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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apter 21. 시험 (2) > 끝

< Chapter 21. 시험 (3) >

르샨테의 중앙 광장.

이곳은 평소 전사들이 휴식을 취하는 장소였다. 허나 오늘만큼은 아니었다. 광장을 중심으로 목책이 세워졌고 수많은 인파가 모여들었다.

바로 족장의 시험을 위해서였다.

"슬슬 할 때도 되긴 했지."

"후보자라면 역시 이로나와 쿠르드인가?"

"그 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사정을 모르는 다크엘프들은 그리 추측했다. 반면 사정을 아는 전사들은 그저 입을 굳게 닫은 채, 광장을 주시할 뿐이었다.

그때 지축을 울리는 발소리와 함께 누군가 광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질긴 가죽 갑옷을 걸친 거구의 남자였다. 뾰족한 귀가 아니었다면 오우거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커다란 덩치를 가진 전사.

'하르민 젬버.'

멀리서 그를 보던 페르다가 눈을 좁혔다.

지난 모든 회차에서 세르네크의 사자로 왔던 자다. 의외의 인물이 등장해 다소 놀랐지만, 이내 납득한 얼굴을 끄덕였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저 남자가 심판을 맡는 게 가장 공정하다.

왜냐면 하르민은 다른 회차에서도 중립적인 태도를 유지한 녀석이니까.

"일곱 번째 전사, 하르민 젬버가 족장님께 인사드립니다."

광장의 중심에 선 하르민이 우직하게 고개를 숙였다. 단상에 앉은 이레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이내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쩌렁쩌렁한 음성으로 소리쳤다.

"그럼 지금부터 족장의 시험을 시작하겠다!"

쿵쿵-!

거대한 도끼로 바닥을 내리찍자 사방에서 환호성이 터졌다. 수십여 년을 주기로 치러지는 시험이니만큼, 광장은 어느새 수많은 인파로 가득 찼다.

수많은 동족을 눈앞에 둔 탓일까?

실반의 얼굴은 긴장한 기색으로 역력했다.

이를 본 페르다는 짐짓 모르는 척 말을 걸었다.

"왜 그래? 어디 불편한 곳이라도 있어?"

"으응, 아니 그냥 목걸이가 좀 갑갑해서······."

애꿎은 달의 눈동자를 만지작거리는 실반. 긴장된 걸 애써 숨기려는 모습에 페르다는 말없이 웃었다. 그러던 중 그의 시선이 달의 목걸이에게 가 닿았다.

'원래는 숲에 들어온 직후, 벗기려고 했는데.'

하지만 그럴 수가 없게 됐다. 아니, 그랬으면 큰일 날 뻔했다.

순간적으로 떠올린 어느 집단 때문이었다.

'지긋지긋한 성법관 놈들.'

성국 세러하임에는 성법관(聖法官)이라는 녀석들이 있다.

대륙 전역의 성물을 관리하는 놈들인데, 이 녀석들은 성물 냄새를 귀신같이 잘 맡는다. 평범한 성물도 잘 찾아내는데 보물이라 불리는 달의 눈동자는 오죽할까.

현재, 달의 눈동자는 실반의 힘을 억누르느라 모든 신성력을 사용하는 중이다. 덕분에 성법관의 눈을 피할 수 있었고. 이 점은 정말 다행이라고 페르다는 생각했다.

'하지만 5회차에서는······.'

그때의 실반은 성법관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그는 가끔 음차원의 마력을 회복하기 위해 종종 목걸이를 벗었는데, 그 탓에 상세한 위치가 발각됐다.

얼마 가지 못해 실반은 결국 성국에게 붙잡혔다.

그리고 산 채로 불태워졌다.

이를 떠올린 페르다는 주먹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꼈다.

'아직은 안 돼.'

실반의 존재도, 달의 눈동자가 여기에 있다는 것도 아직 알려지면 안 된다.

물론 언제까지고 무작정 숨길 생각은 없었다. 페르다는 실반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조금만 참아. 곧 벗을 수 있는 날이 오니까."

"정말?"

실반이 놀란 듯 되묻는다. 그냥 해본 말인데 목걸이를 벗을 수 있다고 하니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났다. 페르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좀 더 있으면······.'

때가 찾아온다.

성법관이 달의 눈동자의 위치를 파악해도, 감히 찾아올 수 없을 때. 신화급 사령술의 격이 드러나도 그것이 실반임을 알아차리지 못할 때.

바로 첫 번째 재앙. '모든 죽음'과 맞설 때다.

'그땐 무조건 벗어야지.'

모든 힘을 다하지 않으면 도리어 실반이 당할 수도 있다.

재앙은 괜히 재앙이라 불리는 게 아니었기에.

그런 생각을 끝으로 상념에서 벗어나던 무렵, 별안간 하르민이 실반이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후보자, 실반 아크듀트는 앞으로!"

이제 슬슬 시작하려나 보네.

쩌렁쩌렁한 외침이 끝나자 광장 일대가 크게 술렁였다.

"뭐? 실반?"

"그 반쪽이가 족장의 시험을 친다고?"

기대가 실망으로 변하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몇몇 다크엘프는 아예 광장을 떠나기까지 했다. 볼 필요도 없다면서.

한편 이름이 호명된 실반은 긴장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페르다는 눈을 가늘게 좁혔다. 적당한 긴장은 상관없지만, 과하면 실수를 불러온다.

"실반."

그래서 실반을 불러세웠다.

그러자 이내 고개를 돌렸다. 힘이 날 만한 말이라도 해주려나? 실반은 그리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페르다는 그런 상투적인 말을 할 생각은 없었다.

"지면 내일부터 당장 아침 훈련에 들어간다."

"······이럴 땐 보통 힘내라고 해주는 거 아니야?"

"대신 이기면 향후 석 달간 체력 훈련은 면제다."

"무조건 이기고 올게."

황금색 눈동자가 의욕으로 불탔다.

잠시 후, 두 사제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피식 웃었다. 별 것 없는 시답잖은 대화를 나눈 것에 불과했지만 이상하게도 긴장감이 사라졌다.

그때 페르다가 히죽 웃었다.

"수련의 성과를 보여줄 때다. 후회 없이 싸우고 와라."

"응, 다녀올게."

미소로 답한 실반이 몸을 돌렸다.

광장을 향해 폴짝 뛰어내린 실반은 훈련용 철제 갑옷을 착용했다. 이어 바닥에 널린 수많은 무기들 중, 그나마 가장 손에 익은 철검을 선택했다.

이후 실반은 하르민과 마주했다. 가까이서 보니 더욱 덩치가 컸다. 그것만으로도 위압감을 느낄 법했으나 실반의 표정에 변화는 없었다. 그러자 하르민의 눈에 일순간 이채가 맺혔다가 사라졌다.

"족장의 시험은 총 세 단계를 거친다."

하르민은 곧장 설명에 들어갔다.

"첫 번째는 힘의 시험. 후보자가 족장에게 필요한 최소한의 무력을 가졌는지 검증하는 시험이다. 이 경우, 후보자는 다섯 명의 전사와 일대일로 전투를 치른다."

그의 말이 끝나자 여기저기서 부정적인 소리가 들려왔다. 네자릿수 전사와 맞붙여도 실반 정도는 거뜬히 이길 거라거나, 내가 싸워도 반쪽이는 이길 수 있다는 말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실반은 동요하지 않았다.

하르민 역시, 무시한 채 말을 이어나갔다.

"정령, 주술, 암기, 독. 어느 것을 사용해도 좋다. 족장 후보는 사령술사라고 들었으니, 언데드를 부려도 좋고 망령을 부려도 된다. 단, 상대의 목숨을 빼앗을 경우, 지엄한 율법에 따라 벌하겠다. 이해했나?"

"이해했습니다."

"좋아. 그럼 시험을 치르도록 하지."

씨익 웃은 하르민이 다시 중심으로 걸어갔다. 좌측에 선 실반은 가벼운 심호흡과 함께 정면을 응시했다. 목책이 걷히자 중무장한 전사 다섯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앞서 족장 후보와 맞설 전사를 소개하겠다. 그루터기 일족의 전사 바르힘, 파도치는 숲 일족의 랭커드, 어둠 장막 일족의 전사······."

하르민이 전사들을 소개할수록 사방에서 놀란 탄성이 터져 나왔다.

모두 실력이 쟁쟁한 젊은 전사들이었던 탓이었다.

"와, 바르힘이 나왔다고?"

"더 볼 것도 없겠네. 그냥 돌아가는 게 낫지 않을까."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보고 가야지."

"반쪽이가 몇 초나 버티려나?"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환호성. 다섯 명의 전사들은 저마다 무기를 점검하며 실반과 마주 섰다. 전사들의 소개가 모두 끝나자 하르민은 좌측에 있는 실반을 가리켰다.

"그리고 족장 후보, 실반 아크듀트다."

하르민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모두가 입을 닫았다. 고요한 침묵만이 감도는 가운데, 누군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비웃음. 이를 시작으로 조롱과 야유가 이어졌다. 그런데도 실반의 표정은 무미건조하기만 했다.

힐끗-

그러던 중 실반이 시선을 돌렸다.

황금색 눈동자가 향한 곳은 페르다가 앉아있는 장소. 실반과 눈을 마주하자, 페르다는 차갑게 웃었다. 그러고는 엄지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그 손짓에 실반은 씩 웃었다.

뒤이어 그의 주변에 희뿌연 연기 같은 게 생겨났다. 언제나 그를 졸졸 따라다니는 세 망령. 그것들을 보며 페르다는 눈을 반짝였다.

'모든 수를 다 써도 된다고 했지만······.'

현재 실반이 가지고 있는 전력은 세 망령과 헤르온이 전부. 허나 헤르온은 시험에 나서선 안 된다. 왜냐면 그 혼자만으로 다섯 전사는 물론이고 여기 있는 대부분을 가볍게 쓸어버릴 수 있으니까.

'그럼 실반이 주목받지 못하게 돼.'

이겨도 이긴 게 아닌 셈이다.

반면 망령들은 다르다. 사령술사, 혹은 이로나처럼 강력한 정령술사가 아니면 망령들의 형체조차 제대로 보기 힘들다.

그저 뿌연 연기처럼 보일 뿐.

즉, 망령들의 활약이 실반의 실력처럼 보일 거란 소리였다.

'조언도 해줬으니까 알아서 잘하겠지.'

페르다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무척이나 편안해 보이는 자세로. 그때 하르민의 외침과 함께 전투가 시작됐다.

자, 그럼 한번 감상해볼까.

그의 입가에 여유로운 미소가 맺혔다.

***

"전투 시작!"

짧은 외침과 함께 시험의 시작을 알렸다.

여기저기서 응원의 박수 소리가 들렸다. 물론 모두 상대 전사를 응원하는 소리였지만 실반은 개의치 않았다.

'난 한 사람이면 돼.'

저렇게 많이도 필요 없다.

딱 한 사람만 그를 응원해주면 그걸로 만족했다. 실반은 입가를 끌어올렸다. 페르다가 보고 있는 이상, 질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았기에.

철컹!

커다란 방패와 철퇴로 무장한 전사가 천천히 다가왔다. 그와 마주한 채, 실반은 아침에 들었던 페르다의 조언을 떠올렸다.

'내 힘으로 꺾는 것처럼 보이라고 했지.'

그래서 헤르온 대신, 상대적으로 눈에 잘 띄지 않는 망령들을 내보냈다. 저 조언을 들은 순간부터 실반은 어떻게 싸워야 할지 생각했다. 수십여 번의 이미지 트레이닝을 거친 뒤, 비로소 답을 찾았다.

쿵쿵쿵쿵-!

그때 상대가 달려왔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실반의 모습에 선공을 펼쳐도 되겠다고 생각한 것이리라. 점점 가까워지는 상대를 바라보며 실반은 입술을 달싹였다.

"······흐물아."

[예, 왕이시여.]

"저 남자가 가진 마력, 전부 먹어치워."

[제게는 포상이나 다름없군요. 감사히 먹겠습니다.]

일곱 눈동자를 가진 악령이 히죽 웃었다.

상대와 고작 십여 걸음을 남겨뒀을 무렵, 흐물이가 빠르게 쇄도했다. 동시에 입을 쩍 벌려 상대의 몸을 그대로 삼켰다.

찰나의 순간, 상대의 마력은 티끌 하나 남기지 않고 증발했다.

"허억!"

기세 좋게 달려나가던 전사, 랭커드가 바닥에 그대로 고꾸라졌다. 온몸의 힘이 쭉 빠지면서 팔다리가 덜덜 떨렸다.

"마, 마력이······."

일순간 증발하듯 사라졌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혹스러워하던 때, 멀리 있던 실반이 걸음을 옮겼다. 이를 보자 랭커드는 순간적으로 깨달았다. 자신을 이리 만든 것이 실반의 짓임을.

"······같잖은 사술을 펼쳤다고 해서 이겼다고 생각하지 마라."

랭커드가 이를 악 깨물었다.

그는 전사다. 마력이 바닥났다고 해서 얌전히 당할 생각은 없었다. 철퇴를 꽉 움켜쥔 채 실반이 가까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열 걸음 정도를 남겼을 무렵, 랭커드의 눈이 빛났다.

'이거나 먹어라!'

모든 힘을 실어 철퇴를 던졌다.

평소 연습을 해둔 보람이 있었다. 철퇴는 실반을 노리고 빠르게 날아들었으니. 랭커드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깃들던 순간.

터엉-!

철퇴는 허무하게 튕겨 나갔다. 랭커드는 두 눈을 부릅떴다. 그도 그럴 게, 실반이 쳐내기도 전에 갑자기 튕겨 나갔던 탓이다.

마치 무형의 벽에 막힌 것처럼.

[무례하다. 어느 안전이라고 그딴 걸 휘두르느냐!]

타락한 망령 기사, 단단이가 사납게 포효했다.

하지만 정령술도, 사령술도 익히지 않은 랭커드가 그의 모습과 목소리를 알아차릴 리 만무했다. 이제 남은 걸음은 고작 여섯 걸음.

랭커드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이걸 사용하는 건 내키지 않지만······.'

방패로 몸을 가린 채, 주머니에서 작은 약병 하나를 꺼냈다. 만에 하나를 대비해 가져온 독(毒)이었다.

리프리드의 독이라는 건데, 한 방울이라도 신체에 닿으면 그 즉시 엄청난 고통을 느낀다. 그럼 분명 자리에 주저앉을 거고, 그 틈을 타, 일격을 먹이면 된다.

'평생 놀림 받는 것보다야 낫다.'

반쪽이에게 졌다는 사실이 퍼지면 일평생 조롱거리가 되리라. 최악의 경우엔 전사 등급이 떨어질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랭커드는 망설이지 않았다.

'조금만 더.'

앞으로 세 걸음.

뒤이어 실반이 발을 내딛던 그때, 랭커드는 빠르게 리프리드의 독병을 던졌다.

쨍그랑-!

이번에도 뭔가에 맞았는지 독병은 허공에서 깨졌다. 허나 거리가 거리인지라 일부가 튀는 것까지 막을 순 없었다. 샛노란 색의 독이 실반의 뺨에 묻은 걸 확인하자 절로 입가가 들렸다.

'됐다!'

이제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겠지. 꼴사납게 바닥을 뒹굴면 바로 일어나 분이 풀릴 때까지 패주마. 잔인한 미소를 지으며 랭커드가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이번에도 예상은 빗나갔다.

뺨에 묻은 독을 훔쳐낸 실반은 미간을 찌푸렸다.

"······고약한 냄새."

그 모습에 랭커드는 입을 떡 벌렸다.

믿을 수 없다는 듯 그의 동공이 격하게 떨렸다. 이는 무지(無智)의 말로였다. 신화급 사령술사는 세계급 이하의 독과 질병, 저주에 면역을 가진다는 걸, 랭커드는 알지 못했기에.

"이, 이, 이 무슨······!"

있을 수 없는 일에 랭커드는 몸을 떨었다. 그때 실반이 바로 코앞까지 다가왔다.

이대로 당할 수만은 없다. 뭐라도 해야만 했다.

결심을 굳힌 랭커드가 앞으로 나서려던 때, 실반이 손에 묻은 독을 허공에 털었다.

그리고 그중 한 방울이 랭커드의 얼굴에 묻었다.

"······! 히야아아악! 흐아아아아악!"

요란스러운 비명과 함께 랭커드가 바닥을 굴렀다. 방패고 뭐고 다 내팽개친 채였다. 전사의 명예와 체통은 개나 줘버렸는지, 굵은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그 순간, 실반의 철검이 허공을 갈랐다.

퍼억-!

머리를 강타한 일격. 동시에 뾰족이의 날카로운 가시가 랭커드의 전신에 박혔다. 그것만으로도 랭커드의 의식은 훨훨 날아가기에 충분했다.

추한 몸부림을 끝으로 그는 정신을 잃었다.

멀리서 싸움을 지켜보던 하르민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두 눈을 허옇게 까뒤집은 채, 거품을 물고 쓰러진 랭커드. 다행히 맥이 잡히는 것으로 보아 죽지는 않은 듯했다.

"······전투 불능이 된 걸 확인했다."

하르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멀뚱멀뚱 서 있는 실반의 팔을 살며시 잡아 들었다.

"승자, 실반 아크듀트."

나직한 한마디를 끝으로 광장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누구 하나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으니까.

짝짝짝-

그때 어디선가 느릿한 박수 소리가 들렸다. 페르다였다. 이어 그가 엄지를 추켜세우자 실반은 환하게 웃었다.

한편 당황한 건 관중들뿐만이 아니었다.

"대,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게냐?"

높은 단상에서 지켜보던 이레아가 말을 더듬었다.

그도 그럴 게, 그녀의 눈에는 랭커드가 혼자 원맨쇼를 하는 것처럼 보였으니. 실반은 그저 터벅터벅 걸어가 그에게 강한 일격을 먹인 게 전부였다.

"무슨 수를 썼기에 저만한 전사를······."

"그래서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곁에 있던 이로나가 입을 열었다.

그녀는 등받이에 태평하게 기댄 채, 옅게 웃었다.

"실반이 알아서 잘할 거라고요."

그것은 마치 모든 것을 초탈한 듯한, 현자의 미소였다.

< Chapter 21. 시험 (3) > 끝

< Chapter 21. 시험 (4) >

전투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

쾅-!

쿠르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다섯 명의 전사가 광장에 올라왔을 때만 해도 그의 얼굴엔 여유가 넘쳤다. 그런데 지금, 쿠르드에게서 여유란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경악만이 가득했다.

"이, 일곱 죄악의 악령이라고?!"

불신이 가득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그의 시선은 광장에 홀연히 모습을 드러낸 일곱 눈알을 가진 악령에게 고정됐다.

모든 마법을 삼키는 자. 마법사들에게는 악몽과도 같은 존재. 어지간히 강력한 사령술사가 아니라면 소환조차 불가능하다 알려진 최고 등급의 악령이 실반의 곁에 있었다.

"대체 어떻게······."

실반에게 재능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것도 그보다 훨씬 뛰어난 재능이. 그 사실에 시기를 느껴, 사령술에는 재능이 없다는 말까지 했었다.

그래서일까? 잠깐 바깥세상에 다녀왔을 실반이 사령술사가 되어 돌아오자 질투의 불꽃이 타올라 견딜 수가 없었다.

"어떻게 저만한 격의 망령이 저 잡종에게······."

그래야 고작 위인의 격이리라 생각했다. 왜냐면 녀석의 어미가 그 정도 격을 가졌었으니. 물론 격이라는 게 이어지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도 고작 그 정도라고 추측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

쿠르드의 눈이 재차 커다랗게 변했다. 랭커드가 철퇴를 휘둘렀을 때, 그것을 막아낸 것을 목격한 탓이었다.

타락한 망령 기사.

어찌 보면 듀라한이나 데스나이트보다 더욱 희귀한 존재였다.

그도 그럴 게, 평소엔 영체(靈體)로 돌아다니면서 모든 물리 공격에 면역인 주제에, 방어 혹은 공격을 퍼부을 때는 물리적인 타격을 가하는 녀석이었으니까.

일곱 죄악의 악령이 마법사들의 악몽이라면, 타락한 망령 기사는 전사들에게 있어 악몽과도 같은 존재였다. 아마 저것 하나만 이곳에 풀어놔도 세르네크 숲은 지옥으로 변하리라.

까드득-!

쿠르드가 손톱을 거칠게 물어뜯었다.

초조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 그는 몸을 부르르 떨며 중얼거렸다.

"······대책, 대책을 생각해야 해."

이대로는 안 된다. 조금 과하더라도 확실한 대비를 해야겠다. 넋이 나간 이처럼 중얼거리던 쿠르드는 이내 몸을 돌려 광장 밖으로 향했다.

"쿠르드님?"

"어딜 가십니까? 아직 시험은······."

부하들의 말에 쿠르드는 얼굴을 와락 구겼다.

멍청한 놈들. 저걸 보고도 모른단 말인가? 첫 번째 시험은 더 이상 볼 필요도 없다. 실반 아크듀트의 압승이리라. 그렇다면 두 번째 시험에서 모든 걸 걸 수밖에.

쿠르드의 눈빛이 비열하게 번뜩였다.

***

벌써 세 명의 전사가 당했다.

잡종, 혹은 반쪽이라고 놀림 받던 실반 아크듀트에게 맛본 패배다. 그중에는 젊은 전사 중에서 가장 실력이 뛰어나다 평가받는 바르힘도 있었다.

'설마 내 차례까지 올 줄이야.'

붉은 진흙 일족의 전사, 룬터는 광장의 중앙을 응시했다. 처음엔 실반의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전투가 이어질수록 착각이라는 걸 느꼈다.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저건 분명한 실반의 실력이었다.

콰직-!

그때 네 번째로 나섰던 전사가 목책 너머로 날아가는 광경이 보였다. 실반은 그저 검을 휘둘렀을 뿐인데, 전사는 마치 랜스에 얻어맞은 것처럼 광장 밖으로 튕겨 나갔다.

"승자, 실반 아크듀트."

하르민의 말이 끝나자 룬터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그의 차례다. 룬터보다 뛰어난 실력의 전사가 모두 당했음에도 그의 얼굴에 두려운 기색은 없었다. 오히려 그의 두 눈은 흥분으로 빛났다.

'이건 기회다.'

앞선 전사들은 실반의 옷 끝 하나 건드리지 못하고 패배했다. 이는 곧 실반은 한 대라도 칠 수 있다면, 그의 실력이 다른 전사들보다 낫다고 증명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한 대만 때리자.

룬터의 목적은 그것으로 변했다. 광장에 올라선 그는 무거운 갑옷을 모두 벗어 던졌다. 이어 양손에 두 자루의 창을 쥐었다.

'전투가 시작되면······.'

앞뒤 볼 것 없이 냅다 달려들자. 실반이 수작을 부릴 틈도 주지 말고, 한 방이라도 먹이겠다. 룬터는 주문을 외우듯 연신 목적을 되뇌었다.

그 순간, 하르민의 외침이 광장을 울렸다.

"전투 시작!"

신호가 끝나기가 무섭게, 룬터는 실반에게로 냅다 뛰었다. 그가 피할 틈을 주지 않기 위해 왼손의 창을 먼저 투척했다.

후웅- 터엉!

허나 창은 뭔가에 의해 막혔다. 그럼 정면은 피하는 게 좋겠지. 즉각 방향을 돌린 룬터는 자세를 낮춘 채로 빠르게 쇄도했다.

그 결과, 실반의 지척까지 접근할 수 있었다.

'이제 한 방만 먹이면······!'

오른손에 든 창을 앞으로 쭉 내밀었다. 동시에 실반의 황금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예기치 못한 기습에 놀랐던 걸까? 마치 눈에 힘이 들어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룬터가 비웃음을 머금던 그 순간.

오싹-

전신에 일순간 소름이 돋아났다.

그 사이 창날은 실반의 코앞에서 멈췄다. 창이 부르르 떨렸다. 아니, 창이 떨리는 게 아니다. 그의 팔다리가 덜덜 떨렸다. 마치 뱀 앞에 놓인 쥐새끼마냥.

앞으로 일보만, 아니 한 뼘만 더 나아가면 되는데 팔이 움직이지 않았다. 다리도, 머리도, 온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쿵쿵쿵-!

심장이 빠르게 뛴다.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강한 현기증이 났다.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걸 느끼며 룬터는 결국 창을 떨어뜨렸다.

"욱! 우웨에엑!"

누런 토사물이 광장을 적셨다. 그는 이후로도 부르르 떨더니 토사물 위로 철퍼덕 엎어졌다. 그러자 실반은 그를 주시하던 눈, 사안(死眼)을 슬쩍 거두었다.

여전히 고요한 광장 일대. 하르민은 룬터의 상태를 확인하고는, 밖에서 대기한 이들을 불렀다. 그가 실려 나가자 이내 실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신기한 녀석.'

하르민의 눈에 짙은 이채가 맺혔다.

예전에는 일족의 조롱과 무시 속에서 쥐죽은 듯이 살았었는데. 불과 반년 만에 완전 다른 사람이 돼서 돌아왔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신기해할 수만은 없었다. 지금 그는 전사가 아닌, 심판이었기에.

그래서 실반의 팔을 들어, 승리를 선포하려 했다.

"승자, 실반······."

허나 그럴 수 없었다. 별안간 실반이 몸을 돌린 탓이다.

저벅저벅-

그가 내딛는 발걸음 소리가 광장에 가득 찬 적막감을 깨뜨렸다. 이윽고 실반이 당도한 곳은 목책 너머의 단상. 고개를 든 실반은 그곳에 있는 군청색 머리의 청년을 보며 입을 열었다.

"선생님."

실반의 목소리가 조용한 분위기를 노크하듯 두드렸다.

그는 페르다와 시선을 마주한 채, 활짝 웃었다.

"전부 이기고 돌아왔습니다."

그 말이 끝나자 좌중의 시선이 페르다에게 향했다. 인간? 아니, 그보다 지금 인간을 스승이라고 불렀어? 그런 대화가 들려오는 걸 보니, 대부분 이제야 페르다를 인식한 모양이었다.

한편 페르다는 실반의 속내를 짐작했다. 실반을 무시했던 다크엘프들에게 본때를 보여줌과 동시에 페르다의 체면까지 세워줄 생각이겠지. 눈에 뻔히 보이는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래, 잘했다."

손을 뻗어 실반의 머리를 헝클어뜨리듯 쓰다듬었다. 투박하지만 기분 좋은 손길에 실반은 배시시 웃었다.

"족장 후보, 실반 아크듀트."

그때 등 뒤에서 하르민의 음성이 들렸다.

실반은 고개를 돌렸다. 페르다를 대할 때와는 달리, 무감정한 얼굴이었다.

"첫 번째 시험을 통과한 걸 축하한다."

"감사합니다."

"바로 두 번째 시험을 치르겠나?"

그 질문에 실반은 다시 페르다를 쳐다봤다. 마치 어떻게 할지 물어보는 것 같았다. 페르다가 고개를 끄덕이자, 실반 역시 똑같은 대답을 내뱉었다.

"네. 시험을 치르겠습니다."

"좋아. 그럼 장소를 옮기겠다."

그 말을 끝으로 길이 트였다. 이어 일행은 북쪽 입구로 향했다.

그사이, 구경하러 온 다크엘프의 수가 배로 늘었다. 실반이 첫 번째 시험을 통과했다는 소식을 듣고 모인 것이리라.

얼마 후, 북쪽 입구에 도착한 일행.

도시 바깥으로 나가는 통로를 등진 채, 하르민은 실반에게 말을 걸었다.

"두 번째는 통솔의 시험이다. 후보자의 인망과 통솔력을 검증하는 시험이지. 힘의 시험과는 달리 규칙이 다소 복잡하니 잘 듣도록."

짧은 헛기침을 끝으로 그가 말을 덧붙였다.

"우선 이곳에서 후보자의 세력을 규합해야 한다."

"세력 말입니까?"

"그래, 기존에 가지고 있는 세력도 상관없고, 아예 새로운 세력을 만드는 것도 가능하다. 예시를 보여주마."

하르민이 실반을 지나 앞으로 걸어갔다. 전사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간 그는 거대한 도끼를 높이 치켜들었다. 그러더니 이내 쩌렁쩌렁 울리는 음성으로 외쳤다.

"나는 숲의 일곱 번째 전사, 하르민 젬버! 세계수 가지에 걸린 천칭을 따르는 자들이여! 무기를 들어라!"

"와아아아아!"

"중립의 전사, 하르민!"

수십여 명의 전사들이 호응하듯 활과 창을 들었다.

잠시 후, 환호성이 잦아들자 하르민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이해하겠나?"

"······하나도 모르겠는데요."

실반이 뚱한 얼굴로 대답하자 하르민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하면 더 쉽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에 잠겨 있던 무렵, 잠자코 있던 페르다가 나섰다.

"요컨대 널 따르는 녀석을 만들라는 소리야."

"아하."

실반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허나 그것도 잠시, 실반은 눈을 가늘게 좁혔다.

"그런데 여기서 절 따를만한 사람은······."

실반의 시선이 관중을 살폈다. 저 많은 동족 중에서 과연 그의 세력이라 부를만한 게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아니오.'였다.

"혹시 모른다. 첫 번째 시험을 성공적으로 통과했으니, 그 사이 네 세력이 되고 싶은 자가 있을지도."

하르민이 위로하듯 말을 더했지만 실반의 표정은 여전히 떨떠름했다. 그 모습을 보며 페르다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반응이 충분히 이해됐기 때문이었다.

고작 시험을 통과했을 뿐인데 세력이 되길 청한다?

십여 년이 넘도록 동족 취급도 안 해줬는데? 그럴 리가 없지. 허나 하르민은 그리 생각하지 않는 듯, 실반의 팔을 높이 치켜들며 소리쳤다.

"족장의 시험을 치르는 후보자, 실반 아크듀트! 여기 젊은 강자의 뒤를 따를 자, 무기를 들어라!"

하르민의 목소리가 메아리치듯 울려 퍼졌다.

그리고 침묵이 찾아왔다.

쩌렁쩌렁한 외침이 무색할 정도로 광장은 고요하게 물들었다. 누구 하나 무기를 드는 이가 없었다. 예상 밖의 상황이었던 걸까? 하르민은 답지 않게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철컥-

그러던 차에 비수 하나가 불쑥 올라왔다. 페르다였다.

이를 발견한 실반은 눈을 반짝였다.

반면 하르민은 이런 건 예상지 못했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끄응, 이러면 곤란한데······."

"왜죠?"

"정말 몰라서 묻는가?"

"네, 선생님만 있으면 될 거 같은데요."

커다란 황금색 눈동자가 순진하게 반짝였다. 한 치의 의심도 없는 강한 신뢰의 눈빛이었다. 허나 하르민의 어두워진 얼굴은 좀처럼 펴지지 않았다.

"앞서 말했듯 이번 시험은 통솔의 시험. 그렇기에 넌 이 시험에 참전할 수 없어. 대신, 널 따르는 세력이 참가해 시험을 치른다."

"어떤 시험인가요?"

실반의 질문을 끝으로 하르민을 입을 닫았다. 그의 시선이 바깥으로 향하는 동굴로 향했다. 곧이어 대답이 들려왔다.

"밀림에서 백 명의 전사와 전투를 펼치는 것."

"······!"

그 대답은 실반도 적잖이 놀라게 했다. 힘의 시험 때처럼 기껏해야 다섯 명 정도와 싸울 줄 알았는데, 백 명? 많아도 너무 많았다.

"그런데 세력이 고작 한 명이어서야."

한숨 섞인 하르민의 말처럼 이건 무모한 싸움이었다. 아무리 페르다가 강자라고 해도 이건 힘들 것 같았다. 걱정스러운 마음이 스멀스멀 피어오를 무렵, 문득 떠오르는 이가 있었다.

일대 다수의 전투에서 압도적인 화력을 보여줬던 이.

실반은 환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 한 명 더 있습니다. 제 권속인 헤르온······."

"세력에 언데드는 포함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때, 누가 그의 말을 끊었다. 애꾸눈을 가진 남자. 실반에게 족장의 시험을 치르게 한 장본인. 쿠르드 아르간다였다.

"왜냐면 언데드는 사령술사의 마력을 받아 탄생한 결과물이니까. 즉, 네 힘에 속한다는 소리지. 널 따르는 세력이라고 할 수는 없어."

그 말에 실반은 하르민을 쳐다봤다. 심판의 대답을 들려달라는 눈빛이다. 하르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쿠르드의 손을 들어줬다.

"쿠르드의 말이 옳아. 언데드는 시험을 치를 수 없다."

"그 말은······."

"저 인간만이 시험에 참여할 수 있다는 뜻이다."

하르민의 뭉뚝한 손가락이 페르다를 가리켰다.

실반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걱정스러운 얼굴에 갈등이 맺혔다.

페르다의 실력을 믿긴 하지만, 상대가 무려 백 명이다. 만에 하나 잘못될 가능성도 있었기에 실반은 망설였다.

"네게 주어진 선택지는 두 개다."

그때 하르민이 두 손가락을 펼쳤다.

"시험을 포기하거나, 아니면 저 인간만 참가하게 해서 진행하거나."

"······."

실반은 입을 꾹 닫았다. 고민 끝에 그는 페르다를 힐끗 쳐다봤다. 시선이 마주하자 실반은 뭐라고 입을 열려고 했다. 그러나 그보다 쿠르드의 말이 한발 앞섰다.

"앞서 한 가지 말하고 싶은 게 있다만."

"뭐지?"

"통솔의 시험이 치러질 장소가 변경됐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하르민이 눈썹을 씰룩였다.

그는 조금 사나워진 눈빛으로 대답했다.

"······들은 적 없는 소린데."

"그야 그렇겠지. 방금 바뀌었으니까."

심판의 동의 없이 멋대로 시험 장소를 바꾼다? 이는 결코 좌시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하르민은 즉시 고개를 저었다.

"불허한다. 그런 건 용납할 수 없어."

"일단 내 말부터 들어봐라. 나라고 바꾸고 싶어서 바꾼 게 아니니."

"그건 또 무슨 소리······."

"좀 전에 수하에게 보고를 받았다."

하르민의 말을 끊은 쿠르드가 통로 너머를 가리켰다.

그러고는 사뭇 심각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북쪽 밀림 일대가 화마(火魔)에 휩싸였다고."

"뭐?"

"게다가 언데드까지 나타났다더군."

하르민의 얼굴이 심각하게 변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주변에서 구경하던 다크엘프들도 술렁거렸다. 저 말이 사실이라면 이는 보통 큰일이 아니었기에.

"그래서 임의로 장소를 변경했다. 미리 말하지 못한 건 사과하마."

쿠르드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잠시 고민하던 하르민은 이내 입을 열었다.

"······우선 그 대답의 진위를 먼저 알아보겠다."

그 말을 끝으로 하르민을 따르던 전사 열 명이 동굴로 몸을 날렸다.

얼마 후, 돌아온 전사들은 하나같이 똑같은 보고를 했다. 밀림이 잿더미가 되었으며 곳곳에 언데드가 불에 탄 흔적이 있었다고.

쿠르드의 말이 사실로 판명되는 순간이었다.

"알겠다. 네 말을 믿지."

보고에 따르면 족장의 시험을 중단할 정도로 큰일은 아니라고 했다. 고개를 끄덕인 하르민은 다시 쿠르드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럼 변경된 곳은 어디지?"

통솔의 시험은 대규모 인원이 참가하는 만큼, 장소도 중요했다. 하르민이 궁금하다는 듯이 묻자 쿠르드는 싸늘하게 웃었다.

"암령굴(暗靈窟)."

비열해 보이는 미소가 맺혔다.

그러던 그 순간, 근처에 있던 이레아가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서릿발이 선 목소리로 노성을 터뜨렸다.

< Chapter 21. 시험 (4) > 끝

< Chapter 21. 시험 (5) >

"지금 어디서 허튼수작을 부리는 게냐!"

이레아의 갑작스러운 난입에 하르민은 옆으로 비켜섰다. 이어 쿠르드를 노려본 그녀는 사납게 소리쳤다.

"그곳은 견습 전사들의 수련장이지 않은가!"

그 말은 듣자 비로소 기억이 났다.

'어디서 들어봤나 했더니······.'

암령굴(暗靈窟).

그곳은 북동쪽 동굴 안에 있는 거대한 공동(空洞)을 뜻했다. 그리고 이레아가 말했던 것처럼 어린 다크엘프족이 전사로 거듭나는 수련장이기도 했다.

'그리고 하나 더.'

암령굴 안에는 암령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지금은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고대 정령이자 밤의 정령이라는 꽤 특별한 속성을 지녔다. 다만 페르다가 암령을 떠올린 건 그것만은 아니었다.

'모든 회차에서 실반과 계약했던 존재.'

실반에게는 정령 친화력이 없다. 그런데도 암령은 먼저 다가와 계약을 제안했다. 이번 회차에서 실반을 먼저 찾아왔던 망령들처럼.

다만 걸리는 게 하나 있었다.

'설마 이번에도 전개가 변하는 건 아니겠지.'

이미 원작과는 상당수 어긋났다. 헤르온을 아군으로 만들었고, 원작에 없던 족장의 시험을 치렀다. 이러한 변화로 인해 암령과의 계약도 충분히 비틀릴 가능성이 있었다.

일순간 불안한 마음이 들던 그때, 다시 이레아가 소리쳤다.

"실반의 세력은 저 남자 하나뿐이다. 그런데 뭐? 암령굴에서 시험을 치러? 그게 정말로 공평하다고 생각하는가!"

그 일갈에 쿠르드는 돌연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더니 삐딱한 태도로 물었다.

"제가 그것까지 고려해야 합니까?"

"뭐, 뭐라고?"

"저는 그저 시험 장소로 가장 적합한 곳을 제안했을 뿐입니다. 실반이 세력을 만들지 못한 건, 그가 부족하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걸 어찌 제 탓으로 돌리십니까?"

뻔뻔한 대답이 돌아오자 도리어 말문이 막혔다.

얼굴을 붉힌 채 입을 뻐끔거리는 이레아를 보며 쿠르드는 히죽 웃었다.

"이래선 시험을 통과해도 문제겠군요."

이어진 조롱에 이레아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한편 이를 지켜보던 하르민은 들리지 않게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이번에도 똑같군.'

족장의 시험이 다가오면 늘 그랬다.

차기 족장 후보는 확보한 입지와 명분을 얻기 위해 현 족장을 비난했다. 꼬투리 잡힐 만한 게 있으면 끝까지 물고 늘어졌고, 때로는 없는 사실까지 만들어가면서.

수십여 년 전, 현 족장인 이레아 위 세르네크가 족장 후보였을 때도 상황은 같았다.

오죽하면 이런 말까지 있겠는가? 족장의 시험이 치러질 때, 현 족장의 권위는 두 자릿수 등급의 전사 만도 못하다고.

'하지만 이는 너무 지나치지 않은가.'

물론 쿠르드의 세력이 거대한 건 인정한다. 젊은 전사들은 대부분 그를 따랐으며, 한 자릿수 등급의 전사들까지 세력으로 끌어들였으니.

허나 아무리 그래도 족장은 족장이다. 그런데 모든 일족이 보는 앞에서 저렇게 대놓고 조롱을 퍼부을 줄이야. 도가 지나친 행동에 하르민은 눈살을 찌푸렸지만 나서지는 않았다. 그는 어디까지나 중립의 전사였으니까.

그때 쿠르드가 다시 입을 열었다.

"허나 족장님의 의견도 일리가 있습니다. 인간은 암령굴의 지리를 알지 못할 테니까요."

실컷 조롱을 내뱉다가 갑자기 태도가 변했다?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게 분명했다. 이레아는 이를 악문 채 쿠르드를 노려봤다. 동시에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서 저는 기회를 드릴까 합니다."

"뭐? 기회?"

"예. 비록 세력은 아니지만, 일족 중에는 실반 아크듀트를 무척이나 따르는 이가 하나 있습니다. 그에게 시험에 참여할 기회를 주고자 하는데 어떠신지요?"

수수께끼 같은 말에 이레아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는 주변에 있던 구경꾼들도 마찬가지였다.

"반쪽이를 따랐던 이가 있다고?"

"그런 소리는 처음 들어보는데?"

대다수의 구경꾼이 고개를 갸웃거리던 때.

문득 이레아의 뇌리를 스치는 인물이 떠올랐다.

이리나가 세상을 떠난 이후, 실반에게 무척이나 헌신적이었던 이가 하나 있었다. 그것을 따른다고 말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현재로서 생각나는 건 오직 한 명뿐이었다.

"설마······."

이레아의 눈이 점점 크게 변했다.

그 무렵, 다른 구경꾼들도 하나둘씩 누군가를 떠올린 눈치였다. 인근에 있던 모든 일족의 시선이 똑같은 방향으로 향했다. 그 광경을 보며 쿠르드는 흡족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입을 열어 상대를 지목했다.

"널 말하는 거다. 이로나 세르네크."

그 말에 주변 일대가 술렁거렸다.

모든 일족의 시선을 한몸에 받았음에도 이로나는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한편 이를 본 페르다는 픽 웃었다. 뻔히 보이는 수작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진 거다.

'실반한테 족장의 시험을 치르라고 할 때부터 수상하긴 했는데.'

이제 알겠다. 그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생각해보면 쿠르드가 실반을 노릴 이유는 하등 없었다. 그의 경쟁자는 어디까지나 이로나 뿐이었으니.

'그래서 이런 식으로 없애버리려는 건가.'

선심을 베풀 듯 이로나를 페르다에게 붙여, 함께 암령굴로 향하게 한다. 그리고 무슨 수를 써서든 둘을 처리한다. 이후에는 불의의 사고라고 둘러대면 그만이다. 아니면 살해에 가담한 전사 몇 명을 뽑아 모든 책임을 뒤집어씌우는 것도 방법이고.

'생각해보니 원작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지.'

족장의 시험을 시작하기 전, 흉계를 꾸며 이로나를 처치하려던 적이 있었다. 물론 실패하긴 했지만. 하여간 분명한 것은 전사의 이름이 아까울 정도로 비열한 놈이라는 거다.

'원래는 흠씬 두들겨주려고만 했는데······.'

생각이 바뀌었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 놈은 애꿎은 실반을 끌어들였다.

그 사실만으로도 쿠르드는 선을 넘었다.

페르다가 싸늘하게 식은 눈으로 쿠르드를 쳐다보던 때, 주변이 작게 술렁거렸다.

"하긴 이로나라면 할만하겠네."

"사실 이로나 정도면 반쪽이의 세력이라고 봐야지."

"맞아. 그간 해왔던 게 있으니까."

구경꾼들이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대세는 기울었다. 쿠르드는 히죽 웃었다.

"어떤가? 이로나."

이로나는 실반을 끔찍하게 아꼈다. 그녀가 대전사의 시험을 치른 것도, 족장의 시험에 임하려는 것도 모두 실반을 위해서였다. 그에게 돌아올 장소를 만들어주기 위해서.

정말이지 같잖은 이유다.

쿠르드는 냉소를 머금었다. 그는 이로나가 이 기회를 덥석 잡을 것이라 확신했다. 이로나는 실반이 창피를 당하는 걸 원치 않을 테니까.

그래서 재차 말을 걸었다.

"실반을 위해서라도 이 기회를 잡는 게 좋지 않겠나?"

그 순간, 이로나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저 입술을 비집고 그가 원하는 답이 흘러나오리라. 쿠르드는 그리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그의 예상은 철저하게 빗나갔다.

"아니, 난 안 껴도 될 것 같은데."

"그래. 그렇게 말할 줄 알았······. 뭐?"

말을 잇던 그가 멍하니 되물었다. 그러자 이로나는 미간을 찌푸린 채, 다시 대답했다.

"귀먹었어? 내가 없어도 충분할 것 같다고."

예상치 못한 답이 들려온 탓일까?

쿠르드는 멍한 표정을 추스르지 못했다. 한편 그 대답에 충격을 받은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레아도 놀랐고, 구경하던 다른 일족들도 눈을 휘둥그레 떴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린 쿠르드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어, 어째서······."

"직접 보면 알 거야."

수수께끼 같은 대답을 끝으로 이로나는 입을 꾹 닫았다.

그로부터 얼마 후, 하르민이 헛기침과 함께 말했다.

"크흠! 그럼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지."

아직 족장의 시험을 치르는 중이다.

하르민은 진지한 얼굴로 실반을 돌아봤다.

"족장 후보, 실반 아크듀트에게 묻겠다. 통솔의 시험에 응하겠는가?"

실반은 잠자코 몸을 돌렸다. 그의 시선이 페르다에게 가 닿았다.

잠시 후, 고민에 닫혀 있던 입이 열렸다.

"선생님, 부탁드려도 될까요?"

조심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걱정이 깃든 눈동자.

바로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실반은 재차 말을 걸었다.

"무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위험할 것 같으면 포기하셔도······."

하지만 실반은 말을 잇지 못했다.

페르다의 커다란 손이 그의 머리를 헝클어뜨리듯 쓰다듬었던 탓이다.

"걱정 말고 여기서 구경하기나 해라."

그의 입가에 가벼운 미소가 맺혔다.

마치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처럼.

"네 스승이 얼마나 강한지 보여주고 올 테니."

나직한 속삭임이 귓가에 닿았다.

자신만만한 대답이 돌아오자 멍하니 있던 실반은 이내 밝은 표정을 지었다.

"······네!"

눈동자에 깃든 걱정이 기대감으로 물들었다.

페르다는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하르민의 앞에 도착하자, 그가 경고하듯 물었다.

"다시 한번 묻겠다, 인간. 한번 시험에 들면 성공하거나 실패하기 전까지 나올 수 없다. 그런데도 시험에 응하겠는가?"

애초에 그러려고 나온 거다.

그래서 대답 대신, 역으로 질문을 던졌다.

"통과에 필요한 조건은?"

"간단하다. 모든 적의 말살. 혹은 수장이 가지고 있는 열쇠를 빼앗아, 문을 열고 나오면 된다."

이어 그는 허리에 붉은색 깃털이 달린 열쇠를 차고 있는 이가 수장이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그러던 중 뭔가를 잘못 말했다는 듯이 방금 했던 말 일부를 정정했다.

"단, 말살이라고 말하긴 했으나······."

"죽이지는 말라는 소린가?"

"그렇다. 하나라도 죽으면 시험은 실격처리된다."

하르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대답에 페르다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딱 숨만 붙어있게 만들면 되겠군."

페르다의 오만한 중얼거림이 고까웠던 걸까?

하르민은 얼굴을 찌푸린 채 말했다.

"······안에 있는 전사는 모두 세 자릿수 등급의 정예다. 방심하지 않길 바란다."

그 말을 끝으로 일행은 걸음을 옮겼다.

백 명의 전사들이 대기하는 장소, 암령굴로 향하기 위함이었다.

일행과 구경꾼들이 한꺼번에 걸음을 옮길 무렵, 쿠르드는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그러고는 피가 나올 정도로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아까부터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다.

터질 것 같은 분노를 애써 억누르던 그때, 수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어떻게 할까요?"

그 말에 짜증이 확 치솟았다.

어쩌긴 뭘 어쩐단 말인가? 계략이 다 실패로 돌아갔는데.

얼굴을 와락 구긴 쿠르드는 낮게 으르렁거렸다.

"······죽여라."

"예?"

"살점 하나 남기지 말고 갈가리 찢어버려!"

이는 단순한 화풀이였다. 하지만 그래야 분이 조금이나마 풀릴 것 같았다.

수하는 알겠다는 대답을 남기고 사라졌다.

그러던 중 재차 하르민의 외침이 들려왔다.

"통솔의 시험을 시작하겠다. 문을 개방하라!"

이를 신호로 암령굴을 가로막고 있던 석문이 요란스럽게 열렸다.

어둠만이 가득한 통로. 페르다가 걸음을 옮기자 등 뒤에서 하르민과 실반의 배웅이 들려왔다.

"그렇다면 무운을 빌겠다."

"조심하세요, 선생님!"

쿠웅-!

이내 석문이 입구를 닫았다.

동굴 안은 조용했다. 어둠이 무겁게 내려앉은 주변을 둘러보며 페르다는 몸을 가볍게 풀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길. 허나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하이드 워커.'

페르다의 몸이 점점 어둠에 물들어갔다.

얼마 후, 기척이 사라졌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말끔하게.

***

그 시각.

암령굴의 출구 인근에 한 남자가 앉아있었다. 붉은색 깃털이 매달린 열쇠를 허리에 찬 것으로 보아, 그가 전사들의 수장인 듯했다.

얼마 후,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때 근처에 있던 발광석에 남자의 얼굴이 비쳤다. 붉은색 머리카락을 가진 다크엘프. 다름 아닌 수호자들의 대장, 칸젤이었다.

한 자릿수 등급의 전사인 그가 어째서 이곳에 있는 걸까?

답은 간단했다.

어젯밤, 쿠르드에게서 은밀한 연락을 받았던 탓이다. 족장의 시험 중 하나인 통솔의 시험에 지원해달라는 부탁. 규율을 무시한 부탁이었으나 칸젤은 흔쾌히 이를 받아들였다.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옛날부터 쿠르드를 지지하기도 했고, 현 족장인 이레아의 온건한 정책에 반감을 품은 탓이기도 했다.

뒷일 또한 걱정할 필요 없었다. 어차피 그가 이곳에 있다는 걸 아는 이는 쿠르드와 그를 따르는 부하들밖에 없었으니까.

"쯧."

그때 칸젤이 혀를 낮게 찼다.

짜증 난 기색이 역력한 얼굴. 이어 그가 중얼거렸다.

"언제까지 이런 장난질을 도와야 하는 거지."

흔쾌히 부탁을 받아들이긴 했지만, 사실 내심 가지고 있던 불만이 하나 있었다.

그가 보기에 쿠르드는 장난을 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왜냐면 쿠르드가 가진 세력은 이레아를 뛰어넘은 지 오래였으니까. 전사의 절반 이상이 그에게 가담했고, 최근에는 몇몇 장로들마저 넘어왔다.

"그냥 엎어버리면 될걸, 명분이 뭐 그리 중요하다고."

만약 강제로 병력을 움직인다면 사흘 안에 족장을 바뀌리라. 장로들은 모두 그리 예측했다. 그만큼 전력의 차이는 뚜렷했다.

허나 쿠르드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말했다. 모든 동족을 하나로 뭉치게 하려면 작은 불씨조차 남기면 안 된다고. 그래서 쿠르드는 계략을 꾸며, 후에 불씨가 될 것들을 하나씩 제거해나갔다.

하지만 이는 칸젤이 선호하는 방식은 아니었다. 어차피 족장이 되면 알아서 설설 길 텐데, 뭐 그리 복잡하게 생각한단 말인가?

답답한 마음에 칸젤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던 중 별안간 발광석 앞의 어둠이 한 차례 일렁였다. 이를 발견한 칸젤이 눈을 가늘게 뜨던 그때, 뭔가가 불쑥 솟아났다.

"저건······."

본적이 있는 마물이다. 어둠 속을 기어 다니는 마물.

분명 쿠르드의 부하가 부리는 하수인이었다. 한편 밖으로 솟구친 마물은 기괴하게 웃더니 이내 몇 가지 단어를 내뱉었다.

[인간, 혼자, 들어, 왔다.]

"뭐? 인간?"

생각지도 못한 말에 칸젤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도 그럴 게, 이곳에 올 예정이었던 건 인간이 아니었다. 바로 쿠르드의 경쟁자이자 차기 족장 후보, 이로나 세르네크였다.

"이로나가 온다고 하지 않았나?"

[실패, 했다.]

이어진 대답에 칸젤의 얼굴은 와락 구겨졌다.

왜냐면 쿠르드가 그를 이곳에 집어넣은 주된 목적이 바로 이로나를 상대하는 것이었기에. 그런데 그걸 실패했다고? 그럼 여기서 계속 있을 필요가 있나?

칸젤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물은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인간, 죽여라. 쿠르드님의, 지시.]

짧은 전언을 끝으로 마물은 다시 사라졌다.

여전히 구겨진 얼굴로 칸젤은 한숨을 내뱉었다.

바깥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일이 틀어진 것 같다. 칸젤은 여전히 얼굴을 구긴 채 한숨을 내쉬었다.

"인간이라면······."

한 명밖에 생각나지 않는다. 아니, 애초에 한 명뿐이다. 올해 숲을 방문한 인간은 실반과 함께 들어온 그 남자밖에 없으니까.

"운도 더럽게 없는 놈이군."

입가에 절로 비웃음이 깃들었다. 칸젤이 보기에 그 인간은 썩 대단치 않아 보였던 탓이었다. 아마 지금쯤이면 진즉에 죽었을 거다. 만약 사로잡혔다면 이곳으로 끌려올 테니까 그때 죽이면 그만이고.

하지만 칸젤은 미처 알지 못했다.

그가 무시하던 인간이 그의 등 뒤에 서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무지의 대가는 잔혹했다.

푹! 콰득! 서걱-!

눈을 한 차례 깜박일 정도로 찰나의 순간.

섬뜩한 소리가 들려왔다.

뭐지? 의아한 마음에 고개를 돌리려고 했으나 돌아가지 않았다.

무릎이 꺾이면서 그의 몸이 무너져 내렸으니까.

"······!"

전신의 관절에서 피가 솟구쳤다. 칸젤의 눈이 점점 커졌다. 그 순간, 비로소 고통이 찾아들었다. 사지가 산산이 부서지는 듯한 끔찍한 고통이.

"으, 으아아······! 컥!"

하지만 비명조차 마음껏 지를 수 없었다. 누군가 주먹으로 그의 목을 후려친 탓이었다. 숨이 턱 막히면서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꺽, 끄윽! 꺼억!"

끔찍한 고통에 비명을 질러도 나오는 건 신음뿐이었다. 그때 눈앞에 갈색 가죽 부츠가 보였다. 반사적으로 칸젤의 시선이 위로 향했다. 이내 그는 눈을 부릅뜰 수밖에 없었다.

'어, 어떻게······.'

이곳에 있어선 안 될 자가 있었다.

군청색 머리카락을 아래로 묶은 인간. 바로 페르다였다.

"네가 왜 이곳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느릿한 말투로 그가 입을 열었다. 커다란 손이 칸젤의 머리카락을 우악스럽게 움켜잡았다. 가늘게 떨리는 칸젤의 눈동자. 이를 바라본 채, 페르다는 차갑게 웃었다.

"운이 더럽게 없었다고 생각해라."

그 말을 끝으로.

콰직-!

페르다는 칸젤의 머리를 그대로 바닥에 처박았다. 몸을 부르르 떨던 칸젤은 곧 축 늘어졌다. 죽일 정도로 세게 하진 않았으니 분명 기절한 것이리라.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툭툭 털었다. 그때 칸젤의 허리춤에 있는 열쇠가 보였다. 붉은색 깃털이 매달린 열쇠. 페르다는 곧장 이를 집어 들었다. 이걸로 출구를 열고 나가면 시험은 종료된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동굴에 들어오기 전, 실반에게 스승의 강함을 보여주겠다고 말한 참이다. 또 이제 슬슬 시건방진 다크엘프 놈들에게 경고할 필요도 있었다.

땡그랑-!

반 토막 난 열쇠가 바닥에 떨어졌다.

열쇠의 잔해를 짓밟은 채, 왔던 길로 걸음을 옮겼다.

스킬이 없어도 상관없었다.

격을 가지지 못한 자들에게 들킬 정도로 페르다의 은신술은 허술하지 않았으니.

전신이 어둠 속으로 빠르게 녹아들었다. 그의 입가에 냉소가 맺혔다.

"앞으로 아흔아홉 마리."

이제부터 사냥을 시작하자.

< Chapter 21. 시험 (5) > 끝

ⓒ 남철우

< Chapter 22. 암령(暗靈) (1) >

Chapter. 22

암령(暗靈)

쿠웅-!

요란스러운 소리를 끝으로 석문이 닫혔다.

정말 혼자서 들어갈 줄이야. 하르민은 눈을 가늘게 떴다.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도 상대는 백 명의 전사. 게다가 밤눈이 밝은 다크엘프를 상대로 동굴에서 싸운다?

무모하기 짝이 없는 짓이다.

어지간한 강자라 해도 힘들 터.

'대체 무슨 생각인지······.'

비장의 수라도 있는 건가? 의문과 호기심이 동시에 들었다.

그 무렵, 주변에서도 부정적인 말들이 쏟아졌다.

"제정신인가? 정말 혼자 시험을 치르겠다고?"

"지금까지 이런 적이 있었나?"

"아니, 백 년 전에 스무 명이 제일 적은 숫자였을걸."

"그때도 실패했던 거로 아는데······."

구경꾼들의 생각은 대체로 하르민과 비슷했다. 모두가 페르다의 패배를 점쳤다. 이레아도 착잡한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반면 실반은 달랐다.

페르다가 걱정하지 말고 기다리라고 했다. 스승의 강함을 보여주겠다고 했다. 그렇다면 얌전히 그 말에 따를 뿐. 실반은 신뢰가 섞인 눈빛으로 석문을 지그시 응시했다.

쿵쿵!

그러던 중 하르민이 돌연 도끼로 바닥을 내리쳤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입장을 확인했으니 출구가 있는 곳으로 이동하겠다."

암령굴의 출구는 여기서 십여 분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다.

하르민은 이내 몸을 돌렸다. 하지만 발걸음을 옮기지는 못했다.

별안간 입구 쪽에서 검은 연기 하나가 치솟은 탓이다. 이윽고 연기는 자그마한 불꽃으로 변했다.

빛의 정령, 위습과 비슷하게 생긴 형상.

그러나 위습치고는 색이 너무 검었다. 이를 발견한 이레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것이 뭔지 아는 눈치였다.

[어쩐지 시끄럽다 했건만.]

그때 불꽃이 말을 했다. 뭔가가 많이 섞인 목소리였다. 아이의 목소리처럼 들리기도 했고, 소녀의 음성 같기도 했다.

[왜 이리 몰려와서 소란이야? 무슨 일이라도 생겼니?]

그늘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던 불꽃은 마침내 하르민의 앞까지 다가왔다. 그러자 뒤에 있던 이레아가 황급히 앞으로 나섰다. 그녀는 불꽃을 향해 대뜸 고개를 숙였다.

"세르네크의 족장, 이레아 위 세르네크가······."

[인사는 됐고, 설명부터 해.]

까칠한 말투에 이레아는 황급히 입을 닫았다.

그녀는 짧게 헛기침을 한 뒤, 다시 말을 이었다.

"알겠습니다. 암령(暗靈)이시여."

검은 불꽃의 정체는 암령굴의 주인인 밤의 정령.

동시에 숲의 수호신을 자처하는 존재이기도 했다.

[그렇구나. 족장의 시험이라.]

잠시 후, 이레아의 설명을 들은 암령은 이해한 말투로 중얼거렸다.

[슬슬 때가 되긴 했지. 너도 옛날에 비하면 많이 늙었고.]

"후후, 아직은 정정한 편입니다."

이레아가 옅게 웃자, 불꽃도 웃음을 터뜨리듯 일렁거렸다.

[좋아. 오랜만에 만난 기념으로 특별한 걸 보여줄게.]

"특별한 것이라면······?"

고개를 갸웃거리던 때, 돌연 불꽃이 주변의 그늘을 집어삼켰다. 꾸물거리던 그늘은 이윽고 새카만 늪처럼 변했다. 잠시 후, 그 위로 어떠한 광경이 비쳤다.

암령굴 내부의 모습이었다.

이레아를 비롯한 일족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후후, 동굴 안의 풍경이야. 모든 어둠은 내 눈이나 다름없으니.]

신기해하는 다크엘프들을 보자 뿌듯한 기분이 든 걸까? 암령은 우쭐한 듯 말을 이었다. 반면 일족들은 여전히 멍한 얼굴로 그늘 속 풍경을 주시했다.

"세상에, 저게 뭐야?"

"저걸 무슨 수로 뚫어?"

"와, 밀림보다 더 심한 것처럼 보이는데······."

하지만 암령은 몰랐다. 다크엘프들이 놀란 이유는 그가 보여준 신비한 능력이 아니라, 동굴 안에 득실대는 전사들 때문이라는 것을.

4인 1조로 이루어진 전사들. 각 조는 동굴의 모든 사각지대를 점령했고, 각종 엄폐물로 몸을 숨긴 상태였다. 게다가 몇몇 길목에는 독과 함정까지 뿌려뒀다. 철저해도 너무 철저했다.

"괜히 족장의 시험이 아니구나."

"이건 이로나가 같이 들어갔어도 힘들었겠어."

시험의 난이도를 실감한 구경꾼들이 혀를 내둘렀다.

한편 멀리서 이를 보던 쿠르드의 얼굴은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진 상태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예상치 못한 상황이 연달아 일어났기 때문이다.

'젠장, 얌전히 굴 안에 처박혀 있을 것이지.'

암령의 존재는 쿠르드도 알고 있었다. 허나 무시했다. 그도 그럴 게, 마지막으로 모습을 드러낸 게 무려 십여 년 전이었으니까. 또 암령은 세상일에 무관심했다.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좀처럼 나서지도 않았다.

그런데 왜 하필 지금 모습을 드러냈단 말인가.

'게다가 저 괴상한 능력은 또 뭐야!'

동굴 안의 풍경을 보여준다고? 그런 건 들어 본 적도 없었다. 쿠르드는 초조한 듯 입술을 잘근거렸다. 저 안에는 드러나선 안 되는 것도 있었기에.

그러던 그때였다.

"근데 그 인간은 어디에 있지?"

한 구경꾼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홀로 암령굴에 들어간 남자, 페르다. 구경꾼들 사이에서 그의 이름이 오르내리기 시작하자 암령은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응? 인간이라니, 그건 또 무슨 소리니?]

"끄응, 그게 어찌 된 일이냐면······."

이레아가 설명을 덧붙였다.

잠시 후, 암령은 흥미가 깃든 음성으로 말했다.

[호오, 신기하네. 하지만 이상하구나.]

"무엇이 말입니까?"

[내 동굴에서 인간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거든.]

"예? 그 말씀은······."

[아예 안 들어갔거나 이미 죽은 게 아닐까?]

암령의 말에 실반의 귀가 움찔 떨렸다.

한편, 이를 들은 구경꾼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반박은 나오지 않았다. 쿠르드 역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그게 나았다. 죽은 거로 처리돼, 시험이 끝난다면 저 괴이한 능력도 사라질 테니.

하지만 암령은 돌연 말을 정정했다.

[아니다. 내가 못 찾은 걸 수도 있으니 한번 찾아볼게.]

그 말에 쿠르드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그러지 말라고 외치고 싶었으나, 암령이 좀 더 빨랐다. 불꽃을 일렁이자, 그늘 안의 풍경이 빠르게 변하기 시작했다. 동굴 구석구석을 비출수록, 쿠르드의 안색도 점점 굳어졌다.

"······!"

이를 보던 중 이레아가 일순간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는 사뭇 다급한 어조로 소리쳤다.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암령이시여!"

[응? 왜 그러니?]

"······방금 보여주신 광경, 한 번만 더 보여주실 수 있으십니까?"

이레아의 눈빛이 가늘게 흔들렸다. 뭔가 이상한 걸 본 모양이다. 암령은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흔쾌히 그녀의 부탁을 받아들였다.

[그러지 뭐. 잠깐만.]

암령에게서 자그마한 팔이 쏙 돋아났다.

이어 그늘을 톡톡 두드리자, 좀 전에 비쳤던 광경이 나타났다.

"응? 출구 쪽이잖아?"

"저기에 이상한 게 있던가?"

저마다 눈을 가늘게 좁히는 구경꾼들. 뭐가 있는지 살펴보기 위함이었다.

반면 쿠르드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린 채였다.

설마 했던 게 현실이 되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그때 발광석 근처로 검은 인영(人影) 하나가 일렁였다. 잠시 후,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타오르듯 새빨간 머리카락을 가진 다크엘프.

"어? 뭐야."

"저 남자는······!"

익숙한 얼굴이었다. 모를 수가 없었다.

남자를 알아본 구경꾼들의 눈이 점점 커다랗게 변했다.

"뭐야? 칸젤이잖아?"

"수호자들의 대장이 왜 저기에 있지?"

"세 자릿수 등급의 전사만 있다고 하지 않았어?"

숲의 여섯 번째 전사, 칸젤 임페일.

그는 그곳에 있어선 안 될 인물이었다. 왜냐면 통솔의 시험에 적으로 임하는 전사들은 세 자릿수 등급의 전사로만 이루어져야 한다는 규율이 있었기에.

구경꾼들의 얼굴에 혼란이 번져갔다.

음흉한 부정의 증거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쿠르드는 이를 악물었다. 이를 본 순간, 드는 생각은 빨리 자리를 피해야겠다는 것뿐이었다.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던 때.

"쿠르드!"

성난 호통이 벼락처럼 내리꽂혔다.

이레아였다. 그녀의 외침과 함께 시뻘건 불의 정령이 모습을 드러냈다. 순식간에 쿠르드를 둘러싼 정령들. 이레아는 족장을 상징하는 검은 면사포까지 집어 던진 채, 쿠르드를 노려봤다.

"이게 어찌 된 일인지 해명해라. 당장!"

족장에서 물러날 때가 코앞이었다. 또 괜히 핏줄을 감싼다는 말도 듣고 싶지 않아 여태껏 벙어리처럼 참아왔다.

하지만 이는 아니다. 도가 지나쳤다. 규율을 어긴 것도 그렇지만, 저런 곳에 이로나를 집어넣으려 했다는 게 가장 화가 치솟았다.

이에 쿠르드는 뻔뻔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애써 태연한 척, 차분히 가라앉은 음성으로 대답했다.

"오해입니다. 저건 제가 한 짓이······."

"하! 오해라고? 지금 오해라고 지껄였느냐!"

콰앙-!

이레아의 손에 창이 들렸다.

시뻘건 화염으로 휩싸인 창. 그 모습을 보며 일족은 잊고 있던 사실을 떠올렸다.

숲의 첫 번째 전사가 누구였는지를.

이레아가 걸음을 옮겼다. 불의 정령이 내뿜는 뜨거운 열기 탓에 구경꾼들이 물러났다.

이윽고 쿠르드의 앞에 선 그녀가 입을 열었다.

"정말 오해라면 카디란토의 영령에 대고 맹세해 보아라. 네가 한 짓이 아니라고."

"······!"

"맹세한다면 없던 일로 하고 넘어가겠다."

그 말에 쿠르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카디란토, 진실의 신.

그의 이름을 걸고 거짓을 고한다면 저주가 내려온다는 전설이 있다. 인간들 사이에선 그저 미신에 불과하지만, 이종족들 사이에선 아니었다.

무엇보다 이 맹세를 하고, 거짓임이 밝혀진다면 그 자리에서 돌로 얻어맞아 죽어도 할 말이 없었다. 이름과 명예, 모든 것을 걸고 하는 신뢰의 맹세.

그것이 카디란토의 맹세였다.

"저는······."

쿠르드가 입을 열었다. 모두의 이목이 그에게 집중됐다. 그의 눈빛이 가늘게 떨렸다. 그냥 한마디만 하면 된다. 내가 한 짓이 아니라고.

하지만 그놈의 맹세가 무어라고, 좀처럼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때 이레아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선을 넘은 것도 모자라, 괴물이 될 생각이더냐."

"······."

그 말에 쿠르드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윽고 그는 고개를 아래로 떨구었다.

체념한 것이리라. 그렇게 생각한 이레아는 쿠르드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는 하르민을 향해 소리쳤다.

"시험은 중지다. 암령굴 안의 전사들에게 통보하라!"

그 말에 하르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허나 이레아는 몰랐다. 머리를 숙이고 있긴 했으나, 쿠르드의 눈빛만큼은 매섭게 번뜩이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할까.'

가장 쉬운 방법은 칸젤을 죽이는 거다.

그와 수하 몇몇을 제외하면, 쿠르드가 부정을 저질렀다는 증거는 사라지는 셈이니. 허나 그 전에, 족장이 칸젤을 붙잡아 진실을 토해내게 만들면 모든 게 끝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그냥 이 자리에서 엎어버리는 게 낫지 않을까?

족장의 시험을 참관하는 전사 대부분은 그의 세력. 게다가 암령굴 안의 전사들도 모두 그의 전사들이다.

족장과 이로나가 적으로 돌아선다고 해도 상관없다. 암령은 걱정할 것도 없었다. 저것은 숲 내부의 일에는 간섭하지 않는 방관자였으니.

승산은 충분했다.

단 하나만 해결한다면.

쿠르드가 고개를 들었다.

살의로 번들거리는 눈동자에 실반이 비쳤다. 이곳에 가장 위협적인 존재는 족장도, 이로나도 아닌 실반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가 다루는 악령.

'······반쪽이부터 죽여야 한다.'

결단을 내리자 떨림이 멎었다.

숨을 천천히 들이마시며 고개를 들었다. 애써 체념한 표정을 지으면서 조금씩 걸음을 옮겼다. 실반에게로 다가가기 위해서.

그런데 그때였다.

[응? 저게 뭐니?]

돌연 암령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늘을 다시 톡톡 두드리자 시야가 좁혀지면서 칸젤의 모습이 확대됐다.

[잘 안 보이지만 뭐가 있는 것 같은데······.]

암령이 미묘한 투로 중얼거렸다.

실없는 소리를 할 존재는 아니었기에 구경꾼들은 그늘을 응시했다. 이레아도, 쿠르드의 시선도 일순간 그늘로 향했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던 그 순간.

이변이라 불릴만한 게 일어났다.

"······!"

멀쩡히 있던 칸젤이 피를 토하며 고꾸라졌다.

워낙 찰나에 벌어진 일이라 지켜보던 이들은 놀랄 틈도 없었다.

잠시 후, 멍하게 물든 얼굴에 점점 놀람의 빛이 번지던 때. 이번엔 누군가 칸젤의 머리를 바닥에 처박았다. 칸젤은 몸을 부르르 떨더니 죽은 생선처럼 늘어졌다.

이어 그를 제압한 자의 정체가 모든 일족의 눈에 선명하게 새겨졌다.

"세상에······."

"어, 어떻게 저 남자가······."

모두의 얼굴에 경악이 깃들었다.

칸젤이 저기 있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면, 저 남자는 있을 수 없는 존재였다.

그때 실반의 입술이 달싹였다. 동시에 남자의 정체가 드러났다.

"선생님!"

그의 정체는 홀로 시험에 임한 인간.

바로 페르다였다.

실반이 두 눈을 빛내던 때, 암령은 깜짝 놀란 듯 중얼거렸다.

[어? 진짜 인간이 있었잖아? 근데 왜 안 보였지?]

한편, 암령의 목소리를 신호로 구경꾼들은 정신을 되찾았다.

그러나 당혹스러운 표정은 여전했다. 그들은 저마다 얼떨떨한 얼굴로 의문을 내뱉었다.

"뭐, 뭐가 어떻게 된 거지?"

"들어간 지 10분밖에 안 되지 않았어?"

"어떻게 벌써 저기까지······."

"다른 전사들은 대체 뭐했던 거야!?"

그들은 보았다. 백 명의 전사들이 조를 이루어 숨어있던 모습을. 길목에 독과 함정이 설치된 것도 보았다.

그런데 고작 10분 만에 그 길을 통과했다고?

유령이 아닌 이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모두가 경악하던 때, 페르다가 열쇠를 집어 드는 모습이 보였다. 이제 저걸로 출구를 열고 나오면 시험은 끝난다. 허나 무슨 생각에선지, 페르다는 열쇠를 가만히 보기만 했다.

그로부터 얼마 후.

구경꾼들은 생각지도 못한 광경을 목격했다.

"······!?"

"무, 무슨······!"

두 동강 난 열쇠가 바닥에 떨어졌다.

열쇠를 짓밟은 채, 페르다는 몸을 돌렸다. 입가에 피어난 싸늘한 미소를 끝으로 그의 몸은 어둠 속으로 녹아들었다.

뒤이어 그는 출구가 아닌, 입구로 향했다.

[흐응, 뭘 할 생각일까?]

호기심이 잔뜩 맺힌 음성과 함께, 암령은 페르다를 주시했다.

그 순간, 습격이 시작됐다.

어둠 속에서 별안간 비수가 번뜩였고, 눈 깜박할 사이에 네 명의 전사가 바닥을 뒹굴었다. 다시 걸음을 옮기는 페르다. 다음, 또 다음에도 똑같은 광경이 펼쳐졌다.

비수를 휘두를 때마다 전사들은 낙엽처럼 쓸려나갔다.

얼마 후, 구경꾼들이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절반의 전사가 쓰러진 뒤였다.

[재밌네. 저 인간, 지금 사냥을 하고 있어.]

암령이 흥미로운 듯 중얼거렸다.

그가 말한 것처럼 그것은 일방적인 사냥이었다.

어디에 숨어있든 소용없었다.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몰라도, 포식자는 사냥감의 위치를 전부 알고 있었다. 게다가 기척을 숨기는 것도 능해, 절반의 전사를 쓰러뜨리는 동안 단 한 번도 발각되지 않았다.

"······."

이쯤 되자 모두가 깨달았다. 페르다의 목적을.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아무도 목소리를 꺼낼 수 없었다.

한 명의 인간이 펼치는 무자비한 사냥에 전율할 뿐.

"아, 아으아아······."

"······그만, 이제 그만해."

구경꾼들은 오한이 든 것처럼 몸을 떨었다. 동족들이 낙엽처럼 쓸리는 모습을 보자, 저도 모르게 이입이 된 탓이었다. 몇몇 구경꾼들은 끝까지 보지 못하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반면 낯빛이 창백하게 질려가는 구경꾼들과는 달리, 실반의 눈동자는 별처럼 반짝였다. 시험에 임하기 전, 페르다가 했던 말이 떠오른 탓이다.

'네 스승이 얼마나 강한지 보여주고 오마.'

지금 페르다는 그 말을 증명하고 있었다.

실반은 양손을 꽉 맞잡은 채, 눈을 크게 떴다. 스승의 활약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눈에 담으려는 듯이.

그리고 페르다는 마침내 입구에 도착했다.

그그그그극-

요란스러운 소리와 함께 석문이 열렸다.

뒤이어 큰 물체 하나가 날아왔다. 눈을 까뒤집은 채 거품을 물고 기절한 전사. 모두가 멍하니 전사를 보던 때, 발소리가 들렸다.

저벅저벅-

그저 발을 옮기는 소리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가 발을 내딛을 때마다 다크엘프들은 몸을 움찔거렸다. 얼마 후, 입구 너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녀석까지 해서 딱 백 명."

페르다였다.

천천히 계단을 내려온 그는 하르민을 쳐다봤다. 그러고는 뺨에 묻은 피를 닦아낸 뒤, 히죽 웃었다.

"모두 숨만 붙여뒀다."

"······."

도발적인 말이었으나 하르민은 반응할 수 없었다.

그가 보여준 광경에 압도당해 몸이 움직이지 않았던 탓이다. 그런 하르민의 배를 툭툭 두드린 뒤, 페르다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실반."

그의 부름에 실반은 고개를 들었다.

반짝이는 황금색 눈동자를 보며 페르다는 입가를 끌어올렸다.

"내가 말했지? 걱정하지 말라고."

"헤헤, 네!"

실반은 밝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겨울처럼 싸늘한 분위기 속에서 오직 두 사제만이 웃었다.

모두가 멍하니 그 광경을 보던 중, 누군가의 목소리가 적막감을 깨뜨렸다.

"어째서 가만히 있나? 하르민 젬버."

이로나의 목소리였다.

갑작스런 말에 하르민은 멍하니 고개를 돌렸다. 이로나는 손을 들어 쿠르드를 가리켰다. 그러고는 얼음장처럼 차가운 음성으로 대답했다.

"심판의 책무를 다하라."

그것이 무얼 의미하는지 이해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하르민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페르다의 무위에 압도당해, 잠시 잊고 있던 일을 이행하기 위해서였다.

"쿠르드 아르간다!"

쩌렁쩌렁한 외침이 숲을 진동시켰다.

이어 하르민은 도끼를 뽑았다. 그는 부리부리한 눈으로 쿠르드를 노려본 채 말을 이었다.

"신성한 족장의 시험에 간섭해 부정을 저지른 죄를 묻겠다!"

지축을 울리는 발소리와 함께 하르민이 다가왔다.

그와 시선을 마주한 채, 쿠르드는 멍하니 웃었다.

"하, 하하하······."

방금 떠올린 계획조차 물거품으로 돌아갔음을 깨달은 탓이다.

암령굴의 전사들이 전멸했다. 칸젤조차 일격에 쓰러졌다. 고작 한 명의 인간에게. 그런데 지금 이 상황에서 쿠데타를 일으킨다? 자살행위나 다름없으리라.

그 사이 하르민은 코앞까지 다가왔다.

"단념해라. 쿠르드."

"······."

"암령께서도 보고 계신다."

이어진 말에 쿠르드는 결국 고개를 떨어뜨렸다. 이를 포기의 의미로 받아들인 하르민은 단숨에 쿠르드를 제압했다. 우악스러운 손길에 그의 머리가 지면에 박혔다.

모든 일족이 보는 앞에서 추한 꼴을 보이자 굴욕감이 치솟았다.

얼굴을 지면에 묻은 채, 쿠르드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대로 끝날 수는 없어.'

입술을 씹어내듯 깨물었다. 비릿한 피 맛이 느껴졌다.

'반드시 돌아오겠다. 반드시!'

설령 악마에게 영혼을 파는 일이 있더라도.

핏발이 선 눈으로 쿠르드는 각오를 다졌다. 허나 고개가 지면에 처박혀 있던 탓에 그는 미처 알지 못했다.

페르다가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 Chapter 22. 암령(暗靈) (1) > 끝

ⓒ 남철우

< Chapter 22. 암령(暗靈) (2) >

그날 저녁.

고생한 실반과 페르다를 위해 진수성찬이 차려졌다. 수많은 음식이 놓이고, 마침내 메인디쉬가 테이블 중앙에 도착했다.

익숙한 냄새. 실반의 귀가 쫑긋거렸다. 잠시 후, 실반은 그것이 무엇인지 깨달은 듯 눈을 반짝였다.

"오리고기!"

"네 선생에게 들었다. 최근 이걸 좋아한다면서?"

"히히, 네."

"그래, 그래. 많이 들려무나."

활짝 웃는 실반을 보며 이레아는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을 보며 페르다도 묵묵히 식사를 시작했다. 그러고는 낮에 있었던 일을 가만히 회상했다.

우선 족장의 시험은 사흘 뒤로 연기됐다.

이유는 당연히 쿠르드가 저지른 부정 때문이었다. 통솔의 시험에만 장난질을 쳐놓은 줄 알았는데, 힘의 시험에도 간섭한 정황이 드러났다.

명백한 증거에 쿠르드는 지하 감옥에 투옥됐다.

또 그를 따르는 전사들의 무력시위를 방지하기 위해, 하르민을 포함한 전사들이 도시의 경계를 섰다. 그래서 지금 르샨테는 흉흉하다 못해 살벌한 분위기로 물든 상태였다.

달그락-

그 무렵, 저녁 식사가 끝났다.

실반이 볼록해진 배를 두드리던 때, 돌연 이레아의 시선이 페르다에게 향했다.

사뭇 진지한 표정과 함께, 그녀의 입술이 달싹였다.

"······지금으로부터 십오 년 전."

페르다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그녀는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이 땅을 침략한 무리가 있었네."

별안간 시작된 과거 이야기에 페르다는 잠자코 귀를 기울였다.

"사막의 인간들이 하나로 뭉친 게 원인이었지. 단숨에 세력을 만든 놈들은 사막을 넘어 이곳, 세르네크 숲까지 스멀스멀 기어왔으니까."

사막의 인간이라 하면 남쪽에 있는 야만족을 뜻했다.

뒤이어 이레아의 말이 이어졌다.

"물론 우린 그런 놈들에게 땅을 넘겨줄 정도로 약하지 않았어. 하지만 세월이 지날수록 침략자들의 수가 늘어났다네. 그리고 전쟁이 터졌지."

야만족과의 전쟁. 이는 페르다도 알고 있었다.

원작에서도 짧게 언급된 적이 있었으니까.

「세르네크 숲에 거주하는 종족에게 가장 증오스러운 이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모두가 사막의 야만족을 꼽을 터다. 십수 년 전, 야만족의 침략으로 벌어진 전쟁 탓이었다.」

전쟁은 치열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피가 강을 이루었고, 수많은 종족이 목숨을 잃었다. 심지어 수가 적은 몇몇 종족은 아예 멸족하기도 했다. 그 정도로 커다란 전쟁이었다.

"간신히 숲을 지키긴 했으나 많은 동족이 죽고 다쳤어. 다음에도 비슷한 규모의 전쟁이 벌어진다면 숲을 내줘야 할 정도로 피해가 컸다네. 그리고 그때쯤, 인간들의 땅에서 사자가 찾아왔지. 휘온이라는 남자가."

휘온 젤 아크듀트.

현 아크듀트 백작의 이름이 나오자 실반이 몸을 움찔 떨었다.

"그는 우리에게 동맹을 제안했어. 함께 힘을 합쳐 사막의 야만족과 싸우자고 했지. 난 기꺼이 받아들었지만, 몇몇 젊은 전사들이 반대했다네. 인간 따위와 손을 잡을 순 없다면서 말이야."

예전 일을 떠올린 걸까? 이레아의 미간에 주름이 팼다.

"그리고 반대파들을 이끌던 녀석이······."

"쿠르드입니까?"

페르다가 담담히 묻자 이레아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다네. 당시에는 반대파의 수가 적어, 동맹이 맺어졌지. 덕분에 큰 피해 없이 사막의 야만족을 물리칠 수 있었어. 하지만 이후로도 쿠르드 녀석은 사사건건 간섭해, 백작가와의 동맹을 끊으라고 했다네."

왜 그리도 백작가를 싫어했던 걸까?

페르다는 의아함을 느꼈다. 그래서 이유를 물으려던 때,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대답이 돌아왔다. 잠자코 있던 이로나에게서였다.

"쿠르드가 백작가를 싫어하게 된 이유는 이리나 때문이야."

이리나 세르네크.

이레아의 둘째 딸이자 실반의 어머니. 그녀의 이름이 나오자 실반의 시선이 이로나에게 향했다. 곧이어 이로나는 말을 이었다.

"그놈이 이리나한테 홀딱 빠져있었거든. 정작 이리나는 관심도 없었지만."

이로나의 대답에 흩어졌던 퍼즐 조각이 조금씩 맞춰졌다.

이리나는 동맹의 증표로서 아크듀트 백작과 결혼식을 올렸다.

이른바 정략결혼인 셈이다. 그러니 이리나를 마음에 두고 있던 쿠르드로서는 분통이 터질 수밖에.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야만족은 숲에 얼씬도 하지 않았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아크듀트 백작과의 동맹도 약해졌지. 그리고 4년 전, 이리나가 세상을 뜨면서 교류가 완전히 끊겼다네."

동시에 쿠르드는 명분을 얻었다. 유명무실해진 동맹을 끊고, 예전처럼 돌아가자는 주장과 함께, 젊은 전사들을 포섭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결과.

이런 상황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모든 설명이 끝나자 이레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과거, 야만족을 막아내는 데 급급해, 일족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의 한숨이었다.

그녀는 페르다에게 고개를 살며시 숙였다.

"자네에게는 못난 모습을 보여 미안할 따름이네."

"······미안하다. 원래는 우리의 문제인데 말려들게 해서."

뒤이어 이로나까지 머리를 숙였다.

그러자 페르다는 개의치 않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사과할 필요 없어. 내 제자를 위해서 움직인 것뿐이니까."

진심에서 우러난 대답이었다.

다크엘프가 뭐가 예쁘다고 그들을 위해 행동한단 말인가? 그런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실반만 아니었다면 멸족하든 말든 상관하지 않았으리라.

"후후,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구먼."

반면 그의 속내를 모르는 이레아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이야기가 끝나고 정적이 찾아올 무렵.

이번에는 페르다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럼 쿠르드의 처리는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감히 신성한 시험에 간섭하여 부정을 저질렀네. 엄벌로 다스려야 마땅하지."

그러니까 무슨 엄벌을 줄 건데?

페르다는 그리 묻고 있었다. 그러자 이를 알아챈 걸까? 이레아는 사뭇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사지의 힘줄을 자르고 20년 동안 독방에 처박을 걸세. 이는 칸젤 역시 마찬가지야. 또 부정을 도운 이들도 예외 없이 같은 형벌을 내릴걸세."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페르다는 미간을 찌푸렸다.

약했다. 약해도 너무 약했다.

물론 부정을 저지른 죄목만 놓고 보면 합당할 수도 있었다. 허나 쿠르드는 살려두면 분명 해가 될 녀석이었다. 페르다의 직감이 그리 속삭였다.

"그리고 족장의 시험을 치를 자격도 박탈할 걸세."

그런 건 형벌이 될 수 없다.

세력도 있겠다, 수틀리면 쿠데타를 일으켜 족장이 되면 그만이니. 물론 그렇게 할 경우, 모든 일족의 지지를 받진 못하겠지만. 어쨌든 화근을 남겨둔다는 것 자체가 마음에 안 들었다.

"이는 우리의 율법에 따른 형벌이야. 존중을 부탁하네."

이레아의 말에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는 페르다.

그녀의 주름진 입가에 밝은 미소가 맺혔다. 그의 행동을 일족의 뜻을 존중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허나 이는 이레아의 착각이었다.

페르다는 그럴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었으니.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잠자코 앉아있던 페르다가 돌연 몸을 일으켰다.

"음? 벌써 일어나려는가?"

이를 본 이레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곧 다과를 내오라고 하려 했건만······."

"예, 조금 피곤해서요."

페르다가 싱긋 웃었다.

그 말에 이레아는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러고 보니 오늘 하루에만 백 명을 상대했었지."

뒤늦게 통솔의 시험을 떠올린 모양이다.

그녀는 미안한 얼굴로 고개를 살짝 숙였다.

"좀 더 일찍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미안하네. 그래, 그럼 푹 쉬게나."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공손히 고개를 숙인 뒤, 몸을 돌렸다.

그러자 잠자코 있던 실반이 덩달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그럼 내가 배웅을······."

"괜찮아. 혼자 잠깐 생각할 게 있어서."

곤란한 듯이 고개를 흔들자, 실반은 이내 수긍했다.

이후 족장의 방을 나선 페르다는 곧장 숙소로 향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침대에 앉아있던 헤르온이 그를 반겼다.

"볼일은 끝났나?"

"그래."

대강 대답한 뒤, 벽에 등을 기댄 채 섰다. 그러고는 창밖을 힐끔거렸다. 바람이 부는 소리와 함께 희뿌연 뭔가가 보였다. 독수리의 형상을 한 물체. 바로 이로나가 부리는 바람의 상위 정령이었다.

'마음이 영 안 놓였나 보군.'

설마 정령으로 미행을 붙일 줄이야.

페르다는 피식 웃었다. 하여간 예리하다니까.

결론부터 말하면 이로나의 추측은 정확했다.

어차피 오늘 밤이 지나기 전, 쿠르드를 제거할 생각이었으니.

'후환을 남겨두는 것만큼 멍청한 것도 없지.'

또 녀석은 개인의 목적을 위해 실반을 끌어들였다.

선을 넘은 것에 대한 대가를 치를 시간이었다.

'어차피 정령은 안까지 들어오지 못해.'

정령들은 부정한 것을 싫어한다. 그런데 마침 숙소 안에는 부정한 것이 넷이나 있다. 헤르온뿐만이 아니라 세 망령도 천장을 빙글거리며 맴돌고 있었으니 말이다.

'숙소 안에 들어온 것까진 보여줬으니까······.'

이제 들키지 않고 나가기만 하면 그만이다.

페르다에게 있어선 식은 죽을 먹는 것처럼 쉬웠다.

'하이드 워커.'

그의 몸이 어둠에 녹아들었다.

***

페르다가 나간 후.

실반은 이레아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주로 세 번째 시험인 '인정의 시험'에 대한 이야기였다.

한편 이로나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창밖을 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한 줄기 바람이 불었다. 동시에 그녀의 귀가 움찔거리며 떨렸다. 페르다에게 붙여둔 시오르에게서 전언이 들려온 탓이었다.

[네가 말했던 그 인간, 그냥 숙소로 들어갔는데?]

'······정말?'

[응, 피곤한 모양이야.]

들려온 대답에 이로나는 미간을 좁혔다.

이상하다. 분명 뭔가 사고를 칠 것 같은 촉이 왔는데.

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다시 말을 걸었다.

'숙소 내부도 확실히 살펴봤어?'

[아니, 그건 못 해.]

'왜?'

[부정한 놈들이 넷이나 있거든.]

단호한 대답이 돌아왔다.

곧이어 시오르는 굳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심지어 넷 다 영웅의 격을 가졌어. 나더러 그런 곳을 들어가라고? 이로나, 혹시 내가 역소환되는 걸 보고 싶은 거야?]

툴툴거리는 대답에 이로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헤르온과 세 망령을 잠시 잊고 있던 탓이었다.

[그럼 이제 돌아가도 될까?]

다시금 시오르의 음성이 들려왔다.

잠시 고민하던 이로나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응, 고마워.'

동시에 시오르는 정령계로 돌아갔다.

이로나는 창밖에 두던 시선을 거두었다.

하긴 페르다도 인간인 이상, 피곤할 수밖에 없으리라. 백 명의 전사를 쓰러뜨렸으니까. 그렇게 이로나는 애써 불안한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러던 그때였다.

사아아아아-

바람이 불었다. 그리고 방 안의 불이 모두 꺼졌다.

"어?"

"왜 갑자기 불이······."

실반과 이레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바람이 불긴 했으나 불이 꺼질 정도로 세진 않았던 탓이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둘과 달리, 이로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입구에 뭔가가 불쑥 솟아난 탓이었다.

"후후, 좋은 밤이구나."

그때 차분하게 가라앉은 음성이 들려왔다. 갑작스레 들린 목소리에 일행은 일제히 입구를 쳐다봤다. 이윽고 이레아는 상대의 정체를 알아차린 듯 눈을 휘둥그레 떴다.

"당신은······!"

"궁금한 게 있어서 찾아왔단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을 검게 물들인 존재.

암령이 웃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갑작스러운 암령의 등장에 셋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던 중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이레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궁금한 거라고 하시면······?"

"너 말고 아까 그 인간한테 용무가 있는 거란다. 응?"

말을 잇던 암령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더니 누군가를 찾듯 주변을 둘러봤다.

"그 남자, 방금까지 여기 있지 않았니?"

"아, 그게······."

이로나는 이내 암령이 찾는 자가 페르다라는 걸 깨달았다.

잠시 후, 그녀의 설명이 끝나자 암령의 입이 열렸다.

"그렇구나. 숙소로 갔다고?"

"네."

그 말에 암령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실례했구나. 그럼 마저 이야기 나누렴."

방 안에 내려앉은 어둠이 빠르게 걷혔다. 이윽고 꺼졌던 불이 다시 타올랐다. 셋은 암령이 있던 자리를 그저 멍하니 쳐다볼 뿐이었다.

***

그 시각, 르샨테의 지하감옥.

감옥 주변을 지키는 경비의 수가 무려 세 배로 불어났다. 한순간에 죄인으로 추락한 족장 후보, 쿠르드를 감시하기 위함이었다.

허나 지하감옥의 입구와 출구에만 경비가 있을 뿐, 쿠르드의 방 앞엔 아무도 없었다. 행여나 쿠르드에게 포섭당할 위험이 있다며 배제된 것이지만 이는 안일한 판단이었다.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쿠르드는 수하를 통해 바깥의 상황을 생생하게 전해 듣고 있었으니까.

"거암족에게 연락은 전했나?"

쿠르드의 시선은 천장에 향한 채였다. 그곳에 있는 것은 꿈틀거리는 어둠. 바로 수하가 부리는 마물이었다.

[쿠르드, 님이, 잡힌, 직후, 완료, 했습니다.]

"도착 예정일은?"

[내일, 밤에, 도착, 할, 겁니다.]

"쯧, 조금 늦군."

쿠르드가 혀를 찼다.

예상컨대 이레아는 내일 당장 그의 죄를 물으리라. 부정을 저지른 증거가 명백했으니. 한편 쿠르드의 심기가 불편해 보이자 마물은 돌연 질문을 던졌다.

[그럼, 사막의, 야만족, 부를, 까요?]

"야만족이라······."

낮은 중얼거림과 함께 쿠르드는 생각에 잠겼다.

뭐가 이익인지 저울질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쿠르드는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그건 최후의 수단이다. 놈들은 여간 탐욕스러운 게 아니니."

[알겠, 습니다. 그럼, 내일, 다시, 뵙겠, 습니다.]

작별 인사를 끝으로 마물은 모습을 감췄다.

감옥은 삽시간에 고요하게 물들었다. 쿠르드는 벽을 마주 본 채, 생각에 잠겼다. 앞으로 어떻게 할지 계획을 세우기 위함이었다.

그러던 그때였다.

"이건 생각지도 못했네."

"······!"

등 뒤에서 들려온 낯선 목소리.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이어 쿠르드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너, 너는······. 컥!"

그 순간, 목이 찢기는 고통에 짧은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비명은 이어지지 못했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던 탓이었다.

그때 쿠르드의 시야로 한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원래는 빠르게 처리하고 나가려고 했는데······."

군청색 머리카락을 내려 묶은 청년.

실반의 곁을 지키는 남자. 바로 페르다였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어서 말이지."

거암족은 그렇다 쳐도, 사막의 야만족? 그쪽과 연결이 되어있었단 말이지? 이건 소설에도 나오지 않았던 거다. 페르다는 흥미로운 눈빛으로 쿠르드의 멱을 움켜쥐었다.

"네가 숨기고 있는 걸 전부 끄집어내라."

서걱-

스산한 소리와 함께 쿠르드의 검지가 잘려나갔다.

검붉은 핏방울이 사방에 흩부려졌다. 페르다는 그의 손목을 잡아끈 뒤, 잘린 손가락의 단면으로 벽을 톡톡 두드렸다.

"편하게 죽고 싶다면."

새파랗게 질려가는 쿠르드의 얼굴과 함께.

페르다의 입가에 잔인한 미소가 피어났다.

< Chapter 22. 암령(暗靈) (2) > 끝

ⓒ 남철우

< Chapter 22. 암령(暗靈) (3) >

철컥철컥-

중무장한 전사들이 도시를 돌아다녔다. 쿠르드를 지지하는 젊은 전사들이 섣부른 짓을 하는 걸 막기 위함이었다. 흉흉한 분위기 속에서 중립의 전사, 하르민 젬버는 우직하게 임무를 수행했다.

"동쪽 지구, 이상 없습니다."

"남쪽도 이상 없습니다."

"서쪽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부하들의 보고를 들으며 하르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남은 곳은 북쪽 지구. 정확히 말하면 북쪽에 있는 지하감옥만 남았다. 쿠르드를 관리하는 건 하르민의 몫이었기에.

부하들에게 재차 순찰을 지시한 그는 곧장 북쪽으로 이동했다.

그로부터 얼마 후.

하르민은 감옥을 찾아온 용무를 꺼냈다.

"죄인의 상태는?"

"여전히 벽만 보고 있습니다."

"다만 마지막으로 확인했던 게 저녁 무렵인지라······."

지하감옥을 지키던 전사들이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쿠르드와 접촉하지 말라고 명령을 내린 것이 바로 하르민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하르민은 잘했다는 듯 전사들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럼 내가 잠깐 다녀오지."

"예!"

전사들이 비켜섰다. 이어 하르민이 지하로 향하는 계단에 발을 내딛던 그때, 별안간 멀리서 한 전사의 외침이 들려왔다.

"하르민님!"

도시 중앙을 순찰하던 전사였다. 설마 무슨 일이 생긴 건가? 헐레벌떡 뛰어오는 그를 보며 하르민은 안색을 굳혔다. 한편 그에게 다가온 전사는 숨을 고르며 말을 이었다.

"족장님께서 찾으십니다. 죄인의 처분에 관해, 하실 말씀이 있다며······."

다행히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었다.

이내 원래의 표정을 회복한 하르민. 그는 잠시나마 고민에 잠겼다. 허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으음, 알겠다. 지금 가도록 하지."

죄인의 상태를 확인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에 대한 처리도 중요하다. 족장에게 다녀온 뒤에 확인해도 별일 없겠지. 그리 생각하며 몸을 돌렸다.

하지만 하르민은 몰랐다.

지금 지하감옥 안에서는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큰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

죄인 쿠르드가 갇힌 독방.

차디찬 감옥의 바닥에 붉은 카펫이 깔렸다. 피로 이루어진 카펫이었다. 그리고 바로 위, 피 웅덩이를 만들어낸 장본인이 있었다.

뚝뚝-

쿠르드의 몸에서 핏방울이 떨어졌다.

열 손가락의 모든 마디가 반씩 잘렸고, 온몸은 크고 작은 상처로 가득했다. 이어 보이는 창백한 얼굴. 눈은 이미 썩은 동태처럼 풀린 지 오래다.

시체처럼 보이는 모습. 허나 아직 죽지는 않았다.

그걸 어떻게 아냐고? 간단하다. 아직 숨통을 끊지 않았으니까.

"설마 또 이런 일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페르다의 눈빛이 차게 물들었다.

헌터 시절, 종종 몬스터를 고문한 적이 있었다. 함정의 파훼법을 알아내거나 보스의 위치를 특정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처음엔 어설펐으나, 실력이 오를수록 고문 기술도 점점 능숙해졌다.

이윽고 S급 헌터가 되었을 때.

그는 '헌터 업계 최고의 고문 기술자'라는 명성도 함께 얻었다.

콸콸콸-

인벤토리에서 포션을 꺼내 쿠르드의 몸에 부었다.

잠시 후, 피가 멎었다. 사실 마시는 게 가장 효과가 좋지만, 어차피 죽일 예정인 녀석이다. 그렇게까지 정성을 들일 필요는 없었다.

"어디 보자."

숨통을 붙여둔 뒤, 페르다는 몸을 돌렸다.

그의 시선이 반대편 벽으로 향했다. 그곳엔 피로 적혀진 글자로 가득했다. 쿠르드가 잘린 손가락으로 직접 적은 정보였다.

고문 도중, 몇 번이고 카디란토의 맹세를 하게 시켰다. 진위는 따로 구분하지 않아도 되리라. 그는 눈을 가늘게 좁힌 채, 벽면에 적힌 정보를 읽어나갔다.

"거암족이 내일 저녁에 도착할 예정이라······."

쿠르드와 거암족의 관계는 알고 있었다. 이는 원작에서도 있던 일이니까. 실제로 쿠르드는 6회차에서 거암족을 이용해 쿠데타를 일으킨 전적이 있다. 그러니 이건 그냥 기억만 해두면 된다.

문제는 그 아래 적힌 정보였다.

"······사막의 야만족."

원작에는 나오지 않았던 기록.

쿠르드가 사막의 야만족과 인연을 맺은 건 지금으로부터 약 20년 전. 당시 전사 수행 도중에 야만족 족장의 후계자와 의형제의 연을 맺은 게 시작이었다.

이후 야만족과 지속적인 교류를 해오던 중, 쿠르드는 야만족에게 은밀한 부탁 한 가지를 했다. 바로 세르네크 숲을 침략해달라는 것. 이레아가 말했던 전쟁을 일으킨 배후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하, 이놈 봐라?"

페르다의 입가가 일그러졌다.

그가 전쟁을 일으킨 이유는 족장이 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외세를 끌어들이면서까지 족장이 되려고 한 이유에 대해선, 이리나 세르네크를 손에 넣기 위해서라고 실토했다.

"생각보다 훨씬 막 나가는 놈이었잖아?"

야만족에게 약속한 대가도 엄청났다. 무려 숲의 절반. 이 정도면 동족을 배신했다고 봐도 무방했다. 페르다는 기가 찬 듯이 웃었다.

"족장에게 들려줄 수가 없어서 아쉽네."

진실을 안다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 모습이 꽤 궁금했지만 고이 접어두었다. 왜냐면 쿠르드는 감옥을 탈출해, 실종된 것으로 처리될 예정이었으니.

"이으, 으어으······."

그때 쿠르드가 뭔가를 중얼거렸다.

초점이 돌아온 눈빛에 강한 갈망의 빛이 깃들었다. 뭘 원하는지 알고 있다. 끔찍하게 고문당하던 몬스터들이 종종 보이던 눈빛이었으니까.

이를 본 페르다는 몸을 돌렸다. 그가 비수를 뽑자 쿠르드가 몸을 움찔거렸다. 하지만 이내 안도하듯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쉴 수 있다는 안도감에 모든 걸 내려놓은 것 같다.

"그래, 나도 그렇게까지 미친놈은 아니야."

코앞까지 다가온 페르다가 싱긋 웃었다.

그는 학대를 즐기는 성정이 아니다. 얻을 정보만 다 얻으면 단번에 숨통을 끊었다. 그것이 그가 베푸는 마지막 자비였다.

그러나 쿠르드는 자비를 베풀 대상이 아니었다.

콰직!

비수가 쿠르드의 귀를 짓뭉갰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쿠르드와 마주한 채, 페르다는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물론 내 제자를 건드리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

"그러게 누가 선을 넘으랬어."

소중한 걸 건드린 적에게 베풀 자비 따윈 없다.

죽어서도 감히 저주조차 할 수 없도록, 압도적인 공포를 심어 죽인다. 그것이 페르다가 정한 '선을 넘은 자'의 말로였다.

"으! 으으, 으으으······!"

쿠르드의 몸이 덜덜 떨렸다.

편히 쉴 수 없음을 깨달은 듯 얼굴 전체가 공포에 질려갔다. 이윽고 두려움으로 물든 눈동자를 향해 비수가 날아들었다.

***

바스락-

늦은 밤. 수풀을 밟는 소리가 났다.

페르다였다. 지하감옥을 나선 그는 단숨에 르샨테를 벗어났다. 인적이 드문 깊은 숲까지 이동한 뒤, 대뜸 인벤토리를 열었다.

뒤이어 꺼낸 것은 피에 물든 자루.

툭!

쿠르드의 시체였다. 그뿐만 아니라 피로 물든 바닥과 벽까지 모조리 긁어왔다. 거기에 바깥으로 통하는 구멍까지 뚫어두었으니, 그 정도면 알아서 탈옥했다고 생각했겠지.

퍽! 퍽퍽퍽!

미리 챙겨둔 삽으로 땅을 팠다. 깊이 파진 않았다. 이 근처에는 산짐승들이 많으니. 대충 묻고 나면 녀석들이 알아서 처리해줄 거다.

"이 정도면 됐겠지."

자루 입구를 슬쩍 열었다. 냄새를 맡고 올 녀석들이 파먹기 좋게.

이후 페르다는 몸을 돌렸다. 얼마 걷지 않았을 무렵, 별안간 숲이 어둠으로 물들었다.

"이건······."

달이 구름에 가려진 게 아니었다.

실제로 달은 여전히 하늘에서 고고한 자태를 뽐내는 중이었으니. 어둠이 물든 건 오로지 페르다의 주변뿐. 그 말은 곧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니라는 뜻이리라.

심상찮은 반응에 페르다는 전신의 감각을 끌어올렸다. 무슨 일이 생겨도 즉각 대처할 수 있게. 그러던 중 돌연 정면에서 무언가가 불쑥 솟구쳤다.

그것은 흡사 살아 움직이는 어둠이었다.

만약 달빛이 아니었다면 형체조차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꿈틀거리던 어둠은 이윽고 어린아이의 형상을 갖췄다.

그러더니 페르다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안녕, 좋은 밤이네."

그것이 인사를 건네왔다. 대답 대신, 페르다는 눈을 좁혔다. 처음엔 마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마물은 아니었다.

저것의 정체는······.

'암령(暗靈).'

밤의 정령이자 암령굴의 주인.

숲의 수호신을 자처하는 존재. 그의 등장에 페르다는 눈을 빛냈다.

'안 그래도 한번 만나러 갈까 생각했는데.'

설마 제 발로 찾아올 줄이야. 수고를 덜었다.

암령은 정령치고는 보기 드물게 격을 가진 정령이다. 또 1회차를 제외한 모든 회차에서 실반과 계약했던 정령이기도 했다.

'그리고 사령술사와 궁합도 잘 맞지.'

밤이 되면 언데드를 어둠 속에 숨길 수도 있으니. 언젠가 동료로 만들어야 할 존재였다. 페르다는 눈을 반짝인 채, 이리로 다가오는 암령을 바라봤다.

"후후, 만나서 반가워."

암령은 눈코입이 없었다. 검은색 덩어리가 간신히 사람의 형체를 이루어 걷는 것처럼만 보였다. 그가 건네온 인사에 페르다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것으로 답했다.

그러자 암령이 다시 말을 이었다.

"궁금한 게 있어서 찾아왔어. 대답해줄 수 있니?"

"내가 대답할 수 있는 거라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언젠가 동료가 될 사이라면 지금부터 조금 친해질 필요가 있으니까. 한편 긍정적인 대답이 돌아오자 기뻤던 걸까? 암령은 웃음기가 묻어나는 음성으로 말했다.

"고마워. 사실 낮에 있었던 일이 신경 쓰여서 말이야."

낮에 일? 그러고 보니 실반에게 들었다. 동굴에 들어간 직후, 암령이 나와서 동굴 안의 풍경을 보여줬다고. 페르다가 이를 떠올릴 무렵, 암령의 질문이 이어졌다.

"그래서 말인데, 낮에 그건 어떻게 한 거니?"

"낮에 그거?"

"존재감을 지우는 것 말이야. 동굴 안의 어둠은 모두 내 눈이나 다를 바 없는데, 어떻게 내 눈을 피할 수 있었어?"

뭘 물어보나 했는데 이런 뻔한 걸 물어볼 줄이야.

페르다는 사실대로 대답했다.

"격이 달라서 그렇다."

"격?"

그 말에 암령은 페르다의 주변을 빙글빙글 맴돌았다. 뭔가를 관찰하듯 머리를 들이민 채로. 잠시 후, 암령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네. 네 격은 흐릿하게만 보이거든."

그럴 거다. 지금은 격을 숨기고 있으니.

어깨를 으쓱인 뒤, 페르다는 감췄던 격을 모조리 드러냈다. 동시에 장난치듯이 주변을 맴돌던 암령이 순간적으로 굳었다. 마치 돌처럼 딱딱하게.

얼마 후, 암령은 닫혔던 입을 열었다.

"······너, 인간 맞니?"

"맞아."

"거짓말할 생각이라면······."

"카디란토의 영령에 대고 맹세라도 할까?"

그 말에 암령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어 그는 뒷걸음질을 치며 중얼거렸다.

"세상에, 어디서 이런 괴물 딱지가······."

솔직한 반응에 페르다는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다시 격을 감췄다. 암령은 이를 신기하다는 듯이 쳐다보며 물었다.

"인간이 어떻게 그만한 격을 손에 넣은 거니?"

"비밀이다."

대답하기 귀찮았던 페르다가 입을 다물었다.

호기심을 해결하지 못했으니, 불평이 나올 줄 알았건만 그러진 않았다. 암령은 그저 몸을 돌린 채, 조그마한 목소리로 뭐라고 중얼거릴 뿐이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괜찮네."

"뭐?"

"크흠! 아, 아무것도 아니란다."

영 수상쩍은 대답과 함께, 암령은 평정을 회복했다.

짧은 헛기침을 끝으로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럼 다음 질문······."

"질문은 앞으로 하나만 더 받겠다."

그때 페르다가 암령의 말을 끊었다.

암령에게 호감을 얻는 건 좋지만, 밤새 어울려줄 생각은 없었기에. 갑작스러운 말에 당황한 걸까? 암령은 멍하니 있다가 이내 불평을 터뜨렸다.

"그런 게 어딨니? 하다못해 앞으로 서른 개만 더······."

"무조건 하나만이다."

단호히 못을 박았다.

이런 영양가 없는 대화를 서른 개씩이나 할 생각이었다고? 제정신으로 하는 소린가? 페르다의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반면 암령은 뚱한 얼굴로 고민에 빠졌다. 수많은 질문 중에서 하나만 추리자면 고민이 될 만도 하겠지. 페르다는 잠자코 그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있잖아."

잠시 후, 암령이 입을 열었다.

그는 팔을 뻗어 어느 한 방향을 가리켰다. 새카만 손가락이 향한 곳은 쿠르드가 묻혀있는 부근이었다.

"쟤는 왜 죽였니?"

사아아아아-

그 말과 함께 스산한 바람이 불었다. 주변의 온도가 싸늘하게 식었다.

페르다는 말없이 암령의 얼굴을 바라봤다. 불쾌하거나 화가 난 기색은 없었다. 그럼 정말 궁금해서 물어본 것이리라.

그래서 솔직하게 대답했다.

"내 제자를 건드렸으니까."

"제자?"

고개를 갸웃거리는 암령.

이를 보며 페르다는 말을 이었다.

"그래. 놈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 내 제자를 끌어들였다."

이어 쿠르드와 얽혔던 일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잠시 후, 암령은 연신 고개를 끄덕거렸다. 마치 이해했다는 듯이. 그러고는 뭔가를 떠올린 듯이 말을 걸었다.

"아, 혹시 네 제자라는 아이가 실반을 말하는 거니?"

"실반을 알고 있나?"

"그럼. 이리나의 아들이잖니. 10년 전쯤에 본 적이 있어. 너한테 오기 전에도 잠깐 봤고."

암령과 이리나가 아는 사이였다고?

이건 처음 듣는 사실이다. 페르다는 흥미로운 눈으로 암령을 쳐다봤다.

"지금 생각해도 이리나는 정말 아까워. 내가 계약자로 점찍어둔 후보 중에서 가장 뛰어난 아이였는데 인간과 정을 통하는 바람에 후보에서 탈락했지 뭐니."

암령은 입맛을 다셨다.

이에 페르다는 넌지시 질문을 던졌다.

"계약자를 고르는 조건이 까다롭나 보군."

원작에서 암령과의 계약 과정은 자세히 묘사되어 있지 않았다. 마치 실반이 사령술사로 각성하는 순간이 생략된 것처럼.

그러니 이참에 정보라도 얻어둘 요량이었다.

한편 페르다의 속내를 알지 못하는 암령은 계약에 관련된 이야기를 술술 털어놓기 시작했다.

"당연하지. 한번 정하면 한쪽이 죽기 전까지 바꿀 수 없거든. 조건은 전부 따져보고 계약하는 편이 좋아. 찰나의 기분에 취해서 덜컥 골랐다가 고생하는 정령들을 많이 봤단다."

의외로 현실적인 대답이 흘러나왔다.

암령은 연신 신중하게 선택해야 한다는 말을 강조했다.

"그래서 아쉬워. 이리나의 아들이라고 해서 계약자 후보에 올려볼까 했는데, 그럴 수가 없게 돼서."

"뭐라고?"

지금 뭔 소리를 하는 거지?

예상하지 못한 소리에 페르다는 멍하니 물었다.

원작에선 암령이 실반한테 먼저 접근해온다. 강하게 끌리는 무언가가 있다면서. 그런데 지금 암령은 마치 실반과 계약하지 않을 것처럼 이야기하는 게 아닌가.

'설마 전개가 틀어졌나?'

그것만큼은 아니기를. 페르다는 미간을 좁힌 채 기도했다.

그때 암령이 이유를 밝혔다.

"그 아이한테선 내가 싫어하는 냄새가 나거든."

"싫어하는 냄새?"

"시체 썩는 냄새를 말하는 거란다."

암령은 없는 코를 쥐는 시늉을 했다.

그 모습을 보자 문득 떠오른 게 있었다.

'그러고 보니······.'

지난 회차의 실반에게는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바로 사령술사로 각성하기 전이라는 것. 그에 비해 지금은 모든 회차 중에서 가장 빨리 사령술사가 됐다. 이 점과 암령의 반응으로 미루어봤을 때, 암령과 계약하기 위한 조건은······.

'······사령술사의 각성 전후.'

오직 그것뿐이다.

전개가 뒤틀린 이유가 드러나자 페르다의 얼굴은 절로 구겨졌다.

'어떻게 한다?'

암령을 데려가지 않는다면 향후 꽤 큰 불편함을 각오해야 했다. 그냥 어둠이 꿈틀거리는 것처럼 보여도 의외로 다양한 능력을 보유한 정령이니까.

페르다가 깊은 고민에 잠겨 있을 무렵.

암령은 연신 말을 이어나갔다.

"아쉽지만 별수 없지. 계약자가 되면 그런 냄새를 평생 맡아야 하니."

그 말을 끝으로 암령은 돌연 페르다를 힐끗거렸다. 뭔가 말을 꺼내기를 주저하는 모습. 허나 고민에 빠진 페르다는 이를 인지하지 못했다.

"흠흠! 그래서 하는 말인데······."

헛기침과 함께 암령은 슬금슬금 다가왔다.

이윽고 페르다의 코앞까지 당도한 암령. 갑작스레 느껴진 기척에 페르다는 암령을 바라봤다. 동시에 암령은 기대감이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너 혹시 나랑 계약할 생각 없니?"

"······뭐?"

아니, 이건 또 무슨 소리야?

페르다는 미간을 좁힌 채 되물었다.

< Chapter 22. 암령(暗靈) (3) > 끝

ⓒ 남철우

< Chapter 22. 암령(暗靈) (4) >

"계약이라고?"

"응. 정령 친화력은 없어도 괜찮아. 물론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나쁠 건 없으니까. 그보다 나랑 계약하면 뭐가 좋냐면······."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민 채. 암령은 계약할 경우 얻는 이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마치 신입 영업사원처럼 열정적인 모습이다. 물론 페르다의 귀에는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지만.

난데없는 소리에 멍하니 있던 페르다가 이내 정신을 추슬렀다.

"나랑? 왜?"

그 질문에 암령은 한발 뒤로 물러났다. 그는 잠시 고민하듯 하더니 곧 웃음기가 담긴 음성으로 대답했다.

"음, 우선 인간이라서 마음에 들어. 인간은 명줄이 짧잖니."

그걸 본인을 앞에 두고 말하는 건가.

페르다가 황당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도 모른 채, 암령은 말을 이어나갔다.

"또 어둠 속에서 내 눈을 피한 것도 네가 처음이야. 머리가 조금 커 보이긴 하지만 그건 넘어갈 수 있단다. 그리고······."

방금 흘려들을 수 없는 말을 들은 것 같은데.

눈을 가늘게 뜨고는 암령을 흘겨봤다. 하지만 암령은 계약 시 얻는 이점을 어필하느라 이를 눈치채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그 사이 페르다는 조금씩 냉정을 되찾았다.

"어때? 소량의 마력을 대가로 이 정도 혜택을 모두 가질 수 있단다. 이 정도면 슬슬 계약할 마음이······."

"예전에 들은 것 중에 이런 말이 있다."

그때 페르다가 암령의 말을 끊었다. 암령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와 얼굴을 마주한 채, 싸늘하게 식은 한마디를 내뱉었다.

"혓바닥이 길어진다는 건, 숨기고 싶은 게 있다는 소리라고."

"······."

일순간 몸을 움찔거리는 암령.

페르다의 눈이 가늘게 좁아졌다. 아무래도 정곡을 찌른 모양이다.

"나와 계약하려는 진짜 이유가 뭐지?"

날카롭게 빛나는 눈동자. 그와 마주한 암령은 고개를 슬그머니 다른 곳으로 돌렸다. 이를 본 페르다는 굳은 말투로 말을 이었다.

"사실대로 대답하지 않으면 계약하지 않겠다."

듣고 싶지 않은 말이 들려오자 암령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몇 번이고 망설였으나 이윽고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카디란토의 맹세를 알고 있는 인간 앞에서 거짓은 해봐야 역효과만 날 테니까.

잠시 후, 암령이 입술이 달싹거렸다.

"······높아서."

"뭐?"

잘 들리지 않았다. 페르다가 되묻자 암령은 머리를 번쩍 쳐들었다.

"격이 높아서 그래! 격이! 이걸 꼭 내 입으로 말해야겠니?"

암령이 빽 소리를 질렀다.

허나 돌아온 대답도 명쾌하진 않았다.

"격이 높은 거랑 계약이랑 무슨 상관······."

"엄청나게 상관있어! 나중에 다른 정령들 만나면 자랑도 할 수 있고, 또 콧대도 세울 수 있단 말이야. 무엇보다 계약자의 격이 높으면 내 성장 가능성도 늘어나고! 그리고, 그리고······."

격이 높아지면 성장 가능성이 늘어난다?

새로운 정보에 페르다는 눈을 반짝였다. 그로부터 얼마 후, 씩씩대며 한참을 떠들던 암령은 돌연 고개를 푹 숙였다.

"······실반, 그 아이도 싹수가, 아니 꽤 높은 격을 가진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계약할까 말까 엄청나게 망설였단 말이야. 냄새만 아니었으면 바로 계약했을 텐데······."

달의 눈동자 덕분에 격이 숨겨진 상황에서도 저런 짐작을 할 정도라니. 페르다는 다소 놀란 듯이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실반이 격을 각성하지 못한 회차에서도 본능적으로 그 자질을 느낀 녀석이다. 그럼 그 정도 눈치는 있겠지. 이후 페르다는 턱을 매만지며 암령을 가만히 응시했다.

'계약이라······.'

암령이 필요한 가장 큰 이유는 언데드가 가진 사기(死氣)와 존재감을 어둠으로 뒤덮어버릴 수 있는 능력 때문이다. 이는 암령을 옆에 두는 것만으로도 가능했다.

이는 곧 굳이 계약 대상이 실반일 필요는 없단 소리다.

또 그가 알기로 계약의 대가는 일정량의 마력을 나눠주는 게 다였다.

'의외로 괜찮은데?'

소량의 마력을 대가로 쓸만한 권속을 얻는 셈.

페르다의 눈이 반짝였다.

한편 고개를 푹 숙인 암령은 바닥에 쪼그려 앉았다. 그러고는 손가락으로 땅바닥을 툭툭 건들며 우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알아.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굳이 나랑 계약할 필요는 없겠지."

뒤로 갈수록 울먹거리는 말투로 변했다.

암령은 이내 무릎 사이로 얼굴을 파묻었다.

"만약 다른 정령들도 네 격을 알면 분명 군침을 흘리면서 달려들 테니까. 또 음침한 밤의 정령보다는 화려한 정령이 더 나을 테니까······."

"계약하자."

"알겠어. 내가 주제넘은 제안을······. 응? 뭐라고?"

암령이 머리를 번쩍 들었다.

잘못 들었나? 마치 그렇게 묻는 듯했다. 페르다는 피식 웃더니 재차 말을 이었다.

"계약하자고."

"저, 정말? 괜히 하는 소리가 아니라?"

그렇다니까, 속고만 살았나. 페르다가 고개를 끄덕이자 암령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더니 기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한 듯, 자리에서 폴짝거리며 뛰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암령은 헛기침과 함께 평정을 되찾았다.

"큼큼! 그래. 그럼 바로 계약을 맺도록 하자꾸나."

이제와서 점잖은 척 해봐야 소용없을 것 같은데.

고개를 끄덕인 페르다는 문득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그런데 왜 그런 말투를 쓰는 거야?"

"으응? 그야 이렇게 말해야 위엄있어 보인다고······."

"전혀 아니니까 그냥 편한 대로 말해."

단언컨대 암령이 위엄있어 보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 말에 암령은 머리를 갸웃거렸지만 이내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알겠어. 넌 곧 내 계약자가 될 사람이니까."

그 대답을 끝으로.

따악!

암령이 손가락을 튕겼다.

동시에 새카만 어둠이 파도처럼 밀려들어 페르다와 암령을 둘러쌌다. 달빛은커녕, 한 줌의 빛도 없는 완벽한 어둠. 그 안에서 암령은 다시 입을 열었다.

"계약을 맺는 건 간단해. 서로의 이름을 교환하면 끝이야."

"이름을 교환한다고?"

"응. 간단히 말하면 자기소개지. 너부터 하면 돼."

암령의 말에 숨을 살짝 들이마셨다.

그러고는 곧장 이름을 내뱉었다.

"페르다 이노시드."

이러면 뭔가 변화가 있는 건가? 그리 생각했으나 딱히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고개를 갸웃거릴 무렵, 암령의 말이 들려왔다.

"어? 이상하네. 계약이 반만 됐어."

"뭐? 반만?"

"응. 혹시나 해서 묻는데 너 다른 이름도 가지고 있니?"

그 질문에 뒤늦게 깨달은 게 있었다.

지금은 페르다 이노시드라는 이름을 쓰고 있지만, 그의 본명은 이게 아니었기에. 헛기침과 함께, 페르다는 옛날 가문명을 입에 머금었다.

"페르다 윈터레스."

"으음, 그건 아닌 것 같아."

이것도 아니라고? 설마 태명을 얘기하라는 건 아니겠지?

페르다의 미간이 구겨졌다.

그러던 중 순간적으로 머릿속에 벼락이 내리쳤다.

"······!"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그러고 보니 또 다른 이름이 있기는 했다.

이제는 사용하지 않는 진짜 이름. 하지만 분명하게 그의 것이었던 이름.

페르다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강태민."

"오! 이제 됐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암령이 박수를 치며 웃었다.

그러고는 신기하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이름이 두 개라니, 격이 높으면 뭐가 달라도 다르구나."

격의 등급에 따라 이름의 개수가 많아지는 거였으면 실반은 다섯 개 정도 가지고 있지 않았을까.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페르다는 풀썩 웃었다.

"큼큼! 이제 내 소개를 할게."

그때 바닥에서 어둠이 솟구쳤다.

사방이 온통 새카맸지만, 신기하게도 암령만큼은 또렷하게 보였다.

"나는 다리안 라디카르."

곧이어 암령이 입을 열었다.

그의 진명(眞名)과 함께, 별안간 주변을 덮었던 어둠이 부서졌다.

쨍그랑-

유리가 깨지는 소리를 내며 사방의 어둠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암령을 덮었던 어둠마저 잿가루처럼 허공에 흩날렸다.

그러자 비로소 암령의 진짜 모습이 보였다.

달빛을 닮은 은색 부엉이.

별을 떼어다 박은 것처럼 커다란 금색 눈동자. 밤의 정령치고는 지나치게 밝은 모습에 페르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어 그가 날개를 펄럭이자, 남은 어둠 조각이 마치 모래처럼 까슬까슬 흘러내렸다.

이윽고 하늘로 날아오르는 다리안. 그 모습에 페르다는 가만히 팔을 뻗었다. 그러자 다리안은 냉큼 날아와 앉았다.

"내 진짜 모습은 오직 너에게만 보여."

다리안의 눈가가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웃음기가 담긴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앞으로 잘 부탁해. 페르다."

***

밤의 정령, 다리안과 계약을 맺은 뒤.

페르다는 르샨테로 돌아왔다. 그는 저 멀리 보이는 숙소를 앞에 둔 채, 돌연 입술을 달싹였다.

"계약을 맺은 기념으로 부탁이 하나 있는데."

"뭔데?"

어깨에 앉아있던 다리안이 머리를 들이밀었다.

페르다는 그를 향해 넌지시 물었다.

"혹시 거짓말할 수 있어?"

"응? 그게 무슨 소리야?"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기 어려웠던 걸까. 다리안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모습에 이런 말을 꺼낸 이유를 밝혔다.

"정령들은 거짓말을 못 한다는 얘기를 들어서."

"뭐? 누가 그런 말을 해?"

"음, 바람의 정령이 그랬던 것 같은데."

정확히 말하면 이로나와 계약한 시오르에게서 그런 말을 들었다. 정령은 거짓말을 못 한다고 했었지. 한편 다리안은 눈을 큼지막하게 뜨더니, 별안간 배를 잡고 웃어댔다.

"아하하, 너 혹시 이런 속담 들어본 적 없어?"

한참을 웃던 그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악동 같은 미소와 함께 다리안은 말을 이었다.

"세상에 거짓말이라는 걸 퍼뜨린 게 밤의 정령이라는 말."

그 말에 페르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거기까지 들은 이상, 대답은 따로 필요 없었다.

페르다와 다리안의 눈빛이 얽혔다.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킬킬거리며 웃었다.

마치 흉계를 꾸미는 악당들처럼.

***

다음날. 르샨테는 발칵 뒤집혔다.

쿠르드의 탈옥 사실이 전해진 탓이었다. 이레아는 즉시 회의를 소집했다. 장로들이 한자리에 모인 가운데, 하르민은 커다란 머리로 바닥을 쿵쿵 두드렸다.

"모두 제 잘못입니다. 안일한 판단으로 그만······."

하르민은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피가 나올 정도로 머리를 박았다. 허나 장로들이 보내는 싸늘한 눈빛에 변함은 없었다. 그때 이레아가 고개를 흔들며 물었다.

"지금은 잘잘못을 따질 때가 아니다. 추격조의 편성은 어떻게 됐나?"

그녀의 시선이 하르민의 뒤에 있던 전사에게로 향했다.

"예. 방금 완료하여 각지로 보냈습니다."

"쿠르드를 따르는 전사들은?"

"이로나 세르네크를 비롯한 정령사들이 감시하고 있습니다."

누구를 감시하는 데는 정령사만 한 이들도 없다.

하급 정령을 수십 마리 불러내 그냥 옆에 붙이기만 하면 그만이니.

전사의 보고에 이레아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여전히 바닥에 머리를 박고 있는 하르민을 쳐다봤다.

"하르민 젬버."

"······예, 족장님."

"쿠르드가 어디로 도망쳤을 거라고 보나?"

비록 잘못을 저지르긴 했으나 하르민은 일족 중 가장 영민한 자다. 숲을 벗어난 죄인을 쫓는 것도, 신묘한 방법으로 침입자들을 물리친 것도 모두 그였으니까.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하르민은 곧 입을 열었다.

"개인적인 추측으로는 서쪽 숲이 아닐까 합니다."

"서쪽 숲이라면 엘프족이 있는 곳인가?"

"이유는?"

장로들의 질문에 하르민의 대답이 이어졌다.

"녀석은 과거, 엘프족과 교류할 때 사절단의 대표를 맡은 적이 있습니다. 최근 저희와 엘프족의 관계가 소원해진 걸 감안하면, 충분히 가능성 있는 추측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럴 듯한 분석이다. 하지만 틀렸다.

어젯밤 쿠르드를 고문하다가 알게 된 거지만, 당시 쿠르드는 엘프족과의 교류가 끝나면 무조건 거암족을 들렀다가 숲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당연히 그걸 알 리가 없지.'

쿠르드도 몇 번이나 가짜 정보를 말했다. 물론 발가락을 전부 자른 뒤, 뼈를 긁어내자 언제 그랬냐는 것처럼 술술 불어댔지만.

"음, 확실히 일리 있군."

"허나 엘프족에게 가서 뭘 어쩔 생각인지······."

저마다 고개를 끄덕이는 장로들. 그 모습을 보아하니 쿠르드가 향한 곳은 엘프족이 있는 서쪽 숲으로 정해진 듯하다. 이레아 역시, 하르민의 추측을 받아들였는지 이내 입을 열었다.

"그럼 서쪽 숲으로 추격대를 파견하여······."

"엘프족이 아닙니다."

그때 이레아의 귓가로 들려온 나직한 목소리.

그녀는 반사적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레아 뿐만이 아니다. 장로들과 하르민을 비롯한 전사들, 그리고 바로 곁에 있던 실반도 고개를 돌렸다.

"페르다······?"

갑작스러운 난입에 실반이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 페르다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어깨를 토닥인 뒤, 재차 말을 이었다.

"그자는 남서부에 있는 대협곡, 거암족의 거처로 향했습니다."

원래는 끼어들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추격대가 엘프족에게 향하는 건 원작에 없던 일이다. 그렇다면 또 전개가 뒤틀릴 가능성이 있었다. 그럴 바엔 차라리 원작에 나온 것처럼 거암족과 전투를 치르는 편이 나았다.

한편 페르다의 말에 장로들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뭐라고? 거암족?"

"하하, 무슨 소리를 하나 했더니."

"하긴 인간이 무엇을 알겠나."

여기저기서 피식거리며 비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레아 역시,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설명했다.

"후우, 거암족은 다른 종족을 배척하기로 유명한 종족일세."

알고 있다. 몸집이 오우거 만큼 크다는 것도 알고, 온몸이 커다란 바위로 뒤덮여 있다는 것도 안다. 또 개체 수도 적은 주제에 자존심 하나는 엄청나게 강해서, 그들 이외의 종족은 벌레 취급하는 것도 아주 잘 안다.

"우리도 거암족과 교류해본 적이 없어. 그러니 자네의 추측은······."

이레아가 고개를 흔들던 그때. 페르다가 그녀의 말을 잘랐다.

"확실한 증거가 있습니다."

"증거?"

증거가 있다는 말에 장로들이 관심을 가졌다. 잠자코 있던 하르민도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페르다는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따악!

이를 신호로 방안이 어둠으로 뒤덮였다.

이제 막 해가 떠오른 참이다. 창문도 활짝 열려있었건만 방은 밤처럼 어둡게 물들었다. 갑작스러운 이변에 모두가 놀란 표정을 짓던 때, 땅바닥에서 어둠이 꿈틀거렸다.

마치 아직 놀랄 일이 남았다는 것처럼.

곧이어 검은 불꽃이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내가 봤단다.]

밤의 정령, 다리안이었다.

반면 페르다의 눈에는 본체인 은빛 부엉이로 보였다. 물론 밤이 아닌 탓에 병아리만 한 크기로 줄어들긴 했지만.

"······!"

"아, 암령?!"

한편 다리안의 등장에 장로들은 모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레아와 하르민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리안은 그런 그들을 쳐다보며 진지한 말투로 말했다.

[감옥에 갇힌 아이가 거암족과 내통하고 있는 모습을.]

뒤이어 다리안의 이야기가 시작됐다.

정확히 말하면 어젯밤, 그와 페르다가 말을 맞춰둔 이야기지만. 진실과 거짓이 교묘하게 섞인 이야기에 이레아와 장로들의 얼굴은 점점 경악으로 물들어갔다.

< Chapter 22. 암령(暗靈) (4) > 끝

ⓒ 남철우

< Chapter 23. 실반의 선택 (1) >

Chapter. 23

실반의 선택

"헉! 허억!"

남자는 미친 듯이 달렸다.

잔가시가 피부를 긁으며 모래와 자갈이 튀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얼마 후, 거칠어진 숨이 턱 끝까지 치달을 무렵, 가까스로 몸을 숨기기에 적합한 곳을 찾았다.

자그마한 토굴(土窟).

그 안에 몸을 숨겼다. 요동치는 심장을 애써 억누르던 때.

그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떨렸다.

"이, 이게 대체 무슨 일······."

에커드 무르반느.

그는 쿠르드의 휘하에 속한 전사였다. 어제 오후, 쿠르드가 투옥되면서 그에게 밀명이 하나 내려왔다. 바로 거암족을 찾아가 군사 지원을 요청받는 것.

한시가 급한 일이라 서둘렀다. 마침내 거암족의 족장에게 쿠르드의 뜻을 전했고 지원을 약속받았다. 거기까진 좋았다.

하지만 오늘 새벽, 문제가 터졌다.

"으, 으으으······!"

아까 있었던 일을 떠올리자 몸이 절로 떨렸다.

그것은 두 눈을 의심케 만드는 광경이었다.

동이 채 트지 않은 어스름한 새벽녘.

안개 너머로 정체불명의 두 존재가 거암족의 거처를 찾았다. 아담한 체구에 가면을 쓰고 있는 여성과 커다란 덩치를 가진 남성.

처음 보는 이들이었기에 관심을 가지고 관찰하려 했다. 허나 그러지 못했다. 왜냐면 그 직후, 에커드의 눈앞에 지옥이 펼쳐졌으니까.

"어째서 어, 언데드가······."

둘의 정체는 다름 아닌 언데드.

심지어 최상급 언데드에 속하는 이들이었다. 죽음에서 되살아난 사령술사, 데스 위치(Death Witch)와 목 없는 기사, 듀라한(Dullahan)이었으니.

모든 거암족이 몰살되는데 걸린 시간은 불과 5분도 채 되지 않았다.

이후 둘은 거암족을 망자로 되살렸다.

그 광경을 마지막으로 에커드는 죽을 힘을 다해 도망쳤다.

"······빨리 쿠르드님께 전해야 해."

거암족의 도움은 기대할 수 없다.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사막의 야만족에게 도움을 청해야만 했다. 강한 사명감과 함께 에커드는 몸을 일으켰다. 다시 뛰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커헉!"

별안간 에커드가 하늘로 치솟았다. 뭔가 밧줄 같은 게 그의 목을 휘감아 들어 올린 탓이었다. 숨이 쉬어지지 않아 컥컥거리던 때, 수풀 속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아가, 어딜 그리 급하게 가는 걸까?"

"······!"

듣고 싶지 않던 목소리.

거암족의 거처에서 목격했던 죽음의 마녀였다. 뒤이어 쿵쿵거리는 발소리와 함께 해골마(骸骨馬)를 탄 기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뛰어봤자 벼룩. 이만 포기하거라."

안장 위에 있던 머리가 더듬더듬 말했다.

그 기괴한 광경을 보며 에커드는 몸을 버둥거렸다. 빠져나가기 위한 발버둥이었으나, 두 언데드가 보기엔 부질없는 발악에 불과했다.

"그래, 그래.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다 들어주마."

마녀가 손을 뻗었다. 팔은 문어 다리처럼 꿈틀거리더니 금세 다섯 갈래로 갈라졌다. 그러고는 에커드의 입과 코, 귀를 비집고 순식간에 뇌를 휘젓기 시작했다.

"꺽! 끄르륵······."

이루 말할 수 없는 끔찍한 고통.

눈이 뒤집히고 입에선 거품이 흘러나왔다. 몸을 부르르 떨더니 이내 축 늘어진 에커드. 한편 마녀는 뭔가 새로운 걸 알았다는 듯 푸른 안광을 반짝였다.

"오호, 그렇구나. 그래서 저것들을 보러 온 거였어."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마녀.

그 모습을 본 듀라한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무언가를 알아냈나?"

"다크엘프 쪽에 내분이 생긴 것 같구나."

"다크엘프?"

"여기서 가까워 보이는데 어떻게 할까?"

마녀가 북동쪽을 가리키며 의견을 물었다. 듀라한은 잠시 고민하듯 하더니 곧 결정을 내린 듯 안광을 번뜩였다.

"이참에 수를 늘려 왕의 군세에 보태는 것도 좋겠지."

"후후, 그래. 나도 같은 생각이었단다."

마녀가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

이어 그녀는 에커드의 시체를 톡톡 두드렸다. 잠시 후, 에커드는 눈을 까뒤집은 상태로 서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녀는 망자가 된 그를 쓰다듬은 뒤, 수풀 너머를 향해 말을 걸었다.

"사랑스러운 아가들아, 이리로 오려무나."

마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쿵! 쿵쿵!

울창한 숲에 가려진 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3층 건물만 한 덩치를 가진 이들, 바로 거암족이었다. 언데드로 변한 거암족은 마녀의 손짓에 따라 숲을 짓밟으며 걸음을 옮겼다.

목적지는 북동쪽.

다크엘프들의 도시, 르샨테였다.

***

그 시각.

밤의 정령, 다리안의 이야기가 끝났다.

무거운 침묵으로 휩싸인 방. 그 누구도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하는 가운데, 정신을 추스른 장로들이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물었다.

"그, 그게 정말입니까?!"

"거암족이 이리로 오고 있다고······."

누구 하나 다리안의 말을 의심하는 이가 없었다. 다리안은 오랜 세월 숲의 수호신을 자처한 '정령'이었기에. 뒤에서 이를 보던 페르다는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 미리 말을 맞춰두길 잘했어.'

다리안이 없었다면 아무도 그의 말을 듣지 않았을 텐데.

한결 편해졌다. 페르다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맺혔다.

한편 방 안의 분위기는 얼음장처럼 차게 식은 상태였다. 다리안의 말에 따르면 지금 상황은 죄인이 외세(外勢)를 끌어들인 거나 다름없으니까. 심각하게 굳어진 가운데, 한 장로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저, 그런데······."

모두의 시선이 장로에게 향했다.

곧이어 장로는 궁금증을 이기지 못한 얼굴로 물었다.

"그런데 암령께서 어찌 인간과 함께······?"

주제에서 조금 벗어난 질문이긴 했지만, 이를 타박하는 이는 없었다. 다리안이 페르다의 어깨에 앉아있는 이유가 궁금한 건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으니까.

한편 다리안은 대수롭지 않은 투로 대답했다.

[음? 계약자와 함께 다니는 게 뭐가 어때서?]

짧은 대답을 끝으로 주변은 일순간 적막하게 변했다.

허나 그것도 잠시, 방 안은 이내 발칵 뒤집혔다.

"예?!"

"계, 계약자라고 하셨습니까?"

"암령께서 계약자를······!"

[그래, 어젯밤에 계약을 맺었어.]

다리안이 의기양양하게 가슴을 내밀었다. 우쭐한 태도에 저도 모르게 풀썩 웃음이 나왔다. 그때 실반의 눈썹이 가늘게 떨렸으나, 이를 눈치챈 이는 아무도 없었다.

얼마 후, 장로들은 여전히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그, 그러면······."

"숲의 수호신은 어찌 되는 겁니까?"

[새로 뽑아야지, 뭘 어떻게 돼?]

다리안은 심드렁한 투로 대꾸했다.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는 장로들. 그때 다리안이 폴짝 뛰어내렸다.

아장아장 걸음을 옮기며 순식간에 장로들에게 다가간 다리안. 이어 그는 페르다가 있는 방향을 가리키며 말했다.

[어쨌든 저 남자는 내 계약자란다. 그러니까 아까처럼 인간이라고 무시하거나 비웃으면······. 그다음은 말 안 해도 알지?]

다리안이 씩 웃자 방 안의 어둠이 요동치듯 일렁거렸다.

위협적인 광경에 장로들은 일제히 입을 닫았다. 음, 역시 계약하길 잘한 것 같다. 페르다가 흐뭇하게 웃고 있던 그때.

"선생님."

잠자코 있던 실반이 옷깃을 잡아끌었다.

고개를 돌리자 조금 딱딱한 미소를 짓고 있는 실반이 보였다. 부자연스러운 표정. 왜 저런 표정을 짓고 있지? 그리 생각할 무렵, 실반이 재차 말을 이었다.

"어젯밤 맺었다는 계약에 대해 자세히 듣고 싶은데요."

아, 생각해보니 실반에게는 아직 말하지 않았구나.

이를 뒤늦게 깨달은 페르다는 곧장 입을 열었다. 그러고는 다리안과 계약한 이유와 그가 가진 특별한 능력에 대해.

잠시 후, 실반은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언데드를 숨길 수 있다구요?"

"그래. 이제 권속을 마음껏 늘려도 돼."

물론 그렇다고 수천 마리까지 늘리면 곤란하다. 다리안이 숨길 수 있는 숫자는 한도가 있으니까. 한편 그의 설명이 끝나자 실반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그러다가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어, 그러니까······."

미간을 찌푸린 채, 생각을 정리하던 실반.

이윽고 그는 조금 놀란 얼굴로 자신을 가리키며 물었다.

"계약한 이유가 저를 위해서라는 거죠?"

"음, 따지고 보면 그렇지."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

다리안과 계약한 가장 큰 이유는 언데드의 존재를 숨기기 위함이니. 페르다의 대답에 실반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더니 이내 방긋 웃었다.

"헤헤. 그럼 됐어요."

진심에서부터 우러난 미소. 아까 억지로 짓던 미소와는 정반대다. 계약한 이유를 들어 만족한 모양이네. 페르다는 그리 생각하며 씨익 웃었다.

그때 멀리서 이레아의 외침이 들려왔다.

"하르민!"

"예, 족장님."

하르민이 고개를 숙였다.

딱딱하게 굳어진 이레아의 얼굴. 다리안의 이야기를 듣고 결단을 내린 것처럼 보였다. 잠시 후, 그녀는 표정만큼이나 굳은 목소리로 명령했다.

"지금 당장 전사들을 소집하라."

자리에서 일어난 이레아가 창을 집어 들었다. 시뻘건 화염이 창을 휘감았다. 직접 전투에 참여하겠다는 의지와 함께, 그녀가 말을 이었다.

"거암족을 몰아내고 쿠르드를 사로잡겠다."

"명을 받듭니다!"

우렁찬 외침을 끝으로 하르민이 방을 나섰다.

곧이어 르샨테의 모든 전사가 한자리에 모였다.

***

"철책을 더 높여!"

"상대는 거암족이다. 이 정도 높이로는 턱도 없어!"

전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이레아가 전사들을 소집한 것에 따른 결과였다. 거암족이 오고 있다는 소식은 도시 곳곳에 퍼졌고, 쿠르드 휘하의 전사들을 제외한 모든 전사가 한데 모였다.

"거암족을 상대하는데 이깟 화살로 뭐 하라고!"

"당장 철시(鐵矢)를 가져와!"

"끓는 기름도 준비해라. 서둘러!"

수많은 전사들이 노력한 덕분일까? 르샨테는 점점 요새로 변해갔다.

그 사이 궁술에 능한 전사들은 북쪽 동굴 앞에 집결했다. 모종의 임무를 위해서였다. 그러던 중 그들 앞에 한 남자가 우뚝 섰다.

"우리 별동대의 목적은 오직 하나!"

숲의 아홉 번째 전사이자, 일족 최강의 궁수.

알터 베리그였다. 알터는 앞에 모인 마흔 명의 궁수를 향해 별동대가 완수해야 할 임무를 설명했다.

"도시 바깥에서 최대한 많은 수의 거암족을 쓰러뜨리는 것! 르샨테에서 전투를 펼치면 피해가 커진다는 걸 명심해라!"

"예!"

우렁찬 외침이 들려오자 알터는 씩 웃었다.

그는 궁수 하나하나와 시선을 마주하며 말했다.

"모두 살아서 다시 만나자."

강한 염원이 깃든 한마디를 끝으로.

마흔한 명의 궁수는 동굴 밖으로 향했다. 이레아는 별동대가 완전히 사라지는 풍경까지 눈에 담은 뒤에야 몸을 돌렸다.

"이런 일에 말려들게 하여 미안하네."

뒤이어 그녀의 시선이 닿은 곳에 있는 건 페르다와 실반. 그리고 실반이 부리는 권속들이었다. 이레아는 고개를 살며시 숙인 채, 진심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우리 때문에 괜히 위험한 일에 낄 필요는 없어."

도움을 청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다. 실반은 둘째 치더라도 페르다는 홀로 전사 일백을 꺾은 강자였기에. 허나 이레아는 그것이 염치없는 행동임을 알고 있었다.

"우리의 문제는 우리가 해결해야지. 잠시만 쉬고 있게나."

그 말을 끝으로 이레아는 몸을 돌려 밖으로 향했다.

끼익- 쿵!

방문이 닫히자 방 안은 적막하게 변했다.

그러던 중 어둠이 불쑥 솟구쳐 페르다의 어깨로 날아들었다.

[다들 싸우러 갔나 보네.]

다리안이었다.

그는 어깨에 다소곳이 앉은 채, 말을 이었다.

[그런데 넌 안 싸워?]

페르다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끼어들고 싶은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다크엘프가 얼마나 죽어 나가든 솔직히 그가 알 바 아니었으니까.

'아니, 오히려 죽는 게 나을 수도 있겠네.'

시체를 되살려 언데드로 부리면, 적어도 실반을 경멸하진 않을 테니.

페르다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맺혔다.

반면 실반은 고민에 빠진 얼굴이었다. 무슨 고민을 하는지는 뻔했다. 전투에 힘을 보태줄지 말지를 고민하는 거겠지. 물론 동족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닌, 가족인 이레아와 이로나 때문이겠지만.

[그렇구나. 사실 나도 뭐 알 바 아니지.]

다리안도 다크엘프란 종족에게 커다란 애착을 가진 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일까? 페르다의 어깨 위에서 빈둥거리기만 할 뿐, 딱히 뭔가를 하려고 하진 않았다.

그로부터 얼마나 지났을까?

[음?]

[잠깐, 이건······.]

돌연 망령들이 일제히 머리를 쳐들었다.

그들은 실반에게 허락을 구한 뒤, 창밖으로 스멀스멀 사라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모습을 드러낸 망령들. 곧장 실반에게 다가가더니 말을 건넸다.

[왕이시여.]

[바깥에서 죽음의 냄새가 납니다.]

"죽음의 냄새?"

실반이 의아한 듯 되묻자 망령들의 대답이 이어졌다.

[예, 망자들이 풍기는 냄새입니다.]

[묘지에서 맡던 것과 비슷합니다.]

망령들이 죽음의 냄새라고 말할 정도면, 격을 가진 언데드의 기운이 느껴진다는 소리다. 실반이 눈을 가늘게 뜨던 그때. 이번엔 페르다의 어깨에 앉아있던 다리안이 얼굴을 와락 구겼다.

[윽! 페르다. 밖에서 시체 썩은 냄새가 나.]

"여기가 아니라?"

[쟤는 그래도 좀 은은하게 나는 편인데, 밖은 아주 고약해.]

다리안이 날개로 창밖을 가리켰다.

그러더니 결국 얼마 버티지 못하고 우는 소리를 냈다.

[끄응, 미안한데 잠깐 쉬었다가 와도 될까?]

페르다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지금 당장 필요하지도 않으니까.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다리안은 다시 어둠 속으로 녹아들었다.

한편 실반은 불안한 눈빛으로 창밖을 바라봤다.

그러다가 이내 페르다의 무릎을 톡톡 두드렸다.

"저기, 페르다. 미안한데······."

"밖에 나가고 싶은 거지?"

눈빛과 행동만 봐도 뭘 원하는지 감이 왔다. 실반이 어색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페르다는 알겠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한번 나가보자."

밤의 정령이 도망칠 정도로 고약한 냄새가 뭔지 궁금한 참이었으니까. 굳게 닫힌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곧 바깥의 풍경이 둘의 눈앞에 펼쳐졌다.

< Chapter 23. 실반의 선택 (1) > 끝

ⓒ 남철우

< Chapter 23. 실반의 선택 (2) >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르샨테의 풍경.

이전의 도시가 평범한 마을이었다면, 지금은 완벽한 요새였다.

이중으로 쌓인 철책 앞은 독과 함정으로 가득했고, 끓인 물과 기름도 준비된 상태. 또 전사들은 중무장한 상태로 배정된 자리에 배치된 채, 곧 닥칠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다.

불과 몇 시간 전과는 사뭇 다른 모습.

신기한 듯 도시를 바라보던 중 둘의 이목을 사로잡은 이가 있었다.

"알터! 정신 차려라, 알터!"

도시를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외침.

비통한 음성의 주인은 다름 아닌 하르민이었다. 그의 앞에는 피투성이가 된 전사 하나가 놓여 있었다.

이때 전사를 알아본 페르다가 눈을 가늘게 좁혔다.

'저 녀석은······.'

숲의 아홉 번째 전사, 알터 베리그.

일족 최고의 궁수라 들었던 것 같다. 아까 별동대를 이끌고 도시 밖으로 나선 자이기도 했다. 그때로부터 불과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았건만 벌써 저런 꼴이 되어서 돌아왔다고?

'거암족이 그렇게 강했던가?'

문득 의문이 솟구쳤다. 원작에선 오우거보다 조금 더 강한 수준이라고 적혀있었는데. 페르다가 의아해하던 때, 재차 하르민의 외침이 들려왔다.

"조금만 버텨라! 이제 곧 치료사들이 도착할 테니······."

허나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꽈악-

덜덜 떨리는 팔을 뻗은 알터. 그가 별안간 하르민의 옷깃을 거칠게 움켜잡았던 탓이다.

"······별동대는 전멸했다. 다들 마지막까지, 용맹하게······."

말을 잇던 알터가 검은 핏물을 게워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지만 그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마흔 명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기 위하여.

알터는 흐릿해져 가는 초점을 애써 붙잡은 채 그가 본 광경을 입에 담았다.

"저, 적은 거암족이 아니야······."

"뭐라고?"

"······최상위 언데드가 망자들을 이끌고 있었다. 쿨럭, 쿨럭!"

뜬금없는 보고에 하르민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멀리서 이를 듣던 페르다도 깜짝 놀랐다.

'언데드라고?'

그럴 리가 없었다. 쿠르드와 그의 수하까지 잡아가며 얻어낸 정보에 따르면 오늘 저녁에 이곳을 습격하는 건 거암족이었다. 그런데 언데드? 페르다의 미간이 조금씩 좁아졌다.

한편 하르민 역시 무슨 말을 하냐는 듯이 소리쳤다.

"그게 무슨 소린가! 언데드라니!"

"이대론, 가망이 없다. 숲의 다른 종족들에게, 도움을, 요청······."

알터가 필사적으로 말을 잇던 그때.

돌연 어둠이 솟구쳤다. 냄새가 난다며 도망쳤던 다리안이었다.

[저 덩치 큰 아이, 위험하겠는데.]

어느새 페르다의 어깨에 앉은 그가 하르민을 가리켰다. 그러고는 알터를 쳐다본 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저기 쓰러져있는 녀석, 저주에 걸려있어. 이제 곧 망자로 변할 거야.]

그건 또 무슨 소리야? 페르다가 그리 물으려던 찰나.

별안간 알터가 엄청난 양의 피를 토해냈다. 가만 놔두면 내장까지 뱉을 기세로 구역질을 해댔다. 이윽고 그는 시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하르민을 쳐다봤다.

"컥! 피, 피해라, 하르민."

"뭐?"

"몸이, 끄헉! 이상······."

그것이 알터의 마지막 말이었다.

눈과 귀, 코와 입에서 검게 죽은 피가 뿜어졌다. 알터의 목이 기괴하게 꺾였다. 동시에 그의 체내에서 적지 않은 양의 음차원의 마나가 휘몰아쳤다.

그리고 그 순간.

"끄륵! 크르륵!"

기괴한 비명과 함께 알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어 새파란 안광이 줄기차게 뿜어졌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 숲이 자랑하던 최고의 궁수는 산 자를 증오하는 언데드로 변했다.

"크흐아아아!"

알터는 가장 가까이에 있던 하르민에게 괴성을 질러댔다.

이를 본 다른 전사들이 황급히 무기를 뽑았다.

"하르민님!"

"물러나십시오!"

하르민은 이를 악문 채, 도끼를 뽑아 들었다.

언데드가 된 알터에게 안식을 주기 위함이었다.

그러던 그때였다.

저벅-

자그마한 체구의 무언가가 그를 스쳐 지나갔다. 바람에 살랑이는 은색 머리카락. 이를 본 순간, 하르민은 그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실반 아크듀트?"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를 지나쳐 간 실반은 그저 묵묵히 알터에게 손을 뻗었다. 이를 본 하르민은 다급히 손을 뻗었다.

"건드리지 마라! 저건 더 이상 알터가 아니야!"

실반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하르민은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누가 옷깃을 잡고 있던 탓이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군청색 머리카락을 가진 인간이 보였다.

분명 실반의 가정교사라고 소개했던 작자였다.

"이게 무슨 짓······."

눈살을 찌푸린 채 그리 물었다.

그런데 그때, 이변이 발생했다.

움찔!

알터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고개를 삐걱거리던 그는 이윽고 팔을 축 늘어뜨린 채, 고개를 숙였다.

때마침 나타난 시스템 메시지.

=====

[알림]

*실반 아크듀트가 구울 아처 (1)구를 강탈했습니다.

=====

알터의 눈빛이 실반과 같은, 황금색으로 물들어갔다.

이를 본 실반은 나직한 말투로 명령했다.

"무릎 꿇고 엎드려."

순순히 명령에 따르는 알터.

이를 본 하르민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주변에 있는 전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이, 이게 대체······."

"실반이 쓰는 사령술 중 하나다."

그들의 의문에 답해준 건 페르다였다.

잘했다는 말과 함께 어깨를 토닥이자 실반은 방긋 웃었다. 문제가 해결됐으니, 이제 의문을 해결할 차례다. 페르다는 의아한 눈으로 하르민을 쳐다보며 물었다.

"그보다 언데드라니, 그게 무슨 소리지?"

"후우, 나도 자세한 건 모른다."

한숨과 함께 하르민은 입을 열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알터가 도착하기 조금 전, 숲 바깥에 있던 몇몇 수호자들이 돌아왔다고 한다. 낯빛을 창백하게 물들인 그들은 하나같이 똑같은 말을 했다. 거암족에게서 죽음의 냄새가 난다고.

이를 들자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 말은······."

"거암족이 언데드로 변했다는 말이겠지."

이어진 하르민의 대답에 그의 얼굴이 구겨졌다.

정찰대만 그런 보고를 했다면 믿지 않았을 터다. 허나 다리안도 시체 썩은 내가 난다고 했고, 알터도 비슷한 유언을 남겼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 페르다는 입술을 깨물었다.

'······원작이랑 달라졌다.'

이번엔 대체 어디서 어긋난 거지?

쿠르드를 몰래 처리해서? 아니면 다리안과 계약을 맺어서?

그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던 무렵.

"하, 하르민님!"

멀리서 한 전사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보아하니, 이번에도 역시 비보(悲報)인 모양이다. 아니나 다를까, 바닥에 무릎을 꿇은 전사는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급보입니다! 쿠르드의 휘하에 있던 전사들이 배, 배신을······."

"······!"

갑작스러운 소식에 모두가 놀란 눈을 떴다.

이어진 보고에 따르면 전투 준비를 하느라 감시가 소홀해진 틈을 타서, 쿠르드 휘하의 전사들이 도시를 빠져나갔다고 한다.

게다가 그들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서쪽 통로에 설치해둔 함정과 각종 마법진까지 파괴했다. 이어 그들은 남쪽 통로를 통해 모조리 사막으로 빠져나갔다.

이를 들은 전사들은 모두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인 채 분통을 터뜨렸다.

"지금 이 상황에서 그런 짓을 했다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동족을 배신할 생각을······."

하르민 역시 참담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비보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서쪽 통로에서 적을 발견!"

"정찰대의 보고가 맞았습니다! 적은 언데드입니다!"

적의 군세가 이곳, 르샨테의 코앞까지 다가왔다는 보고가 연달아 들려왔다. 얼핏 보인 숫자만 무려 일천이라는 말까지 들렸다.

그에 반해, 다크엘프의 숫자는 일천이 채 되지 않는다. 쿠르드 휘하의 전사들이 빠진 탓이었다. 당장 무기를 들고 싸울 수 있는 전사만 놓고 보면 칠백을 간신히 넘기는 수준.

꽈악-

하르민은 주먹을 거세게 움켜쥐었다.

잠시 후, 그의 시선이 페르다에게 가 닿았다. 강철처럼 단단하던 하르민의 눈빛이 조금씩 떨렸다. 이윽고 그는 페르다의 앞까지 다가갔다.

"······염치가 없다는 건 알고 있다."

굳게 닫힌 입이 열렸다.

이어 그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그것만 해도 충분히 놀라운 일이건만, 하르민은 머리까지 숙였다.

"하, 하르민님!"

"어찌 인간에게 고개를······."

전사들이 당황한 듯 외쳤으나 하르민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마에 흙이 묻어도 상관없었다. 르샨테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몇 번이고 머리를 숙일 수 있었다.

"우리에게 힘을 빌려다오."

페르다는 홀로 일백의 전사를 쓰러뜨린 강자다.

옆에 있는 실반도 가공할 힘을 가진 사령술사. 둘이 함께 싸워준다면 분명 든든할 터.

그러나 솔직히 가능성은 희박했다. 페르다는 그들과 전혀 상관없는 이였고, 실반 역시 가족을 제외하면 숲에 좋은 기억 따위는 없으니까.

"······."

페르다는 말없이 하르민을 쳐다봤다.

당연한 소리겠지만 도울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다. 그와 다크엘프는 아무런 접점도 없었기에. 허나 무턱대고 거절하는 것도 모양이 이상했다. 완벽한 타인인 그와는 달리, 실반은 이곳에 가족을 두고 있었으니.

잠시 고민을 이어나가던 때, 그의 입술이 열렸다.

"내가 이곳에 있는 이유는······."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 하르민이 슬쩍 고개를 들었다. 페르다는 무감정한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 봤다.

"내 제자가 여기 있기 때문이다."

사실 그 외의 이유는 없지.

담담하게 진심을 밝힌 페르다가 실반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그러고는 뒤로 조금 물러나, 실반의 한 걸음 뒤에 섰다.

"그러니 부탁하려거든 실반에게 해라. 난 제자의 결정에 따르겠다."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하르민을 포함한 전사들의 시선은 일제히 실반에게로 향했다. 갑작스럽게 결정권이 넘어오자 실반은 조금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그럴 만도 하지. 이 결정에 수많은 이의 목숨이 달려있으니.

"나는······."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좀처럼 말이 나오지 않는 모습. 그때 페르다가 실반의 어깨를 잡았다. 그러고는 그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다 댄 채 나지막이 속삭였다.

"······네겐 두 가지 선택이 있다."

이대로 떠나는 것과 남아서 싸우는 것.

결정은 크게 이 둘로 구분된다.

'물론 도와줄 가능성이 커.'

이곳에는 이레아와 이로나가 있으니까. 이대로 숲을 떠난다면 둘의 목숨을 보장할 수 없을 터. 하지만 단순히 가족을 지킨다는 명분을 내걸고 싸운다면 그건 또 아니었다.

'그럼 녀석들은 실반의 도움을 당연하게 받아들일 테지.'

헌터 업계에서도 비슷한 일이 많았다.

불쌍해서, 혹은 동정이나 연민 때문에 남을 도와주면 당장은 칭송을 받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의 호의는 당연한 것으로 변한다. 그리고 비슷한 상황에서 다른 선택을 할 경우, 한순간에 죽일 놈이 된다.

'그러니 무슨 일이든 첫 단추를 잘 끼워야 해.'

그리 생각할 무렵, 잠자코 있던 실반이 몸을 돌렸다. 커다란 황금색 눈동자가 페르다의 시야를 물들였다. 잠시 후, 실반은 굳게 닫혀있던 입을 열었다.

"만약 페르다라면 어떻게 할 거야?"

나쁘지 않은 자세다.

바로 결정하는 것보단 타인의 생각을 묻는 편이 좋지. 제자의 신중한 모습에 페르다는 흡족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당연히 도망쳐야지. 다크엘프가 어찌 되든 나와는 상관없으니까."

돌아온 대답에 실반은 어색하게 웃었다.

애초에 페르다와 실반에게 주어진 페널티 자체가 달랐다. 그렇기에 페르다의 의견은 당연히 아무런 참고가 될 수 없는 게 당연했다.

다시 고민에 빠진 실반의 모습에 풀썩 웃음이 나왔다. 혼자 고민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도 좋은 공부가 된다. 하지만 이 경우엔 아니다. 지금은 시간이 없으니까.

"실반."

그럼 좀 더 결정하기 쉽게, 스승으로서 가르침을 줘야겠지.

실반이 다시 고개를 돌리던 때, 페르다의 입술이 달싹였다.

"어떤 선택을 해도 후회가 남을 것 같다면, 무엇을 고려해서 선택하는 게 좋을까?"

갑작스러운 질문에 실반은 생각에 잠겼다.

얼마 후, 그의 대답이 이어졌다.

"그야 후회의 크기가 작은 걸 고르면······."

"후회가 남는 이상, 크기는 중요하지 않아."

페르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둘 중 어떤 선택을 해도 후회가 남는다면, 후회의 크기는 고려할 가치가 없다. 어차피 남겨진 후회는 미련으로 바뀔 테니. 크든 작든 똑같다. 그러니 여기선 생각을 바꾸는 게 좋다.

"그러니까 반대로 생각해라."

"반대로?"

"네게 조금이라도 더 득이 되는 걸 골라."

페르다의 말에 실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직 이해하지 못한 눈치다.

"예를 들어 이곳을 떠난다는 선택을 할 경우, 가장 먼저 안전을 확보할 수 있다. 또 널 무시하고 경멸했던 놈들이 자멸하는 꼴을 보고 비웃을 수 있겠지."

그 말에 실반의 눈이 조금 커다랗게 변했다.

이제 좀 이해가 간 모양이다.

"그럼 여기 남아서 싸우면······."

"아까 이 녀석이 최상위 언데드를 운운했지?"

손을 뻗어 알터를 툭툭 건드렸다.

언데드가 되기 전, 그는 말했다. 적은 거암족이 아니라 최상위 언데드가 이끄는 망자들이라고.

"현시점에서 최상위 언데드를 이끄는 자는 하나밖에 없다."

실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얼마 후, 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모든 죽음."

그 말에 페르다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숲에 남아 싸울 경우, 얻을 수 있는 이득은 두 가지.

가족을 지킬 수 있는 것. 그리고 최상위 언데드를 사로잡아, 모든 죽음에 대한 정보를 캐내는 것.

이 둘이라고 볼 수 있었다.

이제 선택은 오롯이 실반의 몫이다. 페르다는 굳게 입을 닫은 채,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한편 눈을 감은 채 생각에 잠겨 있던 실반은 곧 감고 있던 눈을 떴다.

"페르다."

실반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이제 떨리지 않는 황금색 눈동자. 결정을 내린 것 같은 모습이다.

"솔직히 다른 녀석들은 어찌 되든 상관없어. 하지만 족장님과 이로나는 내 가족이야. 그러니까 도와주고 싶어."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결정이다.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던 때, 실반의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모든 죽음과 관련된 정보도 얻으면 좋을 것 같아.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그걸 막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거든."

원작의 주인공다운 대답이다. 재앙과 맞서 싸우는 것은 실반의 숙명이나 다름없었으니. 페르다는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득이 되는 게 있어."

응? 저 두 가지 말고 더 있다고?

페르다의 낯빛에 호기심이 깃들었다.

하지만 실반은 대답 대신, 그저 방긋 웃을 뿐이었다. 이어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어느새 주변으로 몰려든 실반의 권속들. 그들과 마주한 채, 실반은 입을 열었다.

"난 숲에 남아 싸우려고 해. 힘을 빌려줄래?"

실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세 망령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을 모았다.

[저희는 왕의 충복이옵니다.]

[언제든지 명령만 내려주십시오.]

[기꺼이 웃으며 명을 따르겠나이다.]

그야말로 절대적인 복종.

이번에는 헤르온에게 시선이 돌아갔다.

"제 몸뚱어리는 이미 왕의 것입니다. 부디 뜻대로 부리시길."

헤르온이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대답했다.

공손한 대답에 실반은 옅게 웃었다. 이를 끝으로 실반의 시선이 페르다에게로 향했다. 그러자 페르다는 씨익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처음부터 네 결정에 따르기로 했으니 불만은 없다."

만약 가족을 지키고자 숲에 남겠다고 했다면 반대했을 거다. 허나 지금 실반이 내린 결정은 그에게 있어 조금이라도 더 득이 되는 선택이다.

앞으로도 비슷한 갈림길에 선다면 실반은 오늘 있었던 일을 떠올리겠지. 정이나 인연에 이끌리지 않고, 좀 더 득이 되는 선택을 하리라.

그것만으로도 페르다는 만족했다.

"모두 고마워."

실반은 배시시 웃었다. 진심이 담긴 미소였다.

하지만 몸을 돌리자, 미소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뒤이어 실반은 걸음을 옮겼다. 그가 향하는 곳은 하르민이 있는 곳. 곧 그의 앞에 도착한 실반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르민 젬버."

다소 딱딱하게 굳은 말투가 흘러나왔다.

하르민이 고개를 들자, 무미건조한 음성이 이어졌다.

"숲을 지켜내면 그 대가로 내게 무엇을 줄 수 있습니까?"

다소 무례하게 들렸기 때문일까? 몇몇 전사들이 눈썹을 씰룩였다. 허나 그게 전부였다. 그들은 감히 끼어들 수 없었다. 실반의 뒤에 있던 페르다가 비수를 반쯤 뽑아 든 채 노려보고 있었기에.

한편 하르민은 다소 당황한 듯했다. 설마 대가를 바랄 줄은 생각지 못한 얼굴.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는 곧 평정을 회복했다. 그러고는 비장한 투로 대답했다.

"······내가 줄 수 있는 거라면 무엇이든."

아마 저게 최선의 대답이었으리라.

실반은 잠시 고민하듯 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전투가 끝난 다음······."

다시 입을 연 실반.

뒤이어 흘러나온 말은 누구도 생각지 못한 내용이었다.

< Chapter 23. 실반의 선택 (2) > 끝

ⓒ 남철우

< Chapter 23. 실반의 선택 (3) >

"저를 족장으로 인정하세요."

"······!"

하르민이 눈을 부릅떴다.

뒤이어 여기저기서 당황에 가득 찬 탄성이 터져 나왔다. 페르다 역시, 다소 놀란 얼굴로 실반을 바라봤다. 그러던 중 문득 뇌리를 스치는 게 있었다.

'아아, 그렇구나.'

이제 알았다.

실반이 말하지 않았던 이득이 뭔지. 페르다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설마 이 와중에 인정의 시험을 떠올릴 줄이야.'

족장의 시험 그 세 번째, 인정의 시험.

이는 말 그대로 백 명의 전사들에게서 인정을 받는 시험이다.

힘으로 굴복시켜도 좋고, 회유해도 상관없다. 단, 기존 세력이 아닌 전사들에게 인정받아야만 했다.

'제법인데?'

페르다는 솔직하게 감탄했다. 찰나의 순간,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이득을 떠올릴 줄이야. 실반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 대견함이 묻어났다.

'사실 엄청난 이득까진 아니지만······.'

조금 애매하긴 하다.

족장이 된다고 해서 특별한 능력이나 힘을 얻는 것도 아니니.

그래도 첫 명함치고는 나쁘지 않다. 어디 가서 신분을 밝힐 때, 아크듀트 백작가의 서자보단 세르네크의 족장이란 신분이 좀 더 무게감이 있을 테니까.

페르다가 흐뭇한 미소를 짓던 무렵.

굳게 닫혔던 하르민의 입이 열렸다.

"······만약 정말로 숲을 지킬 수 있다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강한 각오가 깃든 얼굴. 하르민은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뿐만이 아니라 모두가 그대를 인정할 거다. 목숨을 구원받고도 감히 뻔뻔한 태도를 보이는 녀석이 있다면 내가 목을 베겠다. 내 이름에 걸고 약속하마."

중립의 전사, 하르민이 이름을 걸고 약속한다는 말을 꺼냈다.

명예와 긍지를 아는 전사의 약속. 전사들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나 실반은 고개를 흔들었다.

"당신의 이름은 가치가 없습니다."

서릿발처럼 차가운 말에 하르민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곧이어 실반의 말이 이어졌다.

"카디란토의 영령에 대고 맹세하세요. 그럼 믿겠습니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몇몇 전사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숲을 구하지도 않았건만,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하르민에게 굴욕을 준단 말인가.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면 그들은 움직이기는커녕, 입조차 벙긋하지 못했다.

"지금 내 제자가 말하고 있잖아."

어느새 다가온 페르다가 그들을 막아선 탓에.

백 명의 전사를 제압한 강자. 그의 등장에 전사들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 또 그들을 압박하는 건 페르다 뿐만이 아니었다.

[너희들, 내 계약자 건들기만 해봐. 가만 안 둬.]

그의 어깨에 앉아있던 다리안이 으르렁거렸다.

오랫동안 숲의 수호신이었던 존재까지 그들 앞을 막아섰다. 그 상황에서 실반에게 뭐라고 할 수 있는 전사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던 그때였다.

쿵쿵-!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난 하르민. 그가 도끼로 바닥을 거세게 두드렸다. 한쪽 무릎을 굽힌 뒤, 하르민은 엄숙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기꺼이 맹세하겠다."

숲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겠다고 각오했으니까.

동족을 지킬 수만 있다면 명예와 긍지조차 버릴 수 있었다. 망설임을 버리는 건 일도 아니다. 진지한 목소리와 함께, 하르민은 모두가 보는 앞에서 카디란토의 맹세를 했다.

적을 몰아내고 숲을 지켜낸다면 실반을 족장으로 인정하겠노라고. 또 목숨을 구원받은 주제에 그를 인정하지 않는 뻔뻔한 놈이 있다면 목을 날려버리겠다고.

그러자 그를 따르는 몇몇 전사들도 덩달아 무릎을 꿇었다.

"나도 맹세하겠다."

"나 역시······."

벌써 십수 명의 전사가 카디란토의 맹세를 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실반은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바람에 펄럭거리는 잿빛 로브 자락. 이어 실반은 몸을 돌렸다.

"따라오세요, 심판."

실반의 시선이 검은 연기로 가득 찬 서쪽 하늘로 향했다.

그러고는 황금색 눈동자를 반짝이며 담담히 말했다.

"인정의 시험에 도전하겠습니다."

***

한편, 르샨테의 서쪽 입구.

가장 늦게 도시를 떠났던 정찰대가 돌아왔다.

이어진 보고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쿠르드를 따르던 전사들의 배신. 그로 인해 무방비 상태로 변한 서쪽 통로로 수많은 언데드 군대가 밀려오고 있다는 보고까지.

암담한 상황이었으나 두 눈 뜨고 당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레아는 전사들의 대부분을 서쪽 입구에 집결시켰다. 임시 지휘소를 설치하고, 어떻게 방어를 할지 논의했다.

그러던 중 망루에 있던 전사들이 다급히 소리쳤다.

"전방에 언데드 발견!"

"서쪽 통로에서 계속 쏟아지고 있습니다!"

조그마한 통로를 비집고 수많은 언데드가 튀어나왔다. 그칠 줄 모르고 쏟아지는 언데드의 홍수에 전사들의 낯빛은 새파랗게 질렸다.

어림잡아도 일천은 가볍게 넘어 보이는 숫자.

그들은 마치 누군가의 지휘를 받듯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마침내 전열을 가다듬자 돌연 서쪽 통로가 와르르 무너졌다.

"퇴로를 차단할 셈인가."

누군가 그리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 추측은 틀렸다.

통로가 무너지면서 안쪽에서 무언가 거대한 것이 걸어 나왔기에.

쿵! 쿵쿵!

지축을 울리는 거대한 진동. 바로 거암족이었다.

시퍼런 안광을 뿜어대는 거암족을 보며 이레아는 신음을 삼켰다.

"······언데드."

앞서 들었던 보고가 전부 사실로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허나 아직 놀랄 일은 끝나지 않았다.

"저건······."

언데드의 군대가 반으로 갈라졌다.

마치 길을 내는 것 같은 행동.

잠시 후, 한가운데에 난 길로 두 명의 남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거대한 말에 올라탄 검은 갑옷의 기사. 그리고 치렁치렁한 로브에 검은색 가면을 쓴 여자.

그 순간, 몇몇 전사들이 둘의 정체를 알아봤다.

"듀, 듀라한!"

"거기에 데스 위치까지······!"

목 없는 기사, 듀라한.

망자를 만들고 부리는 마녀, 데스 위치.

둘 다 최상급 언데드였다. 일천이 넘는 언데드 군대를 상대하는 것도 벅차거늘, 최상급 언데드가 무려 둘이나 있다니. 전사들의 사기가 순식간에 꺾여갔다.

한편 얼굴이 굳은 건 이로나도 마찬가지였다. 어느새 밖으로 나온 두 정령이 잔뜩 긴장된 목소리로 속삭인 탓이었다.

[평범한 듀라한이 아니야. 격을 가지고 있어.]

[저 마녀 역시 격을 가진 존재다. 조심해라.]

격을 가진 언데드가 얼마나 강한지는 겪어봐서 잘 안다.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아직 전투가 벌어지지도 않았건만, 나이가 어린 전사들은 잔뜩 겁을 집어먹었고 노련한 전사들의 표정 또한 긴장된 기색이 역력했으니.

그러던 중 두 정령이 다시 말을 걸어왔다.

[이대로는 승산이 낮다. 하지만······.]

[네 조카가 있다면 이길 수도 있지.]

살라만과 시오르는 직접 눈으로 본 적이 있다.

이로나의 조카, 실반 아크듀트가 얼마나 강력한 사령술사인지. 이로나 역시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실반이 있다면 언데드는 아무리 몰려와도 두렵지 않았으니.

'하지만······.'

이로나의 얼굴이 어둡게 물들었다.

그녀는 실반이 어떻게 자라왔는지 잘 안다. 이리나가 있었을 때는 그나마 나았지만, 그 아이가 세상을 뜨고 난 이후부터는 제대로 된 동족 취급도 받지 못했다.

하물며 며칠 전, 숲에 돌아왔을 때도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다크엘프들에게 실반은 여전히 타인이었고, 조롱거리에 불과했다.

그런 아이에게 동족을 구해달라는 말을 할 수 있을까?

염치가 있다면 그럴 수 없었다. 그래선 안 된다.

"적이 다가옵니다!"

"전원, 전투 준비!"

그때 망루의 전사들이 소리쳤다. 그 말대로 언데드들이 사납게 달려오는 광경이 보였다. 이로나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잡념을 털어냈다.

지금은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다.

싸워야 할 때다.

쾅! 콰아앙!

여기저기서 폭음(爆音)과 함께 불꽃이 치솟았다.

정령사들이 불러낸 불의 정령들이 시뻘건 화염구를 내뱉었기에.

"궁수대, 3열! 앞으로!"

"목표는 전방의 언데드! 쏴라!"

파바바바바박-!

불화살이 좀비와 구울떼를 덮쳤다. 언데드들은 불길에 휩싸인 채 타들어 갔다.

화륵! 화르륵!

잿더미가 된 좀비들을 둘러싸고 불의 장벽이 생겨났다. 미리 바닥에 기름을 발라둔 덕분일까? 불길은 무척이나 거셌다. 생각보다 수월한 방어에 전사들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맺혔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희망의 불씨는 절망의 잿더미로 변했다.

쿵! 쿵쿵!

언데드가 된 거암족이 진격을 시작했다. 그들은 불의 장벽이 있음에도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몇몇 거암족은 아예 바닥에 드러누워 구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불길은 금세 잡혔다.

"젠장, 거암족을 노려!"

"놈들부터 없애라!"

정령사들이 물의 정령을 불러냈다. 거암족은 물에 약했으니까. 이로나 역시, 살라만을 돌려보내고 물의 중급 정령을 소환했다. 이어 거암족을 노리려던 그 순간.

잠자코 있던 듀라한이 움직였다.

투두두두두-

성난 해골마가 푸른 안광을 번뜩이며 달려왔다.

몇몇 언데드가 길을 가로막자 그대로 짓밟아버렸다. 눈 깜박할 사이에 철책까지 다가온 그는 음차원의 마나가 듬뿍 담긴 폴암(Polearm)을 그대로 휘둘렀다.

콰앙-!

강력한 폭발과 함께 철책이 그대로 날아갔다.

실로 가공할만한 위력. 전사들은 이를 악문 채, 무기를 들었다. 듀라한을 막지 못하면 입구가 뚫린다. 그러면 가족과 보금자리가 있는 르샨테가 짓밟히리라.

'그것만은 막아야 해!'

모두가 그런 각오를 품고 듀라한을 향해 달려들었다.

허나 얼마 지나지 않아, 부질없는 발악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팬텀 웨이브(Phantom wave)."

듀라한의 머리가 입을 열어 소리쳤다.

그러자 사방에서 망령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히히! 이히히히!

-흐아아아아!

기괴한 웃음소리와 함께 망령들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전사들은 마치 급류에 휩쓸린 것처럼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으, 으아아악!"

"나가! 내 머릿속에서 나가라고!"

사방에서 들려오는 환청. 몇몇 전사들은 환각까지 본 듯 동료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그 참혹한 광경에 망루에 있던 궁수들의 안색이 새하얗게 탈색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스무 명의 전사들은 모두 주검으로 변했다.

하지만 절망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후후, 일어나렴. 어여쁜 아가들아."

마녀가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팔이 전사들에게로 향하자, 스무 구에 달하는 시체들이 몸을 꿈틀거리며 일어났다.

"으으, 으으으! 크르르!"

"크하아아아아!"

괴성과 함께 스물의 언데드 병사가 탄생했다.

그들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이윽고 동료였던 자를 향해 이빨을 들이밀었다. 그 끔찍한 광경에 사기는 빠르게 떨어졌다.

"으아아아악!"

"사, 살려줘. 커헉!"

여기저기서 피해가 속출했다.

전열이 무너지면서 후방에 있던 몇몇 정령사가 목숨을 잃었다. 입구 근처에 있던 전사들은 이미 언데드로 변한 지 오래였다.

쾅! 쾅쾅쾅!

이윽고 지척까지 다가온 거암족이 철책을 부수기 시작했다.

절망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수십 마리에 달하는 구울들이 망루를 타고 기어올랐고, 그중 몇몇 구울은 도시 내부에 침입했다.

퍼억!

선두를 달리던 구울의 머리가 요란스럽게 터졌다.

이레아였다. 그녀는 불타는 창을 휘둘러 도시로 향하는 구울을 모조리 처리했다. 뒤이어 눈에 들어온 것은 함락 직전인 입구. 이레아는 피를 토하듯 비통한 외침을 내뱉었다.

"모두 퇴각하라! 광장에서 적을 맞이하겠다!"

후퇴 명령이 떨어지자 전사들은 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이로나 역시, 입술을 깨문 채 몸을 뺐다. 득실거리는 언데드를 보자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때 문득 생각나는 이가 있었다.

'하다못해 그 남자라도 있었다면······!'

실반의 스승을 자처하는 남자.

왜 하필 이럴 때 그가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인간이라면 치를 떨 정도로 싫어했는데.

쿠우웅!

그러던 중 최후의 망루가 바닥에 쓰러졌다. 이를 신호로 수십, 수백에 달하는 언데드들이 개미 떼처럼 밀려들었다.

"부질없는 저항은 이쯤에서 멈춰라."

선두에 선 듀라한이 쇠를 긁는 목소리를 냈다.

그러고는 당장이라도 달려들 기세로 외쳤다.

"망자의 군대에 합류해, 모든 죽음께 경배를······."

하지만 말을 마저 잇진 못했다. 돌연 도시 쪽에서 뭔가가 빠르게 날아든 탓이었다. 위협적인 속도에 듀라한은 재빨리 방패를 들어 올렸다.

쾅! 카가각-!

상당한 충격과 함께 방패가 다소 우그러졌다.

이 정도면 마력이 담긴 무언가이리라.

화살인가? 아니면 칼? 듀라한은 방패를 때린 것을 확인하기 위해 머리를 들었다.

정답은 둘 다 아니었다.

"이게 뭔······."

바닥을 굴러다니는 건 평범한 돌멩이.

듀라한이 이를 가만히 보던 때, 돌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생각보다 위력이 있네. 스킬이 있어서 그런가."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듀라한은 머리를 집어 들었다. 동시에 광장으로 퇴각하던 이로나도 자리에 멈췄다. 둘의 시선이 향한 곳은 어느 집의 지붕.

이윽고 지붕 위에 있던 남자가 아래로 뛰어내렸다.

군청색 머리카락을 아래로 묶은 청년.

낯익은 얼굴에 이로나는 눈을 크게 떴다.

"다, 당신······!"

"뒤로 물러나 있어."

어느새 다가온 페르다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러고는 듀라한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씨익 웃었다.

"지금부터 내 제자가 활약할 차례니까."

< Chapter 23. 실반의 선택 (3) > 끝

ⓒ 남철우

< Chapter 24. 압도 (1) >

Chapter. 24

압도

서쪽 입구에 도착했을 땐 이미 늦은 뒤였다.

눈 앞에 펼쳐진 참상에 페르다는 눈살을 찌푸렸다.

"끄응, 지금 끼어들긴 좀 애매하네."

철책을 기어오르는 언데드와 뒤로 물러나는 전사들. 딱 봐도 입구를 포기한 것처럼 보인다. 후퇴하는 방향을 보아하니, 도시 중심부에서 전선을 재구축할 생각이리라.

"시간 좀 벌어줬으면 좋겠는데."

한숨과 함께 페르다는 실반을 쳐다봤다. 실반은 눈앞의 광경에 시선을 고정한 채, 연신 뭔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마력 배열은 단순해. 그리고 전부 똑같아."

빠르게 움직이는 황금색 눈동자.

잠시 후, 무미건조하던 입가에 옅은 미소가 피어났다.

"응, 빼앗을 수 있을 거 같아. 절반 정도는."

그 대답에 페르다도 씩 웃었다.

이곳에 오기 전. 그와 실반은 한 가지 계획을 세웠다.

보다 피해를 최소화해서 적을 막아낼 수 있는 계획. 내용은 단순했다. 마력이 허용되는 한, 최대한 많은 적을 강탈한 뒤에 서로 싸우게 만드는 것. 그리고 그 틈을 타서 지휘관을 제압하는 게 전부다.

절반이라면 딱 좋네. 페르다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이걸로 계획을 실행시킬 준비는 모두 끝났다.

슬슬 시작해볼까? 찌뿌둥한 몸을 풀며 발을 내딛으려던 찰나.

"그런데 페르다."

"응?"

"입구, 뚫린 것 같지 않아?"

실반이 어색한 미소와 함께 말을 걸었다. 그러자 페르다는 놀란 얼굴로 서쪽 입구를 바라보았다. 동시에 마지막 남아있던 망루가 서서히 쓰러지는 모습이 보였다.

쿠우웅!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며 처박히는 망루. 철책이 우수수 무너지면서 바깥에 있던 언데드들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흩어져있던 전사들은 똘똘 뭉쳐 광장으로 퇴각하기 시작했다.

"쯧, 이래선 시간 벌이도 못 시키겠네."

페르다가 혀를 낮게 찼다.

수백 구에 달하는 언데드를 한 번에 강탈해야 하는 일이다. 분명 적잖은 시간이 걸리리라. 또 그동안 적이 멀리 움직이면 그것 또한 낭패다. 그러니 적의 발을 묶어둘 이가 필요했다.

"후우, 어쩔 수 없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헤르온은 근처 어딘가에 몸을 숨긴 상태였다. 향후 실반의 지시에 따라 적을 저격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망령들은 실반의 곁에서 그를 보조하고 보호하는 임무를 맡았다.

반면 페르다는 딱히 하는 일이 없었다.

"내가 시간을 벌어주마."

그럼 이런 일이라도 할 수밖에.

어깨를 으쓱인 뒤, 실반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해도 돼."

"최대한 빠르게 할게."

실반이 씩 웃으며 대답했다.

제자의 배웅을 받으며 페르다는 곧장 지면을 박찼다.

타다다다다-

지붕을 몇 번 뛰어다니자 금세 입구 부근에 도착했다.

저 멀리 목 없는 기사, 듀라한이 보였다. 꼴을 보아하니 후퇴하는 전사들을 향해 당장이라도 돌격할 기세다. 저기서 좀 더 도시로 들어가면 발을 묶어놓기가 힘들어지리라.

'어떻게든 막아야 해.'

이대로 가면 늦는다. 뭐라도 던져서 당장 발을 묶어두는 편이 좋겠다.

때마침 던지기에 안성맞춤인 것이 보였다. 끝부분이 뾰족한 돌멩이. 여기다가 마력을 덧씌워서 던지면 파괴력이 상당하리라. 페르다는 단숨에 생각을 현실로 옮겼다.

쉐에에엑! 카가각-!

요란스러운 소리와 함께.

마력이 깃든 돌멩이가 듀라한의 방패에 제대로 꽂혔다.

뭐지? 생각했던 것보다 위력이 쓸만한데?

그리 생각할 무렵,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

[알림]

-마력이 깃든 돌멩이가 깔끔하게 들어갔습니다.

-'돌 던지기'의 숙련도가 (5)만큼 증가합니다.

=====

아, 이제야 생각났다.

하이드 워커를 뽑을 때, 함께 뽑혔던 '꽝'이 있었다는 걸.

"다, 당신······!"

그때 곁에서 들려온 익숙한 음성. 누군가 했더니 이로나였다.

왜 후퇴하지 않고 여기에 있는 거지?

그리 물으려던 찰나, 돌연 그녀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동시에 페르다도 기척을 느꼈다.

"크릭! 키르륵!"

뭔가가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살아있는 자의 피와 살을 탐하는 괴물, 구울. 느려터진 좀비와는 달리, 움직임이 매우 날래며 손톱에는 강한 시독(屍毒)이 묻어있는 언데드다. 삽시간에 여섯 구에 달하는 구울이 페르다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퍽! 퍽퍽!

그때 구울 세 마리의 머리가 허공에서 터졌다.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 때문이었다. 분명 헤르온이 쏜 화살이리라.

"키햐아아아!"

살아남은 세 마리의 구울이 페르다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 변화는 없었다.

칼집에서 비수가 뽑히는 소리를 끝으로, 구울들은 잘 다져진 고깃덩어리로 변했으니까.

툭! 철퍽-

바닥에 소복이 쌓이는 썩은 살점.

이로나는 멍한 얼굴로 그를 봤다. 어느 틈에 비수를 뽑았는지, 언제, 몇 차례나 휘둘렀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기척을 숨기는 것에만 능한 줄 알았는데, 칼을 다루는 솜씨도 뛰어날 줄이야.

한편 비수에 묻은 피와 살점을 털어내던 무렵.

별안간 누군가의 비명이 들려왔다.

[아악! 이 언데드 성애자가 또······!]

무시해도 상관없는 비명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프랑과 느긋하게 대화를 주고받을 때가 아니었다. 고깃덩어리로 변한 구울 너머로 두 남녀가 보였기에.

"후후, 닭들만 있는 줄 알았는데······."

낮은 웃음소리를 끝으로.

어느새 모습을 드러낸 마녀가 히죽 웃었다.

"매가 한 마리 끼어있었구나."

그 말과 함께, 밀물처럼 밀려든 언데드가 삽시간에 주위를 포위했다.

좀비에 구울, 스켈레톤, 거기에 언데드로 변한 거암족까지. 순식간에 퇴로가 차단됐음에도 페르다는 느긋한 표정이었다.

"우수한 전사는 왕께서도 좋아하신단다."

"힘 빼지 말고 순순히 죽음을 받아들여라."

듀라한이 피로 물든 폴암을 겨누었다. 불꽃처럼 타오르는 푸른색 안광과 함께, 묵직한 한 마디가 이어졌다.

"고작 한 명으로는 전황을 바꿀 수 없으니."

그 말에 페르다는 피식 웃었다.

맞는 말이다. 적은 무려 천 마리가 넘는 언데드. 고작 암살자 하나만으로는 전황을 바꾸기가 힘들다. 아니,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지만 혼자라고 해도 사령술사라면 얘기가 다르다.

그것도 천지가 개벽한 이래, 한번 나올까 말까 한 신화급의 사령술사라면.

=====

[알림]

*실반 아크듀트가 좀비 거암족 (17)구를 강탈했습니다.

=====

별안간 나타난 짤막한 메시지.

이를 시작으로 곧 수많은 메시지가 눈앞을 가로막았다.

=====

[알림]

*실반 아크듀트가 스켈레톤 (61)구를 강탈했습니다.

*실반 아크듀트가 좀비 (247)구를 강탈했습니다.

*실반 아크듀트가 구울 (81)구를······.

=====

시스템 메시지가 계획의 성공을 알렸다.

생각보다 훨씬 빠르잖아. 입가에 맺힌 미소가 짙어졌다.

그때 마녀와 듀라한도 이변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이처럼 몸을 부르르 떨어댔으니까.

"······!"

"이, 이게 무슨······."

시종일관 여유롭던 목소리에 당황이 묻어났다.

그런 둘을 보며 페르다는 비수를 빙글빙글 돌렸다.

"이봐, 대가리."

어디 다시 한번 말해봐.

"누가 한 명이라고?"

페르다가 히죽 웃는 걸 신호로.

전장을 뒤덮은 푸른 안광의 절반이 황금색으로 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