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부녀지간의 응어리
남궁묵은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생각에서 빠져나와 직접 오찬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쌀을 씻고, 배추를 한 줌 내어 식초를 둘러 간단하게 요리하고, 남은 배추 이파리로는 국을 만들었다. 순식간에 적당한 한 끼가 완성되었다.
남궁묵은 원래 취미가 많지 않았는데, 유일한 취미가 있다면 바로 요리를 하는 것이었다. 예전부터 그녀는 가장 친근한 사람들에게 줄곧 음식을 해 주는 것을 좋아했었다.
마침 그녀의 스승과 사숙도 맛있는 요리를 즐기는 것을 좋아했다. 그러나 맛을 즐기는 것에 비해 두 사람의 솜씨가 매우 형편없어서, 절로 남궁묵의 솜씨만 늘어갔다. 하지만 정작 혼자일 땐 남궁묵은 대강 끼니를 맞추는 정도로만 식사를 하곤 했다. 자신에겐 별다른 신경을 기울이진 않는 모습이었다.
이윽고 남궁묵이 음식을 들고 대청으로 돌아왔다. 시녀들은 아직 앉지도 않고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기만 했다. 그러다 소박하기 그지없는 남궁묵의 밥상을 보곤 눈살을 찌푸리며 말을 건넸다.
“아가씨, 남궁가의 큰아가씨께서 어찌하여 이런 음식을 드신단 말입니까? 차라리 옆집으로 가서 드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행여나 남궁가가 영애를 홀대한다는 말이 나올까 두렵습니다.”
결국 인내심이 한계에 달한 남궁묵이 깊게 숨을 한 번 들이쉬었다.
“내가 썩 물러나라 하지 않았느냐! 혹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은 것이냐? 귀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게야?”
그러자 연장자인 시녀가 지지 않고 목소리를 높였다.
“아가씨! 어찌……. 저희는 부인께서 특별히 보내신 사람들입니다!”
“그래, 너희는 내 시중을 들러 온 것이 아니더냐? 그럼 내 분부를 듣고 그대로 행하도록 해라. 너희들, 이만 내 눈앞에서 썩, 물, 러, 나, 거, 라.”
“참으로 호의도 모르시는군요! 어쩐지 초국공께서 수년간 찾지도 않으시더니, 그것만 아니었다면…….”
남궁묵이 눈동자를 들어 그녀를 똑바로 응시했다. 표정만으론 그 어떤 것도 읽을 수 없이 아주 무덤덤한 얼굴이었다.
“그것만 아니었다면, 뭐. 어찌 말을 잇지 못하느냐?”
시녀는 평소 다혈질적인 성정인지라 곧바로 참지 않고 말을 이었다.
“네, 말하라 하시니 말씀 올리지요! 작은아가씨께서 위군맥이라는 그 이상한 분과 혼인하지 않겠다고만 선언하지 않으셨다면, 초국공께서도 아가씨를 평생 떠올리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 입 당장 다물지 못할까!”
그때, 돌연 밖에서 분노한 남궁서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일순 넋이 나간 그녀가 뒤를 돌아보니, 재빠른 걸음으로 다시 이곳에 들어오는 남궁서의 모습이 보였다. 격노한 그 얼굴에 아연실색한 두 시녀가 서둘러 그들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첫째 도련님……. 둘째 도련님…….”
뒤따라 들어온 남궁휘도 매우 굳어진 낯빛으로 크게 소리쳤다.
“저리 썩 물러나지 못하겠느냐!”
남궁회의 정실부인이 세상을 떠나고, 그는 후처 정 씨를 다시 정실로 맞았다. 하지만 정 씨와는 슬하에 남궁주 하나만 있을 뿐, 아들은 없었다. 그래서 남궁묵과는 달리 남궁서, 남궁휘 형제는 아랫사람들의 존중을 받고 있었다. 두 형제는 본처 사이에서 난 초국공부의 적자(嫡子)였기에, 후처 정씨 부인의 사람인 이 시녀들도 두 형제만은 무척이나 경외시하고 있었다.
시녀들은 곧 황급히 달아났고,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에 남궁서가 남궁묵의 차가운 얼굴만 조심히 바라보았다. 그러다 아주 어렵사리 먼저 입술을 뗐다.
“경아야, 아랫사람들이 함부로 지껄이는 말을 너무 염두에 두지 말거라.”
그러자 남궁묵이 담담히 웃으며 물었다.
“오라버니들께서 이곳에 오신 건, 저를 그 무슨 위군맥과 혼인시키기 위함입니까?”
“그건 폐하의 뜻이다.”
남궁서의 답에, 남궁묵이 냉소를 지었다.
“폐하께선 정무를 보시느라 무척 바쁘실 텐데, 다년간 도읍에 머물지도 않는 남궁가의 여식을 기억하신다는 말씀입니까? 폐하께서 성지를 내리실 땐, 장안에 널리 이름을 알린 남궁가의 작은아가씨……, 아니, 남궁가의 유일한 아가씨라고 해야겠군요. 바로 그 남궁주에게 성지를 내리셨겠지요?”
“경아야. 이제 네 나이도 적지 않다. 위군맥은 정강의 군왕 세자이시다. 폐하가 가장 총애하시는 외손자이시기도 하지. 만일 네가 혼인을 한다면…….”
남궁묵은 곧장 손을 내저으며 그의 말을 막아버렸다.
“저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지 않습니다. 돌아가 초국공께 알려주십시오. 당신의 귀중한 영애를 혼인시키시든지, 아니면 당신께서 직접 꽃가마를 타시고 정강군왕부로 시집을 가시든 알아서 결정하시라 말씀드려 주십시오.”
“경아야!”
남궁서, 남궁휘 두 형제는 남궁묵의 말에, 웃을 수도 울 수도 없어 자리만 지키고 서 있었다. 그러다 남궁휘가 무표정한 남궁묵을 향해 최대한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경아야, 네가 위군맥과 혼인하길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형님 말씀이 옳다. 네 나이가 이제 적지가 않다. 일단은 우리와 함께 초국공부로 돌아가 다시 이야기를 해보자꾸나. 만일 네가 도저히 싫다고 한다면 내가 너를 대신해 아버지께 직접 말씀을 올려보겠다. 이건 어떠하냐? 괜찮지 않느냐?”
남궁휘의 말은 충분히 진심으로 느껴졌다. 그건 진실한 그의 눈빛이 증명해 주고 있었다. 하지만 진심 어린 그의 마음이 과연 남궁회의 앞에서도 오래도록 버텨줄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다. 남궁경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남궁묵은 이제 절대 두 번 다신 두 오라버니의 말에 속아 넘어갈 수 없었다.
“제 음식들 다 식겠습니다. 어서 나가십시오.”
역시 뜻을 굽히지 않는 남궁묵을 보던 남궁서가 짧은 한숨과 함께 이야기했다.
“좋다. 다시 한 번 잘 생각해 보아라, 경아야. 아버지는 저쪽 저택에 계신다. 나중에 머릿속이 정리가 되거든 건너가 인사를 드리도록 해라.”
* * *
남궁가의 저택에선 남궁회가 계속 초조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부인 정 씨는 남궁주의 곁에 앉아 남궁주와 살짝 눈빛을 교환한 뒤, 찻잔을 내려놓았다. 곧 정 씨가 웃으며 먼저 운을 뗐다.
“나리, 이렇게 조급해하실 필요가 뭐가 있습니까? 원래 부녀지간의 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 하는데, 큰아가씨의 고집이 세다 한들, 서아와 휘아가 가서 설득하면 자연스럽게 나리 앞에 인사를 드리러 오지 않겠습니까?”
그에 남궁회가 마음을 다잡곤 초조한 기색을 내려놓았지만, 이어진 목소리는 몹시도 기세가 꺾여 있었다.
“불효녀 같으니라고! 그 아이에게 무엇을 바라겠는가.”
정 씨가 입을 가리며 웃었다.
“여식을 사랑하는 나리의 마음을 소첩이 어찌 모르겠습니까? 나리께선 겉으론 그렇지 않다고 하시지만, 실제론 큰아가씨를 무척 그리워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난 그 아이가 부인의 보살핌을 잘 모를까 걱정이구려. 그 아이는 정말 제 어머니를 똑 닮았소. 그런데 부인께선 지금 우리 아이들의 적모신데, 어찌 그 아일 아직 큰아가씨라 부르시는 것이오?”
어느덧 분기가 누그러진 남궁회가 묻자, 정 씨가 다시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나리 말씀이 맞습니다. 우리는 모두 한 가족이지요. 이제 경아가 돌아오면 한집안 식구가 모두 모인 것이 되겠군요.”
“나리, 마님. 첫째 도련님과 둘째 도련님이 돌아오셨습니다.”
그때 마침, 밖에서 하인들의 보고가 들려와 남궁회가 엄숙히 대답했다.
“들어오라 하라, 그 아이도 온 것이냐?”
“나리, 큰아가씨께선 오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부인께서 아가씨의 시중을 위해 보낸 시녀 두 명도 돌아왔는데……. 울고 있는 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몹시 난처한 것 같은 목소리가 이어지자, 남궁회가 다시 분노했다.
“뭣이? 기껏 어머니가 저를 생각해 보내준 시녀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이냐!”
남궁회는 겉으론 부인을 두둔했지만, 사실 남궁묵이 자신을 보러오지 않았다는 것에 더욱 크게 분노하고 있었다. 아들까지 보내 설득했건만, 기어이 뜻을 꺾지도 않은 데다 그녀를 생각해서 보내 준 시녀에게 상처까지 입히다니. 그는 치미는 분노를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몹시 격노한 그의 모습은 5년 전 남궁경이 남궁가를 떠나던 그날을 연상케 할 만큼 아주 비슷한 면모를 보였다.
불과 열한 살 소녀에 불과했던 남궁회의 장녀, 남궁경은 제 어머니를 꼭 닮은 눈으로 부친을 경멸하며 떠나갔었다. 남궁회는 그 눈빛 앞에서 대하의 개국 명장이란 찬란한 명성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악랄하며 후안무치하기 짝이 없는 그저 그런 비천한 인간으로 전락해 버린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남궁회는 여식을 5년간 고향에 내버려 둔 채, 여식의 소식도 등한시해 왔다. 정말 이 황제의 성지가 아니었다면 다시는 여식을 떠올리지 않았을 정도로, 그날 그는 여식에게 몹시도 커다란 상처를 받았었다.
그날 장녀의 눈빛은, 남궁회를 아직도 그 시간에 갇혀 살아가게 했다. 그 눈만 떠올리면, 두려움, 상처, 서러움, 원망 등 모든 감정이 뒤섞인 채, 늘 가슴이 다 미어지는 기분에 사로잡히곤 했다.
“이 악독한 것, 그간 안 본 사이 얼마나 더 극악무도해졌는지 한번 봐야겠구나!”
이윽고 분노에 찬 남궁회가 문 앞으로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 * *
“아버지?”
곧 남궁서와 남궁휘 형제가 대청 앞에서 걸어나오는 남궁회와 마주쳤다. 그러나 남궁회는 옷깃을 매만지며 두 형제를 쳐다보지도 않고 그냥 지나쳐 갔다. 잠시 어리둥절하던 형제가 서로 눈빛을 교환하다가, 남궁휘가 먼저 입술을 뗐다.
“아버지, 무슨 일이십니까?”
그때, 남궁주가 정 씨와 함께 걸어 나오며 대답했다.
“아버지께선 언니가 매우 보고 싶으신가 봅니다. 언니가 오지 않아 매우 불쾌해하셨습니다.”
정 씨도 웃으며 말을 이었다.
“염려 말아라, 경아가 많이 그리우셨는지, 경아가 안 오니 저리 화가 나셨단다.”
그러다 정 씨가 남궁휘를 뒤따라 들어오는 두 시녀를 발견했다. 붉어진 눈시울과 눈물 자욱이 한눈에 선하게 들어왔지만, 정 씨는 그냥 아무것도 못 본 척 두 형제를 인자하게 바라보았다.
“좀 전에 나리께도 말씀드렸다. 부녀지간의 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고 하니, 두 사람이 만나서 잘 이야기하고 나면 마음속에 진 응어리도 자연스럽게 풀릴 것이다.”
남궁서가 잠시 생각을 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머니 말씀이 맞습니다.”
그러나 남궁휘는 살짝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는 남궁서처럼 그리 낙관적인 성정이 아니었고, 부친의 격노를 어느 정도 이해하기도 했다. 실제로 누이동생은 예전의 삶을 지워버리려 스스로 이름까지 바꾼 채 살아왔다.
곧 환하게 웃는 남궁주의 말이 이어졌다.
“큰오라버니, 작은오라버니. 저랑 같이 언니를 보러 가요. 저는 오랫동안 언니를 뵌 적이 없잖아요.”
8년 전 남궁가의 정실부인이 세상을 떠난 후, 남궁경은 3년간 모친의 곁을 지키다 미련 없이 초국공부를 떠났다. 그렇게 시간은 벌써 5년이나 흘렀다. 헤어짐의 시간도 길었고, 본래 언니와 함께 자라지도 않았기에 남궁주는 언니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었다. 심지어 언니의 모습조차 떠오르지 않을 정도였다. 정말 이번 사혼이 아니었다면, 남궁주는 평생 자신만이 남궁가의 유일한 여식이라 여겼을지도 몰랐다.
“그래, 좋다.”
곧 잠시 망설이던 남궁서가 고개를 끄덕이자, 영리한 남궁주도 금세 웃었다.
“큰오라버니, 걱정 마시어요. 전 분명 언니랑 잘 지낼 거예요.”
남궁서도 그제야 연한 웃음을 보였다.
“주아는 정말 사리 분별을 잘하는 아이로구나.”
남궁주가 비록 응석받이의 면모가 있긴 하나, 일의 경중 정도는 잘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이 상황은 언니가 자신을 대신해 혼인을 치르는 것이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괜스레 언니의 노여움을 살 만큼 채신머리가 없는 건 아니었다. 이어 남궁주가 남궁서의 한쪽 팔을 잡곤 애교스럽게 이야기했다.
“이제 가요. 주아는 언니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서 더는 못 참을 지경이에요.”
“경아는 매우 아름답더구나.”
그에 남궁휘가 웃으며 답했지만, 남궁주의 눈동자는 잠시 조그만 동요를 보였다.
“그런가요? 매우 기대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