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novel

38

***

하워드의 지구 유학과 기술 개발이 이어지는 동안 아우테리카의 시간도 빠르게 흘러갔다.

대륙의 모든 이들에게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는 초대형 사건— 교황의 장례식도 무사히 끝마쳤고, 그 뒤를 이은 비공식 3차 대륙 정상 회의도 순조롭게 마무리되었다.

"회담이라 해봐야 뻔한 이야기들밖에 없었지만."

푹신한 의자에 몸을 파묻은 하인즈 2세가 지그시 눈을 감으며 상념에 잠겼다.

물론 그는 그 자리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저 탈리아 왕국의 대리인으로서 브라이트 공작을 파견했을 뿐.

아무리 최근 원만한 관계를 맺고 있다 하나, 뱀파이어의 왕인 그가 교황의 장례식에 몸소 나서는 건 모양새가 이상하지 않은가?

'한창 이리저리 바쁜 와중이기도 했고.'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우테리카와 지구를 동시에 신경 써야 했던 그였다.

요즘에야 이런저런 이유로 하인즈까지 지구로 갈 여력이 없어 자연스럽게 팬텀 활동이 휴업 상태가 되었다지만···.

'아니, 사실 따지고 보면 지금도 한가한 건 아니지.'

아무리 유능한 선원들에게 대부분의 일거리를 떠맡긴다 해도 선장이 되어서 손을 놓고만 있을 순 없는 법이었다.

최근 오바이포까지 흡수하며 흡혈왕의 자리에 오른 이래, 국가뿐만이 아니라 종족의 운명 자체가 그에게 달린 셈이 되었으니 직접 확인할 필요가 있는 업무량이야 오죽할까?

아마 흡혈왕 업적을 달성하는 동시에 얻은 관리 계통 특전, 「군주의 권세」가 없었으면 아예 딴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을 것이다.

그 특전 덕분에 대부분의 일들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고.

'다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다면···.'

물론 모든 일들이 그의 의도대로 흘러가지는 않았다.

생각 이상으로 오래 걸리고 있는 실종자 수색, 부통령 케일라 맥클레어의 아들에 관한 일이 바로 그것이었는데.

오바이포의 뱀파이어들을 전수 조사하며 금방 끝날 줄 알았던 일이 예상했던 것보다 더 지체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에 합당한 이유는 있었다.

'설마 그 일에 혁명가 놈이 직접 개입했었을 줄이야.'

끈질긴 추적 끝에 도달한 존재.

하필 이제는 죽고 없는 역천의 서약의 리더, 혁명가가 그 마지막에 있었다.

'···하여간 도움이 안 되는 놈이군.'

당연하지만 아무리 대륙의 정보 조직들을 한 손에 넣고 주무르는 그라도 이런 상황에서까지 추적을 이어갈 수는 없었다.

놈은 그 한스조차 행적을 쫓는 데 애먹었던 상대인데, 무려 20여 년 전의 움직임을 쫓는다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찝찝하긴 해도 결국 어떤 의식의 제물로 희생되었을 거라고 추측하고 넘어가는 수밖에.

'그래도 일단 계속 추적해 보긴 하겠다만. 내가 직접 원수를 갚아 주기도 했으니 케일라에게 할 말은 있겠군.'

툴크 왕국에 나타나 타라크를 습격한 거인이 바로 혁명가 본인이었다.

어쩌다 보니 그가 복수까지 대행하게 된 셈.

이만하면 대충 체면치레는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다음은."

그렇게 중얼거리던 하인즈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가 처음 세웠던 목표인 뱀파이어 일통과 양지화는 이미 모두 완수했다고 봐도 좋았다.

아마 특별한 일이 없다면 이대로 내버려 둬도 알아서 굴러가겠지.

그렇다면, 이제 하인즈 2세는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가?

앞으로 뭘 목표로 삼아야 할까?

'···이제 슬슬 때가 된 건가.'

그가 아우테리카에서 해야 할 일들은 얼추 끝났다.

그렇다면 다음은 뻔하지 않나!

"지구."

생각해 보면 지금이야말로 최적의 타이밍이기도 했다.

번천회는 무려 동아시아 전체를 총괄하는 지부가 날아간 상황이었다.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진 놈들은 지금쯤 그곳을 향해 잔뜩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을 터.

'경계 대상인 한스가 한국을 벗어나 제 안방이나 다름없는 중국까지 발을 뻗었다. 놈들도 이대로 가만히 있지는 않을 거야.'

거기다 의도치 않은 일이었지만, 하회탈의 재등장 이전까지 한창 화제가 되었던 성기사 하인리히도 놈들의 관심사 중 하나였다.

율령자의 기억 파편을 통해 북아메리카의 지부장인 서기관이라는 놈과 공조하려는 정황을 파악하지 않았던가.

'기억 손실이 크지 않았다면 더 확실하게 알 수 있을 텐데.'

아쉽긴 했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일단 서기관이란 놈이 판테온의 요직에 있다는 걸 미리 안 걸로 만족해야겠지.

어쨌든 한 가지 확실한 건, 놈들의 시선이 한스와 하인리히를 쫓아 동아시아로 쏠리면 다른 쪽은 평소보단 조금이라도 허술해질 거라는 사실이었다.

놈들의 규모를 생각했을 때 그게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왕 갈 거 챙길 수 있는 이득은 되는대로 챙기는 게 좋은 법.

'그래야 어떤 함정이 있더라도 확실히 깨부술 수 있을 테니.'

조용히 앉아있던 하인즈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앞을 가로막은 한계를 뛰어넘어 한 단계 성장할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런데 조금 위험하다 싶을 때마다 계속 도망만 다닐 수는 없지 않나!

마지막으로 생각을 정리한 하인즈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입술을 핥으며 스스로에게 선언하듯 나직이 속삭였다.

"그럼 가 볼까. 유럽으로."

지구에서 뱀파이어의 세력이 가장 강성한 땅.

세계 미식의 중심지로.

#282

유럽 진출 (1)

후우우웅—

시끄러운 엔진 소리가 묵직하게 울려 퍼지고 사방에선 웅성거리며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의 소리가 가득했다.

마치 이곳만 다른 세상이라도 되는 것처럼, 테러가 만연한 현대 사회에서는 그리 쉽게 볼 수 없는 풍경이었다.

'그만큼 방비가 철저하다는 뜻이기도 하지.'

그 공간의 한 편.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것을 보며 가만히 팔짱을 끼고 있던 하인즈 2세가 슬쩍 주변을 살피곤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은 국가 최중요 전략시설 중 하나.

인천 국제공항이었으니까.

'···그래. 원래 외국으로 나가는 덴 비행기를 타는 게 최선이었지.'

그간 워낙 편하게 이곳저곳을 넘나들다 보니 잊고 있었지만, 지구에서 장거리 이동을 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았다.

「영웅의 발자취」를 사용하기 위해선 일단 그곳을 한 번이라도 방문해야 했으며, 한스의 공간 이동 서비스를 이용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으니.

'일본이나 중국처럼 거리가 가깝다면 모를까, 좌표 따자고 거기까지 직접 날아가기도 그렇고.'

아무리 한스의 이동 속도가 비행기 못지않다 하나, 지구 반대편에 가까운 곳까지 그런 식으로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그냥 몰래 비행기에 잠입하고 말지.

-안내 말씀 드리겠습니다. 파리로 가는, 아리아나 항공 OG501편이 잠시 후 출발하오니 탑승하지 않으신 승객께서는···.

그때 마침 기다리던 안내 방송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태연하게 벽에 기댄 채 주변을 구경하던 하인즈는 사전에 결심한 바를 그대로 이행했다.

진짜로 공항의 철통같은 보안을 뚫고 침투를 시도한 것이다.

'아무리 위조 신분이 있다지만 검문 과정이 생각 이상으로 까다롭다. 괜히 쓸데없는 흔적을 남기느니 그냥 이렇게 하는 게 더 편해.'

공항 곳곳에는 수많은 각성자들과 마도구, 결계 등이 배치되어 있었으나, 그 모두를 압도하는 격을 지닌 그가 전력을 다해 구사한 「존재부정」을 잡아낼 수는 없었다.

아무리 요충지라지만 국내에도 몇 없는 초월급 강자가 이런 곳에 종일 죽치고 있을 리도 없었고.

'이참에 다른 지역에도 미리 방문해 둘 필요가 있겠어. 언제든 「영웅의 발자취」로 이동할 수 있도록.'

그렇게 공항 인근에서부터 기척을 감추고 잠입했던 그는 결국 프랑스행 비행기에 유령처럼 숨어드는 데 성공했으며—.

-손님 여러분, 곧 이륙하겠습니다. 좌석 벨트를 매셨는지 다시 한번 확인해 주시기···.

이후 별다른 이상 없이 유럽으로 향하는 장거리 비행을 시작할 수 있었다.

'생전 처음 타 보는 비행기가 밀항이라니.'

그 점이 조금 아쉽긴 했으나 기회야 나중에라도 얼마든지 있지 않겠는가.

하인즈는 기내를 순찰하는 각성자의 옆을 스쳐 지나가며 빈자리에 다리를 꼬고 앉아 느긋하게 눈을 감았다.

도착까지 앞으로 약 13시간.

한 세계를 지배한 흡혈왕의 유럽 상륙까지 남은 카운트다운이었다.

***

선선한 바람과 천천히 흘러가는 구름.

어디론가 여행 가기에 딱 좋은 이 날씨에···.

"슬픈 예감은 항상 빗나가질 않아."

이능관리국 범죄수사과의 신입 요원, 강태산이 하늘을 보며 넋두리하듯 중얼거렸다.

얼마 전에 친구와 함께 대화하며 나왔던 우려가 현실로 다가왔으니.

"뭘 또 혼자 궁시렁거리냐?"

"아, 선배님! 이거 너무한 거 아닙니까? 왜 또 저희가··· 아니, 그보다 백기사는 범죄자도 아니지 않습니까?"

바로 그가 속한 팀이 하회탈에 이은 또 다른 추적 임무에 동원되었던 것이다.

'백기사'는 병원 테러 사건에서 활약했던 성기사에게 이능관리국이 임의로 붙인 코드 네임이었다.

애초에 한국에서 활동하는 성기사가 한둘도 아닌데, 그런 일반명사를 특정인을 지칭하는 데 사용하는 건 부적절했으니 당연한 일.

그래서 지어진 호칭이 그의 상징과도 같은 순백의 갑옷에서 따온 백기사였다.

"어쩔 수 없잖냐. 어쨌든 그가 귀환자 등록을 안 한 건 사실이니까."

일단 법 자체가 그랬으니 명분은 충분했다.

물론 그는 위험한 테러를 막고 민간인들을 보호한 영웅이었으니 정말 범죄자 취급을 하는 건 아니었다.

그 과정에서 테러범이 사망하는 일이 일어나긴 했어도, 그 상황은 충분히 정상참작이 가능한 수준이었으니까.

다만 그렇다고 손을 놓고만 있을 수도 없는 것이···.

"생각해 봐라. 명색이 국가 기관인데 그만한 유명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게 말이 되나. 사실 하회탈 때문에 지금도 체면이 말이 아니야."

엄밀히 따지자면 지금까지 자발적으로 신고하지 않은 이들의 수 자체는 결코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최대한 자신을 숨기고 대중에 나서지 않는 이들.

이번에 대대적으로 매스컴을 탄 데다 세계적인 관심까지 끌어모은 백기사와는 경우가 다른 것이다.

"···끄응, 그거야 그렇죠."

그에 강태산은 수긍하며 뒷머리를 벅벅 긁을 수밖에 없었다.

여전히 진짜 범죄자들을 쫓는 게 아닌 엉뚱한 일만 하는 것이 불만이긴 했지만, 일개 직장인··· 그중에서도 말단 공무원이 무슨 힘이 있겠는가?

그저 위에서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수밖에.

"하지만 그래도 판테온의 편의를 이렇게까지 봐주는 건 좀···. 저희가 무슨 가이드도 아니고."

물론 그렇다고 지금 상황을 완전히 납득한 것도 아니었다.

이쪽이 수사에 협조를 구한 거라면 모를까, 지금 보이는 모양새는 그 정도 수준이 아니었던 것이다.

강태산은 시선을 돌려 통제선 안쪽의 병원 곳곳을 배회하는 외국인 무리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판테온 한국 지부의 성직자들이 아닌, 미국의 총본부에서 파견된 이들이었다.

그의 시선을 따라 그쪽을 흘깃 쳐다본 선배가 가볍게 숨을 내쉬곤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건 나도 좀 고깝긴 한데, 어쩌겠냐. 쟤네랑 틀어지면 피곤해. 이쪽도 도움을 제법 많이 받고 있기도 하고."

판테온은 그 특성상 결집력이 굉장히 약하지만, 그래도 성직자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집단이라는 사실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의 권익을 위해 국가 기관들과도 상당히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고, 위험한 일에 자주 엮이는 이능관리국 요원들 중에도 그 덕분에 목숨을 부지한 사례가 적지 않았다.

'물론 그 복지 혜택이 가족들에게까지 돌아가는 건 아니지만.'

그 때문에 강태산의 할머니도 병원에 입원할 수밖에 없지 않았나.

거기까지 기대하기엔 수요에 비해 공급이 너무 적었다.

그런 성직자들의 위상을 생각해 보면 지금 이 정도 일쯤이야 별로 대단한 것도 아니리라.

"&$#%&@!"

"@$^#@#."

그때, 현장을 살펴보던 외국인들이 옆에 있던 한국인 성직자들과 뭐라 대화를 나눴다.

그리곤 저마다 고개를 끄덕이더니 일제히 이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어, 끝났나 본데요?"

그리 생각한 강태산은 선배와 함께 자세를 바로 했으나, 그들의 조사는 아직 전부 끝난 게 아니었다.

"어, 네?"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한 그가 저도 모르게 되묻자, 한국인 성직자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재차 입을 열었다.

"그때 그 자리에 계셨다고 들었습니다."

"아··· 예. 하지만 전 첫 번째 공격에 곧바로 기절해 버려서 아는 게 없습니다. 그냥 폭발에 휘말려서 날아가다 정신을 잃은 게 전부라서요."

이미 휴가에서 복귀하고 나서 질리도록 했던 말이다.

그는 어색하게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그 순간 병원에 계셨던 이유가 할머님의 퇴원 때문이라고 하던데."

"예, 운이 나빴지요. 하필 딱 정문에 섰을 때 사고가 터지는 바람에."

그 말에 성직자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어느 정도 정보를 공유받았기에 그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으니.

중요한 것은 그 다음이었다.

"진료 차트에 적혀 있기론, 할머님께서 어느 순간부터 급격히 회복되셨다고 들었습니다만."

"···그렇습니다. 나이가 있으셔서인지 완치는 아니었지만요."

그는 자신과 함께한 성직자들을 쭉 둘러보더니 다시 시선을 강태산에게 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분을 저희가 한 번 뵐 수 있겠습니까?"

***

역시 지금 생각해 보면 'VIP 마켓'의 『무작위 기타 스킬 습득 (500,000)』에서 「제노글로시」를 얻은 것은 행운이었던 것 같았다.

탑승했을 때처럼 은밀하게 비행기에서 빠져나온 하인즈 2세는 파리 샤를 드골 국제공항을 둘러보며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짐 제대로 부친 거 맞습니까? 왜 이렇게···."

"일단 숙소로 모시겠습니다. 이쪽으로···."

"오! 아녜스, 무사히 다녀왔구나! 어서 집으로···."

사방에서 들려오는 이국적인 언어들을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었고, 곳곳에 자리한 표지판의 글자들도 어렵지 않게 순식간에 읽어 내렸다.

중국에서도 한번 느끼긴 했으나, 이렇게 먼 타지에 나와 보니 그 성능을 좀 더 절실하게 체감할 수 있었다.

'처음 일본에 갔을 때처럼 번거로운 과정을 되풀이할 필요가 없어서 좋군.'

하인즈는 인천 국제공항과 마찬가지로 곳곳에 배치된 보안 장치들을 이리저리 회피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단순히 프랑스에만 있다 돌아갈 생각은 없는 만큼 유럽 각지의 언어를 곧바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훌륭한 장점이었다.

직접 행동하던 정보를 수집하던 언어야말로 가장 큰 장벽이었으니.

'음?'

그런 생각을 하던 도중, 공항 한가운데의 벤치에 앉아 폰으로 게임을 하던 금발 여성 하나가 슬쩍 그가 있는 방향을 흘기는 게 포착되었다.

그녀는 가볍게 미간을 찌푸리며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갸웃하더니, 이내 다시 아래로 시선을 내려 다시 스마트폰을 두들겼다.

'제법이군.'

하지만 하인즈는 알 수 있었다.

그저 게임에 정신을 팔린 것처럼 보이는 그녀가 아직도 한껏 신경을 곤두세운 채 그가 있는 방향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그는 잠시 풀어졌던 마음을 다잡고 전력으로 「존재부정」을 사용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당연하지만, 감시자는 그의 움직임을 전혀 감지하지 못했다.

'경지는 극의에서도 중위권 정도로 보이는데. 감지 계통 특화인가?'

흡혈귀로 치자면 대충 7레벨의 끄트머리 수준이었다.

그러나 9레벨이라고 할 수 있는 자신의 은신에 미약하나마 위화감을 느꼈다는 것만으로도 그녀의 감지력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 익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만한 인재가 이런 곳에서 공항 경비나 서고 있다니.

'그만큼 이곳의 수준이 높다는 건가, 아니면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는 건가.'

어느 쪽이든 흥미로운 사실이었다.

아무도 자신을 인지하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유령과 같은 발걸음으로 공항을 나선 하인즈는 이내 자신의 품 안에 손을 넣어 새하얀 가면 하나를 꺼내 들었다.

특별한 무늬 없이 이마부터 코까지 뒤덮는 새하얀 오페라 가면.

'그러고 보니 오페라의 유령 원작이 프랑스 작품이었던가.'

어쩐지 유쾌한 기분이 들었다.

잠시 그것을 바라보던 그가 그것을 천천히 얼굴에 가져갔다.

지금까지 줄곧 써 왔던 가면인데, 색다른 장소에서 쓰고 있자니 뭔가 고양감이 느껴졌다.

자신이 진짜 팬텀이 된 것 같은 기분이랄까.

'그럼 나의 크리스틴은 어디에 있으려나.'

가면을 쓴 채 깊게 숨을 들이쉰 그의 시선이 한쪽 방향으로 향했다.

유럽 땅과 가까워진 몇 시간 전부터 계속해서 거칠게 요동치던 「혈통의 갈망」이 이끄는 대로.

그 직후.

그 자리에서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물론 그것조차 누구도 인식하지 못했지만.

이어서 그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곳은 공항으로부터 십여 킬로미터는 떨어진 어느 도심지의 골목길이었다.

이젠 「존재부정」을 사용하지 않고 온전히 모습을 드러낸 그가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당당하게 걸음을 옮겼다.

뚜벅뚜벅—

얼굴에 쓴 하얀 가면과 대비되는 검은 중절모와 고급 양복, 광이 나는 구두.

어딜 보나 세련된 신사 그 자체인 하인즈가 골목 끄트머리에서 인상을 찌푸린 채 그를 경계하는 청년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평소와 같은 냉정한 목소리로 한마디를 건넸다.

"그대가 나의 크리스틴인가?"

"···뭐야, 이 미친놈은?"

의도치 않은 실언에 이어 상대의 어이없다는 표정과 마주한 하인즈는 그제서야 자신이 단순히 들뜬 정도가 아니었다는 걸 자각할 수 있었다.

'이런, 「마인드 허브」로 계속 걸러내다 보니 알아채는 게 늦었네.'

원래의 냉소적이고 침착한 하인즈 2세였다면 이런 실수를 할 리가 없을 텐데.

아무래도 생각했던 것보다 「혈통의 갈망」이 개체에 미치는 영향이 더 큰 모양이었다.

"실례했군. 팬텀이다. 아니면 에릭이라고 불러도 좋고."

"···이게 뒤지려고 헛소리를···!"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화를 터뜨리려던 파리의 흡혈귀 청년은.

"미안하지만."

갑자기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딱딱하게 몸을 굳혔다.

방금까지 사람이 있었던 그의 앞에는 텅 빈 공간 뿐.

상대가 언제 자신의 뒤로 돌아갔는지 인지할 수조차 없었다.

'갑자기 무슨···!'

그가 속으로 욕지기를 내뱉고 있을 때, 차가운 손이 그의 뒷목을 움켜쥐었다.

날카로운 손톱이 살과 근육을 파고들며 숨통을 조여들었다.

"대화는 나중에 하지."

좀 더 고분고분해지고 나서.

#283

유럽 진출 (2)

슬슬 날이 저물어 갈 무렵의 파리 외곽 지역.

오늘도 평소와 같이 충실한 하루를 보내기 위해 밖으로 나온 건실한 흡혈귀 청년, 바스티앙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과 맞닥뜨려 버렸다.

클랜의 영역권을 순찰하는 업무를 위해 이동하던 도중 갑자기 나타난 웬 가면 쓴 괴한에게 불시에 습격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프랑스 최대 규모의 흡혈귀 조직, 파리를 비롯한 주요 도시의 밤을 지배하는 '테르미도르'의 일원인 그가!

'미친 거지! 겁도 없이 감히 이 땅에서 이런 짓을 해? 그것도 밤에?'

프랑스의 수도 파리는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대도시이면서 그만큼 많은 이권이 쏠려있는 금싸라기 땅이었기에, 당연히 조직도 이곳에 많은 신경을 쏟고 있었다.

다른 지역에서는 그래도 중간 간부 정도는 맡을 수 있는 5레벨 흡혈귀 바스티앙이 말단들이나 할 법한 순찰 임무에 직접 투입될 만큼.

'진짜 미친놈이었군. 제법 실력에 자신이 있나 본데, 설령 내가 죽더라도 너는 결코 무사하지 못할 거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눈 하나 깜짝 수 없게 굳어버린 육체.

서서히 목을 죄어오는 차가운 손아귀에 자신의 최후를 직감한 그가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 최후의 저주를 읊조린 순간—.

그는 자신이 뭔가를 단단히 착각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목을 파고든 손끝에서 무언가가 노도와 같이 밀려들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챈 바스티앙이 경악을 표출하기도 전, 거대한 존재감이 그의 사고를 뒤흔들었으며.

일부러 감춘 듯한 어떤 실체가 그의 뇌리에 강제로 때려 박혔다.

'이건···!'

숨이 턱 막힌다.

그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경외감.

높고 아득하다.

넓고 광활하다.

크고 경이롭다.

깊고 섬뜩하다.

그의 몸이 굳은 건 상대가 따로 무슨 수작을 부렸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까마득한 격의 차이를 마주한 본능이 저도 모르게 공포에 질렸던 것일 뿐.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사지가 덜덜 떨리고 있었다.

'최소 7···? 8레벨? 아니, 내가 가늠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야.'

바스티앙이 마주한 적이 있던 가장 강한 흡혈귀, 테르미도르의 고위 간부가 7레벨이었다.

동지들과 함께 사열하고 있던 그때의 그는 극도의 긴장감에 한참을 얼어 있다가 거리가 좀 멀어지고 나서야 겨우 숨을 돌릴 수 있었는데···.

'어쩌면 그 이상··· 로드급일지도.'

지금에 비하면 그때는 휴양하던 것과 다름없었다.

애당초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하지만 그는 더 이상 잡생각을 이어갈 수 없었다.

우드득— 뚜둑!

체내에 들어온 혈액의 영향을 받아 아까부터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모든 근간이 갈아엎어지고 있었으니까.

'이런 게··· 이런 게 가능하다니···!'

그것은 마치 혁명과도 같은 진화였다.

그 잠깐 사이에 육체가 단번에 한계를 넘어서며 시계가 확장했다.

바스티앙은 조금 전의 자신 정도는 수십이라도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은 전능감에 휩싸이며 조용히 전율했다.

물론 그렇게까지 느껴진 건 한창 호르몬이 과다 분비되며 생긴 부작용일 뿐이었지만, 이미 머리끝까지 한껏 뽕이 차오른 그는 그런 사소한 문제 같은 건 신경도 쓰지 않았다.

머릿속을 가득 채우며 휘몰아치는 경외와 소속감, 충성심에 넙죽 엎드린 바스티앙이 고개를 땅에 박으며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복종의 말을 외쳤다.

"무엇이든 명령만 내려주십시오! 저 바스티앙 뒤보스크, 팬텀 님께서 크리스틴을 찾으실 수 있도록 전력을 다하겠습니다!"

"······."

이미 위압적인 존재감에 경도된 그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것 같았지만.

하인즈의 떨떠름한 눈길이 그의 뒤통수에 꽂혔다.

***

'이걸 이렇게 멕이네.'

하인즈는 못마땅한 시선으로 자신의 앞에 엎드린 흡혈귀 청년, 바스티앙을 내려다보았다.

말실수 한 번 한 거 가지고 그걸 또 우려먹다니.

하지만 이후 그가 보인 전폭적 협조는 나쁘지 않았다.

이상할 정도로 자신을 경배하던 그는 하인즈의 질문에 정말 열성적으로 답하며 자기가 아는 바를 모조리 고해바쳤던 것이다.

마치 신을 숭상하는 광신도처럼.

확실히 척 보기에도 정상적인 반응은 아니었다.

'역시 여기에도 「미혹」이 작용한 건가. 이게 이렇게 효과가 좋을 줄은 몰랐는데.'

아무리 「정제혈정」으로 종속하였다 해도 거기엔 저렇게까지 대상자를 홀리는 힘은 없었거늘.

아마 서로 간에 있는 격의 차이도 거기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어쨌든 일이 편해졌으니 이쪽으로선 좋은 일이었다.

'시간을 아낄 수 있었으니 마침 잘 됐지.'

그가 이 유럽의 프랑스에 대해 가지고 있던 정보는 딱 인터넷에서 얻을 수 있는 정도가 전부였다.

쾌적한 활동과 빠른 일 처리를 위해선 현지인의 협력이 필수 불가결.

어차피 5레벨 수준을 종속시키는 걸론 「정제혈정」의 소모도 크지 않으니 딱 적절한 상대였다.

'이 정도 상대는 잡아먹어봤자 간에 기별조차 안 가기도 하고.'

이미 성혈로서 초월에 이른 하인즈 2세가 자신만의 혈통을 완성하고 틀을 부수기 위해선 최소한 진혈급 격을 지닌 흡혈귀의 혈액이 필요했다.

그나마도 최소치일 뿐, 제대로 된 탈피를 위해선 성혈급이 다수는 있어야 할 터.

'지금 프랑스에 있는 성혈급··· 9레벨은 하나.'

하인즈의 시선이 「혈통의 갈망」이 이끄는 방향으로 향했다.

하지만 상대의 격이 격인만큼 어렴풋하게 느껴질 뿐, 이전까지와는 달리 그 위치를 확실하게 파악할 수 없었다.

그는 유럽에 도착한 직후 계속해서 꿈틀거리는 갈증의 충동을 대수롭지 않게 무시하며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했다.

'이 상황에서 무작정 들이박는 건 멍청한 짓이지.'

이곳은 적의 본거지이자 엄연한 타국이었다.

어떤 함정이 있을지도 모르고, 괜히 함부로 움직였다가는 일본에서처럼 정부 측이 개입할 수도 있다는 소리.

'살짝 판을 흔들 필요가 있겠군.'

그래서 그는 바스티앙의 협력하에 곧바로 작업에 착수했다.

수월한 사냥을 위한 약간의 사전 공작을.

***

웅성웅성—

"이거 향이 제법 괜찮군. 상당히 좋은 취향이야."

"그렇지? 구하긴 힘들어도 이것만큼 좋은 게 없지."

"나디아 님, 긴히 드리고 싶은 말씀이···."

파리 인근 베르사유 시에 위치한 테르미도르의 근거지 중 하나.

"아주 개판이군."

한창 광란의 파티가 벌어지고 있던 화려한 저택 내부에서 싸늘한 음성이 속삭이듯 흘러나왔다.

그건 파티의 소란에 묻힐 정도로 자그마한 소리였지만···.

"음?"

"···방금 누구냐."

이 공간에 있던 이들은 그런 이질적인 불협화음을 놓칠 만큼 녹록치 않았다.

풀어져 있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팽팽하게 당겨지고.

기세를 일으키며 빠르게 주변을 살핀 그들은 곧 자연스럽게 자신들의 틈에 섞여 있는 한 불청객을 발견할 수 있었다.

"네놈은 뭐냐!"

"어떻게 여기에? 아니, 언제?"

경계 어린 외침과 함께 그들에게서 뿜어져 나온 흉포한 기운이 주변을 뒤덮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도 소리를 낸 불청객, 오페라 가면을 쓴 하인즈 2세는 굳은 표정으로 천천히 주변을 둘러볼 뿐이었다.

천장에 매달린 커다란 샹들리에와 온갖 귀금속으로 꾸며진 식기, 그리고 한눈에 보기에도 범상치 않아 보이는 예술품들까지.

그 틈바구니에 낀 채 오들오들 떨고 있는 소년소녀들의 모습이 어색하게 느껴질 정도로 화려한 모습이었다.

참가자들이 쥔 은잔에 담긴 피는 물론, 일부러 꾸민 것처럼 사방에 낭자한 혈액과의 부조화는 두말할 것도 없겠지.

'···쯧. 좀 더 빨리 왔다면 좋았을걸.'

가볍게 혀를 찬 하인즈가 희생자들의 신선한 피로 파티를 벌이던 흡혈귀들을 다시 둘러보았다.

어느새 파티장 전체를 둘러싼 그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대응 준비를 모두 마치고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엇, 통신이 안 됩니다!"

"뭣? 대체 언제부터···?"

외부로 이 사태를 전파하는 것만 빼고.

애초에 조용히 처리할 수 있음에도 그가 이렇게 기척을 낸 것도 아무 생각 없이 한 행동은 아니었다.

"시간이 없으니 최대한 빨리 끝내도록 하지."

이미 상황은 끝난 거나 다름없었으니까.

딱—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와 함께.

「피의 신비」가 발동했다.

전위 예술처럼 사방에 흩뿌려져 있던 것은 물론 잔에 담겨있던 피가 일제히 자욱한 운무가 되어 주변을 감싸기 시작했다.

"혈마법 결계다!"

"뭉쳐! 바로 대응 준비를···!"

이후에 이어진 것은 전투가 아니었다.

그저 일방적인 유린일 뿐.

희생자들의 피에 깃든 원한을 느끼며, 일대에 흐르는 인과를 바라보던 하인즈가 그 일부 자락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행하기로 마음을 먹자.

—그리 되었다.

퉁!

콰아앙—!

천장에서 끊어진 샹들리에가 떨어져 내리며 파편이 비산하고.

푸화악—!

촤악—

무언가가 찢기는 소리가 연달아 터져 나왔다.

"커흡!"

"끄르륵···."

공간을 뒤덮은 노을빛 운무 속에서 장미꽃잎처럼 흩날리는 흡혈귀들의 핏줄기.

그 인지를 초월한 공격은 방어도 회피도 불가능했다.

또한 거기에 깃든 아득한 격에 그들이 지닌 변변찮은 재생력 따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크윽!"

물론 모든 이들이 그 한 수에 정리된 건 아니었다.

이 테르미도르 베르사유 지부에서 가장 강한 이.

하인즈가 나타난 순간부터 침착하게 상황을 진두지휘하던 7레벨의 고위 간부, 나디아는 잘려 나간 왼팔의 단면을 붙잡고 곧바로 도주를 시도했다.

'뭐야, 대체?! 9레벨? 9레벨이라고?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격하의 상대는 대적조차 할 수 없는 불가해한 공격.

그녀는 순식간에 토막 나 널브러진 부하들을 뒤로하고 이를 악물었다.

'오페라 가면··· 대체 누구지? 아니, 어디서 온 놈이지? 이탈리아? 독일? 설마 루마니아는 아니겠지?'

9레벨의 흡혈귀는 세상에 그리 많지 않았다.

그 세가 가장 강하다는 유럽에서조차 한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였으니.

그리고 그녀가 알기로 그 중엔 저런 인상착의를 지닌 존재가 없었다.

'설마 다른 대륙에서 넘어온 건가? 아메리카? 아시아? ···그러고 보니 비슷한 얘길 들었던 것 같···.'

하지만 그녀의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뚜벅뚜벅—

바로 앞에서 피의 운무를 헤치고 등장한 하인즈 때문에.

"생각이 많아 보이는군."

그에 발을 멈춘 나디아가 입술을 짓씹었다.

원래라면 이 저택 부지를 벗어나는 데에 1초도 걸리지 않았을 텐데.

무슨 조화인지 그녀는 아직도 붉은 안개가 자욱하게 깔린 저택 내부에 있었다.

"···당신은 누구지? 대체 어디서 무슨 목적으로···!"

"예상했던 대로, 다른 녀석들은 영 부족했다만."

억지로 짜내듯 목소리를 높이는 그녀의 말을 차분한 한 마디가 끊었다.

"넌 제법 영양가가 있어 보이는구나."

말을 마침과 동시에 가면 아래에서 슬쩍 입술을 핥고 사라지는 붉은 혀.

금기를 암시하는 그 언행에 나디아의 동공이 팽창했다.

"···설마 당신···!"

"쉬잇—."

그래봐야 그녀가 뭘 할 수 있겠냐마는.

이윽고 한층 짙어진 핏빛 안개가 주변을 두껍게 감쌌다.

"새로운 흡혈인자를 수집합니다. 특수스킬「혼혈진화」의 영향으로···."

그리고 음소거라도 된 듯 부자연스러운 적막이 지난 후에, 그 자리엔 오직 한 사람만이 남게 되었다.

***

파티의 일부로서 저택에 끌려온 희생자 중 하인즈가 도착하는 순간까지 살아있던 이들은 십여 명 남짓에 불과했다.

하나같이 성인이 될까 말까 한 나이의 소년소녀들.

"우읍."

"으으···."

그간 시끄럽거나 저항하던 이들부터 제물이 되었기에, 그들은 학습된 대로 파티 도중 소동이 일어나는 와중에도 필사적으로 입을 틀어막고 공포에 떨고 있었다.

평범한 인간인 그들로선 주변을 자욱하게 감싼 핏빛 안개 때문에 도무지 상황을 파악할 수 없었으니.

이 혈무에는 희생자들을 보호하는 기능도 있었으나 그들은 그 사실을 알 수 없었다.

'제발, 제발.'

'엄마···.'

그래도 한 가지는 확실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적어도 자신들을 파티 음식으로 삼으려던 괴물들보단 뒤늦게 나타난 반가면 신사가 이기는 쪽이 백배 천배는 낫다는걸.

그렇게 긴장 속에서 기도만을 되풀이한 지 얼마나 되었을까.

주변을 감싸던 피 냄새 가득한 안개가 이내 서서히 옅어지기 시작했고.

마침내 보인 풍경은, 흡혈귀는 물론 피 한 방울 남지 않은 넓은 파티 홀이었다.

"어?"

"아무도··· 없어?"

자신들 외엔 어떤 인적도 없는 가운데 고요한 적막이 사위를 휘감았다.

몇몇이 승자로 추측되는 가면 신사를 찾아 이리저리 고개를 돌렸지만 그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왠지 모르게 바닥에 떨어져 박살 난 샹들리에가 유독 시선을 잡아끌 뿐.

잠시 눈치를 보며 머뭇거리던 그들은 곧 하나둘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하더니, 나중엔 달리듯이 활짝 열린 정문으로 일제히 뛰쳐나갔다.

'흠, 경찰도 근방에 있으니 이 정도면 됐겠지. 그럼 다음으로 가 볼까.'

그러한 가면 신사, 팬텀의 깜짝 방문은 단순히 베르사유 지부에 그치지 않았다.

생드니와 크레테유 등.

파리 주변 도시의 지부들을 순회하듯 습격한 것이다.

그것이 아무리 도시의 어둠 속에서 진행된 일이라 해도, 고작 하룻밤 만에 그만한 일이 연달아 일어났으니 언제까지 알려지지 않을 수도 없었다.

덕분에 빠져나올 수 있었던 생존자들이 계속해서 속출하기도 했으니까.

그리고 테르미도르 클랜과 관련된 이들은 그 사태를 통해 어떤 메시지를 읽을 수 있었다.

그것은 누군가에게 보내는 노골적인 도발이었다.

숨어 있지 말고 당장 튀어나오라는.

-나는 이곳에 있다.

아주 자신감이 넘치는 도발.

#284

유럽 진출 (3)

날이 밝았다.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프랑스의 중심 파리에서는 평소와 같은 분주한 하루가 시작되고 있었다.

학업과 노동, 가사 등을 위해 열심히 움직이는 시민들.

하지만 그런 일상적인 겉모습과는 달리, 밤새도록 깨어있던 도시의 이면은 결코 평화롭지 못했으니.

지난밤에 일어난 이변 때문에 잠들지 못한 이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해서 바쁘게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현 상황은?"

"약 세 시간 전에 있었던 낭테르를 마지막으로 더는 정보가 들어오지 않고 있습니다. 이로써 처음 보고되었던 베르사유를 포함해 총 다섯 곳의 테르미도르 지부가 괴멸한 것으로 파악됩니다."

"허어— 다섯이라? 고작 하룻밤 만에 다섯 곳의 지부가 무너졌다고?"

프랑스의 각성자 관련 문제를 총괄하는 이능안보총국.

부하의 보고에 수도 파리와 인근 지역을 담당하는 청장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테르미도르가 대체 어떤 곳이던가?

프랑스의 암흑가라 할 수 있는 밀리유(Milieu)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것과 다름없는 강대한 조직이 아니냔 말이다.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이 나라의 모든 범죄 조직에는 그들의 손길이 닿아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막강한 영향력에 공권력조차 함부로 손을 쓸 수 없어 골머리만 썩이던 위험한 집단.

그리고 일개 범죄 조직을 그 정도 위치까지 끌어올린 것이 바로···.

"폭군이 가만히 있지 않겠군."

테르미도르의 주인이자 밀리유의 지배자, 폭군(tyran)이었다.

"놈이 작정하고 날뛰기 시작하면 골치 아픈 정도로 끝나지 않을 거다. 설마 이쪽이 계획한 작전이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명색이 국가 기관씩이나 되어서 범죄 조직에 대응하기는커녕 걱정부터 하는 게 이상해 보일 수도 있지만, 생각을 조금만 달리해 보면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그건 생명체가 아니라 일종의 비대칭 전력이나 다름없으니까.'

같은 지구인이 맞나 의심이 갈 정도로 상상을 초월하는 힘을 지닌 극소수의 절대 강자들.

그나마 맞상대라도 할 수 있는 타입이라면 나을 텐데, 진짜 문제는 흡혈귀인 '폭군'과 같이 정면에서 상대하기 까다로운 존재였다.

'몸을 숨긴 놈이 작정하고 국가수반을 비롯한 고위층들만 암살하고 다니면 나라가 통째로 마비되어 버릴 수 있다.'

놈이 대놓고 싸움을 피하며 암습을 거듭한다면, 이쪽이 대등한 수준의 초월자를 섭외해 대응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다.

아마 그렇게 되면 설령 놈을 처치하는 데 성공하더라도 그 끝에 상상할 수조차 없는 어마어마한 피해가 발생할 터.

그것이 정부 측에서 테르미도르를 함부로 건들지 못하고 암묵적인 선을 넘은 경우에만 제재하는 이유였다.

당장 자기 목숨이 아까운 건 누구나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아마 빌런의 세력이 큰 대부분의 나라가 이와 비슷한 사정이리라.

"아직 특별한 움직임은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저쪽도 확실한 정황이 파악되기 전까지는 함부로 움직일 수 없을 테니까요."

"···그건 그나마 다행이군. 그자의 정체는 파악했나? 단신으로 그만한 일을 벌였다면 분명 그 내력이 범상치 않은 자일 텐데."

빌런으로부터 나라를 보호하는 게 존재의의인 입장에서 이런 걸로 안도한다는 데에 자괴감이 들었지만 당장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보다 지금 중요한 것은 이 일을 벌인 이의 정체였다.

일단 그가 누군지는 알아야 뭘 하든 방침을 정할 수 있지 않겠나.

"유창한 프랑스어, 180센티미터 이상의 장신, 귀족적이고 위압적인 분위기, 하얀색 오페라 반가면을 쓴 검은 머리와 붉은 눈의 미남자···."

간밤에 부지런히 움직이며 생존자와 목격자들의 증언을 확보한 덕분에 대상자의 인상착의는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물론 그런 단편적인 정보만으로 상대의 정체를 유추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혹시 몰라 대외안보총국(DGSE)에 협조를 구한 덕분에 가장 유력한 후보자를 특정할 수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그들은 생각 이상으로 수월하게 거의 확실시되는 대상 하나를 꼽을 수 있었다.

이미 국외의 동향을 파악하는 데 힘을 쏟고 있던 프랑스의 첩보 기관이 협조를 청하기 무섭게 답변을 보내왔던 것이다.

"통칭 팬텀."

"···팬텀? 그 가면도 그렇고. 역시 오페라의 유령인가?"

"예. 또한 추정하기로, 그는 이미 한국의 암흑가를 집어삼킨 뱀파이어 클랜의 수장입니다."

"허! 그자도 뱀파이어라? 그만한 거물이 여기까진 대체 어쩐 일이지?"

이윽고 회의실의 영사기를 통해 여러 장의 사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CCTV 영상을 캡처한 듯한 조악한 화질부터 시작해 전문가가 찍은 듯한 화보 같은 사진까지.

그중 마지막에 가장 크게 떠오른 것은 인터넷에서도 화제가 되었던 일명 '팬텀의 레전드 짤'이었다.

"···확실히 특출난 외모군. 가면으로 가려져 있는데도 한눈에 보일 정도로."

"목격자들과도 이미 대조를 마쳤습니다. 여러 가능성에 대비하기 위해 확정하지 않았을 뿐, 이미 내부적으로는 동일인이라고 판단을 끝마친 상황입니다."

"진짜로 한국의 뱀파이어란 말이지? 거참, 갑자기 지구 반대편의 나라 이름이 불쑥 튀어나오니 당황스럽군. 세력 확장을 위해 해외 진출을 노린다기엔 여긴 너무 멀 텐데."

사진을 들여다보던 청장이 거칠게 턱을 쓰다듬었다.

솔직히 그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해서는 교류와 관련된 업무를 처리하며 몇 번 접한 게 전부인지라 딱히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뇌제와 하회탈 말곤 그리 주의할 만한 인물이 없다고 했던 것 같은데 말이야.'

상황을 보아하니 이제 그것도 옛말이 된 듯했다.

그간 관할 지역에서 터지는 사고들을 수습하느라 해외 소식엔 다소 소홀했었는데, 앞으론 그쪽도 좀 더 신경 써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이능안보총국에서 방관을 기본 방침으로 변수에 기민하게 대응하기 위한 계획을 수립해 가고 있을 때.

그와 같은 시각.

"···한국의 뱀파이어라. 저놈이 바로 그놈인가?"

파리 시내의 다른 곳에서도 그 팬텀의 사진을 보며 묘한 감상을 내뱉는 이가 있었다.

바깥은 맑은 햇볕이 내리쬐는 화창한 아침이건만, 모든 창문이 두꺼운 암막 커튼으로 뒤덮여 오직 모니터 불빛만이 아른거리는 어두운 방 안에서—.

"들었던 대로 정말로 여기까지 찾아왔군. 대체 무슨 배짱일까?"

전신이 그림자에 파묻혀 온통 시커멓게 보이는 존재가 느긋하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잠깐 내보인 의문이었을 뿐, 그 이후에 한 대응은 미적지근했던 국가 기관과 전혀 달랐다.

'그 목적이 무엇이건,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순 없지.'

대체 놈이 무엇 때문에 여기까지 왔는지 정확히 알 순 없었으나, 이건 저쪽에서 대놓고 보내온 도발이었다.

그것도 누구나 알 수 있도록 공개적으로 벌인.

벌써 몇 개나 되는 지부가 날아가고 많은 간부들이 유명을 달리했는데, 이만큼 일방적인 선공을 당해 놓고 그 상대를 확실하게 짓밟지 않는다면 그간 쌓아온 테르미도르의 위신 전체가 흔들려 버릴 터.

일이 더 귀찮아지기 전에 얼른 원흉을 제거하고 다시 입지를 공고히 다질 필요가 있었다.

'제법 쓸 만한 놈인 것 같으니 저놈을 잡아다 휘하에 넣는 것도 썩 괜찮겠군. 그렇게만 한다면 이번에 입은 피해 정도야 가볍게 벌충할 수 있을 테고. ···그 루마니아 놈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 것도 짜증 나니까.'

그는 자신이 지배하는 영역에까지 은근슬쩍 간섭하려 들던 불쾌한 이웃을 떠올리며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 욕심 많은 놈은 동유럽 대다수의 음지를 잠식한 것에 그치지 않고 호시탐탐 영역 확장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 이번에 테르미도르가 무시 못 할 피해를 입어 버렸으니, 그것을 알게 된 저쪽에서 어떻게 나올지는 뻔한 일이었다.

'최대한 빨리 마무리하고 태세를 정비한다.'

그림자에 파묻혀 있던 사내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나른한 목소리로 조용히 속삭이듯이 읊조렸다.

["찾아라."]

기묘한 울림을 담은 단어가 울려 퍼지고.

꿈틀—

방 안에 가득 들어찬 그림자들이 그 말에 반응하듯 꿈틀거렸다.

["그리고 내게 고해라."]

놈이 어디에 있는지.

꿈틀꿈틀— 파아앗—!

그 나직한 한마디에 공간 전체를 채우고 일렁거리던 어둠들이 이내 산산이 흩어지며 사방의 그림자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창문 틈, 현관, 복도 등을 넘어 건물 외벽을 타고 도시 전역까지.

끝도 없이 퍼져나간 그것들은 파리 시내에 드리운 그림자들을 타고 넘나들더니, 마침내 위성도시에까지 뻗쳐 거미줄처럼 일대를 완전히 하나로 뒤덮어 버렸다.

내부를 샅샅이 훑는 섬세한 작업임에도 불구하고 그 유효 반경은 무려 20여 킬로미터.

자연현상인 그림자를 이용하기에 기척을 느끼는 것도 불가능에 가까운 권능과도 같은 능력.

그것이 바로 그.

테르미도르의 폭군이 가진 고유스킬 「그림자의 군주」였다.

그리고 벌어들인 대부분의 카르마를 고유스킬 강화에 투자한 그의 상징과도 같은 능력은.

"···찾았다."

그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

파리 남서부, 베르사유 인근의 산림 공원.

깊은 산지에 가만히 서 있던 하인즈 2세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왔나."

주변에 아무 인기척이 없는 상태에서 내뱉은 그 말은 그저 혼잣말처럼 보였지만—.

"호오, 뭔가 이상하다 싶었더니. 역시 기다리고 있었나?"

"뭐, 대충 이쯤이면 올 거라고 짐작했지."

"생각보다 감이 좋군."

그에 답하듯 아무런 기척도 없이 바닥에서 몸을 일으킨 인간 형상의 새카만 그림자가 태연하게 응수했다.

계속해서 한껏 곤두세우고 있던 감각과 「통찰」의 시너지 덕분에 간신히 그 기척을 파악할 수 있었던 하인즈가 새삼스러운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고유스킬만을 갈고닦아 경지에 오른 유형인가. 9레벨인 건 틀림없지만 흡혈인자의 양은 터무니없이 적다. 이런 경우도 있을 수 있었군.'

하인즈 2세가 서울에서 활동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처음으로 지구에서 만난 다른 세계의 흡혈귀, 혈맹 강경파의 감마에게 현대 흡혈귀의 수준을 구분하는 레벨 체계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었다.

원래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나 지구라는 특이점이 발생하며 한 장소에 모이게 된 여러 차원의 흡혈귀들.

그들은 '피'를 필요로 한다는 결정적인 공통점 때문에 같은 카테고리에 묶여있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같은 종족이라 부르기 힘들 정도로 큰 차이가 있었다.

같은 유인원이라 해도 침팬지와 오랑우탄이 서로 같지 않듯이.

'그래서 나온 방법이 그들 모두가 공유하는 공통된 특성, 흡혈인자를 측정해 세부적으로 나눈 레벨 체계라고 했지.'

아무 기준이 없던 상태에서 그것은 확실히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흡혈인자의 농도가 짙고 양이 많을수록 흡혈귀로서 낼 수 있는 힘이 커지는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건 대략적인 수준을 제시할 수 있을지언정, 강함을 나타내는 절대적인 척도가 될 순 없었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지.'

하인즈야 동족 포식을 적극적으로 활용함으로써 흡혈귀로서의 힘을 극한으로 끌어올린 유형이라 하나, 애초에 그들이 가질 수 있는 무력이란 것이 흡혈인자에 의존하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지 않은가?

각성자에게는 누구나 각자의 고유스킬이 있고, 그것이 아니더라도 다른 수단을 통해 경지에 오를 수도 있었다.

고작 잔혈급 뱀파이어가 각고의 노력 끝에 대마법사가 될 수도 있으며, 역으로 모종의 이유 때문에 소드 마스터가 말단 흡혈귀가 되어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하인즈는 그것을 눈앞에 있는 상대, 폭군을 대면하며 새삼 체감할 수 있었다.

놈이 가진 흡혈인자의 양은 진혈 수준에도 간당간당한 정도였지만, 그 질은 환골탈태라도 거친 듯 경지에 합당한 격을 뿜어내고 있다는 것을.

'하긴, 나처럼 비정상적인 방법을 동원하지 않으면 순수하게 뱀파이어로서 초월에 이르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겠지.'

그 일례가 바로 강제적으로 흡혈인자의 농도를 끌어올리다 미쳐버린 알파였다.

그리고 지금 하인즈가 느끼는 감상을 그림자 괴인도 느끼고 있는 모양이었다.

"뭐냐···? 넌?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혈마력이···."

정확히 반대되는 의미로.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한 거지? 흡혈인자를 그 정도 수준으로 정제하려면 고작 몇십 년으론 어림도 없을 텐데···!"

처음 마주한 직후에 몇 마디 나눈 후로 조용히 서로를 탐색하던 그가 결국 떨떠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역시 저만한 격을 지닌 상대에겐 이런 지근거리에서의 「존재부정」도 완벽하진 않은 모양이었다.

"긴말이 필요한가?"

그리고 마찬가지로 탐색과 동시에 타이밍을 재던 하인즈는.

놈이 당황한 틈을 타 곧바로 손을 휘두르며 이곳에 미리 준비해 두었던 결계를 즉시 발동시켰다.

우우우웅—!

그가 가진 「급가속」의 인과에 따라 중간 과정을 건너뛰고 순식간에 구축된 「피의 신비」의 결계.

그에 위협을 느낀 모양인지, 동시에 폭군의 몸에서 폭발적으로 그림자가 뿜어져 나왔다.

마치, 가시를 세운 고슴도치처럼.

"갈 길도 먼데 빨리 끝내도록 하지."

"허, 잔재주 조금 익혔다고 눈에 뵈는 게 없구나."

"글쎄···."

하인즈는 「혈통의 갈망」의 갈증이 뜨겁게 타오르는 것을 느끼며 한 손엔 기다란 피의 칼날을, 다른 손엔 휘몰아치는 붉은 폭풍을 거머쥐었다.

"과연 잔재주일까?"

참고로 동족 포식과 「혼혈진화」를 통해 피를 강탈당한 희생자들의 업을 발판 삼아 성장한 그는.

단순히 최대 에너지양만 큰 게 아니었다.

온갖 잡동사니가 난장판처럼 널브러진 한 연구실에서.

위이이잉— 카가각!

모터가 맹렬하게 돌아가는 소리에 이어 뭔가를 갉아내는 소리가 시끄럽게 울려 퍼졌다.

그에 이어 연달아 들려오는 부서지고 깨지는 요란한 소음들.

곳곳에 첨단기기들이 늘어서 있는 외견과는 썩 어울리지 않는 작업 소리였지만, 그것도 이곳에선 평소와 같은 일상의 풍경일 뿐이었다.

그렇게 평범한 일과가 흘러가던 도중.

삐빅—

그 소란 속에 평소와 다른 이질적인 소리가 끼어들었다.

-닥터, 닥터 계십니까?

그러나 실험실의 작업자는 그것을 듣지 못한 것인지, 계속해서 울려 퍼지던 시끄러운 소음은 그 이후로 몇 차례의 호출이 더 있고서야 서서히 멎기 시작했다.

-닥터?

그땐 이미 처음 불렀을 때 이후로 5분여가 지난 상태였지만, 그 목소리는 익숙하다는 듯 여전히 평온한 음색으로 말을 이었다.

"으응? 뭐야? 한창 잘 되고 있었는데."

그에 한창 분주하게 움직이던 실험실의 작업자, 닥터가 툴툴거리며 잡동사니가 가득한 공간을 가로질렀다.

아무 곳에나 걸려있던 수건을 집어 들어 양손에 묻은 붉은 액체를 대충 쓱쓱 문질러 닦으면서.

삑—

그리고 한쪽 구석에 놓인 책상까지 다가간 그는 그 위에 올려진 마도구를 가볍게 톡 건드려 통신을 연결했다.

"예~ 예~ 닥터입니다. 무슨 용건이십니까?"

-아, 닥터. 갑자기 연락드려서 죄송합니다.

"알았으면 됐습니다. 얼른 용건만 간단히 말해주시죠. 어쩌면 지금 막 안구라는 생체 기관의 용법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개척할 수 있을지도 모를 아이디어가 떠오를 것 같은 느낌이었으니!"

말을 빙빙 돌리고 있었으나 결국 당장 진전된 건 딱히 없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가 이런 말을 하는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던 만큼, 통신을 건 상대는 별다른 반응 없이 태연하게 소식을 전달했다.

-닥터께서 예의 주시하라 하셨던 사냥감이 유럽으로 들어왔다는 첩보를 입수했습니다.

그가 손꼽아 기다리고 있던 낭보를.

-한국의 팬텀, 하인즈가 프랑스 파리로 숨어들었습니다. 현재는 주변 위성도시들의 테르미도르 지부를 궤멸시키고 폭군과의 충돌이 임박한 상황입니다.

"호오?"

뚱해 있던 닥터의 눈이 그 말을 듣고 반달 모양으로 휘어졌다.

한창 애태우며 기다릴 땐 소식이 없더니, 이렇게 예상치 못한 순간에 갑자기 찾아올 줄이야.

그야말로 깜짝 선물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우호홋~ 드디어! 프랑스란 말이죠? 그건 조금 아쉽군요. 뭐, 그래도 나쁘지 않아요! 일단 유럽까지 온 이상 목표는 달성한 거나 다름없으니!"

동유럽 쪽에 도착했다면 더 좋았겠지만 그래봐야 시간문제일 뿐이니 큰 상관은 없었다.

이제 늦든 빠르든 미리 안배해 둔 이끌림을 따라 자연스럽게 동유럽, 그중에서도 루마니아까지 향하게 될 터.

거기까지 가면 상황 종료였다.

"공작에게 전하세요! 나중에 실수하지 않도록 차질 없이 준비하라고!"

-네, 그럼 공작 각하께 그대로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이후에도 관련된 내용으로 특이 사항이 발생하면 곧바로 보고하도록 하세요."

-알겠습니다, 닥터.

이윽고 가볍게 울리던 마도구에서 나오던 빛이 서서히 가라앉으며, 온갖 잡동사니가 굴러다니는 실내에 정적이 감돌았다.

"······."

통신이 끝난 직후부터 가볍게 턱수염을 쓰다듬던 닥터가 자신의 작업실을 천천히 둘러보며 생각에 잠겼다.

오랜 연구의 결정적인 실마리가 될 샘플이 손에 들어오기 직전이라 생각하니, 부푸는 기대로 설레는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이내 그는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리곤 결심했다는 듯 비장한 어투로 입을 열었다.

"역시 페퍼로니 피자로 할까."

오늘의 점심 메뉴를.

지금이 어떤 상황이건 식사는 중요한 문제였으니까.

***

사방이 붉게 물든 기이한 공간 속.

까드드득—

그 일각을 새카만 어둠이 잠식해 들어갔다.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연신 꿈틀거리며 일대를 먹어 치우는 흉포한 괴물의 그림자.

그것은 계속해서 몸집을 부풀리며 쉴 새 없이 영역을 넓혀 나갔고—.

"번거롭게 하는군."

촤아악—

곧 보이지 않는 수백 개의 손에 뜯겨나가듯, 사방에서 가해지는 힘에 갈기갈기 찢겨 버렸다.

하지만 지금까지 줄곧 그래왔던 것처럼, 상황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산산이 조각난 그림자 파편들이 제각기 뭉치기 시작하더니, 이내 한 무더기의 악마 무리가 되어 박쥐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올랐다.

아무리 부숴도 끊임없이 재생성 되어 밀려드는 그림자의 군세.

그것을 상대하는 하인즈 2세는 왜 상대의 이명이 폭군이었는지 여실히 체감할 수 있었다.

'거기다 단순히 소환 계통이라고 볼 수도 없어. 그야말로 만능···, 이거 까다로운데.'

가볍게 공중에 떠 있던 그가 슬쩍 시선을 아래로 내려 대지 곳곳에 자리 잡고 꿈틀거리는 어둠을 바라봤다.

저 폭군이 사용하는 그림자는 하수인 생성에서 그치지 않고 탐색, 은신, 이동, 공격, 방어 등 모든 면에서 활용 가능한 전천후 이능이었다.

거기다 숙련도도 상당히 뛰어난지, 상대는 그 모든 기능을 능수능란하게 다루며 끈질길 정도로 그에게 대적해 오고 있었다.

'흡혈인자가 강함의 척도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으면서도 내심 가볍게 여기고 있었나 보네. 반성해야겠어.'

그 때문인지 애초에 생각했던 것보다 싸움이 더 길어지고 있었다.

미리 수집했던 정보대로 일부러 놈의 주력인 그림자가 약해질 대낮에 결계 내부로 유인하기까지 했는데도.

하지만 그런 감상을 느낀 것은 하인즈만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초반에 있었던 몇 차례의 격돌 후에 힘의 차이를 절감하고 최대한 정면 승부를 피하고 있는 상대가 더했다.

'이거 어이가 없군···. 어디서 갑자기 저런 괴물이 튀어나온 거지? 한국이라고? 거긴 대체 어떤 나라기에···!'

프랑스의 음지를 지배하는 자이며 테르미도르의 주인— 9레벨 흡혈귀, 폭군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 명성에 걸맞지 않게 여전히 그림자 속에 모습을 감추고 쉴 새 없이 공간을 넘나들어 자리를 이동하면서.

사악—

그렇게 기회를 엿보던 그가 재차 한쪽 면의 결계로 쇄도했다.

파지직—

결계와 충돌한 약 1초 남짓.

앞으로 몇 초만 더 투자하면 확실히 뚫고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았으나···.

"젠장."

그는 작업을 채 끝내지 못하고 다시 그림자 속에 파묻혀 곧바로 자리를 벗어났다.

그리고 그 직후, 손상이 갔던 결계가 순식간에 수복되며 일대의 그림자들이 한순간에 찢겨 나가는 것을 보고 억지로 한숨을 삼켰다.

'대체 에너지가 얼마나 많은 거냐?'

정면 승부를 피하기 시작된 후에 그가 가장 먼저 시도한 것은 주변을 둘러싼 결계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은밀성과 빠른 발동을 위해서였는지 결계엔 주변을 가두는 것 외에 특별한 기능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계속해서 적이 준비한 전장에서 상대가 원하는 대로 따라줄 수는 없는 법 아니겠는가?

또 처음에 상대의 힘을 오판한 탓에 자신만만하게 나서긴 했으나, 그림자라는 특성을 가진 그의 장기는 엄연히 전면전이 아닌 게릴라전이었다.

그 장점을 살리기 위해서는 제한된 공간이 아닌 넓은 공간이 훨씬 유리했는데···.

'아니, 단순히 에너지 문제가 아니다. 그림자 군세를 상대하면서 이 내가 한 번에 뚫을 수 없는 수준의 봉쇄 결계를 유지하고, 거기다 탈출의 전조가 감지되자마자 반격과 결계 수복을 동시에 한다고?'

다시 생각해 봐도 어이가 없어서 저도 모르게 눈가가 씰룩거렸다.

아무리 사전에 어느 정도 준비를 했다 해도 그렇게 많은 시간이 주어진 것도 아닐 터인데.

역시 지금 상태로 저 괴물과 일대일은 도저히 무리였다.

쉬카칵—

"큭!"

거기다 어떻게 알았는지 틈이 날 때마다 귀신같이 그의 위치를 파악하고서 공격까지 가하고 있었으니, 모든 수단이 틀어막힌 그로서는 속이 터져나갈 지경이었다.

"···빠르군."

하지만 그렇게 일방적으로 우세를 점하고 있는 하인즈도 속이 편한 건 아니었다.

혀를 찬 그는 사방에서 뻗어오는 날카로운 그림자들을 걷어내고 다시 정신을 집중했다.

그러나 상대도 상당한 격을 이룬 만큼 작정하고 피하려 드니 인과의 흐름을 이용한 공격도 여의치 않았다.

'여기서 더 시간을 끌 순 없다.'

아무리 인적 없는 산림에 신경 써서 결계를 준비했다지만, 이곳은 수도 파리와도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그만큼 시간이 지날수록 주변에서 개입할 확률이 커질 테고, 그렇게 방해받게 된다면 운 좋게 가둘 수 있었던 상대를 놓쳐버리겠지.

일이 그렇게 된다면 아마 다신 이런 기회가 오지 않을 것이다.

'방심한 놈이 제 발로 기어들어 온 지금이 사실상 유일한 찬스라고 봐야 할 터.'

기껏 유럽 땅까지 와서 이렇게까지 시간을 투자했는데 첫 사냥부터 허탕을 칠 수는 없지 않나.

역시 속전속결로 끝내기 위해선 이쪽도 조금 무리할 필요가 있어 보였다.

'···잠깐이라면 괜찮겠지.'

성혈에 오르고 나서도 그에겐 많은 일들이 있었다.

아우테리카에선 오바이포와 더불어 다른 시작의 혈맥들이 남긴 정혈들을 손에 넣었고.

지구에서는 불완전하나마 9레벨에 도달했던 알파의 피를 흡수했다.

'그 뒤에 있었던 혁명가와의 싸움에선 힘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한 상태여서 전력을 낼 수 없었지.'

거기다 그땐 하인리히와 할리를 보조하는 데 집중하느라 그럴 필요도 없었다.

그런 상황이었으니 이번 기회에 실전 데이터를 얻는 것도 그리 나쁜 일은 아니었다.

다른 흡혈귀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정점에 오른 자신의 힘을 제대로 시험해 보기엔.

"하아—."

그리 마음먹은 하인즈가 깊은 심호흡을 내뱉었다.

그리고 체내의 기운을 감추는 「존재부정」을 유지한 채, 뱀파이어라는 종족을 구성하는 근간— 「피의 종주」를 일깨웠다.

두근!

「혼혈진화」로 한계까지 진화한 혈액이···, 「정제혈정」으로 극한으로 순수하게 정제된 혈액이 「피의 신비」를 담고 전신을 휘돌았다.

두근!

그는 「통찰」로 자신의 체내를 관조하며 「급가속」을 이용한 인과의 조절로 한순간에 변화를 앞당겼다.

뿌득— 뿌드득—

치이익—!

끊임없이 가속하며 온몸을 순환하는 혈액과 전신 모공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과 증기.

혈류량의 증가로 근육이 한껏 팽창하고 피부가 붉게 달아올랐다.

'장인은 연장을 탓하지 않는다지만···.'

더 좋은 작업 환경과 도구가 있을 때 훨씬 좋은 결과를 낼 수 있다는 것은 상식이지 않은가?

그것은 하워드로서 직접 제작의 일선에서 뛰고 있는 자신이 늘 체감하고 있는 사실이었다.

"후우우."

그리고 육체는 생명체가 가질 수 있는 가장 완벽한 도구.

'그럼···.'

그렇게 하인즈 2세의 몸속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몸에 가해지는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 평소엔 봉인되어 있던 인자들이.

한꺼번에 눈을 떴다.

***

쉴 새 없이 몰아치던 폭풍이 멎었다.

하지만 몸을 숨긴 채 기회를 노리던 폭군은 함부로 경거망동할 수 없었다.

'뭐지?'

알 수 없다.

분명 적이 갑자기 멈춘 지금이 이 자리를 빠져나갈 절호의 기회일 텐데, 오랜 세월 그의 목숨을 지켜 준 본능은 무조건 숨죽이고 있으라고 비명을 질렀다.

그에 잠시 몸을 멈칫했으나, 그는 곧 이성적으로 판단을 내렸다.

'일단 빠져나가는 걸 우선한다.'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런 기회는 쉽게 오는 게 아니었다.

일단 시도해 보고, 뭔가 잘못되었다 싶으면 그때 재빨리 숨으면 되겠지.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그렇게 순식간에 결계로 쇄도한 그는 결계를 향해 전력을 다한 공격을 내질렀다.

파지직—

고작 몇 초.

별다른 견제가 없는 상황 속에서 드디어 공간을 가로막고 있던 벽에 구멍을 뚫은 순간—.

오싹!

그의 등줄기에서 소름이 내달렸다.

직후 그는 본능에 각인된 대로 힘을 운용했다.

한순간에 전신을 뒤덮은 어둠에서 솟구친 날카로운 가시가 사방을 꿰뚫고, 바닥에서 솟구친 새카만 거인의 손아귀가 공간을 뒤덮었다.

동시에 결계 안에 드리운 모든 그림자가 꿈틀거리며 눈 깜짝할 새에 이쪽으로 뻗어 나왔다.

그리고 그 모든 현상이 일어나는 한 호흡도 되지 않는 사이, 어느새 바닥의 그림자에 깊게 파묻혔던 그는···.

"드디어 잡았구나, 쥐새끼."

뒤이어 들려온 싸늘한 목소리와 함께.

쑤욱— 촤앗!

바닥 깊숙이 파고들어 온 강인한 손아귀에 목을 틀어 잡힌 채, 작살에 꿰인 물고기처럼 지상으로 끌어 올려졌다.

'···크윽, 대체 언제?!'

그리고 그 주위로.

그가 직전에 흩뿌렸던 그림자들이 산산이 부서지며 벚꽃처럼 흩날렸다.

전부 음침한 검은색이었던지라 그다지 운치는 없었지만.

폭군은 한껏 일그러진 얼굴로 자신의 목을 잡고 들어 올린 상대를 노려보았다.

"끄으윽."

이렇게 접촉해 있다 보니 상대의 존재감을 더욱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결계에 구멍을 뚫는 데에 성공했던 그 찰나의 순간, 자기도 모르는 사이 긴장이 풀리고 말았던 것이라고 확신했다.

'젠장···! 아예 에너지양으로 찍어 누르는군!'

그게 아니라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정도였으니까.

어째서 더 빨리 눈치채지 못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상대가 있는 공간의 밀도만 이리 확연하게 다르다는 것이.

그는 자신의 몸속을 헤집으며 이능의 운용을 방해하는 어마어마한 혈마력의 격류를 밀어내려 애쓰며 이를 갈았다.

'이건 얘기가 다르잖아···!'

그의 존재에 대해서는 이미 들은 적이 있었다.

언젠가 한국에서 새롭게 탄생했다는 9레벨의 흡혈귀가 찾아올지 모른다고.

그와 관련된 추가 협조 요청을 무시하면서 더 자세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지만, 그래도 내심 재미있을지 모른다고 기대하기도 했었는데···.

'설마 이 정도로 괴물일 줄이야!'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놈들의 제안을 받아들일 걸 그랬다.

아니, 하지만 그렇게 되면 유럽 내에서 놈들이 영향력이 더 커질 위험이···.

그렇게 절체절명의 상황 속에서 폭군의 머릿속이 이리저리 뒤엉키고 있을 때.

끊어 넘치는 기운을 최대한 통제하며 그의 목을 붙잡고 있던 하인즈는 마침내 상대의 처분을 결정할 수 있었다.

'분명 초월급 흡혈귀이긴 하지만, 정작 사용하는 힘에서 흡혈귀 고유 능력의 비중은 그리 크지 않아. 엄밀히 따지자면 그냥 이종족 초능력자에 가깝다고 봐야겠군.'

그와 몇 차례 손속을 주고받으며 확실히 깨달았다.

상대는 흡혈인자에서 비롯된 힘의 대부분을 그저 고출력의 이능 행사를 보조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사용할 뿐이라는 걸.

그나마도 자기 강화에 사용된 일부를 제외한 나머지는 제대로 사용하지도 않고 남겨두기도 했다.

'아마 비상사태에서 급속 재생 같은 데에다 쓸 예정이었던 것 같은데. 정작 진짜 위기인 지금 상황에선 그 정도로는 어림도 없다는 게 아이러니하네.'

하지만 덕분에 확실히 마음을 정할 수 있었다.

하인즈는 목줄을 틀어쥔 손을 통해 계속해서 에너지를 밀어 넣으며 그대로 그 목덜미에 예리한 송곳니를 가져갔다.

"네놈···!"

그에 대경한 폭군이 눈을 부릅떴으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무리 일시적으로 폭주한 힘을 이용했어도 저만한 상대를 제압해 생포하는 게 쉬울 리 없지 않나!

슬슬 한계이기도 했으니 최대한 빨리 일을 끝마쳐야 했다.

푸욱—

이내 날카로운 이빨이 합금처럼 단단한 피부를 뚫고 틀어박혔다.

그리고 그곳을 통해 서서히 피가 빨려들기 시작했다.

고오오—

콰드득! 콰득!

놈의 저항이 거세진 듯 그림자가 섞인 기운이 거칠게 요동치며 전신을 할퀴어 댔지만, 이미 흡혈이 진행되고 있는 이상 상황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걱정 마라. 죽일 생각까진 없으니.'

아무리 봐도 그는 제법 쓸모 있어 보였으니까.

어차피 자신이 더 성장하기 위해 필요한 건 '전혀 다른 계통으로 상격에 오른 흡혈인자' 뿐이었다.

모든 능력이 폭증하며 피에 대한 통제력까지 극도로 상승한 지금.

목숨을 빼앗지 않는 선에서 포식을 진행하는 것도 영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큭! 매드 뱀프(Mad Vamp)? 이 무슨···! 끄아아악!"

물론 흡혈이라는 행위는 단순히 피를 빨아들이는 게 전부가 아닌, 좀 더 주술적인 의미에서 상대의 일부를 강탈하는 의식이기에 당하는 입장에서는 힘의 절대량이 상당히 많이 깎여나간다는 문제가 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죽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그의 수준이라면 설령 잔혈급으로 떨어지더라도 그리 큰 손실은 아닐 것이다.

'암, 이 정도면 서로 윈윈이라 할 수 있지.'

그렇게 프랑스의 음지를 지배하는 폭군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고.

이 나라의 시민들은 보다 안전한 밤을 영위할 수 있게 되었으며.

"새로운 흡혈인자를 수집합니다. 특수스킬「혼혈진화」의 영향으로 개체의 존재가 한층 뚜렷해집니다."

하인즈 2세는 원래의 목표를 달성하는 동시에 유럽 전초기지까지 손에 넣을 수 있었으니.

그야말로 모두가 행복한 해피 엔딩의 완성이었다.

"내, 내 힘이···! 네놈! 대체 무슨 짓을···!"

"흐음?"

아직 한 명이 납득하는 데 시간이 조금 필요해 보이긴 했지만.

'역시 이 정도 상대한텐 「미혹」이 제대로 먹히지 않는 건가. 아무래도 교육이 조금 필요할 것 같네.'

아마 그것도 그리 오래가진 않을 것이다.

***

하인즈 2세가 한창 유럽에서 활동하고 있을 때.

간만에 지구로 돌아온 한스, 하회탈은 그동안의 부재를 만회라도 하려는 듯 분주하게 움직였다.

'가장 껄끄럽던 번천회주가 자리를 비웠다는 것도 알게 됐으니 굳이 몸을 사릴 필요 없지.'

율령자를 통해 얻을 수 있었던 단편적인 정보 중 하나인 회주의 외유.

그에 한스는 원래의 앞마당이었던 대한민국 전역을 다시 한번 쭉 훑은 것은 물론이고, 도중에 그만두었던 일본 열도를 청소하는 작업도 틈틈이 진행했으며, 한창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는 중국 쪽도 툭툭 찔러보기 시작했다.

'아무리 봐도 중국의 반응이 심상치 않아. 역시 저쪽은 이미 고위층들 대부분이 번천회에 넘어간 것 같은데.'

동아시아 지부장이라는 율령자가 제거당한 직후임에도 번천회의 혼란이 그리 길지 않았다는 것도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단순히 후임자를 새로 파견하는 수준에서는 수습이 그리 쉽지 않았을 텐데.

그렇게 신경 써야 할 만큼 중국이 그들에게도 중요한 거점이라는 소리였다.

'하지만 상황 자체는 그리 나쁘지 않다. 사실 이미 번천회의 존재를 깨닫고 놈들을 경계하는 이들도 은근히 많았던 것 같고.'

그간 혼자만의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거늘.

율령자의 기억에 따르면 그들에게 대항하는 세력들이 제법 여러 곳에 있다는 모양이었다.

강대한 적에 대한 저항 세력의 특성상 저마다 뿔뿔이 흩어져 숨은 채 암약하고 있어서 자신이 미처 파악하지 못한 것뿐.

'중국이 최근 한국에 유독 강경하게 나오는 것도 아마 반(反) 번천회 기조가 강해진 게 원인이겠지.'

번천회 소속이었던 알파의 서울 테러 이후.

귀환자 협회를 중심으로 한국은 좀 더 적극적으로 번천회에 적대적인 노선을 걷기 시작했다.

물론 놈들의 입김이 닿은 듯한 종자들이 정치권을 비롯한 다양한 방면에서 방해 공작을 펼치기도 했으나···.

'굳이 직접적으로 심판하지 않아도 그런 놈들을 무너뜨리는 건 간단하지.'

그간 하회탈은 정부 요인을 비롯한 핵심 인사들에게까지 직접 손을 대진 않았다.

그렇게까지 해버리면 여러모로 귀찮아질 게 불 보듯 뻔했으니까.

그러나 그게 놈들을 그저 방관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원래 뒤가 구린 놈들은 마찬가지로 지저분한 놈들과 어울리는 법."

더러운 일을 대신 해주는 청부업자든, 자금 세탁을 위한 불법 세력이든, 쉽게 부려 먹고 잘라버릴 수 있는 용역 패거리든.

그런 놈들을 족치다 보면 일을 시킨 윗선에 대한 증거 자료도 줄줄이 튀어나오기 마련이었다.

'애초에 그 암흑가가 이미 내 손안에 있기도 하고.'

그 뒤처리는 혈맹을 움직이면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었으니.

결국 놈들은 사회적인 몰락과 이쪽에 대한 전폭적인 협조 중 하나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그렇게 모든 상황이 순조롭게 흘러가고 있다고 느끼던 중.

국내에서 일어난 어떤 움직임이 은근히 신경을 거스르기 시작했다.

가만히 현 상황을 정리하던 나는 의자 팔걸이를 툭툭 두들기며 미간을 찌푸렸다.

'일단은 가만히 두고 보려고 했는데.'

이세계 종교 연합, 판테온의 조사단.

미국에 있다는 번천회 북아메리카 지부장 서기관이 뭔가 개입했다는 걸 알아챈 마당이기도 했으니, 놈들의 목적을 확실하게 파악하기 전까지는 일단 상황을 지켜볼 셈이었다.

이쪽의 일상을 침해하지만 않는다면.

"그런데 너무 들쑤신단 말이지."

조사단의 움직임에 대한 정보를 얻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들도 딱히 거리낄 게 없는 만큼 뭔가를 숨길 생각이 없기도 했고.

애초에 범죄자를 수색하는 게 아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일부러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사람을 굳이 찾아내려 한다는 것부터가 독선적이라는 건 차치하고.'

그건 여러 이해관계가 얽힌 일이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문제는 그들이 지금 보이고 있는 행보.

'설마 그때 병원에 있던 이들 모두를 전수조사하려고 들 줄이야.'

조사단이 강태산의 할머니를 찾아갔다는 소식을 접했을 땐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았다.

물론 할머니의 빠른 퇴원에 하인리히가 개입한 건 분명한 사실이었으나, 애초에 그 현장에 있던 모든 이들에게 초고순도의 신성력이 내리쬔 게 불과 얼마 전이었다.

그런데 그보다 한참 전에 있었던, 그보다 경지가 낮았을 때의 흔적 따위가 남아있을 리 없지 않은가?

당연히 그들은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하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는데···.

그러나 전수조사를 하게 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때 그 자리에는 나도 있었으니까."

각성자라는 걸 숨기고 있는 입장에선 조사 대상이 된다는 것 자체가 큰 부담이었다.

아니, 까놓고 말해 굉장히 곤란했다.

지금이야 어떻게든 숨긴 채 마음대로 돌아다니고 있었지만, 고위 성직자들이 작정하고 검사한다면 결국 들통날 것이 뻔했으니.

안마 의자에 앉은 채 한숨을 푹 내쉰 나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개체 투영」의 부가 능력으로 하인즈의 「존재부정」을 최대한 모사해 본체로 구현한다면···.'

그렇게 하면 어쩌면 숨기는 게 가능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아직 숙련도가 그리 높지 않은 상황인지라 그것조차 도박이라는 건 변함이 없었다.

그냥 아예 조사 대상이 되지 않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일 터.

결국 나는 입맛을 다시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지."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

병원 테러 사건이 보도되며 성기사 하인리히의 존재가 대중에 드러난 이후.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막론하고 많은 이들이 열광하며 그의 행적을 수소문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화려한 첫 등장부터 워낙 많은 이들의 관심을 끌었던 만큼, 그의 신성력에 수혜를 입은 환자들의 상세가 크게 호전되었다는 소식이 대대적으로 언론을 탔던 탓이었다.

물론 성녀와 달리 하인리히의 신성력은 치유보다는 파마(破魔)에 특화되어 있었으나, 그런 분류도 어느 정도 수준에서나 통용되는 법이었다.

여태껏 지구에는 등장한 적이 없던 성자급 신성력, 그것이 성검으로 증폭된 데다가 『차원 장벽 완화』로 손실까지 줄어든 상태라고?

'···이런 반응이 아닌 게 오히려 이상하지.'

원래부터 건강하던 이들은 그간 의식하지 못하던 자잘한 증상들이 사라져 컨디션이 최상으로 치솟았고.

경상이었던 이들의 상처는 씻은 듯이 깨끗하게 없어져 버렸으며.

중상이었던 환자들조차 간단한 치료만 받으면 될 정도로 회복되었다.

심지어 오늘내일하던 병자들까지 다시 치료를 시작해 완치를 노릴 수 있을 정도로 병세가 크게 완화되었으니.

그로 파생된 열기는 굳이 따로 언급할 필요도 없을 정도였다.

판테온과 이능관리국의 합동 조사가 조금 선을 넘었음에도 대중들이 큰 불만을 표하지 않는 이유도 아마 그것이 큰 영향을 끼쳤을 터.

모두가 그 기적을 가져온 인물, '백기사'가 누구인지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어쩌면 하회탈조차 능가할 정도로.

'아니, 그건 아닌가? 그냥 이익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의 차이 때문일지도.'

하회탈의 정체는 몰라도 수혜를 입는 데 별문제 없지만, 백기사의 은총을 받기 위해선 그의 정체를 알아야 한다.

아마 그렇게 생각한 이들이 많은 것도 원인 중 하나겠지.

철컥— 철컥—

그래서 그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이었다.

"엉? 저기 설마···?"

"어? 어어?"

"아니··· 정말로?"

서울 시내의 모 대학 어린이 병원.

철컥— 철컥—

갑작스럽게 정문에 나타난 백색 갑옷의 기사 한 명이 당당히 병원 로비를 가로질렀다.

그의 몸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다가 서서히 주변을 뒤덮기 시작한 은은한 광채.

환자, 보호자, 의사, 간호사 등 로비에 있던 모든 이들의 시선이 멍하니 그곳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 미묘한 혼란도 잠시.

"어어, 진짜잖아! 수아야! 수아야! 이리···."

"우와~ 디게 멋있다."

"꺄악! 선생님! 선생님 제발 저희 아이 좀···!"

"기, 김 선생. 저분 설마 진짜로···?"

곧이어 사방에서 아우성이 터져 나왔다.

부드러운 기운 속에서도 느껴지는 위압감에 차마 가까이 다가가지 못한 이들의 갈망 어린 눈길이 그 중심의 성인(聖人)에게 집중되었다.

'이건 또 미묘한 기분이네.'

조사 때문에 정체가 드러나는 게 걱정이라면 해결 방법은 간단했다.

아예 조사할 필요가 없게 만드는 것.

'이참에 다른 종교들처럼 나도 포교나 하지 뭐. 그럼 지구에서 쓸 수 있는 힘의 제약이 더 풀릴지도.'

그렇게 원격 소환으로 아우테리카에서 불려 온 성자.

하인리히 세인트 랜드가드가 서울 한복판에 모습을 드러냈다.

어느 아파트의 현관 앞.

"이렇게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자매님."

"아유~ 아닙니다, 신관님.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닌데요."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자매님께 신의 축복이 함께하길."

"예, 예. 감사합니다."

자애롭게 미소 지으며 허리를 숙이는 성직자의 말에 그 앞에 있던 중년 여인이 당황하며 마주 고개를 꾸벅거렸다.

그렇게 작별 인사가 끝나자 30대 초반의 여성 성직자는 곧바로 주차장으로 이동해 정차해 있던 차의 뒷자리에 올라탔다.

부르릉—

직후 부드럽게 출발하기 시작한 차 안에서, 그녀는 옆에 놓여있던 태블릿을 들고 안에 정리된 자료들을 다시 훑어보았다.

-······

-백기사 추정 스펙 정리. (상세 보기)

-각 차원의 귀환자들을 통해 신성력을 수소문한 결과, 아우테리카 차원의 주신이 가장 유력함. (인터뷰 전문 상세 보기)

-특정 환자와 모종의 관계가 있다고 가정, 관련자 방문 조사 실시. (현재 진행률 28%)

-······

"흐음."

저도 모르게 나오는 고민 소리와 함께 살짝 옆으로 기우는 머리.

판테온 한국 지부에서 백기사를 추적하기 위해 파견된 조사단의 대표인 그녀는 이내 태블릿에 뭔가를 표기하곤, 그것을 다시 내려놓으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역시 대단하네요.'

그리고 그녀는 이번 방문에서 재차 확인한, 지금은 퇴원한 환자의 몸속에 아직까지 남아있던 신성력의 잔향을 떠올리며 몇 번째인지도 모를 감탄을 터트렸다.

'대체 믿음이 얼마나 깊기에 그런 게 가능한 걸까요.'

그녀는 이미 병원 테러 당일에도 제법 먼 거리에서 그 기척을 감지하고 경악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났다고 하나, 그 잔재를 이렇게 직접적으로 살펴보는 것은 또 새로운 감상을 불러일으켰다.

조사하면 할수록 그 당사자에 대한 존경과 경외가 물씬 피어올랐던 것이다.

'단순히 규모가 큰 정도가 아닌, 오직 신실한 믿음으로 정련된 순수하기 그지없는 신성력. 대체 어떤 성인이기에 지구에서 그만한 에너지를 끌어오는 게 가능했던 건지···.'

그녀 또한 이세계에선 제법 높은 지위까지 올라간 고위 신관이었지만, 아무리 후하게 쳐주더라도 백기사와는 비교할 수 없었다.

굳이 그녀의 출신 세상에서 비슷한 수준을 꼽자면, 아마 신에게 직접 간택 받았다는 사도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

'어떤 사람인지 꼭 한번 만나보고 싶네요.'

사실 그것이 그녀가 적극적으로 조사단의 대표를 맡은 가장 큰 이유였다.

대체 어떤 성품의 사람이기에 그만한 이적이 가능했는지 호기심을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그런 흥미 본위 말고도 실질적인 이유도 있었다.

'그 정도 수준의 성인이라면 정말 판테온의 새로운 중심이 될 수 있을지도···.'

치유 능력이 가진 중요성만큼, 지구에서 성직자들의 처우는 단순히 양호한 정도가 아니었다.

신성력 사용에 제한이 있으니 오히려 다른 세상에서보다 더 귀하다고 보는 게 맞을 터.

그러나 문제는 대외적인 평판이 아닌 내부에 있었다.

"후우."

작게 한숨을 내쉰 그녀가 얼굴을 몇 번 문질렀다.

신성력 덕분인지 매끈하고 탱탱한 피부가 나름의 자랑이었는데, 최근 스트레스 때문에 생긴 피부 트러블이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파벌 간의 반목이 너무 심해요.'

어찌 보면 그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같은 신도들이 모인 일반적인 교단과는 다르게 판테온의 성직자들이 따르는 신과 교리는 모두 제각각이었으니까.

아무리 악신을 숭배하는 등 부정적인 신앙을 품은 이들은 배제했다고 해도, 기본적인 가치관이 다른 만큼 계속해서 마찰이 생기고 불만이 쌓여 균열이 발생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런 상황에서 모두의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이가 중심에 서 준다면···.'

지금 상황을 타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된다면 쓸데없는 파벌 싸움에 쓸 힘을 좀 더 선한 방향으로 표출하게 만들 수도 있겠지.

또 그것은 자연스럽게 사회의 공익으로 이어질 것이다.

'그런 위인을 타국에 빼앗길 순 없죠.'

연합 집단인 판테온의 특성상 미국에 있는 총본부도 상위 기관이 아닌 그저 대표 개념에 더 가까웠다.

이미 요청이 들어온 이상 협조는 하겠지만 맹목적으로 따를 필요는 없다는 소리.

다시 굳게 마음을 다잡은 그녀가 옆에 내려놓았던 태블릿을 들어 조사단원들의 결과 보고를 눈으로 훑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띠링!

갑자기 그녀의 태블릿 메신저에 긴급 메시지 하나가 떠올랐다.

그리고 별생각 없이 그 내용을 읽던 그녀의 눈이 커다랗게 떠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끼이익—!

정속으로 주행하던 그녀가 탄 차가 급하게 드리프트 하며 방향을 틀었다.

다행히 근방엔 다른 차량이 없는 상황.

덕분에 차는 주변의 눈치를 보지 않고 곧바로 급가속을 밟았다.

부우웅— 부아아앙!

그 차량의 목적지는 새로운 급보가 들어온 장소.

백기사가 등장했다는 서울의 한 대학 병원이었다.

***

따스한 빛이 주변을 감쌌다.

화아악—

그 영역은 단순히 주변 몇 미터 정도가 아니었다.

로비에 가득한 사람들을 넘어서 더 멀리, 더 높이 뻗어나간 그것은 마침내 어린이 병원 전체를 아우르며 은은하면서도 아름답게 타올랐다.

그것은 기적의 실재이자 소망의 구현.

이 자리에 있는 환자들의 상처를 쓰다듬어 주는 자비의 현신이었다.

'이왕 할 거 확실하게 해야지.'

그저 따스하게 보이는 겉모습과는 달리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품고 있는 그 초고순도의 신성력은 즉각적인 현상을 불러일으켰다.

회복과 치유, 그리고 재생.

그에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은 그러한 변화를 곧바로 체감할 수 있었다.

"아아—."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우아! 엄마, 이거 신기하다! 디게 따뜻해. 히힛!"

그 말로만 듣던 현상을 직접 체험한 사람들의 반응은 다양했다.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는 이, 두 손을 모은 채 계속해서 기도를 올리는 이, 아무것도 모르고 천진난만한 웃음을 터트리는 아이들 등.

하지만 그 여러 반응 속에서도 단 한 가지, 그들이 보인 공통된 행동이 있었으니.

바로 이 기적을 행한 주체를 하염없이 바라보는 것이었다.

로비의 중앙에 선 채 어둠을 밝히는 등불처럼 찬란한 빛을 휘감고 있는 이.

매끄럽고 유려한 순백의 갑옷을 입고 바닥에 세워진 아름다운 장검의 손잡이에 두 손을 올린 고결한 성인.

백기사 하인리히를.

"아···."

"······."

그 신성한 모습에 주변을 둘러싼 사람들은 그저 멍하니 그를 쳐다보았다.

처음 그가 등장했을 때 아우성치며 자비를 갈구했던 것과 달리, 지금은 차마 그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도 말을 걸 수도 없었다.

그저 예술품을 감상하듯 몇 발짝 떨어진 곳에서 경외만 보낼 뿐.

'역시 효과 한번 확실하군. 그럼 이제 슬슬···.'

그러나 시간이 멈춘 듯 모두가 굳어있던 그때.

타박— 타박—

가장 먼저 움직임을 보인 이가 있었다.

"수··· 수아야?"

이제 예닐곱 살은 되었을까?

자그마한 키만큼 왜소한 여자아이가 체구에 어울리지 않는 환자복을 입은 채 힘겹게 발걸음을 옮겨 그에게로 다가왔다.

조금 전까지 타고 있었던, 아비가 끌던 휠체어를 뒤로하고서.

'오? 어른들도 굳은 이 상황에서 가장 먼저 움직였다?'

뒤늦게 그 뒤를 종종걸음으로 따라붙은 장년의 남성이 안절부절못하면서도 감격스러운 듯한 기색으로 아이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차마 아이의 뜻을 무시하지 못한 그가 걱정스럽게 발만 동동 구르는 사이.

하인리히의 앞까지 도착한 여자아이가 조심스럽게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똘망똘망하게 눈을 빛내며 자그맣게 입을 열었다.

"···천사님?"

질문하는 것처럼 말꼬리를 높이긴 했으나, 그간 이야기로만 들으며 상상했던 이미지와 겹쳤기 때문인지 아이의 눈빛에는 어떤 확신이 깃들어 있었다.

"혹시 수아가 착해서 데리러 온 거에요?"

다만 그다음에 이어진 말은 그도 미처 예상할 수 없었다.

하인리히는 물론 아이의 뒤에 있던 보호자도 멈칫 몸을 굳혔다.

"···저 아직 안 가면 안 되나요? 아직 인사도 다 못했는데···."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힐끔힐끔 그를 올려다보는 아이.

대체 저 작은 머릿속에서 무슨 상상이 펼쳐지고 있는 걸까?

하지만 이미 한 차례 신성력을 쐬었음에도 느껴지는 아이의 몸 상태에 어떤 상황인지는 대충 이해할 수 있었다.

'흐음.'

생각을 정리하며 가만히 아이를 내려다보던 그는 이내 천천히 다리를 굽혀 자리에 쪼그려 앉았다.

그렇게 아이와 눈높이를 맞추고 보니, 그 자그마한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투구가 시선에 들어왔다.

'그래, 이왕 하는 거 아예 이렇게 하는 게 더 확실하겠지.'

그에 천천히 두 손을 들어 투구를 쥔 그는.

그대로 그것을 위로 들어올렸다.

사라락—

답답한 공간에서 해방되며 허공에 흩날리는 은빛 머리칼.

그것이 병원 로비를 비추는 전등과 주변을 감싼 광채를 산란시키며 눈부시게 반짝였다.

"헙!"

"······!"

그리고 그와 동시에, 조용히 숨을 죽인 채 그것을 바라보던 이들이 저도 모르게 헛숨을 들이켰다.

하인리히는 가볍게 은발을 쓸어 넘기고 금빛으로 빛나는 눈매를 부드럽게 휘며 다시 아이와 마주 보았다.

조명과 연출이 어우러진 그 이국적인 미남자의 용모가 환상처럼 사람들의 뇌리에 틀어박혔다.

그는 주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눈을 크게 뜨고 입을 헤 벌린 아이의 머리로 한 손을 뻗다가 멈칫했다.

그리고 다시 팔을 되돌려 오른손의 금속 건틀릿을 벗고는 맨손으로 천천히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으헤헤···."

그 조심스러운 손길에 쑥스러운 듯 헤픈 웃음을 흘리는 아이.

하인리히는 손에 가득 담은 신성력으로 아이에게 추가적인 조치와 함께 축복을 내려주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럼 기다려 줄게. 수아가 다 클 때까지. 언제든 괜찮으니까."

"···정말요? 그럼 진짜 진짜 나중에도 괜찮아요?"

"그래, 대신 앞으로도 치료는 꾸준히 받아야 한다? 그럼 백 살까지도 충분할 거야."

"어··· 배, 백 살?"

장난스럽게 던진 말에 이리저리 눈을 돌리는 걸 보니 아직 그 숫자가 정확히 가늠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치웠다.

그리고 뒤쪽에서 눈물을 글썽거리던 장년의 사내에게 눈짓하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자, 그 보호자는 얼른 아이를 안아 들고 연신 고개를 숙였다.

그 와중에도 아이는 천진하게 웃으며 팔랑팔랑 손을 흔들 뿐.

왠지 모르게 눈길이 가는 아이였다.

'예상 밖의 이벤트이긴 했지만.'

옆구리에 투구를 낀 하인리히가 다시 건틀릿을 착용하며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덕분에 생각했던 것보다 더 효과적으로 홍보를 한 것 같았다.

'테러 때만큼 대규모는 아니어도 치료 수준은 그리 떨어지지 않겠지.'

수사에 혼선을 주기 위해 자연스럽게 시선을 끌고 얼굴까지 공개했으니, 이제 그에게 남은 일은 하나뿐이었다.

그는 목소리에 신성력을 가득 담은 채 나직이 입을 열었다.

"고통에 신음하는 이들에게 따뜻한 관심을, 어려움에 처한 이들에게 구원의 손길을···."

이세계에서 주신에게는 따로 이름 같은 게 없었다.

창조주나 마찬가지인 주신은 그저 홀로 오롯한 존재일 뿐이었으니.

하지만 차원 외적으로 보자면 그를 지칭할 말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었다.

"···모두에게 아우테리카 님의 가호가 함께하길."

해당 차원의 이름이야말로 주신을 지칭할 수 있는 단어 그 자체.

그렇게 신성력을 가득 담은 목소리로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은 인상을 새긴 하인리히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왔나.'

그리고 사방에서 몰려들기 시작한 기척을 느끼고 기운을 갈무리하며 바닥에 박혀있던 성검을 뽑아 들었다.

당장 그는 자신을 찾는 이들과 대면할 생각이 없었다.

'아직은 때가 아니야.'

일단 목표는 달성했으니 더욱 극적인 순간을 위해선 더 애를 태울 필요가 있었다.

이 관심을 이용해 자연스럽게 홍보도 좀 하고.

'무작정 설교를 늘어놓으며 포교하는 건 하책이지.'

지금 하인리히에게 쏠린 관심이라면 슬쩍슬쩍 떡밥만 흘려도 사람들이 알아서 찾아볼 것이다.

그럼 그때까지 자신이 할 일은···.

파앗—

뒤를 쫓는 이들이 들이닥치기 직전에 「축복 : 도약」을 사용한 그가 병원 로비에서 사라졌다.

이후 그가 모습을 드러낸 장소는 그곳과 한참 먼 곳에 떨어진 또 다른 병원.

그렇게 마치 놀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몇 차례 깜짝 방문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날 저녁.

첫 방문부터 이어진 그 꾸준한 소식이 누적된 끝에.

마침내 국내 인터넷 여론이 폭발했다.

인터넷은 현대 사회에서 여론의 흐름을 가장 즉각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매체였다.

그것도 국민 대다수가 스마트폰을 들고 다니는 한국에서는 더더욱.

사람들은 실시간으로 사진과 동영상을 찍으며 각지의 소식을 열심히 퍼 날랐고, 그것은 그대로 SNS를 비롯한 커뮤니티로 확산되는 데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전날 낮부터 꾸준히 이어져 하루가 훌쩍 지나도록 화제를 거의 독점하다시피 한 주제가 하나 있었으니.

바로 바람과 같이 등장했다가 사라진 의문의 영웅, '백기사'의 재등장에 관한 소식이었다.

최근 한국은 물론 전 세계에서 한창 관심을 가지고 있던 인물인 만큼, 당연히 시민들은 그의 갑작스러운 행보에 대해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저거 진짠가? 그동안 계속 숨어있더니 갑자기 이렇게 나와서 자원봉사하고 다닌다고?

-한 곳도 아니고 여러 곳 돌아다녔다는데? 신성력은 쓰는 데 한계가 있다고 하지 않았음?

그렇게 타당한 의문을 표하며 미심쩍어하는 이들도 있었으나, 그들의 앞에 제시된 것은 온갖 장소에서 찍힌 다양한 증거 자료들이었다.

CCTV는 물론 지근거리에서 찍은 듯한 사진과 동영상 등.

도저히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확실한 증거들이 쏟아져 나왔다.

-미친; 진짜였잖아?

-저기 어디예요? 우리 어머니 아프신데 제발 장소 좀 공유해 주세요ㅠㅠ

└이미 늦음. 지금은 다시 잠적함.

-아 근데 왜 초점이 제대로 잡힌 게 하나도 없냐.

└그니까. 현장감 있긴 한데 알아보기 너무 힘드네.

그에 대한 반응은 당연히 폭발적이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사람들의 아쉬움을 사는 점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멀리서 찍힌 CCTV 영상을 제외하면 현장의 모습이 제대로 담긴 자료가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아 카메라 좀 제대로 들라고!

-ㅋㅋㅋ 초반에 잠깐 나왔다가 내내 바닥만 찍고 있네 ㅋㅋㅋ

-ㅅㅂ 호기심에 클릭했다가 더 궁금해짐.

그러나 생각해 보면 그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번에 백기사를 마주한 이들은 환자나 그 보호자, 혹은 병원 관계자들이 대다수였다.

그런데 실시간으로 막대한 신성력이 주변을 뒤덮으며 이적이 일어나는 그 상황에서 침착하게 카메라를 켜고 앵글을 잡아 렌즈를 들이밀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것도 압도적인 격에서 자연스럽게 뿜어져 나오는 카리스마에 누구도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던 공간 속에서.

덕분에 그나마 찍힌 영상들도 때마침 다른 이유로 찍고 있었다가 우연찮게 그의 모습이 담겼던 것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그러던 와중.

그 상황 속에서 찍힌 어떤 영상 하나가 공개되며 다시 커뮤니티가 뒤집어졌다.

-미친, 개 잘생겼네;;

-와... 초점이 이 지랄인데 어떻게 저러냐? 저쪽만 무슨 필터 덧씌운 것 같음.

-팬텀 오빠에 이은 존잘남이 또♥

└이쯤 되면 하회탈도 꽃미남일 거라는 합리적 의심이 든다. 하회탈도 얼공 가즈아~!

-근데 외국인이야? 이목구비는 동양인인 것 같기도 한데... 아니, 뭔가 섞인 것 같은데 혼혈인가?

그가 처음으로 방문한 어린이 병원에서 투구를 벗고 얼굴을 공개하던 순간이 찍힌 동영상.

그 화면 속 은발금안과 신비로운 분위기의 절세미남은 대중들을 열광시켰다.

특히 자애로운 미소를 머금은 그가 어린아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던 순간에 대한 호응은 무섭다고 느껴질 정도.

자연스럽게 그를 찬양하는 팬카페가 우후죽순 생겨나게 되었고.

그때 그가 했던 말도 수면 위로 떠오르며 이리저리 사람들 사이를 오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교단이 아우테리카라고 했던가? 난 처음 듣는데 뭐 아는 사람 있음?

-아우테리카교 개종 1일차. 교리는 모르지만 일단 무지성 기도부터 박는다.

-어디서 들어봤던 이름인 것 같긴 한데···.

아우테리카는 아직 존재가 밝혀진 지 몇 개월 되지도 않은 차원이었던 만큼, 그에 따로 관심 있는 이들이 아니라면 존재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여긴 정보의 교류가 빠르기로 소문난 지구의 대한민국.

그들은 현대인답게 순식간에 관련 내용을 알아내 서로 공유하기 시작했다.

-아우테리카 얼마 전에 귀환자 협회에 등록된 뉴비 차원 이름이더라. (링크)

└오? 진짜? 그럼 거기랑 무슨 관계야?

└이쯤 해 줬으면 나머진 니가 알아서 찾아 봐라ㅡㅡ

└이잉 귀찮아. '해줘'

-와, 갑자기 뭔 난린가 했는데 아우테리카 차원이라고? 나 거기 출신인데.

그리고 일이 거기까지 커지자 마침내 그곳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던 이까지 튀어나와 증언하기에 이르렀다.

어차피 특정 차원에 대한 내용은 딱히 숨길 정보도 아니었던 데다, 귀환자들끼리 모일 때마다 안줏거리로 소비되던 주제였던지라 딱히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오! 어디 썰 좀 풀어봐. 뭐 아는 거 있어?

-혹시 백기사가 누군지 아세요? 저 정도 급이면 상당히 유명했을 거 같은데. 정체가 궁금하당.

-어, 아니. 아우테리카에 주신교단이라고 세계구급 종교가 하나 있긴 했는데. 근데 뭔가 이상하다? 백기사가 거기 출신이라고?

하지만 정작 그 '아우테리카' 차원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귀환자들은 오히려 지금 전개되는 상황에 어떤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어? 아니 설마? 아니 이거 절대 그럴 리가 없는데? 왜지? 뭐지? 진짠가? 에이 설마?

└얘 왜 고장 났냐?

└거 혼자만 알지 말고 같이 좀 압시다.

└어그로인듯? 먹이ㄴㄴ

그도 그럴 것이···.

-아니, 조건에 딱 맞는 사람 중에 생각나는 게 한 명 있긴 해. 난 하꼬여서 직접 본 적은 없지만. 근데 걘 용사일 텐데? 한창 세상을 구하기 위해 싸우는 중인데 걔가 왜 여기에 있어? 거기 싸움 끝남?

└???

└이건 또 무슨 개소리야;

└야 이번 어그로는 신박했다. 이제 뇌절 그만하고 딱 여기까지만 하자.

그들의 머리에 떠오른 인물은 이 지구에 있어서는 안 되는 존재였으니까.

그리고 그런 혼란은 인터넷뿐만 아니라 오프라인에서도 확산되고 있었다.

***

언뜻 보기엔 별다른 특색이 없어 보이는 사무실 안.

"그러니까 강태규 씨 말씀은···."

하지만 그 내부에 들어찬 이들의 면면은 절대 평범하지 않았다.

"그 백기사의 정체로 가장 유력한 게 아우테리카 차원의 성자라는 말씀이시죠?"

국가기관으로서 이능을 가진 자들을 통제할 책임이 있는 이능관리국의 요원.

각성자들의 권익을 위해 뭉쳐 그들을 대표하는 귀환자 협회의 관계자.

백기사를 영입하기 위해 파견된 이세계 종교 연합 판테온의 성직자 등.

그에 딱히 위압적인 분위기가 아니었음에도 그들과 대면해 앉은 이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열심히 아는 바를 털어놓았다.

"예, 예.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그 위치가 위치였으니 굉장히 유명했었지요. 하인리히 세인트 랜드가드. 저랑 직접적인 관련이 없어도 풀 네임을 기억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요."

"흐음···."

그 대답에 사무실 안에 있던 이들이 침음을 흘리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아직 귀환자가 그리 많지 않은 차원이었지만 다행히 한국에도 아우테리카 출신이 네 명 등록되어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들의 앞에서 증언하고 있는 이가 바로 그중 한 명이었다.

"그게 이 영상 속에 나온 인물이 확실합니까?"

가만히 턱을 쓰다듬던 이능관리국의 요원이 다시 한쪽에 놓인 태블릿을 슬쩍 건드렸다.

거기엔 아까부터 백기사의 영상 편집본이 반복 재생되고 있었다.

"어, 확신까지는 좀···.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저랑은 딱히 인연이 없었던지라 직접 본 적은 없습니다. 전 그저 제국 변방에서 작게 활동한 게 전부였거든요. 어지간히 운이 좋거나 초고위층이 되지 않고선 성자씩이나 되는 위인과 대면하긴 힘들죠."

"···그것도 그렇겠군요."

"그래도 아마 맞을 겁니다. 성자와 성녀의 특징 중 하나로 알려진 게 바로 은발과 금안이었거든요. 또 성자 하인리히는 성기사 출신이기도 했으니··· 아마 저 검이 성검이 아닐까 싶네요."

이쯤 되면 백기사의 정체에 대해선 거의 확실해졌다고 봐야 할 터.

하지만 그 와중에도 이곳에 있는 이들은 하나같이 석연치 않은 기색으로 찝찝한 표정을 지었다.

여기 한데 모인 조사 인원들은 물론이고 귀환자 협회 소속으로서 요청받고 불려 온 증언자까지.

"그런데 대체 왜 그런 인물이 여기에···."

그래, 바로 그게 문제였다.

"그가 지구인 출신이었다는 거야 그럴 수 있다고 치더라도···. 하지만 지금 아우테리카는 마왕··· 그러니까 불사왕이란 존재와 전쟁 중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그것도 상당히 위험한 상태라고 들었습니다. 협회가 추정한 위험성 등급도 '상당히 높음, 주의 요망'이었죠."

"그런데 그 최전선에 서야 할 용사가 지구로 도망쳐 왔다는 건 좀··· 그렇지 않나요? 거기다 진짜라면 성검까지 가지고 튀었다는 소리 아닙니까? 그쯤 되면 아무리 성자라도 신이 저 정도의 신성력을 허락해 주진 않을 것 같은데요?"

객관적으로 따지자면 백기사의 정체가 아우테리카의 용사이자 주신교단의 성자, 하인리히 세인트 랜드가드라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그냥 그렇게 받아들이기엔 여러모로 걸리는 점이 많았다.

"거참, 혹시 세계 귀환자 협회에서 아우테리카 관련해서 추가로 온 소식은 따로 없습니까? 거기서 성자가 갑자기 사라졌다거나."

"···딱히 전해 들은 게 없습니다만··· 혹시 모르니 다시 문의해 보겠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다른 차원의 일이야 그들이 상관할 주제가 아니긴 했다.

그런 식으로 위기에 몰리다가 결국 멸망까지 이르는 피해를 입고 '닫힌 차원'이 된 세상이 한둘이 아니기도 했고.

하지만 백기사를 최우선 영입 대상으로 삼고 작업을 해 나가던 이들 입장에서는 그 뒷사정이 여러모로 꺼림칙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서로 다른 소속의 사람들이 이런저런 자료를 늘어놓고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역시 본인에게 물어보는 게 가장 빠를 텐데. 어떻게 대화할 방법이 없을까?'

선배를 따라 이 자리에 동석했던 이능관리국의 신입 요원 강태산은 뒤쪽으로 물러나 벽에 몸을 기대며 입맛을 다셨다.

그는 백기사 덕분에 자신은 물론 할머니와 친구까지 무사할 수 있었다 생각하고 있었기에, 확실하지도 않은 일로 괜한 억측을 늘어놓는 이들이 못마땅하기까지 했다.

'에휴, 내가 뭘 할 수 있겠어. 까라면 까야지 원.'

내심 불만을 삼킨 그는 이내 모니터링을 위해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커뮤니티들은 전날 활활 불타올랐을 때에 비하면 좀 잠잠해진 편이었지만, 여전히 백기사에 대한 이야기로 시끌벅적거리고 있었다.

"어?"

그러나 그 평화로운 한때도 잠시.

무언가의 전조 증상처럼, 갑작스레 폭증하기 시작한 트래픽에 잠시 미간을 찌푸리던 그는—.

"서, 선배님! 지금···!"

곧 그 원인을 파악하고 비명 같은 외침을 터트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삐비비빅!

띠리링—!

각양각색의 알림 소리가 사무실 안에 있는 이들의 품속에서 울려 퍼졌다.

막 시작된 대형 사건을 암시하듯이.

***

나는 계속해서 고민했다.

하인리히의 존재를 어떤 식으로 공개하는 게 좋을까?

일단 조사단의 주의를 돌려 본체가 수사망에서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그 대상자인 하인리히가 직접 나서는 것이 최선이란 건 분명하다.

하지만 거기에도 여러 방식이 있는 만큼 어떤 방식을 선택하는지가 관건이었다.

'하회탈 한스처럼 정체를 감춘 채 활동하면서 본체의 알리바이를 조작해도 되고, 팬텀 하인즈 2세처럼 그럴듯한 가짜 신분을 만들어 그걸 숨기는 척하며 수사에 혼선을 주는 방법도 있지.'

하지만 모두 나름의 장단점은 있어도 확실한 방법은 아니었다.

또 이번 일에 번천회까지 개입했다는 걸 알아챈 이상, 놈들이 무슨 수작을 부려 오던 능동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선 이쪽도 좀 더 전면으로 나설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선택한 방법이 바로 이것이었다.

'그래, 그냥 아예 오픈해 버리자.'

자신이 아우테리카 차원의 성자라는 것을.

물론 모든 것을 백 퍼센트 공개할 수는 없었으니 약간의 설정 수정은 불가피했다.

사실 본체의 정체만 드러나지 않는다면야 뭐가 어떻게 되든 별 상관이 없긴 했으나, 그래도 더 좋은 방법이 있다면 그쪽을 택하는 게 좋지 않겠는가?

거기다···.

"그, 그럼 백기사님은··· 아니, 그러니까···."

"하인리히 세인트 랜드가드입니다."

"예, 예. 그러니까 하인리히 세인트 랜드가드님의 말씀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이 과도한 열기와 관심을 다른 방법으로도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현대 사회에서 대중의 관심과 지지는 곧 힘이자 권력.

그것을 잘만 이용할 수 있다면 앞으로의 일을 훨씬 편한 방향으로 이끌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나?

"예, 전 여러분들이 아우테리카 차원이라 부르는 곳에서 왔습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한껏 긴장한 얼굴의 남자가 든 카메라에 시선을 준 하인리히는—.

"···지구인이 아닌, 이세계인이라 할 수 있겠지요."

부드럽게 웃는 얼굴로 아무렇지 않게 폭탄을 떨어뜨렸다.

"주신의 뜻에 따라, 저희 아우테리카를 비롯한 전 차원에 드리운 악을 뿌리 뽑기 위해서."

괜찮다.

어차피 이제 사기 치는 건 익숙하니까.

따지고 보면 그리 틀린 말도 아니었고.

'어디 한번 엿 돼 봐라.'

하인리히의 전신에서 상서로운 후광이 휘몰아쳤다.

'대박이다.'

전대미문.

그 말이 딱 들어맞는 상황에 병원 로비에서 하인리히를 카메라 화면에 담던 청년이 침을 꿀꺽 삼켰다.

'세상에, 이만한 특종이라니! 내게 이런 행운이 올 줄이야!'

지금 그는 카메라를 든 채 인터뷰를 하고 있었지만 기자는 아니었다.

이제는 그리 특별하다고 볼 수도 없는 직업, 인터넷 개인 방송이 바로 그가 종사하고 있는 일이었으니.

굳이 특별한 부분을 하나 꼽자면··· 그는 귀환자 출신이었고, 그런 자신의 배경을 이용한 덕분에 나름대로 이름을 알리는 데 성공했다는 점 정도일까.

하지만 경지가 그리 높지 못한 데다 고유스킬도 눈에 띄지 않는 종류였던 탓에 방송 규모는 대기업이라 불리기에 한참 부족했다.

'그런 내가 화제의 백기사와 최초로 단독 인터뷰를 한 것도 모자라, 그 내용이 이 정도 빅뉴스라고?'

어쩐지 어젯밤 꿈자리가 유독 좋더라니 이런 행운이 찾아오려고 그랬던 모양이다.

청년은 자신을 이 병원으로 오게 만든 예지몽 계열의 고유스킬을 떠올리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스킬 레벨이 낮은 탓에 그동안은 다음날 닥칠 길흉화복을 대충 어림짐작하는 것 정도밖에 할 수 없었는데···.

-???

-이세계인이라고? 귀환자가 아니라?

-와ㅋㅋㅋㅋ 이거 뭐냐ㅋㅋㅋ

-?????

-진짜인가? 아니면 그냥 관종인가??

지금도 엄청난 속도로 올라가는 채팅창을 보니 잭팟도 이런 잭팟이 따로 없었다.

그는 평소의 몇 배를 넘어 아직까지도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는 시청자 수를 힐끔거리다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앞의 성기사에게 시선을 돌렸다.

투구를 벗은 맨얼굴로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는 이국적인 미남자.

자신이 용기 내서 한 인터뷰 요청에 흔쾌히 응해준 그는 이 와중에도 계속해서 신성력을 내뿜어 병든 자들을 치유하고 있었다.

어느 모로 보나 그 모습은 그야말로 구세의 영웅 그 자체였다.

'···사실 인터뷰 내용의 사실 관계 따윈 아무래도 좋지.'

솔직히 말하자면 그도 하인리히의 발언에 회의적인 입장이긴 했다.

뜬금없이 다른 차원에서 넘어온 이세계인이라니.

아무리 백기사가 여러 차례 어마어마한 신성력을 증명했다고 하나, 그것이 그가 다른 세상의 존재라는 근거는 되지 못했다.

고작 당사자의 주장 한마디로 지금까지 없었던 예외를 인정하는 것보단 확실한 증거가 나올 때까지 부정하는 게 합리적일 수밖에 없지 않나?

"전 차원에 드리운 악이라면···?"

"그들은 수많은 차원에 숨어들어 다양한 방법으로 세상을 멸망으로 몰아갑니다. 저희 아우테리카의 경우로 예를 들자면··· 불사왕이라는 존재가 그 일환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청년은 개인적인 감상과는 달리 여전히 진지한 태도로 백기사 하인리히와의 인터뷰를 계속했다.

그것이 저 최상위권 귀환자의 장난에 불과하건, 광신에 매몰되어 돌아버린 정신이상자의 헛소리이건.

그 내용의 진위 판단은 자신이 하는 게 아니었으니까.

-어이가 없네;; 설마 미친놈이셨던 건가...;

-전 믿습니다! 백기사님 만세! 하인리히 님 만세! 아우테리카 님 만세!

-정보) 이계 전송이 시작된 지 20년도 넘게 지난 지금, 그간 자칭 이세계인은 전 세계적으로 무수히 많았지만 제대로 인정받은 경우는 단 한 건도 없다.

-ㅋㅋㅋ개꿀잼 몰카인가? 이 집 잘하네ㅋㅋㅋ

-지금까지 없었다고 앞으로도 없을 거라는 건 좀. 어떤 가설을 증명하기엔 20년은 너무 짧지 않냐.

-아니, 선생님. 그니까 증거 가져오시라고요 증거!

믿을지 말지의 여부 판단은 전적으로 시청자 본인들의 몫.

그의 역할은 오로지 지금 상황을 전달하는 것뿐이었다.

인지도 급상승과 더불어 쏟아지는 후원금은 그 과정에서 딸려 오는 달콤한 꿀이었고.

그리고 당연하지만.

여러 의견이 맞붙으며 혼재된 가운데, 아직도 대세인 의견은 말도 안 되는 주장이라며 믿지 않는 쪽이었다.

'뭐, 그것도 예상했지.'

그런 여론이 흐르는 채팅창을 초인적인 동체시력으로 슬쩍 훔쳐본 하인리히가 내심 수긍했다.

지구에서 이세계 전송이 시작된 지 어느덧 20여 년이 훌쩍 지났다.

그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지구인 각성자만이 차원의 법칙을 무시할 수 있다는 것은 하나의 법칙으로 정착한 지 오래였다.

그런데 갑자기 이세계인이 지구에 나타났다니?

당연히 그런 뜬금없는 주장을 쉽게 믿을 수 있을 리 없었다.

"···다수의 차원을 멸망으로 이끈 놈들입니다. 그게 무엇이건 그 의도가 세상에 그리 이로운 방향은 아니겠지요. 물론 그건 놈들이 숨어있는 이 지구도 해당합니다."

그러나 하인리히는 그간 단련된 표정 관리를 선보이며 끝까지 진중하게 말을 이었다.

당당함과 자기 확신은 논리와 함께 남을 설득하는 결정적인 요소 중 하나.

"그들이 세상에 남아있는 한, 어느 세상에서도 평화는 오지 않습니다."

그에 번천회와 관련된 부분에 한해서는 확실하게 진실만을 말한 그의 '믿음'은, 곧 그 아득한 격에서 새어 나온 존재감은 물론 「대축복 : 빛의 기사」의 아우라와도 뒤섞이기 시작했으며.

"그것이 제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이유이지요."

그것은 자연스럽게 눈에는 보이지 않는 카리스마의 형태로 퍼져나가 다른 이들의 사고(思考) 일부를 집어삼켰다.

마치 사이비 교주라도 되는 것처럼.

'···어? 설마 진짠가?'

그리고 가장 가까이에 있었기에 그 아우라를 정통으로 마주할 수밖에 없었던 방송인 청년은 이내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연신 눈을 껌벅였다.

자신은 상당히 냉철하게 판단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고유스킬 덕분에 자연스럽게 발달한 그의 직감이 저 말이 사실이라고 말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또 현실에서의 영향력에 비하면 다소 미약한 효과였지만,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렌즈 너머의 인터넷 세상도 마찬가지였다.

-??? 진짜 모르겠네;; 일단 난 중립.

-사실 진짜라면 어차피 금방 밝혀질 텐데 굳이 힘 뺄 필요 없지.

-아ㅋㅋ 난 증거 없으면 안 믿는데ㅋ;

-와, 근데 진짜 잘 생겼다. 얼굴만 보고 살아도 행복할 듯.

-성자님 믿습니다! 그러니 제발 인천에 좀 와 주세요ㅠㅠ 저희 할머니가 아프신데 시간이 얼마 남지 않으셨다고 해서···.

당연하지만 고작 말 몇 마디로 아예 여론이 뒤바뀔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어쩌면'이라는 생각을 심는 데 성공한 건 틀림없을 터.

'지금은 그 정도만이라도 충분해. 어차피 이후에 차차 증명만 하면 해결될 문제니까.'

사실 그것도 이미 방법을 생각해 두었다.

결국 그들은 전대미문의 사태에 도저히 수긍하고 있지 못할 뿐이었다.

그랬기에 어떻게든 이해할 수 있는 영역 안에서 버티며 자신을 납득시켜 보라며 고집부리는 것이리라.

'그럼 아예 지금까지의 상식이란 범주를 넘어서는 다른 사례들을 들이밀어 주면 돼. 그렇게만 된다면···.'

자연스럽게 하인리히의 말에 무게감이 실릴 수밖에 없을 테고, 번천회는 지금까지처럼 계속해서 숨어있을 수도 없게 될 것이다.

여론전에 대응하기 위해서든 실질적인 무력 투사를 위해서든, 어떤 식으로든 약간이라도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게 되겠지.

'···그때부터 본격적인 시작이다.'

번천회라는 악의 조직을 이 세상에서 지우기 위한 본격적인 전쟁이.

하인리히가 눈을 부드럽게 휘며 은근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의 감각으로 전보다 더 빠르게 범위 내로 접근하는 다수의 기척이 느껴졌다.

계획은 지금도 순조롭게 진행 중이었다.

***

인도의 수도 뉴델리.

"···저건 도대체···."

복잡한 만다라 패턴의 직물들이 미로처럼 세워진 방 안에서 한 여성의 떨떠름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어두컴컴한 실내를 밝히는 다수의 촛불과 금속 제구들의 반사광, ···그리고 그것들과는 다소 이질적인 전자기기의 화면에서 비치는 청백색 불빛.

좌식 소파에 반쯤 누워 있던 갈색 피부의 여성이 살짝 미간을 찌푸리고 그 태블릿의 화면을 노려보았다.

-저는 이 세상에 오래 있을 수 없습니다. 신의 뜻에 따라 여러분들에게 미리 경고하기 위해 방문하긴 했습니다만, 아직 저희 세상의 문제도 전부 끝난 게 아니니까요.

-아, 얘기는 들었습니다. 그 불사왕이라는 마왕과의 싸움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했었죠.

-그렇습니다. 인위적인 방법에 의해 저희 세상에서 발아한 악의 씨앗이지요. 아무래도 그쪽이 모두 정리되기 전까지는 자주 오기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지금도 조금 무리한 감이 있어서···.

-세상에! 그럼 정말 두 세상을 마음대로 왕복하실 수 있다는 뜻이신···.

무섭게 화면을 노려보는 그녀의 이마에서 물방울 모양의 붉은 보석이 요사한 광채를 흘렸다.

그렇게 한 손에 든 물담배의 파이프는 아랑곳하지도 않은 채 한동안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던 그녀, 오라클은 재생이 모두 끝난 화면이 멈추자 지그시 눈을 감고 미간을 주무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뭐지? 대체. 내 통찰이 또 빗나갔다고? 그것도 이 정도로 거대한 차원의 변곡점이 될 수 있는 사안이?'

거기다 그 발원지가 이번에도 한국이었다.

가장 먼저 하회탈이라는 불확정 요소가 등장해 그들의 계획을 훼방 놓았던 지역.

이후 하인즈라는 흡혈귀가 자신들에게 날을 세우며 암흑가를 통제하기 시작했던 지역.

'그런데 이번에도···.'

어마어마한 변수가 될 게 틀림없는 이세계의 성자라는 녀석이 툭 튀어나와 버렸다.

아니, 변수고 뭐고 당장 대응하지 않으면 모든 계획이 송두리째 흔들릴 수밖에 없는 대형 폭탄이나 다름없었다.

'이쯤 되면 이제 확실하다 봐야겠군.'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그간 한국에 존재하던 '뭔가'가 슬슬 움직임을 시작했다는 걸.

그리고 아마 그것이 줄곧 한국에 대한 통찰을 가로막던 무언가겠지.

"으음···."

상황이 그쯤 되자 오라클은 최초에 세웠던 자신의 계획에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자원은 한정적이니 불확정 위험 요소가 잠재된 한국에 추가로 투자하기보단, 중국과 일본에 집중한 뒤 그걸 이용해 한국을 간접 통제하는 게 최선이리라 판단했거늘.

'차라리 일본을 포기하고 그 자원을 모두 한국에 집중했다면···. 이상 상황을 사전에 차단할 수 있었을까?'

이제 와선 아무런 의미 없는 가정일 뿐이었다.

애초에 불확정 요소가 있는 이상 투자 대비 효율도 극도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을 테고.

실제로 이미 강환계에서 현경의 고수가 되어 돌아와야 했을 인재 하나가 타이밍 나쁘게 종적이 끊겨 버리지 않았던가?

애초에 초월자급으로 성장할 후보 하나를 지원하는 데도 만만찮은 자원이 소모되는 만큼, 당시의 효율을 위해서라면 한국은 버리는 게 최선이었다.

"후우— 이미 지나간 일은 어쩔 수 없지."

그렇게 다시 생각을 정리한 오라클은 한 손에 쥐고 있던 물담배 파이프를 입에 가져가 깊게 빨아들였다.

어쨌든 상황 파악은 마쳤으니 이제 대응 방안을 강구할 때였다.

'하회탈이라는 천둥벌거숭이가 벌인 짓을 수습해 중국에 대한 통제력을 회복한 게 불과 얼마 전이건만.'

최대한 빨리 일을 바로잡느라 얼마나 많은 수고와 자원이 소모되었는데 이런 일이 또 연달아서 터지다니!

이번에는 흑마법사 하회탈과는 정반대의 타입인 성자 백기사란 놈이 태그라도 하듯 사고를 치고 있으니 속이 터질 지경이었다.

"닥터는?"

그녀는 그런 마음을 담아 파이프에서 입을 떼고 가볍게 한마디 툭 내뱉었다.

그러자 언제부터 그 자리에 있었는지, 전신을 검은 천으로 두른 인영 하나가 바닥에 공손히 부복하며 그녀의 질문에 답했다.

"유럽 쪽 일을 처리하느라 바쁘니 이쪽 일은 전부 알아서 하시랍니다. 닥터는 루마니아에서 하인즈라는 흡혈귀를 생포할 예정이시라고···."

"하! 그 미친 인간은 당장 뭐가 중요한지도 파악하지 못하는 건가? 지금은 그딴 실험체 하나에 신경 쓸 때가 아닌데···!"

닥터가 뭐에 그리 집착하고 있는 건지는 그녀도 익히 알고 있었다.

그 계획이 성공적으로 진행된다면 앞으로의 일에 매우 큰 도움이 되리라는 것도.

하지만 모든 일에는 우선순위라는 게 있지 않던가!

'그 흡혈귀가 유럽의 다른 지역을 도는 시간까지 생각하면 시간도 충분하건만.'

하여간 그 인간은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었다.

회주만 아니었으면 애초에 함께할 일도 없었을 텐데.

그런 불만을 억지로 삼키며 한참 물담배를 뻐금거리던 오라클이 이윽고 연기와 함께 한숨을 푹 뱉어냈다.

뭐 어쩌겠나, 회주가 자리를 비운 지금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니.

"그래도 공론화가 되기 전까진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았을 테니, 지금부터 미리 준비를 해 둔다면···."

그렇게 오라클은 조원이 탈주한 조별 과제를 수습하기 위해 또다시 골머리를 싸매야만 했다.

물론, 과연 수습해야 할 일이 거기서 끝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지만.

***

비행기에 숨어들어 지구 반대편에 가까운 프랑스까지 날아왔던 하인즈 2세.

그가 프랑스 암흑가 최대 규모의 조직, 테르미도르의 폭군 빅토르 발자크를 '교육'하는 데에는 약간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이 정도면 된 것 같군. 그럼 슬슬 다음으로 넘어가 볼까?'

그리고 그 교육이 어느 정도 끝났을 때, 그는 몰래 밀입국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은밀하게 비행기에 올랐다.

그의 손아귀에 들어온 테르미도르에서 가짜 신분을 추가로 마련해 주기는 했으나, 유럽 공항에선 한국보다 흡혈귀 검문이 더 까다로웠기에 번거로운 일을 피하기 위해선 이 방법이 최고였던 것이다.

'어차피 비행시간도 그리 길지 않을 테고.'

마침내 그가 탄 비행기가 별문제 없이 이륙해 날아올랐다.

다음 목표물이 있는 장소.

이탈리아를 향해.

대다수의 분신이 활동하고 있는 아우테리카.

발을 들인 지 얼마 되지 않은 차원인 강환계.

그리고 본체가 있는 중심 거점, 지구까지.

여러 개의 몸을 가지고 다양한 세상을 동시에 살아가면서 느낀 것은 정말 수없이 많았다.

하지만 그렇게 체감할 수 있었던 요소들 중에서도 인상적인 점을 단 하나만 꼽으라면 주저 없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시차'였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겠군. 요즘 지구 쪽에 신경을 좀 많이 쓰긴 했는데···.'

무려 열 배에 달하는 시간차.

그 차원 간의 차이는 절대 녹록지 않았다.

지구에서 삼 일만 보내도 이세계에선 대략 한 달 정도의 시간이 흐르니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고.

그 때문에 지구에서는 겪은 사건들의 규모에 비해 흐른 시간 자체는 짧다고 볼 수 있었으나, 다른 세상의 경우까지 따지자면 딱히 그런 것도 아니었다.

아우테리카, 이온 대륙의 중심에 위치한 성지.

"오셨습니까, 성자님. 이번엔 조금 일찍 돌아오셨군요."

"아, 라이린 경. 오늘도 수고하십니다."

막 정문을 지나 로셀리아 대신전으로 들어선 하인리히가 자신에게 인사를 건네는 푸른 머리의 여성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한때 그도 소속되었던 광휘수호 성기사단의 일원으로, 주신교단의 많은 기사단 중에서도 로셀리아 대신전 내부 수호를 전담하는 엘리트 성기사였다.

마침 근처를 지나는 듯했던 그녀는 그에게 용무가 있었는지 절도 있는 걸음으로 다가와 예를 갖추곤 마저 말을 이었다.

"성녀님께서 조금 전에 혹시 성자님께서 돌아오셨는지 몇 차례 확인하셨습니다. 아무래도 무슨 용건이 있으셨던 것 같습니다만···."

"아, 제가 때맞춰 왔나 보군요. 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이린 경."

"아닙니다, 성자님. 그럼 전 다시 가보겠습니다."

"예, 수고하십시오."

그렇게 용건을 전달한 그녀는 꾸벅 고개를 숙이곤 다시 각진 동작으로 몸을 돌렸다.

그가 대신전 내부로 처음 발령받았을 때의 사수가 그녀였었는데, 그때의 인연으로 지금도 다른 이들보다는 편하게 대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는 직위에 비해 파격적으로 급성장한 케이스라 친분이 있는 이들 자체가 좀 드문 편이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대신전 내부에 불사왕의 파편 중 하나가 있다는 걸 처음 알려준 것도 라이린이었지.'

물론 그것도 경비 업무에 포함된 절차 중 하나였지만, 어쨌든 그것이 이후 이어진 자신의 행보에 도움이 된 것도 사실이었다.

그에 피식 웃음을 터트린 하인리히는 다시 대신전 내부로 발걸음을 옮기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나저나 리에스타가 날 찾았다고 했지. 역시 이번에도 지구에 대해 물어보려는 건가? 뭐, 몇 번이나 왔다 갔다 했으니 대충 이때쯤 올 거라고 짐작했으려나.'

당연하지만 그는 주신교단에 아무 언질 없이 무단으로 지구로 넘어간 게 아니었다.

아무리 최근 백색 거인 사태가 종식되며 다소 여유가 생겼다 한들, 성자이며 용사인 교단 무력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가 마음대로 자리를 비울 순 없지 않겠는가?

'그래서 그냥 이쪽에도 솔직하게 말했지.'

당분간 잠깐씩 자리를 비워서 이세계에 좀 다녀오겠다고.

'물론 그것도 주신의 은혜로 포장하긴 했지만.'

어차피 상대는 하나같이 광신도들, 차원을 넘어선다는 위업조차 신의 위광 앞에선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렇지 않아도 헤스페론에 이어 이세아까지 이세계인이라 밝힌 이후로 호기심을 가지게 된 성녀가 따로 다른 세상에 대한 조사를 벌이는 중이기도 했으니.

'조만간 이세아에게도 따로 말을 꺼내봐야겠군.'

이제 그녀도 귀환 예정 시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대충 불사왕과의 결전이 끝난 직후쯤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

그녀가 지구로 돌아간 이후에 사실을 알게 된다면 배신감을 느낄 수도 있으니, 이번에 미리 언질이라도 해 두는 게 여러모로 좋을 것 같았다.

'그렇게 하면 이후 지구에서도 협조 관계를 계속 이어갈 수 있을 테고.'

아우테리카에 남겨진 인연 때문에 귀환에 쓸 카르마까지 몽땅 털어 넣었던 그녀였다.

그만큼 정이 많은 그녀에게 차원 간의 소통 창구가 되어 줄 하인리히는 마른 땅에 소나기 같은 존재가 되어줄 것이다.

'이제 이세아도 뭔가 계기만 있으면 벽을 넘어설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만한 수준의 전력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법.'

이곳에 있을 때는 지구에 있을 가족에게 대신 안부를 전해줄 수 있고, 돌아가고 나서도 라일리와 간접적인 소통을 계속할 수 있게 될 테니 그녀에게도 좋은 일일 터.

하지만 내심 걱정되는 부분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하회탈과 불사왕이 동일인이라는 건 어떻게든 숨겨야 하는데.'

이세계에선 마왕이었던 악당이 지구로 돌아와 보니 다크 히어로로 활동하고 있다고?

그 양측 모두 당황스러울 조우를 막기 위해선 이제 한스의 활동 영역을 온전히 해외로 고정할 필요가 있었다.

'어차피 이제 한국은 안정된 상태니 굳이 한스까지 있을 필요도 없어. 일단 정면으로 마주치는 것만 무조건 피하면···.'

사진이나 동영상 같은 매체야 그저 비슷한 인물이라고 우기면 그만이었다.

애초에 성향 자체가 너무나도 다른 데다, 칙칙한 검은 로브는 딱히 특별할 것도 없었고, 하회탈은 원래부터 한국의 상징과도 같은 가면이었으니까.

'이세아가 한국인이라는 걸 안 후부턴 아우테리카에서는 일부러 부서진 가면만 쓰고 다니기도 했고.'

하지만 이미 몇 차례나 직접 손속을 나눈 상대와 직접 마주해서까지 정체를 속일 자신은 없었다.

이미 안방극장도 다 끝난 상황에서 들킨다고 큰일이 나는 건 아니었으나, 처음부터 문제가 될 소지는 차단하는 게 좋지 않겠는가.

'그럼 다시 며칠 정도 있다가 지구로 가야 하니 밀린 일 처리를···. 아, 일단 리에스타에게 먼저 가 볼까.'

「이계전송진 소환」의 사용주기는 지구 시간으로 12시간에 한 번씩.

지구에서의 활동이라 해 봐야 고작 하루 몇 시간이 고작이었으니 충분히 양립할 수 있었다.

물론 전송진을 이렇게 타이트하게 운용하면 다른 아바타들의 유동성이 조금 떨어질 우려가 있었지만···.

'당분간은 급한 일도 없으니 별 상관없겠지.'

이제 아우테리카에 남은 큰 사건은 안방극장의 마무리뿐.

폭풍전야와 같은 한때가 지나고 있었다.

***

타라크에 위치한 한 개인 공방.

"오오! 드디어!"

얼마 전에 시제품을 테스트하며 한바탕 소란을 일으킨 직후, 하워드는 자오닉의 공방에 얹혀살던 생활을 벗어나 때마침 준비가 끝난 개인 작업실로 거처를 옮겼다.

자오닉은 지금까지처럼 계속 있어도 상관없다고 했으나, 휴버트 상회를 등에 업고 있는 자신이 돈이 없는 것도 아닌데 굳이 신세를 지는 것도 뭐해 단행한 것이었다.

어차피 이웃이나 다름없는 거리여서 매일같이 교류하는 건 달라지지 않기도 했고.

"드디어 완성이구나!"

그래도 온전히 자신만의 비밀기지라는 것은 묘하게 가슴을 끓어오르게 만드는 뭔가가 있었다.

그 덕분인지 이사한 첫날부터 시작해 뭔가에 홀린 듯이 작업에 매진한 하워드는 몇 주 만에 마침내 유의미한 결실을 거둘 수 있었다.

"만능 전투용 전신 슈트 Mk.2의 왼쪽 팔!"

그래봐야 아직은 팔 한쪽에 불과했지만.

두 손으로 그것을 번쩍 치켜든 그는 감격스러운 눈으로 다시 한번 자신의 역작을 훑어보았다.

척 보기에도 심상치 않은 기세가 풍기는 기계 팔.

고작 파츠 하나였으나 이건 결코 평범한 물건이 아니었다.

거기에 사용된 재료나 기술은 두말할 것도 없고 안에 내장된 에너지원조차 범상치 않았던 것이다.

'역시 기술도 기술이지만 제작에 있어서 자본은 최고의 미덕이라니까!'

최상급 마정석.

특급 마정석이라는 드래곤 하트의 바로 아래 단계에 위치한 귀물이었다.

제국의 황궁조차 비상 상황이 아닐 때는 드래곤 하트가 아닌 최상급 마정석을 결계의 핵으로 사용할 정도니, 그 가치는 말해봐야 입만 아프리라.

'저번엔 혁명가 놈에게서 디아나를 빼돌린다고 하나 날려 먹긴 했지만.'

애초에 그쯤 되는 물건을 소모품으로 써먹었으니 별다른 능력이 없던 휴버트가 그런 괴물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보물이 이번엔 고작 팔 한 짝을 구동하기 위한 에너지원으로써 내장되어 있다는 뜻이었으니···.

'강환계의 만년한철과 마계산 아다만티움의 합금이 아니었으면 어림도 없었겠지.'

두 재료 모두 내구성은 물론이고 에너지 저항력이 뛰어나기로 이름 높은 금속들이다.

그런 것들을 합금으로 만드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으나, 하워드는 「불과 금속의 노래」와 「야금술」, 「기술 혁명」을 이용한 노력 끝에 기어코 성공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탄생한 황금비율의 합금이 이 파츠의 내부에 빼곡하게 깔려 회로 역할을 하고 있었으니 그만한 에너지에도 견딜 수 있는 물건이 탄생한 것이었다.

판타지의 드워프가 무협 세계와 마계의 재료를 가지고 미래 과학 기술을 접목해 만든 강화 외골격이라!

"껄껄껄~ 이쯤이면 소형 우주선 하나를 팔에 달고 다니는 것과 다름없겠구나! 모든 파츠가 완성되면 과연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그렇게 신나서 기계 팔 한 짝을 들고 덩실덩실 춤을 추던 하워드가 갑자기 우뚝 멈춰 섰다.

그리곤 가만히 선 채 그것을 들여다보다가 진지하게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뭔가를 고민했다.

"쓰읍— 이거 이제 슬슬 제대로 된 이름이 필요할 것 같은데."

이런 훌륭한 물건에다 대고 언제까지 '만능 전투용 전신 슈트'라는 밋밋한 이름으로 부를 순 없지 않나.

좀 더 귀에 확 들어오는 멋들어진 고유명사가 필요한 순간이었다.

"흐음, 역시 이건 '아이언 가이'로··· 아니, 아니지. 그러면 너무 짝퉁 같으니까. 그럼 '캡틴 아우테리카'···도 마찬가지군. 크흐흠."

이후 작명의 고통에 시달리며 끙끙거리길 한참.

그러다 갑자기 모든 게 부질없게 느껴진 그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에잉, 그냥 '티탄' 정도가 좋겠구만! 작은 거인 같은 느낌으로다가. 생각해 보니 나도 드워프인데, 이만한 물건이라면 신의 이름에서 따오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

그렇게 대충 이름을 정한 하워드가 혼잣말을 중얼거린 순간.

화르륵—

옆쪽의 화로에서 튀어나온 한 가닥의 불줄기가 거칠게 일렁거리며 그의 주위를 휘감았다.

그리고 그 불길이 사라진 직후에 그의 앞에 몇 줄의 알림창이 떠올랐다.

"타이탄이 당신을 굽어봅니다."

"개체가 조건을 달성하여 성장합니다. 특수스킬「불과 금속의 노래」가 「불과 금속의 조율자」로 진화합니다."

이전에도 한 번 경험해 본 적이 있는 일이었다.

"이건··· 화로의 축복?"

화로 앞에서 뭔가 의미 있는 물건을 만들거나 신의 마음에 드는 장인이 벽을 넘어서 성장 할 때 나타나는 관심의 표현이라고 했었지.

'그렇다는 건, 이거 역시···.'

아무래도 신께서도 마음에 드셨던 모양이었다.

자신의 이름을 딴, 원래는 세상에 없었던 이 새로운 발명품이.

***

솨아아—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가 잔잔하게 울려 퍼졌다.

공기 중에 살짝 섞인 짭짤한 소금기마저 이색적인 감상이 들게 하는 물 좋고 바람 좋은 바닷가.

"으으음!"

그 휴양지와도 같은 곳의 절벽 안쪽 은신처에서 누군가가 용을 쓰는 소리가 작게 흘러나왔다.

"이걸 이러케···."

앳되기 그지없는, 제대로 발음되지 못하고 뭉개지는 그 말투의 주인공은 자기 목소리처럼 매우 어린 외양을 하고 있었다.

찰랑거리는 금발과 촉촉하게 빛나는 금빛 눈동자, 부드럽고 매끄러운 피부와 통통한 볼살이 매력적인 예닐곱 살의 귀여운 남자아이.

아우테리카에 남은 마지막 골드 드래곤 해츨링, 호루스였다.

그는 온갖 신기한 장비들이 늘어선 마법 연구실 의자 위에 올라선 채, 테이블 위에 놓인 무언가를 붙잡고 한참을 끙끙거리더니···.

"돼따!"

이내 만족한 듯 두 손을 번쩍 치켜들며 환호성을 내질렀다.

그리곤—.

"호오, 그건 무엇이냐?"

"으익?!"

갑자기 들려온 늘어지는 목소리에 움찔했다가, 두 손을 든 자세로 뒤를 돌아보며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언제 다가왔는지 뒤에는 골드 일족의 엘더 드래곤 슈리하트겐이 반쯤 감긴 시선을 그에게 향하고 있었다.

"헤헤헤···."

"···허어, 평범한 물건은 아니로군. 그런 게 어디서 난 거지?"

잠시 흐뭇하게 호루스를 바라보던 노룡의 시선이 그 앞에 놓인 물건으로 향했다.

그의 육체는 죽어가는 생을 억지로 붙잡느라 동면 상태나 다름없어졌지만, 그것에게선 그런 상태로도 알아챌 수 있을 정도로 예사롭지 않은 기운이 풍기고 있었다.

"이건··· 드워프의 솜씨로구나. 제법, 아니. 굉장히 잘 만들어졌군. 처음부터 인챈트를 염두에 두고 제작한 건가?"

그 물건을 살펴보던 그의 피곤한 표정에 서서히 놀라움이 들어찼다.

"허, 이 정도면 단순히 마법에 해박한 정도가 아니로군. 최소한 대마법사급의 식견이 없다면 어림도 없을 터인데."

그건 상당히 놀라운 일이었다.

애초에 그 드워프라는 꼴통 종족은 오로지 제작만으로 마도구를 뛰어넘는 물건을 탄생시키는 걸 자랑으로 여기니까.

일단 만들어진 물건에 인챈트를 더하는 정도라면 모를까, 아예 설계 단계에서부터 인챈터의 추가 가공을 염두에 두고 '협업'하는 건 그리 자주 있는 일이 아니었다.

하물며 그 밑바탕이 된 지식수준이 대마법사급이라?

'이 아이가 거기에 인챈트를 한 건가? ···이것도 훌륭하군. 설마 벌써 이 정도 수준이 됐을 줄이야. 처음부터 짜 맞춘 것처럼 아주 조화가 잘 됐어. 이쯤이면 아예 처음부터 한 사람이 만들었다고 봐도 되겠는데.'

새삼스러운 시선으로 호루스를 흘깃 바라본 그가 다시 천천히 그 물건을 감상했다.

미묘한 검은빛의 금속이 주가 되어 유려한 곡선을 그리는 매끄러운 디자인.

어마어마한 세월을 살아온 그조차 처음 보는 양식의 갑옷, 그 왼팔 파츠를.

다른 아바타들이 차근차근 성장하고 있는 동안 해츨링 아바타 호루스도 그저 놀고만 있지 않았다.

이젠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엘더 드래곤 슈리하트겐의 인도에 따라 도착하게 된 은밀한 레어.

그곳에 머무르는 동안 그는 그야말로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었다.

값을 따질 수 없는 귀중한 교보재들과 안식에 들기 전에 최대한 많은 것을 남겨주려는 노룡의 마지막 가르침, 그리고 태생적으로 천부적인 재능에다 그것을 한껏 증폭시키는 '성장의 비약'까지.

때문에 호루스는 나이로만 따지자면 여전히 해츨링이라 할 수 있었으나, 실질적인 능력은 이미 청소년기인 쥬브나일을 넘어서 성룡인 어덜트 드래곤에 근접할 수준까지 이르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나이와 강함이 정비례하는 드래곤으로서는 이레귤러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지.'

단순히 우량아라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돌연변이 그 자체.

애초에 시스템과 관련된 이런저런 보정이 없었다면 탄생할 수 없었을 불가해한 존재였다.

그리고 그러한 영향들은 아바타의 성장에도 자연스럽게 반영되었다.

-개체명 : 호루스

-종족 : 드래곤 (해츨링)

-공통 특성 : 「마인드 허브」, 「페르소나」, 「제노글로시」

-개체 특성 : 「골드 드래곤」, 「만물의 군림자」, 「폴리모프」, 「용언 마법」, 「신비의 탐구자」, 「섭리의 저항자」

-특이 사항 : '성장의 비약'을 통해 개체가 매우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신비의 탐구자」의 영향으로 모든 마법 계열에 강한 보정과 적성을 가진다. 「섭리의 저항자」의 영향으로 개체에 가해지는 제약을 무시 또는 완화한다. 그에 해츨링의 육신으로는 담을 수 없는 힘을 품을 수 있게 되었다.

드래곤이 가진 종족 특성을 더욱 강화해 주는 「골드 드래곤」, 그리고 마력과 속성 지배력 등에 관여하는 「만물의 군림자」에 이어 새로 추가된 자기 강화계 스킬들.

호루스는 처음에 기대했던 대로 빠르게 쑥쑥 커가고 있었다.

'사실 이 정도나 되니까 '티탄의 왼팔'의 인챈트를 맡긴 거기도 하지.'

추가 효과를 부여하는 인챈트는 같은 마법 계열인 불사왕 한스도 할 수 있었지만, 그는 그쪽에 대해선 정말 일말의 가능성도 고려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막대한 기운을 품은 티탄에 한스가 개입한다면···.

'아마 착용하는 순간 사용자를 언데드로 만들어 버리는 저주받은 갑옷이 탄생하지 않을까?'

한스의 힘은 드래곤 하트조차 오염시켜 버릴 정도로 위험했다.

소유주의 안위를 무시하는 흑마도구를 만들 생각이라면 모를까, 그가 완성하고자 하는 티탄은 그런 용도의 물건이 아니었다.

'그럼 다음 단계로 가 볼까.'

그리고 지금 드워프의 신조차 인정한 발명품이자, 마법의 종주인 드래곤의 손을 거친 '티탄의 왼팔'이 있는 곳은 바로—.

"음, 역시 조금 버거울 것 같기도 한데."

한쪽 눈에 검은 안대를 쓰고 오른팔엔 신비로운 문양이 새겨진 붕대를 감싼 청년.

비장한 표정을 짓고 있는 헤스페론의 두 손 위였다.

***

티탄의 사용자로 누가 적합할지는 제작 초기 단계부터 계속해서 고민하던 주제였다.

혁명가에게 타라크가 습격당한 위기 상황에서 상인 휴버트가 잠시 사용하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별다른 능력이 없는 그가 주력으로 쓰기에는 여러모로 문제가 많았다.

애초에 그는 드워프 하워드처럼 비전투용으로 상정한 개체이기도 했으니까.

'휴버트에겐 비상용으로 간소화 버전을 만들어주면 되겠지.'

가장 걸맞은 적임자는 역시 헤스페론밖에 없었다.

사실 왼팔 파츠를 최우선으로 제작한 것도 처음부터 그를 염두에 뒀던 것 때문이기도 했고.

"후우—."

라일리 황녀 덕분에 황궁 내에 준비된 그만의 전용 마법 수련실.

그 한가운데에서 매끄러운 금속 팔을 손에 쥔 헤스페론이 가볍게 숨을 골랐다.

"···대단하네요. 저도 제법 눈이 높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건 태어나서 처음 봤어요."

그에 함께 수련실에 들어와 구석에서 조용히 구경하던 라일리가 작게 감탄을 터트렸다.

교황의 장례와 정상 회의를 겸해 로셀리아 대신전으로 떠났던 그녀는 지금은 다시 황궁으로 돌아온 상태였다.

혹시 몰라 헤스페론이 복귀 날에 마중 나가기까지 했었는데, 당연하다면 당연하달까··· 이번엔 딱히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긴, 또 문제가 생겼다면 단순히 무능한 걸 넘어서 아예 황제가 배후에 있다고 봐야겠지.'

다행히 그런 최악의 사태는 일어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제 황태녀 책봉식이 코앞으로 다가온 상황인데 설마 정말 그렇기야 하겠냐마는.

"그래서 그것도 다른 곳에서 불러오신 건가요? 그 의안처럼?"

"아하하— 뭐, 그렇지?"

그리고 황궁으로 돌아온 그녀가 가장 먼저 추진했던 일이 바로— 헤스페론에게 의안 대신 새로 배양한 안구를 이식해 주는 일이었다.

'성의는 고맙지만 말이지.'

쓴웃음을 지은 그가 한 손을 올려 오른쪽 눈가를 덮은 안대를 위쪽으로 밀어 올렸다.

그러자 이 세상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이질적인, 은은하게 발광하는 신비로운 기계안이 밖으로 드러났다.

'뭐, 처음부터 라일리한텐 미리 말해둘 생각이기도 했으니까.'

인체 연성은 연금술사가 가진 최대의 비원이자 금기 중 하나였다.

그게 손실된 부위를 대체하기 위해 일부만을 배양하는 것이라 해도 절대 쉽지 않은 일이란 건 당연했다.

그런데 라일리가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온갖 압력을 넣어가며 겨우 진행한 일을 거부하고 나섰으니, 그녀를 납득시키기 위해선 그에 합당한 이유를 내놓을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와, 그건 아무리 봐도 신기하네요. 이렇게 다른 세계의 마도구를 진짜로 볼 수 있을 줄은 몰랐는데···."

드러난 그의 우안을 홀린 듯 바라보던 그녀가 작게 중얼거렸다.

하긴, 아무리 그동안 이세계인 두 명과 동고동락하며 익숙해졌어도 이렇게 대놓고 외계 문명을 접하면 신기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겠지.

"···조, 조금 멋진 것 같기도 하고."

헤스페론은 살짝 상기된 얼굴로 이쪽을 힐끔거리며 연신 헛기침하는 라일리를 보며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사이보그 의안은 판타지 세계의 주민에게도 통하는 건가.'

그리고 시야 한쪽에 떠오르는 그녀의 체온과 심박수 등의 건강 정보를 일별하며 다시 자기 손에 들린 금속 팔로 눈길을 돌렸다.

그것은 보이는 것 그대로 상당한 무게를 가지고 있었지만, 공통 특성으로 「괴력」을 가진 그에겐 적당히 묵직한 수준이었다.

'시작하자.'

이어서 깊게 숨을 들이쉰 그가 그 안에 천천히 자기 왼팔을 집어넣었다.

꾸드득—

그와 동시에 팔을 옥죄어 오는 독특한 감촉의 안감.

손끝부터 시작해 서서히 어깨 부근까지 집어삼켜 오는 티탄 내부와 그의 근육, 신경 등이 조금씩 동화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순조롭게 진행되는 상황에서도 살짝 찌푸려진 그의 미간은 펴질 줄을 몰랐으니.

'···역시. 개선을 했는데도 이 정도라···.'

장착부터 동기화와 기동까지 소요된 시간이 10여 초.

다른 갑옷과 비교하자면 그리 길다고 볼 수도 없었으나, 비상사태에 빠르게 대응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다.

'단순히 착용한다고 끝나는 갑옷이 아니니까 어쩔 수 없긴 하지만. 그렇다고 반응을 빠르게 하자고 출력을 줄이는 것도 아깝고.'

거기다 이걸 아공간에 넣고 다니다가 일일이 꺼내서 하나씩 착용해야 한다는 것도 문제였다.

비교적 장착이 간편한 팔 파츠도 이 정도인데 몸통을 비롯한 다른 부위까지 포함한다면···.

'역시 이걸 가장 잘 써먹을 수 있는 건 헤스페론밖에 없겠군.'

티탄이 장착된 왼손가락을 천천히 움직이던 그가 슬쩍 시선을 돌려 시야 한쪽에 떠오른 메시지를 응시했다.

-추정 에너지 : 12,257,225

-추정 위험도 : B

-킬로급 함선 원자로에 해당하는 에너지 반응 감지. 현 상태는 안정적이나 취급에 주의할 것.

'마력 은폐 쪽도 제법 신경 썼는데 이 정도라···. 그만큼 기계안의 성능이 좋은 건지 다 숨길 수 없을 만큼 에너지가 큰 건지 모르겠네.'

어느 쪽이든 지금 그가 해야 할 일은 하나였다.

잠시 메시지들을 바라보던 그는 주저 없이 티탄을 향해 「맹약의 사슬」을 사용했다.

우우웅—

그렇게 연결이 시작되고, 찌릿한 두통과 함께 금속으로 뒤덮인 왼팔이 요란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그 내부에 품고 있는 에너지양만큼 거친 반응.

척 봐도 결코 쉽지 않은 과정이 될 것 같았지만, 지금의 그에겐 확실하게 믿고 있는 점이 한 가지 있었다.

'자, 착하지?'

「맹약의 사슬」은 개체 간의 교감을 통해 인연을 엮어 계약을 맺는 스킬이었다.

그리고 헤스페론은—.

'교감은 이해에서 비롯되는 법이지.'

···티탄에 대해 세상에서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아주 작은 금속 쪼가리부터 시작해서 빼곡하게 새겨진 마력 회로 한 줄까지 전부.

누가 뭐라 해도 이 작품은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그'가 직접 만든 것이었으니까.

기이이잉—!

그 결과는 금방 나타났다.

기계안에 '티탄의 왼팔'에 대한 상세 정보가 주르륵 떠오른 순간.

감각이 뻗어 나가며 육체의 영역이 확장되었다.

지금 이 순간, 팔을 감싸고 있는 것은 단순한 금속 갑주가 아니라 그의 외피이자 팔 그 자체였다.

티탄의 복잡한 구조가 한 번에 뇌리에 틀어박히며 자기 몸을 다루듯 모든 기능을 사용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섰다.

위잉— 철컥!

차라락—

손등과 팔 옆면에서 튀어나오는 칼날과 주먹 부위에서 솟구친 날카로운 가시.

손바닥에 열린 포구(砲口)와 팔 곳곳에서 모습을 드러낸 부스터 등 부속 기능들을 이리저리 확인한 헤스페론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됐다.'

대충 점검을 마친 그는 다시 티탄의 장착을 해제했다.

그리고 그것을 정리해 아공간 마도구 안에 집어넣고 정면을 바라보았다.

"어? 다 끝났나요, 헤론?"

"아니, 아직 마지막 하나가 남았어."

그는 반짝이는 눈으로 흥미롭게 구경하던 라일리의 질문에 태연하게 답하며 텅 빈 왼손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이제 가장 중요한 것을 확인할 차례였다.

'그때처럼.'

그는 왼손을 앞으로 뻗은 상태에서 정신을 집중하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티탄."

이윽고 헤스페론이 그 이름을 부르자.

그것이 그의 부름에 응했다.

우웅—

텅 비어 있던 그의 왼팔을, 공간을 가르고 나타난 검은빛이 감도는 유려한 금속 갑주가 빈틈없이 휘감았다.

기이이잉—!

등장과 동시에 동체의 회로를 타고 빛의 선이 치달아 순식간에 기동이 완료되었다.

그는 고작 1초도 되지 않는 순간에 완전히 임전 태세를 갖춘 왼손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흡족하게 미소 지었다.

"···괜찮네."

곧바로 팔에다 소환함으로써 장착하는 시간을 생략하고, 계약 상태를 이용한 상시 동기화로 이후 과정을 무시한다.

오직 「맹약의 사슬」을 가진 그만이 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지금도 괜찮지만 전신 파츠가 전부 완성될 나중이 더 기대되는데? ···변신 히어로라니, 이거 참···.'

그렇게 만족스럽게 웃은 그가 강한 힘이 느껴지는 왼손을 움켜쥐며 감회에 젖어있을 때.

"어··· 크흠흠···."

뒤쪽에서 미묘한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어쩐지 뒤통수가 따갑다.

왠지 모르게 느껴지는 데자뷔와 함께 묘한 시선이 쿡쿡 날아와 박혔다.

"아."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돌린 그는.

라일리의 옆에서 어색한 웃음을 짓고 있는 이세아와 눈이 마주쳤고.

그와 동시에 들떠 있던 마음이 가라앉으며 자신의 행동을 객관적으로 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

"어, 힘든 게 있으면 도와주려고 했는데···. 라일리도 여기에 있다고 들어서···. 음···."

뭔가 미안한 듯하면서도 어색한 듯, 제대로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슬쩍 시선을 피한 그녀가 변명 같은 말을 흘렸다.

그렇게 잠시 머뭇거리던 그녀는 곧 뭔가를 결심한 듯 고개를 똑바로 치켜들고는, 전부 이해한다는 듯 따뜻한 시선을 보내며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멋진 능력이군요. 헤론과 잘 어울려요."

"아! 저도 세아 언니랑 같은 생각이에요. 진짜 멋있었어요!"

짝짝짝짝—

따뜻한 이세아의 격려에 동조하며 물개처럼 박수를 치는 라일리.

어째선지 그 반응이 더 아프게 다가왔다.

"······."

하지만 갑작스럽게 현실을 자각하게 된 헤스페론은 그들에게 차마 뭐라 하지 못하고 물끄러미 자신의 양손을 내려다보았다.

미래적인 금속 장갑과 오컬트적인 붕대에 감싸인 두 손바닥을.

'···어라, 이상하다? 중2병 성향은 분명 한스가 다 가져갔을 텐데.'

어째서 자신이 이런 취급을 받게 된 걸까.

그는 풀리지 않는 의문을 속으로 삼키며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물론 자동으로 눈꺼풀을 투시하는 기계안 때문에 별 효과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