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 차 이사
SL 제약 보안팀장이 경찰에 사건을 신고했다.
경찰은 즉시 SL 제약 공장에 출동했다.
보안팀장은 자신이 직접 트럭을 운전해 범인들이 타고 있던 승합차를 들이받았다고 주장했다.
"놈들이 우리 공장을 폭파하려고 해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 저 트럭은…."
"마침 우리 트럭이 보이길래 그걸 타고 돌진했습니다."
"계획적인 건 아니었다는 겁니까?"
"당연하지요."
"그래도 트럭으로 들이받는 건 좀…."
"제가 안 그랬으면 우리 공장에서 사람이 죽었을 겁니다."
그럴듯한 근거들도 마련해두었다. 그중에 제일 중요한 근거는 성준혁이 가져온 은색 개방이었다.
경찰은 폭발물 처리반의 지원을 받아 가방을 열었다.
처리반 요원이 말했다.
"가방 내부에서 폭탄을 발견했습니다. 무선 원격 신관도 있습니다."
"위력이 어느 정도나 될 것 같습니까?"
"이게 건물 내부에서 터졌으면 통제실이 아니라 그 바깥쪽까지 날아갔겠는데요?"
폭발물이 발견된 후에 SL 제약의 전문가들이 경찰에 공장 도면을 보여주며 정보를 제공했다.
"통제실은 공장 안쪽에 있습니다. 그 정도 위력이면, 주변 생산 시설들도 폭발에 휘말렸을 겁니다. 그중에는 인화성 물질이 들어 있는 것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게 터졌으면,"
공장 전문가가 도면을 손가락으로 그었다.
"여기부터 여기까지, 공장 절반이 불길에 휩싸였을 겁니다."
형사가 질문했다.
"이런 공장에는 다양한 안전장치가 있을 거 아닙니까?"
"물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안전장치 중 상당수를 중앙에서 제어하는 곳이 통제실입니다. 통제실 내부에서 강력한 폭탄이 터지는 상황을 누가 대비하겠습니까?"
"아. 그러면 범인은 공장 전체를 노리고…."
"우리 회사 판단은 그렇습니다. 이건 완전히 계획적입니다."
성준혁이 폭탄을 옮겼다. 폭탄이라는 건 몰랐지만, 그 가방이 문제를 일으킬 거라는 건 알았다.
차우진이 성준혁을 보며 생각했다.
'멸망한 세계에서는 폭발사고의 원인이 알려지지 않았는데.'
박창수는 사건이 아니라 사고라고 말했다.
'그때는 통제실 주변이 불에 다 타서 증거가 없어졌겠지.'
그렇다고 해서 경찰이나 소방에서 폭발 흔적을 못 찾는 건 아니다.
'성기호 사장이 공장은 잃었어도 아들은 지키려고 증거를 지웠겠지.'
군 복무 중인 성준혁이 배달한 폭탄이 터지고 사망자가 다수 발생했다면, 그는 중형을 피할 수 없다.
그런데 그게 미수로 그쳤다면, 이야기가 좀 달라진다.
성혜리가 옆에서 작은 소리로 말했다.
"준혁이의 마약중독은 원해서 한 게 아니라 자기도 모르게 당한 거예요. 그건 충분히 무죄를 받을 수 있어요."
"압니다."
"협박을 받고 가방을 배달했지만, 그 안에 뭐가 들었는지는 몰랐어요. 통제실에서 정보를 빼내려 한다는 말에 속았죠."
"통제실에서 빼낼 수 있는 정보는 제약 관련 핵심 기술은 아닐 테니까, 피해가 크지 않을 줄 알았겠죠."
"맞아요. 폭탄인 건 몰랐대요. 그러니까 그것도 무죄를 받아내거나, 처벌을 받더라도 집행유예로 넘길 수 있을 거예요."
"다행이네요."
성혜리가 조금 더 다가왔다.
"차 이사님이 제 동생을 살려주신 거예요. 동생이 통제실에 있을 때 폭탄이 터졌으면…."
차우진이 그 말을 정정했다.
"동생이 공장을 나온 후에 터트렸을 겁니다. 그러려고 범인들이 무선 기폭장치를 가져온 거니까."
"예? 왜요?"
"동생이 살아있어야 성 사장님이 이 사건을 덮을 테니까."
멸망한 세계에서는 성기호 사장이 이 사건을 덮었다.
그렇다고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넘어간 건 아니다. 성준혁이 체포되는 건 막았지만, 결국 회사가 망했다.
성혜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럼 범인들은 아빠까지 이용해서 이걸 사고인 것처럼 만들려고 제 동생을…."
"그렇죠."
***
성혜리는 차우진에게 들은 이야기를 성기호에게 전했다.
"차 이사가 그렇게 말했다고?"
"네. 만약 폭탄이 터졌으면, 아빠가 준혁이를 구하려고 사건을 덮었을 거래요. 정확히 말하면, 차 이사님이 아니라 놈들이 그렇게 생각했을 거래요."
성기호는 만약 폭탄이 터지고 공장의 절반이 날아가면 자신이 어떤 행동을 했을지 생각해보았다.
군 복무 중인 군인이 폭탄테러와 살인을 저지르면 높은 확률로 사형 판결을 받는다.
"아…. 덮었겠구나."
"진짜요?"
성기호가 두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내가 이렇게 쓰레기인 줄은 나도 몰랐는데, 그랬을 것 같다."
"차 이사가 그러는데, 범인은 오늘 붙잡힌 두 놈도 죽여서 입을 막으려고 했을 거래요. 그러면 꼬리가 잘렸을 거라고…."
"차 이사를 만나야겠다."
***
성기호와 성혜리가 차우진을 찾아갔다. 만난 장소는 손님이 없는 카페였다.
성기호가 물었다.
"차 이사. 진짜 범인은…."
"아시잖습니까? 당연히 백희선입니다."
"라이프레인 제약의 백희선 이사. 증거는?"
"증거가 있으면 벌써 잡았지요. 그런데 성 사장님도 아시잖습니까? SL 제약이 무너지면 누가 제일 이익을 보는지."
성기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백희선이지. 우리 회사가 망하면 백 이사의 사업부는 실적이 좋아지고 경영권 경쟁에서도 유리해질 테니까."
"단서는 하나 더 있습니다."
"뭔가?"
"레드 크리스털."
"아…. 그렇지."
옆에서 성혜리가 물었다.
"그게 왜요?"
"뭔지 압니까?"
"저 제약회사 다녀요. 부작용이 크지 않은 신종 마약이라고 들었어요."
"맞습니다. 그래서 미래에는 대마초나 프로포폴 같은 라이트한 마약 시장을 레드 크리스털이 잡아먹을 겁니다."
"그러면 그 마약의 시장 규모가 어마어마해지겠네요. 그런데 그 이야기를 왜…."
"저는 백희선이 레드 크리스털의 국내 생산자이거나, 최소한 생산자의 동업자라고 보고 있습니다."
"네?"
성기호가 말했다.
"차 이사가 우리 일을 도와주는 건, 그 마약을 추적하다가 백희선의 테러 계획을 알아냈기 때문이야."
성혜리는 당황했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차 이사가 백희선을 조사하다가 우리 회사에 테러를 저지르려는 걸 알았다더라."
"잠깐만요. 아빠. 차 이사님은 골프장에서 보여준 실력에 감탄해서 초대한 거라면서요."
"계획적으로 나한테 접근했다더라."
"그, 그걸 아빠가 어떻게 아셨어요? 차 이사님의 뒷조사라도 하신 거예요?"
"아니. 차 이사가 직접 이야기해줬다."
"네?"
"준혁이 일을 확인한 후에 나한테 말해줬다."
"언제요?"
"어젯밤에. 네가 집에 돌아온 후에."
성혜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가 차우진에게 물었다.
"그럼 바다에서 날 구해준 것도, 아니, 내가 바다에 빠진 것도 다 계획적…."
차우진이 대답했다.
"그건 우연이고요. 본인이 잘 알 텐데."
"아! 그렇죠! 그때는 제 실수로 바다에 떨어졌으니까!"
그녀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휴우. 그 바다의 일까지 계획적인 거였으면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을 거예요."
"뭘 하늘씩이나."
차우진이 설명했다.
"어젯밤에 압구정 클럽 앞으로 데려간 건, 성준혁을 보여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정상이 아닌 상태라는 걸 보여주려고 했지요. 일이 생각과는 조금 다르게 진행됐지만."
"제가 골목으로 따라가자고 해서요?"
"그것도 그렇고, 그때 우리 앞을 막아선 놈들도 그렇고."
성혜리가 차우진을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차 이사님. 정체가 뭐예요?"
"사덕리소스와 딥어스테크의 이사?"
"뭔가 더 있죠?"
"전기 기술자?"
"아니, 그 골목에서 싸운 거, 보통 무술 실력이 아니었잖아요. 물에서도 그래요. 수영 실력이 무슨 돌고래 같았고, 그리고 또 골프도 아빠 말에 의하면 비거리나 퍼팅이 프로 뺨친다고 하고."
그녀가 혼자 중얼거리다가 차우진에게 물었다.
"국가기밀급 특수부대 출신이거나 첩보 요원이에요?"
"군대는…."
"네."
"취사병 출신입니다만?"
"네?"
"그래서 요리를 좀 하죠."
"아니, 그게 무슨…."
차우진이 어깨를 으쓱한 후에 말했다.
"지금 중요한 건 내가 취사병 출신인 게 아니라, 백희선을, 정확히는 라이프레인 제약을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하는 겁니다."
성기호가 이를 갈았다.
"라이프레인과 백희선은 이제 내 원수다."
"그거야 전부터 원수지간이셨고요."
"이제는 둘 중 하나가 망해야 끝나는 싸움이 되겠지."
"그거 좋네요."
"좋다니?"
차우진이 씩 웃었다.
"우리가 이기면 백희선은 망한단 소리니까."
"어? 아. 그렇지. 역시 차 이사. '우리'라는 말이 참 든든해. 그러면 말이야."
성기호가 제안했다.
"어떻게, 우리 회사에도 이사 자리 하나 준비해줄까?"
"됐습니다."
"아니, 왜? 이미 두 회사에서 겸직 중이라며. 그러면 하나 더 해도 되잖아."
"그거야 필요해서 한 거고요."
성기호가 꼬드겼다.
"차 이사가 백희선과 싸우려면 우리 회사 명함이 필요하지 않을까? 같은 제약 분야니까."
"음…."
차우진이 잠시 생각해보았다.
SL 제약의 이사 자리는 굳이 손에 넣을 필요가 없다. 어차피 성기호 사장과 차우진의 목표는 비슷하다.
그러다 다른 생각이 들었다.
'이선정 박사가 오메가 바이러스 치료제를 정식으로 출시하려면 임상이 필요할 텐데?'
멸망급 재난인 오메가 바이러스는 10년 후에나 발생한다. 아직은 존재하지 않는 질병이라 그걸 타깃으로 약을 만들 수는 없다.
이선정이 만드는 약의 원래 목표는 다른 질환의 치료다.
'오메가 바이러스가 터지기 전에, 그 약이 세상에 충분히 공급된 상태여야 해.'
그러려면 약이 정식으로 출시되어야 한다. 약이 판매되려면 임상시험도 거치고 다양한 절차도 밟아야 한다.
SL 제약에는 자체 개발 의약품들이 있다. 그 의약품들은 그런 과정을 거쳐 출시됐다.
게다가 약은 만들었다고 해서 그냥 팔 수 있는 게 아니다. 판매망이 있어야 한다.
'SL 제약이 그런 일을 하는 전문가 집단이구나.'
차우진이 물었다.
"외부에서 개발된 약의 임상의뢰 같은 것도 할 수 있습니까?"
"혹시 이번 싸움에…."
"아니요. 별개의 건입니다."
"차 이사가 추천하는 약이라면 당연히 해야지. 필요하면 판매까지 다 책임져줄 수 있어."
"좋군요."
"그럼 차 이사도 우리 회사 이사가 되는 거지?"
이러면 이사 자리를 거절할 이유가 없다.
"알겠습니다. 라이프레인이나 백희선과의 싸움에서 변수를 만들려면 그 명함이 필요하긴 하겠군요."
성기호의 표정이 밝아졌다.
"잘 생각했어."
그는 차우진을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차 이사와는 이런 식으로라도 계속 인연을 이어가야지. 차 이사 나이에 저런 능력을 보여주는 사람은 처음 봤으니까.'
옆에서 성혜리가 물었다.
"아빠. 나는?"
"너는 뭐?"
"나는 아직 대리인데?"
"너는 차 이사가 아니야. 아직 더 배워야 해."
"그럼 내가 차 이사님 밑으로 갈까요?"
"응?"
성혜리가 얼른 설명했다.
"차 이사님한테 명함만 파 줄 수는 없잖아요. 밑에 담당 부서가 있어야 백희선을 상대하죠. 그러니까 내가 그 부서로 가는 거예요."
"음…."
성기호가 생각해보니 나쁜 방법이 아니다.
차우진에게 이사 자리를 줄 수는 있지만, 기존 이사를 쫓아내고 그 자리에 앉힐 수는 없다.
그럼 작더라도 새로운 조직을 만들거나, 기존 부서 하나를 떼어다 줘야 한다.
'혜리가 내 딸인 건 회사 사람이 모두 아니까….'
작은 부서라도 성혜리가 들어가면 그 부서의 발언권이 달라진다.
"좋은 생각이다. 어차피 전담 부서를 하나 만들어야 하니까."
"적을 속이기 위해서 부서의 이름은 위장하는 게 좋아요. 그러니까 마케팅 3부나 홍보 3팀 같은 식으로."
"아예 새로운 이름도 좋지. 대외업무분석팀은 어때?"
"해외 사업 개척팀으로 하죠? 아프리카나 호주 개척팀?"
차우진이 물었다.
"명함 이야기가 왜 거기까지 가는 겁니까?"
성혜리가 신나서 말했다.
"차 이사님. 어차피 혼자서는 못 싸워요. 저 믿어보세요. 제가 회사에서 이 부서 저 부서 전전하다 보니까 마당발이 됐거든요. 저랑 같이 싸우면 도움이 많이 될 거예요."
"위험할 수도 있는데."
"네?"
차우진이 경고했다.
"놈들이 공장을 폭파하려고 시도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잖습니까? 백희선은 멀쩡한 인간의 상식으로 판단하면 안 되는 여자입니다."
"아…. 그때는 차 이사님이 지켜주시겠죠."
"나 말고 이 회사 보안팀장님이랑 이야기 잘 해봐요."
"쳇."
119. 조사
중견 제약회사의 공장을 폭파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그 시도가 성공했으면 다수의 사망자가 나올 뻔했다. 회사도 망할 수 있었다.
SL 제약은 그걸 굳이 숨기지 않았다.
뉴스에 자세한 보도가 나갔다. 보도 내용 중 일부는 홍보팀에서 대놓고 뿌렸다.
기사에 댓글들이 붙었다.
- 이 정도면 테러 아닌가?
- 간첩?
- 간첩이 폭파하기엔 회사 규모가 좀 애매하지 않나?
- 그러게. SL 제약이 중견기업이긴 하지만, 더 큰 제약회사도 많잖아.
- 그럼 누가 왜 그런 짓을 저지른 거야?
- 그걸 알면 벌써 잡았겠지.
- 현장에서 잡힌 놈들이 있다며?
- 청부업자랍니다.
청부업자들을 잡은 방법도 알려졌다.
- 청부업자들이 숨어 있던 승합차를 트럭으로 들이받았다며?
- 그거 교통사고 아닌가?
- 대놓고 받았는데 사고는 아니죠.
- 누가 받았대요?
- 뉴스에서 보안팀장이라던데요?
- 와. 그 팀장님 화끈하네.
- 뒷일은 회사에서 책임진다고 하더라고요.
- 회사는 당연히 책임져줘야죠. 공장이 날아갈 뻔한 걸 막았는데.
여론은 승합차를 트럭으로 받은 건 문제 삼지 않았다. 잘했다는 의견이 많았다.
사람들은 다른 것도 궁금해했다.
- 그래서 누가 왜 제약회사의 공장을 폭하려고 한 걸까요?
- 그것도 청부업자까지 동원해서.
- 청부업자와 폭탄은 아무나 구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경쟁 기업에 한 표 던집니다.
***
라이프레인 제약의 이사 백희선이 TV를 향해 술잔을 집어 던졌다.
"아니야!"
그녀가 소리를 질렀다.
"내가 바란 건 이따위로 실패하는 게 아니라고!"
그녀가 화를 내다가 급히 책상을 열었다. 대포폰이 하나 나왔다.
그걸 꺼내 하이힐 뒷굽으로 콱콱 밟았다.
액정이 쩍쩍 갈라졌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확실히 부수기 어려웠다.
그녀가 화를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꺄아악!"
그녀의 사무실은 방음 처리가 되어 있다. 그래도 이렇게 소리를 지르면 조금은 새어나가기 마련이다.
인터폰이 울렸다.
"뭐야!"
- 이사님. 소리가 들려서요. 혹시 도와드릴 일이….
"작두 가져와!"
- 예?
"두 번 말하게 할래? 작두 가져오라고!"
***
차우진이 이선정 박사를 낮에 만났다.
"연구는 잘 되고 있어요?"
이선정이 커피를 마시며 대답했다.
"열심히는 하고 있죠. 근데 결과가 기대만큼 안 나오네요. 내 이론에 잘못된 게 있나 싶어요."
"아니요. 이선정 박사님의 이론은 완벽합니다. 디테일한 부분에 사소한 보완이 필요할 수는 있어도요."
이선정이 웃었다.
"어머. 어떤 내용인지도 모르면서 그렇게 말해도 돼요?"
"믿으니까요."
멸망한 세계의 전문가들은 이선정이 연쇄살인마에 의해 사망하지 않았으면 오메가 바이러스 치료제를 혼자서 만들어냈을 거라고 말했다.
그 부분에 이견을 가진 전문가는 없었다.
차우진이 말했다.
"아마 완성 직전일 겁니다. 마지막 고비만 넘으면 됩니다."
"고마워요. 믿어줘서."
그녀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약을 실험실에서 만든다고 해서 끝이 아니에요. 임상 단계를 통과하는 약은 많지 않으니까요."
"임상 말인데, 계획은 있습니까?"
"맡길 곳을 찾아봐야죠."
"추천해주고 싶은 곳이 있는데."
"어디인데요?"
"SL 제약."
그녀가 손뼉을 쳤다.
"거기랑 되면 정말 좋죠. 아. 근데 거기서 하면 비용이 많이 들겠다. 우리 회사에 그럴 여유는 없을 거예요. 언니가 곤란해 할걸요?"
화선바이오라는 회사 이름은 화영과 선정의 앞글자를 따서 만든 것이다. 이선정의 언니 이화영이 사장이다.
차우진이 말했다.
"임상시험 비용이야 방법을 찾으면 되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네? 어떻게요?"
"음…. 외부 투자?"
"언니가 회사 지분을 안 내놓을 걸요?"
"회사 지분이 아니라, 박사님이 만든 그 약 하나에 대한 외부 투자라면요?"
이선정이 잠깐 생각했다.
"웅…. 그건 내가 따로 만든 거니까 가능하겠죠?"
차우진은 다른 약은 필요 없다. 그 약만 확보할 수 있으면 된다.
"그럼 됐네요."
이선정이 물었다.
"투자자가 누구인데요?"
"나?"
"네?"
"왜요?"
그녀가 걱정했다.
"아. 적금 깨서…."
"아니, 뭐. 적금은 아니고요."
"그럼 집이라도 잡히고…."
"누나랑 살고 있지만 부모님 집이라."
이선정이 웃었다.
임상시험은 실패할 확률이 높다. 그래서 적금이나 집을 잡혀서 투자한다면 말리려고 했는데, 그런 분위기가 아니다.
그녀는 차우진이 농담으로 하는 말인 줄 알았다.
"알았어요. 나중에 임상 실패하면 돈 돌려달라기 없기예요?"
"성공할 겁니다."
"믿어줘서 고마워요. 나도 안 믿는 걸 믿으시네요?"
"믿을만한 분이 만든 약이라서."
이선정이 손으로 얼굴에 바람을 부쳤다.
"아. 여기 어쩐지 좀 덥다."
차우진은 그 약을 SL 제약과 공동으로 개발하라는 제안 따위는 하지 않았다.
'이대로만 가면 개발에 성공해.'
외부 변수는 바라지 않았다.
'외부 회사와 협업하게 했다가 괜한 간섭이 들어오면 약의 효과나 결과가 바뀔 수 있어. 그건 절대로 안 되지.'
차우진이 물었다.
"요즘 다른 문제는 없어요? 예전에 그 스토커 같은 거라든지."
"아뇨. 요즘은 그런 느낌은 받은 적 없어요."
"회사 운영은 여유가 있나요?"
화선바이오는 외주 실험과 분석 등을 하는 작은 회사다.
"요즘 일감이 좀 줄어들긴 했어요. 그래도 설마 망하겠어요? 언니가 잘 운영하겠죠."
"망하면 안 되죠. 절대로."
화선바이오가 망하면 이선정이 개인 연구를 할 곳이 없어진다.
'SL 제약에 외주 의뢰 일감이라도 좀 나눠주자고 해야겠다.'
***
SL 제약 직원들이 휴게실에 모여서 잡담을 했다.
"새로 온다는 차우진 이사님 말이야. 누구인지 들어본 사람 있어?"
"아니요."
"낙하산인가?"
"앞에서 그런 말 하시면 큰일 날 걸요?"
"설마 그러겠냐?"
"실수로라도 하시면 안 돼요."
"응? 뭐 아는 거 있어?"
"성혜리 대리가 이번에 부서 이동하는데, 차 이사님 밑으로 들어간대요."
"헉! 그럼 낙하산이 아니라 공수부대 아냐?"
"그거야 아직 모르죠."
***
성기호는 일단 차우진의 자리부터 만들었다.
직속 팀원은 각 부서에서 차출했다. 그중에 성혜리도 있었다.
이제 차우진은 딥어스테크와 SL 제약 양쪽에 조사팀이 생겼다.
'이러면 백희선에 관한 정보를 교차 검증할 수 있겠어.'
다른 팀원들은 아직 업무 인수인계가 덜 된 상태다. 성혜리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녀는 일단 자리부터 이쪽으로 옮겼다.
그녀가 말했다.
"차 이사님. 오늘은 우리 둘만 있네요?"
"그러면 우리끼리…."
"네에."
"밥부터 먹읍시다."
"네?"
"점심."
"아. 점심!"
***
백희선과 최용구가 한밤중에 한강에서 만났다.
KMTV 기자 최용구가 한숨을 쉬었다.
"뉴스 봤습니다. 큰일을 진행하셨나 본데, 어떻게 그걸 실패하시나."
백희선의 눈빛은 사나웠다.
"나 지금 열 받았으니까 시비 걸지 말아요."
최용구가 어깨를 으쓱했다.
"뭐, 알겠습니다."
백희선이 최용구에게 SL 제약 공장에 관해 미리 말한 건 아니다. 그렇지만 기자들을 통해 관련 정보를 구해오라고 요구하긴 했다.
최용구는 기가 조금 죽었다.
'경쟁회사의 공장을 폭파할 생각을 하다니. 내 생각보다 훨씬 더 미친년이야.'
최용구의 물리적인 조력자는 천상칠의 상칠파였다. 그런데 천상칠은 죽었고 상칠파는 무너졌다.
'천상칠 사장을 죽인 것도 이 미친년이 맞나 본데?'
그가 침을 꼴깍 삼켰다.
상칠파가 아니라도 최용구가 동원할 수 있는 건달은 몇 명 있다. 하지만 그걸로는 백희선을 상대할 자신이 없다.
'어설프게 공격하면 나도 제거당하겠지.'
최용구는 그걸 알면서도 그녀의 옆에 붙어 있었다.
그는 레드 크리스털로 마약 시장을 장악해 막대한 돈을 손에 넣고, 그 돈으로 권력을 쥐고 싶었다.
'기자 간판에 돈과 조직력까지 있으면 나도 정치권에 가서 대가리가 될 수 있어.'
그가 백희선을 힐끗 보며 생각했다.
'그때까지는 나도 이 미친년을 이용해야지.'
백희선이 한강 생태공원에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녀가 연기를 뿜으며 물었다.
"알아봤어요?"
그녀가 오늘 최용구를 만난 건 받아야 하는 정보가 있어서다.
최용구가 대답했다.
"공장을 폭파하려던 청부업자들은 경찰에서 누가 시켰는지 모른다고 주장했습니다. 폭탄인 줄도 몰랐다고 했다더군요."
"경찰이 그 말을 믿어요?"
"믿는지 안 믿는지는 중요한 게 아닙니다. 경찰 손에 백 이사님과 연결될 만한 단서가 없다는 게 중요합니다."
그녀가 최용구를 쳐다보았다. 눈빛이 잡아먹을 것 같았다.
"최 기자님. 왜 내가 범인이라고 생각해요?"
"아이쿠. 아닙니다. 백 이사님이 괜한 오해를 받을까 봐 걱정한 거였습니다."
"그 정보는 얼마나 확실해요?"
"경찰서에 출입하는 기자들을 통해 확인했습니다. 담당 형사들과 술 먹는 사이니까 정보는 확실합니다."
그녀의 인상이 조금 펴졌다.
"괜찮네요."
최용구가 제안했다.
"백 이사님. 다음에 이런 일을 할 거면 먼저 나하고 의논이라도 좀 하시죠. 내가 그래도 정보력 하나는 좋잖습니까?"
"내가 한 짓 아니라니까요."
"예. 알지요. 하, 하하."
최용구가 그녀가 꺼내놓은 장치를 힐끗 보았다. 그건 도청기나 녹음기 같은 전자기기를 감지하는 장치였다.
지금은 파란 불이 켜져 있었다.
'독한 년. 저걸 쓰면서도 범인이라고 인정하는 말은 한마디도 안 한다니까. 나도 저런 태도를 배워야 하는데.'
최용구가 충고했다.
"어쨌든 당분간은 SL 제약은 쳐다보지도 않아야 할 겁니다. 이번 사건에 관심을 가지는 모든 제약회사 관계자는 경찰의 용의선상에 오를 테니까."
"그래서 최 기자님을 통해서 알아보는 거잖아요. 다 아는 이야기로 짜증 나게 하지 말아요."
***
차우진은 이제 두 개의 조사팀을 움직인다.
딥어스테크 조사팀은 얼마 전부터 백희선에 관한 정보를 여러 경로로 수집하는 중이다.
SL 제약의 팀 이름은 신규사업분석팀이라고 지었다.
팀의 이름과 하는 일은 관계가 없었다. 그 팀도 라이프레인 제약과 백희선을 조사했다.
분석팀이 가져오는 자료는 먼저 시작한 딥어스테크의 조사팀과 겹치는 게 많았다.
대신에 같은 제약업계답게 딥어스테크에서는 알아내지 못한 정보들도 들어왔다.
차우진이 회의실 대형 스크린을 보며 물었다.
"그러니까 라이프레인 제약의 경영권을 놓고 자식들이 싸우고 있다는 거군요."
상황을 정리해 보고한 성혜리가 대답했다.
"사장은 병원에 있는데 경영 복귀는 어려운 상태예요."
"경영권은 싸워서 이긴 놈이 다 가지는 상황이고요."
"네. 라이프레인 사장에게는 아들이 둘, 딸이 하나 있어요. 그중에 승자가 경영권을 차지하고, 패자들은 쫓겨날 거예요. 사이가 나쁘거든요."
"실적은 백희선이 낫군요."
"못할 짓도 거리낌 없이 하면서 실적에 집착하거든요. 그래서 아들 둘이 전략적 동맹을 맺었어요. 그게 가능한 이유는, 엄마가 달라서예요."
"집안이 콩가루네."
"공식적으로는 자식이라는 것조차 밝히지 않았어요. 업계 사람 중에서도 일부만 알아요. 백희선이 사장의 숨겨둔 딸이라는 걸요."
"저런 일이 흔합니까?"
"드문 케이스는 아니죠. 저도 주변에서 가끔 봐요. 경영권을 놓고 싸우는 경우는 드물지만요. 보통은 호적에 오르지 못한 쪽이 일방적으로 불리하거든요."
"아들 둘의 전략적 동맹은 백희선을 쳐낸 후에 자기들끼리 경쟁하자는 것일 테고."
"맞아요. 그래서 백희선이 불리한 판세를 뒤집기 위해 선을 자꾸 넘었는데, 그러면서 우리 회사와 충돌했죠. 처음엔 만만하게 봤을 거예요. 라이프레인이 우리 회사보다 크니까."
회사 규모나 매출액은 라이프레인 제약이 SL 제약보다 훨씬 크다.
그런데 모든 분야에서 그런 건 아니다. 백희선과 충돌하는 부분만 놓고 보면 SL 제약이 우위에 있다.
차우진이 말했다.
"그래서 공장 폭파를 시도했군요. SL 제약의 생산이 중단되면 백희선이 맡은 사업부의 실적이 크게 오를 테니까."
"네. 진짜 나쁜 년이죠."
"경찰 수사는?"
그쪽을 담당한 팀원이 보고했다.
"우리 쪽에서 이런 정황을 근거로 경찰에 백희선이 의심스럽다고 말했습니다. 다만, 증거는 제공하지 못했습니다."
"경찰이 수사는 하겠지만 증거가 없으면 성과를 기대하긴 어렵겠군요."
"예. 우리 쪽에서 그 방향으로 밀어붙이는 것 이상으로 라이프레인에서는 무산시키려 할 겁니다."
보고가 계속 이어졌다. 백희선의 동선 정보도 있었다.
차우진이 말했다.
"공식 일정 이외의 움직임은 파악하지 못했단 말이지요?"
"미행을 붙이면 알아낼 수는 있는데, 붙일까요?"
"회사에서 선을 넘었다가 문제가 생기면 지금 잡은 유리한 고지를 잃을 수 있습니다. 합법적으로 조사하시죠."
***
그날 밤에 차우진이 망원렌즈로 한강 공원을 보며 말했다.
"선을 넘는 일은 내가 하면 되니까."
120. 콩가루
차우진은 두 회사의 조사팀이 알아낸 정보에서 시간대만 따로 정리했다.
백희선의 동선에는 비는 시간대가 있었다.
"밤."
SL 제약 분석팀은 백희선에게 미행을 붙이진 않았다. 그렇지만 회사에서 차가 나오는 시간과 집에 차가 들어가는 시간 정도는 확인했다.
공식 스케줄이 있을 때는 그것도 확인했다.
그런데 그 시간이 안 맞는 날이 있었다. 중간에 어딘가로 샜다는 뜻이다.
그 시간에 개인 일정을 처리할 수는 있다. 그래서 그것 자체는 특별한 정보가 아니다.
차우진은 다르게 생각했다.
"용구를 만나서 대책을 논의할 수는 있겠지."
그는 최용구를 미행했다.
최용구가 한밤중에 한강으로 이동했다.
"용구가 이 늦은 시간에 운동을 가는 건 아닐 테고."
분석팀에서 백희선의 차가 오늘 회사를 빠져나간 시간을 문자로 알려주었다.
"이 시간에 출발했으면, 지금쯤 여기 도착하기 딱 좋네."
잠시 후에 백희선이 한강 생태공원에 도착했다. 최용구와 백희선이 접선했다.
***
최용구가 알아온 정보를 늘어놓았다.
"SL 제약에서는 백 이사님이 수상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냥 말만 하는 게 아니라 경찰에 그쪽으로 조사해달라고 압력을 넣고 있습니다."
백희선이 비웃었다.
"등신이 아니라면 눈치는 챘겠죠. 그래서 증거는요?"
"증거는 없고, 추측만 한다고 합니다."
"그쯤은 우리 쪽에서 커버할 수 있어요."
최용구가 제안했다.
"백 이사님. 우리 사업, 앞으로 어떻게 할지 나랑 의논은 언제 할 겁니까?"
백희선이 최용구를 보며 인상을 썼다.
"최 기자님. 사업은 내가 알아서 해요. 내가 전문가예요."
"하지만 동업자인 나도 알아야…."
"최 기자님은 지금처럼 정보만 열심히 모아와요. 그럼 내가 새 사업의 지분은 섭섭지 않게 챙겨줄 테니까."
"끄응."
"아. 하는 김에 다른 것도 좀 알아봐 줘요."
"이번엔 또 뭡니까?"
백희선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백재원과 백재우의 개인 비리."
최용구의 표정은 굳었다.
"라이프레인 전무와 본부장의 개인 비리?"
"알아두면 좋을 것 같아서."
"그건 쉽지 않은데요."
그녀가 고개를 이리저리 꺾으며 말했다.
"최 기자님. 새 사업의 지분을 받고 싶으면 열심히 일해야 할 거예요."
백희선이 현장을 떠났다.
최용구가 멀어지는 그녀의 차를 보며 욕을 했다.
"씨발. 날 시다바리 취급하는 거야? 레드 크리스털의 지분이나 조금 받고 계속 네년 밑에서 일하라고? 감히 나를?"
최용구가 침을 뱉었다.
"두고 보자. 레드 크리스털을 만드는 놈이 누구인지만 알아내면 모든 관계가 변할 테니까."
***
차우진이 망원렌즈로 두 사람의 입 모양을 관찰했다.
최용구의 말은 대충 무슨 소리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
그가 있는 위치에서는 백희선의 입술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돌렸을 때의 몇 마디만 알아보는 게 한계였다.
그래도 최소한의 정보는 얻었다.
"이 상황에서도 마약을 계속 팔겠다? 그만큼 쪼들리나?"
마약을 팔려면 먼저 물량을 확보해야 한다.
차우진이 라이프레인의 경영권 싸움 상황을 떠올렸다. SL 제약 분석팀이 그 싸움을 아주 잘 분석했다.
"곧 움직이겠네."
***
이튿날 백희선이 본가에 들어갔다. 경영권 싸움을 하는 동안에는 집안 행사는 빠지면 안 된다.
식사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는 서로 기본적인 선은 지켰다.
식사가 끝난 후에 정원 테이블에 세 사람이 앉았을 때 문제가 생겼다.
백희선의 큰오빠 백재원이 물었다.
"SL 제약 공장이 날아갈 뻔했다며? 너 그 회사랑 사이 나쁘잖아. 네가 한 거냐?"
백희선이 눈에 불을 켰다.
"아니거든요?"
작은 오빠 백재우도 한마디 했다.
"SL 제약에서 경찰에 네 짓인지 조사해달라고 했다던데?"
"그놈들이 넘겨짚는 거예요. 난 결백해요."
"난 네가 한 줄 알았지."
"아니라고요. 자꾸 누명 씌우지 말아요."
백재원이 말했다.
"넌 이렇게 판을 못 읽는다니까. 누가 했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야. SL 제약이 네 짓이라고 확신한다는 게 문제이지."
"내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해결해요."
"너 혼자의 문제라고 보냐? SL 제약이 복수하겠다고 나오면 회사에 손해가 생긴다. 저쪽이 우위인 사업부들이 있으니까."
백희선이 반발했다.
"그래서 그 사업부를 나한테 넘긴 거잖아요! 실적 안 나는 건 나한테 떠넘겨서 내가 말아먹은 것처럼 만들려고! 꿩 먹고 알 먹으려고!"
백재우가 인상을 썼다.
"어디서 목소리를 키워? 아랫것들이 듣는다."
백재원도 한마디 했다.
"생각해서 사업부를 넘겨줬더니 오해는. 실적 개선은 많이 됐잖아."
"내가 뛰어다녀서 개선한 실적이에요! 다 망해가던 사업부를 내가 살렸다고!"
백재원이 히죽 웃었다.
"이제는 아니겠는데? SL 제약이 같이 죽자면서 출혈경쟁에 들어가면 네 사업부가 버티겠어? 그러면 네가 다 책임져야지."
"더 못 들어주겠네!"
백희선이 자리를 박차고 그곳을 떠났다.
뒤에서 백재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 버르장머리 없는 게!"
"놔둬라. 밖에서 들어온 자식이잖아."
"하긴. 어렸을 때 못 배웠으니까 저러겠지."
백희선이 본가를 나가면서 이를 바드득 갈았다. 그녀가 독기가 담긴 말을 내뱉었다.
"두고 봐. 이 집안에 자식은 나 하나밖에 안 남을 테니까."
차우진은 다른 집 지붕 위에서 망원경으로 그 집안을 살폈다. 사람들이 집 안에 있을 때는 대화를 듣는 건 고사하고 입 모양을 알아보기도 어려웠다.
대신에 정원에 나왔을 때는 대충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는 알 수 있었다. 정확한 대화까지 파악한 건 아니지만 패드립이 난무한다는 것쯤은 알았다.
"콩가루구나."
그건 이미 알고 있었다. 직접 보니 느낌이 다르긴 하지만 새로운 정보는 아니다.
대신에 다른 걸 확인했다.
"역시 백독거미가 궁지에 몰렸어."
***
백희선은 화가 치밀었다.
"그 공장만 폭발했으면 됐는데! 결국 성기호가 다 덮었을 텐데!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사고로 처리했을 텐데!"
그걸 위해서 그녀는 직속 직원들에게 SL 제약과 성기호를 조사하라고 지시했다. 경쟁 업체 동향 파악을 명분으로 걸었다.
최용구를 통해서도 정보를 모았다.
SL 제약 공장 통제구역에 사장이나 임원급이 들어갈 때는 따로 소지품 검사를 하지 않는다는 것도 파악했다. 사장 아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그녀는 현재 군 복무 중인 성준혁을 이용해 공장의 통제실을 날려버릴 계획을 세웠다. 그곳이 날아가면 당연히 공장이 멈춘다.
그런데 실패했다.
"공장이 날아간다 해도 자식의 죄를 덮어줄 인간이니까, 자식의 일을 복수하기 위해서 출혈경쟁이라도 하겠지."
그녀는 이 계획이 실패했을 때의 위험은 무시하고 일을 진행했다. 당연히 성공할 거라고 확신했다.
이전에도 다른 업체를 상대로 다양한 수작을 부려 매번 성공했기 때문에, 이번에도 그럴 거라고 판단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실패했다. 이제 SL 제약의 반격을 방어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그걸 백재원이 눈치챈 것 같아…."
그녀는 초조해져서 손톱을 이빨로 물었다.
"SL 제약을 다시 칠까?"
***
차우진이 백희선을 미행했다.
"SL 제약을 다시 치면 뒷감당이 안 되겠지. 경찰이 바보도 아니고, 이미 의심받고 있는 백희선이 또 덮는 건 불가능하니까."
성기호가 힘이 없는 일반인이면 또 덮을 수도 있다. 그런데 상대는 SL 제약 사장이다.
SL 제약이 라이프레인 제약보다는 작지만, 두 번이나 사건을 덮을 정도로 힘이 차이 나는 건 아니다.
"SL 제약과 싸우면 이기든 지든 백희선의 힘만 빠질 텐데, 과연 그 선택을 하려나?"
***
백희선은 출혈경쟁에서 버틸 힘부터 만들어야 한다.
"버텨? 아니야. 수세에 몰려서 두들겨 맞기만 하면 백재원과 백재우가 그걸 핑계로 나를 날려버릴 거야."
그녀는 라이프레인 제약의 경영권을 원한다.
"다음 기회는 없어. 빨리 백재원과 백재우를 쳐내고 내가 회사를 물려받아야 해. 안 그러면 내가 당해."
그러려면 당연히 필요한 게 있다.
"회사 지분을 더 확보해야 해. 그러려면 돈이 필요해."
***
차우진이 나인세븐 엔터 출신인 조연 배우 김상훈을 만났다.
나인세븐 엔터는 이미 분해됐다. 김상훈은 끈 떨어진 신세가 됐다.
그는 지금은 누가 배역을 준다고 해도 연기를 할 상태가 아니다. 레드 크리스털의 금단증상 때문이다.
그가 술집에 앉아 손을 덜덜 떨었다.
"씨발. 약 하나만 먹으면 소원이 없겠다."
그런 그의 앞에 차우진이 나타났다.
"이 새끼 아직도 못 끊었네?"
"어? 너…."
"너?"
"형님?"
"끊는다더니?"
김상훈이 욕을 했다.
"씨발. 마약이 끊고 싶다고 해서 끊어지는 건 줄 아나."
"치료기관에 들어가."
"한국에서 그러면 제 커리어는 어쩌고요?"
"중독된 상태로 배우 생활을 계속할 수는 있고?"
"자수하면 감옥도 가야 하잖습니까? 저 진짜 억울합니다. 저도 천중칠 사장한테 당한 거란 말입니다."
"그런 놈이 너무 적극적으로 일하더라? 신인 여배우가 붙잡혀 있는데 같이 일하자고 설득하러 갔잖아."
"그, 그건…. 약이 필요해서…."
차우진은 김상훈을 믿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용할 가치는 있다.
"너 일이나 하나 해라."
"내가 왜…."
"네 커리어를 지키려면 해야지?"
"씨발."
"라이프레인에서 일할 때 여자 VIP를 만났다고 했지?"
김상훈이 자랑했다.
"예. 제가 접대한 분은 모두 2차에서 만족하셨습니다. 제가 그런 거 잘합니다."
"그중에 저번에 말한 그 사람을 만나야겠다."
김상훈은 당황했다.
"예? 그 VIP는 이름도 모르는데…."
차우진이 사진을 보여주었다.
"이 사람 맞지?"
"어? 예. 맞습니다."
"라이프레인 제약 백희선 이사다."
김상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이사님이시구나. 예. 제가 잘 꼬셔보겠…."
"무슨 소리야? 자리나 마련하라는 건데."
"예? 왜…."
"비즈니스를 하려고."
"무슨 비즈니스를…."
"그래. 너도 같이 일하려면 알아야겠지. 백희선이 레드 크리스털을 천 사장에게 공급한 사람이다."
김상훈의 눈이 커졌다. 침도 꼴깍 삼켰다.
"그, 그렇습니까?"
"그 사실은 너만 알고 있어야 한다."
"예! 꼭 저만 알고 있겠습니다!"
"알았으면 자리 마련해."
***
손하은이 라이프레인 제약 연구소 휴게실에서 스마트폰으로 메시지를 보냈다.
[거미가 오늘 화가 많이 나 있어요.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는지 평소보다 더 신경질을 내요. 6시에 나갈 거예요.]
거미는 백희선을 지칭하는 암호다.
***
백희선은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았다.
"이럴 때는 나인세븐에 가서 놀면 좀 풀리는데."
나인세븐 엔터는 술집을 직접 운영하진 않지만, 백희선이 원하면 알아서 놀 장소를 섭외하고 같이 놀아줄 남자까지 데려왔다.
"거기가 망하니까 이런 게 다 아쉽네."
그녀가 그렇게 투덜대며 주차해놓은 차로 걸어갔다. 그러다 걸음을 멈추었다.
주차장에 김상훈이 서 있다가 그녀를 보더니 허리를 접으며 인사했다.
"잘 지내셨습니까? 누님."
백희선의 한쪽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이거 우연이니?"
"아닙니다."
백희선이 비서에게 손짓했다.
"먼저 차에 가 있어."
"알겠습니다."
그녀가 손가락을 까닥였다. 김상훈이 얼른 다가왔다.
그녀가 물었다.
"내가 누구인지 어떻게 알았니? 천 사장이 죽기 전에 알려줬니?"
"아닙니다. 원래는 몰랐습니다."
"그런데?"
"제가 아는 형님이 자리 좀 마련해달라고 해서요."
백희선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내가 아무나 만나주는 사람은 아닌데, 너 보낸 놈이 뭐라고 하든?"
"비즈니스가 있다고 합니다."
백희선이 김상훈을 빤히 쳐다보았다.
'나인세븐이 보유한 최고의 선수.'
그녀는 김상훈이 여자와 놀아주는데 최고라고 들었다. 실제로 꽤 만족스러웠다.
그런데 나인세븐의 사장은 천중칠이다. 천중칠의 형은 상칠파 두목 천상칠이다.
상칠파는 서해안 사건 현장에서 마약을 거래하다가 박살 났다.
'작은 천 사장이랑 큰 천 사장이 다 죽어서 나와의 관계는 깔끔하게 정리된 줄 알았는데, 아직 남은 게 있었네?'
그녀가 김상훈을 보는 눈에 살기가 돌았다.
'이것도 치울까?'
121. 미끼
김상훈이 침을 꼴깍 삼켰다. 백희선의 눈빛이 먹이를 노리는 맹수처럼 보여서였다.
백희선은 김상훈이 그녀와 나인세븐 엔터 사이의 관계를 안다는 것이 거슬렸다. 그 관계와 서해안 사건이 연결되기 때문이다.
'아니다. 어차피 최용구 기자도 아는 정보인 데다가, 이놈 뒤에 누가 또 있다니까….'
김상훈의 뒤에 누가 있는지도 모르는데 제거하면, 약점만 잡힌다.
'뒤에 있는 놈이 누구인지, 뭘 아는지도 알아내야지.'
그녀가 결론을 내리고 입을 열었다.
"알았어. 어떤 놈인데 널 보냈는지 얼굴이나 보자. 놈 맞지?"
"네. 놈 맞습니다. 그럼 장소는…."
백희선은 최용구를 한강 생태공원에서 만났다.
그런데 지금은 상대가 누구인지 모른다. 정체를 모르는 사람과 처음부터 한강에서 만날 수는 없다.
"사시미 좋아하나 몰라? 싫어해도 상관없어. 장소는 내가 정하니까."
그녀가 차에 타면서 고급 일식당 이름을 알려주었다.
"상암동 해왕으로 오라고 해. 오늘 저녁 8시에."
그녀가 알려준 곳은 손님의 프라이버시에 신경을 쓰는 일식 요릿집이다. 백희선은 바이어나 다른 기업 임원과 그곳에서 가끔 만났다.
'나중에 문제가 생겨도, 진짜 비즈니스 제안인 줄 알고 거기서 만났다고 하면 되니까.'
게다가 오후 8시면 겨우 2시간 후다. 상대가 그런 고급 식당에서 뭔가 수작을 부리기엔 부족한 시간이다.
그녀가 차 문을 닫았다. 김상훈이 머리를 숙여 인사했다.
"네. 누님. 확실히 전하겠습니다!"
차가 출발했다. 그 차가 보이지 않게 된 후에야 김상훈이 허리를 폈다.
"휘유. 무슨 눈빛이…. 잡아먹히는 줄 알았네."
***
백희선은 8시가 되기 전에 해왕의 별실에 자리를 잡았다.
해왕의 모든 별실은 벽에 방음 처리가 되어 있다. 그래서 그 안에서 무슨 대화를 하든 밖에서는 엿듣지 못한다.
그녀가 먼저 도착한 건 상대가 수작을 부리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다.
차우진은 8시 정각에 도착해 그녀를 찾아왔다.
"백희선 이사님?"
"앉아요. 음식은 먼저 시켰어요."
이미 테이블에 회를 비롯한 각종 음식이 세팅되어 있었다.
"대화하는데 누가 들어오면 방해되니까."
"역시 철저하시군요."
"식사부터? 아니면 이야기부터?"
차우진이 피식 웃었다.
"우리가 밥 먹으러 만난 건 아니잖습니까?"
"잘 아시네. 그래. 나를 보자고 했다고? 왜죠?"
"김상훈이 재미있는 약을 먹고 있더군요."
"영양제라도 먹나요?"
"이거 왜 이러시나?"
그녀가 차우진을 빤히 쳐다보았다.
차우진은 느긋하게 앉아 있었다. 현재 그의 얼굴은 안경을 이용해 변장을 약간 한 상태다. 변장법은 촬영장을 다니면서 어깨너머로 배웠다.
백희선이 생각했다.
'표정만 보고는 속내를 알 수 없는 놈이네?'
문제는 차우진이 꺼낸 이야기다. 확인은 해야 한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용한 곳으로 옮기죠."
두 사람은 식당을 나와 조금 걸었다. 길가에 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다.
백희선이 휴대폰을 나무 사이에 끼워놓으며 말했다.
"휴대폰은 이 근처에 두고 따라와요."
"무슨 의도로 그러는지는 알겠는데."
차우진이 등 뒤로 손가락을 향했다. 멀리서 백희선의 비서가 따라오고 있었다.
"저 친구는 내 휴대폰 근처로도 안 왔으면 좋겠군요."
"그거야 당연한 매너죠. 내 비서는 양아치가 아니에요."
백희선이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 공터에 도착한 후에 가방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도청장치 탐지기예요."
탐지기에는 빨간색 LED가 켜져 있었다.
"이렇게 빨간색이 되면 주변에 도청장치가 있거나, 아니면 녹음기, 그것도 아니면 비슷한 전자장비가 있는 거예요."
차우진이 주머니에서 소형 블루투스 이어폰을 꺼냈다.
"이런 거?"
"부숴요."
"쯧. 이거 신상인데."
차우진이 이어폰과 케이스를 바닥에 던지고 발로 밟았다. 작은 블루투스 이어폰이 부서졌다.
백희선의 상자형 탐지기 불빛이 파란색으로 바뀌었다.
백희선이 말했다.
"이제 진짜 이야기를 해보죠. 김상훈이 약을 했다? 그래서요?"
"꽤 좋은 약이더군요."
"나는 모르는 일이에요. 그래서요?"
"그걸 공급받고 싶은데."
"약국에 가봐요."
"물량이 많이 필요해서."
그녀의 눈이 가늘어졌다.
"약을 직접 하려는 게 아니군요?"
차우진이 어깨를 으쓱했다.
"당연히 팔려는 겁니다만? 알아보니까 공급자가 백 이사님이더군요."
백희선이 눈빛이 사나워졌다.
"그런 소문, 어디서 들은 거죠?"
이럴 때는 상대가 믿을만한 근거를 대야 한다.
"최 기자의 입이 싸더군요."
백희선의 목소리가 커졌다.
"최 기자 누구! 대한민국에 최 기자가 한두 명이야?"
"이거 왜 이러시나? 당연히 용구 이야기지."
백희선이 이를 갈았다.
"그 멍청한 새끼가!"
차우진이 씩 웃었다.
"그러게 친구는 잘 사귀셨어야지."
백희선이 사납게 말했다.
"그 새끼는 내 친구가 아니야!"
"그럼 동업자를 잘 고르던가."
"동업자도 아니라고! 나팔이나 불라고 있는 놈이라고!"
차우진은 화를 내는 백희선을 보며 피식 웃었다.
"뭐, 나야 최 기자가 백 이사님의 동업자든 나팔수든 상관없습니다. 물건만 충분히 받을 수 있으면 되니까."
백희선이 숨을 고른 후에 물었다.
"용케 나에 대해 알아내긴 했는데, 나랑 거래하려면 돈 많이 들어요. 돈은 있으시고?"
차우진이 통장을 네 개 꺼냈다.
"이거면 어떨까 하는데?"
그녀가 비웃었다.
"이런 장사 안 해봤어요? 통장에 돈 넣어놨으니 꺼내 가라? 뭐로? 계좌이체? 그렇게 약장사 하는 사람도 있나?"
"이거 다 증권 계좌 통장입니다."
"그래서요?"
"여기에 라이프레인 제약의 주식이 들어 있습니다."
백희선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뭐?"
"이 정도 물량이면 경영권 싸움을 할 때 한 손 거드는 정도는 될 겁니다."
그 주식은 차우진이 산 게 아니다.
그건 상칠파 두목 천상칠이 가지고 있던 차명 증권 계좌의 통장이다.
천상칠은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만든 차명계좌로 라이프레인 제약의 주식을 사들였다. 조직의 기존 자금은 물론이고 마약을 판 돈도 털어 넣었다.
차우진이 그 계좌에 들어 있는 라이프레인 제약의 주식을 먹을 수는 없다. 자금 출처를 밝힐 수 없어서다.
대신에 이렇게 이용할 수는 있다.
차우진이 백희선에게 통장을 흔들어 보이며 물었다.
"어떻게, 관심이 있으신가?"
"그거 어디서 났어요?"
"주식은 당연히 돈 주고 샀습니다만?"
천상칠의 비밀 금고에서 가져왔다.
그녀의 눈동자가 번들거렸다. 혀가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핥았다.
그녀가 물었다.
"대가로 원하는 건?"
"레드 크리스털의 안정적인 공급."
백희선이 도청기 탐지장치를 힐끗 보았다. 파란불이었다.
"천 사장이 받던 것처럼?"
"그거랑은 달라야 하는데."
"그게 무슨…."
"백 이사님이 공급하면 천 사장이 팔던 옛날 시스템? 그것도 좋은데…."
차우진이 씩 웃으며 물었다.
"그 약을 백 이사님이 직접 만들었습니까?"
"알려줄 수 없어요."
"천 사장도 어디서 만드는지 대충은 눈치챘었나 보던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요."
"천 사장조차 눈치챈 걸 내가 모르면 쓰나. 나도 생산자를 알아야 백 이사님에게 무슨 일이 생겨도 안정적으로 공급받지."
백희선이 짜증을 냈다.
"그런 조건을 내가 받아줄 거라고 생각해요? 천 사장한테도 그렇게는 안 해줬어."
"천 사장은 그냥 물건 떼어가는 사람이었지만."
차우진이 증권 계좌 통장 네 개를 흔들었다.
"난 이게 있으니까."
천상칠도 계획은 있었다. 라이프레인 제약의 주가 상승으로 이익을 보려고 차명계좌로 지분을 매집했던 게 아니다.
천상칠은 라이프레인 제약의 지분을 확보하면 백희선의 약점을 잡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조직의 자금을 다 쏟아부어 그 주식을 사들였다.
그 무기가 이제 차우진의 손에 들어왔다.
백희선은 갈등했다. 그녀는 저 계좌의 주식이 필요하다.
"그 주식, 깨끗한 거죠?"
"이거 전부 다 깨끗하게 세탁된 차명계좌인데, 백 이사님 소유로 바꾸려면 복잡한 절차가 필요할 겁니다. 그것까지 내가 해줄 순 없고."
통장만 보고 계좌가 진짜라고 믿을 수는 없다. 그렇지만 너무 먹고 싶은 미끼라서 무시할 수도 없었다.
그녀가 경고했다.
"그 계좌가 가짜라면, 당신 죽어요."
차우진이 피식 웃으며 통장 네 개 중 하나를 던져주었다.
백희선이 날아오는 통장을 잡아챘다.
차우진이 말했다.
"직접 꺼내서 확인해보던가."
백희선이 통장을 도로 던지며 말했다.
"이거 말고, 제일 왼쪽에 있는 거."
"백 이사님은 꼼꼼한 분이네."
차우진이 다른 통장을 던져주었다.
백희선이 그 통장을 받아서 열어보았다.
안에는 주식 계좌의 ID와 비밀번호가 적힌 쪽지, 차명계좌 명의자의 개인정보 등이 마치 책갈피처럼 끼워져 있었다.
백희선이 물었다.
"내가 이거 꺼내서 먹으면 어쩌려고?"
"그게 계약금이니까 마음대로 하시지. 물론 그걸 꺼내면 계약서에 사인한 거나 마찬가지라는 건 아실 테고."
그녀가 통장에 붙은 메모지의 ID와 비밀번호를 보다가 말했다.
"다시 연락하죠."
"내가 김상훈을 다시 보낼 테니까, 때와 장소만 전달합시다. 우리 사이에는 전화조차 오간 게 없어야 하니까."
"일하는 방식은 마음에 드네요."
공터에서 대화를 마친 두 사람은 차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오는 길에 각자의 스마트폰도 회수했다.
백희선이 물었다.
"당신 차는?"
"눈에 안 뜨이는 곳에 뒀습니다만?"
"나보다 더 철저한 분이네?"
차우진이 그녀의 차에 다가가며 말했다.
"튼튼한 차를 타시네."
"내가 사고로 죽으면 좋아할 사람이 많아서."
"좋은 판단이군요."
차우진이 차 문을 열어주었다.
백희선에 차에 타기 전에 말했다.
"걔한테 이틀 뒤 저녁 일곱 시에 찾아오라고 해요."
"딱 좋군요."
그녀가 뒷좌석에 앉았다. 차우진이 문을 닫았다.
백희선의 차가 출발했다.
***
백희선이 비서에게 물었다.
"그놈이 나 보고 있어?"
운전하던 비서가 룸미러를 힐끗 본 후에 대답했다.
"아닙니다. 사라졌습니다."
그녀가 뒤를 돌아보았다.
"벌써 갔다고? 빠르네."
"댁으로 모실까요?"
"아니야. 적당히 가다가 세워."
그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녀가 작은 소리로 혼잣말을 했다.
"내가 저걸 어떻게 믿고 해달라는 걸 다 해주겠어?"
차가 모퉁이를 돌아갔다.
차우진이 모퉁이 옆에서 나타났다.
"이제 어디로 가려나."
차우진은 백희선의 차 문을 열어주면서 자석식 위치추적기를 부착했다.
위치추적기가 조금 전에 백희선의 탐지기에 걸리지 않은 건, 휴대폰을 빼놓을 때 그 옆에 숨겨두었기 때문이다.
그 추적기는 위치 정보를 차우진에게 전송하는 방식이 아니다. 이동한 경로만 기록하는 방식이다.
위치를 전송하는 방식은 어딘가의 통신 서버에 정보가 남는다.
기록만 하는 장치를 쓴 이유는 또 있었다.
"블루투스 이어폰도 감지하는 탐지장치가 있으면, 전파 송신을 감지하는 장치도 있을지 모르지."
도청 정보를 전파로 전송하면 차에 붙여놔도 탐지될 수 있다. 하지만 차우진이 붙인 장치는 전파를 송신하지 않는다.
"단순 기록장치니까 자동차의 전자장비와 구분이 안 되겠지."
***
백희선이 길가에 차를 세워놓고 차우진에게 받은 계좌 정보를 이용해 증권사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그 정보를 확인하는 데 쓴 스마트폰은 대포폰이다.
"진짜로 들어 있네?"
그녀가 입맛을 다셨다. 증권 계좌에 상당한 양의 라이프레인 제약 주식이 들어 있었다.
"꽤 많아. 이만큼 모으려면 돈 많이 들었겠어."
차우진은 증권 통장을 네 개 가지고 있었다. 그중에 하나를 백희선이 직접 골라서 받았다.
"이런 계좌가 세 개 더 있으면…."
그녀는 배다른 오빠들과 경영권 싸움을 해야 한다. SL 제약이 본격적으로 공격하기 전에 대세를 결정지으려면 회사 지분이 필요하다.
"내 차명계좌에도 지분이 있으니까…."
백희선도 차명계좌를 가지고 있다.
회사 주식을 그녀 이름으로 직접 가지고 있으면 배다른 오빠들이 눈치챌 수 있다. 그래서 그녀는 마약으로 번 돈으로 회사 주식을 매집할 때는 차명계좌를 여러 개 이용했다.
그녀가 실실 웃었다.
"이 정도면 백재원이나 백재우에게 당하진 않겠는데?"
그러려면 차우진이 넘겨준 계좌부터 확실히 처리해야 한다.
그녀가 입술을 핥으며 말했다.
"남이 준 대포 통장을 믿을 순 없지. 이건 새 차명계좌를 만들어서 옮겨야겠다."
비서는 이미 중간에 내렸다.
그녀가 오늘 가야 할 곳을 결정했다.
"세르게이를 만나야겠어."
***
차우진은 위치기록장치만 차에 붙여두었을 뿐 백희선을 따라가지는 않았다.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백독거미가 내 조건을 받아줄 리는 없지만."
차우진이 아는 백독거미라면 생산자 정보를 남과 공유할 리 없다.
"그래도 주식은 탐나겠지. 나를 속여서 주식을 빼앗으려면 생산자와 작당하는 게 최선이니까."
백희선은 이틀 후에 사람을 보내라고 했다.
"백독거미가 오늘 밤이나 내일쯤은 타깃을 만나겠네."
122. 습격
차우진이 배를 만졌다.
"배고프다. 오늘 요리 맛있어 보였는데."
백희선을 상대로 분위기를 잡느라 그 요리에는 젓가락도 대보지 못했다.
"오늘은 미리 잘 먹어둬야 하는데 말이야."
스킬을 쓰면서 싸우면 체력이 크게 소모된다. 전투를 준비하려면 잘 먹어둬야 한다.
국수를 파는 포장마차가 보였다. 플라스틱 의자와 접이식 테이블을 밖에 내놓고 음식을 파는 곳이었다.
"탄수화물 좋지. 에너지를 빨리 만들 수 있으니까."
차우진이 빈자리에 앉아 국수 곱빼기를 주문했다. 김밥도 두 줄 시켰다.
잔치국수 곱빼기와 김밥 두 줄은 금방 나왔다.
"맛있겠…."
차우진이 국수를 먹으려다가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느껴졌다.
저 멀리서 곽수혁 팀장의 딸 곽민지가 걸어오는 게 보였다.
"앗! 진짜 아저씨다!"
곽민지가 후다닥 뛰어왔다. 차우진이 물었다.
"네가 왜 여기에 있냐?"
"오늘 저 앞에서 우리 드라마 촬영이 있었어요."
"아. 여기 상암동이지. 그게 저기였냐?"
드라마 '친구와 연인 사이'의 촬영 스케줄은 이메일로 전달받고 있다. 차우진은 이제 그 드라마에 참여하지 않는데도 스태프나 배우에게 가는 일정표가 꼬박꼬박 날아왔다.
"아저씨는요?"
"지나가다가 배고파서 들렀더니 하필 여기네?"
곽민지가 입맛을 다셨다.
"맛있겠다."
"너도 먹을래?"
"당연하죠! 아줌마! 여기 떡볶이부터 튀김 순대까지, 그리고 뭐 더 있어요? 그냥 쫙 다 주세요!"
곽민지는 촬영장에 놀러 온 학교 친구와 같이 가던 중이었다. 그 친구가 물었다.
"누구셔?"
"내가 잘 아는 아저씨. 우리 아빠랑 같은 회사 다녀."
"이렇게 막 얻어먹어도 돼?"
"괜찮아. 아저씨 월급 많이 받아."
"얼마나?"
"몰라."
차우진이 피식 웃었다.
"역시 이래야 곽민지이지. 근데 너 지금 누구한테 톡 하니?"
곽민지는 스마트폰을 손가락으로 두드리고 있었다.
"예지 언니요."
"이모가 아니라?"
"아. 왔다. 내가 알려줄 필요도 없었네."
정예지가 차우진이 있는 곳으로 성큼성큼 다가와서 따지듯이 말했다.
"이모라니! 민지랑 나랑 몇 살이나 차이 난다고!"
"미성년자와 성인의 차이?"
"내가 우진 오빠보다 훨씬 젊은데! 고마운 줄 알아야죠!"
"고맙다니? 뭘…."
그녀가 차우진의 앞자리에 털썩 앉으며 말을 돌렸다.
"근데 왜 여기서 이런 거 먹어요?"
"배고파서?"
"나한테 전화했으면 내가 근사한 저녁 샀을 텐데."
"이거면 충분히 근사합니다."
그녀가 걱정했다.
"진짜 밥은 먹고 다녀요?"
"배 보면 알 텐데."
"요즘 좀 들어갔던데."
"그래서 걱정입니다."
"그걸 왜 걱정하는데! 보통은 안 들어가서 걱정하는데!"
스킬을 쓰거나 전투를 겪으면 체력이 빠진다. 두 가지를 동시에 쓰면 배가 좀 들어갈 정도로 체력이 심하게 소모된다.
차우진이 배를 만졌다.
"여기에 체력을 저장하는 중이라서."
"그런 거 저장하지 말아요!"
"근데 여기 앉으면 뭐라도 시켜야 합니다."
정예지가 메뉴판을 쭉 보았다.
"난 드라마 스케줄 중이라서 함부로 먹으면 안 돼요."
"민지는 먹는데?"
곽민지는 입술에 빨간 양념을 묻힌 채로 음식을 삼키듯이 먹고 있었다.
"쟤는 고딩이잖아요. 조금 통통해져도 귀엽게 보니까 괜찮아요."
"그래서 아무것도 안 먹을 겁니까?"
정예지가 메뉴판을 살펴보다가 말했다.
"닭똥집이 있네? 난 저것만 먹어야겠다. 뭐해요? 시켜줘요."
"내가?"
"오늘은 우진 오빠가 산다던데요? 그래서 뛰어왔어요."
"민지가 톡으로 뭘 보내나 했더니."
차우진이 닭똥집을 주문한 후에 말했다.
"소주 없이 먹으면 심심하겠네."
"내일도 촬영이 있는데 소주라니! 왜 다른 좋은 방법 다 놔두고 이딴 식으로 유혹하는데!"
"그만 놀려야겠다."
정예지가 음식을 기다리며 물었다.
"근데 진짜로 왜 여기 있는 거예요?"
"뭘 좀 기다리느라?"
그녀가 활짝 웃었다.
"어머. 나 기다렸어요? 말을 하지!"
"그럴 리가."
***
백희선의 목적지는 경기도 외진 곳에 있는 작은 2층 건물이었다. 그녀는 건물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차를 세웠다.
사무실로 쓸 것처럼 생긴 그 건물의 주변에는 담장이 높게 세워져 있었다.
백희선이 대포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나와."
- 어디로?
"나와보면 알아. CCTV에 안 찍히는 곳이니까 안에서 찾으려고 하지 말고."
건물 정문이 열리더니 남자가 한 명 나왔다. 그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백희선의 차를 발견하고 걸어왔다.
"여어. 백 이사. 여기는 어쩐 일이야?"
"세르게이. 나를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지?"
"흐흐. 당신도 나를 이름으로 불렀잖아."
"네 이름은 가명이잖아!"
"여기는 듣는 사람도 없는데…."
"평소에 조심해야 중요한 때 실수를 안 하는 거야!"
세르게이가 두 손을 들었다.
"알았으니까 진정하라고. 오늘따라 더 까칠하네. 무슨 일이야?"
"새로운 약장수가 나타났어."
세르게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천상칠 사장이 죽었으니까 약을 팔 사람이 필요하긴 하지. 믿을만한 사람이야?"
백희선이 사납게 말했다.
"이 바닥에 믿을만한 사람? 그런 놈이 존재한다고 생각해?"
"난 당신은 믿는데?"
"너도 지금 거짓말을 하잖아."
세르게이가 어깨를 으쓱했다.
"우리는 상호이익관계로 꽉 물려 있으니까 믿는 거지. 알잖아. 당신이 망하면 나도 망하는 거. 그래서 믿는다는 뜻이야."
"그래. 계속 그렇게 가자."
세르게이가 물었다.
"그래서 새로운 약장수는 누구야?"
백희선이 인상을 찌푸렸다.
"몰라."
"어?"
"그쪽에서 먼저 접촉해왔어."
이번에는 세르게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정체가 노출됐나?"
"경찰은 아니야. 그건 걱정하지 마. 지하세계 느낌이 강하게 나는 놈이야."
"천 사장처럼?"
"맞아. 천 사장과 관계있는 연줄을 타고 접근했어."
"그래? 음…. 그런데 왜 나를 찾아온 거야? 당신은 그런 거 나랑 의논 안 했잖아."
"새 약장수가 너를 만나고 싶어 하니까."
세르게이가 의심했다.
"한국인 맞아? 나처럼 외모만 한국인인 중국이나 일본 조직 아닐까?"
"너처럼 발음에 외국 억양이 섞이진 않았어."
"그걸로 어떻게 알지? 난 거절한다. 그놈과 거래하는 건 너무 위험해."
백희선이 히죽 웃었다.
"쓸데없는 걱정은. 나도 그놈을 약장수로 쓸 생각은 없어."
"어?"
"갑자기 나타난 놈을 내가 어떻게 믿고 거래해?"
"그럼 나한테는 왜 그놈을 만나라는 거야?"
"그놈을 만나서 내가 원하는 걸 받아내야지. 그러려면 그놈을 속여야 해."
세르게이가 실실 웃었다.
"역시 당신은 대단해. 필요한 것만 빼먹자는 거군."
"뒤탈이 안 나려면 우리가 가진 힘도 보여줘야 해."
"천 사장에게 했던 것처럼?"
"그렇지."
"애들 다 데려가야겠군. 접선이 언제야?"
백희선은 차우진에게 이틀 뒤에 보자고 말했다.
"이틀 뒤. 그때까지 애들 확실히 준비시켜."
"준비는 항상 되어 있지."
세르게이가 뒤를 가리켰다.
"우리 애들은 모두 총이 있거든."
백희선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래. 내가 원하는 게 바로 그거야."
***
차우진은 곽민지와 친구에게는 떡볶이를 사고 정예지에게는 닭똥집을 샀다.
차우진과 곽민지는 배부르게 먹었다.
정예지가 닭똥집을 조금 먹은 후에 제안했다.
"집에 데려다줄게요."
곽민지가 말했다.
"앗! 진짜요? 고맙습니다!"
"응? 너도?"
"앗! 저는 끼면 안 되는 자리군요? 우리는 지하철 타고 갈게요!"
차우진이 말했다.
"비슷한 방향인데, 같이 갑시다."
"쳇. 알았어요."
정예지는 곽민지와 친구까지 차에 태웠다가 집 근처에 내려주었다. 그런 후에 차우진의 아파트로 이동했다.
그녀가 차에서 내려 아파트를 보며 말했다.
"흐응. 여기 사는구나."
"눈빛이 수상한데?"
"아니에요. 갈게요. 히히."
"웃음은 더 수상한데…."
차우진이 아파트 정문을 지나 집으로 들어갔다.
"의도하지 않았는데, 예지 씨를 만나서 알리바이가 추가됐네."
차우진은 일단 집에 들어갔다가 나왔다. 차유리는 오늘은 야간 근무라 집에 없었다.
이번에도 들어갈 때는 CCTV 앞을 지나가고, 나올 때는 공간이동 스킬로 CCTV를 피했다.
***
백희선은 집으로 향했다.
이미 밤이 늦었다. 그녀의 집은 대로변이 아니라 왕복 2차선 도로 안쪽에 있었다. 그 시간에는 그 도로를 통행하는 차가 거의 없었다.
집에 도착하기 전에 차가 신호에 걸려 정차했다. 그렇게 잠시 서 있던 차가 다시 출발했다.
차우진이 도로 옆에서 나타났다. 손에는 백희선의 차에 붙여두었던 위치추적기가 있었다. 방금 차가 정차했을 때 떼어낸 것이다.
차우진이 위치추적기의 GPS 데이터를 공기계에 옮긴 후에 백희선이 오늘 밤에 이동한 경로를 확인했다.
"경기도에 머물다 왔네? 이 시간에 굳이? 거기서 누구를 만났으려나. 레드 크리스털을 만드는 놈이면 좋겠는데."
***
차우진은 백희선의 차가 오래 멈춰 있던 경기도 지역으로 이동했다.
목적지에는 담장으로 둘러싸인 2층 건물이 있었다.
"백희선이 나랑 만난 후에 여기로 왔다는 건, 내가 원하는 놈을 이틀 뒤가 아니라 오늘 당장 만났다는 소리인데."
왜 그랬는지 짐작은 갔다.
"역시 백독거미. 강탈할 생각만 있고 거래할 생각은 없구나."
당연히 차우진도 백희선과 거래할 생각은 없다.
차우진이 건물 정문을 보았다. CCTV가 달려 있었다. 건물 외부에도 CCTV가 보였다. 창문은 모두 블라인드가 내려져 있었다.
건물 벽에 설치된 CCTV 때문에 담장 너머로 공간이동을 하는 건 어려웠다. 넘어가는 게 문제가 아니라, 갑자기 나타나는 모습이 CCTV에 찍히는 게 문제다.
"조용히 침투할 루트를 찾…."
갑자기 유리창이 박살 나며 작은 폭발이 일어났다.
"저건 내가 한 게 아닌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