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상처가 치유된다.
절대로 낫지 않을 저주들이, 심지어 두 주신들에 의해 당한 것들마저도 상상을 초월하는 축복에 의해 지워진다.
지금껏 수많은 이들에 의해 받은 응원과는 차원이 다른 수준이다.
슈우우욱-
무기와 갑옷, 투구 등의, 생전 착용했던 모든 장비들이 생성되었다.
전성기의 자신.
모든 무력을 회복하여 마침내 휘두를 수 있는 상태.
마왕을 상대하기 직전의 모습이었다.
"······."
허나, 빌헬름은 가만히 그 상황을 지켜만 보고 있었다.
비로소 모든 것을 되찾았음에도 딱히 기뻐하는 기색은 없었다.
"··· 어이가 없군. 다시 나를 '문'에서 꺼낸 이유가 너인가?"
다만 천천히 시선을 돌려, 상대를 바라볼 뿐이었다.
영원의 신 란돌프.
그러나 본래라면 빈 껍데기여야 할 그것은 전혀 다른 존재가 되어 있었다.
진리의 문에 바쳐져 사라졌던 또 다른 란돌프다.
홀로 신의 섬에서 심연의 주인들과 태고의 존재들을 학살했던 자.
멸망으로 불리었던 그 괴물이 빌헬름을 가소롭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것도 아닌 자
응원.
상대가 잘할 수 있도록 힘을 북돋기 위한 격려다.
하지만 살아생전 단 한 번도 '개 같은 신'은 자신을 격려한 적이 없었다.
아니, 격려는커녕 한 마디의 언급조차도 없었다.
마치 신은 자신의 존재를 모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무저갱과도 같은 의식의 늪에 빠진 채 허우적대는 자신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언제나 외면하기 일쑤였다.
그런데.
'이제와서······.'
··· 죽고 나서야.
신은 그의 혼을 불러냈으며.
이제야 그를 응원하기 시작했다.
왜?
그토록 바랄 때는 한 마디도 안하지 않았나.
신의 의지를 받들어 경지를 이룩하고 기사왕의 명예가 드높아질수 있도록 도왔으나, 그럼에도 끝까지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던 신이다.
그런데 이제와서 응원을 한다?
설마 란돌프를 토벌하길 바라는 마음에?
'란돌프라.'
빌헬름은 가만히 고개를 들어 란돌프를 바라보았다.
자신처럼 개 같은 신에 의해 조종당한 육체.
그 위에 덧씌워진 영혼은 틀림없이 육체의 주인일 것이다.
하지만 빌헬름은 영혼의 이상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악(惡)이로구나.'
저 영혼은 악에 물들지 않았다.
그저 '악'으로 태어났을 뿐이다.
처음부터 악이었고, 그렇기에 지금도 악일 따름이었다.
허나 의아한 일이었다.
인간은 결코 악으로 태어나지 않는다.
만약 그렇게 태어났다면.
"너는 반쪽짜리로군."
그것은 반쪽일 것이다.
제대로된 인간이 아니라.
"······ 내가 반쪽짜리라고?"
빌헬름의 말을 듣자마자 란돌프가 인상을 구겼다.
반쪽짜리라는 말에 결코 동의할 수가 없었다.
비록 신의 섬에서 패배하여 진리의 문에 갇혔으나.
"나야말로 완전체다. 이 몸의 유일무이한 주인!"
본래의 자리를 되찾은 것에 불과하다.
또한, 이번에야말로 완전해지리라.
패배는 한 번이면 족하다.
다시금 '진리의 문'에 갇힐 수는 없었다.
그건 정말 진저리처지도록 끔찍한 경험이었으니까.
'절대로 돌아가지 않겠다. 절대로!'
떠오른 기억에 란돌프가 한 차례 몸을 떨었다.
허나, 지나간 이상 악몽일 따름이다.
게다가 '진리의 문'을 들어갔다가 나온 경험으로 인해 란돌프는 더욱 완전해질 수 있었다.
이제야 비로소 바로선 느낌.
란돌프가 빌헬름을 바라보았다.
자신을 반쪽짜리라고 평한 어리석은 놈을.
제대로 볼 줄도, 느낄 줄도, 사고할 줄도 모르는 무지몽매한 녀석을.
무엇보다도.
"넌······ 아하."
란돌프가 미소를 지었다.
진리의 문을 들어갔다가 나온 효과일까?
빌헬름을 꿰뚫어 보는데 성공한 것이다.
그리하여 나타난 그의 진짜 모습은.
"너야말로 반쪽짜리 아니냐?"
누가 누굴보고 반쪽을 운운한단 말인가.
퀭한 눈, 앙상하기 그지 없는 손과 발.
폐인이 따로없는 상태로 동굴에 갇힌 채 울부짖는 어린아이.
란돌프가 쯧쯧 혀를 찼다.
"몸도, 이름도, 명예도, 기억마저도. 무엇하나 너의 것이 없지 않느냐?"
무엇 하나도 그의 것이 아니다.
그의 것이었던 적이 없다.
저것을 과연 '존재한다'라고 할 수 있을까.
"너는 아무것도 아니다."
"아아."
그러자 빌헬름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나도 흔쾌하게.
감명이라도 받은 건가?
빌헬름은 이어서 말했다.
"그래,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반쪽짜리."
어중간한 반쪽이 될 바엔, 아무것도 아닌 게 낫다는 듯.
그제야 란돌프는 자신이 계속 불편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 아무래도 너와는 안 맞는 것 같군."
눈앞에 선 놈.
저놈과 자신은 상극이라는 걸.
대화는 끝났다.
이제 남은건.
스릉!
아무것도 아닌 자와, 반쪽의 죽고 죽이는 생사결뿐.
*
모두가 숨을 죽인 채.
"······."
"······."
그저 가만히, 눈앞에서 재생되는 화면에 집중하고 있었다.
모든 각성자가 입도 뻥긋 할 수가 없었다.
빌헬름이 탑을 오르는 모습은 가히 충격 그 자체였으니까.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다.
절대로 쓰러지지 않았다.
어떤 역경이 다가와도, 어떠한 비바람이 몰아쳐도.
그는 묵묵하게 앞으로 나아갈 따름이었다.
그들이 상상한 것 이상으로 빌헬름은 강했다.
올곧았고, 묵직하며 부드러웠다.
가히 기사왕이라는 칭호에 누구보다도 걸맞은 존재.
라이가가 인정한 최강의 남자!
'강하다······.'
'저렇게까지 해야 강해질 수 있는 건가?'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전율이 일고 심장이 뛴다.
한 번도 경험한 적 없고, 본 적조차 없는 강함에.
하지만 그의 압도적인 무력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만약 같은 상황이 주어졌다면 자신은 저 탑을 오를 수 있었을까?
몸과 마음의 상처 따윈 도외시한 채 성난 무소처럼 앞으로만 나아가는 게 과연 가능할까?
'나는 못해.'
'불가능.'
불가하다.
안다고 해도 할 수 없다.
그러나 빌헬름의 도전을 바라보는 모두의 마음에 작은 불씨 하나가 지펴졌다.
강해지고 싶다는 불씨가.
강해져야 한다는 생각이.
그와 함께 세상을 걷고, 그와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싶다는 욕구가 일었다.
그러나 아직 클라이막스에는 닿지 못했다.
마침내 30층.
빌헬름이 투신의 탑 정상에 닿았을 때.
"저게······."
"란돌프!"
영원의 신 란돌프가 등장했다.
등장부터 '명예의 전당'을 휩쓸며 1등을 독차지한 최강자.
지금 투신의 탑에 소란을 만든 장본인이고, 동시에.
········· 저자야 말로 '팬텀'이다.
하지만 란돌프와 달리 빌헬름의 상태는 최악이었다.
불굴의 의지로 30층에 닿았으나 그간 누적된 상처는 도저히 눈을 뜨곤 볼 수 없을 정도였다.
무엇 하나 성한 곳이 없다.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다.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이미 골백번은 죽었으리라.
"··· 여기까지인가?"
"안 돼!"
"··· 빌헬름!"
"빌헬름!"
그들은 목놓아 외쳤다.
어느덧 그들은 빌헬름에게 동화되어 있었다.
자신이 소리를 내지르고 있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한 채로 그의 이름을 울부짖었다.
그러한 응원과 격려가 그에게 닿은 걸까?
"'개 같은 신'님이 '부서진 황금률의 조각(20,000h)을 사용해 '빌헬름'을 응원합니다."
누군가가 무려 2만 시간에 달하는 분량의 조각을 사용해 빌헬름을 응원한 것이다.
2만 시간.
여태껏 수많은 각성자가 응원한 조각은 고작 2천시간 수준에 그쳤다.
그런데 그에 열 배에 달하는 조각을 아낌없이 퍼부은 것이다.
"이, 이만 시간?"
"뭐야?"
"개 같은 신?"
"그게 누구야?"
"신이 빌헬름을 응원하는 거야?"
지켜보던 모든 이들이 당황했다.
2만 시간 분량의 조각.
절대로 한 명이 가질 수 없는 수준의 양이었으니까.
설령 그게 신이라고 한들 마찬가지다.
하지만 일은 벌어졌고.
빌헬름은 '완성'되었다.
"기사왕이시여······."
성녀 세아의 두 눈망울이 크게 흔들렸다.
빌헬름의 도전을 보고 있는 건 각성자들만이 아니다.
탑에 오른 50만명이 넘는 이들도 함께 빌헬름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이윽고 완성된 빌헬름의 늠름한 자태는, 성녀 세아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대원정의 빌헬름과 흡사했다.
저 모습의 빌헬름은 무적이다.
마왕조차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던, 인류의 상징과도 같은 남자.
아이러니하게도 그 반대편에 선 란돌프는 마치 그때의 마왕과 같았다.
한없이 두렵고 두려운 존재.
그리고 곧이어.
"아······!"
두 존재가, 격돌했다.
*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비록 '아무것도 아닌 존재'일지라도.
빌헬름은 분명히 존재했고, 존재하고 있었다.
지금 여기서.
"제법이군, 빌헬름."
촤아아아앙!
··· 검을 휘두르며.
검과 검을 맞댈 때마다 느껴지는 진동에 영혼까지 흔들린다.
란돌프의 공격은 영역 자체를 파훼하는 힘.
신비를 파괴하고, 존재를 파괴시킨다.
놈은 파괴자다.
실로 그러한 이름에 어울리는 자였다.
"'신의 섬'에서조차도 나를 이토록 흥분시킨 자는 없었거늘!"
란돌프 역시 놀라워하는 중이었다.
신의 섬에서 맞붙은 심연의 주인들과 태고의 존재들은 하나같이 강했다.
그러나 자신을 만족시킬 정도는 아니었다.
다들 나사가 하나 빠진 듯이 결여되어 있었으므로.
그나마 '천축의 고래'나 '태어나지 않은 존재', '가라앉은 황제'는 제법 싸울 맛이 났다.
특히 '가라앉은 황제'는 그중에서도 가장 재밌는 놈이었다.
작은 벌레와 같은 것들을 이용해서 진리에 다다른 자신을 위협했으니까.
태어나지 않은 존재는 어떠했나.
솔직히 놀랐다.
그런 불균형한 것과 싸운 경험은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천축의 고래는 별반 싸울 의지가 없는 듯 보여서 재미는 없었지만, 그녀의 힘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외의 것들은 다 기대 이하였다.
반면에 이놈은, 빌헬름은 어떤가.
'아무 것도 아닌 주제에 그들보다 낫군.'
빌헬름이야말로 결격품이다.
모든 게 결여된 '아무것도 아닌 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나 자신을 흥분시키고 있었다.
어찌하여?
'완벽하다.'
바로 검이다.
빌헬름에겐 오로지 검뿐이었다.
하여, 그의 검엔 흠이 없다.
빌헬름의 검은 자신이 바라는 이상에 가까웠다.
완전무결한 정의를 담고 있었다.
그렇기에 탐이 난다.
하지만 이상했다.
'이토록 완전하면서도 처음보는 종류의 검술이라니.'
진리의 문.
그 안에는 모든 완성품들이 존재한다.
저 정도의 완성도라면 진리의 문에 있을 법 하건만, 란돌프는 그 안에서도 빌헬름의 검술을 본 적이 없다.
'하물며 이건 검술이라기보단··· 어떠한 종류의 현상에 더 가깝다.'
흠 없이 완전하나, 이건 검술이 아니다.
검술의 탈을 쓴 무언가다.
저 검술 자체에 무언가가 담겨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게 가당키나 한가?
검술이라는 기술에 다른 어떠한 게 담길 수 있다니.
평범한 게 담겨있다면 이처럼 놀라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챙! 채에엥!
검을 부딪히면 부딪힐수록 그러한 생각은 확신이 되었다.
'··· 내가 밀리고 있다고?'
······ 조금씩 자신이 밀리고 있었으니까.
믿기지가 않았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신의 섬에서부터 감히 대적자가 없던 자신이다.
그야말로 최강이라는 단어에 걸맞은 완전체인 것이다.
그런데 밀리고 있다.
빌헬름이 휘두르는 검.
그 검술에 의해.
'검술 자체에 밀리고 있는 거다. 나라는 존재를 넘어서는 무언가에 의해!'
이건, 어떠한 위대한 격이 빌헬름과 만나 검술 자체로 승화한 것이다.
하지만 그 정도로 위대한 격이라면 그 역시 진리의 문에 포함되어 있어야 함이다.
본 순간 자신이 알아차렸어야만 했다.
한데, 모르겠다.
아무리 보고 또 봐도 알 수가 없다.
이제 막 진리의 문을 나온 그라면 모든 걸 알수 있을진대.
물론, 딱 한 가지 예외적인 경우가 있기는 했다.
자신이 알 수 없고, 그곳에 없는 것이라면.
순간 란돌프의 두 눈이 거칠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넌······ 누구에게서 그 검술을 배운 것이냐?"
······ 왠지 알 것 같았으니까.
저건 빌헬름이 만든 검술이 아니다.
빌헬름이 만든 검술일 수가 없다.
아무 것도 아닌 그가, 영원토록 검술만을 연마한다고 한들, 이러한 검에 다다를 수는 없다.
"어디서, 어떻게? '그'를 만난 것이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일어나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잘못 생각했다.
만일 지금 자신의 예상이 맞는다면.
이놈은, 빌헬름은 아무것도 아닌 자가 아니다.
곧이어, 빌헬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벨룽의 숲에서."
······ 그곳에서, 만났노라고.
나벨룽의 숲에 갇힌 한 달.
오로지 살기 위해 검만을 휘둘렀던 그 때에.
스스로를 깨닫고 몸부림 치던 그 당시에.
'먼 옛날 천상을 위협했던, 그리하여 없는 것이 되어버린 자.'
진정으로 아무 것도 아닌 자.
······ 그를 만났노라고.
·
각성
입을 연 빌헬름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 나벨룽의 숲.'
언제, 어디서 '그'를 만났냐는 란돌프의 물음에 자신도 모르게 나온 대답.
조건반사처럼 흘러나온 나벨룽의 숲이라는 이름.
하지만 나벨룽의 숲은 빌헬름의 기억이 시작된 장소다.
문제는 그곳에서 빌헬름은 누군가를 만난 기억이 없다는 것이다.
'나는 그저 갇혀있을 뿐이었거늘.'
칠흑 같은 심상의 늪.
그곳에서 하루하루를 발악할 뿐이었다.
자신의 몸을 점거하고 마음대로 움직이는 개 같은 신을 원망하며 한 달이 넘는 시간 동안 검을 휘둘러왔다.
허나 이해할 수 없는 건 스스로 내뱉은 대답뿐만이 아니었다.
바늘로 콕콕 찌르듯 끊임없이 이어지는 두통.
"'온전한 황금률'의 남은 강림 시간 1h 1m"
하지만 시간이 없었다.
탑을 오르며 남은 시간은 어느덧 한시간 남짓.
그 안에 결판을 내지 않으면 결국 시련은 실패로 귀결되리라.
동시에 란돌프의 두 눈에 살기가 번졌다.
"······ 너는 절대로 살려두어선 안되겠군."
스아아아아아아아!
마치 물방울처럼 떠오르는 마력의 구슬들.
수백 개에 이르는 그것들 전부가 강으로 이루어진 검환이었다.
신조차도 소멸시킬 정도의 파괴력을 지닌 그것들은 닿는 즉시 빌헬름을 지워버릴 것이었다.
하지만 란돌프가 바라는 건 그런 게 아니다.
스으으으으으으으!
검환들이 하나, 둘 모이며 어떠한 형상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윽고 검환이 뭉쳐 완성된 건 거대한 손의 모양.
"'지고의 검'."
쩌어어어어어어어어억!
하늘이 열린다.
허공을 찢어발긴다.
곧이어 암흑공간 속에서 튀어나온 것은 그야말로 '거대한 검'이었다.
지고의 검이라 불리는 검.
히든 클래스 '지고의 검성'이 가진 유일무이한 고유 스킬이자 히든 스킬!
검성이라 불리는 것들 중에서도 감히 절대적 우위에 선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무기이며, 오로지 '신의 격'을 지닌 존재만이 휘두르는 게 가능한 '신의 검'이었다.
예전 질투의 악마 산샤가 완성되었을 때, 그를 손짓 한 번으로 짓뭉갠 그 검이 다시금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
빌헬름은 가만히 소환된 검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태껏 마주한 그 어떠한 검 중보다도 감히 압도적이라 칭할 만 했으므로.
란돌프는 이 검으로 말미암아 빌헬름을 분쇄해버릴 작정이었다.
검환으로 이루어낸 거대한 손으로 지고의 검을 잡은 채.
"아름답지 않나? 이것은 한때 죽음의 신이 휘둘렀던 '운명의 검'이다. 등급을 정할 수 없는 '규격외'의 작품이지."
"죽음과 삶. 두 운명이 합쳐져 만들어진 검이로군."
"······ 보이는 것이냐? 역시, 네놈은 '소질'이 있나보구나!"
란돌프는 짧게 감탄했다.
지고의 검에 얽힌 이야기를 빌헬름은 단번에 꿰뚫어본 탓이다.
이 운명의 검이 어떻게 소환될 수 있었는지를 말이다.
심연미궁.
그곳의 '보스'로 소환된 구제국 육각의 영웅 라일리.
하지만 그는 두 가지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이성을 잃었을 땐 죽음이라 일컬어지던 '지고룡'으로 변했으며, 이성을 잃지 않았을 땐 찬란한 영웅 '라일리'가 되어 인류를 구원했다.
라일리는 자신의 반쪽인 지고룡을 받아들였고 그로 인해 '지고의 검성'으로 완성되었다.
그러한 반대되는 운명이 합쳐져 사용할 수 있게 된 게 바로 저 검, '지고의 검'인 것이다.
죽음과 삶.
두 이름의 운명을 지닌 검.
'왜 이런 게 보이는 거지?'
허나 이 역시 빌헬름은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란돌프가 지나온 시련을 어떻게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인지.
게다가 심연 미궁의 시련을 돌파한 게 눈앞에 있는 란돌프가 아니라는 것도 잘 알겠다.
개 같은 신.
저 운명의 검은, 그가 직접 이룩한 업적이라는 걸.
란돌프가 작게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면 이 검을 절대로 막을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겠지."
빌헬름의 표정이 더욱 굳었다.
란돌프는 지금 '죽음'을 택했다.
말 그대로 상대에게 죽음을 내리는 것.
운명의 검이 선사하는 죽음의 명제는 절대적이다.
절대로 피할 수 없고, 막을 수도 없다.
확실한 사망선고를 받은 셈이다.
"제법 즐거웠다, 빌헬름."
고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
지고의 검이 바닥으로 처박히기 시작했다.
빌헬름은 검을 들었다.
곧이어 지고의 검이 빌헬름을 삼켰다.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
"이곳에 계십시오, 황자님. 제가 병사들을 유인해보겠습니다."
"가, 가지마. 이런 어두운 곳에서 나 혼자 어떻게 있어?"
"며칠만 견디십시오. 반드시 돌아오겠습니다. 반드시!"
어두운 동굴 속이었다.
나벨룽의 숲.
그 어딘가에 존재하는 주인 없는 동굴.
그곳에서 늙은 기사가 한 소년을 토닥이며, 이내 어딘가로 사라졌다.
하지만 아직 몸도 다 자라지 않은 소년이 옷도 걸치지 않은 채 괴물이 득실대는 숲에서 몇날며칠을 버티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배, 배고파, 목말라······ 추워······."
고작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았음에도 소년은 괴로워했다.
왜 자신이 이런 수모를 겪어야만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르혼 제국.
판게니아에서 가장 강성하며 거대한 그 제국 황제의 아들이 바로 자신이건만.
"내가 진짠데······ 내가 진짜라고······."
쫓겨난 것이다.
가짜에게.
소년은 입술을 깨물었다.
정교하게 자신을 본 따 만들어진 가짜가 진짜 행세를 하고 있었다.
한데, 아무도 소년을 믿어주지 않는다.
도리어 소년을 가짜 취급하며 죽이려고 들었다.
만약 노기사가 없었다면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했으리라.
하지만 겨우 살아서 도망쳤다고 한들, 과연 이게 살았다고 할 수 있는 걸까.
"아무것도 하기 싫어. 내가 왜 이런 일을 당해야돼?"
소년은 동굴의 벽면에 기대어 늘어진 채 자포자기했다.
애초에 소년은 황자다.
노력하지 않아도 얻을 수 있고, 가만히만 있어도 빛이 나는 존재였다.
이런 더럽고 습한 곳에서 발가벗은 채 있는 모습은 결코 어울리지 않는다.
발에 물집이 잡히고, 몸 전체에는 땟자국이 만연하다.
이런건 노예들이나 하는 모습이다.
'꿈이야. 지독한 꿈.'
소년은 눈을 감았다.
눈을 뜨면 다시 현실로 돌아와있기를.
제국의 품에서 예전과 같은 영광을 영위하기를.
······ 하지만 현실은 참혹했다.
눈을 뜨자, 여전히 동굴의 안이었으니까.
"대체 언제 돌아오는 거야?"
게다가 반드시 돌아오겠다는 노기사는 돌아오지 않았다.
아무리 기다리고 또 기다려도.
결국, 병사들을 유인한 끝에 죽음을 맞이한 것이리라.
부르르르!
소년은 몸을 떨었다.
춥다. 괴롭다.
하지만 동굴 바깥은 위험하다.
바깥으로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럴 용기조차 없는 겁쟁이.
무언가를 이룩해내는 근성조차 없다시피했다.
그제야 소년은 자신이 혼자선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깨달음뿐이었다.
단순히 깨닫는다고 모두가 변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
소년은 죽어가고 있었다.
죽음을 은연중 받아들이고 있었다.
어차피 살 수 없다는 무력감이 전신을 지배한 상태.
'죽자.'
죽는거다.
살 의지도, 필요도 없다.
어쩌면 자신이 진짜 가짜일 수도 있었다.
기억도, 육체도 전부 만들어진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이곳을 나가봤자 지옥뿐이다.
단순히 숲을 헤쳐나간다고 끝나지 않는다.
제국의 추격은 집요하므로.
어차피 죽을 것이다.
짹.
짹짹!
그때였다.
파랑새가 동굴 안으로 들어온 건.
죽어가는 와중, 소년은 겨우 눈꺼풀을 들었다.
어째서 파랑새가 동굴 안으로 들어온 걸까.
소년이 힘겹게 손을 내밀자, 파랑새가 손가락 위에 앉았다.
"살고싶니?"
"······?"
환청인가?
순간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
새가 말을 했다.
하지만 잘못 들은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새가 계속해서 지저겼다.
"모든 걸 잊고, 잃어도, 한 가지 소원을 이룰 가능성이 존재한다면, 도전해보고 싶지 않니?"
소원을 이뤄?
내가 황제라도 될 수 있다는 말인가?
허.
죽음이 다가오자 헛것이 보이는 게다.
"너는 아주 훌륭한 자질을 지니고 있단다. '성혈'을 말이야. 이대로 죽기엔 아깝지 않니?"
그럼에도 파랑새는 포기하지 않았다.
갈라진 입술을 겨우 열어서 물었다.
"넌······ 뭐··· 냐."
그러자 파랑새가 말했다.
"나는 이 세계의 운영자란다."
"운··· 영··· 자······?"
운영자.
무언가를 운영하는 사람.
하지만 파랑새가 무엇을 운영할지 좀처럼 감이 잡히지 않았다.
"게임마스터. 세계의 뒤에서 지워진 채 존재하는 자란다."
동시에 파랑새의 두 눈이 보석처럼 새파랗게 빛났다.
"나와 함께 '천상'을 멸망시키지 않겠니?"
*
지고의 검이 빌헬름을 삼키기 직전.
찰나와 같은 순간에.
'아아.'
떠올랐다.
기억이.
가려져있던 장막이 마침내 벗겨졌다.
'나는 분명히.'
그곳에서.
나벨룽의 숲에서.
'파랑새'를 만났다.
스스로를 세계의 운영자라고 칭하던 이름없는 존재.
지워진 자.
하지만 빌헬름의 기억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본래라면 빌헬름의 기억은 완전하게 지워졌어야만 한다.
기억과 의식, 영혼은 잠식당한 채 잠겨있는 상태여야만 했다.
그러나 그는 갖고 있었던 것이다.
기억을. 의지를.
완전하게 지워진 게 아니라, 0에서부터 새로 시작했을 따름이다.
'나는 분명히······.'
동굴의 소년은 빌헬름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빌헬름과는 모든 게 달랐다.
도저히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쉽게 포기하고, 아무런 용기도 없는 겁쟁이에 불과했다.
그랬는데.
그랬을 텐데.
'내가 아닌, 너를 닮고 싶었던 거라고 말하고 싶은 게냐?'
출렁!
순간 세상이 출렁인다.
다시금, 빌헬름은 기억의 늪에 빠졌다.
*
무엇을 하는 걸까.
내 몸으로, 이놈은.
바닥을 기어 동굴을 나가더니 잎에 맺힌 이슬을 핥는다.
개미를 주워먹질 않나, 생초를 뜯어먹어 배탈이 나질 않나.
그렇게 장장 3일 동안 온갖 해괴한 짓은 다 하더니 난데없이 검을 휘두르기 시작한다.
'체력낭비 같은데.'
답답하다.
자신의 몸임이 분명한데도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없으니까.
아침이면 모든걸 피하고, 도망치며, 악착같이 먹을걸 구해온다.
그리곤 계속해서 검을 휘두르는 게 일과의 전부다.
대체 뭘 하고 싶은 걸까?
'내가 더 잘 휘두르겠군.'
심상의 늪에서 검을 휘두른다.
동작을 따라하다보니 군더더기가 많은 것 같다.
본능적으로 알았다.
저렇게 휘두르기만 해서는 어느 순간 한계에 부딪히리라는 걸.
빌헬름은 단점을 보완하듯 검술을 수정하며 계속해서 휘둘러댔다.
어쩌면 경쟁심의 발로일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심상의 늪은 무저갱과 같아서, 아무것도 하기가 싫었으니까.
'질 수 없다.'
놈이 한다면, 나도 한다.
아니, 나는 놈이 하는 것 이상을 달성할 테다.
나보다 못한 놈에게 언제까지고 주도권을 내줄 수는 없으니.
'··· 진짜 징글징글한 놈이로군.'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어느정도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빌헬름이 보기에도 자신의 몸을 점거한 놈은 보통이 아닌 것 같았다.
보통 남의 몸을 이 정도로 근성있게 굴리나?
게다가 지루하기 그지없는 일상을 필사적으로 영위하고 있었다.
하지만 솔직히 의문이었다.
이렇게 한다고 과연 숲을 빠져나갈 수 있을까?
나벨룽의 숲.
이 숲은 온갖 괴물의 천국이다.
수십, 어쩌면 수백종의 괴물이 존재할지도 모른다.
놈들의 방식을 전부 터득하고 있다고 해도 불가하다.
고작해야 엎드린 채 바닥을 기어다니는 게 전부인 상황.
동굴의 앞을 수십 미터 전진하는데도 몇시간이 걸리는데 이 광활한 숲을 언제 빠져나간단 말인가.
미친 짓이다.
'······ 허.'
그런데 그 미친 짓을, 어느 순간 '놈'이 하기 시작했다.
포복한 채로 그간 모은 식량과 생수를 가지고 엉금엉금 동굴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물론, 어느정도 하다가 포기할 줄 알았다.
숲을 빠져나온 것 자체가 시련의 연속이다.
실제로 연거푸 죽을뻔한 위기가 찾아왔다.
3일이 지났을 땐 보유한 식량과 식수도 전부 떨어졌다.
하지만 빌헬름은 계속해서 감탄하고 있었다.
틈을 보고, 기다리며, 기회를 찾는 능력은 소름이 다 돋을 지경이었다.
'여기까지인가?'
허나, 그것도 여기까지다.
물자가 전부 떨어졌고, 거점과도 너무 멀어졌다.
아무리 대단한 초능력을 지녔다고한들 이제는 빌헬름이 보기에도 한계인 듯싶었다.
그럼에도 '놈'은 포기하지 않았다.
장장 10일 동안, 잠도 거의 자지 않은 채로.
엉금엉금 기어서 숲을 탈출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미쳤군.'
빌헬름이 처음으로 '놈'에게 경외감을 느낀 순간이다.
만약 자신이었다면 어땠을까.
숲을 탈출할 수 있었을까?
빌헬름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 몸을 점거하고 있는 이놈은 숲에 대한 모든 걸 알고 있었다.
반면 자신은 모른다.
도전하면 백중 백 죽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몸을 점거한 이놈은.
'······ 이놈은 신인가?'
······ 진정 '개 같은 신'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완성
일반적인 신이라면 자신의 품위를 위해서라도 절대 하지 않을 짓이었다.
십여일간 엉금엉금 바닥을 기어 나벨룽의 숲을 탈출하다니!
이걸 '개' 같은 신이라 아니한다면 무엇이라 부르겠나.
물론 그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정신 하나만큼은 빌헬름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숲을 탈출할 건 시작에 불과했다.
목검 하나 들고서 도착한 곳은 웬 거대한 산이었다.
'뭐 하는 거지?'
도시로 가서 생활전반에 필요한 물건들을 구매해도 모자랄 판국에 숲을 벗어나 왜 대뜸 산으로 들어간단 말인가.
속세를 벗어나는 공부라도 하려는 걸까?
하지만 그러기에 이 산은 너무나도 위험한 곳이었다.
오크들이 득실댔으니까.
'··· 또 기어가겠다고? 이 산을?'
여기서도 '개 같은 신'의 '개' 같은 행위는 반복되었다.
포복한 채로 산을 오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나마 나벨룽의 숲보다 나은 것이라면 마실 물과 요기할 과일들이 많다는 것이었다.
'왜 피하는 거냐?'
하지만 이 산의 오크들은 숲의 괴물보다 약하다.
기습한다면 충분히 한, 두 마리 정도는 죽일 수도 있는 상황.
그런데 한 마리의 오크도 처치하지 않고 장장 7일간 산만 탔다.
마침내 산의 정상에 도착한 개 같은 신은, 놀랍게도.
미치지 않고서야 할 수 없는 '도전'을 실행했다.
'······ 제정신인가? 산의 주인과 대결을 펼치겠다니!'
산의 주인, 오크들의 왕에게 도전장을 내민 것이다!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여태껏 불살(不殺)하며 숲을 빠져나오고, 산을 오른 게 설마 이 거대한 산의 주인에게 도전하기 위험이었던가?
이길 가능성은 없다.
만에 하나 이겨도 살아서 내려가는 건 더더욱 불가능하다.
"위대한 '피뿔산'의 왕이여! '전사의 대결'을 신청한다!"
······ 환장할 노릇이었다.
정상에서야 겨우 몸을 펴고 나섰지만, 이곳은 오크의 왕이 기거하는 곳.
수많은 오크들이 몰려들었다.
하물며 피뿔산의 왕은 목검 한 자루 들고 상대할 수 있는 괴물이 아니었다.
"··· 재밌는 인간이 나타났군."
다른 오크보다 족히 두 배 이상 커다란 체구.
온 몸에 난 상처는 그가 강한 전사임을 입증했다.
게다가 대결을 안 받아주면 어떡하려고?
"피뿔산에 존재하는 수많은 오크의 영혼이 그대를 인정했다. 단 하나의 오크도 죽이지 않고 이 산을 어떻게 오른 건지는 모르겠으나, 명예를 아는 자여! 그대의 대결은 성사됐다!"
······ 받아줬다.
현기증이 날 지경이다.
빌헬름은 어느새 손에 땀을 쥔 채로 둘의 대결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목검으로는 제대로된 싸움을 할 수 없겠지. 받아라!"
피뿔산의 왕은 허리춤에 매인 검집 중 하나를 던졌다.
모두 그에게 도전했던 자들에게서 강탈한 것들이다.
그중에서도 진귀하며 강력한 보검을 넘긴 것이다.
"이것은 전사의 싸움! 나를 이긴다면 그 검과 함께 그대의 목숨은 보전되리라! 허나, 패배한다면 목숨은 없다."
스릉!
이윽고 전사의 대결이 시작됐다.
그나마 1:1의 대결이라 다행이지만 여전히 격차는 확연하다.
개 같은 신은 이 싸움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촤앙!
검이 흔들린다.
몸도 같이 흔들렸다.
아무리 검술을 연마했대도 압도적인 힘의 차이는 어찌할 수 없는 게다.
빌헬름은 저도 모르게 심상의 늪에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반드시 이겨야만 한다는 생각에 필사적으로.
'살갗을 뚫을 정도의 힘은 없다. 저 힘을 역으로 이용하는 것 외에는!'
아무리 좋은 보검이 있어도 힘이 부족하여 타격할 수 없다면 무용지물이다.
게다가 피뿔산의 왕이 지닌 괴력은 혀를 내두를 수준이었다.
그 힘을 이용할 수만 있다면, 저 단단한 살갗을 파고드는 것도 가능할 터.
그때부터였다.
"특수 능력치 '회피력'의 수준이 일정단계를 넘어섰습니다."
"'검 흘리기' 스킬을 익혔습니다."
빌헬름의 의지가 스킬로 만들어졌다.
물론 오롯이 빌헬름의 의지 때문만은 아니었다.
정말 쉬지 않고 '개' 같이 기어다닌 덕분에 스킬을 만들기 위한 회피력이 충분했던 것이다.
후아아아아앙!
그 순간, 마치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 같았다.
피뿔산의 왕이 내지르는 일격이 눈에 보인다.
"'검 흘리기'를 사용했습니다."
정확한 순간에 검을 흘렸다.
허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완벽한 타이밍! '반격'을 사용합니다!"
그 힘을 이용한다.
곧이어 피뿔산의 왕이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
피하고, 흘리며, 무릎으로 쏠린 무게중심을 공격해 반격에 성공한 것이다.
쓰러진 피뿔산의 왕의 두 눈가가 거칠게 흔들렸다.
하지만 입가엔 미소가 머금어져 있었다.
"대단······!"
푸욱!
목을 찌른 뒤 그대로 베어냈다.
'아······!'
동시에 느껴지는 쾌감.
빌헬름은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살아있다.
이것이, 살아있다는 감각이다!
허나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히든 퀘스트 완료!"
"1레벨로 '피뿔산의 왕 사냥하기'가 완료되었습니다."
"경이롭습니다."
"여태껏 단 한 명도 달성하지 못한 유일무이한 업적입니다."
"'1레벨에 피뿔산의 왕을 사냥한' 칭호를 획득합니다."
"히든 클래스 '불굴의 도전자'를 획득할 수 있습니다."
"'발란 왕국'으로 향하여 현상금을 받으십시오."
"명예 500과 SP 500이 부여됩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
······.
*
피뿔산의 왕과의 대결에서 승리한 뒤.
빌헬름은 생전 처음으로 강렬한 희열을 느꼈다.
불가능한 시련에 도전하여 승리하는 것.
그 순간의 쾌락은 빌헬름이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준 것이다.
하지만 모든 상황의 중심에는 빌헬름이 아닌 '개 같은 신'이 있었다.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군.'
숲을 빠져나온 것도, 피뿔산을 오른 것도.
모두 '죽음'이 확정되다시피 한 일들이다.
그럼에도 그는 도전하는데 주저하지 않았으며 결국 달성해냈다.
왜?
자신의 몸이 아닐진대, 그저 조종하는 것에 불과함에도 어째서 이렇게 처절하다 싶을 정도로 몰두하며 도전하는가.
도저히 빌헬름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다음 행보도 마찬가지였다.
'항만도시?'
개 같은 신이 향한 곳은 발란 왕국이 아니었다.
바로 '야숨'이라 불리는 항만도시.
수많은 선박이 출입하고 정박하는 곳.
물자 교류의 중심에 선 도시이기에 그만큼 번영했으며, 세상의 진귀한 온갖 것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살······ 려줘······."
"으으······."
"빨리빨리 움직여라!"
찰싹!또한, '노예'의 거래도 활성화되어 있었다.
사슬에 묶인 채 일렬로 배에서 내려오는 노예들.
남녀노소를 구분치않고 하나같이 뼈가 보일 정도로 앙상하게 말라있다.
이곳에서 노예는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냥 물건이고 소모품일 따름이다.
그래서 채찍을 휘두르거나 매질을 하는 것에 대해 전혀 죄의식이 없었다.
'여기서 뭘 어쩌려는 거지?'
하필이면 왜 이곳으로 왔나.
당연히 발란 왕국으로 향하여 현상금을 받을 줄 알았건만.
설마 노예라도 구하려고?
'······ 구하긴 구했군.'
설마가 사람을 잡았다.
노예를 구하긴 했다.
노예를 산 게 아니라, 노예들을 아예 해방시킨 것이다.
덕분에 수많은 병사들로부터 쫓기게 되는 신세가 되었으나, 그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야숨에서 모든 노예를 해방시켰다.
'대체 왜?'
개 같은 신은 대체 왜 이런 쓸데없는 짓을 자처하는 걸까.
아무런 이득도 없고, 손해만 가득한 짓을.
빌헬름으로선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앞선 도전들과 달리, 사서 고생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해가 안 되는 일들을 계속해서 연거푸 일어났다.
약자를 구하고, 선행을 베풀고, 힘있는 자들에게 굴복하지 않으며, 마침내 발란 왕국에 도착하여 기사의 작위를 수여받았다.
설마 기사가 되기 위해 계산적으로 행했던 일들인가 싶었지만, 이후로도 그의 행보는 거침이 없었다.
······ 그리고.
어느덧 빌헬름은 그의 행보를 함께하고 있었다.
'질 수 없다.'
치기어린 마음의 발로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왜인지 지고 싶지가 않았다.
목적이 있다면 개 같이 기어서라도 달성해내는 근성.
절대로 굽히지 않는 자신감.
그래서일 것이다.
빌헬름은 계속해서 검을 휘둘렀다.
단 하나, 개 같은 신보다 잘난 게 있다면 바로 그건 자신의 '검'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끊임없이 검을 휘두르다보면, 개 같은 신에게 닿을 수 있을 것만 같아서.
'너를 알고 싶다. 나를 알리고 싶다.'
··· 그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싶어서였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러자 어느 순간부터 빌헬름은 '기사왕'이라 불리었다.
모두의 추앙을 받는 명예로운 존재.
천지개벽의 검술을 만들고, 모두가 말리던 대원정을 일으켰지만.
······ 그럼에도 닿지 못했다.
개 같은 신에게.
욕을 하고 원망도 했지만.
하지만, 이제는 확실하게 알겠다.
'이제야 비로소······ 나를 알았다.'
나라는 인간에 대해, 나라는 존재에 대해.
돌고 돌아, 죽음 이후에 이르러서야.
허나 또 다시 죽음의 위기에 직면한 상태다.
이 모든 기억은 죽음 직전의 주마등과 같다.
깨닫고 나아가기엔 많이 늦었다.
허나, 그래도 충분하다.
'보아라. 이게 내가 너에게 보내는 마지막 물음이니.'
마지막 물음이자, 그에게 내리는 마지막 숙제였다.
빌헬름은 검을 쥐었다.
드디어 '완성'했으니까.
나를 알고, 나를 연다.
천지개벽의 벽.
허나, 애초에 이 검술은 천지개벽 중 하나를 떼어와 따로 사용하기 위한 검술이 아니었다.
전부가 하나가 되어 마침내 완성되는 검술.
"'천지개벽'을 사용합니다."
그렇게 너에게 닿겠다.
··· 개 같은 신이여.
*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지고의 검이 지면에 닿자, 가공할 파공음과 함께 죽음을 불러왔다.
절대적인 죽음의 명제!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이 검의 죽음을 감당할 수 없을지니.
"······ 뭐?"
하지만 란돌프는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지고의 검이, 완전히 지면에 닿지 못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지고의 검을 막았다.
빌헬름. 그가.
"넌······."
하지만 이상했다.
지고의 검은 절대로 막을 수 없는 검이다.
규격외의 검을 막을 수 있는 건 오직 규격외뿐이다.
그러나 빌헬름은 '규격외'의 검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
만약 그게 가능하다면.
'스스로가 규격외가 되었다······.'
규격외.
스스로 신이 되는 것!
허나 이 역시 이상한 일이다.
그 누가 되었든, 깨달아 초월하여 신의 격을 지닐 수는 있다.
하지만 신 자체가 되는 건 불가능하다.
신은 만들어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신은 세계와 함께 태동하며 탄생하는 존재이니.
당장 히든 특성 '영원의 신'과 '마혈종의 신'을 보유한 란돌프지만, 그렇다고 란돌프가 진짜 신이 된 것은 아닌 것처럼 말이다.
그저 신과 같은 자격을 지닌 것이다.
비슷한 말 같지만 절대로 같은 말이 아닌 게다.
그런데.
······ 그럴진대.
란돌프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진리의 문에도 이와 같은 현상에 대한 정보는 없었기 때문이다.
빌헬름의 검술은 현상을 조종하는 것.
끝에 다다라서는 '현상' 그 자체가 될 줄이야!
먼지가 가라앉으며 나타난 빌헬름의 모습은.
"스스로 신이 되었다······ 고?"
지고의 검을 검이 아닌 손으로 잡아냈다.
스스로 '죽음'의 운명을 '삶'으로 바꿔낸 것이다.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지을 수 있는 존재가 된 것이었다.
그 모습은, 틀림없이.
가히 '신' 그 자체라 불려도 이상하지 않았다.
만남
당시를 떠올려보면, 내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광기'였다.
몇날며칠.
거의 십일에 가까운 시간 동안 잠도 거의 안 잔 채로 빌헬름을 플레이했으니까.
그때만 하더라도 흔히 말하는 '시간 빌게이츠'······ 백수였는지라 가능했던 일.
취업은 안 되고, 돈 안들이고 할 수 있는게 게임밖에 없으니 묘한 오기가 생긴 모양이다.
'오냐. 내가 깨고 만다!'
판게니아에는 '포복'이라 불리는 회피 기술이 있다.
딱히 대단할 것 없이 그냥 바닥을 기는 커맨드다.
선제공격을 해오는 괴물들에게 최대한 걸리지 않고 이동하는 게 가능토록 해주는 수단.
다만, 이 '포복'을 제대로 사용하기가 매우 어려워서 잘 안 쓰이는 기술이었다.
포복 상태에서 일어나는데 시간이 걸려, 괴물에게 걸렸다간 그대로 먹잇감이 되는 탓이다.
게다가 이동속도도 느리다.
포복 도중 다른 행동을 취할 수도 없다.
차라리 달려서 도망치는 게 낫다는 의견이 많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잘 모르는 게 한 가지 있었다.
'포복 상태로 생존하면 회피력이 오르지. 생존 포인트도 높게 받고.'
내가 노린 점이 바로 그것이다.
회피력이 높으면 선제공격형 괴물에게 잘 포착당하지 않게 된다.
또한 공격을 당할 때 '빗나감'이 발생할 확률이 높아진다.
숲을 빠져나가기 전, 동굴 주변을 포복한 채로 오가며 최대한 회피력을 올린 이유다.
강력한 괴물과의 거리를 아슬아슬하게 유지하며 외줄타기를 할수록 회피력은 더 가파르게 올라, 마침내 숲을 빠져나갈 수준에 이른 것이다.
다만.
'······ 빌헬름은 처음부터 자각하고 있었다.'
빌헬름이 캐릭터 내부에서 자각하고 있었음을 알고는 있었다.
첫 라이가와의 대결에서 검 숙련도 레벨 31을 달성했을 때, 빌헬름의 닫혀있던 기억이 개화하며 내게 한 가지 장면을 회상시킨 것이다.
바로 게임의 '인트로' 부분.
나를 개 같은 신이라 부르며, 세상을 불살라버리겠다 외치는 장면이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빌헬름.
그의 의식은, 캐릭터를 생성한 '처음부터' 존재하고 있었다.
나벨룽의 숲을 탈출하기 훨씬 이전부터 말이다.
'그 오랜 시간을 이곳에서······.'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두컴컴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이곳, 심상의 늪은 너무나도 외롭고 추운 장소였다.
말을 해도 닿지 않고, 움직여도 끝이 없다.
심지어 시간의 흐름마저 이상하다.
족히 수십배 이상은 느리게 가는 것만 같다.
빌헬름이 겪은 한 시간이 내게는 하루와 같았다.
어쩌면 그 이상일 수도 있고.
그 정도로 이곳에서의 시간은 지옥처럼 느껴졌다.
캐릭터가 생성되고 5년 이상.
이 심상의 늪에서 빌헬름이 체감한 시간은 몇 년이었을까.
100년? 200년?
체류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시간의 흐름은 더욱 느려져만 갔다.
얼마나 오랫동안 이곳에 있었는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그저 아득할 뿐이다.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전부 미쳐버렸으리라.
아니, 아니다.
빌헬름을 제외한 모든 인간은 이곳에서의 체류를 감히 감당할 수 없다.
'······ 빌헬름은 묵묵히 검을 휘둘렀다.'
그럼에도 그 지옥 같은 시간 동안 빌헬름은 검을 휘둘렀다.
쉬지않고 오로지 벽을 넘어 내게 닿고자 혈안이 되어있었다.
하지만 나는 듣지 못했다.
그를 인식조차 못하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다.
빌헬름은 내가 키운 게임 속 캐릭터였을 뿐이었으므로.
그저 초반 숙련도를 잘 쌓아놨기에 다른 캐릭터보다 빠르게 성장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특수한 스킬을 얻거나, 특수한 기질을 발휘하는데 빌헬름이 도움을 줬으리라고는 전혀 상상도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히든 퀘스트에 도전해보고 싶어졌지.'
나벨룽의 숲을 벗어난 뒤.
반드시 달성하고 싶은 '히든 퀘스트'가 생겼다.
판게니아에는 공식적으로 존재하는 '히든 퀘스트'가 7개 있다.
불가능한 내용이기에 은연중 '7대 불가사의'라 불렸던 것들.
당연히 그동안은 도전할 엄두조차 못냈다.
농담이 아니라 내가 생각하기에도 진짜 불가능한 내용이었으니까.
퀘스트의 내용은 솔로 플레이로 레벨 1에 피뿔산의 왕을 사냥하는 것.
레벨 1에, 무려 레이드 보스 몬스터이자 7레벨인 피뿔산의 왕을 사냥해야만 한다.
그것도 오크들이 득실대는 산을 올라, 혼자 도전하고 승리한 뒤 내려와야만 하는 게다.
'지금이 아니면 절대로 할 수 없다고 여겼으니.'
판게니아는 대부분 '사냥'을 통해 레벨을 올린다.
퀘스트로 경험치를 얻을 수도 있기는 하지만 사냥에 비하면 턱없이 적다.
당연히 피뿔산을 오르다보면 오크를 사냥해야하고, 오크를 사냥하면 경험치가 쌓여 레벨이 오를 터.
히든 퀘스트의 달성은 그 순간 요원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포복'이 중요했다.
나벨룽의 숲을 탈출할 때도 빌헬름의 레벨은 1이었다.
하지만 회피력이 높은 상태라 오크들의 시선에 안 걸릴 자신이 있었다.
'남은 건 피뿔산의 왕과 1:1의 대결을 펼치는 것.'
그러나 가장 큰 걸림돌은 역시 피뿔산의 왕이다.
전사의 대결을 통해 1:1의 싸움을 유도해야만 그나마의 가능성이 있는 상태.
전사의 대결은 오크를 한 마리도 사냥하지 않은 캐릭터만 가능했으니, 지금이 아니면 평생토록 도전은 불가할 것이었다.
그래서다.
무턱대고 도전한 것은.
'빌헬름이 아니었다면 졌다.'
피뿔산의 왕과 대결하던 도중 생성된 스킬.
그 스킬은 단순히 회피력이 높아서 생긴 것이 아니다.
빌헬름의 의지가 닿아 만들어진 스킬이었다.
만약 그 순간 '검 흘리기' 스킬이 없었다면, 대결은 패배했겠지.
'······ 서로가 무모했군.'
빌헤름의 기억을 바라보며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빌헬름이 나를 보며 생각했던 감정이, 지금의 나와 같았으므로.
칠흑 같은 어둠 속에 갇혀 검만 휘두른다는 것.
아무도 봐주지 않고, 알아주지 않으며, 바깥으로 나갈 가능성조차 없는 상태에서 억겁의 세월동안 검만 휘두른다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그 긴 시간을, 노력을.
······ 나는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네가 있었기에 내가 있을 수 있었다."
어차피 닿지 않으리라는 걸 알지만 나는 그에게 감사함을 전했다.
"열심히 했구나, 빌헬름."
그의 노력을 칭찬했다.
"그런데 '개 같은 신'이 아니라 '개' 같은 신으로 나를 바라본 건 좀 심하지 않나? 다 살려고 한 일인데."
푸념도 늘어놓았다.
'개 같은 신'이라는 말이, 단순히 원망섞인 욕설이 아님을 알았기 때문이다.
정말 바닥을 개처럼 기어서 생긴 별명일 줄은.
어이가 없기는 하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았다면 진즉에 미쳐버렸으리라.
"··· '개' 같은 신이 응원하마. 실컷 날뛰어봐라."
빌헬름의 전부.
그가 내게 보여주고 싶었던 모습!
확실히, 그는 강했다.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단순히 게임 캐릭터였을 때와는 비교가 안 되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이조차도 전부가 아니었다.
모든 기억을 되찾고, 자신을 알게 된 빌헬름은.
"······."
······ 그를 보며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가만히 전율하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빌헬름.
그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존재가 되었으므로.
천지개벽의 완성.
내가 알고 휘두르던 검과는 전혀 달랐으니까.
하지만 도무지 감히 잡히지 않는다.
분명히 같은 것을 익혔을진대, 너무나도 궤가 다르다.
더 이상 그는 내게 외치지 않았다.
내게 닿으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그저, 보여줄 뿐이다.
'··· 이제 내 차례라는 말이냐?'
이번에는 반대로 내가 발악할 차례라고.
닿을 수 없는, 아무리 노력해도 닿지 못할.
"하하하!"
녀석의 방식을 보며 나는 대소를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빌헬름이 내게 보여주려는 것들, 그리하여 내게 느끼게 하고자 하는 감정들이 무엇인지 알겠다.
그건 그야말로.
"진짜 개 같은 놈이로군."
실로 개 같은 놈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
란돌프는 작전을 변경했다.
운명을 결정짓는 지고의 검으로도 죽일 수 없다면, 또 다른 방식을 사용해 누르면 그만이었다.
'신비 파괴.'
빌헬름의 신비를 파괴한다.
지금 그가 두른 신비는 평범한 인간들이 두르는 것과는 분명히 달랐다.
스스로 격을 올리며, 그가 착용한 모든 것들의 규격이 올라갔다.
그렇다면 하나하나 없애버리면 그만.
"'규격외'의 신비는 파괴할 수 없습니다."
······ 하지만, 파괴되지 않는다.
'겨울.'
휘이이이이이잉!
지고의 유일등급 무기.
'겨울(최후의 황혼)'이 지닌 고유스킬을 사용했다.
극한의 추위로 상대를 얼려버리는 것.
하지만, 이 역시 통하지 않는다.
빌헬름에게 이 정도의 추위는 심상에서 느꼈던 추위에 미치지 못했으므로.
스으으으으!
란돌프의 전신이 어둠으로 물든다.
'끔찍한 흉조의 눈.'
어둠의 영역을 넓힌다.
그리하여 상대에게 '끔찍한 흉조의 눈'을 박아넣고 강제로 조종하는 힘.
곧이어 빌헬름의 가슴팍에 '흉조의 눈'이 돋아났다.
하지만,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빌헬름의 육체와 정신은 이미 누군가가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그릇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는 이미 오랜시간 조종당해왔다.
"······ 마혈종의 신으로서 명한다. 나를 지켜라."
마혈종의 신이 지닌 자격.
칼날용신 하나와 두 아이들을 소환하고자 했다.
그러나 소환되지 않는다.
"'칼날용신'이 소환에 응하지 않습니다."
"'이세라'가 소환에 응하지 않습니다."
"'루카리아'가 소환에 응하지 않습니다."
··· 애초에 처음부터 소환된 적이 없다.
그들은 현재의 란돌프가 그들이 모시던 신이 아님을 처음부터 알아보았기 때문이다.
하여 가짜의 인형으로 생성된 것이었다.
만약 소환에 응했다면, 페이즈 2에서 '진짜'로 나타났을 터이니.
빠드득!
"나를 거부하는 거냐? 내가 진짜다. 내가 진짜 란돌프란 말이다!"
란돌프가 이를 갈았다.
응하지 않는건 그들만이 아니다.
'별의 계승자'와 관련된 스킬들도 사용이 불가했다.
동시에.
란돌프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렇게도 원한다면.
"······ 오냐, 보여주마. 내가 왜 '최강'인지."
증명해주마.
신의 섬에서 어떻게 심연의 주인들과 태고의 존재들을 학살했는지.
란돌프가 검을 들었다.
푸욱!
그리곤 스스로 심장을 찔렀다.
그러자.
푸아아아아아악!
심장에서 검은 연기가 솟구치며 수많은 '눈'이 피부 위로 떠올랐다.
"너도 아직 본 적이 없겠지. '멸망의 파편'을 제대로 사용한 모습은."
영원의 란돌프.
죽으면 한 차례 '생명의 힘'을 사용해 부활할 수 있으나.
또 다른 방식도 존재했다.
멸망의 파편, 그 안에 담긴 '죽음의 힘'을 이용하는 것.
오직 지금의 '란돌프'만 사용할 수 있는 힘이다.
신의 섬에서 학살을 일으켰던 진정한 원동력.
란돌프가 미소를 지었다.
"내가 너의 '멸망'이다, 빌헬름!"
*
검을 휘두른다.
쿠아아아앙!
세상이 베어진다.
조각나며 소멸한다.
란돌프의 움직임은 모든 존재를 멸했다.
손에 닿는 모든 것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가히 스스로 '버그'가 되어버린 모습.
쩌어어어어엉!
콰르르르릉!
탑이 무너진다.
세계가 파괴되는 것만 같다.
하지만 검을 휘두르며, 맞대며, 빌헬름은 깨달았다.
-나와 함께 '천상'을 멸망시키지 않겠니?
파랑새의 진의를.
지금 '멸망의 파편'의 힘을 그대로 발휘하고 있는 란돌프를 보자, 이제는 확실히 알 것 같았다.
'멸망은 천상에서 보내온 병기다.'
그것은 지상을 멸절하는 병기다.
오로지 세계를 멸하기 위해 존재하는 무기였다.
갑자기 태어나며 판게니아를 지옥으로 만든 게 아니라, '천상'에서 판게니아를 부수고자 보낸 것이었다.
판게니아만이 아니다.
수많은 세계들을 그렇게 불태웠다.
그래서 알겠다.
지금의 란돌프는 확실하게 '천상'과 연결되어 있었다.
개 같은 신은 그것을 알고 란돌프와 자신을 맞붙힌 걸까.
'감히······.'
하여, 빌헬름은 자신이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개 같은 신이 왜 자신을 응원했는지도 알 것 같았다.
'이곳은 나의 세계다.'
너희들이 마음대로 쥐락펴락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우리의 세계다.'
그러니 보여주마.
무(武)의 극치(極致)를.
'천지창조(天地創造).'
여태껏 경험한 적 없을 무한의 세계를.
빌헬름은 검을 휘둘렀다.
*
구오오오오오오오오-!
세계가 흔들린다.
투신의 탑을 중심으로 모든 게 먹혀간다.
그리하여 투신의 탑 전체가 '어둠'에 먹혔다.
완전히 새로운 세계.
"여긴······ 어디냐?"
란돌프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빌헬름이 휘두른 검.
그 안에 담긴 무수한 묘리와 극의에 정신을 놓아버린 것이다.
진리의 문에서도, 그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는 검이었으니까.
그리고 다시 눈을 뜨자 이곳이었다.
어둠으로 물든 심상의 늪.
춥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움직일 수도 없다.
란돌프는 그 상태로 무수한 세월을 겪었다.
멸망의 힘으로 세계를 파괴했으나, 또 다시 생성되어 란돌프를 집어삼켰다.
무수하게 이어지는 세계.
'아아······.'
괴롭다. 괴롭다. 괴롭다.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아서.
영원토록 갇힌 것만 같아서.
그렇게 얼마나 많은 시간이 지났을까.
툭!
그의 눈앞에 검 한 자루가 떨어졌다.
스릉.
떨어진 검을 쥐고, 누군가가 나타났다.
"이제 사라져라, 가짜여."
······ 박현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
"'영원의 신 란돌프'를 격퇴했습니다."
"히든 페이즈."
"'???'가 등장합니다."
"'온전한 황금률'의 남은 시간 8분"
무의 극의를 펼친 빌헬름이, 이내 다시금 나타난 란돌프를 보며 표정을 굳혔다.
"······ '개 같은 신'이여."
마지막 수업
보자마자 '개 같은 신'이라니.
천하의 빌헬름도 당황하긴 한 모양이다.
나는 피식 웃었다.
"'개' 같은 신 아니었나?"
"······."
정곡이라도 찔린 듯 내 물음에 빌헬름은 답하지 않았다.
무표정하기 그지없는 얼굴.
현미경 수준으로 관찰하지 않으면 보이지도 않을 변화가 있긴 있었다.
파르르.
아주 미세하게 눈가가 떨린 것이다.
하지만 그만하면 충분했다.
절대로 다른 사람 앞에선 감정을 내보이지 않는 빌헬름이 충분히 당황했다는 증거였으므로.
빌헬름이 당황한 모습을 보아하니 왜 이렇게 즐거운 건지 모르겠다.
게다가 이렇게 둘이서 마주한 적은 처음이었다.
빌헬름이 갇혀있거나, 내가 갇혀있거나.
항상 둘 중 하나였다.
결코 소통은 불가능한 구조.
얼굴을 보긴커녕 당연히 제대로된 대화조차 해본 적이 없다.
그토록 오랜시간을 함께했음에도.
스릉.
나는 가볍게 검을 쥐며 말했다.
"하기야······ 우리가 시시콜콜하게 대화나 나누고 있을 사이는 아니긴 하지."
우리가 언제 제대로 말을 주고받아본 적이 있기나 하던가.
처음부터 없다.
그리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서로를 알아가기엔 남은 시간이 너무 적다.
"'온전한 황금률'에 의한 남은 변신 시간 7분 32초"
고작해야 8분이 채 안 되는 짧은 시간.
이 시간에 나눌 수 있는 제대로된 대화가 과연 얼마나 있겠는가.
하물며 그간 쌓인 케케묵은 감정 따위를 이 시간 안에 해소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니.
검으로 시작했으니, 검으로 끝을 낸다.
우리 같은 사이는 말 한 마디보단 검으로 나누는 한 합의 대화가 더욱 가치있는 법이니까.
빌헬름.
너도 그리 생각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스릉.
곧이어 빌헬름도 마주한 채 나를 향해 검을 겨누었다.
이거면 됐다.
우리 사이는.
"······ 승리하는 자가, 옳은 것으로 하지."
너도, 나도, 전부 털어내보자.
그리고 확인해보자.
누가 더 '개' 같은지 말이다.
*
라이가는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이 눈앞에서 펼쳐지는 장면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제국제일검이라 불리며 판게니아의 최강자임을 자처했던 그가.
"······."
지금, 자신보다 더욱 높은 경지의 대결을 목도하고 있었기에.
물론, 이미 빌헬름을 '최강의 사나이'로 인정한 상황이다.
허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또 다른 '최강'의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정상까지 오른 빌헬름은 영원의 신 란돌프와 격돌했다.
둘의 대결은 라이가마저도 손에 땀을 쥐게 만들었으니.
'어이가······ 없군.'
라이가는 이 상황이 그저 어이가 없을 따름이었다.
언제나 상황을 주도하고 이끌어갔던 건 그였다.
누군가가 시련을 대신 해결하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며 숨죽이고 있는 건 살아생전 처음이었다.
하물며 빌헬름은 자신과 싸웠던 때보다 정상에 오른 현재 몇 단계는 더 진일보한 것 같았다.
그럴진대.
그러한 빌헬름과 맞수를 이루는 란돌프라는 자.
그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란돌프······.'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봐도 처음 보는 자다.
저 정도의 강자라면 자신이 알고 있을 법 한데도 불구하고.
허나 분명한건 저 '란돌프'라는 존재로 인해 투신의 탑이 변형되었다는 것이다.
변형된 시련과 바알의 출현.
칼날용신을 소환하고 개미왕을 제몸처럼 부린 '영원의 란돌프'도 모두 지금 저 란돌프와 관계가 있을 터였다.
처음에는 사라진 '황금 염소'를 떠올린 것 또한 사실이었다.
단시간에 사신교의 간부로 오른 그 정체불명의 존재와 란돌프가 깊은 연관이 있으리라고 여겼다.
'··· 다르다. 그때의 염소가 아니야.'
하지만 염소와는 제국에서 한 차례 손을 섞어봤다.
지금 빌헬름에게 검을 휘두르는 란돌프는 그때의 염소와는 모든게 달랐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고, 비교자체가 불가할 정도로 딴판이다.
무엇보다 염소는 죄인이 아니다.
반면에 란돌프는 죄인일 가능성이 높다.
뿐만인가.
"빌헬름님······!"
"아아!"
이자벨라를 비롯한 그들의 반응으로 보아하건대 저 란돌프는 염소가 아닌 게 확실하다.
염소였다면 특히 이자벨라가 걱정어린 눈빛을 보냈을터.
그러나 그들의 시선은 모두 빌헬름에게 향해있었다.
라이가는 다시 고개를 돌려 빌헬름과 란돌프의 싸움을 바라보았다.
동시에.
'······ 우물 안의 개구리는 나였던가?'
라이가는 있는 힘껏 주먹을 쥐고, 고개를 숙였다.
창피하다.
낯이 뜨겁다.
그래서 얼굴을 들 수가 없는 게다.
이 세상에 더 이상 자신보다 강한 자는 존재하지 않으리라고 자신했다.
하여 심연탐사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하지만 착각이다.
멍청한 생각일 뿐이었다.
세상이 이처럼 넓은지 모르고 우물 안에서 최고라 자부하는 꼴이었다.
그래봤자 우물일 따름이거늘.
스스로 멈춰있기를 자처한 것과 다를 게 없다.
'세계는 넓다. 강자는 많다.'
이윽고.
두근! 두근!
미칠 듯이 심장이 뛰었다.
빌헬름과 란돌프의 대결을 바라보고 있자 수십년간 죽어있던 승부욕이라는 감정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닿고 싶다.
이기고 싶다···!
그러기 위해선 우물을 벗어나야만 한다.
그리고 우물을 벗어날 방법은 눈앞에 있다.
자신을 넘어선 두 강자의 대결.
그것을 온전하게 눈에 담고 복기하는 것.
깊은 우물로 떨어진 밧줄이 바로 저것이었다.
잡아야한다.
담아야한다.
그러기 위해선,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해야만 했다.
온전하게 비워내고 다시 채워야 함이다.
'그 시절로 돌아간 것 같군······.'
이만한 열망은 무척이나 오랜만이었다.
기억도 제대로 나지 않는 어린시절.
팔가의 후인에게 점지되어 처음 검을 쥐었을 때.
그때 이런 감정을 느낀 것 같다.
배우고 싶다고.
다시는 노예로 돌아가기 싫다고.
힘을 갖게되면 주도적인 삶을 살겠노라고.
······ 지금은 어떤가.
과연 그는 그러한 초심(初心)을 잘 지키고 있었나?
스으으.
라이가는 검을 쥐었다.
저 둘을 따라갈 수 있을까?
저 둘의 영역에 닿을 수 있을까?
라이가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전신에서 땀이 흘러내렸다.
그저 보고 담는 것만으로도 벅차서.
검을 쥐었으나 휘두를 엄두가 나지 않는다.
"······."
"······."
그러한 감정을 느낀 건, 비단 라이가 뿐만이 아니었다.
지켜보는 이들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둘의 대결은, 그저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뛰고 전율이 일었으니까.
동시에 등이 서늘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탑이 무너진다면?
-그래서 란돌프가 적으로 등장한다면?
······ 상상만으로도 끔찍했으니까.
빌헬름이 실패하면 모든 게 끝이다.
란돌프. 저 괴물을 아무도 막지 못할 것이기에.
하지만 란돌프는 플레이어다.
비록 탑에 의해 상태가 이상해졌다고는 해도 이처럼 차원이 다른 무력이라니!
-우리는 그동안 뭘 한 거지?
-나는 왜 이렇게 나약한거야?
심지어 란돌프가 등장한 시기는 다른 플레이어들에 비해 더욱이 짧다.
아무리 그가 희귀한 정보를 선점하고, 운이 좋더라 할지라도 그 이상가는 노력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지금의 모습에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부정적인 의견을 지닌 사람들도 많았다.
"너무······ 너무 차원이 다르잖아."
"노력하고 말고가 아니야. 저건······ 그냥 다른 존재라고."
"대체 대원정은 어떻게 실패한거야?"
차원이 다른 강함에 포기해버리는 이도 속출했다.
아무리 자신이 노력한다 한들, 닿을 수 없을 것 같았으니까.
그야말로 천외천의 경지다.
어차피 닿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포기하는 것이다.
"닿을 수 있다."
하지만 라이가는 그들의 포기를 일축했다.
그러자 그의 목소리가 마력을 타고 수십만의 인원 모두의 귓가에 울렸다.
라이가는 표정을 굳힌 채 연이어 말했다.
"닿아야만 한다."
절실하게.
더없는 절박함이 느껴지는 어조로.
······ 고작 두 마디 뿐이었으나, 그거면 됐다.
라이가의 말에 담긴 뜻을 모르는 이는 없었으니까.
빌헬름과 란돌프가 나누는 검의 경지.
저 둘의 대결은 그들에게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더 높은 하늘이 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현재에 안주해 더욱 치열해지지 못하면 세계는, 인류는 멸망하리라.
그러니 닿아야만 한다.
닿지 못하면, 어차피 멸망할 터이니.
그때였다.
"뭐, 뭐야 저 '검'은······?"
란돌프가 소환한 검.
세계를 삼킬 정도로 거대한 검이 빌헬름을 향해 휘둘러졌다.
절대적인 '죽음'을 달고서.
지고의 검이 빌헬름에게 닿는 순간.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동시에 거대한 폭발이 일며 탑 전체가 흔들렸다.
구르르르르릉!
그들이 있는 장소도 균형을 잡지 못할 정도로 흔들려댔다.
그러나.
바닥에 엎드려서라도, 다른 사람을 부여잡고서라도.
모두가 중계되는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리고 머지않아 연기가 걷혔을 때.
"아······!"
두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마치 신의 검과도 같은 그것을 빌헬름이 맨손으로 잡고 있었으니.
그리고 이어진 빌헬름의 검격은-
"······?"
"······ 어?"
순간, 사람들은 당황하고 말았다.
느닷없이 화면의 중개가 끊겼기 때문이다.
"하, 하필 이 순간에!"
"뭐가 어떻게 되어가는 거야?"
이리보고, 저리봐도 화면은 더 이상 송출되지 않았다.
모두가 서로를 바라보며 의문을 피우고 있을 때.
그 사이에서 유일하게 표정을 굳힌 남자가 있었다.
마지막으로 빌헬름이 휘두른 검을 보며, 몸을 떠는 이가 있었다.
라이가.
그가 나지막히, 작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저건······ 못닿겠군."
······ 저 마지막 '검'만은 도저히 닿을 수 없을 것 같았기에.
*
"난잡하다."
몇 합의 검을 나누었을 때, 처음으로 빌헬름이 한 말이다.
난잡하다고.
내 검이.
나의 기술이.
아니, 아니다.
검에 한정된 말이 아니었다.
빌헬름은 나의 전체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정확한 정체성에 대해서.
지금 나는 어느때보다도 난잡한 상태였다.
가지가 획일화 되지 않고 중구난방으로 뻗어있다.
탑을 오르며, 흉과 재의 신을 만나면서 그 정도가 더욱 심해졌다.
하여 말하는 것이다.
난잡하다고.
이토록 난잡할 수가 없노라고!
"하나로 합쳐라. 일부러 안 하는 건가?"
묘하게 신경을 긁는 말이었다.
하지만 하나로 합치라는 게 정확히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중구난방으로 뻗어있는 가지를 치는 게 아니라, 하나로 합치라니.
그런 나를 보며 빌헬름이 피식 웃고 말았다.
"아니면 못하는 건가? '개' 같은 신이여?"
······ 이 자식이.
'개'를 강조하며 마치 나를 놀리듯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 놀리듯이?
아니다.
나를 놀리고 있는 게 확실했다.
신이면서 왜 그것도 못하느냐며 면박을 주고 있는 것이다.
허나······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빌헬름.
녀석이 하는 말이 맞았으니까.
너무 난잡해진 탓에 어떻게 해야될지를 모르겠다.
무엇을 쥐고 무엇을 휘두르며 어떻게 나아가야할지 좀처럼 감히 잡히지 않았다.
심상의 늪에서 검을 휘두를 때 보다 확실해졌다.
이대로는 빌헬름에게, 이 개 같은 놈에게 닿을 수 없으리라는 게.
하지만 나는 녀석이 이끄는 검로에 어느덧 매료되어 있었다.
또한, 그는 검으로써 내게 말하고 있었다.
가르쳐주고 있었다.
그간 내가 보지 못했던 것들을.
알 수 없었던 것들을.
한 마디로.
"잘 따라와라. 지금부터 더 어려워질 터이니."
이건 빌헬름이 나를 가르치는 마지막 수업이었다.
구원
채엥-!
부딪힌다.
검과 검이.
사람과 사람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나누는 검의 대화.
'무겁다.'
빌헬름의 검은 무겁다.
한없이 묵직했다.
여태껏 마주한 검사들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의 무게감이 있었다.
허나 정해진 검식(劍式)이 없다.
천지개벽의 검술에는 정해진 틀이 없었다.
틀이 없으니 가벼워야 한다.
그야말로 모순(矛盾)이다.
텅 비어있음에도 어찌하여 이토록 무겁게 느껴질 수 있단 말인가?
'천지개벽은 인간 자체의 검술이다.'
그건 바로 빌헬름이 무겁기 때문이다.
그의 존재가, 그의 인생이, 그의 희로애락이.
비로소 천지개벽의 진정한 묘리를 나는 깨달을 수 있었다.
천지개벽은 스스로를 표현하는 검술이라는 걸.
'천.'
천지개벽의 천(天).
영역을 지배하여 상대를 제어하는 검술.
나는 그게 전부인 줄로만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다.
이는 곧 상대를 읽고 상대가 되는 것과 다름이 없는 능력이다.
······ 빌헬름을 읽고, 빌헬름이 되는 것이다.
관절의 움직임, 근육의 미세한 떨림, 오장육부에서 쥐어짜지는 작은 울림 하나마저도 놓치지 않고 들여다본다.
더 나아가 빌헬름의 생각과 감정까지도 읽어낸다.
그리하여 비로소 빌헬름이 된다.
채에에엥-!
검이 한층 더 묵직해진다.
그러자 빌헬름의 표정에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평소였다면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나, 천의 영역을 펼쳐낸 지금이라면 확실하게 알 것 같았다.
'당황하고 있군.'
내가 제대로 천지개벽의 천을 펼치자 빌헬름은 당황하고 있었다.
상대를 읽는다는 것.
그것은 상대를 이해한다는 것이었으므로.
말인 즉슨.
빌헬름을, '개' 같은 신인 내가 이해하고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절대로 닿지 않고, 절대로 이해하지 못할 줄 알았던 존재인 내가 말이다.
그리고 내가 빌헬름을 읽어냈듯이.
'너도 나를 읽고 있겠지.'
······ 빌헬름 역시 이제야 제대로 나를 알게 되었을 터다.
나라는 존재가 대관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말이다.
진정한 검의 대화였다.
함께 펼쳐내는 천의 영역에서 우리는 마치 하나처럼 움직였다.
검의 울림에 따라, 검의 속삭임에 따라,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검격을 나누었다.
그러자 빌헬름은 단계를 높였다.
'지.'
천지개벽의 지(地).
모든 공격을 파훼하는 검술.
하지만 이 역시 그저 공격을 무효화하는 게 전부인 검술은 아니었다.
상대가 되고, 상대의 모든 것과 공명한다.
공명(共鳴)이란 공감이다.
단순한 이해를 넘어 나의 일처럼 여기는 것이다.
심상의 늪에 갇힌 채 부단하게 나를 이해하고 공감하려 했던 빌헬름만이 온전히 펼칠 수 있는 검술이었다.
'내가 못 따라갈 것 같은가?'
······ 그러니 당연히 내가 따라오지 못할 것이라고, 빌헬름은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이해와 공감은 한끝 차이이지만, 완전한 공감은 타인에게 불가능한 일이었다.
끝없는 시간 동안 나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빌헬름과 같은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면 말이다.
내가 움직인 캐릭터에 동화한 채, 나의 의지와 생각에 하나되어 검을 휘두른 빌헬름.
자신을 포기하며 남과 공명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너는 나고, 나도 너다.'
빌헬름은 '남'이 아니다.
나의 분신과도 같은 존재.
또 다른 나였다.
그의 고통과 슬픔을 나는 이해한다.
녀석은 나를 '개' 같은 신이라 부르며 원망했으나, 동시에 선망하고 있었다.
포기를 모르던 나의 정신에 어느덧 감화된 것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지금 나는 빌헬름이 보여준 불굴의 정신을 선망하고 있다.
그의 지칠줄 모르는 노력과 마침내 맞닿은 극의를 갈구하는 중이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욕망하는 사이인 게다.
그런 주제에 너무나도 닮아서 왠지 미워 보이는 거울 안의 나와 같은 존재였다.
챙! 챙! 채엥!
어느덧 우리는 똑같은 자세와 똑같은 검로로 검을 그리고 있었다.
이제 말은 필요 없다.
그런 과정 자체가 의미가 없었다.
나의 생각이 빌헬름의 생각이고, 나의 의지가 빌헬름의 의지였으므로.
이 다음에 무엇을 행할지 자연스럽게 알았다.
'개.'
천지개벽의 개(開).
세상을 여는 검.
상대의 공간과 모든 걸 넘어서서 마침내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 되는 권능이다.
이 단계부터는 주변 모든 만물과 소통할 수 있다.
말 그대로 신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더이상 나는 더 이상 빌헬름을 따라가지 않았다.
'··· 하나로 합친다. 기존의 것을 더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낸다.'
대신 더욱 깊이 나를 들여다보았다.
만물과의 소통이란 주변을 둘러보는 용도가 아니다.
내가 가진 '난잡한' 것들의 표상(表象)을 읽고, 열며, 아는 용도다.
상대를 알았으니, 이제는 나를 제대로 알 차례였다.
우선······ 지금 이 몸, 란돌프를.
'확실히 너무 많은 게 섞여있군.'
여신의 별과 멸망의 파편.
두 상반되는 힘을 품었다.
히든 특성 [허무]에 의해 어떻게든 지탱되고는 있지만, 란돌프의 성향은 확실히 [악]에 가깝다.
어둠과 끔찍한 흉조의 힘.
하물며 '지고의 검' 역시 '죽음'을 기반하는 능력이지 않나.
바알의 저주 또한 마찬가지다.
덕분에 가파르게 강해질 순 있었으나, 이걸 제대로 분리하고 합치지 않으면 빌헬름과 같은 무극에는 닿을 수 없다.
'란돌프의 몸으로 대천사의 축복을 받지 못하는 이유다.'
그렇다면, 박현명의 몸은?
나 자신의 몸은 어떠한가.
대천사의 축복을 받기는 했으나 계속해서 난잡해지고 있다.
이대로면 머지않아 나의 몸도 란돌프처럼 변할 것이다.
온갖 것이 존재하고 혼란해지며 '또 다른 박현명'이 나타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만약 처음부터 난잡하지 않았다면, 그러한 존재가 등장할 틈 자체가 없었을 터.
그게 아니더라도 이번 일과 같은 일들이 일어날 수도 있다.
투신의 탑에 소환된 란돌프의 허점을 흉과 재의 주신들이 파고든 것과 같은 일이 말이다.
'빛과 어둠은 공존할 수 없다.'
이제는 인정하고 받아들여야만 했다.
공존은 욕심이다.
빛과 어둠은 처음부터 나뉘어있도록 설계된 진리.
그것이 균형이었다.
지금 나는 균형을 잃었다.
'나 혼자서는 모든 균형을 이룰 수 없다······.'
허나 한계가 있다.
그러나 방법이 없지는 않았다.
나는 빌헬름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빌헬름이 고개를 끄덕였다.
"'온전한 황금률'에 의한 남은 강림 시간 2분"
허나, 빌헬름이 도와준다고 하더라도 그 과정은 쉽지 않다.
너무나도 난해하고 복잡하다.
2분의 시간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 할 수 있을까?
아니, 해야만 한다.
반드시 해내야만 했다.
지금이 아니라면 영원히 불가능할 테니까.
필요한 지식은 있었다.
'진리의 문에서 흘러나온 지식이 아직 남아있다.'
또 다른 란돌프가 남겨놓은 지식들이 아직 흩어지지 않고 있었다.
물론 이 역시 시간문제일 따름이나, 어쨌든 시도해볼 수밖에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어떠한 상황에 놓여서도 일단 하는 마음'이니까.
둘이 함께 힘을 합친다면 가능할 터였다.
하지만, 이 하나만은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있었다.
'······ 빌헬름. 너는 내가 밉지 않은가?'
설령 그것이 내 의도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나는 빌헬름의 몸을 조종했다.
빌헬름의 의지와 의식을 무시하고 내 마음대로 행했다.
그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는 하나, 그래도 가슴 한켠에는 원망으로 남아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인간의 감정이란 지극히 복잡한 법이니까.
자신의 감정을 배제한 채, 오롯이 순수한 감정만으로 나를 돕는 게 과연 가능할지 궁금한 게다.
나는 빌헬름을 바라보았다.
동시에.
씨익!
······ 빌헬름이 웃어보였다.
그런데 그 웃음이, 미소가.
'진짜 어색하군.'
너무 어색해서, 나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생각해보니 내 기억 속의 빌헬름은 누구의 앞에서 웃어보인 적이 없다.
어찌됐든 내가 게임에서 로그아웃 했을 때 빌헬름은 잠시의 자유를 되찾을 수 있었음에도, 오직 내가 바라는 길만을 걸어왔다.
철저하게 기사왕을 연기했고, 절대로 본인의 감정을 표출하지 않았다.
웃기는커녕 항상 굳어만 있었다.
······ 누군가의 앞에서 웃어 보인 것 자체가 빌헬름에겐 처음인 것이다.
그것은 곧 용서였고,
나의 구원이었다.
모르겠다.
그냥, 구원받은 기분이 들었다.
빌헬름의 미소를 보자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래서 아쉬웠다.
미안했다.
이 남은 시간을 나를 위해 사용해도 되는 걸까?
내가 아닌 너를 위해, 너의 구원을 위해 사용해야 하는 건 아닌가?
그러자 빌헬름이 고개를 저었다.
괜찮다는 듯이.
이윽고.
"······ 나는."
그가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동화한 상태에서도 감이 잡히지 않았다.
도리어 빌헬름은 그런 나를 이해한다는 듯 온화한 얼굴로 말했다.
"이미 구원받았다."
······ 이미 구원 받았다고?
무엇을?
··· 어떻게?
그의 구원은 자유다.
구속을 풀고 자유를 얻는 것이다.
하지만 결국 대원정에서 그는 죽었다.
죽음은 자유가, 해방이 아니다.
그러한 죽음을 그가 원했을 리 없었으므로.
그럼에도 구원받았다고 한다.
더 이상의 원은 없다고 말한다.
"집중하거라. '개' 같은 신이여."
그의 목소리가 잡념을 지웠다.
괜찮다고, 신경 쓰지 말라고.
무심하게 말하며 그는 내게 가르침을 주고 있다.
마지막 가르침이자, 마지막 선물을 주고 있었다.
후우웁.
나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모든 상념을 떨치고 빌헬름의 호흡에 맞춰 나를 완성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벽.'
천지개벽의 벽(闢).
다시금, 세상을 창조한다.
나를, 우리를, 새롭게 만든다.
"'검 숙련도' 레벨이 상승합니다."
"검 숙련도가 34Lv을 달성했습니다."
"'검 숙련도' 레벨이 상승합니다."
"검 숙련도가 35Lv을 달성했습니다."
"'수련자의 산의 주인'으로부터 발생한 히든 퀘스트 '숙련도 레벨 초월'을 완성했습니다!"
"더 이상의 퀘스트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칭호 '규격 외의 수련자'를 획득합니다."
"히든 특성 '무신(武神) 빌헬름'이 추가됩니다."
"규격 외의 신비 '무신(武神)'을 획득합니다.
"'위대한 위상'에 따라 명예를 두 배(10,000)로 획득합니다."
"'명예'가 50,000을 돌파했습니다."
"명예의 성소에서 '최초의 자격'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메인 퀘스트 5, '신비 얻기'를 클리어했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
·········.
"'투신의 탑' 챔피언이 '란돌프'에서 '빌헬름'으로 변경되었습니다."
"'투신의 탑'의 모든 저주가 정화됩니다."
"'흉과 재'의 주신이 새로운 길을 제시한 당신을 인정합니다."
"서로를 이해하는 것. 그리하여 새롭게 창조하는 것."
"저주와 원망으로는 결코 달성할 수 없는 지고한 영역임을."
"두 주신이 합치(合致)의 의미로, 그리고 모든 시련을 달성한 당신에게 '흉신의 장갑(태고)'과 '재신의 장갑(태고)'을 선물합니다."
"두 장갑이 모여 한 쌍으로 완성되며, 두 장갑은 각기 다른 주신의 격을 담고 있습니다."
"업적 '두 주신에게 최초로 인정받은 자'를 달성합니다."
"'위대한 위상'에 따라 명예를 두 배(10,000)로 획득합니다."
"'명예'가 60,000을 돌파했습니다."
"명예의 성소에서 '최초의 자격(2)'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
······.
"비우고, 채우며, 새로이 쌓아 올립니다."
"두 번째 '탈각(脫殼)'이 시작됩니다."
······.
"'온전한 황금률'이 모두 소모되었습니다."
"'빌헬름'의 강림이 끝났습니다."
소원
심상의 늪이었다.
하지만 이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그것은 한 줄기 빛이, 광명이 비추고 있다는 것.
고작 한 줄기의 빛이 더해졌을 따름인데 더 이상 이곳은 춥지도, 외롭지도, 어둡지도 않았다.
"어딜 가는 거냐?"
나는 저 멀리 앞서나가는 녀석에게 물었다.
그럼에도 녀석은 멈춰서지 않았다.
가만히 빛을 향해 녀석은 그저 계속해서 걷고 있었다.
"개 같은 놈아. 이대로 가버리면 난 어떻게 하라고?"
서로 함께하여 완성할 수 있었다.
혼자였다면 결코 나는 다다르지 못했으리라.
흉과 재의 신으로부터 해방되고, 투신의 탑을 올라, 또 다른 란돌프를 정복한 것 모두가 녀석의 덕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나는 온전히 '존재'할 수 있었다.
계속해서 묵묵히 나와 함께해주었던.
포기하지않고 검을 휘둘러주었던.
"빌헬름!"
··· 빌헬름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툭.
한 발자국을 내딛자, 발이 질척이는 깊은 늪에 빠졌다.
나는 애써 한 발자국을 더 내디뎌보았다.
다시 한 발자국, 또 다시 한 발자국.
하지만 생각처럼 쉬이 나아갈 수가 없다.
아무리 나아가고 나아가도 진척이 없다시피 하였다.
'빌어먹을.'
입술을 깨물었다.
빌헬름은 온전하게 걷고 있음에도 나는 여전히 진창이었다.
늪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었다.
이대로면 영원히 닿지 못할 것이다.
왜 이런 차이가 나는지는 명명백백했다.
산 자와 죽은 자.
우리는 서로 다른 세상을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하여 만날 수 없고, 다가갈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나와 함께 가자!"
··· 나는 너와 함께하고 싶다, 빌헬름.
너와 함께여서 좋았다.
이기적이지만 이번에야말로 함께 끝을 향해 달려나가고 싶은 게다.
검만이 아닌, 검을 들고 나누는 대화만이 아니라.
함께 일상에 관한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고, 가끔 한번씩 밥도 먹고, 차도 마시면서.
누군가를 흉보거나, 혹은 누군가를 칭찬하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누군가를 사랑하며 고민을 털어놓는.
별 거 아닌 일에 고뇌하고, 서로의 고민에 공감하고, 함께 웃으며 여유롭게 대화를 나누는.
"너는 내······."
······ 그런 관계가 되고 싶었다.
그리고 세간에선 그러한 관계를 부르는 호칭이 있었다.
누군가에게는 쉬우나, 나에게는 진정으로 어려운 말.
"둘도 없는 친구, 라고······!"
친구.
나는 손을 뻗었다.
하지만 늪에 빠져간다.
어느덧 허리까지 집어삼킨 늪은 순식간에 가슴팍을 지나 어깨를, 마침내 머리를 먹어치웠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것은, 이 늪은 이승과 저승을 나누는 경계라는 걸.
잠긴다.
끝없이 잠긴 끝에, 나는 다시금 현실로 향하리라.
이제 빌헬름을 재차 마주할 수 있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대로 영원히······.
툭!
그때였다.
누군가가 내가 뻗은 손을 잡았다.
그리곤 늪에 빠진 내 상반신을 들어올리며.
"······ 우리는 함께할 수 없다."
그가.
빌헬름이 말했다.
화아아악!
곧이어 그의 등 뒤로 빛이 더욱 강렬해졌다.
빌헬름을 부르는 빛이다.
빛을 더 자세히 보자, 그곳엔 두 여신이 있었다.
"나는 여신의 품으로 돌아간다."
원래 있던 곳으로.
여신의 품에서 안식을 맞이할 것이라는 말.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안식을 갈구하는 녀석의 의지를 무시할 수 없었으니까.
"나는 이미 구원받았다. 그러니, 그런 눈으로 나를 바라보지 말거라."
그런 눈이라니?
내가 어떤 눈을 하고 있기에.
그리고 정말 괜찮은 건가?
이대로 끝나도?
이러한 끝이 구원이라고 말하는 거냐?
"우리가 함께한 시간에, 후회는 없노라."
툭!
곧이어, 그가 내 손을 놓았다.
이곳은 내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듯이.
다시 늪에 빠지는 나를 보며.
빌헬름이 나지막히 마지막 말을 담았다.
"개 같은······ 나의 친구여."
*
쿠르릉!
탑이 떨린다.
동시에 모두가 알 수 있었다.
··· 종결되었음을.
"'투신의 탑' 챔피언이 '란돌프'에서 '빌헬름'으로 변경되었습니다."
"'투신의 탑'의 모든 저주가 정화됩니다."
빌헬름이 승리하였음을!
지켜보던 모든 이들이 양손을 들었다.
"빌헬름이······!"
"승리했다!!"
"만세!!!"
그리고 빌헬름의 이름을 부르며 환호를 내질렀다.
그가 걷고, 이룩했던 모든 것들이 사람들의 가슴에 불을 지폈으므로.
그의 승리가 마치 자신의 승리처럼 여겨진 것이다.
하지만.
"빌헬름은 어딜 간 거지?"
"란돌프는 그럼 죽은 건가?"
승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패자인 란돌프의 모습도 마찬가지다.
마치 증발한 것처럼 사라졌다.
아무리 찾아봐도, 탑의 그 어디에도 없었다.
하여 모두가 의문을 갖고 있을 때.
"······ 이건 예상 외로군."
한 남자가 작게 중얼거렸다.
소드마스터 락투샤, 개미왕 페르몬과 함께 했던 자.
다크엘프 로드.
그가 락투샤와 페르몬의 시체를 수거하며 말했다.
"드디어 '놈'이 개입할 줄 알았거늘······."
그는 처음부터 탑의 정복에 관심이 없었다.
흑왕의 명령에 따라 바알과 멸망의 파편을 찾는 건 애시당초 관심 밖이었다는 소리다.
'지워진 자.'
잊힌 존재.
스스로를 운영자라 말하는 파랑새.
오로지 천상의 멸망만을 바라는 그 존재가 개입할 줄 알았다.
'이 모든걸 설계한 주제에, 빌헬름이 나타나자 발을 빼버렸다.'
흉과 재의 신.
그 둘을 움직인 것도 모두 '지워진 자'였으니까.
그게 아니라면 '틈새'에서 겁쟁이처럼 잠겨만 있던 두 주신들이 갑자기 탑의 일에 관여할 리가 없지 않은가.
투신의 탑에 숨겨진 틈새의 존재를 알고, 그 틈새로 거침없이 향할 수 있는 건 오직 '지워진 자'뿐이다.
란돌프의 육체로 말미암아 스스로 다시 틈을 열어 소환될 예정이었을 터.
그런데 빌헬름이 나타나자 모습을 숨겼다.
심지어 흉과 재의 두 주신은 합치의 길로 선로를 바꿨다.
모든 게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 판을 뒤흔든 존재, 빌헬름으로 인해.
"······ 아무래도 판을 더 키워야겠군."
다크엘프 로드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다시금 '지워진 자'를 찾으려면, 판을 더 키울 수밖에 없을 듯했으므로.
때마침 한 가지 방법이 떠올랐다.
'여신교를 지우도록하지.'
여신교를 지우면, 나타날 수밖에 없으리라.
파랑새, '지워진 자'는 두 여신과 밀접한 관계였으니까.
어차피 이미 진행중이기도 했고.
투신의 탑을 벗어나, 인적이 없는 곳으로 향한 그가 조용히 눈을 감았다.
동시에.
"로그아웃 했습니다."
"'민트초코맛있어요(4)'로 로그인합니다."
*
제국.
거대한 황궁의 내부, 화려하기 그지없는 방의 안에서.
"······."
한 남자가 거울을 바라보고 있었다.
황금색의 가면을 쓴 자.
사신교를 이끄는 최고간부인 그가.
천천히, 거울을 바라보며.
가면을 벗었다.
"······."
남자는 표정을 굳혔다.
그리고 가면의 너머엔 어쩐지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빌헬름."
지금, 투신의 탑을 정복한 남자의 얼굴이.
탑을 정복한 끝에 사라진 그가 왜 제국에 있는 걸까?
그것도 황금 가면을 쓴 채로.
"내가 진짜다. 너는··· 나를 흉내낸 가짜에 불과해."
어릴 적, 황궁에서 쫓겨난 가짜.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던 모방품.
그가 바로 빌헬름이었기 때문이다.
하여 그는 어릴 때 이후로 가면을 벗은 적이 없다.
자신과 같은 얼굴을 한 존재가 바깥을 돌아다니고 있었으니까.
그 깊숙한 혐오감과 증오가.
더할 나위 없는 짜증이 치밀어 올랐기 때문이다.
"··· 이곳에 네가 있을 자리는 없다."
그가 인상을 찌푸리며 다시 가면을 썼다.
자신의 얼굴이지만 정말 꼴도 보기가 싫었다.
허나 이 얼굴은 제국의 상징이다.
자신이 황제의 핏줄이라는 증거였다.
그가 천천히 바깥을 바라보며 말했다.
"부디······ 바라고 또 바라건대, 돌아오지 말거라. 돌아와봤자 어차피 네놈이 바라던 구원은 없을 터이니."
*
세렝게티는 아우성쳤다.
······ 기사왕.
나의 유일한 주군이시여.
저만을 놔둔 채, 어딜 가시는 겁니까?
-세렝게티! 그대가 단장님을 지켜라!
-우리 '원탁'은 오로지 기사왕을 위해서만 존재하니!
-믿고 맡긴다, 우리 막내!
-울지마, 짜샤! 사내새끼가! ···아, 미안. 여자였나?
순간 들려오는 목소리들.
이미 지나간 자들이다.
죽어서 사라진 기사들이었다.
모두 죽고, 세렝게티 혼자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그래서 세렝게티는 아우성을 쳤다.
어째서.
어찌하여!
겨우 재회했건만, 다시금 저를 혼자 두시는 겁니까?
그 찰나.
-너는 혼자가 아니다.
-너의 왕은 살아있다.
-그러니, 살아서 전하거라.
다시금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사들이 아니다.
기사왕 또한 아니었다.
그건 기억이다.
세렝게티의 잠겨있던 '기억'이 떠올랐다.
빌헬름의 저주를 대신 뒤집어쓰고,
그가 마왕에 의해 죽은 뒤의 기억.
그때, 누군가가 세렝게티를 마왕성에서 탈출시켰다.
그리곤 말했다.
-'원탁'을 부활시키라고.
-'명예의 성소'에서 그들을 부르라고.
-그들은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 왕의 부름만을 기다리고 있노라고!
당신은······.
흐릿한 시야 속에서, 세렝게티는 물었던 것 같다.
누구냐는 물음을 분명히 입에 담았던 것 같다.
그러자 그가 웃으며 말했다.
-나는 낚시를 좋아하지.
-가끔 너처럼 위험에 빠진 사람도 낚고, 수많은 경계에서 생각지도 못한 것들을 낚기도 한단다.
-언젠가, 어느 바다에서, 혹은 어느 경계에서 다시 만날 날이 있을 거야.
-그러니 나의 '구원자'에게, 그대의 왕에게 꼭 전해다오.
*
오랜 꿈을 꾼 기분이었다.
나는 계속해서 달리고 있었다.
알 수 없는 곳을 향해, 미련할 정도로 열심히 그저 달리고 있었다.
어디까지 가려고 하는 걸까?
달린 끝에, 진정으로 '끝'은 있는 걸까?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나는 멈출 수 없다.
멈춰선 안 된다.
꿈을 이루기 위해선.
단 하나의, 나의 소원을 달성하기 위해선.
물론, 처음에는 아무런 소원도 없었다.
소원을 이뤄준다는 말에 시작하긴 했지만, 정작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나는 알지 못했다.
팬텀이라 불리며 정점에 섰을 때조차도.
심지어 판게니아로 빙의된 채 소환되었을 때조차도 구체적인 꿈이라 할 게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있다.
이루고 싶은 소원이 생겼다.
아아.
그래, 나는 지금 소원을 향해 달리고 있다.
너를 향해 달려나가고 있다.
도착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달려나간다면.
언젠가는 반드시 닿게 되리라.
"일어났느냐?"
··· 누군가의 목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아니, 이미 조금씩 깨어가고 있었다.
흐릿한 시야.
'으음.'
강렬한 햇빛에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상반신을 들고, 한 차례 고개를 털자 그제야 주변이 보인다.
'여긴?'
탑이 아니다.
투신의 탑 정상에서 보았던 광경과는 거리가 멀었다.
화려한 방.
어딘가 익숙한 공기.
'제국이로군.'
이곳은 제국이었다.
그리고 황궁이었다.
나는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왜 내가 이곳에 있는 거지?
그러고 보니 누군가가 나를 불렀던 것 같다.
하여 더 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이제 좀 정신이 드나?"
······ 그곳엔 역시나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라이가가 있었다.
처음부터 목소리를 못 알아들은 이유는 도저히 같은 사람이라 생각할 수 없을만큼 변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천길만길로 갈라진 목소리 탓에 라이가라고 확실하게 인식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러한 상태는 비단 목소리뿐만이 아니었다.
파리한 안색.
홀쭉한 얼굴과 반쯤 죽은 눈동자.
사실상 시체와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라이가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경이로운 변화
나를 이곳으로 데려온 장본인이 아무래도 라이가인 듯싶었다.
하지만 쓰러져있던 나보다, 라이가의 상태가 훨씬 좋지 않았다.
당장 죽어도 이상할 게 없다.
그야말로 말기의 중환자가 따로 없는 모습이었으니.
'박현명. 내 몸이다.'
천천히 몸을 살핀 나는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의 나는 박현명이었다.
라이가는 아드리움의 현으로 알고 있는 모습.
그가 나를 발견한 뒤 제국으로 데려온 이유였다.
나는 한차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 꿈이 아니었나.'
모든 시련을 정복하고, 나의 완성을 도우며 결국 그는 여신의 품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빌헬름으로의 강림이 풀린 뒤 온전한 내 모습을 되찾은 것이다.
허나, 지금의 나는 결코 이전과 같지 않았다.
'두 번째 탈각.'
천지개벽으로 말미암아 모든걸 다시 재구성했을 때.
마침내 두 번째 탈각이 시작되며 나는 깊은 잠에 빠졌다.
'무엇이 바뀐 거지?'
그 생각에 다다르자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신의 섬에서 첫 번째 탈각을 완료한 뒤 '무한의 그릇'을 얻었다.
뿐만인가.
자연재생력이 대폭 오르고, 경험치 획득률 2배라는 경이로운 상승률을 손에 넣었다.
압도적인 생존과 성장을 가능케하는 배경을 갖게 된 것이다.
처음의 탈각이 이러할진대, 두 번째 탈각은 무슨 변화를 갖다 줄지 예상조차 가지 않았다.
당장 느껴지는 건 몸이 가볍다 정도.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활력이 넘친다.
'상태창.'
하지만 보다 확실한 변화의 파악을 위해선 상태창을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이윽고 떠오른 창을, 나는 곱씹듯이 천천히 일어내려갔다.
이름 : 박현명
직업(Class) : 무신(武神)
"······."
상태창의 첫 머리를 보고 나는 말문이 턱 막혔다.
클래스, 무신.
신의 이름이 들어가는 클래스는 나도 처음 보았기에.
어떠한 신의 추종자라거나, 계승자 정도는 존재한다 알고 있지만 '신' 그 자체의 이름이 클래스란에 뚜렷이 박혀있는 경우는 듣도보도 못했다.
허나 마냥 좋아할 수가 없었다.
'클래스가 바뀌었다.'
··· 내 기억과 달랐기 때문이다.
빌헬름의 '응원'을 위해 메인 퀘스트를 한꺼번에 밀었을 때.
그 당시 나는 '클래스 획득하기' 역시 끝마쳤다.
위대한 전승으로 말미암아 계속해서 진화했던 히든 클래스의 획득을 마무리했다는 말이다.
'분명히 내가 얻었던 클래스는 역천의 파멸자였을텐데.'
신의 섬에서 튜토리얼을 완료하자 나타났던 대천사 가브리엘.
가브리엘은 나를 축복하며 '위대한 전승'을 건넸고, 그로 인해 나는 끝도 없는 히든 클래스의 진화를 겪었다.
파괴자, 워록, 천마, 성휘를 지우는 자, 디스트로이어, 파멸의 왕······.
그리고 '역천의 파멸자'까지.
이름 하나하나가 '악' 성향에 가까웠다.
결코 '무신'과는 무관한 이름들이었건만.
갑자기 바뀌었다면, 이유는 하나뿐이다.
'빌헬름······.'
빌헬름의 도움에 의해 변한 것이리라.
천지개벽을 완성하고 온전하게 분리한 끝에 성향 자체가 달라졌다는 의미다.
만약 그가 아니었다면, 나 역시도 어둠에 파묻혔을 터.
처음부터 끝까지 그는 내게 이로운 도움만을 주었다.
개 같은 신이라며 욕하고 원망했음에도, 여전히 그는 올곧고 명예로웠다는 뜻이다.
그래서 더욱 아쉽다.
우리의 만남이 너무나도 짧았음에.
'앞으로는 내가 너를 돕겠다.'
하지만 모든 만남에는 이유가 있다고 했다.
내가 녀석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예컨대 빌헬름의 기억을 따라 그의 구원을 완성하는 것이라거나.
닿지 않아도, 만나지 못해도 좋다.
그저 빌헬름을 위해 무언가를 해주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나는 느릿하게 시선을 옮겼다.
아직, 끝이 아니었으므로.
레벨 : 6
힘 : 120(90+30)
체력 : 84
민첩 : 90
지능 : 84
마력 : 138
투신의 탑을 오르며 2레벨이 상승했다.
게다가 6레벨의 능력치라 하기엔 여전히 말도 안 되는 상승폭이었다.
어지간한 10레벨 이상가는 총합이었으니.
'이 정도면 웬만한 칠대 히든 퀘스트도 해결할 수 있겠군.'
칠대 히든 퀘스트.
칠대 불가사의라고도 불리는 그것들.
그중 하나를 빌헬름일 때 달성했었으니, 남은 건 여섯 개였다.
여전히 아무도 깨지 못하고 남아있는 진정한 불가사의들.
란돌프를 육성할 때도 마찬가지로 엄두도 못 냈는데, 지금이라면 그중 몇 개는 가능할 것도 같다.
칠대 히든 퀘스트는 욕이 절로 나올 정도의 악조건들 속에서 말도 안 되는 시련을 해결하는 게 주 내용이니까.
아예 레벨제한이 있거나, 레벨 대비 말도 안 되는 능력치와 지식을 지녀야만 가능한 것들이었다.
피뿔산의 왕을 1레벨에 격퇴하는 퀘스트처럼.
'지긋지긋하긴 하지만, 보상 하나는 확실하지.'
그때를 떠올리자 절로 현기증이 일었다.
지금 생각해도 미친짓이었다.
다만, 그만큼 보상도 미친 수준이었다.
'빌헬름을 넘어선다.'
그를 위해선 반드시 해야만하는 과제였다.
또한.
이번 일로 인해 나는 강렬한 경각심을 갖게 되었다.
'······ 빌헬름의 육체를 차지한 마왕.'
새삼스럽지만, 빌헬름을 겪자 보다 확실해진 것이다.
빌헬름의 육체를 차지한 마왕이 얼마나 강해졌을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빌헬름 스스로도 '대비해야한다'고 말했을 정도이니, 지금 이대로라면 인류는 마왕의 출현과 동시에 멸망할 가능성이 높았다.
'마왕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지고 있다. 그리고 마계도 마왕과 함께 강화되고 있다.'
예상이 아니라 확신이다.
또 다른 란돌프가 소멸하자 잠시간 엿보았던 진리의 문.
그 안에 담긴 지식들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마왕.
그는 착실히 '멸망'이 되어가고 있다는 걸.
'나 혼자서 모든 걸 해결할 수는 없다.'
그리고 그러한 경각심은 비단 나 혼자만 강해진다고 해결될 게 아니라는 깨달음도 주었다.
인류 전체가 강해져야만 한다.
판게니아도, 지구도.
균열의 탑을 올라 한계레벨을 해제하고, 신의 섬에서 2차 각성자를 양성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본격적인 '육성'이 필요하다는 의미이기도 하였다.
게다가 이번 투신의 탑과 같은 이변이 또 언제 일어날지 모른다.
빌헬름이 아니었다면 해결 자체가 불가능했을 터.
그래서다.
내가 강해지는 것만큼, 나를 보조할 다른 이들의 성장도 중요해졌다.
여태까지는 이 정도로 심각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으나 한 번쯤은 충분히 고려해볼 문제인 듯싶었다.
'······ 다음.'
상념을 지운채 나는 남은 상태창을 확인해나갔다.
자연 재생력 : 21,200%
전체 경험치 획득률 : 300%
1 : '무한의 그릇' - 능력치 상한 해제, 능력치 상한 해제에 따른 부작용 제거
2 : '탈각' - 자연재생력 대폭 상승, 경험치 획득률 2배
3 : '탈마' - 수화불침(水火不侵), 만독불침(萬毒不侵), 금강불괴지체(金剛不壞之體)
4 : '승계' - '란돌프'의 능력치를 레벨에 따라 승계합니다.
5 : '공유' - '란돌프'와 경험을 공유합니다. (현재 란돌프의 레벨과 경험치 9Lv, 70%)
6 : '자연경' - 자연의 기운을 이용할 수 있으며 모든 속성 능력치가 대폭 상승합니다. 자연 재생력에 영향을 받습니다.
검 35Lv, 무장 해제(피해량+100%)
[허무]
[손재주]
[올 마스터]
[웨폰 마스터]
[거인의 항마력]
[드루이드의 자연친화력]
[철혈군주의 심장]
[비스트 로드]
[황금의 은총]
[돌연변이]
[대식가]
[대현자]
[천상(天上)]
[무신(武神) 빌헬름]
(1) 무신(武神) - 패시브(Passive).
모든 숙련도 효율 1,000% 상승, 모든 숙련도 레벨 제한 +10Lv, 모든 종류의 무기를 가장 높은 숙련도 레벨에 맞춰 사용가능
"······."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미친 거 아닌가?
추가된 것들 하나하나가 주옥(珠玉) 같지 않은 게 없었다.
자연재생능력과 경험치 획득률이 크게 상승했고, 천마신공이 사라지고 '탈마'로 대체되었으며, 아예 '자연경'이라 불리는 특이사항마저도 생성됐다.
'자연 재생력이 20,000%를 넘길 줄이야······.'
어쩐지 몸이 너무 쌩쌩하더라니.
이 정도면 팔을 잘라도 재생이 될 수준이다.
꼬리를 자르면 재생되는 도마뱀 이상가는 재생능력을 갖게 됐다.
'자연경. 자연의 마력을 사용할 수 있다. 주변 마력을 끌어 사용하던 천마처럼.'
게다가 가진바 이상의 마력을 사용하는 게 가능해졌다.
자연재생력에 영향을 받는다고 하니, 그 효율은 틀림없이 상상을 초월할 터.
그야말로 마르지 않은 샘물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마력이 높아질수록 더 말도 안 되는 짓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고등급 파괴 스킬을 하나쯤 익히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단순히 검강을 피어내고 검환을 펼쳐내는 걸 넘어서서, 아예 강력한 고등급 파괴 스킬을 제대로 익혀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그러한 것들은 마력의 소모가 너무 커서 효율이 떨어진다 생각했는데, 지금이라면 이야기가 아예 다르다.
하지만.
'무신······ 허. 이게 제일 어이가 없군.'
가장 경이로운 건 다름아닌 규격외의 신비 '무신'이다.
숙련도 효율 1,000%상승과 레벨제한 해제를 10이나 해주는 것도 어이가 없는데, 모든 종류의 무기를 가장 높은 숙련도 레벨에 맞춰 사용할 수 있게 되다니!
'진짜 무신이로군.'
··· 이는 검의 숙련도 레벨에 맞춰, 다른 무기도 사용할 수 있다는 뜻이었으므로.
활을 사용하든, 창을 쥐든 간에 모두 35Lv의 숙련도로 쓸 수 있다는 것이다.
숙련도 레벨 제한이 있는 모든 무기의 사용도 가능해진다는 것이었다.
무신.
모든 무(武)의 신이라 불리우는 이름 다운 능력이다.
'만류귀종. 끝에 다다르면 결국 같다는 게 이런 건가.'
검만 익혀도 다른 무기를 연습할 필요가 없다.
오로지 검 하나가 모든 장비와 연결되는 것이다.
솔직히 다른 장비의 숙련도가 부실한 게 그동안 옥의 티로 작용했다.
아쉽지 않았다면 거짓이리라.
그러나 다른 장비를 사용할 여유가 없었다.
검만을 익히기에도 바쁜 시간이었으므로.
'다른 칠대 히든퀘스트들. 그중 한 개는 확실하게 깰 수 있다.'
이로써 더욱이 강렬한 확신이 생겼다.
불가해한 퀘스트.
그중 하나는 확실하게 도달하리라는 확신이.
만약 검의 숙련도 레벨만 높았다면 불가능했을 터이나, 무신의 신비 덕분에 모든 무기의 압도적인 사용이 가능해진 지금이라면 깨지 못할 이유가 없다.
한데, 이마저도 끝이 아니었다.
'흉과 재의 장갑.'
태고 등급으로 책정된 그것들.
라이가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듯하지만, 지금 그 두 장갑이 내 손에 이미 착용된 상태였다.
나는 가만히 그것들을 들여다보았고.
"······ 어디 아픈가? 안색이 많이 안 좋다만."
그런 내 얼굴을 본 라이가가 한 마디 보탰다.
어지간한 일에는 요동조차 없는 내 얼굴이 하얗게 새어버렸으니까.
앞선 변화들 역시 하나하나가 천외천에 가깝지만.
지금 내가 놀란 이유는 단순히 장갑의 능력이 출중해서만은 아니었다.
'변신할 수 있다. 란돌프로.'
장갑의 능력 중 하나가 유독 눈에 들어온 탓이다.
란돌프와 내가, 합쳐졌다.
나뉘지 않고 하나가 되어 언제든지 변신할 수 있다.
흉과 재의 신이 말한 '합치'라는 게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흉의 장갑에는 란돌프가, 재의 장갑에는 바로 내가.
나는 흉의 장갑을 계속해서 바라보았다.
그러자.
이름 : 란돌프
직업(Class) : 또 다른 멸망
······ 란돌프의 상태창이 떠올랐다.
그것도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상태로.
시상식
분명히 란돌프의 클래스는 두 개였다.
별의 계승자, 그리고 지고의 검성.
한데, 그 두 가지 클래스가 사라지고 난데없이 '또 다른 멸망'이라는 이름이 나타난 것이다.
'또 다른 멸망······ 또 다른 란돌프의 영향인가?'
클래스가 변형, 혹은 진화한 것인지.
하지만 기존의 클래스가 변형과 진화를 거듭한들 '또 다른 멸망'으로 완성되진 않을 것 같았다.
이유가 있다면 분명 '또 다른 란돌프'의 영향이리라.
진리의 문에 갇힌 '또 다른 란돌프'는 '천상'과 연결되어버렸다.
하마터면 멸망의 자아가 될 뻔 했으니, 관련된 클래스가 추가된 것일 터.
'······ 그래도 아이러니하군.'
솔직히 골때리는 상황이었다.
멸망이 되려는 걸 막았더니, 또 다른 멸망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아직 모든 게 끝난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박현명'의 2차 탈피가 완료되었습니다."
"'란돌프'의 2차 탈피가 완료되었습니다."
"클래스가 진화하고 추가됩니다."
"'박현명'에게 '별의 군주' 클래스가 추가되었습니다."
"'란돌프'에게 '원시 천마' 클래스가 추가되었습니다."
다시금 떠오른 메시지들.
이제야 비로소 탈피가 완전하게 끝났다는 내용!
'별의 군주, 원시 천마?'
별의 계승자 수준을 넘어 아예 별을 다스리는 군주가 되었다.
나, 박현명이.
란돌프에겐 '원시 천마'라 불리는, 원형의 천마가 클래스로서 주어졌다.
상상조차 못한 일.
그러나 본 순간 어느정도 납득은 되었다.
'성향이 분리되었군.'
빛과 어둠.
박현명은 빛의 성향으로, 란돌프는 어둠의 성향으로 분리된 것이다.
서로가 갖고 있던 혼돈의 기운들이 마침내 제자리로 돌아간 셈이다.
나와 란돌프는 경험을 공유하지만, 이 극의 성향만큼은 공유할 수 없다.
혼란과 혼돈이 가져다주는 현상을 직접 겪지 않았나.
'혼돈은 틈을 만든다. 그 틈을 없앤 거다.'
나뉨으로써 얻게 되는 첫 번째 이점.
이번 투신의 탑에서 일어난 일과 같은 일들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것.
완전무결한 성향은 다른 것들이 개입할 여지를 주지 않는다.
설령 주신이라 할지라도 마찬가지다.
흉과 재의 신과 같은 주신들이 내 몸에 영향을 끼칠 수 없게 된다.
'또 다른 란돌프도 결국 혼돈에서 탄생한 자아이니.'
마찬가지로 '또 다른 란돌프', 혹은 '또 다른 박현명'이 나타날 일도 없을 터였다.
혼돈에서 파생된 자아는 파멸을 불러오기 마련이었다.
'주신, 혹은 천상의 개입 전부를 막는다.'
그런고로 성향의 분리는 반드시 진행해야하는 일이었다.
지금까지는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서 놔뒀을뿐.
천지개벽의 깨달음, 그리고 빌헬름의 도움이 없었다면 여전히 나는 혼돈 상태였을 것이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말이다.
'··· 극의를 본다. 볼 수 있다.'
또한, 이점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극의로 향하는 길이 보다 단순해진 탓이다.
계단으로 치면 그동안은 너무 중구난방이었다.
극의로 향하는 계단은 특히 멀리 떨어져 있어서, 내딛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마침내 일직선으로 계단이 정리되었다.
그저 내딛기만 하면 된다.
천천히 나 자신을 믿고 나아가기만 하면 된다는 소리다.
"피곤하면 조금 더 쉴 테냐?"
"······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라이가의 물음에 현실로 돌아왔다.
지금 나는 '아드리움의 현'이었으니까.
"왜 제가 이곳에 있는 겁니까?"
"기억이 안 나나? 탑의 입구에서 기절해 있었다."
탑의 입구에서?
내심 고개를 갸웃했다.정상을 정복하고 입구로 튕겨나간 건지.
이자벨라와 세렝게티, 그리고 다른 이들은 그럼 어떻게 된 걸까.
"내일 시상식이 진행될 예정이다. 그때까지 몸을 조금 더 회복하도록."
라이가가 천천히 등을 돌렸다.
나는 그런 그를 향해 말했다.
"생사경의 나머지 부분은 말 안해도 되는 겁니까?"
"······."
우뚝!
말이 끝나기 무섭게, 라이가의 동작이 정지했다.
대회의 마지막 시험.
생사경을 읽고, 익히는 내용이었으나 결국 책은 반쪽짜리였다.
하지만 생사경의 소실된 부분을 나는 알고 있었다.
팔가의 비원을 이뤄줄 유일한 존재가 나라는 뜻.
"······ 괜찮다."
허나 라이가는 방을 떠나갔다.
관심이 없다면 거짓일 터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심을 접었다.
어째서?
'이제야 죽음이 와 닿는 것이겠지.'
라이가의 상태는 최악이었다.
당장 죽어도 이상할 게 없을 정도였다.
가뜩이나 상태가 안 좋았는데, 빌헬름과 대결하며 더 상태가 악화된 것이리라.
제국 최강이자 인류 최강이라 불리었던 남자치고는 초라한 뒷모습.
허나, 절대로 그가 약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빌헬름이 너무 강했을 뿐이지.'
라이가는 강하다.
태고의 존재들, 심연의 주인들과 대결해도 밀리지 않을만큼.
그저 상대가 나빴을뿐.
그들보다 빌헬름은 더 강했고,
또 다른 란돌프도 마찬가지였으니까.
'계속된 패배와 확정된 죽음이라······.'
하지만 연달은 패배와 죽음의 공포가 라이가의 정신을 짓누른 것일는지.
작게 혀를 차고 말았다.
그렇다고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없다.
라이가의 죽음은 말 그대로 확정적이었으므로.
그나마 '가라앉은 황제'에게서 가능성을 보긴 했으나, 그를 찾는 일은 해변에서 바늘을 찾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었다.
본인에게 살려는 의지조차 없다면 더욱이 가능성은 희박하다.
하여 아쉬울 따름이었다.
라이가는 분명히 판게니아에서 억제기 역할을 하고 있었다.
사신교를 견제하고, 나름 인류 평화에 이바지하고 있는 게다.
무엇보다.
'······ 심검.'
비록 완성한 것은 아니나, 심검(心劍)의 경지에 스스로 올라섰다.
빌헬름과는 전혀 다른 결이다.
빌헬름 또한 심검지경에 이르긴 했으나 그의 심검은 상대의 힘을 역이용하는 것에 치중되어 있었다.
방어에 가깝다.
반대로 라이가의 심검은 이름 그대로 검(劍)이다.
오로지 공격일변도인 것이다.
심검을 다루는 의지의 방향이 완전히 반대였다.
'그건 좀 배우고싶은데.'
빌헬름과는 전혀 다른 결의 검이기에 도리어 탐이 난다.
익히고 내 것으로 만들수만 있다면 완벽한 심검을 탄생시킬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더욱 아쉬운 것이다.
라이가가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게.
'우선······ 나부터 좀 살펴봐야겠군.'
한차례 고개를 털어냈다.
지금은 라이가보단 나의 변화에 치중할 때였다.
별의 군주, 그리고 원시 천마.
흉과 재의 장갑에 무슨 옵션이 달렸는지도 제대로 확인을 못했으니.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다시금 상태창을 살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확인했을 때.
"······ 허허."
또 다시 어이가 없어서 웃고 말았다.
*
라이가는 확신했다.
하루가 다르게 자신은 죽어가고 있다는 걸.
자신의 생명이 채 한 달이 남지 않았음을.
무의 극의를 보았고 전율하며 자신 또한 닿기를 욕망했으나.
결국 모든 게 부질없음이라.
어차피 죽는다.
특히 마지막에 빌헬름이 보여주었던 검.
'닿지 못한다. 내 재능으로는 닿을 수 없다.'
그 검이, 단 한 번의 휘두름이 그를 절망의 구렁텅이로 처박아넣었다.
절대로 닿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깊은 절망감이 몰려왔다.
이해조차 못했으니까.
탑을 오를 때의 빌헬름은 이해가 되었으나, 그가 마지막에 휘두른 그 검만큼은 아예 알 수가 없었다.
말인 즉슨.
······ 차원이 다를 정도로 라이가와 빌헬름 사이에 간극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빌헬름의 격이, 검에 대한 조예가.
자신을 압도적으로 넘어선다는 뜻이었다.
하여, 생사경의 나머지 반쪽도 알려고 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가 알아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나.
이제 곧 죽음 사람일진대.
"대회의 우승자는 '아드리움의 현'이다."
짝짝짝!
라이가가 박수로 아드리움의 현을 맞이했다.
하지만 환호성은 적었다.
"이 불신한 놈들! 다들 환호하지 않고 뭣들 하는 거냐!"
딱 한 명.
여신교 추기경의 아들, 아론을 제외하곤.
어쩔 수 없다.
제대로된 배경조차 없는 남자의 승리를 축하해줄 이는 어디에도 없는 게 당연했다.
게다가 이곳은 제국이고, 우승자가 여신교의 텃밭에서 나온 인물이라면 더더욱 싸늘한 여론이 형성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시상식은 빠르게 종료됐다.
우승자에겐 약속대로 '빛의 길'과 '거룩한 길'이 지급되었다.
······ 살아생전 빌헬름이 사용했던 장비가.
또한, 아드리움의 현을 '제자'로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전처럼 마음이 들뜨긴커녕 차갑게 식어버렸다.
팔가의 후계자를 정하는 일임에도.
'그래봤자 닿을 수 없을 테니.'
아무리 재능이 넘쳐 흐른다고 한들, 그래봤자 빌헬름을 뛰어넘진 못할 테니까.
*
"······ 미친 거 아닌가?"
"선을 넘었군."
"설마설마 했건만······!"
제국의 심장, 황궁으로 사신교의 간부들이 모여들었다.
한창 '황금의 정령왕'을 찾아 헤메던 이들이 모인 까닭은 다름아닌 시상식 때문이다.
라이가가 진짜로 여신교의 성도에서 온 자를 우승자로 점지했기 때문이다.
선을 넘었다.
그냥 넘은 게 아니라, 선 자체를 박살낸 것과 다를 게 없다.
"이대로 가만히 있을 생각인가, 황금가면?"
"······."
그들의 중심에서 황금가면은 침묵했다.
대회를 여는 조건으로 '탐욕의 심장'을 라이가에게 받기는 했으나, 그 역시 이번 결과는 의외였다.
라이가가 정말 제국의 사람이 아닌 다른 자를, 심지어 여신교의 텃밭에서 나고 자란 남자를 선택할 줄이야.
그때 사자탈을 쓴 남자가 말했다.
"아드리움의 현에 대해 조사해봤다. 그런데 마치 허공에서 솟아난 자 같더군."
신원이 확인되지 않는다.
그가 가진 정보력으로도 알 수 없다면 정말로 그렇다는 말이다.
"제대로된 신원조차 없는 자라니?"
"설마 노예라고?"
그런 경우는 대부분 한 가지뿐이었다.
신분이 없는 노예라는 것.
당연히 그들로선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 동병상련이라도 느낀 건가?"
"미치겠군. 노예라니."
"'팔가'가 또······!"
팔가의 전대 주인이 라이가를 데려와 후계자로 낙인했을 때도 한차례 피바람이 불었다.
전대 팔가의 주인은 라이가에 대해 불신하는 가신들을 모조리 숙청했다.
심지어 자신을 따르던 기사들마저도.
그래서 사신교는 별 말을 하지 않았다.
제알아서 팔가가 손과 발을 자르는데 굳이 의견을 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전대 팔가의 주인이 죽은 뒤에는 라이가를 사지로 몰아넣었다.
심연의 탐색과 같은 일들만 주구장창 시켰다.
나중에야 라이가가 진정 사자새끼였다는 게 밝혀지긴 했으나, 깨달았을 땐 이미 늦었고.
"이번에는 안 된다."
"싹을 잘라내야 해!"
간부들의 원성이 높아졌다.
노예가 같은 황궁에서 숨을 쉬는 것도 한 번이면 족하다.
라이가 때에는 방관했으나 두 번 다시 같은 일을 겪을 순 없었다.
"······ 당장은 놔두도록하지."
하지만, 그러한 원성 속에서 황금가면이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그러자 주변이 더욱 소란스러워졌다.
"라이가와 무슨 거래를 한 거냐?"
"황금가면. 설마 라이가와 그새 정이라도 든 건가?"
거래를 하긴했다.
하지만,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황금가면이 입을 열었다.
"머지않아, 라이가는 죽는다."
"······ 연기일 수도 있지 않나?"
"아니, 확실하다. 라이가는 죽는다. 곧."
황금가면의 확신에 좌중이 순간 조용해졌다.
라이가의 죽음.
팔가의 힘에 공백이 생긴다는 것.
황금가면이 계속해서 말했다.
"길어봐야 한 달이다. 그 안에 힘을 계승한들 한계가 있다. 아드리움의 현은 그 뒤에 처리해도 늦지 않다는 것이다. 구태여 라이가를 건드려 팔가의 세력이 들고 일어날 빌미를 줄 필요는 없지 않나?"
팔가의 세력.
팔가는 단순히 기사단과 라이가만으로 존재하는 집단이 아니다.
그 뒤에 팔가의 진짜 가문이, 세력이 있다.
세상 밖으로는 잘 나오지 않지만, 분명하게 존재하고 있는 괴물들이 있다.
천하의 라이가조차도 그들에게 완전히 인정받진 못했다.
하물며 '아드리움의 현'이 인정받으리란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생각을 정리한 황금가면이 재차 강조했다.
"놔두면 알아서 자멸할 것이다. 라이가도, '아드리움의 현'도. 그러니 놔두도록."
명예의 전당
투신의 탑.
모두에게 절망을 선사했던 그곳의 시련이 종료됨과 동시에.
사람들은, 특히 플레이어들은 크게 당혹할 수밖에 없었다.
"며, 명예의 전당에······!"
"한꺼번에 대체 몇 개가 업데이트 된 거야?"
"내 눈이 잘못 된 건 아니지?"
메인퀘스트를 어떻게 해결하냐에 따라 점수를 책정하고 순위를 매기는 명예의 전당.
그곳이 큰 폭으로 요동친 탓이다.
그것도 한, 두 개가 아니었다.
동시다발적으로 메인퀘스트가 완료되며, 마찬가지로 여러 전당의 목록이 바뀌었다.
여태껏 단 한 번도 없었던 이례적인 일.
갑작스럽게 몇 개의 목록이 '업데이트'된 건 처음이다.
하물며 그곳에 올라간 이름은 그들에게 보다 큰 충격을 선사했다.
"빌헬름이 왜 전당에있어?!"
······ 빌헬름이 명예의 전당에 올라가 있었기 때문이다.
"'메인퀘스트 1 - 생존'의 순위가 업데이트됩니다."
······.
500점.
감히 비교조차 불가할 정도의 압도적인 점수차이.
보고도 믿을 수가 없을 지경의 점수였다.
허나,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빌헬름의 이름은 그 뒤로도 계속해서 등장했다.
"'메인 퀘스트 2, 클래스 얻기'의 순위가 업데이트됩니다."
······.
"'메인 퀘스트 3, 탑 오르기'의 순위가 업데이트됩니다."
······.
메인퀘스트 1, '생존'에서부터.
현존하는 모든 '명예의 전당'에 그의 이름이 등장한 것이다.
빌헬름이 겪었던 모든 업적들이 점수화하며 박제라도 된 듯이.
"이게 말이 돼?"
"그럼 빌헬름이 플레이어라는 말이야?"
모두가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본래 '명예의 전당'은 플레이어의 특혜와도 같다.
오직 플레이어만 등록되며 서로가 자웅을 겨루는 곳이었다.
당연히 플레이어가 아닌 존재가 이름을 올린 적은 없었다.
그렇다면, 빌헬름은 플레이어란 말인가?
허나 플레이어였다면 진즉에 전당에 이름이 올라갔을 일.
느닷없이 업데이트 되듯 추가된 이유가 분명히 있을 터.
그제야 사람들은 명확한 까닭을 알 수가 있었다.
"자세히 봐봐. 빌헬름만이 아니야."
"······ 그러네. 빌헬름 외에도 처음보는 이름이 많아."
"뭐가 어떻게 된 거지?"
빌헬름의 이름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와서 착각했을 뿐.
명예의 전당에 추가된 이름은 빌헬름만이 아니다.
처음보는, 혹은 무언가 익숙하지만 생소한 이름들이 놓여있었다.
한참이나 전당을 살피던 플레이어 중 몇몇은 뒤늦게야 그 이름들의 정체에 대해 깨달을 수 있었다.
"······ 아니, 미친! 내가 키웠던 부캐잖아?"
"부캐들이 전당에 추가됐다고?"
바로 부캐릭터들.
그들이 플레이어가 되기 전 육성했던 캐릭터들의 이름이었다.
부캐릭터들 역시도 게임에서 같은 메인 퀘스트를 완료했으니, 자연스럽게 전당에 이름이 업데이트 된 게 크게 이상할 일은 아니지만.
더 이상 '명예의 전당'이 플레이어만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게 가장 큰 문제다.
자신이 예전에 키웠던, 그러나 이제는 그들의 손에서 벗어나 자유를 되찾은 판게니아의 인간들.
말 그대로 '신병'에 걸렸던 캐릭터들이 그들과 함께 경쟁하게 된 것이다.
"그럼 부캐들도 시스템을 이용할 수 있는 건가?"
"황금률 상점이나 업적 상점 같은 것들도?"
"······ 만약 그렇다면, 큰일 아니야?"
플레이어는 판게니아에서 '죄인'이다.
플레이어가 게임에서 육성했던 부캐릭터들은 '신병'에 걸려, 그들이 플레이했던 시간 동안 기억을 잃는다는 게 어느정도 알려진 상태.
뿐만인가.
'신병'이 걸렸던 그들은 자신을 조종했던 플레이어를 증오한다.
하지만 초월하지 않는 이상 찾을 수 없고, 초월해봤자 단편적인 정보만 알 수 있으니 복수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말 그대로 '부캐릭터'인지라 플레이어에게 위협을 가할 정도로 강한 경우가 적기도 했고.
그런데, 이제는 아니다.
진정으로 부캐릭터들이 시스템의 대열에 합류했다면.
전부가 아니더라도, 명예의 전당 등에서 이점만을 취할 수만 있다면!
······ 그렇다면, 부캐릭터들은 훨씬 더 빠르게 강해질 것이다.
지금만 하더라도 그간 밀려두었던 보상을 한꺼번에 습득할 수 있을 터.
사람들은 당황했다.
하나부터 열까지 당혹스럽지 않은 게 없었다.
하물며.
"박현명······ 이놈은 대체 뭐야?"
"······ 그러니까. 빌헬름과 맞먹는 점수들이잖아."
"어디서 뭘 하고 다니길래?"
"투신의 탑을 오른 건 맞겠지?"
"메인퀘스트 5까지 한번에 전부 클리어했다고?"
빌헬름의 등장이 충격적이라 잠시 뒤로 밀어졌지만.
박현명의 이름 또한 빌헬름과 동급이거나 혹은 바짝 추격하는 형태로 명예의 전당에 등장하고 있었다.
"빌헬름이 등장하고, 란돌프는 아직 살아있다······."
"둘 다 살아있는 거겠지? 명예의 전당은 살아있는 자들만 나타내잖아."
"그래도 이미 그 둘은 우리 손을 벗어났어."
명예의 전당은 '살아있는' 플레이어만 이름을 비추게 만들었다.
란돌프와 빌헬름의 이름도 여전히 등록된 상태였다.
둘 다 살아있다는 방증이다.
하지만 그 둘은 이미 플레이어의 영역을 벗어나, 신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남은 건 한 명.
그들의 손에 그나마 닿을 수 있는 존재는.
"박현명을 찾아!"
"당장 박현명을 찾아와!"
······ 박현명 뿐이었다.
사람들은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금쯤이라면 분명히 지구 어딘가에 있을 테니까.
*
"지금부터 병기술의 기초를 알려줄 것이다."
제국의 넓은 연무장.
창을 쥔 라이가가 우뚝 선 채 말했다.
여전히 병들어보이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래도 그의 상태는 감히 범인(凡人)에 비할 바는 아니다.
쉬익!
창대가 허공을 꿰뚫는다.
공기의 저항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빠른 속도.
"만병지왕. 모든 병기의 왕은 검이라 하지만, 그건 틀린 말이다. 창이야말로 가장 다루기 쉬우며 강력한 무기이니."
"그럼 왜 검을 다루시는 겁니까?"
"결국 그 끝에 검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 너에겐 요원한 경지이니 우선 창술부터 갈고 닦도록."
라이가가 연무장의 끝에 진열된 무기들을 힐끗 바라보았다.
알아서 가져오라는 뜻이다.
큰 기대 없는 눈빛.
정식적으로 사제의 연을 맺은 것조차 아니었다.
그보단 내 재능을 더 보겠다는 의도가 강했다.
제대로된 대회의 진행이 불가능했던 터라, 어쩔 수 없이 우승자로 점찍긴 했지만 아직 확신이 없는 것이다.
게다가 현재의 라이가에겐 아무런 빛도 없는 상태였다.
하루하루를 죽음만 기다리고 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진열장에서 창 한 자루를 가져왔다.
'라이가의 제자 타이틀이 필요하니 어쩔 수 없지.'
여신교의 성지인 아드리움에 가서 소노라의 신병을 확보하고, 롱기누스의 창의 남은 파편을 가지려면 보다 확실한 신분이 필요했다.
란돌프로 변신한 채 아드리움에 들어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란돌프는 완전한 악성향이 됐다. 란돌프인 상태로 들어갔다간 결계에 걸려 발각돼.'
여신의 결계에 걸려 발각당할 터.
라이가의 제자라는 신분이 필요한 이유였다.
물론, 그러한 이유만으로 이곳에 남은 건 아니지만.
'팔가의 힘. 오문의 개방도 결국 자연재생력과 관계가 있지 않을까?'
······ 궁금했던 것이다.
팔가의 비기, 라이가가 한순간 태고의 존재들조차 압도했던 힘의 근간.
오문개방에 관하여.
오문을 개방한다고 즉사하는 게 아니라면, '자연재생력'에 의해 생명을 연장할 수 있지 않을까?
생명을 잃어가는 속도보다 재생의 능력이 더 높다면 '오문'을 개방하고서도 살 수 있지 않을까?
라이가의 검을 익히고 싶은 마음도 굴뚝같지만······ 사실상 가장 궁금한 건 팔가의 비기에 관한 것이었다.
하여, 남았다.
굳이 남지 않을 이유가 없었으므로.
물론, 그 외에도 여러 이유가 있었다.
예컨대······.
'··· 빌헬름의 신분은 황자였다.'
이곳, 제국의 황자였다.
그러나 가짜로 취급되어 쫓겨났다.
이곳 어딘가에 빌헬름의 얼굴을 한 자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건 아마도.
'사신교 간부 중 누군가가 빌헬름의 신분을 대신하고 있다.'
이 제국에 대해 더 깊게 파고들 필요가 있을 듯싶었다.
쫓겨난 황자와, 그 자리를 차지한 가짜.
가짜의 탄생과 종국적인 음모, 계략에 관하여.
제국에는 깊은 어둠이 있다.
아직 내가 알지 못하는 그 어둠을 파고들어, 빌헬름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볼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라이가의 제자 타이틀은 반드시 필요하다.
"창만이 아닌 모든 병기술을 익히게 될 것이다. 쉽지 않을 터이니, 포기하려면 포기하도록."
"포기하지 않을겁니다."
"흠. 자신감은 나쁘지 않군. 그럼 따라해봐라."
쉬익!
천천히, 라이가가 창을 찔러넣었다.
간단하기 그지없는 동작이지만 라이가의 창은 공기와 바람의 결을 정확하게 읽고 꿰뚫었다.
저 원리를 따라하라는 것이다.
창의 달인도 힘들어할 완벽한 타이밍을, 이제 막 창을 쥔 사람이 따라할 수 있을 턱이 없는데도.
후우웁.
나는 숨을 삼키며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쉬익!
*
라이가는 고민하고 있었다.
이대로 자신의 대에서 '팔가'를 끝내는 것에 관하여.
'제대로 계승하지 못할 바엔, 끝내는 게 맞지 않겠나.'
팔가의 숙명은 황제를 보필하는 것.
오로지 황제만을 위해 존재하는 게 '팔가'다.
하지만 오랜시간 황제는 잠들었고, '팔가'의 쓰임 역시 모호해졌다.
황제가 잠들어있으니 진정한 팔가의 세력들도 앞에 나서지 않는다.
오직 라이가만이 현장에서 움직일 따름이다.
노예의 신분이었던.
그리하여 제대로된 인정을 받지 못했던 라이가만이.
그에 대한 깊은 회의감이 있었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내가 팔가의 후계자가 되었을 땐 피바람이 불었지.'
전대 팔가의 주인.
그의 스승이었던 남자.
그가 라이가를 후계자로 만들고자 팔가를 봉문한 것이다.
계승자와 전쟁을 치룰 수 없었던 팔가의 세력은 더욱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고, 이제는 아예 모습조차 비추지 않는다.
'나는 이놈을 위해 그런 선택을 할 수 있는가?'
내심 고개를 저었다.
전대 팔가의 주인, 자신의 스승과 같은 용단을 내릴 수 없을 것 같다.
피바람을 몰고서라도 반드시 후계자로 만들겠다는 의지.
그러기엔 아무런 정도, 욕심도 안 났으니까.
그러나 정식제자로 받아들이려면 팔가의 승인이 필요하다.
규율이 그랬다.
그러니 이놈을 봉문한 팔가로 데려가 승인을 받으려거든 그에게도 확신이 있어야 했다.
또한, 어느정도 망설여지는 게 사실이었다.
어차피 그는 죽어가고 있었으니.
'···어정쩡한 자세로군.'
라이가는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창을 쥔 꼬락서니가 정말 처음으로 창을 쥔 사람같았다.
그저 단순하게 휘두를 생각밖에 없는 것 같았다.
아무런 기대없이, 라이가는 녀석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쉬익!
창이, 휘둘러졌다.
자세와 마찬가지로 아무렇게나 휘둘러진 창.
"······."
하지만, 라이가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 정확했기 때문이다.
바람의 결을 읽고 내지른 창의 일격이.
너무나도 부드럽게 저항 없이 뻗어나간 창의 간격이.
하지만 무기에 따라 모든 쓰임은 달라지기 마련이다.
검을 익혔다고 창의 타이밍을 완벽하게 알 순 없었다.
한데, 단순히 그 정도가 아니었다.
지금 휘둘러진 창에 담긴 묘리는.
"··· 누군가에게서 창을 배운 적이 있느냐?"
"없습니다."
"······ 다음은 '도'다."
라이가는 진열장에서 검이 아닌 도를 가져왔다.
도(刀).
한쪽만 검신이 날카롭게 갈려진 무기.
양쪽 면으로 벨 수 있는 검과는 다르다.
비슷하게 생겼지만, 절삭력을 극대화한 무기가 도였다.
스윽!
무겁게 내리긋는다.
가볍게 움직인 창과 달리 무겁게 바람을 베었다.
그러자 바람의 결이 달라졌다.
더욱 고난도의 기술.
마찬가지로 창을 잘 다룬다고 도를 잘 다룰 수는 없다.
아드리움의 현.
진열장에서 도 한 자루를 가져온 녀석이.
스윽!
그것을 휘둘러, 바람을 베었다.
한데,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
······ 바람만 벤 게 아니다.
라이가의 두 눈동자가 거칠게 떨렸다.
지금, 이놈은.
'······ 나를 베었다.'
순간적으로 라이가를 베었다.
라이가가 베었던 바람의 결을 찾아내 정확하게 등분해버린 것이다.
이는 단순히 바람을 베는 걸 넘어, 몇 차원이나 더 어려운 기술이었다.
그걸 감각적으로, 본능적으로 해낸 것이다.
하지만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동작을 그저 한 번 보고 파악하며 한 발자국 더 나아갔다고?
만약 그렇다면, 그건.
'······ 어이가 없군.'
······ 자신의 재능을 뛰어넘는다는 뜻이었으므로.
또 다른 멸망
병기.
병기란 무릇 용도에 따라 쓰임이 다르다.
하물며 같은 병기라 할지라도 만들어낸 장인에 따라 약간씩 사용을 다르게 해야한다.
예컨대 검을 쥔 자가 있다고 치자.
그는 검의 달인이다.
그러나 평소에 사용하던 검이 아닌 다른 검을 쓰게 된다면, 당연히 처음부터 달인의 면모를 보일 수는 없을 것이다.
아무리 달인이라 할지라도, 같은 검을 사용한다 하더라도 모든 검이 같은 검은 아니기 때문이다.
길이, 검신의 폭, 손잡이의 모양새 따위가 전부 다르기 마련이었다.
'분명히 처음 쥐었을 터인데.'
이곳 연무장의 무기가 그렇다.
모두 다르다.
같은 규격의 무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완벽한 자세를 이끌어내고자 중구난방으로 만들어놓은 것들.
처음 쥐었다면 적응하는 것조차 쉽지 않을 터.
'그런데도 완벽한 자세와 쓰임을 이끌어냈다······.'
바람을 베었다.
라이가가 베었던 바람을 찾아내, 그 결을 베어냈다.
찰나와 같은 순간, 완벽한 틈을 노리고.
무기를 자신의 손과 발처럼 사용해야만 가능한 일.
당연히 처음 쥔 무기로 그렇게 행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재능인가?'
재능(才能).
재능이란 무엇인가.
타고난 것. 하늘이 준 선물.
다른 이보다 능하며 잘하는 것.
여러 가지 견해가 있으나 재능이란 결국 갈고, 닦을 수 있는 기술의 총아다.
전부다.
노력이 중요하다는 말도 있지만 라이가가 보기에 노력 역시 재능이었다.
고로, 모든 일을 능률적으로 잘하기 위해선 재능이 필요하며, 자신의 적성에 맞는 재능을 빠르게 찾는 자가 성공하는 법이었다.
처음부터 완성된 것을 '재능'으로 치부하진 않는다.
그러할진대.
'완성되었다······.'
라이가가 본 아드리움의 현은 완성되어 있었다.
창을 찌르고 도로 베어내는 일련의 과정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다.
적어도 자신이 선보인 자세 그 이상을 해냈다.
기초는 완벽했다.
흠잡을 데 없이.
'투신의 탑에서 보았을 땐 이 정도는 아니었거늘.'
그러나 투신의 탑에서 진행한 대회에서 본 현은 이 정도는 아니었다.
낮은 레벨에 비교해 강하긴 했으나, 지금 선보인 기술은 단순히 '강하다'는 영역에서 말할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 뭔가가 달라졌군.'
탑을 오르며 변화가 있었던 게 틀림없다.
그제야 라이가의 시선이 현의 육체로 닿았다.
'미세하지만 근육의 조형 따위가 전체적으로 바뀌었다. 균형미 있게, 더 많은 힘을 저장할 수 있는 형태로. 얼굴도 한층 날렵해진 것 같은데······.'
묘한 일이었다.
근육이 완벽한 대칭을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인간의 몸은 결코 대칭을 이룰 수 없다.
무의식 속 습관 등에 의해 몸은 비대칭하기 마련이었으므로.
아무리 경지가 드높고, 벽을 부순 천외천의 인간이라 할지라도 완벽하게 균형잡힌 몸은 결코 만들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아드리움의 현은 다르다.
놈의 몸은 완전한 대칭이다.
양쪽 근육 전부 모자라고 더 나은 부분이 없다.
라이가의 눈썰미로 한참을 살펴보아도 마찬가지였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게다가 현의 얼굴은 한층 더 날렵해지고, 피부가 매끈해졌다.
피부에 한점 티가 없었다.
한 마디로 잘생긴 게다.
'하녀들이 흘끗흘끗 쳐다본 게 내가 아니라 이놈이었나.'
연무장에 오기 전의 상황을 떠올려본다.
그러고보니, 지나가는 하녀들이 흘끗흘끗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이 있었다.
그게 라이가 자신이 아니라 이놈 현이었나보다.
"누구에게 배웠지?"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자 아드리움의 현이 답했다.
"······ 가족이자, 친구이자, 스승이었던 자에게 배웠습니다."
그리움이 묻어나는 말.
말 속에 담긴 이별의 어투.
라이가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사람이었나보군."
"예."
"모든 병장기의 쓰임에 대해 배운 건가?"
"그건 아닙니다."
"그럼?"
"오로지 검만을 배웠습니다."
······ 검만 익혔다?
"창과 도는?"
"따로 익히진 않았습니다."
"······."
정말 따로 익히지 않았다고?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는 답이다.
하여, 확인이 필요할 듯했다.
"······ 다음은 활이다."
활은 제법 어려운 기예였다.
배우지 않았다면 따라하는 것조차 벅차리라.
쫘아악.
활을 가져온 라이가가 하늘을 향해 활시위를 당겼다.
그리고.
툭!
쉬이이잉!
허공을 가르고 날아간 화살이.
푹!
라이가의 바로 앞 지면에 박혔다.
조금만 더 가까웠다면 그대로 머리가 꿰뚫렸을 수준으로 가까운 거리.
"한 번 해보거라."
라이가가 쓰던 활을 넘겼다.
그것을 받아든 현은 어렵지 않게 자세를 취했고.
쉬이잉!
푹!
······ 라이가와 마찬가지로, 정확히 바로앞에 화살이 꽂혔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다르다.
라이가는 자신의 발 앞쪽에 화살이 꽂혔으나.
현의 화살은 발 사이에 꽂혔다.
하늘을 향해 쏘았다면 절대로 꽂힐 수 없는 각도다.
라이가보다 가까운 수준이 아니라, 일반적으로는 불가한 각도다.
라이가의 두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바람을 읽었나? 아니······ 바람을 예측한 건가?"
"예."
"이조차 안 배웠다고?"
"활은 몇 번 써본 적이 있습니다."
······ 몇 번 써본 솜씨가 아니다.
하늘을 향해 쏜 화살.
그리고 화살이 수직으로 떨어질 때 불 바람의 강도를 예측해서 쏘아냈다는 뜻이다.
이는 평생을 연마한 궁수도 흉내내지 못할 기술이었다.
나중에 불 바람을 예상한다는 건 일반적인 인간은 할 수 없는 일이니까.
그뿐만이 아니다.
도끼도, 단검도, 곤봉도, 그 외의 모든 것들을.
현은 현존하는 모든 무기를 완벽한 수준으로 펼쳐냈다.
결국, 라이가는 항복을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팔가를 계승하려면 먼저 배워야하는 모든 병장기술.
그걸 따로 가르칠 필요가 없다는 걸.
"······ 검을 쥐어보거라."
그러나 마지막 확인은 남아있었다.
오로지 검만을 배웠다면, 과연 그 검을 어떻게 쓰는지 봐야겠다.
*
늦은 저녁.
팔가의 언덕.
전대 팔가의 주인들이 묻혀있는, 황궁 내에 존재하는 비밀의 장소.
그곳의 신록 밑에 놓인 무덤들을 바라보며 라이가가 말했다.
"위대한 팔가의 주인들을 뵙습니다."
고개를 숙이며 예를 갖춘 라이가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 저는 이제 곧 죽습니다."
무덤덤하게 죽음을 꺼냈다.
머지않아 이곳에 함께 묻히게 될 것이라고.
"팔가의 비원, 오문의 죽음을 이 못난 놈은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물론, 아무도 극복하지 못했다.
초대 팔가의 주인조차도 오문을 개방한 끝에 죽었다고 전해진다.
라이가 자신은 다를 줄 알았으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자신도 다를 게 없다.
최고라고 믿고, 최강이라 자부했으나.
··· 라이가는 가장 마지막에 놓인 무덤을 바라보았다.
전대 팔가의 주인이자 그의 스승이었던 남자의 무덤을.
"스승님께선 항상 말씀하셨지요. 무신의 그릇을 찾아야만 된다고."
라이가는 눈을 감았다.
자신도 무신의 그릇은 아니었던 게다.
팔가의 반대를 무릅쓰고 들여온 그도 비원을 달성하지 못했다.
이윽고, 라이가가 천천히 눈을 떴다.
"찾았습니다, 스승님."
그의 눈에는 더 이상 울적함과 슬픔이 담겨있지 않았다.
마침내 찾았으니까.
무신의 그릇을.
무신 그 자체인 놈을!
하지만, 라이가는 주먹을 쥐어보였다.
너무나도 기쁘다.
한데, 마냥 기뻐할 수가 없다.
자신보다 뛰어난 놈을 발견해서?
아니다.
이미 라이가는 내려놓았다.
자신이 최강이 아니라는 걸, 세상은 넓다는 걸 깨달았다.
빌헬름도, 란돌프도, 어쩌면 그 외의 또 다른 하늘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걸 마음 한켠에서 인정하고 있었다.
그저.
"······ 그래서 아쉽습니다. 죽어야만 한다는 게."
······ 아쉬운 것이다.
이대로 죽어야 하는 게.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고 떠나야하는 것을.
"스승님께선 저를 들이시고자 팔가를 봉문하셨지요. 모든 반대하는 자들의 목을 베어서라도, 그리하여 지탄받고 고립되는 한이 있더라도, 오직 저를 위해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건 엄청난 희생이었다.
가족을, 친구를, 모든 연을 끊어버리며 라이가 하나만을 보고 그렇게 한 것이다.
라이가를 팔가의 후계자로 만들고자.
하지만 팔가는 봉문되고, 라이가는 심연을 돌았다.
······ 인정받기 위해서.
제국을 위해 자신이 헌신하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게 아니라면 라이가는 심연이 아니라 세상을 돌았을 것이다.
명예를 떨치고, 유일무이한 기사왕으로 자리잡으며, 어쩌면 대원정을 일으켰을지도 모르겠다.
허나 인정받지 못했다.
"인정하게 만들겠습니다. 제가 죽기 전에, 전부 목을 베는 한이 있더라도. 팔가를 처음부터 다시 만드는 한이 있더라도."
의지를 굳힌 채 라이가가 고개를 숙였다.
"'명예의 성소'로 가서, 강제로 절차를 밟겠습니다."
팔가의 공식 후계자가 되었음을 알리는 절차.
팔가가 봉문한 장소이며, 모든 '명예로운 자'들이 모이는 곳.
그는 노예였기 때문에 제대로된 절차를 밟지 못했다.
그리하여 팔가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
노예에겐 명예 따윈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허나, 앞으로는 아니다.
그곳에서 강제로 절차를 밟겠다.
남이 뭐라고 하든, 이제는 더 이상 상관이 없었으니.
그 순간이었다.
"음······?"
라이가의 표정이 일순간 굳었다.
고오오오오오-
어디선가 느껴지는 거대한 기운.
전율이 일 정도의, 거대한 악!
투신의 탑에서 겪었던 저주보다 더 끔찍했다.
'설마 악신이라도 소환된 건가?'
라이가가 급히 등을 돌려 발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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