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앨런의 손에는 커다란 짐 가방이 들려 있었다.
분명 무엇을 넣든 그 크기와 무게가 늘어나지 않는 마법 가방을 가지고 있는 앨런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자신의 몸 만큼이나 큰 짐 가방을, 그것도 다른 이를 시키거나 마법을 쓰지도 않고 이렇게 낑낑대며 직접 들고 온 것이었다.
그 의도를 쉬이 눈치 챈 르메인이 높낮이 없는 말투로 물었다.
"미안하다 생각하라는 말인가."
"그나마라도 알아보시니 다행입니다."
굳이 들고 온 짐 가방을 르메인의 책상 옆에까지 들고 와 내려놓은 앨런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리고는 가방 손잡이 자국이 진하게 남은 손바닥을 르메인 앞에 펼쳐보이며 말했다.
"전하께서 아드님을 잠깐 과하게 아끼시는 바람에 늙은이가 이렇게 고생을 하고 있으니, 이를 어찌하시겠습니까?"
르메인은 보고 있던 서류로 눈을 가져가며 대답했다.
"나의 검이 아닌 이들을 믿을 수가 있어야지."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정말 카에라를 보내면 어쩝니까?"
앨런의 눈이 치켜올라갔다.
분명 기사단 카렌을 보내기로 했던 르메인이었다. 그런데 이번 일에 브리센이 깊이 얽혀있음을 알고는 곧장 카에라를 출정시켰다. 그것도 앨런이 칼리안이 시킨 일을 하기 위해 왕실 전서구 담당자를 찾아간 그 잠깐 사이에 말이다. 그야말로 날림 출정이 따로 없었다.
덕분에 앨런은 이렇게 짐을 싸들고 왕궁에 와야 했다. 믿는 구석이 있다는 것처럼 꼴랑 열 명만 남겨둔 카에라의 기사들을 대신해서 르메인의 호위를 맡게 되었으니까.
"전하께서 이렇게 칼리안 왕자님에게만 특별한 대우를 하시게 되면 지금으로서는 왕자님에게 좋을 것이 전혀 없습니다. 편애한다 여기는 순간 순간마다 칼리안 왕자님 생명줄이 깎인다는 말입니다. 그런 일이 없게 하려고 아무에게도 관심을 안보이셨던 분 아니셨습니까?"
르메인이 걱정 말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그 일에 대해서는 생각을 해 둔 바가 있다는 말이었다.
"그래서 내일 점심은 두 왕자와 함께 하기로 했네."
"고작 밥 한끼와 카에라를 같은 무게로 두겠다는 말씀이십니까?"
"두 아이의 사이도 좀 볼 겸."
왕자간의 세력 싸움이 일어날 조짐이 있는지 보려 한다는 말이었다.
"볼 것도 없지요. 당장 피바람이 안 부는 것이 이상할 지경이니."
그렇게 말한 앨런이 소파로 걸어가서 털썩 앉았다. 그런 앨런을 보던 르메인이 안경을 고쳐쓰며 물었다.
"경이 볼 때 그렇게까지 사이가 안좋은가?"
하나하나 살펴보는 수준까지는 되었으나 셋을 한꺼번에 놓고 볼 정신까지는 없는 르메인을 향해 팔자에도 없던 호위 노릇이나 하게 된 앨런의 한쪽 입꼬리가 말아올려졌다. 그것을 본 르메인이 얼른 말을 막았다.
"아니야. 말하지 말게. 알아 들었으니."
투견장의 개들도 왕자들보다는 사이가 좋을 것이라 이야기 해주려던 앨런이 고개를 끄덕이며 싱긋 웃었다.
대체 칼리안은 무슨 생각으로 저런 놈을 주워다 놨느냔 말이다.
정작 앨런과 가장 많이 붙어 있게 된 르메인이 라트란이 있는 방향을 잠시 쳐다봤다.
* * *
잠에 들기 전.
얀과 마주 앉아 차가운 민트 차를 마시며 쉬고 있던 칼리안에게 아르센이 찾아왔다. 아르센은 헤일로부터 빼앗아 온 신물들을 내려놓은 뒤 고생했다 말하는 칼리안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켜보고 있으니 라트란 백작의 언행이 좋지 않았습니다. 감히 제 생각을 말씀드리자면 그에 대한 처벌도 필요할 것 같습니다."
칼리안은 익히 예상했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무슨 말을 했습니까?"
그 말에 아르센이 난감하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그 불손한 내용을 제가 왕자님께 전해드려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대개 마법사들은 암기력이 좋다. 복잡한 주문식과 마법진 구성, 마나 배열 등등, 외워야 할 것이 한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칼리안을 호위할 단 한 명의 마법사로 뽑힌 아르센은 마법사들 중에서도 암기력이 매우 우수한 편에 속했다. 그러니 헤일이 했던 짧은 말을 억양까지 완벽히 외우는 것 쯤은 아르센에게 있어 별 어려운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것을 간과한 칼리안은 별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욕을 먹었다.
그래서 칼리안은 그간 아르센에게 엄한 태도를 보였던 것을 얼른 반성한 뒤, 방에 구금하려던 헤일을 고문실 바로 옆의 옥사로 보냈다.
지하 감옥의 옥사 중 가장 습하고 어두운 곳이었다. 그런 곳에 깔린 짚풀 아래에 무엇이 살고 있을지 온 몸으로 배워보라는 의미를 담은 처사였다. 왕실 모독죄는 왕자의 권한으로도 충분히 처벌을 내릴 수 있는 죄목이었으니까.
그 후 칼리안은 아르센과 마법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거나, 키리에와 검을 주고 받은 뒤 고쳐야 할 것을 일러주거나, 얀과 수다를 떨며 카이리시스에서 올 기사단을 기다렸다.
그리고 얼마 후.
"카에라······ 같은데."
칼리안은 그 위용도 당당한 카에라의 기사들이 라트란에 입성하는 것을 보며 입을 딱 벌렸다. 앨런이 왜 왕궁에 있어야 했는지, 그것이 왜 앨런의 업이라 말했는지를 이해하는 데에는 눈 깜빡할 시간도 필요하지 않았다.
카에라는 라트란에 도착한 뒤 딱 하루를 쉬었다.
그리고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사망'한 노튼을 제외한 두 죄수, 즉 에일라와 헤일을 데리고 곧바로 카이리시스를 향해 출발했다.
물론 사망 후 성 밖으로 내보내진 뒤 다시 잘 깨어난 노튼은 아내와 함께 휘트린 영지를 향해 가고 있을 터였다. 그의 새로운 신분 증명서는 앨런이 보낸 사람을 통해 영지로 전달 될 예정이었다.
"무탈한 여정이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렇게 칼리안은 새로운 영주가 오기 전까지 영지 관리 대리인직을 맡게 된 말콤에게 감사 인사를 받으며 라트란을 떠났다.
다시 시간이 지났다.
헤일은 작위가 해제됐고 평생을 감옥에서 보내게 되었다.
그리고 에일라에 대한 형이 집행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제 막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히리스카 숲을 보며 앨런의 말을 전해들은 칼리안은 고개만 끄덕였다.
제11장. 의도한 건 아니었어 (1)
카이리스 북쪽에 위치한 카이리시스는 여름이 짧고 겨울이 길었다. 때문에 9월이 시작되자 곧바로 선선한 아침 바람이 불었다.
그렇다 하여 벌써부터 창문을 닫아 두어야 할 만큼의 서늘함은 아니었으므로 체르밀 궁의 두 왕자가 식사 중인 곳에도 아직은 창문이 열려 있었다.
열린 창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테이블을 장식한 화병의 꽃잎을 흔들었다. 그러자 말 없던 두 왕자의 눈이 똑같이 꽃에 가 닿았다.
결국 며칠동안 한번도 마주치지 않았던 둘의 눈이 결국 서로를 향하게 되었다.
란델은 아침마다 한마디씩을 건네던 막내를 대신해 앉아있는 둘째를 보며 말했다.
"칼리안이 떠난 뒤로 술을 입에 대지 않는다 들었다."
언뜻 들으면 칭찬이었다. 잘했다는 말일 수도 있었다.
어린 나이에 그렇게 줄창 술을 마셔댔으니 이제라도 그 좋지 않은 버릇을 고쳐 다행이라는 소리로 여길 만한 말이었다.
그것이 일반적인 형제였다면, 분명 그 뜻이 맞았을 것이다.
"아쉬우십니까."
하지만 그런 의미가 아님을 아는 플란츠는 이렇게 답했다.
란델은 대답 없이 잠시동안 플란츠의 눈을 들여다 보았다. 언젠가 칼리안이 느꼈던, 사람의 속내를 끝까지 헤집어보는 그런 시선이었다.
그 안에서 무엇을 찾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란델은 앞에 놓인 접시로 다시 눈을 돌렸다. 그리고 지나가는 소식이나 전해주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오늘 광장에 레니시타 잎이 깔렸더구나."
레니시타 잎은 그 생김이 나뭇잎과 유사하여 모두가 잎이라 부르고는 있지만 사실은 레니시타라는 이름을 가진 선인장의 넓적한 가시였다. 주변의 물기를 빨아들이는 성질이 강했다.
간혹 카이리스 왕실에서 하츠아라 광장 바닥에 이 레니시타 잎을 까는 경우가 있었다. 레니시타 잎 위에 단두대를 설치하여 광장의 하얀 바닥에 핏물이 들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지금 란델은 칼리안을 습격했다 체포된 범인의 참형이 진행된 일을 입에 올린 것이었다. 아침 식사 자리에 올려두기에는 썩 좋은 화제가 아니었다.
란델의 말을 들은 플란츠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평소 말도 없던 란델이 굳이 먼저 입을 연 이유를 눈치 챘기 때문이었다.
"오해가 깊으신 것 같은데요."
그래서 플란츠는 실리케가 또 칼리안에게 손을 댔는지를 묻고 있는 란델에게 이와 같이 대답했다.
사실 란델도 이번 일이 실리케와 연관이 없으리라는 것을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다. 지금 실리케가 어떤 상황인지 모르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따라서 란델은 플란츠의 말을 의심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조금만 더 조용히 지내자꾸나."
관계의 끝을 염두에 둔 말이었다.
언젠가는 서로가 서로에게 비수가 되겠지만 아직은 그럴 때가 아니라는 소리였다.
란델은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고, 플란츠는 잠시 앉아 있었다.
마지막까지 서 있는 것이 과연 란델일지, 혹은 칼리안일지. 플란츠는 그것을 가늠해볼까 하다가 곧 그만두었다. 대신 연회장에서 마지막으로 보았던 칼리안을, 정확하게는 칼리안이 숨긴 것을 떠올렸다. 플란츠가 란델의 빈 의자를 보며 중얼거렸다.
"이 이상 어떻게 더 조용하라는 말씀이신지."
* * *
칼리안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게 다 비 때문이야."
지금 이런 상황이 생긴 것은 순전히 비 때문이라고.
라트란에서 출발할 때, 칼리안은 분명 시아를 히리스카 숲 인근까지만 데려다주기로 마음을 먹었었다.
그런데 얼마 전 내렸던 그 유난스러운 비 때문에 산에서 토사가 잔뜩 흘러내렸고 산을 통과하는 유일한 길이었던 왕도를 막아버렸다.
아르센과 칼리안의 마법으로 해결 될 만큼의 상황이 아니었으므로 일행은 어쩔 수 없이 왔던 길을 되돌아가야 했다. 그리고 아침에 작별 인사를 나누었던 햄프티쉬 자작의 저택에 다시 가서 하루를 더 머물렀다.
칼리안의 감정을 상당히 고생시켰던 바로 그 비 때문에 결국 몸까지 고생을 한 것이다.
"카이리시스로 돌아가면 공간이동 장치를 만들어야겠어."
칼리안의 말에 얀이 매우 좋아했고, 아르센은 못 들은 척 했다.
칼리안이라면 분명히 적임자를 찾아 맡겨놓고 감독만 할 테고 지금 칼리안이 가진 인맥 중에 가장 한가하면서 능력있는 마법사는 아르센 뿐이었으니까.
어쨌거나 당장은 공간이동 같은 것은 꿈도 꿀 수 없었으므로 칼리안 일행은 조금 돌아가는 다른 경로로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새로운 길로 쭉 내려오다보니 히리스카 숲의 코앞에 떡하니 도착해버렸다.
숲 앞에 시아를 데려다놓고 잘가라고 인사를 하려다 보니 그날 밤을 보낼 곳이 마땅치가 않았다. 예정에서 벗어난 길로 이동 중이기 때문이었다.
"마을에 같이 가. 루카 있어. 장로도 있어. 대장, 자고 내일 가."
그런데 마침 시아가 이렇게 일행을 초대했다.
그것은 그동안 시아가 꺼낸 말 중 가장 현명한 소리였으므로, 칼리안은 그리하겠다 대답을 했다. 노숙을 하기 싫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엘프 마을을 보고 싶다는 호기심이 더 컸다. 물론 그런 마음이 비단 칼리안만의 것은 아니었는지 칼리안의 대답을 들은 일행들은 매우 좋아하는 얼굴을 했다.
엘프의 마을은 인간들의 눈에 띄지 않았다.
무슨 수를 쓰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로지 엘프들만이 찾을 수 있는 길을 따라 들어가야 마을에 들어설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시아의 뒤를 따라 숲 속으로 굽이굽이 들어가자 정말 놀랍게도 어느 한 순간 마을이 딱 보였다. 한 발자국을 뒤로 물리면 울창한 숲이 펼쳐져 있는데 다시 한 발자국을 앞으로 디디면 커다란 계곡과 여러 채의 돌집이 모여 있는 멀쩡한 마을이 짠 하고 나타나는 것이다.
마을까지 일행을 안내한 시아가 장로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오겠다며 어디론가 사라진 뒤,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명의 엘프가 일행의 앞으로 다가와 말했다.
"인간들의 왕이 누구인가?"
그 말에 칼리안이 얀을 쳐다봤다. 무슨 말인지 몰라 잠시 어리둥절해서였다. 그런데 얀은 칼리안을 보고 있었다.
칼리안이 주변을 둘러보니 모든 일행의 눈이 칼리안을 향하고 있었다. 그것을 본 엘프가 칼리안에게 다가오자 칼리안이 재빨리 해명했다.
"인간의 왕 같은 그런 대단한 사람은 여기 없어."
"그런가? 장로께서는 인간들의 왕을 만나고 싶어하신다."
"평생 못 만나겠는데."
분명히 르메인의 탄신 기념 축제 때 엘프들도 축하 사절을 보냈다 했는데 그들과 달리 이곳의 엘프들은 인간의 체계를 잘 모르는 것 같았다. 어쨌든 이 자리에서 그런 것까지 상세히 설명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 칼리안이 말했다.
"인간의 왕은 아니지만 내가 이 일행의 대표인 것은 맞아."
그러자 엘프가 고개를 끄덕이며 칼리안을 향해 말했다.
"좋다. 나를 따라와라."
칼리안은 그렇게 엘프를 따라갔고 마을의 가장 큰 집에 있던 장로와 마주하게 됐다. 히나와 같은 은발을 가진 상당한 미남형의 장로는 칼리안을 만나자마자 이렇게 말했다.
"히리스카 마을의 장로인 제르라 하네. 시아는 내 아들이네."
그 말에 칼리안은 속으로 적잖이 놀랐다. 시아가 장로의 아들이어서 놀랐다기 보다는 장로의 아들이 조각품이나 팔러 다녔다던 사실 때문이었다. 한 마을의 장로라면 인간으로 치면 영주 정도 되는 것이 아닌가?
아무튼 인사를 받았고 상대는 인간도 아니었으니 칼리안은 고개를 짧게 끄덕이며 통성명을 했다.
"칼리안. 칼리안 레인 카이리스."
그 말에, 제르의 뾰족한 귀가 한번 움직였다. 제르가 칼리안을 보며 말했다.
"반갑네."
"나를 보고 싶다고 했다던데."
적당히 시아를 데려다 준 것에 대한 감사 인사나 받겠거니 하고 물어본 말이었다. 그런데 제르의 말은 칼리안이 생각한 것과는 아주 많이 달랐다.
"맞네. 그대에게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보자고 했네."
칼리안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오늘 처음 본 사이에, 그것도 아들을 구해다 준 은인한테, 고맙다는 인사는 못할 망정 대뜸 뭘 부탁하겠다니.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방금 이 곳에 도착한 내가 왜 엘프들의 부탁을 받아줘야 하는지 이해가 어려운데."
피로와 짜증이 딱 절반씩 섞인 칼리안의 말에 엘프 장로 제르가 대답했다.
"그대가 인간 일족의 왕이기 때문이다."
"일족 아니고 카이리스. 왕 아니고 왕자."
"그거나 그거나."
누가 잘못 들으면 칼리안 목 날아갈 소리를 하는 제르를 향해 칼리안이 사납게 웃으며 말했다.
"조금, 많이, 다른 뜻이라서."
이런 이야기가 오고 가는 통에 옆에서 한 마디도 못하고 이 꼴을 보고있던 얀은 제 머리를 다 쥐어 뜯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아무튼 그대가 우리 일을 좀 도와줬으면 한다."
상상 이상으로 상식적이지 않은 말을 꺼낸 제르는 칼리안의 의견을 묻지도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얼마 전에 돌아왔던 루카가 이번에는 다른 두 엘프를 데리고 마을 밖으로 나갔네."
"아니, 잠깐만."
"그 후로 열흘이 넘게 돌아오지 않아서 사흘 전에 그들을 찾아오려고 두 명이 더 나갔는데 돌아오지 않는군."
그게 지금 나랑 무슨 상관이냐고 물어보려는데 제르의 말이 끊이질 않았다. 도무지 중간에 끼어들 만한 틈이 없는 것이다.
"인간 세상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고 그리 말을 했는데도 기어이 나가서 사라져버렸으니. 그래서 그들을 찾는 것을 그대가 좀 도와줬으면 좋겠네. 이 곳의 엘프들은 인간 세상을 잘 모른다네. 더는 엘프만 내보낼 수가 없겠더군."
"여기 엘프 다섯 명이 사라진 것을 나더러 찾아달라는 말인가? 내가 왜?"
"그대가 인간 일족의 왕이니까."
도돌이표가 따로 없다.
엘프가 인간 마을에서 사라졌고 없어진 이들을 찾아오기에는 바깥 세상을 잘 알지 못해서 때마침 찾아온 칼리안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뭐 그런 말인 것 같았다.
그렇지만 아무리 그래도 칼리안이 해결을 해줘야 한다는 이유가 어딘지 엉성할 뿐더러 도움을 요청하는 태도도 영 좋지 않았다.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고 있는건지."
결국 칼리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미 밖에 어둠이 내렸으나 칼리안은 그 길로 엘프 마을에서 밖으로 나가려 했다. 이런 곳에서 불편하게 하루를 묵느니 그냥 노숙을 하겠다는 심산이었다.
그러자 제르가 다시 입을 열어 칼리안을 붙들었다.
"그냥 도와달라는 말은 아니네. 그에 대한 대가를 주겠네. 물론 시아를 구해준 것에 대해서도 대가를 치를 것이고."
칼리안은 얼핏 얀에게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엘프들은 빚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라 뭐 하나라도 도움을 받으면 자신들의 기준에 맞는 대가를 주며 꼭 갚기는 한다고.
칼리안의 눈이 잠시 키리에를 향했다. 엘프의 피가 반만 섞였던 키리에도 그랬었으니까.
장로가 일어나 있는 칼리안을 보며 말했다.
"지그프리드의 땅으로 가는 길이라던데. 맞나?"
"맞아."
그러자 장로가 고개를 끄덕이다 대답했다.
"인간의 길은 너무 느리지만 숲의 길을 쓰면 날짜를 넷에 하나로 줄일 수 있을 것이네."
두 달을 넘게 가야 하는 길. 그 거리를 사 분의 일로 줄여주겠다는 말이었다.
'두 달 거리를 보름 안에 갈 수 있다고?'
칼리안의 어깨가 움찔했다.
칼리안이 재빨리 몸을 돌려 자리에 다시 앉았다.
엘프가 다섯 명이나 사라졌다니!
당연히 도와줘야지.
제11장. 의도한 건 아니었어 (2)
칼리안이 마음을 바꾸자 장로 제르가 씩 웃었다. 그것을 본 칼리안은 조금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그 전까지 계속 뻣뻣하게 굴다가 숲의 길이라는 말에 태도를 싹 바꾼 것이니까.
애초에 제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자리에 앉았으니 어떻게 포장할 말도 없었다. 때문에 칼리안은 제르를 보며 솔직하게 말했다.
"그래. 숲의 길 때문에 하는 것이니까 약속은 꼭 지켜."
"인간 일족의 왕은 숨김이 없군. 걱정 말게. 엘프는 약속을 중히 여기는 종족이네."
칼리안이 미간을 찌푸렸다.
약속을 지키겠다는 말 때문은 아니었고 아까부터 계속 입에 담는 호칭이 매우 거슬렸던 탓이다.
"이름 말해줬으니 더는 멋대로 부르지 말고."
제르가 다른 말 없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칼리안은 그런 제르를 향해 물었다.
"없어진 엘프들. 내가 참고할 만한 내용이 있나?"
"모두 20대 초반에서 중반의 남자 엘프라네."
"싸움은 할 줄 아는 이들인가?"
"그대의 기사들에게야 상대도 안되겠지만, 어느정도는 하네."
거기까지 이야기를 들은 칼리안은 조금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한 얼굴이 되었다. 싸울 줄 아는 엘프는 이렇게 찾으면서 더 오랫동안 사라졌던 시아를 찾으러 온 엘프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 시아는 왜 안찾았지?"
"그대가 보호하는 것을 루카가 보았다 했네."
"사람을 너무 믿는 것 아닌가? 아무리 그래도 아들이라면서."
제르가 자신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가리켜보이며 대답했다.
"시아의 얼굴이 겁을 먹은 것은 아니었다 하기에 그 말을 믿었지."
처음 만났을 때 잔뜩 겁에 질렸던 시아의 얼굴을 잠깐 떠올리는데, 제르의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이 마을의 어린 엘프는 모두 나의 아들이며 딸이라네."
그 말을 듣고 오해가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칼리안이 아, 하는 소리를 냈다. 아들이라는 말이 시아가 그의 진짜 친아들이라는 소리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것을 '내 어린 영지민' 정도로 이해한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루카라는 그 엘프는 무엇을 한다며 나갔는데?"
제르가 갑자기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으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돈을 벌러 나갔을 것이네. 한번 인간 마을에 다녀오더니 그대로 홀려서는, 돈을 벌겠다고 마을 밖으로 도망가기를 벌써 몇 번을 했네. 그래도 이렇게 돌아오지 않던 적은 없었는데."
조각품을 팔고 비싸 보이는 신물을 훔친 이유를 알게 된 칼리안이 실소했다. 생각해보니 라트란 사건에 칼리안을 얽히게 한 진짜 원흉은 바로 루카가 아닌가? 칼리안이 약간의 원망을 담아 제르에게 사실을 일러바쳤다.
"루카라는 그 엘프가 인간의 물건을 도둑질했다는 것은 알고 있나?"
그러자 제르의 얼굴이 매우 심각하게 바뀌었다.
그럴만 하다. 엘프가 물건을 훔쳤다는 것을 처음 알았을 때 칼리안도 적잖이 놀라지 않았던가.
"찾아 오면 제대로 교육좀 시켜. 그 엘프가 훔친 물건 때문에 내 속이 꽤 시끌시끌 했으니까."
"알겠네."
"아무튼 조각품을 파는 엘프는 흔치 않을테니. 내일부터 우리가 바로 찾아보지."
그리고 제르가 손가락을 들어 각각 오른쪽과 왼쪽을 가리켜보였다.
"일단 숲의 양 옆으로 도시가 둘 있네. 네리카와 스팅이라는 이름의 도시인데 그 곳부터 찾아보면 조금 나을것이니 참고하게."
두 곳의 이름을 기억해둔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와주어 고맙다는 말을 전한 제르가 다른 엘프를 시켜 일행이 머물 곳과 저녁을 준비해주도록 말했다.
* * *
엘프들이 내어 준 저녁식사는 생각 외로 괜찮았다.
생풀만 뜯어먹는 것은 아닌가 걱정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호밀 특유의 시큼하면서도 텁텁한 맛이 나는 흑빵에 오렌지 잼을 발라 맛있게 먹고 있는데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칼리안의 주변에서 들리기 시작한 대화 주제 때문이었다.
기사들 사이에서 얼마 전 라트란에서 있던 일들이 화두에 올라 있었다. 그다지 되새기고 싶지 않은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나오는 말을 막을 수는 없었던 칼리안은 그저 묵묵히 이야기만 들었다.
그런데 말이 조금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어떻게 하면 검을 산산조각 낼 수 있는가?'
라는 것에 대한 토론이 마치 칼리안 들으라는 듯 시작된 것이다.
"마력탄을 막으신 거겠지."
"검에 그을린 자국이 없었잖아. 게다가 마력탄은 안 터졌어. 깔끔하게 잘려 있었던 것 봤잖아."
점점 목소리가 커진다. 아마 그 말을 들은 칼리안이 직접 설명해주기를 바라는 모양새였다. 칼리안은 못 들은 척 빵만 뜯어먹었다.
칼리안의 눈치를 보다 대답이 나올 기색이 없자 기사들이 이번에는 아르센을 쳐다봤다.
"자네라면 어떻게 할 텐가?"
칼리안의 손이 잠시 멈추었다.
사실 칼리안도 궁금했었다. 과거, 아무리 오러를 사용해도 부서지지 않았던 검이 아르센의 손짓 한 번에 조각나지 않았던가?
질문을 받은 아르센은 대답 대신 손에 들린 나이프에 마력을 집중했다. 그러자 나이프에 곧바로 새하얗게 서리가 맺히며 얼어붙더니 '쩡' 하는 소리와 함께 긴 금이 생겼다. 그것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아르센이 조용히 말했다.
"물론 이런 나이프와 검은 제련하는 방법부터가 다르니 이와 같이 빠르게 얼려 깨뜨릴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유사한 방법으로 파괴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는 있습니다."
아직은 그 방법을 깨우치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 말에 기사 한 명이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검을 부순다니. 마음만 먹으면 소드마스터도 잡겠군."
그래. 잡혔다.
칼리안이 방금 말을 꺼낸 놈의 이름을 단단히 기억해두는 사이, 다른 기사들의 눈이 일제히 칼리안에게 와 닿았다.
"소드······?"
슬레이만의 기사들이다. 소드마스터라는 단어까지 나왔으니 칼리안의 부서진 철검에서 연상된 것이 어찌 없겠는가?
때문에 칼리안은 자연스럽게 웃으며 빵을 한번 더 뜯어먹었다.
어차피 슬레이만과 만나면 오러를 쓰는 것을 바로 들킬텐데 며칠 더 빨리 알게 되든 말든. 뭐 그런 심정이었다.
* * *
다행히 그 뒤로 기사들이 칼리안을 집요하게 따라다니며 사실을 묻거나 대련을 신청하는 일은 없었다. 칼리안이 자신을 대신해서 조사를 해오라며 모조리 숲 밖으로 내보내버렸기 때문이다.
때문에 기사들은 칼리안의 얼굴은 보지도 못한 채 평복을 입고 돌아다니며 수상한 정황을 보이는 도시가 있는지를 먼저 살폈다. 굳이 칼리안이 직접 나서지 않은 이유는, 우선 조심히 살펴보아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처음 제르의 말을 듣자마자 칼리안이 생각했던 것은 바로 엘프 노예 밀매였다. 젊고 건장한 엘프였고 제르의 말을 들어 보아 싸울 줄은 알지만 출중하지는 않은 것 같았으니 충분히 타깃이 될 만하다고 여겼다.
만약 왕자가 직접 나서서 노예 밀매 정황을 살핀다는 것이 알려지기만 해도 모조리 꽁꽁 숨거나 도망갈 것이 분명했으니 기사들만 밖으로 보냈던 터였다.
"특별히 이 근방에서 노예 밀매가 이루어지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용병인 듯한 이들은 간혹 보였으나 범죄와 연관 있는 것으로 보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렇게 조사를 마치고 숲으로 돌아온 유란이 이렇게 말을 했다.
그리하여 다음날에는 칼리안이 직접 밖으로 나왔다. 아직 조사에 참여하지 않았던 키리에만 대동한 채였다. 이미 마을을 뒤져본 기사들은 얼굴을 알아볼 수 있으니 함께 가지 않았다.
"어느 쪽으로 먼저 가시겠습니까?"
엘프 마을에서 나온 뒤 키리에가 이렇게 물어왔다. 숲을 가운데 두고 서로 반대편에 위치해 있는 스팅과 네리카 중 어디를 먼저 갈지를 묻는 말이었다.
질문을 받은 칼리안은 얀이 설명해준 것을 떠올렸다. 두 곳의 규모도 비슷한데다 두 도시의 영주가 비슷한 나이대의 자작이다 보니 서로 경쟁이 심하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다보니 둘 중 어디를 먼저 갈지 고르기가 힘들었다.
"일단 이름 짧은 곳 먼저 가자."
별달리 고민할 것이 없었다.
가장 가깝고 가장 이름 짧은 곳에서 출발해서 발을 넓히다 보면 뭐라도 나오겠지. 이런 생각이었다.
묵묵히 숲을 통과하여 두 시간 정도 말을 달리니, 스팅에 도착했다.
칼리안은 곧바로 로브를 걸치고 후드를 뒤집어 썼다.
스팅은 그리 큰 도시가 아니었다. 멀리서 보아도 라트란과는 확연히 다른 규모였다.
그래도 정돈은 잘 되어 있는 편이었고 오가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았다. 행색들을 보아 크게 경제적으로 어려운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유란의 말마따나 겉보기로는 특별한 문제가 없었으므로 칼리안은 일단 주린 배부터 해결하기로 했다. 칼리안이 키리에를 보며 짧게 말했다.
"고기. 고기 먹을래."
키리에가 평소보다 더 확실하게 웃음을 보였다. 그렇게 진지하게 고민하며 여기까지 와서 한다는 첫 마디가 고기라니. 짐짓 그것을 못본 척한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고기 먹고 무기 상점에 가서 쓸만한 검도 사고. 그리고 나서 조금 더 둘러보자."
"왜 더 좋은 검을 구하지 않으십니까."
"더 좋은 검이 필요한가?"
"일반적인 검은 왕자님께서 오래 사용하실 수 없지 않습니까. 오러를 담을 수 없으니까요."
키리에는 칼리안에게 검을 배우는 입장이었다.
때문에 칼리안은 키리에에게 자신이 어떻게 오러를 다룰 수 있는지를 설명해야 했고, 숨기는 것 잘 못하는 칼리안은 결국 키리에에게 자신의 비밀을 어느정도 알려주었다. 물론 베른과 키리에가 언제, 또 무슨 이유로 죽음을 맞이했는지까지는 알려주지 않았다.
"궁으로 돌아가면 어차피 쓰지도 못할 뿐더러."
이렇게 운을 뗀 칼리안이 손가락을 들어 하늘을 가리켜보였다.
"곧 좋은 재료가 저기서 떨어질 것 같아서."
키리에의 시선이 하늘을 향했지만 수수께끼 같은 그 말만으로는 이해가 어려웠다. 칼리안은 더 이상의 말 없이 레이븐을 움직였다. 다음 해 초에 제대로 된 운석이 떨어진다는 예언가같은 말을 하는 것이 그리 내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렇게 식당을 찾아 고기 많은 식사를 마친 뒤 밖으로 나와 무기 상점을 찾은 둘은 상점 주인이 하는 말에 서로의 얼굴을 보며 고개를 갸웃해야 했다.
"검이 없소."
"검이 없다니. 다 팔렸다는 말인가?"
"용병이오? 아직 어린 것 같기는 한데."
칼리안을 슥 쳐다본 주인이 대답 대신 이렇게 물었다.
칼리안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키리에와 자신을 순서대로 가리켜보이며 대충 대답했다.
"이쪽은 검사고 나는 마법사. 아무튼 검이 한 자루 필요한데 구하기가 어렵겠나?"
그러자 주인이 팔짱을 끼며 무언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 모양새가 말을 할까 말까 갈팡질팡하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지 매우 잘 알고 있는 칼리안이 품에서 은화 두 개를 꺼내 주인에게 건넸다.
그것을 받아 든 주인은 조금 더 망설였고 기어코 하나의 은화를 더 받은 뒤에야 주변을 살피며 조용히 말했다.
"얼마 전부터 암암리에 용병들이 모이는 것 같기는 했소."
"암암리에? 공고도 없이?"
주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더 작은 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러더니 오늘 낮에 병사 둘이 와서는 오늘 밤에 무기를 가져갈테니 모두 넣어두라 했소."
칼리안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어쩐지 좋지 않은 예감이 스멀스멀 차오르는 가운데 주인의 말이 이어졌다.
"그러니 용병이면, 저기로 가보시오."
그렇게 말한 주인이 턱짓으로 가게 밖 어딘가를 가리켜 보였다. 그의 시선이 닿아 있는 곳은 바로 영주성이었다.
칼리안의 눈이 조금씩 빛났다.
비슷한 규모의 소도시 두 개가 가까이 있고 은밀히 용병을 모으고 있는데다, 성내의 무기를 징수했다면 의미하는 바는 딱 하나였다.
"······ 전쟁을 치르려는 것이군."
유란이 사흘을 걸려 알아내지 못한 것을 밥 한끼 먹고 알아낸 칼리안이 고개를 숙이곤 볼을 긁적였다.
"그것 참."
돈을 벌고 싶어 하고 적당히 싸움 좀 하는 엘프가 어디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자신이 또 이상한 일에 발을 담궜다는 것은 더 잘 알 것 같았다.
히리스카 숲 엘프 마을은 두 도시의 사이에 있었다. 둘의 싸움이 벌어지면 당연히 엘프 마을에도 피해가 생길 터였다.
그러니 제르가 왜 굳이 칼리안에게 도움을 요청했는지 역시 알 수 있었다.
'엘프 마을을 찾아온 카이리스의 왕자가 두 도시간의 싸움을 막아주기를 부탁한 거였어.'
후드 아래 가려진 칼리안의 미간이 매우 많이 찌푸려졌다.
제11장. 의도한 건 아니었어 (3)
싸움의 징조를 확인한 칼리안은 곧바로 키리에를 영주성에 보냈다.
용병으로 지원을 하는 척 영주성에 간 키리에는 가장 만만해 보이는 병사에게 은화 몇 개를 건넸다. 그리고 임시 숙소에 다섯 명의 철없는 엘프가 옹기종기 모여있다는 사실과 이번 전쟁의 원인에 대한 내용을 전해 들었다.
"브리센 상단이 원인입니다."
브리센 상단.
"또 레넌 브리센이네."
칼리안이 헛웃음을 흘렸다.
하다하다 이제는 영지간의 싸움에까지 원인을 제공하는가 하는 마음이 든 까닭이다.
"이 주변에 들어오는 상단은 브리센 뿐인데 라트란 영지의 일로 인해 브리센 상단이 이쪽 지역으로는 발을 끊겠다는 말을 했다 합니다."
그렇게 이어진 키리에의 말은 이러했다.
두 영지 모두 밀 농사가 불가능한 지역이라 브리센 상단으로부터 밀과 호밀을 구매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브리센 상단이 멋대로 거래를 끊었다. 그나마 네리카 영지에 비축된 밀이 있어 스팅에서 밀을 좀 팔아달라 요청을 했고 네리카에서는 터무니없는 금액을 불렀다. 그로 인해 벌어진 다툼이 전쟁 준비로 이어졌다.
상황을 전해들은 칼리안은 '밀과 호밀'이라는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그리 걱정할 일이 아니라는 얼굴을 했다.
"식량이 부족한 상황에서 벌이는 싸움이니 오래 가지는 못하겠네."
당연한 일이다.
병사는 물론 용병까지 고용한 마당에 밀과 호밀 없이 어떻게 장기간 싸움을 이어가겠는가.
돌아가는 내용을 대충이나마 파악한 칼리안은 그 이상의 어떤 행동도 하지 않고 엘프 마을로 되돌아왔다.
"잘 다녀 오셨습니까?"
방에 도착해 문을 여니 의자에 앉아있던 얀이 반가워하며 일어났다. 그 인사에 고개를 끄덕여 보인 칼리안이 왕자의 인장을 꺼내놓으며 말했다.
"편지지 좀 가져와줘."
"네. 왕자님."
대답과 함께 밖으로 나갔던 얀이 곧바로 몇 장의 편지지와 펜, 봉랍을 가지고 돌아왔다. 칼리안은 얀이 보는 앞에서 똑같은 내용의 편지 두 장을 썼다.
'조만간 방문하게 될 테니 불편함 없이 머물다 갈 수 있도록 준비를 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그것을 본 얀은 조금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다.
대놓고 저렇게 대접해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자신의 인장까지 찍어가며 쓸 사람이 아니니까. 다만 칼리안의 표정이 그리 좋지 않았던 탓에 얀은 우선 얌전히 옆에 서서 기다렸다.
칼리안이 다 쓴 편지를 접어 봉투에 넣고 봉인하며 말했다.
"하루 이틀 내로 스팅과 네리카가 전쟁을 치를 분위기야. 장로는 그걸 막아줬으면 해서 나한테 부탁을 한 것 같아. 말로는 엘프 다섯을 찾아달라면서."
"왕자님을 속였다는 거네요?"
"그러게. 내가 속았네."
상황을 파악한 얀이 잠시 공작 아들처럼 굴었다.
깜짝 놀란 칼리안이 얀의 입을 막으며 욕도 막은 뒤에 재빨리 다른 말을 꺼내들었다.
"두 영주는 내가 이미 이 곳을 지나간 줄 알고 싸움을 준비하는 것 같으니까 내가 찾아간다고 하면 일단 멈출거야. 라트란에 기사단 카에라가 왔던 것을 다들 알고 있을 테니 나를 자극해서 좋을 것 없다는 것도 알겠지."
칼리안이 무슨 생각으로 저런 속물 근성 가득한 편지를 썼는지 이해한 얀이 물었다.
"그럼 그 뒤에는요? 편지 받고 일단 전쟁을 보류한다 해도 시간이 지나도 왕자님이 방문하시지 않으면 다시 싸우려 할 텐데요."
"엘프 다섯 명 돌아오겠지."
칼리안이 얀을 보며 웃었다.
"전쟁 막아주는 것 말고 엘프 찾아주는 게 거래 조건이었잖아. 싸움이야 나든지 말든지."
이렇게 말한 칼리안이 방금 쓴 편지 두 장을 달랑달랑 들고 제르의 집으로 걸어갔다.
* * *
칼리안이 편지 두 장을 내밀자 제르가 그것을 쳐다보다 물었다.
"이게 무엇인가?"
"편지잖아."
칼리안이 제르의 맞은편에 편한 자세로 앉으며 대답했다.
"스팅과 네리카에 하나씩 보내. 그럼 전쟁이 한 달 쯤 미뤄질거야. 집 나간 엘프들이야 당연히 돌아올 거고. 그 후에는 다시 안 나가게 당신이 알아서 잘 관리 해."
그렇게 대답한 칼리안은 제르의 책상을 톡톡 치며 말을 이었다.
"여기가 남아 있다면."
"그럼 전쟁은······!"
제르가 입을 다물었고 그것을 본 칼리안이 웃었다.
"그래도 엘프니까. 그래서 설마설마 했는데. 두 영주가 싸우리라는 것 알면서 속였네."
칼리안이 고개를 삐딱하게 틀었다.
그 모습과 썩 어울릴 법한 삐딱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나를."
엘프들이 거짓말을 못한다는 말이 진실을 숨기고 말하지 않는 것도 못한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을 몸소 배웠다. 그것을 제대로 알려준 제르의 입이 한참만에 열렸다.
"설마 이대로 떠나겠다는 말인가?"
"엘프 다섯 찾아달라며? 그래서 찾아줬잖아."
화가 난 것인지 부끄러운 것인지 제르의 긴 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제르는 입을 몇 번 달싹였으나 말을 하지는 못했다.
칼리안은 더 지체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책상 위에 올려진 자신의 편지를 손가락으로 가리켜보이며 말했다.
"그건 우리가 그 동안 먹고 잔 값으로 쳐. 우리는 내일 아침에 바로 떠날 거야. 숲의 길인지 뭔지는 필요 없으니까."
돌아서서 걸어나가는 칼리안을 보는 제르의 귀가 조금 더 빨갛게 변했다. 칼리안이 문 앞에 도착했을 때, 제르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대는 그대의 나라에서 전쟁이 나도 괜찮다는 말인가?"
"이유가 있으니 싸우겠지. 저러다 말 거고."
그렇게 말한 칼리안이 손가락을 들어 바닥을 가리켜보였다.
"여기가 그렇게 중요하면 네가 직접 지켜. 수작부리지 말고."
그 뒤 칼리안은 문을 열고 그대로 나가버렸다.
제르는 한동안 말을 잊은 얼굴로 칼리안이 나간 문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가 예상한 것과 너무 다른 일이 벌어져버린 까닭이었다.
* * *
한편.
방으로 돌아온 칼리안은 가만히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 표정이 그리 개운하지 않아 보여서 옆에 서 있던 얀이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심기에 거슬리는 일이 또 있으셨어요?"
"레넌 브리센. 브리센에서 식량 거래 독점한 것도 마음에 안 드는데 이런 식으로 제멋대로 굴고 있으니까."
"밀 거래 끊은 일 때문에요?"
"응. 그런 일 생기면 굶는 건 영주가 아니거든."
이 주변은 광산이 많은 곳이지 대규모 농사를 지을 만큼 비옥한 곳이 아니었다. 그러니 식량은 무조건 거래에 의지해 왔을 것이 분명했다.
"먹을 것 가지고 함부로 굴면 안되는데."
칼리안이 이렇게 중얼거리는데 방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누가 왔을지는 보지 않아도 분명했으므로 칼리안이 얀을 향해 문을 열어주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칼리안의 방에 들어온 것은 예상한대로 제르였다. 정확히 말한다면 표정이 참으로 볼만하게 변한 제르였다.
'왕자 씩이나 된다는 사람이 코앞에서 벌어지는 전쟁을 그냥 두고 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겠지.'
제르는 그런 칼리안을 보며 잠시 머뭇거렸다.
한참동안 기다려도 제르에게서 나오는 말이 없자, 칼리안이 눈썹을 찌푸렸다.
"내 얼굴 구경하러 왔어?"
제르가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네. 내가 설명을 하겠네. 조금만 들어주게."
"짧게 해."
제르의 입이 열렸다.
처음 만났을 때나 조금 전 제르의 방에서 보았을 때와는 확연히 달라진, 매우 조심스러운 목소리였다.
제르는 칼리안도 이미 전해들어 알고 있는 브리센 상단의 일을 말했다. 그러더니 다시 한번 고개를 숙여 보이며 말했다.
"루카로 인해 그대가 라트란의 일에 엮인 것을 알고 있었네. 그런데 이번 전쟁의 발단이 라트란에서 일어났던 일이니 차마 먼저 말을 할 수가 없었네. 루카가 연관되었다 하면 도와주지 않을 것 같아서 숨겼네. 정말 미안하네."
칼리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염치 없지만 우리는 그대의 도움이 필요하네. 그 문제는 우리가 해결을 할 수가 없어."
칼리안은 곧바로 답을 주지 않았다.
한동안 입을 다문 채 생각에 빠져 들었다. 제르는 초조한 얼굴이 되어 칼리안의 입만 쳐다보고 있었다.
칼리안은 속으로 한 명의 이름만 계속해서 되뇌고 있었다.
'레넌 브리센.'
란델에게로 진영을 바꾸어 문제를 일으키더니 멋대로 거래를 끊어서 전쟁을 유발하고 있었다. 그보다 앞서 다이아몬드 교역권을 두고 멜피르 폴룬을 없애려 들었던 것도 레넌이었고, 칼리안이 마신 독 타크리모사를 실리케에게 건넨 것도 레넌이었다.
계속, 계속, 계속!
발목을 잡는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
칼리안이 낮고 빠르게 말했다.
"아직 네리카는 가보지 않았어. 아마 비슷할거야. 가서, 그 곳에서도 싸움을 준비하고 있는지 확인해. 만약 맞다면 그 편지를 주고 오면 돼. 그리고 밀 말고 어떤 것들이 필요한지도 알아 와. 그럼 내가 영주들을 만날 테니."
"도와주겠다는 말인가?"
"엘프 돕는 것 아니니까 착각하지는 말고."
레넌 브리센을 이제 잡아야 할 것 같다는 생각에서 한 말이었다.
어찌됐건 제르의 얼굴에는 반가운 기색이 들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칼리안의 말이 이어졌다.
"난 누구 손바닥 위에서 노는 것 딱 질색이야. 그리고 꿍꿍이 있는 놈들이랑은 거래 안해. 그러니 이번에는 제대로 해."
"알겠네."
이렇게 답한 제르는 몇 번이나 고맙다는 말을 하며 밖으로 나갔다.
* * *
창 밖으로 햇살이 들었다.
칼리안은 뜬 눈으로 밤을 보냈다. 그리고 앨런에게 연락을 취했다. 이른 시간인 탓에 아직 집에 있었던지, 앨런이 곧바로 답했다.
- 밤을 새셨습니까?
칼리안은 은근히 아침 잠이 많았다.
때문에 이렇게 새벽같이 깨어 있을 때는 늘 밤을 샌 뒤였다.
- 네. 생각을 좀 했어요.
- 말씀하시지요.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내용을 전했다. 말을 들은 앨런이 놀라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럴 만 하다고 생각한 칼리안은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 정말 그리 하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앨런이 이렇게 되묻는 것이 처음이다. 칼리안이 웃었다. 보지 않아도 앨런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지 뻔했다. 분명 침대나 소파에 기대 앉아서 관자놀이를 주무르고 있을 것이다.
- 네. 전하께 말씀해주세요. 브리센 후작에게 레넌이 배신했다는 사실을 알려달라고.
- 레넌 브리센이 텐실과 거래한 정황을 브리센 후작에게 전하는 일이 어떤 의미인지 알고 계시는 것 맞으신지요?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에 앨런이 이렇게 말해왔다.
- 내전의 위험도 있고 왕자간의 싸움이 시작될 위험도 있다는 것 압니다. 그리고 브리센 후작이 돈을 좋아하는 것도 압니다.
이번에 헤일 라트란을 보며 알게 된 사실이었다. 헤일이 번 돈을 브리센 후작에게 건넨 뒤에 영지 하나를 선물 받기로 했다고 하지 않았던가.
- 그럼 왕자님께서도 브리센 후작에게 뇌물을 주겠다는 말씀이십니까?
- 아뇨.
그렇게 말을 전한 칼리안이 밤새 생각한 내용을 다시 한번 떠올리며 설명을 이었다.
- 브리센 후작에게 내용을 전하고, 다른 문제 없이 조용하게 레넌을 축출하면 브리센 상단을 사주겠다 해주세요.
앨런이 또 말이 없었다.
지금 칼리안이 뭘 사겠다는 말인지를 생각하는 것이다. 칼리안의 설명이 이어졌다.
- 실리케가 저에게 독을 썼다고 소문이 났을 때 브리센 상단 피해가 가장 컸어요. 레넌과 거래하던 헤일이 그것 때문에 타격을 입었을 정도니까 브리센 상단의 피해는 상상 이상일 겁니다. 브리센 후작이 그 골칫덩이 상단을 계속 끌어안고 싶어할 리가 없어요.
애초에 브리센은 기사 가문이었다.
검에 소질이 없는 레넌이 만들어 시작한 것이 브리센 상단이었다.
레넌의 아버지인 에반 브리센 후작은 돈이 된다는 이유로 레넌의 상단 운영을 그대로 두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돈도 되지 않고 기사 가문의 간판에도 어울리지 않을 상단을 달가워 할 리가 없었다.
- 아무리 그래도 카이리스 제일의 상단입니다. 적자가 심하리라 한들 그것을 어찌 사겠다는 말씀이십니까?
- 운영 적임자는 이미 있지 않습니까. 폴룬 상단의 상단주인 폴룬 남작이라면 충분히 운영할 수 있을 겁니다. 상단 이름이 폴룬으로 바뀐다면 귀족들도 거래를 재개할 테니 적자 문제도 해결될 테고요.
- 운영할 이가 있는지의 문제가 아니지요. 지금 마법사단 발칸이 사용할 부지를 구매하고 건물을 세울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발칸 유지에 들어갈 비용이 만만치 않습니다. 아무리 상황이 어려워져 가치가 내려갔다고는 하나 왕실에서 상단을 구입할 만큼의 자금을 내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앨런이 뭘 오해했는지를 알아챈 칼리안이 말했다.
- 스승님. 아직 제 금고 열어보지 않으셨군요.
르메인은 프레이야를 무척이나 사랑했다.
란델의 모친인 아이샤 왕비가 죽은 뒤 후궁 프레이야를 맞이한 르메인은 프레이야에게 퍽 괜찮은 영지를 하사했다. 실리케는 그 이후에 왕비로 들어왔다.
죽은 프레이야의 영지는 칼리안에게 상속됐다.
그리고 옛 칼리안은 영지 수익금을 쓰지 않았다. 그동안 금고에 얼만큼의 돈이 쌓였을지 브리센에서 궁금해하지 않았을 정도로, 옛 칼리안은 그 돈을 단 한 푼도 쓰지 않았다. 돈은 전부 쌓이기만 했다.
- 레넌 브리센. 이제 치워주세요. 스승님.
카이리스 최대의 밀 생산지에 위치한 휘트린.
휘트린의 영주 칼리안이 그렇게 말했다.
제11장. 의도한 건 아니었어 (4)
르메인이 안경을 벗고 긴 숨을 내쉬었다.
레넌 브리센의 배신이라는 칼을 이번에 휘두르겠다는 칼리안의 말을 전해들은 까닭이다. 심지어 그 칼자루를 쥐는 것은 칼리안이 아니었다. 브리센 후작이 직접 자신의 둘째 아들을 잡도록 하겠다는 말이었다.
"후작을 돈으로 사겠다는 생각을 하다니."
그것이 가능한 정도의 금액이 있는 것도 놀랍지만 후작을 돈으로 부리겠다는 생각을 했다는 것도 놀라웠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앨런이 말했다.
"이번 일은 저와 폴룬 남작이 진행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아무래도 전하와 칼리안 왕자님은 이 일에 개입하지 않은 것으로 해두는 것이 좋지 않을는지요."
칼리안이 나서서 란델의 사람을 공격했다는 것이 알려지지 않게 하겠다는 말이었다.
돈은 멜피르 폴룬이 지불하는 것으로 꾸미고 에반과의 협상은 자신이 나서서 진행하겠다는 것이 앨런의 계획이었다.
물론 그렇게 한다 해도 란델 측에서 눈치를 챌 수는 있겠지만 칼리안이 전면에 나서지만 않는다면 대놓고 문제를 키우지는 못할 터였다.
앨런의 말을 들은 르메인은 얼마 동안 더 생각을 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게."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앨런이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에반 브리센 후작을 만나러 가기 위함이었다.
* * *
그 날은 중앙 귀족의 정기 회의가 있는 날이었다.
카이리스 왕궁에 가기 위해 저택 밖으로 걸어나오던 에반 브리센은 정문 쪽을 보며 잠시 걸음을 멈췄다.
시간이 지나도 그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자 뒤에 서 있던 집사가 무슨 일이 있는지 확인하려 정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한동안 가만히 있던 에반이 입을 열었다.
"오늘은 집에 있겠다."
집사는 에반이 준비를 모두 마치고 출발을 하려다 마음을 바꾼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에반이 먼저 말하지 않는 것을 물었다가는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토를 달지 않고 바로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런 집사의 고개가 다시 들릴 때 쯤, 저 멀리 저택 정문으로 작은 마차 한 대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일반적인 귀족들이 탈 만한 그 마차에는 폴룬 남작 가문의 문장이 그려져 있었다. 마차를 잠시 지켜보던 에반이 몸을 돌려 저택 안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서재로 안내해라."
집사의 얼굴에 다시 한번 의문이 생겼다.
방문객들은 항상 응접실에서 만나오던 에반이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서재로 데려오라는 말을 하니 이상하다 여겨진 것이다.
"네, 알겠습니다."
다만 집사는 이번에도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에반이 들어간 뒤 느긋한 속도로 저택 앞에 도착한 마차의 문이 천천히 열렸다. 그리고 그 안에 있던 이를 본 집사가 깜짝 놀라 숨을 들이켰다.
동글동글한 인상을 가졌다는 멜피르 폴룬을 대신해 적은발의 머리를 하나로 묶어내린 매우 날카로운 인상의 마법사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앨런 마나실이었다.
굳이 자신의 마차를 타고 와 이상한 소문을 만들어낼 이유가 없었던 탓에 멜피르의 마차를 얻어 타고 이 곳에 온 터였다. 멜피르를 영입할 때 칼리안이 써먹었던 방법을 앨런도 따라한 것이다.
그렇게 평생 오지 않을 것 같았던 곳에 발을 디딘 앨런은 자신을 경계하는 수많은 기사들의 시선을 유유히 받아 넘기며 마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집사의 안내를 받아 에반이 기다리는 곳으로 들어갔다.
에반은 이미 서재에 마련된 테이블 앞에 앉아 있었다.
나이만으로 따진다면 앨런보다 대여섯 살 정도가 많을 것이다. 흰 머리가 반쯤 섞인 청록색 머리카락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런 에반의 얼굴을 향해 앨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앨런 마나실입니다."
어찌 모르겠냐만은, 에반은 처음 듣는 이름이라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리고는 짧게 대답했다.
"에반 브리센."
첫 만남에 대한 그 어떤 미사여구도 없이 대마법사와 소드마스터의 무미건조한 첫인사가 이렇게 오갔다. 에반은 앞 자리를 가리켜보이며 입을 열었다.
"미리 언질을 주었다면 준비를 해 두었을 것을."
"너무 많이 준비하실 듯 하여 그냥 왔습니다."
날카롭게 생긴 앨런의 눈이 아주 둥글게 휘어졌다.
브리센에서 앨런을 위해 준비할 것이 환영일지, 독일지, 검일지. 어떻게 알고 미리 알리겠는가.
에반이 권한 자리에 앉은 앨런이 다시 입을 열었다.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곧바로 본론이 나왔다.
"후작님의 둘째 아드님이 전하의 첫째 아드님을 바라보더군요."
그렇게만 말한 앨런이 에반에게로 시선을 고정했다.
에반은 잠시 말이 없었다. 하지만 아들이 배신했다는 말임은 알아듣고 있었다.
에반은 여전히 표정을 바꾸지 않은 채 입만 열어 말했다.
"생각지 못한 이야기군. 하지만 레넌은 그런 일을 벌일 만큼의 그릇이 되지 못하네."
아버지와 형, 그리고 동생을 배신해가며 다른 편에 설 만큼 용기가 있지 않다는 소리였다. 앨런이 웃으며 대꾸했다.
"둘째 아들에 대한 평가가 꽤 박하시군요."
레넌이 마음을 바꾼 것을 믿으려 하질 않는 것이다. 앨런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손가락을 튕겼고 아무것도 없던 곳에 가죽 가방 한 개가 나타났다. 그것을 본 에반의 눈썹이 살짝 꿈틀했다.
굳이 응접실을 두고 서재에서 앨런을 맞이한 이유는 이곳에 설치된 마법 방해 장치 때문이었다. 혹시라도 앨런과 공방을 주고 받을 것을 대비한 일이었다. 그런데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마법을 쓰니 방해를 해도 소용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방 속에서 꺼낸 서류들을 테이블 위에 올려둔 앨런이 에반을 한번 쳐다봤다. 그리고는 그가 무엇 때문에 인상을 찌푸렸는지 안다는 듯 여유롭게 말했다.
"마법 방해하는 그런 장난감에 제가 방해를 받아서야 되겠습니까. 세월을 거슬러 사는 마법사를 그냥저냥 생각하진 마시지요."
곧 앨런이 서류를 들어 에반에게 내밀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아마 아드님보다는 믿을만 할 겁니다."
에반이 묵묵히 손을 뻗어 그것을 받아 들었다.
헤일과 말콤, 그리고 에일라에게서 확인한 내용들을 추린 것이었다. 서류를 넘겨가는 에반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손이 조금씩 떨리는 것은 볼 수 있었다.
매우 화가 난 것을 숨기는 듯한 얼굴이 된 에반이 말했다.
"그래서. 무슨 말이 하고 싶은가."
"이미 레넌을 물러나게 할 생각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한낱 마법사가 간섭할 일은 아니지."
"······ 그것은 한낱 칼잡이의 입에서 나올 말이 아니군요."
그 말을 들은 에반의 기세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당장이라도 앨런의 사지를 조각낼 것 같이 날카로운 살기가 앨런의 온몸을 향해 쏘아졌다.
"이런."
살기를 느낀 앨런이 조금 당황한 듯한 얼굴을 했다.
말 한마디에 자신을 향해서 살기를 보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까닭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앨런 마나실이 아닌가.
"생각 외로 제가 만만하게 보이고 있었나 봅니다."
앨런이 그렇게 말하며 슬쩍 웃었다.
지금 에반이 무엇을 하는지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이 자리에서 싸움이 벌어져 보아야 서로 좋을 것이 없었으니 정말로 공격을 하겠다는 행동은 아닐 터였다. 다만 거슬리는 소리를 하는 앨런의 기를 누르려는 심산인 것이다.
"감당할 수 있으실지."
언젠가 앨런은 르메인에게도 이 말을 했었다. 의미는 달랐지만.
앨런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주변을 맴돌던 공기가 순환을 멈추었다. 그리고 죽음의 공포를 담아냈다. 에반의 동공이 확장됐다.
칼을 쥐는 이들은 살기를 다룬다.
그리고 마나의 이치를 아는 이들은 피어를 내보낸다 하였다.
마음 속 깊은 곳에 숨겨둔 공포감을 끌어내는 힘이다. 그 방법은 서로 달랐으나 결국 상대방을 짓누른다는 것에는 차이가 없었다. 살기를 밀쳐내며 에반의 숨을 틀어막은 앨런이 말했다.
"우선 오늘은 조용히 대화나 나누시지요. 나는 내 제자와 달라서 그리 무르지 않으니."
앨런의 미소는 바뀌지 않았다.
에반을 옥죄는 공포감도 줄어들지 않았다.
잠시 앨런의 반응을 떠보려던 에반이 살기를 거두었다. 그러자 앨런 역시 평소와 같은 만만한 마법사로 돌아왔다.
갑작스럽게 벌어진 기싸움에서 물러난 에반의 귓가에 앨런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드님은 알아서 잘 거두시리라 믿습니다만 조금 덜 부담스러우실 방법을 하나 제안드리지요."
에반이 눈을 조금 찌푸렸고 앨런의 설명이 이어졌다. 란델을 포함한 모두가 레넌이 왜 축출되는지를 알지 못하도록 조용히 마무리를 지어주면 브리센 상단을 사겠다는 말이었다.
"상단을?"
에반이 되물었다.
생각할 것도 없는 일이기는 했다. 후작 가문의 이름을 딴 상단을 항상 마음에 들지 않아 하지 않았던가. 다만 그것을 구매하겠다고 나선 이가 앨런, 아니. 칼리안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3왕자에게 득이 될 일을 왜 내가 해야 하지?"
어느새 평정심을 찾고 이렇게 말하는 에반을 향해, 앨런이 무슨 말이냐는 듯한 얼굴을 보이며 대답했다.
"왕자님에게 브리센 상단을 살 만한 돈이 있을 것 같습니까? 애초에 이 곳에 계시지도 않는 것을."
"칼리안 왕자가 아니면 누가?"
"카이리스 제일의 상단을 운영하고 싶어하는 이가 있지요."
물론 이렇게 꾸며내는 것에 대해 멜피르의 동의는 이미 구해 둔 상태였다. 이름이 한 번 팔리고 브리센 상단이 생기는데 멜피르가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그럴싸한 이유를 만들어 파시지요. 그렇게 하시면, 그럴싸한 가격에 살 겁니다."
그와 함께 앨런이 제시한 금액을 본 에반은 적잖이 놀랐다.
에반은 잠시 고민했고 곧 고개를 끄덕였다.
모자란 아들 한 명, 그리고 처치 곤란한 상단 한 개와 바꾸기에는 충분한 액수였다.
* * *
헤일 라트란이 잡혔다는 것을 알았을 때 레넌 브리센은 얼마나 조마조마했는지 모른다. 행여라도 그와 자신의 관계가 들통날까봐 당장 전 재산을 팔아 텐실로 가야 하는 것은 아닐까 매일매일 걱정을 했다. 그런 헤일 라트란이 감옥에 갇혔고 자신에게는 그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았다.
이런 일을 또 겪고 싶지는 않았던 레넌은 그 길로 라트란이 있는 쪽으로는 두 번 다시 발을 붙이지 않겠노라 선언도 했다. 그와 거래하던 몇몇 영지가 있었지만 그리 신경을 쓸 만큼 대단한 곳들도 아니었다.
'그깟 영지 몇 개쯤, 식량난이 대수인가?'
그리고 오늘, 헤일 라트란이 모아서 보내왔던 신물을 무사히 텐실의 신관에게 넘겼다. 란델 왕자와의 만남을 주선해달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그러니 어찌 기분이 좋지 않겠는가.
레넌은 저도 모르게 흘러나오는 흥얼거림을 멈추지 않으며 창가에 두고 키우던 화초에 직접 물을 주고 잎을 닦았다. 며칠 동안 신경을 쓰지 못했더니 화초 잎이 영 비실비실한 것이 보였다. 그 꼴을 보고 얼마 전의 칼리안을 떠올린 레넌이 재밌다는 듯 큰 웃음을 터뜨렸다.
"어디보자. 영양제가 어디 있었는데."
그렇게 말하며 뒤로 돌아선 레넌의 발이 멈췄다.
어느새 다가왔는지, 두 명의 기사가 레넌의 앞에 서 있었다. 레넌이 아는 이들이었다. 왕궁을 지키던 파벨의 기사들이었다.
때문에 레넌은 움찔 놀라며 한 걸음 물러섰다. 창가에 등이 닿았다.
"뭐야? 네 놈들이 여기가 어디라고······!"
레넌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기사들이 레넌의 벌어진 입 속에 천쪼가리를 욱여넣었기 때문이다. 레넌을 꽁꽁 묶은 기사들은 검은 천 하나를 꺼내 그의 몸을 뒤집어 씌웠다.
레넌은 끝까지 발버둥쳤다. 결국 기사들이 레넌을 기절시키기 직전까지 온 몸을 뒤틀며 저항했다.
그 바람에 조금 전까지 레넌이 애지중지 키우던 화분이 창 밖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 화분의 가치가 어느정도인지 알았다면 기사들이 조금쯤 아쉬워했을까. 레넌은 그런 생각을 하며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방 안이었다. 브리센 후작 저택 지하의 가장 깊숙한 곳에서 레넌의 고함소리가 공허하게 울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제11장. 의도한 건 아니었어 (5)
레넌이 사라졌다.
그 후 앨런의 일처리는 신속했다.
- 멜피르 폴룬을 통해서 상단 인수 작업을 바로 진행하겠습니다.
- 감사합니다, 스승님.
- 해당 지역에도 곧바로 물건을 보내도록 말을 해두었으니 혹시 다른 필요한 것이 있다면 말씀해주시지요.
- 식량 말고는 아직 부족한 것이 없는 듯 합니다. 곧 영주들을 만날 생각이니 만약 이야기하는 것이 있다면 전해드리겠습니다.
- 알겠습니다.
생각보다 앨런과 멜피르가 빠르게 대처해 준 덕에, 한결 가벼워진 마음이 된 칼리안은 다음 날 아침 일찍 스팅과 네리카의 영주를 엘프 마을로 불러냈다. 두 영지의 싸움 중재를 위해서였다.
영주들과의 일이 마무리되면 더 이상 엘프 마을에 머물러야 할 필요도 없었고 그러고 싶은 마음도 없었던 칼리안은 두 영주를 만난 뒤 곧바로 마을을 떠나기로 했다. 물론 장로 제르가 열게 될 숲의 길을 통해서였다.
영주들을 기다리는 동안 얀이 잠시 말을 건넸다.
"우리 왕자님 이제 상단까지 가지게 되셨네요."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네. 딱히 의도한 건 아니었어."
"그래도요. 기분은 좋잖아요."
브리센 상단을 소유할 생각은 정말 없었다.
그저 거슬리는 레넌을 치웠을 뿐인데 상단 하나를 통째로 사들이게 될 줄이야. 피식 웃은 칼리안이 손에 올려진 것을 내려다봤다.
"그나저나, 이건 또 뭘까."
칼리안의 손 위에는 검은 빛의 조약돌같은 것이 올려져 있었다. 마을로 돌아온 엘프 루카에게서 찾아낸 물건이었다.
신물로 보여지는 것들과 함께 있던 검은 조약돌을 손에 쥔 칼리안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 돌이 시아에게 일으킨 변화를 떠올리고 있었다.
조금 전, 루카의 짐에서 그가 훔쳤던 물건을 골라 칼리안에게 전하려던 시아가 입을 열었을 때 칼리안은 적잖이 놀라야 했다. 시아의 독특한 말버릇이었던 '대답을 먼저 하는 능력'이 사라진 것이다.
숲의 길을 안내해주기 위해 잠시동안 더 동행하게 된 시아에게 돌을 건네 준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시아. 밥 먹었어?"
"응. 먹었어."
시아의 대답이 제대로 나오자 칼리안의 눈꼬리가 가늘게 변했다. 옆에 서 있던 아르센이 큰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났다. 그만큼 이상한 일이었다.
곧 칼리안이 조약돌을 다시 건네받았다.
그리고 한번 더 시아에게 말을 걸었다.
"응. 저 쪽에 있어."
"히나 봤어?"
다시, 대답이 먼저 나온다.
칼리안은 자신의 손바닥에 놓인 것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황금색의 문자가 새겨진 작고 검은 조약돌이었는데 보기에는 특별할 것이 없었다. 게다가 시아 외에는 그 돌에 영향을 받는 이들도 없었다.
시아의 이상한 말버릇을 고쳐주고 있는 그 돌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칼리안에게 아르센이 물었다.
"이것 역시 신물일까요?"
"가능성은 크겠지만. 조금 더······."
그렇게 말하던 칼리안이 입을 다물었다.
아르센은 눈치채지 못했으나 칼리안은 분명히 느끼고 있었다. 비슷한 것을 맡은 유란 역시 칼리안의 손에 들린 것을 보며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위험해 보이네요. 피 냄새가 짙게 배어 있습니다."
멀쩡하던 이가 죽게 될 때 흘리는 피.
생명력 강한 피에서 느껴지는 그 독특한 기운. 기사들은 그것을 느끼는 훈련을 한다.
저 돌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바로 그것이었다. 아직 살아갈 수 있을 생명이 강제로 꺼져가며 흘린, 생명력 강한 피의 기운이 느껴졌다. 그것은 곧 조약돌의 원래 주인이 누군가에 의해 살해됐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이것도 신물 훔칠 때 같이 훔쳤어?"
"기억 안 나."
안 날 만도 하다.
훔친 것이 한 둘이 아니었다.
칼리안이 짧은 한숨을 쉬었다. 엘프는 거짓말을 못하니 기억이 안 난 다는 것은 사실일 터였다.
그보다, 루카는 전혀 반성하고 있는 얼굴이 아니었다.
뭘 잘못했는지를 모른다기보다는 인간이 엘프를 인간의 법으로 다스리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저런 태도를 보이는 것이겠지.
곧 제르가 다가와 칼리안의 시선을 돌리려는 듯 말했다.
"어머니 나무께 내가 이미 청을 해두었네. 곧바로 숲의 길로 출발할 수 있을 걸세. 그러니 이 곳의 일은 더 걱정하지 말게."
안절부절 못하는 것이 한 눈에 보였다.
이제 와 알았지만 루카는 장로 제르의 진짜 아들이었다. 때문에 칼리안이 혹시라도 루카에게 화를 내거나 검을 휘두를까 걱정하는 것이다.
검을 뽑는 대신 칼리안은 손에 든 돌을 시아에게 건넸다.
"일단 네가 써. 가는 동안 의사소통은 해야 하니까."
"이건 루카 꺼 아니야?"
칼리안이 루카 쪽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아니야."
"알았어, 대장. 그럼 숲의 길 반대편에 도착하면 돌려줄게."
"그래."
시아가 그것을 제 주머니에 집어넣었고, 곧 두 명의 영주가 칼리안을 찾아왔다. 그런 그들을 앞에 둔 칼리안이 한 말은 딱 한 마디였다.
"폴룬 상단이 곧 거래를 하러 올 겁니다."
참으로 간단하지 않은가.
거래만 재개되면 두 영지가 싸울 이유가 사라지는 것이니 말이다.
물론 칼리안이 싸움의 원인인 레넌 브리센에게 화가 난 나머지 브리센 상단을 사버렸다는 것을 영주들이 알 리가 없었다. 때문에 그들은 그저 좋아하며 감사의 말을 건넬 뿐이었다. 이 일을 가지고 싸움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도 했다.
딱 거기까지.
칼리안은 앞으로 사이좋게 지내라는 불필요한 말은 꺼내지 않았다. 어차피 영주들간의 힘 싸움에는 왕실이 깊이 개입하지 않는다. 서로서로 견제하는 것에 힘을 낭비하기라도 해야 '지나치게 사이가 좋아진' 이들이 힘을 합쳐 왕실을 향해 검을 겨누는 일이 줄어드니까.
잠시 고개를 돌려 장로 제르와 루카를 보던 칼리안이 영주들을 향해 물었다.
"혹시 엘프들과 거래하는 것이 있습니까."
"네. 인근에서 구하기 어려운 채소를 포함한 몇몇 식료품을 이곳에서 구매하고 있습니다."
"공정한 거래였는지 궁금한데. 어땠습니까."
"아무래도 환경이 좋지 않다 보니······."
더 듣지 않아도 뻔하다.
서로 곁눈질을 하는 두 영주의 얼굴이나, 새빨갛게 변한 대장로 제르의 귀만 봐도 대답을 들은 기분이었다. 다른 지역의 몇 배는 될 금액으로 엘프들과 거래를 했다는 뜻이리라.
"왕자인 나도 이용해먹으려 들었는데 나 아닌 다른 사람 상대로는 오죽했을까."
고개를 끄덕이며 이렇게 말한 칼리안이 제르를 쳐다봤다.
"뭘 사고 있는지 알려줘요. 폴룬 상단 거래 품목에 넣을 테니 최소한의 법도 안 지키는 놈들 상대로 거래하지 말고."
"그 일은 사과했잖소. 이런 피해를 우리 엘프들에게 주는 것은,"
"네 아들이 저지른 짓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안 했지. 필요한 것 다 얻어냈으니 미안한 마음도 사라진 것 같은데."
제르가 입술을 달싹였으나 칼리안은 제르의 말을 더 이상 듣지 않았다.
"원래 엘프들이 그랬던 것처럼 너희들끼리 잘 살아봐."
이렇게 말한 칼리안이 말에 오르자 제르의 마음이 다급해졌다.
귀가 빨갛게 변한 제르가 칼리안의 앞을 막아섰다.
"잠깐, 잠깐만 기다리지. 얘기를 좀······."
"나도 더 할 말 없어."
얼결에 칼리안을 붙들려던 제르의 손이 레이븐의 목덜미에 살짝 닿았다. 그리고 항상 고고한 자태를 뽐내던 왕자의 말이 눈을 까뒤집는 것을 보곤 경악하여 손을 뗐다.
그것을 본 체 만 체, 칼리안은 제르가 미리 열어둔 숲의 길로 유유히 들어갔다. 그 뒤를 이어 칼리안의 일행들도 하나 둘 칼리안의 뒤를 따랐다.
황망해하는 제르를 뒤로 한 채였다.
* * *
숲의 길은 정말 숲 속의 길이었다.
푸른 나무들이 가득하여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 길을 걷는 레이븐의 등 위에서 칼리안은 검은 조약돌을 손에 든 채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었다. 아무리 보아도 글씨가 새겨진 것 외에는 그다지 특이할 것이 없는 돌이었다.
그런 모습을 본 유란이 말의 속도를 늦춰 칼리안의 옆으로 왔다. 그리고는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왕자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칼리안은 그 말에 대해 대답하는 대신 질문을 던졌다.
"그래도 피 냄새는 조금씩 옅어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묻는 칼리안이 의미 모를 웃음을 짓고 있었다.
순간 무슨 말이냐며 되물을 뻔했던 유란이 칼리안을 다시 한번 살펴보는 듯한 눈빛을 했다.
"기사들이나 맡을 법한 냄새라서 왕자님께서도 알고 계신 줄은 몰랐습니다."
"어쩌다보니 맡아보게 되었습니다."
어쩌다보니 조금 많이.
"아무튼 피냄새가 나는 돌이라는 이유 때문에 멀리하기에는 이상한 물건이라서요."
칼리안이 걱정하지 말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시아의 말버릇을 고쳐주고 있으니 일반적인 것은 아닌 듯 해서."
남들보다 앞선 대답을 하던 모습을 떠올려 본 유란이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 아이는 다른 이들보다 조금 앞선 시간을 보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하지도 않은 질문에 대해 대답을 하겠습니까."
"예지를 하는 것은 아니라고 했지만. 내 생각에도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능력을 사라지게 하는 돌일까요."
"글쎄. 어떠려나."
이렇게 말한 칼리안이 레이븐의 안장을 톡톡 치며 잠시 생각에 잠겨들었다.
"시간이라······."
조금 앞선 시간. 시간의 뒤틀림.
그것과 관련된 시아의 능력을 무효화 시키는 효과를 지닌 돌.
- 시간의 축.
혹시 시간의 축과 연관이 되어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시간의 축 역시 시간과 관련된 신물이라 여겨지지 않았던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중요한 것인 듯 합니다. 그러니 불쾌한 냄새가 좀 나더라도 참아야겠죠."
이렇게 말하며 생긋 웃어보인 칼리안이 돌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 * *
카이리시스의 왕궁, 그 중에서도 체르밀 궁.
가장 높은 층에 마련된 란델의 방에서 시종이 말을 전했다.
- 상당량의 신물을 텐실로 전달하게 되었다. 그 일에 굉장히 큰 도움을 준 것은 레넌 브리센이다.
- 그런데 레넌이 갑작스럽게 행방불명 되었다. 브리센 후작이 백방으로 조사하고 있으나 찾을 수 없다고 한다.
- 브리센 후작은 앨런 마나실과 멜피르 폴룬을 가장 먼저 의심했으나 관련이 없는 것을 확인했다. 때문에 돈을 노린 집단의 소행이 아닐까 조사중에 있다.
바로, 에반 브리센 후작이 적당히 만들어 퍼뜨린 내용이었다.
란델은 소식을 알려준 시종에게 고개만 끄덕여 보이고는 이만 나가보라는 뜻을 보였다.
그리고 시종이 나간 뒤 읽던 책을 다시 펼쳤다.
한참이 지나도록 책장이 다음 페이지로 넘겨지지 않았다.
문득, 아무 소리도 나지 않던 방 창가에 새 한마리가 날아와 지저귀기 시작했다. 조용히 일어난 란델이 창가로 걸어가니 놀란 새가 포르륵 날아갔다.
란델은 조금 아쉬운 기분을 느끼며 창문을 열었다.
하늘이 맑았다.
란델의 구불구불한 황금색 머리카락이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렸다.
눈을 감고 한동안 바람을 즐기던 란델의 눈이 살짝 떠졌다.
맑은 하늘, 새 소리.
날씨가 좋지 않아 잠을 설쳤다 하고 새 소리가 그립다 했던.
장미가 곧 피어날 것이라던 말이 생각난 까닭이다.
'칼리안. 이번에는 레넌을 물린 것이구나.'
잠시 창 밖을 보며 동생을 생각하던 란델이 밖으로 나갔다.
곧바로 시종들이 따라왔다.
"정원에."
짧은 말이 나왔고 따라오던 이들 중 한 명이 화초들을 관리할 도구를 챙기러 달려갔다. 란델은 서두르지 않는 발걸음으로 호수를 지나 장미가 심겨 있는 정원에 도착했다. 곧 뒤따라온 시종이 그에게 정원 가위를 전해주고 우산을 펼쳐 해를 가렸다.
란델은 조용히 앉아 잔가지를 쳐내고 잡초를 뽑아냈다.
꽃은 없었다. 이미 가을이었으므로 이미 모두 피고 졌다.
그런 란델의 눈에 나무 아래에서 자라난 작고 약한 꽃가지 하나가 보였다. 다른 가지들에 눌려 차마 곧게 뻗어나오지도 못한 꽃가지.
그것은, 오래 전의 칼리안과 같은 가지였다.
그 가지를 가만히 바라보던 란델이 소매 속에서 목걸이 하나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그러자 놀랍게도 목걸이에서 은은한 빛이 흘러나와 그 작은 가지에 가 닿았다. 휘어진 가지가 곧게 펴지고 꽃봉오리가 생겼다.
그 뒤에는 작고 붉은 장미가 한 송이, 피어났다.
"아직은 보기 좋으니. 조금만 더 그렇게 있거라."
홀로 핀 붉은 장미를 내려다보던 란델이 방으로 돌아갔다.
제12장. 살고 있습니다 (1)
온통 숲 뿐이었다.
길잡이를 자처해 준 시아의 안내에 따라 달리다 멈추어 쉬고 일어나 또 달렸다.
그 푸름에 질려 눈이 시큰하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쯤. 마지막 나무 사이를 지나자 멀리 작은 언덕이 보였다.
흙과 바위, 그리고 하늘이 있었다.
길고 긴 길을 비로소 벗어난 것이다.
그러니 시아의 길은 여기까지였다.
"대장! 이제 안녕, 해!"
방금 전 일행이 빠져나온 숲의 앞에서 시아가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이제 헤어지자는 뜻이었다.
"시아. 바로 돌아갈거야?"
"아니야. 근처에 엘프 많은 곳이 또 있어. 거기에 갔다가 마을로 돌아갈 거야."
"마을로는 꼭 돌아가야 하는 건가?"
아직 천진한 시아가 그 이상한 마을로는 돌아가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우리 가족도 다 거기 있으니까 돌아가야해. 나 괜찮아, 대장. 걱정하지 마!"
"······ 그래."
작별 인사는 그리 거창하지 않았다.
칼리안은 그저 시아의 머리를 오래도록 쓰다듬었고 다른 일행들도 한 마디씩 덕담을 건넸다. 그래도 한 달을 함께 해온 사이였으니 아쉬움이 남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마지막으로 히나와 꼭 끌어안으며 가장 긴 인사를 끝낸 시아가 다시 칼리안에게로 다가왔다. 그러더니 그 동안 일행들과의 원만한 대화를 위해 들고 있던 검은 조약돌을 내밀었다.
"이제 대장이 가져. 잘 썼어!"
사실 이 곳에 도착하기 얼마 전, 칼리안과 시아는 대답을 먼저 하는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시스파니안의 의지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으니 혹시라도 그녀에게 이유를 물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때문에 그 때까지 동행을 계속 하는 것은 어떨지 시아에게 물었으나 시아는 거절했다.
- 어머니 나무가 그러셨어. 이렇게 대답하는 게 나한테는 제일 자연스러운 모습이라고. 내가 혼자 다르다고 해서 잘못된 것은 아니라고 하셨어. 말하는 건 달라도 내가 엘프인 것까지 달라지지는 않으니까. 그러니까 알아봐주지 않아도 돼. 고마워!
그 말을 들은 칼리안은 조금 부끄러운 기분을 느꼈었다. 자신도 모르게 시아가 말하는 버릇을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 날을 생각한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돌을 돌려받았다. 그러자 시아는 아직 꺼내지 않은 칼리안의 말에 대한 대답을 했다.
"그래! 그럼 진짜 기쁠거야. 고마웠어! 구해줘서!"
이미 답을 들었지만 칼리안은 하려던 말을 멈추지 않고 꺼내놓았다.
"다음에 만나."
고개를 끄덕인 시아가 다시 한번 팔을 크게 흔들더니 숲 속으로 뛰어 들어가 사라졌다. 칼리안이 만난 여러 엘프 중 가장 착한 엘프와의 동행은 그렇게 끝났다.
시아가 들어간 풀섶이 흔들리지 않게 된 것을 확인한 칼리안이 레이븐을 다시 움직여 목적지를 향한 마지막 언덕을 올랐다.
그리고 잠시 후, 언덕의 정상에 올라선 칼리안이 큰 숨을 들이마셨다. 레이븐이 언덕 꼭대기에 한 발을 올려 놓은 순간 눈 앞에 펼쳐진 장엄함 때문이었다.
칼리안은 저도 모르게 감탄하며 레이븐의 발을 멈추었다.
"저곳이구나."
코끼리들의 땅.
지그프리드 공작령.
1년 전의 플란츠가, 3년 전의 란델이, 그리고 더 오래 전 언젠가의 르메인이 서 있었을 곳. 그 자리에 선 칼리안은 한참동안 말을 잊고 그렇게 지그프리드의 성벽을 바라보았다.
드높은 성벽은 카이리시스의 외성보다 견고하고 웅장했다. 외성의 거대한 정문 양 옆에 높이 세워진 두 개의 석상은 절로 고개가 숙여질 만큼의 엄숙한 느낌을 주었다. 시스파니안의 땅을 지키겠다는 그 일념이 저 성벽에서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었다.
장담하건대 이 자리에 섰던 모든 카이리스의 왕자들은 저도 모르게 가슴을 쓸어내렸을 것이다. 저들이 초식동물인 것에, 그리하여 결코 왕좌를 노리지 않았던 것에 감사하면서.
꽤 오랜 시간 동안 감상을 마친 칼리안이 결연한 얼굴로 옆을 쳐다봤다. 이 곳에 온 이상 코끼리의 땅에 발을 딛기 전에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얀."
칼리안의 부름에 얀이 얼른 고개를 돌리며 싹싹하게 대답했다.
"네, 왕자님."
"들어가면 시종 노릇 하지 마."
제발.
주변에 있던 기사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처음 칼리안을 보았을 때 그들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던가. 얀이 시중을 들고 있다는 그 왕자라는 놈을 어떻게든 혼쭐을 내주겠다고.
스무 기사의 마음이 그랬으니 저 안에 칼리안이 도착하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을 기사들이 몇이나 될지 유란조차 가늠을 할 수 없었다.
어차피 이 곳에 오면 모두 밝혀질 일이었으니 얀은 키리에와 히나, 그리고 아르센에게도 자신의 고향이 어디인지를 알려주었었다. 때문에 셋의 얼굴에도 웃음이 어렸다.
칼리안의 말을 들은 얀의 눈이 호선을 그렸다.
"제가 알아서 할게요."
저 대답이 어떤 느낌을 주는지 이제야 깨달은 칼리안은 또 잠시동안 반성의 시간을 가졌다.
* * *
앨런이 깜짝 놀란 얼굴을 하더니 르메인을 향해 양해를 구했다.
"실례 좀 하겠습니다."
그리고는 손바닥으로 눈을 부비적거리고 손가락으로 귀를 후비적거렸다. 그것을 본 르메인은 자신이 괜한 말을 했음에 대해 매우 후회하며 말했다.
"싫으면 말고."
그러자 앨런이 얼른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집무실의 테이블에 놓인 술병과 두 개의 잔을 보며 웃었다.
"전하께서 먼저 술을 찾으실 줄은 몰랐습니다."
르메인이 별다른 말 없이 맞은편 자리에 앉을 것을 권했다. 하지만 앨런은 자리에 앉는 대신 창 밖을 가리켜 보였다.
사위는 어두웠고 가을 하늘의 달이 오롯이 밝았다.
"좋지 않겠습니까."
밖에서 마시자는 것이다.
르메인이 잠시 멈칫했다.
국왕의 위에 오른 이후 제대로 된 산책 한번 마음 편히 다니질 못했다. 이 거대한 나라를 홀로 떠안은 힘 없는 왕에게는, 넓은 궁에 놓인 책상 앞을 제외한 그 어떤 곳도 안전하지 않았으니까.
그러니, 달이 밝고 마법사가 옆에 있는 이런 날이라면.
좋지 않겠는가.
"······ 그러지."
르메인이 곧 자리에서 일어났다. 앨런이 웃으며 손가락을 튕기자 술병과 술잔이 어디론가 사라졌다.
곧 앨런은 르메인을 데리고 아르피아 궁의 후원에 들어갔다. 지그프리드관에 만들어진 것보다 조금 더 큰 개울이 우아한 곡선을 그리며 흐르고 있는 곳이었다.
잔디밭으로 저벅저벅 걸어간 앨런은 바닥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는 그 옆의 바닥을 손바닥으로 탁탁 치며 말했다.
"앉으시지요. 이 곳이 가장 좋습니다."
그 무례한 꼬락서니에 카에라의 단장이 어쩔 줄을 몰라했지만 이제는 그냥 저 무례함이 과연 어디까지 가는지 보기나 하자는 심정이 된 르메인이 앨런의 옆으로 가 앉았다.
그러자 조금 전 앨런이 챙겨둔 술병과 잔이 그들의 앞에 놓였다.
앨런이 직접 르메인의 잔에 술잔을 채우고 자신의 잔에도 술을 따라 넣었다. 그리고 르메인을 보며 말했다.
"안심이 되어 그러십니까. 아니면 다른 걱정이 되어 그러십니까."
그날 저녁.
칼리안이 지그프리드의 땅에 발을 올렸다.
무사히 슬레이만의 품에 도달한 것이다. 때문에 그것이 좋아 술을 청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걱정거리가 있는지를 묻는 말이었다.
르메인은 일단 술부터 마셨다. 그 뒤 잠시 뜸을 들이다 말했다.
"카밀론의 불을 언제 켜야 할지 고민이 되어 그러네."
"왕세자위에 누구를 올릴지 말씀이십니까."
"칼리안이 돌아오면 세 왕자가 모두 성인이 되지 않나. 세자위를 정해야 할 날이 다가온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카밀론의 주인을 벌써부터 고민하고 계시는지요."
"가장 진중한 란델은 그 속이 깊고도 깊어 보이질 않고. 가장 강한 플란츠는 계속 엇나간 길로 가려 하는데."
그렇게 두 왕자를 언급한 르메인이 작은 한숨을 섞어 덧붙였다.
"칼리안은 아직 다 자라지 않았으니."
르메인에게 가장 도움이 되어 주는 왕자도, 가장 마음이 가는 왕자도, 칼리안이었다.
그러나 칼리안은 가장 어렸다.
나이도 어렸고 지닌 세력도 이제 막 자라기 시작했다.
앨런이 짧게 소리내며 웃더니 찬 소리를 했다.
"그리 급하시면 제일 마음에 안드는 놈을 먼저 올리시지요. 올리자마자 사라질테니."
성급한 고민에 대한 타박이라고는 하나 그 말에 돋힌 가시가 너무 노골적이었다. 르메인이 화가 반쯤 섞인 말투로 말했다.
"정말 그 입 좀 어찌 안되겠는가?"
앨런은 르메인의 질책을 무시하며 손가락을 들어 어느 한 방향을 가리켜보였다. 헤이시아 궁, 바로 실리케가 있는 곳이었다.
"칼리안 왕자님이 저 궁을 비워내기 전까지 란델 왕자님은 얌전할겁니다. 들여다보이지 않는 속은 그때 가면 보실 수 있겠지요."
르메인은 앨런의 손 끝을 따라 헤이시아 궁 쪽을 쳐다봤다. 앨런이 말을 이었다.
"그 때까지는 속내를 보이시면 안됩니다. 그러니 누굴 앉힐지 벌써부터 고민하지 마시라는 겁니다. 그것이 칼리안을 위해서든 아니면 다른 두 왕자를 위해서든. 한 명에게만 특혜를 주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만약 또 홀랑 까먹고 저기 저 친구 함부로 내보내시면,"
왕의 검. 그리고 모든 기사들의 우상.
국왕 친위대 카에라의 기사단장을 '저기 저 친구'라 언급한 앨런이 르메인을 보며 한 글자 한 글자 힘 주어 말했다.
"늙은 마법사는 정말로 남쪽 나라에 요양이나 갈 터이니."
언젠가 칼리안에게도 했었던 말.
칼리안은 그 말을 들으며 듣던 중 무서운 소리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르메인은 듣던 중 반가운 소리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진심이 담긴 긍정은 아니었다.
피식 웃은 앨런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카밀론의 주인이 누가 되든 때가 되면 스스로 증명을 할 것입니다. 구태여 앞서서 고민하지는 마시지요. 오늘은 그저, 달이나 보시면 됩니다."
르메인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마법사가 시키는대로 달이나 보며 술잔을 비웠다.
* * *
지그프리드 공작령이 얼마나 큰지 새삼 느꼈다.
외성을 통과하면 늦은 밤에는 슬레이만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했던 칼리안의 기대는 완벽하게 깨졌다.
"이제 이틀 정도만 더 가면 지그프리드 성에 도착하겠네요."
외성 정문을 통과하자 얀이 느긋한 말투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때문에 칼리안은 그 날 중에 슬레이만 보기를 포기하고 지그프리드의 외성 정문과 연결된 시트렌 시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그리고 다음 날 이른 아침.
자리를 잡고 앉은 칼리안이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주변의 마나를 끌어오기 시작했다.
새로운 기운이 모여들자 칼리안은 항상 그랬듯이 정제된 마나를 심장으로 보냈다.
서클을 늘리는 것을 다시 시도하는 것이었으나 결국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마나가 단전에 흘러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때문에 오늘도 실패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실망하던 때. 문득 시아의 목소리가 귓가를 스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 말하는 건 달라도 내가 엘프인 것까지 달라지지는 않으니까.
그 말을 떠올린 칼리안의 눈이 빛났다.
마나가 오러로 전환되었다 하여 근원이 바뀐 것이 아니었다.
오러와 서클의 근원이 같은데 그것을 왜 다르다 생각했을까!
서클을 만드는 것은 서툴지라도 오러를 다루는 것은 누구보다 잘 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자신 아니던가.
"마나를 오러로 바꾸는 버릇을 못버리겠으면 오러로 서클을 만들면 되는 것을."
옛 칼리안이 만들어 둔 서클.
서클에 쌓아 온 마력을 운용하는 대신 지금까지 칼리안이 단전에 쌓아왔던 오러로 네 번째의 서클을 만들려는 것이다.
엉뚱한 해결 방법을 떠올린 칼리안이 다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곧바로 단전에 둥글게 뭉쳐있던 오러의 힘을 풀어내어 조심스럽게 운용하기 시작했다.
곧 강인하고 날카로운 오러의 힘이 하나의 띠를 이루며 심장으로 흘러들어갔다.
본래의 따뜻한 온기를 품은 마나 대신 잘 벼려진 검날과 같은 오러의 기운이 조금씩 움직이다 점점 긴 형태를 이루며 칼리안의 의도대로 흐르기 시작했다. 칼리안은 계속 속도를 높여가며 같은 것을 반복했다.
잠시 후.
칼리안이 운용하던 마나가 비로소 하나의 고리 형태를 이루었다.
그리고 마침내 힘차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정확히 네 개의 서클이 서로 연결된 것이 확연히 느껴진다.
한동안 그렇게 서클의 회전에 집중하던 칼리안이 눈을 떴다. 그리고는 손을 들어 심장 부근을 어루만졌다. 세 개의 서클을 가지고 있었던 때와 비교하지 못할 만큼의 마력이 심장에 담긴 것이다.
"아······ 드디어."
고작 그 작은 차이 하나를 깨달았을 뿐인데.
이 몸을 얻은 후 처음으로 얻게 된 새로운 성취에 칼리안의 눈에 큰 만족감이 들었다.
칼리안이 다시 자세를 바로하고 주변의 마나를 한번 더 모아 정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클을 만들어내느라 소모된 오러를 채워넣었다.
그런 칼리안의 방 앞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아침부터 대기 중에 휘몰아치는 마나를 느끼고 얼른 이 곳으로 달려온 그는 바로 아르센 헤르츠였다. 지금 칼리안이 어떤 상태인지를 정확히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다.
"괜찮으신 겁니까?"
그런 그의 옆에 서 있던 얀이 조금 걱정스러운 얼굴로 조용히 물어왔다. 아르센이 칼리안의 방 앞에 서서 그 누구도 들어가지 못하게 막아선 채로 한 시간이 넘어가고 있는 까닭이다.
아르센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갈무리 되고 있습니다. 걱정하실 일은 아니니 잠시 기다려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따뜻하고 온화한 것과는 거리가 먼, 오싹하리만치 시린 칼리안의 마력이 조금씩 사그라들고 있음을 느끼면서.
제12장. 살고 있습니다 (2)
아침부터 좋은 일이 둘이나 있었다.
4서클을 완성했다.
그리고 시트렌 시의 시장이 준비한 조찬에 굴이 나왔다!
세크리티아나 리베른과 비교적 가까운 이 지역의 사람들은 해산물을 즐겨 먹는다 하더니 특유의 바다 비린내가 나는 커다란 생굴이 올라 있었다. 그것을 본 칼리안은 자꾸만 올라가는 입꼬리를 내려놓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칼리안이 네 번째 서클을 만들었다는 것보다 생굴에 더 감격했다는 사실을 앨런이 알았다면 참으로 많은 말을 해주었을 터였다.
아무튼 지그프리드에서의 첫 날은 그렇게 기분 좋게 시작됐다.
항상 칼리안의 옆에서 말을 몰던 얀은 유란과 함께 일행의 가장 선두에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얀을 반겨하며 인사를 올리는 여러 사람을 대해야 했던 탓도 있었으나 그보다는 칼리안의 옆에 아르센이 붙어 있었다는 이유가 더 컸다.
아르센은 아침에 느꼈던 칼리안의 기운을 떠올리다 말했다.
"왕자님의 기운이 마치 칼날과 같았습니다."
그 말에 칼리안이 슬쩍 웃으며 대답했다.
"이유가 있습니다."
아르센은 무슨 이유가 있는지 설명해주기를 기다렸으나 그 후에 달리 이어지는 말이 없었다. 이유가 있지만 이 자리에서 알려주기는 어렵다는 뜻 같았서 아르센은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그 후 몇 개의 거리를 지나는 동안 말 없이 있던 칼리안이 아르센의 손을 가리켜보이며 말했다.
"헤르츠 경."
"네, 왕자님."
"경이 만드는 얼음은 어느 정도로 강합니까."
그 말에 아르센이 잠시 생각을 하다 물었다.
"죄송합니다, 왕자님. 말씀하신 강함이라는 것이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설명을 요청드려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아르센의 말은 항상 뒤가 길었다.
그냥 설명해달라고 하면 될 것을 무엇이 그리 어려운지.
"경의 얼음이 얼마나 큰 힘에 부러지는지. 그리고 얼마나 단단한 것을······ 꿰뚫을 수 있는지."
소드마스터의 단단한 육신을 관통했던 아르센의 얼음창을 생각하면서, 칼리안이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아르센은 다시 한번 고민을 했다.
아직 그런 것까지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기도 했지만 칼리안이 굳이 마법의 강도를 묻는 까닭을 몰랐던 이유도 있었다.
곧 대답이 될만한 것을 떠올린 아르센이 입을 열었다.
"얼마 전 베른과 잠시 겨루었던 적이 있습니다."
칼리안이 어깨를 경직시키며 아르센을 쳐다보았다.
그러다 베른이라는 이름이 이제 키리에의 성이기도 하다는 것을 가까스로 떠올렸다.
아르센이 말하는 것이 자신이 아닌 키리에라는 것을 깨달은 칼리안이 놀란 가슴을 가라앉히고 물었다.
"네. 계속 얘기해요."
"그때 제가 베른에게 얼음의 창을 보냈습니다만."
하필 또 그것을 썼다!
칼리안이 어색하게 웃었고 아르센은 매우 아쉬워하는 얼굴을 하며 말을 이었다.
"베른의 검에 제 얼음 창이 부러졌습니다."
칼리안이 잠시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려 키리에를 쳐다봤다. 그리고 키리에는 갑자기 칼리안이 왜 저렇게 훈훈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보는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했다.
그런 상황을 알지 못하는 아르센이 계속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 얼음창으로는 통나무를 꿰뚫었던 적이 있습니다. 베른의 검이 어느 정도 되는지는 알고 계시니 이렇게 설명을 드리면 가늠하시는 것에 도움이 되겠습니까."
"네. 충분합니다."
키리에의 검술이 빼어난 것은 사실이었다.
그간 열심히 가르쳐놓기도 했고 스스로의 재능이나 노력이 결코 적지 않았다. 칼리안이 보기에 유란을 제외한 지그프리드의 기사들과 붙어도 쉽게 지지는 않으리라 생각했다.
물론 아직 칼리안이 '강하다' 여기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런데 키리에의 검에 얼음창이 부러졌다면 얼음창의 강도가 칼리안이 원하는 만큼이 되지는 못한다는 말이 되었다.
"흠."
아르센이 다시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엇 때문에 그러시는지 여쭤보아도 괜찮으시겠습니까?"
그 말을 들은 칼리안이 잠시 고민을 접어놓고 웃었다. 공손하기 짝이 없는 저 말투 때문이다.
이제 칼리안도 아르센과 언제 처음 만났는지를 알고 있었다.
망자가 죽음의 강을 건너가는 자리에서 죽음을 선사한 자와 죽음의 강을 되건너온 자가 다시 만났다니. 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하고, 한참을 웃었었다.
아무튼 칼리안이 누구인지 몰랐을 그 때에도 더할 나위 없이 공손하던 아르센이었다. 보기에 나쁜 것은 아니었지만 발칸의 단장에게 썩 어울릴만한 모습도 아니었다. 때문에 칼리안은 시도 때도 상대방도 가리지 않고 지나치게 공손한 저 태도를 조금만 고쳐보라고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그런 생각을 마치고 문득 옆을 보니 여전히 아르센이 칼리안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제야 아르센이 방금 전 자신에게 질문을 했다는 것을 상기한 칼리안이 얼른 대답했다.
"아. 나는 검을 지니고 다니질 못하니까요. 마법으로 검을 대신할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때마침 오러로 만들어진 마력까지 지니게 되었으니까.
"다만 경의 마법으로도 그 정도의 강도로 그친다면 검으로 사용하기에는 무리가 있으니, 고민을 조금 더 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칼리안의 말에 아르센은 섣불리 대답을 하지 못했다. 왜 저런 고민을 하는지야 당연히 이해할 수 있었으나 쉬운 일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특별히 아르센의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다. 때문에 칼리안은 레이븐의 갈기를 흩트리며 생각을 이어나갔다.
* * *
다음 날 저녁.
칼리안은 다시 한번 레이븐의 발을 멈추었다. 멀리 보이는 바위산 때문이었다.
때마침 석양이 들었다. 저무는 햇빛에 닿아 주홍색으로 신비롭게 물들어가는 바위산은 그 아래 자리한 고성의 위엄이 바로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웅대하고도 아름다웠다.
지그프리드 공작령의 내성 안에 위치한 존재 자체로 이미 하나의 역사가 된 그 바위산을 가리켜보인 얀이 말했다.
"저 곳입니다, 왕자님."
다른 설명은 조금도 들어있지 않은 매우 담백한 말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그 곳에 시스파니안의 빈 둥지가 있다는 충분한 설명이 되었다. 때문에 칼리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석양이 거의 사라지고 하늘이 어둠에 물들기 시작했을 때 쯤, 일행은 내성 앞에 도착했다.
성문 안쪽으로 수많은 기사들이 도열한 채 칼리안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칼리안을 이 곳까지 호위해 온 기사들과 똑같은 검은 색의 갑옷을 입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칼리안이 자세를 바로잡고 앉았다.
그리고 조금도 위축되지 않은 채 그들의 사이를 지나갔다.
그 길의 끝에 하얀 말에 올라 있는 중년의 기사가 있었다.
왕자의 앞이지만 굳이 말에서 내려 인사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 이 나라 카이리스의 유일한 공작.
바로 슬레이만 혼 지그프리드였다.
"어서 오십시오!"
칼리안과 그 옆의 얀을 확인한 그가 이렇게 말하며 양 팔을 벌렸다. 딱히 달려와서 안기라는 뜻은 아니었고 이 땅에 온 것을 환영한다는 대충 그런 의미의 제스처였다.
칼리안이 씩 웃으며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슬레이만의 얼굴에도 비슷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지그프리드 공."
둘은 지금 두 번째 만나는 것이었고 처음 보았을 때에는 아무 말도 나누지 않았었다. 그저 슬레이만은 칼리안이 귀족들을 향해 신나게 뿜어내던 서슬을 느꼈고 칼리안은 슬레이만이 그것을 눈치 채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굳이 집어넣지 않았다. 그것이 둘이 나눈 대화의 전부였다.
그러므로 둘은 이제야 처음으로 말을 나누게 된 것이었으나 어색한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이미 서로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슬레이만이 잠시 칼리안을 살펴보더니 상당히 감탄한 눈을 했다. 그리고 그 놀라움을 굳이 숨기지 않고 입에 담았다.
"이야! 정말 많이 달라지셨습니다."
그것이 겉모습일지 아니면 속에 담아둔 힘일지.
무엇이 달라졌다 말하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칼리안은 여유롭게 웃었다. 그것이 무엇이든 달라진 것은 맞았으니 말이다.
"네. 그때보다는 조금 나아졌습니다."
칼리안의 대답을 들은 슬레이만이 유쾌하게 웃으며 말 머리를 돌렸다. 그리고 칼리안과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흑마인 레이븐의 위에 올라 있는 호리호리한 체격의 칼리안과 백마를 탄 근육질의 슬레이만이 나란히 걷고 있으니 둘의 모습이 완벽하게 대비되었다.
그러면서도 굉장히 오랜만에 만난 막역한 사이와 같은 분위기가 감돌아서, 뒤에서 그들을 바라보던 얀이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칼리안과 슬레이만의 대화가 이어졌다.
"그 막돼먹은 입의 마법사를 꽉 붙들어 두셨다고 들었습니다."
참 한결같은 앨런 마나실이다.
아주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라던 슬레이만조차 이렇게 평가를 하니 말이다. 때문에 칼리안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할 따름입니다."
"여섯 번째 검이 마법까지 다루고 있으니 그놈의 마법사가 제자 하나는 잘 뒀습니다."
슬레이만의 작은 목소리.
물론 칼리안은 놀라지 않았다.
검의 길에 오른지 그리 오래 되지 않은 브리센 후작은 몰라도 슬레이만이라면 단번에 알아볼 것이라 이미 예상을 하고 있었으니까.
"역시 바로 알아보시는군요."
"이래보여도 제가 허투루 살지는 않았으니, 차곡차곡 쌓여있는 왕자님의 오러를 못 볼 리 있겠습니까. 왕자님께는 제것이 보이지 않으시겠지만 제 눈에는 또렷이 보입니다."
이 말대로 슬레이만은 칼리안의 오러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칼리안의 눈에는 슬레이만의 오러가 보이지 않았다.
지닌 오러의 차이.
슬레이만의 오러가 칼리안의 것에 비해 월등히 많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 마법사 아주 신이 나 있겠습니다. 소드마스터가 마법까지 다루게 되었으니."
"신이 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고생은 하고 계십니다."
그렇게 칼리안이 그의 스승을 떠올리며 즐거운 대화를 이어나가는 동안 어느새 둘은 성의 입구 앞에 도착했다. 슬레이만이 말 머리를 다시 돌리며 말했다.
"조금 더 많은 얘기를 나누고 싶습니다만 서쪽 구역의 시찰을 미룰 수가 없습니다. 죄송합니다만 남은 이야기는 아무래도 내일로 미뤄야 하겠습니다."
"미안해하지 않아도 됩니다. 어차피 내가 지나치게 빨리 도착했기 때문에 일정이 틀어진 것이니까요."
불쾌해하지 않고 대답한 칼리안이, 멀리 보이는 바위산을 한 번 바라본 뒤 슬레이만을 향해 말했다.
"내일 시스파니안의 의지를 만난 것까지 보태서 이야기를 나누면 되겠네요."
슬레이만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무쪼록 몸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다녀오시면 풀어놓을 이야기가 아주 많으실 겁니다."
그리고는 아주 유쾌한 소리로 웃었다.
* * *
지그문트 칸 시스파니안.
지극히 위대한, 시스파니안.
시스파니안의 이름 앞에 붙어 있는 두 개의 칭호는 자존감 높은 용들이 자발적으로 붙여준 것이었다. 그 정도의 대우를 받을 자격은 충분히 지니고 있었다.
한때는 온 대륙을 공포에 떨게 하였고 한때는 악신을 봉인하여 대륙을 지켜냈으며, 또 한때는 인간을 사랑했다.
그리고 어느 날 홀연히 사라졌다.
누군가는 생의 권태를 이기지 못해 자연으로 돌아갔다 했고 누군가는 잠든 세렌티를 대신해 신이 되었다 했다.
그런 시스파니안이 남겨둔 의지를 만나고자 아주 먼 길을 온 칼리안이 눈 앞의 거대한 공동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드디어 만나보겠네."
왕자의 성인식은 홀로 치뤄진다. 시스파니안의 뜻이었다.
다른 이들은 산 아래에 남았다. 따라서 칼리안 역시 혼자였다.
잠시 머릿속으로 시스파니안에게 물을 것을 정리한 칼리안은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공동 입구로 발을 디뎠다. 밝은 아침이었으나 공동에 한 걸음을 내딛기가 무섭게 어둠 뿐인 곳에 덩그러니 남겨진 기분이 들었다.
때문에 잠시 발을 멈칫했던 칼리안은 다시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뚜벅 뚜벅 하는 발걸음 소리가 공동을 둔중하게 울리다 아련하게 사라졌다.
그렇게 얼마나 들어갔을까.
얼만큼의 길을 걸어왔는지 문득 궁금해진 칼리안이 뒤를 돌아다 보았다.
그와 동시에 빛이 폭발했다.
적막한 어둠을 사납게 쫓아내는 것 같은 황금색의 빛이 온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때문에 칼리안은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그렇게 또 얼만큼의 시간이 지나고 눈부심에 익숙해졌다고 느꼈을 때 쯤.
- 사아아······.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에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바람결을 타고 함께 날아온 풀냄새가 코 끝을 맴돌았다. 공동 안에서 느끼기에는 힘들 그 감각에 칼리안이 눈을 떴다.
그리고 숨을 멈추었다.
칼리안은 앨런처럼 마나의 이치를 깨달은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다. 하지만 마나 그 자체를 느낄 수는 있었다. 때문에 알 수 있었다. 확신할 수 있었다.
끝을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심대한 마력.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멎을 듯한 공포감.
'의지가 아니다.'
의지가 아니었다.
의지 따위가 아니었다.
때문에 칼리안은 허리를 숙였다.
"지극히 위대한."
검은 머리.
붉은 눈.
"시스파니안을 뵙습니다."
시스파니안이 칼리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12장. 살고 있습니다 (3)
눈부신 빛이 공동을 휘감고 있었다.
아침이었음에도, 이틀 거리에 있는 시트렌 시에서조차 그것을 볼 수 있을 만큼의 밝은 빛이었다.
칼리안이 공동에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지금껏 단 한번도 없었던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분명 불길한 느낌의 빛은 아니었다.
하지만 바위산 아래에서 칼리안을 기다리던 일행들은 완전히 마음을 놓기가 어려웠다.
때문에 얀은 안절부절 못하며 공동 입구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 얀을 향해 누군가 소리 없는 걸음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얀의 곱슬거리는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으며 말을 건넸다.
"네 꼬맹이가 그리 걱정되느냐?"
여러 기사들이 있는 곳이었다.
기사들 뿐인가? 아르센을 포함한 칼리안의 사람들도 있는 자리였다. 이런 자리에서 칼리안을 그렇게 부를 만한 이는 당연 슬레이만 뿐이었다.
제멋대로 헝클어진 머리를 부여잡은 얀이 슬레이만을 보며 놀란 눈을 했다. 그가 도착하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시찰 가신다면서요?"
슬레이만이 확인해야 했던 서쪽 구역은 한나절 거리에 있었다. 전날 저녁에 출발했다 해도 시찰을 마치고 벌써 올 만큼의 시간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얀의 질문을 받은 슬레이만이 살짝 옆으로 비켜서며 대답했다.
"운 좋게 반가운 손님을 마주쳐서 빨리 오게 됐다."
그 말에 얀이 고개를 돌려 슬레이만의 거대한 몸집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사람들을 쳐다봤다. 그리고 슬레이만을 보았을 때의 몇 배는 더 놀란 얼굴을 했다.
얀이 만나보지 못했던 두 명이 서있었다. 하지만 얀의 또래로 보이는 소녀를 본 얀은 단번에 누구인지를 가늠했다.
"베로니카 마나실이라고 해요."
아래로 내려갈수록 점점 붉어지는 머리카락.
앨런 마나실의 손녀였다.
* * *
고요한 가운데 풀잎 스치는 소리가 지나간다.
그리 대단할 것 없는 풀내음이 가득 퍼졌다.
지금 칼리안이 디디고 서 있는 곳은 언덕 진 작은 들판이었다.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땅도 바다도 보이지 않았다. 오로지 하늘 아래 덩그러니 놓인 섬 같은 느낌을 주는 곳이었다. 때문에 칼리안은 이곳이 카이리스가 맞을지 아니. 인간의 땅이 맞을지를 가늠하지 못했다.
- 지극히 위대한, 시스파니안을 뵙습니다.
칼리안의 인사를 받은 시스파니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주변의 모든 공기를 잠식할 것 같던 마력과 숨을 쉬는 것도 잊어버릴 듯한 공포감을 사그라뜨려 주었다.
처음 시스파니안을 마주했을 때 느꼈던 위압감이 한층 사라졌다.
시스파니안을 대하는 것이 확연히 편안해진 것을 느낀 칼리안이 잠시 고개를 숙여 보였다.
칼리안을 보고 있던 시스파니안이 말 없이 뒤로 돌아섰다.
그리고 들판의 끝자락으로 천천히 스치듯 걸어갔다. 길고 검은 머리가 바람을 타고 이리저리 흔들리다 내려앉기를 계속했다.
문득 시스파니안의 목소리가 칼리안의 귓가에 닿았다.
"세상에 없어야 할 아이가 나를 찾기에 무슨 일일까 하였다."
이미 죽었어야 할 운명이었던 칼리안이 어떻게 이 곳에 와 있는지를 궁금해했다.
"다른 시간을 살던 기억을 지니고 있기에 무슨 일일까 하였다."
칼리안이 베른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까닭을 확인하고자 했다.
"나의 축복을 칼날로 벼려두었기에 무슨 일일까 하였다."
시스파니안이 축복을 내려준 심장에 담긴 칼리안의 마력이 남들과 다른 이유를 알고 싶어 했다.
여전히 들판의 끝에 선 채로 먼 곳을 좇던 시스파니안이 고개를 돌려 칼리안을 쳐다봤다. 바로 옆에서 말하는 것 같은 신비로운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하여, 내가 너를 불렀다."
그제야 칼리안은 시스파니안이 왜 의지가 아닌 본신으로 칼리안의 앞에 나타났는지를 알 수 있었다.
시스파니안은 지금 칼리안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직접 만나보기로 마음을 먹었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란델과 플란츠는 시스파니안의 본신을 만난 적이 없다는 말인가.'
이 특별한 만남이 성사되었음에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칼리안이 잠시 쓴웃음을 지었다.
곧 시스파니안이 칼리안을 향해 한 발을 내딛었다. 그러자 어느새 칼리안의 바로 앞으로 다가와 서 있었다.
그 움직임이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덕분에 칼리안은 시스파니안이 갑자기 코앞에 나타난 것에 놀라지도 못했다.
칼리안과 마주보고 선 시스파니안이 말했다.
"보겠다."
무엇을 본다는 말인지에 대한 설명이 없었다.
그저 그렇게만 말한 시스파니안은 자신의 것과 닮아 있는 칼리안의 눈을 오랫동안 쳐다봤다. 그 뒤에는 간혹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한숨을 쉬기도 하고 작게 웃기도 했다.
'내 기억을 보는 듯한데.'
칼리안의 짐작대로였다.
시스파니안은 칼리안의 생을 직접 살펴보고 있었다.
아무런 양해도 구하지 않은 채 기억을 뒤져보는 태도에 기분이 나쁠 법도 했건만 칼리안은 의외로 담담했다. 애초에 시스파니안이 누군가의 양해를 구해야 할 존재도 아니었거니와 시스파니안에게 자신이 겪은 일들을 숨겨야 할 필요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또 시간이 흘렀다.
칼리안에게서 눈을 뗀 시스파니안이 말했다.
"이해하였다."
짧은 한 마디의 말.
베른이 다시 살아나게 되었던 일에 대해 놀라기는 커녕 의구심조차 가지지 않았다. 그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았으니 되었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칼리안이 저도 모르게 맥 풀린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시스파니안의 말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결국 무리한 짓을 벌였구나."
잠시 눈을 감았다 뜬 시스파니안이 읊조리듯 말했다.
그래.
시스파니안은 분명 그렇게 말을 했다.
하지만 그 말은 칼리안에게 닿지 않았다.
바로 앞에서 말했음에도 들리지 않은 것이다. 칼리안은 시스파니안이 입을 달싹이는 것도 보았으나 무슨 말을 한 것인지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심지어 그 입모양조차 머릿속에 남지 않았다.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 때문에 의문이 가득 떠오른 칼리안의 얼굴을 본 시스파니안이 잠시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곧 방금 전의 일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다.
"나의 말을 네가 듣지 못하는구나. 그녀가 원치 않는 까닭이다."
칼리안이 시스파니안의 말을 듣지 못하도록 금제를 걸었다는 것이다. 시스파니안이 말한 '그녀'가 누구를 의미하는지는 오래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아직까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던 칼리안이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세렌티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리 불리더구나."
주신 세렌티가 아니라면 이 세상의 그 누가 감히 시스파니안에게 말의 제약을 가하겠는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갑작스레 드는 궁금증이 있었다.
"세렌티는 악신을 봉인하는 과정에서 잠들었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당신의 말을 막는 것입니까."
잠든 세렌티가 멀쩡히 활동하는 것처럼 시기 적절하게 나타나 시스파니안의 입을 막았다는 것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던 탓이다.
그러자 시스파니안은 별 것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잠들었다 하여 존재가 가려지겠느냐."
"깨어있지 않다 해도 당신의 말을 가릴 수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나조차도 의지를 남겨두고 이곳에 있거늘."
시스파니안의 말이 조금 이상했다.
세렌티가 의지를 남겨두고 잠에 빠져든 것처럼 시스파니안 역시 의지를 남겨두고 '이곳'에 와 있다는 말이 아닌가.
칼리안이 다시 한번 질문했다.
"그렇다면 이곳은 어디입니까."
"인간의 발이 닿을 수 없는 곳이다."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대답이 아니었다.
사실 이해를 하라는 뜻으로 한 대답도 아닌 것 같았다. 알려줄 생각이 아예 없다는 말처럼 들렸으니까. 때문에 칼리안은 그저 고개만 끄덕이며 대충 알아들었다는 뜻을 보였다. 지금 칼리안에게 중요한 것은 시스파니안이 있는 곳이 어디인지가 아니었다.
곧 칼리안이 이 곳에 올 때 가지고 왔던 무언가를 꺼내보였다. 바로 엘프 루카가 누군가로부터 훔쳐온 검은 조약돌이었다. 그것을 본 시스파니안이 손을 내밀었다.
칼리안으로부터 건네 받은 돌을 들여다보던 시스파니안이 다시 한번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그들이 만든 것이구나."
이 말 역시 들리지 않았다.
칼리안이 자신의 말을 듣지 못한 것을 안 시스파니안이 조약돌을 돌려주며 다시 말했다.
"지니고 있거라. 때가 되면 알게 될 테니."
그 말에 칼리안은 또 세렌티의 금제가 있었음을 눈치챘다. 시스파니안 역시 세렌티의 뜻을 거스를 수는 없는 것 같았으므로 이번에도 칼리안은 고개만 끄덕였다.
물론 그것으로 궁금증을 모두 접을 생각은 없었던 칼리안이 잠시 입 속으로 말을 골랐다. 성인식을 빌미로 이렇게 오랜 시간에 걸려 시스파니안을 찾아온 진짜 목적 정말로 확인하고 싶어 했던 것을 꺼내놓기 위해서였다.
"궁금한 것이 많은 아이구나."
칼리안의 질문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시스파니안이 이렇게 말을 했다. 다행히 끈질긴 질문 세례가 귀찮아서 하는 말은 아니었다.
어쩐지 칼리안은 그 말을 꺼낸 시스파니안이 웃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덕분에 조금 더 편안해진 마음이 된 채로 질문을 했다.
"세크리티아에 시간의 축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알고 있다."
시스파니안이 낮은 한숨을 쉬었다.
그 한숨이 조금 전 칼리안의 기억을 뒤져볼 때 보였던 것과 매우 달랐다. 깊은 탄식이 어려 있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때문에 질문하는 것도 잊었던 칼리안이 퍼뜩 정신을 차리며 물었다.
"카이리스에서 시간의 축을 원했던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그 말을 들은 시스파니안이 다시 입을 열었으나 이번에도 금제가 걸렸다. 이번에는 아예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것보다 훨씬 더 강하게 세렌티가 시스파니안의 말을 막아선다.
시스파니안은 이번에도 다른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녀는 네가 조급하게 굴지 않기를 원한다. 네 죽음 뒤의 상황에 대해 네가 섣불리 알아내어 앞으로의 일을 망쳐놓을까 우려하는 까닭이다. 그러니 실망하지 말거라."
그 말에 칼리안의 눈이 빛났다.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거짓이 아니었다.
칼리안은 실망하지 않았다.
계속하여 시스파니안에게 금제가 걸리는 그 모습에서 알게 된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알려지는 것을 방해하려 세렌티가 직접 나설 만큼의 일이 벌어지기는 했었다는 말씀이시군요."
신의 개입이라니.
생각보다 판이 크지 않은가.
10년이나 시간을 거슬러 온 것이, 그것도 세크리티아를 멸망시킨 이 카이리스로 오게 된 것이 결코 무의미한 일이 아니라는 뜻이기도 했다. 잠시 흥미로운 눈으로 칼리안을 보던 시스파니안이 답했다.
"네 말이 옳다."
칼리안이 잠시 입을 다문 채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곧 칼리안의 목소리가 조심스럽게 흘러나왔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묻고 싶습니다."
"듣겠다."
곧바로 허락이 나왔음에도 칼리안은 섣불리 입을 열지 못했다.
주저하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얼굴로 칼리안이 물었다.
"형님께서 저를 되살리고자 시간의 축을 사용한 것이 맞습니까."
시스파니안의 입가에 진짜 웃음이 떠올랐다. 웃는 것 같다는 느낌만 주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웃고 있었다. 그것이 마치 시스파니안이 칼리안을 질책하며 짓는 웃음처럼 여겨졌다.
시스파니안은 웃음이 채 지워지지 않은 얼굴로 답했다.
"네 생각이 깊지 않구나. 그 역시 차차 알게 될 일이다."
"형님께서 사용하신 것이 아니었군요."
그 말만으로도 이미 충분한 대답이 되었다. 하지만 시스파니안은 굳이 한번 더 입을 열었다.
"네 형제이기 이전에 왕이다. 이치를 거슬러가며 너 하나를 우선할 만큼, 네 형제가 그리 아둔한가."
그것은 분명한 질책이었다.
제12장. 살고 있습니다 (4)
그 날.
지그프리드 공작령에서는 하루종일 새가 날아올랐다.
온갖 색의 전서구와 전서응이 카이리시스를 향해 출발한 것이다. 새들의 생김은 모두 달랐으나 편지의 내용은 모두 같았다.
- 칼리안이 시스파니안의 빈 둥지에 들어서니 밝은 빛이 뻗어나왔다. 그 빛이 지그프리드 외성 밖에서도 보일 정도였다.
지그프리드에 머무는 귀족의 가신들이 적어낸 소식은 거기까지였다.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나 빛의 정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었으니 다른 내용이 담길 수가 없었다.
그것을 확인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 칼리안은 산책이라도 다녀온 듯한 얼굴로 산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성인식을 온전히 마쳤음을 간단히 선언한 뒤 곧바로 지그프리드 성으로 돌아갔다.
공작 슬레이만은 그런 칼리안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칼리안의 방에 점심식사를 따로 올리도록 전한 뒤 응접실과 연결된 테라스에 나와서 유유자적 바람을 쐬고 있었다.
테라스에 서 있던 중에 몇 마리의 전서구가 창공을 날아 사라지는 것을 보게 된 슬레이만이 허허 웃었다. 그리고 순수한 놀라움을 담아 말했다.
"내 영내에 저렇게 많은 입이 있는지 이제야 알았다!"
지그프리드의 땅에 거주하며 밖으로 소식을 전달하는 이들이 얼마나 되는지도 파악하지 않고 있었다는 말이었다. 때문에 슬레이만의 옆에 있던 이가 핀잔을 주었다.
"이것이 지금 감탄만 하실 일입니까."
얀의 동생이자 지그프리드 공작가의 소가주인 드미레아였다.
드미레아는 얀처럼 동그란 눈매를 가진 귀여운 얼굴이었는데 어색한 것 같지만 또 묘하게 잘 어울리는 엄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느새 훌쩍 커서는 잔소리까지 하기 시작한 딸을 보며 슬레이만이 부드럽게 말했다.
"감탄만 하고 넘어가도 괜찮지 않겠느냐?"
그러자 드미레아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큰 힘을 시기하는 이들은 어디에나 있는 법이 아닙니까. 저들이 우리 가문과 엮일 일이 영영 없겠습니까. 어떤 가문의 가신들이 이 곳에 있는지 미리 알아두고 경계해야 할 필요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유를 들어가며 자신의 생각을 또박또박 전달하고 있었다. 지그프리드의 다음 주인으로 조금씩 커가고 있는 드미레아의 모습을 본 슬레이만이 흐뭇하게 웃었다.
"좋구나. 너도 나를 조금만 닮은 모양이다. 내가 아무튼 결혼을 잘 했다!"
자식들이 자신을 많이 안닮았다며 좋아할 사람은 아마 슬레이만 뿐일 것이다. 항상 생각이 깊은 지그프리드 공작부인을 떠올리며 한바탕 웃은 슬레이만이 드미레아를 쳐다보다 말을 이었다.
"하지만 레아야. 우리 가문이 저들을 경계하면 그것은 정치가 된다. 우리는 지키는 이들이지 다스리거나 옹립하는 자가 아니다. 우리가 힘을 기르는 것은 방패를 들기 위함이 아니냐."
드미레아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슬레이만과 생각이 달랐기 때문이다.
조금 뒤 드미레아가 멀리 보이는 창문 하나를 가리켜보였다. 칼리안이 머물고 있는 귀빈실 쪽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를 지도 모릅니다, 아버지."
얀이 왕궁에 있었다.
그것도 칼리안과 아주 깊이 관계되어 있었다.
그래서 하는 말임을 슬레이만이라 하여 모르지는 않았다. 심지어 얼마 전 왕궁을 찾았을 때 이미 한번 얀에게 이름을 팔리지 않았던가.
그러니 얀이 다음 번에 필요로 하는 것이 과연 슬레이만의 이름 뿐일지 그의 검일지. 그것은 슬레이만도 장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경계하지 않더라도 대비는 하고 있지 않느냐."
그렇게 대답한 슬레이만이 성내에 마련된 훈련장 쪽을 쳐다봤다. 수많은 기사들이 어김없이 검을 맞대며 훈련을 하고 있었다.
"내가 막 그렇게 매가리가 없지는 않다!"
얼빠진 것처럼 말하고 있기는 해도 자만이라기 보다는 자신감이 어린 소리였다.
다만 슬레이만은 무조건 자신의 생각만 고집할 인물은 아니었다. 때문에 드미레아의 머리를 얌전히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누구의 가신들이 여기 살고 있는지 정도는 알아두마."
그제야 드미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 슬레이만에게 자신의 의견을 들어주어 고맙다는 말을 꺼내려는데, 테라스 문이 열리며 얀이 밖으로 나왔다.
"와. 전서구 진짜 많던데요?"
순수하게 감탄만 하는 인간이 한 명 더 늘어났다.
드미레아는 얼굴을 굳혔고 슬레이만이 다시 크게 웃으며 대답했다.
"정말 많지 않더냐? 나는 매도 보았다!"
그 말에 대한 대답이라도 하듯 새가 또 날아올랐다.
그것을 보며 '또 간다, 우와!' 따위 말을 지껄이는 부자를 보는 드미레아의 눈에 시름이 깊었다. 언젠가는 이 가문을 짊어져야 할 어깨가 매우 무거워진 탓이었다.
* * *
- 충분한 준비가 되었다 생각되는 날에 다시 찾아오거라.
시스파니안의 마지막 말을 떠올리던 칼리안이 실소했다.
"또 무슨 말을 해주려고 그러시는지."
잠시 슬레이만을 만나고 돌아와 칼리안과 마주 앉아있던 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칼리안은 그 시선에 대답하는 대신 테이블에 놓여 있던 차가운 민트차를 들어올렸다. 컵 속에 든 얼음이 맑은 소리를 냈다.
"······ 충분한 준비라."
여전히 의미를 파악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얀은 칼리안을 보던 시선을 창 밖으로 돌렸다. 쳐다보고 있는 것이 괜히 대답을 강요하는 것처럼 보일까봐서였다.
그러자 칼리안도 창 밖을 쳐다봤다.
슬레이만의 기사들이 잔뜩 있는 훈련장이 한눈에 들어왔다. 어느새 거기까지 찾아갔는지 키리에가 기사들과 함께 있는 것이 보였다.
아무튼 열심이라 생각하며 시선을 돌리자 이번에는 정원에 앉아 있는 히나가 눈에 들어왔다.
히나는 무언가를 계속 쓰다듬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브론즈 색 곱슬거리는 털을 가진 푸들이었다. 얀을 하도 닮아서 이름까지 '얀'이 되어버렸다던 슬레이만의 강아지였다. 해맑게 웃는 히나의 얼굴을 본 칼리안이 중얼거렸다.
"새보다 강아지를 더 좋아하네. 체르밀궁에 개를 키워도 되나."
이제껏 한마디도 붙이지 않고 같이 차만 마시던 얀이 말했다.
"자꾸 히나에게 뭘 해줄까 하는 생각을 하시네요. 지난번에는 새를 생각하면서 관심을 보이시더니요."
그렇게 말하는 얀의 목소리가 꽤나 의뭉스러웠다. 무슨 생각에서 저런 말을 하는지 뻔했으므로 칼리안이 곧바로 오해를 풀어주었다.
"그런 관심 아니야."
연애를 꿈꾸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었다.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인 얀이 다시 히나를 쳐다보다 웃었다. 히나가 푸들 얀의 눈 앞에 대고 손짓을 하는 모습을 본 까닭이다.
"강아지한테까지 수어를 쓰네요. 귀엽다고."
그 말에 문득 궁금해진 것이 생긴 칼리안이 물었다.
"넌 어떻게 수어를 알아?"
별 생각 없는 질문이었다.
그런데 얀으로부터 대답이 없었다.
괜한 것을 물었음을 깨달은 칼리안이 말을 돌리려 할 때 얀이 다시 입을 열었다. 창 밖을 보던 눈을 떼지 않은 채였다.
"형이 있었어요."
있었다는 말.
그 말만으로도 설명이 되었다.
하지만 얀은 꺼낸 말을 멈추지 않고 계속 이야기를 해주었다.
"건강하지 못해서······ 같이 지내려면 배워야 할 것이 많았어요. 곧 전부 소용 없게 됐지만요."
그렇게 말한 얀이 차를 들어 한모금을 마셨다. 대답할 만한 말을 찾지 못하는 칼리안의 얼굴을 보던 얀이 웃으면서 말했다.
"오래 전 일이니 괜찮습니다. 지금은 왕자님도 계시고요."
"······ 그래."
곧 얀은 다른 화제를 찾는 것이 분명한 목소리로 창 밖의 강아지를 가리켜보였다.
"쟤 겁 엄청 많아요. 얼마나 짖는데요. 체르밀에서 키웠다가는 플란츠가 가만 있지 않을겁니다. 란델 왕자도 그렇고요."
오래 이야기하며 침울해하고 싶어하지 않는 눈치였다.
어색해하는 칼리안을 위해주는 것일 수도 있었다. 아무튼 죽은 형에 대한 이야기를 이제 집어넣으려는 의도임은 분명했기 때문에 칼리안도 더 묻지 않고 새로운 화제에 대해 대답했다.
"그럼 카밀론으로 가야겠네."
카밀론궁.
왕세자의 거처였다.
얀이 고개를 돌려 칼리안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물었다.
"지금껏 한번도 세자위에 대해 언급한 적 없으셨잖아요."
"체르밀에서는 못 키운다며. 그러니 가야지, 카밀론에."
얀이 어처구니 없다는 듯한 얼굴이 되었다.
"개나 키우겠다고 카밀론에 가겠다는 사람은 왕자님 밖에 없으실 겁니다."
칼리안이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놨다.
민트 특유의 청량한 향이 썩 마음에 든다.
입 안을 가득 채우는 향을 잠시 음미하던 칼리안은 여유로운 얼굴로 창 밖을 보며 입을 열었다.
"시스파니안의 본신을 만난 왕자도 나 밖에 없을걸."
얀이 동그란 눈을 몇 번 깜빡였다.
칼리안의 말을 이해하기까지 몇 초가 흘렀다.
그 뒤 얀의 손에 들려 있던 유리잔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 * *
지그프리드의 내성은 카이리스 왕궁과 마찬가지로 시스파니안의 힘이 닿는 곳이었다. 때문에 앨런과의 소통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칼리안은 앨런과 대화를 나눌 수 있을 만한 적당한 곳으로의 안내를 얀에게 부탁했다. 그리고 얀은 시스파니안이 정말 살아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녀가 칼리안을 직접 불러들여 대화를 나누었다는 소식을 접해 놀란 마음을 다 진정시키지도 못한 채 칼리안과 함께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시스파니안의 힘이 닿지 않으면서 인적이 드물고 내성에서 가장 가까운 적당한 장소를 가까스로 생각해낸 뒤 칼리안을 안내했다.
"여기는 사람들이 잘 안 와요."
칼리안이 주변을 둘러보다 작은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재밌다는 듯 웃는 모습과 참 어울리지 않게도, 주변에는 망자들의 비석이 온통 가득했다. 얀이 안내해온 곳이 지그프리드가의 중요 인물들을 위한 묘지였던 것이다.
"확실히 다른 어떤 곳보다 사람이 없기는 하네."
"네. 편하게 계셔도 됩니다."
그나마 조금 높은 곳으로 가니 비석이 놓이지 않은 너른 땅이 있었다. 그곳까지 올라간 칼리안이 앨런을 불렀다.
- 로젤리타는 잘 마치셨습니까?
기다렸다는 듯한 앨런의 대답이 들려왔다.
분명 앨런도 궁금했을 것이다. 시간의 축에 대해 함께 이야기하고 시스파니안을 만나보라고 조언한 것이 모두 앨런이었으니까.
- 네, 스승님. 성인식은 마쳤고 시스파니안은 잘 만났습니다.
그렇게 운을 뗀 칼리안이 공동 안에서의 일을 모두 전했다.
앨런의 첫 반응 역시 얀과 다르지 않았다.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칼리안은 앨런이 얀보다 몇 곱절은 더 놀랐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텐실의 신관들에게 세렌티가 있다면 세상 모든 마법사에게는 시스파니안이 있다 하지 않던가.
- 시스파니안의 본신을 만나셨다니. 함께 갈 것을 그랬습니다.
역시나 앨런이 이런 말을 했다.
놀라움과 아쉬움이 잔뜩 묻어나는 느낌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물론 함께 왔다 해도 앨런이 시스파니안을 만나지는 못했을 것이었다. 공동의 빛이나마 볼 수는 있었겠지만 그래서야 아쉬움만 커질 뿐이다.
- 준비가 될 때 다시 찾아오라 하였으니 다음 번에는 꼭 스승님과 함께 오겠습니다.
- 듣던 중 감사한 말입니다. 그래서, 무슨 준비를 한 뒤에 만나자는 이야기였습니까.
- 지금 제가 해야 할 준비는 하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말한 칼리안이 잠시 주변을 느긋하게 훑었다.
숱한 죽음의 흔적이 남은 곳. 망자를 기억하려는 이들의 마지막 정성이 담기는 곳을 바라보다 말을 전했다.
- 살아남아야죠. 우선은.
흔적조차 남겨지지 않은 왕제의 영혼을 지닌 이가 삶을 말했다.
- 돌아가면 다시 일어나 있을 실리케부터 상대해야 할 테니 우선은 제 자리부터 잘 지켜야죠. 살아남는 것에 신경을 조금 덜 쓰게 되어야, 앞길이 좀 보이지 않겠습니까.
- ······ 그래요. 애석하지만 맞는 말씀이기는 합니다.
- 브리센 쪽은 분위기가 어떻습니까. 실리케 쪽도 어떤지 궁금하네요. 레넌이 사라졌는데 어떻게 하고 있는지.
칼리안의 질문을 예상하고 있었는지, 앨런이 곧바로 대답했다.
- 열흘이 지나도록 레넌을 찾지 못하니 아무래도 이상한 점을 느낀 듯 합니다. 오늘 아침에 에반 브리센이 궁에 들었다 나갔습니다.
- 브리센을 후작을 불러 자초지종을 물었나 보군요.
- 그리 하였으리라 생각됩니다.
- 하긴. 수족처럼 부리던 레넌 브리센 자작이 갑자기 사라졌으니 답답하기는 하겠네요.
잠시 웃던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 브리센 후작이 직접 브리센 자작이 사라진 이유를 알릴 걱정은 없는 겁니까.
- 저와 맹세의 인을 나누었습니다. 실리케에게 그 사실을 말하면 후작의 목숨줄이 끊어질 터이니 절대로 그 이야기를 입 밖으로 내지는 못합니다.
앨런의 말대로였다.
에반 브리센은, 자신이 레넌을 어떻게 처리했는지에 대해 실리케에게 알리지 않겠다는 내용을 두고 앨런과 '맹세의 인'을 나누었다. 만약 어긴다면 맹세의 인에 의해 심장이 짓눌려 죽을 테니 비밀이 새어나갈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될 터였다.
- 그렇다면 실리케는 레넌을 대신할 다른 수족을 찾으려 할 겁니다. 왕궁 밖을 마음대로 나다닐 수 없는 것은 저나 실리케나 마찬가지니까요. 분명 자신을 도와 줄 다음 사람을 찾으려 들 테니 잘 지켜봐주세요.
앨런의 대답 대신 웃음이 전해졌다.
이런 반응에 눈을 가늘게 뜬 칼리안이 물었다.
- 설마, 벌써 왕궁에 새로 드나드는 브리센 측 인물이 있습니까.
- 지금 제 손에 편지 한 장이 있습니다. 전하를 꽤나 골치아프게 한 편지인데, 안그래도 이것에 대해 말씀을 드리려 하였습니다.
- 편지라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편지를 펼쳐보는 것인지, 아니면 할 말을 고르는 것인지. 앨런으로부터 잠시동안 말이 없었다. 멀리 서 있던 얀을 보며 기다리고 있으려니 앨런의 이야기가 다시 들려왔다.
- 야만족들과의 전투에서 부상을 당해 카이리시스로 돌아와 잠시동안 요양하고자 하니, 자신의 자리를 임시로 맡아 줄 이를 영지로 보내달라. 이런 요청이 적혀 있습니다.
- 혹시······ 브리센 변경백의 편지입니까.
그레이 브리센.
에반 브리센 후작의 첫째 아들. 텐실과 인접한 곳에 영지를 둔 변경백이기도 한 이의 이름이었다.
- 맞습니다. 아마도 실리케가 레넌이 사라진 것을 알자마자 부른 것 같습니다. 부상 핑계를 대고 수도로 돌아오려 하는 것이겠지요. 아직 왕궁에 드나들고 있지는 않지만 왕자님보다 조금 빨리 왕궁에 도착할 것 같습니다.
- 역시.
칼리안의 얼굴에 흥미 가득한 표정이 들어섰다.
- 드디어 얼굴을 보겠네요.
칼리안이 잠시 고개를 돌려 카이리시스가 있을 방향을 쳐다봤다.
또 한 마리의 전서구가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그것이 전할 소식과 그레이 브리센. 그리고 칼리안.
- 또 다른 소드마스터라······ 재밌겠네요. 만나면 어찌될지.
셋이 만날 날이 벌써부터 기대가 되고 있었다.
제12장. 살고 있습니다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