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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사쥐 구, 조던 역 인근.

그곳에 여전히 발이 묶여 있는 중국 협회 소속의 파견팀.

"빌어먹을...."

장시엔 팀장이 작게 중얼거렸다.

다른 던전에서 탈출하기 시작한 몬스터가 진영을 옥죄어 오고 있었지만, 그들은 여전히 제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플레임 리자드 무리의 리더.

그 보이지 않는 몬스터가 언제 어디서 또다시 공격해올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티, 팀장님...."

"저, 저희 어떻게 해야 하는 겁니까?"

"추가 병력은 대체 언제쯤...."

팀원들은 완전히 겁에 질린 채, 바들바들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움직이면 죽는다.

하지만 움직이지 않으면 저 수십 마리의 몬스터 먹이가 된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아무리 정예들이라고 해도 패닉에 빠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크르르르르―!

키에에엑―!

어찌할 줄 몰라 망설이던 사이, 기어이 수십 마리의 몬스터가 그들을 둘러쌌다.

흉포한 플레임 리자드가 이빨을 드러내자 장시엔 팀장을 비롯한 팀원들은 눈을 꾹 감았다.

'시발...."

죽음을 직감하자, 장 팀장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설마하니 처음부터 끝까지 이쪽에서 계획한 작전에서 목숨을 내놓게 될 줄이야.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눈을 감고 생각하기도 잠시.

이내 그들의 머리 위로 굶주린 그림자가 드리웠다.

[고유 스킬 : 천수관음- 각성]

[육관음중사(六觀音中四)]

[제4격 - 십일면관음(十一面觀音)]

슥―.

스스스스슥―!

순간, 날카로운 무언가가 주변을 훑었다.

그 기척에 장 팀장이 천천히 눈을 떴다.

"...뭐야?"

수십 마리의 몬스터가 두 동강이 난 채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 중심에 서 있는 한 여성.

"다, 당신은 아까 그…?"

"이번 작전의 지휘권은 현 시간부로 카르마 코퍼레이션이 인계받았습니다."

조금 전 공항으로 구조를 나가던 그 여성.

카르마 코퍼레이션의 작전 본부장, 김민주였다.

"그, 그게 무슨 소리야! 당신, 내가 끼어들지 말라고 분명히…!"

"말싸움할 시간 없습니다. 같이 싸울 거 아니면 빠지세요."

"...!"

그녀의 눈빛이 장 팀장을 관통했다.

아까 만났을 때와 같은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확 달라진 기세였다.

압도적인 분위기에 움찔하기도 잠시, 순간 잊고 있던 게 떠오른 장 팀장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보, 보스…! 근처에 레드 등급 보스가 있어!"

"...?"

"플레임 리자드의 리더. 은신 스킬을 쓰는 녀석이야. 움직임을 감지하고 공격하는데, 보이지가 않아서 대응할 수가 없어! 일단 움직이지 말고…!"

무척이나 위험한 상황이었지만, 김민주는 담담한 표정으로 무전기를 들었다.

"젠사쥐 조던 역 인근에서 레드 등급 몬스터가 출현했습니다. 리자드 형에 인비저블 타입이라고 하니 마법사 클래스 지원 부탁드립니다."

무전을 끝내고 다시금 검을 쥐고 공격 태세를 갖추는 김민주.

그 모습에 장 팀장은 격양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뭐, 뭐 하는 거야! 내 말 못 들었어?! 움직이면 바로 모가지가…!"

슈우우우―!

그 순간, 그들의 머리 위로 마법 탄환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뭐, 뭐야…!"

"바, 방어 스킬! 방어 스킬!"

파견팀원들은 황급히 방어 스킬을 시전했지만, 김민주는 여전히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검을 쥐고 있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쾅! 콰과과광―!!

탄환들이 그대로 주변 땅을 직격했다.

자욱한 흙먼지가 주위를 뒤덮었다.

그 안에서 김민주는 허공을 맴돌고 있는 먼지를 집중해서 살폈다.

이윽고 보이지 않는 형체가 잠시 모습을 드러냈다.

[고유 스킬 : 천수관음 - 각성]

[육관음중육(六觀音中六)]

[제6격 - 여의륜관음]

스윽―.

한 번의 일격이 보이지 않던 몬스터의 목을 그었다.

키에에에엑―!!

고통에 몸부림치기 시작하는 리자드.

물론 한 번의 공격으로 쓰러트릴 수는 없었지만....

"피, 피가…!"

"보인다!"

몬스터의 목에서 세차게 흐르는 피가 몸을 적시며 형체가 완전히 드러났다.

그걸 확인한 김민주가 다시금 무전을 들었다.

"가시화 완료했습니다. 해당 구역 안전 확인됐으니, 다들 진행해주세요. 저는 계속해서 다른 구역 수색하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멀리서 다른 인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대체 뭐야 저 인간....'

장 팀장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작전 본부장이 선두에서 현장 수색을 맡는다고? 그것도 혼자서?

자기도 모르게 그녀의 등을 바라보고 있던 그때.

"뭐해요!"

그녀의 시선이 장 팀장에게 향했다.

"아직 안 죽었으면 일어나서 좀 도와요."

"...여기서 너희들을 도우면 본부가 가만히 안 놔둘 거야."

"참 나, 이 상황까지 와서 아직도 지부 탈환 걱정이나 하고 있어요?"

김민주가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안 도와줄 거면 시민들을 홍콩 밖으로 대피라도 시키세요. 당신들도 작전팀이라면, 최소한 그 정도는 할 수 있잖아요."

"...."

"그것도 싫으면 어디 가서 작전팀이라고 떠들지 마. 쪽팔리니까."

시퍼렇게 날이 선 눈빛이 장 팀장을 향했다.

「기, 김민주 팀장님!」

그때, 홍콩 외곽 수색을 맡은 조에게서 다급한 무전이 왔다.

"무슨 일이에요?"

「지금 공안들이 홍콩을 봉쇄하고 있습니다!」

"…뭐라고요?"

「육로랑 항로까지 전부 막아버렸어요! 홍콩 밖으로 나갈 수가 없습니다! 이 새끼들… 홍콩을 포기했어요!」

"빌어먹을...."

김민주가 입술을 깨물었다.

본인들이 갖지 못할 바에는 누구에게도 주지 않으려고 묻어버리겠다는 건가.

"그, 그럴 리가...."

그때, 그 충격적인 소식에 반응한 건 다름 아닌, 장 팀장이었다.

"봉쇄라니?! 분명 본부가 추가 병력을 보내주기로 했어! 게다가 아직 우리가 여기 있는데 당국이 우리를 포기할 리가…!"

그는 말끝을 흐렸다.

말로는 그럴 리 없다고 했지만, 머릿속에선 그러고도 남을 인간들이라는 걸 예상한 까닭이었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장 팀장이 절망에 빠진 채 소리치는 사이, 김민주의 무전이 다시금 울렸다.

"네, 선생님."

「너 지금 어디야?」

"조던 역 인근 수색 완료하고 다음 구역으로 이동하려고...."

「아니. 이 시간부로 저지 작전은 미룬다. 너도 한유빈이랑 합류해서 던전 토벌부터 먼저 진행해.」

"네, 네…?"

「일이 좀 생겼어. 지금 생성된 던전, 전부 처리하지 않으면 계속해서 출현할 거야.」

"하, 하지만 저희가 전부 토벌에 투입되면 시민들이 위험해져요! 게다가 지금 홍콩을 봉쇄해버려서 밖으로 나갈 수도 없고요! 대피소까지 들이닥치는 건 시간문제에요. 저지를 맡아줄 최소한의 인원은 있어야...."

그 순간, 김민주의 시선이 다시금 장시엔 팀장에게 향했다.

장 팀장 또한 그 시선의 의미를 단번에 알아차렸다.

주먹을 꽉 움켜쥐며 한참을 망설이던 끝에 그가 답했다.

"저지는… 우리가 맡는다."

이를 악물고 그는 일어섰다.

"괜찮겠어요? 우리를 도우면 본부가 가만 안 놔둘 거라면서요."

"시발! 다 X까라 그래. 뒤통수는 그쪽이 먼저 쳤어!"

그가 소리쳤다.

"도와줄 테니까, 어떻게든 성공시켜!"

"이젠 좀 작전팀 같네요."

김민주가 무전기를 들고 말했다.

"1팀, 전원 던전 집합. 현 시간부로 2팀과 합류해서 던전 토벌 진행합니다. 모두 처리할 때까지 쉬는 시간 없으니까, 단단히 각오들 하세요."

「네!」

「물론입니다!」

이내 조금 전 보았던 압도적인 기세가 다시금 그녀의 전신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

홍콩 지부, 중앙 통제실.

"쯧...."

현재 상황에 나도 모르게 혀를 찼다.

클로이마저 도움을 요청할 정도면, 생각보다 상황이 더 심각하다는 건 틀림없다.

게다가 홍콩 봉쇄령까지 떨어져서 시민들을 홍콩 밖으로 대피시킬 수도 없고.

'설마하니 홍콩을 포기할 줄이야.'

어차피 틀어진 계획, 차라리 다 묻어버리겠다는 건가....

그나마 중국 협회 본부 병력이 저지를 맡아줘서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정말 큰일이 날 수도 있었다.

생각을 정리하며 모니터를 다시금 확인했다.

현재 홍콩 전역에 출현한 던전은 무려 56개.

등급은 모두 옐로우 등급 이상.

토벌에 필요한 최소 인원은 B급 헌터 기준 20명.

현재 총 병력을 최소 토벌 인원에 맞춰 편성한다면 총 5개 팀이 만들어진다.

즉 한 팀당 11개의 던전을 토벌해야 한다는 뜻이다.

'되려나....'

이 정도 작전이면, 석 달을 철저히 준비해도 모자라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준비는커녕 장비도, 지원도 압도적으로 부족한 상황이다.

이아영 본부장이 임시 지원팀을 꾸리긴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런 상황에서 11개의 던전을 연속으로 토벌하는 건 자살행위나 마찬가지다.

'안 되겠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나는 고개를 돌려 입을 열었다.

"황 지부장님."

"예, 예?"

"잠시 지휘 좀 부탁드립니다. 저도 현장에 가봐야겠습니다."

"예?! 자, 잠시만요…!"

황 지부장이 다급하게 불렀지만,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서둘러 통제실을 빠져나왔다.

건물 밖으로 나오자마자 눈에 들어온 풍경은 그야말로 아비규환.

건물이고 도로고 완전히 무너져 내린 그곳에는 사람이 아닌 다른 생명체들만이 득실거리고 있었다.

카아아아아악―!

그때, 마침 나를 발견한 몬스터들이 곧바로 달려들었다.

[습득 스킬 : 아토믹 스피어]

촤악―!

곧바로 꺼내든 창으로 담담하게 녀석의 배를 꿰뚫었다.

수십 마리의 보스급 몬스터들 앞에서 나는 자세를 고쳐 잡았다.

몬스터들을 마주한 순간, 내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이거 어느 세월에 다 청소하냐?'

그것뿐이었다.

***

"봉쇄라니...."

김준우 대표가 통제실을 나선 직후.

라이 팀장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계속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그, 그럴 리 없어. 당국이 우리를 버릴 리가...."

"뭐, 그럼 본부가 목숨 걸고 당신들을 지켜줄 줄 알았습니까?"

황 지부장이 기가 차다는 듯 말했다.

"지부 하나 먹으려고 도시 전체를 파괴한 놈들입니다. 그깟 작전팀 몇 명 버린다고 눈 하나 꿈쩍하겠습니까?"

"...아니야, 본부가 그럴 리 없어!"

"이보세요, 라이 팀장님. 저 남자를 보고 뭐 느낀 거 없습니까?"

황 지부장은 김준우가 달려 나간 방향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저 남자… 지휘권을 잡자마자 가장 먼저 한 게 무리하지 말라는 명령이었습니다. 목숨을 걸어서라도 성공시키라는 게 아니라, 위험하면 언제든 후퇴하라고 했다고요."

"...."

"심지어 상황이 안 좋아지니까 곧바로 직접 현장으로 달려갔습니다. 부하들한테는 무리하지 말라면서, 본인은 부하들을 위해서 목숨을 걸었다고요."

황 지부장은 고개를 저었다.

"저게 조직을 이끄는 책임자입니다. 당신이 지금까지 봐온 본부는 책임자였습니까, 아니면 뒤에서 명령이나 내리는 권력자였습니까!"

"...."

라이 팀장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본인도 대답을 이미 알고 있었다.

"아셨으면 이제 그만 포기하시고, 도와주세요."

"...."

하지만 라이 팀장은 여전히 고개를 떨어트린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 모습에 황 지부장은 혀를 찼다.

됐다, 사람이 그리 쉽게 변하겠는가.

더는 신경을 쓰지 않으려는 그때.

"...청샤완 구 북서쪽으로 내륙과 이어지는 지하도로가 있다."

그가 넌지시 입을 열었다.

"20년 전, 독립운동 진압 당시에 당국에서 공안을 투입하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비밀통로야. 지금은 입구를 막아놨지만, 그것만 치우면 홍콩 밖으로 빠져나갈 수 있어."

"...예?"

"우리 애들한테 그곳으로 시민들 대피시키라고 전해."

라이 지부장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 일은 내가 책임질 테니까."

그의 눈빛은 이후의 일을 모두 각오한 듯한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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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헌터 협회, 카르마 코퍼레이션과의 인수 전 재개.]

[인수전에서 전면전으로. 두 기구 사이에 낀 홍콩, '아수라장']

[봉쇄령 내린 홍콩, 중국 협회 측 '어쩔 수 없는 선택']

[리제이징 협회장, '두 기구에 엄중한 책임 물을 것' 엄포]

[국제 협회 탈퇴? 제3세력 만들어지나. 국제 사회 이목 집중]

중국 협회 본부.

리제이징 협회장이 언론을 통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각.

「지금 뭐 하는 거죠?」

아니나 다를까, 계속 침묵하던 PB 코퍼레이션에서 기어이 먼저 연락이 왔다.

리 협회장은 피식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했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전부 사실인데."

「...이제 와서 수습하기 힘들 것 같으니까 전부 우리한테 떠넘기시겠다?」

"그러게 처음부터 욕심부리지 말고 부탁한 대로만 하지 그랬습니까."

「하, 하하하!」

에마 대표가 크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너, 미쳤구나?」

"...."

「이러다가 너 진짜 쥐도 새도 모르게 죽어.」

결코, 농담으로는 들리지 않는 말에 리 협회장은 자기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하지만 이내 담담한 척 입을 열었다.

"탈환에 실패했다는 걸 당국이 알면 어차피 죽을 목숨입니다. 이러나저러나 똑같이 죽는다면 최소한 살 궁리라도 해봐야겠죠."

「그래 뭐, 그거 며칠 더 살아보겠다고 우리를 적으로 돌린 건 그렇다 치고....」

에마 대표는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이게 정말 우리한테만 덮어씌운다고 끝날 일일까? 애초에 지부 탈환을 위해 홍콩 공습을 부탁한 것도 당신이었고, 공항 폭격도 당신이 허가한 일이잖아. 그것들 안 새어나가게 할 자신 있어?」

"어차피 국제 협회에선 우리를 걸고넘어지지 못하지 않습니까. 차라리 그런 사실이 없다고 잡아떼는 거면 몰라도, 우리가 사주한 거라고 해버리면 공습이 사실이라는 걸 인정하는 셈이니까."

에마 대표의 말이 잠시 끊겼다.

그도 그럴 게, 리 협회장이 정확하게 정곡을 찔러온 거다.

「...홍콩 지부 쪽 사람이랑, 당신 쪽 부하들은? 게네들도 입을 다물고 있을지 모르겠네.」

"어차피 봉쇄한 이상, 그놈들이 홍콩에서 살아서 나올 방법은 없습니다. 그곳에서 있었던 일은, 그곳에 영원히 묻힐 겁니다."

그 순간, 핸드폰 너머에서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글쎄. 그게 생각대로 되려나 모르겠네.」

"무슨…?"

「아직 소식 못 들은 건 아니지? 김준우 그놈이 지휘권을 잡은 거.」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뭐… 뭐가 달라지겠습니까. 그가 아무리 강하다고 한들, 몸이 100개가 아니고서야 홍콩을 되살리는 건 불가능할 텐데."

「하하, 하하하! 당신, 그 남자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네.」

"...?"

에마 대표는 진심으로 가소롭다는 듯 말했다.

「김준우가 진짜 무서운 이유는 그가 힘이 강해서도, 스킬이 뛰어나서도 아니야.」

"그럼…?"

「사람. 그 남자한테는 사람들이 따라. 그게 김준우가 진짜 무서운 이유야.」

"그건 또 무슨 헛소립니까?"

「이해 못 하겠으면 그걸로 됐어. 조만간 당신도 알게 될 테니까.」

리 협회장은 당최 알 수 없는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튼, 당신 뜻은 잘 알았어. 이제부터 국제 협회는 중국 협회에 그 어떠한 간섭도 하지 않을게. 알아서 잘해봐.」

"바라던 바입니다."

리 협회장은 그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이걸로 꼬리는 잘랐다.

뭐, 탈환은 실패했어도... 어차피 아무도 손에 넣지 못하는 땅이 되었으니 최악의 상황은 면했다.

중국 협회는 이제 이번 일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이다.

이제 당국은 그저, 국제 협회와 카르마 코퍼레이션의 인수전에 휘말려 피해를 본 피해자일 뿐이다.

어차피 진실을 알고 있는 놈들은 영원히 홍콩에 묻힐 테니까.

그래, 그렇게 끝내면 된다.

국제 협회는 물론 카르마 코퍼레이션까지 더불어 이미지가 추락하겠지.

그럼 국제 협회를 탈퇴하더라도, 당국이 제3의 토벌 세력으로 독립할 명분이 생긴다.

리 협회장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때.

"혀, 협회장님!!"

직원 한 명이 다급하게 사무실로 들이닥쳤다.

"뭐야?"

"지, 지금 홍콩 시민들이… 모두 홍콩을 빠져나와 광저우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뭐, 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전면 봉쇄했잖아! 대체 어떻게 홍콩을 탈출한 거야?!"

"아무래도 20년 전 지하 통로를 이용한 것 같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거길 아는 놈은 본부에서도 극소수…!"

그 순간 머리에 스친 한 인물.

라이비우 통제팀장.

'이 개새끼가…!'

리 협회장이 이를 으득 씹는 가운데 직원이 계속 말을 이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조금 전 본부 통제팀 위성으로 확인해봤는데 현재 홍콩 내 던전이 빠르게 소멸하고 있답니다."

"그, 그게 무슨...."

말도 안 돼.

이건 말도 안 된다.

그 인원으로 수십 개의 고위험도 등급 던전을 토벌하고 있다고?

***

야우마데이, 오스틴 역 인근에 위치한 오렌지 등급 던전.

그곳에 발을 들여놓으려던 그때였다.

「선생님, 저희 팀 할당 던전 토벌 완료했어요.」

"뭐? 벌써?"

작전 명령 내린 지 얼마나 됐다고, 11개 던전을 다 토벌해?

진짜 미친 건가?

'한국에서 연속 작전에 참가했던 게 여기서 도움이 된 건가....'

대체 어느 시대 사람인 거야.

산속에서 수련하는 무도인도 아니고.

「그래서 다른 팀 토벌 지원 나가려고 하는데, 선생님 동선이 어떻게 되세요?」

"지금 오스틴 역에서 올림픽 역으로 올라가는 중이야. 2팀, 3팀은 괜찮은 것 같고 지원 나갈 거면 4팀, 5팀이랑 합류해."

「알았어요.」

"절대 무리하지 마라. 한 팀이라도 무너지면 진짜 큰일 나니까."

「....」

갑자기 대답이 끊긴다.

그러길 잠시, 옅은 웃음소리와 함께 그녀가 입을 열었다.

「선생님이나 무리하지 마세요.」

"...참 나."

얘 좀 봐라.

짬 좀 찼다고 이제 나한테 훈수를 다 두네.

그래도 뭐....

'든든하긴 하네.'

피식 미소를 짓곤, 다시금 던전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 씨....'

던전에 들어서자마자 탄식을 내뱉었다.

키에에에에엑―!

한눈에 다 들어오지도 않는 크기의 보스.

9개의 머리를 가진 괴물, 엘레멘탈 히드라.

'잘못 걸렸네....'

꽤나 심상치 않은 녀석이었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녀석이 몇 번 출현한 적이 있어 대략적인 정보는 알고 있다.

각각의 머리가 다른 속성의 공격을 내뿜는 몬스터.

각 머리에 맞춰 공격 방식과 대응이 달라지기 때문에 꽤나 까다로운 녀석인데....

'튈까…?'

머릿속에 그런 생각이 스치는 순간.

콰아아아아―!

지이이잉―!

도망갈 틈도 주지 않겠다는 듯, 두 개의 머리가 곧바로 화염과 냉기를 내뿜었다.

[습득 스킬 : 하이퍼 부스트]

파앙―!

'빌어먹을!'

벽을 타고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필 까다로운 던전에 걸려버렸다.

정석대로라면 최소 9명 이상의 서로 다른 클래스로 팀을 꾸려서 진행해야 하는 던전이다.

그리고 각 속성에 대응하며 머리를 하나씩 처리해나가는 게 가장 안전하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그런 사치스러운 작전을 기대할 순 없겠지.

무엇보다 하나씩 처리하기엔 시간도 너무 많이 걸린다.

현재 홍콩 내에서 새로운 던전이 생성되는 주기는 2시간.

이 시간보다 늦게 토벌하면 던전의 수는 계속해서 늘어난다.

물론 2시간 안에 토벌해도 결국 현상 유지.

한 던전 당 무조건 2시간 미만으로 토벌해야 그나마 수를 줄여나갈 수 있다.

1분 1초가 급한 상황에 한곳에서 오랜 시간을 낭비하면 안 된다.

'쯧....'

위험하긴 해도 어쩔 수 없지.

동시에 가는 수밖에.

[고유 스킬 : 마왕 - 각성]

이내 전신으로 검은 기류가 터져 나왔다.

[각성 스킬이 활성화되었습니다]

[현 시간부로 시전자는 기존의 클래스를 초월합니다.]

[각성 클래스 : 절대 군주]

묵직한 감각을 느끼며 깊게 호흡했다.

[시전자는 차원의 힘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정해진 형태의 스킬도, 패턴도 없는 클래스.

내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은 기류를 손으로 훑자 형태가 검으로 변했다.

[무기가 생성되었습니다.]

[마검 : 타르타토스]

그걸 쥐고 엘레멘탈 히드라를 마주하는 순간.

지이이잉―!

그들도 위협을 느낀 것인지, 9개의 머리에서 동시에 빛이 발광하기 시작했다.

***

"하악, 하악...."

"허억…!"

한유빈이 리더를 맡은 3팀.

그들은 9번째 던전의 보스 방을 앞에 두고 모두 녹초가 되어있었다.

그도 그럴 게, 이미 이전 토벌에서 모두가 한계였다.

무엇보다 한유빈 또한 이 정도 강도의 연속 토벌은 해본 적이 없었다.

'그때 민주 씨가 같이하자고 할 때 해둘걸....'

설마하니 정말 이런 날이 올 줄이야.

그렇게 중얼거렸지만,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다들 일어나. 계속 진행하자."

"팀장님, 팀원들의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다른 팀에 지원을 요청하는 게...."

"그럴 시간 없어! 우리가 1분 지체할 때마다 던전 하나가 더 늘어난다고!"

"하, 하지만...."

팀원 중 한 명이 말끝을 흐렸다.

한유빈은 그제야 다시금 주변을 살펴보았다.

"허억, 허억...."

"윽! 으윽…!"

그의 말대로 이미 팀원들은 한계였다.

억지로 진행한다고 해도 저 상태로는 토벌은커녕 전멸만 당할 것이다.

여기선 얌전히 후퇴해서 지원을 기다리는 게....

-정말 그런 날이 오면, 그땐 몸으로 때울게요.

그 순간.

며칠 전 김민주에게 했던 그 말이 머릿속을 스쳤다.

"일단 지원 요청해두겠습니다! 후퇴 명령을…!"

"너희들은 후퇴해. 나 혼자 갈 테니까."

"네, 네…?!"

"혼자 가시다뇨! 마, 말도 안 됩니다!"

"자살행위에요! 티, 팀장님!"

무슨 소리냐는 듯한 팀원의 반응.

한유빈은 대답 대신 피식 미소를 지었다.

그리곤 팀원들의 만류를 무시한 채 홀로 보스 방으로 들어섰다.

그래, 여태껏 잘해오지 않았던가.

이번에도 어떻게든 되겠지.

한유빈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스으으으―.

운이 좋지 않았다,

그녀의 눈앞에 8쌍의 하얀 날개가 아름답게 펼쳐졌다.

'시발....'

한유빈은 자신도 모르게 실소가 튀어나왔다.

레드 등급 던전의 보스.

모든 타입의 몬스터 중 가장 위험한 타입이자,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몬스터.

천사형 몬스터, 아즈라일.

'이게 여기서 뜨네....'

한유빈은 그 초월적인 존재 앞에서 그저 실소를 흘렸다.

혼자서 저걸 토벌할 확률?

당연히 불가능하다.

하지만 최소한 지원이 오기 전까지 힘을 빼놓을 수는 있지 않을까.

[고유 스킬 : 하이패닉 버서커 - 각성]

[현 시간부로 시전자의 모든 공격이 체내 혈액을 소모합니다.]

[자살행위]

이내 한유빈이 이를 빠득 씹으며, 공격 태세를 취하던 그때였다.

턱―!

누군가가 뒤에서 그녀를 잡아끌었다.

덕분에 한유빈은 그대로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곳엔.

"무리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지원 요청을 듣고 곧바로 달려온 김민주가 있었다.

"몸으로 때우겠다고 했는데...."

"그게 죽겠다는 말은 아니잖아요."

"그다지 다를 건 없잖아."

이내 한유빈이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그래서, 민주 씨는 저거 토벌할 수 있어요?"

"...아뇨."

"둘이서는?"

"그것도 힘들 거에요."

"추가로 부를 만한 사람은?"

"…모르겠어요."

"차라리 잘됐네."

한유빈은 다시 공격 자세를 취했다.

"우리 둘이 잡아서 인센티브나 두둑하게 받죠?"

둘이서 아즈라일을 토벌하자고?

가능할 리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김민주 또한 그걸 알고 있음에도.

"…그래요."

이내 검을 움켜쥐었다.

그렇게 둘이 죽음을 각오한 그 순간.

"꼴값들을 떠세요, 아주. 내가 무리하지 말라고 몇 번을 말했는데. 죽으면 인센티브고 뭐고 무슨 소용입니까!"

"...?"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다름 아닌.

"서, 선생님?!"

"여긴 어떻게 알고…?"

"어떻게 알긴, 지원 요청받고 왔죠."

김준우 대표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말투와 다르게, 그의 상태는 꽤나 만신창이였다.

보아하니 그가 맡았던 던전 또한 퍽 만만치 않았던 모양이다.

"좋은 소식이랑 나쁜 소식이 있는데, 뭐부터 들으실 겁니까?"

"...좋은 소식이요."

한유빈이 즉답하자, 김준우가 손가락으로 바닥을 가리켰다.

"현재 출현 던전, 여기 하나 남았습니다."

"네?!"

"정말요?"

김준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김민주가 침을 꿀꺽 삼키며 굳은 얼굴로 물었다.

"그, 그럼 나쁜 소식은...."

"지금 우리 상태로는 저거, 절대 못 잡아."

김준우의 단호한 대답.

두 사람의 얼굴에 그늘이 지던 그때.

"날 때려눕힌 놈 입에서 못한다는 소리가 다 나오다니."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내 세 명의 시선이 그곳으로 한꺼번에 옮겨갔고, 그곳에서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의외의 인물이었다.

"좀 도와줘?"

다름 아닌, 세계 랭킹 1위의 헌터.

노아 웨스턴우드와 그의 길드원들이었다.

"클로이가 보내준다는 지원병력이 그쪽이었습니까?"

"뭐, 사실 씹으려고 했는데, 너무 집요하게 부탁하더라고."

"그건 둘째치고… 여긴 어떻게 왔습니까? 봉쇄됐는데."

"막고 있는 놈들 쥐어패고 들어왔지."

"...."

김준우가 기가 차다는 표정을 짓자, 노아가 다시금 물었다.

"그래서, 도와줘 말어?"

"뭐… 시간 남으시면."

노아는 어깨를 으쓱이며 김준우 옆으로 나란히 섰다.

그 뒤로 김민주와 한유빈이 자세를 잡았다.

"그럼, 다들 실력 좀 볼까!"

노아가 입을 열자.

[고유 스킬 : 아포칼립스]

[고유 스킬 : 천수관음]

[고유 스킬 : 하이패닉 버서커]

모두의 눈빛이 시퍼렇게 번뜩였다.

그리고 그것은.

[고유 스킬 : 마왕]

김준우 또한 마찬가지였다.

201

201

천사형 몬스터.

레드 등급 던전에서만 출현하는 보스이자, 현재까지 전 세계적으로 단 30건만 보고된 희귀 몬스터.

아직까지 해당 타입에 대해선 자세한 정보도, 공략도 존재하지 않는다.

밝혀진 것이라곤 어마어마한 마력 저항력 때문에 애초에 마법 공격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뿐.

게다가 '신성력'이라 불리는 특수한 힘을 지니고 있어, 사각과 약점이 거의 없다시피 하다.

다시 말해 원거리 공격은 무용지물이고, 근접 물리 공격 또한 절대 함부로 파고들어선 안 된다.

다만 문제는....

"후우...."

[고유 스킬 : 천수관음 - 각성]

[육관음중사(六觀音中四)]

[제4격 - 십일면관음(十一面觀音)]

"크으윽…!"

[고유 스킬 : 하이패닉 버서커 - 각성]

[자살 행위]

"크하하하!!"

[고유 스킬 : 아포칼립스]

[생존 - 제1법칙]

[무관용]

파앙―!

"자, 잠깐…!"

선두에 선 놈들이 죄다 앞뒤 없이 파고드는 미친놈들이라는 거다.

내가 다급하게 말렸음에도 김민주와 한유빈 그리고 노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아즈라일을 향해 달려들었다.

스스스스―.

그와 동시에 아즈라일의 날개가 활짝 펼쳐지며 눈 부신 빛이 터져 나왔다.

"이럴 줄 알았어…!"

[고유스킬 : 마왕 - 독재자]

[시전자의 상념에 따라 일회용 스킬을 제작합니다.]

[스킬 제작 중.]

[스킬 제작이 완료되었습니다.]

[블랙 커튼]

사아아악―!

내 몸에서 흘러나온 검은 기류가 곧바로 세 명을 감쌌다.

쾅―!!!!

하지만 아니나 다를까, 아즈라일이 내뿜는 신성력을 모두 흡수할 수는 없었다.

"윽…!"

"크악…!!"

결국, 세 명 모두 커다란 충격에 뒤로 나가떨어졌다.

그들은 그렇게 한참 동안 바닥을 구른 후에야 힘겹게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그러게 기다리라고 했잖아요. 미쳤다고 천사형 몬스터를 상대로 무턱대고 달려듭니까?"

"하, 하지만...."

"우린 모두 근접 포지션이잖아요. 이거 말고 방법이 있어요?"

"에휴...."

나는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식으로는 본인들 목이 먼저 떨어져 나간다는 걸 모르고 있다.

'하긴 뭐… 이야기만 들었지, 직접 경험해본 적은 없었을 테니.'

만나면 반드시 사상자가 나오는 보스 몬스터.

그 어떤 던전보다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하며, 때문에 헌터들 사이에서 가장 기피하는 타입의 몬스터다.

'나도 회귀 전엔 천사형 몬스터는 딱 한 번 만나봤는데....'

악명 높았던 부산 토벌 작전.

당시 서울 본부 다음으로 뛰어난 전력을 보유했던 부산 지부였지만, 천사형 몬스터 하나에 2개 작전팀이 전멸하는 일이 있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느낀 부산 지부장은 곧장 서울 본부로 지원을 요청했고, 나를 포함한 수십 명의 정예 헌터들이 곧바로 파견됐지만....

그중 살아남은 이는 단 9명.

그 사건 이후로 헌터들은 물론, 협회 또한 천사형 몬스터에 트라우마를 갖게 되었다.

개중 몇 명은 다시금 천사형 몬스터가 출현하면 은퇴하겠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우린 지금, 그 악명 높은 몬스터와 마주하고 있다.

당연히 막무가내로 돌격한다고 어찌해볼 수 있는 놈이 아니다.

아니, 애초에 천사형 몬스터는 토벌 대상이 아니다.

"저건 일반적인 몬스터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어디까지나 차원 너머의 초월적인 존재니까."

"네, 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

"날개."

한유빈의 물음에 내가 즉답했다.

"날개를 노려야 합니다. 8쌍의 날개를 모두 잃으면 알아서 차원 너머로 돌아갑니다. 다만 한 가지 주의할 점은...."

아즈라일을 향해 시선을 옮기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날개가 하나씩 떨어질 때마다 점점 흉포해질 겁니다. 대략적인 수치로는 한 쌍을 잃을 때마다 2배씩 강력해진다고 보면 됩니다."

"...."

"...."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세 명의 시선 또한 아즈라일로 향했다.

아직까진 그저 고고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지만....

날개를 잃은 녀석이 어떻게 바뀔지 상상하면, 나조차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다.

"어려울 겁니다. 다들 할 수 있겠습니까?"

"당연하죠."

"설마 우리가 이제 와서 뺄 거 같아요?"

"근데 왜 아까부터 네가 리더인 척하고 있는 거지?"

"...."

됐다, 시발.

이 녀석들이 생각하고 대답해주길 바란 내가 잘못이다.

"…알겠습니다. 그럼, 김민주랑 내가 왼쪽 날개를 맡겠습니다. 유빈 씨랑 노아 씨는 오른쪽 날개를 맡아주십시오."

"잠깐, 아까는 무턱대고 돌격하지 말라면서? 그럼 날개는 어떻게 공격하라는 건데."

"그 부분은 길드원분들이 도와주셔야겠습니다."

나는 그렇게 말하며 노아가 데려온 그의 길드원들을 바라봤다.

"어차피 원거리 공격은 안 통합니다. 그저 1초라도 아즈라일의 움직임을 늦춘다고 생각해주십시오."

"아, 알겠습니다."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길드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시작해보죠."

그렇게 다시금 공격태세를 갖춘 그 순간.

파앗―!

약속이라도 한 듯, 네 명이 동시에 아즈라일에게 달려들었다.

"고, 공격!!"

"계속 쏟아부어!!"

"우린 저 네 명이 파고들 수 있게만 한다!"

[고유 스킬 : 세틀라이트 스피어]

[고유 스킬 : 블리자드라이즈]

[고유 스킬 : 소환 - 헬 하운드]

쾅, 콰과광―!!

그에 맞춰 길드원들이 스킬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즈라일은 귀찮은 파리떼를 치우듯 그저 손을 휘저었고, 그 손짓 한 번에 모든 스킬들이 소멸했다.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딱 1초.

우리가 달려드는 순간, 아즈라일은 다시금 신성력을 방출하려 했지만, 그 한 번의 손짓 덕에 딱 1초의 타이밍이 생겨났다.

그리고 김민주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후읍!"

[고유 스킬 : 천수관음 - 각성]

[육관음중일(六觀音中一)]

[제1격 - 성관음(聖觀音)]

슥―!

엄청난 속도로 아즈라일의 어깨에 검을 찔러 넣었다.

그 공격 덕에 순간적으로 무방비해지며, 아즈라일의 날개가 활짝 펼쳐졌다.

"선생님!"

[고유스킬 : 마왕 - 독재자]

[시전자의 상념에 따라 스킬을 제작할 수 있습니다.]

[제작 스킬 : 포식자]

콰직―!

내 오른손이 거대한 용의 머리로 변하며, 아즈라일의 가장 첫 번째 날개를 으득 씹어 삼켰다.

카아아아아아―!

귀를 찢어발기는 듯한 아즈라일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이제부터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다.

***

김민주와 김준우의 협공에 날개 하나를 잃어버린 직후, 노아는 조금 전까지와는 확연히 다른 기류를 느꼈다.

가만히 서서 그저 방어만 하던 조금 전과는 다르게, 이젠 명백한 적대감을 뿜어대고 있었으니.

'이제 시작이라 이건가....'

노아는 아즈라일이 뿜어대는 신성력을 회피하며 옆 팀을 슬쩍 흘겼다.

쾅, 콰광―!

스슥, 사사사삭―!

김준우와 김민주 사이에는 단 한마디도 오가지 않았다.

언제, 어떻게, 누가 공격을 하고 방어를 할지 그 어떤 상의도 없이 전부 감으로 움직이고 있다.

'어이가 없네....'

한 치의 어긋남 없이 물 흐르듯 이어지는 호흡.

서로를 완전히 믿어야만 가능한 움직임.

본인을 기백만으로 눌러버렸던 김준우는 그렇다 쳐도, 저런 인간과 합을 맞추고 있는 저 여자는 대체 뭔가.

아무리 봐도 한국에 박혀 있을 녀석은 아닌데.

'하여간 괴물 같은 놈들만 모아놨군....'

그 모습을 보자, 노아 또한 몸이 뜨거워지는 기분이었다.

세계 랭킹 1위 체면이 있지, 저놈들한테 질 수 없다.

저놈들보다 먼저 뜯어내 주마.

[고유 스킬 : 아포칼립스]

[생존 - 제1법칙]

[무관용]

파앗―!

그렇게 주먹을 꽉 움켜쥐고 날개를 향해 달려드는 순간이었다.

[고유 스킬 : 하이패닉 버서커]

뻐억―!

"으윽!"

"끅…!!"

옆에서 동시에 달려들던 한유빈과 충돌했다.

"뭐 하는 거야, 이 머저리가!"

실로 어마어마한 충격이 온몸에 전해졌고, 노아는 머리를 붙잡으며 소리쳤다.

물론 한유빈 또한 가만히 있진 않았다.

"이 미친놈이 누구한테 큰소리야! 내가 먼저 공격했는데!"

"뭔 개소리야! 당연히 내가 공격해야지! 랭킹 10위권도 안 되면 닥치고 보조나 해!"

"뭔 개소리야! 토벌을 랭크로 하냐?! 가디언 클래스면 앞에서 얌전히 방어나...!"

목숨이 오가는 그곳에서 잠시 본분을 잊고 실랑이를 벌이던 그때였다.

사아아아아―!

아즈라일의 흉포한 눈빛이 그들을 관통했다.

"이런 시발…!"

"피, 피해…!"

콰과과광―!!!

어마어마한 위력의 광선이 그들에게 직격했다.

가까스로 피할 수 있었지만, 만약 스치기라도 했다면 팔 하나 정도는 포기해야 했을 것이다.

'빌어먹을, 조합이 안 좋아....'

노아가 이를 으득 씹었다.

본인의 전투 방식은, 가디언 클래스 특유의 강력한 방어력을 기반으로 끈질기게 공격을 이어가는 거다.

하지만 천사형 몬스터를 상대로는 공격을 이어가기는커녕, 계속 붙어 있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상성이 좋지 않다.

여기선 끈질긴 공격보다, 강력한 한 방이 필요하다.

미련하게 힘에만 몰빵한 순수 공격 포지션의 한 방이.

"야… 아무래도 네가 공격하는 게 좋을 것 같다."

결국, 노아는 한유빈을 향해 말했다.

"참 나, 처음부터 그럴 것이지."

"…보면 볼수록 마음에 안 드네."

그렇게 중얼거리기도 잠시.

[고유 스킬 : 아포칼립스]

[생존 - 제5법칙]

[강행돌파]

파앗―!

노아는 다시 한번 정면으로 뛰어들었다.

지이이잉―.

동시에 아즈라일이 그를 향해 입을 크게 벌렸고, 그곳으로 밝은 빛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 빛이 노아를 향해 날아드는 순간.

[생존 - 제6법칙]

[우두머리]

콰과과광―!!

"크으윽…!!"

노아는 피하지 않고 그 빛 덩어리를 온몸으로 받아냈다.

그 모습을 본 한유빈은 속으로 생각했다.

'뭐야 저 미친놈은....'

물론 감탄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뭐 하고 있어! 움직여!!"

[고유 스킬 : 하이패닉 버서커 - 스테이터스 해제]

[모든 스테이터스가 근력으로 전환됩니다.]

[근력 : 18,955 (9,107↑)]

[체력 : 1 (2,289↓)]

[민첩 : 1 (5,799↓)]

[마력 : 1 (1,019↓)]

노아가 아즈라일의 공격을 막고 있는 그 틈을 타, 한유빈은 날개를 붙잡는 데 성공했다.

콰직―!

그리고 순백의 거대한 날개를 입으로 물어뜯었다.

카아아아아악―!

그와 동시에 아즈라일이 고통에 몸부림쳤다.

한유빈은 그 충격에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퉷!"

하지만 아무렇지 않게 핏덩이를 뱉으며 몸을 일으킨다. 소매로 입가에 묻은 피를 닦으며 미소를 지었다.

노아는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뭐야, 저 미친년은....'

어쨌든 이쪽도 한 방 먹였다.

"뭘 봐?"

"…됐다. 집중이나 해."

다시금 자세를 고쳐잡는 둘.

다행히 그것을 시작으로 점점 호흡이 맞아가기 시작했다.

콰직, 콱―!

뻐억―!

이내 보스 방에는 살갗이 뜯기는 소리와 네 명의 거친 숨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1초라도 집중이 흐트러진다면 그대로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

네 명의 헌터들은 그렇게 호흡을 맞춰갔다.

몇 시간의 사투 끝에 8쌍의 날개 중 단 한 쌍만이 남게 되었다.

사아아아아―.

아즈라일이 내뿜던 신성력이 점점 응축되더니, 이내 성스러운 빛을 머금은 갑옷과 거대한 검이 나타났다.

"눈 깜빡이지 마십쇼."

김준우가 말했다.

"깜빡이는 순간 죽을지도 모르니까."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아즈라일이 거대한 검을 가볍게 휘둘렀다.

스윽―!

콰과과과과광―!!!

"크으윽…!"

"크헉!!"

"으아아악!!"

단 한 번의 공격으로 던전에 있던 인원 중 반이 날아갔다.

완전히 전투태세에 들어선 아즈라일.

감히 쳐다보는 것조차 함부로 할 수 없는 그 압도적인 힘에, 노아의 머릿속에선 처음으로 그런 생각이 스쳤다.

이길 수 없다.

저건 무슨 일이 있어도 이길 수 없다.

"...안 되겠군요."

김준우 또한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남아있는 길드원들 데리고 뒤로 빠져 있으십시오."

"뭐, 뭐…?"

"선생님?! 대체 무슨…!"

"설마 혼자 상대하려는 건 아니죠?! 다 같이 공격하면 어떻게든…!"

"불가능합니다."

김준우는 천천히 호흡하며 몸을 일으켰다.

"애초에 준비도 없이 천사형 몬스터를 상대하는 것부터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 그런...."

"이제부턴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 다들 최대한 몸을 피하십시오."

진지함을 넘어 강경함이 느껴지는 눈빛.

지금껏 본 적 없는 눈빛이었다.

"그리고 만약 이후에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그때, 김준우가 낮은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맞서지 말고 도망치십시오."

"...."

"...."

모두가 침묵했다.

지금으로선 절대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고유 스킬 : 마왕 - 각성]

이내 검은 기류가 그를 휘감았다.

[장비가 생성되었습니다.]

[마검 : 타르타토스]

[마갑 : 악몽의 베네]

김준우의 모습이 인간의 형태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검은 무기와 갑옷 그리고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릿저릿한 기백.

그야말로 마왕, 그 자체의 형상이었다.

"일어나라."

깊고 낮은 음성.

[군단]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류가 땅에 닿는 순간.

끄그그극―.

까각, 까가각―.

기괴한 뼈 소리와 함께 수백 마리의 마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성검을 든 천사와 마검을 든 마왕.

두 초월적인 존재가 마주하는 순간.

스윽―.

이윽고 김준우가 검을 치켜들었다.

───!!

어둠과 빛이 충돌했다.

얼마큼 시간이 지났을까.

힘겹게 몸을 일으키며 눈을 뜬 노아는, 자신이 잠시 정신을 잃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으윽…!"

"무, 무슨 일이...?"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김민주와 한유빈 그리고 남아있는 길드원들 또한 머리를 부여잡으며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그리곤 서둘러 던전을 둘러보는 이들.

하지만 그곳엔 깃털 몇 개가 남아있을 뿐, 아즈라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등을 돌린 채 우두커니 서 있는 김준우만이 그곳을 지키고 있었다.

"나랑 싸웠을 때도 전력이 아니었나…?"

"역시...."

"참 나, 보면 볼수록 어이가 없다니까."

안도와 경외.

모두가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선생님, 수고했...."

김민주가 김준우에게 다가간 그 순간.

그들은 무언가 잘못됐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그그그그―.

김준우의 모습이 이전으로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다.

"서, 선생님…?"

"이, 이봐! 괜찮은 거야?!"

그 순간, 김준우의 검고 깊은 눈동자가 그들에게 향했다.

그제야 모두는 비로소 깨달았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맞서지 말고 도망가라는 말의 뜻을.

202

202

[국제 헌터 협회와 카르마 코퍼레이션의 홍콩 지부 인수전? 국제 협회 측, '그런 사실 없다' 공식 입장 발표]

[홍콩 시민들의 증언 속출, '중국 협회, 홍콩 지부 탈환 위해 공습' 의혹 제기]

[충분히 대피할 수 있었음에도 '홍콩 봉쇄', 그들은 무엇을 막으려 했던 것인가]

[중국 협회 통제팀 소속 라이비우 팀장, '처음부터 계획된 일' 충격 증언]

[계획 실패 드러나지 않게 하려고, 시민과 지부 모두 묻으려 했다. 리 협회장의 처사는?]

[당국, 모두 리 협회장의 단독 행동. 엄중히 처벌할 것]

[중국 협회는 홍콩 지부 탈환 위해 공습 감행, 카르마 코퍼레이션은 구조작업 위해 파견 감행. 상반된 두 조직]

[카르마 코퍼레이션, 홍콩 시민 구조에 토벌 지원까지. 홍콩 지부 감사 표명]

[지휘권 인계받은 카르마 코퍼레이션, 이대로 홍콩 지부 인수하나?]

중국 협회 본부.

협회장실.

"하하...."

리 협회장은 미친 듯이 쏟아져 나오는 기사들을 보며 실성한 듯 웃음을 흘렸다.

시민들이 홍콩을 탈출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언론을 통제하기 위해 애를 썼지만, 유감스럽게도 해외 언론이 움직이는 것까진 막을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이런 상황이 되어버렸다.

홍콩 시민들과 홍콩 지부 소속 직원들의 증언이 계속해서 이어졌고, 이번 사태에 대한 화살은 정확히 본부를 향했다.

"홍콩은...."

리 협회장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수행비서를 향해 물었다.

"지금 홍콩은 어떻게 됐나."

"현재 홍콩 내 모든 던전, 토벌 완료했답니다."

수행비서가 무거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탈출 몬스터는 홍콩 지부 작전팀이 모두 처리했다고 합니다. 현재는 작전 종료하고 현장 수습 중이라고 합니다."

"하, 무슨 말도 안 되는...."

리 협회장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계속해서 생성되는 수십 개의 고위험도 등급 던전.

도심을 점령한 수백 마리의 탈출 몬스터.

그 누가 지휘를 하더라도 절대 수습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홍콩을 봉쇄한 것이다.

작전 실패라는 명목으로 그 안에서 있었던 일을 영영 묻어버리기 위해.

그런데 그 남자가 지휘권을 인계받은 이후, 모든 것이 틀어졌다.

카르마 코퍼레이션 대표.

김준우.

제대로 된 지원팀도, 준비도 없이 현저히 부족한 인원으로 이 말도 안 되는 사태를 수습했다.

물론 그놈이 대단한 실력자라는 건 익히 들어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게 정녕 가능한 일인가?

아무리 베테랑이라고 해도 혼자서 이 사태를 해결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사람. 그 남자한테는 사람들이 따라. 그게 김준우가 진짜 무서운 이유야.

그 순간, 일전에 에마 대표가 했던 그 말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게 이런 뜻이었나....'

리 협회장은 이제야 그 말의 의미를 깨달았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리제이징."

때마침 공안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사무실로 들이닥쳤다.

"당신을 국가 안보 위협 혐의로 체포한다."

"...."

올 게 왔군.

모든 게 끝났음을 직감한 리 협회장은 이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 발로 가지."

그 말과 함께 공안들에게 둘러싸여 사무실을 나섰다.

***

홍콩 시내.

갑작스러운 재난이 훑고 지나간 그곳은, 그 무엇 하나 멀쩡한 것이 없었다.

완전히 폐허가 된 도심. 개미 새끼 한 마리 없을 것 같은 그곳이었지만.

"문 과장님, B구역 해체 끝났습니다! 운반은 어디로 할까요?"

"아, C구역 부산물이랑 같이 운반할 거니까 내버려둬요."

"알겠습니다!"

"한 팀장님! A구역 사체가 너무 많습니다! 조금만 도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조금만 기다려. 이것만 처리하고 갈게!"

본부에서 파견된 현장 수습팀의 분주한 대화가 계속해서 울려 퍼지고 있었다.

던전 청소팀과 부산물 처리팀 모두가 각자의 역할에 따라 도심 속 사체를 처리해나가던 그때였다.

"문소연! 너희 팀 약품 좀 남냐?"

청소 1팀장, 한상혁이 문소연을 향해 목청을 높였다.

"네? 안 돼요. 우리 것도 모자란단 말이에요!"

"아, 지원팀에 가서 받아와야 하나. 귀찮은데...."

"이왕 갈 거면 우리 것도 좀 받아다 줘요."

"...그럴 거면 그냥 같이 가지?"

"전 할 게 많아서~."

팀장이 청소과장에게 반말하고, 과장이 팀장에게 존대하는 진풍경에 팀원들은 꽤나 당황스러워했지만.

정작 당사자인 둘은 아무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이번에도 꽤나 고생들 했겠네."

한상혁이 사체로 가득한 주변을 훑으며 말했다.

"그러니까요. 이 정도면 저번에 리젠 던전급 아니에요?"

"그것보다 심한 것 같은데? 하여간. 다들 무사한 게 기적이라니까."

"...."

그 순간, 문소연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그리곤 퍽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준우 씨는... 괜찮겠죠?"

"뭐, 의사 말로는 몸에 큰 문제는 없대. 의식만 돌아오면 될 거라는데...."

한상혁 또한 답답한 마음에 머리를 헝클였다.

파견 직후, 그가 가장 먼저 들은 소식은 김준우가 의식불명이 됐다는 것이었다.

김민주가 말하길, 토벌 중에 너무 힘을 많이 써서 그렇다고는 하는데.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도통 이야기해주질 않았다.

그렇게 토벌이 끝나고 3일이 지난 지금까지도 김준우의 의식은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다.

김준우가 쓰러지다니, 한상혁은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여기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다른 사람도 아닌 그놈이 정신을 잃는단 말인가.

"하여간, 그 새끼도 그 새끼라니까...."

"준우 씨도 그렇고, 민주 씨랑 유빈 씨도 크게 다친 걸 보면 정말 위험한 상황이긴 했나 봐요."

"쯧, 그러게...."

무척이나 무거운 이야기에 잠시 둘 사이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렇게 몇 초쯤 흘렀을까.

"한 팀장님! 빨리요!"

한상혁을 부르는 직원의 목소리에 비로소 정적이 깨졌다.

"알았어. 간다, 가! 나 먼저 가볼게. 수고해."

"네. 상혁 씨도 수고하세요."

한상혁은 그렇게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 모두 말은 꺼내지 않았지만, 그가 어서 빨리 눈을 뜨길 진심으로 기도했다.

***

"...허억!"

무언가 끔찍한 심상에 화들짝 놀라 눈을 뜬 순간이었다.

정신을 차리기도 전, 온몸에 극심한 통증과 두통이 먼저 몰려왔다.

온몸은 땀범벅이었고, 계속해서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시발."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은 채 고개를 떨어트렸다.

악몽이라도 꾼 듯했다.

내 손으로 동료들을 죽이는, 굉장히 끔찍한 악몽을.

생각을 털어내기 위해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

"여긴...."

아직 얼떨떨한 눈으로 뒤늦게 주변을 살피니 처음 보는 병실이었다.

이내 천천히 정신이 돌아오기 시작하자, 지난 기억이 불현듯 머릿속을 스쳤다.

마지막 던전.

천사형 몬스터.

그리고 내가 각성 스킬을 써서....

"이런 미친…!"

곧바로 이불을 걷어차고 몸을 일으키려 했다.

"서, 선생님…?"

김민주가 때마침 병실로 들어섰다.

"선생님?! 괜찮아요? 정신이 좀 드세요?! 저 알아보시겠어요?!"

내게 달려와 다급하게 몸 상태를 묻는다.

하지만 그 말은 오히려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너, 너… 괜찮냐? 유빈 씨는? 노아는? 다 무사한 거 맞아?"

"…저흰 다 괜찮아요."

김민주가 애써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지만, 김준우는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진짜 괜찮은 거 맞아?! 내가 정신을 잃었다는 건 분명…!"

"폭주했던 거죠?"

"...."

나는 말문이 턱 막혔다.

스킬 폭주.

한계에 다다른 몸이 본인의 스킬을 컨트롤 할 수 없게 되는 현상.

물론 일반적으로는 아무리 무리를 한다고 해도 폭주 상태까지는 가지 않는다.

대개는 한계를 느낀 몸이 더 이상 스킬을 사용하지 못하게 본능적으로 차단해버리니까.

하지만 본능을 넘어설 만큼 강력한 이능력을 보유한 헌터들은 몸이 한계를 넘어서는 순간, 본인의 스킬에 잠식되어 버린다.

때문에 스킬 폭주는 S랭크 이상의 헌터에게만 간혹 보고되는 현상이다.

폭주 상태의 헌터는 옐로우 등급 보스 몬스터와 맞먹는 수준의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스킬 랭크가 높을수록, 몸이 한계에 가까울수록 그 위험도는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한다.

내 몸은 이전 던전에서 몇 번이고 각성 스킬을 사용한 탓에 이미 한계치였다.

하물며 내 스킬은 SSS랭크.

만약 내가 폭주 상태가 된다면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덤벼들어도 가망이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맞서지 말고 도망치라고 했다.

그런데 내가 지금 병원에 있다는 건....

"사실 안 괜찮을 뻔하긴 했어요."

그때, 김민주가 넌지시 입을 열었다.

"선생님, 되게 무서웠거든요. 우리가 다 덤벼도 못 막을 만큼."

"...."

"그래도, 우리가 어떻게 선생님을 두고 가겠어요. 어떻게든 말려보려고 애를 쓰긴 했는데...."

김민주의 시선이 자신의 오른팔로 향했다.

피범벅이 된 붕대가 칭칭 감겨 있었다.

오른팔뿐만이 아니었다. 이제 보니 얼굴과 목, 다리까지 크게 다친 듯 보였다.

"유빈 씨는 갈비뼈가 거의 다 나갔대요. 덕분에 지금은 침대에서 핸드폰이나 만지작거리고 있고요. 노아는 같은 병원에 있기 싫다고 먼저 어디론가 가버렸고요."

"…그래도 어떻게 막긴 막았나 보네."

"아뇨. 못 막았어요."

"뭐?"

"저희는 못 막았어요. 선생님이 스스로 막은 거지."

그녀가 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이성이 없는 와중에도 우리를 공격하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버티셨어요. 그렇게 무의식 상태에서 한참을 버티시다가 결국 쓰러지셨고요."

"...."

"그래도 이 정도로 끝나서 다행이죠?"

"...."

나는 대답을 아꼈다.

그렇게 한참이나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으니, 김민주 또한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을 지었다.

"저, 전 의사 선생님에게 말씀 좀 드리고 올게요. 무리하지 말고 누워 계세요!"

그리곤 결국 자리를 뜨려고 했다.

그렇게 그녀가 병실을 나가려던 그때.

"...미안하게 됐다."

내가 나지막이 그 말을 전했다.

그러자 김민주는 피식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정 미안하시면 한국 가서 소고기 쏘세요."

"...."

잘 생각해보니까 그렇게까진 안 미안한 것 같기도....

김민주가 자리를 뜨고 다시 조용해진 병실.

이런저런 감정이 뒤섞이던 가운데.

따르릉―.

내 핸드폰이 울렸다.

「김 대표님? 조현민입니다.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다름 아닌, 조현민 대통령에게서 온 전화였다.

"예, 뭐… 괜찮은 것 같습니다."

「의식을 잃으셨다고 들었는데, 무사하시다니 다행입니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어쩐 일로...."

피곤해 죽겠으니 본론만 말해주면 안 되나.

「다른 건 아니고. 리제이징 협회장이 입건됐다고 합니다. 정부 쪽에선 모두 리 협회장의 단독 범행으로 덮어씌우려는 것 같고요.」

"그렇습니까?"

「뭐, 사태가 사태인 이상 저희한테는 책임을 물을 수 없을 겁니다. 홍콩 지부를 인수했다고 하더라도 외교적인 보복은 꿈에도 못 꾸겠죠.」

"그렇게 되면 국제 협회에도 못 남아 있겠군요."

「정확합니다. 국제 협회가 기다렸다는 듯이 탈퇴를 시켜버렸습니다. 이미 이번 일로 완전히 국제 사회의 눈 밖에 났으니 당연한 일이겠죠. 그리고 무엇보다....」

이내 그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이제 유예기간이 끝났습니다.」

"아...."

작게 탄식했다.

독립 협회 및 민간 토벌 조직이 자발적으로 국제 협회에 가입할 수 있는 기간이 드디어 끝이 났다.

이제 모든 토벌권은 국제 협회의 소유가 되었고, 국제 협회 소속이 아닌 이들은 토벌이 불가능하다.

그건 다시 말해.

「중국 협회는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됐습니다.」

"그렇겠군요."

「이왕 이렇게 된 거....」

조현민 대통령이 슬쩍 운을 띄웠다.

「저희가 데려오는 게 어떻겠습니까.」

"뭐, 그것도 나쁘지 않겠죠. 다만...."

나는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끝에 대답했다.

"쉽게는 안 받아줄 겁니다."

왜냐? 상황이 바뀌었거든.

203

203

중국 협회 본부.

이번 일의 마무리를 위해 찾은 이곳은, 홍콩 지부와 다르게 건물 외관부터 사무실 내부까지 모든 게 으리으리했다.

'엔간히 빼먹었나 보네....'

그런 생각을 하며, 마주 앉아 계약서를 읽고 있는 남자를 기다렸다.

아직 회복이 덜 된 건지, 여기저기 쑤셨지만 어쩌겠는가.

대한민국 대통령까지 나선 일을 언제까지 미룰 수도 없는 노릇이니.

"그래서...."

이내 중년의 남자가 한참 동안 계약서를 살펴보던 끝에 입을 열었다.

그 남자의 이름은 왕시엔.

다름 아닌 중국의 국방장관이자, 이번에 중국 협회 임시 협회장을 맡은 자였다.

"인수 합병 조건으로 중국의 토벌권은 중국 정부가 아닌, 카르마 코퍼레이션이 가지겠다는 겁니까?"

"예. 지부 내부 사항에 중국 정부는 일절 간섭하지 않겠다는 것도 포함해서요."

"그렇군요...."

그가 턱을 쓰다듬었다.

당연히 마음에 들지 않는 조건일 것이다.

특히나 중국 국방장관에게는 더더욱.

중국 정부는 현재 중국 협회를 내세워 굉장히 많은 일을 벌이고 있다.

특별 자치구 통제 또한 그중 한 가지.

그런데 중국 협회가 한국 회사에 넘어가는 것도 모자라, 더 이상 본인들의 협회에 손을 댈 수 없게 되면 너무나 많은 걸 잃게 된다.

과장 조금 보태서, 중국의 반을 떼어주는 것과 다름이 없는 수준이다.

"죄송하지만. 이 조건은 받아들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그러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나는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제가 신경 쓸 일은 아니지만, 그럼 앞으로 토벌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

"아시다시피 국제 협회 가입 유예기간이 끝났습니다. 이제 국제 협회가 전 세계의 토벌권을 가지게 되었고, 그들 소속 기구에만 토벌 허가가 떨어질 겁니다."

물론 카르마 코퍼레이션을 제외하고 말이지.

"현재 중국 협회는 국제 협회에서 탈퇴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저희와도 손을 잡지 않으신다면 앞으로 토벌은 불가능하실 텐데요."

이건 협박이다.

지금이라도 우리 손을 잡지 않으면 손해 보는 쪽은 중국이라는 협박.

왕 국무장관도 그것을 알아차린 듯,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우린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이자, 아시아의 중심입니다. 두 세력에 끼지 않더라도 충분히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죠."

"제3의 세력을 만들겠다는 겁니까?"

"충분히 가능한...."

"불가능합니다."

그의 말을 자르며 즉답했다.

"뭐…?"

심기를 건드린 듯, 국무장관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제3세력을 만드는 건 불가능할 거라 말씀드렸습니다."

"무슨 근거로?"

"근거라고 할 것도 없습니다. 국제 여론이 그러니까요."

"...."

단호한 대답에 그가 입을 다물었다.

나는 그 틈을 타서 각국의 신문들을 꺼내 그의 앞에 내려놓았다.

"보시다시피 전 세계적으로, 중국이 특별 자치구를 흡수하기 위해 공습을 감행, 민간인을 위험에 빠트렸다는 여론이 지배적입니다. 어떻게든 덮어씌우고, 묻어버리려고 애를 쓰고 계시는 건 알고 있습니다만, 그것만으로 이번 사태를 무마하기엔 힘드실 겁니다. 심지어...."

이내 왕 장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나지막하게 말을 이었다.

"이번이 처음도 아니지 않습니까."

"...."

그는 대답 대신 가만히 신문을 응시했다.

"이미 중국은 전 세계 공공의 적이 됐습니다. 뭐, 주제넘은 말씀이지만, 그간의 이미지도 한몫했겠죠. 이런 상황에서 중국이 과연 독자적인 토벌 세력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까요."

"...하!"

왕 장관이 헛웃음을 뱉었다.

"언제부터 우리가 국제 사회에 인정받으려고 했다고. 그깟 인정 필요 없어. 우리 일은, 우리가 알아서 해!"

"그게 마음처럼 되겠습니까?"

"당연히…!"

"시스템이라는 게, 그렇게 호락호락한 게 아닙니다."

솔직히 나도 국제 협회가 토벌권을 쥐고 흔드는 것이 탐탁지 않다.

아니, 탐탁지 않은 수준이 아니라 쳐부숴 버리고 싶다.

애초에 그걸 위해 이 고생을 하는 것이고.

그건 비단 나뿐만 아니라 전 세계 모든 국가가 마찬가지겠지.

그럼에도 국제 협회가 하란 대로 고분고분 따르는 이유가 뭐겠는가.

아직은 그들이 시스템을 쥐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잘못되었다고 해서 성급하게 무시해버리기 시작하면, 그것을 기반으로 세워진 모든 시스템이 무너져 내린다.

아무리 얼토당토않은 말이라도, 밑의 기반을 재정립하기 전까지는 국제 협회를 따를 수밖에 없다.

설령 국제 협회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국가라 하더라도 말이지.

전 세계 모두가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이 규칙을 무시하는 이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무너진 질서는 혼란을 야기하고, 그 혼란은 우리 모두의 목숨과 직결되어 있으니.

다시 말해, 국제 사회로부터 완전히 눈 밖에 난 중국이 섣불리 제3세력이니, 자체토벌이니 떠들어 댄다면....

"전 세계가 중국을 막기 위해 기를 쓰고 움직일 겁니다. 그걸 극단적으로 말씀드리면… 전쟁이 되겠죠."

"...!"

"왕 장관님. 장관님은 전 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벌일 각오가 되어 있습니까?"

왕시엔 장관의 낯빛이 순간 어두워졌다.

당연한 일이다.

아무리 대국이라고 해도 전 세계를 적으로 돌리는 게 달가울 리 없을 테니.

"그게 아니라면 그냥 순순히 사인하시지요."

"이, 빌어먹을 놈이…!"

이내 그가 계약서를 구기며 눈을 부라렸다.

물론 되지도 않는 객기다.

어차피 결과는 뻔하니까.

애초에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된 중국에 선택지는 없다.

홀로 남아 도태되느냐.

아니면 자존심 다 버리고 남의 지붕으로 기어들어 가느냐.

그것뿐이다.

"...그래, 좋아. 받아드리지."

왕 장관도 잘 알고 있는 듯, 기어이 꼬리를 내렸다.

"지부 사정에 정부가 개입만 하지 않으면 되는 거지?

"아, 하나 더. 당 출신 공무원 및 모든 국가직 출신은 지부 내 고위 인사직에서 제외해주십시오."

"뭐, 뭐?! 이제 와서 그게 무슨…!"

"개입만 하지 않으면 뭐 합니까. 관리직에 전부 정부 쪽 인사들을 앉혀 놓으면 그만인데."

그의 미간이 점점 좁아졌다.

굉장히 못마땅해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알았다. 그렇게...."

"아, 또 하나. 연 토벌 매출의 10%, 전체 부산물의 15%를 매년 본사에 지급하십시오."

"뭐, 뭐…?"

"마지막으로 본사의 요청이 있을 땐 어떠한 경우에도 도와주겠다고 약속을...."

"지금 뭐 하자는 거야! 어디서 장난질을 치고 있어!"

"장난질?"

지나칠 수 없는 단어에, 나는 가만히 그의 눈을 노려봤다.

"사람 목숨 가지고도 장난질 치신 분이, 고작 이 정도 장난에 열을 내시는 겁니까?"

"...!"

말문이 턱 막힌 듯 입을 다무는 왕 장관.

슬슬 이야기가 마무리된 것 같았기에, 나는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말한 거,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해두셔야 할 겁니다. 저희에게도 손절 당하고 싶지 않으시면."

"크윽…!"

"그럼, 전 이만."

뒤에서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그곳을 나왔다.

건물을 빠져나와 도로로 들어서던 차에 때마침 핸드폰이 울렸다.

예상했던 대로 이아영 본부장이었다.

「어떻게 됐어요?」

"잘됐습니다. 뭐, 애초에 정해진 결과였으니까요."

「그런 거면 제가 가도 됐을 텐데… 몸도 성치 않으시면서.」

"이제 와서 무슨 소립니까. 언제는 대비를 위해서라도 직접 가라고 하신 분이 누구더라?"

「....」

찔리긴 하는지 묵묵부답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가 황급히 화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아, 아무튼! 이번 인수 건은 우리한테도 꽤 의미가 커요.」

"그렇습니까?"

「당연하죠. 이걸로 동아시아 전체가 카르마 코퍼레이션 소속이 됐잖아요. 대륙을 먹었다는 건 이제 엄연히 국제 협회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고요.」

"흐음."

너무 확대해석 아닌가?

그래 봤자 본사에서 직접 운영하는 지부는 중국 협회가 유일한데.

나머진 소속만 한국이지, 자체적으로 운영하고 있지 않은가.

「앞으로는 더 바빠질 거예요.」

"더 바빠질 게 있습니까?"

「당연한 거 아니에요? 국제 협회 가입 유예기간이 끝났다는 건, 우리도 이제부턴 헌터 관리 권한을 행사할 수 있게 됐다는 소리잖아요.」

"아."

나는 작게 신음했다.

그러고 보니 그랬지.

국제 협회가 토벌권을, 우리가 헌터 관리권을 나눠 가졌으니.

「이제부턴 전 세계 헌터 등록 시험부터, 랭크, 승급 시험, 작전 투입, 지원 파견까지 전부 우리가 관리해야 해요.」

"...귀찮아지겠군요."

「그… 사실 이번에 그거 관련해서 이사회 쪽에서 이야기가 나온 게 있는데....」

"또 뭡니까?"

그녀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헌터 랭크 시스템, 이번에 개편해보자고 하더라고요.」

"...예?"

갑자기 그게 뭔 개소리야.

"랭크 시스템 개편이라니. 이해가 안 되는군요. 그게 굳이 필요한 겁니까?"

「지금 랭크 시스템은 국제 협회 기준이었잖아요. 당연히 같은 소속의 헌터들이 가산점을 받기도 했고요. 그걸 점수에서 최대한 배제해야 한다는 입장이에요.」

"글쎄요. 그런 이유라면 지금 당장 급한 건 아니지 않습니까."

「지금부터 미리미리 시스템을 정비해놔야, 이후 국제 협회를 무너뜨렸을 때 부작용이 없지 않겠냐나 뭐라나....」

뭐, 그런 거라면 납득은 간다.

말했듯, 아무런 준비 없이 시스템을 쥐고 있는 국제 협회를 무너뜨렸다간 기존의 질서가 모두 엉망이 되고 말 테니까.

그래 이해는 한다.

내가 진행해야 하는 것만 아니라면.

"설마 심사 담당자로 저를 지목한 건 아니겠죠?"

「아직 결정된 건 없어요. 그래도 아마 당신이 맡진 않을 거예요. 당신 업무도 있고, 몸 상태도 그렇고.... 뭐, 제가 잘 말해놓을게요.」

흠, 그렇다면야.

"그럼, 그렇게 알고 있겠습니다."

「귀국은 언제 할 거예요?」

"더 이상 볼일도 없으니. 바로 들어가도록 하죠."

「알았어요. 그럼 항공편 예약해둘게요.」

"예. 부탁드립니다."

전화를 끊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랭크 시스템 개편이라....'

생각만 해도 귀찮은 일이긴 하다만....

뭐, 내가 진행하는 것만 아니면 상관없겠지.

***

"랭크 시스템 개편?"

카르마 코퍼레이션 본사, 접견실.

박인범 전 협회장이 되물었다.

이두식 이사는 커피를 홀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국제 협회가 본격적으로 전 세계 토벌권을 쥐지 않았습니까. 우리도 슬슬 우리 권한을 써먹어야죠."

"그건 그런데... 굳이 필요한 건가? 오히려 혼란만 줄 수도 있을 텐데."

옳은 말이었다.

한 번 등록된 랭크가 이제 와서 바뀐다고 하면 반발을 살 수도 있고, 연봉과 직급에도 혼란을 야기할 수 있으니.

하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개편을 추진할 수밖에 없었다.

"김민주 헌터라고 혹시 기억하십니까? 예전에 작전 2팀장을 맡았던...."

"어어, 알다마다. 젊은데도 꽤 괜찮은 녀석이었지."

"김준우랑 붙어 다니면서 어마어마하게 성장한 녀석이죠. 아무리 봐도 S랭크에 부족함이 없는 녀석인데... 이상하게 승급 시험에서 매번 떨어지더군요."

"...국제 협회가 랭크에 개입하고 있다는 소리야?"

"세계 랭킹 100위 안에 국제 협회 소속이 아닌 헌터가 몇 명이나 있는지 아십니까?"

"내가 알기로는...."

이내 고개를 숙인 채 곰곰이 생각해보길 잠시.

"...없군."

"정확합니다."

이두식 이사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래 뭐, 그건 알겠는데. 랭크 시스템을 개편하는 게 우리한테 무슨 의미가 있는 거지? 불합리한 시스템을 바꾸려는 것뿐이라면 굳이 지금 당장 진행하지 않아도 될 텐데?"

"아주 큰 의미가 있죠. 개편으로 인해 국제 협회 소속이 아닌 헌터들이 세계 랭킹에 들어가게 된다면, 그만큼 국제 협회를 견제할 수 있는 인재가 늘어난다는 소리지 않습니까."

"호오...."

박인범 전 협회장이 작게 감탄했다.

하지만 이두식 이사는 거기서 끝낼 생각이 없어 보였다.

"뭐, 일단 가장 큰 목적은 그거고, 다른 목적은...."

이내 이두식 이사의 눈빛이 번뜩였다.

"이번 기회에 헌터라는 명함 하나만 믿고 능력도 없이 설치는 놈들, 싹 잘라버릴 생각입니다."

"...하하, 하하하하!"

그 말에 박인범이 호탕하게 웃기 시작했다.

"바라던 바야. 역시 일 하나는 똑 부러지게 하는군!"

"제가 한 게 뭐가 있겠습니까. 다 준우 그놈이 차린 밥상에 숟가락 얹는 것뿐인데."

"그래서?"

이내 박인범이 물었다.

"심사 담당자는 누가 맡을 생각인가?"

"당연히 그놈 말고 또 누가 있겠습니까."

"그렇지… 그렇고말고."

그 순간, 두 남자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204

204

[국제 헌터 협회, '중앙 토벌 관리' 개시]

[격변하는 토벌 시장, 전문가들이 생각하는 추후 양상은?]

[이제부터 국제 협회 소속 외 조직은 자체 토벌 불가. '카르마 코퍼레이션'만 예외]

[베트남, 중앙아프리카, 일본에 이어 중국 협회까지 흡수한 카르마 코퍼레이션. 이제는 전 세계 헌터 관리까지 도맡는다.]

[설립 1년 만에 국제 협회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카르마 코퍼레이션, 그들의 향후 목표는?]

['국제 토벌 기구' 자리를 둘러싸고 펼쳐지는 공방, 제2의 국제 협회 탄생 가능성 대두]

"...."

본사, 대표이사실.

귀국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쏟아지기 시작한 그 과하디과한 기사들을 보자 머리가 지끈거렸다.

뭐, 이런 소스를 풀 만한 놈은 그놈밖에 없지.

구상찬 기자.

'하여간… 이쪽 일이라면 왜 그리 가만히 있지 못해 안달인 건지.'

이쯤 되면 기자인 건지, 사생팬인 건지 헷갈릴 정도다.

"듣자 하니 저번에 사회부 토벌 파트 팀장으로 승진했답니다. 그 후로 더 본격적으로 활동하고 있다고 하니, 아마 며칠은 더 같은 기사를 보셔야 할 겁니다."

그때 마주하고 있던 하성일 본부장이 미소와 함께 말했다.

"쯧, 가뜩이나 앞뒤 없는 놈인데 자리까지 꿰찼으니 더 미쳐 날뛰겠군요."

"뭐, 우호적인 기사를 실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저희야 좋은 거 아니겠습니까."

"우호적인 걸 넘어서 거의 멕이는 수준이니까 하는 소립니다."

"하하하!"

뭐가 그리 재밌는지 호쾌하게 웃어대길 잠시.

이내 그가 물었다.

"그나저나 홍콩 지부 인수하러 가서 중국 협회까지 끌고 오실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대체 어떻게 하신 겁니까?"

"본인들 무덤을 본인들이 팠죠."

나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홍콩 봉쇄가 아닌, 적극적으로 작전 지원을 해주었다면 최소한 자국을 지키려고 했다는 명분이라도 있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국제 여론도 이렇게까지 악화하진 않았을 테고, 나아가 본인들이 원하던 제3세력을 만들 수도 있었겠지.

본인들의 실수를 덮으려고 했던 게 역으로 본인들의 목을 조여 온 셈이다.

"해외사업은 제 담당인데, 대표님이 이렇게 나서주시니 저야 감사할 따름이죠. 덕분에 요 며칠은 거의 놀고먹었습니다."

"그럼, 이번 달 월급도 그만큼만 받아 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하하하! 농담도."

...농담 아닌데?

"아무튼, 이번 인수를 계기로 토벌 사업뿐만 아니라, 외교에서도 한국이 우위에 섰다고 합니다. 덕분에 정부에서도 꽤나 좋아라 하고 있고요."

"손 안 대고 코 풀었으면 우리한테 선물이라도 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선물이라고 하긴 뭐하지만, 앞으로도 적극적으로 지원해주겠다고 하더군요."

"...."

영 시원치 않네.

이왕 줄 거면 돈으로 줄 것이지.

대놓고 심드렁하게 있으니, 하성일 본부장이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뭐, 연달아 큰 건을 처리하셨으니 당분간은 좀 쉬엄쉬엄하세요. 듣자 하니 몸 상태도 좋지 않으시다면서요."

"안 그래도 그럴 생각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등받이에 몸을 푹 기댔다.

아직 미국 지부 건에 대한 일도 마무리가 안 된 상황이고 중국 협회까지 인수해버린 탓에, 이래저래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지만....

이아영과 하성일 본부장이 열심히 해주고 있는 덕에 여유가 좀 생겼다.

뭐, 이럴 때 일하라고 본부장 자리에 앉혀 놓은 거 아닌가.

현장은 내가 처리했으니, 이후는 알아서들 해줘야지.

'그럼 뭐, 며칠 휴가라도 다녀....'

그렇게 생각하던 순간.

여전히 내 앞에서 우물쭈물하고 있던 하성일 본부장과 눈이 마주쳤다.

"...아직 하실 말씀이 남았습니까?"

내가 묻자, 그답지 않게 퍽 데면데면하게 말을 이었다.

"그... 다른 게 아니라, 이번에 이사회에서 저희가 가진 헌터 관리 권한으로 전 세계 헌터 랭크 시스템을 개편한다고...."

"아, 들었습니다. 심사 담당자는 정해졌습니까? 꽤 귀찮은 일일 텐데 책임지고 맡아줄 분이면 좋겠군요."

"그... 대표님입니다."

"...?"

"...대표님이 담당자로 정해졌습니다."

"...."

"이사회에서 대표님 외엔 없다고...."

"하, 하하...."

시발.

장난해?

"분명히 이아영 본부장이 잘 말해주겠다고 했는데...."

"찍소리도 못했습니다."

"그 말은… 이아영 씨도 알고 있다는 겁니까?"

"예."

빌어먹을

도움 되는 놈들이 없네.

'설마 요새 일을 빡세게 하고 있는 게 미안해서 그런 건가…?'

어쩐지, 생색도 안 내고 묵묵하게 일만 하는 게 이상하더라니....

'하아.'

어느 세월에 전 세계 헌터 랭크를 다시 심사한단 말인가. 그 수만 어림잡아 수천만 명인데!

거기다가 심사 항목도 만들고, 실적이랑 경력 평가까지 생각하면....

끝나면 남은 3년은 다 사라지겠는데?

답답함과 짜증에 절로 한숨이 쏟아지던 그때, 하성일 본부장이 다시금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자세한 내용과 일정은 이사회에서 정해지는 대로 내려올 겁니다. 그때까지는 어디 휴가라도 다녀오심이...."

"어디 제대로 쉴 수나 있겠습니까. 이건 뭐 병 주고 약 주는 것도 아니고...."

그가 꽤나 멋쩍은 표정으로 하하, 웃어댔다.

어지간히 눈치가 보이긴 한 모양이었다.

"쯧, 알겠습니다. 어쩔 수 없죠, 뭐. 일단 전 세계 협회에 공지해두겠습니다."

뒤통수에 깍지를 끼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

"카르마 코퍼레이션에서 조만간 헌터 랭크 시스템을 개편할 거라고 합니다."

국제 헌터 협회 본부.

웨슬리 사무총장의 수행비서가 방금 들어온 보고를 전달했다.

"벌써부터 전 세계 협회에 공지가 내려왔다고...."

"랭크 개편?"

"네. 아마 등급 기준부터 심사까지 전부 다시 하려는 것 같습니다."

"이해가 안 되는군요.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의미가 있다고."

"그동안 세계 랭커들을 저희 쪽 헌터들로만 올려놓지 않았습니까. 그걸 최대한 분산시켜서 견제하려는 게 아닐까 합니다."

"흐음...."

웨슬리 사무총장이 펜대를 굴렸다.

단지 그런 이유로 이런 귀찮은 일을 진행한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분명 또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뭐든 간에 우리한테 좋은 건 아니겠지....'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고 있자니, 수행비서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이번 홍콩 사태를 빌미로 카르마에서 중국 협회를 공식 인수했다고 하는데, 괜찮은 걸까요?"

"괜찮을 리가 없죠. 중국 협회는 우리한테도 꽤나 필요한 곳이었으니."

그가 쯧, 혀를 차며 대답했다.

아닌 게 아니라 애초에 중국 협회와 접촉한 이유가 그들을 국제 협회에 붙들어두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그들의 압도적인 병력을 이용하여 카르마 코퍼레이션을 견제할 심산이었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해서 그들을 무너뜨릴 생각이었다.

그들은 현재 너무 많은 것을 가졌고,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이 존재하는 한 국제 협회가, 또 본인이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없다는 걸 이제는 인정해야 했다.

그렇기에 전쟁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고, 이를 위해 중국 협회는 필수적으로 손에 넣어야 하는 곳이었다.

'설마하니 우리를 향해서 이빨을 드러낼 줄이야....'

본보기를 보여주려던 게 실수였나, 그런 생각이 잠시 스쳤지만 이제 와선 늦은 후회였다.

어쨌든 한 번 이빨을 드러낸 놈들을 계속 붙잡고 있을 수는 없었기에 퇴출을 시키긴 했다만. 아니나 다를까, 김준우 그놈이 곧바로 홀랑 집어 삼켜버렸다.

헌터 관리 권한에 이능석과 반능석.

그리고 중국 협회까지 손에 넣은 이들이 앞으로 어떻게 나올지는 너무나 명백했다.

"본격적으로 우리를 집어삼키려 하겠군요."

"...."

그 무거운 목소리에 수행비서는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그놈들이 에덴을 찾지만 않았어도 이렇게까지는 안 됐을 텐데...."

"저… 그 건과 관련해서 드릴 말씀이 있는데...."

이내 그녀는 한참을 망설이던 끝에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미국 지부 사건 때부터 지금까지 특별한 이능파가 감지되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그게 무슨 소리죠?"

"에덴을 처리했다면 그에 준하는 이능파가 감지되어야 했을 거라는 게, 뱅크 아이템 관리팀의 소견입니다."

"그러니까, 그놈들이 아직 에덴을 처리하지 않았다…?"

"그것보다, 발견 당시부터 지금까지 아무런 이능파도 감지하지 못했다는 건...."

그녀는 끊임없이 사무총장의 눈치를 살피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발견했다는 게 거짓일 가능성도 있다는...."

"...."

차마 끝까지 말을 할 수가 없었기에, 대충 말끝을 흐리며 눈치를 살폈다.

그런데 예상과 다르게 웨슬리 사무총장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렇습니까...."

화를 내지도, 그렇다고 충격을 받은 것도 아닌 퍽 담담한 모습.

"뭐, 대충 예상은 하고 있었습니다. 그저 만에 하나를 위해 협상에 응한 것뿐이지, 어차피 이러나저러나 결과는 같았을 겁니다."

"그, 그런가요."

"중요한 건... 어쨌든 지금 에덴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게 확실해졌다는 거겠죠."

이내 그의 눈빛이 번뜩였다.

"그러니 이젠 슬슬 우리 걸 되찾을 준비를 해봅시다."

***

전 세계 협회에 공지를 내린 지 한 달이 지난 시각.

드디어 랭크 시스템 개편, 첫 심사 날이 되었다.

당연히 전 세계의 헌터들을 동시에 심사, 등급 분류를 진행하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일단 한국에서 먼저 심사를 진행하고, 이를 발판삼아 점차 해외로 범위를 넓혀가기로 했다.

그렇게 첫 심사 대상은, 서울 본부 소속 작전팀으로 결정되었다.

"벌써부터 기가 빨리는군요."

오랜만에 방문한 서울 본부, 작전 세미나실.

과거 청소팀과 작전팀의 공동 작전 브리핑 때의 기억이 스쳤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이제 시작인데 벌써부터 그러면 어떡해요."

단상에 오르기 전, 이아영 본부장은 내 매무새를 점검해주었다.

그리곤 이내 넥타이를 다듬어주곤 말했다.

"첫 단추를 잘 끼워야 나중에 문제없는 거 알죠?"

"알고는 있는데 그게 말처럼 쉬운...."

"그럼 잘하고 오세요."

나는 떠밀리듯 단상에 올랐다.

그와 동시에 한눈에 들어오는 서울 본부의 모든 작전팀.

"다들 바쁘실 테니, 본론만 이야기하겠습니다."

한 차례 호흡 후 마이크 앞에 서서 입을 열었다.

"앞서 공지해드렸듯이, 랭크 심사는 앞으로 일주일간 진행될 예정입니다. 랭크는 기존처럼 E부터 A까지 받으실 수 있으며, S랭크 이상은 개별 심사를 통해 부여될 예정입니다."

다들 알고 있는 내용이라는 듯 별다른 말이 없었다.

"1차로 필기시험을 통해 토벌 및 현장 파악 능력을 심사할 것이고. 2차 실기를 통해 스킬 및 포지션과 클래스를 심사할 것입니다. 그 외 추가적으로 실적과 경력 평가를 종합적으로 판단해 심사를 진행할 것입니다."

진행 자체는 기존과 크게 달라진 건 없다.

하지만 진짜 중요한 건 이제부터였다.

"다만, 이번부터는 심사 기준에 한 가지 항목이 더 추가되었습니다."

이두식 이사가 신신당부한 평가 항목.

그것은 다름 아닌.

"바로 인적성 평가입니다."

"...인적성?"

"입사할 때 다 받은 거잖아."

"그게 랭크 심사랑 무슨 상관이래?"

저들끼리 무어라 한마디씩 내뱉었다.

나는 그들을 정숙시키기 위해 헛기침을 하곤 다시 말을 이었다.

"인적성 평가에서 기준치를 통과하지 못하신 분들은 다른 심사 점수와 상관없이 무조건 실격처리 되는 점, 유의해주십시오. 여기서 실격이라 함은...."

헌터들을 슥 훑으며 사뭇 진지하게 말했다.

"헌터 자격을 영구 박탈한다는 뜻입니다."

"...뭐, 뭐?"

"자, 잠시만요!"

"자격 박탈이라뇨! 그건 너무 심하지 않습니까?!"

아니나 다를까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한 세미나실.

당연한 반응이겠지만, 어쩔 수 없다.

이번 랭크 시스템 개편은 국제 협회를 견제하는 것 외에도 중요한 목적이 있으니까.

바로, 자격 미달의 헌터들을 모조리 솎아내는 것.

지금까지 국제 협회가 본인들에게만 유리하게 맞춰놓은 기존 시스템을 재정립하기 위한 첫 단추다.

"뭐,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인적성 검사는 어디까지나 부가적인 평가일 뿐이니까요. 여태까지 별다른 문제 없이 지내온 분들에게는 그다지 의미가 없는 항목일 겁니다."

나는 그렇게 말하며 재빨리 헌터들의 반응을 살폈다.

대부분은 그 말에 안도하는 반응을 보였지만.

"...."

"...."

몇 명은 그러지 못했다.

대놓고 켕기는 것이 있다는 걸 홍보하듯, 꽤나 불안해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몇몇.

나는 그들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럼, 이제부터 랭크 심사를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205

205

본격적인 랭크 심사가 시작된 지 하루가 지났다.

"3번 문제 답이 4번이라고?"

막 필기시험을 마치고 본부 옥상에서 담배를 태우던, 작전 5팀의 최종혁 헌터가 동기들을 향해 물었다.

"뭐야, 설마 그거 틀렸어?"

"아, 시발… 당연히 5번인 줄 알았는데."

"크크. 너 그러다 랭크 떨어지는 거 아니냐?"

"C에서 더 떨어질 데가 있긴 해?"

동기 고현종 헌터와 박태하 헌터가 대놓고 그를 비웃었다.

사실 그들도 랭크 유지가 간당간당한 수준이었지만 굳이 티를 내진 않았다.

"에휴, 시발… 이제 와서 무슨 랭크 재심사냐. 할 일이 그렇게도 없나."

이내 최종혁이 미간을 찌푸리며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서울 본부 작전 5팀 소속, 최종혁.

입사 8년 차 C급 헌터.

그는 이능차원관리 협회가 카르마 코퍼레이션에 흡수된 것에 꽤나 불만을 가지고 있는 이들 중 한 명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카르마 코퍼레이션에 흡수되지 않았으면 이번에 국제 협회 소속이 되었을 테니까.

국제 협회 소속의 헌터가 되는 건 거의 모든 헌터가 가지고 있는 최종 목표라고 할 수 있었다.

국제 협회의 민낯이라고 떠들어대지만, 그런 것 따윈 애초에 아무 상관 없었다.

그저 더 인정받을 수 있는 직장과 더 높은 연봉에만 관심이 있었으니까.

절호의 기회가 날아가 버린 것도 배가 아픈데, 더군다나 웬 청소부 출신이 본인의 우두머리라니.

그로선 꽤나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게 못마땅한 이는 비단, 그 혼자만이 아니었다.

"내 말이. 카르마에 합병되고 나서 해외 지부 쪽으로 올인 할 것처럼 굴더니 갑자기 이게 뭔 개고생이야."

"그러니까. 안 그래도 바빠 죽겠는데. 또 인적성 평가도 본다면서? 시발, 무슨 입사 테스트하는 것도 아니고."

동기들 또한 격하게 공감하며 볼멘소리를 냈다.

"쯧, 이럴 줄 알았으면 그 청소부 새끼 나댈 때 확실하게 조져 놓을걸."

"말은. 그 새끼 본부에 있었을 땐 찍소리도 못했으면서."

"...."

박태하가 비아냥거리자, 고현종이 인상을 팍 쓰며 노려봤다.

그러자 박태하는 할 말 있으면 해 보라는 듯 똑바로 그를 응시했고, 덕분에 둘 사이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험악해졌다.

"야야, 그만해. 안 그래도 머리 아픈데 싸우고 있어."

"...."

"...."

최종혁이 곧바로 끼어들어 둘을 말리며 이내 급하게 화제를 돌렸다.

"하… 청소부 출신이 대표라니. 세상 존나 불공평하다니까."

"다 라인 잘 타서 그런 거지. 막말로 그 인간이 한 게 뭐 있어? 다 윗사람들한테 잘 보여서 승승장구한 거지."

"아, 시발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이두식 라인이나 타둘걸. 뭣도 모르고 서민철 줄 잡고 있다가 쫄딱 망했네."

화제를 돌린 게 먹힌 건지, 그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사이좋게 김준우를 씹어대기 시작했다.

사실 그들은 김준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목표가 무엇인지 잘 알지도 못했고 관심도 없었다.

그저 가끔 언론에서 그의 소식이 들려오는 걸 흘러가듯 본 것뿐이니.

물론 그마저도 언론을 통해 이미지 메이킹을 하려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게라도 김준우를 깎아내리지 않으면, 청소부 출신이 자신들의 머리 위에 있다는 걸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으니까.

"그래서, 평가 기준이 뭐래?"

"몰라. 시험이라도 보겠지."

"참 나, 별 지랄을 다 한다니까. 아...."

그때, 최종혁이 시간을 확인하더니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에이 쯧, 나 먼저 들어간다."

"뭐야. 한 대 더 피우고 가자."

"안 돼. 이번 주 작전 보고서 오후까지 제출하래."

"누가?"

"누구겠냐, 시발. 본부장이지."

"김민주?"

최종혁이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여간 그년도 대단하다니까. 새파란 후배였는데 라인 하나 잘 물어서 본부장까지 1년 만에 올라가고."

"시발, 그 정도면 김준우랑 뭐 있는 거 아니냐?"

"뭐 있는 정도겠냐."

최종혁은 그렇게 말하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다들 그 저급한 대화에 낄낄거리고 있던 그때.

"뭐해요?"

뒤에서 등골이 오싹해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 했던가.

김민주 본부장이 옥상에 나타났다.

"보, 본부장님…?"

"그, 그게 뭐냐면...."

"작전 회의 말입니다. 작전 회의… 하하하!"

"...."

세 남자는 크게 당황하며 얼버무렸다.

동시에 최종혁이 황급히 이야기를 돌렸다.

"그, 그나저나 본부장님이 여긴 왜… 한 대 피우시게요?"

"자리 너무 오래 비우시는 것 같아서 올라와 봤어요. 슬슬 내려가시죠. 오전 내로 보고서 제출해야 하잖아요."

"네, 네. 알겠습니다."

최종혁과 그의 동기들은 도망치듯 그곳을 벗어났다.

그들을 바라보고 있던 김민주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물론 그들의 대화를 모두 듣고 있던 그녀는,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모를 리가 없었다.

다만 이제 와서 그런 저급한 말에 상처나 충격을 받을 것도 없었다.

오히려 딱한 기분만 들었다.

그녀 또한 현직 헌터로서 이번 랭크 개편의 심사 대상이기에, 그들을 평가할 자격은 없지만.

그럼에도 그들의 미래가 보이는 까닭이었다.

***

"랭크 박탈이 확실히 세긴 하네요."

서울 본부, 랭크 평가위원회.

나를 비롯한 본사의 몇몇 인사들로 꾸려진 팀의 회의가 끝난 직후, 이아영 본부장이 서류를 검토하며 넌지시 입을 열었다.

"없던 항목까지 만들어서 이렇게 강하게 나갈 이유가 있어요? 최근에 무슨 문제가 있었나요?"

"아뇨. 보고된 건 없었습니다."

"그럼 왜 굳이 이렇게까지 칼을 든 거예요?"

"보고가 되지 않았다는 것뿐이지, 실제로 문제가 없었다는 건 아니니까요."

"네?"

회귀 전의 일들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예전부터 늘 말이 나오지 않았습니까. 헌터들의 갑질 논란, 폭행, 음주운전… 뭐, 심하면 약까지 손을 대는 놈들도 있었고요."

"뭐, 이 나라에선 헌터가 벼슬인 줄 아는 놈이 한둘이 아니니까요."

"그나마 최근엔 많이 줄긴 했습니다만, 완전히 없어졌다고는 못 하겠죠."

"그래서 겸사겸사 이 기회에 뿌리를 뽑겠다는 거예요?"

"그렇죠. 앞으로 제2의 국제 협회가 되려는 이상, 우리 얼굴에 먹칠하는 놈들은 미리미리 싹을 잘라놓는 게 좋겠죠."

"흐음, 그렇게 말하니까 이해가 되네요. 어쨌든 세계 기구로 인정받으려면 작은 흠도 있어선 안 되니까요."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뭐, 일단 그런 것도 있고...."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눈치를 살폈다.

이내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한 후에 나지막하게 말을 이었다.

"부가적으로는 국제 협회와 관련이 있는 놈들을 색출하려는 목적도 있습니다."

"...네?"

그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뭐, 이건 이두식 이사가 내게만 넌지시 말해 준 것이다.

그녀로서도 처음 듣는 이야기일 테니 당연한 반응이겠지.

"황동휘 대리, 기억하십니까?"

"...당연하죠."

그녀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졌다.

통제팀 소속 황동휘 대리.

동시에 PB 코퍼레이션 밸런스 조정팀, 한국 파트장.

물론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건 본사에서도 극소수 몇 명뿐이다.

하지만 본부 통제팀 직원이 스파이였다는 사실은 당시에 나를 포함, 모두에게 무척이나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심지어는 결국 작전 본부장이었던 최호성을 살해하고 도주하지 않았던가.

실제로 나 또한 그놈 덕에 또다시 목숨을 잃을 뻔했고.

"이두식 이사님 말씀으로는, 혹시 모르니 만약을 대비해서 한 번 더 조사하겠다는 건데… 덕분에 저만 귀찮아졌죠."

이아영 본부장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런데 PB 코퍼레이션은 한국 내에선 손을 뗐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렇긴 합니다만… 앞으로도 손을 대지 않을 거란 보장은 없죠. 특히나 지금 시점에서는."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마 지금쯤이면 국제 협회도 슬슬 이를 갈고 있을 겁니다. 뱅크 아이템에 헌터 관리 권한까지 넘겨줬는데, 중국 협회 인수에 랭크 개편까지.... 이래저래 눈에 거슬리겠죠."

언제든 우리를 무너뜨리려 벼르고 있겠지.

더는 잃을 게 없는 놈들이기에, 전쟁까지 불사할지도 모른다.

"기회를 엿보기 위해 또다시 누군가를 심을지도 모른다는 게, 이두식 이사님 생각입니다."

"하여튼… 의심만 많은 아저씨라니까."

"뭐, 그래도 나름 일리는 있지 않습니까."

내가 귀찮다는 것만 빼면.

"어쨌든 이건 어디까지나 부가적인 거고... 지금은 심사에나 집중합시다."

그렇게 자리에서 일어나자, 이아영이 아직 안 끝났다는 듯 또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인적성 평가는 어떻게 진행되는데요? 시험이라도 볼 거예요?"

"아뇨. 그깟 문제 몇 개로 어떻게 사람을 판단하겠습니까. 직접 옆에서 관찰해봐야지."

"...? 당신이 작전팀에 붙어 있기라도 하게요?"

"심사 평가로도 바빠죽겠는데 무슨."

나는 손을 저으며 말을 이었다.

"다 준비해뒀으니 걱정 마시죠."

그렇게 말하며 먼저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

"자자, 다들 주목."

서울 작전 본부, 작전 5팀 사무실.

이태범 팀장이 팀원들을 향해 손뼉을 치며 집중시켰다.

그런 그의 옆에 다소곳이 서 있는 새 얼굴이 있었다.

"당분간 우리 팀에서 일할 인턴이다. 다들 인사해."

"문소연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카르마 코퍼레이션 기획 본부 소속, 청소과장.

문소연이었다.

"오! 신입?"

"저 드디어 막내 탈출하는 겁니까?!"

"꿈 깨 이 자식아, 인턴이라잖아."

"하하하하!"

새로운 얼굴의 등장에 다들 화기애애해진 분위기 속.

한 팀원이 문소연을 빤히 바라보며 넌지시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어째 낯이 좀 익은 것 같은데...."

"야 이 자식아, 벌써부터 수작질이야?"

"아, 아니 팀장님! 정말로 낯이 익다니까요?"

"헛소리 말고. 인마! 너 괜히 집적대다가 나한테 걸리면 죽는다?"

이태범 팀장이 단칼에 의혹을 차단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는 이미 문소연의 소속을 알고 있었다.

청소팀 출신으로 이미 3년 가까이 그들과 같이 협회에서 일했다는 것과 현재는 본인보다 직급이 높다는 것.

그리고 현재는 랭크 평가위원회 소속이다.

인적성 평가를 위해 김준우가 내려보낸 이들 중 한 명이었다.

그러니 낯이 익다는 게 착각은 아니겠다만....

'제발 아무런 문제가 없길....'

팀장들을 불러 놓고 절대 소속을 발설하지 말아 달라 신신당부하지 않았던가.

팀원들에겐 미안하지만, 대표가 나서서 직접 부탁한 만큼 그녀의 정체는 철저히 비밀에 부쳐야 했다.

이태범 팀장이 설명을 덧붙였다.

"참고로 헌터는 아니야. 청소팀이랑 작전팀 일정 조율 업무랑 장비 지원 처리, 기타 행정 업무를 맡을 거다. 뭐 물어보면 언제든 알려주고."

"네."

"알겠습니다."

"소연 씨도 모르는 거 있으면 편하게 물어봐요."

"네, 네."

그녀가 퍽 긴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한편 그녀를 계속 응시하던 남자가 있었으니.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다름 아닌, 최종혁이었다.

그는 앉은 채로 그녀를 연신 위아래로 훑었다.

분명 낯이 익은데, 어째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생각하기도 잠시.

'...좀 생겼네.'

이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럼 다들 일들 보고. 심사 기간이라서 정신없겠지만, 그렇다고 토벌에 집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알겠습니다."

"오늘 퇴근하면 환영회 겸 회식이나 하자고. 오늘은 특별히 소고기다!"

"네?! 저 오늘 야간 토벌 있는데요?!"

"그럼 넌 못 끼는 거지, 인마!"

"아, 진짜!"

막내 헌터가 대놓고 죽을상을 짓자, 팀원들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어, 종혁이가 옆에서 기본적인 것 좀 알려주고. 난 회의 다녀올 테니까."

"...예."

이태범 팀장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다시 사무실을 나섰다.

"잘 부탁드려요. 선배님."

홀로 남은 문소연은 이내 쭈뼛쭈뼛 최종혁에게 다가가 고개를 꾸벅였다.

"네, 뭐…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그러자 최종혁이 씨익 미소를 지었다.

206

206

지원팀 부속, 다목적 훈련장에 마련된 실기 시험장.

나와 이아영 본부장, 그리고 이두식 이사를 비롯한 랭크 평가위원회의 주요 인사들이 참석하여 헌터들의 스킬을 심사 중이었다.

"그럼… 작전 4팀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실기시험 진행을 맡은 지원팀 소속 송혜연 대리.

한때 김민주의 보좌관이었던 그녀의 목소리가 시험장에 울려 퍼졌다.

꽤나 오랜만에 보니, 어째 요 1년 사이에 신입 티를 완전히 벗은 듯했다. 아니, 벗은 걸 넘어서 언뜻 보면 일에 찌들대로 찌든 15년 차 과장이라 착각할 만한 몰골이다.

듣자 하니 이아영의 뒤를 이어 헌터관리실에서 업무를 보고 있다던데.

'그쪽 일이 원래 좀 빡센가…?'

송혜연 대리를 향해 안타까운 시선을 보내던 그때였다.

"4팀 분들은 밸런스가 좋네요."

평가 시트를 확인하던 이아영 본부장이 넌지시 입을 열었다.

"확실히 포지션과 클래스가 균형 있게 잡혀있긴 합니다만, 어디까지나 개개인의 능력을 보는 자리니까요. 그 점에 있어선 조금 부족한 점이 있긴 하군요."

"뭐, 4팀은 최초 투입보다 백업이랑 지원 토벌에 중점을 두고 있으니까요."

"실적이나 경력에서 특이 사항이 있지 않은 이상, 간신히 현상 유지겠군요."

나는 길게 숨을 늘어뜨리며 말했다.

사실 말이 랭크 재심사지, 이변이 없는 한 90%는 기존 랭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마저도 남은 10% 중 대다수는 랭크 하락.

랭크 상승은 정말 극소수 중 극소수나 가능할 것이다.

'기대치보다 훨씬 별로네....'

애초에 랭크 개편의 의의는 세계 상위권 랭킹에 우리 소속 헌터들을 올려놓는 게 아니었던가.

이 상태라면 세계 랭킹은 크게 변동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부정을 저지르자니 자존심 상하고....

이래저래 아쉬운 마음에 입맛을 다셨다.

"그럼, 이어서 작전 5팀 심사 진행하겠습니다."

이내 다시금 울려 퍼지는 송혜연 대리의 목소리.

"최종혁 헌터님, 들어오세요."

그녀가 호명하자 훈련장 한가운데로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그 얼굴을 보자마자 미간을 찌푸렸다.

혹시나 싶어 곧바로 인적 사항을 뒤적거렸는데....

'저 새끼....'

아니나 다를까, 내가 알고 있던 그놈이었다.

"왜 그래요?"

표정을 구기고 있자, 이아영 본부장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저 사람, 뭐 특이 사항 없습니까?"

"최종혁 헌터요? 글쎄요. 8년 차 C급, 입사 때부터 쭉 서울 본부 소속... 서류엔 딱히 별 내용은 없는데요."

이아영 또한 서류를 뒤적거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뭐, 8년 차 본부 소속이면 당신도 오고 가면서 한 번은 봤겠네요."

"봤다 뿐이겠습니까."

나는 대놓고 불쾌감을 드러내며 혀를 찼다.

어떻게 잊겠는가.

회귀 전, 지원팀 소속 보좌관을 지속적으로 성폭행한 혐의로 징역을 받은 놈인데.

'헌터라는 명함에 먹칠을 하다못해 똥칠을 했지.'

무려 2년 동안이나 지속된 범행.

게다가 수사 과정에서 헌터라는 직위를 내세워 협박을 가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더욱 시민들의 분노를 사게 했다.

'본인 한마디면 이 바닥에서 영영 일 못 하게 할 수도 있다 그랬나....'

그 일을 계기로 시민들은 점점 헌터를 불신하기 시작했고, 정부는 특검을 꾸려 모든 헌터를 대상으로 전수조사를 진행했다.

그건 곧 협회 전체에 나비효과를 일으켰다.

과거 묻혔던 크고 작은 사건들이 수면 위로 드러나며 수많은 헌터의 모가지가 날아가게 된 것이다.

당연히 나 또한 그 불똥을 피할 수 없었다.

폭력 상사, 갑질 논란 기타 등등.

온갖 소스가 언론사에 뿌려졌지만, 다행히 협회 측에서 다분히 노력해준 덕에 전파를 타는 것만큼은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가까스로 입을 틀어막고 있었던 것뿐, 모두 없던 일로 만들 수는 없었다.

결국, 박근태 팀장 폭행 사건이 터진 그 날, 어렵사리 막아왔던 그동안의 일들이 함께 알려지면 평생을 쌓아 올린 내 평판이 한순간에 무너지게 되었다.

그러니 저 새끼가 곱게 보일 리가 있겠는가.

'여기 있는 걸 보면 아직 사고 치기 전인가 보네....'

아주 씹어 먹을 기세로 그를 노려보고 있던 그때, 최근의 기억이 머릿속을 스쳤다.

다름 아닌, 인적성 평가 담당으로 문소연을 5팀에 투입했다는 것이었다.

'쯧, 어째 좀 불안한데....'

그렇다고 이제 와서 담당을 바꾸면 언더커버를 눈치챌 수도 있다.

어떻게 해야 하나, 머리를 굴리고 있는 사이 시험 준비가 끝났다.

"작전 5팀, 최종혁. C랭크, 마법사 클래스입니다."

최종혁의 짤막한 자기소개와 함께 시험이 시작됐다.

쿵―.

이윽고 그의 앞에 나타난 커다란 물체.

국제 협회로부터 넘겨받은 반능석으로 만든 훈련용 더미였다.

실기시험의 목적은 실제 작전 상황에서 몬스터의 성향과 자신의 스킬을 파악하여 얼마나 효과적으로 스킬을 분배, 사용하는지를 평가함이다.

실제 던전에서 진행하는 게 가장 정확하겠지만, 그 많은 헌터를 모두 평가하기엔 현실적으로 불가능했기에 더미를 이용한다.

이능력을 흡수하는 성질 때문에 몇 번이고 스킬을 때려 박아도 끄떡없기에 훈련용으로 제격이었다.

"고스트 형 몬스터. 현재 상황은 근접 포지션이 모두 큰 대미지를 입어 뒤로 물러나 있는 것으로 가정하겠습니다. 준비되셨으면 시작해주세요."

송혜연 실장의 상황 지정이 끝나기 무섭게, 최종혁이 자세를 고쳐 잡았다.

[고유 스킬 : 블리자드 피닉스]

사아아아―.

이윽고 냉기에 휩싸인 커다란 불사조가 허공에 떠올랐다.

그것이 크게 날갯짓을 하는 순간.

[깃털 포화]

콰과과과광―!!

수십 개의 깃털이 더미에 쏟아지며 커다란 폭발을 일으켰다.

멀찍이 떨어져 있는 우리에게까지 충격이 전해질 정도의 위력.

[습득 스킬 : 소환 - 통곡의 벽]

[습득 스킬 : 안티 페이징]

[고유 스킬 : 블리자드 피닉스]

[급속 빙결]

쩌저저적―!

콰과광―!!

최종혁은 이후로도 몇 개의 스킬을 자연스럽게 연계했다.

"흐음...."

그 모습을 유심히 관찰하며 턱을 쓰다듬었다.

한 번의 큰 공격으로 몬스터의 관심을 끈 후, 벽을 세워 동선을 차단한다.

그리곤 근접 포지션을 위해 고스트형 몬스터의 페이징 스킬을 차단하고, 다시 고유 스킬을 이용하여 공격.

그 연계를 지켜보던 이두식 이사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C급치곤 꽤 괜찮은데? 스킬 분배도 나쁘지 않고, 본인 스킬의 특성도 잘 이해하고 있는 것 같고."

"무엇보다 위력이 꽤 강력하네요."

이아영 본부장 또한 한마디 거들었다.

확실히 부정할 수 없다.

정확한 상황 파악 능력, 높은 클래스 이해도, 확실한 화력.

그 어떤 것을 봐도 C랭크 수준을 크게 웃돌고 있다.

아직은 경력 평가에도 문제없고, 실적도 이 정도면 나쁘지 않고.

'마음에 드는 놈은 아니지만....'

그래도 평가는 평가니까.

남은 심사 기간 동안 인적성 평가에도 크게 문제가 없으면 아마 이번에 승급하겠군.

"시험 종료하겠습니다. 다음 분 입장해주세요."

이내 성공적으로 차례를 마친 최종혁이 가벼운 묵례와 함께 퇴장했다.

나는 그의 등을 바라보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 문소연 씨한테 연락해서 혹시라도 무슨 일 있으면 바로바로 보고해달라고 해주십시오. 특히 저놈한텐 가까이 가지 말라고 해주시고요."

"네? 왜요?"

"그냥 그렇게 좀 부탁드립니다."

엮여서 좋을 게 없는 놈이니까.

이아영 본부장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더 이상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로도 실기시험은 계속해서 진행되었다.

우린 집중해서 평가 시트에 점수를 매겼고, 한 시간쯤 지나 5팀의 시험이 모두 끝나가던 차였다.

"죄송합니다. 급한 토벌이 있어서 좀 늦었습니다."

김민주 작전 본부장이 시험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원래대로라면 가장 첫 번째 순서였지만, 보아하니 토벌을 마치자마자 곧장 달려온 모양이다.

"어떻게, 6팀 진행하기 전에 김민주 헌터님 먼저 진행할까요?"

송혜연 실장이 나를 향해 물었다.

우리는 서로 눈빛을 교환하다가 이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앞으로 나와 주세요."

안내에 따라 훈련장 중앙으로 이동한 김민주.

이내 검집을 쥐곤 훈련용 더미 앞에 섰다.

동시에 2층에서 관전하던 헌터들의 시선이 한꺼번에 쏠렸다.

그저 그런 B급 헌터에서 1년 만에 A랭크 승급, 동시에 말도 안 되는 속도로 작전 본부장까지 올라간 이의 실력을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으니.

"골렘형 몬스터. 본인 외에 토벌 가능 인원이 모두 전멸한 상황으로 가정하겠습니다. 준비되셨으면...."

상황 지정이 채 끝나기도 전.

[고유 스킬 : 천수관음 - 각성]

[육관음중외(六觀音中外)]

[접신 - 관세음(觀世音)]

푸른 기운이 훈련장 전체로 터져나갔다.

관전하던 다른 헌터들 모두가 그 거센 기운에 고개를 돌렸다.

이내 그녀가 검을 꺼내 들었다.

[정법명왕여래(正法明王如來)]

"야, 야…! 잠깐…!"

───!

푸른빛이 번쩍이며 그곳에 있는 모든 이들의 시야를 앗아갔다.

나 또한 황급히 소매로 눈을 가렸다.

그렇게 정적이 내려앉기까지 몇 초.

감았던 눈을 조심스레 뜨자 처음으로 시야에 보인 것은.

"이런...."

정확히 사선으로 갈라진 훈련장의 모습이었다.

"...미친 저거 뭐야?"

"저게 가능해…?"

"와 씨… 본부장은 본부장인가."

그 충격적인 광경에 술렁이는 시험장.

하지만 그 광경보다 더 어처구니가 없는 건.

"...."

본인이 그 누구보다 더 당황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성장했다는 자각이 없었던 건가....'

과하다, 과해.

나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보람 있으시겠어요?"

이아영 본부장이 어깨로 나를 툭 치며 너스레를 떨었다.

"...전 가르친 게 없는데요."

"겸손은."

아니, 정말로.

뭐, 일단 그건 둘째치고....

'이 정도면 S랭크는 떼 놓은 당상이겠군.'

황급히 퇴장하는 김민주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계속해서 시험을 진행하려던 그때.

"대표님도 한번 해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2층에서 관전을 하고 있던 한 헌터가 뜬금없는 말을 내뱉었다.

고개를 들어 그곳을 바라보니.

"대표님도 이능력자 아닙니까? 심지어 본부장님의 스승이라고."

최종혁 헌터였다.

"청소부 출신에서 1년 만에 그 자리까지 올라간 걸 보면, 당연히 본부장님보다 더 대단하시겠죠?"

"...."

"시범이라고 생각하고 한번 보여주시죠. 누구라고 말씀드리긴 뭐합니다만, 언론이 조금 과장됐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대놓고 나를 향해 입꼬리를 올리는 그의 모습을 보자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설마 거절하시려는 건...."

"거절하겠습니다."

나는 그의 말을 자르며 짧게 답했다.

"저는 등록된 헌터가 아닙니다. 심사 대상도 아닐뿐더러, 굳이 귀한 시간 쪼개서 의미도 없는 짓을 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군요. 무엇보다 제가 당신이 시키는 대로 따라야 할 이유도 없고요."

"저희도 대표님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고 있어야 신뢰를...."

"최종혁 씨."

나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주제 파악 좀 하세요."

"...."

그가 굳은 표정으로 가만히 나를 바라봤다.

"뭐… 너무 섭섭해하지 마시죠. 제 실력은 언젠가 기회가 되면 보여드릴 테니까."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대화를 하고 싶지 않았기에, 나는 이내 송혜연 대리를 향해 손짓했다.

"그럼 계속 시험 진행하세요."

"네, 네.... 작전 6팀 시작하겠습니다."

재개된 시험.

나는 팔짱을 낀 채 슬쩍 최종혁을 흘기자, 그는 여전히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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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부 근처 한우집.

작전 5팀의 회식이 한창인 그곳에선 오후에 있었던 실기 시험에 관한 이야기로 떠들썩했다.

대부분 더 잘할 수 있었는데 아쉽다는 푸념이나, 옆 팀 누가 승급할 거 같다더라 하는 근거 없는 소문을 늘어놓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 자리의 진짜 주인공은 따로 있었으니.

"아, 맞다. 최종혁! 너 오늘 뭐냐?"

"너 씨, 이러다 승급하는 거 아니야?!"

"그러니까! 언제 우리 몰래 훈련했냐?!"

"이러다 팀장 달수도 있겠는데? 크크크!"

단연, 최종혁이었다.

오늘 있었던 실기 시험에서 보여줬던 모습 때문이었다.

부정할 수 없는 실력으로 모두를 놀라게 하지 않았던가.

4팀과 함께 최초 투입 없이 지원조로 활동하던 그들에겐 흔치 않은 일이었으니, 관심이 쏠리는 건 당연했다.

"훈련은 무슨... 그냥 평소대로 한 거야."

최종혁은 겸손을 떨며 술을 홀짝였다.

당연히 평소 실력은 아니었다.

여기서 말할 만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어쨌든 운이 좋았다.

설마하니 그런 좋은 제안이 본인에게 들어올 줄이야.

'머저리들… 평생 여기서 썩어라.'

속으로 이 자리에 있는 모두를 비웃으며 술을 털어 넘겼다.

물론 당장이라도 떵떵거리며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일을 그르칠 만큼 멍청이는 아니다.

무엇보다 다른 한편으로는 찝찝한 마음도 있었다.

새파란 후배였던 김민주가 보여준 모습.

그리고 청소부 출신의 대표가 대놓고 꼽을 준 것이 아직도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까닭이었다.

그렇게 오묘한 표정을 짓고 있길 잠시.

"죄송합니다, 제가 좀 늦었죠."

"아이고, 우리 인턴 왔네!"

"어서 와요, 어서 와!"

문소연이 뒤늦게 회식 장소에 도착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 그의 얼굴이 환해졌다.

"아 소연 씨, 여기 앉아요."

"네, 네. 감사합니다."

자신의 옆자리에 그녀를 앉힌 최종혁은 곧바로 그녀의 잔에 술을 따랐다.

"오늘 첫날인데 힘드시진 않았어요?"

"아, 많이 도와주셔서 괜찮았어요."

"다행이네. 더 귀찮게 해도 되니까 많이 물어보세요."

"네, 감사합니다."

이내 문소연이 잔을 들자, 최종혁은 곧바로 자신의 잔을 내밀었다.

"저도 한 잔 따라줘요."

"아, 네!"

"소연 씨 혹시… 남자친구 있어요?"

"네, 네?!"

"아하하, 농담이에요 농담! 그렇게 놀라니까 내가 더 당황스럽네."

최종혁은 이미 다른 것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렇게 문소연에게만 온 신경을 쓰며 계속해서 말을 붙이기도 몇 시간.

"자, 한 잔 더 마셔요."

그는 끊임없이 문소연에게 잔을 권했다.

하지만 이후 약속이 있는 문소연은 손을 내저으며 거절 의사를 내비쳤다.

"아, 아니에요. 저 이제 그만 가봐야 해서...."

"에이, 빨리 받아요. 빼지 말고."

"정말 가봐야 하는...."

"스읍. 선배들 다 있는 자리에서 먼저 일어나려고요? 이러면 정규직 전환 때 불리할 수도 있는데...."

이내 최종혁이 눈을 게슴츠레 뜨며 말했다.

문소연은 기가 찰 노릇이었다.

랭크 심사 평가 위원회 소속에게 이 무슨 같잖은 협박인가.

하지만 그 사실을 알 턱이 없는 최종혁은 연신 그녀에게 유세를 떨어댔다.

"요즘 같은 시대에 믿을 만한 구석 하나는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나도 이번 심사에서 승급하면 어엿한 팀장급인데."

"...선배님은 믿을 만한 구석이 있으신가 봐요?"

"...."

문소연의 물음에 최종혁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감히 인턴이 지금 누구에게 그런 말을 지껄이는 건가 싶었다.

"야야, 그러지 마. 시대가 어느 땐데 술을 강요해?"

이태범 팀장이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했는지 손을 휘저으며 최종혁을 말렸다.

"소연 씨, 약속 있으면 먼저 가 봐요. 괜찮으니까."

"그, 그럼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냐, 아냐. 먹고 싶은 사람들끼리 먹는 거지 뭐. 빨리 가 봐요."

"그럼...."

문소연은 이내 꾸벅 인사를 하곤 자리를 떴다.

최종혁은 가게를 나서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쯧, 혀를 차길 한 차례.

그녀의 빈자리를 굳은 표정으로 흘기며 술을 홀짝였다.

***

서울 본부 근처 카페.

홀로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던 참에 마침 기다리던 사람이 도착했다.

"미안해요. 좀 늦었죠?"

인적성 평가위원회 작전 5팀 담당, 문소연이었다.

"괜찮습니다. 저도 방금 도착했습니다."

그녀를 부른 이유는 어디까지나 중간 점검을 위해서였지만, 그보다는 최종혁의 동태를 살피려는 목적이 조금 더 컸다.

근데 어째 마주 앉은 그녀의 두 볼이 꽤나 상기되어 있었다.

"술 마셨습니까?"

"아, 네. 오늘 5팀 회식이 있었거든요."

"미팅도 있는데, 좀 적당히 빼지 그랬습니까."

"그럴 생각이었는데... 선배가 자꾸 권해서 어쩔 수 없이...."

"허, 시대가 어느 땐데.... 선배 누구요?"

"최종혁 씨요."

"...."

이럴 줄 알았다.

하여간 마음에 안 드는 놈이라니까.

"뭐, 일단 그건 둘째 치고. 어떻게, 심사는 잘 되고 있습니까?"

"네, 대체로 특별히 문제 될 만한 건 없어요."

그녀가 가방에서 평가 시트를 꺼내며 말을 이었다.

"이태범 팀장님은 기본적으로 성실하시고 팀원들이랑도 사이가 좋아요. 작은 부분까지 잘 챙겨주시려고 하고요. 다른 분들도 모두 좋은 분들이에요. 다만...."

"다만?"

"최종혁 씨가 조금...."

아니나 다를까, 또다시 그 이름이 튀어나왔다.

"물론 많이 도와주시고 있고, 나쁜 분은 아닌데... 뭐랄까, 조금 강압적인 면이 있어요."

"하아...."

역시나.

그 성격은 어딜 가질 않는군.

"혹시 사적인 부탁이나 직급을 내세워서 뭔가를 강요한 적은 없었습니까?"

"가끔 그러시긴 하는데… 뭐, 농담이겠죠."

"문소연 씨."

나는 사뭇 진지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게 농담인지 아닌지는 듣는 사람이 판단하는 겁니다."

"...."

"그래서… 정말 농담이었습니까?"

그녀의 시선이 바닥을 향했다.

반응으로 보나, 그 새끼 성격으로 보나 절대 농담일 리가 없다.

내버려 두다간 회귀 전처럼 일을 내도 낼 놈이다.

웬만하면 이번 기회에 잘라내고 싶은데.

"감점될 만한 요소는 더 없습니까? 폭언이나 폭력을 행사한다던가."

"아뇨. 그런 건 전혀 없었어요."

"그럼, 다른 점은요?"

"전혀요. 솔직히 강압적인 부분이 있다 해도 그것만으로는 감점 사유가 안 되고요. 무엇보다 업무 태도, 대인관계 등. 평가 기준으로만 따지면 모두 상위권이에요."

"쯧."

헌터 이름에 먹칠을 할 새끼라는 걸 알면서도 내쫓을 수가 없다니.

뭐라도 일이 하나 터질 때까지 기다려야 되는 건가.

'아니지....'

그러면 지금 이 고생을 하는 게 다 무슨 의미가 있겠어.

"아, 그러고 보니 방금 회식 자리에서 이상한 말을 했는데...."

"이상한 말이요?"

내가 되묻자, 문소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저한테, 요즘 같은 시대에 믿는 구석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냐고 하더라고요."

"그래서요?"

"그래서 제가 선배님은 그런 구석이 있냐고 되물으니까... 대답을 못 하시더라고요. 이게 무슨 뜻일까요?"

"뭐... 뻔하죠."

본인한테도 믿을 만한 구석이 있다는 거지.

'누군가 최종혁의 뒤를 봐주고 있다?'

설마 실기 시험에서 높은 성과를 보여준 것도 그것과 연관이 있는 걸까.

만약 뒤를 봐주고 있는 놈이 미리 귀띔이라도 해준 거라면....

'평가위원회 중 한 명이라는 소린데....'

이 씨 부녀를 제외하면 남은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사외 이사 한 명과 사내 이사 세 명.

그중 한 명이 최종혁과 연관이 있다.

"그러면 제가 인적성 평가 담당자라는 것도 알고 있지 않을까요?"

"아뇨. 그렇진 않을 겁니다. 인적성 평가는 저랑 이아영 본부장 둘이서 진행하고 있는 일이니까. 알고 있다고 해봤자 각 팀장뿐이겠죠."

만약 정말 평가위원회 중 한 명이 뒤를 봐주고 있다면 더욱 곤란해진다.

실격 처리는 둘째 치고, 모든 심사를 높은 성적으로 마무리하겠지.

쯧, 그 새끼가 뭐가 이쁘다고....

'...잠깐.'

별다른 생각 없이 한 말이었지만, 문득 그 말이 머릿속에 꽂혔다.

왜 그런 놈의 뒤를 봐주고 있는 거지?

서로 좋아 죽는 사이라 아무런 대가 없이 밀어주는 게 아니고서야, 분명 주고받는 게 있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놈은 그래 봤자 C급 헌터.

이사급에게 도움이 될 만한 걸 줄 수 있는 능력도, 권한도 없을 텐데?

'아니면 도리어 낮은 직급만이 가능한 일을 부탁했다거나…?'

그렇게 한참 동안 머리를 굴렸지만, 마땅히 이렇다 할 만한 건 떠오르지 않았다.

"일단은 조금 더 지켜보도록 하죠."

지금 상황으로선 뭔가를 판단하기엔 정보가 부족하다.

조금 더 알아보는 수밖에.

"뒤를 봐주고 있는 게 누군지는 저희 쪽에서 알아볼 테니, 문소연 씨는 계속 평가 진행해주세요."

"네, 맡겨주세요."

"그럼 들어가시죠. 힘들어 보이는데 집에 가서 푹 쉬시고."

나는 그녀가 내민 평가지를 챙기며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집으로 향하면서도 내 머릿속에선 조금 전 이야기가 계속해서 맴돌았다.

뒤를 봐주고 있는 누군가.

그리고 C랭크 헌터에게 부탁할 만한 일.

대체 무슨 거래가 있었던 걸까.

***

"아, 소연 씨! 잠깐 이리로 와줄래요?"

이른 오전, 작전 5팀 사무실.

문소연이 출근하자마자 이태범 팀장이 다급하게 그녀를 호출했다.

"이거 이번 주 작전 스케줄 초안이거든? 내가 지금 급하게 회의 가야 해서 그런데, 이거 마무리 좀 해서 통제팀에게 넘겨줘요."

"마, 마무리요?"

"어려울 거 없어요. 날짜랑 시간, 장소만 정리해서 표로 만들기만 하면 되니까. 하다가 모르겠으면 종혁이한테 물어보고요."

"아, 알겠습니다."

"그럼 부탁 좀 할게요. 급한 거니까 점심시간 전까지는 보내주고요."

이 팀장은 그 말을 뒤로하고 곧바로 사무실을 뛰쳐나갔다.

문소연은 자리로 돌아가 건네받은 종이를 살펴봤다.

'...하나도 못 알아보겠는데.'

상형 문자라고 해도 믿을 만한 필체로 휘갈긴 글씨들.

어떻게든 눈을 부릅뜨고 읽어보려고 했지만, 아무리 뚫어지게 봐도 단 한 문장도 알아볼 수 없었다.

결국, 문소연은 해독을 포기하고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기 위해 사무실을 둘러봤다.

하지만 모두가 토벌을 나간 건지 사무실에 남아 있는 사람이라고는 최종혁, 한 명뿐이었다.

김준우가 했던 말이 꽤나 마음에 걸렸지만… 별다른 수가 없었기에 문소연은 결국 그에게 다가갔다.

"저… 선배님, 이거 뭐라고 쓰여있는 건지...."

"지금 일하고 있는 거 안 보여?"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날카롭게 쏘아붙이는 최종혁.

어제와는 상반된 그의 모습에 문소연은 퍽 당황스러웠다.

"아. 죄송합니다, 선배님. 그래도 이것만 좀 봐주시면...."

"아 씨… 야, 내가 왜 니 선배야. 헌터도 아니면서."

"...."

"그리고, 내가 뭐 도와달라고 하면 무조건 도와줘야 하는 사람이야? 좀 오냐오냐해줬더니 아주 예의를 밥 말아 처먹었네?"

그가 손가락질과 함께 마구잡이로 말을 내뱉었다.

하지만 문소연은 갑작스러운 호통에 겁을 먹기보다, 하루아침 새에 사람이 바뀌어버린 것이 더 당황스러웠다.

"하여간 요즘 것들은...."

최종혁이 그렇게 중얼거리던 차에 때마침 그의 핸드폰이 울렸다.

"...."

발신자를 확인한 그는 굳은 표정으로 핸드폰을 들고 서둘러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어쩔 수 없지."

최종혁이 나간 자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문소연은 결국 별다른 소득 없이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곤 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 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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