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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화 29. 성 크리오네 (1)

"만슈타인이란 자의 행위가 도를 넘어선 건 맞지만, 렌타이어마르크는 반역을 일으킨 자의 영지. 반역자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는 건 노예제부터 이어진 제국의 전통 아니겠는가? 반역자는 법의 보호를 요구할 권리가 없는 법. 만슈타인의 행동은 권한을 넘어선 것뿐이지, 황제의 이름을 팔아 권리를 남용했다고 볼 수가 없다."

아카이아 대주교가 루페르트를 위해 나선 건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만슈타인을 빌미로 황제의 권위에 흠집을 내려고 시도했던 레벤호스트는 이에 대해 장문의 반박문을 작성해 대주교에 보냈지만, 대주교는 그보다 더 긴 서신으로 화답했다.

레벤호스트는 그의 영지인 트라이아로 돌아갔다.

그의 패배였다.

만슈타인은 보호받았고, 그의 보호자인 루페르트의 권위 또한 지켜졌다.

렌타이어마르크에서의 승리가 공고해지는 순간이었다.

그 승리의 순간에 만슈타인이 루페르트를 찾아왔다.

늘 그렇듯 그는 놀라움을 가지고 왔다.

"저를 해고해 주셨으면 합니다."

확신에 찬 눈동자로 만슈타인이 말했다.

"해고라고?"

"네, 그러합니다. 법률상의 죄는 면했지만, 여전히 저는 선제후들의 눈 밖에 난 상태지요. 저 같은 사람을 데리고 있어 봐야 폐하에게 이득이 될 일은 없어 보입니다. 게다가 저 같은 군인 평화의 시기에 뭘 할 수 있는지도 저 스스로도 알지 못합니다."

만슈타인을 잡아 두고 싶은 마음은 있다.

지난 전쟁에서 만슈타인은 자질을 증명했다.

비록 그 승리의 근저엔 제국 성인이라는 비장의 카드가 있었지만, 그 과정을 만들어 낸 건 만슈타인의 번뜩이는 기지와 대담한 상상력이다.

다가올 전장에서 그의 능력은 루페르트의 가장 날카로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만슈타인의 뜻이 너무나 확고하다.

"저를 해고해 주셔야 합니다. 그것이 폐하와 제국을 위한 길이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루페르트도 알고 있다.

허수아비라고 하나 밑바닥에서만 느낄 수 있는 감각을 길렀다.

'확실히 만슈타인의 말이 옳다. 그를 계속 내 휘하에 놔둔다면 선제후들은 계속해서 그를 빌미 삼아 나를 공격하겠지.'

루페르트의 가장 날카로운 검인 만슈타인은 양날의 검이다.

한 면은 황제의 적을 베지만 다른 한 면은 황제의 권위를 벨 수도 있다.

오랜 고민 끝에 루페르트는 만슈타인의 청을 받아들였다.

"어쩔 수 없군. 그대의 청을 수락하겠다."

만슈타인과 황제의 계약은 만료됐다.

만슈타인은 루페르트의 보호를 벗어났다.

그러나 여전히 루페르트는 미련이 남았다.

"어디로 가고 싶은가?"

한직이라고 하나 만슈타인의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자리 정도는 마련해 줄 생각이었다.

그것이 언젠가 터질 내전에서 만슈타인과 자신을 잇는 가교가 될 수 있을 거라고 보았다.

만슈타인은 그마저도 이미 생각해 둔 듯 막힘없이 자신의 희망을 밝혔다.

"카렐리아 쪽이 좋겠군요. 경비 기마대 지휘관 자리가 남아 있다는 이야기를 고향에 있는 친구의 편지를 보고 알았습니다."

"카렐리아?"

루페르트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카렐리아는 황제의 직할지.

루페르트의 입김이 미치는 곳이다.

루페르트는 흔쾌히 승낙했다.

"좋아. 카렐리아라. 내 오토 브라에에게 일러두겠네."

"그럼 언젠가 다시 폐하의 곁에 머물 날을 기다리며."

만슈타인은 사라졌다.

루페르트는 떠나가는 자신의 가장 날카로운 검을 담담하게 배웅했다.

'이것이 끝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루페르트는 만슈타인을 떠나보내면서도 내심 이것이 그와 자신의 마지막 만남이길 원했다.

모호한 통찰의 만화경의 결과만은 아니다.

만슈타인은 전쟁에서만 쓸모 있는 사람이다.

전쟁을 일으키지 않고 제국의 내분을 막아 내는 것.

그것이 현재 루페르트가 당면한 제1 과제다.

가장 날카로운 검을 떠나보낸 루페르트의 시선은 다음 행선지로 향했다.

* * *

황제의 침소.

루페르트는 의자에 걸터앉아 과거를 회상했다.

루페르트가 생각하는 건 트라이아의 선제후 레벤호스트다.

레벤호스트는 위험한 인물이다.

회귀 전엔 프리드리히 마티아스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제국의 역사를 쥐고 뒤흔들었다.

무엇보다 레벤호스트는 내전에 연루된 세 명의 선제후 중 하나다.

다른 둘은 고어문트의 골트문트와 디더팔츠의 막스 게오르크다.

다만 이 중에서 막스 게오르크는 달리 봐야 한다.

막스 게오르크는 내전을 직접 일으킨 주범은 아니다.

내전의 직접적인 범인으로 지목받는 건 골트문트와 레벤호스트다.

막스 게오르크는 내전이 격화되자 자신의 군대를 소집하여 골트문트를 돕거나 레벤호스트를 돕는 등 이중적인 행보를 보였다.

그가 한쪽의 편만 들었다면 제국의 내전은 의외로 빠르게 종식됐을 것이다.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사람들을 말했다.

막스 게오르크만큼 제국의 균형을 중요시여기는 사람은 달리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 쓸데없는 공평함이 제국을 파멸로 몰아넣었다.

그러므로 그의 책임은 막중하다 볼 수 있다.

하지만 내전이 일어나지 않은 상황에서 막스 게오르크는 그가 신교 선제후라는 걸 감안해도 중립적으로 봐야 한다는 게 루페르트의 생각이다

'그래, 당시에는 알 수 없었지. 그가 왜 그러는지, 왜 그런 이중적인 행보를 보였는지.'

수많은 말과 억측이 있었다.

당시 루페르트의 측근이라고는 얼치기 귀족과 글자도 쓸 줄 모르는 하찮은 신분의 시종이 전부였다.

루페르트 본인조차 사실상 문맹 취급받았는데 제대로 된 인간이 옆에 모이겠냐마는.

회귀한 현재에도 막스 게오르크의 진의가 무엇인지는 루페르트도 알지 못하지만 루페르트는 일단 그를 중립에 두었다.

이튿날 루페르트는 자신의 총신을 한 자리에 불러 모았다.

평상시와 달리 하급 관리는 물론이고 호위까지 내보내고 단 네 명만이 모였다.

황제의 태도를 본 총신 3인방은 평범한 자리가 아니라는 걸 알고 저마다의 표정을 지은 채 황제의 의중을 헤아리려 했다.

루페르트는 천천히 그리고 확실하게 자신이 걱정하는 미래를 말했다.

제국이 반드시 피해야 할 멸망의 씨앗.

바로 내전을 말이다.

루페르트는 단지 내전만을 언급하지 않았다.

다소 혼란스러운 서순과 정려되지 않은 단어를 사용하였지만, 그는 내전이라는 거대한 주제 가운데서 자신이 가장 염려스러워하는 부분을 콕 짚어 말했다.

"내가 볼 때는 골트문트나 레벤호스트. 이 둘 중 하나가 내전의 원인이 될 것이다."

당장 문제가 되는 건 레벤호스트다.

그는 이미 황제에게 공공연히 이빨을 드러내고 황제에 반하려는 연대를 결성하려 한다.

하지만 레벤호스트만을 탓할 수만은 없다.

골트문트는 레벤호스트 이상으로 위험한 자다.

그의 진정한 의도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루페르트는 골트문트는 레벤호스트 이상으로 강한 황제가 들어서는 걸 염려하는 것처럼 보였다.

"어떻게 처리해야겠는가?"

신중한 베르너가 먼저 답했다.

"일단은 이쪽의 힘을 비축하면서 두 선제후의 행동을 지켜보는 것이 옳을 듯싶습니다. 이미 황제 폐하께서는 제국은 물론 대륙에서도 가장 강력한 군주시나 모든 선제후를 아우르기에는 다소 전력이 부족합니다. 허나 선제이신 클라우데 2세만큼의 힘을 가지신다면 선제후들이 어떤 마음을 품건 폐하를 따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타당한 의견이다."

루페르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오토 브라에를 응시했다.

"그대의 생각은 어떤가?"

"저는 골트문트 선제후와 미리 손을 잡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장 쉬우면서도 간편한 방편이 아닐까 싶습니다."

루페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깊이 생각할 것도 없다.

일곱 선제후 중 최강이라는 슈발츠마인을 가진 루페르트와 제국은 물론 대륙에서도 가장 부유하다는 골트문트가 손을 잡는다면 감히 누가 맞서려 들겠는가?

너무나 직관적인 승리의 공식이다.

하지만 여기에도 난점이 있다.

골트문트를 동맹의 열에 세우려면 그와 친해져야 한다.

그것은 루페르트의 아픈 과거와 맞닿아 있다.

루페르트는 표정을 관리하며 오토 브라에에게 물었다.

"그대도 알고 있겠지만 만슈타인 건으로 제국 의회가 들썩일 때 골트문트는 같은 구교를 믿는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나의 편을 들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그를 우리 쪽으로 끌어들일 수 있겠는가?"

오토 브라에가 고개를 숙이며 겸허하게 답했다.

"폐하는 아직 독신이십니다."

"울피아나. 그 여자와 결혼을 하라는 건가."

"마침 울피아나 님도 외국에서 온 청혼을 거절하고 있습니다. 정확한 의도는 모르겠지만, 일설에 따르면 울피아나 님은 폐하의 이야기를 주변에 많이 한다고 들었습니다."

"소문만 가지고 쉬이 판단해서는 아니 되겠지. 게다가 골트문트와 너무 친해지는 것은 그다지 현명하지 않아."

오토 브라에가 의문을 안고 루페르트를 응시했다.

루페르트는 먼 곳을 바라보며 은은한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그는 가까이하기엔 너무나 위험한 사람이다. 게다가 야심가이기도 하지."

"그런 뜻이."

"다른 방법이 떠오른다면 의견을 주시게."

"알겠습니다. 폐하."

마지막으로 루페르트는 셋 중 가장 뛰어나다고 믿는 요하네스를 기대를 담아 응시했다.

요하네스가 특유의 서글서글한 눈웃음으로 화답하며 영리한 목소리를 발했다.

"레벤호스트 선제후는 극도로 위험한 사람입니다. 제2의 프리드리히 마티아스로 만드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요."

"극단적이군. 방법은 있나?"

"황송하오나 그건 아직 생각하지 않았습니다만, 멀리서 볼 때 제국에 가장 덜 피해가 가는 방법은 레벤호스트 선제후를 미리 제거하는 게 가장 옳다고 봅니다. 허나 그렇게 한다면 막스 게오르크 선제후가 행동을 취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건 그때 가서 볼 일이겠지요."

"흐음."

루페르트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친구의 발상은 섬뜩할 정도로 날카로운 통찰이 있지만, 세상이 따라가기엔 너무나 앞서가 있군.'

레벤호스트를 미리 제거한다.

생각지도 못한 방법이다.

확실히 레벤호스트를 미리 죽인다면 반란의 씨앗은 사라질지도 모른다.

프리드리히 마티아스는 반송장이고 게오르크 아르님은 겉으로 큰소리를 치지만 선제후령의 내부 사정은 그리 순탄치 않다.

빙해 약탈자가 기승을 부리고 신의 회초리라 불리는 괴이한 역병이 퍼지고 있으니.

한스 징펠만이 목격한 바 있는 그 역병이 잘 퍼지지 않는 건 그 병에 걸리고 죽는 속도가 너무 빠르기 때문이다.

노르드마르크는 어찌 보면 이미 뼈대부터 삭아 버린 무너져 가는 집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노르드마르크는 내전 시기 너무나도 쉽게 몰락했다.

정식 군대도 아닌 약탈자의 모임한테 영지 전체를 내줬으니.

당시엔 루페르트도 여기저기 피난을 가느라 정확한 사정을 알 방법은 없었지만, 게오르크 아르님은 제대로 된 전쟁 한번 해 보지 못한 채 영지 전체를 잃고 병에 걸려 죽었다고 한다.

'그는 겉모습과 달리 무능한 사람이다. 회귀 직후엔 그의 기세에 위압감을 느꼈지만, 황제가 된 지금은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하는군. 그의 풍채도 걸걸한 목소리도, 목에 두르고 다니는 짐승의 가죽도 말이야.'

막스 게오르크는 섣불리 움직일 사람이 아니다.

그는 상황이 악화되어야 비로소 움직이는 무거운 사람이다.

아무튼 이것이 대략적인 총신들의 계획이다.

루페르트의 생각은 어느 쪽에도 기울지 않았지만, 베르너의 기본적인 전략엔 찬동했다.

'결국은 내 힘이 중요하다. 선제의 방식을 답습하고 싶지 않지만, 누구도 감히 넘볼 수 없는 군대를 거느릴 힘이 있다면 누가 감히 나에게 맞서겠는가? 힘을 통해 유지되는 평화도 있는 법이다.'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자리를 파하려 할 때였다.

오토 브라에가 갑자기 뭔가 생각이 난 듯 푸른 눈을 반짝이며 루페르트를 빤히 쳐다보았다.

"폐하."

"무슨 생각이라도 떠올랐나? 그리 무서운 눈으로 나를 쳐다볼 정도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농담이네."

"하하, 제 말도 약간의 농담이라고 받아들여 주셨으면 좋겠군요."

"호오. 한번 들어나 볼까?"

루페르트가 차를 음미하며 편안하게 의자에 기대앉으며 총신의 새로운 생각을 기다렸다.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오토 브라에에게 낭랑하게 말했다.

"선대 황제 중에 순결제라는 분이 계십니다."

요하네스가 헛기침을 했다.

억지로 기침을 위장하지만 틀림없다.

웃음을 참으려 한 것이다.

베르너는 좀 더 늦게 오토 브라에의 의도를 알아차린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루페르트는 아직 오토 브라에의 진의를 알지 못했다.

침묵 속에서 오토 브라에가 말을 이었다.

"과거의 황제셨던 순결제 루트비히 3세는 슈발츠마인의 가계 중에서 방계 출신이라 폐하처럼 가문의 지지도 선제후의 지지도 크게 받지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마치 최고의 곡예사처럼 정치의 외줄을 능수능란하게 타셔서 위태로웠던 제국을 정상으로 돌려놓으셨죠. 그분이 가문과 선제후의 타협을 이끌어 낼 수 있었던 방법이...."

오토 브라에가 말끝을 흐렸다.

그제야 루페르트는 오토 브라에의 진의를 파악했다.

"독신 선언이었지!"

루페르트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그래, 그 방법이 있었지!'

111화 29. 성 크리오네 (2)

루트비히는 200년 전의 사람으로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황제다.

사람들의 기억에 남기에 너무 이른 시기에 죽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당시 동방 제국과 부르봉 왕국의 양면 공세에 어려움을 겪던 시기, 통합되지 않던 제국을 하나로 뭉치고 제국을 정비해 두 나라의 공세에 대비할 시간을 벌고 나아가 반격의 계기를 마련한 건 역사적인 사실이다.

루페르트는 선제의 벽에 새겨진 루트비히의 조각상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다른 황제의 조각상 주변에 의례적으로 병사나 배우자, 아이들이 새겨진 것과 달리 루트비히는 경건하게 기도하는 모습으로 외로이 서 있다.

그가 어떠한 후손도 남기지 않았다는, 종교에 귀의한 독신이라는 걸 강조하기 위한 조형이다.

'루트비히의 모범을 따른다면 굳이 울피아나와 결혼을 하지 않더라도 골트문트와 힘을 합칠 수 있다. 아니 그뿐만 아니라 다른 선제후의 견제도 받지 않겠지.'

그들이 두려워하는 건 강력한 왕조가 끝없이 이어지는 것이다.

프리드리히 마티아스의 동기도 선제 클라우데 2세의 학정이라고 하지만 그 내면엔 슈발츠마인에게 뺏긴 제관을 찾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황제가 독신을 선언한다면, 다른 말로 후사를 두지 않겠다는 건 제위 경쟁자인 선제후에게 기회가 돌아오는 걸 뜻한다.

슈발츠마인이 독점하던 왕관을 그들이나 후손의 머리 위에 씌울 수 있다는 이야기다.

루페르트가 빨리 죽는다면 그들에게도 기회가 주어진다는 이야기니까.

이 방법은 그러나 널리 사용되는 방법이 아니다.

어떤 황제가 후사를 두지 않으려 하겠는가.

어떤 황제가 자신의 가문이 아닌 적이 될 수도 있는 자에게 권력을 맡기겠는가.

순결제 루트비히는 예외 중의 예외다.

권력 기반이 약하기도 약했을뿐더러 수도승 황제라고 불릴 정도로 신심이 깊었다.

그 대단히 드문 길을 루페르트는 걸으려 하는 것이다.

"하오나, 폐하. 정말로 괜찮겠습니까?"

가장 놀란 건 순결제 이야기를 꺼낸 오토 브라에였다.

루페르트는 쾌활하게 웃으며 답했다.

"내 생의 목적은 오직 제국의 내전을 막고 제국이 선제들이 이어 온 영화 속에서 천년기를 맞는 것이다. 후사 같은 건 아무래도 좋다. 선제후만 해도 그렇다. 그들 또한 제국인이 아니던가? 황제의 왕관은 슈발츠마인만의 것이 아니다. 혹 가문에서 염려를 한다면 황제직이 다른 가문에 넘어가지 않도록 상세한 조치를 하면 될 일이다."

그를 바라보는 중신들의 눈동자에 다채로운 감정이 떠올랐다.

'폐하.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인가?'

'세상에서 가장 강한 남자라는 자리를 가지고도 수도승의 길을 걷겠다니. 폐하의 속은 가끔 읽을 수가 없는 때가 있어.'

누구도 반대하지 않았지만 누가 반대하더라도 루페르트는 자신의 생각을 꺾진 않을 것이다.

"아카이아 대주교에게 말해라. 나 황제 루페르트는 호라신의 제단 앞에 영원한 신의 사도로 남겠노라고."

내전과 레벤호스트의 반기.

두 개의 시련을 뛰어넘은 루페르트는 누구도 생각 못 한 한 수를 발견했다.

독신 선언.

수도승 황제라는 새로운 길을.

그 배경엔 울피아나라는 일생일대의 상처가 큰 지분을 차지하겠지만, 루페르트의 시선은 그 너머를 보고 있다.

* * *

루페르트가 독신 선언을 준비한다는 소식에 선제후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아니, 상상으로라도 그럴 일이 일어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루페르트가 프리드리히 마티아스를 3번 용서했다고 하나 그 충격은 독신 선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오히려 비교를 하려면 황제직을 건 대리 결투 정도는 되어야 급이 맞을 것이다.

선제후들은 저마다의 참모와 조언자를 불러 황제의 속내를 읽으려 했지만 한 가지 사실만은 명확했다.

황제가 후사를 남기지 않겠다는 걸 선언한 이상, 그들에게도 황제의 자리가 열렸다는 소리니까.

가장 큰 충격을 받은 건 레벤호스트였다.

비록 제국 회의에서 체면을 구겼다고 하나 그는 끈질기게 루페르트의 약점을 찾아내서 다른 신교 선제후와 연대하여 루페르트를 궁지에 몰아넣으려고 획책하고 있었다.

그 시도가 한 번의 포석으로 물거품이 됐다.

이제 선제후들의 시선은 루페르트의 견제보다 루페르트 뒤에 선출된 황제 자리를 노리고 있었다.

"이건 속임수입니다. 황제의 속임수입니다. 황제는 썩어 빠진 호라 교단의 지원을 받고 있습니다. 이번 선언도 그중 하나겠지요. 독신을 선언해서 후사를 남기지 않을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호라 교단은 늘 그렇듯이 어처구니없는 궤변을 짜내서 황제의 독신 선언을 형해화시키려 들 것입니다. 우리가 그 사실을 알았을 때 구교 황제는 선제만큼이나 강대한 권력을 휘둘러 우리 신교의 사자들을 겁박하겠지요."

레벤호스트 옆에서 포효하듯이 설교하는 사람은 레벤호스트의 스승이자 조언자인 마르틴 보엠 목사였다.

준수한 외모와 영민함으로 영지 내외에서 인기 높은 레벤호스트의 그늘에 가렸지만 트라이아 선제후령의 실태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이야기한다.

그 똑똑한 레벤호스트는 결국 마르틴 보엠이라는 늙은 신교 목사라는 토양 위에서 배양된 보기 좋은 화초라고.

레벤호스트가 화분의 꽃처럼 보이지 않는 이유는 지속적인 교육의 결과로 레벤호스트와 마르틴 보엠 둘의 머리를 바꿔 끼워도 전혀 차이가 없을 정도로 같아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럴 가능성도 없잖아 있겠어."

레벤호스트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루페르트 가우저 옆엔 아카이아 대주교가 있지. 궤변의 황제라고 할 만한 그 노회한 늙은이라면 독신 선언을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그뿐만 아닙니다. 선제후님."

보엠 목사가 고개를 숙였다.

"또 뭔가 있소?"

"아카이아 대주교가 최근 기이한 일을 꾸민다고 합니다."

"기이한 일이라니?"

"호라 교단 내 오랫동안 알고 지낸 지인에 의하면 대주교는 빙해 문서에서 진정한 신의 이름을 알아낼 단서를 찾았고, 그 이름을 알아내서 황제의 이름으로 제국 전체에 신의 진정한 이름을 공표할 계획을 꾸미고 있다고 합니다."

"신의 진정한 이름이라니? 그런 게 있나? 호라신은 호라가 아니냐고?"

"호라가 이름은 아니지요. 선제후님."

"아, 그러고 보니 그랬었지."

사실 잘 모른다.

레벤호스트는 신학 공부를 열심히 하긴 했지만, 선제후에 오르면서 대부분의 내용은 다 까먹고 말았으니.

하지만 대주교가 꾸민다는 계획은 레벤호스트가 보기에도 기묘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신의 진정한 이름을 알아내서 뭐 하자는 거지? 그게 의미가 있는가?"

"신교에 점점 밀리는 호라 교단을 부흥하기 위해서겠지요. 진정한 신의 이름이란 걸 떠벌여 그들이 진리를 알고 있는 양 대중을 호도하고 그 기치 위에서 다시 한번 우리 신교의 믿을 자유를 짓밟으려 들 겁니다."

"큰일이군."

레벤호스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명성과 달리 그는 목사의 말을 그다지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레벤호스트는 내실보다는 다른 사람의 눈에 어떻게 비치는가를 더 중요시하게 생각했고,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해 세련되게 말하고 학식을 과시하는 법을 배웠을 뿐이다.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만큼 훌륭한 군주도 영민한 인재도 아니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목사."

선제후와 연결된 실을 움직이는 건 마르틴 보엠이다.

선제후를 움직이는 꼭두각시의 실을 쥐고 있으면서도 마르틴 보엠은 침중하기 이를 데 없는 표정으로 선제후에게 고했다.

"카렐리아."

"카렐리아?"

"선제가 카렐리아의 백성들에게 약속한 것이 있습니다."

"그 약속이라 함은?"

"신교를 믿을 자유라는 약속이지요. 신교는 상업 쪽에 보다 관대하니 말입니다. 하지만, 선제는 흐지부지 약속을 미뤄 둔 채 붕어하셨고, 새 황제가 제위에 올랐습니다."

"루페르트 가우저가 약속을 이행하면 그만 아닌가?"

마르틴 보엠이 회심의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황제 폐하가 곧 독신 선언을 하지 않겠습니까? 독신 선언이 뭡니까? 호라신의 종복으로 귀의하겠다는, 수도승-황제의 탄생을 말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토록 독실한 자가 자신의 직할지의 종교를 마음대로 바꿀 수 있겠습니까?"

"듣고 보니. 그러하군."

레벤호스트는 자신의 책사이자 주인을 보며 회심의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 아주 명안이야. 그 방안이라면, 루페르트 가우저를 흔들 수도 있겠군."

1년 전의 레벤호스트가 자신을 본다면 왜 그토록 루페르트를 견제하려는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루페르트가 그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제국의 모든 군주 중 가장 명민하며 뛰어나다는 그의 자부심을.

그의 개인적 질투심은 어쩌면 마르틴 보엠이라는 꼭두각시 술사가 없었더라도 그의 발밑을 태우고 들어갔을지도 모른다.

"카렐리아의 유력자에게 사절을 보내라. 은밀하게 처리해야 할 것이야."

* * *

"들었어?"

"응. 세상에 그 젊은 황제 폐하가 수도사가 된다고 하더라고."

"왜 그런데? 인물도 훌륭하신 분이고, 몇 번이고 업적을 세우신 분인데."

황궁 안, 시녀들의 방에서는 연일 황제의 알 수 없는 결정에 대한 이야기가 꽃을 피웠다.

시녀들만이 아니다.

황궁을 드나드는 모든 이라면 예외 없이 루페르트의 결정을 입에 올렸다.

그 이야기는 당연하게도 마를로네와 그 조부의 귀에 들어갔다.

"나 알 거 같아."

마를로네가 조부를 돌아보았다.

"황제 폐하. 그 여자 엄청 싫어하거든."

마를로네는 그날 자신이 직접 보고 듣고 경험했던 울피아나를 떠올리며 쓴웃음을 머금었다.

"겨우 그런 이유로 쉽게 결정하는 게 아니다. 평생 독신의 길을 걷겠다는 맹세는."

베르크 란은 잘 움직여지지 않는 왼팔을 오므렸다 폈다.

진한 주름이 그의 미간에 깊은 흉터처럼 새겨졌다.

'빌어먹을.'

여전히 팔이 낫지 않는다.

시간이 흐를수록, 다른 상처가 나을수록 베르크 란은 뼈저리게 느꼈다.

그 가면을 쓴 악마가 영원히 낫지 않을 상처를 자신의 몸에 새겼다는 것을.

'이대로는 싸울 수 없다. 검을 쥘 수도 없는데 누구와 어떻게 싸우라는 것인가? 빨간 딱지를 뗐다고 해 봐야 이대로는 평범한 늙은이에 지나지 않는다.'

"할아버지?"

"그래. 마를로네 무슨 일이냐?"

"표정이 워낙 안 좋아서."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그보다 아까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 그래, 황제 폐하의 독신 선언에 관한 이야기를 했었지. 그래 뭔가 본 거라도 있냐?"

"그게."

마를로네는 주변을 돌아보고는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하고 조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황제 말이야. 그 여자 엄청 싫어하더라고."

"누구를?"

"울피아나."

"그럴 리가."

"아니, 진짜야. 나 황제 옆에서 몇 번이나 봤잖아? 할아버지는 못 본 괴물도 보고. 나는 물론이고 그 재수 없는 마법사마저 거품 물고 쓰러질 정도의 괴물 앞에서도 황제는 낯빛 하나 안 변하던데, 그 황제가 세상에 그 여자 보고는 정말로 거세당한 양 벌벌 떨더라니까?"

베르크 란은 코웃음을 쳤다.

그는 손녀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 황제는 보통 인간이 아니야. 그 정도 남자가 고작 여자 하나에 쩔쩔맨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린가.'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복도가 술렁였다.

황제다.

루페르트가 시종과 중신을 거느리고 빠른 걸음으로 황궁을 이동하고 있었다.

근위병까지 동행하는 것으로 보아 황궁 밖에 일이 있는 모양.

베르크 란은 자리에서 일어나 목발을 짚고 일어섰다.

"어디 나가게?"

"잠깐 구경 좀 하게. 폐하의 행차를."

"따라간다고 뭔가 내줄 거 같진 않은데."

"거지도 아니고 황제만 바라보면 쓰나. 할 일 없으면 너도 따라오거라."

"싫어. 그 여자가 나 황제 따라다니는 거 보면 나 가만 안 놔둘 거 같단 말이야."

"뭔 헛소리냐."

베르크 란은 손녀의 말을 일축하고 절뚝이는 걸음으로 황제의 행렬을 따랐다.

예상대로 황제는 황궁 밖으로 나가 황궁 옆에 있는 대주교 회당으로 향하고 있었다.

'독신 선언에 관한 준비라도 하는 건가.'

아직 일정은 잡히지 않았기에 조율 정도를 할 것이다.

그런데.

'저건?'

황궁의 그늘에 세운 마차 뒤에 한 사내가 쪼그리고 있었다.

열 사람을 태우고도 남을 정도로 널찍한 짐칸은 오직 한 사내의 몫이었다.

크다 작다의 문제가 아니다.

거대하다.

인간에게 속한 육체가 아니다.

세상 어디에 3미터에 달하는 키와 곰처럼 넓은 어깨를 가진 자가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그런 자가 실제로 있다.

거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손엔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 손은 능히 한 인간의 사지를 잡아 찢을 수 있을 정도의 힘과 박력이 있었다.

그 거한이 황제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베르크 란의 가슴이 뛰었다.

'이건?'

틀림없다.

암살이다.

112화 29. 성 크리오네 (3)

후계자를 갖고 싶어도 얻지 못하는 군주는 부지기수다.

사람들은 말한다.

왜 굳이 멀쩡한 젊음과 신체를 놔두고 고독하고 돌아보지 않는 수도승의 길을 걷노라고.

슈발츠마인 가문에서 가장 강한 반발이 있었다.

루페르트는 막강한 가문 일원이 모인 자리에서 엄숙하게 말했다.

"두 개의 왕관이 머리에 씌워졌을 때 나는 제국과 호라에게 모든 걸 바치기로 맹세했다. 오히려 나는 묻고 싶다. 제국이 일개 황제의 소유물이냐고? 황제는 제국을 지배하자 제국의 소유자는 아니다. 제국은 유구한 세월을 살아온 선제들과 그의 백성들, 그리고 현재를 살아가는 자들 모두의 것이다. 그대들이 생각하는 이상으로 제국은 위기에 처해 있다. 내 묻겠다. 폐허만 남은 제국을 물려받을지, 아니면 현재의 윤택함이 남은 선제후령을 물려받을지."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진 않았다.

분명 뒤에서는 같은 반감을 가진 자끼리 모여 작당을 하려 들겠지만 적어도 루페르트 앞에서 이의를 제기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루페르트도 그 사실을 알고 있지만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명시적인 반대가 아닌, 고조되는 불만은 차차 회유와 다른 이익의 제시로 무마하면 되니까.

확실히 하기 위해서, 루페르트는 가문의 원로 일부를 불러 모아 넌지시 지시하기도 했다.

"혹 내가 불의의 사고로 죽게 된다면, 그 후계자는 베른하르트라는 자가 좋겠습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전쟁이나 암살, 기타 여하한 사정으로 죽음을 맞이했을 경우의 이야기입니다. 미리 준비해도 나쁘지 않겠지요. 나는 상상외로 적이 많으니까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루페르트는 당연히 죽을 생각 따윈 추호도 없었다.

눈을 감더라도 제국이 안전의 반석 위에 올라간 걸 확인한 후에 죽겠다.

그것이 루페르트의 생각이었다.

회귀 이래 루페르트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사명을 잊은 적이 없다.

'모든 것은 제국을 위한 것이다. 배우자와 후계자? 그런 건 바라지도 않았다.'

황궁을 나서면서 루페르트는 벽면에 새겨진 선제들의 조각상으로 시선을 옮겼다.

명군과 암군, 알려진 자와 잊힌 자. 저마다의 족적을 가진 황제들의 조각상이 루페르트의 지친 눈을 간지럽혔다.

'다른 건 바라지 않는다. 무사히 퇴위해 이 선제들의 반열에 내 모습을 남길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 족해.'

누군가의 노호성이 앞에서 터져 나온 건 그 직후의 일이었다.

상념에 잠겨 있던 루페르트는 무심코 비명을 듣고 고개를 앞으로 돌렸고, 자신을 향해 황소처럼 돌진하는 거한을 보았다.

'뭐, 뭐야?!'

그건 인간이라기엔 너무나도 거대했다.

하지만 인간이다.

저 교차하는 팔과 다리, 수더분한 머리카락의 휘날림 속에서 빛을 발하는 눈동자는 틀림없는 인간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의미로 인간의 범주를 넘어섰다.

"물러나라!"

호위병이 할버드를 세우며 거한을 가로막았다.

거한은 속도를 멈추기는커녕 더 속도를 올려 자신을 노리는 할버드의 창대를 움켜잡더니 그대로 병사와 함께 번쩍 들어 바닥에 메다꽂았다.

쿵!

바닥이 깨질 정도의 충격과 함께 병사는 크게 한 번 튀어 오르더니 그대로 떨어져 다시는 움직이지 않았다.

"꺄아아아아악!"

사방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루페르트는 그때까지도 무슨 상황이 벌어지는지 알지 못했다.

곧 피부를 뒤덮는 소름이 루페르트에게 현실을 뼈저리게 인식시켰다.

'아, 암살자인가?!'

위기 감지가 뒤늦게 발동했다.

그만큼 거한의 행동은 느닷없었고, 돌발적이었다.

병사를 쓰러뜨린 거한이 루페르트를 향해 돌진했다.

챙이 넓은, 화려한 깃털을 꽂은 기병들이 루페르트와 거한 사이를 갈라놓을 듯이 쇄도해 피스톨을 빼내 전쟁에서 그러하듯 상대방의 눈의 흰자가 보일 때까지 기다려 방아쇠를 당겼다.

타탕!

두 정의 피스톨이 하얀 연기를 뿜어내며 총탄을 뿌렸다.

푸푹!

총탄은 그대로 거한의 몸에 박혔다.

그런데 그뿐이다.

총탄은 거한의 돌진을 멈춰 세울 수 없었다.

오히려 거한은 자신을 가로막는 기병들을 말째로 움켜잡아 내동댕이쳤다.

구슬픈 말의 비명과 함께 말과 기병이 동시에 하늘로 솟구쳤다가 동시에 떨어졌다.

쿵!

"히히히힝!"

말 한 필이 구슬픈 비명과 함께 움직여지지 않는 다리를 움직이는 가운데, 그 뒤엔 의식을 잃거나 이미 죽어 버린 병사들의 깨진 머리에서 흐르는 피가 거리를 적시고 있었다.

루페르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틀림없다.

저건 괴물이다.

이 세상에 존재해서는 아니 되고 존재해서조차 아니 되는.

비슷한 것들을 보아 왔다.

뱀을 마주친 설치류마냥 강한 전율이 자신을 휘감는 걸 느끼며 루페르트가 거한을 향해 물었다.

"제국 성인인가?"

거인이 씨익 웃었다.

"크리오네."

거한이 루페르트를 향해 손을 뻗었다.

'빌어먹을.'

너무나 빠르고 당혹스러웠다.

손은 이미 소라고둥에 가 있지만, 거한의 큰 손이 더 가까이에 있다.

저 손에 잡힌다면 볼 것도 없다.

확정된 죽음이다.

'어떻게든 뿌리치지 않으면!'

필사적인 마음과 달리 손은 무정하게 뻗쳐 왔다.

순간 루페르트의 머릿속에 기이한 광경이 펼쳐졌다.

인간의 모습을 한 형체가 움직이며 거인의 손을 피하는 장면이 불연속적으로 마치 오랜 기억을 들추어낸 것처럼 느닷없이 뇌리를 뒤덮은 것이다.

마치 춤사위와도 같은 그 움직임은 그러나 루페르트가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분명 그것은 인간의 한계 내에서 이루어진 것이지만 작은 움직임 하나조차 인간이 끌어낼 수 있는 한계와 아슬아슬하게 맞닿아 있었다.

그리고 환각은 거인의 손이 루페르트의 팔을 붙잡자 마술처럼 사라졌다.

"죽어라. 황제."

거인이 손에 힘을 줬다.

우드득!

"크어어어억!!"

루페르트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강골까진 아니더라도 타고난 유연함을 가졌고 오랜 단련으로 힘과 근육이 붙은 남자의 팔이 단지 악력만으로 나뭇가지처럼 부러지고 말았던 것이다.

팔이 이상한 방향으로 꺾였고, 박살 난 뼈가 살점을 뚫고 튀어나왔다.

그 고통을 제대로 느끼기도 전에 루페르트의 몸이 번쩍 들렸다.

그대로 메다꽂아 죽이려는 셈이다.

저 차가운 바닥에 두 눈을 부릅뜬 채 죽어 있는 병사들같이.

루페르트는 필사적으로 버둥거렸으나, 그의 죽음은 피할 수 없어 보였다.

단념이라는 단어가 고통과 섞여 절망으로 변해 갈 때였다.

루페르트는 보았다.

갑자기 그와 거인 사이를 뚫고 들어오는 검은 잔영을.

곧 루페르트는 그것이 자신이 아주 잘 아는, 그의 챔피언이라는 사실을 알아보았다.

'베르크 란!'

그는 늘 들고 다니던 정강이 길이의, 향사들이 으레 들고 다니는 뾰족한 스틱의 끝을 거인의 팔에 찔러 넣었다.

"어딜 감히!"

근육 혹은 뼈의 일부분을 제대로 건드린 것일까.

루페르트를 잡은 거한의 손이 그의 의지와 관계없이 열렸고 루페르트는 바닥에 떨어졌다.

쿵!

"크아아아아악!"

착지할 때 부러진 팔이 바닥에 채찍처럼 휘며 일그러졌고, 그것은 고스란히 루페르트의 고통과 발버둥으로 이어졌다.

"끄어어억!"

눈앞이 혼미해질 정도의 격통.

그러나 루페르트는 필사적으로 이를 악물며 온전한 팔로 소라고둥을 더듬고 있었다.

'회귀를 해야 해. 회귀를!'

한편 거인은 자신을 공격한 베르크 란을 무심히 응시했다.

"도펠죌트너인가?"

그가 물었다.

베르크 란은 스틱을 놓은 채 맨손을 들어 올렸다.

권투의 자세.

무기가 없고 다리 하나가 불편하며 오른손 아귀에 힘이 들어가지 않음에도 그는 싸울 뜻을 내비쳤다.

거인이 허리를 똑바로 세우자, 베르크 란과 그의 격차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것은 인간 사이의 대결이라기보다는 방앗간에 대적하는 인간의 무모한 고사를 연상하게 했다.

"그야말로 한 마리 불쌍한 개로구나. 주인에게 버림받고 학대당하면서도 필사적으로 먹이를 구걸하며 비정한 주인의 구두를 핥으려 드는."

"닥쳐라."

베르크 란이 루페르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황제여!"

그가 소리쳤다.

"달아나시오. 그리고 기억하시오. 베르크 란이라는 황제의 병사가...."

베르크 란의 말을 이어지지 못했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거인의 팔이 베르크 란을 후려쳤고, 베르크 란은 줄 끊어진 풍선처럼 날아가 마차의 짐칸에 부딪혀 바닥에 그대로 꼬라박고 말았으니.

즉사해도 무방할 충격을 받고도 그러나, 베르크 란은 두 팔을 악착같이 든 채 부들부들 떨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크윽! 제, 제국을 위해 죽어 갔음을. 내 원하는 건 오직 단 하나!"

루페르트는 고통조차 잊은 채 베르크 란을 바라보았다.

'이 남자.'

알고는 있었다.

그가 어떤 각오로 살아가는지.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덕분에 제국을 구할 수 있었다.

거인이 달려오는 모습을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보며 루페르트는 온전한 팔로 소라고둥을 든 채 힘껏 불었다.

부우우우우---

청량한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베르크 란의 다하지 못한 말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나를 장군으로 복...!!"

순간 세상이 검어졌다.

루페르트는 익숙한 검은 복도에 있었다.

* * *

"...."

두 팔은 멀쩡하다.

산산이 조각난 팔도 원래 모습 그대로고 눈알이 튀어나올 정도로 끔찍한 고통도 이제는 없다.

하지만 당시의 고통의 잔향이 생생하게 남아 루페르트의 신경을 날카롭게 긁었다.

쿵! 쿵! 쿵! 쿵!

무엇보다 가슴이 터질 듯이 뛰었다.

목숨은 건졌지만, 죽을 뻔했다.

거의 죽기 일보 직전까지 갔다.

그 하나만 죽으면 다행이겠지만, 제국 자체가 멸망 직전까지 왔다.

"하아."

루페르트는 불안한 숨을 내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무것도 생각하기 싫었고 그저 이대로 시간이 흘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물씬 들었다.

아무도 없는 적막과 고독 속에서 루페르트는 뺨을 타고 흐르는 뜨거운 물방울을 뒤늦게 인지했다.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두려워서일까. 아마 그건 아닐 것이다.

황궁이 불에 탔을 때 루페르트에게 더 이상 두려운 건 없다.

그렇다면 고통 때문에?

그것도 아니리라.

이보다 더한 맛본 적이 있다.

단지,

"...쉬고 싶어."

지쳤다.

여신에게 호언장담하던 시절의 자신의 모습이 눈앞에 겹쳤다.

"휴식이 필요해.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대로...."

돌이켜보면 회귀 이후 단 한 순간도 쉬지 않고 달려왔다.

수많은 사건과 죽음이 있었고 충격이 있었지만 루페르트를 달래 줄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한때 여신이 그런 역할을 했지만, 예전처럼은 돌아갈 수 없다는 걸 루페르트는 너무나도 잘 안다.

그도 바보는 아니다.

어렴풋이 느끼고 있다.

그의 여신은 어쩌면, 그가 상상하는 이상으로 오래되고 잔혹하며 고대의 무자비한 신들을 닮은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때는 정오였다.

세상의 모든 그림자가 사라질 때 거한이 나타났다.

어머니 앞에서 떼를 쓰며 투정을 부리던 아이가 스스로 눈물을 닦아 내고 일어서는 것처럼 루페르트는 소매로 눈물을 닦아 내고 몸을 일으켰다.

어두운 복도 너머 두 개의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그 하나는 원래 루페르트가 가장 그리워하던 낙원이었지만, 그 낙원은 사라졌다.

두 세계, 전부 황궁과 이어졌다.

루페르트는 좀 더 앞의 시간 축에 가고 싶은 욕망을 느꼈지만, 그의 길은 정해져 있었다.

"...."

가장 최근의 시간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도대체가 끝을 알 수 없는 정치 공작과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결재 서류와 그리고 그를 죽이려는 제국 성인이 기다리고 있다.

발걸음 하나를 옮길 때마다 루페르트는 자신의 마음이 어그러지는 감각을 느꼈다.

하지만 멈출 수 없다.

그가 선택한 길이다.

순간 루페르트는 떠올렸다.

처음 저 루돌프라는 사내를 만났을 때 그가 한 질문을.

그때 그는 루페르트를 향해 이렇게 물었다.

"문 너머에 뭐가 보이나?"

그때 루페르트는 이렇게 답했다.

"이상향으로 가는 문이 보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게 답할 것이다.

현실이라는 이름의 지옥이라고.

외면하던 회귀의 무게가 황제의 심신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아직 황위에 복귀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시점의 일이었다.

113화 29. 성 크리오네 (4)

"성 크리오네 말입니까?"

일곱 명의 제국 성인 중에서도 성 크리오네는 그다지 인기가 없는 성인이었다.

흑사병보다 약하다고 하지만 천연두도 걸리면 높은 확률로 죽음에 이르는 병이니까.

한마디로 신통하지 않다는 소리다.

게다가 크리오네는 천연두에 걸린 적도 없다.

모공이 크고 추악한 외모가 곰보를 연상케 해 대충 끼워 맞추기로 유행하는 질병 중 하나를 별명으로 붙였을 뿐이다.

"그래. 그자에 대해 잘 아나?"

루페르트의 세 가신 중 가장 폭넓은 지식을 가진 건 대학을 나온 베르너가 아닌 오토 브라에였다.

대학은 이름과 달리 학문에만 매진하는 곳은 아니다.

만슈타인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술 먹고 패싸움하고 깽판 치는 걸 먼저 배운다.

그 나름 살 만한 청춘 중에 제대로 공부해서 박사 지위를 얻은 사람은 적고 교수가 되는 사람은 더 적다.

오토 브라에는 대학에 가는 대신 훌륭한 가정 교사의 교육을 받으며 학식을 배양했다.

특히 그는 신학 쪽에도 조예가 깊었다.

"크리오네, 크리오네라. 그리 유명한 사람은 아니지요. 다른 성인에 비해 큰 족적을 남기지도 못했고요. 하지만 말입니다. 크리오네와 관련해서 꽤 재밌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재밌는 이야기?"

"네. 들어 보시겠습니까?"

성 크리오네라 불린 자는 제국인이 아니다.

검은 머리카락과 검은 눈동자를 보며 알 수 있듯이 그는 해가 뜨는, 그래서 해가 더 가까이 있는 동쪽에서 왔다.

동방 제국이 성립되기 전 지금은 멸망한 나라에서 왔다는 그는 당시 제국 국경을 빈번하게 침범하던 동방 기마 약탈자의 일원이었고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여자를 겁간하고 마을을 불태웠다.

악마와 다를 바 없는 그는 제국을 세울 운명의 티그리트와 조우했고 보기 좋게 패했다고 한다.

티그리트의 전사들은 잔학무도한 크리오네를 죽일 걸 청했지만, 티그리트에겐 다른 계획이 있었다.

룸 제국 최강의 검투사 출신이던 그는 자신 밑에서 목을 짓밟힌 채 숨을 헐떡거리는 거인의 얼굴에서 그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한 번에 읽어내고 빙그레 웃었다.

"나와 한 번 더 겨루고 싶나?"

거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의 밑에서 나의 노예로 일해라. 내가 만족하는 때, 생사를 건 결투를 해 줄 것을 약속하겠다."

그것이 동방의 사악한 거인 크리오네가 티그리트의 장막 아래 들어온 이유였다.

그러나 티그리트는 그와 결투를 해 주지 않았다.

그 강적을 다시 상대하는 것이 두려워서인지, 아니면 악업에 대한 죗값을 거짓이라는 악업으로 복수를 하고자 한 것인지 그것은 오직 노예만이 알고 있으리라.

중요한 건 크리오네는 원하던 재결투를 하지 못한 채 가장 가혹하고 지독한 전장에서 싸웠고 포로로 붙잡혔으며 갖은 고문 끝에 죽임당해 그 목이 성문 아래 내걸렸다는 것이다.

"제국 성인들이란 하나같이 비참한 운명을 타고난 느낌이야."

루페르트가 가볍게 몸을 떨며 말했다.

"그들이 살아 있었다면 성인으로 축성될 일은 없었겠지요."

"그대는 성인이 될 기회가 있다면 받아들이겠나?"

"지금은 아닙니다만 나이를 먹으면 생각이 바뀔지도 모르겠습니다."

오토 브라에의 사심 섞인 말에 루페르트는 피식 웃었다.

아무튼 크리오네의 과거를 어렴풋이나마 알아냈다.

남은 건 그를 상대하는 것뿐이다.

언제 덮칠지는 알고 있다.

루페르트는 황궁 앞에 죽음의 함정을 파 놓았다.

다섯 문의 대포와 수백 명의 용감무쌍한 병사들이 어둠 속에 숨어 암살자를 기다렸다.

'대낮에 암살이라니. 생각지도 못한 일이지만 오히려 잘됐어. 지긋지긋한 제국 성인 하나를 더 줄일 수 있는 기회니.'

루페르트는 베르크 란을 생각했다.

'그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정말이지 그들 조손은 내게 몇 번이나 큰 도움을 주는군.'

한 끼 식사의 은혜라는 것이 이토록 요긴하게 갈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물론 그들도 원하는 바가 있기에 루페르트를 돕는 것이겠지만, 루페르트는 이미 그들이 해 준 것만으로도 감사를 느끼고 있었다.

'베르크 란이 원하던 건 무엇이지. 일단 이번 일이 끝나면 마를로네에게 물어봐야겠어.'

할 수 있는 것이라면 해 줄 것이다.

할 수 없는 것이라면 설득을 할 것이다.

거사의 날은 다가오고 있다.

루페르트는 이전처럼 소수의 수행원만을 거느리고 황궁을 나섰다.

독신 선언을 위해 호라 교단의 고위 주교와 논의를 하러 가는 길이었다.

루페르트는 선제의 벽 아래 정차된 마차를 보았다.

'저 안에 있겠지.'

루페르트는 태연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막을 수 없던 거한, 크리오네가 나타나길 기다리며.

그런데.

"음?"

마차 안에서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

루페르트가 황궁에서 서른 걸음 거리의 대성당의 문턱에 발을 들여놓을 때까지.

전과는 상황이 다르다.

루페르트는 발걸음을 멈추고 좌우에 명했다.

"저 마차를 뒤져라."

기병대가 마차에 접근했다.

잠시 후 기병 장교가 소식을 전했다.

"마차 안엔 아무도 없습니다. 빈 마차입니다."

"...그래?"

루페르트는 실망감을 드러냈다.

'뭐가 문제지? 설마 내가 역으로 반격하려는 걸 미리 읽고 줄행랑을 친 것인가.'

이쪽이 아마 가장 그럴듯한 이야기일 것이다.

크리오네는 덩치에 걸맞지 않게 교활하고 눈치가 빠른 인간이었다.

그렇다면 수백 명이나 동원한 함정이 자연스레 들킬 수밖에.

'다시 회귀를 해야 하나.'

루페르트는 망설였다.

다시 회귀를 한다고 해서 그 괴인과 마주칠 수 있을까?

괴인을 홀로 압도할 수 있는 소수 정예가 있다면 모를까, 현재로서는 대규모 병력 동원만이 그 상식을 뛰어넘는 제국 성인을 처치할 유일한 방법이다.

제국의 황제라는 자리가 주는 자존심도 회귀를 주저하게 했다.

'암살자 따위를 피해야 하는가? 제국의 황제가?'

노예제 티그리트는 그 자신부터가 초월적인 전사다.

창업 군주답게 티그리트는 무수한 암살의 위협을 받았다.

그때마다 티그리트는 그가 가장 잘하는 것, 살인의 기술을 발휘하며 암살자를 살해했다.

티그리트처럼 하라는 건 아니지만 선대의 모범이 남은 제국은 암살을 비겁하고 비열하며 이민족이나 하는 짓이라 치부했고, 실제로 암살을 업신여기는 풍조가 있다.

루페르트도 그 풍조를 이어받은 제국의 황제다.

겨우 암살에 벌벌 떨며 해야 할 일도 못 한다면 그거야말로 티그리트의 후예답지 않은 짓이라 생각했다.

장고 끝에 루페르트는 그대로 나아가기로 결심했다.

'그래. 겨우 암살자다. 약하니까 암살이나 하는 거다. 그 크리오네라는 자는 에디지우스보다는 명백히 아래고 판텔레온보다 아랫급일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루페르트에겐 소라고둥이 있다.

이번엔 워낙 느닷없는 기습이라 제대로 불지 못했지만, 다음은 다를 것이다.

루페르트는 스스로를 자책했다.

너무 느슨했다.

근래의 성공에 취해 자만했다.

두 눈을 감고 반성했다.

언제든 소라고둥을, 여신님의 성물을 옆에 두고 수족처럼 쓰리라 다짐하며 루페르트는 현장을 떠났다.

* * *

"독신 선언이라. 위대한 결단이십니다. 하지만 폐하. 그건 알려진 만큼 간단한 게 아닙니다. 독신 선언이라는 건 어디까지나 대외에 알려진, 인상적인 부분만을 추린 구호에 지나지 않으며...."

제국의 법도는 복잡하다.

특히 호라 교단이 장악하다시피 한 교회법은 교단법 학자라는 독자적인 집단 속에서도 의견이 갈릴 정도로 상충되는 사례가 많고 잘 정리되지도 않았다.

루페르트가 사전에 호라 교단 고위 성직자를 만난 것도 그 때문이다.

"순결제께서는 교회법적으로 한 수도회에 입회하였고 그 수도회의 규율에 의해 독신이라는 지위를 지킬 의무를 부과받은 것입니다. 다만, 교회법에 의하면 군주는 그 왕관을 벗기 전까지 입회할 수 없다고 정하고 있습니다. 누구든 성직에 들어서고자 하는 자는 모든 걸 벗어던지고 맨발로 들어와야 한다는 소리지요. 하지만 제국의 황제는 누구보다 고귀한 자, 그 왕관을 벗을 수도 없고 그 위에 다른 자가 있는 것 또한 용납해서는 아니 됩니다."

길게 이어지는 설명을 들으며 루페르트는 졸음이 몰려오는 걸 느꼈다.

'더럽게 복잡하군. 좀 쉽게 하면 안 될까. 이렇게 모든 걸 과거, 과거에 돌리니 신교가 인기를 얻는 거지.'

신교가 반항적인 군주들에게 인기가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것만으로 군주의 신하와 상인, 부유한 시민들이 빠르게 개종하는 현상을 깨끗이 설명할 수 없다.

신교도 신교만의 장점이 있다는 소리다.

루페르트는 신교에 대해 아는 바가 없지만, 대중이 가지는 추상적인 이미지 정도는 파악하고 있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신교 지역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만 들어 봐도 알 수 있다.

교단 신부님 골방엔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찌르지만

교회 목사님 독채엔 향긋한 복음이 코를 간질이네

"...순결제께서 그 문제를 타파하기 위해 내놓은 해결책이 해당 교회 합의가 있기 전 설립된 최초의 수도회에 들어가는 것이었죠. 그 수도회는 건물은 남아 있으나 수사(修士)는 한 명도 없습니다. 오직 단 한 명을 위한 수도회이기 때문입니다."

"그 수도회 이름이 뭔가?"

"회색 속죄회입니다."

"회색이라. 그건 재의 색이 아닌가?"

"부정되고 망령된 것들을 불태운 잿더미는 부정한 것을 태워 내고 남은 것이기에 어떻게 보면 가장 깨끗하다고 볼 수 있지요."

"그래. 그렇게 하지. 회색도 좋아 보이는군."

회색이 딱히 마음에 드는 건 아니다.

하지만 답이 정해진 이 탁상공론에 시간을 뺏기고 싶지 않다.

당장 할 일이 태산이다.

오후엔 요하네스와 카렐리아의 재정에 관해 논해야 한다.

상비군을 늘리기 위해서는 더 많은 재정 지출이 있어야 하고 그 돈은 카렐리아 시민의 주머니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폐하는 회색 속죄회의 유일한 수사이자 수도원장으로 황제와 수도사의 길을 양립하실 겁니다."

"그거 훌륭하군. 그래. 그런데 그 수도회에 다른 사람이 들어올 수 있는 건 아니겠지?"

"안 되는 건 아닐 겁니다. 모든 수도회는 원칙적으로 모두에게 문호가 열려 있으니까요."

"그건 곤란한데."

루페르트는 속으로 생각했다.

'울피아나. 그 여자. 설마 수도승, 아니 수녀로 들어오는 건 아니겠지?'

너무 앞서 나간 생각이다.

루페르트는 곧 피식 실소를 머금으며 넌지시 물었다.

"달리 더 알아야 할 게 있나?"

"회색 수도회의 규율이 있습니다. 순결의 의무는 그 규율 중 하나에 불과하죠."

"고기를 못 먹거나 머리를 깎아야 한다는 의무 따윈 없겠지?"

"그런 건 없습니다."

"나중에 서면으로 보내주게. 그 정도는 굳이 여기서 듣지 않아도 될...."

루페르트의 말이 멈췄다.

자신과 교회법 담당 성직자가 자리 잡은 서고의 책이 갑자기 한 번에 울리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뭐지? 기분 탓인가?'

아니다.

다시 한번 책들이 살짝 뛰어올랐다가 저마다의 간격을 두고 차례대로 서가에 내려앉았다.

쿵! 쿵! 쿵!

뒤이어 급격하고 폭력적인 발소리가 들려왔다.

"하아아아악!"

"침입자다!"

그리고 아우성.

콰쾅!

벽이 무너지는 소리.

루페르트는 자기도 모르게 아연실색한 표정을 지었다.

그 수많은 괴이 앞에서도 의연함을 유지했던 루페르트가 이런 표정을 짓는 건 순수한 짜증 때문이다.

곧 문이 산산이 조각나며 두건을 뒤집어쓴 거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제국 성인 크리오네.

"나는 크리오네다."

그가 다시 나타났다.

하지만 루페르트는 이미 소라고둥을 입에 대고 있었다.

부우우우우우--

회귀의 바람이 루페르트를 과거로 다시 데리고 갔다.

"...."

어두운 복도.

루페르트는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한동안 서 있었다.

아무래도 이번 적은 어쩌면 사람의 신경을 긁는다는 점에서 가장 악랄할지도 모르겠다.

"또 그 장광설을 들어야 하잖아...."

114화 29. 성 크리오네 (5)

제국의 수도엔 늘 5천 명에 달하는 상비군이 있다.

그중 3천여 명은 제국의 성벽을 지키는 주둔군이고 나머지 2천은 황궁을 지키는 근위대다.

주둔군은 제국 보병대로 젊은 시절을 보내고 이제 정착을 하려는 경험 많은 병사들로 이루어지는데, 젊음의 힘참보다는 노련함과 끈기를 갖췄고 전쟁의 부속품인 자신이 해야 할 일은 명확히 알고 있다.

반면 근위대는 젊고 주목을 받고 싶은 귀족이나 부유한 상인 계층의 자제가 주로 지원한다.

근위대는 다시 근위 기병대와 황궁 경비대로 나뉘는데 여하한 군대가 그렇듯이 기병대 쪽이 보다 고귀하고 중요한 취급을 받는다.

이 황궁 근위대는 황제보다는 황궁이라는 제국의 심장을 수호하는 것이 주 임무로 항상 정형화된 순찰과 훈련 등 기계적인 일과만을 반복할 뿐이지만 오늘은 이례적으로 근위대 전체가 정해진 일과를 깨고 황궁 주변에 소집됐다.

"폐하를 노리는 불온한 무리가 테타우에 집결했다는 소문이 있다. 다른 곳도 아니고 황궁에서 폐하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는 건 우리는 물론 가문과 후손, 선조의 이름에 먹칠을 가하는 일이다. 샅샅이 주변을 수색에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라."

두 번이나 크리오네에게 당한 루페르트는 이번엔 아예 이를 갈았다.

아예 근위대 전체를 풀었다.

전생에서 루페르트를 버렸던 근위대지만, 지금은 루페르트의 충실한 종복이다.

이번에 새로 취임한 황궁 근위대장은 루페르트가 제위에 오르기 직전 궁내부를 장악한 골트문트가 꽂아 넣은 인간이지만 루페르트는 그 근위대장을 잘 알고 있다.

쿠르트 자우버.

잔뼈 굵은 용병대장 출신으로 귀족의 피는 얕지만, 키가 크고 용모가 수려하고 언변이 뛰어나 출신에 관계없이 고귀해 보이는 자다.

그는 자신의 용모에 어울리는 자리를 갈구했는데 그 자리를 줄 사람은 결국 루페르트나 골트문트 같은 권력자다.

당시에야 루페르트는 이름만 황제인 꼭두각시였지만 지금은 다르다.

"알겠습니다. 폐하. 즉시 휘하의 근위대를 소집해 황궁의 풀 한 포기, 돌멩이 하나까지 들춰 만에 하나 있을지 모르는 위험을 사전에 차단하겠습니다."

이제는 루페르트는 그가 원하는 자리를 줄 힘과 권력이 있다.

'이 인간이 이렇게 싹싹한 사람인 줄은 과거엔 몰랐지.'

딱히 악감정은 없다.

적어도 근위대는 쿠르트 자우버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를 배신하지 않았으니까.

쿠르트 자우버는 테타우가 융커스 베샤문트에게 공성을 당할 때 석연치 않은 사유로 죽었다.

사인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근위대 장교 하나가 같이 술을 먹다 모닥불에 달군 칼로 배를 찔러 죽였고 의식이 남아 있는 채 불구덩이에 던져져 타 죽었다고 한다.

그 장교는 상의를 벗어 어깨에 새겨진 불경한 이교의 표식을 드러내며 자신이 악마 숭배자이며 악마가 자신을 보호한다고 말하며 나머지 장교를 죽이려 들다가 쿠르트 자우버와 같은 신세가 되었다고.

"그래. 근위대장. 그대의 말을 들으니 절로 안심이 되는군."

루페르트는 쿠르트 자우버를 좋게 보았다.

오히려 그처럼 투명하게 이익만을 좇는 인물이 지금 같은 상황에선 매력적인 인재다.

가문의 명예니, 선대의 신의니, 태고의 핏줄이니 지난 수백 년간 고위 가문에서 층층이 쌓은 그들만의 범주만을 취급하고 나머지를 배격하는 자들은 설득도 이해도 불가능하니까.

프리드리히 마티아스처럼 무참하게 무너뜨리지 않는 이상 말이다.

"폐하. 요청하신 지역을 탐사 결과, 특별한 암살자의 징후는 보이지 않습니다."

"저 마차는 뭔가?"

루페르트는 크리오네가 나타나기 전부터 황궁 앞에 불길하게 서 있는 지붕을 씌운 짐마차를 불편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저기서 나타났다.

저 좁아 보이는 짐마차에서 그 거인이 나타났고 안 그래도 할 일이 많은 루페르트의 일을 모두 정지시켜 버렸다.

"알아보겠습니다."

황제가 언급했기에 쿠르트 자우버 본인이 직접 소수 기병을 이끌고 마차 안을 살폈다.

그가 마차를 살피는 사이 황궁 주변엔 황궁을 드나드는 귀족과 시민, 성직자들이 가던 길을 멈추고 분주히 움직이는 황제와 근위대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지켜보았다.

그들이 관심을 가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번쩍거리는 장식용 갑주로 무장한 근위대가 황궁 밖에 이렇게 많이 나오는 건 좀처럼 없는 일이니.

곧 쿠르트 자우버가 루페르트에게 돌아왔다.

"아무런 이상이 없습니다. 평범한 마차입니다. 혹 화약이나 기타 불온한 물건이 있나 살펴보았지만, 마차는 텅 비어 있었습니다."

"누가 저걸 가지고 왔는지 알아봐 주게."

루페르트는 한숨을 내쉬며 대성당의 높은 첨탑을 조금은 맥빠진 시선으로 올려다보았다.

'정말이지 진이 빠지게 하는군.'

또 그 장광설을 들어야 한다.

순결제와 회색 수도회, 그에 얽힌 어지럽고 복잡하기만 한 교회법과 그 적용에 관한 문제를.

무시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작은 행동 하나하나가 모여 평판을 이룬다는 걸 모를 정도로 루페르트는 어리석지 않다.

특히 상대는 제국의 영적 세계의 절반을 장악하는 구교의 대표자 호라 교단이다.

가뜩이나 순결제의 흉내를 내려는 그가 교단을 무시하는 행동을 한다면 의도가 의심받을 것이다.

하지만 대낮부터 이런 난리법석을 피우는 것 또한 평판에 좋다고 할 수 없다.

암살을 두려워해서 여기저기 들쑤시는 모습을 보여 준다면 겁쟁이라고 오인받을 수 있으며, 이런 일이 반복되면 미쳤다는 소문마저 들을 수 있다.

실제로 제국의 몇 안 되는 암군이라 평가받는 600년 전의 황제, 불면제는 칭호대로 잠조차 제대로 못 잘 정도로 암살을 두려워하다 결국 자살 비슷한 형태로 생을 마감했다.

'이번엔 없겠지.'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 소라고둥 위에 손을 올린 채 루페르트는 익숙한 복도를 걸었다.

다행스럽게도 그날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단지 반복된 가르침이 좀을 쑤시게 했을 뿐이다.

교회법에 관한 설교가 끝나자마자 루페르트는 시간의 책갈피를 꺼내 현재 시점을 저장했다.

"하아."

정말이지 다시는 듣기 싫었다.

그건 정신 건강에 좋지 않다.

특히 루페르트처럼 위로받지 못하는 지친 정신에겐 더더욱.

* * *

"...."

늦은 오후.

루페르트는 과거의 문헌을 읽고 있었다.

정신과 영혼에 관한 이야기로 그에 따르면 인간의 정신은 그릇과도 같다고 한다.

고귀하고 훌륭한 부모를 만나는 건 좋은 흙을 얻는 것과 비견되며, 양질의 교육을 통한 성장은 적절하고 잘 관리된 가마 안에서 구워지는 것을 뜻한다. 성년기에 이르면 그 그릇은 비로소 가마 밖으로 나와 인생이라는 것들을 담게 되는데 큰 그릇은 많은 것들을 담을 것이고 세련된 것은 귀하고 향기 나는 것을 담을 것이라고 말한다.

다만 그 그릇은 깨질 수도 있다. 용량보다 많은 걸 담으려 할 때, 거칠고 날카로운 것을 담을 때, 함부로 놀려 바닥에 떨어뜨린다거나 부주의한 관리로 부딪쳐 상처가 날 때.

그러한 것들이 누적되면 그 그릇은 깨진다.

깨진 그릇은 인생을 담을 수 없다.

그릇이 깨진 자는 구빈원의 광인 수용소나 교단에서 관리하는 정신 병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정신은 그릇이라."

모든 의견에 동의하는 건 아니지만 정신이 깨질 수도 있다는 부분은 뼈저리게 동감한다.

루페르트는 이미 몇 번이고 위태로운 것들을 보았다.

봐서는 안 될 것,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 믿고 사랑하고 의지하는 것들이 처참하게 무너지는 것. 그러한 것들은 단지 술이나 휴식을 취한다고 잊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루페르트의 정신이라는 그릇에 흠집으로 남았다.

저서에서는 그 흠집을 치료할 방법에 대해선 설명하지 않았다.

과거의 책이 그러하듯 기도를 하면 낫는다고 하는데, 루페르트에겐 불가능한 일이다.

그에게 상처를 준 주요 원인 중 하나가 그의 여신님인데.

애당초 호라의 신도는 더더욱 아니고.

'결국은 잘 쉬는 게 답인가.'

휴식을 취하는 것도 재주다.

꼭두각시 시절 허구한 날 놀아 봐서 잘 안다.

멍하니 있다고 마음이 새로워지고 개운해지는 게 아니다.

재미있는 것, 흥미로운 것,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고 충분한 보상이 있는 것이 필요하다.

과거에 루페르트는 정부를 두었다.

울피아나가 동침을 거부하는 데다 황제의 개인사 따윈 터럭만큼의 관심도 주지 않았으니까.

다만 정부가 있다는 걸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지나가며 차가운 한마디로 루페르트를 조롱할 뿐이었다.

"자석의 양극이 서로를 끌어당긴다고 하는데, 자석만 그럴까요? 저는 천한 것들이 천한 것들을 서로 끌어당기는 걸 잘 안답니다."

당시 루페르트는 총 세 명의 정부를 두었는데, 모두 루페르트를 떠났다.

만나는 순간만큼은 루페르트에게 위안을 주었지만, 그때뿐이었고 많은 것들을 요구해 왔다.

금전과 관직, 귀한 사치품, 다른 귀족 앞에서 그들을 드러내는 것.

그중 한 여성은 대담하게도 황후 자리를 원했다.

셋 중 가장 아름답고 엉뚱했던 여인이었다.

'도나.'

그 여자는 지금도 테타우에 있을 것이다.

아마 지금 나이는 15세가량으로 아마 고향인 앙쥬 왕국에서 부모와 대들고 싸우면서 다사다난한 하루를 보내고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루페르트가 어린 앙쥬 출신 계집에 빠졌다고 손가락질을 했지만, 세 명의 정부 중 루페르트를 가장 기쁘게 한 건 그녀였다.

다른 정부들은 루페르트가 꼭두각시라는 걸 알고 우호를 가장하면서도 늘 시선은 다른 곳을 향한 반면 도나는 적어도 편견은 없었다.

물론 이번 생에서 그런 정부를 둘 일은 없다.

당시엔 루페르트도 극한에 내몰렸고 과거 탕아 시절의 습벽을 관성처럼 이어 갔을 뿐이니까.

한 가지 확실한 건 그때처럼 삶의 활력소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전처럼 원인 모를 공포감에 젖어 황궁을 방황하지 않기 위해서도 말이다.

잠시 궁리를 하던 루페르트는 근래 뭐가 가장 즐거운 일이었을까 생각을 해 보았다.

딱히 찾아볼 수 없다.

아니, 오싹하리만치 즐거운 일이 없었다.

"...."

돌이켜보면 황제가 된 이후 그의 삶은 대부분이 고통이고 고난이며 가끔의 승리만이 있었을 뿐이다.

개인 루페르트로서 얻은 위안은 0에 수렴한다.

물론 루페르트가 원해서 벌어진 결과겠지만 슬슬 한계가 드러나는 건 명약관화한 사실.

그 엄혹한 현실에 부딪히자 루페르트는 조바심을 느꼈다.

즐겁고 위안이 되는 걸 찾아야 한다.

여자를 제외한.

여자를 생각할 때 잠시 피리스의 얼굴이 스치고 지나간 건 사실이다.

그녀의 미소가 꽁꽁 감추고 있던 루페르트의 욕정을 자극한 것도 사실이다.

'여자는 안 된다.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내가 정했으니까.'

지금 흐름으로는 그의 아내는 한 명밖에 없다.

울피아나. 그 울피아나.

루페르트는 자기도 모르게 벌떡 일어서서 정원에 놓인 돌멩이를 발로 찼다.

경쾌하고 가볍지만 묵직한 힘이 실린 그 발차기는 돌멩이를 멀리 있는 높은 담장을 거의 넘을 듯이 상승하다 벽을 맞고 튕겨 나왔다.

옆에서 고개를 숙인 채 시중을 들던 시종들이 물끄러미 그 모습을 쳐다보지만 루페르트는 그들의 시선 따윈 터럭만큼도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미소 짓고 있었다.

'바로 그거야.'

약간의 위안을 찾았다.

축구다.

그가 좋아하고 잘했던.

"폐하. 공 말입니까?"

시종장에게 공을 부탁했을 때 시종장은 난색부터 지어 보였다.

축구라는 하층민이 하는 놀이를 황제가 한다는 게 못마땅하다기보다는 황제의 위신에 영향이 갈까 싶어서다.

즉위 초기였다면 루페르트도 같은 생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테타우에서 공 좀 찬다는 사람도 구해 줘. 나도 가끔은 몸을 움직여야겠어."

"하오나 폐하. 제국의 황제신 폐하에게는 더 위신에 어울리는 것들이."

"이를테면?"

"사냥이 가장 전통적인 선택지이겠지요."

"솔직히 총 쏘는 거 말이야."

루페르트가 쓴웃음을 머금으며 그를 향해 덮쳐 오던 것들을 생각했다.

설인, 거신상, 붉은 구체, 고목 같던 성인, 그리고 크리오네.

"쓸모가 없더라고."

실로 그러했다.

115화 29. 성 크리오네 (6)

황제가 공을 찬다는 소문은 빠르게 황궁에 퍼졌다.

루페르트를 좋지 않게 보던 호사가들은 즉시 이를 드러내며 신랄한 비난을 퍼부었다.

"역시, 출신이 불분명하다더니."

"하켄하임에서 공을 차며 돈을 벌었다며?"

"슈발츠마인의 가계라고 하지만 오래전에 분가한 사람이지. 모친이 귀족 출신이라고 하는데 옛날에 죽어서 알 방법도 없지. 혹시 아나? 평민이나 그보다 못한 계층일지?"

"쉿! 폐하가 천한 피를 이어받았다고 말하려는 건가? 말조심하게!"

쏟아지는 비난이 위태로운 수준까지 올라왔지만 루페르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미소까지 머금으며 자신에 대한 악소문을 시종에게 되물을 정도였다.

"그래? 그들이 그런 이야기를 한다는 거지?"

과거와 똑같다.

회귀 전에도 황궁에서 공을 찼고 미궁 뒤편에 작은 경기장을 마련해 난다긴다하는 선수를 불러 모아 공놀이를 하곤 했다.

당시의 비판은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좀 더 비난의 수준이 강했고 더 원색적이었을 뿐이지.

그래서일까.

루페르트는 오히려 신선함을 느꼈다.

'욕먹는 것도 나름의 정취가 있군.'

그가 느끼던 미묘한 만족감을 확실하게 한 건 다름 아닌 리프니에였다.

루페르트가 평소처럼 정무를 보고 미궁으로 돌아와 뒤뜰에 공을 차러 나왔을 때 그는 발견했다.

그의 공을 어색하게 갖고 노는 검은 머리의 소녀를.

'...리프니에님.'

그 모습은 그가 보고 싶지 않은 모습이다.

하지만 그토록 싫은 모습인데도 그가 좋아하는 공을, 어색하게 다루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알 수 없는 친근감과 더불어 훈수를 두고 싶은 마음이 새록새록 솟아 나왔다.

"여, 여신님. 그렇게 하시는 게 아닙니다. 좀 더 발등으로 네, 가볍게 깃털을 들어 올리는 기분으로."

리프니에가 루페르트를 돌아보았다.

"루페르트 가우저."

"네. 여신님."

"여신님 여신님. 듣긴 좋은데 계속 그런 호칭으로 부른다면 아무리 당신의 황궁이라고 해도 위험하지 않을까요?"

"괜찮습니다. 제가 공을 찰 땐 개미 한 마리 얼씬하지 못하게 하고 있으니까요."

"암살자가 두렵진 않나요?"

리프니에가 웃음기를 머금은 채 그를 또렷이 응시했다.

루페르트는 속으로 생각했다.

'알고 있었구나. 여신님도. 크리오네가 날 연거푸 죽이려 드는걸.'

모르는 게 이상하다.

회귀는 리프니에의 권능이다.

시간 축 자체가 바뀌는데 모든 시간을 관장한다는 리프니에가 모른다는 게 오히려 어불성설.

단지 궁금한 건 여러 차례의 회귀에도 여신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 리프니에가 루페르트에게 어색하게 공을 차 넘겼다.

황제의 공답게 최고급 송아지의 가죽으로 만들고 갖가지 자수와 정선들인 바느질로 박음질한 공은 또그르르 굴러 루페르트의 구두코에 닿았다.

구두에 공의 느낌이 오자마자 루페르트는 가볍게 차올려 무릎으로 몇 차례 공을 튕긴 후 공을 내려놓고 실없이 웃었다.

"두렵긴 합니다."

두려운 정도가 아니다.

무슨 일을 하건 루페르트는 크리오네를 염두에 두고 있다.

언제 그가 나타나 알량한 호위와 경계를 박살 내고 그의 팔을 부러뜨리고 몸을 구겨 버릴지 모르니까.

늘 목에 거는 소라고둥이 없었다면 루페르트는 진즉에 다가올 공포에 미쳐 버렸을지도 모른다.

불현듯 루페르트는 리프니에의 모습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 소녀의 형태는 안젤리나의 처참한 시체와 겹쳐 늘 악몽 같은 형태로 느껴졌는데, 이례적으로 다르게 보인 것이다.

아마 루페르트는 그것이 현재의 상황과 맞물려 있을 거라고 추측했다.

왜, 소라고둥이 아니었으면 크리오네에게 몇 번이고 잡혀 종이처럼 구겨졌을 테니까.

'늘 생각하지만 내겐 여신님이 전부다. 여신님의 권능이 없이는 나는 아무것도 아니야. 자만하지 말자. 루페르트 가우저. 아니, 황제 루페르트여.'

모처럼 루페르트는 존경을 담아 리프니에를 내려다보았다.

리프니에가 싱긋 웃었다.

"기분 좋은 일이 있나 봐요?"

"아, 아닙니다. 기분 좋은 일은 별로 없었죠. 처참하게 죽을 일은 많았지만."

"그래도 그 표정, 예전 느낌이 나는걸요?"

"저는 언제나 여신님의 종복입니다."

"당신은 저의 종복 같은 게 아니에요. 저의 유일한 사도지요."

"네, 그렇습니다. 저는 여신님의 유일한 사도입니다."

"말 나와서 하는 말인데, 루페르트 가우저."

리프니에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순간 루페르트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감각을 느꼈다.

'이 느낌은?!'

예전에 이런 적이 한 번 있었다.

강렬한 기시감 속에서 루페르트는 리프니에가 전과 같은 상황을 오싹할 정도로 재현하는 걸 굳은 얼굴로 지켜보았다.

"슬슬 저를 위한 신전을 지어야 하지 않겠어요? 황제도 됐겠다."

"시, 신전 말입니까?"

"네. 당신의 작은 별궁에 얹혀사는 것도 좋지만, 루페르트 가우저.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당신을 힘들게 하는 거 같아서요."

"!"

루페르트는 깜짝 놀란 얼굴로 리프니에를 보았다.

'여신님. 거기까지 알고 계셨던 건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셔서 아무것도 모르시는 줄 알았는데.'

2층을 장악한 리프니에는 마음의 병에 일조했다.

가장 편안해야 할 집에서조차 제대로 쉴 수가 없었으니.

"그런 이유로!"

리프니에가 춤추는 것처럼 팔을 내저었다.

그러자 루페르트의 눈앞에 빛나는 문자가 나타났다.

[ 균형의 여신 리프니에의 퀘스트 ]

[ 그 세 번째 ]

[ 루페르트 가우저 당신은 황제가 되고 당신의 이름이 제국은 물론 이웃한 나라의 저잣거리까지 오르내리는 등 당신은 높은 명성을 누리고 있지만 가련한 여신 리프니에는 여전히 아무도 모르는 잊힌 신인 상태 그대로입니다. 리프니에의 유일한 사도인 당신이 이런 언어도단적인 모습을 보고 가만히 있어서는 아니 되겠죠? 오직 당신만을 위해 권능을 베푸는 힘들고 지친 여신 리프니에를 위한 안식처를 만들어 주세요. ]

- 가련한 균형의 여신 리프니에를 위한 신전을 지어라(대성당 이상급으로)

"...."

역시 안 좋은 예감은 들어맞는 법이다.

'시, 신전이라니. 그것도 테타우 대성당 이상급으로?'

터무니없는 이야기다.

아무리 황제라고 그런 거대하고 웅장한 건축물은 쉬이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다.

최고의 건축가와 석공, 막대한 재원을 필요로 한다.

당장 루페르트에겐 들어갈 돈이 많다.

내전에 대비한 군대와 조직을 정비해야 하고, 내전이 발생할 때 군자금으로 지불할 재원을 지금부터 모아 두어야 한다.

전쟁이란 것은 인간의 목숨만이 아니라 돈을 집어삼키는 괴물이니까.

수많은 군주가 파산하는 걸 보았다.

대륙 제일의 부자라는 골트문트조차 오랜 전쟁으로 파산 직전에 내몰린 걸 똑똑히 보았다.

그런데 전쟁 비용만큼이나 돈이 드는 신전을 세운다?

그것도 호라의 수도회 하나를 맡을 루페르트가?

돈도 돈이지만 사람들의 이목을 속이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다.

그런 이유로 주저하고 있자니 리프니에가 물끄러미 루페르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혹시 무리한 부탁인가요?"

"저, 저기. 그러니까 여신님. 테타우 대성당급은 너무 큰 게 아닐는지...."

"아, 그래요? 제가 호라보다는 훨씬 뛰어난 신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허깨비와 여신님을 비교한다는 것이 여신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하는 일이겠지요. 하지만 제가 본 미래에 의하면 곧 전쟁이...."

"아, 전쟁 때문에 못 지어 주겠다. 그 말인가요?"

"최선은 다해 보겠습니다만."

"그럼 일단 작게나마 하나 부탁드려도 될까요? 작지만 화려하게."

리프니에가 한발 양보했다.

"좋습니다. 여신님.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테타우 대성당급 같은 거대한 구조물이 아닌 일반 교회 정도의 크기라면 크게 재정에 무리를 주지 않고 지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조차도 만만한 지출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황궁 옆에 작은 저택이 있죠? 장미가 많던."

"...."

어디를 이야기하는지 알 것 같다.

둘러 말하고 있지만, 안젤리나의 저택이다.

"거기를 허물고 저를 위한 신전을 지어 주세요. 음, 굳이 제 이름을 새기거나 조각상을 만들 필요는 없어요. 단지 황금과 화려한 것들로 채우면 좋을 거 같네요."

"...그곳을 말입니까?"

"네, 혹시 내키지 않으신가요?"

"그건 아닙니다만."

"루페르트 가우저. 저, 그 신전으로 이 몸을 옮기려고 해요."

"그 몸, 말입니까?"

"네. 어째서인지 세상에서 저를 계시의 성녀라고 부르는 느낌인데, 그런 성녀를 위한 자리가 황궁 옆에 있다면 당신의 인기와 권위가 높아지지 않겠나요?"

루페르트는 잠시 생각했다.

리프니에의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루페르트의 마음을 가장 크게 움직인 건 저 안젤리나를 닮은 조각상이 루페르트의 별궁을 떠난다는 것이었다.

"...좋습니다."

내키는 일은 아니다.

하지만 여신의 부탁이다.

그것도 최초의 터무니없는 조건에서 크게 후퇴한 것이다.

이것마저 거부하는 건 여신의 사도로서 할 일이 아니다.

'어쩔 수 없다. 안젤리나 님의 추억이 담긴 곳이지만, 모든 추억은 스러지기 마련이지.'

자신을 합리화하며 루페르트는 여신의 청을 받아들였다.

"그럼 부탁해요. 루페르트 가우저."

거기까진 괜찮았다.

여력도 충분하고.

루페르트는 리히트보덴으로부터 엄청난 수입을 얻고 있었다.

주요 특산품인 일각고래의 뿔이 점점 가치가 낮아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지만, 그건 공급을 조절하면 되는 일이다. 어차피 그 물건은 루페르트가 독점하고 있는 것이니까.

'일단은 순결 선언이다. 그것부터 처리하자.'

예산을 잡고 비용을 집행하고 황궁 궁내부와 상의하고 묘를 이장하는 일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상당한 시간과 수고를 요한다.

루페르트는 먼저 처리할 수 있는 하나의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호라 교단에서 날짜를 보내왔다.

다음 주 월요일 정오.

나날이 거세지는 선제후의 협잡에 치명타 날릴 루페르트의 비장 한 수는 차곡차곡 준비되고 있었다.

* * *

"폐하는 뜻을 꺾을 생각이 조금도 없으십니다. 그분은 순결 선언을 하려 합니다. 거기에 더해 황궁 옆에 새로운 성소를 짓는다고 하시더군요."

루페르트의 행보에 가장 영향을 받는 이는 레벤호스트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보다 더 촉각을 기울이고 황제의 모든 생각을 알고자 하는 자가 있다.

다름 아닌 고어문트의 선제후 골트문트다.

이번 순결 선언은 그와는 일견 관련 없는 일처럼 보이지만 세상일이 그리 단순한 게 아니다.

그가 걱정하는 건 황제도 자신도 아닌 자신의 딸이었다.

"울피아나는 어떻게 지내고 있는가?"

딸만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해지는 골트문트였다.

루페르트가 순결 선언을 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울피아나는 방에 틀어박힌 채 음식도 물도 거부하며 도통 나오려 들지 않았다.

내심 황제의 배필이 될 거라고 기대했고 실제로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었건만, 그런 식으로 결혼이 결렬될 거라고는 자신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소문에 의하면 그녀가 방에 틀어박힌 날, 그녀의 방 안에서는 무언가를 집어 던지고 부수는 소리가 밤새도록 이어졌다고 한다.

오싹한 일이지만 그녀를 말릴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녀를 말려야 할 골트문트의 병사들은 오히려 고용인들을 겁주었다.

그 소문을 함부로 내면 몸이 성치 못할 거라고.

"울피아나 님은 여전히 방에 계십니다."

가신이 참담한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황제의 뜻을 알 수 없군. 불과 작년만 해도 나에게 딸을 달라고 천박하게 부탁을 해 오더니, 해가 바뀌니 언제 그랬냐는 듯 순결제의 뒤를 따르려 들질 않나."

한 가지 확실한 건 이번 일이 골트문트의 심력을 적잖이 갉아먹을 거라는 사실이다.

저 울피아나는 골트문트조차 버거워하는 존재니까.

'어릴 때 시집을 보냈어야 했나. 아니, 어릴 때도 만만치 않았지. 누가 저걸 감당하겠냐고.'

갑자기 하녀 하나가 다급히 집무실에 나타났다.

"선제후님."

"무슨 일이냐?"

"울피아나 님이 선제후님을 찾으십니다."

"안 가면 안 될까?"

"그, 그게...."

"그래. 가야만 하겠지."

복도를 걸으면서 골트문트는 속으로 생각했다.

'순결 선언을 하려는 황제의 마음이 조금은 이해가 가는군. 그런데, 어떻게 알았지? 아니, 알고 그러진 않았겠지....'

울피아나의 방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골트문트는 표정을 관리해야 했다.

방 안엔 깨진 그릇의 파편, 유리, 갈가리 찢긴 종이와 옷, 꽃잎 단위로 분쇄된 꽃 따위가 도살장의 쓰레기장 같은 처참한 형태로 뒤섞여 있었다.

그 더럽힌 바닥 위에 그의 딸이 마치 미의 여신 같은 아름다운 자태로 서 있었다.

그동안 식음을 전폐해 볼이 움푹 들어갔지만, 그조차도 그녀에게 색다른 매력을 부여해 주는 듯했다.

유리가 잔뜩 깔린 날카로운 바닥에 맨발로 선 채 울피아나가 미소 지었다.

골트문트는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전율을 느꼈다.

"아버님."

"그, 그래. 울피아나. 무슨 일이냐?"

"저, 좋은 생각이 떠올랐어요."

"무, 무슨 생각이지?"

"들어주시는 거죠? 어려운 건 아니에요."

울피아나가 맨발을 내디뎠다.

유리로 가득 찬 바닥에 발을 내딛는 걸 본 하녀들이 비명을 질렀지만, 그녀의 발엔 아무런 상처가 나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걸어오지만 마치 파편이나 유리가 그녀를 피하는 듯했다.

마치 그녀의 완미를 감히 해치지 못하는 것처럼.

마술처럼 상처 하나 없이 부친 앞에 선 울피아나가 천진난만하게 말했다.

"저, 수녀가 될래요."

116화 30. 루돌프 (1)

테타우 대성당엔 수많은 인파가 모였다.

이유는 오직 단 하나.

황제 루페르트의 터무니없는 정치·종교적 행보 때문이다.

황제가 독신을 선언한다.

황제가 수도승 황제가 되려 한다.

황제는 그 젊은 나이에 결혼도 후사도 포기하려 한다.

제아무리 냉담한 호사가도 들뜰 수밖에 없는 소재다.

순결제 이후 수백 년 만에 독신을 선언하는 황제가 나타난 것은.

모든 준비는 마쳤다.

교회법은 물론 교단의 모든 의식에 통달한 아카이아 대주교 이를 승인했고, 황제의 선언을 듣는 자의 역할을 자처했다.

이미 결정된 일이다.

그날 테타우엔 굵은 빗줄기가 쏟아졌다.

진흙으로 더럽혀진 거리에 황제가 맨발로 등장했다.

사람들은 저마다 신과 성인에게 기도를 올리며 황제의 안녕과 제국의 평화, 그리고 자신의 건강과 행운을 가장 크게 갈구했다.

대성당으로 향하는 길엔 수많은 병사가 배치됐다.

소문에 의하면 전 도펠죌트너 출신도 다수 배치된 모양.

어디까지나 황제가 고용한 것이 아닌, 황제를 지지하는 귀족과 군주가 편법으로 고용한 모양새지만 한 시대를 풍미했던 강력한 병사들이 자리를 지키는 건 적어도 지금 같은 큰 행사에선 가슴 든든한 일이었다.

종소리와 함께 황제가 행진을 시작했다.

황제 옆엔 청색 속죄회, 맨발 수도회, 백색 복음 기도회, 제13 지파 등 제국 각지에서 인기를 얻고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호라 교단 산하 수도회의 원장들이 맨발로 황제를 호위했다.

그중엔 칠순에 가까운 노인도 있었지만, 세월이 좀먹은 노구(老軀)의 쇠약함도 한 시대를 함께한다는 사명감을 이기지 못했다.

행진의 중간에서 루페르트는 수시로 목에 건 소라고둥을 매만졌다.

사람들의 눈에 비친 그 모습은 황제가 심장 부근을 만지작거리며 신에게 기도를 올리는 것으로 보였다.

'이 난관을 넘으면 적어도 내 마음은 편안해지겠지.'

울피아나 하나를 피하는 것만으로 루페르트의 심신은 크게 안정될 것이다.

물론 루페르트의 진정한 노림수는 선제후들의 마음을 달래는 것이다.

어차피 루페르트의 목적은 왕조를 세우는 게 아니니까.

제국을 지켜 내기만 하면 된다.

처와 자식? 왕조?

그건 사치다.

불타는 황궁에서 후회하며 죽어 간 황제가 바라기엔 과분한 보상이다.

그래서 이 길을 택했고, 이제 한 걸음만 더 나아가면 된다.

하지만 하나의 난관이 남았다.

'크리오네. 설마 여기에 나타날 생각은 아니겠지?'

세간엔 도펠죌트너만 배치됐다고들 한다.

그들만이 아니다.

마법대학은 루페르트의 청을 받아 최강의 마법사를 여기에 배치했다.

발작하는 자 프리츠 에센바하.

마법대학의 중추인 오각의 마법사 중 필두라 불리는 최강의 마법사다.

그의 예지는 하늘에 맞닿았고, 그의 권능은 감히 신화와 전설의 영역에 맞닿아 있다고 전한다.

더욱 기이한 건 그의 나이다.

그는 사실 300년 전부터 마법대학에 존재했는데, 초월적인 마법의 힘으로 불로불사의 비술을 터득했고 이단에 몰리지 않기 위해 이름을 바꿔 가며 오각의 마법사의 한자리를 지켜 왔다는 것이다.

그게 진실이든 허구든 프리츠 에센바하가 있다는 건 더할 나위 없이 든든한 보험이다.

'제아무리 제국 성인이라고 할지라도 오각의 마법사다. 홀로 전황을 바꾼다는 그를 상대로 얼마나 할 수 있을까?'

이번만큼은 크리오네가 나타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폐하?"

나란히 걷던 칠순의 수도원장이 루페르트를 조심스레 짙은 음영이 드리운 푹 파인 눈으로 응시했다.

"걱정이라도 하시는 겁니까? 안색이 좋지 않습니다."

"내 행동이 호라신의 마음에 반하지 않을까 그게 염려스러워 걱정하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폐하. 옛 경전에 따르면 신의 눈은 모든 걸 동시에 보고 있기에 한 명의 개인을 하나로 인식하지 않는다고들 합니다."

"무슨 뜻인가?"

"신은 포괄해서 본다는 이야기입니다. 어쩌면 하늘에 계신 호라신의 눈에 비친 이 거리 행진의 풍경은 어쩌면 한 명의 사람이 행하는 풍경처럼 비칠 수 있다는 이야기지요."

"아."

루페르트는 탄복하는 시늉을 했으나 속으로는 조소를 금치 못했다.

'왜 늙은이들은 뭐든 모호한 사변의 세계로 도피하는 걸까.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볼 순 없는 건가?'

루페르트가 걱정하는 건 단 하나다.

크리오네라는 실질적인 위협이다.

행진을 하기 전 시간의 책갈피에 현재 시점을 저장했다.

루페르트는 죽음의 함정을 팠다.

크리오네가 나타난다면 즉시 소라고둥을 불어 시간을 돌릴 것이고, 다음 시간 축에서 크리오네를 제거할 것이다.

제국의 종양과 같은 제국 성인을 그렇게 쉽게 처리할 수 있다면 오히려 남는 장사다.

루페르트의 신경은 오직 소라고둥을 향했다.

저벅저벅.

물에 젖는 거리를 맨발로 걸으면서.

저기 대성당이 보인다.

'역시 크리오네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인가.'

아쉽지만 이건 이거대로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지긋지긋한 행사를 끝내는 시점에 루페르트의 전사들이 복귀할 테니 말이다.

'다 왔군.'

대성당의 문턱이 지척에 있다.

루페르트는 성호를 긋고 대성당에 입장하려 했다.

그때 주변에서 고성이 터져 나왔다.

"어어어어어!"

"뭐야? 저건!"

"꺄아아아아악!"

뒤늦게 루페르트는 자신의 발밑과 그 주위를 물들인 그림자를 보았다.

'뭐, 뭐냐? 이건? 대체 어떤 마법이냐?'

마법 따위가 아니다.

"위!"

"위를 봐!"

병사들의 외침을 듣고 루페르트는 고개를 들었다.

루페르트의 눈에 거한이 낙하하는 모습이 비쳤다.

쿵!

크리오네가 루페르트의 뒤에 지축을 흔들며 착지했다.

'어, 어떻게?!'

크리오네가 말했다.

"반갑소. 황제."

그가 손을 뻗었다.

"내 이름은 크리오네. 제국 성인이라고도 하지."

루페르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의 병사와 호위병은 지천에 깔렸지만, 지금 가장 가까이 있는 건 저 막을 수 없는 거한이다.

"멈춰라!"

뒤에서 프리츠 에센바하가 천둥과 같은 고함을 지르며 순간 하늘을 어두워지게 할 정도의 마력을 방출했지만, 그전에 크리오네의 손이 루페르트의 팔을 붙잡았다.

"죽어라!"

루페르트의 몸이 위로 들렸다가 아래로 메다꽂혔다.

쿵!

순간 의식이 날아갔고 황천이 보였다.

'이대로 죽는 건가?'

모든 것이 느리게 보인다.

비산하는 돌멩이도 날아가는 핏방울도, 주위에서 들려오는 아우성조차 느리게 들렸다.

"커억!"

느리게 가던 시간이 원래의 흐름을 되찾으며 루페르트는 피를 토해 내고 격하게 기침했다.

"끄아아아아악!"

뒤늦게 처참한 고통이 뒤를 이었다.

그 고통은 끔찍한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축복이었다.

적어도 살아 있다는 증거였으니.

크리오네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게 보인다.

"황제?"

뭘 보고 그리 놀란 것인가.

그뿐만 아니다.

함께 동석하던 수도회장들도 경악한 얼굴로 루페르트를 바라보았다.

"폐, 폐하...?"

"어, 어떻게?!"

루페르트는 속으로 욕을 내뱉었다.

'내가 안 뒤지는 게 그리고 신기한 일이란 말인가!'

"허억!"

루페르트는 진창 속에서 격한 숨을 내쉬며 눈을 떴다.

타타타타탕!

"폐하를 지켜라!"

콩을 볶는 듯한 총성과 함께 천둥소리가 머리 바로 위에서 들려오며 한줄기 뇌전이 크리오네를 강타했다.

황제의 호위병들이 뒤늦게나마 제국 성인을 막으려 드는 것이다.

덕분에 약간의 시간을 벌었다.

루페르트는 움직이지 않는 오른팔 대신 왼팔로 소라고둥을 잡고 힘차게 불었다.

부우우우우---

* * *

거울 속에 비친 얼굴은 어느 때보다 처참하게 질려 있었다.

루페르트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떨리고 있는 오른팔을 지친 눈으로 응시했다.

"이건 아니야."

이렇게 끔찍한 적수가 또 있었을까.

수만 명이 운집한 곳에서 모습을 드러내 황제를 죽이려 드는 괴물이 있다니.

메헨부르그의 야수와 빙해의 스크라엘링은 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크리오네.

그는 살아 있는 고통이자 상처이다.

그 자체로 황제의 마음을 어그러뜨리는.

"...."

그럼에도 나아가야 한다.

저 문을 열어 다시 맨발로 그 비 내리는 진창길을 걸어야 한다.

"...근위대장을 불러라."

떨리는 오른손을 왼손으로 부여잡으며 루페르트가 애써 담담하게 말했다.

시종들이 근위대장을 불러왔다.

루페르트는 근위대장에서 특히 지붕 쪽에 대한 방비를 철저히 하라고 전달했다.

"동방 제국에서 지붕에 숨은 암살자가 동방 황제의 목숨을 노렸다는 소문을 들었다. 비슷한 암살자가 있을지도 모른다. 지붕공을 올려서라도 지붕 쪽을 철저히 조사해라."

"알겠습니다. 폐하."

쿠르트 자우버는 일견 정중하게 답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루페르트의 눈엔 다 보였다.

저 근위대장은 루페르트의 방금 발언을 이상하게 생각한다는 걸.

지나친 과민 반응이라고 속으로 욕하지 않았을까.

아무래도 좋은 일이다.

이걸 위한 회귀였다.

'크리오네. 너의 수는 확실히 읽었다. 이번에는 그냥 당하지 않겠어. 나타나는 순간 아주 벌집으로 만들어 주마.'

크리오네가 준 고통과 공포가 분노로 치환되는 걸 느끼며 루페르트는 옷을 벗고 얇은 흰옷만을 걸친 채 바깥으로 나갔다.

늙은 수도회장들이 전과 같은 모습으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의 기대에 찬 시선은 루페르트의 마음을 그저 냉담하게 만들 뿐이었다.

얕은 한숨을 내쉬고 루페르트가 앞장섰다.

다시금 행진이 시작됐다.

비 내리는 우중충한 하늘과 운집한 군중들.

수많은 시선과 두런거리는 소리들.

기도, 기복, 황제의 무병장수와 안녕, 제국 만세, 아이의 칭얼거림과 아기의 울음소리, 젊은 여자의 재잘거림, 병사의 고함과 말발굽 소리.

도무지 하나로 정의 내릴 수 없는 잡다한 소음 속에서 루페르트는 점점 가까워지는 대성당의 지붕만을 노려보았다.

그의 시선이 어찌나 확고한지 함께 행진하던 수도회장들은 말을 붙여 보고 싶어도 붙일 수가 없을 정도였다.

"...."

루페르트가 옆을 따르는 기마병에게 손짓했다.

"프리츠 에센바하에게 전달해라. 저 지붕 위에 무언가 도사리고 있다고."

"알겠습니다. 폐하."

기마병이 말머리를 돌려 뒤로 향하려 할 때였다.

군중 속에서 우악스러운, 거대한 손이 기마병의 목을 움켜잡더니 그대로 들어 올린 채 목을 악력만으로 꺾어 버렸다.

"아...."

또 그놈이다.

"크리오네."

병사를 집어던지며 거한이 루페르트 앞에 거대한 몸을 드러냈다.

"제국 성인이지."

"제발."

루페르트가 질린 표정을 지으며 소라고둥을 입에 갖다 댔다.

부우우우우우---

다시 어둠이 루페르트를 덮었다.

* * *

'크리오네. 그 괴물의 능력은 단지 거대한 몸과 신체 능력만이 아니라는 건가...?'

몇 번이고 당해 보니 알겠다.

크리오네는 평범하게 힘만 센 거인이 아니다.

놈에겐 뭔가 신출귀몰하게 만드는 속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른 제국 성인처럼 그도 명백히 이능에 속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 거대한 신체가 하나의 이능처럼 보여 생각하지 못했던 점이다.

'그놈은 몸을 숨기는 능력이 있다. 아니 어쩌면 어디에서든 나타날 수 있는 문을 열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지. 동화 속에 나오는 영리한 슈미트처럼 말이야.'

영리한 슈미트는 제국에서 널리 알려진 동화의 주인공이다.

그는 계모에게 학대당하고 부친의 재산을 모두 강탈당한 소년으로 집에서 쫓겨나 거리를 배회하다 한 노인을 도와주고 그에게 3가지 보물을 보상으로 받아 부와 복수와 아름다운 공주를 모두 손에 넣는다.

그가 쓰던 도구 중에 어디로든 갈 수 있는 작은 문이 있었다.

"슈미트의 작은 문 같은 능력이 실제로 존재할 수 있냐고요?"

이번에는 아예 프리츠 에센바하를 옆에 대동했다.

"글쎄요. 어떤 마법사도 공간을 건너서 움직일 수 없습니다. 전설 속의 존재라면 또 모르겠지요."

번개의 사랑을 받았다고 태어난 이 장년의 마법사는 낮은 목소리에도 천둥을 연상케 하는 사나움이 은연중에 드러났다.

사람들은 그런 모습을 보고 그를 천둥의 아이라고 두려워했지만, 오히려 루페르트에게 그 기이함은 안도감으로 다가왔다.

'자, 이제 오각의 마법사가 내 옆에 있다. 어떻게 하겠는가. 크리오네.'

루페르트의 자신은 1분도 채 되지 않아 무너졌다.

출발한 직후 프리츠 에센바하 뒤에 검은 그림자가 나타났고, 우악스러운 손으로 마법사의 얼굴을 감싸 쥐더니 그대로 비틀어 버렸다.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오각의 마법사가 죽었다.

"크리오네."

마법사의 시체를 내던지며 거한이 루페르트 앞에 우뚝 섰다.

"제국 성인이지."

117화 30. 루돌프 (2)

"아아...."

루페르트는 뒷걸음질 쳤다.

그 설인 앞에서도 그 미지의 괴물 앞에서도 자리를 고수하던 부동의 루페르트가 그보다 훨씬 더 격이 떨어지는 존재 앞에서 겁을 집어먹고 뒤로 물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건 아니야. 이건 아니야. 이건 아니야.'

이미 공포가 마음을 잠식했다.

잇따른 끔찍한 고통이 루페르트의 몸에 공포의 각인을 새긴 것이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루페르트는 자신을 향해 뻗어 오는 거대한 손을 보며 소라고둥을 불었다.

* * *

복도 안에서 루페르트는 털썩 무릎을 꿇었다.

"어떻게 해야 하냐고...."

천 명의 호위도 오각의 마법사도 아무 소용이 없다.

단 한 명의 악의가 이렇게 무서울 수 있는 것일까.

이제는 다른 방법이 없다.

루페르트는 행진을 연기하는 것까지 고려해야 했다.

문이 보인다.

루페르트는 주저하며 그 문을 통과했다.

"...."

지옥과 같은 현실이 다시 펼쳐졌다.

비가 내리고 군중들이 모였다.

성직자들은 번쩍이는 제기(祭器)를 산만하게 움직이며 행진을 준비했다.

루페르트는 그대로 의자에 늘어진 채 하늘을 보았다.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달아나고 싶었다.

왜, 방법이 없는데.

어떻게 하란 말인가.

그때 운명처럼 문이 열렸다.

루페르트는 뒤로 몸을 늘어뜨린 채 고개를 돌렸다.

"!"

루페르트의 얼굴에 거짓말처럼 환한 미소가 깃들었다.

"루돌프 님."

그렇다.

그 앞에 나타난 건, 과거의 황제였다.

철혈대제라 불리던.

"곤란을 겪고 계신 모양이군."

때는 정오였다.

* * *

미궁의 뒤뜰.

루돌프는 언제나처럼 음영을 드리우는 두건을 뒤집어쓴 채 안락의자에 앉아 정원의 한구석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오랜만이시죠? 이곳에 오신 건."

루돌프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다지 풍경은 달라진 게 없군."

그는 차를 내왔지만, 향을 맡지도 않았고 찻잔을 입에 대는 일도 없었다.

그는 단지 정원을 바라볼 뿐이었다.

루페르트는 곧 루돌프가 보는 것이 단순한 정원의 전경이 아닌, 정원 곳곳에 심은 장미들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루돌프 님.'

마음 한구석이 아린다.

애써 무시하던 죄책감, 아니 공범 의식이 루페르트의 양심을 무겁게 짓누른 것이다.

여전히 철혈대제의 마음은 오로지 그의 여인만을 향하고 있다.

그토록 많은 피와 많은 죽음과 많은 비극을 낳은 자가 이 정도 순애보를 보여 줄 거라고는 회귀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폐하."

시종 하나가 다급히 다가왔다.

"행진 준비가 완료되었다고 합니다."

"그, 그런가."

루페르트는 적잖이 당황했으나, 옆에서 지켜보던 루돌프가 짧게 말했다.

"무시하게."

두건 아래에 드러난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랐다.

"우리는 그래도 되는 존재 아닌가?"

루돌프의 생각을 알아차린 루페르트는 즉시 표정을 고치고 시종에게 말했다.

"몸이 좋지 않다. 누구도 이곳에 들지 말라고 명해라. 근위병에게 권한을 주겠다. 어느 누구라도 여길 넘어오는 자는 암살자로 판단, 죽음으로 다스리겠다고."

그 말을 듣고 있던 루돌프가 껄껄 웃으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두건에 가린 눈이 순간 번득이는 듯했다.

"그대도 슬슬 황제의 자질을 갖춰 가는군."

"그렇습니까?"

"폭군과 명군은 종이 한 장 차이지."

"흥미로운 이야기군요."

"최소한 폭군이 되려면 아래 인간들을 휘어잡았다는 소리 아닌가? 그자가 권력을 잃기 전까진 말이야."

"그렇게 볼 수도 있겠군요."

루페르트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난 폭군조차 되지 못한 한심한 놈이었지.'

폭군이면 차라리 후회는 남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냥 그대로 천벌을 받았구나 생각하며 죽었을지도 모른다.

"아래 인간의 사정을 일일이 고려할 필요는 없어. 마치 새의 새끼 같지. 아랫놈들이란. 먹이를 줘도 끝까지 대가리를 들이밀며 더 강하게 요구해. 둥지 옆에 나란히 있는 형제가 굶어 죽어 가고 있어도 아랑곳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야."

"그걸 잘 조율하는 게 훌륭한 부모 새의 역할이 아닐까요."

"어떤 현명한 부모 새는 자격 없는 새끼를 죽여서 둥지 밖으로 던져 버리고 하지. 마치 황새처럼 말이야."

"...황새 말입니까?"

"누가 황새를 가지고 아기를 물어오는 새라는 전설을 퍼뜨렸을까. 자기 새끼마저 스스로 죽여 살아 있는 채로 바닥에 던져 버리는 새인데 말이야."

루돌프가 비릿한 냉소를 머금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중요한 건 우리가 키운 새들이 훌륭하게 자라 비상하는 것이겠지? 새가 어떤 암투를 벌이고 어떤 형제 살인을 저지르건 간에 그것이 처음 둥지를 떠나 비상할 때의 그 감회와 아름다움은 인간으로 하여금 천명을 직감하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으니."

그가 검을 들었다.

그리고 루페르트에게 내밀었다.

"루돌프 님?"

루페르트는 그 의미를 알지 못했지만, 곧 루돌프가 자신의 검을 들어 올리는 걸 보고 그의 의도가 무엇인지 파악했다.

"검을 겨뤄 보세."

"겨, 결투는 아니겠지요?"

"뭔."

루돌프가 그답지 않게 피식 웃었다.

"나하고 싸운 자는 거의 다 죽었지. 허나 황제였던 내가 황제를 죽일 거 같나?"

"대련을 하시자는 거군요."

"그자."

루돌프가 눈을 반짝였다.

"어떻게 생각하나?"

"크리오네 말입니까?"

빠드득.

단지 생각하는 것만으로 이가 갈리는 인간이 있었을까.

하나 더 있긴 하다.

울피아나라고.

하지만 그 울피아나가 주는 압박과 크리오네가 주는 압박은 둘 다 끔찍함으로 따지자면 엇비슷했지만, 굳이 구분을 하자면 크리오네의 위협은 원시의 폭력처럼 말초적이고 울피아나의 위협은 보다 깊은 수렁을 연상케 했다.

회귀를 하고 진정한 황제가 됐지만 그 여자가 가진 그 기묘한, 마치 세상의 균열처럼 일렁거리는 듯한 감각은 여전했다.

역시 그녀는 보통 여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존재 자체가 섭리를 벗어난 듯한 그런 느낌이었다.

몇 번의 재회에서 확실히 깨달았다.

'그 여자는 피해야 한다. 무조건 피해야 해. 이건 여신님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그깟 여자라고 손가락질하는 인간도 있겠지. 하지만 그 여자에게서 자유로웠던 남자가 몇이나 되지? 당장 철혈대제조차 안젤리나 님을 잊지 못하고 계시지 않은가.'

당장 문제가 되는 건 크리오네다.

"그자. 그 제국 성인은 정말이지. 상상도 못 했습니다. 어떻게 그렇습니까...?"

몸에 새겨진 수차례의 격통을 떠올리며, 루페르트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루돌프가 차분히 루페르트의 몸을 위아래로 보았다.

"그대는 뛰어난 전사의 자질을 가지고 있어."

"제가요?"

금시초문이다.

공을 잘 차는 건 맞다.

공만 잡으면 솔직하게 제국은 물론 대륙의 내로라하는 공잡이가 와도 다 이길 자신이 있었다.

"저는 공이나 찰 줄 알았지, 검을 휘두르는 건 젬병입니다. 그마저도 선생을 고용해 억지로 익힌 거지만요."

"그건 그 선생이 딱딱한 제국의 검술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야. 힘을 우선적으로 생각한 거리의 조절, 느슨하면서도 신중한 공방, 역습. 부르봉인과 저 아래 룸 제국 찌꺼기들의 검은 사뭇 다르지. 알고 있나?"

"레이피어를 이용한 결투 말이군요. 전쟁에선 쓰지 못할 검법이라 들었습니다."

"갑주만 입어도 간단히 봉쇄되지. 하지만 고대엔 갖가지 다채로운 검들이 있었어. 영웅의 시대만 해도 얼마나 다채로운 무기가 등장했던가?"

루돌프는 이야기를 하면서 느릿하게 검을 휘두르는 시범을 보였다.

루페르트는 이 왕년의 황제가 검을 다루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는 걸 한눈에 간파했다.

느릿하게 회전하는 검이 손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마치 검 그 자체에 의지가 깃든 것처럼.

'철혈대제가 검을 잘 다뤘다는 소문은 듣지 못했다. 하지만 이 검기. 보통이 아니야. 전장에서 능히 자신의 한 몸을 지키고도 남을 정도는 물론이고, 어지간한 검사는 어렵지 않게 쓰러뜨릴 수 있는 기량이 느껴진다.'

"자, 그럼 검을 교환해 보세. 전력을 다해 덤비게. 사양 말고."

"그, 그래도 되겠습니까?"

"그대는 내 몸에 상처 하나 낼 수 없어."

루돌프가 씨익 웃었다.

루돌프를 수차례 봤지만, 그토록 확신 어린 미소를 본 적은 없다.

루페르트는 고개를 끄덕이고 철혈대제를 향해 강하게 맞부딪쳤다.

챙캉! 챙캉!

테타우의 시민은 물론 제국과 대륙의 이목이 모두 황제의 행진에 쏠린 가운데, 루페르트는 이름 모를 노인과 함께 칼싸움을 하고 있다.

그 모습은 지켜보는 이들에게 알 수 없는 기괴한 감정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루페르트는 또 다른 기이함을 느끼고 있었다.

챙캉!

세 합을 넘기는 일이 없었다.

어떻게 부딪쳐도, 어떻게 공격해 들어와도 세 번 검을 교환하면 그의 검은 하늘로 솟구치거나 바닥에 처박힌 채 루돌프의 발에 짓밟혔다.

루돌프가 뒤로 물러났다.

루페르트는 예를 표하며 찬사를 던졌다.

"대, 대단합니다! 폐하."

루돌프 앞에서 자신을 한껏 낮추긴 했지만 루페르트의 검기가 그리 녹록한 게 아니다.

그가 말한 것처럼 검술 사범에게 지도를 받았다.

리프니에의 통찰의 만화경에 의하면 검술 평가 등급은 B에 이르렀다.

마스터나 대가의 경지까진 아니더라도 검으로 벌어먹는 사람들 사이에서 능히 고개를 들고 다닐 정도의 수준은 된다는 소리다.

그런 루페르트를 어린아이 손목 비트는 것처럼 제압하는 루돌프의 실력은 지금까지 본 적이 없던 것이었다.

솔직하게 마술을 보는 기분이랄까.

"그대에게 어울리는 검술이 있을 걸세. 아마도 미네아."

"미네아 말입니까? 그 멸망한 문명 말이지요?"

"미네아의 전사들은 거의 벌거벗은 채 춤을 추는 것처럼 싸웠다고 하더군. 그래, 그대가 잘하는 축구처럼."

"그런 검도 있었군요."

"그대가 검기를 갈고닦으면 어쩌면 그 제국 성인 상대로 쉬이 당하지 않았겠지. 죽이진 못했더라도 어쩌면 통렬한 반격으로 그를 물러나게 했을 수도 있어."

"그렇습니까?"

솔직히 그건 너무 갔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인간이 괴물을 이기겠는가.

아니, 불가능한 것만은 아닌 것처럼 보였다.

그때 크리오네에게 습격을 받았을 때 루페르트가 보았던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지금은 거의 지워졌지만, 당시엔 그가 찰나의 판단 속에서도 충분히 살 수 있는 방법으로 보였으니까.

단지 그것을 실행한다는 게 불가능에 가까워서 그렇지.

"하지만 지금은 시간이 걸리겠군."

"그렇겠지요."

가능하다고 생각지도 않지만 말이다.

"내가 해결해 줄 수 있네."

루돌프가 검을 하나 더 들었다.

쌍검.

루돌프는 두 개의 검을 천천히 엇박으로 회전시키기 시작했다.

느릿하면서도 둔중한 회전이지만 루페르트는 알 수 없는, 사형집행의 예감을 감지했다.

죽음, 아니 처형이라고 할까.

저 검 앞에선 아무것도 할 수 없으리라는, 그런 절망감이 보는 것만으로 루페르트를 옥죈 것이다.

"하지만 그러려면 한 자루의 검이 필요하지."

"검 말입니까?"

"아라키스트. 수정의 검이 필요하네."

"아라키스트, 수정의 검 말입니까?"

그런 검은 들은 적이 없다.

아니, 있다.

하찮은 동화 속에 나오는 검이다.

주인공이 죽어 배가 풍선처럼 부푼 소의 배를 터뜨리고 꺼낸 검.

그 검은 얼음처럼 차가우며 철갑 같은 비늘을 두른 전설의 드래곤마저도 벨 수 있을 정도로 예리하다고 한다.

그 동화의 검을 루돌프가 요구하고 있다.

"황궁 금고에 있는지 확인해 보겠습니다."

루페르트가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하자 루돌프가 정정했다.

"여신에게 부탁하게."

"여신님 말입니까?"

"리프니에님이 그 검을 가지고 있네."

루돌프가 두 자루의 검을 바닥에 내던졌다.

"그 검이 있으면, 나는 자네를 죽이려 드는 그 괴물을 죽일 수 있다네."

두건 속에서 섬뜩한 빛이 번득였다.

118화 30. 루돌프 (3)

여전히 리프니에는 미궁의 2층에 있다.

루페르트는 시종을 물리치고 홀로 2층으로 가서 문을 열고 들어갔다.

짙은 어둠이 루페르트를 감쌌다.

루페르트는 조용히 여신이 자신에게 말을 걸어 주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여신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1분이 지나도 5분이 지나도 10분이 지나도.

'음? 뭐지? 여신님도 설마 낮잠을 주무시거나 하는 건가.'

어둠 너머에서 희끄무레한 형체가 보인다.

순간 루페르트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을 정도의 섬뜩함을 느꼈다.

안젤리나를 꼭 닮은 소녀가 눈을 부릅뜬 채 이쪽을 말없이 노려보고 있는 게 아닌가.

그 모습을 보고 누군가를 아름답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루페르트에게 그 모습은 공포와 별반 다를 바 없는 무언가다.

"여, 여신님?"

루페르트가 조심스레 소녀에게 말을 걸었다.

"...."

소녀는 답이 없다.

다시 한번 불러보았다.

"여신님?"

마찬가지.

소녀는 미동도 없고 눈의 깜빡임조차 없이 허공을 노려볼 뿐이었다.

마치 생명이 없는 것처럼.

'이, 이건 아니다.'

루페르트는 예전에 느낀 공포를 떠올리고 몸을 돌렸다.

'나, 나중에 뵙자. 아무래도 여신님은 낮잠을 주무시는 거 같으니.'

루페르트가 문고리에 손을 올리려고 할 때였다.

"루페르트 가우저?!"

"허억!"

루페르트는 자기도 모르게 경망스러운 소리를 내뱉으며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느닷없이 검은 머리가 소녀가 그 옆에 나타났다.

안 그래도 크리오네로 마음이 극도로 약해진 루페르트다.

쿵! 쿵! 쿵!

심장이 격하게 뛰는 걸 느끼며 루페르트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소녀를 떨리는 눈으로 보았다.

"어머. 루페르트 가우저. 왜 그렇게 처량한 모습인가요? 설마, 그 암살자가 그렇게 두려우신가요?"

"네, 그, 그렇습니다."

누가 두려워하지 않겠는가.

제아무리 철통의 방비를 해도 가볍게 무시하고 들어와 번번이 이쪽을 죽이려 드는 악몽 같은 자를.

소녀의 모습으로 분한 리프니에가 딱한 눈으로 루페르트를 바라보았다.

"불쌍한 루페르트 가우저. 제가 말했죠? 회귀는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니라는 걸요."

그 목소리에 담겨 있는 걱정은 기이하게도 루페르트의 벌어질 대로 벌어진 마음에 상처에 따뜻한 치유의 힘으로 작용했다.

진심처럼 들렸다.

방금 그 짧은 순간만은.

'...여신님.'

따뜻한 한마디와 함께 여신이 직접 소녀의 따뜻한 육체를 움직여 루페르트를 일으켜 세웠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토록 꺼리는 소녀를 보며 루페르트는 예전처럼 열과 성을 다해 여신에게 경의를 표했다.

"어머, 황제인 당신이 직접 제게 찾아와서까지 부탁을 드릴 정도라니. 무슨 일인가요?"

루페르트는 루돌프와의 약속을 떠올렸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 검을 내가 요구했다는 말을 하면 안 되네.'

이유는 말하지 않았다.

루돌프는 신신당부를 했다.

"혹 그 이야기가 여신의 귀에 들어간다면 아마 나는 더 이상 그대를 도울 수 없을지도 몰라. 여신님은 그대를 걱정하는 만큼 나 또한 걱정하거든. 혹 내가 크리오네에게 패해 죽게 된다면, 어쩌면 그녀의 회귀의 권능으로도 날 살릴 수 없을지도 모르지."

"어째서입니까?"

당시 루페르트가 물었다.

"나 또한 수레바퀴 위에 묶였던 몸. 그 수레바퀴에서 벗어난 지금, 나는 그 바퀴의 은혜를 받지 못할 수도 있으니. 왜, 그대의 여러 번의 회귀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대가 크리오네로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 않나?"

"...."

확실히 그러하다.

그가 회귀의 영향을 받았다면 루페르트가 크리오네 때문에 여러 번 회귀했고, 정신이 거의 무너질 정도로 고통받는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여전히 의문점은 남지만, 루돌프는 특별하다.

'그분의 말씀이 옳다면, 어쩔 수 없다. 지금은 크리오네. 그 괴물을 제거해야 한다. 그 괴물이 날 완전히 부숴 버리기 전에 말이야.'

루페르트는 속마음을 숨기고 소녀의 모습을 한 그녀의 여신에게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크리오네를 쓰러뜨릴 무기를 가지고 싶습니다."

"무기요?"

"아라키스트. 수정의 검이라는 강력한 무기만이 크리오네라는 자를 죽일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아라키스트."

리프니에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건 망령을 베는 검인데. 크리오네 같은 살아 있는 존재에게 그리 신통할까요?"

"크리오네는 곰처럼 강한 인간입니다. 곰처럼 강하긴 하지만, 에디지우스나 판텔레온 같은 초월적인 힘을 가지진 못한 것 같습니다."

"초월적이라니요."

리프니에가 조소했다.

"그런 저급한 권능에겐 과분한 표현이네요."

"죄송합니다. 여신님."

"당신이 죄송할 건 없어요. 루페르트 가우저."

리프니에가 허공에서 뭔가를 꺼냈다.

검을 꺼내는 순간 어둠이 걷힐 정도로 환한 빛을 발하는 글자 그대로 수정으로 이루어진 검이었다.

"아라키스트. 수정의 검. 지금은 죽어 버린 어떤 신을 기리기 위해 만든 것이지요."

"신도 죽습니까?"

"네. 죽어요. 당장 제국의 신조차 이미 죽은 신 아니던가요?"

"...그렇습니다."

"자, 받으세요. 루페르트 가우저."

리프니에가 하품을 했다.

"저는 햇빛이 강하면 강할수록 졸음이 온답니다. 하긴, 너무 오래 깨어 있었죠. 저는 잠꾸러기예요. 칠칠치 못한 여신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그게 사실인걸요."

리프니에가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크리오네, 처치했으면 좋겠네요."

그녀의 기척이 사라졌다.

완연한 어둠이 커튼처럼 주위를 다시 덮었다.

자신의 심장 소리가 들릴 정도의 고요한 적막 속에서 루페르트는 좀 더 빨라진 자신의 고동과 약간의 배덕감을 느끼며 손에 들린 검을 응시했다.

"...."

루페르트는 여신이 있는 방향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여신님. 이번 한 번만 거짓말하겠습니다.'

* * *

회차로.

제국의 모든 수레 달린 것들이 돌아가야 하는 끝자락엔 제국의 소수민족 하브루타인들이 사는 거리가 있다.

그 거리의 깊숙한 곳에 가장 은밀한 하브루타인들의 회합장이 있다.

한때 루페르트도 간 적이 있는 그 장소의 중심을 차지한 건 두건을 쓴, 기골이 장대한 노인이었다.

"그래."

그 사내의 정체는 다름 아닌 루돌프.

그는 자신 앞에서 술을 따르고 있는 사막을 닮은 피부를 가진 이국적인 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울피아나라는 여자에 대한 정보는 알아 왔나?"

황제 후보 한 명을 나락으로 떨어뜨린 여인이 고혹적인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상상 이상으로 어긋난 여자더군요."

"그래?"

"다섯 살 때 단지 부친이 자신을 바라봐 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난관에 매달려 자살하겠다고 시위를 부렸다고 합니다."

"하하."

루돌프가 웃었다.

"단지 성격이 좋지 않다고 보았는데, 그 정도로 미친 여자일 줄이야."

루돌프는 호박빛 액체가 담긴 술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룸 제국에서는 그런 아이를 마구잡이로 때렸지."

"그런가요? 군주의 자제도 말입니까?"

"예외는 없었어. 군주의 자식이라고 해도 행동이 이상하거나 엇나가면 노예 가정 교사가 체벌을 가했지. 앙심을 품은 어린이가 나중에 자라 복수를 하는 경우가 있었지만, 어쩌면 그 엄정한 교육 방식이 룸 제국에게 그토록 강한 힘을 준 원인일지도 모르겠지."

"역시 폐하께서는 역사에 통달하시군요."

"영원한 젊음을 누리는 그대도 나만큼 해박하지 않나?"

루돌프의 물음에 여성은 야릇한 미소를 머금은 채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폐하에 비하면 한 마리 벌레에 지나지 않습니다. 몸에 흐르는 피부터 천한걸요."

그때 문가에 서 있던 한 사내가 여성을 향해 손짓했다.

루돌프가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아가티아."

"네. 폐하."

"준비해라."

아가티아라 불린 여성을 포함한 하브루타인들이 서둘러 뒤편의 장막 너머로 걸어 들어갔다.

남은 건 입구를 지키는 문지기 하나.

곧 입구에서 흐릿한 관상을 가진 중년 사내가 나타났다.

문지기가 그 사내를 막아섰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검을 전하러 왔다."

문지기는 정중하게 자리를 비켜 주었다.

중년 사내는 곧장 루돌프에게 다가왔고 그 앞에 앉았다.

거짓말처럼 중년 사내의 얼굴에 걷힌 안개가 걷히고 이제 갓 약관을 넘은 젊은 황제의 얼굴이 선명하게 나타났다.

"루돌프 님."

그 사내의 정체는 다름 아닌 작금의 황제다.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과거의 황제를 찾아왔다.

"이걸 받아 주십시오."

거짓으로 얻어 낸 전설 속을 검을 바치기 위해.

루돌프는 심호흡을 한 차례 하고 그 검을 한 손으로 받아들었다.

"아라키스트."

그가 검의 이름을 말하자 마치 검이 의지를 가진 것처럼 묘한 빛으로 번들거렸다.

그 검을 쥔 채 칼날을 바라보며 루돌프가 말했다.

"...크리오네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을 거야."

"그 말씀은?"

"그대의 치세를 계속하게. 그 암살자가 그대 앞을 가로막는 일은 없을 터이니."

"그자가 어디에 있는지 압니까?"

루페르트가 분노를 드러내며 물었다.

"그자가 죽는 걸 보고 싶습니다."

빠드득.

루페르트의 이가 그의 의지에 관계없이 갈렸다.

사람을 거의 무너질 정도로 괴롭힌 놈이다.

잔혹한 성격의 소유자는 결코 아니지만, 루페르트는 크리오네가 고통스럽게 죽는 걸 보고 싶었다.

그 정도의 증오가 일련의 사태에서 쌓이고 만 것이다.

그 모습을 본 루돌프가 냉소적으로 말했다.

"검투 경기를 좋아하나?"

"아니오.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야만적인 경기지만 영광스러운 싸움이기도 하지."

루돌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황제가 보기엔 지나치게 저열한 오락이야."

그가 방문을 나섰다.

"그대는 황제의 길을 걷게. 나는 내 일을 할 테니."

루돌프가 천천히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루페르트는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하지만 가슴이 강하게 뛰는 걸 느끼며 과거의 황제가 사라지는 걸 가만히 지켜보았다.

* * *

빗속에서 황제의 행진이 시작됐다.

수많은 군중이 운집한 가운데 황제는 누더기를 기운 옷을 입고 맨발로 수도원장과 함께 진흙의 거리를 걸어 나갔다.

그 행진엔 하늘에 휘날리는 헌화도, 황제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환호도 없었다.

모두가 사전에 알린 것과 같이 침묵 혹은 두런거림 속에서 그들의 황제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첨벙.

차가운 물웅덩이를 밟으며 루페르트는 주위를 눈동자를 굴려 조심스레 살폈다.

그 암살자.

그 엄중한 호위를 가볍게 무시하고 루페르트를 죽이려 드는 암살자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걱정이 가라앉지 않는다.

이미 수차례에 걸쳐 루페르트를 위협하고 끔찍한 고통을 안긴 장본인은 이미 루페르트의 마음속에 악몽이라는 형태로 달라붙었으니까.

믿을 건 루돌프뿐이다.

여신에게 거짓말을 한 보람이 있기를 바란다.

빗속에서 느닷없는 참회를 느끼며 루페르트는 자신이 믿지 않는 신의 신전으로 걸어 들어갔다.

"...."

군중 속에 있던 한 사내가 그 모습을 지켜보다 뒤로 돌아섰다.

그의 옆엔 수더분한 차림의, 추악하게 생긴 곰보 자국이 얽힌 사내가 엉거주춤하게 서 있었다.

"크리오네."

루돌프가 말했다.

"그대의 주인을 알아보지 못하는가?"

거한이라기보다는 평범한 체구에 가까운 이국적인 풍모의 사내는 번들거리는 눈으로 과거의 황제를 노려보다 갑자기 주먹을 들었다.

"네깟 놈을 황제로 모신 적이 없다."

이에 루돌프가 가볍게 손짓했다.

"크으으으윽!"

곰보 자국이 얽힌 사내가 격렬한 고통을 호소하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는 머리를 부여잡고 있었다.

"크으으윽!!!!"

사람들이 웅성거렸지만, 루돌프는 그저 차가운 눈으로 사내의 고통을 지켜볼 뿐이다.

"하, 항복! 살려 주시오! 부탁이오!"

곰보 자국 사내가 헛소리를 내뱉으며 자비를 구걸하자 그제야 루돌프는 팔을 내렸다.

그의 손바닥 안엔 루페르트가 잘 아는 한 마리 벌레가 고개를 들이밀고 있었다.

루페르트가 황제의 멍에라고 이름 붙인 그 끔찍한 벌레가 말이다.

"...제국의 진정한 황제시여."

크리오네라 불린 추악한 사내가 자비를 구하듯 고개를 들었다.

"제국은 어찌 되는 겁니까?"

루돌프가 발걸음을 옮겼다.

"그 운명을 이제 정하려 한다."

도시의 종들이 울리고 있다.

천 개의 종이 일제히 울리는 가운데 황제의 서약이 시작되리라.

하지만 루돌프의 귀에 들린 그 수많은 종소리들은 이 질척한 비와 함께 또 다른 시작을 알리는 소리로 들렸다.

"...리프니에."

루돌프의 눈은 황궁 옆에 외로이 서 있는 장미의 저택으로 향했다.

평범한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기괴한 거인이 주인 없는 묘를 미동도 없이 지키고 있었다.

119화 30. 루돌프 (4)

맨발의 황제가 대성당에 들어섰다.

수많은 군중이 침묵으로 황제를 환영했다.

단상에 선 아카이아 대주교가 가볍게 종을 흔들어 의식이 시작됐다는 걸 알렸다.

주르륵.

온몸에서 흘러내린 비가 몸과 옷을 타고 바닥을 적시는 걸 루페르트는 가만히 보았다.

단지 비가 몸을 통해 바닥에 묻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찰나의 시간 치열하게 회전하던 루페르트의 사고는 그의 모든 행동, 결단, 판단이 제국이라는 거인의 몸을 통해 이 세상 구석구석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새삼스러운 결론으로 이어졌다.

"죄인에게 문은 열렸소. 맨발로 들어오시어 전능한 호라에게 자비를 구하시오."

저벅.

루페르트는 발걸음을 옮겼다.

한 발, 한 발 그가 머금은 물기로 대성당의 바닥을 적시면서.

자리에 모인 자들은 제국을 대표하는 자들이다.

낮고 비천한 자는 여전히 바깥에서 비를 맞고 있다.

문득 생각이 들었다.

'이런 짓까지 해야 하나.'

폭군의 길은 언제나 힘 있는 황제를 유혹하는 법이다.

이 절차의 번거로움과 정당한 목적을 위해서라도 하나 지나칠 정도로 자신을 수축하는 선택을 한 반발심이 아이러니하게도 성공을 목전에 두고 고개를 들고 일어났다.

이율배반적이게도 루페르트는 내심 크리오네가 이 순간 나타나 그를 덮쳐 줬으면 하는 생각마저 품었다.

그러나 크리오네는 나타나지 않는다.

저벅.

또 한 걸음을 옮기며 루페르트는 생각했다.

'루돌프 님은 크리오네를 해치운 걸까. 그 검이 그렇게 잘 드는 검인가. 그 검이 있다면 굳이 루돌프 님이 아니라 다른 자를 써도 됐던 게 아닐까.'

단상이 가까워져 온다.

루페르트는 그제야 자신이 포기한 것들이 그리 가볍게 저울대에 올리려는 것이 아니라는 걸 서서히 자각했다.

종의 사명.

자식을 남기고 후대를 이어 나가는 것.

왕의 사명.

왕조를 만들어 내고 이어 나가는 것.

아직 정해지지 않은 가상의, 그러나 따뜻하고 배려 깊고 매력적이기까지 한 여인이 안개처럼 그를 스쳐 지나갔다.

그를 닮은 영민하고 귀여운 아이의 작은 손이 그의 손가락을 만지다 사라졌다.

죽을 때의 풍경을 생각했다.

누가 그가 임종에 이를 때 진심으로 울어 준단 말인가.

그가 죽기만을 바라는 자들이 죽어 가는 자신 옆을 지킬 것인데.

'과연 내가 옳은 선택을 한 것인가.'

돌릴 수는 있다.

그에겐 그럴 힘이 있다.

순간 루페르트는 어금니를 깨물었다.

'겨우 울피아나 하나 따위에 제국의 황제가 휘둘린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린가.'

죽여 버리면 되는 게 아닌가.

암살자를 쓸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적발되면 제국은 내전에 들어갈 것이다.

민중의 지지를 잃는 건 물론이고, 모든 선제후가 그에게 반기를 들 것이다.

아카이아 대주교는 그 옆에 남겠지만, 어쩌면 그 아래 성직자가 대주교를 몰아낼지도 모른다.

그는 위임받은 선제후지 왕조를 이룬 자가 아니니까.

기묘하게 루페르트는 이제 대주교와 가장 비슷한 길을 걸으려 한다.

늙어 가는 자식들을 보지도 못한 채 오직 자기라는 거울만 보며 살아가야 하는 삶.

그런 삶을 살고 싶진 않았다.

'왜, 자꾸 이런 잡념이 드는 걸까. 이 중요한 시기에.'

미처 몰랐다.

자신의 내면에 이렇게 많은 욕망이 꿈틀거리고 있을 줄은.

회귀를 원할 때 그가 원했던 건 단지 제국을 구원하는 것이다.

사심 그득한 욕심 같은 건 바라지도 않았다.

"죄인 루페르트는 들어라."

아카이아 대주교가 루페르트에게 명했다.

지금 그는 대주교가 아닌 신의 대리인으로 명하고 있다.

그 아래 맨발로 선 루페르트 또한 황제가 아닌 한 명의 죄인의 자격으로 서 있다.

"그대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그대는 아버지이길 포기하고 그대가 만들어 갈 가계의 가지를 제 손으로 쳐 버리려 한다. 그 사실이 맞는가?"

대주교가 평소와 전혀 다른, 마치 이단 심문관 시절을 연상케 하는 간담을 서늘케 하는 고성으로 물었다.

내장 전체가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걸 느끼며 루페르트는 고개를 숙였다.

'어떻게 해야 하나.'

그의 손은 어째서인지 소라고둥에 가 있었다.

두 개의 덩굴이 끝없이 교차하며 그의 팔을 휘감고 있었다.

욕망과 후회라는.

그의 답변이 지나치게 지체됐기에 대성당 안엔 작은 웅성임이 일었다.

대주교 또한 의아함을 느꼈다.

'폐하?'

루페르트의 얼굴이 지나치게 안 좋다.

온몸을 부르르 떠는 걸 물론이고 그 얼굴, 그 눈동자엔 불온한 빛이 감돌고 있었다.

아카이아 대주교 본인이 몇 번이고 수레바퀴에 매단 불신자와 같은.

"폐하?"

대주교가 낮은 목소리로 루페르트를 불렀다.

그제야 루페르트도 상황의 심각성을 알아차리고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나는...."

모든 것이 사라지려 한다.

그가 가질 수 있는, 그가 정당하게 요구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특히 여자들이.

미래의 아내가.

그 안엔 피리스와 이름 모를 외국의 공주와 길에서 보았던 기이할 정도로 아름다웠던 망자의 목동, 그리고 마를로네조차 섞여 있었다.

"...."

여전히 비가 내리는 거리.

루돌프는 누구의 제지도 받지 않고 장미가 막 꽃을 피우려는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손에 쥔 건 붕대로 싼 장검.

아무도 없는 저택을 지나 그는 곧장 뒤뜰로 향했다.

아련한 추억과 함께 과거의 향기가 루돌프의 마음을 가볍게 울렸지만, 그 추억이 그의 얼굴을 변하게 하는 일은 없었다.

마치 감정 없는 기계처럼 루돌프는 기계적인 걸음으로 뒤뜰로 향해 한 묘를 지키고 서 있는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는 괴인을 보았다.

그가 다가오자 괴인이 반응했다.

크리오네와는 전혀 느낌이 다른, 이 세상의 존재라고 믿을 수 없는 괴이라는 감각을 먹물처럼 흩뿌리며 그것이 루돌프를 향해 몸을 돌렸다.

"나를 볼 수 있는가? 여신님의 권능을 하사받은 자인가? 돌아가라. 여기는 그대가 올 곳이 아니다."

도저히 인간의 발성 기관에서 발한 거라고 믿기 어려운 섬찟한 음성.

이에 대해 루돌프는 대답을 하는 대신 검을 감싼 붕대를 푸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수정처럼 맑고 번쩍거리는 칼날이 우울한 구름에 가려진 햇빛을 받아 희미하게 번들거렸다.

거인이 손을 뻗었다.

그의 손에서는 마치 식물의 줄기 같은 것들이 무한히 두 개의 가지로 갈라지며 루돌프에게 폭사됐다.

과거의 황제는 두 손으로 검을 들었고 자신을 향해 뻗어 오는 무한히 증식하는 것들을 단칼에 잘라 냈다.

"타필라이!"

이제 누구도 의미 알 수 없는 고대의 호령이 루돌프의 입에서 폭풍처럼 터져 나왔다.

거인이 루돌프에게 달려들었다.

루돌프는 검을 쥔 채 거인의 돌격에 대비했다.

"죄인 루페르트여. 왜 답이 없는가? 여전히 속세에 관한 미련을 품고 있는가?"

아카이아 대주교가 물었다.

루페르트는 심호흡을 했다.

섣불리 정할 수도 있다.

섣불리 대답해서 이 상황을 모면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회귀가 가능하다고 하지만 이 순간을 그냥 넘겨 버리는 건 자신의 삶이나 행동 양식을 너무나 가볍게 보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루페르트의 마음을 돌로 짓누르는 것처럼 압박한 것이다.

'처음부터 생각하자. 내가 왜 이 자리에 서 있는지를.'

지금까지 루페르트는 움직이는 동기는 단순하다.

불타는 테타우와 융커스 베샤문트에게 살육당하던 백성의 비명을 듣는 것만으로 루페르트는 무한한 투지를 느끼고 갖은 절망에 맞설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이미지는 남용됐고, 루페르트가 지금 맞서 싸우는 건 제국의 적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이다.

여전히 그는 이 순간을 되돌리고 순결 선언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정치를 풀어 나가기를 원하고 있다.

'어떻게 해야 하나. 내 욕망의 크기가 이렇게 크다는 게 판명이 났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

루페르트는 새삼스럽게 그가 정부를 3명이나 두었던 걸 떠올렸다.

동방 제국의 황제처럼 수백 명의 후궁을 거느리는 군주도 있다.

강력한 군주치고 애인을 두지 않는 자는 드물다.

레벤호스트 같은 가정에 충실한 자도 있겠지만, 저 고결하다는 막스 게오르크조차 모친이 다른 사생아를 셋이나 두고 있지 않았던가.

당장 루페르트의 성욕은 그리 대단하지가 않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 들어갈수록 그는 여자를 찾을 것이다.

그때의 성욕을 감당할 수 있을까?

루페르트가 치열하게 고민하고 있을 때 맨발의 여인이 대성당에 들어왔다.

사람들이 술렁거렸다.

대성당에 나타난 건 울피아나였다.

"저도 회색 속죄회에 지원하겠어요."

그녀가 기도문을 암송하며 루페르트를 향해 다가왔다.

"!"

루페르트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그가 다급하게 말했다.

"내 죄를 인정합니다. 어떠한 미련도 없다는 걸 증언합니다."

루페르트가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빨리."

울피아나가 오기 전에.

대주교는 그의 뜻을 알아차리고 한발 빠르게 선언했다.

"회색 속죄회의 구성을 선언합니다."

울피아나가 다가왔다.

"저는요?"

"안타깝지만 회색 속죄회의 구성은 완료되었소."

"그, 그런 게 어디 있나요?"

울피아나가 루페르트를 보았다.

루페르트는 그녀의 떨리는 눈빛을 받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이 여자가 내게 도움을 주는 순간도 있구나....'

모든 것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영원한 독신의 몸이 되는 순간 루페르트는 그 간단한 이치를 깨달았다.

아울러 자신 또한 미혹에 빠질 수 있는 암군의 자질을 갖고 있는 것 또한.

* * *

비가 그쳐 간다.

장미의 향기가 남은 정원엔 이제 불투명한 점액질로 이루어진 이 세상의 물질이 아닌 것들의 잔해가 어지러이 널려 있다.

자리에 서 있는 건 피투성이가 된 거구의 전사였다.

두건이 벗겨진 자리엔 수염을 기른 지혜로운 노인의 얼굴 대신, 마치 투견처럼 이를 드러내고 형형한 눈빛을 번득이는, 단지 보는 것만으로 상대방을 주눅 들게 충분한 젊고 강력한 전사의 얼굴이 수더분하게 기른 금발의 머리카락 사이로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허억! 허억!"

가쁘게 숨을 몰아 내쉬면서 그는 삽도 없이 크고 투박한 손으로 묘를 파헤쳤다.

묘의 흠을 한 움큼씩 퍼낼 때마다 사내의 눈동자엔 분노와 실망이 차올랐다.

얼마나 많은 배신이 있었던가.

얼마나 많은 비인간적인 행위를 봐야 했던가.

그것은 모든 걸 주었지만, 동시에 모든 걸 앗아 갔다.

몇 번이고 기회를 줬지만, 그것은 반성하지 않는 아이처럼 천연덕스럽게 같은 비행을 반복했다.

그것에게 복수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것은 신 그 자체니까.

아니 어쩌면 평범한 신을 넘어서는 존재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복수할 수 있는 수단은 있다.

그는 알고 있다.

그것이 간절하게 원하는 게 무엇인지.

가는 곳마다 이르는 곳마다 파괴하고 황폐화하고 멸망으로 몰아넣은 그 괴물은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이 가장 많이 죽이고 파멸한 인간의 사랑을 갈구하고 있었다.

"리프니에."

파헤친 흙 너머로 석관이 무심하게 자리 잡고 있다.

결단의 시간이다.

사내는 두 손으로 관뚜껑을 잡고 그것을 열었다.

"하하...."

메마른 웃음소리가 젖은 대지 위로 아련하게 울려 퍼졌다.

관 안에서 썩어 가는 건 여성의 시체지만 그가 원했던 여성은 아니다.

그는 알고 있다.

자신이 그것에게 준 "마지막 기회"가 어떻게 됐는지.

"하하하하...."

슬픔과 충격에서 비롯됐다기보다는 의무감에서 기묘한 웃음소리를 내며 사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투성이가 된 옷의 일부분이 벗겨졌다.

그 어깨에 숨겨져 있던 문신이 드러났다.

그 문신은 쇠사슬에 묶인 검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지금 기억하는 이는 거의 없겠지만, 그 문신은 룸 제국에서 검투사 노예의 상징이었다.

"리프니에."

루돌프라 불렸던 사내가 이를 갈며 파헤친 관을 노려보았다.

"...나는 너에게 여러 번 기회를 줬었다. 너의 갖은 기행을 단지 룸 제국의 마지막 황제에게 했던 맹세, 그 천 년의 맹세를 지키기 위해 참고 또 참았다. 하지만 이제는 내 인내도 끝을 고하는군."

파헤친 묘를 놔둔 채 그 사내는 돌아섰다.

그의 몸은 젖어 있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모든 걸 태우고 있으니까.

그 불길은 자신만이 아니라 나 자신마저도 태울 것이다.

"내 소망을 불태워 네 소망도 함께 불태워 주마."

그의 이름은 티그리트다.

120화 30. 루돌프 (5)

황제의 순결 선언이 끝났다.

울피아나가 대담하게 그와 함께하려 했지만, 무위로 돌아갔다.

이 소문은 빠르게 제국의 수레와 말을 통해 제국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루페르트를 주시하던 군주들은 회심의 미소를 머금었고, 저마다의 주판알을 두드렸다.

"루페르트. 그 친구가 기어코 그 큰일을 해내는군."

북방의 선제후 게오르크 아르님은 솔직하게 루페르트를 인정했다.

"그 정도 결의가 있는 자가 제국의 구원을 운운한다면, 뭐 인정해 줘야 하지 않겠나?"

막스 게오르크는 루페르트의 진의를 의심하긴 했지만 그 또한 황제가 될 자격이 있는 자. 루페르트의 선택을 기꺼이 반기며 자신의 아들을 불러다 넌지시 말했다.

"너는 그렇게 대성할 인물 앞에서 성질을 부린 것이냐?"

"죄송합니다.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 사람이 그 정도 인물이라는 걸 메헨부르그에서 알아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누이가 웃으면서 한마디를 보탰다.

"당시 황제 폐하는 그리 대단해 보이진 않았던 거 같아요. 기백 같은 건 분명 있었겠지만. 하지만 얼마 전에 봤을 땐 사람이 달라 보이더라고요.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그래?"

"네. 혼백이 몇 번이고 달아나는 경험을 한 사람처럼 눈은 퀭하고 피부는 창백하며 무엇보다 볼이 움푹 들어가 있었어요. 수더분하지만 도련님 같던 분위기는 하나도 나지 않더라고요."

선제후 중 가장 골머리를 앓는 건 골트문트다.

"울피아나. 울피아나. 밖으로 나오거라. 식사를 안 한 지 일주일이 넘었잖냐. 전에도 단식을 했는데...."

울피아나가 다시 단식에 들어갔다.

대중 앞에서, 아마 황제가 의도하진 않았겠지만 크게 한 방 먹은 울피아나는 상당한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

어쩌면 회복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골트문트가 더 염려하는 건 그녀의 추락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딸을 잘 알고 있다.

그 왜곡된 집념이 꺼지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별들이 그녀의 운명을 그렇게 정해 놓았으니.

끔찍한 일이지만 골트문트는 그런 자신의 딸을 사랑한다.

죽은 아내를 위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그는 마지막까지 딸의 소망을 옆에서 도와줄 것이다.

하지만 황제가 괘씸하다는 건 사실이다.

'거기서 그렇게 매몰차게 내쳐야 했나. 아무리 울피아나가 상궤를 넘는 짓을 저질렀다고 하지만 완곡하게 포용해 줬으면 이 사달은 안 났을 거 아닌가.'

루페르트에 대한 악감정이 무엇으로 이루어질지 아직 골트문트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수하들은 끊임없이 연락을 취해 오고 있다.

저 레벤호스트.

트라이아의 선제후가 기어코 큰 사고를 터뜨릴 거라고.

* * *

"루페르트 가우저. 수고했어요. 당신의 결단은 정말로 아름답더군요. 제국을 위해 많은 걸 포기하는 당신의 의지를 보니 솔직하게 저도 약간은 감동했답니다?"

소라고둥이 간만에 말을 걸어왔다.

홀로 침대에 누워 있던 루페르트는 일말의 죄책감을 느끼며 속으로 생각했다.

'루돌프 님은 어떻게 된 거지. 크리오네를 처리한 걸까.'

"저기 그때 빌려 간 검은 어떻게 됐나요?"

"그 검 말입니까?"

"네. 그게."

"괜찮아요. 천천히 돌려줘도. 다만 그 검은 워낙에 인간에게 좋지 않은 영향이 깃든 물건이라 바깥에 오래 놔두면 누군가를 해치게 되거든요. 이 점을 유념해 주세요."

"아, 알겠습니다. 여신님."

소라고둥이 우뚝 선 채 마치 그를 바라보는 것처럼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루페르트 가우저."

여신이 온화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네. 여신님."

루페르트는 산들바람이 얼굴을 스치는 듯한 감각을 느끼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 보니 참 많은 일이 있었죠?"

"네. 그렇습니다."

"어떤가요? 순결 선언이라는 초대형 도박을 한 현재의 심정은?"

"으음. 그다지 좋지는 않군요."

"그렇죠. 군주의 행복 중 가장 큰 걸 거세했으니."

"거세라."

"당신이 좋아하는 여자아이가 그런 표현을 즐겨 쓰더라고요."

소라고둥이 웃었다.

"조, 좋아하다니요."

"그 금발 계집. 좋아하지 않나요?"

"아닙니다. 조그만 녀석을 좋아하는 취향은 없습니다. 여신님도 보셨겠지만, 제가 사랑했던 연인들은 모두 다 컸죠. 그, 그러니까 성숙한 여인의 향기를 품고 있었습니다!"

"흐음~?"

"단지 상대하기 편한 것이겠지요."

루페르트가 맥빠진 표정을 지으며 이실직고했다.

"그 녀석만큼 만만한 사람은 이 황궁에 아무도 없습니다."

"시종들이 있지 않나요."

"시종들을 믿는 건 악의에 자신을 그대로 맡기는 것과 같지요. 게다가 그들은 솔직히 저와 같은 사람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뭐, 신분이 다르니까요."

소라고둥이 자리에 누웠다.

"제 새로운 신전, 기대할게요."

루페르트는 어째서인지 여신이 졸려 하는 듯한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때는 정오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걱정 마십시오. 약속한 대로 여신만을 위한 화려한 사당을 반드시 건축하겠습니다."

여신의 기척이 사라졌다.

홀로 남은 루페르트는 잠시 억눌린 죄책감이 다시금 파도처럼 덮쳐 오는 걸 느끼며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루돌프 님...."

과연 어떻게 됐을까.

무슨 일이 있었을까.

묻고 싶다.

그가 되고 싶던, 철혈대제가 대체 그 검을 가지고 무엇을 하려 했는지, 크리오네는 제대로 처리했는지.

묻고 싶다.

그 소망이 하늘에 닿은 것일까.

그날 오후 루페르트는 한 시종에게 한 사내가 알현을 요청했다는 걸 듣는다.

"폐하가 기다리고 계실 루돌프라는 분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루돌프 님이?!"

루페르트는 가슴이 뛰는 걸 느끼며 즉시 루돌프를 궁 안으로 불러들였다.

그런데 처음부터 뭔가 이상했다.

루돌프는 궁 안에 들어오려 하지 않았다.

그가 장소를 잡았다.

정오에, 대성당 앞에, 홀로.

"뭐지?"

뭔가 중요한 이야기라도 있는 것일까.

가면을 쓰고 루페르트는 홀로 황궁을 빠져 나갔다.

전처럼 누구도 자신을 알아보는 이도 없었고 제지하는 이도 없었다.

신묘한 여신의 권능에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리며 루페르트는 그토록 골치를 썩이던 대성당 앞에 홀로 섰다.

몇 명의 병사가 창칼을 들고 지키고 있었지만, 거리는 한산했고 사람의 그림자는 찾기 어려웠다.

한 사내가 루페르트에게 다가왔다.

두건을 쓴 지혜롭고 고집 있는 노인의 하관.

루돌프다.

"잠깐 걸을까?"

루페르트는 기꺼이 그의 말을 따랐다.

"그대는 좋은 사람이야."

대뜸 루돌프는 루페르트의 칭찬을 했다.

그러나 그 칭찬은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루돌프 본인이 말하지 않았던가.

사람이 좋다는 건 군주에게 있어 모욕과 같은 수식이라고.

"제가 뭔가 잘못한 게 있을까요?"

조심스럽게 루페르트가 물었다.

루돌프는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아니, 그런 건 아니야. 순수한 칭찬이지. 인간 대 인간으로. 자네도 좋은 사람에게 끌리지 않나?"

"아, 네. 그렇지요. 그렇습니다. 솔직히 악인하고는 아무리 마음의 문을 열려 해도 친해지기가 쉽지 않더군요."

"악인과 친해지려면 그대도 악인이 돼야 하기 때문이지. 같은 죄를 저지르면 아주 빠르게 친해질 수 있을 거야."

"하하.... 그럴지도요."

루돌프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가 루페르트를 가만히 노려보았다.

루페르트는 그제서야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그가 존경해 마지않는 선제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그대는 리프니에를 어떻게 생각하나."

"리프니에님 말입니까?"

"그래. 그 괴물을."

"...괴물은 아닌 것 같습니다."

루페르트가 정색했다.

그가 리프니에를 싫어하는 건 잘 알고 있다.

실제로 그럴 만한 짓도 많이 했고.

하지만 루페르트는 여전히 리프니에의 사도다

최근 그녀가 자신에게 따뜻하게 대해 준 것도 좋은 감정을 가지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걸 부정할 수 없으리라.

"그 괴물이 내 아내에게 한 짓이 뭔지 알고 있네."

루돌프가 차갑게 말했다.

순간 루페르트는 호흡이 멎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올 것이 왔다.

'이, 이런. 드디어 눈치를 채신 건가?!'

언제나 이때가 오리라고 생각했다.

모든 죄를 덮을 순 없는 법이다.

"나는 수많은 아내를 가졌었지. 진정으로 사랑한 여인은 세 명 정도 됐을 거야. 하지만 말이야. 그 괴물은 내 아내를 모두 가져갔지."

루돌프가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며 회한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

루페르트는 굳은 채 루돌프의 옆모습을 보며 치열한 생각에 잠겼다.

'무,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거지? 수많은 아내라니.'

"그 괴물이 자네에게 무슨 짓을 한지 알고 있네."

루돌프가 루페르트에게 손을 내밀었다.

"진실을 알면 그대는 아마 크게 고통받겠지. 어쩌면 그것의 다른 장난감처럼 미쳐서 버려질지도 모르고. 아니 이미 몇 번쯤 미치고도 남았나."

루돌프가 희게 웃었다.

"자네는 튼튼한 장난감이야. 그래서 그것도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더군."

"...."

"제위에서 물러나게."

루돌프가 말했다.

"내 자리를 돌려받고 싶군."

"네...?"

루페르트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무슨 말씀입니까? 제위를 돌려받다니요."

"방법은 준비되어 있어. 이미 슈발츠마인 쪽에 고지를 했지."

"죽은 폐하가 살아 돌아온다는 걸 사람들이 납득할 수 있을까요?"

이에 루돌프가 두건을 벗었다.

두건 너머엔 루페르트가 알지 못하는, 단지 보는 것만으로 주눅이 들 수염 없는 금발 전사의 얼굴이 자리 잡고 있었다.

'뭐, 뭐야. 이건. 설마 이게 루돌프 님의 진정한 얼굴?! 노인이 아니었나. 서, 설마 안개 가면?!'

"안개 가면보다 더 높은 권능을 수여 받았지. 리프니에와 함께한 시간이 꽤 되거든."

"...."

"나는 그대가 상상하는 이상으로 고대의 인물이야. 몇 번이고 이름을 바꿔 제국의 황제 노릇을 수행했지."

너무나도 급작스러운 고백에 루페르트는 강한 혼란에 휩싸였다.

'무슨 말을 하는 건가. 루돌프 님은. 아니 철혈대제는?!'

"왜, 지금 물러나기 아쉬운가?"

"그, 그런 차원의 문제가 아닙니다."

루돌프가 북쪽을 바라보았다.

"그대가 그 시대를 경험한 최초의 황제라 생각하나...?"

"무, 무슨 말씀이십니까?"

루페르트의 떨리는 물음에 루돌프는 호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대가 황제가 되기 전에 내가 먼저 경험했어."

"...!!"

"도저히 방법이 안 나오더군. 그대가 존경해 마지않는 철혈대제로도 손을 쓸 수가 없었어."

루돌프가 등에 지고 있던 붕대에 싸인 검을 루페르트의 발치에 내려놓았다.

"그것의 권능을 쓰지 않는 한 이겨 낼 수 없었지. 그대가 생각하는 회귀를 넘어선 권능을. 왜, 프리드리히 마티아스에게 보여 준 마술이 있지 않나?"

"...."

"그런 것들을 계속해서 썼어야 했어. 이미 이 제국은 한계에 달했거든."

"하, 한계요?"

"리프니에의 권능에 너무 의지했지. 진즉에 무너져야 할 제국인데 리프니에의 사악한 권능에 의지해 그때그때 문제를 넘어갔어. 그때 어설프게 넘어간 문제들이 마치 빗물이 모여 샘을 이루듯 앞으로의 시대에 한 번에 대금을 청구하려는 거지. 그게 그대가 맡았던 시대의 본질이야."

루돌프가 돌아섰다.

"심판의 시대지."

그가 발걸음을 옮겼다.

"나도 알아. 내 요구가 지나치게 이르다는 걸. 1년의 시간을 주겠네."

"...루돌프 님."

"내가 말했던가."

루돌프가 루페르트를 돌아보며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해에 눈먼 개들을 다스리는 데 가장 유효한 방법이 뭔지?"

"그, 그건."

"그래. 상대가 오류에 빠져 있도록 하는 거지."

루돌프가 걸어갔다.

수정의 검을 놔두고, 끝이 보이지 않는 대로를 향해. 이름 없는 군중을 향해.

"내 진정한 이름은 클라우데 2세가 아니라, 티그리트다."

진정한 이름을 밝힌, 늘 어두운 복도 속에 앉아 있던 남자는 이제 정오의 햇살 속으로 사라졌다.

루페르트는 그 자리에 선 채 한참 동안이나 움직이지 못했다.

죄악감과 더불어 또 다른 절망이 루페르트의 가슴을 덮쳤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어찌해야 할 바를 알지 못한 채 루페르트는 한참이나 정오의 햇살 아래 우두커니 서 있어야 했다.

* * *

카렐리아 의회.

한 명의 성직자가 의회에 난입했다.

그의 이름은 마르틴 보엠.

레벤호스트의 스승이자 책사다.

"언제까지 황제의 은전만을 기다릴 건가?"

그가 사자처럼 포효했다.

"황제는 약속을 어겼다. 고로 그는 우리의 황제가 아니다. 약속을 어긴 황제에 대해 우리는 저항할 권리가 있다. 우리는 새로운 왕을 맞이해야 할 것이다."

그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호라에게 영광을."

121화 31. 지긋지긋한 것 (1)

여름이 되자 레벤호스트의 도전은 점점 대담해졌다.

그는 외국 군주와 잇따라 사돈 관계를 맺었고 제국 선제후에게도 끊임없이 손을 뻗치며 동맹 관계를 구축하려 했다.

아직 군대를 모집한 건 아니지만 소문에 의하면 그의 화약고엔 도시 전체를 날려 버릴 정도의 화약이 넘쳐흐르고 병기고엔 문을 뚫고 나올 정도의 창과 총이, 마구간에도 영원히 해치우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건초가 쌓이고 있다고 한다.

이제 사람과 말만 부르면 된다.

전쟁을 원하는 이는 얼마든지 있다.

제국이 부유하고 강성하다 하지만 그 부는 소수 귀족과 군주, 성직자에게 집중됐다.

가난한 자는 늘 가난했고, 있는 자는 늘 가난한 자의 몫을 더 뺏으려 들었다.

가난한 자는 제국에만 있는 게 아니다.

제국보다 혼란하고 피폐한 타국에서는 한 푼 금화를 위해서 얼마든지 타인을 죽일 수 있는 자세가 된 병사들이 얼마든지 있었다.

최근 대륙에서는 전쟁이 거의 없었다.

북방에서 치열하게 벌어지던 스베아 왕국와 야디슈 왕국의 전쟁도 절반의 승리와 패배로 화의를 이루었다.

스베아 왕은 전쟁에서 아무것도 건지지 못했다며 사람들이 수군거리지만 스베아 왕이 야디슈 왕국이 자랑하는 창 기병대를 야전에서 처참하게 박살 낸 건 사실이다.

그가 물러난 건 야디슈 왕이 청야전술을 펼친 데다가 궁핍한 봄이 식량 사정을 메마르게 해, 본국의 귀족들이 귀환을 애원했기 때문이라는 소문 또한 조심스레 퍼져 나갔다.

식견 있는 사람들은 말한다.

지난 전쟁에서 자신감을 얻은 스베아 왕은 어쩌면 대륙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를 노릴지도 모른다고.

바로 제국 말이다.

레벤호스트는 그 스베아 왕과도 친분을 다지고 있었다.

'지긋지긋하군.'

루페르트는 넌더리를 느꼈다.

그놈의 정치 공작.

그 레벤호스트의 정치 공작질을 다시 보려니 두통이 몰려왔다.

그 역겨운 행태는 회귀 전에도 진저리나게 경험한 바다.

'대체 그게 어디가 재밌는 거지?'

레벤호스트는 정치 공작을 즐기는 인간이었다.

자기가 똑똑하다고 생각하기에 끊임없이 공작을 펼치고 사람들이 그에 따라 움직여 주는 걸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인간이었다.

루페르트에게 그건 구역질 나는 취향에 불과했다.

하지만 피할 수 없다.

그 지긋지긋한 정치 공작을 즐기는 레벤호스트의 도전에 정면으로 맞설 필요가 생긴 것이다.

루페르트가 동방에서 수입한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켜며 자신의 중신에게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나? 오토 브라에."

이제 명실상부한 독신의 몸이 된 루페르트는 그와 달리 저마다 가정을 이룬 중신들을 모아 놓고 의견을 물었다.

"선제후는 선을 넘고 있습니다. 그냥 놔둬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레벤호스트가 이제 명백한 황제의 적이라는 데는 나머지 중신들도 동의했다.

문제는 그를 어떻게 처리하냐다.

프리드리히 마티아스와는 다르다.

턱이 녹아 제대로 씹지도 못해 가느다란 관으로 간신히 음식을 먹으며 연명한다는 선제후와 달리 레벤호스트는 신교 동맹이라고 인가받지는 않았지만, 모두가 아는 강력한 종교 공동체의 일원이다.

황제가 그를 섣불리 건드리면 게오르크 아르님과 막스 게오르크를 동시에 자극할 것이다.

제국 절반을 적으로 돌린다는 이야기다.

가장 현명한 방법은 레벤호스트와 루페르트가 일대일로 승부하는 것이다.

선제후 자격으로서 일대일로 경쟁한다면 프리드리히 마티아스 때처럼 루페르트는 능히 그를 찍어 누르고 무릎 꿇릴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레벤호스트가 과연 그 뻔한 수에 당해 주냐다.

"선제후의 전략은 동맹을 늘리고 이쪽을 고립시키는 겁니다. 모든 정치적 행보가 이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베르너가 현재 상황을 정리한 문서를 내밀었다.

루페르트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팼다.

'레벤호스트. 대체 무엇이 그대를 이렇게까지 집요하게 만든 것이지?'

레벤호스트가 확보한 잠재적인 동맹은 신교 동맹, 굵직한 이웃 강대국이 아니라 생소한 소국의 군주와 수도원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심지어 이교도인 동방 종교의 전쟁 무리도 포함되어 있었다.

실제 전쟁이 벌어지면 어떻게 나올지는 두고 볼 일이겠지만 레벤호스트가 역겨울 정도로 열심히 외교적 행보를 이어 나가고 있다는 건 분명하다.

"제가 볼 땐."

잠자코 있던 요하네스가 입을 열었다.

"암살도 좋은 선택지라 보입니다."

"암살이라고?"

루페르트뿐만 아니라 다른 중신들의 얼굴에 불쾌감이 떠올랐다.

"그건 레벤호스트보다 더 선을 넘는 행위야. 레벤호스트."

완고한 베르너가 질책했다.

"모두를 적으로 돌리게 되겠지."

오토 브라에 또한 비관적인 의견을 말했다.

그들의 시선은 황제에게 향했다.

루페르트는 쓴웃음을 머금은 채 요하네스를 지그시 응시했다.

"자세히 말해 보게. 요하네스."

"선제후를 암살하자는 게 아닙니다. 그는 암살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마르틴 보엠 목사라는 신교 광신도가 레벤호스트 선제후를 꼭두각시처럼 움직인다는 소문이 있더군요."

"흐음."

"저처럼 한미한 집안은 잘 모르겠지만 공작 이상의 훌륭한 가문은 어김없이 신교나 구교의 고위 성직자가 가정교사를 명목으로 똬리를 트고 앉아 열심히 어린 자제들에게 그들의 사상과 적개심을 주입하지요. 레벤호스트 선제후도 그 운명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겁니다."

루페르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르틴 보엠이라."

그는 군주 계급에 비하면 하찮은 인간이다.

귀족이라고 하지만 하급 귀족이고 하급 귀족 따위는 대외적으로 이름만을 사용하는 군주들의 세계에선 작은 인간이다.

성직자로서도 대단치 않다.

구교와 달리 수직적인 교단을 가지지 않는 신교 특성상 그는 여러 목사 중 하나일 뿐이다.

그저 권세를 업고 돈이 많은.

목사들 세계에선 그건 구교의 고위 성직자에 걸맞은 지위지만 외부에선 볼 땐 단지 일개 목사다.

"그 인간을 죽인다고 일이 해결될까?"

"레벤호스트 선제후와 마르틴 보엠 목사는 사실상 전혀 다르지 않은 사람이긴 하지만, 소문에 의하면 마르틴 보엠 목사 쪽이 좀 더 교활하고 머리를 잘 쓴다고 하더군요."

"그래?"

루페르트는 코웃음을 쳤다.

'그런 내막이 있었나.'

회귀 전에 루페르트는 마르틴 보엠이라는 이름을 잘 알지 못한다.

어쩌다 얼굴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루페르트에게 있어 마르틴 보엠이라는 자는 자신에게 무례하게 대하는 레벤호스트의 그늘에 가려진 잘 보이지 않는 인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 레벤호스트가 그 작은 인간의 꼭두각시라니.

과거라면 믿지 않았겠지만, 군주의 세계에서 확고히 뿌리내린 루페르트는 대충 이 바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보다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별거 없었다.

그 제국을 움직이는 자들도 결국 평범한 개인들의 모임에 지나지 않는다.

저마다의 욕망과 우둔함, 가끔의 고결함으로 움직이는.

"나는 그 마르틴 보엠이라는 자가 죽는 걸 보고 싶군."

루페르트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오토 브라에와 베르너가 깜짝 놀란 얼굴로 루페르트를 보았다.

"암살이라니요."

암살은 제국의 금기다.

비열한 동방 제국이나 부르봉에서나 하는 짓이다.

그런 천박한 짓을 황제 스스로가 하겠다고 나설 줄이야.

아무리 유연한 사고를 가진 그들이라고 해도 받아들일 수 있는 일엔 한계가 있는 법이다.

"아무리 그가 위험하다고 하나, 암살은 그리 좋은 방법은 아닌 것 같습니다."

"폐하가 힘겹게 쌓은 평판을 한 번에 날려 버릴까, 그게 두렵습니다."

일리 있는 이야기지만 루페르트의 마음은 거의 기울었다.

아마 그의 생각을 바꾸게 한 건 그에게 시린 고통을 안겨다 주었던 거인일 것이다.

'크리오네. 그 녀석에게 당해 봐서 알아. 암살이라는 건, 결국 죽인다는 거 아닌가. 죽음은 절대적이다.'

또 약간의 흥미도 있었다.

레벤호스트라는 그 잘난 척하는 인간이 마르틴 보엠이라는 책사를 잃었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일지.

과연 전처럼 잘난 척을 하며 나댈 수 있을지, 아니면 벌거벗은 임금처럼 어리석은 파멸의 길로 들어설지.

'프리드리히 마티아스도 무릎 꿇린 나다. 너라고 해서 못 꿇릴 거 같으냐?'

문제는 방법이다.

선제후가 아닌 일개 목사라고 하나 늘 선제후 곁에 붙어 있는 그의 경호 수준이 선제후와 거의 같다는 건 주지의 사실.

누구를 암살자로 파견하느냐.

루페르트는 얄궂게도 베르크 란과 마를로네 란을 떠올렸다.

어쩔 수가 없는 일이다.

그들은 전에도 비슷한 일을 했으니까.

하지만 그 전에 루페르트는 자신의 망각을 자책했다.

'베르크 란을 돌아본다는 게.'

그가 없었다면 지금도 없었다.

그는 두 번이나 목숨을 걸고 루페르트를 구했다.

권력자가 하급자의 선의를 잘 잃어버린다고 하지만 루페르트는 적어도 그에겐 뭔가를 해 줄 생각이었다.

"회의를 종료한다."

* * *

"할아버지."

그저 하나만을 바라보고 기다리는 삶이란 얼마나 비참한 삶인가.

그 기다림의 끝에 풍족한 보상이 주어진다는 걸 알고 있어도 그건 못할 일이다.

마를로네는 시간이 흐를수록 황궁의 생활에 조바심을 느끼고 있었다.

'그 인간이 우리를 안 찾은 지 두 달이 흘렀어. 그놈의 순결 선언이니 뭐니. 우리를 까맣게 잊은 거겠지. 이름이나 기억할까.'

그녀가 지금까지 기다린 건 사랑하는 조부가 마음을 고쳐먹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이토록 기다림의 시간이 길어지면 그의 조부도 조금은 회의를 느끼고 고개를 돌리지 않을까.

"...."

베르크 란의 상태는 이제 확정됐다.

그는 불구가 되었다.

황제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고 황제의 직을 지켜 낸 건 물론이며 제국의 안녕까지 지켜 냈지만, 그가 얻은 건 그저 빨간 명찰을 떼고 약간의 금전적, 생활적인 보장을 얻은 게 전부였다.

망가져 버린 팔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는 이제 전처럼 도펠죌트너의 대검을 쥘 수 없고 적진 사이에 뛰어들어 사자처럼 날뛸 수도 없다.

그는 이제 오른손이 잘 다물어지지 않고 한쪽 다리를 저는 초로에서 늙은이로 나아가는, 쇠락해 가는 영혼이다.

"우리 이제 부르봉으로 돌아가요."

마를로네가 건조하면서도 은근히 애원하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제가 황제에게 알현을 요청해 약간의 은퇴금을 더 마련하도록 할게요."

"아직은 아니다."

베르크 란이 말했다.

"내 잃은 지위를 돌려받기 전까진 여기를 나설 수 없다."

"그렇군요. 할아버지. 그런데 그 지위가 우리에게 뭘 해 줄 수 있나요? 이름뿐인 지위가 아닌가요?"

"아무것도."

베르크 란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런데 왜?"

"하지만 내가 그 지위를 찾는다면 제국을 위해 죽어 간 나의 전우들이 기뻐하겠지."

"...."

마를로네는 입이 근질거리는 걸 간신히 참았다.

'사람은 죽으면 끝인데, 대체 왜 그렇게....'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사람들이 오고 있다.

뒤에 줄줄이 많은 인간들을 부속품처럼 끌고 다니는 건 다름 아닌 루페르트다.

'황제!'

그가 실로 오랜만에 베르크 란과 마를로네를 찾았다.

누구보다 기뻐한 건 베르크 란이었다.

"폐하!"

그는 서둘러 옷을 정리했다.

마를로네가 차분하게 그의 재킷을 정리하고 잠그지 않은 단추를 대신해서 잠가 주었다.

베르크 란이 황제에게 예를 표했다.

"그래."

루페르트가 조손이 사는 집을 가만히 돌아보았다.

황궁 정원 안에 그림처럼 자리 잡은 집은 내부는 단출했지만 필요한 물건이 모두 있었고, 잘 정돈되어 보기가 좋았다.

루페르트는 베르크 란에게 물었다.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 보시오. 들어줄 수 있는 거라면 뭐든 들어드리리다."

베르크 란의 눈동자에 환희가 떠올랐다.

곧 그가 고개를 숙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실권 같은 건 필요 없습니다. 허울이면 충분합니다. 단지 저에게 장군, 제국의 장군 지위를 내려 주시지 않겠습니까? 잃어버린 동료들을 모아 한 번의 사열을 하는 걸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루페르트는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동석한 베르너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려운 일입니다. 도펠죌트너의 복권조차 문제가 되는데 그를 장군으로 삼는다는 건...."

루페르트가 고개를 끄덕이며 베르크 란에게 말했다.

"다른 건 없소?"

베르크 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별다른 숙려도 고민도 없는 거절에서 베르크 란은 뼈저리게 느꼈다.

비참한 삶에서 억지로 부여잡고 있던 자신의 꿈이, 자신의 소망이 이루어질 수 없는 신기루 같다는걸.

122화 31. 지긋지긋한 것 (2)

"아니, 괜찮습니다. 제게 필요한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베르크 란은 고개를 숙였고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루페르트는 잠시 그를 돌아보다 돌아섰다.

이쪽이 손을 내밀었다.

상대는 과한 보상을 요구했다.

협상은 결렬됐다.

그뿐이다.

루페르트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동안 이런저런 일이 있었지만, 우리의 관계는 이번이 끝이 아닐까 하는.

"폐하."

뒤를 따라오는 자가 있었다.

마를로네다.

루페르트는 그녀를 돌아보았다.

'마를로네.'

처음 봤을 때보다 키가 꽤 자랐다.

황궁에서 좋은 음식을 많이 먹은 게 도움이 됐는지 사내아이로 오인되던 작은 체구는 평범한 여성 수준으로 자라났다.

그래서일까.

얼굴에 여성의 매력이 물씬 묻어난다.

과거 루페르트가 선택했던 여성들처럼 풍만한 몸매는 아닐지언정 그녀는 어디 내놔도 손색이 없는 아름다운 모습을 갖춰 가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

따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조용한 곳에서 농담이나 건네며 그녀와 그녀의 조부를 위로하며 다른 약속으로 그들의 마음을 돌리고 싶었다.

그러나 이제는 과거와는 상황이 다르다.

이제 루페르트는 순결 서약을 한 몸이다.

상대방에게 아무런 흑심이 없다고 하나 젊은 여성과 단둘이서 이야기를 한다는 건 구설수에 오를 가능성이 크다.

황궁의 지긋지긋한 시선과 악담이 어떤 것인지 아주 잘 아는 루페르트는 사심을 접어 두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마를로네의 말을 기다렸다.

"대단히 죄송하오나 저희들에게 약간의 은전을 내려 주시면 아니 될까요? 부르봉에 가서 조부를 모시고 조용히 살고 싶습니다."

"그래. 그대들은 그럴 자격이 있다."

루페르트가 집 안을 바라보았다.

"그대의 조부에게도 감사를 표해라. 그의 부탁을 이뤄 주지 못하는 건 나로서도 가슴이 무거운 일이라고."

루페르트가 시종을 불러 베르크 란 조손의 은퇴 자금에 관한 상의를 하라고 지시했다.

이야기를 끝나고 루페르트는 다시 집무실로 돌아갔다.

마를로네는 잠자코 그가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다 홱 하고 돌아섰다.

"하아."

진한 한숨이 그녀의 입가에서 흘러나왔다.

출신이 다르고 신분이 다르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번만큼 그 격차를 크게 느낀 적은 없었다.

한때 어깨를 나란히 하고 산맥의 험준한 길을 함께 걷던 사내는 이제 더 이상 자신의 곁에 설 일이 없을 것이다.

절반의 아쉬움과 절반의 후련함을 느끼며 그녀는 황궁 안의 작은 집에 들어갔다.

그녀의 눈동자가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할아버지?"

베르크 란은 어느새 모든 짐을 싼 채 황궁을 나서려 하고 있었다.

"어, 어디 가는 거야?"

"나를 써 주는 곳으로 가야지."

"그러니까, 어디?"

베르크 란이 가만히 마를로네를 응시했다.

곧 그가 어깨에 멘 짐을 고쳐 매며 대답했다.

"레벤호스트."

"설마 그 사람 밑으로 가겠다고?"

"다른 방법은 없다. 마를로네."

베르크 란이 손짓했다.

"가자."

베르크 란과 마를로네가 인사도 없이 사라졌다는 소식은 곧 루페르트의 귀에 전해졌다.

"...그래?"

루페르트는 별다른 감정을 내비치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루페르트는 홀로 그 집을 찾았다.

시종이 말한 그대로였다.

집엔 아무도 없었다.

그를 도와주고 지켜주고 한 끼의 은혜로 연결된 관계는 느닷없이 끊어졌다.

아마 영영 그들을 만날 일은 없을 것이다.

짙은 허무감 속에서 루페르트는 푹 꺼진 바닥을 텅 빈 눈으로 응시했다.

"대체 황제란 무엇인가."

루페르트가 자신에게 물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의 소망 하나조차 이뤄 주지 못하는데...."

대답 없는 달이 침울한 황제를 내려다보았다.

* * *

하나가 가면 하나가 온다.

렌타이어마르크 동란 때 함께했던 한스 징펠만이 마침내 일선에 복귀했다.

"다시 폐하 밑에서 모험을 하게 될 생각을 하게 되니 정말이지 며칠째 잠을 한숨도 자지 못했습니다."

언제나처럼 우유를 찾는 이 사냥꾼은 그럼에도 전보다 꽤 수척해 보였다.

애써 명랑한 척을 하고 있지만, 그때 보았던 그 거대한 악의 우상은 여전히 그의 마음에 지워지지 않을 얼룩을 새겨 버린 것이다.

그래서일까.

한스 징펠만은 당시에 대해 이야기를 단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의도적으로 주제를 회피했고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는 징후가 역력했다.

한스 징펠만이 걱정하는 건 주군의 상태였다.

"폐하. 안색이 좋지 않아 보이십니다."

"그야, 제대로 쉬질 못했으니까."

"정말이지 폐하는 부동심의 소유자입니다. 그, 아, 아닙니다. 분명 지쳤을 터인데 쉬지 않고 정무를 계속하시는 걸 보면 말입니다. 주제넘는 말씀일지도 모르겠지만 폐하도 휴식을 취하시는 것이 좋지...."

"부탁하고 싶은 게 있네."

언제부터일까.

이토록 인내심이 없어진 건.

인사치레 같은 건 지루하게 느껴졌다.

빠르게 용건을 말하고 결과만을 얻고 싶어졌다.

어차피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면, 예상과 다른 상황이 벌어진다면 다시 회귀를 해야 하니까.

루페르트는 자신이 뭔가 잘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말을 이었다.

"사람 하나를 사냥해 주게."

한스 징펠만의 입이 살짝 열렸다.

그가 놀라고 있다.

그는 이내 수염을 쓰다듬는 척하며 놀란 표정을 감췄지만 이미 드러난 감정의 동요는 루페르트의 눈에 똑똑히 보였다.

루페르트는 그러나 개의치 않았다.

그는 믿고 있었다.

영혼 동맹의 힘을.

"폐, 폐하의 청이라면 네. 받아들이는 것이 옳겠지요."

"마르틴 보엠이라는 목사로 제국에 기어코 내전을 일으키려는 신교 이교도지."

"좋습니다."

한스 징펠만이 고개를 끄덕였다.

루페르트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여신님의 권능. 영혼 동맹이야.'

"하지만 이건 제가 생각하는 모험과는 좀 다른 것 같군요."

그가 예를 표했다.

"한 달 안에 소식을 전하겠습니다."

루페르트는 가만히 그가 떠나는 걸 눈으로 배웅했다.

일말의 씁쓸함이 느껴졌지만, 그 씁쓸함에 반응하기에 루페르트는 너무나 지쳐 있었다.

한스 징펠만이 제대로 본 것이다.

황제에겐 휴식이 필요하다는걸.

한 달 후. 한스 징펠만의 쌍둥이 도제가 알현을 요청했다.

그들은 작은 가방을 들고 왔는데 그 가방 안에선 시체 썩은 악취가 났다.

그들은 기어코 그 가방 안의 내용물을 황제가 봐야 한다고 요구했다.

주변의 만류에도 루페르트는 일말의 불안감을 느끼면서, 그러나 그걸 내색하지 않으면서 그 가방의 내용물을 드러내라고 명했다.

가방 안에 든 건 잘린 머리였다.

마치 잠을 자는 것처럼 평온한 표정으로 눈을 감고 있던 그 얼굴의 주인은 루페르트의 첫 번째 영혼 동맹 한스 징펠만이었다.

쌍둥이 남매 중 누나 쪽인 루라는 훤칠하게 키가 자란 소녀가 살인자의 이름을 말했다.

"마를로네 란입니다."

그녀가 감정이 섞이지 않는 차가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녀는 단 1초도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