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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푸후."

복도에 기댄 채 물을 토해내는 유신의 앞에는 굳건히 닫힌 철문이 있었다.

가슴께까지 잠기던 것은 설비실을 비롯한 일부.

이곳까지는 아직 저 소금기 가득한 손길이 닿지 않았다.

찰팍.

물론 벌써부터 기세가 심상치 않은 것이 조금만 시간을 끌면 이곳 역시도 곧 물에 가득 찰 테니까 말이다.

'보나 마나 이곳에 있겠지.'

[성물실]

원래부터 있던 것이 아닌, 조악하게 새로 입힌 글자가 철문에 새겨져 있다.

도망친 광명교주가 향할 곳은 이곳밖에 없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수백 킬로그램 짜리 핵탄두를 맨 채 지상과 연결된 엘리베이터까지 갈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유신은 문을 열었다.

위이이이잉!

곧바로 들리는 모터 돌아가는 소리.

"···!"

[에스트 방벽]

유신은 지체없이 장막을 펼쳤다.

그것도 얼마 안 남은 에스트를 쥐어짜네 최고의 강도로.

탁월한 선택이었다.

콰지지지직!

곧바로 장벽에 금이 가며 어마어마한 충격이 몰아치기 시작했으니까.

"큭."

붉은 융단이 깔린 고즈넉한 방안에는 [성물실]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유물과 미술품 대신.

삐삐.

점멸하는 C4와 TNT.

다이너마이트나 녹슨 미사일 등 각양각색의 폭발물들이 흉흉한 빛을 번뜩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성물들의 중심에 있던 광명교주는 핵탄두 하나를 옆에 세워둔 채.

"네이-노오오오옴!"

얼굴을 악귀처럼 일그러트리고.

드르르르륵!

미니건의 방아쇠를 당기고 있었다.

"감히! 감히! 감히! 감히이이이!"

앙증맞은 이름과는 달리 저건 괴물이다.

여섯 개의 총열이 회전하며 분당 4천발의 총탄을 쏟아낸다.

탄환 하나하나에 담긴 위력은 개인화기를 아득히 뛰어넘는다.

그리고 이건 유신이 알고 있던 미래에는 없던 사실이었다.

교주는 원래 성물실에 있는 폭탄을 이용.

얼마 안 남은 핵폭탄과 함께 자살을 시도하니까.

그 정도라면 인형사의 유물을 이용해 쉽게 막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난데없이 미니건이라니?!

'엿 같은 망겜!'

아주 그냥 난이도가 미쳐 돌아가는구나.

"수백 년 동안 이어져온 우리들의 비원을! 인류의 무궁한 발전을 짓밟아버린 이 더러운 악귀!!! 죽어라! 죽어어어어!"

느껴지는 충격에 장막이 요동친다.

안 그래도 격전으로 인해 얼마 없던 에스트가 빠르게 감소하며 유신의 육체에도 타격이 가기 시작한다.

'어떻게 해야 하지?'

절체절명의 상황 속에서 유신은 생각한다.

성물실과 복도는 일직선으로 쭉 이어져 있는 상태였다.

드르르르륵!

그리고 교주는 노련한 사수였다.

전방위로, 유신의 손과 발을 주목하며 장벽 전체를 타격하고 있었다.

딱 봐도 유신의 허튼 수작을 사전에 차단하겠다는 의지가 강하게 엿보였다.

'장벽을 푸는 순간··· 곧바로 벌집이 될 거다.'

지금 이 상태로는 품에 있는 총도, 인형사로부터 빼앗은 유물도 사용할 수 없다.

에스트 인형 역시 저 무지막지한 물리력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렇다면···

방법은 두 개다.

인형사로부터 빼앗은 이공간 능력.

[악몽의 나락]을 구축해 교주를 끌고 가던지.

'남은 에스트가 거의 없다. 100%구축이 가능할 지는 장담할 수 없어.'

첫 번째 수는 도박이다.

철컥.

'아니면 죽음을 각오하고 럭키샷을 노려보던지.'

두 번째 수 역시도 도박이다.

"죽-어어어어어!"

입가에서 핏물이 주르륵 흐른다.

전기모터 돌아가는 소리와 탄피가 튕겨 나가는 소리.

희망을 잃은 광신자의 아우성이 혼란하게 뒤섞여 메아리친다.

유신은 생각했다.

자신은 늘 철두철미하게 계획을 짜고 움직였다.

미래의 지식이 있고, 내재된 찬란한 재능이 있으니 이 지옥 같은 세상 속에서도 대부분의 상황을 제 뜻대로 주무를 수 있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극이 마무리 되어가는 이 시점에서 운명의 여신이 장난질을 일삼았다.

더 이상 칼로 잰 듯 딱딱 맞춰서 움직이지 말고.

어디 주사위나 한번 굴려보라고 종용한다.

너도 다른 피조물들처럼 삶이란 것에 휘말려 춤 한 번 춰보라고 한다.

선택해라.

선택해라.

두 개의 밧줄을 눈앞에 둔 채 유신은 고민했다.

"···"

결국.

유신은 선택을 내렸다.

그가 택한 것은 내재된 권능도, 그렇다고 손에 들린 화약 무기도 아니었다.

쏴아아아. 툭.

파도에 쓸려와 발목에 부딪히고 있는 이것.

마치 잠들어 있는 듯 떠다니는 시체 한 구.

광명교주에게 세뇌당해 이리저리 이용만 당하던 가여운 장기말.

"드위나르."

바로 놓쳤었던 새로운 힘이었다.

운명은 변덕스러웠다.

눈앞에 두 개의 선택지를 제시하다가 금세 또 다른 길을 내놓는다.

하지만.

"어이가 없군."

유신은 기쁘게 그 줄을 잡았다.

[징벌의 심판]

[과도한 능력 흡수!]

[그릇이 넘칩니다!]

[사용자의 선택에 따라 히트맨의 격동하는 육신이 사라집니다!]

이를 악물며 남아있는 한줌의 에스트를 끌어올린다.

"죽어어어어- 죽···?!"

의지를 담아 명령하자 방아쇠를 당기던 교주의 몸에 낙인이 새겨진다.

"···"

유신의 눈동자는 이제 불처럼 이글거리고 있었다.

꾸욱.

주먹을 으스러져라 쥔 그는 마지막 힘을 짜내···

[징벌의 심판]

휘두른다.

쾅!

"컥."

터져나가는 빛과 함께 교주가 나뒹굴었다.

땀범벅이 된 중년인의 입에서 누런 이빨이 툭 떨어진다.

"어, 어떻게···"

상황을 이해한 그의 얼굴은 분노와 증오 대신 당황으로 물들었다.

"그건··· 드위나르의··· 네놈··· 대체 뭐···"

교주는 방아쇠를 다시 당길 생각도 못한 채 어버버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

유신은 궁지에 몰린 광신자를 내려다보면서 삐뚤어지게 웃더니.

"강탈자."

쾅!

이 한 마디를 내뱉으며 방아쇠를 당겼다.

***

삐. 삐···

타이머가 돌아가던 폭약을 핵탄두와 격리시켰다.

곧 성물실 역시 바닷물에 침수되었으니 이제 핵폭발이 일어날 가능성은 없다고 봐도 된다.

이로써···

(구)한국의 메인 시나리오.

수십만의 인명을 죽이는 재앙.

더스트 봄은 사그라 들었다.

(구)한국의 70퍼센트가 사라지는 대재앙을 무효화시킨 것이다.

이로 인해 구원받은 인류.

그리고 이로인해 되돌아가는 운명의 수레바퀴.

뭐가 됐든 이 망가진 세상은 보다 더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단 한 명.

유신이라는 영웅에 의해.

문제는···

"커헉."

유신에게 닥친 현 상황이 문제였다.

광명교주를 처단하기 위해, 드위나르의 능력을 강탈하기 위해.

[히트맨의 격동하는 육신]

데이브의 능력을 어쩔 수 없이 버렸다.

즉 유신의 신체는 다시금 조금만 격렬하게 움직여도 헐떡대는 약골의 그것으로 되돌아왔다.

여기에다가 신체 강화 능력을 오래도록 유지했던 것에서 오는 반동까지.

"허억, 허억."

이건 이 전율적인 권능을 가진 사내의 유일한 단점이었다.

너무도 압도적인 재능을 가졌기에 질투한 신이 내린 반대편의 저울추였다.

'실수다.'

그런 유신 역시 인간이라는 것일까?

총탄과 파도가 쉼 없이 몰아치는 아비규환의 상황.

범인이라면 사고조차 제대로 못하던 그 때.

유신 역시 그만 한 가지 우를 범해버리고 말았다.

'에스트 병에 데이브의 능력을 먼저 담았어야 했는데···'

그랬다면 반동을 겪는 것이 좀 더 나중으로 미뤄졌지 않았을까?

아니, 어차피 에스트가 고갈되었으니 소용 없었을 것 같기도···

"크흐."

시야가 흐릿하며 머리가 지끈거린다.

폐부는 철퇴라도 얻어맞은 듯 욱신거리고.

후들거리는 다리는 내가 지금 어디로 가는지.

쏴아아아.

그냥 파도에 휩쓸리고 있는 건지.

아니면 저 어둠 속으로 파묻히는 건지.

도저히 인식조차 불가하다.

유신은 지금 그 어느 때보다 죽음이 목전까지 들이민 것을 느꼈다.

그러한 상황에서.

덜컥.

"유신!"

델리아가 있던 방을 찾아올 수 있었던 것은 기적에 가까웠다.

"델··· 리아."

델리아는 유신의 모습을 보고 대번에 그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기에 비틀거리던 유신이 쓰러지기 전에 그를 부축했다.

"응, 응. 나 여기 있어. 하고 있던 일은 다 끝난 거야?"

끄덕.

"그럼··· 이제 이곳을 벗어나면 되겠구나."

델리아의 갈색 눈동자에 의지가 깃든다.

유신을 붙들고 있는 손아귀에는 힘줄이 솟았다.

그녀는 자신이 뭘 해야 할지 알 것 같았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고 있어?"

"······"

말 할 힘도 없는지 유신이 속삭였다.

파도 소리에 파묻혀 제대로 들리지도 않을 정도로 미세한 목소리였다.

"알았어. 나한테 맡겨."

하지만 델리아는 유신의 한 마디 한 마디를 똑똑히 기억했다.

그리고···

철컥.

"이것 좀 빌릴게."

그의 품에 있던 권총을 가져간다.

사용법은 알고 있다.

유신이 싸우는 모습을 자세히 살폈으니까.

"후우."

심호흡을 하며 의지를 다잡는다.

그가 날 구해줬듯 이제는···

'내가 너를 구해줄 차례야.'

종업원은 유신을 부축한 채 수몰되고 있는 어두컴컴한 복도를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

쉘터에 구비되어 있던 갖가지 물건들과 살아남은 어인들.

시체가 들고 있던 날카로운 날붙이 등.

몰아치는 파도는 이 모든 것들을 하나로 뭉쳐 거대한 장벽을 만들어냈다.

콰르르르르.

때로는 배수구가 물을 끌어들여 하나의 작은 소용돌이가 만들어지기도 하고.

파지지직!

아직 가동되던 전자기기가 말썽을 일으키며 죽음의 덫을 놓기도 했다.

수몰되고 있는 이 해저기지는 이제 하나의 거대한 각축장이 되었다.

'저곳으로 가면 위험하겠는데··· 우회해야겠어.'

'이걸 놓으면··· 건너갈 수 있을 거야!'

'어쩔 수 없어. 잠수해야 돼.'

그 속에서 델리아는 때로는 머리를 굴렸고, 때로는 제 육신을 담보삼아 길을 개척했다.

"વ્યક!!!"

"그 악마다! 네노···"

탕탕!

때로는 피 한 번 묻혀본 적 없던 손에 피를 묻히기도 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후우, 후우."

드높게 솟아있는 해저 엘리베이터의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탁탁.

유신에게 들은 대로 엘리베이터를 조작한다.

다행이 이 기괴한 모양새의 구축물은 멀쩡히 작동하고 있었다.

위이이잉.

문이 닫히고 승강기가 두 사람을 싣고 천천히 위로 솟구치기 시작한다.

"이거··· 괜찮은 거 맞아?"

순간 델리아의 얼굴이 불안해졌다.

그것에는 바닥만 있고 사방이 탁트인 엘리베이터의 구조 탓도 있겠지만.

근본적으로는 이 엘리베이터를 지탱하고 있는 건물 그 자체에 있었다.

덜컹, 덜컹.

이 엘리베이터가 움직이는 통로는 합금과 강화 유리로 되어있었다.

그러나 주변의 해양 괴물들 때문인지 그 대부분은 크게 파손되어 있었다.

꿀렁.

이를 대신해서 그 부분을 메꾸고 있던 것이 바로 어인들이 보금자리를 만들 때 사용하는 그 투명한 막이다.

저기에 구멍이라도 뚫렸다가는···

'수장될 거야.'

아무리 유신으로부터 안전할 거라고 설명은 들었으나 불안감을 느낄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위이이잉.

[100m]

이 강철관은 아랑곳하지 않고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수심이 얕아질수록.

어두컴컴하던 심해의 바다는 점점 푸르스름하게 변했다.

나중에 가서는 지상에서 새어 들어오는 햇빛으로 인해 마치 에메랄드빛처럼 반짝였다.

도저히 저 차가운 심연과 같은 공간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해냈어! 해냈어! 유신!"

긴장이 탁 풀린 델리아는 그만 유신과 함께 쓰러졌다.

그러다 곧 눈을 동그랗게 떴다.

···

유신으로부터는 반응이 없었기 때문이다.

설마?!

델리아는 유신의 얼굴에 귀를 기울였다.

얕은 숨소리가 새어나온다.

다행이다.

그녀는 기절한 유신을 안고서 배시시 웃었다.

그 안에는 저 생지옥에서 살아남았다는 안도감과.

내가 이 사내에게 도움이 되었다는 뿌듯함과 성취감이 동시에 공존하고 있었다.

'이제 지상으로 나가서 유신이 깨어날 때 까지 버티다가 배를 타기만 하면···'

델리아의 생각이 끊겼다.

저 멀리. 아니, 가까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거대한 실루엣 때문이다.

───────!

마치 장갑처럼 보이는 오돌토돌한 등가죽.

황소도 한입에 집어먹을 정도로 거대한 주둥아리.

그 아래.

심해의 바닷물보다 더 차갑게 빛나는 세로로 갈라진 눈.

악어였다.

어림잡아도 5미터는 될법한 덩치의 거대한 악어가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4급 위험종 크로켄.

공교롭게도 그건 유신과 에피가 낙원에 오자마자 발견한 괴물이었다.

이 근처의 터줏대감이었다가 어인들에게 밀려 영역을 잃은 포식자이기도 했다.

그런 어인들은 현재 유신의 손에 의해 죽거나 뿔뿔이 흩어졌으니.

───────!

이 포식자가 다시금 제 자리로 되돌아온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하필 유신과 델리아가 탈출할 때 놈을 마주친 것은 상황이 더럽게 꼬였다고 밖에 할 수 없지만 말이다.

"···!"

델리아는 헛숨을 들이켰다.

[26m]

지상까지 불과 조금밖에 안 남은 상황.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된다. 그러면 되는데.

'왜 하필 지금···'

쾅!

"꺄악!"

강렬한 충격이 승강기를 덮쳤다.

저 거체에 담긴 물리력 때문인지. 혹은 부실공사의 영향 때문인지.

쩍.

통로는 대번에 금이 가버렸다.

어인들의 막이 뚫린 곳으로는 파도가 쏟아져 들어왔다.

덜컹덜컹.

불길하게 흔들리며 점점 더 느려지는 엘리베이터.

크르르르르!

그리고 꼬리를 살랑거리며 승강기의 진로를 끊어먹을 생각을 하는 영악한 괴물.

찰나의 순간.

델리아는 생각한다.

어떻게든 유신을 깨워볼까?

하지만 상태가 좋아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유신이라고 해도 지금 상태에서 저 괴물을 상대할 순 없을 거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무언가를 결심한 듯 델리아의 눈이 가라앉았다.

곧 그녀는 유신을 뚫어지게 보다가 살포시 입맞춤을 하더니···

탕!

자신의 팔에 비스듬히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부그르륵!"

이후 벌어진 일은 승강기를 박차는 한 여인의 모험담이었다.

투명한 막 속으로 몸을 던진 델리아는 초인적인 힘으로 수압을 이겨내며 억지로 몸을 욱여넣었다. 곧 저 차가운 바닷속 너머로 한 마리의 인어처럼 잠겨 들었다.

후우, 후우.

필사적으로 팔다리를 휘젓는다.

어떻게든 엘리베이터에서 멀어지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시뻘건 핏물이 물감처럼 퍼져 나갔다.

마침내.

───────!

눈앞에 거대한 음영이 드리워졌다.

차가운 뱀의 눈깔이 자신을 뚫어져라 주목하며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조차 델리아는 웃었다.

저 괴물의 시선이 저쪽이 아니라 이쪽을 향했기 때문이다.

승강기는 이미 빛이 스며드는 지상으로 쭉 뻗어 나갔기 때문이다.

이걸로···

'됐어.'

죽음이 임박한 그 순간에도 델리아는 안도했다.

직후 태연하게 손을 흔들며 마지막 작별을 고했다.

'안녕, 유신.'

그건 고귀한 희생임과 동시에 인간이 가진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주는 광경이었다.

한낱 여관 종업원이, 공포에 벌벌 떨 뿐이던 아가씨가 이 세상의 영웅을, 주인공을 구한 상황이니까.

물론···

눈앞의 괴물은 지성체의 아름다운 희생이든, 사랑이든, 인류애든 아무런 감명도 받지 못했다.

크아아아아악!

그저 제 본능을 채우고자 할 뿐이다.

콰직.

흉악한 아가리가 델리아를 집어삼켰다.

그와 동시에.

콰아아아아!

바다가 홍해처럼 갈라지며 거대한 송곳이 떨어져 내렸다.

< 보험과 강탈 >

[더스트 봄]

[Clear]

"캬! 드디어 깼네. 설마하니 몹들 패턴까지 바꿔놓을 줄이야."

검은 화면 위로 붉은 글씨가 느릿하게 나타난다.

나는 손을 싹싹 비비며 주르륵 뜨는 시트를 확인했다.

[파라오의 눈]

등급 : B

파괴력 : C

(구)이집트의 지하 도심에서 발견된 과거의 잔재와 신비가 합쳐져 만들어진 귀물.

소유자의 에스트를 제물로···

[에스트 장벽]

파괴력 : X

특수성 : C

범용성 : D

에스트 소모 : 가변적

[악몽의 나락]

파괴력 : 가변적

특수성 : A

범용성 : B

에스트 소모 : S

[징벌의 심판]

파괴력 : F

특수성 : B

범용성 : A

에스트 소모 : C

오늘 하루 동안 득템한 것들을 보며 나는 기분 좋게 웃었다.

딜에 관련된 아이템이나 능력은 얻지 못했지만 충분히 대박이라고 부를만한 소득이었기 때문이다.

"보호 능력에다가 가불기, 패턴 끊어먹을 수 있는 상태 이상기까지."

어차피 딜템, 혹은 이에 특화된 능력이야 앞으로 흔하게 나온다.

반면에 저런 서포터 계열 능력들은 흔하지 않다.

게임의 초반부.

이렇게 범용성 높은 능력들과 장비들로 든든히 받쳐줘야 나중에 가서 캐릭터가 안 무너지기 때문이다.

멸세생은 단순히 스탯으로 피나 깎아 먹는 게임이 아니었으니까.

"칼잡이나 신체강화 계통은 금방 더 괜찮은 걸로 얻을 수 있고···"

나는 커뮤니티를 뒤적거리며 내가 작성했던 공략집을 다시 한 번 정독했다.

"강탈자 진짜 존나 재밌네. 역시 랭커용 특전 DLC인가?"

그만큼 상대의 능력을 흡수한다는 설정은 매력적이었다.

몸뚱이가 약한 게 한 번씩 조금 짜증나기는 하는데···

하다보니까 이것도 재밌다.

초장부터 레벨99짜리로 무쌍을 찍어봐야 무슨 소용이냐고?

게임이 긴장감이 있어야지 긴장감이.

어쨌든 초반 시나리오도 하나 깼고···

나는 앞으로 이 캐릭터를 어떻게 키워야 할지 빌드를 짜기 시작했다.

'이 다음은 역시 영약을 챙겨서 잠재력을 좀 더 개화시켜야겠지···'

'앞으로 마주하게 될 괴이 현상을 대비해 이에 특화된 동료도 모집하고···'

타닥타닥

"흠흠."

대충 정리가 끝나자 그다음은 동영상 편집이었다.

나는 좀 전까지 내가 플레이했던 영상을 하나하나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오직 나를 위해 준비된 랭커용 특전.

나는 이걸 유튜브에 올릴 생각이거든.

'어쩌면 실시간 급상승에 오를지도···'

속으로 웃고 있던 내 얼굴은···

-안녕, 유신···

괴물을 앞에 둔 채.

차가운 바다를 유영하며 손을 흔드는 한 여자로 인해 깨졌다.

"···"

설마하니 그냥 호감도 작이나 좀 하려고 살려둔 NPC가 내 캐릭터를 위해 희생할 줄이야.

"이건 처음 보는 상황인데··· DLC 때문인가?"

단지 도트 덩어리 뿐이었지만 저 NPC가 짓는 표정.

말투, 제스처.

묘하게 현실감이 넘쳤다.

절로 감정이 이입된다고나 할까?

나의 그런 의문과 뭉클거림은.

삐이이익.

"배달이요."

고대하고 있던 천사의 등장과 함께 사라졌다.

"호우!"

어느새 방으로 되돌아온 나의 손에는 넙적한 박스가 하나 들려있었다.

그리고 그걸 열자 보이는 건.

탐스러운 새우와 게살이 듬뿍 올라간 치즈 덩어리의 향연이다.

그래, 게살피자다.

피자혓의 프리미엄 메뉴.

가격은 더럽게 비싸고 특유의 매니악한 맛 때문에 그렇게 인기는 없었지만···

"맛있는 피자. 게사알 피자~"

나한테 있어서는 이 불금을 함께 보낼 최고의 메뉴다.

"크으."

부모님을 여행을 가셨고, 이 고요한 집안에는 나 혼자다.

그리고 그런 내 눈앞에는 김이 서린 피자와 탄산음료.

멸세생이 켜져 있다.

이렇게···

"행복한 날이 다 있을까?"

미소를 지은 내가 막 피자 한 조각을 들어 올린 그 순간이었다.

삐이이익!

초인종이 다시 한 번 울렸다.

배달원이 뭘 두고 갔나?

나는 현관으로 나갔다.

그리고 당황했다.

삑삑삑삑.

누군가가 도어락을 누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철컥.

이에 그치지 않고 문마저 스르르 열렸다.

그리고 그 너머에서 등장한 건.

"여기서 뭐 해?"

웬 금발머리의 꼬맹이였다.

딱 봐도 외국인처럼 보이고 나이는 열셋···

불량한 느낌이 드는 것이··· 공부와는 담을 쌓게 생겼군.

"누구세요?"

"뭐? 누구? 당신답지 않게 그게 뭔 소리야? 얼빠진 것처럼."

"지금 무슨 소리 하시는 겁니까?"

"나 강해지게 해주겠다면서."

"···?"

"이 세상에서 홀로설 수 있게 해준다면서."

지끈.

순간 머리가 깨질듯이 아팠다.

"크으."

현기증이 나서 비틀거리던 나의 눈앞에 나타난 것은 또 다른 사람이었다.

"유신."

갈색 피부의 시원시원한 이목구비를 가진 라틴계 미녀.

그녀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살아있는 거지? 그렇지?"

"넌 또 뭐···"

"눈을 떠."

"···!"

"눈을 뜨라고!"

순간 기시감이 느껴졌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나를 둘러싸고 있는 이 따뜻한 집이 굉장히 이질적이게 느껴졌다.

아아.

나는 안다.

이곳에 계속 있으면 안 된다는 것을.

하지만···

"개소리···"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이 공간에 계속 있고 싶었다.

내 고향에 안주하고 싶었다.

여기를 벗어나는 순간.

굉장히 더럽고 엿 같으며 끔찍한 상황을 겪어야 될 것이란 걸 알기에.

그러나.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눈앞에 있는 갈색피부의 미녀는.

"넌 말이야. 처음부터..."

아니, 델리아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야."

기가 차다는 듯 웃었다.

***

아, 시발! 피자!

사람은 일반적으로 꿈에서 있었던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건 아무리 전율적인 힘과 재능을 가진 존재 역시 마찬가지였다.

유신이 눈을 떴다.

무겁고 흐릿한 시야 너머로 보이는 것은.

"일어났다악!"

요란스럽게 소리치는 에피와.

"의사를 불러오겠다!"

다급히 어딘가로 달려나가는 게일.

"유신!"

자신을 간호하며 눈물짓고 있는 델리아였다.

'푸후.'

뭐지. 이 익숙하면서도 아쉬운 기분은.

내가 얼마나 잔 거야?

목이 타는 듯한 갈증에 유신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

그때 느껴지는 격통.

근육통을 수 배로 농축한 듯 마치 관절부 전체를 찢는듯한 고통이다.

"콜록! 콜록!"

격하게 나오는 기침은 또 어떤가?

평소의 그것보다도 더욱 강하게 폐부를 쥐어짜는 듯하다.

뒤지겠군.

"진정해! 당신 지금 사흘 만에 깨어난 거야!"

"맞아 유신! 의사 선생님께서 절대 안정을 취해야 된다고 했어!"

에피가 소리쳤다.

델리아가 기겁을 하며 다시 유신을 눕혔다.

"무, 물···"

그리고 유신의 머리를 받치고는 손수 물을 먹여주었다.

"후우, 후우. 델리아···"

"응."

"넌 분명··· 죽었는데."

당사자를 앞에 두고 할 소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어째선지 유신은 그녀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달칵.

그 때 문이 열리며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죽었겠지요. 내가 아니었다면."

자수가 수놓아진 케이프를 두르고 지팡이를 짚고 있는 소년.

클레이모어 메이지였다.

그의 옆에는 흰색 가운을 입은 늙수그레한 노인이 있었다.

그는 의사였다.

그것도 이 낙원에서 가장 실력 좋고 몸값 비싼 의사.

유신은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따스한 햇살이 들어오는 창은 넓었으며 깨끗했다.

푹신한 침대와 이를 감싼 실크 이불은 또 어떻고?

여긴···

'저택인가?'

"우선 몸부터 회복시키면서 천천히 이야기를 나눠보도록 하죠."

메이지가 손가락을 튕겼다.

꾸벅 고개를 숙인 의사가 유신의 몸을 손본다.

그 손길은 정성이 넘쳤으며 말투 역시 정중하기 그지없었다.

"중금속 중독, 방사능 중독입니다. 증세가 그렇게 심하지는 않으나··· 타고나신 신체가 너무도 허약합니다."

"게다가 어떻게 된건지 신체의 모든 장기 역시 극도로 약해져 있는 상태입니다. 최선을 다해서 수술했지만 저로서는 더이상 환자분의 증상이 악화되는 것만을 막아냈을 뿐입니다."

"매 식사 후 이걸 꼭 달여 드시지요. 달맞이 초입니다."

길고 지루한, 하지만 유신으로서는 놓칠 수 없는 설명을 나열한다.

유신이 전에 복용했던, 수 천 크레딧을 호가하는 약초도 내어준다.

의사의 말을 요약하자면 이랬다.

당분간 절대 안정을 취해라.

죽기 싫으면 더 좋은 설비와 의료진이 있는 곳으로 가서 하루빨리 치료받아라.

아니면 어디 전설의 영약이라도 구하던지.

"그럼."

의사가 나갔다.

후루룩.

그러자 이번에는 차분하게 앉아 잔을 기울이던 메이지가 말했다.

"자, 그럼 이제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요?"

델리아가 미끼가 되어 크로켄을 유인하던 그 때.

바닷물이 갈라지며 나타난 것은 거대한 빙산이었다.

그리고 그 얼음덩어리는 괴물에게 치명상을 입히고 잡아먹히기 직전이던 델리아를 구했다. 광명교의 은신처에 방치되어 있던 유신 역시.

이 모든 것을 행한 자는 바로.

"이해가 되셨습니까?"

클레이모어 메이지였다.

"···신세를 졌군."

유신은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메이지가 어떻게 그 타이밍을 노릴 수 있었는지 생각했다.

아마···

'에스트 병에 담아줬던 능력을 추적했겠지. 그리고 그 능력이 사라지자 의문을 느끼고 추적한 걸 테고.'

자신은 저번부터 메이지로부터 요주의 인물로 찍혔다.

그렇기에.

후우.

유신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지금의 상황 역시 유신이 안배해 놓았던 마지막 보험이었기 때문이다.

메이지가 말했다.

"유신."

"왜 그러지?"

"저는 당신과 당신의 연인. 델리아양의 목숨을 구해줬습니다. 그러니까 당신 역시 내가 원하는 바를 줄 수 있겠지요?"

맞는 말이었다.

한가지 어폐만 빼고.

유신이 고개를 끄덕이자 메이지가 손뼉을 쳤다.

또 한 번 문이 열리며 군복을 입은 사내가 들어왔다.

가드 제임스의 손에는 웬 목함이 들려있었다.

달칵.

그 안에 있는 것은 사람의 수급이었다.

아니, 인형이라고 봐야겠지.

내가 전에 깨부쉈던···

"이 형태. 그리고 이 방식. 내가 알기로 이건 극악무도한 A급 범죄자··· 인형사의 분신 중 하나입니다. 당신을 발견한 곳 근처에 떠다니고 있었지요."

"대체 그 아래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메이지의 두 눈이 의문으로 타올랐다.

***

"델리아 양은 웬 광신도 무리랑 어인들이 자신을 비롯한 사람들을 납치했고, 당신이 갑자기 나타나서 구해줬다. 이 말만을 반복하더군요."

"정말 그것뿐인걸요···"

델리아는 유신만 볼 수 있게 한쪽 눈을 깜빡거렸다.

아마 자신의 입에서 튀어나올 말이 유신에게 불이익이 될 수 있다고 판단.

묵비권을 행사한 것이리라.

새삼 느끼지만 정말···

'사려깊다.'

델리아에게 다시 한 번 고마움을 느낀 유신이 말했다.

"델리아의 말이 맞다. 그녀가 웬 괴한한테 당해서 바다로 떨어졌고, 어인이 납치했지. 난 그걸 따라갔다가···"

유신은 해저기지 마린폴에서 일어났던 일을 설명했다.

단 자신이 처음부터 철저하게 계획을 짜고 녀석들을 습격한 것이 아니라 델리아를 구하기 위해 우연찮게 말려든 것으로.

"광명교··· 인형사가 발견되었을 때부터 연관점은 있을거라 생각은 했는데··· 설마하니 바닷속에 본거지를 틀고 있을 줄이야."

메이지가 유신을 발견했을 때. 해저기지는 이미 침수되고 있는 상태였다.

그렇기에 그는 그곳 내부를 수색할 수는 없었다.

즉.

'믿을 건 이 자의 말 뿐이란 거지.'

"믿기지가 않는군요. 당신 혼자서 어떻게 그 광신도들과 인형사마저 당해낼 수 있었단 말입니까?"

혀를 내두르는 것도 잠시 메이지가 미심쩍은 시선을 보냈다.

이에 대한 유신의 답은.

"운이 좋았다."

"···"

"네가 담아준 능력과 해저 기지라는 이점을 이용했지··· 정말이지. 천운이··· 콜록, 콜록."

잡아때는 것뿐이었다.

사실 할 수 있는 게 그것 뿐이기도 하고.

잘 못 하다가는 자신이 여러 개의 능력을 다룬다는 사실을 들킬 테니까.

'뭐, 증거도 없는데 어쩔거야?'

"콜록, 콜록."

다행이도 유신은 죽다 살아난 환자의 입장이었다.

메이지로서도 이 이상 유신을 몰아붙일 수는 없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후우. 알겠습니다. 몸조리 잘하세요."

"잠깐."

"네? 뭐 더 하실 말씀이라도?"

메이지의 눈이 기대로 반짝였다.

사실 유신의 말이 진실이든 아니든 인형사의 시체가 여기서 발견된 건 사실이었다.

그리고 이건 충분히 정치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사안이었다.

여기서 조금만 더 괜찮은 걸 건진다면···

"그 심해에서 싸울 때··· 광신도들이 하는 말을 들었다. 여기 있는 폭탄을 다 터트린다면 (구)한국의 70%는 날아갈 거였다고···"

하지만.

"···확실히 단언할 수는 없지만 재앙 수준은 되었겠지요. 핵폭탄의 위력은 굉장하니까요."

"그리고 난 그걸 막았지."

유신이 내뱉은 말은 메이지가 기대하던 것이 아니었다.

"이 도시와 너의 목숨을 구한 것은 물론. 그 악명 높은 수배범 역시 처리한 거다. 내가. 콜록, 콜록!"

"···"

메이지는 유신이 무슨 말을 할지 알 것 같았다.

"그러니까···"

그리고 자신이 이를 거부할 수 없으리란 것도.

"이에 걸맞는 보수를 요구한다."

"···하하."

아무리 세상을 구하기 위해 영웅적인 행보를 이어나가고 있다고는 해도.

무보수 노동은 사절이다.

유신 역시 영웅이기 이전에 한 명의 사람이니까.

힘들면 울고, 좋은 일이 있으면 웃는.

'저 아래에서 얻은 건 얻은 거고. 이건 이거지.'

즉 뜯어낼 수 있을 때.

뜯어낼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 얻어내야 한다.

그러니까 어서.

내놔.

유신은 덜덜 떨면서도 손을 내밀었다.

< 강탈과 여정 >

-너무 하다는 생각 안 드십니까? 그래도 저도 당신 목숨을 구해줬는데요?

-내가 아니었다면 핵폭탄이 터졌겠지. 그리고 너도 그 자리에서 죽었을 테고. 그래, 이건 비긴걸로 치지. 하지만 인형사의 목에 걸린 현상금은? 낙원에 위치한 컴퍼니의 시설을 지킨 공로는?

-물론 당신은 그 행보에 대한 보수를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단··· 당신의 말이 진실이라는 가정하에 말이죠.

-이를 뒷받침해주는 증거가 저기 있지 않나? 그리고··· 네가 앞으로 상황을 유리하게 풀어가려면 이 이야기는 진실이 되는 편이 더 좋을 텐데?

-···정말이지. 당해낼 수가 없네요. 저도 어디 가서 말 못 한다는 소리는 안 듣는데.

한치의 양보도 없이 이어지는 설전.

결국 메이지가 두 손을 들었다.

"조금 있으면 펑크시티로부터 조사단이 파견될 겁니다. 최대한 잘 말해주도록 하죠. 훌륭한 보수를 받을 수 있을 겁니다."

유물.

클레이모어 임명?

혹은 막대한 크레딧 등.

메이지가 유신 앞으로 날아올 수 있는 혜택들을 나열했다.

그만큼 유신이 이번에 해낸 일은 대단하며 큰 파장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하지만···

"거절하지."

"···?"

"지금 메이지 당신이 줄 수 있는 권한 내에서 최대한 받고 싶은데."

"어째서죠?"

메이지는 웃으면서 의문을 표시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뱀처럼 눈을 뜬 채 유신을 주시했다.

지금 유신의 모습은 마치 컴퍼니와 엮이지 않으려는 것처럼 보였다.

뭔가 꿍꿍이가 있군.

혹은··· 숨겨야 될 사실이라거나.

"한시바삐 가야 할 곳이 있거든."

"컴퍼니의 이동수단을 이용하는 것이 더 빠를 텐데요?"

"꽤나 오지에 있는 곳이라. 그리고···"

"무슨 상관인가?"

유신은 피식 웃었다.

"내 말대로만 하면 그 공적은 온전히 네 것이 될 텐데."

"···"

너무 깊숙히 파헤치지 마라.

그냥 서로가 원하는 걸 가지고 가자고.

너도 좋고, 나도 좋게.

유신은 굳이 상대의 의심을 풀기 위해 스스로를 변호하는 대신.

거래를 제안했다.

그리고 이는···

"···하하. 이것 참."

메이지로서는 거부하기 힘든 제안이었다.

"내가 권력욕이 있다는 건 또 어떻게 아시고."

가드 제임스는 어느새 문을 꽉 틀어막은 채 이 이야기가 새어나가지 않게 감시하고 있었다. 에피와 게일 델리아 역시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

모략과 침묵으로부터 비롯된 섬뜩함이 이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후르륵.

그 중심에 있던 메이지는 다 식어버린 차를 마시다가.

"좋습니다."

환하게 웃었다.

"뭘 원하십니까?"

***

[신비술사의 법칙을 뒤흔드는 벼락] x 1

섬세하게 세공된 유리병이 샛노랗게 반짝인다.

인형사와의 전투에서 결정적인 한수가 되어주었던 그 파괴의 원소가 또다시 자신의 손에 들어왔다.

유신은 만족스럽게 이를 만지작거리다가 고개를 돌렸다.

에피와 게일, 그리고 델리아.

비즈니스적인 관계가 아닌 그와 얽히고설키며 소중한 끈을 만든 인연들만이 이 자리에 남아있었다.

후우.

유신은 호흡이 한층 더 편해졌다.

"유신의 이런 모습은 처음 봐."

식은땀을 닦아주며 그를 간호하던 델리아가 꺄르르 웃었다.

"뭐가 말인가?"

"네가 그렇게 말을 길게 할 수 있다는 것도. 한 번도 안지며 따박따박 뭔가를 요구하는 것도 말이야."

호선을 그리던 입매가 차츰, 차츰 굳어진다.

"난··· 몰랐구나."

델리아의 얼굴이 깊게 가라앉았다.

유신이 떠난다는 말을 듣자 슬픔에 빠진 듯했다.

에피는 이 아가씨가 앓고 있는 열병을 알아챘다.

그리고 병자를 앞에 둔 채 이런 모습을 보이는 건 두 사람 모두에게 안 좋은 결과를 낼 것 역시도 알아챘다. 그래서···

"이제 알았어 언니? 유신은 원래 쫌생이에 구두쇠야."

퍽!

과장된 행동으로 유신을 후려치면서 깔깔거렸다.

"큭! 이 막돼먹은 꼬맹이가!"

"에피! 그럼 못 써!"

"킥킥. 미안~"

이 어른스런 꼬맹이는 혀를 삐죽 내밀며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암튼 존나게 고생했네. 나한테는 잠깐 마실 좀 갖다온다더니 그게 무슨 꼴이야?"

그러게나 말이다.

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게···

"황무지니까."

유신은 앞으로도 이와 비슷한 상황이 즐비하게 일어날 것이라는 것을 안다.

아니, 점점 더 복잡하게 얽히고 설키며 더 거대한 장애물들이 자신의 앞을 가로막을 것을 안다.

그렇기에.

자신 역시도 더 강해져야 한다.

이를 대비하기 위해 더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안주할 시간 따위는 없다.

'몸을 움직일 정도만 되면 곧바로 떠난다.'

유신은 델리아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게일에게 말했다.

"잠깐 시간 좀 괜찮겠나?"

"응? 아, 그래."

***

타닥타닥.

벽난로에 있던 장작들이 훈훈한 온기를 선사한다.

이는 커튼 사이로 떨어지는 달빛과 어우러져 목가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웃기게도 이곳은 바테라의 저택이었다.

주인 잃은 저택이 메이지의 소유로 들어왔고, 지금은 유신의 요양소가 된 것이다.

"···"

가부좌를 틀고 있던 유신은 내면에 있는 에스트를 느끼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능력자들은 내재된 권능을 자주 사용할 수록, 이에 대해서 연구하고 고찰할수록. 능력이 강해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쟁이나 전투를 연달아 겪은 능력자들의 능력의 상승폭이 큰 것 역시 이러한 연유 때문에서였다. 살기 위해서라면 어떻게든 에스트를 쥐어짜내고, 머리를 굴려야 할 테니.

하지만.

'에스트가 늘었다.'

그 누구도 이렇게 단기간 내에 성취를 보이지는 않는다.

'조만간 새로운 그릇을 하나 더 만들 수 있을 같군.'

클레이모어들이 봤다면 웃기는 소리! 라고 지껄일 정도로 유신의 재능은 개화되고 있었다.

유신은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멸세생을 시작할 때 체크된 강탈자의 재능 특성은 최상위였다.

거기다가 이제는 이 세상에 적응하고 살아남기 위해 구르던 시기를 지나.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본격적으로 가지를 뻗어 나가는 상태였다.

사소하게는 식사부터 시작해서 명상을 할 안전한 공간 등.

당장 주변 환경 자체가 천지차이로 달라졌지 않은가.

즉 유신의 성장 속도는 앞으로 빨라지면 빨라졌지 느려지진 않을거란 소리였다.

'세계수의 열매를 얻는다면 이 답도 없는 육체 역시 어느정도 고칠 수 있겠지.'

똑똑.

울리는 노크소리에 유신의 상념이 끊겼다.

"들어갈게."

열린 문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구릿빛 피부의 미녀였다.

"델리아."

델리아는 조심스럽게 다가와 유신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한참을 망설이다가 물었다.

"내일··· 떠나는 거지?"

"···"

이전과는 달리 어째선지 눈을 마주하는 게 힘들었다.

유신은 한 박자 느리게 답했다.

"그래."

"언제 돌아와?"

"모르겠다."

여정 도중 힘이 다해 바스라질 수도.

어쩌면 최종목적을 이루고 고향으로 되돌아갈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수 많은 선택지 중에서 유신이 낙원으로 돌아온다는 길은 굉장히 희박할 것이다.

요원할 정도로.

유신의 짧은 한마디.

그의 분위기.

이 모든 것은 그 사실들을 델리아에게 알려주었다.

그렇기에.

주르륵.

그녀는 더 서글퍼졌다.

붙잡으면 안 되는 거지? 그건 내 이기적인 선택이겠지?

델리아는 속으로 내뱉지 못한 말을 뱉으며 눈물만 흘렸다.

자신한테 힘이 있었더라면 결과는 달랐을까? 라고 자책하며.

"델리아."

"···"

"너한테는 정말 고마워하고 있다."

차가운 심연 속의 해저기지.

델리아가 아니었다면 자신은 죽었다.

정신없는 상황이었지만 유신은 자신을 부축하고 악전고투를 벌이던 델리아의 모습을.

그 숨결을. 그 심장 박동을 오롯이 기억하고 있었다.

어쩌면 내면에서 꿈틀거리는 이 감정도.

그렇기에.

"그에 걸맞는 보상을 준비해뒀다."

유신은 이걸 핑계로 그녀를 때어내고자 한다.

그래야 마음에 걸리는 게 없을 테니까.

그래야 우리 두 사람에게 다 좋을 테니까.

"내일 날이 밝으면···"

"싫어."

하지만 여인은 이를 거부한다.

"넌 맨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거래로 치부하더라?"

"이게 가장 합리적이다. 너나 나 에게도."

"뭐가 합리··· 후우. 그래, 그래야 네가 마음이 편하겠다면 이에 따를게. 그 대신."

"선물 정도는··· 내가 고를 수 있게 해주지 않을래? 네가 그 클레이모어한테 그랬던 것처럼 말이야."

이미 눈이 멀어버린 여인은 다른 걸 원한다.

"뭐지?"

델리아의 물기 젖은 눈동자가 유신을 주시했다.

곧 그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유신은 대번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럴 수 없다. 난 책임지지 못할···"

유신의 입이 틀어막혔다.

부드럽고 촉촉한 무언가가 침범해왔기 때문이다.

"누가 책임져 달래?"

그리고 그 주인은 성나게. 하지만 구슬프게 입맞춤을 하면서.

"난 여급이야. 흐읍."

"하루에도 수많은 이방인들을 상대하고, 그들의 신비로움에 늘 마음을 뺏기는 헤픈 여자라고."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며.

"그러니까..."

입고 있던 옷가지를 벗었다.

"기다리는 건 익숙해."

***

쏴아아아아.

폭우와 어둠으로 인해 깊게 가라앉은 고성 내부.

한 존재가 왕좌에 앉아있다.

그는 눈을 감은 채 마치 죽은 듯이 기대어 있었는데.

까딱.

갑작스럽게 손가락을 움찔거리면서 눈을 떴다.

"이런. 꽤나 공들였던건데···"

범인은 모르겠지만. 존재의 눈동자는 평범한 안구가 아니었다.

마치 곤충의 겹눈처럼 나누어져 제각각 다른 방향을 지켜보고 있었다.

"흐음. 아무리 봐도 이상하단 말이지."

"그 능력. 뭔가 익숙해."

존재의 눈앞에는 수많은 홀로그램들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속에 있는 사람들은 오늘도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추적해서 수집해볼까?"

존재가 내뱉은 순간.

콰아아앙!

벼락이 치며 고성의 창문 틈 사이로 빛이 새어 들어왔다.

그러자 존재의 주변 광경이 드러났다. 그건···

기기긱.

인간의 형태를 닮은 수백 개의 구체관절 인형들이었다.

***

다듬어진 특별지구의 길 위로 여러 대의 자동차들이 정차한다.

[BMW]

그 선두에 있는 것은 유려한 곡선을 가진 그란쿠페였다.

달칵.

문을 열고 내리는 정장 차림의 사람들.

하나같이 상당한 에스트를 뿜어내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들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가장 찬란한 빛을 뿜고 있는 여자.

대기하고 있던 메이지가 긴장된 자세로 허리를 숙였다.

"어, 어서 오십시오! 아이언 나이트님!"

그 모습은 오늘도 한 점 흐트러짐 없다.

(구)한국의 유일한 7위계 능력자는 그 품격에 걸맞게 입가를 가리며 웃었다.

"후후후. 뭘 그렇게 격식을 차려? 네가 신입도 아니고."

"그, 그럴 수는 없습니다! 감히 어떻게···"

"그래 뭐, 마음대로 해. 그보다···"

에바그린의 눈이 가늘어졌다.

"놈은?"

"보관해 뒀습니다."

까딱.

"우선 현장부터 훑어봐."

조사단에게 명령을 내린 에바그린은 홀로 메이지를 따라 빌딩의 최상층으로 향한다.

푹신한 의자에 앉은 에바그린의 앞에는 고급스러운 목함에 담긴. 인형사의 머리가 있었다.

"확실해. 광명교와 붙어먹고 있던 모델이야."

에바그린의 손에는 웬 서류 한 장이 들려있었다.

[클레이모어 나이트메어]

그리고 그곳에는 삐뚤어지게 웃은 여인의 사진이 붙여져 있었다.

공교롭게도 그건 눈앞에 있는 인형의 이목구비와 똑같았다.

"후우."

에바그린은 풍선껌을 불어 재끼다가.

맞은편에 있던 메이지에게 말했다.

"그래, 이걸 네가 잡았다고? 그 사이비 새끼들도 같이?"

"네, 넵!"

"흐음."

어벙해 보이지만(아이언 나이트의 앞에서는) 이 꼬맹이의 실력은 진짜였다.

4위계의 최상급에 도달한 만큼 인형사의 분신 하나 정도는 무리 없이 상대할 수 있을 터. 하지만···

'뭔가 이상한데?'

"한 번 자세히 말해볼래?"

메이지의 입에서 짜맞춘 설명이 튀어나왔다.

"호오."

에바그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추임새를 넣다가.

고오오오오!

"큭!"

느닷없이 살을 에일 정도의 살기를 뿜어냈다.

"우리 메이지. 많이 컸네? 내 앞에서 거짓말도 할 줄 알고."

에바그린은 메이지의 진술에 담긴 의문점을 금방 잡아냈다.

분명 매끈하게 잘 연결되기는 하는데···

'뭔가 이상해.'

오히려 그렇기에 더 이상했던 것이다.

고위계 능력자의 육감은 때때로 거짓말 탐지기보다도 정확하다.

"그, 그게···"

결국 메이지의 모략은 순식간에 간파당하고 말았다.

메이지는 할 수 없이 유신의 일화를 밝혔다.

에바그린은 이 버릇없는 꼬맹이를 어떻게 손봐줄까 고민하다가.

"그래?! 그 들개가 결국 여기까지 해냈단 말이지?"

유신에 관한 말을 듣고 깔깔거렸다.

자신의 안목이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의 증명은 언제나 기분 좋다.

이 자존심 강한 여자한테는 더더욱.

"죄, 죄송합니다! 아이언 나이트님!"

메이지는 사색이 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전 그냥··· 어떻게든 당신께 힘이 되어 드리기 위해서···"

에바그린 정도의 능력자가 왜 이런 오지에서 직접 현장을 뛰겠는가?

그건 다 본사의 권력투쟁에 밀려서 그런 것이다.

뭐, 반쯤은 흥미와 또 그 반쯤은 클레이모어로서의 의무감 때문이지만.

"마음은 고마워. 고마운데··· 앞으로 다시는 그러지마. 알겠지?"

쉭.

바람이 살랑거렸다.

메이지의 앞머리가 예리하게 잘려나갔다.

과도한 팬심에 눈이 먼 소년은 꿀꺽 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

에바그린은 손가락을 접으며 물었다.

"그래서 그 까만 머리는?"

"떠났습니다."

"흐음?"

"컴퍼니의 보수도 필요 없다더군요. 저한테서만 그냥 약간의 성의표시만 받고 떠났습니다."

긴장하던 메이지의 얼굴이 처음으로 본래 페이스를 회복했다.

그가 냉정한 얼굴로 말했다.

"뭔가 숨기는 게 있는 게 틀림없습니다. 비록 악인은 아닐지라도요."

"···"

에바그린은 잠시 눈을 감은 채 정신을 집중했다.

유신에게 심어두었던 에스트의 흐름을 추적하는 것이다.

'이곳은···'

"지도."

메이지가 지도를 펼쳐서 대령했다.

에바그린은 (구)한국의 지역들을 슥 훑더니···

[엘프헬름]

이라고 적힌 곳을 손가락으로 찍었다.

"방향으로 봐서 이곳으로 가는 것 같은데."

메이지가 눈을 부릅떴다.

"이, 이곳은···"

"그래, 제정신이 박힌 인간이라면 절대 가지 않을 금지 중 하나지."

에바그린은 팔짱을 턱 끼며 생각했다.

자신의 앞에서도 떨지 않던 그 건방진 루키를···

"이번엔 또 무슨 꿍꿍이니? 응?"

"깐프들의 흉폭함과 위험성을 모를 리는 없을 테고."

아, 설마 그건가?

***

히히히힝

타고 있던 짐말이 투레질을 한다. 낙원을 떠나기 전에 구한 녀석인데.

덕택에 유신과 에피는 좀 더 수월하게 이 황무지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물론 풍겨오는 짐승 냄새를 맡고 접근하는 괴물들도 있었지만···

지이이잉!

[파라오의 눈]

그 때 마다 유신의 주위에서 휙휙 돌아가는 저 신비로운 구슬들에 의해 한 줌 크레딧이 될 뿐이다.

"엉덩이 아파."

승마의 승자도 모르기에 거의 매달리다시피 하는 에피가 칭얼거렸다.

소녀는 저 전율적인 위력을 가진 유물을 봐도 덤덤한 얼굴이었다.

-와씨! 그건 또 뭐야?! 개쩔어어어···

이렇게 놀라는 것도 한 두 번이지.

괴물들이 즐비하게 덤빌 때마다 저 요상한 구슬에 의해 분쇄되니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다.

사람은 적응하는 동물이었고, 소녀의 적응력은 꽤나 남달랐으니.

"배고픈데 육포 먹어도 돼?"

끄덕.

"물도 마신다?"

끄덕.

유신은 입을 다물고 있었다.

낙원을 떠나온 뒤부터 생각이 많아 보였다.

언니 생각해?

그날 밤 좋았어? 아주 그냥 소리가···

에피는 평소처럼 장난스럽게 말하려다가.

"그래서 우리 지금 어디로 가는 거야?"

후우 한숨을 쉬며 화재를 바꿨다.

이 막돼먹은 꼬맹이는 꽤나 어른스럽다.

다행이도 잡설이 아닌 목적지에 한해서만큼은 유신은 친절했다.

"엘프헬름으로 간다."

에바그린의 짐작대로 유신은 지금 엘프헬름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곳에 존재하는.

"세계수의 열매를 얻기 위해."

"세계수? 그게 그렇게 좋은 거야? 엘프··· 헬. 이라는 곳에 가야할 만큼?"

"헬이 아니라. 헬름··· 뭐, 네 말도 틀린 건 아닌가?"

아무튼 그 질문에 대한 답을 하자면 좋다마다.

"백 년에 한 번밖에 안 열리는 그 열매는 최고의 영약 중 하나거든."

"헤에. 그럼 그걸 먹으면 유신 네 몸도 고칠 수 있는 건가?"

"적어도 이렇게··· 후우. 조금 걸었다고 빌빌 거리지는 않겠지."

후유증은 극심했다.

유신은 자신의 육체가 이전보다 더욱 약화된 것을 체감하고 있었다.

식은땀을 닦으며 유신은 생각했다.

더스트 봄이라는 가장 시급한 사안을 해결했다.

그렇다면 이제 슬슬 이 몸뚱이에 내재된 잠재력을 개화시키며 곳곳에 잠들어 있는 히든피스들을 수집할 때가 됐다.

그래야 나중에 펑크시티에서···

'여왕을 영접할 준비를 할 수 있을 테니.'

7대 재앙 중 하나가 깨어나는 것을 대비할 수 있을테니.

우선 순위는 당연히 이 육체의 체질개선이다.

세계수의 열매는 생명체가 가진 잠재력을 끌어올려 주거든.

물론.

"엘프 녀석들이 그냥 내어주지는 않겠지만."

그래, 그렇게 귀한 거라면 지키는 녀석들이 있겠지.

에피는 이 세상의 당연한 법칙을 생각하더니 물었다.

"엘프? 그 엘프란 놈들이 그렇게 강해?"

트롤이 있고 리자드맨이 있고 어인도 있는 세상이다.

엘프라고 존재하지 않을까.

"···"

단. 유신의 망설임은 이 꼬맹이에게 엘프에 대해 어떻게 설명해야되나 같은 고민이 아니었다.

그건.

"후우."

피곤함과 꺼림칙함이었다.

"강하기도 강하거니와 많이 까다롭지."

물 속의 어인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그 추상적인 설명을 에피는 당연히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뒤이은 유신의 말에 그녀는 대번에 그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자동소총과 로켓포로 무장한 채 나무를 타는 야만인들이니까."

"으, 응?"

유신은 얼굴을 쓸었다.

-게헬-라아아아아!

벌써부터 귓가로 그 포효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망가진 세상의 엘프는 고상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 죽음의 땅 그 너머 >

메마르고 척박한 땅의 경계선으로 두 개의 그림자가 멀어진다.

"─────!"

힘차게 손을 흔들던 델리아는 곧 유신 일행의 모습이 사라지자 몸을 돌렸다.

유신에게는 유신의 역할이 있듯이 자신에게는 자신의 역할이 있었으니까.

"너무 오래 비웠지."

어떻게든 힘겹게 하루를 버텨내는 것.

"아저씨가 화내는 거 아닌가 몰라."

델리아는 힘없이 걸어 방사능 들개 여관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곳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여관주인이 아니었다.

"왔나?"

그윽한 인상을 지닌.

조합의 금패 용병이자 전직 사냥꾼 교육생 게일이었다.

"게일씨? 여기엔 왜···"

"잠깐 같이 가지. 유신이 너한테 남긴 물건이 있다."

"아, 네."

그러고보니 분명 그런 말을 했었지?

정신이 없어서 잊고 있었다.

게일이 안내한 곳은 낙원의 특별지구에 위치한 저택이었다.

그것도 유신이 떠나기 전까지 같이 지내던 바테라의 대저택.

델리아가 물었다.

"여기에는 왜?"

"바로 이거다."

"네?"

"이 저택이 유신이 너한테 남긴 거다."

"···?!

델리아의 눈이 부릅 뜨였다.

"그리고 나한테 의뢰를 한 가지 맡기더군. 별 잡놈들이 꼬이지 못하게 널 좀 도와주라고."

목숨값을 갚겠다는 사냥꾼의 맹세.

게일은 프론티어 쉘터에서 했던 약조를 잊지 않고 있었다.

그렇기에 유신의 제안을 대번에 수락했다.

앞으로 그는 이 어리숙한 부잣집 아가씨한테 접근할 사기꾼과 살인자들의 몸에 화살 구멍을 뚫어주리라.

물론 델리아의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그··· 이 저택 딱 봐도 엄청 비싸보이는데. 유신한테 그런 돈이 어디 있다고··· 그리고 보상이라면 이미 받았···"

"거래의 결과물 입니다. 델리아양."

그 대답은 저택의 문이 열리며 나타난 메이지가 했다.

"여기 집문서랑 마스터키 입니다. 글은 아시나요?"

그는 손에 들린 서류들과 열쇠 꾸러미까지 델리아에게 건네주었는데.

"아, 아뇨."

"하루빨리 배우는 게 좋을 겁니다. 가진 재산과 권력을 지키려면 그 주인 역시 이에 걸맞는 품격이 필요한 법이거든요."

싱긋 웃으며 조언까지 해주었다.

"감사합니다···"

이쯤되니 정말 믿을 수 밖에 없다.

여전히 실감은 안 났지만 말이다.

이게··· 이 거대한 땅과 집이 내 꺼?

보통 사람들은 평생 일해도 발 한 번 디디지도 못할 이곳이?

"유신. 네가 준···"

당장에 얻게 된 물질적인 풍요보다 그의 마음 씀씀이가 더 와 닿는다.

더불어 어젯밤 그와 보낸 추억 역시도.

델리아가 훌쩍거렸다.

그 때.

"아무튼 축하드립니다 델리아양. 능력 있는 남성을 차지하는 건 헌신적이며 아름다운 여성의 특권이죠."

메이지는 앳된 얼굴로 늙은이 같은 소리를 내뱉다가 질문을 하나 던진다.

"참. 델리아양.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요."

"뭔가요?

"그 아래에서 유신이 싸울 때 말입니다."

"···?"

"혹시 무슨 능력을 사용하던가요?"

마치 밥은 먹었니? 정도의 태연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델리아는 등골이 오싹해지며 감격이 달아나는 것을 느꼈다.

"···잘 모르겠어요.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났더니 모든 상황이 끝나있어서."

"하하. 그런가요? 잘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실례하죠."

소년은 늘 그렇듯 멋들어지게 웃고는 떠나갔다.

델리아가 후우 한숨을 내쉬었다.

게일이 웃었다.

"축하한다 델리아. 넌 충분히 이걸 받을 자격이 있어. 이제 뭘 할 건가?"

게일의 얼굴에는 순수한 궁금증뿐. 탐욕은 없었다.

델리아가 답했다.

"힘이 되어주려고 해요."

"응?"

"원래라면 하염없이 기다릴 생각이었어요. 그 사람이 돌아올 때까지요. 나답게. 종업원답게요. 하지만···"

델리아는 떠나는 메이지의 뒷모습을 주시했다.

"아무래도 그 사람한테는 적이 너무 많은 것 같아요. 그렇다면 나 역시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요."

"···확실히 찬란한 재능과 능력은 언제나 파리들을 꼬이게 하지."

"내가 할 수 있는 자리에서 차근차근. 그가 기댈 수 있는 기둥을 만들어 나가겠어요."

다짐하는 델리아의 약지에 끼워진 꽃반지가 싱그럽게 반짝였다.

그 모습을 보던 게일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거 아무래도···

'의뢰의 난이도가 하늘을 치솟을 것 같군.'

한낱 여관 종업원과 낙오된 교육생.

유신의 개입은 이 두 사람의 운명을 극적으로 바꾼다.

***

엘프헬름은 (구)한국의 끝자락.

DMZ.

한반도 군사 분계선.

통칭 38선이라고 불리던 곳의 경계선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곳에 가기 위해서는 이 지역을 꼭 지나쳐야 했다.

툭 투둑.

쿰쿰하던 하늘에서 빗줄기가 한 두 방울 떨어졌다.

쏴아아아.

곧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 씹."

에피가 혀를 찼다.

그건 이 소나기가 차갑고 시야를 가리는 탓도 있었지만 근본적으로 이 빗줄기를 피할 장소가 주변에 마땅치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는 왜 켁켁. 아무것도 없대?"

그래도 바위산과 망가진 도로, 폐허 건물들이 몇 개씩 보이던 며칠 전과는 달리. 이 주변은 텅텅 비어있었다.

을씨년스러울 정도로 아무것도 없었다.

유신은 역시나 철두철미했다.

낙원에서 미리 준비해 놓았던 우산을 쓰며 에피에게도 건넸다.

방사능으로 거대해진 식물의 잎을 가공해 만든 나뭇잎 우산이었다.

"그럴 수 밖에."

유신은 가라앉은 눈으로 말했다.

"이 땅은 종말을 직격타로 맞은 곳이거든."

그들이 엘프헬름으로 가기 위해서 선택한 최적의 루트.

그 길목 사이에 있는 이 공허한 땅은 한때 서울이라고 불리던 곳이었다.

인구 수천만이 바글대며 살아가던 (구)한국의 중심지.

당연히 갑작스레 퍼져 나간 미지의 바이러스든.

모든 것을 놓아버린 지도자들의 전략 폭격이든 그 모든 악의는 이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철저히 유린당했지.

풀 한 포기, 건물 하나 남지 않을 정도로.

"그렇구나."

수 많은 사람들의 죽음도, 찬란했던 문명의 소멸도.

후손은 덤덤하게 넘길 뿐이다.

유신처럼 그 시절을 기억하는 게 아닌 이상. 이들에게는 먼 곳의 이야기일 뿐이니까.

그들이 나고자라며 본 것은 늘···

'이런 망가진 광경들 뿐이니까.'

이 바보들이 불쌍한가?

아니면 그들의 망각이 부러운가?

스스로에게 되묻던 이방인은 얼굴을 쓸었다.

"아무튼 좋지 않군. 빗줄기가 그칠 기미가 안 보여."

빗물은 체온을 낮춘다.

가시거리 역시 극도로 낮춘다.

이는 괴물보다 오감이 떨어지는 인간으로서는 치명적이다.

거기다가.

비가 오면 활동하는 위험한 괴물도 있다.

설상가상.

쿠르르릉!

오히려 천둥까지 치며 빗줄기는 점점 더 거세지기 시작했다.

기껏 준비한 우산이 소용없을 정도로 두 사람은 흠뻑 젖어들었다.

따가운지 에피가 눈을 찡그렸다.

"그 보호막 같은 거 쓰면 안 돼?"

"에스트 아깝다."

"그리고 혹시 모를 주시자들에게 굳이 이쪽의 전력을 노출하는 것은 멍청한 행위지."

"쳇. 이런 날씨 속에서 누가 돌아다닌다고···"

에피는 연신 주변을 둘러보며 이 폭우를 피할 장소를 찾았다.

하지만 마땅찮은 장소가 없었다.

폐허조차 못 남을 정도로 초토화된 땅에 사람이 살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뭐든 지지기반이 될 것이 조금은 있어야 생물도 적응한다.

"왜 서울을 죽음의 땅이라고 하는지 알 것 같네. 뭐, 여행길로서는 최고지만···"

말을 하던 에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유신 저기!"

저 멀리.

흐릿하지만 마을이 하나 보였기 때문이다.

"···"

유신은 눈을 가늘게 떴지만 신나서 말을 모는 에피를 말리지는 않았다.

"어서 가보자!"

히히힝.

투레질과 함께 말이 멈췄다.

과연 눈앞에는 마을이 있었다.

고오오오

물안개에 휩싸여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낮은 목조 건물들과 콘크리트로 이루어진 타운이.

"이 자식들은 쓰레기 벽도 안 세워놓나? 이-봐!"

소리치면서 마을 안으로 들어가려는 에피가 헉 소리를 냈다.

유신이 난데없이 뒷덜미를 잡았기 때문이다.

"이상하다고 생각되지 않나?"

그리고 흘러나오는 말.

"···"

"주변을 한 번 둘러봐라."

도로도 건물들도 모든 것이 파괴되어 있다.

지나오면서 봤던 서울의 풍경에 생명의 흔적이란 없었다.

그런데···

"유독 이 주변만 멀쩡하다."

[할즈버그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마을의 입구 근처에는 푯말까지 세워져 있었다.

과연 유신의 말을 인지하고 바라보자 수상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에피는 폭우로 인해 흐트러진 주의력을 끌어올리며 답했다.

"밴디트나 식인종 소굴이란 거야?"

"그거라면 다행이지."

유신이 고갯짓했다.

고오오오오.

짙은 안개가 끼어 한 치 앞도 들여다볼 수 없는 마을.

쉭. 무언가가 그 안에서 꿈틀거렸다.

실루엣이었다.

안개가 너무 짙었기에 그림자의 형태로 밖에 보이지 않는 실루엣.

그리고 그건···

기기기긱.

기괴하게 몸을 비틀며 제 존재감을 과시했다.

찰팍, 찰팍.

그림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그건 인간의 형태를 한 것도 있었으며, 짐승의 형태를 한 것도 있었다.

어떤 것은 집채만 한 것들도 있었다.

그리고 그 실루엣들은···

어-어어어어···

공허한 소리를 내며 이쪽으로 다가오려고 하고 있었다.

"···"

유신은 에피를 툭툭 치며 뒤로 물러나자고 신호했다.

저것들이 이쪽을 인지하고 다가올 때마다 마을을 둘러싼 안개 역시 게겁스럽게 손을 벌렸기 때문이다.

자칫 하다가는···

먹힌다.

괴이한테.

다각다각.

어느정도 거리가 벌어지자 실루엣들은 두 사람에게 관심을 끊었다.

이윽고.

[할즈버그에 오신 것을 환영···]

마치 안개가 개듯 스르르 사라져 버렸다.

쏴아아아아.

문드러진 백골들과 콘크리트 부스러기가 처량하게 빗물을 받아낸다.

그 거대한 마을이 사라지고 남은 것은 황량한 땅덩어리뿐이었다.

마치 환상처럼 증발해버린 것이다.

지독시리 기이하며 을씨년스럽다.

에피는 제 뒷덜미를 만지작거렸다.

오소소 닭살이 돋아있었다.

"무슨 귀신에 홀린 기분이야··· 저게 대체 뭐야?"

"인간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도, 이해해서도 안 되는 것."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괴이'라고 불리는, 미스테리한 현상이자 소리 없는 재앙이다.

물론 유신은 지금 같은 상황에서도 침착했다.

곧 굳어있는 소녀를 툭툭 치면서 고갯짓했다.

난대없이 마주친 악재 때문일까?

호재 역시 찾아왔다.

"저곳에서 비를 피하지."

유신은 은밀하게 숨겨져 있던 땅굴을 가리켰다.

***

콘크리트 더미로 된 땅굴의 정체는 방공호였다.

아마 서울이 한창 전쟁이다 종말이다 찌라시로 떠들썩할 때 종말주의자들이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안전가옥.

투둑, 투둑.

배수로도 막혀있고 문짝 역시 날아간지 오래였다. 괴물이 둥지를 틀기도 했었는지 미약한 악취도 서려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주인 잃은 이 콘크리트 무덤은 변덕스러운 날씨를 피해갈 정도로는 충분했다.

히히히힝.

말들을 묶어두고, 배당에 있던 장작과 부싯돌로 금세 모닥불까지 만들어보인 에피가 물을 끓였다.

"으하. 이제야 좀 살겠네."

곧 김이 피어오르는 잔 하나를 유신에게 건네고 자신 역시 후루룩 마시며 말했다.

"엘프헬름까지는 얼마나 남았어?"

"이 속도라면 하루 정도?"

"얼마 안 남았···"

말을 하던 에피가 움찔했다.

유신 역시도 마찬가지.

쏴아아아아.

쿠르르르.

쏟아지는 폭우와 천둥소리 사이로.

찰팍.

은밀한 발소리가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에피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이쪽에서 입구를 저격할 수 있는 최적의 위치를 잡으며 조용히 시위를 당겼다.

우우우웅.

유신 역시 품에 있던 파라오의 눈을 띄웠다.

괴물이나 괴이 같은 신비도 물론 위험했다. 하지만 가장 위험한 것은 역시 인간이었다.

그들은 제 욕망을 위해서라면 언제든 동족을 죽일 수 있는 악의를 가졌으며, 이를 실행할 수 있는 영악함 역시 겸비하고 있었다.

이 세상이든 저 세상이든 역시.

'엿같은 새끼들.'

늘 인간이 문제다.

일촉즉발의 그 순간.

"이보쇼! 안에 있는 거 다 아오! 실례가 안 된다면 당신들한테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소만!"

"···"

"값을 치를 테니 비만 좀 같이 피해도 되겠소이까?"

침입자들은 퍽 인간적인 제안을 건네왔다.

< 엘프헬름 >

"흐하하하하! 밖에 말이 묶여져 있길래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내 생각이 맞았구만."

뚝뚝.

빗물을 흘리며 호탕하게 웃어 재끼는 남자는 수염투성이의 거한이었다.

유신보다 머리 하나 정도는 더 큰 2미터는 넘을법한 거인.

그의 옆에는 무표정한 얼굴의 사내들 넷이 제각각 빗물을 털거나 모닥불을 쬐고 있었다.

유신이 이 침입자들의 합석을 허락한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무장을 해제한 채 먼저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

둘째.

구태여 사냥꾼들과 이 빗속에서 트러블을 일으키기는 싫었다는 것.

꾸우욱.

빗물을 짜고 있는 사내들은 하나같이 몸 전체를 가릴만한 기다란 롱코트를 입고 있었다.

비릿한 물 냄새로도 가려지지 않을 정도로 진한 화약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난 게릭이라 하오. 이쪽은 각각 지미, 태준, 카심이지."

게릭이 유난히 붙임성이 좋은건지. 아니면 저들이 사회성이 결여된 건지 나머지 사내들 셋은 고개만 까딱거릴 뿐이다.

"유신이다."

"에피."

유신은 짧게 단답하며 생각했다.

어째서 사냥꾼아 다섯이나 팀을 이뤄 이 황량한 땅까지 왔을까?

아, 설마 그것 때문인가?

그 침묵을 다르게 해석한건지 게릭이 선량하게 웃어 보였다.

"너무 그렇게 경계하지 않아도 되오만··· 사냥꾼은 같은 사냥꾼을 공격하지 않는 것 잘 알지 않소."

그의 시선은 유신의 옆에 놓여진 더블배럴 샷건을 향하고 있었다.

"구닥다리 불문율일 뿐이지. 어디까지나 규범, 혹은 관습."

언제든지 깨질 수 있는.

유신은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다. 원리원칙을 중시하는 사냥꾼들이라면 화를 낼 수도 있는···

하지만.

"하하하! 이해하오! 요즘 워낙 세상이 흉흉하지 않소?"

게릭은 호탕하게 웃어넘길 뿐이었다.

"잘 만든 물건이구려. 10게이지 탄을 쓰는건가? 양식으로 봐서 야경에서 나온 건 아닌 것 같은데. 커스텀 제품?"

오히려 붙임성 있게 계속 말을 걸어왔다.

'피곤한 타입이군.'

친근하게 접근하고 있지만.

"글쎄. 규격을 알고 쏘고 다니지는 않아서."

"하긴 총이야 뭐, 누르면 재깍재깍 나가고 구멍만 잘 뚫으면 그만이지."

저런 녀석들이 오히려 더 까다롭다는 것을 유신은 알고 있었다.

"꼬맹이까지 데리고 다니기에는 퍽 힘든 길인데. 고생이 많으시구려. 메트로폴리스로 가는 거라면 괜찮은 루트를 알려 드리지."

자신들의 정보는 숨긴 채 이쪽의 정보는 은근슬쩍 캐고 있었기 때문.

"마음만 받도록 하지."

그렇기에 유신은 단답으로 일관했다.

"하하하! 이것 참 내 동지들 만큼이나 과묵한 형씨로군. 참. 내 정신 좀 보게. 모닥불을 빌려준 값을 치뤄야지! 따뜻한 스튜라도···"

의심과 경계, 선의와 능청스러움.

그 모든 감정들이 혼란스럽게 섞여들어 간다.

콰아아앙!

그 사이로 더 거세지는 폭우가 제 존재감을 과시한다.

다행이도.

폭우 속 불편한 자들과의 합석은 아무런 문제 없이 끝났다.

***

뚝뚝.

나뭇잎에 서려 있던 물방울이 떨어졌다.

그 사이로 새어들어오는 햇빛과 찌르르 울리는 벌레 소리.

사사삭.

뛰노는 산짐승들까지.

철조망도, 군사기지도 없다.

한 때 격한 이념의 대립이 이루어지던 장소는 지금 그저 무성한 숲이 되었을 뿐이다.

종말의 얼마 안 되는 순기능이었다.

"이렇게 나무가 많은 건 처음 봐···"

엘프헬름으로 막 발을 들인 에피는 주변을 둘러보며 입을 헤 벌렸다.

황무지의 소녀가 본 것은 언제나 모래먼지 가득한 땅과 폐허.

미라처럼 말라비틀어진 나무들뿐이다.

즉 그녀에게 있어 이 숲은 하나의 큰 충격이었다.

마치 바다를 처음 본 것과 같은 감상이랄까?

"어째선지 좋은 냄새가 나는걸. 공기도 더 상쾌한 것 같고···"

에피가 코를 킁킁거리며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동자는 역으로 주변을 예리하게 훑었다.

유신에게 듣기로 이 아름다운 공간은 그들이 지금껏 지나온 그 어떤 황무지보다 위험하다고 했으니까.

유신의 말대로였다.

스으윽.

빽빽하게 솟은 나무들의 틈 사이.

두 사람이 숲에 들어올 때부터 그들을 주시하고 있던 시선이 하나 있었다.

그리고 그 시선은 두 사람이 나갈 기미를 보이지 않자 조용히 손에 들린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었다.

곧 늘 해왔던 대로.

일족의 율법대로.

저 불순물들을 배제하기 위해 방아쇠를 당겼다.

탕!

귀를 찢을듯이 울리는 총성.

곧 피를 뿜으며 쓰러질 침입자들의 모습.

맛보게 될 싱싱한 심장.

앞으로 펼쳐질 상황에 존재가 씨익 웃었다.

딱.

손가락을 튕긴 유신에 의해 투명한 장막이 펼쳐지지만 않았더라면.

[에스트 방벽]

불꽃과 함께 죽음의 납탄은 허무하게 튕겨 나갔다.

침입자의 고개가 홱 돌아가며 이쪽을 주시했다.

"···!"

존재의 머릿속에서 경종이 울렸다.

***

숙련된 사수란 주변환경, 목표의 이동경로, 바람과 거리에 따른 총탄의 각도 등 모든 요건을 고려하여 사격을 가한다.

유신을 노린 사수는 이 모든 조건을 고려할 정도로 뛰어났다.

단.

사수는 사수를 알아본다.

에피 역시 재능넘치는 총잡이.

소녀는 총탄이 착탄된 지점을 역추적.

곧바로 상대의 위치를 잡아낸다.

"저기!"

"쏴라. 죽이지는 말고."

유신이 차갑게 명령했다.

에피는 곧바로 당기고 있던 시위를 놨다.

퉁.

경쾌하게 튕기는 합성궁.

수목을 가르며 은밀하게 번뜩이는 검은 선.

"쳇."

존재는 그 짧은 순간에도 상대의 반격을 인지.

곧바로 몸을 날릴 정도로 재빨랐다.

하지만.

푸욱.

에피가 그 동선까지 고려해서 화살을 날릴줄은 차마 예상하지 못했다.

"끄···"

화끈함과 함께 시야가 흐릿해진다.

이건··· 독?

비틀거리던 존재는 곧 나무 아래로 추락했다.

***

180은 넘을법한 키에 탄탄한 근육질의 몸매.

덥수룩한 은발 머리칼에 활동성을 중시한 가벼운 복장까지.

누가 봐도 흉흉한 야만인의 복장을 하고 있는 이 놈은 엘프였다.

그것도 얼굴만은 미려한 여자엘프.

"와아. 얘는 뭐 이렇게 이쁘게 생겼대? 몸뚱이랑 안 맞게?"

쫑긋쫑긋

"귀 존나 길어서 징그러워. 하지만 신기해."

"으으···"

그녀가 눈을 떴다.

곧바로 상황을 인지하고 몸을 비튼다.

철컹.

하지만 원하는 바를 이룰수는 없다.

밧줄도 아니고 굵직한 쇠사슬로 온 몸이 꽁꽁 묶여있었기 때문이다.

이 괴물같은 깐프를··· 그것도 이 녀석을 묶으려면 이 정도는 해야되거든.

"네놈! 이 더러운 침입자! 이게 무슨 짓이냐-!"

역시나.

허벅지에 화살까지 박히고 손가락 굵기의 세 배는 될법한 쇠사슬로 묶어뒀는데도 사슬이 기기깅 소리를 낸다.

새삼 느끼지만 엘프들의 육체 능력은 역시 굉장하다.

아니, 이 녀석이 특별한 건가?

"죽여라! 더 이상 날 모욕하지 마라!"

은발머리 엘프가 거칠게 소리쳤다.

이 복장과 성정에서 알 수 있듯이 멸세생의 엘프들은 전사의 종족이다.

적에게 사로잡히거나 치욕을 당하는 것을 죽는 것보다도 싫어한다.

한 마디로 외향은 엘프고 속은 오크라고나 할까?

"인질로 쓸꺼면 입도 막는 게 좋지 않아? 이러다간 주변에 있는 녀석들 다 몰려올걸."

엘프로부터 총을 강탈해 어깨에 매고있던 에피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유신은 묶어둔 엘프를 질질 끌고는 오히려 숲의 중심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내가 노리는 게 그거다."

"응?"

"이 괴물들을 상대로 게릴라전은 사양이거든. 차라리···"

유신의 시선이 빽빽하게 자라난 숲을 힐끔거렸다.

"일망타진 하는게 더 낫다."

지금 유신의 신체능력은 바닥을 기기에 녀석들의 위치를 파악할 순 없다.

하지만 그동안 쌓아온 전투경험과 감각은 결코 허상이 아니었다.

유신은 저 초목 뒤에 숨어있는 귀쟁이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짐작이 됐다.

-헤카테가 잡혔다!

-멍청한 녀석. 총도 제대로 못 다룰 때부터 알아봤다. 종족의 수치!

-어떻게 할 건가?

-우선 대장한테 보고한다. 상대는 사악한 힘을 다루는 마귀니까.

그리고 이를 위해 최고의 무대를 마련해뒀다.

***

동물과 벌레 울음소리로 시끄럽던 숲이 고요한 침묵에 잠겨든다.

사사사삭.

그 사이로 수풀이 흔들리는 소리가 조심스레 섞여든다.

한 줄기 바람조차 불지 않는데도 말이다.

저벅.

숲의 한복판에 조성된 널따란 공터.

난대없이 유신의 걸음이 멈췄다.

탕!

이에 호응하듯 곧바로 발치로 박혀드는 납탄.

물론 유신은 이미 에스트 장벽을 빈틈없이 쳐둔 상태였다.

"멈춰라 인간."

높게 솟은 나무 위.

얼굴에 문신이 새겨진 여자가 으르렁거린다.

그녀의 손에 들린 총기는 공교롭게도 K2다.

이 엘프로부터 뺏은 것과 같은 것.

이건 녀석들의 제식무장 같은 거거든.

DMZ잖아.

"네놈들이 왜 우리들의 영역을 침범한 건지 물을 생각은 없다. 궁금하지도 않다."

사사삭.

이번에는 수풀들이 일제히 흔들렸다.

곧 나무 위에서 실루엣들이 나타나며 엘프들이 날렵하게 그 모습을 드러냈다.

"어차피 더러운 인간들의 욕망이야 뻔하니까."

그들의 손에 들린 무구들이 시커먼 총구를 반짝인다.

아까봤던 소총도 있고 샷건도 있다. 유탄발사기와 기관총, 하다못해 로켓런처까지 소지한 자들도 있다.

"미친···"

겨누어진 총구들의 향연에 에피가 입을 쩍 벌렸다.

엘프들, 이 망가진 세상의 귀쟁이들의 화력은 유신이 지금껏 마주쳤던 그 어떤 적들보다도 압도적이다.

아무리 유신의 방벽이 견고하다고 해도 이 모든 화력을 견디지는 못한다.

하지만.

"일말의 변명의 여지조차 안 주겠다는건가?"

지금 같은 상황에서도 유신은 침착했다.

"그랬다면 적법한 절차를 밟고 이 숲에 들어왔겠지."

우위에 서있는 파수꾼 대장 역시도 침착했다.

"그 절차란 게 존재하지도 않지 않나?"

"잘 알고 있군. 그렇다면 출입하면 어떻게 될지 예상하는 것 역시 쉬웠을텐데?"

그 때.

철그럭. 유신의 손에 들린 쇠사슬이 소리를 냈다.

꽁꽁 묶여있던 은발머리 엘프의 입은 지금 꾹 닫혀있었다.

"···"

그 얼굴에 떠오른 것은 자괴감과 참담함.

이에 호응하듯 주변에 있는 엘프들.

파수꾼 대장의 얼굴에 경멸이 드러났다.

"꼴이 그게 뭐냐 헤카테?"

"미, 미안···"

"그 녀석. 인질로 잡을 생각으로 끌고 온 모양인데."

파수꾼 대장은 은발머리 엘프를 무시하며 유신을 주시했다.

"녀석이 어떻게 되든 우리는 개의치 않는다."

"너무 비정한 것 아닌가? 그래도 동료인데?"

"웃기지도 않는 소리···"

파수꾼 대장이 이를 뿌득 물었다.

곧 그녀에게서 강렬한 적의가 뿜어져 나왔다.

"성인식도 끝낸 어엿한 전사가··· 멍청하게 인간 따위에게 붙잡혔다! 저건 더 이상 동료라 부를 수 없다!"

철저한 약육강식.

저게 요정들의 율법이다.

비록 유신이 생각하기에 그것 뿐만이 아니라 개인적인 사심 역시 들어가 있는 모양이지만 말이다.

"헤카테!!! 네게 정녕 전사로서의 자긍심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다면! 당장 이 자리에서 자결해라! 그도 아니면 저 인간들의 발목이라도 물어 뜯든지!"

"큭!"

숲이 떠나가라 소리지른 파수꾼 대장이 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철컥. 요정들이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었다.

"유, 유신! 또 뭔 수가 있는거지?! 그렇지?!"

적의와 분노가 뭉쳐 소용돌이 치는 숲의 한복판.

일촉즉발의 그 순간.

고오오오

유신이 에스트를 끌어올렸다.

내가 뭣하러 포로로 잡은 엘프의 입도 안 막은 채 주의를 끌고, 적들을 한곳으로 모았겠는가?

그건 다···

"추진력을 얻기 위함이었다."

양손을 모은 유신이 권능을 펼쳤다.

[악몽의 나락]

세상이 유리조각처럼 깨어지며 요사스러운 빛이 터져나갔다.

< 엘프헬름 >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저격을 준비하던 요정 전사들도.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폭발물을 설치하던 다른 전사들도.

"···!"

유신의 의지 아래. 모두가 미저궁 속에 처박혔다.

그들을 맞이한 것은 칙칙한 회색빛 하늘.

그리고 그보다 더 칙칙하며 음울한 느낌을 주는 콘크리트들의 무덤이었다.

"여긴 또 어디야?"

"인간들의 건물들 같은데···"

"방심하지 마라! 마귀의 술수 같으니까!"

소리 친 파수꾼 대장이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그 때.

저벅.

건물들의 틈 사이에서 누군가가 튀어나왔다.

탕!

파수꾼 대장이 당긴 방아쇠를 필두로 총성이 연달아 울렸다.

실루엣이 털썩 쓰러졌다.

파수꾼 대장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이건 또 뭐야···"

쓰러져 있는 존재는 유신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 꼬맹이도 아니었다.

"그림자?"

그건 인간의 형태를 한 무언가였다.

마치 달걀귀신처럼. 옷차림은 인간과 유사하나 그 위로 드러난 얼굴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건 뭐···"

씨익.

그 때 그림자 인간이 웃으며 아무렇지 않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엘프들은 움찔하며 또 한 번 방아쇠를 당겼다.

납탄의 세례에 춤추다가 쓰러지는 그림자.

그리고 또 한 번 일어나는 그림자.

기긱기기긱

점점 더 빠른 주기로.

점점 더 격렬하게.

"뭐, 뭐야! 왜 안 죽는거냐!"

저벅저벅

"사방에서 튀어나오고 있다!"

골목과 건물들의 틈에서 그림자 인간들이 스르르 다가왔다.

"일단 쏴! 그리고 너희들을 날 따른다! 이건 그 마귀의 수작질이 분명할 터! 술자를 죽이면···"

요정들은 이에 대응해 미친듯이 방아쇠를 당겼다.

투타타타!

특별한 일이 없는한 요정들은 숲을 떠나가지 않는다.

평생을 숲에서 살아가며 철저한 지리적 이점을 바탕으로 침입자를 압박한다.

그러나.

지금 그 법칙이 깨졌다.

요정들을 맞이한 것은 언제든 몸을 날릴 수 있는 날렵한 나무둥지가 아니라 차가운 콘크리트 무덤이다.

그 속에서 튀어나오는 정체모를 괴물들은 총탄을 맞아도 죽지 않는다.

"게헬-라아아아아아!"

아무리 용감한 전사들이라고 해도.

"죽여! 찢어!"

그들의 마음속에서는 조금씩 동요가 쌓였다.

미약한 공포심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기기기긱!

그건 곧 이 악몽의 훌륭한 자양분이 된다.

그림자 인간들은 이제 빌딩만한 크기의 괴물이 되어 요정들을 압박했다.

콰앙!

끝내 로켓런처까지 날아들었지만 괴물들은 역시나 꿈쩍도 하지 않았다.

"대, 대장!"

"대장이 잡혔다! 아, 아니! 먹혔다!"

퍼져나가는 동요.

그리고 펼쳐지는 학살.

"으으···"

유신에게 붙잡혀 있던 은발머리의 요정.

헤카테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 기괴한 상황 속.

엘프헬름의 파수대가 처참하게 분쇄되는 상황은 그만큼 압도적이었다.

이건 악몽의 재림.

유신이 새롭게 구축하고 다시금 피워낸 가공할 권능.

"크으. 마, 막아야···"

마지막 요정의 단말마와 함께 전투가 끝났다.

쩌억쩌억.

그림자 거인들은 여전히 입을 다시며 서 있었고, 이 교묘한 세상은 조금의 금도 가지 않았다.

불과 얼마 전의 유신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기행.

강탈자의 내재된 힘이 다시 한 번 드러났다.

그 때.

철컥.

고층 건물의 문이 열리며 유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옆에는 경악하고 있는 에피 역시 자리하고 있었다.

"개, 개쩔어어어어! 이건 또 무슨 능력이야?! 어떻게 이렇게···"

"대충 끝났군."

역시나 에피의 궁금증 따위는 가볍게 씹어버린 유신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구축됐던 세상이 스르르 무너지며 다시금 그들은 고요한 숲으로 돌아와 있었다.

'역시나 에스트 소모가 장난 아니다.'

요정들은 풀숲에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있었다.

그들은 죽지 않았다.

다만 기절했을 뿐.

"얘네 왜 안 죽였어?"

태연한 소녀의 물음에 유신의 표정이 떨떠름해졌다.

"넌 대체 날 뭘로 보는거냐?"

"무자비한 살인자. 쫌생이. 내가 아는 가장 음험한 인간?"

딱!

"악!"

딱밤을 날린 유신이 매고있던 가방을 풀었다.

곧 그 안에 있던 밧줄을 꺼내 에피에게 던졌다.

"헛소리 말고 저 녀석들이나 다 묶어라. 저 은발머리처럼 안 묶어도 되니까 적당히 줄줄히 엮어."

압도적인 화력과 용맹을 바탕으로 이 숲을 지키던 파수꾼들.

그들의 콧대를 꺾어놨다.

도저히 말귀를 못 알아듣는 이 야만인들에게 본 때를 보여준 셈이지.

그러므로 이제···

"협상을 할 시간이지."

태연한 유신의 어조에 에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협상이라고? 아무리 봐도 이건···

"협박 같은···"

"씁."

"···"

소녀는 부지런히 손을 놀렸다.

***

"흐아암."

숲의 중심부.

마을의 입구에 서있던 보초 카록이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그의 눈밑은 시커멓게 물들어 있었다.

'짐승같은 년들.'

엘프들은 대대손손 남자가 귀했다.

그리고 여자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모계사회였다.

그렇다보니 카록은 남성으로서 매일 혹독한 대가를 치러내고 있었다.

"카록! 괜찮다면 오늘 밤 나와 하겠는가!"

벌써부터 옆에 있던 짐승이 소리친다.

시발.

카록은 지금의 상황이 치가 떨릴 정도로 싫었다.

이런 부끄러움도 없는 멧돼지들도 싫고, 여기 속박되어 즙처럼 짜이는 자신도 싫었다.

카록은 제발 좀 닥쳐!라고 마주 소리치고 싶었다.

"꺼···"

"싫은가?"

하지만 보초의 부리부리한 몸뚱이와 날선 눈동자를 마주하자 그 말이 쏙 들어가버렸다.

남자 엘프들은 이 아마조네스들에 비해 유약하다.

"···생각 해보겠다."

"5초 안에 답 줘라."

이 황소들은 인내심까지 없다.

5, 4, 3

어떡하지? 저년까지 하면 오늘만 벌써 스무명인데?

이러다 옆집 후탄카처럼 복상사하면···

카록이 일생일대의 고민을 하던 그 순간.

──────!

저 멀리서 거친 비명이 들렸다.

곧 질질질 끌리며 경게선 너머로 누군가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건···

"파, 파수꾼들이잖나?! 그리고 저건··· 인간?!"

파수꾼들이 다 사로잡혔다. 그것도 싸우다 죽은 것도 아니었다.

엘프헬름이 생긴 이례 지금 같은 상황은 처음이었다.

비상! 비사앙!

옆에 있던 보초가 기겁하며 경종을 쳤다.

하지만 그런 일촉즉발의 상황 속에서도.

'나, 나이스!'

카록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

'저 자식은 왜 히죽거리고 있어?'

유신은 실실 쪼개고 있는 남자 엘프를 주시했다.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마을 전체가 난리인데 혼자서 특별행동을 하고 있는 녀석은 당연히 요주의 인물이다.

'경계해야겠군.'

파수꾼들은 엘프헬름의 전력의 일부일 뿐이다.

요정들은 비성인을 제외한 모두가 전사들이다.

그들 모두가 달려든다면 아무리 유신으로서도 답이 없다.

"으으으으읍!"

그렇게 포로를 이끌고 마을의 입구로 다가선 순간.

철컥.

덩쿨이 자라난 철조망과 통나무벽 너머로 총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네놈은 뭐냐! 뭔데 우리 전사들을 핍박하고 성역에 침범했는가!"

보험삼아 장벽부터 쳐두고, 유신은 흐읍 숨을 들이켰다.

"나는 유신이-다!"

그리고 소리쳤다.

깐프들은 전사의 종족.

목소리가 크고 우렁찬 것을 미덕으로 삼는 것들이다.

협상 자리인 이상 이런 건 신경써야겠지.

"오해가 있어 이자들과는 마찰을 겪게되었다! 하지만 내 본래 목적은 너희들과의 싸움이 아니다!"

그건 내가 이들의 목숨을 거두지 않은 것만 봐도 알 수 있을터.

유신은 포로로 붙잡은 엘프들을 흔들어 보였다.

···

과연 냅다 방아쇠부터 당기던 방금 전과는 달리 엘프들은 망설였다.

그야 당연했다.

침입자들을 가장 일선에서 맞이하고 무찌르는 파수꾼들이 단 두 명의 인간들에게 제압을 당한 상황이었으니.

어디서나 그 사람의 말에 담긴 영향력은 그 사람이 가진 힘과 권력에서 나온다.

유신은 새로운 능력을 바탕으로 압도적인 무위를 선보임으로서 이를 달성했다.

'분위기 좋고. 이쯤에서···'

유신이 입을 다시던 순간.

으읍. 읍!

파수꾼 대장이 재갈을 풀며 소리쳤다.

"믿어선 안 된다! 이 녀석은 마귀다! 사악한 힘을 다룬다!"

마귀라는 말이 퍼져나간 순간.

공기가 달라졌다.

그건 어떤 피해를 감수하고서라도 유신을 죽이겠다는 의지였다.

"마귀 주제에! 감히 더러운 새치혀를 놀리다니! 발···"

경비대장이 소리치던 그 순간.

"멈춰라."

고요한 목소리 하나가 퍼져나갔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도 귀에 박힐 정도로 신묘한 울림이었다.

그러자.

"···"

엘프들이 적의를 거뒀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바뀐 분위기였다.

"뭐, 뭐야. 뭔데?"

에피가 당황했다.

하지만 유신은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이쯤 됐으면 나설 줄 알았지.

자, 이제 지루한 투닥거림은 끝내고 일 얘기나 본격적으로 해보자고.

***

사박사박.

엘프들의 마을은 전형적인 동화 속 낙원처럼 생겼다.

따사로운 햇빛 아래.

높고 두꺼운 나무들이 도처에 널려있다. 그리고 그 위에 동그랗거나 넙적한 오두막들이 열매처럼 매달려 있다.

엘프들은 원숭이처럼 나무들을 넘어 다니거나. 나무들 사이를 연결하고 있는 밧줄들에 매달려 있었다.

그래, 여기까지만 본다면 말이지.

하지만 풀숲에 방치되어 있는 녹슨 탱크와 장갑차, 추락한 헬기, 나무둥지에 처박혀 있는 불발탄 같은 (구)시대의 군사병기가 이 마을을 조금 특별하게 만들어준다.

"어떻게 인간이 여기까지···"

그리고 얼굴은 미려하나 몸은 근육 투성이인 저 귀쟁이들 역시도.

유신은 이 신비로운 마을을 쭉 둘러보다가 걸음을 멈췄다.

아파트나 고층빌딩 못지않게 거대한 나무들 사이.

그런 나무들 수백 그루를 뭉쳐놓은 것 같은 초목이 한 그루 있었다.

"와아··· 존나 커."

고개를 올리던 에피가 벌렁 넘어질 정도로 저 나무는 압도적인 존재감을 자랑했다.

그래, 세계수다.

엘프들의 정신적 지주이자 이번 여정의 목적이기도 한 녀석.

그리고 그 아래에는 역시나 엘프 양식의 집이 한 채 있었다.

"족장님께 허튼 짓이라도 했다간··· 가만두지 않겠다!"

안내를 맡은 파수꾼 대장이 으르렁거렸다.

유신은 양손을 들어보인 후에 집 안으로 들어갔다.

훅 풍겨오는 나무냄새.

목가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집 안에는 눈을 감고있는 수려한 인상의 사내가 있었다.

"어서오십시오. 인간들이여."

맹인 엘프의 목소리는 방금 전에 울려퍼진 기묘한 울림과 닮아있었다.

이는 한 가지를 암시했다. 유신의 출입을 허락한 것이 바로 그의 소행이라는 것.

"마치 우리가 오기를 기다렸다는 모양새인데."

"정확히 맞췄습니다. 나는 당신들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별과 나무, 그리고 바람이 내게 길을 알려주었기 때문이지요. 조만간 고귀한 만남이 있을 거라고."

"이게 뭔 개소리···"

에피가 툭 내뱉었다.

하지만 유신은 마냥 개소리라 치부하지 않았다.

눈앞에 있는 엘프족장은.

[예언자 아브라함]

이라고 불리는 엘프헬름의 네임드 npc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

테이블에 앉자 쪼르륵 차부터 따라준다.

외양도 그랬지만 이 족장은 바깥의 다른 엘프들과는 달라보였다.

그런 에피의 생각을 읽은 걸까?

아브라함은 조용히 미소지었다.

"시간은 많은 것을 바꾸어 버리지요. 불같은 열정도, 끝모를 도전과 탐구정신도 천천히 하지만 확실히 마모시켜 버립니다."

"세상 다 산 노인네라 얌전해졌다는 거구나?"

에피의 건방진 말투도 웃어넘길 정도로 그는 기품이 넘쳤다.

"하하하. 그렇게도 볼 수 있겠군요."

유신이 말했다.

"예언자라면 이야기가 빠르겠군.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나는 너희들과 거래를 하고 싶다. 너희 마을이 처해있는 문제를 해결해주지. 그 대가로···"

"세계수의 열매를 원하시는 거겠지요?"

씨익.

유신이 웃었다.

족장 역시도 미소 지었다.

"좋습니다. 당신이 우리가 앓고 있는 이 골칫덩이를 해결해 준다면야··· 그런 열매 정도야 얼마든지 내어드릴 수 있습니다."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모든 엘프들을 이끄는 족장이 엘프들의 정신적 지주인 세계수를 무시하는 언행을 했으니.

역시나 이 자는 범상치 않다.

잠시 아브라함의 배경에 대해 떠올리던 유신이 그를 한 번 떠보고자 했다.

"이렇게까지 말이 잘 통하니 오히려 이쪽에서 의심이 드는군. 난 마귀다. 그런 나를 함부로 믿을 수 있나?"

엘프들은 선천적으로 에스트를 다루지 못한다.

그들에게 있어 에스트란 곧 사악한 힘이었으며 이를 다루는 인간들은 악에 물든 마귀였다.

그렇기에 유신의 의문은 합당한 것이었다.

하지만.

"후후. 장난은 그만 두시지요."

족장이 미소지었다.

"당신 정도의 사람이라면 짐작하고 있을 텐데요? 나 역시···"

이윽고 그의 주변으로 은은한 에스트가 피어올랐다.

"당신과 같은 부류란 걸."

"서, 설마?!"

에피가 눈을 부릅떴다.

유신의 입가에 지어져 있던 미소가 진해졌다.

그래, 이 족장은 능력자다.

그것도 에스트를 다룰 수 없는 엘프 사회에서 태어난 최초의 돌연변이.

[자연을 벗삼은 미래예지]

나와 마찬가지로 사기꾼인거지.

***

[디데이 후 방사능에 피폭된 인간들이 유전자 변형을 일으킨 것으로 보임. 그 중에서도 살아남은 극소수의 개체가 번식에 성공. 지금의 엘프들이 탄생했다는 가설이 유력.]

[우월한 신체능력과 인간 못지않은 지능. 때마침 무주공산이 되어있던 DMZ와 그 인근의 군사기지들까지. 이 모든 요건들이 합쳐져 현재의 엘프 세력이 발로했다고 추정.]

[지금은 모르겠으나 조사단이 파견되었을 때 엘프헬름 근방의 방사능 농도는 극도로 위험한 수준. 엘프들의 무장상태 역시 마찬가지. 다행이 자신들의 영역 바깥으로 나가는 일은 없는 것 같으니 위험종으로 분류할 필요는 없어도 될 듯함.]

컴퍼니에서 조사한 엘프들의 생태에 관한 내용이다.

뭐, 그 밖에도 수컷만 보면 발정한다거나 성격이 흉폭하다는 이야기도 있기는 했지만···

'상관없는 얘기지.'

"이곳이다."

저벅.

걸음을 멈춘 유신의 앞에는 시커먼 동굴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점등하는 랜턴과 중간중간 설치된 지지대.

그냥 동굴이 아니다.

광산이다.

"이 안의 가장 깊숙한 곳에 놈이 있다."

유신에게 붙잡혔던 파수꾼 대장이 이를 으득 물었다.

엘프들은 과거의 열병기들을 숭상하며 이를 이용해 싸우는 전사들이다.

그것도 한 두달 찔끔이 아니라 평생동안.

당연히 그들이 제일 먼저 직면하는 문제는 바로 보급이다.

총탄을 구성하는 철과 납도, 안의 화약도.

기하급수적인 소모가 이루어진다. 주워서 쓰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당연히 지금의 전투력을 유지하려면 자급자족이 필요하다.

그리고 엘프들은 놀랍게도 그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순도 높은 광물이 나오는 광산 역시 소유하고 있었다.

문제는 바로 거기서 시작됐다.

엘프들의 유일한 보급로인 이 광산에 어느순간 괴물이 나타난 것이다.

"총탄도 안 통하고 로켓포도 통하지 않았다. 녀석은 마치 허깨비처럼 우리들을 농락하며 가지고 놀았다."

종말이 시작된 후 늘 자신들을 든든히 지켜주었던 무기가 통하지 않았다. 죽지 않는 불사의 괴물인 것이다. 그렇다고 다른 보급로를 찾자니 천문학적인 비용과 시간이 들고···

엘프들로서는 난감할 수 밖에 없었다.

유신이 말했다.

"안에 있는 녀석을 처리해주면 되는 건가?"

"···그래. 어쩌면 사악한 힘을 다루는 네놈이라면··· 그 괴물을 잡을 수도 있겠지."

파수꾼 대장을 필두로 한 엘프들이 얼굴에 믿음은 없다.

적개심 역시 여전했다. 믿고 따르는 족장의 명령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협조한다는 태도였다.

이 마음씨 넓은 빙의자는 그 분노를 이해했다.

엘프들의 사회는 극도로 폐쇠적이다. 이는 그들의 생존과도 연관되어 있는데···

뭐, 각설하고 그런 상황에서 간혹 찾아오는 인간들조차 비정상인일 수밖에 없는 상황.

이렇게 인식이 박히는 것도 당연했다.

"아까부터 계속 마귀, 마귀. 거 말 존나게 심하네. 우리한테 개발려··· 읍."

딴지를 자주 걸지만 소녀는 기본적으로 유신을 존경하고 따른다.

당연히 나쁜 말을 들으면 한마디 쏘아준다.

'하지만 때가 좋지 않아.'

눈초리가 사나워진 엘프들을 뒤로한 채 유신은 에피의 입을 막았다.

저 귀쟁이들의 콧대를 눌러 줄 상황이 얼마 남지 않았다.

"시간 끌 필요는 없겠지. 곧바로 가겠다. 확인은?"

유신이 고개를 까딱거렸다.

의뢰를 잘 완수하는지 확인하기 위해 직접 따라 붙겠냐는 뜻이었다.

파수꾼 대장은 턱을 쓰다듬다가.

"내가 가지. 그리고···"

꺼림칙해하는 엘프들 중에서 한 녀석을 콕 집었다.

"헤카테. 네가 선두를 맡아서 길을 안내해라."

제일 처음 유신에게 붙잡혔던 은발머리 엘프였다.

"···아, 알았다."

주눅들어 있던 그녀가 랜턴을 든 채 안내를 자처했다.

유신은 이채어린 눈으로 그 두 사람을 보다가 따라붙었다.

그리고 이번 의뢰의 목표에 대해서 생각했다.

엘프들의 진술을 토대로 생각해볼 때 저 광산 밑에 도사리고 있는 괴물은···

"유신. 이거 왠지 그 때와 비슷한 상황 같은데?"

에피의 말대로 그들이 과거에 겪었던 사건을 연상케했다.

하브람으로 가는 도중에 만났던 괴물.

두 사람에게 악몽의 밤을 선사했던 돌연변이.

악령.

'녀석과 같은 개체는 아니지만 그 비슷한 거라 봐야지.'

물론 유신은 그 괴물에 대한 대처법 역시 알고 있다.

하브람에서 악령을 상대할 때 불꽃을 이용해 생존을 도모한 것처럼.

이 녀석 역시도 약점과 강점이 뚜렷한 놈이었기 때문이다.

[신비술사의 법칙을 뒤흔드는 벼락] x 1

[파라오의 눈]

유신은 품에 있던 유물들을 만지작거리며 웃었다.

엘프들에게 있어서 하나의 재앙인 이 괴물은 자신에게 있어서는 누워서 스프먹기 보다 쉽다.

왜냐하면 녀석은···

'에스트가 약점이거든.'

후딱 잡고 능력이나 강탈하자.

이 녀석의 능력은 꽤나 쓸만하다.

< 강탈과 뒤바뀐 대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