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풍파 (3)
임근용은 목소리만 들어도 그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언제부터 그녀의 곁에 와 있었는지 모를 육함은 쳐다보지도 않고 차갑게 말했다.
“육 둘째 오라버니,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네요.”
그리고 그녀는 즉시 몸을 돌려 다른 데로 갔다. 발을 떼기 전에 그녀는 곁눈질로 대나무 숲을 흘끗 쳐다보았는데 그곳에는 이미 아무도 없었다.
어쩌면 자기들끼리 즐겁게 떠들다가 임역지가 그들을 데리고 또 다른 곳으로 놀러 갔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임역지는 왜 육함한테는 들러붙을 생각을 안 하는 걸까?
어쨌든 육함의 그 말은 그녀에게 어떤 깨달음을 주었다. 그녀는 모퉁이까지 걸어가서 여지에게 낮은 소리로 지시했다.
“난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네가 사람을 보내 도 큰 사촌 오라버니한테 말을 좀 전해.”
* * *
육함은 호의를 보이고도 냉대를 받는 상황을 여태껏 경험해본 적이 없었고 특히 젊은 아가씨들에게는 더욱 그랬다.
이 혼사는 그에게도 다른 속셈이 있었기 때문에 절대로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임씨 가문의 아가씨들은 대체로 외모는 괜찮은 편이어서 그가 중점적으로 보는 건 그들의 성품이었다.
지금까지 봤을 때 임근주와 임근옥은 교만하고 흉악해서 언급할 가치가 없었고 다섯째인 임근지가 그나마 온화하고 친절해 보였다.
임근용은 전에는 좀 멍청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얌전하고 책임감이 있었다.
다른 사람들, 예를 들면 오상이나 육륜이 모두 그녀를 자진해서 도와주는 걸 보면 겉과 속이 일치하는 사람인 것 같았다.
그는 나름대로 마음에 맺힌 것이 있어 어른들의 총애를 받는다고 자신의 혈육을 짓밟는 사람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그래서 몇 마디 거들어 주려고 입을 열었던 것뿐이고 누군가의 비위를 맞추려는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그녀는 왜 마치 그와 무슨 원한이라도 있는 것마냥 구는 것일까, 자신이 대체 언제 그녀의 미움을 샀단 말인가?
육함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불쾌한 눈빛으로 임근용의 뒷모습을 흘끗 쓸어 보고는 연극을 보고 있는 건물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 온몸에 흙칠을 해 얼굴까지 새까매진 임신지가 조심스럽게 복숭아 한 접시를 들고 큰 소리로 ‘할아버지’를 부르며 사람들과 담소가 한창인 임 노태야를 향해 걸어갔다.
임 노태야는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갑자기 어린아이의 맑은 목소리를 듣고 얼른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임신지를 보고 깜짝 놀라더니 바로 웃음을 터트렸다.
“일곱째 아가, 너 이게 다 뭐냐? 어찌 이리 진흙 밭에 구른 원숭이 꼴로 복숭아를 들고 여기까지 온 게야?”
임 노태야는 지금 아주 자상해 보였지만 평상시에는 자식과 손자들 앞에서 아주 엄격하게 굴었다.
임신지는 무서워서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고 접시도 덩달아 덜덜거렸다.
육함이 옆에서 침착하게 그의 접시를 살짝 받쳐주고 낮은 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신지야, 서두르지 마.”
임신지는 감동하여 그를 향해 웃어 보이고는 용기를 내어 임 노태야를 보고 더듬더듬 말했다.
“할머니께서는 복숭아를 드셨는데 할아버지께서는 못 드셨잖아요.”
일을 잘하는 하인이 일찌감치 임신지의 손에 들려있던 접시를 받아 들었지만 임신지는 더러운 손으로 복숭아를 집어 들고 임 노태야의 입에 먹여주려 했다.
“할아버지 이거 드세요, 이걸 드시면 오래오래 사실 수 있대요!”
임신지는 이렇게 말하며 침을 꿀꺽 삼켰다.
“일곱째야, 버릇없이 굴면 안 되지!”
임 삼노야는 방금 임역지에게 대나무 숲에서 있었던 소동에 대해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어린아이들 장난에 불과하다고 생각해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런데 이때 어린 아들이 지저분한 모습으로 갑자기 쳐들어와서 사람들 앞에서 먹보처럼 굴며 우스운 행동을 하는 것을 보고 얼굴에 당혹감이 어렸다.
그는 속으로 도씨가 아이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해 사람들 앞에서든 뒤에서든 자신의 체면을 상하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그는 골치 아프다는 듯 어두운 표정으로 임신지를 잡아당겼다.
임신지는 본래 자기 아버지를 가장 무서워해서 무의식중에 눈시울을 붉히고 가련하게 임 노태야에게 기대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
“할아버지…….”
사람이 늙으면 오래 살 거라는 말을 제일 좋아하는 법이다. 임신지는 태생적으로 하얗고 귀여운 얼굴이었고 또 가장 어린 적손이기도 했다.
임 노태야는 손자의 이런 모습이 확실히 품위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나름대로 아이의 동심이 귀엽다는 생각이 들어 소매를 펼쳐 임신지를 감싸고 하하 웃으며 말했다.
“자고로 사람이 일흔 살까지 살면 대단한 것이고, 백세까지 장수한다는 말은 아첨하는 말이라 했네! 이러나저러나 우리 귀여운 손자는 정말 효자야!”
그러고는 임신지의 코를 쥐고 웃으며 말했다.
“요놈 네가 먹고 싶어서 이 할애비를 앞세운 거 아니냐?”
“넷째 누나가 어른께서 주셔야 제가 먹을 수 있다고 했어요. 그러지 않으면 건드리면 안 되는 거라면서 못 먹게 했어요.”
임신지는 아주 솔직하고 분명하게 말을 했다. 그렇지만 임 노태야에게 머리를 문지를 뿐 달라고 떼를 쓰지는 않았다.
임 노태야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그를 품에 안고 맞장구를 쳐 주었다.
“근데 어쩌다 이렇게 되었느냐? 진흙탕에서 기어 다녔느냐?”
“아니에요!”
임신지는 비록 어리긴 했지만 마음속에 미움이 남아 있었다. 그는 불만으로 가득 차 아까의 일을 전부 털어놓으려 했다. 그런데 육함이 다가오더니 예를 올리고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
“제가 외할아버지께 말씀드리겠습니다. 제 장난꾸러기 다섯째 동생이 여치 한 마리를 구해 와서 형제자매들이 모두들 즐거워했습니다.”
임 노태야는 노련한 사람이라 그 말 속에 숨겨진 속사정이 있다는 것을 금세 알아차렸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티를 내지 않고 더러운 임신지의 몸을 품에 안으며 말했다.
“신지야 복숭아를 먹고 싶으면 먹어라. 이 할애비가 허락하마.”
임신지는 복숭아를 자신의 입가로 가져가려다가 또 참았다. 그리고 그 복숭아를 임 노태야의 입가에 내밀며 침을 꿀꺽 삼켰다. 그는 내심 아쉬웠지만 꾹 참고 대범하게 말했다.
“할아버지 먼저 드세요!”
이때 도봉당이 웃으며 말했다.
“일곱째야, 반년 동안 못 본 사이에 많이 컸구나. 어른께 효도할 줄도 알고! 할아버지께서 드시고 나면 이 사촌 형님도 한 입 줄래?”
임신지는 자신에게 말을 태워주는 큰 사촌 형을 진심으로 좋아해서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럼요, 당연하죠! 할아버지가 드시고 나면 줄게요!”
‘넷째 누나가 여기 들어온 후에는 반드시 할아버지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다고 했어. 모든 일에 할아버지를 앞세우면 누구도 당해낼 수 없으니 할아버지도 기뻐할 거랬어. 큰 사촌 형이랑은 나중에 큰 복숭아를 둘로 나눠 먹지 뭐.’
사람들이 박장대소 했다.
도봉당이 말했다.
“여전히 할아버지가 제일 중요하다는 거야?”
임신지는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뒤로 기대 임 노태야의 품에 살짝 비비며 눈을 깜박이고 수줍은 듯 웃었다.
막 여기 도착했을 때의 두려움과 걱정, 그리고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진 후의 기쁨까지, 임신지의 동작은 전부 자연스럽고 사랑스러웠다.
임 노태야도 웃기 시작했다.
좀 전의 일은 분명 누군가가 임신지에게 그리하라고 가르쳤을 것이다. 하지만 임신지의 지금 이 행동은 천성에서 비롯된 것이라 누구도 가르칠 수 없는 것이었다.
임 노태야는 이 어설픈 연극에 갑자기 약간 진심이 되었다. 그는 임신지의 머리를 가볍게 두드리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할애비는 방금 전에 밥을 먹었단다. 그래도 우리 일곱째의 지극한 효심을 생각해 이렇게 한 입 먹으마.”
그는 임신지의 손이 더러운 것도 개의치 않고 정말로 한 입 베어 물었다.
임신지는 할아버지가 드신 것을 보고 그제야 도봉당에게 먹으라고 내밀었다. 도봉당이 웃으며 말했다.
“됐어, 장난친 거야. 형은 배불러!”
임신지는 잠시 망설이다가 새까만 눈으로 비위를 맞추려는 듯 임 삼노야를 보고 말했다.
“아버지, 아버지도 드시겠어요?”
호의호식하면서 사는데 익숙한 임 삼노야는 지저분한 그의 손을 힐끗 쳐다보자 온통 흙과 여치의 진액이 묻어 있다는 생각에 구역질이 일었다. 그는 저걸 어디 먹을 수나 있겠나 싶어 손사래를 쳤다.
“너나 먹어라!”
임신지도 별로 개의치 않아하며 임 노태야의 품에 기대 복숭아를 맛있게 먹었다.
“일곱째야, 서두르지 말거라, 우리 같은 문인들이 이리 예의를 차리지 않아서야 되겠느냐? 자, 일단 칠공자를 데리고 가서 씻기고 옷을 갈아 입혀라!”
임 노태야가 측근 하인인 복전(福全)에게 눈짓을 했고 복전이 앞으로 나와 암신지를 데리고 내려가 조용히 그를 씻겼다.
임 노태야는 다시 사람들과 잡담을 하기 시작했다.
“저 아이가 이 늙은이의 막내 손자라네. 나이는 어리지만 그래도 효도할 줄을 아는구먼. 장난기가 좀 있어서 그렇지…….”
사람들이 또 자연스럽게 호들갑을 떨며 아첨을 하기 시작했다. 임씨 가문의 가풍과 가정교육이 훌륭하다는 둥, 임신지는 장차 큰일을 할 아이라는 둥, 임 노태야가 잘 가르쳐서 그렇다는 둥…… 칭찬도 아주 각양각색이었다.
이렇게 어린 일곱째가 대단한지 아닌지 어찌 안단 말인가?
이게 바로 적출과 서출의 차이였다.
만약 서출이었다면 정말 눈부신 재능이 있지 않고서야 일정 나이도 되지 않은 어린아이를 누가 이렇게 칭찬하겠는가?
임역지는 이런 광경을 넋을 놓고 바라보다가 마음이 좀 서글퍼졌다.
육함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넷째 동생이 아직 밖에서 네 소식을 기다리고 있어.”
“어?”
임역지가 고개를 돌리고 육함을 바라보았다.
육함은 방금 그 말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처럼 벌써 육씨 가문 이노야인 육건중(陆建中)의 곁으로 가 자리에 앉았다.
* * *
임역지는 잠시 멍하게 있다가 몰래 빠져나가 임근용을 찾았다.
건물 밖으로 나갔으나 임근용과 그 시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잠시 생각해 본 뒤 건물 모퉁이를 끼고 돌았다. 그러자 임근용이 여지를 데리고 길가에 서서 도봉당과 이야기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사촌 남매는 두 사람 정도의 거리를 두고 서서 얼굴에 엷은 미소를 띠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떤 이상한 행동도 없는 걸로 보아 분위기가 매우 화기애애하고 친근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저런 화기애애하고 친근한 표정은 아무리 열심히 꾸며내려 해도 꾸며낼 수 없는 것이다.
임역지는 약간 풀이 죽었다. 도봉당은 스스로 임근용에게 가서 상황을 설명해준 건 말할 것도 없고 좀 전에도 사람들 앞에서 임신지를 도와주지 않았는가?
그는 신분이 낮아 말에도 힘이 없었다. 이 일은 처음부터 그가 도울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잠깐 서 있다가 다시 들어가서 전처럼 임 삼노야의 뒤에 서서 연극을 보았다.
임 삼노야는 방금 전에 있었던 일을 벌써 까맣게 잊어버리고 의자 팔걸이에 손을 얹은 채 박자에 맞춰 팔걸이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는 살짝 눈을 감고 머리를 흔들며 까닭을 알 수 없는 도취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임 노태야는 옛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무심코 그의 그런 모습을 보고 절로 인상을 찌푸리며 혐오스러운 듯 눈길을 돌렸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유감스러운 부분이 있다면 그건 바로 아들들이 전부 쓸모가 없거나 그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그는 손자 세대에서나 인재가 나올지 기다려보는 수밖에 없었다.
육함은 계속 조용히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의 표정과 동작을 훑어보고 있었다. 그는 무심코 이 장면을 보고 임 삼노야를 흘끗 쳐다보았다가 또 무심한 듯이 눈길을 거뒀다.
임역지가 이 틈에 급히 육함의 곁으로 다가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육함 형님, 나 왔어요. 봉당 형님이 벌써 넷째한테 이야기하고 있더라고요.”
육함은 아무 대답 없이 웃었다. 그는 조용히 복전이 씻겨서 멀끔해진 임신지를 향해 눈길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