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 엄청난 제단이 탄생할 것이다.
'짐작하기도 어렵군.'
게임을 할 때도 경험해 본 적 없는 일이라 무척 기대됐다.
더불어 뱀파이어 성녀의 반응도 궁금해졌다. 첫 번째 종복이 잃어버린 신체를 찾아올 거라곤 생각도 못했을 테니까.
이래저래 이 성유물은 포기할 수 없는 물건이었고, 나는 이를 악물고 달렸다. 뒤에서 폭주기관차 같은 성기사가 쫓아오고 있었지만 말이다.
"뱀파이어! 당신을 붙잡아 새벽 태양빛으로 천천히 태워죽이겠습니다!"
세상에! 존댓말로 저런 끔찍한 소리를 하다니. 태양 교단 놈들은 어째서 저리 가학적인지 모르겠다니까. 학을 떼며 도망치던 나는 퍼뜩 한 가지가 떠올랐다.
'잠깐? 저 여자가 어째서 성녀의 손가락을 가지고 있었을까?'
뱀파이어 성녀는 태양 교단의 치부로 취급됐다. 그 때문에 성녀의 흔적은 철저히 말살됐다. 일반적인 태양 교단의 신도라면 성녀의 신체로 만든 성유물을 갖고 있을 리 없다.
'들켰다가는 이단으로 경을 칠 테니.'
비록 겉은 금제 장식으로 가려져 있었다지만 소유자 본인이 몰랐을 리가 없다. 즉, 저 여자 성기사는 알고도 성유물을 차고 다녔다는 거다. 하면 결론은 하나다.
'저 녀석은 분명히 아직 성녀를 추종하는 세력에 속해 있는 거군.'
태양 교단은 겉보기와 다르게 내부 사정은 복잡하다. 그중 쫓겨나 뱀파이어가 돼버린 성녀를 아직 옹호하며, 교회의 부패와 싸우는 자들이 있다.
'비밀결사인 정화(淨火)의 기사단인 게 틀림없어. 놈들을 벌써 만나다니 재밌군.'
이건 놀라운 일이었다. 정화의 태양 기사단과 엮이는 이벤트는 게임 중반에나 시작되니까.
돌발적인 상황이지만, 처신하기에 따라서 유리하게 이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녀석들이랑 연계를 잘하면 뱀파이어 성녀에게 점수 좀 따겠는데?'
그런 결론에 다다를 때 뒤에서 재차 원거리 공격이 날아왔다. 이번만큼은 재빨리 피했다. 한데 애초에 목표는 내가 아니었다.
성기사의 검에서 쏘아진 광채는 내 진로 앞에 있던 아름드리나무를 박살 냈다.
우르르릉! 콰앙!
쓰러진 나무가 길을 막았고, 급히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그 틈에 성기사가 미친 속도로 쇄도해왔다.
전신의 힘을 폭발시키는 와중에도 그 눈빛이 서늘하고 차가운 걸 보니 반드시 날 죽이겠다는 각오가 느껴졌다. 이대로라면 비명횡사할 것 같아 급하게 외쳤다.
"멈춰라! 정화의 기사여!"
그 말에 화살처럼 쏘아져 오던 성기사가 급히 다리에 제동을 걸었다. 사방에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나며 그녀는 내 3미터 앞에서 간신히 멈춰 섰다.
"지금 무슨···?"
전혀 예상하지 못한 소리인지 그녀의 얼굴은 혼란으로 가득했다. 아직 정화의 기사단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부 인원들 간의 결속은 긴밀했다. 그런데 웬 뱀파이어 하나가 그걸 입에 담으니 당황할 수밖에. 하지만 이 정도로 놀라긴 이르다.
나는 결사대원끼리 나누는 비밀스러운 인사를 건넸다.
"빛이 우리를 인도해 타락을 정화하리라."
"!"
이에 성기사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그녀는 어깨를 살짝 떨며 검을 겨눠 왔다.
"대체 어떻게 뱀파이어가 그걸 알고 있는 겁니까? 정체를 밝히십시오!"
가정교육을 잘 받은 듯 이런 상황에서도 존댓말에 열심이로군. 할 수만 있다면 매사 반말로 지껄이는 나랑은 대비되는 성격이네.
"글쎄? 순순히 가르쳐줘야 하는지 모르겠다. 내 목을 치려는 녀석에게 말이야."
"말하는 게 좋을 겁니다. 편안히 죽고 싶다면 말입니다."
"그딴 식으로 나오면 더 말하기 싫어지는군. 그보다 너 정화의 기사단 소속이 확실한가?"
내가 미심쩍다는 듯 묻자 상대는 기가 막힌 얼굴이 됐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뱀파이어가 그런 소리를 하니 어이가 없긴 하겠지. 저 반응을 보니 확실한 것 같았다.
"알려줄 생각은 없습니다. 당신의 정체나 밝히시지요. 이건 경고입니다. 다음에는 제 검으로 묻겠습니다."
"살벌하기 짝이 없군. 그렇다면 나도 한 가지 알려주지. 지금 날 벤다면 너는 성녀에게 다시없을 죄를 짓는 것이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이 몸이 바로 반신이 된 성녀의 첫 번째 사도기 때문이지."
"말도 안 되는···!"
성기사는 납득할 수 없다는 얼굴이 됐지만 어느새 검을 아래로 내렸다. 다행이군. 섬기는 분을 팔아서 위기를 넘겼다.
하지만 기껏 정체를 밝혔는데 목숨을 구한 것 정도로는 만족 못 한다. 이 녀석이랑 관계를 형성할 필요가 있다.
"그분이 당신 같이 불길한 존재를 사도로 삼았을 리가 없습니다!"
발끈하며 부인하는 성기사에게 나는 태연히 물었다.
"성녀가 뱀파이어가 된 걸 모르고 하는 소리인가? 무식하게."
"······."
태양 교단의 성녀는 모함을 받아 쫓겨난 후 뱀파이어가 됐고, 이후 반신격까지 올랐다. 눈앞의 성기사도 그걸 모르지는 않을 터.
"네 눈에 나는 부정한 뱀파이어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성녀께서 지금 쓰실 수 있는 가장 유용한 카드기도 하다. 내 말이 틀렸나?"
"······."
"만약 너희 단체가 성녀의 고결한 희생에도 불구하고, 지금 그녀가 뱀파이어 반신격이란 점 때문에 악하다 여긴다면 날 베도 좋다."
내 지적에 성기사는 할 말이 없는 듯 입을 다물고 눈가를 파르르 떨었다. 나는 그런 그녀를 설득했다.
"현재 처지가 어떻든 간에 이루고자 하는 바가 중요하지 않겠나?"
"···일단은 무슨 소린지 알겠습니다."
성기사의 다소 누그러졌지만 여전히 뾰족한 태도로 물어왔다.
"당신이 그분의 사도라는 걸 어떻게 믿습니까?"
"이걸 보도록."
나는 손바닥을 펴서 뱀파이어 성녀가 내린 낙인을 보여줬다. 이 낙인은 과거 성녀가 개인적으로 쓰던 문장과 거의 같았다.
뱀파이어와 반신격을 상징하는 요소 몇 개가 추가됐을 뿐이다. 상대는 그걸 알아보고는 주춤거렸다.
"정말인 겁니까?"
"그렇다. 이 문장은 성녀가 자기 세력에게만 사용하던 거라 아는 이가 거의 없지."
"···당신이 놀라운 증거를 갖고 있긴 하지만, 완전히 믿을 순 없습니다."
"거, 의심이 참 많군. 하지만 이해 못할 건 없지. 성기사가 뱀파이어를 신뢰한다는 건 농담도 안 되니까."
"대체 제게 왜 이런 이야기를 한 겁니까? 원하는 게 뭡니까?"
"간단하다. 성유물을 넘기고 그만 쫓아오도록."
내 요구에 상대가 발끈했다.
"어림없는 소리 하지 마십시오! 그게 어떤 건 줄 알고! 당신이 뱀파이어답게 교활한 혓바닥으로 절 속이는 건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이건 부탁이 아니라 통보다. 성기사. 만약 계속 쫓겠다면 이 성유물을 파괴하겠다."
사실 이건 허풍이다. 이 정도로 대단한 성유물을 부술 힘이 지금 내겐 없었으니까. 하지만 긴박한 상황이라 그런지 잘 먹혔다.
"감히!"
"분노할 것 없다. 이 성유물은 성녀의 사업을 위해 쓰일 테니까. 그대에게도 나쁜 소리는 아니다."
"계속 황당한 소리만 하는군요."
"그것보다 돌아가지 않아도 괜찮겠나? 오크 놈들의 힘이 생각보다 막강해서 그대로 두면 큰 피해를 볼 것 같은데?"
내 지적에 성기사는 대번에 초조한 얼굴이 됐다. 성유물 때문에 쫓아오긴 했어도 당연히 신경이 쓰일 수밖에. 나는 그런 그녀의 불안을 부채질했다.
"아까 보니까 네 동료의 방패가 쪼개지더군."
"으으···."
저 멀리서 전투의 함성과 비명이 계속 울리고 있었다. 결국 성기사는 결정을 내렸다.
"뱀파이어. 당신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오늘은 물러가지만 반드시 성유물을 돌려받겠습니다."
"내 이름?"
그 말에 되묻을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여태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게임처럼 이름을 입력하는 창이 뜨는 것도 아니고.
잠깐 고민하던 나는 마침 적당한 게 떠올라 알려줬다.
"소렌 다켄발트다."
이게 앞으로 내 이름이 됐다.
"네 이름은 뭐지? 성기사."
저 성기사와 연결점을 만드는 것도 중요했다. 그녀가 속한 정화의 기사단은 나중에 태양 교단과 치고받을 때 큰 도움이 될 테니 말이다.
"···세레스티나 발레나 고트리브입니다."
상대는 내키지 않는다는 듯 답해왔다. 이름이 길기도 하다. 저런 어려운 이름은 듣고 몇 분만 지나도 까먹기 십상이지만, 다행히 그럴 일은 없어 보였다.
'고트리브 가문이었나!'
잘 아는 가문이다. 명망 높은 공작가로 태양 교단과도 밀접한 관계를 가진 놈들이다. 공녀였구만. 어쩐지 옆에 남자 성기사가 열심히 눈치를 보더라니.
'그러고 보니 뱀파이어 성녀가 고트리브 가문의 방계인 고트시크 가문 출신이었지. 이래저래 보통 인연이 아니군.'
나는 이후에 기회가 되면 다시 만나자고 했다. 당연히 상대는 분개했다.
"누가 뱀파이어 따위와!"
그 말에 나는 성유물을 살살 흔들어 보였다.
"되찾겠다는 거 뻥이었나? 내가 이걸 들고 흔적도 없이 사라지면 어쩌려고? 찾아가겠다고 해도 불쾌해하니 어찌할지 모르겠군."
"으윽···. 기고만장해 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성녀님과 관계가 없었다면 오늘 이 자리에서 죽었습니다."
결국 발레나 공녀는 자신과 접촉할 방법을 알려줬다.
'좋아, 연락처는 확보했고.'
앞으로 발레나 공녀와 어떤 관계가 될지는 모르겠다. 저 노기 어린 눈빛을 보니 쉽게 풀릴 거 같진 않지만, 어쨌든 원하는 바는 이뤘네.
"그럼, 또 보자고."
"잠깐! 당신의 행선지도 밝히십시오!"
행선지를 밝히라니 어림없는 소리하고 있네. 저 여자가 성기사치고는 상당히 특이한 존재인 건 확실하지만, 그래도 뱀파이어 입장에서 언제 정신이 헤까닥 해서 칼부림 할지 모르는 위험 종자다.
"너무 걱정 말라고. 나중에 연락할 테니."
나는 씩 웃으며 숲의 어둠 속으로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그녀는 발끈하려 했지만, 아군이 다급한 상황이라 어쩔 수 없이 몸을 돌렸다.
* * *
오늘밤 큰 성공을 거뒀다. 이놈의 목이 날아갈 뻔했지만, 용케 성유물까지 챙겨서 본거지로 돌아온 것이다.
'지쳤다. 뒤질 것 같군.'
사냥꾼에 오두막에 숨어 있던 꼬맹이 에레미나가 날 맞아줬다.
"주인님, 오셨습니까? 귀환이 늦어져서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어린놈이 아부가 제법이군. 에레미나는 어느새 날 주인님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나는 오두막 아래의 지하 토굴에 몸을 누이면서 명령했다.
"깨어나면 바로 이곳을 떠나겠다. 오크와 태양 교단 놈들 때문에 무척 위험해졌어."
"어디로 갑니까?"
"미혹의 산. 그곳에 새로운 본거지를 마련한다."
"주인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꼬맹이 놈이 공손하게 답하며 물러갔다. 나는 그대로 잠들었는데 깨어나니까 다시 밤이 돼 있었다.
지체할 것 없이 바로 길을 나섰다. 어제 벌어졌던 전투의 결과가 궁금하긴 했지만 확인해볼 틈은 없었다.
'발레나 공녀가 뒤지면 곤란하긴 한데···.'
겨우 태양 교단에 만든 인맥이 끊기면 아까운 일이다. 하지만 걱정한다고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니 알아서 잘하겠지 하고 넘겼다.
"에레미나. 이걸 매도록."
"이게 뭡니까? 주인님."
"성유물이다. 귀중한 것이니 각별히 관리해야 한다."
미혹의 산까지 뱀파이어인 내가 성유물을 운반하긴 무리다. 그래서 인간인 꼬맹이에게 맡겼다. 한데 그건 생각지도 못한 결과로 이어졌다.
"주인님, 힘이 넘칩니다."
"어? 그러냐?"
이동 중에 이 말라비틀어진 꼬맹이가 퍼지면 어쩌나 싶었는데, 성유물 때문인지 혈색이 아주 좋았다. 딱 봐도 연기를 하는 게 아니다. 성유물을 갖고 있을수록 건강 수치가 오르는 느낌이랄까?
'잘 됐군. 제단을 설치할 때까지 이 녀석을 튼튼하게 만들 수 있겠어.'
역시 성유물이라 그런가 인간에겐 참 좋구만. 나한테는 쥐약과도 같은데 말이지.
아무튼 이런 덕분에 미혹의 산까지의 여정은 순탄했다. 다행히 이동 중에 오크도, 태양 교단도, 블라르 백작의 끄나풀도 없었다.
사흘이 지나자 우리는 미혹에 산에 도착했다. 거기서 다시 이틀을 나아가자 내가 찾고자 했던 골짜기 지역에 닿았다.
"여기로군."
나는 비밀스럽게 감춰진 골짜기 지형을 보며 매우 만족했다. 이곳은 외부에서 좀처럼 눈에 띄지 않는 장소다. 공중에서 봐야 안쪽의 평지가 보이는 숨겨진 장소라고 할까?
몰래 힘을 키우긴 최고였다. 심지어 안에는 무너진 유적도 있어서 건물을 지을 벽돌을 조달하기도 용이하다.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알아주는 꿀지형으로, 안전한 운영을 위해 최고로 여겨지는 장소다.
'여기에 제단을 만들고 신전을 세워야지. 누가 괴롭히러 오지도 않을 테고 최고야. 종국적으로 골짜기를 넘어 미혹의 산 전체를 점령하는 게 목표다.'
미혹의 산은 자원이 풍부하고 방어가 유리해서 잠재력이 큰 장소다. 그렇기에 산지 전체를 먹으면 훗날 태양 교단과 싸울 힘을 기르기 충분했다.
일단 골짜기 안으로 진입해 이곳저곳을 흥미롭게 살펴봤다. 그러던 중 갑자기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이놈들! 어디서 온 침입자들이냐! 여기는 내 땅이야! 고얀 것들!"
소리가 난 쪽을 보니 흰수염이 성성한 중늙은이가 있었다. 나와 에레미나를 보며 눈가를 부르르 떨고 있는데 꽤 화가 난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당황하지 않았다. 여기 오면 저 늙은이를 만날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네크로맨서인 '아단 다켄발트'다. 왕년에는 전설적인 악당이었는데 지금은 그냥 치매 걸린 노인네에 불과했다.
그 점을 잘 이용하면 저자와 친밀한 사이가 될 수 있었다. 나는 네크로맨서를 향해 웃어 보였다.
"삼촌, 접니다. 이 조카 얼굴도 까먹은 겁니까?"
"···읭? 그게 무슨 소리더냐?"
"저라고요. 소렌 다켄발트."
사실 성기사에게 댔던 이름은 저 네크로맨서의 죽은 조카의 이름이었다.
"소렌이라고?"
"네, 삼촌. 오늘부터 같이 살겠다고 했잖아요? 기억 안 나세요?"
그 말에 늙은 네크로맨서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눈동자는 초점이 맞지 않는다. 마치 눈앞이 아니라 과거를 보는 것 같았다. 그러다 그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환하게 웃었다.
"아! 그런 거냐! 이거 참으로 기쁘구나! 어서 들어 오거라! 크흐흐흣!"
"네, 삼촌."
사실 저 노인을 처죽이고 이 땅을 빼앗는 방법도 있지만 별로 내키진 않았다. 그보단 오늘내일 하는 영감탱이 말벗도 해주고 온건하게 물려받는 게 낫지.
게다가 그 방법이 더 괜찮은 건 아단에게 흑마법까지 배울 수 있다는 점이다.
'드디어 마법 능력을 얻겠군.'
전설적인 네크로맨서 아단은 속성으로 흑마법을 배우기에는 최고의 선생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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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적인 네크로맨서(2)
세레스티나 발레나 코트리브.
그녀는 발레나 아가씨라 불리는 세속성기사로, 현재 어두컴컴한 밀실에서 정체불명의 인물과 만나고 있었다.
발레나의 앞쪽에는 베일이 쳐져 있어 상대의 모습이 정확히 보이지 않았다. 다만 안쪽에서 흘러나오는 굵직한 목소리로 나이 든 남자라는 걸 짐작케 했다. 그가 발레나에게 물었다.
"전투 결과가 어찌 됐나?"
"오크 여럿을 베고 격퇴에 성공했습니다. 다만 우리 쪽도 피해가 큽니다. 종복 모두와 수도승 두 분이 귀천했습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명예로운 곤 경이···."
"···애통한 일이로군."
"교구장이 죽지 않은 게 원통할 뿐입니다."
성기사 발레나는 교구장이 교회의 포교를 위해 오크를 이용한 걸 짐작하고 있었다. 그 외에도 여러 건이 있었는데, 애초에 그녀가 이쪽 교구로 온 것은 교구장의 비리를 수집하기 위해서였다.
"선한 이는 죽어 가는데 악인의 목숨은 질기구나···."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런데 몹시 특이한 일이 있었습니다."
"먼저 급히 알려온 성유물의 탈취에 관한 건인가?"
"네."
발레나가 뱀파이어와 겪었던 일을 소상하게 고하자 남자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럴 수가! 만약 그대가 한 얘기가 아니었다면 내 믿지 않았을 것이다."
"뱀파이어가 거짓을 지껄인 건지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겪은 일 자체는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놀랍군··· 정말 놀라워."
남자는 생각을 정리하는 듯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 그 뱀파이어가 반신격이 된 성녀의 사도가 맞을 것 같다고 했다.
"정화의 기사단에 대해 아는 걸 넘어 성녀의 징표까지 새기고 있다니, 필시 우연이 아니다. 그 두 가지를 알고 있는 인물이 몇이나 되겠나? 어찌됐건 성녀와 관계있는 게 틀림없다."
"마침내 그분께서 움직이는 걸까요?"
그들은 성녀가 반신격에 오른 것까지는 알고 있었다. 이후 어떻게든 행동할 거라 여겼는데 꽤 오래 동안 감감무소식이었다.
마치 배신당한 뒤 억울한 누명을 썼던 건 모두 잊겠다는 듯 말이다. 그런데 마침내 사도를 칭하는 자가 나타난 것이다. 이는 필시 뱀파이어 성녀가 어떻게든 세상사에 다시 관여하겠다는 뜻으로 보였다.
"아마 그렇겠지. 어떻게 나올지 모르겠군."
"만약 성녀님의 뜻이 교회의 말씀과 다르면 어떻게 합니까?"
"자매여, 고민할 필요도 없는 문제다. 우리는 태양의 신 대신 성녀를 섬기려는 게 아니니."
"어리석은 질문이었군요. 용서하십시오."
"괜찮다. 우리의 입장은 명확하다. 성녀께서 억울하게 그런 꼴을 당했으니 이후 교단의 부패를 척결하는데 힘을 합칠 수 있을 거라 기대할 뿐이야. 그분이 인간이던 시절에 가장 관심을 갖고 힘쓰던 분야기도 하고."
남자는 잠시 뒤에 선을 긋듯 말했다.
"만약 성녀께서 뱀파이어가 된 데 피치 못할 사정이 있는 게 아니라, 정말로 원한과 증오로 타락한 것이라면 더 이상 함께할 순 없겠지. 아무리 그분이 인간이던 시절에 우리가 큰 은혜를 입었다고 한들···."
"제 생각엔 그럴 것 같진 않습니다. 짧은 삶을 살아왔지만, 그와 같이 고결한 분은 보지 못했습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렇기에 성녀께서 그런 꼴이 됐음에도 마음 한편에 믿음을 갖고 있는 거다. 아마 그분과 교류했던 모두가 그리 느낄 터. 하지만 명확히 확인해야 한다. 자매여, 이제부터 그 뱀파이어를 전담하도록 부탁하지."
"알겠습니다."
"뱀파이어와 다시 접촉하게 되면 다짜고짜 척살하지 말고 전후사정을 상세히 파악해 보도록. 다른 단원에게도 일단은 그 뱀파이어를 만나면 해치지 말라고 해두겠다. 소렌 다켄발트라 했지."
"성물은 어떻게 할까요?"
"일단 그자에게 맡겨두도록."
"네, 그렇게 하지요. 다만···."
발레나는 여러 가지 감정이 섞인 목소리로 남자에게 물었다.
"믿을 만한 뱀파이어란 게 존재할까요? 그들은 악의 화신이지 않습니까?"
"···솔직히 모르겠다. 일반적인 뱀파이어라면 천지가 개벽해도 신뢰를 주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성녀의 사도라니 그 부분은 아직 속단할 수 없겠지."
"그렇군요."
"사도는 신을 대리한다. 그자를 관찰하다 보면 결국 성녀의 뜻도 파악할 수 있게 될 터."
남자는 대신 그 뱀파이어가 악을 저지르고 세상을 어지럽게 하면 주저 없이 척살하라 덧붙였다.
"만약 그렇게 되면 성유물도 회수하도록."
"네, 한데 빛의 자식을 자처하는 우리가 부패와 싸우고자 어둠의 존재와 손을 잡는 게 과연 옳은 길일까요?"
그 말에 남자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독은 독으로 다스린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이미 교회의 상태는 심각해. 통상적인 수단으로는 해결할 방법이 없으니 할 수 있는 건 모든 걸 하겠다."
"······."
"우리 정화의 기사단은 신념을 위해 싸운다. 이후 심판은 태양의 신께 맡길 뿐이야. 만약 이 모든 게 잘못이라면 훗날 신께서 우리를 지옥불에 던지시겠지.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해."
"그게 무엇입니까?"
발레나의 물음에 남자는 다시없는 확신을 갖고 답했다.
"추기경과 그 썩은 무리들이 우리보다 먼저 지옥불에 들어갈 것이란 점이다!"
* * *
다행히 나랑 꼬맹이는 네크로맨서에게 이곳에 거주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그가 날 조카로 착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불편한 점이 없진 않았다.
"네놈 누구냐! 대체! 감히 내 땅에!"
"삼촌, 접니다. 소렌 다켄발트."
"윙? 너였냐?"
"또 까먹으신 겁니까?"
"아···! 그러니까 네놈은 누구냐고!"
"······."
하루에도 이런 상황이 몇 번씩 반복됐다. 귀찮았지만, 네크로맨서와 만날 때마다 하는 인사 비슷한 거라고 생각하니 편했다.
"오늘부터 마법을 가르쳐 주신다고 해서 찾아왔습니다. 삼촌."
"아항? 그런 말을 했던 것도 같고? 아무튼 따라와 보거라. 끌끌끌."
밤이 오면 네크로맨서에게 흑마법을 배웠다. 내게 재능이 있는 건지, 아니면 뱀파이어라 그런 건지 모든 걸 빠르게 습득했다. 그러자 네크로 영감탱이는 무척 만족했다. 그는 즐거워하는 말투로 끄덕였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꾸나. 이제부터 실험을 해야 하니 나가 보거라."
인자한 말투만 보면 왕년에 대악당이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죽인 사람을 셀 수도 없어서 왕국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고 하는 인물이었는데 말이지.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마도 이 영감 앞에선 유치원생 정도에 불과했다. 기록에 의하면 자기 마법을 발전시키려 생체실험한 사람만 천을 헤아린다고 하니까.
하지만 결국 그 마법의 부작용으로 치매에 걸려 저런 꼴이 됐으니 인과응보라 하겠다.
"으응? 내가 무슨 실험을 하려고 했더라?"
"······."
그냥 바로 네크로맨서의 연구실에서 빠져나왔다. 그러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꼬맹이가 나타나 인사를 꾸벅 해왔다.
"주인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오냐."
"낮 시간을 이용해 주인님께서 명령하신 관을 찾아놨습니다. 반쯤 썩은 목관이라 죄송합니다. 튼튼한 석관을 찾으려면 다소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잘했다. 여기 온 지 사흘 밖에 안 됐다. 차근차근 해나가자고. 그것보다 밥은?"
나도 그렇고 네크로 영감도 그렇고 일반적인 식사는 안 해서 이 꼬맹이가 걱정됐다. 그런데 녀석은 씩씩하게 답했다.
"이 일대에 사냥감이 많습니다. 사냥꾼이 오질 못하니 그런 것 같습니다. 낮에 토끼를 몇 마리 잡아 처리해 뒀습니다."
거짓말은 아닌 듯 얼굴색이 좋고 기운도 넘쳐 보인다. 나는 흡족하게 끄덕였다.
"그래, 항상 잘 챙겨 먹어야 한다. 내가 좋은 주인은 아니겠지만 너 밥 먹는 건 지장 없게 하마."
"크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주인님."
"그나저나 토끼는 어떻게 잡았어? 활 같은 것도 없는데."
"올무를 썼습니다. 마침 관을 찾다가 발견했습니다. 아마 땅 밑으로 관을 내릴 때 썼던 줄 같습니다."
똘똘하구만. 사냥꾼의 딸이라 그런지 서바이벌에는 탁월한 감각이 있나 보네.
녀석이 안내한 곳으로 가자 과연 나무관 하나가 있었다. 반쯤 썩은 거긴 하지만 당장은 이거라도 감지덕지였다.
뱀파이어란 놈들은 대체 어떻게 된 건지 관에서 잠을 자지 않으면 피로가 회복되질 않았다. 썩은 관이라도 비단 침대보다 훨씬 나은 것이다.
"으쌰!"
작은 기합과 함께 관을 번쩍 들었다. 썩었어도 꽤나 무거운 관이었지만 뱀파이어의 힘으론 문제없었다. 옆에서 꼬맹이가 아부를 해왔다.
"주인님, 대단하십니다. 거인도 그 힘에 놀랄 겁니다."
귀엽게 생긴 녀석이 무표정하게 손뼉을 치는 꼴이 묘했다. 웃기는 녀석이네, 진짜.
원래 성격인지 모르겠는데 무슨 말을 하던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스타일 같았다.
"칭찬을 하려면 눈웃음을 치면서 해라."
"별로 즐거워서 칭찬하는 게 아닙니다만?"
"그러면 더 잘 먹힐 거라 그렇다. 기왕 귀찮게 칭찬을 했는데 효과가 탁월해야지 않겠냐?"
"호오··· 과연 주인님다운 훌륭하신 말씀입니다."
꼬맹이는 기억해 두겠다는 듯 작은 머리를 끄덕였다. 나는 목관을 거처로 쓰고 있는 지하실로 가져와서 한쪽 구석에 놨다.
"후후, 이제부터 좀 더 안락하겠군."
냄새나는 관에 몸을 누이자 뭐라 설명하기 힘든, 뱀파이어의 본능에 따른 편안함이 밀려왔다.
'아, 잠들고 싶다···. 다 귀찮아. 천년만년 관속에서 지내고 싶어. 인생은 역시 날먹이 최곤데.'
혼자 그런 생각을 하며 관뚜껑으로 손을 가져가는데 난데없이 커다란 폭발음이 들려왔다.
콰아아아앙―!
어찌나 큰지 귀청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동시에 일대가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리더니 지하실의 천장 일부가 무너져 내렸다.
바로 내 머리 위로 굵직한 석재가 떨어지기에 황급히 피했다.
콰직!
떨어진 석재가 관을 완전히 박살냈다. 보자마자 눈물이 나왔다.
"안 돼! 내 보금자리가!"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나는 꼬맹이에게 몸을 숨기라고 하고는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세상에!"
보니까 밤하늘 아래서 네크로 영감탱이의 연구실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얼른 가보니 영감이 검댕이를 뒤집어쓰고 꺼이꺼이 우는 중이었다.
"아이고, 아이고. 내 연구실이!"
"이게 무슨 일입니까?"
"아이고··· 아이고? 음? 뭐였더라? 내가 왜 울고 있지?"
"삼촌!"
빼액 소리를 지르자 그제야 기억난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맞다. 어떻게 된 일이냐면···."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실험실에서 중요한 재료를 가열하다가 까맣게 잊어버렸다는 것. 느긋하게 책을 읽고 있다가 결국 그 마법물질이 대폭발을 일으켰다고 한다.
"······아."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수습을 해야겠구나. 좀 도와주겠느냐?"
"아, 네."
마법도 배우고 있으니 당연히 그 정도는 해줘야지. 나는 네크로 영감이 마법으로 물을 뿜어내는 동안, 그의 해골들과 함께 아직 멀쩡한 짐을 날랐다.
몇 시간 뒤에야 사태가 수습됐는데 연구실은 지하실까지 새까맣게 그을린 상태.
'아주 개판이구만.'
아무래도 여긴 재건하지 말고 버리는 게 최선이 듯했다. 그렇게 혀를 차고 주변을 걷는데 갑자기 지하실 바닥이 와르르 무너졌다.
"으악!"
당연히 위에 서있던 나는 아래로 쑥 꺼지듯 빠졌다.
"큭···."
몇 미터 정도 떨어진 것 같은데, 아무래도 화재로 지하실 바닥이 약해져 있었던 모양이다.
"여긴 대체···?"
지하실 밑에 또 지하실이 있었나? 의아해서 주변을 둘러보니 뭔가 이상했다. 이곳은 연구실과는 벽돌조차 달라서 아예 별개로 보였다.
게다가 습한 느낌에 곰팡내가 퀴퀴하게 풍기는 게 마치 오래간 밀폐돼 있던 장소 같았다. 공기가 제대로 순환하지 못해 부패한 느낌이랄까?
'생전 처음 보는데 뭐지?'
분명 게임을 할 때는 이런 장소가 없었는데 뭐하는 곳이지? 유적 밑에 있는 더 오래된 유적인가?
그때 네크로 영감이 부유마법을 써서 아래로 유유히 내려와서는 물었다.
"조카야, 엎어져서 뭐하느냐? 농땡이 중이냐?"
"그게 아니라···. 그것보다 여기가 뭐하는 곳 같습니까?"
내 말에 네크로 영감은 주변을 둘러보다 벽면에 새겨진 문양을 가리키며 답했다.
"윙? 이거는 천년도 더 된 왕국의 문장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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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적인 네크로맨서(3)
"고대 유적입니까?"
내 물음에 네크로 영감은 황홀감에 젖은 표정으로 유적의 벽면을 매만지며 답했다.
"그렇다. 놀라운 일이군! 줄곧 이 위에서 엉덩이를 깔고 있었으면서 모르다니! 치매에 걸린 늙은이도 이러지 않을 게다. 역시 늙으면 죽으란 말이 옳은가 보구나. 조카야!"
"아···. 그것보다 어쩌실 생각입니까?"
"네 생각은 어떻냐?"
"안쪽을 탐험하고 싶습니다. 어떤 걸 발견할지 기대되는군요."
"그렇다면 같이 가자꾸나. 널 도와주마."
즉석해서 고대 유적의 탐험이 결정됐다. 나는 위쪽을 보며 꼬맹이에게 내려오지 말고 기다리라 한 뒤 내부로 향했다.
네크로 영감은 왕년의 거물이라 그런지 위험해 보이는 고대 유적을 산보하듯 거닐고 있었다. 그는 들뜬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조카야. 너와 함께 이런 모험을 하게 되다니 기쁘구나. 이 못난 삼촌이 항상 마법서만 들여다보느라 좀처럼 이런 기회가 없었지."
그의 목소리는 수많은 사람을 인신공양한 악당 같지 않았다. 그저 인자한 삼촌이었다. 나는 뭐라 설명하기 힘든 감정을 느끼며 답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크흐흐,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말거라. 가족은 서로를 돕는 법이지. 다 늙어빠진 삼촌이 쓸만하다는 사실에 기쁠 뿐이다."
유적 안은 생각 이상으로 복잡했다. 네크로 영감은 지팡이로 돌바닥을 두들기거나 마법을 부려 길을 안내했다.
"이쪽으로 가자꾸나. 강력한 마법의 향기가 느껴진다. 필시 좋은 것이 있겠지."
새로운 일에 집중하는 중이라서 그럴까? 그는 치매 증상을 보이지 않았고, 목소리에는 현기마저 느껴졌다.
길을 찾아가며 네크로 영감이 물어왔다.
"조카야.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이냐? 이전처럼 모험을 찾아 사방을 떠돌며 싸움질이나 계속할 거냐?"
그런데 친근해진 건 좋은데 어르신 특유의 잔소리가 슬슬 시동을 걸고 있었다.
"아, 네."
대강 답하자 네크로 영감은 불만스러운 얼굴이 됐다.
"이놈아, 너도 나이를 먹는다. 젊을 때 노력해야 좋은 각시를 얻지! 늙다리가 되면 아무리 능력 있어도 색시들이 얼씬도 안 하는 법이다."
말하는 게 명절날 뺀질뺀질한 조카 붙잡고 놓고 폭딜하는 꼰대 삼촌 같다.
"그게··· 전 뱀파이어라 늙지를 않습니다."
"이런 못난 놈! 어디서 싸돌아다니다 픽 죽어서 뱀파이어가 된 거냐? 인제 보니 낮 시간에 어디 기어들어 가서 안 나오던 게 그것 때문이었구나! 이 허여멀건 한 얼굴이랑 송곳니 좀 보게."
"아니, 뭐··· 언데드니까 삼촌께서 여러 가지로 도와주실 수 있고 좋지 않습니까?"
생각해 보니 이 양반이랑 나랑 상성이 괜찮다. 네크로맨서랑 언데드니 말이다. 더군다나 꼬맹이도 커서 암살자가 되는 걸 생각해 보니 이거 완전 빌런 파티네?
"이놈. 늙은 나보고 조카 뒤치다꺼리나 하라는 게냐! 암, 소원이라면 그리 해줘야지. 네놈이 색시를 구해올 때까지 옆에서 계속 잔소리 해주마. 늙은이가 쉰내 풍기며 구박하면 얼마나 괴로운지 알려주지."
"······."
순간적으로 난 사실 당신 조카가 아니라고 자백하고 싶었다. 한 번 무너진 둑처럼 터진 영감탱이의 잔소리는 끝날 줄을 몰랐다. 그렇기에 마침 뭔가 특별해 보이는 문이 나타나자 반색할 수밖에 없었다.
"아! 저기 보시죠!"
"윙? 무언가 범상치 않구나."
우리 둘은 저 문을 열고 들어가면 무언가와 맞닥뜨리게 될 거란 걸 직감했다. 그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미지수였으나 이런 곳 안에 아무것도 없으리라 생각하긴 어려웠으니까.
"들어갈 테냐?"
네크로 영감이 무언가 시험하듯 물어왔다.
"자신이 없어서 돌아가겠다고 하면 그도 좋다. 주제 파악이란 좋은 일이지. 어쩔 게냐?"
"도와주신다면 안쪽을 확인하고 싶습니다."
"좋다. 끌끌끌! 이래야 내 조카지. 뱀파이어가 되고도 겁쟁이였다면 사실 네놈 머리통을 한 번 떼서 뇌를 헤집은 뒤에 다시 달아주려 했거든."
"······."
어디까지가 농담인지 구별이 안 가네. 말하는 거 보니까 돌아가겠다고 하면 실망했을 거 같다.
"좋아. 열겠다."
아단이 마법을 부리자 육중한 석재 문이 저절로 열렸다. 안으로 진입하자 그곳은 별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안쪽은 커다란 원형의 방이었다. 바닥은 지금껏 지나왔던 거칠고 울퉁불퉁한 표면 대신, 티 하나 없이 매끄럽고 반짝이는 검은 대리석이었다.
방의 주위로는 이제는 잊혀진 고대의 영웅 조각상이 줄줄이 배치돼 있었다.
천장에는 자체적으로 발광하는 마법의 돌이 별처럼 박혀 있어 신비로운 분위기에서 일대를 밝힌다. 특히 매끄러운 대리석 바닥이 그 빛을 환상적으로 반사하고 있었다.
하지만 가장 눈길을 사로잡는 건 단연 이 방의 주인공이었다. 방 끝 부분에 왕의 권좌를 연상시키는 커다란 석재 의자가 있었는데, 그 위 황금색으로 빛나는 골렘이 앉아 있었다.
그 형상이 지금은 쓰지 않은 투구와 갑옷을 착용한 고대의 전사를 떠올리게 했다. 골렘을 중심으로 막강한 마력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우우웅.
마력의 진동이 마치 육중한 엔진에 시동이 걸리는 것만 같다. 골렘의 눈이 파랗게 빛나며 이쪽을 쳐다본다. 나는 곧장 결론에 도달했다.
"와···, 저건 쉽지 않겠군요. 이 유적의 수호자입니다. 조금만 더 가까이 가면 자리에서 일어날 겁니다."
골렘에서 발산되는 힘 때문에 살갗이 다 따끔거릴 정도였다. 그런데 네크로 늙은이는 물러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내 비록 전성기의 힘을 잃었다고 하나 너와 힘을 합치면 충분히 가능할 것 같구나. 위험하긴 하겠지만 도전해 볼 테냐?"
이 대마두가 적극적으로 도와준다면 또 얘기가 다르긴 하지. 이 정도의 인물의 조력을 받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저 정도 수호자가 지키고 있는 거면 대단할 물건일 거다. 처음 보는 골렘이란 게 문제였지만, 욕심을 내보기로 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좋다. 한 번 해보자. 크흐흐."
우리 둘이 전투를 결심하고 앞으로 나서자 수호자인 골렘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시에 뒤에 있던 문도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쿠웅!
이제 골렘을 쓰러뜨리지 않으면 못 빠져나가게 된 것이다. 골렘은 의자에 기대놨던 거대한 메이스를 들고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골렘의 키는 3미터 정도. 양손으로 쓰는 메이스는 거의 사람만 했다.
"한 방이라도 맞으면 골로 갈 것 같습니다."
"너는 걱정할 것 없다. 그냥 싸울 셈은 아니니."
그 말과 함께 네크로 영감은 빠르게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그러자 주변의 공기가 삽시간에 바뀐다. 놀랍게도 신비롭기만 했던 이 공간이 오래된 무덤에 오기라도 한 듯 칙칙하고 음산해졌다.
이에 무언가를 느낀 듯 골렘이 손에 든 거대한 메이스를 곧장 이쪽으로 투척해 왔다. 무슨 기둥이 날아오는 것 같았는데, 네크로 영감은 왼손에 든 지팡이를 내밀어 충격파를 일으키며 쳐냈다.
카앙!
튕겨 나간 메이스는 근처에 장식돼 있던 전사상을 요란하게 부수며 처박혔다. 네크로 영감은 그 틈에 정확히 주문을 완성했다.
그우우웅.
그와 함께 주변에 불길한 녹색 안개들이 밀려들었다. 희한하게도 그 수호자인 골렘이 가진 황금빛을 삽시간에 칙칙하게 만들었다. 이에 네크로 영감은 만족해했다.
"부정의 안개란 주문이다. 놈을 상당히 약화시켰다. 속도도 느려졌으니 한 번 겨뤄볼만 할 게다."
"대단하군요. 그런데 제 검으로 놈을 벨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내가 든 건 평범한 철검. 잘 만든 물건이긴 하지만 이런 건 사람이나 오크를 찌르라고 만든 거지, 저런 3미터짜리 쇳덩어리 골렘을 해체하는 용도가 아니다.
저런 걸 베거나 찌르면 얼마 안 가서 망가지고 말 터. 그러자 네크로 영감이 턱짓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저기 좋은 게 있지 않느냐. 멍청한 것아!"
영감탱이가 가리킨 건 골렘이 던졌던 2미터짜리 양손 메이스.
"아니, 저건 사람이 쓸 물건이 아닌데···."
"이빨 뾰족한 놈이 무슨 소리를 하는 게야? 헛! 피해라!"
그때 골렘이 거대한 석재 의자의 팔걸이를 잡아 뜯거니 던져왔다. 사람 몸뚱이보다 큰 돌이 날아와서 식겁하며 옆으로 뛰었다.
콰아앙!
방금까지 내가 있던 곳을 때린 석재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박살났다. 한 방만 맞았으면 허리 위로 어떻게 됐을지 상상이 안 간다.
더 이상 여유 부리고 있을 틈이 없었기에 서둘러 양손 메이스를 향해 뛰었다. 그 사이 네크로 영감이 공격 마법을 퍼붓고 있었다.
시커먼 마탄을 기관총처럼 쏴댔는데, 그 위력이 막강해 골렘이 양손을 교차해 막으면서도 뒤로 밀려나고 있었다.
'저대로라면 그냥 혼자 이기는 거 아닌가?'
부정의 안개로 방어력이 약해진 듯, 마탄 때문에 골렘의 장갑은 여기저기 찢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한창 마탄을 쏘아내던 네크로 영감이 힘이 다 한 듯 허리를 굽히더니 토악질을 해대는 것이다.
"그와아아악! 우웩!"
상당히 무리를 한 모양이다. 네크로 영감은 예전이라면 저런 골렘이야 혼자 갈아버렸겠지만, 지금은 마법 몇 개 쓰고 버거워하는 퇴물에 불과했다.
다시 기운을 차릴 때까지 어떻게든 내가 상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메이스를 들어올렸다.
"크흡!"
뱀파이어의 막강한 힘을 갖고도 메이스가 더럽게 무거웠다. 그걸 어깨에 걸치고는 서둘러 골렘에게 달려갔다. 막 네크로 영감의 두개골을 깨부수러 가던 놈에게 있는 힘껏 메이스를 휘둘렀다.
카앙!
메이스가 제대로 들어갔다. 높이 때문에 놈의 머리는 못 때리고 어깨를 강타했는데, 놈의 왼팔이 마치 어깨가 빠진 것처럼 축 늘어졌던 것.
하지만 내 쪽으로 몸을 돌린 골렘이 오른손을 휘두르자 들고 있던 메이스가 날아갔다.
카앙!
다시 한쪽 벽으로 날아가 처박힌 메이스.
"아! 빌어먹을!"
어쩔 수 없었다. 덩치 큰 골렘용 메이스라 그런지 봉 부분이 너무 굵어서 내 손으로는 제대로 아귀힘을 발휘해 잡을 수가 없었다.
이제 어쩌나 싶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게 보였다. 골렘의 흉부 장갑이 일부 찢어져 내부의 핵이 드러났던 것. 네크로 영감이 토할 때까지 마탄을 쏴댄 게 헛일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핵에서 막강한 마력이 용솟음치며 거대한 골렘의 전신에 에너지를 보내고 있었다. 당연히 저것만 파괴할 수 있다면 골렘은 그대로 정지하게 된다.
'한 방만 찌를 수 있다면!'
문제는 그게 쉽지 않다는 거다. 심지어 축 늘어졌던 왼손도 자가 회복을 한 듯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 거대한 양손을 돌파해 가슴팍을 노리긴 불가능에 가까웠다.
'어설프게 돌격했다가는 저 손에 붙들려 구겨질 텐데.'
뭔가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던 나는 한 가지가 떠올랐다. 결코 쉽지 않겠지만 도전해 볼 만했다.
'좋아.'
살짝 호흡을 가다듬은 뒤 골렘을 향해 돌진했다. 그러자 골렘의 양손이 날 붙들기 위해 뻗어져 왔다. 나는 그 순간을 노리고 박쥐로 변신했다.
퍼엉!
연기가 솟구치며 내 몸은 작은 박쥐가 됐고, 골렘의 거대한 팔을 스쳐 지나가며 날았다. 뻗은 팔을 정말 아슬아슬하게 피해서, 옆에서 보면 팔을 타고 올라가는 것 같겠지.
그렇게 안쪽으로 파고들고는 공중에서 변신을 풀었다.
퍼엉!
연기와 함께 인간형으로 돌아온 나는 왼손으로 골렘의 찢어진 흉부 장갑을 붙잡아 매달렸다. 그리고 오른손에 든 검을 있는 힘껏 찔러 넣었다.
카아아앙!
검 끝에 걸리는 감각을 보니 제대로 찔렀다. 아니나 다를까, 골렘은 곧장 무릎이 땅에 닿듯 무너져 내렸다.
그러나 나는 승리의 환호성을 지르지도 못한 채 서둘러 검을 놓고 물러났다.
골렘이 마치 가열한 쇳덩이처럼 벌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걸 본 순간 폭발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아, 뒤질 것 같은데?'
방문이 닫힌 탓에 어디로 피할 곳도 없다. 설마 마지막 기믹이 폭발일 줄이야. 애초에 그런 건 줄 알았으면 도전도 안 했지.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골렘을 보며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혹시 죽으면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으려나?'
여기가 현실이란 걸 비춰보면 별로 희망적인 관측은 아니란 생각에 절로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골렘의 신체가 폭증하는 내부의 에너지를 감당 못 하고 전신에 균열을 일으키는 그 순간, 골골대던 네크로 영감탱이가 끼어들었다.
"걱정하지 마라. 이대로 죽게 두지 않을 테니."
그 말과 함께 네크로 영감이 방어 마법을 일으켰고, 대폭발이 일어났다.
콰아아아앙!
눈앞에 모든 게 하얗게 변하며 내가 사방으로 굴러다니는 게 느껴졌다. 얼굴을 태우는 열기에 감히 눈을 뜰 생각도 못 했다. 얼마 뒤에야 바닥에 엎어졌는데,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으으···."
내 입에서 갈라진 음성이 흘러나왔다. 아마 잠깐 기절했던 거 같다. 억지로 몸을 일으켜 보니 사방이 시커먼 연기로 자욱하고 여기저기 불이 붙어 있었다.
그 열기의 속에서, 네크로 영감탱이가 박살 난 골렘을 배경 삼아 오연히 서 있었다. 나는 반가움을 느꼈다.
아직 살아 있는 걸 보니 그의 방어 마법이 날 구한 것이다. 당장 피해가 심각하긴 했지만, 뱀파이어는 어지간해선 안 죽는다. 나는 네크로 영감에게 걸어가다가 뭔가 위화감을 느끼고는 멈춰 섰다.
"음?"
그는 자기 몸을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었다.
"놀랍군. 엄청난 마법 충격으로 이런 일이 발생할 수도 있는 건가? 아니면, 고대의 힘이 가진 신비로움이라고 해야 하나?"
아까랑 뭔가 어투가 달랐다. 골골 거리는 치매 늙은이가 아닌, 패기 넘치는 강자의 음성이랄까?
어째서인지 본능이 찌르르 경고를 해온다. 네크로 영감을 보고 있자니 쌩쌩하던 황금빛 골렘보다 훨씬 위험해 보였다.
분위기 자체가 달라졌다고 할까?
'뭐지?'
상황을 파악하려 애쓰던 그때 네크로 영감이 날 향해 고개를 돌리더니 웃어 보였다. 그 웃음은 이전의 실없는 것과는 달리 위험으로 가득했다.
네크로 영감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물어왔다.
"몸은 괜찮은가? 조카?"
어쩐지 '조카'란 말에 비꼼이 가득 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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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개조(1)
나는 떨리는 입가를 어색하게나마 위로 올렸다.
"어째 평소보다 부르는 게 다정하시군요. 삼촌."
내 대답에 네크로 영감···.
아니, 아단 다켄발트는 재밌다는 듯 웃어댔다.
"하하하핫! 그렇다면 다행이군."
여유로운 아단과 다르게 나는 초긴장 상태. 저 네크로맨서가 쌓은 악명과 힘은 가히 전설적이다. 제대로 부딪치면 내가 이길 확률은 제로에 가깝다.
아단은 날 보더니 물어왔다.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나?"
"하하, 삼촌도 참. 우리 관계는 이제 시작입니다. 같이 유적도 탐사했는데 앞으로 더 멋진 비지니스 파트너가 될 거 같지 않습니까?"
"오, 그런가? 그렇다면 내 실수했군. 사랑하는 조카와 마지막을 얘기하다니. 크크큭, 하지만···."
뜸을 들인 아단은 눈빛을 잔인하게 빛냈다. 그는 내 몸을 이리저리 훑어보고 있었다.
"본인이 기억을 찾았으니 이 관계는 앞으로 달라질 거야. 그걸 감안해줬으면 좋겠군."
그는 되찾은 힘에 취한 건지 한껏 여유를 부리고 있었다. 이게 내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란 생각이 들었다. 온몸을 긴장시키고 있던 나는 쏜살같이 앞으로 튀어 나갔다.
내 평생 이렇게 빠르게 쏘아진 적이 있나 싶을 정도의 속도였다. 그대로 손을 뻗어 저자의 목줄기를 잡아 뜯어버릴 작정이었다.
하지만 아단이 슬쩍 날 보는 것만으로도 혼신의 힘을 다한 이 공격은 실패했다.
콰앙!
무언가 육중하게 날 강타했고, 그대로 뒤로 튕겨져 나갔다. 벽에 부딪히고 나서야 멈췄는데, 어찌나 충격이 큰지 시야가 흐릿해질 정도였다.
"크으······. 아으윽!"
"조카야, 이 삼촌을 제끼기에는 아직 백 년은 이르구나. 잠시 거기서 쉬고 있거라. 챙겨야 할 게 있으니."
어느새 마법을 걸었는지 꼼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그 사이 아단 다켄발트는 거대한 석재 의자로 다가가 지팡이를 내밀었다.
지팡이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자 단단하던 석재 의자가 마치 모래성처럼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오! 과연 있군."
무너진 의자 속에는 튼튼해 보이는 상자 하나가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생각지도 못한 보물이 나왔다.
바로 전설적인 5대 아티펙트 중에 하나인 '달의 펜던트'였다. 나는 그 화려한 펜던트를 보고는 감탄해서 절로 입을 벌렸다.
'틀림없다. 진짜 달의 펜던트야.'
달의 펜던트는 착용자의 마법 능력을 대폭 상승시켜주고, 상대방의 마법을 먹어치우는 아주 사기적인 특성을 지녔다.
괜히 이 세계에서 가장 강력하다는 '5대 아티펙트'에 들어가는 게 아니다.
'저게 여기 있을 줄이야!'
<신전 짓는 뱀파이어>에 대해선 누구보다 빠삭한 나지만, 모든 걸 아는 건 아니다. 아직 밝혀지지 않은 비밀 역시 많기 때문이다.
그중 대표적인 게 5대 아티펙트로, 3개만 알려졌고 나머지 2개는 오리무중이었다.
나 역시 열심히 찾으려고 노력했다. 정말 공개된 아티펙트의 이미지를 수도 없이 들여다봤었지. 그러니 달의 팬던트가 가진 특유의 형태를 모를 리가 없다.
'저건 기계식 시계의 문페이즈를 닮아서 인상 깊었지.'
기계식 시계에는 달의 위상 변화를 나타내는 문페이즈란 기능이 있다. 저 달의 팬던트도 그것과 똑같았다.
원판 위에 달의 모양이 회전하며, 오늘 어떤 달이 떴는지 알려주는 형태였다. 실제로 뜬 달에 따라 힘이 달라지니까 실용적인 기능이었다.
저 독특한 생김새는 독보적인지라 헷갈릴 수가 없었다. 다만 그건 플레이어의 입장이고, 아단 다켄발트는 달의 펜던트에 대해 무지했다.
다만 마법사의 감각 때문에 그게 범상치 않다는 걸 알아챈 모양이다.
"오호? 신비로운 기운이 느껴지는군. 이런 아티펙트를 구하다니 운이 좋구만. 고맙다. 조카야. 마지막에 박쥐로 변신해 골렘의 내핵을 찌른 건 아주 인상적이었어."
아단 다켄발트는 달의 팬던트를 챙긴 채 내 쪽으로 걸어왔다. 그런데 그가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늙은 얼굴이 점점 젊어져갔다.
주름이 없어지고, 머리칼과 수염이 검게 변했다. 또 피부의 기미도 사라지고, 굽었던 체형이 반듯하게 펴진다.
그렇게 변화를 일으키던 아단 다켄발트는 내 앞에 섰을 때 완숙한 중년인이 돼 있었다.
"어떻게···?"
의문을 담아 묻자 그는 씩 웃었다.
"기억이 돌아와 잃었던 힘의 일부를 되찾았다. 전성기 때 같지는 않지만 이 늙은 육신을 반쯤 되돌릴 정도는 되지."
"세상에, 하늘도 무심하시지. 이 대마두가 힘을 되찾다니."
"이제는 그 너절한 연기를 할 생각도 없는 건가? 나는 꽤 마음에 들었어. 조카가 생겨서 말이야."
"진짜 조카가 아니어서 미안하군."
"아니, 오히려 그래서 괜찮아. 내 진짜 조카는 아주 멍청한 놈이었거든."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아단 다켄발트의 조카에 관한 정보는 거의 없다. 다만 그가 죽었다고만 들었다. 그래서 한 번 물어본 건데 아단 다켄발트가 킥킥 웃었다.
"하도 쓸모가 없어서 실험재료로 써버렸지. 크크큭. 그래서 새 조카가 생겨서 좋았다고. 이번 놈은 플라스크 안에서 핏물이 되어 끓어오를 일은 없어 보였으니까."
나는 잠시 인상을 찌푸린 채 내 몸이 조각나 각종 실험 기구 안에서 가열되는 모습을 상상했다.
"자, 이제 네놈을 어떻게 할까? 아니, 대답할 것 없어. 분명 또 실없는 농담이나 하겠지. 잠깐 잠들어 있으라고."
아단 다켄발트가 지팡이 끝을 내 이마에 갖다 댔고, 그걸로 의식이 끊겼다.
* * *
깨어났을 때는 지상으로 올라온 걸 알 수 있었다. 박살 난 아단의 연구실과 같은 양식의 건물 안이었기 때문이다. 오래된 유적을 개조한 아단의 또 다른 거처인 것 같았다.
"깨어났나? 조카."
소리가 들린 쪽을 보니 아단 놈이 자리에 앉아서 포도주를 홀짝이고 있었다. 옆에선 웬 해골 병사 하나가 집사 흉내를 내는지 공손한 자세로 와인병을 든 상태다.
"으윽! 윽!"
움직이려 했지만 꼼짝도 안 한다. 어찌된 일인가 보니, 형벌용 나무 십자가에 밧줄로 묶여 있었다. 언젠가 교회에서 봤던 예수상을 떠올리게 하는 꼴이다.
"하아······."
한숨이 절로 나왔다. 운이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가. 나는 한탄하듯 물었다.
"갑자기 기억을 찾을 줄이야."
그러자 아단 놈도 어깨를 으쓱했다.
"본인도 정말 몰랐네. 고대의 신비로운 마법과 내 사령술이 뒤섞여 강렬한 에너지가 발생했는데, 그 충격에 치매가 나을 줄이야. 이게 어떤 원리인지 연구해볼 가치가 충분하다고 여겨지는군."
"동의할 수밖에 없겠는걸? 훌륭하신 마법사들 중 많은 수가 치매에 시달리잖아? 좋은 연구 주제도 생겼으니 나 같은 애송이는 그만 풀어주는 게 어떨까? 근사한 아티펙트도 얻었잖아. 나는 무보수로 봉사한 걸로 할 테니까."
"흐흐흐, 이거 볼수록 재밌는 친구로군. 요즘 젊은이들은 자네처럼 다 능글맞나?"
"설마. 나만 좀 유난스러운 편이지. 그것보다 꼬맹이는?"
내 물음에 아단은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한 번 갸웃했다. 그러다 곧 아, 하고 소리를 냈다.
"그 녀석 말이군. 도망갔다. 지하에서 피떡이 된 자네를 질질 끌고 나오는 걸 보자마자 달음박질치더군."
"설마 죽였나?"
"아니다. 애초에 꼬맹이에 대해 신경 쓰지도 않았지. 멀쩡한 정신이 되고 다시 바라보는 밤하늘이 어찌나 아름답던지. 나답지 않게 감수성에 빠져서 말이야. 아마 어디론 가로 갔겠지."
달아났다라···. 차라리 잘 됐군. 머뭇거리다 괜히 나랑 같이 험한 꼴 보는 것보단 낫지.
'그보다 아단 놈. 성유물의 존재에 대해 전혀 몰랐군.'
성녀의 손가락으로 만든 성유물은 현재 꼬맹이가 가지고 있다. 아단이 그걸 알아챘다면 필시 빼앗으려 했겠지.
'꼬마 녀석, 주인이 좆된 거 보고 성유물이라도 챙겨서 튄 건가? 그렇다면 꽤 현명한 판단이라 할 수 밖에···.'
역시 보통 꼬맹이가 아니군. 나는 녀석이 달아난 것에 대해 별다른 원망은 들지 않았다. 솔직히 나라도 그랬을 거 같으니까. 혼자 그런 생각을 하는데 아단이 갑자기 자기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내 기억을 잃기 전까지 한 게 무엇인지 아는가?"
"뭔데?"
"바로 최고의 언데드를 만들기 위한 연구였지. 궁극적인 언데드 말이다."
"그래서?"
"음, 자네 추임새를 꽤 잘 넣어주는군?"
"대화하는 동안에는 안 뒤질 거 같아서. 자, 나는 들을 준비가 됐어. 어서 얘기를 계속해 보라고 네크로맨서 양반. 되도록 긴 이야기가 좋겠군. 적어도 내일 태양이 뜰 때까진 살아있고 싶거든."
"크흐흐흐. 뱀파이어가 태양을 보고 싶다니, 정말 웃기는 놈이군. 좋아. 말해주지."
고개를 끄덕이는 아단의 눈에는 어느새 광기가 가득했다.
"나는 천이 넘는 자를 생체 실험의 재료로 삼았다. 오로지 단 하나의 목표를 위해서 말이야."
"뭔데?"
"강해지고 나 자신의 격을 올리기 위해서다. 그렇게 함으로써 궁극적으로 반신격의 위에 오르려고 했던 거다. 이 나약한 인간의 육신을 벗어던지고 싶었지."
"신이 되려고 했다고? 보통 그쪽 업계에선 리치 같은 걸로 변하지 않나?"
"확실히 그런 뼈다귀가 되길 택했다면 그 고생을 안 했겠지. 하지만 나는 진정으로 신좌에 앉길 원했다. 우주의 질서에 관여하는 신들의 위대한 사명에 비하면, 리치는 세상 한구석에 박혀서 마법이나 탐구하는 골방지기 삼류 악당에 불과해. 이 몸은 겨우 그 정도로 끝나고 싶지 않았지."
그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가 신이 되려고 한 것과 최고의 언데드를 만든 건 무슨 관계야? 잘 이해가 안 되는데."
"안 그래도 말해주려고 했다. 촉새처럼 그만 조잘거리고 귀를 기울여 보라고. 젊은 친구야."
"······그래."
"이 아단 다켄발트. 마법의 세계에서 거인 같은 발자취를 남겼지만, 신이 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천 명의 인간을 생체 실험해 새로운 돌파구를 찾고자 했지만 실패했지."
"···그 반동으로 치매에 까지 걸리고?"
"맞다. 나는 깊이 좌절했다. 이윽고, 자력으로 신좌에 오를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하지만 포기할 줄 모르는 내 운명이 다른 길을 속삭이더군. 이미 초월의 영역에 도달한 신들의 도움을 받으라고."
따지고 보면 이미 신에 오른 자들이니, 지망생에겐 일타 강사긴 하겠네.
"나는 그중 불멸의 여왕 카라즈라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문제는 그를 위해 빼어난 선물이 요구된다는 점이다. 카라즈라조차 처음 보는 독보적인 언데드가 말이야."
결국 지 능력이 부족해서, 윗선에 청탁을 넣기 위한 뇌물을 제작했다는 소리잖아···. 어이가 없네.
확실히 대신격인 카라즈라라면 반신격의 비법을 알려주는 건 일도 아닐 터.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불멸의 여왕 카라즈라는 온갖 언데드의 주인이다. 어지간한 거로는 그녀의 환심을 사긴 무리야. 물질계에서 날고 긴다는 언데드도 카라즈라의 궁전에선 그냥 평범한 주민에 불과하단 소문도 있어."
"놀랍군. 정말 아는 게 많구나. 조카야. 하지만 나는 자신이 있었지. 카라즈라조차 감탄할 궁극적인 언데드를 만들어내는 게. 자, 이걸 보아라. 남에게 보여주는 것은 처음이니 기뻐해도 좋다."
아단은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는데, 그것은 사과보다 약간 큰 오브였다. 그 오브의 안에는 푸른색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딱 봐도 평범한 불꽃이 아니었다.
"그건···?"
"이 몸이 수많은 생체 실험 끝에 만들어낸 신비한 힘이지. 나는 이것에 대해 '영혼의 불꽃'이라 명했다."
"영혼의 불꽃? 그게 뭐지?"
"간단하다 이 불에 닿는 영혼은 타들어 간다. 육체가 아니라 상대의 영혼을 태우는 막강한 힘이지. 가히 내가 만든 것 중 최고라 칭하기에 부끄러움이 없다."
"흉악하군. 대체 그런 건 내게 왜 보여주는 거야?"
어쩐지 불길한 예감을 감추며 묻자 아단이 악마처럼 웃었다.
"이걸 네 몸에 이식해, 궁극의 언데드로 만들려는 것이다. 그 후에 불멸의 여왕에게 공양해주마. 이 사랑스러운 조카야. 크흐흐흐."
"정신 나갔군! 그게 될 거 같아?"
"걱정할 것 없다. 잠들어 있는 동안 검사해 봤는데, 예상대로 네놈은 다시없는 자질을 갖고 있더군. 분명 너라면 저 불가사의한 불길을 몸에 품을 수 있을 거다."
"만약 실패하면 어떻게 되는데?"
그 말에 아단은 뭘 그런 당연한 걸 묻느냐는 표정을 답했다.
"어떻게 되긴. 영혼이 송두리째 타서 소멸하는 거다. 뭐, 그쪽도 나쁘지 않은 결말이겠지."
태연하게 말하는 태도를 보니 진짜 할 수만 있다면 이 새끼 수염을 다 뽑아버리고 싶었다. 그런데 이어진 아단의 말에 귀가 쫑긋해졌다.
"궁극의 언데드를 만드는 작업은 10단계에 걸쳐 이뤄질 거다. 한 달이 좀 넘게 걸리겠지. 크크크. 얼마 남지 않은 삶을 즐기라고. 물론 고통이 대부분이겠지."
그 말과 함께 아단은 떠났다.
내가 홀로 남아 절망에서 발버둥 치길 바라는 모양이었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한 달이라고? 그러면 다시 낙인을 써서 성녀에게 도움을 청할 수 있잖아?'
실컷 신체강화만 하고 도망가면, 저 영감탱이 남 좋은 일만 하는 거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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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개조(2)
다음날부터 곧장 신체개조에 들어갔다.
아단은 냄새가 지독한 약물을 잔뜩 가져오더니 내 앞의 책상에 늘어놓았다. 그리고 기쁜 기색으로 떠들어댔다.
"나는 늘 약점이 없는 궁극의 뱀파이어가 무엇일지 고민해 왔다. 가장 중요한 것 햇빛이지만, 그건 어려운 과제였기에 상대적으로 쉬운 것에 집중했다."
"그게 뭐지?"
"바로 은과 마늘이다."
은은 뱀파이어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주는 물건이다. 실제로 뱀파이어 헌터들은 은제 무기를 선호한다. 아니, 선호하다 못해 은제 무기랑 결혼하라고 하면 할 정도의 은 성애자들이다.
'미친 은박이 새끼들.'
마늘 역시 뱀파이어에게 심한 구토와 어지러움을 일으킨다. 장시간 노출되면 약한 뱀파이어는 죽을 수도 있다.
실제로 유명한 얘기가 하나 있다. 뱀파이어의 연회에서 어떤 하인이 요리를 하다가 실수로 마늘을 좀 넣었는데, 회장이 토악질의 향연으로 변했다나?
아주 고아한 척은 다하던 뱀파이어 놈들이 서로의 토를 흠뻑 뒤집어 쓴 꼴은 이후로도 오래간 놀림거리였다. 피나 마시지 왜 인간 흉내를 내서 음식을 먹다 그 꼴이 됐냐는 거다.
"이 약품들로 네가 은과 마늘에 저항력을 갖게 해주마. 그런 능력을 가진 뱀파이어는 드물기 때문에 불멸의 여왕께서 흥미를 보이시겠지."
"그 정도로 충분하지 않을 텐데?"
"알고 있다. 어디까지나 이건 앞으로 이어질 열 가지의 시술 중 첫 단계에 불과하니까. 기대해도 좋아. 상상 이상의 것을 보여주겠다."
시술에 앞서 먼저 내 몸에 파이프관 같은 걸 꽂기 시작했다. 끝부분이 뾰족한 파이프관을 내 목덜미와 허벅지 같이 동맥이 지나가는 부위에 쑤셔 넣었다.
"크윽! 이런 미친. 아아악!"
"허허, 벌써부터 엄살은. 아직 시작도 안 했다."
"이게 다 뭐야?"
관은 어떤 커다란 통과 연결돼 있었다. 설명을 들어보니 그 안에 직접 개발한 언데드용 수복재를 채워 넣었다고.
"앞으로의 개조를 감당하려면 계속 그 몸이 재생해야 할 거다. 그래서 수복재를 연결해 죽지 않게 한 거지."
"···그것 참 고맙군."
"자, 처음에는 마늘 용액을 네 몸에 투입하겠다. 이것은 고통스럽지만 보람이 있을 거야. 마늘에 대한 면역을 갖게 될 테니까."
그 말과 함께 아단이 박아놓은 파이프관 중 하나를 이용해 내 몸에 마늘 용액을 밀어 넣었다.
"으윽!"
마늘이 주입되자, 즉각적인 반응이 일어났다. 마치 혈관이 타는 듯한 느낌과 함께 불로 달군 바늘이 피부를 콕콕 찌르는 것 같은 격통에 사로잡힌 것이다. 동시에 메스꺼움이 밀려오며 헛구역질이 일어났다.
"우웩!"
방금 전까지 뱀파이어의 토악질 연회를 비웃었던 걸 후회할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 뱀파이어 놈들이 왜 체면도 잊고 입으로 먹은 걸 뿜어냈는지 실감했기 때문이다.
이건 그럴 수밖에 없었다. 설령 앞에 백 년을 짝사랑한 뱀파이어 미소녀가 있더라도 토하지 않고 못 배길 위력이었다.
"우욱! 씹···!"
식은땀을 흘리면서 왜 게임에서 뱀파이어들이 마늘만 만나면 빌빌거리며 힘을 못 쓰는지 이제야 이해가 됐다.
'이건 실질적인 디버프잖아.'
인간이 향신료로 쓰는 평범한 식물 뿌리가 밤의 귀족이라 불리는 뱀파이어에게 이런 피해를 주다니, 참 얄궂은 일이었다.
"으웨엑···!"
계속 헛구역질을 반복하던 게 한참 뒤에야 진정됐는데, 여전히 안 좋았다. 머리가 깨질 듯 아프고 가슴이 언친 듯 둔탁했다.
"빌어 처먹을··· 진짜 좆같군."
끙끙 앓고 한탄하자 아단이 낄낄거렸다.
"역시 그 자질이 놀랍구나. 방금 들어간 용액이 얼마나 진한 건지 모를 거다. 평범한 뱀파이어라면 몇 분도 못 견디고 죽었을 건데, 넌 그냥 몸이 불편하다고 욕하는 게 전부니까."
"널 뱀파이어로 만들고 이 용액을 똑같이 넣어주고 싶군."
"흥미롭긴 하지만 사양하지. 그것보다 궁금하지 않느냐? 조카야. 어찌 네놈이 내 오랜 숙원을 이뤄줄 정도의 자질을 가진 뱀파이어인지 알아봤다는 게?"
"···확실히."
무슨 근거로 내가 궁극의 언데드가 될 다시 없는 자질을 가졌다고 판단한 건지 의문이긴 하네.
"간단하다. 네놈이 신에게 '선택받은 자'란 걸 알아챈 탓이지."
그리 말하며 아단은 들고 있던 지팡이로 내 왼쪽 손바닥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뱀파이어 성녀가 내린 신성한 낙인이 새겨져 있었다. 불로 지진 것 같은 문양이었다. 아단은 거기서 눈을 떼지 못했다.
"흥미로워. 아주 흥미로워. 보자마자 신이 내린 낙인이란 걸 알아챘다. 다만 이게 무슨 신의 상징인지는 파악할 수 없더군. 이후에 많은 책을 뒤졌지만 어디에도 찾지 못했다."
그렇겠지. 개업한 지 얼마 안 됐거든.
"솔직히 무슨 잡신인가 싶었다. 하지만 분명 신은 신이지."
"그래서?"
"신에게 선택받은 자는 다른 이들이 따라갈 수 없는 드높은 자질을 타고나지. 왜냐하면 그들은 신성의 대리인이자 이 세계의 운명을 결정할 위치까지 가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니 틀린 얘기는 아니었다. '선택을 받은 자'라는 건, 내 감각으로 설명해 보자면 게임의 플레이어다. 본디 플레이어란 게임의 주인공이 아닌가. 이 세계의 주민에겐 저리 보이는 게 맞겠지.
"그런데 말이다···."
한참 말하던 아단은 말끝을 흐리더니 갑자기 정색했다. 그의 눈빛은 광망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그것이 무척이나 부럽더군. 질투가 나고, 원망스럽고, 한스러웠다. 신에 선택을 받았다는 그 불합리함이!"
"······."
"나는 세간에서 천재라 불리는 자질을 타고나 부단히 노력해 왔다. 피로와 고통이 내 삶을 늘 지배하고 있었지만,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
"학문을 파고들수록 주변에서 점점 고립돼가고 종국에는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인간이 됐지만, 멈추지 않았다. 혈육의 정을 깎아내고, 극단적인 선택도 서슴지 않았다. 그렇기에 이름을 떨친 네크로맨서가 되었다. 하지만 네놈들···! 크윽!"
아단은 나를 찢어 죽일 듯 쳐다보고 있었다.
"소위 신의 선택을 받았다는 부류들은 그런 모든 노력을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잘난 듯, 세상의 주인공처럼 태어나서 내 노력을 박살 내고 비웃는 그 불합리함!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그제야 나는 아단의 과거를 일부 엿볼 수 있었다. 그가 파멸하는데 분명 선택을 받은 자가 관여한 게 틀림없겠군. 그러니 저리 미워할 수밖에.
"나는 선택받은 자가 타고나는 그 자질을 누구보다 증오하지만, 그게 얼마나 대단한지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네놈을 본 순간 환호했지. 마침내 내게도 기회가 왔음을!"
"······."
"네놈을 발판으로 삼아 반드시 신의 위치에 오르겠다. 그리고 선택받은 자와 받지 못한 자로 나뉘는 이 세상의 불합리함을 극복하겠다! 그것이야말로 차별과 이치에 맞지 않은 세상에 대한 내 분노이자, 외침이며, 결론이다."
나는 왜 네크로맨서 아단이 반신격의 위에 집착하는지 이해하게 됐다. 천재로 태어났지만 선택받은 자를 향한 열등감을 참을 수 없었던 거다.
"웃기게도 내 조카를 참칭했던 네놈!"
아단은 근처에서 도끼를 하나 가져왔다. 그가 주문을 걸자 도끼날이 시퍼렇게 빛을 뿌리기 시작했다. 그는 도끼를 어깨 위로 들어 올려 내 왼팔을 겨냥했다.
"너와 그 신의 연결을 끊어주마! 그렇지 않으면 무슨 수작을 부릴지 모르니까. 동시에 네놈에게 상실을 주겠다! 그게 소위 선택받았다는 쓰레기들에게 가장 큰 고통일 터이니!"
그 말과 함께 아단은 도끼를 내리쳤다. 내 왼팔은 나무 십자가에 묶여 있어 마치 도마 위의 물고기처럼 단번에 토막 나고 말았다.
퍼억!
둔탁한 소리와 함께 왼팔이 끊어지며 뇌가 통째로 전기로 튀겨지는 듯한 통증이 덮쳐왔다.
"아아아아악!"
도저히 비명을 안 지를 수가 없었다. 피가 사방에 튀었다. 얼굴에 그걸 뒤집어쓴 아단은 광기 어린 웃음을 터뜨렸다.
"크하하하! 하하핫!"
그는 십자가의 줄을 풀어 내 왼팔을 들고 즐거워했다.
"가졌던 걸 잃는 기분이 어떤가! 크흐흐흐!"
"으윽···. 이러면 내가 말했던 재료로서의 자질에··· 문제가 생기는 거 아닌가···?"
"괜찮다. 그 자질은 네놈이 선택받은 순간부터 타고난 것이니 낙인을 제거했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이것은 그저 네놈과 신이 소통하는 역할을 하는 것일 뿐이야. 너는 이제 신에게 버림받은 거다."
그 말에 나는 좌절을 느꼈다. 지금 상황에서 유일한 해결책이 한 달에 한 번 뱀파이어 성녀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게 불가능해진다면 커다란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이런 젠장···!'
이를 빠드득 갈았지만 곧장 무언가를 깨닫고는 의아해졌다. 나는 의문 속에서 내 안을 관조했다. 상태창이 있는 건 아니지만 집중하며 무언가 느껴졌다.
'뭐야? 연결이 안 끊어졌는데?'
그와 함께 깨달았다. 육체에 새겨진 낙인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진짜 중요한 건 영혼에 새겨진 낙인이었다.
'즉, 내 영혼을 잘라내지 않는 한 낙인을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다.'
놀라운 일이었다. 내가 아는 지식으로도, 신이 내린 낙인은 해당 부분을 잘라내면 보통은 기능을 못한다. 아단이 틀린 건 아니다. 하지만 나는 일반적이지 않았다.
'첫 번째 사도의 특권인가?'
이것은 대단한 특혜였다. 나의 경우는 영혼부터 신격과 연결돼 있는 것이다.
즉, 나와 뱀파이어 성녀는 보통 관계가 아니란 소리. 일반적인 신격과 사도라기보다 더욱 특별한 종류 같았다.
'역시 1인 사업자를 고르기 잘했구나!'
드사장을 골랐으면 방금 일격에 낙인을 잃어버렸을 거다. 팔을 되찾아 붙이면 되긴 하지만, 저 흉악한 네크로맨서를 상대로 이길 방법도 만무하고.
'이대로라면 한 달만 버텨서 온갖 강화를 다 받은 뒤에 성녀에게 도와달라고 해서 탈출하면 그만이다.'
오히려 상대가 방심할 테니 상황이 좋다고 할까?
* * *
매일, 매일이 지옥이었다.
하루가 천년 같다는 말이 무언지 절절이 깨달았다. 신체개조란 건 하나 같이 극악한 고통을 동반했기 때문이다.
"어쩌서 아직 정신이 멀쩡하지?"
아단은 심각한 얼굴로 날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여기저기 엉망이 된 채 피식 웃어 보였다.
"왜? 마음대로 안 되나? 키킥."
개조의 과정에서 아단은 끊임없이 내 정신을 굴복시키려 했다. 하지만 어떤 것도 통하지 않았다. 이유는 나도 모른다.
뱀파이어 성녀의 가호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점 때문인지.
며칠 동안 잠도 안 재우고 이어진, 개조를 빙자한 고문에도 내 정신은 박살 나지 않았다. 내게도 그건 신비로운 일이었다. 일이 잘 안 풀리자 아단은 점점 안달 냈다.
내가 점점 강해지는데 손쉽게 통제할 수단이 마땅찮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나는 여전히 구속된 상태라 공양에는 문제가 없겠지만, 불안한 점이긴 하지.
"초조해 보이는군. 아단."
"닥쳐라! 혀를 뽑아 버릴까보다."
말은 저렇게 해도 그는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나는 대신격에게 바쳐야 할 중요한 제물이라 큰 흠집이라도 생겨서는 안 됐기 때문이다.
잘랐던 팔도 손바닥의 낙인만 제거해서는 도로 붙여줬다. 그걸 보니 애초에 팔까지 자를 필요가 있었나 싶었지만, 아무래도 초장부터 내 기를 꺾으려 과도한 액션을 했던 게 아닐까 싶다.
아무튼 이런 이유로 개조 작업이 고통을 줄지언정 모든 게 완벽을 향해 조심스럽게 이어졌다.
비록 지금 내 몸이 여기저기 열리고 뼈와 근육, 인대가 교체되는 중이라 엉망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착실한 강화조치였다.
'이름 높은 네크로맨서에게 최고 수준의 신체 강화를 공짜로 받을 줄이야. 이거 따지고 보면 기연이 아닌가···?'
아픈 거 빼곤 날로 먹고 있었다. 다만 문제는 아단의 얼굴이 갈수록 죽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정신적 스트레스와 더불어 개조 작업으로 연일 막대한 마력을 쓰고 있었다. 대신격에게 공양할 제물이라 심열을 다하느라 과로의 연속인 것이다.
'옆에서 보면 쇠약해지는 게 눈에 보일 정도인데.'
하지만 기어코 그는 한 달을 좀 넘겨 10단계의 개조를 완성했다. 나는 그 도움으로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존재로 거듭나게 됐다.
사실 일주일 전부터 성녀에게 도움을 청할 수 있었지만 이걸 다 받느라고 버텼다. 확실히 그 선택은 보람이 있었다.
이 세계의 뱀파이어 중에 나 정도의 잠재력을 가진 이가 또 있을까 싶을 정도가 됐기 때문이다. 선택받은 자의 자질만 해도 대박인데 10단계의 신체 개조가 더해졌다.
'이대로 잘 성장하면 게임에서도 보지 못한 전무후무한 미친놈이 되겠는데?'
이런 내 속도 모르고 아단은 기뻐하며 내일 인신공양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드디어 끝이다. 이 빌어먹을 놈. 네놈이 불멸의 여왕에게 끌려가는 순간에도 그딴 여유만만한 표정을 짓는지 지켜보겠다. 조카야."
아단의 얼굴은 무슨 송장과도 같아서 나보다 저놈이 더 언데드처럼 보였다.
그는 인신공양을 준비하기 위해 쉬러 갔고, 모처럼 나는 끝나지 않는 고통에서 휴식을 얻게 됐다.
나는 눈을 감고 뱀파이어 성녀에게 청원했다.
'구원하소서. 여기 당신의 첫 번째 종이 위기에 처했으니 그 자비로운 손길을 뻗어주시길 원하나이다.'
그와 함께 바로 응답이 왔다. 내 영혼 전체가 성녀의 화답으로 진동했던 것이다.
'역시 날 버리지 않았군. 대체 무슨 능력을 줄까?'
기대감 속에서 다른 세계에 오고 있는 힘을 받아들였다. 그리고는 깊은 의문에 빠져들었다.
"음···? 어? 밤의 혈통 부여?"
그건 너무나 의아한 능력이었기 때문이다.
'권속을 만드는 능력인데 이건?'
대체 이게 탈출과 무슨 상관이며, 어디에 쓰라는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성녀는 신적인 통찰력을 갖고 있다. 그렇다면 분명 필요하니까 준 게 확실한데···.
'아직은 알 수가 없군. 그렇지만 분명 필요한 순간이 오겠지.'
의문투성이었으나 한 가지만큼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힘을 받으며 뱀파이어 성녀 의지가 느껴졌는데, 그녀는 내가 단순히 탈출하는 것만으로 그치길 바라지 않았다.
뱀파이어 성녀가 원하는 건, 거기서 더 나아가 인신공양을 엉망으로 만들고 대신격인 불멸의 여왕에게 망신을 주는 일이었다.
'와, 보통 담력이 아니네. 성녀가 뱀파이어로 타락한 데에 불멸의 여왕이 관여했다고 듣긴 했지만······.'
그래도 막 개업한 1인 사업자 주제에 기어코 대기업 총수의 얼굴에 똥물을 뿌리겠다는 의지에 나는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와 함께 한 가지 사실이 떠올랐다. 그녀가 아직 인간이며 태양 교단의 성녀이던 시절의 별명 말이다.
'교단 최고의 망나니, 문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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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여왕(1)
아단은 본격적인 의식 준비에 들어가 한동안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덕분에 스스로를 점검할 여유가 생겼다.
'탈출만 잘하면 대박이다.'
지난 한 달 동안 아단에게 10단계에 이르는 신체개조를 받았다. 이것은 어마어마한 돈지랄과 높은 경지에 오른 네크로맨서의 노가다가 결합된 걸작이었다.
10단계는 다음과 같았다.
1단계-은과 마늘에 대한 내성 강화.
2단계-힘줄과 인대 교체.
3단계-피부 보강.
4단계-강화된 감각.
5단계-불면불휴.
6단계-흡혈 효율 개선.
7단계-음 에너지 숙달.
8단계-배교.
9단계-블러드 문.
10단계-영혼의 불꽃.
모두 하나 같이 무시무시한 능력이었다.
다만 7단계부터는 아직은 사용 불가였다. 시술에 문제가 있었던 건 아니고, 아직 내 능력이 부족해서다. 그렇다고 개조의 가치가 떨어지는 건 아니다. 나도 언젠가 쓸 날이 올 테니까.
철컥. 철컥.
그때 갇혀 있는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뭔가 해서 보니까 아단이 부리는 해골 병사들이다.
놈들은 날 나무 십자가에서 끌어 내리더니, 주변을 둘러싸고 어디론 가로 데려가기 시작했다. 마치 범죄자를 연행하는 형사 같다.
이놈들 수가 많기도 했고, 내 몸에는 뱀파이어의 힘을 빼는 구속 도구가 곳곳에 달려있어 별다른 반항도 할 수 없었다.
도착한 곳은 한 번도 와본 적 없는 커다란 지하실이었다. 폭만 30미터 넘는 것 같았다.
지하실에는 웅장한 의식용 제단이 설치돼 있었는데, 이것만 봐도 아단이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알 것 같았다.
제단은 '로쏘 밤피로'라 불리는 매우 값진 붉은 대리석으로 만들어져 있었고, 높이만 3미터에 이렀다.
'와, 대박이네. 이 늙은이 돈을 얼마나 벌었던 거야?'
그도 그럴 게, 저 로쏘 밤피로로 만든 붉은 대리석 제단은 존나게 비싸기 때문이다. 저 정도 크기면 작은 성채를 살 값이 들었을 거다.
대신 제단으로서의 가치와 효율은 최상급이다. 대신격에게 기원하기 위한 제단으로 제격이라 하겠다.
'가능하다면 저 제단은 내가 갖고 싶군.'
어차피 이 일대를 근거지로 삼으려면 피의 제단을 만들어야 한다. 원래는 무너진 유적에서 벽돌을 구해 와서 쌓으려 했다.
그거 말고 마땅한 석재가 없기 때문인데 이렇게 다 만들어진 초고급 제단이 있다니···.
'성유물까지 안치하면 그야말로 대박이겠군.'
제단만 아니라 근처의 마법진도 갖은 정성으로 완성한 것이었다. 수많은 보석과 온갖 복잡한 기호로 이뤄진 그것은 내 평생 본 어떤 마법진보다 장대했다.
저걸 그리는 데만 몇 년이 걸릴 것 같은 종류였다. 나는 아단이 이 모든 걸 오랜 세월에 걸쳐 준비해왔다는 걸 알게 됐다.
그는 마법진 한가운데 엄숙하게 서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조카야, 오늘은 좋은 날이다."
나는 그를 향해 웃어 보였다.
"삼촌에게 도움이 될 수 있어서 기쁩니다."
"안타깝게도 오늘은 그 잘 굴러가는 혓바닥을 더 발휘할 수 없겠구나."
그 말과 함께 아단이 손짓을 하자 내 입에 웬 슬라임 같은 게 찰싹 달라붙었다. 그것 때문에 도무지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읍, 으읍!"
내가 소리를 내 항의하자 아단이 피식 웃었다.
"그 혓바닥으로 엄숙한 의식 중에 어떤 개소리를 할지 알 수 없어서 말이다. 오늘은 좀 얌전히 닥치고 있도록."
곧 해골 병사들이 날 마법진의 한쪽에 데려가서는 억지로 무릎 꿇리고 바닥에 붙어 있는 쇠사슬로 칭칭 묶어댔다.
그렇게 준비가 끝나자 아단은 심호흡을 길게 했다. 그는 해골 병사가 가져다 준 와인을 한 잔 마신 뒤 주문 외워나갔다.
"여기 정해진 예법을 준엄히 따라, 고대 언데드의 뼛가루를 바치며, 우리 모두의 머리 위를 비추는 부정한 달빛 아래···.
위대하신 언데드의 어머니께 청합니다. 부디 당신께 청원하는 미욱한 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시옵소서."
신기한 게 주문을 외울수록 마법진의 빛이 선명해졌으며, 아단의 목소리 역시 마이크를 쓴 것처럼 증폭돼 갔다.
그와 함께 어디서 온 건지 모를 원령들이 주변에 들끓기 시작했다. 각자 품은 원한으로 기괴하게 일그러진 그것들은 이 일대를 휘감고 원을 그리며 돌았다.
주변을 도는 원령들의 신음과 통곡이 짙어질수록 중심인 제단에 서린 음 에너지가 점차 늘어갔다.
'저 원령들이 동력원이구나.'
가만히 보니 아단의 주문은 주변에 물고기 떼처럼 가득한 원령을 가혹하게 괴롭히는 것이었다. 그럴수록 원령의 비통한 외침은 커졌고, 제단은 더욱 활성화되고 있었다.
'하여간 저 새끼는 뭐든 악랄하네.'
원령의 외침이 절정에 달했을 때, 아단은 근처에 손짓을 했다. 그러자 전혀 생각지도 못한 존재가 나타났다.
"!"
바로 얼마 전에 도망갔다고 들은 꼬맹이 에레미나였다. 녀석은 밧줄에 묵인 채 해골 병사들에게 끌려오고 있었다. 나는 놀라서 소리를 냈다.
"읍! 읍!"
아단은 사악하게 웃으며 품에서 뼈로 만든 불길한 나이프를 빼들었다. 그리고 내게 말했다.
"불멸의 여왕께선 무구하고 순진한 아이의 피를 좋아하신다. 마침 저 녀석이 있어 다행이야. 게다가 저 아이, 생각지도 못했는데 대단히 특별한 영혼이더구나."
아단은 당황한 내 표정이 마음에 든다는 듯 계속 말을 이어갔다.
"별의 가호를 타고난 아이다. 저런 존재는 한 세대에 한 명 나올까 말까지. 설마 촌구석 사냥꾼의 딸이 그럴 줄이야. 다 이 몸의 운이자 공덕인 거다. 크흐흐흐! 즉, 이 꼬맹이는 최고의 공양물인 셈이다."
에레미나는 날 보더니 슬픈 얼굴로 말해왔다.
"주인님, 죄송합니다. 어떻게든 구해드리려 했지만 제가 부족해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으으?"
도망간 거 아니었냐고 표정으로 묻자 대답은 아단이 해줬다.
"달아나긴 했다. 하지만 네놈을 구하려는 듯 주변에서 계속 얼쩡거리더구나. 몹시 은밀한 움직임이었지만 마법 앞에선 소용없는 법이지. 자, 때 묻지 않은 아이야. 의식의 완성을 위해 그 피를 흘려다오!"
그 말과 함께 아단은 나이프로 꼬맹이의 배를 찔러버렸다.
푹!
정말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잔인한 손속이었다. 그 모습에 나는 비명을 터뜨렸다. 슬라임으로 막혀서 제대로 소리 낼 수 없었지만, 저 빌어먹을 아단에게 온갖 쌍욕이 터져 나왔다.
"으윽! 읍! 으으!"
작디작은 에레미나가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모습을 보니, 이 세계에 온 뒤 가장 큰 정신적 충격을 줬다.
아직 함께한 지 얼마 안 된 꼬마 시종에 불과했지만,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이었다.
'이런 멍청한 놈! 그냥 지 살길 찾아 혼자 도망가지! 뭐한다고 돌아와!'
차라리 그냥 멀리 가서 잘 살았다면 좋았을 것을. 뭘 믿고 이런 위험한 곳에 기어들어 와서··· 그 작은 손을 날 구하겠다고···.
"크으으으!"
이런 상황임에도 뱀파이어의 몸이라 눈물 한 방울 흐르지 않는 게 싫었다.
'잠깐? 뱀파이어?'
그때 한 가지가 떠올랐다. 뱀파이어 성녀가 내려준 새로운 능력 말이다.
'밤의 혈통 부여.'
그것의 능력은 간단하며 실용적이다. 동의가 요구되긴 하지만 의지만으로 상대를 권속으로 만들 수 있다는 거다.
보통 뱀파이어의 권속은 흡혈로 이뤄진다. 권속이 될 대상을 흡혈한 뒤 서로의 피를 섞은 행동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주인이 되는 뱀파이어의 몸에 들어온 권속의 피는, '흡혈의 인자'가 부여되어 본래 몸으로 되돌아간다. 그 후 권속은 주인에게 받은 흡혈의 인자로 말미암아 뱀파이어로 재탄생하게 된다.
반면 성녀가 내려준 능력은 상호동의만으로 가능하다. 즉, 접촉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제야 나는 뱀파이어 성녀가 이런 순간을 위해 그 능력을 내린 것임을 알게 됐다.
'이후 어떻게 될지 미지수지만, 일단 지르고 보자. 에레미나를 살려야 해.'
지금 저 아이는 피를 쏟으며 죽어가고 있다. 뱀파이어로 만들지 않으면 살릴 길이 없었다. 나는 밤의 혈통 부여 능력을 일으켰다.
그 사이 아단은 신이 나서 계속 카라즈라와 접촉할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여기 순결한 존재의 피를 바치오니, 그 절대적이고 두려운 의지를 드러내시옵소서. 그 권능이 우리를 축복하고 우리 혼을 흔들어······."
아단은 의식에 완전히 집중해 나와 에레미나에겐 더는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주변의 해골 병사들이야 명령이 없이는 움직이지 않았고.
덕분에 방해 없이 능력을 발동했다. 그러자 멍한 눈으로 쓰러져 있던 에레미나가 놀란 표정이 된다.
꼬맹이 놈은 자기 몸에 깃들기 시작한 강력한 힘에 의아하더니 고개를 들어 나를 봤다.
나는 받아들이라는 듯 작게 끄덕였다. 뱀파이어가 되길 원하지 않는 건 알지만, 지금은 방법이 없었다.
'살고 봐야지 않겠냐. 뱀파이어가 되면 재생력 덕에 그깟 상처는 아무것도 아니다.'
녀석은 이질적인 힘이 무엇인지 깨닫고는 잠시 고민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곧 순응했다. 그러자 빠르게 권속의 관계가 구축됐고, 텔레파시까지 가능해졌다.
-꼬맹아!
-주, 주인님이십니까? 제 머릿속에 주인님의 존엄하신 목소리가 우, 울립니다?
감정 기복이 좀처럼 없는 녀석이 꽤나 당황해서 말을 더듬어댔다.
-네가 내 권속이 되어서 서로 텔레파시가 가능해진 탓이다.
-역시 그렇군요. 주인님과 제 승리를 위해 기꺼이 흡혈의 삶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아니, 이것을 제 삶의 영광으로 여기겠습니다.
-마음을 바꿔줘서 고맙구나. 이제 저 빌어먹을 영감탱이에게 엿을 먹여주자.
-그렇다면 마침 제게 적당한 게 있습니다. 본래 여기 오자마자 쓰려고 했습니다만, 생각지도 못하게 포박을 하는 바람에 일을 망쳤습니다. 하지만 이제 뱀파이어가 됐으니 이깟 밧줄쯤은 풀어낼 수 있습니다.
꼬맹이는 녀석은 이런 상황에서도 뭔가를 궁리하고 있었던 거다.
-훌륭하구나. 네 의지에 감탄했다.
-이 비장의 수단은 주인님이 원하시는 때에 맞출 수 있습니다.
우리는 빠르게 논의에 들어갔다. 그러는 사이에 아단의 의식이 마침내 완성됐다.
"모든 언데드의 어머니시여! 여기 그 의지를 드러내소서!"
콰아아앙!
동시에 강력한 음 에너지의 폭발이 일어났다. 주변을 맴돌던 원령들은 통곡하며 물러났고, 장대한 의지가 제단 한가운데 나타났다.
'대신격의 의지가 현현한 건가?'
놀라서 쳐다보는데, 순간 특이사항이 발생한 걸 깨달았다. 왜냐하면 나 역시 게임 속에서 불멸의 여왕 카라즈라를 불러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카라즈라는 격이 높은 존재라 직접 나타나지는 않고 의지의 일부를 보내 소환자와 만나는데, 시커먼 연기 덩어리 한 개가 나타난다.
한데 이번에는 달랐다. 시커먼 연기 덩어리가 나온 건 맞는데, 좌우로 붉은색과 녹색의 사이한 연기 덩어리 역시 같이 나타난 것.
이 상황에 의식의 주재자인 아단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셋···? 셋이라고?"
뭐지? 나 역시 당황했다. 저 옆에는 누군지 모르겠다. 그런데 곧 이어진 음성을 듣고 정체를 파악하게 됐다.
왼쪽에 있는 붉은 연기 덩어리가 신의 음성을 낸 것이다.
[위대하신 여왕이시여, 그 은혜와 자비가 우주를 뒤덮으니 이리 필멸자들도 알아서 공양을 해오는군요. 더군다나 저자가 전무후무한 뱀파이어를 만들었다고 하니 구경하는 재미가 있겠습니다.]
이에 가운데 있던 검은 연기 덩어리가 코웃음을 쳤다.
[흥, 호들갑을 떠는구나. 드라큘라.]
뭐야! 드라큘라? 드사장이라고?
어째서인지 뱀파이어의 소신격인 드라큘라가 이번 의식에 동행하고 있었다.
하면 오른쪽에 있는 녹색 연기 덩어리도 신격인 거 같은데, 그쪽은 입을 열지 않아 누군지 모르겠군.
'아무튼, 일이 거창해졌군. 카라즈라만 불렀는데, 다른 신 둘이 구경을 왔어.'
카라즈라와 드라큘라는 우리를 무시하고는 둘이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있었다. 대부분 드라큘라가 열심히 아부를 하는 내용이었다. 역시 협력업체 사장의 비애가 느껴졌다.
그나저나 뱀파이어 성녀는 이런 상황이 벌어질 걸 알고 있었나?
그녀는 분명 이번 의식에서 불멸의 여왕 카라즈라를 망신 주길 원했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이었는데 이렇게 구경꾼까지 끼어들었으니 판이 갖춰진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작전이 성공한다면··· 확실히 성녀가 바라는 걸 이뤄줄 수 있겠군. 아단 놈도 파멸할 테고.'
무대가 만들어졌다. 나는 죽은 척하고 있는 꼬맹이를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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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여왕(2)
한꺼번에 신격 셋이 출현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내 살길을 고민하면서도 아단이 어떻게 대처할지도 관심이 갔다.
일단 그는 흥분하지 않고 차분히 기다렸다. 그리고 신들의 대화가 잦아들자 타이밍 좋게 나섰다.
"칠흑 왕관의 정당한 소유주시여. 여기 정성을 다한 공양물을 준비하여 간절히 원하는 바가 있습니다."
[듣겠노라.]
불멸의 여왕 카라즈라가 관심을 보이자 아단은 설명에 들어갔다. 마치 다급한 세일즈맨 같았다.
그가 불멸의 여왕에게 약속한 건 이랬다.
1. 궁극의 뱀파이어로 개조한 나를 인신공양하겠다.
2. 영혼의 불꽃을 비롯한 모든 비법을 바치겠다.
3. 반신격에 오르면 이천 년간 밑에서 봉사하겠다.
아단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가 노리는 바를 명확히 알 수 있었다.
사실 궁극의 개조를 걸친 뱀파이어가 대단하다고는 하나, 그것만으로는 반신격이란 초월자의 직위를 받긴 애매했다.
대체 어떻게 하려고 한 건가 싶었는데 애초에 이 개조는 자신이 능력 있는 인재임을 어필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아단은 그걸 바탕으로 반신격으로 등용해 달라는 얘기를 하고 있었다.
'독립적인 반신격이 아니라 상급신의 수하 역할을 하는 반신격이 되겠다는 거군.'
당연히 전자와 후자의 처지는 하늘과 땅이다.
독립적인 반신격이 처음에는 고생스럽긴 해도 상급신의 수하인 반신격보다 압도적으로 우월한 게 있으니, 바로 자기 신도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반면 아단은 이천 년간의 봉사 기간 동안은 신도를 하나도 못 만든다.
'카라즈라 밑에 있으니 안정적이긴 하겠지만, 신으로서의 발전이 없지. 게다가 남의 똥이나 치우는 일이 어디 마음 편할까···.'
하지만 아단은 그렇게 해서라도 신좌에 앉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던 것이다.
과연 불멸의 여왕이 어찌 답할까? 지켜보고 있자니 괜히 나까지 긴장됐다.
[이상하구나.]
한데 불멸의 여왕 카라즈라가 뜻밖의 얘기를 해왔다.
[미욱한 자여. 네놈은 이천 년간 봉사하겠다고 하면서도 어찌 의식의 기본적인 절차조차 지키지 않는 건가?]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제물로 바친 아이의 피를 절약하고 있지 않느냐? 이는 여(余)에게 큰 무례를 범한 것이다.]
그 말에 아단은 화들짝 놀라서 무릎을 꿇었다.
"송구하옵니다! 불멸의 여왕이시여. 이는 분명 착오가 있는 것 같습니다. 허락하신다면 바로 확인해 보겠습니다!"
[좋다. 잠깐의 시간을 주지.]
"그 은혜에 감사드리옵니다."
깊게 읍을 한 아단은 몸을 돌려 꼬맹이에게 향했다. 그는 당황하고 흥분해 수염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일어나라! 비천한 것아. 어찌 피가 멈춘 거지!"
당연히 그럴 수밖에. 꼬맹이는 내 권속이 되어 그깟 상처는 나아 버렸다. 아단은 그것도 모르고 의식을 계속했으니 불멸의 여왕에게 타박을 받은 것이다.
그 어떤 일보다 중요한 의식에서 실수가 나왔기에 아단의 표정은 엉망이었다.
"어찌 된 것이야!"
아단은 엎어져 있던 꼬맹이를 붙잡더니 거칠게 일으켰다. 하지만 이것이 꼬맹이가 줄곧 노리던 순간이었다.
꼬맹이는 묶여 있던 밧줄을 뱀파이어의 괴력으로 찢어버렸다. 그리고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아단의 얼굴 앞에 내밀었다. 그건 꼬맹이가 항시 갖고 있던 성유물이었다.
성유물은 눈앞에 있는 부정한 네크로맨서의 힘에 반응해 빛을 뿜어냈다. 그것에 직격 당한 아단은 찢어지는 비명을 내질렀다.
"크아아아아!"
어둠의 힘을 다루는 그에게 성스러운 힘은 치명적이었다. 그는 눈이 타버렸는지, 안구에서 연기를 뿜으며 휘청거렸다.
물론 이쪽도 피해가 컸다. 성유물을 내밀었던 꼬맹이의 왼손이 통째로 타버린 것이다. 이제 녀석도 뱀파이어다. 성유물은 치명적인 존재였다.
뒤쪽에 있던 나도 전신이 후끈후끈 거리며 타는 듯한 격통에 휩싸였다. 그러니 내 앞에 있던 꼬맹이가 어떨지는 안 봐도 훤했다.
하지만 꼬맹이는 침착했다. 멀쩡한 오른손으로 땅에 떨어진 성유물을 다시 주워들고는 내 쪽으로 달려왔다.
"주인님,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꼬맹이는 내 입에 슬라임을 떼어내고, 어둠의 마법이 걸린 사슬을 약화시키기 위해 성유물을 가져다 댔다. 빛이 작렬하자 타는 듯한 격통에 덮쳐왔다.
이건 마치 밧줄을 끊기 위해 불로 지지는 것과 비슷했다. 밧줄이야 끊기겠지만, 여기저기 화상을 입을 수밖에 없는 것과 같았다.
하지만 불평할 수도 없었다. 꼬맹이의 남은 오른손마저 재로 변해 부서졌기 때문이다. 나보다 훨씬 고통스러울 텐데도 녀석은 동요하지 않았다.
"주인님, 이제 구속을 풀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말대로였다. 힘을 주자 단단히 날 묶던 마법의 쇠사슬이 끊어졌다.
캉! 카앙!
꼬맹이는 만족한 듯 끄덕였다.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건 여기까지입니다. 더 도움이 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젓고는 꼬맹이의 머리 위에 손을 턱 올렸다.
"아니다. 넌 날 구했다. 이제부터는 내가 처리하지."
마침 쓰러졌던 아단도 비틀거리며 일어나고 있었다.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신들도 흥미로운지 저마다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중 드라큘라는 감탄한 기색이다.
[저 작은 인간의 충성심이 놀랍습니다. 이제 어떻게 될지 궁금하군요.]
불멸의 여왕은 한심하다는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이름 높은 네크로맨서라 하더니 겨우 이 정도인가?]
신들은 참견할 기색이 없었다. 자신에게 바쳐진 의식이 엉망이 되어가고 있는 불멸의 여왕조차 그랬다.
'여기선 그게 당연하지.'
이 세계는 매우 종교적이지만, 신은 세상사에 제한적으로만 개입할 수 있었다.
그리스로마 신화처럼 맘에 안 든다고 벼락을 떨어뜨리거나 인간을 거미로 만들어 버리는 것은 어려웠다.
'아니, 가능하다고 해도 불멸의 여왕은 안 그러겠지만···.'
신이 가세한다는 건, 애들 싸움에 어른이 끼어든 꼴이니 그게 더 체면 상할 일이다.
하지만 지켜보는 다른 신들이 있는 상황에서 이런 일이 발생했으니 망신스러운 건 사실이다. 아단도 그걸 모를 리 없었기에 황급히 외쳤다.
"존엄하신 불멸의 여왕이시여! 이 소란에 정중한 사죄를 올리나이다. 바로 정리하겠사옵니다!"
아단은 눈이 멀어버렸음에도 이쪽을 정확히 쳐다보고 있었다. 일그러진 얼굴이 악귀와 같았다.
"감히! 감히, 네놈들이!"
이제 그는 사생결단을 내겠다는 태도였다. 객관적 전력으론 내가 불리했다. 하지만 내겐 성유물이 있다. 지금도 실시간으로 손을 태우고 있었지만, 이것이 반전을 만들어줄 거다.
나는 공략쟁이란 입장에서 뱀파이어 성녀에 대해 파고들었다. 그 덕에 그녀가 진짜 성녀였던 시절의 손가락으로 만들어진 이 성유물의 사용법도 잘 안다.
'네크로맨서 같이 어둠의 힘을 다루는 놈을 격퇴하는데 아주 효과적이지.'
대신 리스크가 워낙 커서, 그냥 피의 제단용 재료로 쓰는 게 훨씬 이득이라 생각 안 해봤을 뿐이다. 그러나 이렇게 아단과 생사결을 벌여야 하는 지금은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아단, 날 제물로 쓰려 했던 건 실수다. 대가를 치르게 해주지."
"감히! 네깟 놈이! 어림도 없는 소리! 네 눈앞에 있는 자의 위대함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냐!"
"위대함이라고? 아, 그래서 결과가 이건가?"
나는 엉망이 된 의식을 가리키며 코웃음 쳤다.
"시궁창에 사는 고블린들이 여는 잔치도 이것보단 덜 개판일 거다."
그러자 드라큘라가 웃어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킥킥킥. 저는 저 친구가 마음에 듭니다. 목숨이 간당간당해도 유머를 잃지 않는 게 멋지군요.]
이에 대해 불멸의 여왕은 침묵했지만 드사장은 계속 깐족거렸다.
[여왕이시여. 공양은 저 친구에게 받아야 했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만.]
[···그 입, 다물라.]
상황이 이러니 아단은 수염을 파르르 떨어댔다. 그는 자기 힘을 일으키며 사납게 외쳤다.
"멋대로 지껄여라. 이제부터 네놈에게 영원한 고통을 주마!"
"글쎄? 노인네, 그게 가능할까? 영원히 남을 괴롭힐 만큼 오래 살진 못할 것 같은데? 금방 나한테 뒤질 테니까."
"빌어먹을 놈! 역시 네놈은 슬라임으로 입을 막아놓을 때가 제일 좋았다!"
그 말과 함께 아단이 커다란 파괴 마법을 일으켰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노리는 바였다. 그를 흥분시키기 위해 성유물에 팔이 타들어 가면서도 여유를 가장해 도발했던 거다.
'어둠에 근본을 둔 강력한 한 방. 그것만이 이 싸움의 역전을 위한 조건이니까. 일단 원하는 대로 됐다.'
이론적인 것만 알고 실제로 해보는 건 처음이라 될지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은 성공 외에는 다른 걸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진정한 끝과 마주하라!"
아단은 대상을 즉각적으로 소멸시키는 강력한 마법을 쏘아왔다. 그것은 녹색의 사악한 빛깔을 띤 광선이었다. 저것에 닿으면 몸이 모래처럼 무너질 터였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성유물을 들어 올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쏘아져 오던 사악한 마법을 성유물이 모조리 빨아들인 것이다. 문제는 이제부터였다.
똑바로 하지 못하면 성유물이 흡수한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터져버릴 터. 그러면 당연히 나도 조각조각 난다.
'하지만 그 힘을 이용할 수 있다면 얘기가 다르지.'
태양 교단에는 금기로 지정된 사마외도의 기술이 하나 있다.
교단의 성직자가 어둠의 힘을 받아들이고, 본인이 가진 빛의 힘과 그것을 융합하는 방법이다.
그 상반된 힘은 쌍소멸을 일으키는데 거기서 거대한 에너지가 방출하게 된다.
매우 강력한 힘이지만, 성직자가 어둠의 힘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점에서 금지된 기술이었다. 물론 나와는 상관없는 얘기였다.
'성유물에 담긴 빛의 힘, 아단이 쏘아낸 어둠의 힘. 이 두 가지 상반된 힘을 섞는다.'
한데 막상 시도해 보니 굉장히 어렵고 감이 안 잡혔다. 이론으로 아는 것과 실전은 천양지차였다.
처음에는 잘 되는가 싶더니 성유물의 밖으로 폭주하는 에너지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구우우웅!
손에 쥔 성유물은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사납게 진동해댔다.
'이대로라면 실패해!'
당황해서 안색이 새파랗게 질리던 그때 누군가 은밀히 말을 걸어왔다.
-자네가 무얼 하려는 건지 알겠군. 킥킥. 앞서 재밌는 걸 보여줬으니 조금 도움을 주지.
머릿속에 울리는 이 목소리는 드라큘라가 틀림없었다.
-마법의 가공에는 심상이 중요하네. 일식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검은 태양이 뜨고, 그 테두리로 빛이 선명한 광경을 말일세. 그야말로 어둠과 빛의 조화가 아닌가?
나는 드사장의 말에 어떤 깨달음을 얻었다. 그리고 게임에서의 공략이 아닌, 지금 이 감각대로 새로운 걸 시도해 보기로 했다.
'이곳은 현실이다. 계속 게임에만 얽매여 있어선 곤란해.'
본래 나는 쌍소멸로 발생한 에너지를 아단처럼 파괴 마법으로 쏘아내려고 했다. 게임에선 그런 식으로 활용했으니까. 하지만 드사장의 조언 때문에 생각을 바꿨다.
나는 일식을 떠올리며, 한 자루의 검을 벼려냈다. 그것은 검은 검신을 가졌고, 검날을 따라 선명한 광채가 테두리에서 빛나고 있나고 있는 형태였다.
명확한 심상을 갖게 되자 폭주하던 힘은 안정되어 갔다. 그리고 한 자루의 검이 만들어졌다.
솔직히 아직은 길쭉한 것 빼고는 유려한 검의 형태라고 할 수는 없었다.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한 건 이걸로 뭐든 벨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뭐, 뭣? 이런 말도 안 되는!"
아단은 자신이 쓴 필살의 주문이 너무나 간단히 사라지더니, 이런 식으로 변형된 걸 보고 입을 쩍 벌렸다. 그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물어왔다.
"대체 그게! 무엇인가!"
나는 깊이 고민하지 않고 답했다.
"일식의 검이라 해두지."
그와 함께 앞으로 튀어 나갔다. 아단이 열심히 해준 신체 개조 덕에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속도였다.
"헛!"
대경한 아단은 남은 힘을 끌어내더니 방어마법을 전개했다. 그가 만든 방어력이 어찌나 두껍던지 일대가 왜곡돼 보일 정도였다. 아단의 형상이 휘어지고 마치 저 멀리 있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 강력한 방어막도 일식의 검 앞에서는 버터나 마찬가지였다. 달군 나이프가 두꺼운 버터를 쉽게 가르는 것처럼 방어막을 헤집었다.
그러자 방어막이 빛을 굴절시켜 저 멀리 있던 것처럼 보이던 아단이 제대로 보였다. 찢어진 방어막 너머로, 그는 의외로 가깝게 있었다.
"크헛!"
놀라고 당황한 그의 얼굴이 눈앞에 생생했다. 아단은 후속 주문을 완성할 틈도 없었다.
나는 주저 없이 일식의 검을 그의 가슴팍에 찔러 넣었다.
"삼촌 말대로 오늘은 좋은 날이군요. 크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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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여왕(3)
"크헉!"
검이 관통하자 아단의 방어마법이 산산조각 났다. 그는 지팡이마저 놓친 채, 양손으로 어떻게든 몸에 박힌 검을 빼내려고 발버둥쳤다.
세상에, 그렇게 고통스러운 얼굴은 처음이었다.
그는 칼날을 붙잡은 자기 손이 너덜너덜해지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어떻게든 애쓰고 있었다.
놀랍게도 아단은 이 상황에서도 마력을 일으켜 반발력을 만들었다. 그가 이를 악물수록, 몸을 관통한 일식의 검이 점점 밀려 나왔다.
"이대로! 이대로 끝날 수 없다! 그 긴 세월과 노력이 이토록 허무하게 죽을 수는!"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될 만합니다. 삼촌께선 죽은 자들을 부활시키는 걸 좋아하잖습니까? 그런데 정작 삼촌이 죽으면 누가 부활시켜 주는 겁니까?"
"빌어먹을 놈! 아직도 조카 행세냐! 크으으윽! 가증스럽구나! 쿨럭! 쿨럭!"
"가증스럽긴. 내 몸을 마치 장난감처럼 이리저리 개조한 놈이 할 소리는 아니지."
다시 일식의 검을 힘껏 밀어 넣었다. 이번에는 쉽게 박히지 않았다. 아단이 일으킨 마법적인 반발력과 충돌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마지막 발버둥에 불과했다.
"아단, 이제 네놈의 흑마법은 여기까지다!"
고성과 함께 뱀파이어의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자 반발력에 금이 가는 걸 느꼈다. 그리고 반발력이 깨지는 순간 커다란 폭발이 일어났다.
콰아아앙!
폭음과 함께 제단 근처에 있던 온갖 물건이 박살 나며 날아갔다.
"크윽···."
하지만 폭발을 정면으로 받고도 나는 쓰러지지 않았다. 얼굴을 다리미로 지지는 것 같은 화끈함을 느꼈지만 견뎌냈다. 역설적이게도 아단이 행한 신체 개조 덕분이었다.
"으으······."
폭발로 날아간 아단은 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가늘게 숨을 쉬는 꼴이 얼마 버티지 못할 것 같다.
한때 세상을 벌벌 떨게 했던 네크로맨서가 지금은 벌레처럼 꿈틀거리며 죽어가고 있었다.
'비참한 꼴이구나.'
얼굴은 머리칼이 수염이 다 타버렸고, 화상이 심해서 본래 모습을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의 몸 곳곳에서 연기가 피어났다.
나는 일식의 검을 해제했다. 더 유지했다가는 몸이 남아나지 않을 지경이었기 때문이다. 대신 허리춤의 철제 검을 뽑아 들었다.
"마지막으로 남길 말이 있나?"
"크으으··· 그래, 네가 이겼다. 하지만 지금··· 그 승리를 실컷 즐기도록. 오래가진 않을 테니···. 재앙이 다가올 것이다······."
아단의 목소리는 마치 석탄 가루를 집어삼키고 말하는 것처럼 거칠었다.
"무슨 소리지?"
"내가 너 같은··· 뱀파이어 개조를··· 한두 번 해본 줄 아나? 수많은 실패와 성공이 있었다. 저마다의 특색을 가진···. 많은 뱀파이어를 만들었다."
"그래서?"
"그들의 특징이··· 뭔 줄 아나? 서로 잡아먹고··· 상대의 능력을 빼앗는 거다. 더더욱 강한 뱀파이어가 되도록······ 내 그리 만들었다. 이제 그들이 널 노릴 거다. 네놈의 형제나 마찬가지인 존재들이."
"재밌는 이야기를 하는군. 하지만 나야말로 네놈이 개조했던 존재 중 궁극이 아닌가?"
"그렇긴 하다···. 하지만 아직은··· 가장 약한 놈이기도 하지. 어린 뱀파이어여. 네 형제들은··· 모두 긴 세월을 살아오며 동류를 잡아먹으며··· 온갖 능력을 흡수하며 성장했다······. 애송이인 네가 당해낼 리가 없지."
"뭐, 그래서 내 걱정이라도 해주는 건가?"
"크크크흐흐···! 미친 소리를 하는군. 그들은 조만간 형제 중에 가장 잠재력이 빼어난 네가 태어났다는 걸 알게 될 거다···. 그리고 널 노리겠지."
나는 아단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바로 알았다.
게임 속 뱀파이어 중에는 동족 포식을 하는 미치광이 같은 부류가 있었다. 같은 뱀파이어들에게도 꺼려지는 녀석들인데 그 근원이 영 미지수였다.
그런데 지금 보니까 아단이 개조했던 놈들이었구나. 서로 잡아먹으며 강해지려 했던 거다. 나도 그런 부류이니 좆됐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던 모양인데···.
"오히려 좋은데?"
"뭐···, 뭐라?"
내가 알기로 그 미치광이 뱀파이어들은 저마다 독보적인 능력을 갖고 있었다.
게임을 하면서도 탐나는 힘이 많았는데 그걸 다 내 걸로 할 수 있다는 소리잖아?
'놈들이 쓰는 힘을 어떻게 배우나 했는데, 이걸 이렇게 알게 되네.'
나는 당황한 표정을 짓는 아단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밥상을 차려줬다는 게 이런 소리군. 고맙다. 재산을 쏟아부어 이 몸을 최고의 잠재력을 가진 뱀파이어로 만들어준 거로도 부족해 앞으로 성장할 발판을 다 깔아주다니!"
뭐랄까, 이건 존대가 절로 나왔다. 다시 존경을 담아 삼촌이라고 부르자.
"삼촌, 삼촌은 진정으로 제 은인이십니다."
내 말에 아단은 눈이 커졌다.
"네놈···! 네놈!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그들은 모두··· 전설적인 뱀파이어다. 이제 네놈의 목숨은··· 바람 앞의 등불 같은···."
"하하하. 삼촌. 이기면 되는 거 아닙니까?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뭐랄까, 오랜만에 공략쟁이의 혼이 불타오르는 기분이다.
'공략 가능한 보스 캐릭터가 일제히 개방되는 느낌이잖아?'
게다가 그 미치광이 동족포식자 중에 몇몇은 실제로 누군지 알고 있다. 적을 안다는 입장에서 내게 무척 유리한 싸움이었다. 이점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제가 위험하다 하셨지요? 삼촌. 하지만 그리 쉽게 문제가 들이닥치지 않을 겁니다. 제 형제들이 이 미혹의 숲에 대해선 잘 모를 테니까요."
"어찌 그리··· 확신하는 거냐!"
"알았으면 애초에 치매에 걸리고 힘을 잃은 삼촌을 가만두지 않았을 테니 말입니다."
그들이 아단을 깊이 증오할 것임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아단이 미혹의 숲에서 별 볼 일 없는 늙은이로 지내는 걸 알았다면 반드시 복수하려 했겠지. 하지만 이자는 여태 멀쩡했다.
"즉, 여기 있으면 한동안 안전할 거란 말입니다. 그간 삼촌이 알려준 흑마법을 연구하며 강해져야겠군요."
나는 그에게 양팔을 벌리며 웃어 보였다.
"덕분에 앞으로 갈 길이 선명하게 보이는 것만 같습니다. 이 어리석은 조카를 이토록 계도해 주시니 참으로 가족의 정이 두텁습니다. 크흑···!"
"네 이놈! 네놈만은 어떻게든 천 갈래, 만 갈래 찢어 죽이고 말 것이다!"
"하하하, 삼촌. 남은 시간도 얼마 없으실 텐데 그런 욕설 대신 삶의 이유와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뭐라?"
"애초에 삼촌께서 해왔던 모든 것, 그러니 일천의 사람을 공양하고 수없이 연구에 매진했던 나날이 사실은 반신격이 되기 위한 게 전혀 아니었다면 어떻습니까?"
"무슨···! 무슨 궤변을 하려고."
"사실 그 모든 게 이 조카의 앞길을 닦기 위한 포석에 불과했던 건지도 모르죠. 이거 아주 제대로 된 포장도로군요."
"이놈!"
격분한 아단이 뭐라 외치려는 때 나는 장갑 낀 손으로 그의 입을 막고는 계속 말했다.
"자, 말은 그만하십시오. 네크로맨서가 입으로 뱉는 저주는 영 골치 아파서요."
"그그극! 으극···!"
"너무 원망마시길. 삼촌께선 일생을 악인으로 살았지만, 마지막만큼은 자기 삶의 이유에 충실한 멋진 죽음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제 위로가 도움이 됐습니까?"
"끄으으윽! 끄으으!"
나는 아단을 끝장내기 전에 불멸의 여왕 카라즈라를 보며 물었다.
"위대하신 분이여. 존엄한 죽음의 어머니시여. 제가 이 비루한 자를 처리해도 되겠습니까?"
이 물음에 대해 불멸의 여왕은 간단히 답했다.
[신에겐 신의 일을. 인간에겐 인간의 일을. 그뿐이다.]
사실 저리 답할 건 알고 있었다. 그저 상대가 지고한 존재니 예의상 물어봤을 뿐이다.
"자, 그럼. 삼촌 머나먼 길 잘 가십시오. 조카가 바빠서 멀리 나가진 않겠습니다."
"으으윽! 윽!"
"너무 죽음을 두려워하실 것 없습니다. 그저 삼촌이 부리던 해골과 똑같은 존재가 될 뿐이니까."
나는 왼손으로 아단의 입을 막은 채 오른손으로 든 검으로 그의 목을 썰어버렸다.
서걱.
동맥이 끊어지자 피가 요란하게 튀었다.
그게 끝이었다.
천명을 인신공양하고, 왕국의 공적이라 불리며, 지상에 끝없는 악을 뿌리던 남자치고는 너무나 비참하고 별 거 없는 최후였다.
아단은 그렇게 죽었다.
"삼촌, 그렇게 악을 위해, 악을 다해 살고는 결국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군요. 허망합니다."
의식은 끝났다. 아단은 실패했고 불멸의 여왕은 체면이 상했다. 겉으론 태연한 척해도 속으로 부글부글 끓을 게 뻔했다. 하지만 이제 신들은 곧 돌아갈 것이다.
[한편의 연극 같군. 잘 봤네. 젊은 뱀파이어여.]
소신격인 드라큘라가 말을 걸어왔다.
[혹시 개종할 생각 있나? 이제 보니 막 신좌에 앉은 성녀를 따르고 있군.]
아무래도, 드사장에게 호감을 산 것 같다. 그의 신언(神言)에는 우호적인 느낌이 가득했다.
"죄송합니다만, 그건 어렵겠습니다."
[아깝구만. 성녀의 신도를 보는 건 처음인데, 아주 대단한 친구를 구했군!]
"과찬이십니다."
[크흐흐흣! 있는 그대로 이야기한 것뿐일세. 나중에라도 개종하고 싶으면 연락하게나. 자네라면 후대할 테니.]
그리 말은 드라큘라의 붉은 연기 같은 형상은 뒤로 물러났다. 여태 말이 없던 녹색 연기의 형태를 한 미지의 신도 뒤로 물러났다.
'대체 저 신은 누구지?'
녹색 연기 형체의 신은 말은 없었지만 아까부터 날 유심히 보는 것 같았다. 묘한 관심이 계속 느껴지고 있었으니까.
그들은 그대로 떠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예절 문제인 듯, 불멸의 여왕 카라즈라가 움직일 때까지 기다리려는 것 같았다.
나는 불멸의 여왕을 쳐다봤다. 그녀가 어찌 반응할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쉽사리 감정을 드러낼 거 같지는 않은데··· 그냥 무시하고 떠나려나?'
워낙 거물이니 그래도 이상하지 않다. 다만 나 때문에 체면이 상했으니 자기 신도를 써서 나중에 보복해 올 확률이 높다. 그런데 뜻밖에 불멸의 여왕은 내게 관심을 보여 왔다.
[태양 교단의 아이에게 신도가 생겼을 줄은 몰랐다. 오늘 여를 망신 준 건 그 아이가 꾸민 일이겠군.]
"저는 신들의 일에 대해 알지 못합니다. 위대하신 분이여."
[흥, 미꾸라지 같은 놈. 어쨌거나 오늘 네놈 때문에 헛걸음을 한 게 사실이다. 그렇기에 제안할 게 있다.]
"말씀하십시오. 듣겠습니다."
그러자 불멸의 여왕은 생각지도 못한 얘기를 꺼냈다.
[그대여. 훌륭한 자질이 넘치며 출중하구나. 여를 섬기도록 하라. 만약 그리한다면 반신격에 오를 기회를 내리겠다.]
이건 엄청난 약속이었다. 뒤에서 듣고 있던 드라큘라도 놀란 듯, 그의 붉은 색 연기가 마구 흔들렸다.
불멸의 여왕이 날 반신격에 올려주겠다는 건 아니지만, 그 '기회'라는 것도 결코 아무나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비록 성공할 확률도 무척 낮긴 해도 이것은 아단 같은 자가 일생을 걸고 갖고 싶어 했던 것이었다.
'음··· 노림수로군.'
일단 내가 반신격의 길을 걷겠다고 빠져나가면 가장 타격을 받는 건 뱀파이어 성녀니까.
불멸의 여왕 입장에선 오늘 일을 꾸민 고얀 성녀에게 품위 있게 보복함과 동시에 마음에 드는 인재를 확보하고자 하는 것이다.
심지어 그 압박은 결코 예절 바르게 거절하는 정도로 해결할 정도가 아니었다.
[여는 죽음의 대신격이다. 그 지체가 높음은 그대도 알 것이다. 이 제안을 숙고하라. 설마 그대는 여를 오늘 하루 동안 두 번이나 망신 줄 셈인가?]
대신격의 협박에 몹시 난처했다. 듣는 순간 숨이 턱 막힐 정도였다.
* * *
뱀파이어 성녀는 자신의 성유물을 통해서 현재 상황을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
"어쩌지? 이대로라면 내 사도가 저 할망구에게 넘어가 버릴 텐데! 아악!"
뱀파이어 성녀는 자신의 황금빛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방방 뛰었다. 협박도 협박이지만, 실제로 조건도 좋을 터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은 저 언데드의 여왕보다 사도에게 많은 걸 내릴 수 없었다.
갑자기 뱀파이어 성녀는 자기 처지가 서글퍼졌다. 그녀는 '핏빛 새벽의 여신'이라는 멋진 이명으로 불리는 반신격이었지만, 실상 온갖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일단 경험 부족이 제일 컸다.
누가 신의 업무에 대해 인수인계를 해주거나 알려준 것도 아닌지라 뭘 하면 실수와 시행착오의 연속이었다.
'생각해 보니 이것저것 참 많이 말아 먹었네요···.'
다시 생각해도 한숨이 나올 정도였다. 그렇게 낙담하고 있던 때, 특별한 운명을 타고난 이가 자신의 신도가 됐다.
뱀파이어 성녀는 즉각 그를 첫 번째 사도로 임명하고 지켜보게 됐다.
그런데 이 사도란 게 무슨 깡인지 칼도 쓸 줄 모르면서 오크랑 부딪치는 것이었다.
다행히 어찌저찌 위기를 넘겼는데, 이번에는 강력한 태양 교단이랑 싸우겠다고 날뛰기 시작한 것.
사도의 요청에 박쥐로 변신할 수 있는 능력을 내리긴 했지만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오크를 이간질해서 태양 교단을 노리는 모습에 결국 뱀파이어 성녀는 혼자 발을 동동 굴렀다.
하지만 기적과도 같은 일이 일어났다. 발레나 공녀라는 성기사에게 맞아 죽나 싶었는데, 자신의 손가락이 든 성유물을 얻더니 정화의 기사단과도 연결된 것이다.
뱀파이어 성녀는 자신의 사도에게 감탄했다.
'어쩜 저리 미약한 힘을 가지고 저 정도 성과를 내는 걸까요?'
심지어 제대로 된 후원도 해주지 못했다. 자신이 워낙 가난한 반신격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마땅한 거주지도 없었다.
아무도 찾지도 않고,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암석 차원의 한구석에 머물고 있을 뿐이었다.
의당 신들이 가져야 할 화려한 천상의 궁전도, 섬기며 봉사하는 권속도 없었다. 뱀파이어 성녀는 궁핍했다.
그렇기에 그녀에게 첫 번째 사도는 몹시도 특별하고 소중했다. 첫 번째 사도는 신으로서 그녀가 가진 전부기도 했기에.
'절대! 절대, 잃을 수 없어!'
한데 저쪽에서 이직 제안이 들어왔다. 가난한 사장님인 뱀파이어 성녀는 어질어질한 기분을 맛보고 있었다.
'문제는 거절해서 두 번 망신을 주면 언데드의 여왕의 노여움을 살 텐데···.'
언데드 여왕 정도 되는 거물이 진심으로 노할지는 미지수다. 하지만 화를 낼 그럴 듯한 명분이 생긴다는 게 문제였다. 결코 가볍게 넘어가지 않을 터.
'언데드 여왕은 겉으론 점잖은 척해도 잔인한 존재야. 무슨 일을 겪을지 몰라.'
뱀파이어 성녀는 첫 번째 사도가 걱정돼, 차라리 그냥 보내줘야 하나 싶을 정도였다.
그녀는 애가 타는 기분으로 자신의 사도가 뭐라 답할지 집중했다. 한데 그때 첫 번째 사도가 고개를 돌리더니 성유물 쪽을 바라봤다.
성유물을 통해 상황을 보고 있던 성녀는 서로 눈이 마주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의 첫 번째 사도는 어쩐지 묘한 미소를 짓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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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여왕(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