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귀가
노부인이 온유를 데리고 물러간 지 얼마 안 되어 태안제가 자녕궁(慈寧宮)을 찾아왔다.
태안제는 태후에게 참으로 극진했다. 국사가 너무 바쁜 경우만 아니라면, 자녕궁에 들러 태후와 몇 마디라도 나누는 게 빼먹지 않는 일과 중 하나였다.
“모후(母后), 오늘은 어찌하여 기분이 썩 좋지 않아 보이시는지요?”
몇 마디 말을 나누기도 전에 태안제는 태후의 심경을 눈치챘다.
태후는 담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방금 임가 노부인이 입궁하여 애가를 만나고 돌아갔습니다.”
태안제는 ‘임가’라는 말을 듣자마자 바로 장군부를 떠올렸다. 국공의 자리를 마다하던 고집 센 노장군을 어찌 잊겠는가?
“설마 모후의 심기를 거스르는 소리라도 했습니까?”
“그자가 어찌 애가의 심기를 거슬렀겠습니까. 그저 그자의 사위 얘기를 듣고 나니 애가의 마음이 좀 무겁군요.”
태후는 노부인이 말한 걸 전하고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임 노부인이 그런 험한 일을 겪는 걸 보니, 애가의 마음이 어찌 편하겠습니까? 남편을 먼저 보낸 늙은 과부는 남들이 함부로 대하기 마련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태안제는 태후의 만감이 교차한 모습을 보고 표정이 어두워졌다.
“온여귀 그자가 참으로 도가 지나쳤습니다.”
본시 아무리 황제라고 해도 신하의 집안일까지 참견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모후의 성심을 어지럽혔으니 어찌 그냥 지나갈 수 있겠는가?
“모후, 성심을 편히 가지십시오. 소자가 이렇게 있는데 누가 감히 모후께 함부로 굴겠습니까?”
태후는 태안제의 말에 미소를 지은 다음 한 번 더 탄식했다.
“애가야 우리 황상(皇上)이 계시니 든든하지요. 하지만 그자는 아들도 없지 않습니까?”
태안제는 그제야 임 노장군에게 아들이 없다는 걸 떠올렸다.
만약 아들이 있었다면 임 노장군이 국공 작위를 거부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온여귀 그자가 임씨 가문에 남자가 없다고 막 나갔다는 거로군.
“모후, 소자가 알아서 잘 처리하겠습니다.”
태후도 그제야 안도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건 애가가 관여할 일이 아닙니다만, 어차피 일이 이렇게 시끄러워졌으니 임가와 온가의 인연은 여기까지인 것 같군요. 그자가 입궁하여 애가를 만난 것도 다른 게 아니라 딸과 온여귀의 혼인을 취소해 달라고 청하려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두 외손녀도 임가로 데려가고 싶다고 하더군요.”
“그야 당연히 그래야겠지요.”
태후의 말을 듣자 태안제는 임 노부인이 선을 지킬 줄 안다는 생각이 들어 임씨 가문에 대한 인상이 좋아졌다.
예전에 임 노장군이 국공 작위를 거절했을 때 태안제는 사실 노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당시 그는 막 제위에 오른 터라 말들이 많았다. 그래서 황제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서라도 많은 지지자가 필요했다. 그런데 자기가 내린 국공의 자리를 끝까지 거부한 것은 자신의 즉위에 대한 불만처럼 보일 수밖에 없었다.
태안제는 심지어 임 노장군을 제거할 생각까지 했었다. 다만 임 노장군이 세웠던 공적과 당시 자신의 불안정한 권력 기반 때문에 꾹 참고 지나갔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제 임 노장군이 죽고 임가에는 늙은 과부와 딸만 남았다. 그리고 태안제의 황권은 반석에 올라 있었다. 그러니 당시의 치밀었던 분노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하물며 모후가 직접 부탁한 일이니 임씨 가문을 조금 신경 써 줘도 상관없었다.
태안제가 떠난 자녕궁에서는 상궁 하나가 태후의 뒤에 서서 그녀의 어깨와 등을 주무르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태후는 굳게 감았던 두 눈을 번쩍 뜨며 만감이 교차하는 듯 말했다.
“사람 일이란 참 모를 일이야. 평생 세상 무서운 것 없는 듯 설치던 그 두춘방(竇春芳)이 눈물을 흘리다니.”
태후의 어깨와 등을 주무르던 상궁은 아무 말도 없이 주무르는 힘을 조금 약하게 했다.
“그자도 이제 늙은 게지…….”
태후는 의미심장한 한숨을 쉬었다.
* * *
한편 자신의 침궁으로 돌아온 태안제는 온 시랑이 알현을 청한다는 대전 태감 주희(硃喜)의 보고를 들었다.
태안제는 눈을 슬쩍 들어 올리며 차분한 말투로 말했다.
“짐은 태후마마께 문안을 드리러 갔다고 해라.”
주희는 고개를 숙이고 물러갔다.
온여귀는 밖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다가 주희가 나오는 모습을 보고 냉큼 몇 걸음 나서며 맞이했다.
“주 태감…….”
주희는 손을 들어 온여귀의 말을 끊고 살짝 뒤로 물러나 거리를 두었다.
“온 대인, 오늘은 이만 돌아가시지요. 황상께서는 태후께 문안을 드리러 자녕궁에 가셔서 아직 돌아오지 않으셨습니다.”
온여귀는 그의 말을 듣자마자 얼굴이 창백해졌다.
장모는 이미 입궁하여 태후에게 고자질을 했을 텐데, 황상께서는 또 자녕궁에서 태후와 함께 계신다니. 이게 뭘 뜻하는지 너무도 명백했다.
온여귀는 온부까지 어떻게 돌아왔는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한 무리의 구경꾼들이 아직도 그 뒤를 쫓았지만, 이마저도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그렇게 정신없이 온부 대문에 이르러서야 그의 몸이 휘청하더니 그대로 바닥에 엎어졌다.
“노야, 노야!”
문지기가 소리를 지르면서 달려왔다.
“그렇게 서둘러 가더니 결국 장군부 노부인을 놓친 건가?”
“아무래도 그런 것 같네.”
“쯧쯧, 온 시랑은 영 하체가 부실한가 보네.”
구경꾼들이 주변을 둘러싸고 쑥덕거릴 때였다. 아전 몇이 온부의 대문을 두드렸다.
겨우 일어나 앉은 온여귀는 아전들을 보자 혼비백산하여 여느 때의 침착한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온 대인, 장군부 노부인이 순천부(順天府)에 고해 부인과 대인의 혼인을 취소해 달라고 했습니다. 수고스러우시겠지만 소인들과 같이 가 주셔야겠습니다.”
하지만 온여귀는 아무것도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온 대인, 저희 대인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전이 목소리를 조금 높였다.
온여귀의 옆을 따르던 집사 하나가 바닥에 앉아 미동도 하지 않는 온여귀를 보고 애가 타서 크게 불렀다.
“노야…….”
온여귀는 귀신에 홀린 표정으로 일어나 혼몽한 상태로 아전들을 따라나섰다.
관청 주변은 이미 겹겹이 구경꾼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누군가가 “왔다!” 하고 소리치자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밀지 마시오! 길을 트시오!”
인파 틈으로 겨우 길을 만든 아전들이 온여귀를 데리고 관청으로 들어갔다. 구경꾼들이 그 모습을 보겠다고 몸을 들이미는 바람에 아전 하나는 차고 있던 대도를 떨어뜨릴 뻔하기까지 했다.
순천부 대청 높은 자리에는 순천부윤(順天府尹)이 엄숙하게 앉아 있었다. 그는 온여귀가 도착했는데도 얼굴에 별다른 표정이 드러나지 않았다.
평소였다면 순천부윤과 병부시랑은 같은 품계이니 당연히 정중하게 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공적인 일로 불렀고 또한 상부의 지시가 있었으니 그럴 필요가 없었다.
“온 시랑, 여기 장군부 노부인께서 그대가 장인을 모욕했다는 이유로 고발하였소. 노부인께서는 그 딸인 임 씨와의 혼인을 취소할 것을 요구하였는데 할 말이 있소?”
“나는…….”
온여귀는 멍한 얼굴로 이어 대답했다.
“없소!”
순천부윤은 온여귀가 순순히 협조하는 것이 뜻밖이라고 생각했다. 분명 뭐든 항변할 줄 알았던 것이다.
아무튼, 그가 순순히 동의하니 순천부윤으로서는 수고를 덜게 되었다.
“그렇다면 온 시랑과 임 씨의 혼인은 이로써 취소…….”
“내가 없다고 한 건 장인어른을 모욕한 일이 없다는 뜻이었소!”
온여귀가 크게 소리쳤다.
그러자 노부인이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온여귀, 닭 잡아먹고 오리발을 내밀다니 정말 끝까지 뉘우치지 못하는구나!”
하지만 온여귀로서는 절대 인정할 수 없었다.
“장모님께서 이 사위를 못마땅하게 여기시는 건 압니다. 그러니 완청과의 혼인을 취소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하지 않은 일을 인정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자신의 거짓말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간 그야말로 끝장이었다.
“온 시랑, 그대의 종형과 집사의 말은 다르더구려.”
순천부윤이 담담하게 말했다.
온여귀는 그제야 눈을 똑바로 뜨고 대청을 둘러봤다. 노부인과 임 씨, 두 딸은 물론 온여생과 온평도 있었다.
그의 시선을 받자 온여생과 온평 두 사람은 다급히 눈을 피했다.
온여귀는 순간 화가 치밀어 올라 매서운 목소리로 다그쳤다.
“두 사람은 도대체 누구의 사주를 받아 나를 함정에 밀어 넣은 것이냐!”
“네놈이 숨겨 둔 자식이 선아보다도 나이가 많더구나. 그런데도 네놈이 피해자라는 것이냐?”
노부인이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온여귀는 순간 할 말이 없었다.
묵묵히 있던 임 씨가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웃음소리는 점점 커졌고, 비통하고 처량한 웃음소리가 어느덧 순천부 대청을 가득 메웠다.
“어머니…….”
임 씨의 팔을 꼭 붙든 온유는 속으로 크게 당황했다.
이번 생에서 외할머니의 운명은 바꿨는데 어머니의 운명은 바꾸지 못한 것 아닐까?
혹시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온유는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뚝뚝 흘렸다.
웃을 만큼 웃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딸의 눈물을 보았기 때문인지, 임 씨는 웃음을 멈추고 온여귀를 노려봤다. 그 눈빛에는 광기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온여귀, 나는 네가 인간의 탈을 쓴 이리 같은 자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시궁창 속에 숨은 생쥐 같은 놈이었구나. 내가 널 과대평가했어!”
이 말은 쩌렁쩌렁 울려 온여귀의 얼굴을 냅다 후려치는 것 같았다. 온여귀의 얼굴은 노여움과 부끄러움으로 물들었다.
노부인은 딸이 더 이상 온여귀와 얽히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 순천부윤을 재촉했다.
“대인, 방금 온여귀가 제 입으로 혼인 취소에 동의한다고 했으니 그대로 판결하시지요.”
온평과 온여생이 증인이었으니 온여귀로서는 아무리 발뺌해도 소용이 없었다.
그의 진술은 임씨 가문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따라서 온여귀와 임완청의 혼인을 취소하며, 두 사람 소생의 두 딸은 임 씨와 함께 임씨 가문에 속할 것이다.”
“잠깐 기다리시오!”
온여귀가 순천부윤의 말을 끊었다.
“혼인을 취소하는 건 하는 거지만, 어찌 딸들을 처가에 맡긴다는 말이오?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딨소?”
온여귀는 두 딸만 손에 쥐고 있으면 장군부가 자신을 끝까지 몰아붙이지는 못할 것이라는 계산을 하고 있었다. 장모와 전처가 아무리 자기를 미워해도 빈대 잡으려다가 초가삼간을 태우지는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순천부윤은 온여귀에게 동정의 눈빛을 던지면서도 다시 한번 상황을 인지시켰다.
“온 시랑, 하늘이 내려다보고 있소.”
온여귀의 안색이 순간 흙빛으로 변했다.
하늘이 내려다보고 있다는 말의 ‘하늘’은 분명히 ‘천자’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곧 혼인 취소를 판결한 문서가 두 사람의 손에 쥐여졌다.
노부인은 딸 대신에 판결문을 잘 챙기고 호탕하게 손을 휘휘 저었다.
“가자! 우리 집으로 돌아가자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