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알 헤임달의 늙은 대장장이 (무료 마지막)
#61화.
쿠구구궁—
저 멀리, 거대한 굴착 중장비는 도로의 양 면을 점거하다시피 하며 궤도를 굴렸다. 내가 지상을 다 밟고 지나가겠노라, 새까만 연기를 무한히 피워 올리는 그 괴물은 둔중한 철갑으로 지면을 끝없이 밀어냈다.
와중에 나는, 눈앞의 뾰족한 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엘프?"
"응."
힘 빠지는 마법사의 답변에도 왜 엘프인걸 진작 말하지 않았지? 같은 의미 없는 말은 뱉지 않았다. 엘프면 어떻고 인간이면 어떤가. 이 엘프는 마탑의 중요한 구성원으로, 마탑주 일레힌 포이체카의 신임을 받는 마법사이자 나와 같이 전장에 내던져질 동료일 뿐이다.
"그랬군. 그런데 여인이었나."
"응, 그게 왜?"
마탑의 구성원끼리는 마나 팔찌의 운무 효과로 정확한 외형을 알 수 없었으니. 무언가 중성적인 느낌을 보인다 싶었는데, 여인이었군.
이 엘프 마법사는 나와 비슷한 또래로 보였다.
하지만 보통 엘프들은 같은 나이대의 인간보다 월등히 젊어 보인다. 그래서 나이를 얼마나 먹었는지 외형만으로는 알 수 없다. 마법사로 이룬 경지가 굉장히 높으니 최소한 오십 년 이상은 살지 않았을까 싶었다.
"이제 그만 출발하시, 아니. 할까."
"?"
나는 순간 말을 높이려다가 말았다.
조금 일찍 죽었다 뿐이지, 전생까지 합쳐 백 년을 훌쩍 넘게 산 사내가 바로 나다. 중년으로 추정되는 이 엘프라도 나보다는 한 수 아래다.
"그래, 타."
나는 다시 청록빛 괴물의 등판 위에 올랐다.
알 헤임달 스테이션 근처의 길바닥은 여기저기 더러운 오물이 떨어져 있어 대부분의 주민은 굽이 꽤 높은 부츠를 신고 다녔다. 더군다나 이 근처는 상공을 메운 비공정들의 분진과 매연이 특히 심한지라 다들 얼굴이 꼬질꼬질했다. 빨리 이 더러운 구역을 빠져나가고 싶었다.
그렇게 우리를 등에 태운 청록빛 괴물은, 마공학 대장간을 향해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
알 헤임달은 크게 다섯 구역으로 나뉜다.
동서남북과 중앙 구역.
각각의 구역이 발두르 시티보다 면적이 크다. 그중 엘프 마법사가 아는 마공학 대장간이 있다는 곳은 시티의 남쪽으로, 이족 난쟁이들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이었다.
나는 쾌속하게 달리는 괴물 위에서 도시의 풍경을 구경했다.
중세와 근대의 지구에서 증기선 같은 소품들만 붙여놓은 듯한, 어찌보면 지구의 산업혁명 시절과도 비슷한 도시의 분위기가 겪어본 적도 없는 가상의 향수를 자극했다.
그때, 웬 거대한 그림자가 머리 위로 졌다.
위를 올려다보자 칙칙하고 어두운 하늘에서 빨간빛을 내며 떠다니는 비공정이 증기를 힘차게 뿜어내고 있었다.
비공정들의 그림자는 쉴 새 없이 나타나 안 그래도 어두운 하늘을 또 가렸다. 허공을 유유히 비행하는 저 고래들은 석탄을 잔뜩 처먹고서 이를 닦지도 않는지 연신 새까만 가루를 벚꽃처럼 흩날려댔다. 가끔 엄청난 양의 먼지가 덩어리진 채 지상으로 떨어졌다.
쿵···
나는 다시 고개를 내렸다.
길거리에는 자동차 외에도, 소음이 심한 마차들이 많았다.
아니, 마(馬)차라고 하기는 힘들었다. 뒤에 달린 수레는 말이 아닌 웬 파이프와 고철로 이루어진 기계짐승들이 끌고 있었으니까.
그들은 달리다가 가끔 숯덩이를 꺼내어 먹었는데, 이내 트림을 하듯 까만 매연을 훅 뿜어낸 뒤로는 속도가 매우 빨라졌다.
석탄일 것이다.
알 헤임달에서 나는 석탄과 가스의 품질은 매우 훌륭한데다, 땅을 파면 흙 대신 석탄이 나올 만큼 흔한 동네.
가스와 기름 역시 마찬가지라 이 알 헤임달의 선조들은 양질의 천연자원을 마음껏 퍼다 썼고, 그 덕분에 이렇게 독자적으로 발전했다고 들었다.
다른 시티의 선진 기술? 여기선 별로 알아주지 않는다. 어차피 집 앞 마당을 파면 나오는게 석탄이라 그걸 쓰는게 값싸면서도 효율은 더 좋다. 연료 사용으로 생기는 매연을 지적할 환경단체도 여긴 없다.
전기도 발전소에서 석탄을 태워 만든다. 축복받은 천연자원으로 돌아가는 도시인 셈인데, 요즘은 그래도 몇백 년이나 펑펑 써댄 탓에 예전보다는 생산량이 많이 줄어들었다던가.
면적은 연방 도시 중 가장 큰 편에 속한다. 산맥 위에 세워진 발할라 시티보다도 넓은 면적을 가지고 있다. 다만 그것은 장벽 바깥의 외부 구역들까지 시티의 영역으로 치기에 그렇다.
알 헤임달은 다른 도시들보다 개척에 적극적이다 보니, 수많은 개척가들이 이곳으로 몰려들었고, 장벽 밖으로도 이미 상당히 넓은 땅을 수복해두었다. 거기다가 새로 높은 장벽을 세워 알 헤임달의 위성도시를 만든다던가 하는 소문이 무성했다. 지금도 대대적인 영토 개척을 준비 중일 것이다.
철컥철컥—
우리가 달리던 중간, 철도와 기관차가 시선에 들어왔다.
간이역으로 보이는 철도 위에 커다랗고 긴 증기 기관차가 정차해 있었는데, 그 옆으로 달려온 꼬질한 사람들이 기관차의 창에 붙어 승객들에게 무언가를 판매하고 있었다. 물이나 음식, 기념품 등으로 보였는데 정작 사는 승객들은 많이 없었다.
거기서 조금 더 달리자 꽤 규모있는 도시와 시장이 나왔다. 엘프 마법사는 청록빛 괴물을 수고했다는 듯 쓰다듬으며 멈추게 했다.
"여기서 잠깐 쉬었다가 다시 출발하자. 얘 먹을 것도 챙겨줘야 하거든."
"알았다."
엘프 마법사가 괴물을 이끌고 잠시 사라졌다.
우리는 뜻하지 않게 알 헤임달의 시장을 구경하게 되었다.
온갖 물건들을 깔아놓고 파는 고전적인 좌판들과 상점이 혼합되어 있었는데, 소규모 골동품과 그림들을 판매하는 상점들이 유독 많았다. 나는 혹시 법부적같은 건 없나 살펴보았지만 당연하게도 헛수고였다.
"?"
그런데 어느 상점 지나가던 때, 아힘사가 한곳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중고 회중시계를 고쳐 파는 시계 상점이었다.
철컥.
나와 아힘사가 상점 앞에 이르자, 나이가 지긋한 외알 안경의 주인장은 구경하란 듯 하던 작업을 멈추곤 어디선가 녹슬고 멈춘 회중시계를 꺼내어 앞판을 열었다.
안쪽은 하도 녹슬어서 얼마나 오래됐는지 알 수 없었으나, 그는 먼지를 털고 고장난 파츠들을 능숙히 갈아 끼운뒤 외부의 때까지 벗겨내곤 멋들어진 밑가죽을 씌웠다.
주인장은 마지막으로 회중시계의 더러운 렌즈를 후후 불어 닦고 광까지 낸 뒤, 금속태엽을 힘차게 감았다.
째깍. 째깍.
열쇠줄이 달린 회중시계는 순식간에 멀끔해져 초침 소릴 냈다. 먼지때와 녹에 숨겨져 있던 외관의 화려한 황동 장식도 다시 드러나 오묘한 빛을 냈다.
비록 내부의 부품은 이전보다 좋지 않은 양산품으로 갈아 끼웠지만, 본래의 고풍스러웠던 모습을 조금이나마 되찾았다. 처음부터 그 과정을 유심히 지켜보던 아힘사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저 회중시계는 마치 나와 같지 않습니까?"
아힘사는 갑자기 이럴 때가 가끔 있다.
나는 조용히 아힘사의 그 말을 들어주었다.
자색빛의 눈동자는 감길 생각을 하질 않았다.
"나처럼 언젠가 시간이 멈추었지만, 녹이 슬고 문제가 생긴 부품을 갈아 끼운 뒤 태엽을 돌려주면 초침은 다시 멀쩡하게 돌아갑니다. 태엽과 연결된 스프링이 끊어져 동력을 잃지 않는 한, 회중시계의 초침은 언제든 다시 움직일 수 있습니다. 진정한 열반이라는 동력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태엽을 돌려주는 사람만 있다면 아힘사도 계속 움직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
그 말에 외알 단안경 돋보기로 고친 시계를 살펴보던 주인장이 시선을 돌렸다. 그는 회중시계를 말없이 집어 건넸다.
아힘사는 회중시계를 받아 금속태엽을 한번 길게 돌린 뒤, 경쾌히 째깍대는 초침 소리를 들으며 오도커니 서 있었다.
마탑에 있는 동안도 아힘사의 인공지능은 꾸준히 학습을 반복했을 텐데, 그 몇 달간의 시간이 어떤 방향으로 아힘사를 이끌었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었다.
내가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살래?"
"네.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러자."
현역 때는 꽤 걸출했던 회중시계였던지, 생각보다 꽤 값을 크게 치뤄야 했으나 마음 쓰지 않고 지출했다. 아힘사는 구입한 그것을 받아 태엽을 몇 번 끼적거리더니, 시곗줄을 옷에 묶고 소중히 품속에 넣었다.
그 순간, 주인장이 지나가는 소리로 말했다. 손님인 우리에게 건넨 첫 마디였다.
"태엽을 너무 많이 돌리지 마세요. 태엽과 연결된 부품들이 마모되면 초침도 멈춥니다. 그때는 동력을 잃을 거라는 소리죠."
아힘사는 잠시 멈춰서 그 말을 곱씹다가, 고개를 순순히 끄덕이곤 발걸음을 돌렸다.
*
얼마 지나지 않아 청록빛 괴물을 탄 엘프 마법사가 돌아왔다.
괴물의 입가에는 검붉은 액체가 잔뜩 묻어있었다. 아무튼 우리는 다시 괴물위에 올라 남쪽으로 향했다. 한 시간 이상을 기관차보다 빠르게 달리자 마공학 대장간이 있다는 남쪽의 소도시에 이를 수 있었다.
길거리에는 꽤나 태가 나는 건물과 공방들이 많았다. 엘프 마법사는, 이 소도시가 남쪽에서 가장 번영한 구역이라고 소개했다.
나는 그 소도시를 돌아다니다 사단법인 태도철장(太刀鐵匠)이라는 건물의 현판을 보고 잠시 멈칫했다.
저 문구를 어디서 봤나 했더니, 친씨아의 총포점에서 구매했던 합금압축도의 제조사인 것이 문득 떠올랐다. 장인이 일일이 수작업으로 만든다던가? 산 넘고 좀비 건너왔을 그 압축도를 7만 크레딧에 구매해 적당히 써먹었었지. 그 칼로 썰어넘긴 몸뚱이만 몇 개 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태도철장에 관해 자세히 묻자, 엘프 마법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기는 잘 못 만드는 곳이야. 다른 시티에서는 몰라도 알 헤임달에서는 질 낮은 양산품 만드는 걸로 유명하거든."
"그렇군."
나는 꽤 쓸만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알 헤임달에서는 인정받지 못하는 모양이다.
우리는 그 대화를 마지막으로, 소도시의 대로를 따라 깊은 곳까지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뒤, 엘프 마법사가 말했던 마공학 대장간에 드디어 이를 수 있었다.
그런데, 마공학 대장간이 생각과는 조금 달랐다.
나는 그 대장간의 수상하게도 웅장한 입구 외벽과 하늘 높이 솟아있는 대문의 크기를 바라보다 물었다.
"여기가 가성비가 좋다는 마공학 대장간이 맞나?"
"응, 나한테는 가성비가 좋던데?"
황당했다.
가성비가 좋기는 무슨.
알 헤임달 시티의 4대 대장간인 '칼드락 스미스' 가 가성비가 좋은 곳이라는 얘기는 오늘 처음 들었다. 여긴 심지어 기업형 대장간 칼드락 스미스의 악명 높은 본점 아닌가?
이 대장간과 대장간의 주인은 더럽게 까탈스럽기로 세간에 유명했다. 검 제작하는 실력이 괜찮고 가성비가 좋은 이족 난쟁이들을 많이 안다더니, 아예 4대 대장간의 본점으로 데려올 줄은 몰랐군.
그만큼 보유한 명검과 보검들은 많겠으나, 내가 가진 크레딧으로는 어림도 없을 터.
"분명 백만 크레딧밖에 없다고 말했잖아."
"아~그거면 충분하니까 걱정하지 마. 진짜 잘 알고 있는 마공학 대장장이가 안에 있거든."
"······."
허나 엘프 마법사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자기 귀를 쭉쭉 잡아당기며 당당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녀를 따라 칼드락 스미스 대장간 안으로 들어가자, 카운터나 로비 따위는 없었고, 그저 커다란 수십 개의 화로들과 뜨거운 열기를 내뿜는 초거대 용광로가 떡하니 한 눈에 들어왔다. 말 그대로 대장간. 그 자체였다.
콰과과광—
그리고 대장간의 가장 안쪽 공간에서는 웬 천둥치는 소리가 터져 나오며 장내를 울렸는데, 나는 그 무겁고 진한 마력을 흩어내려 숨을 천천히 쉬었다. 어떠한 경지에 오른 존재가 이 대장간의 안쪽에 있었다.
대장간의 안쪽은 용암보다 뜨거운 열기가 메우고 있었다. 우리가 천천히 걸어 들어가자, 많은 이족 난쟁이들이 각자의 화로 앞에서 연장을 날카롭게 벼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와중에 엘프 마법사는 등에 이고 있던 재료들을 자연스럽게 내려놓았다.
"나 왔어요~"
— 오셨습니까!
— 오셨습니까요!
그러자 얼굴이 붉고 우락부락한 이족 난쟁이, 그러니까 서열이 조금 낮아 보이는 '드워프'들이 후다닥 달려와 재료들을 신중히 감정했다. 역시 꽤 품질이 좋은 금속인지 다들 흡족해하는 눈치였다.
"이제 가자. 더 안으로 들어가서 인사드리고 와야 해."
재료를 내려놓은 엘프 마법사는 천둥소리가 터져나오는 쪽으로 나를 이끌었다. 엘프 마법사를 뒤따라가면서도, 안쪽에서 연신 들려오는 천둥소리에 전율이 일었다.
칼드락 스미스 대장간의 가장 안쪽 공간.
그곳에 이르자, 시야에 어떤 작달막한 드워프가 보였다. 집채만큼 거대한 쇠망치를 든, 작달막한 드워프.
곧, 그 작달막한 드워프가 들고 있던 쇠망치가 공기를 찢어내며 벼락과도 같이 떨어졌다. 천둥 터지는 소리와 동시에 뭉근했던 모루 위의 금속이 미세하게 우그러져 형태를 잡았다.
나는 앞으로 불어오는 바람을 적당히 막아내며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드워프의 주변으로는 광풍이 불어치며 용광로의 열기와 어우러졌다. 그 작달막한 드워프가 휘두르는 망치에는 강맹하고 단단한 기(氣)가 터질듯 담겨있었다. 기운의 조각들은 망치가 내려쳐질 때마다 조금씩 깎여나가며 모루 위 금속에 스며들고 있었다.
달인의 경지에 이른 대장장이의 단조(鍛造)작업.
용광로의 열기마저 그가 만들어낸 광풍에 밀려났다. 사방으로 공기를 밀어내며 세를 뻗친 광풍은, 다시 대장장의 주위로 밀려들어 가다가 또 다시 터져나온 광풍에 밀려나기를 반복했다.
종국에는 밀려들어오는 열기와 밀려나는 열기가 하나의 와류를 만들어내며 그의 주변에 있는 쇠붙이들이 광풍의 와류에 떠밀려 허공을 날아다녔다.
콰과광!!
망치와 금속의 마찰로 시뻘겋고 흉흉한 불티가 일어날 때마다 장내가 대낮처럼 환해졌다. 터져나온 불티는 그 드워프의 몸을 중심으로 소용돌이치듯 흩날렸다. 그러나 그 대장장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망치를 내려쳤다.
하나 얼마나 단단한 금속인지, 저리 거대한 망치에 강맹한 기운을 담아 내려쳤는데도 처음과 큰 차이가 없었다.
그 작달막한 드워프의 망치질은 이내 멎어들었다.
"······."
전신이 땀으로 흠뻑 젖은 드워프는 조용히 기다리고 있는 엘프 마법사를 슬쩍 보더니, 모루 옆에 딸린 작은 화로에 털썩 앉았다. 그는 곧이어 커피로 보이는 가루를 입에 양껏 퍼넣은 뒤, 끓는 물 주전자를 집어 입 안에 들이부었다.
촤아악—
드워프의 입 안에서 커피가루와 끓는 물이 만나며 부글부글 조화를 이루었다. 그 이색적인 모습을 목도한 나는 속으로 그를 좋게 평가했다.
'사내로군.'
그때, 끓는 커피를 꿀꺽 넘겨버린 그 드워프가 엘프 마법사 쪽으로 몸을 돌리더니 입을 열었다. 걸걸한 음성이 열기처럼 내리깔렸다.
"네가 인간 사내를 다 데려오고. 집행관 일 한다는 멀대 이후로 처음이구나."
그러자 엘프 마법사가 퉁명스레 대꾸했다.
"그 인간 얘기는 꺼내지도 말아요."
"쯧, 그놈 딸이라고 오냐오냐했더니 말버릇이 아주."
말대꾸에 드워프의 주름진 얼굴이 구겨졌다.
엘프 마법사는, 그 상황을 빙글빙글 웃어 넘겼다.
"그나저나 다르간트 아저씨, 잘 지내셨어요? 제 아버지는 잘 지내고 계신답니다."
"네 소식 들었다. 마탑에 들어갔다지."
"그건 한참 오래전 얘기인걸요."
"오래되긴, 백 육십먹은 늙은이 앞에서 오래되었다고 말하려면 백 년쯤 된 골동품은 가져와야 할 게다."
드워프가 그리 대답을 마친 순간이었다.
그의 열기 가득하고 단단한 눈동자가 잠깐 아힘사에게로 향하나 싶더니, 그 신형이 자리에서 순식간에 사라졌다. 절정 경지에 오른 내가 낌새를 눈치채기 힘들만큼 빠른 속도였다.
"······."
분명 모루옆 화로에 앉아있던 그는, 찰나의 순간마저 쪼개어 아힘사와 내 앞으로 자연스럽게 이동해 있었다. 키가 작은 그 드워프는 아힘사를 올려다보며 느닷없는 말을 꺼냈다.
"그래, 이 정도는 되어야 조금 오래된 게지. 헌데-"
곧, 드워프는 솥뚜껑보다도 두꺼운 손을 내밀더니 아힘사를 도자기라도 만지듯 조심히 어루어 만졌다. 일견 섹스토이를 희롱이라도 하는 듯 보였으나, 그의 구겨지는 이마 주름이 희롱이 아님을 증명했다.
이윽고.
아힘사를 어루어 만지던 드워프의 전신에 맺혔던 땀방울들이 단숨에 끓어올라 증발하더니, 용광로보다 더한 열기가 전신을 뚫고나와 화마처럼 타올랐다. 그의 이마 주름은 너무나 구겨진 탓에 더 구길 방도가 없어보였다.
"갑자기 왜 그러세요. 아저씨?"
엘프 마법사가 의아한 얼굴로 묻자, 대장장이 드워프는 굉장히 언짢은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그의 입에서 우렁찬 호통이 튀어나와 대장간을 쩌렁쩌렁 울렸다.
"···앙굴리마라. 내 손으로 직접 제작한 것인데 어떤 빌어먹을 놈이 덧만졌길래 행색이 이따위야?"
#62화. 드워프 다르간트 (유료입니다)
#62화.
대장간을 쩌렁쩌렁 울린 그의 사자후가 잦아들자, 이내 단단하고도 정련된 기세의 눈길이 내 면전으로 꽂혀 들었다.
나는 쓰디쓴 입맛을 다셨다.
고작 몇 번 어루만진 것만으로도 앙굴리마라였음을 정확히 짚어냈는데, 여기서 무어라고 구구절절 변명하겠는가.
비무도박에 빠진 발두르 중심유흥가 출신의 은둔 수리공, 구사렴이라는 놈이 섹스토이 부품들로 납땜좀 하고 덧만졌습니다. 하필 기루의 기생들을 고쳐주던 놈팽이 놈이 가지고 있던 게 그딴 것들뿐이라 여체로 만든 건 어쩔 수 없었지요. 그래도 발두르 시티에서 제일가는 섹스토이 부품이랍니다?
···그렇게 구구절절 지루한 소리를 늘어놓을 여건은 되지 못했다. 그랬다간 솥단지만한 주먹이 날아올 듯했으니까.
보통, 심장과 피가 뜨거운 사내들은 그러한 변명 따위를 반기지 않는 법.
나는 있는 사실을 덤덤하게 털어놓았다.
"같이 잘 살아보려다 그만, 그리되었습니다. 만나는 마법사마다 처죽이고 다니는 것보다야 이런 모습이 낫지 않겠습니까."
한데, 이어진 드워프의 호통이 뜻밖이었다.
"누가 네놈에게 그런 것을 물었더냐!"
"······."
갑자기 성난 얼굴로 고함을 지르는 드워프.
아무튼, 나를 그다지 신경 쓰는 기색은 아니었다.
혼자 참지 못하고 급격히 열이 뻗친 상태라고 할까.
아무래도 앙굴리마라의 외형을 섹스토이로 개조한 것보다는, 내가 모르는 또 다른 연유로 인해 머리끝까지 열이 뻗친 듯했다.
내가 입을 닫은 새, 어느새 작달막한 드워프의 신형은 다시 화롯가 옆으로 귀신같이 이동해 있었다.
촤아악—
그는 전신을 꾸물꾸물 뚫고 나오는 열기를 식히려는 듯, 팔팔 끓는 주전자를 집어 다시 입에 부었다. 이열치열(以熱治熱)의 수를 적절히 이용해 노기를 다스리는 그만의 방법인 듯싶었다.
이윽고 언짢은 기색이 가시지 않은 드워프가 코를 팽-하고 풀자, 건조한 열풍이 거칠게 불었는데, 그 열풍을 받아 대장간의 대형 화로들이 더욱 거세게 타올랐다. 이 대장간은 화로에 따로 풀무질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저 드워프가 코를 풀면 될 테니.
'더워 죽겠군.'
나는 그제야 폭포수처럼 흐르는 땀을 적당히 훔쳤다. 저 드워프 근처에만 있어도 루벤카의 타오르는 홍염을 곁에 둔 것만 같았다. 대체 어떻게 되어먹은 육체이기에···대장간의 화로나 용광로보다 저 드워프의 몸뚱이가 더 뜨거울 성싶다.
저 멀리서 열을 식히는 드워프를 보며 생각했다.
괴물을 다루는 이 엘프 마법사도 충분히 고강한 경지인데, 저 다르간트 아저씨라고 불리는 드워프에 비하면 어린이나 다름 없을 듯했다. 나이가 자그마치 백 육십. 사실이라면 알 헤임달의 드워프 중에서도 거의 최고 배분급일 것이다.
그런데 다르간트. 다르간트가 누구더라.
백만방도 포털의 뉴스를 매일같이 읽은 기억과, 인공지능 지니에게 주입받은 지식을 총동원해도 다르간트라는 이름을 잘 모르겠다. 칼드락 스미스의 주인은 명인 드워프 '칼드락' 으로 다르간트라 불리는 이가 아닌데.
하지만 너무도 기백이 남다르다. 손에 칼만 들지 않았다 뿐이지, 조금 전의 망치질만 봐도 규격외 존재임이 명확했다. 게다가 멀고 먼 과거에 앙굴리마라 제작에 손을 보탠 드워프라면 틀림없이 역사적인 인물일 터인데······.
"···앙굴리마라."
노기를 식히던 드워프는 그제야 열이 조금 식었는지 드디어 제대로 된 말문을 열었다.
"시체로 변절한 이들을 성불시키겠다며 우리 대장간에 도움을 구하기에 흔쾌히 도와주었더니, 전쟁의 전선에서 마법사들을 썰어 죽이고 있더구나."
"······."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이면의 이야기였다.
빙글 웃던 엘프 마법사도 궁금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연신 귀를 쫑긋거렸다. 걸걸한 드워프의 욕설과 한탄이 수염 덥수룩한 그의 입가를 타고 쏟아지듯 흘러나왔다.
"빌어먹을 무림계놈들. 그 일 이후로 아주 학을 떼었다. 앞에서는 비위를 맞추어 저것들을 받아가더니, 기어이 말똥 같은 철학을 욱여넣어 괴물로 만들어 버린 게지. 열반 같은 소리—! 그 생각만 하면 열이 뻗쳐서 편히 잠에 들 수가 없다. 죽일 놈들 같으니라고."
내가 모든 맥락을 다 파악할 수는 없겠으나.
초인의 경지에 오른 저 드워프와 무림계간에 해묵은 갈등이 있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 앙굴리마라는 하늘이 내린 손재주를 타고났다는 이족의 난쟁이들과 무림계를 지원하는 대형 무기 제조사들의 합작 아래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병기. ]
이것이 내가 아는 앙굴리마라의 탄생사.
저 늙은 드워프가 말하는 내용과는 많이 달랐다.
반응을 보면 이족 난쟁이들과 무림계의 무기제조사들이 합심해 제작한 것이 아니라, 자신도 무림계의 감언이설에 깜빡 속아 넘어갔다는 식이었다.
그는 안타깝다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무림계 놈들이 가져다준 만년한철로 뼈대를 잡아주었다. 부품만 멀쩡하다면 백 년은 더 가도 한 치 틀어지지 않을 게야. 그만큼 정성을 쏟았을진대 무림계에서 저 불쌍한 것들을 어찌 사용했는지 생각하면 복장이 터지는구나."
헌데.
한탄을 늘어놓던 드워프는 별안간, 기껍다는 듯 장쾌하게 웃었다.
"하하하! 그래도 마법사를 죽이겠다며 날뛰지 않고 착 붙어있는 걸 보아하니, 네 녀석도 그 빌어먹을 열반을 벗은 게로구나. 실로 장하다."
그는 아힘사를 장하다는 듯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주름 깊은 얼굴에는 도무지 숨길 수 없는 자랑스러움이 드러나 있었다. 저 작달막한 드워프는 누구보다도 장대한 세월을 살아온 역사적인 거인임에도 메가콥의 회장들처럼 무게를 잡거나, 고루한 격식을 따지는 부류가 아닌듯 했다.
그런데 네 녀석도 열반을 벗었다라······.
내 귀에는 열반의 굴레에서 빠져나온 앙굴리마라들이 더 있다는 얘기로 들렸다. 하지만 그 드워프가 어느새 또 코앞까지 다가와 나를 단단한 눈으로 바라보는 통에, 상념에서 빠져나올 수 밖에 없었다.
내가 입을 여는 대신, 옆에 있던 엘프 마법사가 웃으며 말했다. 이제야 본론이었다.
"아저씨, 최근에 연방 정부에서 대규모의 영토 수복을 계획하고 있어요."
어딘가 못마땅한 드워프의 대답이 들려왔다.
"영토 수복? 이번엔 또 얼마나 죽어 나갈꼬."
"그래서 부질없이 죽어 나가지 않게 칼 한 자루만 부탁드려요 아저씨. 마탑에 새로 들어온 막내인데, 돈도 별로 없는 데다 칼까지 없고 아무것도 없어서 불쌍해요."
음. 맞는 말이군.
마탑 막내에 돈 없고 칼도 없고 불쌍한.
나는 백번 천번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탑에서 칼 쓸 일이 뭐가 있는가?"
"특이하게 마법사인데 무인이기도 하거든요."
"줘봐."
드워프는 다짜고짜 손바닥을 뻗어 내밀었다.
내가 서둘러 크레딧을 송금하려 하니, 그는 또 쩌렁한 목소리로 호통쳤다. 소리가 어찌나 우렁우렁한지 귀청이 찢어질 것 같았다.
"누가 그깟 크레딧을 달라고 했느냐!"
걸걸하게 고함친 드워프는 내 손목을 덥썩 붙잡았다.
나무토막같이 두껍고 단단한 손가락에서는 압도적인 악력이 느껴졌다. 마음만 먹는다면 이대로 내 손모가지를 우그러뜨릴 수도 있으리라. 호신기나 마력 껍질을 두른대도 떡마냥 주무르겠지.
다행히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도, 강맹한 드워프의 기운은 산등성이를 타고 서서히 흐르는 용암처럼 천천히 세맥까지 흘러 들어왔다.
기이한 열기가 전신에 감돌아 땀이 뻘뻘 흘렀으나, 고통은 일체 없었다. 그는 잠시 뒤 손을 떼고는, 옆에 세워져 있던 나뭇대를 들더니 탁탁 내려쳐 타오르는 화로의 불을 줄인 뒤 큰 문제는 아니라는 듯 말했다.
"균형이 합일하지 못하다. 그래도 시간이 해결해 줄 게다."
정기신의 균형을 말함인가.
드워프는 그 한 마디말만 마치고는 어딘가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자연히 시선이 그의 작달막한 뒷모습을 좇았다. 대장간에 들어온 뒤 백 육십 먹은 대장장이의 신위에 정신이 홀려 주변을 신경쓸 겨를이 채 없었는데, 나는 이제야 주위를 크게 둘러보았다.
장관이었다.
제 스스로의 힘으로 신묘함을 뽐내는 명도와 명검들이 그의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척 봐도 합금압축도나 이전까지 쓰다 부서진 10만 크레딧짜리 검과는 가치를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보물과도 같은 병장기들. 한 종파를 이끄는 고수의 애병 자리쯤은 능히 꿰찰 수 있는 물건들이었다.
그는 벽면에 걸려있는 검을 하나 뽑더니, 검면을 찬찬히 쓸며 말했다. 투명하고 깨끗한 검면이 용광로의 빛을 반사해 번쩍이며 무인의 욕심을 자극했다. 쉬이볼 수 없는 명검이었다. 드워프의 걸걸한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허면, 손에 맞는 명검을 내어주랴?"
"예, 감히 어찌 거절하겠습니까."
"받아라."
스르릉—
드워프는 뽑은 검을 납검해 내 쪽으로 건넸다.
그 검집에 아로새겨진 문양마저도 예사롭지 않은 것이, 내게 대운이 따르는 듯 했다. 기대도 하지 않았던 명검이 목전에 있었다. 손만 뻗으면 이 귀중한 것을 잡아 휘두를 수 있다.
하지만 드워프의 말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곧, 그의 곧은 눈동자가 나를 직시했다.
"이 검을 받아가면 저 앙굴리마라는 나의 손에 들어와야 할 것이다. 과거에 이 다르간트가 만들어낸 것이니, 도로 받아 가야겠구나. 만년한철값은 내 톡톡히 쳐주마."
나는 드워프의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즉답했다.
"그러면 그냥 안 받겠습니다."
"뭐라?"
검집을 받잡을 준비를 마쳤던 손에도 힘이 풀렸다.
드워프는 불끈거리는 팔로 검을 부술듯이 잡더니 주름진 얼굴로 물어왔다.
"어찌하여 거절하는 게지?"
"앙굴리마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
그의 물음에 대신 튀어나와 대답하는, 어떤 농염한 목소리.
그것은 내 옆에서 회중시계를 만지작거리던 아힘사의 음성이었다. 녀석의 옷에 꿰어둔 시곗줄은 흔들리며 차게 철그렁거리는 소리를 냈다.
아힘사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앙굴리마라가 아닌, 아힘사이기 때문입니다."
"흥."
그러자 코웃음을 친 드워프는 곧장 몸을 돌려 신중한 기세로 검 몇 개를 더 집어들고 검신을 내보였다. 드워프의 두꺼운 손바닥을 타고 검병으로 흘러들어간 기운은 검날을 더욱 예리하게 만들었다. 이 공간에 걸려있는 병기들은 그 하나하나가 모두 훌륭하여 너무도 탐나는 병장기들이었다.
공간마저 잘라버릴 듯 기세를 피워올리는 검신. 내가 가진 백만 크레딧으로는 어림도 없었고, 못해도 천만 크레딧은 들고 와야 흥정이나마 될 듯했다. 기업이나 가문의 인사들이 독차지하는 통에, 시중에는 풀리지도 않을 훌륭한 명검들이었다.
그런 귀물들을 한아름 들어올린 드워프는, 정말 필요 없겠냐는 듯 나를 빤히 바라봤다.
욕심이 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거짓말이다.
하지만 사내로 태어나 어찌 한 입으로 두말하랴. 창피한 짓이지. 나는 아쉽지만 두 주먹을 말아쥐고 들어 올려보였다.
감히 저 드워프를 때려주겠다는 마음은 아니었고, 차라리 주먹으로 싸우겠다는 뜻이었다. 실제로 나는 권법과 각법에도 상당히 뛰어난데다 루돌프놈을 두들겨 패며 몸을 단련해왔기에 권각술에는 꽤 자신이 있었다.
역시 사내는 주먹 아니겠는가.
"좋다."
헌데 드워프는 그런 나를 물끄러미 보더니, 한아름 들어올린 명검들을 그대로 용광로 속에 던져 처넣었다.
풍덩!
"?"
훌륭한 명검들이 용광로의 불길로 빨려 들어갔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나는 그것이 못내 황당했으나 저만한 자가 이유없이 화풀이로 저러진 않으리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나는 시선을 그쪽으로 던졌다.
명검들이 내던져진 용광로는 저 바깥 대장간 안에 있던 초거대 용광로가 아니라 금빛의 쇳물이 끓고 있는 작은 용광로였는데, 대체 무슨 금속을 녹여 쇳물을 만들었는지 그 빛깔이 영험하기까지했다.
그다음 일이었다.
드워프는 아힘사의 안광보다도 밝게 타오르는 용광로 쇳물에 우락부락한 팔을 쑤욱 집어넣더니, 뜨거운 기운을 뽑아내어 끝도없이 밀어 넣기 시작했다. 거기서 터져나온 거대한 와류가 출렁이며 대장간 안에 휘몰아쳤다.
잠시 뒤, 본래에도 거품을 내며 팔팔 끓어오르던 용광로의 쇳물이 이제는 아예 흘러 넘칠듯이 박동하며 열기를 발산했다.
무섭도록 집중하여 그 작업에 빠져드는 드워프를 보며, 다시금 몸에 전율이 일었다. 드워프 대장장이는 작달막했으나, 기백이 실로 대단한 거인이었다. 집중하여 피워올리는 기세가 활화산과도 같아 열기들이 대장간의 돌바닥을 녹여버릴 정도였다.
그때였다.
"무슨 일이야! 누가 멋대로 이 칼드락의 굉천용로(宏千鎔爐)를 쓰는 것이냐!"
대장간 안으로 누군가 다급히 뛰어오는 것이 아니겠는가.
뒤뚱거리며 허겁지겁 뛰어온 그 드워프는 태산같은 기운을 줄줄 풍겼으며, 무시무시하게 다부진 몸을 가지고 있었는데, 엘프 마법사도 그를 바라보며 칼드락이라고 부르는 것을 똑똑히 들었다.
그러니까 저 드워프가 이 대장간의 진짜 주인인 칼드락인 듯 했다.
그러면 저 다르간트란 이름의 늙은 드워프는 누구인가?
내가 그리 생각하던 하던 때에 칼드락 스미스의 진짜 주인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확인하고서는 흠칫 놀라며 조심스러운 태도로 말문을 열었다. 엘프 마법사의 옆에 딱 붙어서였다.
"다르간트 노야께 무슨 변고라도 생기셨는가? 오랜만에 본점에 들렀더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아무래도 저 용광로는 대장간의 주인인 칼드락이 소중히 아끼는 것으로 보였는데, 그 성질 까다롭다는 칼드락도 감히 큰 소리를 내지 못했다.
"네, 검을 만들어 주시려나보네요."
"······음? 노야께서 갑자기 검을?"
"오늘따라 기분 좋은 일이 있으셨나봐요."
그 둘이 잡소리를 나누는 와중에도, 다르간트는 극도로 집중하고 있었다. 나는 그를 또다른 눈으로 보아야 했다. 알 헤임달의 4대 대장간 주인마저 노야라는 호칭을 붙여가며 조심스럽게 대해야할 존재라······.
— 팔을 넣어라.
순간, 진중해진 드워프의 음성이 귓전을 울렸다.
용광로에 팔을 집어넣고 기운을 흘려넣던 드워프는 어느덧 명검을 잡아먹은 용광로와 하나가 된 듯 전신으로 오색의 빛을 토해내고 있었다.
그런데···저 미친 용광로에 팔을 집어넣으라고?
정신이 반쯤 나간 사내인 나조차도 쉬이 시도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조금 망설이고 있자니, 다르간트의 목소리가 다시금 쩌렁쩌렁 들려왔다.
그것은 호통이되, 호통이 아닌 말이었다.
— 뭘 꾸물대는 게냐? 팔을 집어넣고 기를 흘려라. 네 검을 만들어 줄 터이니.
#63화. 두 개의 검을 벼리다
#63화.
오색의 광채를 허공에 펼쳐내는 용광로의 쇳물.
금빛을 내던 그것은 지금, 훌륭한 명검들을 잡아먹은 뒤 다르간트의 기운까지 녹여낸 쇳물의 결정체가 되어 연신 오색빛을 뿌려내고 있었다.
— 기를 흘려라. 네 검을 만들어 줄 터이니.
기를 흘리라는 말은 내 기운을 주입하라는 말일 터.
그런데 기똥찬 명검조차 녹여버리는 저 쇳물을 나의 여린 팔이 버틸 수 있을까 모르겠다. 설마 6세대 나노로봇도 수복하지 못할 정도로 녹아내리지는 않을까.
가벼운 마음으로 집어 넣었다가 평생 사이버웨어 팔을 달고 살아야 하는거 아닌지 모르겠군.
"와아아······."
하지만 귀를 쫑긋대는 엘프 마법사의 표정을 보면 병신이 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다르간트의 돌발적인 행동에 놀라기는 했어도 흡족해 하는 표정이다.
"호오······."
그리고 칼드락 스미스 대장간의 주인, 칼드락도 그저 흥미롭게 상황을 바라볼 뿐 말리려 하는 기색이 아니었기에 나는 눈치껏 용광로를 향해 걸어갔다.
철퍽. 철퍽.
용광로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돌바닥은 녹아내려 진흙마냥 질척해져 있었고, 더운 숨을 들이쉰 폐는 사막처럼 바짝 말라 타들어 갈 듯했다.
나는 백 육십 먹은 드워프를 믿어보기로 했다. 마음을 굳게 먹고 고심없이 팔을 뻗었다.
아무 소리도 없이, 내 손가락부터 손목, 팔목까지 용광로의 불길 속으로 사라졌다.
끓어오르는 용광로 속에 팔을 집어넣자 루벤카의 홍염에 불타오르는 듯한 격통이 찾아왔으나,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이 시각에서 오는 가짜 환통임을 알게 되었다.
극렬히 몰아치는 용광로의 화마 속에서도 나의 팔은 비교적 멀쩡했다. 허나 그렇다고 하여 오래 버틸 수 있다는 생각은 버렸다.
'······아주 괜찮지는 못하군.'
치이이익······.
벌써 피부의 아래까지 불타고 있었으니까.
이거, 꾸물대면 아무것도 못 건진 채로 요양만 해야한다.
— 한번, 네 전심전력을 다해보거라.
다르간트의 말에 정신을 다잡았다.
"예."
화아아악—!
대답과 동시에, 드넓은 대장간 내부의 뜨거운 열기가 나의 마나회로로 충만히 빨려들어왔다. 단전에서 잠자고 있던 절정의 내공도 둑을 무너뜨린 물줄기처럼 터져나와 기맥을 치달렸다.
기왕 하기로 한 것, 그의 말대로 전심전력을 쏟아붓고 퍼져버릴 생각이었다.
'공력이 먼저다.'
검에 기운을 주입해 검기를 피어나게 하듯, 다르간트의 웅혼한 진력과 나의 기운이 용광로 안으로 콸콸 쏟아지기 시작했다. 나는 혼백과 육신을 싸그리 갈아 넣어겠다는 일념으로 공력을 주입했다. 무선대지신공의 공능으로 쌓은 정순한 내공들이 용광로의 화마에 스며들었다.
그에 발광하며 불길을 토해내는 용광로.
묵직했던 내 단전이 금세 텅텅 비어버리자, 이번에는 여유가 있던 마나 회로를 혹사할 차례였다. 세상의 마나를 충만히 머금고 있던 마나회로가 단박에 심장을 조여왔다.
짧은 시간.
가마 속에 맨몸으로 뛰어든 듯, 전신의 땀구멍이 열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마나 회로는 최대한 마나를 쥐어 짜내며 과열을 버텨냈으나 세 개밖에 없는지라 결국에는 이른 한계를 맞이했다. 회로와 단전을 번갈아가며 텅텅 비워내니 심신이 혼미해 쓰러질 지경이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이 드워프의 위대함을 선명히 체감했다. 그는 아직까지도 웅혼한 진력을 줄기줄기 뽑아가며 용광로에 밀어넣는 중이었다.
'바보 천치마냥 망설였구나.'
삼존(三尊)이 무력의 꼭대기에 앉아있다면···.
이 늙은 드워프는 대장장이의 길에서 그만한 위업을 달성한 전설일 것이다. 실로 경이로운, 경천동지할 정도의 진력이 불길에 숨을 불어 넣어가며 용광로를 태양처럼 달구고 있었다.
마공학 대장간의 체계를 잘 모르는 나라도, 저 신묘하게 변한 쇳물이 범상치 않은 일을 해낼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나는 즉시 뒤로 물러나 운공했다. 여유가 된다면 조금이라도 더 기운을 쏟아붓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다르간트는 충분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 이미 훌륭하도다.
드워프 특유의 빳빳한 눈썹이 거세게 휘날렸다.
고집스럽기만 하던 그 입매가 호선을 그렸다.
적어도 부족한 것은 아니겠군.
잠시 뒤.
오색광채를 뿌리는 다르간트의 전신과 금빛과 청록빛, 푸른빛이 도는 용광로가 완벽하게 일체된 듯 보였다.
'저 마력까지 빨려 들어갔나?'
그런데 와중에 꽤 선명한 청록빛이 눈에 띄었다. 나도 모르게 일레힌 포이체카 마탑주가 부여해준 마력까지 빼다 넣어버린 모양이다. 아니면 저 마력이 용광로 안으로 알아서 흘러 들어갔던지.
풍덩!
그때, 다르간트는 아까 모루 위에서 단조하던 의문의 금속 덩이를 끌어오더니 망설임없이 용광로 안으로 던져넣었다.
저 위대한 거인이 힘을 담아 내려친 거대 망치질에도 형태가 크게 바뀌지 않을 만큼 괴이한 금속. 일반적인 드워프라면 단조를 시도할 생각조차 불가능케 할 정도의 강성한 물질이 용광로의 쇳물에 닿자, 폭발하는 환한 광채에 눈에 멀어버릴 듯했다.
놀랍게도 거인의 망치질도 버텨낸 그 금속이, 저 신묘한 용광로 안에서는 얼마 버티지 못하고 하릴없이 녹아내려 쇳물에 섞여들었다.
이후로도 내내 진력을 뽑아내 용광로에 퍼붓던 다르간트는 어느 순간, 달아오른 용광로를 번쩍 들어 올렸다.
곧, 나무 토막같았던 그의 손바닥이 시뻘건 화마에 휩싸였다. 대장간의 주인 칼드락은 그것을 보더니 저 뒤에다 대고 쩌렁쩌렁 소리쳤다. 크게 흥분해 붉어진 얼굴이 보였다.
"당장 천문을 열어라—!!"
칼드락의 고함이 끝나기 무섭게 대장간의 천장이 증기를 내뿜으며 가동하더니, 양쪽으로 활짝 열리기 시작했다. 어두운 하늘에 날아다니는 비공정이 보이려다가 순식간에 운무 속으로 사라졌다.
"!"
대장간 내부에 갇혀 가마처럼 절절 끓어오르던 용광로의 열기는, 바깥의 대기와 만나자 급격히 식으며 어마어마한 양의 운무를 만들어 냈다. 굉음을 내며 찬 하늘 위로 빨려 올라간 증기의 바다가 허연 구름을 만들어낼 지경이었다.
용광로와 대장간에서 연신 솟구치는 운무는 고절한 도인의 우화등선을 보는 듯했다. 대장간의 웅장한 대문보다도 높게 솟은 그것들은 하늘 위로 끝없이 불어났다.
다르간트는 운무가 조금 줄어들자 용광로를 거꾸로 뒤집었다.
거기서는 진득한 쇳물이 흘러내렸는데, 금속의 불순물로 보였다. 그는 불순물들을 걸러낸 뒤 다시 용광로를 뒤집더니 우락부락한 맨손으로 순도높은 쇳물의 정수를 훑어 꺼냈다.
훑어낸 쇳물의 정수, 사람 머리통만한 금속의 덩어리가 그 자태를 드러내며 사방팔방 빛줄기를 뿌렸다.
헌데.
콰앙!
금속의 덩어리는 담금질의 단계도 거치지 않았다.
손이 숯처럼 갈라진 다르간트는 용광로에서 훑어낸 그 덩어리를 판판한 모루 위에 던져버린 뒤, 곧장 집채만한 망치를 집어 들었다.
다르간트는 망치를 내려쳤다. 아니, 내려쳤을 것이다. 인간의 눈으로는 제대로 잡아낼 수 없는 속도였다.
콰과과광—
막대한 기파에 대장간 전체가 들썩이며, 오색의 불티가 천지사방으로 눈발처럼 날렸다. 하지만 덩어리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집채만한 망치가 다시 강하게 떨어진다.
이번에도 불티가 크게 튀며 빛나는 덩어리가 살짝 뭉개졌다. 그러나 그뿐이었고 저 덩어리는 신화 속의 금속이라도 되는 양 정정했다. 애꿎은 모루가 충격에 달아오르는 것이 보였다.
콰과과광—
또다시, 망치가 강하게 떨어졌다. 6레벨이든 7레벨이든 저 사이에 끼었다간 살아남지 못할 듯했는데, 야속한 금속의 덩어리는 대장간 내부가 기파에 휘말려 박살나는 와중에도 꿋꿋하게 버텨내고 있었다.
망치와 금속 덩어리의 승부.
금속 덩어리가 식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이대로라면 주어진 시간내로 저 금속을 다 펴내지 못할 성싶었다. 하지만 나는 실패하더라도 그리 아쉽지 않을 것이다. 오랜 역사를 걸어온 사내가 자신의 웅혼함을 태워내고 있었다. 전율적인 저 광경을 보는 것만으로도 정신의 격이 높아지는 기분이었다.
지금, 다르간트는 혼과 기운을 벼려내고 있었다.
실패할지라도 그는 진정한 대장장이였다.
내가 그리 생각하던 시점이었다.
"내—!!! 망치 가져와라—!!!"
대장간의 주인, 칼드락의 포효가 들려온 때가.
그가 한 마리의 사나운 범처럼 포효하자, 바깥에서 열기를 힘겹게 뚫고 들어온 드워프들이 황동빛의 거대한 망치를 내려놓고 사라졌다. 바닥이 눌릴 정도로 육중한 망치가 칼드락의 손아귀에 잡혔다.
알 헤임달 4대 대장간의 주인, 명인 칼드락.
팔뚝을 걷어붙인 그가 모루의 반대편에 서서 망치를 들었다. 다르간트의 눈은 그러거나 말거나 오직 금속의 덩어리에만 고정되어 있었다.
이윽고 일정한 장단으로 떨어지는 다르간트의 망치질 사이 사이에, 태산같은 기운이 담긴 황동빛 망치가 벼락처럼 떨어져 금속 덩이를 때리기 시작했다. 천둥치는 굉음이 쉬지 않고 알 헤임달의 하늘을 떨어울렸다.
'!'
칼드락이 힘을 보태자 변화는 생각보다 금세 일어났다.
경지에 오른 두 명의 대장장이가 번갈아가며 망치를 내려치니, 제아무리 대단한 금속 덩이도 더 이상은 구겨지지 않고 버틸 재간이 없었나 보다.
처음에 사람 머리통만한 크기로 뭉쳐져 모루 위를 달구던 금속은, 단조질에 점차 얇아지며 이제는 사람 손바닥보다도 얇게 펴져 있었다.
그럼에도 신묘한 빛깔만큼은 잃지 않았다. 그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만들어낼 수 없는, 고위도 지방의 하늘을 채운 극광(極光)과도 유사했다.
내가 감탄을 머금는 와중에도, 천둥이 연신 울렸다.
나중에는 모루를 받치고 있던 지면 전체가 폭삭 가라앉았고, 대장간의 모든 화로가 그들이 만들어낸 광풍에 휩쓸려 활활 타올랐다.
그러나 명인들의 묵묵한 망치질은 멈출 기미가 없었다.
금속 덩어리가 점점 검의 형상을 닮아갔다.
* * *
치이익······.
대장간의 바닥이 패여 증기를 내뿜는다.
누가 보면 운석이라도 떨어진줄 알 것이다.
아마 보수작업에 크레딧이 꽤 들어갈 테지.
"······."
그리고 무너진 바닥을 밟고 서있는 내 손에는, 하나의 묵직한 검집이 들려 있었다. 용광로와 화마의 색을 상징하듯 밝은 홍색의 검집.
검병을 틀어쥘 때의 그 느낌이 실로 훌륭했다.
나는 그대로 검을 뽑았다.
스르릉—
이제는 나의 애병이 될 검이 뽑혀 나온다.
만년설처럼 새하얀 검신의 깔끔한 직도. 내가 공력을 조금 주입하자, 예리한 검신이 눈부실 정도로 빛나더니 어두운 녹빛과 푸른빛을 함께 띠었다. 또한 물아일체(物我一體)라 하여, 검이 마치 나의 팔처럼 느껴졌다.
무인에게 검이란, 평생을 함께할 벗.
검병만 쥐어보아도 알 수 있었다.
더 바랄 것이 없는 수준으로 어느 한 군데 부족함이 없었다. 명인들의 혼이 녹아들어갔으니, 감히 신병이라 칭해도 될 법한 대단한 명검이다.
전신을 찌르르 울리는 희열이 찾아왔다.
헌데, 이상한 점이 있었다.
내 경지라면 약간의 공력으로도 기의 아지랑이를 피워낼 수 있을 것인데, 지금의 검은 그저 빛무리와 청아한 검명만 내보일 뿐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자연히 흘러나가야 할 기운을 검이 잡아 가둔 것인가.'
확인해보기 위해 내공을 더 불어넣었다.
아니나 다를까, 내공을 더 불어넣을수록 검은 숫제 광선처럼 변해갔다. 어두운 대장간을 환히 밝히는 일직선의 광원은, 청록색과 푸르스름한 색을 섞어놓은듯 했다. 전설속의 성검이 실존했다면 이랬을까 싶었다.
시간이 지나면 검의 바깥으로 자연히 빠져나가야 할 기운을 검 안에 가둬놓는 이적. 내가 중원무림을 종횡무진하며 닿았던 초절정의 경지. 그 초절정의 경지에서도 극의에 이른 무인들에게 허락된 검기성강(劍氣成罡)처럼.
물론, 진짜 검강보다는 한참 모자라겠으나 상관없었다. 검기로 빠져나가는 내공을 조금이나마 아낄 수 있다는 것 자체로도 이미 신병이었다.
중원무림에서 이름을 날렸던 대장장이들도 이런 이적을 보이는 것은 불가능했다. 금속에 기운이나 진기를 담아내 벼리는 것까지는 어찌저찌 가능한 일이나, 흘러나가는 기운을 가두어 위력을 높이는 검이라니. 듣도 보도 못했다.
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렇게 내가 한참이나 검을 쥐고 있자.
"좋으냐."
부서진 화롯가에 앉아있던 다르간트가 만족스레 끌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의 옆에는 상의가 불타버린 칼드락이 쓰러진 채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명심해라. 네가 직접 불어넣은 기운이 아니라면, 기운을 다시 토해낼 게다. 그러니 어디다 팔아치우지도 못할 게야. 이 다르간트의 진력이 들어갔으니, 칼드락 대장간에는 팔 수 있겠구나."
괜한 흰소리다.
어떤 무인이 이런 보물을 팔아 넘기겠는가.
나는 다르간트의 앞에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어르신. 검의 이름을 내려주시지요."
"광선검(光線劍)으로 하거라."
"검명은 그냥 나중에 제가 따로 짓겠습니다."
"네놈 마음가는 대로 해라. 대장장이는 이미 내어준 병기에 미련을 가지지 않아야 한다."
다르간트는 대수롭잖게 말했다.
그런 뒤, 약간의 시간이 흘렀다.
내가 뭐 썰어볼 것 없나 주변을 기웃거리던 차에, 말없이 조용히 뭔가를 생각하던 다르간트가 고개를 돌렸다. 회한이 가득한 얼굴에 잡힌 깊고 어두운 주름이 그의 심정을 대변하는 듯했다.
다르간트의 심해처럼 깊은 눈동자는 아힘사를 정확히 직시하고 있었다.
이윽고, 그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허나 미숙했던 시절에 미련이 남는 것은, 나라도 도저히 떨쳐낼 자신이 없구나. 사흘 뒤에 다시 찾아오너라. 내 그때까지 검을 하나 더 벼려놓을 터이니."
#64화. 미련
#64화.
— 사흘 뒤에 다시 찾아오너라.
사흘 뒤까지 검을 하나 더 벼려놓겠다.
다르간트의 말은 새로운 검을 만들어 놓겠다는 게 아니라, 오래되어 시간에 삭은 아힘사를 다시 검처럼 벼려주겠다는 뜻. 그러니까 아힘사 자체의 개조를 원한다는 얘기였다.
개조? 아니다.
앙굴리마라의 제작자로 보이는 다르간트가 직접 나선다면 개조(改造)라고 하기에는 많이 부족하고, 차라리 재창조라고 부르는 게 맞겠군.
회한에 젖어든 얼굴의 다르간트를 기억한다. 지고한 경지에 오른 대장장이계의 거인이라도, 아힘사를 바라보던 모습은 그저 주름살이 잔뜩 늘어난 얼굴로 과거의 선택을 후회하는 드워프에 불과했다.
다르간트가 앙굴리마라 프로젝트에 참여했을 때는 나이 예순 전후의 드워프였겠지만, 지금은 자그마치 160년이란 세월을 살아온 드워프다. 알 헤임달 시티 4대 대장간의 주인마저 존경해 마지않는 위대한 대장장이.
저만한 세월을 지나왔다면 예순이라는 나이도 젊었을 적 미숙한 청춘의 일부분이겠지. 그게 자그마치 한 세기 전이니.
그런데 검을 제작해 주고도 여력이 남았던가.
게다가 가치를 감히 매길 수 없는 이 명검도 하루가 채 걸리지 않아 제작해냈는데, 아힘사를 대체 어떻게 손보려고 하기에 사흘이나 걸린다는 말인가.
아마, 그 시간만큼이나 미련이 크게 남았단 얘기겠지.
드워프 다르간트는 내색하지 않았으나, 미숙했던 젊은 날의 선택이 못내 아쉬웠던 모양이다.
하기야 자신이 공들여 탄생시킨 피조물들이 본래의 쓰임새와 다르게 전쟁터의 끔찍한 살인기계로 악명을 떨쳤으니, 손을 떠난 병기에 미련을 가지지 않는다라는 대장장이들의 대원칙을 어겨서라도 바로잡고 싶은 거겠지. 세월이 흐를수록 풀지 못한 미련이 더 짙어질 테니.
"너는 어찌하겠느냐. 아힘사."
"레반, 나의 회중시계를 맡아주시겠습니까?"
"그래."
고집스러운 얼굴의 다르간트가 자신의 창조물인 앙굴리마라의 이름을 마침내 아힘사라고 불렀을 때, 아힘사는 귀하게 차고 있던 회중시계의 시곗줄을 풀어 내게 넘겨주었다.
자의로 칼드락 대장간에 남기로 결정한 것이다.
본래 7레벨급 병기인 아힘사는 오랜 시간을 뛰어넘어 마주한 제작자의 재창조를 기다렸다. 구사렴의 손에 다시 태어나긴 했지만 슬럼가의 한계로 인해 부족하고 수준 낮은 부품들이 많았다. 다르간트의 정력적인 눈을 보면 그에 관해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손볼 듯싶었다.
"그럼, 사흘 뒤에 찾아오겠습니다."
나는 그렇게 대장간을 빠져나왔다.
도중에 알 헤임달 4대 대장간, 칼드락 스미스의 저력도 맛보았다. 혼신을 담은 명인들의 망치질에 파헤쳐지고 부서진 대장간이 몇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아 본래의 모습을 되찾은 것이다.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째깍. 째깍.
회중시계의 초침 소리가 품 안에서 들려온다.
나는 그 초침 소리를 들으며, 엘프 마법사와 함께 발걸음을 옮겼다.
* * *
사흘의 기한이 주어졌다.
알 헤임달 시티에서 못해도 사흘 이상은 보내야 한다는 얘기.
계획이 조금 바뀌었으나, 천금같은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었다.
"난 다녀올 곳이 있어. 근처에 좋은 숙소를 잡아줄게."
엘프 마법사는 발할라부터 가져온 마공학 재료를 칼드락 스미스에서 연성하는 것 말고도, 나름대로의 중요한 일들이 더 있어 보였다. 하루 정도 처리하고 올 일이 있다는데, 다 큰 사내가 돼서 여인 뒤를 강아지처럼 졸졸 따라다닐 수야 없는 노릇.
숙소를 잡아준 그녀가 다른 곳으로 떠나있는 동안, 나도 사흘중 하루를 통째로 빼 네 번째 마나 회로 제작에 착수하기로 했다.
숙소는 남쪽 구역의 가장 번화한 거리에 있었다.
복고풍의 통나무 창문을 활짝 열면 바로 보이는 운치가 좋았다. 조금 더 발전한 근대의 길거리가 보였는데, 기이한 문물과 새로운 문화들이 많아 구경하는 맛이 있었다. 굽 높은 부츠에 하늘에서 떨어지는 석탄먼지를 막기 위해 챙 있는 모자들 쓴 사람들이 파이프 짐승 마차를 타고 길거리를 지나다녔다.
뿌우우—
마차의 시커먼 매연과 어디선가 뿜어진 증기가 창문 안으로 들어오는 것만 빼면 정말 완벽했다.
탁.
매연이 들어오는 창문을 닫은 뒤 치렁한 커튼을 내리고, 새장처럼 생긴 가스등불도 껐다. 그러자 방이 적당한 어둠에 잠겼다.
나는 알 헤임달 서민들의 주식이자 명물이라는 석탄에 태운 바게트빵, 그 사이에 싸구려 버터와 배양과일 잼을 한가득 넣어 배를 채운 뒤 반나절을 내리 운공하며 육체를 관조했다.
운공과 관조가 끝나자 확신이 들었다.
"슬슬 충분하겠군."
육체적인 준비는 4위계에 오르기 충분했고, 기운도 마탑에 있을 때보다 넘쳤다. 무엇보다 이미 한 번 걸어본 길이었다. 곧바로 회로 제작에 착수했다.
결과는 나의 예상대로였다.
매우 수월히 고리를 엮는데 성공하여 이제 마나 회로 네 개, 4위계의 경지를 지닌 마법사가 된 것이다.
'마법사로는 6레벨, 무인으로는 7레벨인가.'
상당히 괜찮은 성취다.
어느 한쪽으로도 크게 치우치지 않은 성장.
물론 전생의 왕국 마탑 마법사들처럼, 경지에 이른 실력자가 이 사실을 안다면 크게 다그칠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나에 집중해도 모자랄 판에 시간을 쪼개 탐욕을 부리냐며 핀잔이나 하겠지.
그러나 몇 번의 생을 겪은 나는 알고 있다.
양쪽 모두를 극한의 효율까지 뽑아 쓸 수 있으니, 어느 한쪽도 놓칠 이유가 없었다. 서로의 기운이 충돌하지 않는 심공도 익혔으며 수백, 수천만 크레딧을 줘도 못 사는 마법과 무공들이 머릿속에 잠들어있는 나만이 가능한 기예였다.
내게 필요한 것은 오로지 시간뿐이다.
다만, 지금까지는 평균 서른의 나이에 요절했지.
지그시 눈을 감았다.
회로 제작으로 진력이 빠져 나른해진 덕에, 상념에 잠겨들기 좋은 때였다.
피와 살이 되는 전생의 기억들과 경험, 훌륭한 재능과 자질까지 지니고 있지만 이상하게도 단명하는 운명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번 생만 해도 반 바이오에서 뛰쳐나온 뒤, 벌써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겼던가.
항상 미래의 계획을 착실히 세워두어도 막상 스물, 서른을 넘기지 못하고 죽어버렸다. 계획이고 뭐고 다른 세계로 쫓겨나 태아부터 시작하는 짓을 몇 번 반복해 보면, 장기적인 목적따위 없이 이리저리 떠밀려 방황하기가 참 쉽다. 내가 그랬다.
지옥같던 아포칼립스때의 악몽과 트라우마로 한 몸 지킬 힘을 추구한 것은 맞으나, 생각해보면 시간이 흐르고 생을 반복할수록 삶에 미련이라는 것이 점점 희미해져간 듯했다.
섬서 화산에 발을 들여 천봉매화를 꺾은 걸 생각하면, 그리고 제국의 세 별이 떨어뜨린 운석과 박치기를 하기 전에 칼을 꺼내어 목을 꿰뚫은 걸 떠올려 보면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의 늙은 드워프 다르간트는 영감을 주는 존재였다.
혼을 깎아내는 듯한 단조 작업을 보는 것만으로도 정신의 격이 높아지는 듯한, 다른 이를 전율케하는 무형의 무언가가 그의 망치질에 서려 있었다.
그 기억에, 자연스레 감겼던 눈이 떠졌다.
탁-
새장 모양의 가스등을 다시 켰다.
희미했던 가스등이 점점 환해졌다.
"······."
나는 품속의 회중시계를 꺼내 지그시 바라봤다.
아힘사가 나에게 잠시 맡겨둔 중고 회중시계.
가는 초침이 째깍소리를 내며 멀쩡하게 돌아갔다.
녹슬고 고장난 중고 회중시계를 즉석에서 고쳐서 팔아먹은 외알 안경의 주인장이 말하길.
[ 태엽을 너무 많이 돌리지 마세요. 태엽과 연결된 부품들이 마모되면 초침도 멈춥니다. 그때는 동력을 잃을 거라는 소리죠. ]
시계의 태엽을 너무 많이 돌리지 말라.
한데, 지금 내 태엽이 몇 번이나 돌아갔던가.
다섯 번의 생을 살았으니 벌써 다섯 번을 돌렸나.
정신이라는 나의 부품은 이미 마모된지 오래였다. 그렇다면 동력은 과연 언제쯤 잃어버리는 것인가.
아힘사를 향해 건넸던 말이, 내게도 통용될 줄이야.
한숨을 내쉬었다.
자그마치 160년을 살아온 드워프마저도 완벽한 존재가 아닌지라 평생 지우지 못할 미련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냥 운명이겠거니 하며 망나니처럼 굴다 뒈져도 상관없는 삶이 아닌. 진정한 사내가 삶을 대하는 자세였다.
잔잔한 호수에 돌덩이를 던져 파문을 일으킨 그의 단조. 다르간트는 금속덩이를 망치로 때린 것이 아니라 내 정신머리를 때려 핀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괜히 혼자 지껄이는 비약이다. 그러나 그 비약이 이상하게 기꺼웠다.
백 년을 넘게 살았더라도, 그 세월조차 뛰어넘은 사내 앞에서는 배울 것이 참으로 많구나.
그렇기에 나도 이제 그 위대한 사내처럼, 삶에 어떠한 미련을 가져볼까 한다.
생각을 마치자, 다르간트가 진력과 혼을 망설임 없이 쏟아부어 벼려낸 칼을 뽑고 싶어졌다.
스릉.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뽑혀 나오는 검.
검병이 손에 저절로 감겨들었으며 만년설처럼 새하얀 검신은 어슴푸레한 조명을 받아 밝게 빛난다. 어두운 세상을 반으로 나누는, 정말 빛으로 이루어진 선이 그어져 있는 듯했다.
이 칼이 얼마나 대단한 금속으로 만들어진 건지, 대장장이가 아닌 나로서는 알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리도 단단하고 야속한, 말 안듣던 금속덩이를 끝끝내 펴낸 다르간트는 알고 있을 것이다.
"헌데 아무리 그래도 광선검(光線劍)은 좀······."
아니다.
검명 따위에 미련을 갖지 말자.
다르간트가 내려준 그대로, 광선(光線).
그래도 검을 빼니 나름 그럴듯하지 않은가. 그리고 강호의 별호에 항상 자리 잡고있던 광(狂)이 아닌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털컥-
나는 광선을 납검하고 창문을 열었다.
하하하—
검이 제자리를 찾아가자, 자연스럽게 박장대소가 터져나왔다.
이것은 발할라 산맥의 설산 꼭대기에서 억지로 꾸며냈던 박장대소가 아니었다. 가슴 속이 후련해질 만큼 시원한 웃음. 한랭했던 산맥 꼭대기보다 어째서인지 지금이 더 시원했다.
— 저기요. 그 안에서 뭘 하는 겁니까! 방에서 마약 하시는 건 절대 금지입니다!
내가 숙소가 떠나가라 손뼉을 치며 지랄발광을 하자, 급히 뛰어 올라온 숙소 주인장이 시끄럽다며 문을 두들겼다. 나는 주인장이 문을 두들기는 소리보다 더 더 크게 손뼉을 마주치며 한바탕 웃어넘겼다. 그 소리가 명인들의 단조 작업과도 같이 파장을 일으켰다.
하늘이 내린 손재주의 이족 난쟁이. 그 말이 정확히 맞구나.
금속만 두드려 펴는 것이 아니라, 사람 마음마저 두들겨 고쳐먹게 만들다니. 보통 손재주의 범주를 뛰어넘은 하늘의 사술이 틀림없다.
마탑주가 예상하길 연방의 시한이 30년쯤이라고 했나.
이 정도의 성취로 계속 성장세를 이룰 수 있다면 거기서 한 10년만 더 살아도 전생보다 월등히 더 높은, 새로운 초월의 경지를 개척해나갈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기에 나는 통크게 목표를 잡았다.
다 망해가는 연방의 시한을 10년쯤 늦추는 것으로.
그런 뒤 기분 좋은 얼굴로 우르드 에센스 병을 꺼내다가, 정신을 차리고는 다시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아니지. 아직 아니야."
당장 마신다면 정순한 내공을 쌓을 수 있을 것이다.
허나 내공으로 갈음하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보물이었다. 이걸 흡수한다고 하여 당장 8레벨의 경지를 밟는 것도 아닌데. 후에 막혀있는 깨달음의 벽을 강제로 뚫거나 환골(換骨)을 노려보아야 할 듯했다.
쾅!
그때, 방문이 굉음을 내며 강제로 개방되었다.
고급스러운 가죽 자켓을 입은 숙소 주인장의 시선은, 들어올 때부터 내가 꺼내둔 우르드 에센스 병에 고정되어 있었다. 수상할만큼 빛깔이 영롱한 액체. 오해하기에 딱 적당한 상황이었다.
주인장은 미간을 크게 찌푸리며 새된 고함을 빼액 질렀다.
"이거 봐요! 마약 하시면 안 된다니까! 당장 나가세요!"
* * *
그렇게 나는 에센스를 마약으로 오해한 주인장에 의해 숙소에서 쫓겨났다. 어차피 오늘이 엘프 마법사가 돌아오는 날이기에 큰 문제는 없었다.
역시나 하루 만에 돌아온 엘프 마법사는, 숙소 앞에서 하룻밤 사이 4위계에 올라선 나를 보더니 뾰족한 귀를 쫑긋거렸다.
곧, 청록빛 괴물에서 내린 그녀의 입이 열렸다.
"마탑주님이 널 좋아하는 이유가 있었네. 진짜 특이하구나."
일레힌 포이체카의 얘기. 꽤 뜬금없는 말이었다.
"좋아해?"
"기분 탓일 수도 있어. 근데 심공을 배워익힌 이후로 조금 침착해지신 것 같더라. 아무리 당가주의 아들이라도 거긴 마탑이었어. 당연히 오만의 대가를 치렀어야 해. 본래 마탑주님의 성정이면 뇌를 헤집어서 백치로 만들었어도 그러려니 했을 텐데······."
"그거야, 그날따라 기분이 좋으셨나보군."
무선대지신공을 익히며 정신 수양이라도 되었는가보지.
아니면 죽을 위기에서 돌아온 뒤 사람이 바뀌었을 수도 있다.
엘프 마법사는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몸을 뒤로 뉘었다. 마차들을 보관해두는 장소에 깔려있던 더러운 짚풀들이 움푹 들어갔다.
"그런데 너는 왜 영토 수복에 참여하고 싶어? 위험한데."
마법사의 물음에 나는 정석적인 대답을 꺼냈다.
당연히 개소리였다.
"마탑주님께 은혜를 갚으려고."
"웃기는 소리. 도망갈 거면 지금 도망가. 생각보다 너무 좋은 병장기를 줘서 지금 도망간대도 이상하지 않거든?"
"그런가."
"응. 대장간에 있는 칼중에 아무거나 내어줘도 좋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 다르간트 아저씨가 직접 솜씨를 발휘해서 만들어줄 줄이야."
나는 엘프 마법사의 혼잣말을 듣다가,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160세 드워프를 아저씨라 부를 정도라면 몇 살이라는 얘기인가. 아무리 봐도 젊은 여인의 얼굴인데. 엘프가 그 정도로 동안이라는 말인가.
"아무튼 좋은 검 얻은거, 늦었지만 축하해. 그런데······."
엘프 마법사는 청록빛의 괴물을 살살 쓰다듬으며 말했다. 얼굴에는 웃음기가 서려있었다.
"한 번 써봐야 하지 않겠어? 영토 수복전에서 개시할 수는 없잖아?"
"음."
그녀의 말에 약간의 동의를 표했다.
이런 명검을 쥐면 휘둘러보고 싶은 것이 이치.
나도 오랜만에 검을 진심으로 휘둘러보고 싶었다.
허나 절정에 이른 무력으로 검을 마구 휘둘러댔다간, 사람 몇 죽어나가기 딱 좋을 것이다. 딱히 죽여버릴 놈도 없고.
"마구잡이로 사람을 썰고 다닐 수는 없지."
내 말에, 엘프 마법사는 아무렇지 않게 입을 열었다.
"무슨 소리야? 장벽 밖에서 써보면 되는 거잖아."
장벽 밖이라는 소리에-
청록빛의 상어 괴물이 긴 혀와 꼬리를 낼름거렸다.
엘프 마법사는 즉시 뉘였던 몸을 일으키며 채비했다.
"말 나온 김에 바로 가보자, 여기는 개척가들이 장벽 바깥을 다 헤집어 놔서 다른 시티의 언데드 가득한 장벽 밖이랑은 조금 다르거든."
좀비.
이번 세계에서는 모래폭풍을 타고 정크타운 17번가의 술집에 쳐들어왔던 그 놈과 연방의 격리시설에서 보았던, 좀비로 변절해가는 마법사를 마주친 것이 끝이다.
그런데 지금 장벽 밖으로 나가자고?
"······."
직접 그것들을 보러 간다고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맥이 빠르게 뛰었다. 나는 지그시 광선의 검병을 붙잡고 한 손으로는 회중시계를 들었다. 째깍거리는 소리가 들려오자, 두방망이질 치던 마음이 진정되었다.
그 순간, 엘프 마법사의 다음 말이 들려왔다.
"왜 그리 긴장해? 사냥하는 건 우리인데?"
철컥.
만면에 웃음기를 띤 그녀는 어디선가, 팔뚝보다도 두꺼운 펌프액션 산탄총을 꺼내 들었다. 마치 서부 개척 시대의 말타는 총잡이처럼. 청록빛 괴물에 올라탄 그녀의 뾰족한 귀가 기분 좋게 흔들렸다.
이윽고 그녀가 내게 팔을 내밀었다.
"얼른 타, 일레힌 마탑 막내 실력 한번 보게."
#65화. 철로를 따라
#65화.
청록빛 괴물은 우리를 태운채 빠르게 질주했다.
높은 대장간들의 슬레이트 지붕과 굴뚝을 타고, 여느 주택들의 석탄가루 쌓인 발코니를 딛었다. 놀란 주민들의 비명소리까지 덤으로 수집했다.
- 으아악! 씨이발 뭐야!
- 괴, 괴물이야!
그 비명소리를 들으며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균형이 틀어진 정기신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전투 일변도인 전장에서 구르는 것이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 나는 그렇기에 마탑에 얹혀 연방의 영토 수복전에 참가하기로 결정했었다.
대단한 발할라 마탑의 마법사들과 동행할 수 있는 기회이니, 어떻게든 가겠노라 결심해 마탑주에게 청한 것이다. 수준 높은 마법사들이 뒤를 든든히 지키고 있다니, 그것만큼 안전한 게 어디 있겠는가.
헌데 그 기회가, 생각보다 빨리 찾아 온 듯했다.
— 영토 수복전에서 개시할 수는 없잖아?
엘프 마법사의 말은 그리 틀리지 않았다.
광선도 길들일 겸 장벽 바깥에 다녀오자는 엘프 마법사의 언뜻 충동적인 제안이 처음에는 당황스러웠으나, 생각해보면 내게도 반드시 필요한 경험이었다.
미리 그 좀비놈들의 면면과 하는 꼴을 한 번쯤은 눈에 담아둔다면 다음에 있을 수복전에서 허둥대지 않을 듯했다. 수많은 목숨이 걸려있는 전장에서 허둥대다 다른 이들에게 방해가 되는 것만큼 한심한 일이 없으니.
그리고 나는 다르간트의 단조를 목도한 이후, 지금까지보다는 조금 더 열심히 굴러야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게다가 알 헤임달 시티라는 특수성이 있어 다른 시티 장벽들보다는 상황이 낫다고 하기에, 나는 결국 엘프 마법사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러니까.
빌어먹을 좀비를 직접 썰어보기로 결정을 내린 것이다.
내가 동의하자 그녀는 그럴줄 알았다는 듯 씨익 웃었다.
— 좋아. 당연히 같이 갈 줄 알았어.
* * *
한 시간 정도를 쉼없이 이동했을까.
엘프 마법사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한 번 봐봐, 이제 잘 보이지?"
남쪽 구역 번화가의 정경이 서서히 멀어져 시야에서 사라진 시점이었다. 그녀는 지금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키고 있었다.
"저기가 알 헤임달 시티의 남쪽 장벽이야."
그 말에 따라 고개를 돌리자, 정말 장벽이 보였다.
하지만 일반적인 시티의 장벽과는 어딘가 많이 다르다.
물샐틈도 없이 일정한 높이와 곡선으로 둘러쳐진 발두르 시티 장벽이나 거대 산맥 위에 천혜의 요새처럼 장벽을 두르고 있는 발할라와는 달리, 알 헤임달 시티의 장벽은 조금 다른 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거대한 장벽 중간에 무슨 개선문이라도 되는 듯한 구멍이 뻥 뚫려 있다는 점이었다. 그 구멍의 지름이 이십 미터는 될 듯했고, 그 밑으로 철로가 깔려있었다.
"저거, 저래도 되는 건가?"
마치 바다와 바다 사이의 해협처럼.
마음만 먹으면 사람이든 좀비든 마음대로 통과할 수 있을 듯했다. 물론 유사시에는 문을 닫고 빗장을 걸어 장벽과 일체형으로 만들 수 있는 장치가 윗쪽에 달려있긴 했다.
엘프 마법사는 짐짓 자랑스럽게 말했다.
"저게 알 헤임달의 개척 방벽이야. 유수한 개척가들과 중장비들이 저 문으로 편하게 들락날락거려. 덕분에 근처에 작은 도시도 형성되어 있고. 경계가 빡빡한 발할라랑은 다르지?"
다른 시티의 주민은 절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편하게 드나들기 위해 대놓고 장벽을 열어둔다니.
네임드 시체라도 한 마리 출입했다간 피바다가 될 것이라, 정신나간 미친짓으로 보일 수 밖에.
그러나 알 헤임달에서는 나름 흔한 광경이란다.
"땅을 개척할 때 필요한 거대하고 무거운 중장비들을 비공정에 실어 일일이 날라댈 수가 없어서 말이야. 그리고 장벽 바깥 개척지에 소규모 장벽들이 둘러져있는 소도시들이 있어. 매장된 자원들을 캐내는 곳들인데, 강력한 언데드가 나타나면 그쪽에서 먼저 발견해 알리니까."
소규모 장벽 안에 세워둔 개척 도시라.
"아무리 강철로 장벽을 쳐봐야 거대 도시들처럼 제대로 된 광역 보호 마법진이 없을 텐데."
내 물음에 엘프 마법사가 어깨를 으쓱였다.
"고절한 흡혈귀들이 임시로 결계를 쳐줘. 그리고 알 헤임달의 연료 소비량을 따라가려면 어차피 누군가는 계속 개척 해야해. 뭐 대부분 기계들이 하는 일이긴 하지만, 보수가 좋아서 지원자들이 넘친다고 하더라."
"그렇군."
저런 특이한 상황 때문일까.
원래 시티 장벽 근처라면 연방군의 경계가 삼엄하거나 주민들이 아무도 살지 않아 황량해야 하건만, 이곳 만큼은 달랐다. 장벽 바로 안쪽임에도 꽤 도시의 태가 났다.
콰아아—
더운 온수를 토해내는 석탄 발전기가 보인다.
마치 목욕탕처럼 생긴, 그 공용 수돗가로 보이는 곳에서 긴 머리를 빨래 빨듯 짜내던 여인과 어떤 사내의 가벼운 대화소리가 들려왔다.
— 아까 들어 보니까 화령검절이 알 헤임달에 와있다더라.
— 화산 그룹의 화령검절(花靈劍絶)? 그 괴물새끼가 여길 왜?
그들은 시커멓게 오염된 장비를 씻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풍기는 기운을 보아하니 6레벨 정도로 보였는데, 바깥에서 얼마나 개고생을 하고 왔는지 얼굴에서 땟국물이 줄줄 흘렀다.
— 무림계 야장들이 마음에 안들어서 직접 매화검이라도 하나 뽑으러 행차하셨나봐.
— 그럴 리가? 이족 난쟁이들이 무인 별로 안 좋아할 텐데.
— 시발, 대체 언제적 얘기야? 세상은 크레딧이 전부야. 칼이든 젖이든 좆이든 크레딧만 있으면 만사형통이거든.
그들을 빠르게 지나치자.
칼드락 스미스가 있는 구역만큼은 아니더라도, 꽤 큰 규모의 소도시가 그 위용을 드러냈다. 증기 기관차가 다니는 철도가 마을의 중심을 관통하여 구멍을 지나 장벽 밖까지 깔려 있었다. 보급품이나 바깥의 물건들을 곧바로 시티 안으로 나르기 위해 길을 뚫어둔듯 했다.
"아이고! 한 번 임장하러오세요~매물이 좋~읍니다."
"?"
그때, 부동산 중개사무소의 나이든 직원으로 보이는 이가 살갑게 다가와 웬 홍보용지를 내 손에 쥐어주고는 급히 떠났다. 송곳니가 튀어나와 있는 늙은이였다.
그 홍보용지에는 최저가 충격! 판매 임박! 같은 말들이 중구난방으로 적혀있었다. 내용은 대강 이랬다.
[ 안전한 알 헤임달 남쪽 장벽 라인, 철도역세권 근접! 원룸 세입자 구함! 보증금 1만 크레딧에 월세 300크레딧, 최저가 신축 풀옵션, 보증금 월세 조정 가능, 조식 제공, 지하2층 이지만 공기가 통하는 오픈형 창문 있음! 관리비 별도, 원한다면 매매나 반전세 가능. ]
달에 300크레딧. 상당히 싼 편이다.
이게 사실이라면 나쁘지 않은 조건이다.
하지만 엘프 마법사는 그걸 보더니 코웃음을 쳤다.
"매달 관리비 명목으로 5천 크레딧 정도는 나올걸. 다 초짜 개척자들 등처먹는 사기꾼들이야."
"역시, 그럴 줄 알았다."
나는 홍보용지를 박박 찢어 태워버렸다.
그 후로 걸음을 쉴 새 없이 옮기자, 몇 분만에 높은 장벽이 눈 앞까지 가깝게 보였다.
그렇게 걸어간 시티 장벽, 커다란 구멍 옆에는 작은 경비소가 있었고 누군가 그 안에 앉아 폐쇄회로 가득한 화면을 감시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장벽을 지키며 외부인의 출입을 결정하는 자로 보였다.
조끼에 나비 넥타이를 차고 작은 경비소에 앉아 정련되고 날카로운 기세를 풍기는 사내였다. 경비소의 직원 따위라고 할 수 없는 것이, 절정에 오른 나보다도 강한 기운을 풍기고 있는 자였다. 그는 얇은 안경을 슬쩍 추켜올리며 물었다.
"무얄라바, 롬진, 파샤치. 남쪽 장벽 밖의 세 곳중 어느 개척지로 가십니까?"
그의 뜻모를 물음에 엘프 마법사가 답했다.
"롬진."
"이유는요?"
경비소의 사내가 곧장 롬진이라는 곳에 가는 이유를 묻자, 엘프 마법사가 샷건의 뚱뚱한 총구를 흔들어보였다. 사내는 헐거운 넥타이를 매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알겠습니다. 그럼 밖에서도 무운을 빕니다."
탁!
작은 경비소 창문이 차갑게 드르륵- 닫혔다.
그 사내는 다시 감시하던 화면에 신경을 집중했다.
"······."
그것이 끝이었다.
스테이션의 수속보다도 빠르게 장벽을 통과한 것이다.
시티 장벽 안이 인간들의 생활 권역이었다면, 이 장벽을 지나서는 좀비들의 권역. 대략 200억 마리의 좀비 앞에 던져진 한 두명의 인간이 되어버리는 것인데도 너무 자유롭지 않은가.
그 마음을 안다는 듯 엘프 마법사가 말했다.
"여긴 분위기가 원래 이래. 나중가면 적응 돼."
빠져나온 장벽 밖의 풍경은 도시보다 어두웠다.
그나마 도시라는 광원이 장벽 밖까지 빛을 내보이긴 하지만 그뿐. 해가 비치지 않는 바깥은 어두울 수 밖에 없다. 좀비놈들은 늘 이런 어둠속에서 살아갈 것이다.
어둠에 익숙할 놈들에게는 인간을 사냥하기 더할 나위없는 광경. 아무리 경지에 이른 고수에다 근방의 기운들을 잘 잡아낸다고 해도 시각과 청각이 일부분 제한된 상태에서는 위축되기 마련이다.
그래도 철로 옆을 따라 희미한 가스등으로 표시된 길이 나있었다. 일정 거리마다 가스등과 석탄등이 켜져있어 구분조차 못 할 정도는 아니었다.
나는 금세 안력을 돋구어 근방을 둘러봤다.
엘프 마법사의 말대로, 3km정도 떨어진 곳들에 강철의 장벽과 그것보다 더 조그마한 규모의 철벽들이 세워져 있었다.
혹시 알 헤임달 시티까지 돌아가지 못할 때를 상정하여 작은 대피소를 만든 것으로 보였다. 저게 강력한 좀비의 앞에서도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아예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
나는 펌프액션 샷건을 들고 사방을 주시하는 엘프 마법사를 흘겼다. 그녀는 아직도 웃음을 띄고 있었다.
뷔에탕의 마력 살덩이를 찢어먹던 짐승과 커다란 펌프액션 샷건을 당당히 들고있는 엘프 마법사. 꽤 좋은 조합이다. 마공학에 조예가 깊은 마법사니 일반적인 재래식 샷건도 아닐테지.
그런데 그때였다.
"문 좀 열어주세요. 저 돌아 왔어요."
똑.똑.똑.
웬 여인이 철로를 터벅터벅 걸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희미한 가스등이 그녀의 얼굴을 비추었으나 치렁한 머리칼 때문에 잘 보이지는 않았다.
"저기요. 문 좀 열어주세—"
콰아앙!
그 순간, 엘프 마법사는 망설임없이 샷건을 격발해 걸어오던 그 여인의 몸통을 통째로 날려버렸다. 곧이어 썩은 피냄새가 훅 밀려오며 무너져 내리는 여인의 얼굴이 드러났는데, 거기에 시뻘건 이빨들이 곳곳에 박혀 있었다.
"······아?"
데구르르 굴러 떨어진 여인의 얼굴. 이빨이 박혀있는 그 얼굴은 마치 아이처럼 울먹이고 있었는데, 눈에서는 말간 눈물이 흘렀다.
"저, 저 아직 감염 안됐어요. 진짜예요!"
그 광경을 보던 엘프 마법사가 총구로 머리를 긁었다.
"얼마나 왔다고 벌써 저런 게 보여? 재수가 없으려나."
거대한 불쾌감이 뇌리 깊은 곳에서 스멀스멀 밀려왔다.
곧, 그 얼굴의 머리통에서 머리카락이 스산히 일어나더니, 뻗친 머리카락을 다리처럼 이용해 걸어다녔다.
— 저저아직감염안됐어요진짜예요저저아직감염안됐어요진짜예요저저아직감염안됐어요진짜예요저저아직감염안됐.
얼굴은 거꾸로 뒤집혀 자신은 아직 감염되지 않았다고 소리쳤다. 거품을 문 여인의 입에서 진득한 침이 흘러내리며 머리카락을 적셨다. 광견병에 걸린 개처럼 머리를 휘저으며 소리를 질렀다.
엘프가 내쪽으로 눈짓하자.
나는 욕지기를 참으며 지면을 박찼다.
서걱!
광선이 뽑혀나오자, 여인의 얼굴은 반쪽이 되어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윽고.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농후한 혈향이 코를 찔렀다.
2회차 때의 좆같은 기억이 한꺼번에 구토처럼 몰려올 기미를 보이자, 나는 괜히 하하하 크게 웃으며 검에 묻은 피를 털었다.
곧이어, 청록빛 상어 괴물이 달려들더니 그 괴이의 잔해를 깔끔하게 잡아먹었다. 철로에는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았다.
"······."
좀비도 먹나? 무슨 게임 크리쳐도 아니고.
나는 씁쓸한 얼굴로 광선을 납검한 뒤, 철로를 따라 걸음을 재촉했다.
그리고 잠시 뒤.
뿌우우우—
철컹대는 증기 기관차 소리가 우리들의 뒤에서 들려왔다. 강풍과 함께, 덮어놓은 천막 바깥으로 빠져나온 군용 폭탄과 다이너마이트가 보였다. 그것들을 가득 싣고 어디론가 달려가는 증기 기관차는, 어둠보다도 검은 증기를 잔뜩 뿜어냈다.
#66화. 개척도시 롬진 1
#66화.
알 헤임달 전역은 석탄과 천연가스의 생산지다.
말하자면, 이 땅속에는 뭔가 많이 묻혀 있었다는 뜻.
과거부터 자원을 캐기 위해 마구잡이로 파헤치고 온갖 곳에 구멍을 뚫어놓은 탓에 알 하임달의 지면은 흙바닥보다 무르고 단단하지 못했다.
그러니 물러터진 지면에서 뭐가 불쑥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다는 사실을 늘 인지해야한다. 무른 땅속에 묻혀있는 게 석탄이 아니라 살아있는 괴물일 수도 있거든.
"지금 또 나온다."
파바바박—
서걱!
어두운 주위를 빛으로 물들이는 검, 광선.
땅 밖으로 머리를 내밀어 내 발목을 물어뜯으려던 좀비의 혀와 턱이 그대로 잘려나간다. 눈은 퇴화되어 없었고 귀가 여러 개로 사내의 손바닥만큼 컸다. 두더지라고도 불리는 부류였다. 가수면 상태로 대기하다가 진동을 감지해 지나가는 인간을 낚아채는.
- 으게게겍!
두더지놈은 잘린 턱을 붙잡고 구슬피 소리 질렀다.
대략 4레벨급으로 추정되는 좀비였는데, 위장은 좋았으나 요사스러운 기운을 숨기는 것이 서툴렀다. 모래폭풍때 왕초삼을 따라왔던 그 대두 놈보다도 조금 약한 수준.
나는 재차 검을 휘둘러 놈을 반토막 내버렸다.
철로를 따라오며 지금까지 너덧 마리 정도의 좀비를 죽였는데, 놈들 중에서는 머리카락을 다리처럼 이용해 달려오던 머리통 여인이 가장 강한 축에 속했다. 그 여인에 비하면 이놈은 잔챙이였다.
놈을 처리한 뒤, 검날에 진득히 묻은 피를 털었다.
후두둑.
진득한 피는 깨끗이 털려 나갔으나 기억은 아니었다.
문 좀 열어달라며 달려오던 그 여인의 역겨운 모습이 아포칼립스때의 빌어먹을 기억과 뒤섞여 머릿속을 쉬이 떠나지 않았다. 수십 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도 생생히 떠오르는 기억들. 뭔지 모를 피비린내가 계속 코로 풍겨와 가시질 않았다.
그렇기에 좀비가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검을 더 강하게 휘두르게 되었다. 도저히 지워지지 않는 그 기억들을 뇌리에서 잘라내는 것처럼.
사냥이 끝나자, 청록빛 괴물은 어김없이 사체를 향해 달려들었다.
"······."
와작와작대는 소리.
에센스 추출이고 뭐고, 청록빛의 괴물은 먹어도 먹어도 배고프다는 듯 끝없이 좀비의 사체를 탐했다. 짐승이라는 말이 참으로 잘 어울렸다. 엘프 마법사는 그 이질적인 모습마저 예쁘다는 듯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제 여섯 마리인가? 철로 근처인데도 오늘따라 조금 많네. 롬진에서 이렇게 많이 흘릴 리가 없는······아 이제 총 일곱 마리다."
불쑥!
그 말과 함께, 그녀의 뒤에서 목이 튀어나왔다.
비수와도 같은 이빨이 얼굴 전체에 끔찍하게 달려있는 형태로, 기다란 목은 지면 밑과 연결되어 있었다. 얼굴은 쫘악 펼쳐지며 엘프 마법사의 목덜미를 노렸다.
이빨이 그녀의 지척까지 이른 순간.
드드드—
잡고있던 광선의 검병이 진동하며 검집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쾌속하게 이어지는 발검. 찰나간 광선에서 오색으로 빛나는 검기가 발출되어 땅과 이어져있는 좀비의 목을 도려내자, 엘프 마법사가 드디어 감탄을 머금었다.
"오오~"
푸욱!
나는 다가가 검신을 땅에 깊숙히 박아 넣었다.
이윽고 그 검을 뽑자, 파인 구멍으로 핏줄기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그때 청록빛의 괴물이 다가와 잘려서 쓰러진 목을 쑥 잡아 뽑으니, 땅 밑에서 피를 뿜고 있는 뚱뚱한 몸뚱이가 알감자처럼 딸려 나왔다.
— 끄아아아악!
저것이 바로 놈의 본체였다.
마치 젊은 사내의 비명과도 비슷한 괴성.
청록빛 괴물은 그러거나 말거나 상어같은 입을 한계까지 벌려 놈의 뚱뚱한 몸뚱이를 뱀처럼 덮은 뒤, 천천히 즐기며 씹어먹었다. 오독대는 소리가 철로에 울려퍼졌다.
"다르간트 아저씨가 만든 검 중에서도 심하게 뛰어난 축인 것 같아. 방금 그거, 잘만 쓰면 7레벨의 극이나 8레벨이라고 해도 믿겠어. 무슨 재료를 넣어서 만드신 거지?"
나는 엘프 마법사의 말에 속으로 동의했다.
'기의 발출이 이리도 수월하다니.'
다르간트의 역작, 광선은 예상보다도 더 훌륭했다.
바깥으로 낭비되는 공력이 거의 없는 덕에 내공을 아껴 안배하기 좋았으며 칼날의 수준 높은 예기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리고 방금의 일격으로 확실히 알아낸 것이 있다.
전력으로 내공을 주입하면 검이 공력을 잔뜩 머금고 색색의 광채를 내뿜는데, 이때에는 공력 소모가 극심하다는 단점이 있었으나 도처에 못 베어내는 것이 없었다. 그 상태에서 기의 발출 역시 가능했는데 궤적에 스치기만 해도 좀비의 목이 날아갔다.
검기를 피워 올리는 것과, 그 기운을 압축해 발출까지 하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무공의 이치를 정확히 깨닫고 검과 물아일체가 되어야만 정확히 내보일 수 있는 기예. 발할라 마탑의 봉우리에서 루벤카에게 내보였던 허술한 발출과는 달랐다.
물론, 기를 발출시키는 것은 내공과 집중력을 미친듯이 잡아먹는다는 큰 단점이 있다. 내공이 무한정에 가깝지 않은 이상, 애써 주입한 기운을 유형화해 발출한다는 것은 별 실속이 없었다. 그러나 상황에 따라서는 유용하게 쓸 수 있는 수단이다.
특히 기운을 흘리지 않고 검신에 눌러 압축시켜둘 수 있는 광선같은 경우에는 그런 변칙적인 움직임과 궁합이 잘 맞을 것이다.
가히 위검강(僞劍罡)이라고 불러도 좋을듯했다.
다만 잘 사용하려면 적당한 조절이 필요했다. 방금 전에도 무슨 마검마냥 공력을 쭉쭉 빨아먹는 탓에 약간의 탈력감이 일었기 때문이다. 아직 분수에 맞지 않는 힘을 마구잡이로 써댔다간 공력이 순식간에 동날 것이다.
청록빛 괴물의 식사가 끝나자, 엘프 마법사와 나는 계속 철로를 따라 걸었다.
유일하게 등이 켜져있는 길이기도 하고, 아까 시티 장벽을 나오며 행선지로 정했던 개척지 '롬진' 으로 가기 위해서였다. 지금 이 철로 근처의 땅은 완충지에 불과했다. 거기는 고절한 흡혈귀들이 임시로 결계를 쳐두었다고 했나.
흡혈귀라······.
그들도 알 헤임달 시티의 이족이긴 하지만, 세상에 그리 자세히 알려져있지 않았다. 아무래도 머릿수가 심히 적은 이족이기에 그런 듯했다. 회복 기능이 있는 수혈팩으로 사업을 한다는 것과 평균적으로 인간보다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직접 가서 마주하면 알 수 있겠지.
"생각보다 좀 지겹지 않아?"
철로가 계속 이어져 끝날 기미가 없자, 엘프 마법사가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가스등 불빛이 그녀의 웃는 얼굴을 적나라하게 비추었다.
"그래도 개척지 앞마당쯤 가면 언데드들이 몰려들 테니까 걱정하지 마. 거기에 비하면 여긴 아무것도 아니거든."
"지금도 전혀 지겹진 않은데."
"롬진에 도착하기 전에 너무 힘을 과하게 쓰지 말라는 뜻이었어."
그녀와 대화를 하다가 나중에 들은 거지만, 원래 개척지까지는 증기 기관차를 타고 이동하는게 일반적이라고 했다. 굳이 걸어갈 필요는 없다고. 하지만 적당한 수준의 좀비들과 어울리며 실전 감각을 끌어올리는 데 큰 도움이 되었기에 내게는 좋은 일이었다.
아무튼 이제 걸어온 거리가 꽤 되어 알 헤임달의 장벽 안쪽 도시가 비추는 광원도, 저 먼 하늘에 어렴풋하게만 보였다.
철로와 조금 떨어져 있는 근방의 땅에는 개미지옥이 뚫어놓은 듯한 구멍들이 보였다. 저게 두더지들이 뚫어놓은 구멍인지, 과거 있었다던 벙커로 통하는 구멍인지는 구별이 힘들었다.
장벽과 멀어질수록 점점 사위가 어두워졌다.
인간이 남긴 흔적은 드물었고, 사람도 없었다.
야트막한 구릉과 석탄처럼 검은 흙바닥만이 펼쳐졌다.
그나마 우리를 반겨주는 것은, 주기적으로 굉음을 울리며 철로를 달려오는 기관차 정도.
지금도 저 반대쪽 철로에서 뭔가를 가득 실은 증기 기관차가 또 빼액대며 달려오고 있다. 기관차는 십 분 주기로 철로를 내달려왔다. 꽁꽁싸맨 화물칸에는 석탄이나 광물 같은 것들이 한가득 실려있었다.
— 께에에엑!
증기 뿜어내는 굉음이 들리자 근처의 수준 낮은 좀비들이 이곳으로 몰려들었는데, 대부분은 기관차의 전방에 달아둔 충각용 톱날에 산산이 찢겨나갔다. 기관차의 충각용 톱날은 굳은 피가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콰아앙—!
육중한 증기 기관차가 압도적인 체급과 속도로 깔아뭉개버리니, 부딪쳐서 살아남는 놈이 거의 없었다.
그래도 아주 허접한 놈들만 있는 것은 아니라, 가끔가다 충격을 버티는 좀비들이나 기관차 안으로 기어 들어가려는 좀비들도 보이긴 했다. 그럴 때면 기관사로 보이는 실력자가 손수 바깥으로 나와 처리했다.
당장 저 앞의 상황이 그랬다.
기관차의 세 번째 량에 좀비가 들러붙었다. 다리는 없었으나 손이 두껍고 거대해 악력이 아주 강해 보이는 놈이었는데, 놈이 붙잡은 기관차의 철판이 구겨지고 뜯겨나갈 정도였다.
— 아이 귀찮게 정말요! 너 나와!
그런데 머리를 뒤로 내밀어 놈을 확인하고는, 기관실 밖으로 풀쩍 뛰어내리는 토끼 귀의 기관사. 그는 기관차에 손가락을 박아넣은 좀비를 맨손으로 끄집어 내리더니, 토실한 발바닥으로 툭 걷어찼다.
콰앙!
그러자 폭탄 터지는 소리가 나며 좀비의 몸체가 풍선처럼 터져나갔다. 놈은 뛰어난 악력을 선보일 새도 없었다.
'6레벨에서 7레벨 사이쯤인가. 다리 힘은 대단하군.'
수인 특유의 대단한 육체 강성을 이용한 각법(脚法)이었다.
풀쩍 풀쩍!
그렇게 좀비를 일격에 쳐죽인 토끼 귀의 기관사는 달리기로 기관차의 속도를 따라잡은 다음, 창을 열고 기관실로 가볍게 뛰어들었다.
기관사는 무심한 얼굴로 빵모자를 쓰고는 다시 전방을 주시했다.
알면 알수록 특이한 도시였다.
"저 토끼, 되게 귀엽다."
"······."
엘프 마법사는 그것을 흥미롭게 구경만 할 뿐, 힘쓰는 것을 자제했다. 어차피 그녀가 나서야 할만한 놈들은 이 근방에 돌아다니지 않았다. 개척지라는 곳들이 어떻게 생겨먹었기에 좀비놈들을 이렇게까지 억제하는지 궁금해졌다.
지면에 깔린 어두운 철로는 계속 이어져 있었다.
이게 대체 저승길로 가는 건지, 삼도천으로 가는 건지 모를 정도. 언 선생의 계단 진법 속을 끝없이 헤매는 것만 같았다.
그래도 헛수고는 아닌 것이 슬슬 커다란 폭음이 들리는 장소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몇분 뒤.
개척지 롬진의 장벽이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했다.
황량한 땅 위에 정말로 꽤 큰 장벽이 세워져 있었다. 연방 거대도시들의 장벽처럼 웅장하진 못해도 상당히 튼튼해 보였다. 개척지라기에 나무 울타리 정도를 생각했는데, 알 헤임달의 개척가들은 장벽에 꽤 진심인 모양이었다.
"저기가 롬진. 알 헤임달의 개척지이자, 전진 기지라 생각하면 돼."
콰아아앙—
그런데 엘프 마법사의 그 심심한 말을 화려히 수식하려는 듯, 귓전을 때리는 폭음과 함께 지축을 진동시키는 충격파가 주변부로 밀려왔다. 하늘로 승천하는 불길과 먼지구름이 멀리서도 보였다.
"······."
높은 하늘 위로 활활 타오르는 불꽃.
나는 그 와중에 어떤 기운을 느끼고는 엘프 마법사를 쳐다봤다. 그녀도 나와 비슷한 것을 느꼈는지, 이제 막 고개를 돌리는 중이었다. 서로의 눈빛이 중간에서 교차했다.
"너도 들었구나? 아니면 느꼈든지."
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7레벨. 바늘이 떨어지는 소리도 생생히 듣는 경지일진대, 방금 그것을 느끼지 못했을 리가 없지. 멀리서 터진 폭음을 말함은 아니었다.
철로를 따라가던 우리의 걸음이 멈추었다.
마침, 다음 기관차가 슬슬 다가올 시간이었다.
곧, 철도가 진동하고 기관차의 굉음이 들렸다.
그리고 반대편에서 달려오던 이번 기관차의 기관사는, 전과는 달리 빨래처럼 기관실의 창틀에 널려있었다. 엘프 마법사와 같이 뾰족한 귀를 가진 기관사였다.
"······."
깨진 유리가 기관사의 복부를 관통했고 얼굴은 형편없이 바스라져 있었다, 뾰족한 귀 부위로 어떤 이족인지만 짐작이 가능했다.
피를 흘리며 질질 끌려다니기라도 한듯, 붉디붉은 선혈이 기관실에 낭자해 있었다. 그것을 제외하고는 전투를 벌였다면 응당 있어야할 흔적은 아무것도 없이 깨끗했다. 그러니까 저 기관사는, 저항도 못해보고 단박에 뒈진거다.
"흠, 어쩌지? 오늘 롬진의 상황이 영 아닌가봐."
적어도 이 상황은, 엘프 마법사가 의도하거나 보여주려던 장면이 아닌 것이 분명했다. 뾰족한 두 귀의 끝이 바르르 떨리는 점을 보면 말이다.
"가서 물어와 볼래?"
그녀의 명령에 청록빛의 괴물이 단박에 기관차 안으로 쇄도해 들어갔다. 쿠당탕거리며 기관실로 진입한 청록빛의 괴물은 곧 중간 칸쯤에서 의문의 존재와 부딪치며 격렬한 박투를 벌였다. 그에 기관차가 탈선할 것처럼 뒤뚱뒤뚱 흔들렸다.
허나 청록빛 괴물은 곧, 기관차의 옆 창문을 다 깨수부며 포탄처럼 튕겨져 나왔다. 우리가 조금 전에 느꼈던, 정상적이지 않은 존재가 저 기관차 안 어딘가에 숨어 있는게 분명했다.
저대로 달렸다면 필시 장벽 안으로 들어갔겠지. 그 장벽 구멍을 지키던 경비소의 나비넥타이 정도라면 저 놈을 막을 수 있었을까? 그것은 아무도 모를 일이다.
그때.
철컥, 샷건의 그립이 슬라이드 되는 소리.
옆을 돌아보자 그녀가 샷건을 조준하고 있었다.
펌프액션의 샷건 총열로 막대한 마력이 모여들었고.
곧, 엘프 마법사의 입에서 반가운 음성 영창이 튀어나왔다.
"마나 미사일."
샷건이 마력의 불꽃을 뿜었다.
쐐애애애액—
거대한 기운은 사방을 잡아먹으며 쏘아졌다.
주변의 소리와 공간마저 잡아먹는 압도적 광역 마법.
증기 기관차의 앞 뚜껑과 충각용 칼날들은 온데간데없이 증발했고, 뒤이어 기관차의 량들이 차례대로 뚫리며 펑펑 터져나갔다. 철도를 달리던 육중한 기관차가 말 그대로 찢겨나갔다.
다음 장면까지는 얼마 걸리지도 않았다.
— 으. 아. 악. 씨. 이. 발. 년. 엘. 프. 년. 이!!
기관차 안에 숨어있다가 6위계급 마법에 직격당한 좀비놈이 박살난 기관차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작은 몸체로 굉장한 요기를 뿜는 놈이었다. 못해도 7레벨은 될 법한 좀비가 방금 전의 마법에 하체를 잃은 채로 괴성을 내질렀다.
그 괴성이 끝나기도 전에 엘프 마법사와 내가 동시에 땅을 박차고 달려들었다.
— 씨. 이. 발. 씨. 이. 발!!!
좀비놈은 기관차 위에서 욕을 내뱉으며 뒤뚱뒤뚱 발악을 해댔으나, 이미 청록빛 괴물과 박투를 벌인데다가 하반신이 잘려나간 상태라 본래의 힘을 내지 못했다. 놈은 강했으나 엘프 마법사의 샷건과 내 검기에 금세 목이 날아갔다.
그 사체를 청록빛 괴물에게 맡겨둔 채, 고개를 들었다.
달리는 증기 기관차 위에 오르자 저 멀리의 상황이 조금 더 잘 보였다. 저기 롬진이라는 이름의 개척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
개미처럼 작은 형체들이 뒤엉키고 있었다.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는 얘기.
저 롬진의 장벽 근처에서는, 하늘을 날아다니며 싸우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웬 가방같은 물건을 매고 있었는데, 그 가방과 연결된 파이프 밑으로 거친 증기가 뿜어져 나오며 하늘에 몸을 띄웠다. 심장이 비공정의 증기보다도 뜨겁게 끓어오른다는 '개척가' 들로 보였다.
장벽 위에 걸려있는 대형 포탑들은 연신 가스를 뿜어내며 쇠작살을 쏘아냈다. 레벨이 낮은 좀비들의 몸뚱이는 작살에 관통당해 땅에 깊숙히 처박혔으나 요기가 강한 놈들은 오히려 작살을 타고 덤벼들었다.
그리고.
개척가들이 자랑하는 그 개척도시 롬진의 장벽에는 증기 기관차의 파편으로 보이는 쇳덩이들이 처박혀 있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아까 폭탄을 잔뜩 싣고 지나갔던 기관차가 공격을 받아 폭발한 뒤 일이 생긴 게 틀림없었다.
실로 아수라장이었다.
그러나 어쩐지 낯이 익은 광경이기도 했다.
아포칼립스 세계였다면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바이크가 있으면 바이크를 타고 도망쳤을 것이고, 차가 있다면 차를 타고 도망쳤을 것이다. 다 없으면 뭐 뛰어서라도 도망쳤겠지.
몸을 돌리면 알 헤임달 시티로 돌아갈 수 있었다. 광선을 길들여 손에 익히고 실전감각을 틔우기 위해 나온 것이지, 개척자들이 해내야할 일에 오지랖을 부리러 온 것이 아니었다.
내가 힘자랑을 해봐야 장벽 밖에서는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기다. 가공할 무위의 실력자들도 자칫 방심하면 팔다리가 잘리고 죽어 나가는 마경인데, 이미 판단할 것도 없이 저곳에선 큰 사태가 벌어진 듯했다.
그리 생각하던 때.
옆에서 고개를 치켜든 엘프 마법사가 말했다.
"아무리 봐도 문제가 생긴 것 같네! 도와주지 말고 돌아가자. 이거 타고 가면 금방이야."
이 기관차는 기관사가 죽고 앞의 기관실마저 박살이 났음에도 철로를 따라 빠르게 내달리고 있었다. 이렇게 가만히만 있어도, 아니 뛰어 내려서 돌아간대도 알 헤임달 시티까지는 금방이었다.
허나 나는 엘프 마법사의 말이, 진심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저 말을 한 그녀의 몸은 이미 저만치 앞으로 쏠려있었다. 부서진 기관차의 이어진 량들을 계속 뛰어건너 벌써 끝자락까지 왔다. 당장이라도 기관차에서 뛰어내릴 기세였다.
그렇기에 나는 황당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 마탑은 왜 이리 간보는 걸 좋아해? 설마 돌아가자는 말을 듣고 싶은 건가?"
"아니지. 그럼 먼저 갈 테니까, 알아서 따라와."
내 말에 그녀는 씨익 웃으며 가볍게 윙크하더니, 청록빛 괴물 위에 훌쩍 올라탔다. 기관차 뒤로 높게 도약한 괴물은 그녀를 태운 채 미친듯 내달렸다. 바람에 옷자락을 흩날리며, 펌프액션 샷건을 들고 황야를 내달리는 모습이 일품이었다.
나는 떠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이제 네 개가 된 마나 회로로 자연의 마나를 빨아들였다.
이윽고.
육신이 허공으로 부웅, 떠오르며 전투중인 롬진을 향해 빠르게 쏘아졌다.
#67화. 개척도시 롬진 2
#67화.
롬진에 접근하며 상황을 확인했다.
'임시 결계가 있다더니, 정상은 아니군.'
수준 높은 흡혈귀가 쳐두었다는 임시 결계는 눈 씻고 봐도 없고, 장벽의 일부분은 무너져내려 있다.
롬진의 개척자들로 추정되는 사체들이 장벽 앞 이곳저곳에 쓰레기처럼 널려있었다. 개중에는 인간이나 엘프들도 있었으나, 토끼 귀를 가진 수인의 비중이 높았다. 아무래도 여긴 묘인(卯人)들이 주도적으로 개척을 벌이는 개척지인 듯 했다.
머리통이 터지고 짓눌린 묘인의 사체들이 여럿이었다. 다들 매끈한 가죽옷 위에 동그란 가방과 장구류를 차고 있었는데, 가방은 증기를 뿜어내는 허공을 부유할 수 있게 해주는 물건이고 장구류는 개척자들이 널리 착용하는 전투장비로 보였다.
— 멀리 나가지 마세요! 장벽을 사수해야!
— 처, 철도가 망가졌대요···제르니가 죽었어!
— 탈출해야 한대요! 비공정에 시동 걸라해! 얼른!
— 10분도 안 남았대요! 연료실에 불 들어갔대!
묘인들 특유의 말투와 비명들이 한데 뒤섞인다.
전투나 방어전이 아닌, 탈출을 생각하고 있는 건가.
보아하니, 이들은 사망한 기관사와 7레벨 좀비를 싣고 알 헤임달로 달리던 기관차에 신경쓸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달려드는 좀비들의 살기가 괴상하리만치 거세서 당장 제 목숨 지키기도 쉽지 않아보인다.
'이래서 빠져나온 좀비들이 알 헤임달 장벽 근처까지 기어 왔군.'
이런 규모의 전투가 벌어졌으니 근방 통제가 가능할 리가 없다. 전투원으로 보이는 자들은 대부분 뛰쳐나와 무너진 장벽 안으로 들어가려는 좀비들을 막아내고 있었다. 장벽 위의 작살은 연신 내리꽂혔고, 개척자들 중 5레벨 밑의 전투원은 한 명도 없었다.
개척도시 롬진, 와르르 무너져 내린 장벽 근처.
아까 전 기관차에 가득 실려있던 폭탄들이 연쇄 폭발이라도 일으켰는지 검은 화마가 대기를 불사르며 피어오르고 있었다. 무너진 장벽과 검은 화마가 조명탄의 역할을 해준 덕분에 저 먼 어둠 속에서 몰려오는 좀비들이 더욱 잘 보이긴 했다.
기감을 넓게 펼칠 필요도 없었다.
당장 보이는 놈들만 수백 마리는 그냥 넘겠군.
개척자로 보이는 묘인들의 머릿수가 좀비보다 적다.
철도의 기관차 위에서 보았던 것보다 상황은 더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콰광—
저 멀리, 피어오르는 화마를 배경삼아 강력한 힘을 지닌 존재들이 연신 충돌하고 있다. 발차기 한 번으로 파공성을 내는 강력한 7레벨 묘인과 복부에 그 발차기를 맞고도 버티는 좀비의 전투가 눈에 들어왔다.
뱃살이 흘러내릴 듯 뚱뚱한 좀비가 입을 벌리자, 그 뱃살이 펑 터지며 전방 십여 미터를 산산이 찢어발기고 녹여버렸다. 그에 땅이 뒤집어졌으나, 7레벨 묘인은 일찍이 허공을 차며 폭발의 범위 내를 벗어났다.
양쪽의 전력은 대강 비슷했고 대부분이 7레벨의 경지를 밟았거나 적당히 뛰어넘은 존재들. 롬진의 전력이 극히 미세하게 앞서고 있다. 나는 저쪽으로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저 아수라장의 판도를 뒤집을 엘프가 왔거든.
콰앙—
청록빛의 괴물을 타고 달려간 엘프 마법사는 이미 전투가 벌어지는 지척까지 당도한 상태였다. 한창 전투를 벌이던 개척자들이 엘프 마법사의 강대한 기척을 느끼고 크게 반색하는 가운데, 그녀의 샷건이 뚱뚱한 좀비의 몸뚱이를 통쾌하게 증발시키는 걸 보며 생각을 마쳤다.
엘프 마법사보다 강력한 좀비는 당장 이 전장에 없다. 그러니 저쪽은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나는 허공에서 천천히 낙하하며 칼을 뽑았다.
회로가 마나를 한껏 빨아들이고 있기에 가슴께는 뜨거웠다. 하지만 가슴이 뜨거운 사내라고 하여 머리까지 뜨거울 필요는 없다. 목숨이 달아나지 않는 선에서 능력껏 움직일 생각이다.
발밑으로 전투중인 좀비와 묘인이 보였다.
5레벨 정도 되는 묘인의 단련된 발이 채찍처럼 휘둘러졌으나, 좀비는 멀쩡했다. 전신을 두르고 있는 외갑피가 눈에 들어왔다.
그어어!
좀비는 단단한 외갑피로 전신을 두르고 있어 묘인의 강력한 각법에도 충격이 없어 보였다. 그 내구성에 기겁한 묘인이 둥근 가방과 연결된 등쪽의 호스를 연신 잡아당겼는데, 연료가 다 되었는지 하늘로 날아오르지 못했다. 곧 좀비의 두터운 팔이 묘인을 뭉개버릴 듯 떨어졌다.
나는, 이도저도 못하고 울상이 된 묘인의 머리 위에 두 발을 살포시 딛었다. 토끼 귀가 쫑긋거리며 발목을 간지럽혔다.
"으, 응?"
그리곤 검을 휘둘렀다.
서걱.
바람결과 함께 벼락처럼 쏘아진 광선이 외갑피로 덮힌 좀비의 팔을 썰어냈다. 종으로 내려치니 두 조각이 나고, 다시 횡으로 휘두르니 네 조각이 났다.
으어어···!
팔이 네 조각 났음에도 놈의 성량이 쩌렁쩌렁하다.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검신은 외갑피 좀비의 반대쪽 팔마저 썰어낸다. 갑피의 단단함에 자신이 있었는지 놈은 두 팔이 다 잘리자 크게 당황한 기색이었다. 급히 뒤돌아 도망치려는 좀비의 등을 찔러 관통한 광선을 그대로 그어 올린다.
푸화악!
"흐억······."
쩌억 벌어진 외갑피 좀비의 몸에서 피분수가 비처럼 쏟아지자 묘인이 질린 얼굴로 털썩 엎어졌다. 녀석은 얼굴에 묻은 피에 기겁하며 가죽 장구류에 달린 줄을 잡아당겼다.
치이익—장구류에서 즉시 수증기가 분사되며 묘인의 얼굴에 묻은 좀비의 혈액을 씻어내린다.
잠시 뒤, 묘인은 날 보며 헛숨을 들이켰다.
"허억! 고마워요. 그, 근데 누구?"
커다란 경계심이 묘인의 표정 위로 드러났다.
안 그래도 경계심이 많기로 유명한 이족이다.
나는 숨돌릴 새도 없이 엎어진 묘인에게 물었다. 대략적으로라도 상황을 들어보기 위함이었다.
"알 헤임달 남쪽. 칼드락 스미스에서 칼 갈아주러 왔는데, 무슨 일이 일어난 겁니까?"
"······카, 칼드락 스미스?"
그래도 칼드락 스미스라는 말과 함께 홍색의 검집을 당당히 드러내며 묻자 묘인의 경계심이 아주 조금은 누그러졌다.
묘인은 몸을 덜덜 떨면서 답했다.
"갑자기 언데드들의 습격을 받아서요······."
"대충 봐도 평범한 일이 아닌데. 개척지가 원래 이럽니까?"
"이건 아마도 말이예요. '남쪽의 어머니'가 직접······."
남쪽의 어머니라는 말이 귓전을 울렸다.
롬진은 알 헤임달 남쪽의 개척지 세 곳중 하나.
그렇다면, 지역명을 기워 붙인 네임드 시체겠군.
그 묘인은 더듬더듬대면서도 힘겹게 말을 이었다.
"알 헤임달 대개척 준비때문에······사, 사형수 수급이 부족해 남쪽의 어머니가 화났어요······저는 그것만 알아요······그나저나 롬진에서 처음 보는 인간······그분께서 인간은 안좋아 하시는데."
하지만 도대체 뭐라는 건지 곧장 알아먹을 수가 없었다.
묘인들은 앞니가 긴 탓인지 발음이 그닥이었다. 이 녀석에게 정상적인 대답을 듣기를 포기한 뒤 다시 땅을 박찼다. 좀비와 생사결을 벌이고 있는 묘인들은 많았다.
나는 그 뒤로 다섯 마리의 좀비를 더 썰어냈고, 또 한 명의 묘인을 돕고 나서야 제대로 된 대답을 들을 기회가 생겼다. 개척도시에서 꽤 지위가 되는 자인지 묘인의 설명은 이전보다 세세했다.
"채굴용 폭탄들이 한꺼번에 터지는 바람에 혈귀의 비술이 약화됐어요. 남쪽의 어머니가 부리는 언데드가 벌인 짓이야. 확실해."
발등에 너클 붕대를 감고있는 묘인은 겁에 질려있지도 않았으며, 이런 사태가 일어났는데도 꽤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강한 편에 속하는 6레벨 정도의 묘인.
나는 곧바로 궁금한 것부터 물었다.
"어머니가 근방을 지배하는 언데드인가?"
"이 남쪽 근방에서 제일 강력한 언데드에게 붙여준 이름이에요. 어머니처럼 많은 언데드를 끌고 다닌다고 해서요. 남쪽의 어머니."
"놈이 왜 갑자기 쳐들어온 거지?"
"······축복 의식을요. 못 치러서 그래."
긴 토끼 귀가 축 늘어졌다.
축복 의식이라는 말은 처음 듣는다.
그 묘인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이를 강간했거나, 무고한 사람을 죽였거나, 죽어도 싼 일을 저질러 사형이나 종신형을 선고받은 알 헤임달의 주민들 중, 출신이 미천한 이들을 남쪽의 어머니에게 바쳐요. 우리 개척할 거니까 귀찮게 방해하지 말아 달라는 뜻이야."
간단히 말하자면.
사형수로 인신공양을 하고 있었다는 말이군.
강력한 네임드 시체가 도시의 개척자들과 공생관계처럼 자리를 잡고 영역을 형성한다. 강력한 좀비의 요기는 수준 낮은 좀비들이 두려워하니, 어지간해서는 강력한 좀비들이 장벽 근처에 기웃거리지 않을 것이다.
여러 좀비를 불러들이느니, 강력한 한 놈만을 의도적으로 불러들인 뒤 먹이를 내어주며 무차별적인 좀비의 습격을 억제하는 방법이다.
단기적으로 따졌을 때 효율적인 방법이 맞다.
남쪽의 어머니인지 뭔지가 막강하다고 해봐야 알 헤임달의 개척지 전체를 싸그리 쓸어버릴 정도로 강하진 않을 테니까.
하지만 종국에는 이렇듯 틀어질 수밖에 없는 관계였으리라.
어릴 적부터 키우던 짐승도 머리가 굵어지고 본성이 도지면 언제 사람을 물지 모른다. 하물며 인간이나 이족 자체를 먹이로 보는 좀비임에야 그 변덕이 오죽하겠는가.
탐욕 따위로 정의할 수 있는 범주가 아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게 아니라 아무리 달아도 언제 뱉어낼지 모르는 놈들이다.
나는 그 묘인을 번쩍 들고 싸움과 동떨어진 장벽 안쪽으로 들어왔다. 밖에서는 연신 폭음과 기파가 부딪쳐 대지를 떨어 울렸다.
조금 안전한 장벽 안쪽으로 이동한 뒤 물었다.
"놈한테 하루에 얼마나 던져줬지?"
"세 하루에 열다섯요. 한 달에 백오십."
그럼 일 년에만 2천 명 가까이 던져줬다는 얘기.
적당히를 모르고, 정말 많이도 가져다 처먹였군.
저렇게 마구 먹이를 던져주다가 만약, 더 상위의 존재로 변태(變態)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는지.
변태(變態).
진화, 강화, 탈태, 개화 등등. 부르는 말들은 제각각이지만 굳이 따지자면 좀비들이 겪는 환골탈태와도 같은 일이다. 일단 한 번이라도 그 과정을 겪은 좀비는 상단전을 뚫은 무인마냥 급속도로 강력해진다.
변태라는 과정을 겪기 위해 필요한 조건은 좀비마다 제각각이나, 대부분은 양분을 배 터지게 처먹은 뒤 변태를 준비한다고 들었다. 이것은 연방 정부에서 발표한 연구 결과다.
어쩌면 그 어머니라는 좀비는, 변태 과정에 필요한 양분을 얻기 위해 제물로 보충하려 들었을 수도 있겠다.
그때, 묘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억울해요! 하필 대개척 때문에 실력자들이 알 헤임달 중앙으로 대거 빠져나간 상태라서요! 원래 개척은 다 그렇게 하는 건데!"
그놈의 대개척은 내가 정크타운에 있을 때부터 준비중이라는 말이 돌더니, 아직까지 첫 삽도 못 떴군.
그래도 묘인의 말을 이해는 한다.
개척이라는 행위가 위험 부담을 크게 지는 것은 필연적이다. 알 헤임달 시티가 평범하게 돌아가려면 지금처럼 지속적인 개척을 통한 자원 수급이 필수다.
천연자원은 다른 연방의 도시들에서도 상당한 양을 사용하고 있기에, 개척은 아무리 위험하더라도 멈출 수 없을 것이다. 도시를 버릴 마음을 먹은게 아닌 이상은.
다만, 자원의 생산량을 안전히 유지하기 위해 강력한 좀비에게 사형수를 공짜로 던져준다는 발상은 실로 끔찍했다. 그건 알 헤임달이 최악으로 가는 지름길일 테니.
몇 년간은 안전하고 효율적으로 자원을 캘 수 있더라도 장기적으로보면 전혀 좋을 것이 없다. 먹이를 마음껏 처먹고 강해진 좀비의 시선이 나중에는 어디로 향할까.
이 녀석에게 말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겠지만.
어찌 되었건 흡혈귀의 임시 결계는 깨졌고, 대개척이라는 미명 하에 실력자들이 차출되어 롬진의 전력에 공백이 생겼다는 얘기.
나는 엉덩이를 들썩대는 묘인을 붙잡고 물었다.
"그 어머니인지는 원래 얼마나 강했지? 이제 처먹을 만큼 처먹었나?"
"정확히는 모르는데 8레벨이라고 들었어요. 그리고 당신이 걱정하는 걸 알아요. 아직 변태는 하지 못했을 거예요."
"그런가."
"네, 우리가 그 정도도 모르고 마구 제물을 바칠 만큼 무식하지는 않아요. 변태의 징조가 조금이라도 보였다면 알 헤임달의 지원을 받아 죽이거나 멀리 쫓아냈을 거에요."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냐?"
"한 일주일 전요···?"
하기야, 원래도 8레벨의 경지를 가지고 있던 놈이 변태까지 했으면 이놈들은 이미 다 뒈졌겠지. 다행히도 그만큼 강대한 좀비가 성공적인 변태를 이루기에 일주일이라는 시간은 너무도 짧다.
그것은 그나마 다행이군.
"잘 들었다."
"잠깐만요!"
내가 장벽 밖으로 나가려 하자, 묘인이 나를 말리며 다급히 입을 열었다.
"이제 중장비로 장벽 입구를 막고 철수할 거예요. 비상 비공정을 띄우고 있으니까 시간만 벌고 있어요. 우린 곧 무얄라바나 파샤치로 갈 거야."
"비공정이 몇 기나 되기에, 전부가 탈 수 있겠나?"
그러자 묘인이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다 못 탈 수도 있지만 어쩔 수 없네요. 다수가 살려면 버리고 가야······뒤! 뒤에!!"
서거걱.
검이 찰나간 뽑혀나오자 세 갈래로 토막나는 좀비.
뒤에서 살기등등히 달려들던, 긴 나무토막같이 생긴 좀비가 갈라지며 사방으로 썩은 내장을 마구 쏟아냈다.
나는 몰타의 껍질로 빌어먹을 좀비의 더럽고 질퍽한 잔해를 막아냈다. 오색 빛으로 물든 검신에 화들짝 놀란 묘인의 얼굴이 보였다.
"이, 일격에······."
곧, 녀석은 고맙다는 말과 곧 도착할 비공정을 놓치지 말라는 말을 남기곤 깡총대며 저 장벽 안으로 사라졌다. 다리 힘이 얼마나 좋은지 스프링을 단 것 같았다.
시티 장벽 안에 편하게 앉아, 백만방도 포털 메인뉴스나 넷을 뒤지며 수십 명이 죽었다더라. 언데드가 세상에 그리도 강하다더라. 장벽 밖이 그렇게나 무서운 마경이라더라···그딴 말들을 아무리 들어봐야 눈앞에서 좀비의 손에 목이 잘리는 장면 한 번 보는 것만 못하다.
하물며 수인의 귀여운 모가지들이 실시간으로 박살나고 있으니, 아득했던 그것이 갑작스레 와닿았다.
어찌됐건 이 개척도시 롬진의 개척자들은 장벽 안으로 들어오려는 좀비들과 적당히 어울려준 뒤, 비상용 비공정을 타고 다른 개척도시로 생각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공교롭게도 강자들이 알 헤임달로 떠난 상태라고 하니, 나중에 돌아와 복구할 생각인 것이다.
그런 와중에 일레힌 마탑의 선배, 엘프 마법사는 지금 무너진 장벽 바로 앞에서······.
콰아아앙—
샷건을 펑펑 쏘면서 학살극을 벌이는 중이고.
보통 기사의 단점은 말이 쓰러지면 끝이라는 것인데, 사람을 태우고도 총탄처럼 움직이는 저 청록빛 괴물이 쓰러질 일은 없어 보인다.
마탑의 2인자나 다름없는 엘프 마법사가 저렇게 발로 뛰는데, 감히 막내가 뒤로 빠져서 끼적대는 걸 들키면 좋은 인상을 남기지는 못하겠지.
나는 광선을 꼬나쥐고 빛살처럼 쏘아졌다.
* * *
좀비 수십 마리가 더 죽어 나갔을 때.
롬진 개척도시 근방의 지축이 크게 진동했다.
방금 전에 구해주었던 묘인의 그 말대로였다.
개척도시의 장벽 안에 있던 중장비들이 가동을 시작했다. 거대한 굴삭기와 불도저같은 채굴 중장비들은 무너진 장벽을 두꺼운 몸집으로 막았다. 곧이어 장벽 위로 우뚝 솟아있던 타워 크레인이 거대한 암반을 옮겨 무너져 내린 장벽을 대충 막았다.
쿠구구궁—
뒤이어 직경 30미터쯤 되는 원형의 블레이드에, 굴삭기 버킷보다 월등히 큰 채굴용 버킷들이 달려있는 중장비가 나타났다. 산도 하루면 옮겨버릴 듯한 포스를 풍기는 채굴 기계였는데 그런 놈이 장벽 앞을 떡하니 막아서니 그 위압감이 보통이 아니었다.
장벽의 막힌 틈새로, 한 명의 사람만이 겨우 지나갈 수 있을 법한 구멍이 남았다.
'중장비들로 큰 틈만 막아두고 탈출할 셈이군.'
그래, 그깟 중장비들보다는 목숨이 먼저다. 좀비들은 먹지도 못하는 석탄 채굴 중장비들에 관심을 둘 것 같지는 않으니.
한데 혼란한 전장에서 10분은 매우 짧은 시간이었다.
왜 혼란하다 하냐면-
— 끄어. 끄륵.
뿌드득.
좀비들에게 당해 나자빠져 있던 수인의 사체들중, 머리가 터지지 않은 사체들이 약속이나 한 듯 몸을 비틀며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었다. 저래서 묘인들이 사체의 머리를 죄다 터뜨려 놓았던 거군. 나중에 좀비가 되어 일어날 수도 있으니.
강한 좀비에게 당했거나, 아니면 감염 부위가 넓은 사체들이 가장 먼저 일어났다. 그들의 관절은 반대로 꺾여있고 행색은 괴이했지만, 초점이 돌아온 그들의 눈동자는 쾌감과 희열 비스무리한 감정들이 들어차 있었다.
사후 감염은 이지를 많이 잃는다고는 하지만-
묘인에서 이제 다른 존재로 변화한 이들은 하나같이 이전보다 요사스러운 기운을 풍겼다. 엇비슷하거나 조금 더 앞섰던 롬진 개척자들과의 전투 향방이 뒤집어지는 순간이었다.
"······."
그렇다면 저들은 2회차 전생자인가.
그리 농담조로 생각하고 있던 때, 장벽 밖에서 싸우던 이들도 그 변화를 확인하고는 모두 장벽 안쪽의 구멍으로 뛰쳐들어왔다. 세 기나 되는 비공정들이 때맞추어 저고도로 비행해 장벽의 안쪽 가까이 다가왔다. 함장들의 주차 실력이 보통이 아니었다.
— 뒤로 후퇴해요! 당장 탈출할 거야!
— 모두 비공정에 오르세요! 갑판은 넓지 않아!
— 구멍으로 들어가세요! 여긴 우리가 막습니다!
장벽 가까이 댄 비공정의 갑판에 묘인들이 펄쩍펄쩍 뛰어올랐다. 비교적 약한 무력의 묘인들이 비공정에 오르는 동안, 경지가 높은 묘인들이 발광하는 좀비들의 진격을 막아냈다.
그들의 앞으로, 죽음에서 살아 돌아온 좀비들의 관절꺾는 소리가 전장을 울렸다. 좀비가 된 이들까지 합세해 움직이기 시작하면 강한 묘인들도 여유가 없을 것이었다.
파이프에서 증기가 미친듯이 솟구친다.
대항해시대의 범선처럼 그 위용을 풍기는 증기 비공정은 전장에서 싸우던 모두가 타지 않았는데도 가차없이 고도를 높여갔다. 검은 가루와 증기가 눈발처럼 흩날리며 거체를 하늘에 띄웠다.
서서히 멀어지는 지상과의 거리.
마지막까지 지상에 남은 6,7레벨의 묘인들은 끈질기게 중장비를 딛고 갑판에 들러붙는 좀비들을 쳐낸다. 나와 엘프 마법사도 그들의 곁에서 들러붙는 좀비들을 썰어냈다.
시간이 지나고 비공정이 어느 정도 높이까지 올라가자, 남아있던 묘인들이 땅을 박차고 비공정의 갑판에 올랐다. 수십 미터를 제자리 뛰기로 올라오는 그 탄력과 강성에 감탄했다.
탓!
엘프 마법사와 나도 청록빛 괴물의 등에 올라 무너진 장벽을 딛고는 비공정 하나를 잡아 탑승했다.
그런데 도착한 비공정의 갑판 위는 조금 어수선했다.
"?"
어디선가 코를 훌쩍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묘인 셋이 무릎 꿇려져 있었다.
전투는 끝났어도, 아직 모든 게 끝난 것은 아니었다.
갑판의 가장자리에 무릎 꿇려진 그들은 붉어진 얼굴로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장막이 오른 뒤 한 편의 연극을 보는 듯했다. 비공정의 모든 비행 조명이 그 셋을 비추고 있었다.
한 묘인은 오른쪽 어깻죽지 밑으로 팔이 없었는데, 절단면이 깨끗하여 무슨 이유로 인해 그가 직접 잘라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연이어 어깻죽지를 잘라내려다가 힘없이 팔을 떨어뜨렸다.
'감염.'
둘러보니, 저 셋은 감염된 묘인들이었다.
비공정의 갑판에 있는 개척자들은 묵묵한 얼굴로 그들의 선택을 기다렸다. 엄숙한 분위기에 함부로 입을 열거나 웅성대는 자들이 없었다. 롬진의 묘인들이 감염자를 대하는 방식인 듯했다.
이윽고 셋 중 하나는 아무 말 없이 비공정에서 뛰어내려 도망쳤다. 5레벨 정도의 경지를 가진 묘인이었다.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
다음은 6레벨 초입의 꽤 강한 묘인이었다. 그녀는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자신은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겠노라 다짐하며, 모두에게 미안하다는 말만 남긴 뒤 역시나 저고도의 비공정에서 뛰어내려 도망쳤다. 핏자국 위로 젤리 같은 토끼 발자국이 남았다.
마지막 남은 묘인에게 모두의 시선이 꽂혀들었다.
그는 7레벨로, 방금의 셋 중 가장 강한 묘인이기도 했다.
묘인은 씁쓸하게 웃어 보이며 장구류를 해제했다.
그는 그러고는 갑판 바닥에 털썩 앉았다. 형언할 수 없는 표정의 그는 좌중을 한 번 둘러보고는 곧바로 단검을 빼 들었다. 모든 과정은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
저 묘인에게는 나처럼 다음 생이 없었다.
나름 완숙한 경지의 7레벨. 성취가 아까울 것이다.
후에 깨달음의 실타래를 잡거나 기연을 얻는다면 언젠가 큰 벽을 돌파할 수도 있다. 여기서 앞의 두 묘인처럼 도망치면 시체로나마 생을 구가할 수 있음에도, 묘인 사내는 더 망설이지 않았다.
푹.
그는 단검으로 자신의 목을 찔렀다.
"!?"
아니, 분명 찌르려고 했었다.
갑판 밖에서 쏘아진 꾸덕한 핏빛 실타래가 묘인의 목을 꿰뚫어, 비공정의 갑판 밖으로 질질 끌고 내려가기 전까지는 그렇게 보였다.
겸허히 죽음을 받아들이던 수인 개척자는 죽음을 모독당했다. 그 광경을 목격한 어떤 묘인이 분을 참지 못하고 고성을 질렀다.
— 아니, 이게 무슨 일이지요!
퍼억.
그렇게 분노한 그 묘인은 비공정의 갑판 밖을 무의식적으로 내다봤는데, 녀석의 머리에도 대나무 굵기의 점액질이 꽂히는 걸 보고서는 더는 아무도 밖으로 고개를 내밀지 못했다.
"······."
고결한 죽음을 각오했던 묘인 개척자는 그 결심을 이루지 못했고, 분노한 묘인은 그 자리에서 죽었다. 안전한 하늘의 방주인 줄 알았던 비공정 위, 형용할 수 없는 불안감과 공포가 맴돌고 있었다.
잠시 뒤.
고도를 높여 비행을 시작한 비공정의 저 밑바닥에서 가늠할 수 없는 요기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머리가 쭈뼛 서는 것이, 지금껏 손을 섞었던 좀비들의 기운과는 격이 다르다.
나는 비공정에서 가장 높은 바람 돛대로 훌쩍 뛰어올라 주변과 저 지상을 둘러보았다.
저 밑, 검은 석탄 색의 무른 땅이 파도처럼 요동친다. 땅 밑에서 무언가가 꾸물대며 움직이고 있다.
동시에.
우리 비공정 편대의 가장 뒤에서 비행하던 세 번째 비공정을, 석탄 색의 지면 어딘가에서 섬광처럼 솟구친 촉수들이 붙잡고 끌어내려 지면에 처박았다. 차마 위험을 경고할 수도 없을 만큼 순식간이었다.
구구구궁—
굉음이 개척도시 롬진의 천공을 때려울렸다.
추락의 충격으로 연료실이 터졌는지 주황색으로 뜨겁게 타오르고 있던 석탄의 잔해가 비공정 밖으로 꾸역꾸역 토해졌다.
실력자로 보이는 수인들은 다행히 추락 전에 재빨리 탈출한 상태였으나, 촉수에 추락한 비공정은 심해로 수장되는 함선처럼 검은 흙바닥 속으로 삼켜졌다. 비공정 위에서 미처 탈출하지 못하고 남아있던 부상자들과 함께.
그리고.
세 번째 비공정을 잡아먹은 촉수들은 다시금 지면을 뚫고 나와, 내가 탄 비공정의 위로 솟구치고 있었다.
옆에서 긴장 가득한 엘프 마법사의 말투가 들려왔다.
"막내. 아까 그 오색 검강 얼마나 쓸 수 있어?"
철컥.
어느새 나처럼 바람 돛대로 뛰어 올라온 그녀가 샷건을 장전하며 물었다. 그 옆으로 따라 올라온 강력한 묘인 둘도 긴장한 얼굴로 발을 풀고 있었다. 나는 아쉽게도 자랑스레 대답할 여력이 없었다. 집중을 해야 해서.
- 남쪽의···어머니다.
그래도 한 묘인은 혼잣말할 여력이 남아 있었나보다.
헌데 그걸 누가 몰라서 이러는줄 아는가.
아무튼 8레벨의 마법사 하나, 7레벨의 나, 그리고 나와 비슷한 경지의 묘인은 원래 셋이었는데, 하나는 방금 전에 끌려내려갔으니 쓸만한 이들은 둘이군. 청록빛의 괴물까지 치면 7레벨 이상의 전력은 다섯뿐인가.
"······부족할 것 같은데."
우리는 하늘까지 높게 솟구쳤다가 궤도를 꺾어 비공정을 덮쳐오는, 그 붉은 살덩이의 촉수들을 바라보며 각자의 기운을 끌어 올렸다.
#68화. 개척도시 롬진 3(수정)
#68화.
쐐애애액—
지면으로부터 솟구쳐 비공정을 덮쳐오는 괴이한 촉수들.
혈액처럼 붉은빛의 기이한 촉수들이 하늘에 펼쳐진다.
검병을 강하게 쥔 레반이 그 하늘을 바라보고 섰다.
'10개인가.'
바다를 건너다가 크라켄을 만나면 이런 기분일까.
세 번째 비공정마냥 가라앉은 난파선이 되기 싫다면 저 촉수들을 어떻게든 잘라내야 할 듯싶다.
샷건을 들어올린 엘프 마법사는 7레벨의 묘인들에게 말했다.
"내가 최대한 끊어 볼테니까, 너희는 들러붙으면 그때 끊어."
콰아앙—
묘인들이 대답을 하기도 전에 펌프액션 샷건의 총열이 마나 불꽃을 토해낸다. 아직 비공정에 채 닿지도 못한 촉수 하나가 쾅 하고 폭발하며 힘을 잃고 떨어졌다.
그리고 철컥대며 이어지는 연발 사격.
콰아앙— 콰아앙—콰아앙—
엘프 마법사는 혼자서 무려 네 개의 촉수를 비공정에 이르기도 전에 끊어냈다. 잠시 뒤, 남은 여섯 개의 기다란 촉수가 비공정에 도착하여 강하게 휘감았다.
쿠르르륵.
거대 두족류의 다리같은 촉수들이 돛대와 비공정의 갑판을 단단히 틀어쥐고 끌어 내리려 한다. 이제 묘인들의 차례. 그들은 각자 가까운 촉수를 붙잡고 끊어낼 준비를 했다. 7레벨의 기운이 실린 강력한 발차기에 파공성이 크게 울려 퍼졌다.
하지만 곧바로 문제가 생겼다.
"아, 안 잘리네요! 어쩌지!"
그 촉수는 강철보다도 단단한 데다 심히 유연한 탓에, 하필 타격이 먹히지 않았다. 7레벨 경지의 묘인들이 힘을 실어 연신 공격했음에도 촉수는 흔들리고 구부러질지언정 끊어지지 않았다.
청록빛 괴물도 비공정에서 뛰쳐나가 촉수를 붙잡고 와작와작 씹어댔으나, 대체 얼마나 질긴건지 그 날카로운 이빨마저 잘 박히지 않았다. 촉수는 좀비의 강대한 요기로 보호받고 있었다.
- 그어억!
심지어 지면과 이어진 촉수를 타고 지상에 있던 좀비들이 비공정을 향해 올라오기 시작했다. 마치 갈고리를 던지고 백병전을 벌이려는 해적들처럼.
— 놈들이 올라오네요! 작살을 쏴요!
— 달궈진 석탄을 꺼내와서 부어요!
촉수를 자르지 못하는 5레벨 내외의 묘인들은 우르르 갑판 가장자리에 몰려들었다. 그들은 나름대로 촉수에 달라붙어 올라오는 좀비들을 떼어냈다.
"쟤들은 자르기 힘들어 보이네. 너는 어때?"
"······."
눈을 흘긴 엘프 마법사가 샷건을 장전하며 마나 회로를 재정비하고 있을 때, 광선을 뽑은 레반이 그 촉수 앞에 서서 기수식을 취했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 크게 고함을 질렀다.
— 하늘돛을 전부 올리고 최대 출력으로요! 비축해둔 고급 압축탄을 연료실에 가득 넣어 주세요! 한시라도 빨리 탈출해야 해!
아까 레반이 구해주었던 6레벨의 묘인이었다.
철도에 이어 하늘길마저 막히면 답이 없다 생각했는지, 묘인들은 필사적으로 소리를 지르며 움직였다. 그들은 개척가들답게 능숙히 비공정을 조작하고 기어 올라오는 좀비를 떨어뜨렸다.
뚜두두둑···.
이내 고급 압축탄이라는 연료가 들어갔는지, 비공정의 증기기관이 굉음을 내며 증기를 더욱 세차게 토해냈다. 접혀있던 모든 하늘 돛들이 일시에 펼쳐지며 이전보다 더한 출력으로 촉수의 손아귀를 벗어나려 한다. 촉수의 장력과 힘대결에 들어간 비공정의 몸체 어딘가에선 짓이겨지는 소음이 크게 들렸다.
그 덕분에 비공정을 휘어감고 있던 촉수가 아주 팽팽해졌다. 말하자면 딱 깔끔하게 자르기 좋도록 세팅이 된 것이다.
때가 오자, 레반은 그간 배분해두었던 공력을 적당히 끌어올려 검에 주입했다. 광선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빛무리가 어두운 주변을 밝혔다.
레반은 비교적 전투의 후위에서 활약했기에, 다른 이들보다 힘을 많이 아낄 수 있었다. 광채가 검을 순식간에 휘감으며, 비공정의 돛대를 잡아 구부러뜨리려는 촉수 두 개를 단박에 잘라냈다.
서거걱-
7레벨 묘인들의 강력한 각법에도 끊어지지 않던 촉수들이 레반의 검날에 잘려나갔고, 그 촉수를 붙잡고 올라오던 좀비들은 먼 지상으로 떨어졌다.
곧, 텅텅 소리가 나며 비공정의 고도가 조금 높아졌다. 잡고 있던 촉수가 두 개가 잘려 약간의 여유가 생긴 것이다.
그걸 본 묘인들이 신을 내며 갑판을 뛰어다녔다.
이제 비공정을 휘감은 놈의 촉수는 네 개 뿐이었다. 금방이라도 모두 끊어내고 벗어날 수 있을 듯했다.
하지만 레반은 곧장 검을 내리고 뒤로 물러섰다.
그의 인상이 팍 찌푸려진 것은, 다음 일이었다.
엘프 마법사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많이 잘라서 조금 화났나?"
철퍽. 철퍽.
정말 화라도 난 건지 다른 비공정으로도 쏘아지던 촉수들이 궤적을 틀더니, 이쪽 비공정을 향해 스멀스멀 다가오기 시작한 것이다. 더해서 묘인의 머리를 꿰뚫었던, 대나무 굵기의 하얀 점액질까지 우리 비공정에 철퍽대며 들러붙었다.
붉고 하얀 밧줄들이 비공정에 매달려있는 모양새였다. 재차 샷건의 장전을 끝낸 엘프 마법사가 레반의 옆으로 걸어오며 입을 열었다.
"붉은색 촉수는 놈이 만들어낸 살덩이에 불과하고, 저 굵고 하얀 점액질이 진짜 놈의 육체 일부야."
매번 머금고 있던 웃음기는 사라져 있었다.
그 말과 함께 엘프 마법사의 펌프액션 샷건이 불을 뿜었지만, 대나무 굵기의 하얀 점액질에는 상처만 날 뿐 촉수처럼 끊어지지 않고 건재했다. 비공정은 허공에 박제라도 된 듯 조금도 움직이지 못했다.
"이건 못 끊겠네. 비공정을 부수는게 아니면."
대나무 굵기의 점액질은, 위계 높은 광역마법이 아니면 끊을 수 없다는 얘기.
그쯤에서 하늘 돛대에 서있던 레반은 밑을 바라봤다.
촉수가 연결된, 검고 넓은 지면이 꾸물꾸물 움직인다.
원형으로 꾸물대는 범위가 적어도 백 미터는 넘었다.
롬진 개척도시 앞쪽의 지면은 파문이 이는 호수처럼, 혹은 커다란 늪지대처럼 꿀렁이고 있다. 지면에 누워있던 묘인의 사체들이 그 꿀렁대는 흙바닥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들은 석탄처럼 검은 흙의 늪에서 다시 떠오르지 못했다.
그리고 그 꿀렁대는 지면의 중심에, 무언가 새하얀 물체가 지면 위로 머리를 빼꼼 내밀고 있었다.
그것은 하얀 실타래에 쌓여있는 고치였다.
마치 누에가 실을 토해내 만든 고치처럼.
징그럽고 역한 점액질과 실타래가 그 고치를 하얗게 뒤덮고 있었으며 간간이 얇은 구멍이 나있었는데, 그 사이로 빠져나온 것들이 바로 비공정을 공격하는 촉수와 점액질이었다.
"변태는 하지 못했지만, 준비는 다 마친 상태네."
"······."
엘프 마법사가 지금의 사태에서 도출해낸 결론이었다. 레반이 그 하얀 고치를 주시하고 있자니, 그녀가 계속 말을 이었다.
"변태에 필요한 양분을 얻기 위해서 습격한 것 같아. 변태 과정에 들어가면 긴 시간 모습을 감출 테니, 남쪽 개척지와 관계가 틀어져도 상관없다는 거겠지."
상위 존재로의 변태가 얼마 남지 않은 남쪽의 어머니는 개척자들과의 관계가 끊어짐을 감수하고서라도 개척자들을 잡아먹으러 왔다.
전면전을 벌이러 온 것이 아니라, 변태에 필요한 양분을 채우는게 목표. 때문에 자신의 기운을 모두 내보이지 않고 촉수만을 보내어 사냥을 하는 중이다.
그리고 놈이 원하는 영양분은, 적당히 강한 기운을 가진 인간이나 수인들이겠지.
엘프 마법사의 말에, 레반이 저 멀리 탈출에 성공한 비공정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쪽 비공정을 바로 포기한 걸 보면 저긴 입맛을 돋우는 강자들이 없었나 보군."
스가각.
말을 끝낸 레반이 돌연 광선을 휘둘렀다. 일직선의 광채가 비공정을 단단히 붙잡고 있는 촉수 두 개를 단번에 베어버린다. 그는 내친김에 대나무 굵기의 점액질에도 검을 휘둘러 보았다.
하지만 역시나였다.
상처 정도는 얼마든 낼 수 있었으나 저것을 베어내기는 무리였다. 레반의 눈에 엘프 마법사도 일찌감치 그것을 잘라낼 마음을 접은듯 보였다. 촉수를 다 베어내더라도 저 점액질을 떼낼 방법이 마땅치 않다.
고도가 서서히 낮아지고 있다.
결국, 이 비공정은 얼마 가지 않아 지상으로 추락할 것이다.
"풋."
"?"
그때, 엘프 마법사가 갑자기 코웃음을 쳤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엘프 마법사의 입에서 놀라운 얘기가 흘러나왔다.
"나는 보내줄 테니까 그냥 가래. 저 웃긴 언데드가."
"······."
저 빌어먹을 고치에 쌓여있는 남쪽의 어머니라는 좀비는, 여기서 가장 강한 엘프 마법사 하나만을 콕 집어 협상을 시도해온 것이다.
레반이 관자놀이를 벅벅 긁으며 물었다.
"그런데, 나는 안 보내준다던가."
"아쉽게도 그런 말은 없던걸."
"촉수를 더 잘랐어야 했군."
"아무튼 변태 전에 양분을 보충하러 온 게 확실한 것 같네? 끼어든 내가 조금 성가신 거고."
레반은 비공정의 갑판을 둘러보았다.
뒷다리로 다급하게 두두두 뛰어다니는 묘인들.
저 엘프 마법사가 빠지면 이들은 반드시 죽는다.
하지만 묘인들에겐 아주 다행히도, 그녀는 단호했다.
"진기를 저장해둔 저 고치라도 깨고 도망칠 생각이야. 지금도 8레벨의 중간급은 되어 보이는데, 고치 속에서 몇 년간 변태와 진화를 거치면 나중에는 진짜 괴물이 되어 돌아올 거야. 영양분을 충분히 흡수한 채로 그 과정에 들면 장벽 밖 남방위의 네임드 정도가 아니라 대륙급 네임드로 성장할 수도 있거든."
— 오오오!
— 그 말이 맞아요! 두 분 최고예요!
"······."
각자 일을 하던 묘인들이 갑자기 오오오! 하며 몰려들었다.
그들은 귀가 아주 밝았다. 안 듣는 척하면서 엘프 마법사의 말을 다 듣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묘인들에게 희망은 엘프 마법사와 레반 뿐이었다. 어디서 튀어 나온지는 몰라도 자신들을 살려줄 구원줄임은 넉넉히 알고 있었다. 특단의 수나 방법을 내기 위해 갑판 위로 모든 묘인들이 몰려들었다.
7레벨의 묘인 둘은, 촉수 자르는 것을 포기하고 다가와 뭐라도 도움이 되겠다며 이런저런 정보들을 늘어놓았다.
— 지금 무얄라바에 고강한 흡혈귀가 있어요. 누군가 지원을 불러올 수 있을까? 거기는 10km밖에 안 돼.
— 알 헤임달 남쪽은 모두 묘왕님의 영역이에요. 여기서 20km밖에 왕의 거처가 자리하고 있는데, 거기까지 구원 신호만 보낼 수 있다면 어떨까.
귀를 쫑긋거리며 저들끼리 떠드는 묘인들.
그런데 묘인들이 그런 말을 늘어놓은 순간.
[······.]
"?"
곧바로 레반이 엘프 마법사와 7레벨의 묘인들을 향해, 대수롭잖은 어조로 전음을 보내왔다. 그 전음에 묘인들이 눈을 반짝였다. 한참 레반의 말을 묵묵히 듣던 엘프 마법사는 팔짱을 끼고는 되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자고?"
[······.]
곧, 레반은 다시금 전음으로 엘프 마법사에게 의도를 전달했다. 혹여 지면에 있는 남쪽의 어머니라는 좀비가 말을 엿들을까 전음으로 소통을 선택한 것이다.
"아~"
잠시 뒤.
철컥.
7레벨의 묘인들은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고, 레반의 전음을 들은 엘프 마법사는 이전과는 다르게 생긴 탄창을 꺼내어 샷건에 결합했다. 청록빛을 내는 탄창이었는데, 기하학적인 문양들이 기운을 줄기차게 흘려냈다.
엘프 마법사는 레반을 향해 한쪽 눈을 깜빡였다.
"위험하긴 한데. 좋아, 그렇게 해보자."
이윽고.
— 우, 우리 끌려내려가요!
묘인들의 비명이 비공정 위를 메아리쳤다.
밑에서 끌어당기는 점액질의 힘에 의해 비공정의 고도가 천천히 낮아지며 지상이 점점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 * *
꾸물대는 지면이 목전으로 다가왔다.
비공정이 지상으로 거의 다 내려왔을 때.
이제는 비공정에 탑승한 모두의 눈에 하얀 고치가 보였다.
레반도, 엘프 마법사도, 비공정 위에 있던 모든 묘인들도 멍하니 그것의 위용을 바라봤다. 하늘에서 본 것보다 더욱 거대한 점액질 고치가 늪처럼 꿀럭이는 지면 중심에 단단히 박혀있었다.
5미터는 될 법한 그 고치에서, 음성이 흘러나왔다.
[ ······포기했구나······엘프, 그 역겨운 짐승과 같이 떠나라······. ]
고치 속의 존재는 기껍게 말문을 열었다.
비공정 위의 이들은 저항을 포기한 듯, 자신의 촉수를 잘라낼 생각도 의지도 없었다. 떨어진 뒤에는 기껏해야 도망치는 것이 전부일 것이니 그중 자신에게 양분이 될만한 세 놈만 잡아 흡수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고치 속의 존재는, 금방 생각을 바꿔 먹어야 했다.
"읏차."
[ ? ]
비공정의 갑판에서 불시에 허공으로 도약한 레반의 검이 오색광채로 환히 물들더니, 뜬금없이 오 척이 넘는 압축 검기를 줄기줄기 발출해냈다. 검기 하나마다, 7레벨이라곤 믿기 힘든 강대한 기운이 담겨 있었다.
목표는, 존재를 둘러싸고 있는 하얀 고치였다.
그것들은 알껍질을 꿰뚫어 버릴 듯한 속도로 쏘아졌다. 동시에 엘프 마법사가 청록빛 괴물을 타고 비공정에서 뛰어내리며 샷건을 네 발 연속으로 격발했다. 끔찍할 정도로 시린 마법이 중첩되고 또 중첩되어 대기를 떨어 울린다.
콰과과광—
이윽고, 청록빛의 그 마력이 사방으로 웅대하게 폭발했다.
[ 감히······! ]
그 존재는 감히 자신의 고치를 노리는 레반의 위검강과 6위계의 광역 마법을 막기 위해, 어마어마한 본신의 요기를 잠시간 끌어 올렸다.
알 헤임달의 근처에서 요기를 강하게 끌어올리는 것은 껄끄러웠으나, 먹잇감들의 진기를 저장해둔 고치가 공격받아 양분을 잃으면 기다렸던 변태가 미뤄질 수도 있기에.
청록빛의 마력 폭발과 오색의 위검강이 고치 위로 계속 쏟아졌다. 레반은 단전은 물론이고, 전심전력을 쥐어 짜내고 있었다.
생각보다 저항이 거센 데다 엘프 마법사까지 자신의 제안을 끝끝내 무시하고 가세하자 그 존재는, 고치를 지키기 위해 더욱 더 요기를 부풀리며 하얀 점액질과 촉수를 마구 쏘아냈다.
개척도시 장벽 바깥, 검은 지면 밑.
일레힌 마탑주의 서재에서처럼, 점액질과 촉수 줄기들이 지면을 부지불식간 뚫고 나오며 허공에 있는 레반의 몸을 노렸다.
그런데.
"도망쳐!"
존재의 요기가 조금 부푸는 듯 싶자, 비공정에서 뛰쳐나와 길길이 날뛰던 레반은 다시 급작스럽게 몸을 돌리고는 중장비로 막아놓은 개척도시의 장벽 안으로 경공을 펼쳐 신속하게 도망치기 시작했다. 비공정의 묘인들 역시 약속이나 한 듯 비공정 밖으로 뛰쳐나와 롬진의 무너진 장벽 쪽으로 내달렸다.
[ 고작······? 시간 끌기······? 한심하구나. ]
그 황당한 광경을 확인한 고치 속의 존재가 웃음을 흘렸다. 그들의 죽기 전 발악은 몇 분도 채 가지 못할 것이다. 단지 뻔하디 뻔한 저런 공격을 위하여 목숨을 걸었다는 말인가.
곧이어 고치 속에서 수십 개의 촉수와 세 개의 점액질이 도망가는 이들을 노리고 총탄처럼 쏘아졌다.
레반과 엘프 마법사, 7레벨의 묘인들이 그것들을 힘겹게 쳐냈으나 장벽까지는 거리가 꽤 있어 몇 분 가지 못할 듯 했다. 그나마 안전한 비공정에서 뛰어내린 이상, 그들은 이미 고치 속 존재의 영역에 들어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레반의 발목에 붉은 촉수가 감겼다.
퐁!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레반이 촉수에 발목이 감긴 그 즉시 작은 병을 품속에서 꺼내더니, 촉수 위에 아주 조심스럽게 떨어뜨렸다.
그러자.
붉은 촉수를 지탱하던 힘이 스르륵 풀리더니,
고치속 존재의 감겨있던 눈이 더 치떠질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랗게 치켜떠졌다.
[ !? ]
콰아아아—
그리곤, 갑작스럽게 고치 속에서 빠져나온 진득한 요기가 세상천지를 뒤덮을 듯 줄기줄기 뻗어져 사방으로 휘몰아쳤다.
레반의 발을 묶고있던 그 붉은 촉수에 어떤 액체를 한 방을 떨어뜨렸을 뿐인데, 절정의 황홀감이라도 느끼는 듯 5미터 크기의 고치는 요기를 내뿜으며 연신 부르르 진동했다.
레반은 한 마디 말을 남기고는 다시 경공을 펼쳤다.
"나도 아직 못 먹어본 건데. 너한테만 주는 거다."
방금의 액체는 그간 레반이 극히 아껴온, 아직 자신도 입조차 대지 못한 9레벨 우르드 에센스 단 한방울이었다.
잘 보이지도 않을 만큼 작은 한 방울이었으나 효과는 실로 충분했다. 끔찍하고 강대한 남쪽 어머니의 요기가 개척 도시 전체를 뒤덮을 것처럼 피어나고 있었다.
변태를 준비중인 8레벨 좀비의 주둥이에 자그마치 9레벨의 에센스를 뿌려 주었으니, 그 뒤에 벌어질 일은 안봐도 빤했다. 쉽게 제정신을 유지할 수 없을 거다.
[ 그, 그거. ]
하얗고 거대한 고치의 일부분이 쩍쩍 갈라지더니, 그 안에서 수십 개의 촉수가 더 튀어나왔다. 요기를 내뿜는 고치는 현재에도 꿈틀대며 변화하고 있었다.
이윽고.
[ 그거 이리 내놔—!!!!!!! ]
촤아악—
남쪽의 어머니가 조종하는 모든 촉수와 하얀 점액질들이 레반의 신형을 무섭게 뒤쫓았다. 쏜살보다 빠른 그것들은 이내 레반의 지척에 당도해 이빨을 마구 들이밀었다.
서걱.
경공을 펼치던 레반이 훌쩍 뒤돌아 검을 내리긋자, 달려들던 촉수 세 개가 연이어 잘려나갔다.
"역시, 좋아 죽는군 아주."
레반은 검기를 뿌리며 경공을 전력으로 펼쳤다.
분에 넘치는 위검강을 하도 써대서 단전은 거의 비어버렸으나 몇 분간 도망칠 힘 정도는 남겨두었다. 이전보다도 빠른 속도로 쏘아지는 촉수를 경공으로 딛고 피해가며 위험할 때마다 엘프 마법사의 도움을 받았다.
남쪽의 어머니는 주변의 그 무엇도 신경쓰지 않고 오직 레반의 신형만을 집요하게 노렸다. 정확히는 레반이 들고있는 우르드 에센스 병을 노렸다. 요기가 점점 더 진득해지는 것이, 모든 요기를 방출해서라도 잡고 싶은 듯했다.
고치가 조금 찢어지고 요력을 상당히 낭비하더라도 9레벨의 에센스만 있으면 메꾸고도 남을 테지. 레반이 들고있는 것은 초월적인 힘을 가졌던 존재가 세상에 남겨두고 간 진액이었다. 변태까지 준비한 마당에 욕심이 나지 않을 리 없다.
쾅-! 콰아앙-!
날파리처럼 촉수를 자르고 방해하는 엘프 마법사와 짐승 부스러기, 강한 묘인들이 조금 거슬렸으나 남쪽의 어머니는 세상 위로 피어오르던 요기를 더더욱 증폭시켜 살덩이와 점액질에 더욱 강한 힘을 주입하는 것으로 대체했다.
[ 귀찮은 것들. ]
수십 개로 불어난 촉수들이 일거에 쏘아졌다. 비공정도 땅으로 끌어내려 처박는 촉수들이 길 자체를 없애버리니, 레반도 겨우 근방을 벗어날 뿐 도리가 없었다.
남쪽의 어머니는 흥분으로 눈이 뒤집힌 상태였다.
긴 세월동안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어떠한 고양감이 몸속에서 용솟음 치고 있었다. 마침 더 상위의 존재로 나아가기 위한 준비를 모두 끝내놓았다. 저 작은 병에 든 진액만 가져올 수 있다면······!
헌데, 그러던 때였다.
정신없이 얼마나 레반의 뒤를 쫓았을까.
고치 속의 존재, 남쪽의 어머니는 문득 공격을 멈추었다.
경공을 펼치는 레반만을 쫓던 촉수와 하얀 점액질들도 제자리에 굳어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느 순간.
[ ······. ]
에센스의 기운에 단단히 홀려 레반만을 좇던 존재가 정신을 차리자, 거대한 고치의 주변으로 무엇인지 모를 파란 알갱이들이 은하단처럼 떠있었다. 어두운 장벽 밖의 하늘을 전부 가릴 정도로, 푸르른 입자들이 새로운 하늘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의아한 기색을 띤 남쪽의 어머니가 고치의 얇은 틈으로 바깥을 내다보았다.
그러자 방금 전의 추락으로 망가져 증기를 내뿜는 비공정 앞, 그곳에서 유일하게 도망치지 않고 있는 묘인이 그 시야에 들어왔다.
상처 가득한 토끼 귀. 두 눈이 없는 맹인.
어디선가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아무런 기척과 쥐톨만한 힘도 느껴지지 않는 무색무취의 그 묘인은, 산보라도 나온 듯 꾸물럭 거리는 지면 위를 사뿐히 걸어 다녔다. 다른 묘인들처럼 자신에게 등을 내보이며 도망치지도 않았다.
어느덧 고치 앞까지 다가온 그 묘인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누가 나의 영역에서 요기를 이토록 부풀리라 했느냐?"
#69화. 화 무슨 검절
#69화.
— 누가 나의 영역에서 요기를 이토록 부풀리라 했느냐?
[ ······. ]
정체불명의 묘인이 신기루처럼 모습을 드러낸 이후, 남쪽의 어머니는 추격을 멈추었다. 묘인의 물음에 대답도 하지 못했다. 조금 전까지 근방을 지배하던 요기는 온데간데없이 사그라들었다.
그리고 분명 수백의 시체들이 이곳에 포진해 있었는데, 장내의 모두가 인식도 하지 못한 사이 전부 무(無)로 돌아갔다. 지면에 처박힌 비공정 앞에는 그 묘인과 남쪽의 어머니, 단 둘 뿐이었다.
레반의 귀로, 엘프 마법사의 음성이 울렸다.
[ 막내, 성공했네. 묘왕께서 행차하셨어. ]
알 헤임달 시티의 수인들은 딱히 강력한 구심점이 없이 인간들과 섞여 살아갔으나, 수인왕이라 불리는 초월의 강자를 배출한 세 수인족은 달랐다.
묘인(卯人),서인(鼠人),계인(鷄人).
토끼와 쥐, 그리고 닭 수인.
그들은 알 헤임달 내에 수인들만의 영역을 단단히 구축하고 여느 대기업에도 밀리지 않는 세력을 성공적으로 형성해냈다. 그리고 그걸 가능케 한 것이 무력으로는 알 헤임달에서 대적할 이가 없다는 수인왕들의 존재였다.
수백만의 수인들을 규합해 군림하는 왕.
두 눈이 있어야 할 자리가 뻥 뚫려있는 저 묘인은, 세 수인왕 중 하나인 묘왕이었다.
오연한 묘왕의 시선이 밑으로 내리깔렸다. 두 눈이 없는 묘왕은 남쪽의 어머니가 들어있는 고치를 정확히 직시하고 있었다.
그 묘왕 주위에 모인 마나가 너무도 농밀해, 푸르른 마나의 결정들이 하늘에 생겨난 것처럼 보였다. 높은 경지의 마법사도 아닐진대, 수인들의 왕이라면 육체의 위력으로 싸우는 무투파에 가까울 텐데도 그러했다.
후우···.
한숨을 돌린 레반이 피섞인 가래를 뱉으며 말했다.
"생각보다도 빨리 오셨군. 얼마나 걸렸지?"
여유를 되찾은 엘프 마법사가 답했다.
"4분."
남쪽의 어머니가 내보이는 요기를 부풀리게 만들어 근방의 강자. 정확히는 다른 개척도시의 흡혈귀나 묘왕에게 신호를 보낸다. 7레벨 묘인들과 상의 끝에 내린 그 결정이 맞아들어갔다.
저 묘왕은 흥분한 남쪽의 어머니가 한껏 부풀린 요기를 느끼고 적어도 20km를 주파해 이곳에 이른 것이다.
단 오 분도 걸리지 않아서.
레반과 함께 도망치던 묘인들은 남쪽의 어머니를 오연히 막아선 묘왕의 뒷모습을 확인하고는, 경외감 가득한 눈빛으로 연신 탄성을 질러댔다.
— 아아아아!
곧, 7레벨의 묘인을 필두로 모든 묘인 개척자들이 꿇어앉아 부복했다. 묘인들은 귀가 땅에 닿을만큼 엎드려 고개를 숙였다. 피가 스며든 더러운 땅임에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이윽고, 묘왕이 하얀 고치에 손을 가져다 댔다.
남쪽의 어머니가 부리던 흉흉한 촉수들은 이미 멈춘지 오래였다. 놈은 자신의 촉수들이 어째서 멈추었는지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기색이었다. 허나 뒤늦게 실수를 깨닫더라도, 이미 늦었을 것이다.
찰나였다.
'연방은 어떻게 150년을 버텼나'라는 이전의 물음에 조금은 대답이 될법한 일이 레반의 눈앞에서 벌어졌다.
— 벌레 주제에. 대답도 안하고.
뿌직!
묘왕이 짧게 주먹을 휘두른 순간, 남쪽의 어머니를 둘러싸고 있던 고치가 꾸덕한 점액을 흩날리며 찌그러진다. 계란 모양의 거대한 고치에 주먹만한 구멍이 뻥 뚫렸다.
멍하니 얼어있던 남쪽의 어머니가 그제야 괴성을 질렀다.
[ 끼아아아악—!!! ]
고치 안에 들어있던 정체불명의 액체들이 터진 수도꼭지처럼 콸콸 흘러나왔다. 남쪽의 어머니가 꾸물거리며 다시금 고치를 기워붙이려 노력했으나 묘왕의 앞에서는 역부족이었다.
뿌지직—
거대한 고치가 전부 부서지는데에 눈 몇번 깜빡할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순식간에 고치를 찢어버린 묘왕이 그 안에서 4미터쯤 되는 좀비의 몸뚱이를 잡아 질질 끄집어냈다.
고치 속에 자리한 좀비의 본체는, 그간 양분을 가득 저장해두어 뚱뚱하게 부풀어 있는 상태였다. 마치 우화해 성충이 되기 전의 곤충 애벌레처럼.
쿵.
절대적일 것만 같던 8레벨 중반의 네임드, 남쪽의 어머니가 도망갈 생각조차 못 한 채 무기력하게 끌려나와 흙바닥에 내팽겨 쳐진다. 레반은 저게 이전의 그 대단한 위력을 가진 괴물이 맞나 싶었다.
[ 자, 잠! ]
묘왕은 즉시 끌어낸 그 애벌레, 남쪽의 어머니를 양손으로 눌러잡더니 무슨 젖은 걸레를 짜듯 비틀어 쥐어짜버렸다.
꾸지지지직.
분명 검기를 극한까지 압축해서 한땀한땀 잘라내야 할 정도로 강성한 육체였는데, 묘왕의 힘 앞에서는 그저 말랑하고 하얀 살덩이즙이 되었다.
그리도 강력한 언데드의 마지막 유언은 '자 잠' 이었다.
그것으로 끝.
심히 정신없고, 비현실적이었다.
압도적인 무력과 위압감이 사위를 짓눌렀다.
끔찍한 힘을 마음껏 뽐내며 묘인들을 잡아먹던 남쪽의 어머니는 그렇게 벌레처럼 쥐어짜이며 죽었다. 그 애벌레의 절반 크기도 되지 않는 묘인에게.
곧.
폭포수처럼 흘러내리는 혈액과 체액들 사이로 하얗고 농밀한 에센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
그것은 눈처럼 걸쭉한 흰색의 에센스였는데, 멀리서 느끼기에도 진한 기운이 농축되어 있었다.
꾸직. 꾸지직.
묘왕은 그 에센스에 별 눈길도 주지 않은 채로 죽은 애벌레를 몇 번 더 비틀어 쥐어짜더니, 애벌레의 껍데기를 쓰레기 던지듯 휙 던져버리고는 레반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묘왕의 손에 잔뜩 묻은 혈액이 뚝뚝 떨어졌다.
레반이 그 광경을 그저 바라보고 서있자.
땅에 엎드려 부복하고 있던 7레벨의 묘인이 조용히 설명했다.
"묘왕 우륵바갈께서는 앞을 보지 못하세요. 그렇더라도 예를 갖추셔야 합니다."
그러니까, 너도 엎드려 예를 갖추란 얘기였다.
적당히 예를 갖춰 고개를 숙인 레반이 슬쩍 물었다.
"사이버웨어 눈알을 이식받으면 되지 않나?"
"앞을 보지 못하신대도, 여전히 수인왕이세요. 다른 감각들로 세상을 누구보다 정확히 읽고 계십니다."
알 헤임달의 남쪽을 지배하는 묘왕은 눈이 없었다.
그러나 육체 오감중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시각을 잃은 대신, 다른 감각들이 월등히 예민하게 진화한 듯 했다. 강한 요기가 퍼졌다곤 해도 무려 20km 밖에서 단숨에 그것을 느끼고 쏜살같이 도착한 점이 묘인의 말을 증명했다.
묘왕은 레반과 엘프 마법사의 발치 앞에 정확히 멈춰섰다.
공포스럽게 뻥 뚫린 두 눈에서는 감정을 읽을 수 없었다. 허나 극한까지 단련한 듯 아름다울 정도로 완벽한 묘왕의 육체가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백색으로 빛나는 털 사이로는 수많은 흉터들이 드러나 있었다.
다가온 묘왕이 대뜸 입을 열었다.
"토퀸타이아의 딸. 슬레모킨."
레반이 그동안 알지 못했던, 엘프 마법사의 이름을 부르며.
엘프 마법사는 싱글 웃으며 답했다.
"헤헤, 저인지 알고 계셨네요?"
"발할라의 마탑에 들어갔다지."
"그건 벌써 오래전의 일인걸요."
"언제나 몸가짐을 바로 해라. 인간들에게 우리는 생김새가 다른 이족일 뿐이다."
엘프 마법사가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레반이 기억을 더듬었다.
···저거 어디서 많이 들었던 대화 방식인데?
떠올려보니 이전의 다르간트와 엘프 마법사의 대화 흐름과 비슷하지 않은가. 토퀸타이아가 누군진 모르겠으나, 다르간트에 이어 수인왕까지 그 존재를 언급하는 걸 보면 엘프 마법사 슬레모킨의 부모는 알 헤임달에서도 상당한 거물인듯 했다.
사실 며칠간 동행하며 그녀의 출신을 대강 추측하고 있었으니, 레반은 별 궁금증이 들지 않았다. 이미 본신만으로 8레벨의 마법사인데 무엇이 더 놀랍겠나. 엘프계의 유명한 장로 딸내미 뭐 그런 거겠지.
레반이 그리 생각하던 때였다.
"인간, 너는 어째서 도망가지 않았나."
인사치레 같은 것도 없었다.
엘프 마법사와의 짧은 대화를 끝내고 고개를 돌린 묘왕은, 뻥 뚫린 눈으로 레반을 지그시 바라보며 물었다.
"······."
고개를 밑으로 숙이고 있는 레반의 눈에, 기둥처럼 세상을 딛고있는 묘왕의 뒷발이 보였다. 큰 상처와 흉터투성이에 굳은살이 알알이 박힌, 수백만 묘인들의 무게를 짊어지고 있는 왕의 고목같은 발이었다.
잠시 대답을 고민하던 레반은, 상념을 지우고 곧장 입을 열어 답했다.
"그저······마음이 동했을 뿐입니다. 묘인도 저와 같은 인(人)이지 않습니까."
거짓말이었다.
* * *
몇 시간 뒤.
나는 롬진을 떠나 알 헤임달 시티로 복귀했다.
시티의 장벽 구멍 안으로 복귀하자마자 새로운 소식을 들었다. 나비넥타이를 한 경비소 직원으로부터였다.
그는 경비소 안의 화면들을 무료하게 주시하며 입을 열었다.
"무얄라바 개척도시가 크게 당했습니다. 남쪽의 어머니가 흉수고요."
롬진 이전에, 남쪽 다른 개척도시인 무얄라바가 먼저 남쪽의 어머니에게 습격당해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는 얘기였다.
그쪽의 개척자들은 대부분 몰살당했고, 무얄라바를 지키던 강력한 흡혈귀 하나도 큰 부상을 입고 도망쳤단다. 묘왕이 먼저 도착한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남쪽의 어머니는 이미 옆 개척도시에서 수십의 '양분' 을 잡아먹고도 부족해 롬진까지 습격한 것이다.
경비소 직원은 넥타이를 매만지며 무덤덤하게 말했다.
"개척 도시 롬진에서도, 기관사가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는 걸 보면 무얄라바의 상황과 비슷하겠군요. 정부 지원을 요청할 정도입니까?"
나는 '롬진에서 오는 기관차와 철로, 개척도시 롬진의 장벽이 무너졌다. 묘인 개척자들이 힘겹게 수습을 하고 있을 것이다' 대충 그렇게만 말해주곤 장벽 구멍의 경비소를 지나쳤다.
한시라도 빨리 숙소를 찾아 쉬고 싶었다.
검을 길들이러 갔다가 그대로 사장당할 뻔했다. 수인왕까지 끌어들여 해결하긴 했다지만, 조금이라도 상황이 틀어졌다면 크게 위험했으리라.
그렇게 장벽 구멍을 통과하자 엘프 마법사, 슬레모킨이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수인왕 앞에서도 거짓말은 당당히 하는구나. 마탑주님도 그렇게 꼬셨어?"
"진심이었다. 그때만큼은."
"풋."
숙소에 도착하기 전까지, 엘프 마법사는 저혼자 내내 흡족해했다. 돌발 상황에 아주 잘 대처했다는 우스갯소리를 하며 이제 정말 일레힌 마탑의 일원으로 인정한다나 하는 말들을 싱글 거리며 해댔다.
나는 대꾸할 기운도 없었다.
우리는 곧, 장벽 근방의 숙소에 도착했다.
"안녕, 내일 보자."
숙소의 앞에서, 엘프 마법사는 한번 윙크를 하고는 쌩하니 떠나버렸다. 하루 사이 재수 없는 일을 시원하게 겪어 휴식이 절실했던 나는, 방에 이르자마자 기절하듯 침대에 몸을 던졌다.
잠시 뒤.
침대에 누워 '내 몫' 으로 받은 에센스 병을 꺼내보았다.
우르드의 에센스를 담은 병 말고도, 하얗고 걸쭉한 에센스를 담은 또 하나의 커다란 병이 나의 손아귀에 잡혀 있다.
8레벨의 좀비, 남쪽의 어머니에게서 뽑아낸 에센스였다. 그 에센스를 담은 병은 우르드의 에센스를 담은 병보다 적어도 몇 배는 컸다.
"······."
묘왕은, 그 위압감만큼이나 손이 컸던 것이다.
* * *
하루의 시간이 금방 지났다.
숙소에서의 휴식은 아쉽게도 얼마 가지 못했다.
오늘로 다르간트가 약속한 사흘이 다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그의 손에 개조되었을 아힘사를 찾으러 갈 시점이었다. 언제까지고 알 헤임달 시티에 머무를 수는 없다.
나는 다르간트와의 약속대로 칼드락 스미스로 향했다. 길거리에서 석탄에 구운 빵과 버터를 사 대강 배를 채웠다.
그런데, 아침부터 부지런히 움직인 내가 찌뿌둥한 몸으로 칼드락 스미스의 부근에 도착했을 때였다.
큰 고함이 들려왔다.
— 헛소리 하지 마라!
"?"
고함은 칼드락 스미스쪽에서 들려왔다.
대장간의 입구 주변으로 칼드락 스미스의 대장장이들이 몰려있었고, 그 앞에서 웬 무인 하나가 열을 내고 있었다. 기백으로 보아 절정의 경지를 밟은 7레벨 무인이다.
그리고 태산같은 기세의 대장간 주인장인 칼드락이 직접 바깥으로 나와, 그 무인의 앞에서 무섭게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한눈에 보아도 무인과 칼드락간에 일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절정의 무인이 칼드락을 향해 말했다.
"칼드락님. 그 금속재료로 매화검을 제작해주기로 약조하셨기에 흔쾌히 내어드린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어찌 이리 약조를 쉽게 어기실 수 있다는 말입니까?"
매화검?
나는 안력을 돋구어 무인의 행색을 살폈다.
말끔한 의복에는 자색빛의 매화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남쪽 장벽 근처에서 지나가는 소리로 화···무슨 검절이 알 헤임달에 와있다는 애기를 듣긴 했던 것 같은데.
칼드락의 쩌렁한 목소리가 상념을 깨고 들어왔다.
"약조? 이것 봐. 우리 대장간에서 크레딧을 주고 충분한 값을 치뤄 가져온 재료인데, 거기에 매화검을 만들어 주기로 했다는 약조가 대체 어디있어? 똑같은 말을 몇 번이나 하게 만드는 거냐!"
"당연히 화산 그룹에서 구해다 드린 귀물이니, 화산에 우선권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헌데 이렇게 급작스레 소식을 전해 들으니 그저 황당할 따름입니다. 그것을 이미 다른 이에게 내주었다니요."
그러자, 칼드락이 못참겠다는 듯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성질을 냈다.
"우선권 같은 소리. 우선권은 화산에서 새로 만든 권법인가? 그게 무슨 개풀뜯는 소리인지. 계속 소란 피우지 말고 썩 물러가라!"
허나, 칼드락의 태산같은 기세에도 무인은 물러서지 않았다. 무인은 되려 더 사납게 따지고 들었다. 저자가 대화의 내용대로 화산의 무인이 맞다면, 그리 이상하게 생각할 일은 아니다.
"아니지요. 이럴줄 알았다면 화산에서 칼드락 스미스의 수중에 그 귀한 물건을 넘겼겠습니까? 같은 무게의 만년한철보다 비쌉니다. 정말 명인께서는 발뺌하실 작정이십니까?"
"······."
아.
조용히 듣자 하니, 내 광선 이야기가 확실하군.
화산 그룹에서 구해 칼드락 스미스로 가져온 귀한 금속을, 다르간트가 임의로 용광로에 집어넣어 내게 검을 만들어 준 듯했다.
물론, 칼드락은 그런 약조따위 절대 없었다며 부정하고 있었다. 아무튼 그는 화산의 무인과 엮이기 귀찮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칼드락님. 뭐라 말씀을 해주시지요."
다만, 화산의 무인은 쉽게 돌아갈 기색이 아니었다.
저걸 계속 기다릴 수도 없고.
어쩔 수 없이 엮이리라 생각한 나는, 곧바로 얼굴의 근육과 뼈를 움직이는 역용술을 사용했다. 절정에 이른 공력이 세밀하게 뻗어져 근육의 위치를 틀어놓았다. 근처 대장간의 창에 얼굴을 비춰보자, 아예 다른 사내의 얼굴이 보였다.
좋군.
나는 곧 칼드락 대장간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마침 도착한 내게, 칼드락의 시선이 꽂혀들었다. 곧장 그 시선을 따라와 나를 확인한 화산의 무인이 칼드락에게 물었다.
"혹시 저자입니까."
"그래, 알아서 해결하고 들어와라!"
칼드락은 저 열정적인 화산의 무인을 더 상대하기가 귀찮은지 알아서 하란 듯한 표정을 하더니, 짧은 다리를 뽈뽈대며 대장간으로 들어가버렸다.
나는 그 짧뚱한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이 대장간은 애프터 서비스가 별로라고.
이윽고.
그 화산의 무인은 내게 다가와 정중히 포권했다. 그리고 포권 뒤에 나온 말은 실로 당당했다.
"그 검, 우리 화산에 넘겨주십시오. 본래 화산의 물건이 서로간의 오해로 인해 흘러간 듯합니다. 다른 명검을 고르신다면 값을 대신 지불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