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죽마고우에도 끝이 있다
정요는 정신이 번쩍 드는 듯했다. 그녀는 신뢰와 불안이 가득 찬 눈동자를 외면한 채 웃으며 말했다.
“아니야. 만약 다른 사람 모두가 네가 교만하다고 생각한다고 해도, 나는 분명히 알아. 정미는 교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정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웃는 모습이 조금 못생겨 보였다.
“그럼 됐어.”
마주 보고 선 두 자매의 거리는 가까워서 서로의 숨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정미가 한 마디씩 띄엄띄엄 말하며 물었다.
“그렇다면, 지 오라버니가 언니를 좋아하는 걸 알았으면서 왜 진작에 내게 알려주지 않았어?”
“뭐?”
정요는 조금 놀랐다.
그녀를 보던 신뢰 가득한 눈동자가 갑자기 적응이 안 될 정도로 차가워졌다.
“둘째 언니, 언니는 내가 교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면서, 왜 일찍 나에게 알려주지 않은 거야? 난 지 오라버니를 무척 좋아해.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줄곧 아주 아주 좋아해 왔어. 하지만, 만약 지 오라버니가 내가 오라버니를 좋아하는 것처럼 언니를 좋아하는 걸 알았다면, 나는 절대 오라버니에게 그런 말을 하지 않았을 거야.”
여기까지 말하자, 정미는 감정이 조금 격해지기 시작했다.
정요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당황하며 말했다.
“정미, 내가 잘못했어. 나…… 나는 그저 네가 알면 슬퍼할까 봐…….”
“슬픈 건 무섭지 않아!”
정미는 화가 나고 억울했다. 화가 난 것은, 본인의 어리석음을 참을 수 없어서였다. 지 오라버니는 이미 둘째 언니가 아니면 안 될 정도에 이르렀는데도, 자신은 이를 알지 못하고 굳이 그에게 마음을 들이밀어 결국 진흙 속에 떨어져 모질게 짓밟힌 꼴이 된 것이 몹시 우스웠다.
억울한 이유는 정미가 둘째 언니 정요를 신뢰해서였다. 이제껏 여러 번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았으니, 정요가 단 한 번이라도 언급해줬더라면, 정미는 가장 가까운 두 사람 사이에 끼어서 큰 웃음거리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둘째 언니, 언니는 알잖아. 나는 슬픈 건 무서워하지 않아. 창피한 것만 두려워하지! 사실 사람들의 말이 맞아. 나는 이렇게 교만하고 제멋대로고, 그 무엇보다 체면이 제일 중요한 사람이야. 지 오라버니가 날 좋아하지 않으면, 나도 오라버니를 좋아하지 않으면 돼. 하루 만에 마음을 접지 못하면 일 년이 걸려도 그렇게 할 거고, 일 년이 걸려도 접지 못하면 평생이 걸리더라도 반드시 해낼 수 있다고. 그리고 나는 내가 계속 언니를 좋아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 내 고약한 성정이 언니를 그렇게 억울하게 할 줄은 모르고.”
정미가 뒤로 물러섰다. 정요는 당황한 나머지 그녀의 손을 붙잡고 더듬거리며 말했다.
“아니야. 난 억울하지 않아…….”
정미는 스스로를 비웃었다.
“정요 언니가 억울하지 않을 리 없어. 아니면 어떻게 이 정도로 나에게 양보하겠어. 내가 속상해할 게 걱정돼서 지 오라버니의 마음을 모르는 척하고, 나를 격려하고, 나에게 언니의 생각을 말해주고, 힘을 다해 나와 지 오라버니를 맺어주려 하고…….”
“정미,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정요는 정미의 말뜻을 이해할 수 없었고 붙잡은 손을 더 세게 잡았다.
정미가 살짝 고개를 들고는 웃었다.
“내 말은, 내가 곁에 있으면 늘 언니를 억울하게 하니까, 앞으로 우리 멀리 떨어져 지내자는 거야.”
정미는 말을 마치고는 몸을 돌려 이번 생에 다신 오고 싶지 않을 이곳을 빠져나가려 했다. 정요가 그녀의 손을 잡아당기며 급히 말했다.
“정미!”
정미는 힘껏 손을 뺐다. 손을 놓친 정요는 저절로 뒤로 몇 걸음 물러나다 뒤따른 비명과 함께 바닥에 넘어졌다.
“둘째 언…….”
정미는 뒤늦게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잡아주려고 했으나, 말을 내뱉은 순간 누군가 튀어나와 그녀를 옆으로 불쑥 밀쳐냈다.
정미는 바닥에 꽈당 넘어졌다. 넘어지는 순간 손으로 땅을 짚으려 했지만, 오른쪽 팔꿈치를 다친 탓에 손목이 삐뚤게 바닥에 찧었고, 이어 극심한 고통이 전해졌다.
그녀는 너무나도 아픈 오른쪽 손목을 쳐다봤고, 마른 나뭇가지가 손목을 비스듬히 찔러 꿰뚫은 것을 볼 수 있었다. 피가 콸콸 흘러 손목에 찬 팔찌를 적셨다.
극심한 고통과 출혈이 만든 착각인지, 정미는 그 팔찌에서 빛이 나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정요, 괜찮아?”
그때 더없이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미가 눈을 들자, 한지가 몹시 쓰린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정요를 부축하는 것이 보였다.
그 순간의 감정을, 정미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녀는 그저 두 사람을 빤히 쳐다볼 뿐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 두 사람의 모습이 달라졌다.
달라진 모습의 정요는 여전히 바닥에 누워있었는데, 지금보다 몇 살 더 먹은 것처럼 보였다. 만약 평소의 정요가 막 모습을 드러낸 작은 연꽃 같았다면, 지금의 정요는 완전히 꽃핀 푸른 연꽃 같았다.
정요는 고통스러운 얼굴로 배를 부여잡았고, 연잎이 사방으로 퍼진 듯 넓은 비단 치마에 선혈이 빠르게 번져나갔다. 치마는 만조가 된 듯 황혼빛으로 물들었고 위의 정교하고 아름다운 공작무늬는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주변의 백매는 오색찬란하고 화려하게 바뀌었으며 겨울날은 빛나는 봄빛이 되어있었다.
이 절연하고 익숙한 듯 낯선 경치에서, 정미는 한 늘씬한 젊은 여인이 정요와 반 장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서 그녀를 등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젊은 여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뒷모습이 익숙했다. 그러자 춥지 않은데도 몸이 떨려오며 순식간에 소름이 돋았다.
정미는 손으로 힘껏 땅을 짚었다. 이 젊은 여인의 모습을 똑똑히 보고 싶었다. 그 여인은 살짝 허리를 숙이며 마치 크게 놀란 듯 한걸음 씩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끝내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낮고 어지러운 발소리가 들려왔고, 사람들의 소리가 떠들썩했다. 그러나 정미는 소리 없는 인형극을 보는 것처럼 그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지 듣지 못했다. 그 사람들의 모습도 잘 보이지 않았다. 주위의 모든 것이 수묵화로 변한 듯했고, 오직 서 있는 사람과 누워있는 사람, 그 두 여인만이 선명한 색채를 띠고 있었다.
이때, 한 사내가 갑자기 나타나 서 있던 젊은 여인의 복부를 힘껏 걷어찼고, 젊은 여인은 그대로 날아올라 세차게 바닥으로 떨어졌다.
정미는 이에 홀려 바닥에서 피를 흘리는 정요를 잊고 눈으론 젊은 여인만을 쫓고 있었다. 젊은 여인이 바닥에 떨어지자 드디어 그녀의 모습이 또렷이 보였다.
괴로운 얼굴을 하며 입가에 피를 흘리는 그 여인은 바로 정미 그녀 자신이었다. 아니, 완전히 그녀 자신이라 말할 수는 없었다. 그 여인은 정미였지만, 지금의 정미보다 몇 살은 더 많아 보였기 때문이다!
정미는 바로 입을 틀어막으며 비명을 지르고 싶은 충동을 참아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사내를 바라보았다.
이상하게도 그 사내는 사라졌고, 바닥의 정요와 또 다른 자신도 자취를 감춘 채였다.
정미가 눈을 깜빡이자, 눈앞의 공기가 잔물결처럼 일렁거렸다. 그리고 또 다른 두 사람이 눈앞에 나타났다.
그 중 한 사람은 바로 열여덟 남짓의 자신이었고, 나머지 한 사람은 뜻밖에도 몇 년 후 한지의 모습이었다. 그들은 마주 서서 뭔가를 논쟁하는 듯했다.
정미는 계속 입을 막고 눈 앞에 펼쳐진 허황된 모든 것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어째서 이런 기괴한 장면이 보이는 것인지 생각하는 일은 이미 잊은 채였다. 오히려 자란 후의 자신과 지 오라버니가 무엇에 대해 다투고 있는지에 대해 강렬한 호기심을 느꼈다.
이 호기심이 너무 강렬한 탓인지, 줄곧 소리 없는 인형극을 보는 듯했던 정미에게 갑자기 두 사람의 대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정미, 나는 너같이 악독한 부인은 정말로 본 적이 없다! 정요가 네게 어떻게 대해왔는지는 네가 똑똑히 알겠지. 그런데 이렇게 독기를 품고 그녀를 유산하게 만들다니!”
“제…… 제가 그런 게 아닙니다…….”
“무엇이 그러지 않았다는 것인지 똑똑히 말해!”
몇 년 후의 한지는 소년의 풋풋함을 벗고, 난옥(暖玉)처럼 곱고 윤이 나 그 눈부신 미모가 더욱 출중해 보였다. 하지만 내뱉은 말은 정미가 이전에 들었던 그 어떠한 말보다 더 무정했다.
“정요를 밀어 그녀가 유산하게 한 게 아니란 것이냐, 아니면 그녀를 질투하여 별의별 궁리를 다해 그녀를 괴롭힌 게 아니란 것이냐!”
“아니, 아닙니다! 한지, 이 망할 자식! 나야말로 당신 같은 사내를 본 적 없습니다. 나를 아내로 삼고는 이미 한 사내의 아내가 된 정요를 한시도 잊지 못하다니!”
한지는 극도로 화가 나 웃었다.
“그래서 네가 그녀를 유산하게 한 것이 맞다는 거냐, 아니라는 것이냐? 정미, 너는 무고한 아이에게까지 무자비하게 손을 대면서, 무엇을 근거로 내가 너처럼 사갈 같은 부인을 좋아할 거라 생각하는 것이냐?”
정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한지를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저를 비난할 자격이 당신에게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당신한테 시집온 이 년 동안, 내게 조금만 더 잘해주고 진정한 아내로 대해줬다면, 내가 어찌 정요와 멀어질 수 있었겠습니까? 만 보 물러서서, 정요가 유산한 게 정말 나 때문이라고 해도, 그것 또한 당신 탓입니다! 난 당신의 정실이에요. 하지만 꼬박 이 년이라는 시간 동안 당신은 나를 전혀 건드리지 않았지요. 내 마음을 헤아려본 적은 있습니까? 저도 사람이라고요!”
청년이 된 한지는 훤칠한 몸매와 준수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정미의 내려다보는 듯한 태도를 보고는 비웃으며 가볍게 한마디 했다.
“널 건드리지 않은 건, 내가 지금까지 한 결정 중 가장 옳은 결정이란 생각이 드는군!”
그는 말을 마치고는 소매를 털고 몸을 돌려 떠났다.
정미는 화가나 멍해진 듯 한참 말을 하지 못했다. 한지가 무정한 뒷모습만 남기고 멀어지는 것을 보자 화나기도 하고 다급한 마음이 들기도 해서, 허리를 굽혀 꽃신을 벗어 던지며 욕했다.
“한지, 이 개자식!”
한지는 어깨에 통증을 느끼고 손을 뒤로해, 그의 어깨를 때린 물건을 잡았다. 뜻밖에도 매미 한 쌍이 그려진 앙증맞은 꽃신이었다.
대량(大梁)의 여인들은 전족을 하지 않았다. 명문가의 귀녀부터 시골계집까지, 모두 자연 그대로의 발이었다.
성장한 후의 정미는 여전히 얼굴이 까맸고, 몸매는 조금 통통했으며, 훤칠한 키는 더욱 통실한 느낌을 주었다. 하지만 그녀에게도 절묘한 부분이 있었는데, 바로 작고 깜찍한 손발을 가졌다는 점이었다. 특히 그 조그마한 발은 성인 여인의 손바닥보다 작았고, 정성을 다해 세심하게 조각한 진귀한 장식품처럼 섬세하고 아름다웠다.
이 신을 신은 한 쌍의 발은 분명히 몹시 정교하고 귀여울 터였다. 사내의 손에 이런 꽃신이 쥐어진다면, 대부분은 유한 마음이 들 것이다. 하지만 한지는 마치 얼음장같이 무표정한 얼굴로 손안의 꽃신을 쳐다봤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 성큼성큼 돌아와서 그 꽃신을 정미의 발치에 내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