에 남겨 둔 나머지 기사들도 영지로 데려가려 했을 뿐이야."

"흠? 그들이야 애초부터 경의 권속들이니 데려가도 상관은 없습니다만... 왜 굳이?"

검은 머리 사내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경께서는 그 기사들 전원의 녹봉을 제공할 수 없어 제게 대여해 주시기로 한 것 아니었습니까? 영지를 장악하는 것 정도는 데려가신 병력으로도 차고 넘치실 텐데요."

"아, 그건."

"그러고 보니."

라시르가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사내는 라시르의 행렬을 훑어보고 말했다.

"떠나셨을 때보다 기사의 숫자가 줄어든 것 같군요."

"...."

"행렬의 구울들은 또 다 어디로 갔답니까? 영지의 구울들은 교육이 안 되어 있으니. 그들을 교육하기 위한 교육 담당으로 데려가셨을 텐데."

거기까지 말한 그는.

무언가 깨달은 듯, 경계심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태양교의 성기사라도 마주치신 겁니까? 자작."

"뭐?"

"그런 거라면 당장 가주님께 연락을...."

그 말에.

라시르는 손사래를 치며 고개를 저었다.

"뭘 걱정하는지는 알겠네만. 아닐세."

"혹시 민망해서 감추시려는 것이라면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저희는 전쟁 중이니, 만약 그들이 나타난 것이라 하면...."

"나도 알아. 하지만 그들의 영역은 내 영지와 한참 떨어져 있지. 그럴 리가 없다는 건 자네도 알고 있지 않나."

그러자.

검은 머리 사내는 김이 샜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나마 다행이군요. 그러면 뭡니까? 항마승병이 다시 나타났을 리도 없으니 잔존한 각성자들이라도 있었던 겁니까?"

"이 일대의 각성자들은 이미 거의 다 박멸되었지 않나."

"아직 소수의 잔당이 남아 태양교 영역으로 도망치고 있는 소문도 있습니다. 그들은 혈귀 사냥꾼들의 노하우를 전수 받은 상태이니, 소수라 해도 무시하기는 힘들겠죠."

"그러니까. 그런 건 아니라고 하지 않았나."

라시르는 무심코 입을 열려다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건 나와 아리엘라 자작의 결투다.'

그 사실을 저 남자에게 알릴 수는 없는 일.

"...그냥 개인적인 사정이 있었다고 알아 두도록."

"개인적인 사정이라니."

그리고.

의아해하는 그 얼굴을 보며.

라시르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자네... 가주님한테 들은 게 없는 건가?"

"예?"

그가 영주로써 선정된 곳에, 이미 영주로 자리 잡고 있는 귀족이 있었다.

이게 의미하는 바는 하나.

그와 아리엘라.

둘 중 더 강한 쪽이 그 땅의 주인이 되리라는 가주님의 시험이겠지.

"...후후."

그런데.

저 사내는 그 사실을 모르는 듯했다.

그 사실에.

"역시 아무리 가주님이 아끼는 듯 보여도 결국은 잡종. 애완동물 이상의 애정은 없다는 뜻이로구나."

"...무슨 의미입니까, 자작?"

"아무것도 아니네."

조금 기분이 좋아진 그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대는 이 귀족 사회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어 모르는 게 많을 테니. 내 조언 하나 하지."

"조언 말입니까."

"모든 귀족은 각자의 세력을 이끄는 이들일세. 그 숫자가 적은 만큼 하나하나가 존귀한 이들이지. 그렇기에, 아무리 지체 높은 귀족이라고 한들 다른 귀족의 일에 지나치게 관여하는 건 굉장한 실례야."

그는 살짝 웃음 섞인 얼굴로.

가마 아래에 서 있는 사내를 내려다본 채 말했다.

"자네처럼 애매한 입장의 귀족이 그러는 것은 더더욱 큰 실례지."

"...하핫.

"여기까지 얘기했으면 아무리 자네도 더 이상 내 일에 대해 묻는 게 얼마나 큰 실례인지 알겠지? 자네와 더 나눌 얘기는 없을 듯하니 물러나게. 자네는 어떨지 몰라도 나는 꽤 바쁜 몸이라서 말이야."

그 말에.

검은 머리의 사내는 웃음을 지으며 옆으로 물러났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대여해 주신 병력은 다시 돌려드리는 거로 알지요."

"그리 하게."

그렇게.

라시르의 행렬은 그를 지나 도시의 안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렇게 멀어지는 행렬을 바라보며.

"...기묘하군요."

검은 머리의 사내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무리 무능한 분이라 해도 그렇지 텅 빈 도시에 찾아가 영주가 된 뒤 구울들을 끌고 전선에 합류하라는 간단한 명령도 따르지 못할 정도는 아니셨을 텐데."

{기사들의 갑옷에 피가 묻어 있더군요. 자작의 기사들이 누군가와 전투를 벌인 것만큼은 확실한 듯합니다}

"...하. 무능한 것도 정도가 있지. 도대체 뭘 어떻게 하면 구울들밖에 없을 도시에서 병력을 잃을 수가 있답니까...?"

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 진저리를 치면서도.

잠시 고민에 빠졌다.

"...이 일은 조금 조사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군요."

{예? 하지만 영주님. 자작께서 말씀하신 대로 다른 귀족이 숨기는 일을 파고드는 것은....}

"좋지 않다?"

{예. 가주님은 그렇다 치더라도... 다른 귀족들이 좋게 보지는 않을 겁니다.}

"그렇겠지요. 저분이 말한 대로 그게 그놈의 귀족의 관습이란 것일 테니."

그 말에.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미천한 잡종이 고귀하신 귀족분들의 심기를 거슬리게 할 수는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영주님.}

"무얼. 너무 걱정하지 마시길. 관습은 어기지 않을 겁니다. 어디까지나...."

그는 싱긋 웃음 지은 채.

곁에 있는 자신의 권속을 바라보며 말했다.

"귀족들의 관습은 말입니다만."

* * *

그 귀족 녀석이 떠나간 뒤.

우리는 다시금 마력을 모으는 작업에 착수했다.

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자작님을 위하여!"

"우리 영혼의 주인, 아리엘라 자작과 그 기사님을 칭송하라!"

살아남은 구울들.

그들의 충성심이 하늘을 찌를 기세로 변해 있었다는 것.

"주인님 덕분이에요."

그런 구울들을 내려다보던 아리엘라가 말했다.

"구울들은 노예로서 태어난 이들인 만큼, 자신들이 섬기는 주인이 대단하면 대단할수록 자부심을 느끼는 이들이니까요."

"...."

"저 정도라면, 혈주가 직접 나타나지 않는 이상 언제나 최선을 다해 우리를 섬기겠죠."

내가 보여 준 전투력이 녀석들에게는 꽤 인상 깊었던 모양.

하지만....

"그건 좀 이상한데."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말했다.

"나도 레벨이 있으니 약한 편은 아니지만... 그 정도는 아니지 않나?"

지금의 나는 확실히 약한 편은 아니다.

내 추측이기는 하지만.

요리를 1개 먹은 상태에서 나는 [전투력측정기]의 파란색 등급 턱걸이 수준이겠지.

그리고.

"네 권속들 중에는 그 정도는 나 말고도 많잖아."

"그렇긴 하죠."

아리엘라의 권속들 중에는 그 정도 괴물들이 더 있었다.

저 마경에서 수급한 4마리의 대마수들.

그 덩치만큼 많은 피를 요구하는 녀석들이라 아직도 제대로 회복되지는 못했지만.

그 녀석들은 요리 1개를 먹은 나보다 강하다.

그런 녀석들도 있는 마당에 내 모습에 저렇게 감명받는 게 의아했으나.

"사실, 대부분 귀족은 주인님 정도의 기사조차 거느리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에요."

"음? 그래?"

"네. 귀족들의 수 자체가 애초에 적은 편이기도 하고 그중 절대다수는 하위 귀족. 하위 귀족이 거느리는 기사라 해 봐야 그렇게 강한 편은 아니거든요. 주인님 정도의 무력이라면 대단한 편이죠."

"흐음."

하긴.

이 녀석이 준남작이었을 시절의 전투력이 아마 나와 비슷했을 테니까.

그런 면에서 보자면, 나는 기사인 주제에 귀족과 비등한 전투력을 지녔다는 뜻.

대단한 일이기는 했다.

"대귀족들이 거느린 권속 중에서도 주인님 정도의 강자는 그렇게 많지 않을 거예요. 정말 드문 일이긴 하지만, 그렇게 뛰어난 능력을 지닌 기사가 뛰어난 공을 세웠을 때는 아예 귀족으로 승작을 시켜 주는 경우도 있을 정도니까요."

그리고.

아리엘라는 가슴에 손을 올리며 당당한 태도로 말했다.

"그리고, 저는 그런 대단한 권속을 넷이나 지니고 있는 대단한 권세가라는 뜻이랍니다."

"...."

"말씀드렸다시피, 다른 혈족들이 없어서 다음 작위로의 승작을 하고 있지 못할 뿐. 사실은 대귀족에 버금가는 게 바로 저라는 말이죠."

"어어, 그래."

...그러고 보면.

'이 땅에 다른 혈족은 없는 걸까.'

만약 이 땅에 아리엘라와 같은 혈족의 대귀족이 있다면.

아리엘라는 그를 만나 다음 단계로의 승작을 이루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내 전력도 어마어마하게 강해질 수 있겠지.

하필 다른 혈족의 귀족들이 이 땅을 지배하고 있다는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쯧."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아리엘라는 구울들을 바라보며 인상을 찡그린 채 말했다.

"애초부터 저 속도로 일했다면 진작에 목표치를 달성했을 텐데 말이죠."

"뭐, 지금이라도 열심히 해 주면 고마운 거지."

아리엘라는 진작에 노력하지 않았다는 게 오히려 짜증 난다는 듯 말했지만.

애초에 저 녀석들은 대부분의 귀족에게 복종하면서도, 진짜로 충성을 다하는 것은 저 녀석들을 구울로 만든 '혈주'뿐이라고 했으니 어쩔 수 없는 일.

"확실히 다행이기는 합니다만...."

아리엘라도 그 부분은 이해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아쉬움을 감출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 속도로는 필요한 마력을 모으기는 힘들 것 같은걸요."

"...뭐, 그렇겠지."

확실히 구울들의 노동 효율이 좋아진 것은 사실이었다.

전에는 소중한 물건이랍시고 숨겨 두었던 물건들까지 가져다 바치니.

마력이 담긴 물건들이 쌓이는 속도도 꽤나 빨랐다.

문제가 있다면.

"아무리 효율이 좋아져 봐야 줄어든 숫자를 대체하지는 못하니...."

"크흠."

저 라시르라는 녀석이 기사를 이끌고 와 벌인 학살.

그 과정에서 구울들의 숫자가 꽤 많이 줄어들었으며.

살아남은 구울들도 큰 부상을 입었다.

'기사'들이었다면 태양 빛에 맞은 것도 아니고 하니 순식간에 회복했을 상처.

하지만 구울들은 뱀파이어라는 종족명이 무색하게도, 별다른 회복력을 가지지 못한 이들이다.

노동에 투입할 수 있는 구울의 숫자가 확 줄어 버린 것은 당연한 일.

'그 라시르라는 귀족이 다시 찾아오기로 한 것은 이틀 뒤.'

높은 확률로.

우리는 그때까지 전이문을 발동하는 데 필요한 마력을 갖추지 못할 것이다.

피의 결투란 녀석은....

아무래도 피할 수 없게 될 것 같았다.

499화 구울 강일.

이틀 뒤까지 필요한 마력을 모으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구울들을 통해 마력을 모으는 일을 멈추지는 않았다.

어쨌든 저 전이문을 활성화시키려면 마력은 필요한 상황.

그 이틀 후에 무슨 일이 생기게 된다고 한들.

그때까지는 최대한 마력을 모으는 것 외에는 할 일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으니까.

-그리하겠습니다...!

-충성충성...!

나는 그렇게 구울들을 시켜 가며 마력을 모으는 작업에 복귀했다.

그리고, 그러던 중.

"아... 기사님!"

"너는... 그때 그."

나는 그중에서도.

묘하게 눈에 익은 녀석을 하나 발견할 수 있었다.

"아아! 기억하고 있으셨던 겁니까."

이 도시에 처음 진입했을 때.

우리를 공격해 오려 했던 바로 그 구울이자.

"헤헤... 기사님 덕에 살았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요."

얼마 전에 있었던 저 기사들과의 싸움에서.

다른 구울들을 이끌고 나를 도와주었던, 바로 그 녀석이었다.

* * *

"헤헤... 기사님 덕에 살았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요."

저 귀족과의 전투는 내가 원해서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고 한들.

솔직히 말해서 내 쪽도 아주 여유가 있는 전투는 아니었다.

아무리 내가 강해진 편이라고 해도, 수적으로 많이 밀리는 상황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어떻게든 그 전투를 이어 나갈 수 있었던 이유는 간단했다.

"기사님이 우리를 위해 싸워 주시는데, 이렇게 보고만 있을 거냐!"

그런 말과 함께.

다른 구울들을 선동해 나를 도와준 녀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그 싸움은 귀족과 귀족 간의 싸움이었지.'

귀족과 다른 누군가와의 싸움이라면, 구울들은 귀족을 지키기 위해 나섰겠지만.

같은 귀족들 간의 싸움에서 구울들이 나서야 할 일은 없다.

아리엘라가 그들의 혈주라면 모를까, 그렇지도 않은 상황.

저 라시르란 녀석도 이 땅의 영주임을 주장하고 있었으니.

구울들로서는 그냥 지켜보기만 해도 그만.

'하지만 그때 이 녀석이 다른 구울들과 함께 나를 도와줬지.'

덕분에 그 전투를 조금 더 수월하게 풀어 나갈 수 있었던 것.

그 귀족의 기사들이 구울들을 학살하고 있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겠지만.

내가 그 덕을 본 것도 사실이다.

나는 약간의 호의를 담은 채 녀석을 바라보았다.

"너, 이름은?"

"강일이라고 합니다요, 헤헤...."

귀에 들리는 발음과 머릿속에서 인식되는 이름이 조금 달랐다.

아마도 중국어로는 다른 이름이겠지만, 이 '정신 언어'라는 스킬이 내 정신에 맞추어 저 이름을 번역해 준 것이겠지.

그나저나.

"너는 인간 출신 구울인가 보군."

"예? 아아. 옙. 그렇습죠."

꽤나 덩치가 큰 녀석.

빡빡 민 머리에 박혀 있는 뱀 문양 문신.

늘어진 나시 안쪽으로도 곳곳에 뱀 문신이 보이고.

몸에는 인간이었을 시절 새겨진 것으로 추측되는 기괴한 상처들도 많았다.

'아마 생전에 썩 바람직한 삶을 살던 녀석은 아니겠지.'

하지만.

그럼에도 인간은 인간이다 보니.

나는 약간의 친근함을 느끼며 말했다.

"이 도시 안의 여러 구울들을 보았지만 인간 출신은 생각보다 많지 않더군."

"아, 실제로도 그렇습니다요. 아예 없는 편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주류는 아니죠."

저 귀족들은 이 도시의 모든 생명들을 구울로 만들었다고 했다.

그중에 인간 출신이 적다는 말은 아마도.

"역시. 구울이 되기도 전에 대부분의 인간은 죽었나 보군."

애초에 대부분 인간이 저 뱀파이어들의 침공 전에 사망했다는 뜻이겠지.

조금 아쉬운 일이기는 하지만.

한국에서도 대부분 도시가 그랬으니까.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던 부분이었다.

"아뇨, 그것도 있습니다만."

그런데.

"그보다는... 이 도시를 떠난 이들이 더 많습죠."

"뭐?"

나는 눈을 크게 뜨며 녀석에게 물었다.

"도시를 떠나다니?"

얼마 전이었다면.

이런 걸 이 녀석에게 물어보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귀족이라면 당연히 알아야 하는 걸 모르고 있는 셈이니까.

하지만.

"아, 실은... 이 도시가 귀족분들의 관리하에 들어가기 전에도 귀족분들의 존재에 대해 조금씩 소문이 나고 있었습니다요."

지금 이 녀석들은 나에 대한 충성심이 상당히 올라간 상태였다.

별다른 의심 없이 내 질문에 답해 주는 모습.

"구체적인 건 잘 몰라도, 엄청나게 강한 괴물 세력이 나타났다... 뭐 그 정도?"

"그래서?"

"물론 소문이 돌기 전에 이 도시가 살기 힘들다고 떠나 버린 이들도 엄청나게 많았습니다마는. 그 괴물 세력에게서 안전한 땅이 있다는 소문이 퍼졌고... 그나마 남아 있던 대부분의 생존자들도 그쪽으로 이동했다고 알고 있습죠."

그 말에.

나는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이거... 아리엘라가 생존자들을 유인했을 때랑 비슷한 것 같은데.'

아리엘라가 인간들을 유인한 방식이 딱 이랬다.

괴물들에게 안전한 땅이 있다는 소문을 퍼트리고.

그곳으로 인간들을 끌어모았었지.

...그래도 아리엘라와 같은 상황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겠지.

그 소문의 지역을 직접 확인해 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일.

그나저나.

"다른 괴물 녀석에게 물었을 때는 그런 말은 없었는데?"

불과 얼마 전에, 나는 이 지역에 대해 꿰고 있다는 괴물에게 살아남은 인간들의 행방을 물었다.

녀석은 이 근처에 살아남은 인간이라고는 없다고 답했지.

"그야...."

그리고.

그 이유는 꽤나 간단한 것이었다.

"먼 곳에 인간들이 모이고 있다는 소문은 인간들 사이에서나 도는 거니까. 괴물이 알 리가 없지 않습니까."

"...아."

"실제로 이 일대에는 인간은 없다고 보는 게 맞을 테니 그놈도 거짓말을 한 건 아닐 겁니다. 그냥 인간들 사이에 도는 소문을 몰랐을 뿐인 거겠죠."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다.

어딘가에 인간들에게 안전한 땅이 있다는 소문.

그런 건 당연히 인간들 사이에서나 돌지, 괴물들이 그런 소문을 알 리가 없으니까.

'애초에 인간 출신인 녀석들에게 물어봤어야 했었나...!'

이 당연한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다는 게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그야, 다 같은 도시에 있던 놈들이니까.

그냥 단순하게 말이 통하는 놈 중에서 물어보면 답이 나오겠거니, 했던 것이다.

"그 위치는? 아는 게 있나?"

"그, 글쎄요.... 제가 들은 건 여기서 먼 서쪽 어딘가라는 것 정도밖에...."

서쪽 어딘가라.

너무 작은 힌트기는 하지만.

꽤나 중요한 단서이기도 했다.

...그나저나.

나는 약간 의아함을 느끼면서 말했다.

"그런 괴물들이나 안전한 땅에 대한 소문이 있었는데, 너는 왜 여기 남아 있었던 거지?"

"그야."

그런 내 말에.

녀석은 볼을 긁적이면서 답했다.

"이곳이 제 고향이니까, 떠날 수는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

"크흠. 그 뭐냐, 제가 비록 이 고향에 도움이라곤 안되는 쓰레기 같은 놈이었다고 해도, 고향은 고향이니까요. 여길 떠나기는 싫지 뭡니까. 남아 있던 다른 인간들도 그런 경우가 꽤 많을 겁니다."

그 이유는 뭐랄까....

너무나도 인간적인 감성이 넘쳐나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다시 체감이 됐다.

아리엘라는 구울들이 노예로서 태어난 이들이라고 말하긴 했지만.

"그 외에는 뭐... 먼 길을 이동하는 게 너무 위험하다든가, 그 소문을 믿을 수 없다든가 그런 경우겠죠."

이 녀석들과 대화를 나누고 보면.

생각보다 평범한 이들이라는 느낌을 많이 받는다.

전에 대화했던 구울 중에는 가족애가 있는 녀석도 있었다.

개중에는 생전에는 온화한 초식동물에 가까웠던 것일까, '미뢰강화'에 느껴지는 맛도 부드러운 이들 역시 상당수.

구울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구울이라.

"너는 어쩌다 구울이 된 거지?"

"뭐, 대단한 이야기는 없습니다. 그냥 갑자기 어느 날 귀족분들이 이 도시에 찾아왔고... 저희들에게 은총을 내려 주신 거죠."

구울은 분명 괴물이기는 하지만.

본인들이 괴물이 되고 싶어서 된 이들은 아니었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철저한 타의로 인해.

구울이라는 괴물로 다시 탄생하게 된 이들.

'...내가 뭐라 할 일은 아닌가.'

생각해 보면 나 역시 범죄자들을 '기사'로 만들고 있었으니까.

그런 면에서 내가 이 일을 비판하는 것도 웃긴 일이겠지.

나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럼, 그 뭐냐... 구울이 된 후의 삶은 어떤가."

그 말을 꺼낸 나는 속으로 흠칫했다.

다른 생각을 하다 보니 무심코 별생각 없이 입에 담아 버리긴 했지만.

그야.

평범한 인간이 괴물이 되어 버린 것이다.

좋은 기분일 리가 없지.

"미안하다. 이건 못 들은 거로...."

그런 생각에.

손사래를 치며 내가 건넨 질문을 없던 거로 하려던 찰나.

"그야 당연히... 기쁨뿐이지요."

"어?"

내가 말을 취소하는 것보다 먼저.

녀석의 답변이 들려왔다.

"의지할 곳 없이 외로울 수밖에 없는 고독한 인간을 벗어나 귀족분들의 보살핌 아래에 들어올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

"비록 그 말석 중에 말석이라고 한들, 이 위대한 귀족들의 사회에 발이라도 걸칠 수 있다니!"

녀석은 두 손을 펼치더니.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저희에게는 그저 무한한 영광일 뿐이지요."

처음에는 '기사'인 내게 잘 보이고자 과장해서 말하는 것인 줄 알았다.

가끔 부대원들 중에서도 군단장인 내 말에 호들갑을 떨며 대답하는 경우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아니었다.

"위대하신 귀족분들에게 저의 모든 것을 바칠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제 삶의 가장 큰 기쁨!"

직전까지 나와 멀쩡하게 대화를 나누던 녀석이었으나.

그 눈이 조금 바뀌어 있었다.

"아직 그 이름은 모르지만 제게 피를 주신 분을 만난다면... 제 모든 생명을 바쳐 이 감사를 전하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텅 빈 동공.

마치 인형처럼.

구울의 삶에 대한 기쁨과 귀족에 대한 찬사를 늘어놓는 녀석.

"...."

나는 그 모습을 보고 나서야.

뱀파이어의 권속이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좀 더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구울들은 혈주 외의 존재에게도 굴복은 하지만, 목숨을 바치지는 않는다고 했지.'

나는 그 얘기조차.

이 녀석들이 생각보다 더 본연의 자아를 유지하고 있기에 그런 것인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진짜 충성은 자신들을 구울로 만든 혈주에게 바쳐야 하기 때문에 다른 존재에게는 진짜 충성을 바치지 않는 거다.'

애초부터 노예로 만들어진 존재.

아리엘라는 이들을 그렇게 평했다.

그리고 지금.

이 땅은 그 노예들로 가득 차 있는 상황.

나와 아리엘라에게는 노동력을 제공받을 수 있는 호재였지만.

이들은 사실... 원치 않게 자아를 잃어버리고, 다른 종족의 노예로서 전락한 상황이라는 것.

"...너는 이번에 나를 도와 싸웠지."

"아, 예."

한 사람의 인간이 괴물의 노예로 전락해 버린 모습.

나는 묘한 감정에 사로잡힌 채 녀석을 바라보며 물었다.

"방금 네가 준 정보도 내게는 꽤나 유용한 것이었다. 그러니... 지금 모으는 마력을 다 모으는 데 성공한다면 그 공을 치하하여 보상을 주도록 하마."

"보상... 말입니까?"

이미 구울이 되어 버린 녀석을 인간으로 되돌릴 방법은 없다.

그런 방법이 있었다면, 저 장영웅부터 '기사'로 만들고 인간으로 되돌렸을 테니까.

"그래. 내가 가능한 선에서 하는 부탁이라면 들어주마."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이미 노예가 되어 버린 이 녀석이 그나마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것 정도밖에 없겠지.

"그렇다면...."

굳이 할 필요는 없는 일이지만.

그냥 이렇게 하면 내 마음이 조금은 편해질 것 같아서 하는 일.

나는 그런 생각에 녀석의 말을 기다렸다.

"...그게 소원인가?"

"예. 무, 물론 분에 넘치는 소원이라는 건 압니다. 하지만...!"

"그건."

그런데.

그 소원을 듣게 된 순간, 나는.

"조금 흥미로운걸."

"예?"

문득 머릿속에 떠오른 아이디어에.

그리 중얼거렸다.

* * *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피의 결투를 할 녀석이 찾아오기로 한 날이 됐다.

"너, 이길 수 있겠냐?"

"...물론이죠!"

아리엘라가 당당한 목소리로 말했다.

얼굴에 약간의 긴장이 서려 있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확신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녀석.

"그자의 작위는 자작이었으니까요."

"너랑 같은 작위 아닌가?"

"나름 높은 작위라면 높은 작위기는 하지만, 사실 별다른 능력은 없으면서도 대귀족의 직계 자손이라던가 하는 이유만으로 자작인 이들도 많답니다. 대귀족에 버금가는 저와 비교되기는 힘들겠죠."

거기까지 말한 그녀는.

당당하게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주인님은 저만 믿으시면 된답니다."

그 말에.

나는 녀석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분명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이 녀석이 대귀족에 버금가는 강함을 지닌 것도.

내가 직접 싸워 본 바에 의하면.

아마 그 자작이란 녀석의 전력이 생각보다 강하지 않을 거란 것과.

모자란 마력을 그 결투라는 것에서 승리한 뒤에 얻어 내면 된다는 것도.

분명 모두 맞는 말이긴 하지만....

'이 땅에 온 뒤로... 이 녀석이 귀족에 관련되어서 한 말 중에 맞는 게 하나도 없었단 말이지.'

귀족이 나타날 일은 없을 거라던가.

적대적인 혈족을 만나면 바로 공격당할 거라던가.

'....'

생각해 보면.

이 녀석, 귀족인 주제에 귀족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 게 얼마 없었다.

"후우... 그래, 맞아. 나는 더 이상 준남작이 아니라 자작.... 그것도 대귀족에 버금가는...."

"...."

"후, 후후. 주인님은 걱정하실 필요 없답니다!"

그리고 지금.

그런 녀석이 자기만 믿으면 된다는 말을 하고 있다, 이건데....

"...그래. 나는 너만 믿으마."

"네! 그런데... 어디 가시려고요?"

"아. 그냥, 잠깐."

어찌 됐든.

그 귀족이란 녀석과의 전투는 피하지 못하게 된 상황.

그렇다면, 아무래도.

"요리를 좀 해 둘까 해서."

나도.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안 그래도 마침.

"해 보고 싶은 요리가 생긴 참이거든."

500화 도망치지 않은 이유.

해가 뜨지 않게 된 세상.

어둠 속에 파묻혀 낮인지 밤인지조차 알 수 없는 풍경 속에서.

"그럼...."

붉은 핏빛으로 반짝이는 수많은 눈동자들이.

도시를 향해 다가오는 것이 보인다.

"약속된 시간이 되었소. 아리엘라 경."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라시르 경."

어둠 속에서 섬뜩하게 빛나는 붉은 눈동자.

핏기라고는 하나도 보이지 않는 창백한 피부.

라시르 자작은 친근한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솔직히 말하면 조금은 걱정했소, 자작. 나는 그대가 누구인지 모르니... 혹시 명예를 모르고 이 땅에서 도망치지는 않을까 우려했었지."

"참으로 쓸모없으면서도... 무례한 걱정이었군요."

"하하, 이제라도 사과드리지."

그 말에.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도망치는 선택지도... 없지는 않았지.'

하지만.

굳이 그 선택지를 고르지는 않았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그중 하나는.

'도망치지 않는 게 이득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점.'

나는 저 라시르라는 귀족이 데리고 온 행렬.

그 뒤쪽을 바라보았다.

'...상당한 병력이다. 예상했던 것보다 더 많아.'

엄청난 숫자의 [기사]들로 이루어진 행렬.

그 숫자는 최소한으로 잡아도 수천 단위에 달했다.

'단 한 명의 귀족이 저만한 숫자의 괴물들을 권속으로 부릴 수 있다니.'

...새삼스럽게 밤의 귀족이라는 종족이 가진 저력이 얼마나 큰지 체감되었다.

거대한 세력을 이룬다는 점에 있어서 이만한 종족을 찾기는 힘들겠지.

'아니, 그보다 중요한 건.'

하지만.

당장 내 눈에 들어오는 것은 저 숫자가 아니었다.

'역시....'

그 행렬 안쪽.

[기사]들이 가지고 온, 각종 거대한 마차들과 그 마차에 실려 있는 화려한 상자들.

그리고 그 안에서는....

'마력이 느껴진다.'

상당한 크기의 마력이 느껴지고 있었다.

처음 저 녀석들과 싸웠을 때도 느꼈다.

귀족이란 녀석들은 아무래도 부와 명예를 꽤 중시하는 듯.

그 행렬에도 온갖 화려하고 가치 있는 물건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피의 결투에서 승자는 패자의 모든 것을 갖는다.'

그리고 그 말은.

결투에 임하는 이는 자신의 모든 것을 가지고 임한다는 것.

"내가 가진 모든 군세와 재산을 가지고 왔소."

이 일대에 군림하는 종족.

그 종족의 일원인 녀석이라면 마력이 담긴 귀중한 물건도 상당수 가지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고.

그 생각이 적중했다.

'어쩐지 도시에서 마력을 구하기가 어렵더니만...!'

나는 저 녀석의 행렬에 포함된 마력석들을 보고 생각했다.

'귀족이란 녀석들이 도시를 휩쓸면서 쓸 만한 물건들은 죄다 털어 갔던 모양이군.'

엄청난 양의 마력석은 물론.

기묘한 마력을 품은 보석이나 무기들도 상당수였다.

애초에.

마력이 담겨 있는 물건들이라고 한다면, 우리뿐만 아니라 뱀파이어들에게도 상당한 가치가 있는 물건들이다.

각 도시를 침공하고 모든 생명들을 구울로 바꾸었을 때.

애초에 그런 물건들도 보이는 대로 약탈해 간 것이리라.

그리고 지금.

이 땅 전역에서 긁어모았을 약탈의 결과물이 저곳에 모여 있었다.

'저것들만 손에 넣는다면....'

그 마력을 눈대중으로 살핀 나는 확신했다.

도시에서 긁어모은 마력석은 필요도 없다.

저 녀석이 가지고 온 물건들만으로도.

전이문을 발동시키는데 충분한 마력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고.

* * *

"그럼, 시작하도록 하지."

그리고.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아리엘라와 라시르는 계속해서 무어라고 대화를 나누더니.

이내 그 대화가 끝난 듯.

서로 손을 내뻗으며 입을 열었다.

"나, 라시르는 귀족의 명예를 걸고 이 싸움에 정정당당히 임하겠노라 맹세한다."

"나, 아리엘라는 귀족의 명예를 걸고 이 싸움에 정정당당히 임하겠노라 맹세한다."

동시에 내뱉어지는 말.

그리고.

그리 말하는 이들의 목소리에는 묘한 마력이 담겨 있었다.

"나의 모든 권속과 내가 가진 모든 피를 동원해 싸울 것이며."

"나의 모든 권속과 내가 가진 모든 피를 동원해 싸울 것이며."

그리고.

나는 그 모습에 과거 아리엘라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뱀파이어는 마족에게서 비롯된 종족이라... 마력을 담아서 꺼낸 말은 결코 어길 수 없다던가.'

그렇기에.

마력을 담아 나에 대한 충성을 내뱉은 아리엘라는 내게 귀속된 권속이 되었다.

"승자는 패자의 모든 것을 갖고."

"패자는 승자에게 모든 것을 바칠지니...."

저 말은.

아리엘라가 내게 건넨 '권속의 맹약'과 같다.

서로의 피와 권속만으로 이루어진 대결을 하겠노라고.

서로가 결코 어길 수 없는 맹세를 나누는 것.

"우리의 위대하신 시조님께서."

"이 대결의 심판관이 되어 주시리라."

그 말과 함께.

주변의 마력이 크게 요동치기 시작한다.

'...!?'

파아아악- 하고.

어디선가 정체 모를 핏물이 튀어 오르더니.

사방으로 퍼져 나가며, 마치 홍수라도 난 것처럼 도시를 가득 메우기 시작한다.

'이건....'

과거.

아리엘라의 승작을 구경했을 때와 비슷했다.

[피의 결투가 성립되었습니다!]

사방에서 튀어나온 핏물은 이내 하늘로 치솟더니.

핏물로 이루어진 거대한 벽이 도시의 사방을 가로막았다.

[결투자]

[카르슈타인 혈족의 자작, 강철군단의 친위대장, 혈족의 부백작, 장막의 성주]

[아리엘라 카르슈타인]

[결투자]

[멜키오른 혈족의 자작, 발라라크의 증손, 혈족의 열두 번째 창, 칭다오의 영주]

그 순간.

내 눈앞에 나타나는 상태창의 문구들.

그리고.

그 문구를 본 나는 순간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이름이 나와 있잖아.'

저자가 이 대결에 임한 것은.

애초에 우리가 같은 혈족의 일원이라고 착각했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들키는 건 아닌가 싶어 신경 쓰였으나....

"시조님께서 이 땅에 임하셨으니...."

"이로써 결투는 성립되었다."

두 귀족은 그런 건 보이지 않는다는 듯 진중하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저 상태창은 나한테만 보이는 것인 모양.

그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

[두 귀족의 선언으로 인해 결투가 성립되었습니다.]

[결투의 참관인이자 심판관으로서, 위대한 시조 - ???가 자리에 임합니다!]

'...시조가, 뭐?'

눈앞에 떠오른 상태창의 문구에.

나는 무심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저 말이 그냥 형식적인 말이 아니었다고?'

밤의 귀족이 마력을 담아 하는 말에는 강제성이 생긴다.

그리고.

그런 녀석들이 시조가 심판관이 되어 준다고 했다는 것은....

'어떤 농담도 비유도 아닌, 정말로 시조가 이 땅에 임한다는 뜻...!'

시조라는 녀석은 아마도 바깥 존재들과 같은 '신격'이겠지.

그런 녀석이 이 자리에 임한다면.

저 하늘에서 이곳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없다...?'

하늘에 떠 있는 별들은 여전히 이곳을 내려다보고 있었지만.

그중에서 이 결투를 바라보고 있는 이는 없었다.

하지만.

상태창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시조라는 녀석은 분명 이 땅에 임해 있을 것이다.

'위가 아니라면....'

그렇다는 건....

'아래.'

나는 고개를 내려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결투가 선언된 순간.

어디서 흘러나와, 주변을 가득 메우고.

온 사방을 가득 둘러싼 피로 이루어진 벽.

그리고.

그 벽을 바라본 나는 본능적으로 눈치챘다.

'이 피.'

이 공간을 가득 채운 핏물.

아니.

이 거대한 미지의 공간 자체가....

'시조.'

시조가 이 땅에 임한 형태인 것이라고.

* * *

이 공간 자체가.

저 녀석들이 말하는 시조.

'...온 사방에서 그 시조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

그걸 인지하는 순간.

나는 묘한 공포감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었다.

'사방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다.'

이 공간 그 자체.

시조라는 녀석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피의 결투는 두 귀족이 혈족으로서 벌이는 신성한 대결입니다.]

[시조의 참관 아래, 두 귀족의 피로 엮이지 않은 존재들은 대결에 참가할 수 없습니다.]

"...무슨!?"

그리고 그 순간.

내 곁에 있던 부대원들의 입에서 비명 소리가 들려오자.

나는 황급히 고개를 돌려 그쪽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보이는 것은.

"구, 군단장님!"

"은인이시여!"

바닥에서 치솟아 오른 핏물이.

부대원들의 몸을 붙잡고 어디론가로 이동하는 모습이었다.

아니, 부대원들뿐만이 아니었다.

"어, 어어...?"

"영주님, 기사님!"

분명 '뱀파이어'에 속하는 이들.

구울들 마저 붙잡은 채 저 하늘 위로 끌고 가는 모습.

핏물은 그들을 들고 저 하늘 위로 이동하더니.

이내, 근처 건물들의 옥상에 앉혔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나서야 눈치챘다.

'이건, 각 귀족의 [피]의 결투.'

즉.

각 귀족의 피가 섞이지 않은 이들은 설령 뱀파이어라고 한들.

이 결투에 참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럼 나는?'

...내 몸의 반은 아리엘라에게서 비롯된 것.

비록 권속은 아니라고 할지언정.

나 역시 아리엘라의 '피' 중 하나로 인정받은 모양이었다.

"구, 군단장님! 제길... 이거, 힘을 쓸 수가!"

"괜찮으니까, 일단은 거기서 대기해라!"

저 피는 부대원들의 육체 능력은 물론.

정수아의 정령술과 같은 능력마저 제한하는 듯했다.

피가 섞이지 않은 이들은 저기서 이 결투를 구경이나 하라는 뜻이겠지.

"허어... 나 역시 피의 결투는 처음이라, 이런 식일 줄은 몰랐구려."

그리고 이건....

굳이 따지자면.

우리에게 좀 더 불리한 조건이었다.

"먼저 이 땅에 도착한 그대로서는 구울들을 동원하지 못하는 게 아쉽겠소. 아리엘라 경."

"...."

"하지만 어쩌겠소. 그들의 혈주는 따로 있는 것을."

피의 결투라는 것이 이런 형태로 이루어질 줄은 몰랐다.

구울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부대원들 정도는 전력으로 동원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 전력을 모두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

"이 대결은 각자의 피를 두고 가리는 싸움...."

그리고.

라시르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양손을 펼치며 말했다.

"누가 더 강한 군세를 이루었나를 증명하는 장인 것이오!"

그 당당한 태도에 걸맞게.

그 뒤로는 엄청난 숫자의 기사들이 도열해 있었다.

...아리엘라의 전성기 시절의 병력과 비교해도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숫자.

'...저만한 숫자의 기사를 어떻게 유지하는 거지?'

[기사]들은 장기간 양질의 피를 섭취하지 못하면 능력치가 하락한다.

내가 괜히 초창기에 아리엘라의 병력을 제한한 것이 아니다.

일정 이상의 기사가 생기는 순간, 몬스터 사냥만으로는 그들을 위한 피를 수급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지.

저 정도의 기사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은.

저 라시르라는 자가 그만큼의 피를 수급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뜻이다.

어쩌면 생각 이상으로 유능한 귀족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하지만.

"할 말은 끝나셨는지?"

"...뭐라?"

"시조께서 임하셨는데도 계속 말을 꺼내시기에, 중요한 얘기라도 하려나 싶었는데... 그런 건 아니었던 모양이로군요."

그 엄청난 숫자의 병력을 눈앞에 두고.

아리엘라는 어깨를 으쓱이더니.

"그럼 이제... 결투를 시작하죠."

그 손으로 가볍게 박수를 쳤다.

그리고.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도망치는 선택지도 있었지만... 도망치지 않은 이유는 두 가지.'

하나는.

도망치지 않는 게 낫다....

저자와 싸우는 게 오히려 이득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점.

"자, 아이들아."

그리고 또 하나는....

"간만에 풍족한 만찬을 준비했으니... 실컷 즐기도록 하거라."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애초에.

도망칠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이게 무슨...!"

도시의 그림자 속에 숨어 있던 거대한 마수들이.

수없이 많은 기사들의 사이로 그 몸을 내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