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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도 에클라힘(6)

이 세계가 단지 게임이라고만 생각하던 시절, 댈런은 이따금씩 악신의 세력에 합류해서 플레이하곤 했었다.

특별한 이유가 있던 건 아니었다. 그저 게임의 자유도가 그만큼 높으니, 다양한 방법으로 즐겨보자고 생각했던 것.

물론 백 회차를 훌쩍 넘어갔을 무렵부터는 조금 달라졌다.

오기를 품고 클리어에 시간을 갈아넣기 시작한 이후, 그가 악신 측에 붙는 이유는 오직 게임 클리어를 위한 염탐의 목적이었다.

수천 수만의 삶을 악신에게 바친 끝에, 실제로 얻어낸 수확 역시 결코 적지 않았고.

'그걸로 변명이 될까.'

그럼에도 이 세상에 떨어진 이후, 가끔은 그런 생각이 떠오를 때가 있었다.

'고통 속에 내던져진 수없이 많은 생명들에게, 당신들은 마지막 한 세계를 구하기 위한 마중물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마우스 클릭 몇 번으로 피난민 수백 명이 목숨을 잃었다.

스킬 콤보 한 차례면 어느새 마을 마을 하나가 불타고 있었다.

이 전당에서 최후를 맞이한 시체 역시 같은 일을 하던 중이었다.

에낙사구스의 군세와 함께 왕도 에클라힘을 불태우고, 지원군으로 파견된 성기사단의 생존자들을 추격해 도시의 깊은 지하까지 다다랐던 것.

'시, 신이시여···커허억······.'

지능 수치에 따라 비약적으로 상승해버린 기억력은, 모니터에 비친 마지막 성기사의 죽음까지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저 그런 그래픽에 중복된 성우로 녹음된 목소리.

단순한 폴리곤과 데이터 덩어리. 쏠쏠한 경험치와 악신의 은총으로 캐릭터를 풍족하게 만들어줄 희생물들.

주말에 속옷 바람으로 마우스와 키보드를 딸깍거리던 아저씨가, 과연 그 사람들의 목숨을 거둘 자격이 있었을까.

오래 전 영역을 이루며 끝맺었던 내적인 갈등은, 회백의 투사와 만난 이후 이따금씩 고개를 들고 있었다.

후우.

고개를 털어 떨쳐낸다.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지나간 과거는 과거일 뿐. 세상에 내둘린 그 당시의 자신에게는 그게 최선이었다.

애당초 한낱 게임이 어떤 세계의 현실임을 그 누가 알았겠는가.

그건 지나가다 밟아죽인 개미 한 마리가 사실 세상을 구할 영웅이었다는 것처럼 황당하기 그지없는 이야기였다.

쉬이이이이―!

눈앞까지 다가온 괴수의 꼬리를 바라보며, 댈런은 가속된 의식 속에서의 상념을 끝맺었다.

과거의 실책을 부정할 것까지는 없지만, 어찌됐건 그 실책들을 통해 앞으로 나아갈 수많은 지식들을 얻은 것 역시 사실이었다.

악신의 편에 붙은 회차들을 통해 각종 악마와 마물에 대한 공략뿐 아니라, 초월자를 잡아먹었다는 눈앞의 괴수를 상대하는 방법도 익힐 수 있었으니까.

쫘아아악!

눈 깜빡할 사이에 목표를 강타한 꼬리.

말채찍처럼 세 갈래로 갈라진 꼬리 끝부분이 굉음을 내며 공기를 찢는다.

괴수의 꼬리에 얻어맞은 댈런이 기둥을 부수고 날아갔다.

쾅 소리와 함께 그의 신형이 전당 벽에 신형이 처박히고, 관전하던 픽카케가 미친 듯이 폭소를 터뜨렸다.

"크히히히헤헤! 그래, 이거지! 그 육중한 몸뚱이에 우겨넣은 알량한 주문 따위로 고대의 짐승을 막을 수 있을 것 같···응?"

웃음은 오래 가지 못했다. 흔들리는 검은 눈동자에 푸른 섬광이 맺혔기 때문이었다.

꽈릉―!

뇌성과 함께 괴수의 거체를 강타하는 섬광.

몸길이가 30미터에 가까운 괴수가 비틀거리며 옆으로 물러나고, 허공에 맺힌 회백색 기운이 흩어지며 댈런의 모습이 드러났다.

"어, 어떻게···."

픽카케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부, 분명 맞았는데?"

"맞기는 지랄."

터벅.

댈런은 자연스럽게 허공을 내디뎠다.

"고대 암월단의 초기 실험체 바르카부스. 무시무시한 괴수이긴 하지. 열 쌍의 눈은 일부 5위계의 초월자도 현혹시킬 정도로 강력한 환각을 만들어내고, 덩치에서 비롯된 완력은 건물 하나쯤은 손쉽게 무너뜨릴 수준이야."

발밑에서 일렁이는 파문과, 청백색의 뇌전을 머금은 성검.

그 비현실적인 광경에 픽카케는 저도 모르게 눈길을 돌렸다. 놈은 방금 전 댈런이 처박혔던 전당 벽을 바라봤다.

거기에는 분명 있어야 할 몸뚱이 대신, 잿빛으로 흩어져가는 그림자의 조각만이 남아있었다.

댈런이 말을 이었다.

"진룡만큼이나 두껍고 단단한 비늘에, 독과 냉기에 대한 강력한 저항능력. 일년의 반 이상 눈이 내리는 북부에서 이런 괴수를 상대할 마법사는 많지 않지. 전사는 말할 것도 없고."

"······."

"유일하게 열기에 취약한 편이긴 하지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을 거야. 미궁도시에서 내가 개방한 영역의 주축은 뇌전. 거기다 기상의 변화를 트리거로 삼는 방식이었으니, 이런 지하에서는 사용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것이겠지."

턱을 슬슬 쓰다듬으며 쏟아내는 말. 암월단에서 여섯 번째로 강한 암살자는 찍 소리도 내지 못했다.

쩍 벌어진 길쭉한 주둥이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훤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어떻게, 혹은 어째서 따위의 현실부정들.

왠지 웃겨 보이는 얼굴이었다. 새삼 변화가 실감나기도 했다.

저 괴수의 뱃속에 들어있는 시체는, 성기사단을 말살한 공을 독차지하기 위해 픽카케가 뒤통수를 때린 결과물.

모니터 너머의 폴리곤 덩어리로는 몇 번을 복수해도 저런 생생 표정까지는 볼 수 없었지. 댈런은 입꼬리를 슬쩍 끌어올리며 성검을 툭 놓았다.

그리고 뇌격의 여파를 수습하고 몸을 일으키는 괴수를 향해, 숨을 깊게 들이쉬며 몸을 기울였다.

투웅―

길쭉하게 늘어지듯 쏘아진 신형.

「회명(回冥)」

그 희끗해진 음영을 따라 일렁이는 그림자.

「이연답산(二聯踏散)」

찰나의 시간 뒤, 그의 몸은 둘로 늘어나 있었다.

괴수를 중심으로 양쪽으로 도약하며, 각자 손에서 주문을 끌어올린다.

「뇌조(雷條)」

파지지지직―!

손아귀를 뒤덮은 전격의 그물이 거대한 발톱으로 변한 뒤, 수십 가닥의 전격으로 쪼개지며 괴수의 몸뚱이를 지져대고.

「염사(炎巳)」

화르르륵!

가볍게 뽑아든 단창을 툭 던지자, 십여 미터 길이의 불뱀이 괴수의 몸뚱이를 휘감고 태워낸다.

캬아아아아아!!

두터운 비늘도 그 사이를 파고드는 열기와 전류의 고통마저 막아줄 순 없었다.

쏟아지는 주문의 폭격에 몸부림치던 괴수가 주둥이를 쩍 벌렸다. 그 안쪽에서 어떤 전조도 없이 녹색 광선이 쏟아졌다.

콰아아아―!

용의 숨결을 흉내내어 만든 포격에, 댈런의 두 신형 중 하나가 휩쓸려 회백색 연기로 변해 사라진다.

"벌써 브레스 패턴이라. 빠르군."

손끝에 푸른 정광을 번뜩이는 댈런은, 슬쩍 웃으며 다시금 수인을 맺기 시작했다.

싸움이 시작된 지 고작 10초.

2페이즈 시작이었다.

***

콰아아아― 콰르르르!!

사방으로 뻗어지는 포격의 향연. 현대의 지구인이라면 어느 축제의 레이저 쇼라고 생각할 법한 광경.

허나 그 첨단에서 실시간으로 으깨지는 기둥과 천장의 석재들은, 평범한 레이저 쇼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콰과과과! 파지지직―

포격과 전격이 엇갈려 교차하고, 발밑에서 화염 기둥이 솟아오르며 얼음폭풍이 휘몰아친다.

숨쉴 틈 없이 몰아치는 술식과 그에 맞서는 괴수의 몸부림에, 수백 년간 보존되온 전당이 폐허로 변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수없이 번뜩이는 주문의 광채. 어둠 속에 감춰졌던 괴수의 형체는 이제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우와 미친, 저건 대체 무슨 누더기 괴물이래···.]

그리고 머릿속에서 들려오는 아르보르의 중얼거림처럼, 놈의 모습은 끔찍하기 그지없었다.

"쯧, 역겨운 쥐룡 새끼."

지네처럼 수십 개의 팔다리가 붙은 길쭉한 몸뚱이에, 전체 몸의 삼분의 일 가까이를 차지하는 꼬리.

등에는 용의 피막 날개 같은 것이 큼직하게 붙어있고, 비늘 덮인 몸뚱이에는 나무뿌리 같은 촉수들이 수없이 삐져나와 덜렁거린다.

거기다 눈 열 개 달린 쥐대가리 같은 머리통까지 붙여놓으니, 그야말로 악마마저 경악할 법한 괴이한 생명체이긴 했다.

모니터 너머에서도 경악할 수준의 몹 디자인에, 첫 조우 때는 어떻게 대처도 하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해버렸을 정도로.

"생각보다 재주가 더 좋구나! 하지만 바르카부스는 용에 필적하는 괴수···그 정도 화력으로는 쓰러지지 않는다!"

넋을 잃고 전투를 쳐다보던 픽카케가 느닷없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안타까울 정도로 악에 받힌 목소리. 허나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

푸른 전격이 비늘 사이를 파고들고, 화염이 비늘 겉면을 그을리고는 있으나 그뿐.

숙련된 대장장이가 주조한 합금 이상으로 단단한 비늘은 쉽게 부서지지 않았고, 가까스로 안쪽 속살까지 미친 피해는 괴수가 미친 듯한 재생력으로 실시간으로 회복하고 있었으니까.

[···극악한 혼종이로다. 에낙사구스의 솥구덩이를 따라한 결과물인 것인가.]

심상 너머 적창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댈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룡의 추측대로 암월단은 에낙사구스의 안배로 만들어진 조직.

다만 원채 꽁꽁 숨겨진 정보이기에, 댈런도 백 회차가 훌쩍 넘어갈 때까지 알지 못했던 사실이기도 했다.

대륙에는 흑마법사를 제외하고서도, 암월단과 같이 악신의 끄나풀 역할을 하는 조직이 꽤 많았다.

암월단처럼 음지의 조직뿐만 아니라, 양지에서 대놓고 활동하는 단체들도 드물지 않을 정도였고.

'암월단이 움직이기 시작했으니, 놈들도 머지않아 본색을 드러내겠지.'

그렇게 되면 곧 대륙은 전란에 휩쓸리게 될 테였다.

양지에서 활동하는 악신의 안배들 중에는, 국가를 움직일 정도로 규모가 거대한 단체도 존재했으니까.

하지만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할 일. 당장으로서는 눈앞의 괴수를 쓰러뜨리는 게 우선이었다.

[영역을 개방하지 않고서는 처치하기 불가능해 보이는구나···저 서인(鼠人) 암살자는 그걸 노린 듯 하고.]

'그럴 거요. 설령 억지로 개방한다 해도 차르국과 척을 지게 될 거라 생각한 것이겠지. 구름 위의 낙뢰가 이곳까지 닿으려면 도시의 한 구역을 통째로 박살내야 할 테니까 말이오.'

[과연 암살자다운 발상이로구나. 과할 정도로 목표의 능력을 제약하는 쪽에만 치중한 모습이야.]

적창이 말했다. 그녀는 낮게 웃고 있었다.

[그럼 보여주면 되지 않겠느냐. 용을 본뜬 저 가짜 혼종에게, 진룡의 모습을 본 네가 만들어낸 영역 속 작품을 말이다.]

약간 신난 듯한 울림.

댈런은 고개를 끄덕이고 손을 뻗었다.

그러자 염사가 소멸하며 단창이 되어 돌아오고, 세 개로 나뉘었던 신형이 그림자처럼 녹아 흩어졌다.

캬악?

갑작스레 멎은 공격에 괴수가 비틀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열 쌍의 눈동자에 잡힌 건, 단창을 어깨 위로 들어올린 채 눈을 반개한 댈런의 모습.

쿠르릉···.

반개한 눈동자 너머.

한없이 늘어난 시간 속에서, 영역을 바라보는 시선이 설산의 어떤 정경을 비춘다.

높게 뻗은 산봉우리들 사이에, 유독 깊게 꺼진 분지에 웅크린 짐승.

몸통은 길다란 불뱀의 형상에, 날개와 두 발은 시퍼런 전격의 그물로 번쩍인다.

'화염 화살과 쏘아지는 번개.'

이 심상이 완성된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오두막의 뒷마당에서 꼬리 물기를 하던 주문들은, 고유 스킬인 염사와 뇌조로 바뀐 뒤 한동안 산맥 사이를 배회했으니까.

일반적으로 하나의 가능성이 만들어내는 풍경은 하나.

허나 시간이 흐르며 두 주문에서 뻗어나온 가능성은 댈런의 심상 속에서 하나로 융화되기 시작했다.

그건 시간이 지날수록 댈런이 적창의 힘에 익숙해져갔기 때문이었고, 동시에 청린 아카샤의 성장을 끊임없이 옆에서 지켜본 영향이기도 했다.

캬아아───!

그리고 그 끝에 만들어진 건, 산맥에 둥지를 튼 두 번째 용.

「영역 개방 : 이색의 비룡」

적창의 모습을 본따 만들어낸 전격과 화염의 용이, 세계의 경계를 찢고 그 날개를 현실에 드리웠다.

그리고.

으직!!

새빨간 화염으로 넘실거리는 주둥이가 콱 닫히자, 거대 괴수의 머리통이 허무하리만치 손쉽게 뜯겨나갔다.

"···어?"

"어는 무슨."

댈런은 검을 뽑아 내리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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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클라힘 방어전(1)

쿠과가가가각!

위에서 아래로 내리그어진 단순한 검격.

그 단조로운 선분에 전당 바닥이 말린 두부처럼 부스러진다.

"크하아악!"

예지력의 경고를 받은 픽카케가 이를 가까스로 피해냈다.

완전히 피하지는 못했다. 왼쪽 팔이 어깨부터 통째로 잘려나갔으니까.

"왜, 왜···이럴 수는······."

경악으로 물든 쥐인간의 얼굴. 검끝이 한 번 더 호선을 그려낸다.

이번에도 픽카케는 예지력으로 껑충 뛰어 피했다. 그 결과 허리가 잘리는 대신 두 허벅지 아래쪽이 사라졌다.

"여, 영역에 대체 몇 개의 풍경을···신도 아닌 한낱 인간이, 어떻게······."

차가운 돌바닥에 등을 뉘인 채, 피거품을 그륵거리면서 중얼거리는 말.

댈런은 무덤덤한 시선으로 그걸 내려다보다가 등을 돌렸다. 그의 눈앞에 머리 잃은 괴수가 쿵 하고 쓰러졌다.

화륵! 까드득! 우득!

화염과 전격의 용이 괴수의 사체를 씹어 부수는 동안, 댈런은 곁에 떨어진 시체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배신당한 악신의 기수의 시체]

- 악신 에낙사구스의 기수로서 차르국을 멸망시킨 암흑기사의 시체. 대륙을 집어삼킨 악마 군세의 선두를 이끈 기수는 수많은 살육과 약탈로 악명이 자자했으나, 에클라힘 공성전 이후 같은 편이었던 암월단의 간부가 판 함정에 빠져 죽었다.

악인의 끝은 비참한 법이라던가.

그 말대로 잿빛 시체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괴수에게 온몸이 산 채로 짓씹히고, 위장에서 녹아내리는 고통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겠지.

"······."

그건 수많은 마을과 도시들을 불태운 흑마법사가 맞이하기에 합당한 최후였다.

그럼에도 그 결말을 보는 댈런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어떤 통쾌함 대신 눅진하고 흐릿한 의문이었다.

만약 내가 게임을 플레이하지 않았다면, 죽어 마땅한 이 악인은 과연 어떻게 되었을 것인가.

눈 덮인 산을 내려와 악신 에낙사구스의 기수가 되었을까?

아니면 오두막의 사냥꾼으로 세상이 끝날 때까지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며 삶을 이어나갔을까?

"···쯧."

답 없는 의문을 떨쳐내고는 손을 뻗는다. 어쨌든 지금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배신당한 악신의 기수의 시체를 회수했습니다. 능력을 계승합니다.]

[계승 보상 : 근력 +1, 마력 +1, 영혼 착취(B)]

댈런은 시체를 회수한 뒤 용을 역소환하고 고개를 돌렸다.

역시나 픽카케는 그 사이 또 헛짓거리를 벌이는 중이었다.

"에낙사구스여, 내 직접 고문해서 죽인 삼백 명의 영혼을 바칩니다. 마지막 힘···을···크아아아아!"

품속에서 꺼내든 새까만 수정 목걸이가 불길하게 진동하더니, 이내 퍽 하고 깨지며 쥐인간의 몸에 사특한 힘이 깃들기 시작한다.

슈르륵!

잘려나간 왼팔과 두 다리에서 일렁이는 보랏빛 기운.

절단면에서 뻗어나온 촉수 같은 그림자가 순식간에 팔다리의 실체를 이뤄냈다.

방금까지 바닥을 기던 쥐인간이 한순간에 공중제비를 돌며 몸을 일으켰다. 놈은 품속에서 낡은 스크롤 하나를 꺼내들며 소리쳤다.

"너, 오만한 전사야! 내가 지금은 물러나지만, 너에게 두 번의 기회는 없을 거다!"

유일하게 멀쩡한 오른손과 보랏빛 그림자로 재구성한 왼손.

쥐인간은 양손으로 우악스럽게 스크롤을 움켜쥔 채, 당장에라도 찢을 듯이 팔에 힘을 잔뜩 줬다.

하는 말과 행동을 보아하니, 저건 분명 텔레포트 스크롤이겠지.

실패율이 아득하게 높기로 유명한 마법을 안정적인 스크롤로 만들어내기까지, 얼마나 많은 희생물을 악신에게 바쳤을지는 추측하기 어렵지 않다.

다 잡은 적을 놓치기 직전의 상황. 하지만 댈런의 얼굴에 조급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그는 입을 열었다. 그리고 손가락을 두 번 딱딱 튕겼다.

"쎄― 타로스."

빠르고 낮은 영창.

손끝을 튕기고 움켜쥐는 간단한 트리거와 함께 맺어진 술식.

용이 남긴 열기로 이글거리던 전당의 공기가 차갑게 식고, 이변을 느낀 픽카케가 스크롤을 찢으려 한 순간이었다.

"흐으?"

손이 없다.

스크롤을 잡고 있던 두 손 중 하나가 사라지고 없었다.

다음은 두 다리였다. 지지할 다리를 잃은 몸뚱이가 그대로 바닥으로 추락했다.

"끄아아악!"

잘린 허벅지가 철퍽 소리를 내며 땅에 닿고, 뼈와 근육이 짓이겨지는 통증에 찍찍거리는 비명이 전당을 메아리친다.

댈런은 움켜쥐었던 오른손을 슬쩍 펴봤다. 진한 보랏빛 기운이 손아귀에서 일렁이고 있었다.

그건 삼백 명의 원혼을 바쳐 얻어낸 팔다리와 활력. 영혼을 갈아서 만들어낸 지옥의 동력이었다.

"···이런 느낌인가."

지옥문의 열쇠 스킬을 얻은 지 꽤 되었음에도, 제대로 흑마법을 사용하는 건 처음이었다.

핏빛 제례용 단검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원혼을 흡수하고, 복잡한 주문의 절차를 전부 생략하며 지옥문을 비틀었던 경험뿐.

다만 악신의 기수가 가지고 있던 비기답게, 영혼 착취는 그런 얕은 수준의 재주가 아니었다.

B등급 스킬부터는 신비의 영역. 그 능력은 일반적인 흑마법과는 궤를 달리하는 바.

영혼 착취 스킬은 살아있는 생명의 영혼을 포함해, 추출된 영혼이나 그 영혼으로 얻어낸 지옥 마력마저도 자유롭게 강탈할 수 있는 이능이었다.

그건 상대가 악마이거나 그와 비슷한 수준의 흑마법사가 아닌 한에야, 무슨 짓을 하던 댈런이 일방적으로 찍어누를 수 있다는 소리이기도 했다.

"후우."

어찌됐건 마치 살아있는 듯 손 안에서 꿈틀거리는 지옥 마력은, 굉장히 이질적이면서 불쾌한 감각이었다.

댈런은 눈살을 찌푸린 채 픽카케에게 다가갔다. 불쾌한 건 불쾌한 거고, 하던 일은 마무리하는 게 맞았다.

"끄으, 흐으으으······."

다시금 바닥을 기게 된 픽카케는 고통에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댈런은 아공간에서 핏빛 단검을 꺼내, 손 안에 응집된 힘을 단검에다 불어넣었다.

"자, 잠깐! 너도 흑마법사였···!"

"쎄 글램."

쩌저저적―!

허공에 균열이 열렸다. 불길한 마력이 일렁이는 공간의 틈.

입을 쩍 벌린 쥐인간이 뭐라 말을 이어갈 새도 없이, 댈런의 도끼가 저 혼자 날아들어 놈의 머리통을 찍어버렸다.

"컥···!"

쥐인간의 숨이 끊어지는 것과 동시에, 길쭉하게 열린 균열이 놈의 육체에서 빠져나온 영혼을 빨아들인다.

암월단의 상급 간부를 지옥 직행 열차에다 태워보낸 댈런은 손을 휘저어 지옥문을 닫았다.

[지옥은 광대하지. 다섯 신들의 지배력마저 닿지 않는 곳이 그리 드물지 않을 정도니라. 네가 놈을 직접 지옥으로 보내버렸으니, 에낙사구스라도 놈의 영혼을 찾을 수는 없을 게다.]

적창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댈런은 말없이 단검 손잡이를 매만졌다.

단검이 웅웅 떨리고 있었다. 잠깐 맛본 힘이 마음에 들었는지, 사특한 기운을 줄기줄기 흘리는 핏빛 단검.

그 울림은 마치 더 많은 영혼과 피를 가져다달라 유혹하는 듯했다.

댈런은 무심한 눈빛으로 단검을 아공간 안에 툭 던져넣었다. 난데없이 뒤통수를 얻어맞은 악마가 비명을 질렀다.

[그악! 따거라!]

[놈의 영혼은 영겁에 달하는 고통 속에서 서서히 소멸해가겠지. 타인의 영혼을 희생시켜 힘을 얻는 자에게 어울리는 결말이로구나.]

적창의 목소리는 어딘가 엄중했다. 댈런은 픽 웃었다.

"타인의 영혼을 희생시킨다···그거 나 이야기하는 거요?"

[그, 그럴 리가 없잖느냐. 애당초 너는 아무 대가 없이 놈을 벌한 것 아니었느냐. 본디 힘 자체가 악하지는 않은 법이다. 그걸 쥔 이의 의도가 악해질 수는 있어도.]

"···그런가."

[그래. 우리 용들의 몰락 역시 그러했느니라. 용이 처음부터 악마와 같은 부류가 되었던 게 아니다. 용신이 그 길을 택하지만 않았더라도···.]

말끝을 흐릿하게 얼버무리는 적창. 댈런은 관심을 접고 발걸음을 옮겼다.

픽카케의 시체는 죽은 뒤에도 텔레포트 스크롤을 꽉 쥐고 있었다. 댈런은 조심스레 스크롤을 회수하고는, 놈의 품속을 마저 뒤져보았다.

얻어낸 건 많지 않았다. 그로서는 사용하기 어려운 암살 도구들과 돈 조금, 그리고 암기 수십 자루가 끝.

댈런은 그것들을 모아 스크롤과 함께 아공간에 조심스레 집어넣었다. 다른 건 몰라도 스크롤은 활용할 방도가 무궁무진했다.

회백의 투사에게서 계승한 이능으로 공간 도약을 유사하게 흉내내게 된 댈런이었지만, 그 방식에도 나름의 한계들이 존재했다.

다른 이와 동행할 수 없다는 점이나, 먼 거리를 이동할 수는 없다는 점 등등.

스크롤을 연구하면 그런 한계점의 돌파구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거기다 그 과정에서 스크롤에 내장된 목적지, 즉 암월단의 숨겨진 심처가 어디 있는지 특정할 수도 있을 테고.

'할 일이 많군.'

해결되지 않은 일들이 산처럼 쌓여있는데, 해야 할 일은 계속 늘어만 간다.

댈런은 손끝에서 불꽃을 일으켜 괴물과 암살자의 시체를 태워버리고, 전당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로써 이 도시에 잠들어있던 시체는 전부 회수했다.

지금부터는 전쟁을 준비할 시간이었다.

***

에클라힘 궁전의 첨탑.

댈런은 난간에 몸을 반쯤 걸친 채, 저 아래쪽 거리의 정경을 내려다보며 턱을 쓰다듬었다.

가장 높은 곳에서 왕도 전역을 내려다볼 수 있는 이곳은, 각종 결계와 은폐 술식으로 외부에서는 모습조차 감춰진 장소였다.

성벽 너머까지 한 눈에 들어오는 전략적인 이점 뿐 아니라, 첨탑 자체에 내장된 술식적인 기능 때문이기도 했다.

댈런이 이곳에 자리한 것 역시, 차리나가 그의 출입을 허락했기에 가능한 일.

"차는 좋아하지 않는다고 들었어요."

낯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막 첨탑 계단을 올라온 차리나가 쟁반을 든 모습이 보였다.

"다도에 관심은 없지만, 커피에는 또 남다른 애정을 보인다고 하던데. 싸움 직전에 마시는 음료는 각별한 법이죠. 그래서 준비해봤어요."

"왕실 특무대가 일을 잘 하긴 하나 보군. 그런데 그거 마실 수 있는 건 맞소?"

"의외로 농담에도 능하군요. 그런 인상은 아니었는데."

"···농담 아니었소만."

차리나가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쟁반은, 사실상 얼음 조각품이나 다름없었다.

조금 전까지 펄펄 끓었을 커피와 찻물마저도 표면에 살얼음이 동동 떠다닐 정도.

"어서 마셔요. 찬 기운은 찬 기운으로 이겨내는 법이죠."

"비슷한 말이 고향에도 있긴 한데, 그렇다고 내가 얼죽아는 아니라서."

"신기한 어감이네요. 고향이 북부는 아니라고 들었는데, 그건 어디 말인가요?"

차리나의 눈꼬리가 흥미롭다는 듯 휘어졌다. 그녀의 얇은 손가락이 찻잔을 기울였다.

얼어붙은 찻물이 사르르 부스러지며 물 흐르듯 입술 안으로 넘어갔다. 댈런은 그 진기한 광경을 가만히 보다가, 성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림자는 잘 처리했나요?"

"덕분에."

"다행이네요. 어쨌거나 내 도시의 지하에 도사린 그림자를 몰아냈으니, 의뢰비에 추가금을 얹어주도록 하겠어요."

더 많은 황금이라. 나쁘지 않지. 세계가 멸망하기 직전까지도 황금은 쓸 데가 많았다. 도통 쓸 시간이 없어서 그렇지.

"곧 싸움이 벌어지는 마당에 왜 따로 불러냈는지 궁금하겠죠. 별 거 아니에요. 잠시 사담을 나누고 싶었을 뿐. 이 전쟁이 끝나고 나면 다시 이야기할 기회가 없을 지도 모르니까요."

후. 작은 한숨. 차리나는 빈 잔을 내려놓았다. 그녀는 새하얀 예복의 소매를 천천히 걷어올렸다.

"수백 년 전, 역천의 우물은 선각자를 통해 예언했어요. 머지않아 이 세계는 닫힌 결말로 다가갈 운명. 하지만 수많은 시간선들의 가능성을 모아, 그 결말을 타파할 존재를 선택할 것이라고."

"······."

"혹자는 그 존재가 반복되는 시간선에 예속된 회귀자일 거라 말하고, 반대로 선견의 권능으로 시간선을 미리 내다보는 선각자의 한 부류일 거라고 이야기해요."

소매를 걷은 차리나가 댈런의 곁으로 다가왔다. 곁에 선 것만으로도 그녀에게서 흘러나오는 냉기가 선명하게 느껴졌다.

보통 사람이라면 순식간에 살을 잘라내야 할 수준의 동상을 입혔을 냉기.

허나 그런 냉기도 댈런의 피부 밑에서 꿈틀거리는 용혈을 식혀내지 못했다.

"몇 달 전부터 당신의 행보를 지켜봤습니다. 용살자의 소문이 들렸을 무렵부터였을 거예요. 누군가는 그저 난세에 나타나는 영웅 중 하나라고 여기겠지만, 그저 영웅이라기에는 당신이 품은 그릇이 너무나도 넓죠."

"그래서 내가 그 예언의 주인공이라 생각한 거요?"

"맞아요. 하지만 확신할 수는 없었죠. 그러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었으니까. 그래서 불러냈어요. 확신을 가지고 싶어서."

"···확신이라."

댈런은 턱을 긁적였다. 북쪽 성벽 너머, 저 멀리 먹구름이 다가오는 게 보였다.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건 없겠군."

180

에클라힘 방어전(2)

"스스로가 예언의 주인공이 아니라고 생각하나요?"

차리나가 말했다.

"글쎄."

댈런은 어깨를 으쓱였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는 역천의 우물이고 나발이고 아는 게 없었으니까. 그저 현질 좀 했다가 이 세계에 떨어졌을 뿐.

스스로가 어떤 주인공이라 생각하던 시절도 있긴 했다. 꿈 많던 10대와 자신감이 가득하던 20대의 그는 그랬다.

하지만 결국 그 역시 특별할 것 없는 수많은 사람들 중 하나였다. 이 세상에 떨어져 좀 비범한 육신을 입은 뒤에도, 그 생각은 크게 변함이 없었다.

아주 조금의 변화가 있다면, 그건 삶의 태도였다.

태어났기에 그저 살아가는 게 아니라, 스스로 살아내려고 하는 삶의 태도.

"애당초 누구 하나만 주인공이겠소. 모든 사람은 자신의 삶에서 주인공일 거요. 예언이고 뭐고 그런 것 없어도. 다만 그 연극이 비극이냐 희극이냐는 본인들의 선택이겠지."

"모두가 주인공이라···기이한 해석이군요."

"도움이 안 될 거라 하지 않았소."

"아뇨, 충분히 도움이 됐습니다."

펄럭.

뒤돌아 첨탑 중앙을 향하는 차리나. 예복의 폭 넓은 옷자락이 바람에 흔들렸다.

첨탑의 한가운데, 서릿발 왕좌와 유사한 모양의 의자에 도달한 그녀는 팔걸이 부분에 꽂혀있던 왕홀을 뽑아들었다.

구우우웅···.

진동하는 대기. 퍼져나가는 무형의 압력.

첨탑 위의 공기가 급격하게 얼어붙는 동시에, 댈런의 입에서 뿜어지는 김이 짙어졌다.

댈런은 고개를 들었다. 불현듯 회색 먹구름이 드넓은 도시 위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의심하는 것처럼 느껴졌다면 미안합니다."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본다. 차리나는 왕좌 위에 앉아 양손으로 왕홀을 부여잡고 있었다.

어깨부터 뺴곡하게 자리한 룬 문자들이 제각기 번쩍이며 춤을 추고, 첨탑의 기운과 공명하면서 수백 가지 술식을 준비해나간다.

"이 싸움에 걸린 건 제 목숨만이 아니어서 그랬습니다. 이 땅, 이 나라 백성들의 목숨까지 함께 판돈으로 걸려 있죠."

"······."

"수백 살 먹은 타국의 노괴들과는 달리, 저는 여전히 이 자리가 버겁습니다. 제게 주어진 무력은 온전히 저의 것이지만, 어찌 남의 배에서 태어난 자식들의 목숨까지 제 것이라 할 수 있을까요."

힘겹게 끌어올리는 입꼬리.

이 순간에도 강맹하게 몰아치며 힘을 불려가는 권능과는 상반된 표정이었다.

"허나 조금 전 당신의 말을 듣고 확신이 섰습니다. 나의 인간적인 유약함과는 별개로, 당신이라면 백성들의 운명을 맡겨도 될 사람···."

"푸흐, 걱정이 정말 많으셨나 보군."

낮은 웃음. 나름 심각하게 이야기를 늘어놓던 차리나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댈런은 그 찡그림을 보며 반란군의 원로들을 떠올렸다.

권력을 잡기 위해 모든 걸 쏟아붓고, 필요하다면 백성의 영혼이라도 가차 없이 희생시키던 놈들.

그들의 눈에 차리나는 유약한 군주일지도 모른다.

왕홀을 허공에 띄워올리며 수인을 맺어가는 그녀를 뒤로 한 채, 댈런은 첨탑의 난간을 밟고 올라섰다.

"난 그쪽에게 고용된 일개 용병일 뿐이오. 백성의 운명이니 그들의 목숨이니 하는 건, 이 나라의 왕인 그쪽이 짊어져야 할 일이지."

"······."

첨탑의 높이는 까마득했다. 댈런은 저 아래 도시의 전경을 찬찬히 뜯어봤다.

오와 열을 맞춰 행군하는 철혈군대 병사들. 다급하게 물자들을 실어나르는 수레. 주요 골목마다 방벽과 함정들로 구축되는 방어선.

노인과 어린아이는 도심부의 주요 건물들로 대피하고 있었다. 젊은 여인들은 성벽으로 향하는 연인에게 마지막으로 입을 맞췄다.

응원의 환호와 이별의 절규가 함께 메아리치는 시가지. 울음은 함성과 섞여 떠들썩했다.

"······."

그건 그저 내려다보는 것만으로도 마음 어딘가를 아릿하게 만드는 광경이었다.

저 백성의 통치자이자 주인으로서, 이 모든 광경의 무게를 짊어진 부담은 상상할 수 없는 무언가겠지.

많지 않은 나이에 책임을 외면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었다.

온갖 비틀린 심상으로 초월자의 자리에 오른 이가 수두룩한 이 세계이기에 더더욱.

스륵.

댈런은 허리춤에 손을 얹었다. 도끼날을 만지는 손끝에 자잘한 실금이 느껴졌다.

거센 바람이 몰아치는 난간 위. 자연스럽게 균형을 잡은 그가 말했다.

"하지만 걱정 마시오. 난 적어도 받은 돈을 떼먹는 용병은 아니니까."

그리고 약속받은 보수면 악마 십수 놈 잡아주는 것 정도야 일도 아니지.

흘러가듯 덧붙인 그의 신형이 난간을 박찼다.

투웅―

순식간에 치솟는 시야. 차디찬 바람이 온몸을 밀어낸다.

댈런은 짧게 숨을 그러모으고 재차 허공을 박찼다. 저항 끝에 부서지는 바람의 벽. 주변의 풍경이 흐릿하게 늘어졌다.

휘이이이···!!

얼굴을 두드리는 한기를 끓어오르는 용혈이 훅 하고 증발시키고.

이글거리는 마력광을 눈동자에 담은 채, 성벽 저 너머의 동토를 내려다본다.

쿠르르릉···.

북쪽 땅은 이질적인 먹구름으로 뒤덮여 있었다.

비나 눈 대신 불덩이와 재를 흩뿌리는 새까만 먹구름. 악마와 마물들의 군세를 수호하는 악신 쑴의 권능.

[호오. 쑴이 실로 작정했나보구나. 며칠 전에 비해 그 세력이 더욱 강력해졌어.]

같은 광경을 내려다보는 적창이 중얼거렸다. 먹구름 아래에는 끝이 보이지 않는 군세가 진군해오고 있었다.

기괴하게 몸이 뒤틀린 수만 마리의 마물과, 그 배 이상은 족히 되는 오염되고 타락한 야만인들.

야만인의 숫자는 어림잡아 십만을 훌쩍 넘어섰다. 저 정도 숫자면 서리고원 북부의 야만족은 9할 이상이 끌려온 거나 다름없었다.

일부는 스스로의 의지로 제 삶을 바쳤겠지만, 대다수가 사로잡힌 채 산 제물로 몸과 영혼이 공양됐겠지.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눈물 흘려줄 때는 아니었다. 지금의 저들은 전신에 뿔과 가시가 돋아난 타락한 병사들일 뿐이니까.

투웅―

고도를 좀 더 높이자 군세의 후위에서 정예 병력을 이끌고 오는 악마들이 보였다.

오십이 넘어서는 악마들. 이 세계에서 눈을 뜬 이래, 한 자리에 저만큼 많은 악마가 모인 건 처음 목격하는 광경이었다.

대공급의 악마가 둘이고, 나머지는 중급이나 하급.

놈들을 육안으로 확인한 순간 수많은 알림창이 우르르 쏟아졌다.

[악마의 창끝에 꿰인 사제의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속박된 사령술사의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고문을 버티지 못한 마법사의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무너지는 성벽을 일으킨 장인의 시체를···.]

[천공요새의 부름을 받은···.]

[······.]

열 구가 넘는 시체.

악마에게 죽어 한 입 거리 식사가 된 결말들.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모니터 너머의 장면들을 흘려보내며, 댈런은 허리춤의 도끼를 뽑아들었다.

금강궁에서 받은 도끼는 수많은 싸움을 거치며 여기저기 실금이 가 있었다.

어쩔 수 없었다. 유물 무기라 하더라도 내구도가 무한한 건 아니었으니까.

"······!!"

그때 군세의 선두에서 야만인과 마물들을 이끌던 하급 악마가 그를 발견했다.

수박만 한 눈동자가 몸통 한가운데서 끔뻑거리는 사 미터짜리 거인 형상의 악마.

믿을 수 없다는 듯 커다란 눈동자가 부릅떠지고, 뭔가 샛노란 마력이 그 앞에서 맺혀갔다. 놈이 뭐라 소리 질렀다. 주문인 모양이었다.

"뭘 야려, 새꺄."

그리고 댈런은 사납게 웃었다.

쉬이―

허공을 가르고 자취를 감춘 도끼.

잿빛 음영이 번뜩이며 손쉽게 공간의 틈을 열어젖힌다.

사라진 도끼가 나타난 건 수박 눈깔의 면전이었다.

문자 그대로 눈앞에서 나타난 도끼. 대처할 틈도 없이 눈알에 틀어박힌 도끼가 황금빛으로 폭발했다.

캬아아아아···!!!

한참을 떨어진 이곳까지도 비명이 전해져온다. 놈의 눈앞에서 맺히던 샛노란 기운이 굴절된 광선처럼 비산하며, 자기 편의 마물들 수십을 일거에 쓸어버렸다.

댈런은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는 회백색 음영이 어른거리는 손아귀를 꽉 움켜쥐었다.

「회명(回冥) : 발화(發火)」

화르르르···!

도끼에 맞은 악마의 몸뚱이가 새빨간 불꽃으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비검의 힘을 파고든 끝에 얻게 된 결실 중 하나였다.

회명과 발화. 두 가지 고유 스킬을 조합하는 과정에서, 레레도나라의 비검이 품은 잠재력을 응용해 접목시킨 것.

아직 신비의 힘을 직접 뒤틀어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6위계의 경지에 이르지는 못했으나.

이를 간접적으로 이용할 수 있다는 건, 적어도 그 경지를 향해 한 걸음 정도는 더 나아갔다는 증거겠지.

신성력이 일렁이는 화염의 향연 속, 악마의 비명이 꿈틀거림으로 잦아든다.

최선두의 기수인 악마가 쓰러지자 진군을 멈춘 군세. 후위에서 이상을 느낀 대악마가 이쪽을 응시했다.

"······."

거대한 갑주가 말없이 노려본다. 댈런은 보란 듯이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짧은 순간 시선이 교환된 뒤, 갑주가 손을 들어올렸다. 놈이 소리쳤다.

───!!!

먹구름에서 붉은 뇌광이 번쩍이고, 멈췄던 군세가 도시를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천공요새의 부름을 받은 대마법사의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댈런은 갑주의 머리 위에 떠오른 문자를 한 번 더 눈에 담고서, 저 아래 성벽을 향해 몸을 떨어뜨렸다.

성벽 위의 수성 병기들이 막 장전을 마쳐가고 있었다.

전투가 시작되었다.

***

어느 공성전이나 시작은 똑같다.

긴장된 공기를 날카롭게 관통하는 외침.

"발사!!"

꽈과과광―!

지휘관의 명령에 수십 문의 대포가 일제히 천둥을 뿜었다. 포물선을 그리며 하늘 높이 날아가는 포환들.

비요른의 개량을 거쳐 난쟁이의 룬 마법이 접목된 포환들은, 수 킬로미터 거리를 활공해 적진의 선두에 직격했다.

두두두두···!

룬 새겨진 돌덩이가 땅을 튀며 굴러간다. 타락한 야만인들이 고깃덩이가 되어 으깨져나갔다.

전장을 이리저리 가로지르는 끈덕한 핏덩이의 선분들. 흩뿌려진 뜨거운 피가 채 식기도 전에 두 번째 성벽의 대포들이 불을 뿜었다.

"2열 발사―!"

꽈과과광!!

첫 번째 성벽의 대포들이 재장전에 들어간 사이, 두 번째와 세 번째 성벽에서 포환들이 쏟아진다.

그리고 나면 다시 첫 번째 성벽이 우렛소리를 토했다. 최전방에 배치된 철혈군대의 사수들은 짧은 시간에도 장전을 끝낼 만큼 숙련되어 있었다.

쿵! 쿠궁! 쿠르르···!

한참을 떨어진 성벽 위쪽으로도 진동이 전해진다.

활시위를 걸고 대기하던 중년의 사내가 과장되게 웃음을 터뜨렸다.

"크하하! 악마의 하수인이니 뭐니 해도 별 것 아니군. 눈 먼 돌덩이에 갈려나가는 신세라니!"

"이 사람아! 그런 소리 말게. 부정 탄다고!"

"악마와 싸우는데 더 탈 부정이 어디 있겠나? 그리고 저기 성기사님을 보게! 그런 미신 따위는 접어두란 말이야!"

사내가 동료의 어깨를 두드리며 이쪽을 쳐다봤다. 루시아는 말없이 잠깐 눈을 마주치고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녀의 답례에 한껏 고양된 얼굴로 떠들기 시작하는 사내. 흉터가 많은 게 두 사람 모두 숙련된 용병인 모양이었다.

"······."

적들의 전열 곳곳에 일어난 피안개를 보며, 루시아는 천천히 숨을 가다듬었다.

오늘은 근 일주일 중 가장 칼바람이 거친 날이었다. 그럼에도 성벽 위는 기이하게 후끈거렸다.

아직 본격적으로 치고받지도 않았는데, 전장의 열기가 벌써부터 성벽을 뭉근하게 덥히고 있는 것.

그때 누군가가 그녀의 옆으로 다가왔다. 그가 말했다.

"저희는 언제 출격합니까?"

변성기가 온 목소리. 파른이었다.

미등록 용병으로 상단 호위를 하던 어린아이는 어느새 성기사단의 갑주를 걸친 수습기사가 되어있었다.

그것도 대외적으로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기사단장에게 직접 가르침을 하사받은 수습기사.

루시아는 소년의 외눈을 잠시 바라봤다. 그녀가 말했다.

"긴장되니?"

"···아닙니다. 그저 한시라도 빨리 저 악마들의 목을 썰어버리고 싶을 뿐···."

"나는 긴장된단다."

소년이 입을 다물었다. 루시아는 느릿하게 손을 들어 소년의 머리를 툭툭 만져주었다.

어린아이들은 키가 빨리 컸다. 가슴께에도 못 오던 소년은 그녀와 눈높이가 엇비슷해져 있었다.

하지만 키만큼이나 정신도 빨리 자라는 건 아니다. 두려움을 인정할 줄 모른다는 점은 소년이 아직 어린아이라는 증거였다.

'나도 두렵소.'

머릿속에 나직하게 울려퍼지는 굵고 낮은 목소리.

죽고 잊혀지는 게 두렵다던, 세상의 무게를 견디지 못할까 걱정한다는 남자.

그럼에도 그는 쉬운 길을 택하지 않겠다 다짐했다. 실패하는 것보다 무력하게 무릎 꿇는 게 더 싫다고 말했다.

"···이상한 사람."

두려움이라고는 한 점도 없을 것 같던 그가, 무덤덤하게 흘려낸 말은 그녀의 심중에 선명한 파장으로 남아있었다.

두 번이나 잃을 수는 없다고 했던가.

루시아는 다짐했다. 자신도 두 번이나 잃지는 않을 거라고.

"무서워해도 괜찮다, 파른. 성기사는 두려움을 모르는 광인이 아니야."

"······."

"모두가 두려워하며 물러서는 상황에서, 스스로도 두렵지만 신께 의지해 전장으로 달려가는 게 성기사란다. 명심해라. 두려움이 없다면 용기도 없어."

작게 끄덕인 파른이 고개를 돌렸다. 소년이 입술을 꽉 깨무는 게 느껴졌다.

루시아도 다시금 전장을 바라봤다. 적들은 끊임없는 화포 세례에 얻어맞으면서도 꾸역꾸역 전진하는 중이었다.

벌써 수백이 넘게 죽었지만 전혀 티가 나지 않는다. 타락한 야만인들의 숫자는 그만큼이나 많았다.

거적때기에 가까운 가죽과 철판으로 몸을 두르고, 피부를 뚫고 자라난 껍질과 가시로 그 빈틈을 메운 근육질의 거한들.

댈런도 성벽 어딘가에서 저 광경을 바라보고 있겠지.

그의 감각이라면 저 야만인들의 무리를 넘어, 수많은 마물들에 둘러싸여 있을 악마들을 이미 보고 있을지도 모르는···.

"···파른. 내 뒤로."

스쳐지나가는 육감의 경고.

퍼뜩 고개를 든 루시아의 눈에서 광채가 점멸했다.

줄기줄기 흘러나오는 신성력. 갑옷 틈 사이로 거세게 빛을 내뿜는 신성문신들.

"기사단! 방어 태세!"

성벽 위를 쩌렁쩌렁 울린 그녀의 외침이 끝나자마자, 저 멀리 하늘을 덮은 새까만 먹구름이 꿈틀거렸다.

붉게 이글거리던 먹구름의 일부가 앞으로 울컥 튀어나왔다.

전조는 그게 끝이었다.

───────!!

그리고 다음 순간, 수백 갈래의 붉은 뇌전이 성벽 곳곳을 폭격하고 있었다.

181

에클라힘 방어전(3)

"썩을."

욕을 씹어뱉은 댈런이 몸을 일으켰다. 구멍 숭숭 뚫린 갑옷 사이로 연기가 피어올랐다.

"괘, 괜찮으십니까···?"

곁에서 주저앉아 있던 용병 소년이 덜덜 떨며 그 모습을 바라봤다. 댈런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 봐야 찰과상이었다.

아군을 지키느라 붉은 뇌전에 직격을 허용하긴 했지만, 대부분 상쇄하고 조금 남은 마력이 피부를 그을렸을 뿐.

치지직···.

용혈의 재생력은 눈 깜짝할 사이에 흉터조차 없이 상처를 회복시킨다. 연기가 흩어진 갑옷 틈 사이로 돌덩이 같은 근육이 내비쳤다.

"어, 어라···?"

눈이 휘둥그레진 용병 소년을 향해 댈런은 손을 내밀었다.

"일어날 수 있겠나?"

"네, 네!"

용병 소년이 벌떡 일어났다. 다릿심이 풀렸는지 손을 놓자마자 휘청거리면서도, 어떻게든 가까스로 균형을 잡는 모습.

주변에서 웅크리고 있던 다른 병사들 역시 한 마디씩 감사 인사를 건네며 일어섰다.

댈런은 고개를 들고 성벽을 둘러봤다. 그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살아남았지만, 모두가 그들처럼 운이 좋은 건 아니었다.

"끄아아아아!."

"커, 허어, 죽여···줘······."

곳곳에서 들려오는 신음과 비명.

하반신이 사라진 병사가 단말마의 신음을 뱉고, 복부에 구멍이 뻥 뚫린 용병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자기 내장을 쓸어담는다.

악신 쑴의 권능으로 빚어진 먹구름. 거기서 쏟아진 붉은 뇌전의 폭격은 실로 어마무시한 위력이었다.

단단하게 지어올려진 삼중의 성벽 중, 첫 번째 성벽이 사실상 기능을 반쯤 상실했으니까.

콰르륵. 우르르르···!

여기저기서 성벽이 붕괴하는 소리가 들린다. 바닥까지 무너진 부분만 십여 곳이었다.

그밖에 반파된 곳이나 무너진 망루 등을 합치면 오십여 군데에 달하는 손상.

벼락이 직격한 곳에서 살아남은 이는 거의 없었다.

오히려 직접적인 타격을 피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여파에 휩쓸려 죽거나 중상을 입은 이가 수백에 달할 정도.

쿠르르릉···.

그때 새까만 먹구름이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방금 건 맛보기에 불과하다는 듯, 살아있는 생물처럼 기괴하게 꿈틀거리는 먹구름.

실제로 그 안에 응축된 뇌전의 마력은, 조금 전 떨어졌던 폭격의 배 이상 되는 힘이었다.

댈런은 성검의 손잡이를 조금 세게 움켜쥐었다. 저걸 막으려면 최소한 영역을 개방해야 했다.

그리고 그 순간.

[이건 제가 맡도록 하죠.]

어디선가 불어온 가느다란 바람 한 줄기가, 희미한 전성을 남기고 전성을 사라졌다.

쩌저저저적···!

공간이 얼어붙는 기이한 소음.

오싹하게 돋아나는 소름에 성벽 위 대부분이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봤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얼어붙은 궁전에 뾰족하게 솟은 첨탑이었다.

평소에는 존재하는지조차 몰랐던, 궁전 한가운데 피뢰침처럼 솟아오른 탑.

"차리나시여···?"

첨탑의 존재를 아는 걸 보니 특무대 요원인 걸까.

댈런의 곁에서 살아남은 병사 중 하나가 중얼거린 것과 함께, 차리나의 전성이 도시 전역에 쩌렁쩌렁 울려퍼졌다.

[에펠.]

[라치나.]

[카스타.]

[발케르···.]

단어 하나하나에 막대한 마력이 녹아난다.

한 어절이 곧 대규모 술식의 시동어나 다름없었다.

켜켜이 쌓여가는 수십 갈래 주문의 영창. 서로 공명하면서 점점 하늘을 향해 뻗어나간다.

구우우웅···.

첨탑을 감춰두던 결계마저 물린 채, 탑의 모든 여력은 그 공명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변을 눈치챈 북쪽의 검은 먹구름이, 성벽을 향해 붉은 뇌전을 뿜어내기 직전 멈칫하고.

[···스타티아.]

어느새 아득하게 멀어진 차리나의 목소리가 마지막 영창을 내뱉은 순간.

쩌적!

「영역 완전개방 : 창공 위 서릿발의 수호자」

하늘이 격변했다.

***

쩌저저적─────

그건 마치 호수가 얼어붙는 것 같은 광경이었다.

하늘을 담은 잔잔한 호수가, 갑작스런 냉기에 얼어붙으며 하얗게 뿌예지는 듯한 모습.

그러나 얼어붙은 게 호수가 아닌 하늘 그 자체라는 점에서, 이건 주문이라는 상식의 범주를 깨부수는 이적이었다.

쩌적───쩍──

탑을 중심으로 얼어붙은 하늘이, 부채꼴로 퍼져나가며 북쪽으로 진격한다.

그 아래에서 내달리는 회색 먹구름은, 일반인의 육안으로도 선명하게 보일 정도로 눈폭풍과 우박을 한가득 머금고 있었다.

얼어붙은 하늘에 둥근 태양이 굴절되어 타원형으로 비치고.

검은 구름이 붉은 뇌전을 뿜어낸 순간, 회색 먹구름에서 서릿발이 몰아쳤다.

꽈광━━쩌저저적!!!

하늘과 하늘의 싸움이었다.

거대한 눈보라가 파도처럼 밀려들고, 붉은 뇌전이 그 폭풍을 파고들어 깨부순다.

수십 갈래로 가지를 뻗어나가는 뇌전이 일순간에 공간째 동결된 순간, 검은 구름이 급격하게 몸집을 불리며 냉기를 밀어냈다.

모든 걸 얼려버리는 극한의 한기와, 고열의 전격을 내뿜는 검은 먹구름이 얽혀든다. 한 뼘이라도 상대방의 세력을 갉아먹고, 자신의 영역을 넓혀내기 위한 처절한 사투.

꽈과광! 꽈릉━쩌저적!

지상에서 올려다보기에, 그건 마치 신과 신의 대결과도 같았다.

"오오······."

"대륙 북방을 다스리던 대정령의 후예······."

"설마 인신(人神) 차르의 전설이 사실이었나?"

곳곳에서 터져나오는 경탄.

초대 차르가 왕권을 다지기 위해 만든 전설이, 마치 정말 있었던 일인 듯 느껴지는 정경.

그걸 멍하니 바라보던 댈런은 눈을 감고,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

차리나의 영역 개방은 그의 심상에도 깊은 깨달음을 남겨내고 있었다.

태곳적의 고룡이나 대악마와 동격인, 6위계의 초월자에게만 허락된 영역의 완전개방.

단순히 기상을 트리거나 도구로 사용하는 수준을 넘어서서, 세계의 법칙과 구성 자체를 자신의 것으로 온전히 대체하는 기적이다.

압도된다기보다는 호승심이 꿈틀거린다. 미궁도시에서 처음 영역 간의 충돌을 목격했던 때와도 비슷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고양감에 함몰될 때가 아니었다.

얽히며 충돌하는 두 하늘 아래, 적의 군세가 밀려오고 있었으니까.

"정신 차리시오."

낮고 굵은 목소리.

마력으로 증폭된 음성이 성벽을 따라 아스라이 퍼져나간다.

넋을 잃고 하늘을 바라보던 병사들이 나직한 일갈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궁병대가 시위에 화살을 메기고, 살아남은 대포에 산탄이 장전된다.

끄아아아아아아!

어느새 화살 한 바탕 남짓 거리까지 다가온 타락한 북방인들. 절규인지 함성인지 모를 놈들의 괴성이 성벽 위까지 들려왔다.

"산탄 발사!"

콰과과광!

하늘의 싸움 아래에서, 땅의 접전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

쉬이이익―

목표를 향해 날아드는 화살.

"크학!"

어깻죽지의 갑옷 틈을 관통당한 야만인이, 비틀거리며 몇 걸음 물러났다.

"크···으아아아!"

우득!

야만인은 괴성을 지르며 손을 뻗어 어깨의 화살을 부러뜨렸다. 울컥 흐르는 핏줄기. 붉어진 눈이 희생양을 찾았다.

"히익!"

놈의 눈에 먼발치에서 그 광경을 보고 주저앉는 궁병이 들어왔다. 방금 전에 화살을 쏜 장본인이었다.

그리고 야만인의 눈에 그건 야들야들한 고기였다. 놈의 우악스런 손아귀가 도끼를 던지기 위해 어깨 위로 들렸다.

타아앙!

지근거리에서 발사된 산탄의 폭풍. 들어올려진 손목이 그대로 끊어져 날아간다.

동시에 허공에서 모습을 드러낸 크레이그가 야만인의 목줄기에 검을 박아넣었다.

"꺽···!"

치솟는 핏방울을 재빠르게 피해낸 뒤, 아룡의 비늘로 만든 은신 망토로 금새 몸을 감춘다.

크레이그는 다시금 성벽 위를 내달리며 도움이 필요한 곳을 찾았다. 망토 아래에서 입꼬리가 웃음을 참지 못하고 씰룩거렸다.

"으하하! 이 산탄총 정말 쩔어주는군! 외눈의 명공이라는 칭호가 괜히 붙은 게 아니야! 이게 낭만이지!"

댈런이 들었다면 미간을 문질렀을 소리를 거침없이 뱉어대며, 적과 아군이 뒤엉킨 성벽 위를 순식간에 주파.

그 과정에서 여덟 명의 타락한 야만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크레이그는 무너진 망루의 잔해 사이에서 산탄총을 장전하며 숨을 돌렸다.

"그래도···이건 좋지 않군."

아군의 머릿수가 시시각각 줄어드는 게 느껴진다.

본격적으로 접전이 시작된 지 고작 한 시간.

첫 번째 성벽은 손쓸 틈 없이 밀리고 있었다. 다름 아닌 접전 직전에 쏟아졌던 붉은 벼락의 포격 때문이었다.

"첫 번째 성벽은 어차피 포기할 생각이었고, 그에 대비한 작전도 세워뒀다고 듣긴 했지만···."

그래도 너무 빠르지 않은가. 오 미터에 달하는 장벽이라면 적어도 하루는 버텨줄 거라 생각했는데.

철컥!

생각을 이어가는 한편 손은 습관처럼 움직였다. 재빠르게 총신 정비를 끝내고, 화약과 탄을 묶어놓은 종이 탄피를 밀어넣은 뒤 탄창 막대를 끼워넣는다.

사실 일선에서 전황을 가지고 지나치게 심사숙고해봐야, 별다른 차선책이 나오지는 않는 법이다.

빠져야 하는 타이밍만 잴 수 있다면, 그 전까지 한 놈이라도 더 쓰러뜨리는 게 최전방 전력의 임무 아니던가.

호흡을 가다듬은 크레이그는 은신 망토를 점검하고 일어섰다. 다시 전장에 뛰어들 시간이었다.

으직―

"커어···?"

느닷없이 복부를 뚫고 튀어나온 손만 아니었다면.

"감각이 좋군. 심장을 노렸는데 피했어."

"크, 무···슨······."

"은신 망토를 쓰는 걸 보니 특무대인가? 집행관급이 아니라면 받지 못하는 마도구라 들었는데."

비릿하게 웃는 목소리. 크레이그는 이를 악물고 등 뒤로 검을 찔렀다.

"흡···!"

"오, 이런."

예상치 못한 공격이었는지, 야만인이 황급히 물러서며 손을 뽑았다.

크레이그는 복부를 감싸고 주저앉았다. 훈련받은 대로 재빨리 포션을 끼얹자, 즉시 어마어마한 격통이 몰려왔다.

"끄으윽···!"

"흐흐, 제법 강단도 있군. 집행관의 고기 맛은 어떨지 궁금한데."

할짝.

야만인은 손에 묻은 살점과 피를 핥았다. 놈의 몸 곳곳에 자라난 붉은 갑피가 번들거렸다.

"나는 두카차. 원래부터 부족 최고의 전사였고, 신의 축복을 받은 지금 주변 부족 중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대전사다."

"지, 랄······."

"신의 제단에 해골과 피를 바치면 북방인 중 최고가 되기까지도 머잖았지. 어쩌면 승천해 필멸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그분의 대공이 될지도 모르고 말이야."

"미친 놈···. 악마 새끼가 되고 싶다는 말을···거창하게도 하네."

흐릿해지는 시야. 크레이그가 느릿하게 고개를 털며 말했다. 야만인이 웃었다.

"얼마 전 시체늪의 대공이 한 전사에게 소멸당했다지. 그 장본인이 북방인 출신일 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워낙 부족이 많다보니 어느 부족 출신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전투에서 기회를 노렸다가 놈의 수급을 취하면···응?"

야만인은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갑자기 세상이 뒤집힌 것이었다.

머지않아 세상이 두어 바퀴쯤 더 돌고, 자신의 몸뚱이가 내려다보였다.

느릿하게 길어진 시간감각 사이로 보이는 것들. 번뜩이는 성검과 몸뚱이 뒤쪽에 일렁이는 잿빛 그림자.

그 그림자 앞에 선 전사를 확인하고서야, 야만인은 마침내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의 머리가 방금 잘려나갔다는 것을.

"무···흐···!"

"머리 잘린 새끼가 말도 하네. 악신 따까리라 그런가."

콰직!

잘린 머리가 땅에 닿기도 전, 벼락같이 떨어진 검이 머리통을 두 쪽으로 갈랐다.

182

에클라힘 방어전(4)

쿵.

갑피로 둘러싸인 몸뚱이가 넘어간다. 3미터에 가까운 덩치의 타락한 전사가 남긴 경험치는 꽤 훌륭했다.

"무, 무슨 일격에 대전사를···."

"멀리서 봤는데 뭔가 너무 말을 주절주절 늘어놓더군. 생긴 건 안 그래도 주문쟁이인가 싶었지. 주문쟁이는 머리부터 날려야 하는 법이오."

"······."

"아, 혹시 방심하게 유도해서 심문할 생각이었소? 방해했다면 미안하오."

그걸 말한 게 아니었던 크레이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는 당혹스러운 한편 입은 웃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래, 이게 낭만이지. 크레이그는 생각했다. 댈런은 쿡쿡 웃는 그의 얼굴에서 묘한 광기를 느꼈다.

"······."

내장이 뜯긴 채로 포션까지 부었으니 아마 정신이 온전하기는 힘들 것이다. 댈런은 일단 그렇게 생각하기로 하고, 호흡을 가다듬으며 눈을 반개했다.

「몽환추적(夢桓追跡)」

「회백전도(灰白全圖)」

심상 속, 드넓은 전장이 흑백의 미니맵처럼 한눈에 들어온다.

첫 번째 성벽은 완전히 적군의 손에 떨어져 있었다. 곳곳이 무너져 사실상 기능을 잃은 성벽. 차르국의 깃발이 내려가고 대신 올라가는 악신 쑴의 깃발.

야만족들은 시체 더미 위에서 환호하고 있었다. 놈들의 선두는 이미 첫 번째 성벽과 두 번째 성벽 사이의 고밀도 시가지에까지 진격하는 중이었다.

'딱 적절한 타이밍이군.'

성벽 위에 더이상 생존자가 없는 걸 확인한 댈런은, 품속에서 수정구를 꺼내 쥐었다. 그가 말했다.

"비요른. 아무래도 지금이 적기인 듯한데. 준비는 되었소?"

[글라···아니, 크레모아 작전 말인가? 거참 발음하기도 어렵네. 어느 나라 말이야?]

"내 고향 말이오. 항전하던 아군 병력은 모두 후방으로 물렸소. 근방 일대의 성벽은 모두 적들의 손에 떨어졌으니 바로 준비해주시오."

[준비야 끝났지. 진작에 끝났는데···거참.]

통신구 너머, 외눈의 명공이 꿍얼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어지간히 화약을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자네는 그보다도 더하구만. 성벽을 탄환으로 써 함정을 팔 생각을 하다니. 그 정도로 미쳐야 5위계의 벽을 뚫을 수 있는 겐가?]

"헛소리 마시고 불이나 붙이시오."

[크흐흐···알았네. 눈보라가 몰아치는 전장이라, 폭탄 터뜨리기 딱 좋은 날씨지.]

수정구의 통신이 끊겼다. 곁에서 그 내용을 듣고 있던 크레이그는 자기 귀가 이상해졌나 의심했다.

무슨 성벽을 탄환으로 쓴다고? 폭탄 터뜨리기 딱 좋은 날씨?

피를 많이 흘려서 정신이 없나 싶은 차에 통신구를 품에 넣은 댈런이 다가왔다. 그가 손을 내밀었다.

"힘든 건 알겠지만 일어나시오. 죽기 싫으면 당장 여길 벗어나야 하니까."

"그게, 무슨···."

"이번에 깨달은 사실이 하나 있소. 경험치를 얻으려면 전사나 주문쟁이 둘 모두 답이 아니었다는 걸."

진중한 얼굴로 중얼거리는 댈런. 그의 억센 손아귀가 크레이그의 허리춤을 잡고 가볍게 어깨 위에다 얹었다.

"제작 직업군을 선택해야 했어. 화약 관련 스킬에 모든 자원을 몰빵해서. 현질로 드워프의 룬 마법 DLC도 살 수 있으면 더 좋고."

"······?"

"조금 어지러울 거요. 피를 많이 흘렸으니 잠시 기절할지도 모르겠군."

그 말을 끝으로, 댈런의 몸이 확 치솟았다.

꽈아아앙!

순식간에 상승하는 시야. 밀어찬 지면에서 돌 박살나는 굉음이 뒤따르고.

꽈아앙―!

재차 허공을 딛기도 전에, 저 아래 어디선가 비슷한 소리가 들려온다.

"도폭선 소리 한 번 우렁차군."

댈런이 말했다. 크레이그는 어지러운 시야를 부여잡고 성벽을 내려다봤다.

오 미터 높이의 최외곽 성벽. 그 안쪽 벽에 큼직하게 룬 문자가 빛나고 있었다.

"저건···."

크레이그는 난쟁이족이 아니라지만 룬어를 조금은 할 줄 알았다. 수 미터 간격으로 성벽을 따라 빼곡하게 새겨진 룬 문자의 주된 내용은 힘의 폭발.

온갖 수식어가 붙어 더 큰 폭발. 아주 큰 폭발 따위를 의미하는 문자들.

"오, 룬어도 할 줄 아시오?"

"예, 조금은······."

"화약 기술의 부족한 점은 대부분 룬 마법으로 때울 수 있더군. 방향성을 조절하는 부분에서 좀 애를 먹는 것 같긴 했지만, 명공이 괜히 명공이 아니지."

댈런이 씩 웃었다. 현대 지구의 잡지식을 이곳에서 써먹게 될 줄이야.

"기본적인 원리만 알려줘도 척척 구현해내더군. 말세에 손재주 하나만으로 영웅이라 불릴 정도면, 이 정도 천재성은 가져야 한다는 것이겠지."

아무리 자유도가 높다 해도, 여러 요소들이 제약된 게임에서는 시도할 수 없었던 응용.

허공을 짓밟고 순식간에 까마득한 높이로 올라서자, 그 장대한 풍경이 댈런의 시야에도 한눈에 들어왔다.

쿵···.

하수도에 걸쳐 땅 깊이 묻어둔 도폭선. 그 연속된 폭발이 마침내 목적지에 도달하고.

쩌저적···!

룬이 새겨진 성벽이 불길하게 갈라지며, 통째로 뒤틀려 도시 바깥쪽을 향해 부풀어오른다.

이변을 느낀 야만인들 사이에서 당혹스런 함성이 터져 나오지만, 이미 늦었다.

여기까지 온 이상 결과를 물리는 건 외눈의 명공이라 해도 불가능했으니.

쿠르르릉···!

화약의 폭발이라기보다 뇌성에 가까운 소리가, 부풀어오른 성벽의 한 구역에서 가장 먼저 울려퍼지고.

쿠지직──!

성벽을 따라 커다랗게 새겨진 룬 문자가 미친 듯이 점멸하며, 마지막 수 초의 카운트다운을 알린다.

그리고 폭발은 한순간이었다.

콰아아아아──!!

오 미터 높이의 외성벽이 한순간에 바스라진다.

십수 년간 쌓아 올린 수천 톤의 돌덩이가, 거대한 석재의 폭풍이 되어 도시의 바깥으로 몰아쳤다.

악신의 힘을 한가득 받아들여 인간의 몸을 반쯤 벗어던진 야만인들이라도, 그 무자비한 힘의 파도 앞에서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없었다.

그저 무력하게 찢겨나간 채, 폭풍과 하나가 되어 휩쓸려가는 것뿐.

콰과과과과과!!

동시에 바깥으로 수천 톤의 파도를 쏟아낸 후폭풍이, 거대한 화염의 물결로 안쪽 방향을 휩쓸었다.

최외곽 성벽과 중간 성벽 사이 백여 미터에 달하는 시가지.

그곳으로 진격해 들어오던 야만인들은 느닷없이 화염의 폭풍에 휘말려 뼛조각까지 바스라져버렸다.

[투람.]

[발케르.]

[스타티아.]

시가지를 휩쓴 것도 모자라 두 번째 성벽에까지 밀려오는 화염의 파도. 그걸 막는 건 왕실 마법사단의 합동 주문이었다.

휘이이이···!!

성벽 위에서 쏟아지는 극한의 서리바람이 거대한 화염의 파도와 만나는 순간, 냉기와 열기가 만나 이차 폭발을 빚어내고.

콰과과과···!

"끄아아아아!"

"흐으, 흐으으으!"

열기에 반쯤 녹아버리고서도 살아남은 타락한 야만인 생존자들이, 재차 덮쳐오는 폭발의 향연에 가루가 되어 사라져버린다.

쿠르르르르···.

팔 미터 높이의 중간 성벽. 그 앞에 남아있는 건 녹아내린 폐허뿐이었다.

외곽 성벽은 그 자체로 파편 폭탄이 되어 날아가버리고, 안쪽의 시가지는 불바다가 된 채 죽음의 연기를 피워올린다.

얼핏 보기에는 마치 차르국이 전쟁에서 패망하는 듯한 모습.

허나 성벽 하나를 대가로 십만을 넘는 타락한 야만인들에게 궤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혔으니, 사실 그리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닌 셈이다.

'어차피 술식적인 방어책이 없는 외곽 성벽은, 마물 군세와의 본격적인 전투에서는 그리 쓸모가 없으니까.'

창공 위에 서서 불타는 대지를 내려다보던 댈런은, 생각을 갈무리하고 후방 성벽을 향해 방향을 틀었다.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하늘 위에서는 여전히 쑴의 먹구름과 차리나의 영역이 치고받는 중이었고, 가까스로 생존한 야만인들이 도망치는 북쪽에는 악마 군세의 본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쑴 휘하의 직속 대공 둘과, 그 휘하의 수십 악마가 이끄는 마물의 군대.

첫 공세인 타락한 야만족을 쓸어버렸으니, 머지않아 놈들이 직접 밀고 들어올 것이다.

그리고 그건 이 전쟁의 마지막 대전투가 될 터였다.

***

어깨 위에 얹혀진 크레이그는 어느새 잠들어 있었다.

"집행관 양반, 일어나시오."

"······."

아니, 잠든 건 아닌 모양이었다. 불러도 대답이 없는 걸 보면.

댈런은 근처 의무대에 크레이그를 맡겨두고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도착한 곳은 삼중성벽의 가장 안쪽이었다.

최후방인 만큼 가장 거대한 규모이기에, 사실상 그 자체로 일종의 요새나 다름없는 후방 성벽.

그 두터운 석벽 안쪽에는 보급고나 의무대를 비롯한 다양한 지원시설들이 마련되어 있었다.

펠버가 이끄는 용병 마법사단이 위치한 장소도 이곳이었다.

사백 명의 용병 마법사들이 각자 조를 짜서 대기하는 거대한 전당.

본격적인 전투를 앞두고 명상 중인 마법사들을 지나쳐, 댈런은 창가에 서서 외성벽을 주시하고 있는 펠버에게 다가갔다.

"계속 지켜보고 있었던 거요, 노인장?"

"그렇지. 자네와 비요른의 주장을 신뢰하지 못한 건 아니네만···나이가 들면 모든 일에 노심초사하는 마음이 생기거든."

펠버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가 바라보던 창밖으로는 중간 성벽 너머, 용암이 휩쓸고 지나간 듯 녹아내린 대지가 펼쳐져 있었다.

"저만한 대군을 마법 전력 없이 상대하겠다니, 어쩌면 급하게라도 지원을 나가야 할지도 모른다 생각했지. 허나 내 생각이 이번에도 짧았군."

"그쪽 입장에서는 당연히 했어야 할 준비였소. 어찌 됐건···그래서 지켜보니 어떠시오?"

"인상적이군."

펠버가 말했다.

"화약이라는 신문물이 대단하다는 건 알았지만, 저 정도 위력을 낼 수 있다는 건 오늘 처음 알았네. 앞으로 전쟁의 판도가 달라지겠어."

"그래도 아직 마법사단이나 초월자를 직접 투입하는 것보다 효율적이진 못하오. 비요른 그 양반쯤 되니까 차르국의 무지막지한 지원을 업고 저만큼 해낼 수 있었던 거요."

"그건 그렇지. 거기다 성벽 하나를 통째로 날려먹는 희생을 감수하고서."

펠버가 끄덕였다. 그는 감았던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그래도 자네 생각대로 흘러갔네. 덕분에 마법 전력은 온전하게 보존되었지."

고개를 돌려 전당에서 대기 중인 마법사단을 훑는 갈색 눈.

지난 일주일간 펠버는 눈 뜨고 있는 시간 대부분을 이들을 훈련시키고 합을 맞추는 데 사용했다.

용병 마법사단은 대륙 각지의 마탑에서, 혹은 아예 소속도 없이 찾아온 마법사들이었다.

허나 이들의 실력은 결코 뒤떨어지지 않았다.

애당초 동급의 전사보다 허약한 육체를 이끌고, 모든 전쟁의 혼란을 뚫어가며 이 머나먼 북부까지 왔다는 사실 자체가 이들의 실력을 증거하는 거나 다름없었으니까.

원래라면 끝이 보이지 않는 타락한 야만족을, 압도적인 화력으로 제압하기 위해 투입되었어야 할 병력.

그 병력을 최후방에서 끝까지 아껴뒀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번 싸움의 핵심은 타락한 야만족을 쓸어버리는 게 아니오. 악마들을 중심으로 놈들의 본대를 어떻게 상대하느냐가 관건이지."

사실상 반영구적으로 계속 쏘아낼 수 있는 화약 병기와는 달리, 마법사들은 정신력이 한계에 달하면 곧장 전투력을 잃는 소모성 전력이다.

그러나 단순히 위력에만 치중된 화약 병기와는 달리, 끝없는 다양성으로 응용될 수 있는 특기전력이기도 했다.

댈런은 그 전력을 아끼기 위해 외곽 성벽에는 최소한의 전력만 배치하고, 적들의 살을 적당히 깎아먹은 시점에 퇴각시켜 성벽 자체를 함정으로 만들었다.

암월단의 마수를 완전히 뿌리치고 남은 며칠.

차리나의 승인 아래 댈런과 비요른이 몰두했던 건, 바로 그 함정인 크레모아 작전을 실현에 옮기는 작업.

그렇게 각고의 노력을 하며 아껴왔던 전력을 사용할 시점이 다가왔다.

바로 다가오는 적들의 본대를 상대하기 위해서.

"흙먼지가 가라앉는군."

펠버가 다시 창밖을 내다봤다.

광범위한 지역을 쑥대밭으로 만든 석재의 파도.

그 여파로 수백 미터 일대에 뿌옇게 피어오른 흙먼지가, 이제서야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다.

황금빛으로, 그리고 푸른 마력의 정광으로 번뜩이는 두 쌍의 눈동자는 그 너머를 어렵잖게 꿰뚫어 봤다. 펠버가 수염을 쓰다듬었다.

"몰려오는군. 조심스러운 움직임이지만, 물러날 기미는 보이지 않네."

"그럼 이만 가봐야겠소."

"정말 그 작전대로 할 생각인가?"

"악마와 치고받다가 성벽이며 도시가 죄다 박살나지 않으려면, 그 방법밖에는 없으니까."

등 뒤를 부탁하겠소. 가볍게 덧붙인 댈런이, 빠르게 무기와 갑옷을 점검한 뒤 창턱에 발을 올렸다.

망설임 없이 훌쩍 뛰어내리는 발걸음. 전사의 신형은 십수 미터 높이의 허공을 박차고 뛰어올라 멀어지기 시작한다.

대마법사는 그걸 가만히 지켜보다가 벽에 기대놓은 지팡이를 잡아들었다.

황금빛 마력으로 작게 공명하는 지팡이의 수정구. 그 울림에 명상에 잠겨있던 마법사들이 하나둘씩 깨어나 몸을 일으켰다.

어느새 중간 성벽을 넘어 박살난 첫 번째 성벽을 향해 나아가는 댈런의 뒷모습을 보며, 펠버는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자네가 믿고 날뛸 수 있는 전장을 만들어주겠네."

183

시산혈해(1)

쿠르르르···.

이질적인 천둥소리가 들려온다. 댈런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반으로 뚝 가른 듯 나뉜 창공. 천상의 싸움은 점점 더 격해지고 있었다.

쿠구궁! 쿠르륵···!!

새까만 먹구름과 얼어붙은 하늘이 뒤섞이며 붉고 푸른 발톱을 서로에게 들이민다.

그 거대한 힘의 충돌에 마력의 파편이 마치 싸락눈처럼 떨어졌다.

파지직. 치직―

뒤틀리고 응축된 마력 파편들은, 불안정한 상태를 오래 유지하지 못하고 제멋대로 천연의 술식으로 화한다.

허공에서 촛불 크기의 불꽃이 피어오르고, 작은 전격의 그물이 나비처럼 날아간다.

느닷없는 돌풍이 소용돌이치는가 싶더니 얼음 조각이 되어 흩어졌다.

땅에서 보기에 그건 마치 신비로운 오로라가 지상으로 내려앉는 것 같은 광경이었다.

손에 잡힐 듯 내려앉다가 지면에 닿기 전 증발하는, 오색찬란한 수백 가지 주문의 비.

댈런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상을 뒤덮은 눈보라를 뚫고 그의 앞으로 거대한 그림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왔냐."

"눈보라가 거세서 좀 늦었다."

마물의 군세를 이끌고 나타난 악마, 머리가 새의 형상인 거인이 말했다.

"시야와 감각을 가려서 우리를 막아보려 한 모양이더군. 시도는 나쁘지 않았어."

새대가리 악마가 고개를 털었다. 깃털 아래 돋아있던 고드름이 푸드득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지상에서 휘몰아치는 눈보라는 차르국의 왕실 마법사들이 힘을 합쳐 만들어낸 폭풍이었다.

범위 안에 들어온 대상의 감각을 혼란시키고 길을 잃게 만들어, 끝내 한기에 잠식당해 얼어붙게 하는 대규모 술식.

서릿발 왕좌의 폭풍처럼 공간째로 동결해버리는 어마어마한 위력은 아니었지만, 눈보라로 말미암은 환각의 위력은 악마의 감각까지도 혼란시킬 정도였다.

아마 파영의 마안이 없었다면 댈런도 그대로 길을 잃었겠지.

다만 아무리 싸움 밖에 모르는 쑴의 종복들이라도, 파훼법이 없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감각이 차단당했다 해서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눈보라마저도, 역겨운 주문쟁이들의 피냄새만큼은 막을 수 없기 때문이야."

새대가리가 웃었다. 부리 틈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웃음소리는 쇠 긁는 듯한 소리였다.

"유물 무기로 우리 군세의 기수를 처치할 때 잠깐 눈을 마주쳤었지. 내 이름을 아나, 전사?"

"새대가리 새끼."

"···악마학에 조예가 깊은 전사라더니, 잘못 알려진 건가. 아니지. 어쩌면 너와 항상 붙어 다닌다는 그 성기사가 알려줬을 수도 있겠어. 그년은 지금 어디 있지? 성벽이 무너지며 죽었나?"

쇳소리가 좀 더 거칠어졌다. 저열한 도발이었다. 댈런은 대답하지 않고 허리춤의 검손잡이를 만지작거렸다.

까딱.

검손잡이에 얹어진 손가락이 자연스레 꿈틀거렸다. 댈런은 속으로 셈을 시작했다.

"흐흐, 그년이 죽어서 홀로 성벽 밖까지 기어나온 거냐. 모든 걸 포기하고 들이받을 생각이었나 보군. 용맹한 전사의 죽음은 연약한 심장에서 비롯된다지. 너도 그런···."

새대가리의 웃음이 뚝 멎었다. 놈의 고개가 뒤로 휙 돌아갔다.

'셋.'

패래래래―

눈보라를 뚫고 들려오는 흐릿한 파공음.

'둘.'

크에―! 켁!

점점 가까워져오는 단말마의 비명들.

새대가리의 눈에서 귀화가 번뜩였다. 거센 눈보라 너머에서 날아들어오는 건 손도끼였다.

전투가 시작될 때, 야만인 군대의 기수를 죽였던 바로 그 유물 무기.

'하나.'

「회명(回冥)」

그리고 눈보라를 뚫고 황금빛 원반이 모습을 드러낸 순간, 댈런의 신형은 그 자리에 없었다.

콰앙!!

새대가리 거인이 검을 휘둘렀다. 집채만 한 검으로 막고서도 놈의 몸이 주춤거렸다.

"무슨, 힘이···!"

놈의 부리에서 신음이 새어나오는 순간, 허공에 붕 뜬 도끼가 황금빛 폭발을 토해내고.

콰아아아아―!

성화로 이글거리는 폭발이 새대가리 거인의 상반신을 집어삼키는 것과 동시에, 댈런의 신형이 놈의 코앞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쐐애―!

수십 미터를 뛰어넘는 잿빛 그림자의 이적.

망설임 없이 거인의 두 다리를 단칼에 잘라버린다.

"케에에에에엑!"

다리가 잘리고 상반신에 불이 붙은 새대가리가 괴성을 지르고, 그걸 신호로 마물들이 우르르 달려들기 시작했다.

상관없었다. 다가오면 함께 썰어버리면 될 뿐.

바닥에 널브러진 악마의 머리통을 향해, 댈런은 성검을 번쩍 치켜든 뒤 내리쳤다.

"네놈, 혼자서는, 막지 못할···!"

꽈르르르릉―!

같잖은 유언 따위 들어줄 이유는 없다.

창공에서 치고받는 두 하늘의 틈바구니 사이로 한 줄기 벼락이 땅을 향해 떨어졌다.

「뇌격(雷擊)」

성검과 하나가 되어 새대가리의 머리통을 단번에 잘라버리는 새파란 벼락.

「방류(放流)」

파지지지직!

거기서 기세를 멈추지 않고, 그대로 지면을 타고 들불처럼 훅 퍼지며 전격의 폭풍을 자아낸다.

크에에!

캬아아악―!

푸른 벼락의 폭풍이 달려들던 마물들을 휩쓸어버리고, 사방에서 휘몰아치던 눈보라마저 걷어낸다.

동시에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전격 폭풍의 범위 밖에 있던 눈보라까지 일시에 잠잠해졌다.

거짓말처럼 사라진 눈보라.

확 트인 마물 군세와 악마들의 시야.

놈들의 눈에 들어온 건, 군세의 삼면을 둘러싼 포위망이었다.

[엘르.]

[메멘토 엘레구스.]

높이 팔 미터에 달하는 두 번째 성벽 위, 성벽의 한 구역 전체를 뒤덮은 황금빛 파동.

[형제들이여.]

[무기를 들어라.]

그리고 눈보라에 모습을 감춘 채 성 밖으로 빠져나와, 군세의 동쪽을 막아선 성기사단의 황금빛 물결.

쿠구구구구구···.

거대한 전격의 띠를 두른 요새가 새까만 먹구름을 뚫고 강하하며, 서쪽 방면을 막아선 채 대규모 술식을 예열시킨다.

눈보라를 가림막으로 만들어낸 삼면 포위망.

그 역습의 시작은 성벽 위에서부터였다.

「영역 개방 : 태엽을 되감는 대지의 손」

「천률일원포(千律一原砲)」

성벽 위의 황금빛 파동이 변칙적인 울림과 함께, 마물 군세를 향해 수천 다발의 주문 포격을 쏟아내기 시작하고.

[전쟁신의 영광을 위해―]

[눈앞의 악을 말살하라!]

성광(聖光)으로 눈이 시리게 빛나는 삼천의 군대가, 마치 거대한 빛의 파도처럼 함성과 함께 덮쳐온다.

[레니아.]

[티타스.]

[달로레마]

[바사크.]

[······.]

마지막은 수십 미터 상공에서 부유하는 천공요새 바르샤바크.

끝없이 울려퍼지는 영창이 요새의 아래쪽에 거대한 번개의 폭풍을 빚어냈다.

콰지지지지직──

동토의 눈을 싹 증발시키는 전격의 열기.

폭풍에 휩쓸린 마물들의 육신이 갈기갈기 찢어지면서, 동시에 수십 가지 전격 계열 술식이 요새의 총안과 첨탑에서 쏟아지기 시작한다.

"케엑···바르샤바크···어떻게 저놈들까지···?"

댈런은 도끼와 검을 들었다.

새대가리 악마의 몸통은 성화에 불타서 죽었고, 머리만이 남아 주절거리는 중이었다.

콰직!

부리를 바들거리는 머리통을 짓밟아 터뜨리자, 한 쪽에 띄워놓은 상태창의 경험치 막대가 상당량 올라갔다.

크르르르···.

주춤한 것도 잠시, 다시금 이빨을 드러내는 마물 군세.

천공요새에 성기사단의 지원, 그리고 성벽의 포격까지 이어졌음에도 전황을 손바닥 뒤집듯 뒤집는 건 불가능했다.

기습의 효과로 수천 단위의 마물이 쓸려나갔지만, 수만 마리의 마물 군세가 정신을 차리고 다시금 공격을 시작한다.

댈런은 그 군세의 한가운데서 어깨를 슬쩍 풀었다. 마물 수만에 악마 수십이라. 그는 낮게 웃었다.

"어디 하루에 레벨 몇 개까지 올릴 수 있나 시험해보자고."

악마의 피로 범벅이 된 발이, 사나운 미소와 함께 한 걸음을 내딛고.

투웅―

그의 신형이 자리에서 사라짐과 동시에, 검붉은 피보라가 몰아쳤다.

***

난전이었다.

키이이이이!

성벽에 손톱을 박아넣으며 기어오르는 갑각류 형태의 마물.

쉬이이익!

그 마물을 떨어뜨리는 검기 맺힌 투창 세례.

쿵― 쿵― 촤라라락!

사다리며 갈고리 밧줄이 셀 수도 없이 성벽에 내걸리고, 살아남은 야만인 전사들이 그걸 타고 오르는 사이 육중한 바위 트롤들이 질량을 무기로 성벽 자체를 두들긴다.

마물들의 마법은 끊임없이 성벽 위의 병사들을 노렸다. 그걸 막아내는 건 왕실 마법사들의 빙결 술식이었다.

거대한 고드름과 극한의 한기가 지옥의 주문과 부딪히며, 성벽 앞의 허공에서 장엄한 폭발의 향연을 빚어낸다.

그 아슬아슬한 균형 사이에서 천공요새 바르샤바크와 성기사단, 그리고 댈런은 적진을 헤집으며 머릿수를 착실히 줄여가고 있었다.

바르샤바크의 광범위 전격 주문이 마물들을 으스러뜨리는 동안, 댈런과 성기사단은 악마들이 성벽을 직접 공격하는 걸 막아서는 식.

"···스승님,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성벽 너머를 내다보던 토미가 약간 초조한 표정으로 물었다. 펠버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뚝. 뚝.

수염에 맺혀 떨어지는 땀방울들.

노인의 주름진 손은 끊임없이 움직이며 복잡한 수인을 맺어내고, 발밑에서는 그에 맞춰 황금빛 파동이 쉴새없이 터져나온다.

평소 같으면 수인의 상당 부분을 나눠서 맡았을 토미이지만, 이번만큼은 그조차도 스승의 영역 개방을 보조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게, 펠버가 지금 해내고 있는 일은 일반적인 주문학의 틀을 완전히 깨부수는 일이기 때문.

펠버는 수십 개 학파에서 몰려온 수백 명의 주문을, 마치 하나의 대규모 술식처럼 연동시켜서 운용하고 있었다.

"이그넬― 타타블로스!"

"이그넬 로트!"

성벽에 넓게 펼쳐져 집결한 마법사들 사이로, 거대한 불덩이와 불화살 수십 발이 둥실 떠오른다.

"레니아 바사크!"

"엘르― 마이아린."

전격의 줄기가 뻗어나고 대지를 움직이는 힘이 작동하는 한편, 뚜렷한 주문이 없는 무영창의 술식들이 술자의 손을 떠나 움직이기 시작했다.

구우우웅──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휘어잡는 황금빛의 마력.

황금빛의 기이한 파장 아래 화염과 전격이 한데 뒤섞이고, 서로 공명하며 증폭되어 몇 배의 화력으로 거듭난다.

콰과과과과과―!!

그 결과물은 적진을 향해 쉼 없이 쏟아지는 수백 갈래 주문의 포격들.

그것도 아군을 피해 마치 저격수의 탄환처럼 적재적소에 떨어지는, 광범위한 영역의 지원 마법이었다.

"저게···대체 인간이란 말인가···?"

곁에서 화염 주문을 시전하던 마법사가 그 광경에 혀를 내두른다.

이그넬라 마탑에서 나름 손에 꼽는 실력자. 영역을 이루기 직전의 초인인 그에게도, 눈앞에서 펼쳐지는 기예는 이해할 수 없는 경지였다.

주문의 공명. 다중 영창. 여러 속성의 연계. 다수의 술자가 공동으로 시전하는 대규모 술식.

어느 하나 이론적으로 불가능한 일은 아니나, 술자의 수가 두 자릿수를 넘어가면 적어도 수 년의 훈련과 연구가 거듭되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수백 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마탑이나, 강력한 권력 아래 철저한 훈련을 거치는 왕실 마법사단이 아니라면 쉽지 않은 일.

그걸 고작 며칠 간의 훈련과 한 사람의 영역 개방으로 해낼 수 있다니.

"시간 그 자체를 다루는 게 아니고서야, 어떻게······."

4위계의 끝자락에 달한 그로서도, 펠버가 지금 직접 시간선을 조작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각 술식의 시전 과정을 순간 단위로 쪼개고 조작해, 완벽한 공명의 시점에 억지로 끼워맞추는 기적 같은 과정.

아무리 펠버가 시대에 몇 없을 천재라지만, 진룡의 종속으로서 종을 탈피해 거듭난 육신에 뼈를 깎는 노력까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겠지.

투과과과과과──!!

재능과 노력, 기연이 한데 뒤섞여 어마어마한 술식의 폭격으로 전장을 난자한다.

뜨겁게 달궈진 두뇌와 끓어오르는 심상 너머의 영역.

나직하고 빠르게 중얼거리는 영창과, 어지러운 수인으로 그 모든 기적을 만들어내면서도 펠버의 표정은 그리 좋지 못했다.

눈에 보이는 정황 자체가 불리하기 때문이 아니다.

남은 두 겹의 성벽과 공중요새가 쏟아내는 화력은, 수만 마리의 마물을 상대로도 과잉에 가까웠으니까.

수십의 악마들이 성벽 위로 올라오면 곤란해지긴 하겠으나, 성기사들과 댈런이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이상 걱정할 필요 없었다.

간혹 그 저지를 뚫고 악마가 성벽을 공격하는 상황이 펼쳐지면, 철혈군대의 5위계 초월자들이 직접 나서서 놈들을 다시 성벽 너머로 몰아내곤 했다.

죽어나가는 마물의 숫자가 쓰러지는 사람의 숫자보다 많다. 그말인즉 이대로 버티면 승리는 어렵지 않다는 의미.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펠버의 표정이 굳어있는 이유.

그건 댈런이 성벽 위를 사수하며 기어오르는 악마를 족족 쳐죽여도 됨에도, 굳이 저 아래로 내려가 적진을 휩쓸고 있는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으지━━

불현듯 무언가 단단한 것이 쪼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뜨겁게 달아오른 두뇌가 이내 기이한 정적을 감지했다.

'······뭐지?'

전장의 소란 속에서 정적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이 위화감은 무언가의 부재에서 생겼다는 이야기.

위화감의 정체를 알아채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전장의 한 일대를 휩쓸던 전격의 폭풍. 인간의 손에서 탄생한 재해가 만들어내는 소음이, 어느 순간부터 들리지 않고 있었으니까.

'···바르샤바크!'

황금색으로 빛나는 눈이 부유하는 천공요새를 향한다.

대마법사의 기감이 전장을 가로질러, 천공요새를 둘러싼 결계에 뚫린 구멍을 감지했다.

고작 수 미터 지름의 작은 구멍. 요새의 압도적인 규모에 비해서는 너무나도 초라한 크기였다.

허나 그 구멍으로 침입한 존재는 결코 초라하지 않았다.

놈은 펠버가 계속해서 경계하던 존재들 중 하나였으니까.

으직.

요새에서 가장 높은 첨탑의 꼭대기.

그 지붕을 딛고 선 용인(龍人)이, 손에 쥔 무언가를 게걸스레 씹어먹는다.

으직. 우적.

그건 시체였다.

그것도 다름아닌 바르샤바크 마탑주의 시체.

콰아아아앙──!

그 순간 천공요새를 두른 전격의 고리가 굉음과 함께 부서지고, 수십 미터 상공에서 부유하던 요새가 서서히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구······.

"···맙소사."

현란하게 맺어가는 수인 사이, 펠버는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꼈다.

모든 전격술사들의 성지라 불리는 대마탑이 너무도 덧없이 무너지고 있었다.

"대악마라는 건···저런 존재인가."

댈런에게 미리 예고받기는 했다.

수십 악마를 이끌고 도래한 이번 침공에는 대악마가 둘이나 포함되어 있으며.

그중 하나는 쑴 휘하의 여섯 대공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존재라는 것을.

흑마법사들에게조차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대악마라던가.

허나 눈앞에서 대륙의 여섯 대마탑 중 하나가 무너지는 걸 보면서도 평정심을 유지하기는 힘들었다.

그리고 그때.

쉬이익──

전장의 저 동편, 난전이 벌어지는 적진 어디선가 황금빛 빛살이 날아들었다.

184

시산혈해(2)

쿠구구구······.

수백 년 묵은 첨탑들이 비명을 지른다.

오래도록 자리를 지켜온 벽과 기둥이 해변가에 쌓은 모래성처럼 허물어졌다.

지상을 향해 우르르 쏟아지는 파편들.

비상시를 대비한 긴급 술식이 작동하며, 유성우처럼 떨어지던 잔해들을 받아냈다.

긴급 술식은 요새 자체를 다시 하늘로 밀어올렸으나, 달리 말하자면 하늘로 밀어올린 게 전부였다.

이미 시작된 붕괴 자체를 막기에는 역부족.

천공요새는 하늘로 천천히 올라가면서도 실시간으로 무너져갔다.

"맙소사, 신이시여······."

이름 모를 성기사가 넋을 놓은 표정으로 말했다.

댈런은 그 중얼거림을 흘려들으며 피 섞인 침을 모아 뱉었다. 자신의 피는 아니고, 방금 죽인 악마의 피였다.

화륵. 손가락을 튕기자 손끝에서 피어오르는 성화의 불꽃.

댈런은 반으로 잘린 악마의 몸뚱이를 그대로 불살라버리며 말했다.

"대악마가 어디 숨었나 했더니 저기를 노리고 있었군. 금방 다녀오겠소."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안 된다는 거 알지 않소."

루시아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댈런은 무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아직 악마놈들 다섯 밖에 쳐죽이지 못했소. 성기사단이 죽인 숫자와 성벽을 넘으려다 죽은 놈들까지 합쳐도 고작 열 남짓이지."

"······."

"성벽 위의 철혈군대가 지금까지는 잘 막아주고 있지만, 악마들이 본격적으로 성벽 위로 올라가게 된다면 그 균형도 끝이오."

성벽 위에도 악마를 상대할 실력자야 여럿 있었다.

전력으로 영역을 개방하고 있는 펠버를 제외하더라도, 왕실 마법사단의 마법단장이나 철혈군대의 냉혈기사단장처럼 5위계에 닿은 초월자들도 존재했고.

다만 전투와 전쟁은 엄연히 다른 영역.

이런 대규모 공성전에서는 더욱 그랬다.

초인들이 힘을 모아 순식간에 악마 셋의 목을 잘라버리더라도, 그 사이에 다른 악마들이 반대쪽 성벽을 공략하면 그걸로 끝이었다.

방어 주술이 깃든 성벽이라 해도 악마의 공격 앞에서 오래 버틸 순 없을 것이고, 한쪽 성벽이 붕괴하는 순간 팽팽하게 유지되던 균형은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는 게 당연한 일.

영역을 이룬 초인들이야 그 아비규환 속에서도 제 한 몸 정도는 건사할 수 있겠으나, 성벽 뒤에서 화살과 투창을 퍼붓던 대부분의 병사들은 그러지 못할 테였다.

악마들도 그걸 알기에 마물들 사이에서 최대한 몸을 숨긴 채, 성벽의 빈 틈을 끊임없이 노리고 있는 게 아닌가.

적진을 헤집으며 그런 악마들을 추적하는 성기사단이 아니었다면, 성벽은 진작에 무너지고도 남을 상황이었다.

"성기사단에는 그쪽이 필요하오, 루시아. 악마에게 칼질을 할 수 있는 성기사는 많아도, 숨어있는 악마를 추적해서 찾아내는 능력을 가진 성기사는 하나뿐이니까."

수만 마리의 마물들 사이에서, 작정하고 몸을 감춘 악마들을 찾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회백전도의 힘이 아니었으면 댈런이라도 지금처럼 악마들을 찾아내서 때려잡지 못했을 테였다.

더군다나 대마탑 바르샤바크에 침투한 대악마의 경우, 천공요새가 붕괴하기 전까지는 댈런의 능력으로도 기척을 찾아낼 수 없을 정도였고.

성기사단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루시아의 영역에 내제된 이능 중 하나는, 악마를 탐지하고 추적하는 능력.

그 능력이 없었다면 기사단은 눈 먼 장님이 휘두르는 칼과 다름없었겠지.

루시아도 그걸 모르지 않았기에,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몸 성히 돌아오셔야 합니다."

"알겠소."

고개를 끄덕이는 루시아. 댈런은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렸다.

투웅―

가볍게 땅을 밀어내는 것만으로 시야가 훅 치솟는다.

몇 번 더 발을 구르자 무너져가는 천공요새와 눈높이가 같아졌다.

걸리적거릴 요소가 없는 창공. 거침없이 허공을 짓밟아가며 가속을 거듭한다.

콰과과광!

발밑에서 공기가 한계까지 응축되었다 터지며 굉음을 빚어낸다.

드넓은 전장을 가로질러 천공요새에 닿는 건 순식간이었다.

콰지직!

성검을 내리쳐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천공요새의 결계를 찢어버린 뒤, 첨탑 중 하나에 내려앉은 댈런은 잠시 숨을 골랐다.

[길 잃은 마력이 사방에 휘몰아치는구나.]

전투가 시작된 이후, 상황을 가만히 주시하고 있던 적창이 그제야 말문을 열었다.

[천공요새라 하여 고대 용인들의 비원에 닿았나 싶었는데, 그 신비와는 정 반대의 방법을 썼을 줄이야. 그저 끝없는 술식의 순환으로 막대한 마력을 응집시켜, 그 힘만으로 거대한 요새를 떠받들고 있던 거라니.]

"···주문쟁이 같이 말하지 마시오."

[특별한 술법이 아니라, 그냥 마력의 총량으로 이 요새를 띄워올렸다는 이야기니라. 그리고 그 마력이 슬슬 폭주하기 시작하고 있고.]

파지지지지직!

적창의 말에 동조하듯, 사방에서 전격의 소용돌이가 제멋대로 휘몰아친다.

그물처럼 뻗어나가다가도 한 데 모여 구체나 입방체를 형성하고, 각종 짐승의 형상을 빚어내는 찰나 폭발하며 첨탑 하나를 날려버리는 전격의 줄기들.

제어되지 않은 수천 갈래 번개의 향연 사이에서는, 수많은 돌덩이들이 저만의 속도로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는 중이었다.

서로 공명과 상쇄를 거듭하면서도 계속해서 커져가는 힘의 총량.

그건 마치 보이지 않는 화로의 한쪽 귀퉁이가 부서져서, 그 안에서 연료와 불길이 끊임없이 쏟아져나오는 것 같은 광경이었다.

'대악마가 다짜고짜 마탑의 수장을 죽인 게 이것 때문이었나.'

모니터 너머에서 수백 회차를 겪어온 댈런마저도, 천공요새 바르샤바크에 발을 들인 적은 많지 않다.

허나 이 세계에서 쌓아올린 주문의 지식과 감각에 적창의 첨언이 더해진다면, 지금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정도는 깨닫기 어렵지 않았다.

적창의 말대로라면 마탑 바르샤바크가 하늘을 날아다니는 원리는, 그저 막대한 마력을 때려넣은 술식에서 기인한 것.

하늘에 요새를 띄울 정도의 마력량이니, 그 술식을 제어하는 인원은 반드시 고위 마법사여야만 했다.

'못해도 5위계 이상의 초월자가 중심을 잡고···최소 수십 명의 영역을 이룬 마법사들이 보조해줘야겠군.'

여섯 대마탑 중 천공요새 바르샤바크만큼 폐쇄적인 곳도 없다던가.

하늘에 부유한다는 지리적인 특성 때문에 그런 줄로만 알았는데, 비단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선조들이 남긴 술식을 연구하고 재능있는 후학을 양성해야 할 인력들 대부분이, 마탑을 하늘에 띄우는 단순한 업무에만 몰두하고 있었을 줄이야.

현재의 위상과 명성을 대가로 미래를 포기한 거나 다름없는 짓거리였다.

'그러고보면 대마탑 중에서는 가장 역사가 짧았지. 천공요새의 존재 하나만으로 대마탑의 자리를 얻어낸 거니까.'

상념을 이어가는 와중에도, 감각을 곤두세우고 여기저기 무너져가는 첨탑들 사이를 훑는다.

분명 천공요새가 기울기 시작할 때까지만 해도 느껴지던 대악마의 기척이, 어느 순간부터 감지되지 않고 있었다.

요새를 아예 떠난 건 아니다. 댈런의 육감은 분명히 경고하고 있었으니까.

사방으로 튀는 전격 줄기와 날아다니는 돌덩이들 사이, 그의 목숨을 위협할 만한 대적자가 숨을 죽이고 있다고.

"······."

문득 시선이 저 멀리 떨어진 첨탑 중 하나에 닿는다.

지붕에 보란 듯이 꽂혀있는 황금빛 도끼.

그건 수 킬로미터 밖에서 대악마를 향해 던져냈던 견제였다.

[핏방울 하나 묻어있지 않구나.]

적창이 말했다. 댈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애당초 유의미한 결과를 위해 던진 게 아니다. 그저 대악마의 시선을 그에게도 돌리기 위함이었으니까.

더군다나 그가 아는 그 대악마라면, 아마 손도끼는 물론 어떤 종류의 무기라도···.

"도끼 던진 놈이군."

불현듯 들려오는 스산한 속삭임.

바로 등 뒤였다.

────꽝!

머리 위에서 터져나오는 파공음을 듣기도 전에, 몸이 먼저 반응하고 성검을 들어 막아낸다.

쿠과과과과―!!

완벽하게 막아냈음에도 불구하고, 힘에서 밀린 육신이 첨탑 지붕을 뚫고 내려간다.

천장과 바닥을 몇 번이나 부수고 내려간 끝에 멈춘 하강. 댈런은 고개를 들어 뻥 뚫린 구멍 위쪽을 올려다봤다.

천공요새에서 새어나오는 푸른 정광을 배후에 둔 채, 음영이 뒤집힌 그림자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우지직. 쩝쩝.

비늘 덮인 파충류의 머리.

세로로 죽 찢어진 붉은 눈동자.

온몸이 시뻘건 피로 뒤덮이고, 군데군데 검게 탄 흔적이 남은 용인은 뭔가를 들고 우물거리고 있었다.

[용인에게 씹어먹힌 궁사의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한입거리 용병이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시산혈해에 파묻힌 성기사의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붉은 주문의 계승자의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눈이 마주치는 것과 동시에 네 개나 되는 알림창이 주르르 나열된다.

네 번의 결말을 뜻하는 글자들 아래, 용인은 입을 쩍 벌리더니 손에 들고 있던 둥근 뭔가를 입안에 던져넣고 씹었다.

콰직!

이빨 사이로 쫙 튀는 핏물과 뇌수.

흘러내리는 붉고 흰 조각들에서 그 둥근 것의 정체를 유추하기는 어렵지 않다.

아마 천공요새의 붕괴를 어떻게든 늦추기 위해, 망가진 술식의 구멍을 메꾸려 동분서주하던 고위 마법사 중 하나였으리라.

"···타알마드."

"오. 나를 아는군. 인간들 사이에 내 이름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은데 말이야."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린 이름에 놈이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냈다.

흑마법사들에게도 거의 알려지지 않은 대악마인 타알마드는, 오히려 악마들 사이에서 유명한 존재였다.

용혈의 배반자.

진룡을 사냥하는 용인.

악마들 사이에서 떠도는 수많은 이명이 있지만, 그중에도 놈을 가리키는 가장 대표적인 명칭은 한 가지였다.

"시산혈해(屍山血海)의 대공."

수십의 악마들을 찢어발기고, 필멸자와 마물을 가리지 않고 셀 수 없는 시체들로 자신만의 지옥을 만들어낸 대악마.

쑴 휘하의 여섯 대공 중에서도, 가장 강력하다 일컬어지는 존재에게 걸맞은 이명이었다.

쿠르륵.

무너진 돌더미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킨 댈런은 성검의 상태를 확인했다.

겉보기에는 멀쩡한 외견이지만, 손끝의 감각은 내부에 퍼진 미세한 균열을 느낄 수 있었다.

여지껏 단 한 번의 흠집조차 난 적 없는 성검이, 단 한 번의 공격에 처음으로 손상된 것.

"쯧."

혀를 차며 성검을 아공간에 집어넣고, 허리띠의 환상 살해자나 품속의 강철 단검도 아공간에 밀어넣는다.

차르국의 왕실 전용 대장간에서 새로 맞춘 갑옷까지 벗어버리자, 남은 건 적당한 두께의 솜이 들어간 천옷뿐이었다.

적을 눈앞에 두고 모든 무구를 집어던지는 기행.

그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던 타알마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신기하군. 이름만이 아니라 내 권능까지도 알고 있는 건가?"

"글쎄."

"그렇지 않고서야 네 행동이 말이 안 되는군."

댈런은 굳이 대답해주지 않았다. 그저 어깨를 살짝 풀고, 발끝을 가볍게 퉁퉁 튕겨볼 뿐이었다.

예상대로 몸의 무게가 한층 가벼워져 있었다.

갑옷이나 무구의 무게에 구애받지 않게 된 지 오래임에도, 어깨의 짐을 덜어낸 듯한 선명한 해방감.

갸웃거리던 용인의 고개가 그 모습을 보고 천천히 바로잡혔다. 놈이 붉게 찢어진 눈을 빛냈다.

"아니, 너는 알고 있다. 내가 무기도 갑옷도 없이 싸운다는 것을. 주먹과 이빨이 내 무기이고, 비늘과 뼈가 내 갑옷이라는 사실을."

성검이 상한 건 단순히 놈의 힘이 강해서가 아니다.

그랬다면 이미 오래 전 청린과 싸웠을 때부터 성검은 손상되기 시작했을 테니까.

성검이 상한 진짜 이유는 놈의 권능 때문이었다.

자신과 싸우는 이의 무구를 약화시키고, 오히려 그 무구가 속박이 되게 만드는 권능.

그건 타알마드를 여섯 대공의 첫 자리에 올려놓은 가장 큰 요인이자, 놈에게 네 구에 달하는 캐릭터가 죽어나간 이유이기도 했다.

대악마의 권능을 무효화하는 건 악신마저도 불가능한 일이기에, 모니터 너머에서도 놈의 존재는 넘을 수 없는 산처럼 느껴지곤 했었다.

"그리고 그렇게 싸워왔기에, 내 주군을 제외한 모든 대공들을 꺾을 수 있었다는 결말까지도."

허나 댈런은 질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넘을 수 없는 산처럼 느껴졌지만, 아예 공략법이 없는 건 아니었으니까.

그 몇 안 되는 공략법 중 하나를 붙잡기 위해, 차리나의 의뢰를 받고서도 굳이 한참을 돌아 세계의 이빨 산맥을 타고 올랐던 게 아닌가.

하이 오크들의 내전에 참전하고, 악마에게 홀린 대족장은 물론 악마의 진체까지 쓰러뜨리는 수고를 감내한 건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그러고도 물러설 생각이 없어보인다는 건, 나를 상대할 무기를 준비해왔다는 이야기겠지."

"그래."

"어디 보여봐라."

용인이 이빨을 드러냈다. 즐겁다는 듯 그르렁대는 울음소리가 그 사이에서 흘러나왔다.

댈런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상대는 대악마. 간을 보거나 할 상황은 아니다.

스으.

주먹을 쥐고, 발걸음을 내디딘다.

머릿속에 그리는 전경은, 회백의 투사와 치고받았던 하늘과 대지.

쿵──

내디딘 첫걸음에서 동심원의 파동이 시작되고.

동시에 새긴 적 없는 백색 문신이 전신에서 빛을 토해내기 시작한다.

반개한 눈 이면에서 영역을 바라보는 시선이, 설산에서 유일하게 그가 직접 만들어내지 않은 지형을 응시했다.

휘이이······.

산봉오리에서 시작된 바람이 쓸어가는 대지에는, 수십 년간 갈고닦은 투사의 묘리가 녹아나고.

쿠르르르···.

심상 너머의 하늘을 가득 채운 먹구름이 유일하게 침노하지 못하는 하늘은, 최후까지 악신에게 일권을 날리던 영웅의 투지가 서린다.

'너에게···맡겨 보겠다.'

마지막 목소리를 떠올린다.

모니터 너머에서 클릭 몇 번으로 움직이던 캐릭터이자.

한 세계의 마지막을 목도하며 저항했던 용사의 음성을.

쿠웅━━━━

아득한 시간선을 건너 남긴 유언이 심중에 파문을 남김과 동시에, 발밑에서 퍼져나가던 무색의 파동에 무채색의 음영이 덧씌워졌다.

그리고 반개했던 눈을 뜬 순간.

「영역 개방 : 종언에 드리운 회백의 하늘」

반파된 천공요새는 완연한 잿빛이었다.

185

쌍천(1)

콰앙―!

첨탑의 벽이 무너지며 잿빛 신형이 창공으로 튀어오른다.

「회명(回冥)」

「오연답산(五聯踏散)」

그걸 시작으로 첨탑을 부수고 뛰쳐나온 사람은 모두 넷.

네 인영은 하나같이 댈런과 동일한 생김새였다. 천옷 하나만 걸친 근육질 용병들이 잿빛 첨탑들 사이를 내달렸다.

"호오."

용인이 슬쩍 이빨을 드러냈다. 놈의 눈동자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공간을 빗겨내는 재주를 극한까지 갈고닦은 건가? 기발한 발상이군."

투웅―

허공을 박차고 치솟은 댈런의 신형. 여유만만한 표정의 용인을 향해 주먹을 내뻗는다.

콰아아앙!

마주 내뻗은 용인의 주먹과 맞닿는 순간, 충격파가 터져나오며 두 사람이 딛고 선 지붕이 돌조각이 되어 바스라졌다.

"재밌는 재주로군! 허나 그렇게 만들어낸 잔상이 스스로의 실력보다 한참이나 하잘것없다면 무슨 소용이겠나!"

뒤섞이는 손발과 연달아 터지는 충격파 사이, 댈런의 모든 공세를 가볍게 막아내며 용인이 소리쳤다.

사실 놈의 말은 틀린 부분이 없었다.

회백의 투사가 남긴 묘리와 영역은, 댈런의 입장에서도 전부 소화해내기 어려운 방대한 깨달음.

때문에 공간의 틈을 파고들어 만들어낸 잔상은, 회백의 투사와 달리 본체와 완벽하게 동일한 능력을 가질 수 없었다.

어정쩡한 감각. 조금 뒤떨어지는 근력. 마력을 완벽하게 다룰 수 없어 봉인된 주문.

혼신의 힘을 다해 공세를 이어가고 있음에도, 용인을 몰아붙이기는커녕 오히려 밀리는 상황인 건 그런 이유.

"이딴 잔상을 앞세우고 주문쟁이처럼 뭘 꾸미는 거냐! 좀 더 재미있는 걸 보여봐라! 쑴께서 주목하는 전사가 고작 이 정도라니 실망이군!"

용인이 포효하며 도발했지만, 댈런은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당장은 이 정도면 충분했다.

어차피 눈앞의 대악마는 진체가 아닌 화신체.

승부를 결정짓는 한 수를 만들어내기까지, 시간을 벌 수 있으면 그걸로 족했으니까.

두두두두두!

격렬하게 오가는 주먹과 발끝에, 첨탑이 위에서부터 깎여나가듯 점점 낮아져간다.

그렇게 첨탑의 높이가 절반 이하로 낮아진 순간, 자취를 감췄던 나머지 세 인영이 동시에 모습을 드러내며 달려들었다.

찌지지지직―!

공간을 찢어발기는 파공성. 먼지구름을 뚫고 사면의 사각을 노린다.

간결한 권격은 오른 어깨.

큰 호선을 그린 발끝은 옆구리를 향하고.

동시에 팔꿈치로 쇄골을 가격하는 동시에, 등 뒤에서 오금을 툭 쳐서 균형을 무너뜨린다.

"흠···!"

세로로 찢어진 용인의 눈동자가 처음으로 이채를 띄었다.

놈의 모습이 순간 흐릿해졌다.

그리고.

쩌저저저정!

막거나 피할 수 없도록 절묘하게 파고들어간 네 갈래 공격이, 놈의 손발에 전부 가로막혔다.

[이런 미친···!]

아공간의 악마가 경악했다. 맞았다. 미친 움직임이었다.

단순히 흘리거나 받아낸 수준이 아니라, 용인의 반격이 네 인영의 공격을 전부 받아쳐 도리어 밀어낸 상황.

이전에 회백의 투사가 비슷한 움직임으로 몰아붙였을 때, 댈런은 주문을 응용한 능력으로 여덟 갈래 공세에 대응했었다.

대악마 타알마드는 주문은커녕 마력 한 줌 사용하지 않았다.

그저 순수한 육체 능력으로 그 정신 나간 기예를 선보인 것.

투과과과과과―!

네 명의 댈런과 한 명의 용인이 치고받았다.

깎여가던 첨탑은 순식간에 폭삭 주저앉고, 아예 지면에 구덩이가 움푹움푹 파이기 시작한다.

팔다리가 어긋나 부딪히고 공방이 교차하는 매 순간, 응축된 공기가 터져나가며 마력의 바람이 뒤틀린 채 휘몰아친다.

천공요새에 흘러넘치는 전격의 물결이, 그 여파에 휩쓸려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콰지지지지―!!

맨손으로 주고받는 공방의 여파만으로 충격파와 전격이 폭풍이 되어 휘몰아치고.

박살난 첨탑 근방의 일대를 무너뜨리는 건 물론, 요새의 기반 자체를 흔들어대기 시작한다.

"크하하하!"

그 파괴의 중심에서 모든 공세를 받아내고 있는 용인은, 오히려 이제야 즐겁다는 듯 큰 소리로 웃어젖혔다.

"좋아, 이 정도는 되어야지! 이제야 주먹이 좀 매서워졌어!"

회백의 투사가 남긴 묘리에 점차 적응하면서, 댈런의 공격은 시간이 갈수록 더 강하고 빨라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인의 기세에는 한 치의 흔들림조차 없었다.

그저 가늘게 휘어진 두 눈으로 전방위에서 밀려오는 모든 공세를 읽어내고.

비늘 덮인 투박한 손발을 놀려 일 초에 수십 번 가해지는 타격을 모조리 받아칠 뿐.

[이, 이게 대악마···.]

더 놀라운 일은 그 움직임에서 어떤 묘리나 신묘한 기예를 찾아보기 힘들다는 사실이었다.

본디 무술이라는 건 오랜 세월이 흐르는 과정에서 가다듬어지고 정제되기 마련.

반대로 대악마의 움직임은 어떤 정렬된 흐름도 없이, 순간 순간의 본능에 모든 걸 맡긴 듯한 모습이었다.

맨손으로 싸우는 무예가라기보다는, 도구를 쓸 줄 모르는 짐승에 가깝다는 말이 어울릴까.

수십 년간 쌓아올린 무투가의 묘리에 기반을 둔 공세는, 그 짐승 같은 움직임에 허무할 정도로 쉽게 무효화되고 있었다.

꽈광!!

쇄골과 후두부를 동시에 노린 두 인영의 공격이 가볍게 막힌다.

터져나오는 충격파가 일대의 흙먼지를 싹 날려버리며 두 존재가 만들어낸 폐허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이미 주변에 멀쩡한 구조물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발밑의 지면마저 구덩이가 만들어지는 걸 넘어서서, 거대한 균열이 쩍쩍 갈라져 위태로운 모습을 보일 지경.

천공요새가 붕괴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언제 바닥이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답보(踏步)」

쿵―

그리고 바닥 상태 따위는 아랑곳않고 진각을 밟아낸 댈런이, 무릎으로 용인의 옆구리를 노렸다.

콱!

용인은 손을 뻗어 무릎을 받아냈다.

마치 가볍게 던져진 공을 받는 것마냥 무릎을 그대로 잡아낸 것.

꾸드드득.

우악스런 손아귀 안에서 관절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용인은 이빨을 드러내며 중얼거렸다.

"재밌기는 한데···이게 끝이라면 더 볼 건 없겠군."

푸훅───

가볍게 휘두른 날카로운 손톱. 댈런의 육신이 회백색 그림자로 흩어진다.

쩌━━━━━

용인의 손톱이 허공에 남긴 궤적.

저 멀리서 가까스로 버티던 첨탑 하나가, 그 궤적에 허리를 가른 듯 뚝 하고 쪼개졌다.

쿠구구구구···!!

손짓의 여파만으로 거대한 방사형의 구덩이가 만들어진다.

맨손으로 백여 미터 안쪽의 모든 것을 날려버리는 비현실적인 광경.

오래 전 균열에서 상대했던 청린의 일격에 비교해도 전혀 뒤쳐지지 않는 위력이었다.

쉬이이익!

포기하지 않고 사각을 노린다. 놈의 등뒤에서 낮은 자세로 주파해온 댈런의 신형.

콰아아아앙!

대악마는 꼬리를 슬쩍 휘두르는 것만으로 그걸 세상에서 지워버렸다. 직경 수십 미터의 구덩이가 하나 더 생겨났다.

우득!

지면의 균열을 이용해 땅에서 솟구친 기습을, 한 발 물러서며 여유롭게 잡아내 목을 비틀어버리고.

쿠웅.

가벼운 진각으로 일대에 충격파를 터뜨려, 등을 노리던 댈런의 신형을 비틀거리게 만든다.

콰직!

발끝에서 머리통이 수박처럼 터진다. 그대로 잿빛 그림자로 변해 흩어지는 육편들.

손을 뻗어 그 잔흔을 움켜쥔 용인이, 짜증을 한가득 담아 소리질렀다.

"이딴 잔재주 말고 본신으로 덤벼라! 얼마든지 똑같이 으스러뜨려 줄 테니!"

[오래 기다렸다.]

폐허가 된 요새에 전성이 울린다. 용인은 휙 고개를 돌렸다.

대부분 무너지고 몇 안 남은 첨탑의 지붕 위쪽. 목소리가 시작된 건 그곳이었다.

[평소랑은 다르게 준비하려면 시간이 좀 필요했거든.]

「풍영결계(風影結界)」

첨탑 지붕에서 소용돌이가 몰아치더니, 허공에서 장막을 걷어내듯 댈런의 모습이 드러난다.

"처음부터 아예 싸울 생각이 없었던 건가! 비겁한 수작을 부리는 게 전사가 아니라 주문쟁이로구나!"

"인간 나라 하나 먹겠다고 마물 수만 마리를 끌고 온 놈이 할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

쯧쯧 혀를 차면서도 집중을 놓지 않는다.

저런 저급한 도발에 넘어가려고 지금까지 전장에서 물러나 있던 게 아니었다.

애당초 필즈의 바람 결계를 응용한 은신 술식, 풍영결계를 실전에서 사용한 것 자체가 이번이 처음.

평소 같으면 몸을 숨기기는커녕 정면으로 쳐들어가서 다 부수는 걸 선호하는 그였다.

그럼에도 한 발 물러선 건, 이번만큼은 그렇게 접근해서는 안 되는 싸움이기 때문이었다.

"이만큼이나 손을 섞은 게 부끄러울 지경이군! 쑴께서 지켜보신다기에 나도 기대했건만, 더 이상 봐주지 않겠다!"

"웃기는군."

쿠르르르······.

픽 웃는 댈런의 목소리에, 하늘이 울었다.

"너 혼자였으면 진작에 뒈졌다. 화신체로 쳐들어온 주제에."

회백의 투사는 생전 마지막 일격으로 쑴의 갑옷을 일그러뜨렸다.

아무리 대악마라지만 화신체에다 상성마저 극복한 이상, 그 유산을 흡수한 댈런이 상대하지 못할 리 만무했다.

그러나 그건 쑴의 첫 침공이면 항상 선두에 서는 타알마드 하나를 상대할 때의 이야기.

지금 전장에 나선 대악마는 무려 둘이었고, 타알마드를 제외한 나머지 한 놈은 전장 어딘가에 숨어있는 상황이었다.

'놈이 언제 어디서 개입해도 이상하지 않다. 그냥 대악마 둘을 상대한다고 가정하고 싸워야 해.'

회백의 투사에게서 흡수한 영역, '종언에 드리운 회백의 하늘'은 타알마드를 대비해서 안배해둔 한 수.

그렇다면 다른 대악마를 상대할 수 역시 준비하는 게 옳다.

댈런이 분신체들로 시간을 끌면서 모습을 감추고 있었던 건, 그 다른 한 수를 준비하기 위함이었다.

몇 번이고 영역을 개방했음에도, 아직까지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시도를.

쿠르르르릉!

하늘의 울림이 더욱 거세진다. 타알마드는 짐승처럼 그르렁거리며 땅에 손을 꽂았다.

쿠드득!

단단한 손톱이 지면을 파고들고, 무너진 건물 밑바닥의 골조 자체를 들어올린 놈이 그걸 그대로 던졌다.

후우우우웅―

첨탑 지붕을 향해 날아오는 수십 톤짜리 돌덩이.

마치 거대한 유성이 아래에서 위로 솟구치는 듯, 중력의 법칙을 위배한 것만 같은 광경이었다.

총알을 맨손으로 잡아채는 초인이라도 저런 무지막지한 질량의 폭격을 견디는 건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댈런은 몸을 피하기는커녕, 오히려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어올리며 눈을 살짝 감았고.

쿠릉···.

다시금 눈꺼풀을 들어올린 순간, 그가 바라보던 하늘 위에서 섬광이 떨어졌다.

━━━━━!!

하늘의 먹구름을 뚫고 땅에 내리꽂힌 빛기둥.

날아오던 돌덩이가 그 낙뢰에 꿰뚫린 채 공중에서 파편으로 산산히 부서진다.

댈런은 여전히 시선을 내리지 않았다. 타알마드는 불현듯 스치는 육감의 경고에 하늘을 쳐다봤다.

쿠르륵. 꾸드드드······.

얼어붙은 하늘과 새까만 먹구름으로 양분되었던 창공.

그 틈 사이를 다른 무언가가 파고든다.

이글거리는 열기. 아득하게 울려퍼지는 뇌성.

두 하늘의 틈을 비집고 나온 검붉은 먹구름이, 수십 줄기의 번개와 불기둥으로 허공을 훑어댄다.

그건 마치 거대한 균열을 비집고 고개를 들이밀며, 붉고 푸른 혓바닥을 낼름거리는 괴수와도 같았다.

「영역 개방 : 닫힌 설산의 하늘」

검붉은 먹구름이 붕괴되어가는 천공요새 위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이미 잿빛으로 물들어버린 요새 위. 영역의 두 일면 사이에서 마력이 기묘하게 공명했다.

"······!"

그 순간 육감의 경종을 느낀 타알마드가 황급히 몸을 굴렸다. 대악마답게 그 간단한 동작으로 백 미터 가까운 거리를 넘어선다.

쿠과과과과―!!

놈이 몸을 피한 직후 곧바로 터져나오는 불기둥.

직경 십수 미터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화력에, 이미 자리에서 멀리 대피한 타알마드의 비늘까지 열기가 미친다.

그리고 그게 시작이었다.

꽈르르르릉──!!

「뇌람(雷濫)」

검붉은 하늘이 땅을 향해 수십 갈래 뇌전의 비를 내리꽂고.

「대하주염(垈煆柱炎)」

잿빛 땅은 하늘을 향해 붉은 불기둥의 향연을 토했다.

하늘과 땅에서 쏟아지는 힘의 파도를 견디지 못하고 마침내 무너져내리는 천공요새.

떨어지기 시작하는 요새의 지면 위,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타알마드가 입을 열었다.

"···말도 안 된다. 6위계의 문턱을 두드리는 거야 그럴 수 있다 쳐도···어떻게 이토록 다른 두 심상이 한 인간의 영역 안에 있을 수 있지?"

"글쎄."

댈런은 하늘을 향해 들었던 고개를 내렸다. 그가 서있던 탑 역시 무너지고 있었다.

지붕에서 발을 떼고 허공을 딛는다. 댈런은 수백 조각으로 부서져 떨어지는 요새를 내려다봤다.

그 눈동자 안에는 붉고 푸른 기운과 잿빛의 색체가 뒤섞여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가 말했다.

"꼬우면 너도 현질하던가."

「영역 공명」

「닫힌 설산의 하늘」

「종언에 드리운 회백의 하늘」

머리 위에 드리운 먹구름과 지면에 깔린 회백색 그림자.

「쌍천(雙天)」

천공요새를 사이에 두고, 두 하늘의 이빨이 교차했다.

186

쌍천(2)

쉬이익―!

검을 내지른다. 첨단에는 신성력의 밝은 성광이 맺혀있었다.

부욱하고 길게 찢어지는 마물의 가죽.

지렁이 같은 몸통에 수십 개의 팔이 달린 마물이 비명을 지르더니 그대로 고꾸라졌다.

쿠웅···!

"후우, 후우."

루시아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검을 들어올렸다. 건물 크기의 괴수를 쓰러뜨렸지만 끝난 게 아니다.

그녀가 노리는 건 마물이 아니라 그 안쪽에 숨어있는 괴물.

이윽고 마물의 시체가 꿈지럭대더니 퍽 소리와 함께 내장과 가죽을 뚫고 큼직한 팔이 튀어나왔다.

"크르르···찾아냈군. 나를."

사체를 찢어발기며 뛰어나온 건 트롤이었다.

마물의 피에 젖어 새빨갛게 물든 피부 위, 붉은 안광을 줄기줄기 흘리는 거대한 트롤.

"맡았나. 냄새를. 인간. 어떻게?"

"오늘 그 질문만 내가 몇 번이나 들었는지 알아?"

붉은 트롤은 악마였다. 마물의 몸속에 숨어서 성벽으로 접근하던 악마들 중 하나.

성기사단의 고서에서 본 적이 있는 듯한 형상이지만, 이름까지 기억나지는 않았다.

물론 기록이 남았다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수준의 파괴를 자행한 악마이긴 했다.

보통의 평범한 성기사라면 수십 명이 몰려와도 고전을 면치 못할 정도로.

"크. 크. 죽을 년. 어차피. 먹어주지. 맛있―그어어억!"

부우욱!

북 찢는 소리가 한 번 더 났다. 악마의 옆구리가 길게 잘려나간 것이었다.

단단한 뱃가죽 사이로 울컥 흘러넘치는 핏덩이들. 악마는 흘러나오는 내장을 본능적으로 쓸어담으며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악마의 배후로 이동한 루시아가 검에 묻은 검붉은 피를 휙 털었다. 그녀가 말했다.

"그 소리도 몇 번째 들은 건지 모르겠네. 어떻게 된 게 항상 똑같은 말만 지껄여?"

"무, 무슨···."

악마는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눈앞에서 섬광이 번뜩이고 시야가 휘청 기울었기 때문이었다.

"그억···?"

스르르 기울다 툭 떨어지는 시야. 붉은 눈동자에 맺힌 건 목 없는 악마 자신의 몸뚱이였다.

피를 분수처럼 뿜어내며 휘청거리는 거구의 육신.

머리가 바닥에 채 떨어지기도 전에, 번쩍이는 섬광이 그 육신을 다시 한 번 반으로 갈랐다.

쉬익―!

악마의 육신을 반으로 가른 섬광이, 곧장 방향을 틀어 막 땅에 떨어진 머리통을 짓이긴다.

콰직!

번뜩이는 검격이 트롤의 두개골을 그대로 뭉개버리고, 남겨진 백색 화염은 무지막지한 재생력마저 연료 삼아 갉아먹으며 타올랐다.

"···후우."

이로써 여덟 마리째.

신성 문신으로 한계까지 힘을 발휘한 육신이 극심한 탈력감에 휩싸인다.

단마의 백염이 악마의 육신을 천천히 집어삼키는 걸 내려다보며, 루시아는 신성 문신의 힘을 잠시 가라앉혔다.

"신이시여. 제게 전장의 무게를 짊어질 체력을 주소서."

전투기도로 몸의 컨디션을 조절하는 한편, 감각을 넓게 퍼트려 빠르게 전장을 훑어내린다.

성기사단은 각 대대별로 유기체처럼 움직이며 악마를 사냥하고 있었고, 그 결과 역시 나름 성공적이었다.

악마 살해자라는 이명이 아깝지 않게, 루시아 혼자서 처치한 악마만 해도 거의 두 자릿수.

전투 초반에 댈런이 쓰러뜨린 숫자와 성기사단이 각종 성물로 처리한 악마까지 포함하면, 참전한 악마의 절반 이상이 무력화되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시아의 미간은 좁아졌다.

성기사단이 피해를 입어가면서까지 어떻게든 악마를 붙들어 매려 했음에도, 성벽 쪽은 속수무책으로 밀리는 중이었기 때문이었다.

"···대마탑이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질 줄은 몰랐는데."

원인은 화력의 공백이었다.

대악마의 손에 천공요새의 기능이 정지되면서, 이쪽의 대규모 화력 투사 수단 하나가 사라진 것.

수만 마리의 마물을 상대로 아군이 밀리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성벽 위를 지키던 철혈군대와 더불어 수많은 술사들의 술식 포격 덕분이었다.

천공요새의 소실은 양쪽 진영 사이에 팽팽하게 유지되던 균형이 깨뜨렸다. 그리고 악마들은 기회를 놓칠 놈들이 아니었다.

성기사들의 방해를 무시해가며 저돌적으로 성벽을 향해 군세를 밀어붙인 끝에, 두 번째 성벽은 거의 함락되다시피 한 상태.

마물의 군세는 더 안쪽까지 진출해, 실질적인 전선은 마지막 성벽 앞에 펼쳐진 시가지에 형성되어 있었다.

아무리 악마와 마물을 상대로 압도적인 상성을 보이는 성기사들이라고 해도, 머릿수에서 밀리는 이상 공세 자체를 저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심문관님! 하급 악마 질트레드를 무력화했습니다. 다음 목표를 부탁드립니다!"

전황을 두고 고민하는 사이 파른이 달려왔다. 소년의 얼굴과 갑옷은 온통 마물의 검붉은 피로 뒤덮여 있었다.

마녀에게 잃어버린 눈을 안대로 덮고, 하나뿐인 팔로 신성력이 이글거리는 검을 쥔 소년.

"잘했다. 잠시만 기다려라."

루시아는 생각을 털어버리고 하늘로 시선을 들어올렸다.

밀리고 있는 상황이기에 더더욱 지체할 여유는 없다.

반쯤 기울어진 채로 하늘을 향해 치솟는 천공요새에서, 댈런은 아예 대악마와 정면으로 치고받는 중 아니던가.

파아아앗···!

하늘을 향한 두 눈에서 성광이 줄기줄기 흘러나오며, 루시아의 시야를 아득한 높이로 부양시킨다.

그녀의 소영역은 악마를 추적하는 데 특화된 심상이었다.

신성력의 힘을 빌려 전장 전체를 굽어다보고, 악마의 존재를 뚜렷하게 감지해 추적할 수 있을 정도의 능력.

대악마 이상 되는 존재가 작정하고 몸을 숨기는 게 아닌 이상, 그녀의 추적을 피할 수 있는 악은 이곳에 없었다.

전장 전체에 걸쳐서 샅샅이 드러나는 악마의 행적들.

루시아는 고개를 치켜든 채 말했다.

"성벽 바깥에 남은 악마가 얼마 없다."

이미 상당수의 악마가 화력의 공백을 틈타 두 번째 성벽 안쪽으로 넘어가 있었다.

바깥에서 기회를 엿보던 악마들은 대부분 성기사단과 댈런의 손에 쓰러진 상황.

슬슬 성벽의 수비 병력을 지원한 시간이었다. 성벽 밖에서 마지막 한 마리의 악마까지 척살해봐야, 성벽 자체가 무너지면 아무 의미가 없었으니까.

그렇게 판단한 루시아는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명령했다.

"다른 대대들에 신호를 보내도록. 병력을 반으로 나눠서 한쪽은 두 번째 성벽의 병력을 구조하고, 다른 쪽은 두 성벽 사이의 시가전을 지원···."

그 순간.

아득하게 넓어진 그녀의 감각권에 이상한 것들이 잡혔다.

***

두두두두···.

그건 거대한 물결이었다.

전장의 동북쪽에서부터 몰려오며 땅을 진동시키는 수천의 존재감.

루시아의 심상은 악마를 추적하는 데 특화되어 있었기에, 그 물결의 정체가 무엇인지 곧바로 파악하는 건 불가능했다.

다만 그것들이 악마나 마물은 아니라는 사실만은 알 수 있었고, 그렇기에 루시아는 더욱 혼란스러웠다.

'분명 동쪽 방어선에서 가용 가능한 병력은 전부 끌고 왔는데···?'

"심문관님! 제 3 대대의 급보입니다!"

그때 성기사 하나가 달려오며 소리쳤다. 신성 문신의 능력으로 다른 부대와의 통신을 맡은 부관이었다.

"거대한 하이 오크 무리가 전장으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숫자는 대략 사천 이상!"

구와아아아아!!

우아아아아!!

보고가 끝나기 무섭게 우렁찬 함성이 전장을 뒤덮는다. 몇 달 전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들었던 함성들.

"하이 오크는 싸운다! 하이 오크는 이긴다!"

"이거 이기면 밥 먹는다! 마물도 고기다!"

"덜격! 덜격한다!"

수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음에도 뚜렷하게 들리는 하이 오크들의 고함 사이로, 루시아의 감각권에 또 다른 기척이 걸려들었다.

"아카샤···?"

균열의 청린용을 쓰러뜨린 뒤, 댈런이 그녀의 둥지에서 거둬들였던 새끼용.

동료가 되었음에도 그 혈통 자체는 악마의 한 부류인 용이었기에, 루시아의 소영역은 그 기척을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고개를 돌리자 저 멀리 성벽을 넘어 전장으로 날아드는 아성체의 진룡이 보였다.

이제는 새끼용이라기에 너무 크기가 커져버린 아카샤의 등에는, 거의 자기 몸만 한 짐이 올려져 있었다.

"으하하하하! 폭탄 터뜨리기 딱 좋은 날씨라니까!"

그 짐더미의 정체는 폭약이었다.

정확히는 어마어마한 양의 폭발물들과, 그 폭발물을 안장처럼 깔고 앉은 땅딸막한 난쟁이.

[잡담할 시간에 어서 떨어뜨리기나 하세요! 아버지의 부탁이 아니었으면 맹세코 이딴 작전은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겁니다!]

"크흐흐, 역시 댈런 그 친구도 어지간히 미쳤다니까! 하늘을 날면서 폭탄을 떨어뜨린다니, 어떻게 그런 발상을···."

[빨리 무게를 덜어내지 않으면 폭탄 대신 당신을 떨어뜨리겠습니다!]

반쯤 광기에 물든 외침과 울화통이 터지기 직전의 전성.

신나게 성벽 근처의 마물들을 폭격하는 난쟁이와 짜증을 숨결로 토해내는 진룡을 바라보며, 루시아는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다.

쿠구구구구···.

그때 등 뒤에서 또 다른 진동이 울려퍼졌다.

반쯤 기운 채 하늘 높이 치솟았던 천공요새가 뒤흔들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맙소사, 신이시여······."

곁에서 명령을 기다리던 부관이 입이 떡 벌어진 채 중얼거렸다.

눈앞에 펼쳐진 건 난데없이 등장한 하이 오크 군대나, 적을 폭격하는 용과 난쟁이의 조합보다도 압도적인 광경이었다.

쿠르릉···.

꽈르르릉―!

하늘의 틈을 비집고 내려온 검붉은 먹구름이 천공요새의 위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폭우처럼 끊임없이 쏟아붓는 수십 다발의 벼락들과, 그에 화답하듯 잿빛으로 물든 천공요새 하부에서 터져나오는 수많은 불기둥들.

위아래에서 터져나오는 벼락과 화염기둥의 향연은, 마치 거대한 짐승이 날카로운 수백 개의 이빨로 천공요새를 으적거리며 씹어대는 것 같은 광경이었다.

그 화력을 비상 술식으로 간신히 부양 중이던 요새가 버틸 수 있을 리 없었다.

수백 개의 크고 작은 파편으로 붕괴한 천공요새는, 그대로 마물의 군대를 향해 떨어지기 시작했다.

콰과과과과······!!

질량 그 자체가 폭격이 되어 군세의 북쪽 측면을 우그러뜨린다.

대악마와 댈런의 싸움에서 비롯된 후폭풍은 근방의 남은 마물마저 싸그리 집어삼켰다.

루시아는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작전을 변경합니다."

"···심문관님?"

"성벽으로 돌아가 방어를 지원하는 건 그대로입니다. 다만 저는 지금부터 단독으로 행동하겠습니다."

이유 없는 기행은 결코 아니다.

무너졌던 전장의 균형이 다시 팽팽해졌다. 아니, 오히려 반대로 역전되고 있었다.

이제 이 전투에 남은 변수는 단 하나.

단 하나의 싸움이, 승리의 향방을 결정지을 터였다.

"···설마 저 괴물들의 싸움에 끼어드시려는 겁니까?"

기사단에서 십수 년을 봉사했다는 부관이, 그 전황과 의중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다.

중년의 성기사는 자신보다 어린 상관의 명령에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악마 살해자라는 이명까지 가진 성기사라 하지만, 저긴 초월자가 아니고서야 끼어들기 어려운 싸움 아닌가.

"제 1 대대의 지휘를 부탁합니다."

루시아는 그 의문을 해소해주지 않고 곧장 발걸음을 옮겼다.

방향은 북쪽. 붕괴된 천공요새가 떨어진 곳.

수십 미터 높이로 치솟은 일대의 흙먼지 안쪽에서는 이 순간에도 격전이 펼쳐지는 중이었다.

루시아는 갈무리했던 감각을 다시 넓혔다. 악마를 추적하는 그녀의 능력은 흙먼지 너머의 싸움을 선명하게 잡아냈다.

요새가 떨어질 때까지만 해도 영역을 이중으로 개방한 댈런이 압도하는 형국이었으나, 대악마 하나가 더 모습을 드러낸 시점부터 판도가 뒤집혔다.

두 대악마의 맹공에 조금씩 밀리기 시작하는 기세.

아무리 댈런이라도 대악마 둘을 상대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저도 두 번 잃지는 않을 겁니다.'

한 달 전 꺼냈던 말이 다시금 머릿속에 메아리친다.

물론 루시아의 체력과 신성력 역시, 이미 한참을 전장에서 싸우며 바닥에 가까워진 상태였다.

허나 어째서일까.

심상 너머에서 퍼져오는 기이한 울림과 함께, 알 수 없는 힘이 그녀의 내면에서 차오르고 있었다.

우우웅···.

북쪽을 향하는 그녀의 등 뒤로, 은빛의 파문이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187

쌍천(3)

쐐애애액!

날카로운 가시가 늘어선 대검이 공기를 가른다.

목젖을 노리는 검끝. 톱날 같은 검신에 휘감긴 거무튀튀한 마력.

평소였다면 바로 성검을 뽑아들고 부딪혔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크하하하! 이제야 좀 즐겁구나!"

불현듯이 측면을 파고들어 손톱을 내지르는 용인의 권능 탓에, 성검을 꺼내드는 것만으로도 신체능력이 저하되기 때문.

"쯧."

댈런은 혀를 한 번 차고 뒤로 훌쩍 물러났다. 용인의 손톱과 갑주 악마의 검끝이 집요하게도 쫓아왔지만 상관없었다.

「회명(回冥)」

공간의 틈을 파고들어 수십 미터를 이동하는 초월자의 기예는, 아무리 대악마의 검이라도 쉽게 따라잡을 수 없는 노릇.

카각! 쿠과과광―!

가시투성이 대검이 가른 건 흐릿하게 뭉게진 잿빛 그림자와, 그 아래에 있던 애꿎은 폐허의 돌더미였다.

"···도망치는 기술 하나는 수준급이군. 에낙사구스의 하수인들처럼 같잖은 술식에 심취한 것도 모자라, 아예 승부에 대한 전사로서의 자존심마저 내다버린 것인가."

검을 휘두른 대악마, 거구의 묵빛 갑주가 중얼거렸다. 댈런은 픽 소리를 내며 입술을 삐뚜름하게 만들었다.

"새꺄, 그러면 대악마 명찰 달고 2대 1로 붙는 건 괜찮고? 니네 신이 퍽이나 좋아라 하시겠다."

"···내 주군을 모독하다니. 죽고 싶은가 보구나."

"안 그래도 서로 죽자고 싸우는 중이잖아."

묵빛 갑주의 투구가 후르르 떨리는 게 보였다. 놈의 입장에서야 화날 만한 발언이긴 했다.

[천공요새의 부름을 받은 대마법사의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영역을 이중으로 개방하자마자 참전한 저 악마는, 초월자 중 하나의 시체를 집어삼킨 대악마 '투르 아라둔'.

지옥 무기고의 대공이라고도 불리는 놈은, 쑴 휘하의 여섯 대공들 중에서도 가장 충성심이 강하기로 유명했으니까.

"아무래도 이 싸움을 최대한 빠르게 마무리지어야겠소, 타알마드 공."

목소리를 가다듬은 갑주가 곁으로 다가온 용인에게 말했다. 용인은 세로로 찢어진 눈을 번뜩이며 대답했다.

"왜 그러지? 이제 막 사냥이 즐거워지려 하던 참인데."

"군세가 사면으로 포위된 형국이오. 동쪽은 하이 오크에게, 서쪽은 성기사단에게. 남쪽의 성벽은 아직 굳건하게 버티는 중이고, 이곳 북쪽의 퇴로는 우리로 인해 막혔소이다."

"그거야 조무래기 악마 새끼들이 알아서 할 일···."

"주군께서 명하신 건 사냥의 여흥이 아니라, 차리나의 왕도를 무너뜨리는 일임을 잊지 마시길 바라오."

"···쯧, 재미없는 새끼."

용인이 이빨을 드러냈다. 물론 갑주의 말이 맞았기에 뭐라 반박할 수는 없었다.

수천 년을 산맥에 처박혀있던 하이 오크들은 무슨 심경의 변화가 생겼는지는 알 수 없는 일.

허나 난데없이 산맥을 벗어난 놈들은, 어떻게 했는지 설원 늑대까지 길들여 타고 전장에 난입해 마물들을 쓸어버리고 있었다.

악마들을 척살하던 성기사단은 성벽 방어에 합류하려는 듯, 서쪽에서부터 아예 군세의 종심을 돌파하는 중이었고.

거기다 방어군의 마법 병력이 집중된 세 번째 성벽에는 아직 접근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데, 성벽 쪽에서는 웬 진룡 아성체를 탄 난쟁이가 난데없이 폭탄을 퍼붓지를 않나.

어떻게 보나 이쪽을 빨리 끝내고 도우러 가는 게 맞았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용인의 눈빛이 착 가라앉았다. 놈은 나직하게 울음을 흘리며 손톱을 들어올렸다.

"놈은 용혈의 보유자다. 사냥용 무기를 꺼내."

"좋소이다. 용 사냥은 오랜만이구려."

검을 왼손으로 옮겨든 묵빛 갑주가 허공에서 길다란 장창 하나를 꺼내들었다.

창날에는 물론 창대에까지 난잡하게 가시가 박힌 형태의 장창. 그걸 본 댈런이 눈을 찌푸렸다.

[조심하거라. 용살의 저주를 품은 창이다.]

"알고 있소."

어떻게 모를 수 있을까.

투르 아라둔은 쑴이 다스리는 지옥, 파멸궁전의 무기고를 관리하는 대악마.

식인을 즐기지 않는 놈의 특성상 직접 잡아먹힌 건 한 번뿐이라지만, 그와 별개로 놈과 손을 섞다가 죽은 캐릭터만 해도 대여섯 명은 됐다.

[저 두 대악마는 오래 전, 아직 용신이 지옥의 권세에 합류하기 이전에 그의 각반을 살해한 이력이 있느니라. 인간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았겠으나, 악마들 사이에서 용 사냥꾼 형제라고 불린 적도 있지.]

"알고 있···."

[내 빈말을 하는 게 아니니라. 진체가 아니라 하더라도 네게는 극도로 위험할 것이야. 조심하거라.]

거참 알고 있다니까. 심상 너머 고룡의 걱정어린 목소리에, 댈런은 무심코 웃음을 픽 흘리고야 말았다.

"예전에 비해 걱정이 많이 늘었군. 설마 내가 죽을까봐 두려우시오?"

[···되었다. 신경 써서 조언해줬더니 헛소리만 늘어놓는구나.]

"고맙군. 걱정해줘서."

[앞이나 잘 보거라.]

어딘가 뾰루퉁해진 듯한 음색. 댈런은 헛웃음을 슬슬 흘리며 고개를 들었다.

누군가의 걱정을 받는다는 건 그리 나쁜 기분이 아니다.

각자의 동기와 속사정이야 전부 다르겠지만, 어찌됐건 그를 아끼는 이가 하나 더 많아졌다는 의미였으니까.

그리고 그건 동시에 그에게 책임의 무게가 더해진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상대방이 그를 지키려 하는 만큼, 그도 무언가 지킬 것이 늘어난 셈이기에.

그게 상대의 생명이건, 마음이건.

혹은 수천 년 묵은 고룡의 희망이건 간에.

"후우."

긴 날숨. 그리고 다시 깊은 들숨.

한계까지 내몰린 근육과 장기에 뜨거운 피가 휘돌고, 사지육신으로 활력이 뻗어나가며 마지막 힘을 쥐어짜낸다.

심상 너머에서 회백의 투사와 사투를 벌인 이후로, 오랜만에 목숨을 저울대에 내건 진짜 싸움이었다.

대악마가 하나도 아닌 무려 둘.

그것도 적창의 말대로 쑴 휘하에서 수천 년간 합을 맞춰온 괴물들이다.

수많은 시체를 쌓아 지옥에서 시산혈해(屍山血海)를 이루었다는 용인.

그리고 파멸궁전의 끝없는 병기들을 제작하고 관리하는 살아있는 갑주.

상대는 진룡도 죽일 수 있는 보구를 꺼내들었는데, 이쪽은 무기는커녕 갑옷 하나 걸칠 수 없다.

아무리 댈런이라도 이대로 혼자 붙었을 때의 승산은 결코 높지 않겠지.

'지옥에서 싸울 때와는 달리 마물들의 지원을 받지 못하고, 온전한 힘을 낼 수 없는 화신체라는 특성을 감안해도···아무리 잘 쳐줘봐야 3할 이하.'

머릿속의 이성이 재빠르게 승산을 분석해 내려간다.

이 세계에서 겪어온 숱한 싸움의 경험과, 머릿속에 남은 수백 회차의 기억에서 비롯된 냉정한 현실.

사실상 지는 게 당연한 싸움.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신은 고양감으로 뜨겁게 달아오른다.

이상한 일은 아니다. 오히려 육신의 이런 반응이야말로, 여지껏 걸어왔던 길의 증거나 다름없었으니까.

돌이켜보면 어느 하나 쉬웠던 싸움이 있었던가.

이 세계에 떨어진 이후 그의 인생은 불가능한 투쟁의 연속이었다.

악마와 결합한 대사도와의 일전에서부터 재의 마녀와 균열의 청린을 쓰러뜨리릴 때도 그랬다.

미궁을 주파해 칼카스를 지옥째로 소멸시킨 이후, 덩굴의 마녀가 획책한 궤계를 막아섰을 때 역시 마찬가지였고.

근래에는 하이 오크의 내전을 겪은 끝에 쑴의 여섯 대공 중 하나를 소멸시키고, 이전 회차의 흔적인 회백의 투사와 일전을 벌이기까지.

승산을 확실하게 점칠 수 없는 싸움은 한두 번이 아니었고, 그밖에도 숱하게 겪어온 자잘한 전투들 역시 단 하나의 목숨을 담보로 거는 도박이었다.

그럼에도 한 번이라도 물러섰다면 지금의 그는 결코 존재할 수 없을 테였다.

이쪽에서 할 수 있는 건 오직 그 도박의 승산을 최대한으로 높이는 일뿐.

그러니 이번에도 마지막 한 걸음을 내딛는 데 망설임은 없었다.

쿠웅―

발걸음에서 동심원의 파문이 퍼져나간다.

잠잠하던 하늘의 먹구름이 다시금 나직하게 울음을 흘리기 시작한다.

이 순간에도 마음 한구석에서 아른거리는 죽음의 공포를 부인하지 않는다. 그저 적당한 수준의 긴장감으로 승화시킬 뿐.

영역을 개방한다는 건 스스로의 세계를 현실의 세상에 밀어넣는 기적.

과거를 수용하고 현재를 직시한 초월자에게만 허락된, 세계의 법칙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행위다.

자신의 마음 하나 오롯이 똑바로 바라보지 못해서야, 애당초 여기까지 걸어올 수도 없었을 것이다.

하물며 지금의 그는 지나간 과거와 이 순간의 현재를 넘어서서, 6위계 초월자들이 바라보는 미래에 대한 단초를 쥐고자 하는 입장.

스팟―!

하늘을 향해 가볍게 전격 줄기를 던져올린다.

이미 오래 전에 완성해낸 '쏘아지는 번개'의 술식.

검붉은 먹구름 사이로 전격의 줄기가 파고드는 걸 올려다보며, 동시에 발밑에서 이글거리는 화염을 잿빛 대지 안쪽으로 흘려보낸다.

「홍류섭(紅流燮)」

쿠구구구구······.

다시금 울음을 토하기 시작하는 두 개의 하늘.

대영역을 빚어낸 5위계 초월자인 그로서도, 영역을 개방한 채로 장기간 싸우는 건 힘의 소모가 클 수밖에 없다.

하물며 전투의 초반부터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체력을 소비하고, 처음으로 영역을 이중으로 개방한 지금은 더 말할 것도 없는 상황.

"내가 전위를 맡지. 알아서 잘 마무리해라."

"알겠소. 인간형으로 변신한 진룡을 상대한다 생각하면 되겠구려."

강대한 대악마답지 않게 익숙하게 역할을 분담하는 용인과 갑주를 바라보며, 댈런은 심상 너머의 힘을 쏟아낼 준비를 마쳤다.

어차피 시간이 없는 건 이쪽도 마찬가지다.

본신에서 비롯된 전격과 화염을 트리거 삼아, 개방된 영역의 힘을 다시금 최고조로 끌어올린 지금이야말로 두 대악마를 상대할 마지막 기회.

「영역 공명」

「닫힌 설산의 하늘」

「종언에 드리운 회백의 하늘」

「쌍천(雙天)」

이번에 물러서면 다음 기회는 없다.

세 가지 색체로 두 눈을 물들인 댈런이 전신에 화염의 갑주를 둘러낸 순간.

두 대악마가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를 박차고 돌격했다.

콰광―!

용인과 갑주가 서있던 땅이 폭발하듯 꺼지며 잔해를 흩날린다.

화신체의 육체 능력만으로 음속을 넘어선 주파.

벌어졌던 수십 미터의 거리가 말 그대로 찰나의 순간에 0으로 수렴하고.

치솟는 잔해의 파도를 뒤로 한 채, 눈앞으로 날카로운 창끝이 파고들었다.

「뇌람(雷濫) : 공명」

그 순간 먹구름이 다시 한 번 수십 갈래의 빛기둥을 떨어뜨리며, 그 첨단으로 창끝을 강타해 저지한다.

도끼나 성검이 없다고 해서 상대의 무구를 막을 수 없는 건 아니다.

그런 무구에 필적하는 강력한 힘을 끌어내려, 마치 검을 휘두르듯 정밀하게 다룰 수만 있다면.

그게 곧 손에 쥔 무기나 다름없는 법이니까.

꽈르르르릉─!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연속적으로 같은 위치에 떨어지며 대악마의 기세를 막아서는 빛줄기.

무기고의 관리자인만큼 유려하게 휘어지며 사각을 파고드는 창끝에, 일일이 전격의 줄기를 그 위로 내리꽂으며 찍어누른다.

투가가가가가강!

술식과 무구가 만났다기보다, 병장기와 병장기가 부딪히는 듯한 격철음이 울려퍼진다.

그건 소리의 범주를 상회하는 충격파 그 자체.

한 번의 격검에 주변의 석재가 가루가 되어 흩날리고, 땅이 움푹움푹 패이며 전장의 지형을 바꿔놓는다.

"흐아아아!"

갑주 위로 불길한 상형문자들이 그려지며 갑주의 속도가 한층 더 빨라진다.

놈의 손이 마치 수십 개로 늘어난 듯 잔상을 내보였다.

낙뢰의 저항을 뚫여내려는 필살의 의지.

그러나 다시 한 번 내려친 벼락의 다발이, 그 마지막 공세마저 틀어막았다.

「뇌령신수(雷零神樹)」

꽈르르릉──!!

그건 드넓은 먹구름 전체에서 뻗어나온 뇌우의 비가, 지상의 단 한 점으로 모여드는 기이한 광경이었다.

반대로 생각하면 회백색으로 물든 땅에 뿌리 내린 뇌전의 나무가, 하늘을 향해 뻗은 벼락의 가지 끝에서 먹구름의 이파리를 맺은 듯한 모양새.

대악마의 일격마저 그 거대한 동체를 뚫지 못하고 멈춰설 수밖에 없었다.

「회명(回冥)」

그리고 그 틈에 일렁이는 잿빛 그림자.

다음 순간 아득하게 높이 뻗은 신목의 가지들 사이에서, 회백색 음영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댈런이 말했다.

"이제 내 차례군."

구우우우······!!

벼락의 나무가 울부짖기 시작했다.

188

전쟁신의 검(1)

구우우우우···!

두 영역의 공명으로 탄생한 신수(神樹)의 주변.

하늘과 하늘 사이를 잇는 뇌전의 줄기를 기점으로, 눈이 시리도록 새파란 파동이 퍼져나간다.

신수의 가지를 딛고 선 댈런은 그 중심부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푸른 전격의 구체가 흘러나와 댈런의 손 안으로 빨려들어가고, 방금까지 지축을 울리던 공명이 돌연 뚝 멎었다.

···콰지지지지직!!

손틈 사이로 새어나오는 눈부신 전광.

그 여파만으로도 주변 마력풍의 흐름을 모조리 으스러뜨린다.

두 하늘의 공명으로 빚어낸 심상의 정수. 아무리 댈런이라도 이걸 오래 붙잡고 있을 수는 없다.

터어엉―!

허공에서 거꾸로 몸을 뒤집은 댈런이, 신수의 가지 하나를 짓밟고 뛰어내리며 갑주를 향해 주먹을 뻗어낸다.

머릿속에 그리는 건 푸른 번개의 형상.

본디 성층권의 구름 사이에 있어야 할 그 파괴적인 뇌령을, 두 하늘 사이인 이곳에 증폭해 강림시킨다.

「청뢰조(靑雷條)」

찌지지━━━!!

허공에 거꾸로 심겨진 두 번째 전격의 나무가, 대기를 찢어발기며 거침없이 가지를 뻗어낸다.

묵빛 갑주가 선 지점을 넘어서서, 그 주변 일대까지 통째로 짓이기는 푸른 뇌전의 폭격.

그야말로 도망칠 틈을 주지 않겠다는 의지의 발현.

세계의 법칙을 갉아먹는 영역의 특성상, 대악마라도 이걸 피하는 건 불가능하다.

"······!!"

그러나 묵빛 갑주는 쓰러지지 않았다.

"타알마드 공···!"

"크흐으···내 비늘이 찌릿할 정도의 뇌전은 오랜만이군."

어느새 놈의 정면에서 모습을 드러낸 붉은 눈의 용인이, 동료에게 쏟아지는 모든 전격의 폭풍을 전부 받아낸 것이다.

"의외인걸. 아까 잡아먹은 대마탑의 주문쟁이들보다 훨씬 낫잖아?"

살짝 벌린 주둥이에서 새어나오는 연기.

거뭇하게 겉표면이 타들어간 비늘 위에서, 푸른 스파크가 산발적으로 튀어오른다.

세로로 찢어진 붉은 눈이 기묘한 열의로 번들거렸다. 길게 뻗어 주둥이를 핥는 갈라진 혀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두 가지.

광기. 그리고 식탐.

"이거···내 생각보다 더 맛있겠잖아?"

용인의 신형이 흐릿해졌다.

꽈광―!

잿더미가 된 땅이 폭발하듯 뒤집어진다. 먼지 구름을 뚫고 용인이 하늘을 향해 치솟았다.

촤악!

등 뒤에서 펼쳐진 피막 날개가 가속을 더하고.

콰지지지직─!

압도적인 벼락의 폭풍을 정면에서 받아내면서도, 그 속도는 한 치도 줄지 않는다.

[댈런, 조시···!]

경고를 들을 틈조차 없다.

내지르던 주먹을 억지로 비틀어내며, 남은 공세의 여력를 갈무리해 방어로 전환한다.

「술식갑주 : 삼중첩」

「청뢰갑(靑雷甲)」

「백풍갑(伯風甲)」

「화염갑(火焰甲)」

쿠지지지직!

뚫린다.

푸른 뇌전의 폭우를 거침없이 찢어발긴 손톱과 이빨이, 번개와 바람의 갑주마저 으스러뜨린 뒤 불꽃의 저항을 만나서야 한순간 멈칫했다.

그럼에도 시간벌이 수준에서 그쳤을 뿐.

재빠르게 번개로 빚어진 신수의 뒤로 피한 댈런을 향해, 피막 날개를 꺼내든 용인이 지체 없이 달려들었다.

"어딜 달아나는 거냐!!"

으지지지직──!

두 하늘의 공명으로 빚어진 첫 번째 신수마저 허무하리만치 손쉽게 으깨진다.

비늘을 두드리는 수백 가닥의 전격에도 불구하고, 용인은 간지럽지도 않다는 듯이 이빨을 들이밀었다.

힘의 총량이 밀린다거나, 기예가 부족하다거나 하는 개념이 아니다.

이건 완벽한 상성의 문제.

용혈의 배반자인 대악마 타알마드에게, 전격이라는 속성 자체가 통하지 않기에 생기는 일이었다.

'용혈의 배반자. 그 옛 혈통이 뇌룡이었다고 하지.'

본디 용인이라 함은 근원 자체가 진룡에 닿아있는 종족.

진룡 수준의 강력한 조상이라면, 머나먼 후대에까지 용혈의 힘이 일부 닿는 건 말 그대로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악마로 타락하기 이전, 타알마드는 자기 일족에서도 혈통의 능력이 강력하게 발현되었던 존재.

불완전한 용혈이기에 벼락을 다루거나 뇌우를 부르는 능력까지는 손에 넣지 못했으나, 뇌전에 대한 저항력 자체는 뇌룡이었던 선조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수준이라던가.

'···그러니 천공요새도 그렇게 순식간에 무너졌지.'

아무리 대악마라고 해도 혼자, 거기다가 화신체에 불과하다.

수백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대마탑 중 하나가, 잠시도 버티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무너진 건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영역의 공명으로 만들어낸 창공 너머의 전격조차도, 기껏해야 비늘 표면을 그을리는 데 그쳤다.

전격술사의 성지인 바르샤바크에서, 저 뇌룡의 후예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술사는 존재할 수조차 없었던 것이다.

"기세만 요란하군! 어떻게 된 거냐!"

꽈광! 꽈르릉―!

땅으로 내려앉은 초월자와 대악마의 공방에 실시간으로 지형이 변해간다.

회백의 투사가 남긴 깨달음으로 그 공세를 받아내며, 댈런은 번개를 갈무리하고 화염의 기운을 꺼내들었다.

무기 봉인의 권능에 더해 뇌룡급 전격 저항력까지 가진 대악마이지만, 그렇다고 아예 약점이 없는 건 아니다.

댈런이 아는 바로 타알마드의 약점은 두 가지.

'불과 신성력.'

놈을 상대로 영역의 일면인 닫힌 설산의 하늘을 개방한 이유는, 사실 뇌전이 아닌 화염의 힘 때문이었다.

영역을 이중으로 개방한 뒤에도, 놈을 직접적으로 공격할 때 벼락을 사용하지 않은 것 역시 마찬가지였고.

「대하주염(垈煆柱炎)」

쿠과과과과···!!

다만 여기서도 문제는 있었다.

싸움 도중에 난입했던 두 번째 대악마, 지옥 무기고의 대공 투르 아라둔.

지옥의 수많은 무기를 제련하고 관리하는 대장장이이자 무구 그 자체인 놈에게는, 파멸궁전의 지옥불마저도 익숙한 열기일 뿐이라는 사실.

"타알마드 공! 내가 막겠소!"

잿빛 지면을 뚫고 용인을 덮쳐가는 화염 기둥.

용살창을 앞세운 묵빛 갑주가, 용인을 제치고 그 열기의 폭풍을 정면에서 막아선다.

쉬이이이──!

장엄한 불기둥의 향연을 거스르는 창끝.

이번에는 정말로 피해낼 틈조차 없다.

짧은 시간에 영역의 힘을 두 번이나 교차해서 전력으로 쏟아냈기에, 다시 태세를 전환하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

「회명(回冥)」

「사연답산(四聯踏散)」

황급히 공간을 빗겨넘어 회피하고, 그림자를 쪼개 분신을 만들어냈음에도 소용없었다.

충분하게 예열된 지옥의 무기와 대악마의 창술이 만나, 거무튀튀한 창끝이 십수 개의 잔영으로 갈라진 건 한순간.

스가가가각!

눈으로 따라갈 수조차 없는 연격은 모든 그림자를 찢어발긴 것도 모자라, 공간의 틈바구니를 뒤따라 비집고 댈런의 옆구리를 길게 찢어놓았다.

"···크윽!"

탁 하고 힘이 풀리는 다리.

가까스로 한쪽 무릎을 꿇고 버티자, 옆구리에서 뜨거운 핏줄기가 왈칵 흘러내린다.

여느 때처럼 용혈에서 새하얀 김이 치솟지만, 벌어진 상처가 저절로 다물어지는 일은 없었다.

용 사냥꾼이라 불릴 정도의 대악마가 사용하는 무구다.

진룡도 해칠 수 있는 수준의 저주에, 아직 완벽하게 용혈을 제 것으로 만들지 못한 댈런이 저항한다는 건 어불성설이겠지.

"···과연 제법이군. 허나 주군의 명예를 욕하기에는 너무도 일천한 실력이다."

뻗어냈던 창을 회수한 묵빛 갑주가, 창끝에 묻은 피를 휙 털어내며 말했다.

"수천 년 묵은 고룡이라도 이 창으로 입은 상처는 쉽게 치유할 수 없지. 네가 용신이 아닌 다음에야 회복하는 데 족히 일주일은 걸릴 것이다."

"크흐흐, 아쉽게 됐어. 모처럼 재미있는 사냥이었는데 금방 끝나게 생겼군."

그 곁으로 다가온 용인이 광기로 눈을 번뜩이며 말을 받았다.

놈은 갑주가 들고있는 창끝에 혀를 가져다대고는 잠시 음미했다.

"적창···신기하군. 이미 천 년도 더 전에 유폐된 존재의 피를 손에 넣다니. 용신이 반역자의 피를 에낙사구스에게 팔아넘겼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과연 뜬소문이 아니었던 건가."

"······."

"적창의 피를 이어받은 아비에 청린용이 그 자식이라···이제 저 새끼용의 육즙만 즐기면 완벽한 식탁이겠군. 어린 용의 고기가 야들거리고 맛있지."

주둥이에 피를 잔뜩 묻힌 용인이 비릿하게 웃었다.

미친 새끼. 댈런은 거칠어진 숨을 가다듬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더 싸우려 하는가."

갑주가 의외라는 듯 중얼거렸다. 사실 어느 면에서건 유리하다고 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화염과 뇌전. 댈런이 이번 회차에 얻어낸 가장 강력한 두 종류의 힘.

쑴 휘하의 대공들 중에서도 하필이면 이 두 속성에 가장 강한 대악마들을, 한 전장에서 동시에 상대하게 될 거라고 누가 예측했겠는가.

그러나 댈런은 끝끝내 일어섰다. 이대로 포기할 싸움이면 아예 시작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더불어 저쪽만 동료가 있는 것도 아니고.

"아, 하나만 말해두지."

"···뭐냐?"

"너 뱀대가리 새끼야, 네가 부모 없는 놈이라는 건 알겠다 이거야.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정도가 있지. 남의 부모 앞에서 자식 욕 하면 안 된다는 것도 못 배웠냐?"

"······."

"생각해보니 못 배워먹은 게 당연하긴 하네. 부모가 없는데 누구한테서 이런 예의범절을 배우겠어."

쏟아지는 욕설에 용인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그게 뱀대가리라는 말 때문인지, 아니면 부모가 없다는 말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곧 죽을 놈이 입 하나는 잘 놀리는구나. 번개와 화염으로 우리의 비늘과 갑주를 뚫을 수 있을 것 같은가? 아비의 사랑? 그딴 헛소리를 하려는 건가?"

"아니. 뭔가 이해를 제대로 못 한 것 같은데, 방금 그건 애당초 내 이야기가 아니거든."

이해할 수 없는 말이다. 용인의 표정이 한층 더 찌푸려졌다.

그 얼굴이 마치 동물원 우리에 갇힌 뱀을 연상시켜, 댈런은 무심코 피식 웃으며 덧붙였다.

"너랑 달리 쟤는 엄마도 있어서."

──────푹.

별다른 파공음은 없었다.

그저 주변의 공기에서 기이한 이질감이 느껴진 다음 순간, 무언가 뾰족한 것이 용인의 가슴팍을 뚫고 나와있었을 뿐.

"커···허억!"

튀어나온 건 번쩍이는 검신의 첨단이었다.

화륵.

백색 화염이 새하얀 검신을 따라 순식간에 불붙어 피어오르고.

"크아아아악!"

조금 전까지 비릿하게 웃던 용인의 몸을, 그 내부에서부터 통째로 태워버리기 시작한다.

촤아악―!

내장에 불을 지르자마자 뽑혀나와 휘릭 하고 주인에게로 돌아가는 검.

어느새 댈런의 곁에 다가온 성기사가, 백염으로 타오르는 그 검을 자연스레 잡아챘다.

"왜 이렇게 늦었소."

"죄송합니다. 상대가 상대인지라···완벽하게 기습할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농담이요. 좋은 판단이었소."

댈런은 낮게 웃으며 루시아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피 묻은 두터운 손. 원래부터 피범벅이던 금발.

잠시 그 손길을 즐기던 성기사는, 이내 검에 묻은 피를 휙 털어냈다.

구우웅···.

그 단순한 동작에 은빛의 파문이 퍼져나간다.

단순히 악마를 추적하는 걸 넘어서서, 악의 심장에 직접 칼을 꽂아버리는 강력한 권능이 개화했다는 증거였다.

「영역 개방 : 악의 심장을 꿰뚫는 백색 비검」

게임 속에서 루시아를 악마 살해자라고 불리게 만든 권능이자.

동시에 플레이어의 입장에서 종말의 마지막 순간까지, 반드시 함께해야 할 영웅 중 하나로 그녀를 꼽게 만든 영역의 힘.

모니터 너머에서는 단순히 방어력이고 뭐고 무시한 즉발 피해로 나타나던 그 이해불가의 힘이, 마침내 이 시간선에서도 꽃을 피워낸 것이었다.

스으―

백염으로 뒤덮인 검의 첨단이 두 대악마를 향한다.

놈들을 노려보는 푸른 눈동자에는 신성한 광채가 이글거리며 타오르고 있었다.

갑주 틈 너머로까지 시리게 내비치는 신성 문신의 성광.

전설에 기록될 성녀의 모습은 어쩌면 이런 형상일까.

주변의 모든 어둠을 몰아내기라도 할 기세로 뿜어지는 밝은빛의 중심부에서, 루시아의 입이 열렸다.

그녀가 말했다.

"대륙의 균열을 수호하는 성기사단의 일원이자, 기사단 내부의 악을 척결하는 심문관 루시아 카스타챌드는, 지금 이 시간부로 대악마 타알마드와 투르 아라둔의 화신체를 처단합니다."

189

전쟁신의 검(2)

"···어떻게, 내 앞에서 무기를!"

용인이 거멓게 죽은 피를 토해내며 소리쳤다. 그 말에 댈런은 루시아의 검을 힐끗 쳐다봤다.

적당한 폭과 길이의 양날검. 평소에 가지고 다니던 것과 비슷한 형태이지만, 새하얀 검면을 따라 새겨진 선명한 물결 문양은 이 검의 비범함을 말해주는 듯했다.

"성검이군. 세 번째 성검. 레레도나텔."

"예. 단장님께서 평소에는 결코 사용하지도, 꺼내지도 말라고 하셨습니다. 단지···."

"단지?"

루시아가 살짝 붉어진 얼굴로 말을 이었다.

"네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을 때, 신의 선물이 그를 죽음에서 구해줄 거라고······."

뒷말을 얼버무리며 검끝을 들어 두 악마를 견제하는 루시아.

댈런은 다 헤진 웃옷을 벗어 옆구리의 상처를 싸매며, 그녀가 남긴 말을 되새겼다.

'과연 인도자. 그 머나먼 과거에서 이 순간을 내다본 건가.'

성기사단의 단장, 에드거 라인하르트는 미래를 볼 수 있었다.

스스로의 능력으로 거머쥔 미래의 편린과는 별개로, 전쟁신이 그에게 보여주는 장면을 초점 흐릿한 두 눈으로 내다볼 수 있는 것.

한쪽 팔과 두 눈을 잃고서도 6위계에 닿은 초월자의 권능과 시야는 과연 어디까지 뻗어 있는 것일까.

그런 상념을 흘러넘기면서, 댈런은 대악마를 가리킨 채 타오르는 성검을 바라봤다.

단장이 예비해둔 저 성검은 루시아가 개방한 영역의 이능과 완벽한 조합이었고, 더불어 용인과 맞서는 이 싸움에서 가장 필요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성검 레레도나텔. 벼락을 부르거나 하는 신적인 권능은 없지만, 검을 다룬다는 개념에 한해서는 그 어떤 방해나 훼방도 허락하지 않지. 거기다···.'

레레도나라가 남긴 비검의 정수를 다룰 수도 있었고.

뛰어난 전사이자 술사였고, 동시에 성기사단에도 적잖은 공헌을 한 영웅 레레도나라.

게임에서도 설정상의 전설 정도로 표현되는 존재이지만, 그 유산은 대륙 곳곳에 다양한 형태로 남아있었다.

댈런이 시체를 통해 회수한 스킬이 그런 유산이었고, 전쟁신이 직접 하사했다는 저 검 역시 마찬가지였다.

저 성검은 레레도나라가 평생을 사용한 검이었으며, 그렇기에 그녀가 창시한 비검의 정수를 품은 강력한 유품이었으니까.

"기사단의 문헌에 의하면, 세 번째 성검은 전쟁신이 레레도나라에게 비검의 깨달음을 하사한 매개체라고 한다네."

허공에 황금빛 파문을 일으키며 두 사람의 곁에 내려앉은 노인이 말했다.

댈런은 펠버를 쳐다봤다. 노인의 안색은 살짝 창백했지만, 그 눈에서 일렁이는 황금빛 광채는 여전히 선명했다.

"성기사단 쪽에도 해박했었소, 노인장?"

"본단에 연구차 한동안 머물지 않았었나. 나이가 들면 귀동냥으로 쌓이는 지식이 많아진다네. 푸근한 인상의 골방 늙은이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기 꽤나 적절한 상대거든."

"그렇군. 성벽은?"

"우리의 열혈 기질 동료들이 아주 잘 맡아주고 있지. 내가 손을 거들 게 없어 보이더군."

펠버가 웃었다. 그는 댈런의 옆구리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자네 혼자서 무리할 건 없다네. 세상을 구할 영웅이라도 홀로 싸울 수는 없는 법이야."

엘르. 메멘토 카시볼그.

미소를 띈 노인이 나직하게 주문을 읊었다.

파아아앗···!

잔잔한 황금빛 물결이 흘러나와 상처를 적신다. 용혈의 기능이 복구되며 찢긴 근육과 피부에서 펄펄 끓는 증기가 뿜어졌다.

왈칵거리는 출혈이 멎고, 흉터 하나 없이 상처가 회복되기까지는 말 그대로 눈 깜짝할 사이.

"···끌끌, 여전히 자네의 시간선에는 손을 댈 수가 없구먼. 자네의 운명을 쥔 건 누구인지 모르겠어."

"그럼 이건 어떻게 한 거요?"

"자네의 육신을 파고든 저주에만 손을 댔다네. 강력한 저주이긴 하지만 시간선을 다루는 입장에서는, 생명의 역동성보다야 뻣뻣한 기물이 만지기 수월하지."

"···역시 노인장도 주문쟁이군."

"응? 무슨 소린가?"

펠버가 고개를 기울였다. 댈런은 대답 없이 픽 웃었다.

"···성벽 위의 그 마법사인가."

그때 용인이 끓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댈런은 놈에게 고개를 돌렸다.

시간이 좀 지나서인지 성검에 꿰뚫렸던 놈의 상처는 겉보기에 어느정도 아물어 있었다.

비늘이 다시 자라지는 않았으나, 피가 굳고 딱지가 앉은 모습.

물론 고통에 표정이 순간순간 일그러지는 걸 보아하니, 내부는 여전히 진탕이 되어있는 게 분명했다.

그도 그럴 게, 단마의 백염에 성검까지 더해진 루시아의 권능은 대악마의 재생력에도 치명적이었으니까.

"타알마드 공, 어떻게 하시겠소?"

용살창을 꽉 쥐고 이쪽을 견제하던 갑주가 물었다. 용인은 으득 하고 이빨을 갈며 대답했다.

"···성기사만 노려라. 시간선을 다룬다고 해봤자 잔재주지. 저 년만 죽이면 우리가 질 일은 없다."

"이해했소."

댈런은 턱을 긁적였다. 웃기는 놈들이네. 누가 그렇게 해준대?

그는 숨을 천천히 들이쉬었다. 이전처럼 온몸에 활력이 도는 일은 없었다.

거의 한계까지 몰린 육신. 바닥에 가까워진 체력과 마력.

그럼에도 아직 조금의 여력은 남아있었다. 아까처럼 공격적으로 몰아붙이지는 못하지만, 기사단의 가장 날카로운 검을 보호하는 방패가 되기에는 딱 맞을 정도였다.

"루시아. 아무 생각 말고 놈들의 심장을 노려주시오. 방어는 내가 맡겠소."

"나도 함께하겠네. 원래 대지 계열 술식은 방어에 최적화된 편이야."

펠버가 재빠르게 수인을 맺어내자, 황금빛 파문이 발 아래에서 일렁이기 시작한다.

댈런도 어깨를 풀었다. 그의 의지에 잿빛 대지와 저 위쪽의 먹구름이 다시금 울음을 토했다.

"···전쟁의 신이시여."

성기사의 육신에서 새하얀 성광이 번뜩이고, 두 대악마의 권능이 꿈틀거린 순간.

━━━━!!

무너진 천공요새의 폐허 위.

두 대악마와 세 초월자가 충돌했다.

***

먼저 내달린 건 용인이었다.

[크아아아아!!]

폐허를 쩌렁쩌렁 울리는 전성과 함께 길게 늘어나듯 솟구치는 놈의 신형.

"엘르― 달타둠!"

쿠구구구구!!

펠버가 주문을 영창한 순간, 폐허를 뚫고 치솟은 거대한 토둔이 그 경로를 막아선다.

엘가이아 마탑의 탑주답게, 어지간한 성채의 성벽에 필적하는 두께와 중량의 토둔.

"크아아아아!"

그러나 용인이 표효와 함께 내지른 가벼운 손짓 한 번에, 토둔은 파도 앞의 모래성처럼 박살났다.

당연하겠지만, 그게 끝은 아니었다.

촤자자자작―

박살난 토둔에서 사방으로 비산하는 흙더미들 사이, 수백 가닥의 뿌리덩굴이 자라나며 용인의 앞을 가로막는다.

필로폰에게서 받은 식목계 마법 개론에서 익힌 두 가지 주문, '급속 발아'와 '살아 움직이는 뿌리'의 조합.

댈런과 펠버는 몇 달간 함께 싸워오며 서로의 능력에 대해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있는 바.

5위계에 접어든 두 술사의 협동은, 주문의 잔흔마저 또 다른 주문의 촉매로 삼는 지경까지 닿는다.

"이딴 잔재주를!"

용인이 눈앞을 가로막은 뿌리덩굴을 향해 손을 뻗어냈다. 그 순간 덩굴의 표피가 쩌적 갈라지며 불꽃을 토해냈다.

「발화(發火)」

「성류옥(聖蘲獄)」

순식간에 용인을 둘러싸고 타오르는 성화의 창살.

그 창살 틈으로 파고든 건 한 줄기의 이질적인 기척이었다.

────푸확!

심장을 꿰뚫고 빠져나온다.

재빠르게 치고 빠지는 성검의 궤적은, 피할 수도 막아설 수도 없었다.

"끄아아아아아!!"

고통에 비명을 토하는 용인이 우악스런 손길로 창살을 잡아채고.

으지지지직!

비늘이 타들어가는 것마저 아랑곳않고 감옥의 창살을 찢어발긴 순간, 저 높은 하늘에서 거뭇한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타알마드 공!"

"캬학, 성기사를···죽여!"

하늘에 나타난 건 묵빛 갑주였다. 먹구름을 등지고 떨어지는 육중한 신형.

동료가 부상당했음에도 도우러 가지 않는다.

그럴 시간에 상대의 유일한 공격 수단을 무력화하는 것이 옳다는 판단이었다.

"나는 지옥 무기고의 열쇠이니―!"

쉬이이이익!!

놈의 의지가 발현된 순간 주변에서 공간이 일렁이더니, 불현듯이 나타난 수백 자루의 창검이 비처럼 쏟아지기 시작한다.

하나하나가 지옥 대장간에서 주조된 무기들.

이 세상에 풀려났다면 흑마법사들이 목숨을 걸고서라도 찾아나섰을 사특한 병기들이었다.

"노인장!"

손 안에서 뇌전을 끌어올리며 소리친다. 말하기도 전에 펠버는 이미 수인을 맺고 있었다.

"엘르. 메멘토 카시볼그."

황금빛 정광이 발밑에서 일렁이는 동심원을 그리고, 퍼져나간 동심원을 기점으로 구축된 황금빛의 돔.

두두두두두두두!

수백 점의 무구가 황금의 돔을 강타했다. 기괴하게 생긴 병기들이 경계를 넘는 순간 황금빛 마력에 사로잡혔다.

파지지직―!!

이글거리는 지옥불. 공간을 핥아대는 핏빛 마력 줄기.

무구에 서린 수천의 원혼들이 울부짖으며 섬뜩한 한기로 일대를 잠식한다.

마치 당장에라도 자신을 휘감은 황금빛 마력을 떨쳐내고 목표의 피와 살점을 탐하겠다는 듯이.

[엘르. 메멘토 카시볼그―!]

다시 한 번 전성으로 떨쳐낸 영창이 그 사특한 의지들을 무위로 돌린다.

와장창 깨지는 소리와 함께 바깥으로 폭발하는 황금빛 돔.

지옥 병기들의 의지와 그 병기들의 시간을 돌려버리는 권능이 충돌하며, 서로가 서로를 상쇄한 채 단순한 힘의 폭발이 되어 흩어진다.

사방팔방으로 비산하는 수백 점의 창칼들. 그 사이를 묵빛 갑주가 뚫고 내려오며 공방이 이어졌다.

파지지지직!

내던지는 뇌전의 줄기. 피하고 받아치는 사이 성검이 빛살처럼 심장을 찌른다.

코앞까지 접근한 용인과 화염 갑주를 두른 댈런이 순식간에 백 합이 넘도록 주먹을 주고받고.

그 틈을 노려 등을 베어낸 용살창의 저주를 황금빛 정광이 무효화한다.

꽈릉─ 쿠과과과과···!!

다섯 인영이 교차할 때마다 언덕이 내려앉고 토사가 파도가 되어 치솟는다.

파괴의 규모만 따지면 수만 군세가 격돌하는 성벽 앞의 전장보다도 더욱 격렬한 싸움터.

시간이 갈수록 백염이 일렁이는 관통상이 두 대악마의 육체에 누적되어가고, 이쪽의 피로와 상처 역시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난다.

인리를 초월한 괴물들임에도 영원히 싸우는 건 불가능하다.

서로가 서로의 초월성을 갉아먹는 사투 속에서, 싸움의 향방이 끝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꽈릉―!

하늘에서 한 줄기 뇌전을 뽑아내 갑주를 강타한 댈런이, 뒤로 훌쩍 물러나며 말했다.

"노인장. 잠시 시간을 벌어주시오."

격렬한 전투 사이의 찰나. 대답 없음이 곧 수긍을 의미한다.

앞으로 성큼 나선 펠버가 전력으로 황금빛 장막을 전개하는 것과 동시에, 눈을 반개한 댈런의 의식이 전장을 굽어봤다.

「몽환추적(夢桓追跡)」

「회백전도(灰白全圖)」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흑백 음영의 전장.

성기사단과 하이 오크들의 활약에 대부분의 악마는 쓰러지고 남은 건 수만 마리의 마물들 뿐이었다.

전장을 내려다보는 댈런의 시선이, 그 치열한 성벽 주변 일대를 샅샅이 훑었다.

찾는 건 알림창이 떠오른 잿빛의 시체들.

전장 곳곳에 흩뿌려진 지난 회차의 유산이었다.

[속박된 사령술사의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은빛 투구 기사단 선임기사의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악마의 창끝에 꿰인 사제의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무너지는 성벽을 일으킨 장인의 시체를···.]

[고문을 버티지 못한 마법사의······.]

모두 합해 열 구에 가까운 시체들.

두 대악마에게 죽은 것 외에도, 전장에 흩뿌려진 가능성의 씨앗은 상당한 규모였다.

「칠연답산(七聯踏散)」

「회명(回冥)」

닳고 닳은 집중력을 쥐어짜 사방으로 신형을 퍼뜨린다.

나뉜 신형 하나하나는 그림자인 동시에 실체.

어떤 술식을 이용한 환상이 아니라, 공간을 빗겨내며 원본의 일면을 투영한 분신체다.

늘어난 여섯 체의 육신이 잿빛 음영을 등지고 전장을 휩쓸며, 곳곳에 흩뿌려진 가능성을 회수한다.

[속박된 사령술사의 시체를 회수했습니다.]

[계승 보상 : 지능 +1, 마력 +1]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양측. 사력을 다해 유지중인 팽팽한 균형은 언제 어느 쪽으로 깨질지 모른다.

[은빛 투구 기사단 선임기사의 시체를 회수했습니다.]

[계승 보상 : 근력 +1, 기량 +1, 실라의 은빛 전신갑주]

그렇기에 아직 닿지 못한 가능성들에서, 최후의 향방을 결정지을 공세의 불씨를 지펴낸다.

[악마의 창끝에 꿰인 사제의 시체를 회수했습니다.]

[계승 보상 : 지능 +1, 치유의 기도(D)]

[무너지는 성벽을 일으킨 장인의 시체를···.]

[계승 보상 : 기량 +1, ···.]

[고문을 버티지 못한 마법사의······.]

[계승 보상 : ······.]

이미 본신의 힘을 모두 소모한 상태라면, 그에 따른 해결책은 의외로 간단하다.

바로 외부에서 새로운 힘을 들여오면 되는 것.

[악마의 도시락이 된 이름 없는 병졸의 시체를 회수했습니다.]

[계승 보상 : 근력 +1]

드넓은 전장의 마지막 시체를 회수한 댈런이, 반개한 눈을 떠 앞을 바라본 순간.

와장창―!

"커허···!"

두 대악마의 맹공에 황금빛 장막이 마침내 깨져나가고, 그 역풍에 얻어맞은 펠버가 허공에 붕 떠서 날아왔다.

"쿨럭! 컥, 커헉!"

무리해서 시전한 영역의 권능. 거기에 술식이 박살나며 생긴 여파.

거친 기침소리에 검붉은 핏덩이가 줄줄 흘러나온다. 갈색 수염에는 이미 죽은 피가 한가득이었다.

"탑주님!"

성검의 제어에 집중하던 루시아가 황급히 다가가 신성력으로 그를 치유하기 시작했다.

댈런은 숨을 천천히 들이쉬고는, 그 둘을 지나쳐 앞으로 나아갔다.

[노인장, 루시아. 고맙소.]

육성이 전성이 되어 울려퍼진다.

쿠웅.

발걸음은 진각이 되어 지면을 내려앉힌다.

열 구에 달하는 시체를 회수하며, 순식간에 축적된 능력치로 극한까지 고양된 육체과 정신.

그건 마치 고열을 앓다가 어느 순간 느껴지는 탈력감, 혹은 수 시간 동안 등에 메고 있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한 해방감이었다.

[후우.]

작은 한숨에 열기가 공기를 일그러뜨린다. 숨결 사이로 희끗 내비치는 검붉은 불꽃의 그림자.

공기의 무게마저 가벼웠다.

아니, 정확히는 원래 그게 무거웠다는 걸 뒤늦게 느꼈다는 쪽에 가까웠다.

물론 이미 한계까지 체력을 소모했기에, 아마도 이 고양감은 그리 오래 가지 못할 터.

그럼에도.

[남은 건 내가 마무리하겠소.]

넝마가 된 악마 두 마리의 경험치를 수급하는 데는, 그 정도만으로도 충분했다.

「회백투영(灰白鬪影)」

산뜻한 고양감 속, 댈런의 신형이 불현듯 흐릿해지고.

「이팔지순(二八至瞬)」

───쩌저저저저적!

다음 순간, 신음을 흘릴 새도 없이 묵빛 갑주의 판금에 스물여덟 군데의 권흔(拳痕)이 새겨졌다.

190

파멸궁전의 왕(1)

영역을 개방할 수 있는 초월자의 경지.

모니터 너머에서 수백 회차의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그곳에 닿은 캐릭터의 숫자는 채 열이 되지 않는다.

그렇게 초월의 자리에 오른 캐릭터를 위해 각각 소모된 시간은, 아무리 적게 잡아도 무려 백수십 시간 이상.

모니터 너머에서 보낸 시간이 그만큼이었다. 실제로 이 땅에서 살아간 인물의 입장에서는, 족히 수십 년에 달하는 세월이었겠지.

"크아아아악!"

한순간에 여기저기 우그러져 걸레짝처럼 변한 묵빛 갑주가, 고통스레 비명을 지르며 물러섰다.

댈런은 자리에서 천천히 손을 움켜쥐었다. 손가락 사이를 휘감는 바람의 감촉. 신선했다.

"이런 느낌이군."

같은 하루, 동일한 한 시간이라도 사람마다 사용하는 밀도가 판이하게 다르다던가.

난세를 보내는 영웅이 보낸 수십 년은, 어쩌면 범인의 수천 수만 년과 동일한 무게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 어마어마한 인고의 시간을 통해 빚어진 심상의 정수. 원래라면 댈런이 그 극치의 깨달음을 넘보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태창.'

――――――――

이름 : 댈런

레벨 : 37

[근력 : 55] [기량 : 48] [체력 : 43]

[감각 : 42] [지능 : 43] [마력 : 45]

스킬 : 데하만의 갑주격투(D), 야간 시야(E), 도약(E), 불꽃 화살(D), 라판텔라의 분쇄검(C), 헤갈레우스의 화염의 비(C), 쏘아지는 번개(D), 저주막이의 인장(D), 레레도나라의 비검(B), 성화의 불씨(C), 검붉은 용의 피(A), 지옥문의 열쇠(C), 아커만의 작도법(C), 필즈의 바람 결계(C), 화영창술(D), 살아 움직이는 뿌리(D), 급속 발아(D), 룰리아의 샘물(C), 영혼 착취(B), 치유의 기도(D), 스카디의 해일(B)

*고유 스킬(15)

――――――――

이미 인간의 한계를 아득하게 뛰어넘어, 사실상 반신에 가까워지고 있는 그의 능력은 그걸 가능케 만들었다.

"권로를 읽을 수가 없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읽혔는데···힘을 숨기고 있던 건가?"

"글쎄."

"아니야. 그럴 수는 없다. 이토록 완벽한 위장은 불가능해. 그것도 본인의 목숨을 담보로 하고서, 대체 어떻게···아니, 왜?"

혼란스럽게 흔들리는 투구 사이의 안광.

댈런은 피식 웃으며 앞으로 걸어나갔다.

영웅이 쌓아올린 수십 년의 무게. 일반적으로 그 과정과 밀도를 온전히 감당해내는 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허나 능력치로 표현된 댈런의 잠재력은 일반적인 궤를 한참이나 벗어났고.

한술 더 떠서 그의 영역에는, 초월자 본인에게서 직접 전수받은 심상의 결과물이 펼쳐져 있었다.

'이쯤이면 흉내 정도는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지.'

생각을 갈무리하며 발을 내디딘다.

그리고.

「회명(回冥)」

「팔연답산(八聯踏散)」

잿빛 그림자가 일렁이는 동시에, 댈런의 거체가 흐릿해졌다.

찌지지지직─!

공간이 찢어지고, 댈런의 모습이 증발하듯이 모습을 감춘다.

다음 순간 갑주의 전후좌우 여덟 방위를 모두 점한 댈런의 신형. 각각의 공세를 뻗어내며 팔방위의 급소만을 노린다.

두두두두두두―!

"카아아아악!"

갑주를 중심으로 수십 번의 충격파가 터져나오고, 변형되다 못해 찢어진 판금에서 검은 기운이 넘실거리며 새어나온다.

"타, 타알마드 공···!"

성큼 다가온 죽음의 예감에 필사적으로 창을 찌르며 동료를 부른다.

댈런은 뻗어오는 창을 가만히 보다가 그냥 잡아버렸다. 우뚝 하고 멈추는 창대.

"무···커억!"

콰앙!

흉부 판금이 완전히 우그러진 갑주가 저 멀리 튕겨나가고, 용살창을 빼앗은 댈런이 손안에서 그걸 한 바퀴 돌렸다.

"뒈져라!"

동시에 갑주의 부름을 받고 내달린 용인의 신형이 코앞이었다. 묵빛 갑주의 창을 뺏어든 탓에, 용인의 권능으로 팔다리가 급격히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적창.'

그러나 댈런은 창을 놓지 않았다. 격돌 직전의 순간. 아득하게 늘어나는 시간 감각 속.

[···그래.]

댈런은 심상 너머의 고룡을 불렀고, 설산의 절벽 위에 걸터앉은 용이 몸을 일으켰다.

[네 본신의 능력이 이 정도까지 향상되었다면, 심장의 주도권을 빼앗지 않고서도 잠깐 정도는 가능하겠구나.]

용이 운을 뗌과 동시에 나른해지는 근육에 새로운 활력이 흘러든다.

혈관을 태워버릴 듯한 힘의 밀도가 대악마의 권능에 저항해냈다.

[한 번 보여줄 테니 잘 기억해두거라. 최대한 네 전투 방식에 알맞게 가르쳐주마.]

그리고 나직한 속삭임이 귓가를 울리는 것과 함께, 팔다리의 주도권이 누군가에게 넘어갔다.

***

저벅.

허상인 듯한 발소리.

그와 함께 나타난 건 꽤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인영이었다.

조금 흐릿한 형체로 나풀거리는 묵색의 도복. 붉은 기가 뒤섞인 검은빛의 머리칼.

마치 시간이 천천히 흘러가는 듯한 장면 속에서, 적창은 고개만 살짝 돌려 댈런을 쳐다봤다.

붉은 기가 조금 감도는 새하얀 얼굴 위로, 두 가지 빛깔로 번뜩이는 눈이 장난스레 웃었다. 그녀가 말했다.

[심장이 꽤 빨리 뛰는구나. 오랜만에 본 내 형상에 반가움을 감출 수가 없더냐?]

쿵. 쿵. 쿵. 쿵.

심장이 요동친다. 댈런은 헛웃음이 나왔다.

적창은 역사 이전과 이후를 통틀어 최강의 진룡 중 하나.

아무리 진룡의 심장으로 만들어낸 용심장이라고 해도, 그 힘을 감당하면서 요동치지 않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억지로 심장을 뛰게 만들어놓고 그런 소리라니. 어디서 도끼병이라도 걸려 오셨소?'

[도끼···뭐? 뭐라 했느냐?]

'고향 말이니 신경 끄시오. 그리고 미안하지만 이제 임자 있는 몸이라.'

[쯧. 고리타분하긴. 뭐, 상관없다.]

미간에 주름을 만든 여인이 성큼 다가오며 발끝을 들어올렸다. 가까워지는 얼굴. 가벼운 접촉.

팔다리의 주도권이 이미 넘어간 상태에서 저항하는 건 불가능했다. 만족스러운 표정이 된 적창이 낮게 속삭였다.

[인간으로서의 네 일면은 그 아이든 마녀든 아무나 가지라 하거라. 네 용의 면모는 내가 가져갈 터이니. 어차피 우린 이미 하나된 몸 아니더냐?]

'···헛소리는 됐고 앞이나 좀 봐주시오.'

[풋, 알겠느니라. 시간이 없으니 잘 익혀보거라.]

시간 없다면서 헛짓거리는 잘도 하는군. 어이가 없어서 내심 고개를 젓는 사이, 창을 든 손이 저 혼자 움직였다.

다시 빨라지는 시간감각.

창 든 손이 간결하게 앞으로 내뻗어진다.

핏━

용인의 손톱과 창끝이 만나고, 가벼운 소음과 함께 두 신형이 교차된다.

쩌적─ 쿠구구구구!

창을 휘두른 궤적을 따라 지면에 커다란 균열이 발생했다. 마치 지진이라도 난 듯 지하의 암반 깊은 곳까지 갈라진 땅.

뒤를 돌아보니 용인은 왼손으로 반대쪽 어깨를 감싸쥐고 비틀거리고 있었다.

놈의 오른팔은 손가락 두 개와 어깨의 살덩이 한 움큼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적창! 어째서 필멸자에게 힘을···용신의 처분이 두렵지도 않은 건가!"

[웃기는구나. 이름마저 빼앗기고 영락한 이가 뭘 더 두려워할 수 있겠느냐?]

피를 토하며 외치는 용인과, 댈런의 입을 빌려 코웃음을 치는 적창.

명색이 용인에 악마임에도 불구하고, 타알마드의 육신은 제대로 재생되지 못하고 있었다.

용살창의 저주를 담은 창과 그 위에 이글거리는 검붉은 화염까지.

용의 피가 섞인 놈에게는 그야말로 최악의 상성이기 때문이겠지.

"···제기랄!"

불리함을 깨달은 용인이 피막 날개를 펼치며 날아올랐다. 시간을 끌려는 속셈인 듯했다.

[그나저나 요정족의 창술이라···댈런, 네 육신은 재미있는 기술을 꽤나 알고 있구나.]

그러나 날개 정도로 노룡의 손을 벗어날 순 없었다.

스가각─

허공을 딛는 발걸음. 공중에 연달이 일어나는 파문을 따라, 댈런의 팔과 다리가 우아한 호선을 그린다.

두 팔에 번갈아 쥐어지며 검붉게 허공을 수놓는 창의 궤적. 그 자취를 따라 셀 수 없는 꽃봉오리가 피었다 사라졌다.

용인이 대처하기도 전에, 그 궤적은 놈을 지나치며 꽃을 피웠다.

「적화주란(赤華株亂)」

단단한 비늘이 저항 없이 녹아내린다.

질긴 가죽을 가른 열기가 용인의 전신에 붉은 꽃을 수놓았다.

본디 머나먼 동방에서 건너왔고, 시체를 통해 회수한 스킬 '화영창술'.

적창은 요정들의 의식에서 비롯된 창술의 극의를 소화해, 완전히 다른 수준으로 탈바꿈한 것이었다.

스파파파팟─

흐드러진 꽃의 향연을 맺으면서도 과도한 소음이나 충격은 없었다.

공기를 찢는 파공성은 유려한 춤사위 속에 묻혀갔고, 충돌의 여파마저 검붉은 화염의 열기에 녹아버린다.

"타알마드 고···컥!"

우그러진 갑주를 추스르고 하늘로 날아오른 대악마. 지옥불에 천 년이 넘도록 연단된 투르 아라둔의 육신까지도 부드럽게 갈라버리는 창끝.

수 분도 채 지나지 않아 반으로 갈라진 묵빛 갑주와, 심장이 꿰뚫린 용인이 지상으로 떨어졌다.

이미 한참이나 힘을 소모한 대악마의 화신체에 불과한 놈들이다. 시간을 오래 끌 이유가 없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구나. 더 이어가면 네 몸의 주도권을 되찾기 어려워질 것이다.]

적창이 말했다. 댈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적창이 지금처럼 전면에 나서는 건 물론 숨겨진 강력한 한 수이지만, 그 힘에 취해 용심장이 넘어갈 수 있다는 위험을 간과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지상으로 내려간 댈런은 용인의 몸뚱이 곁, 잿빛 네 구의 시체 위에 손을 올렸다.

[용인에게 씹어먹힌 궁사의 시체를 회수했습니다.]

[계승 보상 : 기량 +2, 요정의 결목궁]

[한입거리 용병의 시체를 회수했습니다.]

[계승 보상 : 체력 +1]

[시산혈해에 파묻힌 성기사의 시체를 회수했···.]

[붉은 주문의 계승자의······.]

네 구의 시체를 회수하며 능력치를 비롯해 보검과 엘프제 활 한 자루, 그리고 새로운 염열계 술식 하나를 얻었다.

적 하나 쓰러뜨리고 얻은 것치고는 나름대로 짭짤한 보상. 댈런은 남은 시체 하나로 시선을 돌렸다.

[천공요새의 부름을 받은 대마법사의 시체]

- 멸망에 저항했던 전격술사의 시체다. 수많은 기연으로 젊은 나이에 대마법사의 경지에 올랐으며, 천공요새의 부름을 받았으나 응하지 않고 홀로 대륙 곳곳에서 멸망에 맞섰다. 최후에는 쑴의 파멸궁전에 직접 쳐들어가 악신 간의 내분으로 힘이 약해진 쑴을 소멸시키는 데 성공했으나, 그 과정에서 입은 부상 탓에 주군에게 충성스런 대악마였던 투르 아라둔의 추격을 뿌리치지 못하고 사망했다.

'저건 나중에 회수해도 되겠지.'

천공요새의 부름을 받은 대마법사.

저 전격술사는 악신을 소멸시킨 단 두 번의 성공 시도 중 하나였다.

수많은 노하우와 공략법이 정리되어가던 플레이 중후반의 끝자락.

댈런은 정석적인 마법사 캐릭터로 어디까지 키울 수 있는지 시험해보고자, 사전 기획만 수십 시간을 투자해가며 철저하게 준비해서 하나의 캐릭터를 육성했다.

그 결과로 만들어진 전격술사는, 전 회차를 통틀어 세 손가락에 꼽을 만큼 강한 존재.

'회백의 투사 때와 같은 현상이 일어난다면···이번에는 정말로 답이 없으니까.'

회백의 투사와의 싸움도 결코 쉽지 않았다.

단순히 능력치로만 따지면 그를 손쉽게 이길 수 있었음에도, 쌓아온 세월과 그에 따른 심상이 생각 이상으로 깊고 넓었기 때문.

초월자 간의 싸움은 단순한 능력치의 우열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초월자의 자리에 올랐다는 건, 이미 범인을 한참이나 넘어선 잠재력의 보유자라는 의미.

쑴의 갑옷만 구긴 회백의 투사도 그러했을진대, 아예 파멸궁전에 쳐들어가서 쑴을 족친 이 전격술사는 어떻겠는가.

아무리 악신 간의 내분으로 약해진 상태였다고는 하나, 악신 하나를 소멸시키는 건 그 어떤 초월자도 쉽게 해낼 수 없는 일이다.

'돌대가리 오크들이랑 수십 년 같이 산 댈버랑은 달리, 정상적인 주문쟁이면 그래도 말이 통할 것 같기는 한데···아니, 오히려 더 안 통할 확률이 높겠군.'

그나마 남은 일말의 가능성을 고려해보던 댈런은 고개를 저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주문쟁이다.

어떤 의미에서든 상식적인 대화가 통할 리 없지.

성벽 쪽에서는 아직 싸움이 다 끝나지도 않은 상황. 우선은 펠버와 루시아를 데리고 성 안으로 들어가, 남은 전투를 마무리하는 게 옳았다.

그렇게 생각하며 두 사람이 있는 남쪽으로 몸을 돌린 순간.

[그래. 내 시험을 잘 통과했군.]

공기가 얼어붙었다.

[박수를 보내지.]

자박.

작은 발소리.

등 뒤. 북쪽이었다.

펠버를 치료하던 루시아가 이쪽을 돌아보고, 펠버 역시 고개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얼어붙은 하늘이 비명을 질렀다. 조금씩 밀리는 듯하던 새까만 먹구름이 마구잡이로 밀어붙이며 서로 소멸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흐─]

목덜미를 간지럽히는 웃음소리. 목소리의 주인이 속삭였다.

[미안. 기다리려고 했는데···너무 재밌어 보여서 주체할 수가 없었어.]

"······."

[대신 우리 둘만의 전장을 만들어줄게. 다른 건 다 잊고, 우리 둘만.]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사악한 기운이 전장을 뒤덮었다. 다음 순간 수만에 달하는 마물의 군세가 한 줌 핏물로 변했다.

무너진 두 성벽과 그 거리 위에 홍수처럼 넘쳐흐르는 검붉은 핏물.

삽시간에 벌어진 무참한 살육의 현장에, 성벽 위의 모두가 눈앞의 광경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멍하게 바라봤다.

[이러면 서로 더 힘을 뺄 필요도 없지. 안 그래?]

댈런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래. 이제야 여기를 봐주네.]

그건 일그러진 검붉은 형상이었다.

[역천의 우물이 맞은 것 같아. 그래서 난 너무 기뻐.]

유일하게 또렷한 두 개의 눈동자, 선명한 핏방울의 색채가 호선을 그렸다.

[예언의 주인공···우물이 쥐어짜낸 모든 가능성의 집합이라는 존재···다른 네 명의 머저리들보다 내가 너랑···가장 먼저 싸울 수 있다니. 히히.]

악신이 웃었다.

사악하도록 순수한 기쁨이었다.

191

파멸궁전의 왕(2)

[히히.]

광기에 물든 웃음.

그 웃음을 본 댈런은, 이 땅에 떨어진 이래 처음으로 지독한 무력감을 느꼈다.

'이길 수 없다.'

대륙 각지에서 긁어모은 수십 가지 가능성들. 그 모든 걸 더해도 이길 수 없었다.

5위계에 올랐음에도 또렷한 형체조차 볼 수 없다. 아마 성벽 위의 병사들 대부분에게는 저 일그러짐을 목도하는 것마저도 허락되지 않았겠지.

[응? 왜 그래. 왜 망설여? 아까 그 재미난 불꽃 좀 꺼내보라니까? 아니면 번개라도?]

격양된 듯한 목소리가 이어진다. 일그러진 형상 위로 불꽃과 스파크가 튀어오르며 공간을 짓이겼다.

댈런이 반응하지 않자 놈의 눈매가 서서히 가늘어졌다. 목소리가 말했다.

[치···어쩔 수 없지.]

이리저리 구르던 두 개의 눈동자가 댈런의 어깨 너머를 응시했다. 루시아와 펠버가 있는 곳이었다.

[할 수 없다면 하게 만들어줄게. 인간들을 소중한 게 망가지면 강해지더라구. 그러니까···.]

[거기까지다.]

전장을 꿰뚫는 날카로운 전성.

차리나의 목소리였다.

쨍강─

하늘 높은 곳에서 무언가 깨져나가는 소리가 들려온다.

직후 일대에 어떤 전조도 없이 눈폭풍이 불어닥쳤다.

극한의 한기에 공간이 이지러지는 듯한 감각이 지나가자, 불현듯 나타난 건 무려 백여 명에 달하는 술사들의 부대.

댈런과 악신 사이를 가로막은 채 마력을 최대로 끌어올린 이들은, 차리나를 필두로 한 왕실 마법사단의 정예들이었다.

"제 발로 모습을 드러냈구나, 파멸궁전의 왕."

마법사들의 선두, 차리나가 말했다. 쑴을 향해 뻗어진 그녀의 손에는 새하얀 왕홀이 들려있었다.

마치 눈과 얼음을 조각한 듯한 왕홀. 거기서 꿈틀대는 마력은 서릿발 왕좌의 권능에 버금가는 수준이었다.

그녀의 뒤에 도열한 마법사단의 전력 역시, 한 명 한 명이 결코 만만하게 볼 수 없는 수준급의 실력자들이었다.

전원이 4위계 이상. 독자적인 주문을 연구할 수 있는 수준의 고위 마법사들이다.

개중 뚜렷하게 남다른 존재감이 느껴지는 마법사 세 명은, 5위계의 벽을 넘어선 대마법사이자 마법병단의 지휘자들이겠지.

[흐음······.]

4위계 백여 명, 5위계 세 명과 6위계의 술사들.

마음 먹기에 따라 대악마의 진체까지도 토벌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전력이다.

그러나 쑴은 그런 사실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듯했다.

턱을 쓰다듬는 건지, 아니면 머리를 긁적이는 건지 일그러짐이 이리저리 비틀리더니.

[이러면 재미없는데. 난 너희들이랑 싸우러 온 게 아니란 말이야.]

어딘가 뾰로통한 목소리를 툭 내뱉었을 뿐.

[그러니까 죽어.]

꿈틀.

일그러진 형상의 얼굴 부분. 그 위에 붉은 색채가 또 하나 길쭉하게 늘어났다.

그게 죽 찢어진 입이라는 걸 눈치채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놈이 다리를 들었다. 그리고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그것만으로.

구우우웅━━━━

세계가 찢겨나갔다.

형언할 수 없는 파공성은 귀로 들리는 대신 눈으로 보였다.

추락한 천공요새의 폐허 위, 발걸음을 따라 으스러진 공간이 부채꼴을 그려내고.

"스타티아···카학!"

"으아아아!"

일선에서 재빠르게 주문을 빚어내던 4위계 마법사들의 절반 가까이가 피를 흩뿌리며 날아갔다.

급하게나마 보호막 주문을 끌어올린 이들도 있었지만, 그럴 틈도 없이 몸이 갈기갈기 찢겨나간 이도 다수.

[물러나세요.]

부채꼴로 으스러지는 공간을 가로막은 건 차리나였다.

새하얀 예복 아래, 양팔에 빽빽하게 새겨진 룬 문자가 한순간 빛을 발하고.

[에펠.]

[카스타.]

[스타티아.]

중첩된 전성으로 영창을 읊조리며 팔을 뻗은 순간, 왕홀 앞의 공간이 통째로 얼어붙기 시작한다.

쩌저저저적─!!

"댈런, 말씀드렸죠. 제 운명을 걸고 믿겠다고."

으스러지고 얼어붙으며 폭발한다. 의지로 세계 자체를 덮어씌우는 초월적인 힘의 교차.

마력과 공간이 날카로운 파편이 되어 흩날리는 광경 앞에서, 차리나는 댈런을 돌아보며 말했다.

"시간을 끌겠습니다. 힘을 회복하든, 아니면 뭔가 다른 수를 쓰든 하세요."

"······."

"차르국의 결말이 당신의 손에 달렸습니다."

말을 마친 그녀의 신형이 대답도 듣지 않고 흐릿해졌다.

공간의 틈바구니를 억지로 열어내는 걸 넘어서서, 스스로의 권능 하나만으로 공간과 세계를 완벽하게 주무르는 경지.

쯔가가가가각━━

동시에 쑴의 신형도 사라지면서, 붉고 푸른 두 기운이 나선을 이루며 땅에서 하늘로 솟구쳤다.

냉기와 한기가 충돌하며 폭발한다. 서릿바람 속에서 불과 번개가 사방으로 비산하며 소용돌이쳤다.

수십 명의 왕실 마법사들이 주문을 공명시키며 그 여파를 아슬아슬하게 무마시키고, 5위계의 술사 세 명은 중간중간 기회를 노리며 차리나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꽈르르릉···!!

뇌성과 함께 하늘이 이지러진다. 어느새 창공으로 치솟은 나선이 먹구름과 얼어붙은 하늘을 오가며 치고받았다.

[어쩔 생각이냐.]

적창이 물었다. 댈런은 하늘을 올려다보던 고개를 천천히 떨궜다.

쑴을 쓰러뜨린 건 단 한 번뿐이지만, 놈에 대한 공략법은 그 누구보다도 철저하게 연구했었다.

'쑴의 가장 핵심이 되는 권능은 크게 두 가지다.'

놈의 끝없이 파멸궁전에서 용솟음치는 지옥불. 그리고 예측불허의 폭력성을 대변하는 붉은 번개.

놈의 휘하 대공들 중에서도 가장 최측근인 두 대악마가, 각각 전격과 화염에 어마어마한 내성을 가진 건 다른 이유가 아니다.

그만한 저항력이 아니고서야 쑴의 곁에 서는 것조차 불가능하기 때문.

문제는 완벽하게 싸움에 미친 결투사인 악신 쑴의 특성상, 가장 정석적인 공략 루트는 오히려 놈과 동일한 속성으로 정면에서 치고받는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대하주염이나 청뢰가 알맞겠지만···그것만으로는 놈을 이길 수 없다. 적창의 흑염이라면 적어도 지옥불 하나만큼은 어떻게든 무마할 수 있을 텐데.'

다만 그러고서도 기껏해야 쑴의 권능 중 하나를 상대할 수 있는 것일 뿐.

붉은 번개에 육신과 영혼 모두 으스러지는 결말은 피할 수 없었다.

[도망치거라. 차리나가 시간을 끄는 지금이라면 벗어날 수 있다. 내 권능으로 너를 도울 터이니, 우선 물러나서 다음 기회를 엿보거라.]

적창이 드물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과 두려움이 짙게 묻어나는 제안.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압도적인 격의 폭력 앞에서, 그 제안이 달콤하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

그러나 댈런은 여전히 시선을 한 곳에 고정한 채,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순 없소."

[어째서냐? 놈은 지금 정상이 아니다. 이 땅에 발을 딛기 위해 스스로를 한없이 영락시킨 상태야. 대륙의 절반을 불태울 수 있을지언정, 미궁도시를 넘어설 수는 없을 것이니···.]

"적창. 그렇게 살아남으면 뭐가 남소?"

[······.]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댈런은 피식 웃었다.

"죽는 건 누구나 두렵소. 거기서 도망치는 건 너무나도 쉽지."

스릉.

아공간에서 검과 손도끼를 꺼내들어 양손에 쥔다.

천천히 발을 옮겨 반토막난 대악마의 시체 곁으로 향했다.

"허나 살아있음의 소중함은 내 폐가 숨 쉬고 심장이 뛰는 것이 전부가 아니오."

잃어본 이는 알 수 있었다.

입안에서 퍼지는 피자와 치킨의 느끼함. 목구멍을 톡톡 건드리던 탄산의 상큼함.

에어컨 아래에서 건강하지 않은 음식을 먹으며 나누는 쓰잘데기없는 대화들. 뜨끈한 장판의 열기와 알코올의 취기.

기억에 남는 건 그런 시간들이었다.

혼자서는 만들 수 없는 족적들. 일상이라는 미명 하에 가려진 진짜 소중함들.

"한 번 물러서면 다음에도 또 물러서겠지. 처음이 어려울 뿐, 두 번째부터는 쉬우니까."

[······.]

"그렇게 물러서고 물러서서, 끝내 살아남는다 하더라도···지옥이 된 세계에서 홀로 살아남으면 뭐가 남소?"

초월의 자리를 거머쥐었던 회차들 중 하나.

수백 번의 실패로 클리어에 목말랐던 댈런은,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세계가 멸망한 이후까지 살아남은 적이 있었다.

모든 것이 불타고 무너지며 썩어버린 세계. 사자들이 울부짖고, 원혼의 비명이 끊임없이 메아리치던 살아있는 지옥도.

결말을 보고자 살아남았지만 엔딩 크레딧 따위는 올라오지 않았다. 허무함에 캐릭터를 지우고 게임을 종료했다. 그리고 매일 습관처럼 하던 게임을 무려 한 달이나 접었었다.

모니터 너머에서 겪은 공허함이 그 정도였는데, 실제로 겪게 된다면 과연 어떨 것인가.

이미 일상을 한 번 잃어본 댈런이기에, 감히 그 느낌을 알 것 같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나는 이미 한 번 잃었소. 두 번 잃을 수는 없지."

그렇기에 다시 잃지 않겠다 결단한다.

이 세계에 떨어지기 전과 후의 극명한 차이는, 창칼에도 상하지 않는 단단한 몸뚱이만이 아니었으니까.

단순히 살아서 숨 쉰다는 것만으로는 삶을 충족시킬 수 없다는 사실.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댈런은 물러나지 않고 손을 뻗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도와주시오."

[···쑴을 상대하는 걸 말이냐?]

"아니."

시체 회수. 댈런은 속으로 나직하게 읊었다.

그러자 잿빛 시체가 스르르 흩어지며 빛무리로 변하고, 물 흐르듯 손끝으로 빨려들어왔다.

[천공요새의 부름을 받은 대마법사의 시체를 회수했습니다. 능력을 계승합니다.]

[계승 보상 : ]

순식간에 내면을 채우는 충만함. 허나 완전하지 않은 감각.

"지금부터 쑴을 죽인 놈이랑 싸워야 하거든."

이어지다 만 알림창을 마지막으로 댈런은 눈을 감았고.

다시 눈을 뜬 순간, 그는 설산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