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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공인 마스터급 해결사 (4)

160화. 정부공인 마스터급 해결사

한편, 장각과 맞부딪친 노리스는 지금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쿠콰콰쾅!

쩌저적!

자신의 거력이 담긴 공격이 지상을 초토화시키며 휩쓸었지만, 정작 이 공격을 받아내는 장각의 움직임은 표홀하기 짝이 없다.

정면 공격은 모조리 피하면서 기회를 노리고, 그 기회를 역으로 노린 공격도 가볍게 받아내거나 흘리고 있다.

때론 서로에게 치명적인 공격이 오가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오히려 물러서는 건 노리스였다.

살을 주고 뼈를 취하는 공격을 넘어선 동귀어진에 가까운 수였는데, 뭔가 그대로 놈의 수에 어울리기엔 꺼림칙한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동귀어진으로 서로 치명적인 손상이 가해지더라도, 자신은 회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 말이다.

그 알 수 없는 꺼림칙함이 공방을 길어지게 만들었고, 아직도 백중세의 호각을 이루고 있는 이유기도 했다.

콰드드득!

쾅!

또 한 번의 치명적인 공격이 서로를 노렸다.

터져나간 콘크리트 먼지를 뚫고 백색으로 물든 노리스의 칼날이 장각의 머리를 노렸지만, 기다렸다는 듯 머리를 틀고 양손을 내뻗는다.

이대로라면 노리스의 칼날이 장각의 머리 절반은 날려버릴 수도 있었지만, 반대로 검게 물든 장각의 양손도 노리스의 가슴을 꿰뚫는다.

노리스는 하는 수 없이 검로를 변경해 놈의 머리가 아니라 목을 노렸고, 미묘하게 틀어진 검로는 장각의 양손에 막혀 튕겨 나갔다.

'칫! 변방에서 약탈이나 하던 놈이 이리 강하다니?'

그새 거리가 벌린 장각을 노려본 노리스가 이를 갈았다.

강현재도 그렇고, 저놈도 그렇고, 어떻게 이런 놈들이 기다렸다는 듯 한꺼번에 튀어나왔단 말인가?

지난 수십 년간 전설입네, 마스터네 하는 놈들을 숱하게 봤지만, 결코 이 정도 수준은 존재하지 않았다.

문제는 저놈뿐만이 아니었다.

노리스가 빠르게 주변 상황을 살폈다.

경호대와 장각을 지키던 금천교 나부랭이들의 전투가 서서히 한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경호대의 열세로.

이해할 수 없었다. 셀리케 경호대의 장비는 세계 최고 수준. 일개 반군 따위와 비교할 수준이 아니었다.

그런데 놈들의 장비 역시 경호대와 비교해서 크게 밀리지 않았다.

'군사 기지라도 턴 건가?'

하지만 그래도 이해가 안 되는 건 마찬가지다.

이들이 준동한 기간은 짧다.

전투 안드로이드야 바로 사용할 수 있더라도, 군용 사이버웨어의 임플란트는 다른 이야기다.

임플란트 수술을 하고 적응하는 데만 최소 3개월은 잡아야 한다.

게다가 지금도 꾸역꾸역 놈들의 병력이 충원되고 있다.

아무리 적진 한가운데라지만, 이 정도로 여유가 있다고? 시 방위군과 맞붙는 전선이 몇 갠데······.

'시간을 더 끌 순 없다.'

자신은 몰라도 이대로라면 경호대가 전멸한다.

아무리 경호대가 정예병력이라지만 비슷한 수준의 장비로 쏟아붓는 물량엔 장사가 없다. 이놈들을 키우기 위해 공들인 시간이 얼마던가?

'······하는 수 없군. 무리를 해서라도 돌파하는 수밖에.'

노리스의 가슴팍에서 빛무리가 뿜어졌다. 출력을 제한했던 코어의 제한을 해제하고, 한계까지 출력을 끌어올린다.

지금껏 은은하게 빛나던 코어에서 눈이 멀 정도의 강렬한 빛이 터져 나왔다.

서서히 저물던 태양으로 그림자가 늘어지던 전장이 한순간에 백광으로 물들었다.

'쯧! 한소리 듣겠군.'

마음에 들진 않지만, 코어의 관리는 유혜리의 소관이다.

그녀는 위험 상황이 아닌 한 절대 출력제한은 건드리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었다.

코어에 손상이 가면 고치거나 새로운 코어로 교체해야 하고, 그건 또 천문학적인 비용이 깨지니까.

'그래도 장각의 머리를 가져가고, 이놈들을 죄다 쓸어버리면 내게도 명분이 있지.'

노리스의 입꼬리가 섬뜩하게 올라갔다.

마침내 코어의 출력이 100%에 도달했다.

온몸에 차오르는 고양감. 안에서부터 끓어오르는 강력한 에너지.

라이다 센서의 범위가 수 킬로 단위로 확장되고, 그 안을 움직이는 모든 움직임이 데이터로 변환되어 입력된다.

지금 이 순간, 이 구역의 지배자는 자신이었다.

그런데 그때.

"좋은 물건을 가졌군. 그게 셀리케 기술의 총아인가?"

마주하는 장각의 눈빛에서 요사스러운 기운이 감돈다. 검게 물든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붉은빛을 띠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어찌 보면 여유마저 느껴지는 모습이다.

그 모습에 노리스의 입매가 비틀렸다. 저 낯짝에 떠오른 여유가 얼마나 갈지 궁금하군.

"크큭! 그래. 네놈들을 피떡으로 만들어줄 좋은 물건이지!"

비릿한 웃음을 터트린 노리스가 발을 굴렀다.

거대한 힘이 잡아끌기라도 한 것처럼 일직선으로 쇄도한다.

그의 움직임은 빛과 같았다. 눈으로도 쫓기 어려울 정도의 속도로 치닫는다.

마침내 달려드는 궤적 뒤로 거대한 소닉붐이 일었다. 공기를 찢는 파공성이 주변을 휩쓴다.

음속 돌파.

코어의 한계 출력에 도달한 노리스의 움직임이 음속을 넘어선 거다.

그리고.

콰아아앙―――!

노리스와 장각이 맞부딪쳤다.

공간이 터져나가는 폭음. 이윽고 불어닥친 어마어마한 충격파에 주변 건물들의 창문이 와장창 깨진다. 산산이 조각난 유리 파편이 폭죽처럼 쏟아졌다.

어스름한 석양의 빛을 머금은 유리 파편은 마치 신의 축복이 대지를 쓰다듬는 것처럼도 보였다.

하지만.

쿠쿠쿠쿵!

지이잉! 콰쾅!

쩌적! 쩌저저적!

본격적으로 맞부딪친 장각과 노리스의 격돌은 축복보단 재앙에 가까웠다.

이제껏 나눴던 공방만으로도 도로의 콘크리트가 뒤집어지고 건물의 외벽이 허물어질 정도였는데, 지금의 격돌은 건물이 통째로 금이 가고 흔들릴 정도였다.

콰콰쾅!

우르르르!

마침내 버티지 못한 5층짜리 빌딩이 무너져내렸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먼지를 뚫고 하늘로 떠오른 둘이 다시 격돌한다.

서로 쫓고 쫓기고. 격돌하고 피하고. 허수의 허수를 놓으며 단 한 번의 치명적인 공격을 노리는 천외천의 격돌.

이쯤 되자 둘 다 인간은 아득히 벗어난 수준이었다.

그리고 다시 지상으로 떨어져 내린 둘 중 먼저 회심의 수를 쓴 건 장각이었다.

콰득!

목을 노리며 찔러오는 칼끝에 손바닥을 내밀었다. 날카로운 칼날은 꼬치를 꿰듯 그대로 손바닥을 꿰뚫었다.

그런데 장각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그대로 꿰뚫린 손과 함께 오히려 노리스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기다란 칼날을 타고 꿰뚫린 손바닥이 칼날과 손잡이의 경계인 가드를 움켜쥐었다.

한 손을 희생해 칼을 봉인한 거다.

그 순간 장각의 반대쪽 손이 득달같이 쇄도했다. 노리스의 안면을 노리는 공격.

하지만 노리스도 바보가 아니다.

이미 장각이 손을 희생해 칼의 움직임을 봉쇄했을 때부터 대비하고 있었다.

쿠쿵!

노리스의 왼팔이 장각의 공격을 막았다.

한순간 서로의 양팔이 얽힌 채 마주한 상황.

그때 장각이 내뻗은 손을 그대로 펼치며 노리스의 왼손을 움켜쥐었다.

이렇게 되자 서로 양손을 마주 잡은 형태가 됐다.

노리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놈! 이 몸과 힘 싸움을 해보겠다는 거냐?"

"자신 없나 보지?"

"건방진! 갈가리 찢어주마!"

분노를 터트린 노리스가 몸을 밀어붙였다. 마주 잡은 왼손은 물론이고, 칼의 움직임이 봉쇄된 오른손까지.

지이이잉!

사이보그의 거력이 투사된다. 사이버네틱스 코어에서 솟아난 에너지가 고스란히 양팔에 집중된다. 지금의 힘이라면 산조차 뽑아 움직일 수 있는 역발산기개세였다.

그런데.

쉬시시싯!

마주 잡은 팔을 타고 시커먼 무언가가 넘어온다. 순식간에 뱀처럼 양팔을 휘감더니 위로 전진했다.

"무, 무슨 개수작이냐!"

알 수 없는 기현상에 급히 뿌리치려 했지만, 마주 잡은 양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당황한 노리스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장각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네 물건은 내가 잘 써주마."

그 순간 양팔을 휘감았던 시커먼 기운이 노리스의 상체까지 휘감았다.

똬리를 튼 뱀처럼 빙글빙글 돌던 머리가 이윽고 노리스의 가슴 중앙. 사이버네틱스 코어로 빨려 들어갔다.

"멍청한! 자살이라도 하려는 거냐!"

노리스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장각이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건지는 몰라도, 이거 하나는 확실했다.

한계 출력까지 휘도는 코어를 방해해 불안정상태로 만드는 순간, 코어의 에너지는 폭발할 거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 에너지의 폭발은 자신과 장각. 주변의 금천교도와 경호대들마저도 집어삼킬 거대한 폭발이 될 거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거야 두고 보면 알겠지."

그런데 오히려 장각은 지금 이 상황을 즐기기라도 하는 듯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죽으려면 너나 죽······!"

노리스가 뭐라고 더 말을 하려는 순간.

쿠쿵!

체내 사이보그 시스템이 하나씩 다운되며 감각이 흐트러지기 시작됐다.

시야가 흐려지고 혼란스러운 전투소음이 점점 적막으로 빠져들었다.

그렇게 멀어지는 감각 속에서 노리스가 마지막으로 떠올린 존재는······.

'······서둘러라, 소드마스터!'

강현재였다.

* * *

"후우······."

나는 몰려드는 안드로이드들을 모조리 분쇄한 이후 짧게 한숨을 내뱉었다.

「제로의 영역」 2단계 레벨.

공간 절단. 「섬광의 지평선」.

단 한줄기의 검기가 공간을 가로질러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비기.

대규모 광역공격답게 장갑차를 가를 정도는 안 되지만, 안드로이드들의 방호쯤은 간단히 갈라낸다.

"이곳은 얼추 정리됐나?"

EMP가 주변을 휩쓸면서 기존 적들의 병력 대부분이 쓰러졌고, 추가로 투입되던 병력들도 없앴다.

아마 이곳이 적진 한복판이라도 당장에 투입될 수 있는 병력은 한정적일 거다.

전투는 이곳뿐만 아니라 노리스가 끌고 간 장각과도 벌어지고 있었고, 무엇보다 전선의 전투도 끝나지 않았으니까.

"증원군이 슬슬 올 때가 됐는데······."

이번 작전의 순서는 간단했다.

1. 나와 친위대가 금천교의 머리를 친다.

2. 머리가 떨어져 지휘체계가 흐트러진 금천교를 시 정부 방위군이 와서 쓸어버린다.

1번은 절반은 성공했고, 노리스 역시 어렵지 않게 성공할 거다. 장각이 장보와 장량의 수준 정도라면 말이다.

그럼 2번만 기다리면 된다. 엉덩이 무거운 방위군 특성을 고려하더라도, 그렇게 오래 걸리진 않을 거다.

나는 서서히 정신을 차리고 있는 친위대 병력에 다가갔다.

"이봐. 다들 상태가 어때?"

나도 EMP의 후유증에 대해서 이론적으론 알고 있다. 우리가 흔히 게임으로 알고 있는 EMP와 실제 EMP는 차원이 다르다는 걸.

펄스화된 전자기파는 전자장비의 핵심부품을 녹여버릴 정도로 강력했고, 그건 사이버웨어를 둘둘 말고 있는 친위대 병력이라면 더 정도가 심할 터였다.

하지만 이론상 알고 있는 것과 현실은 또 다른 법.

아직도 나자빠져 있는 금천교도들과 달리 얼추 회복한 이들의 상태를 봤을 때, 생각보다 최악은 아닐지도 몰랐다.

비척거리며 몸을 일으킨 친위대원들은 내가 다가오자 멍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어, 어어······?"

"소, 소드 닥터?"

"······?"

으음.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는군. 그냥 정신만 간신히 차린 상태라는 건가?

"아직 정상은 아닌가 보군. 그럼 시 방위군이 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려라."

"어, 어디를 가시려고······?"

"노리스에게 가봐야지. 시간을 끌 필요는 없지 않나?"

"그, 그럼 저희도 가겠습니다! 적진에선 함께 움직이는 게 덜 위험······"

"아니. 나를 걱정해주는 건 좋은데,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 너희 생각보다 멀쩡하니까."

"에? 그, 그게 아니라 저희가 위험······."

나는 고개를 젓고 땅바닥을 나뒹굴고 있는 장보의 머리를 가리켰다.

"그냥 저기 증거만 챙기고 기다려라. 너희 상태를 보아하니 괜히 움직였다가 사상자가 나올 것 같아."

"아, 아니. 그것보다 우리가 위험하단······"

눈을 동그랗게 뜬 녀석이 곤란한 표정으로 무언가 중얼거리려는 그 순간.

나는 표정을 굳힌 채 고개를 돌렸다.

"······."

저 멀리서 본능을 자극할 정도로 강렬한 기운이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온몸의 솜털이 곤두설 정도로 소름 끼치고 꺼림칙한 기운.

'각성자?'

미간이 일그러진다.

아니다. 이건 각성자가 내뿜는 포스와는 궤를 달리했다.

포스이되, 포스가 아닌 기운.

이것저것 뒤죽박죽 뒤섞였으며 안정되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주변의 모든 걸 집어삼킬 살기로 가득했다.

"끄, 끄으윽!"

"이, 이게 무슨······ 우웩!"

간신히 EMP의 영향에서 벗어났던 경호대원들이 구역질을 하고 다시 바닥에 주저앉을 정도로 지독한 살기.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이 기운이 몰려온 곳을 노려봤다.

'그래. 어디서 느껴봤나 했더니······.'

기억이 떠올랐다.

너무 잠깐이고, 기운보다 그 외형이 더 충격이라 바로 떠올리지 못했을 뿐이다.

이 불안정하고 강렬하며 모든 걸 파괴시킬 정도의 살기와 탐욕으로 가득했던 생명체.

'······로보 테크니카.'

바로 로보 테크니카의 화물창고에서 목격했던 알 모양 생명체의 기운이었다.

'생각보다 일이 복잡해질지도 모르겠군.'

미간을 찡그린 나는 그대로 몸을 뽑아 올렸다.

무난히 노리스가 이길 거라는 예상은 장각이 장보나 장량과 비슷한 수준이라는 전제다.

하지만 로보 테크니카의 정체불명의 기술. 이브가 말했던 '기계 생명체'의 흔적이 끼어든다면 말이 달라진다.

* * *

「우리 척씨 가문은 지난 천 년간 검맥이 끊긴 적 없었다. 네가 가문을 이어야 한다.」

······이게 무슨 일이지?

여긴······ 어디?

「노리스. 성장했구나. 척씨 가문의 후계자는 네가 될 것이다!」

「대륙제일검 후보에 올랐다고? 장하다! 역시 내 아들답구나!」

아, 아아······.

「보아라. 이게 네 동생이다.」

「미안하다. 적자 계승의 원칙으로 이 시간부터 척씨 가문의 후계자는 네 동생이다.」

······아버지.

「비천한 서자 주제에 아직도 욕심을 놓지 못하느냐! 정녕 피를 봐야 정신을 차리겠느냐!」

······왜 그러셨습니까?

「키워준 은혜도 모르는 짐승 새끼······ 이래서 출생 성분은 숨길 수가 없는 것인가!」

「끄, 끄윽······ 내 죽어서도 어찌 조상님의 낯을 뵌단 말인가?」

「천 년 세가가 부모를 잡아먹은 괴물 하나로 인해 멸문하는구나······」

그러게 왜 나를 괴물로 만드셨습니까?

······.

「안녕? 네가 사이보그 프로젝트의 지원자라지?」

「반가워. 나는 유혜리야. 너를 인간 그 이상의 무언가로 만들어줄 사람이지.」

유혜리······.

나를 지옥에서 건져낸 것도. 다시 벼랑 끝으로 떨어뜨린 것도.

전부 그녀였다.

온몸이 침전된다.

저 아래, 바닥 끝. 무저갱의 어둠 한가운데로.

'드디어 죽는 건가?'

어느 순간부터 노리스도 깨달았다.

지금 자신은 아주 오래된 기억의 파편들을 거닐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이게 흔히 말하는 죽기 직전에 스쳐 지나가는 압축된 인생의 기억. 즉, 기억의 파노라마라는 것도.

'나쁘지 않은 인생이었다.'

서서히 멀어지는 의식 속에서 노리스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좋은 인생을 살았다고 말할 순 없지만, 완전 최악의 삶을 산 것 또한 아니었다.

천상에서 나락으로, 지옥 아래에서 다시 찬란한 지상으로.

자신의 인생은 롤러코스터였으니, 나쁜 것과 좋았던 것을 합치면 딱 평범한 인생이었다.

그렇게 모든 소음이 멀어지고, 기억의 말소리도, 의식도. 모두 바람결에 속삭인 약속처럼 흩어지려는 순간.

아득히 먼 곳에서도 확연히 구분되는, 특유의 재수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팔자 좋군. 누워있을 여유도 있고."

정부공인 마스터급 해결사 (5)

161화. 정부공인 마스터급 해결사

찬물을 확 끼얹은 기분이다.

어둠 속으로 흩어지던 정신이 단번에 깨어나기 시작한다.

의식의 불이 켜진 순간, 시스템이 구동된다. 아득했던 소음들이 다시 들려오고, 사라졌던 감각들이 하나, 둘 되돌아왔다.

[Operating System ON]

[Senses Controller Boot]

[Cybernetics Core Stabilization]

[System Level 5: Allow]

[MN:Cellique Biotech Cyborg 1144]

이윽고 눈앞에 떠오르던 수많은 문자열이 사라지고 시야가 정상을 되찾았다.

그런 그의 시야에 먼저 들어온 건, 조금 전까지 숨소리가 들려올 거리에서 공방을 펼쳤던 장각이 아니었다.

저물어가는 석양을 등진 채,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흑발흑안의 사내.

강현재였다.

* * *

나는 노리스와 장각을 찾아 몸을 띄웠다.

얼마나 거창하게 싸워댔는지, 그 둘을 발견한 건 처음 격돌이 벌어졌던 곳에서 4블록이나 떨어진 곳에서였다.

그런데 상황이 심상치 않다.

'저건······?'

마주한 상태로 온몸이 흑화된 채 무릎을 꿇고 있는 노리스.

누가 봐도 어떻게 된 상황인지 이해가 되는 장면에, 나는 생각할 것도 없이 장각을 향해 날아들었다.

갑작스럽게 등장한 나를 발견한 장각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내뻗은 칼.

그곳에서 응축된 푸른빛이 터지듯 뿜어져 나왔다. 맹렬한 기세로 쇄도한 검기가 단번에 장각의 머리통을 부술 듯 내리꽂혔다.

그러자 놈의 몸에서 검은 기운이 폭발한다. 거대한 해일처럼 일어난 기운은 그대로 검기와 격돌했다.

콰쾅!

두 에너지의 격돌은 충격파를 만들었다. 폭탄이 터져나간 듯 주변을 휩쓸었다.

나는 사방으로 뻗어 나가는 충격파를 뛰어넘었다. 검은 기운이 정확히 어떤 에너지인 줄은 몰랐지만, 검기를 향해 쏘아진 순간부터 충격파를 대비했다.

덕분에 나는 충격파 너머 장각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쾅!

또 한 번의 폭음.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검은 기운이 마주 부딪친 게 아니라, 장각을 보호하듯 펼쳐졌으니까.

그때까지 노리스의 양손을 부여잡고 있던 장각이 버티지 못하고 물러섰다.

검은 기운은 의지라도 있는 것처럼 빨려들 듯 물러서는 장각을 따라갔다.

"······."

나는 장각을 경계하면서 노리스를 내려다봤다.

호랑이의 흉포함을 머금은 채 붉은빛으로 번쩍이던 사이버아이는 빛을 잃었다. 백광을 내뿜던 코어도 힘을 잃고 회색빛에 가까웠다.

그 오만하기 짝이 없던 사이보그가 이런 꼴이 되다니. 무엇보다 코어의 손상이 놀라웠다.

'사이버네틱스 코어의 에너지가 빛을 잃을 정도라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이 게임의 세계관에서도 사이버네틱스 코어는 치트성 존재에 가까웠다. 주먹 두 개 정도나 될법한 크기의 조그만 기계가 생산하는 에너지의 규모가 웬만한 발전소 못지않았으니까.

게다가 처음에 구동될 미량의 에너지만 존재한다면 스스로 자가발전을 하며 에너지를 생산했다.

오로지 빛을 사용해서만 말이다.

일반적인 에너지보존법칙에 위배되는 존재. 그게 사이버네틱스 코어다.

그런 에너지를 오롯이 혼자 사용하는 사이보그가 강한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런 사이보그를 외력도 아니라 내부에서부터 무너뜨리다니. 아니, 오히려 그랬기 때문에 이런 꼴이 됐으려나?'

조금 전 광경을 떠올렸다.

서로 힘겨루기를 하듯 서로의 양팔을 움켜쥔 둘의 승자는 누가 뭐래도 장각이었다. 그때 이미 노리스는 의식을 잃고 무릎을 꿇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겉보기와 다르게 그 싸움은 단순한 힘겨루기가 아니었다.

정확히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까진 모르겠지만, 장각이 다루던 검은 기운이 노리스의 전신에, 무엇보다 코어에까지 영향을 주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힘겨루기 상황에서 허를 찔린 건가? 그 검은 기운을 미리 보여주지 않고 숨겼더라면······ 충분히 당할 수 있을 여지가 있어.'

검은 기운은 무려 검기와도 상대한 에너지 집합체다.

그걸 보여주지 않고 서로의 손이 묶인 상태에서 사용했더라면······ 아마 손을 쓰기도 전에 당했을 가능성이 컸다.

'그래도 최악은 면한 것 같군.'

노리스를 내려다보던 나는 무던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팔자 좋군. 누워있을 여유도 있고."

꿈틀!

목소리를 듣기 무섭게 경련하듯 몸이 꿈틀거린다.

그 순간 텅 비어 회색빛으로 물들어있던 사이버아이에 서서히 붉은빛이 점등된다.

그렇게 홀린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나를 올려다보는 노리스를 마주봤다.

"그만 자고 일어나지?"

* * *

한편, 무방비 상태에서 검기와 격돌한 장각은 온몸을 찌르르하게 울리는 충격에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이게 무슨 개 같은 경우란 말인가!?'

조금의 시간만 더 있었더라면 저 깡통 사이보그의 에너지를 모조리 빼앗을 수 있었다.

게다가 사이버네틱스 코어는 단순한 에너지 공급장치가 아니었다. 그 자체가 저장장치와 연산장치까지 겸하고 있는 불가해의 산물이었다.

따라서 사이보그의 에너지를 모조리 흡수할 수만 있다면, 그가 가진 코어의 운용능력.

즉, 검술까지 갈취할 수 있었다.

만약 노리스의 검술과 코어의 에너지를 빼앗았더라면······

'시 정부와의 협상에 유리한 위치를 선점했겠지. 어쩌면 자치구를 받아낼 수 있을 정도로 말이야.'

지금 장각의 몸에 노리스의 검술과 코어의 무한에 가까운 에너지까지 합쳐진다면, 더는 무서울 게 없었다.

스스로 일인군단이 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갑자기 어디서 저런 놈이······?'

장각은 조금 전 충돌을 떠올렸다.

놈의 칼끝에서 뻗어 나온 미증유의 에너지.

그것 노리스가 사용했던 코어의 에너지와도 비슷했지만, 또 달랐다. 훨씬 정돈되고 집약된 에너지였다.

그렇다고 절대 코어의 에너지보다 못한 것도 아니었다.

이미 노리스를 상대하면서 코어의 에너지를 상상 이상으로 사용하는 걸 봤던 장각은 방심하지 않고 그 에너지를 막으려 했다.

코어를 먹어치우고 있던 자신의 능력, 블랙 이터(Black Eater)의 일부를 사용하면서까지 말이다.

'······하지만 놈은 그걸 우습게 막아내고 역습을 했지.'

오히려 두 에너지의 충격파를 이용해 자신의 허점을 찔러 들어왔다.

덕분에 거의 먹어치웠던 노리스의 코어에너지를 일부 토해내며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여기까지가 지금까지 상황이었다.

'대체 어디 숨어있다가 이제야 튀어나온······'

그리고 여기까지 생각이 이르자, 장각은 조금 전 신호가 끊겼던 둘째 동생이 떠올랐다.

'······설마?

장각이 강현재를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네놈······ 보를 어떻게 했느냐!"

안 그래도 EMP 쇼크 웨이브의 폭풍을 느꼈던 장각이다.

장보가 EMP를 사용했다는 건, 그만큼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갔다는 뜻.

그래도 걱정을 하진 않았다. 장보의 EMP가 얼마나 특별한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메가코프의 기술력이 뛰어나긴 하지만, 절대 장보의 EMP를 피해갈 순 없다. '그분'의 손길이 닿은 능력이니까.

그래서 처음엔 그 직후 불어닥친 EMP의 후폭풍으로 벌어진 단순한 전파방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저 칼잡이를 보니 생각이 달라졌다.

만약 EMP를 사용한 이유가 저 칼잡이 때문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칼잡이가 이 자리에 도착했다는 의미라면······.

으득!

장보가 당했다는 뜻이 된다.

"좋은 곳으로 보내줬지."

장각의 살기 어린 눈빛을 태연하게 흘려넘긴 강현재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그쪽 셋째한테."

"······뭐라고?"

셋째? 지금 셋째라고 그랬나?

"장량······이었던가? 그 덩치 큰 친구말이야."

"······!"

"지금쯤 둘째 형이랑 당신을 기다리면서 회포를 풀고 있겠군."

약을 올리듯 대답하는 그 말에 담긴 의미는 명확했다.

저 칼잡이에게 장보만 당한 게 아니다. 셋째인 장량도 당했다!

"네놈이······ 감히 우리 형제를······!"

장각이 분노를 토해낸다.

몸 안으로 스며들었던 검은 기운이 다시 폭발하듯 뿜어지며 장각을 검게 물들였다.

마치 검은색 전신 슈트를 입은 것처럼 변하던 장각이 씹어뱉듯 소리쳤다.

"네놈의 살점 하나! 피 한 방울까지 모조리 갈아 마셔주마!"

철컥!

이윽고 얼굴까지 검은 기운으로 뒤덮인 장각이 발을 굴렀다.

대포가 발사된 것처럼 튕겨나간 장각은 눈 깜빡할 사이에 강현재의 전면으로 쇄도했다.

내뻗은 양손으로 검은색 에너지 줄기가 넘실거렸다. 제멋대로 일렁이는 검은 기운이 끝이 뾰쪽한 채찍처럼 길쭉하게 늘어졌다.

쐐애애액!

정확히 그 끝을 강현재의 칼날이 찔렀다. 강현재의 칼날에도 어느새 푸른빛 검기가 일렁이고 있었다.

또다시 벌어진 두 에너지의 충돌.

하지만 이전과 같은 폭발이나 충격파가 없었다. 마치 쇠로 된 날붙이 두 개가 맞부딪친 것처럼 둔탁한 소음이 들렸다.

타탕!

그게 시작이었다.

서로의 힘과 의도를 가늠한 둘은 누구보다 빠르고 간결한 경로를 향해 서로의 목숨줄을 노렸다.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격돌하는 푸른색 검기와 검은색 기운. 그리고 그에 못지않게 고속이동을 해가며 상대의 공격을 피하고, 허를 찌르며, 배후를 점한다.

오로지 서로의 숨통만을 끊으려는 매섭고 날카로운 격돌.

이들이 스쳐 지나간 자리엔 날카로운 무언가에 베인듯한 길쭉한 자상과 뾰족한 무언가가 파고든 듯한 움푹한 창상으로 가득했다.

그건 대상을 가리지 않았다.

도로의 콘크리트건, 갓길에 주차된 차량이건, 쭉 뻗은 건물이건, 그들이 지나간 뒤에 남는 건 엉망이 된 현장뿐이었다.

그러다가 한 번씩 대기를 요동치게 하는 충격파가 터져 나올 때엔······.

쿠르르릉!

쩌저적!

반경 십여 미터가 모조리 쓸려나갔다.

그야말로 재앙의 강림이나 다름없었다.

* * *

노리스는 그 둘의 격돌을 보기만 했다.

마음 같아선 당장에 끼어들어 장각의 목을 베어버리고 싶었지만, 조금 전 겪었던 후유증이 아직도 가라앉지 않았다.

그의 주 에너지원인 코어가 불안정하게 날뛰었고, 지금 당장은 코어를 안정화하는 데에만 모든 신경을 쏟아야 했다.

스스로 폭탄이 되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물론 그러면서도 강현재와 장각의 격돌하는 장면은 빼놓지 않고 바라봤다.

'알고는 있었지만······ 지랄 맞게 강하군.'

강현재를 말함이다.

장각이 얼마나 말도 안 되게 강했는지 조금 전까지 직접 상대해본 입장이다. 100% 출력의 자신과도 호각. 아니, 결론만 놓고 보면 압도했던 장각이다.

그런데······.

'대체 인간이 맞긴 한 건가?'

강현재는 그런 장각을 오히려 밀어붙이고 있었다.

콰콰콰쾅!

파스스!

또 한 번 터지는 충격파.

건물 일부가 무너져내리며 먼지 폭풍이 사방을 뒤덮는다.

서로를 향해 찔러넣었던 수가 맞부딪치며 터져 나온 충격파일 테지만, 그 먼지 폭풍을 뚫고 급급히 물러서는 건 장각이었다.

자신과 마주하면서도 시종일관 묘한 수를 두던 장각이 물러서다니.

심지어 자신을 이 꼴로 만든 동귀어진의 수도 나오지 않았다.

서로 치명적인 각이 나와야 동귀어진이든, 살을 주고 뼈를 취하든 할 텐데, 애초에 그런 각조차 나오지 않으니까.

즉, 강현재는 말 그대로 검술과 체술에서 장각을 '압도'하고 있었다.

'나를 상대했을 땐 여유를 많이 남긴 거였군.'

셀리케 연구소에서 강현재와 칼을 맞댔던 기억을 떠올린 노리스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땐 서로 약간의 여유를 남겼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니었다.

강현재는 처음부터 제대로 맞부딪치지도 않았던 거였다.

'생긴 것만큼이나 재수 없군.'

강현재의 차가우면서도 무표정한 얼굴을 떠올린 노리스가 툴툴거렸다. 감히 자신을 상대로 그런 여유를 부렸었다니.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든든한 것도 사실이다.

어쨌든 저런 강현재가 현재는 아군이었으니까.

'······친해져야겠어. 유혜리 그년만 독식하게 만들 순 없지. 이번 일이 끝나면 좋은 곳으로 데려가야겠군.'

정부공인 마스터급 해결사 (6)

162화. 정부공인 마스터급 해결사

"대장! 괜찮으십니까?"

혼란을 틈타 경호대 몇 명이 다가왔다.

"괜찮다. 전황은?"

고개를 끄덕인 노리스가 물었다. 장각과 싸우면서도 전체적인 전황은 파악하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직접 상대하는 대원들의 의견이 중요했다.

"버티고는 있습니다만, 저항이 거셉니다. 적들의 충원되는 숫자가 줄어들지 않습니다."

경호대원 하나가 어두운 얼굴로 대답한다.

전투 자체는 경호대가 우위에 있었다.

하지만 이곳은 적진 한가운데, 그것도 적들의 우두머리가 있는 곳이다.

어디서 충원되는 건지, 어느 순간부터 쓰러지는 적들보다 늘어나는 적들의 숫자가 더 많아졌다.

"조금만 참아라. 방위군이 도착하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이 정도로 적진 한복판에서 난리가 났으면, 아무리 엉덩이가 무거운 방위군이라도 서두를 수밖에 없을 거다.

그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이 싸움이 끝나기 전에 참전해야 그 공적을 가져갈 수 있을 테니.

그때.

콰콰쾅!

또 한 번 장각과 강현재가 정면으로 격돌하며, 그 충격파로 주변 건물이 터져나간다.

외장재가 뜯겨 나가 흉물스러운 콘크리트 속살이 보이거나, 그것도 아니면 외벽이 통째로 허물어지기도 했고, 간혹 위태롭게 흔들리던 건물은 그 충격을 버텨내지 못하고 무너져내리기까지 했다.

쩌저저적!

마침 8층 빌딩 하나가 반으로 갈라지더니, 쏠림을 이기지 못하고 무너져내렸다.

그 광경을 넋 놓은 채 바라보던 경호대원들 중 하나가 홀린 듯 중얼거렸다.

"······저게 해결사라고?"

그리고 그게 시작이라는 듯 다들 한마디씩 내뱉었다.

"저런 칼잡이가 있다는 건 듣지도 못했어."

"저게 어딜 봐서 칼잡이야? 그냥 전쟁병기나 다름없잖아?"

"세상에······ 대체 저 힘은 뭐지? 건물을 반으로 쪼개버렸어!"

"눈으로 보고도 믿기 어렵군······ 방금 봤어? 도약하는 걸 제대로 보지도 못했는데 20층 높이에서 나타났다고!"

호들갑 아닌 호들갑이 이어졌다. 마치 올림픽 경기를 관전하는 것마냥 움직임 하나하나에 탄성을 내뱉는다.

노리스가 대원들의 반응을 보면서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자신 역시 처음엔 저랬으니까.

저 말도 안 되게 기묘한 움직임과 그 움직임보다 더 말이 안 되는 힘과 검술에 그저 감탄만 내뱉었으니까.

"대, 대장! 저분은 진짜 해결사가 맞습니까? 저렇게 강한 해결사는 본적도, 들은 적도 없습니다!"

경호대원 하나가 노리스에게 물어왔다. 그 물음에 탄성을 내뱉던 경호대원들의 시선이 전부 노리스에게 향했다.

[맞아. 대장은 저 해결사와 꽤 친해 보였지? 혹시 해결사는 위장 신분이고 실제는 셀리케의 숨겨진 비밀요원이 아닐까?]

······하는 기대감 어린 시선이었다.

하지만 이어진 노리스의 대답은 경호대원의 기대감을 철저히 박살냈다.

"나도 마찬가지다. 지난 수십 년간 많은 해결사를 봐왔지만······ 저런 놈은 처음이야. 대체 뭘 하다가 난데없이 이제야 나타났는지 모를 정도로."

"아······!"

입을 벌린 경호대원들의 입에서 나지막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전설 위의 전설로 불리며 소울 시티에서 군림한 노리스마저도 처음 본다니!

그럼에도 그들의 표정은 밝았다.

이 순간 그들의 머릿속에 스쳐가는 생각이 노리스가 했던 생각과 똑같았기 때문이다.

'아군이라서 다행이다!'

······라고.

그런데 그때.

"음?"

노리스의 망원렌즈가 무언가를 캐치했다. 어느새 저문 밤하늘 위로 반짝이는 무언가가 구름 떼처럼 다가오고 있는걸.

말없이 하늘을 주시한 노리스를 따라 시선을 이동하는 경호대원들.

이윽고 노리스가 주시한 빛무리를 발견한 그들의 얼굴에 한줄기 기대감이 떠오른다.

"대, 대장! 저거 혹시······?"

노리스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래. 이 싸움을 끝날 때가 왔다."

* * *

장각과 싸우던 나는 시야 저편으로 보이는 거대한 빛무리를 발견했다.

어둑한 하늘에서도 선명하게 보이는 별과 독수리가 겹쳐진 마크.

'도착했군.'

바로 시 정부 방위군이었다.

쾅!

한차례 격돌한 나는 놈을 밀어내며 뒤로 물러섰다. 갑자기 변한 태도에 장각이 얼굴을 구기며 소리쳤다.

"놈! 도망치는 거냐?"

"미안하지만 나보다 더 네 머리를 원하는 친구들이 나타났거든."

"······!?"

"뭐, 내 실적은 네놈 동생 목을 딴 걸로도 충분하니까."

"무슨 개소리냐!"

버럭 소리를 치는 장각을 향해 어깨를 으쓱했다.

"무슨 소리긴. 쓸데없이 힘 빼는 건 별로 내키지 않는다는 거지."

그러면서 나는 턱짓으로 접근하는 방위군 비행선을 가리켰다. 구긴 얼굴로 하늘을 바라본 장각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놈도 눈치챈 거다. 방위군이 직접 개입한 이상 자신이 죽는 건 기정사실이라는 것을.

그런데.

"······큭큭! 설마 저것들을 믿고 그러는 거냐?"

딱딱하게 굳었던 장각의 입꼬리가 묘하게 비틀리더니, 그 사이로 비웃음이 흘러나왔다.

뭐지? 미치기라도 한 건가?

"글쎄. 네가 저것들이라고 폄하하기 전에······."

놈의 비웃음을 마주한 나 역시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때마침 머리 위로 드리운 비행선의 해치가 열렸다. 그 시커먼 공간에서 방위군이 떨어져 내린다.

쿠쿵!

그대로 수백 미터 아래 지상으로 뛰어내린 방위군 안드로이드들이 거친 소음을 내며 착지했다.

순식간에 주변을 에워싼 방위군 안드로이드들의 두 눈이 장각을 노려봤다. 서슬 퍼런 기세로 쇠 냄새가 가득한 총구를 장각에게 향한다.

저 총구가 일제히 불을 뿜는 순간, 장각의 목숨은 끝이다.

그 광경을 힐끗 바라본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네 목숨부터 걱정해야 할 것 같은데?"

* * *

군용 안드로이드.

그것도 방위군으로 운용되는 안드로이드는 이 사이버펑크 세계 기술력의 집대성이나 다름없다.

저 안드로이드 하나가 일반 전투 안드로이드 열대쯤은 가볍게 상대할 수 있었고, 어설픈 용병단 하나쯤은 홀로 해제할 수 있는 수준이다.

살인과 온갖 강력범죄로 들끓는 이 도시가 나름의 규칙을 지키며 평화롭게 돌아가는 이유.

바로 방위군이 가진 무력 때문이었다.

그 누구라도 시 정부에 찍혔다간 저 살인기계를 만나게 될 테니 말이다.

그때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진다.

발걸음에서부터 느껴지는 묵직한 움직임. 노리스다.

"금천교주 장각. 저항을 포기해라. 그럼 목숨만은 살려주마."

어느 정도 몸이 회복됐는지, 내 옆에 나란히 선 노리스가 선심이라도 쓰듯 말했다.

나는 그 말에 의아함을 느꼈다.

'장각을 살려주겠다고? 방위군까지 떴는데 그게 가능한가?'

그러다가 이내 메가코프의 힘이라면 더한 일도 가능한 세계가 이 사이버펑크 세계라는 걸 떠올렸다.

애초에 20번대 구역에서 엉덩이를 붙이고 있던 방위군을 움직인 것 자체가 셀리케였으니까.

그런데.

"······큭! 큭큭큭! 크하하하!"

이렇게까지 몰린 상황에 실성이라도 한 건지, 난데없이 파안대소를 터트렸다.

"······뭐가 그렇게 웃기지?"

잔뜩 불쾌하단 감정을 실은 노리스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옆에 있는 내게만 들릴 정도로 까드득!하며 불끈 쥔 강철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아마 몸이 멀쩡했으면 칼부터 뽑았을 거다.

"나를 살려주겠다?"

격하게 터트리던 웃음을 뚝!하고 그친 장각이 시커멓게 물든 두 눈으로 노리스를 바라봤다.

"내가 약속하지. 살려는 주겠다."

"하아?"

"못 믿겠나? 그럼 셀리케의 이름으로 보장하지. 방위군은 걱정하지 마라. 이미 이야기가 된······"

"아니아니. 그게 아니야."

차분히 대화를 이어가는 노리스를 향해 장각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 목소리엔 약간의 비웃음마저 담겨있었다.

노리스 역시 그걸 느꼈는지,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아직도 상황파악이 안 되는 건가? 네 하찮은 목숨이라도 건지려면 그런 건방진 태도는 버리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아니! 그게 아니라고!"

"······? 실성이라도 한 건가? 자꾸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

이해 못 할 대답을 늘어놓는 장각의 태도에 노리스가 한껏 얼굴을 구기는 그 순간.

"살려준다, 아니다는 내가 정하는 거지 네놈들이 정하는 게 아니라는 소리다!"

장각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 정신 나간 허세에 나는 물론이고 노리스 역시 헛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진짜 미친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불쑥 들었으니까.

그런데.

"그리고 나는 네놈들을 살려줄 생각이 없다. 단 한 놈도!"

입꼬리를 헤벌쭉하게 찢으며 말을 잇는 장각의 미소를 마주한 그 순간.

'공기가 달려졌다!'

나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전장을 휘감고 있던 공기가 미묘하게 달라졌다는 사실을.

조금 전까지 평온했던 감각이 미친 듯이 날뛴다. 머릿속에서 요란한 경종이 울리고, 모든 감각세포가 위험을 알리기 위해 야단법석을 떨었다.

살갗 위로 돋아난 솜털과 등골을 타고 흐르는 서늘한 감각. 온몸을 휘도는 혈류가 차갑게 식는 느낌.

그 순간.

끼이이익.

장각을 노리고 있던 방위군 안드로이드의 총구가 다른 곳을 향했다.

투타타타타탕!

콰지직!

바로 셀리케 경호대의 등 뒤로.

"커, 커억!"

"꾸륵! 이게 뭔······!"

"씨바알······ 배신······!"

"살려······ 꺽, 꺼르륵!"

무방비 상태로 공격을 받은 셀리케 경호대가 단번에 찢겨 나간다.

정직하게 싸워도 버거운 상대가 뒤통수까지 때리며 배신을 하니 당해낼 방법이 없었다.

50명에 가까웠던 셀리케 경호대가 모조리 쓰러진 건, 불과 30초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이었다.

* * *

나는 내 감각을 무시하지 않았다.

공기가 달라진 순간, 가장 먼저 움직인 건 방위군 안드로이드가 아니라 바로 나였다.

쩌저적!

제자리에서 딛는 디딤발의 움푹 꺼지며 대지가 거미줄처럼 갈라진다. 그 막대한 반발력은 그대로 몸을 시공간 속으로 던져넣었다.

「제로의 영역」 2단계 레벨.

공간 돌파. 「귀신의 발걸음」.

쐐애애액―――!

쐐애―――!

――――!

귓가를 스치는 바람 소리가 아스라이 멀어지고, 주변의 모든 움직임이 슬로우비디오처럼 느려진다.

퉁. 퉁. 퉁. 투퉁!

불꽃을 내뿜는 방위군 안드로이드 총구에서 쏘아지는 탄환이 느릿하게 밀려온다. 양팔에서 플라즈마 블레이드를 꺼낸 안드로이드는 셀리케 경호대 사이로 날아든다.

마음 같아선 저놈들을 모조리 쓸어버리고 싶었지만, 지금은 나조차도 여유가 없는 상황이다. 장보에 이어 장각을 상대하면서 계속 검기를 사용했었기에.

나는 곧바로 근처에 서 있던 노리스의 뒷덜미를 잡았다.

'큭! 지랄 맞게 무겁군.'

나는 녀석을 욕하면서 함께 몸을 빼냈다.

멀리 갈 여유는 없었기에, 백여 미터쯤 떨어진 골목으로 들어선 뒤 제로의 영역을 해제했다.

투타타타타탕!

그제야 잔뜩 물먹은 소리처럼 들려오던 총성이 제대로 들려오기 시작했다.

경호대의 비명소리도 함께.

"허, 헉! 이게 무슨······?"

갑자기 달라진 공간에 화들짝 놀란 노리스가 주변을 경계했다. 난데없이 몸이 이곳으로 옮겨졌고, 총성과 함께 전투소리까지 들려왔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방위군이 튀통수를 쳤어. 이에 대한 플랜B가 있나?"

나는 다급하게 물었다.

당황스럽겠지만, 지금은 설명할 여유가 없다. 경호대가 모두 쓰러지면 그다음은 우리 차례다.

노리스 역시 조금 전 상황이 떠올랐는지, 상황파악이 끝난 얼굴로 욕을 내뱉었다.

"이런 씨발! 방위군이 어째서?"

"그건 지금 의미 없다. 이미 상황은 벌어졌어."

"······그렇지. 이제 어쩔 거지?"

나는 오히려 나에게 되묻는 노리스를 바라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 방금 내가 묻지 않았나? 플랜B가 있냐고."

"제길! 그런 건 없지만, 있다고 해도 누가 방위군의 배신을 예상하고 플랜을 짜!"

"흐음. 그런가?"

하긴 나도 설마 방위군이 배신할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애초에 방위군이 개입한 이유가 셀리케 때문이었으니까.

'셀리케의 외력에 대한 군부의 반감인가? 아니면 이참에 메가코프를 길들이려는 선택?'

그렇다고 시 정부를 뒤집으려는 반군과 손을 잡을까? 설마 그렇게까지 하려고······?

'······하지만 완전히 배제할 순 없지. 이 사이버펑크 세계에서의 진리는 오로지 자신들의 이익뿐이니까.'

그게 시민들이 죽어 나가고, 도시의 절반쯤이 갈려 나간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복잡한 고민은 그만. 지금은 눈앞의 상황에 집중하자. 자세한 건 유혜리가 밝혀내겠지.'

유혜리 성격상 배신당한 걸 알면 길길이 날뛸 게 뻔했으니.

나는 노리스를 바라보며 물었다.

"네 부하들. 살리고 싶나?"

"그걸 말이라고!"

셀리케 경호대원들이 쓰러지긴 했어도 전부 죽은 건 아니었다.

명색이 메가코프의 경호대. 죽은 자도 물론 있겠지만, 아직 목숨이 붙어있는 자들도 있다.

"하나만 약속하면 이 상황을 정리해주지."

내 말에 노리스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뭐? 네가 무슨 수로······? 아니. 아니다. 분명 뭔가 방법이 있으니까 말을 꺼냈겠지. 그래. 내가 뭘 약속해주면 되지?"

자기 혼자서 되묻다가, 결론까지 내린 노리스는 구겨졌던 속도만큼이나 다시 평상시 얼굴로 돌아왔다.

역시 상황파악이 빠르다.

나는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녀석과 눈을 마주쳤다.

"지금부터 네가 보는 것. 전부 비밀로 해라. 당연히 셀리케의 기록저장소에도 남으면 안 되겠지."

정부공인 마스터급 해결사 (7)

163화. 정부공인 마스터급 해결사

"······뭐?"

노리스의 얼굴이 굳었다.

단순히 비밀을 요구하는 걸 넘어서 셀리케 기록저장소에도 등록하지 않는다는 건 나중에 문제가 될 소지가 충분했다.

특히나 셀리케의 안보를 책임지는 경호대장라면 더더욱.

하지만.

"······제길! 뭘 하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좋아! 약속하겠다!"

노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이 상황인 것도 있을 테고, 아마 그동안 나를 지켜봤던 것도 영향이 있을 테지.

"그래. 그럼 네가 나가서 시선을 좀 끌어줬으면 좋겠군."

"설마 나를 미끼로 쓰고 도망치려는 건 아니겠지?"

"이 상황에서 아직도 그런 헛소리를 할 여유가 있는 건가?"

내가 피식 웃으면서 대꾸하자 노리스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유혜리도 그렇고, 노리스도 그렇고, 얼굴을 표현하는 인공피부의 표정이 다양하다. 따로 연구라도 하는 건가?

"젠장! 알았어! 알았다고!"

툴툴거리며 노리스가 몸을 일으킨다.

우리를 찾던 방위군 안드로이드의 총구가 곧바로 노리스에게 향한다.

우락부락한 주먹을 쿵쿵! 두드리더니 노리스가 뛰쳐나가며 씹어뱉듯 소리쳤다.

"나를 배신한 놈들은 지옥 끝까지 쫓아가서 씹어먹어 주마!"

투타타타타탕!

쇄도하는 탄환을 비집고 노리스가 튀어나간다.

"······."

흠. 나한테도 하는 말 같은데?

피식 웃음을 터트린 나는 가만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이브."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이브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 마스터. 인벤토리 방출을 시작합니다."

나는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적들을 쓸어버릴 시간이다.

* * *

"나를 배신한 놈들은 지옥 끝까지 쫓아가서 씹어먹어 주마!"

노리스가 격노에 찬 목소리를 내뱉으며 튀어나갔다.

쇄도하는 탄환들.

방위군이 사용하는 탄환은 일반 납탄이 아니다.

방위군이 출동했다는 건 애초에 상대가 평범한 인간은 아니라는 뜻. 인간을 상대할 때나 쓰는 납탄은 통하지 않을 때가 많다.

그래서 방위군은 한발한발이 특수강에 크롬외피를 덧씌운 특수탄을 사용한다.

당연히 기존 탄환보다 적게는 100배에서 많게는 1,000배 가까이 비쌌다.

다들 특수탄이 좋은 건 알지만, 알고도 사용 못 하는 탄환이다. 이 세계 기준으로 봤을 때, 인간의 목숨이 오히려 더 싸게 먹힐 때가 많았으니까.

물론 방위군과······ 메가코프는 제외다.

지이잉――!

질주하는 노리스의 외피가 하얗게 물든다. 탄소나노강으로 설계된 노리스의 몸은 에너지가 투입되는 만큼 경도가 높아진다.

티티티팅!

노리스와 부딪친 특수탄환들이 빗물처럼 튕겨 나간다.

셀리케에선 방위군이 사용하는 총기와 탄환에 대한 정보, 그리고 맞부딪칠 경우에 대비한 실험까지 진즉에 끝났다.

당연히 셀리케 기술의 총아인 노리스에게 방위군의 총알 따위가 통할 리 없었다.

다만, 문제는.

즈즈즈즛!

플라즈마 블레이드를 양손에 뽑아든 놈들이다.

저것까지는 외피가 막을 수 없다. 저걸 막으려면 장갑이 더 두꺼워져야 하는데, 그러면 지금의 인간형이 아니라 거대로봇 의체가 필요하다.

카카칵!

플라즈마 블레이드와 부딪친다. 현란하게 움직이는 붉은빛 칼날이 눈을 어지럽힌다.

사방을 에워싼 놈들의 공격. 찌르고, 베고, 휘도는 공격이 물 흐르듯 끊기지 않는다.

중앙 시스템이 통제하는 안드로이드는 그 모두가 하나의 유기체처럼 움직이며 노리스를 공격했다.

완벽한 공수합격.

그 누구라도 이 공수합격의 덫에 붙잡히는 순간, 오직 죽음만이 기다릴 거다.

하지만······.

"건방진!! 감히 이 몸을 상대로 칼을 꺼내?"

방위군에겐 안타깝게도 상대는 척 노리스였다.

산업혁명 이전까지 천 년에 가까운 세월을 한반도의 검종(劍宗)으로 불렸던 척씨검가의 마지막 후예.

그 천 년의 검술이 노리스의 손끝에서 펼쳐졌다.

카카카캉!

퍼석!

백광으로 물든 칼날이 마주한 플라즈마 블레이드를 반으로 쪼갠다. 그 칼날은 플라즈마 블레이드 너머 안드로이드에게까지 향했다.

사이버네틱스 블레이드.

노리스가 코어를 자유자재로 다루기 시작하며 깨달은 초고열의 칼날.

콰지지직!

단숨에 안드로이드를 갈라버린 노리스가 포효하듯 소리쳤다.

"다 덤벼! 이 깡통 로봇 새끼들아!"

유혜리가 들었더라면 분명 비꼬았을 말을 내뱉으며 노리스의 칼춤이 시작됐다.

* * *

한편, 장각은 방위군 안드로이드 중 하나에게 다가갔다.

그가 다가서자 기다렸다는 듯 머리를 쭉 내미는 안드로이드.

콰직!

장각은 거침없이 안드로이드의 머릿속으로 손을 박아넣었다.

그 순간 검은 기운이 폭발적으로 뿜어지며 안드로이드를 집어삼킨다.

으적으적!

무언가를 씹어대는 소리.

이윽고 장각이 가볍게 손을 털자 검은 기운에 담겨있던 안드로이드가 떨어져 나간다.

그 형상은 끔찍했다. 마치 거대한 맹수가 씹다 버린 듯 인간형 안드로이드는 정체 모를 찌꺼기 덩어리로 변해있었다.

한 차례 몸을 부르르 떤 장각이 천천히 눈을 떴다.

"······기계 생명체를 찾으라고?"

안드로이드가 소모된 에너지와 함께 가져온 '그분'의 전령.

그건 로보 테크니카에 침입한 기계 생명체를 찾으라는 명령이었다.

전령과 함께 온 영상을 재생했다. 머릿속에서 재생되는 녹화 영상.

그 속에서 등장한 인물의 움직임에 장각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건?'

어디서 많이 봤던 움직임이다.

분명 칼만 안 들었을 뿐, 조금 전까지 자신을 밀어붙였던 칼잡이의 움직임이었다.

'그놈이 기계 생명체였다고?'

물론 움직임만으로는 확신할 수 없다.

그럼에도 장각이 칼잡이를 의심한 이유.

'······광자포를 갈랐다.'

거대한 빛 에너지의 집합체인 광자포를 개인이 갈라냈다는 것.

그건 광자포보다 더한 에너지를 다룰 수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장각은 똑똑히 목격했다.

칼잡이의 칼날에서 피어오르는 불가해의 불꽃을. 빛마저 집어삼키는 어둠, 블랙 이터를 갈라내던 미증유의 에너지를.

대체 어떻게 저런 에너지를 인간 따위가 다룰 수 있나 했더니······.

'인간이 아니었던 거로군. 셀리케 놈들. 손대지 말아야 할 영역에 손을 댔구나.'

새삼스레 '그분'의 선견지명에 감탄이 흘러나왔다.

이렇게 될 줄 알고 '그분'께서도 기계 생명체를 창조하셨으리라.

그때.

"나를 배신한 놈들은 지옥 끝까지 쫓아가서 씹어먹어 주마!"

노리스가 튀어나오며 안드로이드와 격돌했다. 자신과 싸우면서 보여줬던 초고열의 칼날과 백광의 갑옷을 입고서.

힐끗 노리스를 바라본 장각이 시선을 돌려 칼잡이를 찾았다.

노리스는 문제가 아니다. 저 사이보그가 강하다곤 하나, 직접 맞부딪쳐본 장각은 알고 있었다.

절대 저 사이보그 혼자선 방위군을 당해낼 수 없다는 것을.

'어디냐. 어디에 숨어 있는 거냐.'

셀리케의 사이보그가 나타난 이상, 기계 생명체인 그 칼잡이도 어딘가에서 기회를 노리고 있을 거다.

과연 셀리케의 비밀병기다. 저 악명 높은 사이보그를 미끼로 쓰다니. 그만큼 자신이 있는 거겠지만.

'······혹은 특수탄까지는 못 막는 미완성일 수도 있겠지.'

뇌 빼고 전부 기계 의체를 사용하는 사이보그와 달리, 기계 생명체는 유기체 구조에 기계구조가 섞여 들어간 형태.

피륙 또한 인조가 아니라 진짜 피륙일 테니 특수탄에 손상을 입을 수도 있었다.

그래. 아마 그게 맞을 거다. 전지전능에 가까운 '그분'께서도 아직 완성하지 못한 기계 생명체를 셀리케 따위가 어찌 벌써 창조했겠는가?

분명 미완성이리라!

'어디냐! 그 건방진 미완성의 육체. 내가 먹어치워 주마!'

그 육체라면······ 자신 또한 한 단계 더 진화할 수 있을 터였다.

검게 물든 눈을 빛내며 시각을 확장하던 그때.

"거기 있었구나!"

백여 미터 떨어진 빌딩 옥상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놈을 발견했다.

쾅!

장각은 그대로 몸을 질주해 놈에게 날아갔다.

* * *

"역시 걸려들었군."

나는 날아오는 장각을 차분히 바라봤다.

인벤토리를 준비하면서 가장 많이 신경을 쓴 존재는 장각이었다.

안드로이드쯤은 단번에 박살나겠지만, 장각 정도의 능력이라면 텅스텐 막대를 피할 가능성도 컸다.

'그럼 애초에 피할 시도조차 못 하게 만드는 수밖에.'

그래서 놈의 무덤으로 선정한 곳이 이곳이다.

쿵!

장각이 날아들었다.

"쥐새끼 같은 놈! 어딜 도망쳤다가 이제야 나타났느냐!"

"누가 들으면 혼자서 나를 도망치게 만든 줄 알겠군."

나는 입매를 비틀고 비웃음을 날렸다.

놈이 버럭하며 소리쳤다.

"닥쳐라! 어디 인간도 아닌 괴물 따위가 그따위 건방진 말을!?"

"······?"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뭔 개소리야? 내가 인간이 아니면 이 사이버펑크 세계에서 누가 인간이냐?

그러거나 말거나, 장각이 분노 어린 표정으로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순순히 몸을 내놔라!"

놈이 양손을 쭉 내뻗었다.

그러자 해일처럼 일어난 검은 기운이 우르르 몰려왔다.

한순간에 퍼져나간 검은 기운은 금세 이 작은 빌딩의 옥상을 뒤덮었다.

"크하하하! 제법 머리를 썼다만 이곳이 네 무덤이 될 것이다!"

사방을 뒤덮었던 검은 기운이 한 차례 꿀렁거리더니 이내 한 점으로 모여들 듯 쇄도했다.

그 한 점은 바로 나.

그렇게 어둠에 잠식당하려는 그 순간.

화륵.

내 가슴 어림에서 푸른 불꽃이 눈부시게 타올랐다.

"고맙지만, 이 무덤 자리는 네게 양보하지."

서걱.

불꽃이 어둠을 가르고 그 사이로 바깥이 보였다.

나는 그대로 뛰어들었다.

"어, 어엇?"

장각의 가슴팍으로.

놈과 함께 빌딩 바깥으로 떨어져나왔다. 붕뜨는 무중력의 감각.

"이게 무슨 짓이냐! 이런 곳에서 떨어진다고 내가 죽을 것 같으냐!"

장각이 자신에게 달라붙어 있는 내게 버럭 소리쳤다.

놈은 어떤 것도 할 수 없었다. 검은 기운 대부분이 외부로 뿜어져 나가서 지금은 제 몸을 지키는 수준이 전부일 거다. 안 그래도 옥상 위로 분리된 검은 기운이 꼬리를 물고 따라오고 있었다.

처음부터 이걸 노렸던 거다. 장각과 검은 기운이 각각 독립된 개체라는 걸 은연중에 짐작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노린 건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떨어지는 건 네가 아니야."

"······뭣?"

나는 지상으로 끌어당기는 중력을 거스르며, 놈을 강하게 밀어냈다.

그렇게 놈은 공중에서 한 번 더 뒤로 튕겨 나가며 완전히 허공에 떠오른 상태가 됐다.

그리고 하늘을 나는 재주가 있지 않은 한, 그 누구도 허공에서 몸을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없다.

코앞으로 죽음이 날아든다 해도 말이다.

"떨어지는 건 네놈들의 헛된 꿈이다."

그 순간, 귓가로 들려오는 경쾌한 목소리.

-궤도 수정 완료. 목표 진입까지 1.7초.

나는 차가운 눈으로 놈을. 그리고 놈의 머리 위, 검게 물든 밤하늘 위로 모습을 드러낸 무수한 별무리를 바라봤다.

쩌저저정―――!

의지를 타고 뻗어 나간 포스가 거미줄처럼 펼쳐지며 주위 수백 미터를 뒤덮었다.

인간의 이해를 초월한 불가해의 의지가 그릇된 존재를 심판하기 위해 칼을 뽑았다.

「중력조작」. 2단계 레벨.

초정밀 타격스킬. 「심판의 초침」.

번――쩍――!

밤하늘에서 별무리가 쏟아져 내렸다. 긴꼬리와 함께 수백 개의 빛줄기가 지상에 강림했다.

대기권을 통과하며 붉게 달아오른 소형 텅스텐 막대의 소나기.

그 막대한 운동에너지는 정확히 목표를 향해 떨어져 내렸고······.

쿠웅―――!

고오오오―――!

동시다발적으로 떨어진 텅스텐 막대의 충격파는 한순간에 지상을 휩쓸었다.

그리고 그 중 하나의 막대는.

"커, 커허헉!"

허공에서 발버둥 치던 장각의 가슴을 찢는 걸로도 모자라 허리를 끊어버리며 상체와 하체를 분리시켰다.

기우뚱 기울어진 놈의 몸이 이윽고 지상으로 떨어져 내렸다.

나는 추락하는 놈을 보면서 작게 중얼거렸다.

"그게 네 헛된 꿈의 현실이다."

* * *

노리스는 슬슬 한계에 도달하고 있었다.

쓰러뜨린 안드로이드 숫자가 열대는 족히 넘어갔지만, 남아 있는 숫자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대체 언제까지 버텨야 되는 거냐, 소드마스터!'

몸이 멀쩡했어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는 마당에, 장각의 암수에 걸려 소모한 에너지가 너무 많았다.

이대로라면······ 얼마 버티지 못한다.

'설마 나를 버리고 도망친 거냐! 제길! 진짜 그런 거냐?'

'씨발. 그런 길바닥 해결사 따위 처음부터 믿는 게 아니었는데!'

'아니야. 놈이 그럴 리 없다. 분명 무언가 방법이 있으니 내게 비밀을 요구했겠지!'

'젠장! 설마 그것도 노린 거였나? 처음부터 도망갈 생각이었냐고!'

'아니다. 놈의 능력이라면 나를 미끼로 쓰지 않아도 도망칠 수 있었어! 분명 방법이 있을 거다!'

흥분과 분노로 반쯤 정신이 나가버린 노리스는 속으로 강현재를 욕했다, 믿었다를 반복했다.

'제에길! 이제 한계다! 소드마스터, 이 개새······? 엇?'

그때 노리스의 라이다 센서에 무언가 감지됐다. 그리고 그게 무언지 알아채기도 전에.

쿵―――!

쿠웅―――!

쿠콰콰쾅―――!

수십. 아니, 수백 번에 이르는 폭음과 충격파가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고오오오―――!

지상에서 일어난 먼지 폭풍이 하늘을 뒤덮을 정도로 솟구쳤다.

잠시 후, 그 먼지 구덩이를 헤치며 노리스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씨발. 소드마스터가 아니라 소드몬스터였네. 이걸 뭔 수로 비밀로 하라는 거야?"

노리스가 어이없는 헛웃음을 흘렸다.

정부공인 마스터급 해결사 (8)

164화. 정부공인 마스터급 해결사

나는 바닥에 쓰러진 장각을 내려다봤다.

허리 아래로 간신히 상체만 붙어 있는 장각을.

그럼에도 놈의 숨이 끊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거친 숨을 몰아 쉴 때마다 체내의 모든 에너지가 끊어진 허리 절단면을 복구하려고 꿈틀거리고 있었다.

물론 그게 될 리는 없었다. 아무리 자가수복되는 외피라도 아예 사라진 걸 다시 만드는 건 불가능했으니까.

"꼴 좋군."

"크, 크륵! 건방, 진······!"

장각이 핏물과 오일이 뒤섞인 검붉은 액체를 질질 흘리며 입을 열었다.

"건방지다라······ 글쎄? 나보단 헛된 망상을 꿈꿨던 네놈들이 더 건방진 게 아닐까?"

"크륵! 망상······이라고?"

"장량이 그러더군. 네놈들이 꿈꾸는 미래는 모든 인간을 기계로 대체해 완전무결하고 불멸하는 존재가 되겠다지?"

나는 피식 비웃음을 터트렸다. 놈이 충분히 느낄 수 있도록 과장되게.

"네놈들이 부르짖던 '그분'이라는 놈도 완전무결한가? 흐음······? 지금 네 꼴을 보면 아닐 것 같은데."

"감, 감히! 크륵! 그 입을 함부로 놀리지 마라! 불완전한 기계 생명체 따위가! 끄르륵!"

놈이 피거품을 물어가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흥분으로 인한 혈류의 증가로 가슴에서 피가 뿜어졌다.

나는 놈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입매를 살짝 비틀었다.

"아까부터 무슨 얘기를 하나 싶었더니, 나를 기계 생명체로 착각했나 보군. 하핫! 재밌네. 그 흔한 임플란트도 없는 내가 기계 생명체로 오해를 받다니."

"뭐, 뭣!? 그게, 무, 무슨 소리냐!"

검게 물든 놈의 눈동자가 찢어질 듯 커졌다.

"말 그대로다. 나는 인간이거든. 그것도 이 도시에 몇 안 되는 순수 인간이지."

"마, 말도 안 돼! 거짓말 하지 마라!"

"내가 너를 상대로 왜 거짓말을 하지? 지금이라면 손가락만 까딱해도 죽일 수 있는데. 그리고 너도 어렴풋이 느끼지 않았나? 내가 사이버웨어를 한 번도 사용한 적 없다는 사실을."

"그, 그건······!"

장각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놈도 이제야 떠오른 거다. 자신과 격돌하던 그 많은 공방에서 단 한 번도 사이버웨어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놈이 혼란스러운 눈동자로 내 얼굴과 몸 전체를 훑는다.

"그, 그럴 리 없다! 인간 따위가! 끄르륵! 인간 따위가 이런 일이 가능할 리 없어! 우웨에엑!"

피거품만 내뱉으며 간신히 숨을 붙여놓고 있던 장각이 피분수를 내뿜었다. 자기 혼자 생각하고, 상상하다가, 흥분까지해서 지옥으로 걸어 들어간 셈이다.

나는 패닉에 빠진 놈의 눈동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틀렸어."

"······뭐?"

"오직 인간이기에. 인간이고자 했기에 가능했던 거다."

"그럴 리······ 없다······ 그분께서······ 틀릴 리······ 없······"

어느새 목소리에도 힘이 빠졌다. 놈의 눈빛과 호흡에서도 서서히 생기가 사라지고 있었다.

나는 서서히 검은물이 빠지며 회색빛으로 물드는 놈의 눈동자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네 말대로 인간이 완전무결하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기계에 비하면 볼품없고 나약하기 짝이 없는 존재지."

"······끄륵!"

"하지만 불완전하기에······ 인간은 끝없이 앞으로 달려나갈 수 있는 거다. 기계처럼 계산하지 않고, 동력이 모자라면 스스로를 불태워서라도."

"······."

이제 장각의 눈동자는 텅 비었다. 초점이 흐릿하고 벌린 입으론 검붉은 액체가 꾸역꾸역 흘러나왔다.

놈의 입술이 꿈틀거린다. 생이 다한 육체는 숨을 허락하지 않아 목소리가 흘러나오지 않지만, 나는 왠지 지금 장각이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알 것만 같았다.

[그렇게까지 해서 인간이 얻는 건 무엇이지?]

나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기적이다."

"······!"

* * *

결국, 장각은 죽었다.

초점이 없던 장각의 흐릿한 눈동자는 내 마지막 대답에 한 차례 잘게 떨었었다.

그리곤 필사적으로 입술을 오물거렸다. 무언가 말하고 싶었던 걸 테지.

하지만 놈에게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의미 없이 입술만 뻐끔거리다가······ 그렇게 숨이 끊어졌다.

그 마지막 순간에 놈이 필사적으로 말하려던 내용은 뭐였을까? 인간으로 태어나 기계가 되길 바랐던 삶의 끝에서, 가장 순수한 인간을 마주한 놈은 무엇을 깨달았을까?

"뭐 좀 알아냈나?"

건너편에서 노리스가 다가왔다. 원래 반짝이는 검은색과 은색으로 코팅됐던 몸이었지만, 지금은 새어 나온 오일과 먼지가 잔뜩 엉겨 붙어 땟국물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별로. 광신도들 독한 거 모르나?"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실제로 별로 알아낸 건 없었다.

"하긴. 뻔히 이렇게 될 줄 알면서 시 정부를 상대로 전쟁을 벌인 놈들이니······."

"그나저나 이제 어쩔 거지? 솔직히 광신도들보다 방위군이 더 문제인 것 같은데."

방위군에게 뒤통수를 맞았다는 건, 시 정부가 배신했다는 뜻이다. 셀리케도 결코 안전한 상황이 아니다. 아무리 메가코프라도 도시에서만큼은 시 정부의 힘이 강하다.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내 일이나 해야지. 복잡한 일을 처리하는 쪽은 따로 있으니까."

어깨를 으쓱하는 노리스의 머리 위로 비행선이 하나, 둘 드리워졌다. 비행선엔 선명하게 셀리케 바이오텍 마크가 빛나고 있었다.

"······빨리도 왔군."

나는 작게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이 난장판이 끝나길 기다렸다는 듯 빨리도 왔다. 조금만 더 빨랐으면 우리가 뒤처리까지 다 했겠어.

"너무 그렇게 비꼬지 마. 방위군이 뒤통수칠 거라고 누가 예상했겠어?"

나를 힐끗 바라본 노리스가 변명하듯 대답했다.

그때 비행선이 천천히 내려앉았다. 굳이 따지면 경비행기정도의 작은 크기였지만, 그 숫자가 열대는 가뿐히 넘어갔다.

이윽고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셀리케에 방문했을 때에 많이 봤던 보안실 직원들과 이번 작전에 참여 못 했던 나머지 경호대원 들이다.

그리고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건, 검은색 전장 슈트 사이로 유일하게 흰 가운을 입고 있는 유혜리였다.

"네가 여긴 왜······?"

성큼성큼 다가오는 유혜리의 모습에 노리스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하지만.

"괜찮아?"

유혜리가 쌩하고 무시하며 나에게 달려왔다.

"······."

면전에서 무시당한 노리스의 눈에서 불길이 토해졌다. 발작하듯 유혜리를 노려보던 노리스가 쿵쿵거리며 성난 발걸음으로 자리를 떴다.

흐음. 저 둘은 화해할 기미가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사이가 안 좋네.

"뭐, 보다시피."

나는 방심한 틈을 타 어느새 내 몸을 더듬거리는 유혜리의 손을 떼어내며 물었다.

"그런데 어떻게 된 거지? 방위군이 배신하다니? 시 정부가 금천교 쪽으로 돌아서기라도 한 건가?"

"아니야. 안 그래도 위성으로 지켜보고 있다가 그 난리가 나길래 바로 방위군 사령부에 연락했지. 그런데 거기도 난리가 났더라고."

"······? 방위군 사령부도?"

"응. 갑자기 모든 안드로이드가 해킹당해서 연락이 끊겼다나?"

"해킹? 방위군 안드로이드가?"

나는 기가 차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방위군은 시 정부의 중앙 네트워크를 사용한다.

즉, 중앙 네트워크의 방화벽을 뚫고 눈에 불을 켜고 있는 시 정부 사이버러너들의 감시마저 피해서 해킹을 했다는 소린데.

"그게 가능한가?"

내가 알기론 불가능하다.

그게 뚫렸다는 건, 다시 말해서 시 정부 자체의 모든 보안 프로토콜이 뚫렸다는 뜻.

그 말은 마음만 먹으면 소울 시티를 지배할 수 있다는 의미와도 같았다. 지금의 도시는 정부, 기업, 개인 할 것 없이 전부 중앙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있으니까.

"일반적으론 가능하지 않지."

유혜리가 어깨를 으쓱했다.

도시 전체. 아니, 세계 전체를 통틀어도 손에 꼽는 사이버러너인 유혜리가 불가능이라 판단했더라면, 그게 맞을 거다.

하지만 그녀의 말엔 숨은 의미가 있었다.

"일반적으로라······ 그럼 일반적이지 않은 상황에선 가능하단 뜻이군."

"너도 알 거야. 방위군 안드로이드 시스템을 누가 관장하는지."

"······? 설마?"

이 도시의 모든 정부시스템은 마더 AI인 제네시스의 지배 아래에 있다. 방위군 또한 마찬가지.

그럼 바로 답이 나온다. 누가 개수작을 부린 건지.

무엇보다 제네시스는······ 현재 금천교의 배후로 가장 유력하게 의심되는 로보 테크니카의 주인이기도 했다.

"지난번 네 얘길 듣고 어떻게 로보 테크니카에 접근할 수 있을까 고민했는데······ 마침 잘됐지 뭐야? 방위군을 해킹한 AI라니."

유혜리가 재밌다는 듯 키득거렸다. 평소엔 저 음흉한 웃음을 공감하지 못했지만, 이번만큼은 나 역시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제네시스의 배신이라. 확실히 이걸 이유로 든다면 시 정부에서도 허락하겠군."

시 정부는 지난 과거에 있었던 몇 번의 굵직한 AI 쿠데타를 기억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거셌던 건 30년 전에 일어난 로봇 쿠데타다.

시 정부가 전복되기 직전에서야 정상을 되찾았고, 그날 이후 모든 자율 AI는 의체를 잃었다.

이브가 워치에 담겨 있었던 이유 또한 여기서 기인했다.

그만큼 시 정부 입장에선 자율의지를 가진 AI의 반란은 트라우마였다. 만약 그게 다시 반복될 여지가 보인다면 분명 그 뿌리부터 잘라버리려 할 거다.

"그래서 로보 테크니카엔 언제 갈거지?"

내 질문에 유혜리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이미 갔어."

* * *

같은 시각.

로보 테크니카 화물창고 앞으로 군용장갑차와 비행선들이 몰려들었다.

그곳에서 내린 건 당연하게도 방위군이었다.

다만, 안드로이드가 아니라 전원이 기갑 슈트를 입은 진짜 인간 방위군이라는 게 달랐다.

가장 뒤늦게 도착한 차에서 꼬장꼬장하게 생긴 중년과 노년의 경계에 서 있는 군인이 내렸다. 그는 기갑 슈트를 착용한 다른 방위군과 달리 유일하게 녹색과 황토색이 섞인 군복을 입고 있었다.

바로 방위군 부사령관 리차드 대령이었다.

"모두 포위 상태 유지하고 전투 대기! 1팀과 2팀은 나와 함께 진입한다!"

리차드와 방위군들이 활짝 열린 정문으로 당당히 걸어 들어갔다.

원래 한창 바쁘게 움직였을 화물창고는 모든 기능을 멈췄다. 방위군이 화물창고를 비롯한 모든 로봇의 작동을 정지시킨 거다.

이게 가능했던 이유는 의회승인이 떨어진 순간, 방위군의 명령권이 제네시스보다 우위에 서기 때문이었다.

이는 지난 로봇 쿠데타 이후 시 정부에서 마련한 자구책 중 하나였다. 애초에 알고리즘을 설계할 때부터 언제라도 인간이 주도권을 가져올 수 있도록 설계한 거다.

"빠짐없이 뒤져서 의심스러운 건 개미 새끼 한 마리까지 찾아내라!"

"넷, 부사령관님!"

리차드의 분노 어린 눈길이 화물창고 내부를 훑었다.

도시의 안보를 위협하는 존재라면 인간이든, 로봇이든, AI든, 그 무엇이라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 * *

다시 현재.

"그런데 저건 왜 챙기는 거지?"

나는 셀리케에서 장각의 시체를 회수하는 걸 보며 물었다.

장례를 치러 무덤에라도 묻어줄 생각은 아닐 테고······ 저걸 왜 가져가는 거지?

"무덤에 묻어주려고?"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유혜리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그녀를 삐뚜름하게 바라봤다.

"제대로 대답을 해주지 않으면 내 권리를 요구할 거야."

장각은 내가 처리했다. 당연히 시체에 대한 권리도 내게 먼저 있다.

"칫! 재미없기는!"

입술을 삐쭉 내민 유혜리가 툴툴거리며 대답했다.

"뭐겠어? 연구용이지."

"연구용?"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장각이 특이 케이스긴 하지만 셀리케에서 연구할 정도로 특별한가는 조금 다른 이야기였다.

'사실 장각보다는 장각이 다뤘던 그 검은 기운을 연구하는 게 맞을 것 같은데?'

······라는 생각이 든 순간, 나는 불현듯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고 보니 그게 사라졌군.'

검은 기운이 사라졌다.

장각이 살아있을 땐 미저리처럼 졸졸 쫓아다니더니, 지금은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설마 텅스텐 막대에 소멸한 건가?

"왜? 뭐 찾아?"

"아. 아니야. 그럼 장보 시체도 회수하겠군."

고개를 저은 나는 자연스럽게 말을 돌렸다.

"당연한 말씀. 이러니저러니 해도 한낱 약탈자 나부랭이였던 놈들이 우리 대원들보다 강했던 건 사실이니까. 뭐······ 우리 깡통 로봇씨도 꽤 애를 먹은 것 같고."

다행히 유혜리의 말을 못 들었는지 회수하는 장각 시체를 살펴보던 노리스에게선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게 사실은 말이야. 장각보다······"

내가 장각과 장각이 사용하던 검은 기운이 서로 다른 객체로 존재했다는 걸 알려주려는 그 순간.

-마스터! 검은 기운은 제가 연구했으면 합니다.

귓가로 다급한 이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그 순간 머릿속으로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정부공인 마스터급 해결사 (9)

165화. 정부공인 마스터급 해결사

'이브가 이걸 연구하겠다고?'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이다.

대체 왜? 무슨 수로 그걸 연구한다는 거지?

무엇보다······.

'그게 어딨는 줄은 알고 말하는 건가?'

사라진 검은 기운. 애초에 형태라는 게 없었기에, 자취를 감춘 지금 찾을 길이 전무했다. 막말로 바람결에 흩날려 날아갔을 수도 있으니.

그런데 이브는 마치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검은 기운이 숨어든 곳을 알아냈습니다. 제가 추적하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시길.

검은 기운을 추적하고 있다고 고백했다.

"······."

나는 입을 다물었다. 사라졌다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했던 검은 기운을 추적까지 하고 있었다니.

"사실 뭐? 왜 말을 하다 말아?"

유혜리가 고개를 갸웃한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나도 장각에 고전했다고. 그러니까 의뢰대금은 넉넉하게 줬으면 좋겠군. 결과적으로 내가 장보와 장각. 둘 다 처리한 거니까."

후유. 간신히 말을 돌렸다. 좋아. 이 정도면 자연스러웠어.

"에이, 난 또 고백이라도 하려는 줄 알았네!"

유혜리의 미간이 좁혀졌다. 뾰로통하게 입술을 내민 그녀가 김빠진 듯 툴툴거렸다.

"······그건 맥락상 맞지 않지."

"맥락상 맞으면 해줄 거야? 고백?"

유혜리가 눈웃음을 치며 물었다. 아주 요망한 안드로이드다. 이쯤 되니 안드로이드 뒤에 숨어있는 진짜 유혜리의 모습이 궁금해질 정도.

"······그래서 의뢰대금은?"

"흥흥~ 부끄러워하시긴. 걱정 마! 네가 말하지 않았어도 넉넉하게! 부족하면 내 연구비를 쪼개서라도 두둑하게 넣어줄 테니까!"

"오? 그 정도까지?"

나는 의외라는 표정으로 유혜리를 바라봤다. 메가코프 출신답게 의뢰비를 넉넉하게 주는 거야 알고 있었지만, 자기 연구비까지 쪼개서 주겠다니?

"이번 일로 확실해졌거든."

"확실해졌다? 혹시······?"

셀리케에서 나를 지정 해결사로 쓰려는 생각인가?

"맞아! 너를 놓치면 안 되겠다는 사실이 확실해졌지!"

"······?"

"음침한 뒷골목 해결사와 긍지 높은 메가코프 보안실장의 은밀하고 야릇한 밀월관계라! 꺄아아~!"

"······."

저 짧은 한마디에 틀린 게 몇 가지가 들어가 있는 거야?

혼자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유혜리가 짝!하고 박수를 치더니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아, 맞다! 그리고 기대해! 돈 말고도 다른 선물을 준비했으니까!"

"돈 말고?"

나는 시큰둥하게 유혜리를 바라봤다.

유혜리의 성격과 저 장난기 가득한 얼굴을 미루어봤을 때······

'솔직히 그렇게 기대가 되진 않는군.'

* * *

[얼마 전 금천교 쿠데타로 소울시 전역이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교도 세력과 결탁한 무정부주의자들로 물류가 마비되고, 구역 상가들이 털리며 굶어 죽는 자들이 속출하는 등 도시가 소요사태에 빠진 가운데, 시 정부에서도 칼을 빼 들었습니다.]

[방위군 관계자: "우리는 소울 시티의 안전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며, 전복된 구역을 최대한 빠르게 수복······"]

[그러는 한편, 도시의 소요 사태에 팔을 걷어붙인 곳이 있었으니, 셀리케 바이오텍이었습니다.]

[셀리케 바이오텍 관계자: "저희 셀리케에선 메가코프의 막중한 사회적 책임을 공감하며 사병과 해결사를 고용해 도시 수복에 가장 앞설 것······"]

[시 정부와 메가코프에서 팔을 걷어붙였지만, 가장 큰 공을 세운 건 소울 시티의 평범한 해결사였습니다.]

[목격자 A: "진짜 그분이 아니었으면 우리 모두 살아남지 못했을 겁니다. 게다가 그분 덕분에 이렇게 전쟁이 끝난 거나 다름없으니까요."]

[목격자 B: "번쩍! 하는 순간 우리 모두 쓰러졌죠. 아, 이제 죽었구나! 싶었는데, 그분이 적들의 수장은 물론이고 안드로이드까지 단칼에 갈라버린 게 아니겠습니까? 그때의 전율은 진짜······"]

[대체 '그분'이 누구였을까요? 우리는 실제 작전을 진두지휘했던 관계자를 찾아가 물어보았습니다.]

[셀리케 바이오텍 보안실장: "아? 소드마스터요? 대단한 사람이죠. 저와 일찍이부터 밀월관······ 아니, 의뢰관계를 맺었기도 했고요. 아마 이 도시에 수많은 해결사가 있지만, 그 정도로 강하고 무엇보다 믿을 수 있는 해결사는 없을 거예요. 다들 이 도시에서 신뢰가 얼마나 중요한지 아시잖아요?"]

[시 정부에서는 공식적으로 금천교 세력이 와해되었다고 인정했습니다. 방위군과 셀리케 바이오텍의 작전으로 쿠데타를 성공적으로 막아낸 겁니다. 시 정부는 작전에 도움을 준 셀리케 바이오텍에 감사패를 전하는 한편, 큰 공을 세운 소드마스터에겐 그에 합당한 보상이 따를 거라고 언급했습니다.]

[시 정부 관계자: "작전을 수행한 방위군과 셀리케 바이오텍에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큰 공을 세운 소드마스터에겐 그에 합당한 보상을 지급하기로······"]

[도시를 위험에 빠뜨린 것은 금천교에 현혹된 시민들이었지만, 위험에서 구해낸 것 또한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용감한 시민이었습니다. 한편, 시 정부에선 이번 일로 해결사 체계를 정비해 제도권의 경계에 있는 해결사 생태계를 제도권으로 끌고 오겠다고 밝혔습니다. SC 나이트 뉴스, 김수현이었습니다.]

* * *

······내가 잘못 생각했다.

유혜리의 준비는 내 기대를 뛰어넘는 게 아니라, 그냥 전부 다 박살내고 질주하고 있었다.

"신뢰가 얼마나 중요한 줄 아냐고?"

대체 언제 뉴스 인터뷰까지 한 건지, 화면에서 생글생글 웃으면서 특유의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짓던 얼굴이 생생히 떠오른다.

남들이 볼 땐 참 해맑고 밝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그 미소 아래 걸린 장난기가 어딜 향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마스터. 유혜리 씨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때마침 보란 듯이 연락이 온 걸 보면 말이다.

"······연결해."

전화를 받기 무섭게 스피커 너머로 유혜리의 한껏 들뜬 목소리가 들려왔다.

-뉴스 봤어? 어때? 내 선물?

역시 뉴스를 보고 부리나케 전화했군.

나는 떨떠름한 입맛을 다시며 대답했다.

"······이 정도까지 기대한 건 아니었는데."

내 목소리에 담긴 떨떠름한 감정을 느꼈는지, 스피커 너머로 유혜리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웃어라. 웃어.

-이제 좀 즐겨보라고! 언제까지 칼잡이라고 무시당하고 살 거야?

"그런 놈들 박살 내주는 재미도 꽤 쏠쏠해."

-음흉하시긴! 그거 악취미야. 너한테 낚여서 얻어터진 놈들은 무슨 죄야?

"그거야 겉모습만 보고 사람을 무시한 죄겠지."

애초에 겉모습만 보고 시비를 거는 쪽은 그쪽이지 내가 아니니까.

-하여간 한마디를 안 지네. 뭐, 어차피 이제는 소울 시티 전역에서 네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테니 네 취미생활도 끝이겠지만!

"딱히 취미생활이라고 여긴 적은 없다만······."

-네네. 그러시겠죠. 아! 그리고 어쩌다 보니 네 선물이 하나 더 생겨버렸어.

"······?"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어쩌다 보니 선물이 생겨?

"그건 또 무슨 소리지?"

-이번에 방위군이 뒤통수친 거로 내가 힘을 좀 썼거든!

유혜리가 해맑게 대답했다. 특유의 장난기 가득한 웃음소리와 함께.

물론 그와 반대로 내 미간은 좁혀졌다.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인데?"

방위군이 뒤통수를 친 대상은 셀리케지 내가 아니다.

애초에 방위군에선 내 존재도 몰랐겠지. 아니, 알았어도 신경도 안 썼으려나? 일개 해결사. 그것도 칼잡이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을 테니.

-어머? 뻔히 자기를 띄워주는 뉴스를 보면서도 그런 말을 하는 건 뭐야? 나르시시즘? 아니면 쿨병?

"······."

나는 얼굴을 와락 구겼다. 이 여자가 보자 보자 하니까······.

-아하하! 농담이야! 뭘 그리 정색을 해.

"······."

-아무튼, 조만간 시 정부에서 찾아오더라도 놀라지 말라고.

"······시 정부? 의뢰라도 중개했나?"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원래 이런 여자였지. 장난기로 가득해 훅 불면 날아갈 것처럼 너무나 가볍지만, 그 장난기 아래엔 항상 그에 합당한 보상을 준비해놓는 여자.

상대하고 있으면 제법 피곤하지만, 그래도 이 도시에서 나를 호의로 대해주는 몇 안 되는 사람이기도 했다.

물론 아직도 그 호의의 꿍꿍이가 의심스러웠지만.

-에이, 겨우 그 정도는 내가 힘을 쓰지 않아도 되지. 뭐랄까······ 좀 더 특별한 선물이라고나 할까?

그 순간, 나는 유혜리의 목소리에 섞인 장난기를 감지했다.

"······귀찮은 건 딱 질색인데."

나는 본능적으로 딱 잘라서 말했다. 만약 시 정부가 귀찮게 하면 선물이고 뭐고 엎어버리겠다고.

그리고 그걸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유혜리가 대답했다.

-어휴! 그럴 것 같더라니. 걱정하지 마. 귀찮은 건 네가 아니라 네 중개인이 할 테니까.

"······? 대체 뭘 준비했기에 중개인까지······?"

평소였으면 별 기대를 안 했겠지만, 이미 언론까지 동원해 내 이름과 신상을 도시 전역에 광고하듯 뿌려버린 마당이다. 이제 유혜리가 뭘 준비해놨을지 불안할 지경이다.

-그렇게 궁금해하지 않아도 돼. 금방 알게 될 테니까. 너는 그냥 옷이나 잘 입고 사진이나 잘 찍히면 돼.

"······사진?"

-그래. 사진. 그리고 말이 나와서 말인데, 옷 좀 사 입어. 돈도 많이 벌었으면서 언제까지 그 칙칙한 거적때기만 입고 다닐 거야?

"······."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유혜리가 거적때기라고 폄하한 그 옷을 고르는데 3일이나 걸렸다는 사실을.

* * *

공중파 뉴스의 파급력은 어마어마했다.

아파트 엘리베이터.

한창 내려가던 엘리베이터가 중간에 멈춰 서고, 아파트 주민으로 보이는 중년남성이 탔다.

엘리베이터에 탄 남자 둘.

평소였으면 아무 말도 없이 1층까지 내려갔을 텐데, 나를 힐끗 바라본 중년남성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소, 소, 소드마스터? 소드마스터 맞죠? 사이비 학살자!"

"······아, 예."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이비 학살자라니.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그새 새로운 별명이 붙었나.

이후로도 마주치는 사람마다 비슷한 반응이었다.

나와 마주치기 무섭게 위아래를 훑어보더니 화들짝 놀란다. 그리곤 사진을 찍어도 되냐, 사인도 있냐, 우리 애도 호신용으로 검술을 배우려는데 어디 추천해줄 학원이 있냐 등등······.

그래도 아파트 주민들의 반응은 다소 상식적인 틀에 속했다. 유명인을 만난 일반인들의 반응이라고 해야 할까?

'어쩌면 이곳이 17구역이라서 그런 걸지도 모르지.'

언젠가 유혜리가 다른 세상 얘기를 하듯 금천교 쿠데타를 얘기했던 것처럼, 이곳에 거주하는 주민들 역시 금천교니, 쿠데타니 하는 것들 전부 다른 세상 얘기나 마찬가지였을 거다.

아마 1년 전에 있었던 「기적의 서광」으로 인한 소요사태 때도 비슷했겠지.

그 어떤 외부의 위협이 있더라도 이곳만큼은 안전할 거라는 믿음.

그게 도시 외곽에 사는 이들이 기를 쓰고 중심부로 들어오려는 이유였다. 그 말도 안 되는 부동산 가격과 렌트비를 지불하고서라도 말이다.

그럼 부유층 지역이 아닌 곳은 어땠냐? 하면.

"호, 호에엑! 소, 소드마스터!"

"스, 스게에! 진짜 소드마스터다!"

빨갛고 파랗게 염색한 사내 둘이 기괴한 탄성을 내뱉었다.

"소, 소드마스터! 팬입니다! 호, 혹시 사인 좀 해주실 수······"

그러면서 난데없이 윗옷을 벗더니 등짝을 내밀었다. 등에는 이미 지저분한 문신이 난잡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등에다가 싸인이라. 한물간 락스타가 된 느낌이로군.

내가 짧게 한숨을 내뱉자, 그걸 허락으로 생각했는지 등짝을 내민 빨간머리 사내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카, 칼로 가능할까요? 절대 안 아물게 깊게 찔러주세요!"

"······."

그러니까 칼빵으로 사인을 해달라고? 내가 황당한 얼굴로 놈을 쳐다보는데.

"비켜, 이 자식아! 소드마스터께 무슨 무례야! 바쁘실 텐데!"

파란 머리 사내가 빨간 머리 사내를 밀어내더니 버럭 소리쳤다.

그래. 정상인도 있었······

"소드마스터! 저는 귀찮게 사인같은 거 말고 그냥 배때지에 한칼 놔주십쇼!"

"······."

잠시 망각했다.

이 정신 나간 도시가 원래 어떤 곳이었는지.

* * *

우여곡절 끝에 로세툼에 도착했다.

바이크를 세우고 로세툼으로 들어가는데, 안드로이드 몇 대가 정문 근처에서 뚝딱거리고 있다.

문이 고장이라도 난 건가? 하고 봤더니······

[*정부공인 해결사*]

[소드마스터의 공식 중개소]

"이게 뭔······"

갑자기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각성자의 시대 (1)

166화. 각성자의 시대

로제의 사무실.

언제나처럼 차를 내어오는 로제와 소파 위를 침대처럼 뒹굴거리는 데이지를 보며 다소 심란했던 마음이 가라앉는 걸 느꼈다.

달그락.

내 앞에 찻잔을 내려놓은 로제가 지나가듯 물었다.

"대단한 일을 하셨더군요."

다소 가시가 돋친 말투다. 그러면서 건너편에 앉아 표정의 미동도 없이 다리를 꼰다.

무릎을 간신히 덮는 스커트가 펄럭하고 출렁인다. 쭉 뻗은 다리 위로 달라붙은 검은색 스타킹이 조명을 받아 반짝거렸다.

그리고 그 발끝에 걸린, 오늘따라 뾰족하게 느껴지는 빨간색 구두가 칼끝처럼 나를 가리키고 있었다.

얼굴은 아니지만, 태도에선 매우 심기가 불편하다는 걸 팍팍 티내는 상황.

하지만 나는 그녀의 태도가 걱정에서 오는 것임을 알았기에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대답했다.

"어쩌다 보니 휘말린 거야."

"뉴스에서 떠드는 내용으론 자진해서 갔다던데요. 이 도시와 시민들을 위해서 목숨을 걸었다면서요. 그래서 다들 현재 씨를 찬양하고 난리잖아요?"

"하하······ 설마 그걸 믿는 건 아니지?"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도시와 시민을 위해서 목숨을 걸었다니. 내가 생각해도 참 터무니없는 말이다. 다 나 살자고 하는 일인데.

그런데 로제가 이걸 얘기할 줄은 몰랐다. 그래도 나에 대해서 꽤 알 거라 생각했는데······?

"저야 모르죠. 저는 일개 '중개인'에 불과할 뿐이니까. 언론이고 기업이고 사방에서 연락이 오는데 제가 대답해줄 말이 없더라고요? 뭐, 아는 게 있어야 말을 해주죠. 참 우습죠?"

"······."

으음. 이게 서운했던 건가? 하긴 영문도 모른 채 사방에서 연락이 쇄도했더라면 서운했을 법도 할 것 같다. 그래도 명색이 독점 중개인인데.

"미안하군. 다음부턴 미리 말하지. 우리 중개인님이 민망하지 않도록."

장난스럽게 풀어보려는데, 로제는 오히려 나를 흘기듯 바라봤다.

"그러지 않으셔도 돼요. 그럴 필요도 없고요. 다만······"

잠시 머뭇거린다. 할 말을 찾는 건지, 아니면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 건지 입술을 오물거렸다.

아래로 깔린 시선. 흘기듯 바라봤던 시선이 정처 없이 떠돈다. 파르르 떠는 속눈썹이 선명하게 보였다.

"······자기 목숨을 가볍게 여기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

"물론 해결사가 위험한 일이라는 건 알아요. 편한 의뢰, 안전한 의뢰만 있는 건 아니라는 것도. 오히려 현재 씨에게 의뢰가 올 정도라면 위험한 의뢰겠죠. ······하지만 항상 기억해주세요."

아래로 깔려있던 시선이 슬며시 위로 향한다. 촉촉하게 젖은 푸른색 눈동자가 나를 빤히 바라봤다.

"당신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

나는 온몸을 휘감은 생소한 기분에 잠시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빤히 날 바라보는 로제의 두 눈을 바라봤다. 격랑하듯 파도치는 푸른 눈동자는 그 망설임만큼이나 격한 감정을 토해내고 있었다.

사실 로제가 나를 평범한 해결사 이상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건, 나도 바보가 아닌 이상 어느 순간 깨닫고 있었다.

하지만 그 선이 너무나 오묘해서 일정 거리 이상으로 더 가깝게 접근하진 않았다.

그리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지우려 해도, 잊으려 해도, 나는 이 세계에 속한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나는 바깥에서 온 이방인이자, 잠깐 들렀다 사라질 순례자일 뿐이었다.

만약 언젠가 하울의 주인인 소피아가 말했던 것처럼 '선택'을 해야 할 때가 온다면.

그때의 나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이 세계의 진실을 마주하고도, 여전히 로제를 로제라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 아니면 모든 걸 끊어내고 진실의 너머로 나아갈 것인가?

어쩌면 이런 무언의 망설임을 그녀 또한 느꼈는지 몰랐다. 언젠가 떠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그녀가 말한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거기서 기인한 감정일 가능성이 컸다.

"기억할게."

나는 그저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감정을 오롯이 느끼며 부드럽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 아무렴 어떠랴. 그녀가 나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건 변하지 않는 진실인데.

그게 지금, 바로 '현재'인데.

"고마워요."

내 미소를 본 로제 역시 나를 보며 환하게 웃는다. 초승달처럼 휜 눈꼬리가 격랑하던 바다를 감춘다. 대신 해맑게 웃는 미소가 별빛처럼 반짝거리고 있었다.

아름답다.

그저 이 네 글자만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아름답다라는 단어 자체가 그녀를 보고 만들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그때.

"흐으음~"

자작하게 내려앉은 분위기를 뚫고 나른한 목소리가 비집고 들어왔다.

고개를 돌리자 소파에 늘어진 채 팔을 괜 데이지가 나와 로제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화들짝 놀란 로제가 고개를 돌리더니 급히 찻잔을 들었다. 어느새 두 볼은 물론이고 귓불까지 빨갛게 물들어있다.

나도 괜히 어색해져서 찻잔을 집어드는 찰나.

"둘이 잤어?"

데이지의 2타가 들어왔고.

"푸웃!"

차를 막 입에 가져갔던 로제가 그걸 내뿜었다.

"······."

나한테.

* * *

잠시간의 소요가 끝나고 다시 로제의 사무실.

로제에게 등짝을 맞은 데이지가 2층으로 쫓겨났고, 우리는 다소 어색한 상황에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입구에 붙이고 있는 것 봤다. 시 정부에서 저런 것까지 해주나?"

정부공인 해결사라는 게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거의 유명무실한 존재에 가까웠다.

'정부공인 해결사치고 아직까지 해결사를 하는 사람은 없었으니까.'

이 도시는 굉장히 불합리한 도시지만, 때때로 꽤나 합리적이기도 했다.

특출난 능력이 있는 존재에 한해서만.

정부가 공인할 정도로 신분이 확실하고 능력도 있는 해결사?

기업들이 침을 질질 흘리며 탐을 낼 존재다. 신분이 불확실한 내게도 얼마나 많은 접근이 있었던가? 심지어 갑 중의 갑 메가코프까지 말이다.

물론 시 정부도 모르진 않을 거다. 정부공인 해결사라는 게 잠깐의 명예이자, 기업으로 가기 위한 감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도 묵인하는 거다. 제도 밖에 있는 해결사보다 기업으로 끌고 와서 목줄을 채워놓는 게 더 낫다고 여겼을 테니.

그런데 의아한 점은 중개인에게까지 저런 감투?를 해주는지의 여부였다. 마치 미슐랭 별점 레스토랑처럼 명패를 붙여놓지 않았던가?

내가 중개인을 옮기면 어쩌려고?

"원래는 안 해주죠. 중개인에게 따로 통보도 안 할걸요?"

"······? 그런데 로세툼 입구에 그건 뭐지?"

"그야······ 당신은 특별하니까요?"

"······?"

내가 이해를 못 한 듯 고개를 갸웃하자, 로제 역시 고개를 갸웃하며 오히려 되물었다.

"아직 못 들었어요? 당사자에게 먼저 연락이 갔을 텐데?"

"뭘? 정부공인 해결사가 됐다는 것도 여기 와서 알았는데."

"으음! 연락을 잊었나 봐요. 뭔가 중간에 착오가 있었나?"

그 순간 나는 알 수 있었다. 중간에 생긴 착오를 누가 만들었는지.

[어쩌다 보니 네 선물이 하나 더 생겨버렸어.]

[뭐랄까······ 좀 더 특별한 선물이라고나 할까?]

머릿속에서 유혜리의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가 저절로 재생된다. 지금쯤 얼마나 킥킥거리며 웃고 있을까?

"······그래서 뭔데?"

내가 떨떠름한 얼굴로 묻자, 로제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현재 씨는 그냥 정부공인 해결사가 아니에요."

"그럼?"

"시 정부에서 최초로 인정한 마스터급 해결사예요."

"······!"

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번일 만큼은 인정해야겠다. 유혜리가 나를 놀라게 하는 건 확실히 성공했다.

"시 정부에서 그걸 인정했다고?"

이건 진심으로 놀라웠으니까.

그동안 시 정부에선 해결사의 존재 자체를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존재하는 필요악. 혹은 더러운 오물에서 자연발생하는 바퀴벌레와 같이 여겼다.

뭐, 돈만 주면 살인도 꺼리지 않는 존재인데 당연하겠지.

마스터급 해결사도 마찬가지다. 마스터란 말 자체가 한 분야에서 명인의 경지에 올랐다는 뜻.

일종의 명예나 다름없었기에 시 정부에선 공식적으로 마스터급 해결사를 인정하지 않았다.

명예가 없다시피한 지금도 온갖 쓰레기들이 해결사를 하려고 몰려드는 판에, 명예까지 주어진다면 걷잡을 수 없을 테니.

그래서 시 정부가 허락한 건, 딱 '공인'이다. 너희들이 아무리 발버둥 쳐봤자 닿을 수 있는 천장은 신분이 인정되는 수준이 전부라고 선을 긋는 거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그랬던 시 정부가 '인정'한 거다.

마스터급 해결사가 있다고.

'그리고 그게 나라고.'

오늘부터 나는, 이 도시에서 가장 뛰어난 해결사가 됐다.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이, 공식적으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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