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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9화. 기적 같은 기연 (1)

부디.

모든 것이 그저 꿈이길.

한때의 지나가는 편린이길.

황태자 당신이 위기에 내몰린 모든 일들이. 당신이 나를 구하고자 가시를 들었던 순간이. 내가 당신의 목을 졸랐던 찰나가.

그저 악몽이길. 깨어난 후에 고개 저어 털어내면 그만일, 일장춘몽에 불과하길.

부디, 그랬으면 한다.

부디.

"...."

데미안 카이엔은 눈을 떴다.

처음엔 그저 멍하였다. 자신이 아직도 잠을 자고 있는 건가 싶었다. 물끄러미 뜬 눈으로 들어오는 주위의 풍경이, 현실이라 하기엔 지나치게 평화롭고 고요했으니까.

'하지만....'

꿈이 아니다.

현실이다.

눈길을 움직였다. 소박한 실내가 보였다. 제법 익숙한 공간. 툴룬 상단 건물. 크라노스에 도착한 이후로 사용했던 침실. 덮고 있는 새하얀 시트와 폭신한 베개마저도 낯설지가 않았다.

'나는....'

어떻게 된 걸까.

어째서 여기에 누워 있는 걸까.

'황태자 전하는? 그리고....'

마계왕은?

...흠칫.

저도 모르게 어깨가 떨렸다.

비로소 떠올랐다. 그저 꿈이 아니었다. 한때의 지나가는 편린 따위는 더더욱 아니었다.

황태자 당신이 위기에 내몰린 모든 일들이. 당신이 나를 구하고자 가시를 들었던 순간이. 내가 당신의 목을 졸랐던 찰나가.

모두 현실이었다.

깨어난 후에 고개 저어 털어내면 그만인, 일장춘몽이 아니었다.

'....'

데미안은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그 간단한 동작마저도 쉽지가 않았다. 허리와 등, 가슴과 어깨, 목덜미까지. 아팠다. 신체를 이루는 모든 근육의 줄기가 작은 동작 하나에도 비명을 질러댔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왼손을 들어 살폈다.

온통 붕대가 감겨 있었다.

"...."

그래, 추락의 순간. 절벽에 꽂아 넣었던 검마저 부러졌더랬지. 그 후에 맨손으로 절벽을 움켜쥐어서라도 떨어지는 속도를 늦추려 애를 썼던가.

그리고 나는 이 손으로 황태자 당신의 목을....

'나는 어떻게 된 걸까.'

붕괴하던 협곡에서 겪은 일들이 비로소 떠올랐다. 정신을 잃기 직전의 순간들도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마계왕 아케로스.

어째서 내가 그 존재의 정체를 아는지, 심지어 이름마저 알고 있는 건지. 도저히 모르겠다. 동시에 한편으로는 다 알겠다.

내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존재라는 것도. 마계왕의 계획을 위해 마련된 준비물에 불과하다는 것도. 자신에게 주어진 역혈의 심법 또한 그 수단의 하나라는 사실 또한. 모두 날카로운 진실의 비수가 되어 가슴에 서슴없이 박혀 드는 기분이다.

'그런데 전하가....'

그걸 막아낸 걸까. 덕분에 내가 이성을 잃지 않고서 이렇듯 전날의 일을 떠올리고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을 떠올리고 있을 무렵이었다.

두쿵....

마치 이쪽의 의문에 대답이라도 하듯, 심장에 자리한 마나하트가 반응했다. 심장의 움직임에 맞추어 부드러운 울림을 전해 왔다.

한데... 마나하트가 만들어내는 흐름이 정상이 아니었다. 역방향이었다.

"...."

데미안은 황급히 역혈의 심법을 중단하려 하였다. 그러다가 더욱 놀라고 말았다. 자신은 역혈의 심법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예 아무런 심법도 쓰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마나하트가 다시 한 번.

두쿵...!

역방향으로 마나를 순환시켰다.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설마."

나는 이제 숨을 쉬듯이 자연스럽게 마나 역행을 하게 된 건가.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았다. 흐름의 방향을 되돌리려 하여도 소용이 없었다. 마나를 정방향으로 돌리려 하면 오히려 숨을 일부러 멈추고 있는 듯한 불편함이 느껴질 정도였다.

기가 막혔다.

당황스러웠다.

그때였다.

벌컥!

"...!"

침실 문이 서슴없이 열렸다. 부릅뜬 눈길을 반사적으로 던졌다. 그러자 난데없이 등장한 침입자(?)가 튼실한 송곳니를 드러내며 벌쭉 웃었다.

"허? 벌써 깨어난 건가, 꾸익?"

오크 족장, 브라쉬였다.

"인간 데미안, 사흘 만에 눈을 떴다. 보기보다 튼튼하다, 꾸익!"

"...."

사흘?

내가 그렇게나 오래 누워 있었다고?

데미안은 미간을 찡그렸다. 그는 수건을 가지고 쿵쿵 걸어오는 브라쉬를 향해 물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여긴, 나는... 아니 그보다, 전하는 무사하십니까?"

오직 그것만이 가장 궁금하였다.

황태자 당신은 무사할까.

나름 기억을 짚어보려 애를 써도 정작 떠오르는 것이 별로 없었다. 흐릿한 기억의 편린 속에 점점이 박힌 짤막한 순간들만이 떠오를 뿐이었다.

내 팔꿈치에 가시를 꽂던 황태자. 황태자를 향해 호통을 치던 마계왕. 대답 대신 가시를 더욱 지그시 누르던 황태자.

그 끝에 당신은 쓰러졌지, 아마.

그리고 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던가.'

아마도 그랬던 것 같다.

황태자의 목을 조르던 손을 풀고서, 손을 뻗어 허물어지던 그의 몸을 받아 안았던 것도 같다. 그 직후에 마계왕이 되뇌던 말을 들었던 것도 같다.

아직은 끝이 아니라고. 이제 걸음은 멈출 수 없게 되었노라고. 오늘이 단지 시작일 뿐이라고.

"...."

그 비웃음 섞인 말이 마지막이었다. 그렇게 나도 황태자를 받아 안은 채로 의식의 끈을 놓치고 말았으니까.

그러니까....

"전하는 어떻게 되신 겁니까."

물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브라쉬는 선뜻 대답이 없었다. 그 침묵에 저도 모르게 가슴 한쪽이 철렁 내려앉았다. 설마. 아니겠지.

브라쉬의 커다란 입이 열린 것은, 불길한 예감이 뇌리에 들러붙어 오려던 무렵이었다.

"아, 인간의 황태자라면 무사하다, 꾸익!"

"그럼...."

"아직 자는 중이다. 저녁에 뭐 먹을까 생각하다가 질문을 늦게 들었다. 미안하구만, 꾸익."

"...."

한 대 때릴까.

아니, 그건 몸이 좀 나은 다음에.

데미안은 슬며시 고개를 치켜드는 억하심정을 지그시 억눌렀다. 그 사이, 브라쉬가 침대 옆으로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오크 족장의 입가에는 어느새 흐뭇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사흘 만에 깨어났으니 제법 얼떨떨하겠지. 궁금한 것도 많을 테고. 안 그런가, 꾸익?"

"물론입니다. 좀 들려주시겠습니까?"

"당연히. 흠흠, 꾸익!"

브라쉬가 목청을 풀며 빙긋 웃었다.

"우선 제일 궁금해하고 있을 인간의 황태자에 대한 소식부터. 그분은 무사하시네. 크게 다치지도 않았고. 다만 충격이 컸는지 아직 눈을 뜨지는 못했어. 자네보다 튼튼하지 않아서 그런 거겠지만, 꾸익."

"...."

다행이다.

데미안이 안도하며 내뱉는 한숨 사이로 브라쉬의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분과 함께했던 미노타우로스도 멀쩡하네. 갈빗대가 서너 군데쯤 나가고 폐를 살짝 다치긴 했는데, 그건 본인 기준으로는 침 바르면 낫는 거라더구만, 꾸익."

"...."

그것도 다행.

워낙 튼튼한 우루스라면 그럴 법도 하다.

"거기에 자네까지. 도시를 구한 영웅 셋이 결과적으로 모두 무사해서 정말로 다행이야. 그날 인간의 황태자와 자네 등이 보여준 활약과 희생이 아니었다면... 아마 이 도시는 쑥대밭이 되었겠지, 꾸익."

"도시는... 괜찮은 겁니까?"

"보시다시피, 꾸익."

브라쉬가 건장한 어깨를 으쓱였다.

"거의 아무런 피해를 입지도 않았어. 그날 무슨 수를 쓴 건진 모르겠지만, 전장을 배회하던 모든 좀비가 황태자를 따라 뛰어가더군. 협곡 속에서 폭발했고. 만약 그 폭발이 전장에서 일어났다면... 생각도 하기 싫군. 도시가 파괴되는 건 물론이고 수많은 사람이 죽고 다쳤을 테니까."

"그 정도였습니까."

"말도 말게. 폭발이 일어난 지점은 협곡 자체가 아예 사라져 버렸네. 그 주변은 절벽이 통째로 녹았다가 굳으면서 유리로 된 매끈한 벽이 만들어져 버렸고 말이지. 그뿐일까. 한참 떨어진 이곳 도시의 성벽마저도 우르르 흔들렸을 정도였네. 조금만 진동이 강했다면 무너졌을 걸세, 꾸익."

"...."

그랬구나.

새삼 그 난리통에서 살아남았다는 게 스스로도 믿기지가 않았다. 아마도 그건 이쪽을 보는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 심정이겠지.

"어쨌건- 꾸익."

설명을 이어가던 브라쉬가 이쪽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사실은 이상한 점이 있네, 꾸익."

"이상한 점이라시면?"

"인간의 황태자가 거의 매일, 매시간마다 잠꼬대를 심하게 하고 있지, 꾸익."

"잠꼬대를 말입니까?"

데미안은 의아함을 느꼈다. 잠꼬대라니. 한데 그게 저렇듯 심각한 표정으로 이상하다고까지 말할 일이던가.

그 이유는 곧 돌아온 브라쉬의 대답을 통해 알 수 있었다.

"계속해서 자네와 누군가의 이름을 연거푸 부르고 있다네. 알게스? 아가레스? 아케로스? 대략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은데. 혹시 아는 이름인가, 꾸익?"

"아뇨. 모릅니다."

물론 안다.

마계왕의 이름이니까.

그러나 딱 잘라 거짓말을 했다. 아픈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안 되겠다. 내 눈으로 황태자를 살펴봐야겠다. 그러기 전에는 안심이 되지가 않을 것 같다.

"전하께서는 어디 계십니까?"

"지금 가보려고, 꾸익?"

"예."

"그럼 곤란한데, 꾸익."

"어째서입니까."

"인간 데미안, 냄새 난다, 꾸익."

"예에?"

"사흘 동안 누워만 있었다. 머리도 안 감고 양치도 세수도 안 했다. 어휴 더러워, 꾸익."

"...그냥 안내나 해주시죠."

다행히 황태자는 바로 옆방에 누워 있었다. 곤히 잠든 황태자의 모습에 다시금 안도의 한숨이 남몰래 흘러나왔다.

그러나 황태자의 목덜미에 새겨진 피멍을 보면서는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

그날의 나는, 그 순간의 내 손아귀는, 저렇듯 피멍이 새겨질 정도로 독하게 황태자의 목을 졸랐던 거였다.

가능하다면 눈길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싶었다. 그런데 그게 마음대로 되지가 않았다. 황태자에게 다가가면서도, 그의 곁에 의자를 끌어당겨 앉으면서도, 잠든 그의 곁을 지키는 동안에도 내내 그러했다.

오직 황태자의 목덜미에만 시선이 갔다. 선명한 멍 자욱에만 눈길이 사로잡혔다.

미안해서? 혹은, 그날의 행동이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음을 스스로에게 설득하기 위해서?

모르겠다.

그저 바라건대, 황태자가 어서 눈을 떠주면 좋겠다. 잘못했다고 말하고 싶다. 여전히 당신의 곁을 지키고 싶노라 말하고 싶다. 한편으로는 물어보고도 싶다.

'당신은 언제부터, 어디까지 알고 있던 걸까.'

마계왕.

역혈의 심법.

파멸적이던 각성까지.

그동안 혼자서만 그 모든 사실을 품듯이 알고서, 자신을 과잉보호하기 위해 전전긍긍했을 황태자의 모습이 뒤늦게야 훤히 그려졌다.

그래서였다.

앞으로는 그러지 말라고. 내게도 알려달라고. 한 번쯤 그렇게 말해보고 싶었다.

'그러니까 어서 눈을 뜨십시오, 전하.'

여전히 온몸이 아프고 쓰리다. 그러나 눈을 뜨지 못하는 당신의 모습이 더욱 아프고 쓰라리다.

그날, 데미안은 간절히 기원하며 황태자의 곁을 밤새도록 지켰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그러하였다.

그동안 잠든 라키엘에게는 아무도 모를, 기적과도 같은 기연이 일어나고 있었다.

...딩동.

220화. 기적 같은 기연 (2)

세상에는 기적이라는 것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평소에는 믿지 않지만, 결정적이고도 간절한 순간에는 잠깐이나마 진심으로 갈구하게 되는, 그런 기적이라는 것이 있다. 그리고 지금, 이곳 크라노스 시가지의 광장에 모인 사람들이 그런 기적을 바라는 중이었다.

"자네 들었나? 황태자 전하께서 아직도 눈을 못 뜨고 계시다던데?"

"당연히 들었지요. 벌써 열흘째 의식을 못 찾고 계신다고.... 그러니까 제가 여기 나온 게 아니겠습니까?"

"허허. 자네도 기도를 올리려고?"

"예. 아마 어르신도 비슷하신가 봅니다?"

"물론일세. 내 아들이 전하 덕분에 목숨을 건졌으니."

"아, 그날 북문에서 싸웠던 아드님 말이지요? 다친 데는 좀 괜찮습니까?"

"괜찮다마다. 오히려 날이 갈수록 엄살이 늘어서 큰일일세, 허허."

"그렇군요. 다행입니다."

"다행은 무슨. 전하께서 눈을 뜨셔야 진짜 다행인 게지."

"하긴... 예."

사내가 한숨을 내쉬었다. 노인의 얼굴도 수심에 잠겼다. 그 곁의 아낙도 비슷한 표정으로 두 손을 꼭 모았다. 엄마를 따라 나온 아이가 고개를 들었다. 어른들의 틈바구니 너머, 얼핏 보이는 커다란 건물을 바라보았다.

툴룬 상단 본부 건물이었다.

"엄마, 저기서 황태자님이 코오 하는 거야?"

"그렇단다. 우리 전하께서 얼른 일어나시도록 기도를 드려볼까?"

"응! 기도!"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성벽 복구 작업에 동원된 인원을 제외한 거의 모든 시민이 광장에 모였다. 모두가 한마음으로 상단 본부를 바라보며 기원했다. 황태자가 하루빨리 의식을 찾기를. 거룩한 용기와 용감한 희생으로 도시를 구원한 영웅이 눈을 떠 주기를.

그런 마음은 사람들의 틈바구니 한켠에 스며들어 있는 좀비, 툴룬도 마찬가지였다.

'후우. 그나저나 큰일이로군.'

좀비 툴룬은 두툼한 후드를 더욱 깊이 눌러썼다. 다행히 주위의 사람들은 자신의 정체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러니까 이렇듯 태연히 광장을 거닐며 상단 건물을 바라볼 수가 있는 것이지만.

'설마하니 황태자 전하께서 아직도 눈을 뜨지 못하실 줄이야.'

문득, 열흘 전의 일이 떠올랐다.

언데드 군단의 침공이 벌어졌던 날이었다. 자신은 운이 좋게도 다치지 않았다. 전투의 막바지에 카르투의 자폭 명령이 전해져 오기도 했지만, 상큼하게 무시했다.

자신과 함께 혼신의 연기력(?)을 선보였던 북문 수비병들도 모두 무사했다. 다행이었다. 덕분에 미련 없이 잠적할 수 있었다.

그 후로 줄곧 숨어서 지냈다.

좀비의 몰골 때문이었다.

몇 차례인가, 상단 건물로 들어가려는 시도도 해보았다. 그러나 그만두었다. 황태자가 머물고 있기 때문인지, 경계가 너무나 삼엄했다. 몰래 들어가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렇다고 이쪽의 정체를 아는 황태자의 호위들에게 사정을 밝히고 들어가자니, 그것도 여의치가 않았다. 상단 건물 내에 상주하는 눈과 귀가 너무 많은 까닭이었다.

만약 하인이나 일꾼 중의 누군가가 호위에게 부탁하는 자신의 모습을 본다면? 그들의 입을 통해 자신의 외손녀가 진실을 알게 된다면? 자신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낮은 가능성이었지만, 가능성이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그런 시도는 꺼려졌다. 아이가 충격을 받는 것만큼은 무조건 피하고 싶었다.

하여 그날 이후 걸인으로 위장하였다. 일이 좀 더 잠잠해지면 거취를 정하리라 다짐하였다. 한데 좀처럼 일이 잠잠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황태자가 열흘째 눈을 뜨지 못하고 있는 까닭이었다.

좀비 툴룬은 그 며칠 동안 변화한 도시의 분위기를 돌이켜보았다.

'처음엔 다들... 환호했더랬지.'

한꺼번에 엄청난 폭발을 일으킨 언데드 군단. 놈들을 유도하고, 무너지는 협곡 속에서도 크게 다친 곳 없이 생환한 황태자. 영웅의 희생과 업적에 도시의 모두가 눈시울을 붉혔다. 환호하고, 찬사를 머금었다.

한편으로 기다렸다.

영웅이 눈을 떠 주기를.

하지만 기대는 곧 걱정으로 바뀌어야 했다. 혼절한 지 열흘이 지나고 있음에도, 황태자는 소생의 어떠한 기색도 보여주지 못하고 있었다.

난감했다.

설마 이대로 황태자가 잘못되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들었다. 자신의 은인이자 도시를 구원한 영웅의 마지막이 이런 식은 아니었으면 싶었다.

'그러니 전하. 부디, 모쪼록, 눈을 뜨고서 건재함을 알려주소서.'

좀비 툴룬은 고개를 숙이고서 진심으로 기원했다. 그 곁의 무수한 시민들도 마찬가지였다. 한마음으로 머금은 기도와 염원의 숨결이 황야의 바람에 실렸다. 살랑거리는 바람이 누군가의 옷깃에 묻은 고양이털 한 가닥을 흔들었다.

미미한 고양이털이 바람결에 두둥실 떠올랐다. 날려갔다. 상단 본부 건물을 향해. 살짝 열린 창문 틈새로. 창가에 놓인 침대 머리맡으로. 마침내 침대에 누운 라키엘의 이마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라키엘은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몸속에서는 기적 같은 작은 기연이 생겨나고 있었다. 열흘 내내. 한시도 멈추지 않고서.

딩동!

[오장육부가 긴급회의를 소집합니다.]

[오장육부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인상을 씁니다.]

[심장 : 야. 큰일 났다. 진심 비상사태임. 이거 어떡하냐?]

오장육부의 리더, 심장은 미간을 찡그렸다.

난감했다. 설마 이런 사태가 벌어질 줄은 몰랐는데. 막막한 심정에 나머지 오장육부를 돌아보았다.

[허파 : 흐프헙... ㅜㅜ]

[대장 : 후우... 괄약근이 안 풀려 ㅠㅠ]

[간장 : 여기도 마찬가지임. 클났다 ㄹㅇ]

[위장 : 배고파 밥 줘 응애!]

[콩팥 : 이 사태에도 밥이 넘어가냐 ㅉㅉ]

역시나 다른 녀석들의 반응도 매한가지였다. 몸뚱이가 열흘째 눈을 못 뜨고 있으니 하나같이 의기소침해진 모습들이었다.

심장은 애써 모두에게 용기를 불어넣으려 애를 썼다.

[심장 : 쯧. 우리 이럴수록 대책을 논의해봐야지, 응? 그래도 우리가 그 괴물 눈깔 앞에서도 의연하게 대처를 했잖냐.]

[허파 : ...흐픕!]

[대장 : ㅋㅋㅋ 허파 형님 경기 일으켰지 말입니다ㅋㅋㅋ]

[간장 : 근데 마계왕인가? 그놈 눈빛 진심 장난 아니긴 했음ㄹㅇ]

[위장 : ㄹㅇㅇㅈ. 융털돌기 쪼그라들더라.]

[콩팥 : 난 살짝 지렸음!]

[심장 : 그래도 너희가 그때 모두 나서줘서 우리가 산 거임. 나 진짜... 그때 처음으로 멈출 뻔했다?]

심장은 솔직하게 말했다. 사실이었다. 열흘 전, 마계왕과 눈이 마주쳤던 마지막 순간. 라키엘이 마계왕에게서 눈을 돌리지 못하던 그 순간이었던가.

실로 엄청난 타격이 신체에 가해졌다. 단순한 물리적 타격과는 차원이 달랐다. 영혼 자체를 근원에서부터 말살하는 종류의 충격이었다.

그 결과, 심장마비가 왔다. 즉사의 절차가 시작되었다. 신화적 존재와 감히 눈을 마주친 필멸자가 치러야 할, 피할 수 없는 대가였다.

[심장 : 그때 너희가 전부 소매 걷어붙이고 나서서 나 지켜줬잖냐. 다들 막 간절하게 응급 마사지 해주고. 나 그때 좀 감동받았음.]

[허파 : 흐픕...ㅋㅋㅋ 흐프픜ㅋㅋ]

[대장 : 사실은 ㅈㄴ 밟았다는 게 학계의 정설이지 말입니다ㅋㅋ]

[간장 : 그때 조금만 더 밟았으면 엘○스크롤에서 랜덤 커스터마이징 누른 거처럼 대충 생겨먹게 만들 수 있었는데 아ㅋㅋㅋㅋㅋ]

[위장 : 지금도 성의 없게 생겼는데?]

[콩팥 : 몸뚱이 닮아서 그런 듯ㅋㅋㅋ]

그렇듯 모두가 나서준 덕분이었다. 절체절명의 위기를 감지한 오장육부가 모조리 나서서 대응을 했다. 흔들리던 마나써클을 강제로 회전시켰다. 신체의 모든 마나를 심장으로 응축했다.

인위적인 충격을 가했다. 전기로 심장을 마사지하듯이. 멈추려던 심장에 펌프질을 했다. 될 때까지 계속. 포기 없이 집요하게.

덕분에 간신히 심장마비를 모면할 수 있었다. 즉사를 막아냈다. 거기까진 좋았다. 한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심장 : 어쨌건, 일단 위기를 모면한 건 좋은데. 아, 이거 난감하네. 다들 지금 뭐가 문제인진 잘 알지?]

[허파 : 허파?]

[대장 : 땡이지 말입니다ㅋ]

[간장 : 그때 심장마비 막으려고 무리하게 모은 마나가 심장에 고여서 안 빠져나가는 게 문제 아님?]

[위장 : 바로 그거지. 이래서 고인물이 문제임 ㄹㅇ]

[콩팥 : 고여 있는 마나, 그거 잘하면 마나하트 되겠던데? 어쨌든 좋은 거 아니야?]

[심장 : 좋기는 개뿔.]

심장의 미간이 더욱 찡그려졌다.

[심장 : 마나하트가 생기는 것까진 좋은데, 그걸 생성하느라고 신체의 다른 마나까지 모조리 다 빨아들이고 있는 게 문제지. 그래서 우리 몸뚱이가 마나가 부족해서 못 깨어나고 있잖냐. 이러면 뭐가 되겠어.]

[허파 : 허파?]

[대장 : 또 땡ㅋㅋ 정답은 식물인간 아닙니까?]

[간장 : 식물이면 좋은 거 아님?]

[위장 : 녹색 혁명! 뻑 예!]

[콩팥 : 우리 강산 푸르게 푸르게ㅋㅋㅋ]

[심장 : ...ㅅㅂ]

심장의 말투가 심각해졌다.

[심장 : 식물인간 되면 우리 몸뚱이 얼마 못 살고 죽을걸? 기대수명도 못 늘리잖냐.]

[허파 : 허... 픕?!]

[대장 : 그럼 어떡합니까? 누가 깨워줘야 하나?]

[간장 : 괄약근 좀 풀어보면 어떻겠음?]

[위장 : 내가 꼬르륵 소리로 모스 부호 만들어서 주변에 알려볼까? 좀 흔들거나 때려서라도 깨워달라고?]

[콩팥 : 그런 걸로는 택도 없을 듯.]

[심장 : 맞아. 특단의 조치가 필요해. 차라리 리버스 엔지니어링의 원리를 응용해서 기절할 때의 상황을 거꾸로 재현해보는 건 어떨까 싶은데.]

[허파 : ...헢?]

[대장 : 리버스 엔지니어링이 뭡니까?]

[간장 : 개발자가 하는 일을 반대로 하는 거 아님?]

[위장 : 그럼 치킨집부터 차려?]

[콩팥 : 칰ㅋㅋ킨집ㅋㅋㅋㅋㅋㅋㅋㅋㅋ]

[간장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미친놈앜ㅋㅋㅋ]

[심장 : ....]

심장은 쑴펑쑴펑 피어나는 위기감을 느꼈다.

큰일이다. 이놈들, 진짜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자각을 못 하고 있다. 이런 놈들을 데리고서 지옥에 발가락 한 짝 걸치려 들고 있는 몸뚱이를 살려야 한다니. 앞날이 막막해졌다.

차라리 외부에 어떻게든 이 사태를 알리면 좋을 텐데.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할 텐데. 한데대체 어찌해야 그게 가능해질까.

[심장 : 차라리 우리가 목소리라도 낼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럼 며칠째 우리 몸뚱이를 간호하는 저 흑발 호위한테 상황을 알릴 수 있을 텐데 말이지.]

심장은 진심으로 탄식했다. 이대로는 위험하다. 당장 대책을 세워야 하는데, 막상 떠오르는 현실적인 방법이 좀처럼 없다. 생각할수록 막막해졌다.

한데 그때였다.

...스윽.

몸뚱이, 라키엘의 침대 곁에서 간호를 하던 흑발의 호위가 몸을 일으켰다. 어딜 다녀오려는 걸까. 아니었다. 이쪽을 향해 상체를 기울였다. 그러고는 어쩐지 한참, 날카로운 눈길을 빤히 던져 왔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거기."

흑발 호위의 입이 열렸다.

"조금 전부터 전하의 몸속에서 떠들어대는 너희는... 누구지?"

[심장 : ...!]

데미안의 의혹에 찬 물음이 떨어져 내려오는 순간, 심장과 오장육부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기겁하고 말았다.

221화. 천기누설의 보따리 (1)

"조금 전부터 전하의 몸속에서 떠들어대는 너희는... 누구지?"

데미안은 미간을 찡그렸다.

이상했다.

분명 이 침실에는 다른 이가 없다. 오직 자신과 황태자뿐이다. 그런데 조금 전부터 기이한 소리가 아주 희미하게 청각을 자극해 왔다.

처음엔 착각인 줄로만 알았다. 한데 아니었다. 계속해서 거슬렸다. 귀를 기울이고, 집중력을 높였다. 그러자 차츰 명확하게 들려왔다.

여러 사람이 떠드는 말소리였다. 한데 소리가 들려오는 지점이 괴상하기가 짝이 없었다. 황태자의 몸속이었다. 배와 가슴, 곳곳에서 작은 난쟁이들이 수다를 떠는 듯한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

설마 이것도 각성이 중단된 후유증일까. 혹은 마계왕이 뿌린 고약한 씨앗의 여파인 걸까. 아니, 어쩌면 숨 쉬듯이 자연스럽게 유지되고 있는 마나 역행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덕분에 감각이 지나치게 날카로워져 버렸으니까.

'착각이 아니야.'

그는 확신했다.

증거도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황태자의 몸속에서 와글와글 떠들어대던 목소리들이, 자신의 물음을 받자마자 단숨에 조용해져 버린 것이 가장 명확한 증거였다.

마치 나쁜 짓을 하다가 발각당한 좀도둑처럼. 혹은 적진에 숨어들었다가 들킨 첩자처럼. 시끄럽던 수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뚝 끊겨 버렸다.

그래서 더 티가 났다.

"말해. 이제 와서 입을 닫고 있어 봐야 그 안에 있다는 거, 다 안다."

혹시 흑마법사가 아무도 모르게 황태자의 몸속에 저주의 씨앗을 남긴 것은 아닐까. 어쩌면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데미안의 눈길이 날카롭게 번득였다.

덕분에 심장과 오장육부는 기겁하고 말았다.

[심장 : 쉿, 다들 조용.]

[허파 : ...흡, 프흡, 콜록!]

[대장 : ....]

[간장 : ....]

[위장 : ...꼬르륵?]

[콩팥 : ...주르륵?]

"방금 누구야. 누가 기침 소리를 내었어."

데미안의 눈빛이 한결 살벌해졌다.

[허파 : ...허픕, 픕!]

"이제 와서 아닌 척해도 소용없다."

[심장 : 아, 씨.]

데미안의 한결 서늘해진 눈빛을 보며 심장과 오장육부는 깨달았다. 실수했다. 차라리 처음 덜미를 잡혔을 때 그대로 태연한 척 수다를 이어갔어야 했다. 그랬으면 티가 나지 않았을 텐데. 너무나 놀란 나머지 합죽이가 되어 버린 게 잘못이었다.

한편으로 오장육부는 다들 눈알을 데구르르 굴리며 의문에 잠겼다. 저 흑발의 호위가 대체 어떤 수로 자신들의 말소리를 들은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상식 밖의 사태였다.

일단은 어떻게든 수습을 해야 할 것 같았다. 안 그러면 자신들의 몸뚱이가 저 흑발의 호위에게 이상한 의심을 받을 것 같았으니까.

심장과 오장육부는 순식간에 눈짓을 교환하며 작전을 짰다. 목표는 자신들의 주인인 몸뚱이가 쓸데없는 의심을 사지 않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자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곧 답이 나왔다.

다들 목청을 가다듬었다.

[심장 : 크흠흠! 그곳에 있는 인간이여, 우리의 목소리가 들리는가?]

[허파 : 허프흠! 흠흠! 프흠!]

[대장 : 우리의 존재감을 느낄 수 있다니, 인간치고는 제법이지 말입니다.]

[간장 : 그러게 말이지요. 수호천사의 존재감을 감지하는 하계의 인간이라니.]

[위장 : 놀랍습니다. 기나긴 필멸자의 역사에서 이런 일을 해내는 인간과의 조우를 겪을 줄이야.]

[콩팥 :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천사장께서 얼마나 놀라실까요.]

...그러했다.

다들 목소리를 성스럽고도 근엄하게 꾸몄다. 혼신의 성대모사를 통해 자신들의 정체를 한껏 코스프레 했다.

오장육부의 대답을 들은 데미안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수호천사?"

방금, 저들이 스스로를 지칭하는 말을 분명 그렇게 들은 것 같았다. 수호천사라니. 뜻밖의 정체였다. 한편으로는 의심이 들었다. 과연 저 말이 맞을까. 그의 눈길이 한결 신중해졌다.

"설마, 그쪽들이 전하에게 깃들어 있는 수호천사라는 말인가?"

[심장 : 그러하다네, 인간이여.]

[허파 : 허프흠흠! 흠!]

[대장 : 우리의 존재감을 느낀 것도 모자라 의심까지 하다니, 확실히 걸출한 인간인 듯하지 말입니다.]

[간장 : 동시에 건방지기도 하군요.]

[위장 : 당황스럽습니다. 수호천사로서의 기나긴 세월을 지나며 이렇듯 필멸자의 의심을 받는 날이 오게 될 줄이야.]

[콩팥 : 천사장님께서 이 일을 들으면 얼마나 웃으실지 벌써 눈에 훤하군요. 하하핫.]

"...."

오장육부가 너스레를 떨었다. 하지만 데미안은 '아, 그렇군요. 반갑습니다, 천사들이여.' 따위의 순박한 반응을 보이진 않았다.

그는 오히려 더욱 짙은 의심의 눈길을 번득였다.

"증거부터."

모든 믿음에는 최소한의 근거가 있어야 한다. 특히 황태자의 안위와 관련된 일이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오장육부도 만만하지는 않았다. 즉석에서 짜낸 증거들을 회전초밥 접시 내밀듯 뻔뻔하게 촵촵 꺼내놓았다.

[심장 : 그대가 우리를 의심하는 것도 이해는 되는군. 그래, 우리의 존재를 증명하여 줄 증거가 필요하다고? 쉽군, 쉬워.]

[허파 : 허... 파하하하....]

[대장 : 우리의 수호 대상인 라키엘이 그대와 처음 만난 때를 말해볼까 싶은데....]

[간장 : 그때 라키엘이 그대를 보자마자 이런 말을 하였더랬지? 쯧쯧. 안타깝네. 이런 싸구려 진통제를 왜 먹지? 이런 거 먹고 잠이 오나? 라고 말이야.]

[위장 : 당시에 그대는 이렇게 대답하였지. 뭐? 누구냐, 넌. 이라고.]

[콩팥 : 그러자 라키엘이 말했지. 그쪽이 필요로 할 사람, 이라고.]

[심장 : 거기에 그대는 이렇게 대꾸하였지. 혹시 약 팔러 온 놈인가? 라고. 기억이 나는가?]

심장을 비롯한 오장육부가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라키엘과 데미안이 처음 만났던 때 나누었던 첫 대화의 내용 그대로였다.

물론 당시엔 위장이나 콩팥 등은 아직 눈을 뜨기 전이었다. 하지만 단지 눈만 뜨지 않았을 뿐, 라키엘의 신체의 일부로서 모든 활동과 기억을 공유하고 있었다.

데미안은 입을 다물어 버렸다.

"...."

정확하다. 저들이 저 대화 내용을 어떻게 토씨 하나 틀리지 않도록 알고 있는 걸까. 이상했다. 한편으로는 정말로 황태자의 수호천사인 건가 싶었다.

'적어도... 흑마법사의 농간으로 생겨난 놈들은 아닌 듯한데.'

흑마법사가 만들어낸 놈들이라면, 그때 당시의 일을 알고 있을 리가 없다. 그럼 뭘까. 정말로 황태자의 수호천사가 맞단 말인가.

데미안이 그런 생각을 떠올리는 순간, 오장육부가 증언의 쐐기를 박았다.

[심장 : 데미안 카이엔. 그대는 나, 황태자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를 지키기 위하여 온몸을 던졌다. 미노타우로스의 주먹에 맞아 죽을 뻔했던 나를 밀어내고, 대신 잔해에 깔려 다리를 다쳤지. 또한, 그대는 내게 안전한 곳으로 피신할 시간을 벌어주기 위하여 단신으로 미노타우로스에 맞서 싸우는 용맹과 헌신을 보였도다.]

"...."

듣는 순간 데미안은 깨달을 수 있었다. 황태자가 언젠가 자신에게 해준 말이었다. 어디서? 크레모에서. 언제? 심문관에게 억울한 누명을 쓰고 있던 때에. 자신을 구하러 왔던 당시에 모두의 앞에서 꺼냈던 말이었다.

그때 저 말을 들으며 얼마나 가슴이 뛰었던가. 처음으로 자신을 알아보아 준 사람의 말이었다. 그 누구도 인정하지 않던 자신의 헌신을 황태자가 말해준 순간이었다. 어쩌면, 저 날의 저 말이 아직껏 자신을 황태자의 곁에 남겨두었을지도 모를, 그런 말이었다.

"당신들은, 정말로 전하의 수호천사인 겁니까?"

[심장 : 그러하도다, 필멸자여. 그리고 우리는 그대에게 긴급한 상황을 알리기 위하여 피치 못하게 목소리를 내게 되었지.]

"긴급한 상황이라니요?"

데미안은 긴장했다. 긴급한 상황이라니. 그 말이 황태자의 수호천사일지도 모를 존재에게서 나오니 절로 덜컥 걱정이 되었다.

"설마, 전하의 상태가 생각보다 좋지 못한 것입니까?"

그러잖아도 열흘째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황태자였다. 필시 무언가 이유가 있으리라. 어쩌면 저들이 그걸 알려줄지도 모른다. 데미안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심장 : 그렇지. 이제야 우리의 뜻을 알았구나, 필멸자여. 장하도다.]

심장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수호천사 코스프레(?)가 통했음을 자축하며 나머지 오장육부와 몰래 하이파이브를 나누었다. 한편으로는 근엄함을 유지하며 말했다.

[심장 : 하여 그대가 긴급히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를 도와야 할 듯하도다.]

"제가 말입니까?"

[심장 : 그러하다. 우리는 라키엘의 행운을 관장하는 수호천사일 뿐, 필멸자의 생사에 직접 관여할 수는 없음이니. 지금은 그대의 직접적인 조력이 필요한 순간이라 판단하였도다.]

"제가 어떤 조력을 하면 되는 겁니까. 그리고... 전하께서는 어떤 상황이신 겁니까."

[심장 : 라키엘은 그대의 각성을 저지하기 위하여 마계왕과 맞섰고, 당시 받은 큰 충격을 상쇄하기 위하여 혼신의 노력을 다하였지. 그 결과, 심장에 마나하트가 생성되는 중이긴 하나... 그 때문에 신체의 다른 부분의 마나가 부족해진 까닭으로 의식을 찾지 못하는 중이도다.]

"하면...."

[심장 : 그대가 적절하고도 강력한 자극을 가하여 강제로라도 라키엘을 깨워야 한다.]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데미안의 눈빛이 번득였다. 설마 뺨이라도 때려야 할까. 혹은 그보다 더한 짓이라도 벌여야 할까. 어쩌면 금기를 깨는 짓을 해야 할 수도 있다. 비장한 각오가 절로 들었다.

한데 돌아오는 수호천사의 대답은....

[심장 : 오이즙을 짜서 라키엘의 입에 흘려 넣도록 하라.]

"...예?"

[심장 : 어서.]

심장이 단호하게 말했다.

데미안은 난처함을 느꼈다.

"...."

그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난데없는 오이즙이라니. 농담이라도 하는 건가 싶었다. 하지만 마냥 농담으로만 치부하기엔 수호천사의 목소리가 워낙 진중하고 근엄하였다.

결국, 데미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겠습니다. 말씀대로 하지요."

일단 시도나 해보자 싶었다. 그는 금방 오이즙이 담긴 잔을 가지고 돌아왔다. 손수건에 오이즙을 흥건하게 적셨다. 그 한쪽 끄트머리를 라키엘의 입에 살포시 물렸다.

똑... 똑....

손수건에 배어든 오이즙이 천천히 라키엘의 입속으로 흘러들어갔다. 과연 효과가 있을까. 이런 방법 따위로 열흘간 정신을 못 차리던 황태자의 의식을 깨울 수 있을까.

데미안이 일말의 의구심을 품는 순간, 오이즙의 효력이 직빵(?)으로 드러났다.

"...그읍?"

곤히 잠들어 있던 라키엘이 헛구역질을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비렸다. 구역질이 나올 만큼 비렸다!

"우웁, 쿨룩! 콜록!"

간혹 오이를 한 입도 못 먹는 사람들이 있다. 입에 물기만 해도 너무 비리게 느껴져서 그렇다. 그럴 때마다 남들에게 핀잔 아닌 핀잔을 받는 서러움을 겪기도 한다. 이렇게 시원한 오이가 왜 비리냐고, 참 입맛 이상하다는 소리를 듣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이 느끼는 비린 맛은 엄연한 사실이고, 실화였다. 체질 때문이니까. 어쩔 수 없는 고충이었다.

라키엘이 바로 그러한 체질이었다. 그냥저냥 오이를 비리다고 느끼는 정도가 아니었다. 입에만 물어도 헛구역질을 할 정도였다. 그런 라키엘의 특성을 오장육부, 특히 위장은 일찌감치 잘 알고 있었다.

그런 덕분에....

"그으읍!"

너무나 비려서 저절로 눈이 떠졌다!

"...오애애액-"

참을 수가 없었다.

더는 기절해 있을 수도 없었다.

라키엘은 헛구역질을 게워내며 눈물 콧물을 흘렸다. 그러다가 문득, 시야를 가득 채우고 있는 팝업 알림을 발견했다.

딩동!

그것은, 용기와 재치를 겸한 희생으로 한 도시를 구원한 자에게 마땅하게 주어진, 막대하고도 묵직한 보상 꾸러미였다.

222화. 천기누설의 보따리 (2)

오이는 싫다.

먹으면 비린 맛이 너무 심하게 난다. 남들은 안 그렇다고 하는데.

시원하다고들 하는데. 어째서 나만 비리게 느끼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처음부터, 아주 어릴 때부터 그랬으니까.

덕분에 오이는 싫다.

먹으면 헛구역질이 난다. 엄마는 안 그렇다고 하셨는데. 왜 반찬 투정을 하냐고 하셨는데. 어째서 헛구역질이 나는 건지도 잘 모르겠다. 그냥, 먹을 때마다 그랬으니까.

그래서 오이가 싫다.

자꾸 어린 시절이 생각난다. 오이 무침이 싫어서 투정 부리다가 심하게 혼이 났던 날. 울던 나를 가만히 달래던 아빠 손길이 생각난다.

함께 손을 잡고 걷던, 조금은 시큼한 냄새가 나던 초여름 밤의 골목길이 떠오른다.

"우욱."

라키엘은 헛구역질을 참았다. 처음엔 어째서 자신이 헛구역질을 하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저 엄청나게 깊은 잠에 푹 빠져 있었던 것 같은데. 그래서 사실은 꿈도 꾸고 있었는데. 그런데 왜.

그때였다.

...딩동.

온전히 깨어나지 못하여 멍한 의식 사이로, 맑은 알림음이 울렸다. 무슨 일일까. 눈길을 들었다.

너무 오래 눈을 감고 있었던 탓일까. 여전히 눈앞은 뿌옇게 흐렸다. 그럼에도 신기하게 팝업 알림창만큼은 선명하게 보였다.

'보상?'

팝업에 쓰여 있는 '보상'이라는 말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덕분에 다시금 고개를 갸웃. 내가 뭘 했길래 보상을 준다는 걸까. 아니, 그보다는 내가 잠들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기억을 더듬었다. 뿌연 안갯속을 더듬거리며 걷는 것처럼. 혹은 불이 꺼진 까만 방에서 서랍을 뒤적이는 것처럼. 의식의 손끝에 닿는 기억의 조각들을 매만졌다. 그제야 조금씩 떠올랐다.

'아.'

자폭을 감행하던 언데드 군단. 무너지던 협곡. 추락한 자신. 함께 뛰어내린 데미안. 역혈의 마공. 각성. 마계왕. 그리고....

'깨어나던 마계왕과 눈이 마주쳤는데.'

끝내 그 눈길을 피해내지 못하였다. 거부할 수 없는 죽음과 맞닥뜨렸다. 그 마지막 순간에 뻗어오던 데미안의 손길도 떠올랐다.

그 손길이 날 받아냈던가. 혹은 착각이었던가. 알 수 없다. 그 뒤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도.

어째서 데미안이 저런 눈길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건지도.

"...전하, 정신이 드십니까?"

녀석이 곁에 앉아 있다. 나는 누워 있다. 그러니까 내 침대 곁을 녀석이 지키고 있던 걸까. 그럼 난 무사한 걸까.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한데 데미안 녀석은 왜 저러고 있는 걸까.

그러니까, 울먹이는 녀석의 모습은 처음이다.

착각인 줄 알았다.

잘못 본 줄 알았다.

한데 아니었다.

점차 또렷해지는 눈길을 들었다. 차츰 선명하게 보였다.

미세하게 떨리는 데미안의 눈썹. 그 아래로 일렁이듯 젖어드는 눈매. 코끝은 숨기지 못하여 붉었다.

"너 왜 우냐."

"아닙니다, 전하."

"아니긴 뭐가. 맞는데."

"...그야, 전하께서 마침내 눈을 뜨셨으니까요."

"그럼 아주 아침마다 그렇게 울면서 기뻐하지 그러냐."

"그런 아침이 열흘 만에 왔으니까요."

"응?"

무의식중에 멈칫했다. 열흘이라니. 내가 그렇게 오래 누워 있었다는 걸까. 데미안 녀석은 농담을 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전하. 전하께서는 지금 열흘 만에 눈을 뜨셨습니다."

"...내가?"

"예."

"그런데 너는?"

"예?"

"괜찮냐고."

진심으로 물었다. 덜컥 걱정이 들었다. 협곡에서의 그 사건이 열흘 전의 일이라면, 그동안 녀석은 어떤 상태였던 걸까. 각성은, 마계왕은, 모두 어떻게 된 걸까.

"저는 당연히...."

데미안 카이엔은 황급히 콧등을 찡그렸다. 이유는 달리 없었다. 그러지 않으면 그렁그렁해진 눈에서 저도 모르게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았다.

주군 앞에서 감히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설령, 열흘 동안 혼수상태였던 주군이 깨어나자마자 일개 호위의 안위부터 물었을지라도. 그 마음에 감동하였을지라도.

감히 그런 티를 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연했다.

자신은 호위로서 자격이 없으니까. 실격이니까. 넘어선 아니 될 선을 넘어 버렸으니까. 속죄하여야 함이 마땅하니까. 아니, 속죄조차도 허락을 구해야 할 입장이니까.

"괜찮습니다."

당연히 괜찮아야 한다. 주군 앞에선 안 괜찮아도 끝까지 괜찮아야 한다. 그것이 자신의 사명이며, 최소한의 책임이다.

'나는... 감히 주군의 목을 졸랐으니까.'

데미안은 고개를 떨구었다. 그날, 열흘 전의 일을 잊을 수가 없었다.

주군을 구하기 위해 협곡으로 뛰어내렸던 자신. 붕괴에 맞섰지만, 주군을 끝까지 지켜내지는 못하였다. 아니, 마지막에는 오히려 주군을 해하려 하였다.

각성.

마계왕.

뜻밖의 폭주까지.

자신의 의지 밖의 일이었다. 나름 애쓰며 맞섰지만, 불가항력이었다. 도저히 막을 수 없는 신화적 존재감에 짓눌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어떤 이유도 변명이 될 수는 없다. 어쨌건 그때 주군의 목을 조른 건 자신의 손아귀였다. 주군을 거의 죽일 뻔했다.

아직도 미처 풀리지 않은, 주군의 목에 누렇게 남은 멍 자국이 그 증거였다.

"저보다도, 전하께서는 어떠십니까. 불편한 곳은 없으십니까?"

"으음, 네 태도가 불편한데."

"...예?"

"너 왜 이렇게 사근사근해졌냐."

"그야...."

이제 떠날 생각이니까요.

데미안은 뒷말을 차마 꺼내지 못하였다. 하지만 솔직한 진심이었다. 주군을 죽일 뻔한 자신이었다.

이제는 주군의 곁을 지킬 자격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충동적인 기분? 절대로 아니었다. 주군이 누워 있던 지난 열흘 내내 품었던 생각이었다.

그래서 황태자가 깨어나길 기다렸다.

자격이 없는 자신은 이만 물러나겠노라고. 직접 주군께 밝히고 허락을 받은 뒤에 떠나리라 다짐하고 있었다.

그것이 그동안 자신이 받은 은혜에 대한 마땅한 도리라는 생각도 하였다.

그런데....

"...."

막상 말을 꺼내려니 입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내키지가 않았다. 떠나고 싶지가 않았다. 계속 주군의 곁을 지키고 싶었다.

이런 자신이 뻔뻔하고, 이기적이라는 생각마저 들었지만, 정말로 솔직한 진심은 그러하였다.

"너 진짜로 괜찮냐?"

"...."

이쪽을 향해 고개를 갸웃거리는 황태자. 나의 주군이시여. 그동안 당신의 곁을 지켜드릴 수 있어서 진정으로 자랑스러웠습니다.

하지만 이제 저는 떠나야겠습니다. 저의 정체를 알아 버렸습니다. 역혈의 심법을 멈출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또 언제 그런 일이 생겨날지, 저도 모르겠습니다. 저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존재가 언제 또 깨어날지, 저도 모르겠습니다.

하여 저는 두렵습니다.

제 손으로....

"날 해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지?"

"...!"

데미안은 눈을 부릅떴다.

어떻게 생각을 읽은 걸까.

라키엘은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다 보인다, 다 보여.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정말이었다.

데미안 녀석이 왜 저러는지, 이제는 알 수 있었다. 오장육부 덕분이었다. 심장이 알려주었다.

지난 열흘 동안 저 흑발의 호위가 내내 곁을 지켰노라고. 그동안 몇 번인가, 탄식처럼 홀로 중얼거린 말이 있노라고.

심장이 그걸 들었고, 기억하고 있었으며, 고스란히 전해 주었다.

덕분에 데미안 녀석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째서 저렇듯 서글픈 눈빛을 하고 있는지 모두 알 수 있었다.

안타까웠다.

한편으로는 가슴이 철렁했다.

'날 떠나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녀석은 무조건 내 곁을 지켜야 한다. 그것만이 녀석도 살고 나도 살 길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내 옆에 있어야 마계왕의 강림을 막아줄 수 있으니까. 함께 막아내야 하니까.

'그럼 일단은... 퇴사(?) 결심부터 돌려놔야겠구만.'

가장 시급한 일이 보였다.

하여 보상 팝업창을 옆으로 치웠다. 물론 그 와중에도 팝업 내용을 슬쩍 살펴보는 건 잊지 않았다.

<확인하지 않은 보상 알림 목록>

[마나하트 생성]

[비장(脾臟) 오픈]

[오장육부 - 오장(五臟) 수집 퀘스트 달성]

[오행(五行) 순환 시스템 오픈]

[GDP 획득]

[그 외 기타 등등, 이거저거, 이모저모, 블라블라...]

"...."

솔직히 당장 죄다 열어서 확인하고 싶은데. 일단 지금은 제멋대로 퇴사를 감행하려는 데미안 녀석을 붙잡는 일이 급선무니까 나중으로 패스.

'나중에, 혼자 한적하게 있을 때 확인하자고.'

아쉬운 마음을 접어 한쪽으로 보관하였다. 눈길을 가다듬으며 데미안 녀석을 바라보았다. 녀석을 곁에 잡아둘 멘트를 신중하게 준비했다.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마계왕 때문이지?"

"...."

스트레이트로 찔렀다. 흔들리는 녀석의 눈빛. 쉴 틈을 주지 않고 이어서 말했다.

"그날, 너도 네 안의 존재를 느꼈을 테지. 덕분에 불안했겠지. 네가 벌인, 앞으로 벌일 수도 있을 일에 불안감과 죄책감을 느꼈겠지. 내 곁을 지킬 자격을 잃었노라 자책하고 있었겠지. 맞나?"

"...예, 전하. 한편으로는 궁금했습니다."

"내가 언제부터, 어떻게, 어디까지 알고 있었는지를?"

"예."

데미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께서 내내 역혈의 마나 심법을 금지하셨던 이유가, 절 위험에 내던지길 주저하셨던 이유가 그... 마계왕이라는 존재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끝내 알아 버렸으니까 말입니다."

"그래. 그랬겠지."

덕분에 혼란스러웠겠지. 대부분의 사실을 깨달았겠지. 충격도 받았겠지. 자신이 살아오며 쌓은 기억 대부분이 만들어지고 조작된 것이었다는 진실을 알아 버렸으니까.

어린 시절의 기억도.

어머니와의 추억도.

그 모든 것들이 거짓이었다는 걸 알게 되면, 그 사람은 어떤 기분을 느끼게 될까.

하지만 애써 데미안을 토닥거리지는 않았다. 그것은 녀석도 바라지 않을 터다. 대신 녀석이 진정으로 알기를 원할 대답부터 돌려주었다.

"그럼 솔직하게 말하지. 처음부터 모두 알고 있었다. 너의 정체도. 너의 내면에 자리한 그 존재까지도. 모두."

"모두...."

"그래. 처음에 너를 곁에 둔 가장 큰 이유도 그것 때문이었지. 열흘 전과 같은 사태를 어떻게든 막고 싶었으니까."

"그럼 전하께서는...."

"그걸 어떻게 알았느냐고? 간단해. 이미 내 수호천사들과 대화를 나누었을 텐데."

태연하게 거짓말을 섞었다. 오장육부가 실시간으로 알려주는 귓속말 제보를 참고했다.

침대 머리맡에 치워져 있는, 오이즙에 젖은 손수건을 눈짓했다.

"저것 말이다. 내 수호천사들이 알려준 대로 오이즙을 이용해서 날 깨웠잖아. 맞지?"

"예."

"하면 이제는 그들의 존재를 믿겠군."

"아직 조금은... 다 이해가 되는 건 아니지만 말입니다."

"그래. 그럴 테지. 나도 처음엔 그랬으니까. 그들이 너라는 존재를 알려주고, 미래에 너로 인하여 벌어질 재난을 경고하던 날에도 그러하였으니까."

"재난...."

데미안 녀석의 눈빛이 희미하게 흔들렸다.

됐다.

통한다.

흔들기가 먹혔을 때 그대로 쿡.

핵심을 찔렀다.

"그래서다. 데미안 카이엔. 네가 멋대로 내 곁을 떠나지 않길 바라는 것은 말이다."

"하지만 전하. 저는...."

"안다. 위험하지. 언제 그 존재가 다시 눈을 뜨고 주위를 파괴할지 모를 테니까. 그래서 불안하겠지. 그렇지만 말이다. 네가 내 옆에 꼭 붙어 있어야 그 재난을 막을 수 있는 거라면, 내가 널 붙잡는 이유로 충분하지 않을까?"

"...솔직히 말씀드려도 됩니까?"

"얼마든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어떤 점이?"

"전하께서는 지금, 그 어마어마한 존재를 충분히 막아낼 수 있을 거라고 자신하고 계신 것처럼 보입니다."

"어. 잘 봤어. 자신 있으니까."

"...방법이 있는 겁니까."

"물론. 들려줘?"

"부탁드립니다."

데미안은 앉은 자세를 가다듬었다. 라키엘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맺혔다.

"좋아. 우선 가장 기본적인 것부터 말하지. 네 안에 도사리고 있는 그 신화적 존재의 자세한 정체와 목적부터."

그때부터였다.

라키엘의 입에서 그동안 홀로 간직하고 있던, 천기누설의 보따리가 술술 펼쳐지기 시작하였다.

223화. 아름다운 보상 (1)

"좋아. 우선 가장 기본적인 것부터. 네 안에 도사리고 있는 신화적 존재의 자세한 정체와 목적부터 말하지."

"부탁드립니다."

꿀꺽, 출렁이는 데미안의 목젖. 앉아는 있되 살짝 이쪽으로 내밀듯 기울이고 있는 상체. 녀석의 좀처럼 볼 수 없는 초조해하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라키엘은 문득, 기시감을 느꼈다.

'...한의원에서 많이 보던 모습인데.'

한국에서의 나날이 떠올랐다. 뭐, 딱히 스페셜하다고는 절대 말할 수 없을 평범한 일상이었다. 한데 그 일상 속에서 제일 자주 접하는 사람들의 자세가 저것이었다. 이쪽을 마주 보고 앉아서 상체를 살짝 내민 모습. 긴장한 눈빛과 자세.

바로 한의원에 내원한 환자들의 모습이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쪽의 진단을 듣는 환자와 가족들이 제일 많이 보이는 모습이기도 했다.

덕분에 저런 자세를 보이는 사람이 어떤 마음인지, 누구보다도 잘 안다. 그렇기에 내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도 잘 안다.

예를 들자면....

"그 존재의 이름은 아케로스. 마계왕. 우리가 살아가는 이곳 차원의 여러 세상 중에서 가장 아래층에 있는 마계의 주인이지."

"마계... 말입니까?"

"음. 들어본 적이 있나?"

"아뇨. 딱히 자세히는."

"그렇겠지. 사람들이 흔히 아는 지옥과는 전혀 다른 곳이니까."

사실이었다.

소설 마검황에 나왔던 설정이 떠올랐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여러 계층의 세계가 어울리며 겹쳐 있어. 아니, 층층이 쌓여 있다는 표현이 가장 알맞겠지. 여러 겹으로 쌓은 파전... 아니, 팬케이크처럼 말이야."

"그런 겁니까?"

"어. 그중에서 우리의 세계는 물질계. 팬케이크의 중간쯤에 끼어 있지. 햄버거 패티처럼."

라키엘은 자신의 두 손을 포개어 겹쳐 보이며 말했다.

"그리고 여기. 제일 위쪽은 밝혀진 것이 없어. 혹자는 절대자만의 공간이라고도 하고, 또 누군가는 그곳이 비어 있다고도 하지. 아직은 아무도 몰라. 그곳 바로 아래층은 그나마 제법 밝혀져 있지만."

"혹시... 천계입니까?"

"정답. 천사들이 살아가는 곳."

성스러운 워커홀릭 공무원들의 공간. 그곳이 천계라고 했던가.

"그 아래에 정령계가 있고. 그 밑층이 우리 물질계. 더 아래는 정령계와 물질계의 여러 관념과 꿈의 조각이 흘러들어 모여 있다는 유계. 더 아래가 지옥이지. 그리고 마계는 지옥보다도 더 밑에 있어."

"제일 밑바닥이라는 거군요."

"그래. 네 안에 도사리고 있는 아케로스는 그곳 세계의 주인이고. 너도 느꼈겠지만, 놈은 네 육신을 통해서 지옥과 유계를 건너뛰어 물질계에 강림하려 들고 있지."

"저는, 대체 뭡니까?"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무는 데미안.

녀석의 불안해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그 모습 앞에서 잠시 숨을 골랐다. 어찌 말해줘야 할까. 진실을 그대로 말하면 순순히 받아들일 순 있을까. 아니. 충격을 받겠지.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다. 이것이 최선이다. 내가 아는 데미안은 그렇게 나약한 놈이 아니니까.

'그리고... 사람은 현재 자신이 처한 엿 같은 상황의 원인을 제대로 모를 때가 제일 불안하고 괴로운 법이니까.'

경험상 정말로 그랬다.

환자들이 특히 그러했다.

본인, 혹은 가족이 많이 아파본 사람은 안다. 제일 괴로운 것은 아픈 게 아니라, 아픈 원인이 좀처럼 밝혀지지 않는 상황이다. 그런 상황에 처하면 환자도, 가족도 당황하고 만다. 아니, 그건 거의 공포다. 밑바닥이 없어 막막한, 그런 종류의 공포.

차라리 아픈 원인이라도 속 시원히 밝혀지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 아픈 원인에 맞춰서 치료 방향이라도 잡아볼 텐데. 앞으로 어떻게 해나갈지 예상을 하든 마음의 준비를 하든, 뭐라도 해볼 수 있을 텐데.

"...."

갑자기 부모님 얼굴이 떠오르는 건 왜일까. 서둘러 고개를 저어 상념을 털어냈다. 대신 데미안 녀석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내심 다짐하였다. 이제부터는 환자를 대하듯이 하자고. 환자에게 병명, 원인, 증상, 진행, 앞으로의 치료 방향을 설명하듯이 해보자고. 그것이 내가 보여줄 수 있을 최선이겠노라고.

"데미안. 너는 형상은 인간이되, 마계왕의 권좌에서 만들어진 존재다."

"저는...."

"그래. 알아. 충격이 크겠지. 그럼에도 계속 말해도 될까?"

"...예."

"고맙군. 보다 자세히 설명하자면, 네 몸은 마계왕이 인간의 모습을 본떠서 만들었지. 수많은 마계의 마법과 술법, 의식을 거쳐서. 그 어떤 마족보다도 더욱 인간과 흡사하도록 말이야."

데미안 녀석의 기색을 슬쩍 살폈다.

녀석은 생각보다는 크게 충격을 받은 모습이 아니었다. 자신이 들은 내용을 어떻게든 있는 그대로 들으려 노력하고 있었다. 어쩌면 각성이 진행되던 순간에 어느 정도는 스스로에 대해 단서를 얻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어쨌건 좋다.

나쁘지 않다.

용기를 얻고서 계속 말해주었다.

"그것이 10년 전의 일이야. 너를 완성한 마계왕은 자신의 모든 역량을 동원해서 세계의 틈새를 찢었지. 지옥과 유계를 한 번에 건너뛰어, 마계에서 이곳으로 통하는 통로를 만들었고, 그곳을 통해 너를 이곳으로 보냈어. 이유는 간단해. 본인이 직접 넘어오기엔 틈새가 작았거든."

"그럼 제 어린 시절의 기억은...."

"그래. 안타깝지만."

"...."

"이런 말을 해주게 되어서 미안하게 생각한다, 데미안."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전혀 괜찮지 않음을 안다. 그러나 어설픈 위로가 필요하지 않음 또한 안다. 그렇기에 있는 사실만 그대로.

"그렇게 너는 마계왕의 손에 의해 이 세계로 던져졌고, 흘러흘러 지하 검투장의 챔피언이 되었지. 아마 그대로 두었다면 검투장에 화재가 일어나는 날, 너는 그곳을 탈출하여 갖가지 고난과 역경을 겪게 되었을 테고. 마지막에는...."

"마계왕이 제 몸을 빼앗는 운명을 맞이하는 거였습니까?"

"그래. 정확해."

소설 속 내용이 그러했으니까.

"그 모든 고난과 역경, 그에 따른 극복이 계속해서 너를 키우지. 역혈의 마공, 리베르사 심법으로 너를 이끌게 돼. 아마 충분히 느꼈을 거야. 다른 사람이었으면 수십 번을 죽었을 마나 역행을 감행해도 정작 너는 멀쩡하고 편안하다는 걸."

"예."

"그게 바로 마족의 특성이다."

"...."

"리베르사. 즉, 역혈의 심법은 마족의 특기지. 그 정점에 있는 마계왕은 말할 것도 없고. 너는 그렇게 만들어진 거야. 끝내 리베르사 심법을 완성하고, 마계왕의 완벽한 그릇이 되어, 그의 물질계 강림의 수단이 되는."

"전하."

"혹시 듣기 괴롭나? 그럼 쉬었다가 나중에...."

"아닙니다. 그저, 마계왕 그자의 목적이 궁금해서 말입니다."

"물질계 강림을 추진하는 이유?"

"예."

어느새 데미안의 눈빛이 단단해져 있다. 역시. 예상대로 녀석의 멘탈은 튼튼하다. 자신의 정체를 알게 됐다고 해서 값싼 비애감에 젖어들지도, 그걸 티를 내지도 않는다. 내 믿음 그대로였다.

"놈이 물질계로 오려는 이유는 간단해."

"혹시 물질계를 정복, 혹은 정벌하기 위함입니까?"

"아니. 설마하니 그런 단순하고 고전적인 이유일 리가. 놈은 창조를 원하고 있어."

"창조라시면...."

"차원 창조."

"...."

데미안 녀석이 입을 다물었다. 그래. 무슨 말인지 선뜻 이해가 되지 않겠지. 그럼 이걸 어떻게 설명해줘야 할까.

고민하며 입을 열었다.

"아까 말했지? 우리가 사는 차원은 겹쳐서 쌓은 팬케이크처럼 여러 개의 층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최상층에는 아직 실체가 밝혀지지 않은 층이 있다고."

"예. 아마도 절대자의 공간일 수도 있다는...."

"그래. 놈은 그곳으로 가려는 거야."

"차원의 최상층 말입니까? 한데 어째서 물질계로...."

데미안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마계왕이 차원의 최상층으로 가려는 거라면, 그냥 그곳으로 가면 되는 것이 아닌가. 한데 왜 굳이 자신을 이용해서 물질계에 강림하려는 걸까.

라키엘이 답을 알려주었다.

"여기를 징검다리로 삼으려는 거야."

"징검다리...."

"그래. 가장 밑바닥의 마계에서 지옥과 유계를 건너뛸 수는 있었지만, 물질계까지 넘을 수는 없었거든. 그렇기에 물질계를 마계의 식민지로 삼고, 이곳에서 다시 더욱 위로 올라갈 힘을 축적하겠지."

"설마."

"짐작이 됐어?"

"예."

데미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이 추측한 바를 말했다.

"더 위로 올라갈 힘을 모은 뒤엔... 더 위쪽 세계를 침략할 새로운 그릇을 만들겠군요. 저를 만들었던 것처럼. 맞습니까?"

"정확해."

아마도 다음은 정령계, 혹은 어쩌면 천계가 될 것이다. 비슷한 방식으로 자신의 아바타를 먼저 보내고 그곳에서 성장시켜, 강림의 그릇으로 사용할 것이다. 실제로 소설 마검황에서 마계왕이 계획했던 일이 바로 그런 방식이었다.

"그렇게 위로. 또 위로. 천계까지 도달하면 마침내 놈은 최상층으로 가는 문 앞에 서겠지."

"절대자의 세계 말이군요."

"아마도. 그곳으로 들어가면 놈은 절대자와 동등한 위치가 되어 새로운 차원을 창조할 자격을 얻겠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마계왕은 그렇게 기대하고 있어."

"그럼... 마계왕이 창조하려는 새로운 차원은 대체 어떤 것입니까."

"글쎄. 그건 본인만 알겠지?"

나도 거기까지는 모른다. 소설에서도 자세하게는 언급된 적이 없었다. 다만, 확실한 것이 딱 하나는 있다.

"우리가 그걸 막을 수 있어."

소설에서 데미안이 해냈으니까. 수많은 실패와 역경이 있었지만, 끝끝내 성공했으니까. 그러니 우리도 할 수 있다. 내가 그렇게 만들 수 있다.

"아마 너도 느끼고 있겠지만, 이제 마계왕의 각성은 기정사실이 됐지. 각성의 단계가 임계점을 넘었어. 역혈의 심법을 중단할 수가 없지? 오히려 그게 숨을 쉬듯이 자연스러워졌을 거야. 그러니 이제 각성 자체는 중단이 안 돼."

"늦출 수도 없는 겁니까?"

"아주 조금만? 이제는 그냥 숨만 쉬고 있어도 각성이 아주 느리게, 그러나 절대로 멈추지 않고 진행이 될 거야. 마치 휴화산 아래에 마그마가 모이다가 어느 날 펑, 하고 터지는 것처럼 말이지."

"그럼...."

"맞아. 이제는 예방이 아니라 저지의 단계로 접어든 거다. 그리고 우리는 그걸 해낼 수 있어."

확신할 수는 없다.

그러나 아주 조금, 자신은 있었다.

내가 방법을 아니까. 소설 속의 데미안이 어떤 시도를 하였고, 어떻게 실패했으며, 끝내 어찌 그 실패를 극복했는지까지, 모두 알고 있으니까.

"내가 개인적으로 예측해보자면 저지하는 데에 성공할 확률은 반반? 그래도 그게 어디겠어.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이 한 세계의 신화적 지배자를 저지할 확률이 절반인 거면, 그것만으로도 넙죽 엎드리고 감사할 지경인 거지, 뭐."

사실이다.

로또 1등 당첨 확률이 50%인 것과 똑같은 상황이다. 충분히 해볼 만하지 않겠는가.

"그러니 일단은 여기까지. 자세한 방법은 차차 이야기를 해주도록 하지. 나도 생각과 계획을 한 번쯤 정리해봐야 하니까. 어차피 여기서 당장 그걸 할 수도 없을 거고."

사실이었다.

일단은 황도로 돌아가야 뭐라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니, 이제는 이곳에서의 일을 슬슬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을 이들부터 보도록 할까. 다들 목이 빠지도록 내가 깨어나길 기다리고 있을 테니."

특근대와 근위대.

우루스, 수간호사 아니스.

거기에 환상종들과 오크 족장 브라쉬까지.

모두 이쪽을 위해 희생을 무릅쓴 이들이었다. 기꺼이 어깨를 나란히 하여 싸우고, 사심 없이 몸을 던져 이쪽을 지키려 애를 썼다.

그들을 보고 싶었다.

"알겠습니다."

데미안이 순순히 일어났다. 침실 문을 열었다. 덕분에 바깥의 이들과 눈이 마주쳤다.

"...전하?"

열린 이쪽의 침실 문으로 무심결에 고개를 돌리다가 시선이 딱 마주친 사람. 거친 인상의 중년인. 한때 고참 검투사였던 특근대원. 언데드 군단의 첫 시체폭발이 일어나던 순간, 나를 대신해서 온몸으로 폭발을 막아주었던 사내.

특근대의 최연장자인 세르지오였다. 그가 놀란 눈으로 벌떡 일어났다. 다른 이들도 함께 일어났다.

"전하아아-!"

세르지오가 우렁차게 외치며 달려왔다. 어쩐지 그 걸걸한 목소리에 울음이 섞여 있는 듯이 들림은 그저 착각일까. 아니. 그와 함께 달려오는 근위대와 특근대원들, 수간호사 아니스, 꼬슴이와 환상종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격한 포옹을 받는 얼떨떨한 와중에도 깨달을 수 있었다. 아직도 시야 한쪽에서 '확인'을 원하며 반짝이는 보상 팝업창. 저것보다 더욱 값진 보상이 이미 나와 함께하고 있음을.

나를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지고, 희생을 감수하며, 내가 무사함에 기꺼이 눈물을 내보이는 이 모든 사람들. 이들이 나의 가장 귀한 보상임을.

224화. 아름다운 보상 (2)

나를 기꺼이 지켜주고.

내게 기꺼이 희생하고.

그렇게 내 곁을 지켜준 이들.

그들과의 감격적인 해후를 마쳤다.

마침내 평범한(?) 보상을 확인할 순간이 다가왔다.

딩동!

귓가를 울리는 알림음.

눈앞을 상큼하게 채우는 메시지.

보상을 확인하는 순간은 즐겁다. 또 해도 즐겁다. 절대로 질리지 않는다. 언제나 새로운 기분이 든다.

[마나하트 생성]

[당신의 심장에 마나하트가 생성되었습니다. 당신은 초월적인 신화적 존재와 대면하는 충격을 겪었고, 그 결과로 즉사할 운명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 당신의 오장육부가 마나써클을 동원하여 심장 마사지를 시행하였고, 그 자극에 의하여 당신은 목숨을 건짐과 동시에 심장의 마나하트를 얻게 되었습니다.]

[스킬명 : 마나하트]

[단계 : 마나 유저 Lv. 1]

[심장 내부에 고밀도의 마나 저장소를 생성합니다. 저장된 마나는 자유롭게 꺼내어 활용할 수 있습니다. 이는 신체 능력 향상에 큰 도움을 주며, 레벨이 오를수록 마나의 저장량과 사용 효율이 증가합니다. 또한, 마나하트에 저장된 마나는 써클과 연계되어 더욱 증폭될 수 있습니다.]

[신체 능력 향상률 : 150%]

[다음 레벨업에 필요한 HP : 500]

[현재 보유 중인 HP : 2,900]

'후아.'

열흘이나 정신을 잃었던 사이에 와르르 쌓여 있던 보상 무더기. 그 속에서 떠오른 첫 번째 보상은 마나하트 생성이었다. 보자마자 미쳤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내가 마나하트를 얻다니.'

실화 맞나.

만약, 예전에 누군가가 이런 일을 말해줬다면 거짓말 말라며 코웃음부터 쳤을 것이다. 그만큼 마나하트를 얻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소설 마검황의 설정을 따르자면... 보통 최소 5년은 걸린다고 했지.'

천재라고 불리는 사람도 1년은 개고생을 해야 한다 하였다. 만약 자질이 없는 편이라면? 10년을 매달려도 장담할 수 없다고 했던가.

그만큼 마나하트는 아무나 쉽게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하여 애초부터 기대도 하지 않았다. 당장 죽지 않기 위해 기대수명을 늘리는 것만도 바쁘고 빡센데, 마나하트 연공에 매달리며 투자할 시간이나 여유는 없었으니까.

한데 그걸 이렇듯 공짜(?)로 얻게 되었다. 처음엔 얼떨떨하고 실감이 나지 않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키이이이잉...!

두 갈래의 마나써클이 시키지도 않았는데 슬며시 회전했다. 그러자 심장 어름에 뭉쳐 있던 마나하트가 반응했다. 저장하고 있던 소량의 마나를 방출했다. 방출된 마나가 써클로 흘러들어갔다. 증폭되었다. 전신으로 퍼졌다.

"...."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마다 <비타 5,000>을 디테일하게 들이붓는 기분이란!

상큼했다. 짜릿했다. 머리칼이 쭈뼛 서며 모낭이 폴댄스를 흔들어 재꼈다. 비로소 실감이 났다. 내가 마나하트 유저가 되었구나. 생각지도 못한 행운과 기연에 왼쪽 오른쪽 콧구멍이 절로 흥겨움의 트월킹을 추며 벌렁거렸다.

'그럼 다음 보상은?'

눈길을 바쁘게 움직였다.

딩동!

또다시 울리는 상큼한 알림음. 쑴펑쑴펑 보람차게 떠오르는 메시지.

두 번째 보상은 바로....

[당신은 마나하트 획득 과정에서 심장에 특수한 자극을 수차례 받았습니다.]

[이 자극에 의하여 활성화된 심장의 화(火) 성질의 기운이 토(土)의 기운을 북돋아 생(生)하였습니다.]

[화생토(火生土)의 원리에 의하여, 토의 성질을 지닌 오장육부의 장기, 비장이 눈을 뜨고 있습니다.]

[당신의 비장이 깨어났습니다.]

'허?'

눈이 번쩍 뜨였다. 얼마 만에 새로 눈을 뜨는 오장육부 뉴비 멤버인지. 기대감이 좌심실 우심실을 16비트로 두드리는 사이, 마침내 비장이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냈다.

[비장 : 크아아! 내가 비장!]

[짱쎈 비장이 울부짖었습니다.]

[나머지 오장육부가 고개를 갸웃하며 쑥덕거립니다.]

[심장 : 비장이 누구?]

[허파 : 허어? 파하...ㅋ]

[대장 : 비장이라면 전에 들어본 적은 있지 말입니다.]

[간장 : 뭐하는 애야?]

[위장 : 어떤 놈임?]

[콩팥 : 으음, 여기 찾아보니까 관련 자료가 있는데? 모든 척추동물에게 있는 기관이고, 낡은 적혈구를 걸러주고, 헤모글로빈에 있는 철 성분을 재활용하고, 항체도 생성하고, 뭐 그러는 림프 기관? 그렇다는데?]

[심장 : 솔직히 처음 들어봄ㅋㅋㅋ]

[허파 : 허프흐흨ㅋㅋㅋㅋㅋ]

[대장 : 어디 달렸는지 진짜 모르겠지 말입니다ㅋㅋ]

[간장 : 나도ㅋㅋㅋㅋㅋ ㄹㅇ]

[위장 : 결론은 듣보란 거자너ㅋㅋㅋ]

[비장 : ...tlqkf ㅜㅜ]

[나머지 오장육부가 뭐 하는진 여전히 잘 모르겠는 비장을 어쨌건 환영해줍니다.]

[오장육부가 뉴비 탄생을 기뻐하며 1,000 HP를 후원하였습니다.]

[현재 보유 중인 HP : 3,900]

역시나.

HP를 후원해줄 오장육부는 많이 깨어날수록 좋다. 이로써 환자를 진단할 때 비장도 상담에 참여할 수 있게 됐다.

정밀한 진단 범위가 늘어난 셈이다. 흐뭇함에 미소가 무럭무럭 피어날 무렵이었다.

숨 쉴 틈도 없이 연계 보상이 터졌다.

딩동!

[(경) 오장+육부 수집 퀘스트 달성! (축)]

'허?'

펑펑펑!

눈앞에서 상큼하게 터지는 축하 폭죽. 그 사이로 처음 보는 내용의 메시지가 주르륵 떠올랐다.

[당신은 비장을 일깨움으로써, 오장 수집 퀘스트를 완료하였습니다.]

[당신의 오장 + 육부 수집 현황]

[오장 (5/5) : 심장(☆), 간장(☆), 폐장(☆), 콩팥(☆), 비장(☆)]

[육부 (2/6) : 대장(☆), 위장(☆), 소장(X), 쓸개(X), 방광(X), 삼초(X)]

[오장 수집 보상으로 12,000 HP가 특별 지급되었습니다.]

[현재 보유 중인 HP : 15,900]

"...."

미쳤다.

HP 게이지가 터질 지경이다.

그런데 연계 보상이 더 있었다.

딩동!

[오행 순환 시스템이 오픈됩니다.]

'어?'

오행 순환? 시스템?

저건 뭘까.

두 눈을 동그랗게 뜨는 사이, 추가 메시지가 주르륵 떠올랐다.

[세상의 모든 사물에는 오행의 원리가 깃들어 있습니다. 이는 인간의 신체 또한 예외가 아닙니다. 당신은 오늘, 오장 수집 퀘스트를 완료함으로써 신체에 깃든 오행의 장기를 모두 일깨우는 데에 성공하였습니다.]

[당신의 신체에서 오행의 기운이 순환합니다.]

[각 장기별 오행의 위치는 다음과 같습니다.]

[심장 : 화(火) / 비장 : 토(土) / 폐장 : 금(金) / 콩팥 : 수(水) / 간장 : 목(木)]

[이로써 당신은 자연계에 깃들어 있는 오행의 정령과 소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행의 영향을 받는 정령들이 당신에게 크나큰 호감을 갖습니다.]

'정령?'

내가?

그들과 소통할 수 있게 됐다고?

라키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당장 실감은 나지 않았다. 그래도 나중에 뭔가 쓸모가 있겠지 싶었다.

그 밖에도 보상은 더 있었다. GDP 포인트를 얻었다. 덕분에 오랜만에 거짓말 이용권도 한 장을 얻게 됐다.

"후아."

이렇게 많은 보상을 한꺼번에 받는 건 처음이었다.

다 확인하고 나니 먹은 것도 없는데 배가 부른 기분이었다. 하지만 마음 편히 뒹굴거리고만 있을 틈은 없었다.

"전하. 종종 허공을 그렇게 혼자 쳐다보시는 거 말입니다."

생각에 잠길 틈도 없이 데미안 녀석의 말소리가 귓가를 콕콕 찔러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녀석이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응?"

"전부터 종종 그러시는 걸 보았습니다."

"그...랬냐."

티가 났던 건가.

데미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냥 멍하니 있는 모습과는 또 다른 면이 있으셔서, 그냥 특이한 습관인가 싶었지만 이제는 아니라는 걸 알겠습니다."

"...."

녀석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수호천사들과 소통하는 것이었군요. 맞습니까?"

"어."

숨도 쉬지 않고 거짓말로 응수했다. 앞으로도 시스템창을 빤히 쳐다보는 순간들이 종종 있을 테니까. 이렇게 녀석이 알아서 오해를 해주면 차라리 땡큐다.

그렇게 낯빛 하나 바꾸지 않고 거짓말을 한 라키엘은 능구렁이처럼 화제를 전환했다.

"그나저나 툴룬 상단장은?"

"여전히 소식이 없습니다."

"흐음."

라키엘은 침실 구석으로 시선을 돌렸다. 침실 한쪽에 놓인 테이블. 그곳에 자그마한 화분 수십 개가 옹기종기 놓여 있었다.

긴뿌리 감초 양산(?)을 위한 싹 틔우기 실험. 그 노력의 산물이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싹을 틔운 화분은 하나도 없었다. 딱 한 개만 빼고 말이다.

"저거. 아무래도 그때 툴룬 상단장이 오애액... 하고 물을 게워낸 그 화분이 맞는 거 같지?"

"예. 그런 듯합니다."

이쪽이 가리킨 화분. 딱 거기에만 긴뿌리 감초 싹이 자라나 있었다.

저걸 처음 발견한 것은 아까 환상종들과 세르지오, 특근대, 근위대원들이 물러난 직후였다. 처음엔 헛것을 보았나 싶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확실한 긴뿌리 감초 새싹이 맞았다.

'온갖 방법을 동원해도 싹이 안 트더니.'

좀비가 게워낸 물이 긴뿌리 감초 성장의 보약이었다니. 기도 차지 않았다. 어쨌건 그래서 곤란해졌다.

"하필이면 툴룬 상단장이 그날 이후로 행방불명이라. 쯧."

라키엘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찡그렸다. 좀비 툴룬. 그의 행방불명을 알게 된 것도 방금 전의 일이었다.

흑마법사의 침공일 이후로 툴룬을 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하였다.

난리에 휩쓸려서 죽은 걸까.

혹은 시체 폭발을 일으킨 걸까.

하지만 시내에서 보고된 시체 폭발 사례는 없었다. 그렇다면 아마도 스스로 잠적을 선택한 것일 터다.

생각해보면 간단한 이야기였다.

'그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그렇지. 아무리 이성과 지성을 되찾았다지만, 그래도 여전히 좀비 신세니까. 그런 모습으로 계속 지내야 하니까. 한데....'

언제까지 숨어 지낼 수 있을까.

언제까지 들키지 않을 수 있을까.

특히, 외손녀에게 말이다.

'....'

상단 건물의 가장 으슥한 방에서 숨어 지낸다 한들, 언젠가는 누군가에게 들킬 것이다.

하인이나 하녀, 상단의 일꾼들, 가장 최악의 경우라면 외손녀와 직접 마주치게 되는 상황이 있겠다.

'그것만은... 피하고 싶겠지.'

자신의 모습을 보고서 외손녀가 받을 충격. 툴룬의 입장에선 그게 가장 걱정이 됐을 터다. 더 나아가, 자신의 존재 자체를 폭탄처럼 여기게도 됐을 것이고.

'그래서 스스로 떠날 결심을 한 거야.'

때마침 흑마법사가 도시를 침공했다. 난리가 벌어졌다. 그 난리통이 그의 잠적에도 도움이 됐을 터다. 게다가 그런 정황을 설명해주는 간접적인 증거도 있었다.

"데미안. 한데 그 소문이 진짜일까?"

"어떤 소문 말씀이십니까."

"성벽 위에서 언데드 군단에게 맞서서 싸웠다는 좀비 말이야. 조금 전 세르지오가 나가기 전에 알려준 소문."

"예. 실은 며칠 전부터 그런 소문이 돌고는 있었습니다. 제 생각에는 아마도...."

"툴룬이겠지?"

"예."

소문이 사실이라면, 툴룬이 확실하다. 그렇게 싸우다가 죽었거나, 혹은 전투 후에 잠적을 선택했을 터.

"쯧. 그래선 곤란해. 기껏 긴뿌리 감초 양산의 비결을 찾아냈는데."

툴룬이 필요하다.

그가 매일 물을 벌컥벌컥 원샷을 하고, 긴뿌리 감초밭에 오애액 웅장한(?) 구역질을 해줘야 한다.

그러면 농장에서 쑴펑쑴펑 자라난 긴뿌리 감초가 별궁 한의원에 배송되겠지. 별궁 한의원을 찾는 환자들은 더욱 건강해질 거고.

'내 보너스 수명도 덩달아 빵빵해지는 거고!'

어떻게든 그런 여유를 확보해야 한다. 그래야 데미안 녀석의 내면에서 악성 뾰루지처럼 자라나게 될 마계왕의 각성을 저지할 수 있지 않겠는가.

"...."

인생 진짜.

잠깐 비애감을 느낀 라키엘은 결론을 내렸다.

"그러니 그 좀비 아저씨가 제 발로 돌아오게 만들어야지. 살려낸 값도 노동력으로 톡톡히 받아내고."

"혹시 생각해두신 방법이 있는 겁니까?"

"물론."

당연한 소리다.

"외손녀와 마주칠 일이 걱정돼서 숨었을 테니까, 외손녀 앞에 당당하게 설 수 있도록 멍석 좀 깔아줄까 하는데."

"...멍석이요?"

"언론 플레이를 통한 이미지 마사지랄까."

라키엘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다음 날부터, 크라노스 시가지 곳곳에, '도시를 지키기 위해 숭고한 용기를 발휘한 영웅 좀비'에 대한 황태자 공식 피셜의 소문이 들불처럼 번지기 시작했다.

물론 툴룬 상단장의 외손녀, 네일라도 그 소문을 들었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남몰래 생각하였다.

그 영웅 좀비가 자신을 지켜주기 위해 되살아난 할아버지였으면 좋겠다고.

아마도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현실적으로는 절대 불가능하겠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할아버지를 다시 볼 수 있으면, 참 좋겠다고.

225화. 아름다운 보상 (3)

이곳은 크라노스 시가지 외곽, 그 한쪽에 자리한 평범한 가정집 뒤뜰. 언데드 군단의 침공이 안겨준 충격에서 벗어난 어느 가족이 일상의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외삼촌, 그거 들으셨어요?"

"혹시 우리 도시를 지키기 위해 기꺼이 온몸을 내던진 영웅 좀비 이야기 말이더냐?"

"...어?"

"조카야. 넌 내가 그런 소식을 못 들었을 거라고 여긴 거냐? 이 삼촌이 늙어서 세상 소식에 느리고 어두울 거라는 생각은 편견에 불과하단다."

"그, 그럼 그 좀비가...."

"도시를 구하고는 아무런 대가나 칭송조차 바라지 않고서 유유히 잠적했다는 이야기를 알고 있느냐고 물으려던 참이지?"

"...."

"그 소문이 그저 뜬구름만 잡는 과장된 헛소문이 아니며, 황태자 전하께서도 인정하고 인증한 공식적인 사안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냐고도 물으려 했지?"

"...다 아시네요."

"늙은이 무시하지 말라니깐."

"그럼 이건 아세요?"

"뭔데, 또."

"외삼촌, 사랑합니다."

"용돈 필요하다고?"

"옙."

"옛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외삼촌? 왜 이렇게 용돈을 잘 주세요?"

"그래야 우리 누나가 빡치니까."

"아하."

...라는 내용의 대화가 오순도순 오갔다.

한편, 그곳에서 두 블럭 떨어진 어느 술집에서는....

"어이, 주인장? 그건 무슨 벽보요?"

"아, 이거 말이오? 황태자 전하께서 직접 배포하신 전단이외다."

"전단?"

"궁금하면 직접 보시든가."

술집 주인장이 한 발짝 물러났다. 그러자 방금 그가 붙인 벽보의 모습이 드러났다.

"현상금? 도시를 구원한 영웅 좀비를 찾습니다?"

벽보를 본 취객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닌 게 아니라, 벽보에는 간단한 인상착의와 함께 발견 및 제보 시에 지급할 사례금이 내걸린 좀비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취객이 물었다.

"이거, 혹시 그 소문의 영웅 좀비 맞소? 언데드 군단의 침공에 맞서서 싸웠다는 그?"

"맞소."

"에잉, 그거 거짓말 아닌가? 좀비가 어떻게 우리랑 편을 먹고 언데드 군단이랑 싸워?"

"하지만 황태자 전하가 직접 사실이라고 말씀까지 하셨는데 말이오?"

"쯧쯧, 난 그딴 헛소문 안 믿소."

"정말이오?"

"당연하지. 그런 소문을 믿을 바엔 내가 술을 끊겠수다."

"정말로?"

"어. 정말로."

"진짜?"

"어. 진짜로."

"아. 단골손님 잃게 생겼네."

"...왜 그런 표정이오, 주인장?"

"그 소문 그거, 정말로 진짜라서 말이외다."

"...정말로?"

"어. 정말로."

"진짜?"

"어. 진짜로."

"그걸 어찌 그리 확신하오?"

"내 친구 아들놈이 북문 수비병이었으니까 말이오."

"어? 설마 야고프 그 작자네 아들?"

"맞소. 그 친구한테 들었소. 언데드 군단이 쳐들어왔던 날에 말이오. 그날 북문을 지키던 아들이 꼼짝없이 죽게 생겼는데 글쎄, 건장한 좀비 하나가 나타나더니 아들을 살려줬다는구려."

"그 친구, 술 취했던 건 아니고?"

"당연히 아니지. 세상에서 우리 집 술이 제일 맛없다고 떠드는 빌어먹을 친군데."

"잠깐. 그럼, 그 소문이 진짜란 말요?"

"그러니까 황태자 전하께서 그 영웅 좀비를 찾겠다고 이렇게 벽보까지 붙이고 거액의 사례금까지 걸어둔 게 아니겠소?"

"...."

취객이 눈두덩을 비비며 벽보를 다시 쳐다보았다. 그 아래에 적힌 금액을 보며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꺼덕 삼켰다.

"주인장? 그런데 이 좀비 말이오. 인상착의가... 내가 아는 누구랑 좀 비슷한데?"

"누구 말이오?"

"툴룬 상단장 말이외다. 좀 닮았지 않소?"

"어? 어어? 그러고 보니까? 이거?"

...라는 대화가 오갔다.

비단 어느 평범한 가정집 뒤뜰이나, 낡은 술집에서만 그런 이야기가 오가는 것이 아니었다. 오전이 지나고, 점심이 스쳐 가고, 오후가 될 무렵부터는 사람들이 대놓고 광장에 모여 삼삼오오 떠들기 시작하였다.

그 내용은 다들 비슷했다.

"뭐야? 이 정도 사례금이면... 인생이 바뀔 수준인데?"

"그런데 저 영웅 좀비 말입니다. 아무리 봐도 익숙한 모습 아닙니까?"

"툴룬 상단장이랑... 좀 비슷한데요?"

"좀이 아니라 제법 비슷한 것 같습니다만...."

"정말로 툴룬 상단장이 아닐까요?"

"하지만 그는 죽었잖아요?"

"죽었으니까 좀비가 됐겠죠!"

"...아하."

모두가 새삼스러운 눈길로 벽보를 쳐다보았다. 벽보에 그려진 좀비의 얼굴은 누가 보아도 툴룬 상단장과 비슷했다. 당연한 일이지만, 이곳 도시의 사람들치고 툴룬을 모르는 이는 거의 없었다.

배타적이고 고집이 강한 오크 전사들과 거래를 성사시킨 최초의 인간. 거래 성사를 위해서 50세가 넘은 나이에 운동을 시작하여 집념으로 3대 700킬로그램을 성공한 불굴의 사나이.

그가 오크족과 거래를 트고, 그걸 바탕으로 상단을 세웠다. 덕분에 이곳 변방의 보잘것없던 도시에 무역이라는 것이 생겨났다. 일자리가 생겨났다. 이전보다 윤택해진 생활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덕분에 툴룬 상단장은 이 도시에서 가장 존경받는 사람 중의 하나였다. 그가 죽었을 때는 도시 전체가 비탄에 잠겼을 지경이었다.

한데 그가 죽은 후에도, 좀비가 되어 도시를 지키기 위한 영웅적인 활약을 펼쳤다니! 과연 그답다는 생각을 모두가 품었다. 한편으로는 툴룬을 찾아내어 거액의 사례금을 받고 인생 팔자를 고쳐보겠다는 소망도 머금게 되었다.

'이럴 때가 아니야. 남들보다 빨리 찾아야 해.'

'사례금만 받으면... 그걸로 집도 사고... 결혼도 하고...!'

'지긋지긋한 출근을 평생 안 해도 먹고 살 수 있어!'

모두의 눈에 불이 켜졌다. 아니, 아주 그냥 탐욕으로 눈이 뒤집혔다. 본격적인 보물(?) 찾기 타임의 시작이었다.

그렇듯 월ㄹ... 아니, 툴룬을 찾아라 물결에 가담한 이들 중에는 툴룬의 외손녀, 네일라도 있었다.

"저기, 황태자 전하?"

"응?"

"저 벽보 속의 좀비 말예요. 정말 외할아버지가 맞아요?"

"으음, 나도 아직은 잘 몰라."

이쪽을 빤히 올려다보는 네일라의 눈동자. 그 맑은 눈빛 앞에 라키엘은 짐짓 시치미를 떼며 말했다.

"그냥, 뭐, 영웅적인 좀비 하나가 성벽을 지키기 위해서 활약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거든. 그 덕분에 내가 토벌군을 이끌고 돌아오기 전까지 성벽이 함락되지 않고 버틸 수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었고. 그래서야. 착한 사람은 상을 받아야 하는 거 아닐까?"

"사람이 아니고 좀비...."

"좀비라도 예외는 없지. 난 공평한 사람이거든."

라키엘은 어깨를 으쓱였다. 방금 아이에게 해준, 성벽에 대한 이야기는 사실이었다. 소문을 접하고 나름 더욱 깊이 조사를 해보았다. 덕분에 당시 북쪽 성문을 지켰던 생존 병사들의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어느 건장한 좀비가 병사들을 덮치는 척을 하며 좀비 연기를 시켰고, 덕분에 다들 언데드 군단의 공격을 받지 않았노라 했다.

더 놀라운 것은 다음의 이야기였다. 다들 혼신의 좀비 연기를 하며 성벽 바깥으로 기어내려갔다고 했던가. 덕분에 언데드 군단이 그 바람몰이에 이끌려서 성벽에서 잠깐 철수를 했다고도 하였던가.

'덕분에 시간을 번 거지. 안 그랬으면... 우리가 돌아오기 전에 크라노스가 완전히 함락됐을 거야.'

기껏 돌아왔지만 함락되어 있었을 크라노스. 무고한 시민들은 모조리 희생되어 언데드 군단의 좀비로 흡수가 됐을 터다. 지금 함께 있는 네일라도 예외가 아니었을 테고. 생각만 해도 끔찍한 시나리오였다.

하지만 그걸 막아냈다. 툴룬의 용기와 기지 덕분이었다. 그래서였다.

"좋은 일을 하면 상을 받고, 나쁜 일을 하면 벌을 받는 게 세상의 진리란다. 그게 사람이든, 좀비든, 또 다른 존재이든 예외란 없어. 그래야 공평한 거니까."

"돌아가신 우리 외할아버지도요?"

"응. 당연하지. 네일라는 그 좀비가 외할아버지였으면 좋겠어?"

"네."

아이가 1초도 고민하지 않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할아버지 보고 싶어요."

"좀비라도 상관없는 거야?"

"네. 할아버지니까."

"이상한 냄새가 나고 전이랑 조금 다른 모습이어도? 그래도 괜찮아?"

"네. 할아버지 원래 발 냄새 심했어요. 그러니까 괜찮아."

"...어, 그래. 그렇구나."

꼭 찾으면 좋겠다. 진심이다. 아이의 손을 잡고서 나란히, 천천히 거리를 걸으며 물었다.

"그런데 네일라는 말이야. 만약 할아버지가 겁을 내면 어떡할 거야?"

"할아버지가요? 왜요?"

"으음.... 말하자면 조금 복잡하기는 한데, 할아버지는 아마 걱정을 많이 할 수도 있어."

"어떤 걱정이요?"

"네일라 걱정."

아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해가 안 된다는 듯한 기색이다. 아이가 상처받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말해 주었다.

"만약 그 영웅 좀비가 할아버지라도 말이야. 사람들이 아무리 칭송을 해도 할아버지는 달라진 자기 모습 때문에 부끄러울 거야, 아마도. 그래서 선뜻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어."

"에이, 말도 안 돼요."

네일라가 자그마한 눈썹을 찡그렸다.

"우리 할아버지 안 그래요. 만약에 우리 할아버지 놀리는 사람이 있으면 내가 혼내줄 거야."

"정말?"

"응. 정말요."

"네일라가 할아버지 지켜줄 거야?"

"네."

"언제까지?"

"계속. 끝까지. 저 시집갈 때까지요."

"어? 그럼 그다음은?"

"할아버지 하는 거 봐서요."

"그럼 할아버진 큰일 났네. 네일라한테 진짜 잘해야겠네?"

"당연하죠. 그러니까... 보고 싶어."

아이는 고개를 숙였다.

안 그러면 눈물이 흘러나올 것 같았다. 아직은 울고 싶지 않았다. 헤프게 울면 할아버지와 만날 행운이 도망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무 이유도, 까닭도 없었지만, 괜히 느낌이 그랬다.

그때였다.

"그럼... 고개 들어볼래?"

부드러운 황태자 삼촌의 목소리. 네일라는 엉겁결에 그 말을 따랐다. 그리고 보았다.

"어?"

저기 앞쪽. 평범한 거리. 그 언젠가 할아버지랑 술래잡기를 했던 길목. 그러다가 넘어져서 무릎이 까지고, 피가 나는 걸 보고는 울고, 그랬던 자신을 할아버지가 쩔쩔매며 달래주었던 그 자리.

그곳에 익숙한 사람이 보였다.

"네일라? 우리... 병아리?"

구수한 목소리.

익숙한 음성.

듣는 순간 눈물이 왈칵.

아무 이유도, 까닭도 없었지만, 그럼에도 느낄 수 있었다. 할아버지다. 날 저렇게 불러주는 사람은 세상에 할아버지밖에 없으니까.

그다음에 어떻게 뛰어갔는지, 어떻게 와락 안겼는지, 어떻게 할아버지가 통곡하듯 울었는지, 네일라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다만 믿기지 않는 감격만이 가득하였다. 전과 조금은 달라진 할아버지 냄새, 얼굴. 하지만 아무 상관 없었다.

그 모습을 보며 라키엘은 말없이 미소 지었다. 한편으로는 생각했다. 오늘 일을 벌이길 참 잘했다고. 영웅적인 소문을 퍼뜨린 것도. 그 누군가가 들을 수 있도록 네일라와 이야기를 나눈 것도. 전부 보람차다고. 그리고 조금은....

'눈이 조금, 이상하네.'

아무래도 요즘 눈 상태가 안 좋은 거 같다. 그래서 자꾸 시도 때도 없이 시야가 일렁거리는 거 같다. 그러니까, 아무래도 진단이 좀 필요하겠다.

진심으로.

226화. 아버지의 노심초사 (1)

툴룬 상단장이 모두의 품으로 돌아왔다.

그의 외손녀인 네일라는 말할 것도 없고, 상단의 모든 일꾼과 하인들이 그의 놀라운 귀환을 반겼다. 그 어떤 이도 그가 좀비의 몸이라는 사실에 반감을 표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몸으로도 용기를 내어 성벽을 사수한 행동에 찬사를 보내었다.

다행히 그건 긴뿌리 감초 농장의 일꾼들 또한 마찬가지다. 지금, 보는 바와 같이 말이다.

"그는 비록 좀비의 몸이 되었으되, 인간이었던 시절의 용기와 결단을 잃지 않았다. 타인을 향한 미덕 또한 지켜냈다. 자신의 몸을 던지는 각오로 크라노스의 성벽을 지켜내는 데에 크게 일조하였으며, 그러한 공훈을 세웠음에도 어떠한 칭송조차 바라지 않고서 기꺼이 초야에 묻히는 삶을 선택하려 하였다."

라키엘은 잠시 숨을 골랐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따스한 햇볕이 내리쬐는 오전의 농장. 파종을 앞두고서 흙냄새 가득한 드넓은 밭을 뒤로하고서, 스무 명가량의 사람들이 이쪽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최근 긴뿌리 감초 농장에 고용된 일꾼들이었다. 또한, 누구 하나 예외 없이 툴룬 상단장을 잘 아는, 크라노스의 토박이들이기도 하였다.

라키엘은 그들을 향해 말했다.

"하여 나는 툴룬 상단장의 용기와 희생에 깊은 감명을 받았으며, 그에게 특별한 보상을 내리려 한다. 바로 이곳, 긴뿌리 감초 농장의 감독관의 지위이다. 툴룬? 이쪽으로."

툴룬 상단장이 수줍은(?) 표정으로 나섰다. 조금은 살벌한 좀비의 안색임에도 그의 눈빛과 몸짓은 지극히 인간적이었다. 즉, 자신이 감히 이런 직위를 맡아도 되나 싶은 얼떨떨함을 온몸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그를 옆에 세운 라키엘은 빙긋 웃었다.

"자, 여기 일꾼들과는 이미 구면일 테니 딱히 어색하진 않겠지? 모처럼 감독관의 직위를 맡았으니 소감이라도 한마디 해보면 어떨까?"

"어, 음, 제가 그래도 됩니까, 전하?"

"물론."

당연한 일이다.

긴뿌리 감초 농장의 감독관으로 툴룬만큼 적합한 인물은 제국 전체를 뒤져봐도 없을 것이다. 오직 그만이 감초의 싹을 틔우고 성장을 촉진할 수 있는 인재인 까닭이었다.

'설마 했는데, 정말로 그가 마셨다가 내뱉는 물이 감초 성장의 핵심 비료가 될 줄은 몰랐지.'

며칠 전의 일이 떠올랐다.

열흘 만에 의식을 되찾은 후였던가. 침실 한쪽에 놓인 긴뿌리 감초 샘플 화분 중에 새싹을 틔운 화분이 있음을 발견했다. 동시에 깨달았더랬다. 저거, 좀비 툴룬이 물을 게워냈던 그 화분이었노라고.

그걸 깨달은 때부터였다. 작정하고 툴룬의 복귀를 위한 작전을 펼쳤다. 다행히 성공했다. 적극적인 언론 플레이 덕분에 좀비 툴룬은 크라노스의 영웅으로 칭송받게 되었다. 외손녀와도 감동적인 해후를 치러냈다.

그 후에 자신은? 툴룬을 따로 불러서 며칠 동안 실험을 진행했다. 그가 마셨다가 뱉어낸 물이 정말로 긴뿌리 감초의 발아와 생장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한 실험이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예측이 맞았다. 툴룬이 마셨다가 뱉은 물이 특제 비료의 역할을 해 주었다. 이유나 원리는 아직도 상세하게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점이 하나 있긴 했다. 툴룬이 긴뿌리 감초 농장의 운영에 핵심이 될 것이란 사실이었다.

그래서였다.

"오직 그쪽만이 농장을 원활히 운영할 수 있어. 그건 이제 스스로도 잘 알 텐데? 그러니 내가 두둑한 급여와 지위를 보장해준 것이고."

사실이었다.

복귀한 툴룬은 이제 돈방석에 앉을 일만 남았다. 농장의 감독관에 기존의 상단까지 그대로 쥐고 있으니, 그는 이곳 크라노스크 지방에서 가장 부유한 인물이 될 것이다.

"덩달아 네일라도 자네 덕분에 금수저... 아니, 더욱 풍족한 인생을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이고. 게다가."

턱, 툴룬의 어깨를 짚었다. 은근한 목소리로 그의 자신감을 북돋아 주었다.

"사실은 말이야. 자네의 농장 운영 실적이 괜찮게 나오면, 네일라에게 황도 아카데미의 입학과 전액 장학금 혜택까지 보장해 주고 싶은데."

"...!"

확 커지는 툴룬의 눈매.

역시나 사람을 움직이는 데에는 풍족한 보상만큼 적절한 것이 없다. 게다가 그 보상이 본인이 아닌, 자식 손주에게 주어지는 거라면 사람 눈은 더더욱 확 돌아간다. 그건 좀비도 예외가 아니다. 그게 부모이고 할아버지이며 혈육인 법이니까.

그런 덕분이었다.

좀비 툴룬의 움츠러들어 있던 어깨가 쫙 펴졌다. 자신이 좀비 신세라는 자괴감과 위축감은 순식간에 머나먼 은하수 너머로 사라졌다. 대신 그의 눈빛 가득 단호한 의지가 깃들었다. 손녀의 수도권(?) 진학을 이루어내리라는 각오였다.

"흠흠! 다들 반갑소. 다들 구면이라 아시겠지만, 툴룬이오."

한때 3대 700을 달성했던 의지의 사나이, 자신감을 되찾은 툴룬의 당당하고 걸걸한 인사가 농장 일꾼들을 향했다.

그걸 보는 라키엘의 입가에 서린 미소가 한결 짙어졌다. 확신이 들었다. 국밥처럼 든든하다. 이 정도면 충분히 믿고 맡길 수 있겠다.

"저는 여러분을 믿었습니다. 재난과 참사가 모두를 덮쳤던 그날, 크라노스를 향한 급속 회군을 감행하는 내내 말입니다."

마법 구슬을 통해 광장 가득 번지는 목소리. 어쩐지 내 목소리와 약간 다른 것 같아서 어색하다.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빽빽하게 모인 시민들의 저 눈빛도 부담스럽다. 어째서 다들 저렇게 반짝반짝거리는 눈빛인 걸까. 심지어 날 보며 울먹이는 사람마저 있다.

덕분에 의문이 든다.

내가 저런 존경으로 가득한 시선을 받을 만큼, 훌륭한 사람인가.

'아니.'

그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설령 이제 크라노스를 떠나는 순간이라고 해도. 그 출발에 앞서 황태자로서 시민들에게 연설을 하는 지금 이런 자리라고 하여도. 나는 그렇게까지 훌륭한 사람은 아닌 거 같다. 대체적으로는 말이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라키엘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렇기에 여러분에게 고맙습니다. 힘겨운 순간을 잘 이겨내 주어서. 다들 잘 버텨 주어서. 그리고 이렇듯, 자격 없는 이에게 과분한 환호성을 보내 주어서 말입니다."

잠시 호흡을 위해 말을 멈추었다.

광장 가득한 인파가 그사이를 참지 못하고 우레성 같은 환호성을 터뜨렸다. 박수 소리라는 것이 이렇듯 압도적일 수 있는 거였나. 새삼스러운 발견이었다. 저렇듯 거대한 환호성과 박수가 모두 나를 향한 것이라는 사실에 가슴이 뛰었다.

잠시 옆을 돌아보았다. 연단 주위에 늘어선 익숙한 이들이 보였다. 언제나 내 곁을 말없이 지켜주는 사람들이었다.

그 모습을 본 덕분이었을까.

문득, 생각지 못했던 말이 입 밖으로 나왔다.

"또한, 그렇기에 저는, 마젠타노 황실의 황태자로서, 경애하는 크라노스의 여러분에게 진정한 영웅들을 소개하려 합니다."

손을 뻗었다.

세르지오를 지목했다.

내 손길에 움찔하는 특근대의 최고참. 흉터와 수염 자국 가득한 우락부락한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연설을 이어갔다.

"세르지오. 그대는 언제나 말없이, 내 곁을 지키며 헌신하였지.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그때, 전장에서 기습적인 폭발이 일어났던 순간, 그대는 누구보다도 먼저 몸을 날려 나를 감쌌지. 고맙다. 덕분에 내가 지금 이렇게 살아 있게 되었다."

"...전하?"

"나는 나머지 특근대원들의 희생 또한 보았다. 파멸적인 폭발과 폭풍 앞에서도 누구 하나 몸을 움츠리지 않았지. 오히려 방패를 앞세우며 나섰고, 모두가 앞다투어 나보다 앞서 충격을 받아 내려 들었다. 나는, 그 모습을 모두 보았다."

특근대원들의 목울대가 출렁였다.

그러했다.

처음 언데드들이 폭발하기 시작했을 때였다. 분명히 보았다. 폭발을 온몸으로 막아내려 들었던 특근대원들. 날 바닥으로 내리누르며 몸으로 덮어 주던 세르지오. 그들의 다급하고도 절실했던 표정과 눈빛. 그걸 어떻게 잊을까.

다음은 근위대였다.

"프란델 경. 그대와 대원들의 노고와 희생 또한 나는 보았다. 내가 좀비들을 유인하며 달리는 내내, 그대들이 긴박하게 움직이며 좀비들의 포위망이 완성되는 것을 지연시켰지. 고맙다. 덕분에 무사히 협곡으로 달려갈 수 있었다."

"...."

근위대원들의 눈빛이 뭉클해졌다.

다음 차례는 우루스였다.

"또한, 나의 듬직한 미노타우로스 친구여. 그대의 온몸을 던진 헌신과 보호 덕분에 내가 무너지는 협곡 속에서 끝까지 무사할 수 있었지. 그대가 아니었다면 지금의 내가 어찌 이렇듯 건재할 수 있었을까."

부러진 갈빗대 때문에 다소 구부정하게 있던 우루스가 자랑스러운 콧김을 풍, 내뿜었다. 그렇듯, 광장에 모인 시민들의 눈길이 특근대와 근위대, 우루스를 향하였다. 비로소 숨통이 조금은 트였다. 부담감이 덜해졌다.

그러니 이쯤에서 마무리.

조금은 뻔하지만.

내 곁을 지킨 이들과, 이곳의 시민들과, 그날의 재난을 이겨낸 모두가 영웅이라는, 너무 뻔하디뻔한 멘트지만. 그래도 어쩌겠는가.

'그게 내 마음인데.'

덕분에 어울리지 않는 부담스러운 칭송은 다른 곳으로 돌리고. 수행원들의 더욱 드높아진 충성심을 얻고. 나쁘지 않은 장사였다. 연설을 마무리하고 크라노스를 떠나는 내내 만족감이 들었다.

"후우."

배웅하는 시민들의 환호성. 열렬한 외침. 눈물 젖은 감사. 그 모든 마음을 뒤로하고 마차에 오르고서야 비로소 제대로 숨을 쉴 수 있었다. 역시 나는 관심을 너무 받는 건 체질이 아닌 거 같다. 맞은편에 앉은 데미안은... 다르게 생각하는 것 같지만.

"잘하셨습니다. 전하."

"그랬나."

"예. 어차피 전하께서 공을 아무리 다른 곳으로 돌리셔도, 사람들은 전하를 가장 우러르며 칭송할 테니까요."

"...그런가."

"물론입니다."

데미안 녀석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전하께서 저들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안겨 주셨으니까 말입니다. 흑마법사의 침공을 저지한 것뿐만이 아니라, 오랜 시간 도시를 괴롭히던 백일해 풍토병마저 해결해 주셨으니까요."

"어차피 그건 내가 잘되려고 한 일인데, 뭐."

"하지만 사람들은 다르게 받아들이겠지요."

"뭐, 그렇겠지."

"예, 아마도."

덜그럭거리는 마차 안에 잠깐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번에도 먼저 그 침묵을 걷어낸 건 데미안이었다.

"그나저나 전하.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마계왕?"

"어떻게 아셨습니까?"

"지금 네가 나한테 궁금할 게 그것밖에 없잖냐. 앞으로 마계왕의 각성을 어떻게 저지할 계획일지가 궁금한 거겠지?"

"예, 전하."

"그거라면, 음. 너 제법 아프게 될 거다."

"...예?"

데미안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 반응에 개의치 않고 말해 주었다.

"주기적으로 말이다. 굵직한 불치병이 하나씩 도지게 될 거야. 단계별로.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설마...."

"그래. 그게 마계왕이 단계별로 깨어나는 신호야. 그걸 치료하면서 놈의 각성을 틀어막아야 할 거고."

"혹시 전하의 수호천사가 그걸 알려준 겁니까?"

"물론."

"그래서 제가 떠나려던 걸 말리신 거고요?"

"당연하지."

어깨를 으쓱이며 태연하게 대꾸했다. 물론 수호천사가 알려줬다는 건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녀석이 이제부터 주기적으로 굵직한 불치병을 앓게 되리란 이야기는, 그것이 마계왕의 단계적 각성의 과정이라는 말은 전부 사실이었다.

소설 속에서 그랬으니까.

"뭐, 어쨌건 그건 황도에 돌아가서 대책 세우자고. 그러기엔 아무래도 별궁 한의원이 제일 든든한 장소일 테니까."

"...예, 전하의 말씀이 사실이라면, 동감입니다."

이쪽의 말이 충격적인 걸까. 데미안 녀석의 안색이 약간 굳어 있었다. 물론 이쪽도 마음 한쪽이 버석거리며 굳어 가는 건 마찬가지다.

마계왕의 각성을 막을 일이 막막해서?

그건 아니었다.

그보다도 황도로 돌아가면 당장 몰아닥칠 후폭풍이 염려가 되어서였다.

'황제 그 양반이 이번 일을 가지고 어떻게 반응하려나.'

나름 예측을 해 보았다.

그런데 솔직히, 이번에는 반응이 예측되지가 않았다. 변경에서 일어난 재난을 잘 해결했으니 칭찬을 받을 것인지, 혹은 그 과정에서 겪었던 위기를 지적하며 미숙함을 질타할 것인지. 어쩌면 둘 다일까.

물론 어떤 경우에라도 황제가 반드시 보일 딱 한 가지, 예상되는 반응이 있기는 하다.

'내 걱정을 하는 경우는 없겠지.'

황제는 그런 사람이니까. 피도 눈물도 없는 타입이니까. 특히 자신의 자식에게 더더욱 가혹한 사내니까. 소설에 등장해서 죽음으로 퇴장하는 시점까지, 그 태도만큼은 절대로 바뀌지 않은 인물이었으니까.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에게서 인간적인 어떠한 걱정이나 염려, 관심은 바라지도 말아야겠지. 솔직히 그게 이쪽 입장에서는 부담이 덜 되기도 하고.

'그 양반이 갑자기 태도 싹 바꿔서 날 걱정해 주고 챙겨 주고... 으음, 그러면 오히려 소름 돋을 듯.'

생각하자니 절로 쓴웃음이 흘러나왔다.

한데 그때였다.

덜컹!

"...억!"

잘 굴러가던 마차가 갑자기 급정거를 감행했다. 하마터면 허리가 삐끗할 뻔했다. 무슨 일일까. 마부석을 향해 묻기도 전에 바깥에서 외침이 들려왔다.

"전하? 전방, 동남쪽 방면에서 군대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뭐?"

군대?

동남쪽에서?

거기라면... 제국 황도 방향인데?

절로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아직 크라노스 시를 떠난 지 30분도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마차는 여전히 크라노스크 지방을 벗어나지도 못했다.

그런데 황도 마젠타가 있는 동남쪽에서부터 다가오는 군대라니.

뭘까.

"잠깐. 설마."

혹시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마차 문을 열었다. 고개를 내밀어 동남쪽을 쳐다보았다. 과연 그곳에 엄청난 규모의 흙먼지가 피어나고 있었다. 흙먼지를 만들며 진군해 오고 있는 군대도 보였다.

삼엄한 대열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연히 걸어오고 있었다. 그 숫자는 어림짐작으로도 수천 이상. 빽빽하게 서 있는 군기가 곳곳에서 웅장하게 펄럭였다.

한데 그 군기의 디자인이 눈에 익었다. 당연했다. 마젠타노 황실 직속군의 군기니까. 그중에서도 저건 특히 황제 친위대의 깃발이니까.

그리고 그 선두에서는....

'...황제?'

황제 아스테리온 테스타로사 마젠타노. 그 양반이 말을 몰며 돌진해오고 있었다. 마치, 아이가 아파서 조퇴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반차 쓰고 달려오는 부모님처럼 다급한 얼굴을 하고서.

227화. 아버지의 노심초사 (2)

두두두두두두...!

지축이 울린다. 땅이 몸을 떨고, 공기가 바운스바운스 가슴을 때린다. 얻어맞은 갈빗대 안쪽에서 심장이 탭댄스를 춘다. 그렇게, 소리가 온몸을 때린다.

"...와아아아-!"

지축을 울리는 북소리.

터지는 함성.

쏘아지는 축포.

흩날리는 꽃잎.

그 속에서 라키엘은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널따란 대로였다. 드넓은 길이 직선으로 쭉 뻗어 있었다. 그 너비가 어느 정도냐면, 서울 광화문 앞 도로쯤 되는 것 같았다.

한데 그 길이 모조리 화려한 의장대와 군대로 채워져 있었다. 숫자만 대략 수천은 될 것 같다. 그러니까 이건 의장대를 앞세운 군대의 정연한 퍼레이드였다. 아니, 개선식이었다. 바로 크라노스로 달려갔던 황제 직속 친위군의 개선식 말이다.

"이게 다 너를 위한 것이다."

곁에서 흘러오는 묵직한 목소리. 그걸 귀에 담는 순간, 라키엘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살짝 움츠렸다. 삐거덕거리는 동작으로 옆을 돌아보았다.

그곳에서 황제가 이쪽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

눈이 마주쳤다. 얼른 눈길을 돌렸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황제의 입은 어김없이 다시금 열리고야 말았다. 물론 그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엄숙한 훈계였다.

"제아무리 황태자가 멍청하기 짝이 없어 제 목숨 아까운 줄도 모르고 날뛰어 댔다고는 하지만, 그런 황태자에게도 정치적인 입지 정도는 챙겨 줘야 하지 않겠느냐. 그것이 바로 짐의 할 일이기도 하고."

"...."

또 시작이다.

크라노스 외곽에서 황제와 만나 버렸던 20일 전이 떠올랐다. 그때 이후부터 계속 이런 식이다. 황제는 얼굴만 마주치면 신랄한 말로 이쪽을 훈계하곤 했다. 오직 이쪽을 디스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하여 짐이 너를 위해 준비하였다. 보거라. 저 시민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황태자가 변경의 도시 크라노스를 구했다는 표면적인 사실 하나에만 환호하며 너를 반기고 있지 않느냐."

"...."

"참으로 애석한 일이지. 제국 황실의 후계자가 자신의 지위와 그 중요성은 망각한 채, 변경의 도시 하나를 위하여 목숨을 거는 도박을 감행하였다는 사실을 저들에게 어찌 설명할까. 그 멍청하고 어리석기 짝이 없던 행동을 저들에게 어찌 변명할까."

"...."

"하지만 안심하거라. 오늘은 그 일로 저들에게 비난을 받을 일은 없을 터이니. 이 또한 너를 위한 짐의 배려가 아니겠느냐."

"...."

"어떠하더냐. 너는 어찌하여 대답이 없는지."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라키엘은 재빨리 무난한 정석 대답을 내놓았다. 물론 그런 알량한 대답은 황제에겐 씨알도 먹히지 않았지만.

"딱히 망극하지도 않을 그따위 성은."

"...."

아오, 이 양반이 진짜.

'혹시 즐기는 건가.'

어쩌면 황제는 이쪽을 갈구는 데에서 인생의 보람과 참맛을 야물딱지게 느끼는 건 아닐까. 라키엘은 내심 투덜거리며, 황도 마젠타의 중심 거리에서 진행되는 개선식 퍼레이드를 바라보았다.

물론, 투덜거리는 마음이 진심인 건 아니긴 했다.

'황제의 그 표정을... 봐 버렸으니까.'

20일 전의 일이 떠올랐다.

당시에 크라노스를 향해 달려오던 황제의 표정 또한 떠올랐다. 사실은 그 얼굴과 눈빛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저 깐깐하고 냉정하며 피도 눈물도 없을 것 같던 양반이 다 무너진 표정으로 달려오던 모습이라니.

상상도 해 본 적이 없는 일이었다. 당연히 기대해 본 적도 없었다. 물론 이쪽이 무사하다는 걸 보자마자 그 표정이 싹 사라지긴 했지만, 그럼에도 황제를 보며 느낄 수 있었다.

저 사람이 안심하고 있구나, 라고.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구나, 라고.

'그래서 지금도, 날 훈계하는 척하면서도 이런 성대한 개선식을 준비해 준 거겠지. 크라노스에서 벌어졌던 일을 구실로 삼아 내 정치적 입지를 강화해 주려고.'

황태자 영웅 만들기. 이것만큼 좋은 정치적 선전 수단이 있을까. 그리고, 황제 이 사람만큼 자신의 본심을 못 감추는 사람이 또 있을까.

'너무... 티가 난단 말이지.'

이쪽을 훈계하는 내내 보이는 눈빛도. 언뜻언뜻 철가면 같은 무표정 아래로 비치는 진짜 표정도.

사실은 온화하기 짝이 없다.

전에는 몰랐는데, 이제는 조금 알겠다.

'어휴. 츤데레. 아니, 권력데레.'

저도 모를 한숨이 살짝 흘러나왔다. 사실 그런 라키엘의 진단(?)은 정확했다. 지금 이 순간, 황제의 콧구멍은 아무도 모르게 슬며시 벌렁거리고 있었다. 너무나 기쁘고 흐뭇해서였다.

'허허, 허허허.'

황제 아스테리온은 행복했다. 절로 웃음이 덩실덩실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걸 티 내고 싶진 않았다. 그랬다간 자신의 큰아들이 방심할 테니까. 자칫 풀어질 수도 있으니까.

그건 싫었다. 아들은 아직 더 발전해야 한다. 그러니 자신은 엄한 아비로 남아 주어야 한다. 설령 욕을 먹더라도 그리하여야 한다. 그러한 일념 때문이었다. 황제는 덩실덩실 트월킹을 추려는 안면근육을 혼신의 힘으로 꽉 억눌렀다.

한편으로 그는 한 달 전의 일을 떠올렸다.

급보를 받았던가. 크라노스에서 일어났다는 변란. 흑마법사와 언데드 군단. 그들을 토벌하기 위해 직접 움직였다는 황태자. 전투. 협곡에서의 폭발. 그리고....

'그때 짐은 너를 잃는 줄로만 알았다.'

황제는 라키엘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성대한 개선식에 어쩐지 어색해하는 황태자. 자신의 큰아들. 한때는 실망만 안겨 주었던 존재. 하여 매일을 탄식하게 만들었던 혈육.

그러나 막상 정말로 아들이 혼수상태에 빠졌다는 소식을 들은 순간, 하늘이 무너지는 줄로만 알았다. 그때부터 자신이 어떤 정신으로 어떻게 움직였는지도 몰랐을 지경이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친위대를 이끌고 달려가고 있었다. 크라노스를 향하여. 전력으로. 아들의 안위를 직접 살피기 위하여.

그렇게 열흘을 꼬박 달렸던가. 마침내 크라노스의 외곽에서 아들의 모습을 발견했던가. 아마 그때만큼 안심했던 적이 평생 없었던 것 같다.

형제들과의 경쟁에서 승리하여 황제의 자리에 등극하였던 때? 그때조차도 아들의 무사함을 확인했던 때만큼 기쁘진 않았던 것 같다.

얼떨떨한 얼굴로 마차에서 내리던 라키엘. 큰아들 녀석의 그 모습이 어찌나 반갑던지. 또한 어찌나 안심이 되던지. 무너져 내리던 하늘이 메꾸어지고, 나락으로 추락하던 영혼이 구원받는 기분이었다.

어쩌면 눈물이 왈칵 나오려 했던 것도 같다. 간신히 그걸 참아냈던 것도 같다. 냉큼 달려가서 아들을 안아 주려다가... 가까스로 스스로를 억눌렀던 것도 같다. 그리하여 격정적인 포옹 대신에 훈계부터 늘어놓았던 것도 같다.

당시에 내가 무어라 하였더라.

"...."

황제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덕분에 떠올릴 수 있었다.

'너는 어찌하여 지닌바 지위의 중요성을 망각하여 사안의 경중을 파악지 아니하고 함부로 경거망동하여 황실의 존폐를 위태롭게 하였는가... 라고 일갈부터 내렸더랬지, 아마.'

생각하자니 절로 쓴웃음이 나왔다.

사실 마음은 그게 아니었는데.

네가 무사해서 다행이라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더없이 기쁘기 그지없다고. 짐은, 아니, 이 아비는 너에게 고맙다고.

실은 그렇게 말해 주고 싶었는데.

'참으로 어렵단 말이지.'

낯뜨거운 말이 차마 입에서 나오지가 않았다. 그래 본 적이 없으니까. 어색했다. 생각해 보면 실로 기이하고도 이상한 일이었다.

'예전의 나는 어찌하여... 이 아이를 그저 야박하게만 대하였을까.'

다시금 라키엘을 바라보았다. 항상 아쉬운 아들이었다. 매번 아픈 손가락이었다. 어쩌면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부족한 모습 때문이었던 걸까. 자신은 항상 아들을 내몰기만 했던 것 같다.

더욱 성장하라는 구실에만 집중하였다. 새끼를 절벽으로 밀어내듯. 스스로 기어 올라오며 단단해지기만을 바라며. 그런 나날이 오히려 아들의 마음을 부스러지게 만들 수도 있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 보지 못했다.

그걸 이제서야 조금은 알겠다.

크레모에 이어서 앙부아즈 내전, 이번의 크라노스까지. 아들을 잃을 뻔한 경험을 거듭 반복하며 수차례나 가슴이 철렁 무너지고서야 겨우, 조금은 알겠다.

내가 얼마나 못난 아비인지.

'내 다시는 너를... 위험에 처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마.'

황제는 내심 다짐하고 또 다짐하였다. 그러는 사이에 개선식 퍼레이드가 끝났다. 황실의 정해진 예법에 따라, 함께 황궁으로 들어왔다. 문무백관이 지켜보는 가운데, 형식적인 황태자의 귀환 보고를 받았다.

그 후에는 또다시 정해진 예법에 따라, 황태자와 담소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덕분에 황제는 선대의 황제들에게 내심 크게 감사했다. 이런 훌륭한(?) 예법이 없었다면, 황태자는 귀환 보고를 마치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제 별궁으로 돌아가 버렸을 테니까.

'이 녀석은 짐을 항상 어렵게 생각하니까.'

사실은 당연한 일이다.

그동안 자신이 그토록 쥐 잡듯이 아들을 대하였으니, 아들이 함께 숨쉬기도 부담스러워하며 학을 뗄 만도 하다. 그러니까, 아들의 저런 표정은 자신의 업보다. 하지만 그럼에도... 기쁘다, 이 시간이.

"혹여 피로함을 느끼고 있는 것이더냐."

황제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맞은편의 라키엘을 슬쩍 떠보았다. 확실히 라키엘은 피곤한 모습이었다. 무리도 아니었다. 크라노스에서 여기까지 장장 20일의 여정이었다. 마차에 몸을 싣는다고는 하지만,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니까.

게다가 황도에 도착하자마자 쉴 틈도 없이 개선식을 치르랴, 반나절 가까이 억지로 웃으며 손을 흔들고 예법을 챙기랴, 제법 고단했을 것이다.

과연 돌아오는 큰아들의 반응도 그러하였다.

"예, 폐하. 솔직히 말씀드리옵자면 조금은...."

"쯧. 한심하고 못난지고."

"...."

"...."

아들의 침묵.

황제 또한 저도 모르게 침묵. 그는 자신의 실수를 뒤늦게 깨닫고는 스스로 흠칫했다. 아들의 솔직한 대답에 또 타박부터 꺼내고 말았다. 생각해 보니 아주 몹쓸 습관이었다. 그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헛기침을 하였다.

"흠흠! 그래. 피곤할 수도 있지. 하지만 너는 지닌바 지위를 잊어선 아니 된다. 아무리 피곤하고 고단하다 한들, 그것을 남들 앞에서 함부로 내비쳐서는 아니 될 것이야."

"그, 그렇사옵니까."

"당연하다. 그것이 지배자가 마땅히 보여야 할 태도이니."

"하면 폐하께서는 피곤하지 않으시옵니까?"

"짐은... 멀쩡하도다."

"흐음, 안색이 조금 칙칙해지셨사온데."

"서북방의 거친 바람을 맞아서 그렇도다."

"단지 그렇다고만 말씀하시기엔 다크써클도 생기셨사온데."

"...크흠!"

고얀 녀석.

이게 누구 때문인데.

황제는 쓴웃음을 삼켰다. 그리고 새삼스러운 다짐을 다시금 되새겼다. 이제 더는 아니 되겠다. 아들이 매번 위험해지는 것은 더 이상 못 보겠다. 크레모, 앙부아즈, 이번의 크라노스까지. 이런 일이 다시 반복되는 것을 막아야겠다.

그래서였다.

황제는 라키엘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말없이, 한참, 그 눈빛과 분위기의 부담감에 라키엘의 어깨가 긴장해서 굳을 무렵, 툭 내던지듯 선언하였다.

"근래 짐이 가만히 생각하여 보았더니 말이다. 아무래도 너의 몹쓸 취미생활이 이 모든 사건의 원흉인 것 같구나."

"...예?"

"별궁 한의원 말이다."

바로 그것이다. 그 한의원 때문이다. 그것 때문에 매번 아들이 위험에 휘말리는 것 같다. 확실하다. 그러니 이제는....

"별궁 한의원인지 뭔지 하는, 그 소꿉장난 같은 병원 놀이는 그만두고, 이제부터는 후계자 수업에 집중해 보는 것은 어떻겠느냐."

아들을 더는 위험에 빠뜨리지 않겠다는 의지로 가득한, 황제의 폭탄선언이 떨어졌다.

228화. 아버지의 노심초사 (3)

황궁 복도.

황제의 알현실과 제법 떨어진 장소. 데미안은 그곳에 홀로 앉아 있었다. 그의 임무는 황태자의 최근접 호위였지만, 지금은 이곳에서 홀로 대기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호위 대상인 황태자가 안쪽에서 황제와 담소를 나누는 중이기 때문이었다.

'하.'

데미안은 쓴웃음을 삼켰다. 그리고 새삼스러운 성가심을 느꼈다. 이제 더는 안 되겠다. 매번 이러는 건 못 보겠다. 언제부터 이랬던 걸까. 한번 의식하고 나니까, 그 뒤부턴 계속 신경이 쓰인다.

그래서였다.

데미안은 복도 허공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말없이, 한참, 그 눈빛과 분위기만으로 주위의 공기가 싸하게 가라앉았을 무렵, 툭 내던지듯 말했다.

"요즘 가만히 생각해 봤는데... 아무래도 안 되겠군."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러나 그는 개의치 않았다.

"첩보 활동인지 뭔지 하는 그 소꿉장난 같은 관찰은 그만두고, 이제 슬슬 모습을 보이는 게 어떨지."

이제 더는 모르는 체 두지 않겠다는 결단을 머금은, 데미안의 혼잣말이 떨어졌다. 물론 이번에도 처음엔 반응이 없었다. 그저 처음엔, 잠깐은 그랬다.

그러나 몇 초가 더 흐른 뒤.

"...정말 이러깁니까."

데미안에게서 일곱 걸음 떨어진 복도 창가, 장식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내 그곳 벽면과 장식이 일렁였다. 아니, 미세하게 펄럭거렸다. 색상이 바뀌었다. 장식과 똑같은 패턴에서 아무 무늬도 없는 회색 망토로.

망토 뒤에서 쓴웃음을 머금은 남자의 모습이 드러났다.

"우리 피차 이러지 말지요, 데미안 카이엔 경."

"...."

데미안은 남자를 빤히 쳐다보았다.

남자, 마젠타노 황실 특수정보부 소속 3호 요원의 얼굴에 난감한 표정이 스쳤다. 이내 그의 입에서 엄살 섞인 소리가 나왔다.

"저도 그저 제가 맡은 일을 하는 중입니다. 그냥 모른 척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

"혹시 신경에 거슬려서 그러는 겁니까."

끄덕.

데미안의 고개가 희미하게 끄덕여졌다. 사실이었다. 황태자를 미행하며 관찰하는 저 요원의 존재를 깨달은 것은 최근의 일이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크라노스의 협곡에서 각성을 겪은 뒤부터였다.

그때부터 감각이 비약적으로 밝아졌다. 원래도 소드마스터 증후군을 앓으며 감각이 예민한 상태이긴 했지만, 이제는... 수준 자체가 달라졌다.

원한다면 상대방의 혈액이 흐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황태자의 내면에서 떠들어 대는 수호천사의 목소리도 들렸다. 하물며 근처에서 얼쩡거리는 첩보 요원은 말할 것도 없었다.

거슬렸다.

단지 황태자의 주위에서 얼쩡거리고 있어서? 아니. 보호가 목적이 아닌 듯해서 거슬렸다.

"어째서 그날, 협곡에선 나서지 않았지."

"...저는 나설 수 없는 몸입니다."

"예전부터?"

"네. 크레모에서도. 앙부아즈에서도 그랬지요."

"전하께서 매번 위기에 처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구경만 했다는 소리로 들리는데."

"말씀드렸다시피 나설 수가 없는 몸이니까 말입니다."

"관찰만 하는 신세다?"

"대략 그렇지요."

"하면 지난 며칠 동안엔 왜 전하를 떠나 있었지?"

데미안의 눈길이 날카로워졌다.

3호 요원의 얼굴 가득 쓴웃음이 떠올랐다.

"당신 때문입니다, 카이엔 경."

요원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는 최근에 섬뜩함을 느꼈던 날을 떠올렸다. 협곡에서의 대폭발로 황태자가 혼수상태에 빠져 있던 시기의 일이었다.

처음 황태자가 의식을 잃고 3일 동안은 임무에 지장이 없었다. 한데, 저 흑발의 호위가 깨어나면서 모든 것이 바뀌었다. 예전엔 자신의 존재를 파악하지 못했던 흑발의 호위가 달라졌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지금도 그날을 생각하면 소름이 돋았다.

당시의 자신은 평소처럼 황태자를 관찰하며 은신 상태를 유지했다. 그걸 위해 황실의 첩보요원에게만 교육되는 특수한 호흡법을 사용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였다.

흑발의 호위가, 자신의 호흡을 똑같이 따라 하기 시작했다. 들숨과 날숨을 똑같이 맞추어서. 너무나 정확하게. 발을 맞추어 함께 걷듯이!

"...."

그날의 충격을 잊지 못하겠다. 황급히 호흡 리듬을 바꾸었는데도 그걸 고스란히 따라오던 데미안의 모습은 더욱 못 잊겠다.

"그날, 일부러 그랬던 거겠지요?"

"물론."

"공격할 생각이었습니까?"

"그쪽이 꽁지를 빼지 않았다면."

"그래서 최근에 제가 전하를 관찰하지 못한 겁니다."

"그럼 지금은 왜 돌아온 거지?"

"어쨌든 제 임무를 이어 가야 하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내게 부탁을 하러 대놓고 모습을 드러낸 것이겠군."

"당연하죠. 하... 좀 봐주면 안 되겠습니까? 이거, 서로 먹고살자고 하는 일인데."

3호 요원은 진심이었다.

계속 이래서는 곤란했다.

황태자의 호위가 자신을 대놓고 적대시하면, 앞으로 황태자 관찰 임무에 심각한 차질이 생길 것이 뻔했다. 최악의 경우엔 능력에 물음표가 달려 좌천당할 수도 있다. 해고. 모가지. 고용난의 시대에 이보다 끔찍한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게다가 저, 애가 둘입니다."

"그런 거 물은 적 없는데."

"다섯 살과 세 살배기 딸과 아들이지요."

"안 궁금한데."

"그렇듯 행복한 가정을 이끄는 가장의 미래를 짓밟을 생각입니까?"

"그쪽이 협조하지 않는다면 기꺼이."

"...협조라니요?"

3호 요원은 멈칫했다.

데미안이 당연하다는 듯이 툭, 내뱉었다.

"다음부터는 지켜보고만 있지 말라고."

"그게 무슨 뜻입니까."

"전하가 위기에 처하면... 좀 도와달라고."

"...."

"불가능한가?"

"...최대한 노력은 해보지요. 제 임무가 어그러지지 않는 선에서 말입니다."

데미안은 3호 요원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기를 잠시.

"그 대답이 솔직한 것이길 바라지."

"그럼, 제 임무를 방해하지 않을 겁니까?"

"그쪽이 하는 걸 봐서."

"알겠습니다. 후우. 그럼, 이만."

인사를 나눈 직후였다. 3호 요원이 망토로 전신을 가렸다. 망토가 주위의 색과 똑같이 변하며 그의 모습을 감쪽같이 가렸다.

다시 은신 상태에 들어가며 3호 요원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일단 까다로운 흑발 호위를 달래는 데에는 성공했다. 당분간은 임무 수행에 차질이 없을 듯하다. 그러니까 이제부터는....

'...집에 가서 와이프느님을 달래야겠구나.'

눈앞이 캄캄해지는 기분에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졸지에 크라노스까지 다녀오는 바람에 결혼기념일을 챙기지 못했다. 그 뒷수습을 어찌하여야 할까. 마젠타노 황실 특수정보부 소속 3호 요원의 진정한 고난은 이제부터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한편, 복도에서 한참 안쪽. 황제의 알현실에선 라키엘에게도 때아닌 고난이 들이닥치고 있었다.

"별궁 한의원인지 뭔지 하는, 그 소꿉장난 같은 병원 놀이는 그만두고, 이제부터는 후계자 수업에 집중해 보는 것은 어떻겠느냐."

"...예?"

라키엘은 순간 자신이 뭘 잘못 들었나 싶었다. 하마터면 면봉 좀 달라고 외칠 뻔했다. 당연했다. 황제의 발언이 너무나 뜬금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양반 왜 이래?'

끔벅끔벅 눈초리로 황제를 쳐다보았다. 황제가 뜻 모를 미소를 수염 사이로 머금는 게 보였다.

"무얼 그리 쳐다보느냐. 이제 슬슬 후계자 수업에 집중하는 것이 당연한 시기가 되었거늘. 아니, 따지고 보면 제법 늦었지. 그렇지 않느냐?"

"...."

사실은 맞는 말이다.

어쨌거나 황태자니까. 나이도 벌써 스물을 한참 넘었으니까. 원래대로 정상적인 상태였다면 열 살도 되기 전에 후계자 집중 수업을 받아야 했을 테니까.

하지만 병약한 황태자 라키엘은 그러지 못했다. 말 그대로 너무나 병약해서, 온종일 병상에서 골골대느라, 수업 같은 걸 받을 처지가 아니었으니까.

"하니 이제는 별궁 한의원인지 뭔지 하는 그 짓은 그만두거라."

"그건 아니 되옵니다."

대답이 반사적으로 나왔다.

황제의 눈썹이 꿈틀.

그러나 라키엘은 개의치 않고 말했다.

"제가 지금껏 힘들여 꾸려온 한의원이옵니다. 또한, 제게 가장 큰 자산이 될 시설이기도 하옵니다."

솔직한 사실이었다. 한의원이 있어야 자신이 산다. 내원하는 환자를 치료해 주고, 보너스 수명을 챙길 수 있다.

그런데....

'그걸 그만두라고? 나 죽으라고? 이제 겨우 한의원 기틀 좀 잡아 놨는데?'

억울함의 물결이 심연에서부터 쑴펑쑴펑 솟구쳤다. 이건 말 그래도 날벼락이었다. 절대로 안 된다. 황제의 명령이라 해도 이건 따를 수가 없다.

하지만 황제의 생각은 달랐다.

"...."

황제 아스테리온은 의미심장한 눈길로 라키엘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아들. 언제나 병약하고 나약하여 미덥지 못했던 후계자.

그러나 이제는 달리 보였다.

언젠가부터 달라진 아들. 병약하고 나약했던 태도를 벗어던진 후계자. 그러나... 이제는 그것이 너무 과하여 매번 위험을 감수하는 황태자.

'안 되지. 아니 돼. 이제는 이 아비가 너를 그렇게 둘 수는 없음이야.'

그는 크라노스에서 아들이 겪은 일을 떠올렸다. 거의 죽을 뻔했다. 생각만 해도 섬뜩했다. 그래서 후회가 되었다.

'내가 너를... 사지로 몰 뻔하였구나.'

아들이 크라노스로 떠나기 전의 일도 떠올랐다. 당시 황도에 감초 수급난이 생겨났다. 하여 아들이 자신을 찾아왔던가. 사태 해결을 도와달라고.

하지만 자신은 그 요청을 거부하였다. 다가온 곤경을 아들이 스스로 이겨내길 바랐다. 그런 마음으로 크라노스로 떠나는 것을 방치하였다.

그 결과가... 이번의 사태였다.

'나의 불찰이다. 변명할 여지가 없구나.'

아들이 겪었을 위험과 고난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이제 더는 그렇게 두지 않겠다는 다짐을 새삼 새겼다.

"이제는 충분하다. 그만큼이면 되었다. 너도 세상이 얼마나 험난한지 겪을 만큼 겪은 듯하니, 이제부터는 밖으로 나돌 생각을 하지 말거라. 그러자면 우선, 네가 자꾸만 밖으로 나도는 원인이 되는 한의원부터 정리를 하여야겠지."

"하오나 폐하."

"반론은 듣지 않겠다."

황제는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더는 아들을 위험에 내던지기 싫었다. 잃을 뻔하고서야 얼마나 소중했는지를 깨달았다. 지켜주고 싶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아들의 반발이 생각보다 격렬했다.

"들어 주셔야 하옵니다."

"입 다물거라."

"싫사옵니다."

"감히?"

"아무리 그렇게 하명하신다 하여도, 제게는 훗날 커다란 정치적 자산이 될 시설이자 수단이옵니다."

"...무어라?"

황제는 멈칫했다.

커다란 정치적 자산?

고작 병원에 불과한 한의원이?

"혹여, 그곳에서 치료를 받은 백성들이 너를 우러를 것이라 기대하는 순진한 생각을 품는 것이더냐?"

황제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건 너무 순진한 생각이다. 사람은 단순히 그런 것으로 누군가를 칭송하고 우러르진 않는다. 개중에 성정이 착실한 몇몇 이들은 그럴지 모르나, 대부분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사람의 속성이지. 처음엔 무상으로 치료해 주니 고마워하겠지만... 그게 얼마나 갈까.'

오래 가진 않을 것이다. 나중에는 당연한 것으로 여길 것이다. 그것이 무작정 퍼주는 호의에 반응하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씁쓸하고도 적나라한 일면이니까.

그렇기에 황제는 아들의 대답을 신뢰하지 않았다. 너무나 단순하고 순진한 발상이라 여겼다. 라키엘의 이어지는 대답을 듣기 전까지는, 분명 그러하였다.

"단지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니옵니다."

"그런 이유가 아니야?"

"예, 폐하."

라키엘이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호의가 계속되면 그걸 권리로 아는 것이 사람이라 들었습니다. 저 또한 당연히, 한의원에서의 진료가 사람들의 무조건적인 지지와 우러름을 얻어내진 못할 것이라 보고 있사옵니다."

"...하면, 네가 말한 정치적 자산이 무엇이더냐."

아들은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걸까. 한의원으로 무얼 이룩하려는 것이기에 자신의 결정에 반발하는 것일까. 솔직히 후계자 수업에 집중하라는 말을 들으면 기뻐할 줄 알았는데. 드디어 후계자로 인정을 받았노라 자랑스러워할 줄 알았는데.

'한데 너는 어찌하여?'

황제는 의문을 느끼며 라키엘을 바라보았다.

라키엘은 숨을 골랐다. 졸지에 떨어진 한의원 폐쇄 명령이라는 날벼락. 그 앞에서 '제 보너스 수명 때문인데요' 따위의 신뢰성 떨어지는 대답을 꺼낼 수는 없었다.

덕분에 그는 고속으로 머리를 굴려야 했다. 고민은 빠르고 치열하게. 해답은 적절하게. 황제가 혹하며 낚일 수밖에 없을 방식과 목적을 제시할 수 있도록. 인생 최대치의 순발력을 발휘하며.

"이 나라의 정계에 실질적으로 크나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귀족들에 대한 정치적 자산이옵니다."

"귀족?"

"예, 폐하."

"나는 네 대답이 미덥지가 않구나."

"어떤 의미에서 하시는 말씀이시온지."

"고작 한의원으로 어떻게 귀족들에 대한 정치적 자산을 확보할 수 있다는 말이더냐."

"혹여 증명을 바라시는 것이시옵니까?"

"증명이라. 좋지. 방도가 있느냐?"

"물론이옵니다."

"어떻게?"

황제의 눈길이 가늘어졌다.

라키엘은 내심 주먹을 꽉 쥐었다. 됐다. 생각대로 저 물음을 이끌어 냈다. 그러니까 이제는....

"만약 폐하께서 기회를 주신다면, 제가, 별궁 한의원을 활용하여 3개월 내로, 황도 귀족원 귀족 과반수의 정치적 지지 선언을 받아내어 보이겠사옵니다."

즉석으로 계산하고 준비한, 황제를 혹하게 만들어 한의원 폐쇄를 막아낼, 위기 극복 멘트가 라키엘의 혓바닥에서 촵촵 발사되었다.

229화. 귀족에게만 찾아오는 질환 (1)

"만약 폐하께서 기회를 주신다면, 제가, 별궁 한의원을 활용하여 3개월 이내로, 황도 귀족원 귀족 과반수의 정치적 지지 선언을 받아내어 보이겠사옵니다."

질렀다.

즉석에서 계산하고 준비한 대답이었다. 황제를 혹하게 만들어 한의원 폐쇄를 막아낼 위기 극복 멘트이기도 하였다.

'제발 통해라. 제발.'

라키엘은 입술 안쪽을 잘근잘근 씹었다. 겉으로는 자신 있게 내질렀지만, 실제로 황제가 제안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몰라서 조마조마했다.

'별궁 한의원을 때려치우라니. 미치겠네, 진짜.'

그건 안 된다.

저 말을 들으면?

보너스 수명 수입이 끊긴다.

'기껏 의사들 고용하고 체계 정비하면서 종합병원처럼 키우는 중인데... 여기서 그만두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

두통도 없는데 머리가 지끈거렸다.

솔직히 최근 이럴 기미가 살짝 보이긴 했다. 크라노스까지 직접 달려온 황제와 함께 돌아오는 내내 그러했다. 황제는 시시때때로 얼굴만 마주치면 잔소리를 날려왔다. 항상 그러했듯이 불친절하고, 까칠한 태도였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느낄 수 있었다. 황제가 얼마나 노심초사했는지. 행여나 이쪽이 잘못될까 봐 얼마나 가슴을 졸였는지. 하여 황도에 돌아오면 어떤 형태로든 태클을 받을 거라고는 예상했다. 과잉보호의 기미가 보였으니까.

그런데 설마하니, 한의원을 폐쇄하라는 식으로 나올 줄은 몰랐다.

'후우. 이건 너무 극단적이잖아. 가만 보면 황제 이 양반도 중간이 없다니깐, 중간이.'

라키엘은 한숨을 푹푹 삼켰다.

정말이다.

황제 이 양반, 은근 극단적이다.

전에는 거의 방목에 가까운 태도를 보이더니, 알아서 잘 살아남으라고 야생에 내던져놓듯이 하더니, 이제는 아예 극성 부모의 전형적인 과잉보호를 시전하려 들고 있다.

'딱 그거지. 아들 공부나 장래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안 될 듯한 것들은 죄다 없애거나 치우기.'

컴퓨터 없애 버리고.

휴대폰 압수하고.

티브이 금지하고.

그렇게 자식을 과잉보호의 울타리에 가두어두고 공부 머신으로 승화(?)시키려는 거다. 아마 별궁 한의원 폐쇄와 후계자 수업 명령도 그런 취지겠지.

그래서였다.

방금, 저 폭탄선언을 처음 들었을 땐 맹렬한 충동 한 가지를 느꼈더랬다. 바로 거짓말 이용권을 확 사용해 버릴까, 하는 충동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지. 아니야. 그건 진짜로 막다른 길에 몰렸을 때 치트키로 써먹도록 아껴둬야지.'

앙부아즈 때처럼 섣부르게 낭비할 수는 없다. 당시에 거짓말 이용권을 한 장만 남겨뒀어도 쟈빌론에게 붙잡혀 개고생을 하진 않았을 터다.

이번에도 그런 실수를 반복할 수는 없다.

'그러니까 지금 딱 한 장 있는 이용권은 비상용으로 킵 해두고. 우선은 내 역량으로 뚫어 보는 거야.'

라키엘은 다짐하며 황제를 쳐다보았다.

그동안 황제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무표정의 화신 같았다. 하지만 그 모습도 잠시.

"...허."

황제의 조각상처럼 무미건조하던 얼굴에 실금처럼 작은 미소가 새겨졌다. 그것은 명백한 코웃음이었다.

'뭐? 3개월 이내로 황도 귀족원 귀족 과반수의 정치적 지지 선언을 받아내겠노라고?'

황제는 어처구니가 없어짐을 느꼈다.

처음엔 잘못 들었나 싶었다.

한데 아니었다.

하여 더욱 어이가 없었다.

저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아니, 엄밀하게 따지자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기 때문이었다.

'귀족원 귀족들이 그렇게 생각이 없는 자들일까. 말도 안 되는 소리. 하물며 여전히 2황자 녀석과 끈을 대고 있는 인사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판국인데.'

사실이었다.

안타깝게도 라키엘은 아직 정치적 기반이 취약한 상태였다. 병약한 모습으로 오늘내일했던 기간이 너무나 길었던 까닭이었다.

물론 최근에는 조금 달라지긴 했다.

2황자와의 대결에서 우위를 점했다. 자신의 입지를 증명하였다. 앙부아즈 등에서의 활약을 통해 주위의 시선과 인식을 바꾸어 나가고는 있다.

하지만 그 기간이 얼마 되지 않았다는 점이 문제였다.

'귀족들 다수는 여전히 계산을 끝내지 않았지. 누구보다도 이해타산에 철저한 자들이니까. 오직 그것만이 그들이 대대로 누려온 권력과 생존의 비결이었으니까.'

교묘한 정치적 처세술.

줄타기의 장인들.

귀족들이 바로 그런 존재였다. 특히, 지방도 아닌 이곳 황도에서 권세를 누리며 살아남아 있는 가문은 더더욱 그러했다. 황도의 귀족 세계는 칼날 없는 전쟁터나 다름없었다.

한데 공개적인 정치적 지지 선언?

그들이 그런 걸 할 리가 없다.

"어리석구나. 너는 그것이 가능하리라 보는가?"

불가능하다.

사실상 아직도 라키엘과 테오도르, 황태자와 2황자의 계승권 경쟁은 마무리가 되지 않았다. 최종적으로 한 사람이 황좌에 앉기 전에는 끝이 아니다. 어느 한 쪽이 병에 걸려 죽을 수도 있고, 어떤 일을 겪을지 모른다. 이건 원래 그런 종류의 경쟁이니까.

한데, 그 결론이 나오지도 않았는데, 누구보다도 줄타기에 민감한 귀족들이 섣불리 도박을 걸듯이 한쪽에 일방적인 지지 선언을 할까?

아니.

절대로.

행여나 라키엘을 지지하겠노라 성급하게 선언을 하였다가, 훗날 미지수의 격변 끝에 2황자가 덜컥 황제가 되어 버리면?

그 귀족 가문은 끝장이 나는 거다. 최소한 한직으로 물러나거나, 과거의 권세를 잃고는 구석에서 눈치만 보며 지내게 될 것이다.

한데 자신의 큰아들은, 그런 것조차 내다보지 못하고서 섣부른 자신감을 보이고 있다는 말인가. 황제는 내심 혀를 차는 심정으로 라키엘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라키엘의 태도는 여전히 의연하였다.

"저는 가능하리라 보옵니다, 폐하."

"감히 확언을 하기까지."

"개인적으로 엿보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옵니다."

"가능성이라. 어떤?"

"영업 비밀이옵니다."

"...뭐?"

"그 패를 일찍 내보여 제게 좋을 것이 없지 않겠사옵니까."

"끝내 증명을 해 보이고 싶다는 뜻이더냐."

"예, 폐하. 폐하께서 폐쇄하라 명하시는 별궁 한의원이 어떻게 저의 정치적 자산이 될 수 있는지를, 명명백백히 증명해 보이겠사옵니다."

한마디도 지지 않고 또박또박 꺼내는 대답. 결국, 황제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좋다. 네가 그토록 원한다면, 기회를 주도록 하마."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망극은 무슨."

다시금 흘러나오는 코웃음.

슬며시 내걸리는 비웃음.

"어디 열심히 하여 보거라."

"예, 폐하."

그 대답을 끝으로 라키엘이 물러났다. 이내 혼자가 된 황제는 여전히 비웃음을 지우지 못하고서 라키엘이 앉았던 자리만 지그시 바라보았다.

'대체 저 아이는 누굴 닮아서 말도 아니 되는 소리를 저토록 자신 있게 꺼내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본인이 질 수밖에 없는 내용의 내기를 내미는 어리석은 황태자도. 성공하지 못하리라 여기면서도 끝끝내 묘한 기대감을 품고야 마는 자신마저도. 전부.

'대체 어찌하여. 나는 이렇게 말도 안 되는 기대를 품는 것이란 말이더냐.'

다시금 나오는 코웃음.

짙게 내걸리는 비웃음.

사실 황제의 그 모든 웃음은 본인 스스로를 향한 것이었다. 언젠가부터 매번 묘한 기대감을 주는 아들. 그런 아들을 여전히 타박만 하려고 드는 자신. 말로는 아들에게 어리석다 일침하지만 정작 진짜로 어리석은 건 어느 쪽인지.

"허허. 허허허."

그래.

아들이 아비보다 빼어나야지.

그래야 세상이 발전하지 않겠는가.

아무도 없는 알현실이 황제의 나직하고도 흡족한 웃음으로 채워졌다.

"즈어어어어언하아-!"

이런 외침이 들려올 줄 알았다. 별궁 문턱을 밟기도 전에 이 소리를 듣지 못하면 섭하지.

라키엘은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머금으며 웅장한(?) 외침이 들려오는 곳을 바라보았다. 별궁 한의원 정문. 그곳을 박차고서 야생마처럼 달려오는 한 사내가 있었다.

중년의 미남자, 가르딘 경이었다.

"전하! 전하아아... 아억!"

콰당탕!

얼마나 반갑고 급했던 걸까. 냅다 달려오던 가르딘 경의 스텝이 꼬였다. 넘어졌다. 극적인 낙법을 선보이...지는 못하고 떼굴떼굴 굴렀다. 황급히 일어나며 흙먼지를 털고는 다시 달려왔다.

"전하, 전하아! 무사하셨습니까?"

"...어, 대강은?"

"혼수상태에 빠지셨다면서요!"

"그, 그랬지?"

"한데 어째서 절 부르지 않으셨습니까? 제가 전하의 주치의인데 말입니다!"

"어, 그게, 혼수상태였으니까?"

"...."

"가르딘 경, 잘 지냈어?"

"아뇨. 못 지냈습니다!"

"...."

"그렇게 내가 보고 싶었어?"

"아뇨. 전혀요!"

하지만 말과는 달리 가르딘 경의 눈시울은 이미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한편으로는 그의 눈가에 가득한 다크써클이 보였다. 전에 없던 눈꼬리 주름도 조금은 생겨나 있는 것 같았다.

"그래. 고맙군."

내가 없는 동안 한의원을 지켜주느라 고생이 참 많았다. 만약 이런 충실한 이가 없었다면, 나는 지금처럼 마음 놓고 한의원을 맡겨둘 수 있을까. 홀가분히 어딘가에 다녀올 수 있을까. 아니. 거의 불가능하겠지.

"어쨌건. 그동안 별일은 없었고?"

"예, 전하. 전하께서 겪으신 일에 비해서는 이곳의 어떤 일도 별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쯧. 내가 그렇게 걱정을 시켰나."

"예. 매우 확실하게요."

"미안해."

"아닙니다."

가르딘 경은 활짝 웃었다. 한 달 전의 일이 떠올랐다. 크라노스에서 일어난 사건의 소식이 황도에 전해졌던 날이었다. 그날 후로 거의 닷새 정도는 식사도 못 했다. 음식이 넘어가질 않았다. 죄책감 때문이었다.

내가 그날, 전하께 억지를 부려야 했노라고. 날 두고 크라노스로 가게 내버려 둬서는 안 되는 거였다고. 지금 내가 전하 곁에 있었다면, 어떤 시도든 해볼 수 있었을 거라고. 그런데 자신은 여기 황도에만 편하게 머물러 있다고.

그게 너무 죄송해서.

죄인이 된 것 같아서.

온 세상이 회색으로 보였다.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한데 그랬던 걱정이 무색하게 전하께서 무사히 돌아오셨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내색을 하면 안 되는 법이라며 스스로를 단속했다.

"그럼 전하? 먼 길을 돌아오셨으니 피로하실 텐데, 쉴 곳을 준비시킬까요?"

지금은 주군인 황태자의 건강과 피로 관리가 우선이다. 가르딘 경은 행여나 황태자가 몸살이라도 앓을까 걱정하며 물었다.

한데 황태자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뜻밖의 것이었다.

"아니. 일단 환자들부터."

"...예?"

"나 없는 동안에 입원한 환자들 있을 거 아냐. 그들부터 살펴봐야지. 그리고 내일부터는 긴히 추진할 일도 있고."

"긴히 추진할 일이라시면...?"

"별궁에서 내 이름으로 주최할 대연회. 황도 귀족원 귀족 전원에게 보낼 초청장부터 준비해."

라키엘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이 생각했다.

황도의 귀족이라면. 풍족한 사치를 영위하는 중년 남성들이라면. 그들 중의 반수 이상이 똑같은 종류의, 그러나 이곳의 의학 수준으로는 원인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을 공통적인 질환에 고통받고 있을 것이라고.

그 질환에 시달리고 있는 한, 자신의 마수(?)를 벗어날 수 없으리라고.

230화. 귀족에게만 찾아오는 질환 (2)

중년 남성은 슬프다.

중년 여성도 마찬가지다.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모든 것이 예전 같지가 않아진다. 피로가 더럽게 안 풀린다.

어릴 땐 밤샘을 하고서도 다음날 쌩쌩했다면, 마흔 줄 이후부터는 밤샘을 하려면 며칠은 빌빌거릴 각오부터 해야 한다.

비단 그뿐만이 아니다. 정력이 어쩌고 하는 이야기는 꺼낼 필요도 없다. 당장 음식 먹는 일도 젊던 때와 확 달라진다.

일단 소화가 잘 안 된다. 조금만 달고 기름진 음식을 먹어도 살이 금방 찐다. 일단 찐 살은 더럽게 안 빠진다.

운동을 해보아도 근육이 좀처럼 붙지가 않는다. 아니, 근손실이 안 오면 다행이다.

그렇기에 조금만 방심하면 갖가지 성인병을 세트메뉴로 알차게 달고서 살게 된다.

남의 일이냐고? 절대로. 지금 당장 쌩쌩한 20대 청년들도 딱 살아온 날만큼의 시간만 지나면 당장 온몸으로 때려맞으며 겪게 될 현실이다.

'그런데도 그걸 피하는 게 쉽지가 않지. 왜냐. 먹고 사는 게 바빠서. 게다가 당장 드라마틱하게 몸이 확 나빠지는 게 아니라서.

아주 서서히, 본인도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에 슬금슬금 뜨거워지는 솥에 갇힌 것처럼. 관리를 소홀하게 하다가 어느 날 앗 뜨거, 하면서 보면 이미 늦은 거거든.'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테크트리(?)를 타게 된다.

한국에서 겪은 주위의 사람들이 거의 다 그랬다. 내원하는 환자분들, 심지어 자신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곳의 귀족들은?

훨씬 더할 것이다.

'애초부터 건강 관리의 개념이 한국에 비해서 훨씬 희박하니까. 게다가 귀족들은 워낙 부족한 것 없이 잘 먹고 지내는 사람들이라서 말할 것도 없고.'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

과잉이 병마가 되는 법이다.

이곳의 귀족들이 딱 그러할 것이다.

"그러니까 귀족원에 등록된 황도의 모든 귀족가에 초청장을 뿌려. 하나도 빠짐없이 내가 주최하는 연회에 참석할 수 있도록."

"하면 전하? 이번 연회를 통해서 귀족 환자들을 확보하시려는 겁니까?"

"바로 그거지. 그들이 내 정치적 지지기반이 되어줄 테고."

"하오나 전하. 그들이 과연...."

"내 의도를 의심하지 않겠느냐고?"

"예, 전하."

가르딘 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전하께서도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우리 별궁 한의원의 명망이 높아졌고, 덕분에 찾아오는 환자가 제법 늘었지만... 여전히 중앙 귀족들의 반응은 미지근하다는 걸 말입니다."

"물론."

라키엘은 어깨를 으쓱였다.

가르딘 경의 지적대로였다.

그동안의 노력 덕분에 별궁 한의원은 이제 완전히 본궤도에 오른 상태였다. 매일 환자들로 북적였다.

그만큼 고용된 의사들의 다크써클도 짙어졌다. 강철 체력의 웨어울프 간호사들마저 가끔 몸살이 날 지경이었다.

하지만 내원하는 환자들 중에 굵직한 귀족은 거의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귀족이라고 해 보았자 황도 인근 지방의 소귀족 정도가 다였다.

"중앙 정계에 직접적으로 이해관계가 얽히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귀족원의 귀족들은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지. 당연해. 그들은 죄다 가문에서 직접 고용한 주치의가 있을 테니까. 의료대학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인재들, 혹은 명망 높은 의사가 직접 키운 제자들을 비싸게 고용해서 말이야."

"정확한 말씀이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별궁 한의원을 찾지 않는 이유가 또 있다고 봅니다."

"아마도 정치적 줄타기 때문이겠지?"

"예, 전하."

"맞아. 그것 때문이겠지."

그 또한 사실이었다. 아무리 병원이라곤 하지만, 이곳은 엄연히 황태자가 기거하는 별궁이다.

한데 이곳을 중앙 귀족이 들락거린다면? 그 귀족을 보는 주위의 시선엔 색안경이 씌워질 것이다.

'아, 저 귀족이 황태자에게 줄을 대고 있나 보군.'이라고.

"저 중앙 귀족들만큼 줄타기에 민감한 이들이 없지. 자신의 의도와 달리 그런 시선을 받는 게 당연히 꺼려질 테고. 하지만 상관없어. 이번 연회가 끝난 뒤부터는 다들 앞다투어서 내 환자가 되려고 애를 쓸 테니까."

"염두에 두신 계략이 있으신 겁니까?"

"...계략?"

"예, 전하."

"...."

라키엘은 뚱한 눈길로 가르딘 경을 쳐다보았다. 가르딘 경이 어깨를 움츠렸다.

"어, 어째서 그렇게 바라보십니까?"

"어쩐지 말이야. 가르딘 경도 그렇고. 데미안 녀석도 그렇고. 다들 날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건가 의문이 들어서."

"물론 어질고 훌륭하신 황태자 전하이십니다."

"음흉한 계략도 막 꾸미고 말이지?"

"예, 전하."

"...."

"하...하하.... 그런데 혹시 피로하진 않으십니까? 제법 긴 여정을 치르고 돌아오신 뒤에도 제대로 휴식을 취하지 않고 계신데."

"화제 전환을 시도하시겠다?"

"...."

"됐고. 초청장 준비부터 서둘러 줘."

"알겠습니다, 전하."

가르딘 경이 황급히(?) 물러났다. 계획이 착착 진행되었다. 연회도 착착 준비되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그 사이, 반가운 얼굴들이 별궁을 찾아왔다.

"...테오도르, 네가 찾아온 건 반갑긴 한데."

"예, 형님. 크라노스에서 날아온 소식을 듣자마자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이렇게 무사히 돌아오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어 그래. 말이라도 고맙다. 그런데-"

라키엘은 온몸으로 반가움을 반짝반짝 드러내는 2황자 녀석을 향해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조금은 난처해진 시선을 2황자의 옆쪽으로 던졌다.

그곳에 엘프족의 집행자, 실비아가 있었다.

"집행자님? 어째서 여기 있는 겁니까?"

"...나?"

"예."

"그대가 무사히 돌아왔다고 하여 반가운 마음에 찾아왔건만."

"아니, 그건 알고 있는데 말입니다. 어째서 당신이 아직 '이곳 황도에' 있느냐는 말이죠."

"...그게 어째서? 뭔가 문제가 되나?"

"예."

"어떤 문제?"

실비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라키엘의 쓴웃음이 짙어졌다.

"혹시, 제가 크라노스에서 보냈던 서신, 못 받았습니까?"

"아, 그거. 받았는데."

"그렇죠? 받았죠? 크라노스로 와 주면 좋겠다고 제가 썼던 내용도 봤겠지요?"

"물론이지."

"그런데 왜 크라노스에는 오지도 않고, 아니, 아직 출발할 생각도 없이 여기에 있던 겁니까?"

"그대가 너무 일찍 돌아와 버려서."

"...."

너무나 명쾌한 대답에 어이가 없어져서 할 말을 잃었다. 당연하다는 듯한 실비아의 대꾸가 이어졌다.

"나는 그대의 서신을 받자마자 서둘러서 크라노스로 갈 준비를 시작했지."

"그런데요?"

"준비를 끝마치기도 전에 그대가 돌아와 버렸고."

"...."

어오, 이 나무늘보 같은 종족 진짜.

대답을 들어보니까 새삼 알겠다. 저 엘프는 실제로 나름 '빠르게 출발하려고' 준비를 했던 거다.

그런데 그 빠른 준비라는 개념이 인간과는 아득한 시간차가 있는 거다.

"후우. 알겠습니다. 한데 설마, 그동안 계속 2황자궁에 머물러 있었던 겁니까?"

"어. 그랬지."

"어째서요?"

"장로들께 연락을 보냈고, 돌아올 답을 기다리는 중이거든."

"무슨 답을요?"

"그대가 앙부아즈에서 태웠던 숲에 대한 보상 방식 말이야. 직접 하는 봉사 대신, 돈과 인력을 파견해서 보상하겠다는 그대의 중재안을 장로들께 문의했거든."

"...그거, 집행자인 당신이 결정할 수 있는 거 아니었습니까?"

"내게 결정권이 있는 건 맞아. 하지만 예의와 절차상 장로들께도 의사가 전달되어야 하거든. 물론 그분들도 집행자인 내 권한을 최대한 존중해서 동의를 표하실 거고. 말 그대로 형식적인 절차랄까."

"그럼 그 형식적인 대답은 언제쯤 돌아오는 겁니까?"

"아마도 금방 돌아올 거야."

"금방...."

...최소 반년은 더 걸리겠구만.

라키엘은 혀를 찼다. 이제는 이 엘프라는 종족에 대해서 완전히 감이 왔다.

세상 이보다 느려터진 종족이 또 있을까. 아마 한국에서 운전대를 잡으면 경부고속도로에서 시속 10km/h로 무사태평하게 빌빌거릴 것 같다.

어쨌건 그렇게 2황자와 실비아의 반가운 인사를 받았다. 다시 연회 준비에 힘을 썼다. 닷새가 더 지났다.

예정된 연회가 개최되었다. 초청장을 받은 대부분의 귀족이 연회에 참여했다.

화려한 샹들리에.

우아한 음악.

향긋한 술잔과 음식.

"황태자 전하께서 입장하십니다."

라키엘은 모두의 이목을 모으며 입장했다. 이쪽을 바라보는 눈길. 조금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그 시선들이 예전과 달라졌음이 실감이 났다.

'다들 고민하고 있구만.'

이쪽으로 줄을 댈까 말까. 나름 고민에 잠긴 기색들이 느껴졌다. 무리도 아니었다.

지금 대세는 이쪽이 됐으니까. 그럼에도 여전히 이쪽의 건강에 대해 20년 넘게 쌓인 우려가 다 지워지지는 않았을 테니까.

저 아파트를 사면 값이 오를까. 이 주식을 사면 짭짤하지 않을까. 이번 주 로또는 자동을 돌릴까 말까. 딱 그러한 고민을 품은 것과 똑같은 느낌의 시선들이었다.

하지만 라키엘은 개의치 않았다.

조만간 저 고민을 확신으로 바꾸어줄 자신이 있었다. 계획이 있었다. 그 계획에 따라 일단 안구에 힘을 빡 주었다.

'경혈 스캐닝.'

스캐닝을 발동했다.

키이이잉-!

옵션이 발동되며 시야가 바뀌었다. 그때부터였다. 인사를 하러 다가와 예를 표하는 귀족들. 그들 하나하나를 차례대로 스캔했다.

특히 그들의 발에 주목했다. 그들의 엄지발가락 관절, 그곳에 얽힌 난잡한 경혈의 흐름이 똑똑히 보였다.

'빙고.'

역시나 예상대로다.

라키엘은 흐뭇한 웃음을 삼켰다. 그 사이, 통통빵빵 찐빵 같은 인상에 화려한 차림의 아저씨가 다가왔다.

"귀족원장, 에스토크가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언젠가 스치듯 본 적이 있는 귀족원장이 정중한 예법을 건네어 왔다.

물론 예의상 꺼낸 인사겠지. 이쪽이 기다렸던 순간이기도 하고. 그러니까, 이제부터 오늘의 연회를 주최한 목표를 향해 혓바닥 시동, on.

...츄릅!

입술 근육을 풀었다. 혀를 촉촉하게 적셨다. 준비한 멘트를 만면에 짓는 웃음과 함께 팡팡 쏘았다.

"오, 이런. 반갑습니다. 오랜만에 보니 신수가 더욱 훤해지셨군요."

"감사합니다, 전하. 이게 다 폐하와 전하의 어진 정치 덕분입니다."

"그렇습니까?"

"예, 전하. 하면 저는 이만...."

예의상 인사를 마친 귀족원장이 물러나려 하였다. 하지만 라키엘은 그에게 물러날 틈(?)을 주지 않았다.

길 잃은 상대 서폿을 보자마자 페x커가 킬각을 잡고 이니시를 거는 것처럼. 혹은, 교통카드를 제대로 안 찍고 은근슬쩍 무임승차하려는 승객을 버스 기사님이 매의 눈으로 포착하는 것처럼.

대놓고 붙잡았다.

"그런데 공작님? 신수는 훤해지셨는데, 어쩐지 어딘가 건강이 좋지 않아 보이십니다?"

"...예?"

귀족원장이 멈칫했다. 원래는 이쯤에서 자연스럽게 물러날 타이밍인데, 황태자가 대놓고 계속 물음을 던지니 예의상 물러날 수가 없게 됐다.

황족이 물었으니까. 대답을 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제 건강이 좋지 않아 보인다는 게 어떠한 말씀이신지...?"

"혹시 말입니다. 가끔 밤에 자다가 발가락에 엄청난 통증을 느끼지 않습니까?"

"예?"

"보이지 않는 악마가 엄지발가락을 잔혹하게 물어뜯는 것처럼, 열이 나며 벌겋게 붓고, 뼈마디가 으스러지는 듯이 욱신거리고, 그래서 차라리 발가락을, 혹은 발목까지 통째로 잘라 버리면 후련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아픈 통증 말입니다."

"그건...."

"아주 가끔, 잊을 만하면 그런 통증이 올라오겠지요. 한번 통증이 시작되면 심할 때는 사나흘 이상씩 시달리곤 하고. 그때마다 주치의를 불러서 닦달을 해보지만 딱히 뾰족한 처방을 받지도 못하고. 그저 고통을 달래주는 약만 먹으며 간신히 버티고. 맞습니까?"

"...."

귀족원장, 에스토크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황태자의 말 그대로였다. 소름이 돋았다.

딱히 자신의 아픈 곳을 소문낸 적은 없었는데. 그걸 황태자가 어찌 이토록 소상히 알고 있는 걸까. 설마 자신의 주치의를 매수한 건 아닐까.

한데 그렇듯 돋아나는 소름을 느끼는 건 비단 귀족원장뿐만이 아니었다. 주위의 다른 귀족들 상당수도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라키엘의 안부 인사(?)를 가장한 증상 설명을 들으며 저도 모르게 팔뚝에 돋아난 닭살을 쓸어 만졌다.

그리고 한편으로 생각하였다. 저거, 딱 내 이야기인데? 라고.

231화. 아프니까 병원이다 (1)

통풍(痛風, gout).

과도한 요산이 체내에 축적되어 생기는 질환. 주로 관절, 특히 엄지발가락에 날카로운 요산 결정이 침착되어 생기는 지옥의 증상이 통풍이다.

통풍은 아프다.

정말로 아프다.

아파본 사람만 안다.

주로 밤이나 새벽에 자다가 발작이 시작되곤 한다. 악몽을 꾼다. 맹수나 공룡이나 괴물 따위가 발가락을 송곳니로 씹어대서 걸레짝으로 만들어 버리는 등등의 꿈이다.

그럴 때면 꿈을 꾸면서도 너무나 아파서 끙끙댄다.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깨어난다. 비로소 아팠던 순간이 단순한 꿈이었음을 깨닫고는 안도하려다가... 그 고통이 현실에도 고스란히 이어짐을 자각하고는 기겁한다.

동시에 처절한 2차 깨달음을 얻는다. 꿈에서 느낀 고통은 그저 샘플용 맛보기, 튜토리얼에 불과했구나, 라는 아득한 절망감을 말이다.

그만큼 통풍은 아프다. 심지어 한번 발작이 시작되면 좀처럼 끝나지도 않는다. 심할 땐 정말로 일주일 이상도 간다. 평소에 건강하든 근육빵빵맨이든 지구 최강 궁극의 병기이든 뭐든 상관없다. 다 큰 성인도 엉엉 울고 싶을 정도로 아프니까.

물론, 이곳 별궁 연회장에 모인 수많은 귀족 남성들도 마찬가지였다. 사실은 이들 과반수가 이미 통풍을 지니고 있었다. 덕분에 남들 몰래 끙끙대며 눈물로 이불을 적시는 밤을 보낸 경험 또한 풍부(?)했다.

원인은 간단했다.

'다들 너무 잘 먹고 잘 살아서지.'

라키엘은 힐끗 눈길을 던졌다.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주위의 귀족들. 대부분의 얼굴이 통통하며 맨들맨들 윤기가 풍부했다. 몸매도 마찬가지였다. 비교적 관리가 된 사람도 최소 과체중. 거의 대부분은 전형적인 경도 비만의 몸매를 자랑하고 있었다.

아마도 매일 기름지고 풍성한 식단을 즐겨왔을 것이다. 식후에는 향긋한 술과 함께 달달한 디저트를 제한 없이 탐닉했겠지.

거기에 운동은 안 봐도 뻔했다.

'승마나 사냥 정도가 다겠지. 나름 격렬해 봤자 취미 수준의 검술 정도? 본격적인 근력 운동이나 유산소는 하는 사람이 거의 없을 거야. 땀을 뻘뻘 흘리는 운동은 천박한 것이라 여길 테니까.'

즉, 이곳에 모인 귀족 대부분은 성인병에 당첨되기 딱 좋은 식습관과 라이프 스타일을 지니고 있었다. 당장 눈으로 보이는 몸매가 그 증거였다.

경혈 스캐닝의 결과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과반수의 인원에게서 엄지발가락 관절의 이상과 변형의 조짐이 보였다. 요산 결정이 침착된 결과 또한 흐트러진 기혈의 흐름으로 포착되었다.

'전형적인 통풍 그 자체로구만.'

눈앞의 귀족원장 또한 그러했다. 하여 귀족원장과 인사를 나누고 안부를 묻는 척하면서 통풍 증상을 줄줄이 진단해 주었다.

그랬더니?

과연 귀족원장의 동공이 훌라춤을 추며 흔들렸다. 동시에 의문의 기색 또한 내비치는 게 보였다.

'내가 어떻게 자신의 증상을 알고 있는지 의아한 거겠지.'

이쪽을 바라보는 다른 귀족들의 기색도 비슷했다. 다들 은근슬쩍 동요하고 있다. 이목을 끌어모으는 데에 성공한 셈이다.

그러니 이제는?

저들이 별궁 한의원을 방문할 수 있도록 더욱 매혹적인 떡밥을 살랑살랑 살포해 줘야겠지.

"에스토크 공작님? 그게 바로 통풍이라는 병입니다."

"...예?"

귀족원장이 흠칫했다.

라키엘은 개의치 않고 말했다.

"다른 말로는 풍요로운 자들만 걸리는 '제왕병'이라고도 하고, 머나먼 어느 지방에서는 '역절풍(歷節風)'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지요. 어쨌건 그거, 제법 고약한 질병입니다. 원인도 제법 다양하고. 무엇보다도 죽여주게 아프기도 하고."

"그게 무슨...."

"요약을 하자면 요산(uric acid)이 근본적인 원인입니다. 그 요산이라는 놈이 과다하게 생성되거나, 배출에 장애가 생기거나, 간혹 혈중 요산 농도가 급격하게 변화하거나 해서 요산이 결정의 형태로 관절에 축적이 되고, 그 자리에 염증이 생겨나면서 통증이 엄습하는 원리랄까요."

"...."

"뭐, 대략 이러한 질병의 징후가 공작님을 보자마자 느껴지긴 하는데 말입니다. 혹시 공작님의 주치의가 이런 이야기를 평소에 해 주지 않았던가요?"

"아, 예. 물론 주의하라는 충고를 몇 차례 듣기는 했습니다."

"그렇습니까?"

"예, 전하."

귀족원장, 에스토크는 자연스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내심으로는? 식은땀을 닦아냈다.

주치의에게 저런 충고?

사실은 한 번도 못 들어 봤다.

이불만 스쳐도 눈물이 줄줄 나오는 그 통증의 원인이 요산인지 뭔지라는 이야기도 처음 들어봤다. 그러니까, 자신의 주치의는 통증의 원인을 한 번도 짚어낸 적이 없었다! 그저 통증이 엄습할 때마다 진통제 비슷한 약만 먹였을 뿐!

'그런데... 황태자가 내 증상의 원인을 알아본다고? 진찰도 안 하고서? 인사만 나누었을 뿐인데?'

조금 소름이 돋았다.

이상했다. 제대로 진찰을 맡긴 적도 없는데 그걸 어떻게 알아본 걸까. 기이하다 못해 이해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황태자가 말한 증상이 자신의 것과 너무나 똑같다는 점이 문제였다. 마치, 고통에 시달리는 자신의 모습을 훤히 내다본 사람처럼 말이다.

'그게... 가능한가.'

귀족원장은 번민했다.

그러나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았다. 지금 당장 황태자의 진단에 놀라는 티를 내어 버리면 앞으로의 정치적 행보가 골치 아파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뻔하지. 황태자의 저 말에 말려들면 안 되지. 아암. 곤란해지고말고.'

저 말을 수긍하는 순간, 자신은 황태자의 체면을 위해서라도 별궁 한의원에 방문해야 할 것이다. 한데 그 방문이 한 번으로 끝날까? 아니. 절대로 아닐 터.

'별궁 한의원에서 진단을 받고... 처방을 받으면... 그때부터 의사와 환자의 관계가 성립하는 거지. 계속 진찰을 받으러 별궁을 들락거려야 할 테고. 그러면? 과연 다른 이들이 내 별궁 방문을 순수하게 보아 줄까?'

아니.

절대로 아니다.

모든 귀족들이 자신의 별궁 방문에 또 다른 의미를 부여할 것이다. 귀족원장이 황태자를 공식적으로 지지하는 것이라고. 대놓고 줄을 선 것이라고.

'지금 시점에서... 그건 곤란하지.'

귀족원장은 내심 고개를 저었다.

물론 황태자의 입지가 전보다 탄탄해지기는 했다. 2황자와의 대결에서 승리했고, 찬사를 받기에 충분한 공적도 제법 세웠다.

그러나 아직은 확실하지가 않았다. 과연 황태자가 끝끝내 황위를 얻을 것인가를 생각하면... 여전히 확신할 수는 없겠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황태자는 지난 20년 내내 병상을 전전했으니까. 최근에는 제법 건강을 찾으셨다고는 하지만, 예전의 지병이 언제 다시 도질지 모르는 일이니까.'

다시 병을 얻어서 덜컥 쓰러질 수도 있다. 황위를 얻지도 못하고 죽을 수도 있다. 한데 만약, 그 시점의 자신이 황태자에게 대놓고 줄을 서 있는 상태라면?

끝난다.

자신의 정치적 입지도 끝장이 난다. 권력의 변방으로 밀려날 것이다. 정적들에게 자리를 내주어야 할 것이다.

'그러니 지금은, 황태자에게 줄을 서기보다는 적당한 거리에서의 관망을 선택할 때겠지.'

계산을 마친 귀족원장, 에스토크 공작은 태연한 얼굴로 고개를 조아렸다.

"전하의 감사한 당부와, 부족한 저를 향한 염려에 실로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오나 전하께서 알려주신 사항은 이미 평소 주치의로부터 여러 차례 주의를 들어 관리에 힘을 쓰고 있는 부분입니다."

"그렇습니까?"

"예, 전하. 한데 이렇듯 전하께서 제 건강을 염려해 주시고, 경각심을 다시금 일깨워 주시니, 실로 감사하기가 그지없습니다."

"그렇군요. 유능한 주치의를 두셔서 다행입니다."

"감사합니다, 전하. 하면 저는 이만...."

귀족원장은 자연스럽게 예를 표하며 물러남으로써 탈압박(?)에 성공했다. 다른 귀족들도 내심 애쓰며 시치미를 떼었다.

그때부터였다.

언제 라키엘의 진단과 발언이 있었느냐는 듯,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연회가 흘러갔다. 결과적으로는 거의 완벽한 무반응이었다.

그러나 라키엘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당연하게 여겼다.

'역시나.'

이럴 줄 예상했다. 권력 냄새 맡기. 줄타기. 그것이야말로 귀족들의 필수 스킬(?)이니까. 방금 뿌린 정도의 떡밥에 순진하게 반응할 귀족이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과연, 통풍 발작이 와도 그대로 무반응일 수 있을까?'

절대로 아닐 것이다.

예를 들자면 지금 와인을 홀짝거리고 있는 귀족원장이 그렇다. 그 옆에서 최고급 새우를 먹고 있는 어느 귀족 남성이 그러하다. 경혈 스캐닝을 통해서 대략 추측할 수 있었다. 저들 중에 몇몇은 며칠 내로 통풍 발작에 시달릴 거라고.

'통풍 발작의 고통이야 예전에도 겪어 봤던 거겠지. 하지만... 주치의도 짚어내지 못하던 자신의 증상 원인을 이미 나한테서 들어 버렸는데... 과연 예전처럼 잘 듣지도 않는 진통제에만 의지하며 참을 수 있을까?'

아니.

그럴 수 있는 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라키엘은 확신하며 잔을 들었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포커페이스를 가장하고 있는 귀족들을 향해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황태자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다들, 오늘 밤을 즐기시길."

그리고 며칠 내로 진료실에서 또 봅시다.

자신감.

혹은 확연한 예감.

물론 그의 예상은 현실이 되었다. 심지어 며칠 걸리지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