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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덜컹.

1번가 총포상 앞에 멈춰 선 픽업트럭.

"왔어?"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어제 그 여인이 다가와 악수를 건넨다. 만면에 요염한 미소를 띤 채였다.

"여기 총포점 주인 친씨아야. 편하게 이름으로 불러."

손을 잡자 차가운 금속의 질감이 느껴졌다.

"레반이다."

"그런데 옆에 예쁜 언니는 누구야? 저 이상하게 생긴 하레니오 떨거지는 또 뭐고."

"일행이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그래 뭐, 사정이 있겠지."

픽업트럭에 훌쩍 뛰어 올라탄 친씨아는 가져온 총화기들과 두목의 몸뚱이에 붙어있는 사이버웨어 상태를 꼼꼼히 확인했다.

와중에 몸을 숙일 때마다 헐렁한 옷이 늘어지며 하얀 속살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나는 한심한 얼굴로 가슴을 힐긋대는 루돌프를 타박했다.

"보니까 좋냐."

"네? 저 눈 깔고 있었는데요."

"그러니."

"그런데 굉장하긴 하네요."

"이봐 친씨아! 이 천박한 놈이 말하길, 네 젖이 크다는데 어떻게 해줄까? 이빨을 다 뽑아줄까?"

"난 괜찮아. 걔가 보는 눈은 있네."

"······."

원하던 류의 대답은 아니군.

나는 결국 좋다고 계속 힐긋대는 루돌프놈의 얼굴을 주먹으로 찜질 해버렸다. 사실 막연히 놈을 패고 싶었다. 몇 대 때리고 나자 속이 좀 후련해졌다.

이윽고, 가져온 노획품을 다 훑어본 친씨아가 값을 매긴다.

"흐음, 무스코가 쓰던 사이버웨어 파츠들은 상태가 어째 메롱이네. 그런데 그냥 제 값으로 쳐줄게. 어제 가져다준 무기들이랑 요것들까지 해서 십 오만 크레딧. 어때?"

저 고철덩이를 돈 주고 사가겠다고?

하레니오 두목놈의 사이버웨어 파츠는 나와의 전투에서 걸레짝이 되었다. 저건 어디가서 고철값도 받기 힘들다.

"의심하지마. 단골이 될 손님이 오셨는데 사장 재량으로 서비스는 줘야지. 어차피 나 아니면 이만큼 매입해줄 곳도 없다?"

무려 15만 크레딧.

배양육 버거 수천 개를 사서 땅바닥에 내던질 수 있는 금액이자, 연방정부가 있는 오딘 시티까지 운행하는 사설 캐리어 티켓을 구매할 수 있는 돈.

"그럼 그렇게 하지."

내가 수락하자, 친씨아가 웃으며 물어왔다.

"그런데 하레니오가 관리하던 사업장들은 다 어떻게 할 거야?"

그놈들이 사업장도 가지고 있었나?

"설마 몰랐어? 17구역 펍이나 클럽, 사창가는 전부 거기서 보호세 받아가며 관리했는데······다 죽었다는 소식이 퍼지면 여기저기서 눈독 들이겠네. 동업자 개념 없는 게 또 이 동네잖아."

놈들이 관리하던 사업장이라···

아마 보호세를 올려받겠다고 하면 업주들이 반발하겠지. 그때 본보기로 몇 명 죽여패고 말 잘 듣는 놈을 앉혀야겠어.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는데 예상외의 수입이 또 생기겠군.

그렇게 머릿속으로 교통정리를 마쳤다.

"업장들은 내가 알아서 하지."

"판매대금은 어떻게 줄까? 계좌 있어?"

"받기 전에 2층을 좀 둘러보고 싶은데."

비록 뱀눈 마법사가 생각보다 약했다지만, 4레벨급 마법사라는 저 친씨아의 말이 아주 헛소리는 아니었다. 루벤카의 사무실에서 훔쳐온 고농도 마나액이 없었으면 꽤 고전했을거다.

아직 본신의 힘이 일천한 나는, 조금 더 괜찮은 무기에 투자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천천히 둘러봐. 많이 사면 좋고~"

총포상의 2층.

그녀의 말마따나 중고품이나 파는 1층과는 전혀 다르다. 네 자릿수 크레딧부터 시작인 물건들답게 고급스러운 조명 아래 전시된 무기들이 날 반기고 있었다.

심지어 군용 수류탄과 최신식 산탄 지뢰가 박스로 쌓여있는 광경은, 처음 올라와본 고객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저번에 유탄류는 없다고 했던 것 같은데? 크레모아까지 박스 채로 쌓아뒀군."

친씨아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이미 예약이 되어있는 물건들이야. 성질 급하신 기존 고객들이 있거든."

"시체 사냥꾼들인가?"

"응, 거긴 항상 물자가 부족하니까. 그래도 괜찮은 것들은 차고 넘쳐. 아무거나 집어도 후회 안 할 거야."

그런가.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불만을 감추고 다시 2층을 둘러봤다.

하지만 수류탄과 산탄 지뢰를 본 뒤에는 딱히 마음에 와닿는 놈이 없었다.

결정이 늦어지자, 지루한 기색을 보이던 친씨아가 결국 입을 열었다.

"그냥 내가 특급으로만 몇 개 골라서 소개해줄까? 칼이든 총이든 말만 해."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친씨아가 2층을 돌며 무기를 소개하기 시작했다. 한눈에 봐도 쓸만한 화기와 예기가 줄을 이었다.

"왼쪽부터 자동 유도조준장치가 달린 스마트건. 차세대 군용 정밀스코프. 그리고 저 작은 건 통감조절기라고, 팔에 꽂아두면 느끼는 통증의 정도를 순식간에 낮출 수 있어. 수치를 최대로 낮춰놓으면 총에 맞아도 바늘에 찔린 정도의 통증으로 느낄 수 있는 정도? 효과는 두 시간. 혹시 도검류도 필요하면 말해. 광학위장을 탑재한 나이프나 경량화된 접이식 카타나. 이건 여러번 압축한···아 이건 아니다. 멀쩡한 인간이 쓰라고 만든 건 아니니까······."

"음."

수많은 무기 중 내 눈에 들어온 것은 무미건조한 외형의 백색 직도였다.

얼버무리는 친씨아를 향해 물었다.

"방금 그 칼도 파는 건가?"

"흐음, 이 압축도?"

친씨아가 이건 사지 말라는 표정으로 나를 말렸다. 보통 무거운것이 아닌지, 칼을 들어올린 그녀의 팔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이건 사단법인 태도철장(太刀鐵匠)에서 제작한 합금압축도 넘버 6 시리즈. 소속 장인들이 수작업하는 물건이야. 튼튼하긴 한데 워낙 무겁기로 소문나서 실제로 쓰는 사람은 거의 없어. 가격도 7만 크레딧으로 꽤 비싼 편이고. 그냥 다른걸 사는게 어때."

"또 모르지. 잘 맞을지도."

쐐액-

나는 압축도를 받아 몇 번 휘둘러 보았다.

'괜찮군.'

칼날은 얇지만 직접 들어보니 정말 놀랄 정도로 무거웠다. 다만 균형과 무게중심은 훌륭하게 잡혀있었다. 어지간한 총격에 날이 부러지거나 쉽게 중심이 휠 걱정은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일천한 지금의 내 수준으로는 검(劍)보다는 힘 잘 받고 투박한 도(刀)가 더 효율적이기도 하다.

"통감 조절기, 그리고 이 칼로 하지."

*

그로부터 며칠이 지났다.

"후우···."

나는 땀에 절은 몸으로 운기행공을 마치고 일어났다. 고작 며칠이 지났을 뿐인데, 비실했던 몸뚱이에 힘이 붙고 있다.

훌륭한 심법에는 나약한 인간의 근골마저 탈태시키는 신력이 있다. 그러니 신공이라 이름 붙이겠지.

[ 오형검법(忤形劍法)은 대성하면 태산도 벤다. 그리고 무선대지신공(舞仙大地神功)은 빌빌대는 네 근골과 정신을 탈태시켜 줄 것이다. 그러니 제대로 익혀라. ]

[ 태산을 썰어요? 거짓말 좀 하지 마십쇼. ]

[ 게으름을 피워 성취가 늦는다면 하루에 두 시진씩 네 얼굴에 주먹질을 하겠다. ]

[ 두 시진? 벌써 노망이 나셨나. ]

[ 지금부터 주먹질을 하겠다. ]

오형검법(忤形劍法) 그리고 무선대지신공(舞仙大地神功).

스승의 전대(前代)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검법과 심법이었다.

내가 세상의 모든 무공을 아는건 아니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윗단계의 검법이나 심법은 견식해본 적이 없다.

감히 절세(絶世)를 칭할 수 있으리라.

그도 그럴 것이, 정신나간 낭인검객이던 스승을 무림의 십대고수로 만들고 대단한 구파일방의 장문인들과 나란히 서게해준 무공이니까.

매화검신에게 죽었을 때도 단지 그 노괴가 규격 외의 존재였던 것일 뿐. 오형검법이 화산의 무공보다 수준이 낮아서가 아니다.

[ 성취를 쌓아 가다보면, 네놈같은 모지리도 중원을 오시할 날이 올 거다. 절강 흑도에서 칼밥먹던 삼류 검수도 해낸 일이다. ]

칼밥먹던 삼류 검수가 바로 스승이다.

그의 모습이 잠시 머릿속에 떠올랐으나, 곧 뇌리에서 털어냈다.

제정신일 때가 거의 없던 광인의 말씀이시다.

물을 한 모금 마시고는, 윗 층으로 향했다.

네온 불빛이 커튼 사이를 뚫고 들어온다.

이곳은 하레니오가 아지트로 쓰던 그 술집.

시체는 루돌프를 시켜 깔끔히 치워 놓았고, 공짜 휴머노이드 바텐더까지 있으니 당분간은 여기서 머무르기로 했다.

2층.

우주선을 연상케 하는 디자인의 디스플레이들이 펼쳐져 있고, 정신없이 변화하는 선을 바라보는 레나가 눈에 들어온다.

온갖 증권과 관련된 차트들.

그녀는 7만 크레딧이나 하는 칼붙이를 구매한 내게 아쉬움을 표했지만, 곧 크레딧을 더 구해다 주겠다는 소리를 듣곤 남은 돈으로 장비를 구비해 증권시장에 뛰어들었다.

나는 피곤한 눈으로 디스플레이에 집중하고 있는 레나에게 물었다.

"잘 돼가?"

"······."

대답이 없었다.

화면을 슬쩍 확인해본다.

[ 종목명 : B-1 퓨타 밀테크 ]

" 매입 금액 : 32,900C "

" 평가 금액 : 26,600C "

" 손익률 : -19.33% "

[ 종목명 : 로이마르 바이오 ]

" 매입 금액 : 34,900C "

" 평가 금액 : 20,600C "

" 손익률 : -41.11% "

대답이 없던 이유로군.

정말 답이 없었다.

"한탕 치려고 개잡주 탔다가 물렸구나."

"아, 아니거든! 개잡주 아니거든!"

"너무 급하게 하지 않아도 된다."

"거상들이 한꺼번에 물량을 뱉어서 그래. 금방 회복할거라고······!"

콧김을 씩씩대는 레나.

하레니오와의 일은 모두 잊었으려나.

하기야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연속해서 생기다 보면, 받아들이지 못하던 몸도 결국은 적응을 한다. 그런 면에 있어서 레나는 적응을 잘 마쳤다.

"레반, 표정이 왜 그래? 아직 매도 안 했으니까 손해본 금액은 없어."

"그래, 이따 맛있는 거 사 오마."

나는 다시 1층으로 내려왔다.

이틀간 충분히 쉬었으니, 이 이상 휴식을 취할 필요성은 느끼지 못했다. 그간 쌓였던 육신의 피로와 부스터, 마나액의 후유증은 완전히 떨쳐냈다.

"루돌프, 따라와라."

"형님, 어디 가려고 그러세요?"

"17번가에 장사 잘하고 있나 확인하러."

"업장들이요? 잘 쉬다가 갑자기 그걸 왜 확인하러 가십니까?"

"그야 이제 내 것이니까."

그 말에 루돌프놈이 파랗게 질렸다. 놈은 사색이 된 얼굴로 걱정을 늘어놨다.

"하레니에서 관리하던 업장이 한 두 개도 아니고, 개나 소나 콩고물 뜯어 먹으려고 혈안이 돼 있을 겁니다. 지금쯤이면 이미 다른 놈들이 차지했을걸요. 이 동네라면 무조건입니다."

"나도 안다."

"예?"

"하지만 내 업장을 빼앗기면 수입이 적어질 테고, 수입이 적어지면 생활이 궁핍해지겠지. 생활이 궁핍해지면 맛없는 배양육 버거만 처먹어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기분이 나빠진 내 주먹이 누구한테 향할 것 같으냐? 바로 너다."

"······."

"그리고, 너는 하레니오의 갱단의 '적통' 계승자다. 이제 명분은 우리 쪽에 있군."

"다 같이 입 맞추고 덤벼오거나 이미 업장을 먹어버렸으면요. 몇 개는 적당히 포기하고 넘겨주는 게 어떨까요?"

"내 돈을 왜 남한테 넘겨주라 마라냐?"

"그게···."

내 의견에 공감하지 않는 놈을 두들겨 팼다. 아프다며 콧물을 질질 짜도 멈추지 않았다.

못난 놈 같으니.

혹시 내 스승도 이런 마음이었을까 싶군.

"운영하던 사업장, 빠짐없이 안내해라."

"예."

"얼굴에 피나는 건 좀 닦고."

"괜찮습니다. 금방 또 날 텐데요."

"다리는 왜 절고 그러냐. 마음 아프게."

"이거요? 모르겠습니다. 자고 일어났더니 다리 한 짝이 제 말을 안 듣네요. 총에 맞았나."

"잘 타일러 봐. 아니면 아예 잘라버리고 사이버웨어를 달아버리든지."

"그래도 생다리가 낫죠. 노력해보겠습니다."

"노력하는 모습. 보기 좋다."

"감사합니다. 형님."

나는 새로 장만한 압축도를 들고 문을 나섰다. 내 허리에 매달린 권총집을 보던 루돌프놈이 문득 물었다.

"그런데 가서 또 누굴 죽이시게요?"

그건 나도 알 수 없기에 대답하지 못했다.

*

끼익- 끼이익-

당장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소음.

거리의 양쪽 상가를 잇는 층계 구름다리에서 더러운 톱밥과 먼지들이 끊임없이 떨어진다. 녹슨 경첩은 떨어지기 직전이고 대강 덧대놓은 목판들은 습기에 젖어 썩은지 오래다.

공기도 시티 중심가에 비하면 너무 탁해서 내가 숨을 쉬는 건지 먼지를 퍼마시는 건지 헷갈릴 지경.

나는 머리를 털어내며 걸었다.

사창가와 펍, 클럽이 양쪽으로 줄지어 늘어선 17번가 거리.

일명 하레니오의 사업장들이 있는 골목에 도착하자마자, 2층 난간에 기대어 있던 놈 하나가 크게 소리쳤다. 비니를 뒤집어쓴 사내였다.

"뭐야! 밴스 아니야? 하레니오는 전부 죽었다고 들었는데!"

루돌프의 얼굴을 아는 기색인듯 했다.

놈과 눈을 마주친 루돌프놈은, 우중충한 목소리로 '나도 죽고 싶다' 며 혼잣말을 뇌까렸다.

"정말 죽고 싶나?"

"제가 가끔 헛소리를 합니다."

"저 비니쓴 사내는 뭐 하는 놈이냐."

"17번가에서 상업용 섹스토이들 관리하는 놈입니다. 저랑 술도 마시고 목욕탕도 가고 그랬어요."

대화를 나누던 중, 저 위에 있던 비니가 다시 고함친다.

"밴스, 여기 분위기 말도 아니다. 어제 뻗대던 새끼들 죄다 두들겨 맞았어."

"두들겨 맞아? 삼호문 짓이냐?"

"그래. 하레니오 다 뒈졌다고 존나 신나있더라! 솔직히 나도 신났었는데 이제 삼호문에 보호세 내게 생겼다. 하여튼 너도 조심해!"

놈은 주변 눈치를 보며 말하고, 루돌프는 내 눈치를 보며 말했다.

"형님. 그렇다는데 어쩔까요?"

"어쩌긴 뭘 어째. 가장 큰 업장부터 안내해라."

"예."

그렇게 이동한 곳은 17번가에서 가장 보호세를 많이 내왔다는 대규모 클럽이었다.

화려한 입간판이 눈을 사로잡는다.

『 H. Club - Munioz 』

마약에 중독되어 눈빛이 탁한 덩치가 클럽의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루돌프놈이 문지기를 옆으로 밀치며 앞장섰다.

안쪽으로 들어가자, 자욱한 담배 연기와 습기 찬 곰팡이 비린내가 방문자를 맞이한다.

—! —!

개미굴처럼 어둡고 구불대는 통로를 뚫고 들려오는 거칠고 빠른 음악.

흐느적대는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간다.

칙칙한 빛의 조명이 클럽 내부를 비춘다.

털퍽 주저앉아 싸구려 담배를 태우거나 약에 취해서 헤실헤실 웃는 이들이 심심찮게 보이고, 그들의 옷가지에선 지독한 냄새가 났다.

- 우웨엑!

악취가 풍기는 화장실 앞.

한 놈이 벽에 구역질을 해댄다.

앞서가던 루돌프는 익숙한 광경인듯 침을 퉤 뱉고는, 놈을 화장실로 밀어 넣었다.

"더러워 죽겠네. 저렇게 하루 벌어서 하루 사는 놈들이 시간 때우러 옵니다. 술처먹고 꼴아서 스트리퍼 엉덩이도 주물러 대고요."

한 마디로 미래없는 자들의 아지트.

그래도 장사는 확실히 잘될 것 같다.

이 동네 주민은 죄다 미래가 없으니까.

클럽의 통로를 따라 조금 더 들어가자, 뿌연 연기로 가득찬 스테이지 위에서 헐벗은 채 춤을 추던 여자가 이쪽을 향해 끈적한 시선을 보낸다.

—! —!

번쩍이는 조명과 레이저의 향연 속, 클럽을 찾은 밑바닥 인생들은 헐벗은 스트리퍼의 춤사위를 보며 주둥이에 술을 부어댔다.

"여긴 술값이 싼가?"

"독하고 값싼 화주를 대량으로 들여온 다음에 이것저것 섞어서 양을 불린 겁니다. 그래서 무슨 짓을 해도 남는게 술장사란 말이 있죠."

정신이 나간 것처럼 흐느적대는 클럽 내의 군상들은, 허리춤에 대놓고 칼과 총을 차고 다녀도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주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정신놓고 즐기는 것만이 유일한 행복인 것처럼.

"형님. 저쪽 룸에 있을 겁니다."

루돌프가 복잡한 클럽 내를 두리번거리다 한 곳을 가리킨다.

고개를 돌리자 그나마 깨끗한 룸 안.

담배꽁초와 술병, 도넛 박스로 너저분한 테이블 위에 다리를 올려놓은 채 왁자지껄하게 떠들고 있는 두 명이 보였다.

나는 그 옆으로가 털썩 앉았다.

"······? 뭐야 너."

후줄근한 후드에 찢어진 청바지.

테이블 중앙에 앉은 놈은 황당해 하면서도, 내 옆에 기립한 루돌프를 보고 반갑게 인사했다.

"어! 밴스! 너 이 새끼 살아 있었구나?"

나는 놈들이 반가운 해후를 나누는 동안 도넛 하나를 집어 먹었다. 별로 맛은 없었다.

"돌프야. 이 친구가 여기 사장이냐?"

"예. 맞습니다."

루돌프가 자기 말에 아무런 반응없이 눈치만 보고 있자, 금세 웃음기를 지운 후드놈은 날 흘겨보며 대꾸했다.

"뭐냐니까 당신은?"

"이제부터 월세 받을 사람."

"월세? 보호세 말하는 건가?"

후드 대신 옆에 있던 놈이 낄낄댄다.

"하레니오가 나자빠지니까 개나소나 빨대 꽂겠답시고 기어 오는구나. 곧 우리 매장에도 행차하시겠어."

내가 답을 원하는 눈으로 루돌프를 바라보니, 자기도 저 놈은 누군지 잘 모른다는 표정이다.

뭐, 앞으로 따박따박 월세를 낼 임차인중 하나겠지. 태도가 불량하더라도 상냥하게 대해줘야하지 않겠나.

"누구시길래 내 말을 끊을까."

"너야 말로 누군데 보호세 타령이야? 니가 뭐 밴스 애비라도 되는···."

쾅-!

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뒤통수를 잡아 테이블 위에 꽂았다. 도넛의 잔해들이 사방으로 비산한다.

폭력이 일상적인 대화 수단인 동네.

즉, 나는 지금 놈과 대화를 시도한 것이다.

하지만 방금 머리를 처박은 놈은 혼절해버린 관계로 정상적인 대화를 나눌수 있는 상태가 아니게 되었다.

"나랑 더 대화하고 싶은 사람."

엎어진 놈의 코에서 피가 쏟아지며 테이블로 번져나갔다. 후드놈은 그제야 자세를 공손히 했다.

"······저 친구 힘 깨나 쓰는데, 보기보다 화끈하신 분이셨군요."

피를 보고 나서 급변한 태도.

저래봬도 여기서 가장 규모있는 업장을 운영하는 사내이니, 존댓말 정도는 써주기로 했다.

"사장님."

"아이고! 이제 말씀 편하게하세요."

"요즘 벌이는 좀 어때요? 힘든 시기잖습니까."

"아. 예. 그게 요새는 삼호문놈들 때문에 장사가 통 시원찮습니다. 계속 방해를 해가지고."

"설명을 좀 해주시겠어요."

"하레니오가 없어졌으니까 이제부터 지들쪽에 상납을 하라고 하더군요."

뒷골목 세계가 대부분 이렇다.

누군가의 빈자리는 새로운 놈들이 나타나 채운다. 그리고 힘 없는 대다수는 그 순환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물론, 나는 받아들일 생각이 전혀 없다.

"그래서 어떻게 대처하셨죠?"

"생각해보겠다고 했죠."

의리라곤 쥐뿔도 없는 임차인이었군.

"이보세요. 사장님. 여기 하레니오 갱단의 적법한 후계자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있는거 안보여?"

"······누구? 아 밴스 이놈이요? 얘한테 어떤 업주들이 보호세를 내겠습니까."

후드의 말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워낙에 등신이니, 우기는 것도 한계가 있군.

우기기를 포기한 내가 루돌프 놈에게 물었다.

"삼호문은 뭐하는 놈들이냐."

"그게···비무 도박장, 동양식 기루, 객점, 음식점 같은 곳들을 운영하는 애들입니다. 본거지는 25번가에 있어요."

아주 전형적인 흑도 세계의 집단.

하여간 하레니오와 결이 비슷한 놈들이라는 얘기다.

"우리랑 겁나게 많이 싸웠죠. 무스코가 뱀눈이 조만간 삼호문을 칠거라고 했었는데······."

그 전에 나와 싸우다 전멸해버렸고.

"거기 두목이 무인이냐?"

"예. 솔직히 무공 쓰는건 별로 못봤는데 총은 확실하게 쏩니다."

친씨아가 말한 5개의 집단 중 한곳이자, 수장이 무인인 슬럼가의 흑도 무리.

주제에 동양식 기루까지 운영하고···

나는 갑자기 호기심이 동해 물었다.

"기루에 기녀들도 있냐?"

"섹스토이가 반이고 나머지 절반은 사람인데 꽤 반반합니다."

"꽤 반반해?"

"예. 지나가면서 몇 번 슬쩍 봤는데-"

"가자. 안내해라."

"······삼호문 기루요? 저도 같이요?"

"그래. 눈 뜨고 업장을 빼앗길 처지니, 속이 쓰려서 술이나 한잔해야겠어. 삼호문의 주인과 월세에 관한 얘기도 도란도란 나누고."

"그건 안됩니다. 가면 저 죽어요."

내가 부정적인 대답에 눈살을 팍 찌푸리자, 루돌프가 황급히 변명한다.

"형님은 무슨 일이 터져도 어떻게든 하시겠지만, 저는 괜히 휘말렸다가 총이나 칼 맞으면 바로 죽잖아요."

"그렇겠네."

"그쵸? 이제 제 마음을 아시겠어요?"

"모른다."

"형님, 이 바닥이요. 다짜고짜 찾아가서 업장 내놓으란 얘기를 꺼내면 싫어하는? 꺼려하는? 아무튼 삼호문쪽에서 굉장히 불쾌해할 가능성이 있어요. 총도 막 쏘고."

"그쪽 업장이 아닌데 불쾌할 게 뭐가 있어. 내가 억지라도 부리고 있다는 얘기니."

루돌프놈이 고집스럽게 항변했다.

"에, 그건 아니지만 집단 간의 관계라는 게 아무래도 또, 그렇지만은 않기 때문에. 이틀 전처럼 너무 막나가시면 삼호문 쪽에서도 불편한 감정이 격해질 수밖에 없고···."

또 쓸데없이 쫑알대는군.

시종 주제에 자아가 왜이리 강한지.

"대체 뭐가 그리 불편하다더냐. 네 다리보다 더 불편해?"

"···제 다리요?"

뻐억!

나는 곧장 루돌프의 다리를 걷어 차 넘어뜨리곤, 종아리를 마구 밟았다. 뭔가 부러지는 소리가 크게 났다. 이제 정말로 다리가 불편해진 것이다.

"추, 출발하시죠 형님. 안내하겠습니다."

발길질을 잠시 멈추자, 벌떡 일어난 루돌프놈이 드디어 정신을 차리곤 굽신댄다.

하여간 간신배 같은 녀석.

"이제야 말귀를 좀 알아먹는구나."

나는 눈치를 되찾은 놈에게 환한 미소를 지으며 화답했다. 섬세한 사내답게 걱정도 잊지 않았다.

"저런, 너 다리가 왜 그러냐?"

나는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무림때도 허구헌 날 죽도록 맞으면서 꾸역꾸역 버티던 놈이 있었는데, 떠올려보니 이놈과 꽤나 닮았다.

참 재미있는 사내였는데 말이지.

"돌프야. 네 얼굴을 보면 옛날에 내 스승한테 매일 두들겨 맞던 한심한 놈이 겹쳐 보여. 그래서 더 정이 간다."

"설마 그게 형님이십니까."

"아니, 그 놈은 결국 맞다가 죽었다. 난 버티고 버텨서 악착같이 살아남았고."

"······네?"

"너도 못 버티면 그놈처럼 죽는거야."

"······."

루돌프의 표정에서 웃음기가 사라진다.

곧, 비장한 눈빛으로 침을 삼키는 놈. 하지만 나는 그 꿀렁임조차 마음에 들지 않아 놈의 목젖을 강하게 때렸다.

"컥!"

"빨리 가자."

*

위로 올려다보이는 화려한 전각.

삼호문에서 운영한다는 동양식 기루다.

저게 정크타운 25번가의 랜드마크라던가?

『 三虎樓 』

"삼호루?"

높이를 보면 적어도 4층은 되겠군.

기루의 외벽엔 얇은 디스플레이 판을 달아 하늘하늘 흩날리는 흰 꽃을 재생시켜놓았고, 전체적으로 역한 슬럼가의 냄새와는 다르게 괜찮은 주향이 난다.

어떤 귀한놈들을 손님으로 받는 건지, 삼류 흑도무리 치고는 분위기를 내는데 꽤 공을 들였다.

아마 다른 소도시에서 원정 여흥을 즐기러 온 사람들을 상대로 영업하는 곳이지 싶은데···.

"두 분이십니까?"

"그래."

기루의 정문에 당도하자, 문지기 역할을 하는 휴머노이드가 다가와 포권 자세를 취했다.

강호의 예를 익힌 휴머노이드다.

"혹, 흥을 돋울 기녀가 필요하진 않으십니까?"

"기녀?"

"아름다운 기녀와 술을 기울이시려거든 선금으로 일인당 100 크레딧을 지불하시면 됩니다."

"선금도 내야 하나?"

"저희 삼호루의 원칙입니다. 어느 층으로 선택하시겠습니까?"

"이 기루에서 가장 풍광좋은 곳."

"그렇다면 4층입니다. 타운의 풍경이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술을 즐기시는 것만큼 행복한 일이 또 있겠습니까. 4층의 입장가는 400 크레딧입니다."

선금 계산을 마치자 중원식 복장을 한 기루직원이 우릴 4층으로 안내한다.

그렇게 4층 방 앞에 도착한 그때였다.

툭!

"에이 씨발. 뭐야?"

옆 방에서 복도로 나오다 루돌프놈과 어깨를 부딪친 한 남자가 상스러운 욕설을 뱉는다.

술기운이 잔뜩 올라 벌개진 얼굴.

놈이 자기 가슴팍을 툭툭 치며 난데없이 시비를 걸어온다.

"뭘 꼬나 봐. 이거 안 보여?"

특별한 뭔가가 있나 해서 자세히 들여다봤으나, 옷 아래로 볼록 튀어나온 젖꼭지밖에 보이지 않았다.

나는 기분이 몹시 더러워졌다.

"오라버니. 밖에서 그러지 마시고 어서 들어오세요~"

옆 방에서 다급히 따라나온 기녀 하나가 싸움을 말리려는 듯, 놈의 팔을 슬며시 붙잡는다.

그러나 기녀의 그런 행동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미간을 잔뜩 찌푸린 놈이 기녀의 머리채를 잡아 흔든다.

"이게 미쳤나 감히 내가 말하는데······."

"꺄악! 이, 이러지 마세요!"

외형을 보니 하급 안드로이드 같은데···

역시 기루 같은 곳에 오면 저런 몹쓸 장면도 있어 줘야지.

우리는 머리채를 잡혀 질질 끌려다니는 기녀를 내버려두곤 안내받은 방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술상과 함께 들어와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는 기녀 둘. 화려한 의복으로 몸을 가리고 있으나 인간은 아니다.

"설향이에요."

"화향이에요."

외모도 이름도 상당히 평범하다.

"둘 다 안드로이드인가?"

"네. 손님께서 아무리 가슴을 거칠게 주물러도 끄떡없답니다. 한번 쥐어 보시겠어요?"

"괜찮다."

"부끄러워하시긴······."

나온 안주를 몇 개 집어먹고 술도 한잔 걸친다.

무림의 화주를 떠올리게 하는 향과 맛이라 그런가 독해도 그리 나쁘진 않다.

나는 조용히 술잔을 기울이며 정크타운의 야경을 내려다보다, 생글생글 웃고 있는 안드로이드 기녀들에게 물었다.

"궁금한게 있다."

"네. 무엇이 궁금하신가요?"

"여태까지 기루에서 가장 진상을 심하게 부렸던 놈은 무슨 짓을 했지?"

"음, 워낙 많았지만 굳이 꼽자면요."

몇 달 전, 한 손님이 술에 취해 직원을 죽이고 도망쳤다가 결국 삼호문주에게 잡혀 죽었다는 말을 온갖 미사여구까지 붙여가며 늘어놓는 기녀 설향.

기억장치의 성능이 괜찮은지, 바로 앞에서 본 일처럼 생생하게 설명한다.

"그래. 누구 한놈 죽여버리고 진상을 부리면 삼호문주가 허겁지겁 튀어온다고?"

"네, 제 말 뜻은 그게 아니었지만요. 아마도 그렇겠죠?"

떨떠름한 반응을 보아하니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좋아, 술도 시원하게 한 잔 걸쳤겠다. 누구 하나 반 죽여버릴 놈이 없을까?

곰곰이 머리를 굴려보다 손뼉을 탁 쳤다.

다행히도 곧바로 떠오르는 놈이 있지 않은가.

"돌프야."

"네."

"옆방 가서 아까 그놈 끌고 와라."

"맡겨만 주십쇼."

마침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군.

#13화. 소협과 중협

#13화.

짜악-!

삼호루 1층.

삼호문주의 두 번째 제자 여량천이 기루의 운영을 총괄하던 서대기의 뺨을 연신 후려친다.

"대기야. 싸대기 이 미련한 자식아. 손님끼리 싸우고 있는데 뭐? 졸려서 자빠져 잤어? 얼빠진 놈."

뺨이 불어터진 서대기가 억울함을 표했다.

"싸운게 아니라 한쪽이 일방적으로 두들겨 팬겁니다요."

"야 이 새끼야, 그 사단이 나기 전에 네가 올라가서 막았어야지!"

"형님, 막을 새가 없었어요. 웬 북터지는 소리가 나길래 위를 봤는데 발가벗은 사람이 4층에서 막 떨어지더라니까요."

"그걸 말이라고!"

여량천은 울화를 다스리며 심호흡했다. 그럼에도 한껏 구겨진 미간은 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 으으어······.

나체로 쓰러져 신음하는 저 남자.

얼굴이 낯이 익어 자세히 들여다보니, 자신과도 꽤 면식이 있는 자였다.

기루에 자주 들러 매상을 올려주던 단골.

분명, 발두르 시티의 무슨 공무원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형편없이 두들겨 맞고 바닥에 떨어져 지금은 말도 제대로 못 한다. 자칫하면 평생 반병신으로 살아야 할 수도 있다.

"저 인간, 머리털은 왜 뜯겨있어?"

"놈들이 다 쥐어 뽑아서 창밖에 뿌렸답니다. 이런 날에는 뭔가 흩날려야 운치가 있다면서요."

"아주 미친놈들이구만. 사내 둘이라고?"

"예···."

이 빌어먹을 진상들 같으니.

일이 꽤 귀찮게 흘러가게 되었다.

어디 핫바지 손님도 아니고 하필 관청 공무원을 저렇게 만들어? 그것도 자신들이 운영하는 기루에서?

"이 새끼들 지금 어디있어."

여량천이 주먹을 우둑거리며 묻자 서대기가 움찔하며 답했다.

"4, 4층 천호방에 있습니다요."

"뭐? 천호방은 귀빈용 아니야?"

서대기가 엉망이된 남자를 가리켰다.

"원래는 저 손님이 쓰던 방이었는데···그놈들이 천호방이 시티뷰가 더 죽여준다면서 막무가내로 비집고 들어갔습니다요."

"올라갔다 오면 넌 죽을 줄 알아라."

삼호루 4층.

쏜살같이 계단을 뛰어 올라온 여량천과 뒤따르는 몇 명의 삼호문도들이 천호방의 칸막이를 거칠게 열어젖혔다.

탁! 드르륵!

그리고 그곳엔 살면서 두어번 정도 마주쳤던 하레니오의 떨거지 하나와 비실해보이는 사내가 기녀들과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일견 비실해보이는 젊은 사내.

레반이 여량천을 반갑게 맞이했다.

"어서와. 같이 한잔할래?"

"······."

여량천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옆방 손님을 두들겨 팬 다음 속옷까지 싹 벗겨 바닥에 내던진 인간치고는, 상당히 평온하지 않은가.

무섭도록 뻔뻔한 레반의 태도에 헛웃음을 지은 여량천이 입을 뗀다.

"통성명이나 합시다. 나 삼호문의 여량천이오."

"그래 여량천아. 반갑다."

"소협께선 이름이나 호가 없소? 사람은 죽은 뒤에 이름을 남긴다는데, 이름은 알아야지."

"소협? 호?"

풉.

레반이 터져나오는 헛웃음을 참지 못했다.

"꼴에 무림계라고 주접을 바가지로 떠는군."

"뭐?"

"흑도문이라길래 칼부터 꺼내서 쑤실 줄 알았더니, 손님을 웃겨줄 줄도 아네."

그러자 밴스가 아첨하며 레반을 말렸다.

"아이고, 착한 형님이 참으십쇼."

"돌프야. 나더러 소협(小俠)이라잖아."

"그냥 어디서 주워들은 걸로 괜히 개폼잡는 겁니다. 지들끼리는 절대 저렇게 안 해요."

"······이 새끼들이."

원래 말리는 놈이 더 미운 법.

지금 여량천의 눈깔은 뒤로 돌아가기 직전이었다.

그러나 그는 초인적 인내심을 발휘해 분노를 가라앉히며 나지막히 말했다. 그래도 돈을 내고 들어온 손님 아니던가.

"이보세요. 손님들 지금 상황 파악이 잘 안 되시나 본데."

"술맛 떨어지니까 얼른 나가라. 이제부터 시끄러운 놈은 대가리를 깨버릴테니, 여량천 중협께선 이해하시고."

"······.:

하지만 레반의 마지막 비아냥에 드디어 여량천의 인내가 바닥났다.

"굳이 벌주를 마시겠다면야···."

대화가 통할 상대가 아니라 결론내린 여량천은 조용히 뒤로 눈짓했다.

그러자 뒤쪽에 기립해 있던 삼호문도 응곽이 몽둥이를 들고 술상을 넘어 달려들었다.

지지직-

몽둥이의 정체는 고전압 충격기.

총보다 위력은 낮아도 취해서 진상 부리는 놈 상대론 저만한 효자가 없다. 기절시키고 팔 다리를 분지르면 저 진상들의 취기도 싹 가실것이다.

"손님, 아파도 좀 이해해주십쇼!"

응곽이 흉흉한 전기충격기을 앞세워 덤벼들자, 레반의 옆에서 술시중을 들던 설향과 화향이 화들짝 놀라 눈을 가린다.

그런데.

콰당탕!

"억!"

나자빠진건 레반이 아니라 오히려 달려들던 응곽이었다.

응곽의 눈에서 피가 철철 흘러 내린다.

'무슨!?'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목도한 여량천이 재빠르게 바지춤의 권총에 손을 가져간다.

그러나 이어진 다음 광경에 손을 툭, 떨어뜨렸다.

"······."

레반의 손에 산산이 깨져버린 술잔.

그런데도 잔에 담겨있던 술은 멀쩡히 허공을 부유하는 중이다.

그 기이한 광경에 장내에 있던 모두의 입이 굳게 닫혔다.

당황한 여량천의 눈이 빠르게 굴러간다.

'마법사? 그 짧은 찰나에 술잔을 깨서 쏘아냈다고?'

설마···.

하레니오를 다 죽였다던 그자인가?

그 사내 옆에 다소곳이 앉아있는, 이제는 거의 시종처럼 비위를 맞추고 있는 하레니오의 말라깽이가 자신의 가설에 힘을 불어넣어준다.

'이런 시발, 잘못 건드렸다.'

이윽고, 황망하게 굳어있는 그를 지루한 눈으로 바라보던 레반이 입을 열었다.

"왜? 한 번 뽑아서 쏴보지."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여량천이 즉답했다.

쏘면 죽는건 저자가 아니라 필시 자신이다. 홀몸으로 타운의 무장 집단 하나를 지워버린 사내.

문주께서 직접 오는게 아닌 이상, 이 전력으로 상대가 될 리 없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

"대협, 술자리를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다른 방에 가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잘못 들어온 모양이네요."

"그래?"

"예, 저희는 이만 물러가보겠습니다. 뭐하냐 이것들아! 꾸물대지말고 응곽이 저놈 챙겨서 따라나와라. 그리고 당장 이 방에 검남춘 상태 좋은걸로 한 병 넣어드려! 비싼 술인데 제가 죄송해서 사는겁니다. 하하."

웃어보인 여량천이 잽싸게 뒷걸음질 쳤다. 팔 다리 성하게 살아 나가려면 이 방법 뿐이다.

그러나.

"내가 삼호문주와 긴히 할 얘기가 있다. 너부터 이리 와서 앉아봐."

레반이 그를 멈춰세웠다.

"무, 문주님이요?"

화들짝 놀란 여량천은 어떻게든 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노력했다.

"아~무슨 뜻인지 잘 알겠습니다. 내려가서 당장 문주께 연락을 취하겠습니다."

슬쩍 문틀에 발을 걸치고 자연스레 몸을 돌린다. 아무도 모르게 달아날 준비를 마친 그의 등이 식은땀으로 흥건히 젖어가던 그때.

"여량천 중협."

철컥-

권총을 뽑아들어 여량천을 겨눈 레반이 손가락을 움직였다.

"한 잔 받으시오."

"······!"

그 손짓에 허공을 부유하던 술이 꼬물댄다.

실 달린 인형처럼 허공을 부유하던 술은 천천히 움직이더니 결국, 굳어있던 여량천의 입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호록.

달큰한 술맛과 함께 찾아온 두려움이 여량천의 혀 끝을 맴돌았다.

"손님 술 받아먹었으면 이리 와서 앉으시오."

아니나 다를까, 감은 틀리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여량천은 결국 문을 나서지 못했다. 저 괴물을 상대로 도망쳤다간 다시는 세상 빛을 볼 수 없으리라.

- 뭐야, 형님이 쫄았는데?

- 아니 한 번 싸워보지도 않고······.

"야! 시끄럽게 굴지 말고 전부 무릎 꿇고 있어!"

눈치도 없이 웅성대는 문도들을 향해 버럭 호통치는 여량천. 그러곤 자신도 어정쩡하게 무릎을 꿇어앉는다.

"너도 하나 줄까."

레반은 설향이 집어준 안주를 입에 던져넣으며 물었다.

여량천은 기겁하며 고개를 가로로 저었다.

"괘, 괜찮습니다."

"문주한테 연락은 했니."

"지금 연락을 받지 않으셔가지고 일단 메시지만 남겨뒀습니다."

스르릉—

여랑천의 조심스러운 대답을 들은 채 만채 하곤, 이번에 새로 장만한 압축도를 뽑아 어깨 위에 떡하니 걸치는 레반. 칼날이 조명을 받아 은은하게 빛난다.

그는 동시에 술병을 들어 보였다.

"이거 비우기 전까지 연락 없으면, 네가 문주 대신 대화를 나누면 되겠군."

"······예? 무슨 대화요?"

영문도 모른채 불안히 되묻는 여량천.

옆에 있던 밴스가 그런 그를 보며 안쓰러운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너 인질된 거야."

.

나는 망나니처럼 목구멍을 열고 술을 꼴꼴 들이부었다. 그리고 옆에서 입맛을 다시던 루돌프의 입과 콧구멍에도 시원하게 때려 부어주었다.

"아직도 답장 없냐?"

"계, 계속 연락을 취해보겠습니다."

빠른 속도로 가벼워져 가는 술병.

슬슬 술병이 바닥을 드러낼 때쯤.

"이보세요!"

날카로운 누군가의 목소리가 좋은 분위기를 깼다.

여량천의 뒤에 병풍처럼 꿇어있던 놈들중, 가장 연약해 보이던 녀석이 뜬금없이 튀어나오며 빼액 소리 지른다.

"진짜 적당히 하시죠? 너무 하잖아!"

지금껏 더러운 성질을 꾹 참고 있었는지, 날카로운 목소리에 화가 담겨있었다.

"아···아니, 이 썅년이 지금 뭐하는 거야! 당장 안 꿇어 앉아!"

옆에서 무릎 꿇고 있던 여량천은 나를 한 번 보더니 과하게 발끈했다. 내가 칼이라도 뽑을줄 알았나보군.

나는 분명 정신병자이긴 하지만, 성질좀 냈다고 해서 다짜고짜 목을 썰어버리지는 않는다. 내가 이렇게 널널한 사내다.

"사형도 쪽팔린 줄 아세요!"

"이 미친년아! 너 때문에 우리 다 죽을 일 있냐!"

"죽더라도 싸워보고 죽어야지! 응곽이는 눈이 삐꾸가 됐는데 사형이란 사람이 그리 비굴하게—"

"삐꾸 안 됐다."

나는 안주를 질겅대며 녀석의 말을 끊었다. 저리 날뛰는데 오해는 풀어 줘야지 않겠는가.

"······뭐라고요?"

살쾡이같은 녀석이 뒤쪽을 바라보자, 눈을 다쳤던 응곽이 소심하게 말했다.

모기 새끼만도 못한 목소리였다.

- 조, 좀 긁히긴 했는데 앞은 잘 보여.

내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잘 보인대."

"흥, 그래요? 알았어요."

콧김을 쒹쒹대며 돌아간 녀석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문도들 옆에 무릎을 꿇고 앉는다.

정신이 제대로 박혀있는 여인은 아니군.

"넌 손 들고 있어라. 한번 더 지랄했다간 애먼 놈들 잡겠다."

"이런 씨, 보이면 보인다고 말을 하지."

씩씩대면서도 손은 또 높게 든다.

나는 창피함을 못이겨 붉어진 녀석의 얼굴을 구경하다 여량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구, 궁금한게 있소! 아니, 있습니다."

놈이 울상이 되어 다급하게 입을 연다.

내가 말한 대화의 뜻을 알아버린 탓이다.

기녀들과 기루를 찾은 손님, 같은 문도들이 보는 앞에서 아까 그 남자처럼 스트립쇼를 펼쳐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만 아찔해져버린 것일까.

"뭐냐."

"밑에 있던 사내는 왜 그러신 겁니까?"

"애시당초 무례하게 진상을 부릴 예정으로 왔는데, 마침 내 눈앞에다 젖꼭지를 들이밀더군. 그래서 잠시 대화를 나눴다. 사내로서 그 추태를 어찌 그냥 넘어갈 수 있겠나."

"······."

"그나저나 말 돌리는 꼴을 보아하니 답은 안 왔구나."

그렇게 내가 어깨를 풀던 때였다.

여량천의 넷으로 하나의 메시지가 도착한 것은.

"아, 아닙니다. 문주님께서 답신을 방금 막 보내오셨습니다! 그러니까 이게 무슨 내용이냐면. 내가 몸이 좋지 못하니 직접—?"

어량천이 반색하며 메세지를 받아 읽었다. 하지만 놈은 얼마 가지 않아 죽을상이 되었다.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진 놈이 눈을 질끈 감고 말한다.

"······직접 삼호문으로 찾아오라 하십니다."

찾아오라?

흑도 주제에 가지가지 하는군.

풍광 좋은 곳에서 시원한 술이나 한잔하며 건설적인 대화를 나눠보려 했건만 어쩔 수 없지.

"여량천아."

"예, 예. 살려만 주세요."

죽을상을 짓고있는 놈에게 물었다.

"아까 눈 다쳤다던 놈 이름이 오곡이라고 했던가?"

"이대 제자인 '응곽' 입니다."

흑도깡패 주제에 몇 대 제자는 무슨.

나는 한쪽 눈이 파편에 긁혀 잠시 애꾸가 된 놈을 지그시 바라봤다. 응곽이 파들파들 떨며 시선을 피한다.

"내 아까는 미안했다. 눈은 좀 괜찮냐?"

"하, 한쪽은 흐릿하고 한쪽은 잘 보입니다."

"다행이구나. 잘 보이는 한쪽으로 내가 몇 걸음 걷는지 세라."

"네?"

"너희 문주 만나러 갈 때까지 세라. 한 걸음에 백 크레딧은 받아야겠다."

군자의 걸음은 언제나 무거운 법.

문주가 있는 곳까지 천 걸음을 걸으면 10만 크레딧, 만 걸음을 걸으면 100만 크레딧인가.

적당하군. 직접 찾아가 주는데 출장비는 받아야지 않겠나.

"돌프야."

"예! 형님!"

"의욕적인 너도 같이 세라."

분수에 맞지 않는 술과 안주를 맛나게 먹여주었으니, 이제 제 일을 해야할 시간이다.

"또 놀러 오세요! 소저 기다릴게요!"

"다음에도 저 설향이를 찾아주세요!"

"그래. 고생해라."

군자는 걸음을 서두르지 않는 법···

나는 안드로이드 기녀들의 직업정신 투철한 배웅을 받으며 느릿느릿 기루를 빠져나왔다.

*

정크타운 25번가.

삼호문의 문주 등평위가 분노하며 탁자를 내려친다.

쾅!

탁자가 쪼개지며 파편을 흩뿌렸다.

"우르르 몰려가서 한 놈을 못당하냐 한 놈을!"

"죄송합니다. 형님."

"이 망할놈아, 형님이 아니라 문주라 부르라고 몇 번을 말해!"

"아, 죄송합니다. 문주님."

"남아있는 애들 전부 수련관 앞으로 모이게 하고, 밖에 나가 있는 놈들도 빠짐없이 불러들여. 손에 못쓰는 권총이라도 하나씩 쥐여주고."

"예!"

대답한 이가 빠르게 사라진다.

다시 적막해진 삼호문주의 거처.

홀로 남은 등평위가 기억을 되짚어본다.

얼마 전.

삼호문과 계속 부딪히던 하레니오가 외지인에 의해 하루 아침에 사라졌단 소식을 듣곤, 그들과 원한이 있는 상위 레벨이나 기업의 소행인 줄로만 알았다.

헌데 그것이 아닌 것 같다.

수십 명의 단원과 4레벨 급이라 알려진 마법사를 쓸어버릴 정도의 외지인이 정크타운에 자리를 잡으려는 것인가?

'그럴리가. 이 거지같은 슬럼가에 발라먹을 살점이 어디 있다고?'

그만한 실력을 가진 자라면 기업이나 정부에 투신하는 것이 맞다. 부와 명성, 모든걸 취할 수 있을테니.

벌레의 더듬이가 되는 것보단 용이나 뱀의 꼬리가 되는 편이 당연히 더 낫지 않은가.

'명성도 아니고 돈도 아니면···."

삼호문에 원한이 있는 자란 말인가?

자신들도 꽤 긴 시간 타운내 세력의 한축을 담당했으니, 어쩔 수 없이 생겼던 마찰이야 많다면 많겠지만······그간 큰 문제가 될 만한 인물과 부딪친 적은 없을 터.

하레니오 갱단처럼 짧은 시간에 마구잡이로 세력을 불려 적을 만든 것도 아니다.

모두 아니라면 블랙넷을 돌아다니다 운 좋게 불법 마공이라도 다운로드받은 천둥벌거숭이?

"답답하군."

혼자 머리를 열심히 굴려봐도 도저히 그런 기행을 벌인 놈이 자신을 찾는 이유를 모르겠다.

괜히 머리만 복잡해진 등평위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하레니오 놈들보다는 말이 통하겠지."

#14화. 우리는 함께 웃었다

#14화.

"몇 걸음이냐."

"4천 걸음입니다. 형님."

"4천보 입니다."

루돌프와 응곽이 동시에 대답한다.

얼마나 집중했는지 두 놈 다 눈이 충혈되어 있다.

"좀 더 써라."

"그러면 5천 걸음입니다. 형님."

"훌륭하다. 오십만 크레딧이구나."

나는 고개를 위로 치켜들었다.

— 삼호문(三虎門)

겉멋이 잔뜩 든 문패가 걸려있다.

멀리서도 한눈에 들어올 만큼 화려하게 치장해놓은 네온유리관 문패. 저게 대체 문패인지 감성주점 간판인지 분간이 잘 안 간다.

나는 똥 씹은 표정의 여량천에게 물었다.

"저 삼호三虎가 무슨 뜻이냐?"

"전대 문주께서 정크타운의 세 마리의 범이 되라고 저렇게 작명하셨습니다."

흑도놈이 그러면 그렇지.

"전대 문주는 꿈이 참 작았구나."

"그래도 좋은 분이셨습니다."

"지금은 죽었나?"

"예."

"꿈보다 실력이 더 허접했나보군."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전대 문주를 비하하자, 아까의 살쾡이가 또 버럭하며 끼어들었다. 욱하는 성질을 보면 명줄이 길지는 않을 것 같다.

"우리는 적어도 당신네 하레니오가 했던 것처럼 멀쩡한 사람을 끌고가서 토막쳐 팔아먹지는 않아요!"

"은소 이 년아! 제발 가만히 좀 있어라!"

"읍읍!"

여량천이 다급하게 나서 호통치고, 옆에 있던 다른 문도 놈들은 녀석의 입에 손을 넣어가며 틀어막는다.

하지만 꽤 신선한 내용이었다.

"됐다. 무슨 얘기인지 들어나 보자. 고등어도 아니고 누가 토막을 쳐?"

막혔던 입이 풀린 녀석이 다시금 쏘아붙이며 울분을 토해낸다.

"멀쩡한 인간 납치해다가 강간하고 질리면 토막이나 내서 바이오 기업에 갖다 팔고, 그것보다 더 입에 담지도 못할 짓도 매일 했던 자식들이 우리가 어쨌네 전대 문주님이 저쨌네 함부로······."

"이제 잘 알았다. 그만."

더 들어봐야 식상한 얘기겠지.

녀석의 입을 멈추게 한 후, 따라오던 루돌프에게 타이르듯 물었다.

"돌프야. 너 저게 정말이니?"

"아, 아뇨. 저는 안 했습니다."

"거짓말하다 걸리면 넌 시체가 된다."

"워, 원래 있던 놈들끼리 벌이던 일입니다. 저는 진짜 부랄 두쪽 다 걸고 가담 안 했어요. 타운 입구에서 삥뜯고 가오좀 잡는 게 다였습니다. 제발 믿어주십쇼 형님."

"믿겠다."

"크흑, 감사합니다!"

"사실 네가 그런 짓을 했어도 별 상관은 없다. 더 고통스럽게 패면 되니까."

"······."

하레니오 갱단이 재활용 불가능한 쓰레기였던 건 맞는 듯 하나, 이미 고혼이 되어버린 놈들.

나는 은소라는 녀석에게 충고했다.

"앞으로는 성질을 죽이고 살아라. 여자도 패는 사내에게 잘못걸리면 제 명에 못 사는데, 그 사내가 바로 나다."

"우, 웃기고 있네. 때려 보든가?"

쐐액-!

끝없이 맹랑한 녀석의 얼굴을 향해 벼락같이 주먹을 내뻗었다.

하지만 주먹이 놈을 강타하기 직전.

텁-!

몸을 돌려 허공을 낚아채자 무언가 손에 잡혔다.

손바닥을 펴 확인해보니, 무엇인지 모를 액체가 발린 세침이었다.

"······그걸 잡아?"

경악하는 살쾡이년을 보며 시선을 돌렸다.

어쩐지 지나치게 까부는 것이 수상하다 했다.

"음."

세침이 날아온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도열해 있는 수십의 사내와 여인이 보인다. 각자 총화기를 한 정씩 들고있는 꼴이 예사롭지 않았다.

본래 총은 그저 들고 있을 때가 가장 효과적인 법.

곧, 그들 사이로 누군가 걸어나온다.

철선(鐵扇)으로 보이는 부채를 든 중년의 사내.

"마취제를 발라둔 세침이오. 그 아이가 워낙 철이 없어서 잠시 재우려고 그랬소."

차르륵-

그가 철선을 접으며 가볍게 포권했다.

"삼호문주 등평위요. 하레니오 갱단같은 쓰레기들을 청소해주시다니, 진심으로 고맙소."

젊었을 적에는 꽤 미형이었을 사내였다.

소맷단이 나풀대는 도복에 화려한 피어싱.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문주의 외형과는 꽤 거리가 있어 보인다.

확실히 근본없는 흑도라서 그런가.

그래도 장강 줄기처럼 쩍쩍 갈라진 저 손바닥을 보면, 적어도 수련을 우습게 아는 놈은 아니다. 나는 그리 생각했다.

"얘기는 들었소. 할 말이 있으시다고."

내가 별말이 없자, 삼호문주가 철선을 부채처럼 흔들며 물어왔다.

나는 용건만 간단히 말했다.

"이리 쉽게 나올거면 직접 찾아오지 그랬나. 덕분에 너는 오십만 크레딧을 내게 생겼다."

"오십만 크레딧?"

"우리 하레니오 업장의 업주들을 겁박했다지. 보상금에 출장비까지 해서 오십만이다."

문주의 얼굴이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우리 하레니오? 진심이신가?"

"그럼 내가 농담하러 온 사람으로 보이나?"

"······."

문주는 잠시 내 옆의 루돌프를 바라보더니 이내 시선을 거두었다.

가치가 없는 놈인걸 단박에 알아챘군.

어렵지 않게 내 진짜 의중을 눈치챈 삼호문주의 얼굴이 와락 구겨진다.

"17번가의 권리를 따지고 들 줄 알았더니, 그냥 삥 뜯으러 오신게로군."

삼호문주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기루에서 당신이 폭행한 이가 어떤 인물인 줄은 알고 있소?"

"성격 더럽고 젖꼭지가 못생긴 놈이었지."

"그 못생긴 자가 시티 관청 공무원이오."

그 진상 젖꼭지가 시티 공무원이었나?

까딱하면 칼 맞는 동네에서 너무 까분다 싶었는데, 믿는 구석이 있긴 했군.

힘 좀 쓰는 공무원의 한마디면 빈민가의 갱단 하나 쓸어버리는 건 일도 아닐 테니.

"공직자가 오늘 일을 문제 삼는다면 뒷감당은 할 수 있겠소? 자칫하면 타운이 통째로 갈려 나갈텐데."

문주는 짐짓 걱정하는 체하며 말했다.

하지만 큰 문제로 번지지는 않을 것이다.

"비디오 안 찍어뒀나?"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요."

"친절히 옷도 벗겨 뒀잖아. 오히려 나한테 고마워해야 하는것 아닌가."

"······."

그렇게 걱정이 됐으면 온몸 구석구석 영상에 담아뒀을 것이다. 대기업 제품을 카피한 짝퉁 마약이나 흥분제같은 것도 옆에 딱 붙여서.

그것이 진정한 흑도의 방식 아니던가.

설령 진짜 관청 공무원이라도 상관없다. 이런 외곽까지 기어오는 핫바지가 끗발이 그리 강할 리 없으니.

"어찌 되었건 힘든 걸음 하셨군. 17번가에서 우리 문도들이 벌였던 일들은 내가 사과하겠소. 용서하시오."

우회적인 협박이 통하지 않자, 삼호문주는 마지못해 사과를 입에 담았다.

"그리고 입밖으로 내기 우습지만, 이들은 하레니오같은 쓰레기들과 다르오. 그래서 보여주려고 불렀소."

문주가 주변을 슥 둘러본다.

잔뜩 날이 선 채로 이쪽을 주시하고 있는 문도들.

그들의 손에는 총이 들려있긴 하나, 대부분은 몸을 벌벌 떠는 걸 보아하니 전투 경험은 많지 않아 보였다

문주의 말대로 살인을 일삼는 부류는 아니군.

"보다시피 평범한 이들이 더 많지요."

"그래. 사람 구실은 하는 이들이군."

"그러니 서로 이쯤하고 좋게 넘어가는 것이 어떻겠소. 내 당장 5만 크레딧 드리리다."

"싫다."

문주의 타협안, 당연하게도 무시했다.

푼돈을 받으러 여기까지 온 건 아니니까.

그러자 문주가 이번에는 도복 소맷단에서 넷 단말기를 꺼내어 흔들었다.

"우린 외부 기업과도 줄이 닿아있소. 그쪽과 연락하는 대포 단말이오."

"불러봐."

"······."

어림없다.

어디 연줄이 닿아있을지는 몰라도 그게 무서웠다면 기루에 쳐들어가는 일도 없었을 거다.

그리고 내가 반 바이오에서 해온 시종 노릇만 10년이다. 정말 제대로 된 형태의 기업이라면, 이깟 돈도 안되는 슬럼가의 일에 끼어들 이유 따위가 있겠는가.

뭐 그래봐야 조그마한 공장급이나 되겠지.

"안 부르나?"

"이렇게 윽박 질러도 오십만 크레딧은 불가능하오. 이 타운에서 그런 거금을 턱 내놓을 수 있는 건 친씨아, 그 여인 정도밖에 없소."

스르릉-

이러다간 말이 끝도 없이 길어질 것 같기에, 압축도를 뽑아 들었다.

문주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마법사라 들었는데, 칼도 가지고 다니시오?"

그 시선을 무시한 채 말없이 휘둘렀다.

도가 허공을 정직하게 베고 찔러나간다.

누군가의 눈을 매료시킬 만큼 화려하지도, 빠르지도 않은 초식.

그러나 무인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검.

삼재검법(三才劍法)의 기본 초식.

"······삼재검법을 익힌 마법사는 처음보는군."

헛웃음을 내뱉는 삼호문주.

허나 나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삼재검법의 기본 삼 초식을 펼친 뒤, 이제는 공력을 한껏 끌어올려 또 다른 검을 펼쳐나가기 시작한다.

쐐액—

섬전처럼 쏘아진 압축도가 여러개의 검로를 그려가고.

살기 짙은 파공성이 연이어 대기를 가르자, 웅성거리던 장내가 일순간 고요해진다.

퍼걱.

몇 분간 원하는 만큼의 검을 펼쳐낸 나는, 휘적휘적 휘두르던 칼을 경쾌하게 땅에 꽂았다.

- 갑자기 검은 왜 휘둘러?

- 싸우기 전에 하는 의식 같은건가?

영문도 모른채 나를 미친놈 취급하는 이들 사이에서, 삼호문주만이 멍한 표정으로 날 바라본다.

이윽고.

몹시 당황스러운 얼굴로 변한 문주는, 일 분도 지나지 않아 결단을 내렸다.

"감히 내 구역에서 칼을 휘두르다니···."

격노한 그의 음성이 삼호문의 앞뜰을 쩌렁쩌렁 울린다.

"더는 눈 뜨고 못 봐주겠군! 따라 들어오시오!"

.

삼호문, 문주 등평위의 거처.

방금까지 뻣뻣한 목으로 격노했던 삼호문주는, 거처에 들어오자마자 돌변해 땅에 닿을 듯 고개를 깊이 숙였다.

"제가 고수를 몰라뵀습니다."

"무섭게 왜 이래. 하던 대로 하지."

"방금 전 일은 이해해 주십시오. 꼴에 문주인데 다들 보고있는 통에···체면치레는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척 봐도 눈치와 처세가 빠른 놈이다.

그러니 별 볼일 없는 본신의 무력을 가지고도 입지를 다졌겠지. 루돌프가 아니라 이놈을 시종으로 썼어야 했는데.

"괜찮다. 흑도의 수장이라면 응당 그래야지."

"앉으시죠. 이쪽이 상석(上席)입니다."

나는 상석 자리에 풀썩 앉았다. 문주의 좌석은 안마와 통풍 기능이 탑재된 의료용 전동의자였는데, 꽤나 마음에 드는 착좌감이었다.

무림시절 대문파의 장문인들도 이런 호사를 누리지는 못했을거다.

"기술이 좋기는 좋아."

"원하시면 하나 주문해서 내드리겠습니다."

놈이 철선을 부채처럼 살랑살랑 흔든다.

벌써부터 입 안의 혀처럼 굴어대는 중년의 사내에 질린 나는, 고개를 저으며 방 한쪽에 시선을 두었다.

한쪽 면을 전부 차지한 디스플레이에서는 시티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 불과 며칠 전에 있었던 일인데요. ]

30초가량의 짧은 영상.

화염에 휩싸인 반 바이오 컴퍼니 상층, 꼭대기에 커다랗게 박힌 Van Bio Co. 회사 로고가 열기에 녹아 땅으로 떨어진다.

[ 발두르 시티의 반 바이오 컴퍼니, 사천당가와의 나노해독제 특허침해 소송에서 최종심 패소. 연방 대법원의 천문학적 배상금 판결에 불복한 잉그리드 반 회장이 사천당가의 임원들을 겨냥한 무차별 폭발테러 후 자살 추정. 현재까지 정확한 경위와 진상을 놓고 조사중입니다. ]

기업 간 소송이나 시시비비의 끝이 무력충돌 사태나 온갖 방식의 테러, 임원진의 사망 등으로 끝나는 사태는 심심찮게 있는 일이다.

하지만 반 회장은 5레벨. 아무리 자존심이 강해도 당가의 임원급을 상대로 저만한 테러를 벌일 만큼의 힘은 없다. 에센스를 잘못 마시고 마나폭주라도 한 건가.

아무튼 저 박살난 현장에서 시티 경찰이 수습이랍시고 대충 시체랑 잔해나 치우는 동안, 사건은 점점 잊히며 흐지부지될 것이다.

결국 반 바이오 컴퍼니의 주식은 휴지조각이 되고, 보유하고 있던 기업체와 자산은 당가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되겠지.

마지막으로 마약에 빠진 구제불능들은 여느 때와 다름없는 일상으로 돌아가 사천당가표 특제 마약을 소비하면 된다.

간악하지만 훌륭한 결말이다.

[ 다음 소식입니다. ]

금세 넘어간 화면은 한 거대한 장벽을 비춘다.

[ 7레벨급의 언데드가 프레이야 시티의 제 1방벽을 뛰어넘어와 근접구역의 주민 45명이 감염, 70명이 그 자리에서 사망했습니다. 운디네 코퍼레이션(UDN-Corp)의 전무 6레벨 마법사 '로자리오 폴' 과 긴급출동한 연방 특수부대에 의해 사살되었습니다. 추정 수명은 40년으로, 짐승형의 개체입니다. ]

[ ······이후 연방은, 세계 1위의 장벽보안 기업인 '인터네셔널 앱솔루트 코프' 의 광역 마나프로텍트에 대한 사후조사에 착수했습니다. ]

[ 운디네 코퍼레이션의 한 관계자는 '해수 담수화 플랜트 사업 단지에는 피해가 없다' 며 담수 공급에 차질은 없을 것이라고 단호히 선을 그었습니다. 감염이 의심되거나 확실한 45명의 주민은 당분간 격리 예정이며 일주일 내로 호전증세가 나타나지 않을 경우, 장벽 밖으로 추방될 예정입니다. ]

삑-

뉴스가 끝나자 문주가 디스플레이를 끄며 다시 말문을 열었다.

"요새 시체들이 자주 넘어오는 것 같습니다. 마법사들은 언데드라고 부른다지요."

"드넓은 장벽을 완벽히 보호하는 건 무리니까."

"하하, 연방이 얼마나 버틸지 모르겠습니다. 이러다 정말 세상이 망하는 건 아닌지."

- 문주님. 들어가겠습니다.

커피 쟁반을 들고 들어온 여량천은, 상석에 앉아있는 나와 문주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내 앞에 먼저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급속 배양한 원두콩으로 내린, 인위적이고 어딘가 쿰쿰한 향. 맛도 떫을 것이 분명하기에 손도 대지 않았다.

"나는 콜라가 더 좋다. 다시 내와라."

"···하하, 그럴까요?"

억지로 활짝 웃어보인 여량천이 마지못해 밖으로 나가자, 삼호문주가 자세를 공손하게 고쳐앉았다.

"큼, 워낙 별별 사정있는 사람들이 흘러 들어오는 하류니까 대협께서 누군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잠시 목을 가다듬는 삼호문주.

나는 보았다. 무감정을 연기하는 놈의 표정에서 숨길 수 없는 기대감이 엿보이는 것을. 어떤 얘기가 나올지는 듣지 않아도 알 것만 같았다.

"예, 돈은 어디서나 중요하지요."

탁-!

『 300,000 Credit / 연방 은행 』

『 300,000 Credit / 연방 은행 』

은행에서 발행한 고액 크레딧 칩이 두 개.

무려 60만 크레딧을 현물로 떡하니 내놓은 삼호문주가 인자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떻게 구하셨는지는 모르겠으나 아까 그 검법, 저한테 파시지 않겠습니까?"

팔아달라···

그 말에 나도 덩달아 웃었다.

아무리 절반도 못 보여줬다지만.

"남궁세가의 섬전십삼검뢰(閃電十三劍雷)가 개좆으로 보였나? 내가 그 푼돈에 넘기게."

"역시 60만 크레딧으로는 부족하겠지요?"

"그래."

"그렇군요."

—하하하하.

문주와 내가 함께 웃었다.

삼호문에 웃음꽃이 피어난 날이었다.

#15화. 참으로 운이 좋다

#15화.

무엇을 위해 사는가?

마음껏 술을 퍼마시기 위해.

다음 날도 마약을 하기 위해.

돈을 모아서 섹스토이를 사기 위해.

그냥 죽을 용기가 없어서.

조금 머저리같긴 해도, 정크타운의 수많은 주민은 나름대로 이런저런 한심한 이유로 살아간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타운 주민중 한 명이자 완숙한 3레벨의 무인인 삼호문주 등평위의 목표는 '상승의 무학'을 얻어 고수로 발돋움하는 것이었다.

젊었을 적 운 좋게 익힌 편법(鞭法)으로 이류를 바라보는 경지에 올랐으나, 어디까지나 한계가 명확한 무공이었고 무인으로서의 성취는 거기까지였다.

그는 다른 이들처럼 언젠가 웨스트 정크타운에 흘러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혈혈단신, 처세와 실력을 적절히 배분해가며 타운에서의 입지를 다졌다.

그러다가 전대 삼호문주를 만났고, 조금이나마 출세를 원하는 주민들을 규합해 세력을 만들었다. 기루와 비무 도박장 등의 수익 모델을 만들어 밑바닥 크레딧을 긁어모으자 슬럼가에서 알아주는 집단으로 성장했다.

타운의 다른 집단인 하레니오 갱단이나 라네치아 패밀리처럼 평판이 나쁘지도 않았다.

가끔 시가지에서 구역을 지키기 위해 총격전을 벌이긴 했어도 그 악귀들처럼 주민을 학살하는 일은 없었으니까.

오늘, 그런 등평위의 앞에 귀인이 나타났다.

"있으면서 없다고 그리 앙탈을 부렸단 말인가? 애당초 이 슬럼가에서 이만한 돈을 모아둔 것도 신기할 노릇이군."

자그마치 남궁의 섬전십삼검뢰를 익히고 있는 사내.

제왕검형(帝王劍形) 같은 가문의 절기는 아니라도 위세 높은 남궁가의 가인들만이 익히는 무공임은 틀림없었다.

남궁세가 출신의 고수가 넷에 업로드한 '시체 토벌' 영상에 보란 듯 등장하는 무공이었으니.

초식의 절반만 익혀도 외곽 슬럼가쯤은 휘어잡을 수 있을 것이다.

쾌속하고 살기가 짙어 자세히 보지 않으면 사파의 무공처럼 보이기도 하기에, 저 먼 수르트 시티에 있는 남궁세가의 무인들이 직접 와서 보지 않는 이상에야 발각당할 염려도 없다.

발두르 외곽의 슬럼가에서 남궁의 검법이 펼쳐지고 있으리라 감히 상상조차 못 할테니 말이다.

삼호문주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물었다.

"혹여 남궁세가의 방계이십니까?"

"그럴 리가 있나."

문주는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시체의 범람으로 천천히 망해가는 세상에, 어디 말못할 사연을 가진 자들이 한 둘이던가? 바라던 목표만 취하면 그만인 것을.

- 반박귀진(返朴歸眞). 지극한 경지의 고수는 오히려 범인처럼 보인다지요? 그 말이 정말이로군요. 기운이 미약해 무공을 펼치지 않으셨다면 전혀 모를뻔했습니다.

- 대협이 얼마나 높은 경지을 밟고 계시는지, 말단 무인인 저로서는 짐작조차 할 수 없습니다.

삼호문주의 입에서 듣기 좋은 말이 청산유수처럼 흘러나온다.

"······."

레반이 보기에 등평위는 뭔가 오해를 하고 있는듯 했다. 실제로 자신의 내력이 일천하기 그지없기에 저리 느껴지는 걸테지만, 그는 굳이 나서 정정하지 않았다.

"이 등평위, 염치는 있는 놈입니다. 사실 섬전십삼검뢰를 팔아치울 생각은 애초에 없으셨겠지요?"

레반은 무언으로 긍정했다.

자신을 잡아 죽이려는 놈들은 당가만으로도 이미 벅차다. 남궁세가까지 끼어 들었다간 이 몸으로 감당해낼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무림계에서 알아주는 가문인 남궁의 무공일진대, 엄청난 거금도 아니고 고작 60만 크레딧에 팔아넘길 수야 있겠는가.

대신, 돈 받고 던져주기에 적당한 검법은 있지.

'과거 유천표국(流川鏢局)의 검법 정도면 적당하겠군.'

유천표국의 검법과 보법만을 익혀 절정의 반열에 오른 표사들이 왕왕 있었다. 재능이 뛰어나지 않더라도 기본기가 단단하기에 제대로 익힌다면 어디가서 맞고 다니진 않을 거다.

레반은 그리 생각을 마치곤 낚싯대를 드리웠다.

"정말 아쉽군."

"무엇이 말입니까?"

"60만의 두 배인 120만 크레딧이라면 진지하게 생각해봤을 텐데 말이야. 60만 크레딧은 적어도 너무 적어."

"진심이십니까?"

짧은 순간 삼호문주의 눈빛에 이채가 스쳤다. 그 찰나의 반응을 눈으로 확인한 레반이 헛웃음을 지으며 낚싯대를 수거했다.

"당연히 거짓이다. 많이도 모아뒀구나."

무림에 발을 들이고 고수를 꿈꾸는 이라면, 상승의 무공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필연적으로 크레딧을 모아 두었겠지.

"···하하, 이거 제가 또 당했군요."

실망한 표정을 숨겨가며 미소를 짓는 삼호문주. 그를 우묵한 눈으로 바라보던 레반은 다시 입을 열었다.

"120만 크레딧을 내라. 그러면 네게 어울리는 검법을 내어주마."

"예?"

"섬전십삼검뢰에는 못 미치겠으나, 그것 마저도 네겐 훌륭한 무공일 것이다. 대성하면 절정의 경지에 오를 수도 있을테지."

레반의 그 한마디에 문주의 얼굴이 숨길 수 없는 기쁨으로 물들었다. 왜 아니 그렇겠는가? 평생을 이류로 살아가던 차에 찾아온 천금 같은 기회인데.

"감사합니다."

"생각보다 쉽게 믿는군."

등평위가 침착한 어투로 답했다.

"대협께서 저를 죽이고자 마음먹었다면 내 목은 이미 달아났겠지요. 죽이고 크레딧을 빼앗는게 가장 효율적인데 왜 애써 시간을 낭비하겠습니까."

레반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부정했다.

"사람을 왜 죽여? 나는 마음이 여리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한 적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역시나 데이터칩은 이놈 머리에 박아넣었어야 했다.

그런 레반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음을 침착하게 가라앉힌 등평위는 호감이 가득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대협께서는 때가 되면 이 낡은 정크타운을 떠나시겠지요?

"그렇겠지."

"저는 아닙니다. 이미 너무 오래 살았지요. 제 모든것이 전부 이 타운 안에 있습니다."

호로록-

등평위가 커피를 홀짝이며 말했다.

"만약 말씀하신 검법을 제게 팔아주신다면, 대협께서 이곳에 머무시는 동안 모든 편의를 봐 드리는 것은 물론, 다른 집단과 대적할 일이 생기면 삼호문이 최대한 돕겠습니다. 제 이름을 걸고 약속드리지요."

"구두 약속처럼 깨지기 쉬운 건 없다."

"그렇다면 계약서를 쓰시지요. 륭 사무소의 '륭' 선생을 이 계약의 공증인으로 세우면 어떻겠습니까."

사무라이 륭 사무소.

정크타운에 남은 네 집단 중 하나.

총포상의 친씨아에게 전해 듣기로는.

[ 8번가에 있는 륭 사무소. 이쪽은 건드리지 마. 자극하지 않으면 문제될 일 없는 남자거든. ]

8번가 골목에서 해결사 사무소를 운영하는 륭 사무소의 소장, 사무라이 륭.

몇 년 전 은퇴한 시체 사냥꾼.

어떤 힘을 가졌는지는 불분명. 무림계도 마법계도 아닌 자다. 대형 집단 간의 전쟁이 가장 치열한 도시, 로키 시티의 신동경 출신이라고 했던가.

[ 그 남자 6레벨이야. 그것도 7레벨에 가까운 6레벨. 사실 이런 동네에 있을 짬은 절대 아니지. ]

레벨 6.

초일류 무인 혹은 4위계 마법사.

무인으로서의 진정한 꽃을 피우는 절정(絕頂)의 경지 혹은, 마법사로서 제대로 인정받기 시작하는 5위계로 가는 길목에 있는 자들이 6레벨이다.

삼호문주가 철선을 촤락- 펼치며 말했다.

"저도 일전에 륭 선생과 맺어둔 계약이 있습니다. 제가 비명에 간다면 저를 죽인자를 병신으로 만들어 달라는 계약이었지요. 일종의 보험입니다."

"그랬나? 내 너를 죽여 확인해 볼 수도 없고."

"···뭐 그렇게까지 하셔야겠습니까? 이 공증은 대협을 묶어두기 위함이 아닌, 제 약속을 지키기 위한 장치라 생각해 주십시오."

문주가 땀을 닦으며 짐짓 두려운 체한다.

대강 협박하고 구슬려서 돈이나 뜯어 가려고 했더니, 두더지처럼 파놓은 굴이 많다. 머리를 굴리는 꼴이 딱 책사 기질이군.

"문주야. 너 올해로 몇 살이냐?"

"제가 이제 오십이 좀 넘었습니다."

"새파랗게 어린놈이 벌써부터 약아빠졌군."

젊은 외모를 가지고 있는 레반의 입에서 나온 말이지만, 문주는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다. 정크타운같은 슬럼가는 본래 강자존이니까.

"하하하, 아무래도 책임져야 할 입이 많으니 처세술만 잔뜩 늘어나지 뭡니까."

안마의자에 몸을 묻으며 생각한다.

적당한 무공을 골라 던져준다고 해도 과연 '무공은 다운로드받는 것' 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박혀있을 놈들이 이해를 할 수 있을까.

덜컥.

생각이 깊어지는 사이, 여량천이 다시금 콜라 쟁반을 들고 들어온다.

레반은 늘어지는 생각을 끊고 물었다.

"여량천, 무공을 배운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펼쳐 봐라."

무림계 구파일방 오대세가로 대변되는 메가콥급의 기업과 여타 대기업들도 자신들의 무공을 절대 시중에 풀지 않는다.

마법계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그러니 결국 시중에 풀리는 무공이나 마법 데이터 칩은 아무리 비싸고 좋다고 해봐야 거기서 거기다.

정말 극소수의 경우 쫄딱 망한 대기업이 무공의 구결을 데이터화한 후 블랙넷에서 팔아먹는 상황도 있긴 하나, 곧 다른 기업들의 제재에 꼬리를 말고 사라지기 일쑤다.

게다가 어찌어찌 괜찮은 무공을 다운로드받아 익힌다고 해도 단전의 내공이 경지높은 무공을 받쳐줘야 하는 일.

삼류도 못 되는 무공을 익혔을 것이 뻔하지만, 두 눈으로 확인은 해봐야겠다.

등평위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보여 봐라."

곧.

여량천이 비장한 표정으로 검을 뽑는다.

첫 초식은 나름 기본 검로를 따라 정직하게 움직였고, 뒤로 갈수록 화려하고 복잡해지는 검로.

삼재검법(三才劍法)을 뼈대로 해서 살을 덧붙인건가?

마지막에 이르러선 검끝이 눈으로 따라가기 싫어질 만큼 어지러이 움직인다. 슬슬 무슨 의도로 만들어진 검법인지 알 것 같다.

"대협께서 보시기에는 어떻습니까?"

여량천의 무공 시연이 끝나고.

나지막이 기대하는 듯한 문주의 물음에 솔직하게 평했다.

"뭘 어때, 쓰레기지."

3회차 시절, 여느 뒷골목에 널려있던 삼류 흑도방파도 이 정도는 아니었겠다.

지금껏 화기의 힘을 빌려 싸운 건가.

"역시 그렇습니까."

"그래도 삼재검법이 뼈대라 기본 검식은 몸에 배었을 거다. 이제 나머지는 잊고 앞의 세 초식만 취해라. 그게 검의 기초인 삼재다."

레반이 여량천에게 물었다.

"너는 몇 년간 수련했냐."

"햇수로 이제 10년째입니다."

"어떻게 삼류 수준도 못 되는군."

"······."

"섭섭하니?"

"아닙니다. 저도 알고 있었습니다."

"미련없이 버려라. 평생 여기 처박혀 살거라면 사실 그따위 검법으로도 충분하긴 하지. 칼 대신 총을 들고 다니면 되니까."

10년을 내리 수련했는데 저따위라면 여태껏 무공을 수련한 이유가 전혀 없지 않은가. 어차피 총보다도 위력이 못할텐데.

보통이라면 일반인의 범주를 한참 뛰어넘었어야 한다.

최소한 이류는 되었어야지.

"이봐, 문주."

"결정하셨는지요?"

"나머지 크레딧 전부 가져와라. 여량천 너는 당장 나가서 종이랑 붓 가져오고."

"아, 예!"

영문도 모른채 허둥지둥 밖으로 달려 나가는 여량천.

레반은 그 모습을 보다가 문득, 스승이었다면 이 미욱한 놈들을 어찌했을까 떠올려보았다.

그냥 한심한 놈들이라며 죽도록 때렸겠지.

그런 정신나간 스승 밑에서 자신같은 신사가 나오다니.

"등평위, 너는 참으로 운이 좋다."

적당한 무공을 내어주는 대가로 120만 크레딧을 얻게 된 레반은, 자애로운 얼굴로 적당히 웃어보였다.

* * *

은소.

'대체 뭐하는 사람이야?'

전대 문주의 딸인 그녀는, 숨을 죽인 채 문주의 거처를 엿보고 있었다.

'아까 칼좀 휘적휘적한게 그렇게 대단한 무공이야? 하긴 앉은 자리에서 응곽이를 반 애꾸로 만든걸 보면, 보통은 아니긴 한데······.'

문주님과 사형이 저 남자의 말에 때때로 놀라워한다. 그 바보같은 모습을 볼 때마다 은소의 눈매가 한껏 좁아졌다.

'윽.'

그녀는 이따금 시선을 느낀 레반이 뒤를 돌아볼 때마다 딴청을 피웠다.

그렇게 두 시간쯤 지났을까.

셋은 화기애애한 얼굴로 걸어 나왔다.

심지어 문주라는 인간은 친절히 저 남자를 배웅까지 해준다. 아니 어찌 저렇게 자존심이 없을까? 위장 깊은 곳에서부터 들불이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계약서는 애들 시켜서 최대한 빨리 보내 드리겠습니다."

"그래라."

"점심이라도 같이 드시고 가시지요."

"메뉴가 뭔데?"

"배양육을 건조시킨 육포입니다."

"너나 많이 먹어라."

문주의 거처에서부터 문패가 있는 입구까지 몰래 따라간 은소가 둘의 뒤통수에 따가운 눈초리를 보낸다.

저 못된 놈이 삼호문를 나설 때까지, 한참이나 째려본 그녀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당장 달려가서 자존심도 없는 사형을 닦달할 생각이었다.

그러던 그때였다.

"뭐가 그리 궁금하더냐."

"···!?"

등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놀라 몸을 돌리자.

뻐억-

어찌 반응할 틈도 없이 옆통수에 거대한 충격이 가해진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털퍼덕 허물어지는 은소의 육신.

힘겹게 눈을 돌리자, 틀림없이 입구를 나섰던 레반이 앞에 서 있었다.

그의 무미건조한 음성이 들려온다.

- 문주, 외공 중에 철포삼(鐵布衫)이라고 있다. 이런 돌대가리에게 잘 어울리는 무공이지.

- 그렇습니까 대협? 이거 꼭 가르쳐주셔야겠습니다.

- 타운에 박치기 공룡 하나 나오겠군.

—하하하하.

아득해지는 은소의 정신 사이로, 간신같은 문주와 레반의 웃음소리가 어우러졌다.

삼호문에 웃음꽃이 만개한 날이었다.

#16화. 굉장히 무서운 놈들이군

#16화.

나흘이 지났다.

구역의 패자인 하레니오를 지워버린 뒤 삼호문주와의 계약으로 주머니도 두둑해진 나는, 아지트인 술집에 틀어박혀 수행과 정양에 전념했다.

기맥과 근골이 단단히 자리 잡아야 할 시기를 시종 생활로 놓쳤으니, 지금부터라도 곱절로 노력해야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운공과 신체 수련을 번갈아가며 쉬지 않고 병행한다.

강도 높은 수련으로 전신의 근육을 잘게 찢어둬도 조금 쉬고 나면 탈력감과 고통은 금세 사라졌다. 아마도 2세대 나노 로봇이 신체 회복을 보조하는 것이겠지. 구 세대임에도 효과는 만족스럽다. 아직 타운 입구 잡종지에 묻혀있을 6세대 프로토타입 나노로봇이 더욱 기대되는 이유다.

—후우.

육체를 진이 빠질 때까지 몰아붙이고 나면 운공을 시작한다. 무선대지신공(舞仙大地神功)의 공능이 쥐톨만한 단전을 채워간다. 정신이 맑아지며 한 줄기 희미한 내력이 단전으로 흘러들어와 제 자리를 잡는다.

마나 회로의 단련도 빼놓지 않았다.

늦은 새벽이 되면 마나회로를 담금질하기 위해 회로가 뜨거워질 때까지 마법을 구사한다.

—스각!

일전에 패스트푸드 매장에서 썼던 마법이 다시 한번 재현된다. 쏘아진 마나탄환들은 벽지를 길쭉하게 긁고는 흩어졌다.

일전보다 위력은 강해지고 소모하는 마나와 집중력이 크게 줄어들었다.

십 분쯤 마력의 방출과 흡수를 반복하자 슬슬 심장 부근이 뜨겁고 답답해졌다.

아직은 여기까지인가.

과한 운용으로 인한 회로 과열.

두 개의 마나회로가 마력에 적응해 안정화되는 날에는 세 번째 마나회로 제작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절대 경지의 화산파 늙은이와도 검을 섞던 무인의 몸이 아닌 잡일이나 하던 시종의 육체는 그렇게, 상당히 빠른 속도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내가 머리도 식힐 겸 2층으로 올라가자, 수십 개의 차트가 요동치는 디스플레이 앞에서 멍하니 앉아있는 산발의 귀신이 보였다.

윤기가 흐르던 머리칼은 푸석해 보이고눈 밑 그늘이 내려와 얼굴은 퀭해 보인다. 5세대 나노로봇 시술을 받았어도 정신적인 피로는 피해갈 수 없군.

나는 레나가 주시하는 화면을 슬쩍 구경했다.

[ 종목명 : 알 헤임달 시티 100 선물 인버스 3X ]

" 매입 금액 : 36,640C "

" 평가 금액 : 22,196C "

" 손익률 : - 39.42% "

[ 종목명 : 알 헤임달 시티 비공정 조선산업 인버스 2X ]

" 매입 금액 : 7,000C "

" 평가 금액 : 2,597C "

" 손익률 : - 62.9% "

그러다 그만 오- 하고 감탄을 내뱉었다.

망망대해처럼 파랗게 질려있는 차트들.

저 종목 때문에 정신을 놓은 거로군. 반 바이오 컴퍼니에서 자산을 굴릴 땐, 수백만 크레딧의 손실이 생겨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던 녀석인데···

무언가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겠지.

"레나."

"미안해. 하필 오늘 알 헤임달 시티에 큰 개척 이슈가 터져버려서······."

묻지도 않았는데 레나가 먼저 물기 가득한 목소리로 한탄했다.

"이번에 대규모 개척 사업을 하려나봐. 잃어버린 옛 도시들까지 밀고 나가서 수복할 계획이라는데···소식이 퍼지자마자 천연자원 관련 채굴 중장비나 비공정 제작소들의 주가가 다같이 폭등해버렸어."

" 알 헤임달 시티 "

연방을 이루는 7개의 거대도시 중 하나.

다수의 이종족과 인간이 뒤섞여 살아가며, 연방 도시 중 유일하게 증기기관과 화석연료의 사용을 기조로 택해 발전해온 증기와 기계장치의 도시.

어두운 하늘을 천천히 떠다니는 증기선, 갤리온을 닮은 토목 비공정(飛空艇)들의 증기뿜는 굉음이 끊이지 않는 곳.

지하에 막대한 양의 자원이 매장되어 있는 땅이자, 연방도시 중 가장 적극적으로 장벽 밖의 자원개발과 영토 개척을 지속적으로 시도하는 개척가들의 도시.

알 헤임달을 포함해 다른 연방도시에 공급되는 천연자원. 그러니까 질 좋은 석탄부터 시작해 원유, 가스, 금, 철, 희토류, 필수 광물, 뱀파이어 적십자사의 질좋은 수혈팩에 이르기까지.

전부 알 헤임달 시티에서 나온다.

그런데 오늘만큼은 내 소중한 주머니를 털어간 악마 놈들이군.

도로록- 도로록-

레나는 의자를 끌며 가까이 다가오더니, 나를 시무룩한 눈망울로 올려다봤다.

"레반, 솔직히 돈 더 가지고 있지? 어디서 백만 크레딧을 벌었다는 얘기가 들리던데."

"더는 못 준다."

소중한 거금을 증권시장이라는 악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을 수는 없는 일.

내 대답에 실망한 그녀가 조용히 꿍시렁댔다.

"시드머니를 더 태우면 금방 복구할 수 있을 텐데······."

회사와 가문이 망해버린 상황에, 수백억 크레딧이 오가는 증권시장에 뛰어들어 종일 머리 쓰는 것도 꽤 고역일 테지.

자본금 수혈에 실패한 레나는 결국 구석의 침대로 터덜터덜 향했다. 잠시 내 쪽을 돌아보더니, 한껏 불만스럽다는 식의 표정을 보여주고는 이불을 덮는다.

격하게 들썩이던 이불이 이내 조용해지고 고롱대는 소리만이 들려온다. 며칠간 깨어 있더니, 불면증마저 피로를 이기지 못한 모양이다.

마법이나 한번 가르쳐 볼까?

반 바이오 컴퍼니는 마법계 기업이었던 만큼, 레나도 마법에 대한 기본 소양은 가지고 있다.

레나가 시종 따위였던 내게 마법을 배우는 것을···집착 심한 루벤카가 좋아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아마 나중에 알게되면 날 불태워 죽이려 들겠지.

루벤카 그 악독한 여자를 떠올리니 기분이 더러워졌다. 당가의 추적을 피하려면 반드시 접점을 만들어 둬야할 인물이지만···일단 쓸데없는 생각은 접어두기로 한다.

1층으로 내려오자, 바 테이블에 앉아 멀뚱멀뚱 아무것도 안 하고있는 루돌프놈이 시선에 들어왔다. 놈을 대충 옆으로 걷어차 치우곤 휴머노이드 바텐더를 향해 말했다.

"칩 꺼내봐."

- 알겠습니다.

『 300,000 Credit / 연방 은행 』

『 100,000 Credit / 연방 은행 』

30만 크레딧 칩 세 개.

10만 크레딧 칩 세 개.

등평위에게 무공을 내어주고 얻은 120만 크레딧이다. 총포상에서 판매 대금으로 받은 크레딧까지 합하면 140만 크레딧에 육박하는 거금.

삼호루에서 난동을 피울때만 해도 별 탈 없이 이만한 돈이 생길 거라곤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덤벼오면 때려죽이고 돈을 강탈할 생각만 했었지.

강제력을 가진 계약서의 공증을 선 륭이 약간 마음에 걸리긴 하나, 돈의 맛은 확실히 달콤했다. 그저 가끔 꺼내어 바라보기만 해도 마음이 풍요로워진다.

나는 우선 이 돈으로 양자택일을 해야 했다.

묻어둔 프로토타입 나노로봇을 꺼내와 시술해줄 닥터를 찾을지, 아니면 에센스를 구해볼지였다.

며칠간 고민 끝에, 에센스쪽을 택했다.

시판도 되지 않은 거액의 프로토타입 의료기기. 그런걸 신원도 확실하지 않은 사내가 들고 다닌다는 소문이라도 났다간, 그 자리에서 곧바로 신고 당해도 이상하지 않으리라.

내가 그런 생각에 빠져들며 과열된 마나회로가 진정되기를 기다리던 때였다.

별안간 걷어차였던 루돌프놈이 뜻밖의 소리를 꺼냈다.

"그런데 형님. 수련하시는 동안 친씨아한테 연락이 왔었습니다."

"왜."

"딱히 대단한건 아니고요. 공장에서 나온 놈들이 정크타운을 돌아다니고 있답니다."

루돌프가 뒤통수를 벅벅 긁으며 별것 아니라는 듯 말한다. 하지만 저 빌어먹을 놈의 표정이 아무래도 심상치 않기에 즉시 강압적인 취조에 들어갔다.

"무슨 공장? 똑바로 말 안 하면 죽여버린다."

"······하레니오랑 같이 짝짝꿍해서 사람 장사하는 그 공장이요. 저번에 그 삼호문의 은소라는 녀석이 말했던 그곳입니다."

"놈들이 여길 뭐하러 돌아다니냐."

"지금 하레니오가 다 죽어버렸잖습니까? 그놈들 입장에서는 거래처가 갑자기 빵꾸난거죠. 아마 소문이 놈들 귀에도 들어간 모양입니다."

삼호문 돌대가리가 했던 말이 기억난다.

사람을 납치해 토막내고 여기저기 갖다 팔았다는 얘기. 사실 이런 밑바닥 슬럼가라면 그런 막장놈들이 왕왕 있는 법이다. 바이오 장기 시술이 비싸다보니 그냥 슬럼가에서 아무나 잡아다가 배 가르고 장기를 꺼내 팔아치우는 범죄수법은 과거부터도 유명했다.

"그 등신같은 공장은 어디에 박혀있는데."

"여기서 멀지 않은 동네에 있는 공업단지입니다. 무스코가 선금까지 받아놓고 뒈졌으니까 그쪽도 똥줄이 타겠죠."

대체 몇 푼이나 벌겠다고 그딴 일을 벌여 놓은건지. 죽어서까지 하등 도움이 안 되는 놈들같으니.

"하여튼 그래서, 그 새끼들이 나 찾으려고 여길 쑤시고 다닌다는 거냐?"

"······."

내 말에 루돌프가 몸을 떨며 흠칫한다.

반응을 보아하니 정확히 맞췄군.

"너도 차라리 가담하지 그랬냐. 후련하게 패 죽여버리고 싹 잊게."

"어어, 이러지 마십쇼."

좀이 쑤시던 차에 마침 잘 되었다.

나는 내력까지 끌어올려 루돌프의 전신을 흠씬 두들겨 패버렸다. 이제야 주변이 조금 조용해지나 했는데, 이미 저승으로 가버린 양아치들의 뒤처리까지 떠맡아야 하다니.

"다음부터는 그런 일 있으면 꼭 가담하렴."

"아이오, 젖때 아입니다!"

"턱 끼우고."

잠도 못 잔 몸으로 한바탕 격하게 움직여서 그런지 노곤함이 밀려왔다. 공장이고 뭐고 모르겠고 마음같아선 이대로 누워 쉬고싶군.

나는 턱을 막 끼워 맞춘 루돌프놈에게 물었다.

"놈들이 이 술집도 알고있냐?"

"아마 모를 겁니다. 거래할때는 무스코랑 뱀눈이 그놈들 공장으로 직접 갔거든요."

"그럼, 당분간 여기 숨어있으련다. 한숨 잘 테니까 밖에서 경비나 서라."

"저······형님."

루돌프의 말꼬리가 길게 늘어진다.

어딘가 불안한 얼굴을 보아하니 또 무슨 개소리를 지껄일까 궁금해졌다.

"왜."

"제 코에 문신 있잖습니까. 이거 문제없겠죠? 주민들이 안 그래 보여도 은근히 또 입이 무겁긴 합니다."

"······."

과연 문제가 없을까 생각해보았다.

콧잔등에 새빨간 장미 문신.

저건 눈에 띄는 정도가 아니다. 굳이 보지 않으려고 해도 눈이 갈 수밖에 없는 혁명적인 디자인이다.

사람 토막쳐서 장사한다는 놈들이 정크타운을 찾아와선 주민들에게 하레니오에 관한 얘기나 장미문신을 한 놈을 봤느냐고 물어보는 날에는, 유일한 생존자인 저 루돌프놈 얘기가 주민들 입에서 자동반사로 튀어나올 거다.

50크레딧만 던져줘도 어디로 가면 이놈 얼굴을 볼 수 있는지 알려주고도 남겠지. 그만한 돈이면 친절히 동행까지 해줄지도 모른다.

솔직한 말로 나라도 그러겠군.

그렇지 않아도 충분히 못생긴 얼굴에 색칠은 뭐하러 해가지고.

"갑자기 화가 막 나네."

쿵!

알아서 후다닥 머리를 박는 루돌프놈.

문득 드는 불안감에 마력을 최대한 넓게 펼쳐본다. 지금 내 수준으로 탐지할 수 있는 범위는 근방 10미터 내. 딱히 수상한 기척은 없다.

나는 일단 주먹을 거두었다.

친씨아 그 의문스런 여자가 괜한 소리를 하진 않았을 것같고, 괜히 이딴 놈을 두들기다가 힘이라도 빠지면 공연히 내 손해 아니겠나.

"그 문신부터 지워줄 걸 그랬다. 사포로 갈아서."

"······."

수련하느라 잠을 제대로 못 자서 그런가.

심법으로 깨끗하게 다스려놓은 정신머리가 순식간에 혼탁해지며, 신경질이 머리끝까지 올라왔다. 이럴 때는 자칫하면 정신병이 도지곤 한다.

나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말했다.

"등평위한테 연락해서 문도 몇 명 보내달라 해. 경비 세울 거니까 진중하고 입 무거운 놈들로."

"예!"

슬럼가의 갱스터 집단과 그런 거래를 튼 걸 보면, 공장의 배후는 블랙기업이나 전문적인 범죄 집단일 확률이 높다. 아무리 부패한 밑바닥 동네라도 납치와 장기 밀매 따위가 용인될 리 없으니까.

나는 긴 겉옷을 하나 찾아와 걸치고는, 창고에 있는 방진 마스크를 빼와 착용했다.

마스크 위로 두 눈만 드러난 얼굴을 이리저리 찌푸려가며 눈을 뱀처럼 만드는 연습도 해본다. 눈이 그 놈보다 똘망똘망해서 그런가, 쉽지는 않았다.

한 30분쯤 기다리자, 애꾸눈 응곽을 필두로 헐레벌떡 달려온 삼호문도들이 내 앞에 도열해 섰다.

"응곽아, 안대가 멋지구나."

"감사합니다."

"어디를 좀 다녀올테니, 그동안 여기 잘 지키고 있어라. 무슨 일 생기면 연락하고."

"알겠습니다."

방진마스크를 올려쓰며 주섬주섬 나갈 채비를 하자 루돌프가 불안한 얼굴로 묻는다.

"그건 왜 쓰세요? 다음 모래폭풍 오려면 좀 남았는데요."

"너 이리 가까이 와봐."

다가온 놈의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이제부터 넌 밖에 나가면 눈에 띄도록 절뚝이면서 걸어라. 문신 잘 보이게 고개도 빳빳이 들고."

"···형님 이거 혹시."

루돌프놈의 못난 얼굴에서 설마설마하는 표정이 그대로 드러난다. 아무리 눈치 없는 놈이래도, 생각하는 그 설마가 맞을 것이다.

"제가 미끼가 되는겁니까?"

"그래. 그 공돌이놈들 죽여버리게."

"혀, 형님, 그 미친 싸이코 살인마 새끼들이 대뜸 총부터 쏴갈기면 저는 어떻게 합-"

"아이 씨."

철컥.

내가 인상을 구기며 칼집을 쥐자, 예전보다 조금은 눈치가 빨라진 루돌프가 가슴을 펴며 호언장담했다.

"한번 잘 절뚝여 보겠습니다."

*

여느 때처럼 한가한 총포상.

딸랑-

파리만 날리던 총포상의 문이 열리고, 무료한 표정으로 카운터를 보고 있던 친씨아가 눈웃음을 흘리며 손님을 맞이했다.

"안녕 레반?"

"산책하다가 잠깐 들렸다. 전해 들은 얘기가 맞나 하고."

오랜만에 온 손님, 레반이 총포상 밖에서 열심히 절뚝대는 밴스를 보며 고개를 젓는다. 그가 답답한 듯 방진 마스크를 벗어 카운터 위에 올려놓았다.

친씨아는 서글서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응, 귀찮은 놈들이랑 엮였더라? 당분간은 몸조심해. 잠깐 타운을 떠나있는 것도 괜찮고."

"그러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럴 이유도 없고."

"아, 그러셔?"

단호한 대답에 적잖이 당황한 친씨아.

보통은 이렇게까지 걱정해주면 고맙다는 대답이 나와야 하는 거 아닐까? 정말 별난 남자라고 생각한 친씨아의 입매가 슬쩍 틀어졌다.

"우리 고객님이 정말 괜찮을까 모르겠네. 걔들, 마피아랑 엮여 있는데?"

—마피아.

슬럼가의 갱 따위와는 궤를 달리하는 대규모 폭력조직.

그들이 주로 활동하는 로키 시티에선 모르는 사람이 없는 단어이자, 합법 불법을 가리지 않고 년간 벌어들이는 수익이 어지간한 대기업과 맞먹는다는 거대 집단.

이미 조직의 보스부터가 십이제(十二帝)에도 이름을 올렸었던 9레벨의 거물이고, 조직의 간부도 모두 악명을 떨치는 강자들이다.

마법계 기업들의 메카이자 본진인 발할라 시티, 무협계 본사와 가문들이 몰려있는 수르트 시티의 남, 북경을 제외한 다섯 도시에 암세포처럼 퍼져있는 조직원들은 추산하기조차 힘들다.

주 수익원인 보호세금, 대부업, 카지노업, 유흥업을 제외하고도 몇몇 건실한 기업을 산하에 거느리고 있을만큼 자금력이 탄탄하다.

20여년 전 연방과 일부 메가콥이 손잡고 진행한 대규모 토벌에도 뿌리뽑히지 않은 마피아 조직은 현재, 로키 시티에 군림하며 신동경을 중심으로 각 시티 지하사회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친씨아가 방긋 웃어보이며 말했다.

"괜찮겠어? 걔들이 그 공장에서 뭘 하는거냐면······"

살아있는 시체는 신선한 인간의 부속물 냄새를 좋아하기에 공장에서 갓 나온 시체 부속물은 곧바로 시티의 서쪽 장벽으로 배달된다.

그리고 그 '물건' 들을 받아 사용하는 곳이 마피아의 직속 에센스 수급팀. 녀석들을 자극하는 것은 아주 무모한 짓이다.

······라며 성심껏 설명해 주었는데도.

그는 그저 시큰둥한 반응만을 보였다.

왜인지 오늘따라 정신이 없어 보이기도 했고, 언뜻보면 신경질이 난듯 보이기도 했다.

"문피아라, 굉장히 무서운 놈들이군."

심지어 이름마저 제대로 안 들었어?

조금은 쫄아서 도와달라 할 줄 알았더니···

원래 저렇게 태연자약한 성격인 건지, 아니면 믿는 구석이라도 있는건지.

"난 분명히 경고했다?"

결국 조언을 포기한 친씨아가 한숨 쉬며 턱을 괸다. 오랜만에 타운에서 얻은 재미가 사라질 수도 있겠지만, 일정한 선을 넘지 않는 것이 무기중개상의 미덕이다.

"친씨아."

"왜?"

"시체 사냥꾼과 거래를 텄으면 에센스도 취급하나?"

당장 닥쳐온 마피아 얘기는 관심도 없더니? 에센스를 취급하냐는 그의 질문에 친씨아가 그러면 그렇지 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돈은 있고? 낮은 품질의 에센스라도 아무한테나 팔지는 않아. 못해도 백만 크레딧은 가져가야 대화가 통할텐데···."

친씨아가 재미있다는 듯 말을 잇는다.

"아, 마침 가지고 있네?"

"모르는 일이 없다더니 정말이군."

"소문이 빠른게 이 동네 매력이야. 정 궁금하면 여기로 가봐."

친씨아가 명함 하나를 꺼내 던진다. 받은 명함을 확인한 레반이 눈을 가늘게 뜬다.

이번에도 이 사내인가.

" 정크타운 8번가 빨간골목 / 륭 사무소 "

"누군진 알지? 가서 내 소개로 왔다고 해."

"소개비라도 줘야 하나?"

"괜찮아. 곧 죽을지도 모르는 단골이잖아. 에센스좀 마신다고 갑자기 엄청 강해지진 않겠지만, 내가 응원하고 있을게."

"다음에 또 오지."

딸랑-

바람처럼 급하게 사라져버린 레반.

그가 나가고도 계속 턱을 괴고 있던 친씨아가 돌연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가 나서서 도와주지 않는 이상, 다음이 있으려나?"

대답은 아무것도 없던 천장에서 들려왔다.

"진심이십니까."

"당연히 아니지. 칼스가 가만히 있겠어? 안그래도 주식에서 본 손해 때문에 화가 잔뜩 나있잖아."

"그렇다면 개인적인 호기심이십니까? 저자에게만 유독 친절하신 것 같습니다."

"뭐 비슷하지. 내가 알아보라고 했던 건?"

"1만 크레딧을 즉시 송금하면 일주일 내로 저 레반이라는 자의 정보를 받아볼 수 있다고 합니다."

"세 배로 송금해주고 바로 넘겨받아와."

"예."

"대체 뭐하다 온 인간이길래 마피아란 얘기를 듣고도 저렇게 자신감이 넘치나, 어디 한 번 보자고."

#17화. 너도 한 번 막아봐

#17화.

마피아?

내 생각이지만, 마피아와 메가콥은 서로 다를 바가 없다.

당장 사천당가가 반 바이오를 무너뜨린 일도 얄팍한 명분만 있다면 합법으로 포장되는 세상이다. 명분마저 만들어내면 그만이지.

속은 더러운데 겉으로는 깨끗한 체하는 놈들이나, 더러운걸 숨길 생각조차 없는 놈들이나 그냥 오십보 백보 아니겠는가.

마침 대놓고 더러운 놈들이 보이는군.

- 문신 보니까 맞는것 같은데.

- 하레니오 갱단에 절름발이도 있었나?

- 싸우다가 병신이라도 됐나보지.

과연 친씨아의 경고는 거짓이 아니었다.

다리를 절뚝이는 루돌프가 타운을 누빈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주변을 수상히 얼쩡대는 놈들이 눈에 띄었다. 사내 세 명이었는데 느껴지는 기세는 그리 강하지 않았다.

이윽고.

"누, 누구신데 이러세요?"

주변을 슥 둘러본 놈들이 한순간 달려들어 루돌프를 에워쌌다. 개중 한 놈이 루돌프의 목덜미를 붙잡고는 오줌 냄새가 지독할 것만같은 골목으로 끌고 들어간다. 나는 권총에 소음기를 끼우며 그 뒤로 따라붙었다.

"너 하레니오 갱단 새끼 맞지."

"저, 저한테 왜 이러세요? 저도 화나면 한주먹 하는 사람입니다."

"다른쪽 다리도 부러지고 싶어?"

"아, 아뇨."

기운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저중 가장 강한 놈이 등평위의 수준도 못 되었다. 저리 몰려다니며 어깨에 힘줄 정도는 아닌 것 같군.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와중에 놈들이 루돌프를 마구 겁박하기 시작한다.

"왜 선금 받아놓고 잠수를 타고 지랄이야? 너희 때문에 나까지 좆되게 생겼잖아. 응?"

"너희 대장 무스코 어디있어?"

루돌프가 땀을 삐질 흘린다.

"죽었는데요."

"그 누더기 사이보그 새끼가 죽었다고?"

"주민들도 이미 다 아는 얘기입니다. 아무나 붙잡고 물어보세요. 타운에 처음 보는 남자가 나타나서······진짜입니다. 아니면 미쳤다고 잠수를 타겠습니까."

배우 해도 되겠군.

루돌프의 징징대는 생활 연기에 속은 놈들이 탄식을 내뱉으며 저들끼리 얘기를 주고받았다.

"돌겠네 이거. 소문이 사실 맞네."

"머저리들, 산공독이랑 몽환향만 먼저 내주면 정크타운을 접수한다니 뭐니 지랄을 떨 때부터 알아봤지."

"빈손으로 돌아가면 공장장 그 새끼가 가만히 안 있을 거야."

"젠장. 뭐 어떻게 하자고?"

저들끼리 떠드는 시간이 길어진다.

골목 밖에서 조금 더 대화를 엿들어봤지만, 더 이상 알아낼 내용은 없을 듯했다.

"다들 거기서 뭐해! 누굴 괴롭히는 거니."

나는 골목 입구를 막아선 채로 크게 소리쳤다. 지금은 죽어버린 하레니오 뱀눈의 목소리였다.

"!"

죽은 뱀눈 마법사의 특유의 목소리가 골목에 울리자, 놈들이 움찔한 얼굴로 뒷춤에 손을 뻗었다.

"다 죽었다며? 이거 그 마법사 목소리잖아."

"확실해. 나도 몇 번 들어봤다."

"아 그게요······."

모두의 눈초리가 루돌프를 향했다.

저들이 그 뱀눈 수준만 됐어도 의심 정도는 했을터. 저리도 쉽게 속아 넘어가는 걸 보면, 심부름꾼이나 다름없는 놈들이다.

"어이, 역시 넌 안 죽었나봐? 하긴 낭인용병일 하던 마법사가 쉽게 죽을리가 없지."

그 뱀눈 마법사, 용병 출신이었나? 어쩐지 마나 사용법이 마법사치곤 너무 투박하다 싶었다.

나는 얼굴을 가려주는 방진마스크를 믿고선 더욱 뻔뻔하게 대화를 이어갔다.

"죽은 녀석들을 묻어주고 오는 길이다. 난 갱이 적성에 안맞아서 다시 용병으로 돌아가려고 해. 거기 그 빨간코는 죽여도 좋지만 나는 찾지 말아줘. 그리고 받은 선금은 다 써버렸다. 미안하게 됐어."

내가 그리 말하자 저들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놈이 담배를 태우며 심히 불쾌하다는 티를 낸다. 좁은 골목 위로 하얀 담배연기가 퍼져나간다.

"씨발 무슨 헛소리야? 사정은 빌어먹을 섹스토이한테나 가서 하시고요. 이제와서 이러면 뭐 어쩌자는 거야. 배째라는 거야? 여기 눕혀놓고 째줘?"

놈은 담뱃재를 털며 연신 신경질을 냈다.

죽은 뱀눈이 자신들보다 강한 4레벨 마법사임을 알고 있음에도 저런 식으로 행동할 수 있다면, 믿는 뒷배가 있긴 있다는 거로군.

"와보니까 길에 널린게 사람이더라. 내일까지 남은 물량 너희 둘이서라도 시간 맞춰서 가져와."

"너라면 못 할 것도 없잖아?"

"솔직히 우리도 이러기 싫어."

셋은 돌아가며 한 마디씩 뱉어댔다.

내가 아무런 말이 없자 기라도 죽인줄 알았는지, 더욱 기세등등해진 놈들이 킥킥 웃어댔다.

나는 다시금 세 놈을 향해 고함쳤다.

"지금 으악주는거야? 나 산전수전 다 겪은 스트릿출신 마법사라고. 내 뱀처럼 찢어진 눈을 보면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모르겠어?"

"끝까지 지랄하고 있네. 정신 차려 이 새끼야! 우리 물건이 어디로 배달되는지 몰라서 그래? 기한 못 맞췄다간 너도 우리도 다 공장장 손에 죽는······."

"이것들 말이 안 통하네."

나는 놈의 말을 무시한 채, 골목 끝에 꿇어 앉아있는 루돌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녀석이 기다렸다는 듯 말을 뱉는다.

"저는 살려주십쇼 형님! 기가막히게 절뚝대는 연기 보셨죠?"

잠시 고민에 빠졌다.

내가 하레니오 갱단의 쓰레기 같은 계약을 이어받을 이유는 없다. 친씨아가 경고했던 대로 마피아와 엮여있는 귀찮은 놈들 아니던가.

하지만 중심업무지구에서 보고 들었던 마피아는 이런 동네에 장기를 납품하는 한량들이 있는지조차 모를 만큼 커다란 조직이었다.

이놈들이 공급하는 사람 장기가 마피아 산하의 팀에 들어가든 말든, 사실 그들은 아무런 신경조차 쓰지 않을 것이다.

이런 놈들은 다른 외곽 슬럼가에도 널려있을 것이고, 마피아의 수뇌부가 신경 쓰기에는 너무도 하찮은 놈들이니까.

나는 그리 결론을 내리고 외쳤다.

"자! 토막친 시신이 얼마나 필요하지?"

"알면서 뭐하러 처물어봐. 열다섯 구다."

"그럼 토막날 놈 셋은 구했군."

"?"

스르릉-

압축도의 길고 흰 도신이 칼집에서 유유하게 미끄러져나온다. 나는 묵직한 그립감을 즐길 새도 없이 지면을 강하게 박찼다.

탓!

단전에서 펄펄 끓어오르는 공력.

기맥을 타고 올라온 공력이 임계점에 이르렀을 때, 내력을 잔뜩 머금은 압축도가 섬전처럼 쏘아졌다.

퍼억-!

육중한 파공성을 내며 쏘아진 압축도가 지근거리에 있던 사내의 목을 두부처럼 꿰뚫는다. 졸지에 목이 사라진 몸뚱이가 담뱃재를 털던 모습 그대로 허물어진다.

털썩 쓰러진 목에서 피분수가 솟구쳤다.

"뭣······!"

그 광경에 나머지 두 놈은 약속이나 한 듯 뒷춤에서 권총을 뽑았다. 단박에 내 머리를 겨눈 총구들이 불을 뿜는다.

총성이 골목에 메아리 치기 전.

콰과곽!

회로에 응집해있던 마나를 한 호흡에 방출하며 전방에 보호막을 생성한다. 마나 보호막을 때린 탄환은 반쯤 파고들다가 힘을 잃고 떨어진다. 하지만 탄환 한 발을 막을 때마다 보호막이 뭉텅이째로 깎여 나간다.

'뭐지?'

고성능 테크 무기인가.

적어도 싸구려 권총은 아닌게 확실하다.

미리 고농도 마나액을 주입해둘걸 그랬군.

총탄 세례를 막느라 순식간에 과열되어 가는 마나 회로. 하레니오 놈들이 쓰던 구식 무기와는 다르다. 이건 정말 얼마 못 버틴다.

"멈추지 말고 계속 쏴! 저 새끼 저래봐야 4레벨이야. 마력 금방 떨어져!"

"같이 뒤져보자 이 새끼야!"

이대로 가다간 회로가 뻗는다.

나는 보호막의 면적을 줄여나갔다. 보호막의 범위 밖으로 빠져나간 옷자락에 총알구멍이 숭숭 뚫린다.

'저놈 봐라?'

와중에 골목 바닥에 멀뚱멀뚱 꿇어앉아 있는 루돌프놈이 시선에 들어왔다. 나는 눈을 뒤집어 까며 녀석을 주시했다. 후에 대체 몇 대를 두들겨 패줘야 상처받은 내 마음이 풀릴지 모를 일이다.

"우리 돌프는 지 형님 죽을 때까지 가만히 있을 모양이구나."

"······!"

루돌프가 그 말에 흠칫하며 손을 떤다.

마치 죽길 바라는 의중을 들킨 듯한 얼굴이다.

사실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아도, 대놓고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좀 뒤져라. 부탁이야. 제발 죽어. 이렇듯 거칠고 사내다운 욕설을 가슴속에 묻어두고 있을것이다.

"그래서 돌프야. 이제 어쩔 거냐?"

*

타앙-! 타앙-!

"돌프야, 슬슬 결정해야지. 나 죽는다."

"······."

루돌프, 밴스의 등이 땀으로 축축이 젖는다.

정크타운에서 살며 별별 또라이와 범죄자, 살기를 포기한 막장인생은 수두룩하게 봤지만, 저 인간은 뭐랄까···똘끼의 격 자체가 다르다. 마치 파리잡듯 칼을 던져 사람을 죽이는 모습을 보면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할거다.

'자기가 무슨 군용 안드로이드야?'

크레딧이나 섹스를 목적으로 살인을 하거나, 그냥 살인이 주는 흥분감에 미친 놈이거나, 자신만의 신념에 따라 살인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수틀리면 당연하다는 듯 죽여버린다.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싸이코패스 살인마.

적어도 밴스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미친놈. 충분히 넘어갈 수 있는 상황 아니었나? 왜 갑자기 칼은 왜 던져가지고······아무튼 좀 죽었으면 좋겠다.'

"돌프야. 너 지금 무슨 생각 하니?"

"예 형님, 그러니까 그게요. 보자······"

밴스의 눈동자가 세차게 굴러간다.

시야로 들어오는 골목의 풍경.

데구르르-

우선 목이 떨어져 따끈한 시체 하나.

얼마나 대단한 마법인지, 총탄을 아무렇지 않게 막아내며 무표정으로 서있는 저 괴물과, 총격이 생각보다 데미지가 없는듯 보이자 슬금슬금 살아 나갈 궁리를 하는듯 보이는 공장놈 둘.

이렇게 계속 가면 결국은······.

끝이다. 저 괴물이 또 다 죽일거야.

"계속 쏴! 저 새끼 절대 오래 못버텨!"

"아이고~! 으악 나 죽네."

'오래 못버티긴 지랄한다. 망할 새끼들. 마력이 떨어지긴 개뿔 언제 떨어져? 말하는 것만 봐도 존나게 여유있구만······.'

시발. 내가 또 속을줄 알고?

이건 분명 자신을 시험하고 있는거다. 늦었지만 나중에 덜 두들겨 맞으려면 지금이라도 뭔가 보여줘야 한다.

밴스는 속으로 궁시렁대면서도 착실히 움직였다. 목이 잘린 놈의 몸뚱이를 뒤집어 허리춤의 리볼버를 끄집어낸다.

'새끼들, 존나게 좋은 총 쓰네.'

리볼버는 한 눈에 봐도 구형 권총과 차원이 다른 무기였다. 근거리 파괴력을 극대화한 테크리볼버. 전용 탄환을 쓴다면 어지간한 방탄복은 그냥 찢어발긴다.

하지만 이 리볼버보다 무서운 것은, 이 강력한 총을 저렇게 쏴대는데도 멀쩡히 버티는 레반이었다.

밴스의 고민은 잠깐이었다.

어디에 붙어야 살아남을 수 있을지 생각을 마친 그는, 무방비하게 뒤를 내보이고 있는 공장놈을 향해 거침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생색을 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형님! 제가 지금 도와드리겠습니다!"

콰아앙-!

천둥치는 듯한 총성이 일자, 레반과 전투중이던 한 놈의 무릎이 박살나며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저놈은 여기서 살아 나간대도 평생 한 다리로 살 것이 분명했다.

"끄어억!"

"저건 또 뭐야 씨팔!"

무릎을 부여잡고 발광하는 한 놈. 그리고 당황한 나머지 본능적으로 뒤를 돌아보는 한 놈.

기회를 포착한 레반이 찰나간 거리를 좁힌다.

콰득-!

내력이 가득 실린 권격이 망치처럼 떨어져 발광하는 사내를 찍어 내리자, 바닥과 레반의 주먹 사이에 낑긴 놈이 그대로 절명한다.

골목에 수박 터지는 소리가 메아리쳤다.

"이, 이 씨파알!"

딸칵.

이제 혼자가 되어버린 사내는, 탄창이 동난 권총을 던져버리고는 이판사판으로 달려들었다. 어디서 꺼냈는지 모를 정글도가 흉흉한 기운을 흘리며 레반의 머리 위로 떨어진다.

"어디, 이것도 막아봐라 개같은 새—!"

그러나.

타캉-! 타캉-! 타캉-!

고요한 세 발의 총성이 먼저 울렸다.

"······?"

곧, 비장하게 달려들던 남자가 허탈한 표정을 짓으며 고개를 떨군다. 세 개의 작은 구멍이 난 복부에서 울컥이며 흘러나오는 피가 골목의 바닥을 흥건히 적셔간다.

소음기 달린 권총을 흔들어보인 레반이 귀를 후비적대며 말했다.

"막았다."

"······."

이윽고, 권총을 집어넣은 레반이 아까 던진 압축도를 각목마냥 질질 끌고와 그의 앞에 섰다.

피칠갑이 된 도신(刀身)이 허공을 반으로 가르며 떨어진다.

"너도 한 번 막아봐라."

#18화. 엎질러진 물

#18화.

꿀꺽.

목구멍까지 올라온 피를 억지로 삼켜낸다.

고농도 마나액의 도움도 없이 강력한 총탄을 막아내느라 회로가 무리한 것이다. 불타는 듯한 통증이 심장을 강하게 옥죈다.

"괜찮으십니까 형님? 제가 한 놈 개박살내는거 보셨죠? 캬, 저 이런거 처음 해봐요."

이놈이 조금만 더 간을 봤다면 꽤 위험했을 수도 있겠군.

"돌프야."

촤악-

주먹에 묻은 피를 가볍게 털어낸다.

새빨간 피가 후두둑 흩어지자 루돌프놈이 지레 겁을 먹고 뒷걸음쳤다.

"괜찮으니까 터놓고 말해봐라. 내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냐?"

내 물음에 루돌프놈이 마른침을 삼켰다.

만약 이번에도 거짓말이나 헛소리를 지껄인다면 사파식 고문을 듬뿍 해준 다음, 하레니오 갱단놈들의 곁으로 보내버릴 셈이다.

"조금요."

"그래도 거짓말은 안 하는구나."

"하, 하하핫. 그렇죠?"

"웃지 마. 사람이 죽었잖아."

"그냥 추임새였습니다."

사람이 셋이나 죽었는데 실실 웃다니.

예상대로 빌어먹을 놈이로군.

"좋게 넘어가려고 했는데 넌 안되겠다."

"······네?"

나는 곧바로 구타할 준비를 마쳤다. 이런 인성이 덜 된 몹쓸 놈 같으니. 5년 정도는 꾸준히 두들겨 맞아야 사람이 될 놈이다.

그렇게, 주먹을 들어 올리던 그때.

"?"

내가 들어왔던 골목 입구 쪽에서 불쾌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보니, 어두운 그림자 밑에 우두커니 서서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누군가가 보인다.

시야를 방해하는 치렁치렁한 전선들. 공력을 끌어올려 두 눈에 집중하자 익숙한 실루엣이 눈에 들어온다.

- 흐흐.

실루엣의 정체는 타운 길거리에서 횡설수설하며 섹스를 구걸하고 다니던 그 부랑자 거지놈이었다.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듯해서 대충 내버려 두었는데······.

이상하게 자주 마주치는 것 같군.

타운이 그리 좁지도 않은데 말이다.

어찌 되었건 살해현장의 목격자가 생겨버렸다. 나는 주변에 처참하게 널려있는 세 명의 시체를 둘러보곤 놀라 소리쳤다. 저승에 있어야할 뱀눈의 목소리가 이제 자연스레 흘러나왔다.

"세상에! 사람들이 죽어있잖아. 이거 대체 누가 그런거야."

"흐흐, 당신이 한 거 내가 다 봤는데?"

전부 들켜버렸나.

소스라치게 놀라는 연기가 조금 부자연스러웠던 모양이군. 아무래도 연기 연습을 해둬야겠다고 생각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보기에 잔인하고 그렇지는 않던가."

"엄청나게 잔인했지."

나는 얼굴에 뒤집어쓰고 있던 방진 마스크를 툭툭치며 물었다.

"그런데 나 알아?"

"흐흐, 10크레딧 주기로 한 사람. 그거 언제 줄거야?"

거지놈이 이쪽을 뚫어져라 바라본다.

나는 못이기는 척 꼬깃꼬깃한 백 크레딧짜리 현물지폐 세 장을 꺼내 던졌다. 우두커니 서 있던 거지놈은 흩날리는 돈을 보자마자 헐레벌떡 달려왔다.

거지놈이 가까워지자 형용할 수 없이 역한 냄새가 났다. 방진 마스크를 뚫고 들어오는 악취라니. 다음부터는 방독면을 쓰고 다녀야겠군.

"으헤헤! 돈이다!"

놈은 지폐를 줍기 위해 몸을 숙였다. 머릿기름에 떡진 뒤통수가 그대로 드러났는데, 나는 거기에다 대고 슬쩍 총구를 겨누어 보았다.

"어이쿠! 웬 돌부리가!"

그런데 놈은 총구를 겨누기 무섭게 털퍼덕 넘어지더니, 뜬금없이 바닥을 굴러대며 지랄발광을 선보이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그 뒤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자 뻘쭘하게 일어난 거지놈이 떡진 머리를 벅벅 긁었다.

잔뜩 기가 찬 내가 물었다.

"여기 개방도들은 다 네놈같이 뻔뻔하고 어색한가?"

"······."

개방(丐幇).

구파일방의 그 일방.

거지의 탈을 쓴 방도들을 정보원으로 운영하는 무림세력이다.

3회차 중원무림에서 정보수집 능력에 있어선 하오문을 제외하고는 개방을 따라올 곳이 없었다. 그리고 여기서도 별다르지 않다.

이 세계의 개방은 전 세계에서 수집한 정보에 각자의 등급을 매겨 나눠놓고, 크레딧으로 정보를 사고팔 수 있는 대형 플랫폼을 운영한다.

놈의 쓸데없이 추레한 행동거지. 내 주변을 재수 없게 맴도는 듯한 행동. 그리고 이런 쓰레기 동네에서 하루하루 막장처럼 사는데도 몸 건강히 살아있는 것을 종합해보면······.

"누가 내 뒷조사 해오라고 시키더냐."

"나는 17번가 뉴펍의 섹스토이를 좋아해."

"그런가?"

"으흐흐···300 크레딧! 300크레딧이면! 흐흐~"

"내가 오해했군. 어서 가봐라."

나는 신나게 떠나가는 거지를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돌렸다. 대답도 제대로 못하는 정신병자일 뿐인데, 괜한 것에 신경을 쏟은 모양이다.

"하기야, 멀쩡한 개방도가 저리 등신같이 일한다는게 말이 안 돼. "

"······."

"뭐야. 들려버렸나?"

"나~는 섹스토이랑 한 판 하러 가야지!"

"들리는 김에 말해두는데, 귀찮은 일이 생기면 이 동네 거지들 쪽박부터 다 깰거다."

그 말에 내내 헤실대며 동문서답하던 거지놈이 걸음을 멈추더니, 처음으로 정상적인 대답을 했다.

"그래? 어디 해 봐! 으하하!"

이윽고 골목이 떠나가라 웃으며 휘적휘적 걸어나간 거지는 순식간에 동네바보가 되어 골목 밖 인파에 녹아들었다.

범행 현장의 유일한 목격자를 정답게 떠나보낸 나는, 루돌프를 부려 크레딧이 될법한 것들을 전부 주워 챙겼다.

놈들에게서 노획한 물건들 중, 파괴력을 강화한 테크리볼버 세 정과 전용 탄환은 말 그대로 '물건'이었다. 고장이 없기로 유명한 마법계 무기 제조기업의 각인이 보였는데, 신제품으로 구한다면 리볼버 값만 5만 크레딧을 넘어간다.

참고로 이런 테크무기의 전용 탄환은 '한 발' 당 1천 크레딧쯤이다. 내 보호막으로 허공에 날려버린 탄환들만 해도 수만 크레딧이군.

역시 이런 잔챙이들이 사용하기에는 과분한 무기 아닌가? 다행히 값비싼 전용 탄환까지 넉넉하니, 상태가 좋은 한 개는 내가 쓰고 나머지는 팔아넘기면 벌이가 짭짤할 것이다.

"형님. 근데 이제 어쩌실 겁니까?"

"뭐를 말이냐."

"세 명이나 죽였으니 그놈들 진짜 가만히 안 있을 겁니다. 저희 진짜 어떡하죠?"

"쯧, 한숨 자고 일어났을때 와서 말했으면 유하게 넘어갔을 것을. 때를 맞추지 못한 네 잘못이다."

"······."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살았다며 좋아하던 루돌프는, 지금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닫고는 더없이 착잡해졌다.

나는 별수 없다는 듯 가볍게 답했다.

"어쩔 수 없지. 마피아인지 하는 놈들 귀에 소식이 들어가기전에 다 죽여버리는 수밖에."

이미 엎질러진 물. 별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불현듯 상단전이 활짝 열렸으니 이전 생보다 영리하고 총명해져야 하는 것 아닌가 싶었으나, 그만큼 살인멸구(殺人滅口)의 수가 확실한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캬, 그런 방법이 있었네요. 역시 형님이세요."

삶을 포기한 얼굴의 루돌프가 옆에서 물개박수를 치며 아첨했다.

"총포상에 들렀다가 륭 사무소로 와라."

"예, 형님."

나는 놈에게 노획한 물건들을 팔아 돈으로 바꿔오라 명령한 뒤 먼저 8번가로 걸음을 옮겼다.

*

정크타운 8번가.

유흥가에서 멀리 떨어져 비교적 한산한 구역.

8번가 가장자리의 빨간 골목을 돌면, 흔한 해결사 사무소가 자리하고 있다.

담배 쩌든 내가 가득한 사무소 내부에서는 어떤 남자가 눈앞에 재생되는 영상을 넋놓고 바라보고 있었다.

— 내가 저런 괴물도 잡아보는군. 저놈 에센스를 다 뽑아마시면 7레벨도 가능할 것 같은데, 돈이 없어서 그러질 못하는게 한이다.

— 7레벨? 그래도 무인이라는 놈이 절정 경지를 좆으로 봐? 지금 경지도 겨우 올라온 새끼가···내공만 많으면 검기(劍氣)가 막 엿가락처럼 뽑히고 그런다냐? 륭 너는 저거 마셔도 안 돼. 재능있는 놈들이야 대마초 피우다가도 깨달음을 얻어서 경지가 상승한다더라.

— 그게 말이 되냐?

— 아무튼, 나 담배 한 까치만 빌려줘.

— 클로에 때문에 담배 끊었다.

— 뭐? 돌아버리겠네. 지금 안피우면 사냥할때 집중 못 하는데.

— 다들 꾸물대지 말고 일어나! 이제 한 놈만 더 잡고 돌아간다.

홀로그램 영상 속, 마지막 말을 끝으로 영상이 종료된다.

[ 영상 - 2시간 17분 / 재생 횟수 - 638회 ]

남자, 륭이 조용히 의자에서 일어난다.

콜록-

그는 버릇처럼 태우던 담배를 거꾸로 세워 향초처럼 꽂았다. 수백 개의 꽁초가 꽂혀있는 재떨이에서 하얀 연기가 피어나 사무실로 퍼져나간다.

"진짜 싫어."

사무소의 유일한 직원인 클로에는 륭을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며 창문을 활짝 열었다. 그녀는 너무 낡아 작동하지 않는 환풍구를 슬픈 눈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이 낡아 빠지고 연기 자욱한 골초사무실에 누가 일을 믿고 맡기고 싶을까요? 돈 날려도 괜찮은 사람? 담배 냄새를 너무나도 사랑하는 사람?"

"······."

"맨날 봤던거 또 볼 시간에 직접 나가셔서 일거리를 구해오시는 게 어때요? 아니면 길에 사무소 명함이라도 뿌리고 오세요!"

"클로에, 오늘 휴무날 아니었나?"

"휴일에도 저처럼 정시 출근하는 부지런한 직원이 흔한 줄 아세요?"

귀에 익은 잔소리에 륭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하지만 귀는 막을수 없었기에, 총알만큼 따가운 클로에의 잔소리가 고막을 연신 때리고 있었다.

륭이 주섬주섬 귀마개를 찾던 때였다.

끼이익-

소음을 내며 열리는 사무소의 낡은 철문.

하던 잔소리를 곧바로 때려치운 뒤, 종종거리며 앞으로 달려간 클로에가 오늘의 첫 손님을 상냥하게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친씨아 소개받고 왔습니다."

"네? 친씨아 씨가 소개를요···?"

"레반입니다."

처음 보는 얼굴의 의뢰인이 자신을 레반이라 소개했다. 그리곤 곧 연방은행에서 발행한 고액의 크레딧 칩들을 떡하니 꺼내보였다.

"에센스를 구해다 줬으면 합니다."

"!"

그 말을 들은 클로에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아직도 가만히 앉아있는 륭에게 종종대며 다가가 귓속말로 닦달했다.

- 귀한 손님이 오셨는데 눈을 감고 있으시면 어떡해요? 빨리 눈 떠요!

결국 클로에의 닦달에 륭이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려 레반을 바라봤다. 세 사람간에 묘한 정적이 흘렀다.

한동안 이어지던 정적을 깬 사람은 의뢰는 안 받고 의뢰인과 눈싸움을 벌이는 사장에게 성이 난 클로에였다.

"소장님이 하루에 다섯 갑씩 태우는 담배가 한 갑에 95크레딧. 오늘 저 의뢰인 놓치면 앞으로 싸구려 담배만 피우세요. 그리고 미리 말하는데, 의뢰인 앞에서 담배 피울 생각 하지마세요."

"······."

사무 보조의 뼈아픈 일갈에 륭이 레반을 바라보며 묻는다. 그의 이마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혹시 담배 태우십니까."

"기관지가 약해서."

"그렇군요."

치익-

레반의 대답에 아쉽다는 듯 담배 끝을 비벼 끄는 륭. 검은 담뱃재가 휘날린다.

담배 대신 탁상 서랍에서 니코틴 사탕 몇 개를 한주먹 집어 꺼낸 그는, 사탕을 입에 던져넣고 우적우적 씹었다.

카득. 카드득.

륭이 사탕을 씹어먹는 동안 레반은 속으로 그의 첫인상을 평가했다.

'여태껏 본 놈중에 가장 깡패같이 생겼군.'

의뢰인이 갑의 입장이라지만, 6레벨의 강자가 은연중에 풍기는 기도는 상대를 주눅들게 하기 충분하다. 특히나 이런 근육질의 구릿빛 덩치라면 더욱 그렇다.

걷어 올린 소매 밑으로 드러난, 과할 정도로 발달한 팔근육과 단단한 굳은살이 박힌 손은 사내가 숙련된 칼잡이임을 알려준다.

아마 6레벨 중에서도 강한 편에 속하겠지.

그런데 의문인 것은, 경험 많은 6레벨의 강자라면 이런 슬럼가에서 낡아빠진 사무실을 운영할 것이 아니라 시티 중심가에 사무소를 차려도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것.

더해서 륭이 가진 기운도 어딘가 모르게 혼탁했다. 정리되지 않은 내공을 무작정 산더미처럼 쌓아놓은 느낌이었는데 무언가 아귀가 들어맞지 않았다.

전생의 경지였다면 대충 보고도 그 내용을 알아냈겠지만, 현재의 낮은 수준으로는 정확한 파악이 불가능했다. 레반은 한 가지 추측을 떠올리긴 했으나 당장 중요한것은 아니기에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그리 생각을 갈무리하는 사이, 사탕을 다 씹어먹은 륭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삼호문에서 받은 돈을 쓰러 온 겁니까."

삼호문주와 레반의 계약에서 공증을 맡은 륭은 삼호문주 등평위가 전송한 레반의 이름과 인상착의를 기억하고 있었다.

누군가 계약서에 명시된 내용을 어긴다면 직접 찾아가서 칼춤을 춰야 하니까.

레반은 륭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백만 크레딧이면 최하급 에센스 정도는 충분히 구할 수 있을것 같은데. 맞습니까?"

"음······찌꺼기는 추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몸에 독이 될 겁니다."

"그건 상관없습니다."

찌꺼기.

에센스는 블러디 에센스, 블랙 에센스처럼 색깔로 구분 짓는 소수의 극상품을 제외하면 크게 세 등급으로 나누어진다.

상급 - 중급 - 하급.

그런 하(下)급 중에서도 하급으로 취급되는 상품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찌꺼기' 라고도 불리는 최하급의 에센스다.

최하급의 에센스는 좀비의 불순물 덕에 무작정 복용할 시 위험한 독약이나 다름없고, 어찌어찌 불순물을 걸러내고 흡수한다 해도 에센스 자체의 농도가 매우 옅어 들이는 품에 비해 효율이 낮다.

하지만 그렇기에 비교적 구하기가 쉽다.

그리고 레반 자신이라면 제 아무리 불순물이 가득 섞인 에센스라도 최대 효율로 뽑아먹을 자신이 있었다.

[ 입에 맞으냐? ]

[ 누, 누가 만두에 독을 넣었······. ]

[ 극음초(極陰草)다. 대단한 천년설삼도 원래는 음의 기운이 가득한 독약일 뿐이지. 허나 공력을 끌어올려 양기를 불어넣어 주면 음양(陰陽)이 조화되어 천고의 영약이 되는 것이다. ]

[ 해독! 해독제좀! 커, 커허억! ]

[ 이 극음초는 범인이 먹으면 금세 몸이 식어 죽는 독초이지만 양의 기운을 다스릴 줄 아는 이에게는 영약이나 다름없다. 다스리지 못하면 입마에 들 터이니 정신 똑바로 차려라. ]

독약도 많이 먹어본 놈이 잘 먹는 법.

중원에서 레반 자신도 모르게 입으로 들어갔던 독약, 독초가 수십 뿌리는 된다. 방법은 과격했지만 이제와서 보면 스승은 레반에게 천연 해독능력을 잔뜩 길러준 것이다.

[ 무선대지신공(舞仙大地神功)을 익힌 네 놈이 고작 극음초 따위에 패한다면 살 이유가 없다. ]

절세심법인 무선대지신공에 왕국 마탑의 해독마법까지 익히고 있는 자신이라면 찌꺼기든 뭐든 상관없다. 그렇기에 다른 옵션을 제쳐두고 에센스에 돈을 태우는 거다.

"음······"

대부분의 해결사가 으레 그렇듯.

마치 이건 어렵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연신 침음을 흘리는 륭. 난색을 표하는 그를 조용히 바라보던 레반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수수료는 물건의 10퍼센트로 합시다."

"······!"

그 반가운 말에 뒤에서 대접할 차를 준비하던 클로에가 흠칫했다. 최소 백만 크레딧 이상을 쓰러온 의뢰인이다. 10퍼센트면 못해도 10만 크레딧이 사무소 몫으로 떨어진다는 얘기다.

클로에의 따가운 눈빛이 륭이 뒤통수에 꽂혔다. 륭은 얼마 지나지 않아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까지 구해오면 되겠습니까."

레반이 즉시 답했다.

"오늘 저녁까지."

물이 엎질러진 이제는,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19화. 직접 찾아가는 사내

#19화.

륭과 에센스에 관한 거래 조율을 끝마친 레반은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다시 의자에 궁둥이를 붙였다. 그냥 떠나자니 아쉬워 한번 찔러나 보자는 심정이었다.

"사람도 죽여줍니까?"

"······."

륭은 눈썹을 한 번 찌푸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무엇이든 해결해준다는 슬로건을 걸어둔 해결사 사무소라지만 나름의 선은 있었다.

그는 거절의 뜻을 내비치며 일어났다.

"에센스는 저녁까지 구해다 드릴테니 이만 가십시오."

"사람을 토막내 파는 놈들인데, 죽이는 건 내가 할 테니 힘만 조금 보태주면 50만 크레딧을 추가로 지불하겠습니다."

"······."

레반은 다시 한번 륭을 설득하며 액수를 크게 불렀다. 자신이 지금 지불할 수 있는 한계 금액이었다.

돈이 많이 들더라도 보기 힘든 6레벨의 강자를 끌어들일 수만 있다면 충분히 남는 거래라고 생각했다. 륭도 생각보다 큰 액수에 마음이 동하는 듯 보였다.

'어머어머.'

거액의 크레딧을 마구 남발하는 레반을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던 클로에는 탕비실의 비밀선반을 열었다. 돈 되는 고객에게만 내는 고급 찻잎이 있는 곳이었다.

딸랑-

때마침 친씨아의 총포상으로 심부름을 갔던 밴스가 사무소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레반은 시티 중심가의 자산가라도 된 양 거만하게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런데.

노획품을 팔아 따끈한 크레딧을 잔뜩 들고 왔어야 할 밴스가, 아까 들고간 물건들을 그대로 다시 들고온것이 아닌가.

"뭐야? 돈으로 바꿔오라니까."

레반이 눈을 부라리자, 안절부절 못하던 밴스가 초조한 목소리로 답했다.

"친씨아가 그 공장이랑 관련된 물건은 안 사겠다는데요. 아마 휘말리기 싫은가 봅니다."

""······.""

약속이나 한 듯 사무소 내에 정적이 흘렀다.

값비싼 찻잎을 빻아 고급스러운 머그잔에 내릴 준비를 하던 클로에는 다시 찻잎을 깊은 구석에 쑤셔넣고 선반을 탁 소리나게 닫았다.

이윽고 클로에는, 적당히 싼 믹스커피 봉지를 뜯어 컵에 쏟았다.

촤아악-

테이크 아웃용 플라스틱 컵이었다.

*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해?"

응곽과 함께 술집안에서 경비를 서던 은소가 힘 빠지는 소리를 낸다.

그 남자는 무공을 수련하던 문도들을 여기까지 불러내 경비로 세워놓곤, 일이 있다며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문주도 아닌 이가 자신들을 아랫사람 부리듯 하니 속이 뒤틀리는건 당연지사였다.

하지만 문파의 가장 윗사람인 삼호문주가 이미 그 레반이라는 남자의 열렬한 신봉자가 되어 버렸기에 은소는 감히 불만을 표시할 수 없었다.

또한 여량천같이 그나마 실력있는 제자들도 그를 사부로 모시지 못해 안달이 나있었다. 자신의 옆에 있는 응곽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사부님 말만 잘 듣자고. 대충 끄적여놓고 간 무공들이 하나같이 대단한 걸 보면 우리랑은 격이 다른 사람이야. 당장 그 종이만 복사해서 팔아도 팔릴걸? 계약 위반이긴 하지만."

놀랍게도 저 말이 맞다.

타운에서만큼은 유명한 무인인 삼호문주부터가 그 남자 앞에서는 90도로 허리를 굽히며 헤실헤실 대는것만 봐도···그는 쉽게 보기힘든 무림계의 고수인 것이 분명했다. 어쩌면 8번가 빨간골목의 사무라이보다 더 강할지도 몰랐다.

그렇지만, 이게 정말 말이 되나?

"그런 인간이 왜 여기로 왔을까? 기업에 있어야 하는거 아냐?"

"그럴만한 사연이 있나보지. 알면 뭐 할거야?"

"······어휴."

응곽과의 대화를 포기한 은소가 술집 내부를 둘러본다.

어수선한 잡기들이 널려있는 1층.

화면이 꺼진 아케이드 오락기들을 아무렇게나 구석에 박아놓았는데, 하레니오 놈들이 이전에 쓰던 것들로 보였다. 제대로 청소를 하지 않아 먼지가 쌓여있고 난잡하다.

여기저기 고개를 돌리다 작은 바를 지키는 휴머노이드 바텐더와 눈이 마주쳤다. 바텐더는 상황에 맞게 입력된 멘트를 치며 술을 권했다.

- 마음이 울적한 날에는 위스키를 추천합니다. 당신의 촉촉하고 아름다운 눈빛에 건배.

바를 둘러보던 은소가 술에 관심을 보이는 듯하자, 뒤에 앉아있던 응곽이 근심 가득한 목소리로 제지했다.

"함부로 술을 마셨다간 또 처맞을걸."

"안 마셔! 그리고 누가 처맞았다고 그래?"

"저번에 기절해서 대(大)자로 누워있던거 기억 안 나? 그날 움푹 들어간 네 옆통수를 판판하게 편게 문주님이셔."

"······."

얼굴이 붉어진 은소가 눈을 질끈 감았다.

그 뒤로 무공 구결을 달달 외우며 시간을 보내던 그녀는 지루함을 견디다 못해 1층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때마침 시선에 들어온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가자, 어지러이 움직이는 화면들이 보였다. 그다음은 침대 위에 고요히 잠들어있는 레나였다.

자신도 모르게 가까이 다가간 은소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레나를 내려다봤다.

그 남자의 가족인가? 아니면 애인?

일단 슬럼가의 주민은 아닌게 확실하다.

평생 고생이라곤 한번 안 해본 듯한 희고 고운 피부결에 가지런한 흑발. 근데 정크타운에서 이러고 돌아다니다간 섹스토이나 매춘부로 오해받기 딱 좋겠어.

하긴, 그러니 이 술집 안에만 있었겠지.

- ······다시는 곱버스 안 타······.

레나는 고통스러운 얼굴로 잠꼬대를 웅얼대고 있었다. 그러나 그 내용을 알아들을 리 만무한 은소는 금세 흥미를 잃곤, 여기저기를 기웃대다 벽에 나있는 무수한 총탄 자국을 발견했다.

벽과 바닥 사이에 말라붙어있는 대량의 혈흔과 곰보처럼 박혀있는 총탄들.

최근에 일어났던 총격전의 흔적인가?

이것도 당연히 그 남자가 한 짓이겠지.

"······미친, 여기서 몇 명이나 죽인거야?"

하레니오는 위험한 놈들이었다.

그런데 지금까지 해온 짓들을 보면, 오히려 그 인간이 더 위험한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타운에선 명확한 목적 없이 호의를 베푸는 사람을 경계해야한다. 단신으로 갱단을 쓸어버리는 무림계 고수가 여기까지 흘러 들어올 만한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누군가를 암살하고 도피중인 히트맨이라면 또 몰라도.

괜히 찝찝해진 은소는 몸을 돌렸다.

그때.

스윽-

의문의 검은 그림자가 앞을 가로막는다. 은소는 지겹다는 말투로 그림자를 향해 말했다.

"내려가려 했어. 그냥 궁금해서 잠깐······."

"누가 올라와도 좋다고 했지?"

"알았다고 응곽아. 내가 미안~"

뒤로 들러붙는 그림자가 귀찮았던 은소가 어물쩍 넘어가려 한다. 하지만 뒷덜미를 잡아채는 우악스러운 손길에 더이상 참지 못하고 성질을 부렸다.

"뭐야, 응곽! 너 미쳤어? 안 놔?"

하지만 상대에게선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왜인지 섬찟한 기분이 든 은소가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누군가의 피가 쩍쩍 말라붙어 있는 주먹이 눈앞으로 쏟아졌다.

쿠당탕!

"쯧."

술집으로 돌아온 나는 한 방에 기절해 나가떨어진 돌대가리를 대충 내버려 두고는, 멋진 애꾸눈 응곽이를 불렀다.

"등평위를 여기로 불러라."

"으, 은소가 위에서 사고라도 쳤습니까?"

"다른 할 얘기가 있어서 그런다."

"아, 예."

그렇게 약 한 시간쯤 지났을까.

"어쩐 일로 부르셨습니까?"

의아한 얼굴로 술집에 도착한 삼호문주에게 여상스레 운을 뗀다. 내게 어떻게든 도움이 되어주겠다는 계약을 이행할 때가 이리도 빨리 올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문주. 오늘 나랑 일 하나 해야겠다."

"무슨 일을 말씀하시는 건지요?"

"하레니오와 거래하던 공장이 있다. 작은 시비가 붙어 그쪽 직원 셋을 죽였다. 그런데 아무래도 신경이 쓰이는 것이, 직접가서 다 죽이고 와야 마음이 놓일것 같다."

등평위는 급작스런 내 학살 결심에 황망한 표정을 지었다. 영문을 모르는 그는 먼저 술집에 와있던 응곽과 눈빛을 교환하며 연신 헛기침을 했다.

"허어······."

철선을 얼굴에 부쳐가며 내 얘기를 곱씹던 등평위의 얼굴이 시시각각 굳어가다가 종국에는 심히 어두워졌다.

등평위는 철선을 접어 소맷단에 넣고, 파리해진 안색으로 걱정스레 물었다.

"대협, 대책도 없이 그쪽과 엮였다간 큰일 치를겁니다. 여긴 공권력도 닿지 않고 무엇보다 터무니없는 뒷배를 가진 자들이라···뭐 뾰족한 수가 있으신지요?

"놈들이 짝퉁 산공독을 거래 대금으로 썼더군."

"모두 죽인 후에 신고하실 작정이십니까."

"이해가 빠르구나."

공장에서 나온 놈들이 거래대금으로 지불했다고 말했던 '산공독과 몽환향' 은 분명 사천당가의 진짜배기 산공독을 모조해 만든것이다.

당가는 자신들의 울타리를 침범하는 것을 병적으로 싫어하는 족속들이다. 신고가 들어가면 어떻게든 빠르게 상황을 정리하고 싶어하는 관청의 공무원들이 알아서 수를 내겠지.

메가콥과 엮여있는, 딱 봐도 귀찮은 사건을 떠맡기 좋아하는 공무원은 세상 어디에도 없으니.

당가의 손속은 원체 자비가 없다.

반 바이오라는 불쌍한 기업도 그놈들이랑 제품 특허로 붙었다가 사라져 버렸지.

"마침 발두르 관청에 줄도 있군. 저번에 발가벗겨서 포르노 찍어둔 사내에게 연락 넣어둬라. 몸캠 피싱? 뭐 그런 느낌으로."

"관청의 말단직 밖에 못되는 사내입니다."

"뭐라도 하겠지. 공무원인데."

나는 공장의 셋을 처리할 때 썼던 방진마스크와 피 묻은 겉옷을 꺼내 보였다. 물기섞인 핏물이 겉표면을 타고 뚝뚝 떨어진다.

"오늘 새벽에 바로 출발할거다. 괜찮은 리볼버를 세 정 얻었으니, 총 잘 쏘는 놈으로 셋만 추려놔."

*

그날 저녁.

찰랑-

까만 망토를 뒤집어쓰고 17번가 술집으로 찾아온 륭의 사무보조, 클로에가 투명한 유리병을 가볍게 흔들며 말한다.

"2레벨급 시체의 혈액에서 추출한 최하급 에센스에요. 용량은 1리터. 가격은 100mL당 10만 크레딧이랍니다."

옅은 푸른 빛이 감도는 액체가 유리병 안에서 천천히 찰랑인다.

"수수료를 더하면 총 110만 크레딧이 되겠네요."

나는 어마어마한 가격에 혀를 내둘렀다.

백만 크레딧이면 발두르 시티 도심에 좋은 아파트를 구할 수 있는 돈이다. 아무래도 정식 유통로를 통해 구해온게 아니라 그런지 프리미엄이 더럽게 많이 붙었군.

"결제 감사합니다. 나중에 또 찾아주시면, 그때는 좋은 차를 대접할게요!"

클로에가 떠나간 후.

찰랑-

용기 속에서 찰랑거리는 에센스를 노려본다. 이 액체가 내 모든 생을 통틀어 가장 최악이었던 좀비에서 뽑아낸 진액이란다. 좀비의 진액이라 생각하니 거액의 크레딧을 지불해가며 구한 영약이라 해도 어쩐지 기분이 껄끄러웠다.

아무튼 제 값어치는 했으면 좋겠군.

나는 자리에 앉아 가부좌를 틀곤,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에센스를 입에 털어넣었다.

에센스가 목구멍을 타고 천천히 넘어가니 역하고 비릿한 혈향이 코를 찔러왔다.

맛이 쓰레기 같아서 최하급품인가?

그래도 뱉을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역한 맛과 향을 참아가며 진액을 꾸역꾸역 삼켜 넘겼다. 비릿한 혈향은 곱절이 되고, 쓰레기 같은 맛은 연신 혀를 괴롭힌다.

나는 마지막 한 모금까지 다 털어넣은 시점에 가부좌를 틀고 운공을 시작했다. 전생부터 극성에 이르렀던 무선대지신공이 본연의 공능을 발휘해줄 차례였다.

불순물 가득한 에센스가 목구멍을 지나 위에 이르자 신공이 제 할 일을 하기 시작했다. 호흡이 느려지고 숨결이 돌덩이처럼 무거워진다. 뱃속에 똬리튼 에센스의 기운이 기맥에 흡수되어 천천히 순환한다.

가만히 눈을 감고 기를 전신으로 돌리자 주변의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기 시작했다. 오감이 확장되고 전신의 감각이 예민해져간다.

불순물을 걸러내느라 엄습하는 발열과 오한에 온몸에 불이 붙은듯 뜨겁게 달아올랐다가 어느순간 북해에 던져진듯 차갑게 식었다. 그러길 여러 번.

깜빡-

"······."

천근만근 무거웠던 눈꺼풀이 떠진다.

후우웅-!

허공에 권격을 내지르자 주먹이 시원스레 뻗어 나간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힘있게 만들어지는 궤적에 미세한 권풍이 일어났다가 사라진다.

그 뒤로도 조금 더 시간을 들여 상태를 확인해보았다. 오랜 시종 생활로 불균형했던 기운의 중심이 잡혔고, 심장을 휘도는 마나 회로는 더 넓고 단단해졌다.

단전에도 전보다 확실히 묵직해진 내력이 똬리를 틀었다. 못해도 십 년은 운공해야 얻을 수 있는 내공을 최하급 에센스 따위에서 이리도 손쉽게 얻다니. 극성까지 성취를 쌓은 심공을 가지고 있기에 가능했다지만, 차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적게 잡아도 백년설삼급은 되겠군.

좀비의 몸에서 뽑아낸 영약이 이정도라니, 무언가 느낌이 기묘했다. 중원에서 이만한 수준의 영약은 돈이 있다고 해서 구할 수 있는게 아니었는데, 여기선 크레딧만 넉넉하다면 내력을 쉽게 쌓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괜히 전체적인 수준이 높은게 아니었군.'

나는 호흡을 고르며 밖으로 나왔다.

정크타운의 어둑한 밤거리.

- 우웩!

비틀거리며 앞서가던 사람이 길 구석에 엎어져 구토를 한다. 시궁쥐, 바퀴벌레와 같은 타운의 미물들이 몰려든다.

잠시 멈춰서서 하늘을 올려다본다.

슬럼가의 층층 구름다리 사이로 보이는 하늘은 어두컴컴하다. 전 회차들은 공기가 좋아서 그런지 밤만 되면 별이 놀랄 정도로 많았었는데.

바로 옆 동네가 공장단지라 그런가.

대기의 질이 쓰레기 같은 탓이겠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정크타운을 배회하다 1번가까지 흘러온 나는, 내친김에 친씨아의 총포상을 찾았다.

탁!

방금 전까지만 해도 불빛이 새어나오던 총포상 안에서, 나 보란 듯이 조명을 소등해버린다.

불이 꺼진 총포상의 카운터 안쪽.

1층 카운터 안쪽에서 어깨만 으쓱이는 친씨아가 보였다. 리볼버도 팔아주지 않은걸 보면 싸움에 조금도 휘말리기 싫다는 뜻일테지. 나는 융통성이 있는 사내였기에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었다.

적당히 발걸음을 돌렸다.

어느덧 밤은 깊었고, 이른 새벽이 되었다.

총을 들고 등평위를 뒤따르는 문도 셋, 그리고 내가 어두운 정크타운 길거리 속에서 걸음을 재촉했다.

무리의 선두는, 방탄복을 입은 루돌프놈이었다.

#20화. 사내다움으로 승부했다

#20화.

발두르 서쪽 외곽.

웨스트 커너 공장단지.

시티에 위치한 모든 공장단지 중 가장 낙후된 공단이자, 하루 임금 몇십 크레딧에 건강을 버려가며 일하는 노동자들이 모여드는 곳.

망가져도 고쳐줄 필요가 없는, 기름과 전기 대신 싸구려 칼로리바를 연료 삼아 일하는 이들의 터전이다.

노동자들도 출근하지 않은 이른 시각.

사람을 죽이러 온 여섯의 사내가 공단 진입로에 발을 들였다.

웨스트 커너 공장단지는 마치 커다란 미로 같은 구조였다. 등평위는 한 블록을 지날 때마다 바뀌는 주변 광경을 눈에 담아두기 바빴다.

바닥을 덮은 뿌연 먼지와 잿가루.

공장단지는 초입부터 다 쓰러져가는 공장들이 마땅한 구획도 없이 난립해있었고, 정체 모를 폐자재와 폐기물이 길거리에 너저분하게 널려있었다.

질퍽한 길바닥엔 오물과 플라스틱 폐자재가 발에 채여 부스럭대고, 근처에는 정화조 시설이라도 있는지 고약한 냄새가 진동했다.

부스럭-

"으어헉!"

"조용히 해라."

"···예. 죄송합니다 형님."

혹여나 벌집이 될까, 겁을 잔뜩 집어먹은 루돌프놈은 작은 소리에도 몸을 움찔거렸다.

그렇게 공단 진입로에서 20분 정도를 걸어 들어갔을까.

마력으로 후각을 예민하게 강화한 내 발걸음이 뚝 멈추었다. 유독 한 공장의 주위를 비릿한 혈향이 가득 메우고 있었던 탓이다.

유난히 높게 둘러쳐진 담벼락과 철조망.

앞에는 접근 금지를 알리는 방사능 마크와 고전압, 독성물질등의 표지판이 띄엄띄엄 박혀있었다. 흉악한 경고문구 덕에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을테니, 공장의 관계자가 아니고서야 굳이 기웃거릴 일이 없는 곳이었다.

"저 안에서 돼지를 잡을 리는 없고."

어느정도 확신에 찬 내가 물었다.

"돌프야. 아까부터 비린내 안 나더냐?"

"비, 비린내요? 저는 잘 모르겠는데요."

나는 동산처럼 높게 쌓여있는 폐자재를 밟고 뛰어올랐다. 마법으로 몸을 잠시간 허공에 띄우자, 철조망 너머의 풍경을 상세히 볼 수 있었다.

높은 철조망과 담으로 둘러싸인 넓은 부지.

그 중간에 네모반듯한 공장이 보였다. 이곳 저곳에서 간헐적으로 빛나는 렌즈들이 공장부지와 바깥을 사각지대 없이 감시하는듯 보였다.

이렇게 낙후된 공장단지에서 주변을 감시하는 폐쇄 회로 CCTV까지 달 일이 있긴 할까.

강한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자, 뒤따라오던 등평위가 눈치를 채곤 말했다.

"대협, 월담을 해서 안으로 진입하시지요."

"우리가 뭐 부끄러울게 있어서 담을 넘냐. 사람을 좀 죽이러 왔을 뿐이니 흑도의 방식을 따르자."

"좋습니다."

촘촘한 철조망과 자물쇠로 잠겨있는 공장의 입구.

내가 그 앞에 가서 당당히 서자, 입구 철조망에 걸린 렌즈가 빠르게 점멸한다.

[ ······이 시간에 올 사람이 없는데. 누구냐? ]

스피커를 통해 누군가 의문을 표했다.

졸다가 막 깨어난 듯, 잠긴 목소리였다. 슬프게도 야간 당직을 맡은 놈이리라.

나는 눈 아프게 번쩍이는 라이트와 당직놈의 질문을 깡그리 무시하곤 내공을 끌어 올렸다.

우지직-

다짜고짜 굳게 잠긴 자물쇠를 잡아 뜯었다. 반쯤 우그러져 덜렁대는 쇳덩이에 뒤따라온 문도 하나가 기함한다.

자물쇠를 뜯어내자, 그에 딸려와 엉킨 철조망들이 말썽이었다. 철조망을 타고 흐르기 시작한 전류에 펑 소리가 나며 스파크가 튀었다.

나는 압축도를 휘둘러가며 덤불마냥 얽힌 철조망들을 잘라냈다. 몇 초도 지나지 않아 시끄러운 사이렌이 공장 전체에 울려 퍼졌다.

삐이이이-! 삐이이이-!

철조망을 걷어내 입구를 연 뒤, 안력을 끌어올려 주변을 살폈다.

출입금지가 쓰여있는 커다란 공장이 부지 중앙에 하나. 가장자리에 직원들의 숙소나 창고로 추정되는 컨테이너 몇 개.

피비린내는 중앙 공장쪽에서 진하게 풍겨오고 있었다. 이쯤되면 더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이제부터 밖으로 대가리 내놓는 놈은 전부 쏴라."

타앙-!

말이 끝나기 무섭게 총성이 터진다.

저 멀리, 가장자리에 위치한 컨테이너 앞.

비상 사이렌이 울리자 상황을 확인하러 나온 듯한 놈의 이마에 구멍이 뻥 뚫렸다. 시체가 실 끊긴 인형처럼 풀썩 쓰러진다.

옆을 보니 가늠자에 눈을 붙이고 있는 등평위. 그의 총구를 타고 신선한 화약내가 올라오고 있었다.

"젊어서 그런가 수전증은 없군."

"사내는 원래 오십부터 시작이지요. 젊은 사내에겐 없는 중년의 원숙미(圓熟美)가 엿보일 나이 아닙니까."

"음, 묵직한 바디감 뭐 그런 건가."

나는 맞장구를 치며 숨을 한껏 들이켰다.

탓!

이윽고, 경공까지 사용해가며 전속력으로 넓은 부지를 주파한다. 한 번의 호흡에 거리가 수십 미터씩 좁혀졌다. 가장 먼저 중앙에 있는 대형공장을 무력화시킬 생각이었다.

중앙 공장과 거리가 가까워지자, 열린 문 밖으로 특이하게 생긴 휴머노이드 두 기가 뒤뚱대며 튀어나왔다. 놈들이 들고 있던 것은 다름아닌 기다란 날붙이였는데 마치 뼈를 발골하는 칼처럼 생겨 사뭇 위협적이었다.

하지만 속도는 그다지 빠르지 않아보였다.

단숨에 거리를 좁힌 내가 도를 휘둘렀다.

콰직-!

외형과 달리 묵직한 압축도가 앞서있던 휴머노이드의 허리춤을 반쯤 파고든다. 잔뜩 조여놓은 볼트 부품이 덧없이 빠지고, 진동하는 쇳덩이의 기분 좋은 울림이 도를 타고 검명처럼 전해진다.

끼익대며 가동을 멈춘 휴머노이드 한 기.

단단히 박힌 도를 비틀어 회수하곤 중앙 공장쪽으로 몸을 던졌다.

쾅! 끼이익.

강하게 발로 차자 그대로 넘어가는 문.

뒤쪽으로 여러 가지 소음들이 겹쳐 들린다.

휴머노이드의 몸체에 납탄 부딪치는 소음과 컨테이너에서 튀어나온 놈들이 본격적으로 총질을 해대는 소리.

뭐, 알아서들 잘하겠지.

나는 삼호문에 뒤처리를 맡기고 전진했다.

문을 차부수고 공장 안쪽으로 진입하니, 정육점과 비슷한 색감의 조명이 켜져있는 실내가 눈에 들어왔다. 마치 2층짜리 교도소를 연상케 하는 구조였다.

———!

와중에 공장 안쪽에도 귀청이 터질듯한 사이렌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나는 이리저리 고개를 돌렸다. 마침 공장 1층 구석에 '작업실' 이라 적힌 몇개의 격실이 바로 시선에 들어왔다.

덜컹.

작업실 하나를 열고 들어가본다.

환풍기 하나가 애처롭게 돌아가는 격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붉은 피딱지가 뒤덮고 있는 작업대가 격실 내에서 묘한 악취와 피비린내를 풍기고 있었다. 저 작업대 위에서 몇 명의 인간이 명을 달리했을까.

그리고.

토막난 채로 빨랫줄에 대롱대롱 걸려 있는 저 허벅지와 팔뚝들이 짐승의 것은 아닐테지.

무명인들의 명복을 빌어준 나는 곧바로 공장 천장의 조명과 사이렌을 조준 사격했다.

챙강-! 챙강-!

총성이 연거푸 공장 안을 때리고, 실내를 어둡게나마 밝혀주던 네온 유리관들이 챙그랑대며 산산이 깨져나간다.

내부를 시끄럽게 울리던 사이렌도 꺼져 적당히 적막한 어둠이 찾아오자 오감이 곤두섰다. 커다란 총성에 적응된 청각 역시 마찬가지였다.

- 아니, 정문을 그냥 부수고 들어왔다니까!

정문 스피커에서 들었던 그 목소리.

이 중앙공장을 외로이 지키는 당직 근무자인듯 한 놈이 다급한 목소리로 어딘가에 상황을 전파하고 있다.

그 목소리를 쫓아 조용히 위로 올라간다.

2층의 기다란 복도 끝.

열려있는 문틈 사이로 감시카메라 화면이 가득한 방이 보이고, 그 통제실 같은 방에서 한 뚱뚱한 사내가 성질을 내고 있었다.

발소리를 죽이고 뒤로 접근한 나는 놈의 두툼한 목덜미를 잡고 지그시 눌렀다.

"컥!"

놀라 발작하며 고개를 치켜드는 놈.

콰앙-! 콰앙-! 콰앙-!

목덜미를 더 강하게 틀어잡곤, 데스크가 박살날 때까지 내려찍는다. 얼굴이 반쯤 뭉개져서야 비로소 놈이 얌전해졌다.

놈의 귓가에 속삭였다.

"대답해라. 너희 대장 어디있어."

"고, 공장장을 말하는 거냐? 로티스님은 이 시간에 여기 없다. 저녁이 되어야 오실거다."

"나름 야습이라고 한건데 하필 올빼미형 인간이었나."

"그게 무슨 헛소리······."

"로티스란 놈한테 연락해."

우우우웅—

그때, 밖에서 우렁찬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

경치좋은 2층에서 창밖을 내다보자 구불구불한 길을 미친 듯이 내달려오는 사륜 지프차 네 대가 보였다. 연락은 굳이 안 해도 되겠군.

"로티스는 어떻게 생겼지?"

"자, 잘생겼다. 그리고 매일 하얀 수트를 입는다."

"좋다. 이제 그 멋진 놈한테 뱀처럼 찢어진 눈을 가진 마법사가 쳐들어왔다고 크게 외치는거다. 아주 간단하지?"

"······아, 알겠다."

뚱뚱한 녀석은 의외로 순진한 구석이 있었다.

공장장이란 놈이 버럭 화내며 연락을 받자마자 내가 말한 그대로를 앵무새처럼 외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쓸모를 다한 놈의 통신기를 빼앗아 부수고 도를 뽑았다.

스릉-

"뱀눈 마법사한테 안부 전해라. 네 목소리는 잘 쓰고 있다고."

푸욱!

가차 없이 몸을 꿰뚫는 압축도에 육중한 놈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바닥으로 허물어졌다.

놈을 처리한뒤 시선을 돌렸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공장 밖의 전투. 2층 통제실에서는 컨테이너에서 튀어나와 총질을 하는 공장놈들의 면면이 그대로 보였다.

여기 뷰 좋네.

나는 권총을 뽑아들고 방아쇠를 당겼다.

삼호문과 총격전을 벌이던 놈들이 속수무책으로 쓰러져간다. 그와 거의 동시에, 망가진 철조망 입구를 힘으로 뚫고 들어와 급정거하는 네 대의 지프차.

끼이이이익-!

새하얀 양복을 빼입은 한 남자와 열댓 명의 사내들이 다급히 내리는 걸 보곤, 나도 깨진 창문 밖으로 몸을 내던졌다.

땅에 사뿐히 내려선 나는 조용히 포권했다.

"드디어 죽었구나. 잠시였지만 즐거웠다."

눈 앞에서 한심한 자세로 쓰러져 죽어있는 루돌프를 향해서였다. 격한 총격전 중에 결국 비명횡사 해버렸군.

컨트롤 칩은 회수해서 다시 써야하는데 설마 관자놀이에 총을 맞은 건 아니겠지.

"형님. 저 안 죽었는데요?"

"그러냐."

루돌프가 서운한 듯 입을 꾹 닫는다.

나는 엎드려있는 녀석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그러면 왜 바닥에 누워있니."

"초, 총알이 자꾸 날아와서요."

"그래. 그럼 계속 누워있어라."

"네."

쿵!

마지막으로 공장에 진입한 지프차 한 대가 열어뒀던 철조망 문을 반대로 밀어 탈출로를 막아버렸다.

곧, 시커먼 사내들이 줄줄이 내려서고.

고급진 백색 수트를 차려입은 남자가 덩치큰 무언가를 앞세워 중간으로 걸어 나온다. 냅다 총을 갈겨버릴까 했으나 걸음걸이가 딱딱한 것을 보아하니, 저 덩치는 사람이 아닐 확률이 높으리라.

저 수트를 입은 자가 로티스인가.

호위를 받으며 나온 사내는 객관적으로 보기에도 수려한 외모에 헌앙한 풍채를 가지고 있었다. 사람을 토막내서 장사하는 미친놈만 아니었다면 여인 여럿 울렸을 것이다.

총성의 자리를 이제 정적이 대신했다.

쓰레기처럼 널려있는 공장 직원들의 사체와 내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던 놈이 의아한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을 열었다.

"모르는 얼굴인데, 누구냐?"

단 한 마디로 장내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본래 사람의 외형이 뛰어나면 범인들의 관심은 자연스레 따라오는 법이었다.

아무래도 얼굴로는 내쪽이 한 수 밀려 승부를 보기 어려울 것 같기에, 나만의 특장점인 사내다움으로 말의 포문을 열었다.

"죽은 네 부모가 보낸 저승사자다."

"······."

놈의 잘생긴 얼굴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공장장놈은 말을 섞을 가치도 없다는듯, 뒤에 있던 이들에게 고갯짓했다.

그러자 어떤 한 놈이 무리 속에서 불쑥 튀어나와 자기소개를 한다.

"우리, 이 근방의 낭인 용병들입니다."

명령을 기다리는 사냥개처럼 땅에 발을 붙이고 있던 십수 명의 사내중 가장 덜 험상궂게 생긴 녀석이었다.

낭인 용병.

크레딧만 된다면 무슨 의뢰든 받는 자들이다.

"어렵게 가지 맙시다. 그냥 투항해주십쇼."

녀석이 깍듯하면서도 뻔뻔히 요구해왔다.

누가 듣는다면 어이없다며 코웃음을 치겠지만, 결과가 정해진 싸움에서 서로 다치고 목숨을 잃느니 쉽게쉽게 가자는 당차고 효율적인 요구였다.

그러나 나는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사나이 자존심이 있지. 그렇게는 못 하겠다."

"정 그렇다면 우리 입장도 이해 부탁드리겠습니다. 원래 이런 바닥인 거 아시죠?"

"좋다. 내 노력은 한번 해보마."

"고맙습니-"

타앙—!

사내는 깍듯이 고개를 숙이는듯 하다가 찰나간 총을 꺼내 방아쇠를 당겼다. 서부극의 베테랑 총잡이를 연상케 하는 속도였다.

그것이 공격신호인 듯, 낭인 용병들의 거센 총격이 뒤따라 터져나왔다.

#21화. 선채로 죽었다

#21화.

"살려서 내 앞에 데려와. 혀를 뽑아버리게."

——!

총탄이 무차별적으로 쏟아졌다. 상대가 방어 마법을 익힌 마법사라는 것을 알면 주춤할 법도 한데, 무시하고 총탄을 쏟아붓는 걸 보면 이미 마법사와도 여러 번 싸워본 경험이 있으리라.

엄청난 집탄량에 마력이 뭉텅뭉텅 깎여 나간다. 에센스를 흡수한 덕에 마나 회로가 이전보다 강화되긴 했지만, 제자리에서 수백 발의 총탄을 가만히 막고만 서있는건 무리였다.

"등평위!"

"!"

전개한 보호막에 총탄이 튕겨나가는 모습을 넋 놓고 바라보던 삼호문주를 부르자, 컨테이너 뒤에서 엄폐하고 있던 그가 황급히 정신을 차렸다. 강 건너 불구경할 때가 아님을 직시한 등평위는 재빨리 자리를 잡고 놈들을 조준했다.

그때, 내가 다시 등평위를 불렀다.

"신고부터 해라!"

"시, 신고?"

"그래! 되도록 천천히 오라고 해!"

"······."

나는 보호막에 마력을 더 쏟아부었다. 고농도 마나액을 전투 전에 미리 주입해뒀지만, 신이 아닌 이상 무한정으로 총탄을 막아낼 수는 없었다.

'일단 거리부터 좁혀야겠군.'

몰타 왕국의 마탑에는 마권사들이 있었다.

일반적인 왕국의 마법사가 준비된 폭격기라면, 마권사의 역할은 적진속에 던져진 폭탄이었다.

그렇기에 몰타 왕국의 마권사들은 대부분, 원거리 궁병의 저격으로부터 자신의 신체를 보호하는 마법과 적과의 거리를 좁히는 마법에 있어선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리고 제국과 최전선에서 싸웠던 나 역시, 무수히 쏟아내는 궁병들의 화살 세례는 누구보다 익숙하게 돌파해낼 자신이 있었다.

마나 보호막을 앞으로 전개하며 전진한다.

집중력을 요구하는 행위에 회로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저벅대며 한 걸음씩 옮길 때마다 놈들의 탄막이 눈에 띄게 요동친다.

어느덧 엎어지면 코 닿을 정도로 좁혀진 용병들과의 거리. 순간 마나 보호막을 폭발시키자 깨진 마력의 파편들이 전방으로 쏟아졌다.

"피해!"

견고하던 용병들의 진영이 일순간 무너졌다. 나는 압축도를 뽑아들고 가장 가까이 있던 놈을 향해 몸을 쏘아냈다.

그때.

쐐애액-!

총을 내던지며 달려든 용감한 용병놈 하나가 자신의 팔을 뻗어 압축도의 궤적에 갖다댄다.

제 팔 소중한 줄을 모르는 놈이군.

아마 자기 몸뚱이가 아니라서 그렇겠지.

실제로, 저항감 없이 잘려나갈 줄 알았던 놈의 팔에서 쇠 뭉개지는 느낌이 나더니.

카각-!

시퍼런 불똥이 사방으로 튀어오른다.

사이버웨어 암이 반쯤 갈라지며 잘린 신경다발이 밖으로 드러난다. 파지직 거리며 튀는 전광. 생각보다 강한 손상에 경악하는 놈의 표정이 보였다.

"무, 무슨?"

"그럼 멀쩡한 줄 알았나?"

"죽어 이 빌어먹을 새끼야!"

쐐액-

이제는 외팔이가 된 놈이 남은 반대쪽 팔로 낫처럼 생긴 무기를 휘둘러온다.

경지는 낮아도 실전 경험이 풍부한 놈들답게 팔 하나를 내어주곤 곧바로 목을 노리는 움직임이 꽤나 매끄럽다.

하지만.

서걱.

내공을 주입한 압축도가 떨어지는 낫과 팔목을 통째로 베어버린다. 깔끔하게 절삭된 파츠가 툭. 하고 떨어진다.

허전해진 양 팔을 허탈하게 바라본 놈이 혼잣말을 지껄인다.

"······평범한 마법사라며? 이게 뭐야 씨발."

서걱-

낭인 용병 하나가 목숨을 잃었다.

한편, 동료의 죽음이 익숙한 놈들은 이 상황을 오히려 기회 삼아 거리를 멀리 벌린다. 하지만 그리 영리한 판단은 아니었다.

촘촘했던 진영이 사방으로 찢어지자.

타앙—

삼호문 쪽에서 큰 총성이 터져 나온다.

거리를 벌리던 한 놈이 털퍽 고꾸라진다. 나는 뒤를 확인할 새도 없이 흩어진 놈들을 향해 짓쳐들었다.

철그렁!

갑작스럽게 날아든 쇠사슬을 발도로 끊어낸다. 그 반동으로 몸을 돌린 나는 압축도를 횡으로 그었다.

스걱!

도의 궤적에 걸린 한 놈의 목이 더 달아나자, 지금껏 크게 당황하지 않던 놈들이 이제야 조급한 티를 냈다.

평정심을 잃고 허둥대는 놈들만큼 상대하기 쉬운 건 없다.

타앙-! 타앙-!

엄폐물 뒤에서 날아온 삼호문의 총탄에 허둥대던 용병들이 하나씩 고꾸라진다. 같이 쏴대자니 내가 달려들까 무섭고, 그렇다고 신경을 끄자니 총탄에 머리통이 터져나간다.

삽시간에 여유를 잃은 낭인 용병들이 제 목숨을 챙기기 위해 각기 움직였다. 총탄이 적아를 가리지 않고 난무한다.

그렇게 아수라장이 된 장내.

나는 아까부터 뒤에서 가만히 서있던 로티스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넌 옷에 때 탈까 봐 안 싸우는 거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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