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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눈깔 괴물은, 전차대대의 중심부 근처에 있다.

하지만 거리가 먼 이곳에서는 아무리 높은 건물에 올라간다 한들, 전차대대 내부를 보기는 힘들다.

그러니.

녀석을 저격 포인트까지 끌어낼 필요가 있겠지.

[셰프 : 작전 개시.]

"전원-! 진군하라-!!!"

[지휘의 함성 - '진군 명령'이 울려 퍼집니다.]

작전 개시 명령에 따라, 김 중위의 함성이 울려 퍼진다.

쿠웅...

군단의 군홧발이 대지를 흔들었다.

* * *

나는 저격 포인트에 앉아있는 서수혁에게 말했다.

"위에서 내려다보니, 어때?"

"우리 군단. 꽤 위용이 있군요."

그 말대로.

건물의 아래에서는.

200여 명에 달하는 부대원들이, 각자의 무기를 들고 대기 중이었다.

전쟁을 위해 개조된 전투차량들까지.

그들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군단의 기운]이, 부대원들을 하나로 묶고 있는 모습.

매번 저 사이에 껴 있어서 몰랐지.

우리 부대는 꽤 믿음직스럽게 성장한 상태였다.

눈깔 괴물 녀석을 저격 가능한 지점까지 끌어내기 위한 작전은 간단하다.

'눈깔 괴물이 내뿜는 주변을 조종하는 기운. 그걸 넓게 퍼트리기 위해 녀석은 하늘로 올라가야 해.'

각성자인 나조차 신체 일부의 지배권을 한순간 빼앗겼을 정도로 강력한 힘이었다.

하지만 약점도 없진 않다는 거지.

'우리가 병력을 진군시켜서 전차대대까지 접근한다면, 녀석도 분명 그 기운을 퍼트리려고 하겠지.'

사실.

내가 녀석과 싸울 때는 그다지 유효한 약점은 아니었다.

내 전투법은 [중급 단도 숙련]을 적극 활용한 근접전.

권총을 사용한 원거리 공격은 어디까지나 보조에 그치는 수준으로, 하늘로 떠오른 녀석을 제거하기는 힘들었으니.

"후욱."

하지만.

예민해진 감각을 다스리느라 고생 중인 이 녀석.

서수혁 상병에게는 다르다.

'그동안 사수들도 놀고만 있지는 않았거든.'

탄약대대를 점거한 뒤.

탄약대대에서 노획한 총기들은 공병들에 의해 개조를 거쳐 사수들에게 지급되었다.

소음기를 장착한 총기들이 대표적.

그리고 지금 서수혁 상병이 들고 있는 총 역시 마찬가지였다.

'K-14.'

대한민국 국군이 사용하는 저격용 소총.

본래도 준수한 성능의 총이었다만.

공병들이 개조한 지금은 엄연한 '무기 아이템'.

이번에는 화력을 최대한 온존하기 위해 소음기조차 달지 않았다.

'평범한 총기들하고는 비교가 안 될 정도지.'

그리고 사수들이 쏘는 탄환의 위력은 사용자의 능력에 따라 달라진다.

부대 제일 사수인 서수혁.

녀석에게 내 요리로 인한 버프와 공병들이 제작한 장비까지 갖춰진 지금.

상공에 가만히 부유 중인 목표물 따위.

사격 훈련용 표지판이나 다름없겠지.

쿵. 쿵. 쿵.

발을 맞춰 걷기 시작한 병사들의 하나 된 군홧발 소리가 옥상인 이곳까지 들려왔다.

그것을 전차대대에서도 눈치챘다.

퍼버버벙-

"포격, 시작됐습니다!"

거친 포화 소리와 함께.

저 멀리서 붉게 빛나는 형체들이 군단 병사들을 향해 쏟아지기 시작했다.

접근 중인 군단을 감지한 전차대대가 요격을 시도한 것.

"지난번에는 저 포격에 얻어맞고 무력하게 후퇴해야 했지.'

물론.

이번엔 아니다.

"마법사, 사수들은 요격 태세로!"

[지휘의 함성 - '요격 태세'가 울려 퍼집니다.]

김 중위의 명령이 울려퍼지자.

붉은빛의 포탄들에 맞서, 형형색색의 빛들이 허공을 수놓았다.

뇌전, 화염, 얼음, 나무, 물... 다양한 속성의 마법은 물론 무형의 마력 덩어리까지.

군단의 마법사들이 온갖 종류의 마법을 발하기 시작한 것.

콰아앙....

두 빛이 격돌하자.

"요격 성공입니다!"

대부분의 붉은 빛은 형체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라져 버렸다.

계속해서 진군하며 드물게 요격에 실패한 포탄들도 있었지만.

"전사들은 방어 태세로 아군을 보호하라!"

"충성!"

[지휘의 함성 - '방어 태세'가 울려 퍼집니다.]

"흐읍!"

거대한 방패를 든 전사들이 몸을 날려, 포탄의 경로를 가로막았다.

엄청난 열기와 대인 살상용 파편들은 마력이 담긴 방패를 뚫지 못한 채 튕겨 나갔다.

'대단하군.'

새삼스레 놀라게 된다.

이것이 적의 공격을 예상한 각성자 부대의 힘.

충분한 준비를 한 우리는 군부대의 포격조차 뚫어 버릴 수 있다는 거다.

그때.

저격을 위해 자세를 잡고 있던 서수혁 상병이 입을 열었다.

"보입니다."

눈깔 괴물.

녀석들이 군단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몸을 부유시키기 시작한 것.

"아직 최고점이 아닐 거다."

"하지만."

"군단은 문제없이 버티고 있어. 조금만 더 참아."

"...예."

예민해진 감각의 영향으로 눈을 뜨고 스코프를 바라보는 것도 힘겨워 보이는 녀석.

저격수의 자질은 사격 실력뿐만이 아닌 인내심과 체력에 있다고 했던가.

미안하지만 조금 더 버텨 줘야 할 때다.

그렇게 군단원들이 포격을 뚫고 진군하기를 수 분.

"신 병장님. 대대 정문이 열렸습니다."

전차대대의 정문이 열렸다.

무슨 의도인지 파악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저쪽의 눈깔 괴물이 포격만으로는 우리를 저지하기 힘들다고 판단해서, 전차와 보병들을 내보내 우리를 요격하겠다는 거겠지.'

그리고.

보병들을 모조리 내보내기 위해선 곳곳의 초소에 퍼져 대대를 수비 중이던 병사들에게 그 안개와도 같은 기운을 뿌려야 할 터.

즉.

지금이 허공에 떠오른 눈깔 괴물의 위치가 최고점에 도달했을 때라는 것.

"사격 준비."

"사격 준비."

내 명령에 복명복창하며 총을 견착하는 서수혁 상병.

요리의 효과로 인해 예민해진 감각이 주변의 모든 정보를 긁어모았다.

바람의 방향과 세기, 목표물과의 거리.

서수혁 상병의 [하급 사격 숙련]은 모인 정보를 바탕으로 총알의 낙차를 계산하며 총구의 방향을 미세하게 조정했다.

그리고.

"사격 개시!"

"사격 개시!"

타아아아아앙-!

커다란 총성이 울려 퍼지고.

.308 HPBT 탄환이 공기를 가르며 전진했다.

그리고.

수 킬로미터 너머.

일반인의 육안으로는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저 멀리 탄약대대에서.

[——!!! ———!!!!]

끔찍한 절규 소리가 퍼져 나갔다.

동시에 거대한 마력이 요동치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잠시 뒤.

[당신의 식사를 대접받은 이가 전투에서 크게 활약했습니다.]

[요리사의 명성이 퍼져 나갑니다! 경험치가 상승합니다.]

눈앞에 떠오르는 메시지창.

그와 함께 병사들을 향해 쏟아지던 포격 소리 또한 잠잠해졌다.

"성공한 겁니까?"

"그래."

"...하하."

계속해서 고통스러워하던 녀석은 총을 대충 내던지고 옥상 바닥에 드러누워 버렸다.

그러고는 눈을 감고 말했다.

"신 병장님."

"어. 하고 싶은 말 있냐?"

"괜한 훈수 안 두기로 해 놓고 미안합니다만, 한 가지만 조언해 드려도 되겠습니까."

"괜한 훈수 같은 거 언제나 환영이다. 뭔데."

녀석은 식은땀을 흘리고 거친 호흡을 내쉬는 녀석.

"이만한 버프는, 가급적 자제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온갖 정성은 물론.

최근에 농부가 합류하면서 수급된 각종 식재료.

여러 요리들을 만들어서 내놓는 코스 요리에.

특정인을 위해 만들어진 요리기에 생긴 효과 증가까지.

현시점의 내가 뽑아낼 수 있는 최대한의 버프 요리.

"저야 어떻게든 버텨 내긴 했습니다만... 솔직히 말해서, 정신력이 조금이라도 약한 녀석이었다면 진작에 기절했을 겁니다."

그 효과는 확실히 압도적이긴 하다만.

지나치게 강력한 탓에 각성자조차 받아들이기 힘든 반동을 동반하는 것.

'이만한 반동을 감당할 수 있으려면 최소한 나처럼 20레벨 대에는 진입해야 할 확률이 높겠네.'

서수혁의 조언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앞으로는 좀 대충 요리하도록 노력해 보마."

"...그게 그렇게 되는 건가 싶긴 합니다만. 예. 뭐, 신 병장님이 알아서 잘하실 거라 믿습니다."

거기까지 말한 녀석은 툭-하고 고개를 떨궜다.

"기절하신 것 같습니다."

어지간히 힘들었는지.

아예 기절해 버린 모양.

"제가 잘 살펴볼 테니, 걱정 마십쇼."

"부탁한다."

기절한 녀석을 의무병에게 맡긴 뒤.

나는 우리가 공략하려던 거점.

전차대대를 향해 몸을 옮겼다.

* * *

"신 병장님! 오셨습니까!"

"어. 문제는 없지?"

"예. 신 병장님과 서 상병님이 괴물을 처치해 주신 덕분이죠. 진군할 때가 빡셌지, 안쪽에서는 교전 한 번 없었습니다."

전차대대 근처에 도착하자.

미리 도착해 있던 부대원들이 마중을 나왔다.

다행히 특별한 문제는 없었다는 듯.

"전차나 기갑병기들은?"

나는 우리가 전차대대를 공격하고자 한 이유.

우리가 노리던 전차들의 행방을 물었다.

"그게. 깊게 찾으러 들어갈 필요도 없더군요."

"음?"

"따라와 보시면 알 겁니다."

녀석의 말대로였다.

병사들을 따라 전차대대의 정문 안으로 들어가자.

찾을 필요도 없다는 말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전차대대 정문의 위병소 근처.

그곳에 스무 대가 넘는 전차들이 세워져 있었으니까.

"...이것들이 왜 여기 있냐?"

"저희를 요격하기 위해 나서려던 중이었겠죠."

아.

딱히 우리 부대 편하라고 여기에 위치한 건 아닐 테니.

"전차들이 본격적으로 나서기 직전에 서수혁 상병님의 저격이 성공한 모양입니다."

"과연."

군단 병력을 요격하기 위해 움직이던 전차들.

그 전차들이 눈깔 괴물이 죽자마자 멈춰 선 것이 하필이면 정문 바로 앞이었다는 것.

그런데.

눈에 띄는 게 하나 더 있었다.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저건...."

"예. 군복들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전차들의 근처에 군복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전차에 걸쳐지다시피 올려져 있는 군복들.

그곳에 다가가 슬쩍 군복 상의를 들추자.

"이라고 해야겠죠."

"...."

그 군복 속에는.

인간의 뼈가 들어 있었다.

"내가 잠입할 때만 해도 인간의 형태였는데."

"원래 죽은 이들을 그 눈깔 괴물의 마력이 강제로 유지시킨 거겠죠."

그래도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던 군인들을 봤을 때는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도 있었다만.

저 눈깔 괴물 입장에서 군인들을 조종하는 데 살아 있는 상태일 필요는 없었던 모양이다.

눈깔 괴물에게 필요한 최소한의 기능만이 남겨지고, 나머지 부위는 천천히 죽어 간 것이겠지.

그 괴물이 제거되자, 녀석이 유지하던 최소한의 기능조차 사라진 유골만이 남은 것이다.

"군번줄은 잘 챙겨 둬라. 옆 부대 아저씨들이지만, 같은 군인들끼리 장례는 치러 줘야지."

"부대 근처에 정착한 생존자 중에 목사가 있다는 소문을 들었던 것 같습니다. 장례식이 가능한지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다음으로는.

본격적인 전리품 확인이 시작됐다.

"하나, 둘-."

"셋!"

전차에 달라붙은 공병들이 구령을 외치더니.

팡!

"됐습니다!"

입구의 뚜껑을 따 버렸다.

"솔직히 저희가 건드릴 수 있을까 싶었는데, 가능할 것 같습니다."

"으아. 다 좋은데 기름이 거의 오링이네요 이거."

딱히 전차병 출신은 아니다만.

직업이 [공병]이라서일까.

녀석들이 각성하며 얻은 지식 중에는 전차의 사용법에 관한 것도 있었던 모양.

"이 부분은 이렇게 개조하면...."

"장갑은 맥의 마력으로 강화하면 된다 치고. 화력을 키우려면 일단...."

공병들이 각각의 전차에 들어가 전차를 점검하며 개조 방안을 논의했다.

스무 대가 넘는 전차들의 소유권이 '군단'에 넘어오게 된 순간이었다.

전차대대를 찾아온 목표는 달성했지만.

전리품은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또 하나의 전리품은.

전차대대 중앙 근처.

도로 위에 뜬금없이 흩뿌려져 있었다.

[식재료 감별(강화)]

[이형종 - 게이저]

[신선도 - 중]

군인들을 조종하던 눈알 괴물.

'게이저'의 사체였다.

죽기 직전에 어지간히 큰 고통을 느낀 것일까.

극한까지 축소된 동공.

그 중심은 서수혁의 총알에 관통되어 있었다.

"눈알처럼 생겼지만, 진짜 눈알은 아니란 건가."

눈알이 터진 징그러운 장면을 예상했다만.

총알에 뚫린 부분을 제외하면 원래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만져보니 각막 같은 게 아니라 평범한 육류의 식감이 느껴졌다.

이건 좀 신기한걸.

이 녀석은 본체의 전투력은 그다지 강한 편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니 병사들을 조종해서 접근해 오는 적들을 방어하려 한 것이겠지.

하지만 본체의 전투력과 별개로.

이 녀석이 발휘한 이능은, 지금까지 본 그 어떤 능력보다도 강력한 것이었던 바.

이 사체는 분명 쓸모가 있겠지.

그렇게 눈알 괴물 녀석의 사체를 주섬주섬 주워 옮기려 하고 있을 때.

"영준아."

이민재 상병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목표였던 전차를 손에 넣었군."

"목표라고 하니까 애매하네. 알잖아? 전차는 어디까지나 수단에 불과하다는 거."

"그렇지."

전차를 노획하고자 한 것은 어디까지나 전력을 키우기 위함.

전력을 키우고자 한 이유는 하나.

북부에 자리잡은 거대한 적.

'뱀파이어들을 토벌한다.'

77화 뱀파이어 토벌 (1)

강원도의 작은 도시인 인제군.

그 북쪽 구석의 한 산맥 깊은 곳.

그곳에는, 현지인들도 잘 모르는 동굴 하나가 있었다.

그 동굴 내부.

비상시에 대비해 만들어진 군사시설이 지어져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정말로 극소수였다.

하지만.

아는 사람이 아무리 적다고 한들 그곳 역시 인간들의 무력 시설.

그렇기에.

괴물이 나타났다.

"커, 커억...!"

여타 군부대를 습격한 괴물들과 달리.

벙커에 나타난 괴물은 단 한 마리에 불과했다.

그 한 마리의 괴물이.

어떤 남자의 목에 이빨을 박아 넣었다.

목에 이빨이 박힌 남자는 갑작스러운 공격에 저항하면서 고통에 몸부림쳤으나.

그것도 오래가진 않았다.

남자의 몸 안을 돌던 모든 혈액이 괴물의 목으로 넘어간 뒤.

괴물의 피가 거꾸로 흘러 들어와 남자의 혈관을 돌기 시작했다.

그러자.

"여왕님에게 충성을...."

"그래. 네 활약을 기대하마."

이내 영혼 없는 눈으로 괴물의 앞에 무릎 꿇는 남자.

그 모습을 보며.

'여왕'이라 불린 괴물은 생각했다.

'권속도 꽤 많이 늘어났구나.'

그녀가 이곳에 나타난 지도 꽤 시간이 흘렀다.

첫 번째 권속은 이 동굴의 시설을 관리하던 남자였다.

아무래도 인간들 사이에서는 꽤 중요한 지위에 있던 것 같다만.

그런 지위 따위.

그녀의 앞에 맨몸으로 선 이상, 장식으로서의 가치조차 없는 일.

그래도 나름대로 높은 지위의 남자였던지라 이 세상의 지식에 대해서는 꽤 해박했다.

그녀는 첫 번째 권속에게서 이 세상에 대한 정보를 전해 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얻은 지식을 통해 그녀가 얻은 결론은 하나.

'내가 힘을 키우기에 최고의 환경이다.'

가증스러운 성기사들도.

항마 승병도 혈귀 사냥꾼도 없다.

그녀와 비슷한 개념을 지닌 존재에 대한 이야기가 세간에 있는 것 같기는 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공상의 영역으로 여겨지고 있었을 뿐.

그녀와 같은 존재에 대한 대비는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녀의 눈에.

이 세계의 인간들은 자신에게 물어 달라고 목덜미를 내놓고 있는 이들처럼 보였다.

'그때는 참 기분 좋았는데 말이지.'

그 사실을 깨달은 그녀는 기쁜 마음에 곧바로 사냥에 나서려고 했다.

순식간에 힘을 키울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에 벙커를 나서려고 하던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상념이 밀려 들어왔다.

[인간종의 무력 시설을 침공하고, 점거하라.]

[누구에게도 빼앗겨선 안 된다.]

무시하려고도 해 봤지만.

출구에 가까워질수록 더욱 강해지는 상념.

그럼에도 욕심을 버릴 수 없었던 그녀는 생각했다.

'내가 이곳을 떠날 수 없다면, 먹이들이 나를 찾아오게 만들면 되겠지.'

다행히도 그녀의 권속은 자유자재로 벙커의 밖을 돌아다닐 수 있었다.

직접 사냥하는 것에 비하면 확실히 효율이 떨어졌다.

그녀가 하루에 권속으로 만들 수 있는 숫자는 다섯.

초창기에는 하루에 한 명도 권속으로 만들지 못한 날도 많았다.

나름 머리가 좋던 첫 번째 권속이 머리를 굴린 결과.

생존자들 사이에 소문을 내는 데 성공했고.

최근에서야 권속을 늘리는 데에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이대로 힘을 키우다 보면 하루에 만들 수 있는 권속의 숫자도 늘어날 테지.'

지금은 찾아오는 생존자들은 모두 권속들의 먹이로 주거나 새로운 권속으로 만들고 있지만.

충분한 전력이 갖춰진 뒤에는 인간들을 납치해 사육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일종의 식량 생산 공장을 만드는 것.

거기까지 가기만 한다면 그녀가 힘을 키우는 속도에도 가속도가 붙을 것이었다.

언젠가 그녀의 머리를 지배하고 있는 상념조차 밀어낼 수 있을 정도의 힘을 갖출 수 있었을 테지만.

'짜증 나는구나.'

그녀는 얼굴을 찌푸리며 생각했다.

기껏 속도가 붙기 시작했거늘.

최근에 생긴 불미스러운 일 하나 때문에 약간 그 속도가 줄어들었기 때문.

'수완이 좋은 권속이었는데.'

권완태.

권속 중에서도 고레벨에 속하고, 수완도 좋아 각별히 아끼던 존재 중 하나였다.

그가 뜬금없이 살해당한 것.

범인들에 대해 알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군인... 이 세상의 전사 계층.'

최근에 들어온 권속들 중에서는 그 군인들에 대한 소문을 가지고 있던 이들도 있었다.

전멸한 줄 알았던 군부대 중 생존한 부대가 있으며.

그들은 약탈자 그룹을 토벌하는 등 정상적인 활동을 하는 이들이라던가.

그 소문에는 군부대의 대략적인 위치도 있었다.

전사 계층에 속하는 이들.

그녀가 직접 나서지 못하는 지금.

권속만으로 토벌을 시도했다가는 이쪽도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크겠지.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있었다.

'권속은 매일같이 늘어나고 있으니까.'

그녀가 피를 나눠 준 존재를 마음대로 살해한 이들.

결코 용서할 마음은 없었다.

당장은 위험할 수 있으니 힘을 기른다.

그러나 충분할 정도로 힘을 기른 뒤에는.

그녀의 권속들이 파도가 되어 그 전사들을 척살하리라.

* * *

"뭐 그런 생각을 하고 있겠지."

부대의 회의 시간.

이민재 병장이 그렇게 운을 떼며 말했다.

"아쉽지만, 그게 딱히 틀린 생각도 아니야. 영준이가 알아 온 정보가 사실이라면 저쪽이 각성자... 뱀파이어를 늘리는 속도는 비정상적이다. 우리는 못 따라가."

"하루에 다섯이 늘어난다고 했죠? 엄청나긴 하네요...."

"리자드들이 멋모르고 부대에 꼬라박아 주던 때가 가장 빠르게 각성자를 늘린 시기였는데. 그때도 하루에 다섯 명씩 각성시키는 건 무리였으니 말입니다."

말이 하루에 다섯이지.

일주일이면 서른이 넘고, 한 달이면 150명.

지금 우리 부대원의 숫자를 채울 수 있다는 것.

"그러면 시간이 지날수록 격차는 벌어지는 거 아닌가요?"

"그대로 두면 결국에는 지금보다 더 답이 없는 지경까지 갈 것 같은데요."

맞는 말이다.

그러니.

"선제공격으로 가야지."

그러기 위해 전차도 얻은 것 아니겠어.

다만.

전차를 획득한 것은 좋지만 그냥 쓰기에는 조금 모자람이 있었다.

전차의 장갑은 두껍긴 하나, 각성자들이나 괴물들 역시 평범한 존재는 아니니까.

충분히 강력한 각성자라면 그 장갑을 파괴하는 것도 가능하겠지.

그 모자람을 공병들의 개조로 메꾸게 될 것이다.

그리고 공병들이 전차를 개조하는 사이.

나머지 부대원들은 뱀파이어 토벌에 필요한 작전 수립에 들어갔다.

"동굴의 입구는?"

"...산맥의 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커다란 바위가 있다. 거기서 길을 벗어나 올라가다 보면...."

"오호. 요새화가 완료됐다고 했지? 외부 초소들 위치도 좀 알려 줄래?"

"좋다.... 여러 곳에 퍼져 있어서 걸어서 접근해 오는 이들이라면 살아남을 수 없는 구조.... 위치는...."

포로로 잡은 뱀파이어 녀석을 [솔직]하게 만들어 준 뒤.

얻은 정보들은 모조리 지도에 기록했다.

나와 병사들은 그 지도를 보며 머리를 맞대고 공략을 위한 작전을 짜내기로 했다.

작전 계획에 들어간 이들은 부대에서도 머리 좋기로 유명한 이들이 대부분이었다만.

거기에 조금 의외였던 인물이 한 명.

"그건 잘못된 생각이다. 이 부분을 공격하려고 한다면 여기가...."

"아. 그렇군요."

병사 중 한 명이 제시한 작전에 누군가가 반대 의견을 표했다.

하지만 반대 의견이라고 한들 거기에 불만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전략 등에 대해서는 문외한인 내가 봐도 충분히 납득갈 정도로 냉철한 지적이었기 때문이다.

그 내용은 정말이지.

전문가라는 느낌이 팍팍 들어서, 본의 아니게 압도될 정도였다만....

문제는.

"이대로 작전을 짰으면 큰일 날 뻔했군요."

"감사합니다. 김 중위님."

그게 바로 김현석 중위.

부대에서는 일 못 하는 것으로 유명하던 그 남자의 입에서 나온 지적이었다는 것.

"감사할 것 없다. 서로 의견을 내고 모자란 부분을 채우기 위해 작전 회의를 하는 거니까."

"...진짜 적응 안 되네."

"음? 영준아. 뭐라고 했니?"

"아무것도 아님다."

김 중위가 각성한 직업은 [최하급 지휘관].

레벨이 꽤 오른 지금은 [하급 지휘관]이다만.

괜히 지휘관이 아니란 걸까.

작전 회의에 참가하는 그에게서는 423대대의 중대장이던 시절의 어벙함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천재적인 전략가처럼 명석하고 냉정한 조언과 지적을 반복하는 모습.

이 작전 회의.

가장 활약하고 있는 것은 누가 봐도 그였다.

'지휘관으로서의 레벨이 올라가서. 진짜 지휘관으로서의 능력도 향상됐다는 건가?'

조금 어이가 없는 모습.

도무지 적응은 되지 않는다만.

'뭐 좋은 게 좋은 건가?'

사이가 안 좋던 것도 예전이고.

지금은 내게 무한한 충성을 보이는 김 중위니까.

그리고.

이 회의에서 가장 활약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을 뽑으라고 한다면.

'그건 바로 나겠지.'

아쉽지만.

전략, 전술하고는 그다지 연이 없는지라.

애초에 내 전공은 지휘가 아니잖냐.

"작전에 대한 부분은 김 중위님에게 일임하겠습니다."

"그래? 그러면 나중에...."

"간식 하나 더 요리해 드리죠."

"고맙다! 영준아!!!"

그러니.

여기는 김 중위에게 맡기고.

나는 내가 잘하는 일에나 집중하기로 했다.

김 중위의 전공이 지휘라면.

내 전공은 뭐니 뭐니해도 요리거든.

'안 그래도 꽤 공들여서 진행하고 있던 일이 있지.'

꽤 예전부터 시도하던 일이다 보니.

이제 슬슬 그쪽은 마무리 단계.

거기에 적이 무려 뱀파이어이다 보니.

생각해 놓은 요리도 있다.

잘 통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지만.

내 노림수가 적중하기만 한다면.

뱀파이어가 수백 마리라.

'경험치 엄청 많이 벌겠네.'

* * *

인제군 북부에 자리잡은 길드.

[강원도 생존자 연합]

그들에게 합류하기 위해 가족들을 이끌고 찾아온 남자가 한 명 있었다.

그리고.

그는 지금 굉장히 불만이 많은 상태였다.

"제기랄."

"진정하십쇼, 형님."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도착한 지가 언젠데. 대체 언제 합류를 시켜 주겠다는 거야."

먼저 도착한 생존자들에게 이야기를 들어보니.

원래도 꽤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고 한다.

이유가 뭔가 하니.

"그 담당자가 바뀌었다는 것 하나 때문에 이렇게 바뀌나."

아무래도.

이전에 스카우트 담당을 하던 남자가 꽤 수완이 좋은 인물이었다는 것 같다.

하지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최근에 그 담당이 바뀌는 일이 발생했다든가.

새롭게 그 자리에 들어온 사람은 영 능력이 떨어지는 듯.

일의 진행이 상당히 지지부진해진 것.

"이해가 안 가네. 일 잘하고 있던 사람은 갑자기 왜 바꾸는 거야?"

"형님. 대규모 그룹이잖습니까, 덩치가 커지니까 실수가 나오는 거 아닐까요."

"제기랄. 차라리 그 군부대라는 곳에 합류했어야 했나."

남자도 한때 군부대에 도움을 청하기 위해 이동했던 적이 있었으나.

오히려 그곳에 자리 잡고 있던 엄청나게 강력한 괴물들에게 죽을 위기만 겪고 끝났었다.

그런 경험이 있다 보니.

살아남은 군부대가 있다는 소문을 들었음에도, 헛소문.

혹은 약탈자로 변질된 탈영병들이 낸 악의적인 소문일 것이라 판단했다.

잘못된 판단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불만을 가진다고 해결되는 게 있는 것도 아니다 보니.

그저 어쩔 수 없이 화를 삭이고 있던 중.

고오오오오오오....

"뭐, 뭐야?"

갑자기.

땅이 흔들리는 것이 느껴졌다.

"지진 아닙니까?"

"아니. 잘 들어 봐. 근처에서 뭔가 소리가 나고 있어."

불만을 가지기는 했으나.

이 근처는 저 [생존자 연합]이라는 곳이 어느 정도 치안을 정리해 둬서, 괴물이나 좀비를 마주치는 일은 적었다.

하지만.

또 아예 없지는 않았다.

'주변을 이동하던 대형 몬스터가 지나가는 건가...?'

혹시 모르는 일.

상대할 수 없는 몬스터라면 피해야 한다는 생각에 남자는 건물에서 뛰쳐나왔다.

그리고.

남자가 마주친 것은 거대한 괴물 따위가 아니었다.

'뭐야. 군인?'

군복을 입은 젊은 남자들이 몇 명.

군인의 모습을 보지 못한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난 지라 생경한 모습에 조금 당황했지만.

사내는 그 두 명에게 소리쳤다.

"당신들은 누구요! 방금 그 소리는 또 뭐고!"

사실.

총을 든 약탈자들이라고 한다면 본래라면 이렇게 당당하게 말을 걸지는 못했겠지.

하지만 이곳은 저 대규모 그룹, [생존자 연합]의 영역.

그들이 치안을 관리하는 만큼, 저들이 사고를 칠 일은 없으리라 믿었다.

그도 그럴 게, [생존자 연합]은 그 인원만 수백 명에 달하는 대규모 집단.

아무리 대단한 이들이라도 그 눈치를 보지 않을 수가 없을 테니까.

그러나.

"누구냐니...."

"이거 뭐라고 대답해 줘야 하냐."

두 명의 군인은 오히려 뭐 그런 걸 물어보냐는 듯한 태도였다.

그때.

큰 소리와 함께.

병사들의 뒤에서 커다란 진동이 느껴졌다.

'제기랄, 괴물인가!?'

긴장한 남자는 무기를 뽑아 들 준비를 했으나.

이내 그 손을 천천히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지진의 정체가 모습을 드러냈으니까.

거대한 무한궤도가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어, 어...?"

도로에 깔려 있던 좀비의 시체를 으스러트리며 나타난 것은.

거대한 전차였다.

기관총을 둘러매고 있던 병사가 자신들의 뒤를 따라오던 전차를 가리키며 말했다.

보면 모르냐는 듯이.

"군인들인데요."

아연해하는 남자를 뒤로하고.

병사들은 전차의 옆에 서서 천천히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뒤로는.

"정말... 군대잖아."

수십 대의 전차와 장갑차, 군용트럭들.

그 옆을 백 명이 넘는 군인들이 뒤따르고 있었다.

78화 뱀파이어 토벌 (2)

"적습이다."

"다들 방어 태세를 갖추도록."

자신들을 감출 생각도 하지 않고 접근해 오는 적들.

뱀파이어들도 그 접근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았다.

'이럴 때를 대비해 방어선은 완전히 구축해 두었다.'

그들의 거점인 벙커는 이미 군사시설로써 그 자체로 안전하지만.

그들은 거기에 더해 벙커의 동굴이 자리한 산 일대를 요새화해 두었다.

"해가 뜨자마자 공격해 온 걸 보면."

"그래. 우리 종족에 대해 눈치챈 게 확실하군."

어떻게 눈치챘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들에 태양에 약하다는 걸 알고 있다는 듯 여명과 함께 쳐들어오기 시작한 적들.

하지만 뱀파이어들은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그 정도도 대비하지 않았을 리가 있나."

벙커에 도달하기까지.

그들이 만들어 놓은 초소와 방어거점이 수십 개나 된다.

각 초소는 벙커에 도착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거쳐야 하는 위치.

모두가 그림자 속에 자리해 뱀파이어들이 낮에도 대부분의 전력을 발휘할 수 있는 공간.

각 초소가 다른 초소들과 연계하여 대처할 수 있기에 공격자들 입장에서는 지옥과도 같겠지.

"각성자가 수천 명이 몰려와도 막아 낼 수 있다."

"군인들이라. 잘 싸우는 동료가 늘어나겠군."

그런 대화를 나누고 있던 뱀파이어들.

그때.

쾅-

갑작스러운 굉음에 놀란 뱀파이어들이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허공에 붉은 궤적을 그리고 있는 무언가가 그들을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어?"

* * *

"적중했습니다!"

"바로 다음으로 간다."

망원경으로 먼 곳을 지켜보던 공병이 소리쳤다.

전차의 곡사포 포격이 적중한 것.

"다음 초소도 발견했습니다. 은인께서 알려 주신 위치 그대로."

"좌표는?"

"위도...."

한 여자가 허공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녀의 눈은 신비한 푸른빛을 내며 반짝이고 있었다.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저격 총을 들고 있는 남자가 허공에 손을 일자로 세우고 눈을 감았다.

잠시 집중하는 듯하던 그가 이내 입을 열었다.

"바람의 강도는...."

포격에 필요한 정보를 몸으로 알려 주는 남자.

근처 일대는 저쪽의 뱀파이어들이 열심히 정리해 준 덕에 괴물들의 씨가 마른 상태였다.

포격음에 몰려드는 적들을 걱정할 필요도 없을 테니 안심하고 말했다.

"포격 개시."

우리가 노획한 전차포의 사정거리는 3km.

전차대대에서 우리를 향해 이루어진 포격의 사정거리는 그 절반도 되지 않았다.

포격에 필요한 유도정보 제공이 없어진 탓이다.

탑승자의 육안에 의존한 포격은 사정거리가 줄어들 수밖에 없는 일이니까.

하지만 우리 손에 들어온 이상 얘기는 달라졌다.

생포한 뱀파이어 녀석에게서 들은 초소의 대략적인 위치.

그걸 더 정확하게 만들어주는 정수아의 정령을 통한 공중 정찰.

거기에, 서수혁의 감각을 키워 얻어 낸 환경 정보까지.

포격에 필요한 정보들은 갖춰졌다.

그 결과.

"적중했습니다!"

부대의 마법사들은 물론.

부대에서 가장 긴 사정거리를 지닌 서수혁조차 따라 할 수 없을 만한 거리.

그런 거리에서 포격을 갈길 수 있게 돼 버린 것.

'각성자들의 힘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현대 화기를 따라잡기에는 이르단 거지.'

물론 나중에는 마법사들이 폭탄보다도 강력한 화력을 직사포 이상의 사정거리로 갈기게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아직은 아니다.

저쪽도 예상해 봐야 각성자의 공격을 예상했겠지.

전차를 끌고 올 거라고는 생각 못 했을걸.

"솔직히. 적들이 세워 뒀다는 방어거점들의 정보를 들었을 땐 꽤 까다로울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만."

"우리 같은 보병들이 직접 들어가면 정말 지옥 같았을거다."

저쪽에는 군사 전문가라도 있는 것일까.

포로를 통해 알아낸 방어시설의 배치는 정말로 까다로운 것이었다.

'전차라도 끌고 오지 않고서야 공략법은 알 수 없다.'

그렇게 말한 포로의 말이 이해가 갈 정도의 방어시설들.

그래서 이렇게.

"전차를 끌고 와 줬지."

그 방어시설들은.

포격에 의해 말 그대로 박살이 나고 있었다.

현대전에서 포격이 맡은 역할 또한 이거다.

적의 방어시설을 미리 파괴하고 적의 병력을 소모시킨다.

'보병은 그 뒤에야 진입하는거지.'

문명이 박살 난 덕에 각성자들 위주의 전투로 바뀐 뒤.

전투전략은 중세, 혹은 고대의 그것에 가까운 형태로 퇴화했었다.

저쪽의 전략 역시 그 수준에 머물러 있겠지만.

"우리 부대는 다시 현대전의 논리로 간다."

군대 간의 전쟁이라면 이쯤에서 저쪽도 대응 사격을 하거나.

혹은 포대를 공략하기 위한 병력을 보내는 게 정상.

하지만 이 사정거리에 대응할 방법은 저쪽에는 없다.

하늘에는 갓 떠오른 태양이 빛나고 있으니.

뱀파이어들을 파견할 수도 없을 터.

초소들이 박살 나는 것을 보며.

저쪽이 할 수 있는 대응은 뭐가 있을까 생각해 봤다.

음.

째려보기 정도는 할 수 있을지도?

"걸릴 건 하나도 없으니, 신나게 쏴 버려!"

"예!"

저들이 자랑스럽게 여기던 요새화.

그 거점들이 신나게 터져 나갔다.

* * *

"제, 제기랄!"

"포격이다! 다들 도망쳐!"

포격에 노출된 뱀파이어들이 당황하며 소리쳤다.

"포격이 직격하기 직전에 안개화 해라! 이곳은 노출된 것 같으니, B-13 거점으로 후퇴한다!!!"

레벨이 10이 넘어 지휘관의 자격을 부여받은 뱀파이어가 책임감을 가지고 말했으나.

"제, 제가 그쪽에서 도망 온 겁니다! B-13 거점은 이미 파괴됐어요!"

"뭐라고...!?"

뱀파이어들의 입장에서는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이들 모두가 얼마 전까지 인간이었다.

문명이 파괴되고 괴물과 좀비가 나타난 뒤.

매일매일 좀비한테 물려 죽지 않을까 공포에 떨었던 이들.

"그러다가 갑자기 전차라니...!"

좀비물에서 전쟁물로.

아예 장르가 달라졌으니 어이가 없을 수밖에.

콰앙!!!

"크윽...!"

그러나 아쉽게도 그것이 현실이었다.

살면서 처음으로 겪어 본 포격.

뱀파이어가 됨으로써 인간을 초월했다고 생각했다.

좀비 따위에 빌빌대야 하는 열등종과는 다른, 상위종으로 거듭났다고.

그러나.

퍼엉!!!

옆에서 일어난 폭발에 형제의 몸이 터져 나간다.

그들이 직접 일궈 낸 자랑스러운 거점들은 속수무책으로 박살 났다.

폭발로 인한 진동으로 인해 땅이 울려 제대로 뛸 수조차 없었다.

뱀파이어로 거듭난 덕에 청력을 잃지는 않았지만, 울려 퍼지는 굉음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영화의 주인공들은 처음 겪는 포격 속에서도 냉정하게 대처하기도 한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이성적인 판단 따위 불가능하게 만드는 환경.

상위종으로 거듭나게 되었다고 생각했던 날 이후로.

뱀파이어들은, 처음 죽음의 공포에 직면했다.

그때.

누군가가 말이 되냐며 소리쳤다.

"제기랄. 저 자식들! 어떻게 거점의 위치를 전부 파악하고 있는 거야!?"

철저하게 만들어진 거점들.

그중에서는 하늘에서 내려다보아도 찾기 힘들 정도로 숨겨진 곳도 많았다.

하지만 쏟아지는 포격은 모두가 정확하게 그들의 거점을 노리고 있었다.

모든 위치를 정확히 파악한 것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

"누가 누설한 건가...?"

"말도 안 되는 소리."

"형제들 모두가 여왕님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바친다. 인간들 따위와는 달라. 배신자가 있을 수가 없지."

"하지만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우리 거점의 위치를 이렇게 다 알고 있을 수가 있냐고!"

주인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바치는 형제들.

그들로서는, 어째서 저들이 자신들의 정보를 속속들이 알고 있는 것인지.

상상할 수도 없었다.

그 형제들 중 한 명이, 맛있는 식사를 마친 후.

지나치게 솔직한 성격이 되어 버렸다든가.

그런 걸 상상할 수 있을 리가 있나.

"제기랄...!"

"지금이 밤이었다면, 저깟 전차 따위."

뱀파이어들은 동 레벨의 평범한 각성자들보다 강력했다.

접근할 수만 있다면, 아무리 단단한 전차라도 파괴할 수 있다는 자신도 있었다.

벙커에는 대전차 무기도 적게나마 구비되어 있었으니 근처에 가기만 하더라도 피해를 줄 수 있었을 테지만.

"개같은 태양."

이제 막 해가 떠오른 시간.

수 킬로 밖에서 포격하는 전차를 향해 접근할 수는 없었다.

모든 뱀파이어들이 혼란에 빠져있던 그때.

그들의 뇌리에 한 여자의 목소리가 퍼져 나갔다.

[다들 동굴로 돌아오렴.]

"여, 여왕님의 명령이다."

"후퇴하라고 말씀하신 건가?"

"하지만. 이렇게 허무하게 거점들을 잃을 수는...."

[이미 요새들의 파괴는 막을 수 없다. 저 인간의 무기도 대단하지만... 가증스러운 태양은 이곳에서도 우리를 방해하는구나.]

안타까움이 묻어 나오는 여왕의 목소리.

그것을 느낀 권속들은 절망에 빠졌다.

그러나.

여왕의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러니. 태양이 없는 곳에서 싸우면 되는 일 아니겠느냐.]

그 말을 듣고서야.

뱀파이어들은 여왕의 명령을 이해할 수 있었다.

"벙커 안에 숨어서 농성하자는 뜻이신가."

"핵 공격에 대비해 만들어진 벙커야. 저쪽이 아무리 전차를 끌고 왔다고 해도 부술 수 없을 거다."

"아무리 그래도. 항공기까지 동원해야 하는 벙커 버스터 같은 게 있지는 않겠지."

벙커에 들어가 농성한다.

그렇게 농성을 하다 보면 시간이 지날 터.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태양이 내려앉고, 밤이 온다.

[태양 아래가 인간들의 영역이라면. 어둠 속은 우리의 영역일지니....]

뱀파이어들은 수치심을 무릅쓰고 후퇴를 선택했다.

지금은 어쩔 수 없이 물러나지만.

밤이 오는 순간.

그들의 사냥이 시작될 것이다.

* * *

"은인께서 예상하셨던 대로네요."

뱀파이어들의 움직임을 관찰하던 정수아가 말했다.

"모두 벙커의 입구가 있다는 곳으로 도망치기 시작했어요."

"뭐. 그럴 것 같았지."

저들이 요새화한 거점들의 방어력이 대단하다느니 했지만.

사실 냉정하게 따져보면.

저들은 딱히 방어전을 하지 않아도 될 만한 전력을 가지고 있었다.

'순수하게 힘 대 힘의 싸움으로 가면, 숫자가 두 배 이상 차이 나는 이상 이기긴 힘들었겠지.'

그럼에도 벙커의 수비에 집중한 이유는 모르겠다.

저곳을 꼭 지켜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던 걸지도.

아무튼.

힘 대 힘으로 맞붙었을 때 저들이 더 강하다고 한다면.

굳이 답도 없는 거점 방어에 아까운 병력을 소모할 필요가 없지.

어떻게든 숨어서 시간을 끌어, 밤이 됐을 때 우리를 치면 그만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너무 뻔하잖아."

저렇게 나올 걸 누가 모르겠냐고.

시끄러운 포격 현장에서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던 것도 좀이 쑤시던 참이었다.

나는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다음 단계로 가자."

"예."

나는 병사들을 이끌고 이동을 개시했다.

목표는 저들이 숨어든 바로 그 벙커.

거리가 꽤 있는 편이긴 했지만, 문제는 없었다.

방어 병력이 죄다 벙커로 후퇴한 상황이니.

우리는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동굴이 있다는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이 바위에서 길을 벗어나 위쪽으로 가다 보면 나온다고 했지?"

"잘도 숨겨 놨군요."

포로 녀석에게서 들었던 정보대로 이동했다.

중간부터는 이미 많은 뱀파이어 녀석들이 벙커 안으로 도망친 덕에, 발자국을 따라 이동하는 것으로도 충분했다.

산속의, 평소라면 절대 왔을 일 없을 장소.

그곳에 커다란 동굴이 있었다.

그 안으로 한참을 진입하자.

"저기 같습니다."

거대한 철제문이 보였다.

문을 발견한 공병 중 한 명이 문에 다가가 손가락으로 문을 살짝 두들겼다.

통통.

"노크한다고 열어 주겠습니까?"

"그런 게 아니라 두께를 확인해 보는 거다."

"아."

"크흠. 엄청나게 두꺼운 것 같습니다."

공병들이 문 근처에 달라붙어 이리저리 관찰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핵폭발에 대비해서 만들어진 벙커 같군요."

"이 정도면 전차포로도 부수기 힘들겠는데요."

그 얘기를 들은 이민재 병장도 나를 보며 물었다.

"전차를 끌고 오고 마법사들까지 동원하면 결국 부술 수 있긴 할 거다. 하지만...."

"엄청 시간이 걸리겠지?"

"그래. 그 전에 밤이 되고 저 녀석들이 뛰쳐나올 거다."

저들이 벙커에서 농성할 것이라는 점은 이미 알고 있던바.

하지만 아는 것과 대처할 수 있는 것은 다르다.

그 단단한 방공호를 어떻게 뚫느냐에 대해, 작전 회의에서도 한참 막혀 있었다.

그때 나온 해결 방법이.

"너만 믿으라고 했지. 자. 그래서 여기까지 왔는데. 이제 어떻게 할 거냐?"

[나를 믿을 것.]

꽤 대책 없는 말 같긴 한데.

정말 대책이 없는 것은 아니고.

"꽤 공들여서 준비한 일이 하나 있거든."

슬쩍 뒤로 이동한 나는 전투 차량의 짐 속에서 한 물건을 꺼냈다.

그 물건을 가지고 오자 다들 의아한 반응을 보였다.

"그건...."

"케이지 아닙니까?"

"맞아."

애완동물을 넣고 이동하는 데에 쓰는 플라스틱 케이지.

그걸 벙커의 철문 앞에 내려놓은 뒤 케이지의 문을 열었다.

나는 케이지의 안에 있는 존재에게 말했다.

"나와. 겁먹지 말고."

"나오라니, 누구한테 하는 말...."

"쉿. 병장님이 뭔가 준비하신 게 있겠지."

여전히 무슨 일인지 몰라 하는 병사들을 뒤로하고.

계속해서 녀석에게 말했다.

"저기 저 철문 보이지? 저거 좀 먹어 주면 안 될까?"

"끼잉...."

"맛없어 보인다고? 음. 내가 만든 요리랑 비교하면 그렇긴 할 텐데.... 그래도 좀 부탁할게. 그동안 맛있는 거 많이 해 줬잖냐."

"끼잉... 낑."

"집 가면 또 요리해 줄 테니까. 응?"

내가 계속해서 애원하자.

그제서야 어쩔 수 없다는 듯.

"낑."

짧은 한숨 소리와 함께 케이지에서 기어 나오는 형체.

그것은 검은색 솜뭉치처럼 생긴 생명체였다.

얼핏 보면 새끼고양이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그, 그건...!"

"신 병장님. 미치셨습니까!?"

"영준아. 괜찮은 거냐."

그 모습을 본 병사 몇 명이 경악하며 소리쳤다.

"괜찮아. 괜찮아."

어느 정도 예상했던 반응이라 대충 넘어가고.

난 케이지 밖으로 나온 녀석을 관찰했다.

내가 부탁한 대로 벙커로 다가가는 녀석.

녀석의 입 부위가 커다랗게 벌어지더니 철문을 향했다.

그러자.

와그작.

핵폭발에도 버티도록 설계된, 터무니없이 두껍고 단단한 벙커의 입구.

그것이 마치 과자처럼 바스러졌다.

내가 노린 대로.

[식재료 감별(강화)]

[이형종 - 강철을 먹는 '맥']

[신선도 - 최상]

[우호도 - 상]

와그작.

와그작.

과자처럼 바스러지는 소리가 나면 날수록.

검은 털 뭉치의 크기는 점점 커지고.

두꺼운 철문에는 구멍이 뚫려 나갔다.

79화 뱀파이어 토벌 (3)

[식재료 감별]

[이형종 - 강철을 먹는 '맥']

[신선도 - 최상]

[우호도 - 상]

[특성 – 광물 지배]

[모든 종류의 광물은 맥에게 있어서 먹잇감에 불과합니다.]

[모든 종류의 광물을 섭취할 수 있습니다.]

[모든 종류의 광물을 강화할 수 있습니다.]

[모든 종류의 광물을 조종할 수 있습니다.]

강철을 먹는 맥.

이 녀석과 조우한 것은 자재를 확보하기 위해 한 창고를 방문했을 때였다.

그곳에 자리 잡고 철물들을 먹으며 살고 있었지.

부대에 최근에야 합류한 이들이나 작전에 참가하지 않았던 이들은 잘 모르겠지만.

이 녀석.

무려 우리 부대가 '전투'를 포기하게 만들었던 괴물이다.

'지상에 내려오고 만난 괴물들 중 아마 독보적으로 강하지 않을까.'

그 외에도 강적이라고 할 만한 존재들이 있기는 했다.

탄약대대를 점거하고 있던 흰거미의 여왕.

약탈자들의 수장이자 식인을 통해 힘을 길렀던 이상식욕자.

하지만 이들은 결국 싸워서 쓰러트릴 수 있었던 반면.

이 녀석은 너무 강한 나머지 전투를 통한 공략은 일찌감치 포기해야만 했지.

'요리를 먹여서 겨우겨우 무력화시켰지.'

평범한 요리는 애초에 음식물로 보지를 않는 녀석.

덕분에 철판을 기름에 튀겨서 요리한다는 이상한 시도를 하게 됐다.

결과는 여러모로 이득이었지만.

그렇게 생포하게 된 몬스터.

자신의 마력으로 철물을 강화해서 몸을 보호하는 식으로 싸우던 괴물.

적당히 철물의 공급을 제한하면 엄청나게 약해진다는 것을 파악한 공병들이 자재의 강화에 쓰기 위해 적당히 사육하고 있었다만.

'좀 신경 쓰이더라고.'

맛없는 식사.

그것을 굶어 죽지만 않을 정도의 적은 양으로 제공받는다.

그러면서 생명만 겨우겨우 유지한 채 우리 길드의 자재들을 강화해야만 했던 녀석.

우리 부대를 위한 일이긴 했지만

'X간의 혐성 소리 들어도 할 말이 없단 말이지.'

그래서 생각했다.

어차피 굶어 죽지 않도록 먹이를 주긴 줘야 하니까.

이왕 주는 거.

맛있게 요리해서 주면 어떨까? 하고.

'어차피 요리를 완성하면 경험치를 주기도 하니까. 철을 요리해서 주기 시작했지.'

별생각 없이 시작했던 일.

하지만 그 짓을 며칠 정도 반복하자.

변화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끼잉....

늘 하던 대로 녀석에게 밥을 주기 위해 문을 연 순간.

털뭉치 같이 생긴 녀석이 내 발에 제 머리를 비비기 시작한 것.

마치 검은색 새끼 고양이 처럼 생긴 외형.

그 모습을 보자, 갓 부대로 전입 왔던 시절 친해졌던 짬타이거 녀석이 생각났다.

그 후로는 맥과 조금씩 친해져 종종 놀아 주기도 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일까.

녀석의 정보를 [식재료 감별(강화)]로 들여다볼 때.

[우호도 - 상]

이런 문구가 같이 나오기 시작했고.

그 결과가 이것.

"고오오오...."

두꺼운 철문을 와삭와삭 갉아 먹더니.

기어코 사람 한두 명은 지나갈 만한 크기의 구멍을 뚫어 버린 녀석.

철을 집어 먹을수록 크기가 커지는가 싶더니.

새끼 고양이 같던 모습에서, 여우 같은 모습으로.

여우 같던 모습에서, 늑대 같은 모습으로 변하더니.

'호랑이.'

지금은 검은색 호랑이와 같은 모습으로 변해 버렸다.

귀엽던 목소리도 상당히 두꺼워진 결과.

묘한 위엄이 느껴질 정도.

철물 창고에 있던 시절에는 거대한 곰처럼 생겼었지.

그때 정도의 덩치는 아니지만, 이 정도만 해도 몬스터로서 꽤 강력할 터.

본래라면 주의해야 할 테지만.

"잘했어, 까망아! 형이 집 가면 또 맛있는 거 해 줄게!"

"고오!"

내가 쓰다듬어 주자 기쁜 듯 더 머리를 비벼 오는 착한 녀석.

덩치가 커져도 친한 건 그대로였다.

소화가 다 되면 또 작아지는데, 나름 둘 다 매력이 있더라고.

"까망이라니."

"안 어울리게 귀여운 이름은 또 뭐랍니까?"

"...예전에 우리 부대 근처에서 활동하던 짬타이거 이름이군."

"이민재 병장님?"

아연해하는 병사들을 향해.

설명을 시작하는 이민재 병장.

"아, 너희는 모르나? 나하고 영준이가 일병이던 시절까지만 해도 식당에 자주 놀러 오던 고양이가 있었거든. 언제부턴가 영역을 옮긴 건지. 모습을 보이지 않더군. 그때는 영준이 녀석이 꽤 서운해했지."

"크흠. 굳이 민망한 얘기를 하나."

아무튼.

나는 까망이 녀석이 뚫어 준 구멍의 안쪽을 바라보았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꽤 넓은 공간이 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넓긴 하지만. 전차를 끌고 들어가기엔 무리겠는데."

이번 전투에서 전차는 포격에만 쓰였지만.

사실 전차의 진정한 효용성은 그 압도적인 물리력에 있다.

방해되는 적들을 죄다 무한궤도로 짓밟아 버리며 적들에게 포격을 날리는 그 단단함.

하지만 이 안으로 전차가 들어가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였다.

결국 각성자 병사들만으로 안쪽에서 전투를 치러야겠지.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거슬리는 게 한 가지.

나와 같이 안쪽을 바라보던 민재 형 역시 그 점을 지적했다.

"어둡군."

"그러네."

멸망의 날 이후로 한 달도 안 돼서 전기는 모두 끊겼다.

우리 부대 역시 밤이 되면 일찌감치 불 끄고 잠자리에 든다.

그나마 있는 기름으로는 괴물의 습격에 대비한 불침번들의 조명 정도.

이만한 벙커라면 자체적인 전력 생산 수단도 있을 법하긴 하다만.

"뱀파이어들이니."

"불을 켤 필요도 없다는 거지."

태양의 아래가 인간의 영역이라면 어둠 속은 저들의 영역.

이대로 들어가는 건 좀 화려한 자살행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겠지.

그러니.

"밥 먹고 합시다."

잠시 동굴을 벗어난 우리는 한 차량 근처에 모였다.

기동형 취사 장비....

즉.

밥차에.

'평범한 버프 정도로는 답도 없겠지.'

능력치를 조금 올리는 수준으로 해결될 환경도 숫자도 아니니까.

토벌에 필요한 최적의 요리를 해내야 할 필요가 있다.

사실 이때를 위해 나름대로 준비한 재료들도 있거든.

뱀파이어 퇴치라고 하면 뭐.

당연히 왕도를 따라 줘야 하지 않겠냐.

[하급 농부의 정성이 담긴 통마늘]

[미약한 마력이 담겨 있다.]

최근에 부대 근처에 정착한 [농부] 각성자.

그에게 부탁해서 확보한 질 좋은 마늘.

'크으윽! 그만둬라!'

포로로 잡았던 뱀파이어 녀석에게 들이밀어 봤더니 아주 질색을 하더라고.

그리고 이게 전부가 아니다.

"말씀하신 대로 어떻게든 만들어 봤습니다만."

내 부탁을 받은 병사 한 명이 다가오며 말했다.

우리 부대의 두 힐러 중 한 명.

군종병이자 [하급 사제] 각성자, 신중수 일병.

그가 내게 물병 하나를 건넸다.

[하급 성수]

[하급 사제의 축복이 밀집된 성수.]

[섭취 시 미세한 체력 회복과 신체 능력 상승 효과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마의 존재들이 끔찍하게 싫어할 것입니다.]

성수.

이걸 만들기 위해 신중수 일병은 며칠을 고생해야 했다던가.

"그렇게 고생했는데도 한 병 정도 분량이 한계더군요. 제 능력이 모자란 탓에.... 죄송합니다."

"미안하긴 뭘. 한 병이 어디냐."

"하지만...."

우려 섞인 표정으로 말하는 신중수 일병.

"저도 부대 생활 꽤 했으니 이제 감이 옵니다. 이걸 그냥 적들한테 부어 버릴 일은 없을 테니. 요리에 쓰려는 거 아닙니까?"

"그렇지."

"하지만. 물 한 병 정도로는 아무리 아껴 봐야 10인분 정도가 한계 아닙니까."

그렇긴 하지.

성수만 그런 것도 아니다.

'이 마늘도. 최대한 빠르게 질 좋은 놈으로 부탁한 덕에 양은 많지 않아.'

이 재료만으로 모든 병사에게 강력한 버프를 주기에는 무리가 있겠지.

"어떻게 할 생각이십니까?"

"아. 알겠다. 신영준 병장님이나 전광일 상병님 같은 강자들한테만 버프를 몰아 주시려는 생각이군요."

"아니. 그걸로는 모자라지."

"예?"

이왕 먹는 거.

메뉴는 통일하는 게 편하지 않겠냐.

의아해하는 병사들을 뒤로하고.

나는 밥차의 가스 불을 켜고 냄비에 성수를 부었다.

성수가 끓는 동안 스테인리스 팬을 불에 달구고 그 위에 [혼재된 마력의 기름]을 부었다.

'마늘이 메인이 되는 요리. 아는 게 많지는 않지만.'

나름 취사병끼리 요리해 먹으면서 후임들에게 알음알음 배운 메뉴들이 많다.

나머지는 뭐.

[중급 요리 숙련]을 믿고 대충 이러면 맛있겠다 싶은 조합으로 때려 박으면 되겠지.

그렇게.

한 차례 요리를 거치자.

[코스 요리가 완성되었습니다.]

[1. 성스러운 기운의 어니언 갈릭 수프.]

[2. 성스러운 기운의 갈릭버터 검은모래 구리.]

[3. 성스러운 기운의 알리오 올리오.]

[4. ....]

그나마 아는 레시피를 쥐어 짜내서 만든 마늘 요리들.

한국인은 또 마늘을 사랑하는 민족 아니겠는가.

조금 과하다 싶을 정도로 있는 마늘을 다 때려 박았다.

성수 역시 마지막 한 방울까지 사용한 결과.

"메뉴가 많긴 한데."

"전부 일곱 개군요."

총 7종의 요리를 완성할 수 있었다.

"...네 요리를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일곱 종류 정도로 괜찮겠냐? 나는 당연히 대량 급식을 할 줄 알았다만."

민재 형이 의아하다는 듯 말했다.

내가 만든 요리들은 모두 자신이 있는 편이긴 하다만.

그래도 나름 급이 존재한다.

1. 특정인을 위해 만든 코스 요리.

2. 코스 요리.

3. 특정인을 위해 만든 요리.

4. 대량 급식.

5. 전투식량.

뭐 이 정도 순서겠지.

하지만 가장 강한 효과를 보여 주는 '특정인을 위해 만든 코스 요리'라고 한들.

대량 급식으로 수백 명에게 먹인 요리만큼의 버프 효율을 보여 주지는 못한다.

얼마 전의 서수혁의 저격 같은 게 필요한 게 아니고서야.

대규모 전투를 앞둔 지금은 대량 급식 쪽이 효율이 좋았겠지.

하지만.

"나름대로 생각해 둔 게 있거든."

최근에 레벨이 올라 [중급 요리사]로 거듭나면서.

새롭게 얻게 된 스킬이 하나 있다.

[오병이어]

[빵 다섯 개와 두 마리 물고기로 수천 명을 먹인 기적의 일화를 아십니까?]

[이제부터. 당신에게는 기적이 아닌 현실입니다.]

[적은 숫자의 요리로 많은 이들을 먹일 수 있게 됩니다.]

[요리를 공유하는 인원이 늘어날수록 마력 소모량이 증가합니다.]

적은 요리를 많은 이들에게 먹일 수 있게 된다라.

어떤 형태로 발동하는 스킬인 것일지 감도 안 잡히지만.

효과 자체는 심플하다.

나는 곧바로 스킬을 사용하기로 했다.

['오병이어'를 사용하시겠습니까?]

[요리 종류 - 코스]

[식수 인원 - 143명]

그러자.

경고음과 함께 추가로 나타나는 메시지.

[주의]

[대상 요리의 질이 너무 높습니다.]

[식수 인원이 너무 많습니다.]

[엄청난 양의 마력 소모가 예상됩니다.]

[스킬을 취소하시겠습니까? Y/N]

엄청난 양의 마력 소모라.

"뭐, 어쩌겠어."

어차피 나는 전투 인원으로서는 그렇게까지 강하지 않다.

내가 마력 탈진으로 인해 기절하는 한이 있더라도.

최대한 강력한 버프를 부대원들에게 돌리는 게 낫지.

결심을 내린 나는 크게 숨을 들이쉰 뒤.

스킬을 사용했다.

[스킬이 발동됩니다.]

[질이 높은 코스 요리입니다. 마력 소모가 극대화됩니다.]

[식수 인원이 지나치게 많습니다. 마력 소모가 극대화됩니다.]

'흡!'

메시지들을 본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산맥에서 내려올 때, '요리사의 특별소스'를 남발한 결과 마력 탈진을 겪어 본 적이 있었다.

그때는 엄청나게 고통스러웠지.

이번에는 그보다도 더한 고통이 예상되는바.

이를 악물고 눈을 질끈 감으며.

고통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

뭔가.

아무렇지도 않았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 눈을 뜨자.

눈앞에 몇 개의 메시지가 떠 있는 것이 보였다.

[조건을 충족하였습니다.]

[한 번의 식사에서, 100인 이상의 인원에게 최고의 정성이 들어간 요리를 제공할 것 (1/1) (달성)]

[조건을 달성함에 따라, 사용자가 지니고 있던 고유 재능이 개화합니다.]

[재능 : 대규모 조리]

어?

* * *

"제기랄...."

"열등종 따위에게 밀려서 도망치게 되다니."

벙커의 깊숙한 곳.

한 줌의 빛도 들어오지 않는 곳에서 뱀파이어들은 분하다는 듯 이야기를 나눴다.

"다들 진정해."

"맞아. 조금만 기다리면. 우리의 시간이 온다."

어둠 속에서 오히려 편안함을 찾는 이들.

벙커 안에서 상처를 치료하고, 체력을 회복하며 시간이 가기만을 기다렸다.

밤이 되는 순간 치러질 사냥에 대비하기 위해서.

"강자의 피는 더 많은 힘을 준다고 했으니...."

"저만한 인간들을 한 번에 사냥한다면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되게 강해질 수 있을 테지."

"오히려 기대되는군."

그때였다.

벙커의 저 멀리에서부터.

쿵 쿵 쿵 쿵 쿵.

무언가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동족의 것은 아니었다.

"설마."

"그 군인들이 쳐들어온 건가?"

"말도 안 돼."

핵폭발에도 버틸 수 있도록 설계된 벙커.

아무리 전차까지 끌고 왔다고 한들.

그런 벙커의 입구를 부술 수 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아니, 백번 양보해서 파괴에 성공했다고 한들.

그런 엄청난 화력에는 그만한 소음이 동반되어야 정상.

"뭘 부수는 소리 따윈 들리지 않았었는데.

"잠깐. 생각해 보니까 저 녀석들. 무슨 특수부대라고 했잖아."

"...벙커의 문을 밖에서 여는 방법 같은 걸 알고 있던 건가?"

추측이 사실이건 아니건.

중요한 것은 저 두꺼운 문을 뚫고 적들이 쳐들어왔다는 것.

당황한 뱀파이어들이 술렁거렸으나.

"진정하라. 형제들이여. 오히려 잘된 일이니."

한 남자가 오히려 미소를 지으며 그들 사이에 나타났다.

양복을 차려입은 중년의 남성.

뒤에는 그의 보좌를 받는 금발의 여자가 무심한 눈빛으로 서 있었다.

"첫 번째 권속이시여."

"여왕이시여...."

그 둘의 존재를 눈치챈 뱀파이어들이 무릎을 꿇으며 예를 표했다.

무릎 꿇은 뱀파이어 중 한 명이 첫 번째 권속이라 불린 중년 남성에게 물었다.

"오히려 잘됐다는 말씀은 무슨 의미인지...."

"생각해 보거라. 우리가 밤을 기다린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주변을 보라는 듯.

양팔을 넓게 펼치며 웅변하는 남자.

"어둠이야말로 바로 우리의 영역이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아!"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벙커의 어둠은 바깥보다도 깊다. 설마 이곳으로 직접 기어들어 와 줄 줄이야. 어지간히 자신이 넘치는 듯한데... 그런 걸 보통 오만이라고 부르지."

남자는 뱀파이어들을 향해 열의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저 오만한 침략자들을 그냥 둬서 되겠는가! 이 어둠 속에서는 총도, 전차도 우리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걸. 저 녀석들에게 보여 주자꾸나!"

"오오...!"

그 말에 용기를 얻은 뱀파이어들이 무기를 들고 일어났다.

직전의 혼란 따위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의 사기.

그 모습을 보며.

여왕은 생각했다.

'그나마 이 녀석이 쓸 만해서 다행이로구나.'

벙커의 관리를 담당하던 남자.

국가의 요원인가 뭔가 하는 이들 중에서도 요직에 있었던 이.

그를 통해 여왕은 이 세상의 지식을 익혔다.

지금의 세력을 갖추게 된 전략도 대부분이 그에게서 비롯된 것.

[강원도 생존자 연합]이라는 길드의 장을 맡고 있는 것 역시 이 남자였다.

그리고 이번에도 역시.

첫 번째 권속이 한 말은 틀리지 않았다.

'이 세상에서는 성기사도 공상의 영역으로 여겨진다 했으니. 어둠 속에서 나와 권속들을 막을 수 있는 존재는... 없다.'

꽤 소란스러웠지만.

이제 금방 정리되겠어.

그리 생각한 여왕은 첫 번째 권속을 바라보며 말했다.

"전투에는 내가 있을 필요도 없겠지?"

"예. 저희들만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럼 나는 방으로 돌아가야겠구나. 평소였으면 자고 있을 시간인데, 너무 오래 깨어 있었어.... 이곳은 너에게 맡기도록 하마."

"물론입니다. 나의 주인이시여."

남자의 정중한 인사를 받으며.

하품과 함께 방으로 돌아가려던 순간.

...멈칫.

그녀가 발걸음을 멈추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주인이시여."

"네놈."

발걸음을 멈춘 여왕이 뒤를 돌아보자.

의아한 듯 묻는 첫 번째 권속.

그리고.

파악!

여왕의 손이.

그의 목을 거칠게 붙잡았다.

"커, 커억...."

"너. 나에게 거짓말을 했구나."

여왕의 말에 첫 번째 권속은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컥. 무, 무슨 소리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전 언제나 여왕님에게 충성을...."

"그래? 그렇다면. 저것은 뭐냐."

그녀의 손이 벙커의 복도 끝을 가리켰다.

어둠만이 존재하는 긴 복도.

그 끝에서는.

쿵 쿵 쿵.

군화의 발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성기사도, 항마승병도, 혈귀 사냥꾼도 없다고 한 네놈이. 어디 직접 설명해 보란 말이다!"

"쿨럭... 그러니까. 저는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저기서 풍기는 저 역겨운 기운!"

복도 끝에서 울려 퍼지는 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복도 끝의 코너에서.

"저 '항마의 기운'은... 성기사들의 그것이 아니더냐!"

"예?"

찬란한 빛이 어둠을 헤치며 벙커를 밝혔다.

제대로 눈을 뜰 수조차 없게 만드는.

신성한 광휘.

그 속에서.

커다란 함성 소리가 터져 나왔다.

"""군단에 영광 있으라!!!"""

80화 뱀파이어 토벌 (4)

[재능 - 대규모 조리]

저 문구를 본 순간.

나는 상태창을 열어 메시지 로그를 거슬러 올라갔다.

본 적이 있는 문구였으니까.

그리고 그게 언제인가 하면.

[각성을 축하드립니다!]

[각성자에게서 고유 재능이 감지되었습니다.]

[재능 : 대규모 조리]

바로 처음 각성했을 때.

"그때 이후로는 뭔가에 영향을 줬다는 메시지도 없어서 아예 까먹고 있었는데."

설마하니 이제 와서 다시 보게 될 줄이야.

메시지를 읽어 보면 아무래도 재능 자체는 내가 타고난 것이지만.

그걸 개화하기에는 조건이 필요했던 것 같은데....

문제는 그 조건이라는 게.

[한 번의 식사에서, 100인 이상의 인원에게 최고의 정성이 들어간 요리를 제공할 것 (1/1) (달성)]

"말이 되냐, 이게?"

군대 밥이 맛이 없는 이유가 뭐냐고 물으면 사람들은 말한다.

재료가 별로라든가.

취사병들의 요리 실력이 별로라든가.

뭐 그런 이유도 없지는 않겠지.

하지만 취사병들 입장에서 나오는 답은 보통 하나로 통일된다.

"2, 300인분의 요리를 3명에서 하는데. 제대로 만들 틈이 어디 있습니까?"

군대에서 식사는 결국 병사들의 영양 보충인바.

무슨 짓을 해도 저만한 양을 소수의 취사병들이 최고의 퀄리티로 만들지는 못하기에.

가장 후 순위로 밀리는 것이 보통 맛이 돼 버리는 것이다.

커다란 솥에다가 재료를 한 번에 때려 박고 볶아 버리는 게 일반적.

심지어 요리사로 각성한 지금도 평상시의 식사는 그런 식으로 만든다.

혼자서 150여 명의 식사를 만들어야 하는데 안 그러면 답이 없잖냐.

내가 요리사로서 힘을 주고 요리할 때는 소수의 부대원을 위해 요리할 때 정도.

그 경우에는 나름 퀄리티에 자신도 있는 편이다만.

저 조건은 그 소수를 위해 만드는 고퀄리티의 요리.

그걸 한 식사에서 100인 이상에게 제공하라는 것.

취사병은 나 한 명인데.

고급 식당에서나 나올 법한 요리 100인분을 혼자 하라고?

'미친. 원래라면 평생 가도 달성 못 할 조건이었잖아?'

최근에 새로 얻게 된 스킬.

[오병이어].

이 스킬을 우연히 얻은 게 아니었다면 절대 달성하지 못했겠지.

적은 요리로도 많은 이들에게 먹일 수 있다는 스킬.

뱀파이어와의 싸움에 대비해서 만든 힘을 팍 준 코스 요리.

그걸 143명에게 한 번에 먹이기 위해 이 스킬을 사용했다.

그게 '143명에게 최고의 정성이 들어간 요리 제공'이라는 행위로 판정된 것이겠지.

다만.

조건이 달성하기 힘든 만큼.

그 조건을 달성하고 얻은 효과는 대단했다.

[개화한 재능 - 대규모 조리]

[각성자 '신영준'의 고유 재능입니다.]

[요리의 속도가 극단적으로 빨라집니다.]

[대규모 식사 요리 시, 품질 저하가 극단적으로 적게 일어납니다.]

[대규모 식사 요리 시, 소모되는 마력량이 극단적으로 줄어듭니다.]

[대규모 식사 요리를 완성했을 시, 보너스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그 외에도 대규모 식사에 관련된 대부분의 행위에 보너스가 부여됩니다.]

그 효과 문구 중 내가 특히 놀란 것은 한 단어.

'시스템이 표현하는 문구 중에서. 극단적이라는 표현은 처음 보는군.'

소폭 상승, 그냥 상승, 대폭 상승, 아주 많이 상승 등.

그 정도까지는 그래도 본 적이 있다만.

극단적이라는 문구는 또 처음.

코스 요리 하나를 143배로 불렸음에도 마력 탈진을 겪지 않은 이유 역시 이 재능의 개화 덕분인 것 같다.

정말 마력 소모를 극단적으로 줄여 준 거겠지.

무서운 점은....

'마력 탈진까지는 가지 않았지만. 마력량이 한 번에 반 이상 줄어들었다.'

극단적으로 마력 소모를 줄여 줬음에도 이 정도.

...이거.

재능 개화가 없었으면, 마력 탈진이고 뭐고.

그냥 죽지 않았을까?

'크흠. 너무 효율만 추구했나.'

하긴.

요리 하나로 143배의 효과를 보려고 했으니.

진짜 잘못하면 대가로 목숨까지 지불해야 할 뻔했다.

하지만 이 세상은 게임의 룰을 따르는바.

많은 대가를 지불하는 행위에는, 그에 상응하는 효과가 뒤따른다.

"식사 맛있게 하십쇼!"

143인의 군단원들.

그들의 앞에 내 정성이 들어간 [코스 요리]가 차려졌다.

마늘과 성수를 위주로 만든 요리.

그 코스 요리가 보여 주는 효과라면 뻔하지.

[코스 요리 - 항마의 빛]

[섭취한 이들의 능력치가 대폭 상승합니다.]

[마(魔)에 속하는 존재를 상대로 한 전투에서 큰 보너스를 획득합니다.]

"눈부셔."

"이 엄청난 빛은, 대체...!"

병사들의 등에 새하얀 빛이 떠올랐다.

한 명, 한 명의 후광은 그렇게 크지 않았다.

하지만.

100명이 넘는 인원.

거기에.

[군단의 기운]

[같은 기운을 지닌 이들이 일정 이상 모여 있을 시, 시너지 효과가 발휘됩니다.]

던전 공략으로 얻은 길드 스킬로 인해 그 빛은 더 강해졌다.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던 동굴이 찬란한 백색 빛으로 둘러싸였다.

* * *

"오병이어의 기적에, 이 빛까지."

"맹인을 눈 뜨게 했다는 얘기만 들었을 때는. 솔직히 믿기지 않았지만."

"이 정도면... 의심할 여지가 없군."

"정수아 씨가 말했던 게 맞았어."

* * *

찬란한 빛을 등진 군단의 병사들이 벙커 안으로 몰아친다.

"군단에 영광 있으라!!!"

"승리를 위하여!!!"

안쪽의 뱀파이어들을 가장 먼저 발견한 전사들이 소리쳤다.

광일이 녀석을 비롯한 전사조의 함성에 벙커가 진동했다.

"크악...."

"이 빛은 대체 무슨!?"

"당황하지 마라! 숫자는 우리가 우위다!"

어둠 속이라는 이점은 이미 사라진 것과 마찬가지.

갑작스러운 빛에 직면한 뱀파이어들이 당황하며 우리 병사들을 맞이했다.

곧, 전투가 시작되었다.

저쪽의 지휘관 같은 남자가 말한 대로.

숫자는 저쪽이 두 배 이상 앞선다.

게다가 이번 전투는 저쪽이 수비 측.

벙커의 지형을 잘 모르는 우리와 달리, 벙커 곳곳의 공간을 활용해 가며 우리를 공격해 왔다.

하지만.

그럼에도.

"몰아붙여라!"

"박쥐 새끼들. 다 죽여 버려!"

전황은.

압도적으로 우리 측의 우세.

전투 중에 벙커 곳곳의 벽면이 파괴되고.

각종 장치들이 박살 났다.

그리고.

"고오오오...!"

그렇게 박살 난 철과 돌, 각종 자재들이.

까망이의 몸 주위로 몰려들었다.

전성기와는 비교도 안 되게 작아진 모습.

항마의 빛을 두른 병사들과 달리, 까망이에게는 내 요리로 인한 버프도 없었지만.

"컥!"

"인간뿐이라고 생각했는데. 뭐냐 이 괴물은...!"

"방금까지만 해도 평범한 철판이었는데. 뭐가 이렇게 단단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자서 열 마리 이상의 뱀파이어들을 상대로 압도하고 있는 녀석.

몰려든 녀석들이 까망이의 장갑을 두들겼지만 흠집조차 잘 나지 않았다.

어쩌다가 장갑 중 하나가 파괴되어도 주변에서 다른 철판을 끌어와 빈공간을 메꾸기까지 하니.

'진짜 엄청 세네.'

도망치는 적을 굳이 쫓지 않는 성격이라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녀석과 조우한 날이 우리 부대의 제삿날이었을지도.

어찌 됐든.

전황은 우리 쪽이 압도적으로 유리.

이대로만 간다면 두 배 이상이라는 전력 차도 무색하게 전멸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

"이 박쥐 새끼들아! 인간님의 힘을 봐라!"

"그래? 어디 한번 보여 주거라."

"억!?"

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오는가 싶더니.

병사 한 명의 몸이 허공에 떠올랐다.

그러고는.

"크아아아악!"

"성철 아재!?"

병사의 몸이 허공에서 찢겨 나갔다.

그의 피가 뱀파이어들 사이에 뿌려졌다.

성철 아재는 약탈자들한테 포로로 잡혀 있다가 합류해 얼마 전에야 각성한 사내였다.

하지만 우리 길드의 장비와 버프를 모조리 받은 지금은 결코 약하지 않을 텐데.

"쯧. 피 맛이 역하구나. 없는 것보단 낫겠지만."

죽은 병사의 피를 뒤집어쓴 채 걸어 나오는 여자.

금발에 적안.

우연히 이 근처에 있던 외국인... 같은 건 아닐 테지.

포로로 잡았던 뱀파이어 녀석의 말을 떠올렸다.

[우리의 지배자는 여왕님.... 인간 출신인 우리와는 태생부터가 다른 귀족이시지.]

"신 병장님. 저 녀석. 제가 봤을 땐...."

"내 생각도 비슷할걸."

저게 바로 뱀파이어들의 수장.

근처 일대의 생존자들을 집어삼키고 권속으로 삼은 몬스터.

'...길드에 합류한 병사가 죽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부대에서부터 함께했던 병사는 아니지만.

앞으로 함께하게 된 사람이 죽었다.

부대의 첫 사망자.

가급적 사망자를 만들지 않도록 하겠다는 다짐을 한 게 얼마 전 같은데.

내가 손을 쓴 틈도 없이 죽어 버렸다.

이건 좀.

열받는데?

"광일아."

"예. 상병 전광일."

"보스몹 떴다. 어떻게 해야 할지는 알지?"

"예."

고개를 끄덕이는 녀석의 입에서.

'그르륵' 하는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크라아아아악!!!"

쿵!!!

광기를 최대한으로 해방시킨 전광일의 주먹이 뱀파이어 여왕을 향했다.

괜히 보스가 아니란 걸까.

가까스로 공격을 피한 여왕이었지만.

"...역시 전사 계급이라는 건가. 봐 줄 만한 힘이긴 하구나."

그 공격을 본 여왕이 식은땀을 흘리려 하는 것이 보였다.

직격했다면 분명 치명타였겠지.

"전광일 상병님에게 가세한다!"

"레벨 순으로 붙어!"

자기가 좀 강한 줄 아나 본데.

이미 전황은 우리 쪽에 압도적으로 굴러가고 있는 상황.

"큭...! 가증스러운 성기사들 같으니!"

고작 괴물 한 마리가 가세한다고 어떻게 될 정도가 아니거든.

각 부서에서도 높은 레벨을 자랑하는 정예병들이 전담 마크에 들어가자 속수무책으로 밀려나는 녀석.

그렇게 위기에 몰렸을 때.

콱!

녀석의 손길이 부대원 중 한 명의 목덜미를 붙잡았다.

또 한 명이 죽는 건가 했으나.

여왕의 목표는 그게 아니었다.

그녀의 붉은 눈동자가 묘한 빛을 내며 병사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나에게 복종하거라."

"...예."

"병민아!?"

그러자 고개를 끄덕이는 병사.

미친.

전차대대의 눈깔 괴물하고 비슷한 능력인 건가!?

병사를 붙잡은 여왕이 말했다.

"질문에 답하거라. 너희들 중 가장 강한 자가 누구냐?"

여왕의 질문에.

내가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전광일 상병이었다.

'광일이를 노리려는 건가!?'

실제로.

여왕을 상대로 엄청난 전투 능력을 보여 주며 치고 있던 녀석.

우리 부대의 최강자를 꼽으라고 한다면, 십중팔구는 전광일 상병을 언급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그건 나만의 생각이었던 듯.

"저, 저분이십니다...."

여왕의 손에 붙잡힌 이병민 이병.

그 손가락이 가리키는 것은....

'...나 같은데?'

뭐야.

왜 나야.

"저 녀석이? 그렇게 강해 보이지는 않는다만.... 설마, 매료가 통하지 않은 건 아니겠지?"

"그렇게 보이긴 하겠죠. 하지만, 신 병장님의 힘은 겉으로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닙니다...."

"음? 더 말해 보거라."

"신 병장님은 각성을 하기도 전에 식칼 한 자루만으로 괴물을 참살하셨습니다...."

그건.

아니 뭐.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전차대대 탈환전 때 흰거미들의 여왕을 마무리한 것도, 약탈자들을 지배하던 살덩어리 괴물을 처리한 것도 신 병장님...."

"흐음!"

"심지어는 단신으로 던전의 심부로 걸어 들어가 아무렇지 않게 보스를 참살하고 돌아오시기도 하셨죠."

"호오. 그건 대단하군."

"강자로 소문난 전광일 상병님조차 자기는 상대도 되지 않는다고 자주 말할 정도니, 부대의 누구도 이견이 없을 터...."

"과연."

저 녀석이 그 정도의 강자였을 줄은 몰랐다는 듯.

"겉보기로는 몰랐는데. 상당히 위대한 전사인 듯하구나."

흥미롭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여왕.

아니.

오해를 하게 된 이유도 대충 알겠는데.

"그렇다면. 저자를 제거하면 너희의 전력은 크게 줄어든다고 봐도 되겠지?"

"그 정도가 아닙니다.... 우리 부대의 전력은 신 병장님의 버프가 7할 이상. 신 병장님이 사라진다면. 우리 부대는 이 세상에서 버틸 수 없을 정도로 약화될 겁니다...."

"하하하하! 과연 그러하구나!"

나를 그렇게 높게 평가해 주는 건.

그야 고맙긴 한데...!

"좋은 답변이었다."

팍!

붙잡혔던 병사의 몸이 멀리 내던져졌다.

다행히 죽지는 않은 듯하지만.

"네놈만 없어지면, 나머지는 내 권속들만으로 충분히 정리 가능하다는 뜻이렷다."

문제는 나.

나를 보고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여왕.

그녀가 나를 향해 손가락을 가리키자.

그 손가락에 검은 그림자가 모여들기 시작했다.

"...아니. 그건 저 녀석이 오해하는-."

"같이 가자꾸나."

그녀의 몸 주위를 맴돌던 어두운 기운이 한곳에 뭉쳐, 나를 향해 날아들었다.

"제기랄!"

황급히 방어 자세를 취하고 몸을 피했으나.

유도성능이라도 있는 건지 뭔지.

나를 계속해서 쫓아 오는 그림자.

"신 병장님!"

"신 병장님을 지켜라!"

병사들이 호들갑을 떨며 나를 지키기 위해 달려왔지만.

아쉽게도 조금 늦었다.

톡.

검은 그림자가 내 몸 끝에 닿은 순간.

훅, 하고.

나를 지키기 위해 달려들던 병사들의 모습이, 사라져 버렸다.

* * *

아니.

병사들이 사라진 게 아닌가.

'사라진 쪽은... 굳이 따지면 나겠지.'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가 서 있는 곳은 어두운 벙커가 아니였다.

하늘을 올려다보자.

피를 연상 시키는, 새빨간 하늘이 보였다.

현실에서는 볼 수 없는 비현실적인 모습.

"죽은 건가."

여왕의 공격이 몸에 닿자마자 도착한 장소다.

분명 지옥이라고 불리는 곳이겠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을 때.

"내 영역에 온 것을 환영하마. 인간아."

갑자기 내 눈 앞에 나타난 한 형체.

여왕이 나를 반기며 말했다.

"영광으로 알거라. 이 공간에 남을 초대한 적은 네가 처음이니."

아.

제기랄.

'지옥이 아닌 건 다행이긴 한데.'

잘은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상당히 귀찮은 상황에 처해 버린 것 같다.

81화 뱀파이어 여왕

"신 병장님!"

전광일 상병의 손이 공격을 피해 도망가고 있는 신영준 병장을 향했다.

하지만 검은 그림자가 신 병장의 발끝에 닿은 순간.

슈욱.

"...맙소사."

마치 처음부터 거기에 없었다는 듯.

신영준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병장님이...."

"신 병장님이 사라지셨다!"

"저 개자식들이...!"

신영준의 모습이 사라지자 군단의 병사들 사이에 혼란이 퍼져 나갔다.

길드, [강철 군단]의 군단장.

단순히 길드장 역할이 전부가 아니다.

지금 그들이 수적으로 우위인 뱀파이어들을 압도하게 만들어 준 이 빛.

그것부터가 신영준 병장이 만들어 낸 게 아니던가.

'군단 전력의 7할'이라는 말도 과장이 아니었다.

군단에 위기가 찾아올 때마다 신들린 임기응변으로 모든 일을 해결해 낸 인물.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대부분의 군단원이 그에게서 은혜를 느끼고 있었다.

"여왕님께서 적들의 수괴를 데리고 가신 건가."

"잘은 모르겠지만. 그 수괴가 저들 전력의 대부분이었다는 것 같은데."

그렇게 당황한 군단원들과 달리.

뱀파이어들은 오히려 기세가 오르기 시작했다.

"큭큭. 수괴를 잃은 저 녀석들의 전력은 반 이하로 떨어졌다는 거군."

"잘도 형제들을 죽여 줬구나."

"열등종들아. 이제부터는 우리가...."

무기를 쥐고 다가오는 뱀파이어들.

하지만 그들이 한 가지 착각하고 있는 게 있었다.

"이 새끼들이...."

신영준 병장이 전력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버프는 요리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

한번 먹은 요리는 요리사인 신영준이 사라지든 말든 유지된다.

그리고.

신영준 병장에게 은혜를 느끼고 있던 이들.

그들의 분노가 향할 곳은.

지금 같은 경우에는 단 하나.

"감히 신 병장님을...."

"쉽게 죽지는 못할 거다."

안 그래도 군단 측이 우위였던 전황.

그나마 많은 정예병을 혼자 상대한 여왕은 신영준과 마찬가지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즉.

"크아아악...!"

"뭐, 뭐냐. 이 자식들!"

"전력의 7할이 사라질 거라더니. 전혀 아니잖아!"

분노한 군단원들이 무기를 휘둘렀다.

"죽여라!"

"신 병장님의 원수를 척살하라!!!"

"쉽게 죽여선 안 된다! 최대한 고통스럽게...!"

분노로 인한 광기에 휩싸인 병사들.

뱀파이어들과의 전투는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다.

"커, 커허...."

"네놈이 마지막이군."

전광일의 피 묻은 글러브가 마지막 뱀파이어의 머리를 붙잡고 들어 올렸다.

"사, 살려...."

콰직.

그의 한쪽 손이 뱀파이어의 심장을 뽑아내 터트려 버렸다.

전투는 승리로 끝났지만.

기뻐하는 사람은 없었다.

"신 병장님...."

"제기랄."

산맥에서 내려온 뒤로 겪은 가장 큰 규모의 전투.

전황 자체는 군단이 우위였으나.

사망자는 나올 수밖에 없었다.

지상에서 처음으로 생긴 사망자.

"...하필 그중에 신 병장님이 포함되다니."

"우린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병사들의 얼굴에 절망이 내려앉았다.

병력을 수습하고 복귀하는 건 어렵지 않다.

다른 조장 중 누군가가 길드장을 이어받는다면, 길드 자체도 유지는 되겠지.

하지만 신영준이란 인간.

그리고 그가 만든 요리는 군단 전력의 핵심이었다.

그가 사라진 이상.

뱀파이어들과 비슷한, 아니 그보다 못한 세력이라도 조우하는 순간.

군단은 전멸의 위기를 맞게 되겠지.

"크흡."

"X발...."

대부분의 병사가 그 사실에 절망하고.

신영준이 사라졌다는 것 자체에 슬퍼하고 있을 때.

"다들 쓸데없는 일에 마음을 쓰시는군요."

누군가가 그 분위기에 초를 치는 말을 꺼냈다.

최근에 합류하게 된 생존자 출신의 병사.

정수아.

"...그게 무슨 소립니까."

병사들이 그녀를 향해 적의를 보냈다.

이상아 조장이 그녀를 째려보며 말했다.

"당신. 평생 맹인으로 살게 될 뻔했다고 들었는데요."

"맞아요."

"그걸 신영준 씨... 군단장님이 구해 줬다고 했죠."

"그것도 맞습니다."

"...그런 당신이. 어떻게 그렇게 가볍게 말을 할 수 있는 거죠? 은혜란 걸 조금이라도 안다면...!"

당당한 태도에 병사들의 분노가 폭발하려던 순간.

"그러니까.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말라는 거예요."

정수아는 오히려 온화한 표정으로 말했다.

"은인께서 이런 일로 죽으실 리가 없잖습니까."

"...뭐?"

"맹인이었던 제 눈을 뜨게 해 주신 분이에요."

무언가 벅차오르는 게 있는 듯.

두 팔을 넓게 펼치는 정수아.

"단 일곱 그릇의 요리로 수백 명의 사람을 배불리 먹이고, 그 은혜 아래에 싸우는 병사들은 마를 척결하는 신성한 빛을 둘렀죠. 그야말로 기적. 이게 무슨 의미인지, 진정 모르겠나요?"

"...?"

"그분이야말로, 혼란한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내려오신 메시아라는 뜻입니다."

그제서야.

"쯧."

그녀가 하려는 말을 파악한 사람들이 인상을 찌푸렸다.

"하. 저런 사람 꼭 있었지."

"멸망의 날 이후로 이상한 종교관에 사로잡힌 사람들...."

"이 부대에 합류하고는 못 봤는데. 숨어 있었던 것뿐인가 보군."

하루아침에 문명이 부서지고, 사람들은 많은 소중한 것을 잃어야만 했다.

그렇게 상처받은 마음.

그 치유법을 종교에서 찾으려는 이들이 있었다.

"구원자니 뭐니...."

"그런 얘기를 하는 사이비가 어디 한둘이었나."

지상에서 생존 투쟁을 벌여 온 이들은 이미 사이비들에게 진저리를 치고 있었다.

"군단장님은 죽었소. 우리도 슬프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수아 양도 가슴이 아프겠지만... 받아들여야 하오."

"여유롭게 추모할 틈도 없는데. 헛소리나 하고 있어. 짜증 나게...."

아무도 그녀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글쎄요. 제가 옳은지 여러분들이 옳은지는 어차피 조만간 알게 되겠죠."

"자꾸 뭔 개소리야."

"제가 예언 하나 할까요?"

좋지 않은 분위기 따위는 개의치 않고 말을 잇는 정수아.

"그분께서는 곧 아무렇지 않다는 듯 돌아오실 거예요. 죽은 지 사흘 만에 돌아온 예수처럼. 죽음 따위 극복하고 돌아오실 터."

"야, 야. 누가 저 사람 입 좀 닫게 해라."

"여러분들은 그때 가서야 제 말이 옳았다는 걸 깨닫게 될...."

병사 중 한 명의 그녀의 입을 막기 위해 다가가던.

그 순간이었다.

지지지직—

허공에 검은색 선이 생기는가 싶더니.

그 선이 구멍으로 변하고, 곧.

두 개의 형체를 뱉어 냈다.

그 모습을 본 정수아가 두 손을 맞잡으며 말했다.

"아아. 보십시오."

"어, 어어?"

"제 말이 옳았습니다. 아니. 저조차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두 개의 형체.

그중 하나는 방금까지 죽었다고 생각했던 신영준 병장이었다.

그리고 그런 신영준 병장의 손에 붙잡힌 채 기절해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죽음을 극복하시는 걸로 모자라, 마의 수장마저 굴복시키고 돌아오실 줄이야...!"

뱀파이어들의 여왕이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병사들은 혼란에 빠졌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군 생활...."

죽음에서 생환한 신영준 병장은 뒤통수를 긁적이더니.

구석에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개빡세네."

죽음을 극복하고 돌아온 사람이 한 것치고는.

꽤 생생한 말이었다.

* * *

"내 영역에 온 것을 환영하마. 인간아."

여왕이 쏘아 낸 검은 그림자 같은 것에 직격당한 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무것도 없는 검은 공간에 있었다.

'지옥은 아니란 건가.'

처음엔 지옥에 도착한 건가 했는데.

아무래도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저기 선 여왕이 나를 반기고 있었으니까.

"영광으로 알 거라. 이 공간에 남을 초대한 것은 네가 처음이니."

"아. 제기랄."

"후후. 말투가 제법 거칠구나."

슬쩍 하늘을 바라보며 [식재료 감별]을 사용했다.

말이 식재료 감별이지.

모든 것을 감별할 수 있는 특성으로 변한 바.

[그림자의 장막]

[신선도 - 최상]

[밤의 귀족들만이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개인공간입니다.]

[현실과는 괴리된, 심상 속에 존재하는 세계입니다.]

[뚜렷한 실체가 없는 공간으로써, 구성원들의 심상을 그대로 반영합니다.]

이 공간의 정체도 대충은 알 수 있었다.

'심상 속의 세계라.'

결계나, 아공간.

뭐 그런 거겠지.

하늘을 올려다보니, 온 세상이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으며.

내가 밟고 서 있는 곳은, 정체불명의 거대한 회색빛 성채였다.

'이건 설마. 뱀파이어의 성체라는건가.'

아무리 심상 속의 세계라고는 하나.

지나칠 정도로 거대하고 웅장한 성채였다.

'솔직히 조금 주눅드는데.'

주변을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위압감에 짓눌려질 정도.

아무리 심상 속의 세계라고 해도 그렇지.

이만한 성채를 보고도 멀쩡하게 굴기는 조금 힘들었다.

'아까 그 그림자는... 단순한 공격용은 아니였다는거군.'

그보다는.

나를 이 장소로 끌어들이기 위한 스킬 같은 것일 확률이 높다.

이 공간으로 날 끌어들인 이유는....

뭐, 뻔한가?

'가장 중요한 전력을 1:1로 제거해 버리겠다. 뭐 그런 거겠지.'

대충 상황 파악은 이 정도면 끝난 것 같고.

나는 최대한 머리를 굴려 지금의 상황을 냉정하게 판단하기로 했다.

그 결과.

나온 결론은 하나.

'X됐다.'

그것도.

아주 철저하게.

'제대로 X됐다.'

뱀파이어의 여왕이 나를 보며 말했다.

"아까 내가 사로잡았던 그 전사의 말에 의하면. 네놈만 없으면 성기사들의 전력은 급감한다지."

"...."

"네놈을 떼어 내는 데 성공했으니. 바깥은 지금쯤 내 권속들에 의한 사냥이 한참 진행되고 있을 게다."

붙잡힌 병사.

이병민 이병이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다.

우리 부대원들이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뱀파이어들을 이겨 낼 수 있었던 것?

겸손 떨 일도 아니고.

'내 힘이 맞긴 해.'

하지만.

'요리는 이미 먹여 놓은 상태니까. 내가 없어진다고 버프가 끊기진 않을 텐데?'

아무래도 이 여왕.

뭔가를 단단히 착각한 모양이다.

나를 제거하면 당장 군단원들의 전력이 급감하게 될 것이라고.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데 말이지.

'그래도 다행이다.'

아무래도 바깥의 병사들을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걱정 해야 하는게 있다면 그건 아마도 나.

내 눈앞에 있는 것은 뱀파이어들의 보스.

저 녀석하고 일대일로 싸우라고?

여긴 요리 재료도 없는데?

'못 이기잖아. 이거.'

너무나도 당연한 결론에 인상을 찌푸리자.

여왕이 내 표정을 보고 말했다.

"바깥의 인간들이 걱정되는 게냐? 후후. 이해는 한다만, 네 걱정을 먼저 해야 할 게다."

굳이 말해 주지 않아도 바깥 걱정은 없네요.

내 걱정은 절찬리에 하는 중이고.

'...바깥의 전투는 우리 길드가 이길 거야.'

그렇다면.

어떻게든 시간을 끌다 보면, 바깥의 병사들이 나를 구출해 줄 수 있지 않을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것 말고는 답이 없는 상황.

각오를 다진 나는 칼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질 때 지더라도 쉽게 질 생각은 없다.

이래 봬도 스탯은 높은 편이니.

방어에 집중해서 시간을 끈다면 충분히-.

"무서운 표정을 하기는."

그러나.

당연히 날 제거하려 들 것이라 생각했던 여왕은 오히려 여유롭게 웃으며 말했다.

"얼굴 좀 풀 거라. 굳이 날 선 태도를 보일 필요는 없으니."

"...뭐?"

"잠깐 앉아서 얘기나 좀 하지."

그녀가 손을 한 번 허공에 휘두르자.

이 공간의 어둠이 일렁이는가 싶더니 검은색 의자 하나가 만들어졌다.

뭐야 이건.

"무슨 생각이지?"

"말 그대로니라. 싸우는 것도 좋지만, 그 전에 잠깐 얘기 정도는 나눠도 되지 않겠느냐?"

자신의 의자를 만든 그녀 역시 그 위에 앉으며 말했다.

아름다운 금발 여인이 같이 얘기나 하자고 권유해 주는 상황.

뭐 기뻐할 사람들도 많겠지만 말이지.

'예쁜 여자가 말을 걸면 십중팔구는 종교 권유... 나머지 한둘은 다단계 제안인 인생이었거든.'

이럴 때 나는 의심부터 하고 보는 스타일이거든.

그녀를 바라보며 특성을 발동했다.

[식재료 감별(강화)]

[영장류 - 인간종(뱀파이어)]

[신선도 - 최상]

다른 건 필요 없고.

중요한 것은 스킬과 특성.

그중에 신경 쓰이는 게 하나 있었다.

[특성 - 매료]

"나도 그 매료라는 걸로 조종할 셈인가?"

"음? 내 능력을 알고 있나 보구나. 하긴. 성기사들의 수장이라면 당연한가...."

성기사는 또 뭐야.

"걱정하지 말거라. 어차피 너 같은 강자마저 조종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한 힘은 아니니."

"...."

"어차피 이곳에 들어온 이상. 너나 나나 둘 중 한 명이 죽기 전까진 떠나지 못한다. 그러니 잠깐만 얘기를 나누자는 것인데, 그리 믿기 힘든 게냐?"

시간 끌기 같은 건가?

그러고 보니, 이 녀석은 바깥의 병사들이 뱀파이어들에게 사냥당하고 있는 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반대일 가능성이 커. 시간을 끄는 건 오히려 내게도 이득이다.'

한숨을 내쉰 나는 의자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처음으로 만난, 의사소통이 가능한 몬스터.

안 그래도 궁금한 게 있긴 했거든.

"너희들은. 대체 뭐지?"

"무슨 의미지? 내 종족에 대해 궁금한 것이냐?"

"지구에서 나고 자란 존재는 아닐 텐데. 왜 우리 세계를 침공해 왔냐는 거다."

"아아, 그런 의미였나."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모른다."

산뜻하기까지 한 가벼운 대답.

이 자식이.

"대화를 나누자고 한 건 그쪽이다만."

"진심으로 한 대답이다. 나 역시, 내가 왜 이곳에 있는 건지 알 수가 없거든."

"...?"

아무래도 거짓이 아닌 듯.

꽤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잇는 그녀.

"내 기억이 확실하다면. 나는 관 속에 봉인당한 상태였다."

"봉인...?"

"영원한 시간을 관 안에서 지내야만 하는, 가증스러운 성기사들의 비술이지. 해제 따위 불가능한, 죽음이나 다름없는 형벌. 자신들의 적에게는 죽음조차 자비라고 여기는 광신도들의 수법이다."

말하던 그녀가 인상을 찌푸렸다.

자기도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

"하지만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보니 봉인은 온데간데없더구나.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 동굴 안에, 봉인의 힘이 사라진 관과 함께 이동되어 있었지. 머릿속에는 정체 모를 명령 같은 게 심어져 있질 않나."

"의도를 가지고 침략한 게 아니라는 건가?"

"이런 세상이 존재하는 줄도 몰랐는데, 침공이라니? 웃기지도 않는 말이지."

괴물들이 이계에서 온 존재라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의도를 가지고 침략한 게 아니면 대체.

"그럼. 왜 인간을 공격하는 거지?"

"왜냐니.... 이상한 것을 묻는군."

왜 그런 걸 묻냐는 듯 어이없어하며 대답하는 그녀.

"살아남기 위함이다."

"...?"

"갑작스레 전혀 모르는 세상에 떨어진 게다. 내 몸을 지킬 만한 수단을 하나도 가지지 못한 채로 말이지.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머릿속에는 이상한 명령까지 심어져 있으니... 저항해 볼 수밖에 없지 않느냐."

살아남기 위함이라니.

우리랑 똑같잖아.

"나는 밤의 귀족이니라. 많은 피를 섭취할수록. 더 많은 권속을 휘하에 둘수록 내 힘을 키울 수 있지."

"...."

"그렇게 힘을 키우다 보면 언젠가는 사냥당할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힘을 얻을 수 있을 터."

작은 목소리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말하는 여왕.

"이 짜증 나는 상념 역시. 언젠가는...."

생각지도 못했던 이유에 당황하는 사이.

"질문에 대한 답은 이 정도면 충분했을 듯하니. 이번엔 내 차례인가?"

"아니, 그 상념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어허. 이번엔 내 차례니라."

묻고 싶은 게 더 많았으나.

이번엔 그녀가 내게 질문을 해 왔다.

"내 권속이 될 생각은 없느냐?"

정확히는.

질문이 아닌 권유.

"네 생각보다 나쁘지 않을 게다. 실제로 내 부하들을 보아라. 다른 괴물들한테 사냥당했을 운명의 약자들. 하지만 내 권속이 됨으로써, 그들은 오히려 사냥하는 쪽이 되었지."

"그 사람들이 그렇게 되길 바란 건 아닐 텐데."

"의사를 확인한 건 네가 처음이긴 하구나.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내 권속이 되지 않았다면 그들 중 대부분은 지금쯤 시체가 되었을 거라는 점이겠지."

자신은 떳떳하다는 듯.

팔짱까지 끼며 말하는 그녀.

"저들의 목숨을 살린 것은 나라는 얘기다. 네놈들의 입장에서 말하면, 수백 명의 목숨을 구한 셈이지."

"...."

"넌 전사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자라고 했지. 내 권속으로 들어온다면 지금보다 더 강한 힘을 얻을 수 있을 거다. 지금까지 가장 총애하던 권속이 따로 있었지만. 그 녀석은 내 신임을 잃었다."

그러더니.

내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는 여왕.

"너 정도면 얼굴도 그럭저럭 나쁘지 않고... 실력도 출중하니, 그 자리를 네게 주마."

자신과 손을 잡자는 듯.

여왕은 내게 손을 내밀었다.

"이 땅에 밤의 귀족들만의 왕국을 만들자꾸나. 여왕은 내가 되겠지만, 너는 그 왕국의 대공이 될 것이다. 내 이름을 걸고 약속하지."

나는 그 손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밤의 귀족들이 왕국이라.'

그 말에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그렇다면. 이 요새는 너희 종족의 왕성 같은 건가?"

"...음?"

"이만한 요새를 가지고도 봉인 당하다니. 그쪽 성기사라는 양반들도 대단했나 보군."

별거 아닌.

정말 아무 생각 없이 던진 질문이었다.

아까부터 엄청난 위압감을 자랑하는 요새.

그 요새의 정체가 궁금해서, 가볍게 물어본 것에 지나지 않았다.

"요새?"

그런데.

"요새라니... 무슨 소리를...?"

시종일관 여유 넘치는 표정으로 내 말을 듣던 여왕.

그녀의 표정이.

내 질문 한 마디에 일그러졌다.

'...응?'

무슨 일인가 싶어 바라보고 있자니.

그제서야 주변의 풍경을 눈치채기라도 한 듯.

"무, 무엇이냐. 이것은. 대체 언제부터?"

그녀의 눈에 크게 떠졌다.

"이 규모는 대체. 시조님의 성채보다도 압도적인 규모라니. 이런 게 어째서 여기에...!"

믿기 힘들다는 듯한 태도로.

주변을 둘러보는 뱀파이어의 여왕.

"네, 네놈, 어서 설명하지 못하겠느냐!"

"설명하라니. 대체 뭘...."

"시치미 떼지 말 거라!"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는 그녀의 눈빛은.

경악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 요새는 대체... 무엇이냔 말이다!"

82화 요새 (1)

"이 요새는 대체... 뭐냔 말이다!"

별것 아닌 질문일 뿐이었는데.

그 질문을 들은 여왕의 태도가, 뭔가 이상했다.

그 태도를 보니.

한 가지 알 수 있는 사실이 있었다.

[그림자의 장막]

[신선도 - 최상]

[밤의 귀족들만이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개인공간입니다.]

[현실과는 괴리된, 심상 속에 존재하는 세계입니다.]

[뚜렷한 실체가 없는 공간으로써, 구성원들의 심상을 그대로 반영합니다.]

이 곳은 [그림자의 장막]

밤의 귀족만이 자유롭게 오갈 수 있으나.

'그 자체는. 구성원들의 심상 세계를 구현한 곳이라고 했던가.'

딱히 뱀파이어만의 심상이라는 얘기는 없었지.

잘은 모르겠지만.

'이 요새는.'

그녀조차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즉.

'여왕의 영지가 아니란 거다!'

반쯤 살아남기를 포기하고 있었던 나였으나.

그 사실을 깨닫자.

갑자기 머리가 팽팽하게 돌기 시작했다.

'원래라면. 내가 살아남을 방법 따위는 없었다.'

아무리 내가 뛰어난 요리사라고 한들.

대인전에서는 우리 부대의 전사들보다도 못한 수준.

그런 내가 보스몬스터와의 1:1 대결.

심지어 적에게 더 익숙한 환경에서의 1:1 대결이라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지.

기껏해야 최대한 시간을 끈 뒤.

다른 병사들이 어떻게든 구하러 오는 것을 기다리는 것 정도가 유일한 방법.

이마저도 가능성이 높은 방법이라고 하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이 조금 바뀌었다.

'변수!'

이유는 모르겠으나.

이 요새는, 그녀에게도 미지의 공간이라는 것.

'잘만 이용한다면. 살아남을 수 있을지도 몰라.'

머리 속으로는 최대한 지금의 상황을 어떻게 이용해야할지 궁리하면서도.

겉으로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물었다.

"그렇게 말해도 말이지. 여기로 날 초청한건 그쪽 아닌가? 뭐가 문제란건지."

"하, 모르는 척 할 셈이냐!?"

요새의 풍경을 보고 얼마나 분노한 것일까.

그녀의 머리카락이 허공에 떠올랐다.

"그림자의 장막은 나의 심상 세계... 본래라면 이 곳은 아름다운 핏빛의 파도가 치는 바다였어야 정상이다."

하지만.

내가 이 세계에 떨어지자마자 본 것은 저 요새였다.

내가 본 것과는 전혀 다른 풍경을 이야기하는 그녀.

"그 한 가운데에 나의 개인 침대가 세워져 있는 것 정도가, 내가 아는 풍경이었다. 실제로 조금 전까지는 그렇게 보였고!"

"그런데?"

"네 놈이 요새라는 얘기를 꺼내자마자! 그 풍경이 변화했다!"

과연.

내가 그녀에게 내 눈에 보이는 풍경을 얘기하자.

그제서야, 나와 그녀가 보는 광경이 동일해졌다는 뜻이다.

"네 놈이 한 짓이라는게 뻔하거늘. 모른척이라니."

저벅.

분노한 그녀가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선다.

"기껏 함께 할 권리를 주려고 했거늘. 감히, 나의 세계를 더럽히다니!"

아까까지 나보고 대공이네 재상이네 설득하려 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태도.

자신의 세계에 불순물을 들여놓았다는 게 그렇게나 불쾌한 것일까.

진심으로 분노한 듯한 모습이었다.

'협상은 글렀구만.'

저 태도를 보아하니.

날 곱게 보내 줄 생각은 아예 없어 보인다.

"너, 여왕이라고 했나?"

이렇게 된 이상.

나도 굳이 점잖게 대화를 나눠 줄 필요는 없겠지.

"내가 네게 굴복하기만 한다면. 날 대공 같은 자리에 앉혀 주겠다고?"

"이제 와서 제안을 받아들일 생각이라면 늦었다. 내 세계를 더럽힌 네 놈에게 넘겨줄 자리 따위는 없으니."

"딱히 그런 자리가 탐나서 그런건 아니고."

어차피 험한 말 오갈 사이라면.

아까부터 지적하고 싶었던 부분이 하나 있는지라.

"내가 그 쪽의 계급 체계를 잘 몰라서 그러는데 말이야."

그 부분이나 짚고 넘어갈 생각이다.

그도 그럴 게.

[식재료 감별(강화)]

"여왕이라니. 대공의 자리를 주겠다니. 푸흡."

여왕은 무슨.

이 녀석.

"준남작 따위가, 나를 대공 자리에 앉혀 줄 수도 있고. 그런 건가?"

"뭐, 뭐라...!"

[뱀파이어 준 남작]

[아리엘라 폰 카르슈타인]

'준남작이다.'

내가 아는 한.

귀족 체계에서도 저 아래에 쳐박혀 있는 계급.

아니 이게.

하극상도 정도가 있는 법이잖아.

'남작도 아니고. 준남작이 여왕?'

거리가 너무 먼 거 아니냐.

몇 계급을 뛰어넘은 거야, 대체?

"갓 이병이 장성급 자리를 약속해 주겠다. 뭐 그런 거로 들려서."

"...감히!"

의자에 앉아 있던 여왕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붉게 물든다.

그래.

내가 의도한 대로.

'흥분한 상태로 달려 드는 적이라면. 한 방은 먹일 수 있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갑작스럽게 나타난 요새.

거기에 내 도발까지.

지금의 그녀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것은 물론.

내 도발로 인해 흥분한 상태.

즉.

냉정한 판단력을 잃어 버린 상태다.

'판단력을 상실한 적이라면.'

아무리 나보다 강력한 괴물이라고 한들.

빈틈을 찾을 수 있을 터!

박씨 할아버지가 만든 두 자루 식칼을 꺼내 든 뒤.

속으로 중얼거렸다.

'특성 강화권 사용.'

얼마 전.

던전 공략에 성공하면서 획득한 특성 강화권.

이런 데서 쓰기 아깝긴 하지만.

일단 살고 볼 일 아니겠냐.

[중급 단도 숙련(강화)]

서걱-

"...네놈!"

여왕의 오른 팔이.

허공을 날았다.

* * *

[중급 단도 숙련(강화)]

특성강화의 효과는 감으로 알 수 있었다.

식재료 감별과 달리 드라마틱한 변화는 없지만.

더 빠르고.

더 예리해졌다.

서걱-

나를 향해 휘둘러진 여왕의 오른팔.

그 오른팔이, 허공에 피를 흩뿌리며 날아간다.

"...네 놈. 살아서 돌아갈 생각은 접도록 하거라."

분명한 유효타.

하지만.

그 유효타가, 내 입장에선 전혀 기쁘지 않았다.

'...심장을 노렸는데.'

이걸 피하다니.

여왕은 이 요새로 인해 분노한 상태.

거기에, 상대를 흥분시키기 위한 도발 역시 통했다.

뱀파이어들의 약점인 심장.

그곳을 향한 칼날의 궤도 역시 완벽했다.

하지만 칼날이 심장을 꿰뚫기 직전.

가슴 부위가 핏빛 안개로 변하더니.

내 칼날은 허공을 지나쳤다.

'안개화.'

뱀파이어들은 동 레벨의 평범한 각성자들보다도 강했다.

그 이유는, 뱀파이어들이 가지고 있는 여러 특성들.

그 중에서도 가장 껄끄러웠던 녀석이 바로, 안개화였다.

'사실상 두 번째 목숨이나 다름 없는 개사기 능력.'

나 역시, 심장이 안개로 변하자마자 급하게 칼의 경로를 수정했으나.

결국 오른팔을 베어내는 데에 그치고 말았다.

'최고의 공격 기회를 날렸다.'

여기서 죽였어야 했다.

이만한 찬스를 또 만들어 낼 수 있을까.

"결코, 편하게 죽지 못하게 해 주마."

오른팔을 베어내기는 했지만.

숨통을 끊지 못한 이상.

상대의 분노를 더 크게 만드는 것에 불과했다.

"네 혈관을 도는 피를 모두 빨아들이고. 빈 공간을 내 피로 채울 것이다."

"허어."

"너는 의식을 잃은 채 나의 꼭두각시가 될 것이다. 나의 왕국을 만들기 위한 전쟁의 선봉에 서게 되겠지. 평생을 노예처럼 말이야."

꼭두각시라.

다 좋은데.

"...선봉은 좀 그런데. 요리사는 후방 서포터 직업이거든."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는 모르겠다만. 좋다. 어디 한번 놀아 보자꾸나!"

날카로운 손톱을 세운 채.

본격적으로 나를 향해 덤벼드는 그녀.

'크읏!'

나는 그 공격을 가까스로 피한 뒤.

'일단... 챙긴다!'

방금 내가 베어 버린 물건.

바닥에 떨어져 있던, 뱀파이어 여왕의 오른팔을 주워 들었다.

그리고.

'튄다!'

전력을 다해 도망쳤다.

"네 놈!? 어딜가느냐!"

"너 같으면 너 같은 놈이랑 싸워 주겠냐!?"

다행히.

요리로 인한 버프는 유지되고 있었다.

[항마의 빛]

마에 속하는 존재를 상대로 더욱 더 강한 힘을 주는 버프.

덕분에, 추격해오는 여왕을 피해 최대한 도망칠 수 있었다.

'평소의 나였다면... 10초는 버텼을까.'

하지만 지금은 버프가 유지되고 있는 상태.

거기에.

"큿, 여긴 또 어디란 말이냐!"

저 쪽의 홈그라운드라고 생각했던 처음과는 달리.

이 세계....

아니.

'적어도 이 요새는. 저 녀석에게도 미지의 공간이다.'

덕분에.

생각보다도 긴 시간을 그녀를 피해 도주할 수 있었다.

"잡았다!"

하지만.

그것도 길지는 않았다.

"큭!"

기어코 나를 쫓아 와, 내 어깨를 붙잡는 여왕.

그녀는 그대로 팔을 잡아당기며 내 품에 안기는가 싶더니.

내 목덜미에, 자신의 얼굴을 박아 넣었다.

"크윽!"

파악!

가까스로 쳐 내는 데에는 성공했다.

하지만.

목덜미에 손을 가져다 대자.

끈적.

"...."

끈적한 피가 묻어 나왔다.

"역겨운 성기사들의 냄새가 나긴 하지만... 피의 맛은 최상이로구나."

그런 말을 지껄이며, 입맛을 다시는 여왕.

그녀의 입가에는, 얼마 전까지 내 몸을 흐르던 피가 그대로 묻어 있었다.

'나야 스탯만은 높은 편이니, 흡혈귀들 입장에서는 질 좋은 음식으로 보이겠지.'

아니.

맛뿐만이 아니라 건강에도 좋았던 건지.

내가 베어내, 지금도 내 손에 쥐어져 있는 그녀의 오른팔.

주르륵....

그 팔이 곧바로 재생되는 모습.

'무슨 에일리언도 아니고.'

어떻게든 싸워서 대미지를 입힌다고 해도.

한 번 피를 빨리는 순간 전부 회복한다.

그냥 싸움에서도 내가 밀릴 게 뻔한데.

이래서야.

공방이 성립 될 리가 없다.

"자, 이만 포기하려무나."

정말로 승패가 가려졌다고 생각한 것인지.

조금 전까지의 분노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다가오는 그녀.

'기껏 생긴 변수였는데... 이렇게 끝인가.'

답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 얌전히 고개를 숙인.

바로 그 순간.

[비상! 비상! 비상!]

"...어!?"

"네, 네놈, 이번엔 또 무슨 짓을 한 거냐!?"

요새 전체에.

정체불명의 기계 음성이 울려 퍼졌다.

[성주의 생명력 저하를 감지.]

[제1급 위기상황으로 판별.]

'성주, 뭐라고?'

[요새의 자율적 상황 판단에 돌입합니다.]

뭐라 뭐라 떠들어 대는 기계음.

그 말의 뜻을 헤아릴 만한 시간은 없었다.

[자율적 판단 결과]

[요새 내부에 침입한 적으로 인한, 성주의 위기상황으로 결론.]

[자율방어시스템을 기동합니다.]

그와 동시에.

요새 안 쪽에 세워져 있던, 잿빛의 건물들.

그 건물들의 형태가 일그러지는가 싶더니.

쿠우우우웅!!!

"크윽!!!"

그대로.

뱀파이어 여왕의 몸을 강타했다.

'뭐야 저건!?'

건물이 혼자서 움직이는 모습만 해도 충분히 충격적이였는데.

냅다 적을 공격해 버린다고?

[식재료 감별(강화)]

[자율방어시스템]

[Lv. Max]

여왕조차 정체를 모르는 요새.

허공에 울려 퍼지는 기계음.

스스로 움직여, 여왕을 공격하는 건물들까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의 연속이었다.

...아니.

'이해하려 해선 안된다.'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을 굳이 이해하려 하다니.

터무니없는 시간 낭비, 심력 낭비다.

지금의 내게는 그럴 만한 여유따위 없다.

잘은 모르겠지만.

중요한 것은 하나.

'이 요새가. 나를 지키려고 하고 있다는 것.'

[주의!]

[점검 결과, 온전한 소환이 이루어지지 못한 상태임이 확인되었습니다.]

[관련 인원들은 시급히 올바른 소환을 시도해 주시길 바랍니다.]

[자율방어시스템의 위력이 대폭 감소합니다.]

[자율방어시스템의 지속시간이 대폭 감소합니다.]

[요새의 전력 발휘가 힘든 상황임이 확인되었습니다.]

[관련 인원들은 시급히 수비 인원들을 파견.]

[성주의 보호에 가담할 것을 강력히 권고드립니다.]

"쿠, 쿨럭. 네 놈. 어딜가느..."

콰앙!

"꺄악!"

여왕이 내게 다가오려할때마다.

주변의 건물들이 그 몸을 강타한다.

'시간은 번 셈인가. 하지만.'

완전히 안심하기엔 조금 이르다.

[자율방어시스템의 위력이 대폭 감소합니다.]

[자율방어시스템의 지속시간이 대폭 감소합니다.]

지금 나를 도와주고 있는 저 건물들.

[자율방어시스템]은, 어째서인지 상당히 약화된 상태라는 것 같다.

"이, 이런 힘을 가진 요새라니. 커헉!"

콰아앙!

"위대하신 시조의 성채도 이 정도는 아니였... 꺄앗!"

쿠웅!

지금은 여왕을 신나게 후드려 패고 있다만.

어디까지나 내게 접근하지 못하게 하고 있을 뿐.

치명상을 입히지는 못하는 모양이었다.

'저 건물들이 시간을 벌어 주는 동안. 답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언제나 그래왔듯.

내 직업은 요리사.

내가 찾을 만한 답은.

뭐.

뻔한 거 아니겠냐.

"왜 날 도와주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왕 도와주는 거. 하나만 더 부탁하자."

이왕 도와주기로 한 거라면.

이 정도는 도와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가벼운 기대감에, 입을 열었다.

"요리를 할 수 있는 장소가 필요하다."

[명령을 접수하였습니다.]

[네비게이터 시스템을 가동합니다.]

그러자.

머리 속에.

내가 가야할 길이 떠올랐다.

그 길을 따라 전력을 다해 내달리자.

눈 앞에 보이는 하나의 거대한 건물.

[식당]

[Lv.Max]

콰앙!

나는 문을 박차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내 손에는.

[뱀파이어 준남작의 앞다리살]

도무지 마음에 들지는 않는.

재료가 하나 들려 있었다.

83화 요새 (2)

[식당]

[Lv. Max]

머릿속에 떠오르는 길 안내를 따라 이동하자.

도착한 곳에 있는 것은, 거대한 식당이었다.

콰앙!

식당의 문을 발로 박차고 안으로 들어서자.

눈앞을 채우는 메시지.

[식당 Lv. Max가 활성화됩니다.]

[요리사의 숙련도에 보정이 가해집니다.]

[요리의 결과물에 보너스가 추가됩니다.]

이건 설마.

'...버프라고?'

입장하는 것만으로도 버프를 주는 건물이라니.

내 입장에서는 나쁠 것 없다만.

'안쪽은... 취사장하고 비슷한 구조.'

혹시라도 내가 전혀 모르는 구조의 식당이면 어쩌나 고민했으나.

다행히도, 평범한 군대의 취사장 같은 느낌이었다.

'둘러볼 시간 따위는 없다.'

지금도 뱀파이어의 여왕은 나를 쫓아오고 있을 터.

[자율방어시스템]이라는 녀석이 언제까지 버텨 줄지 알 수 없는 일.

나는 곧바로.

요리의 재료를 내려다 놓았다.

[뱀파이어 준남작의 앞다리살]

"...."

아까 내가 잘라 낸, 여왕.

이 아니라, 준남작의 팔.

그걸 집어든 나는, 짧은 고민에 빠졌다.

'이걸 요리해도 되는 걸까.'

지금까지 내가 요리했던 괴물들과 달리.

저 뱀파이어는, 종족은 다를지언정 외모는 인간과 비슷했다.

'다른 식재료 중에... 저 녀석을 상대할 만한 물건은 없다.'

그 팔을 요리해 먹는다는 것은.

구역질이 날 정도로 끔찍한 일.

하지만.

'안 먹으면 뭐. 여기서 그냥 죽으려고?'

내 목표는 언제나 하나.

살아남는 것.

그러기 위해서라면.

조금 구역질이 나는 것 정도는.

"감내해야 한다, 이거겠지. 제기랄!"

그 팔을 향해.

식칼을 휘둘렀다.

[중급 요리 비결 - '뱀파이어 손질법의 깨달음']

고유 재능의 각성.

중급 단도 숙련의 강화.

요리하는 내 칼질 속도는 이전과는 비교도 하기 힘들 정도로 빨라져 있었다.

손질이 끝난 재료를 팬 위에 얹은 뒤.

화구에 불을 붙이고 볶는다.

마지막으로.

그 위에 [특별소스]를 뿌려 주면.

[지독한 목마름의 뱀파이어 준남작 전지 볶음]

[신선한 뱀파이어 준남작의 앞다리살로 만들어진 고기 볶음입니다.]

[식당 Lv. Max의 효과로, 보너스가 주어집니다.]

[해당 요리를 섭취한 이의 모든 특성 효과가 50% 증가합니다.]

나는.

구역질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참아 내며, 어떻게든 고기를 씹었다.

"우읍...."

그러자.

곧, 발동하는 특성.

[스킬 - 절대 미각을 발동하시겠습니까?]

"발동, 한다."

[원하시는 특성을 선택해 주세요.]

[안개화]

[어둠 친화]

[매료]

[초재생]

[신성력 약화]

눈앞에 나열되는 여러 가지 특성들.

하지만.

다른 특성들은 굳이 읽을 필요도 없었다.

내가 필요로 하는 특성은.

단 하나.

[특성을 선택하셨습니다.]

[일시적으로, 새로운 특성을 획득합니다.]

[절대 미각의 패널티로 인해, '항마의 빛'을 포함한 모든 요리의 효과가 제거됩니다.]

요리 재료의 특성 하나를 얻게 해 주는 절대 미각.

대신, 그 효과를 사용하는 순간 다른 버프는 없어진다.

몸에 엄청난 활력을 안겨 주던 밝은 빛.

그 빛이 사그라들고.

[주의!]

[동력 저하로 인해, 자율방어시스템이 강제 종료됩니다.]

[성주의 위기 상황이 종료되지 않은 바.]

[관련 인원들은 시급히-]

울려 퍼지는 기계음은.

나를 지켜 주던 요새의 공격이 끝났음을 알렸다.

"무슨 짓을 한 건지는 모르겠다만... 네놈."

고개를 돌리자.

식당의 문 앞에 서 있는 뱀파이어가 보였다.

"약해졌구나?"

[자율방어시스템]에 심하게 얻어맞은 건지.

꼴이 말이 아닌 여왕이었지만.

내 항마의 빛이 사라진 것을 눈치챈 것일까.

여유롭게 웃으며 다가오는 그녀.

"정말, 지긋지긋한 싸움이었다."

버프를 잃은 지금.

나름대로 저항을 해 보았으나.

"자. 가족이 될 시간이다."

"크윽...!"

콰직!

내 저항을 뚫고 아까처럼 품 안에 들어온 그녀는.

요사한 웃음을 지으며 내 목에 이빨을 박아 넣었다.

츄릅-

몸 안의 피가, 그녀의 입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이 느껴진다.

"커, 허."

이대로 간다면.

나는 제대로 된 저항도 하지 못한 채, 모든 피를 빨리고 죽거나.

아니면, 그녀의 권속이 되어 평생을 노예로 살게 되겠지.

그리고 나는.

'그렇게 되긴 싫거든.'

그렇기에, 내가 한 일은 간단했다.

그녀가 내 목덜미를 물고 있다면.

나 역시 마찬가지.

콰직!

여왕의 목덜미에 입술을 박아 넣었다.

"...뭣!?"

아쉽게도, 내게는 송곳니따위는 없다.

이빨로 최대한 거칠게 그녀의 목덜미를 물어뜯자.

쇠맛이 나는 찐득한 액체가 혀에 닿았다.

[특성 - 흡혈이 발동합니다.]

이게 바로.

[절대 미각]을 통해서 획득한 특성.

[흡혈]

[뱀파이어들에게 있어서 피를 마시는 행위는 여러 의미를 가집니다.]

[힘을 키우기 위한 의식이기도 하고, 체력을 회복하기 위한 휴식이기도 하며.]

[또한, 생명 유지를 위한 식사이기도 합니다.]

[흡혈을 통해 생명력을 회복합니다.]

[흡혈을 통해 일시적으로 능력치를 상승시킬 수 있습니다.]

상처가 난 혈관에서 흘러나오는 핏물.

나는 그 피를, 최대한 힘차게 빨아들였다.

[굉장히 질이 좋은 피입니다.]

[흡혈의 효율이 대폭 상승합니다!]

[일시적으로, 모든 능력치가 소폭 상승합니다.]

무력해졌던 몸에.

약간의 활기가 돌아오기 시작했다.

"무, 무슨 짓을!?"

내 피를 흡혈하기 위해 다가온 여왕.

그녀는 이제, 내게 흡혈을 당하는 처지가 되어 버렸다.

"네, 네 놈, 정말로 미쳐 버린 게냐!?"

자신이 가지고 있던 특성으로 자신을 흡혈하는 적.

그 존재가 상당히 당황스러웠던 듯.

내 목덜미에서 입을 떼고 소리를 지르는 그녀.

'멍청하긴!'

그녀가 입을 때고 소리를 지를 때.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더욱더 힘을 주어, 여왕의 피를 빨아들인다.

'맛은 드럽게 없지만.'

[굉장히 질이 좋은 피를 대량으로 흡혈하였습니다!]

[영구적으로 모든 능력치가 소폭 상승합니다.]

능력치가 높은 나는 뱀파이어들 입장에서 질 좋은 식사로 보였겠지.

하지만 내 피가 아무리 내가 질 좋은 식사라고 한들.

'뱀파이어들. 심지어 그 수장이라는 괴물의 피보다 질이 좋지는 않을걸.'

서로가 흡혈을 반복한다면.

더 질 좋은 피를 먹게 되는 건 나다.

"크윽!"

여왕이 내 머리를 밀어내려 했으나.

"노, 놓아라!"

"못 가."

난 떨어지려는 녀석을 붙잡고 거칠게 끌어안았다.

잠깐 사이 흡혈한 피의 영향으로 꽤 능력치가 많이 올랐다.

반면, 그녀는 [자율방어시스템]에게 얻어맞느라 힘을 상당히 소진한 상태.

이 정도라면.

붙잡아 두는 정도라면 충분히 가능하다.

'다시 전투로 가면. 절대 못 이긴다!'

무슨 일이 있어도 놓아 주면 안 된다.

걱정되는 점이 있다면, 안개화.

그녀가 안개로 변해 내 품을 벗어나 버리는 것이었으나.

'안개화에도 쿨타임은 있잖아?'

내 칼이 심장을 찌르는 걸 막기 위해 사용한 지 5분도 되지 않았으니.

도망갈 수단은 없다.

"젠장, 본녀가 어쩌다 이런 꼴이!"

그 사실을 깨달은 여왕은 다시금 내 목덜미에 이빨을 박아 넣었다.

그렇게.

승부의 방향이 완전히 달라졌다.

내가 의도한 대로.

'전투를 통한 승리는 가망이 없으니.... 종목을 바꾼다.'

조건은 양쪽에게 동일했다.

피를 빨릴수록 생명력이 떨어지고, 능력치를 빼앗긴다.

반대로 피를 빨아들일수록, 생명력이 회복되고, 능력치를 빼앗아 올 수 있다.

'누가 더 빨리, 상대의 모든 것을 빨아들이느냐의 승부...!'

츄릅...

꿀꺽, 꿀꺽.

어두운 공간.

무언가를 빨아들이는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제삼자가 본다면, 글쎄.

정열적인 연인이 서로의 목덜미에 입술을 비비는 장면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실상은 전혀 달랐다.

'조금이라도 늦으면. 내가 죽는다.'

서로의 목숨을 건 치열한 사투.

저쪽은 본래부터가 흡혈귀.

그에 반해 나는 인간이 흡혈이라는 특성만을 빌려 왔다.

본래라면 승부가 되지 않는 게 정상이겠지만.

'나도. 노림수 몇 개는 있거든.'

[흡혈은, 생명 유지를 위한 식사이기도 합니다.]

'흡혈'은 식사 행위.

여기서 피는 음식으로 여겨지는바.

[절대 미각의 효과가 발동합니다.]

'절대 미각'의 발동 조건이 충족됐다.

거기에 [식당 Lv.Max]의 보너스로 인해.

요리를 통해 얻은 내 특성의 효과는 50% 증가한다.

[음식을 통해 얻는 효과가 크게 상승합니다.]

[생명력이 회복됩니다.]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생명력이 회복됩니다.]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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