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교봉(交鋒): 맞서 싸우다
“대감, 전에 현이를 보았던 종악 의원이 당시에 현이의 병증은 몸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혼백을 잃은 것이라고 했던 것 기억하시지요?”
사부인이 대답하자 사대감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때, 명삼 형님이 사람을 불러 혼을 찾기까지 했지만, 아무런 효과도 없었잖소.”
“아마도 그때 불렀던 사람이 그다지 잘 하지 못한 것이겠지요.”
사부인은 현이에게 있었던 일들을 하나하나 사대감에게 전했다. 이야기를 들은 사대감은 다시 찻잔을 채워 차를 마실 뿐, 말이 없었다.
사부인은 어떤 부분이 대감을 기분 나쁘게 한 것인지 불안하기만 해서 그를 불렀다.
“대감….”
사대감은 사부인이 뭐라 하기도 전에 말을 끊으며 갑자기 치고 들어왔다.
“지금 한 이야기 모두 현이가 직접 한 이야기요?”
“네, 당연히 현이가 한 이야기일 밖에요. 다른 이들이 그녀의 혼이 어디에 있었는지 어떻게 알 수가 있겠어요?”
사부인이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대답했다.
“당신이 보기에도 현이가 이제 전혀 아파 보이지 않았소?”
“모자라지 않은 정도가 아닙니다. 제가 볼 땐 우리 말썽꾸러기 자식들보다 더 나아 보였어요.”
사부인이 끄덕이며 대답하곤 다시 말을 이었다.
“아, 현이에게 다른 소식도 있습니다.”
“무슨 소식?”
“현이의 몸에서 빠져나갔던 혼백이 구천현녀의 시종으로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형님께서 그렇게 고생하시며 현녀님을 모셨던 것이 효과가 있었나 봅니다. 현녀님께서 현이를 돌려 보내주셨다고 하더라고요.”
차를 마시던 사대감의 동작이 일순 멈췄다. 사대감이 차갑게 일갈했다.
“현녀는 무슨 현녀! 귀신으로 장난질 치는 사람의 농간이지!”
귀신놀음을 싫어하는 남편이기에 사부인은 허둥지둥 말을 이었다.
“현이가 한 이야기입니다. 진실이라 믿는 것은 아니에요. 어쩌면 형님께서 외인들에게 하려고 생각해낸 이야기일 수도 있으니, 너무 노여워 마세요.”
“흥!”
사대감이 인상을 쓰며 몸을 일으켰다.
“헛소리! 당신은 그 귀신놀음에 낄 생각도 하지 마시오. 애들이나 챙기고 당분간 여방원엔 발길을 들이지 마시오.”
“알겠습니다.”
사부인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러다 사대감이 문을 나서자 급히 다가가 물었다.
“대감, 곧 점심인데 식사하시러 오시나요?”
“난 안 먹을 테니, 당신 혼자 드시오.”
고개도 돌리지 않고 대답한 대감은 그대로 나가버렸다. 사부인은 소리 없이 한숨을 쉬었다.
매번 이런 식이었다. 남편은 기쁜 일이든 화가 나는 일이든 자신과 그 마음을 나누는 일이 없었다. 울컥하는 마음이 올라왔으나 그녀는 빠르게 내리눌렀다.
만족하지 못할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비록 남편은 자신을 친근하게 대해주지는 않더라도 존중해주는 편이었다. 바깥일은 자신이 관여할 바가 아니었지만, 그래도 집안일은 자신의 의견대로 진행하고 있지 않은가?
사부인이 무거운 마음으로 다시 발길을 돌렸을 때, 집안일들을 관장하는 유모가 급히 찾아와 고했다.
“마님, 여방원에…!”
유모에게서 전갈을 받은 사부인은 방금 집을 나선 사대감을 부르며 급히 쫓았다.
“대감! 대감!”
그는 급한 발걸음으로 자신을 쫓아오는 부인의 모습에, 더욱 짜증이 치밀어 퉁명스레 말했다.
“밥 안 먹으니 당신 혼자 먹으라고 하지 않았소?”
“그것이 아닙니다, 대감!”
사부인이 급히 말을 이었다.
“방금 여 씨 유모가 찾아와 말을 전하기를, 현이가 여방원을 청소한다고….”
“청소하면 하는 것이지 그것이 무슨 일이라고 이리 호들갑이시오!”
사대감이 말을 끊어서 하지 못했던 뒷말을 사부인이 이었다.
“…벽을 허문다고 합니다.”
“뭣이!”
사대감의 표정이 일순 변했다. 사대감은 일언반구도 없이 여방원으로 가기 시작했다. 사부인이 그 뒤를 쫓아야 할지 잠시 고민하고 있을 때 명성이 찾아왔다.
“어머니,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얼굴이 너무 좋지 않으십니다. 아버지는 어디를 가시는 것입니까?”
“네 아버지가 세워둔 벽을 현이가 허문다고 하여 화가 많이 나셨다. 그래서 지금 여방원으로….”
“네?”
남편만큼이나 키가 자란 아들을 보자, 사부인은 자신도 모르게 울컥하는 감정을 섞어 말을 할 뻔하였다.
사부인의 이야기를 들은 명성이 깜짝 놀라며 바로 그 뒤를 쫓아가자 사부인이 급히 소리쳤다.
“성아, 아버지께 대들면 아니 된다!”
“알겠습니다!”
대충 외친 명성이 급히 뛰어갔으나, 여방원으로 들어가는 아버지를 잡기엔 이미 너무 늦은 상황이었다.
* * *
한편, 여방원에서는 힘을 잘 쓰는 종복들이 명미의 지시에 맞춰 벽을 허물고 있었다.
견고하게 지어둔 벽이 아니었기에 사대감이 찾아왔을 때는 이미 반쯤 벽이 허물어진 상태였다.
“멈추어라!”
크게 노한 사대감은 명삼부인 앞으로 달려가 화를 내기 시작했다.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전에는 귀신이 있다고 저더러 벽을 세우라더니 다시 부순다고요?”
화를 내는 사대감에게 명삼부인이 뭐라 말을 하려 할 때, 누군가 뒤에서 그를 불렀다.
“숙부님.”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사대감이 뒤를 돌아보자, 긴 복도를 천천히 걸어오는 소녀가 보였다.
자신이 커가는 모습을 지켜본 질녀(*姪女: 조카딸)였으니, 그가 그녀의 모습을 모를 리가 없었다.
가히 절세미인이라 부르기에 모자람이 없던 명삼부인의 딸이었기에 그녀를 많이 닮은 명현도 상당히 예쁜 얼굴이었다.
그저 외모로만 본다면 집안에서 가장 어여쁜 소녀였으나, 명현의 늘 멍한 표정과 혼이 빠진 듯한 모습 때문에 아무리 공을 들여 꾸며 놓아도 그저 나무인형 같을 뿐이었다.
외모가 다가 아닌 것이 미(美)라 하였던가. 혼이 빠진 명현은 명삼부인의 미색의 반을 닮았어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질 못했다. 그러나 지금 눈앞에 걸어오는 명현은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몸가짐이 특별히 우아하지도, 자태가 유독 부드럽고 아름다운 것도 아니었다. 물론 명문가의 규수들을 많이 보아온 사대감에게 우아한 몸가짐이나 아름다운 자태는 질리기만 하는 것이었다.
명현에게는 생명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마치 살아있음을 모두에게 알리기라도 할 듯 생동하고 있었다.
사대감은 그제야 명현이 비록 어미를 많이 닮긴 했지만, 미간의 선은 형과 똑같이 생겼다는 것을 알았다. 그와 형은 쌍둥이라 똑같이 생겼으니, 자신과 닮았다는 것과 같았다. 그런 자신의 질녀(姪女)를 보자 차올랐던 분노가 반쯤 가라앉았다.
명미가 사대감 앞으로 걸어와 몸을 낮추며 인사를 하고는 입을 뗐다.
“제가 그리하라 하였습니다.”
명미의 말을 들은 사대감이 미간을 구긴 채 대답했다.
“현이 네가 병이 나았단 소식을 들었다. 네가 나은 것이 집안에 큰 경사인 것은 맞으나, 그동안 네가 아파 배우지 못한 것들이 산더미가 아니더냐? 어찌 시간을 아껴 배울 생각은 하지 않고, 이런 집안일까지 관심을 두려는 것이냐?”
“제가 이 벽을 치우라 한 것은 벽이 아무런 효과가 없기 때문입니다.”
미소를 지으며 조곤조곤 말대꾸하는 명미의 태도에, 사대감은 결국 화를 내기 시작했다.
“네가 무얼 안다고 함부로 입을 놀리는 것이냐! 너희 여방원에 귀신이 있다고 난리를 치기에 안심하라고 벽을 세웠더니, 그것이 무슨 말버릇이야!”
사대감의 호통에 명미가 한숨을 쉬었다.
“무슨 한숨이냐?”
“숙부님께서는 제가 나았다는 것을 믿으십니까?”
사대감은 명미의 말에 순간 말을 잇지 못하였다. 그는 자신을 보는 명미를 그저 바라만 보았다. 명미가 사대감을 보며 말했다.
“숙부님께서도 알고 계시겠지만, 제가 이리 나을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어머니께서 구천현녀님께 올린 기도에 현녀님께서 감동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지 없이 돌아다녔던 제 혼백을 현녀님께서 거두어 주셨고, 현녀님 옆에서 시중을 들다 보니 이런 일에 대해서 자연히 알게 된 것입니다.”
사대감이 미간을 구기며 입을 열려던 찰나, 명미는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아는 사람처럼 말을 이었다.
“숙부님께서는 세상에 귀신같은 것이 어디 있느냐고 말씀하려던 것이지요?”
명미에게 말을 끊겼음에도 사대감은 묘하게 기운 빠진 듯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귀신이며 요괴 같은 놀음은 명부의 규수가 관여할 일이 아니다.”
“그럼 누가 이런 일에 나설 수 있는 것입니까?”
웃음 띤 얼굴로 사대감에게 질문을 던진 명미가 말을 이었다.
“숙부님께서 지난 세월 저희 모녀를 돌봐주신 것은 어머니와 저도 모두 마음 깊이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저희 모녀가 이리 목숨마저 위험해졌는데, 숙부님은 무얼 하실 수 있나요?”
잔잔히 말을 이은 명미와는 달리, 사대감은 명미의 말에 대번에 화가 나 소리쳤다.
“목숨이 위험하다니! 어찌 아녀자의 입에서 그런 소리가 나오는 것이야? 헛된 소리로 놀라게 하지 말거라!”
명미는 그저 웃을 뿐 대꾸하지 않았다. 명삼부인을 바라본 그녀가 말을 이었다.
“어머니, 날이 이리 더우니 숙부님께 차라도 대접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명미의 말에, 명삼부인이 유모에게 말했다.
“일꾼들에게 잠시 쉬었다가 오후에 다시 하자고 이야기하시게.”
“네, 마님.”
명삼부인의 이야기에 유모는 일꾼들을 모두 물리고는 빙빙에게 차를 준비하도록 했다. 아버지를 쫓았던 명성은 뒤늦게 도착하여 모두가 있는 곳으로 들어섰다.
“아버지!”
급한 마음에 아버지를 불렀던 명성이 명삼부인과 명미를 바라보았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기가 눌린 명성은 목 끝까지 올라왔던 말을 삼켰다.
“오라버니, 어서 오세요. 오신 김에 차를 함께 드시지요.”
명미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단 듯 명성에게 말을 건네자, 그 모습을 바라보던 사대감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사대감은 못마땅한 얼굴로 말했다.
“어디 무슨 이야기인지 들어나 보자!”
* * *
여방원의 작은 객방.
명삼부인이 사대감 부자를 위해 차를 따르며 말했다.
“점심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일단 다과라도 드시지요. 시장하시겠습니다.”
그녀가 찻잔을 채우자 명성은 그저 말없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반면에 사대감은 다과에 눈길도 주지 않은 채, 그저 명미를 주시하며 어떻게든 본때를 보여주려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어머니, 점심은 팔보오리가 먹고 싶은데 주방에 가서 봐주실 수 있을까요?”
어머니에게 자리를 비켜달라는 것이 분명한 명미의 말에 사대감이 냉소했다. 미간을 좁히며 거절을 하려던 명삼부인은 부탁하는 빛이 역력한 명미의 눈빛에 마음이 흔들렸다.
“…알겠다.”
비록 딸의 정신이 돌아온 지 하루가 지났을 뿐이지만, 지금의 딸은 전과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조금 전까지 사대감이 그리 화를 내었음에도 명현은 작은 흔들림도 보이지 않았다. 자신이라도 그렇게까지 의연하게 반응하진 못했으리라.
‘기왕 이리된 것, 현이를 믿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