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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황도로의 귀환 준비는 꼬박 사흘이 걸렸다.

마음 같아선 당장 출발하고 싶었지만, 앙부아즈의 국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제국의 황태자, 게다가 내전의 승부를 결정짓는 전투에서 가장 큰 공훈을 세운 영웅을 허술하게 보낼 수 없다는 주장을 한 까닭이었다.

덕분에 사흘의 준비를 거친 후.

퍼펑! 펑! 퍼퍼펑!

황도를 향해 출발하는 날, 성대한 폭죽이 왕국의 왕도 앙부즈의 하늘을 수놓았다. 수천수만에 달하는 인파가 환호성을 보내고, 색색의 종이 가루를 뿌렸다. 수백 다발의 꽃송이가 날아왔다. 도합 500기의 정예 기사단이 호위로 붙었다.

"...덕분에 황태자께선 무척 부담스러우시겠군요."

"저를 잘 아시네요."

"아무렴요."

어깨를 으쓱거리며 싱긋 웃는 왕녀 아델린. 마차 탑승을 앞둔 라키엘은 그녀를 향해 미소 지었다. 그리고 당부했다.

"어쨌거나, 제가 써드린 처방전대로 탕약 복용을 꼬박꼬박 하셔야 합니다. 하루도 빼먹지 말고 말입니다."

"아무리 쓰고 맛이 없더라도 말이겠죠?"

"물론이지요. 그래야 담석이 다시 생기지 않을 테니까요. 대신...."

"복용 후에 사탕 하나까지는 허락. 맞죠?"

"역시 잘 아시네요."

"아무렴요."

더욱 싱긋 웃는 왕녀 아델린. 하지만 그녀의 미소는 오래가지 않았다. 이내 묘한 눈빛으로 이쪽을 쳐다보았다.

"황태자께는 항상 모든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답니다."

"그, 그렇습니까?"

"네에."

"...."

뭔가 수상하다. 왜 이렇게 갑자기 친절하게 사근사근하지? 왕녀가 저럴 사람이 아닌데. 묘하게 쌔한 느낌이 왔다. 역시나(?) 그 느낌은 틀리지 않았다.

"듣자 하니, 황태자께서 제 아바마마께 참으로 참신한 변명을 하셨더라구요?"

"...."

"당시에 황태자께서 섣부르고 치기 어린 마음에 크나큰 실수를 하셨다고요? 당시에는 나름 진심으로 제 아바마마를 감히 장인어른이라 불러보았는데, 저와 직접 만나고 소통하여 보니 친분을 위한 사이로만 남는 것이 서로에게 좋을 것이라는 현명한 결론을 얻었다구요?"

"...."

"어머나 어머나, 이런? 그럼 저는 아무것도 안 하고 있었는데, 그냥 가만히만 있었을 뿐인데, 저도 모르는 사이에 차여 버린 거네요?"

"...."

"게다가, 뭐요? 내가 성질을 내면서 폭행을 했다고요? 그것도 500대씩이나?"

"...."

위험하다. 날 보는 눈동자에 서린 저 미묘한 기색은... 살기다!

라키엘은 잽싸게 반응했다.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그동안 함께하며 보람찼습니다! 귀국의 앞날에 영광과 번영이 있기를! 그럼 전 이만!"

빛의 속도로 마차에 오르려 했다. 그러나 그보다 빠르게 뻗어온 왕녀의 손아귀에 옆구리 옷깃을 붙잡혀 버렸다.

"어딜 냅다 도망치시려고."

"걹?"

당황스러웠다. 이쪽보다 키도 크고, 완력 또한 우월한 왕녀였다. 강건한 손아귀를 뿌리칠 수가 없었다. 그녀의 폭탄선언도 막을 길이 없었다.

"다음에는 저한테도 기회 좀 주시고요."

"...예에?

기회?

다음에는?

이건 무슨 뜻일까.

깜짝 놀라서 되물었다.

하지만 대답은 들을 수 없었다. 왕녀는 그저 뜻 모를 미소만을 입꼬리에 매단 채로 이쪽을 놓아 주었다. 송별 인파 속으로 자연스럽게 섞여 멀어졌다.

"...."

그렇게 마차에 올랐다. 성대한 인파의 함성 속에, 부담스러울 정도로 질서정연한 정예 기사단의 호위를 받으며 왕도를 출발했다. 귀환의 여정에 올랐다.

여정은 편안했다. 마차는 넓고, 조금의 덜컹거림도 없을 정도로 쾌적했다. 한 번도 타보지 못한 비행기 1등석이 이런 느낌일까 싶었다.

하지만 라키엘은 왕녀가 남긴 싱숭생숭한 뜻 모를 말에도, 쾌적하기 짝이 없는 안락한 마차의 승차감에도 더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보다 훨씬 신경 쓰이고 걱정되는 일이 있기 때문이었다.

"데미안."

여정 첫째 날의 저녁.

라키엘은 데미안을 불러들였다.

이제는, 녀석의 리베르사 심법 각성이 얼마나 진행되었는지를 확인해야 할, 두근두근 살 떨리는 순간이 다가와 있었다.

142화. 나를 반기는 사람들 (2)

"데미안, 이리 와서 좀 앉아 보자."

"...."

"어서."

팡팡!

타닥타닥 조용히 춤추는 모닥불. 구름 낀 하늘 아래 밤이 잔잔히 깊어가는 가운데, 라키엘은 자신의 옆자리를 팡팡 쳤다. 그리고 멀뚱히 서 있는 데미안을 올려다보았다.

데미안의 표정이 마뜩잖아졌다.

"무슨 일이신지."

"왜? 옆에 앉으라는 말이 이상해?"

"예."

"...."

"하실 말씀이 있으면 거기서 하시면 안 됩니까."

"응. 안 돼."

"어째서 말입니까."

"널 진맥하고 싶거든."

"...."

"여기서 원격으로 진맥할까? 응?"

"대체 왜 갑자기 절 진맥하시겠다는 건지."

"사내복지. 건강검진. 몰라?"

"모릅니다."

"그럼 이제부터 알면 되겠네. 앉아. 얼른."

라키엘은 짐짓 당연하다는 듯 콧김을 풍, 뿜었다. 데미안이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로선 어쩔 도리가 없었다.

아무리 대들어봤자 자신은 피고용인, 을에 불과했다. 고용주(?)께서 까라면 깔 수밖에.

그는 황태자가 가리키는 곳에 얌전히 앉았다. 다만, 특유의 서늘한 눈빛만은 여전히 형형하게 빛내고 있었다.

"전하께서 명하신 대로 앉았습니다. 다만-."

"다만?"

"갑자기 이러시는 이유가 조금 궁금합니다."

"새삼스럽게 궁금할 것까지야. 너, 소드 익스퍼트 상급이 됐지?"

"...."

데미안의 눈꼬리가 아주 희미하게 뜨끔했다. 사실이었다.

최근 쟈빌론과 격전을 치르면서, 그 와중에 역혈의 마나 심법을 깨우치며 자연스럽게 소드 익스퍼트 상급의 경지에 오른 터였다.

다만, 아직은 그 사실을 누구에게도 밝힌 적이 없었다. 한데 황태자가 어떻게 알고 있는 걸까.

라키엘의 입가에 피식거리는 미소가 맺혔다.

"티가 너무 나던데. 최근에 잠을 제대로 못 이뤄서 밤새도록 뒤척거리는 걸 내가 모를 줄 알았냐. 게다가 주위에서 조금만 어수선한 소리가 나기만 해도 미간을 팍팍 찡그리고. 완전 수능... 아니, 중요한 시험 하루 앞둔 사람처럼 굴더만."

"...."

"그러니까 너, 소드마스터 증후군을 앓게 됐지?"

"...맞습니다."

이 정도로 족집게면 더는 못 숨기겠다. 결국, 데미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라키엘의 미소가 살포시 더 짙어졌다.

"역시. 소드 익스퍼트 상급의 경지에 오르는 사람은 누구라도 그 증후군을 피할 수 없지. 모든 감각이 폭주에 가까울 정도로 지나치게 예민해지는데, 그걸 누그러뜨릴 정도의 컨트롤을 할 수 없게 되니까. 그걸 넘어서야 비로소 진정한 소드마스터가 되는 거고."

"잘 아시는군요."

"당연히."

소설 마검황을 읽은 덕분에, 주요 설정인 소드마스터 증후군에 대한 건 너무나 잘 알았다. 그래서였다. 그걸 핑계로 삼기로 했다.

"아마 앞으로도 불면증이 점점 더 심해질 거야. 신경도 더욱 예민해질 거고. 그래선 곤란해."

"어떤 점에서 말입니까?"

"내 경호에 차질이 생길 거 아니냐."

"...."

"예민해진 감각은 그만큼 신경을 일찍 지치게 만드는 법이니까. 종종 집중력이 깨질 거고, 잠을 이루지 못하는 만큼 컨디션이 바닥인 채로 지내게 되겠지. 그럼 날 호위하는 능률도 떨어질 거잖아."

"...."

"특근대로 고용이 되어 있는 만큼의 밥값은 해야지, 응?"

"...."

"어쨌건 그래서야. 네가 앓고 있는 소드마스터 증후군과 그 결과로 생긴 심각한 불면증. 그게 얼마나 심한지 진맥을 통해 진단을 해보자. 적절한 처방도 마련해 보고."

"제 불면증이 걱정이 되신다면, 그냥 미노타우황청심원을 주시면 안 됩니까? 그거, 가장 대표적인 부작용이 숙면이지 않습니까."

"응. 안 돼."

"어째서입니까."

"비싸."

"...."

"미노타우황청심원 그게 한 알에 얼만데. 게다가 그거 시즌별로 한정 수량인 거 몰라? 그걸 매일 먹겠다고? 약값 감당할 수 있어?"

"...."

피도 눈물도 없는 자본주의(?)의 논리로 데미안의 반론을 일거에 격침시켰다. 결국 데미안은 침묵의 바다로 침몰했다.

라키엘은 만면에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내심 긴장했다.

'좋아. 일단은 자연스럽게 진맥할 분위기는 만들었고. 이제부터가 진짜다.'

조금씩 가슴이 쿵쿵 뛰었다. 기대감이나 호기심 때문에? 물론 아니었다. 솔직히 말해서 걱정이 앞섰다.

마치, 시한폭탄의 폭발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확인하기 직전인 심정이었다.

'데미안이 일깨운 리베르사 심법, 그게 녀석의 각성을 얼마나 진행시켰는지 확인해야 해.'

만약 녀석의 각성이 완성된다면?

모든 게 끝장이 난다.

적어도 이 대륙 전체가 1, 2차 세계대전을 모조리 합친 이상의 궤멸적 타격을 입게 될 것이다. 그것조차도 매우 낙관적인 전망을 한다는 가정하에 말이다.

'일단 확인부터.'

꿀꺽.

라키엘은 긴장을 누르며 손을 뻗었다. 데미안의 손목을 짚고서 진맥 스킬을 발동했다.

'진맥.'

딩동!

[진맥을 시작합니다.]

[스캔 중.]

[3... 2... 1...]

[진맥 결과가 나왔습니다.]

[아래의 <종합검진표>를 확인해주세요.]

익숙한 안내문이 떠올랐다.

시선을 아래로 움직였다.

[종합검진표]

[검진 대상 : 데미안 카이엔]

[종족 : 인간(+?)]

[성별 : 남자]

[연령 : 3,912세]

[신장 : 186.6 Cm]

[체중 : 79.2 Kg]

[혈액형 : He+ D]

"...."

엄청난 결과가 보였다. 종족에 표기된 의문의 (+?)라는 표식도, 당장 삼천배를 올려야 하나 고민하게 만드는 아득한 연령도, 듣도 보도 못한 기이한 혈액형도, 모두 그랬다.

'역시.'

바뀌었다.

예전에 처음 녀석에게 쑥뜸을 해주던 때는 이렇지 않았다.

그때만 해도 종합검진표에 표기되어 나오는 종족도, 연령도, 혈액형도, 전부 그냥저냥 평범한 인간의 스펙(?)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아니다.

'정말로 각성이 진행되고 있는 건가.'

라키엘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더 아래쪽을 살폈다. 그곳에 <종합 소견> 항목이 있었다.

[종합 소견 : 모든 항목에서 지극히 건강하고, 강인하며, 균형이 잡힌 신체입니다. 다만, 신체의 감각과 교감신경의 지나친 활성화에 따른 심각한 불면증이 감지됩니다. 최근 무리한 수준의 마나 역행을 시도한 대미지가 신체에 남아 있습니다. 예민해진 신경과 지친 신체를 달래기 위한 적절한 휴식과 명상을 권장합니다. 또한, 이질적이며 출처를 알 수 없는 조직 일부가 혈액에서 감지됩니다. 해당 조직은 최근 급격한 탄생과 증식을 겪었으나, 알 수 없는 이유로 증식이 정지된 상태입니다.]

라키엘은 종합 소견을 다섯 번이나 거듭 읽었다. 그 뜻을 해석했다. 어렵지 않게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살았다.'

그는 종합 소견의 말미에 언급된 '출처를 알 수 없는 조직 일부'라는 문구에 주목했다.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저거다. 저게 바로 데미안 녀석의 몸속에서 자라게 될 파멸의 씨앗. 각성의 전조다.

한데 그게 증식을 멈추었단다. 즉, 각성의 과정이 모종의 이유로 중단되었다는 뜻이었다.

'그건 아마도, 쟈빌론이 시전하던 최후의 비기를 내가 대신 맞아 준 덕분이겠지.

십중팔구 그럴 듯했다.

실제로 쟈빌론을 압도하는 내내 데미안의 리베르사 심법이 급격히 강력해지고 있었다. 완전한 깨우침의 단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한데 이쪽이 갑자기 끼어들면서, 쟈빌론의 최후 비기를 대신 몸빵(?) 해주면서 그 흐름이 끊어졌다.

'내가 와락 뛰어들고, 쟈빌론에게 대신 붙잡히면서 녀석이 깜짝 놀랐거든.'

그 서슬에 무아지경의 상태에서 빠져나오게 되었으리라. 집중이 깨졌을 것이다. 걷잡을 수 없이 진행되던 각성도 중단되었을 테지.

새삼 그때 나서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안도감도 들었다.

'그나마 각성이 중단되어서 다행이야. 여기서 더 진행되지만 않으면 돼.'

하니 앞으론 녀석을 위험에 처하도록 두지 말자. 그런 상황은 최대한 피하자. 가급적 녀석을 곁에 붙잡아 두고, 안락한 삶을 사는 황태자의 곁에서 온실의 화초로 지내게 만들자.

라키엘은 새삼스러운 다짐을 거듭 되새겼다. 그리고 짐짓 까탈스러운 눈빛으로 데미안을 쳐다보았다.

"쯧쯧쯧. 큰일이네. 큰일이야."

"...불면증이 많이 심각합니까?"

"그냥 심각한 정도가 아닌데."

"그럼...?"

살짝 미간을 찡그리는 데미안 녀석. 아마도 녀석은 자신의 내면에 무엇이 심어져 있는지 꿈에도 모르고 있겠지. 앞으로도 평생 그걸 모르길 바란다. 정말로, 진심이다.

라키엘은 본심을 접어 두며 엄격한 눈빛으로 데미안을 바라보았다.

"마나, 역행시켰지?"

"...."

"그거 이제 하면 안 돼."

"...어째서입니까?"

"그걸 꼭 말해 줘야 아냐? 상식이잖냐. 마나 역행을 하면 어떤 부작용이 따르는지."

"저도 알고 있습니다. 마나하트가 망가진다지요. 운이 좋으면 불구, 그렇지 않으면 사망. 한데 저는 아무런 부작용도 겪지 않았습니다."

"운이 아주 좋아서 그런 거고."

"...."

"언제까지나 행운이 따라 준다고 낙관하지 마. 그러다가 훅 가는 법이야. 게다가 마나 역행을 시도할수록 마나하트는 어찌어찌 버틸지 몰라도, 신체의 다른 부분들이 착실하게 망가질 거야."

"그렇습니까."

"어. 확실히."

...사실은 구라다.

데미안의 마나하트도, 혈맥과 신체도 전부 멀쩡하다. 마나 역행으로 얻은 부작용이라곤 경미한 수준의 대미지밖에 없다.

보통 사람으로 따지자면 헬스장에서 근육 한 시간쯤 제대로 조진(?) 후의 피로감 정도랄까.

'하지만 녀석이 마나 역행을 계속 시도할수록, 리베르사 심법을 사용할수록 각성이 진행되겠지.'

그런 상황은 막아야 한다.

라키엘은 모처럼 진지한 눈길로 말했다.

"솔직하게 말하지. 나는 자기관리에 소홀한 사람이 내 호위를 맡는 걸 원치 않아. 알겠어? 이 시간 이후로 만약, 내 허락 없이 멋대로 마나 역행을 시도해서 신체가 망가지면, 그땐 얄짤없이 해고할 거야."

"그럼 퇴직금은...."

"안 챙겨줄 건데."

"그거 부당해고 아닙니까?"

"꼬우면 네가 황태자 하든가."

"...."

"아니면 황제 폐하께 가서 하소연이라도 해 보든가. 알현할 방법이 있다면 말이지만."

"전하, 전하께서는 진짜...."

"진짜 뭐. 치사하다고?"

"예."

"치사하면 어쩔 건데."

"...."

"억울하면 네가 황제 아들로 태어나시지. 어쩌자고 그걸 못하셨을까."

"...."

와드득!

얄밉다. 진심으로 얄밉다. 할 수만 있다면 저 얄미운 마빡을 한 대쯤 뽀각 때려보고 싶다. 데미안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반면, 라키엘은 여유로운 척하며 웃었다. 사실은 조마조마했다. 생각 같아선 데미안에게 사실을 확 밝혀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그랬다간 데미안의 내면에 자리한 존재가 자신의 의미를 깨달아 버릴 테니까.

녀석의 각성이 걷잡을 수 없이 진행될 테니까. 그것만큼은 절대로 말해 줄 수 없다.

"그러니까 앞으로 마나 역행은 금지야. 알았지?"

"...알겠습니다."

그렇게 데미안을 단속시켰다.

이후로도 황도로의 여정은 이어졌다. 쾌적한 여정이었다. 마차는 1등석 부럽지 않게 편안했고, 앙부아즈에서 제공한 호위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빵빵했다.

그들과 함께 산 넘고, 물 건너, 평원을 지나, 여러 도시를 거쳤다.

그리고 열흘째 되는 날.

마침내 황도 외곽의 관문에 다다랐다.

"...후아."

마차 안에서 라키엘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았다. 관문이 가까워질수록 두근거림이 커져만 갔다.

집(?)으로 돌아왔다는 설렘 때문에? 아니었다. 그의 두근거림은 사실 조마조마함에 가까웠다. 혹은, 앞으로 겪게 될 혼쭐을 각오하는 마음가짐이었다.

'황제 그 양반, 분명 난리를 치겠지?'

쉽게 예상이 가능했다. 이번에 일을 너무나 크게 벌였기 때문이었다.

'원래는 그냥 조용히 군의관 코스프레나 하면서 보너스 수명만 챙기려고 했던 건데. 그렇게 조용히 돌아오려고 했는데. 쯧.'

처음 황제의 허락을 구할 때도 그렇게 설득을 했더랬다. 한데 결과는? 완전히 달라져 버렸다.

어쩌다(?) 보니 예정에도 없이 반란군 수장 쟈빌론을 직접 때려잡아 버렸다. 그 과정에서 이쪽의 정체 또한 만천하에 공개해 버렸다.

한편으로는 영웅적인 업적이요 공훈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황족에 의한, 타국에 대한 심각한 내정간섭 행위이기도 했다.

'아마도 덕분에 황제 그 양반, 물밑에서 뒷수습에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제법 번거로웠겠지. 앙부아즈 국왕과도 여러 사안을 조율해야 했을 거고.'

그게 전부 자신이 기절한 닷새 사이에 진행되었으리라.

그걸로 황제가 얼마나 벼르고 있을지, 얼마나 풍부한 잔소리와 갈굼을 장전(?)해 놓고 있을지, 미리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두통이 도질 지경이었다.

'어휴. 어쩌겠냐. 다 내 팔잔데.'

쑴펑쑴펑 치솟는 비애감에 또 한숨을 푹 내쉬려는 순간이었다.

덜컹!

갑자기 마차가 멈추었다. 이내 마부석 쪽에서 어수선한 소리가 들려왔다.

'뭐지?'

라키엘은 마부석 방향의 쪽창을 열었다.

"무슨 일이지?"

"아, 전하. 그게...."

마부와 나란히 앉아 있던 가르딘 경이 난감한 얼굴로 이쪽을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더욱 난감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래도 지금, 저 앞의 관문에 말입니다...."

"응, 관문에. 뭐가."

"폐하께서 친히 나와 계신 듯합니다."

"...어?"

진짜?

정말로?

처음엔 믿기지가 않았다. 그런데 주위를 둘러보니 사실인 듯했다. 멈추어선 것은 이쪽을 태운 마차뿐만이 아니었다.

호위병력 전체가 멈추어서 정연하게 줄을 맞추느라 호들갑을 떨고 있었다.

"...."

저런 모습들, 분위기, 뭔지 알겠다. 훈련소에 있을 때 직접 겪어 봤으니까.

투스타가 예고도 없이 훈련소를 방문한 날이었던가. 간부고 조교고 훈련병이고 할 것 없이 저렇듯 황송해하며 허겁지겁 움직였거든.

'하아. 진짜.'

더욱 큰 한숨이 나왔다.

황제가 관문까지 직접 나왔다니. 그냥 마실이나 돌자고 나왔을까. 절대로 아닐 거다. 이쪽을 보러 나온 거다. 반가워서? 놉. 절대로 아니.

'...얼마나 빡쳐서 열렬히 갈구고 싶었으면 내가 가는 것도 못 기다리고 여기까지 나온 거겠냔 거지!'

그러니까 이건 ㅈ됐다.

진짜다.

하지만 피할 길은 없다.

라키엘은 더욱 굳은 각오를 다졌다. 오늘 제대로 갈굼에 털리겠지만, 그럼에도 버티리라. 이 또한 지나가리라. 비장한 마음으로 마차에서 내렸다.

그 순간 그는 보아야 했다.

타닷...!

황제가 '무려' 달려오고 있었다.

다급히 뒤를 따라오는 호위들마저 버려두고서, 관문을 박차고 이쪽을 향해 우랄산맥 떡멧돼지처럼 투두두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와 씨.'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저렇게나 화가 났던 걸까. 얼마나 폭풍처럼 이쪽을 혼내려는 걸까. 행여나 엄한 징계는 받지 않으면 좋겠는데.

마음속으로 빡센 각오를 머금었다. 황제와의 거리가 더욱 가까워졌다. 하여 고개를 숙였다.

눈이 마주치지 않도록 땅만 바라보았다. 발소리가 성큼 가까워져 왔다. 최대한 공손한 자세를 잡았다. 황제의 커진 숨소리마저 들려왔다.

이제 곧이다. 벼락이 떨어지겠지.

...라고 예감하는 순간이었다.

와락!

별안간, 황제가 다짜고짜, 이쪽을 얼싸안았다.

143화. 나를 반기는 사람들 (3)

와락!

라키엘은 만년설을 꽉 움켜쥐었다. 마나를 주입했다. 파츠츠, 피어나는 1.5미터 지름의 냉기 실드 뒤에 웅크리고서 가만히 생각했다.

'아, 내가 어쩌다가 이런 꼴이 됐지.'

그는 망연자실한 눈길을 들었다.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 정면. 반듯하게 깔린 연무장 고운 모래 건너편 5미터 거리. 그곳에 묵직한 보검을 비스듬히 들고 있는 장년의 남자가 있었다.

황제였다.

"준비는 되었느냐?"

...아니오.

라고 대답하고 싶었다.

하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어서 어색한 미소를 어거지로 입술에 밀어 올렸다. 그리고 가만히 생각했다. 나는 진짜로,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는가, 라고.

그러자 문득, 30분 전의 일이 떠올랐다.

...와락!

갑자기 어깨를 감싸던 감촉.

커다란 품이 격정을 담고서 이쪽을 덥석 안았다. 덜컥, 빈약한 멸치파(?) 몸매 때문에 잠깐 뒤로 넘어질 뻔 휘청했다. 빈곤한 척추기립근으로 분발하며 간신히 버텨냈다. 그러고 나서야 사태(?)를 깨달았다.

'황제가?'

...날 반갑게 끌어안았다고?

처음엔 믿기지가 않았다. 이 양반이 미쳤나 싶었다. 하지만 사실이었다. 황제는 달려오던 기세 그대로 냅다 이쪽을 끌어안았고, 덕분에 이쪽은 졸지에 팔자에도 없던, 레슬링파 UFC 선수의 테이크다운을 디펜스하는 기분을 만끽해야 했다.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숨이 막혔다!

끌어안는 힘이 너무 강력했다!

'컥, 커걱, 긔긕!'

부자간의 감동적인 포옹? 평소에 다투던 사이의 감격적인 해후? 그 뒤를 따라오는 어색한 침묵? 그런 건 전혀 없었다. 오히려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그건 기분만 어색하지, 적어도 팔다리와 갈빗대가 가지런하게 세트메뉴로 뽀개질 것 같은 위기감은 느끼지 않아도 될 테니까.

'자, 잠깐! 스톱! 타임!'

속으로 외치며 나름 열심히 버둥거렸다. 그제야 황제도 이쪽의 파리해진 안색을 깨달은 듯했다. 황제의 눈빛이 잠깐 흠칫. 이내 격정적이던 살인성 바디초크, 아니, 포옹이 풀렸다.

"...거헉! 쿨룩! 콜록!"

"그래, 무사히 다녀왔더냐?"

예, 무사히 다녀왔지요. 그리고 방금은 갈빗대 완전 골절의 위기에서 간신히 탈출했고 말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대꾸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간신히 호흡을 가다듬으며 예를 표했다.

"후, 후욱, 제국의 합당한 지배자이신 황제 폐하를, 후우하, 뵈옵나이다."

"그렇구나."

"...."

설마 인사는 이게 끝?

라키엘은 어색한 기분을 느끼며 황제를 슬쩍 올려다보았다. 황제와 눈이 마주쳤다. 얼른 피했다.

"...."

"...."

아까, 차라리 어색한 침묵이 낫겠다고 생각했던 건 취소. 막상 겪어 보니 이런 침묵이 주는 정신적 피로감이 훨씬 큰 거 같다. 농담이 아니다. 이럴 땐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래서 그저 공손히 고개를 숙이고 서 있기만 했다.

그때였다.

고맙게도(?) 황제의 갈굼이 시작되었다.

"혹여나 방금 짐이 반가움을 표현한 행동에 의하여 아팠던 것이더냐? 고작 그 정도로?"

"...."

"쯧쯧쯧. 나약한지고. 그 정도를 버티지 못하여 창백해지는 모습을 쉽게 보여서야 어찌 황좌의 무게를 짊어질 수 있을까."

"...."

"참으로 한심하고 또한 한심하도다. 한편으로는 의구심 또한 아니 느낄 수가 없구나."

"의구심이라시면...?"

"그런 것까지 짐이 종알종알 일일이 알려 주어야 하겠느냐?"

"...."

괜히 슬쩍 되물었다가 매만 벌었다. 동시에 깨달을 수 있었다. 의구심을 느끼기는 개뿔. 사실은 그냥 나오는 대로 꺼낸 말인 거, 느껴졌다.

한편으로는 다른 것도 느껴졌다.

황제의 본심이었다.

'기뻐하고 있구나.'

이쪽이 무사히 돌아와서. 건강한 모습이라서. 이렇듯 마주할 수 있게 되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안도하는 게 느껴졌다. 반갑고, 기쁘고, 흐뭇해하는 마음 또한 느낄 수 있었다. 아까, 처음 이쪽을 와락 끌어안을 때부터 그랬다. 처음 겪는 모습이 아니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아버지.'

문득, 한국의 아버지 당신 생각이 났다. 중3 때였던가. 학교 점심시간에 축구를 하다가 다리가 부러진 적이 있었다. 한동안 통깁스를 하고서 지내야 했다. 버스를 타기도 힘들었다. 그래서 아버지가 승용차로 등하교를 도와주신 적이 있었다.

그때 아버지가 내내 저런 모습이셨다. 입으로는 매일 투덜거리셨다. 공놀이 하다가 다리나 다친 못난 녀석 운운하시고, 라떼는 다리 좀 다쳐도 엄살은 꿈도 안 꿨노라 타박하시고.

하지만 행동으로 보여 주시는 마음은 다르셨다. 가방도 못 들게 하셨다. 아예 교실까지 업고 가주실 기세셨다. 행여나 아픈 다리가 더 아프게 될까 봐, 낫지 않을까 봐 내내 걱정하셨다.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어디선가 무슨 이야기를 듣고 오신 건지, 깁스를 풀 때까지 집안 냉장고엔 아버지가 손수 사 오신 우유와 멸치가 한가득이었으니까. 밥상엔 멸치 반찬 종류만 최소 5가지는 되었으니까.

'내가 그때 평생 먹을 멸치는 다 먹었지.'

피식, 생각만으로도 미소가 흘러나왔다. 한데 그런 이쪽의 미소를 오해한 걸까. 황제의 눈썹이 꿈틀 찡그려졌다.

"무엇이더냐, 그 웃음은?"

"...예?

"지금 짐의 훈계를 들으며 웃음이 나오느냐?"

"예에?"

"아니 되겠구나. 너에겐 더욱 따끔한 훈계가 필요하겠구나. 마침 앙부아즈에서 네가 벌인 일을 논할 참이었으니, 대련 준비를 갖추어 연무장으로 오거라."

"...예에에?"

연무장으로요? 대련을요? 제가요? 왜요?

머릿속으로 백만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하지만 황제는 대답도 듣지 않고 몸을 휙 돌려 멀어졌다.

...덕분에 지금, 이 꼴이다.

연무장에서 황제와 마주하고서 만년설 냉기 실드 뒤에 거북이 모드로 온몸을 웅크리고 있는 것은.

'어오, 아깐 내가 왜 안면 근육을 씰룩거려가지고.'

황제의 본심에 훈훈함을 느끼는 게 아니었다. 잠깐 마음이 풀려서 옛 추억이나 더듬는 게 아니었다. 안면 근육 컨트롤을 흐트러뜨려서는 안 되는 거였다. 하지만 후회는 언제나 늦는 법. 라키엘은 각오를 다지며 만년설을 쥔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황제가 자세를 잡는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가겠노라."

"...."

꿀꺽.

이쪽 말고 저쪽으로 가주시면 참 좋겠지 말입니다.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생각했다. 그 순간, 황제가 땅을 박찼다. 그의 모습이 폭발적으로 확장되었다. 아니, 쇄도해 왔다!

쐐애액!

"...흡!"

반사적으로 만년설을 치켜들었다. 이미 경혈 스캐닝 옵션으로 황제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던 터였다. 공격 방향을 읽는 건 어렵지 않았다. 강렬한 충격이 만년설을 때려왔다.

쩌컹-!

"긋!"

팔뚝과 어깨, 허리까지 전신을 짓누르는 듯한 강렬한 충격! 하지만 버틸 만했다. 기절을 막아 주는 격침불가 옵션을 발동할 필요도 없었다.

'생각보다 쎄진 않은데?'

소드마스터인 쟈빌론의 맹공을 온몸으로 버텨 본 경험 덕분일까. 혹은 황제와 같은 더블 써클의 등급으로 올라선 까닭일까. 아니면, 둘 모두 때문일지. 황제의 공격이 생각보다 부담스럽지 않았다.

이어지는 맹공도 그러했다.

쩌컹! 쾅! 쯔컥! 콰콰콰콱!

상단, 중단, 측면, 하단, 상단, 머리, 어깨, 무릎, 발, 무릎, 발. 아주 그냥 공격이 소나기처럼 일방적으로 쏟아졌다. 그때마다 절묘하게 반응하며 막아 냈다.

그러나 황제의 공격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사실은 쏟아지는 검격보다도 훨씬 위력적인 공격이 따로 있었다.

"후읍! 너는 어찌하여."

콰앙!

"앙부아즈로 떠나기 직전, 짐과 맺었던 약속을 쉽게 저버렸단 말이더냐?"

쿠쾅!

"네가 그 입으로 직접 말하길, 안전한 후방에서 타국의 전쟁 수행 과정을 보고 익히며 경험을 쌓겠노라 하지 않았느냐?"

쩌컹!

"한데, 어찌하여 너는, 그토록 경거망동하여 스스로를 위험에 몰아넣었단 말이더냐."

콰즈컹!

"대답 안 하겠느냐?"

투쾅!

"...긔익!"

절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물론 대답하고 싶었다. 말대꾸도 백 마디는 하고 싶었다. 그러나 차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워낙 황제의 맹공이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와중이라, 반응하는 것만도 숨이 찼기 때문이었다.

"훅! 후, 후우욱...!"

역시나 저질 체력이 문제였다. 그동안 황제의 정신 공격(?)이 물리적 공격과 함께 쏟아졌다.

"또한, 너는 참으로 어리석고, 또 어리석도다."

"...그읍!"

콰앙-!

"하나 묻자꾸나. 너는 자신이 지닌 지위에 대한 자각과 책임감이 없는 것이더냐? 정녕 그러한 것이냐?"

"크읏!"

투쾅-!

"만약 네가 잘못되었을 시에 황가가 겪을 공백과 혼란, 그것으로 생겨날 막심한 손해를 정녕코 생각하지 못하였단 말이더냐?"

"으읍! 그, 그게 아니오라!"

쩌컥-!

"아니면, 무슨 생각으로 소드마스터와 겨루는 만용을 저질렀단 말이더냐?"

"그, 그건... 저도 원치 않았지만 어쩌다 보니!"

"...."

투콰앙-!

"...겍!"

이번엔 진짜다. 제대로 감정이 실린 일격이다. 막아 낸 순간 깨달을 수 있었다. 황제의 표정도 살벌하게 바뀌었다. 화가 치민 걸까. 이쪽을 노려보는 눈빛이 장난이 아니었다.

"너는 이 아비의 기대를, 황가가 네 어깨에 걸어 둔 미래를 장난으로 여기는 것이더냐? 정녕코?"

"...."

라키엘은 말문이 막혔다. 더욱 견고한 방어 자세를 취했다.

황제의 눈빛이 한결 서늘해졌다. 한층 공격적인 기세로 움직였다. 그러나 사실, 황제는 내심 흐뭇함과 경악감을 동시에 느끼는 중이었다.

'이 아이가 벌써... 더블 써클의 경지에까지 올라왔다고?'

아까, 치미는 반가움을 못 이겨 실수로 녀석을 끌어안아 버린 때였던가. 그때 아스라한 심법을 통해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큰아들의 기세가 달라져 있었다.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되는 수준이었다. 일부러 꽉 끌어안으며 녀석의 반응 또한 살폈다. 그때부터 설마 싶었다. 더욱 확실한 확인 또한 해 보고 싶었다.

하여 연무장으로 불러들였다. 거세게 몰아붙였다. 덕분에 깨달을 수 있었다. 언제나 나약했던 큰아들이, 벌써 더블 써클의 경지에 올라서 있었다.

'이게... 가능한 속도란 말인가.'

경이로운 발전 속도였다. 아니, 경악스럽도록 비현실적인 성장 속도였다.

'녀석이 처음 마나써클을 일깨웠던 것이 올해 초. 아직 한 해도 지나지 않은 터인데....'

벌써 더블 써클이라니. 생각할수록 아득해지는 기분이었다. 자신이 싱글 써클에서 더블로 올라서기까지 25년의 시간을 들였던 점을 감안하면 더더욱 그러하였다.

하지만 사실이었다.

거듭 큰아들의 냉기 방패를 후려칠수록 그 사실이 더욱 또렷한 현실로 다가왔다. 놀랍고, 경악스러웠다. 그만큼 흐뭇하고, 대견했다.

물론, 그럴수록 정작 황제가 꺼내는 말은 한결 서늘해졌다.

"참으로 한심하고 또 한심하도다. 황가의 미래를 책임질 황태자의 재목으로 보기에는 너무나 안타까운 마음가짐이로다. 대답하여 보거라. 너는 그토록 하찮은 책임감과 사명감으로 앞으로 무슨 일을 이루겠다는 것이더냐."

"...그으읏, 저는!"

콰앙-!

다시금 떨어진 일격. 라키엘의 다리가 살짝 후들거렸다. 그걸 본 순간, 검을 쥔 황제의 손아귀가 조금 느슨해졌다. 티가 나지 않도록, 아들이 자세를 수습하도록, 아주 잠깐 기다려 주었다.

라키엘은 그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일단 저 공세부터 좀 끊자.'

계속 샌드백 신세가 되어 있으려니 억울했다. 언제까지고 계속 거북이 모드로 일방적인 수세에만 몰려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한데 마침 황제의 주춤하는 모습이 보였다. 기회였다.

'방패 치기!'

재빨리 반 발짝, 황제의 품을 향해 움직였다. 발디딤을 견고히 했다. 다리와 허리를 거쳐, 만년설을 쥔 상체로 힘을 전달했다. 마나써클에서 증폭되는 힘도 함께 실었다. 이대로 방패로 퉁, 하고 황제를 밀어쳐서 거리를 떨어뜨릴 작정이었다.

'지금!'

후왁-!

만년설의 널따란 냉기 실드가 강철의 벽처럼 황제를 향해 쇄도했다. 라키엘의 눈빛에 반격 성공의 예감이 깃들었다.

'됐다!'

황제가 반응하지 못하고 있다. 기습적인 반격 성공이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황제가 이쪽으로 눈길을 던졌다. 싱긋, 눈웃음을 보내어 왔다. 마치 이쪽의 대응을 예상했다는 듯, 너무나 태연하게 한 발짝 스윽 물러났다.

"으엇?"

후욱...?

밀어친 방패가 허공만 때렸다. 덕분에 라키엘은 자세가 흔들리고 말았다. 앞으로 넘어질 뻔했다. 만약, 황제가 손을 뻗어 잡아 주지 않았더라면, 제법 볼썽사나운 자세로 나동그라졌을 것이었다.

터텁!

"...."

이쪽을 붙잡아 준 황제의 손길. 순간 얼굴이 시뻘겋게 뜨거워졌다. 기껏 반격을 하려다가 실패해서 이런 꼴이라니. 살짝 굴욕적이었다. 하지만 그런 굴욕을 만끽(?)할 여유는 주어지지 않았다.

어느샌가 황제가 정체불명의 두툼한 종이뭉치를 품에서 꺼내어 면전에 불쑥, 내밀어 왔기 때문이었다.

"받거라."

"...이건, 무엇이옵니까?"

자세를 바로잡으며 얼결에 뭉치를 받아 들었다. 황제가 묘하게 흐뭇해 보이는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귀에 담자마자 내 귀가 잘못되었나 면봉을 찾게 만드는 말을 꺼냈다.

그것은 폭탄선언이었다.

"각국의 왕실과 유수의 대귀족가에서 앞다투어 보낸, 너에 대한 구혼장이니라."

144화. 구혼장 처리법 (1)

구혼장이라니.

처음엔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이거 미친 거 아닌가. 진짜 이거 실화 맞나.

...그런데 맞았다.

'진짜 실화네.'

다각, 다각.

늦은 저녁의 황도 시가지를 조용히 굴러가는 호화로운 마차. 그 안에서 라키엘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의 눈길은 앞에 늘어놓은 수십 통의 구혼장을 향해 있었다.

아까 황제에게서 이걸 받던 때가 떠올랐다. 당시엔 얼마나 황당하던지. 솔직히 황제가 고약한 종류의 꼬장이라도 부리는 건가 싶었다.

'그 양반이야 항상 날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니까.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더 갈궈 보려고 혈안이니까.'

항상 후계자를 시험에 들게 만드는 남자. 그런 사람이 황제였다. 이번에도 그럴 줄 알았다. 뜻밖의 구혼장 다발을 받은 이쪽의 반응을 떠보려는 건 아닌가 싶었다.

덕분에 침착하게 대응할 수 있었다.

'구혼장이라. 알겠습니다.'

...라고 쿨하게(?) 대답했다. 구혼장 뭉치를 받았다. 그대로 대련을 마치고, 예를 표하며 물러났다. 한편으로는 오늘치 갈굼은 이걸로 끝이구나 싶어서 환호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막상 마차를 타고서 별궁으로 돌아가는 길에 구혼장을 확인해 보니 가슴이 철렁했다. 구혼장은 진짜였다. 황제의 테스트용 가짜 편지 따위가 아니었다. 고약한 꼬장 또한 아니었다.

그냥 아주, 정말로 명백한, 실화였다!

'이건 확실해.'

라키엘의 시선이 제일 위에 있는 구혼장 봉투로 향했다. 봉투에 새겨진 왕가의 문양이 보였다. 그냥 단순한 문양이 아니었다. 마법으로 찍힌 인장이었다. 즉, 위조가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나머지 모든 봉투가 그러했다. 수많은 디자인의 갖가지 문양들. 수많은 왕실과 대귀족 가문들. 그들이 열렬한 마음으로 정성껏 보낸 러브콜(?)이 수십 다발이나 쌓여 있는 이 광경이 살포시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

믿기지가 않았다.

평생 모쏠로 살아온 내 삶에 이런 호재가? 처음엔 솔직히 약간 두근거리기도 했다. 이 세상의 타도해야 할 극소수 존잘 인싸남의 기분이 이런 건가 싶기도 했다. 하지만 더 생각해 보니... 이건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었다!

"전하, 그건 뭡니까?"

마차 건너편 자리에 앉은 데미안이 물어왔다. 이쪽이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어서일까. 녀석의 눈빛도 덩달아 날카롭게 번득이고 있었다.

라키엘은 어깨를 으쓱였다.

"구혼장."

"...예?"

"방금 폐하께 받아 온 구혼장이라고."

"폐하께, 말입니까?"

"어. 최근에 각국 왕실과 유수의 대귀족가들로부터 앞다퉈서 날아왔다더라. 전부 나랑 결혼하고 싶대."

"그거 좋은 일 아닙니까?"

"그럴 거 같냐."

"예."

"아쉽게도 그건 좀 아닌 듯."

"...어째서입니까?"

데미안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가르딘 경이 한마디 슬쩍 끼어들었다.

"혹시 전하께서는 누구를 골라야 하는지 고민이 되시는 겁니까?"

나름 진지하면서도 살짝 신이 난 듯이 보이는 가르딘 경. 보자마자 어째서 저러는지 알 것 같았다. 그의 화려한 연애 스타일을 이미 들은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즉, 그는 지금 모처럼 이쪽에게 연애 코치를 해 보겠다며 의욕을 불태우는 거겠지.

하지만 아쉽게도 이번만큼은 가르딘 경이 주소를 잘못 짚었다. 라키엘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누구를 선택할지 고민? 응 아니야."

"...네?"

"그런 거 아니라고."

"하면 대체 무엇을 고민하시는 건지...."

"이거 전부 한 큐에 거절할 명분을 좀 고민하고 있어."

"...예에에?"

가르딘 경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데미안도 눈썹을 치켜들었다. 이해가 안 된다는 반응이었다. 그렇겠지. 이해가 안 되겠지. 그런 둘을 향해 살짝 더 짙어진 쓴웃음을 보내 주었다.

"아마 지금 구혼장을 보낸 이들은 나, '라키엘'이 아닌 제국의 황제가 될 황태자에게 구혼장을 보낸 거겠지. 신분으로 보나, 미래의 전망으로 보나 내가 자타공인 대륙의 1등 신랑감일 테니까. 안 그렇겠어?"

"물론 그렇겠지요, 전하."

냉큼 고개를 끄덕이는 가르딘 경. 그 모습에 다시금 피식, 쓴웃음이 나왔다.

"그래서야."

"그래서... 라니요?"

"내가 그토록 각광받는 신랑감인데, 어째서 예전에는 아무도 구혼장을 보내지 않다가 이번에 갑자기 와르르 몰려들듯이 보낸 걸까?"

"...아."

비로소 이쪽의 뜻을 알아챈 걸까. 가르딘 경의 눈빛에 이채가 떠올랐다.

"전하께서 앙부아즈에서 활약하신 일이 대륙 곳곳으로 퍼진 덕분이로군요. 맞습니까?"

"정답."

바로 그거다.

라키엘은 구혼장 봉투 하나를 집어들며 말했다.

"전엔 모두가 나를 폐급으로 여기고 있었겠지. 병약한 황태자. 조만간 요절할 놈. 그러니 차기 황제가 될 가능성이 없다고들 여겼을 테고. 썩은 동아줄 취급을 한 거 아니겠어?"

실제로 다들 그랬을 터다. 조금만 생각해 봐도 쉽게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실제로 별궁에서 들은 소문도 그랬다. 이쪽보다도 오히려 2황자에게 은밀한 구혼이 더 많이 빗발쳤다고도 했다.

'당연하지. 내가 요절하면 2황자, 그 녀석이 황태자위를 물려받고 안정적으로 황위를 이을 테니까.'

하지만 2황자는 그 모든 구혼을 거절했다. 듣기로는 '자신보다 형님이 먼저여야 한다'고, '그게 올바른 순서이니까'라는 이유를 꺼냈다나 뭐라나.

"한데 이젠 그게 변해 버린 거야. 내가 앙부아즈에서 벌인 일 때문에."

난데없이 전장 한가운데에서 정체를 드러내 버렸다. 심지어 소드마스터 쟈빌론을 때려잡아 버렸다. 계획에도, 예정에도 없던 일이었다.

어쨌건, 덕분에 이쪽의 건재함(?)이 대륙 방방곡곡에 널리널리 퍼져 버렸다. 이쪽을 향하던 의혹의 시선을 싸그리 날려 버렸음도 물론이었다.

"갑자기 내 주가가 졸지에 떡상... 아니, 내가 원래 지니고 있던 1등 신랑감의 가치를 모두가 확 깨달은 거지. 남에게 빼앗길 수는 없다고, 무조건 잡아야 한다고, 다들 경쟁적으로 구혼장을 보낸 걸 테고."

즉, 지금 시점에서 이쪽은 대륙 최고의 로또남이 되었다. 모두가 이토록 열렬하게 구혼장을 보낼 법도 했다.

하지만... 그게 문제다!

'왜냐고? 난 황제가 될 생각이 없으니까!'

솔직한 진심이었다. 황제 같은 거, 되기 싫다. 수많은 일거리에 치여서 골치 아프게 사는 것도 사양이었다. 그냥, 황족의 지위만 누리면서 평생 탱자탱자 건물주스러운 만수르 라이프를 즐기고 싶었다.

'그런데도 굳이 2황자와 황태자 자리를 놓고 경쟁했던 건... 혹시나 발생할 대전쟁에 대비하기 위한 거였고.'

한데 이제는 쟈빌론이 몰락했으니 대전쟁의 위험도 사라졌다. 하니 몇 가지 문제만 더 해결하면? 슬슬 2황자 녀석에게 황위를 양보할 생각이었다.

'그러니까 이 구혼을 받으면 안 되지!'

라키엘은 굳게 다짐했다.

가르딘 경이 의아한 듯 물어왔다.

"한데 전하, 이상합니다. 모두가 전하의 능력과 전망을 이제야, 비로소 인정하게 된 상황이 아닙니까? 한데 어째서 구혼장을 거절하시겠다는 건지...."

"이해가 안 돼?"

"예. 그동안 인정받지 못하던 것 때문에 삐치신 건가 싶기도 하고."

"쓰읍."

"...죄송합니다."

가르딘 경을 일거에 격침시켰다.

단언컨대, 삐친 건 아니다. 절대로 아니다. 구혼을 받을 수 없는 이유는 명백하다. 받으면 사기 결혼이 되니까.

'저들은 내가 황제가 될 줄 알고 구혼을 한 건데, 나는 황제가 될 생각이 없단 말씀이지.'

말 그대로 구혼장을 보낸 이들은 가문의 미래와, 신부의 인생을 걸고 이쪽에게 배팅을 한 거다. 한데 이쪽이 상의도 없이 황제가 되기 싫다며 상장폐지(?)를 감행하면? 그럼 아내가 될 사람은 인생을 저당 잡혀 사기를 당하는 셈이 된다.

그건 싫었다.

그렇게 살고 싶진 않았다.

'그런데... 쓰으읍. 구혼장을 어떻게 모조리 거절하냔 말이지.'

문득, 아까 구혼장을 건네던 황제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 어렴풋이 보았다. 황제의 눈동자에 약간의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 내심 이번 구혼장 폭격을 매우 즐거워하고 있는 거겠지.

한데 적절한 명분 없이 무작정 구혼장을 거절할 수 있을까.

'아니, 절대로.'

불가능할 거다.

생각할수록 골치가 아파졌다. 마차가 별궁에 도착할 때까지도 그랬다. 적당한 거절 구실이 떠오르지가 않았다. 뾰족한 명분이 생각나지가 않았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좀 걸을까.'

모처럼, 몇 개월 만에 돌아온 별궁. 늦은 저녁의 정원이 고요한 밤공기로 스며들며 이쪽을 반겼다. 고즈넉하고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잠시 걸으며 머리를 식힐까 싶었다.

데미안만 대동하고서 천천히 걸었다. 한데 여독을 풀기도 전에, 황제와의 대련으로 얻은 피로가 쌓이기도 전에 그렇게 걸은 게 조금 무리였을까. 혹은 밤바람이 생각보다 차가운 탓이었을까.

딩동!

[오장육부가 당신의 무책임한 야근 강요 행위를 규탄합니다.]

[심장 : 야! 여기 야근 소리 안 나게 해라!]

[허파 : 이젠 좀... 쉬고 싶허억... 파하....]

[대장 : 형님들, 이 인간 잽싸게 방으로 튀어가게 하려면 괄약근을 푸는 게 빠를지, 괄약근을 리본 모양으로 묶는 게 빠를지 고민이 되지 말입니다?]

[간장 : 둘 다 해 보면 안 될까?]

[위장 : 그러다가 툭 끊어지면... 어우야ㅋㅋ]

[콩팥 : 궁딩이로 지렸다-!]

"...."

처음엔 그냥 투덜거리는 정도인 줄로만 알았다. 뭐라고 와글와글 떠들든 무시하려 했다. 한데 그 순간이었다.

...꾸르릉륵?

'억?'

별안간, 아랫배가 꿀렁거렸다. 급격히 아파 왔다. 그러니까 이건....

딩동!

[대장 : 어머나, 진짜로 풀어 버렸지 말입니다? 히히히.]

[대장이 당신의 하복부에 강력하고도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당신의 하복부에서 파멸적 재난의 징후가 감지됩니다.]

...꿀러렁?

'거억엉.'

라키엘은 저도 모르게 헛숨을 들이마시며 아랫배를 움켜쥐었다. 그러니까 이건... 급x 신호였다! 그는 당황해서 속으로 외쳤다.

'야 뭔데. 나한테 왜 이러는데!'

[심장 : 몰라서 물어?]

심장의 불만 가득한 반문이 날아왔다.

[심장 : 우리가 매일 몸뚱이 너한테 얼마나 많은 일을 해 주는데. 온종일 심장도 뛰게 해 줘. 숨도 쉬게 해 줘. 소화도 시켜 줘. 그러면 우리도 좀 저녁엔 정상적으로 쉬고 그래야 하는 거 아님? 이럴 거면 최소한 야식이라도 좀 빵빵하게 챙겨 주든가.]

'아니, 나도 그건 아는데. 그런데....'

[심장 : 그런데 뭐.]

'가끔은 나도 피치 못할 사정이 있는 거 아니겠냐?'

[심장 : 가끔이 아니라 거의 매일 같은데?]

'어오, 좀! 나 지금은 진짜 심각하다고.'

라키엘은 사정조로 말했다. 안 그래도 때아닌 구혼장 폭격 때문에 골치가 아픈 터였다. 이걸 어떻게 거절할까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다른 누군가에게 떠넘겨서라도 무마하고 싶....

'...어? 잠깐만.'

비통함(?)을 만끽하던 라키엘은 멈칫했다. 방금 심장에게 대꾸하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의 끄트머리. 그 꼬리를 움켜쥐었다. 생각의 단서를 이어 갔다. 조각조각 떠오르는 파편을 연결했다.

그러자 조금씩, 큰 그림이 그려졌다.

'이거, 잘하면....'

되겠다.

가능성이 보인다.

구혼장을 깔끔하게 처리하는 것은 물론이고, 앞으로의 탱자탱자 백수 라이프의 기반도 깔끔하게 다져둘 수 있을 듯했다.

그러니까....

'대장! 멈춰!'

[대장 : 싫은데 말입니다...?]

'안 멈추면 나 보름 동안 단식한다? 감당할 수 있겠어?'

[대장 : 헉.]

꾸르릉....

대장의 기겁하는 소리와 함께 괄약근의 반란이 중단되었다. 극심하게 아프던 아랫배의 통증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됐다. 자신감(?)을 회복한 라키엘이 고개를 들었다. 뒤를 따르던 데미안을 향해 말했다.

"데미안. 아까 보낸 마차, 다시 준비시켜."

"예?"

이쪽이 별안간 아랫배를 움켜쥐는 통에 의아해하고 있던 데미안이었다. 이쪽의 명령에 녀석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2황자궁으로 가야겠다."

"지금 이 늦은 시간에... 말입니까?"

"어."

당장 가 봐야겠다.

방금 떠올린 큰 그림을 실현하려면, 밀려든 구혼장을 처리하려면 그곳만큼 적절한 곳이 없을 테니까.

'생각해보면 그래. 지금 구혼장을 보낸 왕실, 가문들, 사실 엄밀하게 따지자면 나라는 사람이 아닌, 황제가 될 황태자에게 구혼장을 보낸 거니까. 그럼 나중에 실제로 황제가 될 놈에게 구혼장을 떠넘기면 되는 거잖아?'

바로 그거다.

서로가 윈윈.

모두가 만족할 수 있다.

라키엘은 즉석에서 떠올린 '2황자에게 구혼장 짬(?) 시키기' 작전의 큰 그림을 위해 마차에 올랐다. 그를 태운 마차가 거침없이 2황자궁으로 달려갔다.

145화. 구혼장 처리법 (2)

덜거덩, 다각다각.

어느새 어둑해진 거리를 굴러가는 마차. 나직한 덜컹거림 속에서 라키엘은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때마침 마차가 익숙한 장소를 지나는 중이었다.

'...로이-하비교.'

황도 마젠타를 가로지르는 마제나 강.

그 강에 놓인 가장 큰 다리.

약 300년 전의 전설적인 영지설계사 로이드 프론테라가 건설한 현수교이며, 또한 자신과 2황자가 황태자위를 놓고 정정당당히(?) 겨룬 장소이기도 했다.

'하필이면 2황자 녀석을 만나러 가는 길에 딱 여기를 지나가네.'

치미는 공교로움에 쓴웃음이 배어났다. 한편으로 생각해 보니 2황자와 참으로 오랜만에 마주하겠구나 싶었다.

'대결을 한 뒤로는 처음인가.'

아마도 그런 것 같다.

오가며 다른 이들을 통해 소식이나 가끔 들었지, 직접 얼굴을 마주하는 건 그날 이후로 오늘이 처음이다.

심지어 황제가 뇌졸중으로 쓰러져 있던 때에도 그랬다.

묘한 우연인지, 혹은 의도적인 회피였는지, 녀석은 이쪽이 자리를 비우고 있을 때에만 황제를 문병했다.

그러고는 행여나 이쪽과 마주칠까 후다닥 돌아가곤 했다.

'뭐, 그동안 나도 정신없이 바빴으니까.'

돌이켜 보면 참 많은 일을 벌였다.

데미안을 검투장에서 구해 내고, 별궁 한의원을 오픈하고, 간호사를 모집하고, 자금 마련을 위해 크레모에 다녀오고, 앙부아즈에선 더 바쁘게 굴렀다.

그 와중에 2황자를 따로 찾아가 수다나 나눌 여유 따윈 없었다.

'그리고... 애초부터 서로를 살갑게 방문하고 교류하는 사이는 아니었으니까.'

원래부터 그랬다.

소설 마검황의 내용이 떠올랐다.

라키엘과 2황자 테오도르는 배다른 형제였다. 라키엘과 테오도르, 둘 모두 태어나며 어머니를 잃었다.

공교롭게도 둘 모두 지독한 난산이었고, 연이은 두 번의 비극에 충격을 받은 황제는 황후의 자리를 공석으로 두게 되었다던가.

어쨌건 그렇게 라키엘과 테오도르는 각각 엄마 없이 자랐다. 하지만 그런 동질감이 둘을 이어주지는 못했다.

'잠재적인 경쟁 관계였으니까. 원하든, 원하지 않았든. 태생적으로.'

게다가 이쪽은 진짜 라키엘이 아니다. 그저 라키엘인 척만 하고 지내는 가짜일 뿐. 엄밀하게 따지면 테오도르와는 정말로 아무런 연관도 없는, 생판 남일 뿐이다.

한데 녀석을 태연하게 찾아가 친한 척을 하며, 위선을 떨며 지내는 건 싫었다.

껄끄러웠다. 스스로가 가증스러워질 것 같았다. 그럴 바엔 차라리 데면데면한 것이 훨씬 나았다.

'난 라키엘이 아니니까.'

2황자와 가족이 아니니까.

"...."

그러고 보니 진짜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는 어떻게 됐을까. 문득 떠오른 생각에 라키엘, 아니, 이한은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궁금했다. 한편으로는 약간의 죄의식이 들기도 했다. 어쨌거나 녀석의 몸을 이쪽이 강탈한 셈이니까. 그것이 고의였든, 아니었든 간에 말이다.

그래서였다.

문득 궁금해졌다. 확인을 해 보고 싶어졌다. 마침 물어볼 곳도 떠올랐다. 그는 자신의 내면을 향해 물었다.

'어이.'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살짝 인상을 찡그렸을 뿐, 대화 시도를 멈추지 않았다.

'듣고 있는 거 다 알거든. 대답 좀 하지?'

그러자 곧 반응이 왔다.

딩동!

[당신의 대화 시도 때문에 오장육부의 여가생활이 중단됩니다.]

[심장이 TV를 끕니다.]

[허파가 단전호흡을 그만둡니다.]

[대장이 괄약근 줄넘기를 멈추었습니다.]

[간장이 간장 공장 공장장을 집으로 돌려보냅니다.]

[위장이 밀리터리 위장크림을 세척합니다.]

[콩팥이 콩팥 밭에서 땀을 닦습니다.]

'...니들 뭐하고 있던 거냐.'

절로 피식,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느껴졌다. 각자 쉬고(?) 있던 오장육부가 이쪽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너희들, 내가 원래 이 몸의 주인이 아닌 건 알고 있지?'

오장육부에게 물었다.

대답이 즉시 돌아왔다.

딩동!

[심장 : 당연하지. 우리가 이 몸 관리자인데 그걸 어떻게 모를까ㅋ]

...역시.

알고 있구나.

라키엘은 질문을 이어 갔다.

'그럼 원래 이 몸의 주인이었던 사람 말이야. 진짜 황태자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 그 사람 영혼이 어떻게 됐는지 혹시 알 수 있어?'

원래 라키엘의 영혼. 그의 행방을 알고 싶었다. 알고 나면? 솔직히... 거기까진 모르겠다.

'상황에 따라 도울 수도 있고. 혹시나 다시 이 몸을 되찾겠다며 난리를 피우면, 서로가 만족하도록 합의를 볼 수도 있고.'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 몸을 덜컥 돌려주기는 싫었다. 원래 죽었어야 할 몸을 살려주고 가꾼 건 이쪽이니까.

그러니 진짜 라키엘의 영혼과 충분히 대화나 협상을 하며 합의를 볼 생각이었다.

아니, 최소한 그럴 대비라도 조금은 해두고 싶었다. 그래야 조금은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

어쨌건 그런 생각으로 오장육부에게 황태자 라키엘 영혼의 행방을 물었다. 한데 돌아오는 대답은....

[심장 : 우리도 몰라~]

'음?'

[심장 : 진짜야. 우리도 몰라. 어떻게 알겠냐. 하루아침에 그냥 주인이 휙 하고 바뀌어 버렸는데.]

'나로?'

[심장 : 어ㅋ 너로. 우리가 뭐 어떻게 손 쓸 틈도 없었어. 너무 자연스러웠거든, 바뀌던 과정이.]

'...조금 더 자세히 말해 줄 수 있어?'

재차 물었다.

오장육부 녀석들의 싱긋 웃는 소리가 들렸다.

[심장 : 미안. 진짜 진짜 모름ㅎ]

'...그래?'

[심장 : 어ㅎ]

"...."

쓰읍.

괜한 기분 탓일까. 뭔가 알고 있으면서도 슬쩍 숨기는 느낌인데. 암만 봐도 좀 찜찜한데. 하지만 더 물어볼 시간은 없었다. 어느새 마차가 멈추어 섰기 때문이었다.

"전하, 도착했습니다."

고막을 쿡 찔러 오는 데미안의 목소리. 퍼뜩 눈길을 들었다. 창밖으로 고색창연한 건물이 보였다.

처음으로 보는 건축물.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아마도 2황자궁이겠지.

"그래, 가자."

마차에서 내렸다. 쌀쌀한 겨울바람을 헤치고 본궁 건물로 들어갔다. 늙은 시종장이 이쪽을 맞이했다.

"2황자궁의 살림을 도맡은 늙은이가 제국의 합당한 후계자이신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늦은 저녁, 심지어 아무런 예고도 없는 방문이었다.

그런데도 시종장은 전혀 당황하지도, 흐트러지지도 않은 태도와 옷차림이었다. 설마 이런 시간까지 일을 하고 있었던 건가. 의문은 곧 풀렸다.

"여쭙기 송구하오나, 황태자 전하께서는 혹여 2황자님께 용무가 있으십니까?"

"으음."

"이렇게 아뢰옵기 실로 송구하오나, 지금 2황자께서는 식사 중이십니다."

"식사? 이 시간에?"

저녁을 먹기엔 좀 늦은 시간인데? 혹시 야식이라도 먹는 건가, 그 녀석이? 라키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늙은 시종장의 점잖게 주름진 얼굴에 희미한 난처함이 서렸다.

"예, 황태자 전하. 최근 2황자께서 식사에 많은 시간을 들이고 계신지라...."

"오래 먹는다고?"

"예, 전하."

"흐음, 천천히 오래 식사를 하는 습관이 나쁘진 않지. 소화기관에 부담도 덜 될 테고. 사실 그거 몸에 좋은 거거든."

라키엘은 싱긋 웃었다. 이 시간까지 시종장이 정복을 차려입고 있던 이유도 알 것 같았다.

아마도 조금 전까지 2황자의 식사 시중을 들고 있었던 거겠지.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하면, 식사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도록 하지. 예고도 없이 찾아온 방문객 주제에 식사 시간을 방해하는 건 실례일 테니까."

"실로 송구하옵니다, 전하."

"아냐. 괜찮아. 식사가 끝나면 내가 방문했다고 알려 주면 돼."

"명을 받들겠습니다."

시종장이 황송하게 허리를 접으며 물러났다. 그때부터였다. 라키엘은 응접실에서 기다리며 자신의 계획을 살포시 점검했다.

'구혼장, 그걸 2황자 녀석에게 떠넘겨야 해.'

이른바 '구혼장 짬처리 작전.'

충분한 가능성이 보였다. 현실적인 실행각이 보였다. 2황자의 동의와, 구혼 상대의 호응만 있다면 성공시킬 자신도 있었다.

'어차피 나는 황위에 오를 생각이 없으니까. 안정적인 황족 라이프를 즐길 기반만 마련되면 황위 같은 거, 2황자 녀석에게 떠넘길 거니까. 그러니까 황제의 반려자, 황후가 되고 싶어서 구혼장을 보낸 여자들을 2황자 녀석과 이어지게 해 주는 쪽이 맞아. 그게 옳은 길이고.'

확신이 들었다.

물론 꼬장꼬장한 난관이 없진 않을 터였다.

'황제의 반응이 뜨겁긴 할 텐데... 그건 뭐.'

충분히 무마할 자신이 있다. 아니, 오히려 역으로 황제의 의표를 찌를 계획도 빵빵하게 세워뒀다.

황제의 반응은 딱히 걱정할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이번 일로 황제에게 극찬을 들을 거니까.

그러니 2황자궁에서 연회를 개최하면 된다. 구혼장을 보낸 가문의 레이디들을 모조리 초청하면 된다. 그렇게 2황자의 실물을 보여 주면?

게임 끝이다.

무조건 성공한다.

레이디들의 눈동자가 하트로 변할 거다.

'2황자 녀석. 나보다 키도 크고, 체격도 좋고, 비율은 쩔고, 훈남 얼굴에다가 운동도 잘하고, 성격도 성실해, 술 담배도 안 하고. 완전 최고거든.'

게다가 황족 수저까지 갖췄다.

요리 보고, 죠리 봐도 최강의 특급 핵존잘 신랑감이었다. 이 정도면 필승 카드다.

비유하자면, 지구최강 아이돌 산탄소년단 멤버급의 비주얼과 만수르급 재력, 미국 대통령 아들의 사회적 지위를 한 몸에 지닌 존재니까.

...라는 생각을 하던 와중이었다.

"이런, 제가 소식을 듣는 게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이 시간에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어쩐지 묵직한 목소리가 고막을 푹 찔러왔다. 고개를 들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허겁지겁 응접실로 들어오는 거구의 남자가 보였다. 아니, 거구라는 말로도 부족했다.

몸무게는 대강 봐도 150킬로그램은 되어 보였다. 걷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턱 아래엔 삼겹살을 능가하는 5겹으로 겹친 살집이 출렁였다. 배도, 옆구리도, 온몸이 당장 터질 것처럼 빵빵했다.

'날 아나? 아니면 2황자궁에서 일하는 시종인가? 그런데 시종 중에 저렇게 뚱뚱한 사람이 있어?'

아무리 봐도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누구?"

라키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은 2황자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웬 난데없는 초고도 비만남이 와서 미안한 듯이 진땀을 뻘뻘 흘리며 들어오는 걸까. 의아했다.

한데 이쪽의 물음을 받은 비만남이 쑥스러운 듯이 볼살을 푸들거리며 웃었다.

"접니다."

"...음?"

"저라구요."

"...으음?"

"하하하...."

"...."

어색하게 웃는 비만남. 그 푸짐한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자니 비로소, 조금씩 익숙한 이목구비가 고생대 캄브리아기 지층에 뒤덮인 삼엽충 화석처럼 희미하게나마 엿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저 이목구비는....

"저, 테오도르입니다, 형님."

"...."

"오랜만에 뵙네요."

"...거억."

딸랑 1년도 안 되는 사이에 지나치게 튼실빵빵(?)해진 2황자의 모습에, 라키엘은 신음성을 내뱉고 말았다.

146화. 다이어트는 네 운명 (1)

처음엔 괜찮았다. 괜찮을 줄 알았다. 그 유명한 로이-하비교에서 황태자인 형과 겨룬 후, 그 대결에서 패배한 이후에도 정말로 괜찮았다.

그런... 줄로만 알았다.

처음에는.

"...."

2황자, 테오도르는 복잡한 눈길을 들었다. 하지만 라키엘은 그 눈빛을 볼 수 없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테오도르의 눈꺼풀에 피둥피둥하게 찐 살 때문에 눈빛이 가려졌기 때문이었다.

어쨌건 테오도르는 띵띵해진 입술 사이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괜찮은... 줄로만 알았는데.'

아니었다.

처음 3일 동안은 평소와 똑같았다. 아침에는 일어나 검술 훈련을 하고, 오전 내내 제왕학을 비롯한 각종 수업을 받았다.

점심에는 산책을 하고, 오후에는 책을 읽었다. 저녁이 되면 각계 인사, 귀족들과 만남을 가졌다.

너무나 정석적이고 성실한 황자의 하루였다. 매 순간, 어떤 일정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열심히 훈련했고, 성심껏 공부했으며, 모든 만남에 진지했다.

그러다가 4일째 되는 날, 우연히 깨달았다. 세수를 하다가. 아무 생각 없이 물기를 닦으며 거울을 보다가. 그러다가 불현듯 깨닫고야 말았다.

자신이 형에게 패배한 이후 3일 내내, 단 한 번도 웃지 않았다는 사실을.

"...."

충격이었다.

비로소 실감이 났다. 나는 괜찮지 않았던 거구나. 그저, 괜찮은 척만 하고 지냈던 거구나.

그때부터였다. 지독한 상실감이 엄습해 왔다. 평소에 성실했기에, 어릴 적부터 한 번도 게으름을 피운 적이 없었기에, 그토록 항상 노력하며 자라왔기에... 성심껏 키워왔던 꿈의 크기와 열정의 깊이만큼 상실감도 거대했다.

모든 게 허무해졌다.

언젠가 이룰 수 있으리라던 꿈. 자신도 어쩌면 황제가 될 수 있으리라 품었던 희망. 거기에 걸었던 나날들의 노력과 간절함이 전부 허망해졌다. 부질없게 느껴졌다. 지독한 패배감에 몸부림쳤다.

어쩌면 그래서였는지도 모른다.

저도 모르게, 충동적으로, 밤잠을 뒤척이다가 벌떡 일어나 2황자궁의 주방으로 달려간 것은. 잠옷 차림 그대로 주방에 놓인 과일이며 빵을 걸신들린 듯이 먹어치운 것은.

'태어나서 먹은 모든 음식 중에 제일 맛있었어.'

토하기 직전까지 먹었다. 아니, 위장에 음식을 쑤셔 넣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날, 형에게 패배한 이후 처음으로 편하게 잠을 이룰 수 있었다. 그리고 아침을 맞이했을 때, 자신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을 명확히 깨닫게 되었다.

검술 훈련? 하기 싫었다.

먹어야 마음이 편안해졌다.

제왕학을 비롯한 각종 수업? 귀찮아졌다. 먹어야 마음이 편안해졌다.

산책? 독서? 그걸 해서 뭣하나 싶었다. 각계 인사, 귀족과의 만남? 친교? 성가셔졌다. 의미 없게 느껴졌다. 그딴 것들보단 먹을 때가 훨씬 편안하고 행복했다.

그때부터였다.

아침에 일어나며 꿀 발린 빵을 찾았다. 과일이며 각종 크림이 발린 과자, 기름에 튀긴 음식, 또 간식, 다시 음식, 또다시 간식, 거기에 푸짐한 야식까지.

눈을 뜨는 순간부터 잠드는 때까지 지치지도 않고 음식을 씹어댔다. 위장을 채웠다. 아니, 위장을 비우지 않았다.

남들이 뭐라건 상관없었다. 행복했다. 그렇게 1년 조금 안 되는 시간을 보냈다. 물론, 지금도 자신은....

"이래 보여도 저는 괜찮습니다, 형님."

"...."

"자고로 남자는 풍채가 좋아야 한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이것도 나름 나쁘진 않습니다. 하하하."

"...."

2황자, 테오도르가 사람 좋게 웃었다. 그의 빵빵해진 볼살이 물풍선처럼 트월킹을 추며 흔들렸다. 그걸 보는 라키엘의 가슴도 철렁철렁 적색경보를 울려댔다.

'이 사태를 뭐라고 해야 되냐.'

난감했다.

혼란스러웠다.

고작 잠깐 몇 달쯤 못 봤다고, 1년도 안 되는 사이에 2황자가 이렇게 빵빵(?)해져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한편으로는 녀석의 상태를 깨달을 수 있었다. 방금 2황자에게서 대략 들은 설명 덕분이었다.

"나쁘진 않아? 온종일 먹고만 지내는 게?"

"예, 형님. 뭐랄까요. 마음이 아주 편안해집니다."

"어, 추, 충분히 그래 보이네."

"그렇지요?"

"...."

그렇기는 개뿔.

딱 보니까 알겠다.

'이놈 이거, 스트레스성 폭식증이구만.'

성실했던 만큼 실패하며 받은 좌절감이 어마어마했던 거다.

아마 그런 실패는 인생에서 처음이었겠지. 황제의 아들로 태어나 실패라곤 모르는 인생을 살아왔을 테니까. 그렇게 주위의 기대만 잔뜩 받으며 자라왔을 테니까.

'성실한 만큼 온실의 화초 멘탈인 거였어.'

결국, 단 한 번의 패배를 극복하지 못하고 이렇게 무너지고 말았다. 아니, 이 경우엔 무너졌다기보단 지나치게 튼실해져 버렸다고 해야 할까.

어쨌건, 라키엘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아. 이러면 나가린데.'

그의 미간이 팍 찡그려졌다.

자신에게 날아온 수많은 구혼장을 짬 처리하려고 찾아온 터였다. 2황자의 협조를 받아서, 2황자궁에서 연회를 열 계획이었다.

연회에 구혼자들을 초청해서, 2황자와 레이디들 사이에 사랑의 짝대기를 이어주려 했다.

물론 성공할 자신도 있었다.

2황자의 스펙이 워낙 쩔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외모마저 엄청난 훈남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 보니?

'...훈남은 개뿔! 당장 훈제 바비큐를 해도 50인분은 나오겠네 진짜!'

2황자의 훈훈한 외모에 기대를 걸고 추진하려던 계획이 근본부터 흔들리고 무너질 판이다. 아니, 이건 로키산맥 짬통 불곰이 계획의 뿌리에 싸커킥을 날리는 수준이다.

'하. 인생 진짜.'

라키엘은 기나긴 한숨을 내뱉었다. 계획을 포기할까. 하지만 이대로 물러나기는 싫었다.

"어이, 너."

"예, 형님."

"너 혹시, 다이어트 해볼 생각 없어?"

"...다이어트라뇨?"

피둥피둥해져서 단춧구멍이 된 눈을 끔벅거리는 2황자. 녀석의 기색을 보니 다이어트라는 말을 처음 접해보는 듯했다.

라키엘은 제안을 정정했다.

"감량 말이야. 살 빼볼 생각 없냐고."

"살을... 말입니까?"

"어."

라키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반드시 해야 한다. 무조건 이놈을 다시 날씬하게 만들어 주어야 한다. 그래야 이놈한테 구혼장을 짬시킬 수 있을 테니까!

의지를 불태우며 설득에 채찍질을 가했다.

"네가 지금 상태에 만족하고 있다니까 이런 이야기를 하기가 조금 조심스러워지기는 하는데, 아무래도 걱정이 되어서 말이야."

"하지만 형님, 저는 지금 상태에 만족합니다."

"그래. 물론 만족하겠지. 나도 알아. 하지만 그 상태, 건강에 결코 좋지가 않아서 하는 소리야."

"건강... 말입니까?"

"어."

확고하게 끄덕.

확신을 담은 눈초리로 설득했다.

"비만인 상태로 지내다간 갖가지 병에 걸릴 거야. 고지혈증이라거나 당뇨병 같은 것들 말이지. 게다가 지나치게 늘어난 체중 때문에 발목이나 무릎 관절도 안 좋아질 거고."

"...."

"그뿐일까. 고혈압은 물론이고 각종 내분비계에 이상이 생길 수도 있어. 지방간이 온다거나, 심장 혈관이 좁아지는 경우도 있고 말이지. 그 밖에도 말하자면 엄청 많아. 그만큼 비만이 위험한 거거든."

"...."

"그런데도 계속 이렇게 지낼 거야?"

"예."

...어째서!

하마터면 빼액 외칠 뻔했다. 2황자 녀석이 쭈뼛거리며 말했다.

"저는, 정말로 괜찮습니다. 정말로요."

"...."

"사실 저도 압니다. 이렇게 지내는 게 여러모로 좋지 않다는 거 말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습니다. 마음이 편안하거든요. 게다가 제가 이런 모습으로 지낸다고 해서 누군가에게 해가 되는 것도 아닐 테니까 말입니다."

"...."

"그러니까 형님의 마음은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굳이 무리해서 살을 빼는 건... 모르겠습니다. 별로 그러고 싶지가 않네요."

"...."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가 않았다. 본인이 싫다는데 어쩌겠는가. 억지로 시켜서 살을 뺄 수도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난리 났네.'

라키엘은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나름 설득을 시도해봤는데, 의외로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난감했다. 무엇보다도, 2황자 녀석의 다이어트 의지가 1도 느껴지지 않는 점이 가장 곤혹스러웠다.

'모름지기 다이어트에 가장 중요한 건 본인의 의지, 의욕, 동기부여인데.'

그게 전혀 되지 않고 있었다.

이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연하지. 남이 등 떠밀어서 하는 다이어트는 한계가 있으니까. 반드시 실패할 수밖에 없으니까.'

이건 무조건이다. 반박의 여지가 없는 팩트다. 설령 적당히 살을 빼는 데까지 성공한다고 해도? 결국엔 다시 요요를 맞이할 확률이 99.9%는 된다.

그러니 반드시, 스스로 살을 빼겠다는 모티베이션을 활활 불태워야 한다. 그래도 성공할까 말까 하는 게 다이어트라는 놈이니까.

'쓰읍. 어떡하지.'

라키엘은 난감한 눈길로 2황자 녀석을 쳐다보았다. 답이 안 보였다.

그냥 비만도 아니고 고도 비만 수준에, 의지도 보이지 않는 이놈을 어떻게 빡쎄게 감량을 시킬까. 무슨 수로 의지를 붙태우게 만들까.

고민스러웠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생각해라, 이한. 생각을 해.'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대뇌피질로 종이접기를 했다. 뇌 주름 사이에 알차게 들어찬 기억의 알맹이를 좌르륵 검색했다.

그러자 서서히, 각이 보였다.

'그래... 생각해보면 이 녀석, 근본은 엄청 성실한 녀석이었지. 책임감도 유달리 강했고.'

소설 마검황에서 보인 모습들이 그랬다. 비록 우유부단한 면 때문에 몰락하긴 하지만, 2황자 테오도르는 기본적으로 성실한 모범생이었다. 그런 녀석의 성격을 떠올리자 실마리가 잡혔다.

'...이거다.'

퍼즐의 조각이 보였다. 발상을 끌어모았다. 쌓고, 조립하고, 조합했다.

2황자가 스스로 감량 의지를 불태우게 만들 마법의 단어를 생성했다. 문장으로 철컥 장전했다. 본격적인 발사를 위해 혓바닥을 침으로 촵촵 적셨다.

"후우. 그렇구나. 내가 네 마음을 모르고서 너무 쉽게 이야기를 꺼냈구나."

"괜찮습니다, 형님."

...괜찮긴.

난 안 괜찮아, 인마.

그런데 이제 곧 너도 안 괜찮아질 거야.

라키엘은 음흉한 미소를 재빨리 접어 넣으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후우. 내가 이 이야기를 하진 않을 수 없겠구나."

"어떤... 이야기를 말씀이신지요?"

"사실은 말이다."

슬쩍 운을 떼며 조준. 일부러 한 템포 뜸을 들여 녀석의 관심을 끌어올리고. 아련하게 발사.

"실은 내가, 앞으로 1년도 못 살게 될 것 같구나."

"...예에?"

놀란 듯 움찔하는 2황자 녀석.

그러나 라키엘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절반만 진실이라서, 그렇기에 진짜 진실과 거리가 백만 광년쯤 떨어진, 낯짝 두껍고 새빨간 거짓말을 회전초밥 접시 내밀듯이 착착, 혓바닥에 올려놓기 시작했다.

147화. 다이어트는 네 운명 (2)

"...예에?"

2황자, 테오도르는 움찔했다. 귀가 의심스러웠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형님이 1년도 못 살게 될 것 같다고?'

혹시 형님은 고약한 농담을 하려는 걸까. 그럴 거란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그렇게 믿고 싶었다. 무려 자신을 당당히 꺾은 형님이니까. 앙부아즈 내전에서 영웅적인 활약을 선보인 형님이니까. 자신의 건재함을 만방에 알린 분이니까.

그렇게 믿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의 이복형제, 황태자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테오도르는 깨달을 수 있었다. 지금 황태자가 꺼내고 있는 저 말이 결코 농담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래. 혼란스럽겠지. 나도 이런 이야기를 느닷없이 꺼내서 미안하구나. 하지만 어쩔 수가 없겠다. 언젠가 밝혀질 사실이라면, 지금 여기서 네게 밝히는 게 차라리 낫겠지."

"...."

"원래는 내 주치의인 가르딘 경과 나만 알고 지내려고 했어. 앞으로 내 수명이 1년도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이지."

"정말... 입니까?"

"어."

농담이 아니다.

'일부'는 사실이다.

라키엘은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수에 젖은 눈길을 들어 테오도르의 눈동자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일부러 잠깐 템포를 늦추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의도적인 착잡한 침묵이 백 마디의 말보다도 더욱 진한 진실성을 2황자의 가슴에 퐁당퐁당 던져주었다.

"그런...."

2황자가 혼란에 빠져들 무렵.

타이밍을 재던 라키엘이 칼 같은 진입각을 잡으며 혓바닥을 놀렸다.

"알아. 믿기지가 않겠지. 믿기 어렵겠지. 사실은 나도 그래. 인정하기 싫거든. 안 그렇겠어?"

"형님."

"후우. 솔직히 두렵구나. 내가 언제 갑자기 쓰러질지, 사람 구실을 못 하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 당장 내일 아침부터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신세가 될 수도 있고."

"...."

"그래서였어. 별궁에서 환자들을 돌보기 시작했던 건. 앙부아즈까지 가서 부상병을 돌본 건. 최대한 많은 사람들을 치료하려고 애써왔던 건 말이야."

"그게, 형님의 병과 관련이 있는 겁니까?"

테오도르가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라키엘은 피식 웃었다.

새빨간 거짓말을 태연하게 척.

"아니."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나와는 전혀 관련 없어. 오히려 너와 관련이 있지."

"저와 말입니까?"

"어."

흠칫하는 테오도르.

녀석을 향해 의미심장한 눈길을 던져주었다.

"내가 그런 식으로나마 세상에 선행을 뿌려 두면, 언젠가 그 보답이 돌아와 내 대체자를 이롭게 도와주지 않을까 싶어서.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렇게라도 되면 좋겠구나 싶어서. 조금은 막연한 희망으로 말이지."

"그럼...."

"맞아. 그 대체자가 누구겠어."

"절 위해... 일부러 애를 쓰며 수많은 환자들을 돕고 살려왔다는 겁니까?"

"으음, 대놓고 그렇게 말하니까 굉장히 쑥스러워지는구나."

라키엘은 싱긋 웃어 버렸다. 반대로 눈동자는 더욱 아련한 우수로 알차게 채웠다. 즉, 입으로는 밝은 미소를 지으며 눈빛으로는 슬픈 기색을 띄웠다.

"그래서 미안하구나. 정말로."

더욱 아련하게. 하지만 그게 티가 나지는 않게. 오히려 숨기려고 애쓰려는 것처럼 보이게. 그렇기에 한결 착잡하고 쓸쓸한 기색이 꾸안꾸 스타일처럼 스며들도록. 사실과 거짓을 황금비율로 얍얍촵촵 섞어서 혓바닥에 척척 올렸다.

"정말로 미안하다. 그동안 네가 이토록 큰 상실감에 고통받고 있는 줄은 정말로 몰랐다. 이렇게 무너져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어."

"형님, 저는...."

"아니, 너는 잘못 없어. 잘못이 있다면 그건 내 것이겠지. 내가 너에게 무심했던 시간들, 오직 내 생각만 하며 바쁘게 보냈던 나날들 말이다. 만약 네가 이렇게 괴로워하고 있는 줄 알았더라면 차라리, 그날 너와 대결을 하는 게 아니었는데...."

"...."

"그날 내가 물러났어야 했어. 폐하의 말씀을 듣고 너에게 황태자위를 순순히 넘겼어야 했어. 그랬다면 네가 이렇듯 힘든 시간을 감내하지 않아도 되었겠지. 내가 너무 이기적이었다."

"하지만 형님, 이건 전부 제가 못난 탓입니다. 형님의 탓이 아닙니다."

테오도르가 다급하게 반박(?)을 날려 왔다. 하지만 라키엘은 태연하고도 무겁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한숨과 대사를 공기 반 소리 반으로 묵직하게 푹 밀어주고. 다시 발사.

"전적으로 내 탓이다. 너마저 이런 모습으로 무너져 있는 동안 아무런 관심도 기울이지 못하고, 결과적으로 내 수명이 다한 후의 황가의 미래까지 어둡게 만들어 버린 건, 전부 내 불찰인 것 같구나."

"형님...."

"미안하다. 정말로."

손을 내밀었다. 테오도르의 손을 슬며시 붙잡았다. 그 순간, 손끝을 살포시 떨어 주었다. 그 와중에도 손에 힘을 주어보려고 애쓰듯, 부르르.

"미안...하다."

말끝을 떨었다. 고개를 숙였다. 사죄하듯. 더욱 깊이 고개를 숙였다. 덕분에 표정을 숨길 수 있었다. 그동안 힘껏 연기를 하느라 굳어가던 안면 근육에 모처럼 빵긋 휴식을 줄 수 있었다.

'후우! 잘했어. 이쯤이면 결과가 슬슬 보일 때가 됐는데.'

라키엘은 자신했다.

폭탄(?)은 충분히 던졌다. 이제 터질 때가 됐다. 그러니까 마음속으로 카운트를 세자면, 셋, 둘, 하나....

"아닙니다, 형님! 형님의 잘못이 아닙니다!"

...왔구나.

2황자 테오도르의 격정에 잠긴 목소리가 들려온 순간, 라키엘은 쾌재를 불렀다. 하지만 일부러 반응하지 않았다. 그냥 그대로 고개를 푹 숙인 상태를 유지했다. 그런 이쪽의 모습 덕분인지, 테오도르가 점점 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제가 잘못했습니다. 형님? 형님께는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그냥 이건, 제가 못난 탓입니다. 그저 형님께 패배했다고, 원하는 자리를 얻지 못했다고... 고작 그걸로 괴로워하며 못난 꼴을 보인 제 잘못입니다, 형님."

"...."

"게다가 저는... 형님께서 그렇게 홀로 괴로움을 감내하고 계신 줄도 몰랐습니다. 그것도 모르고 사소한 투정만 부린 제가 못난 놈입니다. 죄송합니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테오도르."

"예, 형님."

"나한테 미안해하지 마라."

"...예?"

고개를 들어보니, 어느새 녀석이 울먹이고 있었다. 녀석의 눈을 차분히 바라보며 말해주었다.

"테오도르, 넌 내게 조금도 미안해할 필요가 없어. 하지만 그럼에도 정 미안해하려거든, 너는 황가의 위대한 선왕들께, 그리고 자신의 미래를 맡기고 있는 제국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미안해하여야 할 거야."

"...."

"그리고 미안함을 가슴에 품겠다면, 그걸 만회하려는 모습도 보여야겠지."

"예, 형님."

"하면 이제부턴 어찌할 생각이지?"

"살, 빼겠습니다."

"그래. 좋구나."

마침내 녀석의 입에서 원하던 대사가 나왔다! 하지만 라키엘은 섣불리 기뻐하지 않았다. 대신 마음속으로만 조용히 주먹을 불끈 쥐었다.

'...빙고!'

제대로 먹혔다. 테오도르 녀석의 피둥피둥한 눈꺼풀 사이로 슬쩍 엿보이는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저건, 제대로 동기부여가 되어서 불타오르는 의지의 눈동자였다.

'역시 이 녀석도 소설의 성격 그대로야.'

성실하고 책임감 가득한 모범생. 약간 답답한 우유부단 고구마지만, 그럼에도 자신에게 지워진 책임을 버리고 도망치지는 않는 녀석.

그런 테오도르의 성격을 제대로 찔렀다. 이쪽이 얼마 살지 못할 거라고. 네가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고. 한데 네가 이런 모습이니 우린 다 망했다고.

아련함으로 포장해서 궁상을 잔뜩 떨었다. 그런 궁상이 위기감으로 변해서 녀석의 지방 덩어리 속에 뒤덮여 있던 책임감과 의무감을 자극시킨 모양이었다. 노렸던 의도가 제대로 먹힌 셈이었다.

"그럼 말이다. 테오도르?"

"예, 형님."

"네가 감량을 하겠다니 기쁘구나. 그러니 내가 제안을 하나만 해도 될까?"

"말씀하십시오, 형님."

녀석의 눈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반짝거렸다. 지금은 이쪽이 뭘 하라고 해도 죄다 따를 기세였다. 딱 좋다.

라키엘은 회심의 미소를 슬쩍 숨기며 말했다.

"너, 오늘부터 별궁에 와서 지내자."

"...예?"

"기왕 살을 빼겠다고 결심한 이상, 내가 널 도와주고 싶은데. 안 될까?"

"무, 물론 됩니다."

"그렇겠지?"

"예, 옙."

"고맙구나."

탁, 탁.

아련하게 웃으며 녀석의 어깨를 짚어 주었다. 그걸로 도장 쾅쾅. 제국의 2황자 테오도르의 별궁행이 확정되었다.

'넌 이제 살 빼기 전엔 별궁에서 못 나가는 거야. 크후후!'

이로써 설득(?) 성공.

지옥 다이어트의 시작이었다.

'...라곤 하지만, 이놈 다이어트에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면 곤란한데.'

다음 날, 라키엘은 별궁 한의원 원장실에서 고민에 잠겼다. 그리고 물끄러미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

그곳에 정원을 장식하는 분수대가 있었다. 분수대 가득 채워진 따스한 온수 속을 첨벙첨벙 열심히 걷는 살덩어리가 보였다.

2황자, 테오도르였다.

"...."

마음 같아선 당장 마라톤으로 정원 뺑뺑이를 시키고 싶다. 하지만 저 체중으로 그랬다간 무릎이며 발목이며 관절이 다 상하겠지. 그러면 다이어트 작전에도 차질이 생길 테니... 참으로 갑갑한 노릇이다.

'일단 녀석이 내 프로그램을 잘 따라주는 것까진 좋긴 한데.'

라키엘은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문득, 지난밤에 2황자 녀석을 별궁으로 데려왔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 녀석에게 말해 주었다. 이제부터는 먹으라는 것만 먹고, 하라는 운동만 하라고. 알려주는 식단과 운동 루틴을 무조건 따르라고.

다행히 녀석은 이쪽을 잘 따르고 있다. 하지만 다행이지 못한 점도 있었다.

'빼야 할 살이 너무 많다는 거지.'

다이어트 시작에 앞서 녀석을 진맥부터 해보았더랬다. 그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체중이 무려 151.3킬로그램이었다. 예전, 로이-하비 교에서 녀석과 겨루었던 때보다 거의 80킬로그램이 불어난 셈이었다.

'몸에 무리가 안 가도록 80킬로그램을 다 빼려면... 최소 몇 개월은 걸릴 텐데.'

아무리 좋은 식단이라도, 제아무리 빡쎄게 운동을 해도 넉넉히 그 정도는 걸릴 터였다. 그게 문제였다.

'그때까지 구혼장에 대한 대답을 미룰 수 있을까? 아니. 절대로.'

불가능할 것이다. 아마 황제도, 구혼장을 보낸 이들도 이쪽의 대답을 한가롭게 기다려 주지는 않을 테니까. 하니 그 전에 속전속결로 2황자 녀석을 날씬하게 만들고, 구혼장을 녀석에게 짬(?)시켜야 하리라.

즉, 지금의 관건은 식단과 운동 외에 신체에 무리를 주지 않으면서도 다이어트 속도를 확 올릴 방법을 찾는 것이었다.

"...."

암만 생각해도 떠오르는 게 없는데.

라키엘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차라리 궁정마법사의 변장 마법을 써볼까도 싶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자칫 변장 마법이 풀려 버렸을 때의 뒷감당이 안 될 수도 있으니까.

'쓰읍. 방법이 도통 떠오르지가 않네.'

한약?

그런 한약이 있다면 진즉 팔았으리라. 하지만 아쉽게도 없었다. 한국의 한의원 중에도 살 빠지는 약이라며 판매를 하는 곳도 있지만, 그건 대부분 사기라고 생각하는 그였다. 하여 한국에서 부경 한의원을 운영하면서도 그런 약은 팔지 않았다.

'쯧. 그럼 어떡하지.'

그는 고민에 잠겨 하루를 보냈다. 그동안 황태자의 귀환 소식을 듣고 진료를 받으러 몰려든 수많은 환자를 진맥하고, 진단했다. 정원 분수대에서는 2황자가 우루스와 꾸꾸의 응원(?)을 받으며 열심히 첨벙거렸다.

한데 그러던 저녁 무렵이었다.

"전하, 앙부아즈의 왕녀가 보낸 물건이 별궁에 당도하였습니다."

"...음?"

저녁 식사를 하며 여전히 고민의 바다에서 참방거리고 있으려니, 별궁의 시종장이 뜻밖의 소식을 전해 왔다.

"물건? 앙부아즈의 왕녀가 보낸?"

"예, 전하."

"...."

그러고 보니 떠올랐다.

'베스파로스 여왕벌 담금주, 마침내 왔구나.'

앙부아즈 왕국군을 떠나 반란군에 가담하기 직전, 왕녀에게 신신당부를 하며 부탁했던 일이었다. 한데 그게 마침내 배송(?)이 완료된 모양이었다.

그는 식사를 중단하고 벌떡 일어났다.

'택배 개봉은 못 참지!'

행여나 여기까지 실려 오는 동안 물건이 깨지진 않았을까. 담근 술이 새지는 않았을까. 공기가 들어가서 곰팡이가 핀 건 아닐까. 오만가지 걱정이 다 들어서 식사를 이어갈 수가 없었다. 게다가 온종일 고민에 휩싸여 있던 터라, 머리를 조금 식히고 싶기도 했다.

"어디 볼까."

물건이 왔다는 창고로 내려가 보니, 거대한 물탱크를 연상시키는 오크통이 보였다. 일전에 앙부아즈의 부상병 캠프에서 베스파로스 여왕벌을 토막 내어 담가둔 술통이었다.

라키엘은 기대감 반 걱정 반으로 통 위로 올라가 뚜껑을 개봉했다. 기다란 국자로 술을 살짝 떠보았다.

"흐음."

다행히 색깔은 괜찮다. 향도 나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품속을 향해 말했다.

"뽀복아?"

"뽀복!"

부르자마자 돌아오는 대답. 이내 불사조 개복치 뽀복이가 안주머니에서 쏙 튀어나왔다. 라키엘은 녀석을 향해 국자를 내밀었다.

"오랜만에 부탁 좀 하자. 내가 오늘 새로 받은 맛있는 술이 있는데 말이야."

"뽀복?"

"가장 친한 친구인 너한테 꼭 맛을 보여주고 싶어서. 혹시 세상에서 이걸 제일 먼저 시음할 기회를 누려보지 않을래?"

"뽀보복? 뽀복?"

"이거 진짜 비싼 술이거든."

"뽀!"

'비싼'이라는 말에 뽀복이의 눈이 반짝였다. 라키엘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국자를 슬쩍 내밀었다. 뽀복이가 국자에 달려들었다.

"뽀보복! 뽀복!"

후루룩!

뽀복이가 망설임 없이 국자의 술을 쭉 들이켰다. 그리고... 꼴까닥 죽었다.

"...뽀보!"

딩동!

[불사복치 뽀복이가 스킬 <으앙 쥬금 ㅠㅠ (Lv. 1)>을 시전합니다.]

털푸덕...!

장렬하게 추락하며 눈을 감는 뽀복이. 녀석의 지느러미 불꽃이 꺼졌다. 아예 혀를 붸엙 내밀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뽀오!"

녀석이 눈을 반짝 떴다.

딩동!

[불사복치 뽀복이가 스킬 <부활! (Lv. 1)>을 시전합니다.]

[불사복치 뽀복이의 거대화 1 스택이 적립되었습니다.]

메시지와 함께 녀석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무언가를 먹을 때마다 반드시 죽어야 하는 자신의 팔자를 한탄하듯, 지느러미 한 장을 뚝 떼어냈다. 자신의 송곳니도 뾱 뽑았다. 그러고는....

딩동!

[불사복치 뽀복이가 스킬 <일기 쓰기 (Lv. 1)>를 시전합니다.]

"뽀복! 뽀보보! 뽀오!"

스사사삭!

한 맺힌(?) 투덜거림을 내뱉으며 열심히 일기, 아니, 방금 마신 베스파로스 여왕벌 담금주에 대한 성분 분석 리포트를 써내려가는 뽀복이!

그동안 라키엘은 슬며시 녀석의 곁으로 다가갔다. 눈에 힘을 빡 주며 녀석이 쓰고 있는 깨알 같은 리포트 내용을 읽었다.

덕분에 잠시 후, 그는 깨달아야 했다.

'...어?'

지금 내가 보고 있는 리포트 내용 이거, 실화인가. 암만 봐도 실화 맞는데. 그러니까 이건....

'여왕벌 담금주 이거, 잘만 정제하면... 본격 다이어트 보조식품으로 만들 수 있겠는데?'

불현듯, 2황자를 이용한 신약 임상 시험과 광속 다이어트 더블 성공의 장밋빛 미래가 야물딱지게 그려지기 시작했다.

148화. 다이어트는 네 운명 (3)

'...어?'

저도 모르게 흠칫.

라키엘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거 뭐야?'

그의 눈길이 뽀복이의 리포트, 아니, 일기를 빙자한 성분 분석표를 향했다. 실시간으로 쓰이고 있는 그 내용에서 온종일 품고 있던 해답이 보였다.

그 내용은....

[오늘의 일기]

[주인이 오랜만에 먹을 걸 줬다. 술인데 엄청 맛있다고 유혹했다. 나한테만 제일 먼저 특별히 주는 거라고도 했다. 기분이가 무척 좋았다. 그런데 속았다. 술 완전 맛없어. 특히 T-카르니틴(Carnitine)이 최악이었다. 너무 고농축이라 짜고 신데 느끼했다. 먹자마자 온몸의 지방을 미토콘드리아로 팍팍 약탈당했다. 막을 수가 없었다.]

'...T-카르니틴?'

처음 듣는 성분이었다. 흔히 지방 연소를 도와준다는 비타민 B의 복합체 L-카르니틴은 많이 들어봤지만, T-카르니틴은 금시초문이었다. 애초부터 그런 건 아예 존재하지 않으니까.

한데 저건 뭘까. 이쪽 세계에만 있는 특수한 물질인 걸까. 라키엘의 눈동자가 한층 바쁘게 뽀복이의 일기장을 훑었다.

[...특히 T-카르니틴 때문에 활성화된 지방산이 세포질 외막 효소에서 수산화기로 옮겨질 때가 제일 기분 나빠. 난 안 된다고 했는데 지들 멋대로 막 옮겨. 이건 약탈이야. 내 지방 돌려내. 내 통통한 뱃살 가져가지 마. 완전 단호박으로 말했는데도 씨알도 안 먹혔다.]

'헐.'

진짜다.

라키엘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지금 뽀복이가 일기장에 쓰고 있는 내용, 저건 자신이 알던 L-카르니틴의 대사 작용과 거의 똑같았다.

그런데 조금 다른 점도 있었다.

[...심지어 얘들은 1절, 2절, 3절도 모자라 뇌절까지 쳤다. 보통 이거랑 비슷한 L-카르니틴은 하루에 2g 이상 먹는 건 제한시킨다고 하는데, 얘들은 그런 것도 없다. 완전 미친 거 같다. 막 떼거리로 2g 훨씬 넘게 들어와서 와글와글 노는데 부작용도 없으면 이건 사기꾼 엄친아도 아니고, 인생 너무 불공평한 거 아님?]

'뭐어?'

사기다. 보는 순간 느낄 수 있었다. 원래 지방 연소를 팍팍 도와주는 카르니틴은 과도하게 섭취할 경우 각종 부작용을 불러올 수 있다. 그렇기에 일일 섭취량에 제한을 두는 편인데, 그 제한이 없다니? 심지어 많이 먹어도 부작용이 없다니?

'진심... 치트키 수준인데?'

생각할수록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그렇잖아도 2황자 녀석의 다이어트를 더 빠르게 성공시킬 방법을 고민하고 있던 참인데. 때마침 이런 행운이 터지다니, 우연도 이런 우연이 있을까 싶었다.

'이거 너무 작위적인데? 혹시 신이라든가, 이 세계의 창조자라든가 하는 누군가가 의도한 상황인 거 아냐? 그게 아니면 말이 안 되는데?'

살짝 의심(?)이 들었다.

하지만 그걸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뭐, 어쨌건. 보통 L-카르니틴은 다이어트 보조제 약품에 많이 들어 있지. 그런데 그걸 리미트와 부작용 없이 먹을 수 있다면... 후우.'

벌써부터 2황자의 날씬해진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리는 기분이었다. 한편으로는 새로운 미래도 새록새록 엿보였다. T-카르니틴이라는 사기적 물질이 잔뜩 함유된 베스파로스 여왕벌주. 만약 이걸로 정제를 만들어서 판다면?

'볼 것도 다이어트 약품계를 휩쓸겠지. 그냥 아주 순식간에 서열 정리 수준으로.'

전 대륙의 수많은 비만인들이 지갑을 열어젖히는 미래가 절로 그려졌다. 아니, 아예 돈다발을 마차에 꽉꽉 실어서 달려올 수도 있으리라.

라키엘은 심호흡을 했다.

"좋아. 뽀복아?"

"뽀복?"

"오늘도 성분 분석 고마워."

"...뽀!"

태연하게 죽었다가 살아난 뽀복이가 한쪽 눈을 찡긋. 라키엘의 입가에도 흐뭇한 미소가 쑹컹쑹컹 피어났다.

이제는, 2황자의 지방을 활활 태워줄 시간이 왔다.

2개월이 지났다.

다이어트는 혹독했다.

2황자의 체중이 무려 62킬로그램이 빠졌다.

딩동!

[종합검진표]

[검진 대상 : 테오도르 팔레르모 마젠타노]

[종족 : 인간]

[성별 : 남자]

[연령 : 20세]

[신장 : 184.3 Cm]

[체중 : 88.1 Kg]

[혈액형 : Rh+ A]

'...진짜로 됐다. 90킬로그램 언더, 2개월 컷 성공!'

다이어트를 시작하고 정확히 60일째가 되는 날, 라키엘은 2황자의 진맥 결과를 보며 내심 환호했다.

[종합 소견 : 최근 과도한 비만 상태에서 급격한 감량을 겪으며 신체의 대사 기능이 교란되어 있습니다. 케토시스 지방 대사가 매우 활성화되어 있습니다. 급격한 감량으로 인하여 간과 콩팥에 피로가 누적되어 있습니다. 신체의 균형과 건강을 위해 1개월 정도의 휴식기를 가질 것을 권장합니다.]

[당신의 오장육부가 2황자의 다이어트 성공을 이끌어 낸 당신의 독한 성과에 예의상 박수와 진심 어린 우려를 보냅니다.]

[심장 : 키야. 지방 덩어리 하나 사람으로 만든 것 좀 보소ㅎ 독하다, 독해.]

[허파 : 허어... 파핳ㅋ]

[대장 : 형님들? 저쪽 오장육부는 완전 혹사당했겠지 말입니다?]

[간장 : 내가 저렇게 살 빼는 입장이었으면 파업 마려웠을 듯ㅋ]

[위장 : 나였음 벌써 가출했음ㅋㅋ 탄수화물 없는 인생 x까ㅋㅋㅋ]

[콩팥 : 만약에 우리 몸뚱이가 저 난리 피우면 난 요로결석 만들어서 굴릴 거임. 누가 먼저 지리나 보자ㅋㅋㅋ 멸망전 on ㅋㅋㅋ]

"...."

순간 소름이 돋았다.

뭐, 어쨌건, 이 정도면 그냥 성공 수준이 아니다. 이번에 2황자가 살을 뺀 과정을 누군가가 봤다면? 헬스장이나 약품 회사에서 다이어트 성공 사례로 써먹으려고 군침을 줄줄 흘리며 연락을 해왔겠지.

이건 그 정도로 대성공적인 다이어트였다.

"그렇지? 너도 느끼고 있지 않냐."

라키엘은 싱긋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달라진 모습의 2황자 테오도르가 있었다.

"예, 형님. 덕분에 살이 찐 동안 맞췄던 옷들을 다 버려야 했으니까요."

150킬로그램에 육박하던 출렁출렁 살덩이는 이제 없었다. 제법 다부진 체격의 훈남이 되돌아와(?) 있었다. 예전, 로이-하비교에서 대결하던 때의 테오도르가 날렵한 모델형 몸매였다면, 이제는 약간의 벌크업이 가미된 듬직한 모습이랄까.

'베스파로스 여왕벌주의 효과가 컸지.'

처음 보는 미지의 물질, T-카르니틴의 효과는 대단했다. 섭취하는 순간부터 아주 그냥 지방을 핵융합 발전소처럼 태워 댔다. 심지어 신체의 피로 회복에도 지대한 도움을 주었다!

그런 덕분이었다.

2황자가 원래 지니고 있던 아스라한 심법과 T-카르니틴의 조합. 그걸로 거의 사기적인 신체 회복을 실현할 수 있었다. 마치, 킹콩에게 남성호르몬을 풀세트로 먹이고 운동을 시키는 기분이었다.

온종일 운동을 시켜도 서너 시간만 재우면 쌩쌩해졌다. 근육에 쌓인 젖산이고 뭐고 투스타 사단장이 시찰하는 내무실처럼 말끔해졌다. 덕분에 철저한 식단과 휴식, 수영 등의 운동을 쉴 틈 없이 돌릴 수 있었다. 거기에 침술과 뜸으로 근육, 근막, 인대, 관절의 부상을 최대한 예방해 주었다.

가히 지방 덩어리 하나를 사람으로 빚어내는 과정이었다. 그 결과, 2황자는 이제 예전의 폼(?)을 어느 정도 회복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너, 나한테 고맙진 않냐."

"감사합니다. 정말로요."

"그렇지?"

"예."

2황자, 테오도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진심이었다. 지난 2개월은 말 그대로 살을 깎아내는 노력의 나날이었다. 하지만 그 결과가 온전히 자신의 노력 덕분일까? 아니라는 생각이 종종 들었다.

'형님의 조언과 관리, 격려가 아니었다면... 어림도 없었겠지.'

아예 별궁으로 거처를 옮겨온 덕분이다. 형님이 먹으라는 대로 먹고, 시키는 대로만 운동한 덕분이다. 그 와중에 무수하게 쏟아진 격려와 갈굼 덕분이기도 하다. 그리고 형님이 직접 담가서 숙성시켰다는, 기이한 맛이 나는 술 덕분이기도 하고.

"...."

기이한 술.

그걸 생각하니 절로 혓바닥에 가시가 백만 개쯤 돋아나는 기분이 들었다. 무리도 아니었다. 그 술은 정말로 맛이 없었으니까. 태어나서 지금껏 먹어 본 모든 음식, 아니, 실수로 잘못 삼켰던 물건까지 포함해도 제일 맛이 없었으니까.

'차라리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개똥이 더 감미로웠을 거야. 진심으로.'

그 정도로 심각한 맛이었다. 굳이 표현하자면? 오우거 귓밥이 그런 맛이 아닐까 싶었다.

입에 머금는 순간 혓바닥을 잘라내고 싶어졌다. 삼킬 때부터 식도가 가출하는 기분이 들었다. 이윽고 위가 트위스트를 추고, 창자가 불러재끼는 종말의 세레나데 2중주가 귓가에 환청으로 울릴 지경이었다.

하지만 자신에게는 입가심을 위한 사탕 한 쪼가리도 허락되지 않았다! 당분을 섭취하면 지방 대사 효율이 떨어진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

덕분에 끼니마다 그 술을 한 스푼씩 받아먹어야 할 때면 얼마나 끔찍했던지. 형님께 넌지시 괴로움을 토로해보기도 하였다. 대체 뭘로 담근 술이냐고 물어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돌아온 대답이라곤....

'에헤이. 이거 몸에 좋은 거라니까? 믿고 한 숟갈만 잡숴 봐. 츄라이, 츄라이.'

...가 전부였다.

그저 믿어야 했다.

그저 인내해야 했다.

자신의 믿음과 인내는 틀리지 않았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형님. 만약 형님이 아니셨다면, 그 격려 가득한 담금질이 아니었다면... 저는 여전히 피둥피둥한 몸으로 2황자궁에 틀어박힌 채로 지내고 있었겠지요. 여전히 제 패배만을 곱씹으며 신세만 한탄하고 있었을 겁니다."

"응. 확실히 그랬겠지."

"예. 그래서 더욱 고맙습니다. 형님은... 단지 제 살을 빼준 것뿐만이 아닙니다. 제 앞날과 인생을 구해 주셨습니다."

"응. 확실히 그렇지."

"하여 정말로 거듭, 감사드립니다."

"응. 그런데 그게 끝?"

"...예?"

테오도르는 멈칫했다.

형님의 저 물음은 무슨 뜻일까. 은혜를 입었으니까 감사를 표하였다.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말을 몇 번이고 거듭 건넸다. 그런데 거기서 끝이냐니. 그럼 뭐가 더 필요한 걸까. 그는 아리송함을 느꼈다.

라키엘이 혀를 찼다.

"쯧쯧쯧. 이거 이거. 사회생활의 기본이 안 돼 있네? 응?"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너, 나한테 감사하다며."

"예.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그런데 감사를 말로만 하고 땡이야?"

"...예?"

"말로만 하는 감사를 세상에 누가 못하겠느냐는 거지. 그런 건 길 가는 코흘리개 붙잡고 시켜도 당장 100번은 할 수 있을걸? 안 그래?"

"그건...."

"당연히 그렇지. 한데 내가 너한테 말로만 퉁치고 넘어갈 정도로,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은혜를 베푼 거야? 내가? 2개월 내내 널 붙잡고 애쓴 게? 고작 그거밖에 안 돼?"

"아, 그건 제가 미처...."

"생각을 못 했지?"

"예. 죄송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감사의 마음을 말이 아닌 다른 것으로도 표현해야겠지요."

"그렇지. 바로 그거지."

비로소 라키엘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피어났다. 사실 이건 진리였다. 감사를 말로만 땡치고 넘어가는 경우가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험난한 세상 살아가다가 은혜를 입었으면, 하다못해 삼겹살에 쏘주라도 쏘는 것이 강호의 도리가 아니겠는가 말이다.

또한, 이것이 바로 라키엘이 처음부터 노렸던 바이기도 했다.

"그럼 너, 내 부탁 하나만 들어주라."

"부탁을 말입니까?"

"그렇게 어려운 부탁은 아니고."

"예, 말씀만 하십시오, 형님."

테오도르의 눈동자에 결연한 빛이 떠올랐다. 그는 진심이었다. 정말로 너무나 커다란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2황자궁에 틀어박혀 있던 자신, 아무도 자신을 거들떠보지 않던 나날들, 그 와중에 처음으로 진지하게 손을 내밀어 준 이가 형님이었다.

반드시 은혜를 갚고 싶었다.

그 어떤 부탁이라도 들어주리라. 성심껏 형님을 도와서 은혜를 갚으리라. 내가 하여 드릴 수 있는 일이라면, 그게 형님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그 어떤 일이라도 성심껏 임하리라.

내심 결의를 다졌다.

그런 덕분이었다.

"좋아. 그럼 너, 나 대신 장가 좀 가 주라."

라키엘이 태연한 얼굴로 방긋거리며 입을 열었을 때, 2황자는 문득 생각하고야 말았다.

x발 살 다시 찌워 버릴까, 하고.

149화. 초대받지 않은 손님 (1)

"좋아. 그럼 너, 나 대신 장가 좀 가 주라."

"...."

2황자, 테오도르는 침묵했다.

거창한 이유는 달리 없었다.

그냥 멍해졌다. 방금 자신이 뭘 들은 건지. 그냥 당장 시종에게 가장 크고 두툼한 면봉을 가져오라고 말해야 할까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한 번쯤 귓구멍을 뽀득뽀득 닦아낸 후에 형님의 말을 다시 경청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다행히(?) 형님은 그런 자신의 마음을 알아준 듯했다.

"왜? 이해가 잘 안 돼? 다시 말해 줄까?"

"...."

끄덕끄덕.

테오도르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라키엘의 입가에 뻔뻔한 미소가 양심 없이 걸렸다.

"나 대신 결혼을 해 달라고."

"...어째서 말입니까?"

"어라. 이유를 묻는 거야?"

"그야 당연히...."

"불과 1분 전에는 너, 내가 하는 부탁을 들어주겠다고 했던 거 같은데."

"...."

"이야. 우리 테오도르. 그랬어? 말만 고맙다는 거였어? 그랬던 거야?"

"아니, 그건...."

"부탁 들어준다며."

"하지만 형님...."

"그래. 세상살이 다 이런 거지, 뭐. 진심으로 고마운 게 어딨어. 나한테 이득이 되니까 고맙고 그런 거지. 안 그래?"

"...."

"내가 못 할 부탁을 했던 거구나. 내가 너무 무리한 부탁으로 네 진심을 깨뜨린 거구나. 그래. 네 진심이 그 정도까지였던 게 뭐가 잘못이겠어. 네 진심이 이 정도까지였던 걸 알아채지도 못하고 눈치 없이 군 내가 나쁜 놈이지. 안 그래?"

"...."

"괜찮아. 괜찮아. 그렇게 미안한 표정 지을 거 없다니깐. 나 안 서운해. 그냥 다른 부탁 할게. 사탕 아무거나 하나만 주라.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지? 2개월 내내 너한테 착 달라붙어서 온갖 정성을 기울인 보답으로 사탕 하나쯤은 받아도 되는 거지? 사탕 하나 정도면 네 진심에도 딱 맞는 사이즈일 거 같은데. 안 그러냐?"

"...흐흐흑!"

"어, 왜 울먹이고 그러냐."

"아니, 그게...."

테오도르는 진심으로 억울했다. 형님께 정말로 고맙고 감사한 건 맞았다. 그런데 대뜸 꺼내는 부탁이란 게 자기 대신 장가를 가 달라는 거라니. 이건 상상도 못 했다.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도 감이 오질 않았다.

"너무 갑작스럽고 혼란스러워서 말입니다."

"응. 그랬냐."

"예. 지금도...."

"그래. 알아. 헷갈리겠지. 뭘 대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그렇지?"

"예...."

"쯧쯧쯧. 그래그래. 원래 다 그런 거야."

라키엘은 짐짓 2황자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생각했다. 역시 이 녀석, 착하고 성실한데 우유부단해서 고구마스럽다고. 소설 속 모습과 판박이라고.

'그럼 슬슬 이유를 수긍시켜 줘야겠지.'

일단 크게 한 방 때리며 흔들고, 양심 어택(?)으로 심리적 균열을 만들고, 그 균열 속으로 납득시킬 이유를 자연스럽게 들이붓기. 사전에 의도한 작전대로 그는 혓바닥을 촵촵 풀었다. 준비한 대사를 차례차례 발사했다.

"내가 이런 무리하게만 들리는 부탁을 하는 이유가 궁금한 거지?"

테오도르가 말없이 끄덕끄덕. 라키엘의 입가에 아련한 미소가 싱긋. 태연하게 거짓말을 날름.

"내가 말했잖아. 나, 앞으로 살아갈 날이 1년도 안 남았다고."

"...아."

"이젠 알겠어?"

"예, 조금은."

테오도르의 눈빛에 이채가 떠올랐다. 라키엘은 입꼬리에 걸린 미소를 한결 아련착잡한 색채로 꾸몄다.

"그래. 네가 짐작한 그대로야. 난 시한부 인생이니까. 하지만 그걸 아직은 대외적으로 알리지 않은 상태니까. 한데 그걸 자연스럽게 알리기도 전에 구혼장이 수십 다발이나 날아왔어."

"엄청나게 난처하시겠군요."

"그래. 바로 그거지. 얼마 살지도 못할 주제에 그걸 숨기고서 결혼을 해 버리면, 그것도 엄청난 민폐가 아닐까."

"하면 형님, 그 사실을 솔직하게 밝히면서 거절을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응, 안 돼."

"어째서... 말입니까?"

"내 수명에 대한 사실은 최대한 늦게 알려질수록 좋으니까. 특히, 아직 건강이 다 회복되지 않으신 폐하께는 더더욱."

"...아."

"너도 알잖아? 폐하께서 얼마나 위독하셨는지. 얼마나 기적적으로 회복을 하신 건지."

"예, 압니다."

"그래서야. 폐하께선 겉으로는 예전처럼 활발하게 활동하고 계신 걸로 보이시지만... 그럼에도 후유증은 남아 있어. 위험성도 남아 있고. 갑자기 큰 슬픔이나 격앙에 빠지면 언제 다시 지난번처럼 병환이 터질지 몰라. 그런데, 아무런 마음의 준비도 없이 내 수명에 대한 사실을 알게 되시면 어떨까."

"후우. 그런 이유가 있었을 줄은...."

"몰랐지? 나도 이러고 싶진 않았다."

"예. 그런데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뭔데."

"제가 형님 대신에 구혼장의 이들 중 하나와 혼인을 한다고 치면... 어떻게 해야 혼인을 할 수 있을까요?"

테오도르는 진심으로 궁금했다.

어디까지나 쏟아져 들어온 구혼장은 모두 자신의 형님, 황태자인 라키엘을 향한 것이었다. 저들의 목표에 자신은 없다는 뜻이다. 한데 이쪽이 바란다고 해서, 저들 중의 하나와 혼인이 성립될 수 있을까.

그 의문에 라키엘이 싱긋 웃었다.

"할 수 있어. 저쪽이 하고 싶게 만들어 줘야지."

"저쪽이... 말입니까?"

"어. 저쪽이 먼저 너한테 매달리게 하면 돼. 흔하잖아? 눈 맞는 거."

"...."

"2황자궁에서 연회를 열 거야. 구혼자들을 초대하고, 네가 가장 빛나는 모습으로 그들 앞에 나서면 돼. 그 후엔 눈이 맞아서 누구도 말리지 못할 기세로 결혼까지 골인. 그러면 되는 거거든. 그 틈에 나는 들러리로 물러나는 거고."

"...."

"어때? 할 수 있겠어?"

"예. 그런데 이제야 좀 깨달을 것 같습니다."

"뭘?"

"처음부터 이런 부탁을 하려고 절 감량시킨 거였군요."

"당연하지."

"...."

"그래서, 싫냐?"

"아, 그건 아니고...."

"그럼?"

"좀 속은 것 같아서 말입니다."

"일찍도 깨달았구나."

"...."

"후후후."

"...."

너무나 뻔뻔하게 돌아오는 대답. 테오도르는 그만 쓴웃음을 머금고 말았다. 하지만 불만은 생기지 않았다. 말은 저렇듯 얄밉게 하지만, 황제 폐하와 황가의 미래를 걱정하는 형님의 진심(?)을 느낄 수 있었으니까.

'저, 형님을 실망시키지 않도록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자신이 홀라당 속았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는 채, 테오도르는 나름의 각오를 다졌다.

그리고 다음 날, 구혼장에 대한 답장을 실은 전서구 수십 마리가 별궁에서 날아올랐다. 그것은 마젠타노의 황태자가 주최하는, 2황자궁에서 열릴 연회의, <선착순 50명 컷>의 단호한 내용을 담은 초대장이었다.

며칠 후.

각국의 왕가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대귀족 가문이 출렁거렸다. 이유는 간단했다. 라키엘이 보낸 구혼장의 답신 내용 때문이었다.

"...뭐어? 선착순 50명?"

"50명 안에 들지 못하면, 연회에 입장할 수 없다고?"

"정말로?"

"진심?"

어느 왕가에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떤 대귀족 가문의 후원에서는 답신의 진위를 놓고 논쟁이 벌어졌다. 곧, 모든 이들은 심플한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이건 진짜다!'

마젠타노 황가의 공식 마법 인장이 찍힌 답신이었다. 심지어 전서구는 강력한 마법으로 보호를 받으며 날아온 터였다. 애초부터 위조가 불가능한 상황. 그렇다면 답은 뻔했다.

'진짜야. 절대 거짓일 수가 없어. 연회를 황태자가 기거한다는 별궁이 아닌 2황자궁에서 개최한다는 게 조금 이상하긴 하지만, 어쨌건 이건... 늦으면 안 돼!'

그렇다.

제국의 황태자에게서 돌아온 답신이 선착순 50명 컷 입장권이었다. 그 뜻은? 저 연회에 참석하지 못하면 혼인의 가능성이 날아간다는 뜻이었다!

"...당장 마차를 준비하라!"

각국의 왕실이 분주해졌다.

대귀족 가문이 바빠졌다.

가장 빠르고 튼튼한 마차를 부랴부랴 준비했다. 엄선한 명마를 줄줄이 장착(?)했다. 가장 명성이 자자한 마부가 선발되었다. 장거리 여행의 과정에서 마차에 문제가 생겼을 때 즉각 수리할 수 있을 기술자도 고용되었다.

거기에 각국 최강의 기병대가 호위로 붙었다. 신속한 물자 보급을 위한 작전도 수립되었다.

"출발!"

지체할 틈이란 없었다. 낭비하는 시간은 잠재적인 경쟁자들에게 주어지는 꿀이 될 터였다. 그렇게 각국의 고귀한 레이디들이 가문의 혼사와 자신의 미래를 건 맹렬한 레이스(?)의 대장정에 올랐다.

"이랴! 이랴아! 하!"

투두두두두!

수십 대의 마차가 각자의 출발지에서 흙먼지를 피워 올렸다. 승차감? 그런 건 고려사항이 아니었다. 오로지 속도만이 생명이었다. 모두가 그 사실을 절감하고 있었다. 평소 고귀한 대접만을 양동이째로 퍼받던 레이디 본인들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대체 왜 그렇게 채찍질이 느린가요? 달려요, 더! 빨리!"

"와, 왕녀님?"

"이렇게 좀!"

쫘악! 쫘악!

어느 소국의 왕녀는 피로에 절어가는 마부를 밀어내고 마부석을 강탈하는 용맹(?)을 발휘하였다. 또 어떤 대귀족가의 장녀는 진창에 빠진 바퀴를 빼내기 위해 드레스 자락을 걷어붙이고서 직접 마차를 밀기까지 하였다.

그 끝에 승자와 패자가 가려졌다. 한 달이 지나는 사이에 레이디들이 속속 황도 마젠타에 도착하였다. 1위부터 50위까지가 일사불란하게 가려졌다.

한데 그 이후에 도착한 지각자들은?

얄짤 없었다. 에누리없이 빠꾸(?)를 당했다. 패자의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모국으로 걸음을 돌려야 하였다. 물론 그렇듯 서럽게 손수건을 적시며 돌아가는 레이디들은 자신이 선보였던 뜨거운 경쟁의 레이스가 후세에 어떻게 전해질지, 까맣게 몰랐다.

그야말로 전대미문의, 수많은 레이디가 혼인의 열정을 불태운 대장정이었다. 이러한 업적(?)은 충분히 기념될 만한 일이었다. 유구한 전통으로 승화시키고 싶어질 사건이었다.

하여 후세의 인류가 5년마다 초장거리 여성부 다국적 마차 레이스를 개최하게 되리라는 사실도, 제국의 황도 마젠타를 결승점으로 삼을 이 정기적인 대회가 '임페리얼 마차르 랠리'라 불리게 되리란 사실 또한, 당사자들은 꿈에도 몰랐다.

어쨌건, 그렇게 1개월이 지나는 사이에 2황자궁의 연회 준비도 착착 갖추어졌다. 원래는 최소 3개월은 잡아야 하는 황가의 연회 준비 과정이었다. 그러나 뼛속부터 한국인인 라키엘 앞에선? 3개월은 사치에 불과했다.

"빨리빨리!"

"아 좀! 빨리빨리!"

연회를 준비하는 내내 시종과 시녀들의 구호는 '빨리빨리'가 되었다. 그런 덕분(?)이었다. 연회 준비가 무려 1개월 만에 깔끔하게 끝났다. 그리고 마침내, 2황자궁의 연회가 성대하게 개최되었다.

한편.

"...드디어, 찾았다."

연회에 초대받지 않은 불청객 하나가 2황자궁의 정원 한쪽, 무성하게 피어난 겨울꽃 사이로 스며들어 라키엘을 주시하고 있었다.

150화. 초대받지 않은 손님 (2)

빛나는 샹들리에.

그 아래에서 더욱 빛나는 미소.

2황자궁에서 성대한 연회가 열렸다.

메인홀에 초청된 수많은 이들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대륙 곳곳의 왕국, 공국, 소국의 왕녀들이 모두 모였다. 개중에는 대귀족가의 내놓으라 하는 레이디도 있었다.

다들 혹독한 레이스를 거친 영애들이었다. 짧게는 수백 킬로미터에서, 길게는 천 킬로미터 이상의 여정을 소화했다. 그토록 치열했던 50인 컷의 선착순에 성공한 여인들의 눈빛 가득, 자부심이 배어났다.

동시에 그녀들은 기대했다.

'마젠타노의 황태자는 어떤 분이실까?'

궁금했다.

소문이야 일찌감치 듣기는 하였다.

태어나던 때부터 몸이 병약했다는 황태자. 언제나 갖가지 지병을 달면서 자랐고, 아무런 희망도 없다는 소문마저 파다했던 황태자.

하여 아무도 지금껏 황태자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더랬다. 이곳에 모여든 영애들도 마찬가지였다. 곧 죽을 사람, 없는 사람 취급을 하였다. 얼마 전, 충격적인 소문이 퍼지기 전까지는, 분명 그러하였다.

'전쟁터에 등장해서 소드마스터를 제압하셨다니. 그럼 그동안 퍼졌던 병약하단 소문은 모두 위장이었던 거야. 그럼 황태자는... 사실은 일부러 능력을 숨기고서 지내어 온 겸손한 분이 아닐까?'

'최근에 듣기로는 별궁에 병원을 열어서 병든 이들을 차별 없이 무료로 돌본다던 것 같던데... 아마도 자상한 분이실 거 같아.'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왜 별궁이 아닌 2황자궁에서 연회를 하는 건지 조금 이상했는데... 와서 보니까 알겠어. 황태자께서는 별궁에 머무르는 환자들이 편히 쉬길 바라신 거야. 어쩜, 그렇게 배려심마저 갖추셨을까.'

...등등, 등등. 각자의 뇌리 속에서 망상의 나래가 8K 영상으로 좌르륵 펼쳐졌다.

황태자의 입장을 기다리는 사이, 메인홀에 모인 레이들의 뇌리 속에서 황태자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는 지상 최고의 핫가이, 용맹함과 자상함과 배려심까지 모두 갖춘 완벽남의 아이콘으로 쇽쇽 조립되어 갔다.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다.

악단의 잔잔하던 연주가 멈추었다.

"이곳에 모여 주신 이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제국의 황태자,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 전하께서 입장하심을 알려드립니다."

2황자궁 시종장의 정중한 안내가 모두의 달팽이관을 폭 찔렀다. 뒤이어 악단의 연주가 재개되었다. 힘 있고, 웅장하며, 장대한 선율이 메인홀을 당당하게 뒤덮었다. 여인들의 2심방 2심실을 쿵더덕쿵덕 찰진 가락으로 흔들었다.

이윽고 문이 열렸다.

여인들의 눈빛이 초신성 서치라이트 상향등처럼 번쩍 빛났다. 모든 시선이 열린 문으로 일점사 되었다. 마침내, 오늘의 주인공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팡이를 짚고서, 창백한 면상과 후들거리는 다리로....

"끄흐응↗"

"...."

라키엘의 입에서 노인네 같은 신음성이 흘러나오는 순간. 지팡이를 짚은 그가 레드카펫 위로 후들거리는 첫걸음을 내디딘 순간.

모두가 침묵에 잠겼다.

그러나 라키엘은 개의치 않았다.

"아이고, 끄으흥."

탁, 탁.

빈약한 몸뚱이를 달달 떨며 힘겹게 걸었다. 보폭은 불과 10센티 남짓이었다. 그만큼을 걷는 데에도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마치 90살 먹은 노인네라도 되는 듯, 지팡이가 없다면 당장이라도 나동그라질 것처럼 위태로운 걸음이었다.

반면, 메인홀 가득 깔리는 음악은 여전히 웅장했다. 지배자의 장엄함과, 젊은 권력가의 매혹적인 대담함을 모조리 담아낸 명곡이 가슴을 찌르르 울리려...다가 죄다 고막 밖으로 튕겨 나갔다.

라키엘의 모습 때문이었다.

'저게... 뭐야?'

각국의 왕녀, 대귀족가의 영애들, 레이디 일동은 한마음 한뜻으로 생각했다. 이거, 뭔가 잘못된 것 같다고. 아무래도 주최 측의 농간이 있는 것 같다고.

그러니까... 황태자 라키엘의 몰골이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지팡이?'

'저게 없으면 못 걷는 거야?'

'걸음이 왜 저래? 아니, 몰골이 어째서 저런 거지?'

'황태자... 맞아?'

'정말?'

모두의 머릿속에 물음표가 백만 개씩 쑴펑쑴펑 솟구쳤다. 기대감으로 한껏 콩닥거리던 여인들의 가슴이 본격적인 심정지 상태로 돌입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끄흐, 흐응? 아이고, 다리야... 헉헉."

레드카펫 위를 불과 3미터 이동한 라키엘이 걸음을 멈추었다. 허리를 쭈욱 펴며 힘겹게 숨을 골랐다. 영락없이 동네 뒷산 약수터에 산책을 나온 할아버지 같은 몸짓이었다.

그의 모습은 더욱 가관이었다.

은발 머리칼은 윤기조차 없이 푸석푸석했다. 양쪽 볼은 퀭하니 움푹 들어가 있었다. 눈가는 더했다. 아예 해골처럼 시커먼 다크써클이 점령했다. 안색은 당장 관짝에 누워 있으면 어울릴 정도로 창백했다. 아니, 아예 한 줌의 생기도 엿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화려하게 걸친 옷 사이로 얼핏 드러난 손목은 어떠한가. 그냥 아예 뼈와 가죽밖에 없었다. 심지어 등은 벌써부터 굽어 있고, 무릎은 만년설산에 내던져진 치와와 앞발처럼 달달달 떨리고 있었다!

'뭐야. 저거 진짜 뭐야?'

'이거... 꿈 아니지?'

'내가 저런 사람 눈에 들겠다고 그 고생을 하며 여기까지 온 거라고?'

'...장난해?'

레이디 50인의 눈에 씌워졌던 콩깍지가 한 큐에 싹 벗겨졌다. 모두는 찬물 세례라도 덮어쓴 듯 저도 모르게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안 그러기엔 황태자의 모습이 너무 심했다. 이건 거의 사기가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덕분에 라키엘은?

내심 회심의 미소를 머금었다.

'좋아. 작전 성공!'

일부러 한껏 후덜덜 다리를 떨어대는 라키엘의 입꼬리에 아무도 못 알아볼 희미한 미소가 맺혔다. 자신을 향해 실시간으로 투파팍 꽂히는 극혐의 시선. 그걸 보니, 오늘의 변장이 매우 성공적(?)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당연하지. 이거, 궁정마법사 자네티스 경의 작품이니까!'

아까 연회가 시작되기 전이었던가.

자네티스 경을 불렀다. 미리 부탁해둔 하루짜리 변장 마법을 받았다. 덕분에 원래 모습보다 훨씬 빈약한 몰골을 갖출 수 있었다. 2황자궁 시녀들에게선 초췌한 메이크업을 받았다. 거기에 나름 혼신의 정성을 기울인 연기까지 첨가되니?

가히 완벽한 병자 코스프레가 가능해졌다.

'후후후. 실망해라. 그렇게 더, 날 보면서 실망해라!'

라키엘은 레이디들을 응원(?)하며 힘겨운 척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가 일부러 지팡이질을 삐끗했다.

"끄응... 이흣?"

기우뚱!

지팡이 잘못 짚어서 넘어지기!

동시에 옆으로 슥샥 재빠른 눈짓을 보냈다. 그 눈짓을 간파한 데미안이 적절한 타이밍으로 손을 뻗었다. 넘어지던 이쪽을 붙잡아 주었다.

"허흐흐, 고, 고맙군."

그다음부턴 데미안에게 거의 업히다시피 부축을 받으며 걸었다. 여전히 당당하고 웅장한 음악을 배경으로 삼아. 그렇기에 더더욱 빈약하고 초라해 보이는 몰골로.

덕분에 쏟아지는 레이디들의 시선이 더욱 냉랭해졌다. 그녀들의 번민에 잠긴 눈초리를 보자니, 씁쓸함과 만족감이 반반 짬짜면처럼 뒤섞여서 올라왔다.

'뭐, 소개팅을 나가서 저런 실망감 깃든 시선은 제법 받아봤으니까.'

익숙하다.

딱히 상처받지 않는다.

그러니까....

'크흡.'

라키엘은 활동을 시작하려는 눈물샘을 꽉 틀어막았다. 그리고 거대한 경악의 침묵에 휩싸인 메인홀 전체를 둘러보며 목청을 가다듬었다.

"흠, 크흠!"

모두를 충격적으로 실망시킨 단계가 성공적이니까, 이제는? 저들에게 반전의 희망을 주어야겠지.

계획을 떠올리며 말했다.

"반갑습니다. 오늘 연회의 주최자인... 쿨룩, 콜록! 커흐흐어음,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입니다."

"...."

"쿨룩! 콜록, 커흠! 우선, 오늘의 연회에 참석하여 이 자리를 빛내 주신 여러분께... 콜록! 켁!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이곳에서 연회가 열릴 수 있도록 흔쾌히 장소를 제공하여 준 고마운 이를 여러분께 소개할까 합니다."

이게 진짜다.

이제부터가 중요하다.

라키엘은 혓바닥에 촵촵 침을 발랐다.

"저의 자랑스러운 혈육이며, 마젠타노 황가의 2황자인, 데오도르 팔레르모 마젠타노를 소개합니다."

연회장 입구를 가리켰다.

악단의 연주가 시작되었다.

심드렁해진 모두의 시선이 입구를 향했다. 이윽고, 2황자 녀석이 레드카펫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 순간, 연회장 곳곳에서 숨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벅, 저벅....

180센티를 넘기는 당당한 키.

운동으로 다져진 다부진 체격.

빛나는 눈동자와 수려한 얼굴.

헌앙한 외모와 분위기의 테오도르가 당당한 걸음으로 레드카펫을 걸어 나왔다. 장내의 모두를 향해 차분한 눈길을 자연스럽게 던졌다. 그 와중에 이쪽과도 시선이 잠깐 마주쳤다. 녀석의 눈동자에 미안하고 고마운 기색이 일순간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

그래, 힘내라 짜식.

라키엘은 내심 미소를 지으며 연회장을 슥 둘러보았다.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레드카펫 위의 2황자, 녀석을 바라보는 모든 레이디의 시선이 하트로 변해 있다는 사실을.

'허허. 허허허.'

작전 성공.

이제 이쪽을 보는 레이디는 아무도 없었다. 어느샌가 열렬해진 모두의 시선이 2황자에게로 꽂혀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쪽과 나란히 서 있을수록 녀석이 더욱 돋보일 테니까. 다들 머릿속 계산기가 팍팍 돌아가고 있을 테니까.

'오늘 보인 내 모습 때문에, 나한테는 미래가 없을 거라고 계산을 마쳤겠지.'

이렇듯 허약하게 비실대는 모습을 보며 누가 건강하다고 생각할까. 아마 다들 앙부아즈에서 이쪽이 보였던 활약이 과장된 소문이거나, 거짓된 정보라고 간주하였을 것이다.

'게다가 내가 얼마 살지 못하리라고 판단했을 거고.'

그러면 자연히?

2황자에게 관심이 쏠리게 된다. 그게 인지상정이다. 이쪽이 쓰러지면 다음 황위는 2황자가 차지할 것이라 계산할 테니까.

'좋네. 딱 좋아.'

일부러 저런 반응이 나오도록 판을 짰다. 2황자 녀석이 이쪽과 비교되어 더욱 빛나 보이도록 상황을 세팅했다. 계략 적중. 보람이 듬뿍 느껴졌다.

'그럼 난 적절하게 빠져볼까.'

어설프게 여기서 어물쩍대면 안 된다. 소개팅을 주선해준 사람이 절묘한 타이밍에 빠져줘야 하듯, 자신이 자리를 피해 줘야 2황자에게 몰리는 레이디들이 좀 더 눈치를 보지 않고 대담해질 수 있다. 역사(?)가 이루어질 수 있다.

'난 잠깐 좀.'

라키엘은 데미안에게 눈길을 보냈다. 데미안 녀석이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어딜 가시려는 겁니까?'

'용변. 따라오게?'

'예.'

'아서라. 내가 마실 음료나 하나 시켜놓고 있어.'

'...알겠습니다. 다녀오시죠.'

녀석을 남겨두고 슬며시 자리를 떴다. 멀리 가진 않았다. 연회장 한쪽의 테라스로 나갔다.

"후우."

왁자지껄한 안쪽에 있다가 테라스의 시원한 공기를 마시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제법 쌀쌀해진 밤공기가 모처럼 상쾌했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혼자 여유를 부려본 적이 언제였던가.

'최근 3개월 동안은 정신이 없었지.'

앙부아즈에서 돌아오며 방치되어 있던 별궁 한의원을 정상 가동시키랴, 그 와중에 2황자 녀석의 다이어트를 감독하고 연회를 준비하랴, 진심 바쁜 3개월이었다. 덕분에 이렇듯 한가롭게 밤하늘을 올려다본 지가 언제였는지,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리고 이렇게, 누군가가 내 목덜미에 단검을 갖다 대는 경험도... 가져 본 적이 있었던가?

"쉿. 조용히."

"...."

별안간 목에 닿는 서늘한 감촉. 그보다 더욱 서늘한 목소리.

라키엘은 동작을 딱 멈추었다. 눈동자만 데구르르 굴려 옆쪽을 확인했다. 그곳에 처음 보는 귀 뾰족한 여자가 있었다. 그녀가 이쪽의 목덜미에 단검을 들이대고 있었다.

'이건 또 뭐냐.'

설마, 엘프?

그런데 왜 엘프가 나한테 단검을 겨누는 걸까. 어처구니가 없었다.

연회 도중에 바람 쐬러 테라스로 잠깐 나왔더니 사건이 벌어진다는 이런 상황, 철통 같은 경비를 자랑하는 2황자궁 한복판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다는 사실 자체가, 인간적으로 너무 작위적인 클리셰가 아니냐고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이쪽의 불만과 무관하게, 엘프 여인이 여차하면 단검을 그어 버리겠다는 듯이, 무감정한 눈초리로 추궁을 던져 왔다.

"어린 인간, 솔직하게 대답해. 최근에 불을 지른 적이 있지?"

"예? 최근이요?"

"반문은 허용하지 않아. 대답이나 해."

"...."

꿀꺽.

저도 모르게 마른침이 넘어갔다. 아무래도 장난이 아닌 거 같다. 그래서 고민이 되었다. 최근에? 내가? 불을 지른 적이 있었던가. 잠깐의 심사숙고 끝에 답이 나왔다.

"최근엔 없는데요?"

"거짓말."

그녀의 눈동자가 한층 살벌해졌다.

"최근에 말이야. 그러니까 약 반년쯤 전에, 아피로스 둥지가 있던 숲에 불을 지르지 않았어?"

"...예?"

그게, 최근이라고?

아니 그게 대체 언젯적 얘기야?

라키엘은 황당해서 되묻고 말았다.

151화. 상대성 엘프식 시간 이론 (1)

"최근에 말이야. 그러니까 약 반년쯤 전에, 아피로스 둥지가 있던 숲에 불을 지르지 않았어?"

"...예?"

라키엘은 저도 모르게 되묻고 말았다. 엘프 여인의 눈길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맞잖아. 방화범 무리의 리더. 리한 군의관."

"...."

맞긴 맞다. 발뺌할 생각도 딱히 없다. 그런데 그게 최근의 일은 아니다. 그래서였다.

"이거 좀 억울한데요."

"억울?"

눈썹을 일그러뜨리는 엘프 여인.

그녀를 향해 진심으로 투덜거렸다.

"숲에 불을 질렀던 건 맞습니다. 그런데 그쪽은 교묘한 화법으로 절 치사한 사람으로 만드는군요."

"치사한 사람으로? 내가? 그쪽을?"

"예."

"어째서?"

"처음부터 제 목에 칼을 들이대고서 이렇게 물었지 않습니까. '최근'에 숲에 불을 지른 적이 있지 않느냐고 말입니다."

"그랬지."

"해서 저는 생각했지요. 방화? 최근에 내가 그런 짓을 저질렀나? 하지만 떠오르는 게 있어야 말이지요. 적어도 '최근'에는 말입니다."

라키엘은 태연하게 따졌다.

이 엘프 여인, 대체 무슨 수로 2황자궁의 삼엄한 경비를 뚫고 여기까지 들키지도 않고 들어온 걸까. 엄청난 은신술의 장인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는 겁을 먹지는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엘프 여인의 눈빛을 처음 보는 순간부터, 원만한 대화가 가능하리라는 사실을 일찌감치 눈치챌 수 있었으니까.

'진짜로 날 어떻게 하려는 자였으면 다짜고짜 찌르거나 그었겠지.'

새삼스레 떠올리는 사실이지만, 자신은 제국의 황태자다. 그런 자신에게 시해를 입히려는 자라면 처음부터 말을 걸지도 않았을 거다. 깔끔하게 목적만 달성하고 도주했겠지.

'게다가 소설 마검황에서 엘프들은... 인간의 정치에 절대로 간섭하지 않는다고도 했으니까.'

한데 굳이 자신을 찾아와 해를 입힐 이유도 없다. 즉, 엘프 여인이 자신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는 뜻이다.

그런 덕분이었다.

엘프 여인과 대화로 풀어갈 자신이 생겼다. 대담하게 여인에게 따졌다. 그 효과는 꽤나 짭짤했다.

"지금 무슨. 나와 말장난을 하자는 건가? 최근에 방화를 저질렀잖아. 반년 전에."

"예. 반년 전의 사건을 '최근'의 일이라고 생각할 줄은 몰랐지 말입니다?"

"...어째서 그게 최근이 아니야?"

"어째서 그게 최근입니까?"

"최근이니까 최근이라는 거지."

"그럼, 그걸 반년 만에, 이제야 뒷북치듯이 따지러 온 것도?"

"어떻게 따질지 잠깐 고민하고 온 건데?"

"...."

"...."

허공에서 눈길이 부딪쳤다. 라키엘은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엘프, 어쩐지 시간에 대한 관념이 인간과 꽤나 다른 것 같다고.

"그러니까 말입니다. 일단 남의 목덜미에 들이댄 흉기부터 좀 치우고 이야기를 하죠."

"어째서?"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온 아닙니까?"

"...."

"칼부터 들이미는 건 요구를 하는 바람직한 태도는 아닌 것 같은데 말이지요. 강도질이라면 모를까."

"강도질을 할지도 모르지."

"원하는 요구부터 해 보시죠."

"보상을 원해."

"숲에 불을 지른 것에 대한?"

"당연하지."

당시의 일을 새삼 떠올린 걸까. 잠시 누그러지나 싶었던 엘프 여인의 눈길이 다시금 험악해졌다.

"아름다운 숲이었어. 수많은 식물이 자라고, 저들만의 노래를 머금고 있었어. 그런데 어린 인간, 네가 그걸 불태운 거야. 그 어떤 이의 허락이나 양해도 구하지 않고서, 죄 없는 식물들을 무참히 태워 죽였어."

"예, 죄송합니다. 그건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라키엘은 순순히 자신의 죄(?)를 시인했다. 사실 그건 할 말이 없긴 했다. 거대 말벌인 베스파로스의 위협을 떨쳐내고자 저지른 일이었지만, 어쨌건 방화는 방화니까.

게다가 그는 소설 마검황을 통해 읽었던, 이곳 세계 엘프 종족의 특성을 떠올리고 있기도 했다.

'...광적일 정도의 식물 애호가들.'

그것이 바로 이곳 세계 엘프의 가장 첫 번째로 꼽히는 특성이었다. 식물을 사랑했다. 그냥 아끼고 사랑하는 정도가 아니었다. 미저리 싸다구를 서른 번은 후려칠 정도로 집착했다.

'그게 어느 정도냐면, 식물을 아예 먹지 않을 만큼이라고 했지.'

이곳 세계의 엘프들은 아예 채식을 하지 않았다. 과일도 먹지 않았다. 오직 육식, 고기만을 먹었다. 식물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옷은 전부 가죽과 동물의 힘줄로만, 활과 화살도 동물의 뼈와 힘줄, 흑요석을 가공해서 만들 정도였다.

'심지어 여인들만 마을 밖으로 나와서 사냥 등의 활동을 한다고 했지. 왜냐. 남자에 비해 몸이 가벼워서 숲을 돌아다닐 때 바닥의 풀을 덜 상하게 하니까.'

그야말로 초 극단적 식물애호가.

궁극의 융합퓨전 육식 머신.

그것이 엘프의 실체였다.

한데 그렇듯 광적인 식물 덕후 엘프가 숲에 불을 지른 책임을 물으러 왔다. 제대로 찍혔다는 소리다. 그러니 책임 자체를 부정해선 안 된다. 더 큰 분노만 키우게 될 거니까.

"그러니까, 충분히 만족할 만한 보상을 해드리겠습니다. 말씀만 하시죠."

라키엘은 쿨거래의 마인드로 말했다.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충분히 보상하면 된다. 어떤 보상이든 척척 해줄 자신도 있었다. 황태자니까. 무지막지한 권한이 있으니까. 미노타우황청심원으로 돈도 넉넉하게 벌어 뒀으니까.

한데 이내 돌아온 엘프 여인의 요구는 기가 막히는 것이었다.

"직접 숲에 가서 그곳을 복구시켜."

"예?"

"못 들었나? 네가 불을 지른 그 숲에 가서, 새 나무와 풀을 심으라고."

"...혹시 식목일 홍보대사세요?"

"식목일이 뭐지?"

"아니아니,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 나무와 풀을 심으란 말입니까? 제가 직접 거기까지 가서?"

"그래."

"몇 그루쯤 심으면 됩니까?"

"불타기 전과 똑같이."

"그럼, 그것만 다 심으면 됩니까?"

"아니."

엘프 여인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더욱 충격적인 발언을 했다.

"심은 나무와 풀이 예전과 똑같은 모습으로 자랄 때까지 그들을 정성껏 가꾸어야지. 그게 진정한 복구가 아니겠어?"

"...잠깐."

듣고 있자니 어쩐지 뒷골이 멍해진다. 라키엘은 서슴없이 콕콕 올라오려는 두통을 억누르며 물었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말입니다. 숲이 완전히 복구될 때까지, 풀과 나무를 심고, 그걸 열심히 가꾸는 숲지기 생활을 하라는 거지요?"

"바로 그거지."

"그거, 산불이 난 숲이 완전히 복구되려면 최소 10년, 아니, 20년쯤 시간이 걸린다는 건 알고서 하는 이야기지요?"

"물론."

"...."

"20년이라 봤자 얼마 안 되는 시간이잖아?"

"...."

퍽이나!

라키엘은 속으로 빼액 외치고 말았다. 듣고 있자니 기도 차지 않았다. 말이 20년이지, 그 시간이면 어지간한 사람 인생의 30%는 날아가는 기간이 아닌가.

'아니, 무슨 내가 20년형 선고받을 흉악 범죄를 저지른 것도 아니고!'

심지어 그 엄청난 시간을 '얼마 안 된다'고 말하는 엘프의 태도에 뒷목을 잡고 싶어졌다. 그는 멸망의 트월킹을 추려는 멘탈을 가까스로 부여잡으며 물었다.

"후우, 그러니까 말입니다. 솔직하게 묻겠습니다. 지금 장난해요?"

"장난? 내가? 왜?"

"말이 그렇지 않습니까. 천 년을 능히 사는 당신들 종족에게는 20년이 얼마 안 되는 시간이겠지만, 저한테 20년은 인생 한 귀퉁이가 훅 날아가는 시간이란 말입니다."

라키엘은 억울함과 황당함의 진심을 담아서 따졌다. 솔직한 얘기로 진짜였다. 특히 자신에게는? 20년의 숲지기 생활은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일일 것이다.

'당연하지. 난 누군가를 치료해 줘야 보너스 수명을 받아서 생명을 이어 갈 수 있으니까. 그런데 사람 하나 없는 숲에서 혼자 살면? 그냥 죽으라는 소리잖아.'

그런 개죽음은 당연히 사양이다. 라키엘은 뜨겁게 용솟음치는 항거의 정신으로 재무장하며 말했다.

"그러니 20년짜리 숲지기행은 너무 과하며 가혹한 요구입니다."

"그 뜻은, 저지른 만행에 대한 반성을 거부하겠다는 건가?"

"물론 그건 아니고요."

"하면?"

"다른 방법으로 보상하면 안 되겠습니까?"

"예를 들어봐."

"숲의 복구에 들어가는 비용을 전액 지불하겠습니다."

"돈으로?"

"예."

"웃기지 마. 번쩍이는 금화 몇 닢 따위, 우리 엘프에게는 아무런 가치도 없으니까."

"몇 닢이 아닐 텐데요."

"뭐?"

"몇 상자는 될 텐데."

"...."

"원하면 더 드릴 수도 있고."

"...."

흔들렸다.

방금, 아주 조금, 엘프 여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통한다!'

확신이 들었다.

숲의 고고한 엘프고 뭐고, 금화 앞에서는 평등할 수밖에 없으니까. 돈이 가치가 없다는 거, 전부 뻥카라는 걸 아니까.

'당연하지. 세상 살면서 돈이 안 필요한 사람이 어딨겠어.'

당장 눈앞의 엘프 여인만 봐도 그렇다. 엘프 마을을 떠나 여기까지 오면서 매일 노숙만 했겠는가. 뒷골목에서 쥐나 참새만 잡아먹으며 배를 채웠겠는가.

아니다. 절대로 아니다. 그건 불가능하니까. 만약 노숙과 사냥만 하면서 여기까지 왔다면, 저 트리트먼트 CF 뺨치는 머릿결과 깔끔한 옷차림은 설명이 안 되는 거니까.

설득의 희망을 엿본 라키엘의 혓바닥이 재빠르게 움직였다.

"그러니까, 얼마면 돼요?"

"...."

"숲 복구에 필요한 노동력도 팍팍 제공해 드릴 수 있는데."

"...."

"차라리 그게 서로 편하지 않을까요?"

"...."

엘프 여인의 눈동자가 번민에 잠겼다. 어느샌가 목에 겨누어져 있던 단검도 스르륵 내려가 있었다. 아마도 이쪽의 말이 제법 합리적이라고 느낀 탓이겠지.

분위기를 감지한 라키엘은 쐐기를 박았다.

"차분히 생각해 보시죠. 저는 이미 충분히 반성을 하고 있습니다. 소중한 숲을 망가뜨린 제 잘못을 인정합니다. 그렇기에, 가장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보상을 하고 싶은 겁니다. 한데 저 혼자 낑낑대며 20년 동안 숲을 가꾸면, 그게 무슨 소용입니까?"

"...."

"기왕 복구하는 김에 돈 좀 때려붓고, 상주 인원들 팍팍 고용해서 관리하고. 그러면 20년보다 훨씬 일찍 숲이 자라나고, 건강해지고, 모두가 행복해지고, 맑은 공기 속에서 지저귀는 새가 날아다니고, 산소가 슝슝 뿜어져 나오고, 지구온난화도 예방하고, 다 함께 녹색혁명 그린피스 외치고, 뭐 그렇게 다들 만족하게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지구온난화? 그린피스?"

"아, 어쨌건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숲을 더 일찍 복구하는 게 서로가 두루두루 행복해지는 길이 아니겠느냐, 그런 취지의 말씀이지요."

"...."

"어떻습니까?"

넘어온다. 거의 다 넘어왔다. 기색을 감지한 라키엘의 물음이 은근해졌다.

엘프 여인의 눈빛이 더욱 흔들렸다.

그녀는 생각했다.

'...이 인간, 뭐지?'

당황스러웠다.

이런 반응은 솔직히 예상 못 했다. 그저 지은 죄를 엄히 따지면, 이쪽의 요구에 응하리라고 여겼다. 그게 아니라면 책임을 거부하거나. 둘 중의 하나일 거라고만 여겼다.

한데 아니었다. 엄청나게 많은 돈으로 보상을 하겠다니. 그게 모두에게 만족스러운 길이 될 거라니.

'....'

쓰레기 같은데, 반박을 못하겠다. 그녀는 당황스러운 심정을 애써 수습하며 말했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어. 하지만...."

"고민이 된다는 거지요?"

"...어, 맞아."

"그럼 '잠깐만' 고민 좀 하고 오시는 건 어떻습니까?"

"잠깐만 고민을?"

"예."

라키엘이 낼름 고개를 끄덕였다.

"중요한 일을 결정하고 조율하는 과정 아니겠습니까. 그걸 덜컥 정해 버리는 것도 조금 이상하지요. 안 그렇습니까? 그러니 아주 잠깐이라도 심사숙고를 하고, 따질 것도 좀 따져 보고, 그다음에 다시 이야기를 나눠 보면 어떻겠습니까?"

"...."

일리가 있다.

라키엘의 페이스에 말려든 엘프 여인은 저도 모르게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잠깐만 고민 좀 해보고 오도록 하지."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래. 잠시 후에 돌아올 테니 기다리도록."

"예에, 예. 살펴 가십쇼."

라키엘이 태연하게 인사했다.

엘프 여인의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파앗...!

바람결 사이로 사라진 걸까. 혹은 그림자에 스며들어 떠난 걸까. 알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작전 성공.'

라키엘의 입꼬리에 싱글벙글 강태공의 미소가 맺혔다. 그는 떠난 엘프를 1초도 기다려 주지 않고 연회장으로 돌아갔다. 엘프가 말하는 '잠깐'은 최소 반나절 이상일 테니까.

'그럼 나도 이제 준비를 좀 해 볼까.'

난데없이 나타나 부담스러운 보상을 요구하는 엘프 여인. 처음엔 좀 뜨악했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대응할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러니 잠깐 각 좀 재어 봐야지.'

이번 일을 오히려 이득으로 바꿀 방법. 떠올릴 자신이 있다. 각을 재며 생각할 시간도 충분하다. 하룻밤이면 넉넉하니까.

그의 대뇌피질이 열심히 풀가동을 시작했다.

152화. 상대성 엘프식 시간 이론 (2)

아침이 밝았다. 해가 쭉쭉 떠올랐다. 전날 밤의 성대했던 연회, 밤새도록 2황자를 향한 무한의 경쟁심을 불태웠던 레이디들이 숙취를 동반한 늦잠에 빠져들었다. 2황자도 지친 몸을 이끌고 잠이 들었다.

그러나 예외도 있었다.

라키엘이었다.

"느으어어... 데미안?"

"예, 전하."

"조금만 더 아래."

"여기 말입니까?"

"왼쪽, 왼쪽, 아니아니, 너무 갔잖아. 살짝만 오른쪽. 아 거기, 거기."

"여기요?"

"어 그렇지. 거기. 좀 더 쎄게."

"이렇게 말입니까?"

"...꾸익!"

라키엘이 돼지 멱 따는 듯한 비명을 내질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목덜미를 주물러 주던 데미안이 지나치게 힘을 꽉 주었기 때문이었다. 하마터면 승모근이 '안녕히 계세요, 여러분!'을 외치며 몸뚱이와 영원한 안녕을 고할 뻔했다.

"어그윽, 너무 쎄잖아."

"...죄송합니다."

"좀 잘하자. 응?"

"...."

데미안은 곤혹스러움을 느꼈다. 나는 어째서 이런 아침부터 황태자의 목이나 주물러 주고 있어야 하는 걸까. 그리고 왜....

"전하께서 이토록 쉬질 않으시는 건지, 궁금합니다."

"음?"

"염려도 되어서 말입니다. 지난밤에 연회에 참석하시느라 거의 밤을 지새우셨는데, 굳이 이렇게 무리를 하며 계속 깨어 계셔야 할 이유가 있으신지...."

솔직히 궁금했다. 의아하고 이해가 안 되었다.

데미안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곳은 별궁 정원 한가운데였다. 어느새 늦겨울의 아침엔 햇볕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황태자는 정원에 떡하니 내어놓은 안락의자에 다리를 뻗고 늘어진 채였다.

"...."

도대체 뭘 하자는 걸까.

어째서 아침부터, 정원 한가운데에서, 왜 이러고 있어야 하는 걸까. 생각할수록 풀리지 않는 의문만 깊은 산 속 옹달샘처럼 새록새록 솟구쳤다.

하지만 돌아오는 황태자의 대답은 의문에 아리송함만 더 얹어 줄 뿐이었다.

"이유? 있지. 손님이 올 거라서."

"손님... 말입니까?"

"어. 불청객."

"...."

"잠깐만 생각 좀 해 보고 돌아오겠다는 불청객이 있거든. 근데 내 감을 따르자면, 오전 중에는 돌아올 것 같아서. 그래서 이렇게 기다리는 중이야. 잠들어 있다가 헐레벌떡 깨어나며 맞이하는 건 싫어서."

"...그게 누굽니까? 혹시 저 팻말과 관련이 있는 겁니까?"

데미안은 더욱 덩치를 불려 가는 의혹을 느끼며 눈길을 돌렸다. 그의 눈길이 향한 곳. 그곳에 급조해서 만든 팻말이 세워져 있었다. 팻말에 황태자가 직접 휘갈겨 쓴 '협상 환영'이라는 글귀가 유독 눈에 띄었다.

'협상?'

황태자는 대체 누구와 협상을 하겠다는 걸까. 짐작 가는 곳이 없었다. 하지만 이 인간, 분명 뭔가를 노리고 있다. 그것만은 확실하게 느껴졌다. 지금까지 곁에서 지켜보고 겪어 본 황태자는 언제나 속내를 잔뜩 깔아 두고서 일을 벌이는 인간이었으니까.

"...."

참 알다가도 모르겠는 사람. 황태자를 보는 데미안의 눈길이 복잡해졌다. 반면, 라키엘의 눈꼬리는 가늘어졌다.

"어허. 또. 또. 딴생각 한다? 은근슬쩍 손에서 힘 살살 빠진다?"

"...."

"좀 확실하게 주무르자. 응?"

"하지만 전하. 다른 특근대원도 있지 않습니까?"

"응?"

"왜 저만 이러고 있어야 합니까?"

"다른 대원들이 있으면 난리를 피울 거라서?"

"...예?"

"그런 게 있어."

라키엘은 싱긋 웃었다. 흘려내듯 농담처럼 말했지만, 엄연한 사실이었다. 이제 곧 돌아올지도 모르는 엘프, 그녀가 올 때 최대한 주위를 비워 둠이 좋을 듯했다. 근위대와 특근대 모두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그들이 다 있어도 그 엘프를 못 막을 테니까.'

불현듯 지난밤의 일이 떠올랐다. 아직 이름도 모르는 그 엘프 여인은 2황자궁의 삼엄한 경비를 아무렇지도 않게 뚫고서 테라스까지 들어왔다. 단순히 뛰어난 은신술? 그 정도의 수준이 아니었다.

'심지어 연회장 안쪽에는 데미안이 있었거든. 그런데....'

데미안조차도 엘프의 기척을 감지하지 못했다. 그건 엄청난 일이었다. 데미안은 소드 익스퍼트 상급의 경지에 다다라 있으니까. 전신의 감각이 지극히 예민해지는 소드마스터 증후군을 앓고 있으니까.

'그건 즉, 그 엘프 여자의 실력이 현재의 데미안보다 뛰어나다는 뜻이겠지. 추측하자면 아마도... 소드 익스퍼트 상급과 소드마스터 사이쯤?'

어쩌면 거의 소드마스터에 필적하는 단계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어설픈 대립은 소란만 불러올 뿐이다. 차라리 데미안만 곁에 두고서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는 편이 서로에게 좋으리라.

그렇게 라키엘이 생각하던 무렵이었다.

...후욱.

어디선가 미약한 산들바람이 불어왔다. 늦겨울 목련 꽃잎 한 장이 바람결에 실려 날아와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주 잠깐 시야를 가렸다. 얼결에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떠 보니....

"잠깐 고민을 마치고 왔다."

어느샌가 엘프 여인이 돌아와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너무나 자연스럽게. 세 발짝 떨어진 곳에서 이쪽을 향해 무감정한 눈길을 던져왔다.

덕분에(?) 데미안의 안마가 중단되었다.

"...!"

흑발 호위의 손이 섬전처럼 움직였다. 조금의 군더더기조차 없는 동작으로 검 손잡이를 잡았다. 뽑았다. 아니, 뽑으려는 순간이었다.

"데미안, 그만."

라키엘의 차분한 목소리가 데미안을 가로막았다. 덜컥, 데미안의 발검 동작이 중단되었다. 그는 말없이 서 있는 엘프 여인을 향해 시선을 고정시킨 채 물었다.

"혹시, 저 엘프가 전하께서 말씀하신 손님입니까?"

"어. 그러니까 검 뽑을 필요 없어."

"...."

꿀꺽.

데미안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출렁였다. 그는 보자마자 직감할 수 있었다. 저 엘프, 강하다. 어쩌면, 아니, 아마도 자신보다 더.

'어느 정도의 실력인지 가늠이 안 돼.'

파악할 수가 없었다. 서 있는 자세를 보아도 아무런 느낌이 오지가 않았다. 그 뜻은 간단했다. 자신이 파악할 수 없는 경지의 실력자라는 뜻이다.

"...."

황태자는 저런 엘프를 언제 만났던 걸까. 언제 인연을 맺었던 걸까. 알 수가 없었다. 짐작이 되는 구석도 없었다.

그사이, 엘프 여인이 입을 열었다.

"실비아. 내 이름이다."

자신의 이름을 밝힌 그녀의 눈길이 '협상 환영'이라 쓰인 팻말을 힐끔 살폈다.

"정식으로 협상에 임하려면 통성명 정도는 해 둬야겠지."

"잘 오셨습니다. 그래도 일찍 오셨군요. 내일 오시면 어쩌나 했는데."

"원래는 그러려고 했는데."

"...."

"아주 잠깐 고민해 본 결과, 더 길게 고민해 봐도 답이 없을 것 같아서 그냥 일찍 왔지."

"그렇습니까?"

"으음."

"금전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기 때문이겠지요?"

"...뭐?"

엘프 여인, 실비아의 눈썹이 희미하게 꿈틀거렸다. 그만큼 라키엘의 미소가 은근해졌다.

"제가 어젯밤에 드렸던 제안 말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서로에게 이득이 될 것 같아서 정말 좋은데, 마음에 들고 구미가 당기는데, 차마 그걸 받아들이려니 뭔가가 부족하다고 느끼는 거겠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

실비아의 입이 다물렸다.

그 모습을 보며 라키엘은 확신했다. 자신의 짐작이 맞았노라고. 밤을 지새우며 짰던 계획이 통할 것 같다고.

자신감을 담아서 말했다.

"그럼, 어제 드렸던 제안을 좀 보강해 보도록 할까요."

"보강?"

"예. 그쪽의 목숨을 살려드리죠."

"...."

실비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하지만 라키엘은 개의치 않았다.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죽이겠다, 뭐 그런 따위의 협박이 아닙니다. 어차피 그쪽, 제가 손을 쓰지 않아도 오래 살진 못할 것 같으니까."

"...무슨 뜻이지?"

"당신 말입니다. 스스로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병을 지니고 있는 거, 아십니까?"

"...."

정말로 무슨 뜻일까. 인간 특유의 간사한 말장난일까. 실비아는 더욱 경계하는 눈초리로 라키엘을 쳐다보았다. 라키엘의 말이 이어졌다.

"어젯밤에 처음 접근해 오셨을 때 느꼈지요. 당신의 호흡에 아주 미세하게 섞여 있는 이질적인 소리. 그리고 숨을 내쉴 때마다 희미하게 나는 염증 냄새. 혹시 아침마다 진녹색에 가까운 가래가 나오지 않습니까?"

"...."

"맞으실 텐데."

"그게 어쨌다는 거지?"

"금전으로 보상을 대신하겠다는 제안을 받아들이면 치료를 해 드리겠다는 뜻입니다. 일종의 패키지 보상처럼."

"하."

실비아의 입에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어린 인간 주제에 가소롭군. 그래. 방금 네가 말한 증상은 맞아. 아침마다 독한 가래가 끼지. 요즘 호흡이 조금 불편해진 것도 사실이야. 하지만 그게 어때서? 이 정도는 공기 맑은 곳에 틀어박혀서 몇 년만 쉬어 주면 나을 가벼운 증상이야. 그런데, 고작 그런 걸 치료해 주겠다며 생색을 내려는 건가?"

"가벼운 증상이 아닐 텐데요."

"그걸 어떻게 확신하지?"

"제가 직접 봤으니까 말입니다."

"뭐?"

실비아는 어처구니가 없어짐을 느꼈다. 하지만 라키엘은 그녀의 반응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이런 반응쯤은 예상했다는 듯, 태연하게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이내 다시 꺼낸 그의 손에는....

"오랜만이다, 뽀복아?"

"뽀복! 뽀보복!"

불사조 개복치 환상종, 뽀복이가 반갑게 외쳤다. 라키엘이 뽀복이를 향해 의미심장한 말을 건넸다.

"어제 새벽에 말이야. 내가 저분 진맥해서 전달해 준 영상, 지금 보여줄 수 있어?"

"뽀!"

뽀복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라키엘의 손바닥을 떠나 도동실 떠올랐다. 가슴지느러미를 활짝 펼쳤다. 이내 16:9 비율의 지느러미 디스플레이가 환하게 밝혀졌다. 그리고 그 속에....

파츠즈즈즈...!

지난밤, 엘프 실비아가 단검에 목을 들이대던 그때, 잠시 몸이 맞닿던 순간에 라키엘이 발동했던 진맥 스킬 옵션, 'CT 출력'의 결과물이 불꽃 지느러미 디스플레이에 띄워졌다.

...파즈즛!

처음에 떠오른 영상은 온통 불그스름한 배경이었다. 포도송이처럼 둥근 조직이 공기의 흐름에 따라 희미하게 요동쳤다.

"보이십니까? 당신의 허파 속 광경입니다."

"이게 무슨...."

실비아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지금 황태자, 이 어린 인간이 뭘 하려는 건지 감이 잡히지가 않았다. 그때, 라키엘이 불꽃 지느러미에 떠오른 영상 한쪽을 가리켰다.

"그리고 여기, 이놈이 바로 당신의 허파 속에 똬리를 튼 기생충이지요."

"기생충...?"

"예. 어젯밤에 당신이 접근해 오던 때부터 말입니다. 호흡 소리, 숨에서 나는 냄새, 그런 것들을 통해서 병증의 징후를 예감했고, 진단을 했거든요."

"...."

"어쨌건 당신, 이걸 계속 품고 있다간 상태가 점점 심각해질 겁니다."

"...."

실비아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사실 그녀는 라키엘은 전혀 믿지 않았다. 하지만 눈앞에 떠오른 괴상한 개복치는 믿을 수 있었다. 보자마자 깨달았다. 환상종이라고.

'환상종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까.'

문득, 일족의 대장로께서 해주신 말씀이 떠올랐다. 대장로께서도 젊은 시절, '로이드 프론테라'라고 불린 어느 교활한 인간과 협력한 적이 있었노라 하셨다. 꽤나 시달렸다고도 하셨다. 하지만 그 인간에게 환상종이 있었기에, 믿을 수 있었다고도 하셨던가.

'대장로께서 말씀하셨지. 환상종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그러니 저 개복치 환상종이 펼쳐낸 지느러미 속 영상도 조작이나 거짓이 아닐 것이다. 언뜻 보면 강낭콩을 닮은, 저 꿈틀거리는 벌레가 자신의 허파에 똬리를 틀고 있다는 말도 사실일 것이다.

"그럼 대체 저게, 뭐길래?"

결국, 실비아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 순간 라키엘이 방긋 웃었다. 마치 그 질문만 기다렸다는 듯. 혹은, 엄청난 수명을 지닌 엘프를 환자로 맞이하게 되어서 진심으로 환영한다는 듯, 말했다.

"폐흡충, 폐 디스토마(Paragonimus westermani)입니다."

153화. 신개념 디스토마 치료법 (1)

"폐흡충, 폐 디스토마(Paragonimus westermani)입니다."

겨울이라 하기엔 늦고 봄이라 부르기엔 다소 이른 계절. 서늘한 바람과 따스한 햇볕이 공존하는 별궁 정원 한쪽에서 라키엘의 진단이 떨어졌다.

그가 뽀복이의 불꽃 지느러미 디스플레이를 가리켰다. 그곳에 강낭콩처럼 타원형으로 시뻘겋게 생긴, 통통한 벌레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보이지요? 이게 바로 폐흡충이라는 기생충입니다. 말 그대로 당신의 허파 속에 자리를 잡고서 온갖 해악을 끼치는 중이지요. 당신을 숙주로 삼아서 말입니다."

"...."

엘프, 실비아는 미간을 찡그렸다. 그녀의 눈길이 폐흡충을 향했다. 눈길이 닿는 순간 폐흡충이 꿈틀. 그녀 또한 저도 모르게 흠칫.

'저런 게? 내 몸속에 있다고?'

의문이 피어났다.

믿기지가 않았다.

아니, 환상종이 보여주는 결과물이니, 일단 믿을 수는 있었다. 하지만 어째서 저런 괴악한 기생충이 자신의 몸속에 똬리를 틀고 있는지가 이해가 안 됐다.

"이거, 사실인가?"

"예."

"어째서?"

"예?"

"나는 사악한 흑마법 따위에 당한 적이 없어. 부두술사 같은 놈들의 저주를 받지도 않았고. 악령이 나타나면 그저 베었지. 한데, 내가 저런 기생충에게 농락당하는 중이라고? 어떻게? 무슨 수로?"

정말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신은 일족의 외부 대소사를 처리하는 집행자였다. 말 그대로 일족이 외부와 겪는 갈등, 마찰, 각종 복잡한 이해관계의 일선에서 일을 해결하는 존재였다.

당연히 강력했다.

인간들이 말하는 소드마스터? 능히 겨룰 자신이 있었다. 대마법사? 그들의 마법에 쉽게 당할 정도로 물렁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기생충이라니. 도무지 알 수가 없군."

"당연합니다. 알 수 없는 게."

"...뭐?"

실비아의 한쪽 눈썹이 꿈틀.

라키엘의 태연한 설명이 이어졌다.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폐흡충의 유생을 섭취해서 그렇게 된 겁니다."

"유생?"

"예."

"그게 뭐지?"

"뭐, 폐흡충에 대해 대략적으로나마 설명을 드리자면...."

라키엘이 심호흡을 했다. 이윽고 태연한 얼굴로, 전혀 태연하지 않은 내용을 속사포처럼 쏘아냈다.

"우선 폐흡충의 알은 엄청나게 작습니다. 100나노미터, 그러니까 0.1마이크로미터쯤 되지요. 그런 놈들이 섬모유충(miracidium) 상태로 물속을 떠돌다가 1차 숙주인 다슬기 등등의 몸속에 침투합니다. 그 안에서 여차저차, 분열도 하고, 짝짜꿍도 하고, 유미유충이라는 걸로 짜잔, 변신도 하고."

"무슨...."

"어쨌건 그 뒤에는 2차 숙주인 민물 게나 가재가 다슬기를 잡아먹으면 또 거기로 건너갑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최종 숙주를 기다리지요. 뭐, 가끔은 멧돼지 등등의 동물을 한 번쯤 더 거치기도 하지만 말입니다."

"잠깐. 그럼 설마?"

"눈치채셨습니까?"

실비아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설명을 듣다 보니 문득 깨달아지는 바가 있었다.

"방금 그쪽이 말한 민물 게, 가재, 멧돼지 등을 잡아먹으면?"

"빙고."

라키엘이 방긋 웃었다.

"굽거나 찌거나, 어떤 형태로든 뜨겁게 조리해서 먹으면 괜찮습니다. 제아무리 폐흡충이 지독한 놈들이라도 보글보글 끓는 물이나 이글거리는 불길 속에서 살아남을 수는 없으니까요. 문제는 당신이 말한 민물 게, 가재, 멧돼지 고기 등을 날것으로 먹을 경우에 생깁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습니다. 엘프시죠. 식물을 지그으으윽히 사랑하시는. 그래서 야영을 하면서도 불을 피우지 않죠. 불을 피우려면 나무를 태워야 하니까. 심지어 모든 엘프는 화염 마법을 사용할 줄도 모르지요. 그따위 악독한 마법을 배웠다간 자칫 숲이나 덤불을 태우는 끔찍한 범죄를 저지를 수도 있으니까."

"...."

"이해합니다. 야영을 하면서 불도 못 피워, 화염 마법도 못 써. 휴대하고 다니는 식량이 간당간당 바닥을 드러낼 때도 있겠지요? 그럴 때면 뭐, 멧돼지 한 마리쯤 잡아서 육회 슥삭. 쐬주가 없으셨던 게 안타깝군요."

"쐬주가 뭐지?"

"그런 게 있습니다. 어쨌건."

라키엘이 입가에서 미소를 지웠다.

"야영하며 드셨을 날것들이 문제가 된 겁니다. 덕분에 폐흡충의 유충이 당신 몸속으로 들어갔고, 허파에 자리를 잡은 거지요."

"그런데, 이게 그렇게 호들갑이나 떨 정도로 큰 문제라도 되는 건가?"

실비아가 반문했다.

라키엘이 여유롭게 반박했다.

"어젯밤 처음 만났을 때 말입니다. 그때부터 숨에서 희미한 냄새가 나더군요."

"...뭐?"

"기관지, 허파 조직 곳곳에 염증이 생겨나 있을 겁니다. 그런 염증을 지닌 사람 특유의 숨 냄새가 있습니다. 게다가 숨소리도 조금 이상했습니다. 어딘가 공기가 살짝 새는 듯한 거슬리는 소리? 그거, 기흉의 전조일 수도 있습니다."

사실이었다.

덕분에 만나자마자 이 엘프 여자에게 뭔가 문제가 있다는 걸 단박에 직감할 수 있었다. 그때부터였다. 눈치를 보며 기회를 살폈다. 마침 자신의 목에 단검을 겨누던 그녀의 손목이 이쪽의 쇄골 어름에 살짝 닿았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재빨리 진맥 스킬을 사용했다. 그녀의 병변을 낱낱이 판별할 수 있었다. 병증의 원인을 찾아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앞으로 그녀의 몸에서 생겨날 일들을 예측할 수도 있게 되었다.

"일단, 지금 현재 폐흡충은 당신의 기관지와 소기관지 어름에 완전히 정착해서 염증세포 침윤을 유발하는 중입니다. 제법 기세가 맹렬하지요. 덕분에 당신의 허파 속에서 감염이 지속되었고, 결국엔 섬유조직으로 발전된 충낭(worm capsule)이 생성되어 버렸습니다."

"충...낭?"

"말 그대로 벌레 주머니죠."

"...."

"허파 속에 생겨난 충낭, 그 안에 폐흡충 두 마리가 들어 있습니다. 일종의 커플이랄까요. 화나죠? 짜증 나죠? 우리도 커플 되기가 쉽지 않은 인생인데. 빌어먹을 벌레 x끼들."

"...."

"크흠, 흠!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그라데이션으로 흥분해서 그만. 어쨌건, 충낭 안에는 폐흡충뿐만이 아니라 고름, 숙주세포, 괴사된 찌꺼기, 충란까지 갖가지 잡것들이 버라이어티하게 담겨 있습니다. 가히 효율적인 인체 파괴 패키지죠."

"그럼, 그게 많이 나쁜... 건가?"

"예."

"얼마나?"

"일단 오한과 미열 증상이 반복될 겁니다. 심한 기침과 객혈을 하며 피로감을 느끼고, 전신쇠약 증세까지 따라오게 되지요."

"그거...."

"이미 겪으셨죠?"

"어느 정도는."

실비아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이 인간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겠다. 실제로 최근 그녀는 전에 없던 심한 피로감을 느끼던 중이었다. 아침마다 열과 오한이 났고, 가끔은 기침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리고 더 가끔은... 기침에 피가 섞여 나오기도 했다.

'난 그저, 최근 너무 쉼 없이 활동을 해서 그런 줄 알았는데.'

자신이 너무 무리를 했노라고. 너무 오래 쉬질 못했다고. 이번 일까지 마치면 당분간 휴식을 취해야겠노라고. 그러면 자연스레 나을 거라고.

안일하게 여겼더랬다.

한데 오산이었다.

그냥 피로감 때문이 아니었다.

"그래서 말입니다. 이거 그냥 놔두면 더 심각해질 겁니다. 갖가지 합병증 풀세트 당첨이 거의 확실하니까 말이지요."

"합병증?"

"예. 기관지염, 늑막염, 기흉, 녹흉 등등. 허파와 관련된 온갖 질환들이 다 생길 겁니다. 그렇게 염증이 생기고 회복되고를 반복하다가 마지막 최종 테크트리로는 폐암이 완성될 테고 말입니다."

"폐암...?"

"불치병입니다. 죽을 겁니다."

"...."

"자. 그러니 어떻습니까. 제가 어젯밤에 드렸던 제안 말입니다. 넉넉한 금전과 풍부한 노동력을 제공해서 불탄 숲을 복구해 드리는 거. 그걸 받아들이시면 어떨까요?"

"거부한다면?"

"폐흡충 치료도 안 해드리는 거고."

"...."

실비아는 할 말을 잃었다. 비로소 깨달았다. 이 인간, 자신의 병을 볼모로 삼아 협상 카드로 쓰고 있는 거다!

'무슨 이런....'

지독한 인간이 다 있을까. 그 수단과 의도의 교활함에 치가 떨렸다. 하지만 동시에 또 깨달았다. 이미 자신이 거미줄에 걸렸다는 것을. 저 제안을 거부할 수 없으리란 사실 또한.

'...장로님께 혼날 텐데.'

아마 일족의 장로는 저 인간의 보상 방법에 불만을 표하실 것이다. 정성이 없노라고. 사죄의 마음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분명 그런 반응을 보이시겠지.

하지만 실비아는 이번만큼은 저 인간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죽기 싫어.'

환상종 덕분에 완전히 믿을 수 있게 된 저 인간의 진단. 저 말이 사실이라면 끔찍한 죽음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터다.

그건 싫었다. 기껏 200년을 공부하고 훈련하고 노력해서 집행자가 되었는데,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다하기도 전에 허망한 죽음을 맞이하고 싶지는 않았다.

게다가 자신은... 아직 솔로가 아닌가 말이다!

'아직 제대로 이성을 만나 보지도 못했어. 매일 훈련에 매진하느라고. 부모님께선 항상 말씀하셨지. 연애는 나중에 집행자가 되고 나서 해도 된다고. 그때 실컷 할 수 있을 거라고.'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집행자가 되고 나니 오히려 이성과 교제할 시간이 더 없어졌다. 매일 일족의 분쟁과 마찰을 해결하러 현장을 뛰어다녀야 했다. 그런 와중에 연애는 사치에 불과했다.

하지만 부모님은 또 말씀하셨다. 지금이 취업 초기라서 바쁜 거라고. 좀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고. 연애는 나중에 상급 집행자가 되고 나서 해도 된다고. 그때 실컷 할 수 있을 거라고.

"...."

엄마. 그건 좀 아닌 거 같아. 그러다간 나 할머니 장로 될 때까지도 연애 한 번 못해보겠어.

까득.

실비아는 굳게 이를 갈며 다짐했다. 나중에 장로님께 혼나더라도 이번만큼은 저 인간의 제안을 따르자고. 그렇게 분쟁을 해결하고, 자신의 건강도 되찾자고.

그래서였다.

"그럼... 내가 그쪽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말이야."

"네. 궁금한 게 있으신지?"

"으음. 혹시 어떤 방법으로 폐흡충을 치료할 거지?"

궁금했다.

불안하기도 했다.

황태자라는 이 인간, 온몸에서 온갖 약초 냄새가 가득 났다. 모두가 소중하고도 안타까운 식물 친구들이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엄청나게 걱정이 되었다.

"설마... 소중한 식물들을 뽑고, 자르고, 말리고, 끓이거나 해서 만드는 물약 따위를 내게 먹이려는 건 아니겠지?"

그녀는 보통 인간의 의사라고 불리는 자들이 흔히 쓰는 치료 방식을 떠올렸다. 그건 싫었다. 끔찍했다. 아무리 건강을 위해서라지만 식물을 희생시켜야 한다니. 그런 악독한 일을 감수하는 건 꺼려졌다. 그렇기에 치료를 결정하기 전에, 반드시 확인을 하고 싶었다.

물론 라키엘은 그녀의 염려를 진즉부터 캐치하고 있었다.

"아. 혹시 제가 식물을 괴롭힐까 봐 그러시는 거지요? 그 문제라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이번에 당신에게 해줄 처방에는 식물이 하나도 안 들어갈 겁니다. 적어도 직접 섭취하는 처방에는 말이지요."

"그런가? 정말?"

"예."

라키엘이 희미하게 웃었다.

아무 걱정도 하지 말라는 듯이.

참으로 좋지 않겠느냐는 듯이.

정원 한쪽에서 뒹굴거리며 질겅질겅 되새김질을 하던 미노타우로스, 우루스를 가리켰다.

"저 친구가 옻나무 먹고 만들어 주는 옻똥, 그러니까 옻 끙까로 '우(牛)루왁 커피'를 달여 드시면 될 거지 말입니다?"

그의 미소가 더욱 화사하게 빵긋 피어났다.

154화. 신개념 디스토마 치료법 (2)

"그러니까 옻 끙까로 '우(牛)루왁 커피'를 달여 드시면 될 거지 말입니다?"

"...."

라키엘이 빵긋 웃었다.

실비아가 허허 웃었다.

그녀는 생각했다.

'...이 x끼가?'

하마터면 저도 모르게 쌍욕을 발사할 뻔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쪽은 진지하고 심각했다. 자신의 허파에 끔찍한 기생충들이 똬리를 틀었노라고, 장차 치명적인 병이 줄줄이 생길 거라고 했다.

불안했다. 두려웠다. 허무하게 죽는 건 싫었다. 그래서 저 인간의 제안을 수락하며 치료를 받기로 결심했다. 치료법을 물었다. 식물을 괴롭히지 않을 거란다.

'그런데 뭐? 우루왁? 옻똥? 그러니까, 소똥 달인 물을 마시라고?'

생각할수록 기도 차지 않았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설마 지금, 날 희롱하는 건가?"

그녀의 얼굴에서 표정이 지워졌다. 어느새 형형하게 살벌해진 눈길이 라키엘의 전신을 저며낼 듯이 압박했다. 자신은 절박하고 진지했는데, 그 모든 것들이 농락이었다고 생각하니 얼음장처럼 서늘한 분노가 치밀었다.

그런데 다음 순간이었다.

"제가 장난을 치는 걸로 보입니까, 지금?"

되돌아오는 황태자의 목소리가 잔뜩 굳어 있었다. 덕분에 실비아는 저도 모르게 한쪽 눈썹을 찡그려야 했다.

"...뭐?"

"그러니까, 제가 지금 그쪽을 의미 없이 농락하는 걸로 들리느냐는 말입니다."

"...."

당연하지.

그렇게 대답하고 싶었다. 한데 어쩐지 그 말이 나오지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이쪽을 마주 보는 황태자의 눈빛과 표정이 뜻밖에도 매우 진지했기 때문이었다.

"지금 이거 장난 아닙니다. 우루왁 커피, 정말로 드셔야 합니다."

"...."

"저도 당신을 데리고 장난이나 치고 있을 시간 없습니다. 당신이 알고 있을진 모르겠는데, 제가 시간에 굉장히 민감한 사람입니다. 당신에게는 '잠시'라는 말로도 표현하기 민망할 정도로 짧은 하루라는 시간도, 제게는 엄청나게 크고 소중합니다. 한데 그런 제가, 지금 당신을 희롱이나 하면서 시간을 낭비할 사람으로 보입니까?"

"아니, 그건...."

"압니다. 소똥을 달여서 마시면 나을 거라니, 믿기지가 않겠지요. 황당하겠지요. 사이비 돌팔이처럼 들렸을 테고. 맞습니까?"

실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라키엘이 다 알겠다는 듯이 말했다.

"하지만 엄연히 효과가 있는 치료법입니다. 단순한 소똥이 아니니까요. 옻나무를 먹은, 그냥 소가 아닌 미노타우로스의 똥이니까요."

"...."

똥....

실비아는 문득 울고 싶어졌다. 눈물이 고이는 이유는 모르겠는데, 저 인간이 오히려 정색하고서 진지하게 설명하고 있으니 아무튼 더욱 그랬다.

하지만 라키엘은 진지했다.

그는 자신이 제시한 '우루왁 커피'에 확신을 지니고 있었다.

'당연하지. 이건 그냥 짐작으로 때려 박은 처방이 아니니까. 무려 진맥 과정에서 허파가 직접, 저 엘프의 허파에 똬리를 틀고 있는 폐흡충과 상담을 하며 낚시질을 한 끝에 알아낸 고급 정보의 결과물이니까.'

정말이었다.

사실은 예전, 한국에서 폐흡충 환자가 한의원을 찾아온 적이 있었다. 그때는 옻이니, 소똥이니 하는 따위의 처방을 하지 않았다. 당시 자신이 해준 처방은 간단했다. '종합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으세요.'였다.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폐흡충을 치료하는 가장 간단하고 효과적인 방법은 한의원이 아닌, 병원에 가는 거다. 병원에서 검사를 하고, 진단을 받고, 약국에 가면 된다.

'그러면 폐흡충 치료약을 주거든. 프라지콴텔(Praziquantel)이라고, 그런 성분이 담긴 약들이 있으니까.'

그냥 의사와 약사의 처방에 따라 그 약을 먹으면 된다. 뭔가를 더 할 필요도 없다. 그것만 먹으면 정말로 끝이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한테는 묘한 종특이 있단 말이지. 특히 어르신들 말이야. 몸 어딘가가 아프거나 불편해지면? 일단 먹는 걸 찾아. 장염에 좋은 음식이라든가, 관절에 좋은 음식이라든가 등등. 자꾸 뭔가를 먹어서 치료하려고 들거든.'

그거 참 안 좋은 습관이었다. 특히, 그런 분들을 노리는 사이비 돌팔이들에겐 너무나 먹음직스러운 습관이었다.

'쯧.'

그때 자신을 찾아온 폐흡충 감염 환자도 그랬다. 다른 용하다는 사람한테 가서 기혈 치료니, 혈관 속을 깨끗하게 해줘서 벌레를 죽이는 자연치유법이니, 기운을 북돋니 마니, 그런 근본 없는 처방만 받다가 치료 시기를 많이 놓친 분이었다.

그러면 안 된다.

명심해야 한다.

폐흡충, 간흡충, 그러니까 디스토마 류를 기 치료니 체질 치료니 하는 걸로 해결해 주겠다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사기꾼이다. 그런 사람들이 꺼내는 유혹은 가뿐히 뿌리치고 큰 병원으로 뛰어가야 한다. 다시금 강조하지만, 정말로 그렇게 해야 한다.

'어쨌건, 방금 내가 말한 옻나무 우루왁 커피도 뭐, 한국에서였다면 절대로 생각도 안 했을 치료법이긴 한데.'

라키엘은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만약 한국에서 누가 자신에게 저런 치료법을 제시했다면? 그 자리에서 정수리에 장침을 꽂아 버렸을 것이다. 아니, 경찰부터 불렀을지도 모른다. 여기 사기꾼이 있다고. 당장 수갑 채워서 잡아가라고.

그런데 지금, 자신이 이런 처방을 내려주게 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어젯밤, 진맥 스킬의 결과가 알려주는 정답이 바로 이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그는 자신의 내면을 향해 물었다.

응답이 곧바로 돌아왔다.

딩동!

[당신의 오장육부가 허파의 공적을 칭송합니다.]

[심장 : 이야아 진짜. 우리 허파한테 이런 재주가 있었네?]

[허파 : 허어... 파핳...ㅋ]

[대장 : 설마 허파 형님이 거기서 폐흡충을 낚을 줄은 몰랐지 말입니다.]

[간장 : 아니 진짜. 어떻게 폐흡충이랑 상담을 할 생각을 했지?]

[위장 : 난 폐흡충이 그런 취향일 거라고는 진심 생각도 못 했음ㅋㅋ]

[콩팥 : 누가 그걸 예상이나 했겠냐고 아ㅋㅋㅋ]

[모두의 감탄을 받은 허파가 얼굴을 잔뜩 붉히며 뿌듯해합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하는 법입니다. 그러니 누군가를 비보이로 만들고 싶을 때면 알보칠 말고 칭찬을 잔뜩 발라봅시다.]

"...."

쓴웃음이 절로 나왔다.

문득, 어젯밤 실비아를 진맥하던 때가 떠올랐다. 그때 허파가 뜻밖의 맹활약을 했다.

우선 허파는 실비아의 허파와 면담을 시도했다. 거기까지는 진맥 스킬을 사용할 때마다 으레 거치던 과정이었다. 한데 그다음부터였던가.

'허파 녀석, 갑자기... 완전 뜬금없이 구애의 춤을 추기 시작했지.'

기관지를 요염하게 묶었다.

허파꽈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보고 있자니 어처구니가 없었는데, 뭘 하려는 건지 몰라서 일단 두었다. 그런데... 어이가 없게도 그 구애의 춤이 제대로 효력을 발휘했다!

'저 엘프의 허파에 도사리고 있던 폐흡충의 눈에 콩깍지가 씌었지. 허파의 구애의 춤 덕분에. 완전 반해서.'

그때부터였다.

허파가 폐흡충과 상담(?)을 시작했다.

이미 허파에게 대한 호감도 최고점을 찍은 폐흡충이었다. 알아서 척척 상담에 열심히 임해 주었다.

덕분에 폐흡충이 좋아하는 색깔, 별자리, 선호하는 장르, 장래희망은 물론이고 MBTI와 사주팔자까지 스스로 다 불게 만들었다. 그런 정보 중에는? 폐흡충이 가장 극혐하는 것도 있었다.

'옻나무 냄새, 특히 옻에 많이 들어 있는 주성분인 우루시올(urushiol)을 제일 싫어한다고 했지.'

세상에서 제일 싫단다. 특히, 강력한 소화기관을 지닌 초식동물이 섭취하고 분해한 우루시올이 제일 극혐이란다. 차라리 연쇄살인마가 더 좋을 지경이라나. 그런 방식으로 정제된 우루시올 냄새를 맡으면서 살 바엔 차라리 차가운 바깥세상으로 가출해서 콱 죽고 말 거라고도 했다.

그렇듯, 허파가 물어다 준 고급 정보 덕분이었다. 실비아의 허파에 똬리를 튼 폐흡충을 몰아낼 치료법을 떠올릴 수 있었다.

'우루시올이 가장 많이 함유된 식물은... 뭐니 뭐니 해도 참옻나무지. 그리고 강력한 소화기관을 지닌 초식동물이라면... 우루스만큼 제격인 녀석이 있을까.'

라키엘의 시선이 옆쪽으로 향했다.

그곳에 뒹굴거리는 우루스가 있었다. 녀석은 배를 하늘로 보인 채 우물우물, 되새김질을 하고 있었다. 아마도 아침에 잔뜩 먹인 옻나무를 소화시키고 있는 거겠지.

"어쨌건, 저 녀석이 생산해 주는 끙까를 달여서 마시면 될 겁니다. 물론 행복한 맛은 아니겠지만 뭐, 원래 몸에 좋은 약이 쓴 법 아니겠습니까?"

"...."

라키엘은 싱긋 웃었다. 반면 실비아의 구겨진 얼굴은 펴질 줄을 몰랐다.

아무리 그래도 소똥이라니. 심지어 미노타우로스 똥이라니. 그걸 달여서 마신다는 생각을 하자마자 속이 메슥거리기 시작했다. 끔찍했다. 절벽에 매달려 애원하는 심정으로 그녀는 물었다.

"저기, 그쪽이 말하는 폐흡충, 그걸 치료할 방법을 다 믿기는 하겠는데...."

"하겠는데요?"

"혹시 말이야. 다른 방법은 없을까?"

"예?"

"소똥...을 달여서 마시는 것 말고 다른 방법 말이지."

"아, 차마 소똥 달인 물은 못 마시겠다는 말씀?"

"어."

실비아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라키엘이 다 이해한다는 듯이 인자하게 웃었다.

"그러시겠지요. 저 같아도 소똥 달인 물을 선뜻 마시진 못할 테니까. 끔찍할 테니까. 그래서 말씀을 드리고 싶은데 말입니다."

"뭘?"

"너무 놀라실까 봐 조금 전에는 차마 말씀드리지 못했던, 폐흡충의 다른 위험성이 있거든요."

"다른... 위험성?"

"예. 혹시 이소 폐흡충증(ectopic paragonimiasis)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

들어봤을 리가.

실비아는 희미한 불안감을 느끼며 고개를 저었다. 라키엘의 미소가 한결 인자해졌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술술 나오는 말은 결코 인자하지 못했다.

"이소 폐흡충증이라는 건, 원래 허파에 자리를 잡아야 하는 흡충이 전혀 엉뚱한, 신체의 다른 부위에 자리를 잡아 버리는 걸 뜻합니다. 예를 들자면, 여기."

라키엘의 손이 실비아의 배를 가리켰다.

"복부 폐흡충증(abdominal paragonimiasis)은 흡충이 복강에 있는 장기에 랜덤으로 침투하는 걸 말합니다. 창자 안을 엉망으로 만든다거나, 간에 달라붙어서 충낭 구멍을 뚫어 대고 간에 고름덩어리를 차곡차곡 쌓아 준다거나. 그런데 가끔은 말입니다. 흡충이 배가 아니라 또 다른 곳에도 들어가곤 하거든요?"

"...그게, 어딘데?"

"머리."

"...!"

움찔!

라키엘의 손가락이 실비아의 미간을 가리켰다. 실비아의 어깨가 흠칫했다.

"최악은 뇌 폐흡충증(cerebral paragonimiasis)입니다. 말 그대로 머리 안에 흡충이 들어가 버려요. 그런데 머리 안에 뭐가 있죠? 뇌가 있겠죠. 한데 뇌 속에서 벌레가 탭댄스를 추면 사람이 어떻게 되죠?"

"어떻게 되는데?"

"어떻게는 뭐가 어떻겝니까. 그냥 엿 되는 거지."

"...."

"전간발작, 두통, 이런 건 연습게임 정도인 거고. 더 심각하게는 반신불수, 편마비, 시각장애, 뇌막염이 생기지요. 그런데 거기서 더 최악은 뭔지 아십니까?"

"또... 있어?"

"뇌에서부터 시신경을 타고 눈알에 들어가는 겁니다. 폐흡충이."

"...."

꺄아아아앙아악.

실비아는 저도 모르게 마음속으로 비명을 꽤액 질러 버렸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치료든지 열심히 받겠다고. 협력하겠다고.

덕분에 그날 저녁, 그녀는 로라시아 대륙의 도도하고도 장구한 역사 속에서, 최초로 미노타우로스 끙까를 후루룩 달여 마신 기록적인(?) 엘프가 되었다.

155화. 신개념 디스토마 치료법 (3)

실비아.

너는 대자연의 하나로서, 일족의 아이로서, 아름다운 것을 취하며, 먹고, 누릴 것이니라. 자연이 너에게 허락하는 최후의 숨결까지. 그 모든 순간에.

"...."

엘프족의 집행자, 실비아는 감았던 눈을 떴다. 자신의 앞에 놓인 테이블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새하얀 그릇이 있었다. 그릇에 담긴 고동색 액체가 모락모락 김을 피워냈다. 어쩐지 심각하게 구리구리 구수한(?) 향기와 함께였다.

'후우,'

그녀는 메슥거리려는 속을 억눌렀다. 한편으로 내심 투덜거렸다. 어머니, 저 아름다운 것만 먹고 취하고 누릴 거라면서요. 대자연의 일부라면서요. 그런데 혹시, 그 아름다운 대자연에 이런 것도 포함되는 거였나요.

'인생 진짜.'

설마 자신이 이런 걸 마시게 될 줄은 몰랐다. 그러니까, 미노타우로스가 질겅질겅 씹어 삼킨 옻나무 끙까를, 말리고 볶아서 달여낸 물 같은 걸 마시게 될 줄은, 정말로 몰랐다!

"뭐 합니까?"

"...."

테이블 건너편에서 은근한 재촉이 날아왔다. 고개를 들어보니 빙글빙글 웃는 인간이 보였다. 숲을 불태운 죄인, 황태자였다.

"식으면 약효 떨어집니다. 지금 바로 드셔야지요."

"그, 그게."

"마음의 준비가 필요해서요?"

"...."

"쓰읍. 우리 집행자님, 그렇게 안 봤는데."

"...."

"아프지 마시라고 내가 진짜 정성껏 채취해서 가공한 건데."

"...."

"진짠데."

라키엘은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정말로 진짜였다. 다른 것도 아니고 우루스의 끙까였다. 그걸 채취하고 가공하는 일은 진심 장난이 아니었다. 일단 끙까 사이즈만 해도 사람만큼 컸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그랬다!

그걸 채취해서 적당한 크기의 경단으로 빚었다. 그늘에 말리고, 아궁이에 구웠다. 적당히 구워진 끙까를 곱게 갈았다. 아니, 로스팅(?)했다.

본격 폐흡충 치료 포션, '우루왁 커피'의 첫 완성이었다.

'뭐, 이건 루왁 커피처럼 동물 학대도 아니니까.'

사실 한국에 있을 땐 루왁 커피를 마셔 본 적이 없는 자신이었다. 그걸 좋아하는 사람에겐 취향이니 간섭할 생각은 없었지만, 굳이 동물 끙까를 달여서 마시고 싶진 않았으니까. 그걸 만드는 과정에서 학대받는 동물이 조금 불쌍하기도 했고.

그는 잠깐 떠오르는 상념을 털어내며 말했다.

"그러니까 마시겠다면서요. 협조하신다며. 덕분에 기껏 고생고생해 가면서 이걸 달여왔는데, 이제 와서 못 드시겠다?"

"아니, 그건 아니고...."

"아 괜찮다니깐. 일단 잡숴 봐. 응? 츄라이, 츄라이."

"...."

실비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미 여기까지 온 마당이었다. 돌아갈 길은 없다. 각오를 다진 그녀는 그릇을 들었다. 사약 마시듯 꿀꺽, 삼켰다.

"...붑!"

뿜을 뻔했다. 뿜고 싶었다. 그러나 실패했다. 이런 반응을 미리 예상한 건지, 황태자가 잽싸게 손을 뻗어 입을 틀어막아 버렸기 때문이었다.

"할 수 있어요! 삼켜!"

"...급! 븝!"

"옳지, 잘한다! 꿀꺽!"

"뀕...!"

해냈다. 삼켰다! 어머니, 저 해냈습니다!

실비아는 감격의 눈물을 흘리...진 않았다. 대신 라키엘의 손을 치우자마자 격한 기침을 했다. 억지로 약을 삼키면서 사레가 들린 까닭이었다.

"...컥! 쿨룩! 케욱! 쿡!"

격한 기침이 연달아 나왔다. 사레가 심하게 들린 탓일까. 그런데 점점 이상했다. 보통은 사레가 들리면 처음에만 기침이 나오다가 곧 멎는 법인데, 이번엔 어쩐지 달랐다. 기침이 멎지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점점 격해졌다?

"콜록! 쿨룩! 커허으윽... 쿨룩! 컥!"

기침을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괴로웠다. 뭔가가 가슴속을 쥐어짜는 듯한 느낌마저 났다. 아팠다. 답답했다. 숨을 쉬기가 힘겨워졌다. 이건 정말로, 확실히, 이상했다!

'설마... 독?'

실비아는 가슴이 철렁하는 섬뜩함을 느꼈다. 자꾸만 더욱 격해지는 기침의 고통 속에서 서늘한 직감이 발동했다.

숲을 불태운 황태자. 그에게 보상을 요구하러 온 자신. 그러니 황태자에게 자신은 그저 성가신 상대였을 텐데. 차라리 없어지면 좋을 존재였을 텐데.

그런데 대체 나는 뭘 믿고... 저 인간을 신뢰했던 걸까.

'머, 멍청한... 내가... 속았어.'

섬뜩한 직감이 확신으로 바뀌었다.

독이다.

확실하다.

황태자가 숲을 불태운 책임을 회피하고, 성가신 자신을 제거하기 위해 독살을 시도하는 거다. 폐흡충이니 뭐니 하는 걸로 자신을 속인 거다. 그런 거다. 이 모든 게, 지독하게 사악한 계략이었던 거다!

'...감히!'

실비아의 눈이 번득였다.

확신이 분노로 바뀌었다.

그녀가 이를 갈았다. 더욱 격해지는 기침 속에서 벌떡 일어났다. 허리춤의 단검을 뽑았다. 황태자의 목을 단번에 긋겠노라 다짐했다.

하지만 그 다짐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한계까지 격해진 기침 끝에, 그녀가 저도 모르게 피 한 덩이를 왈칵 토해냈기 때문이었다.

"...커읍?"

울컥!

한 모금이나 되는 핏덩이가 어찌할 틈도 없이 목구멍으로 치고 올라왔다. 도저히 막을 수가 없었다. 토했다.

"컥!"

시커먼 핏물이 병실 바닥을 적셨다. 하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확신을 굳혔다. 마시자마자 시커먼 핏물을 토하게 하는 액체라면, 독약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죽인다!'

그녀의 눈에 살기가 빗발쳤다. 동시에 라키엘의 입가에는 싱글벙글 미소가 내걸렸다.

"왔드아!"

그가 잽싸게 바닥을 가리켰다. 그곳에 실비아가 방금 토해냈던 시커먼 핏덩이가 있었다. 라키엘이 주먹을 불끈 쥐며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 보세요. 이거 보입니까? 이야 이거, 제대로 나왔는데?"

"...."

마침 라키엘을 향해 달려들려던 실비아였다. 한데 어쩌다 보니 타이밍(?)을 빼앗기고 말았다. 덕분에 그녀는 덜컥, 엉거주춤한 자세로 멈추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의문도 느꼈다.

'나왔다니? 제대로? 뭐가?'

저 인간, 뭘 하려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어쩌면 지금의 저 행동 또한 계략의 일부일지도 모른다. 실비아는 경계심을 더욱 끌어올리며 되물었다.

"무슨 수작이지?"

"수작은 개뿔. 인상 펴고 여기부터 좀 보시라니깐?"

"...."

"여기, 이거 안 보여요?"

"...."

실비아는 눈을 가늘게 떴다. 라키엘이 가리키는 핏물덩이 속을 주시했다. 그러자 뭔가, 꿈틀거리는 작은 덩어리가 보였다?

"따란. 당신의 허파 속에서 무단거주를 감행하던 야생의 폐흡충이 나타났습니다?"

"...뭐?"

"기왕 이렇게 안면까지 튼 거, 인사라도 하시죠?"

"...."

정말?

처음엔 얼떨떨했다. 하지만 계속 보니 진짜였다. 그녀는 뛰어난 시력으로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크기는 약 1센티 정도. 통통한 타원형의 벌레가 꿈틀거리는 모습이 제대로 보였다.

폐흡충이었다.

'진짜였던 거야? 독살 시도도... 아니었고?'

그러고 보니 피를 토한 뒤부터 기침이 완전히 멎어 있었다. 그걸 깨달은 순간, 비로소 실비아는 전신에 깃들었던 긴장감을 풀었다. 끌어올렸던 살기를 누그러뜨리느라 살짝 뻘쭘함(?)을 느끼며 물었다.

"저기, 그럼 난 이제 완치된 건가?"

그런 거면 좋겠다. 피를 토했는데 그 속에 폐흡충이 섞여서 나왔으니까. 이제 자신의 허파는 깨끗해진 것이 아닐까. 하면 저 끔찍한 우루왁 커핀지 뭔지도 이제 안 마셔도 되지 않을까.

새록새록 피어나던 그녀의 희망은 돌아온 라키엘의 태연한 대꾸에 와장창 깨지고 말았다.

"아뇨? 아직 전혀?"

"...."

"완치된 거면 저도 좋겠습니다. 소똥 만지는 거 저도 기쁘진 않으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아직은 완치가 아니네요?"

"...."

"에이 너무 그렇게 똥 씹은 표정은 하지 마시고요."

"...."

"앗차차, 진짜로 똥 드셨지."

"...."

"뭐 어쨌건, 일단은 우루왁 커피가 효능이 있다는 건 입증이 됐으니 다행입니다. 첫 복용을 하자마자 이렇게 폐흡충이 나왔다는 건 굉장히 고무적인 일이고 말입니다."

"설마 그럼, 난 앞으로도?"

"예. 매일 아침저녁으로 하루 2회, 폐흡충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 이걸 마셔야겠죠."

"...."

"안 죽어요, 안 죽어."

"...흐흑!"

실비아는 저도 모르게 눈물샘을 왈칵 전면개방하고 말았다. 하지만 별수 없었다. 이미 시작한 치료였다.

그녀는 라키엘의 지시대로 매일 꾸준히 2회씩, 아침저녁마다 우루왁 커피를 복용했다. 그때마다 격한 기침과 함께 피를 토했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핏물 덩어리 속에 폐흡충이 한두 마리씩 섞여 나왔다.

그렇게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엿새째가 되는 날이었다.

...왈칵!

토해낸 핏물 덩어리 속에 폐흡충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동시에 라키엘의 귓가에 반가운 알림음이 힘차게 울렸다.

딩동!

[당신은 맹렬한 헛구역질을 참아내며 직접 조제한 우루왁 커피를 환자 : 실비아에게 복용시켰습니다.]

[스킬 : 탕약조제 (Lv.5)의 효과로 약효가 14% 증가하였습니다.]

[환자 : 실비아는 오랜 생식 습관으로 인하여 전형적인 폐흡충 감염 증상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적절한 치료가 없을 경우 3년 이내에 각종 합병증으로 사망할 운명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조제한 강력한 우루왁 커피의 효능 덕분에, 그녀의 신체에 증식하던 폐흡충이 모두 제거되었습니다.]

[진료비 청구 (Lv. 2) 스킬이 발동됩니다.]

[환자 : 실비아는 당신의 우루왁 커피 복용을 통해 총 732년 6개월의 기대수명 연장 혜택을 받았습니다. 이에 당신은 732년 6개월의 1/1950에 해당하는 보너스 수명을 정산받습니다.]

[환자 : 실비아가 인간이 아닌 관계로, 이종족 페널티가 부여됩니다.]

[정산받는 보너스 수명이 50% 삭감됩니다.]

[67.61일의 보너스 수명이 계산되었습니다.]

[정산되는 수명의 최소 단위는 1일입니다.]

[정산되는 보너스 수명이 반올림 처리됩니다.]

[총 68일의 보너스 수명이 정산됩니다.]

[당신의 예상 기대수명 : 376일]

'...허, 나이스!'

라키엘은 눈을 번쩍 떴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치료 한 번에 무려 68일의 수명이라니. 이건 신기록이었다. 게다가 덕분에 처음으로, 예상 기대수명이 1년 이상으로 쌓였다!

'역시 엘프! 믿고 있었다고!'

가히 천 년을 사는 종족이 엘프라고 하였던가. 그러면 앞으로 이들을 치료해 주면? 보너스 수명 걱정을 할 필요 없이 살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아니, 어쩌면 보너스 수명을 지나치게 많이 쌓아 버릴 수도 있겠다.

'그럼 나도 십장생 신규 멤버(?) 되는 거지!'

그는 새록새록 부풀어 오르는 꿈을 촵촵 핥으며 고개를 들었다.

"축하합니다. 완치되셨습니다."

"...정말로?"

"예. 이제 우루왁 커피 안 드셔도 됩니다?"

"그, 그런... 흐흐흑!"

드디어 해방이라는 깨달음에 감격해서 눈물을 글썽이는 실비아! 그런 그녀를 보는 라키엘의 눈빛이 꿀단지 바라보듯 그윽하게 변했다.

"저기, 그래서 말입니다만, 혹시 가족이나 이웃, 동료 중에 비슷한 증상 있는 분 없으십니까?"

"...폐흡충?"

"예. 굳이 그게 아니더라도 어디 아픈 분 없으십니까?"

"모르겠는데."

"어째서요?"

"어째서긴. 고향이 가본지가 30년이 넘었으니까."

"...혹시 가출하셨습니까?"

"그건 아니고."

실비아가 피식 웃었다.

"나는 외부의 일을 처리하는 집행자니까."

"하지만 임무나 지령을 받을 때는 마을에 돌아가는 거 아니었습니까?"

"응 아니야. 임무는 민들레 홑씨로 받아."

"...예?"

"대장로님께서 의지를 담고서 민들레 씨를 불어 날리시지. 그럼 그 의지에 따라 흩어진 민들레 씨가 나한테까지 날아와. 그 안에 다음 임무의 내용을 담고서."

"무슨 그런...."

라키엘의 어깨가 추욱 늘어졌다. 엘프 대가족을 치료하며 수십 년쯤 보너스 수명을 팍팍 땡겨 받으려던 달달한 꿈이 한 큐에 짜게 식었다.

하지만 그는 금방 멘탈을 회복했다. 그런 건 나중에 기회를 노리면 된다. 언젠가는 엘프 마을에 가볼 날도 있을 것이다.

하니 지금은? 당장 얻을 수 있는 다른 이득을 추가로 노려야 할 터.

'...그럼 슬슬 양념 좀 쳐볼까.'

폐흡충증이 완치되었다는 사실에 순수하게 기뻐하는 엘프 실비아. 그녀를 바라보는 라키엘의 머릿속에 최근 그려오던 다음 계획이 회전초밥처럼 착착 떠올랐다. 그걸 위해 던질 밑밥도 준비했다.

'챙길 건 듬뿍 챙겨야지. 골수까지 뽑아내서라도 빡쎄게, 잔뜩!'

확고한 일념으로 그는 입맛을 다셨다. 실비아를 향해 자본주의적 미소를 듬뿍 머금고서, 당연하다는 듯이 태연하게 말했다.

"그럼 이제 진료비를 주셔야죠?"

"...어?"

뜻밖의 소리에 실비아가 쩌저적, 굳어 버렸다.

156화. 값비싼 진료비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