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신의 있는 여자
시간을 끌수록 불리해질 것이 분명하자, 흑의인 우두머리는 큰 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돌격!”
말이 끝나기 무섭게 검은 옷을 입은 사사들이 말을 탄 채 돌격했다.
양측은 금세 한 덩어리로 뭉쳐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서은은 방패병 뒤에서 전투 양상을 살폈다.
흑의인 우두머리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흑의인들의 무공은 모두 고강하여 힘든 싸움 끝에 포위망에 작은 틈이 벌어졌고, 빠져나간 자들은 사방팔방으로 흩어졌다.
서은은 욕심을 내지 않고 명령을 내렸다.
“처치할 수 있는 자들만 처치해. 굳이 끝까지 쫓을 건 없어.”
적들의 숫자도 적지 않으니 섬멸(殲滅)시킬 가능성은 높지 않았다. 최대한 많은 수를 죽이거나 사로잡으면 됐다.
포위망을 벗어날 때 설여는 뒤를 돌아봤다.
독기 서린 눈으로 서은을 노려보다가 손을 들어 올리자, 소매 아래 숨긴 수전(*袖箭:소매 속에 감추고 용수철로 남몰래 쏘는 활)이 빠르게 출수 되는 소리와 함께 날아갔다.
―탁!
방패에 가로막힌 수전(袖箭)을 보고 계경이 크게 노했다.
“곧 죽을 계집이 감히 우리 소저를 노려? 잡아라!”
“당장 저 계집을 추격해!”
그때,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빠르게 달려 나가는 말이 있었으니.
바로 서은이었다.
잠시 멈칫했던 계경이 대경실색(*大驚失色:너무 놀라 얼굴이 하얗게 질림)하며 말했다.
“소저, 안 됩니다!”
그리고 동시에 수하 여럿을 쫓아가게 했다.
설여는 미친 듯 말을 몰았다.
그러나 뒤통수 가까이 말발굽 소리가 따라붙었다.
설여의 뒤를 받치던 흑의인 하나가 말했다.
“고낭, 그 서씨 집안의 계집이 직접 추격해 왔습니다.”
설여는 놀랍고도 분이 치밀어 이를 악물었다.
“어린 것이 질기기도 하구나!”
“아까 쏘신 화살 때문에 화난 모양입니다. 빚지고는 못사는 계집을 건드렸나 봅니다.”
상한 기분에 설여가 톡 쏘았다.
“지금 다 나 때문이라는 소리냐?”
“소, 소인이 어찌 감히…….”
설여는 들리지 않게 콧방귀를 뀐 다음 부드럽게 말했다.
“너희들이 날 황성으로 무사히 돌려보낸다면 주공께 진언하여 한 급씩 올려 줄 것이다.”
‘임무에 실패하고 또 발각되어서 허둥지둥 도망치는 신세인데, 상은커녕 벌이나 받게 되겠지!’
‘하지만 저 설 고낭은 주공의 총애를 받고 있으니 베갯머리 송사라도 한다면 정말 죄는 면하고 상을 받을 수 있을지도……?’
두 흑의인의 머릿속은 이런저런 생각으로 복잡해졌다.
그러나 잘 풀릴 가능성도 있다는 생각에 두 흑의인은 고분고분 설여를 따랐다.
한편 추격병이 따라붙자 설여는 후회막심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수전(*袖箭:소매 속에 감추고 용수철로 남몰래 쏘는 활)을 쏠 게 아니라 조용히 도망갔어야 했다. 하지만 후회해도 늦었다.
“쏴라!”
깜짝 놀란 설여는 급히 말 등으로 납작 몸을 숙였다.
슉-!
화살들이 귓가를 스쳤다.
겨우 살았나 싶었는데 타고 있던 말이 애달픈 비명을 지르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말이 화살에 맞은 것이다!
설여는 애가 탔다. 말을 잃었으니 이제 도망치긴 글렀다. 저들의 포로가 된다면, 서은의 성격에 자기 신세가 좋을 게 없을 건 분명했다.
바로 그때 한 흑의인이 소리쳤다.
“저쪽에 말이!”
설여가 보고 반색했다.
이런 곳에 말이라니! 누가 이런 인적도 드문 곳에서 야영을 하는지는 몰라도 말 두 필이 길가에 묶여 있었다.
설여는 말에서 떨어져 땅을 구르자마자 날개라도 돋친 듯 그 말 중 하나를 향해 몸을 날렸다. 그와 동시에 비수를 꺼내 묶어 둔 줄을 잘라내고 박차를 가했다.
“이랴!”
말이 땅을 박차고 달리기 시작하자 숲에서 한 사람이 튀어나오면서 소리쳤다.
“서라! 누가 남의 말을 훔치느냐?”
급박한 순간이었다.
그 사람은 나머지 한 필의 말에 뛰어오르더니 설여를 쫓기 시작했다.
뒤를 쫓던 서씨 가문 호위들은 순간 어리둥절했다.
“하나가 늘었는데요?”
서은이 슬쩍 돌아보니 숲에서 한 사람이 더 뛰어나왔다. 그러나 말이 없어 달음질로 몇 걸음 쫓아오면서 소리 질렀다.
“공자님!”
하지만 그의 모습은 금세 말 뒤로 멀리 사라졌다.
“신경 쓰지 말고 저 여자만 잡으면 된다.”
“네.”
그렇게 두 무리와 한 사람이 쫓고 쫓기며 질주했다.
설여가 훔쳐 탄 말은 날랜 준마였다.
게다가 말 주인이 노숙하는 동안 푹 쉬었던지 힘도 넘쳐서 곧 추격병들과 거리를 벌렸다.
그걸 본 서은이 명령했다.
“쏴라!”
“네!”
서씨 가문 호위들은 모두 소형 석궁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일제히 설여를 조준하고 화살을 쐈다.
그녀를 바짝 쫓던 ‘공자’가 그걸 보고 소리쳤다.
“쏘지 마시오! 내 말이오!”
호위들이 그 말을 들을 리가 없었다. 석궁의 방아쇠를 당기자 화살이 쏘아져 나갔다.
마음이 급해진 그는 손에 든 말채찍을 위아래로 휘둘러 날아오는 화살을 일일이 쳐냈다. 그 광경을 보고 나서야 호위들은 ‘공자’를 다시 봤다. 그러자 호위를 이끌던 조장이 소리쳤다.
“관군(官軍)이다! 도적을 쫓는 것이니 볼일 없는 자는 어서 비켜라! 재물 피해는 나중에 변상할 것이다!”
이런 난세에는 도적이 횡행하니, 다른 곳의 관부라면 성이나 지켜내면 다행이었다. 남원처럼 도적을 소탕하고, 재물 피해도 변상하는 곳은 참으로 드물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저 녀석은 내가 어릴 때부터 키운 녀석이오! 돈으로 변상할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이오! 도적을 놓치면 내가 변상할 테니 활은 그만 쏘시오!”
도적을 놓치면 변상하겠다니 이게 무슨 해괴망측한 헛소리인가? 화가 난 조장이 소리쳤다.
“옆으로 물러서라! 그렇지 않으면 다쳐도 모른다!”
그도 물러서지 않았다.
“활을 쏘지 마시오! 내가 대신 잡아 주겠소!”
서은은 그의 말을 듣고 재밌다는 생각이 들어 호위들에게 활을 쏘지 말라고 하려고 했으나, 조장이 먼저 명령을 내렸다.
“무시하고 쏴라!”
호위들이 석궁을 겨냥하고 다시 한번 일제 사격을 했다.
“당신들-”
그는 다시 한번 화살을 쳐내면서 화를 냈다.
“이렇게 막 나가면서 무슨 관군이냐! 네놈들이 도적이 아니냐?”
설여는 이 말을 듣고 기회다 싶어 짐짓 여린 목소리로 소리쳤다.
“공자님, 제발 구해 주시어요. 저들은 소녀를 노리고 있습니다. 저들 손에 떨어지면 저는…….”
하지만 그는 설여의 수작에 넘어가기는커녕 딱 잘라 말했다.
“닥쳐라! 그 교태를 쥐어 짜낸 목소리만 들어도 네가 더러운 것인 건 알겠구나! 내 말을 되찾으면 네 그 더러운 냄새를 씻는 데만도 한참 걸리겠다!”
사내를 후리는 것에 자신이 있던 설여는 어린 애송이에게 이런 대꾸를 들으니 화가 머리끝까지 솟았다.
올해 무슨 액운(厄運)이라도 낀 걸까?
처음엔 서은 저 계집에게 당해 궁지로 몰리더니, 이제는 뜬금없이 나타난 애송이에게 본심을 들키고 욕을 먹었다.
한편 그의 속 시원한 말에 즐거워진 서은은 호위들에게 활을 쏘지 말라고 하려 했다. 그러다 갑자기 앞쪽에서 불꽃 신호가 솟아오르는 걸 보고 낯빛이 어두워졌다.
‘지원군이 있구나!’
“서둘러라! 놈들의 지원군이 온다!”
공자는 관군 틈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리자 놀라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그들이 다시 석궁을 쏘는 것을 보고 급히 채찍을 휘둘러 쳐냈다.
“어? 내 말!”
서은도 더는 여유를 부릴 수 없었다. 여기서 설여를 놓친다면 다시는 잡지 못할 수도 있었다.
“계속 쏴라!”
“내가 대신 잡아 준다지 않소!”
그때 앞을 가로막는 큰 강이 나타났다. 강물 위에는 작은 배 한 척이 떠 있었다.
설여가 반색을 하며 소리쳤다.
“어서!”
다음 순간 물가에 설치한 기관 장치가 움직이더니, 물보라와 함께 화살들이 쏘아졌다.
호위들은 어쩔 수 없이 고삐를 잡아 속도를 늦추면서 칼을 휘둘러 화살을 막았다.
그 틈에 설여는 말에서 뛰어내려 흑의인들의 도움을 받아 배에 올랐다.
닭 쫓던 개 신세가 된 추격병을 보고 한숨 돌린 그녀는 슬며시 손을 들어 자신을 모욕한 애송이를 향해 수전(袖箭)을 쐈다.
공자는 설여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강가에 서 있는 자신의 애마(愛馬)에만 정신이 팔려 말에서 뛰어내려 허둥지둥 달려갈 뿐이었다.
그런데 말고삐를 잡으려는 순간, 말이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쓰러졌다. 그의 옷은 어느새 피투성이가 되었다.
“이게 무슨…….”
아끼던 말을 다시 찾았다고 생각했는데 눈앞에서 죽어 버렸다. 공자는 사람을 잡아먹을 것 같은 표정으로 설여를 노려봤다.
그걸 본 설여가 하얀 이를 드러내고 말했다.
“애송이 주제에! 감히 날 모욕해?”
“네년이 죽으려고 환장했구나!”
낯빛이 싸늘해진 공자는 강가의 큰 바위를 향해 일 장을 부딪쳤고 그 반작용을 이용해 몸을 날렸다.
그가 배를 향해 날아들자 깜짝 놀란 설여는 다시 수전(袖箭)을 발사했다.
―챙!
하지만 공자가 휘두른 하얀 검광에 튕겨 나갔다.
두 흑의인 중 하나는 그에게 암기를 발사하고, 나머지 하나는 긴 채찍을 뻗어 그를 튕겨내려 했다.
그는 옷소매를 휘둘러 암기를 튕겨내고 일부러 자신의 검이 채찍에 감기게 만든 다음 그 힘을 역이용해 배에 올랐다.
두 발이 배에 닿는 순간, 그는 겨드랑이 사이로 검집을 튕겨 채찍을 휘두른 흑의인의 손목을 쳤다.
흑의인은 손목이 시큰해져 채찍을 놓쳤고, 공자는 자유로워진 검을 뒤집어 옆으로 베었다.
“컥!”
잠시 방심했던 다른 흑의인이 칼에 맞았다.
동시에 인정사정없이 걷어차인 흑의인은 그대로 날아가 사공과 부딪혔고, 한 덩어리가 되어 강물 속으로 빠졌다.
이제 설여와 흑의인 하나만 남았다.
깜짝 놀란 설여가 잠시 멈칫했다.
강호의 무인인 건 확실했다. 하지만 이렇게 강할 줄은 몰랐다.
‘이렇게 순식간에 당할 줄이야…….’
기다릴 새도 없이 공자는 흑의인을 향해 검을 찔렀다.
미리 대비하고 있던 흑의인이 연달아 검격을 막아냈다.
하지만 그 순간 공자가 오른발에 무게를 실어 내려찍었다.
쿵!
배가 한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흑의인이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자, 공자는 틈을 놓치지 않고 검을 뻗었다.
첨벙―!
또 한 명의 흑의인이 물속으로 사라졌다.
이제 남은 건 설여 하나였다.
공자가 그녀를 향해 몸을 돌리자, 설여는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며 소리쳤다.
“공자님! 제발…… 말값은 변상하겠습니다!”
설여는 이 애송이가 말을 애지중지했던 것을 떠올리곤 황급히 덧붙였다.
“날 황성까지 안전하게 데려다주면 한혈보마(*汗血寶馬:하루에 천 리를 달린다는 귀중한 명마)를 드릴게요. 오추마(*烏騅馬:항우가 탔었다는 준마)도 좋고, 적로마(*馰盧馬:이마에 흰 털의 점이 별처럼 박힌 말)도 좋아요! 맘에 드시는 거로 고르면 돼요!”
말이 뿜은 피를 뒤집어쓴 공자의 눈빛은 착 가라앉아 마치 염라대왕처럼 무시무시했다. 그는 코웃음을 쳤다.
“말값을 치르겠다고? 그럼, 네 목숨으로 받지.”
공자의 검이 베어 오자 설여는 비명을 지르며 옆으로 피했다.
무공을 익혔다고는 하나 무공이 뛰어난 사사(死士)들도 몇 합 만에 당했으니 어찌 그녀가 상대할 수 있겠는가?
검날이 머리 위를 스치는 듯하더니 섬뜩한 느낌과 함께 머리카락이 흩어졌다.
설여는 깜짝 놀라 머리를 더듬더니 황망해졌다.
‘머리카락! 내 머리카락이……!’
그때 강가에 도착한 서은이 깔깔대며 말했다.
“설 고낭은 신의(信義)가 있는 분이네요. 머리를 깎겠다더니 정말 깎았군요?”
정수리 부근의 머리카락이 사라졌다.
설여는 미친 것처럼 비명을 지르더니 몸에 숨겨 둔 암기를 모두 발사했다.
자기 목숨을 무엇보다 아끼는 그녀는 몸에 숨겨 둔 암기가 적지 않았다.
하지만 공자가 몸을 한 바퀴 회전시키자 온갖 종류의 암기들이 모두 튕겨 나갔다.
-풍덩!
설여는 튕겨 나간 암기에 맞은 듯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강물로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