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5화 [Episode 14] 흡혈귀 (2)
"사, 살려주세요.."
푸욱!
눈물 흘리며 애원하는 여자의 부탁에도 아랑곳 않고, 날카로운 송곳니 두 개가 여자의 목덜미를 꿰뚫었다.
"끄윽, 끅"
여자는 저항할 힘이 없어 그저 멍하니 허공만 올려다봤다.
실시간으로 자신의 피가 빨려나가는 것을 느끼며 좌절할 뿐이다.
"추워..."
대량의 피가 빠져나가며 체온이 급격하게 내려가고 있었다.
반대로 생명의 원천인 피를 빨아들이고 있는 흡혈귀의 생명력은 점점 더 강대해지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여자의 두 눈에서 생기가 사라졌다.
털썩.
"흐흐...."
하급 흡혈귀 제갈성규는 흡족해하며 입가의 피를 닦았다.
처음으로 대규모 사냥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열 명이 넘는 인원을 한꺼번에 사냥할 정도로 강력해진 자신의 힘에 취해 있기도 했다.
"많이 먹어라."
제갈성규는 생명을 잃은 인간들에 달라붙어 피를 빨아대는 최하급 흡혈귀들을 보며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여긴 완전 노다지야'
그가 시민권을 발급받고 이 안전 구역 안으로 발을 들이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처음에는 투명한 벽이 자신을 가로막더니 갑자기 '시민권'이라는 것을 제안했다.
제갈성규는 별 생각 없이 그것을 받아들였고, 영역 안에 진입했을 때에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딜 가도 인간 천지다'
흡혈귀들의 주식은 인간의 피였다.
그리고 그들은 인간을 많이 잡아먹으면 먹을수록 강해지고, 점차 성장한다.
당연히 인간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그런데 여기 있는 인간들은 많을 뿐만 아니라 질도 좋았다.
바깥에서 잡아먹는 것들과 비교하면 거의 몇 배의 효율이 나오는 것 같았다.
덕분에 제갈성규는 빠르게 강해질 수 있었다.
'이제 곧 중급으로 올라갈 수 있다. 그놈처럼'
자신을 쓸모없는 놈 취급하고 버렸던 그놈.
그놈과 대등한 힘을 손에 넣게 되는 것이다.
'대등한 정도로는 부족하다'
좀 더 많은 인간의 피를 마셔서 그 놈을 뛰어넘어야만 했다.
그리고 자신을 쓸모없는 놈 취급한 대가를 치르게 해 줄 생각이다.
'피의 복수를..'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강해지는 것뿐만 아니라 그가 이끌고 있는 집단 자체가 강해질 필요가 있었다.
'한 놈이 죽었나.'
현재 하급 흡혈귀인 제갈성규의 수준으로 부릴 수 있는 최하급 흡혈귀의 숫자는 다섯.
대규모 사냥 과정에서 한 놈이 죽긴 했지만, 상관없었다.
최하급 흡혈귀 하나 만드는 것쯤이야 어렵지 않았으니까.
'여기는 널리고 널린 게 인간이다'
자신이 중급에 오를 때쯤이면 부하들도 슬슬 하나씩 하급 흡혈귀로 승급할 것이다.
그놈들이 다시 새끼를 치듯이 최하급 흡혈귀를 생산하면 자신의 군체는 급격한 성장을 이룩하게 된다.
'그 상태로 이 주변에 있는 인간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먹은 다음, 놈을 찾아간다'
그때쯤이면 놈을 압도하고도 남을 전력이 되어 있을 것이다.
놈이 있는 곳은 인간 한 마리 찾기가 하늘에 별 따기 수준이었다.
그래서 자신이 쫓겨난 것이고.
하지만 반대로 이곳은 낙원이나 다름없었다.
먹잇감이 넘치는 낙원.
이곳에서 자신과 자신의 군체가 성장하는 동안 놈은 정체되어 있을 게 분명했다.
'잡아먹어주마.'
자신의 앞길에 펼쳐질 장밋빛 미래를 상상하며 입가에 묻은 피를 혀로 핥았다.
그 순간.
철컥.
"?"
갑자기 문이 열리더니, 그곳에 웬 남자 하나가 서 있었다.
불청객이 찾아온 것이다.
처음에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단지 영문도 모른 채 이곳의 문을 연 운 없는 남자가 불쌍할 뿐이다.
'저런. 제 발로 죽으러 오다니'
제갈성규가 따로 명령을 내릴 필요도 없이, 살아있는 싱싱한 먹잇감에 최하급 흡혈귀들이 곧바로 반응했다.
"끼이에에엑!"
"캬아아!"
최하급 흡혈귀들이 하악질을 해대며 그 남자를 향해 달려들기 직전.
퍼걱!
남아 있던 네 마리의 최하급 흡혈귀들의 머리가 동시에 터져나갔다.
'어?'
무거운 정적이 사방에 내려앉았다.
정말 아무런 전조도 없이.
전투도 없이.
제갈성규가 이 상황을 이해하는 데에는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머리가 지금의 상황을 이해하는 것을 거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눈앞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태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가 본 게 맞나?'
그러나 두 눈으로 분명하게 목격한 상황.
자신의 부하들이 남자에게 적의를 드러내는 순간, 신의 심판이라도 받듯이 머리가 터져나갔다.
그 적나라한 현실을 인식하게 되자 패닉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공포가 그의 뇌를 뒤덮었다.
'마, 말도 안 돼!'
한 가지 확실하게 이해한 것은, 지금 눈앞에 있는 존재가 가지고 있는 힘이 자신의 머리로는 이해불가해한 영역에 있다는 점이었다.
부하들에 대한 복수심?
피의 복수?
그딴 건 머릿속에서 사라진지 오래.
압도적인 힘을 가진 존재 앞에 자신의 사사로운 감정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남아 있는 것은 그저 살아야 된다는 강렬한 생존 욕구였다.
제갈성규는 무릎을 꿇은 채 간신히 입을 열었다.
온 힘을 다해, 간절한 마음을 담아 입 밖으로 소리를 만들어 내었다.
"사, 살려주세요."
포식자의 입장일 때는 들려오지 않았던, 약자의 절규가 자신의 입에서 똑같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살아남기 위한 자그마한 발버둥.
제갈성규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살려주십ᅳ 커헉!"
그때 무언가 자신의 목을 잡아 위로 끌어 올리는 듯한 감각이 느껴졌다. 이내 발이 닿지 않았다.
공중에 뜬 상태로 버둥거려봤지만 소용없었다.
"감히.."
눈앞에 분노한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그것을 보는 순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 남자가 자신을 용서하는 기적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걸.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데, 자신은 그런 저항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지렁이가 꿈틀거리는 것도 인간 정도의 체급이 자신을 밟았을 때였다.
코끼리가 자신을 밟고 지나가면 지렁이처럼 작은 존재는 즉사하기 마련이다.
제갈성규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눈앞의 존재의 선택을 받아들이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으니까.
"크흡?"
그때였다.
갑자기 목에서 느껴지던 압력이 줄어들더니 발이 땅에 닿았다.
힘없이 바닥에 엎어진 제갈성규는 몸을 덜덜 떨며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남자가 말했다.
"지금부터 내가 묻는 말에 최대한 성실하게 대답해라."
제갈성규는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성실하게 대답하지 않으면 극심한 고통이 부여될 거라는 퀘스트창이 떴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애초에 눈앞에 있는 남자에게 거역할 생각 따위는 추호도 없었으니까.
"...예."
바닥에 바짝 엎드려 목숨을 구걸하기 위해 최선을 다 했다.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잡기 위해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그에게 전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남자가 입을 열었다.
"어떻게 여기에 들어온 거지?"
"그것이...."
하급 흡혈귀, 제갈성규.
놈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나는 머리가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인간이 아닌 몬스터도 시민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줄이야'
시스템 메시지는 시민권을 부여할 때, '인간'이 아닌 '시민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조건을 만족하는 개체'라고 표현했었다.
그 말이 인간이 아닌 몬스터에게도 시민권을 부여할 수 있다는 말일 줄은 몰랐다.
'그것도 인간을 잡아먹는 몬스터에게 시민권 부여가 가능할 줄이야!'
시민들의 유입은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해서 쏟아지고 있었다.
유입되는 시민들의 수가 얼마 되지 않던 옛날에야 일일이 그들을 살피며 시민 정보를 확인했었지만, 그 숫자가 어마어마하게 많아진 지금은 시민권 획득이 가능한 사람이 접근 하면 곧바로 시민권 획득이 가능하게끔 설정해둔 상태였다.
일종의 자동 시스템화였다.
그게 아니라면 일하고 있는 동안에도, 자고 있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유입되는 시민들을 받아들여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이 이렇게 돌아올 줄이야.
부작용이라고 해 봐야 기껏해야 분란을 만드는 성격 더러운 시민이 들어오거나, 범죄자가 들어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차원이 다른 문제가 등장한 것이다.
'흡혈귀라니'
놈을 향해 물었다.
"물리기 전에는 인간이었다고?"
"예, 그렇습니다. 평범한 인간이었고 안상혁이라는 흡혈귀에게 물리고 난 뒤 최하급 흡혈귀가 되었습니다."
충격적인 것은 눈앞에 있는 흡혈귀가 한때는 평범한 인간이었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시민권 부여가 된 걸지도 모르겠군'
어쨌든 시스템적 허점이 나온 이상 앞으로는 아무나 마구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적어도 받아들이는 순간 내가 시민 정보창을 보고 흡혈귀인지 아닌지 정도는 확인을 해야만 했다.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받아들였던 시민들의 정보창도 다시 확인해야할 판이다.
"최하급 흡혈귀로 지냈던 며칠간은 기억이 희미했었고, 인간을 잡아먹으며 하급 흡혈귀로 성장한 거라고 했지?"
"네, 그렇습니다."
제갈성규의 말을 빌리자면, 최하급 흡혈귀들은 본능만 남은 짐승과도 같은 존재들이었다.
그나마 명령을 하면 알아들을 지능은 남아 있는 수준.
인간의 자의식이 생겨나는 것은 하급 흡혈귀부터라고 한다.
"당신을 흡혈귀로 만들었다던 안상혁이라는 남자는 당신보다 더 높은 중급 흡혈귀였고."
"예, 예. 그렇습니다."
현재 하급 흡혈귀인 제갈성규의 레벨은 28.
그렇다는 것은 중급 흡혈귀의 경우 최소한 이보다는 레벨이 더 높을 것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리고 중급이 있다는 건 상급 흡혈귀도 존재한다는 뜻이겠지!'
놈들의 계급이 정확히 어디까지 존재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일단 상급까지는 존재할 것이다.
레벨도 상당히 높을 것으로 예상됐다.
"그 중급 흡혈귀라는 놈의 거점이 어디라고?"
"대연동에 있는 한 아파트 단지입니다."
"잘 알겠습니다."
내가 대화를 끝마치려는 낌새가 보이자 제갈성규는 절박한 목소리로 목숨을 구걸해왔다.
"제, 제가 그 놈이 있는 곳까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부디 당신의 손으로 이 모든 일의 원흉인 그 놈에게 천벌을 내려주십시오!"
[시민 제갈성규의 충성도가 올라갑니다.]
놈의 목적은 뻔히 보였다.
어떻게든 살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는 모습이었으니까.
게다가 나와 마주하고 난 이후부터 급격하게 올라가는 신뢰도와 충성도 수치가 기분을 역하게 만들고 있었다.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의 충성이라니'
달갑지 않았다.
필요한 정보라면 충분히 들었다.
"그렇게 복수가 하고 싶다면 직접 하는 게 어때?"
하급 흡혈귀가 된 제갈성규는 한때 사람이었다고 해도 지금은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일 뿐이었다.
당연히 받아들일 생각도, 살려줄 생각도 없었다.
'퀘스트 부여'
"퀘스트 부여"
퀘스트 내용 : 안상혁을 죽이기
제한 시간 : 24시간 00분 00초
보상 : 소량의 경험치.
실패 페널티 : 죽음.
"안내해줄 필요 없다. 네가 직접 가서 놈을 죽여라."
제한 시간은 24시간.
아직 하급에 불과한 제갈성규가 중급 흡혈귀라는 안상혁을 죽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건 대놓고 가서 죽으라는 소리였다.
그것을 알아들은 제갈성규가 다급하게 말해왔다.
"자, 잠시만요 그럼 제게 인간의 피를 마실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중급만 된다면 그까짓 놈 하나쯤은-!"
"만약 인간에게 손끝 하나라도 댄다면 그 즉시 머리가 터져나갈 거야."
제갈성규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침울해하는 그를 향해 약간의 희망을 심어주기로 했다. 괜히 자포자기해서 다른 사람들을 공격하면 안 되니까.
'상점 오픈. M16 구매'
지이잉—
제갈성규는 눈앞에 나타난 소총과 실탄 100발 세트를 보고는 두 눈을 크게 떴다.
"기회를 드리는 겁니다. 당신을 이렇게 만든 놈에게 복수할 기회를"
놈은 소총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라면... 이거라면 가능합니다! 해보겠습니다!"
"최선을 다해 모든 흡혈귀를 박멸해."
"감사합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것으로 흡혈귀가 아닌 사람을 공격할 경우 그 즉시 죽여 버리겠어."
"며, 명심하겠습니다."
"지금 당장 출발해."
"예!"
제갈성규는 빠릿빠릿하게 대답한 다음 건물 밖으로 나갔다.
놈이 떠나고 남은 건물에는 사람들의 시체가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원통한 죽음에 두 눈을 부릅뜨고 죽은 이들이 절반이었다.
화르륵
그들의 시체를 태우려던 순간, 잠시 멈췄다.
'이들에게도 가족들이 있겠지!'
아무리 처참한 모습의 마지막이더라도 가족들의 얼굴은 봐야하지 않을까.
나는 불꽃을 없앰과 동시에 소통의 반지로 서예진을 불렀다.
[서예진씨. 생쥐들로 따라가 줬으면 하는 남자가 한 명 있습니다.]
제갈성규의 뒤에 서예진의 생쥐를 붙이는 것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 번째는 흡혈귀 놈들의 정확한 위치를 알아내기 위해,
두 번째는 제갈성규가 들고 있는 소총을 놈들에게 넘기지 않기 위해,
마지막으로 조금이라도 뻘짓을 하려고 할 시 불태워 죽여 버리기 위함이었다.
'흡혈귀들을 박멸시킬 팀을 짜봐야겠어!'
인간을 주식으로 하는 괴물이 근처에 있다면, 시민들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모두 없애버리는 게 맞았다.
066화 [Episode 14] 흡혈귀 (3)
제갈성규에게 생쥐를 붙여 집중 감시를 하는 한편, 참사가 일어난 현장을 좀 더 유심히 살폈다.
'최근에 영역이 넓어지면서 시민권을 받은 사람들이다.'
영역의 가장 테두리 쪽에 있는 사람들.
아직 제대로 된 물자 공급이나 구호물자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시민권을 부여받으며 내 영역 안으로 들어오긴 했지만, 여기가 안전하다는 인식조차 하지 못한 이들인 것이다.
'이 사람들을 모두 어쩌면 좋지!'
대부분 무연고자일 가능성이 높았다.
혹여나 이들의 가족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시체를 불태우지 않은 것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가족을 찾고, 또 이 상태가 된 시신을 어떻게 가족들에게 보여줘야 하는 걸까?'
구호 팀의 손길이 닿은 이들은 안전 구역에 대해 인식할 뿐만 아니라 몬스터 사냥으로 돈을 버는 것, 매점에서 그것을 사용하는 것과 같은 기본적인 지식을 안내받았다.
그러나 이들은 다르다.
어떻게든 악착같이 살아남았지만, 몬스터들이 없는 안전 구역 안으로 들어왔다는 사실 조차 인지 못하고 있던 이들.
'아니, 이제는 완전한 안전 구역이라고도 할 수 없나'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이 드나들 수 있는 곳을 안전 구역이라고 표현 할 수는 없을 테니까.
'차라리 나에게 반감을 가져주면 좋으련만'
그 순간 모두 손쉽게 해결할 수 있었을 텐데.
나를 공격하려던 최하급 흡혈귀들의 머리가 터져나간 것처럼 말이다.
제갈성규의 경우 생존을 위한 본능적인 선택인지, 총을 쥐여 주었을 때조차도 나를 향한 적의를 드러내지 않았다.
어쩌면 품위 유지 스킬 덕분에 정신적으로 굴복한 것일지도 모른다.
'일반적인 몬스터들은 영역 확장과 동시에 제거된다.'
제갈성규를 비롯해 최하급 흡혈귀들이 일반적인 몬스터와 다른 점은 '시민권을 부여하는 게 가능한 개체'라는 점이었다.
'몬스터들은 대체적으로 제거하지만, 시민권 부여가 가능한 개체는 나에게 직접적인 적의를 가졌을 때에만 제거한다는 건가?'
시스템이 나에게 일종의 선택지를 주는 거라고 할 수 있었다.
그것들 중에는 흡혈귀처럼 인간을 주식으로 삼는 것이 아닌 쓸모 있는 종족도 있을 테니까.
'오언주의 경우처럼 말이지'
엄밀히 따지고 들자면 오언주도 흡혈귀와 비슷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었다. 수인화를 했을 때 그녀는 인간보다도 괴물에 더 가까운 형태를 취했으니까.
할아버지의 나무 거인이 오언주에게만 반응했던 것이 그 증거이기도 했다.
'그런 이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선택지를 내게 남겨준다는 건가'
오언주를 받아들이고 얻은 장점들을 생각하면 그런 이들을 무작정 죽이는 것은 확실히 내게 손해였다.
그러나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 항상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참혹하군'
흡혈귀에게 피가 빨려 창백해진 피부는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내가 진작부터 흡혈귀를 걸러냈다면, 벌어지지 않았을 비극이다'
이 사태에 대한 책임을 다 할 생각이었다.
[다빈씨.]
[네, 재현님.]
김다빈에게 이 일을 설명하고 자문을 구했다.
[어떻게 해야 이분들의 가족들을 찾을 수 있을까요?]
그러나 그녀에게서 돌아온 답변은 지극히 현실적인 대답이었다.
[...지금으로썬 방법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컴퓨터 데이터베이스가 남아 있어 신원 조회가 가능한 것도 아니고, 통신이 살아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그렇군요.]
[시민들 중에서 그분들의 가족인 사람들은 적을 거라 생각합니다. 아무래도 그 정도로 가까운 거리라면 영역이 넓어지기 전부터라도 찾아갔을 거니까요. 그러니 지금 시점에서는 무연고자라고 봐도 무방할 듯합니다.]
구구절절 맞는 말이었다.
[뭔가 방법이 없을까요?]
김다빈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대답했다.
[우선은 그곳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던 이유부터 알아야 할 것 같습니다. 또는 소지품 중에 주민등록증 같은 것이 있다면 주소를 알아내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요?]
주소가 이 근처라면 그곳에 가족들이 있을 가능성도 있었다.
[조언 감사합니다.]
[너무 상심하시지 마세요.]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시체들의 소지품부터 뒤졌다.
'절대자의 눈'
일일이 시체를 뒤지는 대신 절대자의 눈을 사용해 공간을 전체적으로 훑었다.
그 편이 훨씬 빨랐기 때문이다.
생각보다 지갑이나 신분증을 소지하고 있는 사람들이 없었다.
다만 이들이 여기에 왜 모여 있었던 건지는 파악하기 쉬웠다.
건물 한쪽에 식량이 비축되어 있고, 불을 피운 흔적이 여기저기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곳곳에 이들의 생활 흔적이 남아 있었다.
이들은 살아남기 위해 여기 모인 것이다.
그때였다.
'음?'
건물에 생존자들이 있었다.
구석진 방안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벌벌 떨고 있는 것은 어린 아이들이었다.
저들이 바로 여기서 죽은 이들의 남은 가족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동시에 여기 있는 이들이 어떻게든 저 어린 아이들만이라도 살리려 노력했음을 알 수 있었다.
자신들의 목숨을 희생해서라도.
'알리는 게 맞을까?'
잠시 고민했다.
이 중에 저 아이들의 부모나 가족이 있을 것이다.
그들의 죽음을 알리는 게 맞을까, 아니면 모든 것을 불태워버리고 선의의 거짓말을 하는 게 옳은 일일까.
알 수 없었다.
아직 죽음의 개념도 제대로 알지 못할 것 같은 아이들도 몇몇 보였는데, 그들에게 이 잔혹한 장면을 보여주어야만 할까.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저벅저벅
아무렇게나 방치된 시신들의 모습을 정리하여 똑바로 뉘였다.
작업 효율을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손을 활용하는 게 현명했겠지만, 굳이 구태여 나는 맨손으로 그들의 시신을 정돈했다.
두 눈을 부릅뜬 사람들은 눈을 감겨주었다.
'아까보다는 낫네'
확실히 아까보다는 평온해 보이는 얼굴들이었다. 언뜻 보면 그냥 잠든 것처럼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그 다음 아이들이 있는 곳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절대자의 눈을 통해 내 발걸음 소리에 겁먹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이 빤히 보였다.
그래서 더욱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그리고 문을 노크했다.
똑똑
"히익!"
"쉿! 조용히 해!"
기겁하는 소리와 그를 말리는 소리가 거의 동시에 들려왔다.
자기들 딴에는 최대한 목소리를 낮춘 모양이었지만, 침묵 속에서는 작은 소리도 적나라하게 들릴 뿐이다.
그들을 향해 조심스럽게 말했다.
"문 좀 열어주겠니?"
아기 돼지 삼형제를 노리는 늑대가 된 것만 같은 기분이었지만, 이 이상 시간을 지체해 봤자 의미 없다고 생각했다.
"들어갈게."
아날로그 방식으로 잠겨 있던 문이었지만, 절대자의 문을 사용하니 처음부터 열려 있던 것처럼 저항 없이 문을 열 수 있었다.
"꺄아아악!"
아이들은 흡혈귀들의 존재를 알고 있기라도 한 것인지, 문이 열리는 순간 동시에 공포에 질린 비명을 뱉어댔다.
나는 씁쓸하게 웃으며 그들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
"안녕? 아저씨는 김재현이라고 해."
방 안으로 한 발짝도 다가가지 않은 채 내 이름을 소개했다.
내가 거리를 지키자 아이들도 내 이야기를 약간은 들어볼 생각이 든 것 같았다.
그리고,
[시민 양하윤의 신뢰도가 올라갑니다.]
[시민 양하율의 신뢰도가 올라갑니다.]
[시민 서민우의 신뢰도가 올라갑니다.]
[시민 이서준의 신뢰도가 올라갑니다.]
[시민 한예정의 신뢰도가 올라갑니다.]
다섯 명의 아이들이 나와 마주하는 순간, 품위 유지 스킬이 빛을 발했다.
위협적이지 않은 내 태도에 마음이 놓인 것인지 그들 중 가장 체격이 큰 여자 아이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아저씨는 누구세요?"
그래봤자 초등학생에 불과해 보이는 체격을 가진 작은 여자 아이였다.
"음..."
잠시 고민하던 나는 약간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일단은 구조대라고 해야 할까?"
"구조대요? 구조대가 온 거예요?"
나와 대화를 하던 아이의 얼굴이 밝아지자 다른 아이가 물었다.
"언니, 구조대가 뭐야?"
"으응. 우릴 구하러 오신 거야."
"정말? 그러면 이제 안 숨어도 되는 거야?"
"응!"
한순간에 밝아지는 아이들의 표정을 보며 죄책감을 느꼈다.
"....아저씨랑 같이 가자."
내 뒤를 졸졸 따라오는 아이들의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그곳으로 향했다.
나는 그 앞에서 잠시 망설였다.
이게 정말 맞는 지에 대한 고민이었다.
분명히 고민하고 내린 선택이었음에도 이게 맞는 건지에 대한 확신을 내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엄마!"
한 아이가 엄마를 부르며 나를 지나쳐갔다.
"잠깐...!"
내가 말리기도 전에 그 아이는 방 안의 풍경을 확인했고, 얼굴이 굳었다.
"...엄마?"
아이는 방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물었다.
"...왜 거기서 자고 있어?"
말하는 아이의 얼굴이 어두웠다.
미처 정리하지 못한 방 안의 어지러운 모습에서 위화감을 느낀 것이다. 여기저기 튀어 있는 핏자국이나 어질러진 물건들까지 정리하지는 못했으니까.
분위기만으로 무언가 좋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직감하고 있는 듯 했다.
그러나 그 아이는 죽음이라는 개념을 이해하기에 아직 너무 어렸다.
그때 나에게 맨 처음 말을 걸어왔던 여자 아이, 양하윤이 흔들리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아무런 말도 해주지 못했고, 양하윤은 다급하게 달려 방 안의 참담한 모습을 작은 두 눈에 담았다.
그리고는 가지런히 놓여 있는 시체들 중 한 여자에게로 천천히 걸어갔다.
"...엄마."
새하얗게 질린 채 누워 있는 여자 앞에 주저앉은 양하윤이 닭똥 같은 눈물을 터뜨렸다.
"흐아아앙."
가장 큰 아이의 울음은 다른 아이들에게도 빠르게 전염되었다.
아이들은 영문도 모른 채로 울기 시작했다.
"...미안하다."
차마 아이들 앞에서 시신을 불태울 수는 없었다.
그저 잠을 자는 것으로 생각하는 아이들 앞에서 시신이 불타오르면, 더 큰 상처로 남지 않을까 걱정이 됐다.
화장하는 의미가 있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아이들에게 보여주기 좋은 광경은 아니었으니까.
아마도 평생의 상처로 남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에게 가족들의 마지막을 보여준 것은 그들을 위해서였다.
나중에 가족의 마지막을 제 눈으로 확인하지 못한 것이 평생의 한으로 남을 까봐.
"할아버지! 일어나 보세요, 할아버지!"
아플 것이다.
그래도 그들이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앞으로 그들이 살아가야 할 이 험난한 세상은 수없이 많은 상처를 그들에게 줄 테니까.
그래도 살아가야 할 테니까.
"흐어어엉."
울고 있는 아이들을 향해 말했다.
"얘들아."
아이들은 여전히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이제 엄마 아빠, 그리고 할아버지는 하늘나라로 떠나실 거야."
나는 그들의 시신을 창고에 보관했다.
지이이잉-
불태우는 것보다 훨씬 아프지 않은 모습으로, 마치 정말로 하늘나라로 떠나는 듯한 모습으로 보이길 기도하며.
"엄마! 아빠! 어디가! 가지 마!"
울부짖는 아이들을 보고 있자니 내가 잘못된 선택을 한 건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차라리 거짓말을 하는 게 더 나았을까.
'모르겠어'
한 명씩 안아주기에는 너무 많은 아이들이 울고 있었다.
"으아아앙!"
"흐윽, 엄마."
할아부지이. 흐윽"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어린 것들이 눈물을 뚝뚝 흘리는 모습에 마음이 미어져왔다.
화르륵
나는 그들의 시신이 있었던 자리에 불꽃을 피워냈다.
너무 뜨겁지 않도록 조심해서.
그것들은 한동안 아이들 근처를 위로하듯 맴돌았다.
"...엄마?"
실제로 그들의 영혼이 있다면 지금쯤 이곳에 남아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지 않을까.
그것도 무척이나 슬픈 눈으로 말이다.
그들의 마음을 대변하기 위해 노력했다. 따뜻한 불꽃은 아이들이 눈물을 그치는 것을 확인하고는 떠날 준비를 했다.
"아!"
깨진 창문을 통해 불꽃이 빠져나가자, 아이들은 창문으로 따라가 하늘을 올려다봤다.
신비로운 분위기를 연출한 덕분인지 아이들의 울음은 어느새 완전히 멈춰 있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뻔한 거짓말을 했다.
"엄마 아빠는 저 하늘나라에서 항상 너희들을 지켜보고 계실 거란다."
어쩌면 거짓말이 아닐 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우리 뚝 그치고 씩씩한 모습만 보여주도록 하자."
한 아이가 눈물을 닦아내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동글동글한 얼굴이 굳은 결의가 깃들었다.
다섯 명 중 가장 체구가 작은 아이였다.
'미안하다. 얘들아!'
나는 아이들에게 어른이 되어주길 강요했고, 아이들은 일방적인 요구에 응해주었다.
적어도 지금 당장은 상처에 무너질 아이는 없는 것 같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이들의 상처가 하루라도 빨리 아물기를 기도하는 것뿐이었다.
'가족들의 복수는 내가 대신 해 주마!'
서예진이 다루는 생쥐의 시야에 소총을 든 제갈성규가 한 아파트 단지를 바라보고 서 있는 게 보였다.
'저기군'
흡혈귀들이 모여 있는 아파트에 도착한 듯 했다.
067화 [Episode 14] 흡혈귀 (4)
영역 안에서 대놓고 사람들을 사냥하고 다닐 때부터 알아봤지만, 제갈성규는 확실히 뒤가 없는 남자였다.
투두두두―
대놓고 아파트 단지에 돌격한 제갈성규는 흡혈귀들을 발견할 때마다 총을 휘갈겼다.
분명 100발 밖에 주질 않았는데, 점사도 아니고 연사를 박다니.
'미친놈인가?'
하급 흡혈귀가 되면 지능도 인간 수준이 된다고 듣긴 했는데, 저런 걸 보면 그보다는 낮은 것 아닐까?
"끼에에엑!"
아무튼 제갈성규는 총기난사로 출입구를 지키던 최하급 흡혈귀들을 정리해버리곤 거침없이 진입했다.
'생각보다 흡혈귀가 많지 않은 건가?'
그런데 아니었다.
"크아아악!"
1층 복도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최하급 흡혈귀들이 제갈성규를 향해 달려들었다.
투두두두―!
"뒈져!"
제갈성규는 그들을 향해 총탄을 난사하며 탄창하나를 비워냈다.
여기까지 열 마리에 가까운 흡혈귀들을 죽였으니 마구잡이로 쏜 것 치고는 성과가 좋은 편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복도 안에 밀집되어 있는 놈들을 향해 총을 쐈기 때문이겠지.
달칵! 달칵!
"이런 싯팔!"
총알이 나가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제갈성규는 탄창을 재장전할 생각은 하지 않고 손톱을 앞세웠다.
"캬아아악!"
제갈성규의 손톱이 총을 맞고 비틀 거리던 최하급 흡혈귀의 심장을 꿰뚫었다.
'미친놈이네!'
육탄전을 이어나가는 그의 모습을 보면, 어째서 그를 흡혈귀로 만들었던 안상혁이라는 놈에게 버림받은 건지도 알 수 있었다.
"아악! 이거 놔라!"
그가 육탄전으로 제압한 최하급 흡혈귀는 겨우 2마리.
그것도 한 마리는 총을 맞아 비실비실한 상태의 흡혈귀였다. 실제로 그의 실력으로 잡은 것은 한 마리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그 이후 숫자가 늘어난 최하급 흡혈귀들에게 붙잡혀 제압당했다.
'창고 보관'
곧바로 제갈성규가 가지고 있던 총과 탄창을 압수했다.
"놔라! 이것들아!"
제압된 제갈성규 앞으로 한 여자가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엄청난 소리가 들리길래 누군가 했더니, 성규 오빠였어?"
"그래! 나다 이 씨발년아!"
여자는 한숨을 푹 쉬고는 말했다.
"오빠야. 오빠는 오빠가 왜 버림받았는지 모르겠지?"
"뭐?"
"멍청해서야. 지금도 봐. 최하급 흡혈귀들조차 당해내지 못하는 꼴이란. 제 앞가림도 제대로 못하는 주제에 식량만 축내잖아."
"으아아악!"
발끈하며 소리치는 제갈성규의 모습에 여자는 과장된 모습으로 귀를 막으며 말했다.
"어우 시끄러. 그런데 방금 총 소리 아니었나? 총 들고 쳐들어온 거 아니었어?"
제갈성규의 몸을 이리저리 훑어보는 모습이었지만, 이미 내 창고로 사라진 총과 총알을 찾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여자는 제갈성규가 휘갈긴 총에 맞은 최하급 흡혈귀 한 마리를 곁으로 다가오게 하더니 상처 부분을 살폈다.
"총 맞은 거 맞지?"
"...네에."
최하급 흡혈귀가 어눌한 말투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다시 제갈성규를 향해 고개를 돌린 여자가 물었다.
"그래서 어디에 숨겼어? 총."
"퉤!"
제갈성규는 그런 여자를 향해 침을 내뱉었다.
정확하게 얼굴에 침을 맞은 여자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지시했다.
"죽여."
그녀의 허락이 떨어지자 최하급 흡혈귀들이 허겁지겁 제갈성규의 몸에 이빨을 박아 넣기 시작했다.
"크아아악!"
그것이 제갈성규의 최후였다.
[시민 제갈성규가 사망하였습니다.]
그리고.
"크륵. 크르륵!"
제갈성규의 몸에 이빨을 박아 넣은 최하급 흡혈귀 중 하나가 몸을 부들부들 떨어대기 시작했다.
"응?"
그것을 본 여자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뭐야? 생각보다 영양상태가 좋았나보네? 진화할 줄은 몰랐는데."
최하급 흡혈귀의 몸이 울긋불긋 부풀어 오르다가 전신에서 새하얀 김을 내뿜으며 가라앉았다.
"주변에 총 같은 거 없나 뒤져봐"
여자 흡혈귀는 그 모습을 무표정하게 내려 보다가 코를 킁킁거렸다.
"이게 무슨 냄새지?"
그 순간 나는 소통의 반지를 사용해 서예진에게 말했다.
[예진씨. 준비하세요.]
연결을 끊을 준비를 하라고.
화륵!
불꽃이 일렁거렸고, 복도에 가득 차 있던 가스가 반응했다.
콰과과광!
그곳에 모여 있던 모든 흡혈귀들은 물론 한쪽 구석에 숨어 있던 생쥐까지 쓸어버렸다.
찍─!
생쥐의 단말마를 마지막으로 상황이 종료됐다.
[최하급 흡혈귀(Lv. 18)를 사냥하셨습니다.]
[최하급 흡혈귀(Lv. 18)를 사냥하셨습니다.]
[하급 흡혈귀(Lv. 28)를 사냥하셨습니다.]
--------
사냥에 대한 알림이 어지럽게 울려 퍼졌다.
'생각보다 상당히 가까이 있었어!'
조만간 레벨업을 해서 영역이 넓어진다면, 이놈들이 있는 구역이 포함될 가능성이 컸다.
'제갈성규가 아니었다면 이놈들의 존재조차도 몰랐을 것이다.'
흡혈귀에 대한 존재를 모르니 별 생각 없이 이들에게도 시민권을 부여해주었을 것이다.
보아하니 규모가 상당한 듯 해 보였다.
최소 수십 마리의 흡혈귀들이 시민권을 얻고 내 영역을 배회했을 거라고 생각하니 아찔했다.
'지금이라도 알게 돼서 천만 다행이야!'
영역으로 편입되기 전에 박멸해버릴 생각이었다.
다른 이들이 나설 필요도 없었다.
놈들의 위치를 알게 된 이상 서예진의 생쥐들과 유혜린의 독가스를 활용하기만 해도 놈들을 전멸시키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으니까.
[서예진씨. 유혜린씨. 제 방으로 올라와주세요.]
소통의 반지를 사용하여 그들을 부른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옆에 조용히 앉아 있던 최형준이 입을 열었다.
"벌써 가시게요?"
"네. 아이들 좀 잘 부탁드립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곳에서 구한 아이들은 우선 최형준의 집에 맡겼다.
현재는 최형준의 아내인 박혜원이 욕실에서 아이들을 열심히 씻기고 있는 중이었다.
본격적으로 흡혈귀 말살 작전을 시작하기 위해 집으로 가려는 순간 혼자서 따로 샤워를 끝낸 양하윤과 마주쳤다.
"아저씨? 어디 가세요?"
아이의 눈동자에는 불안감이 비치고 있었다.
나랑 알게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음에도, 떨어지는 것을 무서워하는 것이다.
그런 일을 겪은 탓이겠지.
나는 광대처럼 웃으며 양 손을 펼쳐 보여주었다.
그리고.
'상점 오픈. 초콜릿 구매!'
능숙한 마술사처럼 허공에서 소환한 초콜릿을 집어 들어 양하윤에게 건네주었다.
"아저씨는 잠시 일하러 갔다 올 거야."
양하윤은 초콜릿을 받고는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러네요. 아저씨는 구조대니까 또 사람들을 구하러 가셔야겠죠."
"...그래."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금방 다녀올게"
그때였다.
"언니. 나는 최나연이야! 언니는 이름이 모야?"
최나연이 나서서 양하윤에게 먼저 다가왔다.
"어, 나? 나는 양하윤이야."
"나두 초콜릿!"
이번에는 옆에서 최서연이 끼어들었다.
동생들에게 둘러싸인 양하윤을 보며 말했다.
"동생들 잘 돌보고 있을 수 있지?"
양하윤은 이내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부탁한다."
그렇게 아이들을 최형준 네 가족에게 맡기고 나는 집으로 이동했다.
서예진과 유혜린을 기다리는 동안 시민 정보창을 하나하나 일일이 뒤지고 있었다.
혹시나 흡혈귀 같은 것들이 섞여 들어온 것인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먼저 도착한 것은 서예진이었다.
절대자의 눈으로 유혜린을 살펴보니 다른 동의 공영 시설에서 일을 하고 있던 중이라 여기까지 오려면 시간이 좀 걸릴 듯 했다.
철컥.
문을 열어주자 서예진은 익숙하게 집 안으로 들어왔다.
"실례하겠습니다."
서예진은 소파에 앉아 있는 내 얼굴을 확인하더니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재현님. 고민이라도 있으신가요?"
어차피 유혜린이 도착하려면 시간도 남았겠다, 서예진에게 이야기를 해 봤다.
"시민 정보창을 확인하고 있었거든요. 예진씨도 방금 보셨죠?"
"네. 그 사람들은 뭐죠? 뭔가 평범한 사람들은 아닌 것 같았는데..."
"몬스터입니다."
"네?"
두 눈을 커다랗게 뜨는 서예진을 향해 설명했다.
"마지막쯤에 피를 빠는 걸 보셨죠? 흡혈귀들입니다."
"하지만 그 남자는 시민 아니었나요? 영역 안에서부터 출발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요."
"저도 이번에 처음 알게 된 사실인데, 흡혈귀들에게도 시민권 부여가 가능합니다."
서예진은 내 말의 뜻을 가만히 곱씹어보다가 되물었다.
'그 말씀은, 좀비나 구울 같은 인간형 몬스터들도 시민권을 얻을 수 있다는 뜻인가요?!'
"거기까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아직 영역 내에 좀비들이 포함된 적은 없었으니까.
"다만 그 남자의 경우에는 조금 특별하다고 할 수는 있어요. 원래는 우리들처럼 평범한 인간이었거든요."
"네에?"
"그래서 시민권을 획득할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흡혈귀에게 물려 같은 흡혈귀가 되긴 했지만, 어쨌든 이전에는 인간이었으니까요."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서예진이 물었다.
"그건 남포동 쪽에서 봤던 좀비들도 비슷한 거 아닌가요? 그 사람들도 한 때는 인간이었을 텐데...."
서예진의 말을 들어보니 확실히 그들에게도 시민권 부여가 될 것 같았다.
"그래서 골치입니다. 혹시 지금도 영역 내 어딘가에서 사람들 피를 빨고 있는 흡혈귀가 있는 건 아닌지..."
무작위로 시민 정보창을 확인해보고는 있었지만, 자동으로 시민권을 주는 시스템을 철회하면서 실시간으로 유입되는 시민들을 확인하는 것만 해도 바쁠 지경이었다.
게다가 시민들의 숫자가 3만 명이 다 되어 가니 이름만 보고 확인했던 사람인지 아닌지 구분하는 것도 어려웠다.
그때 서예진이 말했다.
"제가 처음 시민권을 받아들였을 때, 강제로 이곳으로 순간이동 시키셨죠? 그때처럼 하시면 되는 것 아닌가요?"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영양실조나 탈수 상태가 되어 정신을 잃은 사람들의 경우 급하게 퀘스트 부여를 사용해 응급처치를 하거나 이곳으로 순간이동 시켜 온 적도 있었다.
'하지만 한 명을 순간이동 시키는 데 드는 비용만 삼천만원이다.'
영역이 넓어지면서 끄트머리에 있는 사람들을 이곳으로 데려오는 데 비용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막말로 천 명만 이동시켜도 300억이 드는 것이다.
'차라리 그것보다는 돈을 들여서 상태이상을 풀어주는 게 낫다'
당장 탈수와 영양실조 증세를 호전시켜주고 물자만 전달해도 사람들은 알아서 버텨나갈 수 있었다.
사람들에게 매점이나 몬스터 사냥에 대한 시스템을 설명하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과거에는 김다빈을 찾아가라는 퀘스트를 주기도 했었지만, 현재는 인구가 너무 많아지면서 그런 방법으로는 감당할 수 없게 됐다.
'퀘스트 부여를 활용하는 것 보다는 구호 팀의 인원을 늘리는 게 훨씬 낫지!'
현재 구호 팀은 멀쩡한 사람들에게는 간단한 시스템 설명을, 구조가 필요한 사람들은 의료팀에게 보내는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하지만 만성적인 인력 부족으로 실시간으로 늘어나는 인구를 모두 감당하지 못하는 상황인 것이다.
'게다가 되도록 페널티로 죽음을 설정할 수 있다는 것은 알리고 싶지 않다'
언제든지 자신이 죽일 수 있다는 사실을 반길 사람은 없을 테니까.
'골치 아프군'
흡혈귀 때문은 아니었지만, 이 비슷한 문제로 고민한 적은 많았다.
모두에게 퀘스트를 부여하여 시민권을 가진 사람에게 해를 끼치면 페널티를 받는 방법도 생각해봤지만, 그건 너무 극단적이었다.
누군가 당신을 향해 '잠재적 범죄자'라고 낙인찍는다면 당신은 그 사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민심을 잃을 게 뻔해'
괜한 분란을 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어쨌든 나의 개입이 불가피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나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 일에만 신경 쓸 수도 없었고 말이다.
'시민들의 성향을 구분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좋을 텐데'
그때였다.
[시민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조건을 만족하는 개체가 집구석 근처에 접근하였습니다.]
[시민권을 제의하시겠습니까?]
자동으로 시민권을 부여하는 시스템을 끄자마자 징그럽던 이 메시지가 부활했다.
속으로 작게 한숨을 내쉬며 새롭게 유입되는 시민의 정보를 확인했다.
'문제없군. 시민권 제의 해.'
그들이 시민권을 받아들이는 순간.
[시민의 숫자가 30,000명에 도달했습니다.]
[시민들의 숫자가 일정 수준에 도달함에 따라 '업적 시스템'이 개방됩니다.]
이 사태를 타개할 새로운 기능의 등장이었다.
068화 [Episode 14] 흡혈귀 (5)
<업적 시스템>
특정 업적을 달성했을 시 임의로 만든 효과의 칭호를 부여할 수 있다.
설명은 간단했지만, 어떤 식으로 사용할 수 있는지는 바로 감이 왔다.
'업적 설정'
[업적 내용을 설정해주십시오.]
'시민권을 가진 사람을 죽였을 경우!'
[업적 내용 설정이 완료되었습니다.]
[업적을 달성했을 시 획득 할 칭호의 이름과 효과를 설정해주십시오.]
'칭호의 이름은 살인자. 효과는...'
살인은 분명 큰 죄이다.
죽음은 죽음으로 밖에 갚지 못하겠지만, 그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는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전체 능력치 80% 감소. 두 손을 봉인. 이마에 살인자의 낙인이 찍히도록!'
두 손을 봉인하는 이유는 살인자가 총기와 같은 무기를 들고 있으면 대참사가 벌어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붉은색 다이아몬드 낙인을 상상하니 시스템 반응이 나타났다.
[해당 업적 설정 비용은 40,000,000 원이며, 업적 달성 시 칭호 부여에 대한 비용은 4,000,000 원입니다.]
[이대로 설정하시겠습니까?]
'칭호를 내가 임의로 없애는 것도 가능한가?'
[가능합니다.]
다행이었다.
그렇다면 억울한 일이 생기더라도 상황을 듣고 내가 직접 해결할 수 있을 테니까.
'설정한다.'
띠링!
[업적 설정이 완료되었습니다.]
고민 하나가 완전히 해결되었다.
'살인과 마찬가지로 웬만한 강력 범죄는 업적 시스템으로 모두 처벌하는 게 가능하다'
살인, 강간, 폭행 등의 강력 범죄를 일으킨 범죄자에게 '칭호'라는 낙인을 찍는 게 가능해진 셈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반대로 몬스터 사냥에 따른 긍정적인 업적을 부여할 수도 있겠지?'
예를 들면 고블린 100마리를 사냥했을 시 신체 능력이 상승한다던지 하는 효과 말이다.
'음, 어디까지 가능하려나?'
꽤나 좋은 기능이긴 했지만, 이것도 만능은 아닐 것이다.
'업적 설정'
[업적 내용을 설정해주십시오.]
'고블린 100마리를 사냥했을 경우'
[업적 내용 설정이 완료되었습니다.]
[업적을 달성했을 시 획득 할 칭호의 이름과 효과를 설정해주십시오.]
'칭호의 이름은 고블린 학살자. 효과는....'
우선은 말도 안 되는 효과를 넣어봤다.
'각성 능력 획득'
[해당 업적으로는 설정 불가능한 효과입니다.]
역시나 불가능하다는 메시지가 출현했다.
'그럼 10레벨 상승'
[해당 업적으로는 설정 불가능한 효과입니다.]
'그러면...'
몇 번의 실험 끝에 정해진 고블린 학살자의 효과는 이러했다.
{고블린 학살자}
고블린들이 공포를 느끼며, 고블린 사냥 시 기본급을 10% 추가 획득합니다.
근력이 오른다거나 체력이 오른다는 설정도 가능했지만, 그보다는 지금 설정이 훨씬 경제적이었다.
'그 다음은....'
그때 옆에서 빤히 나를 바라보고 있던 서예진과 두 눈이 마주쳤다.
거리가 꽤 가깝기 때문인지 그녀의 긴생머리에서 기분 좋은 샴푸향이 전해져왔다.
서예진은 검은색 트레이닝복 차림이었는데, 마침 내가 입고 있는 것과 똑같은 옷이었다.
내가 직접 상점에 등록했었던 기억이 난다.
'잘 어울리네'
서예진을 향해 말했다.
"제 얼굴에 뭔가 묻었나요?"
한동안 멍하니 나를 바라보던 서예진이 양손으로 입을 가리며 말했다.
"앗, 죄송해요. 혹시 방해가 된 건가요?"
"아닙니다."
날카로운 눈매 때문에 첫인상은 살짝 까칠한 고양이상이었는데, 직접 대화를 해 보면 동글동글한 강아지가 따로 없었다.
약간 어색한 공기 속에서 서예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 생각해봤는데요, 인간 외에 이종족을 찾아내는 게 목적이시면 퀘스트를 주시면 되지 않을까요? 네가 흡혈귀라면 이곳으로 와라! 이렇게."
"그 방식은 의미가 없어요."
퀘스트를 주기 위해서는 내가 그 대상에 대해 확실하게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퀘스트를 주는 순간 이미 나는 그 사람이 흡혈귀인지 아닌지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런가요? 그럼, 으음...."
진지하게 고민하는 서예진을 향해 말했다.
"이제 그 일에 대해서 고민하실 필요 없어요. 해결 방법을 찾았거든요."
"정말요?"
"네."
서예진이 환하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역시 재현님은 대단하세요."
그때였다.
뒤늦게 유혜린이 도착한 것이다.
철컥
잠금을 풀어주자 알아서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바로 시작하면 될까요?"
유혜린은 곧바로 독가스를 만들어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잠시만요."
본격적으로 흡혈귀들을 정리하기 전에 '흡혈귀 학살자'업적부터 만들고 시작할 생각이었다.
아파트 커뮤니티 시설에 한 회의실.
중급 흡혈귀인 안상혁은 사냥을 나간 부하들을 불러 모았다.
근처에 퍼져서 인간 사냥을 이어나가고 있던 흡혈귀들은 안상혁의 호출에 그들의 본거지로 모여들었다.
그들 조직에 간부격인 흡혈귀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안상혁이 입을 열었다.
"신새롬이 죽었다."
곧바로 간부들의 눈이 커지며 시끌시끌해졌다.
"아까 그 1층에 있던 그을린 자국 때문입니까?"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새롬이가 죽다니"
안상혁은 조용해지기를 기다렸다가 입을 열었다.
"총소리가 들린 이후 1층 복도 전체가 폭발했다. 근처에 있던 최하급 흡혈귀들의 사체에서 총을 맞은 흔적이 발견된 것을 보면 그놈들의 짓인 걸로 보인다."
그의 말에 한 남자 흡혈귀가 분노하며 말했다.
"그 빌어먹을 경찰 놈들 말입니까?"
"그렇다."
다른 흡혈귀들이 흥분하며 저마다 한 마디씩 내뱉었다.
"그 자식들! 가만히 내버려두니까 주제도 모르고!"
"총을 들고 있으니까 아주 기고만장해서는."
"먼저 공격해올 줄이야"
제일 처음 분노하던 남자 흡혈귀, 심형식이 강력하게 주장했다.
"당장 그 놈들을 죽여 버리고 총기를 빼앗아 와야 합니다!"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놈들!"
"가자!"
그에게 동조하는 흡혈귀들도 있었고,
"쉽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야. 어찌됐건 놈들에게는 총이 있으니까."
"신중하셔야 합니다."
"놈들과의 전쟁은 너무 위험하다."
신중론을 말하는 흡혈귀들도 있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쳐들어 온 거지?"
"이상해. 그동안 우리들의 존재가 알려지기는 했지만, 이렇게 전면전을 걸어오다니."
"본진이 이곳이라는 건 또 어떻게 알아낸 거지?"
전쟁에 찬성하는 쪽 보다는 반대하는 쪽의 숫자가 더 많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은 모두 '총'의 무서움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평범한 인간은 나약한 먹잇감에 불과하지만, 총을 든 인간은 두려운 게 사실이었다.
그러나 흡혈귀들의 사회는 더 많은 사람들의 의견이 지지받는 민주사회가 아니었다.
오로지 한 명의 결정권자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독재 사회.
그들의 독재자, 안상혁이 말했다.
"놈들을 친다."
순간 희비가 엇갈렸다.
"그렇지!"
"다 죽여 버립시다!"
전쟁을 찬성했던 과격파는 기뻐했고.
"크흠."
"흐음...."
"음."
신중해야 한다고 말했던 흡혈귀들은 침음했다.
"걱정할 필요 없다. 놈들과 전면전을 할 생각은 아니니까."
안상혁은 불안에 떠는 부하들을 향해 작전을 설명해나갔다.
"우선은 평범한 생존자 집단인 척 놈들의 집단에 스며든다. 그 다음 결정적인 순간을 노려 안에서부터 놈들을 무너뜨리는 거다."
신중론을 펼치던 흡혈귀 중 하나가 조심스럽게 질문해왔다.
"하지만 놈들이 새로운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확인한 사실 아닙니까."
"놈들도 다른 생존자 집단과 마찬가지로 지금쯤 심각한 물자 부족에 시달리고 있을 거다. 그걸 미끼로 놈들의 조직에 잠입하는 거다."
"오오!"
흡혈귀들은 힘을 발현하기 전에는 평범한 사람과 별 다를 것 없는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런 대담한 잠입 작전을 펼칠 수 있는 것이다.
"이 작전을 진행할 멤버는...."
안상혁이 자신의 부하들을 천천히 쓸어봤다.
당연한 말이었지만, 이 침투 작전을 수행하는 것은 모두 하급 흡혈귀가 될 것이다.
최하급 흡혈귀는 평범한 인간인 척 연기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제가 하겠습니다! 제게 기회를 주십시오!"
처음부터 경찰 놈들과 전쟁을 주장하던 심형식이 나섰다.
그러나 안상혁은 고개를 저었다.
"손기환, 윤혜지, 이한결, 김봄"
그는 정확히 신중론을 펼치던 흡혈귀들만을 골라서 지목했다.
"너희들이 가라."
지명당한 흡혈귀들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기대에 부응하도록 하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들은 긴장하면서도, 당연한 일이라 생각했다.
매번 싸움과 피만 생각하는 과격파 놈들이 이런 침투 작전을 성공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전투력 자체는 자신들보다 강한 편이었지만, 지능은 자신들이 훨씬 우월한 편이라고 자부하고 있었다.
"끄응. 저런 새 가슴들이 무슨...."
"상혁님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저런 비실비실한 조합으로..."
신중파를 무시하는 건 과격파 흡혈귀들도 마찬가지였다.
매사에 적극적이지 못한 데다 실제로 실적도 그들보다 훨씬 딸렸으니 말이다.
그때 신중파의 리더 격인 손기환이 그들을 향해 말했다.
"상혁님께서 하신 결정에 불만이라도 갖는 건가?"
"뭐?"
과격파의 리더 격인 심형식과 신중파의 리더 격인 손기환이 서로를 노려보며 신경전을 벌였다.
안상혁을 제외하면 유일하게 중급 흡혈귀인 두 사람이었기에 이 둘을 중심으로 두 개의 파가 형성된 것이었다.
그때였다.
쿵쿵쿵!
누군가 회의실 문을 거칠게 두드려댔다.
심형식이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누구야?"
끼이익.
문이 열리며 하급 흡혈귀 한 마리가 들어왔다.
과격파인 심형식 쪽의 흡혈귀였다.
손기환이 힐난하는 어조로 말했다.
"과격파 쪽의 인사들은 정말 예의를 모르는군."
"뭐야? 이자식이—"
그러거나 말거나 회의장에 들어온 하급 흡혈귀는 다급하게 소리쳤다.
"허윽, 헉! 도, 도망가셔야...!"
그가 채 말을 끝맺기도 전에.
찍찍!
회의실로 쥐새끼 한 마리가 달려 들어왔다.
그리고.
푸쉬이이이—
쥐의 뒤쪽으로 보라색의 독가스가 급격히 피어오르며 순식간에 회의실을 가득 채워갔다.
"뭐, 뭐야?"
"전부 숨을 멈춰라!"
"창문으로 도망쳐!"
쨍그랑! 채쟁—!
아수라장이 된 회의실 내부로 창문이 깨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댔다.
[최하급 흡혈귀(Lv. 18)를 사냥하셨습니다.]
[하급 흡혈귀(Lv. 22)를 사냥하셨습니다.]
[하급 흡혈귀(Lv. 23)를 사냥하셨습니다.]
아파트 단지 내에는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은 숫자의 흡혈귀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곳 아파트 단지 내에 있던 사람들을 모조리 잡아먹고 성장한 흡혈귀들인 것 같았다.
'하급 흡혈귀들의 숫자만 해도 수십 마리가 넘는다.'
다시금 생각해보지만 제갈성규는 이런 곳을 도대체 무슨 배짱으로 혼자 쳐들어 간 것일까?
겨우 소총 한 자루 들고 말이다.
'진짜 이상한 놈이었네'
서예진의 생쥐가 사방을 휘저으며 독가스를 뿌리고 다니던 중이었다.
독가스에게서 도망쳐야 할 상황에 흡혈귀 한 마리가 목숨 걸고 독가스 안으로 몸을 던지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예진씨. 저 놈 조용히 따라가 주세요.]
창고 스킬로 독가스를 뿜어내는 것도 멈추고 놈을 지켜봤다.
아니나 다를까 놈이 문을 열고 들어간 곳에는 중요 인물로 보이는 흡혈귀들이 떼거지로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이곳에 모여 있는 흡혈귀들은 레벨부터 달랐다.
「하급 흡혈귀(Lv. 28)」「하급 흡혈귀(Lv. 29)」 「하급 흡혈귀(Lv. 28)」
죄다 하급 흡혈귀 이상에다가 레벨도 20대 후반이었고, 중급 흡혈귀도 세 마리나 존재했다.
그 중에서 누가 리더인지는 구조만 보고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저 놈이 안상혁이군'
「중급 흡혈귀(Lv.38)」
여기 모여 있는 이들 중에서 가장 레벨이 높은 흡혈귀였다.
[지금입니다. 진입하세요.]
서예진의 생쥐가 회의실 안으로 진입하는 것과 동시에 독가스를 사방으로 내뿜기 시작했다.
"도망쳐!"
쨍그랑!
생각보다 눈치가 빠른 놈들이었다.
그들 중 몇몇이 몸을 날려 창문을 박살내며 도망갔다.
그리고.
덥석!
누군가 서예진의 생쥐를 한 손으로 덥석 붙잡았다.
중급 흡혈귀, 안상혁이었다.
콰직!
생쥐의 몸이 박살나며 그대로 연결이 끊겼다.
069화 [Episode 15] Ace Party (1)
"으윽!"
서예진이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며 깨어났다.
"괜찮아요, 예진씨?"
"네에..."
잠시 기다려봤지만, 중급 흡혈귀를 사냥했다는 시스템 알림이 나타나지 않았다.
가능성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독가스를 들이마신 놈이 죽었지만, 그곳에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나 감각이 공유된 서예진의 생쥐가 없기 때문에 정산이 안 되는 경우.
다른 하나는 놈이 죽지 않았을 경우다.
그런데.
[하급 흡혈귀(Lv. 28)를 사냥하셨습니다.]
[하급 흡혈귀(Lv. 29)를 사냥하셨습니다.]
아직 하급 흡혈귀들을 사냥했다는 메시지가 올라오고 있는 것을 보면, 그곳은 집구석 영역의 영향력 아래 있는 것이 분명했다.
별도로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이 없더라도 몬스터 사냥을 하면 정산이 됐을 것이란 소리다.
'확장된 영역에서 그리 먼 거리도 아니었으니까!'
그렇다는 것은 불행히도 두 가지 가능성 중에 후자의 가능성이 크다는 소리였다.
그곳에 있던 중급 흡혈귀는 총 셋.
'그 중 한 마리도 죽이지 못했다.'
아무래도 반응하는 게 느렸던 하급 흡혈귀 몇 마리만 독가스를 들이마신 듯 했다.
'아쉽군'
가능하면 이쪽에 대한 정보가 없었을 때 모두 처리하고 싶었는데 말이다.
이제 저쪽은 독가스가 상당히 위험하다는 것도, 독가스를 만들어내는 게 생쥐라는 것도 알게 됐을 것이다.
'다시 밀폐된 공간에 틀어박혀 있어줄지도 의문이고 말이지'
주변에 생쥐가 있다면 민감하게 반응할 것이다.
'본진을 바꿀 수도 있겠지'
식은땀을 흘리는 서예진을 향해 말했다.
"예진씨. 놈들이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지만 살펴주시겠어요?"
"알겠습니다. 후우."
"무리하지 말고요."
"네에."
그래도 유혜린의 독가스 덕분에 상당히 많은 흡혈귀들을 처리할 수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마지막에 봤던 회의실에 있던 놈들 정도.
하지만 놈들은 모두 정예라고 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놈들을 감당할 수 있는 파티는 하나뿐이다!'
하동건 파티.
그들이 아니면 이놈들을 아무런 피해 없이 처리하기는 힘들 것이다.
'다시 생쥐들을 보내도 되긴 하지만, 그러면 서예진의 부담이 너무 커진다.'
이미 한 번 당해본 놈들이었다.
생쥐만 발견하면 이를 악물고 달려들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서예진이 생쥐가 죽을 때마다 상당한 정신적 타격을 입는 것을 생각할 때, 무작정 다시 시도할만한 작전은 아니었다.
서예진이 놈들의 동태를 살피는 동안 나는 하동건 파티의 상태를 살펴보기로 했다.
'절대자의 눈'
제일 먼저 리더 격인 하동건의 모습을 확인했다.
"후욱. 후욱."
그는 헬스장에서 근력 운동을 하고 있었다.
옆에는 레깅스 차림의 김가영이 함께하고 있었다.
장전동에 다녀온 뒤로 줄곧 집안에만 박혀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굉장히 긍정적인 신호였다.
'훨씬 좋아졌구나'
무표정하게 있어도 깊은 슬픔이 눈을 가득 채우고 있는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그런 분위기가 많이 희석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김가영이 곁에 있어준 덕분이겠지.
'다행이다.'
나는 잠시 그들을 지켜봤다.
"중량은 어떤 거 같아?"
"생각보다 너무 가벼운데."
"...이게 가볍다고?"
하동건의 몸이 좋은 건 사실이었지만, 지금 그가 편안한 얼굴로 들어 올리고 있는 것의 무게는 무려 350kg이었다.
벤치프레스 350kg.
평범한 인간이 도달하기에는 불가능에 가까운 영역이었다.
이것을 들어 올리는 인간이 있다고 해도 그는 80억 인구의 최상위권에 도달해 있는 우락부락한 신체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마저도 350kg의 무게를 '너무 가볍다'고 말하지는 못하겠지.
45레벨에 달한 그의 신체 능력은 그만큼 인간의 한계를 초월해 있었다.
"너도 한 번 해 봐."
"...내가?"
"도와줄게."
"어?"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일어난 하동건을 잠시 바라보던 김가영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 벤치프레스에 누웠다.
이것을 진짜로 들어 올리겠다는 마음보다는 적당히 어울려주겠다는 심산인 것 같았다.
김가영이 바벨을 잡고 하동건이 보조하듯 잡았다.
"준비 됐어?"
"응."
"시작해."
"음."
김가영은 하동건의 장단에 맞춰주며 힘을 주었다.
"어?"
놀랍게도 플레이트가 덕지덕지 걸려 있는 무거운 바벨이 그녀의 손에 의해 뽑혀 나왔다. 심지어 김가영의 팔은 미세한 떨림조차도 없었다.
김가영은 멍하니 자신이 들어 올린 바벨을 바라보다가 하동건을 바라봤다.
"자기가 들고 있는 거야?"
"아니."
"장난치지 말고."
"진짜야."
하동건은 그 말과 함께 아예 바벨에서 손을 놓아버렸다.
"잠...! 깐?"
김가영은 바벨을 내렸다가 다시 들어올렸다.
그리고는 간단하게 감상을 말했다.
"...이거 실화야?"
"나도 놀랐어. 이 정도일 줄은."
하동건 보다는 레벨이 낮지만 김가영도 무려 40레벨에 도달한 괴물이었다.
심지어 그녀의 경우 근력이 아닌 시력이나 순발력 쪽의 능력이 극대화되어 있는 편이었다.
그럼에도 평범한 인간을 아득히 초월한 근력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내가 왜 가볍다고 했는지 알겠지?"
"...응. 진짜였네."
그때였다.
"당신들 도대체 정체가 뭡니까?"
"네?"
한 아저씨가 경악한 얼굴이 되어 그들에게 말을 걸어왔다.
직접적으로 말을 걸어온 것은 그 남자 한 명 뿐이었지만, 현재 헬스장에 있는 모두의 시선이 하동건 쪽으로 집중되어 있었다.
"이거 몰래카메라 같은 거예요? 이거 가짜죠?"
남자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바벨을 가리켰다.
"한 번 들어봐도 되겠습니까?"
"위험할 텐데요."
"아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서 그러지."
생떼를 쓰던 남자는 결국 벤치에 누웠다.
그리고.
"흐읍! 흐으으읍!"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바벨을 들어올리려 안간힘을 써댔다.
하지만 바벨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몸 자체는 그가 하동건보다도 두꺼운 몸을 가지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남자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이 되어 고개를 숙였다.
---
"의심해서 죄송합니다."
하동건은 웃으며 사과를 받아주었다.
"괜찮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생각했다.
'이제 준비가 된 모양이네'
하동건의 상태가 준수하다는 것을 확인한 이후 다른 파티원들의 상태도 살폈다.
실의에 빠져 술에 빠져 있던 강덕수와 김 건은 함께 고블린 사냥을 하고 있었다.
고블린 대여섯 마리가 그들을 향해 달려들었고, 강덕수가 외쳤다.
"일어나라!"
강덕수의 스킬 숙련도는 보기 좋게 늘어나 있었다.
고블린의 바로 앞에서 생성된 기사 한 기가 그대로 할버드를 휘둘렀다.
서걱!
고블린 한 마리의 목이 한 방에 나가떨어졌다.
동시에 고블린의 뒤쪽에서 생성된 강철의 기사들이 고블린의 몸통에 할버드를 찔러 넣었다.
"끼에엑!"
강철 기사들의 움직임도 예전보다 훨씬 자연스러워져 있었다.
스킬을 활용하는 능력이 발전한 것은 강덕수 뿐만이 아니었다.
까아악!
한층 덩치가 커다래진 까마귀가 좁은 동굴을 날아 고블린 한 마리를 덮쳤다.
김 건이 무언가를 할 필요도 없이 덩치가 커진 까마귀들이 고블린들의 숫자를 착실히 줄여주고 있었다.
'걱정할 필요 없겠어!'
강덕수를 데리고 억지로 고블린 소굴로 향했던 것의 효과가 생각보다 좋았다.
함께 실의에 빠져 술을 마시던 김 건도 술독에서 벗어나 간단한 사냥을 나선 모습이었으니까.
45레벨과 40레벨 둘이서 겨우 10레벨도 안 되는 고블린들을 양학하며 몸을 풀고 있는 광경이었지만, 일단 함께 사냥을 한다는 것만으로도 고무적이었다.
강덕수가 김 건을 향해 말했다.
"어때?"
"...괜찮네요."
"오랜만에 나오니까 괜찮지?"
"고블린 소굴로 산책이라니. 선배 취미가 고약해요."
"으하하! 오케이, 오케이. 그래도 뭔가 기분 좋지 않냐?"
김건은 고블린의 목을 부러뜨리는 까망이를 보며 살짝 웃었다.
---
뭐 나쁘진 않네요. 오랜만의 사냥이라 까망이랑 애들도 좋아하는 것 같고."
그들의 레벨이 비해 지나치게 수준이 낮은 던전이었지만, 기분 전환으로는 딱이었다.
김 건이 말했다.
---
선배, 오랜만에 사냥이나 나가볼까요?"
강덕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사냥? 사냥이라면 지금도 하고 있잖아."
"....제 말은 이런 고블린 사냥 말고, 제대로 된 사냥이요. 실은 제가 그동안 술만 마신 건 아니거든요."
김건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보이더니 휘파람을 불었다.
휘이익!
그러자 까망이가 그를 향해 날아왔다.
별 생각 없이 그 광경을 지켜보던 강덕수는 까망이의 속도가 점점 빨라지는 것을 보고는 당황했다. 고블린을 공격할 때처럼 재빠르게 날아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주인인 김 건을 향해서.
그러나 그가 무어라 묻기도 전에 속도를 높인 까망이가 김 건을 덮쳤다.
"건아!"
그 순간.
"걱정하지 마세요, 선배."
까망이에게 덮쳐진 김 건의 모습은 상당히 달라져 있었다.
"...너, 너!"
강덕수뿐만 아니라 나 또한 깜짝 놀라는 중이었다.
'뭐야?'
그도 그럴 것이 김 건의 모습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기 때문이다.
김건이 서서히 두 팔을 펼쳤다.
"!!"
아니, 이제는 두 날개라고 칭하는 게 맞는 거겠지.
"이런 게 가능해졌거든요."
까망이와 김건이 하나로 합쳐져 있었다.
"그러니까 밖으로 나가죠. 이런 좁은 동굴 말고."
새로운 스킬이라니.
나는 다급히 가신 관리창으로 들어가 김 건의 정보창을 확인해 봤다.
'까마귀 교감?'
원래는 까마귀 사역이라고 되어 있던 스킬이 교감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리고 친밀도가 100이 된 대상에 한하여 저런 융합이 가능하다는 설명이었다.
'맙소사'
스스로의 힘으로 스킬을 진화하는 경우가 있다니.
김 건 덕분에 새로운 걸 알게 되었다.
만약에 김 건이 저 모습으로 하늘을 날 수 있다면 정찰 범위가 어마어마하게 넓어지게 될 것이다.
하늘에도 몬스터가 있긴 하지만 지상에서 움직이는 것과는 정말로 천지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훨씬 편해지겠어!'
그렇지 않아도 김 건의 까마귀를 활용할 방법을 생각해두긴 했었다.
서예진의 생쥐를 등에 태우고 움직이게 한다던가 하는 쪽이었는데,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좋군'
모습을 보아하니 강덕수도 김 건도 준비가 된 모습이었다.
'문병호 쪽도 봐 볼까'
문병호와 오언주 그리고 김다정은 지금도 함께 사냥을 나가 있는 상태였다.
'요새는 꽤 멀리까지 간다고 들었는데'
절대자의 눈을 문병호 파티에게 집중했다.
부우웅—
운전 중인 오언주의 모습이 보였다.
마침 사냥에서 돌아오고 있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그들이 달리고 있는 도로는 한쪽으로 차가 치워져 있었는데, 오언주가 직접 두 손으로 치운 것으로 알고 있었다.
뒷좌석에 앉은 문병호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오늘도 덕수 형이랑 건이는 술만 퍼마시고 있겠죠."
"내버려 둬.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정신 차릴 거야."
"그럴까요?"
"응. 걔들은 강한 애들이니까. 조금 시간을 주고 기다려보자. 이런 일에는 시간이 보약이니까."
오언주의 말처럼 그들에게 조금 더 상처를 추스를 시간을 주고 싶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흡혈귀를 대적할만한 파티는 이들밖에 없었다.
하동건, 김가영, 강덕수, 김 건, 문병호, 오언주, 김다정,
현재 내 영역에 있는 파티 중에서는 가장 많은 투자를 받았으며, 그만큼 압도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 에이스 파티.
그들을 향해 소통의 반지를 사용했다.
[오랜만입니다, 다들. 그동안 잘 쉬고 계셨나요?]
070화 [Episode 15] Ace Party (2)
부산 광안리 해변의 한 펜션.
그곳에는 또 하나의 흡혈귀 집단이 존재했다.
안상혁이 이끄는 흡혈귀 집단과 조금 다른 점은 한 사람의 리더가 집단을 이끌고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이었다.
총 다섯 명의 중급 흡혈귀들이 각자의 집단을 통솔하며 의회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이제 이 주변의 인간들은 씨가 말랐어."
"더 이상 흡혈귀의 숫자를 늘리는 것은 안 돼. 이러다가는 다 같이 굶어죽고 말 거야."
그들은 현재 정체기에 든 상황이었다.
주변에 있는 생존자 집단은 모조리 제압을 성공한 상태였다.
현재 광안리 곳곳에 있던 이들은 흡혈귀에게 물려 죽거나, 흡혈귀가 되었다.
모여 있던 흡혈귀들 중 유일한 여자인 오여름이 한탄하듯 말했다.
"그러게 이준영씨. 무식하게 숫자만 늘리는 짓 좀 그만두라고 그랬지?"
"뭐야?"
"내 말이 틀렸어? 너네 애들이 최하급 흡혈귀들을 마구잡이로 늘려대니까 일이 이렇게 된 거 아니야? 어?"
이준영은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오여름을 노려보다가 입을 열었다.
"내 방법은 틀리지 않았다. 우리 중에서도 가장 많은 실적을 올렸고,"
"숫자가 많으니까 그만큼 많이 쳐 먹은 것 뿐 아니야?"
"이 씨발년이?"
오여름이 비꼬듯 말하자 이준영이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이를 갈았다.
"그만"
그때 한쪽에서 턱을 괸 채 가만히 회의를 지켜보던 중년 남자 하나가 끼어들어 두 흡혈귀를 말렸다.
"흠."
"조심해라. 언젠가 그 잘난 턱을 부셔버릴 테니."
"뭐래. 혼자서 생각도 못하는 반병신들만 수두룩하게 들고 있는 주제에."
틱틱대긴 했지만 두 사람의 분위기는 아까처럼 살벌해지지는 않았다.
다른 흡혈귀들은 항상 있어왔던 일이라는 듯 신경도 쓰지 않은 채 회의를 이어나갔다.
"이번 기회에 자리를 좀 옮기는 건 어때요? 여기보다 인간이 더 많은 곳으로."
"나도 그 생각 했어."
그러나 오여름과 이준영의 다툼을 중재했던 남자가 조용히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안 돼."
곧바로 반응이 나타났다.
"왜 안 되는데? 준호야. 자꾸 여기를 고집하는 이유가 뭐야? 예전부터 어째서 여기를 떠나려고 하질 않는 건데? 여기 이러고 있으면 다 같이 사이좋게 굶어 죽는다니깐?"
김준호의 말에 무게감이 있는 것은 그가 안상혁처럼 이 조직을 만들어낸 첫 번째 흡혈귀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안상혁처럼 군림하기 보다는 수평적인 관계를 원했고, 그 덕에 다른 흡혈귀들은 자유롭게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편이었다.
대답이 없자 쏘아붙이듯이 질문을 했던 남자가 가슴을 퍽퍽 쳐대며 말했다.
"답답해 죽겠네. 아무리 우리를 흡혈귀로 만들어주고, 새 삶을 살 수 있게 도와준 너라지만 이유도 모른 채 여기서 굶어죽을 순 없어. 난 떠나야겠어."
그때였다.
"그러면 안 되지."
낯선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누구!"
출가를 선언한 남자가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소리치려던 순간.
푸욱!
"커헉!"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낯선 남자가 그의 목덜미를 물었다.
"끄극 끄그극!"
남자는 순식간에 피를 빨려 미라처럼 말라비틀어져갔다.
그의 피를 전부 빨아먹은 흡혈귀가 천천히 남자의 목에서 입을 떼더니 간단한 감상을 말했다.
"흐음. 잘 익었군."
그때까지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중급 흡혈귀들이 발광하기 시작했다.
"이 미친놈이!"
"죽여!"
바로 오른쪽에 앉아 있던 이준영이 낯선 남자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푸욱!
이준영이 휘두른 주먹은 허공을 갈랐고, 낯선 남자의 오른손은 이준영의 심장을 관통해 있었다.
그 상태 그대로,
푸욱!
송곳니를 이준영의 목에 박아 넣은 낯선 남자가 앞선 경우와 마찬가지로 피를 빨아대기 시작했다.
품속에서 식칼을 꺼냈던 다른 중급 흡혈귀는 그 광경을 지켜보며 조용히 등을 향해 접근했다.
"어억!"
낯선 남자가 이준영의 피를 빠는 것에 전념하는 틈을 타 놈의 등을 노렸다.
"흐읍!"
푸욱!
식칼이 낯선 남자의 등에 깊숙이 꽂혔다.
"흐흐! 병신이 어딜 기어들어—!"
그러나 그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푸슉!
식칼을 꽂은 자리에서 피어오른 핏물이 그대로 그의 목울대를 관통했기 때문이다.
"커헉! 끄윽! 꼭!"
꿀렁!
붉은 핏불로 만들어진 촉수는 남자의 피를 게걸스럽게 먹어치웠다.
목이 관통당한 중급 흡혈귀의 몸이 빠르게 말라비틀어져갔다.
동시에.
미처 반항해보지도 못한 이준영은 그대로 말라비틀어진 미라가 되어 생을 마감했다.
"쩝쩝. 음. 뭐 나쁘진 않네."
달크락!
남자의 등에 박혔던 식칼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댔다.
"쥐새끼처럼 도망가면."
순간 남자의 등에서부터 뻗어 나온 핏줄기가 길게 늘어지더니 발소리를 죽여 가며 도망가던 오여름의 등에 박혔다.
"히이익!"
새된 비명 소리를 들으며 남자의 입고리가 올라갔다.
"살 수 있을 줄 알았나?"
"자, 잘못했어요. 제발 목숨만은... 끄윽.."
그러나 자비는 없었다.
꿀렁!
마찬가지로 오여름은 제대로 된 반항 한 번 못해보고 말라비틀어졌다.
"흐음. 상당히 괜찮은 걸?"
그때까지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김준호가 멍하니 낯선 남자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오랜만입니다, 영훈님."
순식간에 그의 동료 넷을 먹어치운 괴물, 정영훈은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오랜만이네. 한 달만인가?"
"...그 정도 되는 것 같군요."
"그래. 그 동안 잘 지냈어?"
---
"영훈님이 주신 힘 덕분에 아직까지 어떻게든 살아남는 데에는 성공했습니다."
"그렇군. 수고했어."
김준호는 담담하게 물었다.
"이제 제 차례입니까?"
"그렇지."
"여기에서 꼼짝 말고 있으라고 명하신 것도 이것 때문입니까?"
"맞아."
김준호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며 부탁했다.
"살려주십시오."
그러자 정영훈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더니 입을 열었다.
"내가 이러는 이유를 아직도 모르겠어?"
"압니다. 인간을 하나하나 일일이 찾아다니며 피를 빠는 것 보다는 농축되어 있는 중급 흡혈귀의 피가 더 도움이 되시는 거겠지요."
"호오. 잘 알고 있네?"
정영훈의 몸에서 빠져나온 핏줄기들이 갈래갈래 갈라져 김준호에게 다가왔다.
그 중 한 가닥이 날카로운 바늘이 되어 김준호의 얼굴을 찔러왔다.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 한 방울이 핏줄기를 통해서 정영훈의 몸으로 흡수되어 갔다.
"제법 현명하다만. 그러면 더더욱 잘 알 텐데? 목숨을 구걸해 봤자 살아날 구석은 없다는 걸. 차라리 온힘을 다해 나에게 덤벼보지 그랬어?"
"승산이 없는 싸움은 벌이지 않는 성격이라"
"흐흐. 재밌네."
김준호가 담담하게 말했다.
"지금 이 조직이는 수많은 하급 흡혈귀들과 최하급 흡혈귀들이 있습니다. 그들도 분명 평범한 인간보다야 영양이 좋을 테지만, 영훈님께서 몸소 사냥하며 다닐 가치는 없겠지요. 영훈님께서 돌아오기 전까지 다시 중급 흡혈귀 세 마리를 생산해 놓겠습니다."
"이 근방에 인간들은 씨가 말랐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여길 떠날 생각인가?"
"하지만 흡혈귀들은 남아 있지요."
그는 계속해서 설명을 이어나갔다.
"현재 가장 숫자가 많은 아이들은 이준영이 이끌던 애들입니다. 우선은 이준영을 배신자라 칭하여 나머지 애들에게 먹이로 던져줄 생각입니다."
"...계속해 봐."
"동료 흡혈귀의 피를 마시고 힘을 얻은 이들은 동족상잔의 효율성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평범한 인간 수십 마리를 잡아먹는 것 보다 같은 하급 흡혈귀를 잡아먹는 게 낫다는 걸 깨닫게 될 테니까요. 내버려두면 자기들끼리 알아서 잡아먹으며 중급 흡혈귀로 성장하게 될 것입니다."
김준호의 설명을 모두 들은 정영훈은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푸하하! 이거 물건이네? 그렇게 해서라도 며칠이라도 더 살아 보겠다? 진짜 대단한 새끼였네. 크큭."
"영훈님께 가치를 증명하면, 다른 장소로 옮겨서 농장주 역할을 계속하게 될 수도 있겠지요."
"이야. 거기까지 생각하고 있었던 거야?"
"살려만 주신다면, 제가 영훈님의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되겠습니다."
"푸하하하하!"
한참을 그렇게 웃던 정영훈은 고개를 45도로 기울이며 김준호에게 충고했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어떻게든 시간을 벌어서 나와 같은 상급이 되려는 생각이라면 집어 치워."
"상급 흡혈귀들은 너희처럼 천한 태생으로 시작하는 게 아니야. '그분'께 직접 선택받아야만 될 수 있지. 나는 처음부터 상급 흡혈귀였고, 너희는 아무리 발버둥 쳐도 상급 흡혈 귀가 될 순 없어."
"...가슴에 새기겠습니다."
정영훈의 몸에서 뻗어 나온 핏줄기가 서서히 그의 몸으로 되돌아갔다.
"크큭."
한동안 키득대던 정영훈이 넌지시 말했다.
"그럼 기대할게, 농장주"
그것을 마지막으로 그는 다시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가 떠나가고 한동안 김준호는 움직이지 않았다.
시간이 정지하기라도 한 것처럼 그 자리에 앉아서 가만히 어둠 속을 응시하고 있었을 뿐이다.
드르륵
인내심 좋게 기다리던 김준호는 의자에서 일어나 죽은 동료들의 시신을 훑어봤다.
계속해서 무표정하기만 하던 그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개새끼가."
그는 분노가 가득한 눈으로 자신이 직접 흡혈귀로 키워냈던 이들의 시신을 수습했다.
뿌득
이를 갈며 속으로 생각했다.
'궁금하네요. 뒤지기 전에도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는지'
놈이 자신을 살려준 것은 단순한 변덕에 불과할 것이다.
김준호가 무엇을 어떻게 하던지 자신을 어떻게 하지는 못하리라는 자신감.
'거슬려'
김준호가 복수를 다짐할 때, 정영훈은 다음 행선지를 정하고 있었다.
"음. 다음에는 어디였더라. 무슨 아파트 단지였던 거 같은데"
소집에 응한 하동건 파티가 집결하기까지 1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강덕수와 김 건의 일탈 덕분에 술병과 쓰레기가 굴러다니는 소굴이 된 2901호에서 흡혈귀들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했다.
"...그래서 여러분들을 호출한 겁니다."
사정을 모두 들은 하동건이 물었다.
"놈들은 여전히 거기 있습니까?"
"네. 아직은 별다른 움직임을 보여주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도 절대자의 눈을 사용해 놈들을 감시하고 있는 중이었다.
서예진의 생쥐들이 해당 아파트 단지의 하수구를 완전히 장악하고 있는 덕분에 놈들의 움직임을 훤히 꿰뚫어보는 게 가능했다.
"여러분들의 실력이면 무리 없이 정리할 수 있을 겁니다."
그곳의 최고 실력자인 안상혁이라는 놈도 겨우 38레벨인 중급 흡혈귀였다.
전원이 최소 40레벨 이상인 하동건 파티에 감히 대적할 순 없을 것이다.
솔직히 하동건 파티에게 있어서 이것은 나들이나 다를 바 없는 작전인 셈이었다.
"예진씨의 생쥐가 놈들이 있는 아파트 단지로 여러분을 안내해 줄 겁니다. 생각보다 가까워서 금방 도착할 거예요."
만약에 변수가 생긴다고 해도, 웬만한 변수는 하동건 파티에게 위협이 되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한 가지 걱정되는 것이 있다면, 녀석들이 한 때 사람이었던 존재들이라는 것입니다."
내 말에 하동건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지금은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일 뿐이죠."
"...괜찮으시겠습니까?"
하급 흡혈귀였던 제갈성규와 직접 대치해본 나였기에 더욱 잘 알고 있었다.
'겉모습은 인간과 다를 바가 없다'
놈들이 인간을 먹잇감으로 보는 악랄한 존재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가스 폭발이나 독가스로 놈들을 처단할 때 기분이 이상했다.
단지 놈들의 겉모습이 인간을 닮아 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말이다.
아마도 하동건 파티도 나와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다.
'죽이면 죽일수록 익숙해지기는 하지만'
이미 정신적인 충격으로 고생을 하고 있던 이들이라 더욱 걱정이 됐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내 걱정을 눈치 챈 듯 하동건이 나를 똑바로 마주보며 진중하게 입을 열었다.
"재현님께서 무엇을 걱정하시는지는 압니다. 하지만 변해버린 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한 번쯤 거쳐 가야 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네?"
"앞으로 이런 경우가 얼마나 더 많을지 모릅니다. 인간을 닮은 몬스터가 아니라, 진짜 인간을 죽여야 하는 때가 올 지도 모르죠. 그때가 오면, 저는 망설이지 않을 생각입니다."
하동건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때를 위한 예행연습이라고 생각하죠. 괜찮습니다. 이번처럼 멘탈이 깨진다면 또 잠시 쉬면됩니다. 이놈들처럼 술독에 빠지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라 생각합니다."
확신에 가득 찬 어조로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도 제 파티원들도 그렇게 나약하지 않습니다. 중간에 마음이 꺾인다 해도, 다시 일어날 겁니다. 오늘처럼."
나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제가 괜한 걱정을 했네요."
하동건의 각오는 확실히 전해졌다.
"이번에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에이스 파티의 귀환이었다.
071화 [Episode 15] Ace Party (3)
안상혁은 굳은 얼굴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주변에서는 간부급 흡혈귀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해대고 있는 중이었다.
"당장 그놈들을 먼저 쳐야 합니다! 이건 전쟁이에요!"
"그보다는 아지트를 옮겨야 합니다. 적들이 같은 방식으로 계속 공격해댄다면 이곳은 저희들의 무덤이 될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서로 의견이 갈리는 심형식과 손기환이 서로를 노려봤다.
"이봐!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는 말 못 들어봤나?"
"적들은 생쥐 한 마리로 테러가 가능한 집단이야. 이미 발각된 위치에 있어서 좋을 게 하나도 없단 소리다"
"그러니까 시발! 우리가 먼저 치자고!"
심형식의 고함에 손기환이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대답했다.
"상대가 누군 줄 알고?"
그 말을 들은 심형식은 벙찐 얼굴이 되어서는 항변했다.
"누구긴, 시발! 몰라서 물어? 그 자식들 밖에 없잖아! 총 든 병신들!"
"아니."
안상혁이 입을 열자 심형식은 한결 누그러진 말투로 물었다.
"상혁님은 놈들의 정체를 알고 계신 겁니까?"
그의 물음에 안상혁은 고개를 저었다.
"모른다. 하지만 그 집단에 이런 능력을 가진 자가 없다는 건 확실하다. 그리고.."
생쥐가 독가스를 내뿜어낸다는 사실 보다 더욱 심각한 사실이 하나 있었다.
'시체가 사라졌다.'
회의실에 있던 간부급 하급 흡혈귀 중 하나가 독가스에 당해 죽는 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런데 그가 숨을 거두는 즉시 시체가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폭발 사고 때와 똑같다!'
그때도 흔적만 남아 있을 뿐, 시체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더불어 독가스를 내뿜는 생쥐가 회의실에 쳐들어온 직후 갑작스레 수많은 흡혈귀들이 실종되었다.
'같은 놈들의 수작이다.'
그 폭발 사고도, 독가스도,
'경찰 놈들이 아니었어'
즉, 자신들을 노리는 집단이 따로 있다는 소리였다.
'도대체 왜?'
놈들의 정체도, 목적도, 가지고 있는 힘도 현재로써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였다.
"상혁님. 지금 당장 살아남은 모든 흡혈귀들을 데리고 이곳을 떠나야 합니다."
이성적으로 생각한다면 손기환의 말이 정답이었다.
이곳에 있어봤자 알 수 없는 힘을 가진 집단에게 계속해서 테러를 당할 뿐이었다.
'하지만....'
안상혁은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쉽사리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자신을 구해주고, 흡혈귀로 만들어준 그 사람의 당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안상혁에게 이곳에 남아 있으라 명령했다.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 아파트 단지에 있는 모든 이들을 잡아먹으며 성장하고 있으라 했다.
현재 자신은 그 명령을 충실히 이행하고 이제는 주변 생존자들에게까지 영향력을 뻗치고 있었다.
'조금만 기다리면 은인께서 돌아오실 거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은 이 아파트 단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경계 태세를 강화한다. 주변에 생쥐를 발견한다면 반드시 그 자리에서 죽여라. 이상이다."
"상혁님!"
그의 결정에 심형식과 손기환이 동시에 불만을 드러냈다.
그러나 안상혁은 완고했다.
"명령이다."
잠시 침묵하던 두 사람은 고개를 숙이며 복종했다.
그때였다.
벌컥!
회의실 문이 열리며 하급 흡혈귀 하나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적습입니...!"
그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콰아앙!
어디선가 날아온 창이 그의 몸을 꿰어 벽에 쳐 박았기 때문이다.
스르르르
그 직후 하급 흡혈귀의 몸이 모래처럼 흩어지며 사라졌다.
안상혁의 눈이 빛났다.
"....저건?"
지금 찾아온 불청객들이 독가스를 내뿜어대던 생쥐와 한 패라는 것을 단번에 눈치 챌 수 있었다.
저벅저벅
누군가 천천히 이곳으로 걸어오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침묵 속에서 들려오는 발소리의 숫자는 딱 한 명.
곧이어 그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벽에 박힌 창을 뽑아내더니 회의실 안을 바라봤다.
"이런 미친!"
그를 향해 심형식이 달려들었다.
심형식은 맨손이었지만, 날카롭게 벼려진 손톱 자체가 무기였다.
그러나.
서걱!
심형식이 제대로 손톱을 휘둘러보기도 전에 남자의 창이 먼저 심형식의 목을 베어냈다.
심형식은 비명 한 번 제대로 질러보지 못하고 그대로 사라져버렸다.
"흐음."
그 모습을 본 안상혁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러면 나가린데'
은인을 기다리려 했더니 저승사자가 찾아와버렸다.
고민은 짧았고, 결론은 간단했다.
"손기환."
"...네, 상혁님."
"저 놈 막아."
그 말을 마지막으로 안상혁은 이미 부서져 있는 창문을 향해 죽어라 달렸다.
"야, 이 개새끼야!!"
손기환은 욕설을 지껄이더니 반대방향 창문으로 달려 나갔다.
"크아악!"
등 뒤쪽에서 손기환의 최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음 순간, 등골이 서늘해진 것을 느낀 안상혁이 옆으로 몸을 굴렸다.
쐐애애액!
바로 옆으로 창이 고속으로 지나가며 부서진 창문 밖으로 날아갔다.
빠르게 몸을 일으킨 안상혁이 날아간 창을 뒤따라 밖으로 몸을 날렸다.
그러나.
'.....저건 또 뭐야?'
밖으로 나오자마자 자신을 반겨주는 것은 은빛 갑옷을 입고 있는 수상한 놈들이었다.
중세 유럽도 아닌 이곳에서 풀플레이트 갑옷을 입고 있다는 것 자체로 무언가 수상한 놈들이 분명했다.
'빌어먹을!'
그러나 그의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자신의 눈앞에서 빛이 터져나가는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아니, 씨발."
곧이어 빛의 화살이 그의 몸을 헤집었다.
푸부부북!
"크아아악!"
온몸이 찢겨져 나가는 고통 속에서 꼴사납게 바닥에 떨어졌다.
그리고,
푹! 서걱!
은빛 기사들이 들고 있던 할버드가 사정없이 그의 몸을 헤집었다.
[중급 흡혈귀(Lv. 38)를 사냥하셨습니다.]
[초대량의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집구석 절대자의 지갑에 1,823,003,273 원이 입금되었습니다.]
흡혈귀 토벌은 예상보다 훨씬 싱겁게 끝났다.
하동건과 오언주가 건물 안을 헤집고 다니며 남은 잔당들을 처리하고 있었고, 위기를 느끼고 밖으로 도망쳐 나온 흡혈귀들은 강덕수의 강철 기사단의 손에 작살이 났다.
운이 좋아 강철 기사의 포위망의 빈틈을 노린다고 해도 김가영의 빛의 화살이 그들을 노려왔고, 은신 상태로 돌아다니는 문병호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결정적으로 하늘 위에서 까망이와 일체화한 채 아파트 단지를 감시중인 김 건의 시야 밖으로 도망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하동건 파티는 완벽하게 흡혈귀들을 박멸시켜갔다.
[시민 강덕수가 '대연 푸르캐슬 아파트 단지'의 우두머리를 해치웠습니다.]
[대연 푸르캐슬 아파트 단지에 전초기지 건설이 가능해집니다.]
'전초기지 건설이라'
해당 지역에 자리 잡은 우두머리 격인 몬스터를 잡게 되면 가끔씩 뜨는 메시지였다.
'생각보다 쓸 일이 없단 말이지'
건설 기능 중에서 유일하게 한 번도 사용해보지 않은 기능이었다.
'계륵이란 말이지'
지금만 해도 그랬다.
현재 그들이 있는 지역은 영역에서 제법 가까운 거리에 있는 아파트단지였다.
조만간 레벨업을 하게 되면 포함될 지역에 불과한 것이다.
'굳이 돈을 써가면서 전초기지로 만들 필요가 없지'
전초기지를 만들기 적합한 지역은 최소한 영역 내에서 수키로 미터 떨어진 지역이어야 했다.
또한 건설을 위해서는 지금처럼 한 곳에 오래 머문 몬스터를 처리해서 조건을 만족시켜야 했으며, [기사]칭호를 얻은 가신 세 명이 일주일이나 머물러야 했다.
그 이후로도 [기사]칭호를 얻은 가신이 계속해서 머물러야 했고 말이다.
'너무 비효율적이야!'
그렇게까지 해서 전초기지를 활성화시킬 이유를 나는 아직 찾지 못했다.
어떻게든 전초기지를 활용할 방법에 대해 고심하고 있던 그때, 서예진이 눈을 뜨고는 말했다.
"이제 깨끗해요. 흡혈귀들은 모두 박멸된 것 같아요."
생쥐들의 정찰로 확인을 받은 내가 소통의 반지를 사용해 하동건 파티에게 이 사실을 전했다.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이제 귀환해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하동건 파티가 입구에 결집하는 동안 여전히 하늘을 날아다니고 있는 김 건을 향해 물었다.
[아파트 내부에 생존자가 있는 것 같던가요?]
까마귀의 얼굴을 한 김 건이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지금까지는 발견하지 못 했습니다. 창문 대부분이 커튼이 쳐져 있어 확인하기 위해서는 일일이 집을 들려봐야 할 것 같아요."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생존자를 찾기는 쉽지 않았다.
'하긴 평범한 사람이 보면 김 건도 몬스터와 다를 바 없어 보일 테니까'
김건을 발견한다고 해도 SOS를 보내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에 비해 겉모습이 평범한 인간과 같은 흡혈귀들은 사람들을 현혹하기 쉬웠을 것이다.
그냥 문 앞에서 물이나 비상식량 따위를 들고 구하러 왔다는 소리를 지껄이면 현관문을 열 수 있었을 테니까.
'그래도 살아있는 사람은 있을 거다!'
우리 아파트 단지만 해도 끝까지 의심하며 문을 열어주지 않았던 사람들의 숫자가 생각보다 꽤 됐었으니까.
그들을 위해 구호물자라도 지원해주고 싶었지만,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어떡한다.'
그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였다.
김 건이 부리를 열고 말했다.
"재현님. 누군가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습니다."
하동건은 파티를 점검하며 본부로 되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런 것도 나쁘지 않군'
흡혈귀들은 분명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놈들의 목숨을 거두는 과정에서 하동건은 별다른 죄책감을 느끼지 못했다.
놈들이 블랙 오크들과 겹쳐보였기 때문이다.
인간을 주식으로 삼는 흡혈귀들이 아파트 단지를 거점으로 잡은 이유야 뻔했다.
아파트 단지만큼 인구 밀집도가 높은 곳도 드물었으니까.
놈들이 이곳에서 어떻게 사람들을 꾀어내서 잡아먹었을지 뻔히 보였다. 그래서인지 오히려 자비 없이 놈들의 목숨을 끊어낼 수 있었다.
오히려 놈들을 죽이고 처단하는 것에 작은 희열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확실히 정상은 아니군, 나도'
그런데 그게 뭐 어쨌단 말인가.
이미 세상은 미쳐 있었다.
이런 세상 속에서 살아가면서 미치지 않는 게 더 이상할지도 모른다.
'몬스터 사냥이라'
하동건은 자신의 가슴에 작은 목표가 생겨났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세상에 나타난 모든 몬스터들을 쓸어버리고 싶었다.
마침 운이 좋아 자신은 김재현의 선택을 받았고, 덕분에 분에 넘치는 힘을 받았다.
거기에 자신의 친구들로 구성된 파티는 현재 김재현의 영역 내에서도 독보적인 위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정말로 가능할지도 모른다.'
압도적인 힘으로 흡혈귀들을 처단하는 과정에서 한 가지 희망을 마음속에 품게 됐다.
'재현님과 함께라면 이 세상의 모든 몬스터들을 없애버릴 수 있을 지도....'
몬스터들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특히나 아파트 단지에 자리 잡은 몬스터들에게는 손속에 자비를 두지 않을 생각이었다.
굳은 결심을 가슴에 새기는 순간.
"너희들은 뭐야? 뭔데 이렇게 맛있는 냄새를 풍기는 거야?"
웬 젊은 남자 하나가 싱글거리며 그들 앞에 나타났다.
그 순간.
[상급 흡혈귀입니다. 조심하세요.]
김재현의 목소리가 하동건 파티에 들려왔고, 동시에 그들의 눈빛이 변했다.
"일어나라!"
제일 먼저 강덩수가 움직였다.
싱글거리는 남자의 앞에 강철의 기사 한 기가 소환되어 할버드를 휘둘렀다.
콰직!
그러나 남자의 발길질에 강철의 기사는 힘없이 나가떨어졌다.
"!!"
"무슨?"
강덕수가 소환한 강철의 기사는 저리 쉽게 나가떨어질 만한 존재가 아니었다. 저 모습 하나만으로 저 놈이 얼마나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강덕수가 소환한 강철의 기사는 한 기가 아니었다.
푸욱!
놈의 뒤에서 소환된 강철의 기사가 할버드의 도끼날을 놈의 오른쪽 어깨 깊숙이 박아 넣었다.
그러나 할버드는 몇 센티 파고들지 못했다. 강철의 기사가 휘두르는 할버드는 웬만한 몬스터도 일도양단해버리는데 말이다.
순간.
푸슈슉!
어깨 죽지에서 빠져나온 피의 촉수가 은빛 갑옷을 파고들었다.
그 직후.
쫘아악!
거짓말처럼 갑옷이 찢겨져 나갔다.
하동건 파티가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동안, 남자의 입이 양쪽으로 찢어졌다.
"재밌네."
072화 [Episode 15] Ace Party (4)
상황이 심상치 않게 흘러간다는 것을 눈치 챈 김다정이 스킬을 사용했다.
"축복!"
하동건과 오언주의 몸에서 빛이 쏟아내며 상급 흡혈귀의 양쪽에서 짓쳐 들어갔다.
동시에.
"일어나라!"
타이밍을 맞춰 강덕수가 강철의 기사를 소환했다.
상급 흡혈귀의 발아래 상반신만 생성된 강철의 기사들이 할버드를 위쪽으로 찔러왔다.
푸욱!
순식간에 양 옆구리에 창이 박힌 상태가 되었음에도 상급 흡혈귀는 여유를 잃지 않았다.
그 직후.
투두두두―!
놈의 뒤쪽에서 기습적으로 요란한 총소리가 들려왔다.
졸지에 뒤통수에 총탄 세례를 받은 상급 흡혈귀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흡혈귀의 뒷통수는 실시간으로 탄두를 뱉어내고 있었다.
고개를 돌린 상급 흡혈귀는 아무것도 없는 빈 허공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분명 방금까지만 해도 느껴지던 인기척이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그는 의아해하면서도 가볍게 발을 굴렀다.
놈의 양 옆구리에 박혀 있던 할버드가 박살나는 것과 동시에 놈의 몸이 정면을 향해 쏘아져나갔다.
"크륵!"
"!!"
하동건과 오언주가 놈을 향해 거의 동시에 손톱과 창을 휘두르던 시점이었다.
전속력을 다해 돌진하고 있었던 지라 멈출 수도 없었다.
졸지에 두 사람은 서로 충돌하게 생겼고, 동시에 상급 흡혈귀는 나머지 파티원을 향해 돌격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두 사람은 짧은 순간 눈빛을 교환했고, 오언주가 먼저 왼쪽으로 방향을 꺾었다.
그 직후 하동건이 반대 방향으로 몸을 비틀며 창을 들고 있던 손을 뒤쪽으로 힘껏 뺐다.
화르륵!
창날에 검은 불꽃이 일렁였고, 이내 흡혈귀 놈을 향해 쏘아졌다.
그 순간 상급 흡혈귀의 등 뒤쪽에서 뽑아져 나온 피의 촉수가 유려하게 움직이며 하동건의 창을 막아섰지만,
콰직!
검은 기운을 휘감은 창을 막지 못하고 순식간에 바스라졌다.
"응?"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상급 흡혈귀가 고개를 돌린 순간.
파아앗!
정면에서 쏘아진 김가영의 빛의 화살이 그를 덮쳤다.
푸부부!
바로 앞에서 수십 갈래로 찢겨진 빛의 파편이 놈의 몸을 덮치는 것과 동시에 흑색의 창이 지척에 도착했다.
상급 흡혈귀가 혀를 차며 손을 휘둘렀고,
콰앙!
검은 불꽃이 휘감긴 창이 나가떨어졌다.
그러나 지금까지 별다른 타격을 입지 않았던 흡혈귀의 손이 검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놈이 눈살을 찌푸리며 혼잣말 했다.
"이건 또 뭐야."
상급 흡혈귀는 김가영이 쏘아낸 빛의 파편이 직격한 상처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자신의 손을 불태우는 검은 불꽃을 바라보고 있었다.
실제로 빛의 파편이 만들어낸 자잘한 상처들은 순식간에 핏물이 차오르더니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수인화를 한 오언주에 맞먹을 정도로 엄청난 재생력이었다.
상급 흡혈귀가 자신의 손을 불태우는 검은 불꽃을 바라보며 속도를 늦춘 순간.
"크릉!"
광폭화한 오언주가 놈의 심장을 향해 손톱을 휘둘렀다.
촤좌!
그 순간 놈의 몸에서 뻗어 나온 핏줄기들이 오언주의 팔을 휘감은 다음 그녀의 힘을 역이용해 던져 버렸다.
콰아아앙!
오언주는 달려들던 자세 그대로 아파트 벽면을 박살내며 들어가 버렸다.
파아앗!
그 순간 다시 한 번 빛의 화살이 놈을 노리고 날아왔다.
일전에 아무런 피해도 없었기에 상급 흡혈귀는 그것을 무시하며 나아가려 했다.
그러나.
우우웅
산탄총처럼 폭발하며 사방으로 빛의 파편을 뿌리던 그때와는 무언가 달랐다.
불길함을 느낀 상급 흡혈귀가 화살을 붙잡으려 했다.
그러나.
푸슉!
"!?"
피어싱 스킬이 담긴 빛의 화살이 상급 흡혈귀의 손아귀를 박살내며 그대로 심장을 향해 직행했다.
푸욱!
마지막 순간에 몸을 비튼 덕분에 그것은 흡혈귀의 심장 옆을 아슬아슬하게 스쳐지나갔다.
"허억. 허억."
처음으로 위기를 느낀 상급 흡혈귀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원래는 서포터부터 죽이려 했거든? 그게 정석이니까."
광기로 번들거리는 그의 눈이 김가영을 향했다.
"가만히 있었으면 조금 더 오래 살 수 있었을 텐데, 멍청한—"
놈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아무도 놈의 혼잣말에는 관심이 없었고, 기다려줄 이유도 없었기 때문이다.
콰아앙!
흑색 기운을 품은 채 날아온 창을 피해 옆으로 몸을 날린 흡혈귀는 붉게 충혈 된 눈으로 괴성을 질러댔다.
"으아아악! 이 개 잡것들이!"
신경질적인 괴성과 함께 흡혈귀의 허벅지와 종아리가 크게 부풀어올랐다.
그 직후.
콰아앙!
콘크리트 바닥이 박살나며 흡혈귀의 신형이 김가영을 향해 빠르게 쏘아졌다.
촤좌좌!
그에 더해 놈의 양손에서 핏줄기가 튀어나오며 김가영을 노려왔다.
그러나.
슈슉!
놈의 공격이 닿기 직전, 김가영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문병호가 그녀를 데리고 함께 텔레포트한 것이었다.
콰과과곽!
핏물로 만들어진 촉수는 애꿎은 바닥만 찔러댈 뿐이었다.
푸쉬이이이—
그리고 동시에 상급 흡혈귀의 코앞에서 보라색 독가스가 뿜어져 나왔다.
"흐읍!"
그것도 놈이 숨을 들이마시는 타이밍을 기막히게 맞춰서 말이다.
콰아앙!
다시 한 번 발을 구른 상급 흡혈귀가 간신히 보라색 독가스 덩어리에서 빠져나와 숨을 헐떡였다.
"쿨럭! 케헥!"
유혜린의 독가스를 양껏 들이킨 흡혈귀가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몸을 일으켰다.
놈의 목 줄기부터 얼굴까지 혈관이 도드라지게 부어올랐고, 실핏줄이 터져나간 두 눈에서 피눈물이 흘렀다.
천천히 주변을 둘러본 상급 흡혈귀는 어느새 자신의 지척까지 다가온 하동건과 오언주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놈이 노리고 있던 김다정과 김가영은 어느새 상당히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동한 상태였다. 게다가 그녀들의 주위를 강철의 기사들이 단단히 에워싸고 있었다.
"크큭."
짧게 웃은 상급 흡혈귀가 입을 열었다.
"대단해. 너희들 정말 인간 맞아? 정체가 뭐야?"
갑자기 말을 걸어오는 상급 흡혈귀를 상대로 하동건이 적당히 어울려주었다.
"오히려 이쪽에서 묻고 싶군. 너희들의 정체는 뭐지? 흡혈귀들을 이끄는 놈은 어떤 놈이고, 지금 어디에 있지? 살고 싶다면 대답해.."
"내 신세가 처량하군. 먹잇감에게 협박 받는 날이 올 줄이야.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궁금하다고 했나?"
상급 흡혈귀는 속으로 웃고 있었다.
'멍청한 것들'
그의 목적은 시간을 끄는 것.
그것 하나였다.
"우리는 '그분'의 축복을 받아 힘을 얻게 된 신인류다. 그분이 어떤 분인지는 나도 정확하게 알 수 없군. 어디에 계신지는 알고 있지만 말이야."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 상급 흡혈귀를 향해 하동건이 마주 웃으며 물었다.
"그게 어디지?"
"그 전에 내 물음에 먼저 답해줬으면 좋겠는데. 여기에 내 귀여운 흡혈귀들이 있었을 텐데. 그놈들은 어떻게 된 거지?"
"모두 죽였다."
"...호오.."
상급 흡혈귀가 입가를 부들부들 떨면서 물었다.
"그런 것 치고는 피 냄새가 전혀 나지 않는데. 혹시 너희도 피를 마시나? 원래 그것들은 내가 공들여 만들어 놓은 먹잇감들인데 말이지."
그 순간 상급 흡혈귀는 속으로 승리자의 미소를 지었다.
준비가 거의 끝나가기 때문이었다.
쿵!쿵!쿵!
상급 흡혈귀의 심장이 거칠게 박동하며 전신의 피가 빠르게 순환했다.
빠르게 움직이는 피는 조금씩 그의 몸을 팽창시켰다.
넘쳐나는 피가 공급되자 근육이 점점 더 부풀어 오르며 강력해졌다. 전신에 에너지가 가득 넘쳐흐르며 언제든지 폭발할 준비를 마친 순간.
하동건이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아무래도 시간 끄는 게 목적이었나 보군."
뜨끔한 흡혈귀가 이내 미소를 드러냈다.
"이제 와서 알아차려봤자 너무 늦었다!"
전신의 근력을 폭발시키기 직전, 눈앞의 남자가 이상한 말을 했다.
"내가 괜히 쓸데없는 대화에 장단을 맞춰줬을까?"
"뭐?"
그 순간.
지이잉—
흡혈귀의 코앞에서 무언가 이상한 것이 생성되었다.
헬스장에서 많이 볼 수 있는 20kg짜리 플레이트.
"?"
그것을 인식한 순간.
콰직!
엄청난 속도로 발사된 플레이트가 상급 흡혈귀의 머리를 지워버렸다.
중력을 이용해 최대한 가속시킨 쇳덩이를 흡혈귀의 얼굴을 향해 쏘아낸 직후 소통의 반지를 사용해 하동건 파티에게 명령했다.
[아까도 말했듯이 흡혈귀 놈들의 본체는 심장입니다! 심장을 박살내주세요!]
머리가 날아갔음에도 놈은 아직 죽지 않았다.
그 증거로 놈은 쓰러지지도 않았고, 사냥에 성공했다는 시스템 메시지도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화르륵!
하동건의 창에서 검은 불꽃이 피어올랐고, 그것이 놈의 심장을 헤집는 순간.
[상급 흡혈귀(Lv. 49)를 사냥하셨습니다.]
[초대량의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집구석 절대자의 지갑에 36,124,284,637 원이 입금되었습니다.]
막대한 양의 경험치와 정산금이 들어왔다.
절대자의 왕관 덕분에 몇 배는 더 부풀어 오른 양의 경험치와 정산금이었다.
덕분에.
[스킬 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스킬 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오랜만에 연속적인 레벨 업을 경험할 수 있었다.
[집구석 선포가 25레벨에 도달하였습니다.]
[스킬 포인트를 3개 획득합니다.]
즐거운 알림과 함께.
'크읍!'
올 것이 왔다.
나를 중심으로 시야가 확장되며 영역 내의 모든 것들이 축소되어가는 느낌이었다. 순식간에 늘어난 감각이 영역 전체를 가득 채웠을 때, 이윽고 확장이 시작되었다.
'!!!!'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저 고통을 감내하는 것은 이제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뿌득!
내가 고통에 적응하지 못하는 이유를 이제는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레벨이 올라갈수록 느껴지는 고통이 점점 더 강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높아질 대로 높아진 레벨 속에서 한 번에 두 계단이나 점프해버린 덕분일까? 고통의 시간은 상당히 오래 지속되었고, 입에서는 피비린내가 풍겨오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너무 꽉 이를 악문 탓에 잇몸이 박살나고 있는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오언주의 능력인 태고의 생명력 덕분에 실시간으로 상처가 회복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잇몸이 박살나는 고통은, 제대로 느껴지지도 않았다.
영역이 확장되는 것에 대한 고통이 너무나도 커서, 자잘한 고통 따위는 인식하기조차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시간이 끝나고 고통이 끝나자 몸에서 긴장이 풀리며 탈력감이 찾아왔다.
"재현님..."
눈을 떠 보니 그곳에는 울먹거리는 서예진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서예진이 눈물을 닦아내며 물었다.
"또 영역이 늘어난 건가요?"
"...어떻게 알았어요."
"영역이 늘어날 때마다 이렇게 되시잖아요."
내가 레벨업을 할 때 서예진이 옆에 있었던 적이 상당히 많았다는 것이 떠올랐다.
[시민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조건을 만족하는 개체가 발견되었습니다.]
[시민권을 부여하시겠습니까?]
새롭게 늘어난 영역과 그에 포함된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냥 전부 받아버리고 싶지만...'
혹시나 저 속에 흡혈귀가 포함되어 있을지도 모르니 일일이 확인해 봐야 했다.
그러나 시야가 보이는 곳을 가득 메우고 있는 수천 명의 사진을 보고 있자니 막막했다.
힘겹게 하나하나 확인한 뒤 모두 정상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시민권을 부여했다.
새롭게 합류한 이들 중 각성 능력을 가진 이들이 무려 세 명이 있었는데, 그들의 자세한 능력까지는 미처 확인할 여력이 없었다.
[여러분, 수고하셨습니다. 이제 돌아오셔도 됩니다.]
하동건 파티에게 말을 전한 뒤, 서예진을 향해 말했다.
"예진씨."
"네, 재현님."
"조금만 잘게요. 너무 피곤해서요."
서예진이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보였다.
눈꺼풀이 무거웠다.
몰려오는 수마를 그대로 받아들여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073화 [Episode 15] Ace Party (5)
어두운 방 안이었다.
'여긴...?'
한쪽 구석에는 불이라도 피운 것인지 그을린 흔적이 있었고, 다른 곳에는 식량 따위가 모아져 있는 것이 보였다.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하여 발걸음을 옮길 때였다.
찰팍
"...응?"
차갑고, 약간은 끈적이는 감촉이 발바닥을 타고 뇌리를 뒤흔들었다.
이내 그것이 피라는 것을 눈치 채자 바닥에 쓰러져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시체가 보였다.
피라도 빨린 것인지 창백한 피부로 억울한 듯 눈조차 감지 못한 사람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눈에 들어왔다.
그 생생한 죽음의 현장에 압도되었다.
그때.
"허억!"
시체들이 동시에 눈을 번쩍 떴다.
너무 놀란 나머지 나는 뒷걸음질 쳤다.
툭
그때 종아리 뒤쪽에서 무언가 부딪히는 느낌이 들었고, 나는 뒤돌아보았다.
"흐윽. 흑."
아이들이 울고 있었다.
다섯 명의 아이들을 대표하는 양하윤이 굵은 눈물을 흘리며 나를 원망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러셨어요? 왜 나쁜 사람들을 받아준 거에요?"
"그건.."
무언가 변명을 하고 싶었지만, 입이 꽉 틀어 막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입을 열기 위해서 안간 힘을 써 봤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아이들이 엉엉 울면서 나를 원망했다.
"흐어엉. 아저씨 때문이야."
"아저씨 때문에 엄마가 죽었어."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데 갑자기 아이들이 울음을 뚝 그쳤다.
무표정한 아이들이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살려주세요. 아저씨는 우리 엄마 살릴 수 있잖아요."
저 아이들이 어떻게 알게 된 걸까.
오언주를 제외하고는 하동건 파티조차도 자세히 알지 못하는 사실이었다.
그때.
"재현님."
뒤쪽에서 오언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니 오언주가 슬픈 눈을 하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번에 말씀하셨죠? 마지막이 아니라고."
"우리 시우.. 시우가 보고 싶어요."
나에게 다가온 오언주가 내 어깨를 붙잡으며 애원했다.
"그동안 저, 열심히 했잖아요. 네?"
아무런 대꾸도 못하는 나를 향해 싸늘한 표정의 오언주가 말을 이었다.
"...돈이 많이 들어서 그런 거예요? 그런 거죠?"
그 직후 오언주의 몸이 부풀어 오르더니 곰의 아가리가 나를 향해 벌려졌다.
눈을 질끈 감았을 때,
"흐흐흑"
나를 압박하던 감각이 사라지고 희미한 울음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천천히 눈을 뜬 자리에는 물에 젖은 생쥐 꼴로 물에 퉁퉁 불은 시체를 붙잡고 흐느끼는 김가영이 그 자리에 있었다.
눈물범벅인 김가영이 천천히 고개를 올리더니 나를 바라봤다.
"진짜에요? 우리 아빠는 살릴 수 없어요? 왜요?"
서글프게 우는 김가영의 주변으로 하동건, 강덕수, 김 건이 천천히 나를 돌아봤다.
그들은 아무 말도 없었지만, 마치 내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목숨 걸고 네 가족을 찾아준 우리에게 정말로 해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느냐.
그렇게 따져 묻는 것 같았다.
그때, 배경이 점점 어두워지더니 사람들이 하나 둘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나에게 손을 뻗으며 좀비처럼 다가오기 시작했다.
도망칠 수도 없었다.
이미 등 뒤에도 사람들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계속해서 중얼중얼 거리며 나를 향해 다가왔다.
"재현님."
"재현님!"
"김재현!"
여기저기서 내 이름이 메아리처럼 맴돌았고, 기어코 거리를 좁힌 사람들의 손이 내게 닿았다.
턱 턱턱
"으윽!"
거친 손길이 온몸을 짓눌러왔다.
그리고 그들의 손길에서부터 격통이 시작되었다.
마치 영역이 늘어날 때의 고통처럼 몸이 터져나갈 것처럼 아파왔다.
머리가,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으아아아아아악!!!!"
그 직후 꿈에서 깨어났다.
"─아악!"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며 깨어난 나는 본능적으로 온몸을 더듬었다.
아프지 않았다.
멀쩡했다.
"흡, 흐읍."
거친 숨을 몰아쉬며 천천히 이곳이 우리 집 안방이라는 사실을 자각했다.
아무래도 서예진이 직접 옮겨주고 간 듯 했다.
덕분에 푹 잘 수 있었다.
'아주 생생한 악몽을 꾸긴 했지만 말이지!'
암막커튼이 쳐져 있는데다 한밤중이어서 그런지 방 안은 어둠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방금 꿈에서 보았던 그 광경처럼 말이다.
품위유지 스킬을 사용해 불부터 켰다.
번쩍
방 안이 환해지며 조금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후욱, 후우."
악몽이야 매일 같이 꾼다지만, 오늘 것은 유달리 리얼했다.
시체를 눈앞에서 본 탓일까.
"그러고 보니 그 시체들은 어째서 남아 있었던 거지?"
어쨌든 그때 당시에는 흡혈귀 놈들도 시민권을 획득한 상황이었다. 내 영역에 들어와 있었으니까.
그런데 놈들이 죽인 시민들의 사체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인간 사체는 정산되지 않는 건가? 아니면 시민권을 가지고 있어서?'
어느 쪽이든 앞으로는 되도록 보고 싶지 않은 풍경이었다.
흡혈귀 전용 업적도 만들어두는 편이 좋겠어. 실수로 받아들이더라도 문제가 되지 않게.
띠링!
[업적 설정이 완료되었습니다.]
시민권을 가진 이가 흡혈귀가 되었을 경우 그 능력이 극히 제한되고, 살인자와 마찬가지로 얼굴에 표식이 생기도록 해 두었다.
이러면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스킬 포인트가 3개 생겼다!'
그 중 하나는 어디에 쓸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상점 스킬부터 올리고....'
[집구석 절대자의 상점 스킬이 Lv. 6이 되었습니다.]
[등록 가능한 물품의 개수가 1000개로 늘어났습니다.]
[모든 상품의 가격이 30% 할인됩니다.]
여기까지는 예상했던 대로의 기능이었다.
상점의 경우 짝수 레벨 마다 10%의 할인 효과가 추가로 붙곤 했으니까.
그런데.
['인챈트' 기능이 개방됩니다.]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건설 가능 항목에 '인챈트 공작소'가 추가됩니다.]
이건 예상하지 못한 추가 기능이었다.
'인챈트? 그 인챈트 말하는 건가?'
보아하니 인챈트를 위해서는 인챈트 공작소를 지어야 하는 것 같았다.
'건설 모드'
우우웅—
새롭게 추가된 인챈트 공작소를 짓는 비용은 50억이었다.
인챈트 공작소는 가격에 비해 그다지 커다란 공간이 필요 없었다.
'매점 바로 옆에 지으면 되겠군'
마침 그곳이 비어 있었다.
김다빈이 나름대로 청소를 했음에도 고블린이 더럽힌 흔적이 아직 남아 있었다.
이번에 인챈트 공작소를 지으며 그것들을 정리해버리면 될 듯 싶었다.
'인챈트 공작소 건설'
띠링!
[인챈트 공작소를 설치할 장소를 정해주세요.]
'102호'
[인챈트 공작소 시설 건설 완료까지 남은 시간]
-71시간 59분 59초
그때 남은 시간 밑에 평소에는 보지 못했던 버튼 하나를 확인할 수 있었다.
{즉시 완료}
'음?'
처음 보는 기능이었기에 무심코 건드려봤다.
[인챈트 공작소' 시설 건설을 즉시 완료하시겠습니까?]
[해당 시설의 즉시 완료를 위해서는 8개의 크리스탈이 필요합니다.]
아무래도 크리스탈 1개당 10시간 정도 건설 시간을 줄여주는 효과가 있는 것 같았다.
현재 나에게 남아 있는 크리스탈은 100개.
크리스탈 300개를 모으면 신기를 뽑을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렇게 크리스탈을 낭비할 순 없었다.
'취소'
[즉시 완료를 취소합니다.]
'그러고 보니 새롭게 늘어난 영역에 미확인 던전이 있는 것 같았는데, 한 번 찾아봐야겠네.'
확실하게 어디라고는 말 못해도 던전이 생겨난 지역은 대충 감이 왔다.
'이번엔 무슨 던전일까'
일전에 던전 공략으로 제법 많은 것을 얻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꽤 기대가 되었다.
'크리스탈 200개만 더 모으면 신기를 하나 더 뽑을 수 있다.'
소통의 반지도 그렇고 왕관도 그렇고 그 기능이 굉장히 뛰어난 편이었다. 크리스탈은 될 수 있으면 신기 뽑기에만 사용하는 게 가장 효율이 좋을 것이다.
'이제 남은 스킬 포인트는 두 개'
이것들을 어디에 투자할지는 조금 고민해 봐야 할 것 같았다.
'나도 레벨이 올라갈수록 레벨업이 어려워지고 있다.'
30레벨이 언제 다가올지 모른다는 소리였다.
상점 품목을 다 채우고 레벨업을 하지 못하는 답답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인지 스킬 포인트 사용에 신중해질 수밖에 없었다.
'빠른 레벨업을 위해서는 결국 고레벨 몬스터를 사냥해야만 한다'
자잘한 몬스터들이 주는 경험치도 물론 도움이 되었지만, 이번에 사냥한 상급 흡혈귀와 같은 고레벨 몬스터 한 마리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상급 흡혈귀 사냥에 큰 공을 세운 하동건 파티를 생각하니 절로 흐뭇해졌다.
'역시 에이스 파티답다고 해야 하나'
하동건 파티는 복귀하지마자 신고식을 화려하게 치렀다.
흡혈귀들을 소탕하며 수십 억을 벌어줬고, 마지막에 상급 흡혈귀를 잡아내며 무려 360억을 벌어다 주었으니까.
다른 사냥 팀은 한 달을 굴러도 나올까말까 한 실적을 복귀 첫 날에 내다니.
과연 에이스 파티답다고 할 수 있었다.
'보면 운도 좋단 말이지!'
초반부터 나에게 여러 가지를 안겨주었던 축캐 문병호를 제외하고도 하동건 파티는 전체적으로 운이 좋았다.
일단 하동건 파티처럼 고레벨 몬스터와 자주 마주치는 파티가 잘 없었다.
고레벨 몬스터와 마주친다고 해도 그것들을 사냥하거나 몰아붙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파티도 없었고 말이다.
'정산금이나 경험치는 레벨이 올라갈수록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니까'
단적으로 레벨 10이하의 고블린 수백 마리 잡는 것과 10레벨 후반대의 오크 한 마리를 잡는 게 엇비슷하다는 것만 봐도 그 차이를 알 수 있었다.
심지어 경험치의 경우 오크 한 마리가 더 많았다.
이 현상은 위로 올라갈수록 더욱 심해지는 편이었다.
겨우 1레벨 차이가 수십 억 차이를 낼 정도이다.
'문제는 그 정도 레벨인 몬스터는 극소수인데다, 위험하다는 점이지'
이번에는 하동건 파티의 맹활약 덕분에 상급 흡혈귀를 사냥할 수 있었지만, 솔직히 많이 위태위태했다.
'상급 흡혈귀가 두 마리였다면 아무리 하동건 파티라고 해도 피해 없이 공략하진 못했겠지'
결국 빠른 레벨업을 위해서는 고레벨 몬스터를 사냥해야만 하는데, 고레벨 몬스터는 그 숫자도 적은데다 사냥에는 큰 리스크를 동반한다.
'앞으로 운 좋게 고레벨 몬스터들이 나와 준다는 보장도 없다'
무리해서 고레벨 몬스터를 찾아다닐 생각도 없었고 말이다.
그렇게 될 경우, 필연적으로 레벨업 속도는 느려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스킬 포인트는 일단 남겨두자'
30레벨이 되기 전에 또 다시 상점 슬롯을 다 채우게 될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절대자의 눈'
습관처럼 절대자의 눈을 킨 나는 제일 먼저 아이들을 맡긴 최형준네를 확인해 봤다.
최나연과 최서연을 비롯한 일곱 명의 아이들이 거실 바닥에 이불을 깔고 서로 뒤엉켜 잠을 자고 있었다.
아이들답게 겨우 하루 사이에 꽤나 가까워진 듯 했다.
'그 다음은'
강덕수와 김 건이 살고 있는 바로 밑에 층을 살펴봤다.
하동건 파티에게 내어주었던 이곳은 이제 강덕수와 김 건 두 사람의 차지가 되어 있었다.
문병호의 경우 내가 내어준 다른 세대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고, 유혜린의 경우 오언주와 함께 김다정의 집에서 지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드르러어엉~ 쿠우우울."
여전히 빈 술병이 굴러다니기는 했지만, 강덕수와 김 건이 술에 취해 잠들어 있지는 않았다.
그 다음은 자연스레 김다정의 집인 2902호를 둘러보았다.
모두가 잠들어 있을 줄 알았는데, 오언주 혼자 깨어 있었다.
그녀는 이제는 고물이 되어버린 스마트폰으로 시우의 사진을 훑어보고 있는 중이었다.
.....
거실 소파에서 조용히 사진을 넘겨보는 오언주를 향해 소통의 반지를 사용했다.
[오언주씨.]
화들짝 놀란 오언주가 고개를 들었다.
[잠시만 올라와 주실 수 있나요?]
물어보고 싶은 게 하나 있었다.
현관문을 열어주자 오언주가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와 내 질문을 기다렸다.
-이번 흡혈귀 정도면 퀘스트를 걸만 했을 텐데, 어째서 기회를 달라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나요?"
"아...."
돌려 말하긴 했지만, 퀘스트라는 말에 오언주는 내가 지금 말하는 주제가 '부활'에 관한 것이라는 것을 눈치 챘다.
잠시 고민하던 오언주가 말을 꺼냈다.
"저는 그 날,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재현님 덕분이죠."
그녀가 씁쓸한 표정을 짓더니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 이후에 가영씨의 아버님이 돌아가신 것도 보고, 가족을 잃은 동료들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다정이의 이야기도 들었고요."
"다들 아파하고,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면서 느낀 게 많았어요. 만약 제가 계속해서 시우를 보고 싶다고 고집을 부린다면, 언젠가 분명 문제가 될 것입니다.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이니까요. 그로 인해 재현님이 힘들어질 수도 있고, 간신히 안정을 되찾은 지금 이 사회가 혼란스러워 질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는 제 아들이 분란의 씨앗이 되길 원치 않아요."
"그건...."
"다들 비슷한 아픔을 끌어안고, 그럼에도 살아가는데, 저 혼자 유별날 필요는 없다고 결론 내렸어요."
오언주는 나를 향해 허리를 숙이더니 웃는 모습으로 말했다.
"저와 시우에게 기적을 내려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작별 인사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을 선물 받았다는 게... 아직도 꿈만 같아요.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녀의 표정은 처음 만났을 때와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불안정하기만 하던 그때와는 달리, 온화한 표정에서는 안정감이 느껴졌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안녕히 주무세요."
새삼스럽게 그녀가 나보다 한참 어른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어째선지 위로를 받았다는 그녀의 말이, 나에게 위로가 되었다.
지금 잠에 들면 편안하게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후.
한 달이라는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074화 [Episode 16] 폭풍전야 (1)
백승엽은 쌍둥이 형제 문지훈과 문상훈과 함께 고블린 던전을 공략 중이었다.
"캬아아악!"
고블린들이 그들을 발견하자마자 기겁하며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그것은 여기 있는 세 사람 모두가 고블린 학살자의 칭호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블린들에게 본능적인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데다 기본급의 10%를 추가로 주는 칭호였다.
그러나 그들이 고블린들을 보고도 조금도 긴장하지 않은 것은 단순히 칭호의 효과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투두두두―
그들의 손에는 인스턴트 던전 공략을 위해 대여한 소총이 들려 있었기 때문이다.
"끼에엑!"
고블린 열댓 마리가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던전 안의 고블린을 사냥하는 것은 오히려 안전 구역 바깥에 있는 놈들을 사냥하는 것보다 쉬웠다.
일단 이놈들이 가지고 있는 무기라고 해 봐야 무딘 돌칼 정도였기 때문이다.
어느 가정집에서 노획한 것으로 보이는 식칼이나 가위를 들고 덤벼대는 고블린들 보다는 훨씬 덜 위협적이었다.
투두두~!
백승엽은 동굴을 울리는 총성에 눈살을 찌푸렸다. 귀마개가 있긴 했지만 쉴 새 없이 울려 퍼지는 총성에 고막이 먹먹했기 때문이다.
총을 맞고 쓰러진 고블린들을 확인사살 하고 있던 중이었다.
[퀘스트를 완료하셨습니다.]
[보상이 지급됩니다.]
[소량의 경험치를 획득하셨습니다.]
'드디어 오십 마리 다 잡은 건가'
이제는 하루 일과가 되어버린 퀘스트를 완료한 백승엽이 기지개를 켰다.
그때 마지막 고블린 시체가 사라지며 허공에 던전 출구가 나타났다.
그것을 확인한 백승엽이 일행을 향해 물었다.
"다들 얼마나 남았어?"
"열 마리 정도?~"
"미투~"
두 사람은 마흔 마리만 사냥하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승엽이 먼저 퀘스트를 완료해낸 것이다.
그들의 대답에 백승엽이 승리자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다음 던전은 너네끼리 가라. 이 형님은 먼저 퇴근한다."
그러자 문지훈이 부탁했다.
"야. 같이 좀 가줘라."
"흐흐. 어휴. 너희는 이 형님이 없으면 어떡하려고 그러냐? 자립심을 키워, 자립심을."
문지훈이 굳이 그에게 남아달라고 부탁한 것은 던전 최소 공략 인원이 세 명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대로 백승엽이 떠나면 곤란했다.
백승엽의 태도는 아니꼬왔지만, 문지훈은 꾹 참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하하. 그래, 친구야. 우리가 너 없으면 어떻게 이 위험한 곳에 들어오겠어."
"인정~"
문지훈과 문상훈이 이렇게까지 백승엽의 비위를 맞추는 것은 퀘스트 페널티 때문이었다.
예전에 도심에 거인이 나타났을 때, 그들은 책임을 회피하고 도망치는 선택을 했다. 그 대가로 계속해서 고블린 사냥 퀘스트를 강제 받게 되었다.
그 퀘스트를 시간 내에 클리어하지 못 했을 때에 찾아오는 1분 동안의 극심한 고통.
'그건 진짜 지옥이 따로 없었지'
던전이 나타나고 나서는 거의 겪은 적 없었지만, 예전에 주변 고블린들의 씨가 말랐던 시절에는 자주 겪었던 고통이었다.
해당 페널티를 겪게 되면 1분이 한 시간처럼 느껴지는 신비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고통이야'
던전이라는 것이 생겨난 뒤에는 거의 겪을 일 없는 고통이었다.
예전보다 잡아야 하는 고블린 숫자가 늘어나긴 했지만, 크게 걱정할 필요 없었다.
던전에서는 한 번에 백 여 마리나 되는 고블린들이 쏟아져 나왔고, 총이 있는 이상 고블린 사냥의 난이도는 굉장히 쉬운 편이었다.
동굴 전체를 울리는 총성만 참으면 어려울 게 없었기 때문이다.
백승엽이 거들먹거리며 말했다.
"그래, 뭐. 내가 없으면 너희도 많이 불안할 테니, 어울려 주도록 할까."
문지훈은 표정이 썩어 들어가려는 것을 간신히 참으며 대꾸했다.
"고마워, 승엽아."
쌍둥이 형제가 백승엽의 행패를 참아주는 것은 단순히 던전 최소 공략 인원 때문만은 아니었다.
던전이 없던 시절, 그러니까 총을 대여 받을 수 없었던 시절에 백승엽의 도움을 꽤 많이 받았었다. 조잡한 창을 들고 고블린들과 백병전을 벌여야 했던 그 시절에는 백승엽이 여러가지로 도움을 주었었다.
'그러니까 내가 참아야지!'
그때 도와줬던 것을 생각하면 이 정도 거들먹거림 정도야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다.
"일단 밖으로 나가자."
출구를 통해 던전 밖으로 나온 세 사람은 앞에서 대기 중이던 담당 직원에게 다가갔다. 원래라면 총기와 헤드랜턴 등의 장비를 반납해야 했다.
그러나.
"지금 바로 재공략 가능할까요?"
던전 공략 일정은 한 시간 단위로 잡는 편인데 일반적인 파티가 던전 공략에 걸리는 시간이 40분에서 50분 정도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겹도록 고블린 사냥을 해 온 백승엽 팀은 20분도 안 되는 시간에 던전을 공략해 버렸다.
덕분에 이런 제안을 할 수 있는 것이었다.
한두 번 있었던 일도 아니었기에 직원은 익숙하게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가능합니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장비를 점검하고 여분의 탄창에 실탄을 가득 채우는 등의 재정비 이후에 곧바로 다시 던전에 투입되었다.
"가자."
다시 던전 안으로 들어간 세 사람은 이번에도 20여 분 만에 공략을 마치고 나왔다.
담당 직원에게 총기와 장비를 반납한 그들은 내일 공략 예약을 확인한 뒤 갈라졌다.
"그럼 내일 보자."
"그래."
"오케~"
집에 가기 전 문지훈이 문상훈에게 물었다.
"뭐 좀 사갈까?"
"음~ 고기~?"
"고기 좋지. 오늘 저녁은 고기 구워 먹자."
1층 매점을 찾은 그들은 술과 고기 말고도 무언가 살 게 없나 기웃거렸다.
매일매일 고블린 사냥을 강제받는 만큼 그들의 경제 상황은 다른 이들에 비해서 굉장히 여유로운 편이었다. 고블린 한 마리에서 나오는 돈이 5천원에서 6천 원 정도이고, 두 사람이 하루에 100마리가 넘는 고블린을 잡는다.
그들이 하루에 벌어들이는 금액만 50만원이 넘어가는 것이다.
던전 공략에 들어가는 장비 대여와 실탄 소모비용을 빼더라도 한 사람당 20만원이 넘는 순수익을 가져가는 셈이다.
덕분에 돈 쓸 때 눈치 볼 필요가 없었다.
술과 고기와 함께 콜라와 과자 등을 바리바리 싸들고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집에 도착한 그들을 어머님께서 환대해 주셨다.
"우리 아들들 왔어? 오늘은 또 뭘 그렇게 사왔대?"
"고기 사왔어."
"고기 구워 먹자~!"
장 봐온 것들을 정리한 문지훈은 곧바로 안방에 있는 샤워실로 가 따뜻한 물을 맞았다.
"후우. 살 것 같네."
간단히 샤워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자 거실 쪽에 있는 화장실에서 물소리가 들려왔다.
수건으로 대충 머리의 물기를 털어내며 문을 열자 욕조 안에서 물을 맞고 있는 문상훈의 모습이 보였다.
"또 목욕이냐?"
"기분 좋잖아~"
"어쨌든 오늘도 고생했다."
"너도~."
따지고 보면 문지훈이 형이긴 했지만 두 사람은 그런 사소한 것은 신경 쓰지 않았다. 태어날 때부터 친구처럼 지내왔기 때문이다.
문지훈은 컴퓨터 의자에 앉아 거의 눕다시피 한 자세로 멍하니 창문 밖을 바라봤다.
'하늘이 예쁘네'
문지훈은 요즘 들어 가끔 생각하곤 한다.
어쩌면 예전보다 지금이 더 좋은 거 아닐까.
몬스터가 세상에 나타나고 잠시 힘들어지긴 했다.
당장 전기와 수도가 끊기고 밖에 나갈 수도 없는 상황에서 물과 식량이 사라져가기만 하는 극한의 상황은 기억한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김재현이라는 존재가 나타나면서 모든 것이 변했다.
안전지대라는 개념이 생겨났고, 그것을 이용해 고블린들을 사냥할 수 있었다.
그 실적을 인정받아 전기, 수도, 가스를 쓸 수 있게 된 이후부터는 일상의 안정을 되찾을 수 있게 되었다.
퀘스트 페널티 때문에 잠시 힘들었던 때도 있었지만, 던전이 생겨나고 총을 사용해 고블린 사냥을 할 수 있게 된 지금은 솔직히 너무 편했다.
'적어도 그때보단 낫다.'
지잡대를 졸업하고 쥐꼬리만한 월급을 받으며 중소기업을 다니던 그때보다는 지금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는 희망이 안 보였었는데'
하루를 산다기보다는 버텨내고 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던 나날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하루하루가 생동감으로 넘쳐나고 있었다.
'이대로만 이어졌으면...'
문득 이 평화를 가져다 준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사람이 없었다면 이런 평화를 꿈 꿀 수는 없었겠지'
문지훈은 지금 이 안정감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그를 떠올리며 진심을 담아 기도 올렸다.
'부디 이 평화가 계속해서 지속되기를'
그 순간.
우우웅—
"...어?"
문지훈의 몸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와 함께 온몸에 에너지가 넘쳐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빛이 잠잠해지고 나서 문지훈은 멍하니 혼잣말 했다.
---
"뭐였지?"
그는 미처 알지 못했다.
그가 원한 것과는 다르게, 앞으로 그의 미래에는 스펙타클한 사건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시민 문지훈의 충성도가 100에 도달했습니다.]
[시민 문지훈이 가신으로 등록됩니다.]
[가신 보유 한계치가 늘어납니다.]
서예진과 함께 그녀가 만들어준 오일 파스타를 먹고 있던 그때 눈앞에 시스템 창이 나타났다.
'문지훈이 누구였더라?'
아무런 전조도 없이 혼자서 충성도 100을 찍어버린 위인이 누구일까 한참 생각하던 나는 기억 속에서 문지훈의 존재를 떠올릴 수 있었다.
"아!"
백승엽이라는 양아치 옆에 붙어 다니던 쌍둥이 중 하나였다.
시스템을 통해 매일매일 고블린 사냥 퀘스트가 부여되도록 조치해 놓은 놈들 중 하나였다.
예전에 싸이클롭스를 사냥할 때 멋대로 도망친 놈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갑자기 충성도 100을 찍었다고?'
황당해하고 있는 사이 서예진이 나를 불렀다.
"오빠. 왜 그래? 맛이 이상해?"
"으응?"
불안해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서예진을 향해 설명해주었다.
"그런 거 아니고, 잠시 일이 생겨서, 예진아 잠시만."
"응. 천천히 해요."
충성도 100은 쉽사리 찍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어느 정도 이상까지는 나와의 접촉만으로도 충성도와 신뢰도가 빠르게 상승하지만, 위로 올라갈수록 충성도를 올리는 일이 힘들어진다.
특히 충성도 100은 어떤 특별한 이벤트라도 있지 않은 이상 나오기 힘든 수치였다.
'가신 관리, 문지훈'
곧바로 그의 스펙을 확인해 봤다.
이름 : 문지훈 (Lv. 30) [+]
칭호 : [스물한 번째 종] [고블린 학살자]
신뢰도 : 89 충성도 : 100
각성 능력 : 냉기 발산
경험치 분배율 : 0% (+200%)
★퀘스트 부여」
냉기 발산 (A 등급)
정신력을 소모하여 사방으로 냉기를 발산한다.
정확히 어떤 기능인지는 그가 능력을 사용하는 모습을 봐야하겠지만, A등급인 것만 봐도 괜찮은 능력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절대자의 눈'
문지훈은 이제 막 샤워를 하고 나온 것인지 발가벗은 채 의자에 앉아 있었다.
매일 주어지는 고블린 사냥 퀘스트는 이미 완료한 것인지 부여되어 있는 퀘스트가 없었다.
'잘 됐네!'
곧바로 능력을 사용하라는 퀘스트를 부여해봤다.
퀘스트를 부여하자마자.
"뭐, 뭐야? 이게 왜...?"
기겁하며 퀘스트 내용을 확인하는 문지훈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자신이 방금 받은 퀘스트가 고블린 사냥 퀘스트라고 착각한 듯 했다.
그런 그를 향해 소통의 반지를 사용했다.
[안녕하세요, 문지훈씨.]
"히익!"
문지훈은 갑자기 들려온 내 목소리에 당황했고, 그 덕에 의자가 뒤로 넘어갔다.
그런 그를 향해 태연하게 말했다.
[퀘스트 내용을 다시 한 번 확인해주세요.]
"어... 호, 혹시 그분이십니까?"
[그분?]
순간적으로 상급 흡혈귀 놈이 말했던 '그분'이 떠올랐다.
내 목소리가 날카롭게 변하자 문지훈이 더듬거리며 추가 설명을 이어나갔다.
"그, 30층에 계신 분...! 죄, 죄송합니다! 이름을 기억하지 못해서!"
알몸으로 허리를 숙이는 그를 향해 말했다.
[퀘스트 내용을 확인해주세요.]
"네, 넵!"
문지훈은 퀘스트 창을 확인하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냉기 발산...?"
그 순간.
쩌저저적
그의 몸을 중심으로 날카로운 얼음 덩어리들이 솟아올랐다.
이내 그가 있던 방안에 한기가 가득 차오르며 사방이 얼어붙기 시작했다.
"어엇?"
그 모습을 본 나는 결심할 수 있었다.
'역시 고블린 사냥으로 썩히기에는 아까운 능력이야!'
075화 [Episode 16] 폭풍전야 (2)
멍하니 얼어붙은 벽을 바라보는 문지훈을 향해 말했다.
[문지훈씨 파티원들 소집해서 30층으로 올라오세요.]
[문지훈씨?]
"아, 예, 예! 뭐, 뭐라고 말씀 하셨죠?"
[파티원들 소집해서 30층으로 올라와주세요. 잠시면 됩니다.]
"아, 알겠습니다!"
문지훈을 부른 뒤 식사를 마무리했다.
"잘 먹었어."
"맛있었어?"
"응. 엄청"
"헤헤."
사용한 식기들을 식기 세척기 안에 넣고 돌려놓은 다음 소파에 앉았다.
그러자 까미가 내 무릎 위를 차지했고, 나는 그런 까미를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삐이
기분 좋은 듯 늘어지는 까미를 보고는 살짝 미소 짓자 서예진이 내 옆에 앉았다.
"까미가 요새 영 힘이 없는 거 같아. 해가 짧아져서 그런가."
나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얘는 원래부터 이랬어."
내가 기억하는 까미의 모습은 대부분 햇살 아래에 쓰러져 나른한 표정으로 일광욕을 하는 것 밖에는 없었다.
"오빠, 영화 볼래?"
"영화?"
"응. 노트북이라고 옛날 영화야."
"어디서 구했대?"
"몰라. 팔던데? 짜잔!"
서예진은 USB를 자랑스럽게 꺼내 보이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잠시만 기다려, 오빠!"
"그래."
주방으로 쪼르르 달려간 서예진은 부스럭거리며 무언가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요새 저런 게 많이 나오네'
영화뿐만이 아니었다.
드라마, 유튜브 영상, 소설, 만화, 음악 등등.
다양한 컨텐츠들이 시민들 사이에서 거래가 되고 있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저것들 중 대부분은 불법 다운로드를 받은 파일일 것이다.
혹여나 정당하게 돈을 주고 구입한 컨텐츠라고 해도, 다른 사람들에게 대가를 받고 공유하는 것은 불법이었다.
하지만.
'세상이 망해버린 지금, 그게 다 무슨 상관이겠어'
오히려 불법 다운로더들이 인류의 다양한 컨텐츠 유산을 지켜냈다고도 볼 수 있었다.
어쨌든 시민들 사이에서는 영상의 교환이나 직접 돈을 받고 파는 사람들도 꽤 존재했다.
신기한 것은 시민들 사이의 자잘한 거래는 대부분 '현금'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시민들도 지갑에 있는 돈을 거래하는 것이 가능하긴 했다.
하지만 내가 시민들에게 돈을 줄 때처럼 '수수료'가 발생한다.
10%나 되는 수수료를 절약하기 위해서 개인간의 거래는 대부분 현금을 사용하곤 했다.
이것 때문에 2주쯤 전에 주변 현금인출기를 박살내거나 빈집을 찾아다니며 현금을 구해오는 시민들까지 생겼었는데, 그들은 스스로를 '트레저헌터'라고 불렀다.
'꽤 도움이 됐었지.'
일단 트레저헌터라는 새로운 직업이 생겨난 것만 해도 반가운 일이었다.
경제활동인구 스킬과 몬스터 사냥만으로는 아무래도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이 구해온 현금덕분에 현금 거래가 활성화되면서 여러 가지 거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이들이 가져온 현금이 사람들이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의 가짓수를 기하급수적으로 늘려주었던 것이다.
길가에 버려진 차 중에 괜찮은 차를 찾아내어 되파는 중고차 딜러들도 생겨났고, 다양한 음식을 파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또한 서예진이 사온 영화처럼 컨텐츠를 파는 이들도 생겨났다.
각자 자신만의 방법으로 돈을 벌기 시작한 것이다.
어느 정도로 현금 거래가 활성화되었냐 하면, 몬스터 사냥으로 먹고사는 일부 사람들 중에는 매점에서 상품을 구매한 후 현금을 받고 상품을 되팔거나 수수료 10%를 감수하고 현금을 사들이는 사람들까지도 나타났을 정도였다.
현금이 아니면 아예 거래가 안 되는 상품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뭐, 나도 어떻게 보면 트레저헌터였다고 할 수 있나'
물론 나는 평범한 사람들과는 스케일이 조금 달랐다.
그들이 힘들게 현금인출기를 박살내거나 빈집의 문을 따서 현금을 구하는 동안 나는 은행 금고를 털었다.
절대자의 눈과 절대자의 창고를 활용하여 은행에 있는 현금을 싸그리 털어왔다.
덕분에 지금도 우리 집의 작은 방에는 현찰이 가득 쌓여 있었다.
한참 딴 생각에 빠져 있던 그때였다.
투둑 툭!
주방에서 무언가 터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팝콘 향이 집 안에 퍼져나갔다.
"팝콘?"
"응. 맛있겠지?"
"냄새는 일단 합격이네"
한동안 타닥거리더니 서예진은 대야 한 가득 팝콘을 담아 왔다.
"짜잔!"
하나 집어먹어 보니 짭짤하게 맛있게 만들어졌다.
"잘 만들었네."
"이 정돈 기본이지!"
서예진의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말했다.
"고마워. 잘 먹을게"
그녀는 배시시 웃으며 거실 TV에 USB를 꽂았다.
불을 끄고 나니 완벽한 영화 감상실이 완성이 되었다.
식기 세척기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오긴 했지만, 그리 거슬릴 정도는 아니었다.
영화가 시작되자 까미는 초롱초롱한 얼굴이 되어 티비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서예진이 손등으로 까미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재밌겠다. 그치, 까미야?"
뻽!
까미가 에너지가 넘치게 변하는 몇 안 되는 순간 중 하나였다.
'절대자의 눈'
절대자의 눈으로 확인해보니 문지훈과 문상훈 그리고 백승엽까지 모여서 이곳으로 올라오고 있는 중이었다.
[문지훈씨. 죄송한데 내일 아침 일찍 오실 수 있겠습니까?]
"엇 네?"
[제가 급한 일이 생겨서요.]
"아, 알겠습니다. 내일 아침 일찍 찾아뵙겠습니다."
옆을 바라보니 어느새 영화에 몰입해 있는 서예진과 까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평화롭네.'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영화를 봤다.
영화를 보면서, 동시에 절대자의 눈을 운용해 영역 전체를 돌아보기 시작했다.
우선 잘 정비된 도로가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
부서진 곳이나 버려진 차량 없이 과거 세상이 바뀌기 전만큼은 아니지만 소수의 차량이 운행되고 있었다. 또한, 신호등과 같은 교통시설도 정상적으로 운행되는 중이었다.
'전부 수복 스킬 덕분이지'
집구석 절대자의 집구석 수복 스킬은 잘 사용하지 않던 스킬이었다.
돈 들어갈 곳이 차고 넘치는 데 굳이 돈을 들여서 박살난 창문이나 집을 고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예전에 까미가 변신하며 박살내었던 창문을 고치는 것과 김다정이 살고 있는 2902호의 문을 박살냈던 것을 고칠 때 말고는 거의 사용하지 않았던 스킬이었다.
싸이클롭스가 박살낸 곳에는 건설 기능을 사용해 태양광 발전 시설이나 헬스장을 만들어버렸다.
그러면 자잘한 쓰레기나 무너진 건물을 고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로를 사용하는 일이 많아지면서 박살난 도로를 수복해야 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앞으로 쭉 사용하게 될 스킬이란 것을 깨달은 직후 2개 남아 있던 스킬 포인트 중 하나를 수복 스킬에 투자했었다.
'그랬더니 대박이 났지'
집구석 수복 스킬이 레벨2가 되면서 '토용 제작'이라는 기능이 새롭게 생겨났는데, 이게 대박이었다.
마침 절대자의 눈 시야에 한창 수복 공사가 진행 중인 도로가 눈에 들어왔다.
'열심히 일하고 있네'
싸이클롭스가 만들어낸 발자국이 커다랗게 찍혀 있는 곳이었는데, 그곳에서 토용(土俑)이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쿠구구구ᅳ
토용이들이 박살난 콘크리트에 손을 뻗으면 천천히 수복되며 예전 모습을 되찾아나갔다.
'확실히 비싼 값을 한단 말이지!'
한 마리당 무려 3억.
하지만 그 성능이 워낙 마음에 들어서 최대치인 30마리를 모두 채웠다.
100억이라는 거금이 들긴 했지만, 지난 한 달간 토용이들이 수복시킨 도로들에 수복 스킬을 사용했다면 그 몇 배가 들었을 것이다.
'수복 스킬을 올리길 잘 했어!'
스킬 레벨업의 무한한 가능성을 또 한 번 경험했지만, 나는 마지막 스킬 포인트 하나를 쉽사리 사용하지 못하고 있었다.
스킬 포인트를 사용할 곳은 많았다.
매번 매력적인 기능이 생겨났던 품위 유지도 좋았고, 한계가 200kg인 창고의 한계를 늘리고 싶기도 했다.
더불어 거의 매일 사용하는 스킬인 절대자의 눈도 끌렸고, 보이지 않는 손, 건강, 절대자의 문까지.
모든 스킬이 레벨을 올릴 가치가 있었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나도록 마지막 스킬 포인트를 사용하지 못하고 있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아직도 레벨이 25다'
한 달 전, 상급 흡혈귀를 잡고 레벨 25가 된 이후로 단 한 번도 레벨업을 경험해보지 못했다.
'필요 경험치가 급격하게 올라간 기분이야!'
상급 흡혈귀처럼 레벨이 높은 몬스터를 사냥하진 못했지만, 충분히 많은 몬스터들을 잡았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하동건 파티가 던전을 성공적으로 공략해주면서 개수 제한이 30개로 늘어난 고블린 인던에서도 꾸준한 사냥이 이루어졌고, 공략 횟수가 다 해서 사라지면 곧바로 새로운 인던을 만들어주곤 했다.
'그럼에도 부족하다는 건가'
새로운 스킬 포인트를 얻기 위해서는 30레벨을 찍어야만 했다.
그런데 26레벨 가는 것도 이렇게 어려운데, 30레벨은 더욱 힘들 것이다.
당연히 지금보다 더 오랜 시간이 걸릴 거라는 소리였다.
'주변에 있는 몬스터들도 상당히 줄어든 상태이기도 하니'
하동건 파티를 비롯한 수많은 사냥 팀들의 활약 덕분에 이 주변에 있는 몬스터들의 씨가 말랐다.
이제는 몬스터 사냥을 위해서는 상당히 먼 거리까지 가야해서 차로 이동하는 게 기본이 됐을 정도였다.
'다른 곳에 사냥 포인트를 만들어야 해'
몬스터가 풍부한 지역을 찾아서 그곳에 전초기지를 만들어볼 생각이었다.
'전초기지만 만들어지면 절대자의 문 스킬로 통행이 가능해지니까'
더불어 다른 지역에는 고렙 몬스터들이 자리 잡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상급 흡혈귀 수준만 되는 놈들이 몇 마리만 있었어도 금세 30레벨을 찍었을 텐데'
그러나 크게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런 고렙 몬스터들이 무더기로 존재할 수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었으니까.
이때까지는 말이다.
"우으윽"
한 손에 목이 붙들린 채로 공중에 떠 있는 남자가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쳤다.
날카롭게 뻗은 손톱으로 자신의 목을 감싸고 있는 두꺼운 손을 마구 긁어봤지만, 헛수고였다.
"이봐. 네 이름이 뭐라고 했었지?"
"우으으그! 크아악!"
"그렇군. 이 상태로는 말을 못 하겠어."
그가 손가락에 힘을 풀어주자 바닥에 떨어진 남자는 다급하게 숨을 들이쉬었다.
"흐으으읍! 후욱, 훅"
숨을 헐떡거리며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올려다보았다.
자신의 목을 조르던 괴물은 덩치가 어마어마했다. 2m가 넘어갈 것 같은 신장에 돌덩이처럼 단단한 근육이 전신에 알알이 박혀 있었다.
몸만 보면 사람이라기보다는 오크에 가깝게 보였다.
괴물이 입을 열었다.
"네 이름이 뭐라고 했었지?"
"..김준호입니다. 후욱."
다분히 반항적인 눈빛을 하고 있는 것과는 반대로 김준호는 고분고분하게 말을 뱉었다.
"그래. 너 정영훈이 알고 있지?"
"!!"
김준호의 반응을 보며 괴물이 덤덤하게 말했다.
"그래, 그래. 그 나대는 거 좋아하는 병신 새끼 말이야."
김준호는 이를 드러내며 놈을 향해 적대감을 드러냈다.
---
"그 새끼가 보내서 온 겁니까?"
"뭐?"
괴물이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내가 그 멍청한 새끼 밑으로 보이나?"
불쾌함이 짙게 드러나는 표정을 유지한 채로 괴물이 중얼거렸다.
"쭛. 그 새끼가 죽었다는 것도 모르는 걸 보면, 어디로 가서 뒈졌는지도 모르나보군."
"주, 죽었다고요?! 그자식이?"
괴물은 흥미를 잃은 얼굴이 되어 대꾸 없이 손을 휘둘렀다.
퍼석!
순식간에 김준호의 머리가 날아갔다.
머리 잃은 시체가 천천히 앞으로 고꾸라졌다. 괴물은 김준호의 시체를 향해 손을 뻗었다.
울컥울컥
김준호의 모든 생명력이 모여든 핏덩어리가 천천히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 이후 놈이 천천히 입을 벌리자 어둠속에서 날카롭게 빛나는 송곳니가 잠시 보였다.
촤아아악!
생명력이 깃든 피가 놈의 입으로 빨려 들어갔고, 식사를 마친 거구의 남자는 천천히 사무실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곳에는 지옥이 펼쳐져 있었다.
흡혈귀 수십 마리의 시체가 그곳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그것들 중에는 아직 꿈틀거리며 생명을 유지하고 있던 것들이 존재했다.
놈은 천천히 그것들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김준호에게 그랬던 것처럼 손을 뻗었다.
울컥울컥
생명력이 깃든 피의 구체가 솟아오르더니, 다시 그의 입속으로 사라졌다.
"흠."
잠시 입맛을 다시던 거구의 남자가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투덜거렸다.
"이 빌어 쳐 먹을 새끼는 도대체 어디서 뒈진 거야?"
076화 [Episode 16] 폭풍전야 (3)
문지훈은 아직도 얼떨떨했다.
'소문이 진짜일 줄이야'
신비한 능력을 지닌 초능력자들에 대한 이야기는 시민들 사이에서도 제법 유명했다.
그분의 선택을 받은 사람들이 초능력을 얻게 된다는 소문은 공공연하게 퍼져 있는 상황이었다.
시민들 사이에서 초능력의 존재가 일파만파 퍼져나갈 수 있었던 것은 단연코 '의료팀'의 존재 때문이었다. 직접 이능력을 사용하며 환자들을 치료하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경험했다.
문지훈의 경우는 그 기적을 직접 체험한 사람 중 하나였다.
'내가 다정님처럼 그 분의 선택을 받게 될 줄이야!'
던전이 본격적으로 활성화되기 전, 문지훈은 안전 구역 밖의 고블린들과 목숨을 건 사투를 매일같이 벌였다.
고블린들은 약했지만, 떼로 몰려다니는 놈들을 조잡한 무기를 들고 사냥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무리 안전지대를 잘 활용한다고 해도 위험한 순간은 찾아올 수밖에 없었고, 고블린에게 칼을 맞은 적이 있었다.
'그때는 진짜 죽는 줄 알았는데'
근처 의료팀으로 후송 된 이후 응급실에서 처치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운이 좋았던 그는 마침 그곳에 있던 김다정을 만날 수 있었다.
그녀는 초록빛 기운을 내뿜더니 순식간에 상처를 치유해 버렸다.
등에 꼽혀 있던 칼을 뽑을 때에도 통증 한 번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간질간질한 감각과 함께 상처가 사라져 버렸다.
그 신비로운 기적을 몸소 체험했던 문지훈은 별안간 이 거대한 공간을 안전지대로 만들어버린 존재에 대해 제대로 자각할 수 있었다.
딱 한 번 얼굴을 마주했던 그 남자가 얼마나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깨닫게 된 것이다.
거대한 안전지대를 만든 것도 모자라 정말로 소문처럼 저런 능력자들을 만들어낼 수 있는 존재라면, 그는 과연 어떤 존재일까?
비로소 그때 거인이 등장했을 때, 백승엽과 함께 지하 주차장으로 도망쳤던 일이 진심으로 후회됐다.
결정적인 순간에 도망쳐버린 자신은 이제 그의 선택을 받지 못하리라고 여겼으니까.
'그런데 내게도 기회를 주셨다.'
문지훈은 손바닥을 내려다보며 힘을 사용했다.
쩌저적
손바닥 주위로 한기가 퍼져나가며 얼음 결정들이 얼어붙어갔다.
'이 힘만 있으면 고블린 던전 정도는 혼자서도 클리어 가능하다.'
총이 없어도 혼자서 고블린들을 압살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동시에 감사했다.
'내가 마음을 고쳐먹었다는 것을 그분께서 알아주신 거야!'
솔직히 기뻤다.
자신의 속죄와 참회의 마음을 그분께서도 알아주셨다는 의미였으니까.
'이건 기회야'
그는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든 그분께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그분께 깊은 인상을 남겨주는 거야. 문지훈, 넌 할 수 있어!'
그의 방 창문을 통해 햇살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날이 밝은 것이다.
'아침 일찍이라고 하셨으니 이제 슬슬 준비해야겠군'
문지훈은 밤을 꼴딱 샌 상태였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하나도 피곤하지가 않았다. 머릿속에서 엔돌핀이 계속해서 솟구치고 있었다.
제일 먼저 동생의 방을 열어젖힌 다음 그의 이름을 불렀다.
"상훈아."
"으음?"
"일어나. 이제 준비해야지."
속옷 차림의 문상훈은 비몽사몽한 눈빛으로 문지훈을 바라보다가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몇 신데?"
"일어나서 샤워하고 갈 준비해야 돼. 얼른."
문지훈의 재촉에도 불구하고 문상훈은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다른 기능은 불구가 되어버렸지만, 시계 역할 하나는 기가 막히게 수행하는 기기였다.
"...아 뭐야. 일곱시잖아. 더 잘래."
이미 이런 반응을 예상했던 문지훈은 이불을 걷어버리고 냉기를 내뿜는 자신의 손을 문상훈의 등에 집어넣었다.
"아악!"
"이래도 안 일어나? 이래도?"
"그, 그만! 아, 알았어, 일어날게! 일어나면 되잖아!"
그를 강제로 깨워 샤워실로 보낸 문지훈은 곧바로 백승엽의 집까지 찾아갔다.
초인종을 누르자 밖으로 나온 것은 백승엽이 아닌 그의 동생, 백승민이었다.
"....지훈이형?"
"오랜만이다, 승민아."
문지훈은 훈훈한 미소로 그를 바라봤다.
백승민은 그와는 달리 거인이 나타났을 때, 용기를 내어 기회를 거머쥔 사람이었다.
그분께 인정을 받아 권총을 소유할 수 있는 특혜를 받았고, 나중에는 구호팀을 이끌게 되기까지 했다.
보아하니 지금도 출근 준비를 마치고 나가려던 참인 것 같았다.
'하지만 내가 너보다 먼저 그분의 선택을 받았지'
그가 알기로 백승민은 이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승리자가 된 느낌이었다.
"형은?"
"아직 자고 있어요."
"좀 깨워줄래? 그분께서 우리를 아침 일찍 호출하셨거든."
"그분이요?"
문지훈이 검지손가락으로 위쪽을 가리키며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꼭대기 층에 계시는 그분 말이야."
"아아. 재현님이요?"
"그분 이름이 재현님이셔?"
"네. 김재현님이세요."
"그렇구나."
문지훈은 다시는 잊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김재현이라는 이름을 속으로 계속해서 되뇌었다.
그때 백승민이 실소를 내뱉으며 말했다.
"와 근데 이 새끼는 재현님 호출인데도 아직까지 쳐 자고 있었단 말이네요? 아직 정신 못 차렸네?"
"최대한 빨리 준비해서 오라고 좀 전해줄래?"
"알겠어요."
"고맙다."
백승민의 일처리는 아주 확실했다.
덕분에 30분 뒤, 세 사람은 백승엽의 집 앞에서 모일 수 있었다.
백승엽이 하품을 크게 하며 불평했다.
"하암. 그 새끼는 무슨 사람을 아침 댓바람부터 오라가라하냐. 지가 뭔데—"
그 순간.
"야."
문지훈이 백승엽의 말을 끊고 들어왔다.
그는 살벌한 기세로 백승엽을 향해 충고했다.
"입 조심해."
보통 때라면 그냥 넘겼을 말이었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저 말이 거슬려 참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얻은 기회인데...!'
문지훈은 각성 당시를 떠올렸다.
힘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그는 김재현의 시선을 느꼈다.
대화의 흐름이 그의 상황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지금도 김재현이 지켜보고 있을 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저런 발언은 용납할 수 없었다.
"...뭐?"
이런 격한 반응이 처음이었기에 백승엽은 당황스러워 하며 말을 이었다.
"너 지금 뭐라고 그랬냐?"
"입 조심 하라고."
"이 새끼가...!"
백승엽이 주먹을 꽉 쥐는 순간 문상훈이 나서서 분위기를 풀었다.
"에이~. 방금 자고 일어나서 둘 다 예민하네~. 그만하고 올라가자~!"
문상훈의 너스레에 화를 가라앉힌 백승엽이 문지훈을 향해 으르렁 거리듯이 말했다.
"조심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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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동안 두 사람의 팽팽한 긴장감은 계속해서 유지되었다.
띵—
[30층입니다.]
[문이 열립니다.]
김재현이 있는 3002호의 벨을 누르려던 찰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현관문이 열렸다.
문지훈은 김재현을 향해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아, 안녕하십니까!"
백승엽은 그런 문지훈의 모습을 못마땅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눈빛만 봐도 파티 분위기가 대충 어떤지 눈치 챌 수 있었다.
'그렇게 사이가 좋지는 않나 보군'
꽤 오랫동안 합을 맞춰 왔으니 사이가 좋을 거라 생각했는데, 나만의 착각이었던 듯 했다.
'이러면 굳이 세 명 전부를 뭉쳐 놓을 필요는 없지!'
문지훈의 솔직한 심정이 듣고 싶었다.
나는 아직도 허리를 숙이고 있는 문지훈을 향해 말했다.
"지훈씨만 안으로 들어오세요."
"예."
어차피 가신 등록이 되지 않은 문상훈과 백승엽이 들어올 수 있는 곳은 신발들이 놓여 있는 현관까지였기에 더 들어올 수 없었다.
"두 분은 잠시 밖에서 기다려주세요."
"네엡~"
"...네."
문지훈을 데리고 거실까지 이동한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혹시 저들과 계속 파티를 이어나갈 생각이십니까?"
오늘 문지훈을 여기로 부른 것은 그의 능력이 고블린 사냥으로 썩히기에는 아깝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종속의 계약을 맺어 [기사] 칭호를 얻게 해주어 스펙을 강화시키고, 원한다면 함께하는 다른 두 명과도 종속의 계약을 맺어 힘을 실어 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파티의 분위기가 그리 화합적이지 않다면 굳이 종속의 계약까지 써가며 힘을 줄 필요가 없어 보였다.
문지훈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재현님이 원하시는 대로 따르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살짝 젓고는 말했다.
"지훈씨의 솔직한 생각이 듣고 싶습니다."
"저는...."
잠시 고민하던 그가 입을 열어 말을 이었다.
"백승엽과는 그다지 함께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동생은 데려가고 싶습니다."
"알겠습니다."
문지훈을 바라보며 말했다.
"지훈씨에게 제안하고 싶은 일이 하나 있습니다."
종속의 계약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하고 그에게 선택권을 주었다.
문지훈의 대답은 간결했다.
"영광입니다!"
곧바로 종속의 계약을 받아들인 그는 기사로 승격되며 [마법사]칭호를 추가로 얻었고, 냉기 폭발이라는 부가 능력이 생겨났다. 레벨은 그대로 30이었지만, 충분히 강력해 보이는 능력이었다.
'준수하군'
문지훈은 이준혁의 팀에 합류시킬 생각이었다.
'물을 다루는 이준혁의 힘과 냉기를 다루는 문지훈의 힘은 분명 시너지 효과가 클 거다.'
잘만하면 하동건 파티와 같은 에이스 파티를 하나 더 조합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종속의 계약을 마치고 문상훈과 백승엽이 기다리고 있는 복도로 나갔다. 그리고 그들을 향해 말했다.
"축하드립니다. 여러분들은 이제부터 퀘스트에서 해방시켜드리겠습니다."
그러자 백승엽이 화색이 되어 물었다.
"저, 정말입니까?"
"네. 문지훈씨 덕분이니 감사하게 생각하도록 하세요."
곧바로 표정이 굳어버리는 백승엽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참 알기 쉽네. 사람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 성격이긴 했지만, 거짓으로 치장하고 가면을 쓰는 사람들 보단 나았다.
그들 보다는 훨씬 다루기 쉬웠으니까.
"싸이클롭스가 나타났을 때 여러분들이 도망쳤다는 것은 알고 계실 겁니다. 퀘스트는 그에 대한 벌이었고요."
갑자기 숙연해진 분위기 속에서 나는 계속해서 말했다.
"앞으로 그런 일이 발생했을 때는 지금처럼 가벼운 처벌로 끝나지 않을 것이니 명심해 주십시오."
떨떠름한 표정의 백승엽을 향해 말했다.
"백승엽씨는 이제 내려가주세요."
"네? 저만요?"
"네. 다른 분들과는 아직 할 이야기가 남아서요."
"알겠습니다."
백승엽을 떠나보낸 뒤 문상훈에게 마찬가지로 종속의 계약에 대해 설명했다.
"저야 너무 좋죠~"
문상훈은 흔쾌히 제안을 받아들였다.
'과연 어떻게 될까?'
이것은 일종의 실험이었다.
'만약에 정말로 유전자에 따라 각성 능력이 결정되는 거라면'
지금 그 결과가 나타날 것이다.
"제게 무릎 꿇고, 충성을 맹세해주세요."
"넵~"
우우웅
계약을 끝내고 확인한 문상훈의 각성 능력에는 문지훈과 똑같은 '냉기 폭발'이라는 능력이 추가되어 있었다.
'그렇군'
충성도를 확인해보니 문상훈도 가신 등록의 조건은 한참 초월해 있는 상태였다.
'가신 등록, 문상훈'
빛과 함께 문지훈과 똑같은 능력을 가진 가신 하나가 탄생했다.
그때였다.
[시민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조건을 만족하는 개체가 집구석 근처에 접근하였습니다.]
[시민권을 제의하시겠습니까?]
새롭게 합류하는 시민들의 정보를 일일이 확인해 보던 찰나였다.
'각성자?'
새로운 각성자가 합류했다.
'일단 시민권 부여 해!'
그들이 시민권을 받아들이는 그 순간.
[시민의 숫자가 50,000명에 도달했습니다.]
[시민들의 숫자가 일정 수준에 도달함에 따라 '거래소'가 개방됩니다.]
077화 [Episode 16] 폭풍전야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