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화 프롤로그
히사릴 언덕에는 언제나 산들바람이 불었다.
저 서쪽의 한없이 높은 산맥에서부터 시작해, 짧고 뻣뻣한 잡초들을 휩쓸며 아래로 내려가는 바람이.
양치기 투란은 볕 드는 들판에 누워 그 산들바람을 맞으며 양 떼를 감시하는 일을 제일 좋아했다.
아니, 가장 덜 싫어하는 일이라 표현하는 것이 옳을 터다.
양털을 깎거나 축사를 청소하는 것보다 편한 일이라서 그럴 뿐, 이를 즐거워한 적은 없으니까.
사실 그를 괴롭히는 가장 큰 적은 고된 노동 따위가 아닌 지루함이었다.
늘 눈을 뜰 때마다 똑같은 풍경, 똑같은 건물에서 똑같은 일을 하며 똑같은 시간에 잠드는 나날.
가끔은 그러다 말하는 법마저 잊을까 싶어 혼자 말을 걸며 대답하는 것을 놀이 삼기도 했다.
이러한 고독을 이기지 못해, 혹은 생활에 꼭 필요한 물건 몇 개를 교환하기 위해 언덕 아래의 작은 마을로 내려가기도 했으나 이 역시 썩 즐겁지는 않았다.
왜냐면 마을의 주민들 모두가 투란을 싫어했기 때문이다.
물론 투란 역시 그들을 싫어하기는 매한가지였다.
"해도 채 기울지 않았는데, 젊은 놈이 벌써 농땡이나 피우고 있는 게냐?"
느지막한 오후, 평소처럼 볕 드는 들판에 누워 양 떼를 감시하던 투란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의 이름은 라부스.
언덕 아랫마을의 장로 중 한 명이었다.
투란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이하는 대신 얼굴을 찌푸리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비키쇼, 영감. 햇빛 가리니까."
투란은 마을 사람들을 모두 싫어했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더 싫어하는 게 바로 저 늙은이였다.
오 년 전, 투란의 어머니가 죽자 재산을 관리해 주겠다면서 은근슬쩍 언덕의 양들을 모두 마을의 공동 소유로 돌리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 덕분에 투란은 마을 사람들과 거의 전쟁에 가까운 다툼을 치러 가며 양을 돌려받아야만 했다.
퉁명스러운 태도에 라부스의 얼굴이 굳었으나, 그는 이내 이를 악물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하기야 화를 내 봐야 무엇 하겠는가?
여기서 주먹 싸움이라도 한다면 코가 깨져 내려가야 하는 쪽은 그일 게 뻔한데.
"지난밤에 롭이 마을 어귀에서 마수를 발견했다. 온몸이 새카만 그림자로 뒤덮이고 덩치가 집채만 한 표범이라더구나."
마수란 마법의 힘을 깨우친 짐승을 이르는 말로, 평범한 동물보다 체격이 크고 머리가 좋으며 온갖 신비한 힘을 다뤘다.
동종 내에서도 개체 차이는 있으나 보통은 강한 짐승이 변이할수록 위험한 마수가 되며, 표범 마수쯤 되면 평범한 사람들이 감히 당해내기 어려웠다.
"저런."
"겁먹지 않는 게냐? 이 근방에서 마수가 노릴 가능성이 큰 게 너일 텐데도?"
"무서워하고 있는데? 그것도 엄청."
말과 달리, 투란의 얼굴에 동요한 기색은 없었다.
라부스가 보기에는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태도였다.
대체 간덩이가 어떻게 되어 먹었기에 위험한 마수의 출현을 저런 태도로 받아들일 수 있단 말인가?
심지어 그들처럼 울타리 안에 사는 것도 아니면서.
"아무튼, 촌장이 마수를 토벌할 마법사를 청하러 도시로 갔으니 몸조심하거라. 웬만하면 양도 멀리 끌고 가지 말고."
물론 그가 투란을 걱정하는 마음에 이런 사실을 알려주러 온 것은 아니었다.
마음 같아선 이 양치기 놈 따위 확 물려가 버렸으면 좋겠다만, 투란의 양들은 마을의 중요한 영양 공급원이자 보온재, 수출품이었기 때문이다.
투란이 죽는다는 건 그 모두를 잃게 된다는 의미였다.
설마 마수가 사람의 사정을 봐가면서 양치기만 물어 죽이고 양 떼를 내버려 두진 않을 테니까.
그러한 속내를 짐작하고 있기에, 투란 역시 조금의 감사함도 느끼지 않고 한껏 비꼬았다.
"걱정해 주셔서 정말 몸 둘 바를 모르겠네. 말 다 했으면 빨리 꺼져. 당신 입 냄새 때문에 코가 썩을 것 같으니까."
라부스가 투덜대며 언덕을 내려가는 동안, 투란은 그가 조금 전 했던 말을 떠올리며 생각에 잠겼다.
'마법사라···.'
신비한 힘을 다루는 짐승을 마수라 하듯, 신비한 힘을 다루는 인간은 마법사라 불렀다.
다르게는 귀족이나 기사라고도 했는데, 마수가 같은 종의 짐승들을 이끄는 우두머리가 되듯 마법사는 인간 사회의 최상위층에 군림했다.
'얼마나 강하려나.'
이런 시골 촌장이 불러서 올 정도면 아마 마법사 중에서도 별 볼 일 없는 작자일 터.
하지만 그런 이라도 한번 만나보고 싶기는 했다.
가까이 갔다가는 위험할 수도 있으니,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몰래 훔쳐보는 식으로라도.
한참 생각에 잠겨 있던 도중, 투란의 코에 미묘한 냄새가 걸려들었다.
'피 냄새?'
그것도 얼마 지나지 않은 듯 신선한 피 냄새였다.
옆에 세워둔 지팡이를 쥐고 후각의 인도를 따라 걷자, 얼마 지나지 않아 냄새가 시작된 곳에 도달할 수 있었다.
투란은 쯧 하고 가볍게 혀를 찼다.
'나한테 조심하라더니 정작 자기가 먼저 갔구만.'
갈기갈기 찢겨 흩뿌려진 탓에 마치 흐드러지게 핀 빨간 꽃처럼 보이는 라부스의 시체.
전신에 새겨진 선명한 발톱 자국으로 보건대, 그를 공격한 것은 인간이 아닌 존재가 분명했다.
"너냐?"
[그르릉-]
투란이 뒤돌아보며 묻자 나무 아래의 그늘에서 솟구친 그림자가 모여들어 짐승의 형상을 취했다.
어깨높이만 못해도 이 미터는 될, 곰도 뚝딱 잡아먹을 크기의 거대한 표범....
투란은 그를 똑바로 마주 보며 선언했다.
"죽어."
그 순간, 표범의 머리 위로 번갯불이 튀었다.
움찔 놀라며 뒤로 펄쩍 뛰었던 놈은 이내 자극을 받아 화가 났는지 포효하며 투란을 향해 도약했다.
"안 되나...멈춰."
두 번째 명령에 표범의 몸이 움찔하며 멈추는가 싶었으나, 이번에도 채 일 초도 되지 않아 번갯불이 튀며 몸이 자유로워졌다.
눈앞의 나약한 먹잇감이 무언가 이상한 수작을 부린다는 것을 깨달았을까, 표범은 더 지체하지 않고 곧장 앞발을 휙 휘둘렀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반응하지도 못한 채 일격에 즉사해도 이상하지 않을 힘과 속도로.
하지만 순식간에 먹잇감을 찢으리라던 예상과 달리 날카로운 발톱은 무력하게 허공을 갈랐다.
그것이 아주 잠깐 움찔한 순간 투란 역시 비상식적으로 빠르게 움직여 뒤로 물러났기 때문이었다.
"죽이는 게 안 될 줄은 알았지만, 멈추는 정도도 안 되는 거구나...."
투란은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투석구와 둥글게 깎아낸 돌 하나를 주머니에서 꺼내 매겼다.
그런 뒤 이를 두어 바퀴 돌리며 주문을 외웠다.
"단단해져라, 빨라져라, 꿰뚫어라-목표는 머리."
정말로 직관적이고 단순하기 그지없는, 다소 우스꽝스럽게마저 느껴지는 주문.
그와 함께 한쪽 끈을 놓은 순간, 해방된 돌멩이는 바람을 찢는 굉음을 내며 마수를 향해 날아들었다.
마수의 직감이 외쳤다.
저 공격 앞에서 그의 튼튼한 가죽 따윈 소용없을 것이라고.
[캬악!]
경악하여 비명을 지르며 몸을 뒤틀자 본래 명중했어야 할 돌멩이가 아슬아슬하게 귀를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채 안심할 새도 없이, 저 멀리 날아가야 할 돌멩이는 마치 누군가 직접 조종하는 것처럼 크게 휘며 돌아와 마수의 뒤통수에 꽂혀 미간을 뚫고 나왔다.
두개골과 뇌가 으깨진 표범 마수는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쯧."
마을 놈들 좋은 일만 했다는 생각에 혀를 차며, 투란은 죽은 마수의 꼬리를 잡아끌었다.
평범한 남자라면 몇 명이 힘을 합쳐 들어야 할 거구건만, 마치 죽은 개라도 끌고 가는 것처럼 가볍게.
'어디 골짜기에나 던져둘까.'
그러면 남은 잔해는 벌레와 짐승들이 적당히 처리해줄 터였다.
썩 깔끔한 뒤처리라 하기는 어렵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마을의 겁쟁이들은 마수의 흔적을 따라올 용기가 없을 것이고, 며칠 뒤 촌장이 고용한 마법사가 왔을 때쯤엔 아무것도 남지 않을 테니까.
세상의 서쪽 끝, 히사릴 언덕에 사는 양치기 따위가 마법사라는 사실은 들통나지 않을 것이다.
1화
투란이 마법의 힘을 깨우친 것은 지금으로부터 8년 전, 그가 열 살이 되던 해의 겨울이었다.
어머니가 양을 데리고 나간 사이 불이라도 피워 둘까 하고 생각하자 난로에서 불이 확 피어나는 것이 아닌가.
얼마 지나지 않아 투란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많은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건을 들어 올리고, 불을 붙이고, 바람을 불어오게 하거나 보이지 않는 벽을 만들기까지···.
'엄마, 이거 좀 봐! 장작이 날아다녀!'
그날 저녁, 투란은 목양견과 함께 양을 몰아 집에 돌아온 어머니에게 자신의 능력을 자랑했다.
어머니는 아들의 이러한 능력을 신기해하지도, 기뻐하지도 않았다.
그저 체념과 좌절이 섞인 표정으로 허공에 떠다니던 장작을 잡아챘을 뿐.
'투란, 엄마랑 약속하자. 앞으로 그 힘을 함부로 쓰지 않겠다고. 특히 다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는 절대로.'
'왜?'
투란은 언제나 어머니의 말을 잘 듣는 착한 아이였지만, 이런 신기하고 재밌는 힘을 억제하라는 요구에는 투정을 부리지 않을 수 없었다.
어머니는 따뜻하게 데운 양젖 한 잔을 먹여주며 처음으로 저 먼 아래 세상의 이야기를 해 주었다.
'언덕 아래에는 귀족이라는 사람들이 있어.'
어머니가 말하기를, 귀족은 먼 옛날 세상에 강림하여 인간을 구원한 프레아 신족의 후손이었다.
그들은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강력한 마법의 힘을 타고나, 인간의 지배자이자 수호자로 군림했다.
그리고 그중 평범한 인간과 여러 차례 피가 섞여 태어난 이들을 기사라 했는데, 이들 역시 귀족처럼 마법의 힘을 타고나긴 하지만 그 정도가 약하기에 시종으로 부려졌다.
어머니는 투란이 아버지에게서 기사의 힘을 물려받은 것이라고, 그래서 저 산 밑으로 내려가면 나쁜 귀족들이 그를 잡아다 마구 부릴 것이라고 말했다.
'귀족을 우리 같은 양치기라고 하면, 기사는 그 양치기가 키우는 개와 같은 거야. 때로는 가족처럼 여기고 귀여워해 줄 수도 있지만...필요하다면 얼마든지 팔아넘길 수도, 희생시킬 수도 있지.'
귀족들은 모든 것을 가졌음에도 하나라도 더 가지고자 자기들끼리 끊임없이 싸웠는데, 그러는 와중 희생되는 것은 대부분이 휘하의 기사들이었다.
마치 양치기가 늑대를 상대로 직접 나서는 대신 목양견을 싸우게 보내고 자기는 뒤에서 돌팔매질만 하는 것처럼.
이를 설명하는 어머니의 얼굴은 투란이 태어나서 한 번도 본 적 없던 허망함을 담고 있었다.
'투란은 엄마랑 같이 오래오래 살고 싶지?'
'응.'
'그러면 그 힘을 감춰야 해. 그렇지 않으면 나쁜 귀족들이 와서 너를 데려갈 거야. 엄마랑 평생 못 보게 되겠지.'
'알았어, 절대로 남들 앞에서는 안 쓸게!'
그렇게 의기양양하게 약속한 지가 어느덧 8년째.
어머니가 병들어 죽은 뒤로도 투란은 여전히 히사릴 언덕의 한편에서 양을 치며 살아가고 있었다.
언젠가 그를 찾아올지도 모르는 귀족들을 피해서, 그들이 키우는 목양견이 되지 않기 위해서.
* * *
"머저리들 같으니."
투란은 얼굴을 찌푸리며 오두막집의 문을 닫았다.
해가 채 뜨지도 않은 이른 아침, 마을 청년들이 몰려와서 며칠 전 라부스가 죽은 일로 그를 추궁했기 때문이다.
누가 봐도 표범 마수의 공격을 받은 흔적이 역력하건만, 그들은 투란이 노인을 해친 뒤 마수 앞에 먹이로 던진 게 분명하다며 되먹지 않은 누명을 씌우려 들었다.
왜 그런 짓을 하는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젊은 청년들을 두고 나이 든 노인네가 마을을 나왔다가 희생된 상황 아닌가.
너희가 게으르고 겁이 많은 탓에 노인이 죽은 것이라는 비난을 듣기 전, 투란을 이용해 자기들에게 돌아갈 책임을 분산하려는 것이 분명했다.
물론 투란은 그렇게 시비를 걸어온 마을 청년들을 흠씬 두들겨 패서 내쫓아 버렸다.
아마 다음에 물물교환을 위해 마을에 내려가면 이번 일을 꼬투리 잡아 값을 후려치거나 물건에 장난을 치는 식으로 보복하려 들 터였다.
그러면 투란은 그런 마을 놈 몇 명을 또 후려갈겨 제정신을 차리게 한 뒤 공평한 거래를 하게 될 것이고.
지금까지 이미 몇 번이고 있었으며, 아마 앞으로도 있을 지긋지긋한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에 잠겨 있기도 잠시, 갑자기 누군가 밖에서 문을 탕탕 두드렸다.
투란은 깊게 한숨을 내쉰 뒤 문을 열며 으르렁거렸다.
"또 어떤 새끼야? 진짜 뒈지고 싶어?"
분명히 조금 전에 교훈을 주었는데도 그사이에 잊어버릴 정도로 머리가 나빠졌단 말인가?
그런데 문 너머에 있는 것은 의외로 조금 전 찾아왔던 마을 청년 중 누군가가 아니었다.
먼지가 가득 앉은 망토를 두른, 사십 대 중후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가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어···실례했네, 젊은 친구. 여행 중에 잠시 신세 좀 질 수 있을까 해서 왔는데, 안 좋은 때 왔나 보군."
여행객이라니, 십팔 년 평생 처음 만나는 존재에 투란의 머리가 잠시 생각하기를 그만두었다.
정말로 볼 것 하나 없는 이런 시골에 여행을 올 정도로 한가한 사람이 있을 줄이야.
잠시 뻣뻣이 굳었던 투란은 곧장 문에서 비켜나며 들어올 길을 내주었다.
"아뇨, 아닙니다. 들어오시죠. 조금 전까지 기분 나쁜 사람들이 왔다 갔었거든요."
과거 어머니에게 배웠던, 손윗사람에게 쓰는 정중한 말투가 몹시 입에 설게 느껴졌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던 게 언제였던가?
라부스를 비롯한 마을 유지들이 모조리 개새끼들이란 사실을 알기 전이니 실로 오래되기는 했다.
"그럼 실례하겠네."
사실 정체를 감추자면 정체불명의 손님 따위는 후딱 쫓아내는 쪽이 맞겠으나, 투란은 그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누구라도 좋으니 오랜만에 적의 없이 대화를 나누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상대가 나쁜 마음을 먹은 악당이라면 충분히 해치울 자신이 있기도 했고.
"혹시 아침 식사는 하셨습니까?"
"아직일세."
"저도 안 먹었으니 같이 드시죠."
여행객을 식탁에 앉힌 투란은 어제 짠 양젖과 치즈, 마을에서 가져온 말린 곡물로 만든 죽, 으깬 암염 한 덩이와 양고기 육포를 올려놓았다.
굶어 죽을 지경이 아니라면 손님을 극진히 대접해야 하고, 그러면 손님 역시 집주인을 해칠 엄두를 내지 못하는 법.
이 역시 어머니에게 배운 예절이었다.
"워낙 궁핍한 곳인지라 차린 게 많이 없습니다."
"무슨 말을! 진수성찬이 따로 없는걸. 내 감사히 먹겠네."
빈말은 아닌 듯, 남자는 며칠 굶기라도 한 것처럼 투란이 내놓은 음식을 맛있게도 먹어치웠다.
그러는 와중에도 그는 마을 사람들과 달리 식사 예절이 제법 잡힌 모습을 보였다.
음식을 씹으며 말하지 않거나 무언가를 마실 때는 살짝 고개를 돌리는 등···.
여행객 역시 비슷한 인상을 받았는지, 양젖을 한 잔 내려놓고는 투란에게 덕담을 건넸다.
"기본적인 식사 예절을 아는 친구로군. 부모님에게 제대로 가르침을 받은 모양이야."
"어머니께 배웠습니다."
아버지 이야기를 꺼내지 않은 데서 무언가를 직감했는지, 여행객이 잠시 멈칫하더니 이어서 말했다.
"그런데 그분은 마을에 계시는 건가? 집을 보니 같이 사는 것 같지는 않은데."
그새 집안에 이부자리가 하나밖에 없는 것을 간파한 모양이었다.
투란은 고개를 끄덕이며 덤덤한 어조로 말했다.
"몇 년 전에 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여행객은 잠시 낭패한 기색을 보이더니, 이내 한 손으로 성호를 그리며 고개를 숙였다.
투란이 살면서 한번도 본 적 없는 손짓이었다.
"조의를 표하네. 자네처럼 훌륭한 젊은이를 키워내셨으니 틀림없이 신들과 함께 천상의 궁전에 머무실 걸세."
"저 역시 그러기를 바랍니다."
어머니를 잃었을 무렵에는 그냥 떠올리기만 해도 온종일 입맛이 없고 눈물이 흘렀건만.
이를 겉으로나마 웃으며 언급할 수 있게 된 것은 어른이 된 것일까, 아니면 시간이 흐르며 그의 마음속에서 어머니의 존재감이 흐려진 것일까?
투란은 급격히 우울해지는 기분을 환기하고자 억지로 주제를 돌렸다.
"그보다 어르신은 무슨 일로 이런 외진 곳까지 여행을 오셨습니까?"
"우연히 근방의 도시를 지나는데, 어떤 노인이 자기 마을에 표범 마수가 나타났다며 이를 물리칠 마법사를 찾더군. 이야기를 듣고 퇴치하러 왔네. 싸움에는 꽤 자신이 있거든."
"혼자서요?"
심지어 한창때의 젊은이도 아니고 이제 곧 허리가 구부러질 것 같은 중늙은이가, 무기조차 없이 덤벼들려 하다니?
투란의 놀란 표정에 여행객이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나는 기사일세. 아라비온 가문에서 육십 년 동안 봉사했지. 어지간한 마수쯤은 충분히 해치울 수 있어."
기사라는 말을 들은 순간 투란의 눈이 커지며 온몸의 근육이 바짝 긴장했다.
어머니에게 말로만 들어 왔던 존재, 귀족의 하수인....
긴장하기도 잠시, 투란은 그를 보는 상대의 눈빛에 적대적인 기색이 없음을 알고 천천히 힘을 풀었다.
"왜 그러나?"
"마법사를 본 것은 처음이라...그보다 도저히 육십 년간 일하신 분으로는 안 보이는걸요."
"마법사는 보통 사람보다 느리게 늙으며 오래 살지. 내 나이가 올해 일흔다섯일세. 나는 기사라서 이 정도고, 강한 귀족들은 이백에서 삼백 살도 거뜬히 넘긴다더군."
처음 듣는 사실에 투란은 감탄하며 자신과 같은 족속을 유심히 관찰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사람과 차이를 찾기 힘들었다.
굳이 비교하자면 체격이 좋고 얼굴에 혈색이 돌아 건강해 보인다는 것 정도....
즉, 마법사라고 해서 쳐다보기만 해도 상대가 마법사라는 것을 알아챌 수는 없다는 뜻이었다.
이는 굉장히 중요한 정보였다.
투란이 사람들이 모인 도시 한복판에 서 있더라도, 눈에 띄는 마법을 쓰지만 않으면 아무도 그의 정체를 모르리라는 것 아닌가.
그 사실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가슴을 옥죄던 사슬이 한 겹 풀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정말 대단하네요, 마법사라는 건."
"대단은 무슨! 난 자네 같은 이들이 더 대단하다네. 마법의 힘도 빌리지 않고 마수가 나오는 이런 험한 곳에서 살잖나? 나라면 엄두조차 못 냈을 일이야."
그의 생각과 달리 이 근방에서 사람에게 위협적인 수준의 마수가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러니까, 투란이 태어난 이후를 기준으로 했을 때는.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그의 어머니가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라 한들 이곳에서 홀로 양치기 일을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사실 마법의 힘조차 없이, 혼자 이 황량한 언덕에서 자식까지 키워낸 여인이야말로 정말로 찬사를 받아 마땅했다.
"그러고 보니 미처 통성명도 하지 않았군. 내 이름은 케오른일세. 아라비온의 케오른-아니, 이젠 이렇게 자칭해서는 안 되겠지. 방랑자 케오른일세. 자네는?"
"투란입니다. 히사릴 언덕의 하나뿐인 양치기죠."
"멋진 이름이군."
"그런데 조금 전에 가문에 '봉사했다'라고 하셨는데, 그러면 지금은 아니신 겁니까?"
"한 달 전에 정식으로 봉신 계약을 끝냈다네. 가문에서는 내가 원하면 늙어 죽을 때까지 보살펴 주겠다고 했지만...말년에는 이곳저곳을 돌아다녀 보고 싶었거든. 열다섯 살에 고용된 이래 평생을 한 가문에 묶여 살았으니 말이야."
"다른 가문에서 붙잡거나 하지는 않습니까?"
"뭐 하러 그러겠나? 내가 엄청난 업적을 세운 유능한 기사도 아니고 재능 있는 젊은이도 아닌데. 이런 늙은 개를 붙들어 봐야 밥값만 축내지."
늙은 개라고 자기 비하를 하면서도 그의 얼굴에는 감출 수 없는 자부심과 여유가 묻어났다.
귀족들은 오만하고 잔학한 포식자에다 기사는 그들이 부리는 감정 없는 사냥개라고만 들었건만.
케오른은 지금껏 그가 보아온 어떤 어른보다도 여유롭고 유쾌한 사람처럼 보였다.
그렇게 즐거운 식사를 마친 뒤, 케오른이 일어서며 식탁에 작은 은화 한 닢을 내려놓았다.
윗면에는 누군지 모를 잘생긴 남자의 얼굴이 새겨져 있었다.
"아라비온 은화라네. 은화 중에서도 가장 순도가 높지. 마을에서 거래하면 식사비로는 모자라지 않을 거야. 물론 이 동네는 물가가 좀 비싼 것 같지만 말일세."
케오른은 이놈의 마을이 도와주러 온 사람까지 등쳐먹으려 든다고 툴툴댔는데, 그간 경험해온 마을 사람들의 인성을 생각하면 썩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투란은 은화를 챙긴 뒤 정중히 인사했다.
"부디 순조롭게 사냥에 성공하시길 바랍니다."
"너무 그렇게 못 볼 사람처럼 굴지 말게나. 도중에 몇 번 더 얻어먹으러 올 수도 있으니까!"
2화
"모두, 이쪽으로 모여."
황혼이 지는 언덕의 중턱, 투란의 지시 한 마디에 한가로이 풀을 뜯던 양 떼가 몰려들었다.
짖어대며 길을 인도하는 목양견이나 옆구리를 찌르는 양치기의 지팡이 없이도 일사불란하게.
마법의 힘이 작용한 결과였다.
지난 팔 년간 알아본 바에 의하면 마법에는 크게 세 가지 특징이 있었다.
첫째, 무언가를 강력히 갈망하면 마력을 대가로 자신이 원하는 바가 실행된다는 것.
둘째, 그 원하는 바를 직접 입으로 말하면 더 쉽게, 적은 마력을 소모해서 이룰 수 있다는 것.
마지막 셋째는 원하는 소원이 어려운 일일수록 더 많은 힘을 소모하거나-아예 불가능하게 된다는 것.
여기서 '어렵다'라는 조건은 그리 명확하지 않았다.
때로는 이게 이렇게까지 쉽게 들어줄 일인가? 싶을 정도로 너그러웠고, 때로는 고작 이것도 못 들어주나 싶을 정도로 야박했다.
며칠 전 표범 마수와 싸웠던 때만 해도 마찬가지였다.
즉사보다도 훨씬 간단한 조건인, 멈추라는 명령조차 놈에게는 거의 통하지 않았다.
평범한 양 따위라면 동시에 백수십 마리까지도 어렵지 않게 통제할 수 있는데도.
그에 비해 투석구에 놈의 머리통을 부숴버릴 힘과 속도, 그리고 반드시 명중하게 하는 가호를 싣는 것은 우스우리만치 간단했다.
당시 소모된 힘의 양을 계산하자면 투란은 그와 같은 공격을 수백 번쯤 해낼 수 있었다....
생각에 잠긴 채 모든 양을 축사로 밀어 넣었을 때쯤,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옅은 피 냄새가 풍겨왔다.
며칠 전 라부스의 죽음을 감지했을 때처럼.
하지만 그의 예민한 후각으로 감지하건대 인간의 피 냄새는 아니었다. 양도, 표범도 아니고....
'늑대?'
일 년 전쯤 죽여서 도축했던 늑대의 피 냄새가 딱 이런 느낌이었던 것 같았다.
예상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케오른이 죽은 늑대 한 마리를 어깨에 얹은 채 석양을 등지고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좋은 저녁일세, 투란. 괜찮으면 오늘 밤 집에서 묵을 수 있겠나? 숙박비는 이 늑대로 대신할까 하네만."
늑대는 꽤 괜찮은 사냥감이었다.
가죽은 마을 놈들에게 팔 수 있고, 고기 역시 먹으려고 키운 것들만은 못하지만 썩 나쁘지 않았다.
말하자면, 하루 숙박비로는 과할 정도로 훌륭했다.
투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근처에는 늑대가 거의 없을 텐데, 얼마나 멀리까지 갔다 오신 겁니까?"
투란이 지난 몇 년간 주변을 순찰하며 늑대 무리가 보일 때마다 공격해 댄 탓에 이 주변은 육식동물의 씨가 마르다시피 한 지 오래였다.
애초에 히사릴 언덕 자체가 워낙 황량한 곳이라 동물이 많이 살지 않는 곳이기도 했고.
"하늘산맥 인근을 둘러보다 찾았지."
하늘산맥은 세상의 서쪽 끝인 히사릴 언덕에서도 더 서쪽에 있는, 이름 그대로 저 하늘까지 뻗어 오른 산맥을 말했다.
혹자는 대장벽이라고도 불렀는데, 이름 그대로 사람이 절대 넘을 수 없는 장벽에 가까운 형상을 하고 있었다.
"기슭까지 가는 데만 해도 며칠은 걸릴 텐데...."
"내 걸음이면 반나절로 충분하더군."
투란 역시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일이기에 특별히 놀라지는 않았다.
그저 이 마법사가 정말로 허풍선이는 아니었구나, 하고 생각하며 내심 경계심을 높였을 뿐.
잠시 후 두 사람은 집 앞에 피운 모닥불에 둘러앉아 늑대고기 스튜로 저녁 만찬을 즐겼다.
케오른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휘파람을 불었다.
"이곳 별이 정말 밝구만 그래."
"어머니에게 듣기로 이 언덕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땅 중 하나라더군요. 저 서쪽의 하늘산맥만 빼면 말이죠."
"그곳과 비교하면 어딘들 높겠나? 오늘 다녀와 보니 새삼 더 감탄하게 되더군. 아마 귀족들조차 그곳을 넘기는 쉽지 않을 거야."
"귀족들은 신처럼 강한 힘을 지녔다던데, 산맥쯤은 훌쩍 넘을 수 있지 않나요?"
"다 그런 건 아닐세. 대가문의 가주쯤 되면 정말 신이나 다름없지만...."
케오른은 아라비온의 가주가 손짓만으로 작은 언덕을 짓뭉개버리는 것을 본 적 있다며 자랑하듯 말했다.
"오...."
투란은 그 말을 듣고 문득 부끄러움을 느꼈다.
가끔 자신의 힘이 생각보다 더 강하니, 어쩌면 귀족과 같은 수준이 아닐까 하고 망상하곤 했기 때문이었다.
지금 듣고 나니 진짜 귀족들과 비교하면 그가 가진 능력은 실로 하찮은 수준에 불과했다.
"그런데 이런 곳에서 혼자 살면 적적하지는 않은가?"
"그야 그렇지요. 그래도 이젠 익숙합니다."
"마을에서 처자라도 하나 데려와 살지."
"이런 곳에서 평생 양이나 치며 살고 싶은 여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자네처럼 잘생긴 청년이랑 함께 산다고 하면 좋아할 아가씨가 꽤 있을 것 같은데?"
케오른의 너스레에 투란은 멋쩍게 웃었다.
어린 시절 마을에 몇 번 들를 때면 그가 좋다고 따라다니던 여자애들도 있었지만, 어머니가 죽고 마을과 전쟁을 치른 후에는 완전히 교류가 끊겼다.
그녀들 역시 현실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투란과 결혼한다는 건 평생을 이 적막한 언덕에서 유배당한 것처럼 살아야 한다는 의미임을.
"뭐, 너무 그렇게 생각하지 말게. 누가 알겠나? 지나다니는 처자 한 명이라도 있어서 인연이 될지."
물론 지난 18년간 찾아온 여행객이 케오른 한 명이었음을 생각하면 어림도 없는 이야기였다.
그렇게 실없는 대화를 몇 차례 주고받은 뒤, 두 사람은 잠시 말없이 모닥불을 바라보았다.
먼저 침묵을 깨트린 이는 투란이었다.
"왜 이렇게까지 하십니까?"
"음?"
"촌장이 뭘 약속했는지는 몰라도 어르신의 실력이면 더 편하게 많은 돈을 버실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어느 마을이건 주저앉아 머물며 자신이 이곳을 수호하겠다고, 그러니까 그 대가로 재물과 여자를 바치라고 하면 누가 감히 거절하겠는가?
마수 한 마리 잡겠다고 온종일 흙먼지를 먹으며 양치기의 집에서 머무르는 것보다 수백 배쯤 편하고 간단한 방법이었다.
반나절 만에 하늘산맥에서 늑대를 잡아 오는 사람이라면 능력 역시 부족하지 않을 테고....
심지어 마을 사람들이 그런 호의를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냐면 그렇지도 않았다.
애초에 투란의 집에서 묵는 것부터가 마을에서 지나치게 비싼 숙박비를 매긴 탓이니.
만약 그가 케오른과 같은 상황이었다면 마을 건물을 다 때려 부수고 돈을 챙겨 떠났을 것이다.
"가여운 사람들이잖나."
"어떤 점이 말입니까?"
"마법사의 보호도 받지 못한 채 이런 변방에서 하루하루 떨며 살아가는 것이."
늙은 기사는 투란의 앞에 마주 앉아 마치 아들을 가르치듯 자상한 어조로 설명했다.
이곳 히사릴 언덕 주변은 비교적 황량한 지역이라 평온할 뿐, 저 풍요로운 지상에서는 무수히 많은 마수가 산과 들에서 활개를 치며 사람들을 잡아먹는다고.
모름지기 마법사 된 이는 신의 힘을 물려받은 자로서 힘없는 평민을 마수로부터 지키는 것이 긍지라, 이제는 가문에 봉사하지 않는다지만 그냥 두고 볼 수는 없노라고.
투란이 어머니에게 들었던 것과는 사뭇 다른 이야기였다.
그녀가 말했던 귀족들이란 탄압하고 착취하는 이요, 기사는 그 밑에서 일하는 부역자일 뿐이지 않던가....
의아해하는 기색을 읽었는지, 늙은 기사가 씩 웃으며 양젖이 든 그릇을 내밀었다.
"뭐, 다 나처럼 생각하는 건 아니라네. 세상에 사람이 만 명이면 만 개의 생각이 있는 법이니까."
* * *
다음 날 아침, 투란은 가벼운 손짓 한 번으로 축사를 청소하며 생각에 잠겼다.
그가 머릿속에 떠올린 것은 지난밤의 대화였다.
'긍지라....'
그 대화에서 투란은 작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기사란 존재가 그저 귀족의 힘에 굴복한 노예가 아닌, 스스로 평민을 보호하며 보람을 느끼는 존재일 수 있다니?
그 사실을 안 것만으로 어느 귀족을 찾아가 자신을 부려달라 간청할 생각까지는 들지 않았으나, 적어도 마음이 조금 열리기는 했다.
저런 사람이 있다면 귀족 밑에서 사는 것도 그렇게까지 나쁘지만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정도로....
'그건 그렇고, 마수가 이미 죽었다는 걸 어떻게 알리지.'
사실 원래는 한참 헤매다가 떠나도록 내버려 둘 생각이었지만, 케오른처럼 좋은 사람이 이런 황량한 곳에서 허송세월하게 두고 싶지는 않았다.
문제는 이미 마수의 시체를 깊은 골짜기 밑으로 던져버린 지 며칠이 지났다는 것.
그 썩어 문드러진 것을 찾아서 가져다주는 것부터가 고역일뿐더러, 거기에는 투란이 부린 마법의 흔적이 역력할 터였다.
이 주변에서 마법사를 찾자면 가장 수상한 인물이 투란일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었고.
한숨을 내쉬며 손을 내젓자 축사에 쌓여 있던 양의 똥오줌이 모조리 뒤뜰로 날아갔다.
이제 저것이 언덕의 건조한 기후에 바싹 마르면 벽난로에 불을 땔 때 쓰기 좋은 연료가 될 터.
그렇게 청소까지 마치고 나니 시간이 조금 남았다.
'한번 어르신이나 찾아볼까....'
어제처럼 멀리 떠났으면 찾을 수 없겠지만, 듣기로 오늘은 언덕 주변을 좀 더 집중적으로 순찰하겠다고 했으니 충분히 확인할 수 있을 터였다.
투란은 가볍게 정신을 집중하여 지붕 위로 둥실 몸을 띄운 채 주문을 외웠다.
"인간 탐색."
주문과 동시에 투란의 인지능력이 급속도로 팽창했다.
고작해야 백수십 미터까지만 보이던 시야는 순식간에 수 킬로미터 거리에 자라난 들풀조차 구분할 정도가 되었고, 후각과 청각은 그 이상으로 증폭하며 가까운 곳에 있는 벌레들의 다리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옅은 개미산 냄새마저 포착했다.
하지만 그렇게 증폭된 오감은 불필요한 정보를 모두 차단한 채, 오로지 '인간'을 찾는 데만 집중됐다.
'어디...음?'
귀를 기울이며 사방을 둘러보기도 잠시, 투란은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휙 돌렸다.
증폭된 시야로 케오른의 모습이 보였다.
이마와 어깨에서 피를 흘리며 헐떡이는....
그 맞은편에는 투란이 며칠 전 죽였던 표범 마수가 반쯤 썩은 몸뚱이를 이끌고 포효하고 있었다.
* * *
'대체 어떤 놈이 이런 짓을....'
케오른은 죽은 마수의 사령(死靈)을 보며 이를 갈았다.
생물은 대부분 죽는 순간 본능적으로 삶을 갈구하며, 전능의 열쇠인 마력은 그러한 주인의 의지를 이행하고자 망가진 육체를 억지로 살려내니 이를 사령이라 했다.
이 때문에 마법사와 마수를 죽인 뒤에는 그 시체에 담긴 마력을 빨아들이거나 흩어 버리는 것이 규칙.
하지만 눈앞의 표범 마수를 죽인 이는 그런 규칙을 모르거나 의도적으로 무시한 모양이었다.
마수라면 본능적으로 자신이 죽인 적을 먹어 치워 마력을 흡수했을 테니 아마 마법사일 터.
머리에 난 구멍으로 짐작건대 투사체 주문에 능한 인물일 것이다.
[■■■■--!!]
썩어 문드러진 성대에서 토해낸 포효가 망자의 외침처럼 허공에서 수없이 메아리쳤다.
저것의 정체를 생각하면 썩 틀린 말도 아니긴 했다.
"받아라!"
고함과 함께 케오른의 손에서 빛의 화살이 쏘아졌다.
강철 갑옷조차 우습게 꿰뚫는 위력의 공격이건만, 표범의 몸을 뒤덮은 그림자에 접촉하자 화살은 맥없이 흩어졌다.
몸을 감싼 마력이 케오른의 화살 주문보다 월등히 강력하다는 뜻이었다.
그렇게 한 차례 공격을 무력화한 표범은 마법에는 마법으로 대항하겠다는 듯, 땅속으로 녹아들더니 순식간에 케오른의 뒤쪽 그림자에서 실체화했다.
다급히 두 팔을 들어 방어했으나 날카로운 발톱에 걸린 팔뚝에서 뜨거운 핏줄기가 솟구쳤다.
그나마 마력으로 담금질 된 몸이라 이 정도지, 보통 사람이었다면 그대로 팔과 몸통이 날아갔을 수준의 공격이었다.
'이건...기사가 대적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야. 적어도 하위 귀족쯤은 되어야-'
사령이 부활 과정에서 원념으로 몇 배나 강해진다지만, 숙련된 기사인 케오른조차 감히 대적하기 힘들 정도라면 생전에도 강력한 마수였을 게 분명했다.
대체 누가 이런 놈을 죽이고 방치했단 말인가?
도대체 무슨 의도로?
[그르르-]
사령은 다 잡은 먹잇감이라 생각했는지, 여유롭게 으르렁대며 케오른을 향해 다가왔다.
늙은 기사는 죽음을 직감하고 이를 악물며 최후의 반격을 준비했다.
놈이 덤벼드는 순간, 모든 마력을 손에 실어 직접 찔러넣는다면 일말의 희망이 있을지도....
그렇게 비장한 마음가짐으로 계획을 짠 보람이 없게도, 저 멀리 떨어진 곳에서 번쩍이는 섬광 하나가 날아들었다.
너무나도 빠른 나머지 소리의 장벽마저 넘어선, 그래서 청각으로는 그 존재를 인지할 수조차 없을-
둥근 돌멩이가 사령의 썩은 머리통을 산산이 조각냈다.
3화
일격에 마수의 머리를 분쇄한 투란은 투석구를 한 손에 쥔 채 케오른을 향해 다가갔다.
사실 저 기사를 돕겠다는 결정은 투란으로서도 꽤 큰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었다.
케오른이 섬기던 가문으로 돌아가서 이곳에 젊고 쓸만한 노예 한 놈이 있다는 사실을 알리기만 해도 당장 도망쳐야 할 판 아닌가.
그런데도 나선 것은 손님을 보호하는 것이 히사릴 언덕의 영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요, 저 늙은 기사가 손님으로서 예의를 지키며 투란을 존중했기 때문이었다.
"괜찮으십니까?"
그런데 어째서일까, 케오른은 투란이 아닌 머리가 깨져 널브러진 표범 마수를 경계하고 있었다.
"조심하게!"
그게 무슨 뜻이냐, 하고 되물을 필요는 없었다.
표범 마수가 머리 없는 몸뚱이를 휙 일으키더니 투란을 향해 덤벼든 탓이다.
본래는 구멍이 나 있던, 그리고 이제는 완전히 으스러진 머리통을 대신해 일렁이는 연녹색 광채가 솟아났다.
다행히 미리 경고를 들은 덕에 투란은 덤벼드는 마수의 몸뚱이를 발로 걷어차며 거리를 벌릴 수 있었다.
강하게 차인 마수의 몸은 그대로 수십 미터를 데굴데굴 굴러갔으나, 썩 큰 타격을 입은 것 같지는 않았다.
"사령은 물리적인 공격으로는 죽일 수 없네!"
"그러면 어떻게 죽여야 합니까?"
"불이나 번개로!"
조언을 들은 투란은 곧장 마수의 몸뚱이에 불꽃을 피웠으나, 지난번에 그랬듯 번갯불이 번쩍이며 피어오르려던 불꽃이 맥없이 꺼져버렸다.
이 모습을 본 케오른은 그제야 마수를 죽인 것이 투란이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다른 마법 생물에게 마법의 힘을 직접 적용하는 데는 적절한 인과(因果)가 요구된다는 것은 마법사에게 있어 기초적인 상식이건만, 눈앞의 양치기 청년은 그런 이치조차 전혀 모르는 기색이지 않은가.
당연히 죽은 마수의 마력을 흩어내야 한다느니 하는 이치 역시 몰랐을 터였다.
"불을 피우지 말고 만들어서 쏘게!"
케오른은 조언하면서도 투란이 이를 해내기 어려우리라 생각했다.
불꽃을 피워내는 것이야 어린 마법사들도 본능적으로 해내는 일이지만, 이를 직접 조종하는 것은 별도의 훈련이 필요한 기술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걱정하기가 무섭게, 투란의 손 위에서 솟아난 불꽃이 손 주변으로 빙빙 돌더니 원심력이라도 실린 것처럼 마수에게 쏘아졌다.
가장 익숙한 공격수단인 돌팔매질의 원리를 그대로 따온 것이었다.
[■□■□■□■--]
날아든 불꽃이 영체에 옮겨붙자 마수가 괴성을 내지르며 그 자리에 나뒹굴었다.
어떻게든 땅에 비벼서 꺼보려는 심산인 듯했으나, 마법의 불은 주인의 마력을 살라 먹으며 끊임없이 불탔다.
케오른의 공격이 전혀 먹혀들지 않았던 것과 반대로, 투란의 마력이 상대보다 명백히 우위에 있다는 뜻이었다.
투란은 정신을 바짝 집중한 채 마수의 몸에 붙은 불길이 꺼지지 않도록 계속해서 힘을 주입했다.
삼십 초 정도가 지난 뒤, 마수의 몸을 감싸던 영체가 절규하며 곧바로 몸뚱이가 순식간에 타들어 갔다.
투란과 케오른은 동시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진짜 끝난 거 맞습니까?"
"그렇지...우선 마력부터 흡수하시게. 또 사령을 만나고 싶지 않다면."
마력을 흡수하는 방법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시체 위에 손을 뻗은 채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빨아들이는 듯한 상상을 할 것.
그것만으로도 조금 전의 영체와 같은 색을 띤 아우라가 흘러나와 몸으로 스며들었다.
투란은 생전 처음 느끼는 감각에 전율했다.
몸속으로 무언가가 차곡차곡 쌓이는, 그러면서 지금보다 더 강하고 이질적인 존재로 바뀌는 듯한 느낌.
오싹오싹한 쾌감에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정말로 마력을 흡수하는 게 이번이 처음인가?"
"예."
"믿기 힘들군...."
본래 마력은 첫 각성 후 나이를 먹으며 천천히 성장하지만, 다른 마수나 마법사를 죽여 흡수하지 않는 이상 그 상승치는 그리 높지 않았다.
그렇다면 지금 저 능력이 온전히 타고난 힘만을 발휘한 결과라는 의미 아닌가?
마력 흡수로 성장할 수 있는 한계치가 타고난 마력량에 비례함을 생각하면 그 잠재력이 가히 대단할 것이 분명했다.
새삼 그 사실을 깨달은 케오른은 가볍게 헛기침한 뒤 정중한 말투로 물었다.
"그동안 실례가 많았습니다, 공자님. 혹시 어느 가문에 속한 분이신지 알 수 있겠습니까?"
케오른의 그런 공손한 태도에 투란은 불편함을 느꼈다.
이유를 명확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이 노기사가 자신을 이렇게 낮추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우선 몸부터 좀 추스르고 이야기하시죠."
케오른은 아직도 발톱에 긁힌 눈썹 위쪽에서 피를 줄줄 흘리는 중이었다.
* * *
"크으...."
머리에 지혈 효과가 있는 약초즙을 바른 뒤 붕대를 감자 케오른이 작게 신음했다.
투란의 집에는 다칠 때를 대비한 약초와 붕대-사실 잘 씻은 천 조각에 가까운 물건이었다-가 준비되어 있었기에 그럭저럭 괜찮은 응급처치를 해줄 수 있었다.
마법으로 순식간에 치료해 버릴 수 있다면 좋았겠지만, 과거 타박상을 입은 어머니를 치료해 본 경험상 타인의 상처를 치료하는 것은 마력의 소모가 지나칠 정도로 심했다.
아마 투란이 모든 마력을 소모해야 찢어진 머리 가죽의 일 할 정도나 간신히 붙일 수 있을 것이다.
"실례가 많습니다, 공자님. 귀하신 분에게 이런 일을 시키게 하다니."
"몇 번이고 말했지만 귀하신 분 아닙니다.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양치기일 뿐."
그러니까 나를 그런 식으로 대하지 말라는 뜻을 눈빛에 꾹꾹 눌러 담아, 투란은 늙은 기사를 째려보았다.
잠시 눈싸움을 한 뒤 케오른이 못 당하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알았네, 알았어...그렇게 보지 말게나."
그런 모습에 투란 역시 피식 웃었다.
"그런데 자네 같은 강력한 마법사가 왜 이런 곳에서 양치기 일을 하는 건가? 내 양치기 일을 비하할 마음은 없네만, 썩 어울리지는 않는 것 같은데."
마치 어제 당신 같은 사람이 왜 이런 데서 마수 사냥이나 하고 있느냐고 물은 것을 거꾸로 뒤집은 듯한 질문.
투란은 케오른이 그랬듯 양치기 일에 자긍심을 가지고 있노라고 대답할 수는 없었다.
"이야기하자면 조금 깁니다."
투란은 자신의 어린 시절을 덤덤히 풀어놓았다.
마법을 깨달은 것, 어머니에게 들은 무서운 귀족들의 이야기 등등....
이를 모두 들은 케오른이 고개를 끄덕였다.
"현명하셨구만."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조금 의외의 답이었던지라 투란은 눈을 슬쩍 치켜떴다.
자신의 신분을 자랑스러워하는 케오른이라면 투란의 어머니가 너무 겁이 많았다고, 언덕 아래의 세상이 그렇게까지 지옥인 것은 아니라고 말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
"이십여 년 전, 내가 있던 아라비온 가문은 대가문인 자하르 가문과 전쟁을 치렀다네. 그 당시 아라비온의 기사 삼천여 명 중 구백 명 이상이 죽었지."
"거의 삼 분의 일이 죽었군요."
"정말 운이 없는 건 그 삼 분의 일 안에 내가 알던 사람들 모두가 포함됐다는 거야. 내 가장 친한 친구 두 명도, 아내도, 아들도 죽었다네. 오직 나만이 살아남았어."
그렇게 말하는 케오른의 얼굴에는 뭐라 형용하기 힘든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
투란은 감히 그의 슬픔을 헤아릴 수 없었다.
그저 그가 어머니를 잃었을 때만큼이나, 어쩌면 그보다도 더 슬펐으리라 짐작할 뿐.
긴 침묵이 이어진 뒤, 케오른이 다시 얼굴 표정을 밝게 되돌리며 화제를 바꿨다.
"자네 어머님의 말씀대로 기사의 목숨은 때로 평민들보다도 더 쉽고 덧없이 사라지지. 하지만 한 가지 틀린 게 있다면, 자네가 가진 자질은 고작 기사 수준이 아니란 걸세."
"그런가요?"
"이 꼴로 말하기는 민망하네만 나는 꽤 괜찮은 실력의 기사라네. 하지만 그런 나조차 대적하기 힘든 마수를 자네는 손쉽게 처치했지. 마력조차 제대로 흡수하지 않은 상태로."
양젖을 마시며 숨을 한 번 돌린 케오른이 선언했다.
"그 정도면 귀족, 그중에서도 최소 상위권의 자질일세."
투란으로서는 썩 실감이 나지 않는 이야기였다.
어머니로부터 그의 재능이 기사 수준이라 재단 받고 살아온 세월이 길었던 탓일까.
어쩌면 케오른이 지나치게 자신을 과대평가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어머니는 제 아버지가 기사였다고 하셨는데, 그게 거짓말이었던 걸까요?"
"키가 큰 사람들 사이에서 키가 큰 사람만 태어나지는 않듯 언제나 예외는 있지. 귀족 사이에서 기사만도 못한 이가 태어나거나 기사 사이에서 귀족급 마법사가 태어나는 경우도 드물지만 존재하네."
투란은 마을 사람들, 그중에서도 목수 가족을 떠올렸다.
키가 짤막한 목수 부부의 첫째 아들은 부모와 마찬가지로 키가 작았지만, 둘째는 껑충하니 키가 컸더란다.
물론 그 둘째의 얼굴이 마을 주민 중 하나인 덩치 큰 나무꾼과 유난히 닮긴 했지만....
"그런 의미에서 나는 자네가 언덕 아래로 내려가는 게 더 좋으리라 생각하네."
"어째서입니까?"
"우리 인간에게는 더 많은 귀족과 기사가 필요하니까. 아직 인간은 온전한 세상의 주인이 아닐세. 마수들은 물론, 먼 옛날 신들에게 밀려난 여러 이종족이 호시탐탐 재기할 기회를 노리고 있지. 그런 와중에 귀족들은 서로 전쟁이나 해대고 있고. 자네처럼 강하고 선량한 귀족은 한 사람이라도 절실하다네."
이종족....
어머니가 들려주던 옛날이야기에서나 몇 번 나오던, 투란에게는 신이나 악마만큼 허황되게 여겨지는 존재였다.
잘은 모르겠지만 아래 세상에서 그들은 실질적인 위협으로 여겨지는 모양이었다.
"거기다 재능있는 젊은이가 이곳에서 삶을 낭비하는 것이 안타깝기도 하고. 자네, 양치기로 사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 아닌가?"
조금 전 양치기 일을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지 않은 것을 기억한 것일까.
투란은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자네 어머님이 걱정했던 바는 크게 신경 쓸 것 없네. 평범한 기사라면 모를까, 대가문조차 같은 귀족에게는 최소한의 존중을 보이는 법이니까. 자네처럼 강력한 귀족이라면 말할 것도 없고."
"어느 가문에 무턱대고 끌려갈 염려는 없다는 거군요."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 확신할 수는 없네만."
투란의 머릿속에서 온갖 생각이 교차했다.
케오른이 한 말을 믿어보고 싶다는 생각, 그리고 평생을 키워온 탓에 없어지지 않은 귀족들에 대한 두려움.
두 가지 감정이 팽팽하게 대립했다.
그가 깊은 고민에 빠진 사이, 케오른은 몸 이곳저곳에 붕대를 감은 채 침대에 앉아 참을성 있게 이를 기다렸다.
수십 분이 지난 뒤 투란이 나지막이 물었다.
"제가 저 아래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요?"
그 안에 담긴, 세상에 나가보겠다는 의지를 읽은 케오른이 웃으며 이에 답해 주었다.
"무엇을 원하냐에 따라 다르겠지. 재물, 명성, 권세, 그게 아니면 가족이나 우정 등...그 어떤 것도 이곳에서는 얻기 힘들지 않겠나."
케오른은 투란에게 지상에서 할 수 있을 만한 일들을 하나하나 제시했다.
지금의 그처럼 세상을 방랑하며 사람들을 위협하는 마수를 해치운다거나, 아직 인류가 개척하지 못한 미지의 세상을 탐험하는 탐험가가 된다거나, 그도 아니면 어느 가문에 입양되어 권력자의 길을 걷는다거나....
확실한 건, 그중 어떤 것도 히사릴 언덕에서 양을 치는 것보다는 재밌을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미처 생각 못 했는데, 자네 혹시 어떤 혈통 능력을 가지고 있나? 이걸 먼저 물어봐야 했는데 깜빡했군."
"혈통 능력 말입니까?"
처음 듣는 단어에 투란이 되묻자 케오른은 아차 하고 혀를 찼다.
그는 아직 이 양치기 청년이 마법 세계에 대해 무지하다는 사실에 익숙해지지 않은 상태였다.
"우리가 가진 마법의 힘이 선조인 프레아 신족에게서 기인한다는 것은 알고 있나?"
"어머니에게 들은 적 있습니다."
"귀족은 보다 프레아 신족에 가까운 존재로서, 조상인 신이 가지고 있던 특징 일부를 물려받는다네. 이 혈통 능력의 유무가 귀족과 기사의 차이이기도 하지. 가문들 역시 같은 혈통 능력을 가진 이들끼리 모이기 마련이고."
"혈통 능력의 존재는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혹시 마법을 쓰면서 유난히 어떤 마법을 쉽고 간단하게 쓸 수 있다거나, 반대로 어떤 마법은 어렵게 느껴진다거나 한 적 없나? 그게 아니면 마법을 쓰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남들보다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거나."
"남들보다 힘이 센 건 아니겠죠?"
"마법사는 마력을 가진 것만으로도 신체 능력이 강해지지. 더 빠르고 강하고 튼튼해지고 싶은 것은 모든 동물이 가지는 자연스러운 본능이니까. 강한 힘 역시 혈통 능력 중 하나지만 내 생각에 자네의 힘이 그 정도는 아닌 것 같군."
케오른의 말에 투란은 생각에 잠겼다.
그가 가진 능력 중 유난히 두드러진 것....
"저는 코가 좋습니다. 눈이나 귀도 남들보다 좋은 편이긴 합니다만, 두드러지는 건 그쪽인 것 같네요."
그중에서도 특히 피 냄새를 맡는 데는 도가 터서, 냄새만으로 피를 흘린 생물이 무엇인지까지 얼추 구분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이를 들은 케오른이 고개를 끄덕였다.
"후각이 뛰어나다...그 정도로 정밀하다면 혈통 능력으로 간주하기 충분하네. 그리고?"
"돌멩이를 잘 던지는 편입니다. 어려서부터 어머니한테 배워서 그런 거긴 하지만요."
투란은 다섯 살이 되었을 때부터 어머니에게 돌팔매질을 배웠다.
평범한 양치기가 가장 무서운 적, 늑대와 표범 따위를 가장 효과적으로 상대할 방법이었으니까.
거기다 얼마 전에 느꼈듯, 돌멩이에 힘을 실어 던질 때 유난히 마력 소모가 적다고 느끼기도 했다.
"투사 무기에 능함. 이건 우리 아라비온 가문의 특징 중 하나로군그래. 혈통 능력 수준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런가요?"
"사실 이건 꽤 흔한 특징이라네. 투사체를 쏘는 데 능하거나, 육탄전에 능하거나, 둘 다 적당히 하거나. 크게 세 가지로 분류되지."
이후로도 투란과 케오른은 몇 차례 문답을 나누며 유난히 잘하는 것과 아닌 것을 분류했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대화를 나눌수록 케오른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졌다.
그러한 기색은 갈수록 두드러져, 마지막 문답을 나눈 뒤에는 거의 한탄하는 듯한 표정이 되어 있었다.
"알 것 같네."
"어디입니까?"
어째서인지 케오른은 투란의 질문에 곧바로 답을 주지 않았다.
몇 차례 머뭇거리던 그가 마지 못해 입을 열었다.
"몇 가지 후보가 있지만...자하르 혈통의 특징이 가장 두드러지는군. 추격자, 혹은 사냥꾼이라고도 불리지."
자하르, 그 이름을 입안에 한 번 굴리던 투란은 묘하게 익숙한 느낌이라고 생각했다.
어머니에게 마법사 가문에 관한 이야기 따위는 들어본 적 없는데 어째서?
케오른의 우울한 얼굴을 보니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자하르는 바로 케오른의 가문인 아라비온과 전쟁하여, 그의 친구와 가족을 모두 몰살시킨 가문의 이름이었다.
4화
살다 보면 때로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알기 힘든 난처한 상황에 부닥치고는 한다.
지금 투란이 바로 그랬다.
당신의 원수들과 같은 혈통을 타고나서 죄송하다고 사과라도 해야 할까?
그로서는 생전 본 적도 없는 친척들이 행한 일인데도?
그렇다고 나는 모르는 일이요, 하고 넘기는 것 또한 지나치게 뻔뻔한 일처럼 느껴졌다.
애초에 그가 타고난 강대한 마법의 힘 자체가 바로 그 핏줄에서 기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조상의 유산 중 좋은 것은 물려받겠지만 나쁜 것은 내 알 바 아니라고 우기는 셈 아닌가....
끔찍하리만치 긴 침묵이 얼마나 이어졌을까.
케오른이 투란의 어깨를 팡 두드렸다.
"그렇게 죽을 듯한 표정 짓지 말게! 자네가 그 당시 전쟁에 참여했던 것도 아니지 않나?"
투란으로서는 죽을 듯한 표정은 당신이 짓고 있었다고 말하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이를 입 밖에 꺼내기는 어려웠기에 그냥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어른들의 사정에 자네와 같은 젊은이들이 말려드는 것이야말로 무의미한 일일세. 피로 피를 씻으려다 보면 싸움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테지. 고통받는 건 평범한 사람들의 몫일 테고 말이야."
그렇게 말하면서도 케오른의 얼굴에 어린 씁쓸한 기색은 채 가시지 않았다.
투란은 그런 그를 향해 나지막이 물었다.
"후회하십니까?"
"무엇을?"
"제게 언덕 아래로 내려가라고 하신 것을요."
만약 투란이 권력을 추구하게 된다면 필연적으로 자하르 가문에 합류하게 될 터였다.
결국 귀족 가문은 같은 혈통 능력을 가진 이들만이 핵심 구성원이 될 수 있다고 했으니까.
이는 케오른이 섬기던 아라비온 가문에게 치명적인 타격이 될 가능성이 컸다.
전쟁까지 치렀을 정도로 적대적인 진영에 강력한 마법사 한 명이 갑자기 합류하는 것이니 당연한 일.
그런 투란의 지적에 케오른이 고개를 저었다.
"나는 자네의 인품을 믿네. 모르는 손님을 훌륭히 대접하고 숨겨 왔던 정체를 밝혀가면서까지 나를 도와주려고 한 선량함을. 오히려 자하르 가문에 자네 같은 이가 합류한다면, 그리고 가문을 이끌어가는 위치에 오른다면 그런 끔찍한 전쟁이 또다시 일어나는 것을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투란은 케오른이 자신을 지나치게 좋은 사람으로 여기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가 케오른을 극진히 대접한 것은 어머니에게 그러라고 배웠기 때문에, 또한 적대적이지 않은 사람과의 대화가 고팠기 때문일 뿐이었다.
위기에 처한 케오른을 도운 것은 그저 즐겁게 대화를 나눈 사람이 죽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고.
만약 케오른이 퉁명스럽게 투란을 대했다면 그가 죽건 말건 개의치 않았을 터.
투란이 생각에 잠긴 채 묵묵히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자 케오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뭐, 그리 심각하게 생각할 것 없네. 어차피 자하르 가문에 합류하겠다고 정한 것도 아니잖나."
"그건 그렇지요."
사실 지금은 케오른이 하는 것처럼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며 마수를 사냥하는 쪽이 더 끌렸다.
어딘가에 얽매이는 것도 썩 내키지 않고, 그쪽이 더 넓은 세상을 둘러볼 수 있을 테니까.
거기다 이야기를 듣고 나니 자하르 가문에 대한 막연한 악감정이 생기기도 했다.
"어차피 어르신의 부상이 다 나을 때까지는 여기 머물 생각이니까요. 천천히 생각해 보겠습니다."
"부상이라고 하니 너무 거창하게 들리는구만. 고작해야 좀 긁히기만 한 건데 말이야!"
케오른이 껄껄 웃었다.
* * *
케오른이 부상을 치료하는 동안, 투란은 그에게서 본격적으로 마법 지식을 배우기로 했다.
가진 힘을 제멋대로 휘두르기만 했을 뿐 무엇 하나 배운 적 없는 그이기에 알아야 할 것이 많고도 많았다.
"마법의 힘, 마력은 흔히 전능의 열쇠라고 하네."
"전능의 열쇠...."
"하지만 정말 이름처럼 전능한 힘은 아닐세. 정확히는 그러한 일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마력을 대가로 요구하지. 이는 자네도 경험해 봤을 걸세."
"일에 걸맞은 마력이라는 게 기준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이것이야말로 마법을 쓰며 늘 궁금했던 부분이었다.
투란의 질문에 케오른은 가볍게 헛기침하더니 손가락 세 개를 펼쳤다.
"마법의 난이도는 크게 세 가지 요소로 정해진다네. 첫 번째는 혈통, 두 번째는 개성, 세 번째는 인과."
혈통, 개성, 인과.
투란은 가만히 앉은 채 세 개의 단어를 머리에 새겨넣었다.
"첫째인 혈통은 간단히 말해 타고난 혈통 능력의 영향을 받는 걸세. 따라서 기사에게는 해당하지 않지. 예를 들자면...지금 내 상처를 자네가 치료하기는 힘들지 않나?"
"그렇죠."
"대륙 남서쪽에 사는 라비타스 혈통, 치유사 혈통이라고도 불리는 이들은 따로 훈련하지 않아도 상처를 치유하는 마법을 자연스럽게 구사하네. 강한 힘을 타고난 이라면 잘린 팔다리를 붙이고 온갖 병을 고칠 수도 있지. 그에 비해 다른 혈통은 아무리 노력해도 그런 능력을 얻는 게 불가능에 가깝고. 이런 경우일세."
그 말을 들은 순간 투란이 떠올린 것은 어머니였다.
만약 그가 그 혈통의 힘을 타고났다면 어머니가 병으로 죽는 일은 없었을 텐데....
하지만 이제는 무의미한 생각임을 알기에, 투란은 가볍게 입술을 짓씹으며 미련을 접었다.
"그러면 두 번째인 개성은 무슨 의미입니까?"
"다르게는 숙련이라고도 하는데, 마법사 본인이 선호하거나 익숙한 일을 더 쉽게 수행할 수 있다는 개념일세. 평상시 검을 자주 휘두르던 마법사는 무형의 검을 만들거나 존재하는 검을 강화하기가 더 쉽고, 물에서 노는 것을 좋아하는 마법사는 마법으로 물속에서 움직이기가 더 쉬워지는 식일세."
"제가 불꽃을 돌팔매질하듯 던진 것도 그에 해당합니까?"
"똑똑하군. 정답일세. 아마 평범하게 불꽃을 쏘아 보냈다면 그 정도 속도와 화력이 나오지 않았을 테지."
이미 한 번 경험해 보았기에 투란은 그의 말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었다.
현명한 학생을 보듯 흐뭇이 웃던 케오른이 갑자기 얼굴을 찌푸렸다.
"마지막 세 번째인 인과가 가장 중요한데, 이게 꽤 복잡하다네. 사실 나조차도 완벽히 이해하지는 못했어. 말하자면 '자연스러운' 일이 더 쉽게 일어난다는 개념인데...."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되는 듯, 손으로 턱을 한참 쓰다듬던 케오른이 설명을 시작했다.
"자네가 마력을 써서 나를 죽이려고 하면 어떻게 될까?"
"아마 머리에서 빛이 나고 끝나지 않을까요."
투란이 떠올린 것은 최근 마수를 대상으로 마법을 쓰려 했을 때의 현상이었다.
"그렇지. 그게 바로 인과의 부족으로 인해 일어나는 현상일세. 원하는 일에 적절한 원인이 없을 때, 그리고 이뤄야 하는 일이 지나치게 고난도일 때. 이 두 가지 경우에 모두 해당하기 때문이야."
"원인이라는 건 조금 알 것 같습니다."
"설명할 수 있겠나?"
"네. 예를 들어 제가 어르신을 죽이려고 한다면 그냥 막연히 마력을 소모해 죽음을 원하는 게 아니라 불덩이를 만든 뒤 쏘는 식으로 죽음의 원인을 제공해야 한다는 것 아닙니까? 불을 바로 붙이는 것보다 만들어서 쏘는 쪽이 더 '자연스러운'일로 여겨지는 거고요."
이는 아까 전 죽은 마수-사령과 싸울 당시의 경험을 통해 짐작한 것이었다.
투란의 말에 케오른이 감탄한 표정으로 손뼉을 쳤다.
"정확하네! 자네는 마법사가 아니라 학자를 해도 됐겠어. 아주 이해가 빠르군. 그 말대로 제대로 된 원인을 형성하는 것으로 마력의 소모를 극적으로 줄일 수 있지."
"그런데 평범한 늑대나 양은 마음대로 죽이고 조종할 수 있던데, 마수만 유독 그런 게 필요한 이유가 있습니까?"
평상시에 다른 동물에게 마법을 거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기에, 투란은 위험한 동물을 상대할 때 그냥 간단히 마법을 걸어버리곤 했다.
마법에 저항하는 현상은 이번에 마수를 상대하며 처음 겪게 된 것이었다.
"마력을 가진 생물은 가진 마력의 양만큼 마법에 저항하는 능력이 생기기 때문이네. 하지만 이미 완성된 마법을 움직여 접촉할 경우 그런 저항력을 상당량 상쇄할 수 있지. 물론 격차가 심하면 그러고도 마법이 안 통하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말이야."
케오른이 쏜 마법이 거의 먹히지 않은 데 비해 투란의 불꽃이 곧바로 사령을 태워버린 것 역시 이런 원리라고 했다.
즉, 마법사에게도 마법을 바로 거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우리라는 뜻.
그렇게 한참 설명을 듣다 보니 슬슬 머리가 지끈거리는 느낌에 투란은 엄지로 관자놀이를 꾹꾹 주물렀다.
"정말로 쉽지 않네요, 마법이란 건."
"훌륭한 마법사는 마력만 강하다고 되는 게 아니지. 마법의 원리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아는 것은 물론, 주변 상황을 이용할 줄 아는 것 역시 중요하다네."
투란은 눈을 감고 조금 전 케오른에게 배운 내용을 몇 차례 복습했다.
그러다 보니 미처 듣지 못한 게 하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자하르 혈통도 특별한 마법이 있습니까?"
케오른이 지적한 자하르의 선천적 특징은 과민하리만치 뛰어난 후각과 야간 시야, 투사체를 쉽게 쏘아 맞히는 재능 정도였는데 이것 중 마법 능력과 관련된 것은 없었다.
투란의 질문에 케오른이 고개를 끄덕였다.
"있네. 자하르의 마법사는 은신과 추적에 능하지. 혹시 그런 종류의 마법을 써본 적 있나?"
"추적은 몇 번 해본 적 있습니다. 은신은 없고요."
무언가를 찾는 마법은 어머니가 안전하게 있는지를 보기 위해, 혹은 언덕 주변을 배회하는 늑대를 잡아 죽이기 위해 몇 번 써본 적 있었다.
이번에 위기에 처한 케오른을 제때 발견하고 구한 것도 그 마법의 도움이었고.
그에 비해 몸을 숨기는 마법 같은 건 써본 적 없었는데, 당연하게도 투란이 이 언덕에서 누군가를 피해야 할 일 따위는 없기 때문이었다.
"한번 해보게. 투명 마법 정도는 적성에 따라 사용할 수 있는 마법사가 꽤 있네만, 완전히 인지에서 벗어나는 최고 수준의 은신은 자하르 혈통에만 허락된 능력이지."
투란은 곧장 정신을 집중하며 생각했다.
다른 이에게 보이고 싶지 않다, 소리도, 냄새도 느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곧바로 체내의 마력이 빠르게 소모되기 시작했다.
손과 몸을 내려다보았으나 변한 것은 없었다.
"혹시 된 겁니까?"
케오른은 투란의 질문에 답하는 대신 그가 있는 방향을 다소 초점이 맞지 않는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성공했군. 자네가 안 보이네. 아직 그곳에 있나?"
투란은 그대로 의자에서 일어나 천천히 방 안을 한 바퀴 돌았으나, 케오른은 여전히 투란이 원래 앉아 있던 곳만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바닥을 쿵 밟거나 손가락을 가볍게 튕겨도 전혀 듣지 못하는 듯했다.
그것까지 확인한 뒤 소모되는 마력을 차단하자 케오른이 눈을 부릅뜨며 투란을 노려보았다.
잠시 후, 그가 긴장이 풀린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랜만에 보는 거지만 여전히 두려운 능력이군...전쟁 당시 아라비온의 기사들은 밤이 오지 않기를 바랬지. 하룻밤이 지나고 나면 막사에 잠들어 있던 이들이 모조리 목이 달아나기 일쑤였으니까."
"이건...너무 불합리한 능력인 것 같은데요."
조금 전 가지고 싶어 했던 치유 능력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되는 무시무시한 마법이었다.
아예 인지할 수조차 없는 상대와 무슨 수로 싸운단 말인가?
투란의 말에 케오른이 고개를 저어 부정했다.
"아예 무적의 능력까지는 아니네. 최상위 마법기(魔法器) 중에는 자하르의 은신 능력조차 발견해 내는 물건이 몇 개 있고, 주변을 환하게 밝혀서 마력 소모를 증가시키거나 주변을 무차별 폭격하는 방법도 있으니까. 물론 그걸 고려해도 강력한 능력이기에 자하르가 대가문이 된 것이지만."
그나마 유일한 단점이라면 마력 소모가 심하다는 것 정도였는데, 이는 마수를 충분히 사냥해 마력량을 늘리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을 터였다.
거기다 은신에 익숙해질수록 마력 소모량이 줄어들기도 할 것이고.
"어쨌든 이론은 이 정도면 됐네. 이제부터는 간단한 훈련 방법 몇 가지를 알려주지...."
* * *
케오른의 상처가 모두 낫는 사흘간, 투란은 마법 외에도 많은 것을 배웠다.
전체적인 세계의 형상이라거나-케오른도 잘 모르는 영역이 많았기에 그리 정확하지는 않았다-강력한 마법사 가문의 이름과 그들이 자리한 위치, 여행 중 알아야 할 기본적인 상식 등이 그것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떠나기로 한 날 아침.
투란은 보존성이 좋은 음식과 옷 몇 벌, 간단한 요리도구와 어머니의 유품 정도를 가죽 배낭에 챙겨 집에서 나왔다.
미리 나와서 햇빛을 받고 있던 케오른이 그를 보며 말했다.
"영 심란한 얼굴이구만."
"아무래도 평생 살아온 곳을 떠나는 거니까요."
"너무 무겁게 생각하지 말게나. 떠돌다가 정 마음에 안 들면 언제든 다시 돌아오면 될 텐데."
케오른의 말에 투란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 아래 세상이 아무리 마음에 안 들어도 이 지긋지긋한 곳으로 돌아오지는 않을 터였다.
차라리 다른 은둔지를 찾으면 모를까.
함께 언덕을 내려온 뒤, 투란은 가장 먼저 마을의 촌장에게 찾아가 언덕 위 축사에 남은 양 떼를 모두 팔겠다고 말했다.
이를 들은 촌장이 깜짝 놀라 외쳤다.
"양을 팔고 이곳을 떠나겠다고? 그러면 양치기 일은 앞으로 누가 하나?"
"그건 당신들이 알아서 해야지. 아무튼, 적당한 가격으로 사 줬으면 좋겠는데. 안 그러면 그냥 돌아가서 다 풀어놓고 가버릴 생각이거든. 다시 잡아넣는 건 자유지만 아마 고생 좀 해야 할걸."
참으로 다행히도 촌장은 투란과 기싸움을 하는 대신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가격을 쳐 주었다.
아마 그동안 투란이 마을 사람들에게 보여 왔던 일관성 덕분일 터였다.
그는 누구의 팔을 부러트린다고 말하면 정말로 부러트리고 머리를 깬다고 하면 정말로 깨 버리는 사람이었으니까.
마을을 나오며 은화가 든 돈주머니를 몇 번 찰랑이던 투란이 케오른에게 말했다.
"그 와중에 마을 놈들, 어르신이 받아야 할 보수는 떼먹었네요. 받아올까요?"
"어차피 받을 생각도 없었네. 그 마수가 사령이 되어 버린 바람에 가져올 만한 증거도 없잖나. 게다가 따지고 보면 그걸 잡은 건 자네기도 하고."
케오른은 촌장이 약속했던 보수를 떼먹었음에도 허허 웃기만 했다.
하기야 그의 품에는 가문에서 받은 퇴직금이 한가득 남았으니 돈이 궁하지는 않을 터였다.
애초에 일종의 자원봉사 개념으로 마수 사냥을 하러 온 것이었으니까.
그렇게 잡담을 나누며 마을을 떠나 아래로, 더 아래로 내려가자 두 갈래로 갈라진 길이 나왔다.
투란이 다소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서 헤어져야 하는군요."
"그렇지. 자네는 남쪽으로 가기로 했으니 오른쪽 길로 가면 되겠어."
투란은 케오른과 함께 다니고 싶었으나, 케오른 쪽에서 투란과의 동행을 거부했다.
홀로 다니는 것이 더 편하다는 이유였다.
투란은 내심 섭섭함을 느꼈으나 이를 표현하지는 않았다.
"그럼 잘 지내게, 투란. 부디 웃는 얼굴로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감사했습니다, 어르신. 많이 배웠습니다."
인사를 나눈 뒤, 케오른은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왼쪽 길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가만히 이를 바라보던 투란은 그제야 자신이 저 늙은 기사에게 존댓말을 듣고 싶지 않았던 이유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어머니에게 받은 애정이 부족한 적은 없었지만, 투란은 내심 아버지의 존재를 갈망하고 있었다.
자상하고 온화하며, 앞으로 그가 어떤 남자로 자라야 할지 본보기가 되어줄 수 있는....
케오른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북쪽을 바라본 뒤, 투란은 천천히 남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미지의 세상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5화
적갈색으로 말라붙은 대지와 한두 그루씩 돋아난 나무, 저 멀리 펼쳐진 지평선을 노랗게 물들이는 흙먼지.
히사릴 언덕 아래에 펼쳐진 황야 지대 탓에 이곳 근처에는 커다란 마을이나 도시가 생겨날 수 없었다.
많은 인구를 감당할 만큼 식량이 공급되지도 않고, 어딘가에서 식량을 사 올 만한 특산물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덕분에 투란은 사람이라곤 한 명도 만나지 못한 채 황야를 걷고 또 걸어야 했다.
언덕에서는 볼 수 없는 신선한 풍경이라지만 그것도 잠깐이지, 꼬박 하루가 지나자 질릴 수밖에 없었다.
첫 여행을 즐기는 마음 반,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 마력을 아끼겠다는 마음 반으로 다소 천천히 걷긴 했으나 그마저도 보통 사람이 뛰는 것과 다름없는 속도였다.
아마 평범한 여행자가 걸어서 움직였다면 여기까지 오는 데만 사흘은 걸렸을 터.
그런데도 보이는 게 없는 것을 보면 마을 몇 개를 만나지 못하고 지나친 것 같았다.
어차피 먹고 마시는 데 걱정이 없는 이상 걷다 보면 결국에는 어디든 도착하겠지만....
"와라."
하늘을 향해 손을 뻗고 명령하자 저 멀리서 날아가던 새 한 마리가 다가와 그 위에 앉았다.
동물에게 명령을 내리는 것은 마법을 얻은 뒤 한 번도 빠짐없이 해온 일이었기에 숨 쉬듯 간단히 해낼 수 있었다.
투란은 반대쪽 손으로 내려앉은 새의 목을 부러트린 뒤 가방에서 꺼낸 칼로 깃털을 뽑고 가죽을 벗겼다.
마지막으로 목에 칼집을 내어 정신을 집중하자 피가 쏟아져나왔다.
'어디....'
흘러내리는 피에서 검붉고 끈적거리는 덩어리가 툭 떨어지더니 맑은 물이 분리되어 떠올랐다.
혈액에서 마실 수 있는 물을 추출하는 마법.
케오른에게 배운 기술 중 하나로,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물을 만들어내는 것에 비해 수백 배 이상 효율이 높았다.
그렇게 가죽 물통에 물을 채운 다음 구운 새고기를 가지고 있던 양젖 치즈와 곁들여 먹자 끼니가 해결됐다.
배를 채우고 얼마나 걸었을까?
슬슬 해가 한가운데로 떠오를 때쯤, 맞은편에 자리한 야트막한 언덕을 내려오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 수는 총 여섯 명.
모두가 남자였으며 여행자 특유의 흙먼지 가득한 망토 차림에 호신용인 듯한 짧은 칼을 차고 있었다.
뒤에는 천으로 덮은 커다란 수레를 끌고 가는 게, 아마 마을을 돌아다니는 행상인쯤 되는 것 같았다.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가끔 언덕 아랫마을을 들르는 이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곤 했다.
투란이 그들의 앞길을 가로막자, 대장으로 보이는 중년 남자가 경계심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
"당신은 누구길래 우리 앞길을 막으시오?"
"혼자 여행 중인 사람입니다. 혹시 여기서 가까운 도시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정중한 질문에 상인처럼 보이는 이들이 고개를 갸웃하더니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때, 투란은 그들 중 몇 명이 자신을 날카로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것을 느꼈다.
경계라기보다는 욕망이 섞인, 마치 사냥감을 보는 사냥꾼의 그것 같은 눈빛....
대장이 조금 전보다 훨씬 무례한 말투로 말했다.
"우리가 온 길을 그대로 따라가면 무레이란 도시가 나온다. 바퀴 자국을 따라가면 바보가 아닌 이상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겠지."
다소 불쾌한 어조에 투란은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왜 그따위로 말하느냐고 따지고 싶지는 않았다.
어쨌든 갑자기 길을 막은 채 질문한 것은 그였고, 저들은 결국 원하던 정보를 주었으니까.
"고맙습니다."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한 뒤 그들이 말한 대로 바퀴 자국을 따라 걸음을 옮기려는데, 상인 한 명이 그의 앞을 막았다.
이쪽을 바라보는 놈의 얼굴에 비열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잠깐.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게 있어야지. 정보만 받아먹고 그냥 도망갈 참이냐?"
"우선 그 가방부터 열어봐. 두툼한 게 꽤 든 모양인데."
어느새 투란을 포위하고 있는 상인들.
몇몇은 칼을 빼 들기까지 한 게, 반항하는 순간 곧장 목을 쳐버릴 듯한 기세였다.
"강도?"
"겸업이라고 해두마. 얌전히 가방만 놓고 꺼져라. 옷은 봐주지. 우리도 사람 목숨 뺏는 건 좋아하지는 않거든."
투란의 발달한 후각은 때로 생물이 느끼는 감정마저 냄새의 형태로 포착했다.
항상 맡을 수 있는 것은 아니고 가까이 있는 대상의, 그리고 유난히 강렬한 몇몇 감정에 한해서기는 하지만.
그리고 지금 그를 둘러싼 강도들의 몸에서는 포식자가 먹이를 물어뜯기 직전에 풍기는 냄새가 났다.
놓아주겠다는 말은 거짓이고, 아마 가방에 든 물건이 피에 젖는 것을 막고 싶어서 스스로 벗으라는 것인 듯했다.
"좋아, 너희들로 연습이나 해야겠다."
"뭐?"
투란은 손바닥을 쫙 편 채 가로로 휘두르며 자신이 만든 작은 바람이 수백 배로 강해지는 것을 상상했다.
마력을 먹어 치우며 힘을 키운 강풍이 순식간에 여섯 명의 강도를 휩쓸어 날려 버렸다.
"으아아악-!"
확실히 그냥 바람을 만드는 대신 직접 손바람을 일으키고 이를 증폭하니 마력의 소모가 훨씬 적었다.
이 역시 피에서 물을 추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케오른에게 배운 수법 중 하나.
날아간 강도들을 보니 한 놈은 떨어지며 목이 부러졌는지 일어나지 못했고, 다른 하나는 다리가 부러진 듯 절뚝이다가 그 자리에서 넘어져 있었다.
투란은 흙투성이가 된 채 비틀비틀 일어나는 강도 네 명을 향해 두 번째 마법을 사용했다.
시작은 허리에 찬 물주머니를 푸는 것.
입구에서 스멀스멀 흘러나온 물은 뜨끈한 열기를 내뿜으며 끝이 날카로운 얼음송곳으로 화하더니, 투란의 손짓에 따라 슉 날아서 강도 한 명의 복부에 박혔다.
이게 아마 주변에 물이 많을 때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이라고 하던가?
"끄아아아악!"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다리 부러진 놈이 칼을 내던지며 애원하고 절규하는 동안, 투란은 조금 전 사용한 마법에 불만을 느꼈다.
날아가는 속도와 위력, 정확도까지 모든 게 돌팔매질에 비해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부족해서였다.
하기야 돌팔매질은 그가 평생 연마해 온 기술이니 평범하게 쏘는 것과 차이가 있을 수밖에.
시험 삼아 두 번째 얼음송곳을 조종해 두어 번 빙빙 돌린 뒤 쏘자 조금 전의 몇 배에 달하는 속도로 날아 멀리 도망치던 강도 한 명의 목을 관통했다.
"죽어라-!"
그때, 슬금슬금 접근해 온 강도 두 명이 기합을 내지르며 투란을 향해 달려들었다.
투란은 그대로 둘을 걷어차려다 생각을 바꿔 발로 땅을 쾅 내려찍었다.
그러자 적갈색 황무지 위로 순식간에 큼직한 흙 송곳 몇 개가 솟아나며 달려오던 이들의 몸 이곳저곳을 관통했다.
흙으로 된 땅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땅을 일으키며 그 형태를 변형시켜 무기로 사용하는 기술이었다.
"커헉...."
그냥 죽으라고 말 한마디 하면 끝날 나약한 인간들이긴 하지만, 이렇게나마 대충 실전을 경험해 보니 앞으로 싸울 때 어떤 식으로 해야 할지 어느 정도 감이 왔다.
지난 사흘 동안 배운 기술 중 무엇이 실전에서 쓸만한지, 그리고 자신의 적성에 맞는지도 좀 알 것 같았고.
배를 찔린 놈은 어차피 곧 죽을 것 같기에 투란은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다리가 부러진 놈에게 천천히 걸어갔다.
케오른은 노상에서 만날 수 있는 이런 강도 같은 족속에게 절대 자비를 베풀지 말라고 가르쳤다.
불쌍해서 한 명이라도 살려두었다가는 그놈이 언젠가 선량한 사람 열 명을 해치는 것으로 보답할 거라고.
투란은 그 가르침을 철저히 이행할 생각이었다.
"아아...."
오줌까지 지리며 벌벌 떠는 녀석에게 손을 뻗기도 잠시, 투란은 놈을 마무리하는 대신 문득 떠오른 의문을 입에 담았다.
"하나만 묻자."
"마, 말씀해 주십시오! 마법사님! 무엇이든 답하겠습니다!"
구원의 가능성이 열렸다고 생각했는지 강도는 부러진 다리의 통증조차 무시한 채 고개를 조아렸다.
"왜 대책 없이 날 공격한 거지? 혼자 다니는 여행자라면 지금처럼 마법사일 수도 있는데?"
만약 투란이 강도였다면 절대 자신 같은 이를 공격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을 해치지 않는 이에게 먼저 손을 대지 않는다는 최소한의 도덕률 이전에, 이런 황무지에서 혼자 다니는 이에게 한 수가 있으리란 생각쯤은 당연히 할법하지 않나.
뭔가 믿는 게 있었느냐고 하면 그것도 아니고.
그 질문에 강도가 잠시 망설이다 답했다.
"그, 마법사님이 고개를 숙이셔서...."
"뭐?"
"대장이 반말하는데도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셨으니까, 당연히 보통 사람일 줄 알았습니다."
그러니까 일부러 무례한 말투로 말한 게 일종의 떠보기였던 셈이다.
투란이 따지기 귀찮아서 대충 인사하고 넘어가니 상대가 약해 보인다고 판단해 욕망을 채우려던 것이고.
"고맙다. 덕분에 좋은 걸 알았네."
인적 없는 곳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면 상대를 자극하게 된다는 것.
좋은 가르침을 준 대가로, 투란은 마지막 남은 생존자의 이마에 손가락을 댄 채 그대로 죽음을 명령했다.
적어도 그는 고통 없이 죽을 수 있었다.
* * *
강도들이 끌던 수레에는 시골에서 만들기 어려운 여러 생필품이 한가득 담겨 있었는데, 사용감이 별로 없는 것으로 보아 어디서 훔치거나 뺏어온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원래는 상인이었을 거라는 예상이 아예 틀리지는 않았던 셈이다.
이것을 모두 가져가기는 번거로웠기에, 투란은 놈들의 품에서 돈 종류만 챙긴 뒤 수레를 버리고 바퀴 자국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도시가 있는 방향이라 그런지 걸음을 옮길수록 점점 적갈색이던 땅 위에 잡초가 자라나고 나무의 수가 많아지는 것이 느껴졌다.
목적지가 명확해진 만큼 이전의 몇 배에 달하는 속도로 가볍게 달렸기에, 해가 질 무렵 대장 강도가 말했던 무레이라는 도시에 도착할 수 있었다.
"와...."
투란은 야트막한 언덕 아래 펼쳐진 도시의 모습에 탄성을 터트렸다.
저무는 석양 아래, 눈에 보이는 것만 못해도 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길을 걷거나 일을 하고 있었다.
히사릴 언덕 아랫마을의 주민을 모두 합쳐야 고작 삼사십 명 정도건만.
그가 태어난 이래 이렇게 많은 사람이 함께 있는 걸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안쪽으로 진입한 투란은 느릿한 걸음으로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지나가며 생전 처음 보는 도시를 구경했다.
흑갈색 벽돌로 만들어진 건물은 하나같이 비슷한 형태에 이 층에서 삼 층 정도였고, 때론 물건을 파는 것인지 건물 앞에 좌판 같은 것이 놓여 있기도 했다.
지나다니는 이들은 서로에게 별로 관심이 없는지 마주쳐도 말을 걸거나 인사를 나누지 않았다.
투란은 가만히 그들을 관찰하다가 가장 한가해 보이는 과일 상인 한 명을 골라 말을 걸었다.
"실례하겠습니다."
"음? 손님인가?"
"아뇨, 혹시 '여관'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나 해서-"
이방인이 묵을 수 있는 장소에 대한 이야기는 케오른에게 배워 알고 있었다.
도시라면 어지간해선 다 있다고 하던가.
그러나 과일 상인은 투란의 말을 채 듣지도 않고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저었다.
"과일 안 살 거면 꺼져!"
그 야박한 태도에 투란은 잠시 얼굴을 굳혔다.
여기서는 얕잡아 보이지 않기 위해 화를 내야 하는 걸까?
하지만 어쩌면 도시에서는 질문하기 위해선 과일을 사야 하는 게 불문율일 수도 있었다.
잠시 고민하던 투란은 고개를 끄덕이며 주머니를 꺼냈다.
"좋아요. 이거 얼맙니까?"
"사과는 하나에 2더핏이야. 외지인인 것 같은데, 비슷한 크기의 다른 동전으로 내도 되고."
더핏이 무엇인지 물으니 이 도시에서 쓰이는 동화(銅貨)라는 것 같았다.
강도들에게서 턴 돈 중에 같은 게 몇 개 있었기에 투란은 이를 주고 과일을 샀다.
사과라는 과일은 태어나서 처음 보는 것이지만, 시들시들하고 냄새도 영 좋지 않은 게 그리 신선하지 않아 보였다.
"저 길로 쭉 가다가 왼쪽으로 한 번 돌면 나오는 파란 지붕에 맥주잔이 그려진 집이 여관이야."
그렇게 겨우 여관의 위치를 알아낸 투란은 길을 걸으며 사과를 한입 베어 물었다가 그냥 길가에 던져 버렸다.
끔찍하리만치 시고 떫은 게 독이 들어있지 않나 의심될 정도의 맛이었다.
다행히 여관 위치까지 거짓말하지는 않았는지-만약 그랬으면 돌아가서 따끔한 마법의 맛을 보여줄 생각이었다-과일 상인이 말한 곳으로 가자 여관이 보였다.
안으로 들어가자 젊은 여급이 투란에게 다가왔다.
"어머, 잘생긴 오빠네! 손님이세요?"
"음."
투란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동의를 표했다.
여자의 헐렁하다 못해 다 비쳐 보이는 옷차림을 보니 내심 당황스러웠던 탓이다.
이런 곳에는 시중을 들며 때론 창녀 역할까지 하는 이들이 있다고 듣긴 했지만-말로만 듣는 것과 직접 보는 것은 그 느낌이 확실히 달랐다.
"하루에 얼맙니까?"
"16더핏. 1룸으로 내도 괜찮아요. 혹시 다른 돈 가진 것 있으면 주인아저씨한테 물어봐야 하고요."
룸이란 건 또 무엇인고 하니 은화라는 모양이었다.
돈을 내밀자 이를 받은 여급이 배시시 웃으며 투란의 어깨에 은근히 몸을 비볐다.
"혼자 자면 방이 너무 차가울 텐데, 내가 데워 줄까요?"
"됐습니다."
케오른은 여관의 여급을 비롯한 창녀들과 함부로 관계하지 말라고 몇 번이나 거듭 충고했다.
그런 일을 하는 여자는 대부분이 성병 환자이며, 강한 기사나 귀족은 질병 저항력 역시 뛰어나 본인은 문제가 안 되지만 나중에 다른 여자와 관계할 때 이를 옮기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보다 물어보고 싶은 게 하나 있습니다만."
투란이 묻고 싶은 것은 바로 도시 인근에 현상금이 걸린 마수가 있느냐는 것이었다.
마수를 죽여 마력을 흡수하는 것으로 성장하는 것은 물론, 덤으로 돈까지 벌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투란의 말을 들은 여급은 이에 대답하는 대신 옆에 놓인 큼직한 술통을 가리켰다.
언덕을 내려와 얻은 두 번째 깨달음은, 도시에서는 그 어떤 질문도 공짜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6화
투란은 결국 맥주 한 잔을 대가로 정보를 얻어낼 수 있었다.
현상금이 걸린 마수를 찾고 싶으면 시청에 가서 담당 공무원한테 문의하면 된다는 것.
시청은 뭐고 공무원은 또 뭐냐고 물어보니 여급이 푸핫 웃음을 터트렸다.
"이런 것도 모르다니, 오빠 진짜 완전히 시골에서 왔구나!"
깔깔거리던 여급은 시청이란 도시 한가운데에 있는 건물로 도시의 여러 공적 업무를 처리하는 장소이며, 공무원은 도시의 영주에게 고용된 사람들이라고 알려 주었다.
오늘은 해가 완전히 진 상태인 만큼 내일 아침에 시청으로 찾아가 알아보면 될 것 같았다.
"그런데 마수는 왜 찾아요? 설마 오빠도 마수 사냥꾼?"
"마수 사냥꾼은 뭡니까?"
"그 왜, 마수를 사냥하면 마법사가 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요."
무슨 소리인가 하니 평범한 사람들도 마수를 사냥하는 것으로 마법의 힘을 얻을 수 있다는 미신이 퍼져 있어, 이를 위해 목숨을 걸고 마수 사냥을 나서는 이들이 있다고 했다.
보통 사람들은 정신병자 취급하지만 신분 상승을 위해 이를 노리는 이가 의외로 적지 않다던가?
그녀의 설명을 듣는 도중 투란의 어깨에 턱 손을 얹는 이가 있었다.
"이봐, 레나. 마수를 잡아서 마법사가 될 수 있다는 건 미신이 아니라 사실이야. 내 눈으로 직접 봤다고."
그렇게 말하는 이는 서른 살에서 마흔 살 정도로 보이는 장년의 남자였다.
머리도 수염도 덥수룩하게 기른 것이 영 관리하지 않은 듯한 인상이었는데, 그에 비해 눈빛은 기이할 정도로 맑았다.
"미단 아저씨! 살아있었네요?"
"그러면 죽었을까 봐? 말했잖아. 난 마법사가 되기 전엔 절대 안 죽는다니까?"
"미안해요, 레나 양. 우리 대장이 늘 실례가 많네."
미단이라 불린 남자의 뒤로 세 명의 남자가 다가왔다.
길쭉한 창과 활, 건물을 부술 때나 쓸법한 망치로 무장한 이들은 하나같이 큰 체구에다 근육질이었다.
투란이 슬쩍 어깨에 얹힌 손을 치우자 그가 움찔하며 물러섰다.
"어이쿠, 실례."
"괜찮습니다. 그보다 조금 전에 하신 말 더 들을 수 있을까요?"
"음? 어떤 거?"
"마수를 잡아서 마법사가 될 수 있다는 거요."
"오, 역시 젊은 친구도 거기 관심이 있었던 거군?"
미단은 투란의 관심이 기꺼웠는지 히죽 웃으며 설명했다.
마법사들은 마수를 죽이며 그들의 힘을 취해 강해지는데, 같은 원리로 평범한 사람이 마수를 죽이면 마수의 힘을 얻어 마법사가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미 그렇게 힘을 얻은 마법사를 몇 명이나 보았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 넷은 마법사가 되기 위해 마수를 사냥하고 있는 거지."
"벌써 세 마리나 잡았다고!"
"이제 얼마 안 남았어."
미단의 부하-저들 말로는 의형제라는 듯했다-들이 한 마디씩 덧붙였다.
투란은 그들이 마수 세 마리를 잡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
그가 본 유일한 마수는 평범한 인간 따위 수십 명이 모여 있어도 우습게 찢어발길 정도의 힘을 갖고 있었으니까.
"세 마리라니, 혹시 여러분 중에 이미 마법사가 된 사람이 있는 겁니까?"
투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여관 1층에 있던 사람들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럴 리가! 이 도시에 마법사는 영주님과 그분 휘하의 기사 세 명뿐이야."
"우리 중 한 명만 마법사가 되어도 다른 형제들을 돕기 쉬워질 텐데."
"사실 그놈들 잡으면서도 몇 번이고 죽을 뻔했지."
못해도 천 명은 살 것 같은 도시에서 마법사가 고작 네 명뿐이라니?
왜 케오른이 세상에 마법사가 부족하다고 노래를 불렀는지 조금 알 것 같았다.
그때, 미단이 투란의 가방을 힐긋 보더니 물었다.
"그런데 자네 마수 사냥을 한다며? 그런 것 치고는 장비가 너무 부실한데, 무기는 없나?"
"무기요?"
투란은 주머니에 들고 있던 양가죽 투석구를 꺼내며 그들이 이를 비웃으리라 생각했다.
나름 금속으로 된 무장에 비하면 영 볼품없어 보일 테니까.
그러나 예상했던 것과 달리 마수 사냥꾼들은 꽤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오, 이걸로 돌을 걸어서 던지는 건가?"
"닳은 거 보니까 많이 써 본 물건이구만."
"돌멩이는 어느 정도 크기로 쓰나?"
"달걀 정도 크기인 걸 씁니다."
"그 정도면 토끼나 여우에서 변한 놈들 머리통은 충분히 깨고도 남겠는데."
말을 들어보니 이들은 애초에 투란이 잡았던 표범 같은 맹수 출신의 마수를 노리는 게 아닌 것 같았다.
초식 동물이나 비교적 체급이 낮은-일반 동물일 경우 사람이 맨손으로도 이길 수 있을 약한 동물 출신의 마수들만 사냥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런 놈들도 타고난 능력이 무엇이냐에 따라 보통 사람쯤 순식간에 죽일 수도 있겠지만.
"자네 혹시 우리랑 같이 사냥 나갈 생각 없나? 안 그래도 사수 한 명이 더 있었으면 했는데."
"아뇨, 괜찮습니다."
투란은 망설임 없이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마법사인 것을 드러내놓고 다닐 생각도 없었고, 애초에 그의 목표는 저들이 원하는 것과 같은 어쭙잖은 수준의 마수도 아니었으니까.
다행히 미단은 끈덕지게 달라붙지 않고 아쉬움을 표하며 물러섰다.
"쩝, 아쉽구만. 혹시 생각 바뀌면 말하라고."
투란은 조금 더 잡담을 나누다가 여급에게 방 열쇠를 받아 2층으로 올라갔다.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자 마룻바닥을 뚫고 1층의 마수 사냥꾼들이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미단 형님, 아까 그 애송이 녀석은 왜 끼우려고 하신 겁니까? 솔직히 그렇게까지 도움 안 될 거 같던데.]
[맞아. 비리비리한 게 한 방 후리면 질질 짤 것 같더구만.]
미단의 부하-의형제들은 비웃는 듯한 태도로 투란을 흉보고 있었다.
조금 전 밑에서는 그렇게나 사람 좋은 듯이 굴더니.
앞뒤가 다르게 구는 건 마을 놈들을 통해 충분히 느꼈던 터라 마음에 상처를 입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냥 원래 사람이란 이런 거였지, 하고 한숨을 내쉬며 흘려보낼 뿐.
잠시 후 이에 답하는 미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씁, 그냥 그놈 보니까 내 젊은 시절이 생각나서 그래. 저런 거 하나만 들고 혼자 바깥을 나다니다가는 목숨이 몇 개라도 모자라잖냐.]
[하여간 큰형님은 사람이 너무 좋으시다니까.]
[누가 아니래.]
가만히 대화를 듣던 투란은 이내 눈을 감았다.
확실히, 세상에는 좋은 사람도 나쁜 사람도 있는 법이었다.
* * *
다음 날 아침, 투란은 여관에서 제공하는 거무튀튀한 빵과 수프로 끼니를 때운 뒤 시청에 찾아갔다.
도시 한가운데에 자리한 시청은 무려 사 층 짜리 건물로, 안에는 이것저것 업무를 보러 찾아온 시민들이 가득했다.
건물 임대 문제로 다투는 노인과 아주머니를 헤치고 들어간 뒤에야 현상금을 담당하는 공무원을 찾을 수 있었다.
"무슨 일이슈?"
중년의 공무원은 현상금 걸린 마수를 찾으러 왔다는 투란의 말에 한심한 놈팡이를 보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마법사라는 사실을 밝히기만 하면 그 자리에서 넙죽 엎드리겠지만 그러지는 않았다.
어쭙잖은 기사 행세를 하면 과거 두려워했던 것처럼 이곳의 영주가 일하라고 잡으러 올 수도 있고, 귀족급 마법사라는 사실을 밝히면 귀하신 분이 왔다며 온갖 대접을 받느라 시간을 낭비하게 될 테니까.
귀족끼리 서로 접대하는 것 역시 중요한 예의라 이를 함부로 거절하는 것도 무례하게 여겨진다고 하던가?
결론은, 그냥 이 인근에서 잡을 수 있는 마수만 슥 잡고 빨리 떠나는 게 최선이라는 것이었다.
목숨 걸고 정체를 감출 필요까지는 없겠지만.
"반출은 안 되니까 보고 다시 넘겨주쇼."
잠시 후 공무원이 넘겨준 종이에는 마수의 생김새부터 크기와 특징, 목격된 장소와 걸린 현상금 등이 쓰여 있었다.
약하고 무해한 마수들은 거의 생포해야만 현상금이 나왔고, 죽인 뒤 시체만 가져와도 되는 건 사람을 적대시하고 호전적인 부류에 한정되어 있었다.
약한 마수는 그만큼 변이가 덜 되다 보니 시체가 일반 동물과 분간이 안 가서, 평범한 동물을 잡아 현상금을 타 먹으려는 놈들이 많다는 게 그 이유였다.
"주의해야 할 건, 실수로 마수를 죽였더라도 버리지 말고 도시로 가져와야 한다는 거요. 기사님들이 마력을 흩어버리지 않으면 위험한 사령이 되거든. 마수를 죽인 뒤 방치하는 건 도시법에 따라 최대 사형이니 그리 아시고."
"이해했습니다."
마수의 시체를 그냥 버려두면 얼마나 무시무시한 일이 생기는지는 이미 체험한 바라, 투란은 공무원의 경고를 허투루 듣지 않고 깊게 새겼다.
"근데 일반인들이 잡기에는 좀 위험해 보이는 놈들도 있는데, 이런 녀석들은 기사님들이 잡으러 안 오시는 겁니까?"
공무원은 별 희한한 놈을 다 보겠다는 듯 답했다.
"그분들이 그렇게 한가한 사람처럼 보이나? 기사의 역할은 도시의 치안을 유지하고 적의 침입을 막는 거요. 마수 사냥 따위는 댁 같은 건달들이 담당하는 거고."
그 말에 투란은 들고 있던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칼날 까마귀.
깃털 일부가 칼날처럼 단단하고 날카로운 까마귀로, 이를 휘둘러 화살 따위를 쳐낼 수 있으며 높은 곳에서 깃털을 떨어트리는 것으로 사람을 공격함.
도시 변두리의 개나 어린아이를 물어가서 잡아먹은 뒤 잔해를 흩뿌리는 습성이 있음....
마법사가 인간의 수호자라면 이런 놈들부터 당장 찾아가 잡는 게 도리일 것이건만, 역시 인간을 보호하는 데서 긍지를 찾는 이는 그리 많지 않은 모양이었다.
투란은 다소 씁쓸한 기분으로 시청 건물에서 나와 도시의 가장자리로 향했다.
점점 건물이 줄어들다가 완전히 도시 영역을 벗어나자 익숙한 야생이 그를 반겼다.
'슬슬 해볼까.'
인적이 없는 것을 확인한 뒤, 투란은 아까 전 시청에서 보았던 마수를 떠올렸다.
칼날 까마귀, 어린애들을 잡아먹는 식인 마수....
"까마귀 탐색."
주문을 외운 순간 귓가로 수백 종류의 소리가 들려왔다.
깃털 비벼지는 소리, 날갯짓 소리, 무언가를 쪼는 소리까지.
"윽."
사방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너무 다양한 탓에 투란은 얼굴을 찌푸리며 마법을 취소했다.
도시 주변에 머무는 까마귀의 숫자가 지나치게 많아 탐색 주문이 변별력을 잃은 것이었다.
'이 방식은 안 되겠어.'
마수만을 찾으려면 어떤 방식을 써야 할까.
마력을 가진 까마귀?
한 번 시도했지만 아예 발동하지 않는 게, 아무래도 마력의 보유 여부는 탐색 주문의 조건으로 잡을 수 없는 것 같았다.
다음으로는 사람을 잡아먹는 까마귀라는 조건도 시도해 보았으나, 이번에는 또 너무 많은 대상이 잡혔다.
아마 시체를 뜯어먹은 놈들이 들어가는 탓일 터.
"어렵네...."
동물이 드문 히사릴 언덕에서는 이런 문제를 겪을 일이 별로 없었다.
잃어버린 양을 찾으려면 그냥 양을 탐색해서 혼자 떨어져 있는 놈을 찾고, 늑대를 찾으려면 무리 한두 개나 걸리는 게 고작이었으니까.
그렇게 한참을 고민하던 투란은 번뜩 깨달음을 얻고 마법을 사용했다.
'어린아이보다 큰 까마귀.'
마수가 평범한 동물보다 강하다지만 어린아이를 물어가려면 기본적인 체격이 필요할 터.
예상대로 단 한 마리가 깃털을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덤으로 옅은 인간의 피비린내도.
"찾았다."
장애물이 있는 탓에 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바라보아도 보이는 것은 없었지만, 일단 포착한 이상 놓칠 일은 없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족히 10분 이상 뛰어야 할 거리.
하지만 전력 질주하는 귀족급 마법사의 걸음으로는 3분에서 4분 정도면 충분했다.
목표가 거주하는 숲이 눈에 보일 때쯤, 투란은 또 한 가지 마법을 구사했다.
자하르 혈족 특유의 완전 은폐가 아닌 눈에 보이지 않게만 하는 평범한 투명화 마법.
완전 은폐 마법은 마력 소모가 지나치게 크기 때문에 아직 쓰기 부담스럽기도 했고, 경험상 새의 청력이 그리 날카롭지 않음을 알고 있어서이기도 했다.
까마귀 마수가 머무는, 사람 세 명이 팔을 벌려야 감쌀 수 있을 듯한 커다란 나무에 도착한 투란은 곧장 비행 마법으로 몸을 띄워 올라갔다.
'크군....'
까마귀 마수는 앉은 상태의 키만 일 미터가 넘었다.
접힌 날개는 이름처럼 칼날과 같이 날카로웠으며, 날카로운 부리에는 채 사라지지 않은 핏기가 엿보였다.
놈이 밟고 앉은 둥지 곳곳에는 여러 동물의, 그리고 가끔은 사람의 것으로 보이는 뼈가 널브러져 있었다.
예상했던 대로, 놈은 투란의 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한 채 제 깃털을 단장하느라 바빴다.
'그럼 이제 이놈을 어떻게 잡는다.'
가장 간단한 건 곧장 돌팔매질로 머리를 날려버리는 것이지만, 그는 녀석을 상대로 조금 더 다양한 마법을 시험해 볼 생각이었다.
돌팔매질이 쉽다고 거기에만 익숙해져 있다가는 상대가 물리적 투사체에 면역일 때 대책이 없어질 테니까.
가능하면 다양한 대응 방법을 마련해 두라는 게 케오른의 가르침이기도 했다.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니 구름이 꽤 끼어있는 게, 시도하기 딱 좋은 마법이 하나 있었다.
히사릴 언덕에서는 조건이 안 맞았던 탓에 이론만 배우고 써본 적 없는 기술.
투란은 둥지에서 조금 떨어진 채 손가락을 하늘로 치켜들며 기억을 되새겼다.
몇 년 전, 비가 잘 오지 않는 히사릴 언덕에서 드물게도 폭풍우가 치던 날.
세상을 무너트릴 듯한 굉음과 함께 하늘과 대지를 잇던 거대한 빛의 기둥을.
'와라.'
강한 기원과 함께 체내의 마력이 쑥 빨려 나가더니, 잠시 후 구름 사이에서 우르릉 낮은 천둥이 울렸다.
까마귀 마수가 무언가 이변을 깨달은 듯 하늘을 올려다보았으나 이미 피할 기회는 지나간 뒤.
소리보다 빠르게 내려꽂힌 벼락이 새의 둥지를 강타했다.
[까가가가각---!!!]
갑자기 머리 위로 떨어진 낙뢰에 절규하며 도망치려 하는 까마귀.
하지만 자랑스러운 칼날 깃털은 모조리 타들어 가고 금속처럼 벼려진 부분만 떨어졌기에 하늘을 날 방법이 없어진 뒤였다.
지상으로 맥없이 떨어진 까마귀는 몇 번 바르작거리다 이내 움직임을 멈췄다.
혹시라도 다시 움직이지 않나 일 분 정도 신중히 확인한 뒤, 투란은 지상으로 내려와 놈의 마력을 흡수했다.
7화
그날 하루, 투란은 도시 주변을 순찰하며 총 일곱 마리의 마수를 잡았다.
죽은 마수의 시체에서 마력을 흡수할 때마다 밀려오는 오싹오싹한 쾌감에 중독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중에 한계치까지 마력을 흡수하고 나면 그때부터는 이런 즐거움을 못 느끼게 된다는 게 아쉬울 정도.
물론 마수를 잡아먹으며 얻는 게 이런 말초적인 쾌감만은 아니었다.
다섯 번째 마수의 힘을 흡수했을 때쯤, 투란이 가진 마력은 케오른을 만나기 전의 1.5배 정도로 강해져 있었다.
이대로라면 이론상 몇 달 정도만 사냥해도 기존의 수십 배 이상으로 강해질 수 있겠지만....
'그리 쉽게는 안 되겠지.'
흡수를 통한 마력 성장은 반복할수록 점점 상승치가 줄어들며, 약한 마수의 마력으로는 강해지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한곳에서 오래 머물며 사냥하다 보면 당연히 마수 역시 씨가 마르기 마련.
그 때문에 강한 귀족들은 그에 걸맞은 마수를 찾아 순례를 떠나기도 한다던가?
그렇기에 투란은 찾은 놈 중에서 가장 약한, 그래서 흡수할 가치조차 없는 두 마리를 죽이지 않고 생포했다.
꼬리가 제 동족들보다 다섯 배쯤 도톰하여 이를 무기로 쓰는 다람쥐, 그리고 덩치가 좀 크고 털의 색이 주변 환경에 맞게 변하는 오소리.
놈들을 밧줄로 꽁꽁 묶어 시청에 가져가자 담당 공무원이 두 눈을 부릅떴다.
"두 마리나?
"예. 돌멩이로 머리 한 대 맞은 것 말고는 멀쩡히 생포했습니다. 합치면 포상금 25룸, 맞습니까?"
"음, 그게...."
무언가 수작을 부리려는 것인지 말끝을 흐리던 공무원은 투란이 두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자 이내 돈을 내밀었다.
"여기 있네."
이렇게 돈 버는 재미 역시 언덕을 내려오고 나서 알게 된 것 중 하나였다.
은화 25개를 주머니에 넣은 채 여관으로 돌아가자 여급이 웃으며 투란을 반겼다.
"젊은 오빠! 멀쩡히 살아서 돌아왔네요? 저녁도 여기서 드실 거죠? 이번에도 빵에 수프?"
투란은 오늘 아침 그랬듯 가장 싼 메뉴를 시키려다가 마음을 바꿨다.
어차피 돈이야 원하면 얼마든지 벌 수 있으니 이참에 비싼 음식이 왜 비싼지 알아보고 싶었다.
"제일 비싼 거로 주십시오."
투란의 말에 여급의 두 눈이 커졌다.
"와, 돈 좀 버셨나 보다! 주방장 아저씨한테 말씀드리고 올게요!"
미처 몰랐던 사실이지만, 여관 최고의 호화 메뉴는 차려지는 데만 무려 한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탁자에 올려진 음식을 보니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만든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제법 부드럽고 고소한 밀가루 빵에 새콤한 과일잼, 양념을 발라 구운 통닭, 지글지글 끓는 치즈를 위에 얹은 돼지갈비까지....
평생 황량한 언덕에서 살며 누린내 나는 양고기와 곡물죽 따위만 먹어왔던 양치기로서는 넋이 나갈 만한 구성이었다.
정신없이 씹고 뜯으며 즐기다 보니 어느새 탁자 위에 있던 음식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뒤였다.
"...이거 누가 훔쳐먹은 건 아니죠?"
"당연히 아니죠. 근데 오빠 말라서는 진짜 잘 먹는다!"
"오랜만에 차린 건데 맛있게 먹어 줬다니 기쁘구만!"
평상시에는 주방 안쪽에서 쉬는 듯한 주방장마저 나와서 그렇게 한 마디 던질 정도로 평상시에는 잘 안 팔리는 메뉴인 것 같았다.
어쨌든, 덕분에 식도락의 즐거움을 알게 되기는 했다.
* * *
그렇게 사흘이 지날 때쯤, 투란은 무려 서른 마리가 넘는 마수를 잡는 데 성공했다.
그중 제대로 현상금을 타 먹은 건 다섯 마리뿐이었으나 그것만으로도 백 닢이 넘는 은화를 챙길 수 있었기에 그중 일부는 보관을 편리하게 하고자 금화로 바꾸었다.
이렇게 훌륭한 성과를 올린 데는 추적 마법의 숙련도가 오른 것이 한몫했다.
몇 차례의 실험 결과, 추적 대상이 범위 내에 없을 때는 대상의 흔적을 찾는 것으로 뒤쫓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처음 잡았던 칼날 까마귀를 예로 들자면, '어린아이보다 큰 까마귀의 배설물'을 목표로 잡아 녀석의 배설물이 이어지는 방향으로 움직여 마수를 찾는 식이었다.
그렇게 승승장구하는 투란에 비해 미단 패거리는 썩 성과가 없는 듯, 어두운 얼굴로 이대로면 방값도 내기 힘들다느니 뭐니 떠들어대기만 했다.
어느 날인가는 미단의 의형제 두 명이 방으로 쉬러 올라가는 투란의 뒤에 따라붙어 주먹을 들이밀며 을러댔다.
"어이, 말라깽이!"
"요즘 돈 좀 많이 번다며? 동업자에게 적선 좀 해라."
당연하게도 그들은 채 일 분도 되지 않아 투란의 손에 흠씬 두들겨 맞은 뒤 계단 밑으로 굴러떨어졌다.
잠시 소란이 일어난 뒤, 모든 사정을 들은 미단은 그들을 대신해 투란에게 고개를 숙였다.
"진심으로 사과하지. 내 두 놈 다 따끔히 타이르겠어. 앞으로는 절대 이런 일이 없을 거야...."
"많이 힘드십니까?"
투란의 질문에 미단은 잠시 망설이다 솔직히 대꾸했다.
"돈이 좀 궁하긴 해."
미단과 그의 의형제들은 본래 인구만 십만 명이 넘는 큰 도시에 살던 깡패로, 2년 전 마수를 잡아 마법사가 되었다는 사람을 만난 뒤 깡패 생활을 청산하고 마수 사냥꾼으로 전업했다.
하지만 일반인들끼리 모여 마수를 잡는 것도 힘들거니와, 시체만 보고도 마수임이 확인될 정도로 강한 녀석이 아니라면 시체로는 현상금이 지급되지 않는 것이 현실.
따라서 그들은 여러 도시를 돌며 허드렛일을 하는 것으로 근근이 연명하며 마수를 사냥하고 있었다.
'설마 세 마리를 잡는 데 2년이 걸렸을 줄이야.'
하기야 마법사는커녕 전문 사냥꾼도 아니고 원래 깡패였던 이들이 사냥한다고 해봐야 얼마나 하겠는가?
거기다 생계를 위해 부업까지 해야 한다면 온종일 시간을 들이기도 어려울 터.
그런 이야기를 듣고 나니 왜 공무원이 마수 사냥꾼을 건달 취급하는지 알 것도 같았다.
남들이 성실히 일할 때 될지 아닐지도 모를 가능성 하나만 노리고 사는 이들이 곱게 보이겠는가.
"솔직히 앞으로 사흘 정도 지나면 방값을 내기 어려울 것 같아. 이 도시는 너무 작아서 우리가 할 만한 잡일이 별로 없거든. 하지만 젊은 친구에게 손 벌릴 생각은 없어. 이런 일까지 겪게 했는데 돈 달라고 하면 염치가 없지...."
"여기요."
투란은 품을 뒤져 그에게 은화 열 닢을 넘겼다.
조금 깎으면 네 사람이 사흘쯤은 여관에 머물 수 있을 만한 돈.
미단이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니, 왜?"
"형편이 어려운데도 제가 혼자 다니는 게 위험해 보여서 끼워 주려고 했잖습니까. 그 답례입니다."
투란이 어머니에게 배운 도덕관은 간단했다.
자신이 대접받기를 원하는 대로 남을 대하고, 남에게 은혜를 입건 원수를 지건 받은 대로 갚아주라는 것.
그 관점에서 미단이 지난날 보여준 호의는 은화 몇 닢 정도의 값어치를 하기 충분했다.
부하들이 저지른 만행이야 이미 주먹 찜질로 갚아주었고.
"그래도 이런 걸 그냥 받긴 미안한데...."
"정 그냥 받기 뭣하시면 정보나 좀 주시죠. 그간 사냥하느라 돌아다니셨던 도시 이야기 같은 거라도 좋으니까."
정보는 돈 주고 사야 한다는 게 투란이 언덕을 내려와 알게 된 상식.
케오른의 가르침을 통해 대충 세계가 어떻게 생겼고 대가문들이 어디쯤 있는지는 알고 있었지만, 각 지역의 세세한 사정까지 알지는 못했다.
그 제안에 미단이 얼굴에 화색을 띠었다.
"그 정도야 어렵지 않지!"
무려 2년간 여러 도시를 돌아다니며 마수를 찾아 헤맨 만큼 미단은 꽤 아는 것이 많았다.
인근에 자리한 다른 도시로 가는 간단한 지도를 그려주는 것은 물론, 그곳에서 잡을 만한 마수를-물론 미단은 피해가라는 의미로 알려준 것이었다-추천해 주기까지 했다.
슬슬 이곳 무레이 시 주변에서 마수를 보기 뜸해진 만큼 이런 정보는 상당한 값어치가 있었다.
지난번처럼 그냥 저쪽에 도시가 있다더라-하고 대충 여행하는 건 한 번이면 충분했으니까.
그 외에도 어느 도시에는 고대 제국이 남긴 유적지가 있다던가, 어느 마법사 가문은 자기들의 허락을 받지 않은 방랑자가 영토를 지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거나 하는 등의 이야기도 굉장히 유용했다.
특히 투란의 관심을 끈 것은 비교적 가까운 대도시에 있다는 도서관의 존재였다.
"책이 수천 권이나 있단 말입니까?"
"그렇다고 들었어. 나도 직접 들어가 보지는 못했지만."
투란은 어머니에게 쓰고 읽는 법을 배웠지만 책을 읽어본 적은 없었다.
당연하게도 히사릴 언덕과 그 주변 마을은 책을 가지기에 지나치게 가난한 지역이었기 때문.
때때로 투란의 어머니는 한탄하고는 했다.
자신에게 읽어주고 싶은 책이 있는데 이제 그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덕분에 투란의 머릿속에서 책이란 것은 막연히 온 세상의 지혜가 들어있는 신비로운 무언가로 미화되었다.
그런데 미단의 말에 의하면 비교적 가까운 북동쪽의 도시, 오렘의 도서관에는 그런 책이 무려 천 권도 넘게 있다는 것 아닌가?
거기다 입장조건은 고작해야-
"마법사라면 입장할 수 있다...."
"뭐, 우리도 언젠가 마법사가 되면 들어가 볼 수 있겠지!"
투란은 금전욕, 식욕에 이어 자신도 몰랐던 새로운 욕구에 눈을 떴다.
그것은 바로 지식욕이었다.
평생을 언덕 위에서 사느라 알지 못했던....
좀 더 이 세상이 어떤 곳인지 알고 싶어졌다.
"이만하면 값어치가 된 건가?"
"충분합니다."
슬슬 내일까지만 사냥하고 이 도시를 떠날 생각이었는데, 앞으로 어디로 가면 좋을지 알 것 같았다.
* * *
그렇게 좋게 끝난 것이 무색하게도, 다음 날 오후 마지막 사냥을 나왔던 투란은 뱃가죽이 활짝 열린 채 쿨럭 피를 토하는 미단의 부하 한 명과 마주쳤다.
눈이 반쯤 풀린 게 딱 봐도 살아날 수 없을 것 같이 보였다.
"무슨 일입니까?"
"토끼, 마수...괴물...."
"미단 씨는?"
"저기...."
그가 가리킨 곳에는 꽤 눈에 익은 털투성이 머리 하나가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어찌나 억울했는지, 미단은 그 기이하리만치 맑은 두 눈을 부릅뜬 채 죽어 있었다.
그 뒤쪽으로는 몸이 동강 난 시체가 두 구 더.
마지막으로, 무언가를 잘근잘근 씹는 고양이 크기의 토끼 한 마리가 붉은 눈으로 투란을 노려보고 있었다.
앞니는 땅에 닿을 정도로 길고 뒷발이 기괴하리만치 굵게 발달한 놈은, 투란을 보더니 곧바로 화살과 같은 속도로 돌진해 들어왔다.
"윽!"
다급히 몸을 날려 피하자 토끼는 제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투란을 지나쳤는데, 놀랍게도 놈이 들이받은 나무 하나가 그대로 우지끈 소리를 내며 무너졌다.
정확히는 앞니에 걸린 부분이 그대로 잘려 나간 것이다.
'뭐 이런....'
이것저것 시험해 보기에는 위험하리만치 강해 보이는 놈이라, 투란은 곧장 비장의 수단을 꺼냈다.
언제나 챙겨 다니는 양가죽 투석구를 이용한 돌팔매질.
마법의 힘으로 음속을 넘어선 돌멩이가 토끼를 향해 날아들었으나 놀랍게도 놈은 긴 앞니를 휘둘러 이를 받아쳤다.
한 발, 두 발, 그리고 세 발까지.
상대의 말도 안 되는 반사신경에 투란은 혀를 찼다.
케오른이 경고했던, 물리적 투사체가 통하지 않는 적을 생각보다 빠르게 만나게 된 듯했다.
[끼긱!]
고작 이 정도냐는 듯, 토끼는 비웃는 듯 기괴한 목소리를 내며 다시 뒷발에 힘을 주며 도약을 준비했다.
그 순간,
[끽?]
갑자기 투란이 그 자리에서 사라져 버린 탓에 토끼 마수는 그대로 멈춰 서야 했다.
눈앞에 있던 존재가 순식간에 없어지는 현상이라니?
마력을 얻으며 좀 더 똑똑해진 토끼라지만 이런 상황을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도망간 것인가? 어떤 방법으로? 지금은 어디에 있지? 쫓아가기에는 냄새조차 전혀 안 풍기는데....
그런 의문을 품으며 가만히 서 있던 덕에 투란은 은신한 채 토끼에게 다가가 턱밑에 단검을 꽂아 넣을 수 있었다.
[끼기기기에에엑!!]
투란은 턱밑에 꽂힌 단검을 재빨리 한 번 비튼 뒤 그대로 손잡이를 놓고 뒤로 몸을 던졌다.
아마 그러지 않았다면 광분한 토끼가 휘두른 앞니에 걸려 몸이 동강 났을 터.
토끼는 보이지 않는 적을 공격하고자 필사적으로 뛰어다니며 앞니를 휘둘러댔으나, 그의 적은 이미 은신한 채 하늘로 날아오른 상태였다.
그렇게 일 분 정도 주변의 나무들을 베어 넘기던 토끼는 결국 적을 찾아내지 못하고 힘이 다해 쓰러졌다.
투란은 그제야 은신을 해제하고 땅 위로 내려앉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후아...."
슬슬 이 근처의 강한 마수는 다 해치웠다고 생각했는데 뜬금없이 이런 강적을 만나게 될 줄이야.
크기가 작아서 방어력은 좀 떨어지는 느낌이지만 속도와 공격력, 반사신경은 처음 만난 표범 마수보다도 위협적이었다.
케오른을 만나기 전의, 제대로 된 공격 기술이라곤 돌팔매질밖에 없던 투란이라면 패배했을 수도 있겠다 싶을 정도.
실제로 마력을 흡수해 보니 표범을 잡았을 때보다도 훨씬 더 많은 양의 마력이 들어왔다.
'정말 재수도 없지.'
시청에 등록된 마수 중에는 이런 녀석이 없었으니 아마 최근에 변이한 것일 터.
미단 패거리는 이놈이 토끼 형태에 크기도 크지 않으니 잡기 쉽겠다고 방심하고 덤벼들었다가 몰살을 당한 것이었다.
사실 이 토끼의 정체가 어지간한 귀족조차 방심했다가는 순식간에 죽었을 녀석이라는 사실을 알면 어떤 기분일지.
그렇게 상황을 정리한 뒤, 투란은 뱃가죽이 찢어진 사냥꾼에게 다가갔다.
그는 아직도 정신을 잃지 않은 상태였는데, 투란이 싸우는 것을 보았는지 경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너, 아니, 당신...마법사...."
"그래."
"왜...."
왜 정체를 감췄는지를 설명하기는 구구절절하고 의미도 없는지라, 투란은 고개를 저으며 대신 질문했다.
"네 사람 중 누구든 유품을 남길 가족은?"
"없어...."
잠시 후, 투란은 죽은 마수 사냥꾼들을 숲 근처의 양지바른 곳에 매장했다.
네 개의 흙구덩이가 마법사가 되고 싶었던 이들에게 주어진 마지막 몫이었다.
8화
이른 아침, 투란은 무레이 시를 나와 북동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미단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두 도시의 거리는 보통 사람의 걸음으로 일주일 정도.
그의 걸음이라면 이틀에서 사흘 정도로 좁힐 수 있었다.
도시를 떠나고 반나절쯤 지나자 확실히 자연환경이 점점 더 풍요로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사람들이 길을 지나며 자연스럽게 생겨난 도로 좌우로는 숲이 자라났으며, 때때로 평야 지대가 펼쳐질 때면 저 멀찍이 누런 밀밭이 보였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풍요로운 곳에는 동물이 많아지며, 동물이 많아지면 마수도 많아지는 법.
투란은 길을 걷다가 주기적으로 한 번씩 탐색 마법을 쓰며 주변에 마수가 있는지 확인한 후 사냥하고 길로 돌아왔다.
대부분은 슬슬 잡는 의미가 없을 정도로 약한 녀석이었지만 쓸만한 놈도 한둘 섞여 있어 나름대로 보람이 있었다.
큰 도시로 가는 길이라 그런지 이곳에서는 지나다니는 사람 역시 비교적 자주 볼 수 있었다.
인근 마을에 밀을 팔러 가는 농부, 도시를 오가는 행상인, 용병인지 마수 사냥꾼인지 모를 무장한 사람들.
그들 중 몇몇은 홀로 다니는 투란을 보며 슬쩍 눈을 빛내기도 했으나, 한 번 발을 내디딜 때마다 보통 사람의 서너 걸음을 훌쩍 걷는 모습을 보고는 기겁하며 눈을 내리깔았다.
사흘째 오후부터는 흙이 아닌 단단한 돌로 된 가도(街道)를 볼 수 있었다.
누가 관리하는지는 몰라도 조금 부서진 부분만 있을 뿐 굉장히 잘 정비되어 있어 걷기 편했는데, 호기심에 마법으로 가볍게 가장자리를 부숴 보려고 하니 잘 안되는 게 무언가 마법적인 힘이 깃든 듯했다.
그리고 마침내 나흘째.
마수를 잡느라 옆으로 자주 샌 탓에 조금 시간이 더 걸리기는 했지만, 투란은 목표로 했던 오렘 시에 도착하게 되었다.
"자, 자! 줄 맞춰 들어오시오! 거기! 새치기하지 말고!"
오렘 시는 이전에 있던 무레이를 촌 동네처럼 보이게 하는 대도시였다.
그 인구만 수만 명에 달한다고 하던가?
가장자리는 빈민으로 보이는 이들이 사는 허름한 오두막이 한가득 늘어섰으며 안쪽에는 높이가 오 미터 정도쯤 되는 돌 성벽이 세워져 경계를 만들었다.
성문에서는 금속 갑옷으로 무장한 이들이 오고 가는 이들을 지켜보았는데, 옆에 초상화 같은 것이 잔뜩 놓인 것으로 보아 드나드는 사람 중 수배자가 있는지를 검사하는 듯했다.
투란이 문으로 들어가려는데 그들 중 하나가 갑자기 앞을 막아섰다.
"이봐, 옷이 너무 더럽잖아. 적어도 성벽 밖에서 먼지라도 좀 털고 들어오라고."
딱히 괜한 트집을 잡는 게 아니라 투란의 옷이 주변 사람들의 그것에 비해 유난히 더럽기는 했다.
애초에 지금 입고 있는 옷부터가 양치기 시절부터 쭉 입던 것이라 많이 낡아 있기도 했고, 지난 나흘간 노숙하며 제대로 빨래도 하지 않은 탓이었다.
게다가 물이 부족한 히사릴 언덕에서 살아온 탓에 투란은 빨래란 한 달에 한 번쯤 하면 되는 것이라 여겼다.
무레이 시 역시 황야 지대 옆인 만큼 물이 썩 넉넉하지 않아서 똑같이 다들 더러웠고.
그에 비해 이 도시 사람들은 하나같이 단정하고 깔끔해서 투란의 몰골이 더 비교됐다.
"알겠습니다."
성문 밖에서 옷을 탁탁 털고 다시 안으로 들어가자 이번에는 제지를 받지 않았다.
다행히 이번에는 쓰지도 않을 물건을 사며 도서관의 위치를 물을 필요는 없었다.
미단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도서관은 이 도시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라고 했으니까.
대부분이 이 층에서 삼 층인 건물들 사이로, 자기 혼자 삼십 층도 넘을 듯 우뚝 솟은 탑 하나가 보였다.
'아마 마법으로 지은 거겠지?'
도저히 사람의 힘으로 만든 것이라고는 보기 힘든 위용.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너무 말도 안 되게 높아서 기괴하게까지 보였다.
저 위로 올라가면 구름조차 내려다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
한참 넋을 잃고 감상하던 투란은 이내 정신을 차리고 입구를 지키고 있던 경비에게 말을 걸었다.
"여기는 마법사라면 들어갈 수 있다고 들었는데, 맞습니까?"
투란의 질문에 경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웬 거지 같은 옷차림을 한 녀석이 있어서 대충 쫓아낼 생각이었는데 갑자기 이게 웬 말인가?
내심 그냥 미친 녀석이 개소리를 하는 것이라 여겼지만, 마음속에서 혹시나 하는 의혹이 생겼다.
그렇기에, 경비는 마법사만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상대의 정체를 확인하기로 했다.
'음?'
투란은 경비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마력의 흐름에 눈을 크게 떴다.
그 자체로는 아무 현상도 일으키지 않게 조작한, 순수하게 자신의 힘을 입증하기 위한 마법....
마법사들이 싸움 없이 서로의 마력을 감지하여 고하를 나누기 위해 만든 것이라고 하던가?
케오른에게 배운 뒤 서로 몇 번 시험한 적은 있지만 다른 사람에게 받는 건 처음이었다.
그야 다른 마법사와 만나는 게 이번이 처음이었으니까.
투란은 마찬가지로 순수한 마력을 끌어올려 그대로 상대를 향해 투사했다.
"허억...!"
이를 받아낸 경비가 입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그의 마력은 체감상 케오른의 절반 정도, 현재의 투란과 비교하면 이십 분의 일도 안 되는 수준이었으니 버텨낼 재간이 없었다.
하기야 이런 곳에 특출난 실력자를 세워 두는 것도 웃기는 일 아니겠는가.
격차를 실감한 경비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바, 발타스 가문의 기사 케샤입니다. 고귀하신 분, 혹시 어느 가문에서 오신 것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들어가려면 말해야 하는 겁니까?"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감히 너 따위가 그런 것을 물어보냐는 식으로 이해했는지, 기사가 조금 전보다 더 깊게 고개를 숙였다.
투란은 벌써 그와의 대화가 피곤해지기 시작했다.
"아뇨, 진짜 그냥 물어보는 겁니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고개를 든 기사는 투란이 진심임을 그제야 알았는지 소심한 태도로 말했다.
도서관의 이용은 이곳의 영주, 즉 발타스의 가주가 허락한 사람만이 가능하다고.
미단에게 들었던 것과는 사뭇 다른 이야기였다.
"마법사라면 이용할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그것이...제가 알기로 평민이 도서관 이용을 허락받은 적이 없기는 합니다."
드나드는 이가 모두 마법사라서 마법사라면 출입할 수 있다는 식으로 이야기가 와전된 것일까.
투란은 잠시 턱을 긁적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발타스의 주인께 도서관 이용을 허가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높으신 분들의 일이라 저따위는 감히 알지 못합니다. 고귀하신 분께서 허락하신다면 가문에 연락하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말한 뒤 투란은 도서관 정문의 맞은편 담벼락에 기댔다.
이렇게 정체를 밝혔으니 곧 발타스 가문의 '대접'을 받아야 할 터였다.
귀족이 다른 귀족의 영지에 들어가면 손님으로 대접하며 또한 대접받는 것이 도리라고 했으니....
'그냥 몰래 들어가 볼 걸 그랬나.'
자하르 혈통의 은신 능력을 사용하면 몰래 잠입할 수도 있었겠지만, 저 안에 이를 무력화하는 경비 체계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함부로 시도하지는 못했다.
만약 그랬다가는 암살자로 오해받아도 할 말이 없지 않나.
심지어 자하르 혈통의 능력이야말로 가장 암살에 특화된 능력 중 하나이니 더더욱.
잠시 후, 말 네 마리가 끄는 거대한 마차 한 대가 대로를 질주하여 도서관 앞에 멈춰 섰다.
마부 역할을 하던 중년 남자가 투란을 보더니 바로 넙죽 고개를 숙였다.
"지혜의 도시 오렘에 방문하신 것을 환영합니다, 고귀하신 분. 저는 발타스 가문의 집사 레덴입니다. 발타스의 주인께서 손님을 영접하고자 하시는데, 혹여 시간을 내어주실 수 있으십니까?"
"좋습니다."
"부디 저를 높이지 말아주십시오, 고귀하신 분."
투란의 존칭에 레덴이라는 이름의 집사가-사실 집사가 뭔지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했다-당장 바닥을 기기라도 할 듯 비굴한 태도로 말했다.
이 낯간지러운 반응에 투란은 내심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안내하겠습니다."
마차는 무레이에서도 몇 번 본 적 있지만 직접 타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동하는 동안 투란은 정신을 가다듬으며 만일의 상황을 대비했다.
그럴 가능성은 별로 없지만, 이 가문에서 갑자기 공격이라도 해온다면 당장 은신한 뒤 도망쳐야 할 테니까.
십 분 정도 지나자 마차가 멈추며 밖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도착했습니다.]
문을 열고 나오자 새하얀 돌로 지어진 성이 투란을 반겼다.
높이는 오 층에서 육 층 정도일까, 전체적으로 방어보다는 미관을 중시한 듯한 외형이었다.
마부석에서 내린 집사가 그에게 말했다.
"가주님을 뵙기 전 의관을 정제하실 수 있도록 도와드릴까 하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의관을 정제한다는 게 대체 무슨 소리인지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아무튼 만나기 위해 필요한 일일 테니 고개를 끄덕였다.
집사의 안내에 따라 정문으로 들어가자 하녀 세 명이 그에게 다가왔다.
"목욕탕으로 안내하겠습니다, 고귀하신 분."
마침 이곳에 온 뒤로 스스로 더럽다는 걸 느끼고 있던 터라 반가운 제안이었다.
문제는 하녀들이 목욕탕까지 따라 들어왔다는 것.
"목욕 시중을 들어 드리겠습니다."
목욕 시중이라니, 설마 어린애처럼 씻겨 주기라도 하겠다는 뜻인가?
어머니와 둘이 살았다지만 남녀 간에 삼가야 하는 예절 정도는 알았기에, 투란은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혼자 씻겠습-씻겠다. 다 나가 있어."
그런데 이를 들은 하녀들의 얼굴이 파랗게 질리더니 넙죽 엎드려서는 죄송합니다,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하고 비는 것이 아닌가.
심지어 가장 어린 하녀 한 명은 엉엉 울기까지 했다.
황당하기까지 한 반응에 투란은 가장 나이 많은 하녀를 지목해 물었다.
"내가 혼자 씻으면 문제가 되나?"
"예. 저희는 고귀하신 분을 제대로 대접하지 못하면 벌을 받습니다. 부디 자비를...."
마법사와 평민의 계급 차이가 크다는 것을 어느 정도 알기는 했지만 설마 이 정도였을 줄이야.
투란은 밀려오는 피로감에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서 해."
잠시 후, 하녀들은 투란의 옷을 벗기고 따뜻한 물과 비누로 몸을 씻겼다.
그 와중에 직접 무언가를 할 필요 따위는 없었다.
이런 일이 능숙한 듯, 그녀들은 투란에게 팔이나 다리를 움직여달라거나 하는 말조차 없이 온몸을 빈틈없이 닦아냈다.
여자들에게 알몸을 보이는 것과 몸 씻는 일을 다른 사람에게 맡긴다는 것, 그리고 줄줄 흐르는 땟국물을 보인다는 것이 실로 어색하기 짝이 없기는 했지만-그것만 빼면 확실히 목욕 시중이라는 건 받을 만한 가치가 있었다.
목욕을 마친 뒤 엉켜 있던 긴 머리를 빗어내고 옷을 갈아입으며 단장을 마치자 하녀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조금 전 엉엉 울던 투란 또래의 가장 어린 하녀는 얼굴을 붉히며 탄성을 터트리기까지 했다.
"와...."
"왜?"
고개를 돌리며 묻자 그녀가 깜짝 놀라 합, 하고 재빨리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나이 많은 하녀가 대신 설명했다.
"고귀하신 분께서 너무 아름다우셔서 잠시 넋을 잃었나 봅니다. 부디 용서해 주세요."
그렇게 말하며 옆에 놓여있던 큼직한 거울을 가져다 보여주는데, 이를 보니 왜 그런 반응이었는지 알 수 있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평소 자르기 귀찮아서 대충 꽁지머리로 묶었던 회색 머리카락.
하녀들은 이를 잘 빗어낸 다음 뭔지 모를 기름을 발라 늘어트렸는데, 그러자 마치 잘 닦은 강철처럼 윤이 나며 잿빛 눈과 완벽히 어우러졌다.
거기에 잘 씻지 않아 까무잡잡하던 피부가 말끔해지자 선 굵은 이목구비가 도드라졌고, 금실이 수놓아진 하얀 옷은 크고 날렵한 체격을 한층 더 우아해 보이게 만들었다.
씻기 전까지의 그가 제법 잘생긴 거지였다면, 지금은 그야말로 평생을 대접받으며 살아온 귀족 청년처럼 보였다.
잠시 후, 모든 단장을 마친 투란은 집사의 안내를 받아 가주가 기다리고 있는 연회장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만나는 이들 모두가 그를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고개를 넙죽 숙이길래, 투란은 앞장서서 걷는 집사에게 물었다.
"저들이 다 내 신분을 아는 건가?"
"입고 있으신 옷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성에서 금색이 섞인 옷은 오직 고귀하신 분들께만 허락된 색상인지라."
딱 그 말을 들은 순간, 복도 한편에서 금실로 수놓은 회청색 드레스를 입은 아가씨가 나타났다.
투란을 본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이 사람이 그 거지꼴로 왔다는 손님? 뭐야, 씻기고 입힌 거 보니까 왕자님이 따로 없는데?"
"아, 아가씨. 거지꼴이라는 말은...."
"뭐 어때? 전 이젤라예요. 이젤라 발타스. 그쪽은?"
집사가 말하는 호칭과 태도로 보건대 그녀는 아마 발타스 가문의 귀족인 것 같았다.
과연 진짜 귀족이란 이런 거였나, 싶을 정도로 행동과 말투 하나하나에서 묻어나오는 오만함.
본능적으로 밀리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투란은 고개를 숙이지 않고 당당히 선언했다.
"투란입니다."
"그냥 투란? 가문은요?"
"사정상 밝히기 어렵습니다. 적대하는 가문이 있어서요."
이는 투란이 케오른과 상의하여 미리 준비해 둔 핑계였다.
마력을 키우기 위해 순례를 나섰지만 적대하는 가문이 있어 신분을 감춘 귀족인 척하는 것.
본가라 할 수 있는 자하르 가문에서는 정작 투란의 존재조차 모르니 이를 자칭하기는 껄끄럽고, 그렇다고 마냥 감추면 범죄라도 저지르고 도망친 놈 아니냐고 의심을 살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조금 전 도서관의 경비가 그랬던 것처럼 이젤라의 몸에서 마력의 흐름이 솟구쳤다.
마치 그가 사기꾼인지 아닌지 알아보겠다는 것처럼.
이에 투란이 마찬가지로 힘을 방출하자 둘의 마력이 충돌하며 번갯불이 팍 튀었다.
"꺅!"
하녀들이 비명을 지르며 물러서는 가운데, 투란은 조금 전의 충돌을 분석하며 새삼 충격을 느꼈다.
이젤라의 마력이 그와 거의 동등한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리 놀랄 일은 아니었다.
투란의 잠재력이 뛰어난 것과 별개로 그는 이제 마력을 모으기 시작한 지 한 달도 안 된 초보자였으니까.
하지만 그간 만난 마법사들이 모두 그보다 훨씬 약했던 탓에, 이렇게 비슷한 체급의 상대를 마주치자 새삼 그 충격이 크게 느껴졌다.
마치 평생을 난쟁이들과 살다가 갑자기 같은 키의 거인을 마주한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데 잘 보니 맞은편의 이젤라 역시 그의 힘을 느끼고 충격을 받은 눈치였다.
"와...."
탄성을 터트리며 멈칫했던 이젤라가 대뜸 충격적인 소리를 내뱉었다.
"저기 손님, 우리 결혼할래요?"
9화
투란이 어머니에게 배운 바에 의하면 남녀 간의 혼인이란 실로 신성한 것이었다.
신의 이름으로 죽는 날까지 끝나지 않을 사랑을 맹세하는 의식.
그렇게나 중요한 것을 대뜸 언급하는 태도에 멍한 표정을 짓자, 이젤라가 깔깔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뭔 반응이 그래요? 농담 좀 한 거 가지고!"
"아가씨, 제발...."
"알았어. 그런데 한 번 생각 정도는 해 봐요! 지금 내 옆자리는 비어 있으니까!"
이젤라는 그렇게 말하더니 복도 너머로 휙 사라졌다.
힘겹게 이마를 훔치며 실례했습니다, 하고 연신 사과하는 집사는 순식간에 십 년쯤 늙은 것처럼 보였다.
잠시 후, 투란은 이 성에서도 가장 크고 웅장한 외관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마수의 박제와 고풍스러운 가구, 화려한 장식품으로 가득한 집무실.
그 한가운데에 자리한 의자에 앉은 이가 발타스의 가주이자 오렘 시의 영주인 루그 발타스였다.
"어서 오게, 젊은 귀족. 내 이름은 이미 알겠지?"
"투란이라고 합니다."
발타스 가주의 뒤쪽에는 칼을 찬 남녀 한 명이 공손히 서 있었는데, 분위기상 그를 호위하는 기사인 듯했다.
가주씩이나 되는 귀족에게 기사 호위 따위가 무슨 쓸모일까 싶기는 하지만.
투란의 말에 루그가 흥미로워하는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투란이라, 그뿐인가?"
"제 가문과 적대하는 곳이 있어 밝히기가 어렵습니다."
"흠, 요즘 일어난 분쟁 중에 그 정도로 큰 게 무엇이 있었지? 하디트와 코렐, 이레와 켈라우, 아라비온과 자하르-"
아라비온과 자하르의 이름을 들은 순간 투란은 동요한 감정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고자 정신을 집중했다.
그렇게 몇 개 가문의 이름을 나열하던 루그는 상대가 전혀 반응하지 않자 재미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뭐, 어차피 지금 우리는 적대하는 가문이 없으니까. 다만 차후 발타스 혈통이 자네의 보호 아래에 들어갔을 때, 우리가 자네를 대접했듯 대접받으리라 믿겠네."
"약속하겠습니다."
이렇듯, 귀족이 다른 귀족을 손님으로 대접하는 것은 서로를 존중하며 충돌하지 않겠다는 약속이었다.
만약 다른 가문의 영지에 들어갔음에도 대접을 거부한다면 이는 영지의 주인에게 '나는 네 손님이 아니다. 무언가 악한 의도를 가지고 왔다.'라고 선언하는 것과 마찬가지.
이는 과거 투란이 어머니에게 배웠던 접대의 관습과도 일맥상통했다.
"그래서, 도서관을 이용하고 싶다고? 무엇 때문에?"
"제가 자란 환경이 특수하다 보니 아는 것이 많이 없어서, 책으로 세상을 배우고 싶습니다."
그 말을 들은 루그가 코웃음을 쳤다.
"어디서 이상한 소리 듣고 찾아오는 이들이 꽤 있어서 미리 말해두지만, 도서관에 끝내주는 고대 마법이나 마력을 높이는 비법 따위는 없어."
"괜찮습니다. 그런 것은 바란 적 없었으니까요."
투란은 전혀 상관없다는 뜻을 밝혔다.
그는 정말로 평생 언덕 위에서 사느라 몰랐던 것을 알고 싶을 뿐이었으니까.
투란을 빤히 바라보던 루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원한다면 못 들여보내 줄 것은 없지. 어차피 그 안에 우리 가문과 관련된 기밀 같은 건 하나도 없으니까. 오늘은 시간이 좀 되었으니 쉬고 내일 보는 것으로. 괜찮나?"
"가주님의 호의를 잊지 않겠습니다."
"그래, 잊지 않으리라 믿네."
고개를 끄덕이며 이쪽을 바라보는 루그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걸렸다.
* * *
다음 날, 성에서 나온 투란은 발타스의 기사 한 명을 대동한 채 도서관으로 향했다.
입구를 지키고 있던 경비-어제와는 다른 사람이었다-가 가주의 서명이 적힌 종이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출입증 확인했습니다, 고귀하신 분. 하늘 도서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안으로 들어간 투란을 가장 먼저 반긴 것은 책상과 의자 몇 개, 그리고 둥근 벽을 타고 나선형으로 설치된 계단이었다.
창문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천장의 동그란 구체에서 나오는 흰 빛이 실내를 환히 밝혔다.
안쪽으로 들어가자 한 책상에 앉아있던 중년 남자가 투란을 향해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투란 님. 저는 이곳의 사서입니다. 가주님의 명에 따라 이곳의 이용 수칙을 설명하겠습니다."
하늘 도서관의 이용 수칙은 그리 복잡하지 않았다.
첫째, 도서관 내의 책이나 시설물을 훼손할 경우 가문에서 매긴 금액대로 보상할 것.
둘째, 도서관 내의 책은 반출 금지.
투란이 듣기에는 그냥 당연히 하지 말아야 할 일을 나열한 것처럼 보였다.
"또한, 도서관 이용 중에는 제가 수칙 위반을 확인하기 위해 항상 뒤쪽에서 지켜보고 있어야 합니다."
투란은 사서의 설명이 끝나기 무섭게 곧바로 계단을 올랐다.
2층으로 올라오자 가운데 공간에 설치된 책장, 그리고 거기에 꽂힌 수백 권의 책이 보였다.
"오...."
수천 권의 책이 있다던 미단의 말은 오히려 사실을 축소한 것인 듯했다.
이 건물의 높이를 생각하면 수천 권이 아니라 수만 권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겠다 싶을 정도.
하지만 서너 층 정도를 더 올라가 보니 언제부턴가 책장 상당수가 텅텅 비기 시작했다.
십 층 정도부터는 아예 책이 한 권도 꽂혀 있지 않았는데, 뒤따르던 사서가 이 위로는 책이 없다고 말했기에 투란은 다시 2층으로 내려왔다.
"도서관의 크기에 비해 책의 개수가 좀 모자라 보이는데."
"이 도서관은 옛 제국 시절에 지어진 것으로, 전쟁으로 오렘 시의 주인이 여러 차례 바뀌며 그 과정에서 많은 책이 유실되어서 그렇습니다."
옛 제국.
어머니에게 지나가듯 몇 번 들은 적 있는 단어였다.
머나먼 고대, 프레아 신족이 이종족을 물리치고 세상을 정복하여 세운 나라였다고 하던가?
하지만 신들이 승천한 뒤 그 후예인 귀족들이 서로 반목한 끝에 제국은 무너졌고, 지금처럼 여러 마법사 가문이 난립하는 사회가 되었다고 했다.
빽빽이 꽂힌 2층의 책들을 들여다보던 투란은 뒤에 있던 사서에게 시선을 돌렸다.
"사서라면 이곳의 책도 읽어봤겠지."
"예. 이용하시는 분들에게 필요한 책을 찾아드리는 것 역시 제 일입니다."
"기본적인 상식을 얻고 싶다면 어떤 책이 좋을까?"
여기서 하는 말이 모두 가주에게 전해질 수 있음을 고려해 투란은 말을 신중하게 골랐다.
이를 들은 사서는 잠시 고개를 갸웃하더니, 이내 여기저기서 책 몇 권을 뽑아내기 시작했다.
위층까지 몇 번 오간 끝에 그는 십수 권의 책을 1층의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이곳의 책 중 상당수는 수백 년에서 수천 년쯤 지난 것이라 고귀하신 분께서 원하시는 바에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그나마 이 책들을 읽으시는 쪽이 도움이 되리라 생각됩니다."
"고마워."
투란은 감사를 표한 뒤 의자에 앉아 책 한 권을 들고 이리저리 살폈다.
커버는 두툼한 소가죽, 종이는 잘 재단한 양피지로 만들어졌으며 안쪽에는 장인이 한 땀 한 땀 새겨넣은 듯한 글자가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그 자체로도 하나의 예술품처럼 느껴지는 물건.
'이게 바로 책....'
투란은 어머니가 그토록 바라던 물건을 간단히 손에 넣었다는 사실에 복잡한 감정을 느끼며 책을 펼쳤다.
나뭇가지로 모래를 긁어내는 식으로 읽고 쓰는 법을 배웠기에 조금 더듬거리긴 해도 그럭저럭 글을 읽을 수 있었다.
책의 제목은 '세계 일주기'.
누군지 모를 책의 후원자를 예찬하는 서문을 지나자 본격적으로 내용이 시작됐다.
저자는 오렘 북쪽의 작은 도시에서 태어난 귀족으로, 세상의 끝을 보고 싶어 동쪽으로 여행을 떠났다고 했다.
책에 적힌 이야기의 내용은 투란의 정신을 쏙 빼놓았다.
하루 한 번씩만 좌우로 열리는 산맥의 통로, 그곳에 숨어 살며 지나다니는 사람을 잡아먹는 눈먼 난쟁이들.
끊임없이 모래만이 펼쳐져 낮에는 끓어오르고 밤에는 얼어붙는 사막.
울창한 밀림의 요정, 끊임없이 파도가 치는 바다와 암초에서 노래를 부르며 사람을 끌어들이는 인어....
태어나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환경을 실감 나다 못해 오싹하기까지 할 정도로 생생히 묘사하는 능력은 실로 마법과도 같았다.
책을 절반쯤 읽었을 때쯤, 투란은 허기를 느끼며 우선 읽은 부분을 기억한 뒤 책을 접었다.
'대단한데.'
이제 그는 저 동쪽으로 가면 어떤 신기한 지형이 있는지, 그리고 막연히 이름만 들었던 이종족들이 어떻게 생겼으며 어떤 생태와 문화를 가졌는지까지 알 수 있었다.
고작 책 한 권을 반쯤 읽었음에도 이 정도인데 저것들을 다 읽으면 또 무엇을 알게 될까.
기대감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 * *
도서관 출입을 허락받은 뒤, 투란은 매일 아침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저녁이 되고서야 성으로 돌아오는 생활을 반복했다.
둘째 날, 대가문부터 시작해서 평범한 마법사 가문들이 어떤 방식으로 서로를 대하는지, 어떤 체계로 도시와 마을을 경영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셋째 날, 그가 생각 없이 지나쳤던 물건들이 어느 지역에서 나온 어떤 재료를 어떻게 가공하여 만들어지는지를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다.
넷째 날, 마수 도감을 통해 마수들이 생물별로 어떤 힘을 주로 개화하는지, 어떤 신체적 특성이 어떤 힘을 상징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다섯째 날, 옛 제국 시절의 유물 중 상당수가 세상 곳곳에 퍼져 아직도 남아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 도서관부터 시작해서 그가 오렘에 오는 길에 보았던 돌로 된 도로 역시 그중 하나였다.
이런 지식을 하나하나 쌓을수록 그저 미지의 공간으로만 여겨지던 세상이 점점 더 선명해졌다.
무지한 양치기 소년에서 조금 더 나은 무언가로 진화하는 기분....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나 마력을 얻을 때처럼 말초적인 쾌감은 없었지만, 그와 별개로 정신적인 만족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여섯째 날.
도서관으로 향하던 투란은 루그의 호출을 받았다.
그는 집무실에 도착한 투란을 보자마자 대뜸 용건을 꺼냈다.
"도서관을 아주 잘 이용하고 있다지?"
"예."
"내가 자네를 귀족으로서 대접한 것과 별개로 도서관을 이용하도록 허락한 것이 호의임을 알리라 믿네. 지금 그 대가를 받고 싶네만."
"말씀하십시오."
이쪽이 받아먹기만 하고 요구는 안 들어준다고 들면 저쪽에서도 이제 슬슬 꺼지라고 하지 않겠는가.
보통 귀족이 영지를 방문한 손님을 대접하는 시간은 관례상 사나흘 정도.
슬슬 이를 넘어선 투란으로서는 그의 부탁을 들어줄 필요가 있었다.
"최근 오렘의 북쪽에 마수 하나가 나타나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습격하고 있다더군."
"제가 놈을 사냥하기를 원하시는 겁니까?"
투란의 물음에 루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놈을 토벌하러 갔던 기사 네 명이 돌아오지도 못하고 잡아먹혔네. 아무래도 귀족이 직접 나서야 할 텐데, 우리 가문이 동원할 수 있는 건 두 명뿐이야. 자네까지 참여해 세 명이 된다면 훨씬 안전하겠지."
발타스 가문의 구성원은 루그 부부와 루그의 동생, 딸과 조카 두 명까지 총 여섯 명.
그중 루그의 동생과 조카 한 명은 오렘이 아닌 다른 도시의 영주로 나가 있으며, 본인은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도시를 보호해야 했고 부인은 전투에 능숙하지 않았다.
따라서 동원할 수 있는 귀족은 딸과 조카까지 두 명뿐이라는 계산이었다.
"알겠습니다."
흔쾌히 허락한 것은 요즘 책을 읽느라 밖으로 나다니지 않아 실전 경험과 마력을 전혀 쌓지 못하기도 했고, 과거 케오른에게 들었던 말이 떠오르기도 해서였다.
인간은 언제나 마수에게 생활의 터전을 위협받고 있으며, 따라서 마법사가 이를 물리쳐야 한다는 것....
이곳 오렘의 평민들이 투란의 양은 아니지만, 그가 먹고 마시며 몸에 두른 것들은 모두 그들에게서 나왔을 터였다.
양치기는 양의 털과 살점을 먹으며 연명하는 대가로 양을 늑대에게서 지켜야 하는 법.
그렇게 고개를 끄덕이기도 잠시, 문득 의문 하나가 떠올랐다.
무레이의 공무원이 말하던 것을 생각하면 귀족이건 기사건 마수 사냥에 그리 적극적이지 않던데, 그는 왜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반응한단 말인가?
간접적으로 묻자 루그가 답했다.
"놈이 틀어막은 북쪽 길이 중요한 무역로니까. 벌써 열흘째 막혔으니 빨리 뚫어야지."
열흘이라....
투란은 닷새 전, 그가 도서관을 이용하고 싶다고 하자 의미심장하게 웃던 루그의 미소를 떠올렸다.
이제야 왜 도서관 이용을 흔쾌히 허락했는지 알 수 있게 되어서 차라리 마음이 편했다.
1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