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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0-440

430화 내가 너희를 구해 주겠다. (4)

"어푸! 어푸!"

카오르가 한 중년 남자의 얼굴을 물동이에 처박으며 말했다.

"아, 빨리 말하라니까?"

"푸허헉! 이놈, 이게 지금 무슨 짓이냐!"

"무슨 짓이긴, 약이랑 약재 받으러 왔다니까."

"네 이놈! 네놈이 이러고도 목숨이 무사할 줄... 어푸푸푸!"

물고문을 당하는 자는 약을 안 내놓는 영주였다. 카오르는 가타부타 따지지 않고 바로 기습해 고문에 들어갔다.

원래 성질이 더러웠던 카오르인데 이제는 북부군과 지셀의 힘까지 등에 업었다. 솔직히 이제 어지간한 귀족들은 무섭지도 않았다.

게다가 정당한(?) 명령과 명분까지 있지 않은가.

해당 영지의 가신들은 사색이 되어서 외쳤다.

"그, 그만두시오!"

"어찌 기사가 이런 일을 한다는 말이오!"

"북부군 사령관께 정식으로 항의할 것이오!"

카오르는 의자에 앉은 채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했다.

"항의해. 항의하라고. 우리 뒤에 누가 있는지 알지? 브랜포드 후작님이 명령 내린 거 몰라?"

카오르도 클로드만큼 브랜포드 후작의 이름을 잘 팔았다.

사실 지셀의 이름만 팔아도 된다. 무력이 마스터에 이른 데다 잔혹한 전쟁 군주라고 소문이 나 있기에 오히려 지셀의 이름을 파는 게 파급력은 더 강하다.

하지만 벨린다의 잔소리가 문제였다.

― 험한 일 할 때는 도련님 이름 팔지 말고 브랜포드 후작님 이름을 파는 거야. 알았어?

― 알았다고....

그래서 카오르는 적극적으로 브랜포드 후작의 이름을 팔았다.

그 때문에 이 영지의 가신들은 카오르를 무력으로 제압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아니, 사실은 브랜포드 후작보다 북부군이 더 무서웠다. 언제든 칼을 돌려 이곳을 향하면 단번에 짓밟힐 게 뻔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기사들과 병사들도 모두 포위만 하고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어푸푸! 이놈들을 당장 쳐라! 죽여라! 죽이란 말이다!"

영주가 외쳐도 다들 겁을 먹고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

그래도 기개가 높은 인물은 있었다. 이 영지의 기사단장이 크게 외치며 카오르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이놈! 당장 영주님을 놓아 드려라!"

스각!

카오르는 움직이지도 않았다. 돌격대에 따라온 펜리스 기사 한 명이 순식간에 검을 뽑으며 기사단장의 목을 베어 버렸을 뿐이다.

예전 광견단에 속해 있었던 용병 출신 기사였다.

"커억...."

단 한 수에 한 영지의 기사단장이 목이 베여 쓰러졌다.

사람들은 기겁했다. 펜리스 기사들이 강한 건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겉보기엔 다들 건들거리고 있어서 기사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훗."

기사단장의 목을 벤 펜리스 기사는 가볍게 미소 지으며 검을 집어넣었다.

영지의 가신들과 병사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펜리스 놈들은 정말 강하구나. 덤비지 말아야겠다.'

'어찌 일개 기사가 우리 기사단장을 한 수에....'

'그런데 왜 저쪽도 아파 보일까? 왜 갑자기 피를 흘리지?'

공격 한번 안 당한 펜리스 기사의 입에서 피가 철철 흐르고 있었다. 멋 부리려고 힘을 단번에 과하게 끌어 쓴 탓이었다.

그게 아니었으면 한 수에 목을 베지 못했을 테니까.

다른 돌격대 기사들이 그 기사를 에워싸며 속삭였다.

"야, 너 미쳤냐?"

"너 쓰러졌으면 저쪽 놈들 다 덤볐을걸?"

"적당히 멋 부려라."

혼자 멋 부려서 질투가 난 이유도 있지만, 위험했다는 말도 사실이었다.

수는 이쪽이 현저하게 적다. 아무리 펜리스 기사들이 강해도 저 많은 병력을 다 상대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지셀이 아니니까.

그래도 이곳 영주를 인질로 잡고 있어서 얘기가 잘 통했다.

"아, 알겠다! 다 넘길 테니까! 그, 그만해라! 어푸푸!"

약과 약재를 받은 카오르가 영주를 밧줄로 묶으며 말했다.

"죄지은 건 맞으니까 일단 같이 가자. 내가 작위까지 박탈할 수는 없거든."

물론 안전하게 빠져나가기 위해 인질로 잡은 면도 있었다.

그렇게 카오르는 주변을 돌며 약과 약재를 거두고 영주들을 포박해 갔다.

알포이는 카오르보다 조금 더 신사답게 협상에 들어갔다. 어쨌든 그는 마법사로서 자부심이 있었다.

"흠흠, 우리 북부군 병력 아시죠? 제 손짓 한 번이면 이곳으로 다 달려올 텐데. 그리고 나 5서클 마법사인데."

'이 새끼 뭐지? 뭔데 지가 북부군 대장인 것처럼 말하는 거지? 사신으로 온 놈이 말투는 또 왜 이렇게 유치해?'

듣고 있는 영주는 의문에 빠졌지만 뭐라 지적하진 못했다. 어쨌든 정식으로 북부군의 인장과 깃발을 들고 나타난 자였으니까.

요새 북부군 소문이 참 안 좋다. 약과 약재들을 강제로 빼앗고 작위도 박탈한다고 한다.

마음에 안 들지만 당장은 힘이 달리니 어떻게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주변 영주들과 은밀하게 연락을 주고받고 있었다.

위급할 때 북부군 쪽으로 가는 지원을 끊고 도와주지 말자고 말이다.

그래도 지금은 심기를 거스를 수 없었다. 그래프턴 백작이 어떻게 당했는지 이미 들었다.

'그런데 이놈은 펜리스 백작이 아니란 말이지.'

그렇다면 방법이 있다. 그는 알포이에게 상자 하나를 내밀며 말했다.

"이건 여기까지 오신 수고에 대한 약소한 선물입니다. 아시다시피 요새 균열이니 전염병이니 하는 것 때문에 영지 사정이 좋지 않습니다. 정말 숨기고 있는 게 없어요."

한 마디로 그냥 뇌물 받고 돌아가라는 뜻이다. 상자를 열어 본 알포이가 크게 소리를 질렀다.

"지금 나를 어떻게 보고 이딴 걸 내놓는 거야! 내가 클로드인 줄 알아?"

너무 적었다.

클로드는 안 가리고 다 처먹지만 자신은 아니었다. 마법사로서의 자부심이 있었다.

뇌물을 건넨 영주는 당황했다.

'이상하다? 마법사들은 재물을 좋아한다고 했는데? 이 새끼는 얼굴만 봐도 좋아하게 생겼는데?'

맞다. 너무 적어서 화낸 거다.

하지만 언제나 우아하게 말을 돌려 하는 게 당연한 귀족으로서는, 상대가 저렇게 화를 내는 건 뇌물을 싫어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끄응, 제가 마법사님의 명예를 실추한 거 같군요. 그런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영주가 미안해하는 기색으로 상자를 거둬들였다. 그러자 알포이가 다시 소리쳤다.

"지금 뭐 하는 거냐고!"

"네? 제가 실수를 한 거 같아서...."

"아이씨! 진짜!"

"도대체 왜...?"

"내가 기회를 다시 주잖아! 이 새끼야!"

흥분한 알포이가 원래 성질이 나와 버렸다. 영주도 무척이나 기분이 불쾌해졌다.

"마법사라고 대우를 해 줬는데 지금 너무 무례하게 나오는 거 같소이다. 나는 귀족이오."

영주가 손짓을 하자 기사들과 병사들이 몰려와 주변을 포위했다.

"으으으...."

알포이는 화를 가라앉혔다.

솔직히 싸우면 여기 있는 자들은 다 이길 수 있다. 4서클 마법사만 무려 10명이 따라왔고 호위 기사들도 20명이나 따라왔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병사도 수백 명이다.

하지만 자신은 대외적으로 우아한 마법사로 행동하고 싶었다. 따라온 마법사들과 기사들은 이미 알포이를 보고 히죽대고 있었지만.

알포이는 머리를 부여잡고 고민했다.

받은 임무를 멋지게 해결하고 잘난 척하고 싶었다. 그런데 욕심도 생겼다.

'저 보석 상자도 갖고 싶다....'

요새 다들 자기랑 도박을 안 해 줘서 돈이 없었다. 재물을 갖고 싶었다.

그러다가 문득 번뜩이는 생각이 난 알포이가 영주에게 한 가지 제안을 건넸다.

"홀짝으로 합시다."

"뭐요?"

"나랑 홀짝 게임을 해서 그쪽이 이기면 그냥 돌아가죠. 그쪽은 뭘 걸겠습니까?"

영주가 뒤를 돌아보며 가신들에게 물었다.

"홀짝... 게임이 뭐냐?"

게임을 아는 병사 한 명이 설명을 해 주었다. 그러자 영주가 미소를 지었다.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하겠소?"

"저야 좋지요."

영주는 머리를 굴렸다. 어떻게든 한 번만 이기면 돌려보낼 수 있다. 돈 조금 잃는 건 문제도 아니었다.

"그럼 먼저 이 보석 상자를 걸겠소이다."

"그렇게 합시다."

그렇게 해서 두 사람은 도박을 시작했다.

당연히 사기 마법을 쓰는 알포이를 영주가 이길 리가 없었다.

"헤헤."

눈앞에 있는 보석 상자를 알포이가 단숨에 차지했다.

영주는 대수롭지 않게 재물을 더 가져오라 시켰다.

"홀."

"짝."

"홀."

"짝."

게임을 하던 영주의 표정이 굳어졌다.

벌써 엄청난 재물을 뺏겨 버렸다. 솔직히 기분 좋게 돌아가라고 제법 많이 걸었다.

그런데 어떻게 단 한 번을 이길 수가 없다는 말인가! 이건 말이 안 된다.

"지금 나에게... 혹시 사기를 치고 있는 것이오?"

"허?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사기라니요? 증거 있어요?"

"이건 말이 안 되지 않소!"

"아, 왜 말이 안 됩니까?"

"그럼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오? 고작 단순한 홀짝인데 한 번도 맞출 수 없다는 게?"

"당연히 말이 되지요."

"뭐요?"

화가 잔뜩 나 있는 영주의 얼굴을 보며 알포이가 건방진 웃음을 지었다.

"나는 이걸로 신도 이겼거든."

"...."

미친놈이다. 미친 사기꾼 새끼한테 걸렸다. 영주는 영지의 전속 마법사까지 옆에 앉혀 마법을 감시하게 했다.

하지만 영지 마법사가 고개를 저었다.

"모, 모르겠습니다. 마법을 쓴 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알포이가 사기를 치려고 혼을 갈아 만든 마법이다. 게다가 그는 5서클. 고작 4서클에 오른 상대 쪽 마법사가 알아챌 리가 없었다.

"으으으, 그만하겠소."

엄청난 재물을 뺏긴 영주가 고개를 저으며 손을 들었다. 사기가 분명한데 알아낼 수가 없으니 이길 리가 없었다.

모든 게임에서 승리한 알포이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일어났다.

"잘 놀았습니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응?"

"그럼 잘 지내십시오."

알포이가 가볍게 인사를 하고 몸을 돌렸다. 그는 오랜만에 돈을 따서 기분이 너무 좋았다.

그것도 아주 큰 재물이다. 평생 살면서 만져본 적이 없는 양이었다.

'하, 인생 절반 손해 봤어. 진작 이런 기회를 만들었어야 했는데. 그래도 오늘 너무 좋다.'

그런데 따라온 마법사들과 기사들이 알포이의 앞을 막고 인상을 썼다. 그제야 알포이가 정신을 차렸다.

"앗차차, 나 다른 거 하러 왔지."

너무 흥에 겨워서 그냥 돌아갈 뻔했다. 이제 영주에게 볼일이 없는 그가 모두에게 말했다.

"빨리 다 뒤져서 찾아내. 이제 약 찾아서 가자. 다른 데도 가야 하는데 시간 너무 썼다."

솔직히 더 따고 싶지만, 여기서 더 했다가는 밤을 새울 판이었다. 갈수록 판돈도 작아지고 있었고.

이미 볼일 다 본 알포이는 품위고 뭐고 집어 던지고 성을 마구 뒤졌다. 그래도 찾지 못하자 그는 아예 성까지 불태우면서 난리를 피웠다.

결국 모든 게 불타고 약재와 약을 죄다 뺏긴 영주가 알포이를 노려보며 말했다.

"네놈들은 너무 막 나가는구나. 반드시 이 일을 후회할 것이다."

알포이는 눈곱만큼도 무섭지 않았다.

"후회? 난 이미 수백 수천 번 후회하면 살았거든? 나만큼 후회한 사람이 있을까?"

펜리스에 와서 노예가 됐다. 매일 밤 후회하다 이제는 그냥 인생을 포기한 상태였다. 그러다 보니 무서울 게 전혀 없었다.

게다가 이깟 귀족보다 더 무서운 놈들과 함께하고 있고, 그보다 더 무서운 놈들하고 싸우고 있다.

"야, 가자! 이 새끼 빨리 묶어! 이 범죄자 새끼! 나쁜 새끼!"

브랜포드 후작 덕분에 영주들을 체포할 권한까지 생겼다. 그렇게 알포이는 영주들을 만나 돈도 따고 약도 얻으며 성실하게(?) 임무를 수행했다.

이들의 활약 덕분에 전염병은 빠르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애초에 협조하지 않고 욕심을 부리던 영주들의 영지 위주로 퍼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실하게 약을 생산하고 격리 명령을 따랐던 영주들의 지역이나 수도 인근에서는 전염병이 금세 잡혔다.

지셀은 지도에서 전염병 구역 표시를 하나씩 지워 나가며 말했다.

"조금만 더 하면 되겠군."

벨린다가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몇 군데 남지 않았어요. 동부와 왕국군 쪽은 걱정할 필요가 없을 거 같아요."

"그래, 에일즈버 백작 부인하고 브랜포드 후작 영애가 용케 잘 준비해 줬어."

메리엘과 로잘린은 예전 가뭄 대비 때도 지셀을 믿고 움직였던 사람들이다. 사실 그때도, 이번에도 그 두 사람 덕분에 더 커질 수도 있었던 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

지셀 입장에서는 훌륭한 조력자들이었다.

물론 브랜포드 후작과 친왕파가 자신에게 힘을 실어 준 것도 큰 도움이 됐다. 그게 아니었다면 이 정도로 막 나가기는 힘들었을 테니까.

"타국 상황은 어떻지?"

"다들 난리죠. 균열을 제대로 못 막고 있어요. 전염병은 더 그렇고요."

"흠... 그건 어쩔 수 없지."

타국에는 지셀과 브랜포드 후작의 영향력이 미치지 못한다. 지셀의 경고를 믿고 준비한 곳도 있지만 실험을 하겠다고 까분 곳도 있었다.

거기에 구원교가 득세한 왕국도 존재한다.

그래도 전생보다는 상황이 훨씬 나았다. 영지군만으로도 어느 정도 균열을 막고 있는 영지도 있고, 전염병의 치료제가 있기 때문이다.

다른 왕국에서도 지금쯤 약 생산에 박차를 가하고 균열을 막기 위해 군을 정비했을 것이다.

"그래도 조금 도와주는 게 낫겠지."

"지금 왕국 내 균열을 처리하기도 바쁜데 어떻게 도와줘요?"

"약하고 식량만 보내 줘도 돼."

"어차피 균열을 처리하지 못하면 소용없지 않나요? 꽤 늦어질 거 같은데."

"그건 그렇지. 우리는 미리 대비해 뒀으니까 빠르게 움직인 거고."

지셀이 여러모로 준비했기에 이렇게 빨리 균열을 처리하고 다닐 수 있던 것이다. 다른 왕국은 이 정도까지 균열에 대비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지셀은 괜찮다는 듯 말했다.

"다른 왕국에도 괴물들이 있거든. 그들이 균열을 하나씩 처리할 거야. 우리보다는 느리겠지만, 어쨌든 처리할 수 있다는 게 중요하지."

"괴물이요?"

"그래. 나 못지않은 괴물들이지."

지셀이 미소 지었다. 사람들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물론 다른 왕국에도 최고의 자리에 오른 실력자들이 있을 것이다. 그래도 뭔가 지셀에게는 안 될 거 같은 느낌이었다.

지셀은 7서클에 이른 델무드와 마스터인 테넌트도 이겼으니까.

지셀은 신경 쓰지 말라는 듯 손을 몇 번 휘저은 뒤 말을 이었다.

"아무튼, 구원교와의 싸움은 우리 걸 아껴서 될 일이 아니야. 최대한 많은 사람이 힘을 합해야 하거든."

"그러면 일단은 약과 식량만 도와줘도 된다는 거죠?"

"그래, 약과 식량만 지원해 줘도 큰 도움이 될 거야. 균열을 처리하는 건 다른 자들이 본격적으로 움직일 테니까."

사람들은 궁금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 왕국에서만 지내는 지셀이 어떻게 타국의 사정까지 알고 있을까?

지셀은 다른 사람들의 궁금함을 해소해 줄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그저 옛 기억을 떠올리며 흐뭇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놈도 곧 볼 수 있겠네.'

과거로 돌아온 건 좋지만, 전생에 맺었던 좋은 인연이 사라진 것은 아쉽긴 했다.

이번 생에서도 꼭 다시 만나고 싶은 친구가 있었다. 균열이 나타나기 전에는 절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친구가.

물론 그 친구 말고도 각자의 사정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자들도 있었다. 그들을 다시 볼 수 있다는 건 또 다른 즐거움이었다.

그리고....

지셀과 사이가 좋지 않거나 싸워야만 했던.

대륙 7강의 다른 일원들도 이제 하나둘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431화 저번처럼 협박을 하는 수밖에. (1)

콰앙!

라울은 무척이나 분노하며 테이블을 내리쳤다.

그는 제 앞에 있는 구원교의 심판관, 가트로스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어째서 균열이 통제되지 않는 겁니까!"

가트로스는 명확하게 대답하지 못했다. 그들은 그저 자신들의 경전에 따라 준비해 균열을 열었을 뿐이었다.

균열을 통제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썼음에도 균열은 통제되지 않았다. 오히려 사제와 신도들만 잃게 되었다.

"...우리도 모든 걸 완벽하게 알지는 못한다. 우리 힘으로는 균열이 통제되지 않는다는 것만 확인했을 뿐이다."

구원교는 통제가 되지 않는 것을 큰 문제로 여기지 않았다. 처음 해 본 일이니 애초에 완벽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문제는 공작가가 있는 남부에도 몇 개의 균열을 만들었다는 것이었다.

라울이 그 점을 짚으며 눈가를 씰룩였다.

"전쟁을 준비하던 일부 군대를 균열 쪽으로 돌려야 합니다. 우리가 만든 균열을 우리 손으로 없애야 할 판이란 말입니다."

"어쩔 수 없지. 일단 남부 쪽 균열을 없애는 데 교의 힘을 빌려주겠다. 집행관 아이던과 백은기사단도 함께할 것이다."

라울이 의자에 몸을 기대며 이마를 짚었다.

뭔가 자꾸 일이 꼬여 제대로 풀리지 않는다.

균열이 통제되지 않으니 당장은 이쪽도 균열과 싸워야 할 판이 되었다.

지셀이 전생에서부터 궁금해했던 점이 바로 이것이었다. 어째서 남부에 스스로 균열을 열었을까.

우습게도 구원교가 균열을 통제하지 못해 생긴 일이었다.

가트로스가 고민하던 라울에게 말했다.

"혹시 몰라 남부에는 많이 만들지 않았다. 중요 지역 근처에도 만들지 않았지. 몇 개 되지 않으니 금방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요? 그 뒤에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대륙에 퍼뜨린 저 많은 균열들을 어떻게 할 거냐는 말입니다! 게다가 '그것'이 나오면 우리가 막을 수는 있는 겁니까?"

"...."

"우리의 목적은 세계를 멸망시키는 게 아닙니다.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대계를 세운 게 아니었습니까?"

"그 말이 옳다. 결국 우리의 '왕'을 찾아야 해결될 일일 것이다."

"그게 말이 됩니까? 그게 정말 가능한 일입니까? 그런 존재가 있습니까?"

"경전에 그리 나와 있다. 우리는 왕을 깨우기 위해 그 오랜 시간 명맥을 이어 왔다."

쾅!

라울이 다시 테이블을 치며 으르렁거렸다.

"통제할 수 있을 거라 확신하고 연 균열도 통제하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왕'이라는 게 정말 존재하느냔 말입니다!"

"라울, 선을 넘지 말거라."

"...."

"'문'이 열린 것을 보고도 믿지 못하겠느냐? 약속의 때가 찾아왔고 그분께서는 이미 세상에 계신다. 우리가 아직 찾지 못했을 뿐. 우리의 사명은 그분을 깨워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가트로스의 묵직한 말에 라울은 표정을 차갑게 굳혔다.

확실히 균열에 관한 내용은 진실로 판명됐다. 경전의 말이 모두 거짓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니 구원교의 사제들이 그토록 원하는 '왕'이 있을 가능성도 컸다.

가트로스는 다시 라울을 달래듯 말을 이었다.

"경전이 너무 오래되었기에 우리의 해석이 다소 부족했던 것일 수도 있다. 그래도 균열을 열어 일단 대륙에 혼란을 주지 않았느냐. 그걸로도 지금은 충분하다."

그 말도 틀리진 않았다. 균열을 열지 못했다면 지금쯤 모든 대륙의 군대가 구원교와 손을 잡은 자들에게로 향했을 것이다.

펜리스 백작이 그들의 계획을 망치지 않았다면 벌어지지 않았을 일이었지만.

"정말 왕을 찾으면 균열을 통제할 수 있습니까?"

"그럴 것이다. 그래야 할 것이고. 아마 그 열쇠는 마수의 숲에 있을 테지. 최대한 빨리 루타니아 왕실과 마수의 숲을 차지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길잡이'도 찾아야 한다. 분명 루타니아 왕국에 있는 것이 확실한데.... 도무지 행방을 찾을 수가 없구나."

가트로스가 말끝을 흐렸다.

구원교는 꾸준히 루타니아 왕국에서 원하는 것을 찾아 왔지만 소득이 없었다. 조금 더 수색 작업에 힘을 싣고 싶지만, 친왕파가 멀쩡한 상황에서는 존재감을 드러내기 어려웠다.

결국 펜리스 백작이 자신들의 일에 가장 방해가 되는 셈이었다.

라울은 참모들에게 손짓하며 말했다.

"다시 수집한 펜리스와 북부군에 대한 정보를 가져오라."

곧 재조사한 보고서를 받아 든 라울은 서류를 뒤적이며 입을 열었다.

"역시 가장 위험한 인물은 이 '알포이'란 놈인가?"

참모가 고개를 숙이며 긍정했다.

"네, 수상한 점이 상당히 많습니다."

"어떤 점이?"

"펜리스 백작이 7서클 마법사인 델무드를 없앨 때 그가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또한 실버라이트 공방전에도 그가 있었습니다. 무척이나 공교로운 일이지요."

"그러면 소문의 7서클 마법사가 이자란 말이냐? 로드리크군의 그 많은 마법사를 홀로 막은 자가."

"그럴 확률이 높습니다."

"다른 인물이라는 소문이 너무 많은데. 그 바네사라는 하녀 출신 말이다. 영지민들도 다들 바네사가 최고 마법사라고 한다지 않느냐."

"어차피 무지한 영지민들 사이에 도는 소문입니다. 펜리스가 정보를 가리고 있다는 뜻이지요. 그 증거로 현재 알포이의 서클은 5서클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3서클이었지."

"예. 말이 안 되는 속도입니다. 펜리스에서도 더 이상 숨기기 힘들어 서클을 올린 거 같습니다. 드래곤 하트를 먹었다는 헛소문까지 내면서 말이지요."

"그러면 바네사도 6서클이 맞다는 뜻인가?"

"그녀는 위장 마법사일 확률이 높습니다. 모두 뒤에서 알포이가 활약했을 겁니다. 괜히 '신을 이긴 남자'라는 소문이 나진 않았을 테니까요."

"그래, 그럴듯하군."

라울은 고개를 끄덕였다.

몇 번이나 다시 조사해도 이상한 점이 계속 남아 있었다. 하지만 만약 알포이가 7서클 마법사라면, 마음에 걸리던 점이 전부 해결된다.

생각이 너무 많다 보니 제대로 조사를 해 놓고도 빙 둘러 가고 있는 꼴이었다.

라울은 서류를 다시 뒤적이다가 말했다.

"이 뇌물왕이라는 총관도 지금까지 우리 눈을 속이고 있었군."

"맞습니다. 그가 실버라이트의 지휘관이었습니다. 실상 로드리크의 대군을 전멸시킨 건 그의 계책이라고 보는 게 맞습니다."

"이런 인물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으니 당할 수밖에."

라울이 혀를 찼다. 마스터에 이른 펜리스 백작에게만 신경을 집중하고 있다가 다른 뛰어난 인물들을 놓쳤다.

데스몬드 백작이 패배한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라울은 클로드와 알포이의 초상화를 서류의 가장 위로 올려놓고 말했다.

"이 두 놈은 기회가 된다면 반드시 죽여야 한다. 펜리스 백작의 손발을 끊어 놔야 하니까.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어차피 조만간 펜리스 백작과는 힘으로 맞붙을 수밖에 없다. 요주의 인물들이 펜리스 백작과 떨어져 있는 틈을 타 확실히 죽여야 했다.

그러니 그에 대한 준비도 미리 할 생각이었다.

진실과 오해가 절묘하게 섞인 보고서를 확인한 라울이 다른 걸 물었다.

"다른 귀족들은?"

"...모두 저희에게 등을 돌렸습니다."

"쯧."

로드리크 후작이 파벌에서 나간 뒤 공작파에 있던 다른 귀족들도 빠져나갔다. 4대 교단을 적으로 두는 건 그들로서도 무척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그저 남부에 있는 소수의 봉신만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사실 그들도 공작가가 무서워서 떠나지 못하고 있는 것뿐이지만.

라울은 주먹을 꾹 쥐었다. 생각만 해도 열이 뻗쳤다. 그간 다른 귀족들에게 투자를 한 게 얼마나 많았는가. 그것이 모조리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공작가에서 가장 많이 투자한 귀족은....

"아멜리아, 아주 제 이득만 볼 대로 보고 빠졌구나."

뜯어낼 대로 뜯어내더니 구원교 일이 터지자마자 아주 칼같이 관계를 끊어 버렸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어쩔 수 없지만, 당했다는 생각이 사라지지 않았다.

"후우...."

라울이 의자에 등은 기대고 눈을 감았다.

결국 펜리스 백작이 모든 일의 원흉이었다. 그가 북부군을 이끌고 균열과 싸우는 지금 움직여야 유리할 텐데 그럴 수가 없었다.

수습해야 할 일이 너무도 많았기 때문이다.

그가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남부 내에 남아 있는 4대 교단의 신전을 모두 부수고 사제들을 전부 잡아 죽여라."

"...알겠습니다."

4대 교단의 사제들은 대부분 남부를 벗어났다. 하지만 그래도 신의 말씀을 설파하고 사람들을 구하겠다고 남아 있는 자들이 있었다.

이제 이들을 잡아 죽여야 한다. 어차피 확실히 적이 된 상태였으니 상관없었다.

"그리고 최대한 빨리 균열을 처리할 군대를 꾸려라. 더 확장하기 전에 우리도 균열의 영역을 줄여야 한다."

남부에 있는 균열을 정리해야 전쟁을 시작할 수 있다. 그리고 그건 빠르면 빠를수록 좋을 것이다.

이건 북부군과 공작가의 싸움이나 마찬가지였다. 어느 쪽이 먼저 영역 내의 균열을 처리하느냐에 따라 전황이 바뀔 것이다.

공작가는 뛰어난 기사들이 많다. 거기에 초인급에 이르는 구원교의 사제들이 도와주니 빠르게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북부군의 속도도 예상 밖이지."

그들보다 빨리 없앨 거라고는 장담할 수가 없었다. 자신들이 균열과 싸울 때 북부군과 왕국군이 남부를 침략한다면 상당히 곤란해질 것이다.

그래도 아직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자신들도 뒤에서 몰래 준비한 게 있으니까.

라울이 가트로스를 바라보며 물었다.

"덴타리아 쪽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순조롭게 균열이 확장 중이라고 한다. 곧 북방 요새까지 영역을 확장할 것이다. 풍부한 대지의 기운 덕분에 다른 곳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커진 균열이지."

"이번은 우리에게 좋은 상황이군요."

"그래, 그대의 계책이 통했다. 워로카란 놈은 이미 모든 부족의 전사들을 모았다. 페르디움이 균열과 싸우는 틈을 타서 북부를 치기로 했다. 북부는 그간 억눌러 온 그들의 분노를 막을 수 없을 것이다."

라울이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펜리스 백작이 페르디움을 그냥 두고 볼 리가 없다. 그는 반드시 북방 요새로 갈 것이다.

그가 아무리 강해도 엄청나게 확장한 균열과 모든 부족을 끌어모은 야만인 대군을 동시에 막을 수는 없다.

펜리스 백작이 어느 한쪽에서 승리하더라도 북부는 그간 쌓은 기반을 전부 날리게 될 것이다.

그사이에 어떻게든 이쪽이 먼저 균열을 없애고 움직이면 된다.

라울이 입술을 씰룩거리며 잔인한 미소를 지었다.

"이번에는 네놈 뜻대로 안 될 거다. 펜리스 백작."

지금까지 펜리스 때문에 공작가의 계획이 모두 망가지고 계속 끌려다녔다.

하지만 이제는 그쪽이 자신의 뜻대로 끌려다닐 차례였다.

* * *

북방 요새 카이필러.

페르디움군이 주둔하고 있는 그곳은 요즘 상당히, 아니 완벽할 정도로 평화로웠다.

식량은 넘쳐나고 장비들도 훌륭하다. 지셀 덕분에 보급형 마나 연공법이 생겼고 기사들도 전보다 훨씬 늘어났다.

드디어 변경백다운 군대와 위엄을 갖추게 된 것이다.

야만인들과도 싸우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 식량을 받아 가야 하는 처지가 되니 그들도 얌전히 지낼 수밖에 없었다.

그 덕분에 요새 주둔군이 하는 일이라고는 먹고 자고 수련하는 것밖에 없었다.

물론 즈발터 특유의 소심함과 조심스러움 때문에 여전히 경계와 순찰 근무는 강도 높게 돌아가는 편이었다.

"하... 또 잡혔네."

페르디움에서 편히 지내던 스코반은 너른 북방의 땅을 바라보며 코를 훔쳤다.

북방 요새에 여러 군수품을 옮기던 그는 또 붙잡혀 순찰 근무에 투입되었다. 초급 기사들이 수련에 전념하고 있으니 대신 구르다 가란 뜻이었다.

심심해서 따라왔다가 같이 잡힌 부관, 잘생긴 리카르도가 그의 옆에서 말을 걸었다.

"요새 엄청 평화로운데 이렇게까지 나올 필요가 있습니까? 여기는 예전에 야만인들과 싸울 때나 순찰 돌던 지역이잖아요."

"야, 우리 영주님 은근히 겁 많잖아. 하도 고생을 많이 해서 그런다나?"

"우리 이제 전하고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해지지 않았어요? 기사도 100명이나 되는데. 이제 우리도 대영지급이라고요."

그 말에 스코반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 대공자님 덕분이지. 지금은 북부군 사령관님이잖냐. 요새 우리가 제일 잘 나갈걸?"

"참, 대공자님이 그렇게까지 커질 줄이야. 상상도 못 했다니까요."

그 말에 두 사람은 옛 추억에 잠겼다.

두 사람은 지셀이 회귀하자마자 오크 무리를 죽였던 모습을 지켜보았다.

스코반은 그 활약을 동료들에게 말했다가 한 때 거짓말쟁이로 찍혀 술만 마시고 살았다. 아무도 그의 말을 믿지 않은 덕분에 내기에서 돈을 좀 벌긴 했지만.

사실 스코반도 직접 보지 않았다면 지셀이 활약했다는 말을 절대 믿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의 지셀은 그냥 망나니였으니까.

그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거물이 된 지셀을 생각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야, 그때 생각나? 대공자님이 성에서 뛰쳐나갔을 때...."

"마수의 숲에 가서 우리 감옥에 갇혔던 거 생각하면...."

황당한 추억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건 좋은 일이다.

두 사람은 그렇게 옛이야기들을 두런거리며 순찰을 돌았다. 어차피 자주 하던 순찰이니 딱히 어려울 건 없었다.

이렇게 수다라도 떨어야 근무 시간이 잘 가는 법이다.

요새에서 상당히 떨어졌을 때, 문득 리카르도가 농담처럼 말했다.

"그러고 보니 경비대장님이 여기에 잡힐 때마다 난리가 나지 않았나요? 야만인들이 쳐들어오고 그랬잖아요."

"야, 내가 무슨 저주받은 사람이냐?"

"아니, 경비대장님이 있는 곳에는 항상 무슨 일이 벌어졌다니까요? 대공자님 첫 활약도 경비대장님하고 오크 토벌했던 거잖아요. 그 이후에도 전쟁, 마수의 숲 개척, 야만인들과 싸움 등등.... 다 경비대장님이 함께 있었네!"

리카르도의 장난에 스코반이 인상을 팍 썼다.

"농담이라도 그런 말 하지 마라. 괜히 또 무슨 일이 일어날까 봐 겁난다."

"하하하, 농담입니다. 우리 이제 그럴 일 없잖아요. 대공자님하고 엮일 일도 없고요."

"그래, 그렇지. 우리는 여기서 평화롭게 살면 되는 거야. 푸하하하!"

두 사람은 한참 그렇게 웃었다.

지금의 평화가 너무 좋았다. 그간 고생을 너무 많이 했다. 특히 대공자랑 엮여서 고생한 게 컸다.

그렇게 두 사람이 웃고 있을 때, 옆에 있던 한 초급 기사가 스코반에게 물었다.

"경비대장님, 저게 뭘까요?"

노을이 지고 있는 저녁이지만 앞을 살피기에는 충분히 밝았다.

저 멀리 펼쳐진 대지에 푸른 안개가 가득했다. 그리고 그 안개는 꿀렁거리며 천천히 이곳으로 다가오는 것처럼 보였다.

스코반과 리카르도는 웃음을 뚝 그쳤다.

어디서 많이 듣던 현상이었다. 이들도 균열 지역의 특징에 대해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스코반은 식은땀을 흘리며 생각했다.

'저, 정말 나 때문인가?'

인정하기는 싫지만 리카르도의 말이 사실인 거 같았다.

432화 저번처럼 협박을 하는 수밖에. (2)

리카르도가 달달 떨면서 스코반을 바라보았다.

"경비대장님.... 진짜 당신이...."

"다, 닥쳐! 나 때문이 아니야!"

스코반은 고개를 마구 저었다.

자의식 과잉이다. 자신이 뭐라고 페르디움에 쏟아지는 재앙들을 몰고 다닌단 말인가.

우연이다. 정말 우연일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

스코반이 이를 악물며 말했다.

"조금 더 가까이 가서 확인하자."

"가까이 가자고요?"

리카르도가 기겁하며 물었다. 스코반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게 진짜 그 현상인지는 아직 모르잖아? 다른 이상 현상일 수도 있고."

"딱 봐도 균열이란 놈이잖아요?"

"젠장! 그래도 정확한지 확인을 해야 해! 확장하는 속도도 봐야 할 거 아냐! 뭔가 비정상적이잖아!"

지금 저 안개는 변화가 바로 눈에 띌 정도로 빠르게 퍼지고 있었다. 균열에 관한 설명을 여러 번 들었지만, 이 정도로 확장이 빠르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정확하게 확인하고 전달해야 한다. 그는 책임감 있는 기사였다.

"조금만 가까이 가서 확인만 하자고. 나도 안으로 들어갈 생각은 없어."

순찰조는 조심스럽게 균열의 영역으로 다가갔다. 꽤 멀리 있었지만 말을 탄 그들은 금세 다가갈 수 있었다.

스코반이 눈앞을 가득 메운 푸른 안개를 보며 중얼거렸다.

"이게... 균열 지역...."

옆으로 고개를 돌려 봐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이 정도로 균열이 확장되려면 도대체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났다는 말인가.

리카르도도 같이 주변을 돌아보다가 외쳤다.

"우, 우왁! 진짜 다가오잖아!"

푸른 안개가 스멀거리며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느리긴 하지만, 실시간으로 확장되고 있다는 게 문제였다.

이 정도면 며칠 내에 북방 요새까지 집어삼킬 것이다.

스코반은 말에서 내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스윽.

손을 뻗어 안개 안에 넣어 보았다. 안개는 그리 진하지 않아 시야를 가리지 않았다. 그저 너무 넓은 영역에 퍼져 있기에 잘 보일 뿐.

경계를 짓고 있는 땅을 넘어간 자신의 손이 보인다. 저 멀리 보이는 건 생명의 기운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음산한 풍경뿐이었다.

카아아아!

멀리서 괴성이 들렸다.

직접 본 건 처음이지만 순찰조는 다 알고 있다. 이 안에 무엇이 살고 있는지.

스코반도 이 안으로 들어서 확인할 자신은 없었다.

"도, 돌아가자."

스코반이 손을 빼며 몸을 돌리려던 순간.

카아아악!

"으아악! 경비대장님!"

리카르도가 비명을 질렀다. 스코반이 허리춤에서 바로 검을 뽑으며 몸을 돌렸다.

스각!

푸른 마나를 뿜어내는 스코반의 검이 무언가를 갈랐다.

영역 안에서 몸이 반쯤 튀어나온 균열인이었다. 징그러운 얼굴과 이빨을 드러낸 균열인은 몸통의 반이 베여 땅에 떨어졌다.

푸스스스슥....

땅에 떨어진 균열인은 곧 말라비틀어지더니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정말 이 세상에 허락되지 않은 불길한 존재인 것이 잘 보였다.

"으으...."

균열인들의 징그러운 모습을 처음 보고 리카르도와 순찰대 병사들의 얼굴이 사색으로 물들었다.

카아아악!

두두두두두두!

괴성에 이어 멀리서 무언가가 잔뜩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스코반은 얼굴이 창백해져서 말에 올라탔다.

"도, 돌아가자."

그들은 곧바로 말머리를 돌려 요새를 향해 달렸다.

지셀이 북부군을 데리고 출정할 당시, 각지의 균열에는 무려 10만에 이르는 균열인들이 있었다고 한다. 각 영주들이 저지선을 만들고 싸웠는데도 그랬다.

반면 북부에서는 아무도 균열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아무도 저지선을 만들지 않았다.

지셀이 출정한 뒤로도 시간이 꽤 지났다. 그동안 저 북방의 대지를 모두 집어삼키며 확장한 균열 안에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균열인들이 있을까?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스코반은 열심히 말을 달리며 마음속으로 외쳤다.

'나 때문은 아니라고!'

어쩌면 페르디움에서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리카르도가 잔망스러운 입을 가만히 둘 리 없으니까.

* * *

지셀과 북부군의 활약으로 전염병은 빠르게 잡혔다.

전염병이 도는 곳이 아직 자잘하게 남아 있었지만, 이미 약을 먹은 자들은 병에 걸릴 리가 없으니 금세 일상생활로 돌아갈 수 있었다.

물론 지셀이 왕국 전역의 전염병을 해결한 건 아니다. 그는 균열과도 싸워야 했기 때문이다.

수도 인근과 동부 지역은 메리엘과 로잘린이 해결했다. 두 사람이 지셀의 말을 믿고 확실하게 준비한 덕분이었다.

그리고 전염병 해결의 주역 중 한 명, 로잘린은 지셀의 연락을 받고 현재 북부군 진영에 와 있었다.

"이제 타국에 약과 식량을 전해 줘야 한다고요?"

"네. 루타니아 왕국의 전염병은 이제 거의 다 잡지 않았습니까. 타국의 전염병도 빨리 잡아야 다들 균열과 싸울 수 있습니다."

로잘린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당신... 그런 사람 아니잖아요?"

"...."

"이번에 사람들을 구한 것도 그렇고 어째서 그런 '착한' 일을...."

"...."

지셀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었다.

로잘린의 말이 틀리진 않았다. 자신은 일부러 착한 일을 하지는 않는다.

자신은 오직 공작가와 균열을 부순다는 목적만을 향해 달렸다. 지금껏 한 일은 모두 그 목적을 위해 필요한 일들이었다. 단지 방법이 조금 과격했을 뿐이다.

그러니 로잘린이 오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녀가 보는 지셀은 '이득'에 미친놈이었으니까.

로잘린이 갑자기 손뼉을 치며 외쳤다.

"알겠다! 이제 민심까지 얻어 더 강한 권력을 쥐려는 모양이군요! 도대체 욕심이 얼마나 많기에!"

로잘린이 혀를 내둘렀다.

역사적으로 그런 위정자들은 많았다. 진심이 아님에도 백성들을 살펴 강력한 민심을 등에 업은 권력자들 말이다.

물론 그 결과는 대부분 좋았다. 그녀는 지셀이 지금 그런 작업을 하는 줄 알았다.

한숨을 내쉰 지셀이 고개를 저었다.

'도대체 나를 어떻게 보는 거야?'

로잘린의 말만 들으면 왕국을 집어삼키려는 괴물은 델파인 공작이 아니라 자신이었다.

그런 건 아멜리아가 잘하는 거다. 자신은 아예 그런 생각조차 없다.

"권력에는 욕심이 없습니다."

"...."

이번에는 로잘린과 지셀의 측근들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권한을 받았다는 핑계로 영주들을 죄다 잡아가는 게 누구인데.'

겉으로 보기에는 권력을 아주 휘두르다 못해 몽둥이로 때리는 것처럼 보였다.

지셀이 귀찮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빨리 이 시기를 넘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왕국의 전란을 가라앉혀도 다른 쪽이 균열과 구원교에 먹히면 좋을 게 없습니다."

"으음, 그건 그렇죠."

로잘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대륙이 전란에 휩싸인 지 오래였다.

루타니아 왕국만 멀쩡하다고 끝나는 게 아니다. 다른 나라가 균열과 구원교에 먹히면 끊임없이 이곳에 쳐들어올 것이다.

지셀의 목적이 무엇이든, 결국 조금이라도 빨리 그것들을 저지하는 게 모두를 위한 길인 건 맞았다.

"알겠어요. 에일즈버 백작 부인과 상의해서 따로 수량을 준비할게요. 가장 먼저 도와줘야 할 곳이 있을까요?"

"당연히 루타니아와 붙어 있는 왕국들부터죠. 그다음은 튜리안 왕국."

"튜리안 왕국이요?"

"네. 그 나라부터 우선으로 도와주세요. 펜리스에서도 약과 식량을 준비할 겁니다."

"굳이 튜리안 왕국을 돕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뭐... 그쪽은 그림자 산맥의 몬스터만으로도 고생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다른 곳보다 더 힘들 테니까요."

지셀은 대충 둘러대었다. 사실 진짜 이유는 그게 아니었다.

'그래야 그쪽이 더 빨리 안정될 테니까.'

괴물 같은 놈이 그곳에 있다. 그놈이 모습을 드러내면 튜리안 왕국은 금세 안정을 되찾을 것이다.

어느 한 곳이라도 빠르게 상황을 수습해야 앞으로의 싸움에 도움이 된다. 그러기 위해선 약과 식량이 충분해야 한다.

지셀은 가장 효율적으로 싸울 수 있는 곳부터 우선 지정해 준 것이다.

"그리고 몇 군데가 더 있습니다."

지셀은 로잘린에게 자신이 생각하는 우선순위를 말해 주었다.

펜리스 혼자 모든 왕국을 도와줄 수는 없다. 거기다 자신은 루타니아 내부의 균열과 싸우기도 바쁘다.

타국에도 명성이 높은 브랜포드 후작이 힘을 써 준다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어차피 실무는 대부분 로잘린과 메리엘이 맡을 테니 그냥 직접 전달을 한 것이었다.

로잘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길게 보면 지셀의 말이 옳다.

"그래도 이걸 그냥 무상으로 지원하기에는 조금...."

"거래의 개념으로 접근하시면 안 됩니다. 우리에게 여유가 있으니 베푼다고 생각하셔야 합니다."

"으음...."

"보답이야 나중에 받으면 됩니다. 지금은 그런 걸로 시간을 끌면 안 됩니다."

확실히 루타니아 왕국은 다른 왕국보다 여유가 있었다. 지셀 덕분에 조금이라도 미리 대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로잘린도 지셀의 의견을 완강히 거부할 수가 없었다.

"알겠어요. 그나저나 백작님, 많이 변했네요."

돈만 밝히던 자가 돈을 안 아끼고 이렇게 남들을 도와주자고 하다니.

지셀의 염원을 정확히 모르기에 그녀는 그런 오해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혹시나 하고 말을 꺼냈다.

"저기... 화장품은 요새 매출이 좀 떨어져서...."

전란이 났으니 당연히 매출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로잘린은 현재 사업을 조금 축소하고 대금을 미루려고 했다.

그런데 지셀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 계약대로 하셔야죠. 정산은 확실히 맞춰서 해 주셔야 합니다."

'이, 이 새끼는 왜 나한테만 이러지?'

촤르륵.

순간 로잘린이 부채를 꺼내 눈 아래를 가렸다. 남들한테는 끝도 없이 퍼주면서 자신한테는 한 푼도 양보 안 해 준다.

만날 때마다 돈 얘기만 하더니!

속상해서 화가 마구마구 치밀어 올랐다.

갑자기 느껴지는 살기에 지셀이 몸을 뒤로 뺐다.

'뭐야? 또 왜 이래? 내가 뭐 잘못했나?'

그는 아무 이유 없이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는 사람이 아니다. 뭐, 사정을 자세히 얘기하면 당연히 봐줄 여유는 있다.

그런데 단단히 오해한 로잘린은 사정을 설명할 생각보다 열부터 뻗쳐 버렸다.

그녀가 다시 고함을 내지르려고 할 때, 전령 하나가 허겁지겁 다가왔다. 복장을 보니 페르디움에서 온 전령이었다.

지셀이 잘됐다 싶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 아버지가 보냈나? 무슨 일이야?"

"대공자님! 규, 균열이...."

"음?"

"균열이 북방 요새 인근까지 확장됐습니다!"

그 말에 지셀을 비롯한 모두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북부에는 균열이 없었다. 다들 구원교가 그곳까지 침투해 준비할 겨를이 없었다고 여기고 넘어갔다.

그런데 그 너머인 북방의 땅에서 균열을 열었다니!

이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페르디움이 아무리 강해졌어도 균열의 영역에 들어가면 버티지 못할 것이다.

"도련님!"

창백해진 벨린다가 지셀을 불렀다.

그녀에게 페르디움은 마음의 고향이나 마찬가지다. 이대로 균열의 영역이 북방 요새를 삼키게 내버려둘 순 없었다.

지셀을 북부 대공으로 만들겠다는 야망도 즈발터가 살아 있을 때나 의미가 있지, 그를 죽이면서까지 지셀을 띄울 마음은 전혀 없었다.

"당장 북부군을 움직여야 해요!"

벨린다의 말을 들은 지셀이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당연한 말이었다. 자신이 왜 이런 고생을 하며 지금까지 싸워 왔는데. 바로 영지를 지키기 위해 시작한 일이다.

페르디움을 잃으면 지금까지 한 일이 모두 의미가 없어진다.

지셀의 표정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놈들이 사고를 쳤군.'

전생에는 북방 쪽 균열은 없었다. 부족 단위로 생활하는 야만인들은 타인을 배척하고 살아가며, 드넓은 북방의 대지는 무엇 하나 숨기기도 힘들다.

구원교로서도 그런 지역에 몰래 균열을 만드는 건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일이었을 것이다. 차라리 그 노력을 다른 왕국에 쏟아붓는 게 나았다. 실제로도 그렇게 했고.

하지만 지금 북방의 대지에서 균열이 나타났다. 답은 하나뿐이다.

'워로카....'

워로카 그놈이 구원교와 손을 잡은 게 분명했다. 그리고 제물을 직접 가져다 바쳤을 것이다.

'네놈이 최악의 수를 골랐구나.'

당시에는 최대한 피해를 줄여야 했기에 살려 놨다. 덕분에 말도 얻고 펜리스의 기동력은 최강으로 거듭났다.

하지만 워로카의 배신으로 그들의 불안정한 협약은 마침표를 찍었다.

지셀이 고개를 들어 북방 쪽을 바라보았다.

'시간이....'

균열의 영역이 북방 요새 인근까지 다가왔다면, 북부군을 전부 끌고 가기엔 무리였다. 시간 안에 도착하지 못할 것이다.

결국 펜리스 기동군만을 끌고 움직여야 한다. 균열인들이 어마어마하게 불어났을 테니 북부군 대신 북부에 남은 1만의 펜리스군을 데리고 가야 한다.

하지만 자신이 균열과 싸우는 동안 워로카는 분명 요새를 우회해 페르디움을 칠 것이다.

'그리고 북부에서 분탕을 치겠지.'

지금 북부에는 야만인들을 막을 군대가 없다. 죄다 북부군으로 차출됐기 때문이다.

펜리스군마저 북방 요새로 가면 야만인들은 텅텅 빈 북부를 신나게 짓밟고 학살을 벌일 것이다. 그리고 그 영지들을 자신들의 영역으로 선포할 게 분명하다.

그러면 무척이나 피곤해진다. 균열을 처리하는 동안 우회하는 야만인들을 저지할 군대가 필요하다.

'결국 지금 써먹어야 하나.'

아예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북부군을 결성할 때 남겨 둔 군대가 있지 않은가.

그 병력의 주인은 무척이나 유능하다. 전생의 용병왕도 상당히 고전했을 만큼. 그러니 야만인들의 군대 정도는 충분히 저지할 수 있을 것이다.

"펜과 종이를 가져와라."

지셀은 짧은 고민을 끝내고 서신을 하나 써 내려갔다. 거침없이 펜을 놀리던 지셀이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어차피 좋게 말하면 안 들을 거고. 저번처럼 협박을 하는 수밖에."

그때는 참 많은 도움이 되었다. 자신이 여기까지 온 것도 어찌 보면 그 도움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이번에도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433화 저번처럼 협박을 하는 수밖에. (3)

다크가 지셀의 서신을 갖고 까마귀로 변해 어디론가 사라졌다.

지셀은 바로 측근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지금 북부군이 함께 이동하기에는 늦었다. 그러니 펜리스 기동군만 추려서 북방 요새로 간다."

현재 북부군은 서부 끝자락에 와 있었다. 중부 지역을 정리하고 바로 서부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동부는 왕국군과 영주들에게 잠시 저지를 맡긴 상태였다.

카이필러 요새까지 가려면 서부를 가로질러 가야 하는데, 북부군은 대부분이 보병으로 이루어져 속도가 느렸다. 오직 기마술에 뛰어난 기동군만이 제때 도착할 수 있었다.

길리언이 걱정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

"아무도 모르게 확장된 균열입니다. 그것도 북방의 대지를 전부 잡아먹고 컸습니다. 균열인들이 엄청나게 늘어나 있을 겁니다."

"그래, 그렇겠지. 아마 그 정도면...."

지셀이 살짝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대략 50만은 되지 않을까?"

"...."

사람들의 표정이 굳었다.

균열인들은 각 개체의 힘이 일반 병사들의 수준을 뛰어넘는다. 그런 놈들이 50만 마리나 있다면 정말 끔찍할 것이다.

하지만 지셀은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걱정할 필요 없어. 수가 많기는 하지만 이번에는 요새를 끼고 싸울 테니까. 무작정 달려들기만 하는 놈들이야. 시간만 충분하면 다 잡을 수 있다."

사실 에퀴데마가 가장 큰 문제지, 균열인들은 펜리스의 압도적인 화력으로 쓸어버릴 수 있다.

다만 시간이 얼마나 걸리냐가 문제였다. 균열을 처리하는 것으로 끝난다면 다들 이 정도로 걱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들이야말로 균열 처리의 스페셜리스트들이었으니까.

길리언이 걱정을 내비쳤다.

"일단 기동군이 먼저 가서 막고 북부군이 합류하도록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요새를 지키는 동안 야만인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그래, 그놈들이 구원교와 손을 잡았으니 균열을 만들 수 있었겠지. 아마 모든 부족을 끌어모았을 거야."

야만인들도 이번 일전에 모든 걸 걸었을 테니 수만에 이르는 전사들을 끌고 올 것이다.

지셀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시간이 맞지 않아. 북부군이 도착할 즈음이면 우리는 이미 전멸했든, 승리했든 한 뒤일 거야."

"균열 처리에는 합류하기 어렵더라도, 북부를 휩쓸 야만인들을 상대할 수는 있을 겁니다. 펜리스의 전력만으로는 양쪽 다 상대하기는 힘듭니다."

50만에 이르는 균열인들을 상대하려면 기동군뿐만 아니라 영지에 남아 있는 펜리스군 1만도 요새 쪽으로 합류해야 한다.

설령 펜리스군을 영지에 둔다 해도 고작 1만이다. 그 정도 수로는 야만인들을 상대하기 힘들었다. 기껏해야 펜리스를 지키는 게 전부일 것이다.

그사이 야만인들은 비어 있는 다른 영지들을 약탈하고 차지할 게 뻔했다.

이미 북부의 모든 병력을 끌고 왔다. 왕국군은 북부군을 믿고 죄다 남부와 동부의 최전방에 가 있었다.

결국 북부의 진입로에서 야만인 대군을 막아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당장은 시간 내에 가용할 수 있는 병력이 너무나도 적었다.

지셀이 피식 웃으며 답했다.

"그놈들도 우리를 뒤흔들려고 머리를 굴린 거지. 그런데 괜찮아. 야만인은 다른 사람이 막아 주고 있을 거야. 그사이에 균열을 얼른 처리하면 돼."

"네? 도대체 누가...?"

길리언은 의아해하다가 곧 누군가를 떠올렸다.

"설마...."

"그래, 그 설마."

"정말 해 주겠습니까? 그분이 굳이 손해를 감수할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 절대 그런 성격이 아니라고 들었습니다만...."

"그러니까 해 줄 거야. 손해 보는 건 죽을 만큼 싫어하는 성미라."

지셀은 장담할 수 있었다. 지금 여기서 그를 도와주지 않으면 본인의 야망에도 제동이 걸릴 테니, 울며 겨자 먹기로라도 지셀의 말에 따라 줄 것이다.

"어쨌든 북부군이 되돌아가는 건 의미가 없어. 그럴 바엔 할 수 있는 걸 하는 게 낫겠지. 테넌트."

"네."

"펜리스군은 북방 요새를 지원하러 갈 거야. 그동안 북부군을 이끌고 균열을 저지하고 있어. 할 수 있겠지?"

"알겠습니다."

이미 테넌트는 지셀을 대신해 균열을 저지한 적이 있었다. 에퀴데마를 처리하기는 어렵겠지만, 균열인들의 확장을 저지하는 건 문제 없었다.

때마침 클로드가 보낸 전령이 도착했다.

"남은 펜리스군과 병기를 모두 북방 요새로 이동시켰습니다. 이건 총관이 보낸 서신입니다."

[여기 침략당하면 우리 다 죽습니다. 이제 남은 병력이 없어요. 최대한 빨리 균열을 처리하고 야만인들을 막아야 할 겁니다. 나 진짜 도망가려고 짐 다 싸 놨는데 웬디가....]

구구절절 엄살이 잔뜩 섞인 서신이었다. 그걸 본 지셀이 피식 웃었다.

"말하기도 전에 준비는 다 해 놨네."

클로드는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병력을 북방 요새로 보냈다. 지셀이 어떻게 움직일지 예측했다는 뜻이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역시 능력이 출중한 놈이다.

지셀이 흑왕에 올라타며 외쳤다.

"페르디움이 위기에 빠졌다! 모두 전속력으로 달려야 한다!"

이미 소식을 들은 기동군은 엄청난 속도의 강행군을 마다하지 않았다.

페르디움이 뚫리면 그다음은 펜리스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다 기동군에는 페르디움 출신들도 꽤 있었다. 그들은 절대 자신들의 고향이 짓밟히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렇게 지셀과 기동군은 바로 북방 요새를 향해 떠났다.

급박한 상황에 인사도 제대로 못 하고 가 버린 지셀을 향해 로잘린이 한숨을 내쉬었다.

"에휴, 힘내세요."

이 왕국에서 지셀보다 바쁜 사람이 있을까? 아마 없을 것이다. 그가 아니면 이제 이 전란을 헤쳐 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이번에도 제대로 화를 내지 못했다.

그저 예전처럼....

떠나는 지셀의 뒷모습만 바라볼 뿐이었다.

* * *

아멜리아는 의자에 앉아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균열이 북방 요새까지 집어삼킬 정도로 다가왔다고 한다. 동시에 야만인들의 군대도 움직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금세 머릿속에 그려졌다.

"라울이 부린 수작이군."

구원교와 손을 잡았을 테니 그걸 이용해 야만인들을 충동질한 게 분명했다.

문제는 그 시기가 참으로 절묘하다는 점이었다.

"균열을 내버려두면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커지겠지."

북방 요새를 버리고 후퇴하는 방안도 있지만, 야만인들과 싸워야 하는 건 다를 게 없다.

그들을 막는 동안 균열은 더 커지고 싸워야 할 적은 더 많아질 것이다. 아마 페르디움까지 균열의 영역으로 들어갈 게 뻔했다.

영지민들이 피해를 보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지셀과 즈발터는 최대한 피하고 싶어 할 방법이었다.

물론 정 상황이 안 좋으면 그렇게 해야 한다. 그나마 그게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안이다.

하지만 지금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내가 움직이는 거겠지."

지셀이 균열을 막는 동안 자신이 야만인을 막으면 된다. 그러면 가장 좋은 결과를 낼 수 있다.

문제는 그러고 싶지 않다는 거다.

"...누구 좋으라고."

지셀을 도와주고 싶지 않다. 결국 쓰러뜨려야 할 놈이니까. 그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마음은 그렇지만 그래도 고민이 되는 이유가 있었다.

"아직 그놈이 공작가와 붙지 않았어."

펜리스의 피해가 커질수록 공작가에는 좋은 일이다. 그리고 공작가는 아직도 전력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훗날 아멜리아 자신이 공작가까지 쓰러뜨리려면 어떻게든 지셀과 공작가가 상잔해 큰 피해를 봐야 한다.

친왕파만으로는 절대 공작가의 힘을 깎아 낼 수 없다. 북부군과 지셀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지금 여기서 북부군의 기세가 떨어지면 안 된다. 그래서 아멜리아는 북부를 넘기고 동부로 거점을 옮길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후우...."

아멜리아가 다시 이마를 짚었다. 지금 이 상황을 내버려두었다가는 라울의 의도대로 움직이는 꼴이 된다.

그것 자체도 자존심이 상하는데, 펜리스의 피해가 커질수록 자신이 상대해야 할 공작가가 더 강해지는 셈이라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자신의 병력을 소모해서 펜리스를 도와주는 것도 상당히 꺼려진다.

"쯧, 일이 단단히 꼬였어."

야만인들이 북부를 휩쓰는 건 별로 신경 쓰이지도 않는다. 자신이 막아 내면 그만이고, 아예 거점을 옮겨 버려도 되니까.

하지만 공작가가 건재하는 건 안 된다. 그녀는 공작가의 힘을 잘 알고 있다.

펜리스는 반드시 최고의 전력으로 공작가와 맞붙어야 한다.

아멜리아가 그렇게 한참 동안 펜리스를 도와줄까 말까 고민하고 있을 때, 웬 까마귀가 갑자기 대전으로 들어왔다.

파앗!

아멜리아를 향해 쇄도하던 까마귀는 베르나프의 손에 바로 붙잡히고 말았다.

"케엑! 놔라! 이 무례한 놈! 이 몸이 누군지 알고 감히 함부로 잡는 거냐!"

"뭐야?"

다크가 지랄을 하자 베르나프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말하는 까마귀라니, 이런 건 태어나서 처음 봤다.

"어? 이거 설마...?"

로드리크군이 북부를 쳐들어온 이후, 펜리스에 큰 소문이 돌았다. 바로 지셀이 정령까지 사용한다는 소문이었다.

많은 병사가 까마귀로 변한 다크를 봤으니 소문이 안 날 수가 없었다.

"네가 그 소문의... 펜리스 백작이 부린다는 정령이냐?"

"그래! 당장 정령왕인 이 몸을 놓아주지 못할까! 나를 놓지 않으면 널 저주하겠다!"

"그놈의 영지에는 왜 이렇게 왕이 많아. 하나같이 싸가지 없고 이상한 놈들뿐이라니까. 그런데 저주도 내릴 수 있다고? 진짜야?"

베르나프가 순진하게 묻자 다크가 으르렁거렸다.

"그래! 내 권세가 너의 영혼을 잡아먹을 것이고 하늘의 모든 족속들이 너를 덮쳐 갈기갈기 찢을 것이며 땅의 족속들은 너를 붙잡아 불구덩이로...."

다크가 저주의 말을 다 내뱉기도 전에 차가운 목소리가 그걸 끊었다.

"시끄러운 놈이군. 가까이 데리고 와 봐."

아멜리아의 말에 베르나프가 다크를 쥔 채로 가까이 다가갔다.

다크는 아멜리아를 보고 눈을 빛냈다.

"네가 아멜리아냐! 나는 펜리스 백작의 서신을 전하러 왔다!"

아멜리아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답했다.

"주인을 닮아서인지 무척이나 건방진 놈이로구나."

"나는 위대한 존재다! 당장 펜리스 백작의 뜻을 받아라!"

"거절한다."

"뭐?"

"네놈 꼬라지를 보니 어차피 내 신경을 거스르는 말이겠지. 그놈은 그런 놈이니까."

"어... 그건 그렇지만...."

"무슨 말을 하든지 거부할 테니 꺼져라. 내 앞에서 건방 떠는 놈의 말은 들을 생각이 없다. 지셀에게 그렇게 전해라."

"으응?"

다크가 눈을 뒤룩뒤룩 굴렸다. 지금까지는 지셀에게 쩔쩔매는 사람들에게만 갔으니 항상 공손한(?) 대우를 받았다.

이런 반응은 처음이라 당황스러웠다.

"난... 서신을 전해야 하는데? 에잇! 그냥 받아라!"

어쨌든 전달만 하면 된다. 그런데 아멜리아의 품에 있던 바스테트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냐앙!

바스테트가 날렵하게 베르나프의 팔에 올라갔다. 그러더니 바로 다크의 얼굴을 향해 냥냥 펀치를 날렸다.

퍽!

"억! 뭐야! 이 미물은!"

다크가 깜짝 놀라 외쳤지만 바스테트는 멈추지 않았다.

파파파파파파팍!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냥냥 펀치가 날아온다. 다크는 정신도 못 차릴 정도로 얻어맞았다.

"머, 멈춰! 억! 내가 말을 좀! 서신을! 이 망할 고양이 새끼가!"

냐앙!

다크가 바스테트에게 얻어맞으며 비명을 질렀다. 이런 대우를 받는 건 지셀과 만난 이후로 처음이었다.

의식의 공유는 감각의 동화다. 그래야 보고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다.

통각은 최소화하기에 그리 아프진 않았지만, 너무 빨리 때리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자, 잠깐! 펜리스 백작이! 억! 그러니까 너는 병력을 이끌고! 억!"

어떻게든 말을 하려고 해도 할 겨를이 없었다. 바스테트가 쉴 틈 없이 때리니 고개만 자꾸 돌아갔다.

미묘하게 고통도 누적되는 느낌이었다.

냐앙!

파파파파파팍!

다크는 맞으면서 생각했다.

'이 무엄한 것들이! 그런데 얘가 내 탓을 하고 안 움직이면 어떻게 하지?'

지금 상황이 심각한 건 다크도 알았다. 오히려 지셀의 의식 속에서 사니 누구보다 더 잘 안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역할은 서신을 전달해서 아멜리아가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서신의 내용을 아니 말로 전달하려면 할 수는 있다.

그런데 만약에 아멜리아가 거부하면? 그것도 자신이 건방을 떨어서 그런 거라고 밝혀지면?

지셀이 분명 자신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그 생각에 이르자 다크는 오싹함을 느꼈다.

'아, 안 돼! 아멜리아가 야만인을 막아야 해!'

다들 자신의 말을 잘 들어주니 세상 물정을 몰랐다. 모든 사람이 지셀의 부하가 아니라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역시 집 밖으로 나가면 고생이라더니.

다크는 바스테트에게 얻어맞으면서 힘겹게 입을 열었다.

"배, 백작님! 억! 제 말을! 억! 잠시만! 억! 들어 주십시오! 제발!"

태어나서 두 번째로 다크의 말투가 공손해졌다. 건방진 정령이 예의범절을 배우는 순간이었다.

냐앙!

퍼퍼퍼퍼퍽!

"윽! 좀! 폭력 멈춰!"

"그만, 바스테트."

아멜리아의 말에 바스테트가 냥냥 펀치를 멈췄다. 다크는 치욕스럽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크윽.... 두고 보자. 망할 고양이. 저주를 내려 버릴 테다.'

예의를 알게 된 다크에게 아멜리아가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서신은 어디에 있지?"

"네, 여기.... 꺼억."

다크의 벌어진 입에서 편지 하나가 튀어나왔다. 마나로 이루어진 몸이라 안쪽에 보관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

베르나프가 그걸 손가락 끝으로 집어서 탈탈 턴 뒤에 아멜리아에게 건넸다.

아멜리아가 인상을 쓰자 다크가 허겁지겁 변명했다.

"이놈이 날 붙잡고 있잖아요!"

안전하게 서신을 보관하기 위해 다크는 언제나 몸 안쪽에 넣어 다녔다.

그런데 베르나프가 붙잡고 있으니 나올 곳이 입하고 엉덩이 쪽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엉덩이 쪽으로 뺄 만큼 눈치가 없지는 않았다.

만약 엉덩이 쪽으로 뺐으면 서신이고 뭐고 바로 쫓겨났을 것이다.

아멜리아가 경멸 어린 표정을 감추지 않고 서신을 받아 살폈다.

그리고 서신을 펼쳐 본 그녀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이놈이...."

서신에는 예상대로 협박이 줄줄이 쓰여 있었다.

434화 이대로만 가면 된다. (1)

아멜리아는 불쾌함을 감추지 않고 코웃음을 쳤다.

"흥, 북부군을 이끌고 여기를 치겠다고?"

자신이 도와주지 않으면 지셀은 아마 북방 요새를 버리고 야만인들을 먼저 막을 것이다. 그래야 균열과의 싸움에 집중할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 되면 페르디움의 피해는 상당히 커질 게 분명하다. 어쩌면 영주성 인근만 빼고 영지의 북쪽 지역도 다 먹힐 수도 있었다.

하지만 북부군까지 불러온다면 피해를 보더라도 결국 균열을 막아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고 나면 그 미친놈은 자신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고 이곳을 칠 것이다. 얼마든지 그럴 놈이긴 했다.

아멜리아가 머리를 쓸어 올리며 눈을 감았다.

'건방진 놈.'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아직은 지셀과 자신이 붙으면 안 된다. 그건 공작가만 좋은 일을 시키는 셈이다.

그래서 진작에 동부로 이주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게 아닌가.

지금도 지셀의 요구대로 그를 도와주는 게 가장 나은 방법이긴 했다.

알고는 있지만....

'감히 날 협박해?'

이러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뒤통수를 갈기고 싶어지는 게 사람 마음이다.

지금 지셀은 자신을 몰아가고 있었다. 야만인과 싸울지 북부군과 싸울지 선택하라고 말이다.

명분도 충분하다. 지셀은 북부군 사령관이니까. 자신은 친왕파와 협상을 해서 내버려뒀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아멜리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살면서 같은 놈한테 두 번이나 협박을 당한 건 처음이다.

분위기가 싸늘해지자 다크가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저기... 전달할 말이 따로 있는데요."

분명 서신을 보면 아멜리아의 분위기가 안 좋아질 거라고 들었다. 그 뒤에 전하라는 말이 있었다.

"뭐냐."

아멜리아의 말에 다크가 살짝 눈치를 보며 말했다.

"라울의 의도대로 놀아날 거냐고.... 어차피 원하는 게 따로 있지 않냐고.... 이번 일을 무사히 넘기면 동부 이주 때 힘을 실어 주겠다고 했습니다."

아멜리아의 얼굴이 굳어졌다. 지셀은 자신의 야망과 계획을 알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걸 어떻게 알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하지만 나쁘지 않은 거래였다. 동부로 이주하려면 결국 무력을 써야 한다. 친왕파와 협상하긴 했지만 다른 귀족들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그걸 하나하나 다 상대하는 건 무척이나 피곤한 일이다.

'...나에 대해 이상하리만치 너무 잘 알고 있어.'

숨통만 조이면 자신이 다른 생각을 할 걸 알았나 보다. 어쩌면 저렇게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을까?

지셀이 회귀자라는 걸 모르니 아멜리아의 의문이 해결될 리가 없었다.

아멜리아가 다시 눈을 감았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후우....'

숨을 가라앉히고 냉정하게 현 정국을 판단했다. 지셀을 도와주는 건 기분이 나쁜 일이지만, 라울의 의도대로 놀아나는 건 위험한 일이다.

'감정대로만 움직일 수는 없지.'

라울은 분명 자신이 움직이지 않을 거라 확신했을 것이다. 움직이더라도 자신의 능력으로는 야만인을 막지 못할 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공작가의 입장에서 자신은 해럴드 덕분에 영지를 차지한 운 좋은 계집일 뿐이었으니까.

'슬슬 한 번은 보여 줄 때가 되긴 했어.'

찬탈에 성공했음에도 한낱 귀족 영애라는 선입견이 아직도 남아 있다. 여전히 대부분 귀족은 자신을 우습게 보고 있었다.

동부 전선에서부터 명성을 쌓아 가려고 했지만 조금 일찍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

'균열은 전부 처리해야 해.'

자신은 괴물들이 판치는 종말 뒤의 세상을 가지려는 게 아니다. 정신 나간 구원교 따위와 손을 잡을 생각도 없었다.

균열을 쓸어버리려면 결국 북부군이 더 활약해 줘야 한다.

'어쩔 수 없지.'

생각을 정리한 아멜리아가 눈을 뜨고 다크에게 말했다.

"지셀에게 전해라."

"넹."

"이번 한 번만 네 칼춤에 어울려 주겠다고."

"그게 무슨 말이에요? 온다는 거예요, 안 온다는 거예요? 칼춤이면 뭐 우리 주인하고 싸우겠다는 거예요? 똑바로 말을 해 줘요."

"...."

아무래도 이 정령은 사회성을 비롯한 많은 것들이 조금 부족해 보였다.

아멜리아가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옆으로 손짓했다.

"지도."

가신 한 명이 지도를 가져다주자 아멜리아가 한 곳을 짚으며 다크에게 말했다.

"똑똑히 잘 보고 전해. 내가 이곳에서 야만인들을 저지하고 있을 거야. 북부 영지로 들어가는 진입로지."

"넹."

"...내가 그놈들을 막고 있을 테니 소수의 병력이라도 보내 뒤를 치라고 전해. 나 혼자 무리하다 피해를 볼 생각은 없으니까. 알겠어?"

지셀은 아멜리아에게 어떤 전략도 말해 주지 않았다. 그녀라면 알아서 어떻게 해야 할지 알 거라 믿었기 때문이다.

과연 아멜리아는 순식간에 머릿속에서 상황을 그려 낸 뒤 전략을 수립했다. 그리고 이렇게만 전하면 지셀이 알아들을 거라 생각했다.

사이가 안 좋은 두 사람이지만 서로의 능력은 인정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다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로만 전하면 자신의 일은 끝이다.

협상이 성공했다. 다크는 베르나프의 손에서 빠져나와 고개를 숙인 뒤 거리를 벌렸다.

슬금슬금 거리를 벌려 문 앞까지 다가간 다크가 확 소리를 질렀다.

"이 무엄한 것들! 내 반드시 저주를 내릴 거다! 두고 보자! 특히 너 고양이! 오늘의 굴욕은 내가 반드시 복수할 테니 그리 알아라!"

하악!

"안녕!"

바스테트가 몸을 세우며 일어나자 다크가 작별 인사를 남기고 후다닥 밖으로 나가 버렸다.

"...."

아멜리아를 비롯한 대전의 모두가 침묵에 잠겼다.

약혼녀를 협박해서 돈을 뜯어 간 놈, 1골드씩 뇌물을 받는 이상한 총관, 정신 나간 정령까지. 하여간 펜리스에는 정상적인 놈이 없었다.

그런 놈들이 왕국을 휩쓸며 북부 최강의 칭호를 가져갔다는 게 아직도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한숨을 내쉰 아멜리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콘라드에게 말했다.

"바로 움직여. 시간이 촉박한 거 같으니까."

"알겠습니다."

이미 언제든 움직일 수 있도록 준비를 마친 레이폴드군이다. 당장 출정해도 무리가 없었다.

아멜리아는 이 기회에 내버려두었던 내부 단속도 마저 끝내기로 했다.

그녀는 살쾡이 밀매단의 단주, 칼레브에게 따로 은밀한 지시를 내렸다.

"확실하게 처리해. 알겠어?"

"맡겨 주십시오."

칼레브가 비릿한 웃음을 짓고 고개를 숙였다.

아멜리아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결정을 내리니 오히려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여전히 불쾌하긴 하지만 라울이 깔아 놓은 판에서 움직일 생각은 없었다.

"바람을 좀 쐬어야겠어."

다크가 시끄럽게 떠들어서인지, 아니면 고민을 많이 해서인지 머리가 조금 아팠다.

밖으로 나온 아멜리아는 고개를 돌려 북녘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주 오랫동안.

* * *

즈발터는 저 멀리서 요새 쪽으로 다가오는 푸른 안개를 바라보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안개가 지평선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저렇게 커질 수가 있는 거지?"

대자연의 기운이 풍부할수록 균열의 확장 속도가 빠르다고는 들었다.

북방의 대지는 인공적인 구조물이 거의 없고 자연 훼손도 적다. 그러니 대자연의 기운이 다른 곳보다 더 풍부하긴 할 것이다.

하지만 이유를 알아도 이해되지 않을 정도로 확장 속도가 빨랐다.

그리고 그 균열의 영역이 곧 이곳을 덮칠 터였다.

즈발터가 옆에 있는 란돌프에게 말했다.

"야만인들이 이 기회를 놓치지 않겠군."

"네. 분명 균열과의 전투가 시작되면 우회해서 북부로 들어갈 겁니다."

"그놈이 미친 짓을 하고 말았어."

"미친 새끼죠. 구원교와 손을 잡고 저런 일을 벌이다니."

"결국 이렇게 되는 건가."

즈발터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워로카의 욕심이 상식 밖의 일을 불러왔다.

저 균열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부족민을 희생시켰을까? 그렇게 해서 얻은 권력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즈발터는 그 권력욕을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지셀은?"

"곧 도착할 겁니다."

"그래. 저 균열을 막아야 야만인들을 정리할 수 있겠지."

페르디움은 전보다 훨씬 강해졌다.

식량과 장비도 풍부하게 생산되고, 기사와 병사도 많이 늘었다. 이제는 대영지 수준이라 불려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저 균열을 막을 수는 없었다. 결국 지셀의 군대가 와야 균열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야만인들은 아멜리아가 막고 있겠다고 했던가?"

"네, 레이폴드에서 군대를 움직였다는 소식이 막 도착했습니다."

"다행이군. 그 아이가 직접 움직일 줄이야."

동맹이었던 레이폴드 백작이 자리에서 쫓겨난 뒤에 관계가 꽤 서먹해진 건 사실이었다.

아멜리아가 반란을 일으킨 뒤로 결혼 얘기는 쏙 들어가 버렸다. 가신들은 그런 무서운 여자를 페르디움가의 며느리로 들일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교류도 거의 안 하고 있었는데 이런 위기에서 움직여 줄 줄이야.

"그래, 그 아이도 북부 사람이지. 그렇고말고."

지셀이 어떻게 설득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멜리아가 어렸을 때부터 그녀를 봐 온 즈발터는 그 도움이 기꺼웠다.

"최선을 다해 균열을 처리해야 한다. 아멜리아 혼자서 그 많은 야만인을 막기는 쉽지 않을 거야."

균열과의 전투가 우선이다. 균열을 처리하는 동안만 아멜리아가 버텨 주면 된다.

페르디움은 이미 전군이 모여 준비를 끝냈다. 펜리스의 총관이 보낸 1만의 지원군과 병기들도 도착한 상태였다.

거리가 멀지 않기에 서부에 있던 기동군보다 더 빨리 올 수 있었던 것이다.

푸른 안개는 시시각각 요새 쪽으로 밀려왔다. 이 속도라면 일주일도 되기 전에 요새를 덮칠 것이다.

요새의 모든 병력이 긴장한 채 그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 안타깝게도 이곳에는 균열과 싸운 경험이 있는 이들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젠장, 소문으로는 저 안에 50만은 있을 거라는데....'

'정말 우리 힘으로 막을 수 있을까?'

'그 정도 수면 그냥 덮치기만 해도 요새가 무너지는 거 아냐?'

'이게 다 스코반 때문이라는데.... 그 새끼 좀 찝찝하긴 했어.'

균열의 위험함을 익히 들어왔기에 다들 조금씩 겁을 집어먹었다.

미지의 적은 무서운 법이다. 모두가 공포에 조금씩 잠식되고 있었다.

전투 전에 사기가 떨어지는 건 위험한 일이지만 즈발터는 굳이 사람들을 독려하지 않았다.

'펜리스군은 눈빛이 다르다.'

겁을 조금 먹은 페르디움군과는 다르게 펜리스군은 무언가를 기대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물론 그들도 잔뜩 긴장한 건 마찬가지였지만, 두려움은 크지 않았다.

그 이유를 알고 있기에 즈발터도 조용히 기다렸다.

과연 분위기는 며칠 뒤 지셀이 도착하자 완전히 바뀌었다.

"대공자님이 오셨다!"

"우리 영주님이 오셨다!"

"펜리스 기동군이 왔다!"

철컹, 철컹, 철컹.

지셀을 위시한 그의 측근들과 기동군이 요새 안으로 들어오자 사람들이 만면에 화색을 띠었다.

펜리스는 불패의 군대였다. 그들을 이끄는 지셀이야말로 불패의 군주라 할 수 있었다.

이미 수많은 균열을 없앤 그가 오니 저절로 사기가 올라갔다.

"아버지."

지셀이 즈발터 앞에 서서 살짝 고개를 숙였다. 즈발터는 흐뭇한 미소로 아들과 그 측근들을 둘러보았다.

벨린다는 즈발터의 시선을 피해 살짝 눈을 내리깔았다. 본인은 내버려두고 그 아들을 북부 대공으로 만들겠다는 야망이 그렇게 떳떳한 건 아니었다.

즈발터는 지셀의 어깨를 짚으며 말했다.

"지휘를 부탁한다."

"알겠습니다."

말은 길지 않았다. 즈발터는 예전처럼 직접 지휘하겠다고 나설 생각이 없었다.

아들은 이미 자신의 실력을 차고 넘칠 정도로 증명했다.

다른 상황이었다면 또 모르지만, 균열과의 싸움은 지셀이 지휘해야 한다. 모두가 그걸 바랄 것이다.

지셀은 요새 위로 올라가 손을 들었다.

그리고 힘 있는 말투로 모두에게 말했다.

"전군, 전투를 준비하라."

"와아아아!"

단지 그 한마디뿐이었음에도 병사들은 함성을 내질렀다.

이길 수 있다는 믿음. 그것이 지셀이 주는 가장 강력한 힘이었다.

병사들이 각자의 자리에 섰다. 펜리스군은 갈바니움 투석기 100대를 요새 위에 배치했다.

끼이이이익....

페르디움에서 준비한 투석기 수십 대도 요새의 벽 뒤에 배치했다.

두 영지는 그간 만들어 온 것들을 박박 긁어모았다. 이 정도면 어지간한 영지는 순식간에 초토화할 수 있는 양이었다.

드드드득.

요새 위에 있던 대형 발리스타 10대가 장전을 끝마쳤다.

기동군을 따라온 마법사 100명과 80여 명의 사제도 요새 위의 안전한 곳에 자리 잡았다.

준비를 끝마칠 즈음, 푸른 안개도 상당히 가까운 거리까지 다가와 있었다.

눈으로 보기에 조금 거리는 있지만 투석기의 공격은 충분히 닿을 수 있는 거리.

카아아아아!

사방에서 균열인들이 지르는 괴성이 들려왔다.

병사들이 마른침을 삼키며 긴장된 표정으로 명령을 기다렸다.

지셀 또한 저 푸른 안개가 이곳을 덮고 균열인들이 달라붙을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 없었다.

그가 손을 앞으로 뻗으며 명령을 내렸다.

"쏴라."

"쏴라!"

기사들의 복명복창과 함께 투석기가 맹렬하게 돌들을 쏘아 보냈다.

콰아아아앙!

435화 이대로만 가면 된다. (2)

카아아악!

균열 영역에 떨어진 돌들이 많아질수록 균열인들의 비명도 커져 갔다.

워낙 범위가 넓고 균열인들이 많기에 눈 감고 쏘아도 맞출 정도였다.

지셀은 점점 가까워지는 푸른 안개를 보며 외쳤다.

"쉬지 말고 공격해라! 돌이 떨어지지 않게 계속 준비해라!"

요새에는 수백 개의 돌이 준비되어 있지만 이 정도로는 턱도 없었다. 그래서 따로 병력을 추려 주변에서 돌을 구해 오게 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쿵! 콰앙! 쾅!

병사들은 요새 안에서 부술 수 있는 건 다 부쉈다.

어차피 균열에 먹히면 끝이다. 부서진 것들은 다시 세우면 된다.

그렇게 투석기의 탄으로 쓸 재료가 어마어마하게 만들어졌다.

콰아아앙! 콰아아앙!

처음에는 거리가 좀 되기에 투석기 공격만 했다. 하지만 하루가 지나자 푸른 안개는 요새 지척까지 다가왔다.

지셀이 그 모습을 보고 이마를 찡그렸다.

"확실히 비정상적인 속도군. 50만은 확실히 넘었겠어."

어쩌면 100만에 가까울 수도 있었다.

전생에도 이런 허허벌판에 균열이 만들어진 적은 없었다. 애초에 구원교도 그런 곳에서는 균열을 만들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단 만들어지니 균열은 대자연의 기운을 듬뿍 먹고 엄청난 속도로 확장하고 있었다. 방해물이 될 만한 건물 따위가 없어서 확장 속도는 더더욱 빨랐다.

"제 놈들도 감당 못 할 짓을 하다니."

만약 페르디움이 멸망한다면 결국 북부를 차지한 야만인들이 저 균열과 싸워야 한다.

그런데 과연 야만인들이 모두 모인들 저걸 감당할 수 있을까?

워로카는 눈앞의 이득만 보고 멍청한 짓을 한 것이었다.

푸른 안개가 가까워지자 다들 안개 속에서 수도 없이 일렁이는 검은 그림자들을 볼 수 있었다.

카아아아악!

병사들은 이곳으로 달려들고 싶어 꿈틀거리는 균열인들을 보았다.

"저게... 균열인...."

"진짜 괴물들이군."

"끝이 없어 보여."

푸른 안개에 휩싸여 있지만 눈이 좋은 자들은 균열인들의 징그러운 모습을 대충이나마 훑어볼 수 있었다.

아마 가까이서 자세히 보면 더 혐오스러울 것이다.

"궁수! 준비해라!"

병사들은 지셀의 외침에 정신을 차렸다. 이제 활 공격이 통할 거리였다.

엘프 루미나의 지휘 아래 궁병들이 활을 높이 들었다.

펜리스군은 모두가 활을 쏠 줄 안다. 그리고 그 영향으로 페르디움의 기사들과 병사들도 활을 익혔다.

펜리스군만큼 실력이 뛰어난 건 아니지만 그래도 방향을 잡고 쏠 줄은 안다.

"쏴라!"

파아아아아앗!

수만 개의 화살이 동시에 푸른 안개 지역을 향해 날아갔다.

정확하게 위치를 잡을 필요는 없다. 빗나가는 것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맞을 테니까.

투석기의 돌과 달리 화살은 주변에서 수급이 불가능하다. 요새에 비축해 두었던 양과 클로드가 보낸 것까지 쓰고 나면 끝이다.

하지만 지셀은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아끼지 말고 쏴라!"

어차피 화살 수가 한정되어 있으니 결국 백병전으로 승부를 봐야 한다. 그럴 바에는 붙기 전에 적을 하나라도 더 줄이는 게 낫다.

파아아앗!

푸른 안개 안으로 끊임없이 화살이 쏟아졌다. 안개 밖으로 나오면 소멸되는 균열인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카아아아!

몸과 팔이 반쯤 튀어나왔다가 그 부분이 소멸되어 버린 균열인들도 보였다.

병사들은 교대로 공격하며 충분한 휴식을 취했다. 곧 본격적으로 맞붙어야 하니 체력을 비축해 두는 것이었다.

스스스스스슷....

이틀이 지나자 드디어 푸른 안개는 요새의 벽에 닿았다. 그리고 그쯤에서 화살도 거의 다 동이 나고 말았다.

펜리스에서는 전쟁에 대비해 끊임없이 화살을 생산했고, 그걸 전부 북방 요새로 가져왔다.

그런데 고작 3일 만에 바닥을 보였다.

펜리스군은 2만, 식량 부족을 해소하고 끊임없이 병사를 늘린 페르디움군은 1만에 가깝다.

3만이나 되는 병사들이 쉬지 않고 화살을 쏘아 댔으니 3일도 오래 간 것이었다.

"그만! 이제 화살은 엘프들만 사용하도록!"

지셀의 명령에 화살 공격이 멈추고, 얼마 남지 않은 화살은 모두 엘프들에게 배분되었다.

스스스스....

드디어 푸른 안개가 성벽을 집어삼키고 병사들의 얼굴에 닿았다.

차가운 새벽에 내리는 축축한 비를 맞은 것 같은 으슬으슬함이 느껴진다.

"방패!"

갑자기 지셀이 외쳤다. 성벽 위의 병사들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몸을 낮추며 팔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그 순간.

카아아아악!

균열인들이 안개를 뚫고 긴 손톱을 휘둘렀다.

타아아앙!

균열인들의 강한 힘에 직격당한 병사들의 방패가 흔들렸다.

하지만 아직 푸른 안개가 성벽을 완전히 덮지는 못했다. 몇몇 균열인들의 손이 먼지가 되어 흩어졌다.

카아아악! 카아아아! 카아악!

이제 고막을 울릴 정도로 균열인들의 괴성이 가까이에서 들려왔다.

그리고 푸른 안개가 드디어 성벽의 절반쯤 덮었을 때.

카아아아악!

드드득! 드득! 드드드드드드득!

균열인들이 성벽을 손톱으로 찍으며 마구 올라오기 시작했다.

털이 하나도 없는 회색 피부, 긴 팔과 살의로 가득 찬 붉은 눈, 찢어지도록 벌어진 입 안에 보이는 날카로운 이빨.

"흡!"

균열인들의 모습을 처음 본 병사들이 숨을 들이켰다. 말로만 들었지 실제로 보니 공포스럽기가 이를 데 없었다.

그래도 훈련을 받은 정예들답게 다들 방패를 움켜쥐고 자세를 단단히 잡았다.

카아아아악!

순식간에 수백 마리의 균열인들이 올라와 손톱을 마구 휘두르고 입을 벌렸다.

몸 곳곳에 화살이 꽂힌 놈들도 꽤나 많이 보였다. 머리가 완전히 뚫리지 않는 이상 화살 한두 대 맞는다고 죽을 놈들은 아니었다.

타앙! 타탕! 타앙!

가장 앞에서 방패를 든 병사들은 제법 잘 버텼다. 아직은 올라오는 수에 한계가 있어서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균열인들은 방패까지 타고 넘어왔다. 워낙 수가 많으니 제 놈들끼리도 찍어 누르며 올라온 것이다.

균열인들이 하나둘씩 성벽 위에 착지하자 지셀이 크게 외쳤다.

"쳐라!"

한 걸음 떨어져 있던 병사들이 균열인들을 향해 창을 내질렀다.

푸욱! 푹! 푸욱!

균열인들의 방어력은 일반 사람과 다를 바 없다. 대기하고 있던 병사들의 공격에 균열인들은 몸이 뚫렸지만 쉬이 죽지 않았다.

화르르르륵!

지셀의 주변에 마력의 창 수백 개가 생성되었다.

그것들은 주변을 날아다니며, 성벽 위에 착지한 균열인들의 머리를 뚫었다.

콰앙! 콰앙! 콰아앙!

지셀의 측근들과 기사들도 균열인들을 베었다. 이들은 그간 균열인들과 싸우며 어느 정도로 힘을 분배해야 하는지 깨달았다.

균열인들과의 싸움은 지구력 싸움이었다. 워낙 수가 많기에 오래 버티는 쪽이 이긴다.

지셀이 균열인들을 쳐내며 외쳤다.

"바네사!"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바네사가 드디어 마법을 시전했다.

"어스 월."

쿠구구구구구궁!

위로 올라오려는 균열인들과 뒤에 따라오던 균열인들 사이에 거대한 벽이 생성되었다.

크기가 얼마나 큰지 요새 앞을 아예 막아 버릴 정도였다.

카아아아아악!

잠깐이지만 균열인들이 둘로 나뉘었다. 뒤쪽에 있는 균열인들은 자신들을 가로막은 벽을 타고 올라오기 바빴다.

그렇게 고립된 균열인들을 향해 남은 마법사들이 마법을 뿌려 대었다.

콰아앙! 콰앙! 콰아앙!

불과 번개가 번뜩이며 요새로 몰려들던 균열인들을 태워 버렸다.

방패를 쥔 병사들은 성벽 위로 올라오는 균열인들을 어떻게든 밀어내어 떨어뜨렸다. 방패까지 넘어온 균열인들은 뒤에 있는 기사들과 병사들이 죽였다.

높은 망루로 이동한 엘프들은 전장 전체를 시야에 담고 위험한 쪽을 화살로 지원했다.

투석기들은 아직도 돌을 쏟아내며 가장 뒤쪽의 균열인들을 쳐 죽였다.

그야말로 완벽한 합이었다. 단숨에 많은 균열인들이 넘어오지 못하게 바네사가 막아 버리고 차근차근 죽이는 전략을 취한 것이다.

"버텨라! 계속 이렇게만 가면 된다!"

지셀의 독려에 모두가 힘을 내었다. 다들 배우고 준비한 대로 하니 아직은 어렵지 않았다.

어느새 요새 앞에는 균열인들의 시체로 가득 찼다. 균열의 영역이라 먼지로 사라지지도 않고 그대로 쌓이기 시작한 것이다.

바네사가 만든 벽 때문에 균열인들이 넘어오는 속도가 느려졌다.

하지만 문제는 앞에 가득 쌓인 시체였다. 마법사들이 계속 불태웠지만, 시체가 워낙 많으니 점점 언덕이 만들어졌다.

카아아악!

균열인들은 불길마저 뚫으며 달려들었다. 몸에 화살이 꽂히고 불이 붙어도 개의치 않았다.

어떻게든 상대를 죽이겠다는 증오와 집념이 느껴졌다.

병사들은 이를 악물었다. 저 기세에 주눅이 들면 안 된다.

이쪽은 훨씬 더 수가 적다. 어느 한쪽이라도 밀리면 순식간에 진형이 붕괴할 것이다. 그러니 버텨야 했다.

기껏 진로를 막아 놓았던 흙의 벽은 너무나도 많은 균열인들이 달라붙어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때 다시 바네사가 나섰다.

"파이어 필라."

콰아아아앙!

거대한 불기둥들이 요새 앞에서 솟아오르며 균열인들의 시체를 박살 냈다.

덕분에 균열인들은 다시 성벽을 찍으며 올라와야 했다.

"어스 월."

쿠르르르릉!

다시 흙의 벽이 솟아오르며 균열인들의 진로를 막았다.

그리고 다시 조금 전과 같은 과정이 반복되었다. 이 패턴을 반복하며 버티는 게 첫 번째 전략이었다.

"계속 버텨라!"

"물러서지 마라! 할 수 있다!"

"힘을 내라!"

곳곳에서 지휘관들의 독려가 울렸다. 이대로 버티기만 한다면 시간이 걸려도 균열인들을 결국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스스스스스....

하지만 균열은 어느새 벽을 넘어 더 깊은 곳으로 영역을 확장했다. 당연히 옆쪽 성벽에서도 균열인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막아라!"

투석기 공격이 멈췄다. 상대적으로 수가 적다 보니 한 사람도 빠짐없이 공격에 참여해야 했다.

뒤쪽에서 돌을 나르며 투석기 공격을 하던 병력이 요새의 옆쪽을 막았다.

터엉! 터엉! 터엉!

기사들이 양옆으로 지원을 나갔다. 앞쪽의 방어가 다소 느슨해지긴 했지만 아직은 충분히 막을 만했다.

카아아아악!

"죽어! 이 새끼들아!"

양쪽 다 밀리지 않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 이 세계의 생명체에게 살의만 가진 균열인들의 기세는 줄어들 줄을 몰랐다.

콰앙! 콰앙! 콰아앙!

성벽 위에도 점점 균열인들의 시체가 쌓이기 시작했다. 시간이 갈수록 병사들도 움직이기가 힘들 정도였다.

그 문제를 해결한 건 지셀이었다.

부웅! 부웅! 부웅!

그의 몸에서 뻗어 나온 수백 개의 마나의 실은 균열인들의 시체를 마구잡이로 잡아 던졌다.

넘어오는 균열인들은 날아오는 시체에 맞아 박살이 나 버렸다.

퍼억! 퍼억! 퍼억!

누구보다 많은 활약을 한 지셀 덕분에 이 팽팽한 균형을 계속 이어갈 수 있었다.

벽이 무너지면 다시 바네사가 세운다. 7서클 마법사답게 그녀는 아예 요새의 옆까지 둘러 버리는 벽을 세웠다.

시체가 쌓여 언덕이 만들어지면 마법사들이 불태웠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마력의 분배를 잊지 않았다. 에퀴데마도 남아 있고, 이 전투 자체도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계속해서 반복하면 결국 균열인들을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다들 그렇게 믿었다.

하루가 지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파, 팔이 안 움직여.'

'버텨야 해!'

'젠장... 도대체 얼마나 많은 거지?'

사람인 이상, 움직일 수 있는 시간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다.

이게 만약 인간과의 전쟁이었으면 잠시 소강상태에 이를 시간이다. 상대도 쉬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균열인들은 그냥 끝도 없이 몰려왔다. 병사들은 누구도 먹고 자고 쉴 수가 없었다.

그제야 병사들은 균열의 진정한 무서움을 깨달았다.

어느 한쪽이 죽을 때까지 싸워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점점 지쳐서 행동이 굼떠지는 병사들을 보며 지셀이 입술을 깨물었다.

'역시 버티는 게 문제야.'

균열이 크게 확장했을 때는 바로 이게 무서웠다. 균열인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이 정도로 확장이 됐으면 지금도 균열에서 균열인들이 수백 마리씩 튀어나오고 있을 것이다. 저지하던 군대도 없으니 균열인들이 너무 많이 쌓였다.

지금은 쉬겠다고 잠깐 후퇴할 수도 없었다.

몇 날 며칠을 쉬지 않고 싸울 수 있는 자들은 그리 많지 않다. 끝도 없이 몰려오는 적을 상대하다 보면 절망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기사들은 잠깐잠깐 틈이 날 때마다 가루를 섞은 물을 마시고 있지만, 앞에서 균열인들을 막고 있는 병사들은 그조차도 쉽지 않았다.

카아아아악!

콰아아앙!

지셀은 가장 앞에 나서서 수십의 균열인들을 단번에 날려 보낸 뒤 외쳤다.

"회복시켜라!"

그 말에, 대기하고 있던 사제들이 신성력을 뿜어내었다.

파아아아앗!

여기저기서 신성한 빛이 뿜어지며 병사들의 몸을 감쌌다. 주변에 있던 균열인들은 비명을 지르며 몸이 타 버렸다.

덕분에 어느 정도 힘을 되찾은 병사들은 다시 움직일 수 있었다.

지금의 전법을 최대한 오래 유지해야 한다. 하지만 이것도 한계가 있다.

'휴식 시간이 필요하다.'

아무리 사제들을 많이 데려왔어도, 몇만에 이르는 병사들을 회복시키는 일이 쉬울 리가 없다. 당연히 몇 번 쓸 수가 없기에 최대한 아껴 써야 했다.

사제들은 지금 한 번 움직인 것만으로도 지쳤을 것이다.

'어쩔 수 없지.'

회복이 됐을 때 물과 가루를 먹고 조금이라도 쉬어 줘야 한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더 버틸 수 있다.

그리고 그 시간은 자신이 벌어 줄 생각이었다.

"나에게 가호를 걸어라!"

사제들의 신성력이 지셀의 몸을 감쌌다.

곧 지셀의 몸이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여신의 가호는 몸에 활력을 솟아나고 하고 외부의 공격을 경감시켜 준다.

하지만 지셀은 그런 용도로 쓸 생각이 아니었다.

파아아아악!

힘을 분배하며 싸우던 지셀의 눈이 붉어졌다.

3단계 코어까지 활성화할 필요는 없다. 2단계만으로도 어느 정도는 시간을 끌 수 있을 것이다.

지셀이 창 하나를 들어 마나를 집어넣었다.

드드드드드.

창에 검붉은 기운이 서리며 공기가 떨렸다. 엄청난 힘이 몰린 창이 곧 요새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콰아아아앙!

엄청난 굉음이 울리고, 요새 앞에 몰려들던 균열인들이 터져 나갔다.

그리고 동시에 지셀이 그곳으로 뛰어 내려갔다.

그 모습을 보고 스코반은 옛날 일을 떠올렸다.

"또 시작이네."

그때와 다른 건 지셀 혼자 내려갔다는 점뿐이었다.

436화 이대로만 가면 된다. (3)

지셀이 뛰어 내려가자 사람들은 경악했다.

왜 저러는지는 이제 너무 익숙해서 알고 있다. 또 혼자서 시간을 끌겠다는 뜻이다.

그래도 예전에는 용병들과 기사들을 끌고 내려갔다. 지금처럼 무모하게 혼자 많은 적과 싸운 일은 흔치 않았다.

"지셀!"

즈발터가 크게 외쳤다. 저놈 새끼는 꼭 싸우다가 뭔가 마음에 안 들면 적진으로 뛰어들어 버린다.

예전 페르디움 공방전 때도 저래서 얼마나 속을 썩였던가.

"도련님!"

"영주님!"

벨린다와 길리언도 다급하게 외쳤다. 어떤 마음인지는 알겠는데,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적이 많다.

지금도 지셀은 내려가자마자 회색 해일로 덮여 그의 모습조차 제대로 보기 힘들 정도였다.

다들 지셀을 도우러 내려가려고 할 때, 아래에서 큰 외침이 들려왔다.

"내려오지 말고 휴식을 취해라! 물과 가루를 먹고 진형을 정비해! 나도 무리할 생각은 없다!"

그 말에 지셀의 측근들과 기사들은 발을 떼지 못하고 몸만 움찔거렸다. 지금 상황이 어떤지는 그들도 잘 알고 있었다.

기존 균열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넓어진 영역. 그 안에 가득 쌓인 균열인 때문에 전투력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

조금이라도 휴식을 취해야 계속 싸울 수 있다. 그 시간을 지금 지셀이 벌어 주려고 하는 것이었다.

그때 바네사가 나서서 말했다.

"제가 벽을 만들어서 영주님을 보조할게요."

마력을 낭비해서는 안 되지만, 계속 아끼기만 할 수도 없다. 에퀴데마와 싸우기도 전에 아군이 밀리면 마력이 아무리 많이 남아도 소용이 없는 일이니까.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셀이 벌어 준 시간을 조금이라도 활용해야 했다.

카아아악!

균열인의 수가 가장 많은 앞쪽에서 지셀이 싸워 시선을 끌어 주었다.

특히 지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신성력을 느낀 균열인들은 미친 듯이 지셀에게만 달려들었다.

이렇게 시선을 끌기 위해 지셀은 자신의 몸을 신성력으로 감싼 것이다.

그 덕분에 요새 위로 올라오는 균열인들은 순식간에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다.

"어스 월!"

쿠르르릉!

바네사가 다시 사방을 벽으로 막으니 넘어오는 균열인들은 잠깐이나마 더 줄어들었다.

그래도 올라오는 놈들은 기사들이 막으며 교대로 휴식을 취했고, 병사들은 그 틈을 타 처음으로 물과 가루를 먹었다.

쉬는 동안 그들은 지셀이 싸우는 모습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지셀의 움직임은 경이로울 지경이었다.

콰아아앙!

그는 균열인들이 너무 몰렸을 때만 마나를 뿜어내어 공간을 만들었다. 언제나 격렬할 정도로 주변을 초토화하던 평소와는 다른 전투 방식이었다.

카아아아악!

스각!

지셀의 창이 크게 원을 그리며 균열인들의 목을 날렸다. 그는 마나를 최대한 아끼며 오직 기술로만 균열인들을 상대했다.

파파파파팍!

한 호흡에 창이 수십 번이나 뻗어 나갔다. 지셀을 에워쌌던 균열인들은 모두 머리가 뚫리며 쓰러졌다.

빈자리에 순식간에 균열인들이 모여들었지만 바네사가 다시 마법을 써 주었다.

콰아앙!

지셀의 주변에서 몇 번의 폭발이 일어났다. 그렇게 생겨난 틈으로 이동하며 지셀은 균열인들을 끌고 다녔다.

"어떻게 저렇게 움직일 수가 있지?"

"힘으로 밀어붙이는 것도 아니야."

"마치 춤을 추는 거 같아."

지금까지는 너무 강한 파괴력 때문에 그 실력을 제대로 알아보기 힘들었다. 무기를 휘두를 때마다 적들이 다 터져 나갔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창이 움직일 때마다 수십 마리의 균열인들이 죽어 나가는 건 같았지만, 이번에는 그 과정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타타타타타탕!

지셀은 사방을 에워싸는 균열인들의 공격을 모두 막고 피하며 반격했다. 마치 물이 흐르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어찌나 빠르고 정확한지, 균열인들의 시체가 계속 늘어났다.

그야말로 극에 이른 기술.

전보다 공격 한 번에 죽이는 수는 적었지만, 어떻게 하면 가장 적은 힘으로 효과적으로 싸울 수 있는지를 보여 주고 있었다.

마치 모두에게 어떤 경지를 향해 나아가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듯했다.

"대단하다."

그 카오르조차 순간 넋이 나가 평소에 하지 않았던 말을 꺼낼 정도였다.

저 괴물 같은 영주는 날이 갈수록 더 강해지고 있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콰아아아앙!

바네사의 마법 덕분에 다시 몰려드는 균열인들이 터져 나갔다. 그 사이로 춤을 추듯 움직이는 지셀의 검붉은 창이 지나갔다.

기사들과 병사들이 그 모습을 보고 침을 삼켰다.

"역시... 북부 최강...."

지셀의 싸움은 무언가 특별하다.

그가 싸우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다들 가슴이 두근거리고 피가 끓는다.

그와 함께하면 전투에서 패배할 거 같지 않다. 그런 믿음을 준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지셀이 이끄는 군대는 높은 사기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조금만 더 힘을 내자!"

"할 수 있어! 균열 한두 번 없애 본 거 아니잖아?"

"언제까지 대공자님만 싸우게 할 거야!"

병사들이 이를 악물고 일어났다. 사제들이 회복시켜 주었고 지셀 덕분에 상당한 시간을 쉬었다.

물을 마시고 펜리스의 전투 식량을 먹었다. 극한의 상황에서 공급된 영양분은 다시 힘을 내게 해 주었다.

"와아아아아!"

함성을 내지르며 병사들이 올라오는 균열인들을 쳐 냈다.

화살이 떨어진 엘프들까지 합류해 균열인들과 싸웠다.

신성력에 감싸인 지셀이 시선을 끈 덕분에 성벽 위에서는 모든 균열인을 몰아내고 다시 견고한 진형을 갖출 수 있었다.

이제 처음과 같은 상태로 돌아갔다.

"바네사!"

그걸 느낀 지셀이 크게 외치자 바네사가 손을 뻗어 마력을 뿜어내었다.

콰콰콰콰쾅!

화염 기둥 여러 개가 솟아나며 지셀 주변을 초토화했다. 잠깐 생긴 여유를 틈타 지셀이 재빠르게 벽을 타고 올라갔다.

뜨거운 열기 탓에 지셀의 몸에서는 김이 올라오고 있었다.

"도련님!"

특유의 기술로 누구보다 많은 균열인들을 처리한 벨린다가 달려와 지셀의 몸에 차가운 물로 적신 천을 덮어 주었다.

"뭐야? 이건 또 어디서 난 거야?"

"미리 준비해 뒀죠."

"역시 벨린다라니까. 고마워."

대충 얼굴을 닦은 지셀이 씨익 웃으며 외쳤다.

"자! 다시 시작이다! 조금만 더 버텨라!"

10만의 균열인들을 안전하게 처리하는 데 하루가 걸렸다. 지금은 그때보다 균열인들의 수가 더 많고 아군의 수는 더 적다.

하지만 요새를 끼고 싸우는 데다, 마법사들도 더 많은 힘을 쏟아붓고 있었다.

지셀과 병사들은 지금의 전법을 유지하는 데 힘썼다.

바네사가 균열인들을 분리하고 마법사들이 위험한 지역에 마력을 쏟아부었다.

사제들이 지셀의 명령에 따라 절묘한 타이밍에 병사들을 회복시켰다. 정 여의찮으면 지셀이 다시 내려가서 균열인들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지셀은 끊임없이 움직이며 주변을 살폈다.

'이대로만 가면 된다.'

벨린다와 길리언, 카오르 등의 강자들도 큰 도움이 되었다. 그들은 각자 영역을 나누어 맡고 기사들과 병사들을 이끌며 싸웠다.

즈발터와 란돌프, 스코반과 리카르도도 마찬가지였다.

실력이 크게 상승한 페르디움의 기사들도 이 전투가 생애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힘을 내었다.

그렇게 그들은 무아지경에 빠져 계속 싸우고 또 싸웠다.

"허억, 허억...."

재앙의 원인(?)이라 일컬어지는 스코반이 퀭한 눈으로 검을 휘두르며 생각했다.

'나는 왜 이렇게 힘들게 사는 걸까?'

뭔가 인생이 힘들다. 너무나도 격렬한 삶을 살고 있다.

어느 순간부터는 검을 왜 휘두르는지도 몰랐다. 그냥 앞에 균열인들이 있기에 휘둘렀다.

그렇게 힘을 아끼며 조심스레 싸웠음에도 이제 검은 희미한 빛만 내고 있었다. 더 이상 마나도 제대로 끌어오기 힘들었던 것이다.

'왜... 회복을 안 시켜주는 거지?'

그나마 사제들 덕분에 계속 싸울 수 있었다. 한 번 더 회복시켜 주면 좋겠는데 그게 멈췄다.

오랜 전투에 사제들도 신성력을 모두 소모하고 쓰러진 걸 스코반은 몰랐다.

'아, 졸리다.'

눈이 감긴다. 몸이 너무 무겁다. 한계를 넘은 게 확실한데도 검이 휘둘러진다는 게 신기했다.

이미 감각이 모두 망가졌는지 어떠한 고통도 느껴지지 않는다.

펜리스로 전향한 데스몬드의 첩자 3인방도 생각했다.

'죽을 때까지 싸워야 할 거 같아.'

'그냥 죽을까?'

'응, 이러다 죽으면 그만이야.'

그래도 그들의 3인 협력 공격은 균열인들에게 큰 위력을 발휘했다. 최소한의 힘으로 서로를 보완하며 싸웠기 때문이다.

이들은 무려 잠도 안 자고 사흘을 내리 싸웠다. 사제들 덕분에 가능한 것이지만 이제 그것도 끝이 났다.

정신력으로 지금까지 버텨 왔지만, 더는 무리였다. 다들 한계를 넘은 지 오래였다.

"어?"

병사들은 흐느적거리면서도 이상함을 느꼈다.

"줄었다."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요새 위로 올라온 균열인들은 고작 수백 마리(?)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시체의 산을 타며 달려오는 놈들도 비슷했다.

"진짜 줄었다."

도대체 얼마나 죽였을까?

그렇게 마법사들이 시체를 불태우고 터뜨렸음에도 요새 앞에는 산처럼 균열인들의 시체가 쌓여 있었다.

마법사들도 마력을 대부분 소모해 뒤로 물러난 상태였다. 바네사만 아직도 저서클의 마법으로 싸우고 있을 뿐이었다.

"끝이... 보인다."

요새를 향해 달라붙는 균열인들도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줄어들었다. 이제는 듬성듬성 달라붙어 올라오고 있다. 균열에서 튀어나오는 수보다 더 많은 균열인들을 죽였으니 당연한 일이다.

"조금만... 더 힘을 내자...."

병사들은 이를 악물고 싸웠다. 기사들도 피를 토하면서 검을 휘둘렀다.

다들 손에 감각이 없어진 지는 오래다. 서 있기도 힘들었지만, 그들은 이곳을 지키겠다는 책임감 하나로 버텼다.

그나마 지셀과 측근들은 아직 싸울 만했다. 그들은 정말 효과적으로 힘을 분배하며 아군을 돕는 것에 더 힘을 썼기 때문이다.

파아악!

균열인들의 목을 날려 버린 지셀이 숨을 내쉬며 전방을 바라보았다.

성벽 위로 올라온 균열인들은 대부분 죽었다. 올라오는 균열인들은 더더욱 줄어들었다.

이제 거의 다 끝나간다. 마지막 싸움만이 남았다.

"모두 뒤로 물러나라."

그 말에 병사들은 얼마 남지 않은 균열인들과 싸우며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앞에는 지셀의 측근들과 즈발터, 란돌프만이 남았다.

이미 전투 전에 미리 얘기해 둔 일이었다.

― 커어어엉!

멀리서 짐승의 괴성이 들린다.

에퀴데마의 임무는 영역을 확장하고 그것을 지키는 일이다.

힘을 비축해야 하기 때문에 웬만해서는 균열 앞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하지만 간혹 짐승이 스스로 움직일 때가 있었다.

두두두두두두!

멀리서부터 땅을 울리며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에퀴데마가 움직인 것이다.

"후우...."

지셀이 물을 마시며 다시 숨을 가다듬었다.

아직도 자잘하게 균열인들이 올라오고 있다. 하지만 병사들 대부분은 힘이 빠져 주저앉았고, 기사들도 거의 다 입가에서 피를 흘리며 겨우 서 있기만 하는 상태였다.

두두두두두두!

― 커어어엉!

다시 짐승의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에퀴데마가 움직이는 이유는 하나다. 영역을 지키기 위해서.

그간 지셀과 북부군이 처리한 균열에서는 균열인들이 모두 죽어도 에퀴데마가 나선 적이 없었다. 힘을 비축하며 확장에만 힘을 쏟았다.

지금까지 처리한 균열은 에퀴데마 입장에서 너무나도 작은 영역이었다. 그만큼 균열인의 수도 적었고, 다 죽어도 금세 복구될 테니 짐승이 위기감을 느낄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 정도로 영역이 커지면 얘기가 달라진다.

그만큼 이 세계에 발을 디딘 균열인들이 많았음에도 대부분이 죽어 버렸다. 영역에 심각한 위협이 될 만한 강적이 나타났다는 뜻이다.

결국 에퀴데마는 확장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 커어어엉!

두두두두두두!

지축을 울리는 소리에 병사들이 긴장해서 무기를 꽉 쥐었다. 에퀴데마가 이곳까지 달려오는 것도, 슬금슬금 균열인들이 다시 늘어나는 것도 문제였다.

처음만큼은 아니지만 이곳저곳에서 계속 나오는 균열인들의 수가 합쳐지니 다시 천을 넘어갔다. 정말 징그러울 정도로 많은 수였다. 그나마 전략 전술 따위는 몰라서 다행이랄까?

"끄응...."

더 싸워야 한다. 그들은 힘겨워하면서도 꿋꿋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아아악!

균열인들이 다시 성벽을 타고 올라와 덤벼들었다.

지셀은 더 이상 그것들을 상대하지 않았다. 곁에 있던 다른 자들이 균열인들을 처리했다.

단지 지셀은 전방을 향해 검을 크게 휘둘렀을 뿐이다.

콰아아앙!

무언가 폭발하는 듯한 소리가 들리고 성벽 위에 거대한 동체가 착지했다.

크르르르....

에퀴데마가 나타났다. 얼굴에는 가느다란 상처가 나 있었지만 그리 심각한 상처는 아니었다.

짐승의 모습을 처음 본 병사들은 얼굴이 해쓱해져서는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났다. 본능적인 공포심 때문이었다.

크아아아아앙!

분노한 에퀴데마가 포효하자 이미 지칠 대로 지친 병사들은 몸이 굳어 버려 무기까지 놓치고 말았다.

지셀과 에퀴데마가 서로 노려보는 잠깐 사이, 균열인들이 다시 불어났다.

그것들은 몸이 굳은 병사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지셀과 곁에 있는 사람들은 에퀴데마와 대치하느라 균열인들을 모두 처리할 수 없었다.

하지만 괜찮았다. 그들도 믿는 구석이 있었으니까.

곧 뒤에서 마치 천상에서 내려온 듯한, 영롱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신께서 이르시길, 내가 너희에게 그것들을 짓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

쩌엉!

순간 전장에 밝은 빛이 퍼져 나가며 모두를 감쌌다.

437화 이대로만 가면 된다. (4)

빛은 강렬하게 요새의 주변으로 퍼져 나갔다.

카아아아악!

갑자기 퍼진 빛에 닿은 균열인은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지르며 모두 재가 되었다.

치이이익!

빛이 스치고 지나가자 에퀴데마의 몸도 곳곳이 타올랐다. 짐승은 성나서 이를 드러내며 빛이 퍼진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힘이, 힘이 넘친다!"

"다시 움직일 수 있다!"

"일어나! 어서!"

병사들이 무기를 꽉 쥐고 진형을 갖추었다. 균열인들이 다시 모여들고 있었지만, 회복된 지금은 충분히 상대할 만했다.

병사들의 틈에서 피오테가 걸어 나왔다. 그는 조금 긴장한 표정이었지만 눈빛만은 단호했다.

'내가 잘 버텨야 해.'

몇 번이나 나서려 했지만 지셀의 당부 때문에 꾹꾹 참았다. 아군의 진형이 밀리고 균열인들이 덮쳐 와도 나서지 못했다.

지셀은 결국 언젠가는 모두가 지칠 거라고 말했다. 모두가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없을 거라고 했다.

그리고 에퀴데마는 분명 이곳으로 달려올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니 피오테는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마저 힘을 다 쓰면 에퀴데마를 제대로 상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크르르르....

에퀴데마가 피오테를 살의에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짐승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누가 그 빛을 퍼뜨렸는지.

저 증오스러운 기운을 가진 자를 당장 찢어발기고 싶었다.

카아아앙!

에퀴데마가 포효를 내지르며 피오테에게 달려들었다. 피오테가 나타난 이상 짐승의 눈에는 주변이 보이지 않았다.

오직 저자를 죽여 버리겠다는 살의, 그 하나만을 품고 움직이게 된 것이다.

콰아아앙!

치이이익!

피오테를 후려친 에퀴데마의 앞발이 신성력으로 타올랐다. 에퀴데마는 깜짝 놀라며 발을 뒤로 뺐다.

카아아앙!

에퀴데마가 다시 포효하며 피오테를 짓밟았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피오테는 날아가지도 넘어지지도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쥬아나의 가호'가 발동된 덕분이었다.

하지만 그걸 알 리 없는 에퀴데마는 분노하며 몇 번이나 피오테를 후려쳤다.

콰아앙! 콰아아앙!

제대로 해소되지 못한 힘은 밖으로 퍼져 나갔다. 그 충격파로 주변에 있던 병사들이 밀려나고 넘어졌다.

하지만 피오테는 전처럼 주저앉아 있지 않았다. 똑바로 서서 눈을 크게 뜨고 에퀴데마를 마주했다.

'내가 해야 해.'

다들 지쳐 있다. 자신이 조금이라도 에퀴데마의 시선을 끌어야 한다. 그래야 다른 이들이 에퀴데마를 공격하기 쉬울 것이다.

파아아악!

이미 지셀과 다른 이들이 움직여 에퀴데마의 몸을 베고 있었다. 에퀴데마는 몸을 털며 다른 이를 공격하려 했다.

항상 에퀴데마를 잡던 패턴 그대로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피오테의 행동이 조금 달라졌다.

파앗.

치이이익!

크아아아앙!

피오테가 미끄러지듯이 앞으로 뻗어나가며 에퀴데마의 발에 달라붙었다.

그는 지셀로부터 여러 전투 기술을 배웠다. 실제로 전투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시간이 날 때마다 열심히 익혔다.

그중 가장 많이 수련한 게 바로 체술이었다. 지셀은 피오테의 방어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잘 움직이는 법을 우선으로 두고 가르쳤다.

그렇게 익힌 체술 덕분에 피오테는 에퀴데마의 발에 붙어 움직일 수 있던 것이다.

치이이익!

카아아아앙!

에퀴데마가 괴로운 울음을 내뱉었다. 피오테의 몸과 닿은 곳이 조금씩 타오르고 있었다.

그가 내뿜는 기운은 에퀴데마에게 상극이자 천적이나 다름이 없었다.

콰아아앙!

에퀴데마가 피오테를 떨어뜨리려 다른 발로 그를 후려쳤지만 꿈쩍도 안 했다. 오히려 피오테는 신성력을 몸에 두른 채 에퀴데마의 몸을 타고 오르기 바빴다.

콰앙! 콰앙! 콰아앙!

몸에 웬 벌레가 붙었는데 그 벌레가 몸을 태우는 고통까지 주면 견딜 수 있는 생명체는 드물 것이다.

에퀴데마의 지금 꼴이 그랬다. 짐승은 어떻게든 피오테를 떨어뜨리려 몸부림쳤다.

카아아앙!

지셀이 그 모습을 보고 외쳤다.

"지금이다! 기회를 놓치지 마라!"

에퀴데마는 자신들에게 공격을 당해 피를 흘리면서도 어떻게든 피오테만 공격했다. 저런 상태면 피오테는 오래 버틸 수 없다.

콰앙! 콰앙! 콰아앙!

에퀴데마에게 얻어맞을 때마다 피오테의 신성력은 뭉텅이로 사라지는 중이다. 저건 누구도 회복시켜 줄 수 없다.

만약에 에퀴데마를 처리하는 게 늦어져서 피오테가 모든 신성력을 잃는다면....

그는 단 한 수에 핏물이 되어 버릴 것이다.

"끄으윽!"

피오테 또한 그걸 알면서도 에퀴데마의 몸을 타고 결국 목 위까지 올라갔다.

이미 신성력은 반쯤 사라진 거 같았다. 처음에 병사들을 회복하느라 상당한 신성력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내가 더 도움이 되어야 해!'

오직 그 일념뿐이었다.

사실 지친 아군을 위해 몇 번이나 여신과의 연결을 소망했다. 성공만 한다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어쩌면 균열인들을 더 빠르게 처치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염원하고 염원해도 연결이 되지 않았다.

기적이라 불리는 일이다. 자신이 원한다고 아무 때나 성공할 리가 없다.

그래서 피오테는 자신의 힘으로라도 어떻게든 도움이 되고자 했다.

"하아, 하아...."

피오테는 힘겹게 에퀴데마의 목 위에 달라붙었다.

에퀴데마는 계속 날뛰며 피오테를 떨어뜨리려 했다. 마치 목을 긁듯이 발로 피오테를 긁어내려고도 했지만 떨어지지 않았다.

결국 에퀴데마는 자신의 몸을 뒤집고 바닥에 충돌하며 피오테를 박살 내려 했다.

콰아앙! 콰앙!

옆에서 보기에는 에퀴데마가 혼자서 발광하는 것처럼 보였다. 바닥의 돌들이 깨져 나가고 박살 났음에도 피오테는 어떠한 타격도 받지 않았다.

물론 그 충돌을 견디기 위해 신성력은 무지막지하게 빠져나가고 있었다. 이대로는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이다.

'할 수 있어!'

피오테가 에퀴데마의 목덜미를 잡으며 이를 악물었다.

몇 번이고 신에게 간청하고 간청했다. 하지만 기도에만 의지할 수는 없다. 기도만으로 모든 걸 해결할 수는 없다.

...잊고 있었다.

이미 여신께서는 자신에게 힘을 주셨다는 걸.

이제는 행동할 때다.

피오테는 에퀴데마의 목덜미를 붙잡은 채 경전의 구절을 되뇌고 또 되뇌었다.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며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다시 에퀴데마가 일어나 피오테를 긁어 떨구려 할 때, 피오테의 손이 더 빠르게 에퀴데마의 목을 파고들었다.

치이이이이익!

카아아아앙!

신성력을 가득 머금은 피오테의 손이 에퀴데마의 목 부분을 태우기 시작했다.

그 힘은 점점 퍼져 나가 에퀴데마의 목 주변을 어느새 까맣게 물들였다.

"끄으으으...."

피오테의 입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신성력을 한계 이상으로 뿜어내었기 때문이다.

그의 머리카락은 어느새 은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신성력이 그만큼 강해졌다는 뜻이다.

치이이이익!

분명 에퀴데마에게 큰 타격을 주고 있지만 그만큼 신성력이 소모되는 게 느껴졌다.

그건 에퀴데마도 느꼈다. 여전히 공격은 통하지 않지만 짐승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이 끈질기고 저주스러운 생명체의 힘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말이다.

크아아아앙!

주변에서 다른 벌레들이 계속 자신에게 상처를 주고 있다. 목을 파고드는 이 저주스러운 기운이 괴롭다.

하지만 조금만 버틴다면 모두 짓밟아 버릴 수 있을 것이다.

에퀴데마는 강대한 힘을 내뿜으며 그 고통을 견뎌내었다. 목 주변이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녹아들었지만 죽지 않았다.

결국 피오테는 모든 신성력을 소모하고 말았다. 머리카락 또한 원래의 색으로 돌아왔다.

에퀴데마는 저주스러운 기운이 드디어 사라진 걸 느꼈다.

파아아아앙!

에퀴데마의 앞발이 비틀거리는 피오테를 향해 날아갔다. 하지만 그보다 더 빠르게 움직인 자가 있었다.

휘리리릭!

벨린다의 단검과 연결된 줄이 피오테의 몸을 감싸고 잡아 끌었다.

콰아아앙!

피오테는 에퀴데마의 발이 닿기 전에 간발의 차이로 자리를 피했다. 하지만 에퀴데마는 짐승답게 엄청난 반응 속도로 벨린다를 따라갔다.

반드시 죽이겠다는 집념이 보였다.

에퀴데마는 순식간에 벨린다에게 쇄도했다. 그녀가 피오테를 안고 제대로 자세를 잡기도 전이었다.

이대로라면 두 사람 다 에퀴데마의 앞발에 몸이 찢길 것이다.

"이놈!"

에퀴데마가 달려오는 경로에 있던 즈발터가 마나를 뿜어내며 검을 휘둘렀다.

콰아아앙!

온 힘을 다해 베었지만 오히려 즈발터가 튕겨 나갔다. 란돌프도 옆에서 도왔지만 마찬가지였다.

그 정도로 에퀴데마의 힘과 분노는 어마어마했다. 반대편에 있던 길리언과 카오르는 아예 따라붙지도 못했다.

콰콰콰콰콰쾅!

조금 떨어져 있던 바네사의 마법이 에퀴데마를 향해 수없이 쏟아졌다. 하지만 바네사도 마력을 대부분 소모한 상태라 마법의 위력이 떨어졌다.

에퀴데마는 그 모든 걸 몸으로 버텨 내며 오로지 눈앞에 있는 벨린다와 피오테를 죽이기 위해 전진했다.

"칫!"

벨린다가 가까스로 발을 구르며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에퀴데마의 속도가 더 빨랐다.

카아아아앙!

거대한 덩치로 금세 따라잡은 에퀴데마가 앞발을 크게 들었다. 이대로 휘두르기만 해도 눈앞에 있는 두 벌레는 박살이 날 것이다.

푸우우욱!

날카로운 금속이 무언가를 꿰뚫는 듯한 소리가 나며 에퀴데마의 앞발이 멈칫했다. 벨린다는 그 틈을 타 몸을 굴려 겨우 공격을 피했다.

크르르르....

에퀴데마의 입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짐승은 옆으로 피한 벨린다와 피오테를 핏발 서린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드드드드득!

무언가 다시 뚫리는 소리가 나며 에퀴데마의 몸이 움찔거렸다.

사람들은 그제야 상황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에퀴데마의 목을 뚫고 나온 거대한 검의 기운을 말이다.

온몸이 검붉은 연기로 감싸이고 눈에서 붉은 빛을 뿜어내는 지셀이 에퀴데마의 목 위에 올라타 있었다.

그의 검에는 검붉은 오러 블레이드가 엄청난 길이로 솟구쳐 있었다. 그 오러 블레이드가 에퀴데마의 목을 관통하고 있었던 것이다.

"후, 피오테가 한 건 했군."

피오테 덕분에 에퀴데마의 목 부분 가죽과 근육은 완전히 다 타서 사라진 상태였다.

그 덕분에 지셀이 얼마 남지 않은 힘으로도 에퀴데마의 목을 완전히 뚫어 버릴 수 있었다.

크르르륵....

에퀴데마는 피 끓는 소리를 몇 번 내뱉더니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쿠웅!

짐승의 거대한 몸이 땅에 누웠다.

"휴우...."

지셀은 자리에 주저앉아 숨을 내쉬었다. 그의 입가에서도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간 아끼고 아껴 왔던 힘을 모두 쏟아내었다. 마지막 순간에 힘을 폭발시킨 탓에 그의 몸도 정상은 아니었다.

"이, 이겼다."

"드디어 잡았다...."

"이번에는 진짜 위험했어."

다른 이들도 모두 주저앉았다. 며칠을 쉬지 않고 싸우다 보니 다들 마나가 바닥이 난 상태였다.

만약 피오테가 활약하지 않았다면 큰 피해를 봤을지도 모른다.

여전히 균열인들이 듬성듬성 올라오고 있었지만, 기사들과 병사들이 힘을 모아 처리하고 있었다.

그들도 지칠 대로 지친 상태긴 하지만 마지막에 피오테가 회복해 준 덕분에 조금 더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이다.

병사들이 남은 균열인들을 처리하는 걸 잠깐 지켜보던 지셀이 힘겹게 일어났다.

"자, 나머지도 처리하자."

균열인들은 그저 본능에 따라 계속 덤벼들 뿐이다. 자신들이 수가 적건 많건 그것들은 상관하지 않았다.

이미 에퀴데마도 쓰러지고 수도 줄어들 대로 줄어들었으니, 마구잡이로 덤벼드는 놈들 정도는 처리하기 어렵지 않았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자 이제는 몇 마리만 겨우 올라오다가 종국에는 한 마리도 올라오지 않았다. 그 많은 수가 죄다 이곳에서 죽어 버린 것이다.

"드디어 끝났군."

지셀이 한마디 하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 말에 병사들도 모두 바닥에 누워 버리며 웃었다.

"으하하하! 이겼다! 이겼어!"

"저 많은 놈들을 우리가 막아 냈다고!"

"스코반! 나가 죽어! 이 저주받은 새끼!"

모두가 기쁘게 외쳤다. 죽을 듯한 피곤함이 몰려왔지만 그것은 살아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그래서 다들 이 승리에 더 기뻐할 수 있었다.

지셀이 벨린다의 품에서 기절한 피오테를 보고 중얼거렸다.

"새로운 사냥법, 괜찮은 거 같아."

조금 더 위험하게 미끼를 써도 될 거 같았다. 참으로 많이 성장한 피오테였다.

피오테는 기절한 상태에서도 무언가 모를 오싹함을 느끼고 몸을 움찔거렸다.

길리언이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야만인들이 이미 북부 내로 들어왔을 겁니다. 뒤를 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지셀이 손을 휘저었다.

"지금 상태로는 움직여 봤자 도움도 안 될 거야. 조금은 쉬고 가자고."

확실히 그렇다. 누웠다가 그대로 기절한 기사들도 있었다.

며칠을 잠도 안 자고 싸웠다. 지금 움직이는 건 다 같이 죽자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길리언도 다리가 후들거리는지 다시 바닥에 주저앉았다.

"벌써 며칠이나 지났는데 잘 막고 있을지 모르겠군요."

"우리 생각보다 더 잘 막고 있을 거야."

"그렇습니까? 병력 차이가 상당할 텐데 말입니다."

길리언이 걱정스러워하는 기색을 내비쳤다. 만약 그쪽이 뚫리면 가장 먼저 페르디움이 짓밟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셀은 피식 웃으며 답했다.

"그래, 다들 깜짝 놀랄 정도로."

* * *

워로카는 균열이 카이필러 요새를 완전히 덮기도 전에 군대를 움직였다. 자신들이 움직이는 걸 알아도 페르디움에서는 요새를 버릴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워로카가 전사들을 이끌며 크게 외쳤다.

"전사들이여! 드디어 우리의 염원을 이룰 때가 왔다!"

"와아아아아아!"

그간 굴욕적인 조공을 바치던 야만인들은 환희에 찬 함성을 내질렀다. 페르디움과 싸우고 약탈을 하고 싶어 몸이 근질거릴 정도였다.

식량 때문에 협약을 맺은 워로카에게도 불만이 가득 쌓이던 중이었다.

그런데 그가 이렇게 모든 부족을 이끌고 전쟁을 일으키니 지금은 마냥 좋기만 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이제 단 하나뿐이었다. 살육.

북부의 모든 것을 빼앗고 죽이고 싶었다. 그것이 전사들의 염원이었다.

기세등등하게 북부로 쳐들어간 그들은 곧 예상외의 상황에 직면하고 말았다.

"뭐야? 분명 군대는 없다고 들었는데?"

북부의 진입로에서 워로카는 길을 막고 있는 군대를 발견했다. 자신들보다 먼저 왔는지 제대로 진형까지 갖추고 있었다.

이런 상황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공작가에서는 어떠한 군대도 자신들을 막지 않을 거라고 말했으니까.

워로카는 의아해하는 얼굴로 앞에 있는 군대의 깃발을 바라보았다.

"설마... 레이폴드?"

공작가로부터 들은 얘기와 다르다. 움직일 리가 없는 군대가 눈앞에 있었다.

진입로에서 기다리고 있던 군대도 야만인들이 접근하는 걸 발견했다.

베르나프는 지휘소의 가장 상석을 바라보았다.

아멜리아는 무슨 생각이라도 하는지, 화려한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턱을 괴고 눈을 감고 있었다.

베르나프가 그녀에게 조심히 말했다.

"야만인들이 왔습니다."

보고를 들은 아멜리아가 천천히 눈을 떴다. 곧 그녀의 입에서 무감정한 명령이 떨어졌다.

"전군, 전투를 준비하라."

438화 이대로만 가면 된다. (5)

워로카는 입술을 깨물었다. 조금 짜증이 일었다. 전투가 벌어지면 어쨌든 피해를 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는 옆에 있는 구원교의 사제를 향해 물었다.

"분명 북부에서 우리를 막을 군대는 없다고 하지 않았나! 왜 레이폴드가 움직인 거지? 저걸 뚫고 가야 하잖아!"

구원교의 몇몇 사제는 왕국 내에서 길잡이 겸 조언자 역할을 하기 위해 남아 있었다.

물론 속뜻은 워로카의 군대를 공작가의 뜻대로 움직이는 것이었지만 말이다.

사제는 워로카를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 가기 위해 그를 살살 달랬다.

"흐음.... 뭔가 거래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거래?"

"그렇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레이폴드가 움직일 리 없을 테니까요."

공작가는 아멜리아가 움직이지 않을 거라 판단했다. 욕심 많은 그녀가 지셀을 도와줄 리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들이 생각하는 아멜리아는 그저 자신들의 도움을 받아 겨우 찬탈에 성공한 허수아비였다. 야만인들과 싸울 만한 강단과 능력이 없다고도 여겼다.

"어차피 우리 쪽 전력이 압도적이지 않습니까. 무슨 생각으로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그리 어렵진 않을 겁니다. 한낱 귀족 영애에 불과했던 계집입니다. 전쟁에 대해 뭘 알겠습니까?"

사제의 말에 워로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부족의 전사를 끌어모은 워로카의 군세는 대단했다. 무려 6만이나 되는 군대가 만들어진 것이다.

물론 이제 막 성인식을 치른 초급 전사들까지 박박 긁어모은 수이긴 하지만, 북방의 전사는 어릴 때부터 강인하니 쭉정이는 아니었다.

반면 상대는 고작 1만 정도밖에 안 된다. 레이폴드군은 더 많다고 들었는데 아무래도 수비를 위해 일부는 남겨 두고 나온 모양이었다.

1만도 적은 수는 아니지만 6만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사제가 어르듯이 말을 이었다.

"이런 일이 있을 수도 있다고 예상은 했습니다. 그저 별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을 뿐이지요."

워로카를 달래려고 거짓으로 하는 말은 아니었다. 고작 레이폴드 하나만으로는 야만인들의 대군을 상대할 수 없을 거라 확신하고 무시했을 뿐이다.

"오히려 잘됐습니다. 레이폴드까지 여기서 없애 버리면 북부를 점령하기 더 쉽지 않겠습니까?"

"하긴. 여자가 무슨 전쟁을 한다는 말인가. 나쁘지 않은 상황이야."

북방의 대지에서 온 워로카로서는 어처구니없는 상대이긴 했다.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오히려 더 좋았다.

이들의 계획은 페르디움과 펜리스를 완전히 짓밟아 기반 시설을 먼저 없애는 것이다. 그렇게만 되면 북부 최강이라 불리는 펜리스군은 전쟁을 지속할 수 없게 될 테니까.

유일하게 군대가 남아 있는 레이폴드까지 치면 북부는 완전히 비어 버린다.

"차라리 잘됐어. 원래는 다른 영지를 차지하려고 했는데, 그냥 레이폴드에 눌러앉으면 되잖아? 거기 좋은 영지라며?"

그 뒤에 영지 몇 군데를 더 차지하고 버티면 끝이다. 이후에는 공작가가 움직여 왕국을 집어삼킬 것이다.

워로카가 문득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혹시 그놈들이 균열을 못 막고 다 죽으면 어떻게 하지?"

오기 전에 봤을 때도 균열은 이미 엄청나게 확장되어 있었다.

페르디움과 펜리스가 전멸하면 자신들이 균열을 상대해야 한다. 워로카는 그 끔찍한 것들과 직접 싸우고 싶지 않았다.

사제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 웃었다.

"아마 그럴 겁니다. 균열이 워낙 커졌으니까요. 하지만 펜리스군은 강군입니다. 균열도 상당히 크게 피해를 봤을 테니 상대하기는 어렵지 않을 겁니다."

"으음, 그래."

워로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지셀은 그냥 죽을 놈은 아니다. 핏빛 악마라는 별명까지 붙은 놈이니, 적어도 균열과 공멸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균열을 막아 냈어도 분명 큰 피해를 봤을 거야. 당장 우리를 쫓지는 못하겠지.'

균열이 남아도 문제고 지셀이 막아 내도 문제다. 워로카의 심경이 조금 복잡해졌다.

'아니, 아니야. 더 생각하지 말자. 이미 전쟁은 시작됐다.'

고민하던 워로카가 곧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지셀에게 너무 겁을 먹은 거 같다. 어차피 그놈이 이기든 지든 이제 상관없다.

이제 페르디움과 펜리스의 모든 걸 짓밟고 부술 테니까. 그러면 끝이다. 절대 질 리가 없다.

"자, 일단은 저 건방진 계집부터 쓸어버리고 가자!"

워로카가 주변의 지형을 살폈다.

북부의 진입로는 양옆에 언덕과 낮은 산 등이 존재했다. 그리 좁지는 않지만, 6만의 대군이 단숨에 일렬로 몰아치기는 힘들었다.

"병력이 열세니 지형을 이용해서 버텨 보려 한 건가? 쓸모없는 짓을 했군."

자신들은 죄다 기마병이지만, 앞에 있는 레이폴드군은 대부분이 보병이었다. 그대로 돌파만 해도 다 갈아 버릴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 웃기게도 상대의 기마병은 보병의 뒤에 자리 잡고 있었다.

"저런 등신 같은 진형은 누가 가르쳐 준 거야? 그냥 방패만 들고 있으면 막힐 줄 아는 거야?"

한껏 비웃은 워로카가 손을 들었다. 6만이 한꺼번에 움직이기는 어렵지만, 5천의 기마병이 지나갈 정도의 공간은 났다.

"선두 5천, 후속 5천이면 충분하겠군. 그냥 밟아 버려라."

"와아아아아!"

두두두두두두!

그간 전투를 못 해서 몸이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야만인 전사들이다. 마침내 출정 명령을 받고 그들은 격렬한 기세로 상대를 향해 나아갔다.

달려오는 야만인들을 보며 레이폴드군의 전열이 방패를 세웠다.

"쏴라."

아멜리아의 명령이 떨어지자 궁병들이 화살을 쏘았다.

파아아앗!

화살은 다가오는 기마병 대열의 중앙으로 떨어졌다.

야만인 전사들은 방패로 화살을 튕겨 내고 막아 내며 돌격을 멈추지 않았다.

공간이 비좁은 탓에 몇몇 말이 화살을 맞고 쓰러져 대열이 조금 망가졌지만 전사들은 개의치 않았다.

이들이 누구인가. 저 북방의 대지에서 어릴 때부터 말을 타고 산 자들이다.

중앙 대열이 조금 망가졌어도 큰 흐름은 문제가 없었다.

아멜리아가 그 모습을 보며 재차 명령을 내렸다.

"중앙은 조금 더 나서고 활 공격은 멈추지 말아라."

철컹, 철컹, 철컹!

레이폴드군의 대열 가운데 서 있던 보병이 조금 더 앞으로 나갔다. 궁병들은 집요하리만큼 야만인 전사들의 중앙만 노렸다.

말이 몇 마리나 화살에 맞아 쓰러졌지만, 5천이나 되는 군세에는 큰 영향이 없었다.

야만인 전사들이 조금 더 다가오자 이번에는 레이폴드에서 마법사들이 나섰다.

파아아아!

30여 명의 마법사들이 뿜어낸 마법들은 이번에도 야만인 대열의 중앙으로 날아갔다.

콰아앙! 콰아앙!

확실히 마법은 화살에 비해 더 큰 피해를 주었다. 야만인들 쪽에는 마법사가 없기에 공격을 막을 수가 없었다.

그때 구원교의 사제들이 앞으로 나섰다.

고오오오!

그들의 검은 기운이 전장 곳곳에 퍼져 야만인들을 보호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신성력은 상대 마법을 봉쇄할 수는 없지만 아군을 보호하기에는 충분했다.

쿠웅! 쿠우웅! 쿠웅!

레이폴드군의 화살 공격과 마법 공격이 검은 기운에 상쇄되었다. 그걸 본 워로카가 힘차게 웃었다.

"으하하하! 우리가 언제까지 약점을 내버려둘 줄 알았더냐!"

야만인들의 주술사는 정신적 인도자일 뿐 실질적인 힘은 없다. 그러니 대규모 전쟁에서 마법 공격에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약점을 구원교의 사제들이 채워 주니 든든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밀어붙여라! 저쪽은 우리보다 훨씬 더 수가 적다! 다 짓밟을 수 있다!"

약간의 피해는 봤지만 걱정할 만큼 큰 피해는 아니었다. 워로카는 자신만만하게 외치며 전사들을 독려했다.

두두두두두!

가장 걱정했던 마법 공격까지 해결되자 전사들은 광기 어린 표정으로 말을 달렸다.

"으하하하하! 드디어 피 맛을 보겠구나!"

"여자는 모두 죽이고 남자는 겁... 아니! 죄다 죽여라!"

"북부는 우리 것이다!"

앞으로 벌어질 피의 축제를 기대하며 다들 신이 나서 날뛰었다. 그간 참아 왔던 분노를 모두 뿜어낼 생각이었다.

그렇게 사나운 기세로 레이폴드군을 향해 달려가던 그들은 곧 의외의 장애물에 마주쳤다.

히이이이잉!

콰다다당!

선두로 달려가던 중앙 쪽 대열이 무언가 걸려 마구 넘어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으아악! 뭐야!"

"함정이다!"

"멈춰! 속도 줄여!"

선두가 우르르 넘어지자 뒤에서 따라오던 전사들도 같이 엉켜 넘어졌다. 돌격 중에 속도를 줄이기는 힘들었기 때문이다.

"말뚝이다! 말뚝이 박혀 있다!"

돌격을 늦춘 건 낮게 솟아오른 말뚝들이었다. 듬성듬성 낮게 박힌 말뚝은 가까이에서 보지 않으면 눈에 잘 띄지 않았다. 어떤 건 서로 줄로 연결도 되어 있었다.

빠르게 달리던 말이 말뚝을 밟거나 줄에 걸려 균형을 잃고 넘어진 것이다.

워로카가 전사들의 외침을 듣고 이를 갈았다.

"감히 저런 얕은 수작을...."

함정을 제대로 팔 시간이 안 되니 저런 수를 쓴 것이다.

분명 효과가 있긴 하다. 극히 일부긴 하지만 중앙 쪽의 대열이 망가지긴 했으니까.

달리 말하면 고작 그 정도였다. 양옆의 전사들은 여전히 레이폴드군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중앙 쪽 전사들은 말에서 내려라! 그냥 가서 밀어 버려! 우리의 수가 월등히 많다!"

말뚝이 더 있을 수도 있다. 거기에 이미 중앙 쪽 선두는 말들과 뒤엉켜 있다.

어차피 함정에 걸리는 건 선두일 뿐이다. 뒤에 따라가는 부대는 그걸 피하거나 넘어가면 그만인 것이다.

"와아아아아!"

넘어져서 뒤에 오던 말에 밟힌 거 외에는 피해가 그리 크지 않았다. 대열 중앙에 있던 야만인 전사들은 말을 버리고 달려갔다.

뒤에서 따라가던 전사들도 말에서 내렸다. 어차피 앞이 막혀서 기병 돌격의 이점은 사라진 상태였다.

두두두두두두!

중앙 쪽은 말에서 내려 달렸지만 양옆의 돌격은 여전히 기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죽어라아아아아!"

야만인 전사들이 크게 외치며 레이폴드군 코앞까지 다가왔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아멜리아가 다시 명령을 내렸다.

"길을 내어라."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레이폴드군의 진형이 바뀌었다.

철컹! 철컹! 철컹!

병사들이 간격을 벌리며 떨어졌다. 야만인 전사들이 돌격을 해 오는 위치에 통로가 만들어졌다.

중앙에 있던 야만인들은 돌격이 멈춰 버렸으니, 양옆의 군대만 빈 통로로 들어오게 되는 셈이었다.

"어? 어? 안 막아?"

이미 기세를 탄 야만인 전사들은 멈추지도 못했다.

기병 돌격이란 게 그렇다. 선두가 갑자기 멈춰 버리면 후열까지 모두 무너진다. 적과 충돌할 때까지는 마음대로 멈출 수가 없었다.

"어? 어? 어?"

야만인들은 일단 비어 버린 통로로 쭉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레이폴드군의 진형이 다시 바뀌었다.

철컹! 철컹! 철컹!

그들은 모두 옆으로 돌며 방패를 들어 올렸다. 야만인들은 통로를 지나가면서 병사들을 공격하려 했지만 그저 방패를 몇 번 치는 게 전부였다.

양익의 야만인 전사들은 대부분 레이폴드군 진형 안으로 들어와 버렸다.

아멜리아가 다시 명령을 내렸다.

"가둬라."

철컹! 철컹! 철컹!

레이폴드군 앞쪽 병사들이 다시 길을 막고 방패를 세우니 야만인들이 들어오던 통로가 막혀 버렸다.

뒤에 미처 들어오지 못했던 야만인들은 선두의 상황을 보고 속도를 늦추다가 병사들에게 가로막히고 말았다.

아멜리아의 명령이 빠르게 이어졌다.

"떨구도록."

야만인들을 둘러싼 병사들의 방패가 위로 올라가고 밑에서 수많은 갈고리가 튀어나와 말의 다리를 베었다.

촤악! 촤악! 촤아악!

히이이잉!

갑작스러운 공격을 받은 말들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당연히 그 위에 있던 야만인들도 땅에 떨어져 서로 엉키고 말았다.

"으아아악!"

"이 새끼들 뭐야!"

"일어나! 어서 반격해!"

하지만 이미 엉킬 대로 엉킨 탓에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겨우 일어난 전사들이 흉흉한 기세로 도끼를 치켜들었지만 양옆은 단단하게 방패로 막혀 있었다.

"젠장! 뚫어라! 빠져나가야 해!"

카앙! 카앙! 카앙!

그들이 어떻게든 빠져나가려고 방패를 두들겼지만 레이폴드군의 견고한 진형은 흔들림조차 없었다. 병사들의 움직임은 놀라울 정도로 정교했다.

아멜리아는 자신의 지식과 능력으로 그간 끊임없이 병사들을 훈련시켰다. 그리하여 자신의 손짓 하나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한 몸처럼 움직이는 군대가 탄생한 것이다.

아멜리아가 레이폴드군의 진형 안에 갇힌 야만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차가웠다.

"죽여라."

텅! 텅! 텅! 텅!

갈고리들이 들어가고 방패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 직후 방패 사이로 틈이 열리며 무수히도 많은 창이 쏘아져 나왔다.

푸욱! 푸욱! 푸욱!

"크아아아악!"

레이폴드군 안에 가둬진 야만인 전사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견고한 방패의 벽에 포위당해 도망칠 수도 없었다.

카앙! 카앙! 카앙!

아무리 도끼로 내려쳐도 방패는 꿈쩍조차 하지 않았다.

중보병들의 대열을 망가트리기 위해서는 수가 많거나, 강력한 돌파력을 발휘해야 한다. 이렇게 포위되어 갇히면 방법이 없었다.

특히 상대가 훈련이 잘된 정예병이라면 더더욱 도망치기 어려웠다.

"으아아악!"

갇혀 버린 전사들의 비명이 끊임없이 울렸다. 워로카는 분노에 찬 표정으로 외쳤다.

"일부러 중앙을 앞으로 이동시켰구나! 옆쪽을 먼저 치려고! 어서 중앙을 밀어라! 아군을 구해! 양익에는 추가 전력을 투입해라!"

대군은 단번에 움직이지 않는다. 적의 전술과 함정을 보면서 유기적으로 움직인다.

대기하고 있던 야만인 전사들이 레이폴드군의 양익을 향해 다시 달려 나갔다.

두두두두두두!

이미 적의 전법과 함정은 전부 확인했다. 지금 상황에서 다시 저런 길을 만들 수는 없으니, 이대로 밀어붙이면 될 것이다.

야만인 전사들의 추가 전력이 레이폴드군을 잡으려면 시간이 조금 걸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말에서 내려서 달리고 있던 야만인들의 중앙 대열은 금세 레이폴드군에 근접했다.

"와아아아아!"

야만인들의 거친 함성이 전장에 울렸다. 사나운 기세는 앞을 막는 모든 걸 찢어발길 듯했다.

반면 레이폴드군 병사들은 야만인들과 달리 아무런 말이 없었다. 전장의 분위기에 전혀 흔들리지 않는 듯한 냉정한 표정이었다.

그들은 그저 명령받은 대로, 훈련받은 대로 방패를 내밀었을 뿐이다.

철컹! 철컹! 철컹!

뜨거움과 차가움으로 대비되는 그들이 마침내 충돌했다.

콰아아앙!

야만인 전사들의 도끼가 레이폴드군의 방패를 때렸다.

439화 이대로만 가면 된다. (6)

레이폴드군의 진형은 앞쪽이 튀어나온 활과 같은 형태였다. 야만인들의 수가 워낙 많기에 맞부딪치며 버티려면 중앙이 두꺼워야 했다.

콰앙! 콰앙! 콰앙!

가장 앞으로 나와 있기에 가장 먼저 맞붙은 만큼 중앙 쪽에서 벌어지는 전투는 무척이나 치열했다.

야만인 전사들은 대전사들까지 앞세워 레이폴드군을 뚫고 가려 했다. 수적 우위가 확실하기에 강한 공격력으로 중앙을 돌파하려는 속셈이었다.

워로카가 연신 고함을 질러 댔다.

"우리가 훨씬 더 많고 강력하다! 그대로 밀어 버려라! 포위할 수 있다!"

레이폴드군의 양옆은 두꺼운 중앙 부분보다는 방어가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두두두두두!

단순하게 에워싸기만 한다고 포위가 되는 건 아니었다. 피해를 줄 수 있어야 제대로 포위했다 할 수 있는 것이다.

양익의 중보병들을 무너뜨려야 완벽하게 레이폴드군을 밟아 버릴 수 있었다.

전사들이 강력한 수적 우위로 중앙을 압박하는 동안 충원된 전사들은 단숨에 레이폴드군의 양익을 뚫으려 했다.

두두두두두!

달려오는 야만인들을 훑어본 아멜리아가 말했다.

"양익은 물러서지 말고 버텨라."

병사들의 진형이 바뀌기 시작했다.

철컹! 철컹! 철컹!

그들은 바짝 붙어 층을 이루는 방패를 세운 뒤, 방패들의 틈 사이로 창을 들어 올렸다.

어떻게든 기마 돌격을 버텨 내겠다는 심산이었다.

그리고 곧 양쪽 군대가 부딪쳤다.

콰아아아앙!

레이폴드군의 좌익과 우익은 진형이 크게 흔들거리며 살짝 뒤로 밀렸지만, 완전히 뚫리지는 않았다.

야만인들은 왕국의 기사들처럼 전신 갑주와 마갑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그런 상태에서 상대의 방어가 워낙 견고하고 창이 너무 많이 나와 있으니 제대로 뚫기가 힘들었다.

기마 돌격을 주로 삼는 야만인들에게는 참으로 골치 아픈 진형이었다.

워로카가 그 모습을 보고 답답하다는 듯 연신 소리쳤다.

"말에서 내려라! 내려서 붙어! 수는 우리가 훨씬 많다! 힘으로 밀어 버리면 된다!"

완전히 돌파하지 못했으니 차라리 말에서 내려 백병전으로 가는 게 낫다. 길게 나온 창들 때문에 말을 타고서는 다가가기가 힘들었다.

야만인 전사들은 허리춤에서 도끼를 꺼내 레이폴드군에게 달라붙었다.

길게 나와 있는 창을 피해 바싹 붙어서 도끼를 휘두르고, 방패를 타고 넘어갔다. 결국 레이폴드군도 일부는 검을 꺼내 맞서야 했다.

카앙! 카앙! 카앙!

양측이 치열하게 무기를 휘두르며 싸웠다. 야만인들은 어떻게든 밀고 들어가 진형을 무너뜨리려 했고 레이폴드군은 버티려 했다.

워로카가 화색을 띠며 외쳤다.

"됐다! 이대로만 가면 돼!"

상대의 함정은 이미 다 소모되었다. 전처럼 시답지 않은 수를 쓰기는 힘들 것이다.

이렇게 힘과 힘으로 대놓고 맞붙는 상황은 수가 많은 자신들에게 훨씬 유리했다.

이 상태로만 가도 레이폴드군은 결국 지쳐서 무너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양측의 전선이 고착되었을 때, 아멜리아가 새로운 명령을 내렸다.

"양익은 그대로, 중앙은 천천히 뒤로 물러나라."

아멜리아의 명령을 받은 병사들이 다시 움직였다.

진형의 대열은 여러 개로 겹겹이 이루어져 있다. 가장 뒤쪽에 있던 대열이 한 걸음 물러나며 방패를 찍었다.

쿵!

그러자 그 앞에 있던 대열이 똑같이 한 걸음 물러나며 방패를 찍었다.

쿵!

병사들의 호흡과 움직임이 물결처럼 박자를 맞추기 시작했다.

그 변화는 가장 앞에서 야만인들과 맞붙어 싸우던 병사들에게까지 이어졌다.

쿵!

활처럼 움푹하게 튀어나왔던 진형이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마치 레이폴드군이 점점 밀리는 듯한 모양새였다.

"으하하하! 이놈들 지쳐 간다!"

"어서 죽여라!"

"밀어 버려!"

광기에 취한 야만인들은 신이 나서 계속 전진했다. 조금만 더 하면 완전히 적 진형을 무너뜨릴 수 있을 거 같았다.

하지만 레이폴드군의 양익은 대열 전체가 바짝 붙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잠시 후, 활처럼 튀어나왔던 레이폴드군의 진형은 어느새 가운데가 움푹 들어간 모양으로 바뀌었다.

그제야 이상함을 깨달은 워로카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서, 설마...."

전장에서 싸우는 전사들은 주변을 살필 겨를이 없다. 오직 앞에 있는 적들을 치기 바쁘다.

뒤쪽에서 충원되던 야만인 전사들도 꾸역꾸역 중앙 쪽으로 빨려들 듯이 들어갔다.

워낙 수가 많으니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 그곳밖에 없었던 것이다.

레이폴드군의 중앙에 있던 병사들 일부는 양옆의 대열로 이동해 그쪽에 힘을 실었다.

그 순간 아멜리아가 차가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쳐라."

다시 진형의 변화가 이루어졌다.

레이폴드군의 양익에서, 방패 역할을 맡은 선두의 일부를 제외한 나머지 병사들이 몸을 옆으로 돌려 창을 찔렀다.

야만인들은 알아서 기어들어 와 포위가 된 꼴이었다.

푸욱! 푸욱! 푸욱!

"크아아악!"

야만인 전사들은 영문도 모른 채 양옆에서 쏟아지는 공격에 당해 무참하게 쓰러지기 시작했다.

방어 무장이 무척이나 취약한 그들은 쏟아져 나오는 창격을 막을 방도가 전혀 없었다.

전사들은 오직 강인한 체력과 무자비한 공격력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게 야만인들이었으니까.

그 모습을 본 워로카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상대의 의도를 이제야 눈치챈 것이다.

"이, 이럴 수가...."

앞서 보여 준 함정과 전술은 오히려 자신들을 기만하기 위한 미끼였다. 더 준비한 것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지금이 진짜였다.

싸우는 데 집중하면 당할 수밖에 없는 전술이었다. 상대가 물러난다고 같이 물러나는 군대가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아멜리아에게 저런 능력이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상대의 옆을 치란 말이다! 양옆을 밀어야 한다! 어서! 어서 옆을 밀란 말이다!"

워로카는 고함을 내질렀다. 레이폴드군의 양익이 밀리지 않으니 상대의 전술에 그대로 끌려다니게 된 것이었다.

야만인 전사들도 어떻게든 레이폴드군의 양익을 무너뜨리려고 했다. 여기가 무너져야 전황이 바뀐다는 것을 그들도 늦게나마 알아챈 것이었다.

하지만 레이폴드군은 도무지 쉽게 밀리지 않았다.

"젠장! 도대체 뭐야! 우리가 훨씬 많은데!"

전사들이 끝없이 고함을 지르며 공격을 시도했지만 상대는 요지부동이었다.

애초부터 아멜리아는 최고 수준의 정예병들을 양익의 선두에 배치했다. 게다가 그들 사이사이에는 푸른 마나로 감싸인 방패들이 무수히 많았다.

그녀는 대범하게 기사들을 양익의 선두에 세워 방어만 하게 한 것이다.

콰앙! 콰앙! 콰앙!

그러니 야만인 전사들이 아무리 공격해도 레이폴드군은 쉽게 밀리지 않았다. 야만인들은 강한 대전사들을 전부 중앙 돌파에 밀어 넣었으니까.

하지만 중앙 쪽은 이미 말려 들어가 포위가 된 상태였다.

더 이상 안 되겠다고 생각한 워로카가 후퇴 뿔피리를 울리며 외쳤다.

"빠져나와라! 어서 빠져나와!"

워낙 많은 수가 붙어 있어서 쉽게 빠져나오기도 힘들었다. 그 와중에도 레이폴드군은 자기들끼리 거리를 좁혀 가며 포위된 야만인들을 죽이기에 바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뒤로 빠졌던 마법사들이 다시 마법을 난사했고 궁병들도 화살 공격을 재개했다.

물론 구원교의 사제들도 말려 들어간 전사들을 열심히 보호해 주고는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힘으로는 모든 공격을 막을 수는 없었다.

결국 말려 들어간 전사들은 끊임없이 죽어 나갔다.

워로카는 그 모습을 보고 분개해서 외쳤다.

"으아아아! 저 계집이! 감히!"

아직 자신에게는 많은 군대가 남아 있다. 하지만 앞쪽이 막혀 남은 군대를 전부 동시에 투입할 수는 없었다.

양옆을 우회해서 돌아가면 칠 수야 있겠지만, 그걸로는 중보병을 뚫을 수가 없었다.

결국 양옆으로 퍼진 뒤 방향을 틀어 돌격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런데 그걸 상대가 보고만 있을까? 설령 하더라도 저 중보병들이 쉽게 뚫릴까?

안 된다. 다시 진형을 정비하고 싸워야 한다. 이 상태로라면 상대의 의도대로 놀아날 수밖에 없었다.

"빨리 빠져나오란 말이다!"

워로카가 연신 재촉하자 전사들도 조금씩 뒤로 물러나려 했다. 그들도 지금 상황이 위험하다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냐앙.

아멜리아는 여유롭게 하품하는 바스테트를 쓰다듬으며 전장을 훑어보았다.

"좌우익, 뒤로 물러나도록."

다시 새로운 명령이 떨어졌다. 이번에는 레이폴드군의 양익이 한 걸음씩 물러나기 시작했다.

쿵!

물론 그사이에도 야만인들을 향해 창을 찌르는 건 잊지 않았다.

푸욱! 푸욱! 푸욱!

"크아아악!"

쿵!

레이폴드군의 전체 진형이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양익을 치는 데 집중하던 야만인 전사들은 그 움직임의 이유를 착각하고 말았다.

"밀린다! 밀려!"

"어서 쓸어버려라!"

"우리가 훨씬 더 많다!"

진형이 뒤로 밀린다 해도 레이폴드군에게 피해는 없었다. 그저 물러나며 안쪽에 갇힌 전사들을 차근차근 죽일 뿐이었다.

오히려 맞붙지 않고 물러나니 피해가 더 줄었다. 야만인 전사들은 레이폴드군을 따라가기 바빴다.

그 모습을 본 워로카의 정신이 아득해졌다.

"뭐, 뭐지?"

도무지 모르겠다. 상대의 의도를 알 수가 없다. 왜 스스로 물러나는지 파악할 수가 없었다.

혼란에 빠진 그가 다급하게 외쳤다.

"따라가지 마라! 후퇴해! 후퇴하라고 이 멍청한 새끼들아!"

의도를 모르는데 계속 끌려다닐 수는 없었다. 자칫 잘못하면 전부 다 저들에게 말려들어 죽을 것이다.

후속 부대는 워로카의 고함에 진군을 멈추었다. 하지만 이미 맞붙은 전사들은 쉽게 퇴각하지 않았다.

원래 통제가 잘 안 되는 전사들이다. 그들은 그저 영문도 모른 채 레이폴드군을 따라가기 바빴다.

"후퇴하라고!!!!!!!!"

워로카가 앞으로 튀어 나가 고함을 몇 번이나 지른 뒤에야 전사들이 후퇴하기 시작했다.

그마저도 양옆을 치던 전사들뿐이었다. 중앙에 말려든 이들은 제대로 빠져나오지도 못하고 죽어 나가고 있었다.

그래도 레이폴드군의 좌우익이 뒤로 움직이니 포위가 조금씩 풀려 숨구멍이 트이기 시작했다.

안에 갇힌 야만인들이 워낙 많으니 레이폴드군도 단숨에 없앨 수는 없었다. 이동하면서 차근차근 죽여 나가는 게 전부였다.

워로카는 계속 전사들을 재촉했다. 이미 좌우익의 전사들은 모두 후퇴한 상태였다. 상대가 포위를 알아서 풀어 주는 데 계속 싸울 필요가 없었다.

"빨리! 그냥 빨리 빠져나와라!"

이제 중앙으로 깊게 들어간 전사들만 빠져나오면 된다. 아직 살아남은 자들은 많았다. 이대로면 그중 상당수가 빠져나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다시 정비해서 싸울 수 있다.

그것만 믿고 있을 때, 아멜리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쓸어버려라."

철컹! 철컹! 철컹!

갑자기 중앙의 대열이 모두 옆으로 이동하며 공간이 뻥 뚫리고 말았다.

야만인 전사들을 막고 있는 건 양익의 병사들뿐이었다.

그들이 뒤로 빠져나가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을 때, 드디어 가장 후열에 대기하고 있던 레이폴드의 기마병들이 움직였다.

두두두두두두!

"크하하핫! 다 죽을 준비 해라!"

산적 출신인 울칸이 거대한 몽둥이를 빙빙 휘두르며 고함을 질렀다.

그 옆에는 우아한 갑옷을 차려입은 악티움 상단의 상단주, 콘라드가 창을 들고 있었다.

그는 아멜리아의 참모이기도 했지만 전장에서는 훌륭한 기사이기도 했다.

양익을 공격하던 자들은 이미 후퇴를 한 상태였다. 중앙의 전사들도 몸을 돌려 도망을 가는 중이었다.

그야말로 완벽한 무방비 상태.

그곳에 레이폴드군의 기마병이 들이닥쳤다.

콰아아앙!

"으아아악!"

야만인 전사들은 그 어떠한 대항도 하지 못했다. 중앙으로 들어왔던 그들은 그렇게 갈려 나가고 말았다.

이미 뒤로 빠진 야만인 전사들은 아군이 죽어 나가는 걸 구경할 수밖에 없었다.

워로카는 떠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아, 아군을 구출...."

좌우익을 후퇴시키는 바람에 적 기마병이 움직여 버렸다. 자신이 또 당하고 만 것이다.

지금 레이폴드군의 중앙이 훤히 비었다. 다시 병력을 투입해서 밀면 된다. 하지만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철컹! 철컹! 철컹!

어느 순간 레이폴드군의 양익이 이동을 멈추고 다시 방패를 들어 올렸다.

워로카는 감히 추가 병력을 투입하지 못했다. 이번에도 상대의 진형과 전술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뭐지? 저걸로 다시 막으려는 건가? 아니면 허세인가? 또 함정? 지금 들어가면 어떻게 되는 거지?'

전장의 상황은 급박하게 변한다. 그렇기 때문에 지휘관은 누구보다 빠르게 상황을 판단하고 결단을 내려야 한다.

하지만 워로카는 쉽게 결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상대의 의도를 읽어 낼 수가 없었으니까.

그 어떤 의미가 없어도 몇 번이나 당한 워로카는 생각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야말로 워로카의 심리까지 가지고 노는 아멜리아였다.

결국 중앙에 갇혔던 전사들은 레이폴드의 기마병들에게 모두 짓밟혀 전멸하고 말았다.

'도대체 이게....'

그때까지도 워로카는 아무 명령도 내리지 못했다. 구경하던 야만인 전사들도 유령에 홀린 듯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격렬하게 부딪쳤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자신들은 실컷 두들겨 맞고 후퇴한 상태였다.

눈앞에 있는 적만 쳤던 그들은 도무지 뭐에 어떻게 당했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레이폴드군도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수가 훨씬 부족한 그들은 굳이 무리해서 먼저 나갈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번 전투로만 1만쯤 되는 야만인들을 죽인 듯했다. 고개를 몇 번 끄덕인 아멜리아가 바스테트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다음 지역으로 이동한다."

냐앙.

그 명령에 레이폴드군은 질서정연하게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진형에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워로카와 야만인 전사들은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특히 워로카는 누구보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왜 후퇴하는 거지? 도대체 왜? 우리를 막으려는 게 아니었어? 설마 유인하는 건가?'

이번에도 그는 어떻게 해야 할지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전장을 떠나는 레이폴드군을 계속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그 생각을 읽은 듯, 아멜리아는 멀어지는 야만인 군대를 보며 웃었다.

"내가 원하는 장소에서,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방법으로 싸우겠다."

그것의 그녀가 싸우는 방식이었다.

440화 너희들이 포위된 거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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