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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YRETUR

สมจริ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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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nopsis

Chapter 11

# 1

001. 프롤로그-1회차 배드 엔딩

[게임을 클리어하셨습니다.]

[곧 엔딩이 시작됩니다.]

붉은 하늘 한가운데에 있는 거대한 검은 구멍을 바라보며 나는 중얼거렸다.

"...끝났다."

10년 전.

이 세계는 게임이 되었다.

현실이 게임이 되어버렸다.

우리들은 '플레이어'가 되었고.

게임 마스터, 통칭 GM이라 불리는 자들에게 퀘스트를 받아 이야기를 진행했다.

당연히 그것을 즐기는 건 우리가 아니다.

저 하늘 위에 있는 아득한 존재.

'신'이라 불리는 이들을 위해 우리는 이 게임을 강제적으로 플레이해야 했다.

그들은 수많은 GM이 운영하는 게임판 중 마음에 드는 장소에 참가하여 게임을 즐겼다.

그저 지켜보는 이도 있었고, 혹은 마음에 드는 플레이어를 자신의 아바타로 삼아 직접적으로 참여하는 자들도 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

인류는 멸망했다.

'개쓰레기 같은 게임 같으니라고.'

나는 여태 수많은 게임을 플레이했지만, 이것보다 쓰레기인 게임을 해본 적이 없었다.

힘겹게 도달한 엔딩이 인류의 멸망이라니.

'적어도 마지막에라도 그 새끼들을 엿 먹이고 싶었는데.'

씁쓸한 미소가 입가에 맴돌았다.

검은 구멍을 바라보았다.

만약 내가 신격을 얻었다면 저 구멍에 들어갈 수 있겠지만, 나는 누군가의 아바타가 된 몸이었다.

당연히 누군가의 아바타가 되어서야 신격을 얻을 수 없었다.

즉, 나는 이 버려진 세계에서 홀로 살아가야 한다는 거지.

'녀석은 이런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나를 아바타로 삼았던 신은 이런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했다.

비웃을까?

아니면 연민의 시선을 보낼까.

아니, 녀석이라면 이런 결과를 만든 나를 비난할지도 모른다.

[배드 엔딩 '고독한 세계'를 달성하셨습니다.]

마침 들려온 건 녀석의 비난이 아닌 익숙한 시스템의 음성이었다.

'배드 엔딩이라니.'

하기야 지금 이 꼴이 배드 엔딩이 아니면 뭐겠는가.

지금 생각하면 내가 이 게임을 플레이하며 조금만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이런 결말이 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허나 이미 도달한 결말을 바꿀 수는 없었다.

[홀로 모든 퀘스트를 클리어한 당신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모든 플레이가 곧 종료됩니다.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그래, 역시 이렇게 끝나는구나.

나는 귓가에 아련히 들려오는 목소리에 손에 쥔 검을 치켜들었다.

'수고했다'라는 말이 들려왔으니 이제 더 이상 내게 남은 역할이란 없는 거겠지.

서비스가 종료된 게임의 캐릭터가 어찌 될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역시 이제 남은 답은 하나뿐인가.'

나는 이 혼자뿐인 세계에서 살아갈 생각도, 자신도 없었다.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검으로 가슴팍에 찌르려는 순간.

허공에 뜻밖의 메시지창이 나타났다.

[싱글 모드를 모두 클리어하여 DLC상점이 오픈됩니다.]

"...어?"

이게 무슨 소리지?

DLC상점?

한때 콘솔 게임을 즐겼던 내게는 익숙한 명칭이다.

DownLoadable Contents의 약자로, 게임에서 추가적으로 다운받아 사용할 수 있는 콘텐츠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게 갑자기 왜?'

나는 황급히 DLC상점에 관한 설명창을 열었다.

DLC 상점에 관한 설명은 극히 간단했다.

[습득한 포인트로 게임에 도움이 되는 DLC를 구매할 수 있다.]

현재 내가 구매할 수 있는 DLC는 고작 하나였다.

그래, 고작 하나.

난 그것의 이름을 확인한 순간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

2회차 패키지: 게임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여럿의 특전이 해금된다.

가격 1,000,000포인트

==

[다른 DLC는 현재 이용이 불가능합니다. 2회차 시 해금됩니다.]

[현재 보유 포인트: 1,700,000]

"2회차, 패키지?"

말하자면 게임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것이다.

콘솔 게임 같은 부류에선 꽤 흔한 이야기다.

1회차에 얻지 못했던 걸 2회차에 얻는다거나, 혹은 여럿의 특전을 들고 플레이할 수 있는 기능.

'신들은 이걸 알고 있나?'

설마, 알았으면 나를 가만히 내버려 뒀을 리가 없지.

인류 최후의 생존자가 아닌, 인류 멸망에 도달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왜 내게 이런 기능이 생긴 거지?

'설마.'

난 이 '게임'이 시작됐을 때, 한 가지 특성, '싱글 플레이어'를 부여받았다.

여태까지 나는 거기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왜냐면 특성에 어떠한 설명도 없었고, 특별한 효과가 나타난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설마 그 싱글 플레이가 이걸 뜻하는 거였어?"

설마, 모든 게임을 클리어하고 나서야 발동하는 조커라니.

헛웃음이 나왔다.

혹시 미쳐 버린 내가 보는 환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하지만, 지금 내가 보는 게 환상이 아니라 진짜라면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었다.

'내가 이 게임판을 엎어버릴 수 있다는 것.'

나는 손가락을 들었다.

그리곤 DLC상점에 있는 2회차 패키지를 망설임 없이 구매했다.

구매에 필요한 포인트는 100만 포인트.

내가 엔딩까지 클리어하며 모은 포인트는 170만.

후반에는 그다지 쓸 일이 없었던 터라 잔뜩 쌓여 있었다.

[2회차 패키지를 구매하셨습니다]

[2회차 특전이 적용됩니다.]

[2회차 시작부터 DLC 상점에서 다양한 상품의 구매가 가능해집니다.]

메시지가 주르륵 떠오르며, 점차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제발.'

설명이 거짓이 아니기를.

만약 정말로 다시 시작하게 된다면, 내가 저질렀던 잘못된 판단들을 고칠 수 있을 것이다.

이 쓰레기 같은 엔딩도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아.'

몸이 붕 뜨는 감각이 느껴지며, 의식이 점차 멀어졌다.

[2회차에서는 새로운 엔딩에 도전해 보세요.]

[그럼 즐거운 게임 되시기를.]

그 말을 끝으로.

내 1회차는 마무리되었다.

# 2

002. 롤플레잉 게임(1)

"헉!"

나는 거친 숨을 내쉬며 크게 눈을 떴다. 방금 있었던 일 때문인지 전신에 식은땀이 흘렀다.

시간이 흐르고 찬찬히 주위를 살핀 뒤에야 겨우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정말로 돌아왔다."

눈에 들어온 건 내가 오래전에 다니던 대학 캠퍼스였다.

그럭저럭 괜찮은 수준의 대학, 자연경관이 아름다운 캠퍼스로 유명한 곳이었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돌아다니는 걸 보고 있자니 감회가 새로웠다.

아직 '게임'이 시작되기 전의 세계란 지극히 평화로웠다.

"상태창은 아직 열리지 않나."

허공을 손가락으로 두드려 봐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즉, 아직 녀석들이 강림하기 직전이라는 뜻이다.

나는 느긋하게 파란 하늘을 바라보며 벤치에 앉아 있었다.

대체 이런 평화가 얼마만인 건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거기서 뭐해요?"

낯익은 목소리가 귀에 들렸다.

시선을 돌리자 검은 긴 생머리에 어여쁜 여성이 나를 멀뚱멀뚱 바라보고 있었다.

내게도 익숙한 사람이었다.

"한지수."

"네?"

뭐라 설명하기 힘든 감정에 사로잡혔다.

지수는 대학교에 와서 친해진 여학생이었다.

고등학교를 월반했는지 나보다는 한 살 연하였는데, 항상 내가 혼자 있으면 말을 걸고는 했다.

나름 친한 사이였지만 예의가 워낙 바른 녀석이라 마지막까지 내게 말을 놓지는 않았다.

그나마 이름을 튼 게 전부였던가.

"왜 그래요? 제 얼굴에 뭐가 묻었어요?"

"아무것도 아냐."

내가 실없이 대답하자 내 얼굴을 요모조모 살피던 지수가 말했다.

"또 밤 새서 게임하고 피곤한 거죠? 그러다가 이번 학기 학점도 위험할 거예요."

"괜찮아."

"괜찮긴 뭐가 괜찮아요."

왜냐면 어차피 다음 학기는 시작되지 않을 거기 때문이다.

나는 옆에서 종알거리는 지수에게 물었다.

"오늘, 며칠이지?"

"네? 그야 8월 17일이잖아요."

나는 지수의 말에 고개를 숙였다.

8월 17일.

과연 그때 메시지 창 말 그대로였다.

게임을 처음부터 시작하게 해준다더니, 딱 그 첫날로 돌려줄 줄이야.

"왜 그래요? 설마 날짜도 잊고 여태 게임만 한 건 아니겠죠?"

"어, 맞아."

말 그대로 목숨을 건 게임을 했다.

결말까지 방금 보고 온 참이다.

비록 그 결말은 나 빼고 모든 사람이 다 죽는 배드 엔딩이었지만.

"건강에 안 좋으니까 어느 정도는 신경 쓰면서 해요."

"그래."

지수는 남을 챙기기 좋아하는 성격이었지. 대학에서 아싸 노선을 타던 내게 다가와서 말을 걸어준 것도 지수뿐이었다.

내게는 상당히 고마운 존재였다.

"하여튼...."

지수는 내게 뭔가를 더 말할 생각이었던 모양이었지만 누군가를 발견했는지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자리를 옮겨야 할 것 같아요."

시선의 끝에 있는 건 상당히 잘생긴 얼굴의 남학생이었다.

이름은 나도 익히 알고 있는 녀석이다.

아마 이종현이었나.

지수에게 추근거리고 나를 게임폐인이라고 무시하던 녀석.

'저 녀석은 어떻게 됐더라?'

아마 내 기억으로는 이곳에서 벗어난 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첫 번째 스테이지도 클리어하지 못했을 확률이 높았다.

"아니, 굳이 이동할 필요 없어."

"어, 왜요? 만나기 싫어하지 않았나요?"

그랬나? 사실 지금은 별다른 감정도 없다.

이때의 나는 말 그대로 구제불능이었다. 누군가에게 무시를 당해도 납득이 갈 수준이었지.

뭐, 대부분은 가물가물해서 잘 기억나지도 않지만.

지수는 고운 아미를 찡그리며 팔짱을 끼었다.

"으음, 그래도 제가 싫어요. 혹시 저한테 말 걸면 귀찮아지니까 이동하는 게 좋겠어요."

그렇게 이야기한 지수는 어디로 이동하는 게 좋을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다 어느 시점에서 딱 멈췄다.

"...저게 뭐죠?"

멍하니 중얼거리는 그녀의 목소리.

나는 그 말에 기시감을 느꼈다.

아니, 내가 실제로 체험했었다는 점에서 기시감과는 조금 다를지도 모른다.

'그래, 이 말이 시작이었어.'

그날도 그랬다.

전날 밤 새서 게임하고 온 뒤, 벤치해서 휴식하는 내게 지수가 다가왔다.

그리고 몇 마디를 주고받다가, 지수는 이렇게 말했지.

"저거 뭐예요? 무슨 영화촬영 같은 건가요?"

그래, 이렇게.

캠퍼스 한쪽 구석에서 녹색 형상을 한 괴물들이 기어 나왔다.

그리곤 걸어 다니는 사람들을 보며 킬킬 거리고 웃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런 녀석들을 보고 뭔가 싶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우와, 이거 뭐야?"

"사람이 변장한 거 아냐?"

"하지만 이렇게 작은 사람이 어디 있어?"

저마다 한마디씩 내뱉으며 녹색 괴물들에게 말했다.

걔 중에는 손을 뻗으며 다가가는 이들도 있었다.

"우리도 가요."

지수가 손을 끌었다.

예전에는 나도 이 손에 이끌려 저 괴물들을 보러 갔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기다려."

"네?"

"조금만 기다리면 알게 될 거야."

웅성거리며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작은 초록색 괴물의 모습은 금방 사람들에게 뒤덮여 보이지 않았다.

"궁금한데...."

지수는 궁금한지 목을 쭉 빼고 그런 사람들 사이로 초록색 괴물을 보려 했다.

하지만 그런 지수의 호기심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붉은색 액체가 바닥을 적셨기 때문이다.

"어?"

아연한 지수의 목소리와 함께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기 시작했다.

"꺄아아악!"

"사람이 찔렸어! 저거 뭐야?!"

초록색 괴물, 흔히 고블린이라 부르는 몬스터의 손에는 피가 묻은 녹슨 검이 들려 있었다.

고블린의 앞에는 칼에 찔린 남성이 고통으로 꿈틀거리고 있었다.

"저, 저게 뭐예요? 정말로 괴물이에요?"

지수는 그렇게 말한 후, 내 팔을 잡아끌었다.

"뭔가 이상해요, 어서 도망쳐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낄낄 거리는 고블린 주위로 대략 열이 넘는 고블린들이 점차 기어 나왔다.

기어 나온 고블린들은 주변의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습격했다.

갑작스런 사태에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하지만 그건 악수였다.

주로 약자를 노리는 고블린에게 있어, 등을 돌리는 짓은 죽여 달라는 것과 같은 의미니까.

"키익, 케켁."

우리에게도 한 마리의 고블린이 접근하고 있었다.

녹슨 칼을 들고 우리를 죽이기 위해서.

고블린에게 살인은 단순한 사냥이 아닌 유희다.

그렇기에 고블린들은 사람을 죽일 때 웃는다.

"세한 오빠!"

세한, 정말 오랜만에 듣는 내 이름이었다.

지수는 가만히 있는 내 앞을 지키듯 가로막았다.

역시 기억에 있는 모습이다.

멍하니 얼어붙어 있던 나를 지수는 껴안아서 구해줬다.

지수의 새빨간 피가 내 몸을 적셨지.

'그래, 맞아.'

내가 처음으로 본 지인의 죽음은 지수였다.

칼에 찔려 죽어가는 주제에 내게 도망가라고 말하던.

'그런 지수를 난 버리고 도망갔어.'

찌질한 새끼.

절로 욕설이 흘러나왔다.

나는 가만히 앉아있던 몸을 일으켰다

.

이제, 메시지가 들릴 때였다.

[곧 게임이 시작됩니다.]

[시작에 앞서 동기화를 시작합니다.]

2회 차가 시작을 알리는 소리에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벌벌 떨며 겁에 질려있던 김세한은 이제 없었다.

나는 한번 세계의 끝을 본 싱글 플레이어다.

'이번에는 달라.'

[1회차 클리어 특전으로 DLC구매가 가능해집니다.]

[1회차 클리어 특전으로 1회차에 남은 포인트가 계승됩니다.]

[1회차 클리어 특전으로 '커뮤니티'에 접속권한을 얻었습니다. 동기화가 완료되면 이용해 주세요.]

여러 개의 메시지가 스쳐지나갔다.

난 그 모든 걸 무시했다.

그보다 지금 내 앞에서 달려드는 고블린을 처리하는 게 더 중요했으니까.

'이번에는 결코 전처럼 되지 않아.'

간신히 얻은 2회차의 기회였다.

나는 결코 같은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을 것이다.

그게 2회차를 시작하는 나의 다짐이었다.

"캬악?!"

내가 갑자기 달려들자 고블린은 당황한 모습으로 날카로운 울음소리를 내었다.

목을 향해 휘두르는 녀석의 검을 피한 후, 그대로 달려들어 팔을 비틀어 꺾었다.

우드득!

"끼에엑!"

팔이 비틀리자, 검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이 풀렸다.

지면으로 떨어지는 검을 낚아챈 나는, 그것을 그대로 고블린의 목에 쑤셔 넣었다.

푸욱!

"후우."

살을 찢고 들어가는 감각.

본래 이 시기의 나라면, 고블린을 찌르는 순간 구토했을 시기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무감각했다.

[스테이지 최초로 고블린을 처치하셨습니다.]

[보너스로 300포인트가 지급됩니다.]

'좋아.'

포인트란 능력치를 올리거나 다양한 아이템을 구매할 때 필요한 자원이다.

이렇게 퀘스트를 클리어하거나 특정한 업적을 달성하면 얻는 경우도 있었다.

또는 신의 아바타가 되어 후원을 받든가.

'잠깐만.'

나는 고블린을 달려들 때 들려왔던 메시지를 떠올렸다.

'1회차에 남은 포인트가 계승된다고 하지 않았나?'

2회차 패키지를 사고 남은 건 70만 포인트.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상태창을 열었다.

[이름: 김세한]

[보유 포인트: 700300]

"미친."

절로 욕설이 흘러나왔다.

상태창에 표시된 포인트는 전생에 쓰고 남은 70만 포인트 그대로였다.

맙소사, 70만 포인트면 능력치를 현재 올릴 수 있는 최대한도로 모두 올려도 남을 양이었다.

물론, 능력치는 메인 퀘스트마다 올릴 수 있는 한도가 정해져 있지만, 70만 포인트면 매번 최대치로 찍어도 한참동안 넉넉히 사용할 수 있었다.

'또는 포인트 상점에서 필요한 아이템을 펑펑 구매하든지.'

어느 쪽이나 상당한 혜택이다.

하지만....

'능력치는 섣불리 올려선 안 되겠지.'

능력치를 최대로 올리게 되면 다른 플레이어들과 차이가 크게 두드러질 것이다.

특히 이제 막 게임이 오픈한 지금이라면 더더욱.

그럼 신과 GM은 나를 이상하게 생각하고 경계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메인 퀘스트에도 영향이 올 것이며, 앞으로 뭔가를 할 때에도 큰 제약에 걸릴 게 분명했다.

"세, 세한 오빠?"

포인트의 사용 유무에 대해 고민하고 있으니, 지수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저기 그건 뭐예요? 지금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죠?"

지수의 시선은 나와 내가 죽인 고블린을 보고 있지 않았다.

왜냐면 고블린은 이 한 마리만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비켜! 비키라고!!"

"이 괴물들은 뭐야!"

평화롭던 캠퍼스가 아수라장이 되는 데 불과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비명소리와 도망치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을 쫓는 작은 괴물들의 모습은 지독하리만치 현실성이 떨어졌다.

나는 지수의 말에 굳이 대답해 주지 않았다.

어차피 내가 설명하지 않더라도 곧 알게 될 테니까.

[동기화 완료.]

[여러분은 신들의 게임에 초대되셨습니다.]

"어어?"

지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수뿐이 아니다. 고블린에게 쫓겨 도망가던 사람들도 갑작스런 알림에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이제부터 여러분은 게임의 플레이어가 되어 메인 퀘스트를 모두 클리어해야 합니다.]

[클리어를 실패하게 되면 세계는 멸망하게 됩니다.]

[자세한 내용은 '도움말'을 참조해 주세요.]

메시지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물론 사람들이 그런 일방적인 메시지를 납득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 그게 무슨 소리야?! 게임이라니!"

"으아악, 살려줘!"

"이런 시발!"

주변은 아수라장이었다.

갑작스런 메시지에 소리를 지르는 사람, 고블린과 맞서 싸우는 사람.

"세한 오빠.... 지금 이게 무슨 소리예요?"

지수가 멍한 얼굴로 내게 중얼거렸다.

아마 똑똑한 그녀라면 지금 메시지를 듣고 어느 정도 상황을 파악했을 것이다.

내게 굳이 질문을 하는 건, 그저 확신이 필요했을 뿐이리라.

"방금 들었잖아? 말 그대로지."

나는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어딘가에 계신 높으신 분들이 우리의 세계를 게임판으로 만들었다는 이야기야."

"게임판.... 이라니요?"

지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그래, 보통은 그렇지.

도저히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해하지 못하면 죽는다.

그런 세계가 되어버렸으니까.

"갑자기 들리는 이상한 소리. 허공에 나타나는 알림창, 보이지 않아?"

"보, 여요."

느릿하게 머리를 끄덕이며 지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내가 본 첫날의 풍경.

그것을 이번엔 지수도 함께 보고 있었다.

# 3

003. 롤플레잉 게임(2)

지수는 내 말에 생각을 정리하는 듯, 조용히 서 있었다.

나는 그런 지수를 바라보다가 주변을 살폈다. 왜냐면 슬슬 그것이 나타날 때가 됐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왔군.'

포로롱.

파란 하늘 아래로 작은 눈알이 허공에서 돌아다니고 있었다.

문제는 그게 한두 개가 아니라는 점이다.

무척이나 기괴한 모습이지만 내게는 익숙한 광경이었다.

'옵저버.'

저 눈알들의 명칭이다.

GM과 신들의 눈.

저 눈을 통해 게임에 참여하는 신들은 플레이어들의 행동을 유심히 지켜보고 직접 참여할지, 혹은 계속 지켜볼지 판단하게 된다.

옵저버는 GM이 직접 조종하는 옵저버와, 신들이 직접 포인트를 사용해서 움직일 수 있는 공용 옵저버. 그리고 '아바타'를 선택한 신만이 사용할 수 있는 개인 옵저버로 나뉜다.

현재 이곳에 있는 옵저버들은 모두 GM이 조종하는 옵저버였다.

'한국 지역 GM은 아카터스였나?'

GM들 사이에서는 그다지 뛰어나지도, 나쁘지도 않은 위치에 있던 GM이다.

'옵저버가 왔으니 서버에 녀석들이 곧 들어오겠군.'

생각하기 무섭게, 허공에 알림창이 나타났다.

[GM 아카터스가 관리하는 한국 서버가 오픈하였습니다.]

[현재 53명의 유저가 참여 중입니다.]

[이제부터 '커뮤니티'에 접속할 수 있습니다.]

53명.

내 기억과 동일한 숫자였다.

참고로 '유저'란 게임에 참여하는 '신'을 뜻한다.

우리, 플레이어들을 선택하고 게임을 즐기는 이들.

그들은 옵저버를 통해 게임을 지켜보며, 마음에 드는 플레이어를 발견하게 되면 자신의 '아바타'로 삼는다.

아바타가 된 플레이어는 유저, 즉 신의 특성을 계승할 수 있게 되며, 신으로부터 포인트를 후원받을 수 있게 된다.

포인트는 능력치나, 각종 아이템. 그리고 스킬 강화에 필요한 중요한 자원이니 그걸 신으로부터 지원받을 수 있는 아바타는 다른 플레이어들과 큰 차이가 났다.

'더군다나 아바타가 되지 못한 플레이어는 NPC로 취급되니 다들 신들의 아바타가 되기 위해 필사적이었지.'

물론 나도 그중 하나였다.

시작이 그다지 좋지 않았던 나는 더욱 필사적으로 강해지는 것에 집착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한 신의 아바타가 될 수 있었지만, 그게 올바르지 않은 선택이었다는 걸 너무 늦게 깨달았다.

'근데.'

나는 허공에 떠 있던 알림을 지우고 맨 아래에 남아 있는 알림을 유심히 보았다.

'커뮤니티에 접속할 수 있다는 말은 뭐야?'

아까 고블린과 싸우기 직전 들렸던 메시지 중에 커뮤니티 접속 권한을 얻었다고 했었지.

'사용법은 간단하네.'

알림창 귀퉁이에 있는 도움말을 확인하자, 대략적인 접속 방법이 나왔다.

'커뮤니티 접속이라 말하거나, 상태창에 있는 아이콘을 클릭하면 되는 건가.'

상태창을 확인해 보면 '커뮤니티 접속'이라는 아이콘이 보였다.

"세한 오빠."

커뮤니티 접속 스킬에 대한 설명을 자세히 읽고 있으니, 어느덧 생각을 정리한 지수가 말을 걸어 왔다.

"왜?"

"납득하기는 어렵지만 조금은 알 것 같아요. 저런 괴물들이 갑자기 현실에 나타날 일은 없으니까요. 더군다나 이런 알림창도...."

지수는 손가락을 들어 허공을 훑었다.

아마 알림창을 지우는 행동이리라.

"그리고 머릿속에 들리는 이상한 소리도 그 탓이죠?"

"아마 그렇겠지. 현실에서 이런 알림창이 보이고, 메시지가 들릴 리가 없잖아?"

"그렇죠."

지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더 이상 내게 묻지 않았다.

아마 그녀 나름대로 이 상황을 받아들이려고 하는 건지도 모른다.

'침착하네.'

그저 이런 상황에서도 다른 사람들처럼 패닉에 빠지지 않는 것만으로 대견하다고 생각이 들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블린들에게 도망치기 바빴고, 미친 사람처럼 소리칠 뿐이었으니까.

참고로 우리들에게 다가오는 고블린은 없었다.

아마 내가 처음에 고블린 한 마리를 순식간에 죽인 탓일 거다.

가만히 있는 나를 굳이 건드리기보다는 도망치는 사냥감들에 집중하려는 거겠지.

지수 역시 그 사실을 아는지 내게 한층 바싹 붙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근데, 메인 퀘스트를 클리어하라는데, 메인 퀘스트는 뭘까요?"

"곧 알려주지 않을까?"

유저들이 들어왔으니 싫다고 해도 곧 알림창이 뜰 게 분명했다.

아니나 다를까, 생각하기 무섭게 허공에 커다란 알림창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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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인 퀘스트 1: 대학교 캠퍼스를 탈출해라!

지금부터 당신을 노리는 수많은 고블린들이 습격해 올 것이다.

당신은 그들을 피하거나, 처치하여 성공적으로 대학에서 탈출해야 한다.

난이도 E 제한시간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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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인 퀘스트가 시작하였습니다, 플레이어마다 달성도에 따라 보상이 달라집니다.]

포로롱,

알림창이 뜸과 동시에, 여러 개의 옵저버가 나타나 사방으로 흩어졌다.

신들이 좋아할 만한 장면을 촬영하기 위해서다.

"세한 오빠 저, 저건?"

지수도 그제야 옵저버를 발견했는지 손가락을 들어 가리켰다.

"설명은 나중에 해줄게, 우선 움직이자."

"움직인다고요? 어디로요?"

당황한 지수가 내게 물었지만, 그런 지수의 질문은 사방에서 들려오는 비명에 깔끔히 묻혔다.

"꺄아아악! 살려줘!"

"뭐야, 시발!"

퀘스트의 시작을 알리는 알람이 들려오는 동시에, 풀숲에서 숨어있던 고블린들이 우르르 튀어나왔다.

여태까지는 몇 마리가 뛰어다녔다면, 단번에 그 숫자가 수십 마리로 불어났다.

"키에엑!"

고블린들은 저마다 뭉툭한 칼을 들고 사람들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휘둘렀다.

촤악!

"아아악!"

새빨간 피가 바닥을 적셨다.

"달려!"

"네, 네!"

숫자가 불어나자 우리에게도 고블린이 무리 지어 달려왔다.

나와 지수는 고블린들을 피해 전속력으로 달렸다.

다른 사람들은 끼리끼리 뭉치기 시작했지만, 우리는 오히려 최대한 사람이 없는 방향으로 달리고 있었다.

뒤에선 우리를 뒤쫓아 오는 고블린 몇 마리가 눈에 들어왔다.

"저기 다른 사람들은...."

지수가 불안한 얼굴로 내 손을 꽉 쥐었다.

뭐라 말을 잇지 못하는 그녀에게, 나는 천천히 발을 멈추며 말했다.

"괜찮아."

"네?"

"아직은 그다지 사상자가 나오지 않을 거야. 고블린은 성인 남성과 비슷한 근력을 가지고 있으니까."

더불어 지금은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져 있어 무차별적으로 공격할 뿐이지, 사람들이 뭉치기 시작하면 잠시 소강상태에 이를 것이다.

'홉 고블린이 등장하기 전까지.'

홉 고블린은 이 고블린들을 이끄는 대장격 몬스터다.

스테이지 보스라고 할 수 있다.

몬스터 웨이브가 몇 번 반복되면 홉 고블린이 등장하게 되고, 그가 이끄는 고블린들이 뭉쳐 있는 사람들을 단번에 쓸어버릴 것이다.

'그러니....'

나는 재차 한 발짝 앞으로 걸어 들어갔다.

[안전지대에 진입했습니다.]

"어?"

갑작스러운 메시지에 지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안전지대?"

"이게 게임이라면 몬스터가 들어올 수 없는 구역도 존재하겠지. 아마 이곳이 그 안전 구역인 모양이야."

"아.... 그렇군요."

사실 전생에 눈물을 질질 짜며 도망치다가 우연히 들어왔던 장소였다.

그다지 기분이 좋지는 않았지만, 우선은 잠시 시간을 때울 곳이 필요했다.

"키에엑?"

"키엑?"

쫒아온 고블린 무리가 안전지대에 들어온 우리를 향해 불쾌한 울음소리를 내었다.

그리곤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다른 방향으로 달려갔다.

"살았다...."

안전지대를 둘러싸고 있던 고블린 무리에 바싹 얼어 있던 지수는 그제야 긴장감이 풀린 듯 풀썩 주저앉았다.

"우선 여기서 조금 시간을 보내다 움직이자."

"아, 네."

지수는 힘없이 웃으며 답했다.

사실 그녀와 달리 나는 전혀 지치지 않았지만, 우선 제대로 준비를 하고 움직일 생각이었다.

거기다.

'아직은 지켜보는 눈이 있으니까.'

나는 풀숲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곳에는 작은 눈동자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아까 우리가 달릴 때부터 따라온 옵저버다.

아마 사람들과 별개로 움직이는 우리를 보고 뭔가 싶어 쫓아온 거겠지.

'좀 꺼져라, 꺼져.'

옵저버가 우리를 관찰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옵저버를 통해 우리 플레이어들을 지켜보는 신들의 재미를 위해서다.

즉, 재미가 없으면 보지 않는다.

게임을 켜두고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다면 굳이 볼 가치가 없겠지.

쉬익.

30분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자, 옵저버는 부르르 떨리더니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예상보다도 빠른 시간이다.

'참을성 없긴.'

저래서 아카터스는 탑티어 GM이 되지 못하는 거다.

인내심이라는 게 더럽게도 없었다.

'나야 좋지만.'

옵저버가 완전히 사라진 걸 확인한 나는 상태창을 열었다.

'우선 DLC 상점부터 확인하는 게 좋을까? 아니면....'

커뮤니티에 접속해 볼까.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커뮤니티 접속 스킬을 사용하기로 마음먹었다.

우선 '커뮤니티'라는 게 무엇인지 정확히 확인하고 넘어가는 게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접속."

시동키를 중얼거리자, 갑자기 허공이 번쩍였다.

파아앗!

"헉?!"

순간 놀라서 헛바람을 들이켰지만, 옆에 조용히 있는 지수의 반응을 보면 아마 내게만 보인 모양이다.

'아씨, 놀래라.'

벌렁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자, 눈앞에 커다란 알림창이 보였다.

아니, 알림창이라기 보단 이거....

'웹 브라우저?'

마치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와 같은 형식이다.

[새롭게 오픈한 롤플레잉 게임 장소로 '지구'가 선택되었습니다.]

가장 눈에 띄는 문구는 그거다.

마치 새로운 게임이 오픈해서 광고하는 것처럼 커다란 배너가 눈에 들어왔다.

'이것 봐라?'

커뮤니티가 무엇인지 대략 짐작되기 시작했다.

배너를 열고 들어가자, 한 웹사이트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것은 새롭게 오픈한 온라인 게임 '지구'의 사이트였다.

'자유게시판, 공략 게시판... 거기다 채팅방까지.'

평범한 온라인 게임 커뮤니티 사이트 같은 구성이었다.

다른 점이라면 이용자가 인간이 아니라 '신'이라는 점일까.

자유게시판을 훑어보면 '신'들이 올린 글 몇 개를 볼 수 있었다.

뭐, 아직은 게임이 오픈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대부분은 '오픈을 축하합니다.'와 같은 의례적인 글뿐이었다.

'그렇다면 채팅방은 어떻지?'

자유 게시판이나 공략 게시판에는 현재 올라온 글이 없었기에 내 관심이 향한 건 채팅방이었다.

나는 조금 망설이다가 채팅방을 클릭했다.

[익명48번 손님이 입장하셨습니다.]

채팅방에 들어가자 익숙한 문구가 나타났다.

'역시 사용 방법은 보통의 인터넷 채팅과 다를 게 없어.'

대략적인 UI나 사용 방법도 같았다.

허공에 나타난 좌판을 누르면 글자가 입력되는 방식이었다.

그리스대장: 방금 들어온 익명은 누구냐. 인사도 없네.

순간, 딱 봐도 나를 저격하는 글에 순간 가슴이 철렁였다.

혹시 들어오면 신원을 밝혀야 되는 건가?

한쪽눈미아: 어휴, 저 꼰대새끼 또 저런다. 막 오픈한 게임에 바로 아이디 만드는 폐인이 몇이나 된다고.

그리스대장: 자기소개하냐?

나는 그들의 대화에 흘러나올 뻔한 욕을 간신히 삼켰다.

'아씨, 놀라게 할래?'

이어서 올라온 채팅은 그저 실없는 이야기일 뿐이었다.

순간 놀랐던 게 억울해져서 뭐라고 한마디 적을까 했지만 우선은 조용히 있기로 했다.

애초에 익명의 수가 워낙 많았기에 내게 관심을 가지는 신은 없었다.

익명22: 다들 어디 서버에 참여 중이세여? 전 지금 미국 서버인데.

번개보다빠름: 나돈데.

익명62: 난 중국.

그리스대장: 뭐야, 한국 서버 없음?

갑자기 언급된 한국서버라는 말에 나는 눈을 부릅떴다.

하지만 채팅방에 참여한 신들 중에서 한국 서버를 관람하던 자는 없는지 반응은 지극히 차가웠다.

한쪽눈미아: 거기 GM 아카터스 아니냐? 걔 퀘스트 졸라 평범하게 내자너.

그리스대장: 근데 얘가 은근 괜찮은 플레이어들이 걸리더라고. 아까도 귀여운 여자애 있던데.

한쪽눈미아: 너는 아바타를 외모로 고르냐?

그리스대장: 난 남캐는 절대 안 키운다.

한쪽눈미아: 하이고, 첫 번째 메인 퀘스트 끝나기도 전에 아바타 고르게?

그리스대장: 그럴까 했는데 어떤 남자새끼가 옆에 있더라. 여자애 끌고 한참 도망치더니 안전지대에 들어갔음.

게임은템빨: 벌써 안전지대에? 그걸 어떻게 발견했데?

그리스대장: 아마 얻어걸린 거 같다. 근데 아무것도 안 하고 있어서 옵저버가 이동해 버림, 시벌.... 간만에 땡겼는데.

나는 거기까지 채팅을 읽다가 이내 창을 닫았다.

더 이상 얻을 정보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방금 그건 아마 우리 이야기겠지.'

채팅방에 참여하고 있는 게 게임에 참여하는 신의 전부는 아니겠지만, 대략적인 여론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옵저버는 완전히 우리에 대해 관심을 떨어트린 것 같고.'

만약 근처에 옵저버가 있다면 저 그리스대장이라는 신이 언급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나쁘지 않은데?'

나중에 게임이 좀 진행되면 커뮤니티를 통해 다양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아바타'를 선택하는 시점이 오면 더더욱 그렇겠지.

'정기적으로 확인을 해야겠어.'

더욱 중요한 점은 내가 거기다 글을 쓸 수도 있다는 점이다.

이건 굉장한 메리트였다.

신들 사이에 흐르는 정보를 조작할 수 있다는 말이니까.

'커뮤니티는 우선 이정도만 확인해두고, 다음은....'

커뮤니티를 확인하느라 잠시 뒤로 미뤄뒀던 DLC 상점을 열었다.

나는 진지한 얼굴로 판매 목록을 살폈다.

커뮤니티도 중요하긴 했지만, 사실 정말 중요한 건 이쪽이었다.

# 4

004. 롤플레잉 게임(3)

진열되어 있는 물건들은 대부분 2회차를 편하게 보낼 수 있는 패키지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성장 부스트 패키지. 행운의 채집 패키지....'

아직 전부 해금된 건 아니었는데, 아마 메인 퀘스트를 클리어하면 차차 해금되는 모양이었다.

'이게 중요한데 아직 해금이 되지 않았네.'

눈에 들어온 건 '1회차 계승 패키지'였다.

아직 해금이 되지 않았지만 명칭만으로 대략 어떤 패키지인지 알 것 같았다.

'단지 전부 계승이 가능한지 일부만 가능한지 모르겠지만.'

사실 전부는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일부만 계승할 수 있어도 어마어마한 이점인 건 변하지 않았다.

'쩝.'

나는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며 다른 품목을 쭉 훑었다.

'그 외에 특별한 품목이라고 한다면....'

해금되지 않은 건 어차피 구매할 수 없으니, 구매할 수 있는 목록을 우선적으로 훑어보았다.

'응?'

그중 눈에 띄는 패키지가 하나있었다.

'멀티 플레이 패키지?'

[1회차에는 싱글 플레이를 했던 당신! 2회차에선 동료들과 즐겁게 플레이하세요!]

...뭔 소리야.

막연한 설명에 순간 이해하지 못했지만, 뒤이어 적혀 있는 패키지 구성에 나는 신중히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다.

'말하자면 '파티'를 하는 건가. 멀티 플레이란 그런 말이군.'

파티를 하게 되면 파티장인 나와 계약관계가 되며 서로 배신할 수 없게 된다.

정해진 상한은 최대 다섯 명까지.

파티장은 파티원을 강퇴할 수 있지만, 파티원은 불가.

'스킬 숙련 보너스에, 스킬 공유 등 다양한 혜택 제공이라.'

확실히 눈에 띄는 구성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무려 가격이 2만 포인트.'

내가 70만 포인트를 보유하고 있어서 망정이지, 보통은 구매하기 힘든 가격이다.

"모두 이리 오세요!"

"뭔지는 모르겠지만, 뭉치면 괜찮을 겁니다!"

"이 괴물새끼들을 모두 조지죠!"

내가 DLC 상점을 훑어보는 동안 사람들이 하나둘 뭉치기 시작했다.

워낙 사람들과 떨어진 장소로 이동한 탓에 말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지만 말이다.

"이 개새끼들 죽어!"

"어디 무기, 무기 좀! 아악!"

고블린들이 들고 있던 무기를 탈취해 싸우는 이들, 피를 흘리며 쓰러진 이들을 독려하는 사람들.

첫 번째 메인 퀘스트답게 등장하는 몬스터는 오로지 고블린뿐이었기에 가능한 대응이었다.

그 광경을 보던 지수가 물었다.

"우리는 계속 이곳에 있을 거예요?"

"아니."

이제 슬슬 움직여야 할 때다.

대부분의 옵저버는 사람들이 뭉쳐 있는 저 곳을 주시하고 있겠지.

아니면 빠져나가기 위해 고블린들과 싸우는 이들이나.

"그럼 다시 이동할 테니까. 잘 따라와."

"네."

지수는 내게 이러쿵저러쿵 묻지 않고 묵묵히 따라왔다.

'나야 편하긴 한데....'

덕분에 설명할 말도 준비해 뒀지만, 필요가 없어졌다.

사실 이 상황에서 가장 빠르게 적응하고 있는 건 지수가 아닐까 싶을 정도다.

'그래도 계속 물어보는 것보단 이쪽이 낫지.'

나도 아무 생각 없이 지수를 데리고 다니는 건 아니다.

이번 첫 스테이지 클리어에서는 지수에게도 부탁할 것이 있었다.

'우선 이걸 사고.'

나는 DLC상점에서 하나의 패키지와 아이템 두 개를 구매하고 상점을 닫았다.

그리곤 내 말을 기다리고 있는 지수에게 손에 들고 있던 녹슨 검을 내밀었다.

"자."

"이건 아까 세한 오빠가 고블린에게서 빼앗은 무기잖아요? 이걸 저한테 주면 어떡해요!"

"나는 또 뺐으면 되거든."

태연한 내 말에 지수가 벙쪘다.

"정말 세한 오빠 맞아요? 원래 좀 이상한 곳이 있긴 했지만...."

"이상한 곳이 있다니?"

"아, 아니,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예요."

평소에 대체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던 건지 조금 궁금했다.

지수는 내가 더 묻기 전에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아무튼 알겠어요. 잘 사용할게요."

"녹슨 검이라 내구는 그리 좋지 않을 거야. 되도록 호신용으로 사용해."

"네."

손에 무기를 쥐자, 조금 긴장되기 시작하는 듯 지수의 얼굴이 굳었다.

"그리고 이것도 받아."

"이건 또 뭔가요?"

나는 지수에게 녹색 브로치를 내밀었다.

지수는 그걸 잠시 바라보다가 물었다.

"혹시 아이템 같은 거예요? 어디서 찾았어요?"

"고블린을 잡고 얻었어. 근데 아이템이라는 건 어떻게 안 거야?

"게임이면 역시 아이템 같은 게 있잖아요. 게임을 자주 하지는 않지만 세한 오빠에게 들은 지식이 나름 있다고요."

지수는 그렇게 말하며 가슴을 쭉 폈다.

꽤나 의기양양한 얼굴이다.

'사실 고블린을 잡고 나온 게 아니지만.'

방금 DLC 상점에서 1만 포인트를 주고 구매한 브로치다.

두 개를 샀으니 2만 포인트.

상당한 지출이었지만 아이템의 효과를 생각하면 값싼 지출이었다.

==

VIP 브로치: 상처의 회복속도가 빨라진다. 포인트 습득량이 20퍼센트 상승한다.

==

그다지 별거 없는 설명이다.

하지만 효과는 탁월했다.

'상처의 회복만으로 2만 포인트의 가치가 있지.'

현실이 게임이 되었다지만, 죽으면 끝이다.

그만큼 지속적으로 상처를 치유하는 VIP브로치는 가치가 있었다.

덤으로 포인트 습득량이 20퍼센트 상승하는 것도 꿀이지.

'이런 아이템을 전생에 쓸 수 있었다면.'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았다.

일반적인 플레이어들이 이용하는 포인트 상점이 존재하긴 했지만, DLC상점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물건만 판매했다.

사실상 온라인 게임을 하면 마을 장비 상점에서 판매하는 상점표 아이템 정도가 끝이었으니까.

"착용했어요."

"좋아, 이쪽이야."

나는 지수가 VIP 브로치를 착용한 걸 확인한 다음, 오른편으로 손짓하며 이동했다.

주변에 돌아다니는 고블린들을 피해 우리는 조용히 이동했다.

'포인트로 능력치를 전부 찍으면 고블린을 모조리 죽이는 것도 가능하겠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랬다가는 옵저버를 떨쳐냈다고 해도 금방 눈에 띌 게 분명했다.

이제 막 오픈한 게임의 플레이어가 그런 일을 벌인다면 분명 의심과 경계를 살 것이다.

'최소한의 포인트 투자로 클리어해야 해.'

초반만 조심하면 된다.

난 그렇게 다짐하며 길을 나아갔다.

"저기 괴물이 있어요."

지수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힘을 10포인트 구매.'

아직 초기라 능력치 1포인트를 구매하는데 드는 포인트는 10포인트에 불과했다.

내게는 껌값이나 마찬가지.

휙!

나는 바닥에 떨어져있는 돌맹이를 주워 고블린의 경추를 노렸다.

녀석이 우리를 발견하기 전에 즉사시킬 생각이었다.

빠각!

"칵!"

뼈가 부러져나가는 둔탁한 소리가 나며 고블린이 그대로 쓰러졌다.

"와."

설마 돌을 던져 고블린을 즉사시킬 줄은 몰랐는지, 지수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세한 오빠, 어떻게 하면 돌을 그렇게 던져요? 전생에 다윗이었어요?"

"너도 연습하면 금방 해."

"진짜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던지기를 반복하다보면 투척스킬이 생길 테니 틀린 말은 아니다.

"근데 대학을 빠져나가려면 이쪽 방향이 아니지 않아요?"

"맞아."

"그럼?"

"빠져나가는 건 어렵지 않지만, 그렇게 되면 남아 있는 사람들은 모두 죽을 테니까."

지수가 고개를 기울이며 잠시 내 말이 무슨 뜻인지 고민하는 모양이었다.

그리곤 설마, 하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세한 오빠. 다른 사람들을 도우려는 거예요?"

마치 내 행동이 예상외라는 발언이다.

하지만 나는 도리어 그런 지수의 말이 의외였다.

아까 도망칠 때만해도 사람들을 안쓰럽게 보더니, 생각이 정리된 지금은 그저 냉정하기만 했다.

'지수가 나를 제외한 타인과 벽을 두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지수는 나름 친구도 있고 사교적인 성격이었다.

근데 이렇게 냉정하게 구해야 할 사람, 아닌 사람을 구분하고 있었을 줄은 몰랐다.

뭣보다 전생에서 지수는 나를 구하기 위해 대신 희생했던 인물이었기에 더더욱 그랬다.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지수가 어떻게 사람들을 나누는지 궁금하긴 했지만, 나는 지수의 의문을 간단히 해소시켜 주기로 했다.

"맞아. 난 거기에 있는 사람들도 죽게 하지 않을 생각이야."

"왜요? 세한 오빠는 특별히 다른 사람을 도우려는 성격이 아니잖아요."

뭐, 그렇긴 했다.

예전의 나는 그랬지.

'이득이 될 것만 취하고, 누가 죽든지 말든지 오로지 살아남는 것만 생각했었다.'

그때 내 행동이 나쁘다고 생각하거나, 잘못됐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하지만, 이젠 그렇게 사는 게 신물이 나거든.

거기다 지금 하려는 행동이 그저 자원봉사에 불과하냐면 그건 아니다.

난 지수에게 조용히 입을 열었다.

"잘 생각해. 이건 게임이야."

"그게 무슨 뜻이에요?"

"아까 메인 퀘스트 알림창이 떴을 때 나와 있었잖아. 플레이어마다 달성도에 따라 보상도가 달라질 거라고."

"아, 그랬던 것 같아요."

지수는 머리가 좋은 만큼 한번 들은 이야기는 쉽게 잊지 않는다.

덕분에 내 설명도 무척 편했다.

"그렇다면 달성도라는 건 어떻게 올리는 걸까?"

"그건...."

지수는 고민하는 얼굴이 되었다.

그런 지수에게 나는 가볍게 답했다.

"간단해. 업적을 달성하는 거야."

"업적이요?"

"그래, 간단히 설명하자면 퀘스트마다 기여도라는 게 있어. 최종 목표는 하나지만 거기까지 도달하는 방식에 따라 보상이 달라지지."

"도달하는 방식...."

"그래, 간단히 말하자면 지금 우리가 하는 일은 다른 이들을 탈출시키는 데 도움이 되는 일이야. 다른 이들은 하지 못한 일. 그리고 그들이 했어야 할 일을 우리가 하게 돼. 그러면 '게임'인 이상 우리에게 어떠한 형태로든 보상이 돌아올 수밖에 없어."

이건 현실이지만 현실이 아니다.

신들의 게임판의 위에 있는 이상, 철저하게 세상은 게임의 룰에 따른다.

지수는 내 말을 완전히 납득하진 못한 것 같았지만 어느 정도는 이해했는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렇군요. 이해했어요."

덤으로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나는 최대한 사람들이 많이 남아 있는 편이 안심이 되었다.

홀로 살아남아봤자 그저 고독할 뿐이라는 걸 전생에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역시 걱정이네요."

나는 수심이 깃든 지수에게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걱정 마.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니까."

예전의 나였다면 무리였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기왕 2회차이니.'

올 클리어를 노리는 것도 나쁠 건 없었다.

저벅, 저벅.

우리는 고블린들을 피해 조심스럽게 이동했다.

간혹 마주치게 되면 싸우기도 했지만 되도록 조용히 처리했다.

그러기를 30분.

우리는 겨우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여긴 고블린이 너무 많은 것 같아요."

지수가 긴장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그럼 그냥 안전지대에 있지 그랬어?"

"그러게요...."

힘없이 중얼거리는 지수의 모습이 내심 이해가 갔다.

왜냐면 엄청난 숫자의 고블린들이 우글우글 모여 있었기 때문이다.

"키에에엑!"

"키엑!"

고블린들은 인간들이 모여 있는 대학 캠퍼스 안을 바라보며 시끄럽게 소리쳤다.

'대략 2차, 3차 웨이브의 양이구나.'

홉 고블린의 명령이 떨어지지 않았는지 녀석들은 잠자코 대기하고 있었다.

"설마 저 녀석들과 싸울 생각은 아니죠?"

"그럴 생각인데."

"...."

"농담이야."

"노, 농담하지 마요. 진짜같이 들리니까."

지수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나는 그런 지수의 모습에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저 고블린 속에 들어 가야 해. 정확히는 더 깊이 들어가야 하지."

"하지만 여기서는 샛길도 없는데요?"

"맞아. 그러니까 그대로 뚫고 들어가야 하는 거야."

내 말에 지수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럼 결국 싸워야 하잖아요!"

"아니, 싸우는 건 나만 하면 돼."

"...어떻게요?"

나는 나뭇가지를 들어 대략적인 지도를 그렸다.

"저렇게 고블린들이 뭉쳐 있다는 건, 저들을 통솔하는 녀석이 있다는 거야. 풀어져 있는 녀석들은 지금 광장에서 사람들과 싸우고 있고."

"네, 확실히 그런 거 같아요."

"그치? 특히 고블린들은 리더가 있고 없고 차이가 커. 무리 생물이니까, 우두머리가 죽으면 당황해서 날뛰지. 그럼 상대하기도 쉽거든."

"오빠는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요?"

내 말에 지수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나는 뻔뻔하게 답했다.

"RPG가 다 그게 그거지 뭐."

"그, 그런 가...?"

지수는 아리송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지만 더 묻지는 않았다.

"아무튼 작전을 간단하게 말하자면 난 저 깊은 곳에 있는 고블린 대장을 죽이러 간다는 거지."

"하지만 저 고블린들을 뚫고 가는 건 무리일 것 같은데요."

"간단해."

나는 나뭇가지로 쭉 그어 고블린 무리를 이동시켰다.

"네가 저 고블린들을 유인해서 쭉 끌고 가는 거야."

"제, 제가요?"

"걱정 마. 아까 얻은 아이템들을 줄 테니까."

"무슨 고블린 한 마리에서 아이템이 그렇게 많이 나오는 거죠?"

"아마 보물 고블린이었던 모양이지."

"보물 고블린이라니...."

내가 주머니에서 슥슥 아이템을 꺼내며 말하자 지수는 고민하는 얼굴이 되었다.

애초에 지금 상황에서 '아이템'이라고 부를만한 걸 내가 얻을 방법은 없었으니 지수는 믿을 수밖에 없었다.

# 5

005. 파티의 정석(1)

"알겠어요.... 그럼 제가 저 고블린들을 유인하면 되는 거죠?"

"그래, 그럼 나는 그 틈에 안으로 들어가 고블린 대장을 죽일 거다."

정확히는 홉 고블린이지만 최대한 간단하게 설명하자 지수의 머리가 느릿하게 끄덕여졌다.

"그럼 제가 어떻게 유인하면 돼요? 저 고블린들이 통솔되고 있다면 제가 유인하려고 해도 안 따라올 텐데."

"좋은 아이템이 있지."

아까 내가 DLC 상점에서 구매했던 패키지는 '스타터 패키지'.

간단히 말해 초반에 도움이 되는 아이템이 다량 들어있는 저가 고효율 패키지였다.

가격은 500 포인트라 부담도 없었다.

"이걸 뿌리면 고블린들이 네 쪽으로 몰려들 거야."

내가 건넨 건 하나의 향수와 물약 한 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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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혹의 향수

주변 몬스터들을 끌어들입니다. 강한 몬스터에게는 통하지 않습니다. 지속시간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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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신 물약: 먹는 즉시 기척을 완전히 숨깁니다. 지속 시간 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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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혹의 향수는 하급 몬스터에게나 통하는 물건이라 홉고블린에겐 통하지 않았지만 일반 고블린이라면 충분히 먹히고도 남았다.

그리고 은신 물약을 먹게 되면, 몸에 유혹의 향수를 뿌렸어도 단번에 냄새가 사라지며 모습을 감추게 된다.

"간단히 말하면 이걸 몸에 뿌리고 멀리서 고블린들을 유인한 다음 근처에 오면 은신 물약을 먹으면 된다는 거군요."

"그렇지."

"근데, 그러면 고블린들이 금방 돌아갈 텐데 괜찮나요?"

"내가 저 녀석들의 대장에게 도달할 시간만 벌면 끝이야."

그다음 홉고블린을 처치하는 건 문제도 아니다.

거기다 홉고블린이 죽게 되면, 녀석들은 대장을 잃은 충격으로 제대로 싸우지도 못할 터.

"알겠어요. 그럼 지금 바로 가면 될까요?"

"기다려, 우선 내가 지시한 방향에 서 있다가 신호를 보내면 그때 향수를 뿌려."

"네."

나는 향수의 냄새가 퍼지는 거리를 가늠한 뒤, 적당한 장소에 지수를 배치했다.

고블린들의 신체능력은 평범한 인간과 별 다를 것 없고, 지수는 제법 신체능력이 좋으니 이 정도 거리면 쉽게 잡히지 않을 것이다.

위험해지면 은신물약을 먹으면 되고.

'자, 그럼.'

나는 녀석들이 우글우글 모여 있는 공터를 응시하다가 지수에게 손짓했다.

'달려.'

지수가 고개를 끄덕이곤 자신의 몸에 향수를 뿌리고 달리기 시작했다.

"끼엑?"

"키익, 키익!"

고블린들이 코를 벌름거리기 시작했다.

유혹의 향수의 유효범위는 대략 100미터 내외.

절반에 가까운 고블린들이 단번에 몸을 돌렸고, 나머지도 술렁이기 시작했다.

"캬아아악!!"

당연히 고블린들의 대장이라고 할 수 있는 홉고블린의 반응이 격해졌다.

거칠게 포효하며 큼지막한 대검을 붕붕 휘둘렀지만, 고블린들은 그런 홉고블린에게 관심도 없었다.

"캬악! 캬악!"

홉고블린의 통솔이 무너지며 고블린들이 우르르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수가 있는 방향으로 무리가 이동하자, 그걸 본 지수가 더욱 빠르게 도망치기 시작했다.

'오래 버티지는 못하겠지.'

어느 정도 거리가 있고, 지수가 달리기를 잘한다고 해도 그리 시간을 많이 벌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방금 전까지 평범한 삶을 살았던 사람이 괴물들에게 쫓기는데 아슬아슬한 순간까지 버티진 않겠지.

아마 조금이라도 가까워진다 싶으면 바로 은신물약을 먹을 게 뻔했다.

스스슥!

'최대한 빠르게.'

지수가 몸을 숨기는 순간, 향수를 쫓아 움직였던 고블린들 중 절반은 이곳으로 돌아오거나, 혹은 뿔뿔이 흩어질 거다.

그렇게 되면 이쪽으로 시선이 몰릴 게 뻔했다.

"크르륵?"

내 기척을 느낀 홉고블린의 눈이 움직였다.

말이 고블린이지, 그 덩치는 오크에 버금갔다.

거기다 홉고블린은 웬만한 오크들보다도 강했다.

'괜히 히든 보스가 아니니까.'

히든 보스란, 말 그대로 메인 퀘스트가 진행되는 스테이지에 숨겨져 있는 보스다.

굳이 잡을 필요가 없지만 잡는다면 특별한 보상을 얻을 수 있는 존재.

홉고블린은 그런 히든 보스였다.

'물론 히든 보스치고는 그다지 강한 녀석은 아니야.'

사람들이 달라붙어 죽일 수 없냐, 라고 한다면 그건 아니지만 이제 막 플레이어가 된 사람들이 상대하기엔 심히 벅찬 상대였다.

덤으로 진짜 문제는 홉고블린이 지휘하는 무수한 고블린 무리에 있다.

본래 홉고블린은 최후에 등장하여 무리를 이끌고 남아 있던 인간들을 몰살시키는 역할을 맡았다.

세계가 변한 걸 직시하지 못하고 구조대를 기다리던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모두 죽었다.

'첫 번째 퀘스트에서 사망자가 가장 많았던 것도 그런 이유.'

하지만 이번에는 그렇게 되지 않을 거다.

부웅!

"캬아아아!"

홉고블린이 들고 있던 대검이 휘둘러졌다.

맞으면 잘리는 게 아니라 뜯겨나갈 것 같은 크기였다.

'민첩에 20포인트.'

녀석의 속도에 맞게 민첩을 투자하여 속도를 올렸다.

"키에엑?"

콰쾅!

내가 몸을 비틀어 가볍게 대검을 피해내자 홉 고블린의 눈에 당혹감이 감돌았다.

설마 이제 막 플레이어가 된 존재가 자신의 검을 피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다.

나는 대검을 피하는 동시에 홉고블린의 가슴팍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곤 검을 들고 엉거주춤 서있는 녀석의 눈을 향해 손가락을 찔러 넣었다.

"합!"

푸욱!!

말캉한 감촉이 손가락에 감돌았다.

두터운 가죽을 가진 홉고블린이지만, 눈의 각막까지 두꺼운 건 아니었다.

"캬아아아아!!"

비명을 지르는 녀석.

붕붕 대검을 휘두르는 틈을 타, 나는 찔러 넣었던 손가락을 뽑고 녀석의 오른팔을 잡고 그대로 비틀었다.

한쪽 눈을 잃어 시야각이 좁아진 홉고블린은 그대로 내게 공격을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뿌득!

"칵!"

아까 돌맹이를 던질 때 근력을 투자해둔 탓에, 전심전력으로 체중을 실어 꺾자 홉고블린의 팔이 비틀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부러트리진 못했지만, 손에 들고 있던 대검을 떨어트리게 만드는 건 충분했다.

"잘가라."

떨어진 대검을 줍고, 홉고블린의 오금을 걷어찼다.

내 근력으로 홉고블린의 목을 베기 위해선 검의 무게와 함께 내리찍는 방법밖에 없었다.

"카아악!"

균형을 잃고 그대로 무릎을 굽히는 홉고블린의 목을 향해 대검을 수직으로 내리찍었다.

콰직!!

마치 도끼로 나무를 패듯, 우직한 소리가 나며 홉고블린이 목이 동강 잘려나갔다.

단말마도 지르지 못하고 죽어버린 홉고블린의 모습에 나는 이마에 흘러내린 땀을 닦았다.

"후우. 까불긴."

몸이 아직 이 세계에 완전히 적응하지 못한 탓에 조금 지쳤다.

[히든 보스를 처치하셨습니다.]

[최초로 히든 보스를 처치하셨습니다.]

[보스를 처치한 보상으로 '홉고블린의 요대'를 습득하셨습니다.]

[보너스로 500포인트가 지급됩니다.]

역시 보상도 짭짤했다.

과연 히든 보스라고 할 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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홉고블린의 요대

힘이 10포인트 강해진다. 이 수치는 메인 퀘스트 한계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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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템도 제법 쓸 만하고.'

10포인트는 그렇게 높지 않았지만 메인 퀘스트의 영향을 받지 않는 점이 우수했다.

나는 요대를 착용하고 현재 내 능력치를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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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김세한

칭호: 2회차 플레이어

특성: 싱글 플레이어

힘: F (17 +10)

민첩: F (26)

마력: F (3)

체력: F (6)

보유 스킬: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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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치는 F급부터 SS급까지 상승시킬 수 있지만, 메인 퀘스트마다 올릴 수 있는 한계가 정해져 있다.

이제 첫 메인 퀘스트인 지금은 F랭크 100이 한계.

100을 초과하게 되면 랭크가 올라가게 되니, 다음 퀘스트를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랭크가 올라갈수록, 능력치를 올리는 데 필요한 포인트의 양도 많아지지.'

나는 능력치를 좀 더 올려둘까, 하다가 창을 닫았다.

능력치야 필요할 때 올리는 편이 나았고, 아직 몸도 이 세계에 완전히 적응하지 않은 상태였다.

[우두머리를 잃은 고블린들이 당혹스러워합니다.]

아마 이건 모든 플레이어들에게 메시지가 돌아갔을 것이다.

'그럼 서둘러 빠져야겠어.'

신과 GM도 홉고블린에게 일어난 이변을 눈치챘을 테니 곧 옵저버가 이쪽으로 올 게 분명했다.

'지수가 도망친 방향이 이쪽이었지?'

아까 지수가 달려갔던 방향을 시선으로 쫒았지만, 묘하게도 고블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다. 슬슬 고블린들이 이쪽으로 돌아와야 할 텐데."

혹시 내가 홉고블린을 너무 빨리 처치했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고블린들의 울음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캬악! 캬아악!"

엄청난 숫자의 고블린들이 이쪽으로 우르르 달려오고 있었다.

'이제 왔... 응?'

드디어 왔나싶어 고블린들을 향해 다가갔지만, 녀석들의 모습이 묘하게 이상했다.

'우두머리를 잃고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이라기 보단.'

마치 겁에 질려 도망치는 모습.

세한은 눈을 가늘게 뜨고 고블린들이 도망쳐오는 곳을 향해 달렸다.

홉고블린이 있던 장소에서 조금 떨어진 건물의 뒤편에 도착하자, 나는 고블린들이 어째서 도망쳤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세한 오빠, 오셨어요?"

피에 절어 있는 지수가 그곳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피는, 지수 자신의 피가 아닌 고블린들의 피였다.

댕그랑.

"하아, 하아."

털썩.

지수가 손에 들고 있던 녹슨 검을 바닥에 떨어트리고 주저앉았다.

숨을 헐떡이고 있는 걸 보니 꽤나 지친 기색이었다.

'이게 어떻게 가능한 거지?'

주변에 쓰러져있는 고블린의 숫자는 한둘이 아니었다.

족히 열이 넘는 숫자의 고블린이 시체로 변해 누워 있었다.

물론, 지수가 끌고 다니던 대량의 고블린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숫자였지만 혼자서 열이 넘는 고블린을 잡았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하물며 이제 막 플레이어가 됐을 뿐인 여성이.'

나도 고블린 정도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그건 '나니까' 가능한 거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은신 물약은 어쨌어?"

"그게, 몬스터를 끌고 가다가 사람과 마주쳐 버려서...."

지수는 한 구석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기절해있는 남녀 한 쌍이 있었다.

'이종현.'

설마 이 얼굴을 여기서 보게 될 줄이야.

아까 얼핏 보긴 했지만, 이렇게 다시 재회하게 될 줄은 몰랐다.

"모르는 얼굴이었다면 괜찮았을 텐데, 아는 얼굴이라 순간 당황해 버렸어요."

은신 물약을 꺼내는 도중 발견한 탓에, 실수로 물약을 바닥에 떨어트린 지수는 어쩔 수 없이 고블린들과 싸우게 된 모양이다.

저 남녀 한 쌍은 지수가 싸우는 모습을 보고 겁에 질려 졸도했다고 한다.

'대체 어떻게 싸웠기에.'

사람이 졸도하고 고블린들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갈 정도인가.

아무리 죽인 숫자가 제법 된다고 해도, 고블린의 수는 그 이상이었다.

그런데도 도망쳤다니. 솔직히 그 이유가 짐작이 가지 않았다.

"한지수."

"네?"

"괜찮으면 너 상태창 좀 볼 수 있을까?"

"상태창이요? 어떻게 보는 건데요?"

지수는 숨을 고르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이런 상황만 아니었다면 제법 귀엽게 봐줬을 얼굴이었지만, 녹색 피로 절어 있어 도저히 그렇게 볼 수 없었다.

"그냥 상태창이라고 말하면 될 거야."

"네."

"그리고 내가 정보 보기를 신청할 테니까, 네가 수락하면 돼."

"네, 알겠어요."

지수는 곧바로 상태창을 열고는 내 요청을 수락했다.

흔쾌히 상태창을 보여주는 지수의 행동에 나는 내심 한숨을 쉬었다.

'나야 편하지만, 나중에 주의를 주는 게 좋겠어.'

본래 상태창은 남에게 함부로 보여줘선 안 된다. 변해 버린 세계에서 자신의 정보를 함부로 노출하면 뒤통수를 얻어맞기 십상이었으니까.

'아무튼....'

나는 지수의 상태창을 내 쪽으로 돌리고 위에서부터 차근차근 훑었다.

그런 나의 시선은 어느 순간 딱 멈췄다.

'뭐야, 이게 왜 여기서 나와?'

지수의 능력치는 제법 높은 편이긴 했지만, 특별할 건 없었다.

하지만 스킬을 달랐다.

[천살성]

지수의 스킬칸 맨 윗자리에 위치한 패시브 스킬을 보는 순간, 이번만큼은 나조차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 6

006. 파티의 정석(2)

천살성이란 간단히 말해서 자질, 패시브 스킬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도 단순한 패시브 스킬이 아닌, SS랭크에 위치한 초희귀 스킬.

나도 실제로 본 건 이번이 두 번째다.

처음은 전생에 만났던 혈마라 불리던 존재.

무공이 실존하는 세계 '진'이라는 곳에서 넘어온 존재였다.

당연히 퀘스트로 만나게 된 이차원의 절대강자였던 지라, 꽤나 기억에 남는 인물이다.

'그 혈마가 가진 스킬이 천살성이었지.'

이걸 왜 지수가 가지고 있는지 의문이다.

혈마의 말에 따르면 천살성을 지닌 존재는 제정신이 아니다.

광기에 잠식되어 있는 게 보통이며, 그것을 조절할 줄 알아야 온전한 힘을 낼 수 있다고 한다.

'천살성이 있다면 고블린들이 도망친 이유도 납득이 되는군.'

천살성에는 상대에게 공포를 유발시키는 특성이 존재한다.

자신보다 강자에게는 통하지 않지만 고블린들 정도라면 충분히 먹혀들었겠지.

'다만, 그 외에는 천살성의 특징이 보이지 않아.'

나는 유일하게 보이지 않는 지수의 특성란을 뚫어져라 보았다.

상대가 상태창을 보는 걸 허락해도 특성만큼은 볼 수 없었다.

아마 본인이 가진 고유의 능력이기 때문이겠지.

'혈마에게도 들은 적 없는 상태인 걸로 보아 특성란에 뭔가 있는 게 분명해.'

하지만 그렇다 해도 의문인 점은 왜 지수에게 천살성이라는 스킬이 생겼냐는 거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 지수에게 물었다.

"혹시 특성이라 적혀있는 부분에 따로 뭐라고 적혀 있지 않아?"

"네, 적혀 있긴... 해요."

내 말에 지수는 조금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뭐라 적혀 있는지 알려줄 수 있어?"

"으음, 아뇨...."

이번만큼은 지수도 고개를 흔들었다. 대체 뭐라고 적혀 있는지 궁금하긴 했지만, 나는 지수를 존중하기로 했다.

이미 알려준 것 만해도 충분히 나를 신뢰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으니까.

특성은 보통 자기 자신을 나타내는 근간과도 같은 것이니 말하기 싫어도 어쩔 수 없다.

나의 '싱글 플레이어'처럼.

지수는 제대로 대답하지 못한 게 신경 쓰였는지, 내 눈치를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왜 그러세요? 꼭 말해야 한다면 말해드릴 수 있긴 한데요...."

"아니, 괜찮아. 말할 필요 없어. 그냥 예상보다 희귀한 스킬을 네가 가지고 있어서 그랬을 뿐이야."

"희귀한 스킬?"

나는 지수에게 천살성에 대해서 설명했다. 물론 혈마에게 들었던 광기나 제정신이 아니라는 말은 빼고.

"아, 그래서 피를 볼수록 오히려 상태가 좋아졌던 건가요."

"맞아. 천살성은 피를 볼수록 강해지지, 그게 자신의 피나. 혹은 상대의 피라도."

"...흉흉한 스킬이네요."

지수는 떨떠름한 얼굴이었다.

설마 자신에게 살인귀나 가질 법한 스킬이 발현될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하지만 스킬은 그리 쉽게 발현되지 않는다.

특히 SS급 스킬인 천살성이 지수에게 발현됐다는 건, 애초에 플레이어를 각성하는 순간부터 지녔을 가능성이 높다.

간단히 말해, 지수에게는 천살성의 재능이 있다는 말이다.

'아바타도 되지 않고, 이정도의 스킬을 지녔다는 건 굉장한 메리트야.'

수많은 고블린을 상대했음에도 지수의 피부는 자잘한 상처하나 없이 매끈했다.

아마 천살성의 능력과 내가 준 VIP 브로치 효과가 중첩되어 상처가 재생된 게 분명했다.

나조차 예상하지 못한 시너지다.

예상이지만 즉사가 아니면 사실상 지수에게 치명상이 되는 상처는 없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나는 지수를 바라보며 잠시 고민하다 이내 결심했다.

"한지수."

"네?"

천살성이라는 스킬을 가지고 있는 지수는 그 잠재능력도 무궁무진할 게 분명했다.

이런 지수를 그냥 동료로 두는 건 낭비였다.

"나와 계약하지 않을래?"

나는 여기서 지수를 완벽히 나의 편으로 만들 생각이었다.

답은 간단했다.

아까 보았던 '멀티 플레이어 패키지'가 있었으니까.

'2만 포인트나 하는 패키지라면 적어도 포인트값은 하겠지.'

500 포인트에 불과한 스타터 패키지도 굉장히 유용했으니 2만 포인트인 멀티 플레이어 패키지는 어느 정도일지 내심 궁금했다.

"계약이요?"

"말하자면 파티를 맺는 거야."

나는 지수에게 계약에 관해 대략적으로 설명했다.

"아, 그러고 보면 게임에서 파티 사냥 같은 걸 하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어요."

"일반적으로 RPG라면 그게 정석이니까."

"그렇군요."

설명을 들은 지수는 잠시 고민하다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좋아요. 저도 세한 오빠를 따라가려면 명확한 계약이 되어있는 편이 좋으니까요."

지수는 제법 비장한 얼굴이었다.

'그럼 됐어. 마지막으로 패키지를 확실히 확인하자.'

나는 DLC 상점을 열고 재차 멀티 플레이 패키지에 대한 설명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읽었다.

멀티 플레이 패키지에는 여러 혜택이 많이 있었다.

하지만 단연 눈에 띄는 건 이거였다.

'스킬 공유.'

대략 파티원마다 한 가지 스킬을 공유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물론, 파티원도 내게서 스킬을 받아갈 수 있었다.

그렇게 공유된 스킬은 본신의 능력보다는 조금 떨어지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크게 상관없었다.

'앞으로 저 스킬이 필요할 곳이 많아.'

당장 이번 메인 퀘스트만 해도 이 스킬을 가진다면 편하게 돌파가 가능했다.

'거기다 받을 수 있는 파티원의 숫자가 다섯 명이라면.'

그 다섯 명의 스킬중 주요 스킬을 내가 가져올 수 있었다.

나는 머릿속으로 몇몇의 인물들을 선정했다.

그들의 스킬을 가져올 수 있다면, 나는 전생보다도 훨씬 강해질 수 있으리라.

띠링!

[멀티 플레이 패키지를 구매하셨습니다!]

[이제부터 파티 신청을 할 수 있습니다.]

[파티의 인원은 최대 다섯 명까지 받을 수 있습니다. 스킬 공유, 스킬 숙련도 증가. 파티원에 대한 능력치 보너스를 줄 수 있습니다.]

나는 메시지를 들은 뒤, 곧바로 지수를 향해 입을 열었다.

"파티 신청."

"아, 이거 갑자기 이상한 알림이 떴는데 승낙하면 되는 거죠?"

"어, 특별히 해가 되는 일은 생기지 않을 테니, 걱정 말고 눌러."

"네, 알겠어요. 믿을게요."

지수의 검지가 허공을 훑었다.

[첫 번째 파티원을 받아들이셨습니다. 스킬을 공유하시겠습니까?]

"그래."

알림창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보유한 스킬이 없습니다. 해당 파티원과 스킬을 공유할 수 없습니다.]

내가 공유할 스킬을 가지고 있어야 되는 건가?

내가 하나의 스킬을 지수에게 공유하면, 그걸 지수의 스킬과 교환하는 방식인 모양이다.

'아무 스킬이나 얻어서 주는 건 일도 아니지만.'

아무리 그래도 나도 양심이 있었다.

지수는 천살성을 내게 공유했는데, 나는 아무 잡스킬을 공유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최대한 지수에게 도움이 될 만한 스킬을 공유하는 게 좋겠지.'

마치 RPG에서 동료 파티원을 육성하는 것처럼, 나는 지수에게 가장 도움이 될 만한 스킬을 선별했다.

'그렇다면 그게 가장 좋겠어.'

다행히도 나는 지수에게 가장 어울리는 스킬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나도 습득하는데 시간이 좀 걸리니, 우선 스킬 공유는 뒤로 미뤄야겠군.'

당장 내게 천살성이 필요할 일은 없다.

있으면 편하긴 하겠지만 첫 번째 메인 퀘스트는 사실상 이제 거의 끝난 거나 마찬가지였다.

포로롱.

그때, 허공에서 둥근 눈동자가 이쪽으로 오는 게 보였다.

바로 옵저버였다.

'아슬아슬했군.'

이곳에서 지수가 고블린들을 도살했으니 눈에 띄지 않는 게 이상했다.

"끄응."

거기다 기절해 있던 이종현과 여자 하나가 깨어날 낌새가 보였다.

"오빠, 어떡하죠?"

"우선은 흩어진 고블린들을 잡아야겠지."

홉고블린을 죽였지만, 그렇다고 모든 게 해결된 건 아니다.

몰살 루트를 피했을 뿐이지.

지금 사방으로 흩어진 고블린들도 이곳의 사람들에겐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으으, 어? 히이익?!"

그때, 이종현이 깨어나더니 지수를 보고는 비명을 질렀다.

"하, 한지수. 너 대체!!"

언제나 지수에게 추근거리던 주제에 지금은 꽤나 겁에 질린 모습이었다.

"차라리 이 편이 낫네요. 음흉한 눈으로 보는 것보단."

지수는 그런 종현의 반응이 굉장히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포로롱.

옵저버는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은지 허공해서 맴돌았다.

저 옵저버의 눈으로 GM 아카터스와 신들이 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썩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야."

나는 종현을 불렀다.

그제야 나를 발견한 종현이 시선을 돌렸다.

"어, 너, 너는 게임폐인 아냐?"

"그래. 너 왜 이곳에 있었던 거지?"

"이, 이 새끼가 네가 뭔...."

녀석은 말을 더듬으며 내게 윽박지르려고 했다.

하지만 그 말을 끊으며 지수가 말했다.

"세한 오빠의 말에 제대로 답해요."

지수는 고블린의 피로 젖어 있는 녹슨 검을 종현의 목에 가져다댔다. 그러자 녀석은 감전된 벌레마냥 바르작 떨었다.

"으, 으으! 알겠어! 알겠으니까 칼 좀 치워!"

그런 그의 모습에 지수가 싱긋 웃으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마치 '나 잘했죠?'라는 눈치다.

'...설마 이게 본 성격이었던 건 아니겠지.'

덕분에 말을 하긴 편해졌다.

나는 재차 종현에게 물었다.

"다시 묻지. 너 왜 이곳에 있었던 거지? 제대로 설명해."

"그, 그게."

종현은 눈동자를 데구르르 굴려 내 옆의 지수를 보며 떠듬떠듬 말했다.

"정찰... 하기 위해서."

"정찰? 이 여자랑?"

"맞아. 혹시 둘 중 하나가 잘못되면 다른 한 명이 도망가야 하니까."

평소 나를 무시하던 녀석치고 고분고분한 대답이었다.

아마 내 옆에 있는 지수가 무서운 모양인지 이마에는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정찰하러 왔다면서 지수가 싸우는 모습에 졸도하다니.'

천살성도 영향이 있었겠지만 참 심약한 녀석이다.

내가 전생에 이 녀석을 껄끄러워했다는 사실이 부끄러울 정도였다.

"그렇다면 누군가 너에게 지시를 하고 있는 자가 있다는 거군. 네가 자발적으로 정찰을 맡지는 않았을 테니까."

"이 새끼...,"

비꼬는 내 말에 종현의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지수의 칼이 목에 다가오자 광대처럼 웃었다.

"그, 그렇지. 하하. 내가 혼자 자발적으로 정찰을 했을 리가 있나. 하필 시발, 제비뽑기에 져버려서."

"과연."

나는 바로 납득할 수 있었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사람들을 끌어 모아 고블린들과 대항하고 있는 자가 있구나.'

이렇게 빠르게 사람들을 통솔할 수 있는 자라면, 어느 정도 직급이 있는 자일 가능성이 높았다.

거기에 리더십도 있는 거겠지.

'덕분에 전생에는 싹 쓸려 버렸지만.'

방어선을 구축하고 고블린을 막아내는 건 좋았지만, 퀘스트의 내용은 '대학교를 탈출하라'라는 거다.

후에 등장한 홉고블린과 고블린 대군에 의해 다 죽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지.'

홉고블린은 죽었다.

그리고 내가 아직 이곳을 빠져나가지 않았다.

"이종현."

"또, 또 왜 불러?"

"지금 사람들을 모으고 통솔하고 있는 사람에게 안내해 줘."

"어째서?"

이번만큼은 녀석의 얼굴에도 의아함이 감돌았다.

녀석의 입장에서 나는 고작 게임폐인에 불과했으니까.

"하고 싶은 말이 있으니까."

"이 자식이 진짜 미쳤나. 제대로 말 안 할...."

종현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캬아악!"

지수가 죽인 고블린들의 시체 틈에서 살아있던 고블린 한 마리가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이곳저곳 검상이 있어 오래 살기는 힘들어 보였지만, 그래서 더 끔찍한 외형이었다.

"히이이익?!"

간신히 몸을 일으켰던 종현이 뒷걸음질 치다가 뒤로 발라당 넘어졌다.

"크륵, 크륵."

고블린은 그런 종현이 제일 약자라고 판단했는지, 반쯤 부러진 검을 들고 달려들었다.

"캬아아악! 칵?!"

물론, 난 그것을 가만히 보고 있지 않았다.

달려들던 고블린의 발을 걸어 넘어트린 후, 그대로 발을 치켜들어 고블린의 머리를 짓밟았다.

콰작!

고블린의 머리가 과자처럼 부서지며 녹색 피가 종현의 얼굴을 향해 후드득 튀었다.

"흐, 흐으."

종현은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건가 싶은 눈으로, 나와 고블린의 시체를 번갈아 보았다.

대체 내가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지 의문이 담긴 눈이었다.

물론, 나는 녀석의 의문에 답해줄 생각이 없었다.

"빨리 안내해."

당연히 종현의 머리는 군말 없이 끄덕여졌다.

# 7

007. 탈출(1)

전생에 나는 고블린들에게서 도망치기 바빴다.

우연히 안전지대에 들어간 이후, 눈치를 보다가 홀로 도망쳐 나왔던 기억밖에 없다.

"여, 여기야."

내 눈치를 살피며 이야기하는 종현을 무시하며, 나는 주위를 살폈다.

종현의 안내에 따라 도착한 장소는 바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강당이었다.

입구는 폐쇄하고 2층의 사다리를 내려, 그곳을 통해 들어오는 방식이었다.

"부상자가 많이 보이네요."

지수의 중얼거림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처음 습격에 대부분 당한 거겠지."

솔직히 내심 놀랐다.

그 급박한 상황에서 부상 입은 사람들을 구조하고, 이렇게 사람들을 강당에 모았을 줄이야.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한정되지.'

어느 정도 사람들을 이끄는 위치에 있지 않는 이상, 아무리 급박한 상황이었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을 이렇게 통제할 수 있을 리 없었다.

"학생회장인가."

내가 그렇게 중얼거리자 옆에 서 있던 종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

"너하고 저 여자애에게 정찰을 다녀오라고 했던 사람."

내가 뒤를 가리키며 말하자, 뒤따라오고 있던 여성이 움찔거렸다.

전신을 고블린의 피로 적시고 있는 지수 때문인지 얼굴이 무척이나 파리했다.

"그걸 어떻게...."

"다 아는 법이 있지."

아직 '옵저버'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종현으로선 당연한 반응인지도 모른다.

딱 보기에도 현재 강당에서 여러 개의 옵저버가 몰려있는 장소가 있었다.

말끔하게 생긴 인상에 사람들에게 이런저런 지시를 내리고 있는 한 명의 남성.

학생회장 윤현균.

'신들에게 노려지기 딱 좋은 위치구만.'

외모도 좋고, 능력도 좋다.

심지어 리더십도 있으니 신들의 입장에서는 '레어 아바타'정도로 취급받을 위치였다.

물론 전생에서는 아무것도 못 하고 홉고블린이 이끌고 온 무리에 죽었겠지만.

'무척 신중한 성격인 모양이군.'

학교 부지를 빠져나가지 않으면 죽는다는 사실을 신이 귀띔해 주지 않을 리가 없었다.

여기서 버티고 있다는 건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른다는 것.

즉, 아직 아바타가 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보통 튜토리얼이 끝나는 시점에서 아바타를 선택하는 게 보통이지만 저렇게 눈에 띈다면 이미 요청을 보낸 신들이 있을 거야.'

그럼에도 아직 아바타가 되지 않았다는 건 그런 '요청'자체를 전부 의심하고 있다는 거지.

"거기 1학년!"

그때, 잠자코 서 있는 우리를 발견한 윤현균이 우리를 향해 소리쳤다.

그는 내 앞에 서있는 종현과 여자애를 향해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음?"

현균은 종현의 뒤에 서있는 나와, 고블린의 피에 절어 있는 지수를 발견하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한지수?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아무래도 현균은 지수를 아는 모양인지 말을 걸었다.

하지만 지수는 그런 현균의 말에 짧게 혀를 찰 뿐이었다.

"지금 제게 말을 거는 것보단, 이쪽의 보고를 듣는 게 먼저 아닐까요?"

"아, 그건 그렇지."

지수를 살피던 현균은, 지수의 몸에 상처가 없다는 걸 깨닫고 작게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그래, 종현 씨랑 혜선 씨도 괜찮은 거 같고. 밖은 어때? 위험한 곳은 가지 않았지?"

"아, 예."

종현은 학생회장의 말에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종현의 옆에 서 있던 여성의 이름은 아무래도 혜선이라는 이름인 모양이다.

"밖에 경찰이 온 기색은 없고?"

"아, 예. 없었습니다."

종현은 그리 말하며 내 눈치를 살폈다. 고블린과 마주친 걸 말할지 묻는 눈이었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도중에 녹색 괴물들과 마주쳤지만요."

"뭐? 그럼 어떻게...."

광기에 가득 차 사람에게 덤벼드는 괴물들이다.

당혹감과 다치지 않고 돌아왔다는 안도감이 섞인 얼굴로 현균은 종현을 바라보았다.

"조, 조금 도움을 받아서...."

아무래도 이건 설명하기가 힘들었는지 종현이 내 눈치를 슬슬 살피며 말했다.

당연히 그 말에 현균은 당황한 눈치였다.

"그게 무슨...."

종현의 말에 반응한 건 현균만이 아니었다.

그를 따라다니던 옵저버들의 시선도 일제히 내게 향했다.

'적어도 첫 번째 메인 퀘스트가 끝날 때까지는 그다지 눈에 띌 생각이 없었지만, 어쩔 수 없지.'

거기다 그냥 말하는 것뿐이니 크게 나를 주목할 일도 없을 것이다.

종현을 통해 전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아무래도 그건 불안했다.

"저 괴물들과 싸웠습니까? 그러니까 이름이...."

"김세한입니다."

"아, 그럼 세한 씨라고 부르죠. 세한 씨는 어떻게 저 괴물들과 싸울 수 있는 겁니까?"

난 그의 말에 어깨를 으쓱했다.

"못 싸울 건 없죠. 신장도 성인 남성보다 작고, 근력도 비슷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녀석들은 무기를 들고 있습니다. 함부로 덤빌 수 없을 텐데요?"

나는 지수에게 눈짓했다.

지수는 자신의 허리춤에 적당히 고정시켜뒀던 고블린의 녹슨 검을 들어올렸다.

"헉!"

녹색 피가 묻어있는 검의 모습에 현균이 기겁했다.

"어떻게...."

"어찌어찌 되더군요."

"...."

당연히 상대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냐는 시선이었다.

하지만 굳이 자세하게 설명해 봐야 긁어 부스럼 밖에 되지 않았다.

여기선 어물쩍 넘어가는 게 최선이었다.

"그보다 어서 이곳을 빠져나가는 게 좋습니다."

"이곳을 빠져나간다고요?"

갑작스런 내 말에 현균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곤 잠시 고민하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유가 뭡니까?"

"괴물들의 우두머리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우두머리? 아, 아까 그런 알림을 들은 것 같군요."

"네, 그러니 지금 이 타이밍을 노려 빠져나가는 게 상책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말에 현균은 눈을 가늘게 좁혔다.

아무래도 제대로 이해하기 힘들었던 모양이다.

'보는 눈이 많으니 둘러대기도 힘들군.'

나는 힐끗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현균을 지켜보는 다수의 옵저버가 보였다.

"퀘스트창을 열어보시면 제한 시간이 있을 겁니다."

"제한 시간?"

현균은 내 말에 퀘스트창을 열었다.

퀘스트 창의 구석에는 제한시간 '1일 13시간'이 표시되어있었다.

"이런 게 있었을 줄이야...."

"알다시피 지금 상황은 현실과 동떨어진 상황이죠. 마치 누군가가 저희를 대상으로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처럼."

"그 누군가가 대체 누굽니까?"

"그건 저도 모릅니다. 한 가지 확실한 점은 그들은 우리에게 결코 친절하지 않을 거라는 거죠."

벌써 사망자는 몇이나 있었다.

현균은 아마 내 말뜻을 이해했는지 굳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즉, 퀘스트 제한시간 전에 빠져나가지 못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소리군요."

"최악의 경우에는 저희들을 전부 죽이려 할지도 모르죠. 갑자기 괴물들을 풀어 논 작자들이라면 충분히 가능성 있다고 보는데요?"

"으음."

사실 서둘러 빠져나가야하는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뭐냐고?

재미가 없기 때문이다.

'신들의 게임.'

이 게임의 주역은 우리가 아니다.

신이다.

신이 얼마나 재미있게 게임을 즐기는지가 중점이라는 거다.

홉고블린이 죽고, 우두머리를 잃은 고블린들은 흩어졌다.

플레이어들에겐 더할 나위 없는 상황이지만 이 게임을 관전하는 신들의 입장에서는 더럽게 재미없는 상황이다.

위기가 없으니까.

몹이 없는 RPG게임이라고 생각해 봐라. 누가 재밌어하겠는가.

'아직은 홉고블린이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바로 조치가 들어오지는 않겠지만, 그것도 잠시겠지.'

위기가 없어지면 게임이 재미가 없어진다. 그러니 분명 GM의 조치가 들어올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서둘러 괴물들을 처리하거나, 사람들을 이끌고 이곳을 빠져나가야겠군요."

"예,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고블린들의 머리라고 할 수 있는 홉고블린이 살아 있었다면 조직적으로 공격을 가했을 것이기에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우두머리가 죽은 지금이라면 충분히 빠져나갈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뭔가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경찰이나 근처 구급대도 연락이 되지 않으니 구조를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요. 다만... 아무래도 현재 사람들의 의견이 반반 나뉘어져 있어 어찌 설득할지가 고민이군요."

현균은 고심에 찬 얼굴이었지만 내 말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나로선 솔직히 예상외였다.

'이렇게 쉽게 받아들이면서 전생에는 대체 왜 죽었데?'

바로 순응하는 것으로 보아 본인도 어느 정도는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거다.

그런 사람이 전생에서 아무것도 못하고 죽었다고?

'뭔가 이상해.'

자신의 기억으론 강당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고블린들에게 반격을 했던 기억은 없었다.

철저하게 수비위주.

그렇게 버티다가 몰살당했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을 현재 통솔중인 자가 겁이 많거나, 깐깐한 사람이 아닐까 생각했다.

긴급사태 때 구조를 기다려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

하지만 현균은 결코 그런 성격으로 보이지 않았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현균의 등 뒤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회장도 설마 이 사람 말에 동의하는 건 아니겠죠? 여기서 구조를 기다리는 게 최선의 상책입니다. 굳이 강당 밖으로 나가서 위험을 자처할 필요는 없어요."

그리 말하는 사람은 눈이 가늘게 째진 날카로운 인상의 남성이었다.

"동권아. 하지만 그건 경찰이나 구급대에 연락이 될 때야. 지금 현실은 게임처럼 변했다는 걸 너도 알잖아?"

"그래서, 지금 사람들의 목숨을 가지고 도박을 하겠다는 겁니까?"

동권이라 불린 남성의 말에 현균은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그의 말은 정론이다.

굳이 목숨을 걸고 괴물들을 뚫고 지나가기보단 군대나 경찰을 기다리는 편이 옳다.

이것이 '평범한 현실'이라면 말이지.

하지만 난 그 말에 반박을 할 수 없었다.

왜냐면 녀석의 얼굴을 보는 순간 놀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건 회귀한 나조차 전혀 예상치 못한 만남이었다.

'아니, 여기서 박동권이?'

박쥐 박동권.

이 녀석을 내가 모를 리가 없다.

왜냐면 전생에 몇 번이나 나와 마찰을 빚었던 녀석이니까.

설마 이 녀석이 나와 같은 대학 출신이었을 줄이야.

'어쨌든 이제야 감을 잡겠군.'

나는 처음 보는 척 연기하며 입을 열었다.

"누구시죠?"

"학생회 부회장인 박동권입니다."

"아. 들은 적 있는 것 같네요."

나는 학교 총학생회 같은 것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기에 구성원이 어떻게 되는지 전혀 몰랐다.

설마 그 박동권이 같은 학교이며 총학생회 소속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지금 말씀하시는 걸 듣자하니 현균 형에게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더군요."

"말도 안 되는 이야기?"

"예. 밖에 나가 괴물들을 잡는다니, 정신 나갔습니까?"

동권의 입가가 비뚜름하게 기울어졌다. 마치 나를 비웃는 것 같았다.

"운 좋게 괴물 한 마리 정도 죽여서 꽤나 겁이 없어진 모양이군요. 저건 괴물입니다. 군대나 경찰을 도움을 기다리는 편이 최선이죠."

사정을 모르는 평범한 사람이라면 충분히 주장할 수 있는 의견이다.

허나, 나는 그것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왜냐면 이 녀석은....'

전생에 수많은 사람을 죽인 학살자였으니까.

# 8

008. 탈출(2)

'오랜만에 보는구나, 박쥐새끼.'

박쥐 박동권. 전생에서는 그를 그렇게 불렀다.

매번 다른 모습으로 다양한 단체에 숨어 들어가 그곳을 파멸시키는 것을 즐기는 사이코.

자신에게 이득이 된다면 아무리 많은 사람이 죽어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인간의 탈을 쓴 괴물.

"운 좋게 괴물을 죽여? 우리가 어떻게 저 괴물, 아니 고블린들을 죽였는지 아나요?"

그때, 가만히 있던 지수가 입을 열었다.

"고블린?"

"네. 몬스터를 죽이니 녀석들의 머리 위에 이름이 표시되더군요."

차갑게 이야기하는 지수의 말에 동권이 황당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그 말은 당신도 괴물을 죽였다는 겁니까?"

"예. 제가 죽이는 걸 본 목격자도 있어요."

지수는 그렇게 말하며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던 종현을 가리켰다.

"예, 뭐... 그렇습니다."

종현은 갑자기 시선이 자신에게로 향하자 고개를 끄덕였다.

"봤죠? 저 고블린들을 두려워하며 무작정 대기하는 건 바보짓이에요.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고요! 어차피 군인이나 경찰은 지금 움직이지도 못하잖아요?"

지수는 그렇게 말하며 스마트폰을 들어올렸다.

스마트폰에는 지금 전세계적으로 난리가 난 현재 상황에 대한 뉴스가 가득했다.

'그래도 아직은 뉴스가 올라오는군.'

어차피 조금 지나면 인터넷은 먹통이 되겠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기사를 올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에 놀랐다.

"윽."

스마트폰에 표시된 뉴스들에 동권은 얼굴을 와락 찡그렸다.

"그렇지. 기다리기만 해서는 안 돼. 퀘스트창을 보더라도 이곳에서 빠져나가라는 말이었으니."

동권의 말에 잠시 흔들렸던 그였으나 지수의 말을 듣고는 아무래도 생각이 바뀐 모양이다.

아마 여성인 지수가 괴물을 직접 죽였다고 하니 위험도가 대폭 내려간 듯 했다.

실제로 지수는 몸도 여리고 신장도 작아서 연약해 보이는 스타일이긴 하다.

하지만 지수가 가지고 있는 스킬을 생각하면 적어도 이곳에서 지수를 죽일 수 있는 인간은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천살성은 다른 것보다 인간의 형태를 한 존재들을 죽이는데 특화된 스킬이거든.

그건 단순히 인간형 마물뿐이 아니라 그냥 인간도 포함된다.

'그래서 혈마도 더럽게 까다로웠지.'

정말 다시 만나고 싶지 않은 놈이다.

하지만 다시 만나게 되겠지. 그래도 이번엔 전보다 수월하게 싸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그걸 받아들일 것 같습니까?!"

그러나 동권은 여전히 극렬히 반대했다.

겉만 보자면 강당의 사람들을 위해 외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그것에서 묘한 초조감을 느꼈다.

'이것 봐라?'

녀석은 다른 이들을 이렇게 걱정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도리어 이용하고 이용해서 그들의 시체위에 올라서는 타입이었다.

그러니 나는 피식 웃으며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남으시던가요."

"예?"

"애초에 모두 설득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이곳에 남으신다고 해도 저야 상관없죠."

전생과는 달리 이번 생에선 사람들을 돕는 것도 괜찮겠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다.

굳이 죽겠다는 사람을 억지로 끌고 갈 생각은 없다.

나는 할 만큼 했고.

'하지만 이 녀석은 절대 이곳에 남지 않겠지.'

만약 내 생각대로라면.

"크윽!"

동권의 이가 빠득 갈렸다.

아마 내 말이 자신의 계획을 어긋나게 했기 때문일 거다.

'아마 녀석의 목적은.'

강당에 있는 사람들을 몰살시키고, 죽인 숫자만큼 가중되는 보상을 받을 생각이었을 것이다.

사람들을 살려 추가보상을 얻으려는 나와는 완전히 상반된 방식이었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됐으니.'

모든 사람을 설득하여 탈출할 수는 없겠지만, 현균의 리더십으로 보아 상당수가 따라올 확률이 높았다.

그럼 동권의 계획은 자연스럽게 실패.

이곳에서 굳이 남는다고 말해봐야 좋을 게 없었다.

소량의 사람을 죽이고 받는 보상보다, 후에 살아남아 받는 의심 쪽이 더 리스크가 클 테니까.

"정말로 여기 남으실 생각입니까?"

내가 한 번 더 운을 띄우자 동권의 시선이 현균에게 향했다.

현균은 이미 이곳을 빠져나가기로 마음먹은 얼굴이었다.

"...회장이 정말로 간다면 따라가겠습니다. 회장 혼자 보내는 건 걱정되니까요."

내 예상대로 동권은 말을 바꿨다.

마치 현균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따라간다는 말 같았지만, 본심이 그게 아니라는 걸 나는 너무나 잘 알았다.

'역시.'

이걸로 확실해졌다.

박동권, 너 이미 신의 아바타구나.

***

"저, 정말로 괜찮은 게냐? 아직 괴물들이 보이는데...."

"괜찮습니다. 정찰하고 온 학생들의 말에 의하면 우두머리가 죽은 뒤 제대로 된 판단을 하지 못하는 모양입니다."

"그래도."

"어차피 이곳에 구조를 기다려봐야 소용없다는 걸 아실 텐데요? 이미 하루가 지났습니다. 구조를 하러왔으면 벌써 왔어요."

"끄응."

현균의 말에 나이가 지긋한 남성이 고개를 숙였다. 아마 학교의 교수겠지.

현균의 말처럼 게임이 시작된 지도 하루가 흘렀다.

그런데도 뭔가 조치가 되지 않았다는 건 밖에서 뭔가 일이 생겼다는 거다.

"윤현균! 네놈 멋대로 사람을 이끌고 나가려고 하다니! 멋대로 행동하면 다음 학기의 학점은 없을 줄 알아!"

또 어떤 교수는 이런 말을 하는 자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학점이라니.'

그저 실소만 나왔다.

세상이 뒤집힌 지금 학점 따위는 전혀 중요한 게 아니었다.

"괜찮겠지?"

"아, 아마 그렇지 않을까?"

강당에서 밖으로 나가는 걸 선택한 사람의 숫자는 상당히 많았다.

강당에 남는 건 극히 소수만 선택한 걸 보면 현균이 얼마나 인망이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모두 주위를 살피며 오세요!"

현균의 외침에 사람들이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목적지는 당연히 학교 밖이다.

"이제 이대로 가면 되는 건가요?"

무리에 섞여 걸어가던 지수가 내게 물었다.

"그래, 특별한 일이 없다면 금방 나갈 수 있겠지."

"특별한 일이라면... 고블린이요?"

"아니, 우두머리가 없는 고블린은 보통 무리의 사람들에겐 덤벼들지 않거든."

"그럼요?"

또 다른 뭔가가 있냐는 질문에 나는 입을 다물고 하늘 위에 돌아다니는 옵저버들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현균의 옆에서 걸어가는 동권을 보았다.

'당장 처리한다면 처리할 수 있지만.'

미래에 살인마가 될 동권을 죽이는 건 간단했지만, 나는 그리 하지 않았다.

보는 눈이 많은 건 별개로 녀석을 어떻게 이용할 방법이 없을까 고민됐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는 알림창을 열고 DLC상점에 있는 상품 목록을 훑었다.

마침 딱 좋은 물건이 하나 있었다.

"주변의 고블린들을 경계해 주세요!"

현균은 앞장서 걸어가며 소리쳤다.

주위에는 흩어졌던 고블린 몇몇이 우리를 경계하고 있었지만 덤벼들지 않았다.

"저거 덤비는 거 아냐?"

"에이,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사람들에게 덤벼들던 고블린들이다.

그러니 사람들이 겁을 먹는 것도 이상한 게 아니었다.

"녀석들은 무리에서 빠져나와 있는 인간이 아니면 건드리지 않습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세요!"

현균은 내가 설명해 줬던 말을 그대로 사람들에게 전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조금만 힘내세요!"

퀘스트의 내용은 학교 부지를 벗어나는 것.

이제 시야에 들어온 학교 정문에 사람들의 발걸음이 점차 빨라졌다.

"학교 정문이 이렇게 반갑기는 처음이야."

"빨리 나가자. 지금 전화도 안 돼서 부모님이 걱정이야."

주변 사람들의 목소리가 조금 밝아진 것 같았다.

고블린들은 덤빌 기색이 없어보였고, 곧 이 지옥 같은 장소를 벗어난다는 생각에 긴장이 풀린 모양이다.

하지만, 이걸 가만히 두고 볼 리가 없지.

[지금부터 퀘스트 난이도가 상상합니다.]

[난이도 E->D]

"어?"

갑자기 맑은 알림이 들려왔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스테이지에 센티넬에 등장합니다.]

쿵!

육중한 발걸음 소리가 울려 펴졌다.

그건 결코 고블린들이 낼 수 있는 소리가 아니었다.

적어도 수 미터는 되는 거대한 괴물이 아니면 낼 수 없는 소리였다.

"...저거 뭐야."

누군가가 아연히 중얼거렸다.

얼마 남지 않은 학교 정문 앞.

거대한 소의 머리를 한 괴물이 서 있었다.

"미노타우르스, 아냐?"

누가 중얼거린 말인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만큼 눈앞의 괴물을 나타내는 단어는 없었다.

족히 5미터는 되는 거대한 체구.

소의 머리를 가졌으며 울둥불퉁한 근육을 꿈틀거리는 괴물.

특별히 무기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저 괴물에게 그런 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겠지.

평범한 사람 따위는 맨손으로 찢어발길 수 있는 괴물이니까.

'첫 번째 메인 퀘스트부터 미노타우르스라니.'

아예 작정하고 사람들을 죽이겠다고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미노타우르스를 상대로 싸우려면 최소 열다섯 번째 메인 퀘스트까지 진행해야 가능하다.

첫 번째 메인 퀘스트에서는 무슨 짓을 해도 결코 이길 수 없는 몬스터였다.

'본래라면 절대 등장도 시킬 수 없는 몬스터지.'

게임을 관리하는 GM이지만 뭐든지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할 수 있는 것에도 분명 한계가 존재했다.

'그러니 센티넬이라는 편법을 쓴 거겠지.'

보스나 히든 보스같이 단순히 스테이지에 배치된 역할이 아니다.

녀석들은 분명 강하지만 힘을 합치면 어떻게 극복이 가능한 놈들이다.

하지만 센티넬은 아니다.

센티넬은 현재의 플레이어로서는 이길 수 없는, 이길 수 없는 적으로서 등장한다.

'싱글 게임에서 흔히 있지.'

예를 들면 시작 스테이지에서 만나는 최종보스 같은 것.

반드시 패배하고 넘어가는 이벤트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 해도 어느 정도 한계는 있지만.'

센티넬인 미노타우르스는 이곳에 있는 인간들을 모조리 도륙할 수 있을 만큼 강한 몬스터지만, 한계는 분명히 있었다.

메인 퀘스트 능력치 한계 F(100).

미노타우르스는 본디 C급 능력을 지닌 만큼 모든 능력치가 F(100)으로 맞춰져 있을 것이다.

이게 어느 정도인지는 감을 잡기 힘들겠지만, 내가 근력에 20포인트를 투자한 것만으로 돌을 던져 고블린의 머리를 부술 정도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의 능력치는 기껏해야 5~10사이.

순수 숫자로만 계산에도 10배에 가까운 차이이며, 실제로 변환하면 더 큰 차이가 존재했다.

흔히 고릴라가 인간의 20배의 근력이라고 하지만, 지금 눈앞의 미노타우르스는 족히 100배에 가까운 근력을 가지고 있으리라.

후욱, 후욱.

미노타우르스의 거친 숨소리가 이곳까지 들렸다.

모두가 얼어붙은 상황에서 현균의 옆에 서있던 동권이 천천히 등을 돌렸다.

"모두 도망... 읍?!"

뭔가를 말하려던 동권은 갑자기 뒤에서 입을 막은 누군가의 행동에 말을 잊지 못했다.

"미쳤어요? 조용히 해요."

입을 막은 건 지수다.

내가 동권이 무슨 행동을 하려고 하면 막으라고 지시해 뒀기 때문이다.

'잘했어.'

미노타우르스가 나타난 건 조금 의외긴 했지만, GM 아카터스 성격상 뭔가를 저지르리라 생각하긴 했다.

그리고 그런 상황이 닥쳤을 때 동권이라면 분명 무슨 행동을 하려하겠지.

이 또한 예상 범위였다.

미노타우르스는 기본적으로 소의 습성을 따른다.

만약 이곳에서 사람들이 동권의 말에 놀라 우르르 도망쳤다면, 한창 흥분해 있는 미노타우르스는 바로 돌진을 했을 것이다.

"읍, 읍읍!"

동권은 지수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쳤지만 고블린을 학살하며 능력치가 올라간 지수의 손을 벗어나기엔 무리가 있었다.

하지만 모든 일이 뜻대로 되는 건 아니다.

발버둥치는 동권의 모습에 정신을 차린 몇몇이 작은 비명을 지르며 무리를 이탈했다.

"도, 도망쳐!"

"저런 괴물에게서 어떻게 도망간다는 거야?!"

무리에 파문이 일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미노타우르스의 시선이 무리를 이탈해 도망치는 사람들에게로 향했기 때문이다.

"음머어어어!!"

"히익!"

뒤따라 도망치려던 사람들은 스테이지를 가득 울리는 미노타우르스의 울음소리에 발을 멈췄다.

기본적으로 거대 몬스터는 울음소리에 피어(fear) 효과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이 오히려 행운이었다.

만약 공포에 발을 멈추지 않았다면 지금 도망치던 사람들처럼 됐을 테니까.

두두두두두!!

"아아...."

다가오는 미노타우르스를 향해 도망치던 사람들의 시선이 공허해졌다.

저건 피할 수 없다.

그걸 본능적으로 느낀 것이리라.

푸아악!!

마치 전차가 지나간 것 같았다.

방금 전까지 도망치던 사람들은 제대로 된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육편이 되어 사방으로 흩어졌다.

"으, 으으으."

그 광경에 다리가 풀린 몇몇 사람들은 넋을 잃고 주저앉았다.

혼절한 여성도 있었다.

콰드득!

도망친 사람들을 단숨에 갈아버린 미노타우르스의 발이 멈췄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느릿하게 미노타우르스의 시선이 이쪽으로 향했다.

물론,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 9

009. 탈출(3)

현균은 머릿속이 백지가 되는 기분이었다.

설마 갑자기 이런 일이 생길 줄이야.

'퀘스트 난이도가 상승? 그리고 저 괴물은 대체.'

갑자기 난이도가 상승한 이유도 모르겠고, 저 미노타우르스를 닮은 괴물에게서 도망칠 방법도 생각이 안 났다.

방금 도망치던 사람들을 단숨에 갈아버리던 모습을 보면 도저히 인간의 달리기 속도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읍, 읍읍!"

옆에서 동권이 계속 이상한 소리를 내며 발버둥치지 않았다면 아마 현균은 계속 넋을 잃고 있었을 거다.

"회장님."

"아, 예, 예."

그때, 뒤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세한이다.

그의 얼굴을 보니 딱딱하게 굳었던 마음이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

'이 상황에서도 침착하다니.'

자신도 나름 상황을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부류라고 생각했지만, 눈앞의 세한에 비하면 부족하다는 기분이 들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느꼈지만, 그는 묘하게 여유로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갑자기 괴물들에게 습격당하고, 세상의 가치관이 하루아침에 바뀐 상황에서도 그는 태연했다.

세한은 어째서인지 하늘을 슬쩍 본 뒤에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미끼가 되겠습니다."

"...예? 미끼라니요?"

"이대로 있다간 미노타우르스에게 전멸입니다. 누구 한 명은 시선을 끌어야 합니다."

그건 그렇다.

방금 미노타우르스의 돌진은 사람들이 힘을 합친다고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꼭 세한 씨가 하지 않아도...."

"그럼 따로 할 사람이 있습니까?"

없다.

굳이 주변을 돌아볼 필요도 없었다.

죄다 패닉에 빠져 미노타우르스를 똑바로 응시할 수 있는 자조차 없었다.

"세한 오빠."

동권을 붙잡고 있는 지수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세한은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것이 속상했다.

마음 같아선 그러지 말라고 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자신이 남는다고 말해도 도저히 세한이 들어줄 것 같은 얼굴이 아니었다.

'뭔가 생각이 있는 것 같은데.'

자신이 아는 세한은 남들을 위해 희생할 성격도, 무모한 짓을 할 사람도 아니다.

그렇지만 이 상황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지는 도무지 모르겠다.

"하아."

지수는 한숨을 내쉬며 시선을 돌렸다.

답답한 마음에 돌린 시선이었지만, 붙잡고 있던 동권과 시선이 마주치자 기분이 팍 상했다.

'짜증나게.'

세한이 직접 미끼가 된다고 하자 동권의 발버둥이 거짓말처럼 멎은 탓에 조금 인상이 찡그려졌다.

'마치 꿩 대신 닭이라는 것처럼.'

눈치가 빠른 지수는 동권의 의도를 어느 정도 눈치챈 상태였다.

세한이 이 세계가 게임으로서 작용한다는 것을 알려준 덕이었다.

보나마나 이자는 사람들을 죽이고 자신이 보상을 독점하려고 했던 거겠지.

하지만 상황이 자신의 마음처럼 흘러가지 않으니 이런 상황을 만든 세한이라도 죽이고 싶을 거다.

그리고 그런 지수의 생각은 아주 정확했다.

'보상을 독점하지 못하는 건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동권은 지그시 세한을 보았다.

쓸데없는 행동을 해서 자신의 계획을 망친 놈.

'미노타우르스를 이용하는 건 나도 위험할 가능성이 있으니 우선 물러나자.'

어차피 메인 퀘스트가 한 번만 있는 것도 아니다.

초반 스타트가 애매하긴 했지만 자신은 신에게 선택받은 자.

분명 언제든 앞서나갈 수 있으리라.

"후우. 그럼 어쩔 수 없군요."

현균은 진심으로 미안한 얼굴이었다.

미끼가 된다는 세한을 차마 말릴 수가 없었다.

누구 한 명이 희생하지 않으면 모두 죽는다.

'솔직히 얼마나 시간을 벌 수 있을지도 미지수지만.'

방금 전에 죽은 사람들을 생각하면 벌 수 있는 시간은 고작 수초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허나 지금 당당한 세한의 모습을 보면 어쩐지 신뢰가 갔다.

이래죽나 저래죽나 마찬가지다.

현균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죄송합니다. 세한 씨 부탁드리겠습니다."

그 말에 세한은 어째서인지 시선을 피했다.

그리곤 작게 헛기침을 한 뒤, 말했다.

"제가 신호하면 사람들을 이끌고 달리세요."

"알겠습니다."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언제 미노타우르스가 달려들지 모를 노릇이었으니까.

세한은 상의를 벗고 손에 들었다.

그리곤 천천히 무리에서 이탈했다.

하나, 둘.

현균은 그렇게 심호흡하며 세한과 시선이 마주쳤다.

"와라."

세한이 상의를 크게 흔들었다.

마치 깃발을 흔드는 마타도르처럼.

"음머어어!"

갑자기 무리에서 이탈한 세한이 깃발을 흔들자, 미노타우르스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

쿵! 쿵쿵!

바닥을 울리는 소리가 천둥처럼 울려 퍼졌다.

"뛰세요!"

세한의 외침과 동시에 미노타우르스의 신형이 쏘아졌다.

현균 역시 큰 소리로 외쳤다.

"모두 입구까지 달려요!!"

"히, 히익!"

얼어 있던 사람들이 그 소리에 누구라고 할 것 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몇몇은 다른 사람들이 부축하거나 엎고 달렸다.

"빨리, 빨리 빨리!"

현균 역시 쓰러진 사람들을 부축했다.

낙오한 사람들이 없도록 사람들에게 소리쳤다.

[스킬 지휘의 외침을 습득하셨습니다.]

알 수 없는 알람이 추가로 들려왔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세한 씨는?'

사람들이 도망치는 속도는 그다지 빠르지 못했다. 초조함을 느끼며 세한을 바라보자, 현균은 입을 떡 벌릴 수밖에 없었다.

'...저게 뭐지?'

미노타우르스는 무시무시한 몬스터였다.

한 번 돌진할 때마다 반대편에 있는 건물을 사정없이 부서트렸다.

마치 덤프트럭이 건물을 뚫고 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런 살벌한 상황에서도 세한은 무사했다.

"어떻게 저렇게 피할 수 있는 거야?"

말도 안 된다.

세한의 움직임은 그다지 빠르지 않았다.

하지만 미노타우르스는 그런 세한을 전혀 공격하지 못했다.

'응?'

문득 현균은 하늘 위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시선을 들어올렸다.

동그란 뭔가가 날아다니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강당에서도 저런 게 있었지.

그것들은 언제나 현균의 머리에 있었으나, 지금은 세한을 주시하고 있었다.

"회장님!"

멍하니 그 광경을 보고 있자니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 지금 저것에 정신을 팔 때가 아니다.

현균은 달렸다.

숨이 턱밑까지 차올랐지만 멈추지 않고 필사적으로 달렸다.

[메인 퀘스트 1을 클리어 하셨습니다!]

[당신의 퀘스트 달성도는 '금'등급입니다.]

[잠시 후, 보상이 지급됩니다.]

"허억, 허억...."

성공했다.

대학을 벗어나는 순간, 커다란 폭죽소리가 들리며 여럿의 알림창이 나타났다.

'살았다.'

그런 마음이 드는 순간, 아직 미노타우르스와 싸우고 있을 세한이 생각났다.

자신이 무리 중, 가장 마지막으로 남았으니 현재 이 안에 남아있는 사람은 세한 혼자일 터.

쿵!

"윽?!"

그렇게 생각하며 급히 등을 돌리는 순간, 무언가에 부딪쳤다.

"이건 뭐지?"

대학을 벗어난 순간, 대학의 입구에 투명한 막이 생기기 시작했다.

마치 다시 들어갈 수 없다는 것처럼.

사람들을 모두 인도한 뒤, 세한을 돕기 위해 돌아갈 생각이었던 현균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세한 씨! 저희 모두 빠져나왔습니다! 어서 나오세요!"

푸른 막을 손으로 만지며 현균은 소리쳤다.

그런 현균의 외침을 들은 듯, 미노타우르스의 공격을 회피하던 세한이 그를 돌아보았다.

그는 딱 보기에도 한계에 몰린 모습이었다.

"세한 씨!"

퍼억!

거친 타격음이 들리며 세한의 신형이 실 끊어진 인형처럼 날아갔다.

미노타우르의 주먹에 맞은 탓이다.

"아아...."

현균은 망연한 얼굴로 그 광경을 보았다.

그가 날아간 방향으로 미노타우르스가 돌진하는 모습까지 지켜본 그는, 더는 지켜볼 수 없었기에 시선을 돌렸다.

우우웅.

거기다 장막의 색도 더욱 진해져 더 이상 대학 안의 상황을 살필 수 없었다.

"...."

자신의 탓이라는 생각이 가슴에 맴돌았다.

막막한 마음에 고개를 들어 올리니 지수가 현균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지수는 세한과 함께 있었었지. 남자를 꺼려하는 지수가 세한과 같이 있었던 것을 보면 특별한 사이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기에 현균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미안, 하다."

물론, 지수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

전생의 나는 딱히 정의로운 성격이 아니었다. 오히려 비열한 인간에 가까웠다.

그건 지금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현균의 감사를 들었을 때는 조금 오글거렸기에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이런 것도 나쁘지는 않지.'

전생에 나는 힘이 없었다.

재능이 없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나보다 재능이 넘치는 플레이어는 얼마든지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살아남기 위해 비정해지고 비열해질 수밖에 없었다.

난 살고 싶었으니까.

그래서 끝이 어땠지?

'혼자 살아남아봐야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난 그 사실을 깨닫고 회귀했다.

"조금 아프긴 하네."

나는 천천히 돌무더기를 헤치고 몸을 일으켰다.

지켜보는 옵저버의 숫자가 워낙 많아, 일부로 조금 연기를 했다.

맞는 순간 체력에 무려 94포인트를 투자했기에 약간의 타격외는 큰 상처도 없었지만, 지켜보는 입장에서는 죽었다고 생각하겠지.

'역시.'

옵저버는 보이지 않았다.

이제 마음 편히 미노타우르스를 상대해도 될 것 같았다.

"므우?"

그 광경을 본 미노타우르스가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주먹에 얻어맞고 날아가, 돌진에 치여 콘크리트에 파묻혔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수십 번은 죽었을 타격이었지만, 나는 약간의 통증을 제외하면 무사했다.

"역시 현재 네 능력치는 모두 카운터 스톱 상태군."

현재 메인 퀘스트의 한계 능력치는 F(100).

미노타우르스의 능력치는 딱 그 정도였다.

'전생의 내가 이런 상대를 정면에서 싸운 적이 있었나?'

평범한 플레이어라면 절대 잡을 수 없게 설정된 센티넬.

전생의 나는 그것과 싸우게 되는 일을 최대한 피했고, 싸워야 한다면 모든 수단을 동원해 싸웠다.

누가 희생되더라도 개의치 않고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서.

그런 자신이 싫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러고 싶지는 않거든."

쿵, 쿵쿵쿵!

미노타우르스가 연신 발을 굴렀다.

돌진의 전조다.

"음머어어어!"

녀석은 내가 어떻게 일어났는지 관심이 없었다.

그저 눈앞의 상대를 죽이기 위해 움직일 뿐이다.

애초에 그런 목적으로 이곳에 나타난 것이니까.

투쾅!

미노타우르스가 크게 발을 구르자, 지면의 보도블록이 단번에 부서져 날아갔다.

마치 전차의 포탄처럼 날아드는 그것을 보며 무모하게 양손을 뻗었다.

[포인트를 사용하여, 힘이 83포인트 상승합니다!]

[힘 능력치가 한계치에 도달했습니다.]

콰콰쾅!!

달려드는 녀석의 뿔을 잡자 몸이 주르륵 뒤로 밀려났다.

부서진 잔해를 날려버리며 지면의 보도블록을 깎아냈다.

하지만 난 날아가지 않았다.

녀석의 힘과 내 힘은 동일한 F(100).

동등한 상황이지만 달려든 미노타우르스 쪽이 유리했다.

그러나 난 이길 자신이 있었다.

==

홉고블린의 요대

힘이 10포인트 강해진다. 이 수치는 메인 퀘스트 한계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

나의 힘은 F(100)이 아닌, F(110)이었으니까.

고작 10의 차이였지만, 그 차이는 결코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드득, 드드드득.

돌진이 멈췄다.

"음머?"

방금 전까지 붉게 빛나는 미노타우르스의 눈이 순수한 소의 눈망울이 되었다.

그 눈은 나를 바라보며 명백히 당황하고 있었다.

작은 인간인 내가 정면으로 자신을 멈춰 세웠다는 것을

"내가 이겼다."

내가 나직이 말하자 미노타우르스의 눈이 큼지막하게 떠졌다.

뿌득 뿌드득!

"으, 음머어어!"

녀석의 뿔을 잡은 손에 힘을 넣었다.

미노타우르스가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쳤지만, 벗어날 수 없었다.

왜냐면 내가 더 힘이 세니까.

우지직! 콰직!

"음머어?!"

두 개의 뿔이 꺾였다.

두터운 양손으로 뿔이 부러진 자신의 머리를 누르는 미노타우르스를 향해 나는 전력으로 발로 후려 찼다.

콰아앙!!

녀석의 거대한 몸뚱이가 수 미터를 날아가 건물을 부쉈다.

전생의 나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비정하고 오로지 이득만 생각하는 싱글 플레이어.

비범함과 평범함의 경계에 있는, 그런 어리숙한 범인(凡人).

그런 나라면 결코 할 수 없는 일.

"하지만 이번엔 다르지."

지금의 나는 조금도 부족하지 않다.

부족한 재능을 매울 힘이 분명하게 있었다.

"그러니."

나는, 영웅이 되어볼까 한다.

# 10

010. 파티원을 육성하는 법(1)

[메인 퀘스트 1을 클리어 하셨습니다!]

[당신의 퀘스트 달성도는 '백금'등급입니다.]

[잠시 후, 보상이 지급됩니다.]

"오우."

학교를 벗어나자, 기다렸다는 듯 커다란 알림이 들려왔다.

"예상하긴 했지만 백금 등급이라...."

많은 사람들이 탈출하는 걸 돕고, 마지막에 미끼까지 되었다.

히든 보스라고 할 수 있는 홉고블린을 쓰러트리고, 센티넬인 미노타우르스마저 쓰러트렸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오히려 백금 등급 이상을 받았어도 이상하지 않다.

단지 등급이 백금 등급이 끝이라 그 이상이 없었을 뿐이지.

"보상은 뭐가 되려나."

지금 당장 쓸 무기가 없으니 괜찮은 무기나, 혹은 쓸 만한 스킬이나 줬으면 좋겠다.

생존에 필요한 소모품이나 포인트는 내게 전혀 필요하지 않으니까.

"어?"

그런 생각을 하며 조금 걸어가니, 익숙한 인형이 오도카니 앉아 있었다.

"한지수? 너 왜 여기 있어?"

난 당연히 사람들을 따라갔으리라 생각했다.

그렇게 유도하기도 했고.

지수가 사람들을 따라가면 동권의 행동을 감시할 수도 있기도 하고, 녀석의 행동에 제약을 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설마 여기서 기다리고 줄은.

"혹시 걱정했어?"

그래도 이렇게 기다려준 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미노타우르스를 잡고 꽤 느긋하게 쉬다 나온 터라 조금 미안하기도 했다.

"아뇨, 무사할 거라 생각했어요."

"어? 진짜?"

나름 혼신의 연기였는데 가볍게 간파당했을 줄이야.

옵저버들도 그냥 가버린 걸보면 내 연기가 부족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데.

"저번에 파티를 맺은 이후, 파티원의 상태를 볼 수 있더라고요."

지수는 허공을 두드려 알림창을 열었다.

그곳에는 나와 지수의 현재 상태가 표시됐다.

"미노타우르스에게 맞고 날아갔을 때도 멀쩡해서 그냥 연기인가보다 싶었어요. 세한 오빠는 그다지 눈에 띄고 싶어 하지 않았으니까요."

"뭐, 그렇지."

"그러면 미노타우르스는 잡으신 거예요? 달성도는 어떻게 되세요?"

"백금."

"와."

지수의 눈이 동그래졌다.

"넌 뭔데?"

"전 금 등급이에요."

금 등급도 충분히 대단하다. 본래 퀘스트를 최고 수준으로 클리어하면 받는 등급이 금이니까.

백금은 진짜 나오기 힘든 등급이다.

전생의 나도 몇 번 받아보지 못했을 정도로.

[보상이 정산되었습니다.]

[당신은 대단한 업적을 달성하셨습니다!]

또다시 폭죽이 터지며 내가 달성한 업적이 표시됐다. 최초로 센티넬을 처치한 것. 수많은 사람을 위해 희생을 자처한 것.

그것들이 내가 달성한 업적이었다.

'딱히 희생을 자처한 건 아닌데.'

보다시피 멀쩡하게 살아 있으니까.

[보상으로 '가변형 오리하르콘'이 지급됩니다.]

[스킬 결전의 시간(성장형)을 습득합니다.]

[스킬 재생(성장형)을 습득합니다.]

[보상으로 1,000포인트가 지급됩니다.]

"허."

한 번에 세 가지 보상이 주르륵 들어왔다. 이번만큼은 나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가변형 오리하르콘은 뭔지 잘 모르겠지만, 나머지 두 개의 스킬이 습득 난이도가 하늘에 별 따기인 성장형 스킬이었기 때문이다.

이건 단순히 백금 등급을 했다고 얻을 수 있는 보상이 아니다.

아마 히든보스는 물론, 센티넬을 처치한 것까지 가산을 받은 게 아닌가 싶다.

하기야 메인 퀘스트 1에서 전 세계 최초로 센티넬을 잡은 거니 어찌 보면 타당한 보상일지도 모른다.

'그만큼 약화된 센티넬이긴 해도.'

잡은 건 잡은 거지.'

그래도 S급 스킬을 받지 못한 건 좀 아쉽다.

성장형은 후반 포텐셜이 높지만, S급은 성장하지는 못해도 그만큼 사기적인 스킬인 경우가 많으니까.

예를 들어 지수의 천살성처럼.

[보상의 정산이 끝나 메인 퀘스트 2가 시작됩니다.]

==

메인 퀘스트 2: 로메 월드 타워로 향하라!

로메 월드로 향해, 보스 몬스터를 쓰러트려라.

대학교를 빠져나온 당신은 이제 새로운 세계에 첫 발을 내딛었다.

이제부터 당신은 로메월드 타워를 점거하고 있는 괴물을 쓰러트려야만 한다.

난이도 C 제한시간 14일

==

보상의 정산이 끝났기에 퀘스트의 알림이 울렸다.

전생이랑 같은 퀘스트였다.

같은 스테이지를 클리어한 플레이어들은 일정 구간동안 같은 메인 퀘스트를 공유하니 지수도 같을 것이다.

"다른 일행들은 전부 로메 월드 타워로 향했어?"

"네."

"근데 아까 묻다 말았는데, 왜 너는 같이 안 간 거야? 어차피 기다릴 거였으면 거기서 기다렸어도 되잖아."

내가 그리 묻자 지수는 눈을 살며시 찡그렸다.

뭔가 짜증난 얼굴이었는데, 그 짜증은 나보단 다른 뭔가를 향해 있었다.

"우선 사람들이 많은 장소는 싫어하기도 하고요. 뭣보다 그 박동권이라는 사람이 싫었어요."

"왜?"

"악취가 나거든요."

그랬나? 박동권은 딱히 이상한 냄새가 나지는 않던데. 비유적인 의미인지도 몰랐다.

아직 박동권은 전생만큼 능숙하게 연기하고 남을 속이는 수준은 아니었으니까.

예리한 지수라면 녀석의 쓰레기 같은 부분을 간파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면 지수의 재능은 정말 대단한 건지도 모르겠어.'

우선 기본 스킬로 천살성을 가지고 있는 것부터가 어마무시하다.

특성도 뭔가 가지고 있는 것 같으니 전생에서 일찍 죽지 않았다면 분명 이름을 날렸을 게 분명했다.

그것이 영웅일지, 악당일지는 모르겠지만.

"바로 로메 타워로 이동하실 건가요?"

"아니, 조금 천천히 가려고. 어차피 퀘스트 시간도 2주나 되잖아?"

"그렇긴 하죠."

이번 퀘스트 기간은 꽤 길다.

첫 번째 메인 퀘스트가 2일이었던 것에 비해 무려 14일이나 되니까.

물론 여기엔 작은 함정이 있다.

'그나저나 옵저버는 정말 한 대도 없네.'

지수가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걸 생각하면 몇 대는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와는 달리 지수는 제법 눈에 띄었으니까.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네."

"혹시 신의 아바타가 됐어?"

"아뇨."

역시 그런가.

그러니 옵저버가 한 대도 없지.

첫 번째 메인 퀘스트가 끝나면 그때부터 본격적인 신들의 러브콜이 시작된다.

재능이 있는 플레이어라면 여럿의 신이 아바타를 신청하는 경우도 있어 기쁨의 비명을 지르기도 한다.

'역시 나에게 요청한 사람은 하나도 없군.'

혹시 몰라서 알림창을 열어보니 아바타를 신청한 신은 한 명도 없었다.

그야, 내가 죽었을 거라 생각하겠지.

'그 녀석도 안 보이고.'

전생에도 나는 이때 아바타 신청을 받지 못했다.

당시 뭔가를 보여준 것도 아니라 무작정 도망쳤을 뿐이니 신들에게 메리트가 없었을 거다.

내가 신의 아바타가 된 건 좀 더 후였다.

"근데 왜 아바타가 되지 않았어? 아바타의 이점에 대해선 분명 알림창이 알려줬을 텐데."

나야 아무도 신청하지 않아 알림창 자체가 뜨지 않았지만, 한 명이라도 신청을 받게 되면 아바타에 대한 설명을 듣게 된다.

그 모든 이점을 듣고 아바타를 선택하지 않는 플레이어는 보통 없었다.

"저는 얼굴도 알 수 없는 자들을 모시고 싶지 않아요. 특히 아바타라니, 이름만 들어도 기분이 나쁘네요."

"...너 원래 조금 더 사근사근한 성격 아니었나?"

전에도 생각했지만, 지수는 남에게 좀 더 상냥한 성격이었다.

남을 챙겨주고 상냥했기에 과에서도 인기가 많다고 들었다.

생각해보면 나랑 어울린 것부터가 이상한 일이었지.

나는 좋게 말해도 친구가 많은 편도 아니었고, 사교성이 있는 성격도 아니었으니까.

그런데도 지수는 나와 잘 어울렸다.

하지만 지금의 지수는 나를 제외한 타인에게는 한없이 냉정한 판단을 내리고 있었다.

'천살성의 영향인가?'

그러기엔 너무나 미묘한 변화였다.

만약 정말로 영향을 받았다면 피에 미친 광인이 되었을 거다.

그 혈마조차 천살성의 살성을 완전히 버리지 못했다는 걸 생각하면 지금 지수의 모습은 이례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그냥 좀... 이제는 의미 없는 일 같아서."

그렇게 중얼거리는 지수의 말에 나는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뭐, 개인사정일 테니 더 묻지는 말자.

어차피 내게 피해가 오는 것도 아니고.

나는 말을 돌려, 신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꺼냈다.

"그럼 아바타 요청은 몇 명이나 받았는데?"

"음, 열두 명이었나?"

열두 명이라니.

최고수준의 지명도였다.

지수가 적당히 말하는 이름을 들어보니 꽤나 이름 좀 날리는 신들이었다.

그만큼 지수가 탐나 보였던 거겠지.

'지금은 내 파티원이지만.'

이름 좀 날리는 신과의 계약도 거절하는 까다로운 녀석이, 나와는 별 의심 없이 계약을 맺은 거다.

뭔가 알 수 없는 뿌듯한 마음이 생겼다.

'내가 신의 아바타가 되는 것 못지않게 키워주마.'

그러기 위해 잠시 시간을 가질 생각이었다.

"우선 따라와. 머물 곳을 찾아야지. 계속 여기 있을 건 아니잖아?"

"아, 네."

지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수가 계약을 맺었다면 몇 개의 옵저버가 따라붙었겠지.'

그럼 조금 귀찮다. 행동에 제약이 생기니까.

하지만 무려 열두 명의 요청을 거절한데다 몇 시간을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나를 기다렸으니 옵저버들이 죄다 떠나 버렸을 거다.

나로선 정말 좋은 일이었다.

***

나와 지수는 적당한 빈 자취방에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아마 집 주인은 거리에서 돌아다니는 몬스터에게 습격당해 유명을 달리한 모양인지 집안이 아주 피범벅이었다.

지금은 싹 정리도 끝내고 자리에 앉아 앞으로의 일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우선 스킬을 교환하는 게 좋겠지?'

나는 대략 일주일 정도 시간을 가질 생각이었다.

우선 새롭게 얻은 스킬도 확인해야 할뿐더러, 지수도 확실하게 강화시킬 생각이었다.

'지금도 웬만한 플레이어들은 상대도 안 되겠지만.'

현재 내가 습득하는 포인트의 일부가 지수에게 공유되고 있는데다가 본인도 VIP브로치를 착용하여 포인트를 대량 습득하고 있었다.

포인트를 이용하여 능력치를 올릴 수 있는 게임 시스템상, 지수는 천살성이 아니더라도 기본 능력치부터 큰 차이를 보이리라.

'어느 게 좋지?'

되도록 지수에게 잘 맞고 좋은 스킬을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어떤 걸 줄지 좀처럼 결정할 수 없었다.

왜냐면 둘 다 지수에게 너무나 잘 맞는 스킬이었기 때문이다.

==

결전의 시간(F)(성장형)

일정시간동안 모든 행동이 빨라진다. 지속시간 5초. 1시간에 1회 사용 가능.

==

우선 결전의 시간.

말할 필요도 없다.

근접전이 주력이 될 지수에게 결전의 시간은 생존력이면 생존력, 공격이면 공격 양쪽 모두 극도로 올려줄 수 있는 스킬이다.

지금은 지속시간이 무척 짧지만, 나중에는 꽤나 길어질 게 분명했다.

'뭣보다 성장형이고.'

성장형 스킬은 같은 등급이라도 좀 더 우수한 효과를 발휘했다.

말하자면 S급까지 성장시키면 다른 S급 스킬보다도 효과가 좋은 스킬이 되는 거다.

물론 거기까지 성장시키기가 힘들지만 후반을 생각하면 성장형 스킬이 최고였다.

'그다음은 재생.'

==

재생(F)(성장형)

몸에 입은 피해를 50퍼센트 빠르게 회복한다.

==

결전의 시간과는 달리 무척 심플했다. 하지만 그쪽은 엑티브인데 반해 이쪽은 패시브.

'천살성과 VIP브로치만 해도 그 정도의 회복력을 보여줬는데 이것까지 익히면....'

재생을 S급까지 익히면 머리를 통째로 날려버리지 않는 이상 지수가 죽는 일은 웬만해선 없을 것이다.

뭣보다 지금 당장 익혀도 50퍼센트나 회복속도가 빨라져서 효과를 보기 좋다는 점이 눈에 띄었다.

'어떤 게 좋을까....'

파티원으로 등록되어 있는 이상, 지수는 앞으로 내게 오른팔이나 마찬가지인 존재가 될 것이다.

그러니 나는 신중하게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10분 후.

나는 하나의 스킬을 지수와 교환했다.

# 11

011. 파티원을 육성하는 법(2)

[스킬을 파티원과 공유했습니다.]

[공유한 스킬 '재생']

[습득한 스킬 '천살성']

스킬을 교환하자 간결하게 알림창이 나타났다.

'역시 재생이 좋겠어.'

두 개의 스킬 중 어느 것이 지수에게 어울릴까 고민했지만, 내 선택은 재생이었다.

결전의 시간도 분명 좋은 스킬이었지만, 재생 쪽이 지수에게 맞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직 파티원과의 유대가 깊지 않아 공유된 스킬의 능력이 30퍼센트로 떨어집니다.]

[파티원과의 유대가 깊어질수록 스킬의 효과가 최대 80퍼센트까지 상승합니다.]

[대신 공유된 스킬은 스킬에 포함된 디메리트를 받지 않습니다.]

'...뭐?'

뜬금없이 들려온 말에 나는 순간 당황했다.

'파티원과의 유대? 30퍼센트만 사용할 수 있다고?'

아니, 그런 설명은 없었잖아.

==

천살성(S):

인간형 존재에게 피해 +30퍼센트

피해를 받거나 줄시 최대 공격력과 체력재생이 30퍼센트 상승한다.

==

본래라면 여기에 '상태이상 광기에 빠질 수 있다.'라는 말이 추가됐을 것이다.

하지만 효과가 다운되며 디메리트가 사라진 모양이다.

'광기는 그냥 디메리트라고 하긴 뭐하다만.'

천상성의 전력은 광기 상태에서 나오지만 난 없는 쪽이 낫다.

더군다나 유대가 깊어지면 스킬 효과도 상승하니 차라리 이쪽이 좋았다.

"...근데 유대가 깊어지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 거예요?"

마침 지수도 스킬을 공유하며 떠오른 알림창을 확인한 듯 눈을 가늘게 찡그렸다.

"나도 모르지."

"하긴 그렇겠죠. 오빠는 왠지 뭐든 알고 있는 것 같아서 무심코 묻고 말았네요."

지수는 순순히 수긍하며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신기하네요, 갑자기 새로운 스킬이 생기다니."

아마 지수에게 공유된 '재생' 스킬도 30퍼센트만 사용이 가능할 것이다.

성장형 스킬인 걸 생각하면 지금은 극히 효과가 미비하겠지.

지수도 그 사실을 알기에 조금 아쉬워하는 얼굴이었다.

"공격용 스킬이 없어서 조금 불안하네요."

"재생도 충분히 공격적인 스킬이야."

"이건 그냥 회복용 스킬 아닌가요?"

"자고로 우수한 생존기는 우수한 공격스킬이기도 한 법이지."

조금이라도 게임을 해보면 알 것이다.

생존기의 중요성을.

"다른 사람이라면 피해야 할 공격을 너는 무시하고 공격할 수 있지. 맞아도 금방 회복되니까. 거기다 재생은 단순히 상처의 회복뿐이 아니야. 스테미너와 같은 체력적인 문제도 적용되거든."

회피하거나 공격을 하거나, 어느 쪽이나 체력이 필요하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 체력을 회복하는데 시간이 들뿐더러 시간이 지날수록 지치게 된다.

하지만 재생 스킬은 그런 체력과 피로도 빠르게 회복시켜 준다.

"괜히 최상급 스킬이 아니야. 지금은 물론 조금 빠르게 회복되는 정도겠지만 스킬 레벨이 오를수록 더 대단해질걸?"

"아...."

그제야 지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좋은 스킬 같아요. 감사해요."

"아니, 나도 충분히 좋은 걸 받았지."

다시 말하지만 천살성이면 차고 남는 장사였다.

"그럼...."

나는 슬쩍 창밖을 보았다.

거리에서는 몬스터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두 번째 스테이지에 잘 도착하려나.'

현균과 그가 이끄는 사람들이 성공적으로 다음 스테이지에 도착했을지 궁금했다.

우선 내가 현재 해줄 수 있는 건 전부 해줬으니 나머지는 알아서 해야겠지.

'그들이 살길 바라지만 그렇다고 계속 지켜줄 생각은 없거든.'

이 세계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강해질 수밖에 없다.

이제부터 그들은 그것을 알아야 했다.

"저희도 몬스터를 잡아야 하지 않나요? 포인트를 벌어야 할 것 같은데."

그리 말하는 지수는 마치 오늘 점심은 뭔지 묻는 것 같은 뉘앙스였다.

'...그래도 얘는 너무 적응이 빠른데?'

처음에 괴물들에게 벌벌 떨던 여자애가 맞나 싶다.

고블린 무리를 학살한 순간부터 달라진 거 같지만 그렇다 해도 몬스터와 싸운다는 공포가 지나치게 옅었다.

거기다 이해도 빠르고.

우선 좋은 게 좋은 법이니 나는 이 이점을 최대한 이용하기로 했다.

"아니. 그보다 할 게 있어."

"...?"

지수가 의아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두 번째 퀘스트는 너도 알다시피 여유 시간이 좀 길잖아?"

"아, 확실히 14일이었죠."

"그래, 그러니 다음 스테이지에 진입하기 전에 미리 새로운 스킬을 익힐 생각이야."

"이미 익힌 걸로 충분하지 않나요?"

"보통은 그렇지만, 그것만으론 안 되는 게 있는 법이지."

우수한 보상을 받아, 이미 보통의 플레이어들보단 꽤 좋은 위치에서 스타트를 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겨우 그 정도로는 안 된다.

신의 아바타와 경쟁하기 위해선 그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마침 너에게는 재생 스킬 말고도 또 알려줄 스킬이 있거든."

"네? 하지만 스킬 공유는...."

"이건 스킬 공유하지 않아도 알려줄 수 있는 스킬이더라고."

지수는 의심스럽다는 듯 날 바라보며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뭔가 제게 엄청 퍼주는 기분인데요. 세한 오빠는 원래 그런 성격이 아니잖아요. 그 이기적인 세한 오빠가...."

"...."

순간 조금 찔렸다.

확실히 지수의 말처럼 나는 남에게 이것저것 베푸는 성격이 아니었다.

적어도 여태까지는... 말이지.

그러니 지수의 의심은 타당했다

.

'아무리 쪼잔해도 전생에 입은 은혜 정도는 갚는다고.'

파티원으로서 지수를 육성시키려는 의도도 있긴 했지만, 난 전생에 지수가 나를 구하려다 죽은 것을 잊지 않았다.

내가 지수를 챙겨주는 건 그런 복합적인 이유였다.

"흠흠, 아무튼 너에겐 분명 잘 맞을 거야. 이름부터가 너랑 딱 맞거든."

"무슨 스킬인데요?"

"혈천수라공(血天修羅功)."

바로 혈마의 무공이자, 천살성을 가진 마인(魔人)들에게 특화된 살법.

지수에게 이보다 잘 어울리는 스킬은 없었다.

***

스킬을 익히기 위해선 보통 스킬의 계기가 되는 스킬 트리거가 필요하다.

물론 스킬마다 그 종류가 다른데, 무공형 스킬의 경우에는 해당 무공의 구결이나 심득이 필요하다.

'덕분에 등급을 올리거나, 익히기가 무척 까다롭지만.'

혈마의 무공인 혈천수라공은 조금 예외다.

오로지 천살성의 마인들만 익힐 수 있는 무공인 만큼 천살성 스킬을 보유한 경우 익히기가 무척 쉬웠다.

천살성 스킬만 있다면 말이다.

'하지만 그 천살성 스킬이 극히 희귀하고 온전히 지니기 힘든 스킬이라는 점이 크나큰 문제지.'

천살성 스킬을 보유하면 보통 광인이 된다. 그러니 무공을 익힐 수 있을 정도로 제정신이 되기 힘들다는 것.

천살성에 몸이 맞는 소수의 인간만이 정신을 가다듬을 수 있으나, 그렇다 해도 마인(魔人)이라는 점은 다르지 않다.

아무튼 무공자체는 익히기 쉬우나, 조건이 어려운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전생의 나도 익히지 못했지.'

왜냐면 천살성이 없었으니까.

혈마와 싸우고, 그와 인연을 맺어 무공의 구결과 심득을 얻었지만 천살성이 없어 익히지 못했다.

이번에는 지수와 스킬공유를 하여 천살성을 얻어냈으니 익힐 수 있겠지만 솔직히 그다지 끌리지는 않았다

.

왜냐면 내 성향과는 그다지 맞지 않는 무공이기 때문이다.

'...근데.'

나는 힐끗 옆에서 운기조식을 하는 지수를 바라보았다.

'뭔 5일 만에 혈천수라공을 1성까지 익히지?'

무공은 기본적으로 성장형 스킬이다.

그만큼 익히기 어렵고, 얻기도 힘들다. 혈천수라공은 그 무공 중에서도 손꼽히는 비급이다.

아무리 천살성 스킬을 가지면 익히기 쉬운 무공이라고 해도 지나칠 정도였다.

'내가 아낌없이 도움을 주긴 했지만....'

거기다 파티원 보너스 중에는 스킬 숙련이 빠르게 상승하는 효과도 있었다.

'그렇다 쳐도 너무 빨라.'

이정도 속도라면 무림에서 날고 긴다는 천재들도 따라올 수 없는 속도였다.

아마 내가 익혔다면 비슷한 속도로 익힐 수 있었겠지만, 그건 내가 이미 혈마로부터 들은 심득이 있기 때문이다.

'진의 무림인들이 보면 놀라 쓰러지겠군.'

혈마가 보면 어떤 얼굴을 할지 벌써 기대가 됐다.

나는 놀라긴 했어도 그 이상의 감흥은 없었다.

전생에도 이런 천재들은 몇 명이나 봤거든.

사람의 노력이 부질없게 느껴질 만큼 가공할 천재들.

하지만 살아남은 건 나였다.

'아무튼 슬슬 출발해야겠지.'

본래는 일주일 간 운기조식만 익히게 하고, 내공의 구결을 알려준 뒤 가능하다면 혈천수라공을 익히는 것까지만 하려고 했다.

근데 예상보다 훨씬 지수의 성취가 뛰어났기에 이틀 정도는 일찍 움직여도 될 것 같았다.

'어디....'

우선 움직이기에 앞서, 나는 하나 살펴볼 곳이 있었다.

"접속."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커다란 알림창이 여러 개가 나타났다.

바로 신들의 '커뮤니티'다.

'처음에 들어왔을 때보다 훨씬 활성화되어 있군.'

그때는 게시판도 몇 개 없었지만 지금은 공략게시판이나 신들이 이용하는 거래소도 눈에 띄었다.

당연히 내가 확인할 곳은 그중 채팅방이었다.

전과 달리 채팅방은 지역, 즉 서버별로 구분되어 있었는데. 내가 참여할 장소는 당연히 서울 지역 신들이 참여하는 채팅방이었다.

[익명48번 손님이 입장하셨습니다.]

[정직한삶: 아 정말 짜증나네, 다 죽여 버렸으면 좋겠다.]

[어둠속의어둠: 죽긴 뭘 죽여. 지금 한창 재밌고만]

채팅방에 입장하자마자 흉흉한 말이 올라왔다.

'정직한삶이라.'

익숙한 닉네임이다. 왜냐면 이 녀석이 바로 박동권을 아바타로 삼은 신이기 때문이다.

아이디는 정직한삶이지만, 정직함과 가장 먼 신이다. 애초에 저런 아이디부터가 남들을 기만하기 위해서 지은 거지.

보통 신들의 아이디는 플레이어들에게 보이는 외면과 같은 거라, 본인의 업적이나 신으로서의 권능을 나타내는 아이디가 많다.

물론, 꼭 그래야 한다는 법은 없기에 자기 마음이 내키는 대로 짓는 신도 있다.

정직한삶이라는 아이디는 후자에 가까웠다.

'얌전히 있는 모양이구만. 박동권.'

현균이 멀쩡하게 살아 있으니 함부로 움직이기 어렵겠지.

동권의 신이 불평을 말하는 것부터가 그 증거다.

아마 전생처럼 처음에 압도적인 보상을 받은 것도 아니니 몸을 사리고 있으리라.

'아무튼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나는 계속해서 채팅방의 대화를 지켜봤다.

대부분은 별 의미 없는 대화였다.

어떤 아바타가 활약 중이라느니, 서브 퀘스트 중에 좋은 게 있다고 떠드는 정도였다.

[어릿광대: 아~! 내 아바타는 재능은 있는데 서민적이야. 귀중한 내 스킬로 은행이나 털다니. 나중에 후회할 걸 생각하면 그게 또 재밌긴 하지만.]

그때, 기다리던 아이디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최대한 태연한 어조로 말을 걸었다.

익명48: 은행은 왜 터는 거죠? 어차피 지구의 돈은 플레이어에게 큰 의미가 없는 걸로 압니다만.

어릿광대: 몰라~! 그래도 인간들을 속이는 게 재밌어서 내버려 두고는 있어.

익명48: 그렇습니까? 저도 같이 보고 싶은데 괜찮을지....

어릿광대: 별로 상관없어.

[어릿광대 님이 자신의 옵저버에 당신을 초대했습니다.]

이런 기능도 있었나?

옵저버는 보통 GM이 관리하지만 신들도 플레이어를 아바타로 선택한 경우에는 개인 옵저버를 사용 가능하다.

아마 어릿광대는 자신이 직접 조종 중이던 옵저버 채널에 나를 초대한 모양이다.

어릿광대: 여기야, 어때? 내 아바타 괜찮지?

커뮤니티 구석에 작은 영상이 나타났다.

화면에 비친 건 은행이었는데 꽤나 혼란스러운 광경이었다.

몬스터가 아닌 플레이어와 플레이어가 싸우고 있는 모습.

어릿광대: 이제 지구의 돈 같은 건 필요 없는데, 멍청한 인간들이라니까.

익명48: 혹시 이런 상황을 만든 게 당신의 아바타입니까?

어릿광대: 그랬으면 더 재밌었겠지만, 내 아바타는 조~ 금 소시민이라서. 저기 있지?

화면이 확대됐다.

그러자 총을 들고 무리를 내쫓는 한 명의 남성이 눈에 들어왔다.

무척 정의로워 보이는 인상의 인간.

어릿광대: 저게 내 아바타야.

그 말에 나는 옅게 미소 지었다.

'그래, 지금 이 모습으로 있단 말이지.'

왜냐면 이 녀석이 바로 로메 타워에 있는 '그 괴물'을 처리할 키 카드였으니까.

# 12

012. 파티원을 육성하는 법(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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