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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그림

9화. 그림

서은은 밥을 먹자마자 집으로 향했다.

그러자 서사가 깜짝 놀라 말했다.

“벌써 돌아왔어? 바람 좀 쐬지 않고?”

“아버지께서 아직 의식이 없으시잖아. 바람 쐴 기분이 아니었어.”

서사는 웃으면서 동생의 코를 잡아당겼다.

“이제는 제법 철들었네?”

언니와 몇 마디 주고받은 후, 서은은 관사 하나를 불렀다.

“사람을 하나 데려와야겠어. 어린 소저인데 조용한 별채에 방을 마련해 줘.”

관사는 서은에게 위치를 건네받고 물었다.

“소저, 방은 어디가 좋겠습니까?”

어떤 대접을 해야 하느냐는 질문이었다.

서은이 대답했다.

“황 의원 거처와 가까운 곳으로.”

관사는 알았다는 듯 물러갔다.

서사는 무슨 일인지 몰라 물었다.

“은아, 그 소저가 누군데 그러니?”

서은은 언니에게 간단하게 설명했다.

“그 소저는 병이 있는데, 그 오라버니가 내 일을 도와주기로 해서, 내가 황 의원에게 치료를 받도록 도와주겠다고 했어.”

서사는 고개를 끄떡이며 말했다.

“이따 계 총관에게 좀 알아보라고 해야겠다. 혹시 널 속이는지도 모르니 말이야.”

“알았어.”

그녀가 시칠을 찾아간 건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첫 번째 이유는 그 능력 때문이었고, 두 번째는 깨끗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쥐도 새도 모르게 중독된 상황이니, 자사부 내부에 다른 감시자가 있을 수도 있었다.

서은이 보기에도 방익의 배신은 이상한 점이 있었다.

아버지가 그를 사윗감으로 정했고, 가까운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방익이 남원을 탐냈다면 얌전히 언니와 혼인을 올린 다음 가업을 물려받을 날을 기다렸으면 그만이었다.

아버지는 마흔이 넘어 한창 대업을 이룰 연세였으니 남원에 만족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만약 아버지의 기반이 더 커진다면 결국 그에게 좋은 일 아닌가?

게다가 방익 본인도 아직 야심을 드러낼 때가 아님을 알고 있을 것이었다.

남원의 병력은 아버지와 정이 깊은 만숭이 장악하고 있었다. 남원을 다스리는 데는 금록이 있었는데, 방익보다 훨씬 노련했다. 군정(軍政) 두 방면 모두 방익 마음대로 하기에는 시기가 일렀다.

전생에도 그랬다.

방익이 아버지를 해치고 자연스럽게 남원을 손에 넣었지만, 그렇다고 만숭과 금록을 어쩌지는 못했다. 후에 언니를 동강왕에게 보내는 일로 만숭, 금록 두 사람과 완전히 틀어졌고, 그 일로 인해 남원에는 한바탕 내란이 일어났다.

결국 동강왕의 세력을 등에 업은 방익이 가까스로 두 사람을 진압할 수 있었다.

서은은 그를 증오했지만, 방익이 그렇게 어리석지는 않다는 것을 잘 알았다. 쉽고 빠른 길이 있는데 힘은 힘대로 들고 자신에게도 딱히 이득 되는 것 하나 없는 방법을 선택할 필요가 있었을까?

‘우리 집안을 망치고 싶었다면 모를까…….’

무슨 이유든 이제 아버지께서 살아남으셨으니 방익을 죽이는 데 급급할 필요는 없었다. 그보다는 그 뒤에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를 알아내야 했다.

* * *

방익은 두루마리 그림 몇 점을 품에 안고 퇴청하러 나섰다.

이때 친한 아전 하나가 인사를 올렸다.

“방 사마, 퇴청하십니까?”

방익이 웃으며 말했다.

“벗들과 같이 그림 좀 보려고 하네.”

아전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떡였다.

“한달 가량 매일 조마조마했으니, 이제 숨 좀 돌리셔야죠.”

방익도 맞장구쳤다.

“그렇지. 그럼, 먼저 가 보겠네. 내일 보세.”

“네, 내일 뵙겠습니다.”

방익을 눈으로 배웅한 아전이 동료를 보며 감탄했다.

“방 사마는 참으로 대단허이. 얼마 전 대인의 병이 깊으셨을 때 밤낮없이 관아 아니면 대인 곁을 지켰으니 말이야. 친아들도 그렇게는 못 할걸.”

“은혜를 아는 사람인 거지. 대인 아니었으면 방 사마에게 오늘이 있었겠나!”

“그건 그렇지…….”

* * *

관아를 나선 방익은 마차도 가마도 타지 않고, 시종만 거느린 채 느긋한 걸음으로 명덕루(明德樓)에 도착했다.

이곳은 남원 제일의 주루로 그 거리의 반을 차지할 정도로 큰 곳이었다.

주인은 누군지 모르나 수완이 매우 뛰어났다. 요리 솜씨가 뛰어난 숙수(熟手)를 황성에서 데려오고, 주루를 화려하게 꾸몄으며, 가무(歌舞)도 훌륭했다.

또한 이곳의 별채는 호젓하고 운치 있어 남원의 부호들뿐 아니라 문인학사(文人學士)도 즐겨 찾았다.

방익이 도착하자 점소이가 만면에 웃음을 띄고 얼른 나와 맞이했다.

“방 사마, 오랜만이십니다.”

방익도 웃어 보이며 농을 쳤다.

“요리 한 상 시키면 내 봉록(俸祿)의 반달 치가 날아가니, 어찌 자주 오겠나?”

점소이가 왁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방 사마께서는 농담도 잘하십니다. 원하신다면 방 사마께서 돈 쓰실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방익은 가만히 있었지만, 오히려 시종이 언짢은 기색을 드러냈다.

“세상에 공짜 밥이 어디 있소? 우리 공자님을 뭘로 보고!”

점소이는 그제야 자기의 말실수를 깨닫고 서둘러 사죄했다.

“죄송합니다. 소인의 헛소리를 마음에 담아 두지 마십시오.”

방익은 손사래를 치더니 물었다.

“여(黎) 공자는 어디 있나? 같이 그림을 보기로 했네.”

“네! 네!”

점소이가 호들갑을 떨며 그를 안내해 대청을 가로질러 후원으로 향했다.

남원에서 명망 있는 방익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은 없었다.

“저건 방 사마 아닌가? 저 근검한 사람이 명덕루에는 웬일이지?”

그의 일행이 말을 받았다.

“몰랐나? 방 사마가 명덕루에 오는 건 시회(*詩會:시를 짓는 모임) 때문이야. 여럿이 함께 모이니, 갹출하면 그만 아닌가? 게다가 많아야 한 달에 한 번이니 몇 푼이나 들겠나?”

“그랬군. 하긴 됨됨이가 바르니 자사 대인께서 아끼는 거겠지.”

“그렇다니까.”

명덕루는 흥청망청했지만, 후원에는 작은 정자와 누대가 드문드문 있어 운치가 있었다.

점소이는 방익을 작은 누각으로 안내했다. 안에서는 시를 읊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방 사마, 이곳입니다.”

방익은 고개를 끄떡이고 시종에게 말했다.

“너도 가서 차나 마시거라. 끝나면 부르마.”

“네, 공자님.”

시종과 점소이가 가고 나서야 방익은 품속 그림을 만져 보고 한 걸음씩 계단을 올랐다.

문을 지키고 서 있던 푸른 옷의 하인이 큰 소리로 그의 도착을 알리며 문을 열어 주었다.

안으로 들어섰을 땐 몇몇 서생이 서거나 앉은 채 그림 하나를 품평하는 중이었다. 그러다 방익의 모습을 보고는 예의 바르지만 뭔가 불편한 웃음을 지었다. 한 서생이 공수하며 인사했다.

“설 선생께서는 위층에 계십니다.”

방익은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하고 계단을 올랐다.

아래층에서는 다시 웃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겨우 한 층 사이인데 위층은 완전히 다른 분위기였다.

연홍색 휘장이 창가까지 층층이 드리워져 있었고, 창가에 놓인 화려한 침상이 눈에 띄었다.

침상에는 세련된 느낌의 여자 하나가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있었다. 붉은 치마 한 쪽으로 새하얀 종아리가 드러나 요염함을 뽐냈다.

방익을 본 여자는 아름다운 눈을 한 번 깜빡였다.

“방 공자, 오랜만이에요. 얼굴 한 번 보기가 정말 힘드네요.”

방익이 웃음기 없는 얼굴로 그림을 탁자에 내려놓고 차갑게 말했다.

“나도 보고 싶었네. 감히 나더러 오라 가라 하다니, 무슨 수작인지 궁금해서 말이네!”

여자는 웃으면서 나긋나긋한 걸음걸이로 다가와 그의 팔을 껴안았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하시나요? 다 공자를 위한 거 아니겠어요?”

방익은 그럴 마음 없다는 듯 매정하게 뿌리쳤다.

“손대지 말게.”

하마터면 넘어질 뻔한 여자는 한숨을 쉬었다.

“너무 야박하네요. 처음엔 이렇지 않았는데.”

방익은 전혀 동요하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하나 묻겠네.”

여자는 나른한 자태로 그 맞은편에 앉아 턱을 괴었다.

“하긴 공자가 이유 없이 왔을 리 없죠? 궁금한 게 뭐죠?”

“금잠고는 어떻게 된 것인가? 어떻게 피를 토할 때 같이 나온 거지?”

여자는 눈썹을 찡그렸다.

“피와 같이 토했다고요?”

“그자의 병세가 갑자기 호전된 이유가 무엇이냔 말이야? 금잠고(金蠶蠱)를 토해 냈더란 말이네!”

여자가 잠시 생각하더니 다시 확인했다.

“그럴 리가……. 그런 경우는 처음 들어 봐요.”

그러자 방익의 말투가 거칠어졌다.

“너희 때문에 큰일 날 뻔했어! 절대 문제없을 거라더니 이런 일이 생기다니. 대인이 깨어나면 난 끝이란 말이다!”

방익의 당황한 표정을 본 여자는 웃으며 다독였다.

“걱정마세요. 일이 틀어졌으면 바로 잡으면 그만 아닙니까? 그것보다 금잠고를 토했다는 건 어떻게 된 거죠?”

방익은 그날 밤 상황을 먼저 설명했고, 이어서 자신이 서환의 피가 묻은 옷에서 죽은 고충을 찾은 과정도 처음부터 끝까지 말했다.

“내가 제때 죽은 고충을 찾아서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이미 다 탄로 났을 것이네!”

여자가 곰곰이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나에게 금잠고를 넘긴 자가 말하길, 일단 몸 안에 들어가면 절대 몸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고 했어요. 숙주가 죽을 때까지요. 서환은 죽기 직전이었다고 했죠? 확실한가요?”

“그걸 어떻게 착각했겠는가?”

방익은 기분이 상했다.

“고충을 움직이는 방법은 자네가 알려 주지 않았나? 그대로 했으니 문제가 있다면 자네의 방법에 문제가 있는 거지!”

“그럼 가능성은 한 가지뿐이네요.”

여자가 말했다.

“아마 서환에게 먹인 약 중 하나가 우연히 상극이라 고충을 죽였고, 그다음에 피와 함께 나온 거예요.”

방익은 더 이상 그 일을 붙잡고 늘어질 마음이 없었다.

“고충이 죽고 나서 대인은 하루가 다르게 호전되고 있네. 이제 어떡하나? 대인이 깨어나면 난 끝이네! 내가 끝이면 그대들도 마찬가지라고!”

방익의 꾸짖음에 여자가 말했다.

“어머! 또 이러신다. 우리는 이제 같은 배를 탄 사이인데 어떻게 공자를 나 몰라라 하겠어요?”

방익은 그제야 조금 표정을 풀고 말했다.

“그 황 의원이란 자가 대인 옆에 딱 붙어 있으니, 이제는 고독(蠱毒)을 쓸 수가 없다네. 빨리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해.”

“알았어요. 생각 좀 해 보죠…….”

하늘이 어둑해졌고, 방익은 한 시진(*2시간) 후에야 누각을 떠났다.

그가 떠나자 아래층 시회(詩會)도 파했다. 여자는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누각을 나서려다 순간 눈매를 매섭게 치켜떴다.

“누구냐?”

“야옹…….”

새끼 고양이 한 마리가 깜짝 놀라 수풀에서 뛰어나왔다.

“고양이였네…….”

여자는 자기가 너무 긴장했다고 생각했는지 겸연쩍게 웃으며 떠났다.

그리고 한참 후에 석가산(*石假山:바위로 만든 산을 본뜬 조경) 뒤에서 그림자 하나가 나타나 어둠 속으로 빠르게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