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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야의 종

인간은 누구나 살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

그건 류민도 마찬가지다.

'그렇지 않았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지.'

1라운드부터 20라운드까지.

98개의 목숨을 버려가며 아득바득 살아남았다.

그리고 99회차인 지금.

빌어먹을 생존게임의 끝을 보게 됐다.

드디어 마지막 20라운드의 보스룸에 도착한 것이다.

그것도 최후의 1인이 되어.

하지만 일은 생각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보스룸을 열기 위해선 최소 다섯 명의 플레이어가 필요합니다.]

"뭐?"

어이없어서 육성으로 말이 튀어나왔다.

'최소 다섯 명이 필요하다고?'

20라운드까지 온 사람은 류민 혼자였다.

그런데 다섯이 필요하다니.

애당초 혼자서는 깰 수 없는 퀘스트에 류민은 벙찐 표정이 되었다.

'뭐 이런 개 같은 경우가... 다섯 명이 필요한 거였으면 진즉에 말을 하던가!'

퀘스트 메시지에도, 보스룸에 들어오기 전에도 단서가 될 만한 표식은 없었다.

어이없는 조건에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보스룸에 접근한 플레이어가 한 명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조건 미달로 해당 플레이어가 소멸합니다.]

"하?"

허무함을 느낄 새도 없었다.

어느새 몸이 분자 단위로 소멸하고 있었으니까.

죽기 직전 류민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하나였다.

"X발."

[당신은 죽었습니다.]

['시간 역행의 룬'의 조건을 충족하였습니다.]

[1라운드 전으로 시간을 거슬러 갑니다.]

[사용한 기회 : 100/100]

[남은 기회를 전부 사용하였습니다.]

[각인된 룬이 자동으로 소멸합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눈앞에 드리움과 동시에, 류민은 다시 태어났다.

1레벨의 초보 플레이어로.

[100번째 회귀를 시작합니다.]

* * *

2021년 12월 31일.

서울 종로구의 보신각 앞에는 시민이며 기자며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제야의 종소리를 듣기 위해서다.

"희망찬 새해를 맞이하기 위해 많은 시민이 타종행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올해 타종에는 마동원 서울시장과 사회 각 분야의 다양한 인사들이 참여해...."

방송국 카메라까지 돌아가는 그곳에서, 류민은 정신을 차렸다.

'돌아왔다. 이 빌어먹을 게임에 휘말리기 전으로.'

주위를 둘러보니 수많은 사람이 들뜬 얼굴로 자정이 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곧 있으면 기대가 절망으로 뒤바뀔 거라는 것도 모른 채.

'할 수만 있다면 시간을 멈추고 싶다.'

그러나 시간은 흐른다.

행복하든 지겹든, 괴롭고 힘들든 간에 시간은 어쨌거나 흐른다.

아무리 지랄발광을 떨어도 절대로 멈추지 않는다.

'과거로 회귀할 수는 있어도 말이지.'

하지만 그것도 이번으로 끝이다.

여분의 기회는 죽음으로써 모두 써버렸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다. 반드시 20라운드의 보스를 죽이고 이 미친 게임에서 살아남고 말겠어.'

마지막뿐인 기회였지만 희망은 있었다.

보스룸의 입장 조건이 다섯 명이라는 걸 알았으니 이에 맞춰 계획을 세우면 된다.

'그간의 계획을 전면 수정해야겠어.'

그동안은 동료고 나발이고 오직 자신의 생존에만 신경 썼다.

솔직히 다른 사람을 염두에 둘 정신이 없었다.

경쟁에서 뒤처지면 자신이 죽고 마는 생존게임이었으니까.

그 결과 독보적인 힘을 가진 채로 20라운드에 도달했지만.

'어이없게도 최종 라운드에 다섯 명이 필요했다니... 여분의 목숨이 없었다면 나도 얄짤 없이 당할 뻔했잖아?'

알고 보니 혼자서는 깰 수 없는 게임이었다.

류민으로선 신이 만든 의도적인 함정에 농락당했다고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이젠 마지막이야. 회귀도 더 이상 못한다고.'

그동안은 주변을 돌아볼 새가 없었지만, 이제는 아니다.

이전과 달리 자신을 제외한 네 명을 최종 라운드까지 이끌고 가야 한다.

'물론 보모처럼 퍼줄 생각은 없어. 나 하나 강해지기도 벅찬데 무슨.'

단지 마지막 라운드를 위해 이용하겠다는 것뿐이다.

'누구와 함께하는 게 좋을까? 아무래도 보스전이니만큼 능력 있는 아군으로 채우는 게 좋겠지?'

18라운드에서 죽었던 몇몇 네임드들이 떠올랐다.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계획이 그려졌다.

마지막이니만큼 좀 더 신중하고 촘촘하게 계획을 세울 필요가 있었다.

속으로 계획을 점검하며 다짐을 하는 그때.

"드디어 시간이 됐습니다. 다 함께 카운트를 세도록 하겠습니다!"

사회자의 목소리와 함께 죽음의 카운트가 시작됐다.

"20! 19! 18!"

사람들이 기대에 찬 얼굴로 20초부터 세기 시작했고.

"...3, 2, 1!"

제야의 종 앞에 선 서울시장과 여러 유명인사가 당목을 밀며 타종을 거들었다.

대앵- 대앵- 대앵-!

"2022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여러분!"

"와아아아아아!"

환호를 지르는 사람들의 얼굴엔 저마다 웃음꽃이 피어 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킥킥킥. 인간들은 재미있군요. 자신들이 어떤 처지에 있는 줄도 모르고 새해를 축하한다니.]

난데없이 머릿속으로 전해진 목소리에 사람들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뭐야? 방금 무슨 소리가...."

"너 지금 뭐라고 했냐?"

"나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당황해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사람들.

옆에서 말 건 줄 알고 서로를 쳐다보는 사람들.

잘못 들었나 고개를 갸웃하는 사람들까지.

저마다 조금씩 반응은 달랐지만 느끼는 감정은 같았다.

당황.

하지만 그중에서도 오직 한 사람, 류민만큼은 당황하지 않았다.

모든 일이 자신이 아는 상황대로 진행되고 있었으니까.

'이미 99번이나 겪었던 상황이다. 당황할 수가 없지.'

담담한 눈초리로 기다린 끝에 재차 불쾌한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쿄호호호. 당황하는 꼴이 딱 우리에 갇힌 원숭이들 같군요. 아무래도 좋아요.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잖아요?]

"뭐, 뭐야? 이거 어디서 들리는 소리야?"

"방송국에서 장난이라도 치는 건가?"

"야, 말이 되냐? 타종행사에서 몰카를 진행한다고?"

"그럼 이 목소리는 대체 뭔데?"

혼란의 도가니.

고작 목소리만으로도 사람들은 패닉에 빠졌다.

유명인사들은 타종을 치는 것도 잊었다.

아닌 게 아니라 머릿속으로 들리는 음성을 조작으로 치부할 순 없었으니까.

'천사 새끼가 빨리 모습이나 드러낼 것이지. 장난질은.'

말은 천사라고 했지만 하는 짓은 악마다.

류민은 99번의 회귀를 통해 그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고 있었다.

'물론 천사 같은 저급한 년들이 벌이는 짓은 아니겠지만.'

분명히 이 미친 게임의 주최자는 따로 있다.

천사들은 그저 게임을 설명하기 위한 NPC일 뿐이다.

'한낱 게임에 빗대기엔 심각한 상황이지만 말이지.'

잠시 후 하늘에서 찬란한 빛이 내려왔다.

빛과 함께 나타난 여인에 사람들이 하나같이 입을 모아 중얼거렸다.

"천...사?"

한 쌍의 날개와 백옥 같은 피부, 연예인도 질투할 만한 미모 등.

하늘에서 내려온 여인은 사람들이 아는 천사의 모습과 일치했다.

'인성은 악마 그 자체지만.'

오직 류민만이 천사의 겉모습에 현혹되지 않았다.

다른 사람도 곧 있으면 알게 될 거다.

천사가 얼마나 인간들을 무시하는지.

[쓰레기 같은 인간들. 하나같이 제 외모에 반했나 보군요. 다들 멍청하게 쳐다보는 걸 보니.]

"...."

[허튼 생각은 품지 않는 게 좋아요. 버러지 같은 인간들과는 어울려줄 생각이 없으니까요.]

씨익 웃는 천사의 미소는 아름다웠지만, 사람들은 마냥 웃을 수 없었다.

욕을 처먹고도 웃음이 나올 리가 없지 않은가?

[하나같이 정색하는 걸 보니 제 목소리가 제대로 전달되고 있나 보네요. 킥킥킥.]

그때였다.

한 용감한 청년이 큰소리로 모든 사람이 궁금해하는 질문을 던졌다.

"넌 정체가 뭐야? 천사야? 나한테 말 걸고 있는 게 너야?"

천사의 시선이 청년에게 닿았다.

그 모습을 류민이 안타까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천사의 심기를 거스른 청년은 곧 죽는다.

[짜증 나네요.]

바로 지금.

퍼억-!

청년의 머리가 수박처럼 터졌다.

피가 사방으로 튀기자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놀라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악!"

"허억!"

오직 천사만이 고운 미간에 짜증스러운 주름을 만든다.

[하찮은 인간 주제에 감히 고등한 내게 반말로 지껄이다니. 불쾌하네요.]

이미 죽어서 듣지도 못하지만 천사는 계속해서 불만을 토로했다.

[그리고 누가 질문해도 좋다고 했죠? 너희 인간들은 나한테 물을 자격이 없어요. 건방지게 맞먹으려 들지 마세요. 저 인간처럼 머리가 터져 죽고 싶은 게 아니라면.]

"...."

서릿발 같은 음성에 수만 명의 사람이 일제히 숨을 죽였다.

말 한마디 잘못 꺼냈다가 자신도 머리가 터질지 모른다는 공포가 좌중을 지배했다.

'그거야말로 천사가 바라는 바겠지만.'

패닉에 빠진 사람들에게 이성적인 판단을 내릴 여유는 없었다.

오직 류민을 제외하고는.

[지금이 무슨 상황인지 의아하지요?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겠고? 하긴 열등한 인간들이 뭘 알겠어요. 하나하나 쉽게 설명해 줄게요. 그게 내 역할이기도 하니까.]

천사가 깔보는 듯한 눈빛으로 말했다.

[매달 1일이 되면 너희 인간들은 집단으로 잠에 빠져들 거예요. 그리고 강제로 영혼이 전이되어 새로운 차원에서 눈을 뜰 거예요.]

영혼 전이? 새로운 차원?

얼토당토않은 소리였지만 누구도 반박하지 못했다.

천사가 나타난 지금의 상황부터가 말도 안 되는 일이었으니.

[그곳에서 너희 인간들이 할 일은 하나예요. 주어진 퀘스트를 달성하는 것. 퀘스트만 달성하면 다시 현실로 복귀할 수 있어요. 두둑한 보상도 얻고 말이죠.]

퀘스트에 성공하면 돌아올 수 있다는 말에 기뻐하는 사람은 없었다.

달리 말하면 실패할 땐 돌아오지 못한다는 소리였으니까.

하지만 몇몇은 기대를 품기도 했다.

어떤 퀘스트인지는 몰라도 성공만 하면 생존할 수 있다지 않은가?

시간을 두고 천천히 공략해 나간다면 분명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천사의 다음 말은 그런 기대를 무참히 박살 내버렸다.

[퀘스트에 달성한다고 전원이 살아남을 순 없어요. 가장 빨리 퀘스트를 통과한 절반만 살려줄 거거든요. 그러니 늦장 부리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킥킥.]

"저, 절반만 살아남을 수 있다니...."

말하자면 TO가 정해져 있는, 경쟁 구도의 생존게임이었다.

[매달 1일에 한 번씩, 총 20라운드를 진행할 거예요. 앞서 말했듯 라운드마다 절반만 살아남을 수 있고 퀘스트는 갈수록 어려워질 거예요.]

"그, 그런...."

한 번도 아니고 스무 번을 거쳐야 살아남을 수 있다.

사람들의 얼굴에 절망이 드리웠다.

[킥킥, 그렇다고 너무 걱정은 하지 마세요. 전부 다 잡아가진 않을 테니까. 현시점에서 만 15세부터 29세 사이에 있는 인간만 생존게임에 참가할 거예요.]

나이 제한이 있다.

그 말의 파급력은 상당했다.

'휴우... 다행이야.'

'난 해당하지 않겠군.'

언급한 나이에 속하지 않은 어른들이 내심 안도하는 반면.

"나, 나는 포함되잖아?"

"어떡해! 내 생일 1월 1일이라 올해로 만 15세인데!"

나이에 해당하는 10~20대들은 하늘이 무너지는 절망감을 느꼈다.

'난 뭐, 억울할 것도 없지.'

생일이 1월 1일이었던 류민은 올해로 만 19세.

항변할 수도 없는 나이였다.

'따지고 보면 100세가 이미 넘었지만.'

겉모습은 영락없는 고등학생이었지만 99번의 회귀를 거치면서 수많은 세월을 보냈다.

생존으로 가득한 나날들이 어제오늘처럼 선명하게 떠오른다.

'하필이면 생일날 이런 X같은 이벤트에 걸리고 말다니.'

재수가 없어도 이렇게 없을까 싶다.

조금은 억울하기도 하고.

[보니까 몇몇 억울해하는 인간이 보이는 데 그럴 필요 없어요. 여기 있는 인간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인간들을 데려갈 거니까요.]

킥킥 웃는 천사를 보며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더 이상 없었다.

악마.

적어도 지금 보는 천사는 악마에 더 가까웠다.

[어디 보자... 만 15세에서 29세까지의 인간들을 따지면 참가 인원은 1,801,029,290명이 되겠네요. 그럼 대충 설명도 끝났으니 가볼까요? 쿄호호호.]

그 말이 끝나자마자 소등이라도 된 듯 눈앞에 캄캄해졌다.

약 18억 명의 사람들이 죽음의 생존게임에 참가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2. 황용민

어둠이 잠식한 골목길.

취익- 탁!

맥주캔을 뜯은 무리가 꿀꺽꿀꺽 맥주를 마신다.

"키야! 이제 합법적으로 맥주를 마실 수 있다니."

"야, 아직은 아니지. 새해 되려면 30분 남았거든?"

"X같네! 정말. 우리 언제까지 쥐새끼처럼 골목에 숨어서 마셔야 하냐?"

"쥐새끼는 너님이고요. 왜 우리까지 싸잡아서 말하세요?"

"짜증 나니까 그렇지. 너희는 짜증 안 나냐?"

꿀꺽꿀꺽 단숨에 내용물을 비운 황용민이 신경질적으로 맥주캔을 던졌다.

"야, 불 있냐?"

"여기 있슴돠, 용민 형님."

탁탁- 담뱃불까지 붙이고 깊게 연기를 내뿜고 나서야 황용민의 이마에 주름이 펴졌다.

"꼰대들은 이 좋은 걸 왜 못 하게 하나 몰라."

"꼰대니까 그렇지 뭐."

"킥킥킥."

황용민과 친구들이 좋다고 낄낄거리며 웃었다.

그러다 간혹 골목길을 지나가는 사람이 보이면 웃음을 멈추고 싸늘한 시선을 던진다.

신경 끄고 가던 길 가라는 듯이.

그러면 백이면 백 못 본 척하며 후다닥 도망친다.

지금도 그랬다.

"큭큭, 야. 봤냐? 내 눈빛에 쫄아서 도망치는 거?"

"눈빛은 무슨. 네 눈엔 야광 기능이라도 있냐? 어두워서 담뱃불밖에 안 보였을걸?"

"야, 근데 방금 지나간 여자 이쁘지 않았냐? 약간 서아린 삘 나는데."

"서아린? 진짜?"

"아, 서아린 품에서 킁카킁카하고 싶다."

"큭크크크, 미친 새끼."

"큭큭큭큭큭!"

황용민이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짓자 친구들이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큭큭, 야. 맘에 들면 가서 번호라도 따봐."

"미성년자인데 받아줄까?"

"뭘 쫄아? 좀 있으면 성인이잖아."

말마따나 자정이 되면 해가 바뀐다.

고등학생 신분도 얼마 남지 않았다.

"방학 끝나면 지겨운 학교도 이제 졸업이네."

"넌 졸업하면 뭐 할 거냐?"

"아빠한테 오토바이 사달라고 하고 배달이나 알아봐야지. 요즘 배달도 돈 많이 번다더라고."

"그러냐? 태식이는?"

"난 군대 가기 전까지 기숙사 지원되는 공장이나 들어가려고. 집에서 하도 잔소리를 해대니 숨 막혀서 살 수가 있어야지, X발."

한숨과 함께 담배 연기를 내뿜는 친구를 보며 황용민이 킥킥 웃었다.

"용민이 넌?"

"나? 전에 말하지 않았나? 조폭 될 거라고."

"헐, 그거 진심이었음?"

"농담 아니었냐?"

놀라는 친구들의 반응에 황용민이 이맛살을 구겼다.

"나는 나름 진지하게 대답했더니 농담으로 알고 있었어?"

"당연하지. 요즘 세상에 조폭을 장래 희망으로 품는 사람이 어딨어?"

"조폭이라니... 넌 무섭지도 않냐? 잘못하다간 배때기에 칼침 맞고 뒤진다고."

친구들의 걱정에도 황용민은 코웃음만 쳤다.

"X발, 인생 한번 살지 두 번 사냐? 그냥 X대로 살다가 가는 거지 뭐."

"이 새끼 노빠꾸네, 진짜."

"큭큭큭큭."

친구들이 낄낄거리며 웃었지만, 속으론 같은 생각을 떠올리고 있었다.

'미친놈.'

자기들도 학교에서 나름 알아주는 문제아였지만 황용민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다.

친구들이 보기에 황용민은 그냥 꼴통 그 자체였다.

'그래, 너 X대로 해라....'

'졸업하면 이 새끼랑 손절해야지.'

'또라이 새끼....'

중학생 때부터 알고 지냈던 친구들도 거리를 벌리게 만드는 게 황용민이란 존재였다.

"그나저나 용민이 졸업하면 네가 괴롭히던 셔틀은 어떻게 되나?"

"셔틀 누구?"

"그 있잖아. 같은 반에 있는 찐따 새끼."

"아, 그 애미 애비 없는 새끼?"

황용민의 한쪽 입꼬리가 기분 좋게 올라갔다.

"졸업해도 그 새끼는 못 놔주지."

"큭큭큭, 졸업하고도 계속 부려 먹게?"

"당연하지. 내 전용 셔틀인데."

"와... X나 불쌍하다. 그놈은 졸업하면 셔틀 짓도 끝나는 줄 알고 있을 텐데."

"누구 마음대로 끝나? 될 수 있는 한 최대한 갖고 놀아야지."

"진심 악마다. 사탄도 형님 하겠다, 큭큭큭."

시시덕거리며 웃던 일진들이 맥주캔을 비웠다.

그러다 문득 핸드폰을 보니 자정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야, 좀 있으면 새해다."

"오, 그러네?"

"이제 종 치는 거 보러 갈까? 요 앞에서 행사하고 있잖아."

"오키오키. 가보자."

황용민과 일진들은 제야의 종소리를 듣기 위해 보신각 앞으로 향했다.

"와, 사람 졸라 많아."

"개미 떼처럼 바글바글하네."

"이쁜 여자 있나 찾아봐."

주위를 둘러보며 사람 구경을 하던 중.

"어? 용민아. 저기 봐, 저기."

친구가 툭툭 팔을 치며 한쪽을 가리켰다.

"쟤 걔 아니냐? 너 전용 셔틀."

황용민의 시선이 류민에게로 향했다.

"오, 맞네. 내 셔틀."

학교 밖에서 보니 왠지 모르게 반가운 기분마저 들었다.

"저 찐따 새끼도 종 치는 거 구경하러 왔나?"

"새해에는 용민이한테 괴롭힘당하지 않게 해달라고 빌러 왔나 보지."

"큭큭큭, 그거 불가능한 소원이잖아."

"내 말이, 크흐흐흐."

낄낄 웃던 황용민이 류민에게 다가서려다가 걸음을 멈췄다.

'음? 저 새끼....'

뭔가를 생각하는지 류민은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분위기가 남달랐다.

평소에 알던 어깨 축 처진 셔틀처럼 보이지 않는다.

'뭐지? 전과는 묘하게 다른 느낌이 드는 건....'

그때 사회자가 소리쳤다.

"드디어 시간이 됐습니다. 다 함께 카운트를 세도록 하겠습니다!"

사람들이 열광하며 카운트를 셌다.

그러자 황용민과 일진들 또한 새해가 다가오길 바라는 마음으로 카운트에 동참했다.

'새끼, 오늘은 내가 봐준다.'

굳이 새해 첫날부터 괴롭히고 싶진 않았기에 더 이상 다가가지 않았다.

"...3, 2, 1! 드디어 2022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와아아아아아!"

열광의 도가니.

그 한가운데에서 황용민과 친구들이 서로를 향해 한마디씩 뱉었다.

"새해 복 많이 받아라!"

"해피 뉴 이어!"

"드디어 성인이구나! 다들 올해에는 이루는바 이루...."

[킥킥킥.]

덕담하려던 황용민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난데없이 들려오는 정체불명의 목소리 때문이었다.

[쿄호호호. 당황하는 꼴이 딱 우리에 갇힌 원숭이들 같군요.]

재차 들린 목소리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워냈다.

황용민이라고 다를 바는 없었다.

"이거 장난이지? 응?"

처음엔 방송사의 짓궂은 장난으로 치부했으나 하늘에서 빛과 함께 나타난 천사를 보니 생각이 달라졌다.

'이, 이건 진짜다. 결코 장난 따위가 아니야.'

눈으로 보고도 믿기 어려웠지만 둥둥 떠 있는 천사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다.

더욱이.

퍼억-!

천사에게 반말한 청년의 머리가 터지는 걸 보자.

"꺄아아악!"

"허억!"

황용민의 표정은 다른 시민들처럼 굳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X이발...! 새해 첫날부터 이게 뭔 지랄이야!'

살면서 한 번도 사람이 죽는 걸 목격해 본 적이 없다.

그것도 머리가 폭죽처럼 터질 정도로 강렬한 죽음은.

그렇기에 황용민은 천사 앞에서 숨소리도 제대로 낼 수 없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황용민의 시선이 류민에게로 향했다.

'저 셔틀 새끼는 왜 표정에 변화가 없지?'

자신이 아는 류민이라면 겁을 먹거나 석상처럼 굳은 표정을 지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눈앞에 보이는 류민은 겁을 먹기는커녕 여유로운 표정이다.

심지어는.

'응?'

갑자기 고개를 돌려 자신과 정확히 눈을 맞춘다.

'저 새끼, 내가 여기 있는 줄은 어떻게....'

뿐만 아니라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기까지 한다.

마치 자신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저 새끼가...!'

학교에서는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셔틀의 자신만만한 표정에, 황용민의 심사가 뒤틀렸지만 그것뿐.

'두고 보자 셔틀 새끼.'

지금은 분노를 표출할 때가 아니었다.

20라운드까지 살아남아야 하는 지옥의 생존게임에 말려들었음을 알게 됐으니까.

[그럼 대충 설명도 끝났으니 가볼까요? 쿄호호호.]

이윽고 악마 같은 천사의 웃음소리를 뒤로한 채로, 황용민의 시야가 암전됐다.

* * *

'역시나 황용민이 지켜보고 있었군.'

고등학교에 다닐 때 류민은 조용한 아이였다.

특별히 눈에 띄지 않고 튀는 구석이 없는 평범한 학생이었다.

'남들에게 피해 끼치는 일 없이 가만히만 있으면 아무 문제 없을 줄 알았지.'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황용민과 가까운 자리에 앉았다는 이유만으로, 류민은 찍혔다.

특별히 거슬리는 짓을 하지도, 튀는 행동을 하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그 이후는 뭐... 괴롭힘이란 괴롭힘은 전부 당했지.'

쉬는 시간마다 놀림당하는 건 기본이고, 심심하면 학교 뒷산으로 불려와서 처맞았다.

빵셔틀은 물론 술과 담배도 사 오도록 시켰다.

그러다가 편의점 사장에게 걸려서 경찰이 부모님을 호출할 때면 씁쓸한 얼굴로 말해야 했다.

-부모님은... 없어요.

왜 없냐고 물으면 마지못해 대답해야 했다.

-중학생 때 교통사고로 돌아가셨거든요....

이쯤 되면 안쓰럽게 본 경찰관은 다음에는 이러지 말라는 말만 하고 집으로 돌려보낸다.

'그러면 또다시 괴롭힘이 반복되는 거지.'

악순환의 반복.

강자 앞에서 류민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학교에 가는 게 두려울 정도로 온갖 수모를 당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야.'

수많은 회귀와 죽음을 반복한 끝에, 류민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소심하고 나약했던 자신은 이제 없었다.

99번의 회귀가 평범했던 그를 비범한 존재로 만들었다.

그래서일까?

자신을 괴롭힌 황용민을 보고도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었다.

'사실 녀석을 봐도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아.'

이유는 단순했다.

회귀를 반복하며 이미 지겨울 정도로 복수했으니까.

'녀석에게 복수한 게 7회차부터였나?'

어느 정도 공략에 자신감이 붙고 강해진 이후로, 류민은 황용민에게 복수했다.

당했던 만큼 갚아줬다.

살려달라는 말도 들었지만 복수귀가 되어 죽여 버렸다.

한 번이 아니다.

회차를 반복할 때마다 죽이고 또 죽였다.

그동안의 앙갚음이 모두 풀릴 때까지.

'하지만 그것도 스무 번 넘게 반복하다 보니 의미 없는 짓이더라고.'

복수는 지겨울 만큼 끝냈기에 100회차인 지금, 황용민을 봐도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았다.

'이제 와서 또 복수해 봤자 의미는 없어. 아무런 이득이 없으니까. 죽일 땐 죽이더라도 녀석을 이용하고 죽여야 해.'

놈을 어떻게 이용할지는 머릿속으로 이미 계획이 잡혀 있었다.

그렇다고 마지막 라운드까지 데리고 갈 생각은 추호도 없다.

'우선 지금 해야 할 일은....'

류민이 시선을 들었다.

텅 빈 순백색의 공간 속에 덩그러니 놓인 자신이 있었다.

잠시 후.

[쿄호호호,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다들 궁금하겠지요?]

예의 들었던 악마의 목소리가 들린다.

[여러분은 지금 서로가 볼 수 없는 개인 공간에 들어와 있어요. 영혼 전이를 하기에 앞서 육체를 구성해야 하거든요. 인간들이 즐기는 게임으로 치면 아바타를 만드는 일이죠.]

'일종의 커스터마이징이지.'

아바타란 말에 대부분 당황하고 있겠지만 류민만큼은 침착했다.

수십 차례 만들어본 아바타였으니까.

이윽고 백색의 공간에 자신과 똑 닮은 모습의 아바타가 생겨났다.

아바타는 마치 거울처럼 자신을 따라 움직였다.

[지금부터 얼굴이나 신체를 원하는 대로 조정할 수 있어요. 다른 차원에서 쓸 닉네임도 정할 수 있죠. 게임에서 캐릭터를 생성하는 과정과 똑같으니 어려운 점은 없을 거예요.]

안 그래도 게임에 익숙한 청소년과 청년들이 잡혀 왔으니 진행에 문제는 없을 거다.

[기회는 한 번뿐이니 다들 신중하게 결정해야 할 거예요. 그럼 닉네임부터 정해볼까요?]

잠시 후 천사의 목소리와는 전혀 다른 기계음이 들려왔다.

[30초 이내로 시스템에 등록할 닉네임을 말해주십시오.]

[제한 시간 내에 정하지 않을 경우, 자동으로 본명이 등록됩니다.]

'내 닉네임은....'

류민의 입술이 일말의 고민도 없이 움직였다.

3. 아바타 생성

"검은 낫."

고민도 없이 내뱉은 닉네임에 시스템이 응답한다.

[아바타의 닉네임을 '검은 낫'으로 등록하시겠습니까?]

"그래."

[중복되지 않는 닉네임입니다. 등록되었습니다.]

류민이 검은 낫으로 닉네임을 정한 건 다름이 아니었다.

'강해 보이는 닉네임이니까.'

보통 닉네임을 지으라 하면 대부분 아무렇게나 짓게 마련이다.

아니면 고민만 하다가 30초를 흘려보내고 강제로 본명이 선택되거나.

하지만 그동안 회귀를 통해 겪어본 결과, 닉네임을 정하는 건 의외로 중요했다.

'닉네임에 따라서 상대의 인상이 결정된다.'

영혼 전이로 이동되는 곳은 새로운 세상이다.

이계라고 볼 수 있는 그곳에선 본명을 쓰지 않는다.

서로가 철저하게 지금 설정한 닉네임으로만 부른다.

현실의 정체를 떠벌리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다.

사람은 누구나 가면을 쓰고 싶어 하니까.

'아바타 생성 과정에서 본명을 쓰는 건 바보나 하는 짓이지.'

게임에서 굳이 본명을 쓰지 않는 이유와 같다.

특히 남을 밟고서 경쟁해야 하는 생존게임이라면 더더욱 숨겨야 한다.

'그렇기에 닉네임이 중요한 거야. 첫인상을 결정할 수 있는 요소 중 하나니까.'

일부러 숨기는 건지 모르겠지만 천사가 말하지 않은 사실이 있다.

아바타의 머리 위에는 항상 닉네임이 떠 있다는 것.

'마치 게임처럼 말이지.'

때문에 자신의 닉네임을 누구라도 볼 수 있다.

닉네임이 첫인상의 요소로 손꼽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그간의 경험으로 보면 만만하게 보여서 좋을 건 없어. 강해 보이고 기억에 남는 닉네임일수록 좋아.'

처음에는 생각 없이 자신의 본명이나 인터넷에서 쓰는 아이디를 닉네임으로 등록했었다.

하지만 만만하게 봤는지 날파리들이 꼬였고 결국 쓸데없는 시간만 날리게 됐다.

'이곳에선 무조건 강해 보여야 한다. 강한 인상을 심어주면 좋아.'

이후 강해 보이는 닉네임을 생각하다가 검은 낫을 떠올리게 됐다.

'내 주 무기기도 하고 나중에 전직할 직업이 사신이기도 하니까.'

이계에는 대략 30여 개의 다양한 직업이 있다.

클래스라고 하는데 사신의 경우 단 한 명만이 가질 수 있는 유일 클래스에 속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사신으로 전직해야 한다. 이것만큼 강한 직업이 없으니.'

아직 직업을 고르기엔 이르지만 갈 길을 정해둬서 나쁠 건 없다.

[3분 이내로 체형과 외모를 설정해 주십시오.]

[속으로 강하게 이미지를 구상하면 반영됩니다.]

[구상이 끝나면 '구상 완료'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제한 시간 내에 정하지 않을 경우, 자동으로 본모습이 반영됩니다.]

'외모 커스터마이징 시간이군.'

외모는 닉네임과 마찬가지로 첫인상을 결정하는데 중요한 부분이다.

'보통은 여기서 다들 멋있고 예쁘게만 꾸미려고 하겠지.'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을 성형하듯 커스터마이징으로 외모를 가꾸는 데만 주력할 것이다.

안 봐도 뻔하다.

'하지만 생각이 있다면 절대 그래선 안 돼. 특히 여자들은 더더욱.'

예쁘고 잘난 외모는 분명 주위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효과가 있다.

좋은 첫인상을 남기기에도 좋고.

그러나 이계는 약육강식의 세계다.

외모가 뛰어나면 표적이 되기에 십상이다.

특히 여성들이 더 위험하다.

'다들 착각하는데 지금 절대로 게임 속 캐릭터나 만들고 있는 게 아니야. 이계 또한 엄연히 현실이라고.'

이계에서 죽으면 현생에서도 죽는다.

그 점을 망각하고 게임 같은 시스템에 속아 잘못된 판단을 내리는 사람이 부지기수다.

'외모는 튀지만 않으면 돼. 잘 생기지도, 못 생기지도 않아야 한다.'

현실의 모습이 딱 그랬지만 되도록 정체는 숨기는 편이 좋기에 외모를 바꿨다.

'현실과 다르면서 만만해 보이지 않는 인상으로.'

류민은 이번에도 지체 없이 모습을 구상했다.

날렵한 콧대와 턱선, 강한 눈빛으로 차갑고 냉정한 인상을 만들었다.

체격은 평소처럼 왜소한 게 아닌, 적당한 근육질의 몸으로 바꿨다.

검은 낫이라는 닉네임에 걸맞은, 강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구상 완료."

[커스터마이징을 완료하셨습니다.]

[아바타를 생성 중입니다.]

...…

...

[생성 완료.]

[즉시 1라운드로 영혼을 전이하겠습니다. 행운을 빕니다.]

순간 밝은 빛이 류민의 눈을 강타했다.

반사적으로 감았던 눈을 뜨니 새로운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순식간이군.'

1라운드의 배경이 되는 곳은 광활한 초원이었다.

소와 양이 한가롭게 풀을 뜯어 먹고 있을 법한.

물론 이곳에 소나 양 따위는 없다.

'몬스터는 있어도 말이지.'

류민이 자신의 몸을 내려다봤다.

180㎝의 키에 탄탄한 근육질의 체형이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고 있다.

조금 전에 커스터마이징한 신체였다.

'몇 번이나 만들어서 그런지 이제는 진짜 내 몸 같군.'

류민은 12회차부터 지금과 같은 생김새를 유지해 왔다.

그래서인지 처음 만들었음에도 내 몸처럼 익숙했다.

다른 사람들처럼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았다.

몇 번이고 겪어본 영혼 전이였기에.

"여, 여긴 어디지? 초원?"

"어딘진 몰라도 좋다...."

"마음이 평온해지는 느낌이야."

아바타를 만든 사람들이 속속들이 초원에 나타났다.

"어? 몸이 바뀌었잖아?"

"설마 여기 오기 전에 설정한 몸으로 들어온 건가?"

"내가 이렇게 근육질이라고? 그럼 얼굴도...?"

"혹시나 해서 연예인 얼굴로 바꿔봤는데... 이게 되네?"

사람들이 늘어남에 따라 웅성거림도 커졌다.

다른 사람의 머리 위에 뜬 닉네임을 신기하게 쳐다보는 사람들.

연예인처럼 바뀐 자신의 몸을 더듬거리며 만족하는 사람들.

시간제한을 넘긴 탓에 외형을 바꾸지 못했다고 당황하는 사람들.

당황하는 것도 잊고 드넓은 초원의 풍경에 매료된 사람들.

가지각색의 반응을 보였지만 류민만큼은 무미건조한 표정이었다.

이미 지겨울 만큼 체험해 봤으니까.

대신 류민의 시선은 한 곳을 향해 있었다.

'슬슬 올 때가 됐는데.'

잠시 후.

츠으읏-

시선이 머물던 자리에 한 사람이 나타났다.

'이제 왔군. 황용민.'

평소보다 훨씬 더 우락부락한 몸의 황용민이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다.

'역시 이번에도 몸만 근육질로 만들었군.'

얼굴을 바꾸지 않았기에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머리 위에 떠 오른 닉네임도 [황용민]으로 본명 그대로였다.

당황해서 이름을 바꾸지 못한 것이리라.

'하긴 닉네임을 정하기엔 30초란 시간은 생각보다 짧으니.'

주위를 둘러보면 황용민 말고도 본명 그대로인 사람들을 심심찮게 찾을 수 있었다.

그때 우연히 황용민과 눈이 마주쳤다.

하지만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는지 금세 시선을 돌린다.

'알아볼 리가 없지.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모습을 바꿨는데.'

황용민은 류민을 모르지만, 류민은 황용민을 알고 있다.

'그거면 됐어.'

그 사실을 확인하자마자 류민은 황용민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복수는 이미 충분하리만치 끝냈기에 더 이상 관심이 없었다.

'내가 움직이는 건 녀석을 이용하기 좋을 때다.'

지금은 이용 가치가 있기에 살려두는 것뿐이다.

[쿄호호호, 이제 다 모이셨나요?]

후광과 함께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왔다.

이름은 브리엘.

예의 봤던 그 천사다.

[새로 만든 아바타가 마음에 드시나 봐요?]

"...."

천사의 등장에 사방이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아무래도 강렬한 첫인상을 남겼으니 이렇게 조용한 거겠지.'

괜히 나대다가 또 머리가 터질지 모르니 말이다.

천사도 그걸 아는지 입술을 비틀며 웃는다.

[킥킥킥, 겁먹은 얼굴이 보기 좋네요. 걱정 마세요. 무례하게만 굴지 않으면 죽이진 않을 테니까요.]

그 말에 긴장을 놓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디 보자, 총 1,802,910명인 걸 보니 서울에 있던 인간은 다 모인듯싶네요.]

"180만 명?"

"여기 있는 사람이?"

사람들이 중얼거리며 사방을 둘러봤다.

초원에는 많아야 1만 명의 사람이 있었다.

보신각에 있었던 사람 수다.

아무리 봐도 180만 명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천사가 미간을 구기며 대답했다.

[초원이 여기만 있겠어요? 당연히 180만 명이 전부 모여 있는 건 아니죠. 그랬으면 지금 발 디딜 틈이나 있었게요?]

"아...."

[하여간 열등한 인간들 같으니라고. 각자 다른 초원에서 다른 천사들과 라운드를 진행하고 있으니 신경 끄세요.]

그래도 1만 명이면 꽤 많은 숫자다.

광활한 초원이 좁아 보일 정도.

'하지만 이것도 초반일 뿐이야.'

다들 인지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건 절반만 살아나갈 수 있는 생존게임이다.

라운드를 진행할수록 사람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든다.

특히 후반으로 갈수록 어려워져서 클리어 조건에도 들지 못하고 죽는 이들이 늘어간다.

급기야 최종 라운드에는 자신밖에 남지 않을 정도로.

'특히 15라운드에서 엄청나게 많은 사망자가 발생하지.'

그때는 2천 명에 달하던 전 세계 플레이어가 50명 이하로 줄어든다.

절반은커녕 97.5%가 다음 라운드에 가지 못하고 사망한다.

'결국 20라운드에 갔던 건 나 혼자뿐. 나머지는 전부 죽고 말아.'

시작이 18억 명이라는 걸 생각하면 셀 수도 없는 사람들이 죽는 셈이다.

[다 모였으니 이제 설명을 시작하죠. 우선 속으로 '상태창'이라고 말해보세요.]

천사의 말에 사람들이 의아함을 가지고 따라 했다.

밑져야 본전이었으니까.

"헉!"

"이게 뭐야?"

잠시 후 곳곳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모두가 입을 벌린 채로 허공을 쳐다보고 있다.

상태창은 남의 눈에 보이지 않았으니까.

류민 역시 다른 사람들처럼 시동어를 외웠다.

'상태창.'

-이름 : 류민

-닉네임 : 검은 낫

-등급 : 초보

-칭호 : 없음

-레벨 : 1

-직업 : 없음

-힘 : 3, 지능 : 3

-민첩 : 3, 운 : 3

-공용 스킬 : 없음

-전용 스킬 : 없음

-룬 : 없음

-보유 골드 : 0

-남은 스탯 포인트 : 0

<추가 기능>

[??? : Lv10 달성 시 잠금 해제]

[??? : Lv20 달성 시 잠금 해제]

[??? : Lv40 달성 시 잠금 해제]

[??? : Lv60 달성 시 잠금 해제]

[??? : Lv99 달성 시 잠금 해제]

한숨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은, 초라한 상태창이었다.

그 밑에는 일정 레벨이 되면 추가 기능을 이용할 수 있는 칸이 있었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지만 괜찮아. 이번엔 더 강해질 자신이 있으니.'

아무리 최종 라운드까지 간 류민이라도 처음부터 강했던 건 아니었다.

'두 번을 죽고 나서야 1라운드를 겨우 깼을 정도니.'

그저 일진에게 괴롭힘이나 당하던 고등학생일 뿐이었기에 당연한 결과였다.

하지만 회귀를 반복할수록 류민은 강해졌다.

점차 생존 시간이 늘어났고 버티는 라운드도 늘어갔다.

'99회차를 넘어서야 비로소 20라운드까지 도달했지.'

꽤 많은 목숨을 버려야 했지만 평범했던 그가 그만큼이나 도달할 수 있던 것도 기적이었다.

'물론 회귀 없이도 18라운드까지 살아남은 일곱 명이야말로 진정한 재능충이지만.'

18라운드가 되면 류민을 제외하고 일곱 명이 살아남는다.

19라운드엔 이들 중 두 명이 살고 20라운드엔 류민만이 남는다.

'보스룸까지 최소 네 명을 살려가야 해.'

류민은 보스룸까지 함께할 후보를 이들 일곱 명 중에서 고를 작정이었다.

전 세계에 이보다 강한 플레이어는 없을 테니까.

그렇다고 다른 후보를 염두에 두지 않겠다는 말은 아니다.

'이전 라운드에서 떨어진 플레이어 중에서도 강한 자들은 많았지.'

보스룸까지 꼭 다섯 명을 맞출 필요는 없다.

최소 조건이 다섯 명일 뿐 그 이상이어도 좋다.

'생존자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법이니.'

문제는 보스룸까지 생존한 이들이 확실한 아군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아니면 통제할 수 있을 정도로 류민이 강한 힘을 가지거나.

'그 정도는 어려울 게 없어.'

100번째 회귀한 지금, 류민은 누구보다 강해질 자신이 있었다.

전 회차에서도 유일하게 만렙인 99를 찍은 그였으니까.

[자, 상태창은 다들 보셨나요? 게임을 해봤으면 알 거예요. 자신은 지금 볼품없는 쓰레기 수준이라는 것을.]

"...."

[그러니 강해지세요. 20라운드까지 살아남으면 여러분은 누구보다 강해져 있을 거예요. 그렇게 생존해서 20라운드까지 클리어하고 나면!]

천사가 씨익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생존게임에서 해방해 줄 뿐만 아니라 소원까지 들어드리죠.]

"소, 소원?"

소원이라는 말에 사람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정말로 소원을 들어준다고?"

"에이, 설마."

의심하거나 부정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소원이라...."

"마지막 라운드를 깨기만 하면 소원을 들어준단 말이지?"

기대를 품거나 탐욕을 가지는 사람도 있었다.

물론 류민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다.

소원은커녕 최종 라운드까지 살아남기도 벅찬 게임이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그럼 라운드에 앞서 간단하게 설명해 드릴게요. 모두 속으로 '인벤토리'라고 말해보세요.]

'인벤토리.'

시동어를 외우자 상태창과 마찬가지로 보이지 않는 창이 떠올랐다.

거기엔 에메랄드빛을 내는 작은 돌조각이 들어 있었다.

[인벤토리에 기본적으로 아이템 하나가 지급되어 있을 거예요. 손으로 꺼내서 사용해 보세요.]

사람들이 시키는 대로 허공에 손을 넣어 아이템을 꺼냈다.

그러자 자동으로 아이템 정보가 떠올랐다.

4. 1라운드 시작

[랜덤 룬조각]

-분류 : 소모품

-등급 : 유니크

-효과 : 무작위로 룬을 획득한다.

-사용 제한 : 레벨 1 이하

-설명 : 플레이어들에게 제공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벤트성 아이템. 레벨업할 경우 사용하지 못하니 아껴두지 말고 사용할 것.

[보다시피 랜덤 룬조각은 일회성 아이템이에요. 레벨 1일 때만 사용할 수 있는 데다 처음에만 지급하는 유일한 아이템이죠.]

천사의 설명에 사람들이 신기한 눈초리로 쳐다본다.

오직 백전노장이나 다름없는 류민만이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다.

'아직 뭐가 뭔지 모르겠지. 아이템의 사용법도, 룬이라는 것도.'

룬은 몬스터를 잡을 때나 퀘스트를 완료할 때마다 가끔 얻을 수 있는 소모성 아이템이다.

'게임으로 치면 일종의 패시브 스킬이지.'

룬을 사용하면 몸에 각인이 되고 해당하는 능력을 얻을 수 있다.

물론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룬을 얻는 개수에는 제한이 없으니까.

'많이 얻을 수 있다면 말이지만.'

룬의 드롭율은 유니크 아이템과 동급으로 치는 수준이었기에 얻기란 쉽지 않다.

'20라운드 내내 10개도 얻지 못하는 게 현실이지.'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보통 사람의 경우.

'나 같은 경우엔 마지막 회귀 당시 30개의 룬이 있었지만.'

직업도 유일 클래스인 데다 룬조차 많으니 압도적으로 강해질 수 있었다.

비록 실력 발휘도 못 한 채 보스룸 앞에서 어이없이 소멸당해야 했지만.

'이번에는 달라야 한다. 마지막 기회이니만큼 그 어느 회차보다도 압도적으로 성장해야 해.'

룬도 30개가 아니라 50개, 100개 등.

미친 듯이 획득하여 독보적으로 강해져야 한다.

[손에 들고 속으로 '사용'이라고 말하면 아이템을 사용할 수 있어요.]

천사가 사용법을 가르쳐주자, 사람들 손에 있던 룬들이 하나씩 사라졌다.

'사용.'

류민 역시 사용하자, 파스스- 소리를 내며 룬조각이 부서진다.

[랜덤 룬조각을 사용하셨습니다.]

[축하합니다! '시간 역행의 룬'이 나왔습니다!]

[획득한 룬이 플레이어의 신체에 자동으로 각인됩니다!]

룬이 각인됐지만 류민의 얼굴엔 일말의 기대조차 없었다.

잠시 후에 어떤 메시지가 떠오를지 알고 있었으니까.

[플레이어의 영혼에 해당 룬의 잔재가 남아 있습니다.]

[룬 특성에 의해 각인이 실패했습니다.]

각인 실패.

당연한 결과였다.

새로 각인이 된다면 그야말로 무한 회귀를 할 수 있을 테니.

'안 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아쉽네. 이번이 정말 마지막 회귀라고 생각하니....'

처음 회귀해서 룬조각을 사용할 때, 류민은 생각했다.

다른 룬을 얻을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아니었다.

'시간차를 두고 사용도 해보고, 일부러 다음 라운드에서 사용해 보기도 했지만....'

이렇게 하나 저렇게 하나 결과는 같았다.

이미 정해져 있기라도 하듯 시간 역행의 룬만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각인도 매번 실패를 거듭했지.'

남들과 달리 각인이 불가한 상황이었지만 손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자신에겐 99번의 회귀로 인한 경험과 지식이 그대로 남아 있었으니까.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했다.

[영혼에 각인된 룬의 잔재를 통해 100번째 시간 역행자임이 확인되었습니다.]

[칭호 '마지막 시간 역행자'를 획득합니다.]

'뭐? 칭호?'

각인은 실패했지만, 칭호를 얻었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기에 류민의 얼굴에 잠깐이지만 당혹감이 떠올랐다.

'100번째 회귀일 때만 주는 칭호라 이건가?'

설명대로 쌓여 있는 룬의 잔재를 보고 마지막 회귀임을 알아차린 모양이다.

'없음'으로 적혀 있던 칭호란에 새로운 칭호가 등록됐다.

류민이 가볍게 칭호를 터치하자 정보창이 떠오른다.

[칭호 - 마지막 시간 역행자]

-획득 조건 : 시간 역행의 룬 100번째 획득.

-효과 : 죽으면 그 자리에서 1분간 영혼 상태로 머물 수 있다. 원하는 타이밍에 모든 체력을 회복한 채로 부활할 수 있다. 일회성 능력으로 부활시 칭호는 사라진다.

'부활이라고?'

처음에 류민은 칭호와 룬의 차이점을 몰랐다.

둘 다 패시브 스킬처럼 효과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알고 있다.

칭호는 룬의 상위 개념이라는 것을.

'그만큼 룬보다 효과도 좋고 얻기도 어렵지.'

그런 칭호를 룬 대신 얻었다.

당연히 이득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칭호는 룬과 다르게 마음먹으면 닉네임 밑에 떠오르게 할 수 있다.

즉, 사람들 앞에 드러내며 자신의 존재를 과시할 수 있다.

'마지막 시간 역행자라는 칭호는 숨기는 게 좋겠지만.'

물론 칭호를 공개하지 않아도 능력은 적용되기에 문제는 없다.

'부활이라니. 엄청난 걸 얻어버렸잖아?'

100번이나 회귀한 류민조차도 부활 능력이 있는 칭호는 듣도 보도 못했다.

'직업 중에 프리스트가 부활 스킬을 쓸 수 있긴 하지만....'

룬이나 아이템으로는 본 적이 없다.

게다가 모든 체력을 회복시키기까지 하니 통상 30%의 체력만 회복시키는 부활 스킬보다도 상위 능력이다.

'비록 한 번 부활하면 칭호는 사라져 버리지만 그게 어디야?'

더 이상 회귀도 할 수 없는 막다른 상황에서 부활 능력은 가뭄의 단비다.

[다들 룬은 각인하셨나요?]

천사의 말에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몇몇은 좋은 룬이 나왔는지 상기된 표정을 짓고 있었고, 몇몇은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표정을 보니 희비가 엇갈리나 보군요. 좋은 룬이 나왔든, 거지 같은 룬이 나왔든 결과에 승복하세요. 그게 너희 인간들의 운빨이니까요. 킥킥킥.]

웃음소리가 거슬렸지만 천사 앞에서 불만을 토하는 사람은 없었다.

첫인상이 너무 강렬했던 탓이리라.

[룬 각인도 끝났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놀아볼까요?]

천사가 신호하듯 날개를 펼치자, 사람들의 눈앞에 동시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 ROUND 1 ▶

<퀘스트>

└인당 고블린 100마리 처치하기

[전 구역]

└참가자 : 1,801,029,290

└달성자 : 0/900,514,645

[해당 구역 ESKS45-5]

└참가자 : 10,286

└달성자 : 0/5,143

"고블린 100마리 처치하기?"

"게임 속에 나오는 그 고블린?"

"해당 구역은 뭐지? 우리가 있는 곳을 말하는 건가?"

퀘스트를 확인한 사람들이 수군거리자 천사가 끄덕였다.

[여러분이 아는 그 고블린이 맞아요. 해당 구역 ESKS45-5는 여러분이 속한 그룹을 뜻하고요.]

천사가 돌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1라운드라 쉬운 걸로 준비했어요. 고작 100마리만 처치하면 지구로 귀환할 수 있어요. 참 쉽죠?]

'쉬운지 아닌지는 겪어봐야 아는 법이지.'

하지만 우습게도 류민처럼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고블린이면 엄청나게 약한 몬스터 아니야?"

"맞아. 게임에서도 잡몹으로 나오잖아."

"생각보다 별거 아니네?"

"난 또 엄청 어려운 퀘스트인 줄."

걱정했던 것보다 어려워 보이지 않았는지 사람들이 여유를 되찾았다.

'그렇게 만만하게 봤다간 큰코다칠 텐데....'

고블린의 실력을 아는 류민으로선 혀를 내두를 상황이었다.

[다들 자신만만한가 보네요? 그럼 더 이상의 설명은 생략하고 바로 실전으로 들어갈까요? 쿄호호호!]

천사가 즐거운 듯 날개를 펄럭이자.

츠으으읏-

츠으으읏-

초원 너머에 초등학생 크기의 괴물들이 나타났다.

소설이나 게임 속에서 보았던 그 고블린이었다.

"저거 뭐야? 고블린이네?"

"하하, 정말 게임 속에 들어온 것 같잖아?"

몬스터가 등장했음에도 사람들은 그리 겁을 먹지 않았다.

멀리 떨어져 있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허리까지 오는 고블린은 어린아이를 보는 것처럼 만만해 보였다.

여유가 생겨서일까?

급기야 현실을 부정하는 사람도 나타났다.

"설마 꿈은 아니겠지? 말로만 듣던 자각몽이라던가."

"소설에서나 보던 가상현실 게임이 벌써 상용화됐나? 우리는 알게 모르게 납치돼서 테스트 중인 거고?"

"어? 그 말 일리 있는데요?"

게임 같은 상황만 벌어지다 보니 현실 감각은 물론 판단력이 흐려졌다.

그토록 무섭게 보이던 천사에게 질문하는 여유도 생겼다.

"천사님! 우리는 무기 같은 거 안 주나요? 쟤네들은 무기 들고 있는데."

[무기?]

전방에 보이는 고블린들은 하나같이 단검이나 몽둥이 따위를 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던 천사가 인간들을 향해 비웃음을 머금었다.

[그딴 건 없어요. 맨주먹으로 잡든 말든 알아서 잡으시길. 아, 한 가지 덧붙이자면.]

츠으으읏-

츠으읏-

"어?"

[아직 고블린은 전부 소환된 게 아니랍니다.]

전보다 배로 많은 숫자의 고블린이 초원 너머에 속속들이 생겨났다.

얼추 봐도 인간들보다 많은 숫자의 초록 괴물들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현재까지 소환된 고블린은 5만 마리예요.]

"5, 5만 마리?"

[인간 1만 대 고블린 5만. 할만하지 않아요?]

족히 다섯 배가 넘는 숫자가 모이니 사람들이 그제야 긴장하기 시작했다.

[그럼 인간과 고블린들? 서로 죽일 듯이 싸우세요.]

천사의 말을 알아들은 건지, 노려보기만 하던 고블린들이 행동에 나섰다.

"키야아악!"

저돌적으로 달려오는 고블린 무리에 앞줄에 있던 사람들이 주춤거렸다.

막상 무기를 쥐고 뛰어오는 고블린을 보니 겁이 날 수밖에 없었다.

'하긴 개가 달려와도 겁을 먹기 일쑤인데 칼을 든 괴물이 달려오고 있으니....'

사람들의 심정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류민이 앞으로 나섰다.

그 돌발행동에, 사람들의 이목이 류민에게로 집중됐다.

"저 사람 봐."

"혼자서 걸어가는데?"

류민은 수군거리는 소리를 뒤로하고 고블린들이 가까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단순히 관심받고 싶어서 이러는 건 아니었다.

'사람들 앞에서 내 존재감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첫인상은 중요하다.

귀찮은 날파리가 꼬이지 않으려면 여기서 힘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특히 천사의 관심을 끄는 것이 중요해.'

그러려면 약간의 퍼포먼스가 필요하다.

"어이, 이봐요!"

"거기! 가까이 가면 위...."

위험하다고 소리치려던 사람들은 이내 입을 다물었다.

퍽-!

깔끔한 뒤차기로 앞서 달려온 고블린의 안면을 정확히 맞춘 것이다.

"끼에에...."

매부리코가 부러진 고블린이 인상을 찌푸리는 것도 잠시.

턱-

양손으로 머리를 붙잡은 류민이 그대로 돌려 버렸다.

뿌드득-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혀를 빼물며 죽는 고블린을 뒤로하고, 류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녀석이 들고 있던 단검을 빼앗은 채로.

푹- 푹-!

근처에 있던 고블린의 목덜미와 등에 단검이 박혔다 빠져나왔다.

고블린이 쓰러지기도 전에 류민의 몸이 번개처럼 다음 타깃을 노렸다.

푹- 푸욱-!

두 마리 고블린의 가슴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순식간에 벌써 네 마리의 고블린이 죽었다.

물 흐르듯 군더더기 없는 움직임은 숙련된 킬러를 연상케 했다.

"끼이이익!"

동료 고블린이 열을 내며 달려들었지만, 류민의 단검이 그보다 빨랐다.

푹푹-! 푹푹-!

초록색의 피가 사방으로 튀었지만 류민은 개의치 않고 단검을 휘둘렀다.

그야말로 학살의 현장.

그 압도적인 위용에 주변 사람들이 멍하니 입을 벌렸다.

5. 천사의 관심

"쩌, 쩐다...."

"저 사람 뭐야? 엄청나게 잘 싸우는데?"

"검은 낫? 닉네임도 간지나게 지었네."

류민을 보며 입을 벌리던 사람들이 이내 긴장한 눈으로 시선을 돌렸다.

감탄만 하고 있기에는 상황이 촉박했다.

어느새 자신들 앞에도 고블린들이 다가왔으니까.

'하, 할 수 있을 거야. 게임에서도 고블린은 X밥이잖아?'

'어차피 이건 현실이 아니야. 잘 만들어진 가상현실게임이라고.'

'저 사람도 혼자서 수십 마리째 죽이고 있잖아? 막상 상대해 보면 별거 아닐 거야.'

류민의 학살을 보고 자신감을 얻은 걸까?

어느새 사람들의 눈빛에서 두려움은 사라진 상태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푹- 푹- 푹-!

"아아아악!"

"아, 아파!"

우르르 몰려온 고블린들에게 단검을 찔리자, 사람들의 입에선 새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 그만해! 진짜 아프다고!"

"야 이, 괴물 새끼들아!"

"흐아악! 내 팔! 내 팔!"

어린애나 다름없다고 만만하게 보던 사람들이 애처럼 울부짖었다.

"사, 살려줘!"

"사람 살려! 사람 살려!"

"이, 이건 현실이 아니야. 현실이 아니... 커억!"

몽둥이에 맞고 기절하는 사람.

단검에 찔려 자리에 주저앉는 사람.

도망치다가 밀려 넘어지는 사람.

여기저기 밟혀서 웅크리는 사람.

그런 사람들만 골라서 칼침을 놓는 고블린 등.

아비규환이 따로 없는 상황에서 더 이상 게임이라고 착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솔직히 그럴 정신도 없었다.

사람들이 머릿속에 떠올린 생각은 오직 하나.

생존.

어떻게 해서든 살아야 한다는 생존 본능이 머리를 지배했다.

그래서일까?

"죽어! 죽어, 이 괴물 새끼들아!"

도망치는 사람도 많았지만 맞서 싸우는 사람도 종종 보였다.

고블린이 코앞까지 오자 어쩔 수 없이 싸움을 택한 사람들이었다.

퍽- 퍽!

"끼에엑!"

죽기 살기로 주먹을 휘두르자 고블린을 기절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뿐.

죽이는 건 별개의 일이었다.

조그만 동물도 죽여본 적 없는 현대인들이 고블린의 목을 꺾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푹-!

"커어억!"

도리어 칼에 찔려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는다.

그 이후는?

푹- 푹- 푹- 푹-

하이에나처럼 달려든 고블린들에게 둘러싸여 속수무책으로 당할 뿐이었다.

[쿄호호호, 재미있군요. 인간과 고블린의 싸움이라는 건.]

하늘 위에서 내려다보던 천사가 빙글거리며 웃었다.

천사에게 있어서 이 싸움은 개와 고양이의 싸움을 구경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단순한 유흥거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아무리 어린아이 같은 상대라 하더라도 수십 명이 달려들면 버틸 재간이 없죠. 그것도 단검을 들고 있다면 더더욱.]

그런데 어째서일까?

수십 마리가 달려들어도 버티는 한 사람이 있었다.

시작부터 고블린들을 학살했던 인간이었다.

'저 인간은 뭐지? 검은 낫?'

천사 브리엘이 흥미로운 눈으로 인간을 내려다봤다.

이름은 모른다.

천사인 그녀조차도 플레이어들의 상태창은 볼 수가 없다.

시스템 규정이 그렇게 되어 있다.

당연히 어떤 룬을 각인했는지도 알지 못한다.

'정말 개 같은 시스템이야. 퀘스트 진척도는 볼 수 있으면서 플레이어의 정보는 못 보게 막아놓다니.'

브리엘의 미간에 다시금 주름이 잡혔다.

위에서 시켜서 한다지만 안내역은 참으로 못 할 짓이다.

적성에도 맞지 않고.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아비규환의 현장을 보자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갔다.

'나 같은 고귀한 존재가 하등한 인간들의 안내역이나 맡아야 하는 건 자존심 상하는 일이지만....'

치열하고 잔혹한 현장은 브리엘의 취향에 딱 맞았다.

솔직히 기대하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조금 전까지도 인간이랑 고블린이랑 싸움 붙여봤자 얼마나 재미있겠냐며 불만을 토로했었으니까.

'쿄호호호. 근데 생각보다 구경하는 재미가 있잖아?'

절망에 찬 얼굴로 발악하는 인간들.

고통스러운 비명과 피 튀기는 혈전 등.

꽤 시간이 흘렀음에도 지켜보는 브리엘의 입가에선 미소가 떠날 줄을 몰랐다.

'그래, 죽여라, 죽여! 하등한 벌레들끼리 잘들 싸워보라고! 킥킥킥.'

불난 집 구경하듯 여유롭게 감상하던 브리엘의 시선이 한곳으로 움직였다.

빨간 피로 물들었던 조금 전과 달리 그녀가 보는 곳은 초록 피로 가득했다.

그 가운데엔 검은 낫이라는 닉네임을 가진 플레이어가 있었다.

'저 인간은 대체 정체가 뭐지? 아직도 살아 있잖아?'

처음에 나서서 고블린들을 죽였을 때는 꽤 실력 있다고 생각했다.

뭔가 전투에 도움 되는 좋은 룬을 얻었나보다 싶었다.

그러나 그것뿐.

관심 없다는 듯 다시 시선을 돌렸다.

어차피 체력이 바닥나서 결국엔 다른 인간들처럼 죽을 테니까.

하지만 예상을 비웃기라도 하듯, 인간은 아직도 살아 있다.

살아 있을 뿐이랴?

미친개처럼 날뛰며 고블린들을 학살하고 있었다.

'벌써 70마리째야. 다른 인간은 20마리도 못 넘기고 있는 판국에.'

퀘스트 현황을 보던 브리엘이 혀를 내둘렀다.

단독으로 그만큼이나 죽였다는 건 실로 대단한 위용이었다.

처음이라는 걸 감안하면 말이다.

'이런 상황이 처음일 텐데 어떻게 당황하지도 않는 거지? 마치 몇 번이나 겪어본 인간처럼.'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움직임과 냉철한 칼 놀림은 고블린들조차 주춤거리게 했다.

'지구에서의 직업이 킬러라도 되나?'

잘은 모르겠지만 상황이 생각보다 재밌게 돌아가고 있다.

브리엘의 입꼬리가 기분 좋게 말려 올라갔다.

* * *

스걱-!

"키에에엑!"

양쪽 눈을 잃은 고블린이 자지러지며 쓰러졌다.

류민이 지체 없이 몸을 날려 쓰러진 고블린의 목에 단검을 박았다.

푹-!

[고블린을 처치하였습니다!]

[경험치 +4%]

[골드 +10]

[레벨이 올랐습니다!]

[퀘스트 진척도 : 고블린 75/100마리]

[퀘스트 달성까지 남은 고블린 25마리]

레벨이 올랐지만 메시지를 무시하며 즉시 몸을 굴렸다.

칵-!

류민이 있던 자리에 단검이 박힌다.

아찔함을 느낄 새도 없이 튕기듯이 일어났다.

푹-!

"키아아악!"

고블린의 가슴을 찌르고 몸을 돌려 또 다른 고블린을 노린다.

쉴 틈 없는 움직임의 연속.

한순간도 방심할 수 없다.

류민의 눈동자가 빠르게 전황을 훑었다.

"키이이이...."

고블린들이 겁먹은 얼굴로 뒷걸음질을 치고 있다.

가까이에 온 고블린들은 전부 죽었다.

그렇다고 방심하진 않는다.

'잠깐 숨 좀 돌릴 수 있겠군.'

여유를 되찾은 류민이 상태창을 열었다.

어느새 레벨이 4까지 올라 있다.

류민의 손가락이 빠르게 스탯을 터치했다.

'당분간은 민첩에 올인한다.'

레벨이 오르면 주어지는 스탯 포인트는 2개.

류민은 4레벨이 될 동안 전부 민첩에 투자했다.

그 결과 3이었던 민첩이 9까지 올랐다.

'민첩만큼 중요한 건 없지.'

힘, 지능, 민첩, 운 중 당장 필요한 건 민첩이었다.

민첩을 찍으면 회피율은 물론 공격 속도와 이동 속도까지 골고루 증가한다.

류민의 고개가 아군 측을 향했다.

30m 정도 떨어진 곳에선 고블린과 사람들이 얽히고설켜 있었다.

그야말로 아수라장.

"사, 살려줘, 아아악!"

"죽어! 좀 죽으라고 이 괴물 새끼들아!"

빨간 피와 초록 피가 한데 어우러져 난장판을 만들고 있었다.

혼자서 시체의 산을 쌓고 있는 류민과는 온도 차가 극심한 상황.

'그럴 수밖에 없지. 저 사람들은 고블린을 상대하는 게 처음일 테니.'

제아무리 어른이라도 고블린을 죽이기는 쉽지 않다.

무섭고 겁이 날 거다.

막상 싸우려고 하면 몸이 굳어서 움직이지 않을 거다.

이해한다.

자신도 1회차 때는 도망 다니기에 바빴으니.

'하지만 도망 다닌다고 해결될 일은 아니야.'

그 사실을 깨달은 건 두 번 죽고 나서였다.

도망 다니면 시간은 벌 수 있겠지만 상황은 달라지지 않는다.

'천사가 고블린들을 풀어서 어떻게 해서든 싸우게 만드니까.'

게다가 이 초원.

보기엔 넓어 보이지만 사방엔 보이지 않는 장벽이 있다.

'어찌어찌 천사의 눈을 피할 수 있다 쳐도 독 안에 든 쥐라는 거지.'

지옥 같은 이 상황에서 벗어나려면 오직 퀘스트를 수행하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퀘스트에 성공하더라도 귀환할 수 있는 인원은 절반뿐.

'선착순으로 달성하는 사람만 보내주는 시스템이니 가만히 있으면 오히려 손해지.'

차라리 도망치는 것보다 한 마리라도 빨리 죽이는 편이 낫다.

혼자서 고블린을 100마리나 잡는 건 쉽지 않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마냥 어려운 일은 아니야. 사람이 많다는 건 시선 분산하기 좋다는 뜻이니까.'

좋게 말하면 시선 분산이고 나쁘게 말하면 고기 방패가 되어줄 사람이 많다는 뜻이다.

'사람들도 슬슬 느끼고 있겠지. 협동하면 그래도 할만하다는 사실을.'

물론 협동한다고 킬 카운트가 같이 오르진 않는다.

고블린을 죽이는데 기여도가 큰 사람만 킬 수가 오른다.

'그래도 백지장도 맞들면 나은 법이니까.'

인간들이 유리한 점은 그뿐만이 아니다.

고블린의 키는 성인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이곳에 불려온 중학생보다도 작다.

리치 면에서 인간들이 더 유리할 수밖에 없다.

'비록 몽둥이나 단검 따위를 든 고블린과 달리 인간에게 주어진 무기라곤 없지만....'

류민의 시선이 바닥을 향했다.

'무기가 있다면 이야기가 다르지.'

지금은 발에 챌 정도로 널리고 널린 게 무기다.

고블린들이 죽기 전에 들고 있던 것들이었다.

'그렇다고 나처럼 싸우는 건 무리겠지만.'

류민과 다른 사람 간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기본 스탯이 3으로 같다는 점.

근육질이든 마른 몸이든 상관없다.

신체와 관계없이 모든 인간이 똑같은 스탯, 똑같은 조건으로 시작한다.

달리 말하면 다른 사람도 류민처럼 움직일 수 있다는 뜻이었지만....

'쉽지 않겠지. 수십 번의 경험으로 숙달되지 않는 한.'

영화에서나 나오는 킬러가 아닌 이상에야 류민처럼 학살하긴 힘들 거다.

더구나 지금은 민첩도 찍어서 전보다 더 날렵하다.

'이만하면 천사의 관심도 끌었을 테니 슬슬 끝내볼까?'

류민이 움직이자 근처에 있던 고블린들이 눈치를 보며 피하기 시작했다.

즉시 바닥에 있던 단검 하나를 집었다.

별다른 조준 없이 던진 단검이 고블린의 미간에 정확히 명중한다.

"키엑!"

부들거리며 쓰러진 동료의 모습에 고블린들이 흠칫한다.

"안 들어올 거야?"

류민이 다가서자 고블린들이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다시금 단검을 집어서 던지자 또 한 마리가 나자빠진다.

"안 오면 내가 가고."

순간적으로 거리를 좁힌 류민이 칼춤을 췄다.

초록색의 핏물이 사방을 수놓는다.

[고블린을 처치하였습니다!]

[경험치 +4%]

[골드 +10]

[레벨이 올랐습니다!]

[퀘스트 진척도 : 고블린 100/100마리]

[1라운드 퀘스트를 달성하였습니다!]

100마리를 잡고 퀘스트를 달성한 순간.

류민의 주변에 반투명한 빛의 기둥이 생겼다.

퀘스트 성공 즉시 몬스터로부터 격리하는 일종의 보호막이었다.

'1라운드는 가볍게 통과했군.'

보호막이 생겼다는 건 절반의 범주에 들었다는 뜻이다.

선착순으로 통과하지 못하면 즉시 소멸해 버린다.

'내가 고블린을 미친 듯이 잡은 건 천사의 관심을 얻기 위한 것도 있지만....'

류민의 시선이 곧이어 떠오른 메시지에 향했다.

[축하합니다! 해당 구역의 1등으로 퀘스트를 달성하였습니다!]

[축하합니다! 전 구역의 1등으로 퀘스트를 달성하였습니다!]

[닉네임이 랭킹에 등재됩니다.]

'1등이 되기 위해서 빨리 잡은 것도 있지.'

라운드별로 퀘스트는 빨리 달성할수록 유리하다.

등수에 따라 보상이 차등으로 지급되니까.

'해당 구역별로, 전 구역별로, 최대 3위까지 보상이 주어지지.'

그중 전 구역 1위는 단연코 남들보다 유리한 보상을 얻을 수 있다.

18억 명의 플레이어 중 1등으로 퀘스트를 달성했다는 거니까.

잠시 후, 류민의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보상에 관한 메시지였다.

6. 무기 선택

[해당 구역 랭킹 1등 보상으로 '최하급 레어 무기 선택권'이 지급됩니다!]

[전 구역 랭킹 1등 보상으로 '특별 보상 선택 상자'가 지급됩니다!]

메시지를 본 류민이 인벤토리를 열었다.

못 보던 아이템 두 개가 들어 있었다.

무기 선택권과 보상 선택 상자다.

그중 류민은 무기 선택권을 집었다.

'사용.'

그러자 반투명한 창이 떠오른다.

[다음 레어 무기 중 하나를 선택하실 수 있습니다.]

[원하는 보상을 터치해 주세요.]

└ 1. 서슬 퍼런 장검

└ 2. 스틸레토

└ 3. 쟈벨린

검, 단검, 창.

원래 무기 종류는 이보다 많지만, 초반에 선택지는 이뿐이었다.

'이것만 해도 감지덕지하지. 무려 레어 아이템이니.'

아이템에는 6개의 등급이 있다.

노말, 레어, 에픽, 유니크, 레전더리, 갓 등.

레어는 그중 두 번째에 불과하지만, 일반적인 방법으론 얻기 힘들다는 걸 감안하면 꽤 좋은 보상이었다.

'초보자라면 검이나 리치가 긴 창을 고르겠지만....'

류민은 고민하지도 않고 손을 움직였다.

['스틸레토'를 선택하셨습니다.]

인벤토리로 보상이 들어오며 자동으로 정보창이 떠올랐다.

[스틸레토]

-분류 : 무기

-등급 : 레어

-공격력 : 15

-효과 : 민첩+1

-내구력 : 150/150

-사용 제한 : 초보 등급 이상

-설명 : 초보자가 사용할 수 있는 단검 중에선 최고의 무기다.

정보를 본 류민은 손에 들고 있던 고블린의 단검을 버렸다.

공격력 3에 스탯도 붙어 있지 않은 쓰레기였다.

'챙겨봤자 팔 수도 없으니 갖고 있을 필요는 없지.'

인벤토리에 넣어봐야 자리만 차지할 뿐이었다.

류민의 시선이 또 다른 보상에 향했다.

전 구역 1등을 달성해야만 얻을 수 있는 특별 보상 선택 상자였다.

당연히 앞선 최하급 레어 무기 선택권보다 훨씬 더 좋은 보상이었지만....

'일단은 사용을 보류한다.'

건들지 않고 인벤토리창을 닫았다.

그저 상태창을 열어 민첩을 찍고는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이템에는 관심 없다는 듯.

'용민이는 잘 싸우고 있으려나?'

인간과 고블린의 비명으로 가득한 아수라장 속에서 류민이 고개를 기웃거렸다.

라운드 통과자는 기둥 밖으로 이동할 수 없었기에 움직이는데 제한이 있었다.

'저기 있네.'

저 멀리 거대한 덩치의 황용민이 보인다.

다른 사람 뒤에 숨어서 처절하게 싸우는 모습을 보니 내심 안심이 됐다.

'이번에도 살아남겠군.'

1라운드뿐만 아니라 5라운드까지도 살아남는다는 걸 알고는 있지만, 변수가 생길까 봐 불안한 게 사실이었다.

'네놈은 일찍 죽어선 안 돼. 이용할 대로 이용한 다음에 필요가 없어지면 그때 죽여주마.'

하도 복수해서 남아 있는 원한은 없지만, 살려두고 싶지도 않은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아직 끝나려면 멀었지?'

일찍 퀘스트를 완수했다고 집에 먼저 보내주진 않는다.

절반의 달성자가 채워질 때까지는 기다려야 한다.

'의외로 형평성 있는 게임이라니까?'

일찍 끝냈다고 먼저 귀환하면 다른 참가자들은 고스란히 위험에 노출된다.

다들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을 테니까.

'영혼 전이 중인 상태에서 노려지는 것만큼 위험한 게 없지.'

영혼이 이계에 있는 상황에서 지구의 본체가 죽으면?

당연히 영혼도 죽는다.

그때는 플레이어가 아무리 강하다 해도 소용없다.

그저 무방비하게 당하는 것이다.

'가상현실게임 중에 목숨이 노려지는 것과 같은 상황이지.'

그런 위험을 바라지 않는 것인지, 시스템은 라운드가 끝나고 나서야 단체로 통과자들을 귀환시킨다.

류민이 지금 멀뚱히 기다리고 있는 이유였다.

'이 시간만 되면 기다리기 지루하단 말이지.'

1등으로 들어오면 이게 문제다.

"사, 살려줘! 아아악!"

"그, 그만! 그만해!"

사람들의 처절한 비명 속에서도 류민은 따분함을 느꼈다.

그동안 많이 봐온 것이다.

약한 자들은 도태되고, 강한 자들만이 살아남는다는 것을.

'어쩔 수 없어. 이 죽음의 게임에서 벗어나려면 경쟁에서 살아남는 것뿐이야.'

한낱 인간인 류민으로선 바꿀 수 없는 현실이다.

고개를 도리질하던 류민이 시간도 때울 겸 시동어를 외웠다.

'진행창.'

[전 구역]

└참가자 : 1,801,029,290

└달성자 : 3/900,514,645

[해당 구역 ESKS45-5]

└참가자 : 10,286

└달성자 : 1/5,143

퀘스트 진행창을 보니 전 구역 달성자가 3이었다.

현재 자신을 포함해 통과한 사람이 세 명이라는 뜻.

'내가 1등이니 나머지는 2, 3등이겠군.'

반면 이곳인 해당 구역의 달성자는 1명.

자신뿐이었다.

'2, 3위는 다른 구역에서 발생했나 보군.'

어쨌거나 전 구역이든 해당 구역이든 3위 안에 들지 못하면 의미는 없다.

그 밑으로는 따로 주어지는 보상이 없었으니 말이다.

'퀘스트 달성 보상으로 골드가 들어오긴 하지만 그건 누구나 받는 거니....'

그때 1이었던 해당 구역의 숫자가 2로 올라갔다.

주변을 돌아보니 저 멀리 반투명한 기둥에 갇힌 남자가 보인다.

이제 막 고블린 100마리를 잡고 퀘스트에 달성한 모양이다.

'슬슬 통과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겠어.'

예상대로 여기저기서 퀘스트 달성자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해당 구역 3위까지도 채워졌군.'

뜸하던 속도는 점점 가속화되었고 그에 따라 고블린의 수도 많이 줄었다.

'뭐, 순위가 뭐가 중요하겠어. 어떻게 해서든 절반의 범주에 들어가는 게 중요하지.'

고개를 돌려보니 거대한 덩치의 사내가 기둥에 갇혀 있었다.

황용민이었다.

'저 녀석도 통과했군.'

기둥에 갇혀 헉헉거리고 있는 것이 꽤나 고전한 모양이다.

그렇게 한숨을 돌리고 있는 통과자들과 달리 주변에선 치열한 접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키야아악!"

"으아아악!"

온갖 비명이 섞였지만, 처음과 같은 혼돈은 없었다.

사람들도 나름대로 노하우를 터득한 것이다.

'죽여야만 생존할 수 있는 이 환경에 적응한 거일 수도 있고.'

그래서인지 시간이 흐를수록 고블린의 숫자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숫자에선 우세일지 몰라도 개개인의 스펙은 인간들이 더 뛰어나니 당연한 결과.

게다가 고블린을 잡으면 스탯도 찍을 수 있으니 플레이어가 유리한 건 사실이다.

'인간과 고블린의 숫자가 비슷해지고 있어. 슬슬 천사가 나설 때가 됐군.'

퀘스트 달성자가 400명을 넘어서고 5만이었던 고블린이 1만으로 줄었을 때.

관전만 하던 천사가 개입했다.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인간과 고블린의 수가 어느 정도 비슷해졌네요? 그럼 다시 고블린을 충원해 볼까요?]

펄럭-!

날개를 펼치는 것이 신호였는지, 순간 초원에 있던 시체들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사람들이 당황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뭐, 뭐야?"

"고블린의 시체가 사라졌어?"

"고블린만이 아니야. 다른 사람의 시체도 사라졌어!"

당황하던 사람들이지만 그것도 잠시.

여기저기서 고블린들이 대거 나타나자 하나같이 똥 씹은 표정을 지었다.

[쿄호호호, 5만 마리를 리필해 드렸어요. 잡는데 부족하진 않을 거예요. 킥킥킥!]

"...."

모르긴 몰라도 사람들은 지금 천사에게 쌍욕을 퍼붓고 있을 거다.

"죽여!"

"으아아아!"

사람들은 다시금 죽기 살기로 무기를 휘둘러야 했다.

이런 곳에서 비명횡사하기엔 너무도 젊은 나이였다.

└달성자 : 1,021/5,143

...…

└달성자 : 2,129/5,143

...…

└달성자 : 3,533/5,143

퀘스트 달성자가 늘어남에 따라 고블린들이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들었다.

그때마다 천사는 시체를 치우고 고블린들을 추가시켰다.

그렇게 5시간 정도 흘렀을까?

바닥에 앉아 진행창을 보던 류민이 때가 됐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 있으면 달성자가 꽉 찬다.'

슬슬 보상을 정산하고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그 전에 꼭 해야 할 일이 있긴 하지만.

└달성자 : 5,143/5,143

이윽고 퀘스트 달성자 수가 꽉 찬 순간.

"어?"

"뭐야?"

초원을 가득 채웠던 고블린들이 남김없이 사라졌다.

마치 꿈이라도 꾼 듯.

[통과자가 절반이 되었네요.]

천사가 유감이라는 듯 말했다.

[아쉽지만 나머지는 소멸해야겠네요. 그게 이 게임의 룰이거든요.]

"뭐? 소멸?"

"자, 잠깐만요! 천사님! 저 한 마리만 더 잡으면 되거든요? 제발...!"

그때였다.

퀘스트에 달성하지 못한 사람들이 가루처럼 흩날렸다.

대략 3천 명에 달하는 사람들.

나머지 2천 명은 고블린에게 죽임을 당했다.

파스스스-

난데없이 찾아온 죽음에 사람들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그 장관 아닌 장관에, 기둥에서 지켜보던 달성자들이 마른침을 삼켰다.

일찍이 퀘스트를 달성하지 못했다면 자신도 저렇게 소멸당했을지 모른다.

'절반에 들지 못하면 얄짤 없이 소멸행이지.'

1만 명이었던 사람은 어느새 5천 명으로 줄어 있었다.

안타깝지만 류민이 그들을 구할 방법은 없다.

천사의 말대로 이 빌어먹을 게임의 핵심 룰이었으니까.

[다들 표정이 왜 그러죠? 살아남았으니 기뻐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고개를 갸웃하던 천사가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래도 좋아요. 여러분은 생존했으니까요. 축하해요. 이제 귀가할 수 있어요.]

귀가란 말에 사람들의 표정이 풀렸다.

안도의 한숨과 함께 웃음을 되찾았다.

그러나 천사가 입꼬리를 비틀며 웃었다.

아직 기뻐하기엔 일렀다.

[1라운드에 통과하신 걸 축하드려요. 다음 2라운드에서는 좀 더 분발하시길. 킥킥.]

"...."

이제 막 1라운드를 깼을 뿐이다.

다음 달 1일이 되면 예외 없이 2라운드로 불려와야 한다.

고작해야 한 달의 시간을 벌었을 뿐이다.

그 사실을 깨달았는지 사람들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그럼 귀가하기 전에 정산부터 해볼까요?]

천사가 예의 날개를 펼치자 류민의 눈앞에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 1라운드 결과 집계 ★

[전 구역]

└1위. 검은 낫 (Lv5 직업 없음) 00:10:21

└2위. 똥 멍청이들 (Lv5 직업 없음) 00:16:15

└3위. 천마 (Lv5 직업 없음) 00:17:07

[해당 구역 ESKS45-5]

└1위. 검은 낫 (Lv5 직업 없음) 00:10:21

└2위. 인생은 다큐 (Lv5 직업 없음) 00:23:55

└3위. 오른손에 흑염룡 (Lv5 직업 없음) 00:24:43

[현재 '검은 낫' 님의 순위는 전 구역 1위, 해당 구역 1위입니다.]

[순위 보상 - 최하급 레어 무기 선택권 (지급 완료), 특별 보상 선택 상자 (지급 완료)]

[클리어 보상 – 1,000골드 (미지급)]

[잠시 후 클리어 보상이 지급됩니다.]

[클리어 보상으로 1,000골드를 획득하셨습니다! 축하합니다!]

[획득한 골드로 상점에서 아이템을 구입할 수 있습니다.]

[상점 기능은 10레벨이 되면 잠금 해제됩니다.]

류민뿐만이 아니라 모두가 허공을 응시하고 있다.

다 같이 집계 결과를 보고 있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1,000골드만 받았겠지.'

1위를 기록한 류민은 순위 보상이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골드뿐이다.

'이제 내가 1위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겠네?'

아니나 다를까, 사람들이 힐끔거리며 류민을 쳐다봤다.

그 시선에는 부럽다는 눈빛도 있었고, 시기하는 눈빛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이 대단하다는 경외의 시선을 보냈다.

달성시간에서 2위와의 격차가 압도적이었으니 더욱 그러하리라.

놀란 건 비단 인간만이 아니었다.

[내가 맡은 구역에서 전 구역 1위가 나오다니.... 놀랍네요.]

천사의 이목이 류민에게 집중됐다.

[검은 낫? 대답하세요.]

"예."

[어떻게 그렇게 강할 수 있죠? 무슨 특별한 룬이라도 얻었....]

천사가 말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이런 바보 같은 질문을....'

천사의 질문은 명백한 실수였다.

플레이어의 상태창을 알 수 없다는 걸 광고하는 셈이었으니.

물론 류민은 반복된 삶을 통해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천사가 내심 당황하고 있다는 것도.

그렇기에 조금은 놀려주기로 했다.

"제 룬은 상태창을 보시면 알지 않나요?"

천연덕스러운 질문이었으나 천사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럼 알고 있죠. 천사인 내가 여러분의 정보도 모를까 봐요? 그냥 알면서도 물어본 거였어요.]

'거짓말하고 있네.'

류민은 알고 있었다.

천사에게 플레이어의 상태창을 볼 권한 따윈 없다는 것을.

'게임을 안내하고 진행하는데 필요한 권한만 있을 뿐이지, 플레이어들의 개인 정보까진 알지 못해.'

회귀를 진행하면서 의외로 천사에 대한 정보를 많이 알게 됐다.

그래서일까?

"천사님."

[뭐죠? 인간?]

"한 가지 요구 좀 해도 되겠습니까?"

[요구?]

류민은 과감한 발언을 던질 수 있었다.

"랭킹 1위 보상이 너무 짠 거 같아서요."

[뭐라고요?]

"더 좋은 보상을 줬으면 합니다만."

감히 천사를 상대로 흥정을 시도하다니.

당찬 발언에 지켜보던 사람들이 입을 떡 벌렸다.

7. 뒤통수

"저, 저 사람이 지금 뭐라고 했지?"

"더 좋은 보상을 달라고 한 거 같은데?"

"감히 천사님에게 흥정을...?"

"미친놈인가?"

"죽고 싶어서 환장했네."

사람들이 수군거렸지만 천사의 귀엔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귀를 의심했을 뿐.

[지금 뭐라고 했죠? 인간?]

"보상이 마음에 안 드니 더 좋은 걸로 바꿔 달라고요."

[....]

잘못 들었나 싶어 물었더니 아니었다.

눈앞의 인간이 눈알을 똑바로 뜨고서 요구한다.

마치 당연한 권리라는 듯.

'저 빌어 처먹을 인간 새끼가 감히 나에게?'

천사 브리엘의 고운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확 눈알을 파버릴까?'

위협적으로 노려봤지만, 인간은 여전히 당당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헛웃음마저 나왔다.

'초반부터 나름대로 활약 좀 하길래 관심 두고 지켜봤었는데 이런 정신병자 같은 소리나 해대다니.'

고블린 좀 잡았다고 자신을 만만하게 보는 걸까?

어이가 없어서 당장에라도 머리를 터트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일회용이었던 시살(視殺)의 권한은 진즉에 써버렸으니까.

'건방진 인간 새끼. 확 죽여 버릴 수도 없고... 응? 잠깐.'

순간 생각을 이어가던 브리엘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못 죽일 게 뭐 있어? 죽이고 싶으면 죽이면 되잖아?'

좋은 생각이 떠오른 브리엘이 류민을 향해 말했다.

[더 좋은 보상을 원한다고 했죠?]

어느 순간 류민을 감싸고 있던 장막이 사라졌다.

[들어줄 테니 따라오세요. 다른 인간들은 내가 올 때까지 대기하고 있고요.]

그 말에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기둥에 갇혀서 움직일 수도 없지만.

"더 좋은 보상을 준다고?"

"결국 저 검은 낫이라는 녀석의 말대로 해주겠다는 건가?"

"설마 천사에게 흥정이 먹힐 줄이야."

"나도 한번 말해볼까? 보상 좀 바꿔 달라고."

"아마 1위는 찍어야 들어주는 거겠지?"

"진짜로 보상을 바꿔주는 거라면 부럽네."

사람들이 중얼거리며 천사를 따라가는 류민을 부러운 눈으로 쳐다봤다.

류민은 그런 시선들을 보며 내심 혀를 찼지만.

'부러워할 거 없는데. 천사가 데려가서 뭘 하려는지 알면.'

천사는 정말로 보상이나 주겠다고 자신을 데려가는 게 아니다.

'보상이라면 여기서 줘도 되는데 뭐하러 장소를 옮기겠어?'

천사가 장소를 옮기는 이유는 하나.

'조용한 곳으로 유인해서 날 죽일 심산이지.'

류민은 확신했다.

어째서 확신하냐고?

직접 겪어봤으니까.

천사에게 죽임을 당해봤으니까.

'12회차였나? 처음 천사에게 뒤통수 맞았을 땐 정말 아찔했지.'

12회차 때 류민은 그동안의 경험과 실력을 바탕으로 고블린을 학살했다.

그 결과 처음으로 전 구역 1위를 찍어봤다.

'그때 많이 기대했지. 1위는 얼마나 큰 보상을 받는 걸까 하고.'

하지만 기대가 너무 컸던 걸까?

1위라고 주어지는 특별 보상 선택 상자를 보고 류민이 한 말은....

-생각보다 보상이 별로네.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린 불평이었다.

물론 불평이야 할 수 있다.

문제는 그 불평을 천사가 들었다는 거지만.

'그땐 몰랐지. 불평 좀 했다가 천사에게 찍힐 줄은.'

천사에게 찍힌 대가는 컸다.

더 좋은 보상으로 바꿔주겠다며 유인한 천사가 류민의 뒤통수를 쳤다.

고작 자신의 심기를 거슬렀다는 이유로 죽었다.

류민이 천사를 절대로 좋게 볼 수 없는 이유였다.

부당한 죽임을 당했지만 천사가 그런 걸 신경 쓸 리가 없다.

'천사에게 있어서 인간은 하등한 벌레에 지나지 않아. 죽어도 그만이지.'

지금은 비록 안내역을 맡고 있지만, 마음 같아선 인간들을 싹 다 죽이고 싶을 거다.

하지만 그러지 못하는 이유가 있었다.

천사는 생각보다 강하지 않으니까.

'초반 임팩트가 강했기에 사람들은 생각할 거야. 천사에겐 대적해선 안 된다고. 그랬다간 머리통이 터질 거라고.'

하지만 이는 다분히 의도된 상황이었다.

천사가 바라는 상황이었고.

머리를 터트린 것은 인간들을 효과적으로 통솔하기 위한 퍼포먼스에 지나지 않는다.

'머리통을 터트린 건 어디까지나 일회성 능력이야. 안내역을 맡으면서 주어진, 단 한 명한테만 쓸 수 있는 천사의 특권이지.'

시살이라는 능력으로, 과거 회차에 천사를 고문해서 알아낸 정보다.

'그런 특권을 초반에 사용했어.'

그렇기에 천사는 더 이상 머리를 터트릴 수 없었다.

류민이 겁을 먹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시살이 없는 천사는 무서워할 이유가 없지.'

다들 능력에 겁먹고 있어서 그렇지 천사는 생각보다 약하다.

날개 좀 달려 있고 몇 가지 재주를 부릴 줄 알지만 그것뿐.

신체 능력도 인간과 별반 다르지 않다.

오히려 근육도 없고 보이는 것처럼 연약하다.

'천사는 그냥 날개 달린 인간에 불과해.'

천사에게 죽은 류민은 다음 회차 때 바로 복수에 나섰다.

그 과정에서 알게 된 것들이 있다.

천사는 생각보다 약하다는 점.

그리고 천사를 죽이면 히든 보상이 나온다는 점이다.

'히든 보상을 놓칠 수야 없지. 특히 유일 클래스인 사신으로 전직할 수 있는 아이템이라면.'

천사를 죽이면 사신 전직에 필요한 아이템이 나온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이후로, 류민은 계속해서 천사를 죽였다.

다음 회차도, 그다음 회차도.

일부러 1라운드부터 활약해서 천사의 눈에 띈 다음 흥정을 시도했다.

'일종의 미끼를 던진 거지. 나를 물으라는.'

그때마다 천사는 날개 속에 숨긴 비수로 류민을 찔러 죽이려고 했다.

하지만 당하는 건 언제나 천사 쪽이었다.

'뒤통수 맞는 건 12회차 때 한 번으로 족하다.'

이번에도 뒤통수를 맞기 전에 먼저 뒤통수를 치고 보상을 받는다.

그런 생각을 하는 그때, 뒤통수가 따가웠는지 천사가 뒤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뭘 그렇게 떨어져서 따라와요? 자꾸 고개 돌리게 할 거예요? 바짝 따라붙지 못해요?]

"아, 예."

류민이 잰걸음으로 다가섰지만 천사는 여전히 불만 가득한 표정이었다.

'하여간 인간들이란, 꼭 큰소리를 쳐야 말을 쳐 듣는단 말이야. 쯧.'

말귀도 못 알아듣고 욕심도 많다.

좋아하고 싶어도 좋아할 수가 없는 게 인간이란 족속이었다.

'벌레면 벌레답게 주는 대로 처받을 것이지 감히 보상을 요구해? 그래, 욕심부린 대가가 어떤 건지 내가 톡톡히 보여주지. 킥킥킥.'

생각만으로도 웃겼는지 브리엘이 입가에 비웃음을 머금었다.

그녀는 애당초 류민에게 보상을 바꿔줄 생각이 없었다.

그럴 능력도 되지 않는다.

'시스템으로 정해진 보상을 내가 어떻게 바꿔줘?'

단지 달콤한 말로 유인했을 뿐이다.

눈앞의 인간을 목격자가 없는 장소에서 죽이기 위해.

'플레이어를 죽이지 말라는 규정은 없으니까.'

안 그래도 시살로 초반에 한 명 죽이지 않았던가?

일회성이라 이제는 사용이 불가했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죽일 순 없지. 그랬다간 위에서 무슨 소리 들을지 모르니까.'

플레이어를 죽이면 안 된다는 규정은 없지만 그렇다고 죽여도 된다는 규정도 없다.

오히려 개인적인 일로 플레이어를 죽이면 문제가 될 공산이 크다.

플레이어들이 나중에 형평성을 문제 삼아 반항이라도 한다면?

기껏 준비한 게임을 망친 꼴이 되니까.

그때가 되면 브리엘도 책임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목격자를 남기지 않고 죽이는 게 가장 깔끔하고 좋지.'

브리엘은 자신을 열받게 한 인간을 두고 볼 수 없었다.

그냥 두기엔 자존심이 용납지 않는다.

'다른 인간들은 겁먹었는지 말을 잘 듣는데 랭킹 1위라는 인간은 보상을 흥정하며 심기를 거슬리게 한단 말이야.'

1위를 찍어보니 욕심에 눈이 돌아간 모양이다.

'멍청한 인간 새끼. 가만히나 있었으면 중간은 갔을 것을.'

뒤에서 걷고 있지만 생각할수록 괘씸한 인간이었다.

'저 지점만 지나면 바로 죽여주지.'

사람들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어진 천사가 걸음을 멈췄다.

작업하기엔 이쯤이 좋을 듯싶다.

[자, 보상을 원한다고 했죠? 어디 어떤 보상을....]

등을 돌린 그 순간, 천사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눈 앞을 가리는 주먹을 보았으니까.

빠악-!

[캬학!]

비틀거리다 주저앉은 천사가 한차례 머리를 털었다.

고통보다는 충격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뭐지? 설마 저 인간 놈이 날 때렸다고?'

곧이어 자신이 당한 상황을 깨닫고 고운 이마가 사정없이 구겨진다.

[이 빌어먹을 인간 놈이!]

고개를 쳐들었지만, 인간은 눈앞에 없었다.

하지만 어디 있는지는 금세 알 수 있었다.

등 뒤에서 감촉이 느껴졌으니까.

류민은 다름 아니라 날갯죽지를 붙잡고 있었다.

[자, 잠깐! 뭘 하려는...!]

뿌드득-!

소름 끼치는 소리와 동시에 천사의 입이 사정없이 벌어졌다.

[꺄으아아아아악!]

"엄살은."

축 늘어진 날개를 치우고 류민이 다른 쪽 날개를 잡았다.

도망치지 못하게 반대쪽마저 부러뜨릴 셈이다.

뿌드드득-!

[끼야야아아아아아!]

"고통스럽나?"

천사는 비명을 지르다가도 어이가 없어져서 외쳤다.

[다, 당연한 소리를!]

"5분 뒤면 그 당연한 질문을 네가 했겠지. 쿄호호호 같은 특유의 재수 없는 웃음소리를 내면서."

[정신 나갔냐, 인간!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날개에 숨겨놓은 비수로 나 죽이려고 했지?"

[....]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무는 천사의 모습에, 류민이 미소 지었다.

"그럴 줄 알았어."

[주, 죽이다니, 난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애써 거짓말할 필요 없어. 얼굴에 다 티 나니까. 브리엘."

천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인간 따위가 어떻게 내 이름을...?]

"그건 알 바 없고."

류민이 손을 들었다.

그의 손에는 어느덧 단검이 들려 있었다.

1위 보상으로 선택했던 스틸레토였다.

[뭐, 뭐 하는 짓이냐! 갑자기 무기는 왜...!]

"보면 몰라?"

류민의 서슬 퍼런 눈빛에 브리엘은 입을 다물었다.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자신은 이 자리에서 곧 죽을 거라는 사실을.

일순 브리엘의 눈빛에 두려움이 떠올랐지만, 자존심은 꺾이지 않았다.

[머, 머리가 터지고 싶어서 환장한 거냐, 인간!]

"너 이제 시살 능력 없잖아."

[....]

정곡을 찔리자 순간 말문이 막혔다.

천사의 목소리에 당황이 묻어나왔다.

[이, 이런다고 네가 무사할 줄 아느냐! 분명 내 동료들이 가만있지 않을 거다!]

"동료는 무슨. 천사는 남의 일에 관심 없는 이기주의자들이라는 걸 내가 모를 줄 아나? 네가 죽든 말든 아무 상관 안 할걸?"

[그, 그런 것까지 알다니. 대체 어떻게...?]

"알 거 없다니까. 이제 그만 가라."

단검을 치켜들자 천사의 표정에 다급함이 떠올랐다.

[자, 잠깐! 이런다고 너한테 득이 될 건 없어!]

"있어. 넌 모르겠지만."

[날 죽이면 후회한다! 집에 돌아가지 못할 거다!]

"갈 수 있어. 정산이 끝나면 자동으로 귀환하는 시스템이니까."

[어, 어떻게 그런 것까지. 대체 모르는 게 뭐냐?]

"글쎄."

[원하는 정보는 다 내어주마! 한 번만 기회를 다오!]

"정보는 필요 없어. 이미 다 뽑아먹을 대로 먹었으니까."

[뭐? 언제....]

천사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류민의 단검이 천사의 심장을 파고들었으니까.

[커흐륵!]

눈자위가 커진 천사가 한차례 몸을 들썩하더니 축 늘어졌다.

찢긴 천사의 가슴팍에서 금빛의 피가 흘러나온다.

그러거나 말거나 류민의 시선이 떠오른 메시지로 향했다.

히든 보상에 관한 메시지였다.

8. 천사 살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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