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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140화. 삼 초

#140화. 

쿠구구궁······ 

전투로 인한 굉음이 하늘까지 울려퍼진다. 

슬레모킨과 집행관, 루돌프와 아힘사 그리고 딜런의 보좌 둘이 로키의 주민들을 보호하며 고지대로 몰려오는 시체 무리를 요격해 짓이기는 소리. 마법의 포격이 비처럼 쏟아져 땅을 갈아엎는다. 

그리고. 

화아아악! 

시체와 나의 격돌지를 중심으로 강대한 기파가 원형으로 퍼져나간다. 습기를 머금은 대기가 밀려나며 몇 차례나 너울쳤다. 

밀려나는 대기에 편승해 거리를 벌린 놈이 말했다. 

— 역시 인간은 약하구나. 그나저나 어느 정파의 제자지? 그런 검법이 있었나? 

그것은, 자기 신체를 경화시켜 만든 칼날로 나와 다섯 합을 겨뤄본 뒤 내뱉은 말이었다. 

나 또한 직전의 다섯 합으로 놈의 수준을 가늠했다. 지척에서 베고 찌르며 손을 몇 번 섞어본 것만으로도 느낄 수 있었다. 

'힘의 격차가 생각보다도 크군.' 

레벨 차이가 명확하다. 놈은 강하다. 

바만차 따위는 생각도 나지 않을 정도로. 

굳이 따지자면, 요기의 격이 다르다고 해야할까. 

어지간한 공격으로는 놈을 베어넘길 수 없으리라. 

물론, 놈이 익힌 무학의 수준과 완성도는 그리 대단해보이지 않았다. 솔직한 말로 일류는커녕 이류 무학으로 칭해주기도 창피한 수준. 

그러나 시체 특유의 어마어마한 육체 강도와 비정상적으로 빠른 재생력에 더해서, 마구 낭비해도 줄어들 기미가 없는 기운이 그 단점들을 상쇄하고도 남겠지. 

깡마른 몸에 키가 3m에 육박하는 이형의 괴물. 마치 마을 어귀에 세워두는 정승을 보는 것만 같았다. 

"······." 

놈은 전투 시작 이후부터, 피부가 따끔거릴 만큼 농도짙은 요기를 쉴 새 없이 뿜어대고 있다. 그런데도 충분히 여유로워 보인다. 나처럼 공력을 적절히 분배할 필요 자체가 없다는 것. 

단전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내공이 무한정 솟아난다는 공령지체(空靈之體)를 이룩한 것도 아닐 텐데···마치 온 세상의 기운을 몸으로 흡수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 한데······. 

인간은 역시 약하다며 삼류 악당이나 할 법한 말을 지껄이던 놈은, 문득 내 검을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욕심이 나는듯 감탄을 머금었다. 

— 잘 닦인 명검이 나약한 주인을 만났구나. 아무래도 그 물건은 내게 더 어울릴 것 같지 않나? 

"자, 바로 줄 테니 잘 받아라." 

쾅! 

문답무용. 

나는 즉시 디딤발로 땅을 박차고 쇄도해 검을 내뻗었다. 현묘한 이치를 담은 보법이 놈과의 간격을 삭제했다. 뒤이어 검강이 서린 광선이 쾌속하게 쏘아졌다. 

꾸드득- 

"!" 

그러나 광선은 무엇도 자르지 못했고, 웬 단단한 돌벽을 쑤시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시선을 돌리자 광선의 검극이 놈의 옆구리 살갗에 겨우 박혀 있는 정도였다. 한낱 생물의 피부 따위를 검이 관통하지 못한 것이다. 

뿌드드득······ 

그때, 놈의 살갗이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며 검을 물었다. 검을 붙잡은 내 손목이 부러질듯 돌아가기에 즉시 검을 뽑아 회수하여 물러섰다. 

— 킥. 

물러서는 나를 보던 놈은, 마치 불쌍하다는 듯 연민 어린 얼굴로 비웃었다. 추격도 해오지 않았다. 워낙 여유만만한 것이 진작부터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듯한 태도. 

그러던 놈이 이빨을 내보이며 말했다. 

— 그래도, 본 적 없는 무공이로군. 안 그래도 무료했는데 그 검은 물론이고 네 검법도 받아 익혀봐야겠다. 

시체놈의 그 말에 나도 긍정적으로 웃으며 받아쳤다. 

"그럴까? 헌데 멍청한 놈들은 줘도 못 익힌다. 태생부터가 비천한 사파 잡졸따위가 감히 익힐 수 있는 무공이 아니." 

쾅! 

갑자기 거대하면서도 거친 반탄력이 전신을 휘돌았다. 무언가에 맞아 튕겨나간 내 입가에서는 선혈이 흘러내렸다. 

고개를 들자. 

— 비천한 사파 잡졸따위? 

"······." 

길게 늘어진 놈의 팔이 스르륵 줄어들고 있었다. 

강철보다도 단단하면서도 때에 따라 유연하고 낭창하게 흔들리며 충격을 흡수하는 육체. 

전설 속의 광물로 빚어낸 몸뚱이도 아닐진대. 수수깡처럼 말라붙은 뼈에 피륙인지 껍질인지 모를 것만 붙어있는데도 실로 강력하다. 

헌데. 

나도 사파 출신이지만, 저놈은 이상하게 사파라는 말만 나오면 지랄발광이군. 

놈의 첫 등장 때부터 이상했던 부분이다. 현재는 굳이 사파와 정파의 경계가 명확히 나뉘어있지 않은 세상인데, 저놈에게서는 어떠한 열등감의 편린이 엿보였다. 

재능없는 무인의 설움. 거대한 벽에 막혀 좌절한 무인의 설움. 대강 그런 것들이라고 해야 할까. 

스스로 변절한 뒤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이 된 주제에 인간 시절의 기억들에 저리도 격하게 반응해 주다니. 참으로 유치하면서도 기가 막혔다. 

킁. 

나는 기가 막혔으므로 일단 코라도 풀고 자세를 잡았다. 어째서인지 사파잡졸이라는 말에 태도가 일변한 저놈의 요기가 점점 증폭되어 끝도 없이 부풀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드드득! 

창졸간, 놈의 두 팔이 곤충의 갑각처럼 변했다. 더해서 놈의 어깨에서 괴상한 날개가 돋아나 신형을 공중으로 끌어올렸을 때는, 나는 그 괴이함에 더 이상의 할 말을 잃어버렸다. 

— 네놈은 얼마나 잘났기에? 어디 막아봐라 정파놈. 

놈의 분노섞인 말이 끝나자 마자. 

팟! 

깡마른 신형이 순간이동이라도 한 듯 사라졌다. 곧장 섬뜩한 칼날이 목젖 바로 앞까지 들이닥친다. 

카가가강—! 

보고 막은 게 아니라, 예측과 반사신경으로 겨우 비껴냈다. 

광선의 검면을 긁으며 쓸고 내려오는 놈의 칼날. 분명히 출수는 이쪽에서 먼저 했는데도 힘에서 밀렸다. 사내로서 이만큼 부끄러운 일이 또 있을까. 

그러나 못 막을 정도는 또 아니었다. 왜냐하면 놈의 공격에 담긴 이치와 검로가 정말로 단순하며 형편없었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무인이었으나, 지금은 무(武)를 잃어버린 변절자인가? 

"흑도 사파라 그런지 칼을 개처럼 못쓰는군." 

놈에 의해 정파의 무인이 된 나는, 저걸 저잣거리에서나 쓰는 막칼이라고 규정했다. 손 가는대로 마구 휘두른다고 하여 막칼. 대체 저런 놈이 절정의 무인이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저러면 오히려 인간 때보다 실력히 퇴보한 것은 아닌가? 

하지만. 

부우우웅! 

그 막칼에 검강과도 같은 기운이 담겨있다면, 고작 세로 베기가 끔찍한 요기를 머금고 총탄보다도 빠른 속도로 연신 목을 노린다면. 

카가강! 

그리고 검강을 두른 광선마저도 쉽게 튕겨낸다면. 

······그때부터는 막칼이라 부를 수 없다. 실력의 퇴보라고 할 수도 없겠지. 어쩌면 변화한 신체에 걸맞게 진화했다고 보아야 하는 건가. 압도적인 힘의 격차 앞에서는 무공의 고하를 논해봐야 그리 영양가가 없는 듯하다. 

그때였다. 

쿵! 

"무림계 칼잡이놈들, 정파고 사파고 쓸모도 없는 걸로 지랄떨지 마라." 

하늘에서 뚝 떨어진 딜런이 두 팔을 땅에 박아넣자, 마력의 줄기가 이리저리 뻗어나가 지면을 가열차게 달궜다. 

기에에에엑- 

순식간에 용암처럼 절절하게 끓어오른 대지가 그대로 융해된다. 땅 밑 깊숙이 숨어 기회를 엿보던 두더지들도 산채로 녹아내려 땅과 섞여들었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지대가 주변부를 잡아먹으며 점차 넓어졌다. 깡마른 시체놈이 밟고 있던 땅마저 흐물거리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놈은 귀찮다는 얼굴로 자리를 벗어났다. 

곧, 딜런이 마력을 회수하자 별안간 녹았던 땅이 탄 숯처럼 꺼멓게 굳었다. 땅 속에서 튀어나오는 두더지를 의식해 지면을 단단하게 경화시킨 것 같았다. 힘이 아무리 좋은 두더지라 해도 쉽게 뚫고나올 수 없을 테지. 

그렇게 근방 땅 밑에서 조금씩 기감을 방해하던 요기들이 사라지자, 저 깡마른 시체 한 놈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땅이 굳자, 딜런과 나는 서로 말없이 몸을 쏘아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주변의 마력이 모조리 딜런의 심장으로 빨려 들어가나 싶더니. 

꽈과과과광—! 

그 두꺼운 손바닥으로 간단히 쌍장을 뻗자, 강대한 마력이 연속으로 폭사하며 전방을 광역으로 휩쓸어버렸다. 수류탄 수십 다발이 터진듯, 깡마른 시체가 있던 곳을 포함한 근방 오십 미터의 지면이 전부 박살나 튀어올랐다. 그 중심에서 피가 퍽-하고 튀었다. 

역시나 9레벨의 마법사. 그저 간단한 견제 공격인 줄 알았는데, 예상보다도 강력히 터진 충격파에 순간 귀가 먹먹해질 정도였다. 

'내쪽에서 마법을 쓰는 건 자제해야겠군.' 

나는 딜런의 회로가 빨아들이는 마나의 흐름을 조금도 방해할 생각이 없었다. 딜런이 합류했으니 이제 2대 1의 전투 상황. 이제는 이쪽이 유리하다. 

"회복하기 전에 결판을 내자." 

쐐애액! 

광역 마법이 적중해 두 다리가 부러진 시체놈을 확인한 딜런이 속도를 높였다. 

나도 단전에 잠들어 있던 공력과 세맥으로 흩어놓은 기운을 단번에 끌어올렸다. 기경팔맥을 타고 순환하던 기운들과 단전에서 한꺼번에 솟아오른 정순한 기운들이 합류해 내 육신에 거력을 불어넣었다. 

팟! 

딜런의 마법에 산산이 부서져 허공으로 튀어오른 지면 파편을 밟고 몸을 가속했다. 강맹한 경력이 휘몰아치며 터질듯 광선에 주입되었다. 

그런데. 

쐐액! 

"!" 

사파의 무인이라는 말은 명백한 사실인지, 초식을 전개하려던 도중 놈의 입술이 우물거리는 게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그 입술에서 기다란 세침같은 것이 쏘아졌다. 

내가 본능적으로 그것을 피하자. 

으득- 

이번에는 제 혀를 질겅질겅 짓씹더니, 볼을 빵빵하게 부풀렸다. 이윽고 놈은 혀에서 흘러나온 피에 바람을 불어 부채꼴로 흩뿌렸다. 

푸화아아악! 

정면이 붉게 물든다. 

놀란 딜런이 마력을 끌어올리며 즉시 그것들을 태워보려 했으나, 놈의 요기가 담겨있는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씨발." 

결국 딜런은 경로를 틀어 허공으로 솟구쳤다. 딜런이 벗어난 지대에 부채꼴로 쏘아진 놈의 피분수가 자욱하게 내려앉았다. 

푸욱!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딜런이 잠시 벗어난 사이, 놈은 자기 팔을 그어 피를 줄줄 뽑아냈다. 그러고는 그 피를 전신에 덕지덕지 펴발랐다. 

······아주 가지가지 하는구나. 

만약 스쳐서 상처라도 나는 날에는 곧바로 감염. 9레벨급 시체이니 직접적으로 접촉한다면 감염의 속도는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 대단한 정파의 무공을 익히면 뭘 하나. 나는 네놈들을 딱 한 번만 베면 이 싸움을 끝낼 수 있다. 이제 누가 더 고귀한 존재지? 

그놈의 정파를 부르짖던 놈이 비척대며 일어났다. 

벌써 부러졌던 두 다리가 거의 다 재생된 것이다. 

— 이래도 재능같은 걸 논할 생각이냐? 나도 처음부터 구파일방에서 무공을 익혔으면······. 

놈이 흥분을 주체 못하고 떠드는 사이 시선을 잠시 돌렸다. 겁에 질린 주민들을 마탑의 인원들이 돌아가며 힘겹게 방어하고 있다. 저쪽은 무수한 잔챙이들을 상대하느라 이미 한계에 봉착했다. 

— 지금, 어딜 보는 거냐. 

카강! 

기습해온 놈의 칼날을 광선으로 받아 흘려냈다. 그런데 놈의 칼날이 찰나간 쑥 들어가 사라지더니 주먹으로 바뀌었다. 물리법칙 따위는 무시하듯, 채찍처럼 변한 주먹이 경로를 곧장 직각으로 비틀었다. 

뻐어어억! 

광선을 다급하게 들어 권격의 폭사를 막아냈다. 그러자 놈은 제 팔을 검신쪽으로 강하게 붙여 밀었다. 시체놈의 주먹이 검신에 닿자 그대로 두 갈래로 잘려 나뉘었다. 헌데 그 어마무시한 재생력은 상황을 가리지 않았다. 

"!" 

광선이 반쯤 파고들어간 채로, 놈의 손목 부근이 감쪽같이 재생해 붙었다. 검이 놈의 피륙 안에 틀어박힌 꼴이 된 것이다. 

푸확! 

나는 다급히 광선에 내공을 더 주입해 검날을 강하게 비틀었다. 놈의 주먹을 갈라내고는 몸을 뒤로 뺐다. 

시체놈은 검을 놓쳐서 아쉽다는 듯, 깡마른 팔을 툭툭 털며 고개를 꽈배기처럼 꼬아 올렸다. 뼈가 비틀려 부드득거리는 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 ······정파 무인이 아닌가? 왜 도망치지? 

깡마른 육신에서 뿜어지는 불가해한 요기. 과연 저걸 한때나마 사람이었던 생물체라고 볼 수 있을까. 차라리 사람보다는 언가의 생강시에 가까운 존재가 아닐까. 

놈은 딱히 인체의 급소나 혈이라고 할 곳도 없고, 재생이 너무나도 빠르다보니 상대하기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었다. 

'단박에 목을 베어야 하는데.' 

죽이려면 단박에 목을 베어내고 머리를 밟아 터뜨려야 한다. 저 질기고 단단한 살갗을 뚫을 방도를 찾아야 했다. 

그때. 

— 왜 도망쳐. 정파라고 했잖느냐! 

놈은 갑작스레 두눈을 뒤로 까뒤집더니 게거품을 물었다. 사람이 저랬다면 슬슬 뒈져간다는 뜻이겠으나, 시체에게는 아니었다. 

포르르르륵— 

놈이 입에 문 게거품에 슬그머니 요사스러운 피가 섞여들었다. 곧이어 붉은 막을 가진 핏방울들이 게거품처럼 쏟아져 나오고, 순식간에 사방이 피거품 방울로 막혀들었다. 

단 몇 초 사이에 놈의 형체가 보이지도 않았다. 

인간의 감각을 유린하는 요사스러운 기운들의 밀집. 

나는 마력을 발산해 그 역겨운 방울거품들을 밀어내려다 불현듯 힘을 뺐다. 

전투를 지속하며 최대한 거리를 벌렸으나, 아직도 주민들이 있는 곳과 멀리 떨어져있지 않았다. 그러니 방울거품들이 조금이라도 저쪽으로 밀려나가 터진다면 곧장 대참사로 이어진다. 

— 킥. 

저건 무를 익혔던 무인이라고 할 수 없다. 그저 한 마리의 괴물. 이빨을 박아넣고 살점을 뜯을 생각뿐인 괴이. 

나는 주민들이 있는 곳으로 흘끔 시선을 던졌다. 

마법사들과 루돌프놈이 근근이 막아내고 있지만, 언제까지고 막아낼 수는 없을 것이다. 아힘사도 배터리가 거의 없는지 움직임을 최소화 하는 단계에 들어갔다. 

허공으로 솟구쳤던 딜런이 내려서서 물었다. 

"주민들을 인질로 잡을 생각이군. 어쩔 거냐." 

"사람 하나 들어갈 만한 공간을 낼 수 있나?" 

"설마 저 안으로 기어들어 가겠다고? 병신같은 소리. 그게 바로 저 새끼가 원하는 거다. 도망치지 말라는 거지." 

"간다." 

"······." 

나는 그리 말하고는 광선의 검병을 붙잡았다. 

이곳에는 플라자의 원탁때처럼 나의 무공을 견식할 무림계 명숙들이 없다. 나중에라도 귀찮게 따라붙는 시선이 없다고 생각하자, 어딘가 조심스러웠던 마음마저 씻겨 내려가 편해졌다. 

"너 알아서 해라." 

곧이어, 잠시 날 응시하던 딜런은 가타부타 하지않고 마력을 끌어올렸다. 

그 와중에도 시체놈이 뿜어낸 피거품들은 동산처럼 솟아나 근방을 장악해 나갔고. 

준비가 끝난 딜런이 소리를 질렀다. 

후우우우우욱— 

— ! 

어떠한 소리도 없이 공간을 꿰뚫는 마력의 파동. 피거품 방울들의 중간에 작은 구멍이 뚫렸다. 

그 작은 구멍 사이로 찰나간 몸을 밀어넣어 진입한 나는. 어느덧 시체놈의 허벅지 위에 올라타 있었다. 

— 그래, 제 발로······ 

"어. 들어왔다." 

뿌지지직! 

공력을 가득 실어 진각을 쾅쾅 때려 밟았다. 환희하던 놈의 무릎뼈가 그대로 우그러지며 몸이 기우뚱 기울었다. 우그러진 무릎은 곧바로 재생을 시작했다. 

후웅! 

위로 그어지며 나를 동강내려는 칼날을 피해 팔을 타고올랐다. 얇은 줄 위에서 묘기를 보이는 곡예사처럼. 깡마른 팔을 딛고 어깨까지 올라선 나는 검을 뽑아 오형검의 일 초식과 이 초식을 연계했다. 

출. 섬. 

시간을 나눈 듯 느리게 흘러가는 장면 속에서. 

섬전처럼 출수한 검끝에서 명주실처럼 가는 검강이 뽑혀나온다. 가늘게 기운을 뽑았다면 두껍게 늘릴 수도 있다. 두껍게 늘린 뒤에는 또다시 얇게 저밀 수도 있다. 

그러니 나의 검은 형(形)을 그려내는 붓이다. 오형검의 일초와 이초는 형을 그리기 위한 준비 동작. 원하는 형태를 그려내기 위해 시작점에 겨우 선 것에 지나지 않았다. 

스아아악— 

검에서 뽑혀나온 기운들의 줄기가, 느릿해진 정신 속에서 천천히 움직이는 놈의 전신을 덮어간다. 

검강의 실을 뽑았으니, 그 실을 꼬아가며 형태를 만들 차례. 

뇌와 경맥이 타는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그러나 정기신이 합일하여 초절정 끝자락 이상의 경지에 오른 나는, 초식의 전개로 인한 부하를 버텨낼 자신이 있었다. 통증을 참아내며 계속 팔을 움직였다. 

검법의 사조 되는 이가, 사형수의 목을 치기 전 발광하는 망나니를 보고 창안했다는 식. 

오형검법 삼 초. 만휘극파식(滿輝極破式). 

빛나는 검강 줄기가 허공을 어지럽게 수놓는다. 

검강 줄기는 팔방의 극점을 따라 유려히 이어진다. 

하나 둘 비어있는 공간을 메워간 검강 줄기는 어느새 시체놈의 팔방을 완전히 점했다. 삼 초의 과정을 펼쳐내느라 팔뚝의 근육들이 죄다 찢어졌으나, 나는 검끝을 멈추지 않았다. 

쩌적- 

유수처럼 검강 줄기를 그리며 팔방을 점해가던 검로에 어느 순간, 빗금처럼 작은 균열이 생겨났다. 

그것은 의도적으로 낸 균열이었다. 

쩌저저저저적— 

놈의 귀에도 들렸을 것이다. 

휘영청한 팔방의 극점을 따라 어떠한 형태를 그려가던 나의 검강 줄기들은, 마치 깨진 유리처럼 한순간 금이 가더니 반응할 새도 없이 찢어졌고. 

무수한 갈래로 잘게 깨져나간 조각들이, 밝은 휘광을 발산하며 놈의 머리 위로 떨어져내렸다. 

먼지처럼 작은 조각들이, 각자의 강기(罡氣)를 머금고서.

#141화. 나의 벗

#141화. 

하늘을 수놓으며 낙하하는 유성우처럼. 

광채를 뿜는 강기의 파편 조각들이 팔방을 덮으며 떨어진다. 

먼지보다 작은 파편도 존재했으며, 실보다 가늘고 긴 파편도, 손가락만한 강기 파편도 더러 있었다. 

뿌드드득- 

순간, 깡마른 시체놈의 다리근육이 몰라보게 부풀었다. 무언가 기운이 심상치 않으니 즉시 빠져나가려 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놈은 만휘극파식의 범위에서 빠져나가는 데 성공했다. 꼬리를 자르고 도망치는 도마뱀마냥, 망가진 제 무릎을 버려가면서까지 말이다. 

퍼엉! 

놈의 완력에 공기가 터져나가 파공성이 일었다. 

시체놈이 있던 자리는 폭탄 터진 듯 파였고, 뜯겨나간 무릎 밑의 종아리가 남아 풀썩 쓰러졌다. 

얇고 깡마른 허벅지만으로 저런 힘과 속도. 

실로 비현실적인 육체 능력이다. 

도망친 놈은 조소를 머금으며 감탄했다. 

— 확실히 위험한 무공이군! 하지만 잘린 육체야 재생하면 그만······ 

"재생?" 

— ······? 

그리고 놈은 빠져나가고 나서야 반응했다. 

뒤늦게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감지했는지, 제 팔을 앞으로 뻗어 내려다본 놈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주우우욱— 

팔의 마른 살점이 조각조각 잘려 마치 용수철처럼 늘어진다. 

만휘극파식은 이미 이 초식인 섬(纖)의 줄기가 뽑혀나온 순간 공간을 장악했다. 강기 조각들이 떨어지고 나서야 뒤늦게 도망쳤으니, 저렇게 망가진 꼴이 될 수밖에. 

푸화아아아악—!!! 

뒤이어 수도꼭지를 튼 듯, 놈의 전신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 마른 몸에서 피가 저리도 뿜어져 나오는데 왜 에센스는 보이지 않을까. 나는 잠깐 그런 생각을 했다. 

어느 한 부위도 빠짐없이 강기의 조각들이 훑고 지나갔는지, 물에 젖어 찢어진 종이처럼 너덜너덜해진 놈의 전신. 

그것은 마치, 면도칼로 수천 번 그은 걸레짝 같았다. 

— ······끄. 

한철도 두부 자르듯 하는 무수한 강기조각의 지대를, 그 대단한 육체를 쏘아내며 초고속으로 뚫고 지나갔다. 

그 덕에 만휘극파식은 더욱 큰 효과를 보았다. 아무리 검강조차 버텨내는 몸이라곤 해도, 검강의 바다에 몸을 던진 꼴이니 예후가 멀쩡한 것이 이상했다. 

상상을 초월하던 시체의 재생력도, 저 상처들을 단박에 복구시키지는 못했다. 

사실 저놈이 허벅지로나마 서있다는 게 놀라웠다. 

— 끄, 끄아아아악! 

놈의 고통스러운 괴성과 함께, 피거품 방울들과 상처로 뿜어져 나온 피가 재차 적색의 운무를 생성했다. 

육체를 재생할 시간을 벌기 위한 얕은 수. 

···그럼에도 까다롭다. 지겹고 끈질기다. 

또다시 저걸 뚫고 들어가야 하는가? 

"정말 추접하게 싸우는군. 쓰레기가." 

그러나 이번에는, 딜런이 직접 움직였다. 

구구구궁······ 

근방의 넓은 지면을 통째로 퍼낸 딜런은, 놈이 만들어낸 적색의 운무 위로 지면을 쏟아냈다. 공중에서 딜런의 마력을 머금고 우르르 쏟아진 흙더미가 산사태처럼 몽글대던 피거품 방울들을 뭉개고, 시체놈마저 땅바닥에 묻어버렸다. 

그런 뒤, 딜런은 고요하게 입을 열었다. 

"그런데 설마, 나랑 싸울때 쓰려했던 검이 방금 그거냐? 그 좆같이 좁아터진 장소에서 그깟 자존심 한 번 세워보겠다고?" 

원탁때의 일이 떠오른 듯. 

저벅. 저벅. 

미간을 찌푸리며 옆을 지나가는 딜런. 

눈치가 빠른 만큼 친절한 대답을 바라는 건 아닐 거다. 어차피 딜런의 시선은 걸레짝이 된 채 허우적대는 시체놈에게 꽂혀 있으니. 

"···대답 없는 거 보니까 맞나보군. 저 흉악한 걸 사람 상대로 쓰려고 했다고? 병신 병신 거리다가 자칫하면 내가 병신이 될 뻔했어. 이런 개같은 경우가 다 있나." 

화르르륵··· 

그 생각을 떠올리자 성질이 났는지, 그의 모공 하나하나로 마력의 불길이 빠져나오며 활활 타올랐다. 딜런이 밟고 지나간 땅은 부글거리며 녹아내렸다. 그의 커다란 발자국 모양을 따라 끓는 길이 생겨난다. 

대체 저게 마법사인지, 악마인지 구분하기도 힘든 겉모습. 

하기야 저런 무력을 가지고 있으니, 악명높은 카스트라 뷔에탕이 있는 로키에서 당당히 군벌 행세를 할 수 있었겠지. 

"이봐, 만약 살아서 돌아가게 되면 너와 절대로 상종할 일은 없을 거다. 그리고 계속 그렇게 막무가내로 설치면 한 3년 내로 죽을 거다. 숙일 때는 숙여야 나처럼 오래 살아." 

딜런의 충고아닌 충고를 듣는 사이. 

뚝··· 

마지막까지 쥐어짠 내 팔에서도 피가 떨어졌다. 

억지로 초식을 끝까지 전개하느라 근육을 비틀어 쥐어짠 탓에 고통이 꽤 컸다. 만휘극파식은 초절정의 경지로도 육신에 가해지는 부담을 온전히 버텨낼 수 없다. 그렇기에 오랜 전생에서도 몇 번 쓰지 못했었지. 

그래도 이번 생에서는 나노로봇이 있으니 금방 고칠 수 있으리라. 그간 피를 많이 흘려서 그런가 요즘 효과가 줄어든 것 같긴 해도, 아직도 회복력은 꽤 준수하다. 

퍼덕! 퍼덕! 

산처럼 쌓인 흙더미 속. 

— 끄으으윽······. 

시체놈은 몸 전체가 너덜거리는 와중에도, 어깨에 날개 비슷한 것을 만들어내려했다. 

그러나. 

일순간 어두웠던 근방의 하늘이 새파랗게 물든다. 난도질당한 놈이 날개를 완성하기도 전에, 딜런의 맹공이 시작되었다. 

콰앙! 콰아아앙! 

활활 불타는 마력을 뒤집어쓴 거인이 아까보다도 더 비쩍말라 쪼그라든 시체를 육탄으로 짓이긴다. 

무식하다 싶을 정도로 단순한 폭력이 강림했다. 

다만 그 위력이 실로 대단하여, 근방에 있는 시체들의 관심이 쏠리는 부작용이 있었다. 

뿌드득!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딜런은 놈을 손수 잡아 전력으로 찢었다. 귀청을 찢는 폭음과 매서운 열기가 연신 터져나왔다. 시체놈은 끝없이 신체를 기워붙여 재생하려 했으나, 재생하는 속도보다 해체되는 속도가 더욱 빨랐다. 

마침 놈의 목이 부러졌다. 

나는 딜런이 전투인지 폭행인지 모를 것을 하는 동안 고장난 팔을 최대한 회복하고, 감각을 끌어 올렸다. 저 깡마른놈이 지금까지 붙었던 놈들 중 가장 강한 상대는 맞으나, 저걸 죽인다고 해서 라그나로크가 가까워지진 않을 테니. 

카아아악— 

나는 하늘에서 익룡처럼 낙하하며 습격한 시체의 날개를 가볍게 갈라버렸다. 놈은 끈 떨어진 연처럼 지면에 곤두박질쳤다. 피륙 날개를 펼치며 발악하는 놈을 간단히 토막치고 시선을 돌렸다. 

— ······크어억. 

거기에는 딜런이 깡마른 시체의 수급을 들고 있었다. 꼴을 보면 아직 숨은 붙어있는 듯했다. 

"여기 대가리만 남은 놈이 할 말이 있다는데, 혹시 들어볼 사람 있나?" 

"살고자 하면 죽어야지." 

"큭큭." 

저 변절자의 오랜 생은, 오늘로 끝이다. 

놈의 비루한 사연 따위 궁금하지도 않았다. 

퍼걱! 

깡마른 시체의 머리가 가차없이 터져나가며 끝을 고했다. 핏물에 진득하게 잠겨있던 놈의 척추뼈에서 이제야 에센스가 스멀스멀 흘러나왔다. 

고농축의 에센스. 그것을 유리병에 받아 챙겼다. 

그 후에 전투를 벌이는 마탑쪽에 딜런과 함께 합류해 전장을 쓸어버렸다. 주위가 조용해졌고, 아주 잠깐 정도는 호흡을 고를 여유가 생겼다. 

후우— 

나는 호흡을 고르며 안력을 틔웠다. 

그리고 보았다. 

"······개같은 세상이군." 

아직도 많다. 너무도 많다. 

전투의 소음이 워낙 시끄러웠는지, 지평선 너머를 메운 시체들이 개미 떼처럼 이곳으로 몰려들고 있다. 

그러니 지금, 강력한 시체놈을 죽이고 에센스까지 뽑아왔다고 해서 천진난만하게 기뻐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몰려오는 시체들은 피냄새를 맡은 이상 기수를 돌리지 않는다. 움직이지 않는다면 당장은 버틸만해도 가랑비에 옷 젖듯이 언젠가는 지쳐 죽고 말거다. 

"빨리 벗어나야 해. 정말 끝도 없이 몰려온다." 

우리는 호흡을 몇 번 더 고르고는, 반쯤 정신이 나간 주민들을 재촉해 당장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라그나로크 시티 방향으로 5km쯤을 더 이동했다. 

베고. 찌르고. 자르고. 태우고. 

살육의 향연. 

지면 밑을 상어처럼 헤엄쳐 따라오던 7레벨급의 두더지를 요격해 죽이고,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손을 뻗어오는 시체들의 팔을 자르며 전진했다. 소리지르는 놈은 발견 즉시 쫓아가 죽였고, 촉수를 쓰는 놈은 촉수를 뽑아버렸다. 

주민들의 걸음이 느려 시체들을 따돌릴 수가 없으니, 이동하는 동안 전투가 쉬지도 않고 일어났다. 

그아아악! 

근방에서 배회하던 저레벨 시체들이 주민들을 발견하자마자 뛰어온다. 달리는 폼은 우스웠으나, 속도가 자동차와 맞먹는 놈들도 많으니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다. 잠시만 한눈을 팔아도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와 이빨을 들이미는 탓에. 

이어진 전투로 인해 지축이 흔들리고 파공성이 울려퍼지니, 사람 냄새를 맡은 별별 시체들이 다 몰려들었다. 괴성을 지르는 시체들까지 몰려드니 시체들의 수가 눈덩이 불어나듯 불어났다. 

꽤애애액— 

죽여도 죽여도, 어디선가 계속 몰려들어 빈자리를 채운다. 

이후에도, 우리는 끝없이 시체의 목을 베어넘기며 5km를 더 이동했다. 아마도 지금까지 사살한 시체들의 숫자가 만 단위를 훌쩍 넘어갔을 것이다. 에센스를 챙길 시간도 없어 전부 땅바닥에 버리고 가야만 했다. 

정말로, 계속 움직였다. 

그리고 총 15km쯤 가서는 시체를 확인 사살할 여력도 없어 대충 다리를 공격해 따라오지 못하게만 만들고 비척비척 걸었다. 시체들의 뜀박질은 그만 보고 싶다. 왜 저리 빠르고 집요한 것인가. 

··· 

걸으면 걸을수록 점점 지쳐갔다. 

어둡고 황량한 땅만이 계속 이어졌다. 

우리는 휴식을 취할 시간도 없어 돌아가면서 겨우 몇 분 정도씩 회로를 식히고 단전을 채울 뿐이었다. 말수도 줄어만 갔다. 서로 나누는 대화라고는, 이쪽이 라그나로크 시티 방향이 맞는지 묻고 확인하는 정도가 다였다. 

어느덧. 

주민들을 이끌고 총 20km를 호위하며 이동했다. 그때쯤 딜런이 지친 기색을 숨기며 말문을 열었다. 그의 수많은 흉터를 타고 식은땀이 떨어졌다. 

"······이제 30km정도 남았겠군. 저 멀리에 언뜻 보이는 게 장벽인지 아닌지 모르겠다." 

그 말에, 아무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라그나로크의 장벽까지 남은 거리, 최소 30km. 

숙련된 군인이라도 한치 앞도 안 보이는 극한의 어둠 속에서 30km의 거리를 주파하려면 몇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직은 장벽이 보일 거리도 아니다. 

헌데 더 큰 문제는···우리가 당장 30분도 더 버틸 수 있을지 모르는 상황에 처해있다는 것. 모두가 지쳤다. 너무나 지쳤다. 

카스트라 뷔에탕에게 언평 선생의 법부적을 쓰지 않았다면, 잠깐이라도 휴식할 시간을 벌 수 있었을 텐데. 계속 그것이 뇌리에 남아 잡념을 만들어냈다. 

"후우우······." 

사실상 휴식 없는 전투와 이동이 이어지니, 극한의 피로감이 중첩되어 쌓여간다. 초인이라 할지라도 무리에 무리를 거듭하니 발이 점점 느려지고 호흡이 가빠온다. 이제 조금 강력하다 싶은 시체의 요기가 느껴지면, 모두가 바짝 긴장해야 했다. 

딸칵! 

결국 총20km 정도를 이동한 지점에서, 나는 지금껏 얻은 에센스를 남김없이 분배해야 했다. 가륵과 깡마른 시체놈의 값을 매길 수 없는 에센스가 일행의 뱃속으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하지만 에센스를 나누어 마셨다고 해서 만능이 아니다. 아끼지 않고 태운다면 잠시동안 강력한 힘을 낼 수 있도록 도와주겠지만, 정신적인 피로가 씻겨 내려가지는 않을 거다. 

나는 아포칼립스 세계에서 무능력자로도 20년을 넘게 버텨와 이따위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약간의 내성이 있지만, 다른 이들은 아닐 터. 특히 딜런의 보좌 둘은 심히 불만스러운 기색이었다. 

양심이 참으로 없지만, 원래 사람이 그렇다. 

"······주민들의 발이 너무 느려졌습니다. 이러다간 하루가 지나도 라그나로크에 도착하지 못할 겁니다." 

듣기 좋은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냉정하게 보면 틀린 말은 아니다. 서로 부축해주느라 주민들의 걸음이 확연히 느려졌고 많은 이들이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억지를 쓰며 정신력으로 버텨내는 것도 한계가 있을 터. 

딜런의 다른 보좌가 입을 열었다. 

"솔직히, 이제는 단호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입니다." 

주민들을 버리고 우리끼리라도 도망치자는 의미. 직접적으로 꺼내진 않았으나, 그런 뜻으로 뱉은 말이란 것을 모두가 알았다. 

그렇기에 아주 잠깐의 침묵이 있었고. 

"아, 이거 길이 좆같이 험하군." 

나는 그들의 말을 무시하고는 묵묵하게 걸었다. 쉬어선 안 된다. 한 번 퍼지면 끝이라 곧 죽어도 가야함을 알고 있다. 그렇기에 나는 선두에서 묵묵히 걸어가며 전방을 가로막는 시체들을 베어 넘겼다. 

"너희 둘, 쓸데없는 소리 하지마라. 죽어가는 놈들을 살려주었더니." 

그러자 딜런이 보좌 둘을 대놓고 타박했다. 그는 로키의 일면식도 없는 주민들을 살리기 위해, 처음의 의견과는 달리 자기 수하들을 사지로 밀어넣었다. 이제와서 도망치면 그들의 죽음은 정말 의미 없는 헛짓거리로 남는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꾸역꾸역 앞으로 걸어나갔다. 

그러나. 

거기서 3km쯤을 묵묵히 걸어가자, 이제는 정말로 일행 전체가 한계에 봉착했다. 1km전부터 유독 강력한 시체들이 쉴 틈 없이 튀어나와 전투를 벌였기 때문이었다. 

"레반······." 

아힘사는 배터리 부족으로 가동을 거의 멈추어버렸고, 루베르겐 집행관과 슬레모킨의 마나회로도 터져나갈 듯 과열되어 마법을 마음껏 쓰지 못했다. 

그리고 내 몸도 슬슬 누적된 피로에 휴식을 원하는 듯,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광선이 공력을 많이 잡아 먹지 않음에도 단전은 비어버렸고 회로가 둘러진 심장 역시도 터져나갈 듯했다. 

더 이상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려 해도··· 

명확한 해결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우리의 걸음은 점점 느려졌다. 근방에 숨을 만한 도시가 없나 계속 돌아보았으나, 인류가 남긴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이곳은 인류의 터전이 아니니까. 

종래에는. 

총 25km를 이동한 지점에서 약속이나 한 듯 꾸역꾸역 걷던 주민들이 우르르 쓰러졌다. 기절해 퍼져버린 이들도 부지기수였다. 각성제에 부스터까지 투여해서 잠력을 한계까지 끌어 올렸으나, 결국은 평범한 인간의 육체가 고된 노동에 더 버티지 못하고 백기를 들어버린 것이다. 

고요한 정적이 휘몰아치는 도중. 

"······씨발, 무리다 이제." 

나와 같이 묵묵히 걷던 딜런도 제 머리를 감싸며 욕을 뱉었다. 

이거. 

아무래도 기적은 일어나지 않으려나 보다. 

내 입에서 긍정적인 말이 튀어나오지 않으니 말이다. 

고개를 들자, 역시나 하늘은 어두웠다. 해조차도 뜨지 않으려나보다. 라그나로크 시티까지 못해도 20km이상 남았다. 

앞으로도 최소 한나절은 쉼 없이 가야 하는 거리. 

그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래서 오백 명이 넘는 주민들은, 어딘지도 모르는 이 어둠 속에서 찾아오는 죽음을 기다려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해서 비교적 힘이 있는 우리에게는. 

끝까지 이곳을 지키다 같이 죽느냐. 

지금이라도 그냥 두고 떠나느냐. 

두 가지의 선택지가 눈앞에 남아 아른거렸다. 

"정말로, 개같은 세상이 맞군." 

그러면 모든 게 다 부질이 없었는가? 

허면. 

어차피 다 죽을 신세라면, 나는 여태까지 뭘 한 거지. 

사내라는 놈이, 고작해야 오백 명도 못 살려? 

나는 갑자기 심경이 복잡해진 탓에, 근방의 시체를 직접 찾아 베러 다녔다. 목이 잘려 퍽퍽 튀는 피를 보아도 진정이 될 기미가 없었다. 나는 마구 돌아다니며 50마리가량의 시체를 베었고, 묵직했던 단전이 완전히 비어버렸음을 느꼈다. 

"······." 

슬레모킨의 처연한 시선이 옆으로 느껴졌다. 시체 다리를 뜯어먹던 루돌프놈도 힘겨운 얼굴로 다가와 입을 열었다. 

"형님." 

"왜." 

"일단······아직 걸을 수 있는 사람들이라도 살려보시죠. 한 백 명이면 데리고 갈 수 있을겁니다." 

"우리 돌프는 그게 최선이니." 

"예, 아마도요." 

"종후표!!!" 

루돌프놈을 옆으로 치우고, 곧장 종후표를 찾았다. 

그러자 앵무새 법기가 이쪽으로 쪼르르 날아왔다. 앵무새의 부리에서는 심후한 법력이 흘러나왔다. 

나는 사실, 답을 알고 있으면서도 물었다. 

"종후표, 너도 비슷한 생각이냐? 정치꾼인 너라면 잘 알겠지." 

"전부 살릴 것이다." 

"······." 

종후표의 뜬금없는 대답에 나는 놀랐고, 루돌프놈은 개소리를 하냐는 듯 인상을 팍 찡그렸다. 

"갑자기 무슨 개소리야? 날개 뜯어줘?" 

신경질을 낸 루돌프놈이 손을 들어올리던 그때였다. 

"돌프야, 기다려 봐라." 

내가 루돌프놈을 말리며 유심히 앵무새 법기를 살펴보니, 어딘가 평소의 종후표와는 달랐다. 

왜인지 법기의 눈깔에 초점이랄 게 없고. 아까부터 계속 일행에 없는 듯 부리를 재잘거리지도 않았으며, 저번보다 흘러나오는 법력의 기운도 짙고 심후한 것이······. 

"나, 언평이다." 

"······." 

순간. 

젖어버린 등골에 시원한 바람이 스치고 지나갔다. 

지금, 종후표가 아닌 수도자 언평이 자신이 제작한 법기를 통해 말을 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앵무새 모양의 법기의 배가 열리며 언평의 진신 법력이 줄기줄기 흘러나왔다. 

다음 순간. 

앵무새 법기가 아까의 나처럼 하늘로 고개를 치켜들고는 입을 열었고. 

"기다려라. 하늘은 밝아질 것이다." 

화아아아아악— 

한순간, 앵무새 모양의 법기가 조각나며 봉해져있던 언평 선생의 법력이 흘러나와 천공까지 솟구쳤다. 법력은 둥그렇게 퍼져 우리 일행들을 가리는 진법을 쳤다. 

다른 세상이 주변에 덧씌워지듯. 

장벽 바깥의 황폐한 정경이 점점 사라진다. 

어두웠던 하늘은 순식간에 푸른 하늘로 바뀌었으며, 온 사방으로 곧고 높은 대나무가 쑥쑥 자라났다. 

고작 법기를 이용해 이러한 진법을 단숨에 만들어냈다. 

······말인 즉. 

원영경의 수도자인 언평 선생이, 우리가 있는 이 땅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뜻이었다. 

잠시 뒤. 

모두가 황망해 말을 잃은 그 상황 속에서. 

"드디어 왔다." 

"······." 

나는, 눈이 화등잔만하게 커진 딜런을 향해 입을 열었다. 

"네 노력을 알아줄, 나의 벗이."

#142화. 참 신기한 사람

#142화. 

과열된 마나회로가 식어가는 소리. 

귀로 들릴 리가 없으나 왜인지 들리는 것만 같다. 

우우우우웅— 

장벽 바깥의 어두운 풍경이 점점 흩어지고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사위를 점하고 피묻은 손톱을 뻗어오던, 까마득한 시체들의 파도가 진법 바깥으로 밀려나 사라진 것이다. 

충격적인 사건들의 연속은 모두 거짓이고 한낱 악몽이었다는 듯, 기적은 그렇게 찾아왔다. 

— 뭐, 뭐지? 

극한까지 내몰렸던 상황에서 곧장 평온을 되찾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5분쯤 지나도 빌어먹을 시체의 괴성이 더는 들려오지 않자, 많은 주민이 바닥에 쓰러져 잠들듯 기절해버렸다. 

가쁜 숨을 몰아쉬던 사람도, 다리가 후들거려 제대로 서있지도 못하던 사람도, 하나같이 풀린 눈으로 뒤바뀐 세상을 접했다. 

— 사, 살았다! 살았어! 

— 구하러 온 건가봐! 

— 흐으어어······ 

참았던 숨과 울음을 토해내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쏟아졌다. 아직 저들의 바람 섞인 말처럼 생존을 장담할 수는 없겠으나, 적어도 법력이 유지되는 동안 시체들은 진법의 영역을 침범할 수 없을 것이다. 

후우우우— 

습하고 축축한 땅이 아니라 넓은 풀밭이 펼쳐졌다. 곳곳에 아득히 솟아오른 대나무가 숲을 이루고 그림자를 만들어 낸다. 그 울창한 대숲에서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 더운 땀에 절었던 옷자락이 말라간다. 

몇몇 주민은 몽롱한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진법이 보여주는 환영이자 가짜 하늘이나, 저들에게 가짜 하늘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을 터. 

저 하늘은 죽어가던 자들의 희망이 되어 주었다. 그러니 저것이 가짜인지 진짜인지는 현재 중요치 않았다. 생존자들이 그토록 염원하던 것을 투사해 주었으니. 

언평 선생의 도움 덕에 한시름 덜었다. 

우리도 당장 휴식을 취할 시간을 벌었고, 한계까지 몰려있던 정신과 육체를 재정비해 다듬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작정 안심하고 있을 수는 없다. 

언평 선생의 진법 안은 확실히 안전한 장소이지만, 법력이 힘을 다하는 순간 이전과 동일하거나 더한 사태에 직면하게 될 테니. 

재수가 없다면 몰려든 시체들이 진법 근처를 떠나지 않고 온 사방을 촘촘하게 둘러싸고 있을 수도 있겠지. 

그렇기에 나는 딜런을 비롯한 전투원을 한자리에 모았다. 

8레벨 내외가 무려 일곱이고 9레벨이 한 명. 

어디가서든 높은 한 자리씩 차지하고 눌러앉을 대단한 인물들인데, 다들 지옥을 헤쳐오느라 얼굴에 검댕이와 피딱지가 붙어있는 것이 어쩐지 우스웠다. 대숲의 서늘한 바람이 그들을 희미하게 감싸주었다. 

"분위기가 이상한 게 캠핑온 것 같습니다. 형님." 

눈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루돌프놈이, 대강 풀밭에 드러누우며 적막을 깼다. 

그러자, 그전까지 움직임 없던 아힘사의 눈이 거짓말처럼 떠졌다. 

"시끄럽습니다." 

"뭐야, 배터리 끝나서 쓰러진 거 아니었어?" 

"시끄럽습니다." 

"···아니, 왜 나한테만?" 

캠핑의 필수재라고 할 수 있는 화톳불은 없었지만, 우리는 중간을 비우고 풀밭에 원형으로 둘러앉았다. 

바닥과 혼연일체가 되어 늘어져버린 로키의 주민들과는 다르게, 전투를 치른 이들은 이전까지의 처절했던 분위기에서 쉽사리 헤어 나오진 못했다. 

나는 아직도 팽팽한 긴장이 어려있는 저 눈빛들이 꽤 마음에 들었다. 운 좋게 때맞추어 진법 좀 세워졌다고 곧장 드러눕는, 정신 빠진 사람은 없는 것이다. 

휘이— 

"어우, 하늘이 새파래서 좋네요. 세상도 맨날 저러면 얼마나 좋을까요. 제 미래도 저렇게 밝았으면 합니다." 

"······." 

진작 드러누워서 편히 자빠져있는 루돌프놈은 '사람' 이 아니므로 제외했다. 계속 휘파람을 불기에 아힘사를 시켜 주둥이를 닫게 했다. 

와중에 가장 먼저 슬레모킨이 입을 열었다. 그녀는 샷건을 하도 쏴대서 얼얼한 듯, 손가락을 꼼지락대며 말했다. 

"진짜 다행이다. 간발의 차로 마나회로가 망가지지 않았어. 조금만 더 무리했으면 분명 깨져서 되돌릴 수 없었을 거야. 9레벨 에센스의 힘으로도 겨우겨우 버티고 있었는데······." 

뒤이어, 딜런이 슬레모킨의 말을 가로채 내게 물었다. 

"그래서 도대체 뭐냐? 이 괴상한 가짜 세상은." 

나는 갑작스레 우리를 덮어 보호한 이 진법이 무엇인지, 누구의 힘인지 간단하게 설명했다. 

딜런은 설명이 끝나자, 주변으로 솟아난 진법 내부의 정경을 찬찬히 둘러보더니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진주언가라면 나도 들어봤다. 무림계에서 술법으로 유명한 괴짜들이라 들었다. 수르트 시티 장벽을 담당하는 일가라고 들었는데." 

그도 진주언가를 모르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공교롭게도 그 진주언가에 내 벗이 있다." 

"어이가 없군." 

딜런은 헛웃음을 지었다. 

"로키에서 도망친 병신 겁쟁이들이 호들갑 떨며 지껄여댄 말을 듣고 곧바로 움직였어도 우리를 찾으려면 시간이 더 걸렸을 텐데? 그런데 이건 뭐, 소식을 듣기도 전에 달려온 수준이다. 그게 다 네놈 때문이라고?" 

진주언가는 수르트 시티에 있다. 정보를 빠르게 얻었다고 해도, 라그나로크나 로키 시티와는 물리적인 거리가 꽤 있는 편이다. 

여기서 '꽤' 라는건 하늘을 고속으로 비행하는 캐리어를 이용해도 최소 한나절에서 평균 하루 이상이 걸린다는 뜻. 

그러니 딜런이 납득하지 못하는 것도 이해가 간다. 무너지는 로키 시티를 도망쳐 나와 장벽 밖을 표류한지 약 하루쯤 되었을 뿐이다. 급보를 전해 듣자마자 초호화 캐리어에 올라 뛰쳐왔다 해도 너무 이르긴 하다. 

그럼에도 나는 대수롭지않게 말했다. 

"천기(天氣)를 읽었나보지. 그들은 수도자니까." 

"······천기?" 

천기라는 말에, 딜런의 보좌 하나가 아는척 하며 말했다. 

"무림의 수도자들은 하늘의 흐름을 읽는다고 합니다." 

"큭큭, 지랄하고 있군. 9레벨 마법사인 내가 아무것도 못 보는데." 

맞는 말이다. 하늘은 어둡다. 

그러나 언평 선생이 제작한 법기인 종후표가 우리를 내내 따라다니고 있었다. 그는 아마도 자신의 법기를 통해 로키의 일들을 시기 좋게 엿보았을 것이다. 

어쩌면 종후표 그놈이 직접 SOS를 치고 있었을지도 모르지. 내가 죽으면 언가의 심처에 봉인되어 있는 종후표의 몸뚱이도 화형대 위에 올라갈 터이니. 그 대단한 생존 본능이 적절한 시기에 발동했을지도. 

푸후— 

그리 생각하던 때, 안도의 한숨을 내쉰 딜런이 말했다. 

"아무튼, 지랄같은 네놈 성격에 이런 죽음의 땅까지 한달음에 튀어와 줄 친구가 한 명이라도 있다는 게 기적이었다. 장담하는데 분명 정신이 멀쩡한 놈은 아닐 거다." 

대규모 군벌 세력을 끌고다니며 허구헌날 전쟁을 벌였던 인간보다야 한참 멀쩡하지 않을까. 

그러한 생각을 속으로 삼켜내고 귀를 기울였다. 

그는 자기가 말하고도 찔렸는지 곧장 화두를 돌렸다. 

"그래도 목숨을 구해주러 달려온 인간을 두고 함부로 지껄이면 안 되겠지. 그래서 몇 레벨이냐?" 

"9레벨." 

"?" 

딜런이 이해못한 얼굴로 되물었다. 

"몇 레벨?" 

"9레벨의 수도자다." 

딜런이 흉터 가득한 얼굴을 구겼다. 

"어디 처박혀있느라 찾기도 힘들다는 9레벨 수도자라고?" 

"맞다." 

"그런 거물이 너를 손수 구하러 와줬다는 얘기냐? 도무지 무슨 접점이 있는지 이해가 안 가는데. 넌 마탑 소속 아닌가? 그놈들은 무림계에서도 교류가 없기로 유명한 놈들······아. 그거로군." 

곧이어 딜런은 이제야 이해간다는 표정을 하더니, 피곤한 기색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생각해보면 무공과 마법의 쓰임이 자연스럽고 경계가 없었지······진짜 운도 더럽게 좋은 놈이군. 대체 어떤 거물의 물건을 구해다 박은 거냐?" 

인격 메모리칩과 연관지어 상황을 금세 납득해버린 딜런은, 얼마 지나지 않은 얘기들을 늘어놓으며 입맛을 다셨다. 

"르포포이, 그 인간도 로키에 몇 안되는 9레벨이었다. 하지만 좆같은 손가락 괴물이랑 싸우다가 먼저 뒈졌지. 그렇게 허무하게 갈 양반인 줄 알았으면 내 손으로 부숴놓고 로키를 통일했어야 하는 건데." 

시간상으로는 어제 있었던 일. 

어제까지만 해도 인류의 보금자리였던 로키 시티는 이제 완벽하게 시체들의 땅이 되었다. 그러므로 저건 의미가 없는 말이니- 

9레벨이 오더라도 큰 도움을 주기 힘들 것이라는, 부정적인 얘기를 돌려한 것이겠지. 

내 예상대로 딜런은 안타깝다는 듯한 기색이었다. 

"그 수도자가 진법에 조예가 깊은 건 알겠다. 하지만 여기까지 캐리어든 구름이든 타고 온다 쳐도, 혼자 우리를 다 구해낼 수 있겠나?" 

언평 선생은 라그나로크 시티 근처에 있을 것이다. 잘하면 캐리어도 구할 수 있을 테지. 다만 어지간한 캐리어를 타고 와도 오백의 주민을 전부 태워보낼 수는 없다. 화물용 캐리어처럼 거대한 놈을 끌고오면 또 모를까. 

애초에 선주들이 캐리어를 선뜻 내어주긴 하려나? 

수도자들은 자신이 제작한 진법 안에서는 절대적인 신위를 낸다. 하지만 장벽 밖은 그들에게도 마찬가지로 가혹한 환경. 게다가 강력한 시체들이 무리를 이루어 도시를 무너뜨리고, 도망자들을 습격해 행렬을 뿔뿔이 찢어놓은 것만 보아도 평범한 일이 아니지.

그때, 생각에 잠겨있던 루베르겐 집행관이 입을 열었다. 

"이상하게 가면 갈수록 다사다난해지는군. 로키와 멀어질 때마다 언데드들의 수준이 점점 강해졌던 것 같지 않나? 마치 우리의 힘을 천천히 빼려는 것처럼 말이지." 

맞다. 

끝도 없이 늘어선 주민들의 행렬을 모두 방어할 수는 없다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처가 아주 허술하지는 않았다. 

적어도 원탁의 참여자들은 최대한의 대응을 했다. 

그런데 라그나로크와 로키의 중간 지점쯤에 이르렀을 때, 기다렸다는 듯 지능이 높고 강력한 시체들이 나타나 주민들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와중에 행렬의 어딘가에선 땅이 통째로 무너져 몇백 명씩 매몰되어 버리니, 그 거대한 혼란을 다 통제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방어선이 무너지니 지레 겁먹고 도망쳐버린 이들도 있었고, 끝까지 싸우던 이들도 있었지만 결국은 이렇게 되었다. 

"물론, 그저 기우에 불과할 수도 있는 일이다만···" 

"쓸데없는 걱정이 아닐 거다." 

말꼬리를 흐리는 집행관의 말을 딜런이 긍정했다. 지금 딜런의 표정은 꽤나 심각했다. 

"장벽 밖이 원래 좆같은 곳이라도 이건 일정 수준을 넘었어. 능광객이 죽인 두 놈을 빼놓고 봐도 그래. 9레벨급이 그렇게 많이 뭉쳐다니며 지랄을 떠는 건, 처음부터 로키를 무너뜨리고 도망치는 인간들도 사냥하기로 작정을 했다는 거다. 그런데 대체 이유가 뭐지? 그냥 인간을 잡아 처먹고 싶어서?" 

"아!" 

"?" 

딜런의 의문에 뭔가 마음에 두었던 것이 떠오른듯, 슬레모킨의 눈빛에 이채가 스쳤다. 

"9레벨 마법사를 죽인 손가락들이 마탑주님과의 대화에서 그랬어. 자신이 싫어하는 '파루무치' 의 손가락을 여흥으로 잘라 왔노라고. 피를 받으면 모든 사실을 알게 될 거라고. 나중에는 받지 않은 걸 후회하게 해주겠다고······." 

"언데드들 사이에서 반목이라도 일어나고 있다는 얘기로 들리는군. 하지만 그 한 놈 말만 믿고 결론을 내긴 어렵지." 

모두가 마땅한 의미를 찾으며 고심하는 사이, 내가 슬쩍 입을 열었다. 

"실제로, 시체들의 세상도 세력이 나뉘어 있을 수도 있지. 인류의 연방처럼." 

"뭐?" 

"그중 한 축의 지배자가 시체들을 이끌고 로키 시티를 박살내러 온 거야. 그런데 시티를 무너뜨리는 김에 강자들을 수급해 자기들 휘하에 두려고 계속 변절을 권유한 거지. 만약 휘하에 둘 생각이 없었다면, 그냥 아무렇게나 감염시키면 그만 아닌가. 어차피 끓어오르는 본능을 이기지 못하고 알아서 사람을 잡아먹을 테니까." 

"······씨발. 뭔 말인진 알겠는데, 그런 재수 없는 얘기는 집에 가서 해라." 

딜런은 내 말에 미간을 팍 구겼다. 

재수가 없는 얘기라기에 나도 굳이 그 이상 말하지 않았다. 나는 로키의 칠좌인 능광객이 내 앞에 '그놈' 을 보여준 뒤, 나름대로의 가설을 세워가고 있었으나, 모든 게 다 확실치 않은 가정중 하나일 뿐이겠지. 

곧, 딜런이 물었다. 

"그나저나, 이 진법은 얼마나 갈 것 같냐?" 

우리의 목숨을 구해준 언평 선생의 진법. 

법기에 조용히 잠들어있던 법력의 양으로 추측해 보았을 때, 오래는 못 갈 것이다. 더 유입되는 법력도 없으니. 

"외부의 개입이 없다면 반나절 정도." 

"젠장, 오래는 못 가는군. 일단 흰소리 말고 회복부터 해야겠어." 

딜런은 굵직한 침음을 흘리더니 눈을 감았다. 다른 마법사들도 회복이 필요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고요해진 언평 선생의 진법 안. 

나 역시도 가부좌를 틀고 비어버린 단전을 채우기 위해 소주천에 전념했다. 끝없는 전투로 기이하게 팽창한 혈도를 풀고 심신을 닦았다. 

그렇게. 

진법 안에서, 두 시간 정도가 쏜살같이 지났고. 

"······." 

나는 어떠한 기시감을 느끼고는 천천히 눈을 떴다. 내 고개가 저절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은 여전히 푸르다. 진법에 이상은 없는 듯했다. 

하지만 어떠한 기시감에 더해 괴이한 위화감은 점점더 박차를 가하더니, 종국에는 내 전신을 간지럽게 만들었다. 

쿵······ 

쿵쿵거리는 작은 소음. 

나의 심장이 박동하는 소리인가. 

아니면 그저 잡소리에 불과한 것인가. 

그게 무엇이든 확신할 수 없기에, 나는 감각을 한계까지 틔워 진법의 푸른 하늘을 연신 뚫어져라 바라봤고. 

쿠지직—— 

"······." 

실제로, 얼마 지나지 않아 하늘에 미세한 균열이 생겼다. 

쿠직— 

검고 가는 선이 푸른 하늘 사이를 유영하며 점점 번져나간다. 저것은 언평 선생이 친 진법이 외부의 충격으로 인해 흔들리고 있다는 뜻. 진법 안에 있는 모두를 강제로 기상시켜야만 했다. 

뒤이어 퍼져있던 주민들이 모두 단 꿈에서 깨어났을 무렵, 하늘을 가로지른 균열의 한 부분이 점차 벌어지더니. 

콰아앙! 

이윽고, 무언가 우그러지는 굉음과 함께 진법의 푸른 하늘에 날카로운 구멍이 뻥 뚫렸다. 진법 속의 세상이 깜빡거리며 점멸했다. 

우우우우웅—!!! 

언평 선생의 법력은 구멍이 뚫린 즉시, 진법을 공격한 존재에 대항하듯 위력적으로 휘몰아쳤다. 높은 대나무들이 하나둘 뽑혀 올라가며 구멍 뚫린 하늘을 막기위해 고군분투했다. 

그러나 진법을 세우고 남은 여분의 법력으로는, 진법을 부순 존재의 앞에 항거하기에는 역부족인 듯싶었다. 

"!?" 

어느 순간, 구멍 뚫린 하늘 사이로 거대한 '눈동자' 같은 것이 스쳐 지나가더니. 

콰르르르륵— 

갑자기 검붉은 액체가 폭포처럼 진법 내부로 쏟아졌다. 

그것은 누군가의 피였다. 피를 뿜어내는 하늘로 인해 푸르렀던 초원이 붉게 물들어갔다. 흑색과 붉은색이 섞인, 부패한 혈향이 평화롭던 진법을 메웠다. 

그리고, 그때였다. 

언평 선생의 다급한 전언이 사방에서 들려온 것이. 

[ 거대한 무언가가 진법을 강제로 뜯어내려 하고 있다. 한쪽으로 길을 내줄 터이니, 뒤도 돌아보지 말고 뛰어라. ] 

구우우우우웅— 

곧, 그의 말에 따라 진법 속 세상이 엿가락처럼 길게 늘어졌다. 

구멍뚫려 피를 쏟아내던 진법의 구멍이 측면으로 몇 번이나 접히며 저 멀리로 사라졌다. 덕분에 우리는 쏟아지는 피의 폭포와 약간의 거리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진법은 금세 무너질 듯 연신 크게 흔들렸다. 

"이게 무슨······." 

우지지직······ 

진법 속의 세상이 지진난 듯, 흔들리고 모두 우그러진다. 

우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야 했고. 

마지막까지 한가로이 자빠져 자고있다가 봉변을 당한 루돌프놈은, 검붉은 피를 죽죽 뿜어내는 구멍을 향해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야 이 개씨이! 팔놈들아! 적당히 좀 하라고!!!" 

* * * 

구우웅—! 

마치 태산처럼 거대한 육체. 

발할라의 산맥을 옮겨 놓은듯한 거인(巨人). 어두운 하늘 위로 얼굴이 가려 보이지 않을 정도로 드높고 웅장히 솟아있는 거체. 

구우우우웅—! 

구우우우웅—! 

그러한 존재가,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거대한 주먹을 연신 내리쳤다. 하지만 어느 한 공간에 막혀 더 나아가지 못하는 주먹. 그 형태없는 충돌부에서 막대한 기파가 연신 터져나와 지축을 터뜨리고 흔들었다. 

잠시 뒤. 

콰앙! 

계속 이어지는 거인의 주먹질에 결국,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 작은 구멍이 뻥 뚫렸다. 그러자 거체는 고개를 숙이고는, 동굴의 입구보다도 거대한 입을 벌려 뭔가를 잔뜩 쏟아냈다. 

그리고 그 압도적인 광경을, 멀리서 우묵한 눈으로 바라보던 사내. 

허공을 부유하는 캐리어 위, 화산 그룹의 검수들을 둘러본 청풍이 입을 열었다. 

"두렵다면 화산으로 돌아가 무학에 정진하십시오." 

그 말에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청풍은 고개를 내밀어 캐리어 밑을 보았다. 

······그러자 거기에는, 시커멓게 꿈틀대는 땅이 있었다. 

입을 벌리고 구멍뚫린 허공에 무언가를 쏟아붓는 거인을 중심으로, 청풍의 시야에 들어온 광활한 대지를 온갖 종류의 시체들이 빼곡히 메우고 있었던 것이다. 

청풍은 다시금 고개를 들었고. 

이번에는 근처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이내. 

하하하— 

매화건을 질끈 동여맨 청풍이 한바탕 호쾌하게 웃었다. 

시체들의 육신으로 까마득히 메워진 대지. 그에 대항하듯. 

"화산만 온 것이 아니었군. 형장은 참······신기한 사람이오." 

청풍의 시야에 들어온 드넓고 광활한 하늘 역시도, 수백 기가 넘어가는 캐리어가 빈 공간을 가득히 메우고 있었기에.

#143화. 파루무치

#143화. 

천공까지 우뚝 솟아있는 거인. 

어떤 생명체도 감히 비교조차 할 수 없는 크기. 

부패한 피부와 근육 다발, 뼈와 힘줄, 관절이 제멋대로 뒤섞여 있고, 밧줄처럼 길게 늘어진 촉수줄기가 여기저기 잘려 휘날린다. 그것은 마치 누군가가 신화 속 거인의 몸을 해체해 마음대로 재조립 해놓은 듯한 모습이었다. 

그야말로 인간의 형상을 본뜬 태산. 

인류의 도시를 방어하는 장벽보다도 월등히 높아 세계 어디에서든 보일 듯한 거체는, 고개를 숙여 구멍난 진법 안에 연신 무언가를 쏟아냈다. 입에서 새어나온 검붉은 폭포가 무형의 막을 타고 땅으로 흘러내린다. 

그 거대한 존재는 포효하며 다시금 움직였다. 

구우우우웅— 

거인의 느릿한 주먹질 한 번에 세상이 진동한다. 지축에 금이가며 쩍쩍 갈라지고 틀어졌다. 

심지어는, 대기가 주변부로 밀려났다가 다시금 빨려 들어가기를 반복하며 거인 주변의 공간이 휘어져 보이기까지 했다. 

멀리 떨어져서 보았을 때는 느릿하기 그지없는 주먹질이었으나, 만약 저 거인의 산만한 손바닥이 곧장 머리 위에서 떨어진다면 어떠한 느낌일지 청풍의 눈에 훤했다. 상식을 초월하는 규모에 압도되어 육신이 돌처럼 굳어버릴 터. 

그때, 거인이 돌연 발을 높이 들어 올렸다. 

"설마······." 

그 육중한 발바닥에, 미증유의 힘이 실린다. 

콰르르릉—— 

아니나 다를까, 거인의 발이 지상으로 곧장 떨어졌다. 천둥치는 파공성과 함께 지면이 두부처럼 뭉개지고, 피를 머금은 흙먼지와 분진이 원형의 충격파를 타고 화산 폭발하듯 뿌려졌다. 

말 그대로 초토화 되어버린 일대. 

곧, 거인은 땅을 밟았던 발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하필 발치 근처로 몰려들었다가 공격에 휘말린 시체 수백여 마리가, 거대한 발바닥에 개미처럼 눌려 있다가 처참하게 떨어졌다. 압착되어 전신의 피가 빠져나간 시체들의 살가죽이 찢어지고 분리되어 우수수 쏟아진다. 

하지만 다행히도, 구멍 뚫린 진법은 이제 그 위치에 없었다. 

[ ······. ] 

부수려던 진법이 사라지자 격노한듯, 잘 보이지도 않는 저 상공에서 핏줄이 선 거대 눈동자가 나타났다. 지상을 우습게 오시하며 내려다보는, 그 아득하고 거대한 눈동자를 목도하자 소름이 등줄기를 내달렸다. 

쿠웅. 쿠웅. 쿠웅. 

거인은 세상을 받치는 기둥과도 같던 다리를 떼어 성큼성큼 딛었다. 사라진 법력의 흐름을 찾기 위해 온 사방을 짓밟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쯤에서. 

청풍의 입이 열렸다. 

"소문으로만 듣던 파루무치······실로 압도적이구나." 

인간이라는 존재가, 한없이 작고 미약해진다. 

저릿저릿한 요기에 정과 혈이 차갑게 식는 듯한··· 

파공성에 귓전이 먹먹하고 손이 부르르 떨릴 정도의 힘. 

무인이라면 응당 느껴야 할 호승지심(好勝之心)조차 그 불합리한 육체로 억눌러 무력함만을 깨우치게 만드는 이형의 존재. 

허나 그 천재지변 앞에서도, 지금의 청풍은 오연했다. 

"제 목 내놓을 각오를 한 이들이 저리 많은데, 모양 빠지게 꽁무니를 뺄 수는 없는 노릇이지." 

하하하! 

불현듯 호방하게 대소한 청풍은 캐리어의 갑판으로 나와 섰다. 모양새가 참 아쉽게도 청풍을 곧바로 따라나오는 이들이 없었다. 두려움 없기로 둘째가면 서러울 천하의 매화검수들도 저 '파루무치' 의 파멸적인 위력을 목도한 뒤, 다리가 굳어버린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의지가 꺾여버릴 화산이 아니었다. 검수들은 몸을 어기적대면서도 본능적인 거부감과 공포심을 이겨내고 갑판으로 나와 청풍의 뒤에 도열했다. 그들은 호흡을 깊게 내쉬며 흔들리는 심신을 가다듬었다. 

그러던 순간. 

"!" 

분노해 두리번대는 거인의 측면으로, 어떤 기운이 엿가락처럼 주욱 늘어나는 것이 청풍의 예민한 기감에 잡혔다. 그들을 숨기고 보호하던 진법이 더는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도주로를 내는 것이다. 

불안정하게 늘어나던 심후한 법력의 흐름은 거인의 발치와는 조금 떨어진, 어느 한 장소에서 멈추었고. 

스르릉— 

퇴로를 특정한 청풍은 매화검을 뽑았다. 

그러고는 문득, 화사하게 웃으며 뇌까렸다. 

"형장이 좋은 가지를 내준 덕에, 이렇게 많은 이들 앞에서 피어보오." 

— ······. 

이미. 

공중을 부유하는 다른 캐리어들에서 느껴지는 다수의 시선과 강력한 기세들이 청풍의 기감에 닿아있었다. 

청풍은 그들의 시선 앞에서도 거침없이 천명했고. 

"화산이 먼저 내려가겠소." 

그 시선들을 뒤로한 채 갑판 밑으로 신형을 던졌다. 세상의 배경이 빙글 돈다. 매화가 자수된 화산의 무복이 바람의 저항을 받아 펼쳐진 돛처럼 만개했다. 

후아아아악— 

바람을 가르고 떨어진 청풍은 삽시간에 지면에 내려섰다. 근처에 움직이는 모든 것들에서 형용할 수 없는 악취가 풍겨왔다. 사람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자 땅을 메운 시체들의 머리가 동시에 돌아갔다. 

— 그르륵. 

그러나 시체들이 풍기는 악취는 곧 자취를 감추어야 했다. 청풍의 매화검이 명랑하게 흐드러지니, 은은한 향취가 악취를 간단히 누르고 일대를 자욱하게 물들였다. 

매화난만(梅花爛漫). 

후두둑- 

독한 술에 취해 쓰러지는 취객처럼. 청풍을 먹잇감으로 보고 달려든 시체들이 일거에 무릎을 꿇고는 뒤로 쓰러졌다. 목 위에 붙어있어야 할 머리가 죄다 난도질당해 땅에 떨어진 채로. 

다음 순간. 

화르르륵! 

청풍의 전신으로 짙은 자색의 기류가 들불처럼 일어났다. 

태양의 표면과도 같이 뜨거운 열기가 용천혈에서 시작되어 그의 정수리, 백회혈에 모여 서서히 전신으로 녹아내리다가, 종래에는 코와 입으로 빨려 들어간다. 매화건으로 둘러묶은 청풍의 머리칼은 금세 봉두난발이 되어 흐트러졌다. 

어둡기만 한 땅에 피어난 자색 기운. 

화산의 장문인이나 화경의 경지를 이룩한 고수들에게만 익힐 자격이 주어진다는 자하신공(紫霞神功)의 기운이, 고작해야 약관을 갓 지난 청풍의 기혈에서 솟구친 것이다.

독고웅백이 사사한 심득은 이미 아득한 천재였던 청풍의 세계를 다시 한 단계 위로 올려놓았다. 

무림계에서 누구도 비할 바 없던 후기지수는 오늘. 

후기지수라는 태를 벗고 진정한 무림에 발을 들였다. 

쾅! 

깊게 패인 땅. 청풍의 신형이 안개처럼 사라졌다. 

— 저 아이가 벌써······ 

— 뒤쳐지지 말아라! 

희끗한 머리칼이 난 매화검수들이 이미 한참을 앞서간 청풍의 뒤를 따랐다. 

청풍의 전신에서 용솟음치며 일어나는 짙은 자색의 기류를 따라, 까마득히 막혀있던 시체들의 군집이 갈려나가며 혈로가 생겨나고 있었다. 

자색의 기류가 휘몰아치며 전방으로 뻗어나가자, 뒤늦게 핏물이 흩날리며 진득한 혈화를 만들어낸다. 

살의가 담긴 자색의 기류는, 한 치의 물러섬 없이 밀집한 시체들을 양쪽으로 갈라내며 쾌속하게 진격했다. 

서거걱! 

독보적인 위력과 속도. 

매화검수들과의 거리가 꽤 멀었으나, 청풍은 개의치 않고 길을 만들어갔다. 검끝에서 자색의 격류가 번뜩이면, 경로에 있던 시체들의 목에서 반드시 피분수가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청풍의 검이 한 시체의 목을 꿰뚫은 시점이었다. 

위이이이잉—! 

하늘에서 말벌떼가 들고일어나는 듯한 굉음이 크게 울려퍼졌다. 시체를 마구 썰어내며 전진하던 청풍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의 머리 위에 나타난 것은 편대 비행을 뽐내는 수많은 소형 드론이었다. 

곧이어 몇 드론들의 불빛이 깜빡이더니, 작디작은 구슬이 초고속으로 사출되었다. 

툭! 

"?" 

길을 뚫던 청풍과 매화검수들이 구슬을 잡아 펼쳐보았다. 그것의 정체는 바로 당가의 피독단이었다. 의미를 알아챈 청풍은 즉시 피독단을 입에 넣고는 혀를 내둘렀다. 

"당가의 은원은 세상 무엇보다도 확실하다더니." 

청풍에 이어 매화검수들이 그 피독단을 받아 삼키자마자, 전장의 한복판에 있던 그들의 위로 드론 편대가 드넓게 퍼져 지나가며. 

취이이이익— 

······끔찍한 극독의 강우를 가감없이 지상에 쏟아냈다. 

시체들이 뛰는 속도보다 빠르게 퍼져나가는 극독의 안개. 

당가에서 운용하는 공격 드론의 편대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극독과 강산에 머리가 녹아내린 시체가 저들끼리 끔찍하게 뒤엉켰다. 지옥 위에 또 다른 형식의 지옥이 생겨났다. 

더해서, 하늘을 날던 비행형 시체들 역시도 비슷한 꼴이 되었다. 

푸부북···! 

드론의 전면에서 극독이 발린 세침과 암기들이 쏘아지더니, 비행하는 시체들의 눈알과 피막을 꿰뚫고 들어갔다. 독은 순식간에 퍼져나가 시체의 움직임을 무력화시키고 결국에는 머리와 목을 녹여 숨통을 끊어 놓았다. 

그 덕에, 앞서 길을 뚫던 청풍의 양 측면에 넓은 공간이 생겼다. 청풍은 기세를 더욱 격하게 몰아치며 속도를 높였다. 금속보다 단단한 피륙을 자랑하는 시체도, 어디선가 구한 검을 들고 있는 시체도, 청풍의 매화검 앞에서는 얇은 종이처럼 잘려나갔다. 

그러나, 죽음이 두렵지 않은 시체들은 끝없이 빈 공간을 채우며 꾸역꾸역 화산의 앞을 막아섰다. 검으로 오십 마리를 베면 백 마리가 새로이 나타난다. 때문에 청풍의 독보적인 무위로도 전진이 더뎠다. 

[ 도와드리죠. ] 

청풍의 귓전으로 들려온 전음. 

당가의 무인들도 캐리어에서 지상으로 뛰어내렸다. 그렇게 당가의 선두를 맡은 당령이 정확히 지면을 밟았을 때. 

스아아아악—! 

한순간, 세상의 막대한 기운이 어느 한 지점으로 빨려들어가 응집되었다. 사천당가의 캐리어와 드론들이 밀집해있던 바로 위쪽이었다. 

"?" 

대열에서 가장 뒤처져 있던 매화검수와 지상에 내린 당가의 무인들이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을 시점에는, 이미 어떠한 대규모의 마법진이 허공을 선명히 채우고 있었다. 

최신식 광학미채를 탑재한 초호화 캐리어가 준비하던 마법진과 함께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저명한 교수이자 발할라의 대부호. 

론 카산드라의 캐리어. 

— ······. 

곧, 기하학적인 마나 문양들이 마법진 사이로 줄기차게 뻗어나가 하나의 복잡한 식을 완성했다. 

대규모 마법진에 마력을 흘려 넣던 마법사들. 

그러니까 론 카산드라 교수를 필두로 한, 발할라 시립 아카데미의 교수들은 일제히 자신의 마력을 폭사해 마법진의 발현 조건을 갖추었다. 

이윽고, 그 대규모 마법진이 여러 개로 분열했다. 

분열한 마법진은 전장 곳곳으로 흩어졌다. 

달이 여러 개 떠오른 듯 서서히 밝아지는 전장. 그 마법진들은 사물을 비추는 거울처럼 서로의 진을 비추며 잘게 진동하더니······ 

갑작스레 희멀건 빛을 쏟아내 온 세상을 하얗게 물들였다. 

콰아아아아아— 

흩어진 마법진에서 일거에 터져나온 희멀건 빛이 시체로 가득한 대지를 살라먹었다. 청풍의 눈과 귀가 잠시 멀어버릴 정도로 장대한 빛무리. 

과거 대전쟁 시절, 무인들을 벌벌 떨게 만들었던 광역마법의 정수. 

"······마화경(魔華鏡)." 

고강한 경지의 마법사들이 몇 시간이나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대량학살용 마법진은, 광대한 지역에 희멀건한 빛의 폭격을 떨구고 나서야 부스스 사라졌다. 

한바탕 휘몰아치던 마력의 후폭풍이 지나가자, 대지를 까마득히 메운 시체들의 수가 확실히 줄어들었다. 

또한. 

— 아오, 썅! 씨발! 뒈져! 들러붙지 마! 

콰과광! 

갑자기 어디선가 걸걸한 욕설이 들리더니, 노을과도 같이 밝은 홍염이 일어나 시체들의 잔당을 불태워버리기도 했다. 

"······?" 

그에 청풍은 귓전까지 들려온 그 목소리와 익숙한 마력에 잠시 흠칫했다. 그러나 시체를 도륙하는 매화검은 멈출 기색이 없었다.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니었다. 

앞을 막아서는 시체를 모두 베어버리자 어느덧, 청풍은 탈출로로 낙점해 놓았던 진법의 앞까지 도착했다. 

매화검수들과 당가의 무인들이 속속 도착했고, 잠시 분별없이 몰려드는 시체들을 베어내며 기다리고 있자니. 

챙강! 

무형의 불길이 일듯 어지럽게 일렁이던 공간에서, 얼굴에 흉터가 가득한 중년의 사내가 다급히 빠져나와 고함을 질렀다. 대단히 강한 마법사였다. 그는 주변에 있는 화산과 당가의 무인들에겐 신경조차 쓰지 않을만큼 상황이 급박해보였다. 

"이런 병신같은! 피에 닿으면 감염이다! 빨리 튀어나와!" 

고함지르는 마법사의 전신에서 푸른 마력의 불길이 토해졌다. 

그에 화답하듯 흉터 가득한 마법사의 뒤로, 수백 명에 이르는 사람들과 일단의 마법사들이 따라나왔고. 

진법이 다 깨져버릴 쯤 되어 마지막으로 레반이 빠져나왔다. 

화색을 띤 청풍이 진법에서 빠져나온 레반을 반겼고. 

"오래도 기다렸는데, 이제야 나오셨소 형자—" 

쑤욱! 

"······." 

부지불식간, 거대한 기둥이 레반의 머리 위로 내리꽂히더니 청풍의 눈앞이 캄캄해졌다. 잠깐 봤던 레반 대신, 잘린 촉수와 연골이 덕지덕지 붙어있는 '기둥' 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파루무치의 거대한 발이 진법에서 빠져나온 레반을 즉시 벌레처럼 짓밟고도 모자라서 깊은 땅속까지 끌고 들어간 것이다. 

그러나. 

콰지직! 

용이 승천하듯 오색 광채를 뿜는 실선이 소용돌이치며, 근육과 살점이 박동하는 발을 뒤늦게 갈라냈다. 

그 쩍쩍 갈라진 피륙의 상처 사이로, 검붉은 혈액을 흠뻑 뒤집어쓴 레반이 실실 웃으며 빠져나왔다. 

"그래, 청풍이냐." 

"놀랐소 형장! 해후나 나눌 때가 아니오!" 

가쁜 숨을 내쉰 청풍은 이제야 대답한 레반과 함께 이동했다. 먼저 진법을 빠져나온 마법사들과 뒤따라온 당가의 무인들이 주민들을 이끌고 돌아갈 길을 내고 있었다. 저곳까지 합류해 이곳을 빠져나가야 했다. 

콰아아아아아아— 

헌데, 갑자기 하늘이 심히 어두컴컴해지고 몸이 극히 무거워 지기에 청풍은 무의식적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거기에는 어두운 하늘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애석하게도 하늘이 아니었다. 

하늘에 뼈와 살점, 관절이 붙어있을 리 없고. 

촉수가 뻗어나와 다리를 붙잡을 리도 없으니. 

"······." 

하늘이 아닌, 파루무치의 거대한 손바닥이 벌써 그들의 머리 위로 떨어지고 있는 것이다. 

실로 압도적인 요기. 닿기도 전에 무릎 관절부터 틀어지는 것만 같은 지대한 풍압. 바닥에서 뻗어져 나와 발을 묶는 질긴 촉수. 첩첩산중이다. 

'이런.' 

자하신공을 전신에 짙게 두른 청풍마저도 그 막대한 압박감과 상황에 찰나간 멈추어버렸다. 

그러나. 

팟! 

창졸간 그들과 거대한 손바닥의 사이로, 흰 얼굴에 황제같이 길고 화려한 관을 쓴 사내가 홀연히 나타나 긴 의복을 휘날렸다. 

번쩍이는 보석들로 장식한 의복에 뒷짐을 지고 허깨비처럼 나타난 사내의 기백이, 못내 익숙하며 참으로 친숙했다. 

화려한 의복에 창백하게 흰 얼굴을 한 사내. 

독고웅백. 

까딱- 

"큭, 형장!" 

외형을 드러낸 독고웅백이 가볍게 고개를 까딱이자, 청풍의 뒷덜미를 집어든 레반이 순간적으로 쏘아졌다. 그들은 어느새 손바닥의 범위 바깥에 있었다. 

속도를 버티지 못하고 바닥에 엎어진 레반과 청풍의 옆에서 부적을 쥔 언평이 기다렸다는 듯, 하얀 구름을 밟고 내려와 흥건한 피와 달라붙은 요기를 그들의 몸에서 벗겨냈다. 

뒤이어. 

풍압이 역류해 올올이 들고 일어나는 지대에 홀로 남은 독고웅백이, 지상으로 떨어지는 파루무치의 거대한 손바닥을 정면으로 맞이했다. 

허공을 답보한 독고웅백의 맨주먹에 무형(無形)의 기운이 맺혔고,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막대한 투기와 섬찟한 기백이 일대에 내리깔렸다. 

이내. 

10레벨의 무인이 전력을 담아 내지르는 궁극의 일권(一拳)과 네임드 파루무치의 손바닥이 서로의 공간을 짓누르며 충돌했다. 

————!!! 

허공이 터져 찢겨나가는 듯한 굉음이 지나가고. 

손바닥이 통째로 터져나간 파루무치의 거체가 균형을 잃고 기우뚱 거리더니, 통나무 넘어가듯 뒤로 넘어갔다. 

쿠구구구구궁—

#144화. 탈출

#144화. 

—————!!! 

초월적인 존재들의 충돌. 

힘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파동이 생겨난다. 곧 허공이 찢겨나가는 듯한 굉음과 막대한 충격파가 너울치며 주위로 뻗어나갔다. 

— 으아악! 

초인의 범주에 오른 7레벨 이상의 실력자들마저 뇌가 흔들려 다급히 기운을 펼쳐야 할 정도로 막대한 충격파. 구름을 밟고 있던 언평 선생은 즉시 법부적에 법력을 밀어넣어 주민들 쪽으로 퍼지는 여파를 상쇄했다. 

후둑···후두둑······. 

지상에 검붉게 부패한 혈액과 뼈, 살점 등이 장대비처럼 한바탕 쏟아져 내렸다. 청풍이 잠시 하늘로 착각했을 정도로 거대한 파루무치의 손바닥이 통째로 터져나가며 온 세상에 잔해를 흩뿌렸기에. 

그 장대비가 쏟아진 다음에야, 통나무 넘어가듯 둔중하게 뒤로 넘어간 파루무치가 땅을 가렸다. 육체가 너무나도 거대한 탓에 넘어지는 데만 한 세월이 걸린 것이다. 

파루무치의 근처에 있던 시체들의 위로 어두운 그림자가 지고. 

쿠구구구구궁······. 

육중한 거체가 결국 크게 넘어지며 그것들을 깔아뭉갰다. 비현실적인 중량을 흙바닥도 버티지 못했는지, 파무루치는 넘어진 자세 그대로 땅을 부수고 들어가 비대한 규모의 구덩이를 탄생시켰다. 

곧이어 구덩이를 중심으로 막대한 분진을 머금은 강풍이 불어닥치고, 지표면이 사정없이 요동치며 뒤흔들린다. 

자욱한 분진으로 쑥대밭이 되어버린 전장. 

독고웅백은 뻗었던 정권을 회수했다. 

허나 곧, 독고웅백의 관자놀이가 작게 꿈틀거렸다. 

일격으로 저 거체의 손바닥을 터뜨리고 본신마저 넘겨냈으나, 그의 팔을 타고 전해진 힘은 여지껏 겪어보지 못한 무언가였다. 

무당의 진공진인과 밤낮없는 비무를 벌이며 온갖 절초를 다 받아내본 독고웅백이라도, 감히 경시할 수 없을 정도의 위력. 

게다가 전력을 다한 일격은 전체로 따지자면 말단 부위에 불과한 손바닥만을 겨우 터뜨렸을 뿐, 다른 육체는 아직도 건재한 상태였다. 

인간이 상정한 규격을 한참 초월한 맷집과 그 자체로도 파괴적인 덩치. 10레벨의 경지에 오른 절대고수라도 감히 승부를 장담할 수 없는 강대한 적임을 일 초간의 합을 통해 알아냈다. 

일생동안 상승의 무학을 쌓아온 그의 권격을 상대로, 그저 단순하게 손바닥만을 내리뻗어 중량만으로 대적한 셈이니. 

툭. 툭. 

독고웅백은 아릿한 손을 휘저어 불편한 감각을 털어냈다. 

— 만약 인간이었다면 좋은 공부가 되었을 텐데. 

펄럭! 

곧, 금빛 자수와 보석이 가득히 박혀 화려하고 호화로운 그의 의복이 구덩이로부터 불어닥친 강풍에 휘날린다. 

고대의 황제 못지않게 치장한 그는 오늘, 하오문주가 아니라 숭무교의 주인으로 이곳에 걸음했다. 

그는 허공을 천천히 밟으며 내려와 오만히 지상에 내려섰다. 

그런 행동을 기점으로. 

— 정리해라! 

무를 숭상하고, 싸움을 숭상하며 투지를 숭상하는. 

또한 숭무교주만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숭무교도들이 수십 기의 캐리어에서 뛰어내려 살아남은 시체의 잔당들을 확인 사살했다. 

몇 분 전만 해도 살아있는 시체가 까마득히 메우고 있던 광활한 개활지에는, 이제 목이 잘리고 타오르거나 녹아내려 더는 되살아날 수 없는 죽음만이 도래했다. 

그때. 

——! 

땅바닥에 처박힌 파루무치의 잘려나간 팔에서, 끈적하고도 꺼림칙한 요기가 스산히 퍼져나왔다. 

잘게 맥동하는 요기가 세상 밖으로 그 기운을 드러내자, 누구도 피하거나 흘려낼 수 없는 불길하고 끈적한 감각이 공기에 달라붙었다. 

구구구구궁······. 

이내, 흙먼지를 뒤집어쓴 태산이 다시 들고 일어난다. 

땅을 부수며 일어나던 파루무치는 자신이 깔아 짓뭉갠 시체들을 팔로 훑는 동시에 땅거죽을 뒤집어엎었다. 

쿠지지지직······! 

자석으로 강바닥의 철가루를 쓸어 담듯, 죽어버린 시체들의 피와 뼈, 살점과 근육, 피와 관절 등이 손바닥이 터져나간 파루무치의 팔목에 자연스레 들러붙는다. 

빠득- 빠드드득- 

뒤이어 무언가를 꾹꾹 눌러 뭉치는 듯한, 빠득거리는 불쾌한 소음이 들려왔다. 부패한 신체 부위들이 요기에 압축되고 뭉쳐지는 과정에서 괴이한 진액과 구역질 나는 가스가 연신 흘러나왔다. 슬쩍 맡기만 해도 어지럼증이 찾아오는 악취가 전장을 채웠다. 

곧, 짙은 색을 띤 가스와 흙먼지가 퍼져 시야를 가렸다. 

— 불쾌하군. 

독고웅백은 고요히 뒷짐을 지고는 턱을 치켜들었다. 

그와중에, 로키 시티 생존자들의 대피가 마무리되었다. 

시체들이 쓰러진 땅 위로 착륙한 캐리어들에 나누어 탄 오백의 주민들이 얼싸안고 때 이른 신파극을 찍는 사이, 시체 잔해를 압축하는 파루무치를 보던 실력자들의 표정이 점점 결연해져만 갔다. 

파루무치의 거구가 뿜어내는 경이로운 요기로 보아, 쉽게 이 땅을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이 피부로 와닿았기에. 

본래의 '격' 을 드러낸 그 요기 때문일까. 

근방의 공기가 지극히 무거워졌다. 

······잠시 뒤. 

지상을 오만히 밟고 선 숭무교주 독고웅백의 뒤로. 

진주언가의 언평, 화산의 매화검수들과 청풍, 사천당가, 론 카산드라를 필두로 한 발할라 시립 아카데미 교수진, 숭무교의 수많은 교도와 딜런을 포함한 마탑의 일행까지. 

누군가를 구출하기 위한 목표 하나로 이곳까지 모여든 연방의 실력자들이 길게 늘어섰다. 

천지를 뒤덮은 가스와 희미한 흙먼지의 지대를 두고 대치하는 거인과 인간들. 어렴풋한 먼지의 안개 너머로 파루무치의 비대한 윤곽이 점점 가까워진다. 

곧. 

후우웅— 

넓은 보폭으로 걸음을 옮긴 파루무치가 손을 들어 휘둘렀다. 독고웅백의 무형권이 터뜨렸던 손바닥을 재생한 상태로. 

상공에서 뻗어나간 풍압에 자욱한 흙먼지와 가스들이 밀려나자, 금세 또렷하고 선명해지는 대기. 

파루무치는 작은 인간들을 무심히 내려다 보았다. 

그러다 문득, 파루무치의 거대한 눈동자가 공중에서 뒤룩 굴러갔다. 눈동자는 개미처럼 작은 인간들이 늘어서 있는 지점의 한 곳으로 향했고. 

[ ······. ] 

그 시선의 끝에는, 한 남자가 자리 잡고 있었다. 

로키 시티부터 지금의 모든 상황을 헤쳐나온 사내. 

바로 레반이었다. 

다른쪽으로 돌아갈 기미조차 없이 확고한 파루무치 눈동자. 오직 레반을 우두커니 응시한다. 

"뭐, 어쩌라는 건지." 

퉤- 

레반은 갑작스러운 이 상황에 피 고인 침을 뱉으며 읊조렸다. 그러고는 한동안 하늘에 걸린 거인의 눈동자를 똑같이 응시했다. 

그런데. 

불현듯이 떠오른 기억이 레반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레반의 손이 아스파로프의 나뭇대를 꽂아둔 허리춤을 더듬었다. 

'손가락, 요기.' 

생각해보니, 로키 시티에서 벌어졌던 전투에서 거대 손가락의 요기를 잔뜩 빨아먹은 아스파로프의 나뭇대를 아직까지도 몸에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로키의 상공을 둥둥 떠다니던 열두개의 손가락 군집. 그것을 조종하던 의문의 존재가 지껄였던 말과 지금의 상황이 묘하게 얽혔다. 

아마도 언평 선생의 진법이 펼쳐진 지 고작해야 두 시간만에 저 끔찍한 거인이 둔중한 몸을 이끌고 나타났으니 어느 정도 확신이 섰다. 

대충 전후사정을 파악한 레반이 인상을 구겼다. 

'이 요기를 따라 찾아온 거로군. 근데 제 손가락을 잘라간 놈을 잡아 죽이기라도 하겠다는 건지. 아니면 처먹은 요기를 도로 내놓기라도 하란 건지······.' 

그때, 독고웅백이 파루무치를 향해 몇 발 나아가며 입을 열었다. 

— 사람의 말을 할 줄 아는가. 

그것은 마치 가공할 위력을 지닌 신 앞에, 개미처럼 작은 인간의 황제가 청을 올리는 모습 같았다. 

일대에 목 잘린 시체들이 흘린 혈액이 강을 이루고 있으니, 어찌보면 악신에게 인신공양을 올리는 광경 같기도 했다. 

그러나 독고웅백의 전신에 둘러진 무형의 투기와 위엄있는 기백은, 하늘까지 솟은 거인의 앞에서도 무뎌지지 않았다. 

— 말을 할 줄 아느냐고, 네게 물었다. 

돌아오는 대답은 여전히 없었다. 

독고웅백이 풍기는 기세가 점점 부풀고 팽창했다. 

한층 더 가열차게 뿜어나오는 독보적인 박력. 그의 기세가 뻗어나가며 인간들과 파루무치 사이의 공간을 점차 잠식해 나갔다. 

목표는 레반의 구출이었고 반쯤은 이루었으나, 이미 흉흉한 요기를 흘리고 있는 파루무치가 인간들을 순순히 돌려보내 줄 리도 없다. 

게다가 애당초 전투에 미쳐있는 싸움광이 독고웅백이다. 

그러니 빈 공간을 그의 기세가 다 잡아먹고 나면, 신형을 폭사하며 전투의 시작을 알릴 것이었다. 

자그마치 10레벨의 무인. 

현경에 오른 절대고수에게 어지간한 간격은 의미가 없기에. 

그렇게, 줄기찬 기세가 파루무치의 코앞까지 닿은 순간. 

[ ······인간. ] 

아득한 거인, 파루무치가 처음으로 말문을 열었다. 기세를 풀어헤친 독고웅백의 신형도 잠시 멈추어섰다. 

[ 내······앞에······가져다······놓아라. ] 

그 물리적인 음성은 압도적으로 크고 아득히 울렸다. 

어찌나 큰지 귀로 들리는 게 아니라, 세상 전체가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경지가 비교적 모자란 이들은 저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지금 가장 당혹스러운 것은 레반이었다. 

가져다 놓으라는 말을 할 때에도, 뒤룩뒤룩 굴러가던 거대 눈동자는 레반에게 철썩 붙어 떨어지지 않았으니. 

레반은 허리춤에 꽂아둔 나뭇대를 꺼내며 소리쳤다. 

"이걸 말하는 거냐?" 

[ ······거기 있구나······건방······진······. ] 

"···맞군." 

바로 그 순간. 

팟! 

독고웅백의 신형이 창졸간에 사라졌다. 세상 그 누구보다도 싸움에 미쳐있는 사내. 오로지 무(武)라는 가치만을 숭상하는 숭무교의 교주. 

그리고, 시체의 손에 멸망한 독고세가의 마지막 생존자. 

독고웅백은 시체 따위와 대화를 길게 나눌 생각이 없었다. 

쐐액! 

날카로운 안광으로 허점을 노리고 있던 독고웅백의 신형이 비어있는 공간을 한 호흡에 가로질렀다. 그는 숨 한 번 들이마실 시간에 수백 미터의 간격을 뛰어넘어 파루무치의 목전에 나타난 것이다. 

이윽고, 엄청난 속도의 강권이 거침없이 폭사했다. 

콰아아앙—!!! 

파루무치의 넓은 복부에 주먹이 눌린 듯한 흉이 새겨졌다. 

권제(拳帝), 그의 웅대한 별호를 증명하듯 잔상마저 따라오지 못하는 독고웅백의 권격이 거체를 분쇄해버릴 듯 쉴 새 없이 때려박혔다. 

찰나간에 일어나는 권강의 응축과 폭발. 

가공할 위력의 권격이 한 호흡에 수십 번씩 때려 박히자, 결국 파루무치가 대응을 하기도 전에 복부가 그대로 짓이겨지며 검붉은 피의 폭포가 쏟아져 나왔다. 

쿠르르륵······. 

피의 폭포에서 잔해물이 마구 떨어졌다. 

그러나 파루무치의 짓이겨진 복부에서 썩은 뼈다귀로 이루어진 굵은 사슬 수백 다발이 와르르 쏟아져 나와 독고웅백의 전면을 봉해버렸다. 뼈다귀의 사슬 하나하나가 통나무처럼 굵고 경도가 엄청난 탓에, 독고웅백도 잠시 몸을 물려야 했다. 

한편. 

'훌륭하다. 권법으로는 내 생을 통틀어 일절이겠군.' 

레반도 광선을 길게 뽑아들고 지면을 박차고 있었다. 

누가 보아도 자신을 구하러 장벽 밖까지 목숨을 걸고 걸음한 이들이다. 뒤에 조용히 숨어있을 바에야 배를 가르고 죽는 게 나았다. 

탓! 

지면을 박찬 레반의 옆으로 살풍경이 훅훅 지나간다. 

화아아악! 

그런데, 등 뒤에서 희멀건한 마력의 빛무리가 터져나오며 파루무치의 거체를 때렸다. 

"형장, 먼저 가겠소." 

그에 더해서 매화검을 쥔 청풍이 땅을 단숨에 접으며 달려오더니, 레반마저 가볍게 추월해 파무루치의 왼쪽 발목에 검극을 박아넣었다. 

푸욱! 

"병신같은 세상, 저렇게 큰 건 반칙이다." 

심지어, 푸른 불꽃을 피워올리는 딜런까지 레반을 추월해 오른쪽 발목으로 향했다. 

복부쪽에서 공방을 펼치는 독고웅백, 그리고 각자 발목을 하나씩 붙들고 늘어진 청풍과 딜런. 

레반의 뒤쪽으로도 여러 실력자들이 몸을 던져오고 있다. 

콰득! 

그렇기에 이제는 레반도 여력을 남길 수가 없었다. 전방으로 쇄도하던 그는 발목을 비틀어 궤도를 수직으로 꺾었다. 이어서 파루무치의 지척에 이른 레반이 경공으로 기둥같은 파무루치의 다리 위로 뛰어올랐다. 

신동경의 황금빛 플라자 벽면을 오를 때처럼. 

말 그대로, 거인의 피륙을 등반한다. 

울퉁불퉁한 둔부와 등허리 부근까지 순식간에 주파한 레반은, 경사가 진 거인의 몸뚱이에 광선을 박아가며 파루무치의 목과 머리에 가까워지고 있다. 그나마 급소에 조금이라도 가까운 부위를 베기 위해 올라가는 것이다. 

콰드득! 

"!" 

그러나 늑골까지 당도해 더 위쪽으로 올라가려던 레반의 발목을, 두꺼운 살갗을 뚫고 나타난 수십의 촉수들이 방해했다. 부패한 향과 요기가 코를 찔렀다. 그 촉수들의 힘과 속도가 생각보다도 빠른 탓에, 시간이 지체되고 있었다. 

[ ······. ] 

파무루치는 눈 깜빡할 새 자신의 늑골까지 감히 등정한 개미, 레반을 찢어버리기 위해 늑골부위에 요기를 더 집중했다. 

그러자 늑골의 두꺼운 살갗이 활짝 열리며 집채만 한 손바닥들이 거미처럼 기어나와 촉수와 함께 레반을 잡아 몸 속으로 끌고 들어가려했다. 레반의 입장에서는 실로 공포영화가 따로 없었다. 발을 조금만 잘못 움직여도 지면으로 떨어질 것이었다. 

콱! 콱! 콱! 콱! 

그에 레반이 파루무치의 살갗에 검을 박아넣으며 허공에서 몸을 뒤집는 기예를 부리던 그 시점. 

퉁! 

"···언평 선생!" 

아기자기한 소리와 함께,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 대나무와 구름이 생겨났다. 법력이 느껴지는 물건. 언평이 법부적을 변형해 만들어낸 것이었다. 레반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것들을 차례로 밟고 위로 쏘아졌다. 

그렇게, 파루무치의 어깨 부위까지 이른 레반. 이미 고도가 너무도 높아서 지상이 까마득하게 내려다보였다. 레반의 하체에 강력한 힘이 들어갔다. 

쾅! 

어깨를 발판삼아 강하게 박차고 솟구친 레반은 드디어 파루무치의 안면 부근에 이르렀다. 이대로 놈의 아니꼬운 눈동자를 베어버릴 심산이었다. 

그런데. 

뒤룩! 

[ ······. ] 

분명 독고웅백을 응시하는듯 하던 거인의 눈동자가 갑자기 '힐끔' 돌아가더니. 

"?" 

갑자기 끝도 없는 암흑이 레반의 눈앞으로 펼쳐졌다. 

빛 한 점 보이지 않는 세상. 아마도 끔찍한 악취가 나지 않았다면 레반도 재빠르게 알아채지 못했거나 어떠한 진법이라 여겼을 것이다. 

'······그 짧은 사이에 잡아먹혔나? 마지막 쯤에 눈이 있던 위치가 입으로 바뀐 거로군.' 

어찌 되었건 레반은, 파루무치의 입 속에 들어와 있었다. 어지간한 동굴보다도 넓고 거대한 공동. 흐물흐물한 살점과 뼈로 가득한 장소. 파루무치는 그대로 잡아먹은 레반을 익사시킬 생각인지, 뻥 뚫린 목구멍과 입천장에서 진한 혈액을 마구 쏟아냈다. 

"후우." 

허나, 레반을 잡아먹은 것은 파루무치의 오판이었다. 

레반은 곧장 광선에 어마어마한 양의 공력을 밀어넣고 꿈틀대는 공동 안에서 자세를 잡았다. 진법 안에서 휴식하며 부서졌던 팔은 정상으로 돌아온지 오래. 

잠력까지 줄기줄기 뽑아낸 레반의 검 끝에서, 

다시 한번, 만휘극파식이 전개되었다. 

그러자. 

어두운 공동의 주변으로 바둑판 모양으로 실선이 생겨나 약간의 빛이 들이쳤다. 그리고 찰나의 시간이 흐르자, 오색광채를 뿌리는 검강과 눈부신 휘광이 실선들을 죄다 갈라내며 터져나갔다. 

파루무치의 입 속 공동이 걸레짝으로 변하며 두껍고 거대한 살덩이들이 조각조각 잘려 밑으로 떨어지고— 

서거거걱! 

가장 얇은 부위를 찾아 뚫어낸 레반이 거인의 입 속에서 공처럼 쏘아져나왔다. 레반은 허공을 박차 몸을 돌리며 자세를 잡았다. 파루무치의 턱 일부분이 사라져 있었으며 지금 광선의 앞에, 눈동자가 찌르기 좋게 놓여져 있었다. 

뒤룩! 

"······." 

허나 눈동자가 또 뒤룩대며 레반을 직시했다. 형태없는 요기가 격렬하게 쏘아져 전신을 구속하는 듯한 감각이 들었다. 

그래도 눈동자의 크기가 정말 어지간한 캐리어보다도 큰 탓에, 칼을 대충 휘둘러도 무조건 맞을 듯했다. 레반은 저릿한 요기의 파도를 억지로 버티며 칼을 뻗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부지불식간. 

[ ······ ] 

쫘아아아악! 

안 그래도 거대했던 파루무치의 눈동자가 무언가에 놀란 듯 크게 확장되었다. 살점이 덕지덕지 달라붙은 눈동자에서 흰자와 실핏줄이 밀려나고 불길하게 동그란 동공만이 남아 존재했다. 

동시에 레반을 구속했던 요기가 지금까지는 장난이었다는 듯, 둑 터진 강줄기처럼 터져나와 순식간에 전신을 난도질했다. 레반의 입가에서 몇 줄기의 선혈이 줄줄 흘러내렸다. 

그러더니. 

후우우우우웅—!!! 

일순간, 레반의 안면으로 거대한 풍압이 몰려왔다. 

눈동자를 찌르기 위해 겨누었던 자세가 단박에 흐트러진다. 갑작스런 움직임에 당황한 레반이 기감을 펼치자, 이번에는 목이 거꾸로 돌아간 파루무치가 빠른 속도로 몸을 돌려 걷는 것이 느껴졌다. 

마치 귀찮은 무언가를 보고 달아나는 것처럼. 

"?" 

전투 중, 드높은 허공에 난파된 레반은 그 거체가 사라지는 뒷모습을 황망히 바라봤으며. 

쿵···! 쿵···! 쿵···! 쿵···! 

콰광! 

끊임없이 들러붙는 독고웅백을 파리잡듯 후려친 파루무치는 몸을 완전히 돌리고는 더욱 빠르게 가속했다. 저 멀리 날아가 지면에 처박힌 독고웅백이 아무렇지 않게 다시 공중으로 솟구쳤다. 

그러나, 파루무치는 덩치에 비해 실로 빨랐다. 

한걸음에 수백 미터는 가볍게 뛰어넘을 법한 보폭. 

어떠한 방해와 강력한 공격들도 깡그리 무시한 채, 하늘과 지상을 잇는 기둥같은 두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 사라지니, 그 속도가 독고웅백과 레반의 경신법에도 크게 뒤처지지 않았다. 

— ······. 

파루무치가 밟은 지면에서 흙먼지가 해일처럼 일어나 시야를 가렸다. 얼마 뒤 그토록 거대한 파루무치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황당한 일이었다. 지금은 그저, 미세하게 쿵쿵대는 땅의 진동만이 발을 찌르르 타고 올라올 뿐. 

지상에 우뚝 솟아있던 거인이 사라진 방향에서는, 이쪽으로 미친듯이 달려오는 시체들의 까마득한 파도만이 보였다. 

그리고 레반은, 파루무치가 그리한 이유를 금세 알 수 있었다. 

"······" 

몇 번의 호흡을 고를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 

파루무치가 사라진 정반대쪽의 지평선으로, 시꺼먼 인영 두 개가 홀연히 나타났으니. 

갈기갈기 찢어진 백색 장포 차림에 도 한자루를 쥔 사내가 하나. 

커다란 사냥활을 등 뒤에 진, 귀가 뾰족하고 긴 사내가 하나였다. 

지평선을 넘어온 두 사내 중, 커다란 사냥활을 꺼내든 사내가 난데없이 활시위를 팽팽하게 당겼다. 끊어질듯 늘어난 활끝에 구 형태의 마력이 모여들어 응축되었다. 이어서 어마어마한 마력이 회전하며 공간을 찌그러뜨렸다. 

퉁! 

그 사내가 가볍게 손가락을 튕겨 줄을 놓자, 활 끝에 응축된 마력의 구가 발사되었다. 천둥처럼 가공할 속도로 뻗어나간 그것은 파루무치가 걸어 사라진 길을 따라 낮게 쏘아졌고, 파루무치 대신 이리로 몰려오는 수만의 시체들의 앞에 이르렀다. 

콰르르르르르륵— 

이내, 응축된 마력의 투사체가 그 시체들을 모조리 집어삼켰다. 맹렬히 회전하는 마력의 영역은 중력이 붕괴된 행성처럼, 가까이에 다가온 것들을 모조리 안쪽으로 끌고 들어갔다.

순식간에 회전 반경에 빨려들어간 시체들은 핏물로 화해 즉사했다. 한 번의 공격에 광활한 토지와 수만의 시체가 대부분 쓸려나가고 땅에 피거름이 뿌려졌다. 

레반이 그러한 광경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자니. 

그의 앞까지 다가온, 커다란 사냥활을 든 근육질의 사내. 

어두운 땅의 지평선을 넘어 나타난 엘프들의 군주, 아이작은 비교적 멀쩡한 얼굴의 슬레모킨과 아주 엉망이 되어 입가로 선혈을 줄줄 흘리는 레반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냉엄한 아이작의 시선은 다른 이들이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 오직 둘의 행색만을 비교해 훑었고. 

곧. 

레반의 앞까지 천천히 다가간 아이작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고생했다." 

그리고 그것이. 

오백 열 세명의 주민을 모두 살려낸 로키시티 탈출 행렬의 마지막 장면이었다.

#145화. 그만해요

#145화. 

능광객과 군주 아이작의 합류. 

처절한 로키 탈출 행렬은 그제야 종막을 고했다. 

"······." 

먼 지평선을 넘어온 능광객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러나 능광객이 로키 시티의 지척까지 접근했던 '무언가' 를 저지했기에 우리가 이렇게나마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 

능광객의 백색 장포는 거대한 힘에 찢겨나간 듯 넝마주이가 따로 없었다. 인지한 것만으로도 나를 압도했던 존재 '무언가' 는 칠좌(七座)마저 저런 꼴로 만들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무심히 세상을 깔아보는 그의 삼백안은 여전했다. 어떤 계기로 인해 무언가를 깔아보게 되어, 여기있는 모두를 구해낸 셈이다. 

그렇기에 나는 그를 향해, 극진한 예를 갖추어 올렸다. 

난데없이 절을 하자 나를 제외한 이들은 '저거 또 왜 저래?' 하는 눈으로 쳐다보았으나, 능광객은 이쪽으로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가 인사를 받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나는 곧 절을 마치고 일어나 캐리어에 올랐고. 

그렇게, 연방의 아픈 손가락인 로키 시티는 끝장났다. 

발두르보다 큰 도시인 로키가 단 며칠도 걸리지 않아서 처참히 무너졌다. 지금은 수복한 라그나로크 시티 이후, 수십 년 만에 거대 도시를 잃은 대참사로 역사에 기록될 거다. 

그 참사의 중심에 휘말렸던 나는 결국 살아남았다. 

네임드 파루무치가 흙먼지 너머로 완전히 사라진 이후, 우리는 로키의 주민들과 함께 라그나로크 시티로 귀환했다. 

그리고 라그나로크 시티로 가는 길에 시체들을 보았다. 

···어둠만이 자욱하게 내려앉은 지상. 

꽤 멀끔한 옷가지나 보호구를 걸치고 있는 시체들이, 황량한 장벽 밖을 어슬렁거리며 배회하고 있다. 하늘을 비행하는 캐리어를 올려다보는 시체들도 있었다. 그들의 초점없는 눈은 어떠한 빛도 비치지 않았다. 

— 그어억! 

그때, 지상을 배회하던 몇 마리의 시체가 캐리어를 무작정 쫓아 미친듯이 뛰어왔다. 당연히 저 느려터진 뜀박질로 캐리어를 잡을 수는 없겠지만, 그들은 괴음을 뱉으며 계속 내달렸다. 

저들은 살고 싶어 저러는 것인가. 

아니면 죽고 싶어 저러는 것인가. 

옷가지를 입고 있는 시체들은 라그나로크와 로키의 장벽 사이에 유독 많았고, 캐리어는 그 시체들의 초첨없는 눈을 애써 무시하며 머리 위를 날았다. 

30km쯤 되는 거리가 내게는 참 길고 멀게도 느껴졌다. 

* * * 

라그나로크에 도착한 뒤, 폭풍 같은 하루가 지나갔다. 

희미한 온기가 감도는 신식 호텔 방. 

푸우— 

나는 두 팔을 베고 침대에 누워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베짱이처럼 누워있는 내 입에는 담배가 물려있었다. 딱히 연초를 태우지는 않으나, 주둥이에 뭘 꽂고 있으면 기분 전환이라도 될까 싶어서. 

오늘 아침, 로키 생존자들의 행렬에서 끝내 살아남아 라그나로크까지 무사히 도착한 주민들이 처음의 5퍼센트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그러니까, 백명 중 아흔 다섯이 죽은 셈. 

대습격 이후 숨 가쁘게 벌어진 일련의 과정들에서 속도를 끌어올린 초인들을 따라오지 못한 주민들은 그대로 죽어나갔다. 

중간에 강력한 시체 무리에게 습격당한 뒤 뿔뿔이 흩어진 인류의 9레벨들이 그나마 분전했지만, 장벽 바깥 세상의 주인은 시체다. 대단한 무위를 지니고 있다고 해도 한계는 있었다. 

라그나로크 시티에는 종남의 천려일과 무당의 진천진인이 가장 먼저 살아 돌아왔다고 한다. 카스트라 뷔에탕이 부리는 인형들도, 두 고수와 비슷한 시기에 모두 라그나로크 시티의 장벽을 넘었다. 

그들은 생존자 행렬의 선두를 맡은 조. 수준 높은 9레벨 셋에 휘하에도 비범한 실력자들이 잔뜩 모여있었으니, 당연히도 가장 빠르게 장벽 밖이라는 지옥을 돌파해 도착한 것이다. 

절대다수의 생존자가, 그 선두 행렬에서 나왔다. 

그들 다음으로 라그나로크 장벽에 도착한 이는, 생존자 행렬의 측면을 지키던 점창의 육장도였다. 

검을 귀신같이 쓰던 9레벨 검수 육장도는 장벽 바깥에서 한쪽 눈과 발목을 잃은 채 '홀로' 라그나로크 시티까지 걸어왔다. 장벽 앞까지 비척대며 걸어와 쓰러졌다던가. 

육장도는 대체 얼마나 강력한 시체와 전투를 벌였는지, 내상이 극심해 죽기 직전이었다고 들었다. 지금도 수술대에 올라 치료를 받고 있을 것이다. 

육장도의 다음이 우리 일행과 따로 떨어졌던 마탑주, 일레힌 포이체카는 9레벨의 기사인 검주(劍主) 로저 슈베른과 우연히 조우하여 삼백 명의 주민들을 라그나로크까지 이끌고 돌아왔다. 

나를 포함한 마탑의 마법사들은 일레힌 포이체카가 어디선가 생존해 격렬한 전투를 벌이고 있음을 파악하고 있었다. 청록빛의 마력을 끌어다 쓰지 못한 이유도 그것이니. 

아무튼 이로써 일레힌 포이체카 마탑의 사상자는 없었다. 

그 뒤로는 발할라 다섯 번째 봉우리의 주인, 무뇨즈 투르쿤은 전투중 외따로 떨어졌음에도 수십 명의 주민들을 살려 라그나로크까지 주파하는 기염을 토해냈고. 

가장 마지막으로는 딜런, 그리고 내 일행은 무려 오백명이 넘는 주민들을 살려 라그나로크 시티 스테이션의 문턱을 밟았다. 

그리고, 우리가 살려낸 주민들이 로키 시티의 '마지막 생존자' 로 기록되었다. 

······그러니까 선두를 제외하면, 끝도 없이 늘어섰던 측면과 후방의 생존자들을 전부 합해봐야 천 명도 살아남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 그렇게나 죽어도··· 

지금, 이 세상은 어떻게든 돌아가고 있다. 

로키 시티에서 라그나로크로 죽을 고비를 넘기며 건너온 피난민들은 따뜻한 환대는 커녕 급하게 지어놓은 임시 격리구역에 강제로 격리되었다. 

로키의 주민들 대부분이 무일푼에 뒷배가 없는 평범한 이들이었으므로, 특별한 대우같은 건 바랄 수 없으리라. 

그래도 주민들을 살려 라그나로크까지 온 강자들은 연방에서도 대우를 해주어, 열악한 격리구역에 처박히는 수모를 당하진 않았다. 

나와 일행들은 얼마 전 중심가에 지어올린 신축 호텔에 방을 배정받아 각자의 공간에서 머물게 되었다. 

질겅질겅—퉤! 

입에 문 담배의 필터를 조금 씹다가 뱉었다. 맛은 없다. 

나는 어제 라그나로크에 도착했을 때부터 이리저리 분주하게 움직이다 이제야 조금 한가해진 참이었다. 

화산 그룹, 사천당가 코퍼레이션, 진주언가, 시립 아카데미, 독고웅백······여기저기서 얽히고설킨 나의 인연. 

그들은 목숨까지 내걸고는 나를 아수라장에서 끄집어 내주었다. 그래서 하루종일 분주했다. 그 과분함에 고개를 몇 번이나 숙여도 부족하지 않았으니. 

[ 형장, 그거 아시오? ] 

[ 모르겠다. ] 

[ 화산이 가장 먼저 뛰어내렸소. 나중에라도 잊어버리지 마시오. 하하하! ] 

[ 알았다. ] 

청풍이는 라그나로크 시티 수복전과 화산 본문, 독고웅백의 심득이 담긴 메모리칩까지 나와 많은 사건들을 지나왔다. 그렇기에 매화검수들까지 이끌고 출전한 것이다. 굉장히 놀랐던 점은 초절정 경지에서 폐관에 들었던 놈이, 그새 깨달음을 소화시키고 화경의 고수가 되어 나왔다는 것. 

나날이 발전하는 속도가 실로 어마어마했다. 

청풍에게 칩을 내어준 독고웅백도 녀석과 마찬가지로 불세출의 천재였을 터. 필시 그 고절한 깨달음을 소화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인데······. 

그 재능이야 이미 알고 있었으나 그래도 새삼 놀라웠다. 화산에서는 별호를 화령검절 대신 검신(劍神)으로 바꿔 불러야 하는 것 아니냐며 주접을 떨었다던가. 쪽팔린다며 진저리를 치니, 그것이 또 어린 청년의 모습같아 괜히 우스웠다. 

[ 그런데 형장, 내가 저번에 말했던 여인 기억하시오? ] 

[ ······발할라 시립 아카데미에 있다던 천재 마법사? ] 

[ 전장에서 그 여인의 목소리를 설핏 들었던 것 같소. ] 

[ ······. ] 

대뜸 튀어나온 그것은 루벤카의 얘기였다. 사실 나도 현장에서 보고 들었다. 미친년이 욕지거리를 해가며 시체들을 바싹 구워버리던 것을. 

[ 청풍아, 너무 급박해서 잘못 들은거 아니냐. ] 

[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경지에 오른 내가 잘못 들었을리가 없으니 확실하오. 나는 그 여인을 찾으러 서둘러 가봐야겠소. ] 

청풍과 해후를 나누는 시간은 참으로 짧았다. 

실제로 청풍은 루벤카를 찾겠다며 바람처럼 사라졌다. 아마 지금쯤 라그나로크 시티 전체를 이잡듯이 뒤지고 있지 않을까. 

론 카산드라 교수가 왜 그년까지 데리고 왔는지는 모르겠으나, 참으로 슬프기가 그지없었다. 

"청풍아, 말리지 못해서 이 형장이 미안하다." 

그렇게 청풍이 떠나가자, 다음으로는 사천당가의 당령이 찾아와 이전 당명의 일로 소가주를 보내 건네주었던 보은패를 회수해갔다. 

헌데 당령은 보은패 만큼의 값어치를 하지 못했다고 생각했는지, 연신 당가로의 동행을 권했다. 품속에 묵혀만 두었던 당가의 패가 생각보다도 굉장한 가치를 지니고 있었던 것 같다. 

동행은 거절했다. 

[ 패는 회수해 가지만, 당가는 언제까지고 기억하고 기다릴게요. ] 

[ 아냐, 괜찮다. 그러지 말고 나를 그냥 잊어줘. ] 

[ 당가는 잊지 않아요. 그럼 이만. ] 

사천당가의 당령은 날 언제까지고 기억하고 있을 테니, 좋은 말로 할때 당가 본문으로 와달라는 협박만을 남기고 당가의 무인들과 함께 떠나갔다. 

당가의 힘으로 큰 피해없이 저레벨 시체들을 쓸어버린 것은 사실이나, 왜인지 아직도 당가는 조금 꺼려지는 부분이 있다. 

[ 후훗. ] 

카산드라 교수는 별 말이 없었다. 

그저 내 앞에서 자랑스러운 얼굴로 한번 후훗— 웃고는 같이 온 사냥꾼, 아카데미 교수들과 발할라 시티행 캐리어에 몸을 실었다. 대체 아카데미의 교수들을 어찌 구슬려 여기까지 끌고 왔는지는 모르겠다. 수완이 기이할 만큼 대단한 여자다. 

카산드라 교수 다음으로 스테이션에서 마주한 독고웅백도 수련은 끝이 없다는 말과 함께, 숭무교의 교인들을 이끌고 수르트로 돌아갔다. 독고웅백과 한 번의 비무가 남았는데, 그게 언제가 될런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그들을 떠나보낸 뒤, 호텔로 돌아와 생각에 잠겼다. 

대가리에서 전뇌칩을 빼고 탈출한지 이제 2년을 겨우 넘긴 내가, 멸망으로 달려가는 세상의 끝을 조금이나마 늦추어 보겠다며 한 다짐이 떠오른다. 

그 대담한 다짐을 시험해보겠다는 듯 나타난 파루무치는 꽤 많은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무엇보다 이번 일로 확신하게 된 것이 있었다. 

"강하다." 

"응? 뭐가?" 

침대 옆에 걸터앉아 꼼지락대던 슬레모킨이 되물었다. 

"시체들은 일반적으로 세상에 알려진 것보다 몇 단계는 위다. 이름있는 놈들일수록 그 정도가 더한 것 같은데." 

"그야 뭐, 어쩔 수 없지. 괴물의 발구름 한 번에 지진이 일어난다는 말을 들으면 어떤 주민들이 좋아라 하겠어? 그냥 기괴하고 공포스럽기만 할걸. 모르는 게 약이지." 

나는 그녀의 말에 어느정도 수긍했다. 

압도적인 거체가 주는 위용. 

격이 다른 요기에 실로 불합리한 재생력, 살갗이 열리거나 눈과 입의 위치가 뒤집히는 등의 기괴한 전투 방식. 

무식한 생김새에 어울리지 않게 지능도 높아서, 다가오는 능광객과 아이작의 기운을 느끼자마자 일찌감치 몸을 돌려 사라졌다. 

그 파루무치라는 놈을 한 번 마주하고 오니, 살아남은 인류의 마지막 도피처인 시티 장벽이 요즘따라 낮게만 보인다. 

한 번 시체들에게 빼앗긴 전적이 있는 라그나로크의 장벽이라 괜히 더 그렇게 느껴지는 것인가. 

뭐 그래도 목적 없이 살다 세상이 생지옥이 되는 꼴을 지켜보는 것보다야, 미리 알고 다음을 대비하는 게 훨씬 낫겠지. 

"큼큼." 

좋다. 대비 끝. 

덜컥! 

내가 급히 목청을 가다듬는 사이, 아이작이 호텔방의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고. 

나는 어젯밤 이 작은 호텔방에 나와 슬레모킨을 반강제로 집어넣은 아이작을 향해, 사내다운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아무래도 제가 앞으로 할 일이 많아, 혼인은 힘들 것 같습니다." 

"내 딸아이와 하룻밤을 보냈지 않나." 

"아무것도 안 했습니다." 

"어째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 설마 약혼하겠다는 말이, 그저 가볍고 철없는 장난에 불과했던 건가. 인간들은 요즘도 그런 식으로 행동하나 보군." 

"······." 

냉담한 아이작의 반응에 나는 슬레모킨을 흘긋 바라봤다. 간밤에 자기가 생각해도 호텔방에 욱여넣은 것은 아버지가 좀 너무하셨다며 따끔하게 말해주겠다던 그녀였다. 

곧, 귀를 쫑긋 세운 슬레모킨이 아이작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 그만해요." 

"······." 

그만해요? 설마 저게 끝이란 말인가. 

아. 

이거, 엘프들과는 쉽게 엮이지 말았어야 했군. 

* * * 

칙칙한 적안을 가진 인형. 

와인으로 목을 축인 뷔에탕이 입을 열었다. 

"오백명 넘게 살렸다고? 제일 후위에 있었으면서?" 

선두 행렬에 포함된 덕에 살아남은 수많은 주민들에 비하면 오백명은 아주 적은 수였으나, 동행한 주민들을 한 명도 빠짐없이 살려왔다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카스트라 뷔에탕의 기준에서는 무가치한 이들을 살리기 위해, 가치있는 실력자들이 목숨을 배팅해 무모한 여정을 한 것과 다름없었으니. 

생존률이 가장 높던, 로키 행렬의 가장 선두에 있던 뷔에탕도 라그나로크까지 주파하는 과정에서 그간 모아온 정예 인형의 절반 이상을 잃었다. 뼈가 시린 손실. 대형 세력을 상대로 전면전을 벌일 수도 있는 대전력이었다. 

바꿔 말하자면 그들을 습격한 시체들이 굉장히 강했다는 것. 

"그런데 여차저차 구원이 왔다고 해도 오백명. 게다가 그 녀석 한 명 살리자고 뛰쳐온 면면들도 정말 하나같이······화려하네." 

하지만 무슨 동화 속에나 나올법한 얘기를 전해듣자, 뷔에탕은 연신 터져나오는 실소를 참지 못했다. 

"심지어 딜런, 당신도 그 사이에 끼어서 싸웠다고?" 

"······." 

"풋, 진짜 말도 안 돼." 

게다가 로키 시티를 주름잡던 대군벌인 딜런도 그들의 영웅행에 포함되어 있었다. 저 인간, 장벽 밖이라 잠시 미쳐버린 게 틀림없지 않을까? 

뷔에탕은 약간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다가 조용한 음성으로 읊조렸다. 

"그래도 스토리는 좋네." 

지금의 연방정부는 로키 시티의 멸망이라는 엄청난 대악재를, 온갖 영웅적인 스토리들로 덮어보려 부단히 노력하고 있었다. 

미디어들이 기적과도 같은 그 이야기를 칭송하며 연일 특보를 때렸다. 연방 내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거다. 연방군을 좆, 개새끼 등으로 지칭했던 '젊은 영웅' 사건 마저 이번의 활약으로 인해 온데간데 없이 가볍게 묻혀버릴 정도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잠시 뒤, 와인을 비운 뷔에탕은 흥미롭다는 기색으로 물었다. 

"그래서 그 아이랑 뭘 해보겠다고?" 

흥미로워하는 뷔에탕의 물음에. 

딜런이 흉터 가득한 얼굴을 긁으며 답했다. 

"로키 시티는 옛날부터 군벌들의 세상이었으니 마음대로 활개쳤지만, 여기서는 쉽지 않을 거다. 특히 지금은 더 그렇지. 밑에 있는 놈들은 죄다 뒈져나갔고, 쌓아온 기반도 로키에 모조리 두고 왔으니까." 

"아쉽게도 난 그렇지 않은데. 아무튼 그래서~?" 

"그 레반이라는 놈한테 회사 하나 차리자고 제안해볼 생각이다. 여기 라그나로크는 이제 막 태동하기 시작한 도시다. 일찍 자리 잡아서 나쁠 게 없지." 

"······." 

회사를 차리겠다는 말은 곧. 

라그나로크 시티에 하나의 독자적인 세력을 만들겠다는 뜻. 

고상하게 팔짱을 낀 뷔에탕이 눈앞의 딜런을 지그시 바라봤다.

#146화. 딜런

#146화. 

"그 많은 할 일, 다 마치면 알 헤임달로 와라." 

쿵! 

아이작은 호텔방 문을 부술듯 사납게 닫았다. 

"······." 

끼이익- 

이곳은 최근 지어올린 신축 호텔이라고 들었는데, 그가 얼마나 우악스럽게 문을 여닫았는지 벌써 삐걱대는 소음이 난다. 

호텔 매니저를 불러야겠군. 

발할라 산맥 꼭대기처럼 싸늘하게 식어버린 방안의 공기. 

침대맡에 앉아 귀 끝을 매만지던 슬레모킨은 멈칫거리더니, 앓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으, 저거 자동문인데. 무조건 고장났겠다······." 

"혼인 얘기는 저번에 대충 마무리된 거 아니었나?" 

"아무 걱정하지 마. 어차피 별다른 일 없을 거야." 

"거의 싸대기를 후려칠 분위기던데." 

"······아, 아냐. 만나자마자 우리보러 고생했다고 했잖아. 원래 가끔씩 저럴 때가 있어." 

"그런가." 

그리 대답한 순간, 갑자기 시체들의 행진을 한 줌 핏물로 갈아버리던 아이작의 신위가 떠올랐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거대한 마력을 응축해 투사체로 쏘아내던 그 광경이. 

음. 

강제로 호텔 방에 욱여넣은 행동력을 보면, 유야무야 넘어가려다간 무슨 일이 생겨도 단단히 생길 것 같은데. 

"아무튼, 내가 다 알아서 처리할게. 그리고 오늘 일로 알겠지? 내가 괜히 집에서 뛰쳐나온 게 아니라는 거. 객관적으로 봐도 좀 이해하기 힘든 엘프라니까." 

슬레모킨은 도저히 못말리겠다는 듯한 얼굴로 머리를 몇 번 젓더니 표정을 바꾸었다. 그녀는 이 싸늘한 분위기를 피하고 싶은듯 어색하게 웃었다. 

어떤 이유로 아이작의 태도가 저리 극단적으로 변했는지 잘 모르겠다. 장벽 밖에서 멀쩡히 살아있는 딸을 보고 감성이 풍부해지기라도 한 것인가. 

뭐 이유야 어찌 되었든, 아이작은 제 속을 쉽게 내비치지 않는 엘프이기에 물어봐도 소용은 없을 것이다. 하기야 철혈을 표방하는 군주는 원래 제 진의를 감추는 것을 미덕으로 삼아야 하니, 어쩌면 저게 가장 훌륭한 태도일지도 모르겠군. 

그래도 아이작은 어딘가 닫혀있으며 인간을 잘 못 믿고, 변덕이 심한 엘프일지언정, 절대로 정이 없는 자는 아니다. 슬레모킨이 정말로 위험할 것 같자 구하러 온 것은 물론이고, 과거 루돌프놈을 짐승으로 만들 수 있었던 것도 아이작의 도움이 컸으니. 

거기다 그토록 강력한 아이작이 능광객과 동행해 지평선을 넘어왔다는 것은 '무언가' 를 같이 막아섰다는 뜻도 된다. 그도 목숨을 걸고 사선을 여러번 넘나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뭔데?" 

상념을 이어가던 때, 슬레모킨이 가까이 다가와 넌지시 물었다. 

호기심 가득한 얼굴. 

슬레모킨은 어젯밤부터 뜨개질에만 몰두해 있었는데, 이제 뭔가를 더 만들기는 지겨워진 모양이다. 

"일단은 라그나로크에서 쉬어야지." 

"여기서 쉴 거라고? 뭐야······그게 꼭 해야 할 일이었어?" 

은근히 실망한 기색을 보이는 슬레모킨 앞에서. 

나는 다시금 상념에 빠져,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했다. 

이번 로키시티 탈출행으로 느낀 것이 꽤나 많았으니, 이리저리로 가지를 뻗치는 생각들을 정리하고 다듬기에 시간이 좀 걸렸다. 

얼마 뒤, 적당히 정리를 마친 나는 말문을 열었다. 

"로키 시티가 무너졌으니 새로운 시체가 수백, 수천만 마리씩 생겨났을 거다." 

"그거야 그렇지만, 혼자서 너무 자책하지는 마.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 우리는 정말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 

"수천만 마리의 적이 하루 아침에 늘어난 거지. 그래서 장벽 밖을 배회하는 그 수많은 시체를 나 혼자, 아니면 고작 몇 명이서 성불시키려면 평생을 써도 불가능하겠다는 판단이 섰다." 

"아···아, 죽여버리겠다는 얘기였구나? 난 또." 

어딘가 안쓰럽다는 얼굴로 위로해주려던 슬레모킨은 조금 머쓱했는지, 뾰족한 귀를 축 늘어뜨렸다. 

"그래서, 여기서 쉬고난 다음에는 뭘 할건데?" 

슬레모킨의 질문에 나는 창문 커튼을 걷었다. 

우리가 있는 신축 호텔은 라그나로크 중심지에서 살짝 떨어진 외곽. 창을 열면 시티의 중심지가 될 곳이 보인다. 

그리고 현재 가지각색의 대형 빌딩들의 건설현장으로 가득한 라그나로크의 중심 지구에, 유일하게 펜스만 쳐진 채 덩그러니 놓여있는 노른자 땅이 보였다. 

내가 말했다. 

"수련, 그리고 남는 시간에는 기업인 흉내나 내보려고." 

"?" 

"마침 라그나로크 시티 중심에 받아둔 필지가 있다. 계속 묵혀두기에는 아까울 정도로 입지가 좋은 땅이지." 

"수복전 공적으로 연방에서 내준 땅 말하는 거야?" 

"그래, 슬슬 그 위에 뭐라도 하나 세워야겠다." 

"왜? 갑자기 건물주 행세라도 하고 싶어졌어?" 

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용히 뇌까렸다. 

"반 바이오 컴퍼니에서 바이오를 빼고, 간단하게 반 컴퍼니······이름은 나쁘지 않군." 

— 형님! 

벌컥! 

그때, 방 안으로 들어온 루돌프놈이 신난 얼굴로 호들갑을 떨었다. 

"형님, 시티 뉴스 보셨어요?" 

"방에 처박혀 있느라 못 봤다. 뉴스에서 뭐라더냐." 

"한번 보실래요? 지금 형님을 거의 하늘 끝까지 띄워줘가지고, 당장 사이비 종교를 차려도 되겠던데요. 추종자도 생기고 막 그렇습니다. 로키 시티의 구원자 어쩌고······이 기회에 땀냄새 나는 남자놈들 말고 아리따운 분들로만 쏙쏙 골라 받아서 주지육림을 꾸리시죠. 형님만 괜찮다면 제가 면접관을 맡겠습니다." 

나는 돌프 저놈이 하도 호들갑을 떨어대니, 그게 뭐든 보기가 싫어졌다. 

더해서 급격하게 몰려오는 피로감. 

저것도 재능이라면 재능이겠군. 

"그냥 안 보련다. 너나 많이 봐라." 

"아니 왜요! 형님! 형님!" 

* * * 

나는 호텔 로비까지 귀찮게 들러붙는 루돌프놈을 대강 때려눕혀 놓고는, 라그나로크 시티의 중심가로 나왔다. 

천천히 걸으며 시티의 정경을 둘러본다. 

여기저기, 노란 안전모를 쓴 건설 노동자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무언가를 지시하고 있다. 힘 좋아보이는 휴머노이드가 절반 이상이었다. 

— 거기 똑바로 잡고 올리라고! 뒤질래! 현장식당에서 충전 안 했냐? 

— 이 기둥은 철근을 덜 넣어도 안 무너질 것 같은데? 요즘 자재값도 비싼데 너무 쓸데없이 튼튼하게 짓는 거 아닌가? 

— 설계할 때 진작 절반 해처먹었다. 더 빼면 무너져. 

— 그래? 몇 개는 슬쩍 빼도 괜찮아 보이는데. 

— 멍청아, 중심가 건물은 잘못 지었다간 좆돼. 

— 왜? 

— 중심지는 돈 많은 놈들이 산단 말이다. 해먹어도 어디 외곽 같은데서 몰래 해처먹어야지. 외곽지대는 철근 빼고 순살로 지어 올려도 항의할 놈들이 없거든. 

— 오오! 

볼거리가 있는 광경들이 연속해서 이어졌다. 

폐허의 형태로 다 쓰러지기 직전이었던 라그나로크 시티를 수복했다며 축제를 벌이던 게 바로 엊그제 같은데, 빌딩들이 바쁘게 올라가고 있다. 기술이 좋아서 그런지, 꽤 진척이 빠른 듯하다. 

'그래도 거대 도시의 태가 나려면 조금 멀었나.' 

라그나로크 시티 수복은 비교적 최근의 일. 

그렇기에 아직 시티의 부자들이 모이는 중심가라고는 해도, 폐허 위에 있던 이전의 건물들을 철거하거나 리모델링해 각종 빌딩들을 한창 지어 올리는 중이다. 간단히 말해 라그나로크 전체가 대규모 공사판이라고 할 수 있겠다. 

구구구궁! 

길거리에는 각종 중장비와 휴머노이드들이 오래되어 쩍쩍 쪼개진 도로를 걷어내고, 새로운 길을 깔아나가고 있다. 버려진 하수로를 정비하고, 발전소와 이어진 전선을 새로 매설하는등 인프라 작업이 한창이다. 

라그나로크. 

신화 속에서 세계의 종말을 뜻하는 무시무시한 단어이자, 이전의 세상이 무너지고 새로운 세상이 생겨나는 기점. 

공교롭게도 로키 시티가 멸망한 뒤에, 라그나로크가 더 활발하게 살아나고 있는듯 하다. 물론 뭐라도 끼워 맞추고픈 내 눈에만 그렇게 보이는 걸 수도 있다. 

하여튼, 라그나로크 시티는 로키의 생존자들을 포함해 앞으로도 많은 인구가 추가로 유입될 테고, 땅덩이도 발두르 시티보다 크니 뻗어나갈 가능성도 무궁무진하다. 

말인즉, 각 기업과 세력들이 눈을 시뻘겋게 뜨고 출혈 경쟁을 벌이느라 성장 가능성이 낮은 다른 도시들보다 기회가 많은 땅이 될 것이다. 

이제서야 중심지구의 첫 빌딩들이 건설되고 있는 만큼 이곳저곳에서 여러 군상이 모여들 거고, 라그나로크만의 새로운 문화를 형성하고 발전시켜 갈테지. 

"종교를 세워도 될 정도라면, 기업 정도야······." 

몇 년 전이라면 엄두조차 못냈을 일이나, 루돌프놈이 말한 대로 지금처럼 내 주가가 하늘 끝까지 솟았을 때, 혹은 연방에서 띄워준답시고 열심히 밀어줄 때 뭐라도 시작하는 게 나을 것이다. 

일레힌 포이체카 마탑 내에 기업이나 세력을 운영하지 못한다는 제약도 따로 없다. 기업과 마탑 양쪽에 소속되어 있는 마법사들은 이미 많고, 당장 유크 루베르겐 집행관만 보아도 연방정부에서 일을 하고 있으니. 

이전부터 생각해 두었던 계획을 현실로 옮기기 좋은 시기다. 

라그나로크 시티라면 내 행보를 방해하는 세력도 적을 것이다. 수복전에 직접 참여했다는 타이틀도 있는데다, 아직 시티의 산업 전반이 완성되지 못해서 무림계가 꽉 잡고있는 수르트나 마법계의 발할라. 또는 다른 도시들보다 운신이 자유로울 터. 

또, 그간 연을 쌓아온 이들의 뜨거운 의리도 확인했다. 장벽 바깥까지 나를 살리기 위해 걸음할 정도라면, 어지간한 일에는 곧 죽어도 내 손을 들어줄 이들이 생겼다는 얘기. 

다시금 결심이 섰다. 그렇기에 결정을 내렸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는 말이 있다. 나는 아직 라그나로크를 떠나지 않은 언평 선생을 찾아갔다. 

우우웅— 

그는 현재 길가에 작은 진법을 하나 치고, 그 안에서 법기를 만드는 중이었다. 그간 종후표를 담아두었던 앵무새 법기가 이번에 망가져 새로 제작하고 있는 것이다. 

"언평 선생." 

"다른 이들은 잘 배웅해 주었냐." 

"어렵게 걸음해준 이들이니 당연히 시간을 써야지요. 배웅해 보낸 뒤에 곧바로 선생을 찾아오려 했는데, 어젯밤에 예상치 못한 일이 생기는 바람에 늦었습니다." 

언평 선생은 법기제련에 집중하며 말했다. 

"커다란 활을 쓰는 이족이 그리 했겠군. 네게 가진 관심이 지대해 보였다." 

"그걸 선생께서 어떻게 아셨습니까." 

"광활한 장벽 밖에서, 너를 구하러 온 이들을 어떻게 전부 한 곳으로 모았다고 생각하는 거냐." 

"그야, 선생이 힘을 쓰셨겠지요." 

"알면 됐다. 어제오늘 법력을 많이 쓴 탓에 몸이 힘드니, 더 말 시키지 마라." 

"알았습니다." 

나는 언평 선생이 새 법기를 다 만들 때까지 기다렸다. 그래도 작업의 막바지 단계였는지, 언평 선생은 저번의 앵무새 법기를 똑같이 만들어 내게 건넸다. 

"놈을 이어두었다. 말은 며칠 내로 시작할 거다." 

"다행이군요. 그런데 요즘 진주언가는 어떻습니까." 

"바쁘다. 수도계 놈들이 원체 말을 안 들어먹어서." 

"어서 발할라 산맥 첫 번째 봉우리 위로 가셔야지요." 

"얼굴에 금칠하려 들지 말고 할 말 있으면 해라." 

"그럴까요?" 

나는 소중한 벗 언평 선생에게, 라그나로크 시티를 거점으로 기업을 세워보겠다는 얘기를 가감없이 털어놓고 도움을 부탁했다. 

이를테면 기업의 빌딩 안에 언가의 진법을 세운다든지 하는 얘기나, 무력을 쓸 일이 생기면 수도자들을 이끌고 패싸움에 동참해줄 생각이 있는지 등등. 

아무튼 그 뒤로, 농담 식으로 던진 황당무계한 이야기들까지 유심히 들어주던 언평 선생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알아서 해라. 언가는 널 지지해 줄 테니." 

"고맙습니다." 

"다만, 네 벗으로서 하고 싶은 부탁이 하나 있다. 기왕에 기업이라는 걸 세울 거라면—" 

"클로에를 찾아 라그나로크 시티로 데리고 올 생각입니다. 기억하기로 꽤 유능한 비서였으니, 여기서도 한 자리 차지할 능력이 있을 겁니다." 

"음." 

륭의 사무보조이자, 마지막을 지켰던 클로에. 

언평 선생은 겉으로 티는 잘 내지 않았으나, 륭의 기억이 스며들었을 테니 필시 클로에를 신경쓰고 있으리라 여겼다. 

그렇기에 나는 언평 선생의 부탁을 가로채 즉답했고, 언평 선생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뜻은 잘 알았다. 나는 그동안 이곳을 떠나지 않고 있겠다." 

그렇게 나는 언평 선생과 대화를 잘 마친 뒤, 앵무새 법기까지 받아 호텔로 돌아왔다. 

그런데. 

"얼굴 보기 참 힘들군. 존나게 유명해져서 그런가." 

대뜸, 딜런이 호텔 로비로 찾아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로키 시티 탈출 이후로 다시는 볼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나는 솥뚜껑 같은 손으로 악수를 건네는 딜런을 지그시 응시하며 물었다. 

"살아 돌아오면 절대로 안본다고 단언하지 않았나?" 

"그 말은 지금 취소한다. 악수하기 싫냐? 그럼 바로 비즈니스 얘기로 들어가자고." 

딜런은 꽤나 결연했던 그때의 다짐을 간단히 취소해버렸다. 역시 로키에서 깽판을 놓던 대군벌다운 결정이다. 

곧이어. 

내가 자리에 앉자마자, 딜런은 말을 이었다. 

"같이 회사 하나 만들어보자. 이 라그나로크에다가." 

"······." 

"오, 바로 거절하지 않는군. 솔깃하지?" 

어디서 내가 하던 생각이 새어나가기라도 했나. 

아무튼 저 사내가 왜 저러는지는 대충 짐작이 갔다. 

"세력이 해체되고 쌓아온 배경마저 날아간 참에, 날 구하러 온 이들을 보고 생각을 고쳐먹은 거로군. 로키에서 군벌짓 하던 놈을 받아줄 세력은 몇 없으니." 

"네가 봐도 그렇게 보이냐? 정답이다. 큭큭큭. 그리고 뭐든지 시작할 때 배경이 든든한 게 좋지." 

마침 본격적으로 기업을 세워볼 마음을 먹긴 했는데··· 

하필 딜런 이 사내라. 

물론, 9레벨의 마법사는 쉽게 볼 수 있는 실력자가 아니다.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강대한 억제력을 갖는 훌륭한 전력. 

솔직한 말로 곧장 욕심이 났다. 

소속 없는 9레벨 마법사를 어디가서 구하겠는가? 만약 아군으로 둔다면 천군만마와 다름없다. 

게다가 내가 이전부터 세워둔 계획을 실행하려면, 딜런처럼 힘이 있는 이들이 필요하다. 기존의 세력들과 다툼이 꽤 많이 생길 예정이라. 

허나 딜런은 껄끄러운 점이 많았다. 로키 시티를 멋대로 휘젓던 군벌 출신이니, 그간 쌓아놓은 악행과 업이 오죽하겠는가. 

하지만, 그는 그런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처음부터 적대적인 시선들을 매달고 할까봐 꺼려지나? 너무 걱정마라. 그래도 이번에 로키 주민들을 구해온 전적이 있어서, 연방에서도 면죄부를 좀 줄 거다. 언론 분위기가 뜨겁거든. 그리고 솔직한 말로 씨발, 정부 새끼들이 날 쳐죽이길 할 거야 뭘 할거야. 9레벨 마법사 안 필요해?" 

딜런이 웃으며 늘어놓는 말을, 나는 못이기는 척 들었다. 

"군벌이든 기업이든 전부 첫 알박기를 잘하느냐 못하느냐에서 판가름 나는 거야. 무림계 구파일방 새끼들도 결국 시초에 알박기를 잘해둬서 지금까지 큰 거잖아. 그쪽 노하우는 내가 좀 있거든." 

"라그나로크 시티를 잡아먹자는 말로 들리는데." 

"정확히 들었다. 잡아먹다 뿐이냐? 아니지. 아주 쪽쪽 빨아먹을 수 있다. 시체사냥 사업이든 뭐든, 우리 무력이면 꿀릴 게 뭐냐." 

쾅! 

실실 웃던 딜런은, 돌연 두꺼운 손바닥으로 테이블을 치며 말했다. 

"라그나로크 시티는 때 안탄 청정지역이야. 이제야 부랴부랴 빌딩들을 지어올리는 중이지. 이 호텔도 봐라. 완전 신축이잖아. 먹을 게 천지에 깔려있다는 말이지." 

"뷔에탕 그 여자는 아직까지 별 말 없던가?" 

"뭐?" 

"뷔에탕도 라그나로크 시티에 있을 텐데, 그냥 가만히 있겠다던가? 그럴 위인이 아닌데." 

"후우." 

그에, 딜런이 한숨을 내쉬더니 목소리를 줄여 속삭였다. 마나 알갱이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 씨발. 안 그래도 말하려고 했는데. 네가 허락하면 자기는 당연히 한자리 하는 거라고 지랄을 하던데, 혹시 둘이 전에 무슨 일 있었냐? ] 

[ 아니. ] 

[ 젠장! 이 좆같은 얘기는 나중에 따로 하고, 아무튼 같이 해볼 생각 있나? ] 

딜런의 그 말 뒤로 대화가 잠시 끊겼다. 

나는 고민의 시간을 길게 가졌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그의 제안에 조용히 고심하던 나는, 초조히 기다리는 딜런을 바라보다 마침내 입을 열었다. 

"메모리칩 취급하는 기업이나 공장에 쓸만한 인맥 좀 있나?"

#147화. 대협

#147화. 

"음, 메모리칩은 기존 기업들의 아성이 공고해서 쉽게 건들기가 쉽지 않은 분야지. 그 조건이 꼭 필요한 거냐?" 

딜런은 입맛을 다셨다. 아쉽게도 메모리칩 관련 기업과 특별한 관계는 없는 듯했다. 

하지만. 

나는 결국, 딜런과의 동업을 결정했다. 

만약 가장 까다로운 메모리칩 문제가 물 흐르듯 쉽게만 풀렸다면, 나는 오히려 딜런을 의심했을 터이니. 

막나가는 로키의 군벌이 그 보수적인 세력과 긴밀한 접점이 있다면 그건 또 그것대로 문제였다. 그쪽 동네가 부패할대로 부패해 개차반이라는 뜻이니까. 

"하자." 

"!" 

그는 군말없는 결정이 흡족했는지 크게 반색했다. 

"큭, 어쨌든 할 줄 알았다. 시기를 잘 탔어. 일약 유명세를 타서 명성이 높아질대로 높아진 애새끼와, 로키에서 병신짓이나 하며 연방 속 썩이던 마법사가 합자로 세울 합법적 회사. 훌륭하다! 연방정부도 감히 싫은 소리 못 하겠지." 

무려 9레벨 마법사가 하루아침에 둥지를 잃는 바람에 소속없는 자유 용병상태. 여러모로 망설이다 놓치기에는 아쉬운 전력이지 않은가. 

황금빛 플라자 원탁에서의 첫 대면때 지랄맞았던 상황이 있긴 했으나, 이제는 같이 생사를 헤쳐온 마당에 과거의 충돌이 중요하진 않았다. 

그리고 변절 거부에 더해서 제 부하들을 다 잃고도, 끝까지 도주하지 않고 자리를 지킨 딜런에게 약간의 신뢰가 생겨났다. 적어도 불시에 변절이라든지 하는 뒤통수 맞을 가능성은 희박하리라. 

"기대해라. 몇 년 지나면 덩치가 몰라보게 불어나서, 적어도 라그나로크 시티 내에서는 모두가 우리를 우러러보게 될 거다." 

딜런은 뷔에탕과 본질적으로 같은 과인 듯했다. 

'흠······.' 

막강했던 군벌이니만큼, 권력에 욕심이 있을 것이다. 

또한, 그는 인간들의 존경과 동경이 공포심과 두려움에서 기인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공포심 속에 섞인 존경. 두려움 속에 섞인 동경. 그런 것들에서 오는 만족감을 얻거나 권력, 인정욕을 채우는 부류. 

그래도 야심가라면 한 번쯤 꿈꿔볼 만한 인생이군. 

쾅! 쾅! 

딜런은 그 솥뚜껑같은 손으로, 로비의 탁자를 쪼갤듯 내리치며 말했다. 

"메가콥 놈들처럼 좆대로 행동하면서 크레딧도 갈퀴로 긁어모으고, 에센스도 마음껏 빨고, 이 병신같은 세상이 망하기 전까지 펑펑 쓰면서 살아보자고. 돈 벌면 쓸 곳이야 넘쳐나거든. 가상현실 게임에 돈을 처바르면 주먹질 한 번으로 대륙을 날릴 수도 있다던데. 큭큭." 

덧붙여 가끔 대화를 나누다 보면, 메가콥이나 대기업들에 대한 선망과 열등감도 언뜻 엿보였다. 딜런도 바보가 아니라 제 욕망을 숨기려면 너끈히 숨겼을 거다. 허나 처음부터 노골적으로 목적과 욕망을 드러내는 점이 내게는 오히려 편하게 다가왔다. 

만약 무림에서 태어났다면 사파나 마인들의 거두가 되어 정파무림과 대적했을 사내로군. 

좋다. 

내가 기업을 세우려는 이유와 딜런의 방향성은 서로 달랐으나, 각자의 이유로 서로를 필요로 하기도 했고, 중간 지점에서 겹치는 부분이 꽤나 많았다. 

그렇지만. 

"라그나로크 시티를 근거지로 한 최초의 메가콥이 탄생할 거다. 큭큭큭." 

······벌써 메가콥을 운운하는 걸 보면 좀 불안하군. 

라그나로크 시티에 뿌리를 깊게 내리고 아주 이곳저곳에 손을 뻗어 꿀만 빨아먹을 생각이 확고해 보이는데— 

일이 잘 풀리면 한 도시를 주름잡는 대기업이 될 수도 있으나, 방향이 조금만 비틀리면 로키의 군벌이나 마피아처럼 적폐집단으로 취급받아 연방과 다른 세력들의 눈 밖에 나는 것은 순식간일 터. 

물론, 내가 무작정 딜런에게 전권을 맡겨두고 놀고 있지만은 않을 테니······딜런의 생각처럼만 흘러가지는 않을 것이다. 

군벌세력을 십수년간 독자적으로 이끌어본 경험이 있는 딜런에게, 이 동업의 주도권을 넘겨줄 생각은 없었다. 경험 많은 9레벨의 마법사라면 마땅히 그럴 자격이 차고도 넘친다 해도, 어디까지나 그는 나의 조력이 되어주어야 하니까. 

그때, 딜런이 내던 흥을 조금 죽이며 말했다. 

"이제 마음껏 부릴 놈들이 필요하겠어. 이래저래 손이 많이 갈 텐데, 우리가 그 잡다한 걸 직접 하기는 버거울 거다." 

"주변에 쓸만한 이들이 있나?" 

"쓸만한 놈들이야 얼마든 있지. 돈만 쥐여주면 곧장 달려올 놈들이 한트럭이다." 

딜런은 연방 이곳저곳에 인맥이 꽤 있어보였다. 나보다 이 세계에서 훨씬 오래 살았고, 한 도시의 거물급 인사였으니 당연하다. 

"로키쪽은 다 개박살났으니, 발두르나 프레이야 시티 쪽으로 알아봐야겠군. 능력은 있는데 어쩔 수 없이 숨죽이고 있는 인재들이 많지." 

"숨죽이고 있는 인재들?" 

"철창신세를 지고 있는 병신놈들, 원한다면 꺼내올 수 있다." 

"그냥 그렇게 살다가 죽게 내버려둬라. 죗값은 치러야지." 

"아쉽군. 이름도 있고 능력도 확실한 놈들인데." 

설마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딜런은 태생이 막가파 군벌인지라 그런지, 아무래도 음지에서 활동하는 자들과의 연대가 강했다. 

'기업 일에 눈이 밝은 사람이 필요하겠군.' 

나는 커다란 기업을 운영해 본 경험이 딱히 없다. 

뭐, 정 알고 싶다면 머리통에 기업인의 칩을 꽂아서 속성으로 익힐 수야 있겠으나, 내가 진짜 기업 회장을 해먹고 싶어서 회사를 세우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런 잡 정보들을 뇌에 집어넣을 여력도 없지. 

허나 그렇다고 해서 딜런이 데려온, 지하세계의 유명한 범죄자들을 회사 고문이나 직원으로 떡하니 앉혀놓을 수는 없는 노릇. 

그럴 바에 차라리 인공지능 시스템을 앉혀놓는 게 낫다. 인공지능 자체도 해킹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다는 게 넌센스지만. 

아무튼. 

그런 이유들로 외부에서 해킹당할 위험이 없고, 내가 완전히 신뢰할 수 있으며, 기업 운영에 사리가 밝고 경험 있는 인력이 필요한데······ 

마침 딱 떠오르지 않는가. 

내가 완전히 믿을 수 있는, 그리고 약 2년 전쯤만 해도 기업에서 업무를 맡아 보던 유일한 사람이. 

'레나.' 

곧장 레나가 떠올랐다. 

나는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딜런과의 동업을 결정한 뒤, 세부적인 사항의 조율은 뒤로 잠시 미뤄놓고 2주 뒤로 다시 약속을 잡았다. 

"고생했으니 당분간은 쉬어라. 나도 필요한 준비 해놓고, 뒈진놈들 장례도 치러줘야 하거든. 나중에 다시 연락하지." 

딜런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떠나갔다. 밖에서 기다리던 두 명의 보좌가 그를 호위했다. 

이제 나는 처리해야 할 과제들을 생각해냈다. 

우선 레나. 

때마침 공교롭게도, 레나와 자매인 루벤카가 왜인지 카산드라 교수 일행과 같이 발할라로 돌아가지 않았던 게 기억났다. 그리고 만나기도 참으로 쉬웠다. 

지금, 내 앞에 도착했으니. 

"야." 

털썩! 

"방금 나간 그 남자. 장벽 밖에서 너랑 같이 싸우던 마법사지? 진짜 더럽게 무섭게 생겼네. 연쇄살인마가 분명해."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찾아가기도 전에, 루벤카가 호텔에 있는 나를 곧장 찾아왔다. 루벤카는 후드를 눌러써 얼굴을 감추고 있었다. 

"뭘 그렇게 쳐다봐." 

하지만 감추어도 그 절세의 미모를 다 감출 수는 없어서, 힐긋대는 이들이 로비 주변에 많았다. 

나는 루벤카와 대화를 나누기 전, 마법으로 가볍게 장막을 쳤다. 주변의 소리와 기척들이 일거에 사라지며 고요한 적막이 찾아왔다. 그에 마력을 끌어올리려던 루벤카의 눈썹이 비틀렸다. 

"······안 놀란다. 난 안 놀란다. 후우." 

내가 물었다. 

"혹시 최근에 널 찾아온 남자 없었나?" 

"남자? 연락처 따려는 쓰레기들은 있었는데, 지금쯤 다 병원에 드러누워있겠지." 

"다행이군." 

"다행이긴 뭐가 다행······야, 됐어. 너랑 알콩달콩 대화하러 온 건 아니니까. 웃어봐." 

"?" 

뜬금없이도, 루벤카는 주섬대며 뭔가를 꺼냈다. 

그것은 일회용 사진기였다. 

"대충 활짝 웃어봐 빨리. 레나한테 사진 찍어서 갖다주기로 했단말야. 아 씨 이거 괜히 까먹어가지고." 

"······." 

"······." 

우리는 서로를 마주 바라봤다. 

잠시간의 정적이 흘렀고, 루벤카는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일회용 사진기를 내동댕이쳐버렸다. 

콰작! 

일회용 사진기가 처참하게 박살났다. 

"시발, 그냥 좀 웃어주면 되잖아!!!!!!" 

"금방 웃으려 했는데." 

"···아, 지랄하지마." 

툭- 툭- 

이윽고, 루벤카는 박살난 사진기를 줍더니 먼지를 후후 불었다. 그리고는 필름을 꺼내어 마법으로 간단히 내 얼굴을 그려냈다. 

실로 정밀한 솜씨. 

스아아아악! 

나도 모르게 루벤카의 심장으로 흘러 들어가던 마력을 빼앗아 보태니, 완벽한 내 얼굴이 필름 위에 그려졌다. 

"······마력이." 

루벤카의 눈가가 지진난 듯 떨렸다. 

다음 순간. 

"레나가 필요하게 됐다." 

"······뭐?" 

나는 눈가에 경련이 이는 루벤카에게 장황한 얘기들을 간단히 압축해 설명하고, 레나를 라그나로크로 데려와 주었으면 한다고 전했다. 

루벤카는 안전하지도 않은 라그나로크에 미쳤다고 레나를 데려오겠냐며 연신 거절했으나, 내가 계속 교수들 밑에서 빌붙으며 살라고 비꼬자 눈빛이 대번에 바뀌었다. 

"야, 레나는 나 혼자서도 충분히 알아서 먹여 살리······." 

"여기에 와도 알아서 할 수 있다. 레나 때문에 너도 여기까지 온 거잖아. 그리고 누가 너더러 같이 와달랬나? 넌 꺼져 이 악독한 년아. 그냥 가서 말이나 전하라고." 

"······씨, 씨입." 

부들부들- 

자존심 하나는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루벤카였다. 씩씩대면서도 쌍욕을 억지로 틀어막고 있었다. 부르르 떨리는 입술이 참으로 애처로웠다. 

나는 그렇게 루벤카와의 대화를 마쳤다. 

그런데 그때. 

"······." 

기이한 마력을 스멀스멀 뽐내는 사내들이 루벤카와 내 시야에 들어왔다.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안광이 칙칙했다. 호텔 로비를 메운 수가 꽤 여럿이라 그들 주인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었다. 

뷔에탕. 

기별도 없이 찾아왔으나 놀랍지는 않다. 

딜런은 아예 난민이나 다름없는 신세였지만, 뷔에탕은 그보다 사정이 조금 나았다. 점조직인 마피아는 다른 도시에도 나름의 세력을 뻗어두었고 어차피 본 전력은 인형들이니까. 

아마 그녀는 유일한 약점인 본신을 숨기기에 라그나로크 시티가 최적이라고 생각하겠지. 이곳 주민들에게는 참으로 슬픈 일이겠으나, 뷔에탕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선택이다. 

카스트라 뷔에탕도 이번 사태로 전력을 상당히 잃었을 것이다. 그런데 뷔에탕급의 거물이 다른 도시로 숨어들어 기반을 다지려다간, 기존의 세력들과 귀찮은 분쟁들에 휘말릴 게 뻔하니. 

저벅. 

패션쇼의 모델처럼 걸어온, 아름다운 인형이 나와 루벤카를 번갈아 바라보다 인사했다. 

"안녕?" 

쑤욱! 

그리고는 루벤카의 옆자리를 가볍게 차지했다. 

색을 탐하는 뷔에탕이 가장 아끼는 인형일 터. 

그런데, 그 인형마저도 루벤카 앞에서는 빛이 바랬다. 심지어 루벤카는 욕설을 뱉는 중이었다. 

"······아니 이건 또 뭔, 누구야 이 년은?" 

인형들의 에스코트를 받은 뷔에탕의 교접인형이 루벤카의 엉덩이를 옆으로 쑥쑥 밀어넣으며 맞은편에 앉았다. 헌데 이년 소리를 듣자마자, 인형의 목이 곧장 직각으로 돌아갔다. 

"···년?" 

"너 누구냐고 썅년아. 목관절 부러졌니?" 

성격 더럽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여인들이다. 루벤카는 갑자기 자리를 빼앗겨서 그런지 뷔에탕의 인형을 죽일듯이 노려보았다. 저것은 정말 상대가 누구인지 몰라서 가능한 배짱이었다. 

"궁둥이 치워라? 나 아직 얘기 안 끝났어." 

"······역시 아름답구나. 인형으로 만들기 좋겠어." 

"!" 

뷔에탕은 마력을 슬쩍 흘리는 것으로 대응했다. 

그러나 한 성격 하는 루벤카도 본능적으로 기세에서 밀리지 않으려 마력을 끌어올렸다. 

로비 근방이 삽시간에 달아올랐다. 

계속 저러다가는 무슨 일이 터질 것 같아 적당히 둘을 중재해야 했다. 

"서로 죽여라." 

"풋, 저렇게 예쁜데 죽이긴 왜 죽여?" 

"······무슨." 

뷔에탕은 달아오른 얼굴로 성내던 루벤카를 야시시한 눈으로 훑다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 시선에 루벤카가 소름끼치는 얼굴로 제 팔을 쓰다듬었다. 

"딜런이랑 회사 하나 만들 거라며?" 

나는 호기심이 어려있는 뷔에탕의 그 첫 물음으로, 앞으로의 대화가 어찌 흘러갈지 알았다. 

뷔에탕은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재미있겠네. 나도 끼워주는 건 어때?" 

대답을 기다리는 새 뷔에탕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었다. 사실 내가 무슨 대답을 하는지는 뷔에탕에게 중요하지 않을 거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답하기도 전에 말을 이었다. 

"내 자리 비워둬." 

"별것도 아닌 회사가 될 텐데 벌써 관심이 지대하군. 마피아 하나로는 충분한 악명을 떨치기 부족한가." 

"모르는 척하는거 봐. 귀엽게. 진짜 별것도 아닌 회사야?" 

"······." 

뷔에탕의 기세가 단숨에 가라앉았다. 그녀가 요염하게 길쭉한 다리를 꼬자 흰 맨살이 드러나고, 기이한 마력이 공간을 사로잡았다. 

곧이어 그녀가 입을 열었다. 

"내 자리 비워두라는 이유는 첫째, 네가 아직 딜런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 

뷔에탕은 웃는 낯으로 손가락을 하나하나 펴며 말했다. 인형의 칙칙한 안광이 나의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려는 듯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둘째, 네가 기업을 세워 하려는 짓이 무공칩이나 마법칩과 관련된 사업이라면, 반발이 네 상상 이상으로 심할 거라서. 셋째, 감히 내 앞에서도 당당했던 남자가 엄한 놈들한테 부러져 꺾이는 꼴을 보면······내 흥미가 식어버릴 것 같아서. 여기서 이유 더 필요해?" 

그녀의 마지막 문장은 의문문이 아니었다. 

반문이 나와서는 안 된다는 뜻. 

'쯧.' 

이렇게 되면, 연방에서도 예의주시할 수밖에 없을 거다. 로키에서 빠져나온 9레벨 군벌 둘이 작당중인 것으로 보일테니. 

그것도 이제야 태동하는 라그나로크 시티에서. 

너무 시작부터 악인들만 모여드는 것 같은데. 

"난 이만 갈게. 너도 안녕 예쁜아. 우리 또봐?" 

여튼, 뷔에탕은 저 세 가지 이유만을 남기고 홀연히 떠나버렸다. 

"설마, 저런 미친년이랑 만나냐? 예쁜 사랑 해라?" 

그리고 루벤카는 끝까지 남아 떠나는 뷔에탕을 악독하게 노려보다가, 레나에게 말은 전해보겠다며 사라졌다. 

그리고 그 이후. 

나는 호텔 방으로 돌아와 간단한 주변 정리와 채비를 마쳤다. 

"돌프야. 따라와라." 

"예, 형님." 

이제 귀찮은 일들의 정리를 마치고 약간의 여유가 생겼으니, 나도 적당히 필요하고 믿을만한 놈들을 찾으러 가볼 생각으로. 

* * * 

발두르 시티. 

웨스트 정크타운. 

— 삼호대협! 

"별 일 없소?" 

— 없습니다. 대협! 

"허허허. 무슨 변고가 생기면 곧장 고하시오." 

— 알겠습니다. 대협! 

정크타운의 주민들은 삼호문의 일대제자이자 실권자인 여량천을 삼호대협(三虎大俠)이라고 불렀다. 이제는 무인의 태가 나는 삼호문도들을 우르르 이끌고 길거리에 나타나면, 기적처럼 길 중앙이 갈라졌다. 

발두르 중앙 포목점에서 맞춘 위풍당당한 삼호문의 의복을 걸치고 길을 걷노라면 그야말로 세상 부러울 것이 없었다. 

"하하하하!" 

현재 정크타운의 삼호문은 둘도 없는 전성기를 맞는 중이었다. 

웨스트 정크타운 전체가 곧 삼호문의 영역. 

다섯 개의 집단이 나누어 뜯어먹던 정크타운을 삼호문이 홀로 독차지했으니, 그 자금력과 위세가 비할 바 없이 대단했다. 가는 곳마다 온갖 상인들이 부랴부랴 튀어나와 고개를 숙였다. 

— 대협! 

— 대협! 

게다가 삼호문주 등평위의 수완이 상당해서 삼호문은 꽤 합리적으로 세를 걷으면서도 점점 세력을 불려나가고 있었다. 인망도 대단하여 삼호문도가 되고 싶어하는 꾀죄죄한 아이들이, 본문의 문지방을 하루가 멀다하고 드나들었다. 

삼호문이 앞둔 미래 역시 창창하다는 말씀. 

지금, 삼호문의 본문은 증축에 증축을 거듭하여 여타 소도시의 중견문파 못지않은 성세를 자랑했고, 정크타운에서 가장 높은 투레 더 타운도 자금을 부어 완공시켜 버렸다. 

별호 삼호대협, 여량천의 무공도 날이 갈수록 수준이 높아져 이제는 독자적으로 에센스를 구입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3레벨이라고 하기도 부끄러운 무인에서 불과 1년 정도만에 당당한 5레벨의 무인으로 발돋움했다. 지금은 사라진 '그놈' 이 던져주고 간 무공들은 마치 자신만을 위한 무공인듯, 손에 착착 감기는 게 이러다간 절정의 경지까지도 머지않아 보였다. 

조금 아쉬운 것은. 

'쓰읍.' 

여량천은 요즘따라 '그놈' 에게 보내는 막대한 수수료가 조금 아까워졌다. 삼호문이 얻는 수익의 거의 절반 이상이, 얼굴도 보이지 않는 그놈에게 송금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 그 돈은 절대로 건들면 안 돼! 필시 죽을 거다. ] 

하지만 문주인 등평위가 워낙에 완고한 바람에 말려봐도 일대제자인 여량천으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여량천은 늙어가는 사내들은 원래 겁이 많은 법이라 생각하며 고개를 저었다. 

쪼륵- 

오늘도 삼호루에 들러 술을 기울이던 여량천은, 잔에 고급 위스키를 따르며 생각했다. 

아무래도 자신이 곧 절정에 이르게 되면 판도를— 

쾅! 

그때, 기루의 두꺼운 방문이 부서졌다. 

"!?" 

갑자기 여량천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술을 마시던 그가 화들짝 고개를 들어보니, 부서진 문 너머에 어딘가 익숙하면서도 생소한 사내 둘이 서 있었다. 

"쟤가 이제 대협이야?" 

"여긴 문이 굉장히 튼튼하네요. 형님." 

"삼호문 이 새끼들은 뭐 이딴 데다가 돈을 썼어 아깝게. 그냥 문풍지로 대충 발라서 만들 것이지." 

이윽고. 

둘 중, 머리칼이 조금 길고 젊은 사내가 여량천의 앞에 털썩 앉더니 위스키병을 빼앗아 입에 털어넣었다. 

꼴꼴꼴꼴- 

그리고 위스키를 병째로 빼앗아 주둥이에 때려붓는, 

그 젊은 사내의 미소가 어딘가 낯설지 않았다. 

곧, 사내가 입을 열었다. 

"그간 잘 있었냐. 량천아."

#148화. 돈만 많은 과부

#14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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