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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3

어젯밤, 본부기획실.

후인이 가져온 문서를 반으로 찢은 직후.

오히려 당황한 사람은 줄곧 말을 아끼고 있던 김민주와 한유빈이었다.

"서, 선생님…?"

"그, 그렇게 단번에 결정할 일이...."

"협회, 넘겨줍시다."

내 난데없는 결정에 말문이 턱 막힌 듯했다.

"인수 한 번 하자고 다들 감방 갈 거 아니잖습니까? 그렇다고 현지 직원들 방패로 세워서 도망가는 것도 모양 빠지고."

물러날 때는 미련 없이 물러나는 게 낫다.

괜히 어중간하게 붙잡고 있다간 오히려 상황이 더 꼬일 수 있다.

"어쩌겠습니까. 협회와 허브를 다 넘겨줄 테니 우리한테서 손 떼 달라고 해주는 수밖엔. 일단 결재란만 잘 숨기면 당장은 손을 댈 수 없을 테고."

"그놈이 원하는 대로 하겠다는 거예요?"

"더 좋은 방법이라도 있습니까?"

"...."

"...."

그녀들의 표정이 구겨졌다.

그녀들로서도 그게 가장 옳은 선택이라는 걸 알고 있다. 다만, 분한 마음이 드는 건 그것과는 별개의 일이었다.

하나 같이 죽을상을 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표정들 푸시죠. 당연히 그냥 넘겨줄 생각은 없으니까."

"...네?"

"뭐, 자세한 건 차근차근 설명하기로 하고.... 일단은 세 분 다 지금 당장 주변 협회에 연락 좀 돌려주셔야겠습니다."

후인을 포함한 세 명 모두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주변 협회에 도움을 요청할 생각이라면, 기대는 안 하시는 게...."

"아뇨. 그 반대입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허브 유통비, 세 배로 올리겠다고 통보하세요."

"...네, 네?"

"추가로 유통되는 부산물 중 5%를 베트남 협회에 지불하라고도 전해주시고요. 만약 이에 응하지 않을 시 무력 충돌도 고려하겠다고요."

"자, 잠깐만요! 이미 협의도 다 끝났는데 갑자기 그렇게 나오면 주변 협회에서 반발이 어마어마할 텐데요."

"상관없습니다."

"지부뿐만 아니라 국제 협회 본부에서도...."

아, 후인이 짧게 신음했다.

그제야 뭔가를 눈치챈 모양이었다.

그건 김민주와 한유빈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래.

기어이 욕심을 내겠다면 원하는 대로 실컷 떠먹여 줘야지.

이걸 받아먹고도 괜찮을지는 모르겠지만.

***

―국제 협회 소속, 말레이시아 지부.

"뭐?"

늦은 새벽, 말레이시아 지부장 이스마일에게 어처구니없는 소식이 전달됐다.

"허브 유통비를 세 배로 올리겠다고?"

"네. 추가로 한 달 유통량에서 5%를 지급하라고...."

쾅―!

"이런 미친 새끼들을 봤나! 진짜 전쟁이라도 하자는 거야 뭐야?"

이스마일 지부장의 목소리가 격양됐다.

그에게 소식을 보고한 수행비서 또한 애써 참고 있을 뿐, 입장은 마찬가지였다.

"요근래 급성장을 하더니 아무래도 욕심을 부리는 것 같습니다."

"시발, 정도껏 해야지! 허브 세우는 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 줬더니, 이딴 식으로 뒤통수를 쳐?!"

"그나저나 이런 식으로 나오면 동남아 지부를 다 적으로 돌릴 게 뻔한데… 누가 이런 멍청한 지시를 한 걸까요."

"누구겠냐? 이딴 짓 할 놈이 비엣, 그 새끼밖에 더 있어?"

상황을 알 턱이 없는 그로선 당연한 오해였다.

"어쨌든 시발, 이딴 식으로 나오면 우리도 가만히 못 있지."

이스마일 지부장이 이를 갈았다.

일방적인 인상 통보에 잔뜩 화가 난 건, 비단 말레이시아 지부뿐만이 아니었다.

―캄보디아 지부.

집무실에서 보고를 들은 중년 여성, 밀리어 지부장은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오히려 미소를 지었다.

"요새 갑자기 성장세를 올리더니, 비엣 이 개새끼가 이젠 눈에 뵈는 게 없나 보네."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다른 협회들 반응은 어때?"

"마찬가지 반응입니다. 다들 가만히 안 있겠다고...."

"당연히 그래야지. 지금 그 돼지 새끼가 우리를 개 호구로 보고 있는데."

밀리어 지부장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아마 그 새끼, 곱게는 못 죽을 거야."

그녀는 곧바로 대응책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태국 지부

"주변 협회를 다 적으로 돌리겠다고? 하물며 국제 협회 지부들을?"

드디어 돈 앞에서 이성을 잃었군, 쁘라셋 지부장이 중얼거렸다.

"이제 어떻게 할까요? 저희도 강경책으로 나가야 할 것 같은데...."

"뭘 어떻게 해. 이거, 우리 선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냐?"

"아니죠."

쁘라셋 지부장이 옅은 한숨을 쉬었다.

"본부에 연락해."

수행비서는 짧은 대답과 함께 집무실을 나섰다.

"그 욕심쟁이 새끼, 기어이 지 무덤을 지가 파네."

동시에 쁘라셋 지부장은 헛웃음을 뱉었다.

―프랑스, 국제 협회 본부.

똑똑―.

건물 꼭대기 층에 위치한 사무총장실에 노크 소리가 울려 퍼졌다.

"예."

중후한 음성이 깔리자 수행비서가 조심스레 사무실로 들어섰다.

"사무총장님, 지금 베트남 협회에서...."

"소식은 들었습니다."

처음으로 헌터 랭크 시스템을 도입, 전 세계 모든 헌터를 관리 등록하는 기관.

동시에 전 세계 총 52개의 지부를 두고 있는 최고 국제 헌터 기구.

현 국제 헌터 협회의 우두머리, 웨슬리 사무총장이 수행비서의 말을 자르며 입을 열었다.

"베트남 협회가 고집을 부리고 있다고요."

"예. 덕분에 동남아 지부들의 항의가 거셉니다. 뭐, 지부들 반응은 둘째 쳐도...."

"우리로서도 반가운 일은 아니죠."

흐음.

웨슬리 사무총장이 한숨을 쉬었다.

베트남 협회의 실상을 어렴풋이 알고 있던 그로선 사실 별로 흥미가 동하지 않았다.

작년에 추진한 인수합병이 베트남 정부에 의해 엎어지고 난 후로는 신경조차 쓰지 않던 곳이었다.

그런데 그조차 손을 뗀 베트남 협회가 한 달 새에 갑자기 성장세를 올린 건 꽤나 놀라운 일이었다.

"뭐, 비엣 그 멍청이가 직접 추진한 건 아닐 테고... 어디서 백기사 하나는 잘 구했군요."

"그...."

그때, 수행비서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사실 PB 코퍼레이션에서 올린 보고에 의하면, 아무래도 한국 협회 놈들이 움직인 것 같다고...."

"한국 협회가?"

웨슬리 사무총장의 눈이 꿈틀했다.

"네. 며칠 전에 김 본부장과 그의 동료들이 베트남에 입국했다는 정보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케인 팀장의 의견으로는 한국 협회가 베트남 협회를 키워서 인수하려는 게 아닐까 하는...."

"그러니까, 한국 협회가 해외에 지부를 두려 한다…?"

"네."

"하아...."

웨슬리 사무총장은 머리를 쓸어 넘겼다.

김 본부장이라면 그 또한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미국 지부 건부터 해서 몇 번이고 보고가 올라온 적이 있다.

어쩐지 하는 짓이 너무 똑똑하다 싶었다.

부산물 유통 루트를 정확히 공략한 것도 그렇지만, 국제 협회 지부들을 상대로 이득을 챙기는 동시에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선에서 거래를 진행했다.

처음 제시한 허브 비용 또한 마찬가지.

한눈에 봐도 적정선을 지키겠다는 입장이 보일 정도였다.

그런 놈이 갑자기 협의가 끝난 유통비를 세 배나 올리겠다고 할 리가 없다.

그런 멍청한 짓을 할 만한 사람은 딱 한 명뿐.

"아무래도 비엣이 중간에 뒤통수를 쳤나 보군요."

"동감입니다."

"쓰읍, 이러면 곤란해지는데요."

사무총장의 미간이 확 좁아졌다.

사실 그 욕심쟁이가 저지른 일 자체는 해결이 그리 어렵지 않다.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 버리면 그만이니까.

어차피 안팎으로 적이 많은 놈이다. 언제 갑자기 목이 날아가도 이상할 것 없으니 처리하기엔 더할 나위 없겠지만....

문제는 한국 협회가 끼어 있는 지금, 비엣을 죽여 버리면 결국 한국이 베트남 협회를 먹는 걸 도와주는 셈이다.

그렇다고 내버려두자니 지부들의 반발을 무시할 수도 없고.... 무엇보다 비용적인 손해가 막심해지겠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뭐, 어쩔 수 없죠. 지금 와서 김을 죽여 봤자 한국 협회로 넘어가는 걸 막을 순 없을 테고… 손을 쓰기엔 이미 늦은 것 같으니. 이번엔 한발 물러나 주는 수밖에요."

이미 끓을 대로 끓어 뜨거워진 주전자를 건들다가는 손을 데기에 십상이다. 여기선 잠시 기다리는 게 이롭다. 하지만....

"한국 협회 분들한테도 확실하게 경고할 필요는 있을 것 같군요."

"그 말씀은...."

"마르크 팀장 좀 불러주세요."

결국, 밸런스 조정 팀장이 나서야 할 때였다.

***

취조실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어수선해졌다.

"구, 국제 협회에서 연락이 왔다고? 대체 왜?!"

공안이 전해준 소식에 비엣이 크게 당황하며 물었다.

"이번에 허브 비용 인상 통보에 대해서 원만한 합의가 이뤄지지 않으면 국가 차원에서 강경 대응을 하겠다고...."

"비용 인상 통보? 그게 뭔 개소리야!"

"저, 저도 자세히는 잘...."

비엣에겐 어리둥절하기만 한 이야기겠지만, 뭐 무슨 상관이겠는가.

"국제 협회뿐만이 아닙니다. 주변국들이 전부 들고 일어났어요. 빨리 대응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 순간, 비엣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왜 절 보십니까?"

"너 대체 무슨 개짓거리를 한 거야!"

"음? 무슨 소린지 잘 모르겠습니다. 협회의 최고 책임자는 국장님이시지 않습니까. 책임자가 알아야지 왜 저한테 그러십니까."

"이, 미친놈이…!"

그가 내 멱살을 들어 올린 그때.

취조실로 몇 명의 공안이 또다시 들이닥쳤다.

"국장님! 방금 말레이시아 지부에서 연락이 왔는데, 모든 국교를 단절하겠답니다!"

"필리핀 지부에선 비용을 낮추지 않으면 무력도 불사하겠다고 합니다."

"태국 지부는 아예 국경을 막겠다고...."

비엣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그제야 지금 상황이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듯했다.

"국장님, 이거 잘못하다간… 진짜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시발, 내가 한 거 아니라고 해! 내가 아니라 이 새끼가 벌인 짓이라고!"

"당연히 우린 모르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귓등으로도 안 듣습니다."

"...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간의 행적이 있으니 당연한 반응이겠죠."

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이 있다.

난 여기에 한 숟갈의 계기만 더했을 뿐이지. 그 이후에 벌어진 일은 당사자가 자초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니 평소 행실을 바르게 했어야지.

'...왜 내가 찔리지?'

뭐 아무튼.

"그동안 많이도 쥐어짜셨습니다. 뭐, 국민의 존망이 달린 협회를 그저 돈방석으로만 보고 계시니 주변 상황 따윈 관심도 없으셨겠죠. 심정은 이해합니다. 저도 예전엔 자주 그랬으니."

더 하면 더했지, 절대 덜하지 않았던 찬란한 과거가 머릿속을 스쳤다.

"하지만 계속 그렇게 사시면 적이 많아집니다. 나중에는 정말 쥐도 새도 모르게 객사하실 수도 있어요."

"너... 지금 나 협박하는 거냐?"

"협박이 아니라 조언입니다. 사실 죽는 건 그렇다고 칠 수 있어요. 다만 그것보다 억울한 건 말입니다."

비엣의 눈을 정확히 바라보며 말했다.

"죽는 그 순간까지 누구 손에 뒤졌는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동시에 비엣의 대답이 멈췄다.

"제가 말씀드렸죠. 욕심부리다간 돈도 친구도 다 잃게 될 거라고. 근데 방금 한 가지가 추가됐습니다."

"뭐?"

"국장님 자리까지 잃으시게 될 것 같거든요."

내가 말을 마친 그 순간이었다.

쾅―.

취조실의 두꺼운 문이 벌컥 열렸다.

"야, 이 개새끼야!!"

열댓 명의 공안들과 함께 들이닥친 그 남자는, 다름 아닌 베트남 내 권력 서열 1위, 당 서기장이었다.

"너 대체 일을 어떻게 한 거야!!"

"서, 서기장님! 이건 제가 한 게 아니라...."

퍼억―.

비엣의 턱에 난데없이 주먹이 날아들었다.

"너 새끼 몇 번 못 본 척해주니까? 이젠 아예 나라를 갖다 팔려고 작정을 했지?!"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이거 다 이 새끼가...."

두 남자의 시선이 나에게 향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책상 위에 놓인 계약서를 가리켰다.

당 서기장의 얼굴이 우락부락해졌다.

"제가… 제가 해결할 수 있습니다."

"뭘 어떻게?"

"지부에 찾아가서 무릎이라도 꿇으면...."

"야."

당 서기장의 서슬 퍼런 목소리가 깔렸다.

"지금 이게 장난 같냐? 너 진짜 그거로 해결이 될 것 같아?"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뭐 하고 있어. 데려가."

"자, 잠깐만요! 서기장님! 서기장님!!"

서기장은 볼 거 없다는 듯 공안을 향해 고갯짓했다.

그들은 곧바로 국장의 양팔을 붙잡아 끌고 나가기 시작했다.

복도를 따라 울려 퍼지는 애절한 목소리.

당 서기장은 그 절규를 들으며 쯧, 혀를 찼다.

"그러게 멍청하면 욕심이라도 적당히 부렸어야지."

그 직후, 정적이 내려앉은 취조실.

서기장이 날 돌아보았다.

"자넨가? 이번 사업을 추진한 게."

"예, 맞습니다."

"지금 이거, 우린 감당 못 해. 자네가 만든 거니까 자네가 책임지고 다시 가져가."

"글쎄요. 저도 그러고 싶긴 한데...."

나는 계약서를 슬쩍 흘겼다.

그러자 당 서기장은 다짜고짜 계약서를 집어 들더니, 내 앞에서 반으로 쭉 찢어버렸다.

"이제 됐나?"

"...."

그냥 저렇게 해도 되는 건가?

서열 1위답게 화끈하네.

"부탁함세. 도로 가져가고 앞으로 우리랑은 엮이지 말아 주게."

"엮이지 말라심은...."

"수습은 자네가 알아서 하라는 소리야. 우린 모르는 일이니."

우리와 엮이지 말아라.

나는 그 말에 작게 미소를 지었다.

이번 일에 대한 책임을 지라는 뜻이었겠지만, 그건 결국 하나의 어엿한 독립 협회라는 걸 정식으로 인정을 받은 것이나 다름이 없었으니까.

호박이 굴러 굴러 다시 우리에게 돌아온 것이다.

0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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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노이 작전본부, 본부기획실.

"방법이 좀 과격하긴 했는데... 그래도 효과는 있었네요."

모두 무사히 풀려난 직후, 김민주가 긴장이 풀린 목소리로 말했다.

한편 한유빈은 조금 다른 반응이었다.

"조금이 아니지 않아요? 주변 협회 반응 보니까 쉽게 가라앉을 거 같지 않던데.... 결국 이거 우리가 수습해야 하잖아요."

"걱정 마시죠. 비엣이 파면되면 조금은 잠잠해질 테니."

"파면이요?"

"뭐, 모두가 이번 일을 비엣이 주도한 거라 생각하고 있는 이상, 외교 문제로까지 번지지 않게 하기 위해선 당사자를 잘라버리는 게 가장 효과적이니까요."

"흐음."

한유빈이 팔짱을 낀 채 신음했다.

"나름 고위 관직인 비엣을 무관용으로 강력하게 처벌하는 걸 보여준다면 주변 협회들도 조금은 화가 누그러들지 않겠습니까."

"확실히... 그렇긴 하겠네요."

당 입장에서도 이제 비엣은 마냥 쥐고 있을 수만은 없는 패가 되었다.

해임이든 파면이든 액션을 취하겠지.

그리고 그 이후부턴 우리의 소임이다.

두 발로 뛰어다니면서 이번 일에 대한 사과와 함께 다시 합의를 진행할 생각이다.

쉽진 않겠지만 불가능할 것도 없다.

물론, 그것도 결국 비엣이 어떤 처분을 받느냐에 달렸지만.

"뭐, 당이 합리적인 판단을 해주길 바라야죠."

나는 앉은 채로 기지개를 켰다.

"자, 할 일이 많습니다. 계속 수고들 좀 해주십시오."

"네."

"그래요."

"알겠습니다."

세 직원의 대답이 동시에 울려 퍼졌다.

그 후로 우린 하노이에 일주일간 머무르며 수습에 박차를 가했다.

예상대로 비엣은 불명예 파면을 당했다.

온갖 비리 혐의가 적용되었지만, 그중에서도 단연 충격을 준 것은 역시나 1년간 유령 협회를 통해 모든 지원금을 횡령한 건이었다.

덕분에 비엣은 파면에 이어 곧바로 재판에 넘겨졌다.

그 과정에서 후인을 찾아와 무릎을 꿇고 탄원서를 부탁했지만... 뭐, 씨알도 안 먹힐 짓이지.

어쨌든 비엣이 그렇게 날아가자마자, 나는 곧바로 협의회를 열어 주변 협회 지부장들을 소집했다.

허브 유통 건에 대해 재협의를 하기 위해서였다.

뭐, 이쯤이면 과열된 분위기도 조금은 가라앉았을 것이다.

사과의 의미로 주변 협회에 조금 더 유리한 방향으로 재계약을 진행한다면 그들로서도 거절할 이유는 없겠지.

...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정말이지 놀랍게도 단 한 군데도 재계약에 동의하지 않았다.

"어째 생각대로 되는 일이 없네."

지부장들은 마치 처음부터 짠 것처럼 일말의 고민도 없이 반대를 던졌고, 지들끼리 합의해서 다시 연락을 주겠다고 하며 자리를 떴다.

그리고 곧바로 돌아온 조건은.

"1년간 모든 유통비 면제 및 향후 10년간 유통비 동결을 제시했습니다."

"빌어먹을...."

협의회가 끝나고 하노이로 복귀한 직후, 나는 그 소식을 듣고 머리를 싸맸다.

후인은 공문을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만약 해당 협상이 결렬될 시 동남아 지부 모두 허브를 이용하지 않겠답니다."

"예? 그 말은 국제 협회에 부산물을 납품하지 않겠다는 겁니까? 본부가 그걸 허락해주진 않을 거 같은데."

"애초에 본부에서 내린 지침이라고 합니다. 협상이 안 되면 동남아 지부에 한해서 아예 납품을 포기하겠다고...."

"허."

본부까지 나서서 걸고넘어진다고?

이 틈에 뜯어먹을 수 있는 건 최대한 뜯어먹겠다는 심보군.

허공으로 시선을 옮겼다.

10년이라.

허브 사업이 가져다줄 경제 성장률을 고려해봤을 때 10년 동안 비용 동결은 너무 뼈가 아픈 조건이다.

'빌어먹을 놈들... 숙이고 들어갈 때 곱게 처받을 것이지.'

애초에 구실을 준 게 문제였나.

입술을 잘근 씹던 그때, 후인이 넌지시 입을 열었다.

"그냥 허세를 부리는 걸 수도 있어요. 동남아에 지부가 몇 갠데 언제까지 본부가 납품을 면제시켜줄 순 없을 거 아니에요."

"그렇긴 합니다만... 문제는 허브 사업에 들어간 비용을 감안하면 몇 달만 유통이 없어도 우리 쪽 손해가 너무 큽니다."

조건을 들어주든, 들어주지 않든 양쪽 다 우리에겐 독이다.

쯧, 이렇게 귀찮게 나올 줄이야.

어떻게든 내 선에서 해결해보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우리끼리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닌 것 같군요."

고개를 저으며 말하자, 후인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뭐 어쩌려고, 라 말하는 듯한 얼굴.

솔직히 여기까지 가고 싶진 않았지만, 더는 방법이 없다.

나는 곧바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예, 협회장님. 김준웁니다."

「그래, 일은 잘돼 가냐?」

"문제가 좀 생겼습니다."

「자넨 꼭 문제 생겼을 때만 연락하더라? 좋은 소식 좀 전해주면 안 되냐?」

"저도 그러고 싶은데, 마음처럼 잘 안 되네요."

협회장이 끌끌 웃었다.

「그래서 이번엔 뭔데.」

"사실은...."

나는 현재 상황을 짤막하게 전달했다.

"...아무튼, 그것 때문에 주변 협회에서 꽤나 강경하게 대응하고 있습니다. 허브 유통비를 10년간 올리지 않겠다는 조건에 합의하지 않으면 아예 납품 자체를 포기하겠다는군요."

「흠, 뭘 고르든 손해겠군. 협상의 여지는?」

"없을 것 같습니다."

「자네 생각은 어때. 맞받아칠 건가?」

"그래야지 않겠습니까. 저희가 벌인 일도 아닌데 지금 조건은 너무 과하니."

「...? 자네가 벌인 일 맞잖나.」

"협회장님.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 안 합니다."

「....」

미친놈인가, 라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어렴풋하게 들려왔다.

「무슨 말인지 알았네. 그래, 내가 어떻게든 해보지.」

"감사합니다."

그렇게 전화를 끊고 한숨을 돌렸다.

"뭐, 어떻게든 될 것 같습니다."

"그, 진짜 협회장님이랑 통화하신 겁니까...? 한국 협회의...."

"예. 왜 그러십니까."

"아니... 그렇게 높으신 분한테 일방적으로 부탁드려도 되는 겁니까?"

"...? 안 될 건 뭡니까."

"...."

후안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 문화가 다르니 그럴 수도 있겠지.

***

국제 협회 직영, 태국 지부

"한국 협회에서 연락이 왔다고?"

한창 집무실에서 업무를 보고 있는 쁘라셋 지부장에게 굉장히 뜬금없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갑자기 그쪽에서 연락이 왜 와?"

"그, 그게 이번에 한국 협회가 베트남 협회를 공식 인수했으니 이제부턴 그쪽에서 직접 해결하겠다고...."

"...뭐?"

쁘라셋 지부장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한국이 베트남 협회를 인수했다니, 이 무슨 뜬금없는 소리인가.

"듣기론 이번 비용 인상 건도 인수합병을 진행하다가 비엣이 중간에 끼어들어서 발생한 문제라고 합니다. 확인해보니 정말 공식적으로 인수된 상태였습니다."

"그게 지금 무슨...."

공식적인 발표가 없었으니 그가 몰랐던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이번 베트남 협회가 내민 재계약을 거절한 건 당연히 구실을 잡고 더 큰 걸 요구하기 위해서였다.

한 달 전만 해도 다 죽어가던 협회였으니 조금만 세게 나간다면 이참에 베트남 쪽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거라 여겼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미 한국 협회에 인수합병 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한국 협회를 건드렸다는 소리냐?"

쁘라셋이 마른침을 삼키며 물었다.

그러자 수행비서는 대답 대신 한국에서 날아온 입장문을 건넸다.

「우선, 본 협회는 비용 인상을 주도한 비엣 총정치국장과 아무런 관련이 없음을 미리 밝힌다.」

쁘라셋은 천천히 입장문을 읽어 내려갔다.

대충 본인들은 이번 일과 관련이 없고, 모두 비엣이 독단적으로 벌인 일이라는 내용이었다.

다만 중요한 건 그다음이었다.

「물론 관계 여부를 떠나 지부에서 발생한 일인 만큼 어느 정도 책임을 질 의무는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당국에서 본 협회에 제안한 조건은 너무 과한 조치라는 판단이며 때문에 당국이 현재 조건을 강행할 시, 한국 협회는 손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라도 그간 당국과 진행했던 모든 토벌 및 청소 지원을 철회할 수밖에 없는 입장임을 단호하게 밝힌다.」

쁘라셋의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이거 우리한테만 온 거냐?"

"아뇨. 주변 지부들도 전부 받았답니다."

"시발...."

그는 입장문을 꾸깃꾸깃 접으며 이를 깨물었다.

조건을 낮추지 않으면 한국 협회는 모든 동남아 지부와 단절할 것이다.

그 말을 순화조차 없이 때려 넣었다.

이건 입장문이 아니라....

'지금 우리한테 경고하는 거야…?'

그리고 그때, 그의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려대기 시작했다.

「쁘라셋 지부장님! 입장문 보셨습니까? 이거 뭡니까?!」

「한국 협회가 끼어 있다곤 안 했잖습니까!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조건 맞춰서 협의 봤죠!」

「본부에선 아무 말 없습니까?!」

「더 버티다간 우리만 X됩니다! 저흰 그냥 합의 보겠습니다!」

이미 주변 협회는 발칵 뒤집힌 듯, 주변 모든 지부에서 전화가 쏟아졌다.

그도 그럴 게, 애초에 국제 협회에서 직영으로 관리하는 태국 지부를 제외하면 나머지 지부들은 거의 독자적으로 운영을 하는 상황이었으니까.

때문에 이따금 다른 독립협회에 지원을 요청하곤 했는데, 사실상 그 요청을 들어주던 협회는 한국밖에 없었다.

그런데 한국 협회가 더는 요청을 받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힌 이상 그들로선 꽤나 난처해질 수밖에 없었다.

"시발, 비엣 나가리 되면서 빈집 된 줄 알았는데... 언제부터...!"

"어떡하시겠습니까. 한국 협회랑 척을 지는 건 저희로서도 그리 좋은 상황은 아닌데...."

"...그쪽에서 제안한 조건은 뭔데."

"1년간 유통 비용 동결만 제시했고 추가적인 조건은 없었습니다."

"쯧, 어쩔 수 없지 뭐. 더 욕심부릴 수도 없고. 그대로 진행...."

그때 또다시 사무실의 전화기가 울렸다.

또 다른 지부에서 온 항의 전화인 듯했다.

그는 대뜸 짜증 섞인 목소리로 수화기를 들었다.

"아, 그만 좀 전화하십시오! 지금 우리도 상황 파악 중이니까…!"

「잘 계셨습니까. 쁘라셋 지부장님.」

전혀 예상치 못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 마르크 팀장님...?"

「오, 기억하고 계시는군요.」

침이 꿀꺽 넘어갔다.

PB코퍼레이션 밸런스 조정팀의 마르크 팀장.

그가 직통으로 전화를 해온 것이다.

「대충 상황은 들었습니다. 한국 협회에서 맞대응했다고요.」

"예, 예."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저, 저희로선 베트남 협회가 한국 협회에 인수됐다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이라... 아무래도 조건을 맞춰주는 게...."

「쁘라셋 지부장님.」

마르크 팀장이 그의 말을 끊고 입을 열었다.

「본부에선 베트남 협회가 가지고 있는 허브를 굉장히 못마땅하게 생각합니다. 본부가 부산물 면제 정책까지 시행한 마당에, 이제 와서 약한 모습을 보여야겠습니까?」

"하지만... 아시잖습니까. 한국 협회의 지원이 없으면 운영에 꽤나 애를 먹게 될 겁니다."

「그거야 지부 입장이고.」

마르크 팀장이 답답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사실 유통비를 10년 동결하든, 100년 동결하든 결국 본부 입장에선 쓸데없는 비용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무엇보다 이번처럼 유통비 인상을 무기로 우리에게 온갖 협박을 할 수도 있고요. 어느 쪽이든 우리로선 썩 달가운 이야기는 아니죠.」

"...그, 그런가요."

「본부는 이번 협상에 대해 조금도 물러설 생각이 없습니다. 그에 따라 저희 PB코퍼레이션에선 그에 맞게 더욱 강경 대응할 생각인데, 동남아 지부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저, 저희가 뭘...."

「이제부터 제가 말하는 대로만 하십시오.」

이윽고 그의 지시를 듣던 쁘라셋 지부장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085

085

"지금 뭐라고?"

하노이 지부, 본부기획실.

나는 잘못 들은 건가 싶어 김민주에게 재차 물었다.

하지만 그녀의 대답은 같았다.

"소속 불명의 헌터들이 국경 인근 던전들을 무단으로 점거하고 있다고요!"

"던전 점거...?"

아, 아니 것보다.

"소속 불명 헌터라니. 어디 카르텔이라도 움직인 거야? 분명히 10년 전쯤에 국제 협회가 씨를 말렸을 텐데."

"아직 자세히는 모르겠어요. 다만 지금 확인된 곳만 라오바오, 테이, 쏩콥 국경 검문소 인근까지 총 세 군데에요."

"심지어 하나도 아니다...."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왜 하필 이런 타이밍에....'

던전 점거.

지금에야 국제 협회와 독립협회들이 힘을 합쳐 긴 노력 끝에 대부분 소탕했지만, 과거엔 개발도상국들을 중심으로 이능력자 카르텔이 활개를 치던 때가 있었다.

이들의 주요 활동은 시민 납치 및 테러.

그리고 협회 소속 직원들이 던전에 진입한 틈을 타 입구를 점거하고, 던전이 닫히기 전에 협회에 금전을 요구하는 던전 점거.

요즘 같은 시대에 그 짓을 다시 보게 될 줄이야.

'대체 어떻게 돼먹은 나라길래 이딴 말도 안 되는 일만 계속 일어나냐.'

하지만 아무리 악명 높은 카르텔이라도 작전팀을 상대로 던전 점거를 벌이지는 않았다.

그들의 주요 타깃은 던전에 진입하는 팀들 중 이능력이 없어 비교적 다루기 쉬운 이들.

그래....

"혹시 지금 그 새끼들이 점거하고 있는 던전에 청소팀 들어가 있냐?"

"...네."

"빌어먹을."

역시.

어떤 놈들인지는 몰라도 작업 일정까지 확인해서 움직였다.

작정하고 움직인 거라고 봐야겠지.

"우리 쪽 대응은 어떻게 되고 있어? 설마 손 놓고 있는 건 아니겠지."

"근처에 작전팀이 바로 출동하긴 했는데.... 상대 인원이 너무 많아서 대응하는 것조차 힘든 상황이라고...."

젠장.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면 어떡하자는 건가.

"그래서 그쪽에서 원하는 건 뭐래? 몸값이라도 요구하디?"

"그게, 요구하긴 했는데... 1,000억을 불렀어요."

"이런 미친."

너무 기가 차서 헛웃음부터 튀어나왔다.

1,000억이 누구 집 개 이름인가?

시발, 상식적으로 가능한 금액이 아니지 않은가.

"그 정도 금액을 마련하려면 이제 막 완공된 허브라도 팔아야 겨우...."

잠깐.

그 순간 머릿속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만약 카르텔이 작전팀을 상대로 점거했다면 협회 입장에선 무력 충돌을 감수하더라도 구출하려 할 것이다.

작전팀은 곧 협회의 가장 큰 재산이자 무엇보다 중요한 인원들이니까.

하지만 청소팀은 다르다.

냉정한 말일지 모르지만, 청소부 몇 명을 구출하기 위해 작전팀이 충돌을 감수하는 건 영 수지가 안 맞거든.

카르텔 또한 그걸 알고 있기에 터무니없는 요구는 하지 않는다.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해봤자 그냥 무시할 테니까.

그런데도 1,000억을 불렀다고?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둘 중 하나다.

그냥 제정신이 아닌 놈들이거나 아니면....

"김민주."

"네."

"지금 우리 쪽 허브… 추산 매각 금액이 얼마나 되냐."

애초에 다른 목적이 있거나.

"현재 가치로 치면 대략 1,000억이요."

"그런데 웬 정체도 모르는 헌터 새끼들이 그 정도 금액을 몸값으로 요구했고?"

"...그렇게 되겠네요."

"어떻게 생각하냐."

"어떻게 생각하냐니.... 설마 이게 이번 허브 관련 건과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허브 추산 매각 금액과 같은 비용. 그리고 막 각 지부와 협상이 결렬된 마당에 타이밍 좋게 벌어진 사건.

우연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너무 저쪽 입장에 좋게 돌아가고 있었다.

설사 아니라고 하더라도 이번 문제를 간과하고 넘긴다면 협상은 이쪽에 더 불리하게 진행되고 만다.

"...어떻게 하실 건가요."

그때 김민주가 조심스레 물었다.

나는 깊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청소부 몇 명 구하자고 그만한 돈을 줄 순 없잖아. 그렇다고 이제 막 인수한 지부의 현지 직원들을 포기해버리면...."

"반발이 어마어마하겠죠. 자칫하면 인수 자체가 엎어질 수도 있고요."

"그럼 뭐, 선택지가 없네."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남아 있는 작전팀은?"

"3팀, 4팀, 8팀, 9팀이에요."

"좋아. 김민주 너는 3, 4팀 데리고 테이 국경 검문소로 가. 한유빈 씨는 8, 9팀이랑 같이 쏩콥으로 가시고요."

"네."

주먹을 꽉 쥔 채 연신 눈에서 분노를 뿜어대던 한유빈이 기다렸다는 듯 벌떡 일어났다.

"그럼 라오바오 쪽은...."

"나 혼자 간다."

"괜찮으시겠어요?"

김민주가 걱정스레 물었지만, 굳이 대답하진 않았다.

"각자 장비 챙기고 헬기 대기시키십시오."

그렇게 말하며 먼저 사무실을 나섰다.

"같잖은 새끼들 면상이나 보러 갑시다."

***

서쪽, 라오바오 국경에서 수 km 떨어진 어느 산속.

보고 받은 위치에 도착하자 괴한들과 멀찍이 거리를 두고 대치하고 있는 작전 1팀과 후인이 보였다.

"오셨습니까."

나를 발견한 후인이 헐레벌떡 다가왔다.

"예, 상황은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보고 드린 그대로입니다. 던전 안에 청소 3팀이 갇혀 있는데 접근하려고 하면 공격부터 해서 대응조차 쉽지 않습니다."

"던전 닫힐 때까진 얼마나 남았습니까."

"15분도 간당간당합니다."

쯧, 아슬아슬하네.

"저쪽에선 뭐 특별한 말은 없었습니까?"

"네. 몸값 요구 이후로는 입을 닫고 있습니다. 협상이라도 해보려고 다가가면 곧바로 공격을 퍼붓는 통에 섣불리 움직일 수도 없고...."

주변을 둘러보니 부상을 입은 팀원 몇 명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로서도 이미 몇 번이나 접촉을 시도한 듯했다.

"무엇보다 저쪽 인원이 꽤나 많습니다. 그리고 이런 말 창피한 줄 압니다만... 실력도 저희보다 위인 것 같습니다."

"흠."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멀리 떨어진 던전을 살폈다.

300m쯤 떨어진 거리.

꽤나 많은 인원이 던전 입구를 점거하고 있는 모습이 어렴풋이 눈에 들어왔다.

'40… 아니, 50명쯤 되나.'

확실히 생각보다 많다.

'저 정도면 2개 작전팀 정도 규모는 되는 것 같은데.'

청소팀 진입을 정확히 노린 점거.

50명은 족히 넘어 보이는 인원.

어디서 굴러먹던 놈들인지는 몰라도 꽤 실력 있는 헌터들.

누가 봐도 작정하고 움직인 거라고 봐야겠지.

"안에 있는 청소팀부터 어떻게든 빼내야 하는데... 최소한 협상이라도 해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후인이 말끝을 흐리며 이를 물었다.

대충 상황은 모두 전달받은 것 같았기에 나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이제부턴 제가 어떻게든 할 테니 후인 씨는 지원팀에 연락해서 의료진부터 호출하십시오."

"네, 네?! 어떻게든 하신다뇨? 설마 혼자 싸우시기라도 하실 건...."

"최대한 대화로 풀어볼 생각입니다."

애써 미소를 지어 보이곤 이내 걸음을 뗐다.

던전을 향해 몇 발자국 앞으로 다가가자.

쾅―!!

원거리에서 공격이 날아들었다.

쾅, 쾅―!!

이어지는 몇 번의 공격.

정확히 노린 공격은 아니다.

위협 사격, 혹은 기선을 제압하기 위한 연막인 듯했다.

겁만 먹지 않는다면 크게 움직이지 않고도 쉽게 피할 수 있는 정도.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앞으로 걸어 나갔고, 이윽고 100m 정도의 거리를 두고 던전을 점거 중인 헌터들과 마주했다.

더 이상 공격은 날아오지 않았다.

그 대신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베트남 협회 책임자인가?"

커다란 덩치에 복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들의 우두머리인 듯했다.

"그렇습니다."

"몸값을 가져온 건가?"

"아뇨."

"...."

복면 사이로 남자의 얼굴이 험악해지는 것이 보였다.

"그럼 여긴 왜 왔지?"

"우리 직원들을 구하러 왔습니다."

"…푸! 푸하하하!"

남자의 웃음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꼴랑 혼자서 뭘 어쩌고저째? 지금 장난쳐?"

"하하하."

나 또한 장단을 맞춰 웃어주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지금 이게 시발, 장난 같습니까?"

"...."

다행히 진심이 전해진 듯 더 이상 웃음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 대신 남자는 더욱 험악해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우리 요구는 무시해놓고 동료를 구하겠다?"

"예."

"어떻게? 미리 말하는데, 혹시 협상이라도 할 생각이면...."

[습득 스킬 : 디스트로이어]

쾅―!!

"협상은 시발, X까는 소리하고 있어."

남자는 말을 하다 말고 폭발과 함께 뒤로 날아갔다.

"...?"

"...바, 방금 무슨?"

나머지 헌터들은 날아간 남자와 나를 번갈아 보며 벙찐 표정을 지었다.

"야!"

결국,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니들 동남아 지부 소속들이지?"

"...."

"...."

대답 참 정직하네.

뻔하지 않은가.

확인도 안 되는 카르텔이 이런 타이밍에 그런 금액을 요구한다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데.

그래서, 과연 지들끼리 손잡고 벌인 짓일까, 아니면 위에서 내려온 지시일까.

뭐 어느 쪽이든 용서가 안 되네.

어디서 나름 국제 협회 지부라는 새끼들이 이딴 양아치 짓을 벌여.

그것도 소속을 숨기고 카르텔인 척까지 해가면서.

"...죽여."

그때, 피칠갑을 한 남자가 힘겹게 몸을 일으키며 입을 열었다.

"저 새끼 죽여 버리라고, 시발!!"

"예, 예!"

그의 지시에 50여 명의 헌터들이 전투태세를 갖췄고, 그중 몇 명은 곧바로 나를 향해 돌진해오기 시작했다.

나는 그들을 바라보며 무전기를 들었다.

"아쉽게도 협상 결렬됐습니다."

수신자는 다른 현장에 가 있는 한유빈과 김민주였다.

「다짜고짜 공격하신 건 아니죠?」

"...그럴 리가요. 최대한 대화로 풀어보려고 했습니다."

일단 하긴 했으니 문제는 없겠지.

「그럼 뭐, 방법이 없네요.」

"예."

그녀들에게 떨어진 하나의 지시.

"몽둥이를 듭시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무전기를 내던지고는 스킬을 발동했다.

[습득 스킬 : 하이퍼 부스트]

[전투 중 시전자의 이동속도가 대폭 증가합니다]

파앙―.

마주 오는 놈들을 향해 정면으로 돌진했다.

***

―테이 국경 검문소 인근, 숲속.

작전 3, 4팀과 막 현장에 도착한 김민주는 무전을 끊고 정면을 바라봤다.

'...아무리 봐도 먼저 공격하신 거 같은데.'

그렇게 중얼거리던 찰나, 작전 3팀장이 물었다.

"뭐라고 하십니까?"

"뻔하죠, 뭐."

그녀가 피식 실소를 뱉었다.

"전원 전투태세 갖추세요."

"...."

"...."

30여 명의 헌터들이 꽤나 비장한 얼굴로 자세를 잡았다.

하지만 그들과 다르게 김민주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무기를 꺼내 들었다.

아쉽게도 그녀의 단짝인 흑랑지도는 한국에 두고 왔기에, 급한 대로 다른 헌터의 것을 빌린 것이었다.

"후우...."

이윽고 크게 심호흡을 하길 한 차례.

[고유 스킬 : 천수관음(千手觀音)]

그녀의 서슬 퍼런 눈빛이 적들을 관통했다.

"갑시다."

탓―.

가벼운 움직임으로 적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쏩콥 국경 인근, 일찍이 버려진 옛 도로.

작전 8, 9팀과 함께 괴한들과 마주한 한유빈은 목과 어깨를 빙글 돌리며 몸을 풀었다.

"괜히 휘말리지 않게 알아서들 조심해요. 적군, 아군 가리면서 싸우는 거 잘 못 하니까."

그녀가 입을 열자 작전 8팀장이 조심스레 물었다.

"저, 그런데 팀장님은 청소팀 소속 아니십니까...?"

"전투 가능하시겠어요?"

다른 작전팀원들 또한 같은 반응이었다.

뭐, 자신이 싸우는 모습을 본 적이 없는 이들이니 한유빈은 이해하기로 했다.

그렇다고 일일이 전직 뭐였고, 어떤 스타일이고 설명할 시간은 없고.

그래서 대답 대신에....

[고유 스킬 : 하이패닉 버서커]

그저 고삐를 풀었다.

086

"윽, 하필 구데기 스킬...."

내 모습이 흉포한 도마뱀의 형태로 바뀌는 순간, 사방에서 공격이 날아들었다.

퍽, 퍼억―!

퍼버버버벅―!!

하지만 '리자드' 특유의 질긴 비닐 피부와 방어력에 큰 대미지를 줄 순 없었다.

오히려 육탄 전차가 되어 녀석들을 들이박으며 던전으로 향하는 길을 뚫었다.

사방에서 헌터의 고함과 비명이 교차하며 울려 퍼진다.

1대 다수의 전투.

절대 한순간도 놈들에게 틈을 내어주면 안 된다.

최대한 변칙적이고 난잡하게, 쉴 틈 없이 공격을 이어가야 한다.

[습득 스킬 : 아토믹 스피어]

[습득 스킬 : 디스트로이어]

[습득 스킬 : 업화]

파바바박―!

쿠구궁―!!

콰광!!

공격을 쏟아부어 생긴 틈을 타 새로운 스킬을 몸에 덮어쓴다.

[습득 스킬 : 폴리모프]

[최근 처치한 몬스터로 폴리모프 합니다]

[최근 처치 몬스터 - 이터널 파이선]

지이이잉―.

"뭐, 뭐야 저거!"

"저게 말이 돼…?"

"뭐해!! 가만히 있지 말고 피해!!"

쿠구구궁―!

"끄아아악!!"

"으아악!!"

주변을 향해 브레스를 한 차례 난사하고 거친 숨을 쏟아냈다.

[습득 스킬 : 폴리모프 - 효과가 해제됩니다]

마침 계산했던 대로 스킬 지속 시간도 끝났다.

"저, 저 새끼 대체 클래스가 뭐야?!"

"검사... 아, 아니 마법사?"

"이런 시발! 저런 놈이 있다곤 못 들었다고!"

다행히 기세가 먹힌 것인지, 놈들은 주춤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잠시 이어진 대치 속에 나는 눈을 돌려 상황을 다시 한번 빠르게 살폈다.

현장엔 50여 명의 인원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벌써 몇 차례나 공격을 퍼부었지만, 사제 클래스 때문인지 도저히 쓰러질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하지만 무엇보다 성가신 건, 진형이 생각보다 지나치게 잘 짜여 있다는 것.

근접, 원거리, 사제의 4:4:2 배치.

대규모 레이드에서 쓰이는 가장 정통적인 전술. 그리고 서로의 스킬 효율성까지 고려한 클래스 조합.

덕분에 대다수가 낮은 랭크임에도 높은 전투력을 뽑아낼 수 있다.

이런 구성은 어마어마한 작전 경험을 가진 놈이 아니면 흉내조차 낼 수 없는 기획이다.

확신할 수 있다.

국제 협회, 아니면 '그 조직' 새끼들이 짠 작전이다.

'정말 작정하고 움직였군.'

하긴, 대놓고 내 부하들을 건드리는데 이 정도는 준비해야지.

인원도 그렇고, 전력도 그렇고.

오래 끌수록 내가 불리해지겠군.

그렇게 판단을 마친 그때.

[고유 스킬 : 로빈 후드]

피슝―!

거대한 화살이 엄청난 속도로 날아들었다.

'시발, 저건 또 뭐야....'

[습득 스킬 : 하이퍼 부스트]

[전투 중 시전자의 이동속도가 대폭 상승합니다]

콰광―!!

"크윽…!"

아슬아슬하게 피할 수 있었지만, 꽤나 강렬한 충격이 전해졌다.

"오, 그걸 피해?"

그 순간, 우두머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 멀찍이 떨어진 그 남자와 눈을 맞췄다.

저격수 클래스.

그것도 꽤나 희귀한 궁수.

'새끼, 좀 치네?'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고유 스킬 : 로빈 후드]

[화살 - 아마겟돈]

조금 전과는 확연히 다른 느낌의 화살.

막아야 하나 피해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화살은 곧장 활시위를 떠났다.

쿠구구궁―!!

번쩍, 하는 빛과 함께 대지가 흔들릴 정도의 충격이 일었다.

"지, 지금이야!! 전원 공격해!!"

"스킬 다 쏟아부어!"

쾅, 콰과광―!!

퍼버벙―!

쿵, 쿠구궁―!!

기회를 놓칠세라 그 뒤를 이어 수십 개의 스킬이 날아들었다.

굉음과 함께 거대한 폭발이 나를 집어삼켰다.

"...허억, 허억."

"시발, 좀 죽어라...."

짙게 일은 먼지 밖에서 거친 숨소리와 함께 간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물론, 아쉽게도 그럴 일은 없었지만.

"쯧, 이래서 사람이랑 싸우는 건 영...."

[습득 스킬 : 형상 - 천국의 사자]

[10초간 시전자에게 가해지는 모든 공격에 면역됩니다.]

나는 새어 나온 피를 대충 소매로 닦으며 먼지 밖으로 빠져나왔다.

몬스터랑 싸우는 게 확실히 더 담백한 맛이 있다.

생각할 거 없이 그냥 죽여버려도 되고.

'너무 만만히 보긴 했네.'

확실히 힘들 것 같다.

죽이지 않고 싸우는 건.

다만 아무리 정당방위라고 해도 죽여버리면 문제가 생기긴 할 텐데....

어쩔 수 없지.

"어, 어차피 다 죽어가는 놈이야! 신경 쓰지 말고 하던 대로...!"

우두머리가 입을 여는 동시에, 나는 손가락을 들어 올렸고.

[습득 스킬 : 형상 - 우리엘]

[형상이 유지되는 동안 시전자가 지정한 아군은 사망하지 않습니다.]

그대로 50명의 인원을 슥 가리켰다.

[아군 지정이 완료되었습니다]

[해당 아군의 사망 면역까지 앞으로 10초]

숨만 붙여놓는 수밖에.

***

테이 국경 검문소 인근, 숲속.

슥―.

스윽―.

조용하지만 날카로운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김민주는 작은 기합조차 내지 않은 채 전장을 누볐다.

"...뭐, 뭡니까. 저분."

"한국 협회 소속 헌터는 다 저렇게 강하답니까?"

"낸들 알겠냐...."

작전 3, 4팀의 팀원들은 그 모습에 넋을 잃을 뻔했다.

단 하나의 군더더기도 없는 완벽한 움직임.

과하거나 모자란 것 없이 절제된 그 모습은 가히 아름답다고 느껴질 수준이었다.

[습득 스킬 : 경보]

탓, 타닷―.

김민주는 주변 나무들을 발판삼아 빠르게 중앙으로 파고들었다.

[습득 스킬 : 연화무쌍]

[습득 스킬 : 만월참]

스윽―.

사사사사삭―!

엄청난 속도로 공격을 퍼부어댔다.

덕분에 적들은 어디서 공격이 오는지도 알아차리지 못한 채, 픽픽 쓰러져갔다.

그 광경을 보며 모두가 실감했다.

강하다.

어쩌면 지금 3, 4팀 전력을 다 합쳐도 발끝에도 못 미칠 정도로 강하다.

하지만....

"결정타가 없어요."

"일부러 죽이지 않으려는 것 같은데...."

"사제 때문에 적들이 쓰러져도 계속 일어납니다. 이대론 끝이 없어요."

"...."

작전 3팀장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쪽엔 사제 클래스를 비롯해 다양한 클래스가 완벽한 조합을 이루고 있다.

게다가 던전 입구까지 향하는 길을 철통으로 사수하고 있기에 진입로 또한 꽉 막혀 있다.

이대론 저 인원을 뚫고 청소팀을 구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걸 모를 리가 없을 텐데, 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

그런 의문이 들기도 잠시.

"어, 어?"

"티, 팀장님!"

"뭐야? 왜 그래!"

"길이… 열렸습니다"

"...뭐?"

팀원 중 한 명이 가리킨 곳으로 고개를 들자 거짓말같이 던전 입구가 훤히 드러났다.

'어, 어떻게 된 거야…?'

작전 3팀장은 어안이 벙벙했다.

설마 50명이 넘는 인원을 상대로 시선을 끈 건가?

길을 열고 우리를 보내기 위해서?

그것도 혼자서?

"가만히 있지 말고 움직이세요."

그때 김민주의 음성이 울렸다.

'설마가 아니었군.'

아무리 본인의 실력이 좋다고 해도 나머지가 받쳐주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작전이다.

팀을 믿지 못하면 절대 할 수 없는 일.

실망시키면 안 되겠지.

"돌격해!"

이윽고 작전 3팀장의 지시가 떨어졌다.

"원거리 포지션은 계속 팀장님 지원해! 나머진 다른 거 신경 쓰지 말고 앞으로만 가!!"

작전 3팀과 4팀이 동시에 돌격하기 시작했고, 뒤늦게 눈치챈 적들이 그들을 막아서기 위해 움직였다.

물론 김민주가 그것을 가만히 내버려둘 리가 없었다.

[고유 스킬 : 천수관음- 각성]

[육관음중사(六觀音中四)]

그녀의 전신을 따라 붉은 기운이 퍼져나갔다.

[제4격 - 십일면관음(十一面觀音)]

슥―.

스스스스슥―.

작전팀을 향해 달려들던 헌터들이 하나둘씩 나자빠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팀원들의 눈에는 검도, 검을 쥔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그건 상대의 우두머리 또한 마찬가지였다.

"흐, 흩어지지 마!! 빨리 모여! 모이라고!!"

테이 구역 담당 지휘관인 듯한 중년 여성이 당황한 듯 소리쳤다.

물론 그녀의 명령을 들을 만한 정신이 남아 있는 이는 없었다.

"이 머저리들이 진짜…!"

[고유 스킬 : 네크로맨]

여자의 스킬이 발동되기 직전.

바로 눈앞에서 푸른 안광이 번뜩였다.

[육관음중일(六觀音中一)]

[제1격 - 성관음(聖觀音)]

뚜둑―.

그녀의 목에서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

―쏩콥 국경 인근, 옛 도로.

허허벌판인 그곳은 이미 아비규환이었다.

[습득 스킬 : 광폭화 - 과열]

[습득 스킬 : 광폭화 - 붉은 악마]

뿌득―!

뻐억, 콰직―!

시뻘겋게 물든 물체가 광적인 공격으로 수십 명의 뼈를 으그러뜨리고 있었다.

"자, 잠깐…!"

"살려…!"

"으아아악!!"

그곳은 가히 지옥이었다.

공포에 질린 비명과 고통에 물든 절규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겁에 질려 주춤하는 건 비단 적들뿐만이 아니었다.

"뭐, 뭡니까, 저 인간...."

"저, 정말 청소팀장 맞아요?"

"한국 협회엔 죄다 저런 괴물밖에 없답니까?"

"...."

작전 8팀장이 대답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 또한 저 악마 같은 모습에 살짝 지린 상태였으니.

"시, 시발! 이게 무슨...."

그때, 지옥도를 바라보던 쏩콥 구역 담당 지휘관이 절망에 차 중얼거렸다.

하지만 곧바로 옆에 있던 부하 헌터를 향해 소리쳤다.

"지, 지부에 지원병력 더 요청해!"

"예, 예?! 그럼 저희가 지부 소속인 걸 들킬 수도 있습니다."

"지금 그런 거 따질 때야?! 저 미친년이 지금 팔다리를 죄다 부숴버리고 있는...!"

"미친년…?"

그 순간 어디선가 사람이라곤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기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유 스킬 : 하이패닉 버서커 - 스테이터스 해제]

[모든 스테이터스가 근력으로 전환됩니다.]

[근력 : 18,955 (9,107↑)]

[체력 : 1 (2,289↓)]

[민첩 : 1 (5,799↓)]

[마력 : 1 (1,019↓)]

"사람 가두고 돈 달라고 하는 쪽이 더 미친 거 아닌가?"

"자, 잠...!"

한유빈이 소름 끼치는 미소와 함께 남자에게 달려들었다.

***

처음 겪는 던전 밖에서의 전투.

후인은 눈앞의 처절한 광경에 고개를 떨어뜨렸다.

작정하고 움직인 국제 협회 소속의 헌터들.

그것도 50명이 넘는 말도 안 되는 전력 차.

이건 승산이 없는 싸움이다.

김준우가 제아무리 강하다고 한들 수십 명의 국제 협회 소속 헌터들을 상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가 도와야 한다, 그렇게 생각했다.

"쯧, 이래서 사람이랑 싸우는 건 영...."

수십 명의 스킬을 맞고도 멀쩡히 걸어 나오기 전까진.

[습득 스킬 : 형상 - 우리엘]

이내 김준우의 등에서 8개의 날개가 솟아났다.

후인을 포함한 작전 1팀은 그 모습을 그저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었다.

"뭐야, 시발! 저 새끼 대체 뭐냐고!!"

우두머리는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는 건지 고함을 질러댔다.

그리곤 또다시 활시위를 당겼다.

[고유 스킬 : 로빈 후드]

[화살 - 라그나로크]

이윽고 화살에서 화염이 피어오르는 순간.

슈웅―!

엄청난 충격파와 함께 화살이 발사됐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화살을 보고도 담담한 반응이었다.

"...적당히 봐주니까 지랑 동급인 줄 아네."

이윽고 천천히 오른팔을 들어 올렸다.

[S랭크 스킬의 안전장치 해제 시퀀스를 시작합니다.]

[발동 조건 확인 중]

[시전자 본인 확인]

[시전자의 랭크 확인]

[전투 상태 확인]

[형상 - 우리엘 활성화 상태 확인]

[발동 조건이 확인되었습니다.]

[해당 스킬의 안전장치가 해제되었습니다.]

[스킬 사용에 주의하십시오.]

허공에 거대한 순백의 창이 떠올랐다.

[습득 스킬 : 전능]

슈욱―.

그 거대한 창은 이내 날아오던 화살을 반으로 가르며 그대로 남자를 향해 날아들었다.

────!

그저 어마어마하게 밝은 빛이 소리 없이 한 차례 번쩍였을 뿐이었다.

고막이 나간 건가 싶던 찰나, 땅 위에 있던 모든 것이 하늘로 떠올랐다.

후인의 눈엔 그 모든 장면이 마치 슬로우 모션처럼 보였다.

몇 초쯤 지났을까.

빛이 걷히며 천천히 시야가 돌아왔다.

현장엔 이미 정적이 내려앉은 채였다.

소리를 낼 수 있는 이들이 더는 안 남아 있는 까닭이었다.

"...."

"...."

자신을 포함해, 숨을 죽인 채 전투를 지켜보던 작전 1팀원들 모두가 할 말을 잃었다.

다들 자신들이 무엇을 본 건지 믿을 수 없다는 듯했다.

"우리가 저런 사람을 납치했던 겁니까?"

"...나중에 꼭 사과드리자고."

모두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087

087

쑥대밭이 된 산속.

아니, 나무고 뭐고 다 사라졌으니 이젠 산속이라고 하기도 뭐한가.

한바탕 난리를 피운 직후, 곧바로 입구를 막고 있던 바리케이드를 치우고 청소팀을 빼냈다.

시간이 워낙 지체되었기에 가스 농도가 꽤나 높았는지 청소팀원들은 밖으로 나오자마자 거친 기침과 함께 구토를 해댔다.

대기 중이던 의무팀이 곧바로 처치에 나섰다.

다행히도 모두 특별한 문제는 없었다.

때맞춰 김민주와 한유빈이 맡은 현장에서 무사히 구출했다는 무전이 날아들었다.

모두가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한 뒤, 곧바로 마무리 작업에 나섰다.

"소속."

"...."

짝―.

"소속."

"라, 라오스 지부 소속 작전 2팀 C랭크 헌터 응고르입니다."

말로 할 때 알아들으면 안 되는 걸까.

무릎을 꿇고 있는 그 헌터의 인적사항을 받아 적곤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넌."

"필리핀 지부 작전 7팀, 코코입니다!"

"참 나, 뒤죽박죽 잘도 섞어놨네."

그렇게 중얼거리며 펜을 끄적거렸다.

50명이 넘는 인원의 신상을 하나하나 적는다는 게 참으로 귀찮은 짓이었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돌아가서 나 몰라라 할 게 뻔하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둘 넷 여섯 여덟... 한 명 남았네."

마지막 남은 한 놈.

다름 아닌 녀석들의 우두머리였다.

"넌 어디 소속이야."

"태, 태국 지부...."

그는 말을 하던 도중 나와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눈을 아래로 깔았다.

뭘 그리 놀래. 아직 손도 안 댔는데.

"태국 지부 작전 1팀장 카, 카나롯… 입니다."

"작전 팀장?"

"네, 네 그렇습니다."

"혹시 이번 작전 네가 기획한 거냐? 전술이랑 인원 배치까지?"

"아, 아닙니다. 전 그냥 시키는 대로 준비한 겁니다."

"누가 시켰는데."

"저도 자세한 건.... 본부에서 지령이 내려왔다는 것밖엔...."

역시 국제 협회가 직접 움직인 거였나.

그럼 뭐, 이런 일을 벌인 이유도 대충 알만하네.

'우리가 허브를 만든 게 어지간히도 눈에 거슬렸나 보군.'

펜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다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나설 줄이야.

본인들한테 거슬리면 청소부 몇 명 정도야 죽어도 상관없다는 건가?

'...하긴, 한국에선 100명이 넘는 헌터도 죽이려고 했는데.'

주춤하긴커녕 더 대담해지고 있다.

마치 더 이상 눈에 띄면 봐주지 않겠다는 듯한 느낌.

'...쯧.'

국제 협회를 견제하기 위해 벌인 일인데, 도리어 견제가 들어오다니.

이러면 완전히 나가리가 아닌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그때였다.

"제 쪽은 다 끝났는데, 아직 다 못 하셨으면 도와 드릴까요?"

후인이 노트를 펄럭이며 다가왔다.

"아뇨, 저도 마침 끝났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그럼, 이제 이놈들은 어떻게 할까요."

"뭐… 돌려보내야죠."

"…네?"

후인이 당황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아시잖습니까, 국제 협회 본부가 끼어있다는 거. 저흰 어디까지나 직원을 구출하기 위해 진압한 거지, 여기서 더 나가면 그다음은 전쟁입니다."

"그, 그래도 그냥 풀어주는 건...."

"걱정 마시죠. 이번 일에 대한 책임은 반드시 물게 할 거니까."

나는 일부러 카나롯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낯빛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왜, 뭐 할 말 있어?"

내가 묻자 불안함을 감추기 위함인지 그가 빠득빠득 목소리를 높였다.

"...고, 고작해야 몸집 좀 큰 독립협회 주제에 국제 협회 지부를 상대로 책임을 물겠다고? 우, 우리 본부가 가만히 있을 것 같아?!"

"에휴...."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화가 난다기보단... 그냥 측은한 기분이 들었다.

"너희 설마 본부가 나서서 감싸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뭐?"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거면 머리에 문제 있는 거다."

결국, 표면적으로 일을 벌인 건 이들이 아닌가.

직접 지시를 내린 태국 지부장 한 명만 관리하면 밑에 놈들이야 얼마든지 꼬리를 자를 수 있다.

아니, 분명히 자른다.

내가 국제협회라도 그럴 테니까.

명백히 범법 행위인 던전 점거.

타 협회에 대한 공격.

던전 밖에서의 이능력 사용에 기타 등등.

세간에 드러나면 국제 협회라 하더라도 유야무야 넘어가기 힘들다.

이용당한 이 녀석들의 헌터 생활은 끝났다고 봐야지.

"...시, 시발."

카나롯 팀장 또한 그제야 현실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알았으면 돌아가서 곱게 목이나 닦고 기다리고 있어. 조만간 연락이 갈...."

퍼억―!

그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나를 밀치곤 뒤에 있던 후인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곤 허리춤에서 단검을 뽑아 그의 목에 가져다 대며 소리쳤다.

"우, 움직이지 마!"

"하... 시발, 가지가지 하네."

어째 좋게 끝나는 경우가 없네.

"내, 내가 시발 어떻게 들어갔는데! 이대로 나가리 될 거 같아?!"

"야, 다 끝난 마당에 일 더 크게 만들지 말고 그냥...."

"우, 움직이지 마! 움직이지 말라고!"

카나롯의 눈에서 이성이 나갔다.

푹―.

그리고 후인의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

국제 협회, 태국 지부.

지부장 집무실.

쁘라셋 지부장은 수화기를 든 채로 머리를 쥐어뜯었다.

"...한국 협회 놈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당연한 거 아닙니까? 한국 협회에서 인수했는데.」

마르크 팀장의 담담한 반응에 쁘라셋 지부장은 더욱 복장이 터질 지경이었다.

"그렇게 강한 놈들이라곤 말씀 안 하셨잖습니까...!"

「하, 하하하! 알았으면 뭐 달라졌을 것 같습니까? 뭐, 사실 저로서도 예상 밖이긴 했습니다.」

"...."

「나름 국제 협회 소속 헌터라는 놈들이 고작 세 명한테 개박살이 날 줄은.」

그 어처구니없는 대답에 쁘라셋 지부장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반박할 수는 없었다.

어찌 됐든 결과적으로 실력에서 패했고, 그건 본인 또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으니까.

빠득 이가 갈리는 가운데 그는 애써 화를 참으며 입을 열었다.

"...한국 협회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그거야 당연하겠죠. 뭐랍니까?」

"관용은 없다고 못을 박더군요. 그동안 동남아 지부들에 지원해준 장비와 인원 파견에 대한 보상도 요구했고.... 더불어 앞으로의 지원은 일절 없을 거라고."

쁘라셋 지부장은 막막한 심정으로 말을 꺼냈다.

"사실 보상은 둘째 치고라도... 지금 우리 지부를 포함해서 주변 지부들도 이번 일에 대한 모든 책임을 물게 됐습니다. 이미 저희 소속 애들 몇 명은 재판에 넘어갔고요."

「그렇군요. 뭐, 재수 없으면 국가 분쟁으로까지 번질 수도 있겠죠.」

참으로 성의 없는 대답.

마치 남의 일이라는 듯한 말투였다.

「뭐, 본인들이 능력이 없어서 실패한 걸 어쩌겠습니까. 국가 문제는 우리가 나설 수도 없으니 각자 알아서 잘 해결 보십시오.」

"그, 그게 무슨...!"

「아, 그래도 너무 걱정 마십시오. 지부장님만큼은 보호해드릴 생각이니. 나름 동남아 지부에서 PB코퍼레이션과 직통할 수 있는 유일한 지부 아닙니까.」

"지금 저 혼자 산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잖습니까! 당신 말만 듣고 끌어들인 지부만 몇 개인데…! 여, 여보세요? 여보세요! …이런 시발!!"

콰직―!

쁘라셋 지부장은 결국 화를 참지 못하고 수화기를 집어 던졌다.

동남아 나머지 지부들은 PB코퍼레이션의 존재도, 이번 일이 국제 협회 본부에서 내린 지시라는 것도 모르고 있다.

때문에 온갖 이유를 대며 다른 지부들을 끌어들인 건 다름 아닌 본인이다.

그런데 이번 일로 당사자인 본인 외의 모든 지부가 피해를 입는다면... 그 모두가 적으로 돌아설 것이다.

아니.

동남아 지부 전체가 완전히 갈라서겠지.

'이 개새끼들....'

쁘라셋 지부장의 이가 빠득빠득 갈렸다.

이런 새끼들인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텐데.

그의 눈엔 국제 협회에 대한 분노로 가득했다.

그리고 한편으론 또 다른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쪽은 좋겠네, 시발. 백기사 한 명 잘 만나서 승승장구하고....'

그것은 베트남 협회, 아니 한국 협회 베트남 지부에 대한 부러움이었다.

***

같은 시각, 프랑스. 국제 헌터 협회 본부.

"저, 사무총장님...."

"네, 말씀하세요."

웨슬리 사무총장을 마주한 수행비서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작전은 어떻게 됐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뭐, 100명 가까운 인원이 모조리 깨졌다더군요. 그것도 단 세 명한테."

"그, 그럼...."

"당연히 협상은 물 건너갔고 일에 가담한 헌터들 신상까지 모조리 공개됐어요. PB코퍼레이션 쪽도 일찍이 꼬리를 잘랐으니 지부들만 안 됐죠."

"작전은 실패...했군요."

"음? 아뇨?"

사무총장이 무슨 소리냐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자 수행비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놈들이 질 거라는 건 이미 예상한 일입니다. 이렇게 될 거라는 것도 전혀 모르고 있던 것도 아니고요."

"네, 네…? 그럼 왜 굳이...."

"허브를 매각하게 하는 건 실패했지만, 메시지는 확실히 전달되지 않았습니까."

사무총장의 눈이 번뜩였다.

"이제 그놈도 알겠죠. 본인이 계속 우리를 적대하는 한, 본인 주변에 있는 인물 모두가 계속 위험해질 거라는 걸."

"...."

"제아무리 대단한 놈이라고 해도 이젠 마음대로 날뛰진 못할 겁니다. 결과적으로 우리의 목적은 이룬 셈이니 실패라고 할 순 없죠."

수행비서는 침묵했다.

그가 말하는 '그놈'은 곧 김준우를 말한다는 걸 수행비서 또한 눈치껏 알아들었다.

하지만 설마하니 고작 그것 때문에 동남아 지부 전체를 이용할 줄이야.

그녀로선 가히 생각조차 못 한 일이었다.

"...이다음은 어떡하실 생각이십니까."

"본보기도 보여줬겠다.... 이제 하나씩 처리해나가야겠죠. 쓸모없는 곳은 적당히 정리하고, 괜찮은 곳은 키우고. 눈에 거슬리는 곳은 없애고."

사무총장이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슬슬 전 세계 토벌권 통합 건을 추진할 겁니다."

***

노이바이 공항.

출국을 몇 시간 앞둔 시각.

그리도 기다렸던 귀국인데도 우리는 팍 가라앉은 분위기였다.

뭐, 당연한 일이다.

꽤나 안타까운 일이 있었으니까.

"하아...."

"잘해보려고 온 건데 결국 이런 일이 생겼네요."

"...."

한유빈은 아까부터 계속 말이 없었다.

"어쩔 수 없지. 세상일이 다 우리 뜻대로 되는 것도 아니니까."

"그래도 꽤 좋은 분이셨는데...."

또다시 숙연해진 분위기.

그리고 그때.

"저... 말씀은 감사한데, 꼭 그렇게 죽은 사람처럼 얘기할 필요가 있습니까?"

뒤에 있던 후인이 말했다.

"...."

'...."

우리는 휠체어를 탄 채로 배웅을 나온 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래도 죽다 살아난 건 사실이지 않습니까. 참 안타까운 일이었죠."

"어쨌든 멀쩡히 살아 있잖아요. 그냥 놀리고 싶은 거라고 솔직하게 말씀하시죠."

김민주와 한유빈은 결국 참지 못하고 풋,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게 그냥 병원에서 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몸도 성치 않으시면서 뭘 굳이 배웅하겠다고."

"그러면 오히려 고맙다고 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나는 대답 대신 미소를 지었다.

동시에 우리를 배웅하러 나온 베트남 지부 직원들 또한 웃음을 터트렸다.

주변 협회 헌터들과 한바탕 일을 벌였던 그 날.

우두머리의 칼에 복부를 찔린 직후, 그의 상태는 매우 심각했다.

칼이 너무 깊게 들어간 까닭에 출혈도 심했고 이미 정신도 잃은 뒤였으니.

급히 내가 가지고 있던 몇 개의 사제 스킬로 응급처치를 하고 병원으로 옮겼고, 다행히 늦지 않게 처치할 수 있었다.

"종종 놀러 오세요."

후인이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놀 시간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하하. 그럼 일하러 오세요. 제가 잘하고 있나 감시도 할 겸."

"그건 놀러 오는 것보다 더 의미가 없겠군요."

후인이 크게 웃는다.

"어쨌든 한 달간 고생 많으셨습니다."

"수고는 제가 아니라 당신이 했죠."

그가 담백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혹시라도 저희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연락주세요."

"말하지 않아도 그렇게 할 겁니다."

그가 건넨 악수를 받았다.

"그럼 안녕히 가세요. 김준우 본부장님."

"베트남 지부,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지부장님."

짧은 악수를 마치고 우린 입국심사장으로 들어섰다.

길고 길었던 출장이 드디어 끝이 났다.

하지만 분명 기다렸던 날이었음에도 내 표정은 여전히 심각했다.

[귀하의 목표 달성 현황에 변수가 발생했습니다.]

[귀하에 대한 국제 헌터 협회의 적대감이 기준치를 초과했습니다.]

[해당 변수에 따라 귀하의 현 목표 달성 현황을 갱신합니다.]

[....]

머릿속에서 뜻밖의 그 음성이 들려온 까닭이었다.

088

088

여의도 행정본부, 협회장실.

나는 귀국하자마자 짐도 풀지 않고 곧바로 그곳을 찾았다.

"대체 출장 가서 뭔 일을 그렇게 벌이고 온 거냐."

협회장은 날 보자마자 대뜸 그 말로 포문을 열었다.

"국제 협회 지부들이 손을 잡고 던전 점거를 하다니. 내 협회 인생 50년 동안 듣도 보도 못한 말이다."

"마찬가지입니다. 뭐, 그래도 나름...."

나름 잘 해결했다, 그 말을 차마 뱉을 수 없어 말끝을 흐렸다.

정말 잘 해결했다면 후인이 찔리지 않았을 테니까.

협회장이 사뭇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혹시 주변 협회가 그런 일을 벌인 게 우리랑도 관련이 있나?"

"없진 않습니다. 뭐, 제 추측이지만… 저번에 말씀드렸던 국제 협회와 관련된 어떤 조직이 직접 지시를 내린 것 같습니다."

"흐음, 대충 무슨 말인지 알겠군. 나도 그런 괴담이라면 들어본 적이 있네. 뭐, 자네 반응을 보니까 마냥 괴담은 아닌 모양이군."

협회장이 나를 흘겼다.

궁금한 게 많은 눈빛이었지만 그 이상 뭔가를 묻진 않았다.

"본부는 어땠습니까?"

"여기야말로 별일 없었어."

"다행이군요."

협회장이 흠, 하며 신음했다.

"뭔가 신경 쓰이는 게 있나 보군. 저번 수중 던전 때와 비슷한 상황인가?"

"더 대담해지고 있습니다."

"...듣던 중 나쁜 소식이군."

"아무래도 경고하려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더 움직이면 계속 위험해질 거라고."

"자네가?"

"저 혼자라면 차라리 다행이죠."

오는 놈들 다 조져버리면 그만이니까.

어차피 개인적으로 볼일도 있고.

하지만 이번 일은 결코 나에게만 위협을 주려는 게 아니다.

"자네 주변을 위협하려는 거군."

"예."

흐음, 협회장이 굳은 얼굴로 턱을 만지작거렸다.

어쨌든 회귀 전에 날 죽인 것도 그놈들일 확률이 높다.

물론 아무것도 모르고 기습당한 거라 쳐도, 결과적으론 SSS랭크였던 나를 죽이는 데 성공한 놈들이다.

그런 놈들이 다른 녀석들을 작정하고 노린다면, 무조건 당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혹 떼러 갔다가 되레 혹이 붙어 버렸네그려."

"...죄송합니다."

고개를 푹 숙였다.

"베트남 지부를 먹으면 조금이나마 주춤할 줄 알았습니다. 설마하니 이렇게까지 직접적으로 나올 줄은...."

"주제넘은 소리 마. 자네는 제안했을 뿐이고 최종적인 판단은 내가 했네. 그럼 그게 누구 잘못이겠나."

"...."

뭐… 맞는 말이긴 하다.

내 잘못은 아니지.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건가. 자네도 더 강경하게 대응할 생각인가?"

"그러기엔 아직 상대에 대해서 아는 게 별로 없습니다. 일단은 몸을 사리고 상황을 지켜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 확실히 더 움직이긴 힘들겠어. 해외 지부 사업 건도 이쯤에서 퍼즈 해야겠고."

"아뇨."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음?"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해외 사업 건은 계속 진행할 생각입니다. 추가적으로 다른 건들도 함께 진행할 계획이고요. 여기서 멈춘다면 꼬리를 마는 꼴이지 않습니까."

"경고가 들어왔다면서? 이상 더 일을 벌이는 건 위험하지 않겠나."

"공식적으로 진행한다면 그렇겠죠."

협회장의 눈썹이 꿈틀했다.

"자세히 말해봐."

퍽 무거워 보이는 목소리.

사무실을 슥 살핀 후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해외 지부 사업을 비롯한 국제 협회 대응 건들은 지금처럼 공식적으로 진행하는 게 아니라 음지에서 진행하려고 합니다. 그편이 국제 협회의 눈을 피해 활동하기엔 더 좋을 테니까요."

"그러니까 자네 말은, 협회 내부가 아니라 외부에서 움직이자?"

"예."

"방법은?"

나는 잠시 숨을 골랐다.

"협회 뒤에서 비공식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산하 조직을 하나 만들까 합니다."

"흠, 국제 협회를 따라 하자는 건가?"

"따라 하다 뿐이겠습니까."

몸을 앞으로 숙이며 나지막하게 말을 이었다.

"잡아먹을 생각까지 하고 있는데."

"...."

협회장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내 눈에는 애써 담담한 척을 하는 거로 보였다.

그의 입꼬리가 조금씩 떨리고 있었으니까.

"대체 어디서 이런 또라이가...."

"예?"

"아무것도 아닐세."

그래, 산하 조직이라─ 협회장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길게 숨을 내뱉었다.

"그나저나 그만둘 거라 하지 않았나? 왜 마음이 바뀐 건가."

"계획에 변수가 좀 생겨서요. 이대론 나가도 딱히 의미가 없게 됐습니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엄밀히 따지면 이것도 나가는 거긴 하죠. 말이 비공식 산하 조직이지, 결국엔 협회에서 독립하겠다는 뜻이니. 아시다시피 제가 공식석상에 있는 한 협회 전체가 타깃이 될 테니까요."

"제아무리 비공식적으로 진행한다고 해도 결국엔 눈에 띄게 될 텐데?"

"겉으로는 다른 사업으로 포장해야겠죠. 생각해둔 게 있습니다."

"위장 사업이란 말이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판단은 협회장님께 맡기겠습니다. 기껏 말해 놓고 이런 말 하긴 뭐하지만... 이 프로젝트를 시작하면 되돌릴 순 없습니다. 앞으로는 완전히 국제 협회를 적으로 돌리게 되겠죠."

사뭇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언젠가는 무력 충돌도 감수해야 할 겁니다."

"겁주는 겐가?"

"사실대로 말씀드리는 겁니다."

협회장이 푸, 숨을 뱉었다.

"어쨌거나 이걸 단둘이 있을 때 얘기한다는 건 다른 사람들은 몰랐으면 한다는 거겠지?"

"예. 이두식 이사에게도 비밀로 해주셨으면 합니다."

"그건 믿어도 된다. 입 하나는 무겁거든."

그는 이내 고개를 뒤로 팍 젖혔다.

"토벌만 하면 될 줄 알았더니 별일이 다 생기는군...."

그렇게 중얼거리며 눈을 감았다.

그리곤 잠시 고민하던 끝에.

"그래, 시벌. 해보지 뭐."

허가가 떨어졌다.

"물론 당장 진행할 생각은 없습니다. 이것저것 준비해야 할 것도 많고. 무엇보다 누가 어떤 목적으로 움직이고 있는지도 알아볼 필요도 있으니까요."

"그래. 준비되면 언질이라도 해주게."

그가 나를 지그시 바라봤다.

"쯧, 결국 자네가 나가게 되는구먼. 어떻게든 꼬셔서 계속 붙어 있게 하려고 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허가를 내주지 말 걸 그랬나."

...뭐라는 거야.

"어차피 같은 배에 탄 입장입니다. 잠시 떨어져 있는 거라고 생각해주십시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아무튼,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그런 말 마라. 감사는 오히려 내가 해야지. 자네 같은 사람이 협회에 있어 준 것만으로도 큰 행운이었네."

"...."

세계 1위 헌터였던 전생에서도 들어본 적이 없던 말이라 좀 당황스러웠다.

괜히 멋쩍어진 기분에 서둘러 사무실을 나서려던 그때.

"그래서, 이건 개인적인 질문인데."

협회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 대체 뭘 하고 싶은 건가?"

"예?"

"협회장 제안도 거절하고 말이지. 심지어 본부장 자리도 마다하는 걸 내가 억지로 앉히지 않았나. 그렇다고 돈 욕심이 있는 것도 아닌 것 같고."

그가 턱을 괸 채 말을 이었다.

"청소부로 시작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그동안 자네가 욕심부리는 걸 한 번도 못 봤네. 자네, 대체 목표가 뭔가?"

"뭐...."

목표라.

당연한 거 아닌가.

"높이 가는 겁니다."

"얼마나?"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가능한 만큼."

그 말을 뒤로하고 나는 협회장실을 빠져나왔다.

***

'에휴....'

속으로 연신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귀국 직후부터 계속 골머리를 앓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 시작은.

[귀하의 목표 달성 현황에 변수가 발생했습니다.]

공항에서 들려온 그 음성에서부터였다.

[귀하에 대한 국제 헌터 협회의 적대감이 기준치를 초과했습니다.]

[해당 변수에 따라 귀하의 현 목표 달성 현황을 갱신합니다.]

[....]

[귀하의 현 목표 달성 현황이 갱신되었습니다.]

[히든 스킬 : 업보]

[스킬 해제 조건 : 국제 헌터 협회의 사무총장 달성]

[현재 직책 : 대한민국 이능차원관리협회 서울 작전본부장]

[현재 스킬 해금률 : 99.8%]

[현재 클래스 : 검사, 사제, 마법사]

[현재 비공식 랭크 : SS]

[현재 비공식 랭킹 : 국내 1위, 세계 37위]

[현재 국제 헌터 협회와의 관계 : 매우 나쁨]

[현 시간 기준, 기존 계획대로 진행 시 해당 목표 달성 확률]

[1.068%]

여태까지는 들어본 적이 없었던 내용의 음성이었지만, 어쨌든 중요한 건.

'1프로라니, 시발....'

사무총장이 될 확률이 바닥을 기고 있었다.

그 절망적인 확률에 하마터면 공항에서 소리를 지를 뻔했다.

뭐… 냉정하게 따지면 그럴 만하다.

기존의 내 기획은 스킬을 모두 해금해서 다시 헌터가 되어 국제 협회에 입성하는 거다.

하지만 국제 협회의 타깃이 되어버린 현재, 국제 협회 입성은 고사하고 헌터 등록조차 할 수 없는 처지다.

그러니 저딴 확률이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어쨌든 이대로는 1프로의 확률을 뚫고 사무총장이 되는 건 기대하기 힘들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선 계획에 수정이 필요했다.

뭐… 수정이라고 해봤자 할 수 있는 건 하나밖에 없지만.

'새로 하나 만드는 거지 뭐.'

물론, 이미 국제 협회의 타깃이 된 마당에 그걸 대놓고 진행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협회장에게 비공식 산하 조직을 제안한 것이다.

개인 사업으로 위장해 국제 협회의 눈을 피해 야금야금 세력을 넓혀가기 위해서.

제2의 국제 협회 사무총장.

이 얼마나 그럴싸한 방법인가.

물론 이 빌어먹을 업보가 그걸 인정해줄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모 아니면 도다.

뭐라도 해보는 수밖에.

"그래… 결국 나가게 됐구먼."

오랜만에 발걸음한 청소팀 사무실.

마주 앉은 박 과장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나가서 뭐 할지는 생각해봤고? 내가 아는 사람 중에 협회 하청으로 몬스터 부산물 처리하는 놈 있거든? 준우, 너만 괜찮다면 거기 자리 하나 부탁해볼게."

"하하...."

부산물 처리 시설?

죽어도 싫다.

"제안은 감사하지만… 이미 생각해둔 게 있습니다."

"오, 벌써? 어떤 건데?"

"뭐,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청소팀 파견 사업을 해볼까 합니다."

"청소팀 파견…?"

청소과장인 그조차 의아하다는 반응이다.

"이번에 베트남 출장을 다녀오면서 알게 된 건데, 생각보다 많은 나라의 독립협회에서 청소팀이 부족하다더군요."

"그거야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잖냐. 서울본부나 몸집이 좀 큰 지부는 몰라도 조금만 지방으로 내려가도 아직까지 인원이 많이 부족하지."

"그러니까 말입니다. 어쨌든 수요야 넘쳐나니, 그런 곳을 상대로 청소부를 파견해준다면 서로서로 좋은 거 아니겠습니까."

"...듣고 보니 괜찮은데?"

금세 생각이 바뀐 듯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헌터 아카데미를 운영할까도 꽤나 많이 고민했지만....

최대한 적은 자본으로 시작할 수 있는 걸 고르다 보니 청소부 파견만 한 게 없었다.

잘되면 해외까지 건드려볼 수도 있고. 오히려 금전적으론 더 짭짤할지도 모르지.

'뭐, 그건 공식적인 이유고....'

비공식적인 이유로는 어쨌든 여러 나라를 다닐 명분이 필요할 뿐이다.

사업을 명분으로 해외 지부 인수합병을 진행하기에는 이만한 아이템이 없으니까.

'음....'

어째 아이러니했다.

전생에선 청소팀이 뭘 하는 팀인지도 모르고 인원 감축을 제안했던 내가, 이젠 아예 반대 입장이 돼서 청소팀 파견 사업을 하려 한다니.

오래 살고 볼 일이네.

아니, 죽고 볼 일인가.

"이야, 너 처음 왔을 때 생각나네. 솔직히 그땐 하루 이틀 하다가 나가겠거니 했는데... 설마하니 우리 일에 그렇게 살신성인 것 나설 줄이야."

박 과장이 클클 웃었다.

"네가 청소팀에 있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정말 고마웠다. 그동안 고생 많았어."

"...과장님도 고생하셨습니다."

왜 다들 반응이 이렇게 격한 건가 싶다.

쓸데없이 무안해지게.

나는 짧은 인사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그리고."

동시에 다시 박 과장을 향해 꽤나 늦은 그 말을 전했다,

"그때 일은 죄송했습니다."

"으, 음? 뭐, 뭐가?"

어리둥절한 모습.

나는 가만히 미소를 지었다.

"그런 게 있습니다."

089

089

본부는 이미 내가 퇴사한다는 소문이 싹 퍼져선 꽤나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미리 알고 있던 김민주나 이아영, 한유빈 등등은 그나마 덜 했지만, 다른 놈들이 꽤나 야단법석이었다.

그 중엔 차석현 길드장과 구상찬 기자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몇 달 같이 일하지도 않은 청소부 출신 한 명 나간다는데 왜들 그리 호들갑인지 잘 이해는 안 갔지만....

아무튼, 나는 여기저기서 걸려오는 전화를 받느라 꽤나 바쁜 시간을 보내는 와중에도 내 업무는 마무리 지어야 했다.

덕분에 요 며칠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보냈다.

어쨌든 시간은 착실히 흘렀고, 그렇게 마지막 출근 날이 찾아왔다.

"그동안 수고하셨어요."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아영 실장과 편 팀장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알고 있긴 했지만… 이제야 그만두신다는 게 실감이 나네요."

"근데 우리 회식은 왜 안 해요? 끝까지 구두쇠야, 아주."

그들뿐만 아니라 김민주와 한유빈 팀장 또한 내 사무실을 찾았다.

김민주와 편 팀장은 꽃다발을 전해주었고, 한유빈은 액자에 담긴 2달러짜리 지폐를 선물했다.

미국에선 행운의 상징이라나 뭐라나.

그리고 이아영 실장은... 빈손이었다.

"그쪽은 뭐 없습니까?"

"참 나, 다 큰 어른이 무슨 선물을 강요해요?"

팔짱을 끼며 톡 쏘아붙인다.

끝까지 한 대 쥐어박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하는 여자다.

"설마 저 나간다고 삐졌습니까?"

"자의식 과잉이시네. 서운할 게 뭐가 있어요. 다 각자 갈 길 가는 거지 뭐."

뭐가 그리 대수냐는 표정으로 고개를 획 돌린다.

노골적으로 아쉬운 티를 내던 요전과는 완전히 다른 반응이었다.

홍길동도 아니고, 무슨 기분이 이리도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건지 나로서는 알 도리가 없었다.

'암만 봐도 제정신은 아니야.'

더 엮이기 전에 나가게 돼서 다행이 아닐 수 없다.

"그나저나 이제 좋은 날도 다 갔습니다. 본부장님 없으면 제대로 굴러가기나 하겠습니까."

"나갈 마당에 아부하셔도 뭐 없습니다. 저 없을 때도 잘만 하지 않았습니까."

"서민철 그 새끼 있었을 때요? 설마 그 꼴이 정말 잘 돌아갔다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시죠?"

편 팀장은 곧바로 괴상한 표정을 지으며 서민철을 흉내 냈고, 동시에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덕분에 분위기가 한층 가벼워졌다.

"준비하고 계신다는 게… 청소팀 파견 사업이라고 하셨나요?"

"예. 뭐, 아직 생각만 하고 있고 진행된 건 아무것도 없지만요."

"청소팀 분들한테 스카웃 제의라도 해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그것도 뭐 기반이라도 잡혀야 하죠. 맨바닥부터 시작해야 하는데 누가 어울려주기나 하겠습니까."

"글쎄요~. 제 생각엔 한 명쯤은 무조건 있을 것 같은데."

편 팀장의 시선이 이아영을 향했다.

그녀는 뭔가 뜨끔 하는 게 있는지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실수하고 눈치 보는 고양이 같은 반응이다.

"그나저나 아이디어 괜찮네요. 미리 알았으면 제가 먼저 했을 텐데."

"뭣 하면 동업하시겠습니까? 자리 하나 만들어 놓겠습니다."

"정말입니까? 약속 지키셔야 합니다?"

"농담입니다. 통제팀장씩이나 되는 분을 어떻게 끌어들이겠습니까."

편 팀장이 노골적으로 섭섭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 사실 국제 협회를 무너뜨리기 위한 위장 사업이라는 걸 알았다면 저런 반응이 나올 리가 없지만.

"혹시 뭐 필요하신 게 있으면 언제든 연락주십시오. 제가 도울 수 있는 건 꼭 도와드리고 싶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후로 그간 있었던 일에 대해 소소한 담소가 이어졌다.

한 시간 정도가 흐르자 모두가 본인의 자리로 돌아갔고, 나는 홀로 남은 사무실에서 대충 시간을 때웠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퇴근 시간이 다가왔다.

나는 가방을 챙겨 사무실을 나왔다.

계단을 내려가면서도 별다른 감상이 들진 않았다.

퇴사라곤 해도 결국 진짜 내 일도 아니었고.

원래로 돌아가기 위해 잠깐 들렀던 것뿐이었으니 딱히 아쉬울 것도 없었다.

여기서 만난 이들도 나와는 별 상관없는 이들이고, 무엇보다 결국 나가면 다 끝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했다.

본부 로비에서 그들을 만나기 전까진.

"수고하셨습니다."

"나가셔도 건강하시고요."

"본부장님 덕분에 요 몇 달은 정말 일할 맛 났습니다. 감사했습니다."

"가끔이라도 좋으니까 한 번씩 얼굴 비춰주시죠. 하하하!"

청소팀을 비롯해 꽤나 많은 팀원이 나를 배웅하기 위해 모였다.

그중에 문소연과 한상혁도 보였다.

"...일들은 안 하십니까. 이러고 있을 시간이 있으면 가서 던전 하나라도 더 작업할 것이지."

"크하하! 하여간 본부장님 일 중독이라니까!"

"낭만이 없어요, 낭만이!"

진심으로 한 말인데 어째 반응이 심상치 않다.

걱정해줘도 뭐라네.

"...종종 연락해도 되죠?"

"편하신 대로 하십쇼."

"...히히."

내가 대답하자 문소연이 환하게 웃는다.

"밖에서 나 모른 척하면 안 된다?"

그녀의 뒤를 이어 이번엔 한상혁이 다가왔다.

"너 하는 거 보고."

"참 나!"

한상혁이 피식 실소를 뱉었다.

그렇게 나는 남은 이들의 배웅을 뒤로하고 본부 건물을 걸어 나왔다.

'뭐, 아주 상관없지는 않았네.'

나는 그것으로 전생에 이어 반평생을 보냈던 협회에서, 전생에서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공식적인 작별을 고했다.

***

「(1보) 이능차원관리협회, 김준우 작전 본부장 사퇴.」

「본부장 위임 2달 만에 사퇴, '대체 왜?'」

「너무 무거운 짐이었나… 김 작전 본부장의 돌연 사퇴에 누리꾼들 '충격'」

「박인범 협회장 '본인의 결정을 존중한다', 이사회조차 몰랐던 사퇴」

「아레스 길드, 차석현 대표 '당황스러운 결정', '그럼에도 응원한다' 마음 전해」

「청소팀 막내에서 작전 본부장까지. 김 작전 본부장의 초고속 승진이 가능했던 이유는?」

「'우리 길드로 와주세요' 김 작전 본부장 영입을 위해 전국 각지 길드에서 때아닌 '스카웃 전쟁'」

「최연소, 최다 업적, 최단기간. '역대급' 김 前 작전 본부장, 앞으로의 행보는?」

"아쉬우시겠습니다."

여의도 행정본부, 협회장실.

기사를 확인하던 이두식 이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쉽기는. 나간 사람 신경 쓸 만큼 우리가 할 일이 없는 것도 아닌데."

말은 그렇게 했지만, 축 처진 목소리는 누가 봐도 아쉬워 죽으려는 듯했다.

이두식 이사는 애써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어련하시겠습니까. 그럼 일단은 차기 본부장부터 어떻게 해야겠죠. 후임으로 생각해둔 사람은 있습니까?"

"글쎄다. 그게 고민이긴 한데."

"뭐, 누가 앉든 그놈만큼은 못할 겁니다."

"그런 건 기대도 안 해."

협회장이 손을 휘휘 저었다.

이두식 이사는 잠시 턱을 쓰다듬다가 넌지시 물었다.

"김민주 팀장은 어떻습니까?"

"안 물어봤겠냐?"

"거절입니까?"

"단칼에 자르더라. 참 나, 누구랑 똑같아 아주."

"어쩔 수 없죠. 뭐, 그놈이 해놓은 일을 보고도 뒤를 이을 놈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시벌. 난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니까."

협회장이 클클 웃었다.

새파랗게 젊은 청소부 막내가 협회 직원들조차 무시하던 그 청소팀의 입지를 미친 듯이 끌어올리질 않나.

협회 실세였던 이수용과 서민철을 날려버리질 않나....

하나하나 열거하려면 날이 샐 정도였다.

"하아...."

협회장이 길게 숨을 뱉었다.

"조용해지겠구먼."

"그러니까 말입니다. 해외 지부 건도 실질적으로 퍼즈가 났으니. 하여간 국제 협회 새끼들...."

"너무 그러지 마라. 똥은 무서워 피하는 게 아니라 더러워서 피하는 거니까."

물론 피할 생각도 없지만.

협회장은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렸다.

당연하겠지만, 이두식 이사는 자세한 내막을 모르고 있었다.

김준우가 협회를 나간 건 더 이상 본인들을 끌어들이지 않고 혼자 위험을 떠맡기 위해서라는 걸.

보아하니 국제 협회의 타깃이 되고, 주변 사람들마저 위험해진 게 모두 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래서 직접 책임을 지려는 거겠지.

냉철하게 봤을 때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벌였던 일들은 결국 다 우리를 위해서 한 행동이 아니었던가.

그 책임을 혼자 짊어지려는데, 협회장으로서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다.

"잘됐으면 좋겠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하지만 목소리가 조금 컸던 모양인지 이두식 이사가 대답했다.

"선물을 보냈으니 괜찮을 겁니다."

"무슨 선물?"

"비밀입니다."

"별게 참."

"협회장님도 저 빼고 둘이서 비밀 얘기 나누시지 않았습니까."

대답 대신 실소를 뱉었다.

"선물이 마음에 들어야 할 텐데."

이두식 이사가 중얼거렸다.

***

작은 원룸.

낯설기만 했던 공간도 이젠 너무 익숙해졌다.

간만에 갖는 여유로운 시간.

나는 가만히 침대에 누워 앞으로의 일들을 머릿속으로 구상하는 중이었다.

띵동―.

그 순간 난데없이 초인종이 울렸다.

올 사람이 없는데.

누군가 싶어 나가보니 생각지 못한 사람이 있었다.

"어, 집에 있었네요?"

"...?"

이아영 실장이었다.

뭐지…?

이 사람이 여긴 왜?

너무 뜬금없는 등장에 잠시 벙쪄 있자니, 이아영 실장이 내 눈앞에다 손바닥을 흔들었다.

"표정이 왜 그래요. 내가 뭐 못 올 데라도 왔어요?"

"...뭡니까. 본부에 뭔 일이라도 났습니까?"

"아니, 뭐 그런 건 아니고."

잠시 우물쭈물하다 말을 잇는다.

"저 퇴사했어요."

"...뭐요?"

"아, 엄밀히 따지면 잘린 거긴 한데."

다짜고짜 충격적인 말을 내뱉는다.

"자, 잘렸다뇨. 누가 당신을 자릅니까?"

"누구겠어요."

"...설마 이두식 이사님이라고 하려는 건 아니겠죠?"

"아니긴요. 나가고 싶다고 하니까 바로 해고 처리해버리던데요?"

나는 이마를 탁 짚었다.

아무리 본인이 나가고 싶다고 해도, 지원팀 최고 책임자를 그렇게 한 큐에 날려버린다고?

대체 어떻게 되먹은 부녀인가.

아니, 그런 것보다... 퇴사한 거면 한 거지 여긴 왜 찾아온 건가.

"설마 잘렸으니까 나보고 책임지라는 건...."

"하,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자의식 과잉이에요?"

"그럼 우리 집엔 왜 왔습니까."

내가 묻자 그녀는 큼큼, 헛기침했다.

"그… 사업 준비는 잘돼가요?"

"그럭저럭. 그건 왜요."

"나도 끼워주면 안 돼요?"

"...?"

뭐라는 거야, 시발.

"저 백수 되면 책임져준다면서요."

"대체 내가 언제.... 아니 그것보다, 방금은 나보고 책임지라는 거 아니라면서요."

"...."

눈을 돌려 시선을 피한다.

장난하자는 거야 뭐야.

"됐으니까 돌아가시죠. 크게 도움도 안 될 것 같은...."

"자, 잠깐만요! 설마 거절하려는 건 아니죠? 나 있는 거랑 없는 거랑 차이 되게 클 텐데?"

"참 나, 별...."

자의식 과잉은 내가 아니라 그쪽이네.

"아, 맞다! 서, 선물도 가져왔어요!"

"선물…?"

"그때 안 줬다고 삐졌잖아요? 지금이라도 줄 테니까 기분 풀어요."

가방을 이리저리 뒤지더니 서류 봉투 하나를 꺼내 내게 건넨다.

한눈에 봐도 꽤나 두꺼워 보이는 서류 뭉치였다.

"...이게 뭡니까?"

"국내 지부 청소팀 현황이에요. 팀당 인원이랑 예산, 작업량, 근무 시간 등등. 어때요? 당신 사업에 꼭 필요한 정보 같은데."

"...."

잠시 멈칫했지만... 국내 정보 정도야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지 않은가.

무엇보다 청소팀 파견 사업에 올인할 것도 아니고.

뭐, 해외 협회 정보라면 모를까.

"별로 구미가...."

"그리고 이것도."

말을 꺼내기 무섭게 그녀가 또 다른 서류를 꺼내 들었다.

"이건 해외 각국 독립협회 정보들. 각 팀별 인원이랑 운영 현황이에요. 이건 어때요?"

"...."

"후후, 이건 좀 구미가 당기나 보네요."

"...아니, 그전에 이런 거 막 가져와도 되는 겁니까?"

"당연히 안 되죠."

말은 안 된다는데 표정은 왜 저리 당당한 건지 모르겠다.

"그래서, 저 이제 들어가도 돼요?"

이아영 실장이 집안을 가리키며 말했다.

한숨 뱉길 한 차례.

나는 결국 문을 열어주고 말았다.

090

090

프랑스 파리, PB코퍼레이션 본사.

"김 본부장이 사퇴했답니다."

마르크 팀장에게 뜻밖의 소식이 전해졌다.

"엥? 갑자기?"

"예. 기사에서도 개인적인 사정이라고 하는 거 보면 딱히 이유를 말하지 않으려는 것 같은데... 뭐, 아무래도...."

"풉, 푸하하하!"

그가 다짜고짜 웃음을 터트렸다.

"경고가 제대로 먹혔나 보군."

그리곤 매우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지부들을 끌어들이는 건 위험 부담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효과는 있었네.

마르크 팀장은 그렇게 생각하며 팔짱을 꼈다.

뭐, 어차피 동남아 지부들은 그리 중요한 곳도 아니었고. 이번 일로 협회에서 탈퇴하고 싶다고 해도 지들 입지를 생각하면 그럴 수도 없겠지.

결과적으로 다 좋다.

지부 놈들한테는 아니겠지만.

그때 직원이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그래도 이제 눈엣가시가 사라져서 다행입니다."

"그러니까. 이제야 속이 좀 후련...."

그 순간, 마르크 팀장은 이내 묘한 위화감에 말끝을 흐렸다.

'아니, 잠깐....'

생각해보니 고작 청소부 출신의 동양인 한 명이 PB코퍼레이션의 눈엣가시였다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되는 일이 아닌가?

게다가 명색이 밸런스 조정팀장이라는 자신이, 그 눈엣가시를 죽이는 데 성공한 것도 아니고 제 발로 협회를 걸어 나간 것에 안도하고 있다니.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엄청난 자존심에 타격과 깊은 패배감이 밀려왔다.

"...기분 X같네."

"뭐, 예삿놈이 아니긴 했잖습니까. 하하."

"그니까. 그게 제일 이해가 안 간다고."

쯧, 마르크 팀장이 혀를 찼다.

유년 시절부터 천재 소리 들어온 이능력자들도 5년도 채 못 버티고 나가버리는 게 이 바닥이다.

그런 바닥에서 고작해야 5개월 만에 작전 본부장을 달고 한국 협회를 손에 쥔 것도 모자라, 우리 쪽에서 진행한 적대적 인수합병을 막아내고 베트남 협회를 단독으로 인수해버리다니.

이게 과연 말이 되는가.

인생을 두 번 살고 있는 게 아니고서야.

"...됐다. 이미 나간 놈인데 자꾸 생각해서 뭐 하겠어."

그가 한숨을 뱉었다.

하지만 직원은 아직 안심하긴 이르다는 반응이었다.

"설마 이제 손을 떼실 생각이십니까? 우리 존재를 알고 있는 놈인데 가만히 내버려두는 건 아무래도 좀...."

"누가 내버려둔대?"

마르크 팀장이 쏘아붙였다.

"그놈처럼 동료들한테 목숨 거는 놈은 정면으로 상대하면 안 돼. 아니, 오히려 그걸 바라는 놈이야. 동료가 위험해지느니 차라리 혼자 위험한 게 낫다고 생각하는 족속이거든."

"그래서 급하게 사퇴를 한 거군요. 동료들을 지키려고."

"그렇겠지."

다만─ 마르크 팀장이 그렇게 말을 이었다.

"알잖냐. 그만큼 올곧은 놈은 결국 그게 약점이라는 거. 계속 주변을 붙잡고 늘어지면 결국 스스로 목숨을 내놓을 놈이야."

"아하...."

직원은 과장되게 감탄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본부에선 뭐 소식 없냐?"

"슬슬 토벌권 통합 건을 추진한다고 합니다. 아마 회수팀의 케인 팀장님이랑 같이 움직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쪽도 나름 바쁘구먼."

"저희 팀에도 영향이 있을까요?"

"완전히 별개 프로젝트도 아니고, 그쪽 일 진행하다 보면 우리 팀이 필요할 때가 분명히 있을 거야. 일단은 하던 일이나 계속하고 있자고. 기다리다 보면 소식이 있겠지. 그나저나 양은 뭐 하고 있냐?"

"당분간 좀 숨어 있으라고 해뒀습니다. 죽은 듯 살고 있을 겁니다."

"슬슬 대기하고 있으라고 해. 언제 다시 움직여야 할지 모르니까. 아 그리고, 똑바로 전해. 이번에도 실패하면 한강에서 변사체로 발견될 거라고."

"...알겠습니다."

"하는 김에 뱅크 아이템 관리팀에도 연락해서 반능석도 좀 준비시켜놓고."

"...예?"

반능석이라는 말에 직원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 아이템은 S랭크 이상의 헌터들을 작업할 때나 쓰는 것이었다.

하지만 직원의 기억상, 당분간 S랭크 이상 작업은 없었다.

그런데 왜 그걸 갑자기....

"설마 김에게 쓰실 생각이십니까...."

"맞아."

"너무 과한 거 아닙니까. 제아무리 이레귤러라고 해도 반능석까지 쓸 정도는 아닐 텐데요."

"뭐...."

마크르 팀장은 등받이에 몸을 푹 기대며 말을 이었다.

"혹시 모르잖냐."

***

작은 원룸.

본부장이 되고 나선 집에서까지 일을 했던 까닭에 방은 꽤나 어수선한 상태였다.

나는 토벌 기획과 던전 정보를 정리해놓은 문서들을 대충 치우며 이아영 실장과 마주 앉았다.

'쯧,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네.'

무슨 지원팀 실장이라는 사람이 남 사업에 동참하겠다고 작정하고 협회 정보를 빼돌릴 생각을 하는가.

뭐, 다른 협회들 정보는 내 사업을 떠나 지부 건설 건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으니 나로선 거절할 이유야 없다만.

일단 그 얘기 전에.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내가 말했다.

"시간석 연구하시던 건 어쩌고 나오신 겁니까?"

"으음..."

딱 봐도 당황스러운 표정.

"그게, 아직 연구실 완공도 안 됐고 안 들어온 장비도 있어서...."

"진척도 없이 퇴사했다는 말이군요."

"...."

"에휴...."

이아영 실장이 멋쩍은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길 잠시.

"그런데 당신은 그걸 왜 그렇게 신경 쓰는 거예요? 본부장일 때는 몰라도 이젠 딱히 상관없는 물건이잖아요."

뭐, 확실히 다른 사람 눈에는 이상해 보일 수도 있겠다.

무기나 다른 아이템으로 가공할 수도 없는 아이템인데, 관련 분야가 아니고서야 시간 쓰고 돈 써서 굳이 연구하려는 이들은 많지 않을 테니.

애초에 나도 가설이 생기기 전까진 딱히 신경 안 쓰던 아이템이기도 했고.

'이걸 말해야 하나....'

잠시 고민했지만, 이제 이야기를 해도 되겠다고 판단했다.

"이건 그냥 가정인데 말입니다. 만약 어떤 나쁜 놈들이 그 시간석을 가공해서...."

"그거 불법인데요?"

"아니 그러니까 가정이라고 했잖습니까. 자꾸 말 끊으실 겁니까?"

"...알았어요. 계속 말해 봐요."

큼큼.

헛기침 후 다시 말을 이었다.

"시간석을 총알로 가공해서 그걸 사람한테 쏜다면.... 그 사람한테 루프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습니까?"

"...?"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듯한 표정.

그럼 그렇지.

괜한 말을 했다 싶어 곧바로 손사래를 쳤다.

"됐습니다. 그냥 한 번 해본 소리니까 신경 쓰지...."

"될걸요."

"...예?"

뜻밖의 대답이 들려왔다.

"저번에도 말했잖아요. 시간석의 루프는 던전에만 적용되는 게 아닌 것 같다고. 뭐랄까… 쉽게 설명하자면 하나의 스킬 같은 느낌이거든요."

"...."

"그러니까 뭐, 되지 않을까요? 어떤 형태로 루프가 발생할지는 모르겠지만."

이아영 실장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게 무슨 대수냐는 듯한 표정이었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지금 본인이 얼마나 어마어마한 발언을 한 건지 죽었다 깨어나도 모르겠지.

"근데 뭐, 어디까지나 이론상으로 가능하다는 얘기고. 현실적으로 따져보면 힘들죠."

"그렇습니까?"

"당연하죠. 일단 시간석 같은 뱅크 아이템을 가공하려면 장난 없는 자본에 기술력이 들어가야 하니까요. 만약 가공했다고 해도 그걸 발사하려면 웬만한 총으론 어림도 없죠. 타이탄 정도면 모를까."

그 말이 더욱 확신을 심어주었다.

국제 협회라면 자본과 기술력은 말할 것도 없고.

내 머리에 박아 넣은 건 분명히 타이탄이었고.

그리고 그와 동시에 시작된 회귀.

모든 게 맞아떨어진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문제는 하나.

"그런데... 그렇게까지 고생해서 굳이 시간석을 사람한테 쏠 필요가 있을까요?"

그때, 같은 의문이 든 건지 이아영 실장이 불쑥 질문을 던졌다.

"...뭐, 말했잖습니까. 그냥 가정이라고."

이아영이 정확히 짚은 것이다.

당시 그놈들은 작정하고 날 죽이려고 했다.

하지만 단순히 죽이려는 거라면 다른 방법도 얼마든지 있었을 것이다.

하다못해 반능석을 이용해서 내 이능력을 모두 해제했다면 일반 총알로도 충분히 죽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만약 내 머리에 박은 총알이 정말로 시간석을 가공한 것이었다고 한다면....

굳이 그럴 이유가 있었을까?

"뭐… 대충 알겠습니다. 이제 본론으로 넘어가죠."

일 얘기로 주제를 돌렸다.

지금 생각해봤자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니었으니.

나는 이아영 실장이 가져온 서류를 집어 들며 말했다.

"그나저나 국내 지부 정보는 꼭 필요한 겁니까? 솔직히 전 국내보단 해외 협회 쪽으로 더 중점을 두고 싶은데."

"해외 협회를 상대로 사업을 할 거면 일단 국내 협회에서 인지도를 쌓는 게 우선이에요."

기다렸다는 듯 그녀는 설명을 시작했다.

"서류 보시면 알겠지만. 수원 지부, 대전 지부, 부산 지부 같은 규모가 좀 있는 지부들은 기본적으로 10개 이상의 청소팀이 있어요."

"생각보다 많군요. 이렇게까진 없었던 것 같은데...."

"그 왜, 당신 본부장 될 때 떠들썩했잖아요. 청소팀이 실적에 크게 영향을 미치는 걸 두 눈으로 봤으니 여유가 좀 있는 지부는 이때다 싶어 너도나도 신설한 거죠."

한창 지부들의 '청소팀 키우기' 열풍이 있었을 때인가 보군.

"그런데 뭐, 어차피 우리가 노리는 곳은 그런 지부가 아니잖아요? 그냥 넘어가시고… 그다음 장이 청소팀 5개 이하의 지부들 목록이에요."

"흐음."

나는 서류를 집중해서 훑어보기 시작했다.

"보시다시피 대부분이 재정 상태도 썩 좋지 않아요. 헌터 수도 많이 부족해서 전반적으로 민간 길드에 많이 의지하는 상태고요."

"스읍, 이 정도면 본부 차원에서 발령을 내줘야 하는 수준 아닙니까?"

"헌터들이 안 가려고 하죠. 일단 너무 지방이기도 하고...."

그녀가 괜스레 목소리를 낮추며 말을 이었다.

"또 듣자 하니 워낙 저들끼리 고여 있다 보니까, 이상한 텃세부터 부조리까지 뭐 많다던데요."

"안 가려고 할 만하군요."

"그렇죠?"

그녀가 어깨를 으쓱였다.

"어쨌든 청소팀 부족으로 하루 토벌량도 한계가 있고, 그렇다고 청소팀을 늘릴 만한 예산은 없는 곳들이에요. 딱 우리가 파고들기 좋은 조건이죠."

"그렇긴 하군요. 좋습니다. 일단 그쪽 위주로 노려보는 거로 하고.... 지금은 사업자등록부터 합시다. 사무실도 적당한 곳으로 좀 구해야 하고요."

"바빠지겠네요. 직원들도 뽑고, 지부 돌면서 계약도 따야 하고.... 아, 부산물 처리 시설이랑도 연줄을 좀 만들어놔야겠죠?"

"예, 뭐...…."

"박근태 과장님이 이쪽으로 아는 사람이 있다니까 한번 연락을 해볼게요. 아, 또 필요한 서류는 제가 알아서...."

"...."

쉴 새 없이 말을 쏟아내는 그녀를 잠자코 보고 있자니, 시선을 느낀 듯 내 눈치를 봤다.

"...뭘 그렇게 봐요? 뭐 맘에 안 드는 거라도 있어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고개를 저었다.

말은 안 했지만 묘한 든든함이 느껴진 까닭이었다.

이렇게 열정적인 녀석이 전생의 그 기계 같은 녀석과 동일 인물이라니....

어째 믿기지 않았다.

이런 녀석인 줄 알았으면 그때도 부하가 아니라 친구로 둘 걸 그랬군. 훨씬 도움이 됐을 텐데, 그런 생각이 문득 스치길 잠시.

"...저기요, 저기요! 듣고 있어요?"

"예, 예? 무슨 말 했습니까?"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회사 이름, 생각해둔 거 있냐고요."

"아. 뭐… 있긴 한데."

"뭔데요?"

퍽 부끄러운 기분이 들어 망설이길 잠시, 나는 이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Korea Agency of Reset-a-dungeon Management Association."

"...?"

아리송하다는 반응.

"한국 협회 던전 청소 경영 기구…? 직관적이긴 한데… 너무 긴데요."

"뭐, 약자 따면 되잖습니까."

"약자가...."

"카르마(KARMA)."

내가 즉답했다.

"카르마 코퍼레이션입니다."

091

091

호기롭게 본격적인 사업에 뛰어든 지 일주일째.

우린 허름한 사무실을 하나 구했고, 곧바로 사업자등록까지 마쳤다.

이제 남은 건 청소부 구인과 지방 지부를 돌며 계약을 따내는 것이었다.

뭐, 그리 어려울 건 없겠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눈앞의 현실을 마주하기 전까진.

"...하아."

벽이 쩍쩍 갈라진 작고 낡은 사무실.

나는 온라인 지원 현황을 확인하며 계속해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숨 좀 그만 쉬세요. 그런다고 없는 이력서가 생기는 것도 아니고."

"...안 나오게 생겼습니까."

"처음부터 쉬운 게 어디 있겠어요. 그랬으면 세상 사람 다 성공했지."

맞은편에 앉아 있던 이아영 실장이 볼멘소리를 냈다.

그럼에도 나는 연신 새로 고침 키를 연타했다.

물론 텅 빈 화면은 몇 번을 고쳐도 그대로였지만.

모집 공고를 올린 지 일주일째, 여전히 단 한 건의 이력서도 오지 않았다.

냉정하게 보자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이름도 모르는 신생 회사에, 그것도 던전 청소부로 지원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너무 만만하게 봤나....

"그러게, 진작 구상찬 기자한테 부탁 좀 해보라고 했잖아요. '김준우 전 작전 본부장, 청소 파견 지원 업체 개업.' 이거 한 줄이면 이미 100명은 면접 보러 왔겠다!"

저도 모르게 또다시 한숨을 내뱉자, 이아영 실장도 더 이상 못 참겠는지 책상을 '탁' 치며 목소리를 높였다.

"...말했잖습니까. 그건 안 된다고."

"아니, 왜 굳이 숨기려는 거예요? 안 좋은 일로 퇴사한 것도 아니고. 솔직히 당신 네임벨류면 이 바닥에서 못 할 게 거의 없을 텐데?"

이아영 실장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나에게도 나름의 이유는 있었다.

국제 협회의 눈을 피하려고 만든 회사인데 내 이름을 걸고 홍보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아니면 뭐, 그런 거예요? 과거의 명성에 편승하지 않겠다?"

"...그런 거 아닙니다."

"물론 당신답긴 하지만... 그래도 사업을 하려면 조금은 현실과 타협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에휴… 알았어요. 그래, 내가 먼저 도와주겠다고 쫓아왔는데 어쩌겠어. 우리 대표님 말 들어야지."

"...."

몇 대 쥐어박고 그냥 쫓아낼까?

"정 안 되겠으면 협회장님한테라도 부탁해봐요. 인원 몇 명만 좀 데려가겠다고."

"이미 연락해봤습니다."

"…거절했어요?"

"역정을 냅디다."

불과 엊그제 있었던 일이다.

통 지원자가 없었기에 나는 협회장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곧바로 돌아온 대답은....

-야 인마, 아주 간이고 쓸개고 다 빼가라! 너 그동안 예산 다 끌어 쓰고 나가서 우리도 위태위태한데 뭘 또 달라고 하고 싶냐?!

그쯤 되니 나 또한 할 말이 없었다.

이번 분기는 고사하고 다음 분기, 다다음 분기 예산까지 죄다 끌어다 썼으니.

'본부도 고생깨나 하겠네.'

그러게 왜 안 하겠다는 걸 시켜서 말이야.

"아니면 뭐 개인적으로라도 연락해보던가요. 소연 씨나 상혁 씨도 좋고. 유빈 씨랑 민주 씨도 당신 전화 한 통이면 바로 달려오지 않겠어요?"

이아영 실장이 넌지시 말했다.

하지만 단칼에 고개를 저었다.

"그것도 좀 그렇습니다. 다들 본부에서 각 팀 베테랑들인데, 모조리 빼가면 본부 입장에서도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안 그래도 지금 좀 어려운 상황 같던데."

"...아무리 봐도 당신, 사업가 체질은 아니네요."

이아영이 푹 꺼진 목소리로 말했다.

뭐, 사실 개인적으로 데려오지 못하는 이유 또한 내 이름을 내걸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유였다.

한때 나와 같이 일했던 녀석들이 한꺼번에 같은 곳으로 이직을 해버리면 눈에 띌 게 뻔하지 않은가.

자칫하다간 또다시 국제 협회의 타깃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아....'

퍽 답답했다.

일단 회사 구색이라도 갖춰져야 해외 협회 인수를 진행하든 말든 할 텐데.

이래선 시작조차 할 수 없지 않은가.

막막한 상황에 뭘 어떻게 해야 하나 싶던 그때.

"여기요."

이아영 실장이 아까부터 컴퓨터로 만들고 있던 무언가를 인쇄해서 나에게 건넸다.

"이게 뭡니까?"

"뭐긴 뭐예요."

그녀가 쏘아붙였다.

"같이 전단지라도 돌리러 나가요."

"...."

퇴사하지 말 걸 그랬나.

***

서울 본부, 본부장실.

일주일간 공석이었던 그곳엔 어느 중년의 남성이 앉아 있었다.

최호성 전 순천 지부장.

어제부로 그가 서울 본부의 새로운 작전 본부장으로 취임한 것이다.

순천 지부에서 지부장을 위임하길 몇 년.

서울 본부로 가기 위해 갖다 바친 한우와 장어만 해도 수십 킬로였다.

그럼에도 결과는 영 좋지 못했다.

그 당시 본부장이었던 서민철의 입지가 너무나 컸다.

그가 나가리 되고 나선 드디어 자신에게도 기회가 왔구나 싶었지만 웬걸, 이번엔 청소부 출신의 웬 듣도 보도 못한 놈이 그 자리를 꿰찼다.

며칠간은 배가 아파 죽을 지경이었지만... 결과적으로 하늘은 그의 편이었다.

2개월 만에 김준우가 본부장직을 내려놓으며 다시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이때다 싶어 최호성은 다시금 줄을 찾아다니기 시작했고, 바로 며칠 전 한 통의 전화를 받게 되었다.

다름 아닌 박인범 협회장의 전화를 직통으로.

-믿을 만한 친구가 자네를 추천하더군. 그래, 잘해볼 수 있겠나?

최호성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지만, 티를 낼 순 없었다.

그는 못 이기는 척 협회장의 말을 받아들였고, 결국 학수고대하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하지만 성공의 기쁨도 잠시.

"아니, 시발 이게 무슨...."

그는 눈앞의 현실을 마주하곤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남은 예산이 왜 이 모양이야…?"

몇 번이고 서류를 확인했지만, 결과는 같았다.

이번 분기 예산은 이미 바닥이었던 것이다.

그뿐이랴.

다음 분기, 다다음 분기, 심지어 내년 예산까지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덕분에 저번 달과 이번 달은 연이어 엄청난 적자를 기록 중이었다.

'시발. 대체 뭔 개짓거리를 해놓은 거야....'

최호성은 신음했다.

그 모습을 잠자코 보고 있던 그의 수행비서, 유영수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 김준우 전 본부장이 각 팀에 이것저것 지원한다고 예산을 좀 많이 뿌렸다고 합니다."

"아니 뭘 어떻게 얼마나 지원했길래 예산이 내년도까지 오링이냐? 이거 이사회에서는 알고 있어?"

"아마도...."

"알고 있는데도 내버려뒀다고?"

유영수는 입을 닫았다.

아닌 게 아니라, 그는 최호성이 순천 지부에서 데려온 인사로 그 또한 서울 본부에 올라온 건 고작 하루째였으니.

본부 내부 사정에 관해 물어봤자 그가 대답할 수 있을 리 없었다.

"하아...."

최호성은 머리를 싸맸다.

물론 민간 길드 협력업체 체결과 베트남 지부가 건설되면서 함께 지어진 허브 때문에 앞으로의 수익은 보장되어 있었지만....

그것도 몇 개월은 있어야 성과가 나는 것들이었다.

결국, 그 몇 개월간은 이 말도 안 되는 적자를 끌어안고 가야 한다는 말이었다.

그것도 어제 막 취임한 본인이 책임지고.

'빌어먹을 놈, 이렇게 개판을 만들어 놓고 나가다니....'

그러니까 왜 청소부 출신한테 이런 중책을 맡겨 가지고.

최호성 본부장은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건 그냥 독이 든 성배가 아닌가.

이걸 전부 수습해야 하는 자리인 줄 알았다면 분명히 고사했을 것이다.

최호성이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헤집었다.

그리고 그때, 문득 한 가지 의심이 머릿속을 스쳤다.

"야, 이거 혹시... 김준우 그놈이 해 처먹은 거 아닐까?"

넌지시 입을 열자 유영수 수행비서가 학을 뗐다.

"에이, 설마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데."

"아니, 그러지 않고서야 말이 안 되잖아. 내가 볼 땐 이거 백퍼야. 총무부 가서 예산 내역서 좀 보내 달라고 해봐."

"아, 네. 잠시만요."

유영수 수행비서가 행정본부에 전화를 걸어 무어라 대화를 나누길 잠시.

이내 최호성의 사내 메신저로 한 문서가 도착했다.

최호성은 곧바로 문서를 확인했다.

김준우에 대한 평판은 그 또한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이 시대의 진정한 리더.

직원의 권리를 위해 살신성인의 자세로 나서는 인격자.

최연소, 최단기간, 최고 실적의 본부장.

대개 과한 포장이 되어 있는 놈들일수록 내용물이 구릴 확률이 높다.

아무리 겉으로 칭송받고 있다고 해도 실상을 까보면....

[스테인리스 빗자루 300개(주문 제작) - 5,203,000₩]

[다용도 걸레 5,000장(이탈리아제) - 40,380,340₩]

[특수소재 C급 방호복 200벌(미국제) - 240,523,000₩]

[...]

"…이게 뭐야?"

최호성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그 밑으로 30페이지가 넘는 내역이 죄다 청소팀 장비, 성과급, 인센티브, 보너스로 채워져 있었다.

미친놈이다.

청소에 미친 놈이야.

아무리 본인이 청소팀 출신이라고 해도 그렇지, 어떻게 한 분기 예산을 청소팀에 모조리 때려 박을 수 있는가.

물론 그것들이 김준우가 본부장 취임 직후 스킬 해금을 위해 벌인 일이라는 걸, 최호성이 알 리가 없었다.

최호성은 계속해서 스크롤을 내렸다.

청소팀에 한 분기 예산을 때려 박은 이후엔 지원팀 연구시설 증축에 500억을 때려 박았고, 그다음엔 수중 던전 때 사용할 특수 슈트 '골리앗' 확보에 200억을 쏟아부었다.

그리고 화룡점정으로 베트남 지부 개발에 나머지 예산을 깡그리 털어 넣었다.

두 눈으로 보고도 납득할 수가 없는 내역이었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래, 예산을 빼돌린 건 아니다.

그저 앞뒤 없이 미친놈처럼 돈을 처뿌린 것뿐.

사실 그놈이 어떤 생각으로 이딴 짓을 했는지 본인이 알 바는 아니지만, 지금 상황으론 당장 이번 달 작전팀 월급부터 간당간당하다.

'시발. 작전팀 월급이 밀린다...?'

생각만 해도 머리가 새하얘졌다.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협회 1순위 재산은 헌터들이다. 그들에겐 최고의 복지와 최고의 대우를 해줘야 한다.

최고의 복지, 대우라 함은 결국 연봉이다.

작전 본부장인 본인이 그걸 책임지지 못한다면... 위아래로 모든 반발을 뒤집어써야 할 것이다.

차라리 그렇게 끝나면 다행이지.

자칫하다간 본부장 최단기간 위임은 아마 본인이 갱신하게 될 수도 있었다.

'...그럴 순 없지.'

최호성이 중얼거렸다.

아무렴, 어떻게 올라온 자리인데.

내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한다.

그것이 최호성의 모토였고, 또 여기까지 올라오게 만든 원동력이었다.

그는 이내 마음을 굳게 먹고, 곧바로 김준우가 남긴 모든 서류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어떻게 해서든 예산을 확보할 방법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모든 사항을 천천히 검토하던 끝에.

'…아무리 봐도 이거밖엔 없네.'

한 가지가 눈에 들어왔다.

던전 청소팀.

김준우가 작전 본부장이 된 이후로 인원도, 연봉도 두 배가 넘게 뛰며 가장 많은 혜택을 본 그곳.

고작해야 청소부인데 이렇게 많을 필요도 없잖아.

물론 반발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겠지.

도마뱀이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꼬리를 잘라내는 이유는, 그것이 최후의 수단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건 서울 본부의 최후의 수단이니까.

"영수야."

"네, 네?"

이윽고 그가 입을 열자 유영수 수행비서가 불안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우리, 욕 좀 먹어야겠다."

092

092

여의도 행정본부, 대회의실.

이사회가 소집되어 박인범 협회장을 비롯한 모든 이사가 참석한 자리.

"그래서 청소팀 인원을 감축하겠다고?"

잠자코 최호성 본부장이 상정한 안건을 듣고 있던 박인범 협회장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네."

"스읍, 자네 본부장 된 지 얼마나 됐나?"

"오늘로 4일째입니다."

"그래, 취임한 지 4일 만에 청소팀 구조조정 얘기를 꺼내든다라...."

협회장이 넌지시 물었다.

"자네, 그 자리가 어떤 사람의 자리였는지는 아나?"

"…알고 있습니다."

"그래."

협회장이 턱을 쓰다듬다가 이내 눈을 위로 치켜떴다.

"그런데 그걸 알고 있는 사람이 그딴 말을 입에 올려?"

"...."

서슬 퍼런 눈빛이 최호성에게 날아들었다.

노인이라곤 도저히 믿기 힘든 카리스마에 최호성은 순간적으로 온몸이 얼어붙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걸 봐주십쇼."

그는 준비했던 자료를 꺼내 들었다.

질타를 받을 거라는 건 이미 예상한 일이다.

당연하지 않은가.

거의 신격화 되고 있는 사람이 직접 키운 것을 이제 와서 무너뜨리겠다는데.

무엇보다 현재 협회의 모든 실권을 쥐고 있는 두 남자, 박인범 협회장과 이두식 이사는 김준우와 개인적인 친분도 있다고 들었다.

그럼에도 그들 앞에서 구조조정이라는 카드를 대놓고 꺼내든 건,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뜻이었다.

"보시다시피 현재 서울 본부에 남은 예산이 얼마 없습니다. 다음 분기, 다다음 분기까지 모조리 끌어다 쓴 바람에 당장 이번 달 작전팀 월급 지급에 차질이 생길 전망입니다."

"그래도 현재 토벌 추이랑 베트남 지부 개발 건으로 들어올 수익이 꽤 만만치 않을 텐데?"

자료를 확인하던 협회장이 반박했다.

이미 예상한 반론이었기에, 최호성 본부장은 망설임 없이 입을 열었다.

"토벌 수익으로는 저번에 발생했던 대규모 인터셉트 피해액을 이제 겨우 메웠고, 베트남 지부 건은 수익 발생까지 얼마나 걸릴지 모릅니다. 이대론 최소 반년간은 엄청난 적자를 기록할 것입니다."

"...."

협회장이 대답을 아꼈다.

최호성 본부장은 이때다 싶어 계속 말을 이었다.

"물론 이 힘든 시기, 다 같이 힘내서 극복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요. 저 또한 그게 싫어서 안건을 상정한 게 아닙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단 거 다들 아시잖습니까."

"그러면 헌터들의 월급을 잠시 조정하는 건 어떤가. 그들도 다 이해해줄 걸세. 잠깐 힘든 거 때문에 그 많은 사람을 잘라내는 건 좀...."

"이번 달은 헌터들 월급을 조정해서 어떻게든 넘긴다고 해도... 그럼 다음 달은 어떡하시겠습니까? 그다음 달은요? 헌터들 월급 삭감으로도 커버가 안 되면. 그다음은 이사님들 월급 또한 줄여야 할 겁니다."

"크흠...."

"아니 뭐 그렇게까지...."

여기저기서 헛기침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 반응에 최호성 본부장은 승리를 직감했다.

아무리 직원을 아낀다고 해도, 결국 다 말뿐이다.

본인들 밥그릇 앞에선 동료도 부하도 없다.

최호성은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긴 했지만.

"이건 아닙니다! 우리가 토벌 실적을 이렇게까지 끌어올릴 수 있었던 건 청소팀의 역할이 컸다는 거, 다들 인정하지 않습니까!"

아니나 다를까, 이두식 이사였다.

하지만 이번엔 굳이 최호성 본부장이 반론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도… 솔직히 청소팀 쪽으로 빠지는 예산이 너무 크긴 하지 않나."

"맞네. 아무리 그래도 협회의 1순위는 작전팀인데, 청소팀 때문에 헌터들이 피해를 보는 건 나로서도 좀...."

"현실적으로 생각하자고. 현실적으로."

다른 이사들이 나서서 그를 말리기 시작했다.

이미 여론은 기울었다.

위기감을 느낀 이두식 이사는 협회장을 바라봤다. 뭐라도 한마디 해달라는 의미였다.

협회장은 한참을 고민 끝에 다시 입을 열었다.

"…뭐, 틀린 말은 아니군."

예상 밖의 대답을 내뱉었다.

"혀, 협회장님!!"

"조용히 해. 감정적으로만 나올 일이 아니야."

"...."

단호한 목소리.

이두식 이사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웠다.

"최호성 본부장."

협회장의 날카로운 눈빛이 다시 한번 최호성에게 향했다.

"이 안건, 만약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기면 자네가 모두 책임져야 할 걸세. 그럴 수 있겠나?"

"물론입니다."

"그래...."

자신만만한 대답에 협회장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그러길 잠시.

"진행해."

협회장의 허가가 떨어졌다.

***

청소팀 사무실.

박근태 과장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구, 구조조정이요?!"

그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맞은편에 앉아 있던 남자는 퍽 담담한 어투였다.

"인원 감축과 함께 연봉 또한 대대적으로 조정이 들어갈 겁니다."

"이, 이건 좀 너무하지 않습니까! 취임하신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부터 칼을 꺼내 드시는 겁니까!"

"박근태 과장."

최호성 본부장은 더 듣기도 싫다는 듯 귀를 후비며 말을 이었다.

"이미 위에서 결정 난 사항입니다. 따지실 거면 위에 가서 따지세요. 저한테 말씀하셔봤자 아무 소용없으니까."

"...."

박 과장은 입을 다물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이전에도 몇 번이나 본 것이었다.

같은 동료라고 눈곱만큼도 생각하지 않는다는 눈빛.

김준우가 협회에 들어오고 나서는 앞으로 볼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던 그 눈빛이었다.

"우선 희망자부터 받아서 명단 작성해주십시오. 말씀드렸다시피 절반입니다. 명단이 모자라면 그 이후엔 제 독단으로 처리하겠습니다."

"...."

최호성 본부장은 그 말을 남기곤 사무실을 나섰다.

이내 박근태 과장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위에서 결정이 났다니....'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협회장님과 이두식 이사님은 이 안건에 찬성하실 분들이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당장 닥친 현실은 받아들여야 했다.

본부장이 두고 간 명부를 바라보던 박 과장은 이내 고개를 뒤로 푹 젖혔다.

퇴직 희망자가 있을 리 없지 않은가.

이건 그냥 회유하든 권고하든 알아서 명단을 채우라는 것밖에 안 됐다.

'이걸 나보고 채우라니....'

박 과장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이걸 어찌해야 하나 고민하던 중.

준우한테 연락해볼까, 그런 생각이 문득 스친 그때.

사무실 전화가 울렸다.

"네, 청소과장 박근태...."

그의 인사를 끊고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혀, 협회장님?! 아, 안녕하십니까!"

다름 아닌 박인범 협회장이었다.

박 과장은 저도 모르게 두 손으로 전화기를 붙들었다.

"네, 네."

"안 그래도 방금 왔다 갔습니다."

"네. 희망자 명단부터 작성하라고… 막막합니다, 정말."

"네네."

그 순간.

"...네?"

뜻밖의 말을 전달받았다.

***

[한국 협회 서울 본부, 던전 청소팀 대규모 구조조정]

서울 외곽. 낡은 사무실.

이아영 실장과 함께 늦은 점심을 먹고 있던 그때, 텔레비전에서 웬 뉴스가 흘러나왔다.

[박인범 협회장 '재정 악화로 인한 어쩔 수 없는 선택' 일축. 더불어 '이직, 재취업 적극 지원하겠다.' 발언]

[난데없이 길거리로 내몰린 던전 청소부. 그런데 전원 자진 사퇴 희망자? '다른 회사 취직 약속받았다' 화제.]

[자진해서 협회 나온 청소부들, 다들 어디로? 청소팀 파견 업체 '카르마 코퍼레이션' 화두.]

"어…?"

그와 동시에 이아영의 젓가락질이 갑자기 멈췄다.

이내 동그래진 눈으로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뭐, 뭐예요…? 저거 실화예요?"

"글쎄요...."

어물쩍 대답했지만, 이아영 실장은 여전히 믿기 힘들다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사무실의 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네, 카르마 코퍼레이션... 네, 맞습니다. 아, 지금 이력서 들고 오신다고요? 네네, 시간 괜찮습니다. 네 그럼 이따 뵙겠습니다."

짤막한 통화가 끝나자마자 내가 물었다.

"지원잡니까?"

"네.... 서울 본부 청소팀 소속이었는데 여길 추천 받았다고...."

아직도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목소리.

하지만 생각할 겨를도 없다는 듯, 또다시 전화가 울렸다.

"네, 지금 모집 중 맞습니다. 아, 네네."

"연봉은 협상에 따라 결정되지만, 일단 협회와 같은 수준으로 맞춰드릴 생각입니다."

"아, 그건 일단 대표님이랑 상의를 해보고...."

"아, 네네. 물론입니다. 그럼 메일 불러드릴 테니 그쪽으로...."

전화기에 불이라도 난 듯 계속해서 문의가 이어졌다.

그 모습을 잠자코 바라보던 그때, 마침 내 핸드폰도 울리기 시작했다.

조용히 사무실을 나가 비상계단에서 전화를 받았다.

「그래, 뉴스 봤냐?」

대뜸 협회장이 그 말부터 내뱉었다.

"네. 방금 봤습니다."

「원하는 대로 반 뚝 떼어줬다. 뭐, 본인들이 알아서 이력서 넣을 거지만 혹시 모르니까 명부도 나중에 보내주마.」

"감사합니다. 수고 많으셨어요."

인사를 전하자 반대편에서 깊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야 이놈아, 아무리 구인이 안 된다고 해도 그렇지 이렇게까지 해야 했었냐?」

"협회 재정 모르는 것도 아니고, 내버려두면 언젠가는 터질 일이었다는 거 아시잖습니까."

「그거 다 자네 때문인 거 알고 있지?」

"그래서 도와드린 거 아닙니까. 뭐, 협회는 예산 아끼고 저는 직원 들이고. 직원들 일자리는 그대로. 결과적으로 다 좋은 거 아닙니까."

「미친놈 진짜....」

협회장이 학을 뗐다.

"무엇보다 이렇게 데려온 인원은 절대 국제 협회 눈에 띄지 않을 테니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내가 분명히 말하는데, 다신 이런 일에 어울리게 하지 마라. 마음고생 얼마나 했는지 알아? 이두식이 그놈도 아주 그냥 벌레 보듯이 하더라니까.」

"하하하, 그 점은 죄송하게 됐습니다. 나중에 잘 설명해주십쇼."

어찌 됐든 원하던 대로 잘 진행된 것에 만족했다.

그래, 사실 이번 구조조정은 처음부터 계획된 것이다.

뭐, 엄밀히 따지자면 계획이라기보단 도박에 가까웠지만.

최호성에게 건 도박.

「근데 최호성이가 구조조정 안건을 올릴 거라는 건 어떻게 알았냐?」

"본인에게 위기가 닥치면 가차 없이 꼬리부터 자르는 인간이니까요."

「그니까 그걸 어떻게 알았냐고.」

"뭐… 따지자면 제 옛 스승 같은 사람이라서.」

나는 대충 얼버무렸다.

최호성.

회귀 전에 서민철 뒤를 이어 작전 본부장에 취임한 남자.

당시 막 작전 1팀장을 단 나에게 꽤나 많은 것을 알려준 인물이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을 꼽자면....

'도마뱀 꼬리가 어쩌고 하는 거였는데.'

하도 오래돼서 이젠 기억도 잘 안 나네.

아무튼, 그가 작전 본부장으로서 보여준 실적은 참으로 대단한 것들이었다.

틈만 나면 팀을 통째로 뒤집어엎는 건 부지기수였고, 청소팀의 임금은 매년 깎여나가다가 종국엔 반 토막이 났다.

그 사람이라면 내가 조지고 나간 예산을 보자마자 인원 감축을 떠올릴 것이라 확신했다.

그것도 본인 기준에 가장 쓸모없다고 생각하는 청소팀을.

그래서 협회장에게 차기 작전 본부장으로 그를 추천했다.

협회 재정도 안정화할 겸, 구조조정 당한 인원들을 모조리 내 쪽으로 끌어오기 위해서.

더불어 기사까지 났으니 회사 홍보도 톡톡히 한 셈이다.

물론 이 건은 나와 협회장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만.

「그래도 다행인 게, 자네 회사로 보내주겠다고 하니까 다들 자진해서 나가겠다고 하더라. 오히려 퇴사 희망자가 너무 많아서 제비뽑기로 몇 명은 쳐냈어.」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쯧, 다들 만족하니 망정이지 조금이라도 불만이 있었으면 자네나 나나 그 사람들한테 몹쓸 짓 한 거야. 알아?」

"알고 있습니다."

「아무튼, 이렇게 된 이상 잘해봐라. 이렇게 일 벌여 데려가 놓고 우리 직원들 고생시키면 가만 안 둬.」

"예, 명심하겠습니다."

그렇게 대답하며 작게 웃었다.

「그나저나 최호성은 어떻게 할 생각이냐? 이번에 보니까 그 인간, 본인 자리 지키려면 무슨 짓이든 할 놈이야. 계속 거기 앉혀놓기엔 좀 불안한데.」

"괜찮을 겁니다. 적당한 자리에 앉혀두고 장기 말로 쓰기 딱 좋은 인간이잖습니까."

「가끔 보면 네가 제일 나쁜 놈 같군.」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눈치가 빠르네.

이게 관록이라는 건가?

"그나저나… 국제 협회 쪽에선 별다른 반응 없습니까?"

「자네가 나간 이후론 잠잠해.」

"다행이군요."

「그래서 말인데, 해외 인수 건은 언제쯤 진행할 생각이냐?」

"뭐… 일단 입지는 다져놔야 뭐라도 하지 않겠습니까. 믿음직스러운 직원들도 생겼겠다, 당분간은 지부 상대로 기반부터 좀 잡아볼 생각입니다."

「그래. 또 필요한 거 있으면 연락하지 말고.」

"...."

그 말을 뒤로하고 전화를 내려놨다.

그리고 그 순간.

"준우 씨!"

"이야, 오랜만이다?"

"회사 건물이 이게 뭐예요. 되게 당당하게 나가길래 기대 좀 했더니."

문소연과 한상혁 그리고 한유빈이 사무실을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